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전역에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졌다. 알려진 사건 이외에도 지난 몇 개월간 시내 곳곳에서 야심한 밤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괴한들에 대한 신고가 여러 건 들어왔던 게 확인됐고, 지난밤에는 론테즈 산기슭에서 기관총 소리를 들었다는 인근 야영객들의 신고가 줄을 이었기 때문에 경찰서 내부에서부터 놈들의 정체를 하루빨리 밝히고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첸의 말대로 녀석들이 천년의 역사를 가진 자경단이라면, 놈들을 상대하는 일은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놈들이 정말 괴물 사냥 전문 기사단이라면 일반 범죄조직 취급하듯 일방적으로 놈들을 소탕하는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심각한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다. 놈들이 없어지면 오컴이나 대공 같은 괴물 사냥을 고스란히 짭새들이 떠안아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실제로 우리가 대공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을 때 이미 놈들은 대공을 추적 중이었고 결국 첸의 본가 지하 감옥에라도 놈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기사단과 첸이 아니었으면 지금도 도시 어딘가에서 일주일에 서너 개씩 바싹 마른 미라 사체가 굴러다니고 있었을 거고, 나는 그 사건에 시달려서 미쳐가고 있었을 거다.
브리핑을 마치고 나서 바로 지하 1층 서류실로 내려갔다. 최근 20년간 있었던 미해결 사건 파일이 쌓여 있는 이 서류창고가 요즘은 내 사무실이고 휴게실이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창고 제일 안쪽으로 들어가서 맨 바닥에 쫙 뻗었다. 한잠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도저히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단결근을 할 수도 없고, 계속 첸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는 돌 것 같아서 보통 때보다도 일찍 우화각을 나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지금까지 분명하다고 생각해왔던 선과 악의 개념이 모호하게 뒤섞였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상식의 경계가 흐려지거나 아예 무너졌다.
쥬드가 세계관 어쩌고 하면서 죽는 소리를 할 때는 엄살이 너무 거창하다고 얕보고 비웃었는데, 막상 내 차례가 되고 보니 그 충격이 흡사 트럭에 치인 것과 같았다. 세계관이 무너지는 건, 내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너무 경솔하고 어리석었다. 감당하지 못할 비밀 따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 그간 간간이 일어났던 어이없는 일의 실체가 이런 건 줄은 몰랐다. 이런 비밀은 언제까지나 비밀인 채로 묻혀 있는 게 더 좋았을 거다.
오컴이든 대공이든 용의 군대든 나타날 때가 돼서 나타나는 건 좋다. 봉인 어쩌고 하는 걸 보면 막을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니콜라스 얘기는 대체 뭐냐? 사실 첸한테서 들은 말 중에 생각나는 거라곤 니콜라스에 관한 것뿐이었다.
니콜라스가 사람이 아니라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해보려고 밤새 뒤척이며 노력했지만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머리만 아팠다. 니콜라스가 나쁜 놈인 건 사실이다. 그것만 해도 속이 쓰린데 아예 사람이 아니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선배님, 안에 계세요?”
앤디다. 뭔가 일이 있어 찾는 모양인데 대답하기 귀찮아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지금은 나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선배님, 왜 그러고 계세요?”
케비닛과 서류 상자가 켜켜이 쌓인 선반 사이를 들여다보고 다니던 앤디가 구석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어디 아파요? 아니면 다치셨어요?”
“피곤해서 그래.”
“어제 쉬셨잖아요.”
“그래도 피곤해.”
앤디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뭐 중요한 일 있는 게 아니면 나 좀 내버려둬. 오늘은 에쉬하고 터너 따라 나가서 현장 근무라도 하든가…….”
“저는 특별히 중요한 일은 없는데, 크롬웰 양이 선배님을 좀 보재요.”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만나기 싫은 사람이 쥬드다. 분명히 기사단이니 전쟁이니 그딴 소리나 잔뜩 늘어놓으면서 나를 다그칠 텐데, 이미 들은 얘기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다.
“나 못 찾았다 그래.”
“선배님 출근한 거 뻔히 알고 데려오라는데, 그런 말을 어떻게 해요? 그 여자가 이 경찰서 실세 중의 실세라고 겁을 준 건 선배님이잖아요.”
호출에 응할 마음이 전혀 없어서 버티기에 들어갔더니, 앤디가 나를 우격다짐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 자식이 그동안 터너랑 에쉬를 쫓아다니면서 안 좋은 것만 두루두루 배우더니만 요즘 이렇게 나를 들볶는다.
“쥬드한테 내려오라고 해. 오는 길에 커피 한 잔 갖다 달라고 하고…….”
“터너 선배도 크롬웰 양이라면 꼼짝을 못하던데, 선배님은 뭘 믿고 그 여자한테 이렇게 개기는 거예요?”
믿는 거 없다. 그저 나는 쥬드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대도 더 이상 무섭지 않을 뿐이다.
앤디가 나를 책상 있는 데까지 끌고 가서 의자에 걸쳐놓고는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잔소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쥬드가 들이닥치기 전에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까? 장서각이니, 기사단이니 그런 소리만 나오면 경기를 하던 쥬드의 심정이 이제 이해가 된다.
첸이 니콜라스에 대한 것 말고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검은 용, 봉인, 그리고 용의 군대…… 대공하고 오컴이 한 마리씩 나타난 것만으로도 이 큰 도시가 패닉에 빠졌었고, 경찰은 제대로 된 대처도 없이 삽질만 하고 다녔다. 두 괴수로 인한 인명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나씩 튀어나오는 괴물들만 해도 감당이 안 되는 형국인데, 전쟁에는 귀신이라는 검은 용과 그 휘하 10만 대군의 귀환이라니…… 검은 군대가 어떤 놈들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쉽게 말하자면 천년 동안 잠들어 있던 괴물 10만 마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온다는 얘기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한테는 당장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나가서 술을 퍼마시든 전봇대를 들이받든, 어젯밤에 첸에게서 들은 이상한 말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다. 하지만 쥬드가 한발 빨랐다. 방을 뛰쳐나가려고 문을 열어 젖혔을 때엔 이미 쥬드가 문 밖에 서 있었다.
“얘기 좀 하자는데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요?”
쥬드가 커피 잔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얼굴 보니까 쥬드도 어제 잠을 못 잤다.
“무슨 얘기?”
“어제 루크 첸하고 당신 사이에 뭔가 심도 있는 대화가 오고 갔을 테니까, 우선 그 얘기부터 해봐요.”
“입 닥치고 떡만 쳤어.”
“남자친구한테서 거짓말 하는 요령도 좀 배우지 그래요? 떡만 치지 말고…….”
쥬드가 면박을 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방안 분위기가 안 좋다. 본래 서류 창고가 분위기 찾을 만한 곳은 아니지만 쥬드는 자기 손톱만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고, 나는 그 앞에서 눈치 보면서 커피나 마시고…… 그렇게 썰렁한 침묵 속에 20분이 지났다. 할 말 있으면 내려오라는 내 전언에 득달같이 쫓아 내려오기는 했지만 쥬드도 선뜻 입을 못 열었다. 그래서…….
