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천진난만한 교도관의 정체 (3/29)

02. 천진난만한 교도관의 정체

-코드 블루. TICU. 권역 외상 센터 5층, 외상 소생 구역….

방송이 나오자마자 병원 곳곳에서 분주하게 뛰는 발소리가 울렸다. 식당에서 배식을 받던 지호도 식판을 놓고 다급하게 뛰었다.

“야! 연지호!”

병원 본관에서 권역 외상 센터로 향하는 통로를 지날 때였다. 동료 의사가 허겁지겁 따라오는 걸 이제야 눈치챘다. 속도를 조금 늦춰 뒤를 보자 멀리 있던 흐릿한 얼굴이 가까워지고 선명해졌다.

“박 교수님?”

“식당에서부터 같이 가자고 그렇게 불렀는데!”

“지금 코드 블루인데 누구 기다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어차피 승강기 탈 때 만날 텐데 좀 기다려 주면 어때서 그래?”

“그래도 안 돼요. 환자가 애타게 기다리잖아요.”

얼추 따라잡힌 걸 확인하고 다시 속력을 냈다. 점점 멀어지는 격차에 숨을 헐떡거린 박 교수가 에이씨, 짜증 내며 힘을 쥐어짰다. 이 와중에도 무슨 할 말이 많은지 열심히 놀리는 입이 바빴다.

“아무래도 오늘 새벽에 들어온 그 환자 같아. 수술은 잘 끝나긴 했는데, 어째 불안 불안했거든.”

“새벽에 환자 들어왔어요?”

“몰랐어? 건물 3층에서 떨어진 환자인데, 몸은 다 망가지고 겨우 숨만 붙어 있었어. 늑골이 부러졌는데, 그게 장기를 꽉 누르는 바람에 애먹었잖아. 수술 도중에 심장 마사지를 다 했다니까? ISS 15점 넘었어.”

“그 정도로 심각한 환자인데 저는 왜 전혀 몰랐죠?”

“응? 그러게? 그러고 보니 연 교수가 모르고 있는 게 의문이네? ER에서 다른 과 안 거치고 바로 넘어온 건데?”

허! 외상 센터로 들어온 중증 환자를 외상 센터 의사가 모르고 있었다니! 그것도 당직이었던 의사가 말이다. 뭔가 좋지 않은 낌새가 느껴진다. 가뜩이나 일그러져 있던 지호의 미간이 더 일그러졌다.

“저희 애들은 그때 없었어요?”

“연 교수네 애들? 아, 성현이 있었네. 성현이한테 못 들었어? 말하기 좋아하는 녀석이라 당연히 할 줄 알았는데.”

“경황이 없었나 보네요. 자세한 건 나중에 제가 물어볼게요.”

외상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타이밍 좋게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서둘러 올라타 초조하게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응급도 응급이지만 박 교수의 말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급한 환자였다면 당연히 지금처럼 코드 블루 방송이 나왔을 거고, 밤새 병원에 있던 자신은 당장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방송을 들은 기억도, 그런 환자가 있는 줄도 몰랐다. 방송은 다른 수술 중에 나온 거라 몰랐을 수 있다고 해도, 심각한 환자가 생긴 것을 보고받지 못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성현 선생이라면 오늘 아침에 휴게실에서 한 번 만났다.

* * *

“저한테 알리지 말라고 했다는 겁니까?”

“네….”

풀이 죽은 듯 기어가는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괜히 더 불쌍해 보이게, 하필이면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외상 소생구역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상황 종료 방송이 울렸다. 덕분에 숨만 잔뜩 차고, 땀만 줄줄 흘리는 꼴이 되었지만, 코드 블루가 종료된 건 다행이었다. 종료 방송에 안도하며 식사를 하려던 것도 잊고 곧장 성현을 찾았다.

대부분 의사마다 담당 환자가 있긴 하지만, ISS가 일정 점수를 초과한 환자의 경우에는 조금 더 신경을 쓴다. 만일을 대비해 모든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고조차도 안 한다고? 이건 말이 안 된다.

지호는 성현을 데리고 빈 회의실에 들어갔다. 화를 누른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센터장님이 교수님한테 알리지 말라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나온 대답이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겁먹은 목소리가 떨렸다. 멋모르고 윗사람들에게 치여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아, 짜증 나게.

차마 더 뭐라 할 수 없게 만드는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결국 다음부터는 꼭 보고하라고 일러두며 어깨를 다독이는 것으로 끝냈다.

