19. 찰나의 그림자
아직 해가 뜰 듯 말 듯 망설이는 어두운 새벽. 지호가 번쩍 눈을 떴다. 놀란 그의 얼굴에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심스레 일어나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다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깜빡깜빡, 그 안에서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하아….”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샜다.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꾹 누르고는 한참 뒤에 고개를 돌렸다. 얌전히 잠든 태주의 얼굴을 하염없이 눈에 담았다.
‘그러기엔 선생님이 살린 숨이, 지금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내가, 살린 숨.
그 어떤 것도 구해 본 적 없는 내가 유일하게 구한 사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있으면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어쩌면 내가 이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서.
하지만….
“그러다가도 나 때문에 망가질까 봐 걱정이에요.”
어떻게 해야 다치지 않고 이 사람과 함께할 수 있을까? 내 처지로는 너무 큰 바람일까?
태주의 얼굴 가까이에 손을 뻗었다. 그대로 차마 만지지도 못하고 숨결만 느꼈다.
“그래도 태주 씨가 도와줄래요?”
아무 상관도 없는 당신을 끌어들여서 너무나도 미안한데….
“함께하면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아요. 이번엔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아요.”
나지막이 속삭인 지호가 손을 거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벗어두었던 코트 안주머니에서 라벨이 없는 약과 주사기를 꺼냈다.
익숙하게 약물을 잰 그는 왼쪽 소매를 걷어 곧바로 바늘을 찔러 넣었다. 그의 등 뒤로, 잠들어 있는 듯했던 태주가 조용히 눈을 떴다.
* * *
-진정한 강함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바로 다정함이라고 하죠. 오늘은 이 ‘다정함’을 주제로 온 사연을 모아 봤는데요. 신청곡 먼저 듣고, 사연을 하나씩 소개해 보도록 할게요.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하는지 몰라….”
한동안 괜찮은가 싶던 오 교도가 또 실연의 아픔을 앓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보라미 방송은 이럴 때만 찰떡같이 선곡을 잘했다. 오 교도의 마음을 대변하는 노래만 골라 틀어 주었다.
즉석밥을 뜯을지, 초코바를 뜯을지 고민하던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경이로운 눈으로 스피커를 보았다. 문득 오 교도는 어떻게 이런 오래된 노래까지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 때였다.
관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심 교도가 들어섰다.
“아, 남 부장님! 십오 분 뒤에 차량 들어온답니다!”
“차량이요? …아아, 오늘 새 수용자 들어오는 날이구나? 그런데 우리 사동에도 들어옵니까?”
“얼마 전에 조폭들이 단체로 자수했다잖아요. 거기 있는 알파랑 오메가는 죄다 우리 교도소일걸요? 아무튼 과장님이랑 계장님도 나가 보신다니까 저희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오 교도님, 그만 울고 일어나세요.”
“힝, 네….”
점퍼를 집어 든 태주가 소매에 팔을 끼운 뒤 복장을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모자를 챙겨 먼지를 툭툭 털며 관구실을 나섰다.
그나저나 조직폭력배라….
또 신경 써서 지켜봐야 할 재소자가 늘어났다.
* * *
“어? 선생님도 나오셨습니까?”
밖으로 나오자 교도관뿐만이 아니라 의무사무관까지 몇몇 나와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에 다가간 태주가 톡톡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선 지호가 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태주 씨…. 아니, 남 교사님 나왔어요? 날이 많이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
“그러는 선생님은 셔츠에 가운만 걸치지 않았습니까. 손이 얼었습니다.”
지호의 손을 끌어 잡은 태주가 살살 문지르며 체온을 나눠 주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은근하게 스미는 묘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는 지호의 뒤로,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보는 이 부장이 서 있었다.
“지금 둘이 뭐 하는 거예요? 연애해?”
그 말에 태주 대신 지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려고 워밍업 중이죠.”
“어엉? 진짜로?”
놀란 이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쯤 놀리려고 꺼낸 말에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의 시선이 정말이냐고 묻는 듯 태주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태주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뭐예요? 왜 태주 씨까지 놀라는 거예요? 태주 씨는 놀라면 안 되죠.”
“아니, 그게….”
그럼 안 놀라냐?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데. 이 인간이 그래도 나랑 뭔가가 될 생각이 있긴 하구나.
하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 속마음을 있는 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조심스레 잡은 손을 놓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다행히 때맞춰 법무부 차량이 들어섰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차량 출입문을 주시했다. 조금 후 먼저 하차한 교도관의 뒤로 수용복을 입은 재소자들이 줄줄이 내렸다. 대부분이 노란색 수형표를 달고 있었다. 주시가 필요한 수용자가 잔뜩이란 뜻이다.
“이야, 이번엔 외부 진료 뚫을 수도 있겠는데?”
하나씩 하차하는 새 수용자의 얼굴을 보며 의무과장이 말했다. 폭력을 업으로 삼았던 이가 많은 만큼 얼굴이나 손등 곳곳의 흉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외부 진료가 아니라 장례식장 뚫겠는데요.”
다들 손 두꺼운 것 좀 봐요. 오 교도가 작게 속삭였다. 일반 수용자와 싸움이라도 나면 골로 갈 것 같단다.
같은 조직원은 한 사동에 있을 수 없으니 이들의 대부분이 서로 다른 조직원일 거고, 만약 조직끼리 한판 붙기라도 하는 날엔…. 으, 끔찍해!
혼자 중얼거리던 오 교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지호의 소매를 잡으며 간곡히 말했다.
“연 선생님, 제가 재소자 싸움 말리다가 쓰러지면 저 꼭 고쳐 주셔야 합니다? 선생님 무지 실력 좋은 써전이었잖아요. 아셨죠?”
“야, 오성윤. 오버하지 마. 맨날 CRPT 끼고 다니는 게 어디서 이 한 몸 불사르는 척이야.”
다행히 지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심 교도가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오 교도의 발을 꾹 눌러 밟았다.
지호는 잠시 그 두 사람을 기분 좋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꼭 자신의 수련의로 있던 우재와 인주를 보는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재소자끼리 쉽게 싸울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니까요.”
그 두 사람이 듣든지 말든지 뒤늦게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차량 쪽으로 돌렸다. 마지막 재소자까지 전부 하차했는지 차량 출입문이 닫혔다.
무심한 눈으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중 제법 멋대로 산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한 재소자가 눈에 띄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재소자가 지호를 마주 볼 때였다.
“서, 선생님….”
이번엔 태주가 지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네, 태주 씨.’ 작게 대꾸한 지호가 태주를 보았다.
뭔가 혼란스러운지 표정이 심각했다. 태주는 몇 번이나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길 반복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끝에서 네 번째 재소자 말입니다.”
“….”
“다니엘 씨 아닙니까?”
제법 제멋대로 산 도련님 같은 생김새의 새 수용자. 그는 다름 아닌 다니엘이었다.
* * *
“나, 참….”
“뭐야, 그 한심하다는 시선은. ‘내가 너 이럴 줄 알았다’ 뭐, 이런 말이 하고 싶어?”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가 봅니다?”
태주가 삐딱한 시선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수용복을 멋지게도 롤 업 해서 입었길래 얼른 내리라고 지적했다. 그랬더니 반항이 장난 아니다.
“옷은 좀 자유롭게 입게 해 줘라. 이 정도 자유도 없냐? 민주 교정이니 뭐니 하는 포스터는 벽마다 붙여 놓고, 어째 민주적인 게 하나도 없어.”
“네, 당연히 없습니다. 그게 교도소니까요. 그러게 왜 자유를 저버릴 짓을 하셨습니까? 얼른 소매 내리세요. 반말도 하지 마시고요.”
