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애쓰지 않고 돌아서니까 (14/29)

13. 애쓰지 않고 돌아서니까

“아아아, 남 부장님 나 너무 아파….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니야?”

“안 죽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나 진짜 심각해. 의무실 치료로는 안 될 것 같아. 나 빨리 내보내 줘, 응?”

“그건 의무실 선생님이 먼저 살펴본 다음에 결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반말하지 마세요. 제가 7120보다 나이 많거든요?”

그만 칭얼거리고 빨리 걸읍시다. 의무 사동 출입문을 연 태주가 걸음을 재촉했다. 배를 감싸며 주춤주춤 걷는 재소자에겐 가끔가다 눈길만 던지고 말 뿐이다.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꾀병인지 아닌지 구분이 된다. 드디어 뼛속까지 교도관이 된 모양이다. 하긴, 어느 교도소든 주마다 한두 번씩 발생하는 이벤트이니…. 연기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다.

“과장님, 지금 바쁘십니까?”

의무실 문을 연 태주가 인사처럼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금이 꽤 한가한 시간대임을 알았다.

하지만 무슨 일일까. 평소와 다르게 의무실 안은 재소자로 가득했다. 담당 교도관들이 골치 아픈 눈으로 재소자의 상태를 말하기 바빴다.

“그러니까 2사동 베타, 6259…. 열이 나고, 오전엔 구토까지 했다.”

“어때요? 외부 진료 나가야 돼요?”

“에이, 뭘 외부 진료예요. 지금은 열 하나도 안 나는데. 구토한 건 사실이에요? 확인해 봤어요?”

“직접 확인은 안 했죠. 재소자 토한 것까지 어떻게 확인해요.”

“그럼 일단은 데려가서 상황 지켜봐요. 정 걱정되면 의무 사동에 반나절 둬 보든가. 오늘 보안 과장님이 친히 살펴 주신대서 어떤 병이든 아주 싹 나을걸? 외부 진료는 직접 계호도 나가신댔어요, 협력 병원도 좀 살펴볼 겸.”

보아하니 여기 있는 재소자의 대부분이 꾀병인 듯했다. 오늘은 보안과장이 직접 의무 사동을 살핀다는 얘기에 재소자들이 술렁였다. 자칫하다가 꾀병인 게 밝혀지면 행형점수가 나락으로 갈 테니, 날을 잘못 골랐구나 싶을 수밖에.

“어우, 갑자기 몸이 하나도 안 아프네!”

“어? 김 교도님! 저 이제 가슴에서 통증이 안 느껴집니다!”

“저도 감기 다 나은 것 같은데요?”

“두드러기 이거 뭐, 금방 없어지겠죠. 하하!”

바글바글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다들 담당 교도관한테 얼른 돌아가자며 재촉했다. 태주와 함께 온 7120도 마찬가지였다.

“나, 남 부장님! 나도 이제는 괜찮은 것 같네. 흐흥.”

하지만 다른 교도관은 곧장 돌아가도, 애민 넘치는 남태주 교사는 그냥 갈 수 없었다.

“어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죠. 우리 7120께서 그렇게 고통을 호소하셨는데.”

아까는 죽으면 어떡하냐면서요. 심각한 표정으로 한껏 미간을 접고 입꼬리를 내렸다. 교도관이 아닌 배우였다면 온갖 시상식의 상을 휩쓸었을지도 몰랐다.

“과장님! 우리 사동 재소자도 좀 부탁드립니다!”

여기에 그는 한술 더 떠 7120을 번쩍 안아 들었다. 친히 침대에 눕혀 주며 따스하게 머리카락까지 쓸어 넘겨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떤 병이든 낫게 해 줄 테니까.”

말투도, 목소리도, 분명 상냥한데 왜 겁이 나는 걸까. 7120이 몸을 덜덜 떨었다. 철컹, 어느새 그의 손목과 침대가 수갑으로 연결되었다.

* * *

의무실에서 일어난 그 일은 삽시간에 1사동 전체로 퍼졌다.

“어후, 남 부장 무서운 새끼.”

“사람이 왜 갑자기 그렇게 잔인해졌어?”

“내가 출소만 해 봐. 남 부장 그 새끼부터! 어?”

“어떻게 하기 전에 징벌위원회부터 열어 볼까요? 서류 한번 싹 돌면, 어느새 화려한 징벌방이 그대들을 감싸고 있겠네요?”

짜릿한 원룸! 한번 체험해 보시겠어요? 똥도 마음 놓고 못 싼답니다! 잔망스럽게 방 안으로 윙크를 날린 오 교도가 과장된 몸짓으로 파일을 펼쳤다.

“일 하, 오 방, 사이삼구우?”

