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극적인 재회
-김 주임님! 오메가 수용동 3274 수용자 상태가 안 좋습니다!
“3274? 그 임부 오메가 말하는 거야?”
-네! 지금 외부 진료 나가야 하는데 계호 인원이 부족합니다! 어떡하죠?
“아이고야, 계호 인원은 또 왜 부족하대?”
-어제 알파 수용동에 큰 싸움 나서 그쪽도 외부 진료 나갔잖습니까! 한 명 더 있어야 외부 진료 나갑니다! 지금 수용자와 아이 둘 다 위험하다고 하는데, 안 나가면 큰일입니다!
“이거 일 났네. 일단 그 수용자 데리고 나와. 오 부장 퇴근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내가 한번 연락해 볼게.”
-네, 알겠습니다!
인터폰을 내려놓은 김 주임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도관 인원 문제로 골머리를 썩인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은 처음 있는 일이다. 사무실을 나선 구둣발이 빠르게 걷다가 이내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오메가 수용동의 3274번 수용자. 그는 살인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수용자이자, 태아를 품은 임부였다.
“하여튼 이놈의 도둑놈들, 하루도 조용히 있지를 않아요.”
정말 끊임없이 신선한 업무를 선사하는구나. 작게 개탄하며 좀 더 속력을 냈다. 말은 미워하는 모양새인데, 행동은 말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놈의 도둑놈들을 쓸모 있게 교화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던 탓이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3274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임부가 참 독한 짓을 했다고 말한다. 맞다. 독한 짓이다. 자기 자신과 뱃속의 태아를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를 마냥 욕해도 좋을지, 아주 가끔은 모르겠다.
3274의 연인은 택시 기사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그 택시 기사는 3274에게 살해당했다.
남의 연인을 죽여놓고 멀쩡히 살아가는 모습에 화가 났다고 했다. 정서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형량을 받은 것도 이해가 안 간다고. 그래서 직접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어휴, 그 인간은 뭔 놈의 인생이 이렇게 순탄치 않다냐.”
한숨을 내쉬며 탈의실 문을 열었다. 외부 진료면 교도소 밖으로 나가야 하니, 핸드폰을 챙겨야 했다. 쏜살같이 캐비닛 앞으로 가 비밀번호를 누를 때였다.
“응?”
급하게 뛰어온 탓에 얼핏 보긴 했지만, 뭔가 있던 것 같다. 슬쩍 고개를 빼고 문가의 넓은 통로를 보았다.
“남 부장?”
“어? 김 주임님?”
“뭐야? 남 부장 출근 내일부터잖아. 근데 왜 이 밤중에 왔어?”
그는 긴 병가를 끝내고 이튿날 복직 예정인 남태주 교사였다. 복직 기념으로 선물을 가져왔다며 양손을 들어 보였다. 커다란 홍삼 세트 봉투가 잔뜩이다.
“원래는 내일 들고 오려고 했는데, 이 부장님이 내일 오프라고 하셔서요.”
태주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뜻밖의 선물에 놀라는 것도 잠시, 김 주임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남 부장….”
번뜩 뜬 그의 눈이 부담스럽게 반짝였다. 미간을 찌푸린 태주가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이, 남 부자앙.”
“왜 그러세요. 느끼하게.”
하도 느끼해서 대한민국이 산유국인 줄 착각할 뻔했다. 대체 어디서 나오는 기름기란 말인가.
아, 이거 뭔가 불안한데?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미 꽉 쥐고 있던 홍삼 봉투를 더 꽉 쥐었다. 괜히 오늘 왔다는 후회가 얼굴에 어렸다.
“이, 이런 환영 인사, 반갑지 않은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난 만큼, 아니, 그보다 배로 김 주임이 다가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이거 안 되겠다 싶을 때 양손이 꼼짝없이 붙잡혔다.
“어? 어어?”
홍삼 봉투가 손을 떠나 중앙 벤치에 놓였다. 살살 타이르는 말과 함께 등이 떠밀렸다.
“남 부장, 내가 남 부장한테 기대가 큰 거 알지?”
“모, 모르겠는데요. 우리 엄마도 안 하는 아들내미 기대를 왜 김 주임님이 합니까?”
“에이, 그러지 말고. 지금 워낙 급해서 그래. 3274 알죠? 오메가 수용소에.”
“어? 그 만삭인 오메가 수용자요? 왜요? 아이 낳습니까?”
“낳아야 하는데, 문제가 좀 있나 봐. 위급하다네?”
“정말입니까? 지금 그 수용자 어디 있습니까?”
듣기 싫다는 듯 찌푸려져 있던 미간이 풀렸다. 어느새 본인의 캐비닛까지 떠밀려 왔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그 수용자 병원 가야 돼. 애가 나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대로 나오면 큰일 나나 봐.”
“예? 어떻게 되어 있길래요?”
