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아무래도 그만큼 (12/29)

11. 아무래도 그만큼

아, 엄청나게 시달렸다.

경찰서 밖으로 나온 태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교도소와 호텔 CCTV 자료가 서에 도착할 때까지 형사로부터 은근한 경계와 압박을 받았다. 조금 전 사고로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데, 이곳에서 더 너덜너덜해졌다.

“태주야!”

고개를 푹 숙인 채 한껏 넋을 놓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차에서 내리는 혁주가 보였다.

“어, 형.”

“무슨 일이야? 사고 났다며. 괜찮아?”

“어어, 괜찮아. 머리에 혹만 조금 났어.”

“어휴, 왜 하필 거기야? 그나마 쓸 만한 게 머리인 놈이. 삼백칠십사 곱하기 이십육은?”

“구천칠백이십사. 지금 나 걱정하는 거 맞지?”

“그럼. 이렇게 현실적으로 걱정해 주는 형이 어딨냐?”

일단 이거나 받아. 혁주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새 핸드폰이었다. 태주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핸드폰 없어도 되는데.”

“깨지고 난리 났다며. 화면도 안 보이는 거 그냥 쓰게?”

“수리하려고 그랬지.”

“그 정도 깨졌으면 수리비가 더 나오겠다.”

“그래도….”

그래도 이건 선생님이 준 건데. 주머니를 뒤적이며 깨진 핸드폰을 꺼냈다. 정말 곱게 썼는데 얼마 쓰지도 못하고 이렇게 돼서 아쉽다.

고민하다가 새 핸드폰의 포장을 뜯었다. 깨진 핸드폰은 집에 고이 모셔두기로 했다.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그래, 또 막 굴리지 말고.”

“막 안 굴려. 날 뭐로 보고?”

“막 구르는 애.”

“너무하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입을 여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혁주는 능청스레 화제를 돌렸다.

“아, 태주야. 네가 전에 부탁한 거 있잖아.”

“뭐?”

“그 백 의원님 아들 말이야.”

“백 의원 아들?”

듣자마자 누구인지 금세 떠올렸다. 가장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어서 그런지 자신도 모르게 격양된 목소리가 나왔다.

“백현수 쪽에서 연락 왔어? 뭐래? 나 그 사람 만날 수 있어?”

“어, 그게….”

집중하는 두 눈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 충분했다. 말꼬리를 늘인 혁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타고 온 렉서스가 서 있었다. 뒤따라 시선을 옮긴 태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설마, 같이 온 거야?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역시, 일 처리 속도 한번 끝내준다! 그래, 고작 새 핸드폰을 주겠다고 경찰서까지 오진 않았을 거다.

형질 진단 키트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나중에 연지호가 서에서 나오면 그 부분은 어떻게든 될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붙잡아 놓자는 생각으로 차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목소리 톤을 살짝 낮춰 진지한 투로 ‘백현수 씨?’ 작게 부를 때였다.

갑자기 휙, 머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뒤이어 머리카락이 전부 뽑힐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아! 아아아아!”

태주는 상체만 뒷좌석에 올라탄 꼴로 버둥거렸다. 이 손길, 이 악력. 여기에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아픔까지. 누군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아버지?”

떨리는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아버지는 무슨! 오늘부터 나, 네 아비 아니다!”

그리고 더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까지 합치면 2,463번 정도 된 듯하다. 부자의 연을 끊는 게 이렇게나 쉽다. 태주는 당분간 이사장님의 성을 빌려, 남태주가 아닌 원태주로서의 삶을 살겠다 다짐했다.

“저걸 내가 어쩌면 좋냐.”

그 모습을 혁주는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밖으로 비죽 나온 다리가 허공에서 마구 흔들렸다.

이번엔 얼마나 걸릴까. 긴 한숨과 함께 그런 생각이 튀어나왔다. 그나마 보는 눈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하여튼 남태주. 총알처럼 몸이 튀어 나가는 버릇을 여태 못 고쳤다. 적어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아버지한테 들켰으니까 조심하라고, 미리 언질을 주려고 했건만.

남들 앞에선 똑똑한 동생이 가족 앞에서만 멍청한 게 참 희한하다. 경찰서에 국회의원 아들을 왜 데리고 온단 말인가. 괜히 이상한 가십에 휘말리기만 할 텐데.

