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하고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지난 며칠 비바람이 거세고 날씨가 우중충했었는데 모처럼 눈부시게 날씨가 좋아서…… 미뤄둔 청소와 빨래를 몰아서 했다. 퇴원해서 내 아파트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고, 일요일이다.
샤워까지 하고 나와서 침대에 길게 뻗었다. 진즉에 좀 치울 걸…… 퇴원하고 오늘까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일어났다 앉을 때마다 풀썩거리는 먼지구덩이에서 그냥 뒹굴었다.
퇴원 첫날 저녁엔 쥬드하고 마리우스가 와서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어젠 반장님한테서 살 만하면 한시바삐 출근하라는 독촉전화가 왔었다. 그리고 저녁때엔 앤디가 직접 찾아와서 선배님 언제 복귀하시느냐고 눈물을 글썽이며 조르다가 돌아갔다.
퇴원은 했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서 당장 복귀는 어려웠다. 반장이 경찰서 골칫덩어리인 비니하고 나한테까지 그렇게 껄떡거리는 걸로 봐선 복귀하면 바로 현장투입인데, 아직은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에 부쳤다.
바로 옆 큰 길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 복도에서 애들 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또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 아기 우는 소리…… 이 아파트는 소음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쉬어도 쉬어도 계속 피곤하기만 한 게 아무래도 이 끊이지 않는 소음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면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너무 호사스럽게 지낸 탓이든지…….
루크하고 같이 사는 건 나름대로 편하고 안락한 생활이었다. 내 손으론 물 한잔 끓일 필요도 없고, 수건 한 장 세탁할 일도 없었으니까…… 대신 몇 달에 한 번씩 목숨이 위험해서 탈이지.
전화가 왔다. 비니네…….
「뭐해?」
“그냥 있어.”
「몸은 좀 어때?」
“그냥 그래…….”
「목소리가 왜 그래?」
“목소리가 어떤데?”
「기운이 하나도 없잖아.」
이 녀석은 요즘 어디서 뭘 하는지, 한번 오지도 않고 아침저녁으로 전화만 한다.
「첸, 그 자식한테 시달리는 거 아냐?」
비니의 목소리가 대뜸 날카로워졌다. 시달리기는…… 그놈을 봐야 시달리든 말든 하지.
“그런 거 아냐.”
「아니면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건데?」
옆구리에 총 맞은 지 20일 만에 퇴원해서 이 정도 회복했으면 짐승 같은 체력이지, 바라는 것도 많다. 하긴, 이 자식이 언제 크게 다쳐봤어야 일반인 사정을 알지.
“방 치우고 빨래했어. 피곤해서 그래.”
「…….」
한동안 대답 대신 쌕쌕 숨 쉬는 소리만 들려왔다.
“비니?”
「첸하고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내 아파트야.”
「그 자식하고 헤어진 거야?」
비니가 전화기에서 튀어나올 듯 반색을 했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왜……?」
“루크는 바쁘고, 나는 쉬고 싶고…….”
「가도 돼?」
비니는 그동안 내가 루크하고 같이 있는 줄 알았나 보다. 내가 말을 안 했던가? 안 했구나…….
“얼마든지. 같이 저녁 먹자.”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좋아. 어디서 볼까?」
“차이나타운만 아니면 어디든.”
잠깐 머뭇거리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누굴까? 혹시…….
「그 자식하고 헤어진 거 맞지?」
비니가 한 번 더 다그쳐 물었다. 내가 루크하고 헤어졌다고 하면 춤이라도 추겠다.
“아니라니까?”
「그런데 왜 차이나타운도 피해 다녀?」
“거긴 이미 너 때문에 깨질 만큼 깨졌어. 넌 중국인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
저녁 때 근처에서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누구세요?”
내 물음에 문밖에서 귀에 익은 퉁명스런 대꾸가 돌아왔다.
“나야.”
젠장…….
문을 열자 자오, 푸웨이 그리고…… 필립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뒤에 누가 더 있나 싶어서 슬쩍 내다봤지만 이놈들이 전부였다.
“오랜만이야.”
자오가 나를 싹 지나쳐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금방 샤워했나 봐?”
필립이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대고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자식은 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지, 나를 먹고 싶은 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집 꼬라지하고는…….”
푸웨이가 집안을 휙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니콜라스 얘기를 하다가 삐져서 가버린 이후 루크는 병원에 다시 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흘 후에 퇴원했고, 또 사흘이 지났으니까 오늘로 거의 일주일이나 루크를 못 봤다. 얘네들도 덩달아 일주일만이었다.
“왜 왔어?”
“너, 회장님하고 헤어진 거야?”
몸은 어떠냐, 어떻게 지냈느냐는 인사 따위는 다 걷어치우고 자오가 느닷없이 물었다.
“아니야.”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가면서 나도 간략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몰라서 물어? 집에서 쉬는 중이잖아.”
대답에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자오가 나를 날카롭게 노려봤다. 하지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달리 대답할 말이 없다.
“루크는 어떻게 지내? 잘 있어?”
내 물음에 자오하고 푸웨이가 동시에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별일은 없어.”
잠깐 망설이던 푸웨이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별일 없는 거치곤 표정이 시무룩하다.
“별일은 없는데, 숨이 막혀서 회장님 근처에 못 가겠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도 없는데 숨이 왜…… 막혀?”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묻자 둘이 동시에 나를 쥐어박을 듯 노려봤다.
“그걸 우리한테 물어? 너 때문이잖아!”
“그 자식 성질이 못된 게 어째서 내 탓이야?”
이불을 끌어 덮으면서 나도 투덜거렸다. 니콜라스 일을 두고 다투다가 그렇게 쌩 하니 나가버린 후로 녀석은 전화도 한번 없었고, 퇴원하는 날에도 오지 않았다. 녀석이 그렇게 나오니까 내가 먼저 연락을 하기도 뻘쭘했고, 병원을 나와서 녀석에게 가기는 더 어려웠다.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타협하고 사과도 하겠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 없다. 니콜라스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도, 진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와 관련된 일은 뭐든 그렇게 어려웠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기운이 없고 지치지? 아침을 아직 안 먹어서 그런가? 하긴, 점심때도 지났으니까…… 생각을 하다가 어제 저녁도 건너뛰었다는 걸 깨닫고는 기분이 확 내려앉고 말았다. 이젠 그 자식이 없으면 끼니도 못 찾아먹는 병신이 된 건가 싶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끝낼 거 아니면 그만 돌아오지 그래?”
자오가 마치 자기 구역 수금하러 다니는 조폭처럼 험악하게 나를 을렀다. 흑풍회 보스 오른팔에, 그 자체로도 인상과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자오가 이렇게 나오면 누구라도 가진 거 다 내놓고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루크가 보내서 온 거야?”
“회장님은 요즘 니 얘긴 한마디도 안 해.”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
내 대꾸에 자오가 한 번 더 인상을 험하게 구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싸우고 틀어질 때마다 매번 회장님이 널 데리러 와야 되는 거야? 니 발로 먼저 찾아가면 발목이 부러지냐?”
“…….”
“헤어질 거면 제대로 끝내고 각자 갈 길을 가든가…… 왜 이렇게 옆에 있는 사람 피를 말려?”
자오가 이젠 대놓고 신경질을 냈다. 나 때문에 피가 마르는 것도 아니면서…… 하긴, 루크보다는 내가 만만하겠지.
“왜 싸웠어?”
자오가 잠시 쉬는 사이에 푸웨이가 심문을 시작했다.
“싸운 건 아니고…… 냉각기 같은 거야.”
“냉각기?”
“만나다 보면 그럴 때가 있잖아. 상대가 하는 일이 마땅치 않거나, 의심스럽거나…….”
자오와 푸웨이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요즘 들어서 별 꼴을 다 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마땅치 않고, 의심스러운 일이 뭔데? 회장님이 조폭 유부남인 거 몰랐냐?”
조폭 유부남과 짭새 홀아비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 최악의 조합이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서 한숨을 쉬며 돌아눕다가 필립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귀신같은 놈. 언제부터 뒤에 누워 있었던 거냐?
“잘 됐네. 그 능구렁이 정리하고 나한테 와.”
그렇게 속삭이면서 필립이 내 목덜미를 혀끝으로 슥 핥았다. 내가 소름이 끼쳐서 덜덜 떨고 있는 사이, 다행히 자오가 일어나서 필립을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함부로 입대지 마. 그러다 사고 칠라.”
버르장머리 없는 조카한테 하듯 가볍게 잔소리를 한마디 하고 나서 자오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곱게 말로 할 때 차이나타운으로 와.”
“생각 좀 해보고…….”
“회장님은 요즘 본관 펜트하우스에서 지내.”
청연루가 다 허물어졌으니까 거처를 옮겼을 거란 생각은 했다. 그런데…… 본관이 어디냐?
“흑풍회 사무실 말이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다 못마땅하다는 듯 눈총을 주면서 자오가 내 앞에 카드키를 툭 던졌다.
자오 패거리가 들이닥칠 때하고 비슷한 기세로 싹 빠져나가고 난 후, 한참 동안 멍하니 천장만 올려다봤다. 지난 며칠간 이런 저런 생각에 때도 없이 시달리다 보니 이젠 멍하니 있어도 머리가 아팠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하지만 루크가, 니콜라스가…… 또다시 머릿속에서 뒤엉키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검은 군대의 귀환은 절대 반대다. 하지만 그걸 저지하기 위해서는 니콜라스가 죽어야 하다니…… 말도 안 된다. 용의 군대 따위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 나는 절대로 니콜라스가 놈들에게 살해당하는 걸 두고만 보지는 않을 거다.
‘니가 용서 못하는 건 너 자신이야. 왜냐하면 넌 그자를 벌써 용서했으니까……’
루크가 병실을 나가면서 던지듯 내뱉고 간 그 말이 귓전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정말 내가 니콜라스를 용서한 걸까? 어떻게? 오닐을 죽인 엘리야 하이네는 내 손으로 죽이고도 용서를 못했는데…… 그를 용서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럴 리 없다. 이건 다른 거다.
비니가 온 건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고민이 엎치고 덮쳐서 끙끙거리다가 지쳐서 설핏 잠이 든 참이었는데 비니가 저녁거리를 들고 나타났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다가 앞에 서 있는 비니를 봤을 때는 반가워서 녀석을 끌어안을 뻔했다. 마치 굉장히 오랫동안 혼자였던 것처럼…….
“뭘 이렇게 잔뜩 사왔어?”
“오는 길에 큰아버지 식당에 들렀어.”
짧게 대답하면서 비니가 커다란 봉투 두 개를 식탁 위에 부렸다. 비니가 사온 저녁은 피자나 햄버거 세트 같은 게 아니라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비니 큰아버지 식당에서 사온 정찬 코스요리였다.
“그냥 근처에 나가서 먹어도 되는데…….”
“일요일 저녁이잖아. 괜찮은 식당은 앉을 자리도 없어.”
그렇게 대꾸하면서 비니가 큰아버지 식당의 인기 메뉴인 특제 스테이크 포장을 뜯었다.
허기지고 기운만 없었지, 배가 고픈 줄도 모르겠더니…… 오랜만에 맡는 제대로 된 음식 냄새가 뇌신경과 위장을 동시에 자극했다.
스테이크 큰 거 하나에, 크림스프, 샐러드, 바케트 반 개를 정신없이 쓸어 넣고 헐떡거리는 나를 비니가 짠한 눈길로 쳐다봤다.
“망할 놈…….”
“내가 뭘?”
“너 말고, 루크 첸 말이야.”
비니는 입맛이 없는지 아까부터 테이크아웃 커피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본래 먹성이라면 만만치 않던 놈인데, 이런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도 초연한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짠해서 비니를 빤히 쳐다봤다.
“니가 먼저 끝내자고 했을 리는 없고…… 그놈한테 차인 거지?”
“헤어진 거 아니라니까?”
“다른 여자라도 생겼대? 아니면 남자? 뭐라 그러면서 헤어지자고 하든?”
“그런 거 아니야.”
비니는 이미 심증을 굳혔다. 녀석은 내가 루크에게 딱지맞고 빌빌거리고 있다고 단정 짓고 모든 정황을 거기에 끌어 맞추고 있었다.
“아니면 왜 널 이렇게 버려둬? 니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인데? 넌 그 자식을 위해서 목숨도 걸었었잖아.”
“루크는…….”
커피를 마시면서 숨을 돌렸다. 그것조차도 시름에 겨워서 한숨을 쉬는 걸로 보였는지 비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니콜라스를 아직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자가 나타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쪽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래서 화가 나 있는 거야.”
내 대답에 비니가 커피 잔을 내려놨다. 커피 맛도 똑 떨어진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니콜라스가 곧 나타날 거야.”
“그자가 왜?”
“그럴 일이 있어.”
이상하고 위험한 일이 많이도 벌어졌던 지난 반년 간 엉뚱한 곳에 처박혀 있었던 비니는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설명을 썩 잘 한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얘기를 제대로 듣는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요즘 가장 위험한 무장 폭력단인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흑풍회가 니콜라스를 뒤쫓고 있는 최근 상황에 대한 비니의 입장은 단순하고도 단호했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안 돼. 다시는 그자하고 엮이지 마.”
“다시 엮어보겠다는 게 아니야.”
“그럼 죽든 말든 신경도 쓰지 마!”
무슨 일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비니가 루크보다 한술 더 뜬다. 하긴, 친구니까 그렇겠지.
비니가 하도 거칠게 나오니까 말문이 막혀서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그런데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니가 허…… 하고 장탄식을 내뱉더니 일어나서 별로 넓지도 않은 거실을 헤매 다니기 시작했다.
“넌…… 어쩔 거야?”
분위기를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눈치를 살피며 비니한테 물었다.
“뭘?”
“반장이 복직하라고 했다면서?”
“…….”
“복직하고 나랑 같이 다니자. 전처럼…….”
내 제안에 비니의 눈빛이 파도치듯 격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 시침 뚝 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짭새 노릇도 할 만큼 했어. 이젠 다른 일을 알아볼래.”
“다른 일 뭐?”
“뭐든…… 할 일이 있겠지.”
“비니.”
나는 오래 쉬지도 못하고 기껏 한두 주 더 쉬면 끌려 나갈 텐데, 그때도 비니 없이 혼자라는 생각을 하니까 좀 전에 한 끼 잘 먹은 보람도 없이 기운이 다 빠지고 말았다.
“공연히 내 얘기로 말 돌리지 마. 나는 겨우 직업 문제야.”
“그렇게 따지면 난 겨우 남자 문제잖아.”
“말이라고 해? 번번이 목숨이 위험하잖아! 더군다나 니콜라스 그놈은…….”
입에 올리기도 치가 떨리는지 비니가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널 잡아서 제사를 지내려고 했던 놈이야. 다음에 걸리면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어!”
비니를 잡아서 앉히고 마시던 커피를 다시 손에 쥐어줬다. 이쯤에서 진정을 시켜야지, 이러다 집 무너지겠다. 그렇지 않아도 부실공사 탓인지 금간 곳이 많고 물도 새는 집인데 여기서 더 망가지면 곤란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 아파트로 와.”
잠시 둘 다 할 말이 없어서 잠잠한 사이 어디선가 깍, 하는 비명소리와 와장창 물건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자동차 소음은 이제 익숙해져서 신경도 안 쓰일 정도고…… 이 아파트는 자정은 넘어야 주변이 좀 조용해진다. 어쨌든 주거 환경이 별로라고 생각됐는지 비니가 느닷없이 동거를 제안했다.
“혼자서 청승 떨지 말고…….”
“혼자 있을래. 어른이잖아.”
나를 보는 비니의 눈빛은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니콜라스 얘긴 괜히 꺼냈다. 적당히 둘러댈 걸…….
“그나저나, 무슨 소리야? 헤슬렘이 봉인인지 뭔지를 깨면 뭐가 어떻게 된다고?”
좀 전에 대강 얘길 해줬는데도 이런다.
“시간 날 때 쥬드를 찾아가서 물어봐. 머리도 좋고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는 여자니까 지금은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을 거야.”
“크롬웰이?”
비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쥬드가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건 비니도 잘 안다. 그런 쥬드까지도 손발 다 들게 만들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던 걸 몰라서 탈이지…….
“쥬드를 퇴근 후에 만나려면 마리우스의 책방에 가는 게 제일 빠를 거야.”
비니가 돌아간 후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였다. 병원에 있을 때에도, 지금도 하루 일과는 똑같았다. 해결책도 없는 문제를 고민하느라 녹초가 되고, 그러다 지쳐서 잠들고…… 그런데 지금은 잠도 안 온다. 당연하다. 종일 잤으니까…….
니콜라스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자오가 왔다간 이후론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아니, 이것도 그동안 계속 생각했었던 건데 자오가 던져놓고 간 카드키 덕분에 눈앞에 닥친 고민이 되고 말았다. 루크를 보러 갈까?
루크를 처음 만난 그때부터, 녀석이 두렵지 않은 때가 없었고 가슴 두근거리지 않았던 순간도 없었다. 좋았던 때보다는 화가 나서 심장이 펄떡거렸던 적이 훨씬 더 많았지만…… 녀석이 보고 싶다. 언제부터 이렇게 그리워하게 된 걸까? 하나도 의지할 구석이 없는 놈인데 왜 무작정 기대고 싶을까?
녀석이 머물고 있다는 흑풍회 건물 펜트하우스의 카드키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렸다. 까만 바탕에 자개로 작은 칼과 창이 엇갈린 문양이 들어간 아름다운 열쇠였다. 이걸로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되는 걸까? 내게는 루크를 만족시켜줄 어떤 대답도 없는데…… 한참이나 카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일단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침대에서 다시 일어난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아무리 뒤척여도 이대로 잠들기는 글렀다. 밤이 깊어갈수록 정신은 더 말짱해져서 이렇게 머릿속이 맑을 때가 최근에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안정제가 있으면 좋겠지만 다 떨어졌으니까…… 나가서 맥주라도 몇 병 사 와야겠다. 마시고, 한잠 푹 자고…… 내일은 마리우스의 서점에 가 봐야겠다. 그곳은 니콜라스의 장서각이니까 그의 행적에 관해서 뭔가 단서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술기운을 빌려서 잠을 청하는 게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계속된 불면에 시달리는 것도 만만치 않게 위험한 일이라서 지갑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24시간 영업하는 상점이 있다.
밤바람은 꽤 쌀쌀했다. 하지만 며칠 만에 쐬는 바깥바람이라서 춥다기보다는 시원하고 후련하게 느껴졌다. 이제 곧 겨울이란 생각이 들어서 마음 한구석이 빈 것처럼 휑하기도 했지만…… 나는 계절이 오가는 일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편인데도 이맘때면 그런 기분이 들었다.
늦은 밤인데다 시 외곽이라서 길엔 차도, 인적도 뜸했다. 큰 길을 두 번 건너는 사이 승용차하고 택시가 서너 대 지나갔을 뿐, 거리엔 바람만 가득했다. 10여 분을 걸어서 사거리 모퉁이의 작은 편의점까지 가는 사이 목덜미도 시리고 마음도 시렸다.
맥주 세 병, 간단하게 데워먹을 아침거리 몇 가지…… 맥주 서너 병이면 오늘 밤은 어떻게든 잠은 청하겠지만, 이 한기를 이길 수 있을까? 자꾸 서글픈 기분이 들어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큰길을 따라 걷는 잠깐 사이, 서너 대의 택시가 옆을 지나쳐갔다. 그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멀어져가는 택시를 쳐다봤다. 그중 한 대는 내가 타려는 줄 알고 잠시 정차를 했다가 출발하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짧은 시간이 무척 길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떤 꼴로 돌아가도 루크는 나를 밀어내거나 비웃지 않을 거다. 어쩌면 더는 니콜라스의 일 같은 건 따지지 않은 채, 쿨하고 멋있게 받아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루크에게 돌아가는 게 옳은 일일까? 니콜라스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번잡하고 괴로우면서…… 루크에게 가서 위로를 바라는 건 너무 이기적이다.
옆으로 지나쳐가는 택시를 잠깐 쳐다보다가 머리를 한번 털고 다시 걸었다. 빨리 돌아가야지, 이러다 다음 택시를 집어타고 차이나타운으로 달려가겠다. 다행히 모퉁이만 돌면 바로 집으로 가는 샛길이었다. 그때, 뒤에서 또 차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건 샛길까지 슬슬 쫓아오는 자동차 소리 때문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샛길에서도 눈부시게 번쩍이는 광채, 늘씬한 보디라인…… 벤틀리 컨버터블이었다. 이거 종종 보던 차다. 이 동네에선 좀처럼 볼 일이 없는 차종이지만…….
“이제 들어가는 거야?”
차 안에서 익숙하면서도 많이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어딜 갔었는데?”
“맥주 사러.”
“타.”
“…….”
내가 머뭇거리며 쳐다만 보고 있자 루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려서 문이라도 열어줘?”
녀석의 차에 올라타긴 했지만, 멀리 가진 않았다. 아파트 앞에 차를 대고 집으로 올라갔으니까…… 식탁에 맥주를 내려놓고 뭐 대접할 만한 게 없나 싶어서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내내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민망하고 미안했다. 내가 먼저 갈 걸, 잘못했다 싶기도 하고…….
“뭘 그렇게 뒤져? 별 것도 없어 보이는데?”
내가 눈도 안 마주치고 냉장고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루크가 핀잔을 날렸다.
“그러게…….”
“와서 앉아. 저녁 먹으려고 온 거 아니니까.”
결국 냉장고에서 아무것도 못 건진 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루크와 마주 앉았다.
“혼자 왔어?”
“응.”
루크는 어지간해서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어딜 가든 최소한 석 대의 차량에 경호원이 대여섯 명은 붙어 다니는데…….
“위험하지 않아?”
“늘 그렇지 뭐.”
“내가…… 갔을 텐데.”
“언제?”
내일이나, 모래쯤? 오래는 못 버텼을 거다. 이렇게 루크를 만나고 보니 지난 며칠간 혼자 끙끙거린 게 한없이 모자란 짓처럼 여겨졌다. 어차피 어떻게든 만났을 테니까…….
“계속 여기 있었어?”
“응.”
맥주라도 같이 마시려고 잔을 꺼내서 식탁에 놓고 맥주병을 땄다.
“혼자서?”
“응.”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쉬었어.”
목이 탔는지 루크가 내가 건넨 맥주 한잔을 한 모금에 털어마셨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도 맥주 반잔을 한 입에 털어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갑자기 왜 이렇게 목이 타는지 모르겠다.
“넌…… 어떻게 지냈어?”
“나도 그냥 쉬었어.”
그렇게 뚝뚝 끊어지는 대화 중에 맥주 세 병만 어느새 빈병이 되고 말았다. 본래 우리 대화가 이렇게 어색하고 무미건조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녀석이 대화를 길게 할 기분이 아니다 보니 모든 질문과 대답이 단답형이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생각?”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까칠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내내 딴 놈 생각만 한 거야?”
“그건 아니고…….”
당황해서 말을 좀 더듬었더니 루크가 더욱 더 언짢은 눈길로 노려봤다.
“됐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무슨 뜻이야?”
대놓고 무식하다고 무시하는 투라서 나도 녀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녀석은 좀 전의 막말에 대해서 미안해하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이해도 못하는데 뭘 생각한다는 거야? 괜히 머리만 아프고, 엉뚱한 궁리나 하게 될 거야.”
이젠 아예 머리가 없는 놈 취급이다.
“내가 너만은 못해도…….”
“그리고 니가 그 핑계로 줄창 라두칸 생각에 빠져 있는 것도 기분 나빠.”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루크가 일어나더니 내 팔을 움켜잡았다.
터덜터덜 침실로 들어가자마자 루크가 나를 벽에 밀어 붙이고 입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까지 거칠고 사나운 행동을 애정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습격의 강도가 마치 마약소굴 소탕작전에 돌입한 타격대의 그것만큼이나 우악스러울 뿐, 섬세함이라곤 통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첫 키스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탐욕스럽게 입을 맞춘 건 루크였지만, 더위에 시달리다가 소나기라도 맞은 것 같은 청량감을 느낀 건 내 쪽이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루크를 어루만지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많은 고민이 사라졌고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녀석과 다시 만난 것뿐인데, 다정한 말 한마디 없이 서로 틱틱거리며 맥주만 나눠 마셨는데도 어떤 좋은 소식을 들은 것보다 기분이 들떴다.
“제발 애 좀 태우지 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입맞춤 끝에 루크가 투덜거렸다. 그리곤 나를 침대 위로 확 떠밀었다.
어찌어찌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은 이후, 나하고 루크의 사생활은 금욕적인 거하곤 거리가 좀 있었다. 하지만 내 병원 생활이 길었고, 거기에 냉각기까지 겹치는 바람에 마지막 잠자리가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루크가 전에 없이 조급증을 내며 성급하게 덤벼들었다.
녀석이 으르렁거리며 나를 타고 앉았다. 그리곤 마치 금방 잡은 이 맛있는 토끼를 어디부터 어떻게 먹을까 궁리하는 늑대처럼 서늘한 눈길로 나를 한번 쓱 훑었다. 작정하고 덤비면 상당히 거친 놈이라서 긴장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녀석이 마음을 정했는지 내 목을 덥석 물었다.
그렇게 목부터 시작해서 허벅지 안쪽까지 한 번씩 꼭꼭 씹어놓고 나서 녀석이 나를 냅다 엎었다. 보통은 온몸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고, 자극하면서 뼈가 녹을 정도로 기운을 빼 놓는 게 이 자식의 스타일이고, 기분 좋을 때는 그런 전희가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길었었는데…… 오늘은 다 귀찮은 모양이다. 나는 사실 기대를 좀 했었는데…….
“아!”
갑작스런 침입에 놀라서 비명을 지르다가 내 소리에 내가 놀라서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워낙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이런 느낌도 처음처럼 부담스럽고 아팠다. 이래본 게 거의 두 달 만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녀석이 성급하고 거칠어서 그런지 아릿한 통증이 좀처럼 잦아들질 않았다.
불편하고 쓰린 걸 참아보려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이랬었나? 오늘 따라 녀석의 부피와 열기가 감당 못하게 부담스러웠다. 녀석과의 섹스는 좋다거나 흥분되는 거 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힘들고 부담스럽다에서 참을 만하다로 간신히 넘어가던 참이었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내 사정은 아랑곳없이 녀석이 나를 더 깊이 찔렀다.
“뭐야…… 너, 나한테 분풀이 하려고 온 거야?”
너무 아파서 숨도 못 쉬고 얕은 숨만 연거푸 내뱉었다. 몸을 빼 보려고 손을 뻗어서 밀어봤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분풀이 이런 식으로 안 해.”
녀석이 뚱한 음성으로 대꾸하며 내 허리를 잡아서 더 바싹 끌어당겼다.
루크가 마치 못질이라도 하듯 나를 다그쳤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 내 억눌린 신음소리, 루크의 거친 숨소리로 작은 방안에 가득 찼다. 고개를 돌려서 루크를 올려다봤다. 양손으로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내키는 대로 나를 휘젓고 있는 루크의 얼굴엔 세상의 주인 같은 오만함과 함께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색기가 흘렀다.
맥주를 몇 잔이나 마셨는데도 녀석의 눈길에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탔다. 이 방에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다. 이런 꼴로 깔려서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애가 타서 녀석을 곁눈질하는 내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할 테니까…… 나하고 눈길이 마주친 녀석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오싹하게 웃었다. 마치 뭔가를 훔쳐보다 들킨 것 같은 무안함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런 짓까지 하는 사이에 새삼 부끄러울 게 남았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내 몸 안에서 녀석이 갑자기 쑥 빠져나갔다. 여태 빠듯한 느낌으로 들어차 있던 게 갑자기 끌려 나가는 느낌은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오싹하고 불쾌했다. 기분 나쁘니까 이렇게 함부로 들락거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번번이 제멋대로다.
루크가 나를 똑바로 눕히고 한쪽 다리를 들어서 허리에 감았다. 초장부터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서 꽤나 거칠게 나올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자식…… 좀 심하다.
“내가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봐. 난 네 거니까.”
“인심이 후하네?”
“이 정도로 뭘? 난 너한테 세상도 줄 수 있어.”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하며 녀석이 또 다시 내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
녀석에게 붙들린 채 허리를 비틀고 시트를 잡아 뜯었다. 하지만 아픔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이 아픔처럼 모든 게 처음 같았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그러다가 루크의 가슴을 얼굴로 들이받고 말았다. 싱글베드에 남자 둘이 누워 자려니 조금만 움직여도 이리저리 부딪히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루크가 콜록하고 기침을 하면서 나를 이불째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깼어?”
“아니…….”
웅얼거리며 녀석의 품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맞는 따뜻하고 평온한 아침이었다. 루크는 바로 옆에 누워 있고, 출근할 필요도 없고…… 하루 종일 이렇게 뒹굴었으면 좋겠다.
“배 안 고파?”
“아니…….”
“그럼, 한 번 더 하고 싶어?”
“……”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루크에게서 슬금슬금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침대가 비좁아서 곧바로 침대 아래로 톡 떨어지고 말았다. 나를 잡아주려다 이불만 움켜잡은 루크가 킥, 하고 웃었다. 녀석은 이런 거 좋아한다. 내가 욕조에서 미끄러지거나, 침대에서 떨어지는 거…….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녀석을 버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한 물을 틀어 놓고 그 아래 서서 지난밤, 길게 이어진 치정의 흔적과 아직도 복잡한 머릿속을 씻어냈다.
녀석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내 안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녀석과 만난 후로는 정반대의 것들이 마음속에 공존할 때가 많았다.
루크가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짐승 같은 놈, 니가 그렇지…… 생각하면서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어딜 가?”
루크가 내 허리를 잡아채서 다시 샤워기 아래에 세웠다.
“난 다 씻었어.”
“뭘 다 씻어? 들어온 지 5분도 안됐는데…….”
그렇게 핀잔을 주며 녀석이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움켜잡더니 우악스럽게 입을 맞췄다.
“하지 마. 힘들어…….”
새벽까지 시달려서 온 몸이 얼얼하고 기력이라곤 없는데 아침부터 이게 웬 행패냐?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버둥거리지 말고.”
명령하듯 지껄이면서 루크가 나를 타일 벽에 밀어붙였다. 요즘 들어서 녀석에게 별로 잘 한 게 없어서 저자세로 고분고분 받아줬더니,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른다. 피곤에 쩔어 있는 나를 붙들고 기어이 아침부터 제 욕심을 채울 모양인데…… 귀엽게 굴면서 사정을 해도 들어줄까 말까 한 판에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나도 반응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 말라니까!”
짜증이 나서 등 뒤로 바싹 다가서는 녀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확 찍어버렸다. 방심하고 있다가 허를 찔린 녀석이 옆구리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씻고 나와. 아침 먹으러 가게.”
근처에 있는 괜찮은 식당을 다 지나쳐서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결국 목적지는 차이나타운이었다. 아침부터 중국요리는 좀 기름지지 않나? 루크처럼 삼시 세 때를 푸짐하게 먹어치우는 대식가라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오는 차이나타운 거리를 구경하는 내 눈에 청연루가 딱 들어왔다. 대문만 간신히 남고 성벽처럼 높고 견고하던 돌담은 그날 새벽의 습격으로 반도 넘게 허물어져 있었다. 그 담을 따라 출입금지를 알리는 푯말과 빨간 금줄이 쳐져 있고…… 담 안쪽으로 언뜻 보이는 정원은 파헤쳐진 그대로 버려진 채 복구공사의 흔적도 보이질 않았다. 저기서 숙식해결하면서 지낼 땐 중국 마피아 보스하고 동거한다는 눈총에 정신적으로는 힘들었지만 몸은 편했었는데…….