“그건 나도 잘 모르지. 아무튼 당장 외부 진료 나가야 하는데, 지금 계호 인원이 부족해서 나까지 나가 봐야 하거든?”
“그럼 전 주임님 오실 때까지 여기 있으면 됩니까?”
“그렇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좋네.”
“뭐, 상황이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죠. 아이는 무사히 낳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런 거라면 이해해요, 이해해. 태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캐비닛 문을 열었다. 빳빳하게 다림질된 정복이 얌전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자태였다.
“아, 정말. 이 부장님 센스 봐. 안 사랑할 수가 없다니까? 그냥 세탁만 부탁했는데 다림질까지 싹 해 주시고.”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정복에 팔을 끼웠다. 섬유유연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좋다. 좋아.
“그럼 좀 부탁해, 응? 일과 종료했으니까 그냥 가서 자리만 지키면 돼. 사무실도 조용해. 그리고 내가 오 부장한테 연락했거든? 오 부장 오면 집에 가고, 응?”
“네, 알겠습니다. 제가 오래 쉬긴 했어도 교도소 일은 다 기억합니다.”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맨 태주가 거울을 보며 상태를 점검했다. 옷이 깨끗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인상이 말끔해 보였다.
핸드폰을 꺼내 서랍에 넣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뭐 잊은 거 없겠지? 짧게 점검한 뒤, 캐비닛 문을 닫으려다가 멈칫했다.
“아, 그런데 김 주임님.”
“응? 왜요?”
막 탈의실을 나서던 김 주임이 고개만 쏙 안으로 들이밀었다. 무슨 용건이냐는 듯 캐비닛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지난 후였다.
“지금 어느 병원으로 가시는 겁니까?”
* * *
“이 부장님!”
허겁지겁 달려 나온 태주가 구급차에 올라탔다. 놀란 이 부장이 등받이에 등을 붙이다 말고 멈칫했다.
“뭐야? 왜 남 부장이 왔어요? 김 주임님이 오신댔는데?”
“이 부장님이 불러서 왔다가 김 주임님한테 걸렸잖아요. 계호 인원 부족하다면서요?”
“그래서 외부 진료 같이 가려고요? 이 수용자, 병원에 얼마나 있게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급하잖아요. 빨리 가죠.”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봐요. 이 부장을 밀고 들어간 태주가 꾸역꾸역 좁은 좌석에 앉았다. 인원이 다 차자, 왱왱거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출발했다.
“그런데 계호 인원이 왜 부족한 겁니까?”
“어제 알파 수용동에서 큰 싸움 났잖아요. 갈비뼈가 부러졌다나 뭐라나? 의료과장님이 그거 장비로 검사해 봐야 할 것 같다고, 외부 진료 나가라 해서 나갔어요. 그래서 인원이 그쪽으로 다 빠진 거지, 뭐.”
“일부러 바깥바람 쐬고 싶어서 사고 친 거 아니고요?”
“그거야 모르지. 가뜩이나 계호 부담도 큰데, 요즘 외부 진료 많아서 걱정이야.”
이 부장이 피곤해 죽겠다며 뒷목을 주물렀다. 태주가 콩콩,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하시네요. 작게 위로하자, 이 부장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남 부장이 하고 있지, 뭐.”
“네? 제가요? 에이, 제가 무슨 고생을 한다고.”
“무슨 고생을 하긴. 원래 내일 복직인데 오늘부터 일하잖아요. 내가 오늘 오라고 하는 바람에.”
“아, 맞다.”
“아, 맞다? 허! 참 나!”
“교도관이 천직이라 그런가? 고생인 줄도 몰랐지 뭡니까?”
“다친 건 배인데 왜 머리가 이상해져서 왔어요?”
“머리가 이상하다니요. 조금만 기다려 봐요. 금방 스마트한 남태주로 돌아올 거니까.”
숨을 깊게 들이쉰 태주가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았다. 살짝 시선을 내리자 고통스러워하는 임부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는데, 꽉 다물린 입술은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는다. 그저 미간만 구기며 고통을 안으로 삼킬 뿐이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작게 난 창문과 임부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근데요, 이 부장님.”
“네.”
눈을 지그시 감은 이 부장이 느리게 대꾸했다. 말하기를 귀찮아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 탈의실에서처럼 짧은 침묵을 머금다 입을 열었다.
“우리 지금 혜성 병원으로 가는 거 맞죠?”
그 병원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진지한 목소리였다.
* * *
다행히 도착하자마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수술하면 괜찮다는 말에 한시름을 놓았다. 대기실 소파에 앉은 이 부장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어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힘들어 죽겠네.”
“고생하셨습니다. 커피라도 사 올까요?”
“남 부장이 사는 거예요?”
“네, 뭐. 커피 정도야.”
“나 그럼 샷 추가해서 달달한 바닐라 라떼로.”
“아, 그냥 자판기에서 뽑으려고 했는데.”
