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소리지? 익숙하기는 하지만 성가시고 귀에 거슬리는…… 아, 전화가 왔나 보다. 내 전화기가 어디 있지? 아마 서에서 온 걸 텐데, 눈도 안 떠지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미치겠네. 왜 이렇게 잠이 안 깨지?
“……별일 없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글쎄, 지금은 전화 받기가 좀 어렵겠는데요.”
이 목소리는 루크다. 간신히 눈을 떠 보니 녀석이 내 휴대폰을 들고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요. 피곤하기도 할 거고…… 서에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녀석이 돌아서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깼어? 베이비?”
녀석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잠이나 더 잘걸, 뭣 때문에 눈을 떴을까?
선잠을 깬 탓에 눈이 따갑고 아렸다, 코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녀석의 모습도 흐려 보일 정도로 초점도 안 맞고…… 지금이 몇 시지? 녀석은 출근 준비를 벌써 다한 것 같은 차림이었다. 몸에 잘 맞는 검은 양복에 하얀 셔츠, 그리고 짙은 자주색 넥타이가 아직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체 목에 걸려 있었다.
“크롬웰이야. 너 좀 바꾸라는데, 전화 받을 수 있겠어?”
왜 아침부터 전화냐? 어차피 출근하면 볼 텐데…….
“지금 몇 시야?”
전화기를 건네받으려고 손을 뻗었다.
“열 시.”
“뭐?”
벌떡 일어나려다가 온몸을 덮치는 근육통 때문에 신음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왜 이렇게 몸이 아프지? 밤새 저 자식한테 시달리긴 했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을 텐데…… 맞다. 어제 자오한테 폭행을 당했었지.
「이제 일어났어요?」
“응…….”
전화기를 넘겨주고 나서 루크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출근 안 해요?」
“앞으로 며칠은 출근하기 힘들 것 같아.”
내가 출근을 안 한다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루크가 싱글거리면서 몸을 굽혀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전화기 저쪽의 반응은 영 까칠했다.
「뭐가 어째요?」
“이쪽 일이 좀…….”
쥬드한테 알려줄 만한 일인가? 어차피 늘 있어왔던 깡패들 세력 다툼인데다 차이나타운 내부 문제니까 경찰은 알아도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하실에서 서류 정리하는 것보다 이쪽 일이 더 급하게 됐어. 그렇게만 알고 휴가 처리 좀 해줘.”
갈비뼈가 다 제대로 붙어 있나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뼈마디마다 쪽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고 있는 루크의 머리를 밀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말 같지 않은 소리 작작하고 당장 출근해요!」
“못 간다니까?”
「차는 어쩌고요? 남의 차를 끌고 갔으면 돌려줘야 할 거 아니에요?」
잊고 있었다. 차를 빌렸었지.
“줘 봐.”
루크가 내 손에서 멋대로 전화기를 낚아챘다. 그리곤 차량 반납 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차는 사람 시켜서 바로 돌려보낼게요.”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아니, 별 건 아니고 좀 다쳤어요. 어제 내 경호원한테 공연히 시비 걸다가 얻어 터졌거든요. 당신도 본 적은 있을 거예요. 자오라고…… 맞아요. 그 녀석이요.”
루크가 손을 뻗어서 내 왼쪽 얼굴을 손등으로 슬슬 문질렀다.
“어제 저녁때까지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 보니까 얼굴 절반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어요. 몸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하고…… 출근해봐야 일도 못할 거고, 남자친구한테 맞고 사는 한심한 놈이라고 뒷소리나 들을 것 같은데…….”
그럴싸하게 갖다 붙이는 건 정말 타고 났다. 쥬드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는지 녀석이 씩 웃으면서 나한테 휴대폰을 돌려줬다.
「이삼 일은 어림도 없어요. 내일 아침엔 출근해요.」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투다.
“고마워.”
「차는 바로 돌려보내고요.」
“그렇게 할게.”
「그리고……」
“또 뭐?”
「루크 첸하고 너무 붙어 다니지 말아요. 요즘 그 동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들려요.」
쥬드가 요즘 들어서 이런 저런 핑계로 차이나타운을 자주 드나들기는 하지만 가는 곳이라고 해봐야 중국차 전문점, 골동품가게, 한약방, 미용실…… 뭐 그 정도에 불과한데 어떻게 정보 수집의 속도가 흑풍회 내부에 첩자를 두고 있는 바바라만큼이나 빠른 걸까? 아무래도 그 가게들 중 어딘가에 차이나타운 뒷소식에 정통한 정보통이 하나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한잠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곤하고 뒤숭숭했다. 등은 욱신거리고 허리는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자오는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왜 일어나? 더 안 자?”
5분을 버둥거리다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욱신거리는 눈을 반쯤 뜨고 보니 녀석은 벌써 넥타이를 다 매고 양복 윗도리까지 집어 들었다. 보통 때도 옷맵시가 좋은 편이었지만 오늘 따라 와인색 넥타이가 굉장히 예쁘고 잘 어울렸다. 문 앞이 저승인 놈이 무슨 멋은 저렇게 내는지…….
“백 대인이 온다면서? 지금 그 영감 만나러 나가는 거 아냐?”
“점심 때쯤 온다고는 했는데, 왜?”
“같이 가. 그 영감이 뭐라고 하는지 나도 좀 들어야겠어.”
자는 동안 몇 번이나 기분 나쁜 꿈에 시달렸는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대부분 루크가 이런 저런 안 좋은 꼴을 당하는 꿈이었다. 계속 이런 식이면 녀석이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편하게 자기는 틀린 거다.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가긴 어디 간다고 나서? 그냥 잠이나 더 자.”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루크가 다시 밀어 앉혔다.
“이 상황에 잠이…… 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이런 소리 하려니까 좀 민망하기는 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백 대인 입장도 생각해야지.”
“무슨 뜻이야?”
“생각을 해봐. 나 하나도 못마땅한 판에 옆에 짭새까지 한 마리 버티고 있으면 입이 떨어지겠어? 보기보다 예민한 사람이야.”
그런가?
“한두 시간 더 쉬다가 청연루로 나와. 점심 같이 먹자.”
녀석이 나를 침대에 밀어 눕히고 머리카락을 가볍게 엉클었다.
“그 말은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나는 여기 퍼질러져서 잠이나 자고 밥이나 먹으란 소리야?”
기분이 상해서 투덜거리자 녀석이 웃으면서 내 입에 키스를 했다.
“백 대인하고 무슨 얘기했는지 나중에 얘기해줄게.”
물어보면 얘기는 해주겠지.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건 입맛대로 자르고 각색한 편집본이 아니라 대화 원본이다.
“오늘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특별한 일 없으면 그럴까 해. 모처럼 너도 쉬잖아.”
마치 오늘 아침이 어느 평범한 날의 아침 같다. 녀석은 출근을 하고 나는 모처럼 휴가를 얻어서 편하게 쉬는…… 느긋하고 평온한 그런 날 같았다.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니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공연한 걱정 할 거 없어.”
“제발 좀…….”
녀석이 다시 내게 입을 맞췄다. 이건 키스가 아니라 명백히 입막음이었다.
“너…….”
“있다 보자.”
녀석이 얼른 내 옆에서 물러섰다. 그리곤 실실 웃으면서 손을 한번 흔들고는 잽싸게 방에서 나갔다.
한 30분 정도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몸 아픈 건 몇 시간 내에 좋아지기 힘들겠지만 정신이라도 빨리 맑아지기를 기다리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저런 녀석하고는 애초에 엮이지 않는 편이 제일 좋았을 거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돼버렸으니 나도 녀석과 함께 막다른 구석에 몰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 된다. 녀석이 그 탐욕스럽고 잔인한 놈들에게 당하게 둘 수는 없다.
일단 샤워부터 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 보니 누워 있을 때하고 컨디션이 또 달랐다. 일단 거울에 비친 얼굴도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표가 확 났고, 허리는 똑바로 펴지지도 않았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허리부터 등골까지 짜릿짜릿한 통증이 퍼지는 게, 이래가지곤 누구한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것 자체가 민폐였다.
미지근한 물을 틀어놓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 감고 대강 씻고 나왔다. 허리를 펼 때마다 옆구리를 찌르는 듯 날카로운 통증 때문에 잠은 진즉에 다 달아났다. 짭새 노릇 거의 10년에 이 정도 부상은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총상도 입어봤고, 떼강도 소탕하다가 얼굴이 거의 내려앉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 외에서 소소한 몸싸움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비니랑 오래 파트너로 다닌 탓에 몸 아픈 날이 안 아픈 날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어쨌든 전에는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거나, 며칠 쉴 궁리가 전부였는데 요즘엔 좀 다르다. 기린이 아직 방에 있을까?
“왔……어?”
방문을 열던 용이 입에 물고 있던 돼지 갈비를 하마터면 뼈째로 삼킬 뻔했다. 여태 아침을 먹고 있었는지 문 열자마자 안에서 온갖 음식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얼굴이…….”
“기린 있어?”
용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엔 요리 접시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TV에선 아침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접시마다 고기만 수북한 걸 보니 기린은 아침을 먼저 먹었나 보다. 아니면 아직 침대에 누워서 뭉개고 있든가…….
“당신은 누구한테 맞았길래 얼굴이 그래?”
“자오.”
“자오가 왜?”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침실 쪽을 보니 킹사이즈 더블베드에 사람이 하나 누워 있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 덮은 이불 끄트머리로 환한 은발이 몇 가닥 삐져나와 있는 걸 보니 기린이 틀림없었다.
“여태 자는 거야?”
“몰라.”
용이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 드라마에 집중하면서 갈비를 뜯어먹는 저 느긋하고 별 생각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면 용이란 종족이 그렇게까지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검은 용은 많이 다를까?
“자냐?”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서 녀석이 뒤집어쓴 이불을 살짝 내렸다.
“뭐야?”
기린이 인상을 쓰며 퉁퉁 부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이불 밖으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서 물러앉았다. 좀 전에 내 얼굴을 본 용의 심정이 이랬을까?
“너 얼굴이 어쩌다가…….”
눈두덩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입술은 터지고…… 어디 끌려가서 멍석말이라도 당한 몰골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까 답은 뻔했다.
“그러게 내가 잔디밭은 안 된다고 했잖아!”
“시끄러! 꺼져!!”
기린이 짜증을 내면서 이불을 도로 뒤집어썼다. 맞아도 싸다. 그렇게 겁도 없이 까불더니…….
“얼굴만 이런 거야? 다른 데는 괜찮아?”
“귀찮다니까!”
녀석이 내 손을 뿌리치고 돌아누웠다.
“좀 보자니까!”
이불을 벗기고 녀석을 바로 눕히고 보니, 싫다는 사람을 굳이 잔디밭으로 끌고 나간 기린도 잘한 건 없지만 발렌타인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화도 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냥 한두 대 쥐어박으면 그만이지, 뭘 이렇게까지 애를 밟았냐? 얼굴도 여기저기 벌겋고, 아랫입술은 터져서 거의 두 배로 부었다. 게다가 벌어진 옷깃 틈으로 가슴팍도 뻘겋게 부은 걸 보니 여긴 발에 채인 게 틀림없다.
“대체 이게 뭐야? 마음껏 패라고 그냥 대주고 있었던 거야?”
한심해서 혀를 끌끌 차며 한소리 했더니 녀석이 갖잖다는 듯 나를 비웃었다.
“당신 얼굴도 만만치 않은데 뭘 그래?”
“나는 남자친구한테 맞은 건 아니거든.”
이래가지곤 나 아픈 거 손 좀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렵다. 기린은 자기 몸 아플 때는 치유력도 보통 때보다 많이 떨어지는데다, 사랑하는 남자한테 얻어터져서 심기 불편한 마당에 그런 자원봉사가 내킬 리도 없었다.
“발렌타인은 어디 갔어?”
“몰라.”
기린이 끙끙 신음소리를 내며 다시 이불을 끌어 덮었다.
애를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뛰쳐나갔으면 아주 가버린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화도 많이 났을 거고, 기린을 감당하기가 난감하기도 할 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 루크가 한번은 선심 써서 소재를 파악해줬지만, 그런 일을 두 번씩 해줄 만큼 착한 녀석은 아니다. 요즘은 그럴 경황도 없을 거고…….
“나간 지 얼마나 됐어?”
“모른다니까?”
기린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짜증을 냈다.
“그거 몇 대 맞았다고 벌써 마음이 식은 거야?”
“무슨 소리야?”
“니 태도가 너무 무심하잖아. 발렌타인은 한번 없어지면 찾기도 힘든 거, 너는 몰라? 아니면 이젠 어디 가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뜻이야?”
발렌타인이 병원에서 뛰쳐나간 이후 기린은 일주일도 넘게 발렌타인을 찾아 온 도시를 헤매며 속을 태웠었다. 그나마 결국 자기 힘으로는 찾지도 못했고…… 맞아서 마음 상한 건 알겠는데 겨우 이 정도에 정이 떨어질 거였으면서 그 난리를 피웠나 생각하니 좀 가소롭다.
“멀리 안 갔어.”
기린이 내 쪽으로 돌아눕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 노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아?”
멀리 가고 말고는 발렌타인 마음이지, 여기 누워서 그렇게 확신할 일이 아니다.
“그건 몰라도 돼. 어쨌든 이 근처에 있어.”
“발렌타인 등판에 추적기라도 붙여놨어?”
“그 비슷한 게 있어.”
기린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한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마음이 울적해서 뭐라도 끌어안고 싶은지 기린은 자꾸 감기고, 나는 이렇게라도 가까이 있다 보면 몸이 좀 풀릴까 하는 흑심이 있어서 슬금슬금 녀석을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녀석에게 허리를 붙들린 채 침대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짜증나.”
기린의 손을 슬그머니 옆구리에서 제일 아픈 부분으로 옮겨 놓고 있는데 녀석이 들릴 듯 말 듯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뭐가?”
“그 남자 말이야. 뭐가 그렇게 까다로워? 벌컥벌컥 화도 잘 내고…….”
그러니까 기린은 지가 맞은 게 순전히 발렌타인이 별스럽게 까다롭고 성격이 안 좋은 탓이라는 거다.
“내가 말했잖아. 잔디밭은 안 된다고.”
단순히 장소만 문제가 된 건 아니었겠지만…….
“거기가 왜 안 되는데?”
“본래 섹스는 조용하고 으슥하고 약간 어두운 데서 하는 거야. 사람들 눈에 절대로 띄지 않을 만한 그런 곳 말이야.”
“장담하는데, 사람들 눈에 절대로 안 띄었어!”
그러느라 온 동네를 밤새 안개로 뒤덮어서 나까지 잔디밭에서 뒹굴게 만들었으니, 정말 장한 일 했다.
“뭘 해도 자꾸 화만 내고, 도망치려고만 하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기린이 곰 인형 끌어안듯 나를 바싹 당겨 안으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하소연을 했다. 발렌타인의 반응 같은 거 전혀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명색이 연애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다.
“어제 일은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잘못한 거 없어도 그냥 미안하다고 해. 본래 연애가 그런 거야.”
이렇게 누워 있으니 기린이 손대는 자리마다 후끈후끈한 것이…… 정말 좋다. 사정만 허락한다면 이 녀석 끌어안고 하루 종일이라도 이렇게 누워 있고 싶었다.
“그리고 종일 방에만 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동네 구경이라도 해. 차이나타운은 동네 자체가 특색이 있어서 멀리서도 일부러 데이트하러 오는 곳이니까 볼거리도 꽤 있을 거야.”
“순순히 따라 나갈 것 같아?”
안타깝기는 하지만 기린과 킬러의 연애라니, 애초에 마주친 것부터가 재수 없는 조합이다.
“끌고 나가.”
우선 다시 돌아올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따끔따끔하기도 하고 후끈하기도 한 느낌이 좋아서 녀석을 끌어안고 잠깐 졸았다. 그러다 갑자기 옆구리가 확 뜨거워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녀석의 손이 옷자락을 들추고 들어와 맨살에 닿은 거다.
“야.”
“왜?”
사람 자는 틈에 맘 놓고 더듬어대던 놈이 뻔뻔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 녀석은 화르륵 타오르는 성격 같기는 한데, 지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기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한 눈도 팔 것 같고……. 하긴, 청소년이니까.
“거기 말고, 이쪽에 손 좀 대고 있어 봐.”
허리만 아픈 게 아니라 등도 많이 아프다. 어제 책상 위에 내던져질 때 등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당신 비상약이야?”
기린이 삐져서 투덜거렸다. 나도 애를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건 미안하지만, 지금은 내 코가 석자다. 등에 기린의 손이 닿으니 마사지 받는 것처럼 좋기는 한데…….
“뭐 좀 빠른 거 없을까? 나 지금 나가 봐야 되거든.”
“빠른 거? 당연히 있지.”
기린이 심술 사나운 표정으로 대꾸하더니 내 몸을 뒤집고는 배 위에 냉큼 올라탔다.
“윗도리는 왜 벗어?”
“빠른 거 찾았잖아?”
녀석이 윗옷을 터프하게 바닥에 집어 던지고는 내 팔을 잡아서 침대에 꽉 눌렀다. 어제 저녁부터 청연루를 가득 채웠던 분홍색 안개는 동틀 무렵이나 되어서야 사라졌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자식이 새벽까지 발렌타인을 붙들고 안 놔줬다는 거다. 그게 겨우 몇 시간 전의 일인데 이렇게 다시 덤비는 걸 보면 10대의 체력이란 정말 짐승 같은 건가 보다.
기린이 내 귓가에 거친 숨을 불어 넣으며 으르렁거렸다. 초식동물 주제에…… 얘가 나하고 진짜로 사고를 치자고 이렇게 까부는 건 아닐 거다, 내가 필요한 일 생길 때마다 자기를 진통제, 혹은 치료제 취급을 하면서 치대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 겸, 발렌타인하고 자꾸 꼬이는 요즘 상황에 대한 화풀이 겸 덤비는 것 같은데 나는 나대로 이런 심술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다.
“그렇게 맞고도 아직 매가 모자라지?”
“당신한테 얻어맞을 정로도 굼뜨지는 않아.”
“그렇게 날쌘데 발렌타인한테는 왜 이렇게 쥐어 터졌어?”
내 물음에 발렌타인한테 얻어맞던 당시 일이 떠올랐는지 기린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털어댔다.
“그쪽은…… 정말 빨랐어.”
기린하고 내가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동안에도 용은 아침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도대체 저 자식은 먹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냐?
“야! 나 좀…….”
허리 아픈 거나 좀 달래고 갈까 해서 들렀다가 허리가 완전히 나갈 판이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기린을 당할 수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용한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용은 드라마에 빠져서 이 방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지경이었다.
용이란 건 본래 저렇게까지 아무 쓸모가 없는 짐승인가 싶어 잠시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기린이 나를 뒤집어엎고는 셔츠를 홀랑 깠다.
“여기가 아프다고 했어?”
그렇게 지껄이고는 기린이 내 등줄기를 혀끝으로 슥 핥았다.
“됐으니까 집어치워!”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치사한 자식! 어렵고 힘든 일을 시킨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 잠깐 붙어 있었던 것뿐인데, 그거 가지고 이렇게 행패를 부리다니…….
“됐다니까?”
“가만있어!”
버르장머리 없이 대꾸하면서 녀석이 내 목덜미를 꽉 물었다.
“아윽…….”
아파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발렌타인이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다가 침대 위에서 묘한 체위로 뒹굴고 있는 기린과 나를 보고 멈춰 섰다. 순간, 발렌타인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쳐지나가는 걸 나는 분명히 봤다.
“오해야. 우린 그냥…….”
“우리?”
발렌타인이 한 걸음 물러서며 냉랭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얘하고 나는…….”
발렌타인의 갑작스런 등장과 태도가 당황스러워서 내가 말을 좀 더듬는 사이 기린이 내 위에서 내려갔다. 그리곤 태연한 얼굴로 발렌타인과 마주섰다.
“그냥 장난 좀 친 거야.”
“누가 뭐래?”
발렌타인이 싸늘한 눈초리로 기린을 노려봤다.
“하던 장난 계속 쳐. 비켜줄 테니까.”
발렌타인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삐졌네. 그것도 많이…….
“안 따라 나가?”