“저긴, 그냥 저렇게 두는 거야?”
아예 저렇게 문을 닫는 건가 싶어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청연루는 루크하고 처음 마주친 곳이고, 그 외에 괜찮은 기억도 많은 곳이다. 물론 루크가 위기에 몰릴 때마다 표적이 되는 바람에 사선을 넘나들기도 했었지만…….
“장 대인한테 넘겼어. 문을 닫든, 고쳐 쓰든 알아서 하겠지.”
“저길 딴 사람한테 넘긴 거야?”
청연루를 다른 사람한테 넘겼단 말에 놀라서 루크를 쳐다봤다.
“왜? 서운해?”
섭섭하다.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이 청연루를 홀랑 팔아치우다니…….
“니가 하는 일 중에 합법적인 사업이라곤 저게 전부 아니었어?”
“그랬었지.”
루크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나하고는 달리 청연루에 남은 미련 같은 건 전혀 없는 눈치였다.
루크가 차를 세운 곳은 청연루에서 두 블록 떨어진 차이나타운 구시가지 뒷길의 작은 식당 앞이었다. 루크가 가게 옆에 있는 딱지만한 빈틈에 솜씨 좋게 차를 밀어 넣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조수석 문을 열 공간도 없을 정도의 밀착 주차라서 나까지 운전석으로 기어서 내렸다.
「계림 객잔」이라…… 그간 차이나타운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처음 와보는 골목이고, 처음 보는 식당이었다. 규모는 보통 중국집 정도 크기지만 중국풍의 2층 기와집인데다 처마 끝에 내걸린 붉은 등이 꽤나 정취가 있었다. 나름 유명한 식당인지 점심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식당 앞에서 서너 명이 대기 중이었다.
루크가 나를 데리고 식당 안으로 쑥 들어갔다. 젊은 놈들이 새치기 한다는 불평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들 입에서 터져 나왔지만 루크는 그런 거 귓등으로도 신경쓰는 기색이 없었다.
“부인.”
루크가 카운터를 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첸 회장님 아니시우?”
몸집은 아담한데 비해 성깔은 보통 아니게 생긴 아주머니가 루크와 나를 번갈아 가며 싸늘하게 훑었다. 루크가 피식 웃으며 나한테 눈짓을 했다.
“인사드려. 자오 어머니.”
루크의 소개에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자오 어머니는 내가 맘에 안 드는지 표정이 영 떫었다. 자오 어머니가 루크도 무서워할 정도로 드세고, 극성맞고, 정보가 빠른 부인이라는 건 알음알음 알고 있었지만 식당도 운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큰길 어디쯤에 월병 가게도 하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2층에 방 있죠?”
“있긴 있지만…….”
“그럼 음식은 2층으로 올려주세요. 빨리 되는 것부터 2인분씩 부탁해요.”
“하지만…….”
부인이 눈썹을 곤두세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2층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자오다. 뒤에 푸웨이도 같이 내려오는 걸 보니 둘이 여기서 아침을 먹은 모양이었다.
“결국 데리러 가셨네요.”
자오가 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서 있는 푸웨이도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마누라 버릇 저렇게 들이면 안 되는데…….”
“말조심해!”
그렇지 않아도 불쾌해서 한마디 하려는데 루크가 나서서 푸웨이를 나무랐다. 그래도 남자친구라고 나설 때는 나서는구나 싶어서 뿌듯한 것도 잠시…….
“내 마누라 버릇을 어떻게 들이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루크하고 푸웨이 둘한테서 동시에 농락당한 기분이 들어서 씩씩 거리고 있는데 자오 어머니가 자오한테 날카로운 음성으로 뭔가 불평을 시작했다. 중국말이라서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아무래도 루크하고 내 얘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크가 나를 끌고 성큼성큼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오 어머니는 왜 저러셔?”
“자오 엄마는 처음부터 날 안 좋아했어.”
“왜?”
“내가 저 아줌마 속을 어떻게 알아?”
루크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나를 골목길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로 밀어 앉혔다.
청연루가 쿠간 시민들이 주로 찾는 차이나타운의 명소라면 이 식당은 차이나타운 주민들이 단골로 드나드는 숨겨진 맛집 정도 되나 보다. 꼭 이런 식당이 아니라도 차이나타운에서 감춰진 건 외부인이 찾기 힘들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골목길 정취도 괜찮았다. 구시가지는 오래된 중국풍 건물이 많은데다 이쪽은 관광객이 몰리는 상가골목이 아니고 주택가 초입이라서 느낌이 더 한적하고 예스러웠다.
“주인 아줌마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굳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뭐야?”
“음식이 맛있어.”
“그럼 청연루가 다시 문을 열 때까지 계속 여기서 밥을 먹어야 되는 거야?”
내 물음에 루크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보통은 시켜 먹어.”
“본관…… 펜트하우스에서?”
요즘 거처를 찍어 맞추자 루크가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봤다.
“거길 알아?”
“카드키도 있어.”
내 대꾸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잘 됐네. 밥 먹고 먼저 들어가 있어. 나도 일찍 들어갈게.”
말투가 별스럽게 다정한 것도 아닌데 팔뚝에 솜털이 쫙 일어섰다. 내가 창밖을 내다보며 팔을 벅벅 긁자 루크가 나를 슬쩍 노려봤다.
“왜? 싫어?”
“아냐. 가 있을게.”
흑풍회 회장님 특별 대접인지 종업원 대신 주인 아들인 자오가 자스민 차와 만두 두 통을 들고 나타났다.
“넌 여기서 알바 중이야?”
루크가 자오를 쳐다보며 괜히 시비를 걸었다.
“직원 하나가 감기로 못 나와서요. 회장님도 여기 계시겠다, 잠깐 거들어 드리는 거죠.”
“니네 어머니는 나만 보면 대체 왜 그러셔?”
“본래 그러시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자기가 뒷말 듣는 거 아니니까 자오는 그냥 쿨하다.
“해물 완자탕하고 누룽지탕 있는데 뭘로 드실래요?”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듯 루크가 자오를 노려봤다.
“둘 다 갖고 와.”
“그래도 입맛을 찾으셔서 다행이네요. 지난 며칠, 끼니도 거르고 끙끙거리시더니…….”
자오의 고자질에 루크가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자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침 뚝 떼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자오가 내려가자 루크가 자스민차와 만두 한통을 내 앞으로 밀었다. 차만 받고, 만두는 루크에게 다시 밀어 보냈다.
“많이 먹어. 그동안 굶었다며?”
“너 때문에 굶은 거 아니니까 감격할 거 없어.”
“그렇겠지. 다른 고민도 많았을 테니까…….”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툴툴거리는 게 귀여워서 젓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꾹 찍어서 루크에게 내밀었다.
“청연루도 팔아 치웠고, 저쪽 왕들하고도 얘기가 잘 끝났으면……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 거야?”
“무슨 일이겠어?”
혹시…… 니콜라스를 잡으러 다니는 건가? 내가 빤히 쳐다보자 루크가 갑자기 먹는 일에 열중하며 만두를 꾸역꾸역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천천히 먹어. 곤란한 거 안 물어볼 테니까…….”
“물어보는 건 괜찮은데, 라두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다니지도 마.”
“그건 힘들겠는데?”
“니가 그렇게 애태우면서 찾아다니지 않아도 그자는 나타나.”
루크가 한입 우물거리던 만두를 꿀꺽 삼키며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지껄였다. 하지만 나는 니콜라스가 곧 나타날 거란 한마디에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거칠게 쿵쾅거렸다.
“공연히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다간 그자를 붙잡는 미끼 노릇이나 하게 될 거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너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어.”
“그렇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면 내가 안중에나 있겠어?”
내 시무룩한 변명에 루크가 헛소리 작작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곤 엄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어쨌든 그때 가서 널 미끼로 써먹었다는 비난을 듣기는 싫어. 그리고 난 그자를 내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만나고 싶어.”
본관 펜트하우스는 루크의 사무실 바로 위층이었다. 펜트하우스의 느낌은 녀석의 사무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검은색, 회색, 은색…… 기본적인 치장이며 가구, 작은 장식품 하나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없었다. 하지만 고풍스럽고 아늑했던 우화각과는 달리 이곳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었다. 이 싸늘한 한기도 곧 익숙해질까? 루크의 모든 것이 결국 익숙해진 것처럼……
주방에 전문점에서나 쓸 것 같은 번듯한 커피머신이 있길래 라떼 한 잔을 내렸다. 그리고 창가에 서서 차이나타운을 내려다봤다. 차이나타운과 먼 시가지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이 멋진 창 앞에서 루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거칠고 아름다운 도시를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권력을 만끽했을까? 아니면 여기에선 보이지 않는 더 먼 어딘가를 바라봤을까?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은 너무 작아서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았고, 도로 위의 차량은 마치 강물처럼 쉴 새 없이 어딘가로 흘렀다. 쿠간의 검은 권력을 상징하는 건물의 최상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마치 아득히 높은 곳에서 발아래의 숲을 내려다보는 맹수처럼…… 루크도 종종 이 창가에서 세상을 내려다봤을 거다.
나는 루크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녀석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목숨을 걸면서까지 잡고 싶어 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나는 루크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아직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 루크는 니콜라스하고 접점이라곤 없는 놈이었다. 녀석은 뻔뻔한 속물에,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단순한 악당일 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니콜라스를 알고 있었고, 그를 뒤쫓고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그리고 집요하게…….
니콜라스는 맛이 갔을 때를 제외하면 진중하고 매력 넘치는 신사였었고 그에 비하면 루크는 유들유들하고 경박스러운 놈인데…… 왜 이제 와서 둘이 무척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들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상황파악이 영 안 되는 건 아니다. 매번 늦어서 탈이지…… 커피는 식어갈수록 더 씁쓸해졌고, 숨은 내쉬고 들이쉴 때마다 길이가 두 배씩 길어졌다.
니콜라스를 자신이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서 만나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목숨을 건 위험한 줄타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루크가 원하는 게 대체 뭘까? 녀석은 누굴까?
마리우스의 장서각에 도착한 건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한때 인적도 드문 빈민가였던 루벳 거리는 이제 제법 번듯한 홍등가로 변모해서 초저녁 이른 시간부터 흥청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장서각의 번쩍거리는 네온 간판이 거리의 야경에 하나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새까만 단발머리에 두툼한 아이라인 때문에 못된 너구리처럼 보이는 여직원이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은 채 건성으로 손님을 맞았다.
“뭘 찾으세요? 잡지는 오른쪽, DVD는 왼쪽, 기구는 뒤쪽이에요.”
“마리우스를 찾는데요?”
그제야 직원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사장은 왜요?”
“친구예요.”
내 대답에 여직원이 한숨을 푹 쉬며 뒷방을 가리켰다.
“가게 손님 중에 좀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전부 사장만 찾네요. 하긴, 그만하면 귀엽죠.”
무심코 뒷방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다.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전부 마리우스만 찾는다는 것은…….
“최근에 마리우스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나요?”
“그런데요…….”
직업은 못 속인다고, 내 태도가 좀 고압적이었는지 여직원이 바짝 긴장해서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죠? 나이는 어느 정도? 말투는 어땠어요?”
니콜라스가 왔었던 걸까? 이 도시에서 여길 알고 마리우스를 찾아올 만한 사람이라면…….
“되게 미남이었어요. 키도 훌쩍 크고……”
여직원의 대답에 나도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니콜라스도 키 크고 미남이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고…….”
20대 후반은…… 아닌데?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이만큼 길고…….”
그것도 아닌데…… 여자가 입을 열 때마다 인상착의가 니콜라스하고 멀어지자 실망감에 내 어깨도 점점 처졌다. 어쨌든 나이는 20대 후반에 잘 생기고, 키 크고, 머리 길고…… 어렴풋이 누군가 떠오를 듯도 한데…… 그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 사람이에요.”
여직원이 눈을 반짝이며 내 등 뒤를 손으로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다가 나도 멈칫했고, 상대도 그랬다.
“형사?”
“오웬?”
되게 오랜만이다.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오래 만나도 인상이 희미하고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순간 스쳐 지나가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인상이 강렬한 사람이 있는데, 오웬으로 말하면 단연 후자였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경찰서에 나타났을 때도 그랬지만, 안개비 내리는 축축한 새벽에 공원에서 장검을 들고 날아다니다가 결국 사람의 목을 쳤으니…… 어지간히 험한 일 많이 겪은 내게도 그날의 일은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걸 바로 코앞에서 목격했으니 기억상실에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그날 일은 결코 잊지 못할 거다.
“빨리 회복하셔서 다행이에요. 꽤 중상이라 오래 병원에 계실 줄 알았는데……”
마리우스가 방금 내린 커피와 수제쿠키 한 접시를 내와서 테이블에 차렸다. 마리우스는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쥬드하고 같이 문병을 와서 걱정을 많이 하고 갔었다.
“걱정해준 덕분에 빨리 좋아졌어.”
“퇴원하셨단 얘기 듣고 댁으로도 한번 갈까 하던 참이었어요.”
“뭘 그렇게까지…….”
“그런데 쥬드가 요즘 댁에 안 계실 때 많을 거라고…… 가지 말라고 말리더라고요.”
“내가 오면 되지 뭐, 가게 일도 바쁠 텐데…….”
그렇게 얼버무리고 얼른 커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한동안은 쉬시죠? 워낙 중상이었으니까…… 금방 복귀하실 건 아니죠?”
착하고 다정한 놈. 서에서도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는 없었다. 앤디가 며칠간 계속 문병을 오며 친동생처럼 살펴주긴 했지만, 그 녀석은 빨리 복귀하라는 재촉이 서장보다 더 득달같았다.
“나는 서두를 마음이 없는데 서에서 자꾸 재촉을 하네.”
“하긴, 능력이 있으시니까요.”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오가는 대화를 조용히 듣기만 하던 오웬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딜 다쳤었나 봐?”
“응. 좀…….”
내 대답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마리우스가 끼어들어서 부연설명을 했다.
“얼마 전에 차이나타운에서 난리가 났었거든. 사람도 많이 죽고…… 경찰도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몰라. 그때 형사님도 심하게 다쳤었어.”
“차이나타운? 갱단 간에 전쟁이라도 터졌던 건가?”
오웬의 물음에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심드렁하게 한마디를 붙였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 한판 떴었나 봐.”
오웬은 한동안 묵묵히 앉아서 커피만 마셨다. 마리우스는 늘 있는 일인 듯 무심하게 한마디 했지만, 오웬은 그 의미를 달리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한동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오웬이 빈 잔을 내려놓고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자들이 왜?”
“……”
너무 정색을 하고 묻는 바람에 당황해서 오웬을 멀뚱히 쳐다만 봤다. 아, 녀석은 하이랜더라고 했었지. 동족의 검 날에 목이 날아가지 않는 한 무병장수하는 종족인데다 깨달은 종족하고 교류가 있어서 용하고 기린을 찾아다닌 적도 있었으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해서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몰라? 요즘 흑풍회 회장하고 잘 지낸다고 들었는데, 이불 속에서만 각별한 거였나?”
어쭈? 아는 걸 냉큼 토해내지 않는다고 사람을 막 갈구네?
“시간을 담은…… 병이란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걸로 알아.”
“그게 그자들 수중에 들어간 거야?”
본의 아니게 내 손을 잠깐 거치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오웬이 눈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쩐지 여태 잠잠하다 싶더니…… 시간을 담은 병을 잃어버린 거였군.”
오웬이 중얼거리면서 앞에 놓인 과자를 하나 집었다.
오웬이 과자를 한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사이 마리우스가 빈 잔에 커피 한 잔을 더 따랐다.
“이번엔 좀 오래 있다 가. 별로 바쁜 일도 없잖아.”
마리우스가 배고픈 강아지 같은 눈길로 오웬을 바라보며 보챘다. 마리우스는 쿠간 시 한복판에서 두 기사단이 사생결단으로 한판 붙은 일이나, 시간을 담은 병의 행방 같은 것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곳이 정말 니콜라스의 장서각이고 마리우스가 그 수호기사라면 이럴 수는 없지 않나? 마리우스는 아무리 봐도 서점 장기 알바생 이상으론 안 보였다.
“난 본래 한 곳에 오래 못 있는 거 알잖아.”
오웬이 마리우스의 머리카락을 엉클며 미안한 듯 웃었다.
“있고 싶으면 있는 거지, 못 있는 게 어디 있어?”
“넌 요즘 만나는 여자친구가 있다며?”
“쥬드는 요즘 비상이라 늘 늦고, 와서도 새벽까지 책만 보다 자는 걸.”
마리우스가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울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책 보는 걸 좋아한다면 장서각의 여주인으론 더할 나위 없겠는데?”
“물론 그렇지만…… 나도 좀 봐줬으면 좋겠어.”
마리우스가 오웬에게 칭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여자! 어린애를 꼬셨으면 책임을 져야지, 마음만 잔뜩 들뜨게 해놓고서는 이렇게 방치하다니…… 쥬드의 연애 상대로는 재판받고 형무소로 넘어가기 직전의 흉악범이 딱이다.
어쨌든 그런 여자한테 걸린 것도 마리우스의 팔자고, 나는 남의 연애에 잘난 척하며 훈수 둘 입장이 아니라서 다른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신은 그동안 어디 먼 데라도 갔다 왔나 봐?”
“난 늘 떠돌아다녀.”
“그래서? 이번엔 어딜 갔다 왔는데?”
오웬이 재미있다는 듯 내 눈을 응시했고, 나도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한쪽 벽에 고문서며 양피지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어서 마치 현자의 서재와도 같은 장서각의 뒷방에 갑자기 묘한 긴장감이 가득 찼다.
“뭘 알고 싶은 거야?”
오웬의 눈빛은 아무것도 감출 것 없다는 듯 담담하고 자신만만했다. 오래 살아서 그런가…… 이렇게 보면 보통사람들하고 어딘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 얼마든지 대답해줄 테니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최근에 니콜라스 헤슬렘을 본 적 있어?”
“아니.”
빌어먹을! 대체 그 인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보고 싶어? 요즘 사귀는 남자 있다면서?”
내 표정에 실망하는 기색이 너무 역력했는지, 오웬이 재미있다는 듯 살살 갈궜다. 전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꼴도 보기 싫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날까 겁날 정도로…….”
“혹시 보게 되면 그렇게 전해주지.”
혹시 보게 되면이라…… 내가 눈을 번뜩이며 노려보자 오웬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디 있든 조만간 나타나겠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난겨울 초입, 조무래기 갱단의 세력다툼에 휘말려서 칼부림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 들어왔었던 이 남자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탓에 한동안은 존재조차 잊고 있었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 미스터리 가득한 남자에 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가 하나씩 떠올랐다.
아이스, 불멸의 기사, 흑룡 바솔로뮤의 심장에 검을 꽂아서 종족대전을 마무리 지은 전쟁 종결자…… 정말 이 남자가 루소 의원집의 테피스트리, 그리고 용의 무덤 벽화에 그려져 있었던 그자일까? 몇 달 전이라면 생각하는 것조차 미친 짓으로 여겨졌을 일이지만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오웬에게 서슴없이 이렇게 말할 정도로…….
“검은 용이 다시 돌아오는 거, 당신은 괜찮아?”
“별로…… 상관없어.”
오웬의 담담하고 배짱 좋은 대꾸에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내심 오웬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무슨 헛소리냐고 까칠하게 되물어주기를 바랐었는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당신이 그놈한테 엄청난 해코지를 했다면서? 그런데 이제 돌아오면 입장이 곤란하지 않겠어?”
“난 살 만큼 살았어.”
아…… 그러셔? 천살 먹은 영감 같은 오웬의 반응에 말문이 막혀서 잠깐 허둥거리다가 별로 먹을 마음도 없는 과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초코칩, 혹은 초코떡 쿠킨데…… 이거 하나 먹으면 저녁도 때우겠다 싶을 정도로 크고 두툼했다.
내가 탁자 위에 부스러기를 산같이 흘려가며 과자를 뜯어먹는 사이, 오웬이 마리우스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배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마치 나이 차이 좀 나는 형이 어린 동생을 데리고 놀 듯, 두 사람 사이는 전혀 스스럼이 없었다. 오웬한테 배를 물리기라도 했는지 마리우스가 몸을 비틀며 캑하고 자지러졌다.
“넌 어때? 검은 용과 그 군대가 돌아오는 거…….”
오웬이 마리우스한테 물었다.
“어쩌겠어? 때가 돼서 돌아오는 걸.”
용의 귀환에 관한 어르신들의 반응은 다 이런 걸까? 되게도 쿨 하다.
“넌 본 적 없지? 바솔로뮤도, 그자의 군대도…….”
“책에서 보긴 했어. 그렇게 무시무시했다며?”
마리우스의 어린애 같은 물음에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의 눈길은 이미 먼 예전의 일을 회상하느라 아련했다.
“용의 군대는 대군이었어. 멀리 지평선까지 검은 군대의 보석 같은 갑옷에 뒤덮여서 번쩍거릴 정도로……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도 그런 장관은 보지 못했어.”
그런 거 떠올리는 표정과 말투가 어떻게 저럴까? 마치 예전에 봤던 가장 아름다운 일몰, 연인과 함께 거닐었던 바닷가를 회상하는 것 같다.
“어떤 놈이었어? 그 검은 용은?”
설마 진짜 날개 달린 공룡 같은 거였을까? 제발 그런 건 아니기를 바라면서 무심코 묻다가 흠칫 놀라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왜 그래?”
혼자 중얼거리다가 혼자 놀라니까 오웬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야. 아무것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과자 하나를 더 집었다.
“바솔로뮤가 어떤 놈인지 알고 싶어?”
“됐어. 그놈이 어떤 놈인지 내가 알아서 뭐해?”
그렇게 대꾸하고는 손바닥만 한 과자를 한입에 밀어 넣었다.
오웬하고 마리우스가 옛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 대화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접시에 있는 과자를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단 과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속이 메스껍고 단내가 올라와서 가슴을 두드리며 꺽꺽거리고 있을 때 루크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친구 만나고 있어.”
「친구 누구? 짭새들?」
“그건 아니고…….”
「언제 와? 금방 올라간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튀어나가?」
기다리다가 날 다 저물어서야 나왔는데 트집은…… 마음 같아선 너도 그 썰렁한 방에서 나 한번 기다려 보라고 쏘고 싶지만, 마리우스하고 오웬 때문에 성질을 대폭 죽였다.
“금방 갈게.”
「빨리 와. 보고 싶어.」
옆에서 들을까 무서워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마리우스와 오웬의 눈초리는 이미 짓궂은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 만나는 그 남자야?”
오웬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
“어떻게 만난 거야? 우연히 마주친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사생활에 관심 있어?”
나도 모르게 대답이 까칠하게 나갔다. 루크하고 이런 사이가 된 게 그렇게까지 당당하고 떳떳한 일은 아니니까…….
“둘 사이는 벌써 유명하던데? 크게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궁금해서…….”
오웬은 내 반응이 까칠하건 따끔하건 신경도 안 쓰인다는 투였다. 하긴, 일면식도 없는 사람 목을 댕겅댕겅 날리는 놈이니 그렇게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은 아니겠지.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흑풍회 회장이면 천년 조약의 기사단 수장이기도 할 텐데, 라두칸하고 천년 조약의 기사단 보스를 순서대로 사귀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어서.”
“그건…….”
“당신이 그렇게까지 매력이 넘치는 타입도 아니잖아?”
나도 루크가 꽃다발을 줄줄이 보내고 경찰서 앞에 악단까지 깔았을 때엔 열 받아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분명히 루크는 나한테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그게 진심이 된 걸까?
“그쪽에서 의도적으로 접근을 했어. 내가…… 시간을 담은 병을 갖고 있는 줄 알고.”
“어쩐지…….”
뭔가 의도가 있지 않고는 루크가 나한테 찝쩍거렸을 리 절대 없다는 듯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알고도 넘어간 거야?”
오웬이 한심하다는 투로 물었다. 루크가 내게 걸어온 작업의 다양함과 집요함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꽃다발 소동은 말 그대로 서막에 불과했고, 그 이후로 녀석은 마주칠 때마다 뻔뻔하면서 섹시하고, 유들유들하면서 섹시하고, 못돼 처먹었는데도 섹시한 모습을 과시하며 사람의 혼을 쏙 뽑았다. 장담하건데, 녀석의 작전에 한번 휘말리면 인생의 쓴맛을 보지 않고 발을 빼기란 불가능할 거다. 하지만 구구절절 늘어놔봐야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서 나의 모든 어휘력을 동원해서 상황을 정리했다.
“응.”
“참 편하게 사네.”
나 사는 게 편해 보일 정도면 이 형도 인생이 어지간히 팍팍했나 보다. 뭐, 오래 살았으면 그만큼 곡절도 많았겠지.
오웬이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리우스에게 잠시 들른 건지, 아니면 뭔가 목적이 있어서 돌아온 건지…… 그런 건 모르겠다. 어쨌든 이쪽도 아직 니콜라스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가 언젠가는 나타날 거라고 생각만 하는 중이었다. 막연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니콜라스를 만나게 되면 말이라도 전할까 싶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또다시 전화기가 징…… 하고 울렸다.
“사이가 좋은가 봐.”
재미있다는 듯 오웬이 피식 웃었다.
“그럭저럭…… 잘 지내.”
“빨리 들어가 봐. 안달 나게 하지 말고…….”
그렇지 않아도 일어나려던 참이다.
“만나서 반가웠어.”
사실, 반갑다기보다는 놀란 쪽이지만…….
“정말?”
악수를 청하며 내민 내 손을 맞잡으며 오웬이 짓궂게 되물었다. 약간 반가웠던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보고 싶다거나,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마리우스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었으면 했는데요.”
쥬드한테 마리우스 건사 좀 잘 하라고 해야겠다. 한창 데이트 중인 요즘도 사람만 보면 이렇게 치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다 쥬드가 애한테 소홀한 탓이다.
“금방 또 올게. 맛있는 거 사가지고…….”
마리우스의 등을 한번 토닥거리고 오웬을 다시 돌아봤다.
“혹시라도 니콜라스를 보게 된다면 말 좀 전해줘.”
“뭐라고 전할까?”
사실은…… 니콜라스를 한 번은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막상 그와 마주치면 어떻게 될까? 니콜라스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며칠 밤을 새도 다 못다 할 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보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에 관한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할 말이 있다면서?”
오웬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영원히 돌아오지 말라고…… 전해줘.”
루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소파에 늘어져서 흘러간 옛날 영화를 보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엔 휑하고 싸늘하기만 했던 곳이 루크의 존재만으로 편안하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금방 온다며?”
문 열고 한 발짝 들이밀기도 전에 루크가 퉁명스럽게 따졌다.
“길이 막혔어. 한참 그럴 시간이잖아.”
“저녁은 먹었어?”
저녁이라…… 엄청난 크기의 초코칩 쿠키 세 개가 뱃속에서 위벽을 막 긁어대고 있었다.
“생각 없어.”
짧게 대꾸하고 바로 욕실로 향했다.
처음엔 후다닥 씻고 나가서 바로 누울 생각뿐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물을 맞으며 하염없이 서 있었다. 속도 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인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모르겠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기분은 또 왜 이렇게 바닥인지…… 마리우스는 여전히 다정했고, 오웬하고는 몇 마디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젠 샤워 중에 문이 열려도 놀라거나, 긴장이 되지 않았다. 누구의 발소린지, 내 몸을 쫙 훑는 시선이 누구 것인지 돌아보지 않아도 잘 아니까…….
“뭐해?”
“샤워해.”
“난 또…… 물 맞으면서 도라도 닦는 줄 알았지.”
녀석이 비아냥거리며 물을 잠갔다. 그리고는 수건을 걷어서 내 머리에 푹 덮어씌웠다.
수건을 뒤집어쓴 채 루크에게 거의 들려서 욕실을 나왔다.
한참을 방향도 모르고 붙들려가다가 이 집이 이렇게 넓었던가, 대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건가 궁금해질 즈음…… 녀석이 다리를 걸어서 나를 바닥으로 매다 꽂았다. 아니, 침대 위로…….
아무리 이런저런 꼴 다 보인 처지라곤 해도 다 벗은 채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져서 버둥거리는 모습은 너무 꼴사나웠다. 나도 자존심이 있고,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기분이 더 울적해져서 루크를 노려봤다. 하지만 녀석은 니 기분 따위 알게 뭐냐는 듯 위로 올라오더니 내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리고 함부러 입을 맞췄다.
루크가 소중한 것을 쓰다듬듯 내 몸을 어루만졌다. 루크의 입술이 닿고 손길이 스쳐 지나간 곳마다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했다. 자극, 흥분, 욕구, 그리고 죄책감…… 루크하고 같이 있으면 그런 감정이 뱃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종국엔 내 몸이 온통 그런 것들로 끓어올랐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것…… 살아 있다는 생생함이 루크로 인해 비로소 깨어났고, 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몇 년 간이나 심장의 반쪽이 잘려나간 것처럼 살아온 탓에 그런 감정이 다시 살아날 때엔 날카로운 것에 신경을 찔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 아픈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도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울적해?”
“좋은 일이 별로 없잖아. 몸은 아직도 여기저기 아프고,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고, 앞날은 깜깜하고…….”
“앞날이 왜 깜깜해?”
“그냥…….”
이번엔 내가 루크를 끌어안고 목과 가슴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녀석이 나를 떼어내더니 가슴을 꾹 내리 눌렀다.
“넌 뭐 대답하기 싫을 때마다 이러더라.”
루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넌 내가 그럴 기분이 돼서 적극적으로 나갈 때마다 이러더라.”
“귀엽고, 매력 있고, 나 같은 애인 있고…… 공무원이니까 몸조심해가면서 퇴직할 때까지 잘 버티면 다달이 연금도 착착 나올 텐데 뭐가 걱정이야?”
이렇게 들으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운 좋고 걱정 없는 놈인 것 같다.
“대체 뭐가 걱정인데?”
루크가 내 턱을 잡아서 눈을 맞추며 대답을 재촉했다.
“듣고 보니까 마음이 푹 놓이고 아무 걱정도 없어.”
“…….”
다시 루크의 목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체온과 심장 박동을 느끼고, 숨소리를 듣고 싶어서…… 귀엽고 매력이 있다고 해봐야 얻어 걸리는 건 죄다 천인공노할 흉악한 놈들뿐이고, 요즘 같아선 퇴직해서 연금 받을 때까지 버틸 자신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녀석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지만, 이런 관계가 얼마나 갈까?
루크가 나한테 접근한 데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얼마간의 호기심하고 호감, 변덕으로 내가 좋아졌다고 해도 이런 마음이 얼마나 갈까? 지금은 녹아내릴 듯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본질은 사납고 냉정한 놈이다. 지금의 호감이 사라지거나, 좀 더 구미가 당기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거다.
“니 한숨 때문에 감기 걸리겠어.”
