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어디 있어?”
「어?」
자다 깼는지 비니의 목소리가 꽉 막혀 있었다. 캠핑카에 모든 것을 다 싣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훌쩍 떠난 비니는 다행히 휴대폰도 잘 챙겨갔고, 번호도 바꾸지 않았다.
“거기 어디야? 정말 사막으로 간 거야?”
「무슨 일 있어? 이 시간에 웬 전화야?」
“그냥 답답해서 걸었어. 어디 있는 거야?”
통화가 되는 걸 보니 사막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않은 것 같은데…….
「다르바 오아시스라고……. 」
비니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르바 오아시스는 주유소와 식료품점, 그리고 작은 모텔 몇 개가 길옆에 늘어선 작은 동네였다. 여행자들이 본격적인 사막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족한 물이나 식량을 보충하고, 쉬어가기도 하는 기착지로 그렇게까지 험하고 외로운 곳은 아니다. 그리고 국도를 따라서 다섯 시간 정도 달리면 닿는 곳이니까 별로 멀지도 않다.
“계속 거기 있었어?”
「이틀 됐어.」
“그럼 그 전엔 어디에 있었는데?”
「오아시스 워터파크.」
비니는 잠깐 머리 식히러 사막에 간 것뿐인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걸까?
「너…… 무슨 일 있지?」
이제 정신이 좀 돌아오는지 비니 목소리가 많이 분명해졌다.
“일은 무슨 일? 별 일 없어.”
대답하면서 창밖으로 마당을 슬쩍 내다봤다. 전등은 모두 꺼져 있지만 오늘따라 밝은 달빛이 청연루 앞마당을 훤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당에서 위치를 잡고 대기 중인 천년 조약의 기사단은 아직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어쨌든 극적인 타결이 없다면 오늘 밤 안으로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거다.
“그냥 걱정돼서 전화했어. 어디 있는지도 궁금하고…… 언제 올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
오늘 밤은 첸 콴의 습격이 있었던 그날 밤하고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은 그때와 흡사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이 사람 저 사람 보고 싶은 얼굴이 두서없이 떠오르는 게…… 조짐이 안 좋았다. 조짐이 안 좋아서 딱히 두렵거나 초조한 건 아니었다. 그냥 평상시보다 좀 더 싱숭생숭한 것뿐이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면 누구한테 해야 되나 잠깐 생각 하다가 비니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야?」
비니가 보채듯 물었다.
“아무 일 없다니까?”
「니 목소리하고 말투가 우울증 말긴데, 아무 일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아니, 내 목소리하고 말투가 어디가 어때서?
「루크 첸, 그 자식이 속썩이냐?」
“응.”
내 대꾸에 전화기 저편에서 깊은 한숨이 날아왔다.
「그 자식이 뭘 어쨌는데?」
“그냥 그래. 니 말대로 태생이 나쁜 놈인데, 붙어 있어봐야 뭐 좋은 일이 있겠어?”
내 넋두리에 비니가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헤어져.」
말만 들어서는 굉장히 간단한 일 같은데, 왜 그렇게 쉽지 않는지 모르겠다.
“며칠 놀다가 돌아와. 볼 것도 없는 사막에 오래 있지 말고…….”
「알아서 할게.」
“부모님도 걱정하셔.”
「한 번씩 찾아뵈야지.」
이 자식, 정말 사막에 오래 있을 작정인가 보다.
“비니.”
「왜?」
“방법이 있을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말고…….”
「…….」
“델 파소에서 있었던 일은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었잖아. 살면서 설마 그런 일을 두 번이야 겪겠어?
「또 없으란 보장도 없으니까…….」
델 파소가 그렇게 허물어진 것이 비니 때문이라는 건 거의 확실하지만, 그게 온전히 비니 잘못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비니.”
「왜?」
“내가 그동안 너한테 했었던 말 중에 좀 심했던 말은 대부분 화가 나서 아무렇게나 지껄인 소리였어.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진 말고…….”
「너 왜 그래?」
“그리고…….”
그때 문이 달칵 열리더니 루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아까 입었던 푸른 드레스 차림이고 손엔 장검을 들고 있었다. 표정도 태연하고 태평해서 불리한 결전을 눈앞에 둔 긴장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제이?」
“너한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극복하고 다시 돌아와줘서 정말 고마워. 넌 정말 괜찮은 놈이고, 좋은 친구였어.”
「왜 갑자기 과거형이야?」
비니가 굳은 음성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말이 잘못 나왔어.”
「대체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야.”
사막 한복판에 있는 놈이 상황을 알면 뭐하냐?
「너 진짜 이럴래?」
비니가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내 일엔 신경 쓸 거 없고, 너나 마음 추스르고 빨리 돌아와. 넌 태생이 대도시 체질인데 대체 사막 한복판에서 무슨 청승이야?”
「야!」
루크가 전화 빨리 끊으라고 눈치를 줬다. 꼴도 보기 싫어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몸조심하고, 머리나 살짝 식히고 바로 돌아와. 거기 오래있을 생각은 하지도 말고…….”
「무슨 일인지 대답을 하라니까!」
비니가 버럭 소리를 쳤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우울하고 음침했나? 어쨌든 이렇게 흥분하다가 캠핑카 타이어라도 나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전화를 그만 끊어야겠다.
“저기 비니…….”
그때 등 뒤로 슬그머니 다가온 루크가 내 허리를 한 팔로 감고는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야?”
내가 짜증내며 버둥거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루크가 전화기에 대고 비니를 약 올렸다.
“사막은 어때? 지낼 만해? 마법사?”
「너 대체 제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헉, 비니의 고함소리 뒤편으로 뭔가 빠개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넌 니 앞날이나 걱정해. 앞으로 평생 사막에서 살려면 굉장히 힘들고 답답할 거야.”
「너 때문에 제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남자는 지켜. 그러니까 넌 걱정할 거 없어.”
휴대폰을 뺐으려고 달려들었지만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는지 루크는 나한테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악착같이 휴대폰을 사수했다.
“전화기 안 내놔?”
“가만있어 봐.”
이러다 캠핑카가 주저앉기라도 하면 사막 한복판에서 비니만 죽어날 거다.
「너…….」
비니가 약이 올라서 숨을 헐떡거리는 사이, 루크가 내 눈총에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지막으로 비니의 속을 뒤집었다.
“늦었으니까 잠이나 자. 사막은 밤에 추우니까 감기 조심하고…….”
괜히 전화를 해서 비니 기분만 잡치게 만들었나 보다. 비니도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었을 텐데…….
“뭐야? 비니 몬티첼리한테 작별인사라도 하고 있었던 거야?”
루크가 휴대폰을 돌려주면서 따지듯 물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쳐들어온다면서?”
생각해보면 지난 번 첸 콴의 습격 때 그렇게까지 겁에 질리거나 낙담을 하지 않았던 건 내가 녀석들의 실력을 전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절대적으로 루크가 불리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지금처럼 미리 체념을 하지는 않았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아무리 살기등등해 봐야 조폭 행동대원에 불과했던 콴의 부하들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였다. 놈들은 제대로 훈련 받은 특수부대원들이고, 화력은 말도 못하게 빵빵하고, 일단 작전 개시하면 인정사정없었다. 몬티첼리 저택과 델 파소에서 놈들이 설치는 걸 보고 난 후, 겁에 질려서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놈들을 상대로 하는 전면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 재수 없는 목걸이를 그냥 걔네들한테 주면 안 돼?”
“안 돼!”
루크가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죽으면 다 소용없어.”
“안 죽어.”
“너 이러다 진짜 큰일난단 말이야!”
“너는 아직도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꼭 벽을 보고 혼자서 떠드는 것 같은 답답함에 입에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습게 보이지는 않아, 미친 것 같지.”
루크를 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루크가 나를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옆에 와서 앉았다.
“그렇게 불안하면 지금이라도 니 아파트에 가서 기다려. 여기 일이 일단락되면 연락할게.”
듣다 보니 짜증이 나서 루크를 노려봤다. 이 자식은 이런 상황에선 항상 그럼 넌 빠지라는 식이지, 한 번도 의견 수렴이나 양보가 없었다.
“나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루크가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불안하다며?”
“그래서? 집에 가라고? 집에 가서 속편하게 잠이나 자라고?”
“내가 지금까지 이런 사태를 맞아서 한 번이라도 널 실망시킨 적이 있었어?”
순전히 운발로 구사일생 목숨 부지한 거 가지고 잘난 척이 하늘을 찌르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기를 모면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드는 게 정상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짓인데다 루크가 이렇게 천하태평인 걸 보니 답답해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꼴도 보기 싫어서 돌아앉아 있는데 놈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놔!”
“있어 봐.”
나는 뿌리치고, 루크는 들러붙는 사이 등에 뭔가 단단한 것이 배기는 느낌이 들어 몸을 틀었다.
“뭐야?”
“응?”
느낌이 좀 싸해서 루크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역시 뭔가 있다. 곤란한 표정으로 몸을 뒤로 빼는 루크를 붙들어서 어깨의 매듭단추를 풀고 옷섶을 풀어헤쳤다. 루크의 가슴팍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탁한 수정이 걸려 있었다. 시간을 담은 병이었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목걸이를 노려보자 루크가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 옷섶을 여몄다.
“왜 그래?”
“은행 보관함에 맡겨놨다면서?”
“찾아왔어. 저쪽에서 그렇게 집요하게 나오면 은행도 안전한 장소는 아니니까…….”
은행도 안전하질 않은데 그걸 목에 걸고 돌아다니는구나. 이것 때문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금방 밀고 들어온다는데…… 이 자식이 정말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보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에 이런 걸 꼭 목에 걸고 있어야겠어?”
내가 평정심을 잃고 울먹거리자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루크가 내 어깨를 슬쩍 끌어안았다.
“진정해.”
“백 대인은 뭐래? 아까 만나러 간다고 했었잖아.”
“수십 년 만에 군복 제대로 갖춰 입고 1층 로비에서 부하들하고 작전회의 중이야.”
그 영감도 정신이 나갔구나.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서 침대에 길게 뻗어 있는데 루크가 내 옷자락 속으로 손을 들이밀더니 배하고 가슴을 슬금슬금 더듬기 시작했다. 언제 무장 헬기가 안마당에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이 염치없는 촉수는 대체 뭐냐?
“안 바빠?”
녀석의 손을 잡아 치우고 돌아누웠다.
“바빠도 니가 이러고 있으면 나가기 그렇잖아.”
“됐으니까 나가서 일 봐. 밖에서 총소리 나면 나도 나갈게.”
“벽에 뭐 볼 거라도 있어? 고개 좀 돌려봐.”
그러게 말하면서 녀석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내가 이유 없이 삐졌다는 투다.
“크롬웰은 잘 갔어?”
“응.”
“데려다주는 길에 같이 가지 그랬어?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데…….”
루크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 자칫 위험한 게 아니라 틀림없이 위험하다.
“넌 여기서 죽게 버려두고?”
그렇지 않아도 주차장에서 쥬드하고 30분이나 실랑이를 벌였었다. 분위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으니 청연루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랑 같이 가자고 조르는 쥬드를 떼어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씨익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던 루크가 몸을 더 굽혔다.
빡!
“아우!!”
입이라도 맞추려는 듯 입술을 쑥 내밀며 다가들던 루크가 내 이마에 눈두덩을 된통 받히고는 낮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되게 아팠을 거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소리, 너도 들려?”
“무슨 소리?”
루크가 눈언저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벌컥 짜증을 냈다.
귓전에서 모기가 백 마리 정도 윙윙거리는 것 같은 이 소리는 내 귀엔 무척 익숙했다. 경찰차 사이렌 소리…… 게다가 한두 대가 아니라 먼 곳에서부터 떼로 몰려오는 소리였다.
청연루 본관은 층고가 꽤 높은 건물이라서 3층 정도면 청연루의 담장 바깥이 충분히 내다보였다. 갑자기 들려온 사이렌 소리에 차이나타운에서 대형 사고가 터진 건가 싶어서 급한 대로 테라스에 나가서 주변을 둘러봤다. 밤이라서 확실치는 않지만 대강 보기엔 주변에 불이 난 곳도 없고, 교통의 흐름도 정상적이었다. 쥬드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며 잠시 큰길 쪽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도로를 점거하다시피 새까맣게 몰려온 경찰 순찰차 50여 대가 순식간에 청연루 주위를 에워쌌다.
기다리고 있었던 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었는데 이 짭새들은 다 뭐냐? 순찰차 50대면 차 한 대에 짭새 둘씩만 잡아도 백 명이다.
“너, 요즘 뭐 나쁜 짓 한 거 있지?”
영문을 몰라서 인상을 쓰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루크를 바싹 따라붙었다. 루크가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럼 없겠어?”
안마당엘 나와 보니 백 대인과 천년 조약의 기사 중 조금 연식이 있어 보이는 대원 서너 명이 그새 정문을 열고 경찰 책임자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경찰 책임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냐 하면 쥬드하고, 반장…… 헉, 반장님!
멋모르고 마당 중간까지 루크를 졸졸 따라가다가 반장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서 마침 바로 옆에 서 있던 덩치 좋은 기사 뒤쪽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반장이 나를 봤을까?
“무슨 일입니까?”
루크가 반장을 싹 지나쳐서 곧바로 쥬드를 마주 보고 섰다. 쥬드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고, 옆에 서 있던 백 대인이 손에 쥐고 있던 서류꾸러미를 루크에게 내밀었다.
“수색영장이라는군.”
“우리 식당에 밥 먹으러 왔다가 지갑이라도 놓고 갔습니까?”
루크가 백 대인이 내민 서류 뭉치는 쳐다보지도 않고 쥬드를 노려보며 까칠하게 따졌다.
“청연루 별채에 중국 본토에서 밀수한 생아편 수백 킬로그램을 보관 중이란 제보가 있었어요, 그리고 본관 지하에서 상습적으로 거금이 오가는 불법 마작판이 벌어진다는 제보도 있고…… 그리고 시청 보건 위생부에 이 식당에서 유통기한 지난 해물을 쓴다는 신고도 있었어요.”
쥬드가 청산유수로 혐의 내용을 읊었다. 세 가지 다 차이나타운에선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아편 밀수는 경찰이 드물게나마 한 번씩 차이나타운 집중 단속에 나서는 주된 원인이기도 했다. 아편 밀수하고 불법 마작 얘기는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루크가 유통기한 지난 해물을 팔았다는 혐의에 발끈해서 백 대인이 들고 있는 영장을 낚아챘다.
“그럴듯한 혐의도 많을 텐데, 하필 이렇게 구질구질한 걸로 엮어서 내 체면을 깎아야겠습니까?”
“이렇게 큰 식당에서 저지르기 쉬운 실수죠.”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할 각오는 하고 벌이는 짓입니까?”
“그쪽이야말로 당장 비키지 않으면 공무집행 방해예요.”
쥬드의 으름장에 루크가 별 수 없겠다는 표정으로 백 대인을 쳐다봤다. 사실 짭새들하고 전쟁을 벌일 게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선 한 발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이 식당은 정원도 넓고 부속 건물도 많으니까 수색에 시간이 많이 걸릴 거예요. 잘못하면 밤을 새겠네요.”
쥬드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십 명의 짭새들에게 건물 안으로 진입하라는 사인을 주고는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수색은 굉장히 느리고 형식적이었다. 백 명에 가까운 수색대가 몰려온 것 치곤 뭔가를 열심히 찾는 기색도 없었고, 수색대 절반은 천년 조약의 기사들과 대치하는 것 같은 대형으로 마당을 서성거릴 뿐 아예 건물 안으로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무장한 타격대와 역시 만만치 않은 화기로 무장한 천년 조약의 기사들이 서로를 마땅찮은 눈빛으로 노려보며 마주선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조마조마했다.
한동안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 지켜보던 루크가 쥬드에게 협상안을 제시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우선 제이를 우리한테 넘겨주시고…….”
쥬드의 요구에 루크가 덩치 큰 천년 조약의 기사 뒤에 몸을 숨긴 채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나한테로 걸어오더니 손목을 틀어잡고는 쥬드와 반장과 터너, 에쉬…… 그 외 이런 식으로 얼굴 마주치기 곤란한 동료들 앞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나를 짭새들 쪽으로 떠밀었다.
“이제 됐습니까?”
“야, 너…….”
어이가 없어서 녀석에게 달려드는 내 목덜미를 터너가 사정없이 잡아챘다. 그 바람에 목이 졸려서 기침을 하며 멈춰섰다.
“그리고 당신도 서까지 동행을 해주셔야겠어요.”
쥬드의 요구에 루크가 인상을 확 구겼다.
“나를 체포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수갑을 찬 채로 끌려가는 쪽이 취향이라면 당장 영장을 받아올 수도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하시죠.”
루크가 깐깐하게 나오자 쥬드도 눈살을 찌푸렸다.
“웬 고집이에요? 여기서 손 놓고 습격을 당하는 것보다는 서에 가 있는 편이 당신 신변에 더 이롭지 않겠어요?”
쥬드가 짭새들을 백 명이나 끌고 차이나타운을 침공한 의도는 분명했다. 쥬드는 아까 나하고 같이 청연루에 왔을 때 완전무장을 한 채 청연루 곳곳에 버티고 선 천년 조약의 기사들을 직접 봤다. 오늘 밤 안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질 것을 알았으니 상황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은 짭새들의 여왕으로써 심각한 직무 유기라고 판단을 했을 거다.
차이나타운에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천년 조약의 기사들이 한판 붙는 건 이전의 어떤 폭력사태하고도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심각한 인적, 물적 손실이 예상되는 최악의 사태였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이유를 불문하고 떴다하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다니는 개망나니들인데다, 차이나타운은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관광특구였다. 예전에 오컴을 추적할 때 델 파소 주민들의 안전에 대한 기사단의 태도가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놈들이 또다시 시내 한복판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사전에 차단하는 게 상책이었다.
게다가 비슷한 화력의 천년 조약의 기사단과 맞장이라니…… 이건 바로 전쟁이라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놈들이 벌일 무지막지한 폭력 사태가 청연루 담장 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치고받는 걸로 끝나는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청연루 주변을 경찰이 에워싸고, 모든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루크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보호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미봉책으론 나쁜 방법도 아니었다. 사실 어떤 방법이라도 여기서 버티다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거친 공세를 달랑 검 한 자루 손에 쥔 허전한 상태로 받아내는 것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루크는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부하들과 떨어져서 혼자 경찰서에 끌려가는 게 더 안전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드는데요.”
“설마 놈들이 경찰서까지 쳐들어오겠어요?”
쥬드의 장담에 루크가 대놓고 비웃음을 날렸다.
“경찰서가 독수리 요새라도 됩니까?”
공공 기관의 권위를 부정하는 듯 불손한 반문에 쥬드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루크에게 다시 물었다.
“경찰서의 안전성을 못 믿겠다는 거예요?”
“나는 본래 내 머리하고 능력 외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루크의 거만한 대꾸에 쥬드가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차이나타운도 엄연히 경찰 관할이에요. 당신들은 이곳이 치외법권이나, 흑풍회의 영지라도 된다는 듯 설치고 다니지만, 우리는 이 지역에서 대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지는 걸 두 손 놓고 구경만 할 생각은 없어요.”
“이건 당신들이 간섭할 일도, 말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에요.”
어지간하면 못이기는 척 따라가면 좋으련만, 루크가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쥬드의 태도도 강경했다. 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루크와 농담 따먹기나 잠깐 하다가 빈손 들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던지, 쥬드가 터너를 돌아보며 사인을 보냈다. 그러자 터너가 수갑을 찰랑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짭새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경찰서로 끌고 갈 심산이란 걸 깨달은 루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장검을 뽑아들었다. 거의 동시에 루크의 등 뒤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천년 조약의 기사들도 소총을 들어 경찰 수뇌부를 일제히 겨냥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루크의 거친 반발에 터너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쥬드하고 반장도 당황해서 표정이 일순 굳었고, 나는…… 심장이 잠깐 멎었다.
“야…… 너 왜 그래?”
내가 지금까지 사태를 조용히 관망했던 것은 쥬드가 가지고 온 해결책 쪽으로 마음이 확 쏠렸기 때문이었다. 경찰서 정도면 1급 보안구역이었다. 실제로 경찰서 안에는 중요한 증인이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범죄 피해자들이 장기 체류하는 구역이 있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배후가 아무리 빵빵하다고 해도,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경찰서에까지 쳐들어오지 못할 거다.
그래도 쥬드나 되니까 그간의 정을 잊지 않고 짭새를 백 명이나 데리고 와서 살 길을 터주는 건데, 고맙다고 큰절은 못할망정 이게 무슨 행패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쥬드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마치 철없는 어린애 나무라듯 루크에게 따졌다.
“경찰서 방문은 다음 기회로 미루죠. 오늘 밤엔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서요.”
“소총 든 부하들 몇 명 거느렸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나 봐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한판 붙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럼 그 칼은 넣어뒀다 돼지고기 자를 때나 쓰고, 얌전히 따라 나서지 그래요?”
“당신이나 부하들 데리고 그만 돌아가요. 생각해주는 것도 고맙고, 노력도 가상하지만 이 전쟁은 아무도 못 막아요.”
루크가 장검을 빼 든 채 쥬드하고 말씨름하는 게 보기 아슬아슬하고 답답해서 내가 나섰다.
“그러지 말고 일단 가. 경찰서 출입이 처음도 아니잖아. 앞으로 드나들 일도 한두 번이 아닐 거고…….”
“너나 친구들 따라 가. 내일 전화할게.”
녀석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잘라 말했다.
“야. 제발…….”
“여기 버티고 있으면 놈들하고 제대로 한판 붙을 수 있어. 하지만 이대로 수갑 차고 경찰서로 끌려가다가 길바닥에서 놈들하고 마주치면 그땐 정말 죽은 목숨이야.”
“…….”
역시 이런 일은 양쪽의 말을 모두 들어봐야 되나 보다. 루크의 설명을 들으니 놈들이라면 충분히 경찰 호송차량이나, 경찰서 습격도 불사할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급히 바뀌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중심을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것 같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떻게 하면 루크가 무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결국 이 위기를 모면할 방법은 없는 걸까?
아무런 희망도 없었을 때엔 마음이 그냥 그랬었는데, 살 길이 열릴 듯싶다가 다시 닫혀버리니까 낙심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터너가 끌어당겨서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검을 쥐고 있던 루크가 흠칫 놀라서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잠깐 걱정스런 눈빛으로 한눈을 팔던 루크가 다시 쥬드를 쳐다봤다.
“늦기 전에 부하들 데리고 돌아가요. 공연히 머뭇거리다 당신하고 다른 짭새들까지 전쟁에 휘말리는 건 나도 원치 않으니까.”
