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안 되면 동료를 이용하라
-오늘도 힘차게 생활하고 계실 전국 수용자분들을 위해 힘내시라는 의미에서 노래 한 곡을 준비해 봤어요. 노래는 따로 소개하지 않을게요. 차분하게 가사를 느끼면서 잠시 마음의 휴식을 취해 보는 게 어떨까요?
-다시 만날 그날만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하염없이….
“하염없이…. 이이이….”
경기 남부 교도소 제 1사동 관구실에서 구슬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중앙 테이블에 볼을 찰싹 붙인 태주가 녹아내리듯 자리에 붙어 있었다. 주변에는 온갖 의학 서적과 약학 서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허이구! 이게 다 뭐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 부장과 성 부장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널려있는 책을 들춰 보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여기서 다른 일 하겠다고 공부하는 놈들 숱하게 봤지만, 의학 공부하는 놈은 처음 본다.”
“요즘 또 남 부장님 왜 그래요? 뭔가 보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기분이 처지시는 것 같네?”
“냅 둬. 남 부장 지금 상사병 앓고 있잖아. 혜성 병원 간판 의사 때문에.”
“어? 정말요?”
“아닙니다! 제 존경심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시라니까요?”
놀리는 말에 넘어간 태주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남의 커피를 빼앗아 벌컥벌컥 들이켠다. 내린 지 얼마 안 된 탓에 뜨거울 텐데, 아무렇지도 않나 보다.
“남 부장님, 식도 안 타요? 엄청 뜨거울 텐데?”
“냅둬요. 저 인간은 뚝배기에 나온 국밥도 원 샷 하는 사람이야.”
“아, 하긴.”
너무 잘 먹는 사람을 보고 놀라긴 처음이었다며 둘이서 하하 호호 웃는다. 서글픈 태주의 얼굴은 어느새 그들의 안중에서 사라졌다. 다시 흐물흐물 녹듯이 자리에 앉은 태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제 또 언제 선생님을 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전과 같은 우연도 없고, 만날 핑계도 없다. 딱 하나 남은 방법은 그때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뿐이다. 강도가 약사에게 어떤 약을 요구했는지 기억해야 선생님께 연락할 구실이 생긴다.
“….”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닥파닥 팔다리를 휘저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아!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안 난다! 이걸 어떡하지?
이대로는 선생님을 만날 구실이 생기지 않는데!
* * *
하지만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번에도 우연이 일어났다. 급하게 구급차에 올라탄 태주는 손수건을 꺼냈다. 수용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한 달 전 아이를 낳은 오메가 수용자였다.
“못해도 두세 달은 푹 쉬어야 하는 건데.”
이 부장이 딱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접었다. 병원에 가는 것은 좋지만, 환자의 얼굴을 보면 또 마냥 좋아할 수가 없다.
“의료과장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 안쪽에 출혈이 있는 것 같다네? 우리 의무실 초음파로는 잘 안 보이니까 외부 진료 나가래요.”
“원격 진료는요?”
“당연히 내원해서 검사해 봐야 안다고 하지.”
“아.”
오래된 기계는 있으나 마나였다. 도움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의료 시설이 노후화되다 보니, 의무실에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것에도 외부 진료를 나가야 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우리 의료 시설 너무 협소한 거 아닙니까? 서부 교도소는 간단한 수술도 가능하다고 아주 자랑을 하던데.”
“우리가 좀 뒤처지긴 했죠. 그래도 소장이 조만간 의무실 싹 바꿀 거라고 했어요.”
“의무실을요?”
“이번에 지원금 나왔잖아요. 그걸로 의료 시설 최고 교도소로 만든다고 난리야. 의무사무관도 더 뽑을 거라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법무부에서 허가한 겁니까?”
“받는 중이래요.”
“아아, 그럼 아직 확정은 아니네요.”
괜히 좋다 말았다. 시트에 몸을 기댄 태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빨리 의무시설이 개선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외부 진료를 나가지 못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살짝 뒤숭숭해진다.
선생님을 더 만나기 힘들어질 텐데.