“라두칸이란 놈에 대해서 아는 거 있으면 얘기 좀 해봐.”
커다란 머그잔에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찼던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난 후에 내가 먼저 쥬드에게 물었다. 쥬드는 옛날 책도 워낙 좋아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장서각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잘 알고 있었으니까 라두칸이라는 놈에 대해서도 뭔가 아는 게 있을 거다. 믿기지는 않지만 라두칸이 니콜라스하고 동일인물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나온 이상, 나한테도 최대한의 정보가 필요했다. 되도록 그 주장을 반박할 만한 걸로…….
“아는 게 별로 없는데요.”
“뭐라도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이름이라도 아는 거잖아. 대단한 거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아는 대로 말해줘.”
“갑자기 웬 관심이에요?”
“첸이…….”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더 이상 무리했다가는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 그래요?”
쥬드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물끄러미 봤다.
“첸이 그러는데, 라두칸이 니콜라스래. 둘이 동일 인물이고, 니콜라스는 천년도 넘게 살고 있고…… 사람이 아니래.”
가슴에 돌덩어리가 얹힌 느낌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소리를 하게 되다니……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몰려왔다.
머리통을 감싸 쥐고 끙끙 앓다가 쥬드를 쳐다봤다. 쥬드는 그렇게까지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안 놀랄 수가 있지?
“왜 안 놀라?”
“놀랐어요.”
거짓말이다. 부쩍 심란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심란한 거하고 놀라는 건 다르다.
“니콜라스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낌새가 있었는데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던 거야?”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보통사람 같지 않은 느낌은 있었잖아요.”
당연히 보통사람 같지는 않았다. 연쇄살인범이었으니까.
“니콜라스가 라두칸이라…… 마리우스의 장서각이 헤슬렘 소유라고 했을 때 눈치를 챌 수도 있었는데, 그동안 스스로 눈을 가린 격이네요.”
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는데, 같은 말을 듣고도 저쪽은 반응이 너무 썰렁하니까 머리가 더 멍했다. 한때 알던 사람이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고, 나이가 천 살도 넘었다고 하면 보통 이렇게 심드렁한 게 정상인데 나만 유난스러운 걸까?
“당신은 사람인 거 맞아?”
주변에 또 누가 인간의 탈을 쓴 괴물, 요정, 혹은 용이나 기린 같은 이상한 종족일까 의심해본다면 쥬드도 꽤나 수상한 쪽이었다. 그 다음이 비니고…….
“잠꼬대해요?”
“솔직히 말해도 돼. 난 이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안 놀랄 자신 있어.”
대답 대신 쥬드가 내 무릎을 세게 걷어찼다.
쥬드의 설명에 따르면 라두칸은 바하르나 전서와 그 외 몇 개의 고문서에 잠깐씩 등장하는 중세 판타지 단골이었다. 바하르나 전서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 중 한명으로 전쟁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영화로 치면 공동 주연 정도의 비중 있는 역할을 했지만 정확하게 어떤 인물인지는 모른단다.
“왜 몰라? 주연이면 등장하는 장면도 많을 거 아냐?”
“안타깝게도 몇 장면 안 나와요.”
“주연이라며?”
“등장할 때마다 인상이 깊었어요. 전쟁의 양상을 뒤집을 만큼 중요한 역할도 했었고…….”
거기서 얘기 끊어먹고 잠잠하길래 뭘 하나 싶어서 쳐다봤더니 팔짱끼고, 눈 감고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하르나의 오거스트 왕과 처음 만나던 그때, 라두칸은 냇가에서 피 묻은 칼을 씻고 있었어요. 왕이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기원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죠. 라두칸은 바하르나 전서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가 많은 인물이면서 동시에 매력적이었어요. 니콜라스가 라두칸이었다니, 그자를 몇 개월이나 지켜보고, 직접 만나고, 심문을 했었다니…….”
혼잣말 하듯 중얼거리는 쥬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웃었잖아! 지금!”
남은 속이 타다 못해서 이제는 재가 날릴 판인데, 내 앞에서 그 인간 얘기를 하면서 히죽거려?
“그럼 울어요? 지금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에요.”
다시 대화가 끊어졌다. 이런 대화를 이렇게라도 이어 나가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 우리 둘 다 힘들다.
“라두칸은 전략 전술에 능한 전략가였고, 드문 일이긴 하지만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는 패한 적이 거의 없는 뛰어난 장수였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불가사의한 도서관의 주인이기도 했고, 고대 마법과 의술에도 능했기 때문에 이름 앞엔 항상 현자라는 칭호가 붙어 다니죠.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멀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예요.”
말을 하다 말고 쥬드가 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딴 생각에 빠졌다.
“라두칸이 몇 천년을 살 수 있는 초인적인 존재라면, 멀린하고 동일인물일 수도 있어요. 중세 문학 연구자들 중엔 둘을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꽤 있거든요.”
아는 이름이 나왔다고 반가워할 일이 아니다. 이게 나름 전문직에 종사하는 두 사람이 맨 정신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라는 게 놀라울 뿐이다.
“니콜라스가 왕하고 처음 만났을 때 피 묻은 칼을 씻고 있었다고 했다면, 그럼 혹시…….”
사람을 죽였던 걸까? 20여 년에 걸쳐 저지른 15건의 살인…… 그것만으로도 쿠간 시 역사상 제일 잔혹한 살인마 명단에서 상당히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니콜라슨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열다섯 명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라는 얘기다.
“그때부터 연쇄살인범이었던 거야?”
“라두칸은 제사장, 혹은 신관의 이미지도 강해요. 한창 전쟁 중에 어떤 의식을 위해 몇 주나 자리를 비웠다는 기록도 있거든요. 이제 와서 말이지만, 니콜라스의 살인에 그런 느낌이 많았던 건 부인할 수 없어요. 굽타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고요.”
나도 기억난다. 니콜라스의 살인은 어떤 부정한 목적을 가진 의식 같았다. 살인이 이루어졌던 장소도 오래된 신전 같은 분위기였고 그곳의 흙냄새, 돌 냄새, 그리고 꽃향기에조차 희미한 피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꿈에서 그곳을 보고, 그 냄새를 맡는다.
“어쨌든 연쇄살인이네.”
그렇게 천년을 넘게 살았으면 희생자가 못 되도 천 명은 됐을 거다. 그러니 무슨 죄책감이 있었을까?
“왜 그렇게 다 죽어가요?”
바닥에 주저앉아서 얼굴 감싸 쥐고 앓고 있는 나를 쥬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냥…….”
지난겨울, 니콜라스에게 이끌려서 눈발 날리는 산자락을 달리던 그때 생각이 났다. 팔이 거의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는데도 아픔 따위 모른다는 듯 태연하던 얼굴, 나를 대신해서 기사단 놈들에게 끌려가던 뒷모습, 서부호수를 둘러싼 언덕 마루에서 목격한 추락, 그리고 폭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야 하나씩 풀려갔다.
