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약 주고 다시 병 주기
나,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더라? 연지호한테 병원 하나 지어 줄 수 있으려나? 병원에서 잘리면, 의사 면허 정지되면 어떡하지? 내가 먹여 살릴까? 그런데 내가 먹여 살리는 걸 연지호가 찬성할까? 나는 알파, 연지호는 오메가로 형질 위조해서 결혼할까? 하지만 이건 법을 어기는 거잖아. 아니지, 의료법까지 위반한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랑…. 사랑은 아니지만, 도피를 하자.
별별 생각을 늘어놓으며 빈 잔을 채웠다. 취한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술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일단 정신을 차려야 했고, 밖에는 남태주의 귀염둥이 붕붕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얘가. 냉수만 몇 잔을 들이켜는 거야? 밥 대신 물배라도 채우는 거야?”
홀로 주방에서 냉수와 함께 궁상을 떨고 있자니, 모친인 결영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든 태주가 ‘오셨어요.’라며 힘없이 인사했다.
“밖에 차 세웠던데, 왜 차고에 세우지 않고? 자고 갈 거 아니야?”
“가야죠. 내일도 출근하는데.”
“오전?”
“오후 출근이요.”
“뭐야, 그럼 자고 가.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병원에 가 봐야 해요.”
하아…. 병원 얘기에 한숨을 내쉰 태주가 다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이걸 주정뱅이 술 들이켜듯 마시니, 보는 사람으로선 참 말리고 싶다.
“무슨 일 있어? 태주 너 이러는 거 오랜만에 보네?”
한 번은 파혼 직후, 초라하게 덩그러니 선 모습의 사진이 돌아다닐 때였다.
결영의 시선이 테이블 위를 훑었다. 오래된 법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 녀석이 왜 갑자기 법을 찾지? 순간 제 아들이 범죄에 휘말린 건가 싶어 심장이 철렁했다. 하지만 이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함께 있음을 깨닫고 작게 안도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응급구조사 자격증은 왜, 드디어 교도관 관두고 싶어진 거야?”
“아뇨. 그냥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태주의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샜다. 그는 가만히 테이블 구석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몇 번이나 더 한숨을 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래, 왜.”
“저, 연지호 선생님한테 병원 선물해 주고 싶어요.”
“뭐?”
“선생님한테 병원 주고 싶다고요.”
쿵. 고개를 숙인 태주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죄책감이 밀려들어서 괴로웠다. 사고가 일어났던 어젯밤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같은 일을 할 거라서 더 괴로웠다. 몇 번을 그때로 돌아가도 남태주는 연지호의 지시대로 움직여 사람부터 살릴 것이다.
“얘, 너 맹물 먹고 취했니?”
하지만 태주의 속사정을 모르는 결영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난데없이 병원을 주고 싶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설마 태주 너…. 그 사람 사랑하니?”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심정은 생각의 핸들을 무지막지하게 틀어 버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거냐는 눈빛. 거기에 약간,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까지 섞여 있다.
대체 이 어머니는 아들을 어떻게 보고 있던 걸까.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이해 못 할 행동만 해 왔던 탓인가? 아니면 방황과 우유부단의 끝판왕이었던 사춘기 때문에? 둘 다 유력한 이유이긴 하다. 습관처럼 뱉었던 모친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어휴, 태주야. 엄만 이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태주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사랑 얘기가 왜 나와요? 사랑의 도피, 그 비슷한 걸 하려고 하긴 했지만.
“에이, 사랑은 무슨. 이건 연민이고, 죄책감이죠.”
“정말 아니야?”
“아! 아니에요. 앞으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없진 않단 소리네?”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립니다, 어머니!”
냉수로도 차려지지 않던 정신이 모친의 말 한마디에 번쩍 들었다. 태주는 아직 결영의 손에 있는 자격증을 받아 챙겼다. 내일 오전, 지호의 징계위원회가 열릴 거란 소식을 전하면서였다.
“그래서 그렇게 시들시들한 꼴로 있었어?”