혁주는 슬쩍 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둥거리는 태주의 두 다리를 몸으로 가려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린다 한들,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까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아, 아버지! 잠시만요!”

“글쎄 나 네 아비 아니라니까?”

“어어, 그럼 아저씨!”

“뭐, 인마?”

남 회장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태주가 아차 싶었는지 손을 마구 저었다. 얼른 뱉은 말을 수정했다.

“아니, 아니, 회장님! 그래서 백현수 씨는요? 같이 안 왔어요?”

일말의 희망을 품은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조수석에 있나? 상체를 들고 앞자리를 확인했다가 다시 머리채를 잡혔다.

“이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백 의원 아들은 갑자기 왜 찾고 난리냐, 이 녀석아!”

“저랑 동갑에다가 같은 베타라면서요. 친구로 지내기 딱 좋지 않습니까.”

“허! 네 엄마가 그렇게 만나보라고 한 사람은 죽어도 안 만나더니, 갑자기 무슨 친구 타령이야!”

“아이, 그거는! 의도가 불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백현수 씨는 보세요. 비행기 사고라는 그 어려움을 딛고 살지 않았습니까. 똑같이 죽었다가 산 사람으로서 동병상련의 마음이….”

“아직 눈도 못 뜬 사람이랑 퍽이나 친해지겠다. 쯧쯧. 너 인마, 언제 철들래? 대체 누굴 닮아서 이래?”

언제쯤 이 상황이 끝날까? 혁주가 초조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5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제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지호가 나왔다.

“다음에 또 이런 일 생기기만 해! 교도관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게 가둬 버릴 줄 알아!”

경찰서에서 나온 지호는 흠칫 놀라며 멈춰 섰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에, 혁주는 대답 대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태주 씨.”

“….”

“태주 씨?”

“….”

“목 안 아파요? 되게 불편해 보이는데.”

“안 아픕니다. 쪽팔린 마음이 더 아픕니다.”

지호의 집으로 가는 길. 태주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 이건 진짜 비밀이었는데. 서른 넘어서까지 아버지한테 혼나면서 사는 거, 이건 진짜 감추고 싶었는데. 잘난 사람한테 들키니까 더 창피하다.

하지만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붉어진 얼굴이 조금 식으면 다시 고개를 들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잘 식지 않아 타이밍을 놓친 것도 있었다.

“선생님.”

눈치를 보다가 건널목 신호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눈은 마주치자마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서 피했다.

“그런데 아까는 형사님께 뭘 물었던 겁니까?”

나란히 걷는 발끝을 보며, 먼저 나가 있으라던 지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염상훈 교도에 관해서 물었을 것이다.

“우리를 만나러 온 날 죽은 거잖아요. 교도관님이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했어요.”

“아, 확실히 어딘가 개운하지 않긴 합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연지호가 그냥 넘어갔을 리 없다.

소매를 걷은 태주가 시간을 확인했다. 깨진 유리 너머로 자정을 향해 달리는 바늘이 보였다. 은성서까지 왕복 시간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여기서 염상훈 교도의 시체가 발견된 은성시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한쪽은 경기도 남부이고, 다른 한쪽은 경기도 북부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염상훈 교도는 무슨 일로 은성시까지 간 걸까?

아니면 살해를 당한 뒤에 시신이 거기까지 옮겨진 건가?

후자라면, 범인은 왜 시신을 왕산 터널에 유기한 걸까?

“형사님께선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사 기밀이라 말할 수 없단 뻔한 얘기만 하셨죠, 뭐.”

“그래도 마음에 좀 걸립니다. 저와 만나서 무슨 얘길 하려고 했던 걸까요?”

“글쎄요. 소지품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수사가 끝난 뒤에나 가능하다고.”

“그럼 수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죠. 빨리 범인을 잡았으면 좋겠는데….”

신호가 바뀌고 두 사람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지호가 사는 맨션이었다.

조금 경사진 비탈길을 느긋하게 오를 때였다. 갑자기 매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찬 공기에 두 사람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쿵! 바람에 밀린 출입문이 조금 세게 닫혔다.

“아, 깜짝이야.”