* * *

센터장이 내린 지시라면 굳이 따지러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직접 가서 듣지 않아도 그의 입에서 나올 말 정돈 알고 있었다. 지호는 짜증이 섞인 손짓으로 연구실 문을 열었다. 커다란 홀케이크를 먹고 있던 박 교수가 고개를 들었다.

“어, 연 교수. 성현이가 뭐라든?”

“센터장이 시켜서 보고 안 한 거래요. 제가 VIP 환자 안 맡겠다고 할까 봐요.”

“센터장이?”

“네.”

“이게 진짜, 돈에 눈이 멀었나?”

“네, 맞아요. 그 사람 돈에 눈멀었어요. 그걸 이제 알았어요?”

나무젓가락을 가져온 지호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붙어 있는 젓가락을 뜯어 케이크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왜 밥을 안 먹고 케이크를 먹어?”

“식당까지 갈 기력도 없어요. 어차피 한 판인데 조금만 나눠 먹어요.”

“양아치. 그게 어디 조금이냐? 환자들이 너 이런 성격인 거 알아?”

“절대 모르죠. 저 이 병원 천사 의산데. 오죽하면 탈인간 급 별명을 붙여 주셨을까.”

“지랄.”

탁, 박 교수가 젓가락을 던지듯 놓았다. 케이크는 포기하고 커피나 마시려 손을 뻗는데 컵이 쑥 사라진다. 허, 이 새끼가 진짜. 헛손질한 손을 멍하니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야, 네가 사 먹어! 양심이 있으면 적당히 먹어야지! 에이씨! 반이나 마셨어!”

“박 교수님도 매번 제 냉장고에서 초콜릿 훔쳐 드시잖아요. 그게 얼마나 사기 힘든 건데요. 그리고 나중에 제가 커피 사 드리면 되잖아요.”

“어우, 얄미워. 얄미워. 오늘 연 교수 기분 안 좋으니까 내가 참는다.”

초콜릿 훔쳐 먹는 건 또 어떻게 안 건지. 티 안 나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가늘게 뜬 박 교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 모닝커피는 연 교수가 책임지란 말을 하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말을 바꿨다.

“근데 말이야. 연 교수 너, 오늘 새벽에 누구 수술 들어갔었어?”

“누구였더라? 무슨 방송국 국장이라고 그러던데?”

“방송국 국장이 왔어?”

“아니요. 국장 동생의 내연녀였나, 그랬을 거예요.”

잠시 생각하는 듯 젓가락 끝을 한참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응, 맞네요. 내연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놀란 박 교수가 테이블을 탁 쳤다.

“이야, 부인도 아니고 내연녀야? 그래서 최소인원만 쏙 빼서 수술실 갔구나?”

“네, 뭐.”

“그럼 입 꼭 닫고 있으라고 당부받았을 텐데. 이렇게 얘기해도 돼?”

“안 되죠.”

“근데 왜 그렇게 상쾌하게 웃고 앉았어?”

“난 누가 하지 말라는 짓 할 때가 제일 짜릿하더라.”

“애냐?”

“요즘 애들도 나처럼 말 안 듣진 않을걸요.”

“허, 그건 잘 아네.”

아주 센터장한테 단단히 화가 났네, 저거. 박 교수가 케이크를 쭉 앞으로 밀었다. 이 양아치 의사에게 남은 케이크를 전부 양보하겠다는 뜻이다.

지호는 남은 케이크는 물론 커피까지 다 마셔 버렸다. 그러고는 멍하니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새벽에 실려 온 환자가 살아서 다행이에요. 그 환자 잘못됐으면 제가 센터장 죽였을 거예요.”

“이게, 의사란 놈이 살벌하게….”

다 잘 끝났으니까 적당히 하지? 박 교수가 지호의 머리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한숨이 삐져나왔다.

“제가 수술한 그 환자 말인데요. 꼭 오늘 새벽에 수술할 필요 없었고, 간담췌에서 수술하면 되는 거였어요. 오히려 그쪽이 더 잘할 거고요.”

“….”

“그런데 굳이 저한테 수술받으시겠다고 하셔서 불려간 거예요. 이성현 선생한테 물어보니까 새벽에 그 환자 받고 저 찾았다면서요. 김 교수님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신 게 다행이었지, 정말 큰일 날 뻔했대요.”

턱을 괴고 있던 팔이 스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팔을 따라 고개가 내려갔다. 지호는 테이블에 볼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외상외과는 분야 특성상 중증 외상 환자가 생기면 목숨을 부지할 확률이 현저히 낮았다. 아무리 헬기를 띄워 데려오고, 5분 내로 환자를 이송해도, 죽어서 병원에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혈할 혈액도 늘 부족하고, 알파나 오메가의 경우엔 외상으로 인해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난데없이 히트나 러트가 올 때도 있었다.