발랄하게 수형 번호까지 부르자, 어수선했던 1사동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네, 좋아요. 애초에 교도관을 속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제야 만족한 듯 오 교도도 보여 주기식으로 펼쳤던 파일을 다시 덮었다. 어느새 조금 전의 발랄함은 사라지고, 그의 얼굴에는 걱정만 남았다. 그가 다시 입을 뗐다.

“거, 방장이 같은 거실 사람들 좀 잘 관리합시다. 요즘 남 부장님 상태 안 좋아요. 그나마 이 교도소에서 여러분 살뜰히 살펴 주는 사람인데, 예? 좀 잘합시다.”

통통. 괜히 한번 창문을 두드린 오 교도가 걸음을 옮겼다. 알파 수용동을 나와 중앙 관구실 문을 열었다. 뒤이어 눈에 들어오는 광경에 한숨을 내쉬었다.

“남 부장님, 안 드세요?”

특별히 사 온 치킨 세 마리가 손 한 번 안 댄 모양새로 한 김 식어 있었다. 소파에 멍하니 누운 태주를 보며, 오 교도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번엔 진짜다. 진짜 교도관을 관둘 것 같다. 집도 엄청 부자라며? 여기서 교도관을 오래 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렇게 무료해하는 걸 보면, 조만간 관둘 낌새다.

입술을 꾹 깨문 오 교도가 비통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안 되는데. 우리 1사동 어벤저스 영원해야 하는데.

여전히 멍한 태주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다가 다시 관구실을 나왔다. 재빨리 이 부장과 심 교도를 찾으며 소리쳤다.

빨리 우리 남 부장님이 혜성 병원 선생님이랑 만날 수 있게 해 주자! 아무래도 실연당한 것 같아!

* * *

의무실이 너무 좋아져도 문제였다. 외부 진료를 나갈 일이 줄어들다 보니, 태주의 어깨도 축 처졌다. 요즘 1사동의 트렌드가 ‘남태주 부장 눈치 보기’로 바뀌었을 정도다.

“실연당했다며?”

“우리 교도소 협력 병원 의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대.”

“그 의사 예뻐?”

“그 뭐냐, 아이돌 닮았다는데?”

“긴 생머리에, 키도 크고, 뭣보다 크으…. 섹시하대.”

“그래? 내가 듣기로는 남자 오메가라고 하던데?”

“아무튼 장난 아니래.”

“하긴, 남 부장 정도면….”

“그렇지, 미인을 만나야 이 얼굴 급이 맞지.”

“참 나. 급이고, 나발이고, 그래봤자 차였는데 뭐.”

“근데 왜 차였지?”

“그러게?”

아침 운동 시간, 한데 모여 있는 건 규칙 위반이기에 재소자들은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며 스치듯 말을 주고받았다. 가만히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태주가 미간을 구겼다.

남 부장? 이 교도소에 남 부장은 나밖에 없는데?

“내가 협력 병원 의사랑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

아니, 아니. 그것보다 내가 차였다고?

소문이 퍼져도 뭐 이런 소문이 퍼졌을까. 파혼은 당해봤어도 차인 적은 없다. 파혼당한 게 차인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어쩌다 소문이 돌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다른 교도관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큼.”

“크흠.”

그런데 이 반응은 뭐란 말인가. 왜인지 다들 시선을 피한다. 뭔가를 알고 있긴 하지만, 알려줄 순 없다는 행동 메시지. 태주의 미간 주름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왜 다들 제 눈을 피합니까?”

“피, 피하긴요!”

“우리가 어, 언제 피했다고!”

“그나저나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어둑어둑한 하늘을 보며 청춘 만화 주인공처럼 웃는 게 사람을 더 의심하게 만든다.

“됐습니다. 묻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이 또한 다음 주면 흐지부지해질 소문. 태주는 그냥 실연남이 되기로 했다. 그 덕인지 모르지만, 재소자들이 요즘은 사고도 안 치고 좋다.

벽에 기댄 태주가 팔짱을 척 꼈다. 곁에 있던 동료 교도관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교도소 내에서 누군가를 때린 적도, 위협한 적도 없는 태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대체 뭐야? 연지호부터 시작해서 다들 왜 이래?

사람 답답하게 본 적 없는 낯선 모습만 보여 준다. 순간 속이 꽉 조이는 듯한 느낌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요.’

그날 이후, 연지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먼저 연락할까도 생각했지만, 기다리는 게 예의 같아 꾹 참는 중이다.

차라리 전처럼 외부 진료라도 잦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연을 가장하고 만났을 텐데.