놀란 태주가 흠칫 몸을 떨었다. 혼자 놀란 게 괜히 멋쩍어서 얼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먼저 안으로 발을 밀어 넣을 때였다.

“아니면, 태주 씨.”

뒤따라 올라탄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투에서 곰곰이 생각한 티가 났다. 대답 대신 가만히 바라보자 유하게 시선을 맞추며 그런다.

“같이 가 볼래요?”

“…어디를 말입니까?”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요.”

“왕산 지하도요?”

“네.”

“이미 현장이 정리되지 않았을까요?”

지하도면 그래도 사람이 지나는 길일 테니까. 핸드폰을 꺼낸 태주가 인터넷을 켰다. ‘왕산 지하도’ 검색하자 관련 기사 몇 개와 사진 몇 장이 떴다.

하지만 그중 염상훈 교도와 관련된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경찰 쪽에서 조용히 수사하고 있는 듯했다.

“으음….”

가만히 핸드폰 화면을 주시했다. 다른 건 그다지 문제가 안 되는데, 이상하게 지하도 사진이 눈에 거슬렸다. 아, 이게 뭐더라? 내가 어디서 이걸 봤는데?

띵.

그러나 눈치 없이 울린 도착음이 생각을 방해했다. 먼저 내리라는 지호의 눈짓에 태주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바로 돌아서서 말했다.

“좋습니다. 한번 가 보죠.”

그곳에 단서가 있든 없든, 안 가 보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 * *

러어어어언! 웅장한 음악과 함께 목청이 터지도록 지르는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속옷 바람으로 한껏 미간을 접은 태주는 TV 화면에 몰입 중이었다.

오른쪽 맨 위 귀퉁이에 19 딱지가 붙어 있었다. 한때 잔인하기로 유명했던 영화였다. 예고 없이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오며 유혈이 낭자했다.

“왜 이런 걸 보고 있어요?”

“아, 선생님.”

무난한 오트밀 색 홈웨어를 들고 나타난 지호가 채널을 돌렸다. 푸르른 하늘이 펼쳐지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이번엔 숲으로 가서 피톤치드를 어쩌고…. 여행 프로그램이다.

“이제는 피나 날카로운 걸 봐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보고 있던 거예요?”

“네, 신기해서요.”

대답과 동시에 저절로 바보 같은 웃음이 샜다. 그렇게 좋냐는 지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옷을 입었다.

“아무래도 사고 현장에서 응급 시술을 했던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칼이나 피보다 사람이 죽는 게 더 무서웠거든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요. 이제 TV는 그만 보고 들어가서 자요.”

리모컨 전원 버튼을 누른 지호가 침실로 가라며 눈짓했다. 고분고분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들어가서 자라는 게, 같이 꿈나라로 가자는 뜻이 아니었던 걸까? 왜 자신만 침실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침실 문 앞에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선생님은 안 주무십니까?”

“태주 씨 먼저 자요. 저는 이것 좀 보다가 잘게요.”

지호가 손에 쥔 서류 파우치를 흔들었다. 그 손을 보는 태주의 눈이 일그러졌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다.

“꼭 지금 봐야 합니까?”

“그냥 매일 하는 공부 같은 거죠.”

서류를 꺼내고 나서부터는 이쪽은 쳐다도 안 본다. 더 마음에 안 든다.

공부? 공부 좋지. 남태주도 그거 되게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는 자기소개 취미란에 ‘1등’이라고 쓴 적도 있다. 공부라는 게 싫어진 순간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저게 인간의 삶인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연지호는 논문이나 책 따위를 보다가 잤다.

“선생님.”

보다 못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네, 태주 씨.”

언제나처럼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서류에 박혀 있었다.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태주가 팔짱을 척 끼며 그를 보았다. 정수리가 뚫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빛을 쏘는데도 이쪽을 봐 주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애타는 마음에 입술을 꾹 물었다 놓았다.

오늘 반드시. 반드시 저 뱀파이어 같은 인간을 푹 재울 생각이다. 여태 알고 지내면서 저 인간이 4시간 이상 자는 걸 본 적이 없다.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옆자리에 털썩 앉자, 그제야 고개를 돌리고 쳐다봐 준다. 그 시선을 건성으로 짧게 맞춘 뒤, 그대로 몸을 기울여 누웠다. 연지호의 다리를 베개 삼아서.

