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를 잡아서 다시 눕히고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저녁 내내 무서운 아저씨한테 구박 당하면서 내 마음도 조금은 서운했던지, 이렇게 망가진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다른 놈이 채가지 않을까 걱정해 주는 남자친구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물론 제정신인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하루 정도 날씨가 반짝 맑더니, 다음날부터 또 다시 금방 눈이라도 퍼부을 것처럼 하늘이 무거워졌다. 기온은 하루하루 떨어져서 늘 영하 10도 근처에서 머물렀고, 한낮에도 수은주가 좀처럼 영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온 지 이제 사흘째였다. 지난 사흘간 거의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진 탓인지, 아니면 기린이 없어서 그런 건지 온 몸이 아팠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별장에 있을 때엔 불편한 대로 한두 시간 정원 산책도 했었는데, 여기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쳤다.
“루크…….”
루크는 창가에 서 있었다. 손에 커피 잔을 쥐고 있긴 했지만, 커피를 마시는 건 아니었다. 요즘 들어서 루크는 자주 창밖을 쳐다보는 척,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몇 시간이고 저러고 있으면 그 모습이 마치 교회 종탑 같은 데 웅크리고 앉은 가고일 같아 보일 정도였다.
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경황도 없고, 루크하고 떨어져 있을 때가 많아서 미처 몰랐는데 언제부터 저렇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던 걸까?
일어나려고 부스럭거리자 루크가 나를 돌아봤다.
“이리 좀 와 봐.”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눕고 말았다.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와서 내 몸이 급격히 악화된 건 아니다. 더뎌서 그렇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속도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기까지 반 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루크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다가왔다.
“깼어?”
깬 지 좀 됐다. 루크가 눈치를 못 챈 거지.
“너 요즘 무슨 고민 있지?”
“그야 뭐…….”
루크가 습관처럼 내 이마와 목덜미를 짚었다. 며칠째 불쑥 열이 올랐다 떨어지곤 해서, 루크는 같이 있을 때면 이런 식으로 내 얼굴부터 더듬었다.
“무슨 일이야? 영감님들 패싸움은 해결했다면서? 그거 말고 더 곤란한 일이라도 생겼어?”
“일이야 많지. 한 군데 간신히 틀어막으면 다른 데 터지고, 거기도 묶었다 싶으면 또 다른 데가 말썽이고…… 항상 그런 식이야.”
그야 뭐, 하는 일이 범죄조직 보스니까 당연히 그렇겠지. 게다가 루크는 범죄조직 보스치곤 특이한 일도 많이 하는 편이고…… 내가 지척에서 지켜본 일만으로도 뱀파이어 사냥하기, 흑풍회 보스 자리를 놓고 처사촌하고 한판 붙기, 시간을 담은 병을 두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정면대결하기 등등…… 루크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큰 사건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어떤 위기 상황이 코앞에서 닥쳤어도 이런 식으로 티 나게 울적해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얼버무리지 말고 구체적으로 얘길 해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또 뭐가 안 좋아? 혹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루크하고 루소 의원 사이에 꽤나 험한 말이 오고간 모양이던데, 혹시 그것 때문에 곤란해진 걸까?
“꼭 그런 건 아니야.”
“꼭 그렇지 않다는 건 무슨 뜻이야?”
내가 집요하게 캐묻자 루크가 흠……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바바라 소사가 요즘 부쩍 자주 만나고 있어.”
아…….
“둘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겠어? 머리 맞대고 나를 잡아 죽일 궁리나 하겠지.”
프란시스 몬티첼리. 과거 15년간 이 도시의 왕으로 군림했던 잔혹한 남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고 하루아침에 몰락했지만, 절대 순순히 물러설 리 없는 끈질긴 악당. 잠시 잊고 있었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게다가 몬티첼리가 바바라 소사하고 손을 잡았다면 분명 치밀하고 치명적인 리벤지 매치를 준비하고 있을 거다.
“큰일 났네. 어떡하지?”
말만 들어도 골이 띵해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나온 길도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는데, 앞날도 이렇게 첩첩산중이라니…… 그러게 애초에 흑풍회 같은 걸 뭐하려고 집어먹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또…….”
“뭐가 또 있어?”
청연루가 쑥대밭이 된 게 그렇게 오래전의 일도 아닌데, 뭐가 또 동시다발로 터지나 보다 싶어서 아픈 것도 잠시 잊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니가 도통 기운을 못 차리고 이렇게 뻗어 있으니까 심란해.”
“그야 뭐…….”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어수선한데 나까지 걱정거리를 안겨준 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차차 괜찮아지겠지.”
“그리고 니가 자꾸만 잠꼬대로 니콜라스를 불러대는 것도 기분 나빠.”
자면서 니콜라스의 이름이라도 불렀던 걸까? 루크가 유감이 가득한 눈길로 노려보는 걸 보니…… 그랬나 보다.
“그건, 자꾸만 꿈에 나오니까…….”
아픈 척 하면서 슬그머니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루크는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루크가 내 턱을 잡아서 눈을 맞췄다. 내가 몸져누운 이후 분위기가 처음으로 살벌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
“경고하는데, 한번 만 더 그 자식한테 휘말려서 이렇게 터져오면 나도 더는 못 참아.”
“뭘…… 어쩔 건데?”
“본가에 있는 지하 감옥에 가둬버리겠어.”
루크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어?”
루크가 나를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아니, 난 그냥…… 그래도 헤어지자는 소리는 안 하는구나 싶어서…….”
“뭐가 어째?”
루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면회는 오는 거지? 그 지하 감옥 말이야…….”
“농담으로 때우고 넘길 생각 하지 마. 난 심각해.”
겨우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갑자기 몸이 축 늘어졌다. 또 열이 오르나?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끌어 덮자 루크가 수상쩍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엄살 피우지 마. 너, 요즘 들어서 좀 몰린다 싶으면 상습적으로 죽는 시늉이야.”
대답 대신 루크의 손을 잡아서 이마에 얹었다. 그제야 녀석이 좀 누그러진 표정으로 침대에 올라와서 곁에 누웠다.
“루크.”
“왜?”
녀석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사실은 나도 니가 한 말, 못 믿겠어.”
“무슨…… 말?”
“아무리 생각해도 프란시스 몬티첼리 때문에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니가 언제부터 그런 일로 며칠씩이나 고민을 했어?”
“지금은 프란시스 몬티첼리보다 니가 더 걱정이야.”
투덜거리면서 루크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루크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을 수 없는 말이 있는 것처럼…… 루크에게도 비밀이 있다. 의외로 감추는 거 없는 화통한 성격인데, 이렇게 혼자만 품고 있는 비밀은 어떤 걸까? 집요하게 묻고 다그치면 진실을 알 수도 있겠지만,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루크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키스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이상의 효과는 없어서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아무래도 날 밝는 대로 별장에 사람을 보내서 새끼 기린을 잡아 와야겠어.”
루크가 내 등을 다독거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또 다시 큰 눈이 내리기 전에 애들을 시내로 데려오기는 해야 된다. 해안 별장이 아름답긴 하지만 폭설에 길이 막히면 식량 확보가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니다. 하지만 아빠 기린도 따라올 텐데, 괜찮을까?
발렌타인, 킵, 마커스, 푸웨이 그리고 부하 두 명…… 머리가 하나 모자라는데?
별장 식구들이 펜트하우스에 들이닥친 건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눈으로 막혔던 길은 내가 돌아온 다음날 오전에 풀렸고, 덕분에 그간 다들 잘 먹고 편하게 지냈는지 얼굴에서 빛이 났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확 갔네.”
발렌타인이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발렌타인은 그간 기린하고 어지간히 잘 지냈는지 이젠 나보다 더 젊어 보였다. 내 얼굴은 지금 나이가 문제가 아니지만…….
“그러게 별장에 같이 있지, 시끄럽고 먼지 날리는 여긴 왜 와?”
킵이 나를 끌어안고 다짜고짜 입부터 맞췄다. 언제부터 우리가 키스 정도는 이렇게 대뜸, 자연스럽게 하는 사이가 된 걸까? 느낌은 좋은데, 임자 있는 몸이라서 양심이 찔렸다. 발렌타인의 눈총에 뒤통수도 따끔거리고…….
“그런데, 아버님은?”
킵을 밀어내고 문 쪽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누가 더 들어오는 기척은 없었다. 내 물음에 킵이 어깨를 으쓱했다.
“갔어.”
“가다니?”
“어딜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어. 어제 아침에…….”
놀라서 킵을 쳐다봤다. 가버리다니, 어디로?
“아마 라두칸을 만나러 갔겠지. 그것 때문에 온 거니까…….”
킵의 태도와 표정엔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아직 어려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아빠가 정말 싫어서 어디 가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걸까?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할 것 같아서 킵은 옆으로 밀어 놓고 세상 물정 알 만큼은 아는 발렌타인과 마주 섰다.
“어떻게 된 거야? 제월공이 니콜라스를 찾아갔어?”
“그렇게 됐어.”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발렌타인도 태평하긴 마찬가지다.
“니콜라스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고…….”
“새를 풀어서 알아봤겠지. 반나절 정도 까마귀며, 갈매기며 부지런히 오고갔거든. 라두칸은 아직 루소 의원 집에 있는 것 같아. 아침에 보니까 우리 마당에 모여 있던 새들이 그쪽으로 다 옮겨 갔더라고.”
“그래서, 어디 가는지 알면서도 그냥 뒀어? 거긴 호랑이굴이야. 그 놈들은 니콜라스도 죽일 작정을 하고 있는데, 제월공은 그냥 두겠어?”
대체 제월공은 무슨 생각으로 혼자서 거길 간 걸까? 가서 점잖게 니콜라스를 내달라고 하면 놈들이 순순히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제월공은 뭘 몰라서 그런다 치고, 발렌타인은 제월공이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데도 왜 말리지 않았을까? 혹시, 킵과의 관계가 들통 나는 게 두려워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발렌타인이 발끈해서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내 기분도 그렇게 좋지는 않다.
“당신 태도가 수상하잖아? 제월공을 그렇게 순순히 보낸 이유가 뭐야? 당신은 기사단이 어떤 놈들인지 잘 알잖아?”
“제월공도 그 정도는 알아.”
“예전에 돌도끼 들고 전쟁할 때하고 지금 상황이 같아?”
제월공이 깨달은 종족의 대장로라고는 해도 내가 볼 때, 위기 상황에서 써먹을 유용한 재주는 없었다. 새를 다스린다고는 하지만 새 몇 마리로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기사단을 대적할 수 없다. 하지만 발렌타인의 얼굴엔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깨달은 종족이 바보 같아 보일 때도 많지만 진짜 바보는 아니야. 넌 니 걱정이나 해.”
나는 열 받아서 소파에 몸져누웠고, 발렌타인은 씩씩거리며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 사이에 용하고 기린은 곧바로 냉장고 털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 집엔 직접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 보니 냉장고에도 별게 없다.
“어떻게 저 큰 냉장고에 말라비틀어진 당근 한 개도 없을 수가 있어?”
킵이 맥주 한 병을 쥐고는 툴툴거리며 내 머리맡에 와서 앉았다. 넌 무슨 아들이 아버지가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가 있냐?
“배고파?”
“점심때잖아.”
그렇게 대꾸하면서 킵이 내 머리를 자기 다리에 얹더니 강아지 쓰다듬듯 함부로 만지고 토닥거렸다. 오늘따라 둘 다 꼴 보기 싫다. 이럴 거면 그냥 발렌타인을 데리고 히말라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푸웨이하고 근처 식당에라도 가. 차이나타운엔 널린 게 식당이니까…….”
“그럴까?”
오랜만에 외식할 생각에 킵이 입맛을 다시며 마커스를 돌아봤다.
킵과 마커스가 머리를 맞대고 점심을 어떻게 먹을지에 관한 길고 긴 토론과 협상에 돌입했다. 오랜만에 차이나타운에 왔으니까 중국집엘 가자, 큰길 가에 새로 생긴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 그러지 말고 두루두루 시켜서 먹자…… 이러면서 한창 심각한 실랑이를 벌이던 둘은 결국 점심은 각자 먹고 싶은 거 먹고, 저녁을 시켜서 같이 먹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커스는 고기 좋아하는 푸웨이하고 오리고기 전문점에 가기로 했고, 킵은 신선한 샐러드가 잔뜩 있는 건강식 전문 레스토랑에 같이 가자며 발렌타인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생각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갔다 와.”
“그럼, 오는 길에 뭐 좀 사다 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기린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라떼 한잔 사 와. 청연루 옆에 있는 작은 가게 있지? 우리가 가끔 들러서 커피 마시던…… ”
기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렌타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 침대 머리맡에 뒀던 내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 올 데가 없는데…… 루크가 걸었나?
기린을 내보낸 발렌타인이 축 늘어진 내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건넸다.
비니한테서 온 전화였다. 요 며칠은 비니한테서도 통 연락이 없었다. 경찰서에서도, 다른 동료들한테서도…… 어차피 한동안 복직은 글렀지만, 벌써부터 세상에서 잊혀진 느낌이었다.
“비니?”
「몸은 좀 어때?」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고, 보고 싶었다. 터너하고 에쉬도 보고 싶고, 엔디도 보고 싶다. 하지만 만나려면 내가 나가야지, 걔네들이 중국 마피아의 거처를 드나들기는 어렵다.
“괜찮아. 넌?”
「눈 때문에 며칠 꼼짝도 못했어. 넌 계속 별장에 있는 거야?」
“아니, 차이나타운이야. 폭설 때문에 별장은 좀 불편해서…… 근처에 있으면 잠깐 볼래?”
「난 지금 작은아버지 댁이야.」
“그래?”
해안 별장이었다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린데, 길이 엇갈렸네.
“그럼 시내에 나오면…….”
「제이?」
“응?”
「오웬을 찾았어.」
전화를 끊고 발렌타인을 힐끔 쳐다봤다. 벽난로에서 활활 타는 장작불을 들여다보던 발렌타인도 그때 하필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눈길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왜?”
“아냐, 아무것도…….”
그렇게만 대답하고 슬그머니 일어나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되는대로 옷을 찾아 입었다. 몸이 아프다 보니 옷 입는 것도 힘들어서 청바지에 스웨터 하나 입는 것도 15분이나 걸렸다.
옷은 대강 입었는데, 양말은 어떻게 신지? 몸이 잘 굽혀지질 않다 보니 양말 신는 게 의외로 난이도가 높았다. 양말을 붙들고 드레스룸을 굴러다니며 낑낑거리고 있는데 발렌타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하는 거야?”
“옷 입어.”
“왜?”
“잠깐 나갔다 올 건데…….”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발렌타인을 따돌릴 방법은 없다. 게다가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나, 차 좀 빌려줘.”
루크의 해안 별장 차고에는 쓸 만한 벤츠도 한 대 있었다. 별장도 넘긴 마당에 루크가 차 한 대 갖고 깐깐하게 굴지는 않았을 테고, 푸웨이와 부하들도 차가 한 대뿐이었으니까 마커스하고 킵은 그 차를 타고 왔을 거다.
“차는 뭐 하게?”
발렌타인이 뚱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니까?”
“양말도 혼자 못 신으면서 어떻게?”
“…….”
어렵사리 양말을 다 신고 비틀거리며 드레스 룸에서 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잠깐 누웠다. 본래는 발렌타인한테서 차 열쇠를 받아서 바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렌타인 말이 맞다. 이 상태로 장거리 운전은 무리다. 잠깐 옷만 입고 나왔을 뿐인데 온 몸이 다 저리고 아프고…… 기린이 잠깐 만져준 것도 그 사이 약발이 다 했나 보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발렌타인이 벗어놨던 재킷을 뒤적이더니 차 열쇠를 꺼내서 내 앞에 툭 던졌다. 뭘 어떻게 할지 보고 싶은 모양이다. 그 태도가 거슬려서 이를 악물고 일어나 앉았다.
“나 좀 도와줘.”
“싫어.”
발렌타인이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거절부터 했다.
“어려운 일을 해달라는 게 아니야. 그냥 몬티첼리 저택까지 운전만 좀 해줘.”
몬티첼리 저택에 데려다 달라는 말에 발렌타인이 살짝 호기심을 보였다. 거긴 친구네 집이기도 하니까…….
“거긴 왜?”
“비니가 지금 그 집에 있대.”
“비니를 보러 가는 건 아니잖아?”
거 참, 되게도 깐깐하네.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싫다는 사람을 붙들고 계속 사정을 하기도 구차해서 그냥 일어났다. 생각해보니까 발렌타인 신세를 안 지고도 몬티첼리 저택으로 갈 방법은 있었다.
“그냥 택시 타고 갈게.”
내가 어떻게든 몬티첼리 저택으로 갈 작정이라는 걸 깨달은 발렌타인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군소리 없이 재킷을 걸쳤다.
한낮인데도 날이 흐려서 저녁 무렵 같더니, 해안도로로 접어들자 눈발이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길이 막혀서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만 해도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요즘은 이렇게 오래 앉아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시트를 최대한 젖히고 거의 누워서 가는데도 차가 흔들릴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스팔트에 파인 곳이라도 있었는지 차가 한차례 요동을 쳤다. 그 바람에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이자 발렌타인이 나를 힐끔 노려봤다.
“괜찮아?”
“응…….”
“지금이라도 차이나타운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여기까지 와서 그럴 순 없지.
“계속 가.”
“그 집에 누가 있는데 이렇게 고집이야?”
“오웬.”
내 대답에 발렌타인은 드러내놓고 놀라거나 못마땅한 티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차를 갓길에 댔다. 오는 내내 이렇게 눈치주고 신경 쓰이게 할 줄 알았으면 속편하게 택시를 탔을 거다.
“부탁이야. 계속 가…… 이제 얼마 멀지도 않잖아?”
“어쩔 작정이야? 녀석을 앞세워서 루소 의원 집에 쳐들어갈 거야?”
“그게 가능할까?”
“정신 차려.”
딱 잘라 면박을 주면서 발렌타인이 차를 출발시켰다. 다음 교차로에서 차 돌려서 돌아갈 기세였다.
“쳐들어간다기보다…… 오웬은 루소를 개인적으로 알더라고. 그러니까 일단, 가서 말은 해볼 수 있잖아?”
“무슨 말?”
잘 모르겠다. 사실, 말 몇 마디로 니콜라스를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상황이 안 좋은 건 나도 알지만, 니콜라스를 죽일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시간을 담은 병은 루크가 가졌어. 그게 없으면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못하잖아?”
“살아만 있으면 그자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높이 평가해줘서 고맙지만, 니콜라스는 그렇게까지 천하무적은 아니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었으면 경찰에 체포되지도 않았을 거고, 루소의 사병들에게 속수무책 잡혀 있지도 않을 거다.
“라두칸은 그만 잊어. 옛날 남자 때문에 자꾸 이러는 거…… 루크 첸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발렌타인이 속도를 늦추며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꾹 찔렀다. 전방에 시내로 들어가는 램프가 있다. 그리로 빠져서 돌아갈 모양이다.
“니콜라스는 도움이 필요해.”
“그 하이렌더가 왜 그자를 돕겠어?”
“니콜라스의 친구잖아.”
발렌타인이 큭 하고 웃었다. 내 대답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웃겼을까?
“왜 웃어?”
“라두칸에게는 친구가 별로 없어. 깨달은 종족하고는 사이가 안 좋고, 인간은 너무 빨리 죽어버리니까…… 그자에게 친구는 제월공뿐이야.”
“뭐, 둘이 꼭 친구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한, 둘은 만난 적도 없어.”
그럴 리가 있나? 오웬은 예전에 니콜라스의 사주로 검은 용을 죽였었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부터 니콜라스를 찾아다니고 있었고…… 그리고 마리우스하고도 굉장히 친하다. 마리우스의 장서각에도 자주 들리던데, 정작 니콜라스하고 모르는 사이라니?
“라두칸과 깨달은 종족이 검은 용을 잠재우고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했을 때, 불멸의 기사를 찾아서 임무를 맡긴 건 나였어. 오웬은 내 친구야. 라두칸의 친구가 아니라…….”
“하지만…….”
“하이렌더는 깨달은 종족들의 기사야. 깨달은 종족이 하이렌더를 종으로 부리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부탁이나 심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어. 그게 하이렌더의 의무니까…… 오웬은 라두칸이 아니라 마커스하고 킵을 찾고 있었던 거야.”
“그래도…….”
“둘이 어쩌다 마주쳤을 수도 있고, 죽 알고 지냈을 수도 있지. 오웬은 장서각의 수호기사를 동생처럼 보살펴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라두칸의 정체를 알고도 친구하겠다고 다가갈 자는 많지 않아.”
“왜?”
“두려우니까.”
발렌타인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가끔…… 발렌타인은 이런 시선으로 나를 볼 때가 있었다. 조금은 안쓰러운 듯, 안타까운 듯,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듯…… 이제 보니까 이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놈을 쳐다보는 눈빛이었다.
“물론 그자의 교활한 꼬임에 넘어가서 비명횡사한 인간은 꽤 될 거야. 그건 너도 알지?”
물론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아무 데나…… 차 좀 세워봐.”
슬슬 차를 몰던 발렌타인이 해안 절벽 초입에 차를 세웠다. 어느새 눈발이 풀풀 날려서 세상이 온통 회백색이었다. 날리는 눈발만큼이나 내 마음도 어지러웠다. 우선 오웬이 위험을 무릅쓰고 루소 의원의 집에 찾아갈 만큼 니콜라스하고 친하지 않다는 게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또…….
“당신 정체가 대체 뭐야?”
“대체 몇 번을 물어봐? 그 질문엔 전에 대답을 했잖아.”
“나한테 거짓말했어. 평범한 인간이라며?”
“거짓말한 적 없어.”
거짓말이다. 내가 짭새가 아니라도, 그리고 컨디션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그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천년 전에 깨달은 종족의 심부름을 해줬다면서? 평범한 인간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
게다가 얘기를 종합해보면 깨달은 종족에, 기사에, 현자에…… 주로 고위층들하고만 놀았다. 그것도 수상하다.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하나뿐이야. 난 그냥…….”
“인간이라고 우기는 건 봐줄게. 하지만 아무리 양보해도 평범하진 않아.”
발렌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그건 내 꿈일 뿐이지.”
발렌타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서 액정을 확인한 발렌타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좋기는 되게 좋은 모양이다.
“왜?”
「어디 있어?」
킵이 다짜고짜 행적부터 캤다. 녀석이 이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병원에서 사라져버린 발렌타인을 찾아서 온 도시를 헤맨 적이 있으니까…… 발렌타인을 손에 넣기까지의 전 과정이 킵에게는 만만치 않았지만, 그때처럼 놀라고 당황한 적도 없었을 거다.
“잠깐 나왔어.”
「커피 사왔는데…….」
“너 마셔. 너도 좋아하잖아.”
「언제 들어와? 멀리 갔어?」
“아냐, 금방 들어갈 거야.”
「팔찌를 풀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킵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발렌타인의 손목이 허전한 걸 깨달았다. 워낙 가늘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지만…….
“금방 들어간다니까? 짭새 아저씨가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보채서 데리고 나왔어.”
전화를 끊고 나서 발렌타인이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며칠 전 같은 폭설이 내린다면 오늘 안으로 차이나타운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돌아가서 마피아 남자친구한테 어리광이나 피워. 넌 그게 제일 잘 어울려. 그럴만한 자격도 있고…….”
그런 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할 거다.
“계속 가.”
발렌타인이 핸들을 잡은 채 나를 쳐다봤다. 아까 본 것보다 두 배는 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오웬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 굉장히 오래 살았고, 세상 풍파도 겪을 만큼 겪었어. 그리고 타고난 기질도 냉담하고 무심한 놈이야.”
“그래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는단 뜻이야.”
애초에 오웬을 찾은 건, 그가 니콜라스의 절친한 친구고 니콜라스를 위해 기꺼이 위험을 무릅쓸 만큼 친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이 좁은 세상에서 수천 년을 살면서도 둘이 친구가 아니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긴, 순조롭게 술술 풀리면 내 인생이 아니지.
“일단 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발렌타인이 짧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뭘 어쩌는지 구경이나 하자는 듯…….
지난겨울,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을 당해서 자택이 폐허로 변하고 수하의 주요 조직원들을 대부분 잃은 후, 완전히 몰락해서 개털이 됐다는 항간의 소문과는 달리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새집은 서부호수 근처에 있던 그 저택만큼이나 크고 번듯했다. 생각해보면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제위기간도 짧지는 않았으니, 집 한 채 날아간 정도는 큰 타격이 아니었을 거다. 무너지거나 이탈한 조직을 재정비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경계가 삼엄한 몬티첼리 저택의 정문을 발렌타인은 가벼운 인사 한번으로 통과했다. 내가 아는 한 쿠간 시 최고의 마당발은 비니였는데, 발렌타인에 비하면 녀석은 우물 안 개구리만도 못하다. 대체 이 작자는 정체가 뭘까?
발렌타인이 현관 앞에 차를 댔다. 내 몸 상태를 고려해서 최대한 문 앞에 바짝 댔지만, 차에서 내리는 데만 10분이 걸렸다. 그동안 발렌타인은 짜증을 내지도, 나를 재촉하지도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다. 표정은 점점 더 썩어갔지만…….
“사이몬!”
문을 열고 발렌타인을 반겨준 건 레빈이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혼자 왔나? 그 귀여운 친구들은…….”
레빈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아직 병원에 있을 때였다. 그 이후론 바쁘기도 했고, 루크하고 그렇게 엮이는 바람에 민망하기도 해서 따로 연락하거나 찾아오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본 레빈은 여전해 보였다. 몸도 괜찮아 보였고…….
레빈과 눈이 마주쳐서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레빈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잠시 후엔 놀라서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형사님?”
“이젠 그냥 제이라고 부르세요. 휴직한 지 한참 됐으니까…….”
“다쳤단 얘기는 들었지만, 얼굴이…… 아니, 어떻게…….”
놀라서 말을 못 잇고 버벅거리는 레빈의 등을 발렌타인이 툭 쳤다.
“안에 비니 있어?”
“어…… 응…….”
“그럼 이 녀석은 비니한테 데려다줘. 프란시스는 거실에 있나?”
발렌타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레빈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곤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도 정도가 있지,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투덜거리며 레빈이 내 등을 다독거렸다. 오랜만에 레빈을 보니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반가웠다. 루크만 아니었으면 그간 자주 만나고, 좀 더 친하게 지냈을 텐데…….
레빈이 발렌타인과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저택 끄트머리에 있는 막다른 방이었다. 게임룸이라기에 모여서 비디오 게임이라도 하고 있나 했는데, 마피아 대부님의 놀이방은 일반인들의 그것보다는 매우 부티 나고 격조가 있었다. 비니하고 오웬, 그리고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커다란 방 한 가운데 설치된 호사스런 당구대에 둘러서서 한창 당구를 치는 중이었다.
자기 차례가 돌아왔는지 막 공을 치던 오웬이 들어서는 나를 힐끔 보고는 삑사리를 냈다. 내 몰골이 쇼깅하긴 한 모양이다. 몬티첼리도 저놈은 뭐냐…… 하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허, 하고 조그맣게 혀를 찼다.
“짭새?”
돌아보니 가르시아가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문 초소에서도 그렇고, 집안을 오가는 경호원들 중에서도 아는 얼굴이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온 가르시아를 보니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짭새가 이러면 안 되는데…… 개인적으로 요즘은 조폭들이 경찰서 동료들보다 더 익숙하고 친근했다.
“얼굴이 왜 그래?”
가르시아도 남의 얼굴 아까워할 처지는 아니었다. 천행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가르시아의 얼굴은 한창 몸 좋을 때의 반쪽도 안 돼 보였다.
몬티첼리의 오른팔이었던 가르시아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 때, 몸을 사리지 않고 놈들에게 저항하면서 여러 군데 총상을 입었었다. 그중에서도 복부 총상이 특히 심각한 중상이었고, 그 때문에 수술도 여러 번 받았다.
그 고생을 하고도 몸 상태가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가르시아는 결국 몬티첼리의 경호원 생활을 접고 두 달 전에 시내에 파스타 전문점을 차렸다. 처음엔 꽃집을 차리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죄다 마피아인 가르시아의 친구들이 파스타는 매일이라도 가서 먹어줄 수 있지만 꽃은 그럴 수 없다고 만류해서 업종을 바꿨다고 들었다.
“무슨 일을 당한 거냐고 묻잖아?”
내 대답이 늦어지자 가르시아가 벌컥 화를 냈다. 새로 시작한 사업 때문에 바빠서 내 최근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작년에 파티장에 쳐들어왔던 그놈들 있지?”
“그놈들이 왜?”
듣기만 해도 불쾌한지 가르시아가 더욱 험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최근에 또 만났어.”