필요한 순간에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한 생명이 죽을 수도 있었다.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이런 식으로 환자를 받으려고 의사가 된 게 아니다.

느슨하게 몸에서 힘을 뺀 지호가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했다. 무방비한 얼굴에는 피로와 외로움이 엉겨 붙어 있었다.

* * *

-정오의 면회, 오늘 첫 사연입니다. 경기 남부 교도소에서 온 사연이네요. 안녕하세요, 아나운서님! 저는 지금 경기 남부 교도소에서 징역을 사는 재소자입니다.

오오오오!

방송을 듣고 있던 수용자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이들은 모두 경기 남부 교도소에 징역 중인 수용자였다.

-이렇게 사연을 보내는 건 얼마 전에 이곳 오메가 수용소에서 정말로 축복할 만한 일이 생겼기 때문인데요. 그게 뭔지 궁금하시죠? 그건 바로,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아, 여기 아기 사진이 함께 왔네요? 어머, 너무 귀엽다!

정오가 되면 전국 모든 교도소에서 수용자들을 위한 교화 방송을 틀어 준다. ‘정오의 면회’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은 보통 라디오 방송처럼 사연을 받고, 신청곡을 받아 들려주었다.

“요즘 수용자들은 아주 별걸 다해요.”

관구실에서 방송을 듣고 있던 이 부장이 픽 웃음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는 동의를 구하듯 맞은편을 보았다.

“안 그래요, 남 부장?”

“네. …네? 뭘 말입니까?”

한참을 손바닥만 들여다보던 태주가 놀란 듯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 부장이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태주 교사님, 요즘 왜 이러시는 겁니까? 진짜 배가 아니라 머리가 뚫렸나?”

가져다준 지 20분이 지난 커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평소라면 쿠키 한 박스를 옆에 끼고 있어야 할 인간이 이상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틈만 나면 손바닥만 들여다보기 바빴다. 미간을 구긴 이 부장이 태주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나도 좀 봅시다. 가뜩이나 핸드폰 출입도 안 돼서 심심한데.”

“아아! 이 부장님!”

당황한 태주가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이미 꽉 붙잡힌 상태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허무하게 힘에서 밀려 손바닥을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모서리가 살짝 닳은 명함이 드러났다.

“뭐야, 겨우 이거 하나에 정신을 다 팔아먹은 거였어요?”

“겨우 이거라니요! 이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맥 빠지게 웃는 얼굴에 버럭 화를 내며 손을 거뒀다. 다행히 이번에는 쉽게 빠져나왔다. 두 손으로 명함을 소중하게 쥔 태주는 그 안에 적힌 11개의 숫자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지호의 핸드폰 번호였다.

“남 부장, 연애해요? 아니면 짝사랑? 그게 아니면 뭔 명함 한 장을 스마트폰 보듯 봐?”

“그런 거 아닙니다. 저의 동경 어린 시선을 그렇게 해석하지 마세요.”

“동경 어린 시선? 누구 명함인데 그래요?”

“저 구해주신 의사 선생님 명함입니다. 우리 외부 진료는 거의 혜성대 병원으로 가잖아요.”

“아아, 거기 외상외과에 있는 그 의사 선생님?”

“네, 맞아요.”

“생긴 것도 아주 잘생긴 게, 잘하면 그 얼굴로도 사람 구하겠던데요?”

“그죠? 이 부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도 반은 그 얼굴을 보고 나았답니다. 차마 뒷말까지는 잇지 못한 태주가 홀로 조용히 웃었다. 정말로 크게 다쳤음에도 빠른 회복력을 보였으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믿었다.

“진짜 어떻게 그런 사람이 다 있지?”

지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 번 더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황홀해하다가, 금세 고민 깊은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 카페에서 본 이후로 벌써 보름이 지났다. 보름 동안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외부 진료를 나가야 만날 구실이 생기는데, 외부 진료를 나갈 일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병원에 갈 만큼 몸이 아픈 일도 없었다. 대체 그 신의 손이 이 뚫린 배를 얼마나 잘 고쳐 놓은 건지, 격한 운동을 해도 복통 한번 호소하지 않는다.

그냥 따로 만나자고 해 볼까? 하지만 이쪽이나 그쪽이나 근무 시간 유동이 심하다 보니 아무 이유 없이 만나자고 하기는 조심스럽다.

“하아….”

