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49)

1681344479499.jpg

16813444794996.jpg

병원 주차장에 들어가서 차 댈 곳을 찾아 한 바퀴 도는 사이, 오늘도 비니를 면회하는 일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리즐 시 번호판이 붙은 검은색 벤츠 석대가 나란히 주차된 코너를 지나면서는 다른 데 갔다가 저녁 때 올까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두려움을 꾹 참고 구석자리를 찾아서 차를 댔다. 아예 병원 근처에 걸음을 끊으면 모를까 어차피 당분간은 바바라와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비니의 회복으로 바바라도 요즘은 기분이 많이 풀렸을 테니까 시비 없이 조용히 지나쳐주기만 바랄 뿐이다.

“형, 오셨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비니 병실을 향해 앞만 보고 걸어가는데 휴게실 방향에서 롭이 튀어나왔다. 얼핏 보니 휴게실은 비니 일가에게 거의 점령당한 형국이었다. 비니 삼촌, 사촌, 이모 고모 그리고 바바라…….

“비니는 좀 어때?”

“어제보다 더 좋아졌어요. 아침엔 밥도 반이나 먹었고…….”

“기분은 어떤 것 같아?”

“그건…….”

롭이 병실 쪽을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차차 좋아지겠죠.”

그 거친 징크스에도 불구하고 비니는 집안에서 굉장히 사랑받는 아들이자, 조카이자, 사촌이었다. 혼수상태가 길었던 만큼 비니의 회복 여부는 몬티첼리 일가의 큰 근심거리였었기 때문에 드디어 비니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친척들이 비니를 보기 위해 병원에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꽤 먼 곳에 사는 친척들까지 병원을 찾기 시작한 탓에 어제 오늘 비니 부모님과 세 명의 누이들한테는 비니를 돌보는 일보다 친척들 접대가 더 큰 일이 되고 말았다.

비니는 커튼이 드리워져서 컴컴한 병실에서 혼자 자는 척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모른 척하고 눈 감고 누워만 있는데 다른 사람 같으면 자는 줄 알고 돌아나갔겠지만, 10년 친구인 나는 비니의 잠버릇을 잘 안다. 비니는 저렇게 반듯하게 누워서 자지 않는다. 코도 곯고, 몸부림도 치고…… 잠복하는 중에도 뒷좌석에 누워 잘 때면 밤새 사람을 몇 번이나 걷어차는지 모른다.

“나 왔어.”

“…….”

의자를 가져다 비니 머리맡에 놓고 앉았다. 한 5분 정도 앉아서 버티자 비니가 몸을 뒤척이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귀찮으면 그냥 있어도 되는데…… 나는 얼굴만 잠깐 보고 가도 큰 불만은 없으니까.

“기분이 그렇게 별로야?”

“그냥…… 멍해.”

비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이렇게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하고 있어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비니가 살아나다니…… 한동안은 정말 가망이 없어서 꼼짝없이 이 녀석을 떠나보내는 줄 알았었다. 이렇게 얼굴 마주 보면서 다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니, 정말 꿈같다.

“걱정 많이 했지?”

“말이라고 하냐?”

내 원망 섞인 대꾸에 비니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

이렇게 풀죽고 맥 빠진 비니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어떤 대형사고 앞에서도 마치 양심에 철갑을 두른 듯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비니였는데…… 물론 그런 모습이 항상 좋아보였던 건 아니지만, 의식이 돌아온 이상 하루 빨리 본인의 정체성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의기소침한 모습은 비니하고는 안 어울렸다.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많은데,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꿈인지 모르겠어. 심한 뇌진탕을 앓는 기분이야.”

“뭔가를 기억해내려고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다 지난 일이다. 이제 와서 기억을 되살려봐야 돌이킬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델 파소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하려고 애쓸 것도 없어. 그건 이제 다 생각 나.”

“그럼 딴 일을 생각해.”

비니가 한숨을 내쉬더니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넌 어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별로 안 좋았어. 이상한 일도 많았고…….”

“이상한 일이라니?”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장장 6개월간의 혼수상태에서 방금 깨어난 애를 붙들고 떠들 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우울해하는데 뱀파이어니, 잠에서 깨어날 날만 기다리고 있는 10만 대군이니…… 그런 소리 지껄여서 괜한 쇼크를 먹이고 싶지는 않다.

“차차 얘기해줄게.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뭔가 되게 큰 게 터졌나 봐?”

“너 누워 있는 동안 일어난 일 얘기하려면 일주일도 모자라.”

정말로 궁금했으면 꼬치꼬치 캐묻고 귀찮게 굴었을 텐데, 아직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가질 여력이 없는지 비니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는? 누구랑 같이 다녔어?”

“앤디라고, 새로 온 애 있어.”

“새 파트너가 그렇게 소원이더니…… 좋았겠다?”

좋았나?

“좋은 점도 있고, 깨는 데도 있고…… 그랬어.”

“그동안 뭐 재미있는 일 있으면 애기 좀 해봐.”

비니를 웃게 할 만큼 재미있는 일이 뭐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내 인생이 대체로 그랬었지만 특히나 지난 6개월은 온갖 희한한 사건사고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니가 그렇게 누워 있는데 그동안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어?”

비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비니의 따뜻한 체온이 손닿은 곳으로부터 온 몸으로 번지는 느낌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찬바람이 한줄기 휙 몰아쳤다.

“좋은 일이 왜 없어요? 새 남자친구가 생겼잖아요?”

바바라가 방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살면서 싫은 여자는 몇 명 없었는데 바바라는 참…… 그렇다. 어렸을 때 겪은 일을 생각하면 불쌍하기는 한데, 마주칠 때마다 드는 건 아무리 그래도 요즘 하는 짓은 심하다는 생각뿐이다.

“하긴, 그게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네요.”

바바라가 얄밉게 이죽거리면서 침대 발치로 다가왔다. 바바라의 등장으로 방안 분위기가 급격하게 식었다. 장소가 어디든 상황이 어떻든 바바라만 뜨면 이렇게 된다.

“무슨 소리야? 남자친구라니?”

비니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루크 첸하고 내가 가깝게 지내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기 때문에 의식을 회복한 이상 비니도 조만간 알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바바라가 이런 식으로 냉큼 일러바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신경 쓸 거 없어. 별 일 아니야.”

“지금 그 말, 루크 첸이 들으면 무척 서운해 할 거예요.”

바바라가 들으라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바바라의 입에서 루크 첸이란 이름이 나오자 비니가 내 옷깃을 틀어잡았다.

“너……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나하고 루크 첸이 본격적으로 부적절한 관계에 돌입한 이후, 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는 않았다. 서장님은 복도나 브리핑 룸에서 나하고 마주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반장은 아예 눈도 안 마주치려고 들고, 터너하고 에쉬는 볼 때마다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번갈아서 한숨을 쉬고…… 하지만 비니처럼 놀라거나 대놓고 화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첸이 그간 나한테 걸어온 수작이 대부분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삽질하고 헤매는 걸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봐온 사람들이라서 대부분은 ‘결국 그렇게 됐구나……’ 하면서 한심해 하는 정도였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너, 제정신이야?”

비니가 갑작스런 호흡곤란 때문에 숨을 못 쉬었다. 충격이 큰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설마 제정신이었겠어?”

“야…….”

“그동안 굉장히 힘들었어. 우여곡절도 많았고…….”

“언제는 힘이 안 들고, 곡절이 없었어? 그런 건 항상 있었던 일이잖아?”

“니가 있을 때하고는 많이 달랐어.”

오늘따라 바바라가 더 밉상이다. 이런 얘기는 비니가 좀 더 안정을 찾은 다음에 해도 충분할 텐데, 다짜고짜 왜 그런 말을 꺼내가지고 애를 이렇게 펄쩍 뛰게 만드는지…….

“이유가 뭐든…… 말이 돼? 어떻게 그런 자식하고…….”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말했잖아. 별 일 아니라고.”

나는 내가 첸하고 가까워지면 뭔가 큰일이 날 줄 알았었다. 아주 뺑 돌아버리거나, 인생이 막장으로 바로 내리 꽂히든가, 녀석에게 휘둘려서 나도 비슷하게 나쁜 놈이 되거나…… 어쨌든 되게 이상해질 줄 알았는데 사고 친 다음날도 여전히 해는 떴고 나는 경찰서로 출근했다. 녀석하고 그런 사이가 됐다고 해서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물론 경찰서 내에서 받는 대접이 더 형편없어지긴 했지만…… 세상은 장밋빛으로도 암흑으로도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희뿌연 회색일 뿐이었다.

“내가 듣기론 그 남자가 그렇게까지 별 볼일 없는 남자는 아니라고 하던데요? 특히 침대에서는…….”

바바라가 끼어들어서 본격적으로 내 속에 불을 지폈다. 이번엔 비니가 바바라를 노려봤다. 바바라 같은 천하의 악당도 사랑하는 남자가 화내는 건 마음이 쓰이는지 비니의 눈총에 여고생처럼 새초롬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유도 모르겠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 되냐고?”

비니가 한 손으론 여전히 내 멱살을 움켜쥐고, 남은 손으로는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비니의 화난 목소리가 복도에서도 제법 크게 들렸는지 롭이 놀란 표정으로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들이 밀었다.