“남자친구가 그런 놈이라는데 당신 같으면 기분 좋겠어?”
“옛 남자 따위, 어떤 놈이든 무슨 상관이에요?”
첸도 어제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그 말 되게 슬프다.
“아무리 상관이 없어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너무하잖아.”
“좋게 생각해요.”
“뭘 좋게 생각해?”
“얘기가 이렇게 되면, 최소한 니콜라스가 정신 이상이었던 건 아니잖아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제 더 이상은 쥬드하고 한마디도 더 주고받기 싫어서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쥬드는 니콜라스가 사이코가 아닌 게 다행스러운지 몰라도 나는 니콜라스가 정신병자라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니콜라스가 저지른 짓에 대해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곤 그것뿐이었다. 맨 정신으로 천년 동안 사람을 잡아 제사를 지냈다는 건, 한때 사랑했던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끔찍한 일이다.
“니콜라스에 관한 건 신경 쓰지 말아요. 그자가 죽었든 살았든, 사람이든 아니든 이제 당신하고는 상관없어요.”
“노력하는 중이야.”
“지금 남자친구는 괜찮잖아요.”
괜찮은 거 좋아하네. 내가 볼 땐 그놈이 그놈이다.
“얘기가 이렇게 돌아가면, 그 자식은 틀림없이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어.”
“뭐, 수상한 낌새라도 있었어요?”
낌새로만 치면 첸, 그 자식이 니콜라스보다 더 수상하다.
“데릴사위로 들어가서 억지로 처가 뒤치다꺼리하는 놈치고는 정황을 너무 자세히 알고 있어. 보기보다 힘도 세고 능력도 있고, 그리고…….”
쥬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라는 듯 말을 잘랐다.
“들은 얘기겠죠. 따로 조사도 했을 거고…… 뭘 알아야 대장 노릇도 할 테니까요.”
“가끔은 천년 전에 있었다는 그 전쟁에 대해서 직접 본 것처럼 얘기할 때가 있어.”
“…….”
여태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튕기던 쥬드의 표정이 갑자기 뒤숭숭해졌다.
“왜 그래?”
“아니에요. 아무것도…….”
쥬드가 머릿속에 떠오른 나쁜 생각을 떨치려고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말은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뭔가 심하게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주변엔 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바로 며칠 전에 본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 첸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리우스 때문에 그래?”
나를 보는 쥬드의 시선이 대번이 날카로워졌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애 이름은 들먹이고 그래요? 마리우스는 그냥 망상증이 있는 것뿐이라고요!”
하긴, 남자친구가 천년째 책방 알바를 하고 있는 이상한 종족인 것보다는 살짝 정신 이상이 있다고 믿는 게 마음이 편하긴 하겠지.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제이!”
쥬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쥬드한테 또 걷어 채일까 무서워서 나도 얼른 일어나 앉았다.
“첸이나 마리우스가 진짜로 수상쩍다는 뜻은 아니야. 그냥, 어제부터 기분이 뒤숭숭한 게 눈에 띄는 사람들이 다 수상하고 의심스럽고…… 그래.”
니콜라스 하나만 그렇다는 소릴 들어도 소화가 안 돼서 속이 이렇게 부대끼는데 첸이나 마리우스까지 그렇다면 남자 만나기 정말 무서울 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앞자리에 앉았던 뚱뚱한 아줌마를 봐도 그렇고, 경찰서 들어오는 길에 마주친 심술 사납게 생긴 영감도 그랬고, 당신도 그렇고, 비니도 그렇고…… 나만 빼고 다 수상해.”
내 두통이 옮아갔는지 쥬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조퇴 시켜줘요?”
조퇴라니 솔깃하긴 하지만, 일을 하루 땡땡이 칠 것인가 말 것인가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어쩔 거야? 이 일이 모두 사실이라면 세상이 홀랑 뒤집히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얘기잖아.”
“솔직히, 나는 루크 첸이 하는 말을 하나도 못 믿겠어요.”
그럴 줄 알았다.
“당신은 오컴이나 대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놈들이 저지른 짓은 다 봤어. 대공이 첸 본가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것도 사실이고…… 무조건 못 믿겠다고 버티는 것도 현실도피야. 당신은 그렇게 무능력하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 아니잖아.”
“능력하고 책임감이 무슨 소용이에요? 루크 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어요.”
사실이다. 이 일은 쥬드하고 나한테는 너무 규모가 크다. 나는 평범한 짭새에 불과하고, 쥬드는 평범하지는 않지만 취미생활로 살인범 몇 명씩 잡아들이는 경찰서장 비서일 뿐이다.
“어떡해. 그럼? 앉아서 죽어?”
“어떻게 죽든, 사람은 결국 죽잖아요.”
죽음 자체는 대단할 게 없다는 듯 쥬드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전화가 왔다. 요즘 내 휴대폰으로 개인적인 전화를 하는 놈은 첸뿐이었다. 귀찮아서 안 받고 버티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휴대폰을 꺼냈다. 이런 식으로 녀석의 전화를 돌리거나 씹었다가 뒤탈 없이 조용히 넘어갔던 적이 별로 없었다.
「뭐해?」
“그냥…… 일 해.”
사실은 쥬드가 나간 후로 계속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 정신인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정신 차리고 일을 하려고 해봤지만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또 유치장 구석에 틀어박혀서 끙끙 앓고 있는 건 아니고?」
이 자식은 정말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첸이 다른 종족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 독심술을 하는 천년 묵은 늑대?
「크게 중요한 일 하는 거 아니면 접고 그냥 오지 그래?」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출퇴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크롬웰한테 전화해줄게. 그 여자 정도면 2~3일 정도 근무를 빼줄 권한은 있을 거 아냐?」
안 그래도 쥬드가 나갈 때 정 일하기 힘들면 하루 이틀 쉬면서 정신 차리고 오라고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죽고 싶은 거지, 쉬고 싶은 게 아니다.
“비서한테 그런 권한이 어디 있어?”
「가만 보니까 서장 머리 꼭대기에서 놀던데, 그 정도 권한도 없단 말이야? 실망이네.」
사실 쥬드한테는 휴가 2~3일이 아니라 짭새 한두 마리 정도는 아예 푹 쉬게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있다.
「일찍 들어와.」
“봐서…….”
「저녁에 데리러 갈까?」
또 협박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하면 울컥 화가 났는데, 지금은 그럴 기운도 없다.
“일찍 갈게.”
비니나 보러 갈까? 비니가 횡설수설 떠들고 사고치는 거라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도 같았다. 최근 들어 일어난 일 중에 좋은 일이라곤 비니가 정신을 차린 것뿐이다. 어제는 막 의식이 돌아온 데다 다른 일가도 많아서 변변한 인사도 제대로 못했었다. 가 볼까?