옷 똑바로 입을 때까지는 안 갈 겁니다. 단호하게 말한 태주가 딱 버티고 섰다. 정말로 움직이지 않을 기세에 다니엘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소매를 내렸다.
“하, 내가 진짜 할 말이 많지만 아직은 꾹 참는다. 왜 하필 내 담당 교도관이 그쪽이야?”
“다니엘 씨 기록 보니까 알파로 표기되어 있던데요? 알파나 오메가는 무조건 1사동 배정입니다. 교육 끝났으니까 가죠. 벌써 점호 시간 지났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다 교육 끝난 거야?”
“한참 전에 끝나고 돌아가서 저녁까지 먹고 잠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다니엘 씨는 아직 저녁 안 먹었죠?”
“먹었어. 교육실에서 선생님이랑. 여기가 그래도 밥은 먹을만하더라. 자, 됐지? 가자.”
“반말도 하지 말아야죠.”
“아아, 네! 알겠으니까 얼른 가기나 합시다, 교도관님!”
“좋아요.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며 건성으로 칭찬한 태주가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탁. 탁. 앞으로 나아가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태주의 발소리뿐이었다.
눈으로 확인하면 분명 자신을 잘 따라오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기척을 숨기고 죽이는 게 아주 익숙한 사람 같았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혼자서 이 늦은 시간까지 교육을 받은 건지. 수형표가 파란색인 걸 보면 마약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 인간이 마약을?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하지?”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태주는 대답 대신 그에게 눈길 한 번만 슬쩍 주고 말았다.
“뭐야? 안 궁금해?”
“수형표에 마약이라고 떡하니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세한 내막 같은 게 궁금할 거 아니야. 난 우리가 그 정도는 알고 싶을 정도로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억울하게 누명 쓰고 들어온 겁니까? 그런 거 아니면 수용자의 사정을 일일이 알고 싶진 않은데요.”
“와, 칼 같네. 처음엔 왜 교도관을 하고 있나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교도관이 천직이야.”
“예, 감사합니다. 6425도 지금 보니까 수용복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천직이시네요.”
“야, 이씨. 그 칭찬은 좀 너무하네.”
“그러니까 조용히 하고 그냥 갑시다. 허튼수작 부리려는 거 다 보여요.”
딱 봐도 뭔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태주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겠다고 당부하며 선을 그었다. 여기에 사연 팔이도 하지 말라는 말은 덤이었다. 할 말을 잃은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고요한 복도에는 태주의 발소리만 울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봐요, 교도관님. 잠깐 의무실에 들르면 안 돼?”
“어디 불편하십니까?”
“머리가 좀 아파. 내가 원래도 편두통을 자주 앓거든. 약 하나만 타고 갈게.”
“그건 방으로 돌아가서 누워 있다 보면 나아질 겁니다. 나중에 두통약 따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칫, 이것도 안 넘어오네.”
다시 또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잠시뿐이었다. 다니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아! 의무실 좀 가면 안 돼? 여긴 인권도 없냐?”
“그 인권을 해친 사람이 여기로 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아픈 게 아니라 선생님을 만나고 싶은 거겠죠.”
이 생활을 지금 몇 년째 하고 있는데, 재소자가 수 쓰는 거 하나 모를까.
“괜히 선생님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갑시다.”
“괴롭히다니. 연지호도 지금은 내가 좀 보고 싶을걸? 똑똑한 놈이니까 내가 여기 올 것도 예상했을 거야.”
“그럼 선생님이 먼저 만나러 올 때까지 기다리시면 되겠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만나게 해 주라.”
“안 됩니다.”
어떻게 부탁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니까 포기하세요. 단호하게 말한 태주가 그 뒤로 다니엘이 있는 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는 듯 그 뒤통수를 쳐다본 다니엘이 마지막 수단을 꺼냈다.
“만나게 해 주면 그쪽이 모르는 연지호에 대해서 알려줄게.”
“선생님에 관한 건 제가 스스로 알아가겠습니다.”
“글쎄? 연지호가 직접 입 열지 않는 이상 힘들걸?”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수용자와 거래할 순 없죠.”
“연지호의 몸 상태에 관한 건데도?”
뚝. 결국 태주의 걸음이 멎었다. 그게 무슨 의미냐는 시선이 다니엘에게 향했다. 얄미운 입꼬리가 길게 위로 올라갔다.
“연지호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서 알아?”
순간 정체 모를 약물을 투약하던 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 이라뇨?”
“아, 교도관님은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나는 아는데. 전부 다.”
궁금하면 가르쳐 줄까? 거만하게 턱을 든 다니엘이 눈썹을 들썩였다. 굉장히 얄미운 모양새로, 사람의 속을 긁는 재주가 남달랐다. 태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안 합니다.”
“왜? 연지호한테 관심 많은 거 아니었어? 좋아하잖아.”
“네, 관심도 많고 좋아해서 불쾌합니다. 선생님을 두고 거래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선생님에 관한 건 제가 직접 알아가겠습니다.”
정말로 병이 있다면 알고 싶고 궁금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믿기로 결정한 사람이 우선이다.
이제 정말 그만하고 가자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얼른 달려간 다니엘이 태주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 잠깐만. 잠깐만!”
“뭐가 또 잠깐입니까.”
“의무실 좀 들렀다 가자니까?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려운 게 아니라,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는데? 살짝 만나고 가는 건데 뭐 어때서. 교도관님만 조용히 하면 아무도 모른다니까? 정말로 잠깐이면 돼. 만나게 해 줘.”
“그럴 순 없습니다. 다니엘 씨 아픈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 데나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여긴.”
대체 이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걸까. 그러게, 그렇게 멋대로 굴고 싶었으면 적어도 그 옷은 입지 말았어야지. 태주가 화를 삼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걸 진짜 어쩌면 좋냐?
그런데 생각이 들기 무섭게 답이 나왔다. 다만 남태주의 사고와 의지로 도출한 답은 아니었다.
일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터졌다. 몸놀림이 얼마나 빠른지 잡을 새도 없었다. 빠른 속도로 벽에 돌진한 다니엘이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다니엘 씨!”
쿵! 반동으로 튕긴 몸이 뒤로 넘어갔다. 놀란 태주가 넘어지는 그의 몸을 받아 안았다.
“괜찮습니까? 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얼른 손수건을 꺼내 상처를 눌러 지혈했다.
하지만 지혈만으로 해결될 게 아니었다. 손수건을 금세 적신 피가 태주의 손에까지 묻었다.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오려는 걸 꾹 참는데, 왜인지 여유로운 다니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자, 이제 의무실 갈 수 있지?”
진짜 환장하겠다.
* * *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꿰맨 부위를 거즈로 잘 덮으며 지호가 말했다. 다니엘의 미간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나한테 머리 나쁘다고 했냐?”
“그렇게 들렸어요? 그럼 좀 똑똑하게 굴어 보지 그랬어요. 왜 애꿎은 교도관을 고생시켜요. 태주 씨, 이 수용자는 오늘 의무사동에서 지켜볼게요.”
“늦은 시간에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좀 더 잘 주시했어야 하는데.”
태주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연지호를 1초라도 더 쉬게 만들고 싶은 그였기에 기분이 축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지호는 조용히 다니엘의 발을 밟았다. 억지로 고통을 참은 다니엘이 얼른 자리를 피했다. 대뜸 벽 쪽 침대에 누워 태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들었지? 교도관님은 나 여기 두고 돌아가면 돼.”
어쩜 한마디 한마디를 저렇게 재수 없게 뱉을까. 밝은 표정이 꼭 사람을 농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잠시 눈을 흘겨 그 모습을 얄밉게 바라보았다.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슬슬 의무실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도톰한 이불을 꺼내 다니엘에게 덮어 준 지호가 태주를 붙잡았다.