“그러는 너는, 그때 델 파소에서 그렇게 주저앉은 이후로 반년이나 시체처럼 누워 있었던 건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왜 지금 이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비니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할 만한 말도 아닌데…….

“너까지 그렇게 된 다음부터는 세상이 온통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였어. 그걸 혼자서 감당하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그 자식이 옆에 있었어.”

“그놈은 완전 제비잖아! 그 빤한 수작에 넘어갔단 말이야?”

“뻔히 알면서도 안 넘어갈 수 없을 만큼 실력이 좋았어.”

이 얘기를 계속해야 되나? 자칫하다간 비니가 다시 정신을 놓게 생겼다.

“저기, 형…….”

상황을 지켜보던 롭이 비니가 뭐 때문에 이렇게 흥분했는지 감을 잡고 앞으로 나섰다.

“진정하고, 제이 형한테 너무 그러지 마. 제이 형이 그동안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드나들면서 형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알아?”

롭이 서툴게 중재에 나서는 바람에 비니가 한층 더 발끈했다.

“그게 대체 그 자식 일하고 무슨 상관인데?”

비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방 전체가 덜컹하고 한번 흔들리더니 유리창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리창만 갈라진 게 아니라 방안에 있는 것 중에 유리 비슷한 걸로 된 물건은 대부분 해를 입었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액자에도 금이 갔고, 내 시계 유리판도 부서졌다. 그리고 바바라의 재킷 주머니에 꽂혀 있던 선글라스도 작은 파열음과 함께 터져버렸다.

이 방안에서 이 정도 일에 놀라거나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바라, 롭 그리고 나는 오랜 시간 비니와 함께 지내면서 온갖 봉변을 다 겪어온 일종의 재난 전문가였다. 자잘한 물건 몇 개 깨진 정도는 우리한테는 일상생활이었다. 게다가 바바라는 그저 태연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안심이 된다는 듯 깨진 선글라스를 보면서 슬쩍 미소까지 지었다. 하지만 비니의 반응은 전과 달랐다.

비니가 확 깬 표정으로 내 옷깃을 놨다. 그리곤 어디 다친 데 없나 살피기라도 하려는 듯 내 몸을 슬쩍 건드려보더니 나를 뒤로 밀었다.

“다 나가.”

비니가 침울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우리한테서 등을 돌렸다.

“야, 뭐 이 정도로…….”

유리창 나간 것보다 비니가 이러는 게 훨씬 당황스러웠다. 비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자기하고 전혀 상관없다는 신념으로 평생을 살아온 놈이었다. 상황이 애매할 때도 무척 많았지만, 누가 봐도 비니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하고 위험한 일조차 절대 책임을 인정하는 일이 없어서 징크스 자체보다 그 뻔뻔함에 넌더리가 났던 적도 많았다. 그런데 사건이라고 할 것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에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정말 걱정스럽다.

“피곤하니까 그만 나가줘. 그리고 넌…… 그 자식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면서 비니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죄책감은 내게도 그렇게 생소한 감정은 아니었다. 수사 도중에 니콜라스하고 사고를 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나 니콜라스 체포 과정에서 수사팀이 크게 피해를 입었을 때는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죄 지은 기분이었고 그만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앞이 캄캄했었다. 심한 부상을 입고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게 하나도 고맙거나 다행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왜 나를 살려서 이런 고통을 겪게 만드나 하는 생각에 모두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사건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많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델 파소가 무너지면서 인명피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혼이 나갈 정도의 죄책감이란 건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 걸까? 비니가 그런 걸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말도 못하게 아팠다.

비니 옆에 억지로 버티고 있어 봐야 첸 문제로 화만 돋울 테고, 그러다 보면 또 뭔가가 깨지고 터질 거고, 결국 비니만 더 우울해질 것 같아서 일단 방에서 나왔다.

“고마워요. 누구도 비니한테 하기 힘든 얘기였을 텐데 대신 터트려줘서.”

피차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어지간한 일에는 화도 안 나지만, 오늘은 바바라가 너무했다.

“뭘요? 그 정도쯤이야…….”

아직껏 당황한 얼굴로 병실 쪽을 쳐다보던 바바라가 못되고 거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바라가 남자였으면, 아니 하다못해 덩치라도 좀 컸으면 조폭두목이든 비니 여자친구든 상관없이 그냥 받아버렸을 거다.

“혹시 나한테 비니를 뺐길까 봐 이러는 겁니까?”

너무 화가 나니까 입에서 헛소리가 막 나갔다. 하지만 바바라는 그저 웃긴다는 투였다.

“비니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루크 첸한테서 당신을 뺐어올 정도는 아닐 거예요.”

바바라하고는 단 10분만 마주 보고 있어도 내 영혼까지 피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첸하고 대화할 때 숨 막히고 분통 터지는 거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거였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면 이 여자가 지금 나처럼 속이 벌컥 뒤집힐까? 그동안 당한 만큼 갚아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가 됐든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물론 바바라를 상대로 그런 짓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나도 어지간해서는 이런 생각 잘 안 하는데, 왜 사람을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신은 의외로 나쁜 남자한테 끌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고…….”

더 이상 얼굴 마주 보고 있다가는 나도 모르게 바바라를 한대 때릴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디가요?”

바바라가 뒤따라오며 물었다. 보통 때는 가면 가나 보다 하고 내버려두더니 오늘따라 집요하다.

“바빠서요.”

“얘기 잠깐해요.”

아직도 못다 부린 행패가 남았는지 바바라가 나를 잡아 세웠다.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싫어요!”

하지만 바바라를 뿌리치고 돌아섰을 때는 이미 엘리베이터 입구를 바바라의 경호원들이 막아선 후였다.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할 얘기가 있어요.”

엘리베이터 앞에 두 명, 어느 틈에 바바라 옆에 붙어선 떡대가 하나…… 오고 가는 것도 이젠 내 마음대로가 아니었다.

할 얘기 있다면서 바바라가 나를 끌고 간 곳은 병원 지하에 있는 영안실이었다. 부하 녀석한테 조용히 얘기할 만한 장소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더니, 기껏 알아본 게 여긴가 보다.

“할 얘기 있으면 그냥 휴게실에서 하면 되지, 왜 하필 이런 데로 사람을 끌고 오는 겁니까?”

“남들 듣는 데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니라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하고 바바라 사이엔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할 만한 얘기가 없다.

“당신 남자친구 말이에요. 그만 정리하지 그래요?”

아니, 무슨 정리를 벌써? 첸하고 사고 친 지 이제 2주일도 안됐다.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멍하니 쳐다만 보자 바바라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 남자친구한테 그대로 이르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런 약속은 못해요.”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바바라가 갖잖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도요?”

“누구 목숨이요?”

“루크 첸. 재수 없으면 당신까지…….”

썰렁한 영안실 안에는 바바라와 나뿐이었다. 바바라는 항상 그림자처럼 달고 다니던 경호원들도 복도에 세워놓고 혼자 들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평상시보다 만만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경호원이 곁에 있을 때보다는 만만해서 바바라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겁니까?”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에요.”

“당신 말고 그럴 만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당신 남자친구는 루크 첸이에요. 설마 그 인간한테 적이 나밖에 없겠어요?”

바바라가 손목을 비틀어서 빼내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리곤 일없이 시체 안치함 쪽으로 다가가더니 명찰에 적힌 이름을 들여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뜸을 들이며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바바라가 결국 인심 쓴다는 듯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 남자친구한테 경쟁자가 많다는 건 알고 있어요?”

경쟁자라…….

“이 바닥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차이나타운은 이권다툼이 더 복잡하고 치열한 아수라장이에요. 루크 첸은 아무 기반도 없이 그 난장판에 뛰어든 신참이고…… 물론 처가가 든든하기는 하죠. 하지만 그 든든한 처가가 바로 독사 소굴이기도 하거든요.”

첸한테 경쟁자가 많다는 얘기는 나도 들었다. 그중에 이름을 아는 건 한 놈뿐이지만…….

“그 콴이란 놈 얘기를 하는 겁니까?”

내 반문에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라면 첸이 파리로 쫓아버리는 걸로 상황을 종결지었다고 들었는데…….

“루크 첸이 일처리를 허술하게 했어요. 그런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어야죠.”

첸 콴이 개인적으로 루크 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이상할 게 없었다. 루크 첸이 나타나기 전까지 콴은 차이나타운의 왕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살던 놈이 마리아 첸과의 결혼문제에서부터 첸에게 밀리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나라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었으니 절치부심, 무슨 짓을 해서든 첸을 잡으려고 덤비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태까지 루크 첸과 맞짱 뜨는 자리마다 판판이 나가떨어졌던 멍청한 놈이 무슨 수로 바바라가 훈수를 두고 나설 정도로 위험해진 걸까? 녀석이 첸을 죽이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이 도시를 떠난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바바라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최근에 있었던 차이나타운 습격사건이 누구 소행일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히…….

“당신이 그런 게 아니란 겁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그렇게 알고 있다. 막연한 짐작일 뿐이지만,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확신을 바꿀 사람이 많지 않을 거다.

