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드물게 잘한 일
“요즘 왜 콧구멍에 바람 넣고 왔단 녀석이 없냐? 이제 외부 진료 잘 안 보내 주나?”
“그, 뭐냐. 이번에 의사를 엄청나게 뽑았다잖아요. 의무실도 싹 바뀌고. 이제 웬만한 건 의무실에서 다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요즘 수용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싹 바뀐 의무실과 새로 온 의무사무관이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의무실로 떠난 수용자도 24시간 이내 방으로 돌아오니, 대체 의무실이 어떻게 바뀐 건가 싶은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선생님 실력이 무지하게 좋은가 봐요. 전에 보니까 생긴 것도 심상치 않던데요? 옆방 개미 녀석이 어제 의무실 갔다가 개안하고 나왔다잖아요.”
“옆 사동 놈 갈비에 냅다 빨대 꽂은 그 의사 말하는 거지? 곱다랗게 잘생기긴 했더라. 근데 그래도 남 부장이 더 잘생기지 않았냐?”
“둘이 분야가 달라서 비교하기 애매해요. 한쪽은 번듯하니 잘생기고, 다른 한쪽은 곱게 잘생기고. 이거는 취향에 따라 갈린다니까? 들리는 얘기로는 그 의사 선생님이 오메가라 하던데요?”
“와, 옆 사동 알파들 환장하겠다. 난리 나겠네.”
특히 수용자들은 새로 온 의무사무관에게 관심이 많았다. 교도관처럼 매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탓에 상상할 여지가 잔뜩이었다. 여기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는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으니, 이만큼 좋은 화젯거리가 또 없다.
“어디서는 소장 아들이라고 하대?”
“전에는 뭐, 법의학자였다는데?”
“한국대 나왔다며? 엄청 똑똑하다더라.”
“근데 왜 교도소로 왔어? 대학 병원 연봉이 훨씬 많지 않아?”
“옆 사동 남 부장처럼 집에 돈이 많은가 봐. 놀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여기 온 거라는데?”
“그래? 나는 박 선생처럼 병원에서 쫓겨나서 여기 온 거라고 들었는데?”
“엉? 그러냐? 뭐지? 내가 들은 거랑 다르네?”
“뭐야? 뭔 말이 이렇게 많이 돌아? 그래서 뭐가 진짠데?”
그 의무사무관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마지막은 이런 식이었다. 모두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달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이, 연지호라고 했나?
대체 뭐 하는 작자래?
* * *
“와,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인간 맞냐?”
의무과장이 1사동 관구실 문을 힘차게 열며 소리쳤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교도관들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김 주임이 숨겨 둔 박스에서 알로에 주스를 한 병 꺼냈다.
“주임님이랑 또 한바탕하려고 그러십니까?”
작게 웃은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를 내려 올 테니 주스는 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할 때였다. 똑, 맑은 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뚜껑이 열렸다.
“됐어요, 그냥 앉아요. 나 남 부장이랑 할 얘기 있어서 왔어요.”
단숨에 주스 한 병을 비운 의무과장이 의자를 질질 끌어와 앉았다. 아니, 앉았다기보다는 몸의 지탱을 의자에 맡긴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행색이 후줄근하고 지쳐 보였다. 태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의무실 일이 많습니까? 굉장히 피곤해 보이십니다.”
“일은 안 많아요. 근데 굉장히 피곤해요. 아, 좋다 말았네.”
한숨을 길게 뱉은 의무과장이 작게 한탄했다. 그는 몇 번을 더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본론을 꺼냈다.
“아니, 남 부장. 남 부장이 그 연지호 선생이랑 친하다면서요? 전부터 담당 의사랑 환자 관계였다며?”
“예? 예, 뭐.”
“남 부장이 그 인간 좀 말려 봐요. 이러다 나 죽겠어요. 어우, 무슨 인간이 한계가 없어? 한 달 동안 차근차근 숙지하라고 준 매뉴얼을 반나절 만에 달달 외워서는….”
“아,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쉬지도 않고 뭘 자꾸 하죠? 아마 지칠 때까지 그럴 겁니다.”
내가 또 연지호의 그런 면은 많이 겪어 봤지.
남은 지금 하소연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태주는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묘한 기분을 느낀 의무과장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대화 상대를 잘못 고른 듯한 느낌이지? 그래도 이왕 꺼낸 말,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사람이 참 상냥하고 일은 잘하는데 너무 피곤해. 이틀 만에 의무실 환자 기록을 싹 보더니, 이건 왜 이런 처방이 나왔냐. 이 약은 들이는 데 수량 제한이 있냐. 어느 정도의 중증이어야 외부 진료 나가는 거냐. 엄청나게 물어봐. 심지어 그러느라 밥도 잘 안 먹어요.”