쥬드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루크가 예상했던 것보다 세게 나오고, 또 상황이 생각만큼 녹록치 않으니 당혹스런 눈치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쥬드가 싸늘한 눈초리로 루크를 노려봤다.
“차나 한 잔 마셔야겠어요. 안에 빈자리는 있죠?”
주방에 가서 해물 냉장고나 대충 뒤져보다가 곱게 물러가줬으면 하는 루크의 바람과는 달리 홀에 들어가 자리 잡고 앉은 쥬드는 서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동원 가능한 타격대원들을 몽땅 차이나타운으로 보내달라는 대담한 요구를 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쥬드를 빨리 보내고 싶은 마음에 직접 차 시중을 들던 루크가 짜증을 내며 차 주전자를 내려놨다.
루크의 성화에 쥬드가 조용히 좀 하라고 손을 흔들며 서장과 통화를 계속했다.
“아직은 잠잠한데, 첸 사장이 겁을 먹고 움직이려 들질 않네요.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고, 상황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되는대로 긁어서 보내주세요.”
자기가 겁에 질려서 청연루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는 쥬드의 모함에 루크가 발끈해서 일어섰다. 하지만 지금이 한가롭게 기분 타령을 할 때는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루크를 도로 자리에 끌어 앉혔다.
“몇 명이나 더 오는 거야?”
내 질문에 쥬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옆에 앉아 있던 타격대 대장 멜 반장을 돌아봤다.
“추가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겠어요?”
“비상 대기 인원까지 다 불러내면 70명 정도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홀 안에는 쥬드 외에도 우리 반장하고 타격대 멜 반장이 짭새측 대표로 들어와 앉아 있었다. 흑풍회 대표로는 루크, 백 대인, 그리고 딱히 대표 자격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얼떨결에 자오가 따라 들어왔고, 나는 루크의 남자친구라는 하찮은 자격으로 옆 테이블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쥬드와 멜 반장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주워듣는 중이었다.
“되도록이면 안전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어서요. 그 정도면 별 일 없겠죠?”
쥬드의 물음에 멜 반장이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쿠간 시 타격대가 몽땅 몰려와 진을 치고 있는데 여길 쳐들어올 정도로 미친놈들이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군요.”
멜 반장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루크가 허탈하게 웃었다. 루크는 이제 나도 모르겠으니 니들 맘대로 해보라는 투였다. 녀석의 그런 태도 때문에 나까지 덩달아 불안했다.
경찰 타격대가 청연루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으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시간을 담은 병을 포기하고 곱게 물러설까?
이런 상황에서 덩치를 크게 부풀리는 건 중요하다. 쥬드의 전술이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경우에나 통하는 수였다. 그 기사단 놈들이 청연루를 에워싼 타격대를 보고 그냥 물러설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해온다면 이 결정은 도리어 총격전의 규모만 더 키울 위험이 있었다.
“너도 차 한 잔 줄까?”
루크가 주전자를 들어 보이며 나한테 물었다.
“됐어. 있으면 술이나 한 잔 주던가.”
추가 지원 병력이 청연루에 도착한 건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추가 인원은 애초에 예상보다는 좀 적은 50여 명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청연루 마당은 주말 저녁, 한창 장사 잘 되는 시간만큼이나 복작거렸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특수부대 연병장처럼 변해버린 정원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그치질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숨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타격대의 숫자가 늘면 늘수록 안심이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불안감만 커졌다.
“왜 그래?”
나 마시라고 자오가 가져다준 고량주를 슬쩍 집어 마시면서 루크가 물었다.
“몰라서 물어?”
짜증이 나서 사납게 쏘아붙이고 옆에서 하품을 하고 앉아 있는 쥬드를 돌아봤다.
“괜찮을까?”
“뭐가요?”
“타격대말이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소총과 방탄복으로 무장한 타격대의 안전을 걱정할 일은 없겠지만, 상대가 로켓만한 탄환을 갈기고 다니는 미친놈들일 때엔 이쪽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게다가 좀 전부터는 몬티첼리 저택의 그 말도 안 되는 습격사건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바람에 앉아 있기도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놈들은 훈련된 특수부대야. 경찰 타격대라고 해봐야 몰려다니면서 갱단 소탕하고, 흉악범 잡아들이는 게 고작이지, 전쟁을 치러본 건 아니잖아.”
“그럼 어떡해요? 당신 남자친구가 여기서 꼼짝을 않겠다는데?”
쥬드의 지적에 이 모든 사태의 원인 제공자에게 눈총이 쏟아졌다. 하지만 루크도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왜 이래?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도, 짭새 타격대도 내가 초대한 게 아니잖아?”
시간이 어느덧 새벽 4시로 접어들었다. 차를 한 주전자나 마시고 힘들게 졸음을 쫓던 쥬드는 테이블에 엎어진 지 오래고, 반장도 홀 구석에 의자 서너 개를 붙이고 편안하게 누워 간간히 코까지 곯고 있었다. 백 대인과 루크는 경찰 지원 병력이 도착한 직후에 홀을 나갔기 때문에 지금 안에 있는 흑풍회 관계자는 자오뿐이었다.
역시 쥬드의 전략이 주효해서 놈들이 습격을 포기한 걸까? 이제 한두 시간 후면 날이 밝을 거다. 새벽 두 시부터 네 시 사이가 가장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쥐죽은 듯 적막한 어둠 속에서 그 죽음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탈 없이 날이 밝아주면 한숨 돌리겠지만…… 괜찮을까?
“오늘을 그냥 넘어갈 모양인데?”
자오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어깨너머로 창밖을 내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럴까?”
“올라가서 좀 쉬지 그래?”
“마음이 안 놓여.”
“좀 있으면 날이 밝을 텐데, 아무리 미친 것들이라도 벌건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서 판을 벌이겠어?”
“그렇기는 한데…….”
예감이 안 좋다. 뭔가 크고 위험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유별나게 예민하거나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확실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오나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이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날이 확실히 밝을 때까지는 마음을 못 놓겠어.”
지금의 이 어둠과 고요함은 음습하고, 음험했다. 폭풍 전야의 그것처럼 뭔가 커다란 위험과 음모를 감추고 사람의 눈과 귀를 가리는 불길한 장막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밤이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더 강하게 들었다. 격렬한 총격전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도 처음 겪는 일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겁이 나는 걸까?
“왜 이렇게 바짝 쫄았어?”
시간이 지날수록 뻣뻣하게 굳어가는 나를 자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그럼 콧노래라도 불러?”
“하여간 짭새들은…… 영화에서나 터프하지, 실제론 참 쓸데없어.”
웃자고 지껄이는 소리겠거니 싶어서 그냥 웃었다.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에서 니들이 누구 덕에 살았는지는 이제 기억도 안 나지?”
“그런데 왜 이렇게 떨어?”
어쩌다 보니 재수에 옴이 붙어서 그간 쿠간에서 벌어진 난장판이란 난장판은 다 헤집고 돌아다니느라 정신적으로 만신창이가 되다 보니 지레 겁을 먹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면 다행이고…… 그런데, 밖이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창밖을 내다보니 경찰 타격대원들하고, 루크네 기사 몇 명이 정문 근처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크게 떠드는 건 아니지만 열댓 명 정도가 모여서 웅성거리다 보니 아직 조용한 새벽이라 그 소리가 제법 컸다. 창문 너머로만 봐선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서 자오와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누구야?”
“알게 뭐야? 짭새 지원병인가 보지.”
정문 쪽에서 좀 떨어져 선 루크네 기사 서너 명이 마땅치 않은 듯 떫은 표정으로 자기네들끼리 투덜거리고 있었다.
추가 병력이 더 온 건가? 지금 몰려와 있는 타격대도 슬슬 철수 준비를 하는 분위긴데, 이 늦은 시간에?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디에 박혀 있었던 거야?”
“이 새벽에 여긴 어쩐 일이야?”
문 앞에는 완전 무장을 한 타격대원들이 깊은 숲의 우거진 나무처럼 빽빽하게 버티고 서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왔길래 이렇게 몰려서서 떠들고 있는 걸까?
유난히 덩치 큰 대원 몇 명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질 않아서 억지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 앞쪽에서 무척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들이야말로 왜 이렇게 잔뜩 모여 있어? 여기 무슨 일 있어?”
비니가 왔다.
루크하고의 짧지만 빈정 심하게 상하는 통화를 마친 후, 비니는 자신의 중고 캠핑카로 국도를 시속 120킬로미터 속도로 달려서 다섯 시간 반 만에 청연루에 도착했다. 비니가 사막으로 들어간 지도 꽤 됐고, 사막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이제 그만 마음 추스르고 돌아올 때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런 때에 여기에 나타날 게 뭐냐?
“대체 무슨 일이야?”
비니가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보며 따지듯 물었다.
“왔으면 집에나 가지, 여긴 왜 왔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게 할 소리야?”
비니가 나를 밀고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며 투덜거렸다. 그동안 비니의 방황이 끝나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다시 봐서 정말 반갑지만, 비니가 여기 오래 있는 건 좋을 게 없었다. 비니한테도 안 좋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더욱 안 좋을 거다.
“됐으니까, 일단 가! 내일 만나서 얘기해.”
“그럴 거면 내일 왔지. 루크 첸, 그 자식 어디 있어?”
비니가 붙잡는 나를 뿌리치고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안에서 나오던 멜 반장, 그리고 타격대 부대장인 러셀과 마주쳤다.
“비니, 너…….”
러셀이 반가운 표정으로 비니에게 다가서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멈췄다.
“니가 여긴 웬일이야?”
“너는…….”
비니가 러셀과 멜 반장을 보고 주춤했다. 타격대 회식 이외의 자리에서 둘이 같이 있는 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비니를 본 멜 반장이 한숨을 쉬며 러셀을 뒤로 끌어당겼다.
“엄청난 사건이라도 터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라니…… 오늘 여기 쳐들어오는 놈이 비니였던 거야?”
“그런 모양인데요?”
러셀이 멜 반장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멜 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비니를 노려봤다.
“타격대가 아무리 궂은 일 담당이지만, 너무하는 거 아냐? 우리가 저놈을 어떻게 당해?”
멜 반장의 농담에 비니가 발끈해서 반장을 노려봤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루크 첸만 잡아 죽이고 바로 돌아갈 거니까…….”
비니의 대꾸에 러셀하고 멜 반장이 정말 놀랐다.
“뭐야? 진짜 너 때문이었던 거야?”
“그 자식, 안에 있어요?”
비니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성급하게 메인 홀로 통하는 현관문을 열어 젖혔다. 그 모습을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던 멜 반장이 러셀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애들 철수준비 시켜라. 일도 중요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델 파소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더구나 원인도 밝히지 못한 채 사건이 종결되자 경찰서 내부에선 이게 아무래도 비니하고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분분히 오고갔었다. 워낙 피해 규모가 컸고 사망자도 여럿 발생한 사건이라서 함부로 떠들어대는 사람은 없었지만 비니가 오랜 혼수상태였던 것과, 깨어나서도 두문불출하다가 결국 사막으로 떠나버린 정황 때문에 델 파소 붕괴 사고가 비니의 소행일 거란 의심은 이제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날 밝으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데요?”
러셀이 시계와 컴컴한 밤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멜 반장은 어느새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슬슬 준비시켜. 가비우스 어쩌고 하는 놈들이 들이닥칠 거라더니, 비니 몬티첼리가 웬 말이야? 저 녀석하고 마주칠 줄 알았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을 거야.”
그 사이 홀을 둘러보고는 안에 루크가 없다는 걸 확인한 비니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침 그때 후원 쪽에서 루크가 자기 기사들을 몇 명 거느리고 나타났다.
루크를 발견한 비니가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이 뱀 같은 자식! 너, 오늘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뒤늦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비니를 발견한 루크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뭐야? 니가 왜 여기…….”
완전 무장한 특수부대가 쳐들어온다고 할 때도 태연하고 자신만만하던 루크라서 평생 저렇게 당황한 얼굴은 못 볼 줄 알았는데, 오늘 비니 덕에 좋은 구경했다. 어쨌든 비니가 루크나, 그 옆에 선 무장 기사단하고 충돌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전력으로 쫓아가서 비니를 덮쳤다.
“이거 안 놔? 저런 자식도 남자친구라고, 진짜 이럴래?”
루크를 바로 앞에 두고 바닥에 엎어진 비니가 몸부림을 치며 벌컥 화를 냈다.
“가만히 좀 있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이 새벽에 쫓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너 설마 술 마시고 운전한 건 아니지?”
“무슨 헛소리야?”
비니가 악을 쓰며 몸을 비틀었다. 그때 돌풍이 한번 세차게 불면서 건물을 빙 둘러 걸려 있던 홍등의 전구가 퍽퍽 터져나갔다. 총격전을 각오하고 있던 차에 전등 몇 개 터진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지만, 비니의 징크스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은 그 자체로도 사람을 얼어붙게 만드는 섬뜩함이 있다. 하지만 갑작스런 전구 폭발에 누구보다도 놀란 건 비니였다.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펄펄 뛰더니, 겨우 전구 몇 개 터진 걸 가지고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몰아쉬는 비니를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안쓰러움이 확 밀려왔다. 그래서 녀석을 꾹 누르고 있던 자세를 바꿔서 어깨를 끌어안고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
“…….”
“왜 그래? 무슨 큰일이라고…….”
비니를 달래서 일으켜 앉혔다. 전엔 사람이 픽픽 쓰러져 나가도 자기가 그런 거 아니라면서 당당하게 발뺌이더니…… 그때는 비니의 그런 태도가 정말 거슬리고 인간성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싫었는데, 막상 이렇게 풀 죽은 모습도 별로였다. 결국 비니의 징크스 자체가 문제인 거지, 징크스에 대처하는 녀석의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거다.
“뭘 그렇게 철썩 붙어 있어? 이리 와.”
착잡한 심정으로 비니를 위로하고 있는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루크가 못된 소리를 지껄였다.
“시끄러!”
오늘 따라 루크가 하는 짓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애초에 비니를 약 올려서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도 루크니까 오늘 여기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나든 전부 저 자식 책임이다.
“위험하다니까?”
루크가 무심한 듯 시크하게 비니 가슴에 다시 한 번 못질을 했다. 나는 비니하고 파트너로 엮여서 1년 반이나 같은 차 타고, 같이 밥 먹으면서 하루 열 시간을 붙어 다녔다. 이제 와서 어디 한 군데 더 까지는 게 무슨 대수냐? 그리고 옆에 붙어 있으나, 루크처럼 몇 발짝 떨어져 있으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시끄럽다니까? 너는 가서…….”
루크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먼 곳에서 전해져오는 어떤 불길한 울림 때문이었다.
소리보다 더 빠르게 전해지는 대기의 진동에 몸이 먼저 굳었다. 이 진동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파열음은 비록 익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면을 깨우는 암시어처럼 예전의 끔찍했던 기억을 한순간에 불러 일으켰다. 엄청난 파열음과 거친 충돌, 사지가 떨어져 나간 시체와 발목까지 차오르던 혈류, 총성, 비명, 숨이 막힐 것 같은 피 냄새, 그리고 니콜라스…… 몬티첼리 저택에서의 지옥 같았던 밤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놈들이 왔다.
삽시간에 다가온 시커먼 헬기 여섯 대가 머리 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전투의 포문을 연 것은 천년 조약의 기사단 쪽이었다. 청연루 본관의 최상층에서 한줄기 섬광과 함께 로켓포가 날아갔고, 먹이를 발견하고 모여든 익룡처럼 청연루 상공을 선회하고 있는 헬기 중 한 대의 꼬리 날개를 명중시켰다.
꼬리를 잃은 헬기가 눈 깜짝할 사이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을 치더니 청연루의 담장에 부딪혀 동체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귀를 찢을 듯 엄청난 폭음과 함께 쪼개진 동체 뒷부분은 충돌의 충격으로 반이나 허물어진 담장 밖으로 떨어져 나갔고, 블랙호크 머리 부분의 2/3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불과 3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떨어져 다시 한 번 대폭발을 일으켰다.
천년 기사단의 선공은 성공적이었다. 정원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몽땅 다 헬기 동체에 깔려서 죽을 뻔하긴 했지만…….
충격적인 선빵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반격은 신속하고 정확했다. 선제공격이 시작된 청연루 상층부에 블랙호크의 무차별 사격이 집중됐고, 그 공격으로 건물 한 층이 낡은 옷처럼 너덜너덜하게 헤지고 말았다.
최전방 저격수를 잃은 천년 기사단이 허공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퍼부었다. 한꺼번에 쏟아진 수천 발의 총격도 미사일만큼 위력적이어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헬기 한 대가 동체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빙글빙글 돌다가 청연루의 아름다운 정원을 죄다 뭉개면서 거칠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불시착한 헬기로부터 검은 유니폼을 입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정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천년 기사단의 총격에 거꾸러졌지만 그 나머지는 정원의 조경석과 나무 뒤에 자리를 잡고 대응을 시작했다.
“뭐야? 이게…….”
바로 등 뒤에서 일어난 헬기의 추락과 폭발로 넋이 나간 비니가 혼자 중얼거렸다.
헬기 추락은 내게는 낯선 광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욱더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지난겨울의 그 끔찍했던 날로 되돌아가서 같은 일을 다시 겪는 악몽을 몇 번이나 꿨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악몽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친 것이다. 어쩌다 또 다시 이런 일에 휘말린 걸까? 아득하게 멀어지던 정신이 누군가 어깨를 잡아 흔드는 바람에 간신히 돌아왔다.
“정신 차려!”
소리를 버럭 지르고는 루크가 나를 청연루 본관 쪽으로 떠밀었다.
“안으로 들어가!”
“어?”
“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건물 3층이 완전히 날아가고, 아직도 놈들의 블랙호크가 청연루 본관을 사격하고 있는데, 안에 들어가 있으라니…….
내가 넋을 잃고 있는 동안에도 청연루의 후원 쪽에서 또 한 차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돌음과 함께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헬기가 지축을 울리며 거칠게 내려앉았다. 기사단의 헬기 석 대가 제대로 된 공격을 해보지도 못하고 역공을 당해 전투 기능을 잃었다. 이정도면 천년 기사단의 실력이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지옥문이 열린 것 같은 무자비한 반격이 시작됐다.
하늘에서 총알이 그야말로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공에서 쏟아지는 총격을 지상에서 대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때까지 지상에 노출돼 있던 타격 대원과 천년 기사단이 그 총격에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돌아와서 그때까지도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비니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청연루 본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비니는 지난 반년 동안 혼수상태로 누워 있다가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렸고, 그 이후로도 무념무상으로 지내며 오직 죄책감에만 집중한 탓에 실전 감각을 다 까먹었다. 이런 식의 기습을 처음 당하는 거니까 상황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비니가 위험한 지경을 당해서 사태파악은 제때 못해도 동작은 누구보다 빨랐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인정사정없는 공세에 천년 기사단이 몸을 숨길만 한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느라 반격이 잠시 주춤했다. 정원 이곳저곳에는 벌써 총격에 쓰러진 타격 대원들과 기사단원의 수가 십여 명이 넘었고, 운 좋게 총격을 면한 대원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거친 총격과 쓰러진 동료들 때문에 공황에 빠져서 더 이상의 대응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었다. 지금 타격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쓰러진 동료들을 수습해서 몸을 숨길만 한 곳으로 끌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사실 짭새들에게 이런 종류의 기습은 극히 생소한 일이었다. 짭새란 항상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 현장에 불려가는 입장인데다, 타격대라고 해봐야 갱단의 소굴이나 마약 사범을 덮치는 정도가 고작이지 특수부대의 기습을 감당하는 건 애초에 전공하고 거리가 멀었다.
이쪽의 숫자를 최대한 부풀려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청연루 공격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계획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예상대로 되지 않을 때는 오히려 피해만 커질 위험이 있었는데, 지금 상황은 그 최악의 시나리오와 거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청연루를 초토화시킬 기세로 총알을 퍼붓던 놈들의 공세가 잠시 멈췄다 싶더니 다음 순간, 놈들의 블랙호크로부터 수십 개의 로프가 내려왔다. 곧이어 기사들이 로프를 타고 정원 곳곳에 내려섰다. 놈들의 하강이 얼마나 민첩한지, 마치 커다란 검은 새가 속속 지상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야…… 저것들은…….”
비니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 소리를 하고 또 했다.
“정신 차리고! 안에 쥬드하고 반장님이 있으니까 니가 책임지고 보호해!”
“너는?”
하강한 기사단 놈들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루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서는데 비니가 다급하게 나를 붙들었다.
“첸, 그 자식한테 가는 거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루크는 놈들한테 걸리면 틀림없이 죽어.”
“미쳤어? 아무리 남자가 좋아도…… 저놈들을 뚫고 그 자식한테 가겠단 말이야?”
그러려고 했는데 비니 때문에 늦었다. 헬기에서 하강한 놈들이 어느새 전열을 가다듬고 번뜩이는 눈초리로 사방을 노려보며 먹이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건물 안에는 벌써 놈들이 퍼부은 총알 비를 피해 들어온 타격대원과 기사들이 꽤 됐다. 놈들의 기습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던 천년 조약의 기사들도 어지간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니 무슨 일인 줄도 모르고 출동 명령을 받고 와서 설렁설렁 돌아다니던 짭새 타격대원들은 당연히 혼비백산이었다. 그 때문에 비니하고 같이 노크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었다가 하마터면 타격대 총에 세상 하직할 뻔했다.
“빌어먹을! 반장님이 당했어!”
우리를 알아보고 총을 거둔 러셀이 나한테 따지듯 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타격대 멜 반장이 한쪽 팔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놈들이 기습을 감행할 때 정원에 나와 있던 멜 반장은 과연 타격대 리더답게 놈들의 헬기를 향해 응사를 하며 침착하게 대응했지만 운이 나빴다. 반장 외에도 여기저기서 총상을 입고 신음하는 대원이 이 안에만 여섯 명이었다.
“놈들이 온 거예요? 상황이 어때요?”
멜 반장을 끌어안은 채 상처를 살피던 쥬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타격대원들은 피투성이가 돼서 뒹굴고, 천년 기사단은 굳은 표정으로 창가에 붙어 서서 수비태세에 들어갔으니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일 거다.
“최악이야!”
내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놈들의 총격에 정원 쪽으로 난 창문 유리가 박살이 났다. 청연루 1층은 정원과 연못 방향으로 난 창이 모두 통유리라서 몸을 숨기기 적당한 구조가 아니었다. 기사단이 홀 곳곳에 놓인 커다란 화분을 굴려서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놓지 않았으면 이쪽의 사상자가 이번 총격으로 배는 늘었을 거다.
기사단과 배짱 좋은 타격대원 몇 명이 바리케이드에 붙어서 대응은 하고 있지만 초장부터 너무 열세였다. 비니도 슬슬 정신이 드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멜 반장의 소총을 움켜쥐었다.