연달아 한숨이 터진다. 진짜, 진짜로 연락하고 싶다. 하지만 선생님께 피해를 주게 되면 어떡해? 아, 그냥 저번처럼 우연히 만나는 게 딱인데.

한 번 더 자연스러운 우연이 일어나기는 어려울까?

어깨가 축 늘어졌다. 누가 보면 상사병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표정이 아련했다. 이 부장이 별꼴을 다 본다며 커피를 들이켰다.

* * *

자연스러운 우연이 일어났다. 참고인 조사로 방문한 경찰서에서 지호와 맞닥뜨린 것이다.

“태주 씨도 참고인 조사 때문에 들렀나 봐요?”

“아, 네. 그나저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1시간 정도 일찍 올 걸 그랬다. 누가 봐도 지호의 모습은 참고인 조사를 막 끝내고 나온 모양새였다. 태주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선생님은 이제 참고인 조사 끝난 겁니까?”

“네, 뭐.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금 걸리더라고요. 태주 씨는 이제 온 거죠?”

“네에.”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담당 형사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고작 10분밖에 안 남았다. 게다가 능력 있고 바쁜 선생님은 곧장 병원으로 가 봐야 할지도 몰랐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무거운 입술을 떼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히 가라고 했지만, 보내기 싫은 티가 역력한 목소리였다. 어쩐지 기운 없는 태주의 모습에 지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단정하게 걷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터덜터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지호는 한참 동안 태주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뭐지? 나한테 호감 있는 거 아니었나?”

잠깐 데이트 좀 할까 했는데.

* * *

태주를 찌르고 도망친 강도는 한 달이 넘게 지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마스크와 모자를 쓴 탓에 제대로 얼굴을 본 이가 없었고, 사건 현장에서도 건질 만한 단서가 없었다. 주변에 설치된 CCTV와 참고인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저희가 좀 살펴봤는데 말이죠. 남양주에서 동선이 끊겼더라고요. 블랙박스에 일반 가게 CCTV까지 다 뒤져 봐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시일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남양주면 차를 타고 도주했을 텐데, 차도 아직 발견 못 한 건가요?”

“차량은 확인이 됐는데 도난 차량이어서요. 원래 차주분도 오셔서 조사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렇다 할 단서가 없는 거군요.”

“네, 그게 참 면목이 없네요.”

“….”

“저, 혹시라도 신변이 위협될까 걱정되시는 거라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잠시 시선을 내린 태주가 그때 일을 떠올렸다.

약국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카운터에서 머뭇거리던 남자가 갑자기 칼을 꺼내자 약사는 기겁했다. 깜짝 놀란 태주가 넘어질 뻔할 정도로 비명이 요란했다.

칼을 쥔 강도는 약과 함께 돈을 요구했다. 어떤 약을 요구한 건지는 모른다. 얼핏 듣기는 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고 단어가 생소한 탓에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 그때, 조용히 그곳을 벗어났다면 칼에 찔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도망치는 것보다 몰래 강도의 뒤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택했고, 그 덕에 생사를 넘나드는 아찔한 경험을 얻었다.

칼은 빗장뼈 밑을 스친 뒤, 바로 끝을 세워 뱃가죽을 파고들었다.

휘두르는 몸짓은 어설펐지만, 단번에 살을 파고들어 장기를 스칠 만큼 힘이 좋았다. 찌르고 빼기까지 체감상 10초도 안 걸린 듯했다. 뭘 해 볼 새도 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범인은 뭐가 목적이었을까?

수면제나 마약류의 약을 요구한 것 같지는 않은데….

잡히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수사도 벌써 두 달이 넘게 제자리걸음 중이다.

“오늘도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다른 게 더 생각나거나 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톡톡 키보드를 두드리던 담당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일어난 태주가 가방을 들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네, 알겠습니다. 저도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 *

태주는 긴 복도를 느릿느릿 걸으며 손으로 배를 짚었다. 칼에 찔린 자리였다. 로비를 가로질러 중앙 회전문을 밀고 나올 때였다.

“아, 태주 씨.”

문 옆에 기대 있던 지호가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바로 섰다. 그러나 해맑게 지은 미소가 무색하게 태주는 슥 지나쳐 갔다.

“어디 안 좋은가?”

의아한 지호의 시선이 멀어지는 뒷모습에 박혔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얼른 쫓아가 태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남태주 씨.”

“어? 선생님?”

앞을 막은 뒤에야 놀란 눈이 지호를 담았다. 아직 이곳에 있는 줄 전혀 몰랐다는 눈빛. 그 빛 안에는 반가움이 뒤섞여 있었다.