그렇게 잘 안 먹는데 키는 또 왜 그렇게 크냐며 이제는 그것도 열받는단다. 지호가 먹을 수 있을 때 몰아서 먹는 타입이라는 건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보지 않아도 어떻게 일하고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진다. 태주는 의무과장이 안됐다 싶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조금만 더 견디면 오히려 편해질 거라고 말할 때였다.
“과장님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관구실 문이 또 한 번 활짝 열렸다. 아직도 직장 동료가 됐다는 게 적응이 안 되는 지호가 들어왔다. 의무과장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간절한 시선이 태주에게로 향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떻게 좀 해 보라는 뜻인 걸 알겠다. 하지만 지호와 친분이 있는 태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기 때문에.
우리 선생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그런데 끼니만 좀 잘 챙깁시다! 오히려 속으로 그를 응원하며 반갑게 말을 붙였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어? 태주 씨? 아아, 여기가 1사동이었구나?”
아무래도 무작정 의무과장을 찾으러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지호가 신기한 듯 작게 감탄했다.
“관구실을 중심으로 수용동이 나뉘나 봐요? 이쪽이 알파 수용동이고 저쪽이 오메가 수용동인가?”
“네, 맞습니다. 아직 소내는 안 둘러보신 겁니까? 여기 꽤 복잡해서 한 번은 둘러보시는 게 좋은데.”
“그건 조금 나중에요. 수용자 상태 파악 먼저 하고요. 아! 말이 나와서 그런데요, 과장님.”
지호의 시선이 다시 의무과장에게로 향했다. 그가 태주와 함께 소내를 둘러보러 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의무과장이 화들짝 놀랐다. 젠장, 또 시작이겠군.
“이 환자는 한 달 전부터 처방이 바뀌어 있던데, 수용자한테도 보통 신약을 권유하는 경우가 있나요?”
들고 온 파일에서 처방전 두 장을 꺼낸 지호가 그것을 보여 주었다. 의무과장이 오늘은 제발 그만하자는 투로 답했다.
“네. 있어요. 잦습니다. 수용자한테 신약 처방할 때는 꼭 내 허가받으세요. 아셨어요?”
“아아, 과장님 허가를 받아야 하는구나.”
“그리고 연지호 선생님. 우리 질문은 하루에 세 번만 하는 걸로 하면 안 될까?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내가 파이팅이 넘칠 나이는 아니라 참 힘들어요.”
그가 더는 힘들다며 파일을 빼앗아 처방전을 끼워 넣고 덮었다. 그러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기록 열람 시간도 연지호만 하루 세 시간으로 제약을 주겠단다.
이에 지호는 조금 미안한 듯 어렵게 웃었다. 이제 그만하고 물러나려나 싶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죄송해요. 과장님 불편하신 건 아는데, 그래도 사람 목숨과 직결된 일이잖아요. 실수가 용납이 안 되는 일인 만큼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달리, 지호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류애 가득한 멘트로 1사동 교도관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오 교도와 심 교도가 기립박수라도 보낼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과장님이 진 것 같습니다.”
태주가 작게 의무과장의 귀에 속삭였다. 하는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쉰 의무과장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래도 과하게 일하는 연지호가 뺀질거리는 박차영보다 낫지. 알았으니까 뭐든 물어봐요. 막 나 귀찮게 해, 어?”
그러면서 주스 한 병을 더 꺼내 들곤 관구실을 나섰다. 일단 교도소부터 한 바퀴 돌잖다.
그 말에 지호는 의무과장을 한 번, 그리고 태주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 * *
“그냥 의무과장님이랑 가지 그러셨습니까? 서운해하시는 것 같은데.”
1사동을 나선 태주와 지호는 긴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아직 새 직장이 낯선 지호를 위해 소내 곳곳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의무과장이 안내를 하려고 했으나, 지호가 이런 건 교도관님께 부탁해도 된다며 거절했다.
“나름대로 되도록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참 어렵네요. 좋아하실 줄 알았지, 서운해하실 줄은 몰랐어요.”
“요 며칠 계속 붙어 다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막상 떨어지니까 허전하신 걸 겁니다.”
어느 직장이든 상사의 속을 알기 어려운 건 똑같은 모양이다. 그래도 병원에서 일할 때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며 지호가 웃었다. 다만 평소보다는 조금 흐린 웃음이었다.
태주는 흘끗 그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해도 괜찮으신 겁니까? 혜성대 병원으로 다시 가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곳에 당신의 아버지가 몇 년째인지 모르는 시간 동안 잠들어 있는데. 당신은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걸까?
당연히 뒷말은 속으로만 하고 뱉지 않았다. 그래도 연지호는 자신의 말뜻을 충분히 알 거라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도 안 되더라고요. 애초에 섬으로 보낸 것부터 말 다 했죠. 병원에서는 내가 먼저 사표 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도 이 교도소 협력 병원이 혜성대 병원이니까요. 언젠간 병원과 접촉할 일이 있겠죠?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할 일이 있기도 하고요.”
“할 일이요?”