일주일 사이에 착착 들어온 새 장비 덕에 외부 진료를 나갈 일이 없다. 지난번 갑작스럽게 보았던 응급구조사 시험도 이에 한몫했다. 법무부와 보건복지부의 체면을 제대로 살려 주었다며, 의무실 발전에 모두가 힘을 실어 주었다.

연락은 못 하겠고. 그렇다고 우연을 가장해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희재를 핑계로 병원에서 버티자니, 아이를 그런 데 이용하면 쓰나 싶고. 게다가 희재라면 얼마 전에 보고 왔다. 바로 또 보러 가기는 조금 그렇다.

“사건….”

그 강도 사건이나, 백상중 의원 아들 정보만 얻어도 만날 구실이 생길 텐데.

왕산 지하도엔 언제 갈 거냐고 물어볼까? 하지만 이건 지금 경찰이 조사 중인 사건이다. 괜히 만날 구실을 만든 게 티가 날 것이다. 현장도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일 거고.

“아….”

어쩌지? 어떻게 해야 어쩔 수 없이 만나는 느낌이 날까?

그리 긴 시간까지는 필요 없다. 그냥 그 사람이 괜찮은지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찰나면 충분하다.

팔짱을 풀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때마침 운동 시간이 끝난 듯 방송이 흘러나왔다. 슬슬 수용자들을 인솔해 사동으로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부스럭. 주머니 깊은 곳에서 웬 구겨진 종이가 만져졌다. 뭐지? 집어 꺼내자 강렬한 노란색이 눈에 띄었다. 조심조심 펼쳐서 보이는 글씨를 읽었다.

[불륜 현장 포착해 드립니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사장 정정택]

이 강렬한 문구. 원래 기억력이 타고난 것도 있지만, 이런 자극적인 문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게 언제 받은 명함이더라?

정복을 몇 번이나 세탁했는데도 명함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그 험한 세탁기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떼인 돈을 기필코 받겠단 깊은 의지가 이 코팅 종이에 담긴 듯했다.

태주는 말끄러미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이 사람이 뭔가 더 알아낸 게 있다면, 이를 구실로 연지호를 만날 수 있을 듯했다. 왜인지 몰라도 연지호는 이 사건에 아주 관심이 많으니까.

좋아.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꽉 쥐었다. 이미 구겨질 대로 구겨진 명함이 또 한 번 구겨졌다.

“남 부장님, 안 가세요?”

한편, 뭔가 허전함을 느낀 오 교도는 몸을 돌렸다. 함께 수용자를 인솔해 돌아가야 할 태주가 저만치에 뒤처져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태주의 시선을 따라 눈을 굴린 그는 강렬한 색의 명함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부, 불륜 현장 포착? 저거 흥신소 명함 아닌가?

아니, 남 부장님?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

이러다 옆 사동 베타 수용소에서 이 인간을 만나게 생겼다! 교도관 대 교도관이 아니라, 교도관 대 재소자로! 오, 이런 사랑에 미친 자여! 실연에 돌아버린 자여!

오 교도는 때마침 지나가는 심 교도를 붙잡았다. 그에게 긴박하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야, 심! 우리 빨리 남 부장님 혜성 병원으로 데려가자!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겠어!”

* * *

다행히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구실이 생겼다. 물론, 모든 것은 오 교도의 오해로, 구실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남 부장님 내일 오프죠?”

일과를 마친 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태주의 옆에 오 교도가 슬그머니 섰다.

“네, 그런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평소에도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는 오 교도지만, 오늘따라 몹시 이상했다. 몸을 비비 꼬며 턱을 한껏 당기고 시선을 위로 들었다. 수줍어하는 자세인 것 같은데, 조금 징그러웠다.

태주는 눈살을 찌푸리며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러나 물러난 만큼 다가온 오 교도가 어깨를 붙이며 어쭙잖은 애교를 부렸다.

“남 부장님, 내일 안 바쁘시면 저랑 같이 어디 좀 가실래요?”

“어디를, 말입니까?”

피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태주가 넌지시 물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은 오 교도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보여 주었다. 백화점 연말 행사 광고였다.

“아기용품 사러요. 우리 사동에 아이 있지 않습니까. 어우, 필요한 게 너무너무 많아요.”

“아아, 아기용품.”

아기를 데리고 있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소 내에는 마땅한 아기용품이 없었다. 급히 산 몇 가지를 제외하고 분유와 기저귀에만 신경을 썼지, 다른 덴 신경 쓸 생각을 못 했다.

“아무튼 남 부장님, 내일 저랑 여기 가요. 네? 네? 네에?”

“네, 뭐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그러죠. 몇 시에 만날까요? 아니, 근데 오 교도님도 내일 오프입니까?”

“아뇨, 전 건강검진이요. 근데 이건 오전에 다 끝나니까 상관없어요. 아! 어차피 백화점도 그 근처니까 남 부장님이 병원으로 오실래요?”