루크가 입술과 목, 가슴에 수도 없이 입을 맞추며 달콤하게 나를 심문했다. 나도 정신이 나갔지. 지금 같은 때에 겨우 걱정이 이놈이 나를 버리고 가면 어쩌나 하는 거라니…….
“넌 애초에 딴 마음이 있어서 나한테 접근한 거였잖아.”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놓다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해서 베개를 끌어다 얼굴을 슬쩍 덮었다.
“그건…… 처음에 잠깐 그랬었던 거야.”
아랫배에 얼굴을 파묻고 쪽쪽거리던 녀석이 고개를 들고는 내 얼굴에서 베개를 치웠다.
“그런데 그나마도 헛짚은 거였고…… 게다가 넌 자타가 공인하는 나쁜 놈에 바람둥이니까…….”
“그래서 뭐?”
녀석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버리고 쌩하니 떠나겠지. 내가 너한테 푹 빠져서 머저리처럼 해롱거리고 있을 때…….”
“너 나를 대체 뭘로 보고…….”
“그러니까 나쁜 놈이고 바람둥이라고 하는 거잖아. 애초에 동기도 안 좋았으니까 별로 아쉽지도 않을걸.”
이 녀석이 어떤 놈인지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런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보통 남자들에 비해서 바람기가 좀 있는 건 사실이야.”
루크가 속 시원하게 자기 단점을 깠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만으로도 바람기가 좀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하지만 뭐가 걱정이야? 우린 튜린의 맹세를 했잖아.”
“뭘……해?”
내 반문에 루크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사막에서 내가 너한테 무릎까지 꿇었는데, 설마 까먹은 거야?”
아, 그거…….
“마음이 식으면 다 끝난 거지, 맹세가 무슨 소용이야?”
루크가 바로 앉아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영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나도 뭐 그렇게까지 크게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아서 녀석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일가친척 다 모아 놓고 제대로 절차 밟아서 한 결혼도 숱하게 깨지는 판에, 아무도 없는 사막 한복판에서 무릎 잠깐 꿇었다가 일어난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내 항변에 루크가 입 다물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목숨 걸고 한 맹세를 달랑 입만 갖고 몇 마디 지껄이는 결혼 서약하고 비교하는 거야?”
“그래도 그건 법적인 효력이 있거든.”
“그럼 결혼을 할래?”
“됐어. 너랑 결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어.”
나도 후회막심이다. 대체 왜 그런 말을 꺼냈을까? 아까 오웬하고 잠깐 얘기 할 때도 그렇게까지 신경이 쓰였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루크를 끌어안고 녀석이 좀 전에 내게 한 것처럼 얼굴을 어루만지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루크는 이미 마음이 상해서 퉁퉁 부었다.
“너 이상해.”
녀석이 뒤로 물러앉으며 투덜거렸다.
“왜 갑자기 그래? 지난번에 다 끝낸 얘기고, 내가 바람둥이라는 것도 신경 안 썼잖아.”
“항상 신경 쓰였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난 널 안 떠나. 너도 나를 절대로 못 버리고…….”
“너…….”
루크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감정을 깊이 감추고 있는 눈빛이지만 녀석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가 둔하다고는 해도 그것조차 못 느낄 정도로 무심하진 않다. 하지만 왜 마음 한쪽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이 조금도 가시질 않을까?
“뭐?”
“아냐. 아무것도…….”
“또 그런다.”
루크의 불평을 무시하고 그냥 끌어안았다. 루크도 이번엔 나를 뿌리치는 대신 마주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낯설면서도 몹시 익숙한 곳. 별빛, 달빛, 바람소리조차 외롭고 쓸쓸한 여기가 어디더라……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 턱을 넘으며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모래 언덕을 넘어서니 묘비 같은 검은 바위가 지평선까지 늘어서 있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전사들의 무덤에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더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왔구나 생각하면서 온갖 형태로 늘어선 바위틈을 걷다가 하늘을 이고 선 듯 크고 아름다운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꺾인 마디마다 검은 수정이 길게 자라서 달빛과 별빛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위는 다시 보니 무릎을 꿇고 앉은 전사의 형상이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바위가 깊이 숙인 고개를 들었다. 검은 바위는 루크였다.
“여기서 뭐해?”
손을 뻗어서 바위의 관절에서 자란 수정을 만졌다. 그 순간 바위가 크게 움직였고, 그 바람에 수정이 후드득 부서져서 모래 위로 떨어졌다. 이러다 애가 다 부서져서 없어지는 게 아닐까 겁이 나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데 녀석이 눈을 반짝이며 내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결혼할래?”
“집어치워!”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을 거야.”
순간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곁에 있을 거야…… 니콜라스가 법정에서 내게 달려들어 속삭인 그 말이었다. 근처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들은 기자들은 니콜라스가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복수하겠다며 나를 협박했다는 기사를 다음날 1면에 실었지만, 그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
이 자식이 그 소리를 어디서 듣고는 나한테 써먹는 걸까 싶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말 기절하게 놀라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루크가 뭔가 다른 것으로 변해 있었다. 검고, 크고, 반짝이는 어떤 것…… 온몸이 검은 비늘로 뒤덮인 그 형상은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공포에 질려서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는데, 녀석이 자수정 같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거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왜……?”
루크가 더듬더듬 나를 찾아서 품속으로 끌어당기며 잠꼬대처럼 물었다.
“꿈꿨어.”
“무슨 꿈을 꿨는데 그렇게 끙끙거려?”
“용꿈…… 아니, 개꿈.”
“용꿈을 꾼 거야? 개꿈을 꾼 거야?”
녀석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또 웅얼거렸다. 한창 깊이 자던 중이었던 모양인데 계속 자지, 따지기는…….
“용이 나오는…… 개꿈이었어.”
뭐 그따위 꿈이 다 있을까?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펄떡거렸다. 루크도 그런 기미를 알았는지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많이 놀랐나 봐. 심장 터지겠는데?”
“꿈이 좀 무서웠어.”
루크가 피식 웃으면서 내 얼굴에 이불을 뒤집어 씌웠다.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네. 이젠 꿈이 무서워서 바들바들 떠냐?”
나도 내가 대체 왜 이러나 싶다.
“아무래도 다음 주엔 복직을 해야겠어.”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루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가 어째?”
“노니까 잡생각만 나고…… 뒤숭숭해서 안 되겠어.”
“아무리 그래도 다음 주라니, 절대 안 돼!”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녀석이 투덜거렸다.
며칠 사이 날이 갑자기 추워진다 싶더니 아침엔 드디어 진눈깨비가 휘날렸다. 눈은 잠깐 내리다 그쳤지만 헐벗은 가로수, 목도리와 장갑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거리 풍경은 완연한 겨울이었다. 그 와중에 나만 눈치 없이 얇은 셔츠에 가죽점퍼 하나 걸치고 나와서 종일 떨었다.
경찰서에 복귀한 나한테 제일 먼저 떨어진 일은 엔젤 거리 뒷골목에서 발견된 노숙자 사망사건이었다. 별다른 대비 없이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닥친 추위에 노숙자가 얼어 죽는 건 초겨울에 흔한 사건이었다. 60대 알콜 중독자였고, 사체엔 별다른 외상도 없었기 때문에 정황은 누가 봐도 객사였다. 그래도 사망자의 신원 파악과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게 짭새의 일이라서 방금 시신이 안치된 자선 병원에서 담당의사를 만나서 사인을 확인하고 나온 길이다.
“그럼, 보고서만 올리면 이번 사건은 마감이네?”
비니가 나한테 커피를 내밀었다.
“그렇지.”
비니도 나도 연차 만만치 않은 중고참인데다 업무 평가도 나름 괜찮은 편인데, 다른 짭새들이 계획적이고 잔혹하고 난감한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이 우리는 동사자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었다. 나야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살살 부려먹는 중이라고 해도, 비니한테는 제대로 된 대접이 아니다.
“바로 서에 갈 거야?”
그러기엔 시간이 아직 일렀다. 가 봐야 할 일이라곤 서류작업 뿐이고…… 그리고 시립 자선병원하고 경찰 병원은 가까웠다.
“경찰 병원에 잠깐 들르자. 에쉬하고 터너 본 지도 오래 됐잖아.”
에쉬의 병실은 비어 있었다. 저녁때가 다 됐는데 어딜 간 걸까? 경찰 병원은 곳곳에 안락한 휴게실과 멋진 정원이 갖춰진 겐지 클리닉하고는 달라서 환자나 보호자가 나가서 오래 노닥거릴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에쉬가 퇴원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근처에 있긴 있을 텐데…….
탐문과 수색이 본업인 짭새 둘이 갈 곳이라곤 빤한 건물 안에서 사람을 찾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입원병동 휴게실에 녀석들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우리가 직행한 곳은 수술병동이었다.
에쉬하고 터너는 경찰병원에서 가장 재수 없는 곳. 그 저주받은 수술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병원 직원들도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 으슥한 구석방에서 두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느냐 하면…… 밖에서 사온 닭튀김을 안주 삼아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왔어?”
터너가 몰래 먹던 간식 위에 급히 덮었던 무릎담요를 걷어내면서 시큰둥하게 우리를 맞았다.
“간식 먹고 있었나 봐?”
에쉬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이 있던 날 새벽에 청연루에 있다가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날아가서 건물에 충돌하는 바람에 심한 내상을 입었다. 골절에 내출혈에 뇌진탕에…… 비록 총에 맞은 건 아니지만 아주 골병이 들었다. 그 때문에 옆구리에 총 한 발 맞고 사경을 헤매던 내가 퇴원해서 며칠 쉬고 복직한 이 시점까지도 환자복을 못 벗고 있었다.
“에쉬가 병원 밥을 너무 안 먹어서…….”
터너가 툴툴거리면서 닭 날개 살을 뜯어서 에쉬에게 내밀었다.
“너도 한 달 넘게 환자식만 먹어봐. 식판만 봐도 멀미 나.”
터너가 내민 닭 날개를 덥석 받아먹으며 에쉬도 질세라 툴툴거렸다.
에쉬한테 닭고기를 한 조각 더 먹이고, 맥주 한 캔을 따서 들려준 다음에야 터너가 나를 돌아봤다.
“복직했다는 말은 들었어. 부상이 심했었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오래 놀면 뭐해? 움직일 만하면 일해야지.”
“오늘은 비번이야?”
“아냐, 일 때문에 근처에 나왔다가 잠깐 들렀어.”
내 대답에 터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영 찜찜한 표정으로 비니를 돌아봤다.
“너도…… 복직했다면서?”
복직한 이후 비니에게는 이런 눈빛과 질문이 쏟아졌었다. 사실 비니의 현장복귀는 내가 며칠간 어르고, 달래고, 조르고, 울어서 어렵게 성사시킨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원성도 빗발쳤지만, 비니는 나한테 소중한 친구다. 녀석이 골방에 박혀서 해결 방법도 없는 문제를 놓고 끙끙거리는 건 싫다. 비니는 본래 경찰 일을 좋아했었다. 그리고 내가 파트너로 다니면서 모든 불상사를 마크하겠다는데 딴 놈들이 무슨 상관이냐?
“왜? 뭐가 불만이야?”
맥주 캔 하나를 집어 따면서 까칠하게 되물었다. 요 며칠 딴 놈들한테 하도 시달려서 이런 태도엔 신경부터 벌떡 곤두섰다. 하지만 터너가 너하곤 볼 일 없다는 듯 나를 밀어치우고 비니를 험하게 노려봤다.
“너 말이야…….”
“뭐?”
비니도 시무룩한 눈길로 터너를 마주봤다.
“그때 불었던 바람 말인데…….”
헉…… 일 났다. 그날 새벽에 갑자기 휘몰아친 돌풍이 누구 소행인지 눈치챘나 보다. 에쉬가 이렇게 골병든 게 비니 탓인 걸 터너가 알면 아무리 비니라도 무사히 넘어가긴 어려운데…….
내 안색이 싹 변하는 걸 확인한 터너가 더욱 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비니에게 다가섰다. 그때, 에쉬가 그만 두라는 듯 터너의 정강이를 툭 걷어찼다.
“문병 온 손님들한테 웬 시비야? 거기 닭다리나 하나 더 줘 봐.”
에쉬는 손가락도 두 개나 부러져서 오른손은 아직도 석고붕대에 감겨 있었다. 하지만 왼손은 말짱한데 그건 맥주 캔 쥐는 용도로만 쓰면서 닭다리 가져와라, 가슴살이 왜 이리 퍽퍽 하냐, 날개 더 없냐…… 온갖 어리광을 다 피우면서 터너를 쥐어짜고 있었다.
“이제 그만 먹어. 이러다 또 배탈 나면 의사한테 나만 욕먹어.”
시달리다 지친 터너가 짜증을 내며 치킨 박스를 우리 쪽으로 밀었다.
“경찰서는 좀 어때?”
터너한테 마시던 맥주까지 빼앗긴 에쉬가 퉁퉁 부은 얼굴로 물었다.
“뭐가 어때? 그 자리에 잘 있어.”
비니하고 닭 가슴살 한 조각씩을 집어 들고 건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고, 이 방에서 먹는 치킨과 맥주는 맛이 각별했다.
“일은 할 만해? 바깥분위기는 어때? 터너 말로는 밖에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던데…….”
“우리가 아는 건 이제 날이 많이 추워졌고, 그 바람에 노숙자들이 얼어 죽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야.”
실은 다시 출근을 해보니 연방특수경찰 한 떼거리가 경찰서 6층에 아예 본부를 차리고 눌러앉아 있었다. 그 바람에 요즘은 노튼과 아침저녁으로 마주쳤다. 특수경찰의 수사 내용은 일급 기밀이라며 자기네들끼리만 쑥떡거리기 때문에 다른 짭새들은 그 거슬리는 입주인들의 업무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야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서 그쪽으론 눈길도 안 주고 바닥만 쳐다보고 다녔다.
“그래서…… 자선 병원에 가서 노숙자 사인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란 말이야?”
“사인의 반은 간 경변, 반은 동사래.”
나하고 비니가 경찰학교 막 졸업한 새내기들한테나 떨어지는 허드렛일을 하고 다닌다는 근황보고에 에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터너를 돌아봤다.
“우린 최대한 버티자. 공연히 부지런 떨다가 저런 꼴 당하지 말고…….”
“어차피 넌 올해 안에 복직 못해.”
터너가 공연한 걱정한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리곤 맥주 한 모금을 꿀꺽 마시더니 슬쩍 에쉬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난 다음 달엔 복귀해야 돼.”
“뭐야?”
에쉬가 아르릉거리며 터너를 노려봤다.
“이번 달까지 휴가를 연장하는 것도 힘들었어. 난 몇 달씩 병가를 낼 정도로 부상이 심했던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날 버리고 간다고?”
비니하고 나를 관객 삼아서 둘이 아주 영화를 찍는다.
“너도 이번 달 가기 전에 퇴원할 거야. 부모님 댁에서 몇 달 더 몸조리를 해야겠지만…….”
터너가 솥뚜껑만한 손으로 에쉬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무뚝뚝하게 달랬다.
“복직하면 누구하고 같이 다닐 건데?”
“아쉬운 대로 앤디랑…….”
“배신자!”
터너하고 에쉬는 몇 년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우정과 애정과 금슬을 자랑해온 경찰서 베스트 커플이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렇게 분위기가 애틋했었나? 에쉬가 부상 중이라서 이런 건지, 둘 다 여자 친구한테 버림받은 처량한 솔로들이라 그런 건지…… 둘 사이가 예전에 비해 뭔가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
썰렁한 수술실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병실로 돌아왔다. 에쉬는 침대에 눕자마자 이번엔 피자가 먹고 싶다고 우는 소리를 하다가 터너한테 기어이 한소리를 듣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길이 막히기 전에 서에 돌아가려고 그만 자리를 접었다.
“니네 둘…… 설마 넘지 말아야 한 선을 넘은 건 아니겠지?”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마중 나온 터너한테 비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는 듯 터너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린 그냥 플라토닉한 관계야.”
“플라톤이 뭐하던 사람인지는 알아?”
“살인범만 아니면 무슨 짓을 했든 관심 없어.”
위층에 붙들린 엘리베이터가 좀처럼 내려오질 않는 짧지만 지루한 순간, 터너와 비니 사이에 불이 이는 것 같은 신경전이 벌어졌다.
아무래도 터너는 비니를 족쳐서 그날 새벽에 불었던 돌풍이 자기 짓이란 자백을 받아내고 싶은 눈치였다. 물증을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에쉬가 저승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니 터너는 심증만으로도 얼마든지 비니를 죽이려고 덤빌 거다.
“터너.”
보고 있기 답답해서 내가 나섰다. 하지만 터너가 내 가슴을 툭 밀쳤다.
“넌 가만있어. 비니하고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렇게는 못하겠다.
“니 파트너가 금쪽같으면 내 파트너도 중요해. 비니한테 공연히 시비 걸지 마.”
딱 부러지게 이르고 마침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비니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터너한테 작별인사를 했다.
“에쉬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 또 올게.”
경찰서로 돌아오는 길 내내 비니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밖만 쳐다봤다. 그래서 경찰서에 도착한 후 비니는 커피 한잔과 함께 자리에 곱게 모셔놓고 반장한테 보고도 내가 하고, 보고서도 내가 썼다. 뭐, 사건이 있었던 게 아니니까 보고서라고 해봐야 최근에 작성한 문서 중엔 제일 짧고 간단했다.
“저희, 이제 퇴근해도 되죠?”
반장한테 사건 보고서를 내밀면서 퇴근하겠다는 의사도 같이 전했다.
“몸은 좀 어때?”
초저녁에 부하 직원을 순순히 집에 보내주기는 싫은지 반장이 말을 돌렸다.
“많이 좋아졌어요.”
“얼마나 많이?”
“이런 허드렛일 말고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요.”
내 삐딱한 대꾸에 반장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청연루에서 그 난리가 나는 바람에 사상초유의 인력부족 사태가 발생하지만 않았으면 너하고 비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라버렸을 거야.”
“그런데 저희 둘한테 이런 잔심부름이나 시키시는 걸 보면 그 사이에 충원이 많이 된 모양이죠? 제 눈엔 안 보이지만…….”
나도 없고, 터너하고 에쉬도 장기 휴직 중인데다, 쥬드까지 정신이 온통 딴 데 가 있었던 관계로 강력반은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각자 사정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동안에 쿠간 시의 나쁜 놈들도 같이 쉬었던 건 아니니까 남은 동료들에게 업무가 고스란히 돌아갔고, 과중한 뺑뺑이가 한 달 넘게 계속된 탓에 이번엔 동료들이 과로로 병원에 입원할 지경이었다.
범인 검거율도 반 토막이 난 판에 우리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물론 비니나 나나 오래 쉬다 나와서 적응기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계속 이러면 곤란한 건 반장이다.
“너, 정말 그놈하고 안 헤어질 거야?”
그 문제에 관해서는 한동안 갈등도 있었지만, 이젠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직장보다는 사랑이 중하죠.”
반장이 담뱃갑을 꺼내서 뒤적거리다가 비어 있는 걸 깨닫고는 있는 대로 신경질을 내면서 빈 갑을 휴지통에 처박았다.
“태도가 날이 갈수록 밉상인 게, 너 말이야. 그놈을 닮아가는 것 같아.”
그럴 수도 있다. 만난 지도 좀 됐고, 최근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태도가 삐딱한 건 우리한테 제대로 된 사건을 넘겨주지 않는 반장 때문이다.
“코렐 거리에서 발생한 여학생 변사사건, 우리한테 주세요.”
기숙학교에 다니다가 주말에 귀가하던 여학생이 실종된 지 닷새 만에 오래 비어 있던 트레일러 창고에서 시체로 발견된 건 우리가 출근하던 날 새벽의 일이었다. 그래서 브리핑 할 때부터 내심 그건 우리 사건이라고 찍어 놓고 있었는데, 정작 그 사건은 새까만 신참들한테 돌아가고 비니하고 나한테는 안타깝기는 하지만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숙자 동사 뒤처리가 떨어진 거다.
경력 9년차로 접어드는 강력반 짭새한테 있을 수 없는 치욕적인 대접이었지만 한 달 넘게 쉬다가 막 출근한 참이었고, 우리 둘 다 초장부터 언성 높이면서 세게 나갈 입장이 아니라 군소리 없이 지시대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이젠 내 차례다. 하지만 반장은 여전히 심술맞은 표정이었다.
“그건 빈스하고 청이 맡고 있잖아.”
“사건에 진전이 있나요?”
“남의 사건 욕심 내지 마. 니네들이 할 만한 일도 있으니까.”
이제야 얘기가 좀 먹히나 보다. 하긴, 한 팀이 사건을 두세 개씩 맡아서 뺑뺑 돌고 있으니 아무리 우리가 밉상이라도 계속 놀릴 수는 없겠지.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인지 내도록 시무룩하던 비니도 반장 쪽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뭘까? 한주일 전에 증권사 임원이 자살한 사건이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강력반으로 넘어왔는데, 그걸까? 로즈 공원에서 발생한 사체 유기 사건도 단순해 보이진 않던데…… 뭘까? 뭘까?
“니네들, 엘리 크로우 알지?”
엘리 크로우라는 이름에 사무실 짭새들이 일순 하던 일을 멈추고 반장을 쳐다봤다.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엘리 크로우는 현재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방년 19세. 예쁘고 귀엽고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금발머리 여가수였다.
“엘리 크로우가 죽었어요?”
나하고 비니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동시에 반장에게 물었다. 엘리 크로우는 요번 주말에 쿠간 시 농구 경기장에서 대형 콘서트를 열 예정이라 지금 온 도시가 그녀의 도발적인 포스터로 뒤덮여 있었다. 공연 준비로 엊그제 쿠간에 들어왔다는 뉴스는 봤는데…….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도 마!”
반장이 책상을 내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그리고는 어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우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쪽에서 경호 요청이 들어왔어.”
“에?”
“본래도 극성팬이 많기로 유명한데 요즘 들어 스토커가 더 늘어난 모양이야. 개인경호원 만으론 안심이 안 된대. 지난 번 오레스 시 공연에서도 누군가 무대 뒤쪽으로 침입하려다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더군.”
“하지만 반장님…….”
어차피 관객이 수만 명씩 몰리는 대형 공연엔 공연장 질서유지 차원에서 경찰이 배치된다. 그럼 그쪽에서 인원을 몇 명 늘려서 개인 경호도 세우면 되지, 왜 우리더러 그 일을 하라는 거냐? 우리는 강력반 형사지, 사정 급하면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딱풀이 아니다. 게다가 비니나 나나 유명인 경호 같은 건 해본 적도 없다.
“엘리 크로우가 우리 동네에 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는 날엔 여기서 무사할 사람 아무도 없어. 게다가 이건 시장실에서 직접 내려온 지시야.”
시장이 친구 이모부라고 해봐야 좋은 일은 하나도 없고, 매번 눈치 보이고 성가시기만 하다. 내년 선거에선 딴 사람을 찍어야겠다.
“그러니까 니네들은 내일부터 공연 끝날 때까지 그쪽 경호팀하고 협조해서 그 귀염둥이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게 잘 지켜!”
역시, 복직을 너무 일찍 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반장이 제발 출근해 달라고 내 바지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흘릴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저녁이나 먹자. 맥주도 한잔 하고…….”
반장한테 앓는 소리 해봐야 루크하고 헤어지라는 타박이나 듣지, 건질 것도 없어서 비니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오늘은 일찍 안 들어가?”
비니의 대꾸가 시큰둥했다. 지난 이틀 동안 퇴근하자마자 자길 버리고 갔다고 이런다.
루크 때문에 비니를 소홀이 하기는 싫었지만, 녀석은 내가 이번 주에 복직하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내 맘대로 복직한 걸 두고 단단히 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처음 하루 이틀은 눈치 보고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루크의 귀가 시간은 번번이 자정 이후라서 초저녁 귀가가 아무 보람이 없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자기 말 안 듣고 복직했다고 시위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이제 버티고 버티다가 새벽에 들어갈 거다.
“맥주를 밤새 마실 것도 아닌데 뭐…….”
“그럼…… 어디로 갈까?”
어디가 좋을까? 경찰서는 나름 번화가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갈 만한 술집은 사방에 널렸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새로 개업한 안주거리 다양하고 서비스 좋다는 그 집엘 갈까? 단골로 다니던 선술집이 있긴 하지만, 거긴 짭새 둥지나 마찬가지라서 요즘은 드나들기가 좀 껄끄럽다. 중국 마피아 두목하고 내놓고 동거를 하고 있는 나도 그렇고, 그간 수많은 짭새들에게 다양한 이유로 병원 밥을 먹였던 비니도 그렇고…… 아직은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새로 생긴 호프집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로비를 가로지르다가 노튼과 마주쳤다.
“퇴근하는 길인가?”
뭔가 고민이 많은 얼굴로 부하들을 몰고 들어오던 노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예…….”
노튼하고는 이런 식으로 종종 마주친다. 노튼의 팀이 경찰서에 아예 방을 잡았으니까…….
“몸은 좀 어때? 부상이 심했었다고 들었는데, 일은 할 만한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노튼은 내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를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도 노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긴 있다.
“바로…… 차이나타운으로 갈 건가?”
“저녁 먹고요.”
노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잘 가라는 뜻이려니 싶어서 나도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노튼이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저녁을 근처에서 먹는 거면, 합석해도 될까?”
“예?”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서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그리고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
대답부터 지르고 나서 노상 아기오리처럼 노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세 명의 특경 짭새들을 힐끔 쳐다봤다. 그럼, 저 짭새들하고도 같이 저녁을 먹어야 되는 건가? 내가 낯가림이 심한 편은 아니지만 연방특수경찰이 우리 경찰서에서 제일 큰 방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는 일이 어떤 건지 대강 짐작은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쟤네들을 앞에 놓고 밥이 넘어갈지 모르겠다.
“그럼 식당에 먼저 가 있게. 난 위에 올라가서 마무리할 일이 있으니까…….”
“저희는 ‘클로버 퀸’에 갈까 하거든요.”
“거기 괜찮지. 나도 몇 번 가 봤어.”
노튼이 좀 있다 보자는 인사를 남기고는 부하들을 끌고 엘리베이터 통로 쪽으로 사라졌다. 얼떨결에 저녁 약속을 잡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노튼하고 밥 한 끼 같이 못 먹을 것도 없었다. 워낙 안 좋은 상황에서 마주친 기억 때문에 볼 때마다 그 일이 떠올라서 탈이지, 사람이 나쁘다거나 나한테 해코지를 한 건 아니니까…… 오히려 노튼은 늘 나를 걱정하는 쪽이었다.
“저 아저씨가 왜 갑자기 우리랑 밥을 먹자는 거야?”
비니가 막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힐끔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녁 먹을 때잖아.”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널 찍은 건 아닐 거 아냐?”
“할 말이 있나 보지.”
그렇게 대꾸하고 비니를 출입문 쪽으로 밀었다.
노튼이 ‘클로버 퀸’에 나타난 건 비니하고 내가 매운 양념으로 버무린 돼지 갈비를 뜯으면서 석 잔째 맥주를 비울 즈음이었다. 부상과 오랜 병원 생활로 그간 본의 아니게 몸에 좋은 것만 찾아먹으며 금주를 하다 보니 기름진 돼지고기하고 맥주 맛이 정말 꿀맛이라 노튼이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노튼이 인사를 건네며 비니를 밀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테이블 담당이 내민 메뉴판은 쳐다보지도 않고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식사는 안 하시고요?”
“요즘은 배고픈 걸 잘 못 느끼겠어. 대신 늘 목이 타지.”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봐요.”
노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그런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노튼은 요즘 볼 때마다 부쩍 늙어 있는 느낌이었다.
“며칠 휴가라도 내시죠.”
비니가 테이블 담당에게 튀긴 감자와 치즈 토핑을 추가로 주문하면서 한가롭게 말했다.
“내 오랜 꿈이지. 어떤 걱정이나 두려움도 없이 긴 휴가를 즐기는 것…….”
노튼이 씁쓸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홀에 내걸린 대형 TV에서 마침 축구 중계를 해주고 있어서 우리는 한동안 경기에 빠진 채 빵을 뜯어 먹고 맥주를 마셨다. 일과를 마치고 동료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축구 경기를 보고, 골 찬스가 올 때마다 환호하고, 혹은 탄식을 내뱉고…… 이런 저녁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물론 노튼은 동료라고 하긴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둘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군.”
누가 봐도 명백한 오심 끝에 페널티 골이 들어간 걸 두고 나하고 비니가 흥분해서 투덜거리는 걸 나이 지긋한 교장 선생님 같은 눈길로 쳐다보던 노튼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지난겨울부터 두 사람한테는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이렇게 잘 견디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많이 무뎌진 것 같군.”
“우릴 어떻게 보셨는데요?”
반년이나 뻗어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일어난 데다, 이후로도 계속 정신 못 차리고 삽질을 거듭하던 주제에 비니가 한껏 거만을 떨었다.
“보통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했었지. 두려움 많고, 고통에도 약한…….”
“정말 잘못 보셨네요.”
우리가 특별히 잘났다는 건 아니지만 겁 많고 마음 약하면 강력반 형사 같은 건 애초에 못한다. 그리고 다른 건 몰라도 비니는 마음에 병이 있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겁은 없는 편이다.
“세상은 항상 변하는 거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은 너무 쉽게 변하지. 자네들은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한결같은 데가 있어서 좋군.”
누구하고 같이 있어도 몇 번은 닥치게 마련인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돌아왔다. 하지만 다행히 이 자리엔 비니가 있다. 비니는 사교적이고 말주변도 좋아서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는데 능숙했다.
“연방경찰들은 6층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이번엔 너무 정면 돌파를 한 것 같지만…… 연방특수경찰의 업무는 철저한 대외비였다. 따라서 비니의 질문은 규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상당히 무례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튼은 불쾌하거나 곤란한 기색 없이 비니의 기습에 도리어 정면으로 대응했다.
“니콜라스 헤슬렘을 찾고 있네.”
“…….”
생각지도 않게 니콜라스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비니가 당황해서 나를 돌아봤다. 나는…… 별로 안 놀랐다. 노튼과 그의 팀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놀랐을 거다.
“그 작자를 왜…… 여기서 찾아요?”
“여기 있으니까.”
“그 자식이 왜요? 어떻게 목숨을 건졌는지 모르지만, 살아 있다면 지구 반대편 어디쯤에 숨어 있겠죠.”
비니가 그렇지 않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나는 모른 척 비니의 눈길을 외면했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여길 떠났던 적도 없을 거야. 그자가 원하는 게 모두 여기 있거든.”
“그자가 원하는 게 뭔데요?”
“시간을 담은 병하고, 이 친구지.”
노튼이 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이 또다시 우리 테이블을 휘감았다. 비니도 감히 대화를 시도하지 못했고, 노튼도 뭔가 생각이 깊어서 서먹함이 한없이 길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총대를 멨다.
“그날…… 호숫가 별장에서 니콜라스를 만났습니까?”
경찰서 로비나 복도에서 노튼과 마주치거나, 스쳐 지나갈 때마다 묻고 싶었다. 니콜라스의 버려진 별장이 습격을 당했던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니콜라스를 함정에 빠뜨렸던 겁니까?”
“내가 그 일을 자네한테 변명해야 하나?”