서류창고 바닥에 늘어져 있는 것도 한심해서 일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얘는 요즘 바쁜 일이 없나? 이젠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질이네…… 지금까지의 전적으로 봐서 이 자식이 이렇게 질기게 보채면 결국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놈이니까.
여태 이런 식으로 녀석에게 당한 일들이 떠올라서 조금 울컥한 기분으로 전화기를 꺼냈다. 하지만 액정에 떠 있는 건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
「너, 나 좀 보자.」
많이 듣던 목소리다. 그런데 누구지?
「여긴 홀리웨이 거리에 있는 ‘젠’이라는 호텔 510호실이야.」
“발렌타인?”
「되도록 빨리 왔으면 좋겠어.」
홀리웨이는 본래 쿠간에서 북부 사막으로 들어가는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길고 한적한 도로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쿠간 북서쪽 끄트머리에 붙은 작은 마을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북부 사막의 입구 역할을 하는 그 마을은 사막여행자들을 위한 숙소와 식료품점들이 서너 블록 정도 밀집해 있는 조용한 마을인데, 관할 구역도 아니고 큰 사건도 없는 곳이라서 거의 갈 일이 없었다.
발렌타인이 병원을 뛰쳐나간 게 오늘로 열흘째였다. 발렌타인이 그렇게 병원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기린 때문에 얼마나 난감한지도 잘 알았기 때문에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런 전화에, 되도록 빨리 와달라니…… 무슨 일일까?
“쥬드.”
쥬드는 서장실 소파에 앉아서 빛바랜 양피지가 가득한 박스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서장은 점심 먹으러 나갔는지 안 보였다.
“아직도 안 갔어요?”
쥬드가 박스를 슬그머니 밀어치우며 귀찮다는 투로 물었다. 저 와인 박스 안에 든 종이 꾸러미는 틀림없이 마리우스의 지하실에서 나온 니콜라스 관련 문서일 터였다. 기사단이나 검은 용에 관련된 건 쳐다보지도 않을 것처럼 떠들더니, 공부 중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차 좀 빌려줘.”
홀리웨이는 멀다. 쿠간과 북부 사막의 경계라서 도로 사정 좋을 때 출발해도 2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타도 되긴 하지만 오고가는 택시비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일단 쥬드한테 말이나 해보려고 올라왔다.
“내 차가 렌터카에요?”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까칠했다.
“급하게 갈 데가 있어서 그래.”
“그 몰골을 해가지고 어딜 간다고 그래요? 앞길에서 택시 잡아타고 남자친구 호텔에나 가요.”
중고로라도 차를 한 대 사든가 해야지, 필요한 일 있을 때마다 참 번거롭다.
“지난번에도 내 차 빌려서 타고 나갔다가 라이트하고 범퍼 깨뜨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길 옆에 그냥 버려뒀었잖아요.”
“그때는…….”
무장괴한 수십 명이 백화점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거 보고 놀라서 차 건사할 정신이 없었다. 그 다음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아니까 참았지, 아니었으면 당신은 내 손에 죽었어요.”
쥬드한테서 차를 빌리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내가 깜빡했다. 쥬드의 재규어가 성능 좋고 운전석에 앉으면 폼도 나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그럼 순찰차 남는 거라도 한 대 꺼내줘.”
“대체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예요?”
“홀리웨이.”
“거긴 왜요?”
그건 나도 아직 모른다.
“발렌타인한테서 전화가 왔어. 지금 거기 있대.”
“사이몬 발렌타인이요? 그 사람이 왜 당신한테 전화를 해요?”
쥬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쥬드가 아는 건 발렌타인과 내가 서로의 친구를 죽인 원수라는 것과, 발렌타인이 얼마 전에 겐지 클리닉에서 의사 동의 없이 퇴원했다는 것 정도였다.
“병세가 또 안 좋아졌든가…… 뭐 안 좋은 일이 있으니까 연락을 했겠지.”
“당신을 한적한 동네로 불러내서 죽이고 싶어 하는 눈치는 없었고요?”
발렌타인이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그럴 기회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는 거다.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오늘 이후로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홀리웨이로 수색대나 보내줘.”
“있어 봐요.”
쥬드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다가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 열쇠를 찾아서 나한테 휙 던졌다.
“깨끗하게 쓰고 내일 아침까지 주차장에 갖다 놔요.”
주말이면 여행자들이 빈번히 오고 가는 사막 초입의 작은 마을, 열대여섯 개의 모텔이 죽 늘어선 도로 변에서 찾아낸 호텔은 딱 사이몬 발렌타인 같은 인간이 귀찮은 일이나 추적자들을 피해 숨어들 만한 곳이었다.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크기, 사막의 모래색과 비슷한 외벽의 색깔, 심심한 외관까지 눈에 띄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여행자용의 중급 호텔이었다.
병원을 나온 후에 계속 여기 있었던 걸까? 허연 모래 먼지에 모든 것이 한 꺼풀 덮여서 얼핏 황량하게까지 보이는 이런 동네의 허름한 호텔방에 열흘이나 틀어박혀서 뭘 했을까 생각하니 속이 싸하게 아파왔다.
기린이 나름대로 애는 많이 썼지만 병원을 나갈 당시 발렌타인은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호텔 침대에 늘어져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이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거다. 하필이면 이렇게 외진 동네 호텔방에 틀어박혀서 무슨 궁상인지…….
어쩌면 급하게 구급차를 불러야 할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510호의 문을 두드렸다.
“왔어?”
노크를 하고 기다리자 잠깐 틈을 두고 문이 열렸다. 깨끗하거나 아늑한 거 하고는 거리가 먼 호텔방에서 혼자 심하게 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발렌타인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얼굴이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방안 풍경도 생각했던 거 하고는 좀 달랐다.
방안은 수수한 외관에 비해선 깨끗하고 넓었다. 침대 하나 달랑 놓인 좁은 방이 아니라 침대 발치엔 2인용 소파와 테이블을 놓고도 공간이 좀 남을 정도로 여유가 있고, 사막 쪽으로 난 테라스의 전망도 꽤 좋은 편이었다. 무턱대고 들어온 게 아니라 나름 신경 써서 고른 방인 것 같았다.
이 동네에 오래 머물 생각이었던 걸까? 어쨌든, 발렌타인은 방에 혼자 있었던 게 아니었다.
“왔어요?”
소파에 퍼질러져 앉아 있던 용이 들어오는 나를 보고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나마 용은 인사성이 밝은 편이고, 기린은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서 인사도 없이 나를 노려만 보고 있었다.
“니네들…….”
이 자식들, 제법이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구석에 처박혀 있는 발렌타인을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걸까?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발렌타인이 기린의 멱살을 잡아서 침대에서 끌어내더니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왔으면 이 자식들 좀 데리고 가.”
“응?”
“니가 이 자식들 보호자라며? 그러니까 데리고 꺼지라고. 둘 다 죽여버리기 전에!”
아하……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였구나.