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가르시아를 몬티첼리가 다독거려서 다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비니도 나를 붙들어서 소파 한 옆에 앉혔다.
“이렇게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하지? 내가 오웬하고 차이나타운으로 가도 되는데…….”
“괜찮아.”
“괜찮은데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 너…… 열 있는 것 같아.”
비니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짚으며 잔소리를 늘어놨다.
“괜찮다니까…….”
사실은 괜찮지 않다. 허리는 끊어질 것 같고, 몸은 덜덜 떨리고……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래야 오웬하고 중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가르시아를 옆으로 밀고 내 앞에 앉은 건 프란시스 몬티첼리였다.
“대체 그놈들이 왜 니콜라스 헤슬렘을 쫓고 있는 건가?”
몬티첼리가 안부인사 한마디 없이 대뜸 나를 몰아붙였다.
“그, 그건 저도 잘…….”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긴 곤란하다. 무슨 비밀을 지키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런 얘기를 꺼낼 때마다 미친놈 취급 받는 것도 이젠 지쳤다. 하지만 나를 노려보는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시선은 두개골이라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처음엔 내 집을 습격한 게 루크 첸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어. 그 놈들이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그리고 내가 알기론 흑풍회에도 군복 입고 군발이 흉내 내는 실성한 놈들이 있거든. 이름이 뭐랬더라…….”
몬티첼리가 손가락을 저어가며 흑풍회 산하의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든 행동대 명칭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몬티첼리가 머리가 나빠서 그 이름을 기억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처음 들었을 땐 되게 웃기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요.”
“맞아. 그놈들…… 그런데 망할! 여기저기 있는 대로 줄을 당겨서 알아보니까 그놈들이 아니더라고! 내 집에 들이닥쳤던 놈들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란 정부 소속의 비밀 특수부대였고, 제일 윗대가리엔 알렉산더 루소가 버티고 있었어.”
태도는 침착하고 말투는 그냥 투덜대는 것 같았지만, 몬티첼리가 온 몸으로 내뿜는 살기는 방안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알렉산더 루소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아무리 움켜진 돈이 많고, 그 아래 조직이 빵빵해도 조폭은 조폭일 뿐이다. 정부나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만 하세요. 제이가 뭘 어쨌다고…….”
비니가 몬티첼리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하지만 서툴게 두둔해봐야 작은아버지 부아만 더 돋울 뿐이었다. 게다가 원인이 나한테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뭘 어쨌는지 가르쳐 줄까? 놈들은 헤슬렘을 잡으려고 내 집에 들이닥친 거였어. 그런데 헤슬렘은 그날 왜 내 집에 왔을까? 바로 이 녀석 때문이야. 헤슬렘을 내 집에 끌어들인 게 바로 이 짭새란 말이야!”
“제이가 그자를 초대한 건 아니잖아요.”
비니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몬티첼리와 맞섰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창문이 한차례 거칠게 덜컹거렸다.
“비니 말이 맞아. 그 일로 제이를 책망할 수는 없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언제나 한발 물러서서 구경만 하던 발렌타인이 어쩐 일로 바로 비니를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자 가르시아도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그렇죠. 그래도 그때 짭새는 총 들고 들어와서 헤슬렘을 체포하려고 했었잖아요. 그놈을 만찬 테이블에 앉히고 손님으로 대접한 머저리는 대부님이었죠.”
갑작스런 참견에 몬티첼리가 가르시아를 노려봤다.
“넌 그만 가! 사장이 노상 나와 놀면 가게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아?”
“기왕 왔으니까 저녁은 먹고 갈래요. 우리 가게 스파게티는 이제 물렸어요.”
갑작스런 몰락으로 그간 절치부심하며 권위도 많이 떨어진 몬티첼리가 심호흡을 하며 성질을 다스렸다. 그리곤 잠깐 잊고 있었던 용건을 기억해내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 일을 지금 따져서 자네한테 화풀이를 하겠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대체 왜 그 난리가 났었던 건지 나도 이유는 알아야겠어.”
몬티첼리는 니콜라스 때문에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았다. 그러니 그 까닭이라도 알아야겠다고 눈을 부라리는 게 공연한 성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려서 헛소리가 아닌 것처럼 설득력 있게 설명할 능력이 없는데, 가만있자…….
“왜?”
내가 빤히 쳐다보자 발렌타인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사정은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잖아?”
“너한테 묻잖아?”
“아무나 잘 아는 사람이 설명하는 게 낫지.”
내 대꾸에 비니가 덩달아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영 갖잖다는 투로 나하고 비니를 마주보던 발렌타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원한 같은 거야. 니콜라스 헤슬렘은 워낙 나쁜 놈이잖아.”
발렌타인의 간결한 대답에 몬티첼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덩달아 나까지 잡은 거야?”
“당신도 나쁜 놈이니까 별로 미안하지도 않았겠지.”
“이 빚은 꼭 갚고 말겠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잊어버려.”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을 잡아 죽일 듯 노려봤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피차 당구 큐대 하나씩 들고 있는 상황이고, 거기에 발렌타인은 이제 몸도 말짱하고, 회춘도 했으니까 몬티첼리가 하나도 안 무서운 모양이다.
“알렉산더 루소하고 싸울 수는 없잖아?”
“못할 것 같아? 그놈 손에 죽은 내 부하들이 몇 명인데?”
“총알이 머리에도 하나 박힌 거야? 그자는 정부고, 군대야. 당신은 세상 밑바닥에서 더러운 돈이나 긁어모으는 조폭이고…….”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분을 못 참고 벌떡 일어났다.
“니 말대로 그 늙은이는 귀족이고, 난 쓰레기야. 그렇다고 내가 그놈 하나 못 죽일 것 같아?”
금방이라도 발렌타인에게 달려들 것 같은 몬티첼리를 가르시아와 비니가 붙들어서 다시 소파에 앉혔다. 반면 발렌타인은 여유가 넘쳐서 그런 몬티첼리를 보고도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건 아니지, 프란시스.”
이러다 몬티첼리가 정말 큐대 휘두르며 달려들겠다. 잠잠히 지켜보던 레빈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가와서 발렌타인의 등을 툭 쳤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은 그저 잡아 죽이는 걸 복수라고 하나? 당신이 느낀 고통, 좌절, 분노 그리고 슬픔을 그자도 느껴야 그게 복수지. 당신이 겪은 추락을 그자도 똑같이 맛보게 하고, 다시 기어오르려는 의지까지도 밟아버려야 그때 비로소 복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나도 복수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아는데, 죽이는 것도 분명히 복수야!”
몬티첼리가 상처 입은 사자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죽음을 바라는 거라면 그냥 기다리는 게 더 나아. 루소는 어차피 노인이야. 살면 앞으로 얼마를 더 살 거라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손을 더럽히나?”
친구 같은 건 안 만드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발렌타인은 몬티첼리하고 보기보다 친했던 모양이다. 몬티첼리가 헛된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개죽음을 당할까봐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걸 보면…….
한동안 발렌타인을 노려보며 씩씩거리던 몬티첼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심호흡을 하며 힘들게 분을 삭였다. 그리고는 퉁퉁 부은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내 걱정이 바로 그거야. 그 영감이 제풀에 죽어버리면…… 기분이 정말 더러울 거야.”
발렌타인이 몬티첼리를 창가에 있는 바로 데리고 가서 술 한 잔 따라주며 위로하는 걸 잠깐 지켜보다가 나하고 비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옆방은 안락하게 꾸며진 객실이었다. 폭신해 보이는 침대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자석처럼 이끌려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아흐흐…… 하는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눈 더 쌓이기 전에 병원엘 가자.”
내 꼴을 보며 한숨을 폭폭 내쉬던 비니가 다가와서 이불을 도로 걷었다. 하지만 잠깐 들러서 몬티첼리한테 인사나 하고 돌아가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그건 됐고, 오웬 좀…….”
“찾아달라고 해서 데려오긴 했는데, 그 녀석은 왜?”
“의논할 일이 있어.”
그때, 오웬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나를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나하고…… 무슨 의논?”
니콜라스가 어울리지도 않는 팝가수 공연장에 불쑥 나타난 일, 뒤이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들이닥치고 놈들을 피해서 달아나다가 사고를 당한 일, 엉망으로 깨진 채 루소의 저택으로 끌려갔다가 나 혼자 살아 나온 얘기를 듣는 동안 오웬의 표정은 그냥 그랬다.
발렌타인한테 들은 소리도 있고 해서 놈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이 우리를 덮쳤는지, 도로 위에서의 추격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그리고 루소의 집 지하실에서 처음 발견된 내 몰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최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오웬의 반응은 걱정했던 것처럼 영 맹숭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니콜라스를 구하러 갈 정도로 화를 내거나, 흥분해서 들썩이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곁에서 듣던 비니가 열 받아서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씩씩거렸다.
“그놈들을 그냥 두지 않겠어. 언젠가는 기필코…….”
비니도 놈들에게 유감과 원한이 만만치 않다. 놈들 손에 작은아버지 집과 조직이 절단 났고, 친구들도 많이 죽었으니까…… 하지만 비니가 놈들을 손 봐줄 때엔, 놈들뿐 아니라 근처에 있는 모든 게 다 날아갈 거다.
“그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군.”
오웬이 진지하게, 하지만 차분하게 중얼거렸다.
“놈들은 니콜라스를 죽일 작정이야.”
“설마?”
“설마가 다 뭐야? 니콜라스는 벌써 한쪽 손목도 날아갔어. 놈들은 니콜라스하고 문제를 대화로 풀어볼 의지가 전혀 없단 말이야.”
“인간은 그자를 못 죽여.”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죽여! 놈들은 니콜라스를 해칠 수 있는 무기를 이미 확보했어.”
오웬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당장 구하러 가자고 떨치고 일어서지 않는 거 보면…… 역시 니콜라스하고 친하진 않은가 보다.
불안한 마음으로 오웬의 눈치만 살피는 사이, 비니가 있는 대로 못마땅한 티를 내며 나를 노려봤다.
“갑자기 오웬을 찾아오라더니…… 너, 이 녀석을 앞세워서 루소네 집에 쳐들어가기라도 할 생각인 거야?”
“니콜라스를 죽게 버려둘 수는 없잖아.”
“왜 없어? 그 자식이 죽든 살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비니가 벌컥 화를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열린 창문도 없는데 세찬 바람이 불어서 내 얼굴을 후려갈기고 이불을 허공에 날려버렸다. 갑작스런 돌풍에 벽에 걸린 액자도 모조리 떨어져서 박살이 났고, 창가의 선반에 놓여 있던 화병도 맞은편 벽에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게 무슨 행패야? 그만두지 못해!”
내 몸까지 침대에서 훅 뜨는 바람에 기겁해서 침대 헤드를 붙들었다. 내 고함소리에 비니가 흠칫했다.
녀석이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이, 오웬이 방구석까지 날아간 이불을 집어 와서 다시 나한테 덮었다. 망할 자식! 사막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 오더니, 이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내가 이불을 둘둘 감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가르시아를 필두로 밖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방안의 소란이 밖에도 꽤 크게 들렸던 모양이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지금은 은퇴했지만, 전직 행동대장답게 선두에서 밀고 들어온 가르시아가 놀란 눈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니들…… 싸웠냐?”
그렇게 다그치면서도 가르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벽에 걸려 있던 건 다 떨어져서 바닥에 뒹굴고, 소파까지 본래 있던 자리에서 한참이나 밀린 방안 꼬락서니를 보면 안에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에 사람이라곤 달랑 셋뿐인데, 그나마 나는 침대에 뻗어 있고, 오웬하고 비니는 방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굴러다녔다고 보기엔 너무 멀쩡하니까 얼른 판단이 안 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몬티첼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상황을 간파하고 비니를 엄하게 노려봤다.
“너, 이럴 거면 앞으로 우리 집에 오지 마!”
“죄송해요.”
비니가 풀이 죽어서 중얼거렸다. 주의 한마디 주고 나갈 줄 알았던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비니의 울적한 표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녀석에게 다가가서 등을 툭툭 두드렸다. 몬티첼리는 천성이 난폭하고 양심도 없는 악당이지만 조카들한테는 다정한 숙부였다. 많은 조카들 중에서도 비니한테는 유독 그랬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러지 말고 털어놔 봐. 혹시 알아? 내가 도울 일이 있을지?”
몬티첼리의 다정한 설득에 비니가 잔뜩 인상을 쓰며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우리 사이에 조용히 오가던 얘기를 작은아버지한테 냉큼 일렀다.
“저 자식이 글쎄…….”
내가 루소의 저택에 들어가서 니콜라스를 구출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몬티첼리가 가르시아하고 힘을 합쳐서 구석에 밀려가 있던 소파를 침대 옆으로 밀고 왔다. 그리곤 소파에 앉아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니콜라스 헤슬렘이 지금 루소에게 잡혀 있단 말인가?”
“예…….”
내 대답에 몬티첼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가르시아도 그렇고…… 지난해에 당한 참사가 눈앞에 생생한 표정이었다. 둘 다 암흑가의 핵심인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지만, 그 충격에서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다.
“그 자식은 그때 죽은 거 아니었어?”
가르시아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석연찮은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심한 부상 끝에 은퇴해서 지금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사장님이지만, 가르시아의 눈빛은 여전히 사납고 살벌했다. 느닷없는 눈총에 나도 긴장해서 가르시아를 쳐다봤다.
“왜?”
“넌 만나는 놈이 따로 있잖아?”
무슨 얘긴가 했네.
“그건…….”
“바람피우는 거야?”
“아니야.”
가르시아는 이미 나를 다시 없이 난잡한 바람둥이로 딱 찍었다. 그래서 내 기력 떨어진 부인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루크 첸하고 같이 살면서 니콜라스 헤슬렘하고 바람이라니…… 목숨이 열이라도 살아남겠냐?”
“아니라니까!”
“아니기는…… 하여튼 짭새씩이나 돼 가지고 행실이 어째 그 모양이야?”
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냐?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놓고서…… 그때, 몬티첼리가 짭새의 품행에 대해 일장 훈계를 늘어놓으려고 폼 잡는 가르시아의 정강이를 찼다.
본인의 사생활이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만큼, 몬티첼리는 짭새라고 해서 사생활도 반듯해야 한다는 편견 같은 건 없다. 물론 내가 루크하고 사귀는 걸 언짢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루크가 자기 적이고, 오래도록 지켜온 자신의 자리를 냉큼 집어삼켰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지금도 몬티첼리는 내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건지, 이게 바람인지 아닌지 따위엔 손톱 끄트머리만큼의 관심도 없다. 몬티첼리가 궁금해 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래서, 얘기가 어디까지 된 거야? 루소의 집에 쳐들어갈 방법이 있는 거야?”
구체적인 계획을 묻는 몬티첼리의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진지했다.
“루소의 집 주변엔 전문적인 경호원만 30명 정도야. 게다가 그 기사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완전무장하고 쫙 깔려 있을 때도 있고…… 왕정 시대의 군주도 그놈처럼 몸조심이 극성스럽지는 않았을 거야. 그놈들을 뚫고 루소에게 접근할 방법이 있을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나는 루소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니콜라스를 살리고 싶은 거다. 개인적으로 루소에게 유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자에게 그렇게까지 큰 관심은 없다. 그자가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안타깝지는 않을 것 같지만, 굳이 내손으로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저는 그냥…… 오웬이 루소 의원도 알고, 니콜라스가 처한 상황을 알면 도와주지 않을까 해서…….”
“자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그 미친놈을 구할 방법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직은 구체적인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몬티첼리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시비조로 투덜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비니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눈길로 몬티첼리를 쳐다봤다.
“작은아버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루소의 집에 쳐들어가서 그놈을 죽여버릴 방법이 혹시 있나 해서 잠깐 마음이 설렜어.”
“삼촌!”
비니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몬티첼리의 태도는 담담했다.
“네 친구는 애인을 구하고, 난 복수를 하고…… 뭐가 나빠?”
어디선가 또다시 찬바람이 슥 불었다. 좀 전에 몰아친 돌풍에 비하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찬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비니가 일으키는 바람에는 자연풍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섬뜩함이 있었다.
잠시 방안에 깔린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건 오웬이었다.
“당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오웬이 발렌타인에게 물었다.
“글쎄…….”
글쎄라니? 저 인간이…… 열 받아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오웬이 내 가슴을 밀어서 도로 눕혔다. 그리곤 다시 발렌타인을 돌아봤다.
“이 친구 말로는…… 루소가 라두칸을 해칠 수도 있다던데요?”
“바하르나 조약의 파기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지. 그게 그자의 의무니까.”
“왕의 의무는 조약을 지키는 겁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항이 있다고 조약을 멋대로 파기하는 건 시정의 잡배나 하는 짓입니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용의 귀환이 두려운 건 당연하잖아?”
“그러니까 잡배라는 거죠. 두려움 때문에 신의를 저버리는 자니까…… 그자에게 왕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불멸의 기사라고 하더니…… 오웬에겐 아직 기사도 정신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발렌타인보다 훨씬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그래, 기사라면 저런 정신이 있어야지.
“그래서, 어쩔 작정인가? 루소에게 찾아가서 라두칸을 내놓으라고 할 건가?”
니콜라스가 그만 죽었으면 좋겠는지 발렌타인이 또 딴죽을 걸었다.
“그러는 당신은 라두칸이 죽어도 상관없습니까?”
“라두칸이 없는 세상은 어떨까 생각은 많이 해봤지.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답지 않겠나?”
“야, 이…….”
일어나 앉으려다가 다시 오웬에게 제지당했다. 발렌타인에겐 안 된 말이지만, 연쇄살인범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다. 물론 없는 편이 낫긴 하지만…….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험하게 노려보자 발렌타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오웬의 기사도 정신을 농락하는 발언을 했다.
“검은 용이 돌아오는 거…… 자네한테도 좋을 건 없잖아?”
혼자 올 걸…… 내가 왜 이렇게 중요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 저런 인간을 데리고 왔을까? 아니나 다를까, 발렌타인의 질문이 정곡을 찔렀는지 오웬의 표정이 더 어둡고 복잡해졌다.
“라두칸하고 당신은 친구가 아닌가요?”
“라두칸은 친구가 없어. 나도 그렇고…… 우린 그저 가끔,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는 것뿐이야.”
여기서 이런 소리 지껄이고 있는 걸 알면, 니콜라스도 저런 친구는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다.
“지금은 그와 생각이 다르십니까? 저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종족이 공존하던 시절도 무척 아름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오웬의 반격에 발렌타인의 표정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리곤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라두칸이 죽으면 장서각은 어떻게 됩니까?”
“무너지겠지.”
“마리우스는요?”
“사라지겠지. 마리우스가 산 세월을 가늠해보면 육신은 먼지가 돼서 흩어질 거고, 죽은 자리에 백골이라도 남을지 모르겠군.”
발렌타인의 대답에 심장이 철렁했다. 니콜라스 때문에 마리우스까지 덩달아 위험해진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마리우스가 죽어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니…….
“그럼, 얘기는 끝난 것 같군요.”
오웬이 마음을 정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루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자의 군대는 더 그렇고…… 자네를 죽이는 건 라두칸을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워.”
“어쨌든 나를 죽이기 전엔 그자를 죽일 수 없을 겁니다.”
오웬의 대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매달리긴 했지만, 실상 가능성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지 않고는 나설 수 없는 일이니까…….
오웬과 발렌타인 사이에 오고가는 얘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몬티첼리가 눈을 번뜩이며 몸을 앞으로 슥 내밀었다. 그리곤 못된 음모를 꾸미는 악당처럼 음산하게 속삭였다.
“그럼…… 하는 거야?”
“아, 좀…….”
비니가 벌컥 신경질을 내며 몬티첼리의 어깨를 잡아서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심기 불편한 눈길로 오웬을 쳐다봤다.
“하긴 뭘 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물론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경호원이 잔뜩 깔려 있는 국회의원 집엘 대체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야? 거기서 니콜라스는 또 어떻게 데리고 나올 건데? 루소도 목적이 있어서 그자를 붙들어 둔 걸 텐데, 물건 하나 슬쩍 들고 나오듯 일이 손쉬울 것 같아?”
비니의 거친 반발에 몬티첼리가 또 슬쩍 나섰다.
“방법은 찾아봐야지.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고…….”
“삼촌은 가만 좀 계세요!”
비니의 거친 언행에 몬티첼리도 발끈했다.
“내 부하들을 몰살시킨 놈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는데, 날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사이몬이 아까 한 말을 그새 잊으셨어요? 그 일은 잊어버리시라고요!”
“웃기지 마! 그 일은 죽기 전엔 절대로 못 잊어!”
니콜라스 구출에 관한 논의가 급작스럽게 삼촌과 조카 간의 극한 말다툼으로 변질됐고, 방안은 갑자기 고성이 난무하고 돌풍이 휘몰아치는 살벌한 싸움판으로 변했다.
몬티첼리는 가르시아와 레빈이 붙들어 말리고, 비니는 발렌타인하고 오웬이 다독거려서 모든 것이 다 날아가는 참사는 다행히 면했지만, 유감이 남아서 이후로도 한참을 서로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이런다고 내가 그 원수를 안 갚고 그냥 넘어갈 것 같아?”
레빈에게 잡혀서 잠깐 쉰 몬티첼리가 다시 기운을 차려서 버럭 소리쳤다. 좀 전에 휘몰아친 돌풍에 벽까지 굴러갔다가 돌아온 가르시아가 몬티첼리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는 것으로 입을 막았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몬티첼리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비니가 오웬을 노려봤다.
“너, 루소 의원집 근처에 얼씬거리기만 해봐. 당장 체포해서 해가 바뀔 때까지 콩밥을 먹이고 말테니까…….”
오웬이 비니의 협박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좀 전에 카시엘이 한 말 못 들었어? 라두칸이 놈들에게 살해당하면 마리우스도 죽어.”
“세상에 그런 헛소리가 어딨어? 너 제정신 아닌 건 진즉에 알아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모르면 가만있어. 그리고 아무 데서나 바람 일으키지 말고…….”
비니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쳤다. 이러다 아예 태풍이 불어서 모두가 다 날려가는 건 아닌지 슬쩍 걱정스러운 참인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집안을 오가는 몬티첼리의 경호원 중 하나였다.
“뭐야?”
몬티첼리가 공연히 경호원을 윽박질렀다. 경호원은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방안 풍경에 놀란 참인데, 거기에 보스가 신경질까지 부리자 바짝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다.
“저기…… 좀 나와 보셔야겠는데요?”
“뭔데?”
“밖에 누가 와서 대부님을 뵙겠다는데 들여보내도 될지…… 정문 초소에서 연락이 와서요.”
방문객이 날짜와 시간을 잘못 골랐다.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만나봐야 몬티첼리에게서 좋은 소리 듣기는 텄다. 몬티첼리도 사람을 더 만날 기분이 아닌지 듣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잡상인은 사절이야. 보험도 안 들 거고…… 돌려보내.”
“아, 예…… 그럼…….”
경호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가 문밖으로 사라지기 전에 레빈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중요한 사항을 확인했다.
“누군데?”
돌아나가던 경호원이 그때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와서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러니까…… 저기…… 루크 첸이요.”
순간, 아픈 것도 잊고 침대에서 후다닥 뛰어내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와?”
모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만큼은 아니라도 모두의 얼굴엔 놀란 기색이 완연했다.
“루크…… 첸이 왔다는데?”
가르시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별꼴을 다 본다는 투로 대꾸했다.
“왜?”
내가 놀라긴 놀랐나 보다. 루크가 여기 나타난 이유를 이 사람들한테 묻는 걸 보면…… 이번에도 가르시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보지.”
한동안 잠잠하던 몬티첼리가 허허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에 더 가까웠지만…….
“살면서 희한한 놈들도 많이 봤지만, 그놈도 참 만만치 않군.”
“살짝 맛이 간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가르시아가 뒤춤에 차고 있던 총을 꺼내서 장전을 확인했다. 아니, 이젠 암흑가를 떠나서 새 삶을 산다더니 왜 저런 걸…… 내가 허옇게 질려서 가르시아를 쳐다보자 비니가 녀석의 손에서 총을 낚아챘다.
“뭐야?”
“너야말로 이걸로 뭘 하려고?”
“루크 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살려 보내란 말이야?”
가르시아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비니도 밀리지 않고 맞섰다.
“짭새가 둘이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우리 앞에서 그 녀석을 죽이겠다는 거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런 건 못 본 척 해줘도 되잖아?”
되지도 않을 헛소리를 지껄이던 가르시아가 나를 힐끔 봤다. 그리곤 한다는 소리가…….
“이 동네에 남자가 그놈 하나야? 넌 어차피 지금도 양다리잖아?”
저런 나쁜 놈!
이제 와서 몇 마디 타이른다고 가르시아를 새사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급한 일도 아니라서 섭섭한 마음을 접어두고 일어섰다. 그리고 비틀비틀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온몸이 욱신거리는 통증에 현기증까지 겹쳐서 문고리를 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내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몸이 정말 원망스럽다.
“어딜 가시려고요?”
레빈이 다가와서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루크가 왔다잖아요?”
큰 사고 나기 전에 데리고 돌아가야 된다. 녀석이 나 때문에 왔는지, 다른 볼 일이 있는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일단 집안에 발을 들여 놓은 후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나가서…… 데리고 가야죠.”
레빈이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죠. 그자도 뭔가 용건이 있어서 왔을 테니까요.”
아니, 믿었던 레빈까지 이렇게 나오면…….
“하지만 가르시아가…… 몬티첼리 씨도…….”
“설마 죽으려고 왔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왔겠죠.”
자기 남자친구 아니라고 너무하네. 정말…….
레빈이 나를 질질 끌어다 다시 침대에 눕히는 사이, 몬티첼리가 심부름 온 경호원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 본인 포함해서 같이 온 녀석들 몸수색 제대로 하고…….”
“예. 대부님.”
그때 비니가 손을 내저으며 몬티첼리를 만류하고 나섰다.
“그냥 가라고 하세요.”
“왜?”
“작은아버지야말로 그 녀석을 불러서 뭐하시게요?”
그래도 믿을 건 현직 짭새, 내 오랜 파트너 비니뿐이다. 비니도 루크를 좋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루크가 이 집에서 죽게 두지는 않을 모양이다. 하지만 몬티첼리가 말을 안 듣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불렀어? 지가 왔잖아?”
“그 자식하고 면담만 하고 곱게 보내실 거 아니잖아요?”
“그건, 그놈 하는 거 봐서 결정할래.”
“삼촌!”
몬티첼리가 비니를 밀어치우고 경호원에게 루크를 데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삼촌, 왜 이러세요? 여기서 무슨 사고라도 나면 저 정말 입장 곤란해져요.”
비니가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며 몬티첼리한테 항의했다. 하지만 몬티첼리는 비니가 뭐라고 하던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루크를 곱게 보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레빈이 말한 대로 살아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왔겠지.”
몬티첼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어느 때보다 음습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놈이 요즘 제 세상 만난 것처럼 온 도시를 휘젓고 다니면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서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모양인데…… 어떻게 살아나가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몬티첼리의 경호원으로부터 루크가 여기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귀가 의심스럽더니, 막상 저택의 접객실로 걸어 들어오는 루크를 봤을 땐 내 눈이 의심스러웠고, 이게 꿈인지 생신지 혼란스러웠다.
“루크…….”
루크가 들어오다가 문가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방안을 한눈에 슥 훑었다. 문 옆에 서 있는 레빈, 소파에 앉아 있는 몬티첼리와 가르시아, 앞으로 벌어질 일을 구경하기에 딱 좋은 포지션을 찾다가 접객실 구석 홈바에 자리를 잡은 발렌타인…… 순간, 루크의 눈길이 날카로워지기에 누굴 보고 저러나 싶어서 나도 고개를 돌렸다. 홈바에 앉아서 발렌타인이 꺼내주는 맥주를 막 따고 있는 오웬이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오웬도 인상이 강렬한 편이니까…….
오웬을 잠깐 노려보던 루크가 눈길을 돌려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소파 팔걸이에 젖은 빨래처럼 걸쳐져 있는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내 속에 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루크도 나를 엄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혹시 나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이건 너무 심한 거다. 말도 안 하고 여기까지 온 건 미안하다. 달가워하지 않을 거 빤히 알면서 오웬을 붙들고 니콜라스를 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하지만 내가 아무리 미워도 이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나?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한마디 하려다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일단 온건 온 건데…… 녀석의 주변이 왜 이렇게 허전하지? 녀석은 청연루 정원을 일없이 왔다 갔다 할 때에도 최소한 대여섯 명의 경호원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지금은 뒤에 누가 따라오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거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문이 닫혔다.
“자오는?”