“어쨌든 니콜라스는 당신을 믿었기 때문에 만나기로 했을 텐데,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게 그를 넘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뭘 따지거나 추궁하고 싶은 건 아닌데…… 내 귀에도 내 말투가 되게 까칠했다. 내가 지금 노튼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노튼이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군.”
노튼의 한마디에 내 말문도 딱 막히고 말았다. 대답을 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왜 이상한 소릴 지껄여서 속을 뒤집냐? 교활한 영감 같으니…….
“하긴, 그럴 줄 알았지. 증오와 미움처럼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없거든. 그를 정말 증오하거나 원망했다면 자네도 변했을 거야.”
“그만하시죠.”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듣기 괴로워서 말을 막았다. 사실, 그날 호숫가 별장에서 있었던 일 따위 몰라도 그만이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니까.
“그날 아침에 내가 니콜라스를 만났던 건 사실이야. 오랜만의 재회였고,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지. 그를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게 그의 행방을 알렸을 것 같은가? 난 지금의 자네보다 더 젊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어. 그리고 자네만큼이나 그를 사랑했지.”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 나보다 더 젊었을 때부터 니콜라스를 알고 있었고 사랑을 했다니, 그럼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아니다. 니콜라스도 한꺼풀 벗기고 보면 바람기 풀풀 날리는 난봉꾼이었다. 그리고 노튼도 지금은 나이 먹고 격무에 시달려서 이 지경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분위기 괜찮은 신사다. 그럼 니콜라스하고 노튼이…….
“우린 그런 사이는 아니었어.”
노튼이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그놈의 플라토닉 타령은 이제 지겹다. 자기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짭새를 꼬셔서 잡아먹는 게 니콜라스의 오랜 습관이었던 걸까? 왜 이렇게 마음이 상하지? 나한테는 이제 루크가 있는데…….
“어쨌든 난 니콜라스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상에 남아주길 바라는 입장이야. 그가 없는 세상이라니…… 얼마나 허전하고 이상하겠나?”
“어련하시겠어요?”
무심코 틱틱거리다가 속이 찔려서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사이에 비니는 니콜라스하고 노튼의 나이를 계산하면서 괴로운 표정으로 머리를 잡아 뜯었다. 액면가로는 노튼이 니콜라스보다 10년은 위니까 답이 안 나올 거다. 니콜라스가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몇 번이나 얘길 했는데 비니는 아직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네를 위해서 그러길 바라네.”
“그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어떻게 알고 거길 덮친 겁니까?”
“그자들은 나도 감시하고 있었어. 그 감시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질 못했네.”
“그자들이라면…….”
“아홉 명의 왕들이라고 해두지.”
노튼이 빈 맥주잔을 붙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이 있었던 그날 아침의 일을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젊은 시절에 만났던 니콜라스를 회상하고 있는 걸까?
어쨌든 노튼이 니콜라스를 함정에 빠뜨린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덕에 그간 꽁하게 틀어져 있었던 마음은 많이 풀렸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와는 별개로 나는 니콜라스가 믿을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쫓겨 다니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었다.
“무슨 얘기를 했어요? 그날 아침에…….”
“긴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어. 커피 한잔을 다 마시기도 전에 기사단이 들이닥쳤으니까.”
“…….”
엉망으로 부서진 별장의 부엌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니콜라스의 별장은 내게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지난 몇 년 간 니콜라스와 관련된 일은 떠올리지도 않았고 그의 저택이나 별장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막상 별장이 침범당하고 함부로 짓밟힌 광경을 보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노튼이 잔을 들다가 이미 빈 잔인 걸 깨닫고는 머쓱하게 내려놨다. 그리곤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젊은 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지 종종 궁금했었는데…….
“지금 하려는 일을 포기하라고 했지. 그만두고 떠나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그랬더니, 뭐래요?”
“시간을 담은 병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묻더군.”
속에서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니콜라스는 지난 번 몬티첼리 저택 습격 때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리고 한 번 더 걸리면 틀림없이 죽는다. 카넴의 단검인지 뭔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니콜라스를 한칼에 보낼 수 있는 무기도 확보한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어디서 병 타령이냐? 목이 타서 남은 맥주를 한입에 부었다.
“니콜라스는 곧 자네를 찾아갈 거야.”
순간…… 목이 콱 막히면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던 맥주가 반이나 튀어나왔다. 얼마나 기침을 요란하게 했는지 옆 테이블 손님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눈치를 줄 정도였다.
“저를…… 왜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쉰 목소리를 쥐어짰다.
“자네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그리고 내가 니콜라스한테 그 수정 목걸이의 행방을 알려줬거든.”
별로 한 것도 없이 피곤해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기어 들어가서 뻗었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아니면 노튼한테서 엄청난 얘기를 들은 충격 때문인지 아직도 머리가 멍했다.
“왜 사람을 거들떠도 안 보고 그냥 지나가? 내가 투명인간이야?”
소파에 앉아서 패션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루크가 옆으로 다가와서 시비를 걸었다.
“있었어?”
“뭐야? 너 진짜 나를 못 본 거야?”
투덜거리며 이불을 들추던 루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술 마셨어?”
“맥주…… 몇 잔.”
“넌 아직 환자야. 이 꼴을 해가지고 일 한다고 나다니는 것도 못마땅한데 이젠 술까지 퍼 마셔?”
루크가 잔소리를 하며 내 셔츠를 벗기고 허리띠 버클을 풀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
“니가 늦은 거지. 열두 시 다 됐어.”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베개를 바로 놔주고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는 게 재미있어서 피식 웃었다.
“웃어?”
이젠 웃는 걸로도 시비를 걸 모양이다. 술기운도 돌고 계속되는 잔소리도 거슬려서 녀석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확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
버둥거리는 녀석을 끌어안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맥주 몇 잔에 내가 취했나? 헛소리가 막 나오네.
“무슨 소리야?”
“좋잖아. 요즘…… 비니하고 다시 파트너로 일하고, 날 저물어서 돌아오면 너도 있고…… 잔소리 하고, 투덜거리고, 시비 걸고…….”
내 횡설수설에 루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나는 니가 비니 몬티첼리하고 같이 다니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들어!”
“사랑해.”
루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녀석이 좀 잠잠해졌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잠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녀석이 그렇게 한마디를 지껄이고는 내 머리 위에 이불을 푹 덮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강력반 전체 미팅을 마친 후, 다른 짭새들은 사건 현장으로, 혹은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놈들이 바쁜 티를 있는 대로 내면서 몰려나가는 동안 우리는 반장에게서 포시즌 호텔 룸 넘버하고 엘리 크로우 공연의 보안 책임자 전화번호를 받아서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기분 탓일까?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더 추운 것 같았다.
“혹시 아냐? 여신 같은 댄서 여자친구가 생길지?”
비니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농담을 지껄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려는 자세는 훌륭하다. 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늘씬 빵빵한 댄서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난 남자친구가 있잖아.”
“반 년 넘어갔으면 슬슬 딴 데로 눈길이 돌아갈 때잖아.”
나하고 루크 사이를 비니가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지는 잘 안다. 하지만 반 년이 그렇게 긴 기간도 아닐뿐더러 나는 엘리 크로우의 순회공연 멤버로 뽑힐 만큼 실력 좋고 예쁜 댄서를 어떻게 해 볼 능력도 없다.
“걔네들이 우리 같은 아저씨들을 거들떠나 보겠냐?”
“니 매력을 과소평가 하지 마. 넌 온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흉악범을 둘이나 쓰러뜨린 망나니잖아.”
“칭찬은 고마워.”
그럴 마음도 없지만, 만에 하나 딴 데 한 눈 팔다가 루크한테 걸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루크가 내놓고 겁을 줬던 적은 없지만…… 그날이 내 제삿날이 되겠지.
“루크 첸이 겁나서 그러는 거면, 그 자식은 내가 막아줄게.”
“어떻게?”
“어떻게든.”
“나 요즘 잘 지낸다니까?”
내 대답에 비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재주도 좋다. 그런 놈하고 잘 지내는 게 어떻게 가능해?”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 며칠간은 정말 잠을 깊이 잤다. 루크의 영지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사적인 공간에서 구름처럼 폭신한 이불에 감긴 채…… 가슴이 시린 외로움, 꿈속에서도 떨치지 못하던 슬픔과 불안을 요즘은 잊고 지냈다. 뭔가 큰 게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사라진 건 아닌데 녀석의 체온, 숨소리, 심장의 고동이 내 몸을 휘감고 있으면 그런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너한테 눈길을 주는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최선을 다해서 껄떡거려 봐. 나도 최대한 지원해줄게.”
“루크는 어쩌고?”
“어차피 며칠 못 가서 바람 날 놈이잖아. 니가 먼저 버려!”
비니가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며 딱 잘라 말했다. 좌회전을 해서 20분 정도 직진을 하면 특급호텔이 즐비한 블루버드 힐이었다.
한창 인기 상종가를 치고 있는 팝스타의 투숙으로 호텔 앞은 아침부터 북새통이었다. 엘리 크로우의 오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죽치고 있는 애들이 삼백 명은 되는 것 같았고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든 파파라치가 수십 명, 거기에 오가는 손님들이 불평할까 봐 나와서 통로를 지키는 호텔 경비원이 또 십여 명…… 이렇게 혼잡하고 소란스러운 광경은 최근엔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이 금요일이지?”
“응.”
비니가 주차장 입구를 찾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이 금요일, 토요일 저녁이니까…… 이번 주만 벌을 서면 내 죄가 좀 가벼워질까?”
“그 정도론 어림도 없을 걸.”
비니가 심술 사납게 투덜거렸다.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씹었다고 이런다.
엘리 크로우의 경호팀장은 다니엘 페레라는 이름의 까다롭고 지쳐 보이는 프랑스 인이었다. 페레 씨 외에도 응접실을 들락거리는 스텝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퀭한 걸 보면 톱스타의 경호 업무라는 건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강력반…… 이요?”
비니하고 내가 이름과 직급을 밝히자 심드렁하던 페레 씨가 비로소 기운을 차리고 눈에 힘을 줬다.
“요즘 들어서 엘리 어머니가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 주변 사람들까지 미치게 만드는 바람에 경찰에 지원 요청을 하긴 했지만…… 강력반 형사들이 왜요? 문제라고 해봐야 고약한 팬레터 몇 장에 스토커 몇 명이 쫓아다니는 정도에 불과하고, 스케줄대로 엘리를 따라다니면서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없는데요.”
“크로우 양이 워낙 유명한 스타니까 만에 하나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하려는 거죠.”
비니가 눈도 깜빡 않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인사치레를 했다. 우리가 각자 개인적인 문제로 경찰서에서 사람대접 못 받는 사정을 이 사람이 굳이 알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살인 사건이 난 것도 아닌데 강력반 형사가 둘이나 달려온 건 아무래도 지나치단 생각이 드는지 페레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히나 시장님은 크로우 양이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쿠간 시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간직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비니가 뜬금없이 시장을 들먹이자 페레 씨가 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장님이 저희 이모부 되시거든요.”
“아…….”
다른 건 모르겠지만 비니가 나름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인 걸 확인한 페레 씨가 한결 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 크로우는 방년 십구 세로, 아직은 소녀티를 다 벗지 못한 어린 나이지만 다섯 살 때부터 출연한 영화가 열 편, 열다섯 살 때 가수로 데뷔해서 발표한 음반이 석 장…… 이제 삼십대로 접어든 내 짭새 이력보다 훨씬 경력이 긴 베테랑 연예인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린 탓인지 신경이 예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주변사람들을 지치게 만드는 걸로 악명이 높았고, 지난여름에 발표한 세 번째 음반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란 평가 외엔 별다른 반응이 없는데다 성희롱과 협박성 팬레터에 병적인 스토커만 잔뜩 늘어나는 바람에 요즘은 히스테리가 절정에 달했다는 게 페레 씨의 하소연이었다.
“우리도 공연장이나 엘리의 신변 보안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건 달갑지 않지만, 크로우 부인이 지난 번 공연장에서 외부인이 무대 뒤까지 들어온 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어서요. 바쁘신 분들께 폐를 끼치게 된 건 유감이지만 강력반에서 나오셨다니 부인을 진정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네요.”
복직하고 맡은 첫 번째 임무는 동사자 신원파악이더니, 두 번째는 크다 만 여자애 보모노릇인가 보다. 내가 루크하고 만나면서 그 녀석 때문에 힘들 때도 많았지만, 요즘은 반장 때문에 짜증나서 못 살겠다.
“오늘 공연 외에 다른 일정이 있나요?”
내가 심호흡을 하면서 쓰린 속을 다스리는 동안 비니가 직업적인 냉철함을 유지하며 오늘 할 일을 체크했다.
“12시에 잡지 인터뷰하고 화보 촬영이 있어요.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요즘은 패션잡지 쪽 영향력도 상당하니까요. 촬영은 늦어도 다섯 시까지는 마무리 될 거고, 거기서 바로 공연장으로 갈 겁니다. 지금쯤 나갈 준비가 거의 끝났을 테니까 올라가시죠.”
엘리 크로우의 공연팀은 12층 특실과 그 아래층을 통으로 빌려서 쓰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공연 스텝이 특급 호텔 두 개 층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봐도 요즘 엘리 크로우의 인기와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대강 감이 왔다.
엘리 크로우가 묵고 있는 방은 침실 두 개와 어지간한 회사 회의실만한 응접실이 딸린 호화로운 특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응접실은 수십 벌의 드레스가 걸린 옷걸이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구두, 가방, 그 외 자잘한 물건들이 널려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고 매니저, 비서, 메이크업 담당, 코디네이터, 친구, 친하게 지내는 댄서 등등 수십 명이 이 방 저 방 들락거리며 떠들어대는 통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잡했다.
마치 백화점 폭탄 세일 첫날 같은 난리북새통을 헤치고 가던 페레 씨가 냉정한 인상의 중년 부인을 찾아내서 우리를 소개했다.
“크로우 부인. 이분들은 경찰에서 경호를 돕기 위해 파견 나온 분들입니다. 이분은 몬티첼리 형사, 그리고 이분은…….”
페레 씨의 소개가 다 끝나기도 전에 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둘이 전부인가요?”
“이분들은 강력반 소속이신데 엘리를 위해서 특별히 일을 맡아주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둘이라니, 우리 엘리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돼요! 요즘 호텔이나 공연장 주변에 미친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잖아요?”
부인이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자 페레 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군부대라도 출동할 줄 아셨나요?”
“쿠간 시 시장님이 분명히 엘리의 안전을 위해서 최대한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고요!”
페레 씨가 짭새 두 마리 추가로는 자기 딸의 신변을 철벽처럼 보호할 수 없다고 신경질을 부리는 부인 앞으로 비니를 밀어 보냈다.
“그 얘긴 몬티첼리 형사하고 하시죠. 이분이 시장님 조카가 되신다니까…….”
시장 조카라는 타이틀이 그렇게 엄청난 걸까? 방금 전까지 흥분해서 펄펄 뛰던 크로우 부인의 기세가 확연히 한풀 꺾였다. 시장도 비니를 별로 안 좋아하고, 비니도 막내 이모부하곤 깊은 정이 없는 편인데…… 이 사람들이 그걸 몰라서 정말 다행이다.
최근 3년간 가장 화끈한 10대 가수로 꼽히고 있는 엘리 크로우가 응접실로 나온 건 크로우 부인이 바로 호구 조사에 돌입해서 비니가 현 시장의 처조카일 뿐 아니라 시내에 대형 마트를 4개나 가진 유통재벌의 장남이란 것까지 다 캐낸 다음이었다.
비니를 사위 삼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건 굳이 알아서 뭘 할까 싶었지만 부인은 짧은 기간이나마 자기 딸 주변에서 얼쩡거릴 남자가 상류층 출신이란 게 무척 마음에 든 눈치였다.
“이 아저씨들은 누구야?”
엘리 크로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엘리 크로우는 잠이 덜 깼는지, 아니면 지난밤에 마신 술이 덜 깼는지 피곤하고 부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제 열아홉인데다 섹시함으로 승부를 건 아이돌 가수답게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상당히 육감적이었다. 지금 걸치고 있는 게 속옷이 환히 비치는 얇은 셔츠에 손바닥만 한 숏팬츠 뿐이라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만…….
“경찰에서 나오셨다는구나. 엄마가 이틀 전 파티에서 시장님을 만나서 네 경호 문제를 얘기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글쎄 조카분을 보내셨지 뭐니?”
일하러 온 건 우린데, 크로우 부인이 잔뜩 생색을 내며 딸을 돌아봤다. 하지만 엘리는 영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그런데, 준비는 다 한 거야? 그렇게 입고 나가려고?”
“어차피 가면 다른 옷 입을 텐데 뭐…….”
“무슨 소리야? 호텔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파파라치들을 어쩌고? 지난주에 모니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샤넬로 도배를 해서 베스트 드레서라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넌 그러고 돌아다니겠다는 거니?”
딸에게 냅다 잔소리를 퍼부은 크로우 부인이 드레스가 잔뜩 걸린 옷걸이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엘리는 엄마의 잔소리가 지겨운 티를 팍팍 내면서 소파에 걸쳐져 있던 북실북실한 모피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 땅꼬마가 뭘 입었든, 내가 알 게 뭐야?”
“엘리!”
크로우 부인이 버럭 소리 쳤지만 엘리는 엄마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발길을 돌렸다.
“나 지금 나가. 엄마는 나중에 공연장으로 와.”
애초에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지만, 막상 엘리 크로우를 만나보니 괜히 왔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경호 책임자의 태도를 봐도 엘리 크로우의 신변이 평상시보다 더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고, 이 천방지축 십대 소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엘리는 이제 막 만났으니까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없는데 보면 볼수록 전에 알던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좋은 느낌은 아니다. 아니,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순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싫은 기분이 들었다. 더는 기억을 더듬기도 두려울 정도로…….
싫은 느낌을 떨치려고 애쓰면서 엘리 크로우의 뒤를 쫓았다. 아무리 싫어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이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애를 경호하는 게 우리 일이었다.
“아저씨가 시장 조카에요?”
엘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후에야 나를 힐끔 돌아보며 대뜸 물었다.
“아니.”
고개를 저으며 옆에 있는 비니를 가리켰다. 하지만 엘리는 비니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더 유심히 쳐다봤다.
“혹시 전에 내 공연에 온 적 있어요?”
“아니.”
“그럼…… 나한테 사인을 받거나, 파티 같은 데서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요?”
엘리는 그냥 질문을 한 것뿐이지만 나는 십대 여자애 공연장에나 쫓아다니고, 사인을 받으려고 주변을 기웃거리는 음흉한 아저씨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없는데.”
내 대답에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이라 나도 엘리를 빤히 쳐다봤다.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을 때까지 엘리와 나는 서로를 빤히 보면서 상대를 어디서 봤는지, 누구랑 닮았는지 각자 기억을 더듬었다.
“아…….”
로비를 가로지르던 엘리가 뭔가 엄청난 걸 발견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봤다. 나를 어디서 봤는지 이제 기억이 났나보다.
“아저씨, 그 형사 맞죠? 마피아 두목 애인이라던…….”
엘리가 꺅 소리를 지르면서 떠드는 바람에 로비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이 몽땅 나한테 쏠리고 말았다.
“신문에 사진이 난 걸 몇 번이나 봤는데 까맣게 몰랐네. 맞죠? 루크 첸이라는 그 오빠랑 사귀는 거죠?”
나는 아저씨고, 루크는 오빠냐? 루크 관련해서 여러 가지 황당한 일을 겪기는 했지만 사람 많은 호텔 로비에서 이렇게 기습을 당하기는 처음이라 당황해서 얼굴만 벌겋게 붉히고 있는데 엘리가 혼자 떠드는 것도 모자라서 옆에 같이 가던 친구를 붙들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어머, 어쩜…… 멜, 마피아 두목 애인이 내 경호원이라니…… 너무 재미있지 않니?”
“그러게. 인증샷 찍어서 애들한테 쫙 돌리자. 모니카도 되게 배 아파할걸?”
배를 잡고 깔깔거리던 엘리가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친구에게 넘기고는 나를 붙들고 온갖 포즈를 다 잡기 시작했다. 끌어안고, 목에 매달리고, 잡아먹을 듯 입 맞추고…….
내가 루크하고 사귀면 사귀는 거지, 얘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지도 알 수가 없고 오늘 일진이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얼떨떨한 기분으로 온갖 봉변을 골고루 당하고서야 겨우 극성맞은 어린 스타한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좋을 대로 나를 실컷 써먹은 엘리는 친구하고 같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떠들고 깔깔거리면서 호텔 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렸다.
“기분 풀어. 아직 어린애잖아.”
시무룩한 얼굴로 엘리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서 있는 내 어깨를 비니가 툭 쳤다.
“예쁘고 귀엽잖아. 팬들 입장에선 니가 정말로 복 터진 거야.”
물론 좀 전에 당한 일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게 불쾌해서 엘리를 노려보고 있었던 건 아니다.
“저 여자애…… 누굴 닮았는지 기억이 났어.”
“요즘 애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잖아.”
성의 없이 대꾸하면서 비니가 나를 잡아끌었다.
“엘리스 스톤하고 많이 닮은 것 같아.”
눈매도 그렇고, 성격 종잡을 수 없는 것도 그렇고…… 그때, 내 위에 있던 공연 스텝 한 명이 행, 하고 콧방귀를 날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래를 엘리스 스톤의 반만큼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요.”
엘리가 호텔을 나서자마자 호텔 앞은 순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종일 엘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팬들이 먼저 꺅 소리를 지르며 몰려들었고, 파파라치들도 그 대열에 합세해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경호원들과 호텔 경비원들이 팬들을 밀어가며 어렵게 열어준 길을 따라 승합차로 다가가던 엘리가 차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뭘 잊고 나온 것처럼 발을 한번 구르더니 돌아서서 다시 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엘리?”
페레 씨가 열 받은 얼굴로 엘리를 불렀다.
“잠깐만요. 깜빡한 게 있어요.”
뭘 잊고 나온 걸까? 모자도 썼고, 작지만 핸드백도 들었는데…… 바지를 안 입고 나온 걸 이제 알았나?
엘리가 꼭 나를 향해서 다가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좀 전에 로비에서 같이 사진 몇 장 찍었다고 내가 들떴나 보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엘리가 곧바로 나를 향해 돌진을 하더니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곤 나를 질질 끌고 승합차로 돌아갔다.
“같이 가요.”
“우린…… 우리 차로 갈 건데…….”
그때, 덩치 큰 파파라치 하나가 호텔 경비원을 밀치고 카메라를 엘리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놀란 엘리가 어머! 하고 비명을 지르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사람이 수백 명이나 몰려 있는 곳에서 별로 취향도 아닌 여자애를 끌어안고 다니긴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서 엘리를 끌어안고 파파라치를 밀어냈다. 그리고 엘리를 감싸 안은 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등을 뜯겨가며 어렵사리 승합차에 올라탔다. 외출할 때마다 이 난리를 겪는 거라면 페레 씨가 그렇게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근사한 남자는 대체 어떻게 낚았어요? 처음에 어떻게 만난 거예요?”
경호원들이 몰려드는 팬들을 떼어내고 간신히 승합차 문을 닫자마자 엘리가 숨 돌릴 틈도 안 주고 나를 몰아쳤다. 내가 루크를 처음 만난 건…….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비니가 잘 쫓아오고 있나? 차가 안 보이는데…… 저 뒤차에 타고 있는 건가?
“궁금하잖아요? 짭새하고 마피아 두목의 러브스토리라니…… 영화 같아요.”
“게다가 루크 첸은 진짜 미남이잖아요. 그런 남자를 대체 어떻게 꼬셨어요?”
엘리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옆자리에 앉은 멜이란 친구까지 방방 뛰면서 나를 다그쳤다.
“그 오빠 중국집에 밥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어.”
“그리고요?”
“그리고 그 자식이 경찰서에 조사 받으러왔을 때 한 번 더 마주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소녀가 꺅…… 하고 환성을 질렀다.
“완전 영화야! 너무 로맨틱하다!”
로맨틱한가? 난 전혀 모르겠는데…….
언제 반했냐? 첫 키스는 언제냐? 좋아한다는 고백은 누가 먼저 한 거냐? 만난 지 백 일되는 날 선물로 뭐 받았냐…… 나를 가운데 앉혀 놓고 둘이 흉악범 족치듯 숨 쉴 틈도 안 주고 압박 심문을 했다. 엘리는 나중에 인기 떨어지고 할 일 없어지면 경찰을 해도 잘 하겠다.
“그 오빠는 침실에선 어때요? 거칠어요? 아니면 부드러워요?”
“누가 탑이에요? 하룻밤 최고 기록은 몇 번이예요?”
질문의 수위가 점점 민망하고 난감해져갈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핑계로 둘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서 놓여난 건 일단 다행이었다. 하지만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발신자가 루크였다. 무슨 일이지? 근무시간엔 전화 잘 안 하는데……
“예. 반장님…….”
잔뜩 소리를 죽이고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수화기 건너편에서 넘어온 음성은 거칠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뭘……요? 저 지금 일하는 중인데요.”
「일하는 중인데 왜 호텔 앞에서 반 벗은 여자애를 끌어안고 돌아다녀?」
헉…… 그걸 어떻게? 호텔 떠난 지 이제 10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너, 내 뒷조사 하냐?”
「뒷조사는 무슨 뒷조사야? 지금 TV에 줄창 나오고 있는데!」
아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
「너, 나한테는 출근한다고 하고 계속 딴 짓 하면서 돌아다녔던 거야? 바람 피냐?」
“무슨 소리야? 일하는 중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다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엘리와 멜이 내가 누구랑 통화하고 있는지 눈치 챘다. 둘이 사냥감을 노리는 어린 늑대처럼 호기심과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데,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루크의 언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일은 무슨 일? 그 금발머리가 사람이라도 죽였어?」
“어머, 질투하나 봐. 목소리도 섹시해!”
“귀여워!”
요즘 십대들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루크가 뭐 하는 놈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던데 섹시하다는 둥, 귀엽다는 둥…… 이게 무슨 망발이냐?
「지금 어디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루크가 귀엽게 짜증을 냈다. 하지만 녀석이 아무리 보채도 지금은 길게 통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중에 얘기해. 지금 바빠.”
그렇게만 말하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엘리가 사냥감한테 달려드는 맹수처럼 나를 덮쳤다.
극성맞고 경우 없는 십대 여자애 둘한테 잠깐 깔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셔츠 단추는 두 개나 떨어졌고, 휴대폰은 벌써 엘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게 십대의 친화력인지, 뻔뻔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얘들이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함부로 덤비는지 모르겠다.
“남자친구 맞네. 발신자 이름이 첸이야.”
“어머, 재미없어. 첸이 뭐니?”
“폰도 엄청 후졌어. 우리 할머니도 이런 거 안 써.”
엘리가 한심하다는 듯 타박하며 내 휴대폰을 멋대로 주물렀다. 전화기가 너무 후져서 기능을 하나도 모르겠다는 둥, 포토 앨범에 이상한 사진만 잔뜩 들었고, 루크 사진은 한 장도 없다는 둥…… 내 남친이 이러면 바로 끝장이라는 둥…… 이러면서 둘이 머리를 맞대고 또 무슨 궁리가 한창이었다.
“니 폰으로 사진 좀 검색해봐. 잘 나온 거 한 장 찾아서 이리 보내.”
“사진이 의외로 몇 장 없네. 그래도 전부 경찰서 드나들 때 찍힌 거라서 슈트발 죽이는데? 어머…… 이 제냐 셔츠는 스타일리스트들도 못 구해서 발을 동동 구르던 건데, 이 오빠가 입었네? 와인색, 너무 잘 받는다.”
둘이 그렇게 찧고 까불면서 남의 휴대폰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고 있는데 또 벨소리가 울렸다. 둘이 하고 노는 걸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벨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화기 이리 내.”
내 점잖은 기기 반환 요구에 엘리가 대답 대신 발을 번쩍 들어올렸다. 엘리는 굽 높이가 12센티미터 정도 되는 킬힐을 신고 있는데, 그게 내 눈엔 구두가 아니라 흉기처럼 보였다. 게다가 바로 코앞에서 저렇게 짧은 바지를 입고 다리를 들어 올리니까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킬힐을 번뜩이며 접근을 막은 엘리가 당당하게 내 전화를 받았다.
“루크?”
「너 누구야?」
“엘리라고 해요.”
「왜 니가 전화를 받아?」
“당신 남자친구는 내가 며칠 빌렸어요. 앞으로 이삼 일은 집에 못 들어가니까 그렇게 알아요.”
「뭐가 어째?」
“왜 화는 내고 그래요? 잘 데리고 놀다가 곱게 돌려줄 텐데…….”
천하의 루크 첸도 천방지축 10대 여자애는 당할 도리가 없는지 전화기 저편에서 쌕쌕 숨소리만 거칠었다. 엘리야 순전히 장난으로 이러는 거지만, 루크가 열 받으면 감당은 고스란히 내 몫이다. 그래서 엘리의 다리를 밀어 치우고 전화기를 찾아왔다.
“왜 또?”
「그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애는 대체 누구야?」
“엘리 크로우라고…….”
「걔가 살인범이야?」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하다. 어른답지 못하게…….
“가수야. 공연 끝날 때까지 신변 경호가 필요하다고 해서 같이 있는 거야.”
「경호라니? 넌 강력반이잖아.」
“요즘은 아니야.”
내가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루크도 잠잠하니 말이 없었다. 눈치가 빠르니까 복잡한 일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건 좋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몰라.”
「무슨 소리야? 모른다니?」
“이동 중이야.”
차는 어느새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화보 촬영이 있다더니 경치 좋은 데를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외곽으로 나와서는 일정대로 움직인다고 해도 공연장으로 가는 길이 막힐 텐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그러게 왜 복직한다고 고집은 피워서 그런 허드렛일을 하고 다녀?」
“나중에 얘기해.”
아직도 기분이 안 풀렸는지 루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내가 금발머리 여자애하고 놀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으니까 이젠 시비 거리가 없다.
“끊을게.”
공연히 눈치가 보여서 루크를 살살 달랬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다.
「외박은 절대 안 돼!」
차가 도착한 곳은 해안 절벽에 위치한 별장 중 한 곳이었다. 바람 불고 좀 춥긴 하지만 사시사철 사진발 잘 받기로 소문난 곳이니까 화보촬영 장소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별장도 철골 구조에 전면이 유리로 마감된 현대적이고 시원스러운 건물이라서 고풍스런 옛 건물이 많은 이 주변에서는 단연 눈에 띄었다. 그래도 내 마음에 제일 드는 건 건너 건너에 있는 루크의 별장이지만…….
“뭐야? 너 차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뒤차에서 내려선 비니가 내 행색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차 안에서 무슨 짓을 했냐고? 휴대폰 뺐기고, 킬힐에 찍힐 뻔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도 안 당해본 괴롭힘을 당했다.
“앞으로는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나 좀 지켜. 쟤네들 손에 뜯겨 죽는 줄 알았어.”
“엘리 크로우가 이랬어?”
비니가 삐뚤어진 옷깃과 엉클어진 머리를 만져주면서 물었다. 둘이 비슷하게 극성이었지만 주범은 확실히 엘리였다.
“응. 보기보다 애가 거칠어.”
“미안해, 제이.”
비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으며 뜬금없이 사과를 했다. 뭐가 미안한데?