“이거 왜 이래?”
멜 반장이 비니한테 총을 안 빼앗기려고 용을 썼다.
“저는 사막에 갈 때 배지하고 총하고 다 반납하고 가서 지금 빈손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차피 반장님은 이제 아웃이잖아요?”
“이거 안 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내 총은 안 돼!”
급박한 와중에도 멜 반장이 아픈 팔로 소총을 꽉 끌어안으며 버텼다. 안 그래도 기가 죽어 있는 놈한테 할 말이 아닌 것 같아서 힐끔 쳐다보고 말았지만, 비니 손에 총이 들어가는 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열 놈이 등 뒤에 버티고 있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반장님!”
“왜?”
멜 반장이 넌 또 뭐냐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타격대는 철수시키죠.”
“…….”
“무지막지한 놈들이에요. 이 상태로는 허둥거리다 인명피해만 늘어나요.”
“하지만…….”
반장이 망설였다. 눈앞에 쳐들어온 정체불명의 괴한들을 두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두려워서 꽁무니를 빼는 건 멜 반장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타일보다는 목숨이 먼저다. 처음부터 짭새 타격대는 전시용이었을 뿐이다. 전시효과가 없었으니 이제 할 일은 신속하게 퇴장하는 거다.
“놈들은 훈련받은 특수부대원들이고, 자체로 살인병기나 마찬가지에요! 타격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러다 우리가 다 죽어요!”
“너, 그거…… 타격대를 충분히 무시하는 소리야.”
반장이 총 달라고 보채는 비니를 힘겹게 발로 밀면서 숨을 헐떡거렸다.
“밖에 있는 애들한테 안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하고, 안에 있는 애들한테도 놈들하고 맞설 생각하지 말고 청연루 밖으로 빠져나가라고 하세요!”
“니가 타격대 반장이야?”
출혈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는지 그렇게 대꾸하면서 멜 반장이 옆으로 쓰러졌다. 반장이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결국 비니가 노리던 소총을 손에 넣었다. 이젠 홀 안도 바깥만큼이나 위험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요란한 총성과 함께 창과 문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갔고, 뒤이어 놈들이 밀고 들어왔다.
양 방향에서 동시에 출몰한 수십 명의 적들은 그림자만으로도 심장을 얼게 만들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그렇지 않아도 잔뜩 움츠리고 있던 타격대 중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맞아 제대로 대응하는 대원이 별로 많지 않았다. 전면에서 밖을 경계하고 있던 서너 명의 기사들이 침입자들을 향해 발포하면서 놈들의 진입을 저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옆에 제대로 훈련받은 기사들이 있다는 게 큰 다행일 정도로 천년 기사단의 대응은 침착했고, 타격대보다는 훨씬 쓸 만했다. 덕분에 최초의 총격 이후로 놈들도 홀 안에 쉽게 진입을 못하고 있었다.
“비니! 쥬드하고 멜 반장을 데리고 주방으로 가! 다른 부상자들도 같이! 거기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까지 내려가니까…….”
바로 그 순간, 한바탕 총성이 울리더니 러셀이 공중에 붕 떴다. 러셀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공중에 떴다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눈앞에 펼쳐졌다.
“러셀!”
러셀을 살필 겨를도 없이 바리케이드 바로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놈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하지만 순간 어디선가 세찬 바람에 불면서 내 몸의 중심이 크게 흔들렸다. 다행히 비니의 신속한 대응으로 창문 쪽으로 뛰어들던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서너 명이 바리케이드 바로 앞에서 나동그라졌다. 뒤이어 바리케이드 안쪽에 있던 천년 조약의 기사 한 명도 자기 허벅지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런 게 비니 손에 총이 들려 있을 때 각오해야 할 불상사였다.
“뭐 하는 짓이야?”
비니한테 당한 기사가 신음을 내뱉으며 따졌다.
“아, 죄송…….”
“뭐가 어째?”
아군이랍시고 뒤에서 얼쩡거리던 비니한테 당한 기사 입장에선 분통 터지는 일이겠지만, 이 정도면 비니도 최대한 성의껏 사과한 거다. 본래 비니는 이보다 더 고약한 인명피해도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딱 잡아떼던 놈이었다.
건물 전면을 차지하던 창문도 산산조각이 나고, 현관문도 다 깨져서 1층 홀은 이제 야외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일까? 웬 바람이 이렇게 거친지 모르겠다. 어쨌든 잠시 밖이 잠잠한 틈을 타서 쓰러진 러셀에게로 다가갔다. 어느새 비니도 바로 옆으로 다가와서 러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러셀은 경찰학교 1년 선배고, 비니만큼이나 오랜 친구다.
“러셀…….”
바닥에 엎어진 러셀을 돌려 눕히는 순간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다행히 러셀은 내가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망할 자식들…….”
꿈틀거리는 러셀을 밀쳐놓고 옆에 주저앉았다. 부상자에,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적군에, 총 든 비니까지…… 죽어서 지옥에 왔대도 이보다 더 막막하지는 않겠다.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다고 했냐?”
한바탕 휘몰아친 놈들의 공세가 주춤한 틈을 타서 비니가 물었다. 놈들이 이 기세와 병력으로 한 번 더 덮치면 이쪽은 전멸이다.
“다 데리고 주방으로 가. 건물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는데, 옆 블록에 있는 극장 지하로 통해.”
“안전할까?”
“조심해야지.”
놈들의 공세가 느슨해진 틈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부상자들을 끌고 주방으로 몸을 피했다. 좀 전부터 먼 곳에서만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리는 걸 보면 놈들은 더 이상 본관을 공격할 마음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본관에 루크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면, 놈들이 더 이상 이곳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었다.
비니, 러셀, 그리고 부상은 당했지만 전투력은 상실하지 않은 기사가 또 서너 명이니까 나가는 길이 그렇게 험하지는 않을 거다. 지하에 차가 있을지 모르겠다. 심한 부상자도 대여섯 명이나 되니까 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놈들도 지하 통로에 대해 알고 있을까? 전에 보니까 여기 지하에 통로가 있다는 게 그렇게까지 비밀은 아닌 것 같던데…… 운세 불길해서 아래층에 기사단 놈들이 매복을 하고 있다면 내려가는 것보다는 여기서 버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행동 방침은 속전속결이었다. 곧 날이 밝아올 테니까 놈들은 여기서 오래 머뭇거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시간 가기만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멜 반장의 부상이 가볍지 않았다.
“비니.”
“응?”
“니가 책임지고 이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
비니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그 옆에 있던 쥬드는 더 놀랐고, 러셀과 멜 반장은 아예 사색이 됐다.
“너는?”
멜 반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한테 따졌다.
“전 찾아야 될 사람이 있어서요.”
내 대답에 러셀이 벌컥 화를 냈다.
“너, 우리를 비니한테 떠넘기고 지금 남자친구를 찾으러 가겠다는 거야?”
러셀은 타격대치고 머리가 좋은 편이다. 눈치도 빠르고…….
“그럼 안 돼? 남자친군데?”
비니도 책임감 있고, 능력 있는 짭새다. 징크스가 예측불허라 탈이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니가 맡은 일을 크게 그르쳤던 적은 아직 없었다.
“지하에 매복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나도 그게 걱정이다. 하지만 오늘 일진이 그렇게까지 사납다면 내가 있고 없고는 큰 의미가 없을 거다. 게다가 타격대가 언제부터 날 그렇게 믿었다고 이렇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럼…….”
지하 통로까지만 같이 내려갈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가 먹먹한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벽에 달린 벽장이며 주방기구들이 위험하게 떨어져서 발치에 나뒹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헬기가 한 대 더 떨어져나? 아니다. 지금 밖에는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큰 사건이 터졌다.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어서 러셀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그냥 여기서 기다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여기 다시 안 와.”
그렇게 지시를 하고 주방 문 쪽으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다.
“무슨 보장이라도 있어?”
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막 뛰어나가려던 참에 러셀이 기어와서 내 바지 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보장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내가 아는 한, 놈들이 더 이상 이쪽을 기웃거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여기엔 놈들이 원하는 게 없어.”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새 동편 하늘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무너진 담장, 처참하게 부서져서 잔해로 나뒹구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헬기와 발에 채이는 시체를 넘어서 후원으로 통하는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옛 중국의 어느 골목길 같은 이곳의 담장 곳곳에도 추적과 교전의 흔적이 뚜렷했다.
총알에 패인 담장과 여기저기 엎어져 있는 시체, 그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틀거리는 무장한 병사들 사이를 지나며 후원으로 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후원으로 나가는 골목의 막바지 십여 미터 정도 되는 담장이 양쪽 다 무너져서 돌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아니, 돌무더기가 아니라 무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 같다. 폭발로 인해 무너진 것이 분명한 담장 아래엔 몇 명인지도 모를 기사들의 시체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루크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여유가 넘치더니, 이런 짓을 꾸미고 있었던 건가? 루크는 자신의 영지 곳곳에 함정을 만들어 놓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끌어들여서 내키는 대로 학살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맥이 풀려서 비틀거렸다. 나는 이 길을 대체 누굴 위해서 가고 있는 걸까? 루크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잔혹한 놈이다. 녀석의 실체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 때문에 더 이상은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후원 어딘가에서 또다시 귀가 아플 정도의 폭음과 총성이 연달아 들려왔다. 누군가가 붙들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끌고 화약 냄새와 피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기사단의 무덤을 밟고 올라섰다. 어차피 똑같은 놈들이라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자초한 화라고 생각을 해봤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잡다한 상념을 떨치려고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놈들의 블랙호크가 머리 위에 나타났을 때부터 참사는 예견된 일이었다.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루크의 안전뿐이다. 그것만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무너진 돌무더기를 넘어 후원에 있는 별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연루의 후원에는 별채가 많았다. 삼층 이상 되는 호텔건물도 서너 채가 있고, 정원의 제일 안쪽에는 예전에 흑풍회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전통가옥도 있었다.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곳은 아마도 그 별채가 있는 방향인 것 같았다.
단풍나무 숲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시체와 부상자들, 이제 막 흘러내린 듯 선명한 핏자국을 보면 후원 초입부터 치열한 교전이 계속 벌어졌던 게 틀림없었다.
별채 초입에 위치한 단풍나무 숲 언덕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산발적으로 들리던 총성이 잠시 멎었다. 아직은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데다 울창한 나무에 가려서 별채의 상황이 정확히 파악되질 않았다. 게다가 평소엔 손바닥만 하다고 생각했던 정원이 이제 보니 구조가 오밀조밀하고, 키는 크지 않아도 둥치가 굵은 나무와 조경석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서 매복과 산발적인 총격전엔 최적의 장소였다. 청연루 안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구석진 곳이기도 하지만, 루크가 왜 이곳을 결전의 장소로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별채 쪽으로 한걸음 옮기는데 어디선가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 거친 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순간, 등 뒤에서 서너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위협적인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 팔려서 등 뒤의 적을 경계하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이미 기사단 세 명의 표적이 된 이후였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총격이 시작됐다. 지척에서 울리는 총성에 귀가 아플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옆구리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고통보다 먼저 이러면 안 되는데…… 싶은 낭패감이 몰려왔다.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옆에 있는 소나무 뒤쪽으로 기었다. 3:1이면 비슷한 수준의 무장이라도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나마도 내가 가진 권총은 놈들이 갖고 있는 소총하고 비교하면 장난감 수준이었다. 루크가 어떻게 됐는지 아직 확인도 못했는데 가는 길목에서 이렇게 되다니…….
한숨 돌릴 사이도 없이 다시 총격이 쏟아졌다. 눈앞에서 소나무 가지가 부러져 떨어지고 나무껍질이 거칠게 튀었다. 어디선가 지원 병력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이 위기를 모면할 방법이 없었다.
총을 고쳐 잡고 나무에 바짝 붙어 섰다. 루크만 생각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려고 애썼지만 눈앞이 캄캄했다.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게 절망적인 순간에 세 방향에서 포위하듯 다가서던 놈들 쪽에서 얼어붙을 것 같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서 내다본 소나무 숲 바깥쪽에서는 내 입장에서도 행운이라기보다는 재난이라고 해야 할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필립이 기사단을 덮친 거다. 대체 저 자식이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필립이 제일 뒤쪽에서 접근하던 기사에게 달려들어서 그가 들고 있던 총을 꺾어 던지고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상대는 셋이나 되는데다 완전무장을 했고, 괴물 사냥이 처음인 놈들도 아니다 보니 필립에게도 그렇게 만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필립에게 목을 꺾인 채 목덜미를 물린 기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피를 뿜으며 몸부림을 쳤다.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괴기스러웠다. 인간이 사냥당하고 잡아먹히는 건 차마 눈 뜨고 못 볼 참상이었다.
필립에게 붙들린 기사를 구해내기는 늦었다는 판단이 섰는지, 아니면 그저 겁에 질려서 본능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명의 기사가 아직까지도 동료를 붙들고 있는 필립을 향해 소총을 갈겼다. 그 총격에 미처 숨이 떨어지지 않은 기사의 몸이 조잡하게 만든 헝겊 인형처럼 뜯겨 나갔고 필립의 등과 옆구리에서도 피가 솟았다.
“필립!”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를 돌아본 것은 필립이 아니라 자기 동료에게 소총을 난사하던 기사들이었다. 얼결에 나도 총을 들어올리긴 했지만 총 든 손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대체 이게 웬 바람일까? 아까부터 종종 세찬 바람이 한 번씩 몰아치기는 했지만 이건 그런 바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광풍이었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수도 없을 정도로 거친 돌풍이 후원에 몰아쳤고, 내 몸을 허공에 날려버릴 기세로 뒤흔들었다.
갑작스런 돌풍에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던 기사단 두 놈도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고, 나는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재간이 없어서 휘청거리다 2~3미터 정도 몸이 뜬 채 날려가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제이!”
누군가가 바람 속에서 숨넘어갈 듯 내 이름을 불렀다. 희미해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서 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비니였다. 그래, 어쩐지…… 시내 한복판에 있는 중국집 뒷마당에서 이게 웬 초특급 태풍인가 했다.
온 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꾹 참고 몸을 일으켰다. 총에 맞은 것도 억울한데, 바람에 날려 다니다 맨바닥에 떨어지기까지 하고 보니 몸이 아픈 것만큼이나 짜증이 말도 못하게 치밀었다. 비니 덕에 목숨을 구하기는 했는데 고맙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제이, 괜찮아? 너…….”
바람을 헤치고 다가오던 비니가 피에 젖은 내 손과 옆구리를 보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니까 제발 이 바람이나 어떻게 해봐…….”
“무슨 소리야? 부는 바람을 날더러 어쩌라고?”
“그러지 말고…… 딴 생각을 하든가, 찬물을 뒤집어쓰던가, 제발…….”
세찬 바람에 뒤로 떠밀려 이번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번만 더 이런 식으로 넘어지면 정신을 잃고 말 거다. 자기가 일으킨 바람을 주체 못해서 비니도 앞으로 엎어져서 두어 바퀴 구르다가 마당에 핀 풀꽃을 붙들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필립이 없었다. 기사단 놈들도 어디로 날려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야, 어디가? 그 꼴을 해가지고…….”
내가 허우적거리며 아직 간간이 총소리가 들려오는 후원 별채 쪽으로 다가가자 비니가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루크 찾으러 가!”
“미쳤어?”
“너 때문에 미치겠어! 사막에서 본격적으로 마법 공부라도 한 거야?”
내가 아는 한 비니한테 이런 재주는 없었다. 기존의 징크스가 좀 진정이 돼도 사람들하고 어울려 사는 일이 순탄치 않을 판인데, 이젠 사고의 규모가 말 그대로 재난이다. 델 파소 사건 이후로 반년을 곯아떨어져 있는 동안 녀석의 말썽 에너지가 대폭 확장된 게 틀림없다. 대체 이 노릇을 어쩌면 좋으냐?
후원 별채로 접근하는 중에 돌풍이 다소 약해졌다. 하지만 바람이 아예 지나간 건 아니었다. 이제 보니 커다란 회오리기둥이 청연루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나는 그 바람을 빠져 나온 것뿐이었다. 하늘까지 치솟은 회오리 기둥을 보니 이게 자연적인 현상일 리는 절대로 없다는 확신만 더 강해졌다.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붙잡고 개천에 걸린 돌다리를 지나서 별채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벌써 바람에 한바탕 쓸렸다. 사람을 들어 날릴 정도의 강풍에 별채의 기와지붕이 반이나 날아가 없어졌고, 뒤편의 대나무 숲도 태풍을 만난 듯 옆으로 쓰러져서 후원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참혹한 광경은 별채 옆 마당에 벌어져 있었다.
후원 별채 앞에서의 전투는 이미 종결이 나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의 수가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넘을 것 같았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천년 조약의 기사단, 그리고 사복 차림의 남자들이 시체로,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별채 앞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생존자이자, 학살자들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찾던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온 몸이 타는 듯 아프고 저렸다. 더는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쓰러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손에 장검을 들고 서 있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보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루크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보이는 것도 없을 정도로 눈앞이 흐리긴 했지만…….
루크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아름답고 잔혹한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금방 걸어 나온 악마 같았다. 그때 후원에 다시 거센 바람이 몰아쳤고, 마치 암전이 된 듯 눈앞이 어두워졌다.
차이나타운의 명소이자 흑풍회의 본거지이기도 한 청연루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의 습격에 초토화된 모습이 하루 종일 뉴스를 탔다. 추락해서 폭파된 헬기의 잔해, 허물어진 성벽과 건물 일부, 그리고 뿌리째 뽑혀서 나뒹구는 소나무와 석조 장식품들, 바디백에 담긴 채 아직 청연루 마당에 놓여 있는 수십 구의 시체…… 어제까지도 쿠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혔던 언덕과 작은 숲은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수년간 전쟁에 시달린 듯 참혹한 킬링필드의 형상으로 변해 있었다.
예전의 모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엉망이 된 청연루의 몰골을 보고 있으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저곳에서 겪었던 일은 오래전에 영화 속에서 본 장면처럼 아무 감흥 없이 머릿속을 떠돌 뿐인데 루크와 산책했던 돌다리, 후원, 고즈넉한 분위기의 돌담이 사라져버린 건 절로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쉬웠다. 루크와 처음 마주쳤던 곳도 저기였는데, 엄청난 폭발로 이젠 예전 모습이 흔적도 없었다.
다 허물어진 청연루 꼬라지가 보기 괴로워서 리모컨을 집어 채널을 돌렸다. 돌리다 보니 이번엔 경찰서에서 나오는 루크의 모습이 흔들리는 보도화면을 가득 채웠다. 조사를 받고 나오는 모습인데, 저 장면도 저녁 내내 뉴스 채널마다 나오고 있었다. 루크는 보도진의 집중적인 플래시 세례와 쏟아지는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차에 올랐고, 곧 이어진 청장의 인터뷰도 아직 사태를 조사 중이며 전말이 밝혀지는 대로 기자회견을 열겠다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말뿐이었다.
루크가 차에 오르기 직전의 모습에서 화면이 정지되고, 리포터가 어제 새벽에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폭력사태의 전말을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루크도 많이 다쳤다. 오른쪽 얼굴 절반에 반창고가 붙어 있고, 왼손도 붕대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래도 그 무작스러운 놈들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은 것 치곤 말짱한 편이다.
길고 긴 속보 어디에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루크 첸의 경쟁자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대규모 습격이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었다.
“일어났어?”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낮고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 혼자였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한 건가 멍한 머리로 기억을 더듬으며 혼자 손가락 발가락을 까딱거려 보고 있을 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내가 깨어난 것을 본 간호사는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관통상이었고, 응급수술로 찢어진 장을 꿰맸다고 일러줬다. 출혈이 심해서 꼬박 하루 동안 혼수상태였고, 그동안 친구들이 찾아와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자오가 휠체어를 밀고 들어와서 루크는 조사 받으러 경찰서에 불려 들어갔다고,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올 거라고 말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자오의 얼굴은 수척하고 어두웠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을 이기고 살아남았지만 그 눈빛과 표정 어디에도 승리의 기쁨이나 승자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자오는 우울해 보였고, 지친 것 같았다.
어제 동틀 무렵 청연루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 짧은 시간에 무려 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사망자 중 반 이상이 양측의 기사들이었고, 그 나머지는 흑풍회의 조직원들이었다. 조직원들은 대부분 자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투닥거리며 지내온 동네 친구들이었으니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맞아서 거둔 1승이 그저 쓰기만 할 뿐, 다른 감흥은 없는 게 당연했다.
“좀 어때?”
“어떻겠어? 별로야.”
내 퉁명스런 대꾸에 루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침상에 걸터앉아서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슬슬 엉클었다.
“정신 차린 걸 보니까 마음이 좀 놓인다. 부상이 꽤 심했었거든.”
“경찰서에 불려갔었다면서?”
루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TV 화면으로 봤을 땐 그냥 얼굴을 다쳤구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성한 쪽도 많이 부었다. 직업도 변변찮고, 성격도 안 좋고…… 얼굴 잘생긴 거 하나 보고 만났는데, 뭐 이러냐?
“나야 뭐, 그렇게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그동안 경찰서 들락거리면서 미운털 박힌 것도 있어서 그런지 보자마자 끌고 가더라고.”
“그래도 금방 나왔네. 저지른 짓을 보면 이번 생엔 구치소에서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나는 피해자야.”
녀석이 정색을 하며 거즈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찢어지고 퉁퉁 부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큰 돌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서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끌어 덮었다.
“자오한테나 좀 가보지? 풀이 많이 죽었던데?”
“내가 가도 별 위로는 안 될 거야. 백 대인이 많이 다쳤거든.”
저런…….
“부상이 심해?”
“너하고 비슷해. 옆구리에 한 발, 어깨에 한 발…… 어깨 쪽은 대수롭지 않은데, 옆구리로 들어간 총알이 등뼈에 박혀서 수술을 여섯 시간이나 받았어.”
모르긴 몰라도 어제 새벽에 청연루에 있었던 사람들 중 다친 데 한 곳 없이 무사한 사람은 얼마 없었을 거다. 더구나 백 대인은 직함이 천년 기사단의 대장이었으니 나이 많다고 뒤로 빠져 있지도 않았을 거고…….
“살 수는 있는 거야?”
“그걸 아직 모르니까 자오가 그렇게 울적해 하는 거 아니겠어?”
무심하게 대꾸하면서 루크가 뒤집어쓴 내 이불을 살금살금 끌어 내렸다.
“많이 힘들어?”
“됐어.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니고, 부상자가 나 하나도 아니고……”
“이런 일에 자꾸 휘말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
녀석의 말투가 너무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하마터면 괜찮다고 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멍청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신경 쓸 거 없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루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따졌다.
“힘들어. 나가.”