* * *
“아, 네. 이쪽에 상처가 좀 있네요. 하지만 아직 자연 치유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니까 며칠 입원해서 경과 좀 지켜보죠. 상태가 악화되면 그때 수술 들어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조심스레 진료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료 교도관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자연 치유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라서 좀 지켜본 다음에 수술 여부 결정하시겠답니다.”
“이야, 다행이네. 이번에는 수용자도 우리도 좀 덜 고생하겠어.”
이 부장이 쭉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흘끗 눈치를 보며 무심한 척 툭 내뱉었다.
“온 김에 만나고 오지 그래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지호의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든 태주가 눈을 빛냈다.
“그래도 됩니까?”
“대신 올 때 커피 사 와요. 이번엔 꼭 향긋한 바닐라 라떼.”
“네, 사 올게요! 내가 백 잔 사 줄 수 있습니다, 그거!”
“백 잔이나 필요는 없고. 우리 인원수 맞춰서 사 와요.”
수용자는 자신이 보고 있을 테니 다녀오라고 하자, 곧장 손을 흔들며 달려 나간다. 딱딱딱딱, 바닥과 마찰하는 구둣발의 소리가 경쾌하다. 만나고 오라는 소릴 안 했으면 서운해서 울었겠다. 그렇게 좋을까?
“암만 봐도 내 눈엔 사랑이야, 저거.”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첫눈에 반한 거지. 암, 그렇고 말고.
멀어지는 태주를 보며 이 부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야, 남태주. 어머니가 너 전화 안 받는다고 성화야. 전화 좀 받지 그래?
“받으면. 또 그 오메가 만나 보라고 할 텐데?”
가벼웠던 걸음이 혁주와의 통화로 인해 무거워졌다. 외상 센터로 향하는 통로를 느릿느릿 걸으며 태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파혼한 지 반년도 안 지났다. 그리고 내가 누구 만날 시간이 어딨어.”
-시간은 다 내면 있어. 보니까 연지호인지 뭔지 하는 의사랑은 기를 쓰고 만나더만.
“아, 그건 외부 진료 나오는 김에 겸사겸사…. 근데 그 의미심장한 언사는 뭐냐? 나 다른 마음 품고 만나는 거 아니거든?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여태 연애에 환장했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파혼한 약혼자와도 굉장히 얌전하게 교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사랑에 미친 사람처럼 보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상대는 남자다. 그것도 같은 베타로 추정되는.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혁주가 투박한 말투로 달래왔다. 알았어, 인마. 알았으니까 이번에만 가서 좀 만나 봐.
-어머니도 그냥 만나만 보라잖아. 한 번만 고분고분 굴어라.
“한 번만 이러고 끝내실 분이면 나도 별말 없이 만났지. 게다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근데 어쩌겠어. 너 파혼당한 것 때문에 상처가 큰데. 베타는 거들떠보기도 싫으시대. 소윤 씨가 미워 죽겠는데, 소윤 씨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또 없는 게 짜증 난다고.
“….”
-아무튼 전화라도 잘 받아라, 어? 나 이제 곧 회의라 끊는다.
“알았어.”
뚝. 통화가 끊기는 것과 동시에 걸음이 멎었다. 태주는 화면이 까맣게 꺼질 때까지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소윤 씨가 미워 죽겠는데, 소윤 씨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또 없는 게 짜증 난다고.’
애초에 섣부르게 약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함께 있으면 편해서 오래오래 잘 지낼 거라고 판단했던 게 문제다. 서로의 집안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린 생각으로 덜컥 해 버린 약혼이었다. 그 집안에서 재벌가 도련님 사위는 좋아해도, 교도관 사위는 안 좋아할 줄 누가 알았나?
애써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통유리 너머의 바깥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켰다. 지호의 연락처를 하나씩 입력할 때였다.
“남태주 교도관님?”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손가락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체격이 좋은 남자 셋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초면이었다.
“누구시죠?”
체격이 큰 걸 보면 남 회장이 붙여 준 사람은 아니었다. 남 회장은 체격이 큰 놈이 곁에 있으면 자신이 작아 보인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태주는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쥔 손 안쪽에서 빛이 살짝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뭔가 위험한 물건을 쥔 듯한 모양새다.
뭐지? 누굴까? 무슨 목적인 거지?