“이왕 사는 거 카페 커피로 사 줘요.”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태주가 다른 교도관에게도 뭘 마실 건지 물었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지, 죽어 가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딸기 스무디로 하겠습니다.”
“저는 따뜻한 그린티 라떼로 부탁드립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여전히 통일성이 없다. 혹시나 까먹을까, 중얼중얼 메뉴를 외며 대기실을 나섰다.
* * *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한쪽에서는 지갑이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핸드폰이….
“어? 내 핸드폰. 어쨌지?”
걸음이 멈췄다. 몸을 더듬더듬 짚으며 찾는데, 불길한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오래 쉬긴 했어도 교도소 일은 다 기억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 있게 핸드폰을 캐비닛 서랍에 넣었다.
“아오, 멍청아.”
교도소 일을 너무 잘 기억해서 탈이었다. 한 달을 넘게 쉬었는데도 그 습관이 어디 가지 않았다. 정복 착용과 동시에 핸드폰을 몸에서 떼어 놓는 건 교도관이 소내에서 지켜야 할 기본 규칙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지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핸드폰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병원 앞 광장을 지나 큰 길가에 들어섰다. 본관과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그런지 주변이 휑했다. 분주한 빛을 내는 본관 쪽과 다르게, 이쪽은 잔잔하기 그지없다.
시간이 늦은 탓도 있지만, 도로를 지나는 차도 보이지 않았다.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발장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슬며시 정적을 파고드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헤드라이트가 반짝 빛나며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어? 어어어어?”
뭐야, 저거 왜 저래? 음주운전 아니야?
어마어마한 속도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도에서 인도로 올라왔을 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복직 신고식 한번 제대로 한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끼이이익! 쾅!
아슬아슬하게 곁을 스친 승용차가 버스 정류장을 들이받았다.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
얼어붙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놀란 눈은 동그래지고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숨이 턱 막히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처참하게 앞이 구겨진 승용차를 보는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달렸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정신 차려요! 이봐요!”
쾅쾅쾅! 운전석으로 달려가 연신 창문을 두드렸다. 아무 반응이 없다. 창에 이마를 붙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석에 쓰러진 남자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팔꿈치로 창문을 쳐 봤다. 남자는 의식이 없고, 창문은 깨질 기미조차 안 보였다.
뭔가 창문을 깰 만한 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벤치 기둥이 뽑혀 나간 것을 보고 재빠르게 주워 들었다. 다시 쾅쾅, 조수석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여기요! 아무도 안 계십니까? 사람이 다쳤습니다!”
계속해서 외치며 창문을 내려쳤다. 하지만 요령이 없어서인지 잘 깨지지 않았다.
혼자서는 역부족인 듯했다. 사람을 불러와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차 밑으로 새는 검은 기름이 시야에 들어왔다. 왠지 이대로 두는 건 위험해 보였다.
결국 다시 벤치 기둥을 꽉 잡았다. 얼결에 모서리 부분을 쳤는데, 운이 좋게 금이 갔다.
좀 더 세게 내려쳐 창문을 깨고 드디어 문을 열었다. 서둘러 남자를 끄집어냈다.
“이봐요! 괜찮습니까?”
“윽! 으으….”
다행히 의식이 있다. 남자를 부축해 차에서 멀리 떨어졌다. 예상과 다르게 그에게서 술 냄새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사고가 나기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이봐요! 이봐요!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댄 덕인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한 여자가 겉옷을 벗어 남자에게 덮어 주며 말을 붙여왔다.
“병원에 가시는 거죠? 저도 부축 도울게요.”
“아, 그럼 먼저 가셔서 도움 좀 요청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혼자서 괜찮겠어요?”
“아뇨. 괜찮지 않아서 베드에 실어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아, 그럼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올게요!”
“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꺼낸 여자가 응급실에 전화를 걸며 뛰었다.
“여보세요? 혜성대 병원 응급실이죠? 병원 앞에 심하게 다친 사람이 있어요.”
태주는 점점 멀어지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남자의 체격이 큰 탓도 있지만, 축 처진 몸을 이끄는 게 여간 쉽지 않았다. 다리를 질질 끌던 남자가 앞으로 고꾸라지자, 중심을 잃은 태주까지 함께 넘어졌다.
“괜찮습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윽! 헉, 허어억! 헉!”
대답 대신 거칠게 쉬는 숨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헉헉거리기 바빴다. 호흡이 불안정한 모습에, 얼른 바닥에 겉옷을 깔았다.
“속이 답답합니까? 숨을 못 쉬겠어요? 잠깐 누워 있을래요? 곧 의사가 올 겁니다.”
“읏, 으윽.”
“제 쪽으로 머리 기대세요. 아무래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자의 머리와 어깨를 받쳐 천천히 눕혔다. 하지만 남자는 등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고통을 호소했다. 몸을 일으키려는 듯 발버둥 치는 모습에 급히 뒤를 받쳐 다시 앉혔다.