힘들다는 건 엄살이 아니었다. 정신 차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내내 뉴스를 돌려가며 신경을 쓴 탓에 기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러던 차에 루크가 나타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이젠 눈을 뜨고 있을 기운도 없었다.
“야…….”
“…….”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자식하고 엮일 때부터 좋은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지뢰밭을 밟게 될 줄은 몰랐다. 한고비 넘었나 싶으면 또 한고비가 닥치고, 일의 규모는 점점 커져서 이젠 아예 전쟁을 치르는 지경이니…… 차라리 좀 외롭고 말지, 남자 하나 잘못 만나서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몸이 아파서 그런지, 그 비오는 구질구질한 날에 이 자식을 찾아서 청연루에 제 발로 갔던 게 사무치게 한심하고 후회스러웠다.
침상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한동안 말도 없이 숨만 쌕쌕 내쉬던 루크가 간다는 말도 없이 방에서 나갔다. 내가 좀 심했나? 그래서 삐졌나? 문 닫히는 기척이 나기도 전에 그런 칠칠치 못한 생각이 들었다. 저 자식 때문에 내가 여태 겪은 고생이 얼마고, 끊은 진단서가 몇 장인데 겨우 나가란 말 한마디 한 걸로 내가 미안해 하냐? 진짜 바보 같다.
긴 생각하기도 구차하고 신경질 나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도 일단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앞에는 또 어떤 일이 버티고 있을까?
혈관에 진통제를 있는 대로 부어넣고 세상모르게 잠이나 자고 싶은데 정신만 몽롱해질 뿐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든 것도, 깬 것도 아닌 가수면 상태에서 청연루 별채 마당에서 있던 루크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피를 뒤집어쓴 채 붉은 대지를 딛고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은 대공의 그것보다도 더 섬뜩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만큼이나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크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여자 하나 꼬셔서 중국계 거대 조폭 조직을 꿰어 찬 제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죽이고, 무엇이든 움켜잡는 탐욕스런 악당,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과 비밀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 대강 그런 게 루크의 정체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녀석의 진짜 모습은 아니었다. 뭘까? 대체 루크의 정체가 뭘까? 사람이긴 한 걸까?
진통제가 제대로 듣기 시작했는지 통증이 둔해지고, 대신 환영은 더 분명해졌다. 그리고 루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부터 어제 새벽, 전쟁터로 변한 청연루 뒷마당에서 봤던 녀석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모든 감각이 마비된 와중에도 슬픔만은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녀석과 나는 결국 헤어지게 될 거다.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 훨씬 더 나쁘게…….
멀리서 달칵하는 소리가 열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아니, 뭔가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소릴까? 힘겹게 눈을 뜨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간호사 두 명이 이동침대를 밀고 들어오더니 그걸 내 침대 옆에 밀어 넣었다. 나를 옮겨가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환자가 들어오나? 저기 안으로 들어오는 놈은 루크 같은데…… 진통제 과용 때문인지 머리가 멍해서 루크가 환자복 차림으로 옆 침대에 눕는 걸 봐도 이게 무슨 일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니가 왜…….”
“나도 여기 입원했어.”
하긴, 다쳤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특실을 달라고 했더니 거긴 벌써 임자가 있대. 그래서 이리 왔어.”
그렇구나……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아니, 잠깐…….
“이 병원에 방이 여기밖에 없어?”
“그럴 리가 있어? 기왕 입원하는 거, 너하고 같은 방을 쓰고 싶다고 하니까 처음엔 안 된다고 하더라고. 니가 중환자라서 안정이 필요하대.”
“그런데?”
“나하고 같이 있는 게 안정하는데 더 좋을 거라고 한 번 더 부탁을 했지. 의사도 내가 누군지 아는데, 계속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어?”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아까 내가…… 너한테 나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피곤해 보이는데 잠이나 자. 내가 옆에 있어줄게.”
녀석이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덮으며 느긋하게 대꾸했다.
“야…….”
“나가란다고 나가고, 꺼지란다고 꺼지고……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사람으로 안 보이니까 이렇게 심란한 거다. 어쨌든……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하게 꺼진다 싶었다.
“너…….”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꺼지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좀 전엔 그렇게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이 안 오더니, 하필 이런 때에 둑이라도 터진 듯 잠이 쏟아질 게 뭐냐…….
“시간은?”
잠결에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번잡스런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또 방문객이 한 떼거리 몰려온 모양이었다.
“다음 주 목요일입니다. 시간은 오후 일곱 시 정각으로 잡았습니다.”
녀석이 환자복을 한 벌 주워 입고 내 병실로 밀고 들어온 그 다음날, 특실이 비었다. 병실 좁다고 종일 툴툴거리면서 문병 온 변호사를 두 번이나 원장실에 파견 보내더니, 특실 환자를 기어이 다른 병실로 쫓아낸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 소식은 내게도 반가웠다. 단 며칠, 몇 시간이라도 이 수상하고 못된 놈에게서 벗어나서 조용히 몸을 추스르고 마음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일 뿐, 녀석은 특실로 옮겨가면서 당연하다는 듯 나까지 끌고 들어왔다. 됐다고, 싫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모든 일이 녀석 맘 대로였다.
겐지 클리닉 특실은 여태 입원해 있던 1인실에 비하면 축구장만큼이나 광활했다. 하지만 흑풍회 회장 겸, 다쳤다고는 해도 굳이 입원치료를 할 정도는 아닌 사이비 환자의 병원 생활은 조용한 거 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1인실에 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뭔가 긴한 용건을 물고 들락거리는 루크의 측근들로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더니, 응접세트며 간이침대까지 구비된 특실로 옮기고 나니까 이젠 아예 흑풍회 관계자들이 진을 치고 방에서 나가지도 않았다. 게다가 방문객도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많아져서 내가 병원에 입원을 한 건지, 흑풍회 회장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누운 건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장소는?”
자기는 아픈 데가 없으니까 만날 사람 다 만나고 할 일 하는 거지만, 진짜 중환자인 나는 모르는 사람들이 방안에 떼로 몰려와서 이렇게 떠들어대면 괴롭고 힘들다.
눈 뜨자마자 짜증이 나서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그러자 루크의 침상을 빙 둘러선 양복 입은 남자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대답을 못해? 어디서 만나는 건지는 까먹었어?”
예전에 기린을 구치소에서 꺼내줬던 변호사가 나를 힐끔거리며 대꾸를 않자 루크가 다그쳐물었다.
“죄송하지만, 친구 분은 아직 짭새가 아니신가요?”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이번 회합은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해서요.”
“그 회합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보안이 아니라, 내가 간다는 사실이야.”
“…….”
“장소를 알아야 가지.”
루크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변호사가 별 수 없다는 듯 일급비밀을 툭 깠다.
“루소 의원의 저택입니다.”
루소 의원의 저택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도로 쓰러졌다. 그리곤 옆구리 꿰맨 자리가 터지는 것 같은 고통에 숨넘어가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루크가 침대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몸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서 끙끙거리고 있는 내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뭐에 놀라서 그렇게 몸부림을 쳐? 많이 아파? 의사 불러줄까?”
“됐어…….”
“천천히 바로 누워봐.”
신음을 하며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 몸을 천천히 폈다. 다행히 상처가 터지지는 않은 것 같지만…… 더럽게 아프다.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한참 만에 바로 누워서 긴 한숨을 내쉬자 루크가 나를 나무랐다. 중환자 옆에서 온갖 비즈니스를 다 처리하면서 그게 할 소리냐?
“루소 의원 집엔 뭐 하러 가는데?”
“사람 만나러.”
그걸 대답이라고 지껄이고는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넘겼다. 녀석의 갑작스런 닭살행각에 넓은 병원 특실을 가득 채운 루크의 측근들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그럼 거기 사람을 만나러 가지, 빈집 구경을 가겠어? 어떤 사람을 만나는 거냐고 묻는 거잖아?”
내 짜증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친구 이름이라도 대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홉 명의 왕들.”
루크의 대답에 나도 놀랐지만, 측근들은 더 놀랐다. 딴에는 기밀이라고 보안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나 본데, 최고위층에서 정보가 줄줄 새는 것이 당혹스런 눈치였다.
“그 사람들을 왜 그 집에서…….”
루소 의원은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까지 나왔던 정계의 실력자였다. 게다가 오랜 정치인 생활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비리나 구설에 올랐던 일조차 없는 인물이었다. 청렴하고 정직하다기보다는 그만큼 치밀하고 철저한 인물이라는 게 루소 의원에 대한 세간의 평이었다. 그런 사람이 조폭조직의 보스를 집안으로 불러들이다니…….
아홉 명의 왕들이 천년 전의 조약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현역 실세들이란 사실은 들어 알고 있지만, 그가 루크를 선뜻 집으로 불렀다는 게 놀라웠다. 루크 첸의 자택방문은 자칫하면 큰 스캔들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엔 현직 대통령도 끼어 있고 그렇다는데, 그 사람들이 회합 장소로 니네 집 좀 써야겠다고 루소 의원에게 압력이라도 넣은 걸까?
지난 번 잠깐 마주쳤던 루소 의원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힘들게 갸웃거리자 루크가 되게 귀엽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루소도 왕들 중 하나야?”
“왕 중 왕이야.”
내 옆에서 붙어서 그렇게 다정한 남자친구 행세를 잠깐 하고 난 후, 루크가 다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침상 주변에 서 있던 흑풍회 핵심들을 앞에 불러 앉히고 백 대인의 부상으로 공석이 된 천년 조약의 기사단 수장 자리를 누구한테 넘길까 하는 중차대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루크는 나를 믿는 걸까? 아니면 무시하는 걸까?
“부단장인 이명도 전사했고, 그 외 간부들도 상당수 전사하거나, 부상 중이라 기사단이 거의 마비상탭니다. 빨리 후임을 정하고 조직을 정비해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흑풍회 간부들도 나를 없는 사람으로 치고 편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루소 의원의 저택에서 아홉 명의 왕들과 만나기로 한 것도 다 깠으니까, 더는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나보다.
“단장 후임을 찾는 게 뭐가 문제야? 남은 대원들 중에서 직급 높은 애한테 맡기면 되잖아?”
“몸 성한 대원들 중에선 지휘 책임을 맡길 대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전임 지휘관의 추천을 받거나, 흑풍회 원로회의에서 임명하는 게 전통이기도 하고요.”
“그럼 그렇게 하든가…….”
루크는 천년 조약의 기사단 수장을 결정하는 문제엔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어떤 조직에서든 천년 조약의 기사단 같은 행동대는 가장 중요한 세력일 텐데…….
“전임 지휘관이 혼수상태로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원로 어르신들은 이번 사태에 많이 놀라셔서 경황이 없으십니다.”
“그럼 내가 할까?”
루크의 제안에 조직원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는 잠시 자기네들끼리 슬쩍 눈짓을 주고받았다.
“흑풍회 수장은 기사단장을 겸임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의 조심스런 대답에 루크가 심드렁한 얼굴로 소파에 등을 푹 기댔다. 뭐 대단한 직책이라고 따지는 것도 더럽게 많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냥 백 대인이 정신 차릴 때까지 기다려. 어차피 지금 기사단은 반이나 깨져서 당장은 정비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상태잖아.”
루크의 성의 없는 대책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백 대인께서 회복이 되실까요?”
“오전에 의사를 만나봤는데, 상태가 많이 안정됐대. 질기고 독한 영감이잖아.”
상태가 안정이 됐다니 일단은 다행이다. 하지만 그 나이에,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으면 이제 현역 복귀는 어려울 거다.
다른 수뇌부들은 속 시원하게 후임을 찍어줬으면 싶은 눈친데 루크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면서 애를 태우자 또 서로서로 뭔가 눈짓을 주고받았다.
“기사단의 지휘관 자리를 언제까지 공석으로 비워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논의를 해서 이번 주 안으로 내정하고, 원로회의의 승인을 받는 걸로 하시죠.”
“논의를 하고 싶어도 누가 있어야 하지. 일가에, 친척에, 건너건너 아는 사람에…… 그런 식으로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여 있는 조직에 뭐 그렇게 인재가 넘쳐서 빈자리를 바로바로 채우겠어?”
“열악하면 열악한 대로 물색을 해봐야죠.”
기사단 단장 임명 건을 변호사가 질기게 붙들고 늘어지자 루크의 눈빛에 슬슬 짜증이 어렸다.
“그럼 니가 물색을 해서 오든가.”
루크의 퉁명스런 대꾸에 변호사가 기다렸다는 듯 본인이 미는 후임자를 밝혔다.
“자오가 어떨까요?”
변호사의 제안에 루크가 당황했다. 그리고 나도 놀랐다. 자오는 루크의 비서 겸 경호원인데…… 어떻게 기사단의 지휘관직에 자오를 거론하는 걸까? 자오가 아무리 루크의 최측근이지만, 이건 너무 낙하산이다.
“자오가 뭐?”
루크가 변호사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법정에서 상대편 변호사나 검사에게서 비슷한 눈총을 항상 받고 사는 변호사는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자오는 본래 천년 조약의 기사였는데 회장님이 끌고 가서 조직원 겸 비서로 부려먹고 계신 게 아닙니까? 그 친구는 백 대인의 상속자겸, 후계자이기도 하니까 기사단에서도 큰 불만은 없을 겁니다.”
“내가 불만이야. 자오를 데려가면 난 어쩌라고?”
루크가 벌컥 화를 내며 변호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이제 보니 자오가 조직 내에서 상당한 엘리트였나 보다. 게다가 백 대인의 후계자라니…… 어쩐지 다른 놈들 같지 않게 믿음직하고 일도 잘 한다 싶었다. 그러니까 루크도 어딜 가나 자오를 데리고 다녔고, 중요한 일은 다 맡겼던 거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게 아니다. 그동안 자오가 루크 똘마니로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비서는 새로 알아보셔야죠.”
“그런 소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해? 조직 상태를 빤히 알면서?”
“우리 조직 상태가 뭐 어떻다고 노상 그 말씀이십니까?”
흑풍회를 싸잡아서 깎아 내리는 루크의 언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변호사가 삐친 얼굴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애초부터 흑풍회 돌아가는 꼬라지에 불만이 많았던 루크는 영 갖잖다는 반응이었다.
“솔직히 이게 조직이야? 꼴통 집합소지?”
“회장님!”
“어쨌든 자오는 안 돼! 나도 옆에 믿을 놈이 하나는 있어야 운신을 할 거 아냐?”
“하지만 지금은 기사단의 재건이 제일 시급합니다!”
변호사의 강력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루크는 기사단이 어떻게 되든 난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정 사람이 없으면 니가 기사단 단장을 하든가, 그게 싫으면 백 대인이 정신 차리고 몸 추슬러서 복귀할 때까지 기다려. 자오는 아무 데도 못 보내.”
루크가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잘라 말했다.
루크가 그런 식으로 측근들과 함께 흑풍회의 중요한 사안을 닥치는 대로 해결하고 있을 때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흑풍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요인들은 지금 이 방안에 다 모여 있는데 더 올 사람이 있었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다가 나도 모르게 또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다시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져버렸지만…….
“비니…….”
“몸은 좀 어때?”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 크고 심각해서 짭새들도 경황이 없는지 어제 오늘, 나를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루크 쪽은 문병객, 방문객, 아랫것들까지 매일 수십 명씩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는데 상대적으로 내 주변은 너무 썰렁해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서럽고 쓸쓸했었다.
“왔어? 어서 와.”
백년 만에 찾아온 내 손님이다. 게다가 비니라니…… 마침 보고 싶던 참이라 반가워서 손짓을 하며 반겼다.
비니가 소파에 앉아 고개를 까딱이며 아는 체를 하는 루크와 그 외 흑풍회 관계자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비니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이 있었던 그 새벽에 격전지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했다. 뭐…… 돌이켜 생각해보면 녀석은 그간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몸 상하는 일이 없기는 했다. 그런 놈이 지난 봄, 다친 데도 없이 쓰러져서 반 년을 못 일어났으니 그동안 걱정하며 마음 졸인 건 말로 다 못한다.
“아픈 건 좀 어때? 많이 힘들지?”
비니가 의자를 끌어와서 곁에 앉으며 걱정스런 눈길로 내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치명상은 면했지만 엄연한 총상이고, 상처 부위도 옆구리라서 금방 털고 일어나긴 글렀다.
“그렇지 뭐…….”
“그러게 왜…….”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지 비니가 도끼눈을 뜨고 루크를 다시 노려봤다. 이러다 뭔 일 날까 무서워서 얼른 비니의 손을 잡아서 꼭 쥐었다.
“너라도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야. 멜 반장하고 러셀 소식은 들었어? 두 사람은 어때?”
이번 사태로 타격대도 피해가 컸다. 두 기사단의 전면전이라 피해 역시 그쪽에 집중됐지만, 그 격돌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허둥거리던 타격대의 피해도 막심했다. 두 명 사망에 열한 명 부상이면 단일 사건으로는 최근에 없었던 인명피해였다.
“안 그래도 아침에 경찰 병원에 들렀다가 오는 길이야. 멜 반장은 회복 중이고, 러셀도 괜찮아.”
다행이다. 러셀이 눈앞에서 가슴에 총을 맞고 날아가 떨어지는 걸 봤을 땐, 이렇게 친구 하나 보내는구나 했었다.
“근데 왜 저 자식하고 같은 방에 있어? 넌 중환자잖아. 병원에 있는 동안에라도 제대로 쉬어야지.”
그러면서 비니가 또 루크를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또다시 비니의 손등을 다독거려서 주의를 돌렸다.
“나도 편해. 방도 크고, 저쪽에서 종일 떠드니까 심심치 않아서 좋아.”
“그렇지 말고 방을 옮겨. 내가 너 보러 올 때마다 저 자식까지 봐야 돼?”
비니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비니가 병원에 누워 있었던 반 년 간 내가 하루도 마음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것처럼, 비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비니의 손길은 다정하고 따뜻했다.
“어차피 루크는 이번 주 안으로 퇴원할 거야.”
“애초에 입원은 왜 한 거야?”
루크가 멀쩡한 것도 신경질이 나는지 비니가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얘가 어지간해서는 당사자 앞에서 이러지 않는데, 루크가 정말 싫은가 보다.
부하들과 뭔가 궁리가 한창이던 루크가 고개를 들어 비니를 봤고,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둘 사이에서 뭔가가 팍 튄다고 느낀 순간, 루크가 들고 있던 서류가 휘리릭 날렸다.
“조심해, 마법사. 방안에서 태풍은 금지야.”
“너 때문에 제이가 죽을 뻔했어!”
“고생시킨 건 꼭 갚을 거야. 평생 데리고 살면서.”
루크의 도발적인 말대꾸에 비니가 열 받아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비니 손을 잡고 있던 나도 끌려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러다가 오늘 안에 진짜 옆구리 터지겠다.
내가 침대에 엎어져서 몸을 웅크리고 끙끙거리자 비니가 루크에게 달려들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날리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 잔을 쓰러뜨렸다. 루크의 부하들이 일어나서 창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창은 처음부터 닫혀 있었다.
“참아, 비니.”
아파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비니를 붙들어서 달랬다. 이 자식, 사막에 가더니 이상한 걸 배워왔다.
“일일이 신경 쓰고 맘 상할 거 없어. 너 열 받으라고 더 그러는 거야.”
“그래서 열 받았어!”
“진정해. 본래 그런 놈이잖아.”
“그러니까 왜 하필 저런 놈하고…….”
비니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끙끙거렸다. 바람 때문에 루크의 부하들이 모두 일어나서 우왕좌왕했고, 루크도 눈살을 찌푸리며 비니를 노려봤다. 내 이불도 훌쩍 날려갔고, 좀 있으면 나도 날아갈 판이다.
“미안해. 비니.”
“저 자식 때문에 니가 죽고 말 거야! 전에 니콜라스 때문에 그랬던 것처럼…….”
“나도 생각을 다시 해볼게.”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비니가 원한 대답이 그거였었나 보다.
“정말이야?”
“나라고 저놈이 좋기만 하겠어? 하는 거 봐서 계속 이런 식이면…….”
그렇게 말하면서 루크를 힐끔 돌아봤다. 녀석이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놀고 있네 하는 표정이지만, 썩 편안한 미소는 아니었다.
“나도 살 길을 찾아야지.”
“정말이지?”
내가 루크하고 확실히 헤어지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비니가 반색하면서 되물었다.
“생각 중이야.”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늘 계속 사랑도 좋지만,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녀석의 직업, 사납고 더러운 성격 따위 다 알고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며칠에 한 번씩 총에 맞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저 자식 근처에 얼씬도 안 했다.
어쨌든 그렇게 비니를 달래서 다시 옆에 앉혔다. 예전엔 비니가 가까이에 있으면 이유 불문 무섭고 조마조마했었는데 그동안 워낙 세파에 시달려서 그런지, 이젠 별로 겁도 안 난다.
“넌 좀 어때? 다시 사막에 갈 건 아니지?”
“나야 뭐…….”
비니가 대답을 얼버무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속세를 떠나서라도 자신으로 인한 피해를 줄여 보려는 성의는 가상하지만, 사막에서 비니가 얻을 거라곤 우울증뿐이다.
“그러지 말고, 좀 더 쉬다가 복귀해. 전처럼 나하고 한 팀으로 다시 일하자.”
“제이, 나는…….”
여태까지 성가시고 고까운 것을 잘 참고 앉아 있던 루크가 벌떡 일어났다. 미간이 확 찌그러진 걸 보니 나하고 비니의 대화에 뭔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나 보다.
“너 제정신이야? 비니 몬티첼리하고 다시 한 팀으로 일을 해?”
루크가 으르렁거리며 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안 되는데…….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면 상황만 더 나빠진다. 비니를 자극하는 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도 잡을 수 없는 위험을 자초하는 짓이다.
루크의 위협적인 접근에 비니 역시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맞섰다. 이러다 치고받을까 봐 무서워서 비니를 얼른 붙들었다.
“우린 본래 한 팀이었어.”
비니를 두둔하고 나서자 루크가 총 맞은 옆구리를 움켜잡고 자기를 찾아서 청연루 후원을 미친 듯이 뒤지고 다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눈만 마주치면 나 때문에 총 맞고 고생한다고 징징거리더니, 비니 몬티첼리하고 붙어 다니겠다는 게 말이 돼?”
“그건 그거고.”
“웃기지마. 절대 허락 못해!”
아까부터 루크가 지껄이는 말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평생 살면서 신세를 갚겠다는 둥, 내가 비니하고 파트너로 일하는 걸 허락 못한다는 둥…… 무심코 지껄이는 소리 같지만, 녀석은 어떤 시커먼 꿍꿍이 없이 저런 말을 입 밖에 낼 놈이 아니었다. 보아하니 비니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그래 봐야 돌아올 거라곤 날벼락, 물벼락, 아니면 태풍뿐이다. 그리고 그런 헛소리…… 비니보다 내가 더 불편하다.