“얘네들 때문에 나를 부른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연락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건 그렇다. 혼자 버티기 힘들 정도면 몸이 아프면 자기 발로 병원에 갔을 거고, 돈이 떨어진 거라면 몬티첼리한테 전화를 했을 테니까…… 이 동네까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발렌타인이 나한테 전화할 만한 일은 딱히 없었다. 오죽하면 쥬드 말대로 죽기 전에 갑자기 나를 죽이고 싶어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꽤 진지하게 하면서 호텔 주차장에 차를 댔었다.
발렌타인이 한 번 더 기린의 등을 떠밀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데리고 나가라고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곧 바로는 못 나가겠다. 여기 오려고 두 시간도 넘게 운전을 했고, 발렌타인이 비쩍 말라비틀어진 몰골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오는 내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기린을 여기서 데리고 가야 할 의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지냈어? 몸은 좀 어때?”
용을 옆으로 밀고 나도 소파에 걸터앉았다.
“다 나가!”
발렌타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버럭 소리 쳤다.
기린과 용이 호텔방에 들이닥친 건 오늘 새벽이었다. 발렌타인은 불법으로 구입한 진통제를 인사불성이 되도록 복용하고 뻗어 있었던 탓에 두 녀석이 방에 들어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약 기운이 떨어져서 눈을 떠보니 옆구리엔 기린이 붙어서 자고 있고, 소파에는 용 한 마리가 엎어져 있고…….
발렌타인은 적어도 최근 15년간 각국의 경찰과 정보부의 추적을 따돌리며 살아온 잠수 전문가였다. 나부터도 예전에 엘리야 하이네를 추적하던 중에 딱 한번 마주쳤던 그 끔찍한 날 이후, 몬티첼리 저택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어디서도 발렌타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중병에 시달리느라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는 않을 테지만 여전히 발렌타인은 그 방면의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러니 낌새도 없이 들어와서 옆에서 누워 자고 있는 기린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까?
기린이 풀이 죽어서 시무룩한 걸 보니 벌써 발렌타인한테 정신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눈치였다. 사실, 기린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만으로도 발렌타인은 많이 참은 거다. 아무리 결과가 긍정적이라도 기린의 행동에 문제의 소지가 많았던 건 부인할 수 없다.
“너, 괜찮아?”
앞에 앉혀놓고 어디 맞은 데는 없나 기린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기린은 별다른 대꾸가 없고, 대신 침대에 쓰러져서 분을 삭이고 있던 발렌타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 자식이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어?”
일단 몸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신적인 면까지 괜찮다고 하기엔 애가 너무 풀이 죽었다. 여기서 나까지 짐승 같은 놈이라고 잘잘못 따지며 다그쳤다가는 바로 울게 생겼다.
“새벽에 여기 왔으면, 밥은? 뭐라도 좀 챙겨 먹었어?”
“아니…….”
점심때도 훌쩍 지났는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먹었으면 둘 다 배가 고플 거다. 그럼 일단 데리고 나가서 뭘 좀 먹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엔 베개가 내 얼굴을 향해 정통으로 날아들었다.
“지금 밥이 문제야? 저 자식이 나를 쫓아다니면서 스토킹을 하고 있다니까!”
솔직히 나는 발렌타인보다는 기린이 불쌍하다. 어쩌다 첫사랑이 저런 인간이냐?
“그건 미안하지만, 당신도 잘 한 거 없잖아?”
“뭐가 어째?”
발렌타인이 뭔가 집어던질 걸 찾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이드 테이블에 전화기와 전등이 있고, 옆에 물 컵하고 작은 생수병이 놓여 있었다.
“얘네들이 그동안 당신 찾아다닌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런 식으로 병원에서 나가버리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물병이 날아왔다. 조준은 정확했지만, 뭐가 날아오나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엔 제대로 피했다.
“폭력 쓰지 말고 말로 해.”
“아침부터 지금까지 목이 쉬도록 말로 하고 있어! 저 자식, 아주 악질이야.”
간신히 말을 마치고 헐떡거리던 발렌타인이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서 약병을 꺼내더니 뚜껑을 땄다. 그리고는 몇 갠지 세어보지도 않고 손바닥에 수북하게 약을 털어서 입안에 밀어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의사 처방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위험한 짓이다.
“많이 아파?”
“됐으니까, 이 자식들이나 데리고 나가라. 제발…….”
발렌타인이 다시 침대에 쓰러지며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발렌타인은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말랐다. 병세가 더 심해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호텔방에 틀어박혀서 통증이 심해지면 약 먹고 쓰러져 자고, 약기운 떨어지면 깨고, 다시 약 먹고 자고…… 병원을 나온 이후 계속 이런 식으로 지낸 게 틀림없었다. 쓰레기통도 깨끗하고, 테이블 위엔 과자 부스러기 하나 떨어진 게 없었다. 최소한 이 방안에는 사람이 뭘 먹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일어나서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아직 약기운이 안 도는지 발렌타인이 몸을 웅크린 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뭐야?”
나한테 짜증 내봐야 무슨 소용이냐? 본인도 기린을 쫓아낼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나한테 전화를 한 거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잔다고 기린이 순순히 따라나설 거라고 생각했다면 기린을 너무 과소평가했거나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거다.
“이제 그만…….”
“그만, 뭐?”
“포기하는 게 어떨까 해서.”
발렌타인은 기린에게서 도망치려고 할 수 있는 짓은 다 했다. 기린을 경찰에 고소도 해봤고, 죽여버린다고 협박도 했고, 그래도 녀석이 물러서지 않자 결국 도망쳐서 절대 찾지 못할 만한 곳으로 숨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 찾아왔으면 기린이 이긴 거다.
“저 녀석한테도 기회를 줘봐. 당신도 쟤가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잖아?”
강간 사건 때문에 기린이라면 그림자만 어른거려도 펄쩍 뛰는 발렌타인이지만, 감정이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싫었으면 발렌타인은 기린을 이렇게 살려두지도 않았을 거다.
발렌타인이 기린을 바라보는 눈빛, 말투, 지금 보이고 있는 반응에는 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설레임, 안타까움 그리고 죄책감…… 대강 그런…….
속마음을 들킨 게 불쾌한지 발렌타인이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데, 견딜 수가 없어.”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기린이 발렌타인을 향해 돌아앉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난 니가 엘리야로 보여.”
발렌타인이 엘리야 하이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언제나 조금은 슬픈 떨림이 있었다. 발렌타인 외엔 아무도 그 남자의 이름을 그렇게 부를 수 없을 거다.
“그게 누군데?”
“내가 사랑했던 남자.”
기린이 엘리야 하이네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닮았으니까…… 사랑했던 남자라는 발렌타인의 말에 기린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뭐 하는 놈인데?”
“아무것도 안 해. 죽었거든.”
“뭐야? 그러니까 내가 죽은 놈한테 밀린 거야?”
약기운이 도는지 발렌타인의 말투가 점점 어눌해지고 있었다. 발렌타인의 아름다운 갈색 눈동자도 초점을 잃은 채 기린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가 자꾸 생각나고, 신경 쓰이고, 죽을까 봐 겁나고…… 보통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나? 울컥해서 발렌타인에게 다가가는 기린을 잡아 세웠다.