혹시 문 밖에서 붙들렸나? 어차피 호랑이굴이니 자오가 있어도 별 뾰족한 수는 없지만…… 자오가 없으니까 루크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 같았다. 허전하고,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혼자 왔어.”
루크의 태연한 대답에 당황해서 허리를 펴고 앉았다.
“혼자 오다니?”
“내가 여기 온다고 하면, 자오가 곱게 따라나섰을 것 같아? 되레 펄펄 뛰면서 붙들고 늘어졌겠지.”
당연히 그랬을 거다. 자오한테는 분별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대체 여긴 왜 왔어? 정신 나갔어?”
쉰 목소리로 벌컥 소리치자 루크가 되레 언짢은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내 무리한 외출에 대한 입장을 딱 한마디로 전했다.
“넌 당분간 외출 금지야.”
루크가 접객실과 안에 모인 사람들을 훑어보는 사이, 몬티첼리 패밀리도 날카로운 눈길로 루크를 관찰했다. 실질적인 적들로부터 이렇게 살기등등한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면 좀 쭈뼛거리고, 떨고…… 그런 게 있어야 하는데, 루크는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몬티첼리와 마주섰다.
“니가 내 집엔 어쩐 일이야?”
접대니, 인사니…… 그런 건 싹 걷어치우고 몬티첼리가 대뜸 루크를 몰아세웠다. 본래 이렇게까지 여유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지나치게 여유만만한 루크의 태도가 어지간히 꼴 보기 싫었나 보다.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몸을 날려서 저놈의 조동아리를 틀어 막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내 안타까운 심정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루크가 비니를 밀고 내 옆에 앉았다.
“제발…… 말조심 좀 해.”
루크의 귓전에 대고 조그맣게, 하지만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통사정을 했다. 일은 벌어졌으니, 우선은 무사히 나가는 게 관건이다.
“내가 뭐, 실수라도 했어?”
루크가 내 얼굴을 손등으로 슬슬 건드리며 속에 불을 질렀다.
루크하고 내가 붙어 앉아서 속닥거리는 걸 차마 못 볼 꼴인 듯 오만 인상을 쓰며 노려보던 가르시아가 허허…… 하고 들으라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가르시아의 눈총에 나는 루크한테서 떨어져서 소파 구석에 바싹 붙어 앉았고, 루크도 다시 몬티첼리를 돌아봤다. 하지만 대뜸 나서서 루크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린 건 가르시아였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락거려?”
“내 귀여운 남자친구가 성치도 않은 몸으로 여길 왔다기에 걱정이 돼서 말이야. 나 몰래 무슨 짓을 하는지도 좀 신경 쓰이고…….”
“이 자식이 근데, 사람을 놀리나…….”
가르시아가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으며 뒤춤을 더듬었다. 하지만 다행히 가르시아의 총은 비니가 탄창을 따로 빼서 보관 중이었다.
“왜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내? 내가 뭘 어쨌다고?”
가만히 있어도 분위기가 부글부글 끓는 판에, 루크가 가르시아를 대놓고 놀렸다. 놀라서 루크의 등을 쥐어박았지만, 이미 늦었다.
가르시아가 성난 코뿔소처럼 투레질을 하며 벌떡 일어났고, 몬티첼리의 표정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했다.
“보자보자 하니까…… 뭐가 어째? 파티 하는 집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백 명이나 죽이고, 남의 조직을 통째로 집어삼켜놓고 어디서 발뺌이야? 한 1년 흑풍회 보스랍시고 거들먹거려 보니까, 이젠 우리가 만만하고 우습지? 허수아비로 뵈지?”
가르시아의 협박과 막말에 루크의 눈매도 부쩍 날카로워졌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이런 얘기를 스파게티 집 주인하고 해야 되나?”
루크의 싸가지 없는 말대꾸에 가르시아의 분노가 폭발했다.
“너, 이 자식! 오늘 죽었어!”
가르시아가 버럭 소리를 치더니, 아쉬운 대로 사냥용 엽총이 전시된 장식장 쪽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왜 응접실에 총 같은 걸 걸어놓는 걸까? 저런 게 무슨 장식이 된다고…… 다행히 비니가 얼른 가르시아를 쫓아가서 장식장 앞을 가로막고 버텼다.
“안 비켜?”
“참아! 저 자식을 정말 죽일 거야?”
“내가 이런 일로 농담하는 거 봤어? 너 먼저 죽기 싫으면 저리 비켜!”
비니하고 가르시아가 장식장 앞에서 실랑이 벌이는 걸 잠깐 구경하던 루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몬티첼리는 돌아봤다.
“이건 좀 실망인데, 돈 몬티첼리. 당신 정도면 그 사건의 배후 정도는 어떻게든 알아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루크의 지적질에 몬티첼리가 영 떫은 표정을 지었다.
“루소가 한 짓이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너하고 그놈은 한통속이잖아.”
루소하고 루크가 휘하에 비슷한 목적을 가진 기사단을 하나씩 거느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한통속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교감이 좋은 관계는 아니다. 오히려 두 조직은 시간을 담은 병을 놓고 한바탕 전쟁을 불사할 만큼 경쟁적이고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한통속이란 몬티첼리의 비난에 도리어 교활한 미소로 응수했다.
“잠깐 그럴 때도 있었지만, 이 바닥에서 동업이란 어차피 일시적인 거지.”
루크의 한마디에 몬티첼리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여태까지 놔라, 비켜라 비니하고 실랑이를 계속하던 가르시아도 동작을 멈추고 루크를 돌아봤다. 어수선하던 방안에 한순간, 이상한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 찼다.
“네놈 속셈이 대체 뭐야?”
몬티첼리가 의심스러운 한편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루소는 정재계의 유력자야. 쿠간에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행세깨나 하는 놈이지. 그렇게 든든한 조력자도 다시 찾기 어려울 텐데…… 그런 놈을 버리겠다는 거야? 나보고 그런 헛소리를 믿으라고?”
대체 이건 무슨 소리냐? 설마 루소하고 또 한판 붙을 심산일까? 나는 이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는 그런 식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다. 꼭 필요하다면 피할 수는 없겠지만…… 나를 안심이라도 시키려는 듯 루크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하지만 녀석의 손길도, 몬티첼리에게 한 대답도 별로 위안이 되질 않았다.
“당신도 정보통이 있으니까 루소가 몇 주 전에 차이나타운을 한바탕 뒤집은 건 알 거야. 작년에 당신한테 보냈던 그놈들이 고스란히 내 식당에 들이닥쳤는데, 덕분에 나도 데리고 있던 애들을 많이 잃었고, 왕궁 같던 식당도 다 허물어졌어. 나를 당신 정도라고 생각하고 쉽게 본 거지. 어쨌든 그 시점에 그자와의 동맹은 깨졌어.”
중간에 몬티첼리 얘기는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걸…… 살짝 호감을 보이던 몬티첼리의 표정이 또다시 굳었다.
“그래서? 너도 이제 그놈하고 원수가 됐다는 거야?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헛소리를 하고 싶어?”
“그런 심정은 모르지. 당신은 완전히 깨졌고, 난 이겼으니까…….”
루크의 도발에 몬티첼리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내 집에서 살아나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나 봐?”
“당신하고 할 얘기 다 하고 나면, 난 남자친구 데리고 들어왔던 그 길로 나갈 거야.”
“내 기분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는데 어떻게?”
몬티첼리가 음산한 눈길로 루크를 노려봤다. 말투나 표정이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사실, 몬티첼리는 굳이 인상을 구겨가면서 루크를 협박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는 자기 집이고, 루크는 무기도 없는 빈 몸이니까…….
루크가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조금만 겁먹은 표정을 짓거나, 말조심이라도 해주길 바라면서 녀석을 돌아봤다. 하지만 뭐가 그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한지, 루크의 대답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건 내가 나갈 때 알게 될 거야.”
몬티첼리가 짠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얼굴도 미남이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매력도 있지만…… 이 자식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야. 넌 대체 뭐가 문제야? 왜 만나는 놈마다 이 모양이야?”
몬티첼리의 꾸중에 뭐라 변명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내 남자관계가 몬티첼리한테까지 미안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놈이지만 제발 목숨만은 살려서 내보내줬으면 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루크가 눈치도 없이 내 뒤통수를 슬슬 쓰다듬었다.
“청연루를 습격한 것도 내 입장에선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인데, 그 작자는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이 녀석을 초주검을 만들어서 자기 집 지하실에 아무렇게나 던져놨어. 마치 사냥해온 들개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동업자로 존중한다면 할 수 없는 짓이야.”
“그렇게까지 생각해준다니 고맙군. 제이는 비니의 둘도 없는 친구고, 좋은 녀석이야. 나한테도 조카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내 집에서 무사히 나가기 어려울 걸.”
몬티첼리는 화가 많이 났다. 무리도 아니다. 면전에 대고 그렇게 약을 올렸으니, 너 이 자식, 두고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게 당연했다. 루크는 장점도 많은 놈이지만, 처지불문하고 언제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건 제발 좀 고쳤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 오두막에 처박혀서 절치부심하며 지난 1년간 자나 깨나 원했던 걸 갖게 해준다면?”
루크의 재수 없지만 과감한 제안에 몬티첼리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널 살려서 내보낼 만큼 내가 절박하게 원하는 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복수, 그리고 잃어버린 왕좌. 뭐 그런 거 아닐까?”
“…….”
몬티첼리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소파 깊숙이 물러앉았다. 루크를 노려보는 눈길이 얼마나 이글거리는지, 당장이라도 뭔가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아서 심장이 확 졸아들었다.
“둘 중에 어떤 걸 원해? 나한테 협조만 해주면, 원하는 걸 갖게 될 거야.”
“둘 중 하나 같은 건 없어. 난 둘 다 원해. 그리고 무슨 짓을 해서든 둘 다 가질 거야.”
루크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몬티첼리의 대답이 마음에 쏙 든 표정이었다.
“진정한 왕이라면 마땅히 그래야지.”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몬티첼리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뭐야?”
“남은 얘기는 단둘이, 되도록 조용히 했으면 싶어서…….”
루크의 제안에 몬티첼리가 순순히 일어났다. 그리고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몬티첼리를 따라 나가던 루크가 문 앞에서 나를 돌아봤다. 마치 말 더럽게 안 듣는 어린애 보듯 착잡한 표정으로…… 내가 루크 마주 보는 눈길도 아마 비슷했을 거다.
“옷 찾아 입고 기다려. 얘기 끝나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그렇게 이르고 발길을 돌리던 루크가 오웬을 다시 힐끔 쳐다봤다. 돌아보니 오웬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루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탐색은 짧고 무심했다. 만만찮은 놈들이 마주쳤을 때 조성되는 약간의 긴장감과 적대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좀 전에 루크가 몬티첼리와 마주 앉았을 때의 그것에는 비할 바 없을 만큼 미약한 것이었다.
“어때 보여?”
루크가 방에서 나가자 발렌타인이 오웬에게 물었다. 조용하고 짧은 한 마디였지만, 두 사람이 나가고 난 직후 방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기 때문에 남은 사람들의 숨소리조차 거친 바람 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누구요?”
“루크 첸 말이야.”
“영리하고 대담한 놈이네요.”
“그뿐이야?”
발렌타인이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하지만 오웬의 태도는 그저 담백했다.
“전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보는 능력은 없어서요.”
그렇게 대답하며 오웬이 맥주 한 병 더 달라는 손짓을 했다.
발렌타인과 오웬의 짧은 대화에 까닭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오웬이 엉뚱한 소리를 하지 않을까 내심 불안했었는데…… 거기에 아까 루크가 여기 나타났을 때부터 바짝 들었던 긴장감이 풀려서 소파에 길게 뻗고 말았다.
“저 자식 속셈이 대체 뭐야?”
가르시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을 냈다. 그리곤 뭔가 답을 바라는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 자식 속마음을 난들 아나?
“넌 요즘 저놈하고 같이 산다며?”
가르시아가 한 번 더 나를 을렀다.
“저 자식하고는 잠만 같이 자. 속셈 같은 거 나도 몰라.”
“짭새, 한심하기는…….”
가르시아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염탐이라도 할 모양이었다.
루크가 루소에게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번 청연루 습격을 돌이켜보면, 루크가 루소하고 우호적이고 침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은 가차 없었다. 루크도 어지간히 독한 놈이라서 기사단의 습격을 막아낸 거지, 조금이라도 대응이 미흡했거나 운이 나빴으면 시간을 담은 병과 함께 목숨도 잃었을 거다.
하지만 이후로 별다른 언급이 없기에 나는 루크가 시간을 담은 병을 지킨 걸로 만족하고 그 일은 그냥 잊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연루가 초토화 돼버렸으니 금전적인 타격도 상당했을 거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상대를 그냥 두고 보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겠지만…… 상대가 루소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속이 끓어서 일어나 앉았다.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몬티첼리와 결탁해서 루소한테 분풀이 할 궁리를 하다니…… 루크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무리 못돼 처먹었어도 그나마 남은 흑풍회 보스 자리와 목숨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그러냐? 원래부터 분쟁이나 충돌을 피해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상대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뭘 그렇게 끙끙거려? 너도 루소를 상대로 비슷한 짓을 할 생각이었잖아.”
아까부터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던 비니가 틱틱거렸다.
“난 니콜라스만 꺼내오면 그만이야. 그자에게 복수 같은 거 할 생각 없어.”
“루소가 니콜라스를 포장지로 예쁘게 싸서 어서 데려가라고 선선히 내놓을 게 아니라면, 결국 그게 그거야.”
“그럼…….”
“뭐?”
오웬을 슬쩍 돌아봤다. 비니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선수를 치는 게 낫겠어.”
루크와 몬티첼리의 밀담은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간 지 20분도 안 돼서 응접실로 돌아왔고, 루크는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들어왔던 그 문으로 걸어 나왔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나를 질질 끌고서…….
그 사이 길에 눈이 제법 쌓여서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오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돌아오는 내내 루크도 나도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왔다. 나는 루크가 몬티첼리랑 단둘이 무슨 작당을 했는지 묻지 않았고, 루크도 내가 몬티첼리 저택에 간 이유를 굳이 따지지 않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빤한 일이고, 루크도 나도 서로의 무모함에 화가 나 있었으니까…….
다행히 건물의 지하실 같은 곳으로 끌려가지는 않았다. 루크가 오랜 정체 끝에 도착해서 축 늘어진 나를 떠메고 들어간 곳은 우리가 여태 지내던 본관의 펜트하우스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처음으로 여기가 집처럼 느껴졌다. 총성이 난무하는 액션 영화에 푹 빠져 있던 킵과 마커스가 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돌아봤다.
마커스는 고개만 한번 까딱하고는 다시 TV를 향해 돌아앉았고, 킵은 슬금슬금 다가와서 현관 쪽을 넘겨봤다.
“사이몬은?”
킵이 물었다.
“친구네 집에 있어. 자고 내일 온데.”
“같이 나갔으면, 같이 오는 거 아니었어?”
킵이 발렌타인의 외박을 나한테 따졌다.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맥주를 몇 병 마셨어. 눈길에 음주운전을 할 수는 없잖아?”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팔찌를 그렇게 쉽게 풀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킵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발렌타인도 돌아오면 외출금지를 당할 거다.
침실에 들어오자마자 루크가 어깨에 들쳐 멨던 나를 침대 위로 냅다 던졌다. 그 바람에 잠깐 기절했다가 깼다.
“무슨…… 짓이야?”
온몸의 뼈가 동시에 어긋나는 것 같은 아찔한 고통에 한동안 숨도 못 쉬고 쩔쩔 맸다. 몬티첼리 저택까지 왔다 갔다 한 것만 해도 몸에 무리라 금방 정신을 놓을 판이었는데, 이런 행패를 당하다니…… 하지만 내 항의에도 녀석의 눈초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엄살 작작 피워. 내 앞에서나 죽는 소리지, 사실은 멀쩡한 거 아냐?”
“엄살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울컥해서 루크에게 대들었다. 내가 일일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고를 당한 이후 실수로라도 거울을 쳐다볼 때면 모든 의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번 그러고 나면 마음 추스르는 것도 쉽지 않았고…….
“살 만하니까 이탈리아 대부네 집을 들락거리고, 하이랜더를 불러다 옛날 애인을 구출할 깜찍한 계획을 세웠겠지.”
“계획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넌 대체 뭘 어쩔 작정이야?”
“말꼬리 돌리지 마! 지금 니 얘기를 하는 중이잖아!”
나는 루크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 내가 루크에게 바라는 건 녀석이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착하게 사는 게 아니다. 나는 루크에게 그렇게까지 큰 기대는 없다.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조폭 두목노릇이라도 길고 안전하게 했으면, 더는 위험한 분란에 휘말려서 죽을 구석으로 몰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등골이 송곳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에 캑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진짜 아파서 그런 건데, 이것도 엄살이다 싶은지 루크가 으르렁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앞으론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화장실 가는 것 외엔 내 허락 없이는 어디도 못 가!”
“그런 게 어딨어? 그거…… 감금이잖아?”
“맞아. 그거야.”
나하고 루크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겁도 없이 문이 덜컥 열렸다.
“힘들게 살려놨더니…… 왜 한나절 만에 이렇게 다 죽어가?”
킵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어지간한 강심장이라도 방안 분위기가 이 모양이면 모른 척 문 닫고 물러섰을 텐데, 이 녀석은 겁도 없고 눈치도 없다.
킵이 곁에 앉아서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옷섶에 손을 넣었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스스럼없이…… 녀석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마치 뜨거운 물이 튄 것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아…….”
“좋은가 봐?”
킵이 피식 웃었다. 녀석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며 말투가 거슬렸다. 발렌타인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만만하냐 싶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며 킵을 잠깐 노려봤다. 하지만 그래 봐야 녀석이 내 눈치를 볼 것도 아니라서, 다 접어두고 제일 쑤시고 아픈 곳에 녀석의 손을 얹었다.
“여기도 좀…… 만져줘.”
“뭐, 얼마든지.”
허리 아래 조금 오른쪽, 아까 차에 앉아 올 때부터 못 견디게 쑤시고 결리던 곳이 기린의 손길에 서서히 뜨거워졌다.
뜨거운 물수건을 얹은 듯 화끈거리는 느낌에 내가 몸을 비틀며 끙끙거리자 킵이 킥, 하고 웃었다.
“친구네 집이라면, 몬티첼리한테 갔었던 거야?”
“응…….”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따라갔을 걸.”
발렌타인이 오늘 외박하는 게 서운한지 킵이 투덜거리며 내 바지를 멋대로 끌어내렸다. 그리곤 욱신거리는 허리에 입을 맞췄다.
“아으…….”
뭔가 뜨거운 걸로 아픈 곳을 꾹 찌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에 놀라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킵은 내 힘없는 몸부림 정도는 손쉽게 제압하고는 아예 나를 타고 앉았다. 킵에게 깔려서 힐끔 눈치를 보니 루크가 무시무시한 눈길로 우리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할래?”
킵이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치 먹이를 움켜쥔 맹수처럼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태도에 까닭도 없이 주눅이 들었다.
“뭐, 뭘?”
“섹스.”
역시…… 눈치라곤 없는 놈이다.
루크가 킵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내 위에서 끌어내려 방구석으로 던져버렸다. 생각지도 않게 봉변을 당한 킵이 떨어지면서 어딜 심하게 부딪쳤는지 바로 일어나질 못하고 버둥거렸다. 아니, 왜 애한테…….
“킵…….”
머리통을 감싸 쥐고 끙끙거리는 기린을 끌어안았다.
“다쳤어? 많이 아파?”
“머리가 띵해.”
고개를 들어서 루크를 노려봤다. 이건 비열한 화풀이다. 킵이 실언을 하긴 했지만…… 얘는 처음부터 그런 녀석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놈이 너한테 추근거렸잖아!”
“그렇다고 애를 그렇게 던져? 머리를 다쳤잖아!”
머리 밑에 손가락을 넣어서 살살 살펴보니, 뒤통수가 불룩한 게…… 혹이 났나 보다.
“이 자식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나는 많이 참았어!”
“아직 어린애잖아!”
“그렇게 안 어려! 그리고 아무리 어려도 내 앞에서 너한테 껄떡거리는 건 못 참아!”
“루크!”
루크가 이번엔 나를 집어 던질 듯 노려봤다. 녀석을 만난 이후, 이렇게까지 화내는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뱃속이 시릴 만큼 무서웠지만, 꾹 참고 녀석을 마주 봤다. 루크가 어떻게 나오든 나도 결코 물러설 수 없으니까…… 니콜라스를 루소의 손에 죽도록 버려둘 수도 없고, 루크가 그자에게 위험천만한 복수를 하려고 덤비는 것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루크가 뭐라고 하든 그 두 가지는 반드시 막을 거다.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차라리 전쟁이 쉽지, 넌 정말…….”
나를 노려보던 루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끄러!”
루크가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이젠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너하곤 끝이라는 듯…… 방에서 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이 차갑고 멀게만 느껴졌다.
킵을 일으켜서 침대로 데려가서 눕혔다. 그리고 충격으로 정신 못 차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당사자는 미안한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뭘 대신 사과해?”
킵이 끙끙거리며 짜증을 냈다.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거니까…….”
“당신은 왜 저 작자 속을 그렇게 자주 뒤집어?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당신을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인 것 같던데…….”
“어쩌다 보니까 자꾸 그렇게 되네.”
그러고 보니 녀석과 헤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요즘은 통 안 했다. 처음엔 늘 그 생각뿐이었는데…… 진심이 있든 없든 나하고 녀석은 오래 갈 관계가 아니었다. 내가 루크를 못 견디든가, 루크가 나한테 싫증을 내든가…… 어쨌든 곧 그렇게 깨질 거라는 불안과 체념이 항상 가슴 언저리에 도사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녀석을 떠나는 일도, 녀석이 나를 버리는 일도 없을 거란 믿음이 생긴 것이…….
루크와 함께 떠났던 사막 어딘가를 기억 속에 더듬고 있는데 킵이 손을 뻗어서 내 얼굴을 푹 감쌌다. 그리곤 아무 거리낌 없이 입을 맞췄다. 그것도 굉장히 진하게…… 이 자식, 머리가 띵하다더니…….
기린의 키스는 자극적이었다. 예전의 그 밍숭하고 아무 느낌도 없는 입맞춤이 아니라 뭔가 확실한 의도가 있는 위험한 키스였다. 녀석이 그렇게 어리지는 않다는 루크의 말이 맞았다. 녀석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킵.”
“응?”
“난 너랑 섹스 안 해.”
내 엉덩이를 더듬는 녀석의 손을 잡아서 허리 부근으로 올렸다.
“왜?”
녀석이 입을 비쭉이 내밀며 툴툴거렸다.
“내가 그런 걸 하고 싶은 상대는 루크뿐이야.”
“그 남자는 당신한테 화를 내고 나갔잖아.”
“돌아올 거야.”
킵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나를 바짝 당겨서 꽉 끌어안았다. 온 몸에 불이 붙는 것처럼…… 녀석의 몸이 유난히 뜨거웠다.
“이건 괜찮지?”
“응…….”
오웬은 몬티첼리가 루소 주변의 정보망을 이용해서 저택 상황을 우선 파악한 후에 움직일 거라고 했다. 내일 밤, 혹은 새벽…… 더 늦어지진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내게도 시간이 얼마 없다. 오웬하고 나…… 운이 좋으면 발렌타인의 손도 빌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가 니콜라스를 구해낼 수 있을까? 그 이후에 루크하고 화해하는 게 가능할까? 생각할수록 심란해서 나도 킵의 목에 팔을 감았다.
루크는 돌아오지 않았다. 밤에 몇 번인가 선잠을 깨서 주변을 더듬었지만, 손끝에 걸리는 거라곤 잠버릇 거친 기린 한 마리뿐이었다. 기린이 밤새 나를 끌어안고 발렌타인에게 하던 버릇대로 더듬고, 치대고…… 사랑과 우정 사이를 넘나들며 문어처럼 휘감아준 덕에 몸은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텅 빈 침대 한쪽을 쳐다보는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겁고 서글펐다.
어딜 간 걸까? 돌아오겠지? 설마……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다시 혼자가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뱃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었다. 견딜 수 있을까? 그 쓸쓸함을…… 영혼을 다 갉아먹는 것 같은 공허함을…….
머리맡을 더듬어서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전화기를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베개 아래 묻어버리고 말았다. 루크가 전화를 받아봐야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미안하단 말이나 되풀이하겠지만, 니콜라스 일에서 손을 떼겠다는 약속 없이는 의미 없는 말장난일 뿐이었다. 언제부터 내 안에서 루크의 자리가 이렇게 커졌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그저 녀석의 고약한 장난에 휘말린 것뿐이었는데…….
루크가 없으니까 자오도, 푸웨이도 덩달아 보이질 않았다. 다음날 오후가 다 되도록 펜트하우스엔 나하고 킵, 마커스뿐이었다. 혹시 누구한테서라도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해서 노상 휴대폰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어떤 연락도 없었다.
“난 탕수육하고 고기만두 그리고 오리 통구이. 점심이니까 가볍게 두 마리만…….”
“난 야채만두하고 두부튀김.”
“식당은 어디로 할까?”
“만두는 죽림원이 제일 낫지 않아?”
30분 가까이 식당 전단지를 늘어놓고 장고를 거듭한 끝에 킵하고 마커스가 드디어 점심 메뉴를 정했다.
마커스가 식당에 전화를 걸어서 모든 메뉴를 3인분씩 주문하고 있을 때, 나도 슬그머니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자오한테…… 다행히 자오는 신호 가자마자 시원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왜?」
“아니, 그냥…… 뭐하고 있나 궁금해서.”
「내가 뭐하고 있는지가 왜 궁금해?」
“너 말고, 루크.”
「아가씨하고 같이 계셔.」
아가씨? 어떤 아가씨?
「마리아 아가씨 말이야. 지금 본가에 와 있어.」
깜빡했다. 녀석은 유부남이었지. 그렇기는 하지만, 나랑 다투고 바로 본가로 갔다니…… 기분이 묘하다.
“기분은 좀 어때? 루크 말이야…….”
「그냥 그래. 왜?」
“아냐, 아무것도…….”
자오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루크가 어제 몬티첼리 저택에 왔었던 것도, 나하고 싸운 것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아무 일 없어.”
「아무 일도 없는데, 밤새 같이 있다가 지금 또 전화질이야?」
자오한테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어젠 말도 없이 어딜 갔었던 거야?」
“그냥…… 산책 좀 했어.”
「좀 기다려. 회장님은 금방 시내로 들어가실 거야. 흑풍회 원로들하고 저녁 약속이 있거든. 전화 왔었다고 전해줄게.」
“그럴 거 없어.”
집에 잘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밤새 자다 깨다 하면서 기다렸던 게 혼자 민망해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그냥…… 일하게 둬.”
전화를 끊고 잠깐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꿉꿉했다. 아무리 사랑해도 역시 가정이 있는 놈이라…… 그런 현실이 떠오를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막다른 벽에 딱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나쁜 놈…… 정략결혼이었다면서 보통 때는 신경도 안 쓰더니, 나랑 한번 싸웠다고 바로 집으로 튀어 들어가?
아니…… 내가 지금 이런 일로 마음 상해서 앓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러니까……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니콜라스, 그래…… 니콜라스를 잡아놨으니 루소 저택의 경계도 만만치 않겠지. 무작정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되고, 뭔가 작전이 있어야 되는데…….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이 징…… 하고 울었다. 루큰가? 아니…… 비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첸, 그 자식하고는 별 일 없었고?」
비니는 내가 루크한테 맞고 사는 줄 아는 모양이다. 뭐, 맞은 적도 있긴 있지만…….
“그럼. 잘 왔어.”
「얘기는 좀 해봤어?」
“무슨…… 얘기?”
「작은아버지가 되게 헷갈려 해.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애가 알면 알수록 이상한 것 같다고…….」
루크가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되게 계산적이고 손해 볼 짓은 절대로 안 할 것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충동적이고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일 때가 있다. 그건 그렇고…….
“루크하고 니네 작은아버지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지난밤의 밀담이 궁금해서 비니에게 물었다. 비록 조폭 숙부에 짭새 조카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비니는 사이가 좋다.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비니한테는 비밀이 없었다. 그리고 비니는 웬만한 일은 나한테 술술 부는 편이고…….
「애들을 빌려달라고 했대.」
“…….”
이게 무슨 소리냐? 애들을…… 빌리다니?
「아무리 자기라도 루소 의원 집에 덜렁 혼자 갈 수는 없지 않겠냐고…… 이쪽 패밀리에서 쓸 만한 조직원 백 명만 모아주면 그 영감을 아주 보내버리겠다고 했다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내가 전화에 대고 버럭 소리치자 시계를 쳐다보면서 점심밥 오기만 기다리던 마커스하고 킵이 깜짝 놀라서 나를 돌아봤다.