자초지종을 들은 결영은 태주가 늘어놓은 법전을 차곡차곡 쌓아 저만치 밀어 두었다.
“응급구조사면 의사 지시받고 시술할 수 있지. 그건 의료법 위반 아니니까. 엄마도 내일 오전에 병원 가 볼게.”
“그렇지만 이건 좀 특수한 사례로 받은 자격증이잖아요. 여기 보면 보건복지부랑 법무부가 같이 표기되어 있고요.”
남들처럼 응급구조학과를 나와 몇 년 동안 교육과정을 밟고 딴 자격증이 아니다. 교도관 대표로 1년짜리 교육과정을 밟고, 별 어려움 없이 받은 거였다.
이게 과연 연지호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아니, 솔직하게는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란 쪽으로 판단이 기운다.
역시, 병원을 차려 주거나 남은 생을 책임져 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병원을 관두게 되면, 아직 차가운 냉동고에 갇힌 선생님의 아버지는 어떡하지?
태주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를 보는 결영의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 찼다. 그는 말없이 정적을 지키고 있다가, 안 되겠는지 아들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태주 너, 지금 이러고 있을 때 아니야. 얼른 일어나.”
“예?”
“오늘은 오피스텔에 가지 말고, 잠도 자지 마.”
“갑자기요? 뭔데 그래요?”
“잠자코 오기나 해.”
“어? 어어?”
결영이 태주를 끌고 간 곳은 2층 서재였다. 평소 다른 이의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결영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태주는 조금 놀란 눈으로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서재를 눈으로 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여기서 뭘 하라는 건데요?”
“뭘 하긴?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그 말에 태주는 생각에 잠겼다. 얼마 안 가 결영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소매를 걷어붙였다.
서둘러 책장에서 온갖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잘하는 걸 해서인지 안색이 전보다 조금 밝아졌다.
* * *
“야! 남태주! 아아! 남태주우!”
“아!”
퍽! 시원하게 등을 후려치는 손길에 태주가 온몸을 비틀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고통을 참으며 몸을 돌렸다.
“아오, 오빠라고 부르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좀 점잖게 불러 줘라.”
“점잖은 무슨! 주차장에서부터 계속 불렀건만. 아, 나 목에서 피 나는 것 같아.”
“그래? 에소파거스 손상이 의심되네. 어제 뼈해장국 먹다가 다친 거 아니니?”
“너 때문에 소리 질러서 아픈 거잖아! 에소파거스 손상은 무슨. 근데 그 말투는 뭐냐?”
얼굴은 또 왜 그렇고? 손을 뻗은 우주가 태주의 양 볼을 착 소리가 나도록 붙잡았다.
“아. 아파.”
“어제 잠 못 잤어?”
붉게 충혈된 눈 위에 반쯤 내려앉은 부은 눈꺼풀, 그 위로 또 쌍꺼풀이 줄지어 서 있다. 보고만 있어도 오늘을 견디는 게 힘들 것 같아 쯧쯧 혀를 차게 되는 몰골이었다.
“내가 볼 땐, 그 오피스텔 터가 안 좋아서 그런 것 같아. 빨리 팔고 이사 가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나 어제 본가에 있었어.”
“진짜?”
“그럼 진짜지. 내가 그런 거 거짓말해서 뭐 해? 아무튼, 나머진 나중에 얘기해. 나 간다.”
툭툭, 수고하란 의미로 우주의 어깨를 두드린 태주가 걸음을 옮겼다. 우주는 멀뚱히 서서 멀어지는 제 혈육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딘가 평소와 달랐다.
“뭐야? 어디 가는 건데?”
외상 센터로 향하는 통로는 반대쪽이니, 희재를 보러 온 건 아닌 듯하다. 그리고 연지호 교수는 오늘 열리는 징계위원회 때문에 만나기 힘들다는 걸….
“헐…. 미쳤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미간이 구겨졌다. 때마침 병원 앞에 익숙한 차가 섰다. 그 차의 주인이 뒷좌석에서 내리는 순간, 우주는 자신의 짐작이 맞음을 깨달았다.