“태주 씨?”

놀란 지호가 양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태주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편하게 눈을 감았다.

“선생님은 사람이 아닙니까? 왜 잠을 안 잡니까?”

“그게 불만이라서 지금 이렇게 시위하는 거예요? 드러누워서?”

“네, 그러면 안 됩니까?”

머리 위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태주는 눈썹만 살짝 들썩일 뿐, 눈을 뜨지는 않았다. 조금 후, 아무렇게나 쏟아진 머리카락에 조심스러운 손길이 닿았다.

“태주 씨 나 걱정하는구나?”

“선생님은 보면, 쉴 줄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기분이 어떤지 티도 잘 나지 않잖습니까.”

나른하게 말을 흘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만 눈동자가 오롯이 저만 비추고 있는 것이 보인다. 태주는 손을 뻗어 조금 피곤해 보이는 지호의 눈가를 슬쩍 건드려 보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티를 안 내니까 더 걱정됩니다.”

선생님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게 속삭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같이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온다. 점점 의식이 멀어질 즈음이었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에 놀라 잠이 달아났다. 눈을 뜨고 살피니 느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로 몸이 붕 떠 있다. 뭐 하는 거냐고 말도 못 꺼내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지호를 올려다보았다.

“잠은 침대에서 자야죠, 태주 씨.”

“…선생님도 같이 자는 겁니까?”

“나랑 같이 자고 싶어요?”

“네, 같이 자고 싶습니다.”

“어머, 화끈해라.”

“장난치지 마시고요. 그래서 저랑 잘 겁니까, 말 겁니까?”

얄밉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태주가 지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왕 안은 거 침대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알았어요. 같이 자요. 같이 자면 나야 좋지, 뭐.”

지호는 태주를 안쪽에 눕힌 뒤, 자신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을 덮어 주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 온기가 스르르 파고들었다.

팔을 뻗은 태주가 지호를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나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수갑을 채워 버리겠다는 둥, 끈으로 묶어 놓겠다는 둥, 온갖 살벌한 협박을 하는데도 지호는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태주 씨 덕에 새로운 취향에 눈을 뜰 것 같은데요? 묶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또 장난이십니까? 저 지금 진지하다니까요? 얼른 눈이나 감으세요.”

“네, 눈 감을게요. 굿나잇 인사 먼저 하고요. 잘 자요, 내 태주 씨.”

촉. 태주의 이마에 지호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눈을 감고 있긴 했어도 이마에 닿은 게 입술인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번쩍 눈을 뜬 태주가 놀란 눈으로 지호를 보았다. 그는 이미 눈을 감은 채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건 뭐지?

장난의 연장인가?

아무튼 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설레….

“아, 진짜.”

얼굴을 가릴 손이 없어서 지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콩콩 이마를 박으며 괜히 어깨를 때렸다. 안 자는 거 다 압니다. 진짜 이러실 겁니까? 내태주 아니고, 남태주라니까요? 나랑 연애할 것도 아니면서 수작이야.

중얼중얼 불만 같은 아무 말을 늘어놓다가 눈을 감았다. 그래도 따뜻하고 좋으니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을 생각이다. 약간 거슬리는 게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직’ 견딜 만했다.

그나저나 연지호 이 인간. 사람 여럿 홀려 봤구나. 동성까지 무너뜨리는 무적의 스킬이다. 심장 뛰는 소리가 쿵쿵이 아닌 촉촉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에 편히 잠들었다. 얼마 만에 남우주의 괴롭힘 없이 자 보는지. 핸드폰이 고장 난 게 신의 한 수였다.

태주는 휴게실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책을 들여다보았다. <부모 교육>, <보호자의 자격>, <우리 아이, 어떻게 키워야 할까?> 등 이번엔 육아 서적이다. 어제처럼 아이에게 갑자기 생길 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였다. 점심도 거른 채 머릿속으로 내용을 집어넣고 있는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남 부장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소리가 안으로 들어섰다. 상기된 얼굴의 오 교도와 심 교도였다.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상체를 양옆으로 왔다 갔다 움직이며 리듬을 탔다.

“뭐 좋은 일 있습니까? 굉장히 신나 보입니다?”