발렌타인이 저렇게 나가버리는데 기린은 그걸 보고만 있다가 침대에 다시 주저앉았다.
사랑하는 남자가 저렇게 화가 나서 나가버리면 이유야 어찌되었건 쫓아가서 붙들어야 하는데 얘가 오늘 아침부터 발렌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성의가 전혀 없다. 불같이 타오르던 첫사랑이 확 식을 만큼 발렌타인의 주먹이 셌던 걸까?
“금방 돌아올 거야.”
“이 꼴이 되도록 얻어맞았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청소년의 첫사랑이라니…… 좋을 때는 혼자 들떠서 그렇게 절절하더니, 식는 속도도 장난이 아니네. 못된 놈.
“하지만 넌 맞을 만해서 맞은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속이 상해?”
“무슨 소리야?”
기린이 기분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에서 아주 그만 둘 거 아니면 나가서 데리고 와.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저렇게 돌아다니게 두지 말고.”
“금방 올 거라니까?”
기린에게는 예지력 같은 것도 있는 걸까? 녀석의 짜증 섞인 대꾸가 다 튀어나오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발렌타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되돌아온 발렌타인의 눈동자는 불이라도 일 듯 사나웠다. 애초에 발렌타인은 기린한테 뭔가 따질 일이 있었다. 그래서 방에 돌아온 거였는데 기린하고 내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바람에 놀라서 용건도 까먹고 그냥 나갔던 거다. 뭔지는 몰라도 발렌타인의 표정만 봐선 기린이 또 뭔가 엄청난 잘못을 했나 보다.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버럭 소리치면서 발렌타인이 기린에게 달려들었다.
발렌타인이 휘두른 번개 같은 펀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기린이 체중을 다 실은 주먹질이 빗나간 여파로 휘청거리는 발렌타인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하지만 곧바로 발렌타인의 팔꿈치에 명치를 얻어맞고는 캑 하는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뒤이어 발렌타인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베개를 집어서 기린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한참 다 죽어갈 때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서 헐떡거리더니, 이제 기운이 좀 나는지 아주 펄펄 날아다닌다.
발렌타인한테 속수무책으로 연타를 얻어맞은 기린이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처박히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분이 안 풀렸는지 발렌타인이 베개를 집어던지고 아무 거나 손에 잡히는 걸 새로 집어 들었다. 그런데 하필 그게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제법 묵직해 보이는 도자기 스탠드였다.
이건 말려야 된다. 아무리 기린이라도 저런 거에 맞으면 죽는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는데, 나보다는 용이 더 동작이 빨랐다. 어느새 달려온 용이 기린의 머리통을 부셔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치켜든 발렌타인의 팔을 잡아 꺾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기린이 얻어터지고 있으니까 그 좋아하는 닭다리 튀김도 내려놓고 달려오긴 오는구나. 내가 기린한테 깔려서 버둥거릴 때는 본 척도 않더니…….
“진정해. 이 녀석을 죽일 작정이야?”
용이 발렌타인을 안고 뒤로 끌어내는 사이 내가 기린의 앞을 막아섰다.
“넌 참견 말고 저리 비켜!”
발렌타인이 어떻게든 용을 떼어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악을 썼다.
잔디밭에서 그런 불상사를 당한 것은 쪽팔리고 분통 터지는 일이 분명하다. 하지만 얼굴에 피멍이 들도록 애를 팼으면 그걸로 분을 풀어야지, 볼 때마다 이럴 것까지는 없지 않나? 기린이 장담한 대로 둘이 그러는 걸 누가 봤을 리도 없고…… 안개 때문에 정작 고생한 건 나다.
“못된 자식! 이거 당장 안 풀어?”
발렌타인이 버둥거린 끝에 왼팔을 용의 손아귀에서 비틀어 빼며 기린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얼핏 보니 발렌타인의 손목에 뭔가가 반짝거리는 것이 감겨져 있었다.
발렌타인이 열 받아서 뛰어 들어온 건 손목에 감긴 가는 끈 때문이었다. 그냥 보기엔 여자들 머리 묶는 고무줄 굵기의 보통 끈이었다. 하지만 저 반짝거리는 은빛은 어디서 많이 봤던 거다.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씩씩거리는 발렌타인의 팔을 들어 살펴보니, 이 끈의 재료는 기린의 머리카락이 틀림없었다. 기린의 은빛 머리카락 20~30가닥 정도가 매듭도 없이 얽혀서 발렌타인의 손목에 감겨 있는데 결이 곱고 반짝반짝 빛나는 게 그냥 보면 가는 은팔찌 같았다.
“아니,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난리를 친 거야?”
본래 성질머리가 이 따윈데 내가 몰랐던 건지, 기린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사람이 미쳐가는 건지 분간을 못하겠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팔찌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렇게 소란을 피운 거라면 발렌타인한테 정말 실망이다.
“마음에 안 들면 빼버려. 왜 아무것도 아닌 것 갖고 애를 때리고 그래?”
“니가 한번 해봐! 이게 빠지나?”
발렌타인이 이번엔 나한테 버럭 신경질을 냈다.
끈을 잡고 두어 번 당겨본 결과, 이건 늘어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는 질긴 물질이란 결론이 나왔다. 발렌타인의 손목이 왜 이렇게 빨갛게 쓸렸나 했더니 여태 이걸 붙들고 끊어보려고 애를 많이 썼던 모양이다.
“무슨 머리카락이 이렇게 질겨?”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나를 발렌타인이 한심하다는 듯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유감이 가득한 눈초리로 기린을 노려봤다.
“풀어.”
발렌타인이 기린에게 팔을 내밀며 명령했다.
“그때 병원을 나갔던 것처럼 멋대로 사라져버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니 멋대로 한 짓에 무슨 조건을 달아? 당장 이거 풀어!”
기분 거슬렀다가는 그대로 달려들어서 끝장을 볼 기세였다. 하지만 기린은 얼굴이 총천연색이 되도록 얻어맞고도 발렌타인이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은지, 의젓한 표정으로 그 요구를 거절했다.
“싫어.”
기린의 입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비호처럼 기린에게 달려드는 발렌타인을 용하고 내가 간신히 붙들었다.
“대체 그게 뭔데 이 난리야? 그냥 액세서리 아냐?”
“액세서리 좋아하네! 이게 개목걸이지, 무슨 액세서리야!”
얼떨결에 기린한테 붙들려서 새벽까지 호텔 앞 풀밭을 굴러다닌 분풀이로 기린을 흠씬 두들겨 팬 후, 그걸로도 마음이 안 풀린 발렌타인은 행선지도 없이 무작정 청연루를 뛰쳐나갔다.
기린 때문에 밤새 야외 플레이를 한 것 때문에 화도 났을 거고, 본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꾸만 기린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게 당황스럽기도 했을 거다.
발렌타인의 심정이 복잡한 건 나도 이해할 수 있다. 발렌타인도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기린이 싫고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 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번잡스럽고 의미 없는 일로 느껴졌을 거고, 두려웠을 거다. 루크하고 자꾸 엮일 때 나도 그런 생각 많이 했었다.
무작정 뛰쳐나가서 차이나타운 뒷골목으로 접어들 즈음엔 기린이 절대 못 찾을 만한 곳으로 숨어버려야겠다는 궁리도 없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골목 입구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주변이 낯설게 보이고, 발걸음이 무거운데다 자신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생각이 나질 않아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발렌타인이 정신을 차린 건 새벽에 어디론가 배달을 가던 오토바이 경적소리 때문이었다.
“그게 이것 때문이라는 거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 작고 가는 끈에 그렇게 엄청난 기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펄펄 뛰다 제풀에 기운 다 빼고 쓰러진 발렌타인이 더는 말하기도 귀찮은 듯 돌아눕다가 그쪽으로 누우면 기린을 정면으로 보게 된다는 걸 깨닫고 다시 몸을 틀었다.
“저 자식이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하겠어?”
자신이 길에서 눈 뜬 채 정신을 잃었던 게 기린의 조화 탓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발렌타인은 그저 기린이 괘씸해서 죽는다.
“당신은 워낙 몸이 안 좋잖아. 게다가 저 녀석 때문에 다른 스트레스도 왕창 받고 있었으니까 과부하가 걸려서 잠깐 그랬던 게 아닐까?”
“말이 돼?”
발렌타인은 요즘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에 신경질이다.
“말이 안 되는 걸로 따지면 당신 주장이 더 황당하지. 이게 무슨 하이테크놀로지 전자 팔찌야?”
“저 자식이 뭔가 주술을 걸어 놓은 게 틀림없어!”
“그거야말로 말이 돼?”
핀잔을 주면서 기린을 힐끔 봤다. 발렌타인의 억지에 기린도 코웃음을 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냐? 저 표정은…… 저렇게 새침한 표정으로 딴 데를 쳐다보는 건 지은 죄가 있는 뜻이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던 기린이 일어나서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등 돌리고 누워 있는 발렌타인의 어깨를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려 눕혔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내가 주술을 걸었어. 이게 손목에 감겨 있는 한 당신은 나한테서 천 걸음 이상은 못 떨어져.”
눈빛도 그렇고, 진지한 말투도 그렇고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내 기분이 도리어 이상하고 두 사람 보기 뻘쭘했다. 겨우 머리카락 몇 가닥에 그렇게 엄청난 성능이 있다니…… 인권침해적인 면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사실이라면 괜찮은데?
발렌타인의 손목을 잡고 다시 한 번 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젠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는지 내가 자기 손목을 대놓고 주물러도 발렌타인은 그냥 무반응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그건 절대로 안 풀어줄 테니까.”
“이렇게 억지로 나를 잡아둘 수 있을 것 같아? 이럴수록 마음만 더 멀어져.”
“당신 마음 같은 거 내가 알 게 뭐야?”
아무래도 기린은 날 잡아서 루크한테 과외 수업을 받아야 된다. 짝사랑에 목메고 있는 주제에 말을 저 따위로 하면 어떻게 하냐?
“풀밭이든 어디든 너 좋을 대로 끌고 다니면서 섹스나 하면 그만이란 뜻이야?”
“당신이 병원에서 사라져버리고 난 후에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이번엔 기린이 발렌타인한테 성질을 냈다. 원망 가득한 기린의 눈초리에 발렌타인이 긴장해서 슬금슬금 내 쪽으로 몸을 뺐다.
“당신을 찾아다니는 며칠 동안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 영영 못 찾는 건 아닌지, 아무도 모르는 데 가서 죽어버린 건 아닌지…… 정말 미쳐버리는 줄 알았단 말이야! 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재주는 없어. 그렇게 죽어버리면 마음 같은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리 그래도…….”
발렌타인의 목소리에 기운이 많이 빠졌다.
“이건 아니야. 이게 감금당한 거하고 뭐가 달라?”
“어디든 같이 가. 그럼 되잖아?”
투정부리듯 대꾸하면서 기린이 발렌타인을 꼭 끌어안았다. 기린의 고집과 투정에 발렌타인도 더는 화를 내지 못했다. 그저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을 뿐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발렌타인의 기세가 한풀 꺾이는 것까지 확인하고 호텔을 나왔다. 생각해보면 기린이야말로 은근히 무서운 놈이다.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 허술한 구석이 있지만, 성깔도 사납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으니까 저대로 잘 크면 정말 만만치 않을 놈이다. 발렌타인은 임자 제대로 만난 거다.
기린으로부터 천 걸음이라…… 그러면 활동 반경이 7, 8백 미터 정도 되는 건가? 발렌타인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고 다소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청연루에 밥 먹으러 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거다. 기분 틀어지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늘 신경이 쓰였었는데, 기린 덕분에 그 걱정은 덜었다.
루크의 사무실은 청연루 3층이었다. 위층에 사무실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은 없었다. 여태 뻔질나게 드나들었어도 여기서 한 일이라곤 2층 막다른 방에서 루크하고 저녁밥 먹은 게 전부였다.
청연루 3층은 아래층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청연루 1층은 로비겸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넓고 화려한 느낌이 있고, 2층은 작은 방을 여러 개 만들어 오밀조밀한 느낌인데 비해 3층은 중국 대가의 안채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한발 내려놓자마자 강력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곳은 첸 집안의 본가 안채하고 분위기가 거의 비슷했다. 묵직하고 차갑고 휑한 것이…….
“여긴 무슨 일이야?”
대청처럼 넓고 썰렁한 로비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저만큼 떨어진 커다란 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던 자오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매일 봐서 그런가? 그다지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남자친구 일하는 거 구경 좀 하러 왔어.”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징그러워서 돌겠어!”
자오가 치를 떨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백 대인 왔어?”
“좀 전에…….”
얼결에 대꾸하던 자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온 지 얼마나 지났어?”
좀 전에 자오가 붙어서 있던 방문 앞에는 자오 외에 세 명이 더 서 있었다. 회견 장소는 저 방이 분명했다.
“대체 여긴 왜 왔어?”
“말 했잖아? 한 번 더 해?”
“너 좀 전까지 회장님이랑 같이 있었던 거 아냐?”
“그렇기는 한데…….”
안에서 하는 말을 엿들을 방법이 없을까? 경호원들이 지키고 선 커다란 문 양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씩 있는데 저건 옆방인가?
“그렇게 보고 싶냐? 한두 시간 떨어져 있는 것도 못 참을 정도로?”
“사랑에 빠지면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도저히 못 들어주겠는지 자오가 아예 귀를 틀어막았다.
“회장님한테 왔었다는 말은 전할 테니까 볼일 있으면 아래층에서 기다려.”
“옆방에서 기다릴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작은 문으로 걸어가서 문고리를 비틀었다.
“야! 누구 맘대로…….”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내 뒷덜미를 움켜잡으려고 덤비는 자오를 피해서 잽싸게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내가 뛰어든 방은 큰 응접실 옆에 흔히 있는 곁방, 혹은 골방 같은 곳이었다. 자개장식이 아름다운 작은 응접 가구가 놓여 있고, 구석에 놓인 사방탁자에는 아기자기한 화병이 놓여 있는…… 이런 방의 벽은 허술한 가벽인 경우가 많으니까 혹시 안에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벽에 귀를 바싹 갖다 댔다.
저쪽에서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분간할 정도는 아니었다. 루크와 백 대인의 말소리는 개미 소리만 하고, 자오가 방문 두드리는 소리는 변방의 북소리만큼이나 크고 시끄러웠다.
“안 열어? 너, 내 손에 잡히면 죽을 줄 알아!”
아무리 점수를 야박하게 주려고 해도 루크 첸의 남자친구라는 건 이로운 점이 꽤 많은 일이었다. 청연루에서 예약 없이 푸짐한 중국 음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고, 호텔 특실도 자기 방처럼 드나들 수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자오가 저렇게 살벌하게 나와도 그렇게까지 겁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루크가 깊은 속내까지는 잘 안 보여주는 음험한 놈이지만 어쨌든 내가 자오 손에 죽도록 버려두지는 않을 거다.
“야! 가서 이 방 열쇠 찾아와!”
문밖에서 자오가 누군가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까지 됐으면 그냥 좀 있지, 기어이 문을 열고 들어올 모양이다. 가만있자…… 이 방에도 베란다가 있나?
살펴보니 이방 창은 그냥 밋밋한데, 바로 옆 큰 방엔 누각을 닮은 근사한 돌출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거리는 10여 미터, 중국 고성 같은 외관을 가진 건물이라 발 디딜 만한 장식돌도 군데군데 박혀 있어서 넘어가는 게 그렇지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비록 3층이라고는 해도 층고가 일반 건물에 비해 훨씬 높은 탓에 떨어지면 바로 사망이었다.
자오가 그새 열쇠를 찾았는지 문고리가 덜그럭거리는 바람에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창밖으로 나가서 벽에 붙었다. 백 대인하고 루크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짓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얘기였으면 좋겠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이리 안 와?”
문을 따고 방에 뛰어 들어온 자오가 장식돌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나를 보고는 주저앉을 듯 놀라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해. 너 때문에 놀라서 떨어지겠어.”
“저 자식이…….”
열 받은 자오가 나를 쫓아서 창밖으로 뛰쳐나오려는 걸 다른 동료들이 기겁을 하고 달려들어서 창틀에서 뜯어냈다. 서너 명의 장정들이 동시에 뒤로 넘어지면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그 바람에 놀라서 떨어질 뻔했다.
이런 짓 하는 거, 생각해보니까 꽤 오랜만이었다. 전에 비니 때문에 건물 옥상에서 밀려 떨어졌다가 외부에 걸쳐져 있는 전선 겸 빨랫줄 잡고 겨우 살아난 적이 한 번 있었다. 오늘도 그날만큼 운이 좋아야 할 텐데…….
일단 중심을 잡고, 자오 패거리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잃었던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이제 누각 난간까지는 2미터도 안 남았다. 잘만 뛰면 누각 안으로 문제없이 안착이다.
하지만 여기서 뛰면 소리가 너무 클 텐데…… 좀 더 접근을 한 다음에 뛸까? 그 편이 더 조용하고 안전할 것 같아서 다음 장식돌 쪽으로 침착하게 발을 뻗었다. 그 순간, 건물의 모든 유리창이 덜컹거릴 정도로 세찬 강풍이 불어 닥쳤다.
갑작스런 돌풍에 몸이 세게 떠밀렸다. 이대로는 꼼짝없이 추락하고 말 것 같아서 발을 딛고 있던 장식돌을 힘껏 차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숨넘어갈 것 같은 자오의 비명이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한 순간이었지만 남자친구 식당 창문에서 떨어져 죽을 만큼 재수가 없지는 않아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누각 난간을 잡고 매달렸다. 일이 이쯤 되니까 차라리 바른 소리 나올 때까지 루크를 고문이라도 하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너…….”
이 꼴을 지척에서 지켜본 자오는 놀라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중이었다.
“거기, 거기 그대로 있어! 금방 가서 올려줄 테니까!!”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정도는 혼자 올라갈 수 있다. 이렇게 목숨 걸고 잠입했는데 백 대인하고 마주 앉아서 부동산 재태크 비법이나 떠들어대고 있으면, 이번엔 정말로 루크하고 헤어질 거다.
“……그렇다면 콴은 믿을 만한 인간이란 뜻입니까?”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떤 입장도 표명한 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루크하고 백 대인은 한창 진지하게 말싸움 중이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대화 내용을 엿듣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 백 대인의 음성은 단호하고 카랑카랑했다.
“그 말씀은 결과를 보고 아무나 이기는 쪽에 붙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무례하군.”
백 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들었던 찻잔을 내려놨다. 그때 자오가 문을 박차고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짓이야?”
자오의 난입에 백 대인과 루크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자오가 루크의 추궁에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헐떡거렸다. 여차하면 다시 담타고 옆방으로 넘어가야 할 판이다. 제발 모른 척하고 나가달라고 창 너머에서 정신없이 손짓 발짓 텔레파시를 보내다가 자오하고 시선이 딱 마주쳤다.
“밖에 뭐라도 있어?”
까칠하게 따져 물으며 자오의 시선을 따라 루크도 고개를 돌렸다. 에잇! 빌어먹을!!
“아닙니다. 방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누각 구석에 붙어서 난간을 다시 타고 넘다가 자오의 맥 빠진 목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말씀 나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착각이고 뭐고,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디서 불이라도 났어?”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자오가 지은 죄도 없이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다. 자오한테는 이틀 연속으로 미안하게 됐다.
“자오가 대체 왜 저러나?”
자오가 물러나가자 다시 자리에 앉은 백 대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번 대공 사건 이후로 계속 몸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긴, 거의 죽다가 살아났으니…….”
자오 때문에 대화가 끊어진 탓에 백 대인이 찻잔을 두어 번 들었다 내려놓는 동안 둘 사이엔 침묵만 흘렀다.
“자오의 애비가 생각나는군. 대단한 전사였지. 녀석은 제 애비를 많이 닮았어. 좀 엉뚱한 구석도 없진 않지만…….”
좀 전에 하던 얘기를 계속할 줄 알았는데 백 대인이 뜬금없이 자오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모친을 닮아서 그렇게 난폭한 게 아니었습니까?”
“제수씨 성질도 대단하긴 하지.”