이 사람은 대체. 아직도 무너질 것처럼 겨우 서 있으면서 또 무슨 일을 한다는 걸까?
미소 짓는 지호를 따라 마주 웃었던 얼굴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태주는 잠시 침묵을 삼키다 말을 꺼냈다.
“저는, 선생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습니다.”
이에 지호가 돌아섰다. 올곧은 눈동자는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태주를 담고 있었다.
“모르는 게 많은 건 괜찮습니다. 결국엔 함께 있는 만큼 하나씩 알아가게 될 테니까요. 그런데요, 선생님.”
“….”
“그 과정이 전혀 즐겁지 않고 슬프면 저는 많이 아플 것 같습니다.”
“….”
“선생님을 알아가는 일이, 많이 슬플까요?”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진심이라는 걸 안다. 지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즐거운 일을 많이 해 둘까요?”
찬 기운에 닿아 조금 붉어진 손가락이 가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태주를 마주 보던 구둣발 또한 돌아섰다. 고요한 복도에 연지호의 발소리만 울렸다.
태주는 가만히 그 뒷모습을 보다가,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느리게 한 발짝씩 내딛다가 점점 속도를 높였다.
어느새 다시 나란히 함께 걸었다. 언제 심각했냐는 듯 태주가 먼저 어깨를 툭 부딪치며 장난을 걸었다.
“혹시 너무 슬프면 선생님 좀 안고 울어도 됩니까?”
“그다지 슬프지 않을 때도 그런 스킨십은 언제든 환영이죠.”
“와, 선생님은 어떻게 고민도 안 하고 그런 대답이 바로 튀어나옵니까?”
“그냥 태주 씨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알아서 일러 주던데요?”
“으으, 또 간지러운 소리!”
정말로 즐거운 일을 많이 해 두려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데, 슬플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그때가 온다고 해도 연지호가 실망스럽고 미워서 슬플 것 같지는 않다고, 태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 * *
“해마다 작업 전시회가 있습니다. 수용자들이 작업소에서 만든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행사인데, 유독 그 시기에 부상자가 많이 나옵니다.”
작업소 건물에 들어서기 무섭게 온갖 소음으로 귀가 시끄러웠다. 잠시 눈살을 찌푸린 지호가 목공 작업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위험한 물건이 많아 보이는데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수용자 중에서도 행형 점수가 높은 수용자만 일할 수 있습니다.”
“아아….”
“내년 초에 작업 전시회가 열리니까 아마 그즈음 의무실 일이 많을 겁니다. 병원만큼은 아니지만요.”
어쩌면 지호에겐 한가하다 못해 지루할 수도 있을 터였다. 외상외과 때의 그를 떠올리며 태주는 멋쩍게 웃었다. 함께 있는 건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 선생님, 여기 있다가 손 굳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그 속을 알 리가 없는 지호는 호기심 짙은 얼굴로 작업실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대체로 수용자 교화가 잘된 것 같네요? 작업실은 형질에 상관없이 다 같은 공간에 있는 거예요?”
“아, 특수 강간 수용자만 제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그쪽은 교육 때문에 작업할 시간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다 보셨으면 갈까요?”
아무래도 갇힌 공간인 탓에 그다지 볼만한 풍경은 없었다. 창문도 머리보다 높이 있어 복도에서 밖을 보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태주는 세세한 부분까지 열심히 설명하며 지호를 안내했다. 특히 직원 식당과 휴게실은 반드시 위치를 알아두라며 거듭 강조했다. 연지호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이란다.
“이제 각 사동 건물만 남았습니다. 1사동을 제외한 나머지는 베타 수용동이라 전부 돌아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구조는 다 똑같거든요.”
“그럼 1사동만 조금 둘러보고 갈게요.”
곳곳을 둘러본 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다시 1사동이었다. 알파 수용동의 문을 연 태주가 먼저 앞장섰다. 페로몬 경보기와 비상용 억제제가 있는 자리를 하나하나 짚으며 베타 사동과 다른 점을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지호가 시선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상층 7번 방 수용자와 눈이 마주쳤다. 슬쩍 그의 수형표를 확인하자, 노란색 바탕에 네 개의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6239?”
섬에 있을 때, 결영을 통해 들었던 그 수용자다. 기원 약국 강도 사건의 범인. 다행히 아직 이감하지 않고 이곳에 살아 있었다.
조심스레 7번 방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을 쳐다보는 6239를 향해 입을 뗄 때였다.
“저기….”
“남 부장! 남 부장!”
맞은편 방에 있던 수용자가 큰소리로 태주를 불렀다. 잠시 고민하던 지호는 결국 6239를 두고 태주와 함께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방 안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맞지? 이번에 새로 온 의사 선생.
“남 부장,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새로 온 의사 선생이지?”
평소에도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재소자였다. 태주는 그의 말을 능숙하게 받아쳐 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반말은 하지 마시라니까, 또 이러시지. 반말 안 돼요. 아시겠습니까?”