“난 니가 댄서만 하나 엮어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과소평가했어. 역시 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매력이 철철 넘치는 놈인가 봐.”
난 또 무슨 소리라고…….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톱스타 경호란 건 별 게 없었다. 호텔을 빠져나올 때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그 외엔 아직까지 일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잡지사에서 미리 섭외해 놓은 경치 좋은 별장에 따라와서 엘리가 인터뷰하고 사진 찍는 걸 두 시간 정도 구경하고 있으려니 왜 페레 씨가 비니랑 나를 보고 그렇게 당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커피하고 쿠키 먹어가며 노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복귀가 너무 일렀는지 그렇지 않아도 점심때만 지나면 컨디션이 급격히 떨어지고 머리가 멍해져서 곤란하던 참이었다. 이러다 기력 떨어져서 며칠 쉬겠다고 하면 반장이 이참에 아예 사직서를 받으려고 덤빌 것 같아서 내색도 못하고 쉬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린이 보고 싶다. 기린하고 하룻밤만 같이 잤으면…… 아직 어린앤데다, 옆엔 저승사자 같은 남자친구까지 붙어 있지만 너무 기력이 없으니까 요즘은 상사병 걸린 것처럼 기린 생각이 간절했다.
“왜?”
커피를 마시다가 퍼뜩 깨달음이 와서 고개를 번쩍 들자 비니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린이 옆집에 있어.”
“걔가?”
“루크가 자기 별장을 빌려줬거든. 바로 한 집 건너야.”
잠깐 가서 뽀뽀 한번 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서 바로 마음을 접었다. 녀석은 공짜로는 일을 안 한다. 발렌타인이 허락을 해줄 것 같지도 않고…… 결국 기력 회복의 해결책은 자오가 엄마한테 부탁해서 지어다 준 한약밖에 없는 걸까?
“옷이 하나같이 다 할머니 옷 같아. 좀 더 눈에 확 띄고 화끈한 거 없어요? 나는 열아홉 살이란 말이에요!”
아까부터 옷 한 벌 갈아입을 때마다 징징대던 엘리가 속옷 바람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기 도착한 이후 계속 관찰한 결과, 엘리는 치마가 다리를 조금만 덮으면 저렇게 펄쩍 뛰면서 잡지사에서 나온 직원들의 속을 뒤집고 있었다.
“게다가 별장은 이게 또 뭐야? 이쪽 해안은 소문난 호화별장지라면서, 기껏 빌린 건 볼 거라곤 유리창밖에 없는 창고잖아? 이럴 거면 차라리 호텔에서 촬영을 하지, 뭐 하러 여기까지 나온 건데?”
“진정해, 엘리. 어쨌든 다섯 시까지는 끝내야 돼.”
보다 못한 멜이 매니저의 눈치를 보면서 엘리를 구슬렸다. 하지만 엘리는 오늘 촬영에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싫어! 내가 왜 이렇게 후진 옷을 입고, 이런 창고에서 창문에 혼자 붙어서 입 벌리고 사진을 찍어야 돼? 지난달에 모니카는 천만 불짜리 요트 위에서 맥스하고 커플로 화보를 찍었단 말이야!”
소문으로만 듣던 엘리 크로우의 행패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자니, 그래도 아까 차 안에서는 되게 인간적이었던 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니카 같은 음치 땅꼬마도 요즘 제일 잘 나가는 헐리웃 핫가이하고 커플 화보를 찍는데, 난 뭐가 모자라서 이런 몰골이냐고?”
“맥스는 진짜로 모니카 남자친구잖아.”
멜의 핀잔에 엘리가 들고 있던 소파 쿠션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게 제일 짜증나!”
엘리의 투정과 짜증에 결국 매니저와 잡지사에서 나온 사진작가가 항복 선언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30분 휴식시간을 갖기로 했다.
잠깐 쉬면서 초콜릿 덩어리나 다름없는 찐득한 컵케이크 하나를 먹어 치우고 나서야 엘리가 얼마간 진정된 얼굴로 손가락을 빨았다. 엘리가 간식을 먹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동안 나는 비니를 엄폐물 삼아 구석에 박혀서 창밖을 내다봤다.
초겨울 해는 짧다. 이제 세 시도 안됐는데, 벌써 해가 서편으로 많이 넘어간 데다 날이 흐려서 느낌은 이미 저녁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원시림처럼 잡목과 덩굴이 우거진 해안 절벽과 잘 손질된 별장의 정원도 지금은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서 주변 풍경은 한겨울보다 오히려 더 볼품이 없었다. 그 와중에 언뜻 보이는 루크의 별장 정원만 나뭇잎은 푸르고, 백화가 만발하고…… 저게 사과나무였나? 전엔 있는 줄도 몰랐던 웬 나무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사과가 잔뜩 열려 있었다.
“저긴 누구네 집이예요?”
거의 동시에 나하고 같은 걸 본 엘리가 옆에 있던 잡지사 직원한테 물었다.
“저쪽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건물도 예쁘고, 정원도 근사하고…….”
“우리도 처음엔 저 별장을 섭외하려고 했는데 저 집엔 지금 거주자가 있더라고요.”
“있으면 안 돼요? 겨우 몇 시간 쓰는 건데?”
“그래도 싫다는데 어쩌겠어요? 자기들 사는 걸 밖에 내보이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요.”
직원의 대답에 엘리가 힝…… 하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엘리가 또 무슨 트집을 잡을까 겁을 먹은 직원이 얼른 눈앞에 있는 낙원 같은 별장을 섭외하지 못한 사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저 별장 주인은 위험한 사람이에요. 쿠간 시를 꽉 잡고 있는 조폭 두목이죠. 루크 첸이라고…….”
아, 안 되는데…….
공연 막바지라 지치고, 늘 배고프고, 남자친구하고는 지난여름에 헤어지고…… 설상가상 아역배우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모니카란 여자애는 요즘 부쩍 예뻐지고, 영화도 대박 터지고, 남자친구는 잘 나가고…… 그런 저런 스트레스로 미쳐가던 엘리가 나를 목표로 성큼성큼 다가왔고 나는 속절없이 밀려서 바다를 향해 난 유리창에 붙어 섰다.
“루크한테 전화해서 별장 좀 쓴다고 해요.”
“저 별장은 지금 입주자가 있어.”
“집주인이 루크 첸이라면서요?”
“누구한테 잠깐 빌려줬어.”
“집주인이 허락하면 빌려 쓰는 사람들이 뭘 어쩌겠어요.”
“그 입주자도 되게 위험한 사람이야.”
나는 발렌타인하고 기린이 잘 놀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몰고 가서 둘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 불편한 루크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도 싫고, 이 별장에서 사진 촬영을 못 할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여기 있는 짐하고 사람을 다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다.
“별장 빌려줘요. 루크 첸이 아저씨 애인이라면서요?”
엘리가 벌컥 성질을 냈다. 하지만 아까 호텔로비에서 당한 봉변이 하도 충격적이라서 이렇게 떠드는 정도는 쪽팔린 것도 모르겠다.
“쉬는 시간 다 끝났으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해. 네 시 반엔 출발해야 시내로 돌아갈 수 있어.”
“정말 이럴 거예요?”
“내가 뭘?”
엘리가 앙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을 때는…… 솔직히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티내면 지는 거다. 그리고 스텝들은 한솥밥 먹는 처지니까 이 여자애 눈치도 보고 행패도 받아주는 거지만, 시한부로 파견을 나온 데다 월급도 시에서 받는 나는 그럴 이유가 없다. 나는 강력반 형사다. 그러니까 쫄지 말자.
엘리가 악마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가 이긴 걸까? 지금 상황만 봐선 그런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잠깐의 휴식을 마치고 재계된 화보 촬영에서 엘리는 처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더는 의상 디자인이나 치마 길이를 두고 촬영 스텝과 실랑이를 벌이지도 않았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포즈나 얼굴이 갸름하고 예뻐 보이는 각도를 고집하지도 않았다. 엘리가 협조적으로 촬영에 임한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한 시간 만에 마지막 의상의 촬영 준비가 마무리됐다.
“남자친구한테서 전화 안 왔어요?”
몸에 빈틈없이 들러붙는 베이지색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매만지던 엘리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우린 본래 전화 자주 안 해.”
“이상하다. 전화 올 텐데…….”
아까 차에서 전화가 두 번이나 오니까 나하고 루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질을 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내가 갑자기 TV에 나오니까 놀라서 그랬던 거지, 아까 같은 일은 드물다.
엘리가 피식 웃으며 마지막 촬영을 위해 사진작가와 2층에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굳이 2층까지 따라갈 건 없을 것 같아서 커피를 한잔 더 마시려고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간식으로 나왔던 도넛이 아직 남았나 싶어서 도넛 박스를 뒤적이고 있는데 안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이 윙…… 하고 몸을 떨었다.
전화기를 꺼내서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놀라서 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루크한테서 온 전환데, 그래서 놀란 건 아니고…… 액정에 가득 찬 이 사진은 대체 뭐냐? 게다가 ‘자기야~♥’ 라니…… 나는 이런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생각하다가 아까 차 안에서 엘리하고 멜이 허락도 없이 전화기를 멋대로 주물렀던 게 생각났다. 그렇게 키득거리면서 무슨 짓을 하나 했다. 하여튼 애들이라니…….
“무슨…….”
「거기 어디야?」
루크가 버럭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녀석의 언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좀 떨어진 곳에서 촬영용으로 놓여 있는 신상품 구두를 구경하고 있던 비니가 내 쪽을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어디냐고 묻잖아!」
“어딘지는 알아서 뭐하게?”
「한번만 더 묻겠어! 어디야?」
목소리가 하도 커서 전화기를 틀어막고 복도로 나오고 말았다.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해안 절벽이야. 니 별장 바로 옆인데…….”
「기다려. 바로 갈 테니까.」
“못 기다려. 좀 있다 다시 시내로…….”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어졌다. 와도 허탕칠 텐데…….
엘리가 깽판 안 치고 고분고분 협조한 덕분에 촬영은 예정보다 30분 일찍 끝났다. 그렇게 생긴 얼마간의 자투리 시간에 촬영 스텝들이 준비해온 케이크와 샐러드를 테이블에 차렸고, 고생한 사람들이 그 주변에 빙 둘러섰다. 그리고 사람들을 고생시킨 엘리도…….
그렇게 옷 타박을 해대던 엘리도 마지막 드레스는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테이블에 붙어 앉았다. 엘리의 드레스는 옷깃이 목까지 올라오고, 치맛자락이 거실을 다 덮을 것 같은 길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신한 구석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희한한 옷이었다. 조신은커녕 재질이 온통 베이지색 레이스라서 애가 옷을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분간도 안 될 정도였다. 옷감을 저렇게 많이 쓰고도 이렇게 휑한 옷을 만들다니…… 디자이너도 참 대단한 직업이다.
“얘가 미쳤나 봐. 그 케이크 당장 안 내려놔?”
엘리가 치즈 케이크 절반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자 멜이 달려들어서 접시를 낚아챘다. 케이크를 맛도 못 보고 강탈당한 엘리가 발끈해서 포크를 나이프처럼 움켜잡았다.
“이리 내놔! 난 저녁에 세 시간짜리 공연이 있단 말이야!”
“그 공연을 브라톱하고 마이크로 미니 팬츠만 걸치고 한다는 걸 잊지 마.”
“나도 뭘 먹어야 기운을 낼 거 아냐?”
“이거 먹어.”
멜이 양상추하고 삶은 닭 가슴살이 몇 조각 섞인 샐러드 접시를 틱 밀어 보냈다.
“장난해? 내가 이딴 거 먹는 거 봤어?”
엘리가 샐러드 접시를 도로 밀어 보내며 으르렁거렸다. 내 생각에도 저녁에 세 시간 넘게 춤추고 노래하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지만 멜의 태도는 단호했다.
“공연도 오늘 내일이면 끝이잖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일 저녁에 다 쓸어 먹어.”
“웃기지 마!”
“또 아랫배 불룩 나온 사진 찍혔다고 신경질 내면서 사람 돌게 만들면 난 다시는 너랑 안 다녀!”
멜의 엄중한 경고에 엘리가 주춤했다.
결국 케이크를 포기한 엘리가 시무룩한 얼굴로 턱을 괴고 앉아서 포크로 닭 가슴살만 꾹꾹 찔렀다. 연예인 경호원 노릇이 이제 반나절이라 이 직업의 고충을 다는 모르겠지만, 한참 먹을 나이에 몸매 관리하느라 쫄쫄 굶고 있는 건 정말 딱하다.
“루크네 별장이요…….”
멜이 만만치 않으니 이제 나를 잡을 심산인지, 엘리가 음산한 눈길로 나를 슥 쳐다봤다.
“왜?”
“잠깐 가서 구경만 해요.”
“안 돼.”
“애인이라면서, 별장 구경도 못해요? 루크하고 사귀는 건 맞아요?”
바로 옆이니까 잠깐 가서 구경하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 없어. 30분 안엔 출발해야 공연장에 탈 없이 도착할 거야.”
계속 안 된다는 말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이 금요일인 걸 생각하면 더 서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새 사랑이 식은 건 아니고요?”
다시 심술보가 터진 엘리가 또 시비를 걸었다. 루크의 별장에서 촬영하고 싶다는 걸 내가 안 된다고 한 이후, 계속 나한테 감정이 안 좋다.
“엘리!”
보다 못한 페레 씨가 엘리를 말려봤지만 예의범절은 밥 말아 먹은 지 오래된 팝스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혹시 진즉에 차인 거 아니에요? 아니면 루크는 미지근한데 아저씨가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거든지…….”
“그놈이 나한테 매달린 거야.”
“그런데 왜 별장 구경하는 것도 그렇게 눈치를 봐요? 게다가 여태 전화도 한 통 없고…….”
전화가 오긴 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리로 오겠다는데…… 어차피 길이 엇갈릴 거니까 그 전화는 안 온 거나 마찬가지다.
“아저씨들은 바빠. 그리고 아무리 한가해도 니네들처럼 하루 종일 전화통 붙들고 수다 떨면서 시간을 보내진 않아.”
내 대답에 엘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날렸다.
“진짜 실망이야. 당장 달려오진 못해도 전화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뭔가 음모의 냄새가 난다. 엘리가 저렇게 루크의 반응을 계속 체크하는 것과 루크가 갑자기 당장 이리 오겠다면서 펄펄 뛰는 상황이 아무런 연관도 없을까? 이건 짭새 본능까지 갈 것도 없는 문제다. 엘리가 루크한테 무슨 짓을 했다. 대체 뭘까?
“치즈 케이크 진짜 맛있는데?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엘리의 심술에 나도 앞에 놓인 치즈 케이크 한 조각을 한입에 털어 먹으며 약을 올렸다. 엘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 걱정이 되긴 하지만, 어차피 루크하고는 늦은 밤에나 보게 될 거다. 그때쯤이면 흥분도 가셨을 거고, 어린 여자애가 친 장난쯤이야 간단한 설명 몇 마디면 그냥 웃어넘기고 말 거다.
이따금 장난이 질기고 짓궂어서 탈이지, 루크는 엘리의 농간에 놀아날 만큼 바보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내가 만나본 중 가장 냉철하고 상황 판단이 날카로운 놈이다. 그 좋은 머리와 판단력을 주로 나쁜 짓 하는데 써먹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내 도발에 엘리가 눈을 번뜩이며 콧김을 내뿜었다. 자기는 나한테 온갖 행패를 다 부려놓고는 거슬리는 소리 한마디 들었다고 저렇게 파르르 떨다니…… 성격 정말 안 좋다. 어쨌든, 반응이 바로바로 오니까 보람차고 재미있는데? 살짝 긴장도 되지만…….
“왜 그래? 내일 공연 끝나고 먹으면 되지.”
내가 한마디를 더 붙이자 엘리가 배고픈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쥐더니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자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나이를 먹은 걸까? 요즘 애들은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야, 뭐해?”
멜이 옆에서 엘리의 휴대폰을 넘겨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이미 용건을 마쳤는지 엘리가 작업을 종료하고 의기양양하게 휴대폰을 흔들었다.
“10분 안에 남자친구한테서 전화 안 오면 때려치우고 다른 남자를 찾아요.”
루크한테 문자라도 보냈나 보다. 아까 내 휴대폰을 한참이나 쥐고 주물렀으니 루크의 번호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건 루크한테서 직접 들어요.”
사실, 무슨 짓을 했든 상관없다. 엘리의 시시한 장난에 루크가 낚일 리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그 오빠한테 자꾸 장난 문자 보내지 마. 엮여서 좋을 거 별로 없어.”
“지금 나를 견제하는 거예요?”
겨우 몇 마디 연속으로 주고받은 것뿐인데 잠복근무를 열두 시간은 한 것 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내가 왜 얘하고 이렇게 유치한 말싸움을 하게 된 걸까?
“루크가 나쁜 놈이긴 하지만 어린이는 안 건드려.”
“어린이라니! 어떻게 그런 소릴…….”
엘리가 드레스 앞섶이 터질 듯 빵빵한 가슴을 디밀며 거칠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 가슴의 성분 대부분은 속옷에 우겨 넣은 패드다. 아까 멜이 소품 가방을 뒤져서 말랑한 스펀지를 한 움큼 찾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간 이후, 가슴이 급성장했다.
“난 지금까지 내가 노린 남자는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다고요!”
“나도 마찬가지야!”
자랑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잠시 본분을 망각하고 열아홉 살짜리 신변보호 대상과 아르릉거리고 있을 때 거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 쪽을 힐끔 쳐다만 보고 다시 엘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근엔 누구하고 말싸움을 하든 이겨본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더 작정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십대 애 녀석한테까지 깨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고개를 돌려서 열린 문 쪽을 돌아봤다. 왜 루크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어……?”
처음엔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문 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루크였다. 아니, 어떻게……? 차이나타운은 여기서 한 시간 반 거리다. 그것도 도로가 한가한 시간에 속도위반 딱지를 각오하고 꾹 밟았을 때 그렇다. 루크하고 통화를 한 게 불과 30분 전인데,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온 걸까?
“재미 좋은가 봐?”
루크가 안으로 들어오자 뭔가 공기가 싸늘해지는데…… 이건 그냥 내 기분이겠지?
약간의 트러블은 있었지만 시간 안에 촬영을 잘 마무리한 걸 축하하던 화기애애한 티타임이 삽시간에 냉탕으로 변했다.
나하고 엘리가 말다툼할 때엔 눈길도 한번 안 주고 앞에 놓인 케이크를 집어 먹기 바빴던 스텝들이 어느 순간부터 먹던 걸 내려놓고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키는 걸 보면 이 냉기는 나만 느끼는 게 아닌가 보다. 이런 와중에 엘리하고 멜만 서로를 붙들고 ‘어머, 왔어!’ ‘진짜 왔어!’ 이러면서 팔짝팔짝 뛰었다.
“야, 대체 어떻게…….”
“온다고 했잖아.”
대체 무슨 재주로 차이나타운에서 30분 만에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루크가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에 나도 갑자기 마음이 상해서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이유 불문하고, 녀석의 이런 행동과 눈빛은 불쾌하다. 게다가 나는 녀석에게서 이런 눈총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게 없다.
“저기…….”
엘리의 매니저와 오늘 촬영을 진행한 잡지사 직원이 눈치를 보며 슬슬 다가왔다. 어찌 되었든 사람 많은 데서 루크하고 실랑이를 벌이긴 싫었다. 그래서 문 앞에 버티고 있는 녀석을 밀치고 복도로 나왔다. 이제 보니 복도엔 자오를 필두로 녀석의 측근들 한 떼거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본래 홀가분하게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 녀석들을 다 몰고 여기까지 쳐들어오다니…… 이건 업무 방해다.
“어디 가?”
루크가 내 뒤통수에 대고 험악하게 따졌다. 그래서 나도 녀석을 돌아보며 벌컥 소리쳤다.
“나와! 얘기 좀 하게.”
이 별장은 나한테도 낯선 장소라서 복도에 있는 방문을 한두 개 열어 보다가 창고로 쓰는 것 같은 작고 어수선한 방으로 앞서서 들어갔다.
“왜 왔어?”
“이유를 몰라?”
나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온 녀석이 거칠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침착하자.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전혀 모르겠으니까 말해봐. 대체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쫓아와서 행패야? 그동안 내가 너 때문에 당한 망신이 아직도 모자라? 오늘만 해도 너 때문에 제대로 된 일도 못하고 자기가 공주라도 되는 줄 아는 성질 못된 여자애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것도 아예 못하게 됐으면 좋겠어?”
말을 하다 보니, 그동안 쌓인 울분과 스트레스가 새록새록 터져 나와서 내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루크도 지지 않고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도리어 큰소리야? 뭐 잘한 게 있다고?”
“그러니까 이유를 얘기해보란 말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 그냥 장난이거나, 장난은 아니라도 내가 판단하기에 사유가 전혀 얼토당토않은 거라면 너,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내 엄중한 경고에 루크가 마치 최후의 일격을 위해 장검을 뽑아들 듯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역시나 엘리의 장난 문자 몇 줄에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모양이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고 다니더니 이 자식, 대체 뭐냐?
“엘리 크로우가 무슨 헛소리를 했든, 다 그냥…….”
그간 이 녀석 때문에 격은 곤란하고, 민망하고, 쪽팔린 일을 어제 일처럼 되새기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내 눈앞에 녀석이 휴대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싸늘한 음성으로 으르렁거렸다.
“이게 대체 뭐야?”
남녀가 진득하게 입을 맞추고 있는 전신사진이었다. 액정이 작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는 엘리 같고 남자는…… 커헉…….
당황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건 아까 호텔 로비에서 엘리한테 붙들렸을 때 찍힌 사진이다. 엘리가 갑자기 나한테 달려들어서 끌어안고, 더듬고, 입 맞추고…… 나는 갑작스런 습격에 놀라서 경황없이 엘리를 밀어내고 뜯어내던 그때 찍은 거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장면이 나왔지? 이 사진만 보면 내가 엘리의 팔을 움켜잡고 적극적으로 키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고 진하게…… 얼굴이 제대로 나왔으면 내 표정이 썩어 있는 게 나왔을 텐데, 각도가 안 좋아서 얼굴의 반이 머리카락에 가렸다.
“설명할게.”
침착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떨렸다. 내 약한 모습에 루크의 눈길이 더욱 차가워졌다.
“변명이겠지.”
“이건…… 합성이야.”
난 엘리하고 키스한 적 없다. 입술이 잠깐 맞닿은 적은 있지만 엘리 입장에선 장난이었고, 내 입장에선 봉변이었을 뿐이다. 이 사진엔 진실이 없다. 그러니까 합성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대답에 루크의 표정이 더 거칠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루크가 몇 장의 사진을 연달아 넘겼다. 엘리가 문어처럼 목을 감는 바람에 손목을 잡아서 떼어내는 모습은 마치 엘리의 손목을 꽉 잡아 끌어당기고 있는 것처럼 나왔고, 실랑이 도중에 킬힐 때문에 비틀거리는 엘리를 잡아주는 장면은 호텔 로비에서 대담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찍혀 있었다. 게다가 엘리가 내 허리를 팔로 감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상반신 크로즈업은 나하고 엘리가 정말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분위기가 좋았다. 나쁜 계집애 같으니…… 대체 사진을 몇 장이나 보낸 거냐?
“이것도 다 합성이야?”
“설명할게.”
“거짓말이겠지!”
전세가 삽시간에 뒤집어져서 이젠 내가 지은 죄도 없이 구석에 몰려섰다. 엘리가 루크한테 사진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사진이 저렇게까지 착시효과가 있는 건지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보는 순간 당황했고 내 그런 태도가 루크를 더 기세등등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전세가 기울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진정하고…… 저녁에 얘기해. 난 지금 근무 중이잖아.”
“근무는 무슨 근무! 여자애하고 호텔에서 놀아나는 것도 근무야? TV에서 이 계집애를 끌어안고 돌아다니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도 널 믿은 내가 병신이지!”
애초에 팝스타 경호 같은 이상한 일을 맡았을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냐? 루크한테 이런 바가지를 긁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수습도 난감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막 해? 얘는 이제 열아홉이야. 내가 이런 핏덩이하고 무슨 짓을 하겠어?”
“무슨 짓을 했는지 증거가 이렇게 엄연한데도 발뺌이야?”
나를 구석에 몰아놓고 루크가 대역죄인 문초하듯 다그쳤다.
“이럴 일이 아니야, 루크. 그건 걔가 친 장난이라니까?”
내가 왜 루크한테 이렇게 쩔쩔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 번씩 과격하게 싸울 때도 있지만, 어린애 장난에 휘말려서 낯선 집 골방에서 이러고 있는 것도 믿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대체 니 행실이 어쨌기에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여자애가 나한테 이런 장난을 쳐?”
루크의 행실 운운에 나도 발끈했다. 행실이라니? 상황이 오해를 할 만도 해서 일을 원만하게 해결해볼까 했더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냐?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잘못한 것도 없어. 사진 몇 장 이상하게 찍힌 걸 갖고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뭐가 어째?”
“게다가 행실이라니? 엘리는 오늘 아침에 처음 본 애야. 내가 만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여자애하고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내 항의에 루크가 다시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신경질이 나서 녀석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서 방구석에 던져버렸다.
“사진은 집어치우고 생각을 해봐. 내 성격을 몰라? 겪어봤으면 내가 그렇게까지 붙임성 좋은 성격이 아닌 건 너도 알 거 아냐?”
내 평생에 누군가를 이렇게 이성적으로, 성의껏 설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도 이렇게 웃기는 일로는…… 하지만 루크는 내 말에 더욱 끓어올랐다.
“그래서 더 열 받아! 너, 나는 그렇게 공을 들이고 온갖 뒤치다꺼리를 다 해줘도 몇 달을 두고 애를 먹이더니, 얘하고는 만나자 마자 이렇게 물고 빨아? 게다가 나는 사람들 많은 데서는 아는 척만 해도 질색을 했잖아! 상대가 여자고, 금발이고, 열아홉 살이면 이러는 거야?”
더는 루크하고 얘기 못하겠다. 루크는 지금 누구하고도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나도 루크도 열만 받고, 이 골방에서 밤을 샐 것 같아서 녀석을 밀치고 방을 나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뭐냐? 이 인파는…… 루크의 부하 녀석들을 필두로 비니, 엘리, 멜, 페레 씨, 그 외 촬영 스텝들로 복도가 마치 출근길 지하철처럼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디 가?”
루크가 버럭 소리를 치면서 따라 나오다가 내 등 뒤에 멈춰 섰다. 엘리가 마치 월척을 낚은 낚시꾼처럼 루크를 향해 씨익 웃었다. 돌아보니 루크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엘리를 노려보고 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루크가 엘리를 붙들고 싸움이라도 벌이면 쪽팔려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냐?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비니 쪽으로 다가갔다. 둘도 없는 내 절친한 친구, 그리고 오늘 종일 나하고 같이 다니면서 모든 정황을 빠짐없이 목격한 정직한 증인…….
“니가 말 좀 해줘. 넌 아까 그 상황을 다 봤잖아!”
내 다급한 구조요청에 비니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난, 뭐…… 좋아 보이던데?”
비니는 나하고 루크가 한시바삐 찢어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놈이라는 걸 깜빡했다.
루크를 만난 이후 가끔 이 비슷한 악몽을 꾸긴 했지만, 현실이 꿈보다 더 가혹하다. 루크가 열 받아서 씩씩거리고 있는 건 이제 신경도 안 쓰인다. 그저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 게이 사랑싸움을 구경하려고 몰려와 버티고 있는 이 상황이 쪽팔려서 정신을 못 차리겠다. 그때 자오가 앞으로 나오더니 내 어깨를 툭 쥐어박았다.
“그냥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고 끝내.”
“난 잘못한 거 없어!”
“없어도 그냥 해. 시간 끌어봐야 너만 힘들어져. 우리 회장님은 수치를 모르잖아.”
그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이번 일로는 루크한테 사과하기 싫다. 우선 사과를 할 만큼 잘못한 것도 없고, 미안하단 소리 잘못 꺼냈다가는 내가 진짜로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 없는 죄를 뒤집어 쓸 판이다.
“우리도 쪽팔리니까 빨리 정리하자.”
자오가 재촉하며 나를 다시 루크에게로 밀어 보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루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뿐이다.
“유치해!”
“유치하다고?”
“내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쟤하고 그렇고 그런 사진을 몇 장 찍었다고 해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이 값을 좀 해! 열아홉 살짜리 어린애한테 질투라도 하는 거야?”
루크가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지금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야?”
내 판단으론 잘잘못 가릴 일 자체가 없었다.
“그만하고 가! 일하는데 쳐들어와서 대체 뭐하는 거야? 이런 식이면 나도 언젠가는 니가 일하는데 타격대 몰고 가서 부스러기 한 놈 안 남기고 싹 잡아들이고 말 테니까 알아서 해!”
루크는 애초에 열 받은 상태로 도착했고, 나도 속이 끓어서 맞짱을 뜨다 보니 분위기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자칫하면 서로에게 주먹이라도 날릴 정도로 공기가 험한데…… 어디선가 찰칵찰칵하는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던 루크하고 내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범인은 엘리였다. 갑자기 쏟아진 우리 둘의 눈총에 놀란 엘리가 휴대폰을 슬그머니 내렸다.
“인증사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물론 남자들이 나를 두고 싸우는 건 자주 있는 일이지만…… 대부분 학교 친구들이나, 댄서들이었거든요.”
“너 때문에 싸우는 거지, 너를 두고 싸우는 건 아니거든?”
루크도 어이가 없는지 기세가 한풀 꺾였다. 반면 엘리는 여유가 넘쳤다.
“사진으로 보면 그게 그거죠, 뭐…….”
루크가 나를 밀고 엘리한테 다가섰다. 그러자 자오도 세상을 짊어진 듯 피곤한 표정으로 루크 옆에 붙었다. 피도 눈물도 없게 생긴 자오도 부끄러운 걸 아는데, 왜 루크는 그런 걸 모를까?
“조심하세요, 회장님. 엘리 크로우예요.”
자오가 루크를 붙들어 세우며 조용히 타일렀다.
“엘리 크로운데, 뭘 조심해?”
“누군지는 아시죠? 잘못 건드리면 팬들한테 뜯겨 죽어요.”
“걱정 마. 안 건드려.”
그렇게 잘라 말하고 루크가 엘리와 마주섰다.
나는 엘리하고 달라서 학교 다닐 때든, 졸업한 이후든 남자들이 나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던 적은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치어리더나 예쁜 여자애를 놓고 모자란 친구들이 치고받는 걸 가끔 구경은 했지만…… 그런데 다 늦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한 명은 암흑가 거물, 한 명은 공연 한 번에 정원 삼만 명의 경기장을 꽉 채우는 팝스타. 루크는 뭘 하다 왔는지 빈틈없는 정장차림이고, 엘리는 화보촬영용 드레스와 공들인 메이크업으로 당장 무도회에 달려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렇게 보고 있으면 바람은 저 둘이 피우는 것 같다.
“그동안 게이 커플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뜨거운 사이는 처음 봐요. 저 아저씨를 정말 사랑하나 봐요?”
“그게 궁금해서 이런 장난을 친 거야?”
“장난인 걸 알아도 그렇게 화가 나요?”