백 대인이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찻잔을 들었다. 백 대인이 차를 음미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루크도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오가 그렇게까지 따르는 걸 보면, 자네한테는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이 있어.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자네는 알면 알수록 사람을 놀라게 하는 면이 있어. 영리하고 치밀하고, 의외로 대담해. 대공을 추적해서 사로잡을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은데, 자네가 그런 일을 해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정말 놀랐네.”
“그런데요?”
“그런데 난 자네가 아직도 못미더워.”
백 대인의 말에 루크가 흠…… 하고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마리아가 처음 자네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부터 어딘지 수상했어.”
“아는 집안 출신이 아니면 차이나타운에서는 다 이방인이죠.”
“나는 근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구닥다리 노인네야. 그걸 부인하지는 않겠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며 뛰어다녀도 녀석이 흑풍회에서 받는 대접은 고작 이 정도인 모양이었다.
루크를 따라서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엔 루크가 기대할 만한 게 더 이상 없는 게 아닐까?
“콴이 대인에게 제시한 게 뭡니까?”
루크가 백 대인에게 물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걸 자네한테 알려줄 이유가 있나?”
“결국 돈 때문에 이러시는 거라면 실망이 클 겁니다.”
그런 의심을 받는 것조차 불쾌한지 백 대인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백 대인도 루크가 이런 식으로 대답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거다. 하지만 루크가 처한 상황이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걸까? 별로 애 먹이지 않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을 담은 병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그거면 납득이 되겠나?”
시간을 담은 병. 천년의 긴 잠에 빠져 있는 검은 용의 군대를 잠에서 깨우는 일에 꼭 필요한 열쇠. 본래 니콜라스가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내 수중에 있다고 여러 사람이 믿고 있는 어떤 것, 다시 니콜라스 손에 들어가면 세상이 절단 나는 굉장히 위험한 물건…… 내가 시간을 담은 병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대강 그 정도였다.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루크가 잘라 말했다. 하지만 백 대인도 뭔가 확신이 있는지 그 정도로는 태도가 흔들리지 않았다.
“확실한 건가? 아니면 그저 자네의 바램인가?”
“콴이 시간을 담은 병이라고 주장하는 물건을 실제로 보기는 하셨습니까?”
루크의 음성이 보통 때와는 달리 살짝 떨리는 것이 나한테도 느껴졌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콴의 수중에 있다면 상황을 역전시킬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 그래서 녀석도 저렇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는 건가 해서 내 마음도 덩달아 울렁거렸다.
“바하르나 전서 외전에 있는 그 스케치와 흡사하더군.”
“바하르나 전서 외전의 사본은 저도 본 적이 있습니다. 콴도 그럴 기회가 있었겠죠.”
백 대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 첸을 지그시 응시했다.
“콴은 자네만큼 똑똑하진 않아. 하지만 시간을 담은 병의 모조품을 들고 나를 찾아올 만큼 바보도 아니지. 그만한 배짱도 없고…….”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데, 배짱이 두둑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달리 살 길이 없어서 그런 거죠.”
“난 자넨 잘 모르지만 콴은 알아.”
“저도 콴을 압니다. 제가 여태 만난 인간들 중에 제일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놈인데,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습니까?”
루크가 살짝 흥분해서 백 대인에게 따졌다. 콴이 인간적으로 한심한 놈이라는 데는 백 대인도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린 지금 콴의 인품에 대해 토론을 하는 게 아니야. 솔직히 난 우리 조직에서 명예라든가, 품위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꽤 오래 됐어. 우리가 하는 일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자네 장인도 인간성은 바닥이지만, 평생 조직을 그럭저럭 큰 무리 없이 이끌어가더군. 누구라도 조직을 와해시킬 정도로 멍청하지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이야.”
백 대인은 인상만 봐도 깐깐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루크하고 마주앉아 얘기하는 폼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랬다. 지금 분위기만 봐서는 루크가 이 회합을 자기한테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흑풍회 수장으로 명예도 모르고 품위도 없는 인간이 적격이라면 이 자리는 당연히 콴이 차지해야겠죠. 하지만 흑풍회가 오늘날 말짱 도둑놈 소굴이 된 건 결국 그 두 가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대인이 원하시는 조직의 모습이 그런 겁니까?”
“나는 검은 군대의 귀환을 막고 싶을 뿐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런 다음엔 이미 오래전에 조폭 조직으로 변해버린 흑풍회 따위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싶은지 루크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벼댔다.
“콴이 가지고 있다는 그 물건에 대해 기대가 크신 것 같은데, 어차피 시간을 담은 병의 진위여부를 가릴 수 있는 건 라두칸뿐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엔 그 비슷한 물건이 백 개가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고요.”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무슨 근거로 콴의 주장을 그렇게 철썩 같이 믿으시는 겁니까?”
“콴이 그 물건을 입수한 과정이 그럴 듯했어.”
“과정……이라고요?”
콴의 사기에 놀아나는 거라고 확언을 하던 루크도 시간을 담은 병의 진위 여부엔 어쩔 수 없이 관심이 쏠리는지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도 덩달아 창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그 형사 때문에 라두칸이 경찰에 체포된 후에 연방특수경찰이 라두칸의 집을 비롯해서 그자와 관련된 곳은 모조리 뒤지고 다녔던 건 자네도 알 거야.”
또 다시 튀어나온 라두칸이란 이상하면서도 이미 귀에 익은 그 이름 때문에 숨을 멈췄다. 시간을 담은 병에 관련된 일에 그 이름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자의 세간까지 다 쓸어다 자기네들 창고에 갖다 놓고 아예 분해를 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취향이 어지간히 사치스러워서 연방 요원들이 부수입을 짭짤하게 챙겼다는 말도 있었고…… 하지만 시간을 담은 병을 그쪽에서 가진 것 같지는 않던데요?”
“우리 생각보다 집념이 강한 자들이야. 털어볼 수 있는 곳은 다 털어도 나오는 게 없자 라두칸의 남자친구 집까지 뒤졌던 모양이야. 아, 지금은 자네 남자친구지.”
깜짝 놀라서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다가 하마터면 유리창을 들이 받을 뻔했다. 내 얘기가 나오자 루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자네보다 3년쯤 발이 빨랐던 셈이지.”
루크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백 대인 앞에서 저렇게 내색을 할 정도면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자네도 그 형사한테 추근거리는 대신 집이나 뒤지는 편이 나을 걸 그랬지?”
“왜요? 집을 뒤지는 것보다 그 친구하고 데이트하는 편이 훨씬 재미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가 뚱하다.
“자네가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도 재미가 있었겠나?”
처음부터 루크가 나한테 접근한 데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여자든 남자든 사람 만나는 게 아쉬울 게 없는 저 녀석이 나한테 그렇게 다양하고 질 나쁜 작업을 걸어올 이유가 없었다. 말로는 내가 좋아서 그런다고 했지만, 또 그게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고 해도 분명히 이유가 그거 하나는 아니었다.
시간을 담은 병이라…… 그 동안의 작업이 모두 그것 때문이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맥이 좀 빠졌다.
“그래서, 그 녀석 집을 뒤져서 그걸 찾았다는 겁니까?”
“시간을 담은 병을 찾아낸 건 자네 남자친구의 전 부인 집이었다는군.”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전 부인이라니…… 놈들이 내 집을 뒤진 것도 모자라서 위니가 사는 곳까지 손을 댔었다는 건가?
“그런 짓까지 하다니, 정말 구차스럽고 치사하네요.”
루크가 불쾌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다 자네 같을 수는 없지.”
그동안 루크가 세상 사람들 보란 듯 내놓고 나하고 어울려 다녔던 게 백 대인한테도 어지간히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까부터 계속 그걸로 시비다.
“그래서, 연방경찰이 찾아낸 그 물건을 어떻게 콴이 가지고 있다는 겁니까?”
“그걸 발견한 연방 요원이 상부에 보고를 안 하고 물건을 빼돌렸어. 그렇게 비싸 보이지도 않는 목걸이니까 도둑질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았겠지. 지난 몇 년간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으면서 구매자를 물색했을 거고…… 그러던 중에 콴이 요즘 형편이 안 좋으니까 값을 괜찮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흥정을 붙였던 모양이야. 천만 불에 사들였다는군.”
입수 과정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루크도 더는 시간을 담은 병의 진위 여부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한심하다는 듯 콧방귀를 날렸다.
“그것 때문에 자기 종족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데, 잘도 그런 헐값에 사고파는군요.”
“수치스러운 일이지.”
백 대인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콴이 그걸 수중에 넣었다니 큰 다행이지. 자네가 라두칸의 옛 남자친구나 주무르고 있을 때 콴은 일을 제대로 한 셈이 아닌가?”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있어서 시간을 담은 병을 찾아다녔던 건 아니죠. 녀석은 단지 저한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자네한테는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게 있나?”
조롱이나 비난이 섞이진 않았지만 백 대인의 말투와 눈빛은 차가웠다.
“결국 자네도 부와 권력을 탐하는 야심에 가득 찬 젊은이일 뿐이야.”
백 대인은 차를 다 마셨고, 둘 사이의 대화도 끝났다. 백 대인이 빈 찻잔에 그려진 무늬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테이블에 내려놨다.
“자네는 그동안 흑풍회 수장 노릇을 잘 했어. 그건 고맙게 생각하네.”
“뭘요.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루크가 떪은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조용히 떠나는 게 좋지 않겠나? 이 방 금고에만 해도 평생 먹고 살 만한 금이 있을 테니까, 그 정도만 챙겨서 가게. 자네 신변은 내가 보호해주겠네.”
그래도 저 영감은 보기보다는 인정이 있다. 하지만 영감이 기껏 터준 살 길을 루크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걷어찼다.
“가지고 오신 벼루는 놓고 가십시오. 대금은 이번 주 안에 자오나 푸웨이 편에 보내겠습니다.”
백 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크도 따라 일어났다.
“공연한 허세 부리지 말고 생각을 잘 해보게.”
“겨우 그런 놈한테 밀려서 허겁지겁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를 정말 잘못 보신 겁니다, 대인.”
나도 녀석을 잘못 본 걸까? 자만심이 지나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죽음을 부를 정도로 미련하고 모자란 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죽어도 곱게 물러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노인네 가시는데 엘리베이터까지라도 나가서 배웅을 좀 하지, 그냥 문 앞까지만 나갔다 도로 들어오면 나는 어쩌란 말이냐?
보란 듯이 나가기도 민망하고, 다시 담을 타자니 안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어서 테라스 구석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멍했다. 헤어진 후 위니는 자기 물건을 챙겨서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골동품 점에서 일하면서 하나씩 사들인 세간과 옷가지, 그 외 자잘한 물건들이 사라진 아파트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휑했다. 연방경찰이 위니 부모님 집까지 뒤지다니, 모르는 사이에 위니까지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만들었던 셈이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 즈음의 일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었다. 멀쩡한 척하고 돌아다니긴 했었지만 그때는 정말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었고, 기억에 남는 것도 없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내가 뭘 했는지 하는 따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속이 타는 것 같은 고통 이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위니 생각이 두서없이 밀려와서 연거푸 한숨만 쉬고 있는데 루크가 테라스로 나왔다. 아까 녀석이 테라스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잽싸게 숨는다고 숨었는데, 생각만큼 빠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저쪽에서 넘어온 거야?”
루크가 내가 넘어온 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미치겠다. 정말…….”
루크가 조용히 짜증을 냈다. 그리고는 내 어깨 죽지를 움켜잡더니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루크가 좀 전까지 백 대인이 앉아 있던 의자에 나를 밀어 앉혔다.
“엿들어보니 어땠어? 목숨 걸 만한 가치가 있었어?”
녀석이 내 주위를 뱅뱅 돌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화가 난 건 확실한데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다. 내가 중요한 얘기를 엿들어서 그런 건지, 3층에서 담타기를 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나한테 ‘시간을 담은 병’이 없다는 게 밝혀져서 그런 건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궁금증은 풀렸어.”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데?”
“니가 대체 왜 나한테 이렇게 별나게 구는 건지 항상 궁금했었거든. 뭐…… 내가 눈치만 좀 빨랐으면 목숨을 걸 필요까지는 없었겠지.”
어딜 봐도 이 녀석은 사랑에 모든 것을 다 거는 순정파는 아니었다. 녀석이 순수하게 내가 좋아서 꽃다발을 보내고, 시도 때도 없이 밥 같이 먹자고 보채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시작한 일이니까, 이제 와서 그 이유가 밝혀졌다고 해도 새삼스럽게 놀라거나 화낼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하고는 다르게 입을 열자마자 그 얘기부터 튀어나갔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우고 있는데 녀석이 실눈 뜨고 나를 노려보더니 속 시원하게 본심을 깠다.
“사실, 그걸 니가 가지고 있는 게 나쁠 건 없잖아?”
기왕 들통이 났으니 숨길 거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까 빈정이 확 상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그 콴이란 놈한테 꽃다발 줄줄이 보내고, 악단도 보내. 혹시 알아? 그놈도 나만큼 멍청할지?”
“그걸 말이라고 해?”
생각만 해도 비위 상한다는 듯 루크가 인상을 썼다.
“애초에 내가 그 물건을 갖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건 맞잖아.”
“너, 진짜 뻔뻔하다.”
녀석이 적반하장으로 나를 나무랐다. 누가 뭐래도 쿠간에서 제일 낯짝 두꺼운 인간은 루크다. 질기고, 뻔뻔하고, 음흉하고…… 녀석의 눈엔 내 어디가 그렇게 뻔뻔해 보이는지 몰라도, 난 어디까지나 감수성 예민한 보통 사람이다.
“남의 얘기를 몰래 엿듣다가 들켰으면 미안한 척이라도 좀 해봐. 뭘 잘 했다고 도리어 시비야?”
그건 그런데…….
“너도 시커먼 속셈을 다 들켰으면 당황하는 척이라도 좀 하지 그래? 진짜 뻔뻔하고 양심 없는 게 대체 누구야?”
“시커먼 속셈이라니?”
녀석이 벌컥 화를 냈다. 경우 없는 놈! 이 상황에서 화낼 사람이 대체 누구냐?
“시간을 담은 병인가 뭔가…… 순전히 그것 때문에 나한테 작업을 걸었던 거잖아!”
“아무 상관도 없는 인간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소리를 엿듣고 이렇게 사람 잡을래? 너 이러는 거 상습이야!”
“상습이라니?”
“전에도 꼭 이렇게 혼자 펄펄 뛰다가 나한테 총질하고 뛰쳐나간 적 있었잖아!”
생각해보니 전에도 이 비슷한 상황이 한번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너한테 총질을 했어?”
생각할수록 아깝다. 그때 그냥 이 자식을 쏴 버렸으면 좋았을걸.
녀석이 나한테 무슨 목적으로 접근을 했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기분은 더럽지만 이런 말싸움은 유치하고 답도 없다. 아는데, 녀석하고 몇 마디 주고받을수록 속만 부글거릴 뿐 좀처럼 이성적인 대화의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볼 때마다 사랑한다고 노래라도 불러 줘?”
“됐어. 다 귀찮아.”
울컥울컥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참느라 손끝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사랑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다 됐으니까…… 가라. 그냥…….”
“무슨 소리야?”
배고픈 사자처럼 방안을 뱅뱅 돌던 루크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이쯤에서 물러서면 해코지는 않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래서라니…….
“그나마 기회 있을 때 목숨이라도 건져야 할 거 아냐?”
백 대인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뭐든 챙길 만큼 챙겨서 떠나라는 건 이제 더 이상은 루크하고 남은 볼 일이 없다는 말이고, 곱게 물러서면 목숨은 살려주겠지만 더 이상 소란을 피우거나 내분을 부추기면 국물도 없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어떤 타격에도 그 입지가 흔들릴 것 같지 않았던 프란시스 몬티첼리조차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 한방으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란 조직의 화력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견줄 정도라면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얘기였다.
“그 영감까지 저렇게 나오면 얘기는 다 끝난 거잖아?”
녀석이 무슨 목적이 있어서 나한테 덤빈 거라고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그런 게 무슨 대수냐? 아무래도 상관없고, 루크가 지금 당장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하지만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웃기지 마. 이제부터 시작이야.”
루크의 태도는 처음부터 확고했다. 녀석은 누가 뭐래도 흑풍회 수장 자리를 순순히 내놓고 물러날 마음이 없었다.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걸까? 그렇게 영악하고 똑똑한 놈이 왜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몬티첼리 저택에서 벌어졌던 학살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에 루크의 얼굴이 겹쳐 보여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왜 그래?”
루크가 다가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몰라서 물어?”
녀석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처음부터 이 자식하고 엮여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코앞에 이런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시간을 담은 병이란 게 대체 뭘까? 니콜라스가 나를 찾아서 몬티첼리 저택까지 찾아왔던 것도 그렇고, 좀 전에 백 대인이 했던 얘기를 들어봐도 그건 한때 내 수중에 있었던 물건이 틀림없었다. 대체 뭐였을까?
내가 그 물건을 간수만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흑풍회가 비록 조폭이긴 해도 검은 군대의 귀환에 관한 입장은 연방 특수 경찰이나 정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루크가 그걸 손에 넣었어도 크게 잘못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런 물건을 함부로 굴려서 일을 이렇게 만들다니…….
“어디 가?”
더 이상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속이 터질 것 같아서 문으로 다가가는데, 루크가 나를 붙들었다.
“놔! 이제 나한테는 볼일 없는 거잖아?”
“무슨 소리야?”
녀석이 움켜잡은 내 팔을 비틀며 사납게 되물었다.
“내가 이러는 것도 웃기지? 속은 거 뻔히 알면서, 진짜 속도 없는 놈이구나 싶지?”
녀석이 곧 부러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비틀어 잡고 있던 팔을 놨다. 웬일로 쉽게 놔준다 했더니 곧바로 면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말 함부로 지껄이지 마!”
따귀 한대 맞고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뺨을 맞은 거니까 따귀를 맞은 건 맞는데, 사람한테 맞은 게 아니라 곰 발바닥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가물가물한 것이…… 자오한테 잡혀서 책상 위로 날아 떨어졌을 때도 이렇게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아…….”
얼굴을 감싸 쥐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손바닥으로 뭔가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코하고 입에서 동시에 쏟아진 피 때문에 바닥에 깔려 있던 호피 무늬 카펫에 커다란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당황스러워서 정신도 없고, 숨 쉴 때마다 피가 기도로 넘어가서 자꾸만 기침이 났다. 연신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하고 있는데 루크가 머뭇머뭇 옆으로 다가왔다.
“손 치워봐.”
“됐어.”
“좀 보자니까!”
녀석이 억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여태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나는 코하고 입에서 동시에 피를 철철 쏟고 있고, 루크는 큰 죄 지은 놈처럼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이 한심한 순간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기…….”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던 자오가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발브레이크를 걸었다.
“뭐야?”
루크가 자오를 노려보며 시비조로 물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애꿎은 자오가 덤터기 쓰고 이 사태에 대한 화풀이를 당할 판이다. 자오도 그 위험을 눈치재고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니까 저기…… 큰아버지가 가신 지 꽤 됐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다른 애들도 불안해하고 있고, 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백 대인이 쟤네 큰아버지야?”
순간적으로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놀라서 루크한테 따졌다.
“혈연관계는 아니고, 쟤네 아버지하고 백 대인이 의형제였어. 친형제보다 더 각별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자오도 자식처럼 챙겨.”
녀석이 내 얼굴을 슬쩍 만지며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 유혈사태에 녀석도 많이 놀란 눈치였다. 어쨌든 백 대인이 자오하고 그런 사이라니, 차이나타운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가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얘기가 이렇게 되면…….
“뭐야? 그럼 니 측근 중에 자오가 1순위로 빠지는 거야?”
코피는 금방 멎었다. 자오가 욕실에서 물에 적신 수건 몇 장을 갖고 나와서 얼굴하고 손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냉장고에서 얼음도 한통 꺼내서 수건에 돌돌 싸더니 무섭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내 왼쪽 뺨에 대줬다.
“울지 마. 남자가 아프다고 우는 거 아냐.”
마음이 갑갑해서 한숨 쉬다가 눈물 찔끔 흘린 거 갖고 자오가 퉁명스럽게 틱틱 거렸다.