“교수님 때문에 왔구나!”
* * *
“아니, 어떻게 일개 교도관한테 그런 지시를 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윤상갑상연골절개술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또 상황이 급하니까….”
“이봐요, 윤현성 과장. 그런 위험한 소리 하지 마세요. 기관을 직접 절개하는 건데, 그게 일반인한테 쉬웠겠습니까?”
지호는 멀뚱히 앉아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징계 대상자인 그에게 뭐 하나 묻는 것 없이 위원끼리 싸우기 바빴다. 뻔히 나올 질문을 대비해 대답 몇 가지를 준비했는데, 괜히 한 것 같다.
“연 교수가 무조건 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뜩이나 일손 부족한 외과입니다. 그것도 외상외과요. 게다가 오늘 법무부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냥 교도관이 시술한 거 아니랍니다. 법무부랑 보건복지부에서 했던 응급 구조 프로그램 수료자래요. 자격증도 있다니까요?”
“그게 다른 응급구조사 자격증이랑 같습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니요! 그 자격증도 엄연히 시험을 통해서 받는 겁니다! 그것도 다른 응시자들과 똑같은 시험이요!”
아무래도 지호가 외과 의사다 보니, 외과 과장인 윤현성 입장에선 징계를 최소화하고 싶은 모양이다. 혼자 열심히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맞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다. 결국에는 보다 못한 부원장이 이를 제지했다.
“다들 목소리 낮추세요! 이사장님까지 계신 자리에서 이게 뭐 하는 겁니까?”
“하지만….”
“윤현성 과장!”
잠시 회의실에 침묵이 돌았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엄숙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아직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지호는 조금 신기한 눈으로 윤현성 과장을 보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같은 외과라고 해도 너무 감싸 주는 거 아닌가? 왜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자신을 감싸는 걸까?
“연지호 교수?”
“네.”
부르는 소리에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센터장이었다. 그는 사실 확인부터 하겠다며, 정말로 교도관에게 윤상갑상연골절개술을 지시했는지 물었다. 얼굴에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네, 제가 지시했습니다.”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도관한테 지시했죠?”
“현장에 있던 응급구조사와 의무사무관은 손을 다쳐 시술이 불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교도관에게 그런 지시를 내립니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교도관 대표로 응급 구조 교육을 받은 것도 알고 있었고요.”
지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차분한 목소리는 조금의 떨림조차 없이 덤덤하기까지 했다. 다시 위원들이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응급 구조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그 교육, 수박 겉핥기식의 교육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까. 이건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제 의견도 같습니다. 그냥 넘어갔다간 좋지 못한 선례가 될 겁니다.”
“기껏해야 일 년 교육받은 교도관이 뭘 알겠습니까?”
“뭘 알긴요! 그 교도관이 어디 다른 사람과 같습니까? 이렇든, 저렇든, 어쨌든 응급구조사 자격증 아닙니까!”
여전히 윤현성 과장은 처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다시금 위원들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명백한 일에 왜 자꾸 억지를 써서 피곤하게 만듭니까! 이봐, 당신! 연 교수한테 뭐 돈이라도 받았어?”
“돈을 받다니! 말조심해, 이 사람아! 어디 사람을! 내가 그쪽 같은 줄 알아?”
“뭐? 그쪽? 지금 말 다 했어?”
“다 못했다, 왜!”
답답함은 이미 극에 달했는데, 여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쌓였다. 결국 참다못한 윤현성 과장이 책상을 탕 치며 일어났다.
“아, 글쎄! 내 말 좀 들어 보라고! 연 교수가 오더 내린 그 교도관은! 어? 그냥 교도관이 아니라니까!”
“그냥 교도관이 아니면 뭔데! 법무부 장관 아들이라고 돼? 어?”
“그 교도관, 내 아들이에요.”
벌컥! 순간 회의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모두의 이목이 문가로 향하자 도도한 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이음 재단 이사장 원결영이에요.”