엘리가 그렇게 받아 넘기며 루크를 위아래로 한번 짝 훑었다. 생각해보니 엘리는 처음부터 루크한테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나를 미끼삼아서 루크를 낚은 거다. 나이 치곤 상당히 능수능란하다.
“장난으로라도 건드리지 마. 난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건 못 참아. 남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루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렇게 지껄이는데, 나는 이대로 땅이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부끄러웠다. 자오와 다른 녀석들도 얼굴이 벌겋게 달았고, 스텝들 사이에서도 흠…… 하고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장 가! 창피해!”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무서워서 루크의 팔을 잡아끌었다.
“내가 창피해?”
“어린애 붙들고 대체 무슨 헛소리야? 일단 가! 공연만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뭐가 됐든 나하고 얘기해!”
“넌 잘못한 거 전혀 없다며?”
“내가 잘못했어! 이제 됐냐?”
“아니, 진정성이 전혀 없어.”
나쁜 놈!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린다. 화가 치밀어서 덜덜 떨고 있는 나를 자오 쪽으로 밀치고 루크가 다시 엘리와 마주섰다.
“너 말이야…….”
“좋겠어요. 저렇게 귀여운 남자친구가 있어서.”
“남의 남자 넘보지 말고 딴 데 가서 알아봐.”
“내일 저녁때까지는 내 남자죠. 내 경호원이고, 나하고 계속 같이 있을 거니까.”
“…….”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루크가 나를 돌아봤다. 계속 같이라…… 글쎄?
“공연 끝내고,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나서 퇴근할 거니까…… 늦어도 열두 시면 들어갈 거야.”
열두 시도 못마땅한지 루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공연 끝나는 시간에 호텔까지의 거리, 또 호텔에서 차이나타운까지 가는 시간을 따져보면 그보다 더 빠른 퇴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엘리는 그것도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요즘 스토커들이 늘어서 얼마나 무서운데요. 공연 끝나고 나면 호텔까지 쫓아오는 팬들도 수백 명인데, 그중에 누가 끼어 있을지 어떻게 알아요? 게다가 난 특히나 밤에 예민해지는 체질이라고요.”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팝스타라면서 개인 경호원도 없어?”
“있긴 있지만, 귀여운 경호원은 드물거든요.”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섭다고 땡깡 피우면서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면 붙들려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루크가 하는 짓을 보면 하루 정도 외박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고…….
엘리의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대거리에 루크가 심호흡을 했다. 루크도 고약한 구석이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공주님 대접을 받고 자라서 두려움을 모르는 팝스타의 건방도 만만치 않아서 둘의 대결이 의외로 박빙이었다.
루크가 팔짱을 끼고 엘리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뭔가 엘리하고 협상을 하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그렇게 심술을 부린 거였나? 엘리가 원하는 거라…….
“저 옆에 있는 별장이 오빠 거라면서요?”
“그런데?”
“한 시간만 빌려줘요. 촬영도 하고, 구경도 하게…….”
엘리의 당당한 요구에 루크가 허탈하게 웃었다.
“니가 뭐가 예뻐서?”
“남자친구는 바로 퇴근시켜줄게요.”
난 지금 당장 루크하고 같이 차이나타운으로 돌아갈 기분이 아닌데…… 그리고 나의 상관은 반장이지 엘리가 아니다. 반장이 공연 끝날 때까지 신변 경호를 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하는 거지, 중간에 엘리가 가란다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루크는 벌써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대로 나를 끌고 가서 족칠 생각을 하니 좋은 모양이다.
“그럼…….”
“당신이 촬영을 좀 도와주면 내일 출근 시간도 조정 가능해요. 내일은 다른 스케줄도 없고, 공연은 오후 일곱 시 반이니까…… 다섯 시 어때요?”
이건…… 좋은데?
“촬영을 도와달라니?”
“커플샷 몇 장만 같이 찍어요.”
엘리의 제안에 루크가 나를 힐끔 돌아봤다. 저 비열한 미소의 의미는 뭘까?
“좋아!”
흔쾌히 엘리의 조건을 수락한 루크가 너 두고 보자는 듯 나를 슥 노려봤다. 그리곤 부하들을 끌고 앞장서서 밖으로 나갔다.
촬영은 주로 정원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진행됐다. 루크의 별장은 본래부터 이 해안 절벽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었지만, 기린의 신혼집이 된 지금은 이름도 모를 온갖 꽃에, 아름다운 새에, 벌 나비까지 몰려들어서 신선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 덕분에 사과나무 아래에서 루크가 엘리를 끌어안고, 엘리는 손을 뻗어 사과를 움켜잡는 장면은 마치 아담과 이브의 상류층 버전처럼 보였다.
“둘이 대체 뭘 하는 거야?”
발렌타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촬영하는 걸 구경하던 기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 찍잖아.”
“그새 새 여자친구라도 사귄 거야?”
“그냥 사진만 찍는 거야.”
내 목소리가 왜 이렇게 시무룩할까? 두 사람은 그냥 사진을 찍고 있는 것뿐인데…….
기린은 자기 집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는 별장에 수십 명의 외부인이 갑자기 들이닥친 걸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주인이 밀고 들어오는 걸 막을 명분도 없어서 정원 구석에 물러서서 이 사람들이 볼 일 다 보고 빨리 나가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 여자애는 누구야? 모델치곤 좀 작은데…….”
발렌타인이 물었다. 발렌타인은 이제 기린한테 안겨 있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건강이 많이 좋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사랑이 좋은 건지 20대 청년처럼 얼굴에서 빛이 반짝반짝 났다.
“엘리 크로우라고…… 가수야.”
“예쁜데?”
“…….”
루크하고 엘리는 장소를 옮겨서 넝쿨장미가 미친 듯이 피어 있는 테라스 난간 앞에서 서로를 칭칭 휘감고 있는 중이었다. 패션 화보라더니, 엘리는 걸친 것도 얼마 없고 루크는 그나마 입고 있던 슈트 재킷도 벗어 던졌다. 그리곤 계속 서로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면서 30분째 저렇게 치대고 있었다. 엘리는 친구들한테 자랑할 인증샷이 목적이고, 루크는 나를 열 받게 하려고 더 저런다. 속셈은 다 알지만, 그래도 기분은 별로다.
“지금 저 여자한테 한 눈 파는 거야?”
기린이 투덜거리며 발렌타인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하지 마. 사람들이 보잖아.”
할 거 다 하고 나서 발렌타인이 기린을 타일렀다.
“여긴 우리 집이야. 그리고 저쪽도 하는데 뭐…….”
기린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루크하고 엘리는 키스씬이 한창이었다. 유치하기는…….
“아무리 사진만 찍는 거라도, 당신이 다른 여자랑 저러면 난 못 참을 거야.”
기린이 발렌타인을 당겨서 바짝 끌어안으며 내 속을 긁었다. 실수했다. 이 둘 옆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연예인들은 저게 일인데 뭐…….”
발렌타인이 나를 힐끔 보고는 피식 웃었다.
“저 작자는 연예인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루크하고 엘리는 지금도 각도를 바꿔가면서 있는 대로 도발적이고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이었다. 내가 지은 죄라곤 아침에 엘리한테 잠깐 기습을 당해서 5분 정도 붙들려 있었던 게 전분데, 그걸 한 시간 꽉 채운 19금 화보촬영으로 돌려받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한 거다. 게다가 저 둘이 저러고 있는 거야말로 바람이다. 둘 다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엉뚱한 사심이 한 가득이니까……
“나 저녁에 사과파이 만들어줘.”
기린이 귓속말하는 척하면서 발렌타인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뺐다.
“파이는 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당신이 파이 만드는 걸 보는 게 좋거든.”
정말 자리를 잘못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보글거리는데 지척에서 이런 염장이라니……
“용은 어디 갔어?”
말 상대가 아쉬워서 용을 찾았다. 녀석은 이 뜨거운 커플 틈새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집에 갔어.”
집이라니……?
“장로들한테서 소환령이 왔는데, 귀찮아서 그 녀석만 보냈어.”
귀찮은 게 아니라 발렌타인을 두고 가기가 싫었겠지. 그런데 소환령이라니, 시기가 시기인 만큼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소환령이…… 무슨 일로?”
“라두칸 때문이겠지. 애초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온 거니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흑풍회에, 깨달은 종족까지…… 니콜라스는 어딜 가나 요즘 인기 폭발이다.
“니콜라스하고 깨달은 종족은 관계가 어떤 편이야? 적대적이야? 아니면…….”
기사단이나 흑풍회의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해 있는 게 니콜라스에겐 유일한 살 길이다. 깨달은 종족이 어디에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히말라야 정도라면 괜찮은 은신처가 되지 않을까?
“사이는 되게 안 좋아. 장로들이 그자에 대해서 좋은 말 하는 거 한 번도 못 들어봤어.”
오래 살았다더니 그동안 여기저기서 원한만 잔뜩 산 모양이다. 니콜라스 보고 현자라고도 하던데, 대체 어떤 면이 현명하다는 건지 통 모르겠다.
“그럼 니네 종족도 니콜라스를 잡아 죽이려고 찾아다니고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다행스럽게도 기린이 고개를 저었다.
“장로들은 어쨌든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이야. 게다가 제월공은 그자를 되게 보고 싶어 해.”
“깨달은 종족하고 사이가 안 좋다면서?”
“제월공하고는 친해.”
“달랑 그 한 명하고만?”
세상에서 니콜라스를 걱정하는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 싶지만. 한 명은 너무 적다.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제월공이 대장로거든.”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기린이 다시 발렌타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사과 파이 언제 만들어줄 거야?”
“저 사람들 다 가면……”
둘이 하는 게 눈꼴이 시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해가 막 저물어가는 테라스 앞에서는 더 기막힌 꼴이 펼쳐지고 있었다. 루크하고 엘리가 아예 테라스 바닥에 드러누웠다.
최근 들어서 한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루크가 대리석 바닥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엘리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걸 지켜보는 동안엔 되도록 딴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엘리는 그만 공연장에 보내고, 루크는 테라스 아래로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루크.”
그렇게 치대고도 뭐가 모자랐는지 엘리가 루크를 끌어안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나도 재미있었어.”
루크도 엘리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공연장에 같이 가요. 공연 끝나면 호텔에 가서 샴페인도 따고요.”
“다음에. 오늘은 바빠.”
“남자친구하고 같이 가면 되잖아요.”
엘리가 귀여운 표정으로 루크를 한 번 더 졸랐다.
“우린 오늘 굉장히 바쁠 거야.”
루크가 그렇게 지껄이며 나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어쩌면 저렇게 밉상이지?
루크를 붙들고 꾸물거리던 엘리가 결국 매니저에게 끌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니가 나를 돌아봤다.
“어쩔 거야? 저 자식하고 차이나타운으로 갈 거야?”
처음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응.”
어이가 없다는 듯 비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엘리하고 얘기가 됐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할 거야?”
비니한테는 미안하다.
“엘리를 한 대 쥐어박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오늘 할 일은 다 한 거야.”
“제이!”
“오늘만 봐줘. 내일은 내가 니 몫까지 맡을게.”
비니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더는 말도 하기 싫은 얼굴로…… 엘리를 실은 벤이 방금 출발했기 때문에 꾸물거릴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결국 일도, 친구도 버리고 남자친구 옆에 남았다. 좋아서 남은 건 아니지만 비니를 보내고 혼자 남아서 루크를 노려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녀석의 얕은 꾀고 농간이란 걸 다 아는데, 알면서도 넘어가는 나는 또 뭐냐?
돌아보니 루크는 정원 한쪽에 놓인 왕골 소파에 앉아서 부하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뭐 중요한 일이 남았나? 표정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스테이크는 미디엄, 사이드 메뉴는 있는 대로 다 챙겨오고, 술은…… 그냥 맥주 사 와. 제이가 좋아하니까.”
“지금 그 호텔까지 갔다 오려면 한 시간도 넘게 걸릴 텐데요.”
“그럼 애들을 지금 바로 보내.”
“다른 건 안 필요하시고요?”
“달랑 스테이크만 사 올 생각이야? 내일 아침은 굶어?”
“특별히 땡기는 메뉴가 있으신가요?”
분위기가 하도 진지하기에 중요한 일이 있는 줄 알았더니, 뭐냐……?
“알아서 적당히 사 와. 나, 아침은 가볍게 먹잖아.”
“하긴, 어머니도 그러시더라고요. 요즘은 아침을 전보다 많이 못 드시는 것 같다고…….”
“스트레스 탓인가 봐.”
“오래 같이 있다 보니, 회장님이 스트레스 받는 걸 다 보네요.”
그렇게 대꾸하고는 자오가 부하들을 손짓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너는 이 길로 해안 절벽 좀 아래쪽에 있는 호텔에 가서 특제 스테이크 4인분 테이크아웃 해오고, 너는 시내에 있는 식료품점에서 아침거리 알아서 사 오라고 일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대체 뭐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좀 전에 화난 건 잠깐 접어놓고 루크한테 물었다.
“저녁 먹어야지. 넌 배 안 고파?”
그런 본능적인 욕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도 열 받아서…….
“차이나타운에 안 가?”
“한창 막힐 시간인데 굳이 시내로 들어갈 거 뭐 있어?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쉴래.”
루크의 대답에 좀 떨어진 곳에서 촬영 중 스텝들에게 밟힌 풀꽃을 들여다보고 있던 기린이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같이 저녁이나 먹으면서 놀자는 거야?”
“안 될 건 뭐야? 아까 엘리 일로 화 낸 건 사과할게. 내가 너무 성급했어.”
루크가 미안한 표정이라곤 손톱 끄트머리만치도 없는 표정으로 지껄였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 나를 놀리는 거다.
“너…….”
“왜 그렇게 씩씩거려?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거야?”
루크가 비아냥거렸다.
“뭐가 어째?”
“하긴, 넌 이성적이고 성숙한 인간이니까 질투 같은 건 절대로 안 하겠지. 게다가 그 여자애는 겨우 열아홉 살이잖아? 어린애를 상대로 그렇게 유치한 감정을 느낄 리 있나?”
루크가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그렇게까지 이성적이고 성숙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자주 이성을 잃는 편이고, 이성을 잃으면 폭력적으로 변한다. 지금도 그런 증세가 나타나서 잠깐 정신이 나갔다가 되돌아왔을 때엔 루크는 이미 얼굴을 감싸 쥔 채 잔디밭을 뒹굴고 있었다.
“내가 걔랑 치대는 걸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나 봐?”
녀석이 입가에 묻은 피를 소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툴툴거렸다. 반성의 기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 주먹따귀 한 대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래서 이번에도 대답 대신 녀석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아으…….”
루크가 정강이를 붙잡고 구르는 동안 자오가 내 덜미를 움켜잡아서 뒤로 끌어냈다.
“말로 해.”
“이거 놔!”
“침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패든가…… 보는 앞에서 이러면 나도 입장이 곤란해.”
자오의 우악스러운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내가 지금 루크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뿐이다.
“스테이크 먹고 푹 쉬어. 난 먼저 갈 테니까!”
이건 질투가 아니다. 나는 루크의 유치하고 못된 행동에 화가 난 것뿐이다. 그리고 지금 같아선 이 화가 평생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눈앞에서 한 시간을 꽉 채워서 어린 여자애랑 노닥거려 놓고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스테이크 타령에, 또 뭐가 어째? 녀석이 악당인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내 속을 뒤집을 줄은 몰랐다.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헐떡거리면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는데 뒤에서 위협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뭔가가 굉장히 빠르게 나를 향해 돌진해오는 느낌이었다.
이 상황에 나한테 이렇게 덤빌 녀석은 한 놈뿐이다. 내가 끓어오르는 성질을 다 참고 주먹질 한 번, 발길질 한 번으로 넘어가줬는데도 이런다 이거지…… 그렇지 않아도 너무 참아준 것 같아서 걸음이 무겁던 참인데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그 순간, 녀석이 날아서 나를 덮쳤다.
루크의 기세는 마치 먹이를 덮치는 호랑이의 그것처럼 인정이라곤 없었다. 녀석의 공격에 제대로 걸리는 바람에 온갖 풀꽃이 빼곡히 올라와서 마치 화려한 카펫을 깔아 놓은 것 같은 잔디밭을 녀석과 함께 거칠게 나뒹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닥치는 대로 잡아 뜯고, 걸리는 대로 쥐어박는 진흙 밭의 개싸움이 이어졌다.
“나보고 유치하다더니!”
루크가 내 팔꿈치에 정통으로 쥐어 박힌 옆구리를 움켜쥐고는 벌컥 소리쳤다.
“유치하기만 해? 호색하고, 비열하고, 뻔뻔하고…… 이 나쁜 놈아!”
녀석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넘어지면서 얼마나 세게 떨어졌는지, 온 몸이 다 얼얼했다. 등도 아프고 무릎도 아파서 휘청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는데, 녀석이 내 허리춤을 움켜잡고 다시 바닥에 주저 앉혔다. 오늘 나한테 꽤 맞았는데 아직도 매가 모자라나 보다.
몸을 틀어서 녀석의 얼굴에 한 번 더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엔 녀석이 내 주먹을 잽싸게 피하더니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바닥에 찍어 눌렀다. 녀석의 누르기에 딱 걸리고 말았다. 이러면 자력으로는 못 빠져 나가는데…… 게다가 벌써부터 손목이 끊어질 듯 아팠다.
“내가 그 여자애하고 노닥거리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그때 말을 하지 그랬어?”
“니가 엘리하고 사진 몇 장 찍었다고 화내는 거 아니야!”
“거짓말.”
루크가 나를 잡아먹을 듯 음습한 눈길로 노려봤다. 이젠 손목이 저리다 못해서 감각이 없었다.
“이거 놔!”
남은 힘을 다 해서 몸부림을 쳐봤지만 루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본래 힘이 센 놈이라서 몸싸움이 길어지면 나한테는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뭐 이렇게 무겁냐? 마치 바위에 깔린 것 같았다.
“이제 좀 솔직해져 봐. 내가 너 아닌 다른 사람은 쳐다보는 것도 싫다고…… 질투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이 자식이 미쳤나…….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린 그냥 건전하게 치고받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언제 그렇게 위험해졌지?
“너…….”
“왜?”
“하지 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크가 주둥이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그야말로 혼비백산을 해서 몸을 비틀었다. 여긴 사방이 탁 트인 마당 한복판이다. 게다가 주변엔 루크의 경호원들이 쫙 깔렸고, 좀 떨어진 곳에는 기린이 이 꼴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루크가 주변 상황을 감안해서 키스만 한번 하고 나를 곱게 놔 줄까? 수치를 모르는 놈인데다 지금 잔뜩 흥분해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
입술을 된통 깨물리고서야 녀석이 내게서 입을 뗐다.
“하지 말랬지?”
“나도 밤새도록 키스만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놈이 이번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좀 전에 입술 깨물린 걸 분풀이라도 하듯 내 귓불을 꾹 씹었다. 아…….
자력으로 이 위기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누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주변에 있는 거라곤 깡패 겸, 이 녀석의 경호원 녀석들뿐이었다. 그 외엔 인간사엔 관심도 없고 간섭하는 것도 싫어한다는 기린이 한 마리 있고…… 그나마 발렌타인은 어디 갔는지 뵈지도 않았다.
“자, 자오…….”
“왜?”
왜……라니?
“나 좀 도와줘. 구경만 하지 말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 정원에 핀 장미꽃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자오가 마지못해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냥 우리가 비켜줄게.”
“야! 너 정말…….”
그때, 어쩐 일로 루크가 결박이라도 한 듯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을 놔줬다. 이 녀석도 여기서 더 일을 크게 벌일 마음은 없나 보다 싶어서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녀석이 내 바지 버클을 움켜잡았다.
일이 이쯤 되니까 모든 것이 다 후회스러웠다. 질투난다고 곱게 털어놓고 하자는 대로 할 걸…… 엘리가 날린 사진을 보고 열 받아서 쫓아왔을 때에도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마음 풀릴 때까지 달랠 걸…… 아무리 괴롭고 마음이 허전했어도 이런 놈은 사귀지 말 걸……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모두 부질없다. 일단 정신을 차리자.
바지 버클은 풀렸지만 대신 두 손은 자유로웠다. 그래서 급한 대로 루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배 위에서 녀석을 떼어냈다.
“으악!”
머리카락을 한 움큼이나 뜯긴 루크가 정수리를 움켜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꼭 그러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단 녀석에게서 빠져나왔다.
“무슨 짓이야? 나를 대머리로 만들 참이야?”
으르렁거리며 다시 달려들던 루크가 멈칫했다. 내가 총을 빼들었기 때문이다. 본래는 수갑을 꺼내려고 했던 거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다.
“이건 반칙이야.”
총구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자 루크가 마음 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태도는 좀 전에 비해 더 없이 얌전해졌다.
“길바닥에서 남의 바지를 벗기려고 덤비는 것도 반칙이야. 일어서.”
“뭘 어쩔 작정이야?”
“일어서라고!”
버럭 소리치자 녀석이 분을 못 이기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내 손에 총이 들렸을 때엔 녀석도 내 말을 들어야 된다.
“안으로 들어가.”
내가 턱으로 별장을 가리키자 루크의 표정이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안에서 처리할 건가 봐.”
“나 같으면 바닷가로 끌고 나갈 텐데…….”
안으로 터덜터덜 끌려들어가는 루크를 보면서 녀석의 부하들이 한마디씩 참견을 했다. 그러자 자오가 녀석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후려 갈겼다.
“가서 저녁이나 사 와!”
자오가 이제야 부하들에게 저녁 심부름 시키는 게 언짢은지 루크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놈들을 노려봤다. 안됐지만 저녁을 먹일지 굶길지도 내 마음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루크가 거실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이제 어쩔까?”
“뭘 물어? 침실로 가!”
침실로 가라는 내 명령에 루크의 표정이 확 풀렸다. 대신 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기대하고 따라 들어왔던 기린은 정색을 했다.
“거긴 우리 침실이야!”
우리 침실 좋아하네. 내가 루크한테 봉변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목 부러진 난꽃만 들여다보고 있었던 주제에…… 내가 유감 가득한 눈초리로 노려보자 기린이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남의 집에 와서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시끄러!”
계속 뒤에서 툴툴거리는 기린을 버려두고 루크를 침실에 밀어 넣었다.
“이런 플레이도 괜찮은데? 색다르고, 긴장감 있고……”
나한테 떠밀려서 비틀거리던 루크가 침대 앞에서 겨우 중심을 잡고 섰다. 그리곤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콧잔등은 벌겋고, 입술은 터지고, 턱은 퍼렇고…… 이렇게 보니까 진짜 머저리 같다.
“이건 플레이가 아니야.”
일단 총은 선반에 올려놨다. 어차피 녀석을 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녀석도 내 손에 죽을까 무서워서 고분고분 끌려 들어온 건 아니다.
“하지만…….”
루크의 가슴팍을 밀어서 침대에 주저 앉혔다. 그리고 녀석의 턱을 잡아서 시선을 맞췄다.
“한번만 더 그런 짓 하면, 그땐 진짜 죽을 줄 알아.”
“응…….”
녀석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고분고분했으면 귀엽고 좋잖아? 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루크에게 입을 맞췄다.
녀석의 넥타이를 거칠게 당겼다. 그 바람에 목이 졸린 루크가 콜록 기침을 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급하게 풀려다보니까 손이 좀 엇나간 거지. 어쨌든 그렇게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녀석의 셔츠 앞섶을 잡아 뜯었다. 이런 게 취향인지 루크가 입안으로 와우…… 하고 탄성을 질렀다. 엉큼하고, 음흉하고, 하여튼 나쁜 놈…….
몸을 굽혀서 녀석의 목덜미와 쇄골에 입을 맞췄다. 루크의 몸에는 아직도 희미한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녀석도 즐겨 쓰는 향수가 있긴 하지만, 이건 익숙한 무스크향이 아니었다. 약간 달큰하면서도 화사한 민트향이 섞인…… 여기까지 오는 차 안에서 숨이 막히도록 맡았던 엘리의 향수였다. 바람피우고 돌아온 남자친구를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너한테서 여자 향수 냄새 나.”
루크가 엘리하고 비밀스럽게 끌어안고 나뒹굴었던 것도 아니니까 이런 얘기 꺼내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지는 않아서 녀석을 뒤로 밀쳤다. 하지만 이럴 때 말싸움에서 밀리면 그건 루크가 아니다.
“너한테서는 이 냄새 안 나는 줄 알아?”
“…….”
그런가?
“아까 그 별장 거실에서 봤을 때, 니 몸에서도 향수 냄새가 진동을 했어.”
“같은 차 타고 다녀서 그래.”
“호텔 로비에서 키스도 했잖아.”
어쭈?
“너는 저 앞마당에서 걔하고 한 시간을 굴러다녔잖아!”
아까 나무 밑에서 엘리를 끌어안고 실실 웃던 모습이 떠올라서 녀석의 얼굴을 확 밀어버렸다.
바지까지 벗겨서 방구석에 던져버리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루크가 활짝 웃으며 나를 끌어안더니 내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다른 여자 향수 냄새를 풍기는 남자친구라니…… 다음엔 안 참을 거니까 알아서 해.”
언제, 뭘 참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루크가 아까 밖에서 벗기려다 실패한 내 바지 벨트를 움켜잡았다.
루크가 한 손으론 내 손목을 잡아 누르고, 다른 팔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다리는 다리끼리 얽혔고, 혀끝은 서로를 탐욕스럽게 맛봤다. 루크가 내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더 단단히 조였다. 커다란 뱀에게 붙들려서 온몸이 단단히 감기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결국 숨이 막힐 것 같다.
처음부터 그랬다. 녀석에게서 도망치고, 밀어내고,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덤벼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녀석은 사냥에는 도가 튼 맹수였고, 한번 표적이 된 이상 그 날카로운 밥톱과 이빨을 피할 방법은 달리 없었다.
루크가 몸에 밴 향수 냄새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내 귓불을 깨물고 목 언저리를 핥았다. 그리고는 어깨부터 시작해서 내 몸의 민감한 부분을 찾아가며 거칠게 어루만지고, 입을 맞췄다. 그렇지 않아도 녀석과 잠자리를 할 때면 이러다 진짜 먹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가 보다.
전흰지, 한 입 물어뜯기 전에 육질 연해지라고 고기를 다지는 건지 알 수 없는 시달림 끝에 녀석이 내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
“넌…….”
루크가 체중을 다 실어서 나를 내리누르며 마치 감상이라도 하듯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럴 때가 가장 아름다워. 이 모습으로 동상이라도 만들고 싶을 정도로…….”
“넌 이럴 때가 제일…… 재수 없어.”
루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내 몸 깊숙한 곳으로 더욱 난폭하게 파고들었다.
입술을 깨물어도 자꾸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초장부터 거칠었던 녀석의 기세는 전혀 누그러들지 않았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으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며 몸과 마음을 달래주다가도, 숨 좀 돌릴 만하면 다시 한계까지 밀고 들어와서 오히려 더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런 식으로 녀석은 나를 완전히 손에 넣고 압도했다.
루크가 내 허벅지를 움켜잡고 거꾸로 들 듯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무릎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 허리를 잔뜩 꺾었다. 뭐냐, 이 흉악한 자세는…… 녀석의 코앞에 치부가 다 드러난 것도 그렇고, 이런 자세로 관계를 가질 만큼 내 몸이 유연한 것도 아니라서 몸을 비틀었다
“이런 꼴도 동상으로 만들고 싶어?”
“그것도 좋지. 동상을 열 개는 만들어야 할까 봐.”
“죽여버린다?”
죽는 거 하나도 안 무섭다는 듯, 루크가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는 위에서 나를 내리눌렀다.
“아…….”
좀 전보다 한층 더 깊어진 삽입에 신음이 조심성 없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프고 느낌이 섬뜩했다. 대강 좀 해줬으면 해서 눈을 사납게 뜨고 노려봤지만, 녀석은 한 번 더 울어보라는 듯 재차 나를 찍어 눌렀다.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어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신음소리라도 죽여 보려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왜 그래?”
루크가 입을 막은 내 손을 떼어내며 무심하게 물었다.
“밖에서 니 부하 놈들이 다 듣잖아!”
뭐가 문제냐는 듯 루크가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손목을 잡아 매트리스 위에 내리 눌렀다.
“걔네들은 우리가 안에서 뭐하는 지 다 알아.”
무심하게 지껄이면서 루크가 이미 기진해서 축 늘어져 있는 나를 또다시 뒤흔들었다.
섹스라는 건 이상하다. 이렇게 쾌감보다는 고통과 긴장이 훨씬 더 클 때라도 녀석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어느 때보다 확실히 느끼고, 나 역시 그렇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녀석이 내 심장까지라도 들어와 줬으면 좋겠고, 시간이 여기서 딱 멈춘 채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루크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느새 침대 머리맡까지 몰려 있었고, 이제 거의 절정인 듯 녀석의 움직임은 더 거칠어졌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루크를 올려다봤다. 내 모습을 동상으로라도 만들고 싶다고 지껄인 건 루크였지만, 나야말로 녀석의 이런 모습에 홀릴 것 같았다. 흐트러진 호흡, 살짝 벌어진 입술, 음심과 욕심이 넘칠 듯 가득한 사나운 눈길…….
무심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눈빛으로 루크가 나를 노려봤다. 이젠 정말 한계였다. 이러다간 정신을 잃고 말겠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무는 순간, 루크가 몸을 한껏 뒤로 젖히며 짐승처럼 크게 울었다. 그리고는 지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내 위로 천천히 무너졌다.
이러나저러나, 막판엔 이렇게 되는구나……. 결국 이 자식하고는 사이좋게 잘 지내든, 서로 죽일 듯 으르렁거리며 대판 붙어 싸우든 결론은 이런 거다. 차이라곤 침대 위에서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고 조심스러운가, 아니면 거칠고 난폭한가 하는 것뿐이다.
옆에 엎어져 있던 루크가 끙끙거리며 다가오더니 나를 당겨서 끌어안고는 다시 축 늘어졌다. 이 자식이 이 정도면 나는 죽다가 산 거다. 숨소리도 듣기 싫어서 녀석을 밀쳤다. 내 입에서도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일요일 날 쉬는 거 맞지?”
루크가 꿋꿋하게 내 허리에 팔을 감으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오늘부터 한 열흘쯤 쉬고 싶다.
“응…….”
“공연 끝내고 그 꼬맹이를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나오면 11시쯤 되겠네?”
“바로 나오면 그렇겠지.”
“내가 데리러 갈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루크 쪽으로 돌아누웠다.
“나도 차이나타운 가는 길은 알아.”
“차이나타운 말고, 여기서 하루 종일 같이 있자.”
뭐…… 나쁜 생각은 아니다. 흑풍회 건물의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나한테는 너무 휑하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이 별장은 공기도 맑고, 건물도 아담할 뿐 아니라 기린이 오래 거처로 사용한 덕에 정원이 별천지였다. 쿠간을 다 뒤져도 이만한 휴식처는 아마 없을 거다. 하지만 현재 이 별장의 주인은 기린이다.
“기린 녀석이 우릴 잡아먹겠다고 덤빌걸?”
오늘은 우리가 틈을 안 주고 몰아치니까 얼결에 넘어갔지만, 내일 저녁에 또 오면 싫어할 거다.
“기린은 고기 안 먹어.”
“그럼 씹다가 뱉겠지.”