「니가 듣기에도 그런 것 같지? 작은아버지도 그 자식하고 얘기 할 때는 솔깃했는데, 보내 놓고 나니까 이게 말이 되나 싶은가 봐. 오죽하면 작은아버지가 그 자식에 대해서 너한테 좀 알아보라고 했겠어.」
뭐야. 그럼…… 지금 비니가 나를 염탐하는 건가?
“너, 얘기를 제대로 들은 게 확실해? 루크가 니네 작은아버지한테서 조직원을 빌리다니…… 그게 말이 돼? 화력이라면 흑풍회가 더 빵빵하지. 이쪽은 그냥 조직원이 아니라 기사단이 있단 말이야. 그런데 왜…….”
「루소를 치러가는 건 개인적인 일이라서 조직을 동원할 수 없다고 했대.」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개인적인 일이라니?
「아무래도 수상하잖아? 작은아버지는 의심스러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가르시아가 잔뜩 들떠서 작은아버지를 부추기고 있어. 가르시아 성격 알잖아? 루소한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악마하고라도 손을 잡을 텐데, 루크 첸이 대수냐면서…… 작은아버지가 안 움직이면 혼자라도 녀석을 따라나설 기세야.」
기린 덕분에 조금 나아졌던 몸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머리가 집중적으로 지끈거렸다.
「청연루 습격도 그렇고, 너한테 한 짓도 그렇고…… 루크 첸도 루소한테 유감이 없지는 않을 테니까…….」
“비니, 가르시아를 실망시키긴 싫지만, 루크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런 짓 할 놈이 아니야.”
청연루 습격은 이미 일단락된 사건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만만하면 또 모르겠지만, 다 지난 일을 두고 원수를 갚겠다고 종신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인 권력자한테 덤비는 바보는 없다. 루크가 그간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많이 했고, 때론 미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진짜로 미치지는 않았다.
「그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면 그런 짓을 할 수도 있을까?」
“다른 이유, 뭐?”
「내가 알아?」
하긴, 그 자식의 깊고 음흉한 속을 비니가 알 턱이 있나?
「너한테는 아무 말 없었어? 왜 그러느냐고 안 물어봤어?」
“그 자식, 나한테 화났어. 어젯밤에 날 여기 던져 놓고 나가서 전화도 한 통 없어.”
「웬만하면 달래서 좀 알아봐.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아.」
어지간한 일이면 비니가 나한테 이런 말 안 할 텐데…….
「그 자식이 진심이라면 작은아버지가 그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 조직원 백 명이 뭐야? 직접 무장하고 앞장서서 들어가려고 할 걸. 작은아버지는 어차피 루소한테 갚을 빚도 있고, 흑풍회하고도 제대로 한판 붙으려고 벼르던 참이었어. 그것 때문에 바바라하고까지 협상 중이었단 말이야. 그런 참에 첸, 그 자식이 나서서 루소를 잡아 준다는데 싫다고 할 이유가 없잖아?」
“루크가 니네 작은아버지만 좋을 일을 뭐 하러 하겠어? 내 남자친구에 대해서 이런 얘기하기 그렇지만…… 나쁠 때는 상상을 초월하게 나쁜 놈이야. 니네 작은아버지가 바바라하고 작당하고 슬슬 고개를 드니까 루소하고 싸움을 붙여서 아예 싹을 잘라버리려는 걸 수도 있어.”
「작은아버지라고 그걸 모르겠냐? 우리 작은아버지도 그런 쪽 머리는 비상해. 너도 알잖아?」
남자친구 자랑은 아니지만, 루크가 프란시스 몬티첼리보다 더 나쁜 놈이다. 아무리 프란시스 몬티첼리라고 해도 잔머리로는 루크를 못 당한다.
“나 같으면 좀 더 조심하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니네 작은아버지하고 루크가 손잡고 하는 일의 결과가 좋을 리 없잖아? 루소를 해치우고 나면 그 다음엔 두 사람이 전쟁을 벌일 텐데…… 작은아버지한테 승산이 없는 일이야.”
비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새 주변에 무슨 사고가 생겼는지 투덜투덜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많이 듣던 목소리다.
“터너랑 같이 있어?”
「터너도 요즘 파트너가 없잖아. 그래서…….」
불쌍한 터너. 마누라 같던 에쉬가 몸져누우니까 좋은 일이 하나도 없구나. 에쉬도 이 사실을 알면 걱정이 많겠다.
「너, 정말 첸한테서 들은 말이 아무것도 없어?」
“너, 니네 작은아버지 부탁 받고 나 염탐하냐?”
내 까칠한 반문에 비니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염탐이라니? 난 그냥…….」
“내가 작은아버지한테 할 수 있는 충고는 루크한테 말려들지 말라는 것뿐이야. 비니, 루크는 정말 위험한 놈이야. 나는 루크가 첸 콴을 잡아 죽이는 것도 봤고, 루소의 기사단하고 맞짱 뜨는 것도 지켜봤어. 그 자식은 니네 작은아버지하고도 달라.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단 말이야.”
「난 그 자식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그래, 난 눈치도 없고 사람 보는 눈도 없다. 그래서 루크가 그런 놈인 걸 반년이나 같이 살고, 온갖 사건 사고를 겪고 나서야 겨우 알았다.
「나도 작은아버지가 그 자식하고 손잡고 루소 의원 집에 쳐들어가는 건 반대야. 하지만 내가 말린다고 다 들어줄 것 같았으면 작은아버지는 애초에 마피아 대부 노릇도 안 했을 거야.」
“그냥 작은아버지한테 그 자식이 완전히 맛이 갔다고 해. 동서남북 구별도 못하고 횡설수설한다고…….”
「첸이 멀쩡한 건 작은아버지도 알아. 어제 직접 만났고, 얘기도 꽤 길게 했었잖아.」
“그럼 작은아버지는 대체 나한테서 뭘 알아보라고 한 건데?”
「그러니까…… 향후 계획 같은 거 말이야. 여행을 갈 것 같은 낌새가 있었다든지, 어디 멀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든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면 헤어지자는 언질이라도…….」
“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비니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터너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비니?”
「아무래도 첸, 그 자식…… 크게 한탕하고 쿠간을 뜰 생각인 것 같아.」
루크가 프란시스 몬티첼리에게 제안한 건 알렉산더 루소에 대한 복수뿐만이 아니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와의 독대에서는 복수보다 더 달콤한 두 번째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이야말로 루크를 제거하고 흑풍회를 다시 차이나타운 담장 안으로 밀어 넣을 궁리로 절치부심하던 프란시스 몬티첼리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것이었다. 루크는 쿠간을 떠날 생각이었던 거다.
일을 마무리 짓고 나면 자신은 쿠간을 떠날 거라고…… 이미 자기 몫은 충분히 챙겼고, 흑풍회 수장 자리에 미련 따위는 없으니까 호랑이 떠난 굴에서 마음껏 왕 노릇을 하시라고 했다는데, 그건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거부할 수 있는 제안이 아니었다.
루크가 없는 흑풍회는 프란시스 몬티첼리에겐 만만한 조무래기일 뿐이었다. 총수인 첸 진은 병들어 누운 지 오래고 후계자를 자처하며 거들먹거리던 첸 콴도 루크 손에 죽었으니, 루크만 비켜준다면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암흑가의 왕좌를 차지하는 데엔 전쟁도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걸까? 이런 식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작정이었나? 어떤 언질도 없이 바람결에 연기가 흩어지듯…….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하는 웃기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럴 수 있으니까 나쁜 놈인 거다. 처음부터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런 놈하고 엮이지 말라고, 너만 죽어날 거라고 충고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충고를 무시했고, 그 결과가 이거다.
“뭐야? 오늘도 안 들어와?”
홀로 울분을 삭이느라 머리가 돌 것 같은데 킵이 시끄럽게 앵앵거렸다. 왜 저러나 싶어서 눈을 뜨고 돌아보니 녀석은 휴대폰을 붙들고 씩씩거리는 중이었다. 발렌타인하고 통화 중인 모양이다.
“왜?”
킵은 발렌타인이랑 사랑싸움이 한창이고, 마커스는 배달 온 음식을 테이블에 떡 벌어지게 차리는 중이었다. 4인용 식탁이 음식 접시로 넘칠 지경인데, 저게 두 녀석의 한 끼라니…… 볼 때마다 놀랍다. 나도 좀 전까지는 배가 고팠는데, 스트레스 때문인지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몬티첼리 집이지? 내가 그리로 갈게.”
발렌타인의 대답이 마땅치 않았는지 킵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무슨 짓을 하는데 오지도 말래? 정말 이럴 거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루크, 그 자식은 나중에 찾아서 죽여버리고…… 주섬주섬 일어나서 킵의 손에서 전화기를 뺐었다.
“언제 갈 거야?”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래도 발렌타인은 무리 없이 알아들었다. 하지만…….
「생각 중이야.」
이건 내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다.
“지금 갈게. 같이 생각해.”
발렌타인이 피식 웃었다.
「넌 외출 금지라며?」
“앞으로 내 앞에서 그 자식 얘긴 꺼내지도 마!”
휴대폰을 기린에게 돌려주고 나갈 준비를 했다. 몸이 말짱해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면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다.
“사이몬한테 가는 거야? 그럼, 같이 가.”
내가 현관으로 나서자 킵이 후다닥 달려 나와서 앞길을 막았다.
“넌 가서 만두나 먹어. 일 끝나면 발렌타인은 틀림없이 보내줄 테니까…….”
킵을 옆으로 밀고 문을 열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이런 배신감을 이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나? 노여움으로, 그리고 슬픔 때문에 심장이 이제라도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발렌타인하고 오웬은 저택의 별채 응접실에서 놀고 있었다. 어제 내려 쌓인 눈 때문에 여기까지 오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 바람에 초겨울의 짧은 해가 이제 막 수평선 아래로 떨어질 참이었다. 그런데 이 둘은 뭐가 이렇게 한가하냐? 오웬은 당구 연습 중이었고, 발렌타인은 인터넷으로 뭔가를 한창 검색하고 있었다.
“뭐야?”
내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왔어?”
“웬일이야?”
둘의 표정과 말투도 마냥 한가하기만 했다. 혹시 니콜라스 구출 작전을 포기한 걸까? 다시 생각해보니까 너무 위험하다, 우리 목숨도 소중하다……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면 딱히 설득할 방법도 없었다.
“니콜라스를 구하러 간다며? 그것도 되도록 빨리…….”
“갈 거야.”
“언제?”
“저녁에.”
발렌타인의 화끈한 대답에 홀린 듯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저녁이면…… 언제? 오늘?”
발렌타인은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은 뉴스 한 줄 볼 경황이 없어서 나도 모니터를 슬쩍 넘겨봤다. 루소 관련해서 뭔가 기사가 떴나 했는데, 환경 관련인가? 웬 새떼가 모니터 가득 드글거리고 있었다. 쿠간 시 남쪽, 킬리요크 강 하구엔 겨울이면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몰려오는 도래지가 있는데 거기 사진인가?
“루소 쪽은…… 움직임이 어때? 좀 알아봤어?”
환경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지만, 요즘 같은 때에 뭐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지…… 뭔가 계획은 세워 놓고 이러는 거겠지?
“지금 보고 있잖아.”
그렇게 대꾸하면서 발렌타인이 턱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하지만 모니터를 가득 채운 건 보고 또 봐도 새떼뿐이었다.
“이게 뭐? 그냥…….”
새잖아…… 아니, 새떼에 뒤덮인 이 번쩍거리는 철문은 전에 본 적이 있다. 청동의 테두리에 금박으로 고지도를 새긴…… 이렇게 으리번쩍 부티 나는 대문을 가진 집은 쿠간에서도 드물었다.
“여기 혹시…….”
“힌트라도 줄까?”
이제 보니 사진 제목이 ‘해안 절벽의 이색풍경. 새떼 약 30만 마리 언덕 위에 집결’ 이었다. 해안 절벽이라면 이 집은 루소의 저택이 확실했다.
무슨 일일까? 해안 절벽에 갈매기 서식지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언덕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새가 모두 갈매기도 아니고…… 게다가 30만 마리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말했잖아. 제월공은 새를 다스린다고…….”
아, 맞다. 아빠 기린이 루소의 저택에 갔었지. 하지만 그 아저씨는 며칠째 소식 한 자락 없고, 나는 신경 쓰이는 다른 일이 많아서 깜빡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빠 아니라고 너무 무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제월공이 이 새들을 불러들인 거란 말이야? 30만 마리를?”
나는 아직도 새를 다스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많은 새를 어떻게 다 불러 모았을까? 나는 그동안 쿠간에 새가 30만 마리나 있는 줄도 몰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거야. 알잖아? 새는 멀리 날거든.”
치유능력밖에 없다고 하기에 좀 만만히 봤었는데…… 언덕을 빼곡히 뒤덮고 있는 30만 마리의 새는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히 무서웠다. 하지만 새떼를 이렇게 불러 모으기만 할 수 있는 거라면, 다스린다고 하기엔 좀 부족하지 않나?
기사를 보니까 새떼가 언덕에 모이기 시작한 건 제월공이 루소의 저택으로 찾아간 그날부터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제월공이 니콜라스를 데리고 나왔다는 소식은 없으니…… 새떼 30만 마리가 모여서 꾸륵거리는 정도로는 루소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는 뜻이다.
“표정이 왜 그렇게 떫어?”
내가 제월공의 능력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감격하지 않는 게 마땅치 않은지, 발렌타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냥…… 30만 대군이 저렇게 모여만 있는 건가 해서. 불러 모으는 거 말고, 다른 건 못 시켜?”
“다른 거 뭐?”
“새는 사납다면서?”
“이 새들이 동시에 날아올라서 루소의 경호원들이라도 뜯어먹었으면 좋겠어?”
니콜라스를 그 집에서 무사히 데리고 나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바다 오리한테는 좀 무리겠지?”
자세히 보니 부리도 넓적한 것이, 사나운 구석이라곤 통 없는 귀여운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까마귀나 갈매기, 독수리 같은 놈들이 섞여 있긴 하지만…….
“제월공이 자기 귀여운 친구들을 아끼는 건 사실이야. 험한 일에 앞세우는 일도 거의 없고…… 기린은 자비심이 깊은 동물이거든.”
그렇게 자비심이 깊은데, 왜 나는 그 손에 목이 졸려 죽을 뻔했는지 모르겠다.
“제월공도 화나면 포악해.”
여태 죽어라 당구 연습만 하던 오웬이 툭 끼어들었다. 제월공이 화나면 얼마나 포악한지는 나도 안다. 그 불벼락을 정통으로 맞았으니까.
“제월공이 화나면 새들도 덩달아 흥분하겠지. 그 광경을 실제로 보면…… 한동안은 튀긴 닭도 무서울걸?”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얌전하고 민주적이야?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선 시위도 훌륭한 의사표현이지만…… 오리 30만 마리가 아니라 300만 마리라도, 저렇게 깃이나 고르고 앉아 있으면 루소가 눈 하나 깜짝하겠어? 니콜라스하고 제월공은 친구라면서? 그럼 조금은 화낼 만하잖아?”
내 대답에 오웬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뭔가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그래서, 언제 어떻게 그 집에 들어갈 건지 구체적으로 물어보려는 참에 휴대폰이 울렸다. 이 중요한 순간에 어떤 놈이…… 휴대폰을 꺼내서 액정을 확인하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루크였다. 액정에 뜬〈자기야~♥〉를 잠깐 노려보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
“누군데 그렇게…….”
“뭐?”
되묻는 말투가 너무 사나웠는지 발렌타인이 움찔했다.
“화가 났어?”
“그냥 신경이 좀 곤두서서 그래.”
루크의 전화 때문인지 잠시 잊었던 피곤과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터덜터덜 소파로 걸어가는 잠깐 사이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이번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휴대폰을 소파 구석에 던져버리고 나도 소파에 길게 뻗었다.
여기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녀석과 혼자 싸우고, 혼자 헤어졌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 더 남아서 전화를 하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설명도 듣기 싫고 변명도 필요 없다.
루크는 언제라도 쿠간을 떠날 수 있다. 자신이 원할 때, 혹은 그럴 필요가 있을 때…… 사실 나는 줄곧 녀석이 여길 떠나기를 바라는 입장이었다. 첸 콴이 왕자의 난 비슷한 걸 일으켜서 루크를 위협했을 때도 그랬고, 시간을 담은 병 때문에 루소가 위협적으로 나왔을 때에도 미련스럽게 버티는 놈을 등 떠밀어서라도 멀리 보내려고 했었다. 루크도 그걸 아는데 왜 내게 한마디 말도 없었던 걸까? 간다고 하면 내가 잡을까 봐? 제발 버리지 말라고 매달릴까 봐? 아니, 그럴 가치도 없었겠지. 난 녀석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루크 첸하고 싸웠군.”
발렌타인이 다가와서 머리맡에 앉았다.
“아니야.”
“그 녀석이 말을 좀 심하게 했다고 해도…… 그 정도는 니가 참아야 되는 거 아니야?”
“그 자식하고 안 싸웠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든, 내가 왜 참아?”
몸을 좀 끌어 올려서 발렌타인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러면 진정이 좀 될까 싶어서…… 하지만 발렌타인이 사정도 모르고 내 속을 긁었다.
“라두칸 때문에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 거…… 바람피우는 거잖아.”
“이젠 아니야. 나 그놈하고 헤어졌어.”
사실, 헤어진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차인 거지. 아니, 차인 것도 아니고 이건 뭐랄까…… 최소한의 인간 대접도 못 받고 그냥 버려진 거다.
“루크 첸이 헤어지자고 했어?”
“그 얘기는 하기 싫어. 길게 말할 거리도 없고…… 오리 30만 마리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니콜라스를 데리고 나올 방법이나 얘기해 봐.”
“헤어지자고 했어도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그 자식 진심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
“이 호랑이 굴까지 널 데리러 왔었잖아. 금방 헤어질 상대 때문에 목숨을 걸 정도로 미련한 놈이 아니잖아?”
“그 자식은 몬티첼리하고 비즈니스가 있었어. 그때 하필 내가 여기 와 있어서 날 데리러 온 것처럼 보인 것뿐이야. 그런 식으로 사람 헛갈리게 만드는 데는 도가 튼 놈이야.”
내 대답에 발렌타인이 혀를 끌끌 찼다.
“엄청 살벌하게 다퉜나 보네.”
발렌타인이 내 머리를 치우고 일어났다. 그리곤 소파 구석에 끼어 있는 휴대폰을 찾아서 전원을 켰다.
“하지 마. 뭐하려고?”
“그새 두 통이나 더 왔어. 루크 첸은 이렇게 널 애타게 찾는데, 넌 뭐가 문제야?”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발렌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이런 식으로 루크 첸을 후다닥 정리하고 라두칸한테 돌아가고 싶은 거야?”
아무리 오해라도, 불쾌하고 모욕적이다.
“난 어떤 놈한테도 안 돌아가!”
연쇄살인범도 싫고, 조폭 두목은 치가 떨린다. 나는 진심인데, 발렌타인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넌 앞으로 긴 인생을 살게 될 거야, 짭새. 힘이 많이 들 텐데, 옆에 누구라도 있어야지.”
“오래 살면서 그놈들한테 시달리느니, 그냥 오늘 저녁에 죽었으면 좋겠어.”
내 대꾸에 발렌타인이 기다렸다는 듯 통화버튼을 꾹 눌렀다.
“왜 그래? 그 자식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고…….”
“궁금해서. 길고 힘든 저녁이 될 텐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지.”
내 주변엔 왜 하나같이 저런 놈들뿐인지 모르겠다.
발렌타인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대기도 전에 저쪽에서 거친 추궁이 쏟아졌다. 거기 어디냐, 너 왜 이러는 거냐, 대체 무슨 일이냐…… 루크 목소리 듣기도 싫어서 쿠션을 집어서 귀를 틀어막았다.
“너야말로 짭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끌고 가서 팼어?”
귀를 막아도 발렌타인의 목소리는 고스란히 다 들렸다.
“미안하지만 니 전화 안 받아. 짭새 치곤 순하고 착한 놈인데…… 무슨 짓을 한 거야?”
발렌타인이 다시 내 머리맡에 와서 앉았다. 그리곤 내 얼굴에서 쿠션을 치우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루크 첸은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는데?”
거짓말은 아니다. 녀석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궁리를 하면서도 말 한마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걸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발렌타인이 내민 전화기를 잠깐 노려보다가…… 받아들었다.
“루크.”
「대체 무슨 짓이야? 내가 분명히 당분간 외출금지라고 했었지? 그런데 거긴 왜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어? 너 설마…… 루소 의원 집에 같이 들어갈 생각인 거야?」
“니콜라스 일이고, 내가 구조요청을 했으니까 같이 가야지, 어떻게 나만 쏙 빠져? 내가 좋은 일엔 자주 빠져도 험하고 궂은일엔 안 빠지는 거…… 너도 알잖아?”
「제정신이야? 그 자식 일에 니가 왜 또 목숨을 걸어?」
얼마나 소리를 질러대는지, 귀가 아파서 전화기를 귀에서 뗐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어도, 한마디 안 하고 꾹 참았어. 그런데 넌 대체 뭐가 불만이야? 라두칸한테 그렇게 목을 매도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가니까, 내가 만만해?」
나야말로 노여움으로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터질 것 같아도 한마디 안 하고 참는 중이다. 일일이 묻고, 따지고, 빤한 변명 들어주고, 이해하는 것도 구차해서…….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하고 싶지만, 그럼 죽어서도 만날 테니까…… 그건 싫어. 그냥, 가고 싶은데 가서 잘 살아.”
「몸 아프다고 이상한 약이라도 주워 먹은 거야? 웬 헛소리야?」
“한탕 크게 하고 여길 뜰 거라면서?”
「그건…….」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 자식도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죽을죄를 짓고, 그걸 딱 들켰을 때. 그러니까…… 지금처럼.
“쿠간을 떠난다고 솔직히 말했어도 난 널 안 잡았을 거야.”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멋대로 넘겨짚지 마.」
“작별인사 한마디 정도는 미리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어쩌겠어. 넌 본래 그런 놈인 걸…….”
「작별인사는 무슨 작별인사야? 헤어질 것도 아닌데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왜 해?」
교활한 놈! 끝까지 말장난이다. 귀신도 모르게 쿠간을 뜨면 그게 헤어지는 거지, 지금 나랑 장거리 펜팔이라도 하자는 거냐?
「그리고…… 본래 그런 놈이란 게 무슨 뜻이야?」
루크가 씨근덕거리며 사납게 따졌다. 이 자식 상대로 길게 떠들 기운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궁금하다니 마지막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비열하고 나쁜 놈이란 뜻이야. 그 정도는 너한테 욕도 아니지만…….”
긴말하기도 허무해서 전화를 끊었다. 이게 나하고 녀석의 마지막 대화다. 오늘 밤, 운이 좋아서 루소의 저택에서 살아나올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루크하고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휴대폰을 정원에 서 있는 나무 둥치에 던져서 박살내고 창문을 닫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분해서 씩씩거리며 돌아서는 나를 오웬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그자가 인사 한마디 없이 어딜 갔어?”
“루소네 집에 어떻게 들어갈 거야? 생각해 놓은 작전은 있어?”
오웬이 발렌타인을 힐끔 돌아봤다. 아무 대책도 없이 이렇게 놀고 있었던 거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설마 했는데 발렌타인의 대답은 역시나였다.
“작전은 뭐…… 그냥 들어가 보는 거지. 오리 안 밟게 조심하면서…….”
발렌타인이 루소의 저택에 그냥 들어간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농담인 줄 알았다. 이쪽은 달랑 세 명뿐이니까, 어차피 가능한 방법은 몰래 숨어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연기처럼 저택에 잠입해서 지하실을 뒤져 니콜라스를 찾아낸 후, 들어갈 때처럼 조용히 나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 와중에 경호원들에게 발각이 될 경우, 소리 없이 처리하고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작전의 성패를 가르게 되는 거다. 그래서 야음을 틈타서 조용히 잠입하는 걸 나름 재치 있게 돌려서 말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기…… 발렌타인.”
“왜?”
“정말 이렇게 가는 거야? 정문으로?”
루소 저택의 아름다운 정문이 몇 미터 남지 않았다. 게다가 오리 안 밟게 조심해서 간다더니, 언덕을 올라오면서 벌써 세 마리째 오리를 걷어찼다.
“왜? 뒷문으로 들어가면 루소가 모를 것 같아?”
“우리 작전은 저 집에 몰래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진입로부터 50미터마다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고, 주변을 경계하는 기사들만 해도 200~300명은 될 거야. 그런데 저길 어떻게 몰래 들어가?”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댁 찾아가듯 당당하게 가나?
“당신은 본래 그런 거 전문이잖아?”
“내 전문이 뭐라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사람 죽이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 난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투덜거리다가 그만 오리발을 밟고 말았다. 사람이 지나가는데 비킬 생각도 않고 버티던 시커먼 오리 한 마리가 꽥 소리를 지르며 퍼덕거렸다. 그 바람에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다가 이번엔 오리 두 마리를 연달아 걷어찼다.
사방에서 날아오르며 위협적으로 푸드덕거리는 새떼에 놀라 허둥거리는 나를 발렌타인이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몰래 들어가서 루소를 해치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고? 너 때문에 오리 30만 마리가 다 들고 일어날 판인데?”
사실, 오리와 까마귀, 비둘기, 기타 등등…… 이름 모를 새가 30만 마리나 몰려와서 조약돌처럼 널려 있는 이 언덕을 조용히 지나갈 방법은 애초에 없었다. 바다오리는 사진에서 본 것처럼 귀엽지도 않고, 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덩치도 징그럽게 컸다. 게다가 떼로 몰려 있으니 이것들도 간이 부었는지, 사람이 지나가도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노려보며 떽떽거리는 판국이었다.
발렌타인이 새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헛소리한다고 했을 때는 그래 봐야 새가 뭐…… 이러면서 속으로 비웃었는데, 엄청난 새떼가 언덕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는 광경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오리 정도면 만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놈들이 떠서 한 번씩만 치고 지나가도 살기는 틀린 거다.
게다가 현장에 와서 보니 사진에는 몇 마리 보이지도 않던 독수리나 까마귀가 중간 중간 상당히 섞여 있었다. 나는 동물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높은 나무 위에 올라앉아서 우리를 노려보는 놈들은…… 솔직히 무서웠다. 놈들이 한꺼번에 열 마리만 달려들어도 우리가 당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리 떼와 씨름을 해가며 저택의 정문에 도착했다. 철문 위쪽이 새들에게는 상당히 명당인지, 덩치 크고 사나워 보이는 독수리들이 빈틈도 없이 앉아 있었다. 철문과 담장 위에 앉아 있는 놈들만 해도 족히 수천 마리는 될 것 같았다.
창살 사이로 들여다본 저택의 정원은 상태가 더 살벌했다. 저택의 드넓은 안마당은 까마귀 떼에게 점령당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저택 본채의 지붕에도 검은 새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루소가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이런 지경을 당하고도 태연할 수 있을까? 니콜라스와 제월공 그리고 알렉산더 루소가 같이 있다면 집안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오웬이 앞으로 나서서 들고 있던 검 끄트머리로 새똥 범벅이 된 초인종을 꾹 눌렀다. 설마 했는데, 정말 정문으로 들어가는구나. 초대받은 손님처럼 당당하게…….
「누구십니까?」
안에서 침착한 음성이 들려왔다.
“의원님 계십니까? 잠깐 뵙고 싶은데요?”
「선약이 있으십니까?」
이 꼴을 당하고도 여유가 넘치네. 선약은 무슨…… 발렌타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오웬을 옆으로 밀고 대신 대답을 했다.
“선약은 없지만…… 의원께서 지금 많이 바쁘신가?”
「원칙적으로…….」
“선약 없이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군.”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나도 미리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거든.”
「대통령이나, 아니면 교황이라도 되시나 보죠.」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비아냥에 발렌타인은 오히려 여유가 넘쳤다.
“카시엘이 왔다고 전하게. 의원도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거야.”
선약이 없으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열릴 것 같지 않던 저택의 철문이 5분이 지나기도 전에 순순히 열렸다. 발렌타인이란 지금 이름만큼이나 카시엘이라는 옛 이름도 유명한 게 분명했다. 굳게 닫힌 루소 저택의 대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힐 만한 영향력이라…… 청부 살인자 정도의 명성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대체 발렌타인의 정체가 뭘까 하는 것도 이젠 묵은 의문이었다. 본인은 자기가 평범한 인간이라고 빠득빠득 우기지만, 씨알도 안 먹힐 헛소리다. 그간은 산적한 문제가 많아서 은퇴한 청부 자객의 과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카시엘이라…… 인터넷 검색 같은 거라도 해보면 걸리는 게 좀 있으려나?