“왜 그러십니까? 누우면 아픕니까? 어디가 아픈 겁니까?”
미치겠네! 병원이 코앞인데 의사는 왜 안 오고 있는지. 병원을 앞에 두고도 구급차를 불러야 할 판이다. 정작 필요한 의사는 안 오고, 소란에 기웃거리던 사람들만 따라와서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마땅히 도움을 줄 것 같은 사람이 없다. 다들 남자가 흘리는 피에 겁먹은 듯했다. 도움을 구하는 건 포기하고, 다시 남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말하기 어려우면 손가락이라도 움직여 봐요. 등이 아픈 겁니까?”
“윽, 으윽…. 헉, 헉….”
“이봐요. 내 말 안 들립니까? 네?”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파서 말도 잘 못 듣는 건가? 어떡하지? 짧게 고민하다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등은 안 아픕니까? 그럼 목은요?”
“하아, 하, 윽! 허억!”
“네? 목이 아픈 겁니까?”
제발, 제발 대답해요. 아무것도 못 하니까 미치겠잖아. 그러니까 제발….
간절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톡. 다행히 이번에는 손가락이 움직였다.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보내는 사인이었다. 태주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예, 잘하셨습니다. 누웠을 때 목이 아픈 거죠? 머리도 아픕니까? 아, 머리는 아닙니까?”
어깨는요? 배는요? 허리는요? 차근차근 물으며 남자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이런 응급 상황이라면 교도소에서도 몇 번 겪어 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격 진료가 잦은 교도소에서는 담당 교도관과 의무사무관이 환자에 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진단이 빨리 나와 응급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환자가 잘 걷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바지를 걷어 양쪽 다리를 살폈다. 부기가 심한 오른쪽 다리에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왼쪽 다리와 비교해 보면 길이도 조금 짧은 게, 아무래도 골절인 듯싶다.
더는 이대로 못 두겠다. 기다리기만 하다간 더 위험해질 것 같다. 단단히 각오한 태주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고 할 때였다.
“어? 저기! 저 사람 배에서 피 나요!”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다시 급하게 남자를 살펴보았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남자가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다. 얼른 상의를 들추자 복부 깊숙이 박힌 볼펜이 보였다. 아, 어떡해. 여기저기서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빼야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수로 저렇게 깊이 박힌 걸 빼?”
“그럼 저대로 둬?”
“어후, 어쩌다 저런 게 박힌 거야?”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남자를 업고 응급실까지 달려가려 했는데, 상태가 이러니 업을 수가 없다. 볼펜이 더 깊숙이 파고들지도 몰랐다. 피가 나오는 양상을 봐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하는 수 없다. 안고 달리는 수밖에!
후! 힘차게 숨을 뱉었다. 오른팔로 남자의 어깨를 감싸며 왼팔을 두 무릎 밑으로 찔러 넣었다. 그대로 안아 들려고 하는 순간, 사람들의 불안한 외침이 들렸다.
“어어어어!”
의식을 잃은 남자가 쓰러졌다. 그의 상체가 뒤로 넘어가면서 태주의 오른팔에 갑작스레 무게가 실렸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함께 넘어질 게 뻔해, 남자를 감싸 안을 때였다.
툭, 소리와 함께 몸이 기울어지다가 말았다.
“괜찮아요?”
부드럽게 자신을 받는 품에 눈이 커졌다. 그대로 굳은 태주가 잠시 숨을 멈췄다. 탁.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려놓는 손이 시야 끝에 걸렸다.
길게 뻗은 손가락. 그리고 적당히 도드라진 손등의 핏줄.
이 손의 주인을 잘 알고 있다. 김 주임을 대신해 직접 계호를 맡은 이유였으니까.
“선생님?”
겨우 고개를 돌려 그 얼굴을 확인했다. 이마를 덮은 까만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 여기까지만 확인하면 다른 건 더 볼 필요가 없다. 저 눈동자 하나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다. 이 세상 어디를 뒤져도 이 사람보다 잘 빚어진 남자는 없을 것이다.
멍하니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작게 미소 지은 그가 양 손목을 살포시 감싸 쥐어왔다. 하얀 가운에 매달린 ID카드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Hyeseong University Medical Center Trauma Surgery 연지호]
“자, 천천히 손 빼요.”
조심스레 태주의 손을 거둔 지호가 쓰러진 남자를 살폈다. 먼저 전체적인 모습을 눈으로 훑은 뒤 창백한 안색을 보고 손목의 맥을 짚었다.
“많이 안 좋습니까?”
“네, 그런 것 같네요.”
맥박이 잘 느껴지지 않는지 표정이 좋지 못하다. 지호의 손이 이번엔 환자의 목으로 향했다. 확장된 정맥이 도드라진 게 눈에 보였다.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됐죠?”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오시기 직전입니다.”
“혹시 눈에 띄게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숨 쉬는 걸 힘들어하셨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죠?”