루크가 데리고 다니는 조직원들 중에 그나마 믿음이 가는 건 자오뿐이었다. 수십 명에 이르는 루크의 경호원들을 직접 지휘하는 사람도 자오고, 지난 번 대공 사건 때 끝까지 루크와 함께 했던 사람도 자오였다. 자오가 떠나버리면 조직에서 루크 옆에 남을 사람이 달리 없었다.
“남자친구한테 맞아서 입술 터지고, 코피 터져봐. 눈물이 안 나고 배기나…….”
눈 내리깔고 맞은편에 묵묵히 앉아 있던 루크가 그제야 눈꺼풀을 들고 나를 한번 매섭게 노려봤다.
“뭐? 할 말 있어?”
나도 녀석을 노려보며 까칠하게 따졌다. 보스니, 총수니 직함만 거창했지 알면 알수록 허술하고 한심하다.
“아냐.”
뭔가 할 말 많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다시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이게 뭐야? 그러게 왜 담은 타 넘어?”
피가 배어나오는 내 입술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자오가 루크 쪽으로 대놓고 눈을 흘겼다.
“그리고 넘어갔으면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빠져나와야지, 그걸 들키냐?”
“그것 때문에 맞은 거 아니야.”
내 변명에 자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오는 내가 담타고 넘어와서 중요한 얘기를 엿듣다 들켜서 루크한테 얻어터진 걸로 이미 결론을 내렸다.
“그거 좀 엿들었다고 애를 이렇게 패요?”
자오가 얼음주머니를 들어내고 내 얼굴 상태를 다시 확인하면서 혀를 끌끌 차더니 기어이 루크를 건드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니가 그런 소리 할 자격이 있어?”
루크가 자오를 노려보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지금이야 이렇게 붙어서 닦아주고, 달래주고 있지만 자오하고 시비 붙어서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게 바로 어제 일이다. 내가 생각할 때도 자오가 이런 말할 입장이 되나 싶지만, 본인은 되게 당당했다.
“제가 이 자식한테 꽃다발 보내고, 악단 보내고, 가는 데마다 쫓아다니면서 작업 건 거 아니잖아요? 싫다고 버티는 걸 그렇게 꼬드겨서 결국 두 손 들게 만들었으면, 회장님은 얘한테 이러면 안 되죠.”
지들끼리는 그렇게 세세한 디테일까지 따져가면서 더 나쁜 놈, 덜 나쁜 놈 줄을 세우는 모양인데,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다 똑같은 놈들이다.
“물론 얘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함부로 설치고 다니는 건 있어요. 하지만 짭새들이 하는 일이 본래 그런 거고, 얘가 큰아버지하고 회장님이 하는 얘기를 엿들었다고 해도 그걸 어디다 팔아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그만해…….”
이러다 이번엔 자오하고 루크 사이에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자오를 조용히 말렸다. 자오의 타박이 길어질수록 루크의 숨소리도 따라서 거칠어지고 있었다.
“얼굴만 이런 거야? 다른 데는 괜찮아? 이거 맨주먹에 맞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큰아버지가 벼룬지 뭔지 가져오셨다던데, 혹시 그걸로…….”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루크가 벌떡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자오도 일어나서 루크하고 마주 섰고 얼결에 나도 일어났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얼굴 절반이 마취가 된 것처럼 얼얼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어쨌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자오를 문 쪽으로 떠밀었다.
“괜찮으니까 나가서 일 봐.”
“얘기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일을 하지!”
자오가 안 밀려나가려고 버티면서 짜증을 냈다.
“얘기가 잘 됐으면 내가 이렇게 얻어 터졌겠어?”
백 대인하고 얘기가 틀어진 것 때문에 직접적으로 화풀이를 당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얘기의 결말이 그 따위로 나다 보니 나도 마음이 조급해서 말이 함부로 나갔고, 루크도 손이 함부로 나왔다.
내 대꾸에 자오가 심하게 놀란 표정으로 루크를 쳐다봤다.
“얘기가 잘 안 됐어요?”
“뭘 그렇게 놀라? 백 대인이 언제 내 편 들어주는 거 봤어?”
“그렇다고 콴, 그 자식 편을 드신단 말이에요?”
“백 대인은 딱히 누구 편이랄 게 없어. 다른 원로 영감들하고 달리 나한테 돈 문제로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루크가 도로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리다가 나하고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금방 자기 손끝을 쳐다보며 딴전을 피웠다.
“그럼 대체 왜 그러신데요?”
“시간을 담은 병을 그 자식이 가지고 있대.”
시간을 담은 병 얘기에 자오도 한동안 잠잠해졌다. 시간을 담은 병의 행방이 이 조직에서 얼마나 지대한 관심사였었는지는 자오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간의 심란함, 심각함을 넘어서 망연자실이었다.
“그 자식이 어떻게 그걸…….”
중얼거리던 자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건 니가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대체 그게 뭔데?”
뭔지는 몰라도 내 수중에 있을 때 간수를 좀 잘 했더라면 싶어서 후회가 막심하고, 이 사태가 나 때문에 초래된 것 같아서 무척 미안하다. 하지만 이 일이 자오나 루크한테 내가 직접적으로 사과를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어린애 주먹만 한 맑은 수정이야. 정말 기억 안 나? 그런 거 본 적 없어?”
수정이라니…… 니콜라스의 저택엔 값나가는 장식품들도 많았으니까 혹시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기억나는 건 없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니콜라스한테서 그런 걸 받은 적은 없어.”
“그럼 대체 왜 그 작자가 몬티첼리 저택에 나타나서 너한테 그걸 내놓으라고 했었던 건데?”
“그건…….”
자오가 나를 다그치며 다가서는 걸 루크가 잡아서 뒤로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 그만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본래 갖고 있었는데 연방경찰이 뒤져서 찾아낸 모양이야. 저 녀석이나, 전처나 그게 무슨 물건인지도 몰랐고, 그래서 없어진 것도 몰랐던 것 같아.”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던 자오가 문득 불순한 시선으로 다시 루크를 쳐다봤다.
“아니, 그럼 그것 때문에 김이 새서 애를 이렇게…….”
“이 자식이 근데…….”
루크가 발끈해서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자오한테 달려들었다.
루크가 내지른 주먹을 자오가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덩치 큰 것 치고 저 정도면 정말 날렵한 거다. 루크의 선제공격을 잘 피한 자오가 헛주먹질로 중심을 잃은 루크의 멱살을 틀어잡고는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성질나면 보스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걸 보니 진정한 파이터란 저런 것이구나 싶었다.
“아니면 그만이지, 왜 화는 내고 그래요?”
보스를 집어던져서 문 앞까지 굴러가게 만들고도 자오가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도리어 투덜거렸다.
“아니면 그만? 너…….”
루크가 몸을 일으키면서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만해. 왜 자오한테 성질이야?”
다시 자오한테 달려들려고 폼 잡는 루크의 팔을 얼른 붙들었다.
“저 자식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루크가 잡힌 팔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선 자세로 버럭 소리쳤다. 자오가 무슨 소리를 했든 그게 무슨 대수라고 이 난린지 모르겠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지도 모르겠고…….
“어쨌든 그만 하라니까?”
녀석한테 소리를 지르는 순간, 다시 코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코피 터진 걸 기회로 엄살을 좀 피워서 자오와 루크를 멀찍이 떼어 놓는데 일단 성공은 했다. 그렇게 해 놓고 나도 소파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처음엔 마취 주사라도 맞은 것처럼 얼얼하던 얼굴이 본격적으로 아팠다. 겨우 따귀 한대 맞은 것뿐이니까 다쳤다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지만 또 며칠 부은 얼굴로 다닐 생각을 하니 그것도 심란했다. 기린한테 가서 비비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이러다간 기린하고 정분날 것 같아서 두렵다.
“어쩔 거야?”
입안에 자꾸만 고이는 피를 수건에 뱉어내면서 루크를 다그쳤다.
“생각 중이야.”
백 대인 앞에서는 사람 잘못 봤다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그새 풀이 많이 죽었다.
“생각하면 무슨 수가 나?”
“…….”
나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마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면서 뭔가 고민하던 루크가 잠시 후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자오.”
“예?”
“우선 지배인한테 식당하고 호텔 예약 전부 취소시키라고 해. 오늘부터 당분간 청연루는 영업 정지야. 그리고 푸웨이 밖에 있지?”
“어딜 가시게요?”
지금 현재 녀석의 행선지로 가장 바람직한 곳은 공항이다. 하지만…….
“본가에 갈 거야.”
녀석이 전혀 엉뚱한 행선지를 대면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를 싹 지나쳐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자오가 나를 한번 힐끔 보고는 루크를 따라 일어났다.
“당장 출발하시게요?”
“넌 따라올 거 없어.”
루크가 따라붙는 자오를 보고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턱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쟤 데리고 병원에나 가 봐.”
루크가 방을 나간 후에도 잠시 문에서 눈을 못 떼던 자오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일어나. 병원에 가자.”
이 방에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건 아니라서 일단 일어났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야.”
병원이란 총에 맞거나, 갈비뼈가 부러져야 가는 곳이다. 얼굴 좀 붓고 코피 약간 흘린 정도의 폭행엔 시간이 약이다.
“얼굴이 많이 부었어. 코뼈가 나갔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세게 맞지는 않았어.”
“얼굴만 봐선 차에 치었대도 믿겠어.”
자오가 나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청연루 1층 홀은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자수성가한 건 아니지만 식당이나 호텔 운영을 이 만큼이라도 하는 건 오너의 사업 수완이 괜찮기 때문이다. 이 정도 능력이면 어디 가서 뭘 해도 잘 먹고 잘 살 텐데, 대체 왜 흑풍회 수장 자리에 이렇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반 잡기가 정 힘들면 다른 동네에 가서 또 부잣집 딸을 꼬셔 보든가…….
1층 로비를 가로지르던 자오가 홀을 두리번거리더니 지나가는 웨이터를 하나 잡아 세웠다.
“지배인은 어디 있어?”
“별관에 계시는데요. 오늘 저녁에 있을 천 대인 댁 막내아들 결혼 피로연 준비 때문에…….”
“할 말 있으니까 당장 오라고 해.”
홀에 앉아서 한가롭게 점심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배가 고팠다. 지금 이 상황에 배가 고프다는 게 한심하긴 하지만…….
“잠깐 앉아서 기다려. 지배인하고 얘기 잠깐하고 가자.”
자오가 홀 구석 빈자리에 나를 밀어 앉히며 일방적으로 양해를 구했다.
10분쯤 후에 나타난 지배인은 식당과 호텔에 들어온 예약을 다 취소시키고 오늘 저녁 이후로 청연루 문을 걸어 잠그라는 자오의 지시에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정신 나갔어? 요즘 가게 하루 매상이 얼만지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닫으라면 그냥 닫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자오가 징징거리는 지배인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봤다.
“대체 백 대인 어르신하고 얘기가 어떻게 된 거야?”
“얘기가 잘 됐으면 내가 이런 말 하겠어?”
지배인이 손님으로 북적거리는 홀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둘러봤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없지만 지금 지배인의 마음은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한 테이블에 돈이 얼만데……’ 딱 그거다. 아무래도 예약 취소나 영업 정지가 내키질 않는지 지배인이 자오의 지시에 다시 토를 달았다.
“예약을 다 취소하고 청연루를 비우라는 건, 여길 닫아걸고 수성전이라도 하겠단 얘기야?”
“위치도 그렇고, 건물 구조도 그렇고…… 여기가 제일 낫잖아.”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무슨 뜻이야?”
자오가 정색하고 지배인을 노려봤다.
지배인이 자오의 거친 기세에 눌려서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게 문을 닫는 건 싫은지 한숨 한번 쉬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백 대인 어르신하고도 얘기가 잘 안 된 거면, 솔직히 승산이 없는 거 아냐? 그런데 뭘 굳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자오가 지배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죽을래?”
“아니, 나는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잔말 말고 예약 취소하고 이 시간 이후로는 식당이든 호텔이든 손님 받지 마. 이 사람들도 한 시간 이내로 다 내보내고, 그리고 너도 꺼져!”
지배인이 자오한테 떠밀려서 한없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들어오는 손님하고 부딪힌 다음에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아침저녁으로 얼굴 보면서 회장님, 회장님 하고 굽실거리더니, 겨우 며칠 매상 손해나게 생긴 걸로 이렇게 안면 몰수하는 게 차이나타운 인심인가 싶어 나도 기분이 안 좋다.
“일어나. 차로 10분만 가면 병원 괜찮은 데 있으니까 가자.”
지배인이 홀 뒤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던 자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원은 됐고, 점심이나 먹자. 누룽지탕 하나 시켜줘.”
웨이터가 밀고 지나가는 트레이에서 향기로운 냄새도 솔솔 풍겨 나오고, 마침 옆 테이블에서는 떡 벌어지게 한상 차려 놓고 막 식사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배고파?”
“응.”
“얼굴이 다 터졌는데 지금 밥 생각이 나?”
“위장이 터진 건 아니잖아. 그리고 나 아침도 안 먹었어.”
주로 루크하고 같이 저녁을 먹던 2층 방이 다행히 비어 있어서 자오하고 같이 자리를 옮겼다. 먹는 김에 같이 먹자고 해도 자오는 밥 생각 없다면서 누룽지탕만 하나 시키고 웨이터를 내보냈다.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크게 곤란한 거 아니면 대답해줄게.”
내가 창밖도 쳐다보고 벽에 걸린 족자도 들여다보면서 뜸을 들이자 자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첸이 저렇게 버티는 거, 니가 보기엔 어때?”
전세 역전의 가능성은 둘째 치고, 같은 편에 서줄 만한 사람이 있긴 있는 건지 궁금했다.
“미친 짓이야.”
자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미친 짓인 건 나도 알아.”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미친 짓이야.”
”루크 쪽엔 모을 수 있는 인원이 몇이나 돼?”
조폭 세력 다툼 따위에 뭐 대단한 전략 전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머릿수 싸움이다. 차이나타운의 굵직한 계파들이 모두 콴에게 붙었다니 루크가 불리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불리한지 알아야 나도 대책을 세우든, 마음의 준비를 하던 앞일을 정할 수 있다.
“글쎄? 열 명 정도?”
“…….”
직접 부리는 부하들만 해도 몇 백 명은 되는 것 같았는데, 열 명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잇고 뻐끔거리자 자오가 민망한 듯 내 시선을 피했다.
“너무 그러지 마. 꼭 차이나타운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어느 바닥이나 의리 때문에 죽어도 좋다는 놈은 많지 않아.”
“의리파가 열 명이면 적은 것도 아니네.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솔직히 의리 같은 건 상관없어. 콴이 총수 자리에 앉으면 그날로 목이 떨어질 녀석들이 그 정도 된다는 얘기야.”
주문한 누룽지탕이 들어왔다. 좀 전까지는 속이 따끔거리긴 해도 분명히 배가 고팠는데 막상 음식을 보니 내가 이걸 왜 시켰나 싶었다.
“안 먹어?”
누룽지탕을 멀뚱히 들여다보는 나를 자오가 빤히 쳐다봤다.
“먹을 거야. 좀 식은 다음에…….”
누룽지탕을 몇 번 휘젓고 나서 곱게 숟가락을 내려놨다. 열 명이라…… 그나마 없는 것보다 낫다고 할지 몰라도, 사실 없는 거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숫자다.
청연루의 콘셉트가 중국풍 성이라서 제법 성곽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가 진짜 성은 아니다. 아무리 문을 꽁꽁 걸어 잠가봐야 이곳은 2미터 남짓한 담장에 둘러싸인 식당일뿐이다.
“저기…….”
“더 궁금한 게 있어?”
“콴이 흑풍회를 장악하면 목이 떨어질 놈들 중에 너도 끼어 있는 건가 해서…….”
“아니.”
자오가 짧게 대꾸했다. 하긴, 자오는 기사단 총수인 백 대인이 친아들처럼 아끼는 친구 아들이라니까, 그 정도 배경이면 사이가 좋든 나쁘든 콴도 자오를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 할 거다.
“다행이네.”
“표정은 전혀 아닌데?”
이 싸움에 자오가 말려들어서 같이 죽어주길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변에 믿을 놈 하나 없이 혼자 버티게 생긴 루크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다.
“누룽지탕 그만 휘젓고 일어나. 병원에 갔다가 아파트까지 데려다 주는 걸로 니 보모 노릇도 끝이야.”
“내 아파트?”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다른 집을 알아봐. 꼭 그렇게 후진 데서 살아야 돼?”
“난 아무 데도 안 가. 호텔로 돌아가서 잠이나 잘래.”
자오가 한숨을 쉬었다.
“여긴 좀 있으면 전쟁터가 될 거야.”
“그때쯤엔 깨겠지.”
자오가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유부남에다 얼굴 절반이 탱탱 붓도록 널 때린 놈이야. 목숨을 걸 정도로 좋은 게 확실해?”
녀석의 모든 면이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오늘 아침까지도 사이가 괜찮았었는데, 따귀 한대 맞은 걸 핑계로 이때다 하면서 발뺌할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난 본래 나쁜 남자가 취향이야.”
잠에서 깬 건 어스름 해가 저물어갈 즈음이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욕실에 있는 약장을 뒤져서 진통제 몇 알을 찾아 먹고 바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며칠 피곤이 쌓여서 그런지, 아니면 진통제 약발 덕분인지 눈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자리는 썩 편하지 않았다. 잠들자마자 온갖 뒤숭숭한 악몽들이 엉망으로 뒤섞인 채 끝도 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잠을 안 잤다고 할 수도 없고, 잘 잤다고 하기도 어림없는 상태에서 멍하니 저녁 햇살이 길게 들이치는 창문 쪽을 쳐다봤다.
자오가 병원에 가자고 했을 때 잠깐 갔다 올 걸 잘못했다. 얼굴이 너무 아프다. 한잠 자고 나면 통증이 좀 가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욱신거리는 얼굴을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젠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저런 발소리를 내면서 들어오는 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잤어?”
루크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말을 붙였다.
“아…….”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신음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병원엔 왜 안 가? 이렇게 끙끙거리면서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아, 아…….”
일어나 앉으려고 좀 움직였더니 이젠 머리가 통째로 깨질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약장에 진통제가 몇 알 더 남아 있으니까 일단 그거라도 먹고 버텨야겠다.
“시위가 아니라 정말 아파.”
“미안해.”
루크가 내 어깨를 감싸 안더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들릴 듯 말 듯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미안해.”
“집어치워.”
그냥 그렇게 한마디 하고 붙잡는 녀석을 뿌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몇 시간 사이 얼굴이 조금 더 부었고, 색깔은 완전히 총 천연색으로 피멍이 들어 있었다. 고작 따귀 한대였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행히 약병엔 아직 진통제가 다섯 알 정도 남아 있었다. 이걸 나눠서 먹을까, 지금 다 먹을까 잠깐 고민 하다가 그냥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욕실에서 나와 보니 루크는 침대에 벌렁 누워 있었다. 한쪽 팔로 눈을 가린 채 잠잠히 누워 있는 모습이 여태 봐온 녀석의 모습 중에 제일 침울하고 무거웠다. 지금 상황에 일없이 본가엘 갔을 리는 없는데, 갔던 일이 잘 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장인한테 도움을 청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한 걸까?
“갔던 일이 잘 안 됐어?”
“잘 되고, 안 되고…… 그럴 만한 일도 없었어.”
“옷이나 갈아입으러 갔던 건 아닐 거 아냐?”
대답 대신 녀석이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렇게 손을 내밀면 외면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다.
녀석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평소와 달리 의기소침한 모습에 나도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화 낼 일도 아니었는데…….”
“그 얘긴 됐어. 언제 갚을 날이 있겠지.”
루크가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옆에 앉자 녀석이 내 손을 만지작거리다 깍지를 꼈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사방이 너무 조용했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고 세상에 나하고 루크 둘만 남은 것 같은 고독감조차 느껴졌다. 공허함과 쓸쓸함 그리고 묘한 설렘이 뒤섞인 이 이상한 행복감은 오래전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때에 종종 느꼈던 그런 감정이었다.
“조용하네. 사람들은 다 내보낸 거야?”
“기린 한 마리, 용 한 마리, 킬러 하나, 짭새 하나…….”
기린하고 용 그리고 발렌타인은 루크에게 큰 도움이 안 될 거다. 다들 루크한테 호감이 별로 없고, 특히 발렌타인은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절친한 친구다.