저택의 정원은 완전히 까마귀 밭이었다. 까마귀가 본래 이렇게 컸나? 아니면 내가 겁을 먹어서 본래 병아리만한 새가 타조로 보이나? 게다가 이놈들은 울타리 밖에 있던 오리하고 또 달라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맣고, 성격도 드세 보이는 게…… 잘못 건드렸다가는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리겠다 싶을 정도로 살벌한 느낌이 있었다.
나는 겁이 나서 한 걸음 옮기기도 조심스럽고, 조마조마한데, 발렌타인은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까마귀들을 툭툭 차며 거침없이 저택으로 다가갔다.
“어쩔 작정이야?”
“일단 인사를 해야겠지.”
“좋겠네. 저녁도 얻어먹고, 수다도 떨고…….”
“설마 그렇게까지 분위기가 좋겠어? 물이라도 한잔 갖다 주면 점잖은 거지.”
정문 초소도 비어 있더니, 이 넓은 정원에도 경호원 한 놈이 없었다. 모두 새떼에게 쫓겨서 안에 들어가 있는 건가? 그럼 저택 안은 기사단 놈들로 버글버글 하단 얘긴데…… 오웬은 검 한 자루, 나는 총 한 자루, 그나마 발렌타인은 뭘 갖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정말 이렇게 가도 괜찮은 걸까?
“사람은 점잖아.”
“만난 적이 있었나?”
“예전에 잠깐.”
너무 정상적으로 들어온다고 발렌타인에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막상 와 보니 몰래 들어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택의 주변에도 감시 카메라가 쫙 깔렸다. 대부분 새똥 벼락을 맞았거나, 새들이 잡아 뜯었는지 간신히 전선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긴 했지만…… 이렇게 철통같은 경계태세에 안에 버티고 있을 병력까지 감안하면 예전에 몬티첼리 저택이나, 청연루 습격 때처럼 헬기든, 경찰 타격대 버스든 대규모 병력을 몰고 와서 때려 엎는 것 외엔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습격은 이미 당했구나. 사람이 아니라 새떼한테…….
이제 현관이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까마귀 떼의 사나운 눈초리는 피할 수 있겠지만, 안에 버티고 있을 병력을 생각하니 뱃속에서 한숨부터 터져 나왔다.
“겉보기엔 점잖은 신사지만, 굉장히 냉혹한 성격이란 평판이 있어. 그건 알아?”
발렌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안 그런 왕도 있나?”
현관문 앞에 다 와서야 지난 며칠간 새들이 얌전히 앉아만 있었던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관문은 테두리와 중앙에 주물 장식을 박은 나무문으로 저택의 격에 맞게 묵직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니 문은 성한 곳 한군데 없을 정도로 패이고 뜯겨 있었다. 군데군데 집중 공략을 당한 곳은 금방 구멍이라도 뚫릴 정도로 패인 자리가 깊었다.
새를 다스린다더니…… 이런 거였나? 안에서 덧문을 닫아놔서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저택의 유리창도 성한 게 몇 장 없었다. 새들은 이미 루소의 저택을 공격했었던 거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얌전히 앉아만 있는 걸까?
그때, 어딘가에서 아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름 끼치는 소리에 기겁해서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이게 무슨 소리야?”
“까마귀 우는 소리 처음 들어?”
오웬이 혀를 끌끌 차며 핀잔을 날렸다.
처음 듣는다. 이게 까마귀 우는 소리냐? 어디서 사람이 칼에 찔렸는지 알았다. 그래도 까마귀 소리라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 좀 하고…… 흐억…….
분위기도 너무 이상하고, 새도 무섭고, 앞일도 걱정스럽고…… 게다가 좀 전의 비명소리로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선 참이었는데 이번엔 크고 시커먼 어떤 것이 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뭐야…… 이게…….”
이번에야말로 혼비백산을 해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넋 나간 얼굴로 헐떡거리며 손사래를 치자 이번엔 발렌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까마귀 처음 봐?”
그게 까마귀였어? 뭐가 그렇게 크고 빨라? 게다가 왜 나한테 날아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상황에 내가 아무래도 겁에 잔뜩 질려 있었던 모양이다. 발렌타인하고 오웬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어서 나도 그런 척하고 따라오긴 했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었던 건 나 자신도 미처 몰랐다.
나한테 덤벼들었던 까마귀는 다시 보니 오웬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망할 까마귀 같으니…… 목표가 오웬이었으면 그리 바로 날아갈 일이지, 왜 나를 거쳐 가? 오웬하고 까마귀를 번갈아 노려보며 일어났다. 그리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도리질도 치고, 얼굴도 박박 문질렀다. 고작 까마귀 한 마리 때문에 이렇게 허둥거리면 안 된다. 아직 지옥문은 열리지도 않았다.
“괜찮아?”
발렌타인의 음성에 짜증이 약간 묻어 있었다.
“괜찮아.”
“그렇다니 다행이지만, 널 대체 왜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어쩔 수 없잖아? 나야말로 평범한 인간이란 말이야.”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 하는 거 아냐? 평범에 못 미칠 때도 많잖아?”
내가 노려보자 발렌타인이 흠, 하고 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저택의 현관문이 삐끔 열렸다.
문 안에서 고개를 내민 건 저택의 집사였다. 예전에 잠깐 본 얼굴이었지만, 집사치곤 인상이 강렬한 편이라 확실히 기억이 났다. 집사는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물론 우리 때문에 겁에 질린 건 아니고…….
“오랜만…….”
“일단 들어오시죠.”
집사가 조급한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한 사람 간신히 드나들 만한 문틈으로 나부터 끌어당겼다.
“새는 안 돼요. 새는 절대로…….”
무턱대고 우리를 집안으로 끌어당기던 집사가 오웬의 어깨에 올라앉은 까마귀를 보고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 눈엔 집사의 행동이 하나도 한심하거나 호들갑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게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반응이다.
어쨌든, 안에 들어와 보니 우리를 맞으러 나온 건 집사 혼자가 아니었다. 저택 입구부터 시작되는 긴 회랑엔 백여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무장한 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집사와는 달리 크게 긴장하거나, 총을 들이대며 우리를 위협하진 않았지만……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초인종 누르고 정문으로 들어왔으면 당연히 이렇게 되는 거지, 대체 뭘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기사들 중에서 개중 나이 좀 있어 보이는 놈이 우리 앞으로 나섰다.
“무기는 우리가 보관하겠습니다.”
손에 든 거 내놓으라는 기사단의 요구에 오웬이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완전 무장한 백 명의 병력을 상대로 버틸 재간이 없으니 별 수 없이 한시도 떼어 놓지 않고 항상 지니고 다니던 검을 놈들에게 건넸다. 그 사이에 나도 갖고 있던 총을 빼앗겼다. 나한테는 총 내놓으라는 요청도 없이 여기저기 툭툭 건드리더니 허리춤을 뒤져서 그냥 털어갔다.
“당신은?”
저쪽 보스가 발렌타인에게 다가섰다.
“난 총 같은 거 없어.”
뭐야…… 작전도 마음에 안 드는데, 달랑 빈손이야? 내가 노려보자 발렌타인이 미안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털릴 거 뭐 하러 갖고 다녀?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그리고…….”
발렌타인이 둘러선 기사들의 무장 상태를 슥 훑었다.
“필요하면, 빌려 쓰지 뭐.”
보스의 지시에 기사단 두 명이 발렌타인의 몸을 샅샅이 더듬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주머니칼 하나 가진 것 없는 빈 몸이었다.
“당신이 카시엘이야?”
기사단 보스가 발렌타인을 위아래로 한번 슥 훑었다.
“기대했던 거하곤 좀 다르네?”
“뭘 기대했는데?”
“천사는 날개가 있다던데?”
천사……라고?
“잘라버렸어. 거추장스러워서.”
발렌타인이 집사를 돌아봤다.
“의원은?”
“안에…….”
“안내해주게.”
“아, 예…… 하지만 새는…….”
집사가 오웬의 어깨에 앉아서 날개를 고르고 있는 까마귀를 질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오웬이 까마귀를 손등으로 툭 쳐서 날렸다. 그 바람에 기사단이 그간 새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확실히 알았다. 백 명이나 되는 놈들이 거의 동시에 들고 있던 소총으로 날아오른 까마귀를 조준했던 것이다. 다행히 까마귀는 한순간에 회랑 안쪽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당신…… 천사야?”
물어보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아니.”
“그럼 좀 전에 그 얘기는 뭐였어? 저 작자가 분명히 천사 어쩌고…… 했잖아?”
“천사 같은 건 없어.”
“날개가 있었어?”
여태 담담하던 발렌타인이 날개 얘기에 흠…… 하고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건 그것 말고도 많아.”
뭐야…… 날개가 있긴 있었단 소리잖아. 한순간, 발렌타인의 등에 작은 날개가 돋아서 파닥거리는 허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도시에 이상한 놈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천사라니…… 용에, 기린에, 뱀파이어도 사람처럼 하고 돌아다니니까 그건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천사가 왜 청부살인에, 성질은 그 따위고…….
“그동안 꽤 자주 만나고, 여기까지 같이 왔는데 그 정도는 솔직히 말해줘도 되잖아?”
“난 너하고 여기 같이 올 마음 전혀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서 관심 꺼.”
“당신이 천사였다고 해도 안 놀릴게.”
“말했잖아. 천사 같은 건 없다니까.”
발렌타인이 나를 노려보며 짜증을 냈다.
시간을 거슬러 1년 전 초겨울의 어느 날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긴 복도를 따라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폐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저택의 공기조차 1년 전의 그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내 손가락과 무릎이 떨리는 것은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 어딘가에 니콜라스가 잡혀 있다. 무사할까?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살아서 이 고대의 신전, 혹은 무덤 같은 저택을 나갈 수 있을까? 불안감과 함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몇 번인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전에 한번 와봤던 그 방…… 루소의 개인 서재였다. 수천 권의 책이 두서없이 꽂혀 있는 오래된 서가, 장작이 타고 있는 벽난로,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창밖의 황량한 겨울 풍경, 그리고 알렉산더 루소…….
루소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좀 더 나이 들고 여위어 보였다.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서는 우리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은 이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엄했다. 저택을 휘감고 있는 냉기가 마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루소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발렌타인의 정체가 무엇이든, 어떤 말을 하던 루소를 설득할 수는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자네…….”
우리가 서재에 들어선 순간부터 루소는 발렌타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쌩 무시하기는 좀 힘들었는지 마지못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많이 좋아졌군. 다행일세.”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까지 다행으로 생각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엉망으로 깨지고 터진 채 이 집에서 업혀 나간 게 불과 며칠 전이란 걸 생각해보면, 루소의 표정이 떫은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카시엘과도 아는 사이였는지는 미처 몰랐네.”
나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발렌타인이 전에 누구였는지 따위, 사실 별로 관심도 없다.
“니콜라스는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작전도 없이 밀고 들어온 거…… 그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안부인사 길게 늘여서 해봐야 분위기가 부드러워질 것도 아니고, 저쪽도 우리가 들이닥친 이유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성격이 급하군.”
“의원님!”
내가 발끈하자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기사들이 대뜸 총을 고쳐 쥐고 험악하게 나왔다. 이쪽은 겨우 세 명에, 그나마 문 앞에서 무기까지 싹 털어가 놓고서 호들갑은…….
“당신 멋대로 니콜라스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을 우리한테 넘겨주십시오.”
흥분과 노여움으로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발렌타인이 진정하라는 듯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갑자기 치밀어 오른 울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화가 나 있었던 걸까? 이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아니면, 니콜라스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채 이 집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 그 순간부터였나?
나는 알렉산더 루소가 두렵다. 이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른 사람들이 아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알려진 것보다 더 두려운 이면이 있다는 사실까지 다 알고 마주선 지금은 뱃속이 얼어붙는 것 같을 정도였다. 하지만 니콜라스를 해코지 하는 것까지 용납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소는 내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니콜라스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 그를 잡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이자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솔직하기도 하고, 대담하기도 하고, 또 어리석기도 하고…….”
“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하지만 자네의 어떤 면이 그렇게까지 특별한지는 모르겠어. 그자에게 인간은 자신의 제단에 바칠 하찮은 제물에 지나지 않을 텐데…… 자네는 뭐가 그렇게 달랐을까?”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나서 니콜라스하고 연애질이냐고 묻는 거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사실 니콜라스가 몬티첼리 저택으로, 공연장 백 스테이지로 나를 찾아오고 그랬던 건 순수하게 내가 그립고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구질구질한 사연까지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눈이 찢어져라 루소를 노려만 봤다.
“당신이 국회의원이면 다야? 깡패들 풀어서 아무 데나 습격하고, 아무나 잡아와서 죽이고…… 그래도 되는 줄 알아? 회원 가입한 친목계 명칭이 ‘아홉 명의 왕’이라더니, 진짜 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여태 시내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의 배후가 당신이란 게 밝혀지면 그땐 이 따위 왕 놀이도 끝장이야!”
“순진하고 맹하니…… 귀여운 구석은 있군.”
길게 말 섞기도 피곤하다는 듯 루소가 내 말을 툭 잘랐다. 그리고는 바로 발렌타인에게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의원.”
발렌타인이 내 어깨를 다독거리고는 앞으로 나섰다. 발렌타인을 쳐다보는 루소의 눈길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카시엘이란 이름을 쓸 때에도 평판은 시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이름 바꾼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당신이 카시엘이란 증거라도 있습니까? 아무리 봐도 천사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지금은 천사가 아니니까.”
발렌타인이 나를 소파에 밀어 앉히고 자기도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오웬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했지만, 그는 고개를 한번 가로젓고는 우리 등 뒤에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섰다. 빈손인데도 불구하고 오웬은 주눅 든 기색이라곤 없었고, 손에 보검을 쥔 것처럼 태도가 당당했다.
“증거도 없고, 천사도 아니라…… 그럼 당신이 카시엘이라는 걸 내가 믿지 않아도 큰 불만은 없겠군요.”
루소가 우리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지금 태도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팔러 온 잡상인 대하듯 건성이었다.
“당신도 ‘페라가몬의 노래’ 정도는 읽어봤을 텐데요.”
“피에 젖은 천사가 왕에게 내려오니, 왕이 천사를 경배하며 지혜를 구하고, 조언을 따르리라……는 그 대목 말입니까?”
피에 젖은 천사라, 별명하고는…… 별명만 들어도 예전에 어쩌고 돌아다녔는지 감이 왔다. 어쨌든 발렌타인에게 날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루소가 발렌타인을 경배까지는 않더라도 태도가 지금보다는 공손했을 거다.
“그 외에도 수백 명이 지난 천년간 검은 용의 귀환에 대한 예언을 남겼지만…… 난 그런 거, 믿지 않아요.”
“나도 마찬가집니다. 공연히 인간사에 참견하면서 예언 좋아하는 수다쟁이들 호들갑에 장단 맞춰주기도 싫고…… 하지만 별 수 있습니까? 당신이 라두칸에, 깨달은 종족의 대장로까지 잡아놨으니 나라도 나설 수밖에…….”
발렌타인을 쳐다보는 루소의 눈빛이 다시 냉랭해졌다.
“나서서 뭘 어쩌려고요?”
“왕에게 조언을 해야죠.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큰 실수라…….”
“용의 귀환이 두려운 일이라는 건 나도 압니다. 하지만 두려운 일도 일어나는 게 세상일이 아닙니까?”
피에 젖은 천사와 왕의 대면을 지척에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애초에 이 저택에 나하고 같이 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오웬 정도였다. 발렌타인이 여기 오기로 마음을 먹은 건 불과 하루 이틀 전의 일이었다.
발렌타인은 현존하는 최고의 자객이지만, 합당한 보수가 없으면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않는 프로페셔널이기도 해서 손을 좀 빌렸으면 싶어도 마음만 그럴 뿐, 입도 못 떼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부탁도 안 한 일에 선뜻 나서더라니…… 이게 벌써 몇 백 년 전에 다 예정이 되어 있던 일이었다는 건가? 어떤 귀신이 이런 걸 때려 맞췄지?
그런데 막상 상황을 보면 발렌타인이 여기 온 것까지는 어떻게 맞췄어도 왕은 천사를 경배하고, 지혜를 구하고…… 조언에 따를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예언이 틀린 건가?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발렌타인이 기막힌 언변으로 루소를 구워삶나?
“그래, 그 덜떨어진 현자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집안에 있지만…… 그를 데려갈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도 어림없어요.”
“그자가 연쇄살인범에, 그 외 행실도 현자라는 호칭에 비해 한참 모자라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막 대하는 건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루소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자는 당신네 선조들을 용의 군대로부터 구해준 은인이 아닙니까?”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이 두려워서 검은 용과 그자의 군대가 돌아오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란 말입니까?”
“…….”
“그자가 돌아오면 어느 한쪽이 전멸하지 않고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겁니다. 당신이 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젠 도리어 발렌타인이 루소에게 설득을 당하게 생겼다. 용이 돌아오면 다시 시작될 전쟁 얘기에 나조차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현자를 죽여서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의원. 바솔로뮤는 이미 돌아왔어요.”
발렌타인의 대답에 루소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자의 무덤이 비어 있는 건 나도 압니다.”
“용에게 곱게 영지를 돌려주면 꼭 전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협상을 도와줄 수도 있어요.”
귀찮은 거 극도로 싫어하는 발렌타인이 적극적으로 루소를 설득했다. 하지만 루소의 태도는 완강했다.
“용의 영지에 쿠간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이 도시가 용의 영지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어깨가 축 처졌다.
협상이고 설득이고 다 텄다. 부동산은 항상 민감한 문제다. 더구나 여기처럼 땅값 비싼 동네에서는 손바닥만 한 자투리땅을 두고도 소송이 끊이질 않는데…… 도시가 통째로 용의 땅이라니, 이거야말로 전쟁도 불사할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니까…… 협상을 해보자는 거죠.”
“정체도 확실치 않은 방문객의 불확실한 약속만 믿고 그런 일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루소의 대답에 발렌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당신은 지금 바솔로뮤를 설득하고 그의 자비를 구할 수 있는 좋은 카드 하나를 내던진 겁니다.”
“내가 그 짐승 앞에 무릎꿇고 자비를 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렇게 단언한 루소가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집사가 현관까지는 마중을 해줄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돌아가시죠.”
그때, 말 한마디 없이 잠잠하던 오웬이 입을 열었다.
“제월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 맞다. 제월공…… 돌아보니 발렌타인도 제월공 일을 깜빡 했었던지 손끝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루소의 성의 없는 대답에 발렌타인이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새는 더 늘어날 텐데요.”
새라는 소리만 들어도 언짢은지 루소가 거친 숨을 내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번만 더 새를 부려서 나를 위협하면, 라두칸의 심장에 카넴의 단검이 꽂힐 겁니다.”
내 심장에 단검이 들어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심장에 검은 단검이 박힌 채 죽어 있는 니콜라스의 모습이 아주 잠깐 눈앞을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온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발렌타인이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가는 거야? 그냥…… 이렇게?”
“꼭 예상했던 것만큼 고집이 세네. 어리석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가자고?”
“별 수 없잖아?”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 발렌타인이 내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그 바람에 넘어질 듯 휘청거리다가 문 옆에 서 있던 기사 하나를 붙들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았다. 하긴, 아무리 발렌타인이라도 별 수 없겠지. 이쪽은 겨우 세 명, 게다가 빈손…… 집안에 병력이 몇 명인지, 니콜라스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까…… 하지만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니콜라스를 두고 이렇게 돌아가라고?
“진정해.”
오웬이 다가와서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진정은커녕 경련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루소 앞에서 계속 떠들 수도 없어서 이를 악물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카시엘.”
우리가 막 방을 나서려는데 루소가 발렌타인을 불러 세웠다.
“혹시, 검은 용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까?”
“용의 정체라…….”
알긴 알지만, 말해주기 좀 그렇다는 투로 발렌타인이 머뭇거리자 루소가 조급증을 보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바솔로뮤를 잡을 수 있다면, 굳이 현자를 해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도 그렇겠다는 듯 발렌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를 구할 해결책이 생긴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마음이 놓이기는커녕 숨이 콱 막혔다.
“당신은 이미 바솔로뮤를 만났을 수도 있어요.”
나도 모르게 발렌타인의 팔을 움켜잡았다.
“발렌타인…….”
발렌타인이 괜찮다는 듯 내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나한테 괜찮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발렌타인이 다시 루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깨달은 종족은 작정하고 기색을 감추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어요. 인간은 물론이고 같은 종족끼리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칠 정도죠. 하지만 그자는 당신이 만났던 어떤 인간보다 아름다웠을 겁니다, 의원.”
하얀 새치가 섞인 루소의 눈썹이 경련이 일 듯 꿈틀거렸다.
“어떤 인간보다 아름답다고요?”
“미에 대한 관점이야 각자 다르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던데요.”
방안에 잠시 살벌한 침묵이 흘렀다. 발렌타인의 언질 한마디에 루소가 감 잡았다는 표정으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떤 인간보다도 아름답다는 한마디가 결정적인 단서라도 되는 것처럼…… 경찰서에선 그렇게 두루뭉술한 표현은 증언으로 치지도 않는데…….
“설마, 그자가…….”
루소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곤 또다시 나를 노려봤다. 달려들어서 멱살이라도 잡을 듯 험악한 눈빛으로…….
“자네는 알고 있었나?”
루소가 대역죄인 심문하듯 엄하게 나를 추궁했다.
“뭘요?”
나도 루소한테 거칠게 되물었다. 납치에, 감금에, 살해협박에…… 나쁜 짓은 누가 하고 있는데, 왜 나한테 시비냐? 게다가 내가 뭘…… 그때, 오웬이 흠……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입니까? 카시엘. 정말 루크 첸이…….”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싶어서 펄쩍 뛰며 노려보자 오웬이 조그맣게 혀를 찼다.
“루크가 뭐?”
내가 물어뜯을 듯 대들자 오웬이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니, 혹시 그자가…… 흑룡인가 싶어서.”
“무슨 헛소리야? 그게 말이 돼?”
“카시엘이 굉장히 아름다운 자라고 하니까…….”
나도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리에 루크는 절대로 그 용가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루크는 일반인 기준으로 보통보다 조금 괜찮게 생긴 정도다. 어떤 인간보다 아름답기는 개뿔…… 루소가 70년 가까이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엔 그놈보다 잘생긴 남자들이 수두룩했을 거다.
“이 동네에 잘생긴 놈이 한둘이야? 영화배우도 있고, 모델도 있고…… 비싼 양복 좋아하고, 늙어 꼬부라진 조폭 두목들 틈에 있으니까 좀 잘나 보이는 거지, 루크는 그냥 평범한 얼굴이야.”
딱 잘라 말하고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니콜라스하고 제월공을 데리고 나가는 게 시급한 일이란 건 나도 안다. 여기서 니콜라스의 신변을 나보다 더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목숨을 버릴 각오가 없었다면 이 집에 오지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이건 아니다. 루소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자고 거기에 루크를 들이밀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 루크가 흑룡이라는 의심이 들면 루소는 얼마든지 그 자식을 죽일 거다. 흑룡이야말로 루소의 진짜 적이니까…… 니콜라스하고는 또 달라서 루크를 해치는 일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을 거다. 루크가 내 평생 만난 놈들 중에 제일 고약하고, 비열하기로는 경쟁자조차 없는 악당이긴 하지만 헤어지면 그만이지, 흑룡이란 누명을 씌워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는 아니다.
“속셈은 알겠는데…… 그만 둬. 루크를 죽일 작정이야?”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행여나 루소가 부하들에게 당장 루크를 찾아서 죽이라고 할까 싶어서 내 속은 바짝 타는데, 발렌타인은 천하태평이었다.
모르는 사이에 루크가 발렌타인에게도 뭔가 못된 짓을 한 걸까? 그간 발렌타인하고 루크는 잘 지냈었다. 소 닭 쳐다보듯 호감도 없고, 유감도 없이 …….
“대체 왜 이래? 그 자식한테 뒤통수 얻어맞은 건 당신이 아니잖아!”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런데 왜…….”
“그게 사실이니까.”
“…….”
“용 중의 용. 검은 악마, 또 뭐랬더라…… 별명이 많은 녀석인데…….”
“하지만…….”
“넌 살면서 그 녀석보다 더 잘생긴 남자를 본 적 있어?”
“루크는 내가 잘 알아!”
현관에서 놈들이 총을 걷어간 건 누구보다 발렌타인에게 다행이었다. 내 손에 총이 있었으면 발렌타인을 쏴 버렸을 거다.
“그 자식은 사람이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인간이란 말이야!”
제발 이제라도 농담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루소 앞에서 그러기 힘들면 그냥 잘못 알았던 것 같다고, 확실한 건 아니라고…… 그 정도만이라도……. 하지만 발렌타인은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내가 안다니까? 그 자식은…….”
발렌타인하고 길게 말해봐야 오해만 더 살 것 같아서 루소를 돌아봤다. 하지만 루소는 이미 루크를 검은 용으로 확신하는 눈치였다.
“절대로 용인지 뭔지…… 그런 게 아니에요. 루크가 그런 괴물이었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잖아요? 난 반 년도 넘게 그 자식하고 같이 잤다고요!”
내 항변에도 루소의 표정은 그냥 그랬다. 거기다 발렌타인이 한 번 더 초를 쳤다.
“그래서 조금은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거든.”
천사라더니…… 이 악마!
루크가 용이라니, 그것도 옛날에 전쟁을 일으켜서 온 세상을 떨게 만들었던 그놈이라니…… 말도 안 된다. 가끔 녀석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폭 두목으로써 언행에 살짝 깨는 구석이 있는 정도였지, 녀석이 미친 용처럼 불을 뿜고 다닌 건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수천 년을 살고 있는 현자라면서? 그런데 루크는 용이야? 말이 안 되잖아? 평범한 짭새가 그런 놈들을 연달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발렌타인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서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흥……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평범한 짭새가 연쇄살인범과 조폭 두목을 연달아 사귈 확률하고 비슷하겠지.”
빌어먹을…….
내가 말싸움에서 발렌타인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자 결국 루소가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기사를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듣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도록 살벌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부하들을 풀어서 루크 첸을 찾아. 찾아서…….”
루소가 잠깐 망설였다. 루크를 찾아서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이리 데리고 올까요?”
“죽여버려.”
“대체 그게 무슨…….”
루소에게 달려드는 나를 발렌타인이 잡아 세웠다. 루소가 제일 싫고, 그 다음이 이 망할 자식이다. 비쩍 마른 주제에 힘은 왜 이렇게 세냐? 발렌타인이 나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는 사이, 루소의 기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잡아서 확인을 하시죠. 그냥 죽여버리면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요.”
“그자가 진짜 바솔로뮤라면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게 훨씬 힘들 거야.”
“바솔로뮤가 아니라면요?”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발렌타인을 힐끔 쳐다봤다.
“모든 게 저자의 농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루소가 한손으로 턱을 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루소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말을 무턱대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정치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루소가 기사를 응시하는 눈빛은 더 이상의 이견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엄하고 단호했다.
“그렇다면 죽이는 게 훨씬 쉽겠군.”
발렌타인에게 붙들려 있지 않았으면 바닥에 주저앉았을 거다. 뒤통수를 둔기에 제대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대체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돼버린 걸까? 어떻게든 니콜라스를 구할 결심을 한 순간부터 내 걱정은 니콜라스와 내 목숨뿐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루크의 목숨이 제일 위험해지고 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발렌타인의 속셈이 뭐냐? 혹시 이거…… 처음부터 니콜라스의 생사 따위는 관심도 없었고, 루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루크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발렌타인하고 짜고 역공을 펴는 건가?
몬티첼리하고 루크는 본래 적대 관계였고, 애초에 루크가 제시한 조건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으니까 그런 작전을 짤 수도 있다. 하지만 발렌타인의 말 한마디에 홀랑 넘어가서 루크부터 죽이고 보겠다는 저 영감은 대체 뭐냐?
발렌타인이 당혹감에 욕도 한마디 못하고 헐떡거리고만 있는 나를 소파에 대강 부렸다. 그리고 내 머리를 함부로 툭툭 어루만졌다.
지금 나를 위로하는 거냐, 아니면 놀리는 거냐? 전 남자친구 좀 구해 달랬더니, 지금 있는 놈을 죽을 구덩이로 몰아?
“바솔로뮤에게 돌려줄 것 돌려주고 잘 지내는 편이 좋을 텐데요, 의원.”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해봐야 저 영감이 잘도 듣겠다! 화가 치밀어서 발렌타인의 손을 거칠게 밀쳤다.
“나는 그자에게 돌려줄 게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뿐입니다.”