“콴이 마지막 반격을 노리면서 꼭 만나야 할 사람, 왜 만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 할 것 없이 다 쑤시고 다니고 있어요. 내가 알아낸 바로는 흑풍회 휘하에 꽤 큰 조직이 여럿 돌아섰어요. 이대로라면 전쟁은 피할 수 없어요. 조만간 어느 한쪽이 싹 쓸릴 텐데…… 일이 그렇게 되면 흑풍회 내부에선 당신 남자친구를 끝까지 옹호할 세력이 얼마 없어요.”

첸에게 믿을 만한 아군이 없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첸이 그런 일로 걱정하거나 의기소침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최근에 닥쳤던 큰 위기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기고 수습을 잘 하길래 조직 내부 문제는 마무리가 잘 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콴이란 자식이 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갑자기…….”

“뭔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하긴, 마리아 첸까지도 자기 집안사람들은 조건만 맞으면 얼마든지 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을 했었다. 피부를 파고드는 한기에 몸이 떨려왔다. 냉장실이나 다름없는 이 방에 너무 오래 있었다.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죠. 둘이 싸우다 조직이 반 토막이라도 나주면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

사람 죽이고 때려 부수는 일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자신 있다는 투였다.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은 비니 친구니까요.”

“당신은 나를 싫어하잖아요.”

“당신이 루크 첸이랑 같이 있는 것도 싫어서 저 난리를 치는데, 그 근처에 얼씬거리다 재수 옴 붙어서 죽기라도 하면 비니 심정이 어떻겠어요? 가뜩이나 우울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런 일까지 당하게 하기는 싫어요.”

이런 경우에도 마음 써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되나?

“어쨌든 당신 남자친구 형편이 지금 그러니까 공연히 그 근처에서 얼씬거리지 말아요. 지난번 습격 때, 당신이 첸하고 한 차에 타고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제일 많이 듣고 있는 말이 첸하고 헤어지라는 충고였다. 물론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는 말이라는 건 안다. 딴 사람도 아니고 바바라가 이렇게 나올 정도면 사태가 꽤 심각한 거다.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한심하다는 듯, 혹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바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는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따라 나가다보니 병원 직원이 두 명이나 바바라의 경호원들한테 붙들려서 시체실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나도 충고 하나 할게요.”

“바보가 해주는 충고 따윈 필요 없어요.”

그렇게 쏘아붙이며 바바라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 동네를 함부로 넘보지 말아요. 흑풍회는 당신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위험한 조직이니까…….”

“그…… 「천년 조약의 기사단」인가 하는 용병들 얘기를 하는 건가 봐요?”

흑풍회 내부에 꽤 쓸 만한 정보원이 있는 모양이다. 요즘 들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는 달리 천년조약의 기사단은 이름만 들어봤지 아직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자들은 일반적인 조폭 행동대원들하고는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일단 그쪽도 기사단이니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거의 군대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일종의 특수부대 같은…….”

말만 들어서는 별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지 바바라의 표정은 그저 그랬다.

“루크 첸이 몸조심을 단단히 해야겠네요. 듣기론 그 조직도 돌아섰다니까.”

첸이 전화를 안 받는다. 벌써 세 번째 놈에게 전화 중인데…… 같이 주차장까지 나와서 바바라는 자기 차를 타고 쌩하니 가버렸고 뒤에 남은 나는 전화통 붙들고 10분도 넘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니가 웬일이야?」

“전화 좀 쉽게 받으면 어디가 덧나?”

수화기 저쪽에서 들리는 녀석의 음성이 태평하고 느긋해서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금 어디야?”

「사무실인데…… 왜?」

“거기 가만있어. 바로 갈 테니까!”

「야, 잠깐만…….」

잠깐만은 무슨…… 긴말 듣기 싫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그런지, 운전이 자꾸 거칠어져서 가는 동안 애먹었다.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차선 변경을 하는 바람에 뒤쪽에서 끼어드는 차를 받을 뻔하기도 했고 사거리에서 두 번 정도 아슬아슬한 좌회전도 했다.

운전을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화가 나서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몰고 있는 차가 쥬드한테서 빌린 귀중품이라는 사실이 생각난 건 흑풍회 사무실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난 후였다.

흑풍회 사무실은 그렇게 한가해 보이지도, 딱히 바빠 보이지도 않았다. 평범한 사무직으로 보이는 직원들이 서류를 들고 이 방 저 방으로 돌아다니거나 전화를 받는 풍경은 다른 회사하고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다른 게 있다면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 하고, 회장실 앞에 자오와 다른 떡대 두세 명이 버티고 있는 것 정도였다.

“짭새 니가 여긴 웬일이야?”

자오가 문 앞을 막아서며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비켜!”

이 자식도 똑같은 놈이다. 지금이야 회장님, 회장님 하면서 모시고 다니지만 조만간 첸의 등에 칼을 꽂을 놈이다. 흑풍회 전체가 다 그렇다. 이럴 거면 마리아 첸하고 결혼은 왜 시키고, 회장 자리는 왜 내주냐? 그렇게 외부인이 싫으면 처음부터 지들끼리 다 해먹을 것이지…… 나쁜 자식들!

“지금 안에…….”

화들짝 놀라서 앞을 막아서는 자오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찬 다음에 옆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회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하지만 실수였다. 문 열고 안으로 한발 밀어 넣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첸은 열두 명 정도는 여유 있게 둘러앉을 만큼 널찍한 소파에서 어떤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전에 이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녀석은 쌔끈한 금발 미녀와 한창 재미가 좋았으니까 이게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하고는 상대도, 분위기도 많이 달랐다.

첸은 여자랑 노닥거리는 게 아니라 여자를 끌어안고 다독거리며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뒤태가 한눈에 봐도 마리아 첸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에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마리아 첸의 얼굴은 눈물에 푹 젖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계신 줄 모르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은데다 마리아 첸 앞에선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라서 문 앞에서 바짝 얼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남편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울던 마리아가 나를 보더니 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자오한테 덜미를 잡혀서 방에서 끌려나왔다.

“뭘 믿고 이렇게 기세가 등등해? 회장님은 엄연히 유부남인데, 남자친구가 뭐 그렇게 대단한 벼슬이라고 이렇게 설쳐?”

자오가 나를 옆에 있는 사무실 안쪽으로 거칠게 밀어 넣으면서 살벌하게 나무랐다. 방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 아니 자오 때문에 놀라서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진즉에 얘기를 하지!”

“말할 틈이나 있었어?”

자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책상에 놓인 멀쩡한 컴퓨터 모니터를 확 잡아 뜯더니 내 쪽으로 집어던졌다. 모니터가 내 옆구리를 스쳐서 구석으로 날아가더니 제법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나갔다. 물론 이번 일은 내가 성급했지만 하는 짓이 참 갖잖다. 차이나타운에서 장사하는 가게 주인한테서 세금 뜯을 때나 써먹던 빤한 수작으로 누굴 겁주려고…….

“내가 알았냐고?”

“그동안 회장님 여자친구가 심하면 한 주일에 한번 꼴로 바뀌었었고 개중엔 정말 별 희한한 것들도 많았었는데, 니가 지금 걔네들보다 더 해!”

듣자듣자 하니, 이 자식이…… 열 받아서 아까 걷어찬 데를 한 번 더 깠다. 자오가 컥…… 하고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움켜잡고 깡총거리다가 진짜 열 받아서 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큰일 났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왼쪽으로 들어오는 잽 한방에 정신이 잠깐 나갔다 들어왔다. 살짝 빗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맞아본 주먹 중 파워가 단연 최강이었다.

한대 맞고 비틀거리는 내 멱살을 틀어잡은 자오가 나를 들어서 책상 위에 거의 패대기를 쳤다.

책상에 몸이 닿는 순간 두 번째로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그래도 두목 남자친구라고 창밖으로 던지지는 않는구나……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책상 위에 늘어진 채 정신이 나갔다 돌아왔다 하며 점점 멀어지는 사이, 첸의 화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뭔가 차가운 것이 얼굴에 와 닿는 느낌에 놀라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도 한동안 앞이 부옇게 흐려서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가만있자, 그러니까 여기가…….

“정신 좀 들어?”

“응…….”

눈앞에 뭔가 거무스름한 것이 얼씬거리길래 손을 뻗어서 만져봤다. 사람인데…… 첸인가?

“자꾸 건드리지 마. 걔 아직 화가 덜 풀렸어.”

헉…….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첸은 머리맡에 앉아 있고, 앞에 서 있는 덩치는 자오였다. 아직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정신 들었으면 일어나 봐. 병원에 가자.”

첸이 얼음주머니를 내 왼쪽 얼굴에 대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하게 어딜 다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병원 신세를 질 정도는 아닐 거다. 주먹질 한 번에 책상 위로 날아서 떨어지는 정도는 현장에서 종종 당하는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봉변이다.

“괜찮아. 뭐 이 정도로…….”

“뭐가 괜찮아? 넌 정신과 치료를 좀 받아야 돼!”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해서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 막 깨어난 사람한테 이게 무슨 막말이냐?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첸이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왜 자오는 걷어차고 난리야? 그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야?”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내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구나 싶기는 하다.

“난 그냥…….”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딱 그런 경우다. 뭔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어서 말은 꺼냈는데, 생각해보니까 내가 자오를 공연히 건드린 게 맞았다. 바바라한테 들은 얘기 때문에 오는 내내 흑풍회라면 이가 갈리던 차, 하필 자오가 앞을 가로 막았고 그래서 화가 폭발하고 만 거다.