기분 좋은 둘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눈을 살짝 접어 웃은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축하할 일이라면 큰 박수라도 안겨 줄 요량으로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러나 박수를 건네는 건 태주가 아닌 오 교도와 심 교도였다. 두 사람은 요즘 연극에서도 안 할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남 부장님! 드디어! 드디어 나왔습니다!”

“네, 맞습니다! 드디어 나왔어요! 이놈의 법무부가 그동안 밀당을 그렇게 하더니, 드디어!”

“드디어 우리 경기 남부 교도소 의무실! 뤼뫄뒐링 들어갑니다!”

“예산도 더 나오고요! 장비는 내일 당장 착착착! 들어오고요!”

“앞으로는 간단한 수술까지 가능할 거랍니다! 이제 맹장염 정도는 외부 진료 나갈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1등 의료 시설 경기 북부 교도소? 와하하! 이제 그 타이틀 내놓으라고 해! 어?”

그렇게 좋을까? 둘 다 잔뜩 흥분해서는 허공에 팔까지 휘젓는다. 이제 병원에서 퇴근하는 일은 별로 없겠다며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계호 문제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탓이다. 아무래도 범죄자를 데리고 바깥에 나가는 일이다 보니, 외부 진료가 잦으면 그만큼 교도관이 지는 부담도 클 수밖에 없다.

고개를 끄덕인 태주가 그동안 고생했다며 두 교도관을 격려했다. 그러자 팔을 뻗은 두 사람이 태주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감정이 격양되어서인지 작은 격려에도 크게 감동한 얼굴들이었다.

“다 남 부장님 덕분입니다.”

“맞아요. 남 부장님 덕분에 우리 예산 더 들어온 거잖아요.”

“에이, 그게 왜 제 덕분입니까?”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며 그들을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게 조금 버겁지만, 감동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조용히 버텼다. 그렇게 한창 훈훈한 장면을 연출할 때였다.

“어이구? 하여튼 하루라도 꼴값을 안 떨면 오랑 심이 아니지.”

또 한 번 벌컥 문이 열렸다. 문턱에는 아니꼬운 표정의 이 부장이 서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케이크 상자를 든 채였다.

그는 아니꼬운 광경의 맞은편에 앉아 상자를 열었다.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였다.

“어이, 남 부장. 축하해요. 이건 소장님 선물.”

스윽, 케이크가 앞에 놓였다. 네? 누구 선물요? 놀란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저 오늘 생일입니까? 아닌데? 이미 지났는데?”

생일이 아니고서야, 교도소에서 케이크를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아니, 생일 때도 케이크는 준 적이 없다. 지역 사회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며 지역 상품권을 받았다.

영문을 모르겠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상사의 호의는 오히려 부하 직원을 의심하게 할 뿐이었다. 좀 과장을 보태 ‘우리 소장님이 뭘 잘못 드셨나?’ 이런 생각까지 했다.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이 부장을 보았다.

“오랑 심이 얘기 안 했어요? 식당에서 난리를 치면서 달려가길래 벌써 말한 줄 알았지?”

“뭘 말입니까?”

“남 부장 표창장 받잖아요. 어제 그 사고 현장에서 응급처치한 걸로.”

“표창장이요? 제가요?”

“네, 네가요.”

“왜요?”

표창장이라니. 황당한 듯 태주가 미간을 좁혔다. 이 부장이 설명을 좀 더 덧붙여 주었다.

“그 왜, 남 부장이 우리 교도소 대표로 응급 구조 교육 들었잖아요. 보건복지부랑 법무부가 같이 시행했던 거. 그런데 그게 헛된 일이다, 예산 낭비다, 얼마나 말이 많았어요?”

“그, 러긴 했죠?”

“그래서 그걸로 몇 년째 욕먹고 있는데, 남 부장이 딱! 어? 그때 배운 걸 실제로 써먹었으니, 죽어 있던 체면이 확 서지 뭐야. 오늘 아침에 어제 사고 기사 나자마자 바로 예산 심사 통과했다더라고.”

“그 기사 때문인 게 확실해요?”

“그럼 뭐겠어? 통과해도 내년은 될 거라고 다들 예상했었는데. 아무튼 잘했어요. 축하해.”