“아아, 미안해요. 미안해. 아무튼, 오오…. 듣던 대로 곱게 잘생겼네. 남 부장이 우리 교도소 얼굴이었는데 이번에 바뀌는 거 아니야?”
“교도소의 얼굴은 소장님이시죠. 무슨 교도관이 얼굴을 합니까. 괜히 또 실없는 이야기들 나누지 마시고 책이라도 한 권 더 읽으세요. 크리스마스 때 독서 퀴즈 대회 열리는 거 아시죠?”
탕탕, 손끝으로 철창을 두드린 태주가 몇몇 수용자들을 지적했다. 수용자와의 소통을 위해 모른 척한 것이지, 사실 그 또한 지호에 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다.
“똑바로들 앉고. 거기, 운동하지 마시고요.”
아무래도 지호를 수용동 안으로 데리고 온 게 잘못인 듯했다. 적당히 수용자와의 대화를 마무리 짓고 돌아섰다. 이만 나가자며 지호를 잡아끄는 순간이었다.
삑. 삑. 삑. 갑자기 페로몬 경보기가 울기 시작했다. 놀란 태주가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들여다보았던 거실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누구지?
페로몬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계호해 왔던 수용자들이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찾는 건 금방이었다. 거실 문을 열고 한 수용자를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사이클도 아니잖아요.”
“뭐, 뭐야? 왜 생사람을 잡아? 내가 페로몬 흘렸다는 증거 있어?”
조금 전까지 팔굽혀펴기를 하다가 지적당한 수용자였다. 그는 조금도 누그러지는 법 없이 당당했다.
이 사람이 분명하다. 운동하면서 위화감을 조성할 때부터 알아봤다. 낌새가 묘해 당장 방장을 찾았다.
“방장 어디 있습니까? 이 수용자, 평소에도 교도관 눈 피해서 운동합니까?”
“저기, 그게….”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걸 보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우물쭈물하는 것만 봐도 답은 나왔다.
“수용자 조사하고 징벌위원회 열겠습니다.”
“씨발, 내가 한 거 아니라고! 막말로 내 페로몬인지 댁이 어떻게 아는데? 경보기가 미친 걸로 생사람을 잡네?”
“제가 생사람을 잡았는지 아닌지는 수용자 조사를 해 보면 알겠죠. 그리고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죄송하다고 하면 한 번은 넘어가 줄 텐데 꼭 이렇게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이유로 교도소에 들어온 자들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태주 씨, 잠깐 나와 볼래요? 억제제부터 놓는 게 좋겠어요.”
가운 주머니에서 억제제와 주사를 꺼낸 지호가 포장을 뜯어 약물을 쟀다. 만약을 대비해 의무사무관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상비약이었다. 억제제를 투약하기 위해 상의를 벗겨 어깨를 내릴 때였다.
“씨발! 나 아니라니까! 개새끼야! 너 베타라며! 베타가 페로몬을 어떻게 아는데! 저 오메가 새끼가 알려주든? 애초에 알파 수용동에 오메가를 데려온 네가 미친놈 아니야? 저 의사 새끼 강간하라고 데려온 거나 마찬가…. 으으읍!”
“야, 징벌방으로는 많이 모자라?”
자신을 욕할 때는 그다지 동요하지 않던 태주의 눈빛이 갑자기 변했다. 아무리 속을 긁어도 반말은 절대 하지 않던 그였기에 순식간에 수용동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는 벗긴 수용자의 상의를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강간? 한번 해 봐, 어디.”
연지호가 보기엔 유약해 보여도 쉽게 당할 사람은 아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기는 날엔….
“그쪽이 돌아갈 사회 같은 거 평생 없을 테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뭘 해도 무너지고, 좌절하는 삶이 궁금하다면 해. 한번 해 봐.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두기 위해 그의 얼굴과 수형표를 한참 바라보았다. 놀라서 굳어 있는 지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선생님, 주세요. 제가 놓겠습니다.”
억제제를 투약하기 무섭게 오 교도가 헐레벌떡 CRPT를 데리고 뛰어왔다. 그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태주와 지호를 꼭 끌어안았다.
“한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왜 이래요? 우리 1사동 어벤저스, 언제나 강하고, 건강하고, 정의롭고, 여기에 안전하게도 추가해요. 어어엉….”
순간 덩달아 1사동 어벤 어쩌고가 된 지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결국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자연스레 옮겨간 시선이 미안해하는 시선과 맞닿았다.
‘그런 말 듣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태주의 눈동자에 어린 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 * *
어째서 그런 소문이 난 걸까? 연지호한테 오메가 같은 느낌이 있나?
쿵. 캐비닛에 이마를 박은 태주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알파 같은 건 뭐고, 오메가 같은 건 뭔지 모르겠다. 결국엔 얼마 안 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니, 넥타이만 풀다가 말았다.
“아, 왜 그런 소문이 난 거야?”