첸이 얼음주머니를 들어내고 내 얼굴을 슬쩍 만졌다. 얼굴 욱신거리는 게 거의 치통 말기의 고통이었다.

“건드리지 마. 아파…….”

내가 끙끙거리자 첸이 자오를 매섭게 노려봤다. 하지만 사람 노려보는 건 자오도 잘한다.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얼굴로 첸하고 눈싸움을 하던 자오가 결국 직급에 밀려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보니 자오도 눈언저리가 뻘겋다. 나는 얼굴은 안 때렸는데…….

“아무리 못마땅한 게 있어도 그렇지, 내 남자친구를 그렇게 무작하게 패?”

첸이 자오를 엄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화가 나서 그만…….”

“화나면 마리아도 그렇게 때릴 거야?”

기세가 한풀 꺾였던 자오가 마리아 첸 얘기에 발끈해서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러다 둘이 싸울까 겁나서 첸을 말렸다. 이 일은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게 맞고, 기왕 맞은 매가 이런다고 물러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자오한테 몇 대 맞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일어나 앉았다. 무슨 얘기부터 하지? 정신을 잃었던 충격 때문에 내가 왜 여기까지 헐레벌떡 쫓아왔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괜찮아? 제일 심하게 아픈 데가 어디야? 어제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은 다 나?”

첸이 내 머리를 가슴 쪽으로 당겨 안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첸의 셔츠 가슴에 얼룩덜룩한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마리아 첸의 눈물 자국이었다. 이런 바람둥이도 남편이라고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울 만큼 마음이 약해 보이지는 않던데,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아주 잠깐 봤을 뿐이지만 마리아는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픈 것 같았다.

“부인은?”

“니가 자오한테 그렇게 얻어맞은 걸 보고 마리아도 많이 놀랐어.”

그건 누가 봤어도 놀랐을 거다.

“울고 있던데, 무슨 일 있었어?”

“집안일이야. 넌 신경 쓸 거 없어.”

“나 때문이야?”

내가 마리아 첸한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둘이 아무리 허울뿐인 부부라도 내가 신경 거슬리지 않을 리 없고, 괘씸하지 않을 리 없었다.

“다른 일이야.”

첸이 별일 아니라는 듯 내 어깨를 다독거렸다.

“마리아는 내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별로 신경 안 써.”

“아니면 달리 널 붙들고 그렇게 서럽게 울 일이 뭐가 있어?”

혹시, 아까 바바라가 말했던 그 일 때문일까? 바바라가 정보원을 통해서 내막을 알고 있을 정도면 마리아 첸도 차이나타운 돌아가는 상황을 대강은 알고 있을 거다. 직접 나서서 상황을 컨트롤할 능력은 없지만 주변 일에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도 않았다.

“이혼해달래.”

“…….”

잠시 할 말을 잃고 멀뚱거리다 자오랑 눈이 마주쳤다. 자오는 표정이 시무룩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 이혼 얘기가 오고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다.

“요즘 안팎으로 분위기가 저조해서 힘들어 하는 것 같기는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야. 이혼 얘기는 전에도 한번 나왔었지만 그렇게 우는 건 결혼하고 처음 봤어.”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다. 하지만 가뜩이나 첸의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데, 하필이면 이런 때 이혼 요구라니…… 첸이 흑풍회 회장 자리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마리아 첸과의 결혼이었다. 이혼하면 첸은 흑풍회 내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나마 휘하에 남아 있던 조직까지도 미련 없이 첸을 버릴 거다.

쫓겨났던 사촌이 돌아와서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다시 설치고, 흑풍회 산하의 조직들이 속속 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이런 때에 갈라서자는 건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기 살 길만 찾겠다는 뜻인가? 어떤 기준으로 봐도 첸이 좋은 남편은 아니었겠지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해버려.”

자오한테 두들겨 맞고 억지로 진정됐던 감정이 다시 확 일어났다. 내 퉁명스러운 이혼 찬성에 첸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너, 보기보다 독점욕 있다?”

“하필 이런 때 이혼을 하자는 건 이젠 니가 필요 없다는 뜻이야? 죽었으면 좋겠대?”

짜증이 나서 말을 막하고 있는데 첸이 나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이거, 좀 전에 마리아 첸이 하고 있었던 거하고 똑같은 폼이다. 갑자기 내 처지가 두 배는 더 한심하게 느껴져서 첸을 밀고 떨어져 앉았다.

“마리아는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야.”

“걱정?”

“이제라도 이혼하고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자오에게 나가 있으라고 이른 후, 첸이 방구석에 설치된 미니바에서 잠깐 달그락거리더니 얼음 잔뜩 넣은 위스키 반 잔을 들고 왔다.

“조직이 다 돌아섰다는 거, 정말이야?”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첸이 내 손에 잔을 쥐어줬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첸도, 그리고 마리아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하긴, 바바라가 알고 있는 일을 첸이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생각해보면 녀석은 요즘 계속 바빴다. 전화도 안 받을 때가 많았고, 전화 받을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변명도 몇 번인가 들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듣고 걱정이 돼서 그렇게 다급하게 들이닥쳤던 거야? 난 또 무슨 일인가 했네.”

매사에 별 거 아니라는 저 말투, 상당히 거슬린다. 이 상황을 무사히 돌파할 자신이 있다는 건지, 죽고 사는 일 자체가 별 거 아니라는 건지 의미가 분명치 않아서 더 그렇다.

“며칠 전에 있었던 출근길 테러도 그놈 소행이었다는데, 알고 있었던 거야?”

“그건 바바라 소사가 그런 거 아니었어?”

첸이 마치 남의 집에 난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되물었다. 누구 짓이든 관심 없다는 투였다.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간의 사건으로 너무 놀라서 정신을 놔 버린 건 아닌지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마리아 첸하고 이혼하면, 살 수는 있어?”

좀 전엔 그냥 화가 나서 되는 대로 지껄여본 소리였지만 지금은 진심이었다. 이혼으로 살 길이 열린다면 못할 거 뭐 있냐? 좀 구차스럽긴 하지만 일단 살고 봐야지…… 하지만 내 물음에 첸이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렇게라도 하면 일이 조용히 수습되지 않을까 하는 건 마리아의 희망일 뿐이야.”

탁자에 술잔 내려놓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저 자식하고 엮이는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마음 편할 날이 없냐? 비니가 정신을 차려서 간만에 숨 좀 편하게 쉬나 했더니, 뭐냐? 이게…….

“그런 식으로 수습이 된다고 해도 내가 싫어.”

“싫으면 어쩔 건데?”

“콴 그 자식하고는 이번에 끝장을 봐야지. 확실하게.”

투지는 좋다. 하지만 방금 전에 내가 들은 얘기로는 콴보다 첸이 끝장 날 위험이 훨씬 높았다.

“내 정보가 어디까지 맞는 거야?”

“대부분 맞아. 출근길 습격 사건은 어떤 놈 짓인지 모르겠지만…….”

“니네 처삼촌은 뭐래? 그나마 그쪽 집안이 너한테는 아군이었잖아. 그쪽도 위태위태한 거야?”

“위태위태한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알기론 콴하고 제일 먼저 손잡은 사람이 장 대인이야. 요즘엔 마리아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만나주지도 않아.”

어떻게 그런 말을 이렇게 담담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누워 있는 것도 갑갑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일어나 앉았다. 내가 눕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채 쩔쩔 매는 걸 지켜보던 첸이 나를 곁으로 끌어 당겼다.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거야? 장 대인 일파는 마리아 첸 때문에라도 계속 널 지지해왔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첸이 손을 들어서 내 입을 덥석 막았다.

“마리아 하나 달래는 것만 해도 힘들어서 진이 다 빠졌는데, 너까지 왜 이래? 나도 좀 쉬자.”

대책 없는 놈!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서 뭐가 어째?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물어?”

내가 목에서 쇳소리가 나도록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첸이 지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대체 어떤 놈이 너한테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거야?”

차이나타운은 도심 속의 관광지이자 행정적으로는 특구 아닌 특구였다.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중국풍 가옥이 아무런 계획 없이 뒤섞인 구시가지 쪽은 특히 분위기가 독특해서 그 거리를 잠깐 거니는 것만으로도 먼 나라의 낯선 골목으로 접어든 듯 묘한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차이나타운 사람들은 이주 초창기부터 자신들만의 구역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왔다. 외부인들도 차이나타운 어디에 괜찮은 중국식 식당이 있는지, 찻집이 있는지, 혹은 바가지 씌우지 않는 정직한 골동품점이 있는지 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차이나타운 내부의 사람들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조용한 동네…… 내부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기 전까지 차이나타운은 나한테 그런 곳이었다.

시내의 다른 구역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매매춘 단속도 차이나타운은 예외였다. 바깥으로 드러나는 큰 사건이 없는 한 차이나타운을 공연히 건드리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이상한 불문율 같은 게 쿠간에는 분명히 있었다.