지호의 바로 뒤에서 멈춰선 결영이 징계위원회의 위원들을 쭉 눈으로 훑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아쉽게도 법무부 장관의 아들은 아니지만, 내 아들이에요. 그 교도관.”
이음 재단 이사장. 매달 막대한 후원금을 이 병원에 기부하는,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를 알아본 병원 이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현성 과장의 옆구리를 찌른 내과 과장이 왜 진작 말 안 했냐며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그냥 교도관이 아니라고. 연 교수가 저 집 아들내미 생명의 은인이야.”
“아아,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다들 하나같이 젊은 조교수를 부려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동안 외상 센터 센터장을 따라 그를 얼마나 쉽게 대했던가. 그 막대한 후원금을 왜 하필 이 병원에 대나 했더니, 다 연지호 하나만 보고 대는 거였다.
“사실 확인을 하려면 당사자를 불러서 제대로 확인해야죠. 그래서 데려왔어요, 내 아들. 아니, 이건 잠시 배제해 두죠. 지금은 교도관 남태주로만 봐 주셨으면 좋겠네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 뒤로 또 한 사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목소리에 작게 미소 지은 지호가 고개를 돌렸다.
“경기 남부 교도소 교사, 남태주입니다.”
교도관 정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태주가 단정한 걸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옆에는 보건복지부 주무관도 함께였다.
* * *
“솔직히 좀 멋있었죠?”
삐뚤어진 넥타이를 고친 태주가 제 어깨로 지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한바탕의 폭풍이 휘몰아친 뒤였다. 텅 빈 회의실 앞 복도, 두 사람은 창가에 기대선 채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평소였으면 해사하게 웃어줬을 연지호가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다.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태주가 살짝 더 과장한 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사장님이 이럴 때 쇼는 필수라고 하셔서요. 기선제압을 해 줘야 한다나 뭐라나?”
“….”
“큼, 크흠! 저, 저는 뭐…. 별로 이런 거 좋아하지 않지만, 선생님을 위해서….”
“나한테 화 안 났어요?”
“예?”
사람 무안하게. 반응 없이 망부석처럼 있더니, 갑자기 말을 끊고 진지하게 묻는다. 잠시 고민하던 태주가 고개를 돌렸다.
“제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럴 것 같았어요. 내가 태주 씨 속인 거잖아요.”
누군가를 상처입히고 받는 상 같은 거, 원할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책임지겠다고 한 일이에요. 그래서 태주 씨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덤덤하게 말한 지호가 여긴 왜 왔냐며 작게 나무랐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삐딱하게 선 태주는 팔짱을 꼈다. 단정한 차림새가 의외로 그 불량한 태도와 어울렸다. 여유롭게 얼굴에 건 미소가 이 조화에 한몫한 듯했다.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니요. 이미 같이 뛰어들지 않았습니까.”
타박타박. 이미 가까운 거리임에도 태주는 지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화났습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났어요. 이 인간이 왜 나한테 이런 죄책감을 짊어지게 하는 걸까. 뭐가 좋아서 내 앞에서 웃었을까. 당장 손에서 메스를 놓게 될 수도 있는데, 뭘 믿고 이렇게 차분한 걸까.”
“….”
“경험이 없던 거죠? 늘 혼자서 수습해 왔으니까 함께하는 방법 같은 거, 잘 몰랐던 거잖아요. 그래서 화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태주 씨….”
“몰랐는데, 저 말이죠. 선생님 같은 사람을 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재밌습니다. 선생님이랑은 어떤 어려운 일을 해도.”
잔뜩 힘이 들어간 두 손이 지호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까맣게 반짝이는 눈동자 속엔 오로지 연지호 하나만 비쳤다.
“저, 엄청나게 준비하고 왔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우리 법무부와 보건복지부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합니다. 아니, 감히 국가 기관에서 시행한 프로그램을 무시해?”
“….”
“그러니까, 이번엔 선생님이 저 한번 믿어 봐요.”