남 부장님 차 타고 가요. 남 부장님 차 좋잖아요. 오 교도는 기다렸다는 듯 미리 준비한 대사를 랩처럼 줄줄 읊었다. 가만 듣고 있던 태주가 결국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정복 넥타이를 풀며 물었다.

“내 차 그렇게 안 좋은데. 뭐, 알았어요. 어느 병원으로 가면 돼요?”

“혜성대 병원이요! 아시죠? 우리 협력 병원이잖아요!”

해맑게 웃은 오 교도가 천진난만한 투로 대답했다.

* * *

퇴근 후, 태주가 향한 곳은 오피스텔도, 본가도 아닌 호텔이었다. 온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늘 머무르던 방으로 향했다.

며칠째 집을 놔두고 호텔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틈만 나면 자꾸 찾아와서 자고 가겠다는 우주 때문이었다. 말로는 남태주를 부려 먹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우주의 마음이 놓일 때까지 당분간 사람 많은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건 뒤, 책이 널려 있는 침대에 뛰어들었다. 책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했는데도 침구는 매일 새것으로 바뀌어 있다. 침구를 바꾼 뒤 책을 전부 원래 자리에 놓는 모양이다.

“아, 괜히 나 때문에 불편한 것 같아서 죄송하네.”

아무래도 매일 침구를 갈아 준 직원에겐 뭔가 답례를 해야겠지 싶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태주가 이불에 폭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아싸!’를 외치며 다리를 마구 위아래로 움직였다.

“신난다.”

내일이면 오 교도와의 약속을 핑계로 지호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핑계는 아니지. 약속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당분간은 은근슬쩍 살펴볼 기회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생긴다. 빙글, 몸을 반 바퀴 굴린 태주가 이번엔 천장을 보며 넓게 뻗었다. 아무 책이나 손이 닿는 대로 집어 가슴 위에 살포시 덮었다.

만나면 뭐라고 하지?

내가 그 사람을 위로해 줄 순 없는 걸까?

* * *

태주는 가늘게 뜬 눈으로 외상 센터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외상 센터로 향하는 통로에서 오 교도를 기다리는데, 지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응급실에 외상 환자가 그다지 없어서인 듯하다.

“어? 교도관님 오랜만에 보네요? 아니다, 오랜만은 아닌가?”

건들거리며 걷던 우재가 태주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아! 응급실 남우주 선생이 교도관님 동생이라면서요? 크으, 어쩐지! 교도관님처럼 남 선생한테서도 부티가 나더라!”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제 동생.”

태주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거의 간단한 인사만 주고받았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잠시 ‘우리가 엄청 친했던가?’하는 착각이 일게 했다. 익숙하면서도 친근한 느낌이다.

어딘가 묘하게 부산스러운 말투. 그에게서 오 교도의 향기가 난다. 우재는 친한 친구를 대하듯 태주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윙크까지 날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외상외과에 콜 오면 일등으로 달려갈게요. 그런데 오늘도 김희재 환아 보러 오신 거예요? 아니면 교수님 뵈러?”

“예? 아뇨….”

“교수님 지금 연구실에 계시는데 한번 가 보세요. 아, 근데 가셔도 만나지는 못하겠다. 요즘 교수님, 틈만 나면 주무시거든요. 그동안 피로가 많이 쌓이셨나 봐요.”

“오늘은 안 바쁘십니까?”

“어쩌다 한 번 이렇게 가뭄에 콩 나듯이 여유 있을 때가 있어요. 오늘은 외상으로 온 응급 환자도 없고, 코드블루도 안 떴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간식 사러 나갔다 오고.”

손에 쥔 봉지를 살랑살랑 흔든 우재가 킁킁거리며 봉지 속 냄새를 맡았다. 기름 냄새가 옅게 나는 걸 보니 튀긴 음식인 듯하다. 그는 식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며 작별을 고했다.

“저 그럼 가 볼게요. 아쉬워도 붙잡지 마시기!”

먼저 사람을 붙잡은 게 누군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 교도의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미워할 수가 없다.

픽, 힘없는 웃음을 뱉은 태주가 다음에 또 뵙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우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요즘 교수님, 틈만 나면 주무시거든요.’

복도를 걷는 내내 태주는 우재의 말을 떠올렸다.

그동안 자느라 연락 한번 없었던 걸까? 희재를 보러 갔을 때도, 그때도 자고 있던 건가?

탁. 413호 연구실 앞에서 두 발이 멈춰 섰다. 태주는 가만히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살짝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부드럽게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창이 많은 탓에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아도 밝은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창마다 죄다 커튼을 쳐 놓아서인지 연구실 안이 어두웠다. 다행히 아예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지호가 잠든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시선을 내려 조금 야윈 듯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슬려 보이는 머리카락을 넘겨 줄까 싶어 손을 뻗었다가 다시 말아쥐었다.