여차하면 무력으로 맞설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병원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 일이 커져서 남 회장의 귀에 들어갔다간, 또 당장 교도관을 관두라며 난리를 칠 게 뻔했다.
“남태주 교도관님 맞으십니까?”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남태주 교도관이 맞냐며 묻고 있지만, 표정은 맞게 잘 찾아왔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맞다고 대꾸하자 조금 섬뜩하게 씨익 웃는다. 뭐 하나 때려 부수고 싶은 건지, 아니면 기분이 좋은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표정이다.
“이야, 드디어 찾았네요! 재벌가 도련님이 교도관으로 계실 거라곤 생각 못 했지 뭡니까?”
다행히 후자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태주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명함 한 장을 꺼내면서였다. 일단 자신은 이런 사람이란다.
[불륜 현장 포착해 드립니다!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사장 정정택]
“그나저나 참 멋진 일 하십니다! 나쁜 놈들 교화하느라 고생 많습니다.”
“아, 네.”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강렬한 명함이다. 오히려 자신보다는 이 남자가 더 멋진 일을 하는 것 같다. 불륜 포착은 물론, 떼인 돈을 받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태주는 습관처럼 자신의 명함도 꺼내려다가 멈칫했다. 굳이 이 사람에게 자신의 명함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눈치를 보다가 슬쩍 받은 명함만 대충 주머니에 넣었다. 여전히 이 남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데 저한테 무슨 볼일이십니까?”
“아, 그게 말이죠.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잠깐 까페나 가서 코코아나 한잔할까요?”
주변의 눈치를 보던 정택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나름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려는 것 같은데, 그게 더 유난으로 보인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제가 지금은 근무 중이라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길게 안 잡아요.”
처음에 풍긴 위협적인 분위기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약간 사투리가 섞인 억양이 어딘가 순박한 느낌을 주었다.
뭐, 별일 없지 않을까?
왠지 나쁜 짓을 하려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태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코코아는 조금 그렇고, 그냥 바깥에서 잠시 얘기하죠.”
* * *
두 사람은 병원 옆 산책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노란색 음료를 한 캔씩 쥔 채였다. 정정택이란 남자가 기어이 코코아를 마셔야겠다며 초콜릿 음료를 뽑아 온 탓이다. 굵고 커다란 손으로 살포시 캔을 붙잡은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역시 겨울엔 코코아지. 찬 바람 불 땐, 코코아.”
넓은 얼굴에 감성이 가득 붙어 있다. 태주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어설프게 손목시계의 시간만 확인하다가 넌지시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말씀 하시죠. 무슨 일로 절 찾으신 겁니까?”
“아, 우리가 교도관님을 찾아온 건 말이죠. 다름이 아니라….”
“….”
“교도관님이 칼에 찔렸던 그 사건 말입니다. 그 사건에 우리가 좀 알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서 미행…. 아니, 교도관님을 만나러 이렇게 온 겁니다.”
“그, 사건이라뇨? 그쪽이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언론에도 나오지 않은 사건인데.”
“그건, 어쩌다 보니 압니다. 네, 뭐.”
“어쩌다 보니 안다고요?”
어쩌다 보니 알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이 기를 쓰고 유출을 막은 사건이니까.
처음부터 좀 수상했지만, 점점 더 이 남자가 수상해진다.
“저기, 교도관님?”
정택이 흘끗 눈치를 보았다. 태주의 미간이 구겨지자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무, 물론 쉽게 꺼내기 힘든 기억인 거 압니다. 하지만 저희가 꼭!”
“뭐가 알고 싶은…. 아니, 왜 알고 싶은 겁니까? 그 사건을 알아서 뭘 하시려고요?”
“저기, 교도관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매섭게 쏘아보자 당황한 정택이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겠는데, 그런 건 절대로 아니란다.
“우린 교도관님한테 절대로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도 그 강도 찾으려고 이러는 겁니다! 약사님 의뢰받고요!”
“약사님이요?”
“네, 그러니까 일단 제 말부터 좀 들어 보시고….”
“지금 기원 약국 약사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맞아요. 여기 약사님이랑 쓴 계약서도 있습니다. 진짜예요.”
정택의 재킷 안 주머니에서 작게 접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펼치자 가운데 상단에 커다랗게 ‘계약서’라고 적혀 있다.