단속 없는 매춘 업소란 업주에게도 손님들에게도 꿈같은 곳이었다. 중국 마피아가 직영으로 운영하는 회원제 고급 클럽 서너 곳은 황제의 후궁처럼 화려하고 음란하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차이나타운 북쪽 두 블록에 걸쳐 성업 중인 다양한 컨셉의 매춘 업소들은 그런 식으로 태평성대를 누려왔었다. 오랜 기간 첸 콴의 소유였는데 그 자식이 첸에게 까불다가 쫓겨나는 바람에 이권이 공중에 뜬 바로 그곳이었다. 첸이 갑작스레 코너에 몰린 것도 결국 그 매춘 업소를 둘러싼 이권다툼 때문이었다.

대공을 추적하다 봉변을 당한 첸이 의식을 잃은 채 자리보존하고 무방비상태로 누워 있을 때, 녀석을 비호해준 유일한 세력이 마리아 첸의 외가인 장 대인 일가였다. 차이나타운을 첸 일가와 더불어 양분하고 있는 막강한 일족이라서 콴도 함부로 첸의 본가에 침입할 수 없었고, 그렇게 기회를 놓친 콴은 혼수상태에서 회복한 첸의 반격으로 결국 차이나타운에서 발붙일 곳도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게 차이나타운 식의 전쟁이었다. 그토록 치열하고 잔인한 암투가 벌어지고 마무리되는 동안에도 차이나타운의 거리는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평온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첸의 조직 장악에 크게 기여한 장 대인 일파가 콴의 부재로 주인이 없어진 각종 이권사업의 지분을 요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북부 지역의 유흥업소는 장 대인이 오래전부터 콴과 다툼을 벌이며 눈독을 들여오던 사업체였던 터라, 콴이 밀려난 이후 그 지역이 장 대인의 손안에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에는 어떤 이견도 없었다. 그런 걸 첸이 다 엎어버리고 쇼핑몰인가 뭔가를 짓겠다고 재를 뿌리고 나섰으니 장 대인 입장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고, 키운 개한테 손등을 물린 기분이었을 거다. 바바라가 말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결국 돈이었던 거다.

“그 사창가, 그냥 장 대인한테 넘기지 그래?”

“왜? 쇼핑몰 짓는 거 너도 좋아했잖아?”

“좋아한 적 없어. 그리고 좋아했었어도, 니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인 줄 몰랐을 때 얘기야. 어차피 이 동네에서 니네 조직이 백 년 동안이나 해오던 짓이야. 계속 그렇게 살게 두고 넌 니 목숨이나 잘 간수해.”

“싫어.”

첸이 딱 잘라 말했다.

“이미 그렇게 하기로 내가 정했어. 누구 비위를 맞추거나 달래기 위해서 거래를 하거나 결정한 일을 번복하지는 않을 거야.”

“시내에 널린 게 쇼핑몰이야. 차이나타운에 그런 거 없어도 아쉬워할 사람 하나도 없어. 그리고 애초에 그런 일을 하고 싶었으면 유통업계 쪽으로 장가를 들었어야지.”

보통 때는 뭐가 자기한테 불리하고 유리한지 주판알 부지런히 튕겨가며 절대 손해날 짓은 안 하던 놈인데, 모르는 사이에 어디다 머리라도 받았는지 도무지 설득이 먹히질 않았다. 무릎만 안 꿇었지 거의 빌고 있는데도 녀석은 애매한 표정으로 딴청만 피웠다.

“어찌 됐든,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할 줄 알았는데 이 모양 이 꼴이잖아!!”

답답해서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첸이 나를 잡아서 다시 옆에 주저앉혔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차분함이나 진지함을 넘어 어느새 굉장히 어둡고 무거웠다.

“흑풍회의 수장은 나야. 진심은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나를 수장으로 인정했으면 어떤 일에도 복종해야 되는 거야. 그런 게 조직이잖아? 고작 매춘굴에서 나오는 돈 몇 푼 때문에 나를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겠다고 덤비는 건 애초에 나를 수장으로 인정한 게 아니라 자기들 유리한 대로 움직여주는 꼭두각시 정도로 봤다는 뜻이야. 저쪽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도 내가 그 자식들 비위를 맞추고 굽실거려야 된다는 거야?”

첸의 주변 일이 이렇게 틀어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녀석은 언제부터 이런 일을 알고 있었던 걸까? 첸의 눈빛이 오랜 시간 눌러 참아왔던 노여움으로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늙은 놈이나 젊은 놈이나 돈이라면 환장을 해서 덤벼들고, 가문의 명예를 걸었다는 약속이 한 달을 못 가. 질투에, 시기에, 탐욕에, 빤한 계략까지…… 참는 것도 이젠 한계야. 이런 오합지졸들은 보다 처음이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니네 조직이 군대라도 되는 줄 알아? 바랄 걸 바래. 조폭들한테는 본래 대가 없는 충성 같은 건 없어.”

“정말 질렸어.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도 없었지만…….”

첸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녀석은 대화나 협상으로 장 대인의 마음을 돌릴 생각 따위는 아예 없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라면 흑풍회 전체를 혼자 상대하겠다는 얘긴데 이런 몹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이제 흑풍회에 니 편이 하나라도 있어?”

“아마 백 대인이 아직 버티고 있을 거야.”

내가 아는 백 대인은 사사건건 첸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장인 친구 영감 한 명뿐이다. 분위기로 봐선 그 영감이 일등으로 돌아섰을 것 같은데…….

“그 영감이 어쩐 일로?”

“흑풍회에서 유일하게 돈에 큰 관심 없는 사람이 백 대인이야.”

“돈에 관심 없는 조폭도 있어?”

“흑풍회 원로이긴 하지만 백 대인을 조폭이라고 할 수는 없어. 동네 어귀에서 평생 작은 골동품 점하고 찻집을 운영해서 먹고 살았고, 다른 종류의 돈벌이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거든. 백 대인의 집안은 흑풍회를 지켜온 여섯 가문 중에 제일 오래된 집안이고, 동시에 엄격한 무사 가문이야.”

조폭 조직에서 제일 오래된 가문인데 조폭이 아니라니…… 말이 되나?

“그렇다 치고, 그 영감이 니네 조직에서 무슨 끗발이 있는데?”

가진 거라곤 작은 찻집하고 골동품가게뿐이라니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조직 내에서 맡고 있는 직책도 중풍 걸린 장인 말동무 정도인 것 같던데, 그 영감이 돌아서든 버티든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하지만 첸의 대답은 내 예상하고는 많이 달랐다.

“백 대인은 천년 조약의 기사단 수장이야. 흑풍회 수장은 나지만, 기사단을 실제로 지배하고 지휘하는 건 백 대인이야.”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라고?”

그 성질 급하고 깐깐해 보이는 노인이 그런 중책을 맡고 있었다니, 의외다. 하지만 그 기사단이라면…….

“백 대인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콴도 함부로 나한테 못 덤벼. 기사단의 화력은 콴이 데리고 있는 허술한 깡패 놈들의 자동 소총 따위로 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백 대인은 최근까지도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었는데, 지난번 대공을 잡아들인 이후엔 태도가 많이 바뀌었어.”

“야…….”

내가 금방 넘어갈 듯 헐떡이자 첸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봤다.

“왜?”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그 영감도 콴한테 붙었어.”

무슨 헛소리냐는 듯 첸이 피식 웃었다.

“믿을 만한 정보야. 정확하게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 돌아섰다고 했어.”

“잘못 안 걸 거야. 백 대인은 콴을 망나니 조폭 이상으로 안 봐.”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콴이 가진 것 중에는 백 대인이 탐낼 만한 게 없어.”

첸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하지만 바바라가…….”

헙…… 내 입에서 바바라의 이름이 나오자 첸이 눈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고 사나운 음성으로 따졌다.

“그 여자였어? 정보원이?”

“범죄자들 중에서도 특히 악질인 건 확실하지만 헛소리는 안 하는 여자야.”

내 대꾸에 첸이 흥, 하고 콧방귀를 날렸다.

“또 뭐래? 그 마녀가?”

“들은 얘기는 그게 다야. 같이 죽기 싫으면 너랑 헤어지래.”

첸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말을 괜히 했나? 이런 얘기를 했다고 첸과 바바라 사이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이미 최악이니까.

바바라의 결별 권유에 마음이 상해서 인상을 쓰던 첸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백 대인을 사창가 지분 따위로 꼬셨다는 건 말도 안 돼.”

“돈 앞에 장사 있냐?”

“백 대인은 흑풍회가 완전히 조폭 소굴로 변한 것도, 포주노릇 따위를 하면서 돈벌이에 열중하는 것도 큰 수치라고 생각해. 지금 흑풍회 원로 중엔 그나마 정신 제대로 박힌 노인이란 말이야.”

“그렇게 못 믿겠으면 바바라한테 직접 물어봐.”

첸하고 바바라를 직접 만나게 하는 게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굴 만나더라도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내 제안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 여자한테 물어볼 거 뭐 있어? 당사자가 지척에 있는데.”

첸이 일어나서 책상 쪽으로 가더니 스피커폰으로 밖에서 대기 중인 자오를 불러들였다.

자오는 아까 나갈 때보다 눈 주위가 조금 더 빨갛게 부어 있었다. 자오를 보니까 내 얼굴도 아픈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아프다. 첸 때문에 열 받고 놀라서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있었다.