뭐야, 사람 걱정하는 건 생각도 안 하나? 지금 태평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때인가? 그 잘난 머릿속에 남태주 생각은 안 나든?

얄밉게 노려보다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이게 나았다. 혼자서 몸을 혹사하고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잘 쉬어 주니 좋다.

“푹 쉬고, 나중에 만나요.”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찾을 때, 우리가 더 쉽게 만날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툭, 저도 모르게 자는 사람의 이마에 입술을 내려놓았다.

…아.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화들짝 놀라 후다닥 물러났다.

자, 잠깐 홀렸다. 뭔지 몰라도 뭔가에 홀렸다. 아니, 이 인간한테 옮은 거다. 이 인간도 저번에 내 이마에, 어?

소리 없는 몸짓으로 횡설수설 방황했다. 듣고 있지도 않을 사람에게 이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뭐, 이건 그냥…. 이런 인사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럼 안녕히 주무십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도망치듯 연구실을 나섰다. 급한 와중에도 소리를 죽여, 잡음 하나 없이 문까지 완벽하게 닫았다.

그렇게 태주가 떠나고 한참 뒤, 지호가 느리게 눈을 떴다. 인형처럼 멍하니 미동조차 없이 있다가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좋아해요.”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샜다.

* * *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걸까? 내가 이렇게까지 기다림을 몰랐나?

오 교도를 집까지 데려다준 뒤, 태주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속으로는 연신 ‘안돼!’, ‘어딜 가는 거야, 너!’를 외쳤지만, 핸들을 잡은 손과 액셀을 밟는 발은 멈출 줄을 몰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머리를 쿵 핸들에 박았다. 빠앙! 울리는 큰 소리에 곧장 고개를 들었다. 허겁지겁 시동을 끄고 시트에 기댔다.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보면, 아기자기한 아기용품과 그 밑에 작은 신발 상자가 있다. 태주는 신발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아니야. 난 우리 희재 선물 주러 온 거야.”

그리고 겸사겸사 연지호는 잘 있는지도 좀 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맞은편 차를 괜히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신발 상자를 탁 내려놓고 외쳤다.

“아, 그래. 사실은 좀 보고 싶은데 뭐 어쩔 거야. 내가 연지호 좀 보고 싶을 수 있지. 내가 내 눈으로 보겠다는데 자기가 뭐 어쩔 거냐고.”

그 얼굴을, 그 생김새를 봐라. 얼마나 곱게 잘 빚어졌는가. 쓸데없이 슬픈 모습까지 처연하게 아름답고 난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냥, 괜히, 그 사람을 혼자 두고 싶지 않다.

자꾸만 얘기하고 싶고, 같이 마주 보며 웃고 싶고, 잔뜩 귀찮게 만들고 싶다.

“내가 뭐,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좀 놀자는 건데.”

한숨을 내쉬며 눈을 깜빡이다가 차에서 내렸다. 역시 얌전히 있는 것은 남태주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가서 좀 어울려 달라고 해야지, 안 되겠다.

탁. 탁. 탁. 탁. 느리지만 가벼운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며 잠이 든 차 안에는 작은 신발 상자가 그대로 있었다.

* * *

“선생님?”

진료실에 있을 시간은 지난 탓에 연구실로 먼저 갔다. 문을 두드리고, 문손잡이도 잡아 돌려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국에 있나?”

하지만 의국은 잘 안 가는 것 같았는데? 걸음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행동이 앞서도 너무 앞섰다는 걸 깨달았다.

“아, 멍청이. 전화를 하면 되잖아.”

이렇게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핸드폰을 꺼내 지호의 번호를 입력했다. 하지만 연결음만 연달아 들릴 뿐, 도통 연지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잘 맞던 전화 타이밍이 오늘따라 맞지 않는다. 태주는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 인간이 지금 나 피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맨날 내태주니, 뭐니 하는 인간이. 보고 있어도 그립다며. 이게 그리워하는 사람의 자세인가?

“안 되지. 피하는 건 있을 수 없지.”

받을 때까지 건다, 내가.

이제는 오기였다. 연결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나올 때마다 종료 버튼을 누르고 곧장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에서 열기가 느껴질 즈음이었다.

다시 한번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미운 여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구실 건물 밖으로 나온 태주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중요한 용건 아니면 끊어. 나 바빠.”

-바쁘긴 뭐가 바빠. 바쁘다는 인간이 지금 병원에 있냐?