“여기! 여기 보십쇼, 교도관님! 여기!”
굵은 손가락이 다급하게 서명란을 가리켰다. ‘양지원’ 세 글자에 일그러진 태주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약사의 이름은 참고인 조사 때 몇 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삐뚤삐뚤한 이 세 글자의 주인은 기원 약국의 약사가 맞았다.
서명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택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작게 안도하며 계약서를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오해는 풀린 거지요?”
“그럼 사건 후에 약사님을 만나신 겁니까?”
“예. 그런데 약사님이 지금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탭니다. 밖에도 아예 못 나와요. 그 강도 잡을 때까지는 돌아다니는 거도 무섭다네요.”
하긴, 꼭꼭 숨어 지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 가게에 강도가 든 데다, 칼에 찔려 피를 철철 흘리는 사람까지 봤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 태주도 입원해 있는 동안, 지호에게 몇 번이나 신경정신과 상담을 권유받았었다.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요.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꼭 얘기해 줘야 해요.’
매일 자신의 기분 하나하나까지 확인하던 지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뇌리에 선명히 박힌 것은 사연이 있는 듯했던 지호의 눈빛뿐이었다.
‘그냥, 제가 아는 사건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 사건과 많이 다르네요.’
후에 말을 바꾸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그때 그 사건에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그냥 궁금하다는 단순한 이유로 물은 것이 아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어떻게 할까. 이 남자를 잘 이용하면 사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대로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할까. 아니면 선생님을 도와야 할까.
역시,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마음이 기운다.
“약사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그 계약, 어디서 하신 거죠?”
“예?”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예 못 나온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밖에서 만나 계약서를 작성했을 리는 없고.”
“….”
“아마 사장님께서 직접 약사님께 찾아가셨겠죠. 거기가 어디였습니까?”
“그게, 그….”
정택이 난감한 듯 식은땀을 흘렸다. 난처한 표정을 보니, 기원 약국의 약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모양이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턱밑을 닦았다.
“미안하지만 약사님이 계신 곳은 못 알려드립니다.”
“어째서죠?”
“계약 위반이거든요. 의뢰인의 개인 정보는 못 알려줍니다.”
정말로 말할 수가 없는지 입을 꾹 다문다. 무슨 짓을 해도 열지 않을 기세다. 잠시 고민한 태주가 질문을 바꿨다.
“그럼 어떤 약이었는지라도 알 수 있습니까? 그때 강도가 돈과 함께 요구했던 약이요. 약사님께 사건 내용을 들으셨다면 사장님도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예, 들은 것도 같긴 하네요.”
잠시 생각하던 정택이 작은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뒤적였다. 한참을 넘겨보다가 수첩을 멀리 떨어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약 이름은 자세하게 모르고…. 페로몬 억제제라는 것만 압니다.”
“페로몬 억제제요?”
“네, 알파나 오메가가 주기적으로 먹는 약 있잖아요. 그거 말입니다.”
“확실합니까?”
“제가 뭣 하러 이런 거로 교도관님을 속입니까?”
“충분히 속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합니다.”
“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페로몬 억제제를 요구했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작 그런 걸 얻겠다고 강도 짓을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과도하게 복용할 시 마약과 비슷한 작용을 하지만, 마약으로 이용하기에는 사실상 어려운 약물이다. 의사의 처방이 없어도 구매할 수 있었다.
보험 적용하면 가격도 저렴하지. 그마저도 어려우면 한 달에 두 번, 보건소에서 무료 제공도 받을 수 있지. 굳이 강도 짓을 하면서까지 얻을 가치가 있나?
역시, 약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다. 다 같은 억제제라고 해도 제조 회사에 따라 성분이 조금씩 다르긴 할 것이다.
“약 이름은 정말 모르십니까? 약사님께서 말씀 안 하셨습니까?”
“예, 약사님이 제약 회사가 수상하다고 하셔서 제약 회사 이름만 들었습니다. 근데 뭐, 회사를 알면 페로몬 억제제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그 회사가 어딥니까?”
“아마 교도관님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우리 제약이라고, 우리나라 1등 제약 회사 있잖아요. 온갖 약이 다 거서 나오지 않습니까?”