“거기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차 사고가 나기 전부터 상태가 안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술을 드신 것 같지는 않은데, 운전을 제대로 못 하셨습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의식을 잃은 채 허여멀건 얼굴로 눈을 감고 있다.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났다.
“선생님.”
불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남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댄 지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심음이 너무 약해요. 작게 중얼거린 그가 서둘러 남자를 안아 들었다.
“당장 심장 초음파 검사해야 해요. 환자 옮길게요. 태주 씨는….”
“아, 잠시만요! 저기 사람이 옵니다!”
벌떡 일어난 태주가 갑자기 광장 중앙을 가리키며 외쳤다. 병원 사람들이 베드를 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응급실로 달려갔던 여자도 보인다. 다행이다.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조용히 안도할 때였다.
“아, 귀찮게….”
지호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그는 달려오는 의료진이 전혀 반갑지 않은 듯했다. 서둘러 도망치듯 그들과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안한데 구급상자랑 커피 좀 들고 와 줄래요? 보다시피 내가 손이 없어서.”
“예?”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를 따라 태주의 고개가 돌아갔다. 가까운 곳에 구급차가 세워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지 못한 걸로 봐서는 지호가 끌고 온 듯했다.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다가 얼른 구급상자와 커피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 조급하게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이 환자분, 의식을 잃기 전에 눕는 걸 많이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눕자마자 급하게 일어나셨던 것으로 봐서는 누울 때만 통증을 느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큰일이네요. 이 상태로는 응급실까지 옮길 시간도 없겠는데요.”
심전계의 전선이 남자의 가슴에 다닥다닥 붙었다. 지호는 화면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혈압을 재기 시작했다. 심전도 맥박이 무서운 속도로 오르고 있다. 146, 147, 148….
“태주 씨, 환자가 누울 때 어딜 많이 아파했어요? 목? 어깨? 복부? 허리?”
“그게…. 전부 다입니다.”
“네?”
“목, 어깨, 복부, 허리. 전부 다 아프다고 하셨습니다.”
혈압계를 떼던 손이 멈칫했다. 화면에만 집중하던 지호가 조금 놀란 눈으로 태주를 보았다. 마치 ‘제법인데?’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그걸 다 확인했어요?”
“아니, 그냥….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했어요. 고마워요.”
“네? …네.”
당연하게 한 일로 칭찬을 들으니 좀 어색하다. 뿌듯하면서도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사이 병원에서 온 사람들이 도착했다.
“연 교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커피 사러 나간 사람이 구급차는 어떻게 몰고 온 거야?”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환자부터 옮기죠! 야, 연지호!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나와! 김 선생, 얼른 베드 붙여!”
“네!”
구급차 뒷문으로 베드가 바짝 붙었다. 가뜩이나 좁아터진 차에 몇몇이 더 올라탔다. 환자의 가슴에 붙은 전선에 그들의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물러서.”
“하지만 교수님….”
“물러서라고 했어요.”
“….”
“두 번이나 말했는데도 못 알아듣겠어요?”
잔잔하지만 서늘한 목소리가 훑고 지나갔다. 전선을 떼려던 손이 움찔 떨렸다. 다들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자, 그들에게 오더를 내린 의사가 나섰다.
“지금 물러서야 하는 게 누군데 이래!”
그는 자신이 직접 전선을 떼려는 듯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들어 손목을 붙잡는 태주 때문에 그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또 뭐야?”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 응급실까지 옮길 시간조차 없다고 했습니다.”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 당신 의사야? 어? 비켜!”
소리친 의사가 시선을 내렸다. 교도관 정복 가슴에 박힌 이름을 확인하는 듯했다. 태주도 똑같이 시선을 내려 그의 가슴에 붙은 ID카드를 확인했다.
[Cardiothoracic Surgery 이우경]
흉부외과 의사로 지호와는 진료과가 달랐다. 그는 태주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더니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야, 연지호. 너야말로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환자 넘겨. 지금 병원 코앞에 두고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데리고 가서 내부 출혈 있는지 초음파부터 확인해. 그게 순서야.”
“….”
“내 말 듣고 있어?”
“….”
“이봐, 연 교수.”
“….”
“야!”
“….”
“이 새끼가! 너 사람 말이 우스워?”
결국 지호의 옷깃을 붙잡아 당긴 우경이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작은 소동에 수납함이 엎어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바늘이 우수수 떨어졌다.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지호가 애써 화를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이거 놔.”
하지만 우경을 보는 지호의 시선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가운 깃에 붙어 있는 우경의 손을 떼어 낸 뒤, 떨어진 바늘을 주웠다.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네 말, 하나도 안 우스워. 안 우습고 짜증만 나.”
끝끝내 환자를 내어 주지 않은 지호는 다시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나도 웬만하면 순서 지키고 싶어. 내가 원칙대로 하나하나 확인하고 승인받는 동안 환자가 버텨 줬으면 좋겠어.”