나, 이래 보여도 천재니까.
잔망스럽게 윙크까지 날리며 자기 어필하는 모습에 지호의 표정이 풀렸다. 단단하게 한 무장이 갑작스레 해제된 것처럼 몸에서 힘이 빠졌다.
“나 이제 태주 씨는 절대 못 이기겠어요.”
느리게 고개를 움직인 지호가 태주의 어깨에 턱을 얹었다. 자세는 조금 불편한데, 이상하게 진짜 휴식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태주가 자신만만하게 와서 제안한 것은 응급구조사 시험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시험이 아닌 모의시험이었다. 어떤 시험이든 만점을 받아 줄 테니, 자신을 인정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태주 씨.”
곁에 앉아 있던 지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태주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당당한 상체와 달리, 덜덜 떨고 있는 하체 때문이었다. 이럴 거면 대체 뭘 믿어 보라는 건지. 하여간 웃기고 귀엽다.
“진짜 괜찮겠어요?”
“그럼요. 저 천재라니까요.”
“제가 봤던 천재들과는 좀 많이 다른 모습이라서 그래요.”
엄청나게 떨고 있는데. 차마 뒷말까지는 붙이지 못하고 태주를 다독였다.
“당장 오늘 시험해 보겠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반나절은 시간이 있을 줄 알았거든요.”
“매일 회진 돌 때마다 인턴이나 레지던트한테 별별 문제를 다 내는 사람들이에요. 시험 문제 몇 가지 만드는 건 일도 아니죠. 진짜 응급구조사 시험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책에 나오기만 한 거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해요?”
“아, 그럼 제 손에 선생님의 삶이 걸려 있는데! 이 정도 불안은 좀 봐주세요.”
바지춤에 손을 여러 번 문지를 태주가 큼큼 헛기침했다. 그래도 나름 마인드 컨트롤은 하는 것 같은 게, 다리를 덜덜 떨긴 해도 횡설수설하는 법이 없다. 테이블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지호가 태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안 되면 태주 씨가 내 삶 책임지면 되지.”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까지 하고 왔습니다. 저 여기서 망하면 연지호 씨 나랑 결혼하는 줄 아세요. 알겠습니까?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막장 드라마 한 편 진하게 찍을 겁니다.”
“오, 그거 되게 솔깃하고 설레는데요?”
“설레다니요. 저는 되게 심각하거든요?”
“난 태주 씨가 그렇게 심각하게 우리의 미래를 걱정할 줄 몰랐어요. 아, 벌써 사랑에 빠질 것 같은데?”
“으으, 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중요한 순간에까지 장난입니까?”
“그래서 덕분에 태주 씨 떨림이 멈췄잖아요.”
“예?”
“어때요? 긴장이 좀 풀렸죠?”
“어어? 그러네?”
태주의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 지호가 손을 뗐다. 태주가 신기한지 가슴에 손을 대 보았다.
그 모습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본 지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태주의 귓가에 나지막이 몇 마디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 삶을 잘 부탁해요, 태주 씨.”
“으아아악!”
놀란 태주가 얼른 귀를 감췄다. 귓가에 닿은 숨결도 숨결이지만 입술이 문제였다. 이리저리 당황한 시선을 배회하다가 다시 다리를 달달 떨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뭐야? 약 주고 다시 병 주는 게 어딨어?
* * *
“괘, 괜찮겠죠? 잘못되면 저 진짜 경위서에, 감봉에….”
누구보다 긴장한 것은 시험을 보는 태주도, 그런 태주를 기다리는 지호도 아니었다. 함께 온 보건복지부 주무관이 한겨울에 땀까지 닦으며 초조해했다.
조금 후,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시험을 마친 태주가 나왔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실기는 잘 넘겼습니다.”
“필기는요?”
“아직 채점 중이라 결과는 모릅니다.”
“그래요? 그럼 문제는요? 문제는 많이 어려웠습니까?”
“음, 어렵지는 않은 것 같은데….”
“….”