“그야, 그만큼 규모가 크니까….”
우리 제약…. 우리 제약….
속으로 되뇌던 태주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중 분명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건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약사님은 왜 제약 회사가 수상하다고 하신 겁니까?”
“글쎄요. 워낙 말을 아끼셔서요. 저희도 정보 얻기가 힘듭니다.”
“흐음, 이해가 안 갑니다. 의뢰는 했지만, 정보는 잘 안 준다니. 그리고 사장님도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이거 상해 사건이에요. 위험 부담이 클 텐데 왜 의뢰를 받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뭐, 위험해도 어쩌겠습니까. 돈 벌라면 해야지요. 게다가 약사님은 범인 잡아 달라고 하신 적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안전할 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지.”
“예? 그럼 범인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범인을 잡는 게 약사님이 가장 안전해지는 방법이니까요. 저희가 좀 험악하게 생겼어도, 그래도 정의롭게 삽니다. 그 새끼, 나쁜 놈이잖습니까. 잡아야죠.”
정택은 쥐고 있던 음료 캔을 단숨에 구겨 버렸다. 말 모양새는 분명 정의로운데, 얼굴은 악당이 따로 없는 표정이었다.
* * *
“감사했습니다, 교도관님.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아, 네. 저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마를 땅에 박다시피 힘차게 인사한 정택이 손을 내밀었다. 흠칫 놀란 태주가 잠시 주춤거리다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신도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의 힘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의 마음이 정의로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요. 교도관님의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됩니까? 혹시 또 물을 게 생길지도 몰라서 그럽니다.”
“아, 네. 혹시 뭔가 더 알게 된 게 있다면 그때도 연락….”
정복 주머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낼 때였다. 언뜻 둔 시선에 지호가 걸렸다. 제과점 로고가 박힌 종이봉투를 여러 개 들고 있었다. 동료 의료진과 함께 먹을 간식을 산 모양이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묘한 낌새를 느낀 정택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도 지호가 들어섰다.
“저 의사하고는 잘 아는 사입니까?”
“네?”
“저 의사요. 이름이 연지호였나?”
“네, 연지호 선생님 맞습니다. 저 구해주신 은인이요.”
“아! 그때 교도관님 수술한 의사가 저 사람인가 보네요. 어쩐지. 그래서 그랬나? 근데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외상 센터 입구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호가 사라진 뒤에도 정택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혼자 생각에 빠져 중얼거리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도관님, 이건 제가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요.”
“….”
“저 의사 선생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마세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환했던 태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지호를 보는 정택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저 의사, 뭔가 좀 이상합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한발 앞서고 있거든요.”
“….”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 사건에 집요하게 파고드는 거 같더라고요. 좀 수상합니다.”
“….”
“조심하세요. 괜히 같이 있다가 교도관님한테 불똥 튑니다.”
* * *
‘저 의사 선생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마세요.’
‘뭔가 좀 이상합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한발 앞서가고 있거든요.’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을 속일 거였다면 강도가 요구한 약이 페로몬 억제제라는 말은 안 했을 것이다. 차라리 좀 더 그럴싸한 약물의 이름을 뱉었겠지.
정택과 헤어진 뒤, 태주는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중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심각한 얼굴로 벤치에 한참을 앉았다. 손끝이 찬 기운에 붉었다.
정택이 가는 곳마다 지호가 한발 앞서고 있다.
정택이 캐고 있는 사건을 지호 또한 캐고 있다.
지금까지 지호의 모습을 곱씹어 생각하다가 음료 캔을 꽉 쥐었다. 붉었던 손끝이 하얗게 변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해.”
선생님이 위험할지도 모를 일에 뛰어들었다. 왜 뛰어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선한 이유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지호니까.
정택은 지호와 가까워지지 않는 게 좋겠다고 일렀지만, 태주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깊어졌다. 혹시라도 사건에 뛰어든 그가 위험에 처하면 구해 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그를 적극적으로 도우며 지키리라 다짐했다.
우선 선생님께 약에 대해 알아낸 정보를 전해야 한다!
긴 생각을 마친 뒤, 서둘러 외상 센터로 걸음을 옮겼다. 핸드폰을 꺼내 수백 번도 더 들여다봤던 연락처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터치가 안 돼.”