“….”
“그런데 그게 잘 안 돼. 내가 만나는 환자의 대부분이 그래. 원리, 원칙, 순서 그런 거 따지는 동안 숨을 놔 버는 경우가 허다해. 그래서 살려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잘 들지 않아.”
무심한 눈빛이 환자에게 닿는 순간 변한다. 신중해지고 진지해진다.
주사기를 쥔 손이 환자의 명치 아래쪽에 자리를 잡았다. 긴 바늘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환자가 누울 때 고통을 느껴. 맥박이 안 느껴지고, 심음은 희미해. 여기에 눈에 보일 정도로 확장된 정맥과 심전계 상태. 이래도 모르겠어?”
“설마, 이 환자….”
“탐폰이야. 당장 응급 시술 안 하면 죽어.”
망설임 없이 주사기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피부를 파고든 바늘이 늑골 안쪽까지 들어갔다. 피스톤을 당기자 혈액이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혈액을 빼던 지호는 그 횟수가 10번이 넘을 즈음부터 심전계 모니터를 확인했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맥박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환자 데려가서 패스트 확인해.”
툭, 피 묻은 장갑이 뒤집힌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호가 구급차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양옆으로 갈라섰다. 슬쩍 눈치를 보는 게, 할 말이 있으나 뱉기 어려워하는 모양새였다.
태주는 멋쩍은 눈으로 그들을 훑다가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지호를 따라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뭐 하고 있어요, 태주 씨?”
“예?”
다행히 고민은 금방 끝났다.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온 신경이 한자리에 정착했다. 몸을 돌려 뒤로 걷는 지호와 시선이 맞닿았다.
“나 만나러 여기 온 거 아니었어요?”
“네?”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아, 그게….”
선생님도 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전 당신을 만나려고 온 겁니다. 미안합니다, 3274.
‘계호’ 두 글자는 잠시 머릿속에서 지워 둔 태주가 얼른 구급차에서 내렸다. 정신없이 지호를 따르려다 멈칫하곤 다시 돌아섰다. 고생하시란 의미로 우경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가요, 태주 씨.”
갔던 길을 되돌아온 지호가 태주의 손목을 잡았다. 사람을 구하는 손이라서 그런지 감긴 온기가 따듯했다.
서둘러 보폭을 맞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기분이 좋아서 자꾸만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나저나 ‘나 만나러 여기 온 거 아니었어요?’라니. 손목을 잡아 이끄는 거 하며, 정말 로코 드라마가 따로 없다. 근사한 그의 얼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대사와 행동이었다.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 구름을 밟은 것처럼 폭신폭신하다. 아, 진짜 멋있다. 뭘 먹었길래 이렇게까지 멋질 수 있을까. 존경하고 동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태주는 황홀한 눈으로 지호의 올곧은 뒷모습을 보았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등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오, 선생님!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마음대로 구급차를 가져가시면 어떡해요! 도난당한 줄 알고 놀랐잖아요. 하마터면 저 징계받을 뻔했다고요. 그래도 환자 구하려고 그러신 거니까 이해는 해 드릴…. 아,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태주의 등 뒤에는 졸지에 구급차 도둑이 된 한 의사가 있었다. 억울하게 잘못을 덮어쓴 우경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 아니야! 나 진짜 아니라고! 연지호 저 새끼 짓이라니까?”
하지만 연지호 저 새끼는 이미 현장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정말이지, 완벽한 범죄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용의자를 만들어 놓고 떠나는 치밀함까지 선보였다.
급격하게 몰려오는 짜증과 피로에 절로 이마가 짚어졌다. 이 능구렁이 새끼가, 그새 어디로 튄 거지?
“왜 환자 떠넘기고 서두르나 했다, 저거.”
“응? 그럼 선생님이 구급차 가져가신 거 아니에요?”
“내가 구급차를 왜 가져가요! 이 병원에서 그런 짓 할 새끼가 나겠어요, 걔겠어요?”
개새끼. 여우 같은 새끼. 나이는 손가락으로만 처먹은 새끼. 속으로 연신 욕을 읊조린 우경이 구조 요원의 등을 떠밀었다. 일단 환자가 먼저니까 저 앞까지 운전 좀 부탁합시다.
* * *
“아, 커피 놓고 왔다.”
갑자기 걸음을 멈춘 지호가 귓불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여태 잡은 태주의 손목을 발견하고 슬쩍 손아귀의 힘을 뺐다.
“미안해요. 너무 멋대로 붙잡고 있었네.”
“아니요! 괜찮습니다!”
태주는 아쉬운 눈으로 손목을 슬쩍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지호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따라 걸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다. 약 한 달, 정확히는 37일 만이었다.
‘내가 당신 살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칼에 찔려 죽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던 그때, 남태주를 구한 사람이 바로 여기 있는 연지호였다. 병원 내에서는 물론, 학계에서도 실력 좋기로 잔잔히 알려진 그는 동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남태주의 눈에는 말이다.