“바솔로뮤는 이미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요. 세상에 나올 때부터 그 용은 이 대륙의 주인이었습니다.”
“지옥에서 왔으니 지옥으로 돌려보낼 거요.”
루소가 딱 잘라 말하고 문 앞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그만 우리를 쫓아낼 건가 보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아직 얘기가 조금 더 남은 것 같았다.
“안드레아스는…….”
발렌타인의 한마디에 루소가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당신이 이러는 거,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안드레아스를 압니까?”
“깨달은 종족과 인간들 사이를 오가다 보면 하이랜더도 많이 알게 되죠. 안드레아스는…….”
“그는 죽었습니다. 지난겨울에.”
안드레아스가 누군지 이제 기억이 났다. 지난겨울, 귀신 나올 것 같이 음산한 새벽에 콘웨이 공원에서 오웬과 결투를 벌였던…….
“그는 당신이 바솔로뮤와 싸우는 걸 어떻게든 말렸을 겁니다.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마치 아들처럼…….”
하필 이런 때에 왜 그 얘기를…… 그렇게 각별한 사람을 죽인 게 오웬인데…… 아니, 나였나? 안드레아스를 떠올렸는지 루소의 표정이 부쩍 침울해졌다. 눈물도 살짝 고인 것 같았고…… 눈빛이 조금 흔들린 게 무슨 큰 약점이라도 되는 것처럼 루소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한층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안드레아스는 죽었어요. 잘 알겠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발렌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축 늘어져 있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루소를 설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나를 먼저 문가로 밀어 보낸 발렌타인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루소를 돌아봤다.
“사라진 종족이 돌아오는 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포스럽지만은 않을 겁니다, 의원. 내 기억으론 그들이 존재했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웠어요.”
“나는 현재의 세상, 지금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지켜야 됩니다. 그런 세상을 볼 수 없는 건 유감입니다.”
발렌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루소를 향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보게 될 겁니다. 혹시 모르죠. 당신도 좋아하게 될지…….”
저택의 길고 긴 회랑을 걷다가 중간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집에 들어올 때에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이…… 니콜라스를 구하기는커녕 루크만 죽을 구석에 몰아넣고 돌아 나오려니 마음도, 발걸음도 천근같았다.
“대체 이게 뭐야?”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고, 발렌타인이 원망스러워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우리를 에워싸고 가던 기사놈들이 총을 고쳐 쥐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발렌타인하고 얘기를 좀 해야겠다.
“당신 속셈이 대체 뭐야? 루크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여기 같이 오겠다고 한 거였어?”
“바솔로뮤는 괜찮을 거야.”
“루소가 기사단을 풀어서 당장 찾아 죽이라고 명령한 거, 당신은 못 봤어?”
“천년 전의 왕들은 루소보다 훨씬 더 거칠고 야비했어. 하지만 바솔로뮤는 한술 더 떴지.”
발렌타인은 정말로 루크가 검은 용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루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계략을 꾸민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믿고 루소에게 얘기를 했던 거다. 바솔로뮤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내 말을 믿어. 포악하고 교활하기로는 니 남자친구를 따라올 인간은 없어.”
“루크는 용이 아니라니까!”
내 목소리가 저택의 유리창이 들썩거릴 정도로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 바람에 기사들과 집사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고, 다음 순간 기둥 사이로 뭔가 시커먼 것이 푸드득 날았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까 오웬과 같이 들어왔던 까마귀가 좀 떨어진 복도 안쪽의 감시카메라 위에 사뿐히 올라 앉아 있었다. 그 바람에 집사는 기절할 듯 놀라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확실치도 않은 얘기를 거기서 떠들면 어떡해? 니콜라스를 구하러 왔다면서? 그런데 정작 니콜라스는 머리카락도 못 보고, 루크만 팔아넘기고 나왔잖아? 루소한테 말 몇 마디만 지껄이면 그 영감이 니콜라스를 데리고 나가라고 순순히 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을 이렇게 해?”
내가 금방이라도 발렌타인에게 달려들 듯 펄펄 뛰자 이번엔 오웬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 자식은 또 뭐냐? 손을 밀어치우고 오웬을 노려봤다.
“너…… 옛날에 니가 그 용하고 한판 붙었었다면서? 그럼 루크가 용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니가 잘 알 거 아냐?”
내가 따지면서 대들자 오웬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얼굴은 못 봤어. 온통 검은 비늘에 덮여 있었거든.”
“그럼 아닌 거 맞잖아?”
루크는 얼굴에 비늘은커녕 잡티도 하나 없다. 내가 이런 것들을 믿고 이 호랑이굴에 들어오다니…… 비니를 데리고 왔어도 이렇게 기가 차진 않았을 거다. 더는 버티고 서 있을 기운도 없어서 가까운 기둥에 기대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오웬한테 소리치는 동안 까마귀를 쳐다보며 딴 짓 하던 발렌타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바솔로뮤 얘기를 꺼낸 건…… 미안해. 너도 짐작은 하고 있는 줄 알았지.”
“뭐가 어째?”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시간이 좀 필요했거든. 제월공이 있는 곳은 알아야 되니까…….”
무슨 소리냐? 제월공이 있는 곳을 알아내다니…… 우리가 이 집에서 한 일이라곤 루소의 서재에 잠깐 있다가 쫓겨나온 것뿐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발렌타인을 빤히 쳐다봤다. 그때, 오웬이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기사에게 달려들어서 소총을 움켜잡았다.
오웬이 기사의 손에서 총을 낚아챈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마치 어린아이 손에서 막대 사탕 빼앗듯, 소총을 휙 비틀어서 손에 넣은 오웬이 맞은편에서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기사를 발로 밀어 찼다. 그 사이 발렌타인도 등 뒤에서 따라오던 기사의 덜미를 잡아서 옆에 있던 기둥에 박아버리고 놈의 소총을 집어 들었다.
기습은 전광석화 같았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아직 십여 명의 무장 병력이 버티고 있는데 대체 어쩌자고…… 너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잠시 허둥거리던 놈들이 신속하게 전열을 가다듬고 오웬과 발렌타인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이대로라면 둘이 내 눈앞에서 벌집이 되는 참사를 모면할 길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사격은 오웬이 더 빨랐다. 하지만…… 왜 창문에 대고 총질이냐? 오웬이 엉뚱한 방향에 대고 총질하는 걸 본 놈들도 당황해서 멈칫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나 역시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오웬과 발렌타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휑할 정도로 넓은 복도에 총성의 메아리가 길게 울렸다가 잦아들었다. 두려움과 황망함 때문에 그 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지만,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총 버려!”
우리를 포위한 기사들이 격앙된 목소리로 엄중하게 경고했다.
“뭐, 뭐하는 거야?”
나도 경황없이 손을 내저으며 둘을 만류했다. 아까부터 죄다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이건 누굴 구하는 게 아니라 자살행위다.
하지만 오웬의 난동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오웬과 발렌타인에게 함부로 총질을 하지는 못했다. 발렌타인이 탈취한 소총으로 집사의 머리를 정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짓을 하고 여기서 살아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집사가 부들부들 떨면서 발렌타인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집사를 겨냥한 발렌타인의 총구는 미동도 없었다. 그때, 깨진 창문 틈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이쳤다. 그리고 거친 바람소리가…… 아니, 아니다. 뭘까? 이 소리는…… 오싹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소리에 모두가 얼어붙은 채 귀를 기울였다. 그 순간, 깨진 창으로 어떤 시커먼 덩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갈라진 둑의 틈새로 갇혀 있던 물줄기가 터져 나오듯…… 시커멓고 위협적인 것이 집안으로 쏟아졌다. 그 크고 불길한 덩어리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깨진 유리그릇처럼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더니 다시 허공으로 사납게 날아올랐다.
창문 안으로 밀려들어온 것이 한 무리의 까마귀 떼라는 것을 깨달은 건 귓가를 스쳐 지나간 까마귀 날개에 뺨을 아프게 얻어맞고 나서였다.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와서 삽시간에 회랑을 가득채운 까마귀 떼에 루소의 기사들이 겁에 질렸다.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라서 나 역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놈들의 공포는 한층 더 심했고 반응도 과격했다.
말 그대로 패닉에 빠진 놈들이 허공에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들의 다급한 총질도 한번 시작된 새떼의 난입을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새떼는 벽이 터져나갈 기세로 쏟아져 들어왔고, 총성에 놀란 탓인지 날갯짓이 더욱 거칠어졌다.
“까마귀를 따라가!”
도망칠 엄두도 안 나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나를 발렌타인이 잡아 일으켰다.
“응?”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무슨 소리야?”
뭘 어쩌란 거냐? 지금 이 집안엔 까마귀가 만 마리도 넘는다. 게다가 다 중구남방으로 날아다니며 벽에도 부딪히고, 자기들끼리 충돌하고 난리가 났는데…… 까마귀를 따라가라니?
“내가 널 왜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발렌타인이 벌컥 짜증을 내면서 나를 오웬이 있는 쪽으로 떠밀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새들은 딱히 기사단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어쨌든 놈들을 뜯어먹을 듯 달려들지는 않았다. 단지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을 뿐인데 그 수가 너무 많고, 점점 더 늘어나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덩치도 작지 않은 놈들이 빠른 속도로 날면서 여기저기 한번씩 치고 지나가면 그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앞장서서 저택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던 오웬이 날아든 바다오리에게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휘청거렸다. 오리는 까마귀보다 훨씬 커서 대부분 중간 크기 강아지만 했다. 오웬이니까 고개를 한번 털고 다시 일어났지, 내가 그렇게 당했으면 정신을 잃었을 거다.
오웬이 복도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복도 끝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오웬은 까마귀를 따라가고 있는 걸까? 어디로 갈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발길이 거침없었다. 이쪽도 날아든 새 때문에 복도가 꽉 막힐 지경인데…….
새떼가 앞을 막아서 주춤거릴 때마다 발렌타인이 내 등을 사정없이 떠밀었다. 계단에서도 한번 그러는 바람에 지하실엔 내가 오웬보다 먼저 도착했다. 내가 정신 못 차리고 허둥거리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나는 천사도, 하이랜더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만큼 철벽같은 정신력을 가진 인간은 아마 없을 거다.
계단 턱에 부딪혀서 피가 흐르는 이마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오웬이 계단 중턱쯤에서 몸을 던져서 나를 덮쳤다. 그 바람에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한 번 더 짓찧었을 때는 충격 때문에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따질 요량으로 고개를 들어 오웬을 노려봤다. 그 순간, 복도 안쪽에서 거친 총성이 울렸다.
고함소리, 비명, 귀를 찢는 것 같은 총성…… 지하에도 꽤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비상사태에 전투병들은 중요한 인물 근처에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지하에 수십 명이나 되는 무장 병력이 모여 있는 건 여기 니콜라스가 있다는 확실한 단서였다.
“괜찮아?”
발렌타인이 다가와서 나하고 오웬을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발렌타인을 돌아보다가 놀라서 바닥에 더 바짝 붙었다. 발렌타인 등 뒤로 검은 새떼가 먹구름처럼, 성난 파도처럼 밀려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 당황한 기사단이 난사하는 총성으로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다.
놈들이 새를 향해 총질을 하는 건지, 우리를 보고 그러는지도 분명치 않았다. 하지만 좁은 복도에서 이렇게 꾸물거리다간 유탄에 맞기 십상이었다. 당장 계단의 나무 난간이 복도 저 끝에서 쏟아진 포화에 나무 부스러기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발렌타인이 급한 대로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밀쳐서 열었다. 그리고 나하고 오웬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스톰이 오른쪽으로 사라졌어요. 아마 라두칸하고 제월공이…….”
스톰이 누군지는 확실치 않지만, 설마…… 진짜로 까마귀를 따라온 걸까? 온 집안이 시커먼 새떼로 미어질 지경인데…….
“빨리 찾아야 돼. 세가 불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놈들은 라두칸을 빼앗기느니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할 거야.”
발렌타인이 옆구리를 움켜쥐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보니 옆구리가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뭐야? 총에 맞은 거야?”
발렌타인이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장부터 재수 옴 붙었어.”
“어, 어떡해…… 움직일 수 있겠어?”
“아직은 괜찮아.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돼.”
상대가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인 이런 상황에선 속전속결 외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는 형편이라 당장 이 방에서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새만 믿고 죽치고 있을 수도 없고…….
“내 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웬이 문가에 붙어서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 웬 검 타령이냐? 아무리 후져도 검보다는 총이 낫지. 게다가 오웬이 들고 있는 건 성능 좋기로 유명한 반자동 소총이다.
“왜 그래? 총질도 잘 하던데?”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몇 번 만져본 적은 있는데, 익숙하진 않아.”
일이 쉽지 않을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상황이었다. 발렌타인하고 오웬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런 비상사태엔 둘도 없이 요긴한 전문 인력인데, 하나는 부상이고 하나는 총을 잘 못 다루고…… 아직 니콜라스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벌써 이러면 곤란하다.
이미 벌어진 일, 돌아나갈 수도 없고,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다.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고 생각하며 발렌타인의 손에서 총을 낚아챘다.
“뭐하는 거야?”
발렌타인이 총을 다시 빼앗아 가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부상 중이라 벌써 동작이 많이 느려졌다.
“당신은 여기 있어. 니콜라스는 내가 찾아볼게.”
“니가?”
발렌타인이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내가 사생활 관련으로는 종종 주변의 비웃음을 샀었지만, 타격대 지원으로 소탕 작전에 나갔을 때는 어떤 놈도 나를 비웃지 않았다.
오웬을 문가에서 끌어내고 내가 앞에 섰다. 복도엔 아직도 새떼가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1층은 까마귀 판이더니…… 지금 몰려들어오고 있는 건 주로 오리, 갈매기였다. 대부분 덩치가 까마귀 두 배는 되는 놈들인데다 미친 듯 날갯짓까지 하고 있으니, 놈들 틈으로 뛰어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게다가 나가려고 움찔할 때마다 기사단의 총격과 사나운 새 울음소리가 뒤엉키는 바람에 두 번이나 타이밍을 놓쳤다.
“안 나갈 거면 좀 비키지?”
오웬이 짜증을 내면서 내 등을 한 대 쥐어박았다. 되게 보채네. 앞뒤 없이 뛰쳐나갔다가 나까지 총에 맞아 쓰러지면 대책도 없을 텐데…….
“나갈 거야.”
“언제?”
“지금!”
계단 통로에서 한 무리의 오리 떼가 송곳 꽂을 틈도 없을 정도로 빡빡하게 복도를 채우며 날아들었고, 나도 그 무리에 끼어서 복도로 굴러 나왔다.
바닥은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입고 꿈틀거리는 새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마구잡이 난사라고는 해도 워낙 총질을 해대니, 새들도 성할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날개가 꺾였을지언정 투지는 꺾이지 않은 몇 놈은 사납게 꽥꽥거리며 내 머리카락과 손을 부리로 물어뜯었다. 역시 새라서…… 적군과 아군은 구별을 못하는 모양이다.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한 기사들도 봇물처럼 밀어닥친 새떼를 맞아 고전 중이었다. 새에게 들이받히고 쥐어 뜯겨서 전의를 상실한 채 구석에 웅크리고 처박혀 있는 놈들이 십여 명은 넘어 보였고, 그중 몇몇은 기절을 했는지 죽었는지 쓰러져서 미동도 없었다. 남은 기사들도 복도 안쪽으로 밀려들어간 채 달려드는 새들을 떼어 내느라 경황이 없었다.
스톰이 오른쪽으로 날아갔다고 했었나? 그럼 오른쪽에 니콜라스가 있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저만치 앞쪽에서 오리한테 마구 얻어맞으며 비틀거리던 놈이 나를 발견했다.
놈과 내가 총을 고쳐 쥐고 상대를 겨냥한 건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하지만 놈은 날아드는 오리한테 얼굴을 정통으로 받혔고, 나는 퍼덕이는 갈매기 날개에 따귀를 호되게 얻어맞았다. 놈의 총알은 내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고, 내 총알은 녀석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놈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거꾸러지자 그제야 다른 놈들도 우리를 발견했다. 하지만 놈들도 사람인지라 몰려드는 새떼에 정신이 혼미한 상황이었고, 그 때문에 침입자를 발견하고도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허둥거리는 놈들을 하나씩 처리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회오리바람처럼 몰아치는 새떼를 뚫고 전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놈 저놈 한 번씩 전속력으로 나를 치고 지나갈 때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뒷덜미며 옆구리도 얼마나 뜯겼는지 두툼한 겨울 점퍼가 누더기로 변하고 말았다. 하지만 피해는 기사단 쪽이 더욱 극심했다.
나하고 오웬이 짧은 교전 끝에 대여섯 명의 기사들을 쓰러뜨리는 동안 성난 오리 떼가 또 그만큼을 해치웠다. 오리가 순하고 맹할 거라는 생각은 정말 큰 착각이었다. 위층에선 곱게 사람만 치고 지나가던 놈들이 뭐에 그렇게 흥분을 했는지, 이만저만 난폭한 게 아니었다.
제일 앞에서 버티던 놈들이 변변한 저항도 못해보고 쓰러지거나 등을 보이고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자 나머지도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물러섰다.
“스톰은 오른쪽으로 날아갔어.”
“그런데 왜 놈들은 모조리 왼쪽으로 사라졌을까?”
복도 끝까지 와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아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때 어느 틈에 뒤따라온 발렌타인이 내 등을 냅다 갈겼다.
“까마귀를 따라가라니까?”
“왜 나왔어? 그냥 있지.”
“아예 숨이 떨어진 게 아니면 움직여야지, 거기서 잠이라도 자?”
그렇게 타박을 하고는 발렌타인이 앞장서서 오른쪽 복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곤 복도 중간쯤에 있는 작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저긴가? 니콜라스가 잡혀 있는 곳이? 하지만 뭔가 허술한데…… 니콜라스를 잡아 놓은 방인데 왜 주변엔 총 든 기사도 한 명 없고, 방문엔 허술한 자물쇠 하나만 달랑 걸려 있을까? 내가 볼 땐 그냥 비품창고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발렌타인이 오웬에게 문 좀 열어보라는 사인을 보냈다.
오웬이 자물쇠에 대고 총질을 한번 하고 방문을 밀어 찼다. 안을 보니 창고는 아니고, 간소한 침대하고 집기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아마 저택에 상주하는 고용인들이 쓰는 침실인 것 같은데…….
“제월공!”
오웬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제월공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저택의 지하 골방에 며칠이나 갇혀 있긴 했지만, 다행히 제월공은 어딜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소 지쳐 보였고,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우리를 쳐다보는 은색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환했고, 녹색 눈동자는 침울하고 어두웠다.
“괜찮으십니까?”
오웬이 제월공을 일으키고는 위아래로 쫙 한번 훑었다.
“용케 들어왔군. 병사들이 많아서 뚫고 들어오기 힘들었을 텐데…….”
제월공이 투덜거리듯 말하고 나를 힐끔 노려봤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제월공이 나한테 화를 풀려고 덤비는 걸 발렌타인이 가로막았다.
“우선 나오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뒤늦게 발렌타인을 본 제월공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은색 눈동자의 날카로운 빛도 은은하게 가라앉았고, 녹색 눈동자는 생기를 되찾아 곱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카시엘…….”
“라두칸을 찾아야죠. 전력이 만만치 않은 놈들이니 곧 반격을 해올 겁니다.”
“피를 흘리고 있잖아? 다친 거야?”
제월공이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놀라서 발렌타인에게 다가갔다.
“심한 건…… 아닙니다.”
제월공이 뒤로 물러서는 발렌타인을 붙들었다. 그리곤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옆구리를 확인했다. 본인은 대단치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자동소총에 근거리에서 당했으면 어딜 어떻게 맞았어도 중상이다. 발렌타인의 상처를 확인하고 고개를 든 제월공의 은색 눈동자가 곧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감히 인간의 왕 따위가…….”
제월공이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당황한 발렌타인이 얼른 제월공의 어깨를 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이럴 때가 아닙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월공이 발렌타인에게 입을 맞췄다. 내가 볼 땐…… 저건 의료행위가 아니라 사심이 잔뜩 들어간 진짜 입맞춤이었다. 발렌타인이 제월공한테 킵과의 관계를 기를 쓰고 감추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발렌타인이 제월공을 밀어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이런 위급한 상황에 할 생각은 아니지만…… 발렌타인 입장이 정말 곤란하겠다. 역시 난감한지 발렌타인이 제월공의 눈길을 피하며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라두칸이나 구해서 데리고 나가죠. 장서각이 무너지고, 흑룡이 미쳐 날뛰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복도는 이미 몰려든 새떼로 가득차서 그 틈에 뛰어들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발렌타인을 바로 뒤따라 나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숨을 고르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제월공이 나를 밀어치우고 성큼성큼 복도로 나갔다.
제월공이 새떼에 에워싸인 모습은 우리가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이리저리 얻어맞으며 허둥거렸던 거하고는 많이 달랐다. 새들은 제월공에게 덤벼들지도 않았고, 사납게 울지도 않았다. 좁은 복도에서도 한 무리의 고등어 떼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리듬을 타며 질서정연하게 날았고, 그 비행은 협소한 공간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미친 듯 푸드득거리던 좀 전의 그 모습과도 확연히 달랐다.
제월공은 사실, 좀처럼 볼 수 없는 희귀한 오드아이 이외엔 별로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나이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준수하고 호감 가는 외모를 갖고 있긴 했지만, 이질적이고 기묘한 느낌은 아들인 킵의 반의반만큼도 없었다. 킵이 100미터 밖에서도 눈이 번쩍 뜨이는 존재감을 가졌다면 제월공은 사람 많은 거리에서 인파에 한번 쓸리면 찾아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특징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깨달은 종족의 대장로라든지, 세상에 있는 모든 새들의 주인이라는 엄청난 타이틀이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었는데…….
제월공의 머리카락이 언제부터 저렇게 빛나는 은발이었을까? 제월공의 머리색은 기린하고도 달라서 막 건져 올린 갈치비늘처럼 오색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키도 좀 전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은 듯 커 보였고, 화난 듯,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은 처음 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낯설고 아름다웠다.
깨달은 종족이란 신 같은 걸까? 새떼를 이끌고 복도 안쪽 막다른 방으로 향하는 제월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복도 왼편의 막다른 문 앞에서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난폭하고 일방적인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앙복도에서 밀려 왼편으로 후퇴했던 기사들의 숫자는 20여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까마귀며 갈매기 떼가 한 놈당 백 마리쯤 붙어서 놈들을 미친 듯 물어뜯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새떼가 방향 없이 날아다니는 것만 봐도 무서워서 정신이 혼미하고, 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예 작정하고 사람을 뜯어먹고 있는 장면은 공포감에 피가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런 공격은 어떤 군대도 당해낼 수 없을 거다. 제월공이 왜 깨달은 종족의 대장로인지, 기린치곤 사납고 난폭하다고 하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제월공을 필두로 우리가 다가가는 몇 분 사이에 대여섯 명은 총알도 다 떨어졌는지 허공에 총질도 더 이상 못하고 복도 구석에 쓰러졌고, 나머지는 온몸에 새를 새까맣게 붙인 채 문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뭐…… 살생은 안 하기로 했다면서?”
발렌타인이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을 힐끗 내려다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제월공이 남 얘기하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생각해보니까 그런 맹세는 속세에 내려올 때마다 했었던 것 같아.”
까마귀 떼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뜯겼는지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저 문 안에 니콜라스가 있는 걸까? 수십 명의 기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저 방에…… 이렇게 가까운 곳에…….
니콜라스가 그간의 범죄를 자백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그날 이후, 내가 니콜라스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오직 내 꿈속에서 뿐이었다. 꿈속에서 니콜라스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달콤하고 다정한 연인이기도 했고, 때론 현실에서보다 더 끔찍한 살인마의 모습으로 나를 뒤쫓기도 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니콜라스가 나왔던 꿈은 내게는 모두 악몽이었다. 간신히 쌓아올렸던 자잘한 일상이 대수롭지도 않은 꿈 한번으로 허물어지곤 했고, 그 후유증이 길면 몇 달을 두고 계속 됐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등장했던 어떤 악몽도 지난번 실제로 그를 봤을 때처럼 처참하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짧은 순간 만나고, 그렇게 허무하게 헤어졌던 적도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절대 니콜라스를 잊을 수 없는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어느 하루, 한 순간도 니콜라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루크를 마주보기 힘들 때도 많았다.
루소가 왜 그렇게까지 니콜라스를 죽이려고 하는지 그 이유도 알고, 기사단이 뭘 지키려고 하는 지도 안다. 니콜라스하고 이런 식으로 얽히지만 않았으면 나는 오히려 아무 갈등 없이 그 편에 섰을 거다. 하지만 내게는 니콜라스를 죽여서까지 지켜야 할 게 없었다. 그가 죽고 없는 평화로운 세상은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방안에서 날카로운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제월공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번뜩였다. 복도에서 소란이 일어난 지 한참이 지났고, 지금 막 최후의 위병들이 초주검이 돼서 안으로 도망쳤다.
혹시 벌써……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제월공을 밀쳤다. 제일 선두에 서 있는 오웬도 밀어버리고 크고 무거운 문을 열어젖혔다.
방안은 천개의 등불을 밝힌 것만큼이나 밝았다. 지하에 왜 이런 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방안은 크고 밝았다. 처음 왔을 때부터 이 집이 어딘지 신전 같다는 생각은 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긴 복도, 끝도 없이 늘어선 하얀 대리석 기둥, 차갑고 무거운 공기…… 그중에서도 이 방은 신전 가장 깊은 곳에 마련된 제실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 제단이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사제들이 늘어서서 은밀하면서도 엄숙한 제의를 치르는…….
방 한복판의 검은 제단에 묶여 있는 남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가 니콜라스라는 건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찾았다든가, 이렇게라도 니콜라스를 만나서 다행이라든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니콜라스의 상태를 깨닫는 순간…… 내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니콜라스는 끈이나 수갑에 묶여 있는 게 아니었다. 니콜라스의 두 팔과 다리는 날카로운 단검에 꿰인 채 제단의 상판에 박혀 있었다. 검은 제단 아래 하얀 대리석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붉은 피는 모두 니콜라스의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혹형을 당한 죄수처럼 제단에 못 박힌 채 죽어가고 있었다.
제단을 에워싼 기사단의 잔당과 니콜라스의 머리맡에 서 있는 루소를 발견한 건 다음 순간이었다. 벌써 어딘가로 빠져나갔거나, 자기 서재에 갇혀 있을 줄 알았는데…… 서재에서 이 지하실로 바로 내려오는 통로라도 있었던 걸까? 문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검은 새와 나를 응시하는 루소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기 위해서 표정을 읽을 필요는 없었다. 나를 힐끔 돌아본 루소가 지체 없이 손에 쥔 돌칼을 들어올렸다.
입구에서 제단까지의 거리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다. 하지만 루소가 쥐고 있는 칼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니콜라스의 집에서 봤던,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베고 말았던 그 칼이었다. 루소가 그 검은 칼로 니콜라스의 심장을 지금 당장 찢어버릴 참이었다. 반사적으로 총을 들어 루소를 겨냥했다. 제단을 에워싼 기사들 역시 일제히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각오했던 중 최악의 상황이 닥치고 말았다. 너무 늦어버린 걸까?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극히 짧은 그 순간에 이게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방아쇠를 당긴 것과 놈들의 총구가 불을 뿜은 건 거의 동시였다. 루소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주저앉았고, 내 얼굴 쪽으로 날아들던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내 대신 총에 맞았는지 큰 울음소리를 내며 퍼덕거리다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요행은 그뿐이었다.
쏟아진 총격이 내 어깨를, 가슴을, 배를 꿰뚫었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고, 계속되는 총격에 몸이 날리듯 뒤로 밀렸다. 이따금 죽는 순간엔 무슨 생각이 날까 궁금했었는데…… 뭐 별로…… 생각나는 건 없었다. 차가운 바닥에 나동그라져서 죽음을 기다리는 아주 짧은 순간, 루크의 얼굴이 눈앞을 한번 스쳐갔을 뿐이었다.
죽음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형사란 다른 일에 비하면 위험 요소가 많은 직업이고 근무 중 변고를 당한 동료도 여럿이었다. 나 자신도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언제든 내 차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했었고 영혼이나 사후세계 같은 건 안 믿으니까, 죽음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는 완벽한 소멸이 아닐까 하는 정도가 죽음에 대한 내 견해였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시끄럽지? 죽으면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푸득거리는 이 소리는 뭐고, 거친 물살에 휩쓸린 것 같은 이 요동은 또 뭐냐? 죽음이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니거나, 내가 죽은 게 아니거나…… 둘 중 하난가 보다.
“이봐…….”
응?
“이봐, 추적자!”