“벌써 가려고요? 바쁘지 않으면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선생님은 안 바쁘십니까?”
“바보 하나 있는 거 빼면 여유로워요. 앉아요.”
금세 차를 준비한 지호가 태주에게 건넸다. 벌떡 일어나 저도 달라고 하는 다니엘은 가볍게 무시했다.
“다니엘이라면 크게 신경 쓸 거 없어요.”
돌돌돌돌, 바퀴 구르는 소리와 함께 지호가 이동식 파티션을 끌고 왔다. 다니엘이 누운 침대 주변에 둘러 세우고 자리로 돌아갔다. 파티션 너머로 욕이 들렸지만, 이 또한 가볍게 무시했다.
“사람이 좀 상스럽긴 해도 일은 열심히 해요. 지금도 아마 일하는 중일 거고요.”
“일, 이요?”
태주가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으로 지호를 보았다. 교도소에서 수용자가 징역을 사는 것 말고 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다니엘이 했던 말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다니엘의 직업이….
“저렇게 보여도 다니엘은 사실 국가 기밀에 속하는 사람이….”
“야, 야, 야! 멈춰! 멈춰!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순간 파티션을 헤치고 튀어나온 다니엘이 지호의 입을 막았다. 우당탕탕, 요란한 몸짓에 무게를 버티지 못한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선생님!”
이번에도 어떻게 할 새 없이 일이 터졌다. 다니엘의 머리를 감싼 채 뒤로 넘어진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날뛰면 내가 더 피곤해져요, 다니엘. 덧나면 또 치료해 줘야 하잖아요? 태주 씨면 몰라도, 당신한테 두 번이나 정성 들이고 싶지 않은데.”
머리 조심하고 일어나요. 지호가 다니엘의 어깨를 쭉 밀었다. 그러나 상반신만 일으킨 다니엘은 더 물러서지 않았다.
“야, 연지호.”
“어린 게 또 반말이지.”
“나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니거든? 그 입 찢어 버리기 전에 적당히 놀….”
“너야말로 적당히 해. 네 일에 난 이용해도 내 사람은 이용하지 마.”
“뭐?”
“이런 같잖은 짓 하면서 네 뜻대로 태주 씨 움직이지 말란 얘기야.”
지호의 시선이 다니엘의 이마에 있는 상처로 향했다. 다니엘의 표정이 구겨졌다.
“허! 너 미쳤구나?”
순식간에 의무실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이대로 뒀다간 서로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았다. 태주가 두 사람을 중재하기 시작했다.
“두 분 다 거기까지 하세요. 이러다 CRPT 오겠습니다.”
슬쩍 CCTV를 가리키며 말하자 다니엘의 고개가 잠시 돌아갔다. 조금 후, 하는 수 없다는 듯 다니엘이 먼저 일어났다. 그사이에 태주는 얼른 지호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괜찮습니까? 손등에 상처 났습니다.”
별로 심하지도 않은 가벼운 상처임에도 기분이 상했다. 조심 좀 하시지. 작게 핀잔하며 그의 손등을 치료해 주었다. 그동안 침대에 가만히 앉은 다니엘은 아직도 불만인지 얼굴에 심술이 가득했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국가 기밀에 속해 있다고 하니까 저도 어느 정도는 알겠습니다. 다니엘이 여기 재소자로 있는 게 일 때문이라는 거죠?”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으면.”
“글쎄요. 그런 기밀을 알았다고 죽을 만큼 제 배경이 평범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시니까 저한테 이야기하려고 한 거겠죠.”
맞죠? 작게 미소 지으며 지호를 쳐다보았다. 지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시선만 맞춰 주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겠습니다. 보니까 선생님도 그 일에 끼어들었거나 휘말린 것 같은데, 그럼 저도 가야죠. 우린 이제 한 몸이거든요.”
국가 기밀이라니. 뭐 이런 영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 실재하나 싶지만, 거짓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거짓말을 할 거였다면 좀 더 똑똑하게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짜 왔을 것이다. 연지호나 다니엘이나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다니엘은 연지호를 알고, 연지호는 다니엘을 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건 남태주뿐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나도 좀 알아야겠다.
어서 설명해 달라는 눈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해탈한 듯 한숨을 내쉰 다니엘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교도관님 혹시 필요악이라고 알아?”
내가 하는 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래. 입을 연 그는 자신이 하는 일부터 간략하게 설명했다.
“올바른 건 아니지만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어쩔 수 없어서 가끔은 나쁜 짓도 해. 사람을 해쳐야 할 때도 있어.”
기밀 유지가 가장 중요한 탓에 기관의 이름은 없다고 한다. 조용히 법과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일을 처리하는 게 그곳에서 하는 일이었다.
“아마 교도관님도 알 거야. 작년부터 계속 교도소 재소자들이 죽어 나가는 거. 하도 죽어 나가서 흔한 일이 되는 바람에, 이제는 뉴스에도 안 나오고 별 이슈도 안 되지만, 내가 속해 있는 곳은 여전히 이 일을 조사하고 있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조사를 위해서였다.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라, 재소자로 위장해 몇 달 동안 교도소를 전전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가 마지막이야. 여긴 꽤 오래 잠잠해서 큰 기대는 걸지 않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어쩌면 그 사건의 주동자가 있는 곳이라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걸 수도 있고.”
“다니엘은 그 일들의 범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응, 반드시 존재해. 신이란 작자가 따로 몇 명만 골라서 심판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일 년 가까이 이 사건만 팠는데, 나도 얻은 정보가 아예 없지는 않다고.”
지호를 짧게 노려본 다니엘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제 잘 거라며 꼼지락꼼지락 이불 속에서 자세를 잡았다.
“아무튼 그래, 이렇게 된 거 교도관님 도움 좀 받자. 앞으로 내가 면담 신청하면 다른 일 다 제치고 무조건 나한테 먼저 와 줘. 수용자 정보도 많이 필요해. 교도소 들어오기 전에 보긴 했는데, 너무 오래전이라. 갱신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좋습니다. 법무부의 일이기도 하니까 일단은 저도 협력하겠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해친다든가 하는 윤리적인 선은 넘지 않을 겁니다. 다니엘도, 선생님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하고요.”
그리고 몇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돌아선 태주가 다니엘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불쑥 나온 손이 이를 거부하듯 파티션을 질질 끌어갔다.
“나머지는 연지호한테 물어. 저 새끼가 그쪽한테는 이제 숨기지 않기로 한 모양인데, 뭐 좋은 기회 아니겠어? 이것저것 물어봐. 아는 게 꽤 많으니까.”
이에 벽처럼 막혀 있는 파티션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왠지 어렵게 미소 짓고 있는 듯한 지호와 눈이 마주쳤다.
* * *
“왜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혹시 무리하고 있는 거라면 서두르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무사한 게 먼저니까요.”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태주는 나란히 맞춰 나아가는 발끝을 보았다. 먼저 퇴근하는 지호를 주차장까지 배웅하는 길이었다.
“그동안 드러낸 것보다 감추면서 살았던 날이 더 많지 않습니까. 몰래 천천히 무너졌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
“그랬던 선생님이 갑자기 모든 걸 드러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태주 씨….”
“혼자 품고 있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해 준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합니다. 하나씩 천천히 알아가겠습니다. 가장 보여 주기 편한 선생님의 모습부터 차례로 보여 주세요.”
미소 지은 태주가 슬그머니 지호의 손을 잡았다. 살랑살랑 앞뒤로 흔들었다.