“그리고?”
“총수 모시고 다닌다고 거드름 피우다가 콴한테 단단히 찍힌 한심한 놈들 몇 명이 남아 있긴 해.”
결국 각오했던 중 최악의 상황이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성질이 급한 놈이야. 시간 끌 이유도 없고.”
나도 녀석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얼굴이 아파서 사소한 행동도 함부로 못하겠다. 천천히 돌아눕던 중에 입구 근처의 서랍장에 걸쳐져 있는 낯익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적월신검이라고 했던가? 루크가 일 있을 때마다 비장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들고 다니던 장검이었다.
“본가에 가서 가지고 온 거야?”
“내 거니까.”
“저런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 총공세로 밀고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콴이 데리고 있던 조직원 백 명 정도야.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백 명이라니, 그 자식은 무슨 부하들이 그렇게나 많으냐?
“니 수하에 남은 인원은 고작 열댓 명이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넌…….”
루크가 내 얼굴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내가 그런 놈한테 맥없이 당할 것 같아?”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어떻게 이겨?”
“그렇게 생각하는데 넌 어째서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걸 꼭 말로 읊어야 되나? 질문 자체가 못마땅해서 녀석을 노려봤다.
“그걸 말이라고 해?”
“딴 소리 하지 말고.”
“니가 일을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가?”
“나 때문에 죽어도 괜찮아?”
“괜찮은 건 아니야.”
긴 말 하기도 울적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녀석이 어깨를 잡아서 나를 뒤로 나동그라지게 만들었다. 쓰러지면서 하필 얼굴을 매트리스에 부딪치는 바람에 기절할 뻔했다.
“넌 날 안 믿잖아. 내가 순전히 널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했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목숨을 걸어?”
낮에 있었던 일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지 녀석이 시비를 걸었다. 어떻게 지금 이런 말을 할 정신이 있나 모르겠다.
“나한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달라는 게 아니야.”
“나중에 하자.”
뭐라고 한마디로 말을 못하겠다. 이 상황도, 내 감정도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루크 첸이라는 인간 자체가 단순하질 않다. 알면 알수록 나는 루크에게서 마음에도 없는 결혼으로 어두운 권력을 틀어잡은 얄팍한 인간에게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이상한 모습을 보곤 했다.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나를 루크가 한 번 더 붙잡았다.
“나중엔 기회가 없다면?”
“…….”
“이게 마지막이라면, 나한테 무슨 말을 할 것 같아?”
“…….”
“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
“좋아해.”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뚱했지만 대답이 맘에 든 것 같았다.
“좋아하니까 같이 있고 싶은 거야. 무슨 일이 생기든, 안 좋을 때는 더…….”
용과 기린 그리고 발렌타인이 묵고 있는 객실엔 기린과 발렌타인 둘 뿐이었다. 둘 다 샤워라도 했는지 말갛고 촉촉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둘의 분위기는 뭔가, 밀월 중인 연인들의 그것처럼 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방안을 떠도는 공기에서조차 그런 향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용은?”
“식당에 갔어. 저녁때잖아.”
대꾸하면서 기린이 부어터진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넌 저녁 안 먹어?”
종목이 달라서 그렇지 먹는 양은 기린도 용에게 뒤지지 않는다. 용을 먼저 식당으로 보낸 사정은 대강 알겠지만…….
“이제 갈 거야.”
기린이 발렌타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기린은 저녁 먹으러 같이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발렌타인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넌 대체 얼굴이 노상 왜 그래?”
“어…….”
내가 어물쩍 얼버무리자 발렌타인이 내 뒤에 서 있는 루크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루크한테 얻어맞은 건 사실이지만, 허구한 날 두들겨 패고 얻어맞는 한심한 사이로 보이는 건 쪽팔렸다. 그게 사실도 아니고…….
“의견 충돌이 좀 있었어.”
“충격이 컸겠네.”
핀잔을 날리면서 발렌타인이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같이 안 갈래?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하고…….”
기린이 발렌타인의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저녁 같이 먹자고 꼬셨다. 발렌타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린이 가까이만 와도 움찔거렸었는데, 어느새 기린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편해졌다.
“피곤해.”
“그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갖고 올게.”
“됐어. 가.”
발렌타인이 머리를 뒤로 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후원은 어두웠다. 날이 저무는 시간에 맞춰서 밝혀지던 정원의 등도 오늘은 꺼져 있고, 본관 건물을 휘감은 홍등도 항상 내뿜던 유혹적인 붉은 빛을 잃은 채 밤바람에 스산하게 흔들리고만 있었다.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 소리, 그리고 발소리…… 항상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후원은 동양화 속 풍경처럼 아름답고 적막했다.
기린이 제일 앞에 가고, 나는 루크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어쩌면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드는데,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엔 이상한 일이 많이도 일어났었다. 시간을 담은 병이 콴의 손에 들어갔다니, 그럼 어쨌든 검은 군대의 귀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니콜라스는…….
갑자기 니콜라스의 얼굴이 눈앞에 그린 것처럼 떠올라서 걸음을 멈췄다. 니콜라스는 그 물건을 되찾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몬티첼리의 저택까지 나를 찾아왔었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습격을 받았던 거다.
시간을 담은 병이 중국계 조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니콜라스는 어떤 행동을 할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걸 되찾으려고 할 거고, 그럼 다시 위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정황상 살아 있는 건 확실하지만, 니콜라스는 이미 팔 하나를 잃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을 눈앞에서 지우려고 머리를 세게 흔들어 털었다. 당장 오늘 밤 살아남을 일이 막막한 처지에 주제 넘는 걱정이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니콜라스는 천년을 넘게 살고 있는 현자라니,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처리하고 앞으로도 잘 살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루크가 나를 돌아봤다.
“그 시간을 담은 병이란 거 말이야, 설마…….”
수정, 어린아이 주먹만 한 수정이라는 게 혹시 그건가? 보트 전복 사고 때문에 잠시 들렀던 니콜라스의 별장에서 우연히 봤던 그 목걸이, 내가 멋대로 꺼내서 안주머니에 몰래 집어넣었던…….
“왜? 뭔가 생각이 났어?”
“그게 혹시 목걸이야? 크기는 이만하고, 탁한 유리덩어리 같은…….”
“니콜라스 헤슬렘한테서 그런 거 받은 적 없다더니, 이제 생각이 나는 모양이네?”
루크가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맙소사, 어떻게…….”
맥이 빠져서 비틀거리다 옆에 있는 돌난간을 짚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그 수정 목걸이가 ‘시간을 담은 병’이었다니, 잠든 용의 군대를 깨울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다니…….
어떻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물건일 수 있을까? 그 수정은 니콜라스의 별장 구석방에 버려진 거나 다름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게 조금이라도 비싸고 중요한 물건처럼 보였으면 애초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 것도 모르고…….”
어이가 없어서 숨을 몰아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내 평생 딱 한번 해본 도둑질에 얻어 걸린 게 왜 하필 그런 물건이었을까? 그런 걸 집어온 것도 모자라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 뭐.”
루크가 다가와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물건 때문에 당장 오늘 밤에 죽게 생겼는데, 정말 마음도 넓다.
“그냥 보면 여자친구한테 선물하기도 마땅치 않은 허접한 유리 장신구처럼 보이잖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실제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물건이고…….”
“하지만 나 때문에…….”
“이건 너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야. 그 물건이 어디에 있었던 결국은 연방경찰이 찾아냈을 거고, 이런 식으로 내돌려졌을 거야.”
기왕 벌어진 일, 잘잘못 따지고 책임 추궁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서 그런지 루크가 쿨하게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차라리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이라도 한마디 날려주는 게 마음은 더 편하겠다.
“내가 간수를 좀 더 잘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잖아?”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간수를 잘 해?”
“하지만…….”
루크가 뭐라고 하던 나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 어떻게 일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됐어. 그런 물건을 은근슬쩍 너한테 떠넘긴 그 자식이 나쁜 놈이잖아?”
“사실은 그게…….”
“어차피 다 끝난 일이야.”
루크가 그 얘기는 그만하자는 투로 잘라 말하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시간을 담은 병이 이제 어디에 있는지 알았으니까, 그거면 됐어. 이제라도 찾아오면 그만이야.”
아무 눈치도 못 채고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던 기린이 골목길을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청연루 본관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다.
“왜 이렇게 어두워? 오늘은 장사 안 해?”
오는 내내 어둡고 인적도 없었는데 청연루 본관을 보고서야 이런다. 머릿속엔 발렌타인하고 밥 생각뿐, 다른 일엔 아무 관심도 없는 놈이다.
“임시 휴업이야.”
“그럼 저녁은?”
녀석이 저녁밥을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루크에게 따졌다. 임시 휴업을 하게 된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주방에 먹을 만한 게 있을 거야.”
“그래?”
그럼 됐다는 듯 기린이 청연루를 향해 돌아섰다. 그때 루크가 기린을 붙들어 세웠다.
“너 일 하나만 해라.”
“무슨 일?”
“안개 소환.”
기린이 루크를 멀뚱히 쳐다봤다. 동시에 나도 루크를 쳐다봤다.
“안개를 불러달라고?”
여기서 말하는 안개란, 기린이 발렌타인이랑 야외에서 뭔가 야한 짓을 하고 싶을 때 연막으로 사용하는…… 자연 발생적인 안개보다 열 배는 더 짙고 끈적해서 흡사 우유통 속에 빠진 것처럼 사람을 겁먹게 만드는 고약한 조화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그래서? 당신이 요구하면 자장면 배달하듯 냉큼 대령이라도 하란 말이야?”
“남자친구하고 재미 볼 때 연막으로 뻔질나게 불러대잖아? 힘든 일도 아니면서 이렇게 튕길래?”
“안개를 언제 불러내든 그거야 내 맘이지.”
기린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고집을 피웠다. 기린의 안개라…… 그 안개에 갇히면 일단 모든 활동이 전면 스톱이다. 안개를 유리하게 이용하기는 어렵지만 절제절명의 상황을 모면하기엔 더없이 괜찮은 아이템이다. 이런 묘안이 있었는데, 난 왜 그런 생각을 전혀 못했을까?
멍한 얼굴로 루크를 쳐다봤다. 머리가 좋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저런 잔머리를 굴릴 수 있다니, 정말 존경스럽다.
“그동안 먹여주고 재워줬잖아. 넌 내가 고맙지도 않냐?”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으면 고마웠겠지.”
그렇게 대꾸하고 기린이 싹 돌아섰다. 루크가 뒤통수라도 한대 후려갈길 것 같은 표정으로 기린을 노려봤다. 만약 여기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기린의 협조는 더더욱 물 건너가는 거다. 그래서 내가 얼른 기린에게 따라붙었다.
“야, 잠깐 있어 봐.”
“왜? 또?”
기린이 귀찮다는 듯 인상을 썼다.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면, 잠깐 도와줘도 괜찮잖아?”
“영문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어. 내가 신세를 지고 있는 건 맞지만 저 작자 부하가 된 건 아니잖아?”
그건 기린의 말이 맞다. 실은 아까 기린의 방에 내려갈 때만 해도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거처를 옮기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기린과 발렌타인 사이의 에로틱한 분위기에 놀라서 용건을 까먹고 있었다.
루크의 부하 두 명이 주방에서 대강 씻은 야채 한 광주리를 들고 나왔다. 웅크리면 어른도 들어갈 정도로 커다란 광주리에 야채랑 과일이 넘칠 정도로 가득했다. 팔다 남은 야채란 야채는 몽땅 다 담아온 모양이었다.
“습격이라고?”
저녁밥에 한 눈 파느라 기린은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영문도 모르면서 일에 끼어들 수는 없다고 해서 기껏 설명을 해줬더니…….
“그럼 싸움이라도 나는 거야? 언제?”
진작 와서 빈 스테이크 접시를 다섯 개째 쌓고 있던 용이 솔깃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언젠지는 쳐들어오는 놈들 마음이야.”
“여기 있다가 구경 좀 해도 될까?”
용이 스테이크를 야무지게 씹으며 속 편한 소릴 지껄였다.
“구경하다 죽어도 좋으면 니 맘대로 해!”
내가 벌컥 소리를 지르자 용이 입 다물고 다시 스테이크에 칼질을 하기 시작했다. 용을 보고 있으려니 얘네들을 이런 난장판에 끌어들이는 게 잘하는 짓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이쪽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이 두 녀석은 먹는 거, 노는 거밖에 모르는 애들일 뿐이다.
“그래서…… 도와달라는 거야?”
기린이 커다란 멜론을 껍질째 물어뜯으며 루크를 힐끔 쳐다봤다. 당장 오늘 밤에라도 대규모 습격이 있을지 모른다는 내 설명에 기린하고 용은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그래줬으면 해.”
말을 하면서도 어린애한테 너무 위험한 일을 시키는 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기린이 쌀쌀맞게 고개를 흔들었다.
“난 인간들 다툼에 끼어들기 싫어.”
기린은 본래 무슨 일이든 처음부터 고분고분 들어주는 일이 없다. 녀석은 전에도 내 부탁을 싹 무시했다가 루크가 밥 사주면서 라두칸 찾는 걸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니까 미끼를 덥석 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루크도 기린한테 다른 흥정을 붙일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잠잠히 듣고 있던 루크가 실눈을 뜨고 기린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남자친구 데리고 내 호텔에서 당장 나가!”
“이거 좀 먹고…….”
기린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루크의 약을 슬슬 올리면서 즐겁게 저녁을 먹고 있을 때 2층에서 사람이 하나 내려왔다. 현재 1층 메인 홀에 모여 있는 인원이 딱 열 명이라서 더 이상은 남은 사람이 없는 줄 알았는데 위에 사람이 더 있었나 보다.
누군가 싶어서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쟤가 어떻게…….
“자오?”
“좀 쉬었어?”
자오가 내 얼굴을 힐끔 보며 물었다.
“응…….”
보통 때라면 자오가 여기 있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오는 루크가 심부름을 보내거나, 심한 부상을 당했을 때 외엔 주변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관해서는 루크 때문에 목숨까지 걸 만한 의리는 없다는 투였는데…….
“그런데 넌 여기서 뭐해?”
“나 말이야?”
자오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넌 빠지는 거 아니었어? 아까 분명히…….”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콴하고 그렇게까지 안 좋은 일은 없다고 했잖아?”
“그건 그쪽 얘기고, 난 그 자식, 옛날부터 재수 없었어.”
자오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한창 식사 중인 용과 기린에게 다가갔다.
“니네는 무슨 밥을 한 시간이나 먹고 있어? 오늘이 누구 생일이야?”
“왜 그래?”
자오의 타박에 기린과 용이 음식을 한입씩 물고 우물거리며 되물었다. 대답 대신 자오가 루크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얘네들은 왜 여태 여기 있어요? 안 내보내요?”
“니가 좀 끌고 나가라.”
속사정을 모르는 자오의 추궁에 루크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수박만한 멜론 하나를 흔적도 없이 해치우고 이번엔 호박을 먹을까? 가지를 먹을까? 입맛을 다시며 광주리를 뒤지던 기린이 루크를 보고 피식 웃었다.
“형편이 어지간히 안 좋은가 봐? 다들 얼굴이 아주 하얗게 질렸네?”
굳이 저렇게까지 약을 올리지 않아도 루크는 지금 충분히 심기가 불편하다.
“그거나 빨리 먹고 꺼져! 너하고 그 허접한 안개 같은 거 필요 없어!”
“진심이야?”
루크가 일어나려고 움찔하는 걸 내가 잡아 앉혔다.
“참아. 밥 먹고 간다잖아.”
나는 처음부터 기린하고 용이 아직까지 여기서 얼쩡거리는 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기린이 가진 재주가 어쩌면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여기는 곧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변할 거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수 차이가 열 배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남은 사람은 각자 남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는 거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애들까지 이런 난장판에 휘말리게 하는 건 아무리 형편이 아쉬워도 할 짓이 아니다.
“대강 먹고 발렌타인 데리고 빠져나가.”
“아직 초저녁인데 뭐가 그렇게 급해?”
기린이 가지를 껌처럼 질겅질겅 씹으며 건방을 떨었다.
“시간을 정하는 건 우리가 아니거든.”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기린에게 던졌다.
“뭐야?”
얼결에 지갑을 받아든 기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장 다른 호텔을 찾는 것부터가 돈 드는 일인데, 용하고 기린은 돈이 없다. 발렌타인이 빈털터리는 아니겠지만, 이 두 녀석을 데리고 버티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닐 거다. 까다롭거나 성격이 나쁜 애들은 아니지만 돈이 많이 드는 녀석들이다.
“카드 쓰는 법은 알지?”
나한테는 몇 달 월급이지만 이 녀석들한테는 한 달 식비나 될지 모르겠다.
“이제 이런 거 필요 없다는 뜻이야?”
기린이 뭔가 불길한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지갑을 쳐다봤다.
“나중에 돌려줘.”
기린이 나 한번, 지갑 한번 쳐다보며 뭔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쪽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2층에 사람이 몇 명 더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인원이 한두 명 더 많거나 적다고 해서 뭔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옷이 뭐 이래? 마음에 안 들어.”
발소리와 함께 툴툴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젊은 남자였다. 목소리에 끌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남자가 누군지 깨닫기도 전에 혈관에 차가운 피가 흐르는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너…….”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남자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신은 존재할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목격하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악마는 분명히 있었다.
온 몸이 부서지고 꺾인 채 여기저기 나동그라져있던 시체들, 맑은 물 대신 붉은 피가 솟구치던 분수, 하얀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러 작은 시내처럼 흘러넘치던 피, 그리고 또 피…… 지옥 한복판 같던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 로비의 풍경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졌다.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어온 나도 그렇게 참혹하고 엽기적인 광경은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뒤로 물러서면서 루크에게 따졌다. 목이 막혀서 더는 말도 안 나왔다.
“그렇게 놀랄 거 없어.”
“장난해?”
녀석은 살인범이다. 하지만 단순한 살인범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것도 녀석의 정체를 제대로 설명하기엔 부족했다. 배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무장한 기사들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던 녀석의 모습은 저승에서 뛰쳐나온 악마, 그 자체였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가 봐?”
필립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피식 웃었다. 제 딴엔 농담이라고 저런 소리 하는 모양인데,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음산하고 징그러울 뿐이다.
“이건 또 뭐야?”
기린이 씹던 오이를 내려놓고 필립을 경계의 눈빛으로 노려봤다. 용도 어느새 스테이크 접시를 옆으로 밀고 팔짱을 꼈다. 쟤네들 눈에도 놈이 예사로 보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필립이야.”
일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도 머리가 아픈지 루크가 이마를 짚으며 간단하게 뉴페이스를 소개했다.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닌데?”
“자세한 건 알 필요 없어. 사이좋게 지낼 필요도 없고, 그냥 싸우지만 마.”
루크가 더는 군소리 말라는 듯 말을 딱 잘랐다. 하지만 나는 이 사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야겠다. 무슨 말을 들어도 설득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너…….”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서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은 걸 옆에 있는 테이블을 잡고 간신히 버텼다.
“어떻게 저 녀석을 풀어줄 수가 있어? 미쳤어?”
“진정해.”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태연한 루크의 태도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대공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정확히 몇 명인지도 알 수 없고, 수십 명의 기사단원이 완전무장을 하고 달려들었다가 놈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대공은 내가 알고 있는 흉악범 중에서도 제일 흉악하고 위험한 놈이었다. 지난번에 놈을 잡을 수 있었던 건 한마디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건 연달아 두 번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운이었다.
“영원히 지하 감옥에 가둬둘 수는 없잖아?”
“영원히 가둬둘 자신도 없으면서 뭐 땜에 저놈을 집안에 뒀던 건데?”
이래서 대공이 루크네 본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마음대로 집어넣고 싶은 놈 집어넣고, 꺼내주고 싶은 놈 꺼내주고…… 어떻게 이러냐?
루크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과는 별개로 녀석에게는 내가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동조할 수도 없는 면이 분명히 있었다. 이런 식으로 그걸 확인할 때마다 정말 절망스럽다.
“제이.”
루크가 차분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이 일은 나한테 중요해. 시간을 담은 병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악마하고라도 거래를 했을 거야.”