톡. 톡. 톡. 톡.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실어 꾹꾹 화면을 눌렀다. 하지만 차갑게 언 손은 번호를 제대로 누르지 못했다.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한 채 핸드폰 화면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때였다.
툭.
미처 앞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어깨를 부딪쳤다. 놀라서 얼른 고개를 숙이는데, 갑자기 손이 덥석 붙잡혔다. 따뜻한 온기가 태주의 언 손을 감쌌다.
“몸이 왜 이렇게 차요? 어디 아파요?”
“선생님?”
어깨를 부딪친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호였다. 그는 태주의 핸드폰 화면을 흘끗 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 화면에는 완성되지 못한 연락처가 둥둥 떠 있었다.
“나한테 연락하려고 했어요? 나도 마침 태주 씨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통했네요?”
쿵쿵. 그 한마디에 태주의 심장이 뛰었다. 가뜩이나 목소리도 좋은 사람이, 말도 예쁘게 하고 앉았다.
“선생님!”
반가운 마음에 와락 끌어안았다. 놀란 지호가 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작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몸이 차가운 태주를 감싸듯 끌어안았다.
“몸이 많이 차요. 어디 가서 좀 녹여요.”
따듯한 차라도 한 잔 내어 주겠다며 태주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말투는 다정했고 손길은 부드러웠다.
“와, 연 교수 또 꼴값하는 것 봐.”
원치 않게 그 모습을 목격한 박 교수가 느릿느릿 박수를 쳤다. 가식도 저런 가식이 없다며 혀를 내두르다가 얄미운 것을 보듯 눈을 흘겼다.
“저거 아주 여우야, 여우.”
* * *
“마셔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 하나가 앞에 놓였다. 태주는 슬쩍 머그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유자차다. 두 손을 포개 머그잔을 붙잡자 따뜻한 기운이 손에서부터 퍼졌다.
“감사합니다.”
유자차 한 모금을 홀짝인 뒤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꽂이에 정갈하게 꽂힌 책들은 깨끗하지만, 많이 들여다본 티가 났다. 책상 위만 조금 어질러져 있었는데, 여러 자료가 많은 것을 보니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듯싶다.
“계속 그렇게 둘러보시니까 조금 부끄럽네요. 생각보다 별거 없죠?”
지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좀 치워 놓을 걸 그랬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좋습니다! 깔끔하고, 책도 많고.”
기껏해야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 갈 줄 알았는데, 연지호의 연구실이라니. 연구실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사진으로 담아 간직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얌전히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소곳이 명함을 내밀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지난번에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고마워요. 교도관 명함은 처음 받아 보네요.”
이렇게 생겼구나. 중얼거린 지호가 별것도 없는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핸드폰에 태주의 번호를 입력한 뒤 화면을 보이며 흔들었다.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해도 되죠?”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 아.”
“왜 그래요?”
“그게…. 언제든지 연락이 되면 좋겠지만, 제가 소내에 있을 땐 연락이 어렵습니다. 핸드폰 소지가 안 되거든요.”
“아아, 교도소니까 그렇겠구나.”
“네.”
어깨가 축 처졌다. ‘소내에서는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칙이 이렇게까지 야속한 적이 없다. 혹시나 이것 때문에 선생님의 연락을 못 받게 되지는 않을까, 얼른 뒷말을 붙였다.
“그래도 퇴근 후에나 오프 때는 바로바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거면 됐어요. 태주 씨 일하는 데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선생님….”
“태주 씨도 언제든지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해요. 저도 수술 때나 회진 때 아니면 바로 받을 수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역시 그릇이 큰 사람은 마음도 크다. 괜히 감동한 태주가 코를 훌쩍이며 유자차를 들이켰다. 조금씩 천천히 마시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는데, 이놈의 먹성이 또 분위기를 모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벌써 바닥이 보였다.
한 모금 정도 남은 양을 보며 이걸 어떻게 아껴 마시나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용건에 고개를 들었다.
“저기, 그런데 선생님.”
“네, 태주 씨.”
“그,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빤하게 이쪽을 보는 지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도록 머릿속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전에 기원 약….”
“야, 연 교수!”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뛰어왔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쉰 박 교수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소리쳤다.