“우리 이제 한 팀이고, 한 몸이니까 막 잡아도 되죠? 내 거 내가 잡겠다는데 굳이 허락이 필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장난스레 분위기를 환기하는 행동에 지호의 표정도 사르르 풀렸다. 어느새 어렵게 지은 미소가 아닌, 훨씬 더 편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걸렸다.
“태주 씨.”
“네, 선생님.”
“내가 예전에 법의관으로 있었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요?”
“음, 기억합니다.”
“그때 내가 일했던 곳이 평범한 법의학 연구소는 아니었어요. 지금 다니엘이 몸담은 곳과 연계된 법의학 연구소였거든요.”
지호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나를 드러낼수록 득이 될 게 없었어요. 나는 나를 보호할 보호자도 없었고,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란 꼬리표를 달고 있었고, 별난 병까지 얻었거든요.”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어쩐지 애를 쓰는 듯한 느낌이었다. 왠지 말려야 할 것 같은데, 마지막에 나온 ‘별난 병’이란 단어 때문에 생각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였다.
“아, 그런데 걱정은 하지 말아요. 관리만 잘하면 내 몸에서 함께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는 병이니까. 물론, 옮기는 병도 아니고요.”
“그럼 큰 문제는 없는 겁니까?”
“평생 약에 의존해야 하는 것만 제외하면요. 음, 그리고….”
“그리고요?”
“성생활에 조금, 문제가 있으려나?”
“예?”
뭔 생활?
심각하게 듣고 있었건만. 순간 힘이 탁 풀리는 듯했다. 당황한 태주가 두 눈을 깜빡였다. 발이 살짝 어긋나면서 맞춰 걷던 걸음이 흐트러졌다.
성생활….
그래,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 그런데 대체 무슨 병이길래 그런 예민한 문제가 있는 걸까? 매독? HIV? 그 전에 성병이 별난 병에 속하나?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연지호 이 인간이, 진짜로 성병에 걸린 거면 어쩌지?
“태주 씨?”
머릿속에서 늘어지는 생각들이 정리가 안 된다. 당황스러웠던 기분은 어느새 혼란으로 바뀌었다. 만약에 정말로 연지호가 그런 병에 걸린 거라면 큰 문제였다.
아, 안 되는데. 나, 이 사람이랑 언젠가는 그…. 안 하게 될까?
아니지!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앉는 게 말이 돼?
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완벽한 남자를 눈으로 훑노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옷을 입고 있어도 잘 빠진 게 눈에 보이는데 너무 아깝지 않은가.
사귀지도 않는 시점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긴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지호를 걱정해야 하는데, 자꾸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만 걱정하고 있다.
“태주 씨.”
톡톡, 볼에 닿는 느낌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손끝으로 태주의 볼을 찌른 지호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인 태주가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
“네, 태주 씨.”
“그 병이라는 게, 뭔지 자세히 물어도 되겠습니까?”
다른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걱정이 돼서 묻는다는 말은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그 전에 가까스로 제 기능을 한 이성이 이를 막았다. 하마터면 수상하게 보일 뻔했다.
겨우 속을 가다듬으며 흐트러진 걸음도 다시 맞춰 걸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주차장이었다. 지호의 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같은 사례의 환자도 없고, 그 외 사례도 찾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어요.”
먼저 걸음을 멈춰 선 지호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잡은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머리에 문제가 조금 있어요.”
“머리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행히 성병은 아니었다. 지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도 될까요? 이 이상은 소내 규칙 위반이 될 수도 있어서요.”
이를 마지막으로 지호는 입을 닫았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일부러 대화를 피하는 건 아닌 듯했다. 천천히 떨어지는 손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제가 많이 걱정할 문제는 아닌 겁니까?”
지호가 차에 올라타기 전, 태주가 물었다. 지호는 대답 대신 작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떴다. 긍정의 제스처였다.
“그래도 어디가 안 좋거나 아프면 꼭 저한테 알려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처럼 사람을 고칠 수는 없어도, 다른 뛰어난 의사를 불러올 순 있습니다.”
“그러기엔 나를 고치고 있는 게 태주 씨인 것 같은데.”
“예?”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요. 쉬면서 해요.”
장난스레 마지막 인사를 남긴 지호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태주는 지호의 차가 멀어지고,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을 때였다.
“소내 규칙 위반?”
무슨 병이길래 소내 규칙 위반까지 엮인 건데?
조금 전 지호 앞에서 의연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팔짱을 낀 채 왔다 갔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심각한 표정으로 땅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내 규칙, 머리, 성생활…. 이 세 가지가 엮일 만한 것.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답이 금방 나왔다.
“설마, 베타가 아니야?”
교도소 인력이 새로 충원되면서 1사동 교도관을 제외한 모든 교도관은 자신의 형질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연지호가 앓고 있는 병이 형질과 관련된 것이라면 여기서 이야기하기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페로몬은 뇌와 가장 연관이 깊으니까….
그리고 그 페로몬에 문제가 생기면 성생활도….
“진짜 오메가인가 봐….”
소내에 돌아다닌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 태주는 다리가 풀리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버텼다.
지난날 알파 수용동으로 연지호를 데리고 갔던 남태주가 떠올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얼굴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내가 어쩌자고 그 사람을!
당장이라도 어디든 좋으니 머리를 박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교도소. 사각지대를 찾을 수가 없는 곳이다. 벽에 머리라도 박았다간 바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연신 마른세수만 해댔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험난한 교도소에서 선생님을 지켜야만 한다!
1사동으로 돌아가는 길, 특수 강간으로 들어온 재소자가 몇이나 되는지 세어 보았다. 바로 떠오른 재소자만 해도 열 명은 족히 넘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암담하다.
* * *
“요즘 말이에요.”
점심을 먹다 말고 갑자기 턱을 괸 지호가 어느 한 곳을 주시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이 부장이 밥을 뜨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왠지 불안한 기운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싶을 때였다.
“태주 씨…. 아니, 남 교사님 꽤 귀엽지 않아요?”
“어엉?”
이 부장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런 얘길 들으려고 여기 앉은 게 아닌데. 하필이면 꽉 찬 식당은 이쪽 테이블 말곤 자리가 없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계속 날 보호하려고 드는데 말이죠. 그게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어느새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지호의 모습에 이 부장은 경악했다. 그동안 장난으로 두 사람을 엮었는데, 왠지 그 장난이 진짜가 되려는 듯한 조짐을 지울 수가 없다.
“뭐 저런 게 다 있지?”
한곳으로 향해 있는 시선이 지나치게 황홀해 보였다. 이 부장의 고개가 슬그머니 그 시선을 따라 이동했다. 뭘 그렇게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나 했더니, 밥을 얼마나 먹을지 고민하는 남태주가 서 있었다.
아주 사랑에 빠져 버렸구만. 나중에는 어? 결혼한다고 난데없이 청첩장까지 내밀겠어.
이 부장은 곧 이리로 올 태주를 생각하며 얼른 수저를 놀렸다. 얼마 남지 않은 밥과 반찬을 입에 넣고 국을 그릇째 들이켰다.
“난 먼저 가 볼 테니까 남 부장이랑 천천히 먹고 와요.”
“벌써 다 드신 거예요?”
“벌써는 무슨 벌써야? 연 선생님 국 다 식었건만.”
아무튼 먼저 가요. 후다닥 자리를 정돈하며 이 부장이 일어났다. 때마침 식사를 다 받은 태주가 지호를 발견하곤 활짝 웃었다.
“선생님! 오늘은 어떻게 시간이 맞은 것 같습니다?”
“태주 씨는 오늘도 살짝 늦었네요? 일이 많은 거예요?”
“아무래도 새 수용자가 많다 보니까 당분간은 조금 바쁠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네.”