죽음의 대공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일에 대해 일말의 후회나 우려도 없다는 투였다.
“실제로 악마하고 거래를 한 거야!”
“저 녀석은 그 정도는 아니야.”
본관에 도착해서 열 명 남짓 남아 있는 루크의 부하들을 봤을 때는 상황이 예상했던 경우 중 최악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상상조차 못했던 최악이었다.
“그 잘난 갱단 주도권 싸움에 저런 놈까지 끌어들여야 돼? 쉽게 안 죽는다고 뭐 대단한 대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히든카드가 겨우 저놈이었어?”
“썩 미덥진 않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저통을 집어 들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서 꽤 크고 무거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오가 얼른 쫓아와서 팔을 비트는 바람에 던지지는 못했다.
“차라리 아까 그 길로 공항에 가서 아무 비행기나 잡아타고 떠나버리지 그랬어? 이 빌어먹을 놈아!!”
한번 입이 터지니까 쏟아져 나오는 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크한테 살면서 들었던 욕이란 욕은 다 퍼붓다가 결국 자오한테 번쩍 들려서 건물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도 회장님 결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자오가 나를 연못 근처에 있는 벤치에 내려놓으면서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끝까지 말렸어야지!”
“본가에 같이 갔으면 말렸겠지.”
자오도 대공 때문에 사경을 헤맬 정도로 치명상을 입었었다. 같이 갔으면 놈을 풀어주는 미친 짓에 동조했을 리 없다. 어쩐지 어딜 가나 달고 다니던 자오를 굳이 떨궈 놓고 가더라니……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란 것도 허울 좋은 핑계였던 거다.
“진정해. 어차피 우리 입장에선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대공의 첫 피해자인 티파니 샤오란의 바싹 마른 사체부터 시작해서 그간 놈이 저지르고 다닌 범죄 현장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 사건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생각을 하는 것도 끔찍해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말았다.
“나도 좀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건 훨씬 더 나빠.”
“글쎄…….”
자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오늘 저녁에 죽는 거면, 그 다음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잖아?”
어떻게 루크하고 그 주변에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백 명이나 된다는 깡패 타격대가 언제 밀어닥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을 맞아,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을 하고 있어도 모자랄 형편이지만 정신이 도통 돌아오질 않았다. 귀신을 봤어도 내가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자오.”
“왜?”
자오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다가 나를 돌아봤다.
“니 친구 콴한테 전화해서…….”
“왜 내가 그 자식하고 친구야?”
친구라는 말조차 기분 나쁘다는 듯 자오가 퉁명스럽게 따졌다.
“어쨌든 전화해서 웬만하면 오지 말라고 해.”
특공대나 다름없는 기사단도 대공한테 걸려서 떼죽음을 당했다. 콴의 부하들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땐 최소한 반은 저 녀석 밥이다. 루크가 뭘 어떻게 하기로 하고 놈을 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엔 우리가 밥이 될 거다.
“전화로 오지 말라고 하면, 그놈들이 안 와?”
“대공 그 자식 사진을 한 장 찍어서 보내보면…….”
“그 자식들이 대공이 뭐하는 놈인지 알게 뭐야?”
자오의 대꾸가 이해가 안 돼서 잠깐 혼자서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 해봐도 콴이 대공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놈은 흑풍회 수장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차이나타운 2인자였다. 선대 회장이자 루크의 장인이기도 한 첸 진의 조카, 혹은 밖에서 낳은 아들이라면 정보 면에서도 루크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였을 거다. 게다가 루크가 대공한테 당해서 사경을 헤매는 안 좋은 시기를 틈타서 아예 루크를 제거하려고 뒷공작까지 벌였었는데 대공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나?
“그 자식은 본래 돈하고 여자, 그리고 노 회장님 조카라고 잘난 척 거드름 피우는 것 외에 다른 일엔 관심도 없는 놈이야. 회장님하고 기사단이 대공을 뒤쫓느라 며칠 잠도 못 자고 시내를 뒤질 때에도 그 자식은 코빼기도 안 내밀었었어.”
“하지만…….”
“뱀파이어를 잡으러 다녔다는 말은 들었겠지. 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도 있잖아. 나도 대공이 날아다니면서 사람 잡는 거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어떤 놈인지 몰랐을 거야.”
“…….”
“그리고 지금 그놈들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무장한 조폭 백 명을 당해내겠어? 타격은 있겠지만 우리가 한참 불리해.”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도 이젠 헛갈린다. 내 인생엔 어느 순간부터 명확하고 분명한 게 하나도 없었다.
“다른 생각 길게 할 거 없어.”
넋이 반쯤 나가 있는 내 어깨를 자오가 툭 건드렸다.
“어떻게 하면 내일 아침에 해 뜨는 걸 다시 볼 수 있을지…… 그거나 생각해.”
자오를 따라서 터덜터덜 홀로 돌아가는데, 마치 괴물이 사는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자오 말대로 오늘 밤을 어떻게 무사히 넘길까 하는 궁리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한 판인데 아군 진영 한복판에 저런 놈까지 버티고 있으니, 무섭고 싫어서 돌 것 같다.
나하고 자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홀 안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일단 들어가기는 했지만 홀 안쪽으로는 접근도 못하고, 대공이 버티고 있는 자리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테라스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서가던 자오가 내가 쫓아오는 기색이 없는 걸 깨닫고 두리번거리다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차라도 한 잔 줄까?”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지금은 안 되겠지?
“괜찮아. 생각 없어.”
됐다는데 굳이 차 한 잔을 가져와서 앞에 놔주고 자오도 옆자리에 앉았다. 애써 내색은 않고 있지만 자오도 대공 근처에는 가기 싫은 거다. 녀석의 정체를 알고도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건 루크뿐이었다.
나를 보고 야릇한 미소를 짓던 대공이 기린이 식사 중인 테이블에 냉큼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기린의 저녁밥이 든 바구니를 허락도 없이 뒤적거리다가 빨간 토마토를 한 개 꺼냈다.
“어우…… 맛이 뭐 이래?”
토마토에 코를 대고 냄새도 맡고, 날름거리며 핥아도 보다가 한입 베어 물고 씹던 녀석이 인상을 쓰며 토마토를 뱉어냈다.
대공이 하는 짓을 가만 보고 있던 기린이 녀석의 손에서 토마토를 거칠게 낚아 갔다. 겨우 토마토 한 개 때문에 마음이 상한 대공과 기린이 불꽃이 튀도록 서로를 사납게 노려봤다.
“한번만 더 내 밥에 손대면 그땐 모가지를 분질러버리겠어!”
기린의 살벌한 경고에 대공이 행…… 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걱정 마. 난 그 딴 거 두 번 다시 입에 댈 생각 없어.”
밉살맞게 대꾸하고 나서 대공이 루크를 쳐다봤다.
“나 배고파.”
“알아.”
손으로 이마를 짚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루크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당신 말 들으면 밥은 먹게 해준다며?”
하필 물 한 모금 마시다가 그 소리에 사래가 들려서 자오한테 뿜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아무래도 백화점 사건 때 충격을 심하게 받았었나 보다. 앉아만 있는데도 무릎이 덜덜 떨리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석방 교섭 중에 저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을지 상상하기도 두렵다.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이 났다.
“뭐……야?”
문을 밀고 홀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던 발렌타인이 자동소총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루크의 부하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별 생각 없이 식당 문을 밀고 들어왔는데 대접이 이 따위면 누구라도 싫을 거다.
그 와중에 기린만은 발렌타인이 반가워서 먹던 오이도 집어던지고 활짝 웃으면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어?”
발렌타인이 문에서 제일 가까운 데 앉아 있는데다 개중 만만한 나를 노려보며 따졌다.
“어…… 좀…….”
“그게 대답이야?”
한마디로는 설명이 곤란한 일이라 딴청을 피우다가 하필이면 또 대공이랑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내 표정이 흙 씹은 것처럼 일그러지는 걸 본 발렌타인이 내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저건……?”
대공을 발견한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왔어? 피곤해서 잔다더니?”
기린이 날듯이 달려와서 발렌타인 앞에 섰다. 누가 보면 되게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는지 알겠다.
“자다 깼어.”
발렌타인이 앞을 막아선 기린을 옆으로 밀고 다시 대공을 주시했다. 한 눈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 자식을 업고 돌아다녔었는데…….
“왜?”
“너무 조용해서.”
발렌타인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눈치 빠르고 예민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오는 길에 인적 없는 정원과 불 꺼진 건물을 봤을 테니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도 남았을 거다.
기린에게서 띄엄띄엄 조만간 벌어질 대규모 습격에 대해 설명을 듣는 동안에도 발렌타인은 대공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습격보다는 오히려 대공이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그런 일이 있는데,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애들을 여기 계속 잡아둔 거야?”
대공을 노려보던 마땅치 않은 시선이 이번엔 내게 와서 꽂혔다. 애들한테 나쁜 짓을 시키려다가 애들 아버지한테 딱 걸린 기분이었다.
“저녁만 먹이고 내보내려던 참이었어.”
당황해서 말을 좀 더듬었더니 발렌타인이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듯 기린을 돌아봤다. 기린이 사실이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발렌타인의 눈에서 힘이 좀 빠졌다.
“저녁은 다 먹었어?”
“응. 거의.”
“그럼 나가자. 공연히 얼쩡거리다 휘말려서 좋을 거 없으니까.”
맹물처럼 담담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종전에 비해 태도가 상당히 부드러워진 거고, 기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거다. 그런데 발렌타인의 재촉에 기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글쎄라니?”
발렌타인이 다시 필립을 주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은 근처에 있는 호텔에 잠깐 피해 있어. 난 좀 거들어주고 갈게.”
“거들긴 뭘 거들어? 니가 깡패 조직원이야?”
“그동안 신세진 것도 있는데, 모른 척하긴 그렇잖아.”
아까 루크가 도와달라고 할 때는 딱 잘라서 싫다고 하더니,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하지만 발렌타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신세? 호텔방 며칠 빌린 거하고, 밥 몇 끼 얻어먹은 거?”
“뭐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그게 목숨을 버릴 정도로 대단한 신세야?”
발렌타인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투로 말을 자르고 일어났다. 그리고 홀 한복판에서 콜라로 입가심하고 있던 용에게도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왜?”
용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몰라서 물어? 앞장 서!”
“난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
용이 자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린은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사정이 있지만, 용은 그런 것도 아니고 있어 봐야 본인만 위험해질 뿐이었다. 자오도 그간 용하고 정이 많이 들었었는지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다정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헛소리 작작하고 빨리 꺼져!”
발렌타인이 밍기적거리는 용의 뒷덜미를 잡아서 문 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나를 돌아봤다.
“넌?”
“나?”
“이런 시시한 패싸움에 엮여서 죽을 만큼 바보는 아니잖아?”
그런 말을 들으니까 내가 진짜 바보 같다.
“나야 뭐…….”
어깨를 으쓱하며 어물쩍 얼버무리자 발렌타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야? 사랑에 목숨을 거는 거야?”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가면 되지, 그렇게 비아냥거릴 건 뭐냐? 사람 민망하게…….
“당신이 그런 거 비웃을 처지는 아니잖아?”
“처지가 무슨 상관이야? 웃기면 웃는 거지.”
쿨 하게 대꾸하고 나서 발렌타인이 용과 기린을 말 안 듣는 망아지 몰 듯 문 쪽으로 거칠게 밀었다.
그때 어디선가 윙 하는 진동음이 울렸다. 뭔가 싶어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자오가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드는 중이었다. 이 와중에 전화라니…… 좀 웃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자오가 당황한 기색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어, 엄마…….”
자오가 재빨리 전화기를 틀어막고는 슬금슬금 홀 구석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한참 통화를 하는데 중국말이라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걸로 봐서 자오 어머니가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건 확실했다.
느낌엔 어머니가 뒤늦게 상황을 알고 빨리 빠져 나오라고 다그치는 것 같은데, 자오는 처음 한마디 외엔 대꾸도 없이 그 시끄러운 야단을 듣고만 있었다. 변명할 말도 없을 거다. 보통 때처럼 다녀오겠습니다 한마디 하고 나와서 이러고 있는 거면…….
전화기 너머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린 어머니 때문에 쩔쩔 매던 자오가 힘들게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 좀 전보다 한층 어둡고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문가에서 발렌타인하고 실랑이를 하다 막 문밖으로 밀려나가던 기린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밖으로 나가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
자오가 기린하고 용을 다시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걸었다.
“무슨 뜻이야?”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자오와 마주섰다.
“안전하게 빠져 나가긴 늦은 것 같단 뜻이야. 콴의 부하들이 벌써 차이나타운에 쫙 풀렸대.”
빠르다. 이제 겨우 날이 저물기 시작했을 뿐인데…… 기습이라면 새벽쯤에 들이닥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저쪽도 어지간히 안달이 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좀 전에 그 전화, 엄마한테서 온 거 아니었어?”
정황상 분명히 어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자오 어머니가 아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걱정돼서 연락한 것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차이나타운 돌아가는 정황을 실시간으로 알고 찔러주셨다고 보기는 좀…….
“우리 엄마도 정보가 빨라.”
자오가 귓불을 붉히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한동안 잠잠히 앉아 있던 루크가 고개를 들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 앉아서 자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루크는 뭔가 생각이 깊었다. 저렇게 진지한 면도 있구나 싶어서 낯이 설 정도였다.
“콴이 흑풍회 사무실을 접수했다는데요.”
자오가 루크에게로 다가가서 담담하게 상황을 알렸다.
“지키는 사람도 없는 빈 사무실에 들어가 앉은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그게 한 시간쯤 전이고, 그 녀석 부하들이 지금 청연루 주변을 다 에워싸고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 태세랍니다.”
“니네 어머니가 어디서 망원경으로 정탐이라도 하고 계신 거야?”
“지금 백 대인 댁에 계신답니다.”
자오의 대답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어머니 극성에 백 대인이 혼쭐이 나고 있겠네?”
“그렇겠죠.”
루크와 자오의 대화가 잠깐 끊어졌다. 그 침묵과 동시에 홀 안의 분위기가 납덩이를 얹은 듯 무거워졌다. 루크의 부하들은 얼굴이 사색이 돼서 자기들끼리 구석에 모여서 떨고 있고, 발렌타인은 자기하고 애들을 이런 위험에 빠뜨린 게 못마땅해서 나를 쏘아보는 눈빛에서 레이저빔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이 홀 안에서 다른 짓을 하고 있는 건 대공뿐이었다. 녀석은 기린의 저녁밥 광주리를 뒤져서 빨간 순무 하나를 찾아 들고는 이건 맛이 어떨까 하는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심각함, 두려움 뭐 이런 건 찾아볼 수도 없고 녀석의 눈빛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게 있다면 딱 하나, 극심한 배고픔 정도였다.
“저희도 뭔가 대비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자오가 동료들 쪽을 힐끔 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 대비?”
“정원에 나가서 매복을 한다든가…….”
자오도 딱히 이거다 싶은 전략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가만있기 답답하니까 뭐라도 하자는 말인데, 루크는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 자체가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백 명이 몰려오는데 열 명으로 매복을 하자는 게 말이 돼? 게다가 여기 어디 정글이라도 있어? 그냥 예쁘게만 꾸며놓은 손바닥만 한 앞마당에서 매복은 무슨 매복이야?”
“그럼, 여기 다 같이 모여 있다가 한꺼번에 당하는 게 더 나을까요?”
루크한테 면박을 당한 자오가 투덜거렸다.
“기다려. 어차피 내 상대는 그놈들이 아니야.”
저런 게 보스의 여유일까? 아니면 상황이 감당 안 돼서 살짝 미친 걸까? 답답한 심정으로 루크를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대공이 순무를 한 입 씹어 보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힐끔거리기 시작하는데, 그 눈빛이 흡사 초원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사슴을 지켜보는 사자의 눈빛처럼 음산했다. 지금 제일 큰 문제는 루크가 대공이랑 너무 가까이 있다는 거였다. 다른 건 다 나중 문제다.
탈출은 이미 텄다는 소리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발렌타인이 대공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더니 자오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물었다.
“총 남은 거 있어?”
발렌타인의 요구에 자오가 어쩔까요? 하는 눈빛으로 루크를 봤다. 그제야 루크가 발렌타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특별히 원하는 기종이라도 있습니까?”
그 물음에 발렌타인이 루크의 다른 부하들이 하나씩 쥐고 있는 자동소총을 가리켰다.
“난 취향이 그렇게 까다로운 편은 아니니까…… 저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발렌타인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는 투지만 루크의 부하들이 들고 있는 건 데릭앤 소여사의 JP7 시리즈의 최신형이었다. 아무래도 좁은 건물 안에서의 교전이 될 테니까 무기는 적절하게 잘 골랐다. 물론 문 밖에서 돌격 준비를 하고 있는 놈들도 비슷한 수준의 무장을 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된 게 요즘엔 갱들의 화력이 특수부대하고 막상막하다.
“지하에 무기고가 있으니까 내려가서 입맛대로 골라 보시죠.”
그렇게 말하면서 루크가 한쪽에 모여 있는 부하들 중 하나에게 손짓을 했다.
발렌타인이 루크의 부하를 따라 지하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기린과 용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쫄쫄 따라 붙었다. 이 상황에서 믿을 게 저런 애 녀석하고 또 저런…… 헉…….
대공을 돌아보다가 기겁해서 루크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태평하게 앉아 있는 루크를 자리에서 끌어냈다.
대공이 어느 틈에 루크의 등 뒤에 붙어 서서 그 목덜미를 홀린 듯 쳐다보고 있는 걸 봤을 땐 심장이 그대로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
“왜 이래? 갑자기…….”
“알 거 없어.”
설명하기도 기분 나빠서 그렇게만 대꾸하고 루크를 벽 쪽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대공과 마주섰다.
“왜 이렇게 냉정해? 백화점에선 그렇게 귀엽고 다정하더니…….”
루크를 기습해서 배 채울 기회를 놓친 대공이 이번엔 나를 향해서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빌어먹을 감방에 묶여서 니 생각 정말 많이 했었어.”
그런 소리 하면 내가 되게 겁먹을 줄 아는 모양인데, 감방에서 내 생각을 하며 이를 갈고 있는 놈은 이미 하나둘이 아니다.
“그럼, 내 손에 죽을 뻔했던 것도 기억나?”
그 한마디에 대공의 입가에서 징그러운 미소가 싹 가셨다.
“어떻게 잊겠어? 그렇게 짜릿한 경험을?”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녀석이 한 걸음 다가왔다.
“기억을 한다니까 긴말 않겠어. 너, 내 말 잘 들어.”
나도 녀석 쪽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한번만 더 내 친구한테 눈독들이면, 그땐 완전히 반 토막을 내버리겠어!”
이 자식이, 말이 말 같지 않나? 왜 딴청이야? 내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대공이 눈을 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바람의 냄새를 맡듯…… 깊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대공의 입가에 또다시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너…….”
그때 대공이 내 어깨너머로 루크에게 조용히 말했다.
“온 것 같은데?”
저벅거리는 어지러운 발소리가 청연루를 에워쌌다. 오래 준비하고 결행하는 일인 듯 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단단히 잠겨 있던 청연루의 대문이 집중된 총격에 조각조각 깨져나갔고, 줄잡아 50여 명은 넘어 보이는 무장한 갱들이 일거에 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게 뭐야?”
“불이라도 지른 건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홀 안의 풍경에 선발대가 주춤했다.
“정신 차려! 이거 연막이야!”
“샅샅이 뒤져! 분명히 안에 있어!”
청연루를 가득 채운 뿌연 연기에 당황한 습격자들이 총을 고쳐 쥐고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안개는 아직까지는 그렇게 짙지 않았다. 하지만 곳곳에 칸막이와 시야를 가리는 큰 항아리, 키 높이는 족히 넘는 소나무 화분 따위가 놓여 있어서 한눈에 홀 안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놈들이 테이블이며 의자를 거칠게 밀치면서 개방된 구역을 지나서 좀 더 안쪽, 칸막이로 가려진 작은 방들이 흩어져 있는 내실 구역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제 놈들과의 거리는 불과 10여 미터였다.