“저 기다리신 겁니까?”

“네, 기다리고 있었어요. 바쁘지 않으시면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

그 말에 동그랗게 뜬 눈이 가늘게 접히며 휘어졌다. 환하게 웃은 태주가 곧장 답했다.

“저 하나도 안 바쁩니다! 오늘 쉬는 날이거든요!”

사실 이후에 형과 점심 약속을 했지만, 그런 건 당장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 빠르게 등 뒤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보냈다.

[형혼 자 멉어ㅓ 안녕]

대충 써서 보내고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쏙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쪽 엉덩이에서 미친 듯이 진동이 울렸다. 아마 불만 가득한 형의 연락일 것이다. 당연히 받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병원에 안 가셔도 되는 겁니까?”

“저도 오늘은 쉬는 날이라서요. 급한 연락이 오면 가 봐야겠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태주 씨 점심 아직이면 같이 먹을까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배고팠습니다! 아, 선생님 오늘 차 가져오셨습니까?”

“아뇨, 조금 피곤해서 택시 타고 왔어요.”

“그럼 제 차 타고 같이 가요. 저 오늘 차 가져왔습니다.”

차 키를 꺼내 버튼을 꾹 누르자, 멀끔한 고급 승용차가 번쩍 신호를 보냈다. 대충 보아도 주차된 차 중에서 가장 비싸고 때깔이 고왔다.

교도관 월급이 이 정도로 많았나? 잠시 멈칫한 지호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차에 올라탔다.

* * *

도착한 곳은 뭐든지 적당한 면을 자랑하는 무난한 레스토랑이었다. 의사인 지호에게 비싼 점심을 대접하는 건 법에 어긋났던 탓이다. 손님까지 적당히 있는 레스토랑 내부를 보며 태주는 만족스러운 듯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여기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더 좋은 걸 대접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창 옆에 있는 2인 테이블에 앉았다. 지호는 습관인 핸드폰에 시선을 던지곤 했다. 몇 번이나 무의식중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곤 멋쩍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버릇이라서.”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음식이 나온 후에는 서로 소소한 안부를 물으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태주는 한 수저 크게 음식을 뜨다가도, 수저 위의 음식을 반 이상 덜기를 반복했다. 분명 그럭저럭 잘 먹고 있기는 한데 만족스럽게 먹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의 별난 식사 태도를 가만히 보던 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응? 왜 웃으십니까?”

“그냥, 같이 밥 먹으니까 좋아서요.”

지호는 몇 수저를 더 뜨다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식사를 마쳤다기보단 뭔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태주 씨한테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그날 일과 관련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툭. 얌전히 놓으려고 했던 수저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이를 본 직원이 얼른 새 수저를 가져와 놓고 갔다. 그때까지 가만히 굳은 태주는 지호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들었다.

‘그날’이 언제를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머리가 단번에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참고인 조사까지 다녀온 직후다.

“어, 그게….”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며 잠시 뜸을 들였다.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은 아니었다. 서로 먼저 보도하겠다며 난리 치는 언론을 겨우 막았으니 처신 똑바로 하라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을 뿐이다.

빠르게 주위를 훑은 눈이 다시 지호를 마주했다. 아무도 이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태주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누가 봐도 은밀하고 요란하게 묻는다. 이를 바라보는 지호의 눈에 의아한 빛을 띠었다.

최대한 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애를 쓰는 것 같은데, 그게 더 이상해진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작게 픽 웃은 지호가 똑같이 상체를 기울였다. 제 앞에 있는 반듯한 이목구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면 말이죠, 태주 씨. 그때 약국에서 강도가 뭘 요구했는지 기억해요?”

“강도가 요구한 것 말입니까?”

“네.”

“그야, 약국이니까 돈과 약을 요구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게 어떤 약인지도 기억이 나나요?”

톡톡. 지호의 손끝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무의식에 나오는 습관 같기도 하고, 어딘가 초조한 것 같기도 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뭔가 알아내야 하는 게 있는 건가? 태주가 깊게 생각하듯 미간을 접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름을 듣긴 했는데, 생소해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약학에서 쓰는 전문 용어 같다는 것 외에…. 아! 그래도 포장 상자 모서리가 약간 붉은색이었던 건 기억합니다.”

“모서리가 붉은색인 포장이요?”

“네.”

“으음….”

지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좀 부족하다 느끼는 모양새였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알기 어렵겠죠?”

“아무래도 좀, 그러네요.”

“그럼 형사님께 한번 여쭤볼까요?”