발렌타인은 지금 진통제 과다복용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통증이 둔해지는 것과 함께 정신도 몽롱해지면서 헛것이라도 보이는지 눈동자가 빛을 잃고 탁하게 흐려졌다. 약을 반병이나 한입에 털어 먹을 때부터 저럴 줄 알았다.
발렌타인이 눈을 세게 비비고는 다시 눈에 힘을 줬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발렌타인은 이미 기린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봐. 나를 처음 봤을 때, 어땠어?”
발렌타인이 기린의 가슴과 배 사이 어딘가를 노려보며 반쯤 뭉개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때는 뭐 별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지 않았어? 온 몸이 떨리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고, 그리고 좀 있다가는 눈물이 왈칵 솟을 정도로 속이 시리고…….”
기린의 표정을 보니 발렌타인이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첫눈에 반하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강도가 센 경우도 있나?
“그게 뭐?”
“너는 나한테 반한 게 아니라 그때 내 마음을 읽었던 거야. 그리고 그게 니 감정이라고 착각을 한 거고…… 그게 전부야. 본래 기린은 그렇게 정이 깊은 종족이 아니잖아?”
약에 취해 해롱거리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은 소리 다 하고 나서 발렌타인이 눈을 감았다.
기린이 싸늘한 눈초리로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방안 공기가 숨 쉬기도 거북할 정도로 무거웠다. 이게 단순히 기분 탓일까? 얼마 전에도 첸이 기린을 열 받게 하는 바람에 숨 막혀 죽을 뻔한 적이 있는데 혹시 이것도 그때 그런 거 아닐까?
가슴이 답답해서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여태 한마디 않고 묵묵히 상황을 구경만 하던 용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건데?”
꼭 찍어서 나한테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하필 그때 용이랑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에 무심코 솔직한 의견이 튀어 나갔다.
“그러게.”
갑자기 발렌타인이 크게 한번 앓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척였다. 완전히 의식을 잃고 깊은 수면, 내지는 혼수상태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웬일인지 있는 대로 열 받은 표정이었다.
발렌타인이 힘겹게 버둥거린 끝에 몸을 뒤집어서 베개 밑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총을 꺼내들었다.
“이건 납치야!”
철길 건널목을 지나느라 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린 발렌타인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입만 살았지 뒷좌석에서 기린의 무릎을 베고 누운 딱한 처지였다. 호텔방에서 총 들고 설치다가 나하고 기린한테 2중으로 깔리는 바람에 발렌타인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었다.
“넌 그나마 정신 제대로 박힌 짭새라고 생각했었는데…….”
발렌타인이 만만한 나를 책망했다. 발렌타인은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실제로 선택 가능한 옵션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세 사람을 다 데리고 호텔을 나오든가, 아니면 나 혼자 나오든가…… 진통제를 밥처럼 퍼먹고 뻗어준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졌으니 그건 고맙다.
“나 배고파.”
슬슬 시작되는 정체 때문에 사거리를 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자 용이 몸을 비틀며 투정을 했다.
“조금만 참아. 다 왔어.”
“어디로 가는 거야?”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이란 소리에 용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 식당에 가는 거야?”
용하고 기린의 허기진 상태로 보면 오늘은 청연루의 식재료가 거덜 나는 날이다. 용도 얼굴이 전에 비해 많이 까칠해졌지만, 기린은 그 사이 볼 살이 쏙 빠져서 엘리야 하이네랑 얼굴이 더 비슷해지고 말았다. 뭐라도 먹여서 빨리 살을 올려야지, 이젠 무서워서 쳐다도 못 보겠다.
“야.”
백미러로 기린을 힐끔 보면서 말을 걸었다. 기린은 아까부터 말이 통 없었다. 호텔에서부터 시무룩하던 표정에도 변화가 없고…… 안됐지만 나쁜 남자하고 연애를 해보기로 작정한 이상,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다.
“아까 발렌타인이 했던 말은 그냥 잊어버려. 그 아저씨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기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대신 이제 정신이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발렌타인이 운전석 등받이를 발로 밀어 찼다.
“누구 맘대로 그냥 잊어버려?”
병이 깊어서 그런가, 히스테리가 심하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대체 어쩔 생각이야?”
발렌타인이 차 밑바닥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는 목소리로 따졌다. 구체적인 계획을 묻는 거라면, 글쎄…….
“일단 식당에 가서 애들 밥부터 먹이고, 난 잠이나 잘래.”
“뭐가 어째?”
“지난 이틀 동안 잠을 거의 못 잤어. 지금 운전도 제정신으로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사거리에서 신호 받아서 코너만 돌면 차이나타운이었다. 보통 때라면 청연루까지 10분이면 갈 텐데, 앞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차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피곤한데 뭐하러 왔어? 그냥 잠이나 자지.”
“언제는 빨리 오라며?”
“니가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절대로 전화 안 했어!”
투덜거리던 발렌타인의 호흡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벌써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약을 한주먹이나 먹었는데도 약기운이 불과 세 시간이라니, 지난 열흘을 어떻게 버텼나 싶다.
기린이 발렌타인의 젖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발렌타인의 매몰찬 거절뿐이었다.
“됐으니까 약병이나 내놔.”
“약병?”
나는 안 챙겼는데…… 옆에 앉은 용을 쳐다봤지만, 용도 자기는 그런 거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너는 도대체…….”
우리 중에 진통제를 챙겨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눈치챈 발렌타인이 분통을 터뜨렸다.
“처방전 없이 진통제 구하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알기나 해?”
모른다. 나는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기린이 다시 발렌타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발렌타인도 이번엔 기린의 손을 뿌리치거나 밀어내지 못했다. 기린이 먼저 발렌타인의 손목을 잡아 눌러버렸기 때문이다.
슬슬 차가 빠지기 시작해서 앞만 보고 열심히 차를 모는 사이 뒷좌석에선 사람 억지로 눌러 놓고 키스하는 소리, 발렌타인이 발버둥을 치며 욕하는 소리 등등이 거의 5분에 걸쳐서 들려왔다.
“어딜 만져? 이 손 안 치워?”
어딜 만지길래 저 난리를 치나 궁금해서 돌아보다가 앞차를 받을 뻔했다. 기린이 그새 발렌타인의 바지를 거의 다 벗겼다.
“뭘 보고만 있어? 이 자식 좀 말려!”
이젠 허우적거릴 기운도 없는 발렌타인이 결국 나한테 쉰 소리로 고함을 쳤다. 마침 앞차가 슬슬 빠지는 중이라 뒤에서 빨리 움직이라고 빵빵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야. 너…….”