“백 대인한테 푸웨이를 보내서 지난번에 가게에 들어왔다는 송대 벼루를 한번 보고 싶으니까 가지고 오라고 해. 내가 내일 점심때까지는 청연루에 있을 테니까 오전 중에 편할 때 오면 된다고…….”

“송대 벼루요?”

“그렇게만 얘기하면 알 거야.”

“예.”

“그리고 지금 외부에 나가 있는 애들을 다 청연루로 불러놔. 비상대기야.”

비상대기라는 말에 자오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첸이 그나마 믿고 있던 백 대인이 배신을 때린 건 어쩌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녀석이 고집을 꺾고 장 대인과 재협상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백 대인이 천년 기사단의 수장이고 그 기사단의 화력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못지않게 빵빵하다고 해도, 그쪽에만 의지해서 흑풍회를 끌고 가는 건 어렵다. 어떤 조직도 온전히 힘으로만 다스릴 수는 없다. 첸이 오래 살면서 흑풍회 보스 노릇을 계속하고 싶으면 백 대인보다는 장 대인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영감을 만나서 뭘 어쩌려고?”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야지.”

“묻는다고 호락호락 털어 놓겠어?”

“털어 놓게 만들면 돼.”

구체적으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조직에서 배신이란 건 어차피 원한, 아니면 돈 문제다.

“결국 돈 때문이었다면 어쩔 건데?”

첸이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그 영감을 죽이게 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겠지.”

비보를 전해 듣고 부리나케 쫓아와서 충고도 해보고, 화도 내봤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대체 이 자식의 뭐냐? 놀려먹기 좋은 머저리? 만만한 잠자리 상대?

“이럴 거면 헤어지자.”

마리아 첸도 이렇게 옥신각신하다 속이 문드러져서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을 거다. 분명히…… 하지만 와이프한테 이혼하자는 말을 먼저 들어서 단련이 됐는지, 헤어지자는 내 엄포가 약발이 하나도 안 받았다.

“이만한 일로 헤어진다는 건 말도 안 되고, 며칠 떨어져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 혹시 일이 거칠어지면 주변에 있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하마터면 녀석을 한대 칠 뻔했다.

“내가 지금 나 살자고 이래?”

“그만 좀 징징거려. 이만한 일로 나 안 죽어.”

한가롭게 지껄이면서 녀석이 나를 끌어당기더니, 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상대기라더니 청연루 안팎에 양복 차림의 인상 안 좋은 애들이 좀 늘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비상사태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청연루는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렸고 정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은 평소보다 오히려 그 수가 더 많았다.

“어머, 안개가 끼었네?”

데이트를 나온 것 같은 발랄하고 어린 커플이 우리를 스쳐지나가면서 탄성을 질렀다. 안개가 끼었는지 불이 났는지 그런 데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 말을 듣고 둘러보니 주변이 부옇기는 했다. 이게 안갠가? 그런데 왜 안개가 분홍색이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막 홍등이 골목 여기저기 밝혀지기 시작한 어스름한 저녁이다. 보통 때도 이맘때면 청연루는 분위기가 굉장히 좋은데 얇은 베일에 에워싸인 듯 안개까지 흐르고 있으니 정취가 보통 때보다 훨씬 깊었다.

“뭐해? 안 가고?”

잠깐 그렇게 서 있었을 뿐인데 자오가 내 등을 떠밀었다. 안 그래도 아까 당한 폭행 때문에 온 몸의 뼈가 다 어긋난 느낌인데, 등짝을 한 대 더 얻어맞으니까 입에서 캑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내 비명에 앞서가던 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자식, 엄살은…….”

첸의 눈총에 자오가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물론 아까 내가 공연히 시비 걸고, 두 번 걷어찬 건 맞지만, 그 즉시 열배로 돌려받았는데 아직도 유감이 남았는지 자오가 나를 보는 눈초리는 곱지 않았다.

내가 정신이 나갔지, 어쩌자고 자오를 건드려서 그렇지 않아도 험난한 인생에 가시를 뿌렸는지 모르겠다.

“얘 자꾸 툭툭 칠래?”

첸이 다가와서 나를 잡아끌며 자오한테 경고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신경이 좀 곤두서서…….”

사실 쳤다고 할 수도 없는 경미한 접촉이었는데, 자오가 순순히 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러면 내 입장이 더 이상해지는데…….

첸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만나서 늘 저녁을 먹던 청연루 2층의 그 방이었다.

방에 들어가 앉자마자 첸이 웨이터한테 풀코스 정식 스페셜을 주문하고 넥타이를 풀었다.

“아니, 정식은 시켜서 뭐하게?”

놀라서 녀석에게 물었다.

“먹어야지.”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녀석이 나를 쳐다봤다.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간단 말이야?”

“그럼 굶어? 너하고 마리아가 순서대로 들이닥쳐서 달달 볶는 바람에 나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야.”

첸이 말도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나는 얘가 비상사태 선포하고 바로 청연루로 오길래 부하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든가, 격려를 하든가…… 하다못해 장사를 중단하고 문단속이라도 할 줄 알았다.

“너 진짜…….”

“굶고 앉아있는 다고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잖아?”

이러다 병이 날 것 같아서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보다 정말 아름다운 건물이고, 정원이었다. 높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도 이곳은 담장 바깥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고립된 또 하나의 세상 같았다. 옅은 안개에 잠긴 채 여기저기 붉은 불빛이 안개 속에서 흐릿하게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 더욱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럴 만한 가치가 있어?”

“뭐가?”

“모든 것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녀석에게는 결국 함정일 뿐이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밥 먹고 하자.”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았나, 그놈의 밥 타령은…….

“대체 이런 결혼을 무슨 생각으로 한 거야? 차이나타운은 외부인한테 그렇게 호의적인 곳이 아니야.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거, 전혀 몰랐어?”

내가 속이 타거나 말거나, 녀석은 젓가락 끝에 찻물 찍어서 테이블에 뭔가 글씨를 끄적거리며 계속 딴 짓이었다.

“야!”

“사실 결혼할 때는 흑풍회가 이렇게까지 막장인 줄은 몰랐었어. 전신이 천년 조약의 기사단이라길래 조폭 노릇은 해도 어느 정도 명예심은 남아 있을 줄 알았지.”

말하다 말고 첸이 혼자 피식 웃었다.

“하긴, 인간의 명예심이라니…… 탐욕 앞에서 그게 무너지지 않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조폭한테 명예심 없는 게 무슨 흉이냐? 있는 게 이상하지.

“흑풍회가 사회봉사 단체야? 왜 거기 가서 명예심을 찾아?”

얼굴이 아파서 이젠 말소리도 크게 못 내겠다. 한마디 하고 얼굴이 아파서 쩔쩔매는 나를 첸이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앉아. 공연히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 일으키지 말고…….”

“됐어! 나는 밥 안 먹어!”

“잔소리 그만하고 얌전히 앉아서 저녁 먹어. 그럼 마리아하고 결혼할 때 사정이 어땠는지 얘기해줄게.”

새우 게살 스프를 선두로 해서 두부 완자탕, 광동식 탕수육, 훈제 오리껍데기, 그리고 새끼 고래만한 생선 튀김까지 나와서 상을 가득 채우도록 꾹 참고 기다렸다.

결혼 뒷얘기 해준다기에 그거 얻어 들으려고 입맛이 소태처럼 쓴데도 불구하고 게살 스프 한 그릇 다 비우고 탕수육도 내가 반이나 먹었다. 하지만 녀석은 요리가 나오자마자 일주일 굶은 거지처럼 이것저것 퍼먹기만 바빴지 도무지 입을 열 기미가 없었다.

“야, 천천히 먹어. 얘기도 좀 해가면서…….”

“미안해. 난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걸로 푸는 스타일이거든.”

스트레스 좋아하네. 앞으로 얼마나 더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평소에 먹는 양하고 비슷하다. 녀석은 스트레스를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배가 고픈 거다.

“대체 그 세기의 정략결혼 얘기는 언제쯤 불 거야?”

“말도 참 고상하게 한다. 누가 짭새 아니랄까 봐…….”

조폭 주제에 명예 찾고, 고상 찾고 참 여러 가지 한다.

“마리아를 만난 건 마리아가 다니던 대학 도서관에서였어. 마리아는 그때 대학원생이었는데 아시아 중세사를 공부하는 학생이었어. 공부를 계속 했으면 훌륭한 역사학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

“넌 전공이 뭐였는데?”

“난 그냥 도서관에 들락거리면서 책이나 빌려보는 일반인이었지.”

“직업은 있었을 거 아냐?”

“기자였어. 작은 신문사에서 경제칼럼을 쓰면서 집세 내고, 겨우 밥이나 먹는…….”

경제 전문기자라니 안 어울린다. 녀석의 분위기는 그런 전문직 쪽이 아니라 나이트를 전전하는 직업 제비, 아니면 부모한테 한 재산 물려받은 부잣집 망나니…… 뭐 그런 쪽이었다. 실제로 마리아 첸하고 결혼할 때도 돈 좀 있는 상류층 자제설이 제일 유력했었다.

“그거 말고도 직업이라면 꽤 여러 가지가 있었어. 대서양 한가운데서 물고기도 잡아봤고, 광산 일도 해봤고, 군대에도 몇 년 있어 봤고…… 그냥 일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시간도 꽤 길었었어.”