역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해당 수용자는 철저히 조사 후 징벌위원회에 넘겼지만, 이 수용자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몇몇 수용자가 연지호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건 잘 알겠다. 착하게 생겼지, 말투 상냥하지, 잘 웃어주지. 쉽게 보기 딱 좋지 않은가. 병원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인간이 얼마나 많았는가.
쿵. 쿵. 착잡한 마음에 캐비닛에 머리를 더 박았다. 수용자 관리를 좀 더 신경 써서 해야겠다고 다짐할 무렵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다치면 속상한데.”
부딪치는 소리가 더는 나지 않았다. 슬쩍 손을 끼워 넣은 지호가 태주의 이마를 받았다.
“선생님?”
기척을 듣지 못했는데 언제 온 걸까? 아니, 그보다 아직도 퇴근을 안 했어?
“왜 아직 여기 계십니까? 퇴근 시간 한참 지났는데.”
“그러는 태주 씨는 왜 이제 왔어요? 난 여기서 태주 씨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
그러고 보니 가운 차림이 아닌, 사복에 가방까지 들고 있다.
“태주 씨랑 같이 퇴근할까 해서요. 그런데 안 좋은 일 있었어요? 고민이 많아 보이네?”
“아, 별거 아닙니다.”
수용자들에 관한 문제는 나중에 다시 고민하기로 하며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 정복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함께하는 퇴근이라니. 진짜 직장 동료가 됐다는 게 이런 데서 실감이 난다.
“가요, 선생님.”
언제 심각했냐는 듯 조금 들뜬 마음으로 태주가 앞장섰다. 평소보다 걸음이 약간 빨랐다. 이에 남몰래 웃은 지호가 함께 맞춰 걸어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가도 주차장에서 헤어질 텐데, 그냥 먼저 가시지 그러셨습니까. 기다린 시간이 아깝겠습니다.”
“태주 씨가 나 기다려 준 시간에 비하면 찰나인 수준 아니에요? 그리고 태주 씨만 괜찮다면 난 오늘 태주 씨 차 얻어 타고 갈 생각인데?”
“어? 차 안 가지고 오셨습니까?”
“주차장에 있어요. 오늘은 두고 가려고요.”
“아아, 가끔 운전하기 힘들 때가 있죠. 기념회 때 선생님이 저 데려다주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선생님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집이 어디십니까? 아! 이사는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이사는 다음 주에 하기로 했고, 지금은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요. 태주 씨 오피스텔에서 별로 멀지 않아요.”
“그럼 호텔 말고 제 오피스텔에서 지내시지. 방도 많은데.”
“그럴 순 없죠. 그러다 같이 살고 싶어지면 어떡하라고?”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직장도 같겠다, 출퇴근할 때도 차 한 대로만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거, 직장만 같으면 누구든 함께 살아도 상관없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저를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시죠?”
제가 정말 그런 뜻으로 말한 건지. 몇 발자국 앞선 태주가 몸을 돌렸다. 지호를 보며 뒤로 걸었다. 서로를 마주하는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까 계속 욕심이 나네.”
“아니, 그런 거 말고 제 진심을 보시라니까요?”
욕심난다고 갖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사람 설레게 하고 있지. 이 남자가 안전해지는 때가 언제일까? 부친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알았을 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 있는 걸까?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나서, 연지호는 어떤 삶을 살다가 지금까지 온 걸까?
“선생님.”
태주가 나직이 지호를 불렀다. 여전히 뒤로 걸으며 그와 눈을 맞춘 채였다.
“네, 태주 씨.”
연지호는 부르면 ‘왜?’라든가, ‘왜요?’라고 반응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사소한 말버릇에서 그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사람인지 드러난다. 말투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쉬운 일이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알아갈수록 많이 슬플 거란 이야기도 아마 이런 뜻이겠지. 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그런 모습을 알아갈수록 나도 많이 슬플 테니까.
궁금한 것이 많다. 알고 싶은 것이 얼마나 산더미처럼 쌓였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이것저것 묻고 싶지만, 꾹 참으며 말을 돌렸다.
“선생님, 이후에 바쁜 일 없으시면 저랑 술 한잔 어떻습니까?”
“좋죠. 아,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가도 될까요? 오래 걸리진 않아요.”
“네, 괜찮습니다.”
“태주 씨랑 술 마시는 거 오랜만이네요.”
“이번엔 그때처럼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부축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태주 씨한테 수작 부리고 싶어서 일부러 그런 거라고 해도요?”
“…예?”
“설마 아직도 눈치 못 채고 있었나? 서운하네. 내 수작은 그때부터였는데.”
“아니, 그럼 그때…. 일부러 쓰러지신 겁니까? 쓰러질 때까지 마신 겁니까, 아니면 쓰러진 척을 하고 있던 겁니까?”
“글쎄요? 태주 씨가 보기엔 어느 쪽 같아요?”