수술 후, 의식을 찾은 태주는 지호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 죽어 갈 땐 시야가 흐려서 이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그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햇살처럼 따스하게 반짝이는 그를 보면서, 뭐 이렇게 다 가진 사람이 있나 생각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고, 미소가 지어졌다. 오죽하면 환자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도 ‘천사 선생님’이었다.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덕분에 한동안은 매일같이 지호를 볼 수 있었다. 퇴원 날짜가 정해졌을 때는 아쉬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당연히 겉으로 내비치지는 못하고, 조용히 퇴원했다.
그렇게 한 달이었다. 얼굴을 못 본 지 한 달이 훌쩍 지나 버렸다.
매일같이 만났던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죽을 맛이었다. TV에서도 볼 수 있는 아이돌을 왜 굳이 직접 보러 가는지, 그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아침마다 컨디션을 체크해 주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갑자기 내 삶에 찾아온 빛과 소금. 나의 우상.
연지호는 생김새와 실력이 잘난 것도 모자라서, 성격도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한 번도 그가 소리치며 화를 내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게다가 주변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꾸준히 기부까지 한다고.
어떻게 사람이 이러지? 이게 천사가 아니면 뭘까?
정말이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그래서 자꾸만 보고 싶고, 할 수 있다면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돈 많은 집안 식구를 닦달해 병원에 후원까지 할 정도였다.
“태주 씨.”
“….”
“태주 씨?”
“아, 네!”
잠시 생각하느라 부르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움찔한 태주가 지호를 보았다. 분명 같은 속도로 걷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격차가 꽤 벌어져 있었다.
후다닥 달려가 곁에 섰다. 오랜만에 우상을 만나서인가? 왠지 조금 긴장이 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까 그 환자 때문에 너무 놀라서 그런 건가?”
“아뇨. 그, 물론 놀라긴 했습니다만. 많이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이번엔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그러다 문득, 목적지를 정한 것도 아닌데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병원에 바로 안 가 보셔도 됩니까?”
“지금 돌아가면 골치 아파져서요. 커피도 다시 살 겸 카페에 들렀다 가게요. 태주 씨는요?”
“저는 수용자 외부 진료 나왔다가 커피 심부름 가는 길입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까 직업이 교도관이라고 하셨죠?”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제가 담당한 환자에 관한 건 거의 기억해요.”
보폭을 크게 벌린 지호가 한 걸음 앞섰다. 그대로 몸을 돌려 뒤로 걸으며 태주를 마주 보았다. 그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손끝으로 새침하게 입술을 두드렸다.
“게다가 우린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잖아요. 내 입술 깨문 거 기억나요?”
“아니, 그건….”
순간 당황한 태주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장난이라는 걸 금세 눈치채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짓궂은 장난도 할 줄 아십니까? 긴장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얼핏 한 장면이 떠오른다. 쉴 새 없이 흐르는 피에 체온은 뚝뚝 떨어지고,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을 때였다. 조금만 더 버텨 달라는 지호의 말에 이를 악물었는데, 뭔가 말캉한 것이 으득 씹혔다. 알고 보니 숨을 불어 넣어 주고 있던 지호의 입술을 깨문 것이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세게 깨문 탓에 피가 줄줄 흘렀다고 한다.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왔을 땐 마스크가 피에 젖어 있었다고.
“그때, 많이 아프셨습니까?”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생각이 난 김에 물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작게 사과를 덧붙이는데, 눈치 없는 밤바람이 찬기와 함께 불어닥쳤다.
다시 몸을 빙글 돌린 지호가 똑바로 앞을 보고 걸었다. 이마를 덮은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반질반질한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글쎄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
“태주 씨한테 온 신경이 쏠려서 아픈 것도 몰랐어요.”
카페 문을 활짝 연 그가 먼저 들어가라는 듯 미소 짓는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미소에 태주는 온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부시게 환한 탓에 머릿속까지 아주 새하얘졌다.
메뉴에 적힌 글자를 하나도 못 읽겠다.
어, 그러니까…. 뭐 사 오라고 했더라? 따뜻한 그린티 스무디랑, 바닐라 딸기, 그리고 라떼 라떼…. 뭐 이런 거 아니었나?
메뉴는 제대로 골랐는지, 계산은 제대로 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대충 주문을 마치고, 다시 온 신경을 지호에게 두었다.
* * *
“벌써 다 왔네요.”
“네?”
나긋한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앞으로 펼쳐진 풍경에 화들짝 놀랐다. 진짜 왜 벌써 다 온 거지?
누군가 남태주의 시간을 한 토막 정도 훔쳐 간 모양이다. 분명 조금 전에 음료 주문을 마쳤는데, 눈 한 번 깜빡였더니 병원 앞이다. 두 다리로 걸은 기억이 없건만, 왜 몸이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진짜, 벌써 다 왔네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숨긴 채 지호를 보았다. 시선이 맞닿았다.