“나 병원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혹시 근처에 있는 건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핸드폰을 고쳐 들자 기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혹시나 해서 차량 번호 조회해 봤지. 지하 주차장에 있던데? 네 차.

“허! 참 나. 그냥 전화를 해라. 음습하게 그게 뭐야?”

-전화했는데 네가 자꾸 통화 중이라잖아! 누구랑 그렇게 전화하냐? 너 연애해?

“어, 한다. 어쩔래?”

-오, 진짜? 그럼 기념으로 한 턱 내라!

“이거 이제 보니까 배고파서 연락한 거네. 네가 알아서 사 먹어. 난 내 애인 먹이기도 바빠.”

당연히 있지도 않은 애인이고, 우주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태주의 거짓말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먹고 싶은 메뉴를 줄줄 읊었다.

-병원 후문 건너편에 수제 버거 가게 오픈했거든? 세트 구매하면 치즈볼 서비스! 그리고 거기 밀크셰이크가 그렇게 맛있대! 후식은 그 옆에, 옆에 있는 달달하고 먹기 편한 마카롱이 좋겠다!

“이봐요, 남우주 선생님. 설명하지 말아 주시죠? 안 사 줄 거니까.”

-아아, 왜에! 나 오늘 한 끼도 못 먹었단 말이야. 응급 환자 엄청 많이 들어와서. 사 줘. 사 줘, 오빠. 응?

“이럴 때만 오빠지, 아주? 너 지금 어디 있는데.”

미운 동생이지만 종일 굶었다는 말에 결국에는 또 져 준다. 걸음을 돌린 태주가 후문으로 향했다. 스테이션으로 가져다 달라는 말에 사람은 몇 명이나 있는지, 혹시 못 먹는 게 있는지 체크한 뒤 통화를 끝냈다.

“뭐야, 그럼. 피하는 게 아닌가?”

까맣게 꺼진 핸드폰 화면을 보며 태주가 목덜미를 매만졌다. 응급 환자가 많아서 종일 바빴다는 우주의 말을 떠올렸다. 낮에는 없던 외상 환자가 밤에 발생할 수도 있지, 뭐. 괜히 오버한 것 같고 민망하다.

그냥 바쁜 거구나. 바빠서 연락 못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평소에는 ‘남우주 이 화상….’하면서 열었던 지갑을 웬일로 별말 없이 가볍게 열었다.

* * *

“어? 남태주! 여기, 여기!”

스테이션에 기대서 있던 우주가 태주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봉투를 두 개나 든 태주는 그것을 건네려다 ‘어디에다 두면 돼?’ 물었다.

“나 줘. 내가 들게.”

“됐어. 먹을 거만 가지고 튀려고 그러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짐을 들게 하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였다. 환자 CT 사진을 보고 있던 몇몇 의사가 태주에게 흐뭇한 눈길을 보냈다.

“남우주 선생 진짜 좋겠다.”

“우리 집 누구랑은 얼굴부터 차원이 다른 오빠네.”

“맨날 피자 사 오라고 시키는 그 오빠요?”

“네, 죽어도 자기 돈 안 써요. 얻어먹는 주제면 말이라도 예쁘게 하든가.”

그 말을 슬쩍 들은 우주가 태주를 툭툭 건드리며 장난쳤다.

“내 덕에 너 이렇게 평판 좋아진 거 봐. 기분 좋지?”

“그래, 그래. 너무 신나네.”

“흐흥, 고마워. 나 첫 월급 타면 내가 예쁜 내복 사 줄게.”

“됐으니까 굶지나 말고 잘 먹어. 너 살이라도 빠져 봐. 아버지 난리 나.”

스테이션 테이블에 봉투를 올려놓은 태주가 늘 혁주에게 듣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감기 안 걸리게 옷 잘 입고 다니고, 집에 연락도 자주 하고….

“자기도 안 하면서 나한테만 잔소리는.”

“나도 형한테 받은 잔소리 그대로 내려 주는 거야. 같이 듣자고.”

“그래. 밥 사 줬으니까 나눠 들어 줄게.”

“가서 먹어. 난 이제 가 볼게.”

“응. 호텔로 갈 거지?”

“어어, 오피스텔로 안 가니까 걱정하지 마.”

“조심해서 가.”

휘휘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지호는 아무래도 수술실에 들어간 건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만나는 건 완전히 포기한 채 오늘은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고개를 돌려 슬쩍 스테이션을 보았다. 옹기종기 모인 응급의학과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먹을 것을 나눴다.

종종 사 와야겠네.

수제 버거를 한 입 크게 무는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얼굴이다. 그 모습에 픽 웃으며 다시 병원 밖으로 향할 때였다.