“어어? 뭐야? 쓰러진 척하고 있던 거 아니죠? 네? 아니, 잠깐만. 선생님! 연지호 씨! …야!”
“아, 배고프다. 얼른 가요.”
똑바로 앞에 보면서 걷고. 태주의 어깨를 잡아 돌린 지호가 도망치듯 서둘러 걸었다. 당황한 듯 태주의 걸음이 멎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른 달려가 지호의 등에 업히듯 매달렸다.
“와, 진짜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내가 볼 땐 태주 씨도 만만치 않게 너무한데요?”
“예? 제가 뭘 했다고요?”
“뭘 안 하니까 너무한 건데?”
“응?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해 줄게요.”
그 말과 동시에 두 다리를 붙잡혔다. 어어? 업어달라는 게 아니었는데? 깜짝 놀라 내려달라고 했지만, 지호는 그대로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올라타는 건 멋대로 올라탔을지 몰라도, 내려오는 건 그렇게 순순히 안 되죠.”
생긴 건 유약해 보이기 그지없는 인간이,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남자를 아주 가뿐히 업고 있다. 이런 체력이니까 그 힘든 외상외과에서 버텼겠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슬쩍 지호를 본 태주는 처음엔 괜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분 좋게 지호의 등에 몸을 맡겼다.
타박타박, 복도에 울리는 발소리가 듣기 좋았다.
* * *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정한 곳은 태주의 오피스텔이었다. 여기저기서 받아 놓고 못 먹은 술이 많기도 했고, 사람 많은 금요일 밤엔 다른 가게보다 집이 편했다.
잠시 볼일이 있다는 지호와 1층 로비에서 헤어지고, 태주만 홀로 먼저 올라갔다. 도착하기 무섭게 그는 서둘러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장 팬트리 문을 열어 이것저것 꺼내기 시작했다.
“아, 언제 샀던 거더라? 유통기한 안 지났겠지?”
다행히 사람을 불러 관리한 덕에 상하거나 오래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백화점 해외 식료품 코너에서 막 집어 온 느낌이 강했다.
“올리브? 올리브는 왜 여기 있지? 뭐야, 통조림은 또 왜 이렇게 많아? 밤, 죽순, 토마토, 클램차우더, 라타투이…. 뭐지? 나 언제 전쟁이라도 대비했나.”
다 꺼내 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도 뭐가 많았다. 대부분 우주가 나중에 먹겠다며 두고 간 것들이지만, 지금쯤이면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저것 꺼내 그나마 할 수 있는 요리를 떠올리며 조리대 앞에 섰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요리 좀 배워 두는 건데.”
그러면서 찬장에 있는 즉석밥도 꺼냈다. 일단 가장 잘하는 요리, 즉석밥 데우기.
…이거 참, 혼자 있는데도 민망해진다.
* * *
그다지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요리가 끝났다. 때맞춰 테이블에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구지? 남우주인가? 아니면 오 교도님?
전화할 사람이라고 해 봤자 가족 아니면 직장 동료가 전부였다. 슬쩍 화면을 들여다본 태주는 그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태주 씨, 나 지금 오피스텔 입구인데 문 좀 열어 줄래요?
“어? 벌써 일 다 보고 오신 겁니까? 그럼 그냥 벨 누르시지.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습니까.”
-무슨 일? 무슨 일이야 당연히 있죠. 내가 지금 태주 씨랑 통화하고 있잖아요. 핸드폰 생기면 가장 먼저 연락하겠다고 한 약속 지키는 중인데, 반응이 영 떨떠름하네?
“…어? 그러고 보니까 진짜 핸드폰으로 연락하셨네요?”
그제야 깜짝 놀란 눈으로 다시 한번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1년 동안 통화 취소 표시만 잔뜩 찍힌 번호가 화면에 떡하니 떠 있다.
“볼일 있다고 한 게 이거였습니까?”
-태주 씨랑 헤어지고 가면 닫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보다 문 좀 열어 주시죠?
“아, 맞다! 잠시만요!”
얼른 입구를 연 태주가 주변을 정돈한 뒤 현관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든 지호가 도착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습니까? 그냥 오셔도 되는데.”
“이건 해장국이니까 내일 아침에 데워서 먹으면 되고, 이건 그냥 간단한 안주 몇 개 샀어요.”
간단하다기엔 묵직한 봉투가 태주의 손으로 옮겨갔다. 슬쩍 그 안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내용물도 간단하지는 않았다. 온갖 과일에 치즈, 햄, 육포, 샐러드….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온다.
“그런데 태주 씨 요리하고 있었어요? 조리대에 뭐가 많네요?”
“아, 너무 빈속에 마시는 것 같아서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집에 있는 걸로 진짜 대충 했습니다.”
그럭저럭 차린 것들을 테이블로 옮겼다. 겉옷을 벗고 손을 씻은 뒤 돌아온 지호가 테이블 위를 보며 웃었다. 유부초밥과 오믈렛, 그리고 문어 모양으로 귀엽게 잘라 구운 소시지가 아기자기한 그릇에 담겨 있었다.