뭐야…… 아직 살아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기사단 십여 명이 내게 집중포화를 퍼부었는데…….
“죽는 시늉 그만하고 정신 차려! 밤새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계속되는 타박에 있는 힘을 다해서 눈을 끔뻑거려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뭔가 환한 것 같기는 한데…… 눈을 가늘게 뜨고 앞에 얼씬거리는 환한 빛을 쳐다봤다. 가만 보니까 뭔가 형태가 있는 것도 같았다.
천사? 하느님? 하지만 사후 세계가 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좋은 쪽으로 높은 분을 만날 일은 없을 텐데…… 멍한 머리를 힘들게 굴려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하느님을 밀치고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신이 들어? 그렇게 무턱대고 뛰어 들어가면 어떡해?”
발렌타인?
“내가…….”
“정신 차려. 이쪽 상황은 일단 끝났지만 오래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놈들의 본대가 몰려오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돼.”
“내가 살아 있어?”
“괜한 짓을 했어. 니가 그렇게 나서지 않았어도 오웬이 알아서 처리했을 텐데…….”
“어떻게…….”
발렌타인이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제월공을 쳐다봤다.
“응급조치를 좀 더 해봐요. 라두칸도 저 지경인데, 이 녀석까지 업고 돌아다닐 수는 없어요.”
제월공이 뚱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봤다.
“추적자들이 바보짓을 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지. 실제로 멍청하니까. 하지만 지난 천년 간 봤던 어떤 추적자도 너처럼 어리석고 무모하진 않았어.”
“그런 말…… 종종 들어요.”
“어쨌든 내 친구를 구했으니까 보답은 해야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월공이 내 셔츠 자락을 헤치고 배에 손을 얹었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이 조여드는 것 같은 고통이 한결 가셨다. 치유 능력이 있다더니, 숨이 떨어지기 전에 제월공이 뭔가 조치를 취해줘서 내가 살아난 건가?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건 그렇고 친구를 구했다니, 그럼 니콜라스는…… 니콜라스가 어떤지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제월공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아 꼼짝 못하게 붙들었다. 제월공의 은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초록색 눈동자는 세상에 있는 어떤 에메랄드보다 곱고 부드럽게 빛났고…… 제월공의 기분이 눈빛에 나타나는 거라면, 지금 기분은 괜찮은 것 같았다.
제월공의 입맞춤은…… 키스 테크닉 같은 거 전혀 분간 못하는 내 느낌으로도 상당히 섹시한 느낌이 있었다. 제월공은 나를 굉장히 안 좋게 생각하고 있는데, 키스는 왜 이렇게 느낌이 좋지? 배와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어딘지 관능적이고…… 이 와중에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이런 게 바람둥이의 관록이란 걸까? 나도 그간 나름 명성 드높은 바람둥이들만 겪어왔지만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저기, 어르신…….”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만 같은 입맞춤에서 간신히 놓여나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낫고 있는 건가? 왜 이렇게 현기증이 나지? 누워 있는데도 눈앞이 캄캄했다.
“아까 무슨 생각 했어?”
제월공이 내 입술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물었다.
“아까…… 언제요?”
“총에 맞아서 쓰러졌을 때. 고통 말고도 눈빛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던 것 같아서.”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순간에 무슨 생각을…….”
제월공이 내 머리카락을 아플 정도로 세게 틀어쥐었다. 그리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눈을 맞췄다. 차갑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를 아주 잠깐 들여다봤을 뿐인데 현기증이 두 배는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남자친구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추적자치곤 로맨틱하군.”
추적자는 사람도 아니냐?
“헤어져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요. 오늘 헤어져서…… 그것도 굉장히 안 좋게 채여서 화가 많이 났었는데…….”
“남자친구면, 킵하고 양다리 걸치고 있다는 그놈?”
금방 저승 문턱을 넘어갔다 돌아온 사람한테 너무 하시네…….
“그놈하고 헤어졌어도 킵은 안 돼.”
딱 잘라 말하고 제월공이 다시 입을 맞췄다.
혹시 걷게는 만들어주나 싶어서 확실한 사심이 느껴지는 입맞춤을 꾹 참았다. 하지만 기운이 돌아오기는커녕 눈앞이 팽팽 도는 현기증만 더 심해졌다. 총상의 고통은 조금 더 무뎌졌지만, 기력도 다 빠져나가서 온 몸의 뼈가 녹아버린 것처럼 늘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두 번째 입맞춤에선 제월공의 사심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대체 왜 이러시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게서 입술을 뗀 후 제월공은 나를 바닥에 팽개쳐 놓고 제단 쪽으로 쌩하니 가버렸다. 이러는 걸 보면 제월공은 순수한 마음으로 응급조치를 해준 건데 내가 공연히 앞서 나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어딘가에 있을 거다. 내가 방에 들어온 그 시점에서 이미 무사한 거하곤 거리가 먼 상태였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은 거겠지?
숨을 한번 몰아쉬고 주변을 돌아봤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내 눈에 그제야 어수선한 방안의 상황이 들어왔다. 바닥에 새까맣게 죽어서 떨어져 있는 새들, 온통 피에 물든 시뻘건 바닥, 여기저기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기사들, 그리고…….
“니키…….”
기진맥진한 얼굴로 재단에 걸터앉아 거친 숨을 내쉬고 있던 니콜라스가 나를 돌아봤다. 얼굴은 새파랗게 얼어 있고, 손목이 꿰뚫린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흰자위가 충혈되다 못해 눈동자까지도 새빨간 니콜라스의 눈길에 흠칫 놀라서 숨을 삼켰다. 내가 보이긴 하는 걸까?
“니키…….”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전혀 방향을 못 잡는 눈치였다.
한참을 버둥거려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제월공의 치유 능력이 정말 대단하긴 한 건지…… 아무 문제없이 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단까지 기어갈 수는 있었다. 중간에 등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한번 쫙 뻗기는 했지만…….
“제이?”
눈시울에 가득 고였다가 뺨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까지도 핏물이었다. 니콜라스나 나나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제단 턱을 붙들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끌어안고 그 앙상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 사람은 한번 만나는 게 뭐가 이렇게 어렵고 위험한지 모르겠다.
니콜라스가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쪽은 손목이 꿰뚫려 피가 흐르고, 나머지 한쪽은 아예 손목이 날아가버린 마른 팔이었지만 나를 감싸 안는 힘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이 인간 때문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반나절 정도 욕을 퍼부어도 마음이 풀리지 않겠지만, 하고 있는 꼴이 너무 형편없어서 꾹 참고 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등만 쓸어내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제월공이 혀를 끌끌 차며 투덜거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말 이해를 못하겠네.”
그동안 니콜라스에게 가졌던 원망과 두려움을 잠시 잊고,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사랑처럼 부둥켜안고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은 살아 있고, 이렇게 다시 만났다는 사실 만이 중요했다. 니콜라스의 체온, 심장의 고동, 거친 숨소리…… 모든 것이 생생한데 그래서 오히려 덧없이 사라져버리고 말 꿈처럼 느껴졌다.
“뭐해? 시간 없다니까?”
우리가 뭐 그렇게 오래 이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발렌타인이 내 등을 사정없이 갈겼다. 아니…… 그렇게 세게 친 건 아니겠지만, 내 상태가 워낙 시원찮다 보니 등이 터지는 것처럼 아팠고, 내 입에서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바람에 니콜라스가 덩달아 놀라서 허둥거렸다.
“왜?”
“별 일…… 아니에요.”
“왜 이렇게 몸이 차? 다쳤어?”
니콜라스가 내 목덜미와 어깨를 더듬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내 몸이 차다지만 니콜라스의 몸이야말로 얼음장이었다.
“지금 이 방에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과장이 아니다. 발렌타인은 옆구리에서 흐른 피가 발등을 적시고 있고, 오웬도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루소의 기사들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이고, 제월공은…… 아, 제월공은 멀쩡하다.
제월공은 심하게 다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꿈틀거리는 오리를 주워 안고는 부리에 입을 맞추고, 부러진 날개깃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곧 죽을 것처럼 상태가 안 좋았던 오리는 제월공의 품안에서 바로 기력을 되찾아서 고개를 들었고, 한두 번 꾸륵거리다가 그 품을 박차고 날갯짓을 했다. 비록 작은 생명이지만, 죽어가던 것을 살려내는 제월공의 모습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모습보다 아름다웠다.
오리를 날려 보낸 후 주변을 둘러보던 제월공의 눈길이 나하고 딱 마주쳤다. 오리도 급하지만, 니콜라스도 많이 다쳤는데…… 먼저 좀 봐주면 안 될까 해서 제월공에게 아쉬운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제월공은 나를 싹 무시하고 방구석에 기대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소 의원에게 다가갔다.
루소는…… 지척에서 총격을 당한 사람치곤 운이 좋았다. 루소가 내 총에 맞고 뒤로 쓰러지는 걸 봤을 땐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루소는 손과 팔에 두 군데 총상을 입었을 뿐, 치명상이라고 할 만한 부상은 없었다. 루소가 검은 칼을 쥐고 니콜라스를 막 찌르려는 순간 사격을 해서 그랬을까? 나는 그렇게까지 명사수는 아닌데…… 어떻게 딱 손을 명중시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고집불통 영감을 어쩌면 좋겠나, 카시엘?”
제월공이 손을 뻗어 루소의 턱을 들어 올리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응급조치나 해주시죠. 치명상은 아니지만, 피를 많이 흘렸으니 그냥 두면 버티지 못할 겁니다. 당장 병원에 갈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나이도 있으니까요.”
“나를 골방에 가두고 내 절친한 친구를 죽이려고 한 놈인데 어디가 예뻐서?”
“이자는 인간들의 왕입니다. 자기 종족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할 일을 한 건데, 어떻게 나무라겠습니까?”
우리를 다 죽이려고 했는데 나무라지도 못하냐? 발렌타인이 천사라고 했을 때는 속으로 콧방귀만 연속으로 날렸었는데, 이제 보니 천사도 저런 천사가 없다.
“여길 빠져나가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자비를 베푸시죠. 제월공.”
발렌타인의 설득에 제월공이 마지못해 루소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아직은 기력과 성깔은 남았는지, 루소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루소의 거친 반응에 제월공도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자비도 어디 귀여운 구석이 있어야 베푸는 거지, 이런 자한테 쓸 기운이 있으면 내 까마귀나 보살피겠어.”
투덜거리면서 제월공이 루소를 툭 떨치고 일어섰다. 까마귀를 보살피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니콜라스 좀 어떻게 해주지…… 친한 친구라면서 니콜라스는 왜 까마귀보다도 뒷전이냐?
“저기…….”
참다못해서 내가 제월공을 불렀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자는 안드레아스의 대자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니콜라스를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눈이 안 보여서 그런지 니콜라스는 내 어이없는 심정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뭐? 안드레아스에게는 대자가 천 명도 넘었을 거야.”
제월공이 시큰둥한 음성으로 투덜거렸다.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자식이 있으면 아버지 노릇도 곧잘 했었지만, 그래 봐야 10년이 고작이었지. 친자식도 아니고, 같은 종족도 아닌데 깊은 정이 있었겠나?”
“안드레아스는 그 아이들을 모두 친자식처럼 사랑했어. 곁에서 오래 보살펴주지 못했던 이유는…… 자네도 알잖아?”
나도 안드레아스가 누군지는 안다. 이런 순간에 왜 그 사람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영문을 몰라서 탈이지…….
“안드레아스의 대자 중에 이렇게 막나가는 놈은 없었을 걸. 이런 짓하는 걸 못 보고 먼저 간 게 안드레아스한테는 다행이지.”
루소가 고개를 들어서 제월공을 노려봤다. 하지만 루소를 내려다보는 제월공의 눈길도 만만치 않게 냉랭했다.
“네 녀석의 어미가 얼마나 미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드레아스는 너 같은 놈은 기억도 못했을 거야. 기억을 하고 있었다면 분명 부끄러워했을 거고.”
제월공이 루소에게 당한 행패로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는 그 한마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루소가 그 안드레아스라는 남자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말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 발렌타인이 제월공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이자는 안드레아스가 가장 사랑한 대자였습니다. 목이 떨어져나가는 순간까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을 걸요.”
“웃기지 마. 이 녀석이 어디가 그렇게 특별해서?”
“안드레아스에게는 특별했어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을 정도로…….”
생각지도 않게 개인사를 폭로당한 루소가 고통도 잠시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월공도 마땅치 않은 듯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돈 거 아냐?”
제월공이 벌컥 신경질을 내다가 루소하고 다시 눈길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 눈빛은 좀 전에 비해선 기세가 많이 꺾여 있었다.
“하이랜더는…… 가끔 미친 짓을 할 때가 있어. 세월에 지치면 증세가 더 심해지기도 하고…… 대자라고 해봐야, 어차피 오다가다 만난 인연이잖아?”
제월공이 변명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뚱한 눈길로 루소를 힐끔 살폈다.
“험한 일을 당했던 거야? 안드레아스가 검으로 널 위협하기라도 했나?”
제월공의 조심스런 물음에 루소가 오히려 모욕을 당했다는 듯 발끈했다.
“무슨 헛소리야? 그건 내가 원했던 일이었어!”
“다행이군.”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제월공이 루소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총알에 꿰뚫려 피가 솟구치고 있는 손목과 손등에 입을 맞췄다.
루소의 손이 온통 피투성이라서 그 입맞춤 한 번으로 상처가 아물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출혈은 멎은 것 같았고, 루소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안드레아스가 이런 자를 사랑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 가끔 만날 때마다 뚱하니 말수도 적어서 통 속을 모르겠더니…….”
“그러는 당신은 안드레아스를 어떻게 알지? 깨달은 종족의 대장로라더니…… 불러다 심부름이라도 시켰었나?”
목숨을 구해준 은혜도 대단치 않다는 듯 루소가 제월공의 손아귀에서 손목을 비틀어 빼내며 신경질을 냈다.
발렌타인은 루소를 살려두면 여기서 나가는데 도움이라도 좀 받을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볼 땐 살려줬다고 딱히 득볼 것도 없어 보였다. 제월공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칼을 집어서 목도리로 둘둘 감으며 루소의 물음에 답을 했다.
“안드레아스는 내 동생이었어. 혹은 형이거나…….”
제월공의 대답에 루소는 드러내놓고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단지 표정과 눈빛에 언뜻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놀라서 벌에 쏘인 듯 펄쩍 뛰고 말았다. 그 남자가 제월공의 형제였다니…… 내가 죽였는데…….
내가 품안에서 자꾸 움찔거리니까 덩달아 충격을 받은 니콜라스가 끙…… 하고 신음을 했다.
“왜? 왜 그래?”
니콜라스가 몸 아픈 것도 꾹 참고 놀란 망아지 진정시키듯 나를 달랬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헉, 제월공이 이리로 오네? 놀라서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이?”
“괜찮아요. 기운이 없어서 좀…….”
요즘은 왜 이렇게 놀랄 일이 많은지 모르겠다. 1년 전 공원에서 마주쳤던 그 미친 검객이 제월공의 동생, 혹은 형이라니…… 아니다. 그때 그 사건은 정당방위였다. 나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고…… 내가 그자를 죽이지 않았으면 그자가 나를 죽였을 거다. 하지만 그 남자하고 제월공이 형제간이면 그런 변명이 먹힐까? 당장 그 남자가 루소를 사랑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제월공은 그간 당한 행패를 다 용서했다. 게다가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미운털이 콕 박혔고…….
“꼴이 말이 아니군.”
마치 이제야 봤다는 듯 제월공이 성의 없이 니콜라스를 훑어봤다.
“그렇게 엉망이야?”
“내가 자네를 알고 지낸 세월은 돌이켜 헤아리기도 어렵고, 어떻게 만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지만…… 이렇게까지 불쌍해 보인 적은 처음이야.”
“나가면 옷부터 새로 사 입어야겠군. 머리도 하고…….”
“내가 좀 도와줄까?”
“뭘? 쇼핑을?”
딴청을 피우며 니콜라스가 제단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발목의 상처도 깊고 출혈도 심해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 제월공의 부축으로 겨우 중심을 잡았다. 니콜라스가 제월공을 밀고 제단 턱에 기대앉았다.
“뭘 그렇게 겁을 내고 그래? 우리 사이에…….”
제월공이 갑자기 콧소리를 내며 니콜라스한테 착 감겼다. 바람둥이라더니…… 이건 정말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수준의 문어발이다. 벌써 이 방안에서만 제월공이 찝쩍거린 남자가 몇이냐? 나하고 루소는 그렇다 쳐도 발렌타인한테 흑심이 있었던 건 확실했는데…….
“너야말로 우리 사이에 왜 그렇게 헐떡거려? 우린 그냥 친구잖아?”
“마침 기회도 좋은데 우리도 선을 좀 넘어보면 어떨까 해서…….”
니콜라스가 손을 뻗어서 제월공의 어깨와 얼굴을 더듬어서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기력이 없는 와중에도 제월공의 옆통수를 빡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겼다.
“내가 죽다 살아난 게 너한테는 좋은 기회야?”
“알잖아. 내가 아파서 다 죽어가는 남자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거…….”
제법 매섭게 얻어맞았는데도 정신적, 육체적인 타격이 전혀 없는지 제월공이 꿋꿋하게 들이대며 니콜라스를 끌어안았다. 기린이 자비로운 짐승이라더니…… 자비의 실체가 걷잡을 수 없는 바람기였나 싶어서 깨달은 종족에 대해 갖고 있던 모호하고 신비롭던 이미지에 금이 쫙 갔다.
제월공이 니콜라스를 끌어안고는 단검에 꿰뚫려 있던 손목을 혀끝으로 핥았다. 그저 그것뿐인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찝찝한지는 잘 모르겠고…….
“저자하곤 대체 무슨 사이야?”
“누구?”
“무례하고, 성급하고, 파렴치하고, 호색한 저 추적자 말이야.”
“무례하고, 성급하고, 파렴치하고, 호색하다면…… 너잖아.”
“내가 그랬어?”
제월공이 피식 웃으며 니콜라스의 눈에 입을 맞췄다.
“하지 말라니까…….”
“우린 여기서 바로 나가야 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걷지도 못하고, 앞도 못 보면 곤란하잖아?”
달짝지근하게 니콜라스를 달래며 제월공이 그의 입술도 먹어치웠다. 비록 정상 컨디션은 아니라지만, 니콜라스를 저렇게 쥐락펴락하며 갖고 놀다니…… 내 눈엔 지금의 제월공이 성난 새떼를 몰고 이 방으로 돌진하던 그때보다 더 무시무시해 보였다. 루크가 제월공을 그렇게 경계하더라니…… 저런 식으로 맘먹고 작업 들어가면 성별과 종족을 불문하고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
나도 니콜라스하고 해본 기억이 까마득한 딥키스를 제월공이 하고 있는 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발렌타인이 제월공의 등을 주먹으로 한 대 갈겼다.
“그만 치대고 우선 나가시죠.”
“질투하는 거야?”
“그렇게 사랑스러우면 당신 친구는 당신이 데리고 나가시고요.”
“라두칸하고 나는 그냥 친구야, 카시엘. 내 영원한 사랑은 너뿐이야.”
제월공의 뻔뻔하고 넉살좋은 대꾸에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남몰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가 나하고 눈길이 딱 마주쳤다.
제월공의 입맞춤은 더할 수 없이 깊고 섹시했지만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던 니콜라스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떡 일으켜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발렌타인의 채근에 제월공이 여전히 얼굴은 얼어붙은 듯 창백하고, 앞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니콜라스를 어깨에 들쳐 멨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저택을 지키고 있던 백여 명이 병력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게다가 우리가 이 저택을 귀신도 모르게 급습한 것도 아니니까 외부에도 저택의 상황이 이미 알려졌을 거다.
오웬은 나를 잡아 일으켰고, 발렌타인은 루소를 부축했다. 지금 이 저택에서 몸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내 상태가 제일 엉망인 것 같았다. 그런 총격을 당하고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지 모르겠지만…… 신속하게 움직여서 저택을 빠져나가는 건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프고,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오웬에게 질질 끌려서 어떻게 방을 나오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오웬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지만 팔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에 정신만 더 혼미해질 뿐이었다.
“난…… 안 되겠어.”
“무슨 소리야? 일어나!”
나는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니다. 니콜라스와 함께 이 무덤 같은 저택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은 없을 거다. 이 집을 나간 후, 니콜라스가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것까지 직접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운이 나빴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하고 벌인 일이었으니까 운이 이뿐이라도 어쩔 수 없다.
“먼저 가. 난 뒤에 갈게.”
“농담해? 뒤에 언제?”
오웬이 눈치도 없이 버럭 소리를 치는 바람에 제일 앞서 가던 제월공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러다간 내가 모두의 발목을 잡고 말겠다. 하지만 더는 입을 뗄 기력도 없어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옆으로 누워버렸다.
“제이…….”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쓰러진 나를 안아 일으킨 사람이 니콜라스인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내 눈에는 니콜라스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니키, 나는…….”
얼굴을 한 번 더 만져보려고 했지만,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팔은커녕, 손가락 하나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제 의식도 점점 흐트러져서 깊은 잠에 빠져들 때처럼 모든 것이 몽롱하기만 했다.
“제이!”
니콜라스가 나를 한 번 더 세게 뒤흔들었다.
뭔가…… 굉장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젠 정말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순간에 입맞춤이라니, 그것도 괜찮네. 니콜라스…… 아닌데? 간신히 눈을 뜨고 눈앞에 이 뿌연 형체가 누군지 분간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야, 추적자! 여기서 이렇게 뻗어 자면 어떡해?”
뻗어 자다니…… 이게 무슨 막말이냐?
“저, 지금…… 죽을 거 같거든요…….”
“안 죽어.”
딱 잘라 말하고는 제월공이 나를 다시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곤 녹아내릴 듯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리였으면 금방 괜찮아졌을 텐데…….”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이렇게 지체하다가 기사단의 본진이 쏟아져 들어오기라도 하면 목숨 걸고 고생한 보람이 없다. 지금 우리 팀의 팀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라면 절대 이러지 않았을 거다.
제월공이 나를 끌어안고 애완오리처럼 어루만지며 다독거리는 사이, 니콜라스가 벽에 기대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루소에게 다가섰다.
“이런 저택이라면 비밀통로가 있을 텐데…… 어딘가?”
“비밀통로 같은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란 자들의 습성은 대부분 비슷해. 이렇게 번듯한 궁전을 지어놓고 비상사태에 대비하지 않았을 리가 있나?”
“있다고 해도, 내가 내 입으로 그걸 알려서 당신의 탈출을 돕겠소?”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일도 하게 될 때가 있잖아? 안드레아스를 보냈을 때처럼…….”
루소가 불이 이는 것 같은 눈길로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오히려 내 인생을 한번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던 적이 있나 싶군.”
“안드레아스도 그걸 안타까워했었어. 그래서 아득할 정도로 길었던 인생의 마지막 몇 달을 당신과 함께 보내기로 했던 거고…….”
그 안드레아스라는 남자……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쪽 세계에선 유명한 사람이었나 보다. 제월공의 형제에, 루소 의원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까마득한 고위층이다.
“안드레아스 얘긴 그만하지. 공연히 그 이름 들먹여봐야 나는 절대…….”
“어차피 말하게 될 거야. 제월공의 은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니콜라스의 설득, 혹은 협박에 루소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표정이 급작스럽게 불안해지는 걸 보니 니콜라스가 영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좀 거들어줘?”
제월공이 니콜라스를 돌아보며 루소를 압박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거든 효과가 있어서 루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지하로 한 층 더 내려가면 해안 절벽으로 통하는 터널이 있어.”
“해안 절벽이라…… 괜찮군.”
비밀통로라니, 그런 게 있었구나.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잘하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루소가 초를 쳤다.
“그래 봐야 거기도 기사들이 지키고 있을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비밀통로라면서?”
니콜라스가 투덜거렸다.
“침입자들한테나 비밀이지, 기사들한테까지 비밀이겠나?”
니콜라스가 루소 맞은편에 주저앉아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움직이기도 하고, 루소를 상대로 탈출 루트를 캐내기도 하기에 상태가 좀 좋아졌나 싶었는데, 겨우 그거 몇 마디 했다고 저렇게 퍼지는 걸 보니까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물론 몸 상태는 내가 제일 한심하지만…….
부상자가 한두 명이어도 걸음이 무거울 판에,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모르겠다. 너무 늦기 전에 니콜라스를 찾을 수만 있으면 뭔가 희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너…….”
제월공이 내 눈 꼬리로 흘러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마치 내 얼굴을 처음 보는 것처럼…….
“니 이름이 제이야?”
이제야 이름을 아는 척하다니, 내가 정말 싫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빤히 올려다보자 제월공의 초록색 눈동자가 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반짝였다. 뭔가 느낌이 방금 전하고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제월공이 내 셔츠앞섶을 풀어헤치더니 가슴에 입을 맞췄다.
왜 이러시느냐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뻐끔거려봤지만 제월공은 들은 척도 않고 가슴에, 옆구리에 입을 맞췄다. 여차하면 여기서 아예 자리를 펼 기세였다.
제월공의 입술이 닿는 자리마다 뜨거운 열기가 퍼지면서 마비라도 된 듯 고통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여긴 남의 집 복도다. 루크가 꼬박꼬박 기린을 짐승이라고 부를 때엔 사람이 맞는데 왜 그러나 의아하더니…… 왜 짐승인지 이제 확실히 알겠다.
“니키…….”
내가 애타게 부르자 그제야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장 달려와서 도와줄 기미는 없고…….
“제이는 제월공이 데리고 나가면 되겠군. 루소는 오웬이 맡고…… 카시엘, 자네가 날 좀 도와주지.”
그렇게 말하며 니콜라스가 발렌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하로 갑니까?”
“그쪽이 낫겠어.”
“루소의 말대로라면 그쪽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데요.”
“어차피 여기 있어도 갇히는 거야. 일단 이 집을 빠져나가야 돼.”
“그건…… 그렇죠.”
발렌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니콜라스를 일으켜 부축했다. 오웬도 루소를 데리고 일어섰고,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껄떡거리던 제월공은 니콜라스한테 한 번 더 재촉을 당하고서야 일어나서 나를 업었다.
“저자를 꼭 데리고 갈 필요가 있어?”
제월공이 루소를 가리키며 니콜라스에게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저자는 우리 쪽 협상카드야.”
제월공이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소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쓰게 웃었다.
“당신 목숨을 구하는데 나는 아무 도움도 안 될 거요.”
“왜?”
“내 기사들은 당신하고 어떤 협상도 하지 않을 테니까…….”
루소의 장담에 이번엔 니콜라스가 그를 비웃었다.
“조건만 맞으면 악마하고도 할 수 있는 게 협상이야.”
지하통로는 길고 협소했다. 비상사태를 위해 만든 탈출로인지, 본래 있던 동굴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바닥도 거친데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때문에 통로를 지나는 도중에 다들 여기저기 부딪히고 비틀거리다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앞으로 나가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통로 상황은 열악했다. 손전등이라도 몇 개 있었으면 이동이 훨씬 용이했겠지만, 난리북새통에 그런 거 찾아다닐 경황이 없었다. 현재 우리가 가진 장비라곤 발렌타인과 오웬이 들고 있는 소총 한 자루씩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움직이는 걸 보면 다들 보통 사람들보다는 밤눈이 밝은가 보다. 나는 아무리 눈을 부릅떠 봐도 제월공의 은발만 어른거릴 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대체 이 고약한 터널을 언제쯤 빠져나가나, 터널에서 지체되는 시간이 의외로 긴데 이러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장한 기사단과 딱 마주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날 즈음 저만치 앞쪽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숨 같은 신음이 들려왔다.
“니키…….”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이 속도로 이렇게 오래 움직이기엔 니콜라스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다. 넘어져서 다른 부상이라도 입었다면…….
“바다 냄새가 나.”
어둠 속에서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기진한 듯 꽉 잠긴 목소리였다.
“매복이 있는지 제가 나가서 확인을 해보죠.”
“서두를 거 없어, 카시엘. 자네도 잠깐 쉬지.”
힘든 건 알지만, 이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바깥 상황을 살펴보고 다행히 놈들이 아직 몰려오지 않았다면 최대한 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야 된다.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이.”
니콜라스가 어둠 속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니콜라스가 보이지 않지만, 제월공이 몇 걸음 앞으로 나가더니 나를 바닥에 내려줬다. 제월공 덕분에 몸 아픈 건 이제 견딜 만한데, 시력은 전혀 안 돌아왔다. 지척에 있는 니콜라스의 얼굴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제이.”
짙은 어둠이 나를 끌어안았다. 본래 니콜라스에겐 특유의 체향과 영혼까지 녹아내릴 것 같은 뜨거운 체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느낄 수 있는 거라곤 짙은 피비린내뿐이었다.