“에이, 무리까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는 선생님은 요즘 안 바쁘십니까?”
“오후부터 조금 바쁠 것 같아요. 아, 태주 씨가 1사동 담당이니까 알겠네요. 오늘 수용자 형질 조사 있는 거.”
“어? 혹시 담당이 선생님이십니까?”
“네, 저랑 박차영 선생님이 맡기로 했어요.”
툭.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것도 잠시, 태주가 쥐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렸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저, 정말로요?”
“네, 정말로.”
“거짓말 아니고?”
“내가 태주 씨한테 감춘 건 있어도 거짓말한 건 없는데.”
“아….”
표정만 봐도 생각이 많아진 게 눈에 보인다. 지호는 그런 태주의 얼굴을 감상하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며칠 전 알파 수용동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신경 쓰는 걸까? 그런 수용자가 몇 명 있다고 해도 내가 쉽게 당할 리는 없는데.
하지만 자신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태주가 좋았다. 어떻게든 지켜 주려고 하고, 보호하려고 들 때마다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오늘 또 만나겠네요. 이렇게 태주 씨 얼굴 자주 보니까 좋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지 못해도, 그 걱정을 덜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조금 더 누리고 싶은 욕심이 아직 남아 있다.
지호는 오늘까지만 지켜보기로 하며 조금 더 태주에게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태주가 수저를 제대로 쥐었다. 시선을 맞추며 똑같이 미소 지어 주었다.
웃는 게 참 예쁘네. 매일 이렇게 함께 웃고 싶을 정도로.
태주 앞에서 지호는 다 식어 버린 국도 맛있었다. 남태주가 워낙 따뜻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함께 있으면 차갑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지친 얼굴로 허공만 쳐다보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이것도 자꾸 그 시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남태주 때문이었다. 덕분에 웃음이 늘었다.
* * *
보는 눈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태주는 할 수만 있다면 수용자들의 눈을 전부 가리고 싶었다. 살면서 이런 마음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아, 왜 이렇게 우리 선생님이 닳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지? 그만 보라고 하고 싶다.
왜인지 몰라도 오메가라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이로 인해 지호는 알파 수용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역시 형질은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가 없는 법인 걸까. 의무실 앞에 서 있는 수용자들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 남 부장님, 남 부장님! 이예!”
그사이 의무실에서 나온 차영이 태주를 발견하고 알은체했다. 두 손을 들며 다가오길래 태주도 손을 들어 그의 손과 맞부딪쳐 주었다.
“어우, 형질 검사를 뭐 이렇게 자주 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이번에도 별 이상 없이 그대로일 텐데.”
“별 이상 없어야 위에서 지원금이 잘 나옵니다. 게다가 이번에 수용자가 많이 늘어나기도 했고요.”
힘들다며 몸을 축 늘어뜨린 차영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렇게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다가 슬슬 보내려고 했다. 이 인간을 빨리 들여보내지 않으면 우리 선생님이 혼자서 고생하기 때문에.
그런데 또 무슨 용건인지, 시들시들해 있던 인간이 갑자기 기운을 차렸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슬슬 보다가 조그맣게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들어온 수용자 대부분이 조폭이라면서요. 남 부장님 괜찮은 거예요?”
새로 온 수용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알파 수용동에서 있던 일이 떠올랐지만, 굳이 그 일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뭐, 아직은 별일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되도록 신경 쓸 거고요.”
“아아, 다행이네. 그래도 조심해요. 나도 처음엔 그것들이 자수하고 교도소 온 거래서 안심했는데, 가만 보니까 안심할 게 아니더라고. 여전히 질이 나빠요.”
자수하고 들어왔대서 반성하면서 징역 살 줄 알았건만. 쯧쯧 혀를 찬 차영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본 게 있거나 들은 게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냐며 태주가 넌지시 물었다. 차영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오전 운동 시간에 오 교도님이 수용자 하나 데리고 왔거든요? 그런데 나도 그렇고 오 교도님도 그렇고 왜소하니까 만만해 보였나 봐. 갑자기 욕을 하면서 담배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데, 어휴.”
“아, 오늘 오 교도가 조사 넘긴 수용자인가 봅니다.”
“어어, 맞아요!”
다행히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또 교도관의 눈을 피해 다른 짓이라도 한 줄 알고 긴장했던 속이 한결 느슨해졌다.
아니, 느슨해지는 건 잠시뿐이었다.
“게다가 연 선생님한테는 잘 대 주게 생겼다느니, 페로몬도 천한 냄새 날 것 같다느니 지껄이면서 성희롱을 하더라니까요?”
이어지는 차영의 말에 태주의 표정이 굳었다. 지호의 일은 오 교도에게 전혀 보고받지 못했던 탓이다. 지호가 전혀 반응하지 않은 데다가, 오 교도가 바로 수습한 덕분에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순 없었다.
지호가 오메가란 소문이 재소자들 사이에서 기정사실로 변한 듯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의무실에 들어선 태주는 심 교도와 위치를 바꿨다.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환장할 만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무슨 의사가 이렇게 손이 고와? 원래 의사들 손이 다 이렇게 곱나?”
한 수용자가 청진기를 든 지호의 손을 노골적으로 만지작거렸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이를 악물었다. 얼른 그 둘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할 때였다.
“글쎄요? 제가 외과 의사라 연약한 내장을 많이 만져서 그럴까요? 아, 오랫동안 수술을 못 했더니 누구든 좋으니까 배 좀 가르고 싶네요.”
“어, 어?”
“사람 내장이 엄청 부드럽고 따뜻하거든요. 조금만 힘줘서 잡아도 잘 터지니까, 제 손도 그만큼 아주 부드러워야겠죠?”
“….”
“어디 아픈 사람 없나? 오랜만에 만지고 싶은데.”
지호의 검지 끝이 은근하게 수용자의 명치를 훑었다. 메스를 쥔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서늘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수용자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급히 손을 거뒀다.
걱정…. 조금 덜 해도 괜찮은 걸까? 미소 짓는 지호의 모습이 태주의 눈에 박혔다.
가만히 넋 놓고 있자,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피어 있던 미소가 조금 더 분명해지고 해사해졌다.
아, 역시. 저렇게 예쁘고 잘났는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역시! 역시나! 자신이 지켜 줘야 할 남자임이 분명했다. 저렇게 고운 얼굴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여태 살아 온 걸까?
태주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저 얼굴을 보고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아직 한참 더 남았는데.”
“전 직장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죠.”
“이후에 별다른 일정 없으니까 서두르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우리 남 교사님을 계속 서 있게 할 순 없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손 하나는 빠르니까 금방 끝낼게요.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지호가 조금 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차영이 한 사람을 볼 때, 그는 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원래도 굉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더 실감이 난다. 역시 교도소 의무사무관으로만 있기에는 아까웠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호의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지호와 태주를 몇몇 수용자가 눈여겨보고 있었다.
* * *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이른 아침, 1사동 중에서도 알파 수용동의 일과는 다른 사동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다.
일과의 시작인 아침 운동 시간에는 대부분 졸린 눈을 비비며 운동장을 돌았다. 다른 형질의 수용자를 피해야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계호하는 교도관 또한 다른 이의 눈을 피해 찌익 하품을 하곤 했다.
“큼, 크흠.”
한 수용자가 교도관의 눈치를 보며 슬쩍 구석의 벤치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벽에 다른 수용자가 쭈뼛쭈뼛 섰다. 두 사람은 교도관의 행태를 살피며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니까, 그 의사 선생이 오메가라고? 그럼 남 부장 그 새끼는 뭔데? 알파?”
“아뇨, 형님. 남 부장은 베타입니다.”