“이미 물어봤는데 말하기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자세한 수사 내용은 알려 줄 수 없다네요.”

“아, 그렇겠군요.”

확실히, 아직 용의자조차 추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태주는 반쯤 꺼낸 핸드폰을 슬그머니 도로 넣었다. 결국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살짝 풀이 죽었다. 힘없이 수저를 들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넣으려다가 또 아차 하고 반을 덜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지호를 보았다.

“그럼 약사님께 묻는 게 어떻습니까? 약사님은 기억하실 것 같은데.”

넣었던 핸드폰을 또다시 꺼냈다. 약국 연락처를 찾아 전화해 볼 생각….

“약국에도 찾아가 봤어요.”

아.

“그런데 주인이 바뀌었더라고요. 충격이 크셨나 봐요. 그 일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가신 모양이에요. 어디로 가신 건지는 알 수 없고요.”

이미 약국에도 다녀오셨구나.

하긴, 약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았을 리 없다. 칼 맞고 드러누운 사람이 뭘 알겠는가.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눈썹을 축 늘어뜨린 태주가 고개를 숙였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왠지 밥맛이 떨어졌다.

“아뇨. 태주 씨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고개 들어요. 너무 풀 죽어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지는데요?”

“하지만.”

“괜찮아요.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니까.”

“….”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알았죠?”

부드럽게 타이른 지호가 작게 미소 지었다. 손을 뻗어 태주의 고개에 가져다 대었다. 힘주어 올리자 여전히 미안함 가득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 정도로 지호의 행동은 그냥 궁금한 수준이 아니었다. 약국에 직접 찾아간 것도 그렇고, 경찰서 앞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게 왜 궁금하신 건지 여쭤도 됩니까?”

태주가 넌지시 물었다. 볼과 턱에 살짝 닿아 있던 지호의 손이 느리게 떨어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

“제가 아는 사건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네?”

메시지라도 온 건지 알림등이 깜빡인다. 화면을 켠 지호가 잠시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별거 아닌 짧은 시선의 움직임이 왠지 낯설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눈빛이다. 말없이 그 낯선 빛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테이블이 지이잉 울렸다. 지호의 핸드폰 진동이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 사건과 많이 다르네요.”

“….”

“괜한 생각이었나 봐요.”

말을 마친 지호가 핸드폰을 쥐었다.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전화가 왔다. 분명,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 볼게요.”

병원에서 온 전화인가 보다. 지호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 무섭게 어수선한 소리가 샜다.

“그래서요? 아직 이송 전인가요? 구조대는 지금 어디 있죠?”

다급히 일어나는 지호를 따라 태주도 소지품을 챙겨 일어났다. 서두르는 걸음만 봐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급하게 지갑을 꺼내며 카운터 앞에 섰다.

“계산! 계산이요!”

“어? 계산, 방금 나가신 분이 하셨는데….”

“네?”

아니, 그 급한 와중에 계산은 또 언제 했대?

대접하려고 데려왔는데 오히려 얻어먹는 꼴이 되었다.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다가 아차 정신을 차리고 다시 뛰어나갔다. 택시를 타려는 듯 큰길로 뛰어가는 지호를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태주 씨? 왜 벌써 나왔어요?”

“제 차로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급하잖아요! 여기 사람 많아서 택시 잡기 힘듭니다! 빨리요!”

얼결에 얻어먹게 된 거긴 하지만, 이대로 받기만 하고 헤어질 순 없었다. 덥석, 지호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무사고 10년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 * *

“헬기 고장이요?”

심각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렸다. 태주는 흘끗 옆자리에 눈길을 던졌다. 운전에 집중하면서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조금씩 귀에 담았다.

“그럼 다른 병원 헬기는요?”

-헬기가 있는 병원이 있어야지! 게다가 죄다 수술실 풀이란다! 응급실 베드조차 없어!

“아아….”

-일단 차가 올라가고 있기는 하니까. 그때까지 환자가 버티길 바라야지, 뭐.

“펠비스 관통했다면서요. 언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떡하냐? 당장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뿐인데!

“하아….”

-일단 병원으로 와. 곧장 수술 들어갈 수 있게 준비라도 해 둬야지.

“알았어요. OS 임주연 선생님 미리 콜 해 주세요.”

통화가 끝나고 차 안은 적막이 찾아왔다. 시트에 머리를 기댄 지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옆자리를 본 태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환자 이송용 헬기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헬기가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차가 대신 움직이는 듯했다.

펠비스(pelvis)면 골반을 관통했다는 건데, 이거 진짜 응급 상황 아닌가?