“너야말로…… 웃기지 마.”
갑자기 옆구리가 욱신거려서 힘겹게 한마디를 하고 끙끙 앓았다. 그 틈에 루크가 나를 버려두고 비니한테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병문안을 왔으면 인사나 하고 가, 제이한테 작업 걸지 말고.”
“너야말로 제이한테서 손 떼. 양심이 있으면 사람을 살게는 해줘야 할 거 아냐?”
비니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루크와 맞섰다.
“앞으론 이런 일 절대 없을 거야.”
“니가 루크 첸인 이상, 이런 일은 언제라도 다시 벌어질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가 그런 소리 지껄일 주제가 된다고 생각해?”
루크가 치사하게 비니의 약점을 들먹였다. 어지간히 마음이 언짢았는지 비니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침대가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듯 들썩거렸다.
“비니!”
침대째 날려가서 루크를 덮치게 될까 두려워서 아픈 것도 잠시 잊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옆구리를 잡아 찢는 것 같은 고통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는 않았는지 다시 눈을 떴을 때엔 허리에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고, 의사가 루크와 비니를 향해 환자를 자극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뚱한 표정으로 주의를 듣던 루크가 고개를 돌리다가 내가 정신 차린 것을 보고는 머리맡으로 다가왔다.
“정신이 들어?”
“응.”
내 목소리를 들은 비니가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루크하고 맞설 때와는 달리 기가 확 꺾인 얼굴이었다.
“비니…….”
“난 이만 가 볼게.”
“괜찮아. 좀 더 있다가 가.”
“또 올게.”
비니는 내가 기절한 게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고 있다. 이렇게 가버리면 다시는 병원에 오지 않을 거다. 이러다가 또 사막으로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얼른 손을 뻗어서 뒷걸음질 치는 비니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부탁이 있어.”
“뭔데?”
“기린을 찾아서 데려다줘. 여태 청연루에 같이 있다가 습격당하기 직전에 발렌타인이 데리고 나갔어.”
“걔는 왜?”
“기린이 옆에 있으면 몸이 빨리 좋아져.”
비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넌 사람 찾는 거 잘 하잖아. 부탁이니까…… 찾아서 데려다줘.”
내 부탁에 비니가 더는 까닭도 묻지 않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착잡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시간이 되자 병원직원이 내 저녁을 가지고 들어왔다. 루크도 하루 종일 끼고 있던 떨거지들을 모두 내보내고 옆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급한 일은 대강 마무리를 지었으니까 내일부터는 조용할 거야.”
그렇게 사과를 하면서 루크가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곤 모두가 멀건 유동식인 걸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찼다.
“인간들 하는 짓은 이해할 수가 없어. 이런 걸 먹고 어떻게 기운을 차리라는 거야?”
“지금 인간들 하는 짓…… 이라고 했어?”
그렇지 않아도 놈의 정체가 수상하고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던 참이라 별 것 아닌 한마디에도 귓바퀴가 바짝 곤두섰다.
“의사들 말이야.”
건성으로 대꾸하며 녀석이 내 죽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봤다. 그리고 이번엔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숟가락을 내려놨다. 나는 먹을 만하던데 왜?
“이거 치우고 잠깐 기다려봐. 좀 있으면 푸웨이가 내 저녁밥을 갖고 올 거야. 그중에 먹을 만한 게 있나 찾아보자.”
루크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저녁을 치워버리려고 들어 올렸다. 얼른 손을 뻗어서 식판을 잡았다. 마음은 고맙지만, 옆구리에 총구멍이 난 내 형편에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어차피 이런 것뿐이다.
“내려놔. 어차피 맛으로 먹는 거 아니야. 살려고 먹는 거지.”
“기왕 먹는 거, 맛도 있으면 좋잖아.”
죽이 다 그렇지, 맛은 무슨…….
“괜찮다니까?”
내가 식판을 붙들고 버티자 루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저녁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상한 일에 고집을 부리네?”
“주는 대로 먹고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려고 그러지.”
사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먹을 마음이 없다. 좀 전에 옆구리를 다시 치료받고 진통제를 왕창 맞아서 그런지, 배가 고픈 것도 모르겠고 온몸이 멍할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빨리 몸 상태를 정상화 시켜야 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병원 밥이란 게 본래 맛이 있다 없다 따질 건 없지만, 지금은 특히나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진통제에 혓바닥도 마비가 됐나? 어쨌든 미음에 가까운 묽은 죽을 반쯤 먹다 보니 루크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걸 먹고 언제 자리를 털고 일어날까 하는 회의가 슬슬 들었다. 그렇게 딴 생각하다가 죽을 잘못 넘겨서 사례가 들렸고, 기침하다가 한 번 더 기절할 뻔했다.
루크가 옆구리를 움켜잡고 끙끙거리는 나를 달래서 바로 눕히고 죽 그릇을 치웠다. 그리곤 다시 옆으로 다가와서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힘든 건 알지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다음 주에 루소 의원 집에 간다며?”
왕이라는 명칭답게 현역 실세들이 득시글한 그 회합이 루크한테 우호적일까? 루크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그쪽에 큰 손실을 안긴 장본인이다. 게다가 그 난리를 피운 덕에 온 세상 사람들이 대체 쿠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궁금해 하고 있으니, 비밀 좋아하는 그 영감들이 루크를 곱게 볼 리 없었다.
루크는 청연루 방어에 성공한 걸 두고 대단한 승리라도 거둔 것처럼 의기양양하지만, 그쪽도 루크를 전쟁에서 이긴 적장으로 대접해줄까? 대통령까지 끼어 있다는 현역 실세들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거긴 루크에게는 어디까지나 적진이다.
“내가 그 집에 가는 게 뭐? 따라가고 싶어?”
“어차피 경호원 몇 명은 데려갈 거잖아.”
“꿈 깨. 현역 짭새가 낄 자리도 아니지만, 이 몸으로 거길 어떻게 따라가?”
루크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이마를 손끝으로 톡 튕겼다. 물론 이 상태로 따라가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정도 중상이 일주일 안에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호전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건 일반인들 얘기고, 나한테는 기린 친구가 있다.
“비니가 기린을 찾아올 거야.”
비니의 사람 찾는 실력은 거의 신통력 수준이었다. 비니하고 파트너로 일할 때엔 고달픈 일도 많았지만, 사람 찾아내는 일 하나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찾아야 할 용의자나 관련자 신상 파일이 책상위에 일단 떨어지면, 아무리 늦어도 다음날 점심때면 우리는 이미 그 사람 앞에 있었다.
그렇다고 비니가 뭔가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상대를 추적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들어간 바, 저기 한번 들어가 보자고 해서 끌려들어간 뒷골목의 허름한 모텔, 요기나 할까 해서 들어간 패스트푸드 식당에 거짓말처럼 용의자가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일이 안 풀리면 비니는 지나가는 길고양이까지 불러 세워서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사람 본 적 없느냐고 묻고 다녔었다.
“기린을 찾아오면? 아무리 기린이라도 입김 한두 번 불어서 이런 부상을 낫게 할 수는 없어.”
루크가 고개를 저으며 내 희망사항에 초를 쳤다. 녀석은 내가 루소 의원의 저택에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서는 게 싫은 거다.
“다 죽어가던 발렌타인도 살려냈는데 이깟 총상을 못 고치겠어?”
“그쪽은 깊은 관계잖아.”
그래? 그렇다면…….
“녀석이 와서 손이라도 잡아주면 아픈 건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마. 그 녀석하고 동침을 하지 않는 이상, 한주일 만에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건 무리야.”
“그럼 같이 잘래.”
“야!”
루크가 벌컥 화를 내며 내 이마에서 딱 소리가 나도록 딱밤을 때렸다.
“방법이 그거밖에 없으면 어쩔 수 없잖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음 주까지는 일어날 거야!”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내 굳은 의지를 녀석에게 밝혔다.
“갔다 와서 무슨 일 있었는지 다 얘기 해줄게. 그러면 됐지, 굳이 따라올 거 뭐 있어?”
“가서 상황이 어떤지 내가 직접 보고, 경호도 해주고…… 그러면 좋잖아?”
“니가 기린하고 놀아나겠다는데, 퍽도 좋겠다.”
투덜거리면서 루크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서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녀석의 입술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가벼운 입맞춤도 며칠만이라 몸이 침대 아래로 푹 꺼지는 것처럼 좋았다.
몸이 엉망이 돼도 이런 건 좋을 만큼 내가 음란한 걸까? 종종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면 몸이 아픈 것도 괴로웠지만, 그보다는 버려진 것처럼 혼자 덩그러니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서글프고 힘들었다. 루크가 부하들을 병실에 불러들여서 온종일 흑풍회의 대소사를 처리하느라 바쁘고, 한창 시끄러울 때는 왜 나를 다른 방에도 안 보내주고 이렇게 피곤하게 하나 싶어서 괘씸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오늘은 한 순간도 외롭다거나, 혼자라거나……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녀석이 나를 배려해서 그렇게 떠들어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입술은 말짱해서 다행이야.”
루크가 혀끝으로 내 입술을 부드럽게 핥으며 싱거운 소릴 지껄였다.
“성한 데가 한 군데는 있어야지.”
“널 그런 일에 끼워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야.”
실수로라도 그런 일이 마지막이라고는 안 하는구나.
“앞으로도 그럴 일이 또 있을 거란 뜻이야?”
“앞 일을 누가 알겠어?”
루크가 슬그머니 물러앉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루크.”
손을 뻗어서 녀석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끌어 내려서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두 번째 키스는 첫 번째보다 훨씬 길고 깊었다. 보통 때에 이 정도 분위기였으면 오늘 밤도 길고 격렬했을 거다.
녀석의 손길이 내 목덜미와 앙상한 쇄골을 두서없이 어루만졌다. 하지만 곧 손끝이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는 붕대에 닿았고, 가슴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더듬던 녀석이 아쉬운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술을 뗐다.
“기린하고 바람을 안 피우고도 빨리 회복될 방법이 있으면……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루크가 중얼거리면서 환자복 바지 끈을 슬그머니 풀었다. 그 버릇없는 손이 바지춤으로 파고드는 걸 그냥 버려두고 손을 들어서 녀석의 턱을 잡았다. 그렇게 녀석과 눈을 맞추고 우리 둘이 이렇게 이상한 사이가 된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내 진심을 밝혔다.
“그런 난리가 한 번만 더 터지면, 그땐 정말 너하곤 끝이야.”
“…….”
“새겨들어. 농담하는 거 아니니까.”
“끝이라는 둥, 헤어지자는 둥…… 그런 말 가볍게 하지 마. 버릇 들어.”
루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야.”
“내가 그런 일에 재미가 나서 쫓아다니는 게 아니잖아. 저쪽에서 매번 시비를 걸어오는데 어쩌라고? 피해? 도망쳐?”
“계속 이런 식이면 얼마나 더 버틸 것 같아? 운이 나쁠 수도 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질 수도 있어. 니가 죽으면 어차피 우린 끝이야.”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앞으론 조심하라고 하면 되지, 말을 꼭 그렇게…….”
“무조건 끝이야!”
딱 잘라 말하고 이불을 덮어 썼다. 하지만 녀석은 그때까지도 내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지 않았고, 나도 굳이 그것까지 떨쳐버리진 않았다.
비니가 다시 병원에 온 건 다음 날 점심 무렵이었다.
“제이…….”
병실로 들어서던 비니가 등 뒤에 베개를 잔뜩 받치고 비스듬하게 앉아서 루크에게서 감자스프를 받아먹고 있는 나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비니를 힐끔 돌아본 루크가 피식 웃으며 냅킨을 집어 들더니 아무것도 안 묻은 내 입가를 일없이 박박 닦았다.
“왔어?”
루크의 손을 밀어 치우고 비니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때 비니 양 옆에서 용하고 기린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살아 있네?”
기린이 썰렁하게 안부를 묻고는 방안을 슥 살폈다. 전에 자기가 입원했었던 조그만 1인실을 떠올리며 이 방은 왜 이렇게 크고 좋은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용도 나를 향해 고개를 한번 까딱 하고는 킁킁거리다가 시선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식에 딱 꽂혔다.
소파 테이블에는 정상적인 위를 가진 성인 남자 세 명 정도가 둘러앉아서 부족함 없이 한 끼 먹을 정도로 푸짐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루크의 부하 세 명이 오전에 온 시내 맛집을 다 돌면서 사다 나른 국적과 종류도 다양한 먹음직한 먹거리들인데…… 루크는 아침이 부실했다면서 저걸 점심 한 끼에 먹어치울 작정을 하고 있었다.
“걱정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야.”
용이 건성으로 지껄이면서 홀린 듯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로 이끌려갔다. 기린도 고개를 쭉 빼고 식탁을 탐색하다가 샐러드는 몇 종류 안 되는 것을 깨닫고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그거라도 먹어야겠다 싶었는지 얼른 용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무심하고 무정한 짐승들 같으니…….
“이번엔 제대로 한방 먹었나 봐.”
두 녀석 뒤에 서서 보이지도 않던 발렌타인이 침대 옆으로 다가서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를 한번 쭉 훑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듯, 귀찮은 듯……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시체처럼 창백하던 얼굴에 이젠 홍조가 돌고, 살도 제법 올라서 아무리 인상을 써도 전처럼 어둡고 냉막해 보이진 않았다. 며칠 못 본 사이 10년은 젊어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기린하고 무척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 게 틀림없었다.
“총알이 옆구리를 살짝 스쳤어.”
“이번에도 꽤나 거칠었다면서? 어땠어? 놈들의 규모도 그렇고, 헬기 습격도 그렇고…… 지난겨울에 프란시스네 집에 쳐들어왔을 때하고 양상이 비슷했던 것 같은데…….”
“비슷했어.”
생각해보니 불과 반 년 사이에 그 난리를 두 번이나 겪은 거였구나. 그 사이에 겪은 험한 일은 정리도 안 될 정도고…… 쿠간이 분쟁지역도 아닌데 왜 나만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당신은 좋아 보이네? 잘 지내나 봐?”
“난 낄 데, 빠질 데 분간은 하거든.”
발렌타인이 이불을 들추고 내 상처를 구경하면서 빈정거렸다.
“어쩐 일로 문병을 다 왔어? 나를 걱정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내 물음에 발렌타인이 갑자기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대답 대신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목엔 기린이 채운 은색 팔찌가 예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발렌타인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기린하고 같이 다녀야 된다. 아무리 깐깐하고 사납게 굴어봐야 임자 만나면 다 부질없다.
루크가 허락도 없이 자기 점심을 퍼먹고 앉아 있는 용하고 기린을 못마땅한 눈길로 노려보는 사이, 비니가 곁으로 다가와서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아픈 건 좀 어때?”
“어제보다 훨씬 나아.”
“다행이다.”
“그건 그렇고, 용케 찾았네? 쉽지 않았을 텐데…….”
비니의 여러 가지 능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막상 그 실력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큰 도시에서 어디로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린 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하루 만에 찾아서 데려온 걸까? 내 치하에 비니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쉬웠어. 작은아버지 댁에 있던데?”
쿠간 시 상위 1% 부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서부 해안 절벽에 별장이 있었다. 해안 별장도 지난겨울에 초토화된 서부 호수 근처 자택과 비슷한 크기라서 몬티첼리는 퇴원 후에 그곳에 본거지를 마련하고 요양 중이었다. 뭐…… 절치부심 루크를 때려잡을 궁리도 같이 하고 있겠지만, 녀석이 휘말린 일이 워낙 골 때려서 그런지 요즘 그쪽은 쥐죽은 듯 잠잠했다.
“그래?”
피식 웃으며 발렌타인을 쳐다봤다. 그러자 발렌타인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돈 몬티첼리가 많이 놀랐겠네?”
“저승에서 온 유령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더군.”
그랬겠지.
“기린을 보고는 뭐래?”
“저놈도 지옥에서 돌아온 줄 알아. 많이…… 닮았으니까.”
발렌타인이 소파에 주저앉아서 남의 점심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는 두 녀석을 돌아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철벽같은 포커페이스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감출 수는 없는 모양이다. 기린을 보는 발렌타인의 눈길엔 어느 사이 온기가 가득했다.
“저 녀석은 왜 보자고 한 거야?”
“기린을 이박삼일만 빌려줘.”
남자친구 빌려달라는 말에 발렌타인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안 돼!”
발렌타인이 사정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불쾌한 표정으로 거절부터 날렸다.
“그럼 일박이일만…….”
“조폭 관련은 무조건 사절이야.”
“조폭 관련이 아니고…… 나, 다음 주까지는 일어나서 움직여야 돼.”
내 변명에 발렌타인의 표정이 더욱 떨떠름해졌다.
“애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내가 설마 쟤한테 나쁜 짓을 시키겠어?”
루크한테는 기린하고 같이 잠자리라도 할 것처럼 떠들었지만, 진짜 그럴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저 기린을 끌어안고 몇 시간만 누워 있어 보고 싶은 것뿐이다. 말기 암환자 치료는 좀 번거로웠지만, 이런 부상은 그 정도만 해도 차도가 확실히 있을 거다. 지난번에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냥 병원에서 해주는 치료나 받아. 저 녀석이 건강식품이야?”
메스를 훔쳐들고 와서 기린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설치던 때가 불과 몇 주 전인데, 이젠 애가 축이라도 날까 싶어서 철통같이 간수를 하네.
“그새 커플링이라도 맞췄어? 저 녀석한테 부탁할 게 있으면 당신한테 일일이 허락이라도 받아야 되는 거야?”
잠자리부터 시작한 커플이라 역사는 나름 깊지만 마음 열기 시작한 지는 며칠 되지도 않은 주제에 벌써부터 애인 노릇, 보호자 노릇하며 까다롭게 구는 게 성가셔서 나도 까칠하게 받아쳤다.
발렌타인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없는 상대이긴 하지만, 나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음 주에 루크를 따라서 루소 의원 저택에 가고 말 거다.
발렌타인하고 내가 서로를 지그시 노려보면서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 샐러드 세 접시하고, 스테이크 옆에 놓인 아스파라거스와 삶은 시금치까지 다 닦아 먹은 기린이 일어나서 설렁설렁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기린이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녀석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니까 겁이 덜컥 났다. 샐러드 한두 접시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는지, 녀석의 눈빛에 허기가 살짝 비쳤다.
“저기……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기린이 침대에 냉큼 올라앉았다. 그리고는 이불을 들추고 두툼하게 붕대를 둘러놓은 내 허리를 살펴보더니 묻지도 않고 그 위에 손을 덥석 얹었다. 진찰이라도 하듯 잠깐 진지한 표정을 짓던 기린이 이내 음흉하게 히죽거렸다.
“이건 손만 붙들고 자는 걸로는 어림도 없겠는데?”
헉…….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데?”
기린이 손끝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속삭였다.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당신이 말해봐. 원하는 건 다 해줄게.”
한창 혈기왕성한 10대 후반의 애 녀석이란 종족을 불문하고 열정만 넘쳤지, 지조는 바닥인 모양이다.
어쨌든 녀석의 대담한 제안에 나도 놀랐고, 루크도 놀랐고, 비니도 이상한 삼각, 혹은 사각 관계에 당혹스런 얼굴이고…… 발렌타인은 한마디로 기분 싹 잡친 표정이었다.
“왜 이렇게 인심이 후해?”
녀석을 슬쩍 밀면서 발렌타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기린은 방안에 사람이 여럿이라는 것, 내 애인, 자기 애인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요즘은 기분이 좋거든.”
기린이 키득키득 웃으며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옷섶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래 봐야 만질 수 있는 건 두툼한 붕대뿐이다. 어쨌든 이건 누가 봐도 이 녀석이 나한테 작업을 거는 거다.
루크도 그렇게 판단을 하고 탁자에 올려놨던 스프 그릇을 일단 자기 침대 위로 치웠다. 그리곤 기린을 침대 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다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기린을 싸늘한 눈길로 노려보던 발렌타인은 그대로 방에서 나가버리고 말았다.
“봤어?”
쿵…… 하고 병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린이 나를 돌아보며 자랑하듯 물었다.
“뭘?”
“질투하는 거.”
“…….”
“이젠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거야. 그렇지?”
어쩐지 인심 좋게 나온다 했다. 본래 그런 놈이 아닌데…… 좀 컸다고 이 자식이 이제 몸도 성치 않은 나를 테스터로 써먹는구나.
내가 이런 놈한테 아쉬운 소리 해가면서까지 몸을 추슬러야 하나 싶은 회의가 밀물처럼 밀려올 즈음…… 루크가 기린의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녀석을 침대에서 무작스럽게 끌어내서 방구석으로 패대기를 쳐 버렸다.
“왜 애를 때리고 그래?”
바닥에 떨어지면서 머리라도 부딪혔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끙끙거리는 기린을 일으켜 앉히며 비니가 루크한테 따졌다. 기린이 먼저 버릇없이 굴기는 했지만, 루크의 대응이 너무 난폭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 남자한테 껄떡거린 대가야.”
“제이는 내 파트너야!”
비니가 투덜거리며 기린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외상은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경황이 없는지 애가 계속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발렌타인의 마음을 확인하는데 나를 써먹은 건 괘씸하지만 옆에 누워 있을 때엔 후끈하니 좋았는데…….
대강 정신이 돌아왔는지 기린이 루크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루크는 노려보면 어쩔래? 하는 표정으로 콧방귀를 날렸다.
“정신 차렸으면 가서 남자친구나 찾아와. 할 말이 있으니까.”
루크로 말하면 생긴 건 완전 제비족이지만, 최악의 폭력사태를 맞아 두 번이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악당 중의 악당이었다. 맨손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뭘 들고 덤빈다고 해도 몸싸움이라면 기린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잠시 루크를 노려보던 기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녀석이 분을 못 참고 달려들까 봐 무서워서 발로 루크의 엉덩이를 밀어냈다. 그리고 기린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왜?”
기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나가서 발렌타인이나 찾아와. 그 아저씨는 보기보다 섬세하고 뒤끝 있는 성격이야. 이제 잠자리도 같이 하고, 어리광도 받아주니까 그렇게 만만해 보여? 겁도 없이 성질 건드리다가 날벼락 맞지 말고 점잖게 굴어.”
“나는 그냥…….”
“빨리 가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발렌타인이 진짜 열 받으면 방구석에 던져지는 것 정도는 장난이야.”
루크한테 좀 전의 폭행을 따지는 것보다는 발렌타인을 찾아서 달래는 일이 시급하단 생각이 들었는지 기린이 뒤통수를 감싸 쥐고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끙끙 앓으며 발렌타인이 한번 와줄까 싶어서 기다리던 처량 맞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참 많이 컸다. 자식…….