루크가 키득키득 웃었다. 지금은 웃는 소리도 기운이 없었다.
“왜 이렇게 다 죽어가?”
“그러게. 겨우 3라운드 뛰고 이렇게 뻗은 적은 없었는데…….”
루크가 숨을 몰아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3라운드라는 말이 불쾌해서 녀석을 노려봤다.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 자식한테 왜 번번이 깔리는 건지 모르겠다.
“다음엔 입장 바꿔서 3라운드 정도 뛰어볼래?”
내 제안에 루크가 별로 갈등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난 니가 위로 올라가는 것도 좋아.”
머리맡을 더듬어서 베개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걸로 한 대 갈길까, 얼굴에 대고 눌러버릴까 잠깐 생각하고 있는데…… 루크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무슨 기척이라도 느낀 걸까? 루크의 눈빛이 전에 없이 예민하게 번뜩였다. 덩달아 놀라서 귀를 기울여봤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왜 그래?”
루크가 조용히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탐색했다. 최근 들어서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혹시 또 어떤 놈들이 쳐들어오는 건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때 루크가 나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스테이크가 왔나 봐.”
맥없이 늘어져 있던 루크가 먹고 살겠다고 휘청거리면서 응접실로 나갔다. 어이가 없어서 잠깐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따라 나가보니 저녁 사러 나갔던 애들도 이제 막 안으로 들어오는 참인데…… 대체 고기 냄새는 어떻게 맡은 걸까?
“나간 지가 언젠데 저녁을 지금 갖고 와? 나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
루크가 부지런히 음식 포장을 푸는 부하들에게 짜증을 내며 식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루크가 공연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니었다. 시간을 보니 저녁 심부름 간 지 두 시간 만에 나타난 거다. 그 바람에 싸늘하게 식은 스테이크는 오븐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뭐 그래도 전체요리하고 샐러드가 있으니까…….
“오는 길에 가비우스 그 자식들하고 한판 붙을 뻔했어요.”
식탁에 포크와 나이프를 세팅하면서 푸웨이가 투덜거렸다. 그 말에 자오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자식들하고 왜?”
“호텔에 가는데 시커먼 승합차가 두 대나 따라붙잖아. 뭔가 했더니 그놈들이더라고.”
“그놈들이 니네들을 미행하더란 말이야?”
“미행도 아니고…… 대놓고 쫓아오던데?”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떴다는 소식에 급한 대로 집어 들었던 새우 칵테일 그릇을 도로 내려놨다. 나는 걔네들 이름을 들으면 입맛부터 달아난다.
“이건 루소 의원이 약속했던 거하고 얘기가 다른데요?”
자오가 루크한테 항의하듯 투덜거렸다.
“정치하는 인간들이 다 그렇지 뭐…….”
루크가 으깬 감자를 포크 끝으로 콕콕 찍으며 성의 없이 대꾸하자 자오가 다시 푸웨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그냥 뒀어?”
“갓길에 차 잠깐 세우고 뭐하는 짓이냐고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지들은 상부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라고 개소리를 하면서 버티더라고. 말이 통하는 놈들도 아니고, 한 차에 네 명씩 탔던데 우리 셋이서 그놈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잠깐 실랑이 하다가 관뒀어.”
푸웨이와 자오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얘기를 하는데, 루크는 스테이크가 들어간 오븐만 홀린 듯 쳐다볼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내가 나섰다.
“저녁거리 사러 간 니네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게 상부 지시란 말이야?”
“우리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푸웨이가 루크를 힐끔거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회장님을 노리는 것 같아.”
루크를 노리다니…… 두 기사단의 적대관계는 청연루 전투로 다 마무리된 일이 아니었나?
“놈들이 아직도 루크를 노리는 거야?”
“가만 보니까 별장 근처에도 비슷한 차량이 쫙 깔렸어. 우리가 확인한 것만 열두 댄데…… 그 많은 병력이 누굴 잡으려고 몰려왔겠어?”
푸웨이의 대답에 이번에야말로 대경실색을 해서 루크를 돌아봤다. 청연루 전투 때 목숨을 건진 게 아직도 꿈같은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게 또 무슨 소리냐? 하지만 루크의 눈빛이나 표정에선 조금 전, 스테이크 냄새를 감별해내던 때 보였던 긴장감이 흔적도 없었다. 루크는 오직 스테이크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기 그만 꺼내. 너무 익으면 맛없어.”
루크가 포크를 빨면서 자오를 졸랐다.
“야!”
내가 버럭 소리를 치자 루크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널 잡으러 몰려왔다잖아! 무슨 대책을 세워야지, 이 판국에 스테이크 타령이 나와?”
내 채근에도 루크는 스테이크 빨리 대령하라고 자오를 조르기 바빴다. 그리고는 자오가 미지근한 스테이크를 앞에 내려놓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몰려와 있는 게 아니야. 놈들이 나를 잡아다 어디 쓰겠어? 루소는 내가 죽어도 시간을 담은 병을 내놓지 않을 걸 알아. 그리고 이 상황에서 흑풍회를 더 자극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나하고 싸우는 것보다 같은 편이 되는 게 훨씬 이롭다는 것도 알아.”
“그럼 대체 왜…….”
“놈들은 라두칸을 기다리고 있는 거야.”
별일 아니라는 듯 태평하게 대꾸하고는 루크가 스테이크를 반으로 썰더니, 손바닥만 한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밀어 넣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입맛을 잃고 맥주만 깡으로 홀짝이는 사이, 루크는 스테이크 세 접시하고 세트로 따라온 사이드 메뉴를 싹싹 쓸었다. 손도 안 대고 밀어 놓은 내 몫의 스테이크는 기린이 냉큼 거둬가서 발렌타인에게 넘겼다.
“왜 안 먹어? 놈들이 라두칸을 노리는 게 어제오늘 일이야?”
맥주로 입가심을 하면서 루크가 뚱한 표정으로 시비를 걸었다.
“놈들이 널 그런 식으로 지켜보는 게 싫어.”
“라두칸은 걱정 안 되고?”
“물론 걱정돼. 그 미친놈들이 너하고 니콜라스를 한방에 보내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 건 더 걱정되고.”
“라두칸 걱정에 나까지 끼워줘서 고마워.”
비싼 스테이크를 세 접시나 먹어 치우고 저런 헛소리라니…… 밥값을 내가 낸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놈들은 정말 인정사정없어. 니콜라스가 그 수정 목걸이 때문에 나타났다가 너하고 마주치는 것도 안 좋은 일이지만, 그걸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아는 건 정말 안 좋은 일이야. 둘 다 죽거나, 심하게 다칠 테니까.”
지난겨울의 어느 날 밤이 또다시 눈앞에 선하게 펼쳐졌다.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느낌이었고, 아직도 가끔 그날 일을 꿈에 보고 땀에 젖은 채 눈을 뜬다. 그런 일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니콜라스도, 나도, 그리고 루크도…….
내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지 루크가 눈을 내리 깔았다.
“그렇지 않아도 감시병들을 철수시키라고 저쪽 두목한테 경고를 하긴 했었어.”
“저쪽 두목이면 누구? 루소 의원?”
“놈들은 나만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거든. 니 주변에도 한 떼거리가 붙어 다니는데, 니가 라두칸하고 같이 있다가 날벼락 맞는 건 나도 싫어.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만 특별히 봐줄 놈들도 아니니까…… 니가 라두칸을 만나는 상황 자체가 싫지만, 놈들이 참견할 일은 아니잖아?”
어디선가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때론 어렴풋이, 때론 확실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니 담당하고, 내 담당이 겹치는 바람에 오늘 밤 이 근처가 그렇게 혼잡했나 봐?”
“놈들도 우리처럼 화끈한 시간을 보내면 좋을 텐데…….”
큰 바구니에 산처럼 쌓아 놓은 감자튀김을 앞으로 끌어당기면서 루크가 싱거운 소릴 지껄였다.
“루소 의원은 언제 만났어?”
“아까 낮에.”
“…….”
“그 영감하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그 얘길 하고 있는 중에 너하고 그 버르장머리 없는 팝스타가 키스하는 사진이 줄줄이 날아온 거야.”
루소 의원의 저택은 여기서 멀지 않다. 어쩐지 금방 오더라. 그건 그렇고…….
“그럼 너한테는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해놓고서 코앞에 저렇게 진을 치고 있는 거야?”
정치 거물과 암흑가 보스의 화법은 잘 모르지만, 이건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확답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루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루크가 밥 먹는 걸 보고 있으려니 기껏 올려놨던 호감도가 한순간에 바닥을 쳤다. 반면에 기린은 발렌타인이 스테이크 썰어 먹는 걸 그윽한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그동안 자기 때문에 덩달아 채식만 하느라 얼굴 축났다고 걱정에, 앞으론 스테이크 같은 것도 자주 먹으러 다니자며 다 잡은 고기 상대로 어장관리가 한창이었다.
“루소는 백 대인보다 더 깐깐하고 의심 많은 노인이야. 백 대인은 나를 안 믿었지만, 그자는 세상 누구도 안 믿어. 게다가 애초에 왕들은 흑풍회를 무식하고 거친 조폭 정도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해서 나를 파트너로 인정할 리 없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우리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어. 그런데도 방법이 없단 말이야? 나는 가진 거 쥐뿔도 없는 짭새니까 그냥 당할 수밖에 없지만, 너한테는 조직도 있고 기사단도 있잖아.”
“그야…… 그렇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루크가 감자튀김을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다시 만나서 얘기를 해볼게. 그러니까 걱정 그만하고 뭐라도 좀 먹어.”
엘리 크로우의 쿠간 시 첫날 공연은 한마디로 재난의 연속이었다. 우선 엘리 자신이 공연장에 20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수많은 자신의 팬과 공연 스텝들에게서 그럼 그렇지…… 라는 눈총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노래 두 곡을 마치기도 전에 음향기기에 문제가 생겨서 몇 분간 공연장엔 윙…… 하는 기계음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건 이후 벌어질 온갖 종류의 시련을 알리는 작은 나팔소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무대로 올라가던 댄서들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줄줄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중 한 명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한창 분위기가 고조되던 순간에 엘리는 팬들도 잘 모르는 심심한 발라드를 내리 세 곡이나 불러서 간신히 살아나는 공연 분위기에 스스로 초를 쳐야만 했다.
그리고 공연 중 엘리와 댄서들을 싣고 무대 일부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순서가 있었는데, 무대 아래에서 뭔가가 부러지는 두 번의 굉음이 난 후, 무대 장치가 잠시 멈춰 섰다가 바닥으로 폭삭 주저 앉아버렸다. 그 바람에 가장자리에 서 있던 기타리스트가 무대 아래로 떨어졌고, 또 그 다음엔 공연장에 아예 전기가 나가서 비상 전기를 끌어올 때까지 10여 분간 최대 정원 삼만 명의 스타디움이 암흑천지가 되고 말았다.
엘리의 공연은 백여 명의 팬들이 공연장 뒷문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그 사람들 틈에서 엘리를 빼내느라 경호원들이 이리저리 떠밀리고 잡아 뜯기는 소동으로 대미를 장식하며 마무리 됐다. 그 팬들이 엘리를 한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뒷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지, 아니면 화가 나서 공연 티켓을 환불 받으려고 그랬던 건지는 확실치 않다.
“어제 고생 많으셨다면서요?”
내 인사에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페레 씨가 이마에 놓인 얼음주머니를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했다.
“일찍 왔네요.”
“일찍은요? 벌써…… 세 신데요.”
어제는 오전부터 전체가 시끌벅적하던 특실층이 오늘은 이 시간이 되도록 조용했다. 공연 다음날은 다들 오후까지 쉬는 건가? 아니면 어제 공연이 망해서 분위기가 가라앉았나?
“엘리는 어때요? 아직 안 일어났습니까?”
어제 나하고 루크를 번갈아가며 들었다 놨다 할 때엔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얄밉기도 했지만, 막상 지난밤 공연을 최근 10년 내에 쿠간 시에서 있었던 공연 중 최악이며 일종의 재난이라고 평가한 신문 기사를 보니까 엘리가 걱정스러웠다. 책임감과 죄책감도 좀 느껴졌고…… 엘리가 공연장에서 당한 횡액은 그 다양함으로 보나, 다발성으로 보나 비니의 소행이란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엘리는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평이 너무 안 좋아서 걱정했었는데…….”
“엘리는 보기보다 대범한 구석이 있어요. 크로우 부인이 예민해서 탈이지…….”
“막판에 팬들이 난입해서 애를 많이 먹었다던데,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한두 명 더 있었어도 상황은 비슷했을 거예요.”
페레 씨가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리곤 다시 소파에 눕더니 얼음주머니를 찾아서 이마에 얹었다.
“엘리는 다섯 시에 공연장으로 갈 거예요. 그때까지 커피라도 한잔 하면서 쉬어요. 비니 몬티첼리 형사가 근처에 있을 거예요.”
비니는 1층 커피숍에 있는 걸 좀 전에 보고 올라왔다. 녀석은 그 사이 엘리의 댄서들하고 안면을 터서 그 쭉쭉빵빵한 미녀들하고 천국 같은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럼…… 다시 내려가서 비니 기분이나 맞춰줄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맞은편 침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엘리가 나타났다.
엘리는 걱정했던 것만큼 풀이 죽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잠을 설쳤는지 얼굴이 푸석했고, 눈은 조금 부어 있었다.
속상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비니 징크스의 피해자치곤 이 정도면 정말 의연한 거다.
“괜찮아?”
내 물음에 엘리가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공연은 잘 되길 빌어야죠. 나쁜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는 거니까…….”
우리 경찰서 금언은 ‘나쁜 날이 있으면 더 나쁜 날도 있다.’ 지만…… 큰 공연이 한 번 더 남았는데 그런 소리로 김을 뺄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하곤 어땠어요? 화보 촬영할 때 무시무시한 눈길로 우릴 노려보던데…….”
“덕분에 길고 화끈한 밤을 보냈어.”
내 대답에 엘리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심술을 부렸다.
“실망이네요. 싸우고 헤어졌으면 내가 주워 가질까 했는데…….”
어제 저녁에 잠깐 데리고 논 걸로는 성이 안 찼던 모양이다.
“그 오빠는 그만 잊어.”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정말 매력적인 남자잖아요.”
“남자 보는 눈이 없으면 두고두고 고생해.”
내 대답에 엘리가 힝…… 하고 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안으로 잡아끌었다.
“티파티를 하던 중이었거든요. 같이 차 마셔요. 케이크도 먹고…….”
들어가 보니 엘리는 티파티를 빙자한 케이크 파티를 하고 있었다. 침실엔 멜 말고도 두 명의 친구가 더 있었고, 테이블엔 케이크가 열 개도 넘게 놓여 있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이 마지막 공연이니까 다이어트는 접어두고 당분 섭취로 스트레스를 다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멜이 인사를 하면서 찻잔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엘리는 새빨간 딸기 무스를 두부 자르듯 한칼에 잘라서 큰 조각을 접시에 덜었다.
“난 점심을 먹고 왔는데…….”
“그야 뭐…… 당연히 그 멋진 남자하고 다정하게 마주 앉아서 우아한 브런치를 즐겼겠죠.”
엘리가 내 앞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엘리는 루크에 대해 터무니없는 환상을 갖고 있다. 루크가 몸매 날렵하고 풍기는 분위기도 샤프한 구석이 있으니까 아침도 모닝커피와 베이글 한 조각으로 검소하고 우아하게 때울 줄 아는 모양인데,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거다.
오늘 아침만 해도 루크는 부하들하고 싸워가면서 베이컨을 1킬로그램도 넘게 먹어치웠고, 거기에 더해서 에그스크램블 한 사발하고 식빵 한 봉지를 쓸어먹는 과정엔 어떤 우아함도 없었다.
“잠은 좀 잤어?”
“얼마 못 잤어요. 어제 공연은 내가 그동안 꿔온 악몽의 총집합이었어요. 이게 꿈이 아닌가 싶어서 노래 부르면서 몇 번이나 눈을 부릅뜨고 옆구리를 꼬집었는지 몰라요. 혹시 꿈이면 깰까 해서…… 하지만 안 깨더라고요. 꿈이 아니니까.”
넋두리하듯 중얼거리며 엘리가 시커먼 초콜릿 케이크를 푹 떠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잊어버려.”
“삼만 명이나 되는 관중들 앞에서 3시간 내내 개망신을 당했는데 어떻게 잊어요?”
엘리가 케이크를 한입 가득 물고 울먹였다. 어제 일이 선하게 떠오른 표정이었다.
나도 그간 비니 때문에 당한 봉변, 루크 때문에 겪은 망신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엘리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사람들도 금방 잊을 거야. 남은 공연도 있으니까 오늘 잘하면 되지.”
위로가 될까 해서 건넨 말이었는데, 엘리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게 제일 걱정이에요. 오늘도 어제 같으면 어떡해요? 그 무대에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니까 눈앞이 깜깜하고 무릎이 후들거려요.”
이 일을 어쩌냐? 비니 때문에 무대 공포증이 생겼다. 이건 엘리가 어리거나 심약해서 겪는 증상이 아니다. 경찰서엔 비니 때문에 자동차 공포증, 계단 공포증, 선반 공포증, 샤워실 공포증에 시달리는 짭새들이 셀 수도 없다.
케이크를 삼키지도 못하고 훌쩍거리는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엘리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다들 어제 같은 공연은 처음이래요. 무대 설비 세팅만 15년간 했다는 스텝도 그렇게 여러 가지 사고가 한꺼번에 터지는 건 처음 봤다고…… 공연장에 귀신이라도 붙은 것 같다고 그랬다고요.”
“오늘은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 소리는 아침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요!”
“내 말은 믿어.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오늘은 내가 비니를 일찍 들여보낼 거니까…….
내가 엘리를 끌어안고 달래는 모습을 멜이 휴대폰으로 몇 장 찍었다. 설마 이러고 있는 모습을 또 루크한테 보낼 건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신경이 쓰여서 멜을 돌아봤다. 엘리도 거슬리는지 멜을 노려봤다.
“찍지 마. 나 메이크업도 안 했잖아.”
“뭐 어때? 그래도 예쁜데. 이 사진 몇 장 모니카한테 보내자.”
멜의 제안에 엘리가 펄쩍 뛰었다.
“공연 망치고 아침에 초콜릿 케이크를 퍼먹으면서 울고 있는 사진을 모니카한테 보내자는 거야? 제정신이니? 그 기집애는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걸어서는 공연 소식 들었다면서 오늘은 잘 해보라고 나를 비웃었단 말이야!”
“너한테는 이런 때 위로하고 달래주는 미남 경호원이 있잖아. 맥스는 죽었다 깨나도 모니카한테 이렇게 안 해줄 거야. 그 머저리는 모니카가 숨이 넘어가도 옆에서 자기 몸매자랑이나 할 걸.”
“그건…… 그래.”
멜의 설득에 넘어간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싹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아예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엘리는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공연장으로 출발했다. 본래 일정은 다섯 시쯤 출발해서 30분 정도 간단한 리허설만 하고 휴식을 하다가 무대에 서는 거였지만, 마음을 다잡은 엘리가 어제 실수를 만회하고 싶다면서 자청해서 리허설 시간을 늘려 잡았다.
“넌 그만 가라.”
다른 경호원들과 함께 벤에 올라타려는 비니를 잡아서 옆으로 끌어냈다.
“왜?”
“어젠 내가 일찍 퇴근했으니까 오늘은 니가 일찍 들어가서 쉬어.”
“괜찮아. 나한테는 첸, 그 자식 같은 남자친구도 없는데 일찍 들어가서 뭐해?”
비니가 고집을 피우면서 어제 일을 은근히 돌려서 깠다. 비니가 예전의 무심함과 뻔뻔함을 찾아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그래도 오늘은 공연장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지 말고 그냥 가. 넌 양심도 없냐?”
어제 공연 때문에 엘리는 벌써 무대 공포증이 생겼다. 오늘 공연까지 망치면 충격이 오래 갈 거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에, 내 남자친구를 노리는 위험인물이긴 하지만 십대 소녀에게 비니의 징크스는 너무 가혹한 시련이다.
“뭐야? 어제 공연이 그렇게 된 게 내 탓이란 거야?”
비니가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내가 그동안 비니를 위로하려고 애썼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녀석이 그간 일으킨 사건이 고의는 아니었으니까 너무 죄책감 느끼지 말라는 뜻이었지, 징크스 자체를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긴 적은 없었다.
“그건 집에 가서 혼자 잘 생각해봐.”
“어제 그 일은 어느 공연장에서건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사고였어. 그게 내 탓이란 증거라도 있어?”
어제 일이 어느 공연장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고가 한꺼번에 서너 개나 터졌고 근처에 비니가 있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비니 탓이다.
“증거가 있었으면 넌 진즉에 구속이 됐든가, 아니면 황무지에 버려졌을 거야.”
“야!”
설마 이 정도로 삐져서 다시 사막으로 기어들어가지는 않겠지. 누가 봐도 명백한 자기 과실을 눈도 깜빡 않고 딱 잡아뗄 정도로 컨디션을 회복했으니까…….
“휴일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
영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는 비니의 등을 두드려주고 경호원 벤에 올라탔다. 웬만하면 비니 마음 상하는 일은 피하고 싶지만, 엘리의 안전도 중요하다. 그리고 비니도 자기 때문에 어린 가수의 앞날이 막히는 건 바라지 않을 거다.
어제 공연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고 때문에 최악의 공연이란 악평과 팬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지만, 오늘 공연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발 디딜 틈 없는 대성황이었다. 엘리의 공연 티켓은 이미 두 달 전에 매진이었고 오늘 무대가 올해 마지막 콘서트라서 팬들은 과연 오늘은 어떨까 하는 기대를 안고 공연장으로 몰려들었다.
엘리 역시 어제의 불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전에 없는 집중력을 발휘해서 실제 공연이나 다름없는 한 시간 반짜리 리허설을 아무 불평 없이 소화하고 대기실에서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본 공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어떤 거였어요?”
무대 뒤 경호원 대기실에서 다른 경호원들하고 커피를 마시다가 불려온 나한테 엘리가 따지듯 물었다. 글쎄…….
“없어.”
“다들 그렇게 시시했어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이런 콘서트를 굳이 시간 내서 보러 다닌 적이 없다. 예전에 니콜라스하고 음악회에 갔었던 적이 있었지만, 그건 클래식 소품 공연이었고 그나마 내도록 자다가 나왔다. 정원이 삼 만 이천 명인 대형경기장에서 삼만 명을 모아놓고 하는 공연을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공연엔 처음 와 봐.”
내 대답에 엘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감성이 메마른 짭새거든.”
“완전 아저씨 같아요.”
“아저씨 맞아. 너도 내도록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잖아.”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엘리가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 공연시작이 10분 정도 남았다. 공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열기로 무대 뒤도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였다.
“엘리, 시간 다 됐어. 그만 나가자.”
멜이 엘리의 의상하고 메이크업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 등을 떠밀었다. 딴 생각하고 있다가 갑자기 떠밀린 엘리가 넘어질 듯 휘청거리는 걸 간신히 붙들어 세웠다. 붙들려 선 김에 엘리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제야 엘리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알았다.
“오늘은 괜찮을 거라니까?”
리허설 때 무대 장치도 아무 이상 없이 잘 돌아갔고, 음향도 나무랄 데 없었다. 그리고 비니도 집에 갔으니까 오늘은 최고의 무대를 선보일 수 있을 거다.
“공연하는 동안 무대 옆에 있어줘요. 대기실에서 다른 아저씨들하고 수다나 떨지 말고…….”
“알았어.”
진정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렇게 대답하고 엘리의 등을 토닥거렸다. 무대 주변은 페레 씨와 그 외 개인 경호원들이 지키고, 공연장엔 안전요원들도 충분하니까 대기실에서 쉬다가 공연이 끝난 후 호텔까지 데려다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나도 엘리의 공연을 지켜보고 싶었다.
“당신을 만난 게 요즘 들어서 나한테 생긴 가장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내가 좋다는 뜻일까? 아니면 나를 미끼 삼아서 루크를 낚은 게 좋았다는 뜻일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가 내게 덥석 입을 맞췄다.
“선은 지켜줘. 이러다 정 들라.”
내 입술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엘리를 뜯어내서 멜 쪽으로 밀어 보냈다.
“행운을 비는 키스예요. 나한테는 지금 강력한 행운이 필요하다고요.”
엘리가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행운이라니……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안다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못 할 거다.
“난 운 같은 거 없는 사람이야.”
내 대답에 엘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운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남자를 차지했겠어요?”
엘리의 공연은 오프닝부터 화려하고 화끈했다. 무대 양 옆에 세워진 높은 기둥으로 불꽃이 타고 올라갔고, 무대 뒤에 세워진 대형 모니터에는 엘리의 트레이드마크인 천사의 날개가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어서 현란한 레이저쇼가 잠시 펼쳐지더니 엘리의 최신 히트곡의 전주가 넓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가슴을 쿵쿵 울리는 멋진 드럼 비트 속에 엘리가 카리스마 넘치는 전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대 위의 엘리는 그간 봐온 천방지축 말괄량이가 아니었다. 엘리는 크고 화려한 무대에 눌리지도 않았고, 열 명도 넘는 댄서들 틈에 묻히지도 않았다. 엘리는 정말 스타였고, 노래하고 춤추는 모든 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과 에너지가 넘쳤다.
무대 장치도 움직여야 할 때 제대로 움직였고, 음향도 거슬리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다. 엘리 역시 공연 시작 전에 불안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그리고 무대 분위기가 바뀌어서 엘리가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무대 의상을 걸치고 도발적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엔 공연장의 열기는 점점 더해져서 그 흥분과 기대감에 경기장의 지붕이 터져나갈 지경이었다.
공연의 후반부는 전반부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이제 열아홉 살인데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노출도 심하고 노래 가사나 분위기도 선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관객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고, 엘리가 무대 위에서 댄서들하고 떼로 뒹굴 때엔 흥분한 관중들이 무대에 뛰어 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앞으로 쏠려서 안전요원들과 함께 그 사람들을 밀어내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는 광팬을 잡아서 끌어내리느라 진땀을 뺐다.
불이 흐르는 강을 건너고, 사나운 용을 해치우고, 까마득히 높은 탑을 기어올라 내 침실로 뛰어들라니…… 무슨 노래 가사가 그러냐? 그러고 나서는 또 한참 동안 헐떡거리는 신음소리만 내고 있으니까 남자들이 단체로 정신을 놔버렸다.
왜 엘리의 스토커가 요즘 들어서 폭발적으로 늘었는지, 공연 때마다 관객들이 서너 명씩 밟히고 치어서 실려 나가는지 비로소 이해가 갔다.
관중들의 위험한 분위기도 아랑곳없이 무대 위에선 아슬아슬한 퍼포먼스가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야한 옷차림의 댄서들이 단체로 엉켜서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노골적인 춤으로 관객들을 유혹했고. 그 강력한 시각적, 청각적 자극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혈기가 하늘을 찌르는 남자애들이 또 다시 무대를 향해 우르르 돌진했다. 게다가 이번엔 그중 두 명이 안전요원들의 저지선을 뚫고 무대 위까지 뛰어 올라가고 말았다.
젊은 남자애들이 무대 위로 기어 올라가서 엘리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에 나도 놀라서 무대로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다행히 침입자들은 무대 초입에서 페레 씨와 다른 경호원들에게 붙들려 다시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역시 경험이 많고, 노련한 전문가들이라 이런 돌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일처리가 신속, 정확, 깔끔했다.
엘리와 댄서들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도 슬금슬금 무대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서기 직전에 여자 댄서들이 우르르 몰려와 앞을 막더니 나를 잡아서 무대 중앙까지 끌고 갔다.
“아니, 나는 왜…….”
무대 중앙에서 나를 기다리는 엘리한테 더듬더듬 항의 해봤지만 돌아온 것이라곤 배고픈 살쾡이 같은 눈빛과 열에 들뜬 한마디뿐이었다.
“묶어!”
묶다니…… 뭘? 헉…… 얘네들이 왜 이래?
댄서들이 나를 좀 전에 엘리가 올라서서 노래했던 무대 상단의 철골 구조물로 질질 끌고 가더니 가죽 끈으로 철골에 내 두 팔을 칭칭 동여 묶었다. 한창 공연 잘 하더니, 이게 무슨 짓이냐?
댄서들이 나를 잡아온 사냥감처럼 묶고 나자 밴드의 음악이 더욱더 음침하고 끈적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리고 엘리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뭐…… 하는 거야?”
“선물이에요. 귀여운 아저씨. 그동안 나한테 잘해줬잖아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엘리가 내 앞에서 몸을 틀어 돌아섰다. 그리곤 엉덩이를 턱 들이대더니 내 허벅지부터 시작해서 그 위쪽을 한번 싹 훑었다. 그 한방에 그만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팔이 묶인 덕에 그렇게 한심한 꼴은 면했다.
“장난 그만 하고 풀어줘.”
“장난이 아니에요.”
그렇게 대꾸하고는 엘리가 내 셔츠 단추를 톡톡 풀더니 옷섶에 손을 쏙 집어넣었다.
“엘리!”
놀라서 버럭 소리를 쳤다. 하지만 엘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내 목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틀어보니 대형 모니터에 내 모습이 고스란히 뜨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신경 쓰일 판에, 삼만 명의 흥분한 관중들 앞에서 이게 무슨 봉변이냐?
“엘리…….”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좋았어요.”
“이거 왜 이래? 넌 루크한테 마음이 있었잖아!”
대체 이 곡은 언제쯤 끝이 나는 걸까? 엘리의 댄서들이 나를 에워싸고는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 놓고 온 몸을 주물렀다. 게다가 댄서들 몇 명은 코앞에서 온갖 묘한 포즈로 사람 혼을 쏙 빼는 중이다.
“내 엉덩이에서 당장 손 떼지 못해?”
벌컥 화를 내자 뒤에서 나를 감고 있던 댄서가 툴툴거리며 물러섰다.
“별꼴이야. 좋으면서…….”
이 자식, 남자다. 그때 엘리가 내 허리춤을 잡고는 몸을 바싹 붙이더니 한쪽 다리를 내 허리에 감았다.
“내일이면 이별이라니, 정말 아쉬워요. 이대로 주머니에 넣어서 집에 데려가고 싶네요.”
하긴, 루크보다는 내가 만만하겠지.
어차피 이렇게 걸린 거…… 이 순서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엘리가 내게 입을 맞추며 바지 버클을 톡 풀었다. 그 바람에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관중석에선 남의 속도 모르고 휘파람 불고, 야유 보내고 난리가 났다. 내가 되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보다.
“너무하잖아! 이러지 마!”
내가 엘리하고 이러고 있는 걸 알면 루크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만 해도 무섭다. 얼마나 심술을 부리고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을까?
“다음에 내가 쿠간에 오면 다시 만나요.”
엘리가 나를 거칠게 밀어붙이며 흥분한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렸다.
“응! 그래! 만나! 전화하면 바로 나갈게!”
길게 생각할 것도 없어서 허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지가 벗겨지는 건 싫으니까…….
나를 묶어놓고 멋대로 농락하고, 결국 항복을 받아낸 엘리가 활짝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예쁘긴 정말 예쁘다. 성격은 좀 그렇지만…….