“문제가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네? 영어요? 저, 전부 다? 보기까지 싹 다?”
“네.”
“허….”
망했다. 딱 표정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작게 웃은 태주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지호에게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지호가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교도소에서 계속 전화 오던데. 확인해 봐요.”
“혹시 받으셨습니까?”
“아뇨. 받을까 했다가 그냥 뒀어요. 태주 씨 여기 있는 거 알 것 같아서.”
“아, 잘하셨습니다. 별로 중요한 용건은 아닐 겁니다.”
안 봐도 뻔하다. 오지랖 넓은 오 교도나, 걱정 많은 심 교도겠지. 둘 다 성격이 급해서 얌전히 있을 타입이 아니다.
부재중 전화 목록만 대충 확인한 뒤, 정복 주머니에 쏙 넣었다. 셔츠 여밈 사이에 넣어 둔 넥타이를 주섬주섬 끄집어냈다. 나지막이 묻는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때요? 나 태주 씨한테 장가갈 준비 할까요?”
딱 봐도 놀리는 투의 장난스러운 목소리. 이에 잠시 망한 척 연기를 해 볼까 싶었지만, 그 생각은 금세 버렸다. 대신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말했잖아요. 저 천재라고.”
“오, 자신 있나 보네요?”
“그럼요.”
제가 또 영어를 참 잘해서. 걱정하지 말라며 지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안 바쁘십니까? 왜 계속 여기 계십니까?”
“징계받을지도 모르는 의사한테 수술을 떠넘길 리가 없잖아요. 덕분에 오늘은 좀 여유가 있어요.”
“그럼 좀 주무시지. 평소에도 잘 못 주무시지 않습니까.”
“내 삶을 쥐고 있는 남자가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요. 배고프죠? 결과 나오려면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동안 점심 먹고 올까요?”
“그럼 요 앞에 바지락 칼국수요.”
전에 제 동생이 그러는데 천상의 맛이랍니다. 선생님은 가 보셨습니까? 지호에게 어깨를 딱 붙이고 걸으며 태주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어딘가 외로움이 묻은 얼굴로 이쪽을 보는 주무관과 눈이 마주쳤다.
아차차! 깜빡할 뻔했다!
“주무관님도 점심 아직이죠? 같이 가실래요? 바지락 칼국수 좋아하십니까?”
“너무. 너무요.”
끝까지 안 돌아보고 두고 갔으면 울었겠다. 감격 어린 표정을 지은 주무관이 서둘러 따라붙었다.
* * *
이럴 줄 알았으면 겉옷 챙길걸. 식당 밖에서 몸을 움츠린 태주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덜덜 떨었다.
-소장님이 우리 사동에서 떠나시질 않아요. 정말 잘 본 거 맞죠?
“당연하죠. 아무튼 걱정하지 마세요. 법무부 이름에 먹칠하진 않았으니까요. 소장님께도 잘 말씀해 주세요.”
-알았어요. 목소리가 자신만만한 걸 보니 정말인가 보네. 그럼 조심해서 와요.
“네, 그럼 끊겠습니다.”
뚝.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한숨이 나왔다. 우리 소장님이 또 유난이라며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어깨에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지호의 코트였다.
“추운데 뭘 그렇게 오래 통화해요?”
“소장님이 걱정이 많으셔서요. 그러는 선생님은 왜 나오셨습니까? 추운데.”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지호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손에 꽉 쥐고 있는 핸드폰을 보니, 급한 연락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응급 환자입니까?”
“그건 아니고, 지켜보던 환자한테 문제가 조금 생겨서요. 먼저 가 볼게요. 음식 나왔으니까 태주 씨는 먹고 와요. 계산은 내가 했어요.”
“예? 제가 사려고 했는데!”
“다음에 사면 되죠.”
그럼 가 볼게요. 식사 맛있게 해요. 미소 지으며 인사한 지호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어? 잠깐만요, 선생님! 다급하게 불러도 뒤 한 번 돌아보는 일이 없다.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가 보다.