애초에 예상했던 숫자가 백 명이라 의외로 수가 적다는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정상적인 교전으로 이길 수 있는 규모는 이미 넘었다. 이 와중에 루크가 자오에게 병력 절반을 맡겨서 2층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지금 1층 홀에 남아 있는 건 여섯 명뿐이었다. 그런데 발렌타인이 기린하고 용을 주방에 밀어 넣고 그 앞을 지키고 있으니까 실제로 교전 가능한 인원은 4명뿐이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내 선택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2층으로 통하는 홀 중앙의 계단 쪽을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안개가 삽시간에 더 짙어진 탓에 루크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제 습격자와의 거리는 그야말로 지척이었다. 놈이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나도 총을 쥐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초의 총성이 울린 것은 주방 쪽이었다.
기관단총의 연사가 아니라 한발씩 딱딱 끊어지는 총성이 세 번 정도 들려왔고, 거의 동시에 비명, 사람이 쓰러지면서 내는 둔탁한 소리, 자동소총의 난사음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2층에서도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릿한 안개에 갇힌 습격자들이 침착함을 잃고 사방에 총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기린의 안개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대단했다. 앞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보일 듯 말 듯 애매한 안개는 오히려 앞이 전혀 안 보이는 짙은 안개보다 사람을 더 허둥거리게 만들었다.
콴의 부하들이 적군과 아군을 쉽게 분간하지 못하고 겁에 질린 채 닥치는 대로 총질을 해대는 와중에 내가 몸을 숨기고 있던 대형 화분이 그 총격에 쩍쩍 금이 가고 입술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이 여우같은 자식, 연기를 피워 놓고 2층에 숨어 있는 것 같아!”
“밖에 연락해서 애들 다 들여보내라고 해!”
“빌어먹을! 창문 좀 열어!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습격자 한 놈이 계단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총을 겨눈 것은 거의 동시였지만 간발의 차이로 내 운이 더 좋았다.
습격자가 배에서 뜨거운 피를 쏟으며 앞으로 거꾸러졌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서 나도 그 피를 뒤집어쓰다시피 했다. 확 끼치는 피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손등으로 눈에 튄 피를 훔치면서 몸을 낮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 사이 몇 놈은 내 앞을 지나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몇 놈은 창이란 창엔 모조리 총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급한 대로 환기라도 시키면 시야가 트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건물 바깥쪽도 온통 희뿌연 안개였다.
기린의 안개가 나한테는 이미 낯설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전이라니…… 어쩌다 보니 사방이 습격자들로 에워싸인 데다 앞도 안 보이는 와중에 총성은 지척에서 들려오고, 그와 함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점점 더해져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안개 저편에서…….
“루크 첸이다! 이쪽이야!”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어지러운 총성과 비명소리가 귀를 찔렀다. 설마…….
속이 얼어붙는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면서 무작정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짙은 안개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잠시 풀린 듯 걷히면서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습격자들의 처참한 몰골이 드러났다. 그리고 또 안개, 그리고 또…….
“루크?”
피가 흥건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얼핏 루크와 비슷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그 소리에 사방에서 어른거리던 대여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게 마지막인가? 뭐 하나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하는 따위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과 함께 다시 짙은 안개가 몰려왔고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와 힘으로 나를 덮쳤다. 거의 동시에 습격자들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조심 좀 해!”
루크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내 귓불을 꽉 깨물었다. 바닥을 뒹구느라 누구 건지도 모를 피로 온 몸이 다 젖었는데,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얻다 대고 장난질이야!
“아파!”
“총에 맞았으면 훨씬 더 아팠을 거야.”
빈정거리면서 나를 잡아 일으키는 루크의 등 뒤로 다시 검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안개 때문에 놈들이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며 숫자를 줄이고 있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그때마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심장이 경련을 했다. 등 뒤에서 기척을 느낀 루크가 나를 놓고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루크가 습격자 쪽으로 몸을 틀기도 전에 또 다른 그림자가 바람을 일으키며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으악!!”
왜 하필 또 이런 때 바람이 안개를 불어 날렸을까? 대공이 습격자의 목을 물어뜯는 참혹한 광경에 주춤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대공의 살인을 목격하는 건 심리적인 타격이 컸다.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사냥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목숨을 빼앗는 게 아니라 잡아먹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안개 때문에 고전하던 습격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참사까지 목격하고는 총을 손에서 놓을 정도로 당황했다.
잠시 후 그 참혹한 장면은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지만, 머릿속에는 평생이라도 남을 것 같았다.
“일어나!”
맥이 풀려서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루크가 나를 질질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개도 이젠 상당히 짙어져서 내 눈엔 아무것도 분간이 안 되는데, 방향은 알고 가나? 루크한테 끌려가는 동안에도 눈앞에는 대공에게 목을 물어 뜯겨 비명 한마디 못 지르고 죽어가던 습격자의 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어쨌든 그놈 덕에 살았는데도 고맙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이렇게 거치적거릴 줄 알았으면 진작 아파트로 쫓아버리는 건데…….”
뒤쪽에선 대공이 습격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있는지 산발적인 총성과 함께 외마디 비명, 혹은 사람의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어.”
막 중심을 잡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루크가 나를 거칠게 팽개쳤다. 바로 다음 순간, 머리 위에서 단발의 총성이 울렸다. 기겁해서 몸을 일으켜 보니 코앞에서 루크와 발렌타인이 서로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루크의 검은 발렌타인의 목에 닿아 있었고, 다른 한 손으론 총을 쥔 발렌타인의 손목을 단단히 틀어잡은 상태였다. 지금 구도만 보면 검을 든 루크가 총을 들고 있는 발렌타인을 이겼다. 내 남자친구지만 좀 대단하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조심 좀 하지?”
루크가 발렌타인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생기는 것도 없이 남의 싸움에 말려든 발렌타인의 심기도 만만치 않게 불편했다.
“너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어?”
둘이 잠깐 붙어 서서 실랑이를 벌이는 그 짧은 동안에 뒤에서 또 컥…… 하고 숨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서슬에 루크와 발렌타인이 동시에 총칼을 거두고 떨어져 섰다. 다음 순간, 또 누군가가 총질을 해댔고, 루크, 발렌타인 그리고 나까지 셋이 모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기린이 연막을 쳤다고 해도 안전하고는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루크가 내 멱살을 잡아서 어딘가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바닥을 두 바퀴 정도 구른 후에 뭔가 단단한 것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니, 단단한 게 아니고 이건…… 사람 다리 같은데?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여긴 주방이고, 다리의 주인은 용이었다.
“꼴이 이게 뭐야?”
용이 나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몰골만 보면 나는 과다출혈로 다 죽어가는 중이었다.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다쳤어?”
어디서 아삭아삭 소리가 난다 했더니, 기린이 싱크대 위에 걸터앉아서 배추를 뜯어 먹고 있었다. 밖은 깡패 타격대와 뱀파이어가 날뛰는 아비규환인데 이 안은 평화롭기도 하다. 후드가 풀가동 중이라 그런지 안개도 많이 흐리고…….
“그냥 피만 묻었어.”
기린하고 안부인사 나누는 동안 발렌타인도 주방 안으로 피해 들어왔다. 바깥쪽은 이제 거의 먹통이었다. 문이나 빨리 닫았으면 좋겠는데, 루크가 여태 문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왜 저러나 했더니…….
“필립! 대강 설치고 들어와!”
루크가 안개 속에 대고 소리쳤다. 내가 가까이에 있었으면 저 입을 틀어막았을 거다.
“이제 어쩔 거야?”
발렌타인이 주방으로 들어서는 루크에게 벌컥 화를 냈다.
“뱀파이어 한 마리 풀어 놓고 언제까지 안개 속에 숨어서 버티는 게 당신 작전이야?”
“왜? 맘에 안 들어?”
잘못하면 이제 둘이 한판 붙을 분위기였다. 다행히 루크와 발렌타인 사이로 대공이 불쑥 들어서는 바람에 둘 다 흠칫 놀라서 한발씩 물러섰다.
온 얼굴과 몸에 피 칠갑을 하고 들어온 대공의 모습은 눈 뜨고 보기 괴로울 정도로 괴기했다. 얼굴과 손에서는 아직도 더운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피를 양껏 들이키고 난 후의 저 만족스럽고 여유로운 표정이라니…….
발렌타인이 오만상을 다 찡그리며 대공 쪽으로 총구를 돌렸다.
“한창 파티 중이었는데, 왜?”
대공이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날름 핥으며 투덜거렸다.
“초반부터 너무 달리면 곤란해. 진짜 파티는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
“그래?”
대공이 눈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대공처럼 들뜬 얼굴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전부 미심쩍은 눈초리로 루크를 쳐다봤다.
“진짜 파티라니?”
내가 물었다.
“행사란 게 본래 중요한 순서는 2부에 몰려 있잖아?”
루크가 주방 안쪽에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보통 주방에는 음식이나 나르는 작은 승강기가 설치되는 거하곤 달리 청연루 주방엔 사람이 직접 트레이를 싣고 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하지만 용도가 용도인 만큼 성인 남자 여섯 명이 타기는 너무 협소했다.
“이걸 타라고?”
발렌타인은 엘리베이터에 타는 게 전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지하에 비밀 통로가 있어.”
“비밀통로?”
영화 같은 걸 보면 고성엔 본래 유사시를 대비해서 그런 은밀한 탈출구가 하나 정도는 있다. 하지만 중국집 지하에 비밀 통로라니…… 웃긴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빠져 나갔어야지, 왜 이런 난리를 겪게 만들어?”
“70~80명 정도는 여기 가둬 놓고 나가야 콴 그 자식을 잡아 죽일 거 아냐?”
뚱하게 대꾸하면서 루크가 나를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밀려 타고 보니 하필 대공이 코앞이었다. 지하 3층까지 내려가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역시 거북해서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내내 고개를 발렌타인의 등짝에 묻고 있었다.
지하 3층은 보통 건물 지하에 있음직한 주차장이었다. 건물 규모에 비해선 좀 좁다 싶은 공간에 차 석대가 벽을 따라 늘어서 있었고, 자오와 그 나머지 2층 잠복조도 이미 내려와 있었다. 사전에 여기서 합류하기로 얘기가 돼 있었던 모양이다.
“왜 일곱 명뿐이야?”
“바이하고 령은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오는 놈들을 저지하다가 그만…….”
“나머지는?”
루크의 추궁에 자오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안개 속에서 잃어버렸습니다.”
루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자오를 쳐다봤다. 자오가 루크의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죄송합니다.”
부하를 두 명이나 잃었다니 2층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던 모양이다. 2층에 루크가 있을지 모른다며 습격자 상당수가 2층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그 공세를 막아내는 건 어려웠을 거다. 그래도 2층 매복조는 1층에 있었던 우리보다 옷은 깨끗했다.
2층 매복조 중 무사히 내려온 일곱 명이 먼저 12인승 정도 될 것 같은 덩치 좋은 밴에 우르르 몰려 탔다. 나는 차종은 상관없었다. 대공하고 같은 차만 아니면…… 하지만 루크는 대공하고 같이 움직일 생각인지 차 조수석에 대공부터 밀어 넣었다.
“이 통로, 어디로 통하는 거야?”
거리낌 없이 차 뒷좌석에 냉큼 올라탄 용하고 기린과는 달리 발렌타인이 루크의 진로를 막아서며 따졌다. 사전에 어떤 언질이나 경고도 못 듣고 이런 일에 휘말렸으니 저렇게 신경질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옆 블록에 있는 극장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데, 그건 왜?”
“그럼 동행은 거기까지야.”
“깜빡했어. 당신, 자원봉사 체질은 아니었지?”
“맞아.”
딱 잘라 말하고 발렌타인이 차 뒷좌석에서 용과 기린을 끌어 내렸다. 남은 차 한 대를 셋이 이용할 모양인데, 그럼 나는 결국 루크하고 대공이 탄 차를 타야 되나? 손끝을 달달 떨면서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발렌타인이 용하고 기린을 옆 차로 옮겨 태우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이번엔 루크가 반쯤 연 차문을 다시 닫고 발렌타인과 마주섰다.
“당신, 몸값이 얼마야?”
“몸은 안 팔아.”
발렌타인이 너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루크를 거칠게 밀쳤다. 발렌타인을 이렇게 보내기 아쉬운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 사람 하나가 아쉬운 상황인데, 하물며 발렌타인은 수적인 열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특급 전문가였다. 하지만…….
“청부업자라면 창녀보다 나은 것도 없잖아?”
저게 아쉬워서 도움을 청하는 인간이 입에 담을 말이냐? 뭔가 목적이 있을 때는 상대를 도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상대가 발렌타인일 때는 죽을 각오를 해야 된다. 게다가 발렌타인은 지금 총을 들고 있다.
“창녀보다 낫다고 한 적 없어. 오히려 비슷하지. 손님을 가려서 받거든.”
“창녀한테 퇴짜를 맞을 정도로 내가 별로야?”
“창녀는 손님 얼굴 따윈 안 봐.”
“지갑은 보잖아?”
발렌타인이 더는 못 참겠는지 총구로 루크의 가슴팍을 꾹 찔렀다.
“비켜.”
내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루크를 지켜만 본 이유는 루크의 협상 교섭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 눈에 콩깍지가 덮여서 루크를 너무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걸까? 협상 교섭은 개뿔…… 총 든 킬러 앞에서 이게 무슨 삽질이냐?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루크를 옆으로 끌어내고 발렌타인을 달랬다. 발렌타인이 놓치기 아까운 실력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발렌타인은 루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는 입장이었다.
“공연한 일에 끼어들게 만든 것도 미안하고…….”
발렌타인의 눈빛이 좀 누그러지나 싶은데, 루크가 다시 끼어들었다.
“십만 불, 어때?”
이러다 정말 총에 맞겠다.
“넌 아직도 저 자식하고 같이 죽고 싶은 거야?”
발렌타인이 뭐 저딴 놈이 다 있느냐는 표정으로 나한테 투덜거렸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거 뭐 있어? 좀 전에 그 난장판도 살아서 빠져 나왔는데…….”
“운이라는 게 하루에 두 번씩 좋기는 힘들어. 그리고 이젠 기린도 없을 거고.”
“재수 없는 소리 미리부터 할 거 없고, 나중에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해.”
잠깐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노려보던 발렌타인이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탔다. 발렌타인은 본래 한 말 또 하는 타입도 아니고, 누굴 붙들고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타입도 아니었다.
발렌타인이 출발하는 걸 본 후에 나도 차에 탔다. 대공하고는 절대로 한 차에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오의 밴이 연이어 출발을 해버리는 바람에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청연루 건물이 고풍스러운 것에 비해 비밀통로는 꽤나 현대식이었다. 소형차량이라면 양방향 통행도 가능할 정도로 번듯한 통로를 빠져나가다 보니 건물 참 쓸 만하게 지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야?”
“콴을 만나봐야지. 되도록 조용히…….”
그럼 다음 목적지는 흑풍회 사무실인가 보다. 통로가 이웃 건물 지하 주차장과 통해 있다니 차로 움직이면 불과 5분에서 10분 거리다.
청연루에서 우리가 살아 나온 건 실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기린 덕분이었다. 70, 80명 정도를 청연루에 가둬놓고 나왔다지만 콴 주변엔 또 다른 인의 장막이 있을 거다. 달랑 열 명 안팎의 인원으로 정면승부가 가능할까? 더구나 이제 믿을 놈은 도무지 믿을 구석이라고는 없는 뱀파이어 한 마리뿐이다.
“이제라도 너만 조용히 도망가면 일이 훨씬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같이 갈래?”
“갈 마음이 있기는 있어?”
내가 정색하고 묻자 루크가 어물쩍 입을 다물었다.
“그 자식한테 남은 인원이 우리 쪽보다 아직 배는 많아. 이젠 기린도 없고…… 1차 습격에서 간신히 목숨 건진 거 갖고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냐?”
루크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 주변에 남은 건 기껏해야 열 명 안팎이야.”
“부하가 백 명이 넘는다면서?”
“남은 놈들 중 반 정도가 이 길 끝에서 매복 중일걸.”
“뭐야?”
놀라서 좌석 앞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다가 하필 그때 뒤를 삐끔 돌아보던 대공하고 헤딩을 하고 말았다. 대공이 캑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눈언저리를 감싸 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의외로 충격에 약하네…….
“매복이라니?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말이 비밀통로지, 실상 그렇게까지 비밀도 아니거든.”
차 뒷좌석에서 나 혼자 펄쩍 뛰었다. 지금 선두 차량을 발렌타인이 몰고 있는데, 이건 발렌타인을 완전히 함정에 몰아넣은 꼴이다.
“그런 얘기를 발렌타인한테는 왜 안 했어?”
“깜빡했어.”
믿을 수 없다. 발렌타인도 안 믿을 거다.
“발렌타인이 널 죽일 거야!”
“몰랐다고 딱 잡아떼야지.”
나쁜 놈!
“너무 걱정할 거 없어. 생각했던 것보다 실력 좋던데 뭘. 그리고 기린하고 용도 같이 있잖아.”
“걔네들은 아직 어려! 애들까지 위험에 빠뜨린 거잖아!”
“걔네들이 깨달은 종족 기준으로 어린 건 사실이지만, 나이는 너보다 훨씬 많아.”
그때 통로 앞쪽에서 귀를 찢을 것 같은 요란한 총성과 함께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차에서 내려서 출구 쪽으로 뛰었다. 들려온 충돌음의 크기로 봐서 출구는 멀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휜 경사로를 따라 50여 미터 정도를 달리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화약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확 끼쳤다. 희미한 연기를 헤치고 다가가 보니 출구 막바지에 자오 일행이 타고 있던 벤이 버려진 것처럼 삐딱하게 출구를 막고 서 있었다.
“자오?”
달리는 동안 간간이 들리던 총성도 어느 틈엔가 딱 멈췄다. 어떻게 된 걸까? 상황을 전혀 몰랐다고는 해도 발렌타인이 그렇게 호락호락 놈들에게 당했을까? 바로 뒤에 자오 일행이 따라 가고 있었으니까 아쉬운 대로 지원이 있었을 텐데…….
벤 너머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현장을 살피다가 걸음을 멈췄다.
“왔어?”
현장 한 복판에서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내려다보던 자오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발렌타인은…….”
자오가 대답 대신 턱으로 주차장 안쪽을 가리켰다.
최초의 굉음과 총성이 들려온 지 불과 1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상황은 벌써 결판이 나 있었다. 출구 맞은편에 대여섯 대의 차량이 우그러진 채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걸로 봐선 놈들이 바리케이트로 세워놓은 서너 대의 차량을 발렌타인이 그대로 받아버린 모양이었다. 처음 들려온 소리는 그 충돌음이었던 거다.
“발렌타인은? 애들은?”
이미 죽은 것으로 보이는 동양계 남자들 서너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우그러진 차 근처에도 또 그만큼의 인원이 쓰러진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건 교전이라기보다는 교통사고 현장에 더 가까웠다. 최소한 반은 차에 치여서 죽거나 다쳤으니까…….
주변을 경계하면서 부서진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주차장 구석의 뒤집힌 차 뒤에서 용이 얼굴을 내밀었다.
“이쪽이야.”
용은 이마에 피가 흘러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충격 때문에 아직도 정신이 없는지 용이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는 어쩌다가…….”
“나는 괜찮은데 킵이 많이 다쳤어.”
용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뒤를 돌아봤다. 기린이 자오의 부하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부서진 차량 사이에서 질질 끌려나오는 중이었다. 걷지도 못하고 옆구리와 오른쪽 다리가 온통 피투성이인 걸 봐선 총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총에 맞은 거야?”
“그렇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야.”
출혈이 심했는지 기린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발렌타인이 그렇게 애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는데, 우리 살자고 그걸 붙들어서 결국 이렇게 상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
그때 등 뒤에서 루크의 발소리가 들렸다. 대체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걸까? 차를 이고 왔어도 이보다는 빨리 왔겠다. 총상 입은 기린을 발견한 루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니 남자친구는?”
발렌타인이 안 보이는 게 두렵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루크의 물음에 기린이 힘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뒤에 있는데…… 좀 가 봐. 화가 많이 났어.”
발렌타인 화났다는 소리에 루크가 주춤 물러섰다. 매복이 있는 걸 알고도 시치미 뚝 떼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걸 발렌타인이 눈치채기라도 하면 루크에게 제일 위험한 적은 콴이 아니다.