“어린이 정식 같은 식탁이네요, 술만 빼면.”
“요리는 이런 것밖에 할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아이한테 이런 거 많이 해 줬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런 게 아니면 태주 씨가 그다지 요리할 이유가 없어 보여서요. 희재한테 해 줬던 거예요?”
“어릴 때부터 재단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자주 갔거든요. 애들하고 같이 소풍을 가는데 도시락을 싸야 한대서 급하게 배웠던 겁니다. 우리 희재한테도 당연히 해 줬고요.”
밥을 볶아서 유부초밥을 만들면 아이들이 좋아했다며 태주가 웃었다. 그래도 십 년을 넘게 꾸준히 만든 탓에 어느 정도 자신 있단다.
지호는 태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게 먹어 주었다. 술은 차린 것들을 어느 정도 먹은 뒤, 그다음에 뚜껑을 열었다.
직장이 같아진 만큼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서로 교도소 업무 이야기로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서, 어느덧 술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반도 채 남지 않은 술을 보며 태주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술을 꺼낼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쯤에서 슬슬 마무리하기로 정했다.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어갔다. 빈 접시를 치우고 애매한 자리에 놓여 있던 유부초밥을 중앙으로 끌어왔다.
“우주랑 술 마실 땐 말이죠. 가끔 이 유부초밥 하나만 놓고 마시는데, 이게 은근히 소주랑 잘 어울립니다.”
“남우주 선생님한테도 만들어 주는 거예요? 좋은 오빠네.”
“그죠? 걔가 나의 소중함을 좀 알아야 하는데.”
장난스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술잔을 든 지호가 작게 톡 부딪쳐 주었다. 그러고는 문득 궁금해졌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남우주 선생님은 정형외과가 목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어때요? 정형외과로 갔으려나?”
“여전히 응급실에 있습니다. 내년에 갈 것 같다고는 하는데, 아직 정확하진 않나 봅니다. 그런데 우주 걔가 선생님한테 그런 것까지 말했습니까?”
“나중에 진료과 정하게 되면 외상외과로 오라고 했거든요. 그때 보기 좋게 바로 거절당하면서 들었어요. 정형외과로 이미 마음을 정했다는데요?”
“절단이 불가피한 환자한테 관심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쪽에서 의수나 의족도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오, 굉장하네요. 수련의 때부터 그렇게 구체적으로 정하기 쉽지 않은데.”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참 신기해요. 그전에는 우주도 저도 대충 살았는데 말이죠. 집에 돈이 많으니까, 적당히 선만 넘지 않고 살면 솔직히 여생이 편하잖습니까.”
“….”
“저도 압니다. 저는 굳이 일할 필요도 없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누구보다 잘살아진다는 걸.”
그 말에 지호가 웃었다. 사람이 사서 고생만 하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냐며, 빈 잔에 술을 채웠다.
태주는 제 앞에 놓인 잔이 채워지는 걸 가만히 보았다. 마지막 잔이었다.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뗐다.
“선생님, 제가 왜 교도관이 된 줄 아십니까?”
“음, 태주 씨가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뭐, 그것도 약간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정확한 정답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테이블에 팔을 접어 얹은 지호가 태주에게 집중했다. 사실 결영에게 들어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태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때 남태주의 기분은 어땠는지. 너무 힘들지는 않았는지. 그 일로 이 사람이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려서, 그래서 이렇게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던 거라면…. 많이 안쓰러울 것 같은데.
“교도관이 될 생각은 어쩌다가 하게 된 거예요?”
지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는 듯 뜸을 들인 태주가 느리게 입을 뗐다.
“선생님.”
“네, 태주 씨.”
“제가 말이죠. 열아홉 살 때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까 봉사활동 다니던 보육원 아이가 훔친 거였습니다.”
“보육원 아이가요?”
“네. 엄마랑 아빠 만나러 가겠다고 몰래 보육원을 나갔는데, 차비가 없어서 제 지갑을 훔쳤다고 하더라고요.”
“아아….”
“그 애가 열네 살이거든요? 정말 어린 아이면 모를까, 조금 자란 아이들은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지잖아요.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쉽지도 않고요.”
매일 싸우던 동생과 꼭 붙어 다닐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그때 태주는 이틀을 꼬박 우주와 아이를 찾으러 다녔다. 실종 신고가 접수되기까지 기다리기엔 그전에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보육원 앞에 서는 버스란 버스는 다 탔을 겁니다. 종점까지 왔다 갔다 하다가 상가 건물에서 겨우 찾았는데, 그 애 오른발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상처도 많았고요.”
“추운 날씨였으면 동상으로 많이 상했겠네요.”