“외부 진료 환자가 생기면, 항상 우리 병원으로 오는 거예요?”
“거의 그렇습니다. 병실이 다 찼거나, 진료 대기가 긴 경우만 제외하면요.”
“그럼 종종 만날 수도 있겠네요. 아, 그렇다고 외부 진료를 할 만큼 심각한 환자가 생기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지호가 반가웠다며 손을 내밀었다. 환자를 돌보느라 고생했을 텐데도, 그의 손은 못난 곳 없이 예쁘기만 했다.
왠지 모를 뭉클함과 이제 헤어진다는 서운함이 속에서 뒤섞였다. 태주는 몰래 입술 뒤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떨리지 않도록 팔에 조금 힘을 주며 손을 맞잡았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맞잡은 손은 떨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짧은 악수였다. 조용히 손을 쥐었다 편 뒤, 가 보겠다며 몸을 돌렸다. 한 발짝씩 뗄 때마다 간절히 빌었다.
불러라. 불러라. 제발 불러.
“잠깐만요, 남태주 씨.”
아싸! 속으로 쾌재를 부른 태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놓았다. 기쁨을 누르며 의연한 척 고개를 돌렸다. 가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 지호가 성큼 다가왔다.
“종종 오게 되면 연락해요. 이렇게 얼굴 보니까 좋네요. 또, 태주 씨한테 궁금한 것도 많고요.”
“저한테, 궁금한 거요?”
“혹시 제가 부담스럽게 했나요?”
“아니요! 전혀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얼른 두 손을 뻗어 정중히 명함을 받았다. 소중히 챙기며 정복 주머니를 뒤적였다. 받았으니 이번에는 줄 차례였다.
“그럼 제 명함도….”
하지만 정복 주머니 안에서 집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핸드폰도 두고 나온 마당에 명함이라고 챙겼을 리 만무했다.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손이 멋쩍게 뒷머리로 향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명함을 못 챙겼네요. 나중에 기회 되면 제 명함도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태주 씨 연락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모르는 번호로 와도 웬만하면 다 받을게요. 그럼 들어가요.”
이제 진짜 작별이다. 지호가 먼저 여운을 그리며 걸음을 뗐다. 타이밍을 놓쳐 마주 인사하지 못한 태주는 멍청하게 서서 그의 뒤꽁무니만 보았다.
긴 다리가 성큼성큼 로비 쉼터까지 잘도 걷는다. 목적지는 달라붙은 떡처럼 늘어져 있는 동료 의사 앞이었다. 혜성대 병원의 천사는 다정한 손길로 늘어진 떡을 토닥여 주었다.
별것도 아닌 그 장면을 얼마나 오랫동안 봤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바라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느새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역시. 역시나 연지호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다.
* * *
“어? 나, 바닐라 라떼라니까 왜 마키아또를 사 왔어요?”
“응? 그거 바닐라 라떼 아닙니까?”
“여기 거품 위에 시럽 봐요. 바닐라 시럽 아니잖아.”
“아, 그러네요. 아이고. 어떡하지?”
내용물을 확인한 이 부장이 컵 안을 보여 주었다. 죄송하다며 멋쩍게 웃은 태주가 오늘만 봐달라며 애교를 부렸다. 필요할 때만 나오는 생계형 애교였다.
“다음엔 제대로 사 드릴게요.”
“뭐, 그래도 단 건 똑같으니까. 잘 마실게요.”
순순히 넘어간 이 부장은 더 뭐라 하지 못했다. 얻어 마시는 입장에서 뭘 더 불평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단 건 똑같으니 그냥 마시기로 했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흐흥….”
직장 동료가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더니 이상해졌다.
뭐야, 무섭게. 왜 저러지? 길 가다 돈이라도 주웠나? 옷은 또 왜 저렇게 구겨졌대?
그 짧은 새에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사람이 배가 뚫리면 머리도 이상해지는 건가. 이제는 걱정스러워서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남 부장, 아까부터 왜 자꾸 쪼개요? 뭐 좋은 일 있어?”
“맞아요. 남 부장님 들어올 때부터 함박웃음인 게 좀 이상했어요.”
“뭔데 그래요? 우리도 같이 좀 알아요!”
화제를 열자 동료 교도관들이 너도나도 궁금하다며 끼어든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알자는 듯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
“네? 아니, 뭐 그냥….”
내가 그렇게 티를 냈나? 환했던 태주의 얼굴이 애매하게 흐려졌다. 그는 쥐고 있던 지호의 명함을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그냥 오랜만에 일하니까 좋아서요.”
그러자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시선이 날아들었다.
[1] 탐폰 (Cardiac Tamponade) 심낭압전. 심낭에 혈액이 고여 심장을 누름으로써 심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혈압이 떨어지는 상태.
[2] 패스트 (Focused Assessment with Sonography for Trauma) 외상 초음파 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