“차 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내가 멋대로 내려서…….”
기린이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마 너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내가…….”
루크에게 손수건을 받아서 기린의 다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 고통에 기린이 비명 한마디 제대로 못 지르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바로 뒤에 따라붙었으면서, 이렇게 되도록 손 놓고 구경만 했어?”
루크가 자오를 돌아보며 나무랐다. 루크도 이런 사태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불과 1, 2분 사이였는데 워낙 집중 공격을 당해서…….”
앞에 바리케이트가 있으면 멈춰 서서 뒤차를 기다렸어야지, 발렌타인은 성질이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이런 게 킬러의 본색인 걸까? 겉보기엔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좀 아티스트 타입인데 비해 본색은 정말 거칠고 안 좋다.
“얘네 둘은 내 차에 태워. 애 하나 붙여서 병원에 보내고, 나머지는…….”
루크가 부하들에게 우그러진 차들로 꽉 막혀 있는 통로를 치우라고 지시하는 사이, 발렌타인이 있다는 차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크의 부하들이 기린만 들쳐 매고 나온 걸 보니 발렌타인이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은데 차 뒤편에선 아직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발렌타인?”
우그러지고 총구멍이 무수히 뚫려 있는 차 뒤쪽을 넘겨보니 발렌타인은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다쳤어?”
내가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발렌타인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기린 말로는 화가 났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화가 난 게 아니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괜찮아.”
발렌타인이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이며 손이 피투성이기는 하지만 움직임엔 문제가 없는 걸 보니 어딜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기린은 괜찮을 거야.”
“나도 알아.”
냉랭하게 대꾸하면서 발렌타인이 나를 지나쳤다. 방향이 곧바로 루크 쪽이었다. 발렌타인이 루크를 이대로 죽여버린대도 뭐라고 편들어줄 말이 없다.
“너…….”
발렌타인이 이를 갈면서 루크를 향해 험악한 기세로 돌진했다. 루크가 웬만해서는 저렇게 밀리는 일이 없는데, 발렌타인이 다가가자 끝도 없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벽까지 몰리고 말았다.
“누가 차로 그렇게 밀어버리래? 좀 기다렸다가 자오 팀하고 같이 처리했으면…….”
발렌타인이 총구로 루크의 목을 꾹 찔렀다. 내가 선 방향에선 그 뒤통수만 보일 뿐이라서 지금 발렌타인의 얼굴이 얼마나 험악할지 짐작도 못하겠다.
“놈들이 우리를 보자마자 총질을 해댔어. 차를 세워도 죽었을 거고, 거기서 후진을 했으면 우리끼리 충돌해서 저놈들 좋은 일만 시켰겠지.”
“그렇게 판단이 빠르면, 지금 나를 죽이는 게 별로 잘하는 짓이 아니란 것도 알 텐데?”
“난 천성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살지.”
“참아줘. 난 할 일이 있어.”
“그런 생각은 나하고 애들을 죽을 구덩이로 몰아넣기 전에 했어야지.”
이러다 정말 발렌타인이 루크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허둥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잠시 사태를 지켜보던 자오도 슬금슬금 발렌타인 쪽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가 뭔가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었다. 루크가 전광석화의 속도로 발렌타인의 손에서 총을 잡아챘으니까…… 굉장히 위험한 짓이지만, 어쨌든 목숨은 건졌다.
“50만 불.”
루크가 발렌타인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뭐가 어째?”
발렌타인이 노여움에 몸을 떨면서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사과라고 생각해. 달리 해줄 것도 없고…… 그 정도면 야박한 액수는 아니잖아?”
루크의 생색에 발렌타인이 더욱더 노했다.
“장난해? 어디 가서 한나절 삽질을 해도 그 정도는 받아!”
발렌타인의 속 터지는 심정, 나는 정말 심하게 공감한다. 하지만 들고 있던 총을 빼앗겼으면 얘긴 끝난 거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열 받았어도 자오를 비롯해서 루크의 부하들이 빙 둘러서 있는데 자리에서 루크를 죽이는 건 미친 짓이다.
이쯤에서 그만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발렌타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루크하고 오래 붙어 있어 봐야 혈압만 오른다. 기린하고 용이 병원에 가는데 발렌타인만 여기 남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용하고 기린이 타고 있는 차 쪽으로 발렌타인을 데리고 가는데, 발렌타인이 내 손을 뿌리치고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그래?”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어째 멀쩡하다 했더니…… 차 보닛이 완전히 들릴 정도의 충돌이었으니까 이 정도 후유증도 없으면 그게 도리어 이상하다.
“일단 애들하고 같이 병원에 가. 난 좀 있다 갈게.”
비틀거리는 발렌타인을 다시 부축했다. 콴은 다음 문제고, 우선 발렌타인만 차에 태워서 보내도 큰 시름을 더는 거다.
“영안실로 실려 오지 않을 자신 있어?”
그건…….
“왜 하필 저런 놈하고 엮여서 이 난리야? 남자 보는 눈이 그거밖에 안 되면 차라리 혼자 살아!”
발렌타인이 나를 사납게 밀치고 차에 올라탔다. 루크 때문에 여러 가지 곤란한 일을 겪을 줄 알고는 있었지만, 발렌타인한테서 남자 보는 안목에 대한 충고를 듣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면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지옥 같은 교전의 시간은 무척 길었다. 마치 하룻밤이 다 지나간 것처럼…… 하지만 막상 나와 보니 밖은 여전히 초저녁이었다. 나는 온몸이 습격자들의 피에 젖다 못해 옷자락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릴 지경인데 차창 밖의 세상은 쇼핑할 만한 멋진 물건과 맛있는 저녁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보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지금 이 차안을 들여다본다면 기겁 하겠지만, 나한테는 오히려 창밖의 평화로움이 영화 속의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너무 이상해.”
“응?”
운전하던 자오가 백미러로 나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용의 군대니, 봉인이니, 시간을 담은 병이니…… 이게 대체 말이 돼? 게다가 기린하고 용도 모자라서 뱀파이어까지 나와서 설치고…… 이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야. 생지옥이지.”
“아직도 그렇게 적응이 안 돼?”
실은 너무 과하게 적응을 해서 이젠 평범하고 멀쩡한 사람들이 오히려 낯설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렇게들 태평한가 싶고,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회장님.”
자오가 옆에 앉은 루크를 가만히 불렀다.
“왜?”
“쟤는 중간에 내려주면 안 될까요? 애가 완전히 넋이 나간 것 같은데요?”
루크가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자기가 보기에도 내가 별 도움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어떻게 할래? 내릴래?”
선심 쓰는 척 그렇게 물었다. 이 상황도 마음에 안 들고, 좀 전에 발렌타인한테 들었던 충고도 맘 상하던 차에 지금 지껄이는 소리도 너무 거슬렸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이 꼴을 해가지고, 길바닥에 내리란 말이야?”
신경질이 뻗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투가 너무 거칠었는지 차 안에 있던 모두가 움찔할 정도로 놀랐다. 특히나 아직껏 손등에 묻은 피를 할짝할짝 핥아대던 대공은 놀라서 자기 손등을 깨물 뻔했다.
지하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극장에서 흑풍회 사무실 건물까지는 차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사실 걸어가도 그 정도밖에 안 걸릴 거리였는데, 이 시간쯤엔 항상 그렇듯 차이나타운의 길이란 길은 모조리 막혀서 차가 거의 기다시피 했다.
신속하게 움직이려면 차를 버리고 후다닥 뛰는 게 제일 빨랐겠지만, 다들 몰골이 너무 험악하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꼴로 대로를 휘젓고 다녔으면 흑풍회 사무실에 닿기도 전에 경찰이 출동했을 거다.
승합차 문이 동시에 열리면서 열 명 남짓의 귀신같은 몰골을 한 무장 괴한들이 길바닥으로 쏟아지자 주변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귀를 찢는 것 같은 소프라노의 비명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렸고, 그나마 소리도 못 지르고 주저앉은 행인도 여럿이었다. 흑풍회 사무실 건물 1층이 하필이면 관광객이 들끓는 상가 아케이드라서 우리 몰골이 더 엽기적이었다.
왜 차를 1층 정문 앞에다 댔을까?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를 보고는 기절초풍해서 도망치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눈에 띄는 진입은 우리한테도 이로울 게 없었다. 콴에게 우리가 올라가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직접 전화로 알려주는 거하고 뭐가 다르냐?
“지금은 지하 주차장이 미어터질 시간이야. 들어가는 데만 30분은 걸릴걸.”
루크가 쇼핑하다가 놀라서 얼어붙은 젊은 커플에게 눈독 들이느라 멈춰 선 대공의 뒷덜미를 잡아끌면서 담담하게 대꾸했다. 상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다 뛰쳐나가기 전에 엘리베이터나 탔으면 좋겠다.
흑풍회 건물은 청연루와는 극과 극의 이미지를 가진 현대식 건물이었다. 지하와 3층까지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그 위쪽으로는 오피스, 그리고 최상층은 흑풍회가 장악하고 있는…… 청연루가 구 차이나타운의 중심이자 대표라면 흑풍회 건물은 신 차이나타운의 얼굴이었다. 그런 대표성을 가진 건물이 모두 흑풍회 소유라는 게 차이나타운 내부에서 흑풍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어쩌면 청연루와 이 건물을 오가면서 한바탕 전쟁을 벌이는 게 누가 차이나타운의 최종적인 패왕이 되느냐를 결정짓는 통과의례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남은 놈들은 많아봐야 스무 명 안팎이야.”
루크가 알아서 건물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뭘 기다리는 거야?”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버튼은 누르지도 않았으면서…… 그때 상가 한 복판에서 작동 중이던 에스컬레이터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제야 자오와 부하 몇 명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기계실이 지하에 있거든.”
20층 정도에 걸려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한 대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라인에 있는 열 개의 엘리베이터가 거의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쯤 방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겠지. 겁이 많은 놈이거든.”
“너도 좀 떠는 것 같은데?”
실제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루크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흥분해서 그런 거야.”
“그렇게까지 콴이란 놈이 싫어?”
“사실 그 자식한테는 별로 관심 없어. 이렇게 잡아 죽일 기회가 생긴 건 고맙지만…….”
엘리베이터가 속속 1층에 도착했다. 1층이 목적지가 아니었던 사람들 몇몇은 ‘왜 이래’ 하면서 투덜거렸지만 피 칠갑을 한 여섯 명의 괴한들을 발견하고는 두말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제일 바깥쪽 엘리베이터 두 대에 두 팀으로 갈라져서 올라탔다. 한쪽엔 루크하고 나 그리고 맞은편엔 대공과 다른 부하들…… 팀 구성이 이래도 되나? 대공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쟤네들이 40층까지 살아 올라갈 수 있을까?
“내가 저쪽에 타는 게 낫지 않겠어? 니가 대공하고 같이 올라가고…….”
“넌 내 뒤에만 붙어 있어.”
루크가 끝까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나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시하냐? 나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
아까 청연루에선 좀 버벅거렸지만…….
“됐으니까 무조건 뒤에 붙어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루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완전히 거추장스러운 짐짝 취급이다.
건물의 모든 엘리베이터가 동시에 올라간다고 해도, 역시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건 위험한 선택이었다. 가뜩이나 숫자도 딸리는데 재수 없어서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하고 딱 마주치기라도 하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상황이 끝나는 수가 있었다.
38, 39, 40……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갈수록 루크가 점점 문 옆으로 붙으면서 나를 등으로 꾹 눌렀다.
“좀 비켜! 답답해!”
루크를 밀고 마지막으로 총을 점검했다. 어쩌다 보니 이 자식한테 덜떨어진 놈 취급을 받고는 있지만, 경찰 작전에 투입될 때마다 내 자리는 거의 타격대 선두였었다. 아까 청연루에서 실력발휘를 못한 건 순전히 안개 공포증 때문이었다.
루크의 어깨너머로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엘리베이터 통로 입구에 버티고 서서 우리를 기다리는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총성보다 먼저 들려온 것은 듣는 이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섬뜩한 비명소리였다.
10개나 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것은 거의 동시였지만 맞은 편 팀의 움직임이 우리보다 훨씬 빨랐다. 문이 채 반도 안 열렸을 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튀어나와 적진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이젠 그게 누군지 굳이 확인할 것도 없었다.
대공의 돌진에는 어떤 두려움이나 머뭇거림도 없었다. 사냥감을 결정하고 들소 떼 한복판으로 돌진하는 맹수처럼 주저 없이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고, 그 사나운 일격에 적들의 대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대공이 제일 가운데 서 있던 리더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의 총을 비틀어 바닥에 내던지고 다음 순간 남자의 목을 물었다. 남자의 목에서 피가 터져 바닥과 벽에 튀었고, 바로 옆에 있던 다른 한 놈이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총구를 대공에게 겨눴다.
이미 사냥감 하나를 잡아서 목을 뜯던 대공이 손을 뻗어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꺾어버렸다.
콴의 부하들에겐 지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다른 적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영역 한복판에 성난 호랑이처럼 뛰어들어서 맨입으로 사람을 물어뜯는 괴물에게 완전히 압도당했고, 그 괴물 외엔 어떤 것도 눈에 안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동료가 잡혀 있건 말건 대공을 향해 총질을 하려던 놈들을 향해 루크가 검을 빼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떻게 루크의 검이 놈들의 총보다 빠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놈들이 당황해서 주춤거리는 사이 루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놈들의 팔과 등을 단숨에 뱄다. 그렇게 다섯 명이 눈 깜짝할 사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걸로 승부는 거의 결판이 났다.
허둥거리던 나머지가 루크 부하들의 총격에 일방적으로 밀려났다. 어느새 바닥엔 놈들의 시체가 열 구에 가까웠다. 루크는 이제 대공보다도 선두에 서서 늘 자신의 영지를 내려다보며 권력을 만끽했었던 그 방, 흑풍회 수장의 왕좌가 있는 아름다운 방으로 향했다. 피 묻은 검을 든 루크의 뒷모습은 빼앗긴 왕국을 되찾으러 가는 왕처럼 우아하고 당당했다.
“야! 잠깐…….”
회장실 문 앞에 조심성 없이 멈춰선 루크를 얼른 옆으로 끌어냈다. 거의 동시에 자게로 장식된 검은 나무문이 안에서 가해진 총격에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생각 없이 루크를 뒤따르던 부하 하나가 문을 관통한 총알에 옆구리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고마워.”
루크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마침 그때 지하 기계실로 내려갔던 자오와 부하들이 막 도착했다.
루크가 부하들에게 간단한 손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아마 문을 부수라는 지시 같았는데…… 루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부하들이 문을 향해 총알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집중적인 기관총 사격에 회장실 문에 사람도 빠져나갈 만한 구멍이 뚫렸고 안에선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비열한 술수와 백 명도 넘는 조직원을 믿고 루크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그놈이 원인 제공을 하긴 했지만,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응징이었다.
총알 수백 발로 회장실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은 후 부하들이 다 해지다시피 부서진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앞에 수북하게 쌓아 놓은 소파와 테이블 같은 집기들을 밀고 들어가 보니 뒤편엔 바리케이트로도 막지 못한 총격에 콴의 부하들이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콴은…….”
자오가 쓰러진 놈들을 한 번 쓱 살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중엔 그놈이 없는 모양이었다.
“뭐야? 빠져 나간 거야?”
여기서 콴을 놓치면 곤란하다. 콴은 이미 한번 루크한테 패배했다가 항복을 번복하고 다시 돌아와 일을 꾸몄다. 놈은 차이나타운 내에서 혈통적으로 루크보다 유리한 입장인데다 시간을 담은 병까지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담은 병에 정확히 어떤 위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백 대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물건이었다.
“그 자식, 애초에 여기 있었던 게 맞긴 맞는 거야?”
내 조급한 혼잣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여기 있어.”
루크가 눈짓으로 회장실 옆의 작은 방을 가리켰다. 개인 응접실 겸, 침실 겸…… 특급 호텔처럼 예쁘게 꾸며 놓고 루크가 개인적인 용도로 요긴하게 쓰던 방이다.
“자오.”
“예, 회장님.”
루크와 같은 곳을 보고 있던 자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끌고 와.”
응접실 문을 두들겨 부수고 안에 숨어 있던 콴을 끌어내는 건 굉장히 간단했다. 날 저물기 전부터 가슴 졸이며 기다렸던 일전의 마지막이 고작 이런 건가 싶어서 허무할 정도로…….
안에 숨어 있던 남자는 반격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자오한테 멱살을 잡혀서 끌려나왔다.
첸 콴. 선대 흑풍회 회장인 첸 진의 조카다.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첸 진의 아들이란 말까지 돌 정도로 선대 회장의 사랑을 받던 차이나타운의 유력자로, 루크가 갑자기 나타나서 왕좌를 가로채기 전까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동네 2인자였다.
콴은 외적으로는 그다지 인상적인 데가 없었다. 아담한 체구에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차이나타운의 골동품점이나 찻집에서 흔하게 볼 만한 평범한 인상의 동양인 남자였다. 조금은 약삭빠르고 욕심 사나워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겁에 질린 탓에 차이나타운의 왕족 같은 거만함이나 수백 명의 조직원을 수족처럼 부리는 보스의 카리스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전에 너한테 했던 말, 기억 나?”
루크가 씨익 웃으며 콴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야 이 위기에서 콴을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콴의 부하들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지. 한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린다고…….”
루크의 협박에 콴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널 살려둘 것 같아?”
“어느 아버지를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니네 아버지 하나도 안 무서워.”
루크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빼들었다. 콴을 살려주거나 그 목숨으로 흥정을 할 의사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 루크가 검 끝으로 콴의 넥타이를 꾹 찔렀다.
“그거 어디 있어?”
“말해도 어차피 날 죽일 거잖아?”
“죽음에도 격이 있어. 전쟁에서 패한 장수처럼 품위 있게 가던가, 아니면…….”
루크가 뒤에 버티고 있는 대공을 가리켰다.
“사냥당한 짐승처럼 잡아먹히든가.”
“마, 마음대로 해! 나는 절대…….”
콴이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서 소리쳤다.
“경고하는데, 끔찍하게 고통스러울 거야.”
루크가 비아냥거리면서 칼끝으로 콴의 넥타이를 베어내고 단추를 하나씩 떼어냈다. 마치 잠시 후에 있을 처형을 준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다 뭔가를 발견한 루크가 손을 멈췄다.
루크가 흠칫 떨며 몸을 움츠리는 콴의 옷깃을 잡아 뜯었다. 콴의 목에 작은 열쇠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루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콴의 목에서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아무런 표시도 없는 작은 열쇠일 뿐인데 루크는 한눈에 그게 뭔지 알아본 눈치였다.
“필립.”
목걸이를 손에 넣은 루크가 대공을 돌아봤다.
“처리해.”
루크의 말이 떨어지자 대공이 음산하게 웃으면서 입맛을 다셨다.
대공이 콴에게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나는 뒷걸음질 쳐서 방에서 나왔다.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사람이 죽는 걸 너무 많이 봤다. 내 몸에서 진동하는 피 냄새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웠다.
“허억…… 으아악…….”
방에서 나오자마자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너무 끔찍하게 느껴져서 들었던 총을 내려놓고 귀를 틀어막았다. 이런 비명소리도 오늘은 너무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귀를 막아도 비명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실제로 콴의 비명인지, 환청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루크가 대공 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틈을 타서 루크를 죽이려고 했을 때부터 죽어도 싼 놈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처형이라니…… 비명소리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끙끙 앓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내가 회장실 쪽으로 눈길을 주자 루크가 아, 그거……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 대공도 먹어야 살아.”
루크가 정말 무섭게 느껴질 때는 화를 내거나, 상대를 사납게 노려보거나,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태연할까? 적이었다고는 해도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본인도 죽을 뻔했는데…… 지금 녀석이 하는 걸 봐선 배고프면 여기다 상 차려 놓고 밥도 먹겠다.
“그건…… 뭐야?”
나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화제를 바꿨다. 루크가 피식 웃으며 콴에게서 빼앗은 열쇠를 내게 보여줬다. 보관함 열쇠 같은데,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차이나타운 중앙은행 비밀금고 열쇠야.”
열쇠를 움켜쥔 루크의 손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10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