기린이 나가자 좀 전에 녀석이 나한테 작업 걸던 자리에 비니가 와서 앉았다. 나도 던지려면 던져 보라는 듯 비니의 태도가 도발적이었다. 그 모습에 루크가 끙…… 하고 한번 앓는 소리를 하고는 돌아섰다. 비니랑 나 사이는 별로 걱정이 안 되나 보다. 아니면 비니는 기린만큼 만만치 않던지…….
소파 쪽으로 다가가던 루크가 걸음을 멈추고 뭔가에 크게 놀란 듯 숨을 몰아쉬었다. 자기 점심이 빈 접시만 남은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던 것이다.
“뭐 더 없어?”
용이 손가락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쪽쪽 빨면서 루크에게 물었다. 루크가 대답 대신 손을 내저으며 터덜터덜 자기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곤 침대에 털썩 눕더니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덮고 심호흡을 했다. 입원한 이후 제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루크도 나한테 손님이 많으니까 신경 쓰이고 짜증이 나나 보다.
“무슨 뜻이야? 다음 주까지 일어나서 움직여야 된다는 게?”
비니가 눈을 가릴 정도로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걷어주며 물었다.
“가 볼 데가 있어.”
“어디?”
“루소 의원 저택에…….”
대답하면서 루크를 슬쩍 돌아봤다. 자기는 나한테 스스럼없이 비밀을 깠지만, 내가 그 일을 비니한테 옮기는 건 마땅치 않은지 나를 보는 눈초리가 심히 언짢았다. 하지만 나는 흑풍회 조직원도 아니고, 기사단 떨거지는 더더욱 아니니까 그쪽 비밀을 지켜줄 의무나 의리는 없다.
“거긴 왜?”
“이유는 가 봐야 알아.”
“저 녀석하고 관련이 있는 일이야?”
루크의 표정이 편치 않은 것을 본 비니가 세부적인 사안을 파고들었다.
“다음 주에 그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루크가 초대를 받았어.”
파티라니까 좋은 건 줄 알았는지 비니가 심란한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부부동반이야?”
“경호원 동반이야.”
그제야 비니가 눈을 반짝이며 루소 의원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관심을 보였다.
지난 육 개월 간 가사상태로 누워 있었던 탓에 비니는 그간 쿠간이 얼마나 위험하고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런 비니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관해서는 일반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인 프란시스 몬티첼리 저택을 습격해서 쑥밭을 만든 게 바로 그놈들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비니도 놈들에 대한 유감이 만만치 않다. 일단 조폭 두목으로는 쿠간에서 제일 잘 나가던 작은 아버지가 그놈들 때문에 심한 부상을 입고 몰락의 길을 걸었으니 개인적인 원한도 있고, 오컴을 잡는답시고 사람 사는 동네에 총질을 하며 돌아다닌 것도 감점사유였다. 게다가 엊그제 새벽엔 멋모르고 청연루에 왔다가 그 살벌한 난리에 휘말렸고, 친하게 지내던 경찰 타격대의 피해도 컸으니 그놈들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우리가 애초에 짐작했던 것보다 규모도 크고 역사도 깊고……정통성도 있는 조직이란 내 설명에 비니의 표정이 점점 썩어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놈들이 사실은 천년 전에 잠든 용의 군대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특수부대고, 유서 깊은 명문가의 후손들과 각국 대통령들이 포진하고 있는 아홉 명의 왕들이란 모임이 놈들의 배후세력이라는 것까지 설명했을 때 비니가 치를 떨며 말을 잘랐다.
“그놈들이 지구를 지켜? 사람 사는 기본적인 도리나 지키라고 해!”
내가 얘기를 지어낸 것도 아니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관계자도 아닌데, 비니가 나한테 화를 냈다.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할 기회가 생기면 그럴게.”
“게다가, 천년 조약의 기사단? 그놈들은 흑풍회 행동대 아니야? 말짱 다 깡패들이구만, 대체 그런 놈들이 뭘 지킨다는 거야? 만나서 또 동네를 들어 엎을 궁리나 하겠지!”
이런 일은 쥬드가 조리 있게 설명을 잘 한다. 게다가 나는 지금 컨디션도 바닥이라서 이 거창하고 복잡한 사정을 더 상세하게 설명 하는 건 무리였다.
“어쨌든 그쪽에서 루크를 만나자고 했는데, 저 자식이 겁도 없이 그걸 덥석 물었어. 엊그제 전쟁을 치르고 놈들도 대판 깨졌는데 루크를 불러들여서 곱게 대화만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내 말에 비니가 여태 투덜거리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
“그럼 또 저놈을 따라서 죽을 구덩이에 뛰어들겠다는 거야?”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 한번만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헤어질 거라고 못을 박았는데…….
“어떻게 될지는 가 봐야 알지.”
“가지 마.”
“…….”
“저 자식하고는 이쯤에서 정리해. 저놈하고 엮여서 너한테 좋은 게 하나라도 있었어? 결국 이 지경이잖아.”
비니가 루크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 바람에 침대가 공중 부양하듯 잠깐 떴다가 툭 떨어졌다.
“가야 돼.”
“야!”
“이 모든 일이 다 니콜라스하고 연결돼 있어.”
내 입에서 니콜라스의 이름이 나오자 비니가 뜨악한 눈길로 나를 내려다봤다.
“니콜라스가 용의 군사들을 깨울 거래. 그래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기를 쓰고 쫓아다니면서 죽이려고 하는 거고…….”
비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 작자하고도 이제 그만 끝내.”
“벌써 옛날에 끝났어. 하지만 앞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알아야겠어.”
“신경 꺼! 무슨 상관이야?”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나한테는 이 일에 관한 분명한 지분이 있다. 니콜라스를 잡느라 잠복하다가 사랑에 빠진 건 한심한 일이지만…… 어쨌든 니콜라스는 잡았었다. 그 과정에서 웬 미친 여자한테 걸려서 저승 문 앞까지 갔다 왔고, 루크 때문에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오컴도 만나봤고, 대공도 내가 잡았고…… 이 일에 나보다 더 상관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다.
“뭐야? 내가 걱정돼서 같이 가겠다고 한 게 아니었어?”
뒤통수로 날아온 까칠한 시비에 고개를 돌려보니 루크가 나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걱정되지.”
“니콜라스 헤슬렘이 걱정되는 게 아니고?”
나도 걱정하기 싫지만, 걱정된다. 놈들은 루크에게도 거칠게 굴었지만 니콜라스에 대해서는 거친 정도가 아니었다. 몬티첼리 저택 습격 때도 그렇고, 서부 호수의 별장이 박살난 걸 봐도 니콜라스에 대한 놈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게 걸리면 니콜라스는 죽는다.
“너, 이러는 것도 바람이야.”
심사가 복잡해서 얼른 대꾸를 못했더니 루크가 냉큼 생트집을 잡았다. 그래서 나도 놈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사람을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뭐 잘한 게 있다고 바람 타령이야?”
“내가 너를 총으로 쐈어?”
“어쨌든 다 니 탓이야!”
“그러니까 꼼짝 말고 누워서 몸이나 추슬러. 나 따라다닐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나하고 루크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루크와 내가 동시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눈빛이 좀 거칠었는지 발렌타인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던 기린이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다면서?”
나하고 루크의 살벌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는 당황해서 멈칫거리는 기린을 발렌타인이 옆으로 밀었다. 삐져서 나가기에 달래서 데리고 오는데 반나절은 걸릴 줄 알았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끌려 들어온 거 봐라. 어쩌다 저렇게 쉬운 남자가 된 걸까? 예전의 쿨 하고 못된 발렌타인도 꽤나 매력적이었는데…….
“다른 일 없으면 기린하고 자주 들러서 제이 좀 봐줘.”
“명령하는 거야?”
발렌타인이 고깝다는 듯 눈을 내리 깔며 루크한테 따졌다.
“부탁하는 거야.”
“싫어.”
발렌타인이 기다렸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기린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린도 내 부탁을 한 번에 선뜻 들어준 적은 없었지만, 맛있는 거 많이 사준다고 꼬시면서 잘 부탁하면 거의 넘어왔었다. 하지만 이제 기린하고 발렌타인이 깊은 관계가 돼서 녀석에 관한 일을 일일이 발렌타인에게 허락받아야 되는 거면…… 앞으로 기린 덕을 보긴 다 틀렸다.
“매정하긴…… 옆구리에 총 맞고 저렇게 누워 있는 게 불쌍하지도 않아?”
부탁하는 주제에 루크가 있는 대로 건방을 떨며 발렌타인을 나무랐다. 하지만 아무리 루크라도 발렌타인은 만만히 주무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런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으면 불쌍하겠지. 하지만 여긴 병원이잖아?”
“무료봉사를 하라는 게 아니야.”
“알바비라도 챙겨주게?”
나는 어째서 루크가 말싸움에서 밀리는 걸 보면 이렇게 고소하고 통쾌한 걸까? 어쨌든 루크하고 발렌타인 사이에 한바탕 불꽃 튀는 눈싸움이 벌어졌다. 여기서 조금만 더 빈정이 상하면 너 죽고 나 죽자고 서로에게 덤벼들 분위기였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는지 루크가 자기 딴에 생각하고 있던 적정한 보상을 제시했다.
“해안에 있는 내 별장을 쓰게 해줄게. 전망 좋고, 정원도 괜찮고…… 방도 많으니까 저 두 녀석을 데리고 지내기에 옹색하진 않을 거야.”
“해안…… 별장?”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다 튕겨낼 것처럼 강경했던 발렌타인의 표정이 초호화 부동산 무상 임대라는 달콤한 제안에 살짝 흔들렸다.
“당신이야 몬티첼리 저택 곁방에 끼어 자도 괜찮겠지만, 기린하고 용의 거처로는 너무 궁상맞잖아. 그 언덕에서도 괜찮다고 소문난 집이니까 쟤네들도 좋아할 거야. 당신 마음에도 들 거고.”
쿠간 시 서부 해안 절벽엔 허름한 집이 없다. 대부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부자들의 별장이라서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다 호화주택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잠시 들렀던 루크의 별장이 얼마나 호사스러웠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병구완 며칠 해주는 대가로는 아주 괜찮은 보수다.
요즘은 폐업 중이지만, 몬티첼리 저택도 어차피 깡패 소굴이다. 겉보기엔 무심한 듯 보여도 발렌타인은 애들이 그런 데서 나쁜 물이나 들지 않을까 싶어서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호젓한 별장에서 애들하고 조용히 지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을 거다. 해안 별장이면 몬티첼리 저택하고 멀지 않을 테니 왕래도 편할 거고…….
발렌타인이 잠시 어쩔까 생각을 하는 사이 뒤에서 루크의 제안을 유심히 듣고 있던 기린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당신 별장이 어떤 건데?”
“101번지야. 언덕 꼭대기 세 번째 집인데…….”
루크의 설명에 기린이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나섰다.
“그 장미색 대리석 집말이야? 장미 정원이 있고, 그 아래 벼랑엔 갈매기 둥지가 잔뜩 몰려 있는?”
루크의 별장을 알고 있는 걸 보니 기린은 벌써 동네 답사를 마친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아래 벼랑에 갈매기 둥지가 있었던가?
“맞아. 그 집이야.”
“할게.”
기린이 루크의 제안을 덥석 물자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기린은 해안 별장 입주권을 발렌타인 눈치 보느라 날려버릴 생각은 없는지 태도가 전에 없이 적극적이었다.
“뭘 하면 돼? 같이 잠이라도 자?”
“그것만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
루크가 여전히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기린을 노려보며 선을 딱 그었다.
기린이 아예 신발을 벗고 침대에 기어 올라와서 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딱 1인용인 병원 침대에서 남자 둘이 이렇게 누워 있는 건…… 아무리 치료목적이라도 얼굴이 좀 뜨끈하다. 이러고 있는데 의사나 간호사가 들어오면 분명히 오해할 거다.
하지만 기린이 옆에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특히 하루 한 때라도 안 아플 때가 없는 중환자 입장에선 더 그랬다.
못 견디게 욱신거리던 옆구리부터 뜨끈한 기운이 번지면서 침대에서 살짝 뜬 것 같은 나른함이 온 몸에 퍼졌다.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앉은 기분이 이럴까? 어쨌든 병원에서 주는 진통제의 효과하고는 질적으로 다르게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모르게 아웅…… 하고 기분 좋은 신음을 내며 기린 쪽으로 돌아누웠다. 정신적 고통 어쩌고 해도, 아픈 것 중에선 몸 아픈 게 최고봉이다. 기린을 잡아 죽일 것처럼 펄펄 뛰던 발렌타인도 이런 편안함과 안도감엔 버틸 도리가 없었을 거다.
“별장이 되게 마음에 들었나 봐?”
녀석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응. 그 근처 집들 중에선 제일 좋아보였어. 그렇지 않아도 비어 있는 것 같아서 아깝단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그랬어?”
“사이몬도 좋아했어. 임대가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까지 했었거든. 거기가 안 되면 근처에 다른 집이라도…….”
둘이 그 언덕에서 신혼집이라도 보고 다녔나 보다. 뭐, 한창 좋을 때니까…….
“니가 그 집을 계속 기웃거리니까 그랬던 거지.”
별장 빌려준다는 말에 혹해서 주저 없이 나를 끌어안고 누워 있는 기린을 곱지 않은 눈길로 노려보던 발렌타인이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비니의 어깨를 툭 쳤다.
“왜?”
내도록 표정이 시무룩하던 비니가 발렌타인을 돌아봤다.
“가서 점심이나 먹지. 할 얘기도 있고…….”
점심 같이 먹자는 발렌타인의 말에 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소파에 퍼질러져 앉아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용도 냉큼 일어났다. 따라 나가서 두 번째 점심을 먹을 건가 보다.
“너는…….”
발렌타인이 용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녀석을 먼저 등 떠밀어서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곤 뒤따라 나가다가 되돌아와서 루크 앞에 버티고 섰다.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뭔데?”
발렌타인이 기린하고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한층 더 싸늘한 표정으로 루크를 노려봤다.
“쟤한테 한번만 더 손찌검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발렌타인의 경고에 루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날렸다.
“내 남자친구한테 작업만 안 걸면 나도 안 그럴게.”
“저 녀석이 니 남자친구를 잡아먹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앞으론 조심해.”
하루 종일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절은 어느새 가을, 아침저녁으론 한기가 들 정도로 바람이 서늘하고 가로수도 단풍이 들어서 울긋불긋했다. 더위에 헐떡거리면서 퍽치기범을 잡으러 온 시내를 헤매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병원 후원에 나와서 선선한 바람을 쐬며 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지난여름에 다녀온 사막 여행이 떠올랐다.
조용한 일출, 사람을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일몰, 세상 끝에서 불어온 것 같은 바람, 그 아름다움, 그 막막함…… 모든 것이 좋았었다. 몸이 좀 좋아지면 한 번 더 갔다 올까?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등 뒤에서 살벌한 기척과 함께 더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왔다 싶으면 그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이 원초적인 공포의 주인공은 필립이었다.
“그냥…….”
“마셔.”
필립이 손에 쥔 걸 내밀었다. 더운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였다.
루크는 특실에서 이틀을 더 치대다가 일요일 아침에 퇴원했다. 녀석은 어차피 크게 다친 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핑계 김에 나랑 며칠 같이 있겠다고 입원한 거였으니까 퇴원도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렇지 않아도 녀석이 아침저녁으로 부하 녀석들 불러들여서 이런 저런 보고받는 거 지켜보는 것도 신경 쓰여서 피곤하던 참이라 퇴원은 나도 반가웠다. 하지만 그 심술 사나운 녀석이 퇴원하면서 나 심심할까 봐 간병인을 하나 붙여주고 갔는데, 그게 바로 필립이었다.
“넌 왜 나왔어? 게임이나 하지?”
필립이 종일 병원에서 하는 일이라곤 조그만 게임기를 들여다보며 카드 맞추고, 블록 깨고, 보물을 찾는 것뿐이었다. 언제부터 게임에 그렇게 재미를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커스가 TV 중독이라면 필립은 게임중독이었다. 어쨌든 오늘은 소파에 누워서 종일 구슬 없애기 게임에 몰입하기에 조용히 나와서 쉬고 있었는데, 그새 따라 나왔네? 반갑지 않은데…….
“한참 지나도 안 들어와서 찾으러 나왔어.”
“금방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커피를 홀짝거리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건 절대 놈이 좋아서 설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또 근처에서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자오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바람 쐬고 있었어?”
“응…….”
“방에 없길래, 어딜 갔나 했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 자오가 내 손에서 커피 잔을 낚아갔다.
“이젠 좀 살 만 한가 봐? 종일 밖으로 돌아다니네?”
내가 종일 병실 밖으로 슬금슬금 숨어 다니는 이유를 전혀 모른다는 듯 자오가 무심하게 지껄였다.
“너야말로 좋아 보여. 이젠 휠체어 없이 그냥 다니는 거야?”
나하고 비슷한 중상을 입은 데다 치명상에 가까운 중상을 입고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백 대인 걱정으로 풀이 팍 죽어 있던 자오는 갑자기 현대 의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세로 회복해서 이젠 휠체어는커녕 목발도 없이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게. 살다 보니 별 일 다 있어. 한 달은 꼬박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자오가 무심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별 일이 아니라 이게 다 기린 그 자식 탓이다. 망할 놈…… 애초에 루크한테서 별장을 얻어낼 때엔 나를 봐주기로 한 거였는데, 첫날 하루 좀 길게 놀아주더니 그 다음날부터는 종일 자오랑 붙어 있는 바람에 일이 꼬이고 말았다. 자오가 빨리 회복한 게 잘못됐다거나, 배가 아픈 건 아니다. 하지만 내일이 루소 의원 저택에서 미팅이 있는 날인데, 나는 여전히 일어나서 옆구리 펴는데 반나절은 걸린다.
“백 대인은 좀 어때?”
“아침부터는 미음도 좀 드실 정도로 좋아지셨어.”
그것도 기린 덕분이다. 백 대인은 혼수상태가 길어서 의사들도 그 회생여부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는데, 지난 주말에 꿈에서 깬 듯 홀연히 정신을 차리고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기린은?”
“갔어. 별장에 가서 날 저무는 거 본다고…….”
기린하고 발렌타인은 요즘 완전히 신혼이었다. 하긴, 쿠간에서 가장 호화로운 해안 별장에 살림까지 차렸으니 둘의 분위기가 완전히 핑크빛으로 접어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발렌타인은 어쩔 수 없이 기린을 따라와서는 내도록 말도 몇 마디 안 하고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는 게 전부였지만, 이따금 기린을 쳐다보는 눈길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발렌타인에게 빠져서 애를 태웠던 기린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사불성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 키득거리고, 종일 시내 관광지도를 들여다보며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이것도 먹어보고…… 이러면서 데이트 스케줄 짜고…… 보고 있으면 저놈이 전에 봤던 냉막하고 매사에 무심하던 그놈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웬 한숨이야?”
자오가 반도 안 남은 커피를 돌려주며 물었다.
“그 자식은 말도 안 하고 그렇게 가버린 거야?”
업무성과가 시원찮으면 야근이라도 해주고 가야지, 인사도 없이 가버리면 나는 어쩌냐? 이 상태로는 루크를 따라서 루소 의원 집에 못 간다.
“벌써 보고 싶어? 회장님이 질투할라.”
농담을 하는 것 같은데 표정만 봐선 자오의 기분을 모르겠다. 막강한 경쟁세력인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맞아서 그만하면 선방했겠다, 백 대인도 큰 고비는 넘겼겠다, 부상도 초고속으로 회복 중이겠다…… 큰 걱정거리는 없을 것 같은데 요즘 들어서 자오는 얼굴이 내도록 시무룩했다.
“왜 그래?”
“뭐가?”
“기분이 계속 저조하잖아.”
그간 자오가 울적하고 안색이 어두웠던 건 백 대인이 중상을 입은 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누구라도 그런 전쟁 통에 휘말리면 후유증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오는 산전수전 다 겪은 루크의 최측근이었다. 지난 번 필립을 잡을 때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에서 벌어진 참사도 고스란히 목격했고, 그때 입은 부상도 이번 총상 못지않게 심각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의 자오는 이렇지 않았었다.
사실, 시각적 충격으로 따지면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의 참사는 인간들끼리 총 들고 싸운 거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기스러웠다. 그런 일을 겪고도 별로 충격 받은 기색이 없을 정도로 신경이 질기고, 그 손에 죽을 뻔하고도 필립이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걸 예사로 봐 넘길 만큼 배짱도 두둑한 자오가 대체 왜 이렇게 풀이 죽은 걸까?
“그냥……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
“현자 라두칸이 봉인을 풀면 돌아온다는 종족들 말이야…… 정말 그동안 들어온 것처럼 끔찍한 것들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자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좀 떨어진 나무벤치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필립한테 커피를 넘기고 휠체어를 밀어서 자오 옆으로 다가갔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건데?”
“종족대전을 막는답시고 하는 짓이 우리끼리 서로 총질하고 죽이는 거잖아. 용의 군대는 구경도 못했는데 이러다가 인간들끼리 다 죽이고 끝장을 볼 것 같아.”
자오가 전에 없이 짜증을 냈다. 하긴, 두 기사단의 충돌은 그저 조직 간의 주도권 다툼에 불과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충돌로 동료들이 죽어나가고, 존경하던 백 대인마저 잃을 뻔했던 것 때문에 자오의 마음이 그렇게 심란했던 모양이다.
명분 같은 거 신경 안 쓰고 어떤 싸움이든 이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편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루크하고는 많이 다르다.
“넌 어떻게 생각해?”
자오가 갑자기 나를 공격했다. 생각이라…….
“난…… 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자세히는 모르잖아.”
“하긴, 너처럼 단순무식한 짭새한테서 무슨 속 시원한 답이 나오겠어? 물어보는 내가 한심하지.”
이 자식 봐라…… 세상일이 맘같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그 화를 나한테 푸네?
내가 어이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는 사이 필립이 자오 옆에 가서 앉더니 미니게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잠시 만지작거리다 아예 자오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필립이 순한 강아지라도 된다는 듯 자오가 녀석의 머리카락을 함부로 쓰다듬었다. 저 정도 강심장이면 뭐가 돌아오든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사라진 종족이 다 이 녀석 같다면, 난 그자들이 돌아오는 건 반대야.”
“다 얘 같지는 않잖아. 기린하고 용은…… 아름답고 신성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
“걔네들이?”
두 녀석 다 잘생긴 건 맞다. 하지만 십대 후반 정도 되는 보통 애 녀석들에 비해서 별스럽게 다른 건 모르겠다. 단지 뭘 먹을 때만 아,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었지…… 싶을 뿐이다.