다시 바뀐 신호에 액셀을 밟으며 고민했다.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돕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떠오르는 조력자의 얼굴에 핸들을 탁 쳤다.

“선생님!”

“네?”

기운 넘치는 목소리에 지호가 번쩍 눈을 떴다. 운전대를 붙잡은 태주의 얼굴이 환하다.

“헬기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네?”

“헬기가 필요하다고 하셨잖습니까. 일반 헬기도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구조용 헬기로 쓸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신호가 걸렸다. 병원 근처 사거리에서였다.

태주는 그 틈에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반쯤 넋 나간 시선이 오른쪽 볼에 닿는 게 느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얼빠진 소리냐고 말하는 듯하다. 믿지 못하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환하게 외쳤다.

“지금 당장 헬기 띄울 수 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응급구조사나 의사를 태워야 하니까 일단 병원으로 가면 되겠죠?”

“네?”

“헬기요! 헬기!”

“아니, 그게 무슨….”

하지만 몇 번이나 말해도 지호의 표정은 여전했다.

* * *

정말로 헬기가 떴다. 그것도 남태주의 전화 한 번에. 어이가 없기도 하고, 이 천진난만한 교도관의 정체가 뭔가 싶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걸 생각할 경황은 없었다. 지호는 환자가 이송되는 대로 바쁘게 외상 센터를 뛰어다녔다.

“패스트 확인하고 바로 OR로 옮길게요!”

“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병원 바닥 전체가 울렸다. 헬기로 이송된 환자 외에도 외상 센터에는 심각한 중증 환자가 많았다.

환자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지호가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태주는 덩그러니 외상 센터 한가운데 남았다.

“아.”

뭔가 엄청난 일이 지나가고 있는데, 자신만 태풍의 눈이 된 것처럼 고요하다. 멋쩍은 기분에 괜히 코를 훌쩍이며 턱밑을 깔짝깔짝 긁었다. 땀 나게 뛰는 의료진들과 통증을 호소하며 실려 가는 환자들이 앞뒤로 스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멋쩍은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묵직한 기분만이 남았다.

손을 들어 천천히 배에 가져다 대었다. 복부를 관통당했을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신도 이곳 환자들과 다를 것 없이 급히 실려 왔고, 생사를 몇 번이나 넘나들며 긴 수술을 마쳤다.

새삼스럽지만 연지호라는 사람은 정말로 대단했다. 또 한 번 속으로 감탄했다. 헤어지면서 인사를 받지 못한 것도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게다가 헬기를 띄워 그에게 도움이 되기까지 했다.

뿌듯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을 막아선 익숙한 그림자에 표정이 굳었다.

“태주, 너!”

“하, 하하….”

아버지인 남 회장과 형인 남혁주였다.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급하게 온 모양이다. 어색하게 웃은 태주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아버지, 형.”

전화 한 번에 헬기를 띄워 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태주는 남 회장과 혁주를 꼭 끌어안으며 볼에 진한 뽀뽀까지 남겼다. 이렇게 해야 징그러워서라도 잔소리를 더 안 한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 하나 살렸잖아요. 게다가 우리 회사에서 후원하고 있는 병원이기도 하고….”

“그것도 네 성화에 못 이겨서 하는 거잖아, 이 모자란 녀석아. 아무튼, 네 엄마가 너 보고 싶다고 난리니까 혁주랑 집에 가 있어.”

혁주에게 눈짓을 보낸 남 회장은 병원장을 만나고 가겠다며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태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어머니는 왜 갑자기 또 내가 보고 싶으실까.”

“요즘 같은 화실 다니는 오메가가 참 성격도 밝고 좋다 하시더라.”

“진짜?”

“어, 진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덤덤한 표정이 마주해 온다. 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기울인 태주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베타 아들을 왜 자꾸 알파, 오메가랑 엮으려고 하신대?”

“내 말이. 나도 우리의 모친께서 이렇게 열려 있으신 줄 몰랐다.”

“집에 안 가면 안 되겠지?”

“아버지 성격 알잖아. 홧김에 병원 후원 끊으시면 어쩌려고. 연지호인가? 그 선생 때문에 여기 후원해 달라고 떼쓴 거 아니었어?”

“선생님 뵙고 가고 싶은데….”

“몇 시간이나 걸릴 수술인 줄 알고? 가자. 다음에 와서 봐.”

결국 끌려가듯이 병원을 나섰다. 더듬더듬 어긋난 걸음이 마지못해 혁주의 뒤를 따랐다. 몇 번이나 미련이 짙은 눈으로 뒤를 돌아보면서였다.