어딜 봐도 그렇게까지 고생한 티는 안 나는데…….

“나, 사실은 꽤 오랫동안 기억상실이었어.”

녀석이 그 커다란 생선튀김을 한입에 절반이나 뜯어먹으며 건성으로 지껄였다.

남자들끼리 노가리 좀 까다 보면 학교 다닐 때 몇 대 몇으로 붙어서 학교 짱을 포함한 모든 애들을 모조리 때려 눕혔다거나, 동시에 세다리, 네다리 학교 퀸들을 독점하고 다녔다는 둥 헛소리가 도를 넘을 때가 종종 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소설 쓰냐?”

“못 믿겠어?”

“기억상실은 드라마나 소설에서 너무 많이 써먹은 거잖아. 식상해.”

요즘엔 어리숙한 사춘기 여자애라도 그런 말은 안 믿을 거다.

“그럼 그 얘기부터 해줄까?”

“됐으니까 마리아 얘기나 해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거 아니지?”

내 질문에 첸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한 만남이었으면 그냥 스쳐지나갔겠지. 마리아는 그때 우연히 만난 남자한테 눈길을 돌릴 정도로 인생이 여유롭질 않았거든.”

분위기가 얼음 같은 중국 귀부인의 대학 시절이라…… 어렸을 때부터 표정이 지금처럼 싸늘했던 게 아니라면 분명히 인기가 많았을 거다.

“집안에서는 입에 올리기도 징그러운 혼담이 심각하게 오가는 중이었고, 유일한 바람막이였던 장모님은 혈액암으로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서 장례식 날짜를 받아 놓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마리아한테 흑풍회 수장의 딸이란 현실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처형 날짜를 기다리는 죄수하고 다를 게 없었어. 콴이라니, 녀석이 사촌이나 혹은 배다른 오빠가 아니라도 마리아한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거야. 인간 자체가 별 볼일 없는 놈이거든.”

중간에 또 이름도 알 수 없는 엄청난 요리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대화가 잠깐 끊어졌다. 여기서부터는 확실히 보통 때보다 폭식이었다.

녀석이 상어지느러미, 전복, 각종 버섯과 함께 끓인 스프를 아예 들고 마시다가 나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

“마리아는 니가 자기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거, 몰랐어?”

“도서관에서 세 번째 마주쳤을 때 내가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커피라도 마시자고 말을 건넸는데, 그때는 마리아도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도 불평 없이 따라오더라고.”

마리아 첸의 행동이 경솔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첸 같은 놈이 눈앞에서 자꾸 얼쩡거리면서 차 마시자, 밥 먹자…… 이런 식으로 꼬시면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드물 거다.

“봤으니까 알겠지만 쉽게 속마음을 보이는 타입이 아니야. 집안 분위기가 그러니까 그렇게 조심스러운 게 무리도 아니지. 어쨌든 그렇게 만나서 가끔 차 마시고, 학교 스낵바에서 점심 먹으면서 친구처럼 지냈어. 두 달…… 정도.”

“그렇게 꼬드겨서 홀랑 넘어오게 한 다음에 결혼 승낙까지 받아내는 데 두 달이면, 니 기준으로는 빠른 거야? 늦은 거야?”

“모르겠어. 결혼은 처음이었거든.”

배경 빵빵한 집안 딸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해서 결혼까지 한 파렴치한 과거지사를 첸이 떳떳하게 밝혔다. 하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이제 와서 발뺌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결혼하자니까 순순히 하겠대? 니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제비라는 걸 알고도?”

“처음엔 반응이 별로였지. 하지만 설득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 그때 마리아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만큼 절박한 심정이었거든.”

“결국 마리아도 널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던 거야?”

일전에 쥬드한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부부관계도 없고 서로 사생활도 간섭하지 않는 남 같은 부부라고…… 둘이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건 세상에 떠도는 가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마리아 첸과 결혼한 직후부터 첸은 다른 여자들하고 세상 사람들 보란 듯 어울리곤 했으니까.

“사실 마리아한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어. 대학생 때 만난 상급생이었는데, 마리아한테는 그 남자가 첫사랑이었고, 나랑 만났을 때도 그 남자 걱정으로 고민이 많았어.”

이건 또 의외의 전개다.

“아니, 그럼 그 남자하고 결혼을 하지 왜…….”

첸이 어림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 친구는 직업이 박물관 큐레이터고 주말이면 동네 어린이 축구팀 코치를 무료로 봐주는 천사 같은 남자였어.”

그럼…… 어려웠겠다.

“결혼도 문제지만 마리아는 콴이 남자친구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잔뜩 먹은 상태였어. 마리아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콴하고 결혼을 한다고 해도, 성질 뒤틀리면 얼마든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이거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리아가 불쌍하다. 조폭 보스 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난 죄로 사랑하는 남자하고는 생이별을 하고 이복 오빠 아니면 처음 보는 제비, 둘 중 하나하고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니…….

“많이 망설이던 마리아가 결혼에 동의한 건 남자친구 신변을 보호하고, 결혼 후에도 둘 사이를 유지하는데 절대 시비 걸지 않겠다는 조건 때문이었어. 결혼으로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는 셀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사정이 안 좋아졌다고 해서 마리아를 원망할 수는 없어.”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준다는 조건으로 이 자식하고 결혼을 결심했을 때 마리아 첸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 호랑이를 피해서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을 거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마리아 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쪽도 사정이 절박했고, 이미 5, 6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 자식이 쇼핑몰을 짓겠다며 장 대인을 돌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난감해지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 모든 건 순전히 이 자식 탓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마리아하고 결혼할 필요가 있었어?”

“서로에게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어. 마리아는 사랑하는 남자를 지킬 수 있고, 나한테도 흑풍회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었으니까…… 그 정도면 서로가 이기는 게임이라고 할 만하잖아?”

“그러니까 왜 흑풍회 수장 자리가 그렇게 탐이 났었던 거냐고 묻는 거잖아?”

첸이 만두를 집어들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편하게 살고 싶어서.”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편하게 살고 싶은 놈이 공연히 벌통을 쑤셔서 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 리 없다. 이 자식한테는 뭔가 딴 생각이 있다. 흑풍회를 이렇게 뒤흔들어서 녀석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뭘까? 뭣 때문에 이렇게 목숨을 저당 잡힌 인생을 택한 걸까?

“흑풍회가 이렇게 개판인 줄 처음엔 몰랐다니까?”

녀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만두 두 통, 꽃빵 다섯 개로 남은 소스까지 닦아먹고 녀석이 상을 물렸다. 저렇게 먹고도 배가 안 터지는 게 신기하다.

정원엔 아직 안개가 자욱했다. 처음엔 얇은 실크처럼 가볍던 안개가 아까보다는 좀 더 짙어졌다. 안개에 잠긴 중국풍 담장이며, 돌다리는 실제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낡은 듯 보였고 정원의 꽃과 나무, 그리고 여기저기 걸려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홍등의 붉은 빛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아련하고 아름다웠다.

홍등에 분홍색 안개가 너무 대놓고 러브모드를 조성한 탓인지 정원 여기저기서 커플들의 애정행각이 난리도 아니었다. 데이트 중인 커플들이 담장 구석이나 숲길로 통하는 그늘진 곳에서 키스 정도 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부쩍 대담한 커플이 늘었다.

“우화각으로 가실 겁니까?”

쿠간에서 제일 음란한 클럽의 뒷방처럼 변해버린 골목길을 빠져나와 돌다리를 건너려는데 자오가 첸을 불러 세웠다.

“오늘은 일찍 쉴 거야. 힘든 하루였거든.”

“비상 대기조한테 특별히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 해서요.”

아, 그거…… 하면서 첸이 돌아섰다. 설마, 부하들을 비상소집한 걸 까먹고 있었던 걸까?

“가게 영업 끝나면 문단속 잘 하라고 일러둬. 큰 문은 다 봉쇄하고, 호텔 손님이 출입할 때는 가드 붙여서 옆문으로 안내해. 그리고 내일 오전에 백 대인 오기 전에 애들 완전무장 시켜서 입구부터 촘촘하게 세워놔. 껄렁하게 서 있지 않게 미리 기합을 좀 넣어둬. 백 대인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군인답게 혹은 무사답게, 바짝 긴장해서 뻣뻣하게 서 있는 거 말이야.”

“그렇게만 하면 됩니까?”

“달리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애들이잖아.”

첸이 자오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돌아섰다.

“넌 더 이상 따라올 거 없어. 돌아가서 애들 간수나 해.”

돌다리를 건너서부터는 안개가 유독 짙었다. 밤이 돼서 안개가 더 몰려온 걸까? 아니면 이거 혹시…… 뭔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려고 하는데 첸이 안개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내 손을 잡았다.

“잘 따라와. 여기서 헤어지면 내일 아침에나 만나게 될 것 같으니까…….”

다리를 건너서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휑한 잔디밭이 나오고 잔디밭을 가로지르기만 하면 우화각이었다. 아무리 안개가 짙어도 여기서 길을 잃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서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안개에 앞이 완전히 막혔던 것이다.