“녀석들이 처음 청연루에 왔을 때부터 유심히 지켜봤었거든. 기린이 정원을 산책할 때면 녀석이 발 디딘 자리가 온통 꽃밭이 되고. 새나 물고기하고도 대화를 나누고, 가끔 형형색색의 안개가 몰려오고…… 그 녀석 주변의 공기조차도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였어.”
기린에게 그런 신통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특히나 요즘은 연애 중이다 보니 녀석이 정원에 한발 들이밀기만 해도 주변 땅에서 백화가 난리라도 난 것처럼 피어올랐다. 계절이 한겨울도 아니라서 그렇게 한번 핀 꽃은 기린이 떠난 후에 바로 져버리지 않았고, 그 덕에 요즘은 사방이 온통 꽃 천지였다.
자오 덕분에 나도 사라진 종족의 컴백에 관해 잠시 고민을 했다. 기린하고 용은 확실히 크게 해로운 녀석들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기린은 병도 고치고, 꽃구경도 시켜주고…… 하지만 오컴이나 필립 때문에 인간 외에 다른 종족에 대한 내 인상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검은 용의 군대는 십만 명쯤 된다는데…… 한두 마리만 튀어나와도 사람들이 혼비백산을 하는 판에, 필립 같은 놈이 십만 대군이면 그 감당을 어떻게 하냐?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었어. 물론 선대엔 요즘 같은 비상사태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어렸을 때부터 놈들은 괴물이고 우리가 살기 위해선 괴물들을 다 잡아 죽여야 된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었는데, 막상 녀석들을 겪어 보니까 정말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어. 호기심도 생기고…….”
필립에게 다리 베개를 해주고 슬슬 쓰다듬으면서 그런 소리 하는 걸 보니까 자오가 더 이상은 단순 무식한 조폭 똘마니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루크 녀석의 뒤치다꺼리나 하기엔 아깝고, 천년 조약의 기사단 수장 자리에 추천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지적이네?”
내가 필립을 힐끔거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자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누운 채 한창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필립의 눈을 솥뚜껑만한 손으로 텁 하고 덮어버렸다.
“인간들 중엔 연쇄살인범이 없냐?”
“그건 그렇지.”
두려움을 모르는 자오의 행동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카드놀이를 하던 필립이 갑작스런 방해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자오는 겁을 먹기는커녕 필립의 손에서 게임기를 낚아챘다.
“왜 이래?”
필립이 자오한테 항의했다.
“이대로만 가면 이번 판은 신기록이었단 말이야!”
“그만 놀고 가서 책이라도 좀 봐. 이러다 까막눈 되겠다.”
쟤한테 공부는 시켜서 뭘 하겠다고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다. 옆에서 보기 조마조마해서 내가 자오한테서 게임기를 빼앗아서 필립에게 돌려줬다.
“심사가 복잡한 건 알겠는데 왜 아무한테나 시비야? 정신 차려.”
필립이 자오를 한번 노려보고는 아까 하던 게임을 찾아서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자오가 좀 전에 하던 대로 녀석의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 어루만졌다.
“죽음의 대공, 뱀파이어, 필립…… 이 녀석은 모든 인간의 말을 알고 있대. 놀랍지 않아?”
놀랍다. 그리고 믿기지도 않는다.
“이 자식이?”
“오래 살았으니까 많은 걸 봤겠지. 아득한 예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기억하고 있을 거고, 수많은 사건도 목격했을 거고…… 나는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걸 많이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사고도 많이 쳤겠지.”
“라두칸은 어떤 자였어?”
자오의 질문에 움찔했다. 갑작스럽게 옆구리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글쎄…….”
“잘 알 거 아냐? 그자하고 꽤 깊은 사이였다면서?”
내가 니콜라스를 잘 알았던가? 열병을 앓듯 사랑하긴 했지만 니콜라스의 진짜 정체를 안 것도 최근의 일이다.
“내가 그자에 대해서 아는 건 비밀이 많고, 위험하다는 것뿐이야.”
병실로 돌아왔을 땐 루크가 벌써 와 있었다. 나를 데려다 준 자오가 루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너…….”
며칠 새 몰라보게 좋아져서 이젠 내 휠체어를 밀고 다닐 정도로 회복된 자오를 루크가 빤히 쳐다봤다.
“좋아 보인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루크가 아직도 휠체어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넌 좀 어때?”
“그냥 그래.”
갑자기 울컥 짜증이 나서 그렇게만 대꾸하고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그동안 살림 차려 놓고 살던 청연루가 박살이 나는 바람에 루크는 퇴원하고도 병원으로 퇴근을 하고 있었다. 차이나타운하고 겐지 클리닉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오가는 길이 퇴근시간 정체 구간이라서 루크의 운전기사는 골목길 전문 드라이버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저녁은?”
루크가 침대 발치에 놓인 병원식사를 들추며 물었다.
“생각 없어.”
기린이 옆에 있으면 덮쳐서라도 몸조리를 할 판인데, 있는 거라곤 구슬 깨기에 미쳐 있는 연쇄살인마 뱀파이어뿐이라 답답해서 이불을 덮고 돌아누웠다. 미팅을 며칠 미루는 건…… 불가능하겠지?
“너라도 좋아져서 다행이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향월당 피해서 빙 돌아다니느라 번거로웠거든.”
루크가 자오한테 툴툴거리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향월당이 뭐하는 곳인데 루크가 피해 다닌다는 걸까? 궁금해서 돌아보자 루크가 나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자오 엄마가 하는 월병가게야. 쟤네 엄마,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말하고는 루크가 다시 자오를 돌아봤다.
“며칠 있으면 퇴원도 하겠는데?”
“퇴원은 지금 당장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회합엔 제가 모시고 가려고요.”
“무리할 거 없어.”
대꾸하면서 루크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아홉 명의 왕들하고 상견례 하시는데 무리가 되더라도 제가 모셔야죠.”
내가 따라가려고 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푹 내쉬자 루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자꾸 그래? 어쩔 수 없잖아?”
“정말 괜찮을까?”
“뭐가 걱정이야? 이제 그 꼬장꼬장한 영감들도 나하고 손잡는 게 자기들한테 유리하다는 걸 알았을 거야.”
“너랑 손잡는 게 그자들한테 유리한 일이야?”
한 이불 덮고 자는 나도 녀석의 정체와 의도가 의심스럽고 두려울 때가 많다. 그런데 그자들이 호락호락 루크를 믿고 파트너로 받아들일까?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이 일이 루크 입장에선 제 발로 호랑이굴에 걸어 들어가는 일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다.
“나처럼 능력 있는 파트너를 얻는 건 누구한테나 유리한 일이잖아.”
녀석이 태평하고 거만하게 지껄였다.
“누구한테나 유리해?”
루크가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너 때문에 몇 번이나 죽다가 살았는지 알아?”
계속 같은 소리하면서 투덜거리고 싶진 않지만, 루크가 자꾸 내 속을 뒤집는다. 어쩌다 엮여서 이 지경이 된 건 내 탓이지만 녀석이 저렇게 나올 때마다 내 마음은 한없이 협소해졌다. 내 원망에 루크의 얼굴에도 짜증이 살짝 비쳤다. 하지만 녀석은 화를 내는 대신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뭘 어떻게 해줄까? 루소 의원 집에 같이 가는 거 빼곤 니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정말?”
녀석의 제안에 솔깃해서 얼른 돌아누웠다. 그러다 자오하고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나를 보는 자오의 눈빛엔 마치 부자 남자친구한테 떼써서 한 재산 뜯어내는 불여우를 보는 것 같은 경멸과 혐오가 적절히 섞여 있었다.
“뭘…… 원하는데?”
뭐든 다 들어준다고 하더니, 내가 제안을 덥석 물자 루크가 흠칫 몸을 사렸다.
“루소 의원 집에 나 대신 한 사람 더 데려가.”
“누구?”
나도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했던 게 아니라서 딱히 생각해둔 사람은 없다. 지금 막 떠오른 사람은…….
“비니, 어때?”
“어떻긴 뭐가 어때? 절대 안 돼!”
루크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준다며?”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어.”
루크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가 했던 말을 싹 걷어 들였다.
“비니가 뭐 어때서?”
“어떤지 정말 몰라?”
“그러지 말고 같이 가. 비니가 사고를 좀 쳐서 그렇지, 실력도 괜찮고 위기 상황에선 쓸 만해.”
무엇보다 비니는 어떤 위험에 노출되더라도 크게 다칠 위험이 없다. 그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루크는 루소 의원 저택에 비니와 동행할 생각이 절대 없는 것 같았다.
“루소도 델 파소가 돌밭으로 변한 게 누구 짓인지 알아. 그런 상황에서 그쪽 회합에 비니 몬티첼리를 데려가는 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야.”
그런가? 왕들이 비니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대목에서 내가 갑작스럽게 수세에 몰렸다. 내 대타로 비니 이상은 없는데…… 어쩌지?
“그럼 발렌타인이라도 데려가.”
발렌타인의 이름이 나오자 루크가 이번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작자는 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실력이 좋으니까 경호도 잘 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을 보는 눈이 객관적이고 쓸데없는 거짓말을 안 하니까 가서 보고 들은 걸 나한테 굳이 감추지 않을 거다.
“그자가 동행하면 용하고 기린도 따라 나설 텐데, 그놈들까지 달고 거길 가란 거야? 루소 의원 집이 관광지야?”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며?”
“모든 청탁엔 수용 가능한 범위가 있는 거야.”
내가 눈에 힘을 주고 매섭게 노려보자 루크가 눈길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퇴원하고 좋은 데로 여행을 가자든가, 짭새 노릇을 때려치울 테니까 놀고먹게 해달라든가…… 그런 부탁을 좀 해봐. 나도 들어주면서 기분 좋고 마음 편하게…….”
“결국, 내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아니라 니가 원하는 걸 하겠다는 거잖아.”
그럼 그렇지 싶어서 다시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누웠다.
애초부터 별로 좋지 않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고, 루크가 숨 쉬는 소리만 쌕쌕 거칠게 들렸다. 내가 환자만 아니었으면 한 주먹 날아왔겠다 싶을 정도로 방안 공기도 덩달아 험해졌다. 내가 이러는 게 맘에 안 들겠지.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니까…….
“그자가 일당벌이라도 하겠대? 얘긴 해보고 이러는 거야?”
루크가 내 이불을 걷어치우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나도 놈을 노려봤다.
“그런 얘길 내가 왜 해? 니가 설득해서 데려가야지!”
결국…… 루소 의원 집에 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붙으려고 지난주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던 일인데, 기린의 직무태만으로 오후까지 게으름을 피우다 느긋하게 차이나타운으로 출근하는 루크를 주차장까지 배웅만 하고 말았다. 내 표정이 시무룩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루크는 그렇게 상황이 궁금하면 녹취록이라도 만들어주겠다고 떠들었지만, 설마 그럴 리는 없고…… 그저 성한 몸으로 돌아오기나 했으면 좋겠다.
“제이?”
루크를 보내고 슬슬 병실로 돌아오는데 로비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터너가 다가오고 있었다.
청연루 대첩이 벌어졌던 그 새벽에 터너하고 에쉬도 거기 있었다. 교전이 길지 않았고, 둘 다 자기 앞가림은 하는 녀석들이라서 둘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게 크게 당하진 않았다. 하지만 둘 다 그렇게까지 운이 좋은 것도 아니어서, 터너는 총알이 허벅지를 스쳐서 하루 반나절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에쉬는…… 총상을 입은 건 아닌데, 갑작스런 돌풍에 날려가서 온몸으로 식당 유리창을 들이받는 불상사를 당했다. 심한 타박상, 뇌진탕, 군데군데 유리 파편에 찢어진 자상 등등…… 다 합치면 총알 한발 맞은 것만큼 심한 부상이라 에쉬는 3주 진단을 받고 지금도 경찰 병원에 누워 있다.
“나 보러 온 거야?”
에쉬가 중상을 입고 누워 있으니까 당분간은 못 볼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
“너…….”
터너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수상쩍은 눈으로 내 상태를 살폈다.
“뭐야? 왜 이렇게 멀쩡해?”
“누구 놀려?”
몸이 멀쩡하질 못해서 굉장히 중요한 현장을 놓쳤다. 그 일 때문에 계속 기분이 울적하고, 그래서 그런지 몸도 어제보다 훨씬 무겁고 아픈데…… 멀쩡하다니?
“넌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잖아? 숨만 간신히 붙어서 실려 가는 걸 내가 분명히 봤는데…….”
“그런데 지금에야 나타난 거야? 참 감격적이다.”
그렇게 쏘아붙이고 방향을 틀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자 터너가 터덜터덜 뒤를 쫓아왔다.
“비니 편에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어. 크롬웰도 네가 며칠 새 많이 좋아졌다고 하기에…….”
“그러셔?”
“나도 병원에 이틀이나 있었어. 타격대 장례식도 있었고…… 에쉬도 상태가 안 좋아서 자리 비우기 힘들었어.”
아…… 장례식이 있었지. 정면충돌한 두 기사단의 사상자 규모에 비하면 피해가 적은 편이지만 동료들의 죽음은 언제나 충격이 크다. 만약 검은 군대가 깨어나면 얼마나 참혹한 일이 벌어질까? 자오는 그간 자신이 너무 사태를 단편적으로만 인식해온 게 아닌가 하는 고민도 많고, 한편 사라진 종족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기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에쉬는 좀 어때?”
에쉬의 안부를 묻는 내 물음에 터너가 기다렸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 돌풍에 날려가서 통유리를 깨고 안으로 떨어졌다니까? 머리를 얼마나 된통 갖다 박았는지, 정신을 차리고 반나절이 지나도록 나도 못 알아봤어.”
그 돌풍이 비니 짓인 걸 알면, 터너가 비니를 죽일 거다.
터너가 내 병실 앞에서 주춤 걸음을 멈췄다.
“특실이야?”
터너가 광활하게 넓은 병실 안을 들여다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겐지 클리닉은 시내에서 비싸기로 소문난 병원인 만큼 시설도 좋다. 게다가 특실은 병실이라기보다는 특급호텔 스위트룸에 가까웠다. 그동안 병원 신세는 많이 졌지만, 이렇게 호화로운 병원생활은 처음이라서 나도 내 방에 들어오면서 깜짝깜짝 놀란다.
“짭새, 호강하네.”
“옆구리에 총 맞고 병원에 누워 있는 게 호강이야?”
“에쉬는 4인실에 누워 있어. 나는 병실이 없어서 하루 반나절을 응급실에만 있다 나왔고.”
그렇게 대꾸하던 터너가 소파에 누워 있는 필립을 발견하고 다시 주춤했다. 필립은 자오가 새로 깔아준 드라이빙 게임에 빠져서 다들 나갈 때에도 건성으로 손만 한번 흔들고 말았었다.
“쟤는 필립이라고…….”
“누군데 여기 있어? 흑풍회 조직원이야?”
어떻게 설명을 하지? 필립이 한때 온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미라 연쇄살인범이란 사실을 알면 쟤도 죽이려고 할 텐데…….
“간병인이야.”
“간병인?”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터너를 버려두고 필립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 손에서 게임기를 낚아챘다. 어제만 해도 나는 이런 짓 절대 안 할 줄 알았는데…….
“왜?”
그제야 필립이 벌떡 일어나서 나를 노려봤다.
“사람이 왔으면 일어나서 쳐다는 봐야 할 거 아냐?”
필립이 터너를 사납게 노려봤다.
“누군데?”
“내 친구야.”
“그래서? 인사라도 하라고?”
“가서 커피 두 잔 뽑아와.”
필립이 별꼴 다 보겠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공연한 짓을 한 걸까? 겁 없이 자오 흉내 내다가 불벼락 맞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고압적으로 필립을 압박했다.
“게임기는 당분간 압수야.”
“그런 법이…….”
필립이 화들짝 놀라서 따지고 들었다. 법? 지금 나하고 법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마디뿐이다.
“커피!”
게임기를 인질로 잡힌 필립이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괜히 부려먹는다고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말을 잘 듣네?”
터너가 필립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예상치 못했던 시내에서의 폭력사태로 타격대가 도리어 큰 타격을 입고, 강력계 베테랑들까지 중상으로 휴직 중이라 경찰서는 지난주부터 계속 비상근무라고 했다. 짭새들이 엉뚱한 데서 된통 깨져서 치안이 헐렁해진 탓에 사소한 교통사고부터 강력사건까지 업무도 폭주상태라 앤디도 내가 입원한 첫날 이후로는 문병을 못 오고 있었다.
“오죽하면 서장이 비니한테 복직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대.”
터너가 필립에게서 커피를 받아들며 경찰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한마디로 전했다.
“그렇게 바빠?”
“퇴원한 지 며칠 되지도 않는 나한테까지 일하러 나오라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바로 복귀해도 될 것 같은데?”
경찰서 측에서 보면 터너는 하루도 놀리기 아까운 든든한 수사관이다. 게다가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요즘 같은 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아쉬울 거다. 몸놀림이 좀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일을 못할 정도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내 의견에 터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에쉬는 어쩌고?”
에쉬를 뭘 어째? 부모형제 다 있고, 모두 시내에 사는데?
“부모님 두 분 다 바빠서 이번 주부터는 매일 오지도 않으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짠한지 터너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만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부모님도 철수한 병실을 터너가 지키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매년 연말에 최고의 커플로 뽑혀서 2박 3일 사막여행권을 타가지.
이대로라면 최고의 커플 부문 3연패는 에쉬와 터너가 맡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둘이 갔다 오라고 준 티켓을 불법으로 양도해서 재작년엔 터너가 여자친구랑 여행을 갔고, 작년엔 에쉬가 여자친구하고 갔는데…… 올해는 둘 다 여자친구가 없다. 뭐, 이젠 둘이 사막여행 한번 갔다 올 때가 되긴 했다.
“앤디는 요즘 누구랑 다녀?”
“반장하고 다녀.”
불쌍한 놈…….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화제는 자연히 모두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청연루 대첩으로 옮겨갔다.
현장에 있던 짭새들 중 그런 공격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이나타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니까 늘 있는 갱단간의 총격전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가 그런 기습을 당했으니, 짭새들은 말 그대로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헬기 수십 대를 몰고 들이닥쳐서 목표를 초토화시키고, 정예군을 투입해서 상대를 제압하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화력은 전직 특수부대원이었던 터너에게도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놈들의 존재를 감지한 순간부터 반감을 숨기지 않았던 터너는 이번 일로 적대감이 수직상승해서 어떤 놈들인지 기필코 밝히고 말겠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
“무슨 비밀 결사라도 되는 것처럼 굴더니, 그 자식들도 조폭인 거지? 처음엔 프란시스 몬티첼리, 그 다음엔 루크 첸…… 쿠간에서 잘 나가는 조직을 다 때려잡고 주도권을 잡아 보겠다는 건가?”
아직 복귀할 생각 없다고 딱 잡아뗀 주제에, 터너가 강력반 형사의 자세로 돌아가서 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뭔데? 그런 게 아니면 그놈들이 왜 루크 첸을 건드려?”
설명은커녕 돌이켜 생각하기도 벅찰 만큼 일의 스케일이 커서 한숨부터 나왔다. 게다가 터너가 믿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곤 비니의 징크스뿐인데, 설명을 하면 알아듣기나 할까?
내가 우물쭈물하면서 선뜻 입을 열지 않자 터너의 눈길이 대뜸 날카로워졌다.
“넌 보스 애인이니까 놈들에 대해서 들은 말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래서 그날 새벽에도 그렇게 질려 있었던 거고…….”
“난 그놈들하고 필드에서 마주친 게 처음이 아니잖아.”
“놈들은 대체 어디 소속이야? 우리가 아는 조직이야?”
터너는 놈들이 신흥 조폭 행동대일 거라고 아예 단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놈들의 기동력과 화력, 그리고 신속하고 잔혹한 작전수행은 전형적인 특수부대 스타일이었다. 그 자신이 특수부대 출신인 터너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터너는 단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놈들이 잘 훈련받은 군인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자들이 소속과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인식표도 없이 시내를 활보하며 시민들에게 총질을 해대고 있다는 사실을…….
“내 생각엔…… 정부 소속인 것 같아.”
놈들이 말 그대로 특수부대고, 그 배후가 ‘아홉 명의 왕들’이란 일종의 국제기구라는 내 설명에 터너가 침울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마치 내가 놈들의 배후라도 된다는 듯 무섭게 눈을 흘겼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일이 우리 생각보다 좀…… 골 때려.”
“진짜 골 때린다. 벌써 머리가 띵할 정도로…….”
내막을 다 듣고 나면 머리가 띵한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다.
“넌 용이라든가, 뱀파이어라든가, 마법사라든가…… 그런 거 안 믿지?”
터너가 대답도 않고 나를 노려봤다. 대꾸하기도 싫다는 표정이었다. 터너의 눈총을 피해서 고개를 돌린 내 시야에 들어온 건 이미 서쪽으로 많이 기운 저녁 햇살과 내 침대에 멋대로 누워서 또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필립이었다. 나도 천년 전의 전쟁이니, 용의 군대니 다 헛소리로 치고 관심을 꺼버리고 싶지만, 저 자식이 종일 눈앞에서 얼쩡거리니까 그것도 어렵다.
“계속 그러고 놀 거면 자오 방에라도 가지 그래?”
옆에 필립을 두고 터너하고 얘기를 나누려니 편치 않아서 자리 좀 비켜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루크가 내 간병인으로 던져놓고 갔지만 녀석은 종일 게임기를 쥐고 자오 방하고 내 방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이었고, 밤엔 자오의 방에서 잤으니까 시간으로만 따지면 자오랑 함께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다.
“자오도 없는데 그 방엔 왜?”
“혼자서 조용히 놀라고.”
“내가 떠들었어?”
녀석이 게임기에서 눈 한 번 안 떼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순간 녀석의 손에서 게임기를 빼앗아서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자오가 겁도 없이 녀석에게 너무 함부로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종일 저러고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고역이다.
“종일 게임기만 흔들어대지 말고 어디 가서 신문이라도 갖다 읽어! 글자는 읽을 줄 안다면서?”
“싫어. 말 시키지 마.”
녀석이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대꾸하면서 싹 돌아누웠다.
내가 필립을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보자 터너가 나를 툭 건드렸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뭘 그래?”
“옆에서 자꾸 부스럭거리니까 신경 쓰이잖아.”
“간병인이라더니…… 뭐하는 애야? 생긴 건 중국 정 반대쪽인데?”
“그냥…… 되게 골 때리는 놈이야.”
내가 시름에 겨운 눈빛으로 필립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터너가 좀 전보다 강도를 높여서 나를 다그쳤다.
“딴 소리 그만하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터너가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고, 터너는 교회도 안 다니는 놈인데…….
“놈들은 일종의 자경단이야.”