차를 몰면서 뒷좌석을 돌아봤다. 골반 뼈가 다 두드러질 정도로 앙상한 발렌타인의 엉덩이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을 몰랐다. 어쨌든 여기서는 안 된다. 아직 해도 저물지 않은 초저녁인데다, 이건 목숨 걸고 빌린 차다. 자기 차 뒷좌석에서 남자 둘이 이런 짓을 하게 버려둔 걸 알면, 쥬드가 나를 차에 묶어서 끌고 다닐 거다.
“그만 둬. 길바닥에서 무슨 짓이야?”
“뭐?”
기린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노려봤다. 방해하는 놈은 누구든 덮쳐서 찢어버릴 듯 사나운 눈빛이었다. 종종 기린이 성질 피우는 건 봤지만 이렇게 정색하고 노려보는 건 처음이라 무서워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수치를 모르는 짐승이라도 설마 이런 상황에 그런 짓을 할까? 아니다. 녀석은 실제로 짐승이고 수치심도 없었다. 발렌타인이 다시 한 번 의자 등받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뒤이어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신음소리가 두 번 정도 더 들려왔다.
퇴근 정체에다가 도로 공사구간까지 겹쳐서 차이나타운 초입에서 청연루까지 오는데 30분이나 걸렸다. 오는 내내 차창이 짙은 색이라 정말 다행이란 생각과, 여태 저런 식이었으면 발렌타인이 치를 떨 만도 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저렇게 거칠게 밀어붙이면 성한 사람도 몸살 나겠다.
오는 동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앞만 보고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예 모를 수는 없어서 내내 부들부들 떨었다. 발렌타인은 그 사이에 두 번은 기절했다 깨어났고, 지금은 다 포기한 채 기린한테 안겨서 씩씩거리는 중이었다.
“저녁은…….”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됐어.”
“닥쳐!”
사실은 나도 밥 생각이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속이 쓰릴 정도로 배가 고팠는데, 뒤에서 그 난리를 치는 바람에 놀라서 허기가 싹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친구가 뒷좌석에서 남자를 덮치건 말건 용은 의연하고 침착했다.
“나는 배고파.”
용이 입맛을 찹찹 다시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문 열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누군가 카드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 발, 두 발…… 조용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어느 지점에서 뚝 멈췄다.
“이게 다 뭐야?”
첸이 방안을 둘러보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왔어?”
첸이 온 것도 알고, 잠도 깼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밖이 어두운 걸 보니 날은 벌써 저물었다.
“대체 방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이 떨거지들은 다 뭐야?”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발렌타인과 기린, TV 앞에 리모컨을 쥐고 엎어져 있는 용…… 식탁과 바 그리고 바닥에 널려 있는 접시와 먹다 남긴 음식들…….
“룸서비스를 좀 이용했어.”
메뉴판에 있는 요리를 몽땅 두 개씩 시키는 바람에 열 명 정도 되는 호텔 종업원들이 대여섯 번씩 들락거리며 음식을 날랐고 굶주린 짐승 두 마리가 그걸 두 시간 내내 퍼먹었다. 그 틈에 끼어서 나도 사이드 메뉴로 나온 빵 몇 조각을 집어먹었고, 발렌타인도 기린의 강권에 못 이겨 스프 한 그릇을 억지로 떠먹었다.
“식인종 마을 축제 다음 날 풍경 같아.”
첸이 뼈다귀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를 발끝으로 밀어 치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돼지 갈비뼈야. 사람 뼈다귀가 아니라…….”
“어떻게 된 거야?”
첸이 자고 있는 용의 손에서 리모컨을 잡아채서는 TV를 꺼버렸다. 어차피 TV는 보는 사람도 없이 혼자 번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막상 꺼지고 나니까 방안이 너무 조용해지고 말았다. 여기서 떠들다간 어렵게 잠든 발렌타인이 깰 것 같아서 첸을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기린하고 용이 발렌타인을 찾아냈더라고. 그래서…….”
“동서남북 분간도 못하는 녀석들이 숨어 다니는 자객을 어떻게 찾아?”
첸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투로 손을 내저었다. 나도 그게 이상하긴 했지만 기린은 뭔가 할 줄 아는 게 많으니까…….
“내가 찾아서 가르쳐줬어.”
첸이 거만한 표정으로 생색을 냈다. 어쩐지…….
“물심양면 그 정도로 신경 써줬으면 됐지, 우리 방까지 내줄 건 없잖아? 이제 어디서 잘래?”
“이 호텔에 방이 여기 하나 밖에 없는 건 아니잖아?”
“내 호텔을 물로 보냐? 특실은 보통 80% 예약 완료야.”
좋겠다. 장사 잘 돼서…….
“특실이 아니면 잠을 못 자?”
“아무 상관도 없는 떼거지들한테 안방을 내주고 구석방에서 웅크리고 자라고? 내가 미쳤어?”
첸이 긴말하기 귀찮다는 듯 나를 끌고 엘리베이터 입구로 향했다.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너도 인생 그렇게 살지 마.”
첸이 호텔 지배인을 닦달해서 새로 얻어낸 방은 1층 서쪽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막다른 방이었다. 여태 사용했던 특실만은 못한 게 사실이지만, 구석방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창밖으로는 건물을 빙 둘러싼 소나무 정원이 앞마당처럼 펼쳐져 있어서 청연루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꼭대기 층하고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발렌타인도, 기린도 도움이 필요한 형편이라서 못 본 척 그냥 돌아올 수가 없었어. 방 문제는…… 미안하게 됐어.”
“상관없어. 내일 아침에 다 쫓아내버릴 테니까.”
툴툴거리면서 첸이 정원 쪽으로 난 창을 열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옅은 소나무 향기가 실려 들어왔다.
“이 방도 좋은데 뭘 그래?”
침대를 보니 급히 졸음이 밀려와서 슬그머니 올라가 누웠다. 이틀 못 잔 것치고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현실이 암담하고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두통도 많이 좋아졌고…… 용하고 기린 때문에 골방으로 밀려났다고 툴툴거리는 첸이 오늘따라 평범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보통 남자처럼 보였다.
발렌타인은 기린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착각이라고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 사랑이 어느 정도는 착각으로 시작되고, 유지되기 때문이었다.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누군가가 계속 생각나고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현상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어디서 무슨 착각을 했길래 이 녀석하고 이런 사이가 된 걸까?
내가 침대에 눕는 걸 본 첸이 냉큼 침대 옆으로 다가와서 옆에 걸터앉았다.
“너 시간 좀 있어?”
“요즘 바빠.”
하긴, 차이나타운 재개발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지구를 지키느라 바쁘겠지.
“하지만 니가 원하면 시간을 만들어봐야지. 왜?”
“그럼, 기린한테 데이트 코치 좀 해줘.”
내 셔츠를 슬그머니 걷어 올리던 첸이 하던 짓을 멈췄다.
“뭐야?”
“기린이 잘만 하면 발렌타인이 못 이기는 척 넘어갈 것도 같은데 애가 도통 요령도 없고, 심야 케이블 채널에서 이상한 짓만 배워가지고는…….”
“내가 그렇게까지 한가해 보여?”