“뭐야? 알파도 아니면서 뭐 그렇게 그 오메가를 싸고도는데? 오메가 뒷구멍 맛 아는 거 아니야? 한번 박아 본 적이라도 있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교도관 때문에 작은 형님이 지금 징벌방에 있습니다.”
“새끼가 쪽팔리게 교도관 하나한테 꼼짝을 못하네?”
며칠 전 새로 들어온 수용자였다. 둘의 시선이 짧게 태주에게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베타이긴 해도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습니다. 괜히 눈에 띄는 행동은 안 하시는 게….”
“야.”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그들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벤치에 앉은 수용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우리만 더러운 새끼인 것 같아?”
“그게….”
“교도관도 만만치 않게 더러워. 수용자 가족한테 돈 받는 새끼도 있는데, 걔네랑 우리가 다를 게 뭐겠냐?”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눈이 갈수록 위협적인 빛을 띠었다.
“남 부장 저 새끼도 봐. 의사 선생 싸고돈단 소문이 괜히 돌겠어? 그 선생 약점 잡아서 뒷구멍에 좆질 몇 번 했을걸? 원래 저렇게 번듯한 새끼들이 더하다니까?”
“그, 그렇습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더 잘됐지, 뭐. 안 그래도 한동안 못해서 터질 것 같았는데. 우리도 약점 하나 잡아서 그 반반한 의사 선생 맛 좀 보자고.”
올라가는 입꼬리가 섬뜩했다. 고개를 돌린 태주와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얼굴로 스트레칭을 하듯 팔을 돌렸다. 태주의 시선이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그다지 큰 걱정은 안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다니엘이 지루한 표정으로 진료 의자에 앉았다. 그 앞에 선 지호는 이마에 붙은 반창고와 거즈를 떼고 상처를 살폈다.
“다니엘이 내 걱정을 다 할 때가 있어요? 보자, 상처는 잘 아물고 있네요.”
“나 지금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거든? 그 새끼들 마약 팔고, 무기 팔고, 사람까지 파는 완전 생 조폭 소속이야. 나도 맨몸으로 그 새끼들 전부 대처하긴 힘들다고.”
“그럼 신경 쓰지 말고 다니엘 일만 하면서 얌전히 지내요. 밖에서 어떤 조폭이었든 여기선 그냥 재소자일 뿐인데 뭐가 걱정이에요.”
“너의 그 안일한 생각이 걱정이야. 너 말고 남태주한테 그런 소릴 했어 봐. 네가 가만히 있었겠어?”
“당연히 가만히 안 있죠. 그런데 그 전에 태주 씨와 나는 다르잖아요. 나한테 그런 얘기하는 건 별로 기분 안 나빠요. 게다가 지금으로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새 거즈와 반창고를 붙인 지호가 다 됐다며 물러났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고 창밖을 보는 모습이 세상 태평하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다니엘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돌아설 때였다.
“그런데 그 재소자들이 사고를 치면 우리 태주 씨가 힘들겠죠?”
손을 쓰긴 해야겠네. 작게 중얼거린 지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 * *
“6425 말이에요.”
관구실 문을 연 심 교도가 잠시 뜸을 들였다. 할 말이 있는데, 꺼내도 되는지 분위기를 살피는 눈치였다. 태주가 뭐냐고 묻자 그제야 말을 이었다.
“그 사람 혹시 바보예요? 약간, 그, 뭐랄까. 모자라요? 그래서 생각 없이 마약인 줄도 모르고 어영부영 주는 물건 옮기다가 여기까지 온 건가?”
“심 교도님도 CCTV 보고 오셨습니까?”
“네, 교도관들 사이에서 핫한 영상이라길래 봤는데 우리 사동 사람이더라고요. 난 또, 새로 데뷔한 걸그룹 영상이라도 보는 줄 알았네.”
성난 들소처럼 냅다 벽에 머리를 박은 다니엘의 모습은 금세 교도관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다. 태주도 이 이슈를 몰랐다가 격려하듯 어깨를 툭툭 치는 교도관들 덕분에 알았다.
‘남 부장, 웬 또라이가 들어와서 고생 좀 하겠어?’ 그 또라이가 다니엘이란 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타입이라 그러지,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태주가 작게 웃으며 다니엘을 대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가 없다.
“영상 봤는데 남 부장님 진짜 당황스러우셨겠습니다. 여태까지 자해라고 해 봐야 수건으로 목 조르는 게 다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6425는 냅다 머리 박더니, 피가 철철 나는데도 미친놈처럼 웃고 있고. 어휴….”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한 심 교도는 여전히 표정이 심각했다. 오늘 의무사동에서 돌아올 텐데 큰일 났단다. 이에 태주는 걱정하지 말라며 심 교도를 다독였다.
“6425는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이제 슬슬 의무사동에서 데리고 오면 되겠네요.”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식사가 돌 시간이다. 관구실 창문 너머로 사동 도우미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짧게 스트레칭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무실에 가면 선생님 계시겠지? 같이 저녁 먹자고 할까? 행복한 계획을 세우며 관구실을 나설 때였다. 덥석 태주를 붙잡은 심 교도가 이를 막았다.
“어어? 남 부장님이 6425 데려오시게요? 남 부장님은 여기 계세요! 제가 가겠습니다!”
“예? 제가 가도 되는데?”
“아이, 그렇게 따지면 제가 가도 상관없는 거 아닙니까? 오전에 행사 준비로 힘드셨으니까, 좀 쉬세요.”
“행사 준비는 심 교도님도 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 그래도 그런 또라이는 제가 맡겠습니다! 남 부장님은 여기서, 음…. 어어! 저기 사동 도우미 손 흔든다! 뭐 문제 있나 본데요?”
“어디요?”
심 교도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태주의 시선이 이동했다. 정말로 한 사동 도우미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아, 선생님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하지만 근무 중에 일을 제치고 갈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심 교도를 의무실로 보내고 사동 도우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요. 김치가 이것밖에 없는데 방 다 못 돌 것 같아서요.”
슬쩍 반찬통을 보여 준 사동 도우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두 군데밖에 배식하지 않았는데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이런 실수 잘 안 하는데? 일단 계속 배식하세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고개를 기웃거린 태주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듯 다른 수용동으로 향했다. 반찬이 남으면 다른 사동 도우미에게 주라고 하자, 이쪽은 또 양이 딱 맞는단다.
응? 뭐야? 오늘따라 왜 이래? 양을 평소보다 적게 했을 리는 없고. 다른 사동으로 다 넘어갔나?
결국에는 다른 사동까지 넘어간다. 밖으로 나와 2사동 건물로 향하던 도중 벌써 배식을 마친 사동 도우미와 마주쳤다. 그 옆에서 같이 걷던 성 부장이 먼저 태주에게 인사했다.
“오, 남 부장. 수고.”
“아, 네. 그런데 2사동은 벌써 배식 마쳤습니까?”
“응, 정리하고 가는 길인데?”
“그럼 혹시 반찬 남은 거 없습니까? 저희 사동에 양이 너무 적게 들어와서요.”
“그래? 그렇지 않아도 우리 쪽은 반찬이 너무 많더라고. 다 이쪽으로 왔나 보네. 어이, 6211. 남은 반찬 있죠? 그거 1사동에 줘요.”
“네? 아, 배식 카트 반납했는데…. 그래도 방금 해서 아직 치우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제가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인 태주가 가볍게 뛰었다. 이를 가만히 보던 2사동 사동 도우미가 성 부장에게 물었다.
“남 부장님 카트 못 찾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가 가서 도와드려도 돼요?”
“어, 그래. 다녀와요.”