“니키.”
“나를 용서해줘.”
“…….”
니콜라스가 나한테 지은 죄가 분명히 있긴 있지만…… 지금이 이런 얘기할 때는 아니지 않나? 내가 대답을 않고 헐떡거리고만 있으니까 니콜라스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니, 용서하지 마. 나는…….”
“니키…….”
“나는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나는…… 행복 따위는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처음부터 니콜라스가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고, 잠복근무 중이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최악일 줄은 정말 몰랐다.
“저기,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몸을 비틀었다. 니콜라스가 지껄이는 뜬금없는 소리가 마치 작별인사 같아서…… 게다가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굉장히 불길했다.
“일단 나가서…….”
“해모수.”
니콜라스가 뜻 모를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무슨 주문이라도 외우는 건가 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때 제월공이 입을 열었다.
“왜?”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어. 만약 그렇게 되면…… 제이를 좀 돌봐줘.”
그렇게 말하고는 니콜라스가 나를 제월공에게 넘겨줬다. 그 순간, 어렴풋하던 옛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몬티첼리 저택이 습격을 당했던 그날 밤, 나를 눈 쌓인 산등성이에 남겨두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검은 헬기에 올라타던 그 모습이…… 마치 어제 일인 듯 선하게 떠올랐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온 몸을 총알에 꿰뚫린 고통이 또다시 덮쳐오는 것 같았고, 사지가 조여드는 것처럼 저렸다. 솟구쳐 오른 눈물 때문에 어둠조차도 부옇게 흐려졌고, 목구멍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이래? 진정해.”
제월공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이럴 때가 아닌 것도 알고, 이러고 싶지도 않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어떻게 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진정은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경련이라도 일어난 듯 덜덜 떨렸고, 신음은 아예 울음으로 변해서 좁은 동굴을 울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 걸까? 나는 니콜라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떤 정당한 절차도 없이 살해당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이대로 몸을 피해서 누구도 뒤쫓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안전하게 살 수 있었으면 했던 건 지나친 바람이었을까? 비록 그와 나 사이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그럴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걸고 싶었다.
천년 전의 약속을 지킨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일까? 니콜라스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고, 또 기사단은 왜 이토록 집요한 걸까? 간신히 움켜잡았다 싶으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번번이 이런 이별, 이제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이러다 숨넘어가겠어.”
내가 가슴을 잡아 뜯으며 아예 목을 놓아 울자 당황한 제월공이 니콜라스에게 따졌다.
“나 때문에 그래. 그동안 많이 힘들었거든.”
“힘들다고 이렇게 울어? 대체 이 녀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얘길 다 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
그렇게 대꾸하고는 니콜라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에 두서없이 팔을 휘저어서 아무 거나 걸리는 대로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붙잡지 못하고 허공만 움켜쥐고 말았다.
“가지 말아요……. 제발…….”
“왜 그래?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제월공이 나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마치 취할 것처럼 다정하고 달콤한 음성이었지만, 그것조차 위로가 되진 않았다.
목이 막혀서 뭐라 대답도 못하고 축 늘어진 나를 제월공이 바닥에 눕혔다. 이제라도 니콜라스를 뒤쫓아 가려고 버둥거려봤지만 이젠 팔과 다리, 어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야, 정신 좀 차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
달래기도 지쳤는지 제월공이 벌컥 화를 냈다.
“놈들이 동굴 앞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해도, 내가 하나뿐인 친구를 죽게 둘 것 같아?”
제월공이 그렇게 믿음직했으면 니콜라스가 자기 목숨을 버리려고 나섰을까? 방금 전, 루소가 니콜라스의 심장에 칼을 박으려고 했던 그때도 제월공은 대책 없이 골방이 갇혀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웬, 자네가 루소를 데리고 나와. 카시엘은 여기서 제이하고 제월공을 지키고…….”
“놈들과 협상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발렌타인의 목소리도 조금 지친 듯, 허탈한 듯 기운이라곤 없었다.
“별 수 없잖아? 다들 부상이 심하고, 나도…… 당장은 뭘 어떻게 해볼 기력이 없어.”
“당신이 다시 잡히면 오늘 저녁 고생이 모두 허사가 되는데요.”
“그러게.”
마치 남 얘기하듯 니콜라스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혹시 바솔로뮤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는데…… 예전엔 그자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지 않았나요?”
“천년이나 잠들어 있었으니 실력이 녹슬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녀석이라고 항상 운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바솔로뮤라면…… 루크 얘기를 하는 걸까? 녀석은 벌써 쿠간을 떴을 텐데…….
“제가 엄호를 할 테니까 어떻게든 바다까지 가시죠. 일단 거기까지만 가면…….”
“자넨 이제 바르카의 광폭한 전사가 아니야. 날개도 없고 갑옷도 없는데 몸조심을 해야지. 나 살자고 자네를 위험에 빠뜨리면 제월공한테 세상 끝날 때까지 원망을 들을 거야.”
“하지만…….”
“오웬.”
니콜라스가 다시 오웬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오웬이 루소를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얕은 신음소리와 함께 잔돌맹이가 발부리에 체이는 소리, 불편한 다리가 거친 바닥에 끌리는 소리로 주변이 잠시 어수선했다. 그리고 곧 세 사람의 발소리가 점차 어둠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니키!”
일어나 앉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타고 팔이 찢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니콜라스를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제월공이 내 어깨를 잡았다.
“여기 있어, 내가 가 볼게.”
제월공이 나를 지나쳐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발렌타인도 제월공을 따라 나가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니콜라스에게 살 길을 터주려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이젠 천사도 아니니까 몸조심하라던 니콜라스의 경고가 떠올라서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발렌타인…….”
“넌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상황 끝나면 데리러 올 테니까.”
발렌타인이 그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좀 전에 제월공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내 어깨를 조심성 없이 치고 지나갔다.
온몸을 엄습한 아찔한 고통이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동굴의 출구에 기사단이 아직 닿지 못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걸까? 아까 발렌타인이 뭐랬더라? 어떻게든 바다까지만 가면 살 길이 있을 것처럼 얘길 하던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벽을 더듬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총격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동굴을 나가는 건 쉽지 않았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고, 발끝에 돌부리가 걸릴 때마다 통증이 등골까지 파고들었다. 이 꼴로는 나가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컴컴한 굴속에 처박힌 채 정신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내 부상 정도나, 지금 상태로 봐선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을 더듬으며 얼마를 걸어 나가자 내 얼굴에도 차가운 바깥바람이 와서 닿았다. 이제 거의 나온 건가?
니콜라스가 앞서 나간 지 좀 됐는데 아직은 외부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놈들이 아직 들이닥치지 않았고, 니콜라스가 무사히 바다까지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내 어리석은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저만치 앞쪽에서 불길하고 괴기한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얼핏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소리는 무척 낯설었지만, 동시에 귀에 익었다. 저녁 내내 루소의 저택에서 들었던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수천 마리의 새떼가 좁은 곳에서 동시에 퍼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그리고 새들의 울음소리…… 다음 순간, 마찬가지로 저녁 내내 나를 괴롭혔던 또 다른 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총소리였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동굴 바깥은 대낮처럼 환했다. 시야가 흐린데다 동굴 앞에 잡목이 우거져서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대충 봐도 좁은 해안은 이미 놈들의 헬기에 의해 완전히 막힌 것 같았다.
서치라이트를 밝힌 채 해안에 늘어서 있는 십여 대의 헬기는 흡사 두 눈을 부릅뜬 괴조처럼 보였다. 대체 몇 명이나 몰려온 걸까? 바다가 바로 눈앞인데, 놈들의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길이 보이질 않았다.
니콜라스는, 오웬은…… 어디에 있을까? 뭐라도 찾아보려고 잡목 숲을 노려봤다. 그때, 해안에서 다시 한 번 연속적인 총성이 울려 퍼졌다.
해안 어딘가에서 교전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건가? 동굴 벽에 바짝 붙어서 해안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사물이 2중 3중으로 퍼져 보이는 흐린 시야와 앞을 막고 있는 굵은 나뭇가지 때문에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통 파악이 되질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이…… 아니 어떤 거친 기류가 몰려왔다. 그건 확실히 느껴졌다. 뭔가 싶어서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니 밤하늘에서 시커먼 구름 같은 것이 몰려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구름의 실체가 엄청난 무리의 새떼라는 걸 깨달은 건 방향을 잃은 오리 몇 마리가 푸득거리며 눈앞을 날아간 후였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은 새떼가 기사단을 향해 날아들었고, 그때마다 놈들은 허공에 총질을 하며 새떼를 흩어버리고 있었다. 숲 어딘가에서 제월공이 새들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좁은 해안이지만,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새떼라니…… 수많은 새들이 좁은 집안에 밀고 들어오는 것도 무서웠지만, 수십 만 마리의 새들이 유영하듯 하늘로 치솟았다가 해변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군인들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세상에 새보다 더 무서운 건 달리 없을 것 같았다. 제월공도 그렇고…….
하지만 이 정도로 기사단을 해안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기사단은 오리들의 총공세에 맞서 자신들의 헬기를 엄폐물 삼아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버티고 있는 헬기는 십여 대, 병력은 백 명 이쪽저쪽이지만…… 놈들의 본진은 이 정도가 아닐 거다. 아홉 명의 왕들이 뭐하는 사람들인지를 생각해보면 백 명의 특공대는 그냥 선발대에 불과했다. 놈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정부군이 수만 명이라도 몰려올 터였다.
동굴 안에서는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무장한 백여 명의 기사단과 그 완강한 태도를 보니 왜 니콜라스가 마지막 가는 길인 듯 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잡목 숲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짧았지만 실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이었다. 제월공이 애는 쓰고 있지만 놈들의 지원 병력이 더 몰려오기 전에 바다로 가는 길을 뚫지 못하면, 결국 니콜라스를 잃게 될 거다.
기사단의 총격에 산산이 흩어졌던 새떼가 공중에서 다시 한 번 큰 덩어리로 뭉쳤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사단을 향해 돌진했다. 공격이 되풀이될 때마다 무리는 더 커졌고, 속도는 더 빨라졌다. 거친 총소리와 함께 간간이 놈들의 비명도 들려왔고, 몇몇은 몸에 달라붙은 새들을 떼어내려고 허둥거리며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다. 그 사이 새들은 다시 한 번 수면을 박차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새가 계속 날아오고 있는지 무리는 점점 늘어났고, 날갯짓은 더욱 난폭해졌다. 놈들을 다 밀어내고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건 어려워도…… 계속 밀어붙이면 한두 명 정도 빠져나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놈들의 저항도 거칠지만 새들의 난폭한 공세에 기사단의 대오가 조금씩 흔들리고 뒤로 밀리는 기색이 보여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희망을 가진 것도 잠시 뿐이었다. 절벽 위쪽에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굴 안쪽에서도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입구는 바닥에서 2층 높이 정도 되는 허공으로 나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철재 계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계단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려가기엔 너무 가팔랐다. 이제라도 숲으로 내려가서 놈들의 지원병이 몰려온 사실을 알리고, 무리가 되더라도 니콜라스를 바다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계단으로 한걸음 내려서기는 했지만 바로 균형을 잃은 채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날카로운 철재 계단 턱에 옆구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행히 아주 정신을 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발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고, 곧 나를 에워쌌다.
“짭새?”
날카로운 손전등 불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데…….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야? 살아는 있냐?”
누군가가 나를 안아 일으키더니 목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세게 흔들었다. 부상자를 이렇게 잡아 흔들다니…… 이 무식한 놈은 대체 누구냐…….
“야, 짭새! 죽으면 안 돼! 정신 차려!”
“가르시아……?”
다 뭉개진 소리로 간신히 한마디 중얼거리자 가르시아가 긴 한숨을 내쉬며 나를 끌어안았다.
“안 죽었구나, 짭새!”
“여긴 왜…… 어떻게…….”
“알바 중이야. 스파게티 몇 그릇 팔아가지곤 먹고살기 힘들거든.”
그렇게 대꾸하고 가르시아가 지시를 기다리는 부하들을 돌아봤다.
“니들 먼저 내려가서 니콜라스 헤슬렘을 찾아. 나도 금방 내려갈 테니까…….”
가르시아의 한마디에 부하들이 일사분란하게 계단을 내려가더니 숲으로 사라졌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가르시아가 왜 여기에 있는지, 뭘 하는 건지…… 하지만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가르시아가 나를 들쳐 업었다. 그리곤 동굴 입구로 올라가더니 좀 전까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나를 내려놨다.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일 끝내고 데리러 올 테니까…… 그 사이에 니 맘대로 죽거나 하면 안 돼!”
그렇게 자기 할 말만 지껄이고 다시 내려가려는 가르시아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대체 여긴 어떻게…….”
“너도 알잖아? 우리가 알렉산더 루소한테 갚을 빚이 있는 거…….”
“그래서 빚을 갚으러 몰려온 거야? 딱 이런 상황에? 게다가…… 니콜라스는 왜 찾아?”
“우리 대부님하고 니 남자친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어. 난 그 녀석이 별로 맘에 안 들지만…… 거래 조건은 괜찮더라고.”
거래? 하지만 루크는…….
“루크는 떠난 거 아니었어?”
“동네를 뜬다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지금은 저 위에 있을 거야.”
가르시아의 대답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벼랑 위를 올려다봤다. 백 미터 정도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뭔가가 거친 발사음을 내며 해안의 모래사장을 향해 날아갔다. 꼭 미사일이 날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직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검은 헬기가 엄청난 폭음을 내며 산산이 터져나갔다.
최초의 공격과 폭발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수십 발의 미사일이 해안으로 쏟아졌다. 포격은 한순간인 듯 짧았지만 공세는 가차 없었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는 미사일 공격에 수십 만 마리 새들의 습격에도 꿈쩍 않던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헬기가 처참한 몰골로 폭발하거나, 급히 하늘로 떠오르다 추진력을 잃고 얕은 바다에 처박혔다. 불붙은 헬기의 연쇄 폭발로 해안은 한바탕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 같았다. 폭발음과 총성, 그리고 비명소리…… 마치 지옥에서 벌어진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았다.
절벽 위의 검은 그림자가 한순간 사라졌다 싶더니, 해안 저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저 틈에 루크도 있는 건가? 알면 알수록 뭔가 범상치 않은 놈이란 느낌은 있었지만, 검은 용이라니…… 사실이라면 천하에 둘도 없이 교활하고 악랄한 놈이다. 마리아 첸한테 접근해서 흑풍회를 손에 넣고, 그 수정 목걸이 때문에 나한테 그렇게 치근덕거리더니…… 결국 원하는 걸 둘 다 움켜쥐는구나. 시간을 담은 병하고 니콜라스를…….
갑자기 지난여름, 루크와 함께 떠났던 사막 여행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별이 쏟아질 듯 빛나던 밤하늘, 전사들의 무덤. 몰래 캠프를 빠져나가 혼자 울먹이던 루크…… 검은 전사들의 귀환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결국은 이렇게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그렇게나 원했던 일이었으니까…… 루크는 자신의 군대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했을 거고, 그 누구도 녀석을 막지 못했을 거다.
해안으로 내려온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이쪽 숲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르시아 일당과 함께 기사단의 잔당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마치 교활한 늑대 무리에게 둘러싸인 양떼처럼 수십 명의 기사들이 놈들에게 쫓겨 바닷가로 내몰리는 것까지 보다가 눈을 감았다. 차가운 겨울바람 때문인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더는 버틸 기력이 없어서 정신이 가물거렸다. 그렇게 정신을 잃어가는 중에 이대로 다시 눈을 뜨지 못해도 별로 아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근처에 큰 불이라도 피운 것처럼…… 하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부드러운 온기에 이끌려서 따뜻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쪽으로 한껏 몸을 붙였다.
“정신이 들어?”
뭐야…… 또 제월공이잖아…….
“정신 차렸으면 눈 좀 떠 봐. 너 나하고 얘기 좀 하자.”
제월공이 뚱한 음성으로 투덜거리며 나를 조심성 없이 흔들었다.
“아파요…….”
내 입에서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제월공의 태도엔 조심성이라곤 전혀 없었다.
“니 전 남자친구가 라두칸이고, 현 남자친구는 바솔로뮤야? 그 와중에 내 아들하고도 한 다리 걸쳤고?”
내가 들어도 기가 차지만…… 대강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하냐? 어차피 죽으면 다 끝이다.
“저…… 지금 죽을 거 같거든요…….”
“안 죽었잖아.”
대체 어떤 놈이 기린을 자비로운 짐승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보니 나는 해안 모래사장에 내려와 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는 않았는지 해변은 아직 어지러웠다. 헬기는 여전히 불타고 있었고, 불 뿜는 용의 치명적인 공격에도 살아남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잔당들은 무장을 해제당한 채 잡목 숲 어귀에 붙들려 있었다. 루크는? 그리고…….
“니콜라스는……요?”
“라두칸은 무사해. 저쪽에 있어.”
고개를 돌려서 제월공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봤다. 그 불바다에서도 헬기 한두 대는 살아남았는데…… 니콜라스는 그중 좀 더 멀쩡한 헬기에 걸터앉아서 몬티첼리의 부하들에게 응급처치를 받고 있었다. 몬티첼리한테 손 좀 빌려달라고 했다더니,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보다. 내가 했던 것처럼 덜렁 서너 명 데리고 와봐야 결국 이 꼴이 됐을 테니까…….
“정신이 들었네요.”
잡목 숲 쪽에서 누군가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내 머리맡에 멈춰 섰다. 군복 같은 걸 입고 있어서 누군가 했는데…… 레빈이었다.
“동굴 입구에 쓰러져 있는 게 영락없이 죽은 사람의 형상이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레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져서 울먹였다. 그러자 제월공이 나를 더 바싹 끌어안고 손바닥으로 내 눈을 가렸다.
“또 운다.”
“저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울지 마! 하룻저녁에 두 번이나 그 꼴을 봐도 좋을 만큼 니가 귀여운 줄 알아?”
제월공이 딱 잘라 말하고는 어느새 눈 꼬리를 따라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박박 훔쳤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시간을 담은 병에, 니콜라스까지 잡았으니까 이게 게임이라면 루크의 완승이다. 무슨 봉인을 깬다더니…… 뭔가 의식이라도 치르는 건가? 봉인이 깨지면 사방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세상이 괴물들의 소굴로 변하는 걸까?
“이제 가는 건가?”
어딘가에서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덕분에 일이 잘 끝났으니까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두 번 다시 안 돌아오는 거…… 확실하지?”
좀 떨어진 곳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지만 몬티첼리가 잔뜩 들뜬 건 확실히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다. 루크가 쿠간을 뜨면 온 동네가 다시 자기 세상이니까……
“난 다시 와 봐야 루벳 거리까지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 영지는 거기까지니까…….”
하필 소리가 들리는 건 제월공의 등 뒤였다. 제월공의 가슴팍에 안겨 있다 보니 등 뒤를 넘겨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월공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일으켰다.
루크와 몬티첼리는 불이 붙어서 벌겋게 달아오른 헬기 근처에 마주 서 있었다. 루크는 등을 돌리고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몬티첼리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다.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야? 떠난다고 했으면, 최소한 지구 반대편 아냐?”
“내가 어딜 가든 당신이 상관할 거 없잖아?”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설마 루소를 잡아 죽이고도 이 근처에서 얼쩡거릴 건 아니지?”
“아직 안 죽였잖아.”
루크의 쿨한 대꾸에 몬티첼리가 발끈했다.
“저 작자를 살려둘 생각이야?”
“처음엔 눈에 띄기만 하면 바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이젠 그런 자비를 베풀 기분도 아니야.”
루크의 대답에 몬티첼리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헛소리 그만 걷어치우라는 듯 두 손을 내저었다.
“죽일 배짱이 없으면 그냥 두고 가. 내가 처리해서 귀신도 못 찾을 곳에 묻어버릴 테니까…….”
“루소를 어쩌건 그것도 내 맘이야.”
루크의 짧은 한마디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몬티첼리가 들고 있던 소총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총구로 루크의 목을 꾹 찔렀다.
“넌 이대로 여길 뜬다며? 저 영감이 살아 있으면 니가 한 짓까지 덤터기 쓰고 날벼락 맞는 건 나야.”
“그런 건 걱정할 필요 없어. 루소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살든, 조무래기 조폭 따위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주둥이 곱게 놀려. 한번만 더 그 따위로 지껄이면 너도 저 영감 옆에 나란히 눕게 될 거야.”
몬티첼리가 감춰둔 본성을 드러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몬티첼리가 열 받은 김에 방아쇠를 당겨버리지 않을까 겁이 나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다행히 발렌타인이 나서서 몬티첼리의 총구를 밀어치웠다.
“복수를 한다며? 딴 건 다 그만두고라도 제이가 저 지경이 됐는데 넌 성질도 안 나? 나한테는 조카 친구지만, 너한테는 남자친구잖아?”
몬티첼리의 도발에 이번엔 루크가 검을 빼들었다. 왜 저래, 둘 다…….
“너야말로 말조심 해. 두 동강을 내서 던져버리고 갈 수도 있으니까!”
“니가 그렇게 해야 할 놈은 루소야. 비니가 여기 와서 제이가 저렇게 벌집이 돼서 뻗어 있는 걸 봤으면, 저 영감은 달까지 날아갔어!”
애초에 저 둘의 동업은 무리였다. 그게 어떤 일이건, 결과가 어찌 되었건 결국은 둘이 저렇게 서로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거렸을 거다. 다행히 이번에도 발렌타인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만들 둬. 여기서 이렇게 꾸물거릴 때가 아니잖아?”
“이 자식이 루소를 살려준다잖아!”
몬티첼리가 발레타인에게 벌컥 화를 냈다. 몬티첼리가 저렇게 펄쩍 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일을 벌여 놓고 루소를 살려둔다는 건, 몬티첼리에게 패밀리를 다 끌고 무덤에 들어가란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루소가 비록 지금은 지친 몰골로 해변에 주저앉아 있지만, 그는 여전히 쿠간을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 프란시스. 내가 알기론 복수는 이쪽이 훨씬 더 전문이야.”
“그냥 죽여버리면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해?”
몬티첼리가 있는 대로 성질을 내며 포효했다.
몬티첼리를 진정시키는 일은 발렌타인에게 맡기고 돌아서던 루크가 걸음을 멈췄다. 아마 제월공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를 본 것 같았다. 뚜렷하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나를 노려보는 루크의 눈빛만은 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
앓는 소리를 내며 제월공의 목을 슬그머니 놨다. 그리고 제월공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녀석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내 입장도 떳떳치 않고, 무엇보다도…… 아무리 봐도 루크는 루크였다. 외모도 그대로고, 여태 해오던 것과 하는 짓도 똑같았다. 그간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고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용이라니…….
“제월공.”
루크가 다가오다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녀석을 데리고 헬기에 타시죠. 지금 출발할 겁니다.”
“바로 갈 건가?”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루크의 대답에 제월공이 나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루크를 스치듯 지나쳐서 헬기로 다가갔다.
“루크.”
지금은 루크를 바로 볼 기분도 아니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녀석을 불렀다.
“왜?”
“저 녀석들을 어쩔 생각이야?”
내 물음에 루크가 수풀 앞에 꿇어앉은 기사들을 쳐다봤다. 얼핏 30명은 넘어 보이고, 부상이 심한지 누워서 헐떡거리는 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떻게 하자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힘든 상황이긴 하지만, 루크가 놈들을 다 죽이고 떠날까 봐 두려웠다.
“왜?”
녀석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화를 눌러 참으며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죽일 건 아니지?”
“벌써 반도 넘게 죽어 넘어졌는데, 이제 와서 몇 놈 살려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30명은 적은 수가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적이라도 포로는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게 인간 세상의 법이다.
“일단…… 상황은 끝났잖아.”
루크가 성가신 눈길로 기사단을 노려봤다. 그리곤 더 언짢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다행히 대답은 그렇게까지 과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관심도 없고.”
툭 던지듯 한마디를 지껄이고는 루크가 기사단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니콜라스, 나, 제월공, 그리고 오웬…… 조종석엔 레빈의 소개로 일당 벌이를 하러 왔다가 상상 이상의 참사를 목격하고는 정신이 반쯤 나간 전직 헬기 조종사가 한숨을 폭풍처럼 내쉬며 앉아 있었다. 이제 루크하고 발렌타인만 타면 되는 건가?
앞일이 어떻게 되든 빨리 이 해안을 벗어났으면 싶어서 혼자 조바심을 내고 있는데 제월공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바싹 끌어안았다.
“너 말이야, 인간 치곤 마음이 넓은데? 정말 직업이 추적자야?”
“경찰이에요.”
“하는 일이 살인자를 뒤쫓는 거라면서? 뭐라고 부르건, 그게 그거잖아.”
그게 그거라니…… 경찰은 엄연한 공무원이다.
“몇 년 동안 공부하고, 훈련받고…… 어려운 시험 봐서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거든요.”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제월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쨌든 잘 했어. 기사단이니 뭐니 해도, 무기도 다 뺐기고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는데 저기다 대고 총질을 하는 건가 해서 마음이 언짢았었거든.”
“그러셨어요?”
“물론 다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기린의 자비로운 면을 볼 날이 올까? 여태까지 난폭하고 음란한 모습만 집중적으로 봐서 그런지, 기린의 자비로운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안 간다.
제월공의 어깨에 기대서 눈을 감았다. 이젠 한계까지 버틴 느낌이 왔다. 이대로 잠들면 백 년은 잘 것 같은데…… 눈감고 숨 한번 들이쉬기도 전에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루크가 루소를 끌고 와서 헬기 안으로 거칠게 떠밀었기 때문이다.
“이자는 왜? 데리고 가게?”
니콜라스가 루크에게 물었다. 둘이 친군지, 원순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은 이미 최악이었다.
“여기 두면 프란시스가 이자를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뒤따라온 발렌타인이 대답하며 루소를 일으켜서 헬기에 밀어 올렸다.
“그리고 기사단의 추적을 받게 되더라도, 이자가 있으면 함부로 공격을 하진 못할 테니까…….”
“그런가?”
니콜라스가 마땅치 않은 눈길로 루소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결국 루소하고 한 헬기를 타게 되는 건가?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이쪽 팀에 붙어봐야 루소가 산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동안 루소 때문에 당한 일이 있는데…… 니콜라스나 루크가 루소를 살려줄까? 루소에겐 안 된 일이지만, 둘 다 그렇게까지 인정 넘치는 성격이 아니다. 루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냉담한 눈길로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탈출하는 길에 내 덕을 볼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요. 내 기사들은 나를 살리자고 당신을 놔주지는 않을 테니까…….”
니콜라스가 뭔가 독설을 퍼부으려고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루크가 루소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방패로 써먹자고 널 데려가는 게 아니야.”
루크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불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루크에 대한 루소의 유감도 만만치 않았고, 기개도 대단했다.
“뱀보다 간악한 놈! 네놈의 속셈이 뭐든,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다!”
“내 속셈이 알고 싶어?”
루크의 위협적인 속삭임에 나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한 번 더 힘들게 떴다. 루소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녀석의 속셈이 뭔지 정말 알고 싶다.
“난 너한테 죽음이라는 관용을 베풀 마음이 없어. 그게 이유야. 넌 평생 그렇게 두려워했던 일이 벌어지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거야. 또 다른 세계가 열리고, 검은 군대와 다섯 종족이 돌아오는 것까지…… 난 오히려 네가 보통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인간들의 세계가 천천히 무너지는 걸 지켜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지껄이고 나서 루크가 루소를 니콜라스 쪽으로 떠밀어버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발렌타인이 어느새 뒤에 와 있던 몬티첼리를 돌아봤다.
“내가 뭐랬어? 저런 게 진짜 복수라니까?”
“그래서 결론이 뭐야? 저 영감을 살려준다는 거잖아?”
몬티첼리가 입에 물었던 먹이를 강탈당한 늑대처럼 사납게 투덜거렸다.
루크가 조종석 옆자리에 올라타자 헬기가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뭐해, 카시엘? 안 갈 거야?”
헬기가 막 떠오르려고 하는데도 발렌타인이 올라탈 생각을 않자 제월공이 조바심을 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같이 갈 생각이 없는지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정리하는 것도 도와줘야 할 것 같고…… 애들한테 가 봐야죠. 잠깐 갔다 온다고 얘기하고 나왔으니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넨 부상을 당했잖아?”
발렌타인이 애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발렌타인과 킵의 관계가 언제 제월공한테 들통이 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땐 나도 꼭 그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일 끝나면 별장으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발렌타인의 목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희미했다. 헬기 소음 때문인지, 내가 정신을 잃어가고 있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제월공에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의식이 몽롱해지는 중에도 그런 두려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희미한 의식의 마지막 자락을 놓는 순간…… 헬기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