“TA 응급 환자입니다! 왼쪽 허벅지에 출혈 있고요! BP 구십에 육십으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십육 번 베드로 옮길게요. 환자분.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그렇게 찾아 헤맸던 연지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방금 도착한 환자를 구급대원과 함께 살피고 있었다. 하얀 가운이 피인지, 오물인지 모를 것으로 얼룩덜룩했다.

“펄스 없어요! 어레스트예요!”

순간 숨을 급히 들이켜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환자가 실신했다. 맥박을 확인한 지호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환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뛰어온 의료진들이 서둘러 베드를 끌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결국 이번에도 알은체 한 번 못 했다. 태주는 순간 가슴이 꽉 조이는 것처럼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응급실 유리 벽 너머의 연지호가 남태주의 마음에 아프게 박혔다.

이런 사람이란 걸 잊고 있었다. 연지호가 무수한 사람의 상처와 숨을 어루만지는 의사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겠다니,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던 걸까. 연지호가 수많은 사람을 살피는 동안 나는 뭘 했지?

애초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깊게 숨을 들이쉰 태주가 돌아섰다. 아무리 전보다 가까워졌다고 한들, 그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연지호가 걱정된다고 했으면서, 사실은 자신만 생각하고 행동했었다.

보고 싶다는 이유로. 함께 어울려 줬으면 한다는 이유로.

* * *

이보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희재를 만나러 갔다가 선물을 차에 두고 내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직접 손에 들고 있기까지 했으면서 왜 그런 멍청한 실수를 했을까.

“아, 진짜 볼품없다, 남태주.”

옥상 정원 벤치에 털썩 앉아 지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의 도시는 별을 피우는 방법을 잊은 지 오래다. 희미하게 구름에 가려진 달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후, 한숨을 뱉었다. 하얀 입김이 입 밖으로 나와 번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넋을 놓다가 옆자리에 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우주의 심부름을 하면서 따로 산 휘낭시에였다. 연지호를 만나면 주려고 했던. 예쁜 포장을 마구잡이로 뜯었다.

어차피 연지호를 만나긴 글렀는걸, 뭐.

지금쯤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조금 전에 그 환자, 외상이 심해 보이던데.

낱개 포장된 휘낭시에를 하나씩 까서 입에 넣었다. 동시에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애써서 만나지 말자. 그 사람의 시간을 빼앗지 말자. 나보다 더 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냥 곁에서,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나이를 서른 넘게 먹어 놓고 철없이 굴지 말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다행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주변을 깨끗이 정돈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희재가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선물을 나중에 줘도 되겠지 싶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기로 하고 돌아설 때였다.

벌컥, 옥상 정원의 문이 열렸다. 자연스레 태주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태주 씨?”

뭐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애써서 만나지 않기로 다짐하기 무섭게 연지호가 눈앞에 나타났다. 조금 전 보았던 얼룩덜룩한 차림 그대로. 아니, 그보다 좀 더 심한 상태로.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그동안 바빠서 연락도 못 했다며 지호가 웃었다. 전과 달리 지친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못한 웃음이었다.

태주는 가만히 그 모습을 살폈다. 그가 지금 얼마나 애써서 웃고 있는지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도록 잘 감춰 쥐고 있지만, 지호의 오른손 안에 있는 게 담배와 라이터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병원은 모든 곳이 금연이라는 걸 뻔히 알 텐데도 이러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힘든가 보다. 게다가 지금 그가 수술실이 아닌 이곳에 있다는 건….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다가갔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당황한 듯 지호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

“태주 씨,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나 지금 많이 더러워요.”

그 말에 태주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더러워도 상관없으면.”

“….”

“그러면 선생님께 가도 됩니까?”

“…그래도 안 왔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안 왔으면 좋겠다는 말과 다르게, 표정은 체념한 듯 보였다. 맥이 탁 풀린 사람처럼 그가 웃었다. 뒤이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힘을 뺀 지호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쥐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가 사라졌다.

“이럴 것 같아서 안 오길 바랐는데.”

지호는 자신의 허리를 감아오는 태주의 온기를 가만히 받았다.

“이러면 놓아 주기 싫잖아요.”

조금 지난 뒤엔 손을 들어 태주의 뒷머리를 감쌌다. 꼭 끌어 마주 안자 두 사람의 온기가 짙게 맞닿았다.

“미안해요. 멀쩡할 때 태주 씨 만나려고 했는데. 결국 실패했네.”

“괜찮습니다. 원래 사람은 다 멀쩡할 때가 별로 없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거 은근히 위로되네요.”

“저는 뭐, 멀쩡한 상태로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태주 씨야, 멀쩡한 걸 넘어서서 늘 반짝반짝 빛나죠. 조금 과하게 멋있던데.”