성 부장은 흔쾌히 가라고 손짓했다. 사동 도우미가 태주의 뒤를 따라 뛰었다. 동시에 조용히 주변을 살피는 눈에 긴장이 어려 있었다.
* * *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있던 교도소가 원주 교도소라고 했죠? 거기 그 방화범 있는 교도소 아니에요?”
‘그 방화범’에서 미세하게 목소리가 어긋났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멀쩡해 보여도 힘들게 꺼낸 이야기였다. 당연히 이를 모를 리 없는 다니엘이 모르는 척 능청스레 반응했다.
“참 빨리도 묻는다. 내가 이 문제로 너 만나려고 이마까지 찢어 먹었는데.”
“괜한 헛수고였네요.”
“내 말이! 에이, 씨발. 아무튼, 아동 시설만 골라서 불 지른 그 새끼 말하는 거지? 일 년 전에 키즈 카페 불도 걔가 지른 거라며? 나랑 같은 수용동에 있어서 몇 번 봤는데 전적이 화려하더라?”
“그래요?”
“예전에 혜성대 병원에 김희재인지 뭔지 하는 애 하나 들어왔었잖아. 그 애 유치원도 그 새끼가 불 지른 거였어. 행사 때 같이 앉을 기회가 있어서 몇 마디 나눴는데, 그 새끼 완전 사이코더라.”
개 또라이 새끼. 욕을 한 다니엘이 관자놀이 즈음까지 검지를 올린 채 빙글빙글 돌렸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야기에 지호가 귀를 기울였다.
“어떤 면에서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증상이 있는 건가요?”
“내가 볼 땐 그래. 타인을 전혀 공감할 줄 몰라. 애들이 죽는 건 신경도 쓴 적 없다네? 그 새끼가 뭐라 그러는지 알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다니엘이 순간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는 마치 방화범에게 빙의라도 한 듯 공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람이 죽을 줄은 몰랐는데. 애들이 죽었다는 것도 검사한테 들어서 알았어.”
“….”
“처음엔 식당에 딸린 작은 놀이방이었어. 누가 돈을 주더니 불을 지르래. 지르고 오면 더 준대. 그래서 질렀어. 그냥 돈 버는 것뿐인데 내가 그 안에 애가 있는지 확인까지 해야 돼? 왜? 그건 내 일이 아니잖아.”
타인의 기분이나 상태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 따진다. 이용 가치가 없거나 다한 건 딱히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다니엘의 말대로 문제가 있어 보였다. 짧게 숨을 들이켠 지호가 떨리는 속을 조용히 가라앉혔다. 품에 끌어안았던 차가운 몸이, 멎은 숨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럼, 지금까지 저지른 방화가 전부 돈 때문이었던 건가요?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한 짓인 거예요?”
“그렇지. 누군지 몰라도 아마 한 사람 아니면, 한 세력일 거야. 많은 사람이 의뢰했다면 그 새끼도 아동 시설만 노리진 않았겠지.”
“그러네요. 그런데 왜 아동 시설만 노렸을까요? 대체 왜….”
지금껏 겪어온 일 때문일까?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임에도 신경이 쓰였다.
“힘들겠지만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때? 그 사건 피해자들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화재 직후에 찾아갔어요. 크게 이상한 점은 못 느꼈는데, 희재 유치원 쪽도 한번 살펴봐야겠네요.”
태주 씨가 아직 희재 유치원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했던가? 생각에 잠긴 지호가 책상에 기대앉았다. 그 순간 벌컥 의무실 문이 열렸다.
“6425 여기 있습니까?”
다니엘을 데리러 온 심 교도였다. 태주가 오지 않은 것에 조금 아쉬워한 지호가 자세를 바로 했다.
“심 교도님 오셨어요?”
“6425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별 탈 없이 잘 회복하고 있어요. 다음 주 정도면 실밥 제거해도 될 거예요.”
“티 안 나게 예쁘게 꿰매 주신 거죠? 가뜩이나 범죄자인데, 얼굴에 험악한 상처까지 있으면 나중에 사회 적응하기 힘들 거 아니에요.”
“글쎄요? 제 나름대로 예쁘게 꿰매긴 했는데 모르겠네요.”
흉이 남으면 어쩔 수 없죠, 뭐. 험한 세상, 험한 얼굴로 살아가는 수밖에. 작게 웃은 지호가 다니엘을 데려가도 된다며 눈짓했다.
“갑시다, 6425.”
심 교도가 다니엘을 잡아 일으켰다. 의무실을 나서려다가 멈칫했다.
“남 부장님은 오전에 행사 준비로 무리하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예?”
뜬금없는 소리에 지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심 교도가 말을 덧붙였다.
“그냥 궁금하신 것 같아서요! 남 부장님이랑 친하시잖아요!”
그러면서 잔망스럽게 윙크를 남기곤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에 픽 웃음을 터뜨린 다니엘이 심 교도와 똑같이 윙크를 날렸다.
아니, 근데 심 교도는 몰라도 왜 다니엘 저것까지? 보다 못한 지호가 책상 위에 놓인 붕대를 집어 던졌다. 돌돌 말린 것이 휘리릭 풀리며 날아갔다. 아깝게 다니엘을 피해 문에 맞았다.
남태주가 아니라서 서운한 게 그렇게 티 났나? 그래도 나름 표정 하나는 잘 감춘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남은 의무실. 지호는 괜히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다.
“너무 티 나면 안 되는데….”
아직 내가 남태주 옆에 설 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서.
* * *
잠시 쉬고 오라는 의무과장의 말에 지호는 의무실을 나섰다. 웬만하면 쉴 때도 의무실에 얌전히 있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다른 교도관을 만나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우리 태주가 신경 쓰지 않는 선에서 묻어 버려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작게 한숨을 쉴 때였다.
“오오, 연 선생! 어디 가요? 화장실?”
김 주임이 어깨를 톡 건드리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지호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아, 김 교위님. 그냥 잠깐 좀 걸으려고요.”
“그럼 지금 좀 시간 괜찮은가 보네? 잘됐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무슨 일 있나요?”
“잠깐 밖에 돌고 오는데 감시 카메라 하나가 이상해서. 묘하게 각도가 틀어진 것 같은데 새가 날다가 부딪친 건지, 원.”
화면 각도가 바뀐 건지 확인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어서 제대로 보일지 모르겠단다. 그다지 어려울 게 없는 부탁에 지호는 흔쾌히 김 주임의 뒤를 따랐다.
“연 선생이 여기 오기 전에 외과 의사로 일했다면서요. 수술할 때 세세한 거 다 눈으로 봐 왔으니까 화면도 잘 보겠네.”
“그런데 쉬는 동안 감각이 둔해져서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게다가 수술 땐 장비를 이용해서 보기도 하고….
지호는 굳이 그 점을 짚어 주진 않았다. 김 주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가끔 대꾸해 주는 게 전부였다.
두 사람은 외부 통로를 지나 중앙 건물에 들어섰다. 보안실에 들러 담당 교도관과 함께 CCTV 촬영 화면을 돌려보았다.
하늘이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 시간부터 영상을 빠르게 재생했다. 아침 운동 시간이 끝날 무렵, 화면이 짧게 흔들리더니 다른 방향으로 각도를 틀었다.
“아이고, 여기서 틀어졌네.”
역시 자신의 감이 맞았다는 듯 김 주임이 화면을 가리켰다. 미간을 좁힌 지호가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뭐가 부딪친 건지는 보이지 않아요.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새겠지, 뭐. 일단 저것부터 바로 해야겠네.”
아이고, 해 지기 전에 마쳐야지. 김 주임이 팔을 쭉 벋어 스트레칭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지호는 가만히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교도소의 핵심은 경비다. 그러므로 사각지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카메라의 각도가 조금 바뀌면서 사각지대가 생겼다. 경비가 무너졌다.