팔을 뻗은 이 부장이 툭툭 태주의 어깨를 건드렸다. 하지만 태주의 표정은 여전히 풀릴 줄을 몰랐다.

분명 좋은 일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복잡하다. 왠지 이게 다가 아닌 것처럼.

* * *

“네가 제정신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그보다 더한 손짓이 뺨을 스쳤다. 오른쪽으로 휙 돌아간 고개를 지호는 그대로 두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로웠던 의국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샌드위치 포장을 뜯다 만 의사들이 슬금슬금 밖으로 나갔다.

“어휴, 살벌해 죽겠네.”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온 우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야무지게 챙긴 샌드위치를 동료 의사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아, 이게 뭐예요.”

성현이 작게 한탄했다. 점심시간도 없이 내내 일하다 이제야 좀 쉬는 거였는데. 어째 신세들이 처량해졌다. 다들 복도에 서서 불쌍한 얼굴로 빵을 뜯어 먹었다.

혜성대 병원 외상외과 수련의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건 끔찍한 모습의 환자도, 연이은 당직도 아니다. 자신의 상사가 눈앞에서 맞는 것보다 차라리 그게 덜 불편했다. 센터장이 왔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외상 센터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으로 바뀌었다.

“센터장님 아니어도 우리 과 진짜 많이 힘든데….”

인주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들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배가 고파서 샀던 샌드위치는 어쩐지 입맛이 없어져서 다시 포장을 덮어 놓았다.

“이번엔 좀 걸릴 것 같은데 스테이션에 가 있을까?”

“그러자.”

“교수님은요? 저대로 둬도 될까요?”

“우리가 여기서 듣고 있는 게 교수님한테 더 불편해.”

“에휴, 가자.”

다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익. 지익. 오늘따라 크록스가 무겁게 끌리는 소리를 냈다. 로비로 향하는 중간 문을 열 때였다.

“야! 연지호 어딨어, 연지호!”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온 박 교수가 지호를 찾았다. 평소에는 연 교수라고 꼬박 부르던 사람이, 다 제치고 이름을 부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급한 듯하다. 우재가 얼른 의국을 가리켰다.

“교수님 지금 센터장님과 면담 중이십니다.”

“뭐? 면담? 또 맞고 있어?”

“늘 그렇죠, 뭐.”

“아오! 내가 잘 피해 다니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박 교수가 표정을 구겼다. 드러난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가만 보던 인주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연 교수님은 왜 찾으십니까?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이 없으면, 내가 이렇게 달려오겠어? 큰일 났어, 지금!”

나 참, 이걸 어쩌면 좋냐? 우왕좌왕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발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래도 좀 유난인 박 교수였지만, 오늘은 그 유난이 더 심했다.

좋지 못한 낌새가 스멀스멀 발밑을 기어올랐다. 충격적인 소리가 튀어나왔다.

“징계위원회 열린대! 연지호가 어제 의사 면허도 없는 일반인한테 의료 지시 내려서!”

“네?”

엄청난 소식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 * *

“와아, 그럼 태주 씨 표창장 받는 거예요? 언제요?”

“모르겠습니다. 그다지 관심도 없고요.”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던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호가 건네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받고 다시 앉았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건데, 표정은 좋지 못했다.

“왜 관심이 없어요? 좋은 일 해서 상 받는 건데.”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한 거잖습니까. 저만 받는 게 조금 그렇습니다.”

태주는 발끝으로 툭툭 땅을 찼다. 생각보다 더 환하게 웃는 지호의 얼굴에 기분이 묘했다. 그냥 선생님의 도움으로 받는 표창장이니까 얘기한 것뿐인데.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거면 표창장 받는 날 밥 사요. 난 그거면 되니까.”

“밥은 천 번, 만 번도 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불편한 얼굴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없는 얼굴이 아닌데?”

“별건 아니고 그냥, 좋은 일만 있으니까 불안해서요.”

요즘 이런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상하네. 그러면서 태주는 오늘 일어난 좋은 일들을 늘어놓았다. 소장이 준 크레이프 케이크가 맛있었고, 오 교도와 심 교도가 징그럽게 귀여웠으며, 드디어 의무실 시설 보완 허가가 떨어져서 앞으로는 외부 진료를….