“여기서 속 편하게 뭐 하고 있는 거야? 메시지 확인 안 해 봤어? 지금 응급이야!”
“응급이요?”
지호가 곧장 테이블에 엎어 두었던 핸드폰을 뒤집었다. 화면을 확인하자 왜인지 핸드폰이 무음으로 되어 있다. 소리로 바꾼 뒤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TA 소아 환자면 형질 발현은 아직 안 된 건가요?”
“어, 그런데 피가 부족해. 아직 발현 안 된 애들은 베타 아니면 피 못 받잖아. 다행히 백화 병원에서 피 공수 중이긴 한데, 거리가 꽤 돼서 한 시간은 걸리나 봐.”
“한 시간이라니요. 너무 늦어요. 환자가 못 버팁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급한 대로 의료진 중에 O형 찾는 중이야. 근데 O형 베타 찾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 세계 인구의 80퍼센트가 베타라는데, 그 통계가 진짜인지 이제는 못 믿겠다! 죄다 알파 아니면 오메가야, 죄다! 헌혈하는 사람이 하나밖에 없어.”
“서 선생님이 O형 베타예요. 오늘 휴일이긴 해도 근처에 사니까 차로 움직이면 십 분 내로 올 수 있어요. 연락 한번 해 볼게요.”
지호가 다급하게 차 키를 챙겨 들었다. 당장 연구실을 나설 듯한 모습에 태주의 눈이 바쁘게 그의 동선을 좇았다.
“다른 센터에도 더 찾아보면 있을 겁니다. 그걸로도 부족하면 셀세이버 돌려서 어떻게든 시간 버는 수밖에 없어요.”
“지금 애 상태 봐선 셀세이버 못 돌려. 감염 위험 있어서 안 돼.”
“그러니까 정말 마지막 방법인 거죠. 죽는 것보다는 낫고, 후에 잘 치료하면 나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반은 알아듣겠고, 반은 못 알아듣겠다. 눈살을 찌푸린 태주가 조금 전 대화를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수술이 급한 환자가 있는데, 피가 확보되지 않아 수술이 어려운 상태라는 건 알겠다. 그리고 O형 베타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도.
O형 베타. O형 베타라면….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O형 베타를 찾는 거라면 제가 O형 베타이긴 한데요.”
“네? 태주 씨가요?”
의외라는 듯 놀란 시선이 꽂혔다. 조금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O형 베타 맞습니다. 교도관은 업무 특성상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만 가질 수 있는 직업이니까요.”
신분증을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베타만 받을 수 있는 고유번호가 모퉁이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박 교수가 이게 웬 횡재냐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아아, 맞아! 그렇다고 들었어! 이야, 이거 잘됐는….”
“아뇨. 안 돼요.”
하지만 지호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태주 씨는 헌혈이 불가해요. 수술한 지 아직 2개월밖에 안 지난 데다가, 수혈을 받은 수술이라 1년은 지켜봐야 해요.”
“아오, 맞다. 그것도 잊고 있었네. 저분 연 교수 환자였지?”
“서 선생님 데리러 다녀올게요. 지금은 그게 가장 빨라요.”
“알았어. 그럼 난 다른 센터에 가 볼게.”
좋다 말았다며 박 교수가 아쉬워했다. 태주 또한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무지해서 경솔했다며 작게 중얼거리는데, 문득 머릿속에 뭔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아, 저 말고 여기에 O형 베타가 더 있습니다!”
그 말에 밖으로 향하던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저와 함께 외부 진료 나온 동료 교사님이신데 그분은 잠도 잘 주무시고, 밥도 잘 챙겨 드십니다.”
“….”
“태어나서 수술은 고래 잡는 수술밖에 안 하신, 아주 건강한 분이시고요.”
“….”
다시 박 교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좌우로 움직이지 않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 * *
“참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좋은 일 하셔놓고 어이가 없다니요.”
“이봐요, 남 부장. 내가 가서 연애하고 오랬지, 봉사활동 신청서 내라고 했어요?”
아유, 뻐근해. 어깨를 몇 번 돌린 이 부장이 눈을 흘겼다. 어색하게 웃은 태주가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럼 어떡합니까? 아홉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죽는다는데. 그리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시지?”