“윤 교도님, 이 카메라가 원래 비추던 원래 비추고 있던 자리와 같은 곳을 비추는 다른 카메라가 있을까요?”
“아, 예. 살짝 다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겹치는 카메라가 있긴 합니다. 잠시만요.”
윤 교도가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타닥타닥 들리는 키보드 소리를 따라 지호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조금 전, 다니엘이 조심하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자신을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한 지 하루도 안 지난 시점에서 일을 벌이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새끼들 마약 팔고, 무기 팔고, 사람까지 파는 완전 생 조폭 소속이야. 나도 맨몸으로 그 새끼들 전부 대처하긴 힘들다고.’
역시 방심할 순 없었다. 카메라가 원래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방향이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던 탓이다. 구매품 차량이나, 법무부 차량 같은 것들이 드나드는 주차 구역이었다.
“선생님, 여기 16번 화면입니다. 앞으로 좀 돌릴까요?”
“네, 역시간으로 빠르게 재생 부탁드려요.”
지호의 온 신경이 화면에 집중됐다. 찰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풍경만 계속해서 보일 뿐, 따로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함께 화면을 보던 윤 교도가 몰래 하품을 할 때였다.
“잠시만요.”
갑자기 멈춰 보라는 말에 윤 교도의 턱이 굳었다. 고개를 저으며 퍼뜩 정신을 차린 그가 얼른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여기서부터 원래 속도로 재생해 줄래요?”
“예? 예.”
다시 똑같은 풍경이 그림처럼 화면에 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 귀퉁이에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 게 보였다.
쿵. 순간 왠지 모를 서늘함을 느낀 지호가 서둘러 보안실을 나섰다.
* * *
뛰고 또 뛰었다. 구역을 지날 때마다 카드키를 이용해야 하는 순간이 거슬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지만, 지금과 같은 촉은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다.
“어? 이봐, 연 선생! 혹시 남….”
“죄송해요, 이 부장님. 나중에 얘기해요.”
가는 길에 만난 이 부장의 말까지 자르며 좀 더 서둘렀다. 순식간에 곁을 스친 그 동선을 따라 이 부장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지? 남 부장, 연 선생한테 간 거 아닌가?”
멀어지는 지호를 보며 이 부장이 중얼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소리치며 지호를 뒤따라 뛰었다.
“근데 뭔 일 있어요? 어딜 그렇게 뛰어 가? 거, 뭔 일 있는 거면 혼자 안 가는 게 좋은데!”
* * *
급히 주차 구역으로 들어선 지호가 주변을 살폈다. 냉동탑차 한 대와 상자 몇 개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점 없이 고요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운전석과 조수석부터 확인했다. 자리가 비어 있었다.
“헉! 헉! 아이고, 죽겠네!”
뒤늦게 도착한 이 부장이 벽을 붙잡고 숨을 골랐다. 지호의 곁으로 가려 하는데, 퉁! 냉동 창고에서 소리가 났다.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창고를 쳐다보았다. 지호도 묘한 낌새를 느꼈는지 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부장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긴장한 얼굴로 쿵쿵 창고를 두드렸다.
“거, 안에 누구 있어요?”
하지만 입구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는데 사람이 있을 리가. 당연히 안쪽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한참 뒤에 다시 퉁! 안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이거, 안에 누가 갇힌 것 같은데? 이 부장이 좀 더 크게 소리쳤다.
“안에 누굽니까? 갇힌 거예요? 여기 자물쇠 열쇠 어디….”
“이 부장님?”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하다. 몇 년째 매일같이 직장 동료로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태주였다.
“남 부장? 뭐야? 남 부장이 왜 그 안에 있어?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같이 오신 겁니까?”
“어어, 이 사람이 미친 듯이 여기로 뛰길래 내가 따라왔죠. 그나저나 이거 어떡하냐? 거기 냉동고 켜져 있어요? 많이 추워?”
“냉동고는 켜져 있는데 처음에만 조금 추웠지, 지금은 괜찮습니다. 열이 좀 나서 그런가 봐요.”
“아휴,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봐요! 이봐, 연 선생님? 이거 어쩌지?”
태주와 이야기를 마친 이 부장이 지호를 보았다. 왜인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지호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굳어 있었다. 다행히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 부장님, 연장이요. 지금 창고 열쇠 찾는 것보다 자물쇠를 부수는 게 더 빨라요.”
어느 때보다 다급하고 심각한 모습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태주를 부르며 창고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태주 씨! 태주 씨? 열이 많이 나요? 지금 많이 더워요? 그래도 옷이 젖은 게 아니면 절대로 벗으면 안 돼요! 알았죠?”
그냥 갇혀 있을 뿐이지, 괜찮아 보이건만. 이렇게까지 유난일 필요가 있나 싶다.
진짜 저 둘은 무슨 관계인 거야?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이 부장이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맨손으로 자물쇠를 잡아 뜯던 지호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어서요, 이 부장님! 태주 씨 당장 여기서 안 꺼내면 안 돼요! 지금 태주 씨, 저체온 현상이 심해져서 열이 나는 거라고요!”
“뭐?”
“게다가 저는 여기 도착한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태주 씨가 먼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꽉 막힌 공간에서 나를 봤을 리가 없잖아요.”
“아이, 그….”
“환각을 봤을 가능성이 커요. 이 정도면 뇌 기능까지 손상됐을 거예요.”
“아니, 그럼 그걸…. 아오! 진작 말했어야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줄 알았나? 소리친 이 부장이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지호는 손톱이 부러지고, 피부가 갈라져 피가 흐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자물쇠를 잡아 뜯는 데 집중했다.
그 똑똑한 남태주가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란 것조차 자각 못 하고 천진하게 군다. 뇌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해 혼란에 빠졌다는 뜻이다.
어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손만 점점 더 망가질 뿐, 자물쇠는 도저히 끊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살문과 가까운 바닥에 수갑이 있었다. 조금 전, 이 부장이 서두르다가 떨어뜨린 것이었다.
지호는 수갑을 주워 계속해서 자물쇠를 내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사 부분이 헐거워지는가 싶더니, 잠금장치가 떨어져 나갔다. 서둘러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 곧장 태주를 끌어안았다.
“남태주!”
“아, 선생님….”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미안해….”
혼자서 적어도 15분가량을 버텼을 것이다. 여기서 5분만 더 늦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이 사람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면서 지호는 무서워졌다. 품에 안은 태주를 놓을 수가 없었다. 끌어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불안을 눈치채고 안심시키기라도 하려는 건지, 태주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미소 지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선생님….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근육이 경직돼서 그런 거예요.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니니까 괜찮아. 응, 괜찮아.”
“그런, 겁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이를 마지막으로 올라가 있던 태주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힘 빠진 몸이 축 늘어졌다.
“태주 씨.”
“….”
“태주 씨?”
“….”
“몸이 너무 차갑다. 많이 추웠죠?”
이럴 때 입고 있는 게 가운밖에 없는 것이 속상하다. 그래도 가운을 벗어 태주의 몸에 덮은 지호는 그를 안고 창고를 나왔다.
때마침 헐레벌떡 다른 연장을 들고 온 이 부장이 그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둘 다 괜찮냐는 물음에 지호가 대답 대신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괜찮을 리가.
전혀,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자신이 아닌 태주를 먼저 건드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마 눈엣가시인 남태주를 먼저 처리하고, 그다음에 자신을 노리려고 했던 듯하다.
이런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닌데.
지호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미안하고 착잡한 마음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지금은 품 안에 있는 남태주가 무엇보다도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