“아.”

“…태주 씨?”

앞으로는 외부 진료를 나올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끝까지 잇지 못한 태주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툭툭 땅만 차던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을 예쁘게도 받은 지호의 얼굴이 태주의 두 눈에 비쳤다.

이 인간은 참, 얼굴에 진 그림자까지 잘났다.

외부 진료를 나오지 않으면, 지금처럼 자주 보는 것도 힘들겠지?

교도소 바깥의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지낸 게 처음이라서 그럴까. 왠지 모르게 서운하다. 그동안 어려운 일을 함께 겪은 탓인지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다. 아예 안 보는 것도 아니고, 만나는 횟수가 조금 줄어드는 것뿐인데도 아쉽다. 그래서 좋은 일에도 기분이 이렇게 묘했던 걸까.

“선생님.”

“네, 태주 씨.”

“…우리 왕산 지하도는 언제 갑니까?”

아쉬운 마음을 그대로 전하려다 말을 바꿨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지호의 눈빛이 묘하게 바뀌었지만, 다행히 거기서 끝이었다.

“글쎄요. 언제가 좋을까요? 조만간 조금 길게 휴가가 생길 것 같기도 한데.”

“휴가요?”

“네, 그러니까 태주 씨 시간에 내가 맞출게요. 언제 비번이에요?”

“다음 주 월요일일 것 같은데, 자세한 건 근무표를 봐야 압니다. 근데 웬 휴가입니까?”

연지호가 휴가를?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그럴 리가. 당직이 아닌 날까지 병원에 붙어 있는 위인이.

분명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매번 몸을 혹사하더니 드디어 큰 병이라도 얻은 걸까. 지호를 보는 태주의 눈이 순식간에 걱정으로 물들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십니까?”

“어디가 안 좋아서라기보다는 박 교수님이 제발 좀 쉬라고 성화라서요. 저번에 HIV 환자 수술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게 걸렸거든요. 센터장이 잔뜩 화나 있으니까 피해 있으래요.”

“아아, 난 또…. 놀랐습니다.”

다행히 아픈 건 아니구나. 그런 거라면 이참에 푹 쉬는 게 좋겠다.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조금 부어 있는 지호의 볼이 신경 쓰인 참이다.

“나 쉬는 동안 가끔 만나러 와서 놀아줘야 해요, 알았죠? 같이 밥도 먹어 주고, 말 상대도 해 주고. 바쁘게 오래 살다 보니까 친구가 없거든요.”

숨을 깊게 들이쉰 지호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그의 고개가 별 하나 없는 검은 밤하늘로 향했다. 그제야 태주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좋습니다. 저도 친구라고 할 만한 게 선생님뿐입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든 태주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날이 쌀쌀한 탓에 벌써 한 김이 식어 있었다. 미지근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방황하는 날벌레들이 눈에 들어왔다. 추운 날씨에도 꿋꿋하게 빛을 향해서 날고 있다.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싶어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지이이잉. 작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내 건가? 더듬더듬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태주가 핸드폰을 만져 보았다. 얌전한 걸 보니, 연지호의 것인 듯했다. 핸드폰을 꺼낸 지호가 돌아서서 전화를 받았다.

“네, 김우재 선생님. …아, 그래요? 알았어요. 내가 가 볼게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슬슬 헤어질 때가 된 것 같다. 남은 커피를 모조리 입 안으로 쏟아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주 씨 가려고요?”

때마침 통화를 마친 지호도 몸을 일으켰다.

“네, 선생님도 들어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닌데.”

“그래도 시간이 늦었잖습니까. 그렇게 저를 보내기 싫으십니까?”

“그럼요. 할 수 있다면 옆에 묶어 두고 싶은데.”

“으. 또 간지러운 소리.”

오늘은 좀 그냥 넘어가나 했더니. 언젠간 면역을 짱짱하게 쌓아서 반격하리라. 다짐한 태주가 밉게 눈을 흘기다 픽 웃어 버렸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진짜인지 인사치레인지 모를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야외 주차장에 주차한 탓에 지호와 가는 방향이 반대였다.