이 정도 걸어 나왔으면 우화각이 바로 보여야 되는데 앞이 그냥 허옇기만 했다. 이쯤 되니까 이게 어떤 놈의 소행인지 확실히 알겠다. 이건 안개가 아니다. 발렌타인, 설마…… 잔디밭으로 끌려나온 거야?

“너, 어디가 어딘지 방향은 알고 가는 거야?”

이 안개는 한번 갇히면 시간이고 방향이고 다 잊게 만드는 강력한 연막이었다. 겨우 병원 복도에서도 사람들이 빠져나가질 못하고 안개가 걷힐 때까지 꼼짝없이 갇혀 있었는데, 여기는 병원 복도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넓었다.

“글쎄…….”

두려운 기색 따위 전혀 없이 나를 끌고 기세 좋게 안개 속으로 뛰어든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안개가 생각했던 것보다 짙네. 길을 잃은 것 같은데?”

“넌 매사가 이런 식인 거야?”

안개에 갇힌 것 자체는 큰 일이 아니다. 기린하고 발렌타인이 잔디밭 플레이를 마무리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안개도 걷힐 테니까…… 하지만 첸이 지금 처한 상황은 그렇게 저절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언저리에서 구경만 하는 걸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일이 있잖아. 인생이란 게 본래 저지를 때는 저질러줘야…….”

“그러다 꼼짝없이 죽게 생겼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화가 나서 첸의 손을 뿌리치고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이 안개 속에서는 사람을 한번 놓치면 찾기도 어렵다. 아차 싶어서 뒤를 돌아봤을 때, 벌써 첸은 형체도 없고 안개로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기린의 연막은 보통 안개하고 확연히 달랐다. 마치 눈 속에 파묻힌 것처럼 한치 앞도 분간이 안 되고, 목소리까지 묻혀버렸다. 야외라서 그런지 안개가 병원 복도에서의 그것만큼 짙은 건 아니니까 좀 돌아다니다 보면 녀석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야, 어디 있어? 내 말 들려?”

녀석이 있을 거라고 짐작되는 쪽으로 소리쳐 봤지만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잘 안 들렸다.

기린 이 망할 자식은 발렌타인을 끌고 풀밭에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타일렀으면 말을 좀 듣지, 그놈의 야외플레이 때문에 나까지 이게 웬 고생이냐? 게다가 아까 청연루에 왔을 때부터 안개가 끼었던데 지금까지 이렇다는 건, 장장 너댓 시간을 밖에서 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러다 발렌타인 손에 목숨을 잃어도 나는 모른다.

몇 걸음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첸을 부르며 여기저기 더듬어봤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손은 놓지 말 걸 잘못했다. 첸도 잃고, 길도 잃었다.

“미치겠네. 진짜…….”

방향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서 앞으로도 뒤로도 못 움직인 채 얼마나 머뭇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패닉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때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 잡았다.

“그렇게 멋대로 가버리면 어떡해? 한참 찾았잖아.”

“…….”

“이건 안개가 아니라 기린이 불러들인 구름이야. 얼마나 짙은 줄 알아? 한번 갇히면 인간은 절대 못 빠져나가.”

첸이 나를 나무라며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갑자기 밀려온 안도감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주저앉고 보니 바닥이 온통 꽃밭이었다. 이름도 모를 온갖 색깔의 꽃이 종아리까지 올라와 흐드러져 있는데 안개 때문에 놀라서 여태 깨닫질 못했다. 바닥이 유난히 푹신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발밑조차 보이질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기린 이 자식, 정말 별짓을 다 한다.

갑작스럽게 드러난 꽃밭에 마음을 빼앗긴 채 멍하나 앉아 있는데 갑자기 첸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왜 이래?”

“아니, 그냥…… 이런 기회도 드물 것 같아서.”

냉큼 대꾸하고는 녀석이 나를 덮쳤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 안개, 이 꽃밭, 그리고 이 남자…… 지루하고 공허하고 그날이 그날 같고, 때론 숨이 막힐 만큼 고통스러운 게 현실이고 인생일 텐데, 요즘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은 터무니없이 이상하고 때론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만해. 지금이 이런 짓이나 할 때야?”

첸이 나를 내리누르고 이마에, 뺨에,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이놈의 안개하고 풀꽃 향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이대로 녀석의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되는데, 녀석의 키스와 음란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내 상태를 눈치 챈 녀석이 씨익 웃으며 셔츠를 끌어 올리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 이럴 기분 아니라니까!”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사정없이 뜯어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눈에 빤히 보이는데…….”

녀석이 나한테 잡아 뜯긴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너하고 달라서 기분이 아래쪽에 몽땅 몰려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녀석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좀 전에 녀석을 안개 속에서 잃어버렸을 때, 뭣 때문에 그렇게 찾아다녔던 걸까? 이럴 바엔 안개 속에 혼자 앉아 있는 편이 낫겠다. 하지만 첸은 하던 짓을 중단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지 말고 기분을 끌어 올려 보자. 이 안개 속에선 달리 할 일도 없잖아.”

한가롭게 지껄이면서 녀석이 내 발목을 잡아챘다. 그 바람에 꽃밭 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내가 본래부터 게이였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니콜라스하고 그렇게 된 건 그냥 니콜라스가 워낙 매력적이라 누구라도 그럴 만했던 거지 나한테 그런 성향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이 자식하고까지 엮이고 보니 내 성향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야외플레이는 싫다.

“싫다니까! 게다가 밖에서 이러는 건 진짜…….”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는데?”

태평하게 지껄이면서 녀석이 내 바지를 안개 속으로 집어던졌다.

“야!”

거기다 던지면…….

“그만 좀 버둥거려. 내가 여기서 더 흥분하면 너만 고생이야.”

녀석이 내 가슴을 찍어 누르며 협박했다.

“이 짐승아!”

열이 확 뻗쳐서 욕을 퍼붓는 순간, 녀석이 내 중요한 곳을 덥석 물었다.

안갯속의 정사라…… 이 자식 때문에 정말 별짓을 다 해본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약에 취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럴 기분이 아니란 말은 거짓말이었다. 골목길에서 옅은 안개에 취해 서로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던 커플들을 지나치면서부터 실은 마음이 싱숭생숭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다리를 건널 때까지 녀석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잘 왔는데, 안개 때문에 이게 뭐냐?

“아윽, 그만…….”

안개 탓인지, 야외라는 낯선 환경 때문인지 오늘따라 흥분이 지나쳤다. 이런 식의 애무는 보통 전희 정도로 그치던 녀석도 오늘은 별스럽게 집요했다. 그 바람에 절정에 이르는 시간도 다른 날보다는 훨씬 짧았다. 하지만 다급하게 눈치를 줘도 녀석이 나를 놔줄 생각을 않았다.

“그만해. 이러다…….”

손을 뻗어서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오늘따라 이 자식 머리채를 너무 자주 잡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을 안 들으니 다른 수가 없었다.

“나를 아예 대머리로 만들 작정이야?”

머리채를 잡혀서 옆으로 밀쳐진 녀석이 정색을 하고 툴툴거렸다.

“그러니까 말로 할 때 들으면 좋잖아?”

그나마 타이밍이 안 맞아서 녀석의 입술하고 얼굴에 정액이 좀 튀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손바닥으로 얼른 녀석의 얼굴을 닦아냈다.

“얼굴에 튀었잖아.”

“뭐가 어때서?”

무심한 척하는 게 눈꼴시어서 보란 듯이 녀석의 코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이걸 후식으로 먹었을 텐데 그래도 괜찮아?”

“뭐…… 얼마든지.”

녀석이 내 손목을 움켜잡더니 손바닥에 묻은 정액을 혀끝으로 쓱 핥았다. 순간, 전기가 오른 것처럼 온 몸이 짜릿했다. 당황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녀석이 움켜잡고 놔주질 않았다.

“더러운 짓 좀 작작해.”

“별로 더럽지 않아. 맛은 별로지만…….”

안개가 이렇게 짙은데도 바람은 불었다. 안개가 잠시 흩어졌다가 더 짙은 안개로 되돌아왔고, 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한번 멋지게 흩날렸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고 몸이 좀 떨렸다.

“추워?”

첸이 웃옷을 벗어서 내 어깨에 푹 덮어 씌웠다. 멀쩡한 남의 옷은 찾지도 못할 데로 던져버리고서 자기 옷으로 생색은…….

“너 정말 나한테 왜 이래?”

“왜 또 시비야? 내가 뭘 어쨌다고?”

녀석이 핀잔을 주며 나를 끌어안았다. 차게 식었던 몸과 함께 그동안 품고 있던 경계심까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 몸에 전해지는 녀석의 온기가 그렇게 따뜻했다.

“니가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직도 그 소리야?”

하긴, 이 자식한테 뭐 그렇게 대단한 의도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이렇게 공을 들여봐야 평범한 짭새에 불과한 나한테서 이 녀석이 얻어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첸이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귓불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니가 좋아.”

이유도 없이 목이 메었다. 이렇게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닌데…….

“볼 때마다 점점 더 좋아져. 그런 건 이유가 안 돼?”

첸이 두 팔로 나를 더 힘껏 부둥켜안았다.

“아직도 추워?”

“괜찮아. 이제…… 별로 안 추워.”

안개가 빨리 걷혔으면 좋겠다. 이대로 있다간 녀석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