“그래, 연애는 아니지! 정확히는 짝사랑이니까!”
“하나도 안 정확합니다!”
“아무튼, 아까운 내 피까지 바쳤으니까 그 아이 꼭 살아야 돼요. 수술 잘 안 되면 내가 남 부장 평생 못살게 굴 줄 알아요. 그리고 바닐라 라떼 열 잔 사.”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요. 열 잔이 뭐야? 백 잔 사 드립니다, 제가. 누적해 뒀다가 커피 생각날 때 연락하시면 그때마다 무료 쿠폰 쏘겠습니다.”
“안 지키기만 해 봐.”
반드시 지키라며 당부한 이 부장이 팔을 들었다. 태주의 뒤로 넘어간 팔이 어깨를 감싸려다 말았다. 어깨동무를 하는 대신 등을 톡 한 번 건드렸다.
“나 먼저 가요.”
“네? 왜요? 같이 가시지?”
“뒤에.”
“태주 씨.”
성큼 다가온 지호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아는지, 환하게 웃은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저렇게 좋을까? 인간이 아니라 강아지였으면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었겠다. 픽 웃은 이 부장이 얼른 자리를 떴다.
“매번 태주 씨한테는 도움만 받네요. 미안하고 고마워요. 헌혈해 주신 교도관님께는 물 많이 마시고, 오늘은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해 주세요.”
“네, 그럴게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지호를 따라 태주도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등 뒤로 지나가는 다급한 상황에 점점 표정이 어색해졌다.
“빨리 뛰어! 빨리!”
“엘리베이터 잡아!”
“비켜 주세요! 엘리베이터 양보해 주세요! 응급입니다!”
상자를 감싸 안은 의사가 전력을 다해 뛰었다. 백화 병원의 로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피가 도착한 모양이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서두르는 의사의 모습을 보며 지호가 작게 안도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에야 그 시선은 다시 태주에게 향했다.
“태주 씨, 나머지는 자리를 좀 옮겨서 이야기할까요?”
* * *
“페로몬 억제제였군요.”
이야기를 듣는 지호의 표정이 진지했다. 응급 환자가 발생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태주는 정정택이란 남자로부터 얻은 정보를 전부 지호에게 전했다. 하지만 어떻게 얻은 정보인지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지호가 정택의 존재를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형이 알아봐 준 정보라 아마 정확할 겁니다.”
“저 때문에 태주 씨랑 형 분께서 고생하셨겠네요.”
“아뇨. 그다지 고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우리 제약에서 나온 억제제가 얼마나 될까요?”
“….”
“선생님?”
“….”
뭐지? 갑자기 대답이 없다.
슬쩍 고개를 기울인 태주가 지호의 얼굴을 살폈다. 시선을 아래로 둔 채 가만히 있는 모습이, 생각에 잠긴 듯한 모양새였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제야 지호가 정신을 차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어수선한 책상 앞으로 향했다.
몇 권의 책을 헤치고 그가 가져온 것은 노트북이었다. 전원을 켜고 잠시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그 화면을 보여 주었다.
“이건….”
“전부 우리 제약에서 나온 페로몬 억제제예요.”
화면에는 수도 없이 많은 약의 사진과 이름이 정렬되어 있었다. 생긴 지 80년도 더 된 회사답게 제조한 약의 수 또한 한두 개가 아니다.
놀란 태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크롤을 내렸다. 내려도 내려도 스크롤은 끝이 없었다. 정정택 그 인간! 테이블 밑에서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근데 뭐, 회사를 알면 페로몬 억제제는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하, 하하!’
뭐? 제조 회사만 알면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가 아니다. 눈이 핑글핑글 돌면서 두통이 밀려오는 듯했다. 심지어 포장 상자까지 죄다 비슷하다. 아무리 얼핏 본 적이 있는 약이라고 해도 이건….
“제가 열심히, 기억을 쥐어짜 보겠습니다.”
수험생 때보다 더 피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9] TA (Traffic Accident) 교통사고.
[10] 셀세이버 (Cell Saver) 자가혈회수기. 수술 중 환자로부터 빠져나온 혈액을 성분 분리한 뒤, 다시 환자에게 주입하도록 돕는 장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