볼수록 멋진 사람이라 매번 깜짝 놀라요. 가끔은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장난스레 말하며 흘린 웃음에 안도감이 묻어 있다. 지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태주 씨한테 부끄러운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요. 예전에는 아무래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그래요.”

태주의 어깨로 조금 더 무게가 내려앉았다. 몸을 기댄 지호가 편하게 눈을 감았다. 토닥토닥, 태주의 손이 지호의 등을 두드렸다.

“뭐 그런 걸 신경 쓰십니까? 한 번도 선생님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저한테는 언제나 대단한 사람이니까요.”

“오늘도 이 손으로 사람을 죽였는데도요?”

“죽인 게 아니라, 살리려고 애를 쓴 거죠.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

“….”

“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슬프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도 참 많습니다.”

말을 마친 태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무언가를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짓는 웃음이었다. 이 순간, 그는 굳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감정을 더 얹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후유증이 한동안 오래 갔어요.

* * *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차 앞에서 돌아선 태주가 지호를 마주하며 웃었다.

“운전 조심히 해요. 차 한 잔도 못 내어 준 게 마음에 걸리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도 늦었는데요, 뭘.”

“그래요. 도착하면 연락해요. 아, 요즘 호텔에서 지낸다면서요?”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남우주 선생님한테 들었어요. 아직도 태주 씨 걱정 많이 하던데요.”

오호, 나랑은 안 만나면서, 내 동생이랑은 꾸준히 얘기했겠다? 진료과도 다르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볼 것이지.

눈을 가늘게 뜬 태주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이야기하라고 하려다가, 괜히 유치해 보이는 것 같아서 관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동생 때문에 무지 피곤합니다. 제가 오피스텔로 간다고 하면 난리입니다. 혼자 있지 말라고.”

“이제 PTSD 증상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어요? 병원은 아직 잘 다니고 있죠?”

“네, 그쪽 선생님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우주 이게, 하아…. 줄어든 약을 보여 줘도 안 믿어요. 이제는 절 놀리려고 이러나 싶은 마음마저 든다니까요?”

놀리는 거든 아니든, 어차피 장단을 맞춰 줄 거면서 괜히 퉁명스레 군다. 동생 한정으로 말과 행동이 다른 게 참 웃기고 귀엽다. 웃음을 참은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볼 때 놀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틈만 나면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거든요. 제가 주치의였으니까 뭔가 더 알고 있지 않겠냐면서요.”

“그렇습니까? 걔는 바쁜 사람을 왜 그렇게 귀찮게 하고…. 저 때문에 괜히 선생님까지 고생이십니다. 그 녀석 얘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 순 없죠, 태주 씨 일인데.”

“저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저보다 선생님이 더 걱정입니다. 왜 이렇게 야위었습니까?”

아, 저 선생님 얼굴 진짜 좋아하는데. 손을 든 태주가 지호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바라보는 표정에서 진실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다시 잘 가꿔 놓을게요. 그런 말은 좀 더 일찍 해 줬으면 평소에 신경 썼을 텐데.”

지호가 태주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을 뻗어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남우주 선생님이 괜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보기보다 감이 좋은 사람이거든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목소리가 진지하다. 태주도 장난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압니다. 그래도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어서 조만간은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프고 힘든 거 혼자 앓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약속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한 태주가 이제 정말로 가 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차에 타려다가 운전석에 놓인 상자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지호에게 대신 전해 달라고 할지 고민하다가 조용히 뒷좌석으로 상자를 옮겼다.

직접 줘야지.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딱히 이걸 구실 삼아서 연지호를 한 번 더 보려는 건 아니고.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뒤에 던져 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심해서 가고, 다음에 봐요.”

“네, 선생님도 너무 일만 하지 마시고 좀 쉬기도 하세요.”

“알았어요. 태주 씨 가는 거 보고 눈 좀 붙일게요.”

연락하라는 흔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지호가 문을 붙잡았다. 대신 닫아 주려고 하는데, 갑자기 태주가 급히 손을 뻗었다. 문이 닫히려다 말았다.

“선생님.”

반듯하고 말간 얼굴이 올려다보며 웃는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마주 웃으며 대꾸했다.

“네, 태주 씨. 무슨 일이에요? 뭐 잊은 거라도 있어요?”

“그냥, 뭐…. 별건 아니고요.”

“….”

“선생님도 아프고 힘든 거 혼자 앓지 말라고요. 알았죠?”

그럼 진짜 갑니다! 손을 흔들며 문을 닫은 태주가 벨트를 두르고 시동을 걸었다. 가볍게 주위를 살핀 뒤 핸들을 붙잡고 액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움직인 차는 금세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가 떠난 뒤에도 지호는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텅 빈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어쩌죠? 큰일이네.”

난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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