“네, 병원에 데려가니까 이미 괴사해서 절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이가 충격을 받고 많이 울었는데, 그 모습이 집으로 가서도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
“다리를 자르지 않을 수는 없을까. 자른다면 최대한 일상생활이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하는데. 우주랑 밤새 서재에서 온갖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때부터 남우주 선생님은 의족이나 의수에 관심을 뒀던 건가 보네요?”
“맞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몇 달 파고들다가 말 줄 알았는데, 갑자기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하더니 유학까지 다녀온 거 있죠? 그러고는 의사가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평소에는 미운 애가 그때는 좀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럼 태주 씨는요? 태주 씨도 그때부터였어요?”
마지막 잔까지 모두 비었다. 태주는 조금 치우면서 이야기해도 되겠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시계를 확인하는 게 시간이 늦은 탓인 듯했다.
지호도 함께 일어나 정리를 도왔다. 두 사람의 손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저는 뭐, 처음엔 교도관이 될 마음 같은 거 없었습니다. 변호사가 돼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사람을 멋지게 변호해 주자! 이런 생각만 했죠. 그 아이의 문제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거든요.”
“….”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게….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그때 잠시 태주의 손이 작게 떨렸다.
“고작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그 애가 살인 사건 용의자가 되어 있더라고요. 또래의 가출한 아이를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던 건가요?”
“거기서부터 골치가 아파졌습니다. 아이가 경찰 앞에선 자기가 죽였다고 하고, 아무도 없을 땐 자기가 한 게 아니라면서 울더라고요.”
“….”
“그래서 또 우주랑 둘이 머리 싸매고 밤새 고민했죠. 정말 아닐까? 하긴, 다리가 그 지경이 된 애가 사람을 어떻게 죽여? 죽였다고 해도 멀리 도망치기 힘들 텐데, 금방 잡혔겠지. 결국엔 믿기로 했습니다.”
어느새 둘 다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그래서 누명을 벗었냐고 묻는 지호에 태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저도 미성년자였고, 제가 아이를 믿는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
“그런데도 저는, 그 아이한테 내가 믿어 주고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그때까지의 제 삶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삶이었으니까요.”
“….”
“제 뜻대로 안 되는 건 그 아이가 처음이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아이의 누명을 벗겨 줄 수가 없어서, 마지막엔 결국 울면서 어머니한테 달려갔죠. 온 동네 CCTV와 블랙박스를 다 뒤져서 겨우 진범을 찾았습니다.”
“….”
“그 애가 죽은 다음에요.”
직접 가져가서 보여 주고 싶다며, 우주가 완성된 의족을 안고 병원으로 간 날이었다. 그날 아이는 이 상황을 더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그래서 그때는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지나고 보니까 변호사로는 부족한 것 같지 뭡니까? 진범이 징역 5년을 살고도 정신 못 차렸거든요. 나오자마자 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런 사람들을 바꾸고 싶었던 거네요, 태주 씨는.”
“범죄자의 대부분이 결국엔 사회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같은 사람이 계속 되돌아오면, 그 아이 같은 사람도 계속 생길 테니까요.”
그들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다.
“어쨌든 사회로 돌아갈 사람들이니까, 그 전에 고쳐 놔야 하는 겁니다.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애정 어린 시선을 건넬 수 있게끔.”
“….”
“그리고 법정에 서는 사람은 다 하나같이 억울해하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서 진짜 억울한 사람을 구분할 자신이 없습니다.”
마지막은 장난 가득한 웃음과 함께 마무리 지었다. 태주가 다시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 치운 뒤에는 또 한 번 시계를 확인했다. 너무 늦었으니 자고 가라며 지호를 끌고 욕실로 향했다.
지호는 욕실 거울에 비친 태주의 얼굴을 보았다. 딱히 위로 같은 건 바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욕실로 끌고 와 칫솔부터 넣어 줬겠지. 자기 얘길 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 * *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하룻밤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하염없이 보고 있는데 옆에서 뒤척이는 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모로 누운 태주가 지호를 보고 있었다.
“선생님.”
“네, 태주 씨.”
“전에 봉안당에 갔다가 카페 화재 사고로 죽은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랬어요?”
“우리 아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습니다.”
“….”
“그렇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례식 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하셨다고.”
태주가 손끝으로 톡톡 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만 자신을 똑바로 봐 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지호가 몸을 돌렸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한 채 오롯이 시선을 맞댔다. 한참 후에 다시 입을 연 태주가 말을 이었다.
“제 지갑을 훔친 그 아이도 죽기 전에 저한테 편지를 남겼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믿어 주고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요.”
태주가 지호의 손을 잡아 조심스레 제 쪽으로 끌어왔다. 자신의 볼 위에 그 손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지호의 손이 부드럽게 태주의 얼굴을 감쌌다.
“물론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많이 슬프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요, 선생님. 슬픈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무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러기엔 선생님이 살린 숨이, 지금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지그시 눈을 감은 지호가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살면서 뭔가를 잘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는데.
이 사람을 만나길 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