무대 위에 묶여 있었던 시간은 4분 남짓이었다. 노래 한 곡 길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체감은 저녁 내내 붙들려 있었던 것처럼 맥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했다. 팝스타 경호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빡세다.
가죽 끈에 묶였던 팔목을 주무르며 무대에서 내려서다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환호성에 뒤를 다시 돌아봤다. 엘리가 걸치고 있던 짧은 재킷을 벗어서 관중석으로 던져버린 거다. 엘리는 브래지어 달랑 하나 걸친 시원스런 모습으로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었고, 무대 뒤 대형 모니터에는 환성을 지르고 펄펄 뛰는 팬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대부분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정도였다. 그렇게 좋을까? 몇 명은 아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대기실에 가서 좀 앉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쳐다봤다. 모니터에 아는 얼굴이 언뜻 스쳐간 것 같아서…… 관중석 카메라는 아직도 2층 객석 어딘가를 비추고 있었다. 흥분이 지나쳐 훌쩍거리는 소녀들과 아예 웃옷을 벗어 흔들고 있는 남자애들 틈에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앞줄에 서서 모니터를 향해 ‘엘리, 사랑해’를 외치고 있는 남자애들 때문에 그의 얼굴은 아주 잠깐 모니터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니콜라스가 사라진 모니터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 2층 객석을 올려다봤지만 삼만 명이나 되는 흥분한 관중들 틈에서 니콜라스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사람을 잘못 본 걸까? 아니다. 내가 니콜라스를 못 알아볼 리도, 다른 사람을 니콜라스로 착각했을 리도 없었다. 불과 몇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니콜라스였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엘리를 보려고 계단 통로까지 점령한 관중들을 헤치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좀 전에 니콜라스가 있었던 곳이 어디쯤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공연의 열기로 펄펄 뛰는 사람들 때문에 시야가 막혀서 아래에 있을 때보다 더 보이는 게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객석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객석 중간까지 비집고 들어가서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니콜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봤는데, 여기 어디에 있었는데…… 그때, 저만치 앞쪽에서 노란 셔츠가 휘날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니콜라스의 얼굴 앞에서 펄럭거렸던 그 셔츠였다.
앞을 막아서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밀치고 셔츠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흥분을 주체 못하고 훌쩍거리고 있는 여자애들, 거의 절정에 이른 공연을 한껏 즐기고 있는 남자애들…… 니콜라스 주변에 있었던 그 애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있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던 남자 어디로 갔느냐고 옆에 앉은 애를 붙들고 흔들어봤지만, 돌아온 것이라곤 무슨 소리냐는 눈총과 모른다는 대꾸뿐이었다. 니콜라스가 얘네들한테 어디 간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지는 않았을 테니까…….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니콜라스가 앉아 있던 자리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니콜라스가 정말 여기 있었을까?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니콜라스가 나타났다는 것도, 이토록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도 믿기질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다리가 풀려서 니콜라스가 앉았던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요즘처럼 위태로운 때에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난 걸까? 한가롭게 콘서트 구경이나 다닐 상황이 아닐 텐데…… 게다가 왔으면 공연 끝날 때까지 꼼짝 말고 앉아 있을 것이지, 그새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냐? 그 인간 속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니콜라스의 자리는 2층의 중간쯤, 거기서도 난간에서 뒤로 좀 들어간 위치였다. 모니터에 우연히 잡히지 않았으면 니콜라스는 절대 내 눈에 띄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3등석 정도 되는 구석임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한눈에 내려다보기엔 불편함이 없는 자리였다. 거리가 다소 멀기는 하지만 무대 뒤와 양옆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엔 댄서들과 멋진 군무를 펼쳐 보이는 엘리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니콜라스를 발견하고 여기까지 뛰어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여 분 남짓이었다. 순간 이동 같은 걸 할 줄 아는 게 아니라면 니콜라스는 아직 근처에 있을 거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예 모를 때엔 생각도 안 나고 좋더니…… 사람을 보고도 어디 있는지 몰라서 주저앉아 있으려니까 답답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막막하고 울적했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것을 코앞에서 놓쳐버린 기분이었다. 니콜라스를 놓친 것도 허탈하고, 내 기분이 이 지경인 것도 언짢았다.
니콜라스야 오건 가건 그저 무심할 수는 없는 걸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해도…… 이렇게 허겁지겁 달려올 수밖에 없는 걸까? 간발의 차이로 그를 놓쳤다고 마치 깊은 구덩이에라도 빠진 기분으로 주저앉아야만 하는 걸까? 니콜라스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보다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가 더 큰 문제였다.
니콜라스 때문에 내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조각난 날카로운 파편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아픈데, 왜 이렇게까지 그에게 연연하는 걸까? 루크가 말했던 것처럼 내가 이미 니콜라스를 용서한 거라면,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면…… 나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엘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늘 공연을 찾아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쿠간은 자신에게 좋은 추억이 많은 아름다운 곳이라며 내년에도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엘리의 인사에 관중들이 공연장이 떠나갈 듯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답을 했고, 곧바로 공연 마지막 곡의 전주가 울려 퍼졌다.
공연도 이제 막바지였다. 앵콜 한두 곡을 더 부르더라도 20분 안엔 마무리가 될 테니까 엘리를 차질 없이 호텔까지 경호하려면 이젠 내려가서 출구를 점검하고 나갈 준비를 해야 된다.
1층으로 내려가다가 계단참에 멈춰 서서 니콜라스가 있었던 곳을 돌아봤다. 니콜라스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거의 1년 전이었다. 지난겨울, 서부호수 근처의 숲에서 부상당한 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게 끌려가던 뒷모습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니콜라스의 모습이었다.
그냥 공연을 구경하러 왔을 리 없는데, 내가 여기 있는 걸 니콜라스도 알았을 텐데…… 나를 만나고 싶지는 않은 걸까? 하긴, 그 수정 목걸이를 누가 갖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한테는 남은 볼일이 없겠지. 나쁜 놈! 이럴 거면 공연은 TV로나 볼 일이지, 뭐 하러 나타나서 사람을 이렇게 우습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속으로 두서없이 투덜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1층 무대 앞의 움직임이 어딘지 수상했다. 건장한 남자들이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서 무대 옆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대 옆의 어느 한 지점이 목표였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남자들의 동선을 시선으로 쫓다가 놀라서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놈들은 무대 뒤로 통하는 비상구로 향하고 있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다. 놈들이 니콜라스를 쫓고 있었다.
지난겨울, 그 밤의 일이 악몽처럼…… 혹은 현실처럼 또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그간 셀 수도 없이 시달렸던 악몽에서처럼 주변이 한순간 눈 덮인 언덕으로 바뀌었고 사방은 놈들의 위협적인 발소리로 가득 찼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과 추격은 잔혹하고 집요했다. 니콜라스를 대하는 놈들의 태도엔 어떤 인정이나 자비도 없었다. 팔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고 놈들에게 끌려가던 니콜라스의 모습이 어제 본 듯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끌려가면서 니콜라스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이 쉬도록 이름을 부르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꿈속에선 항상 그랬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뭘 지키는 놈들이든, 니콜라스가 하려는 일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놈들에게 잡히면 니콜라스는 죽는다.
계단을 거의 굴러서 내려왔다. 그리고 무대 뒤로 통하는 또 다른 비상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엘리가 리허설을 하는 동안 경호원들과 무대 뒤를 돌면서 비상구와 뒷문을 점검했기 때문에 이쪽 구조는 나도 잘 안다. 건물의 본래 용도가 경기장이라서 뒤쪽은 선수 대기실과 통제실, 기계실, 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개의 방이 있고 관계자와 VIP 전용 복도가 있어서 구조가 다른 곳에 비해 복잡한 편이었다.
마지막 곡이 끝났는지 엘리의 이름을 부르고 발을 구르는 관중들의 성화로 경기장 전체가 쿵쿵 울렸다. 그 소란스러움과 복도를 바쁘게 오가고 있는 스텝들을 뚫고 앞으로 나갔다. 이 복도는 경기장 뒤쪽의 중앙통로로 관중석과도 통해 있고 VIP룸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맞은편에는 밖으로 바로 통하는 비상구도 있었다. 니콜라스는 이쪽으로 올 거다. 운이 좋다면…… 살아남으려면 이리로 와야 된다.
공연의 마지막 곡이 끝났다고 공연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올해 마지막 공연인 만큼 앵콜이 두세 곡은 될 거라고 했고, 엘리도 단순한 앵콜이 아니라 좀 더 스페셜한 무대를 원했기 때문에 백 스테이지는 진짜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대 설비를 교체하기 위해 오가는 스텝들 때문에 앞이 막혀서 대기실 문 옆으로 비켜선 채 니콜라스를 찾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놈들에게 잡힌 건가? 니콜라스가 이리로 왔다면 이쯤에선 마주쳐야 되는데…… 그때 복도 저편에서 니콜라스를 쫓던 놈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놈들도 복도를 가득 매운 공연관계자들과 맞닥뜨리자 당황한 눈치였다. 게다가 자기네들끼리 니콜라스의 행방을 묻는 걸 보면 놈들도 그를 놓친 게 틀림없었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벽에 더 바짝 붙었다. 니콜라스가 놈들을 따돌렸다니 우선은 다행이다. 그럼, 무사히 공연장을 빠져나간 걸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드는데…… 뭐지? 바로 그 순간, 문 안에서 손이 쑥 나오더니 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내가 끌려들어간 방은 댄서들의 분장실이었다. 방은 20, 30여 명이 한꺼번에 사용하기에도 무리 없을 정도로 컸지만 방을 가로지르는 분장 테이블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의상이며 집기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어수선했다.
갑작스럽게 끌려 들어와서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나를 누군가가 억센 팔로 감아 안았다.
“제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등골을 타고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거의 1년 만에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들었던 그날 이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목소리였다.
“제이…….”
입술이 목덜미에 와 닿았고, 니콜라스의 팔이 내 허리를 더 단단히 감았다. 이런 것도 재회라고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목이 막히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오랜만이야, 제이. 그동안…….”
“닥쳐요!”
니콜라스를 떼어내고는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섰다. 뒤통수를 둔기에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결국 만났다. 하지만 왜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된 걸까?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닌데…… 빨리 공연장을 빠져나가서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되는데……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했지만 실제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니콜라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니콜라스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야위어 있었고 행색도 허름했다. 얼굴빛은 병자처럼 창백했고, 머리카락도 어지럽게 엉클어져 있었다. 걸치고 있는 옷도 투박한 스웨터에 낡은 청바지, 그리고 이 계절에 입고 다니기엔 얇아 보이는 어정쩡한 길이의 사파리 점퍼뿐이었다. 그리고…… 왼손이 있어야 할 자리엔 옷자락만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자신의 왼팔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팔짱을 꼈다. 그때 대기실 문이 벌컥 열렸다.
“헉…….”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들이닥친 줄 알고…… 하지만 문을 박차고 몰려들어온 건 기사단이 아니라 엘리의 댄서들이었다.
“3분 안에 의상하고 메이크업 점검하고 다시 나와요. 거기 남자 분들은 나가주시고요!”
하필이면 여자들 분장실로 들어올 게 뭐냐…… 헤드셋을 쓴 깐깐해 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나하고 니콜라스를 언짢은 눈길로 노려보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정작 댄서들은 옷 갈아입고 화장 고치느라 방안에 남자가 있건, 연쇄살인범이 있건 눈길도 한번 주지 않았다.
댄서들 담당 스텝이 아무리 무서워도 지금 복도로 나갈 배짱은 없었다. 당장 총격전이 벌어질 텐데, 그런 사태는 공연 주최 측도 원하지 않을 거다. 다행히 방 안쪽엔 옆방으로 바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그래서 뻘쭘하게 서 있는 니콜라스를 잡아끌고 그 문을 열었다.
“어머!”
“꺄악!”
옆방은 하필이면 엘리의 개인 대기실이었다. 방안엔 엘리와 멜, 엘리 어머니와 모르는 여자들 두 명이 버티고 있었고, 엘리는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원피스에 막 머리를 집어넣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데 일이 자꾸만 이렇게 꼬이니까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놀랄 거 없어. 나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서 일단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엘리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건 아닐까?
“우리가 서로 감출 거 없는 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죠.”
엘리가 야무지게 쏘아붙이며 원피스를 끌어내렸다. 크로우 부인이 대판 항의를 하려고 앞으로 나섰지만 엘리가 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니콜라스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저 영감은 누구예요?”
영감이란 소리에 니콜라스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엘리를 노려봤다. 그만큼 오래 살았으면 영감이 아니라 조상님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냥…… 아는 사람이야.”
“설마 루크 오빠를 두고 이 노숙자 할아버지랑 바람피우는 건 아니죠?”
나한테 질문을 하는 걸까? 아니면 니콜라스한테 시비를 거는 걸까? 니콜라스는 후자라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좀 전보다 더 시무룩해졌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 내 공연을 같이 본 거예요?”
“아니라니까.”
그렇게만 대답하고 복도로 난 문을 살짝 열었다. 다행히 지금은 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엔 앵콜 무대를 준비하는 스텝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나가는 게 나을까? 되도록 빨리 여길 나가야 하는 건 확실하지만, 지금은 기사단 놈들이 자기네들 전투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밖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공연 스텝인지, 놈들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자들이라니…….”
엘리가 그렇게 쫑알거리면서 파운데이션을 푹 찍어서 땀에 젖은 얼굴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삐딱하게 노려보던 니콜라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이가 루크 첸을 두고 나하고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니야. 나를 두고 그놈을 만나는 거지. 물론, 잠깐 그러는 거겠지만…….”
니콜라스의 대꾸에 엘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도 안 돼요.”
“왜 안 돼? 사실인데.”
그렇게 지껄이고는 니콜라스가 나를 쳐다봤다.
“한 숨 돌리고 나면 나하고 얘기 좀 해.”
“무슨…… 얘기요?”
“그 차이나타운 제비 말이야.”
흑풍회 두목이자, 프란시스 몬티첼리를 몰아내고 쿠간 시 나쁜 놈 대장으로 등극한 루크하고 내가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루크가 나한테 들이대는 과정부터가 요란했던 데다 녀석의 사생활은 유명 연예인만큼이나 공개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젠 내 사생활이기도 한 우리 둘 사이를 두고 아직도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대중들의 반응은 둘째 치고, 일단 내 주변에서도 내가 차이나타운을 들락거리는 걸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 때문에 강력반 업무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배치돼서 쫓겨 온 거고…… 그나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을 거다. 조만간 루크하고 헤어질 건지, 사직을 할 건지 결정을 내려야 된다.
하지만, 온 세상이 다 내 어리석은 행동을 나무란다고 해도 니콜라스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내 생각엔 없는 것 같은데…….
“니콜라스…….”
“내 생각만 하면서 처량 맞게 지내길 바란 건 아니지만…… 왜 하필 그놈이야?”
“시끄러워요!”
니콜라스하고 긴말도 하기 싫고, 혹시 밖에 목소리가 샐까 걱정스러워서 얼른 입을 막았다. 그런데 이번엔 엘리하고 멜이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들었어? 제이가 저 영감을 니콜라스라고 불렀어.”
“설마 니콜라스 헤슬렘은 아니겠지?”
“아니겠지. 그 사람은 죽었잖아.”
“맞아. 그리고 저렇게 늙지도 않았어.”
엘리가 거울을 향해 돌아서서 침착하게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빗어 올렸다. 그 사이에 멜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다용도로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크로우 부인은 니콜라스 헤슬렘이란 이름만 얼핏 듣고도 벌써 얼굴이 허옇게 떴다.
“걱정 마세요, 부인. 우린 금방 나갈 거니까…….”
저쪽 복도 끝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떡대 둘이 아무래도 수상쩍다. 딱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호시탐탐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는데 그 사이 멜이 검색을 끝내고 엘리에게 휴대폰을 넘겼다. 인터넷을 뒤져서 니콜라스 사진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름만 치면 수백 페이지가 바로 뜨니까. 액정을 잠시 들여다보던 엘리가 거친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멜에게 돌려줬다.
“그냥 귀엽고 평범한 짭샌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경쟁이 빡세네요.”
“오늘 정말 멋있었어, 엘리. 남은 공연 마무리 잘 하고…….”
“호텔까지 안 데려다줄 거예요?”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아.”
다른 스텝들도 무대로 나갔고, 옆방에 있던 댄서들도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리고 여태 복도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던 수상한 덩치들도 사라졌다. 지금이 기회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거울 옆에 걸려 있는 모자를 걷어서 니콜라스에게 푹 뒤집어 씌웠다.
“그건 내 건데……”
엘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그렇게 들으니까 니콜라스가 쓰기엔 모자가 너무 예쁜 것도 같았다. 거울을 힐끔 보더니 니콜라스도 질세라 투덜거렸다.
“뭐야, 진짜 노숙자 같잖아?”
“나가면 오른쪽으로 뛰어요. 20미터 앞에 건물 밖으로 나가는 비상문이 있으니까, 그리로 나가요.”
“그 다음엔?”
그 다음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려요.”
“제이…….”
“당신이 제일 잘하는 게 그거니까.”
다시 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댄서들도 싹 빠진 복도엔 몇 명의 공연 스텝과 페레 씨의 경호원들뿐이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갑자기 증발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상황이 이보다 괜찮기는 어려웠다. 깊은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20미터가 200미터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비상구를 향해 달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사이에도 그간 니콜라스에 관한 믿지 못할 얘기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이번에야말로 니콜라스를 얼마나 단단히 벼르고 있는지 따위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놈들은 처음부터 니콜라스를 죽이고 싶어 했다. 게다가 카넴의 단검인지 뭔지 하는 흉악한 물건도 입수했다니, 이번에야말로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일단 밖으로만 나가면 괜찮을 거다. 밖은 어둡고 주변은 번화가였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게다가 20분 안에 삼만 명의 관중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거니까 이 고비만 잘 넘기면…… 아, 빌어먹을! 놈들이다.
비상구 손잡이를 움켜잡는 순간, 저만치 앞쪽에 놈들이 나타났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대로 비상구를 열어젖혔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먼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거의 동시에 니콜라스가 나를 안으로 끌어당기고 비상문을 거칠게 닫았다. 바로 다음 순간, 거친 총성과 함께 철문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요동을 쳤다.
각오는 했지만 수만 명의 관중이 모여 있는 공연장에서까지 거침없이 총질을 하는 놈들의 흉폭함에 놀라서 사지가 덜덜 떨렸다. 한순간만 늦었어도 문에 낀 채 벌집이 됐을 걸 생각하니까 맥이 풀려서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런 나를 잡아끌고 니콜라스가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짧은 통로를 달려서 밖으로 뛰어나올 즈음, 놈들이 잠긴 비상문을 부수고 통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정말 우악스런 놈들이다.
우리가 빠져나온 출구는 경기장 뒷길로 통한 두 개의 비상구 중 하나였다. 경기장 뒤쪽이라 인적은 뜸하지만 대신 공연 때문에 동원된 커다란 수송차들이 수십 대나 늘어서 있으니 이만하면 재수 옴 붙은 중에도 운이 아주 바닥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출구 바로 앞에 시동까지 켜진 벤이 대기하고 있다는 거였다. 공연 마치고 엘리가 후문으로 빠져 나오면 바로 출발하려고 준비 중인 차량이었다.
내가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니콜라스가 벤으로 돌진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기사를 끌어내리고는 운전석을 차지했다. 이런 짓, 한두 번 해본 실력이 아니다.
기사를 끌어내린 니콜라스가 나를 들어서 조수석에 처박고는 그대로 악셀을 밟아 밤거리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 조수석 대시 보드 아래서 머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사정이 급박하긴 했지만, 그렇게 사정없이 집어던지다니…… 목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미안, 놈들이 바짝 쫓아오기에 다급해서 그만…….”
니콜라스가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급커브를 틀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띵한데 운전까지 거칠어서 이번엔 니콜라스의 가슴팍을 들이받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고…… 대체 여긴 뭐 하러 왔어요?”
“뭐 하러 왔을 것 같아?”
“공연 같은 건 그냥 TV로 보면 안 돼요? 당신이 뭐 잘 한 게 있다고 공연장을 당당하게 들락거려요? 게다가 겨우 열아홉 살짜리 여자애 공연을 보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공연은 성인용이던데 왜?”
니콜라스가 뚱하게 대꾸하면서 두 차선 안쪽으로 위험하게 파고들었다. 과속에 난폭하기까지…… 운전을 왜 이 따위로 하나 싶어서 뒤를 살피다가 심장 멎을 뻔했다. 바로 뒤에 시커먼 밴과 지프가 여섯 대나 따라 붙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와서 바로 차를 훔쳐 타고 튀었는데, 이게 웬일이냐? 저놈들이 대체 어떻게…….
“빌어먹을! 이제 어쩔 거예요?”
“내가 설마 그 여자애를 보겠다고 거길 갔겠어?”
그때 우리를 쫓던 시커먼 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튀어나오더니 조수석 쪽으로 달려들었다.
“니콜라스!”
“보고 싶었어.”
바로 그 순간, 놈들의 벤이 우리 차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살면서 이런 강도의 충돌은 처음이었다. 마치 거대한 해머에 온몸을 얻어맞은 것 같았고, 차는 그대로 뒤집히기라도 할 것처럼 위태롭게 요동쳤다. 바퀴가 조금만 더 떴으면 차는 정말로 전복이 되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가 강탈한 차량도 동급 최강의 체력을 자랑하는 명차였고, 니콜라스의 운전 솜씨도 나쁘지 않아서 중앙선을 잠깐 넘어갔다가 다시 차선을 찾아 들어왔다. 대신 마주 오던 차들이 충돌을 피하려고 급제동을 걸고, 방향을 틀면서 반대편 도로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동안 계속 만나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어. 니 주변엔 항상 놈들이 깔려 있었거든.”
“그럼 아예 나타나질 말았어야죠!”
“너무 그러지 마. 나도 참을 만큼 참은 거야.”
반대편 도로가 엉키는 바람에 중앙선을 넘어온 대형 트럭이 기사단의 밴 두 대와 연쇄충돌을 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차량이 다섯 대였다. 니콜라스도 속도를 내고 있지만, 놈들의 기세도 무서울 정도였다. 우리 처지가 대여섯 마리의 사자 떼에게 사냥을 당하는 초식동물과 흡사했다.
“삼만 명이 모이는 대형 콘서트 정도면 괜찮은 기회잖아. 숨기 편하고, 놈들의 시선도 분산될 테고…….”
괜찮기는 개뿔! 이렇게 딱 걸렸으니, 대체 이 일을 어쩔 거냐? 내가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자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번엔 차선 세 개를 한 번에 미끄러져서 킬리요크 강변도로 방향의 출구로 뛰어들었다.
우리를 바짝 추격하던 기사단의 지프 한 대가 한발 늦게 따라붙다가 분리대를 들이받았고, 니콜라스의 과격한 새치기에 당황한 차량들이 줄줄이 추돌하며 나들목 입구를 틀어막았다. 하여튼 이 인간은 한번 뜰 때마다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왜…… 안 떠났어요?”
“언젠간 한가롭게 여행을 다닐 날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놈들의 추적을 생각보다 간단하게 따돌리긴 했지만…… 이걸로 괜찮은 걸까? 주말 저녁이라 강변도로의 정체가 만만치 않았다. 니콜라스는 당당하게 갓길을 타고 과속 중이지만…….
“꼭 이래야 돼요?”
“미안해.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냥 잠깐 얼굴이나 보고 갈까 했었는데…….”
긴 도피생활 때문에 눈치가 무뎌진 걸까? 아까부터 계속 동문서답이다.
“봉인인가 뭔가…… 그거 말이에요.”
“…….”
“다 집어치우고 그냥 사라져버리면 안 돼요? 우리도 당신도…… 그냥 살던 대로 사는 것도 나쁠 건 없잖아요.”
“세상은 애초에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었어. 지금 이 상태는 자연스럽지 않아.”
고집은…….
“그 시커먼 용가리는 세상에서 인간들을 쓸어버리려고 했다면서요? 왜 그런 놈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요?”
“인간들이 먼저 그 못된 용가리의 성질을 건드렸어. 그러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경고를 해도 무시했지. 용의 영지는 광활하고, 아름답고, 비옥하고…… 엄청난 보석 광산이 세 군데나 있었거든. 결국 탐욕이 두려움을 이겼지.”
“그럼 왜 그때 인간들 편을 들었어요?”
“바솔로뮤도 너무 막 나갔거든. 내가 바란 건 어느 한 쪽의 멸망이 아니었어. 공존이고, 균형이었지.”
“그자가 돌아와도 자기 땅은 이제 못 찾아요!”
그렇게 쓸 만하고 괜찮은 땅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리 없다. 도시가 들어섰거나, 농장으로 쓰고 있거나…… 하다못해 국립공원이라도 돼 있을 텐데 이제 와서 천 년 전 주인에게 땅을 호락호락 내줄 리 없다. 사람들은 전쟁도 모르고 조약도 모른다. 안다고 해도 전쟁을 다시 벌이지 않고는 자신의 옛 땅에 차 한 대도 마음대로 못 세울 거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용의 앞날을 나보다는 밝게 봤다.
“찾을 거야. 용 외에는 다스릴 수 없는 땅이니까.”
사정 얘기를 대강 듣고 보니 그쪽도 안 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다. 어디선가 음산하고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의식 밑바닥에 깔린 두려움의 전주곡 같은 이 소리가 들리고도 일이 조용히 끝나거나, 누군가가 크게 다치지 않고 지나간 적은 없었다. 헬기가 떴다.
놈들의 헬기는 순식간에 우리 머리 위로 들이닥쳤다. 이 차가 제법 쓸 만하고, 니콜라스가 귀신같은 운전 실력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는 놈들을 따돌릴 수 없다.
“천행으로 여기서 살아남으면…… 다 잊어버리고 그냥 떠나요.”
“미안해, 제이. 그런 약속은 못 해.”
“놈들이 당신을 죽일 거예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바솔로뮤가 나를 죽이겠지.”
“그자는 잔다면서요?”
“깼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울렸다. 그리고는 이후로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두근거렸다. 가슴을 움켜잡고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니콜라스가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때 되면 누가 안 깨워도 알아서 일어나는 놈이야. 어른이잖아.”
놈들의 헬기가 바닥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며 우리 앞을 막았다. 눈이 멀 것처럼 강렬한 불빛에 고개를 돌리고 총을 꺼내들었다. 상대는 무슨 일만 났다 하면 헬기부터 날리고 보는 럭셔리한 무장괴한들인데, 그 앞에서 겨우 권총 한 자루를 들고 깔짝거리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배고픈 시조새처럼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노려보던 놈들의 헬기가 먼저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니콜라스가 중앙 분리대를 받아버리고 반대편 도로로 뛰어 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놈들의 공격은 위협적이었고, 총알이 앞 유리를 뚫고 들어와서 내 어깨 바로 옆을 뚫고 들어갔다.
“웅크리고 있어. 고개 들지 말고…….”
“시끄러워요!”
버럭 소리를 치고는 놈들을 향해 응사했다. 고작 서너 발의 반격이었지만, 이쪽에 무기가 있다는 걸 깨달은 놈들이 헬기를 띄워서 거리를 뒀다. 내가 헬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사이에 니콜라스는 마주 오는 차를 피해서 미친 듯 곡예 운전을 했다. 이런 식이라면 기사단은 어떻게 피한다고 해도, 교통사고로 죽을 거다.
마주 오는 세단을 용케도 피하며 간다 싶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저만치 앞쪽에서 대형 덤프트럭이 달려오다가 우리를 발견하고 핸들을 틀었다. 정면충돌을 피하려는 배려는 고맙지만, 차선 3개를 가로막고 서는 바람에 꼼짝없이 진로가 막히고 말았다. 이제 남은 선택이라곤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든가, 그대로 충돌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멈춰요!”
“루크 첸하고는 그만 헤어져.”
“뭐가 어째?”
이성을 잃고 버럭 소리를 쳤다.
“너하고는 안 어울려. 결국 상처만 잔뜩 입을 거야.”
그렇게 대꾸하면서 니콜라스가 멈춰선 트럭과 도로 난간 사이에 난, 빠져 나가기는 터무니없이 좁은 틈으로 돌진했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더니……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는 안 죽을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짓도 하는 모양인데, 난 대체 어쩌란 거냐?
“제이?”
충돌 시점이 지난 것 같은데도 차가 여전히 달리는 중이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물론 중간에 큰 충격이 한번 있긴 했지만 우리도 별 일 없고, 차도 생각보다는 멀쩡했다. 차 왼쪽 옆구리가 찢어지고 뒷문은 아예 날아가고…… 뭐, 그 정도였다.
한고비를 용케 넘겼다. 하지만 살았다고 하기는 일렀다. 우리는 여전히 도로를 역주행 중이고, 놈들의 헬기는 머리 위에서 윙윙거리고 있으니까…….
“내 앞에서 상처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차 지붕으로 다시 총격이 쏟아졌다.
“이놈의 도로엔 왜 터널 같은 것도 하나 없는 거야?”
니콜라스가 술통에 빠졌다가 나온 것처럼 멋대로 차를 몰면서 투덜거렸다.
“강변도로잖아요.”
이 차는 오래 못 간다. 총격에 엔진이라도 터진 걸까? 우그러진 보닛에서 연기가 풀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름 냄새도 심하게 나는데, 차를 세우고 내려서 뛰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어?”
그 녀석이라니?
“누구요?”
“루크 첸 말이야.”
헬기에서 잠깐 눈을 떼고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루크는 왜 찾아요?”
“한 번 만나게.”
니콜라스하고 루크가 만나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다. 우연히 스쳐만 지나간다고 해도 무섭다. 연쇄살인범과 조폭 두목의 조우라니…… 분명히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칠 거다.
“만나서 루크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요?”
“니 얘기도 하고, 일 얘기도 좀 하고…….”
“일?”
내 물음에 니콜라스가 경황없는 중에도 나를 힐끔 봤다. 분명히 눈치를 살핀 거다.
“녀석이 시간을 담은 병을 가지고 있다니까…….”
맞다. 루크가 그 수정 목걸이를 갖고 있었지. 니콜라스는 그걸 목숨 걸고 찾아다니는 중이었고…… 그때 문득 니콜라스가 몬티첼리 저택에 나타났었던 것도 결국 시간을 담은 병 때문이란 게 기억났다.
“제이?”
열 받아서 총구를 니콜라스의 목덜미에 꾹 찔러 넣었다.
“결국, 그것 때문에 나한테 접근했던 거야?”
“시간을 담은 병 때문에 너한테 접근한 건 그 중국 제비야. 내가 아니라…….”
이런 인간을…… 오랜만에 봤다고 놀라고, 가슴 두근거리면서 찾아다니고, 죽을까 봐 걱정돼서 데리고 도망까지 치고 있는 내가 병신이다.
내가 총을 겨눈 채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으니까 걱정이 됐는지 니콜라스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오해야, 제이.”
“닥쳐!”
“사랑해.”
그때 또 다시 머리 위로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두 대의 헬기에서 쏟아진 무자비한 총격에 엔진룸이 떨어져 나갔고, 니콜라스의 배와 다리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앞을 막아서는 헬기를 향해 마지막 총알까지 다 써버렸지만 놈들은 움찔하는 기색도 없었다.
니콜라스가 핸들을 끌어안고 엎어진 것과 차가 뒤집어진 것은 거의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