* * *

수술실에서 나온 지호는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넋을 놓았다. 뒤이어 나온 동료 의사 주연이 발끝으로 지호를 툭툭 건드렸다.

“여기서 뭐 해요? 밖에 보호자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선생님이 대신 좀 얘기해 주세요.”

“알았어요, 그럼. 고생했어요.”

“고맙습니다.”

주연이 떠나고, 텅 빈 수술실 앞에 지호 혼자 남았다. 그는 주르륵 등을 미끄러뜨리며 주저앉았다. 장장 여섯 시간이 넘은 수술이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가만히 앉아 눈을 깜빡이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갔겠지?”

주섬주섬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손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동안 온 연락이 없나 확인했지만, 화면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당장 헬기를 띄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태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당당한 그 모습에 짧게 터지듯 웃음이 나왔다.

교도관에,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러고 보니 남태주는 꽤 좋은 차를 타고 다녔다. 병실도 1인 병실을 이용했고, 매일같이 그의 병실로 수많은 선물이 들어왔었다.

“엄청난 VIP 고객이었네.”

읏차!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호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온 연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당연히 핸드폰 화면은 조금 전과 다르지 않았다.

번호를 줬는데도 왜 여태 연락이 없는지 이제야 알겠다. 남태주와 연지호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어떤 재벌이 아무런 뒷배도 없는 일개 의사와 친분을 쌓을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 못해 아쉽지만, 그런 건 혼자 속으로 하고 말기로 했다. 지금까지 태주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그런 인사치레에 크게 신경을 쓰진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뭐, 약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니.

자신도 더는 태주에게 볼 일이 없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 *

“태주, 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얌전히 좀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어떻게 얌전히 있어요, 아버지.”

“이게 또 말대답이지!”

네 형을 보라며 남 회장이 소리쳤다. 그렇게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어 입을 합 다물었다. 확실히 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히 공부만 하고, 지금도 얌전히 회사 일만 하고 있었다.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며 난리를 치던 자신과는 달랐다.

“참고인 조사 갔다는 놈이 갑자기 헬기 띄워 달래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이게 납치를 당한 건지, 조난을 당한 건지, 네 형이랑 얼마나 전전긍긍했는데!”

“상황이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다음에는 오해 안 하시게 잘 설명할게요.”

아무리 꾸중을 들어도 다음엔 안 그러겠다는 말 만큼은 못 뱉었다. 언제든 지호가 헬기를 띄워야 한다고 말하면, 몇 번이든 헬기를 띄울 생각이다. 비록 회사 재산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좋은 게 아닌가? 조만간 기사가 뜨면 기업 이미지도 분명 좋아질 것이다.

태주는 여태껏 잘 다져왔던 특유의 처세술로 남 회장의 기분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 회장이 포기한 듯 한숨을 폭 내쉰다.

“그건 그렇고, 교도관 일은 언제까지 할 거야?”

하지만 하나의 난관이 들어가자, 다른 난관이 툭 튀어나왔다. 법 공부를 했으면 변호사나 될 것이지, 교도관이 됐다며 늘 듣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미간을 접은 태주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또 그 얘기 하신다. 저 교도관 계속할 거라니까요?”

처음으로 제대로 마음먹고 정한 길이다. 이 일, 저 일 간을 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진심이라며 분명하게 말하자 남 회장이 또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짙고 긴 한숨이었다.

“안타까워서 그러지. 고작 직업 하나 때문에 파혼이나 당하고 말이야. 너 그러다 혼자 늙어 죽어.”

전에도 한번 이런 대화가 오간 적이 있었다. 태주가 파혼을 당한 다음 날이었다. 잔뜩 술에 취한 남 회장은 혀가 꼬부라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손주를 못 보는 건 괜찮다. 결혼을 못 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주변 사람 다 잃고 혼자가 될까 봐, 그게 걱정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마저도 이 직업이 불만이라며 떠났는데, 다른 이는 오죽할까? 지금도 조금씩 멀어진 인연들이 보인다.

사실은 평생 혼자 살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어렴풋이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다.

[3] 코드 블루 (Code Blue) 의료 코드의 한 종류로 심정지 상태인 환자가 발생했으므로 심폐소생술이 필요함을 알림.

[4] TICU (Trauma Intensive Care Unit) 외상 중환자실.

[5] ISS (Injury Severity Score) 중증 외상 환자의 신체 손상 정도를 평가한 점수.

[6] ER (Emergency Room) 응급실.

[7] OS (Orthopedic Surgery) 정형외과.

[8] OR (Operating Room) 수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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