“조폭 단속하는데 그렇게 무시무시한 자경단이 왜 필요해? 그럼 우린 뭐하고?”
“조폭은 잊어버려.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그렇게 마음이 무겁거나 복잡하진 않은데, 자꾸 한숨이 나왔다. 내가 자기한테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터너가 이젠 아예 조사실에 붙들려온 용의자 심문하듯 제대로 나를 을렀다.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 니가 살인범, 조폭도 아닌데 나한테 숨길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진을 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려면 용, 마법사, 뱀파이어, 괴물, 기타 등등…… 맨 정신으로는 믿을 수 없는 많은 걸 믿어야 돼.”
“지금 나한테 교회 다니라고 전도하는 거야?”
“종교를 갖는 것도 나쁠 거 없어. 뭐라도 믿긴 믿어야 될 테니까…….”
현역 실세들이 모인 아홉 명의 왕들이란 국제기구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배후세력이라는 것, 그자들의 임무는 괴물 사냥과 옛날 옛적에 체결된 휴전 조약의 유지라는 것, 휴전이 끝나면 바로 전쟁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필사적이라는 것, 놈들에게는 천년 조약의 기사들이란 경쟁 세력이 있는데 ‘시간을 담은 병’이란 물건을 놓고 자기네들끼리 주도권 다툼하느라 청연루에서 그 난리가 났었다는 얘기를 대강 풀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터너는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다.
“난 니가 혼자서 휠체어 밀고 다니기에 큰 문제는 없는 줄 알았어. 총알을 옆구리에 맞은 거야? 머리에 맞은 거야?”
내 설명에 밑도 끝도 없었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설명을 잘 했어도 터너의 반응은 다르지 않았을 거다.
“너도 오컴은 실제로 봤잖아.”
“그건…….”
“얼마 전에 발생했던 미라 연쇄살인사건도 사람이 저지른 일이 아니었어.”
“사람이 아니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필립을 힐끔 쳐다봤다. 나랑 눈이 딱 마주친 녀석이 내가 뭘? 이런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너랑 에쉬한테 뱀파이어 얘기는 했었지?”
터너가 되게 피곤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 부상 중에 세상의 운명이 걸린 복잡한 일을 완벽하게 요약정리까지 한 나는 얼마나 피곤하겠냐?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듯 뻐근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어 그런지 허리가 욱신거려서 일어나서 침대로 갔다. 내가 다가오는 걸 빤히 알면서도 필립은 침대에서 도통 비킬 기미가 없었다.
“비켜.”
그제야 필립이 나를 힐끔 보더니 옆으로 살짝 옮겨갔다.
“비키라니까?”
“비켰잖아?”
양심도 없는 흡혈귀 같으니…… 신경질이 나서 확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지는 않아서 녀석을 가장자리로 조금 더 밀고 베개를 잡아 뺐다.
“너,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나도 안 했어.”
내가 필립을 살살 밀고 좁은 공간에 옹색하게 몸을 눕히는 사이, 터너가 침대 옆으로 옮겨 앉으며 투덜거렸다.
“난 알고 있는 건 다 불었어. 니가 못 알아들은 거지.”
“죄다 헛소린데 어떻게 알아들어?”
“말 했잖아. 뭐든지 다 믿어야 된다고…… 우선 내 말부터 믿어봐.”
터너가 어디 많이 아픈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내가 이래서 동료들한테 말을 못하는 거다. 어차피 안 믿을 걸 아니까 루크도 그렇게 멋대로 떠들고 다니는 거고…….
“루크가 오늘 그자들을 만나러 갔어. 자기네들끼리 한판 뜨고 승패가 갈렸으니까 마무리할 얘기가 있겠지. 아니면 다른 꼼수가 있거나…….”
“루크 첸이 놈들을 만나러 갔다고?”
터너를 딸려 보내도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최소한 나를 이렇게 귀찮게 굴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조직이 있는 건 사실이야.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 같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 걸로 봐선 겁에 바짝 질려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어떤 시간이 되면 검은 용의 군대가 돌아오는 것도 아마 사실일 거야. 어차피 짭새가 거들 일도 없을 것 같으니까 믿거나 말거나 맘대로 해.”
시간을 담은 병의 소유권은 확실히 정해졌다. 그럼 남은 건 뭘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필립이 허락도 없이 내 팔을 풀더니 떡 하니 베고 누웠다. 내 회복이 더딘 건 기린이 게으름을 피운 탓이 아니라 이 자식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임금님들하고 루크 첸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한다는 거야? 기사 작위라도 주나?”
터너가 이젠 심문을 넘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때 산 넘고 물 건너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있던 필립이 피식 웃으며 터너를 힐끔 쳐다봤다.
“그자들이 할 얘기란 게 빤한 거 아냐?”
여태 필립을 외면하고 다른 데를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놈이 내 팔을 베고 있는 관계로 이렇게 보면 녀석의 얼굴이 바로 코앞이다.
“뭔데?”
“시간을 담은 병을 일단 확보한 걸로 치면, 그 다음에 할 일이란 게 뭐겠어? 라두칸을 찾겠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다. 몬티첼리 저택 습격사건도 그렇고, 최근에 발생한 서부호수의 추격전도 그렇고…… 놈들이 니콜라스를 쫓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찾아서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람이나 잡아먹고 종일 게임이나 하는 괴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필립도 니콜라스에 관해서 뭔가 아는 게 있는 걸까? 녀석이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죽여버리겠지.”
하지만…….
“인간이 그를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했어.”
“카넴의 단검이 있으면 가능해.”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이 허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잠을 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밤을 샜다. 뭔가 두서없는 생각이 쉴 새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긴 하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다. 머릿속은 마취를 당한 듯 멍한데, 가슴은 불에 덴 것처럼 쓰라렸다. 뭘 고민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그렇게 심란한 기분으로 밤을 보냈다.
절대로 올 것 같지 않았던 아침이 오고 복도에서 사람들 오가는 소리가 빈번히 들려올 무렵, 루크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왔어?”
“깼어?”
루크는 막 사무실에 출근한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짙은 잿빛 양복에 셔츠 깃도 빳빳했고, 넥타이도 못 보던 거였다. 밤새 계속된 회의와 의견충돌로 지친 얼굴도 아니었다. 루소 의원 집에서의 회합은 걱정했던 것만큼 길고 거칠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밤을 샌 거야?”
녀석이 내 안색을 살피며 침대로 다가왔다.
“영영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있어?”
내가 기다리는 걸 빤히 알면서도 루크는 지난밤에 전화조차 없었다. 입원한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이다. 아니…… 녀석과 만난 후로 이렇게 무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얘긴 잘 됐어?”
“뭐…….”
“놈들이 널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는데…….”
“당분간은 조용할 거야.”
“당분간?”
“어차피 영원한 건 없잖아.”
루크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마치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는 듯…….
녀석이 돌아오면 물어볼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일단 쏟아지는 비는 피한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데…… 그 외엔 나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피곤하고 지칠 뿐이다.
“일 하러 가. 난 좀 자야겠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누웠다. 하다못해 터진 곰 인형 같은 것도 없어서 옆구리에 붙어서 자는 뱀파이어를 끌어안고 마음을 달래려니…… 회복실에서 막 정신을 차렸을 때보다 더 기운이 없었다.
“왜 그래?”
루크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끌어 덮은 담요 위로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무슨 일이야? 밤새 내 걱정을 하면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얼굴 보자마자 어떻게 됐냐고, 무슨 얘기를 했느냐고 범인 심문하듯 다그쳐야 되는 거 아니었어?”
어쩐지 책망하는 투다. 그게 귀찮아서 일부러 날 샌 후에 나타났으면서…….
이불을 끌어 내리고 루크를 쳐다봤다. 녀석의 보석 같은 눈동자는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눈동자에 어떤 감정이 엿보이는 건 아주 가끔이었다. 그 짧은 순간 외엔 녀석의 눈은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울 뿐이었다.
“어젯밤엔 어디에 있었어?”
“우화각에…….”
“왜 바로 안 오고?”
“얘기가 늦게 끝났어. 조용히 생각할 일도 있고…….”
걱정을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루소 의원 집에서 무슨 말이 오고갔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루크의 손을 쥐고 눈을 감았다.
언젠가부터 내 인간관계는 온통 불길한 비밀 투성이였다. 오히려 타인에게보다 연인에게 더 감추는 게 많았고 혹시 상대가 내 정체를, 내 마음을 눈치챌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니콜라스에겐 니콜라스의 비밀이, 나에겐 나의 비밀이 있었다. 언젠간 밝혀질 줄 알면서도 진실을 마주볼 용기가 없어서 필사적으로 외면했었고, 그 결과는 차마 돌이켜 생각하기도 괴로울 정도로 처참한 파국이었다.
그런 일을 두 번은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외로워서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가 잡은 게 하필이면 루크였다. 니콜라스에게 비밀이 있었던 것처럼, 녀석에게도 비밀이 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피곤해서 그래. 밤새 한잠 못 잤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몸을 더 웅크렸다. 내게는 지금 느끼는 이 고통이 비밀이다. 루크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가. 나중에…….”
“궁금한 게 전혀 없어?”
루크가 내 어깨를 잡아 바로 눕히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눈빛이 잔뜩 언짢았다.
루크에게 뭔가를 감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영악하고 눈치가 빠른 녀석이니까. 나는 감정을 숨기는 데 서툴고…… 게다가 녀석은 인정머리라곤 없어서 적당히 속아주고 넘어가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루크의 눈총을 못 이기고 베개를 바로 놓고 일어나 앉았다. 사실 궁금한 것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말 몇 마디로 상황이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그 목걸이를 없애버리면 안 돼? 어차피 수중에 든 거고 물건일 뿐이잖아.”
내 입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하소연이 흘러나왔다. 니콜라스의 목숨을 구걸해서 얻을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건 불가능해.”
루크가 잘라 말했다.
“대체 그걸로 무슨 짓을 할 작정이야? 위험한 거면 깨끗이 없애버려!”
“없앨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니콜라스를 잡아 죽이는 건 가능하고?”
루크가 흠…… 하고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회합에서 어떤 얘기가 오고갈지 대강 짐작은 하고 있었나 봐?”
“그 수정을 깨버려! 니콜라스는 내버려두고.”
“시간을 담은 병이 깨지면 봉인이 풀리는 거야.”
“…….”
“오직 라두칸만이 그 수정을 깨고 천년 전에 멈췄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수 있어. 시간을 담은 병을 땅속 깊이 파묻어도, 바다 한복판에 던져도 그자가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어.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까. 이쪽도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어.”
니콜라스가 죽는 것 외엔 해결책이 없다니…… 그럴 리 없다.
“제발…….”
“그자를 살릴 수만 있으면 다른 건 다 상관없어? 전쟁이 터져도 괜찮고, 세상이 뒤집어져도 좋아?”
“방법이 있을 거야.”
“그만해!”
루크가 사납게 내 말을 잘랐다. 순간, 울컥해서 녀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나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빛도 만만치 않게 차가웠다.
“그자를 잊으라고 하진 않겠어. 잊을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건 이제 그만둬.”
“그건 옛날에 그만뒀어.”
“웃기지 마.”
녀석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난 그 작자하고 다 끝났어. 그것도 아주 비참하고 확실하게.”
니콜라스를 향한 내 어설픈 기대와 사랑은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깨졌다. 그가 엘리스 스톤을 죽였을 때부터, 그리고 또…… 굽타를 죽인 그 순간에.
그날의 일은 거의 기억이 없다.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그날 아침에 총격을 당한 것뿐이었다. 근거리 사격이었고, 총알이 심장 근처에 박힌 치명상이었다. 니콜라스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았고, 불과 몇 초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든 숨을 쉬어보려고 가슴을 쥐어뜯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내 이름만 연거푸 중얼거리는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그 얼굴이 흐려졌다. 의식을 놓치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다음부터는 단편적인 기억뿐이었다. 핏물이 가득 고인 욕조, 목이 베이고 가슴이 열린 엘리스 스톤의 시체, 피에 젖은 단검, 니콜라스의 손안에서 꿈틀거리던 누군가의 심장…… 당시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후에 사건 보고서와 엘리스 스톤의 사체 사진을 수도 없이 봤으니까 내 기억은 많은 부분 편할 대로 조작됐을 거다. 어떻게 조작해도 편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대로 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니콜라스의 건조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뭐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까? 여긴 어딜까? 내가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 주변은 온통 안개였다. 눈을 끔뻑이며 둘러봐도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내가 어떤 상태인지…… 확실한 건 내 곁에 니콜라스가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내 발치에 걸터앉아서 안개가 자욱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눈에 익은 청바지, 하얀 셔츠…… 아침에 입고 있었던 그대로였지만 니콜라스의 옷과 손,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이름을 부르려고 하는 순간 니콜라스가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그대로 있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순간, 맥락 없이 흩어져 있던 기억이 악몽처럼 되풀이됐다. 가슴이 열린 채 버려져 있는 여자의 사체, 한손에는 흑요석으로 깎은 돌칼을 들고, 남은 한 손엔 펄떡거리는 뜨거운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니콜라스…… 제발 꿈이길 바라면서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네 마음엔 안 들겠지만…….”
니콜라스가 곁으로 다가와서 검붉은 피가 잔뜩 말라붙은 손을 들어 올렸다. 항상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그 손이 지금은 괴기스럽고 두려웠다. 니콜라스의 모든 것이 그랬다. 그간 애써 외면했던 그의 실체는 결국 이런 것이었다.
“나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니콜라스가 왼손을 마저 들었다. 그제야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거실의 장식 선반에 놓여 있던 그 검은 칼, 엘리스 스톤의 가슴을 가르고 목을 그었던…….
“니키, 무슨 짓을…….”
그 순간, 니콜라스가 단검으로 자신의 손목을 깊이 찔렀다. 반이나 베어져나간 그 손목에서 뜨거운 피가 터져 나와서 내 얼굴과 가슴을 적셨다. 벌건 속살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끔찍해서, 질식할 것 같은 피비린내 때문에 놀라서 움찔했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무서운 힘으로 내 몸을 찍어 누르고는 턱을 움켜잡았다.
억지로 벌어진 입안으로 더운 피가 쏟아져 들어왔다. 고개를 돌릴 수도,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마치 온 몸의 피를 다 내게 먹이기라도 하려는 듯 니콜라스가 집요하고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니콜라스는 미친 것 같았고, 나는 그렇게 붙들려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피를 얼마나 들이켰을까?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을 즈음…… 니콜라스가 팔을 거두고 나를 놓아줬다. 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나를 끌어안았고, 아직도 자신의 피를 잔뜩 머금고 있는 내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췄다.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과 사나운 입맞춤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나를 살리고 싶었던 거다. 하지만 이런 미친 짓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엘리스 스톤을 죽여서 심장을 꺼내고, 자신의 피를 내게 퍼붓는 것으로 어떻게 내가 살 수 있을까?
나도 살고 싶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지금에조차 이 사람 곁에 더 머물고 싶었고, 그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부질없는 짓이다. 잠시 마비된 듯 아무런 감각도 없던 몸이 다시 예민해졌고, 가슴이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그리고 곧 그 고통이 사지말단까지 퍼졌고, 나중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다 저리고 쓰라렸다.
“도망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서 중얼거렸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런 말뿐이었다.
“도망쳐요. 절대…… 잡히지 말아요.”
“…….”
“가, 제발…….”
“괜찮아.”
니콜라스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어느새 목소리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쉬어 있었다.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으니까 멀쩡할 리가 없다.
“쉬어. 내가 지켜줄게.”
니콜라스가 곧 쓰러질 듯 지치고 탈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숨소리도 거칠고 앉아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손목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는데, 니콜라스는 자기 상태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고, 니콜라스의 모습은 낯설고 두렵기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이 탈 만큼 슬프고 안타까웠다.
“피가…….”
손을 뻗어서 니콜라스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때, 니콜라스가 인기척을 느낀 야생동물처럼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냥 바람이 아니라 뭔가를 뒤흔들고, 공기 자체를 바꿔 버리는 수상한 강풍이었다. 경황없이 누워 있는 내게도 니콜라스가 느끼는 위기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던 안개가 서서히 흩어졌다.
두터운 장막 같았던 은색 안개가 옅어지면서 주변의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 흐린 하늘, 철도 아닌데 흐드러지게 핀 넝쿨장미, 그리고 돌로 깎은 아름다운 제단…… 이곳은 니콜라스의 신전이었다. 나는 그토록 두려워했던 곳. 환각을 본 거라고, 꿈이라도 꾼 모양이라며 멋대로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그곳에 피투성이로 누워 있었다.
“하필 이런 때에…….”
니콜라스가 당황한 얼굴로 일어섰다. 하지만 출혈 때문인지 한 걸음 떼어 놓지도 못하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니콜라스가 제단에 기대선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왔나 봐.”
미로 바깥에서 들려오는 건 내 이름이었다. 동료들이 나를 찾아 미로에 들어온 거다.
“아마도…….”
니콜라스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단 끄트머리에 던져놨던 단검을 움켜잡았다.
“아직 일러.”
“무슨 짓을 하려고…….”
얼결에 몸을 일으켜 니콜라스를 붙들었다. 하지만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안 돼, 니키…… 제발…….”
“이런 방해는 용납할 수 없어.”
니콜라스의 음성은 차분했다. 하지만 돌아선 등 뒤에서조차 감출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내가 실종된 걸로 간주하고 수색을 하는 거라면 형사 한두 명이 미로를 헤치고 다니는 게 아니라 타격대가 출동했을 거다. 니콜라스에게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미로를 이용해서 도망치거나, 그냥 투항을 하거나…… 혼자서 저런 단검을 들고 맞서는 건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제발…… 그냥 가.”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졌다. 엘리스 스톤이 쏜 총에 맞았을 때 느꼈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제단이 불에 달군 쇠처럼 느껴졌고, 내가 산 채로 태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제단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려봤지만 그럴수록 고통만 더하고 의식만 멀어질 뿐이었다.
온몸을 덮친 이해할 수 없는 통증에 정신이 가물거릴 즈음…… 나무 울타리가 세게 흔들리더니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제이!”
비니…… 비니가 다 죽어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경황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주변을 미처 살피지 못한 탓에 제단 근처엔 접근도 못한 채 니콜라스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니콜라스가 비니를 미로 입구로 집어던졌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처럼 던져진 비니가 뒤따라 들어오던 마키바 반장을 덮쳐서 같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뒤이어 굽타가 신전 안으로 뛰어들었고, 피에 젖은 채 제단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언제나 사려 깊고 침착하던 굽타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는 내가 니콜라스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던 거다. 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니콜라스에게 불리한 정황이었다. 굽타가 내 앞에 버티고 선 니콜라스를 정조준 했다. 그리고 경고 한마디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굽타의 총격에 니콜라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두 번째 총격엔 무릎을 꿇었고, 세 번째 총격엔 손으로 땅을 짚은 채 피를 토했다. 굽타는 탄창이 빌 때까지 사격을 멈추지 않을 기세였다. 차라리 엘리스 스톤의 총에 맞은 그 순간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 살아서 이런 꼴을 보다니……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고통도 잊고 제단에서 기어 내려왔다. 하지만 한 걸음 걷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나 때문에 놀랐는지 굽타가 주춤 사격을 멈췄다. 바로 그때,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던 니콜라스가 비호처럼 무서운 기세로 굽타에게 달려들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엉켜 있는 동안 총성이 두 발 정도 더 울렸다. 하지만 잠시 후,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것은 굽타였다. 굽타는 이미 숨진 후였고, 니콜라스의 단검이 가슴 깊이 박혀 있었다.
누구보다도 존경했던 수사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얼마 없는 내가 아버지처럼 믿고 사랑했던 굽타가 니콜라스의 손에 그렇게 죽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숨이 막혔고,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날의 기억을 지우려고 머리를 세게 털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생각이 나버렸으니 앞으로 몇 달은 악몽에 시달릴 거다. 빌어먹을…….
“니 말대로야. 난 그자를 못 잊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됐어.”
루크가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끝난 건 끝난 거야. 내가 설마 니콜라스하고 다시 연애를 하겠어?”
“마음만 먹으면 하는 거지, 못할 건 뭐야?”
니콜라스하고 나는 마음이 식었다든가, 바람을 피웠다든가…… 그렇게 인간적인 문제로 헤어진 게 아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그를 다시 만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술 마시고,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럴 수는 없다.
“헤슬렘이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 다시 시작하겠지. 넌 그자가 돌아오길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가 요즘 돌아오길 기다리는 건 너뿐이야.”
“그럼 상관하지 마. 그자가 죽든 살든…….”
“그럴 순 없어.”
방안 공기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해졌다. 나는 니콜라스가 아홉 명의 왕들에게 붙들려서 죽는 걸 구경만 할 마음은 없고, 루크는 내가 아직도 니콜라스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얘기는 길게 해봐야 결론도 없고 마음만 상할 뿐이다.
“내가 이제 와서 니콜라스하고 너,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되는 거야?”
“누구 맘대로? 넌 내 거야.”
태도가 분명한 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자신만만한 것도 그렇고…….
“하지만 네가 딴 놈을 심중에 품고 있는 건 불쾌해.”
“어쩌겠어? 먼저 만난 걸…….”
“너…….”
“어쨌든 내가 널 버리고 니콜라스한테 돌아갈 일은 없어. 니가 먼저 날 차도, 마찬가지고…… 그럼 된 거 아냐?”
“되긴 뭐가 돼? 니가 호시탐탐 그 자식한테 돌아갈 기회만 엿보는데?”
“니콜라스를 체포할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거야.”
자꾸만 떠오르는 악몽 같은 옛 기억에 지쳐서 침대 위에 털썩 쓰러졌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알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니가…….”
이래서 연애 전력을 상대방한테 까지 말라는 불문율이 있나 보다.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인데, 그나마도 진전이 전혀 없다.
“아멜 굽타는 나한테 특별한 사람이었어. 그 사람을 죽인 거……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루크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몇 년이나 지났고, 벌써 끝난 일을 놓고 이렇게 변명을 해야 하는 것도 구차하고 피곤하다.
“그자가 저지른 일이 모두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면? 너 때문에…… 너를 위해서였다면 어쩔 거야?”
루크의 물음에 내 심장이 쿵…… 하고 아프게 울렸다. 대체 무슨 헛소리냐? 엘리스 스톤을 죽이고 굽타를 죽인 게 나를 위해서였다니…….
“온 세상을 구했대도 마찬가지야!”
내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루크가 범죄의 확증이라도 잡은 듯 차가운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니가 용서 못하는 건 너 자신이야. 왜냐하면 넌 그자를 벌써 용서했으니까…….”
영문 모를 한마디를 툭 던지고 루크가 방에서 나갔다. 쿵쾅거리며 내게서 멀어져가는 녀석의 발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에 남았다.
(11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