타박타박. 일부러 구두 소리를 크게 내며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 지호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어지고, 작아진다. 걸음걸음마다 이상하게 외로움이 묻어난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혼자였던 사람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남태주가 아는 연지호는 다정한 말을 담백하게 뱉어 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온화하다. 사람을 대하는 데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서 깊은 고독과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건….

아무래도 그만큼 깊은 비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거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멎었다. 지호의 모습 또한 외상 센터 건물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태주는 층층이 빛이 쌓인 센터 외관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시 두 발을 움직였다.

* * *

30분이 지났는데도 아직 병원이다. 운전석에 멍하니 앉은 태주는 뒷좌석에서 책을 가져와 펼쳤다. 얼마 보지 못하고 다시 덮었다.

“아오, 이게 진짜! 곧이라며!”

넌 30분이 곧이냐? 어? 중얼거리며 창문에 머리를 콩 박았다. 하여간 남태주의 기분을 망치는 덴 선수다. 어떻게 남우주 같은 게 내 동생이지?

병원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떠나려는 타이밍에 기가 막히게 전화해 뼈해장국을 사달란다. 무시하려고 가려니까 종일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겼다는 말이 덤으로 얹어졌다. 한국인으로서 그냥 넘어가기 힘든 소리였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굶고 다녀, 굶고 다니긴.

“배고파서 오다가 쓰러지기라도 했나? 왜 이렇게 안 와?”

거치대에 꽂아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우주의 번호를 입력할 때였다.

저만치에서 익숙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가운에 크록스 차림인 걸 확인하기 무섭게 태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차에서 내려 소리쳤다. 야, 남우주!

“뭐야? 왜 아직 옷도 안 갈아입었어?”

“어? 남태주!”

태주를 발견한 우주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다급한 표정을 보니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작게 한숨을 내쉰 태주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잔소리와 함께 우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감기 걸리면 또 누굴 고생시키려고.”

“지금 감기가 중요해? 그보다 너 오늘 연 교수님 만났어?”

“어, 만났는데. 왜.”

“교수님이 아무 말도 안 하든?”

“아무 말도 안 하면 왜 만났겠냐?”

“장난치지 말고! 교수님이 징계위원회 얘긴 안 꺼냈어?”

“뭔 징계위원…. 뭐?”

연지호와는 어울리지도 않고, 어울렸다간 큰일 나는 단어였다. 태주의 표정이 굳었다. 조금 전 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만간 조금 길게 휴가가 생길 것 같기도 한데.’

휴가가 생길 것도 같다는 게 그런 뜻이었을 줄이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충격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가, 나중에는 점점 걱정이 밀려들면서 화가 났다.

“남태주 너, 어젯밤에 교수님 지시받고 환자한테 크리코 시술했다며. 의료법 위반이야, 그거. 그래서 징계위원회 열리는 거고.”

우주의 말에 태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표창장을 받는 거냐며 기뻐해 주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입술을 꾹 깨물며 울고 싶은 기분을 집어삼켰다.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우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로 밥 꼭 먹어. 춥게 다니지 말고.”

그리고 진료과 정할 때 외상외과는 절대로 가지 마. 거기 교수가 좀 멍청한 것 같으니까.

* * *

태주는 연구실 문 아래 미세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았다. 빛이 새어 나온다는 건 높은 확률로 안에 연지호가 있단 소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문을 뻥 차고 들어가고 싶지만, 고도의 인내심을 발휘해 참았다.

아, 짜증 나. 신경 쓰여. 멍청한 새끼.

그 어떤 흉악 범죄자 앞에서조차 쓴 적 없던 욕이 여기서 나온다. 턱 근육이 들썩일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문손잡이를 한 번 잡았다가, 결국에는 손을 떼고 돌아섰다.

우주와 헤어질 때만 해도 연지호의 멱살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붙잡고, 몰아붙이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따위로 놀리는 거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내가 우습습니까? 차라리….

“차라리 웃지라도 말든가.”

붙잡지 못하고, 몰아붙이지 못하며, 소리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상처를 주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커서.

지금 상황에서 누구보다 힘든 게 연지호일 터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짓밟고 받는 상에 기뻐해 주었다.

대체 뭔데. 뭐라고 당신이 내 생각을 해.

착잡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이 흘러넘치다 못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자꾸만 찌푸려지는 표정에 태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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