“어떻게 사람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냐?”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코트 소매에 팔을 끼웠다. 왠지 모르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식당 문을 열었다. 자리를 찾아가서 앉자, 환한 얼굴의 주무관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어! 교도관님! 방금 병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만점이래요! 교도관님 진짜 똑똑하시구나!”
이제야 마음이 좀 놓입니다! 편하게 밥 먹을 수 있겠어요!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한 그가 그릇에 칼국수를 덜었다. 고생한 교도관님 먼저 드시라며 태주의 앞에 놓아주었다.
태주는 가만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맛있을 것 같은데, 왜인지 입으로 가져가는 게 내키지 않았다. 먼저 간 지호가 신경 쓰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드시고 오세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교도관님!”
몸을 홱 돌린 태주가 식당을 뛰어나갔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주무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맛있는데 같이 먹지.”
혼자 먹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출입문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국자를 고쳐 쥐었다.
* * *
지호가 급하게 향한 곳은 소아 병동이었다. 병실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벽에 기대 있던 신 교수가 바로 섰다.
“어, 연 교수.”
“어떻게 된 거예요?”
“조금 전에 사망 선고했어. 결국 장기 기증은 허가 못 받았고.”
울음이 새는 병실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온 가족이 곁에서 애틋한 손길로 시신을 어루만졌다.
“끝까지 지켜줄게. 아무한테도 안 줄 거야. 우리 애 털끝 하나도 못 줘….”
그 모습을 보는 지호의 마음은 무거웠다. 말로는 감히 표현할 수도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장기 기증을 권유한 자신 때문에 보호자가 저런 말까지 하는 게 미안했다. 그리고 여태 맞는 심장을 찾지 못해 아파하고 있을 아이에게도.
순간 눈앞이 흐려지면서 짧게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질 뻔한 걸 겨우 버티며 벽을 짚었다. 툭. 툭. 코에서 뭔가 흐르는가 싶더니, 바닥에 붉은색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연 교수? 괜찮아?”
손수건을 꺼낸 신 교수가 코 밑에 대 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지호가 옷 소매를 끌어 바닥을 닦았다.
“네. 괜, 찮아요….”
아니,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몰랐는데 몸부터 마음까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견디고 또 견디면, 어디 더 버텨보라는 듯 쉴 틈 없이 다른 일이 찾아온다. 희망 같은 건 없다는 듯 막막하기만 하다.
“이제는 정말 바드밖에 없어. 보호자 잘 설득해 봐.”
“그래야죠.”
가슴을 두 번이나 갈라야 하는 게 큰 무리가 되겠지만, 이제는 정말 이 방법뿐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몸을 돌렸다. 환자의 가족이 이쪽을 보기 전에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태주 씨?”
왜인지 식당에 있어야 할 남태주가 눈앞에 있다. 잠시 헛것을 본 게 아닌지 눈을 깜빡여 봤지만, 그의 반듯한 모습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선생님.”
잔뜩 걱정이 어린 표정과 목소리에 지호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평소처럼 괜찮은 미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일그러지려고 하는 표정에 그는 결국 눈을 감았다. 완전히 틀렸다.
이렇게 서서히, 내가 망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못 보겠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추하든, 일그러지든, 타인의 시선에 큰 신경을 쓴 적이 없는데. 어디론가 숨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다. 묘하면서도 짜증 나는 기분이었다.
숨을 수 없으니, 보지 않는 걸 택했다. 미안하지만,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차라리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했다. 지금 이 잘난 남자를 마주하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했다.
그대로 걸음을 옮겨 태주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치려고 했다. 팔을 단단히 붙잡는 손길에 다시 걸음이 멎었다. 결국 눈을 뜨고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차마 괜찮냐고 묻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지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좀 지치네요. 쉬어야겠어요.”
나중에 내가 연락할게요. 천천히 붙잡은 손을 떼고 지나쳤다.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위로받고 싶어질 것 같아요. 이 말은 속으로 삼킨 채였다.
[18] 에소파거스 (Esophagus) 식도(食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