바쁜 와중에 발렌타인의 소재를 수소문해서 기린한테 인심 한번 크게 쓴 당사자가 갑자기 겸손은…….
사실 옆에서 그만큼 도와주면 나머지는 본인이 알아서 하는 게 맞지만, 기린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기린에게는 제대로 된 데이트 코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쪽 방면에서는 첸이 최고 고수였다. 이건 근거 없는 사견이 아니라 쿠간 시 전체가 인정한 사실이다.
“니네 집 별채에서 허구한 날 날밤 까면서 포르노를 시청한 후유증으로 애가 행실이 나빠졌어. 니네 집에서 시작된 일이니까 니가 책임져.”
“넌 어떻게 억지가 장인 친구 영감들보다 한술 더 뜰 수가 있냐?”
첸이 한숨을 쉬며 내 옆에 털썩 누웠다.
어제 오늘은, 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쿠간에서는 그간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많이 벌어졌었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그 사태의 내막을 어찌어찌 알아내나 싶었더니, 이건 뭐…… 어이도 없고, 말도 안 나오고, 앞일이 전체적으로 막막하기만 했다.
그 모든 일이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지다가도 당장 위층에 기린하고 용이 한 마리씩 자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뭔가 큰 사건이 터질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애초에 용하고 기린도 니콜라스를 찾아서 쿠간에 온 거잖아?”
“쟤네 둘처럼 해가지고는 백 만년이 걸려도 그 자를 못 찾을걸.”
그래서 첸이 대신 찾아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을 거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도 마치 전생의 일처럼 기억이 멀었다.
“만약에 찾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느 쪽이 그자를 먼저 찾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져. 깨달은 종족은 약속은 애초에 합의한 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입장일 거야. 귀찮고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는 은둔자들이긴 하지만, 완고한 원칙주의자들이기도 하거든.”
“그리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나 연방 특수 경찰이 먼저 찾으면…….”
“니콜라스를 죽일까?”
다시 살아날 10만 명의 괴수들을 생각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되는 게 우리 쪽 입장이긴 하지만…….
“죽일 능력이 있으면 진즉에 죽였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인간이 그자를 죽이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럼…….”
“봉인을 깨지 못하게 설득을 하던가,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깊숙한 감옥에 넣어버리던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니콜라스를 야생동물 사냥하듯 우악스럽게 뒤쫓았고, 니콜라스의 팔 한쪽까지 날려버렸다. 그 모든 사태를 직접 겪고 목격한 사람 입장에서 단언하자면, 설득은 물 건너간 지 오래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잠이나 잘 걸, 공연히 말 꺼냈다가 잠이 싹 달아나고 말았다.
“무슨 생각해?”
첸이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냥,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첸이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친밀감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키스였다.
“이것도 꿈이었으면 좋겠어?”
“여기까지는…… 괜찮아.”
첸을 밀어내고 돌아누웠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달아난 잠이나 찾아서 다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 감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죄다 한숨이었다.
죽지 않았다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몸도 성치 않은데 어딘가에서 거지꼴로 숨어 다니고 있는 건 아닌지…… 더 이상은 생각하기 싫은데 어느새 머릿속이 니콜라스의 이런 저런 모습으로 터질 것 같았다.
“자?”
첸이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대로 곱게 재울 마음은 전혀 없는 눈치였다.
“그…… 봉인을 깬다는 거 말이야. 뭔가 특별한 푸닥거리라도 해야 되는 거야?”
“그렇게 유별난 절차는 없는 걸로 알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뭐?”
“명색이 의식인데 맨입으로 할 수는 없잖아. 봉인을 깨기 위한 도구가 필요해.”
도구라…… 머릿속에 망치, 대형 스패너, 가택 진입용 해머…… 등등 뭔가 부수기에 적합한 도구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그런 걸 휘두르며 뭔가를 깨부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젠 니콜라스를 알았다고 하기도 뭣하지만, 그렇게 우악스러운 면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 검은 군대를 봉인한 바위산에 박혀 있던 수정이야. 크기가 이 정도쯤 될 걸.”
첸이 손가락으로 제법 큰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아…….”
이번엔 돌산에 수정 폭탄을 집어던지는 니콜라스가 잠깐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첸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이건 내가 관여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 동굴 앞에서 ‘열려라. 참깨!’라도 외치는 거야?”
첸이 뭔가 생각하다가 킥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니콜라스가 바위산 앞에서 주문 외우는 모습을 상상이라도 했는지…….
“무슨 짓을 하든, 그것보다는 덜 웃기겠지.”
첸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타고 앉았다.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니 손이 닿지 않는 일이야.”
“벌써 다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있어 봐. 금방 아무것도 신경 안 쓰이게 만들어 줄게.”
첸이 내 바지 벨트를 풀면서 자신만만하게 지껄였다.
아직도 많이 헷갈린다. 이 녀석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뺀질거리면서 농담이나 지껄일 때엔 한없이 가볍고 경박한 놈처럼 보이는데,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고 사나운 눈빛으로 사람을 얼게 만들기도 하고…… 나한테 무슨 목적이 있어서 이렇게 잘하나 싶은 의심이 들다가도 그냥 단순하게 내가 마음에 들고 좋아서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남자가 현실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이 있는가 하면,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홀랑 깰 때도 많고…….
녀석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입술에 키스하고, 가슴을 음란하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보통 때보다 조심스럽고 부드러웠지만 며칠째 녀석에게 시달린 몸은 별것 아닌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싫어?”
“이번 주엔 거의 매일이잖아. 힘들어.”
“그만 할까? 쉴래?”
이렇게 아쉬운 표정으로 그런 소리 해봐야 고맙지도 않다. 이렇게까지 됐는데 밀어내는 것도 의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엔 내가 녀석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신경 안 쓰이게 만들어준다며?”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와서 닿는 녀석의 입술이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사람의 체온은 고작 37℃에 지나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뜨겁게 느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첸은 호언장담한대로 다음날 특실에서 용하고 기린, 그리고 발렌타인을 쫓아냈다. 다행히 호텔 밖으로 쫓아낸 건 아니고, 전날 우리가 썼던 방하고 바꿨다. 용하고 기린은 룸서비스 무제한 이용이라는 첸의 조건에 반색을 하면서 군소리 없이 방을 뺐다.
“1층이야?”
방에 들어선 발렌타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가더니 밖을 내다봤다. 슬쩍 테라스와 지상의 높이 차이를 가늠하는 눈치였다. 1층이니까 애들이 한눈 팔 때 빠져나가기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발렌타인의 안색은 어제하고 비교도 못하게 좋아졌다.
“마당 좋은데?”
기린이 발렌타인을 지나쳐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깔끔한 잔디밭과 그 너머 소나무 숲을 둘러보더니 난간을 훌쩍 뛰어서 마당으로 내려갔다. 높이라고 해봐야 1미터 남짓이었다.
“당신도 내려와.”
기린이 발렌타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됐어. 나는…….”
“그러지 말고, 나와서 햇빛도 쐬고 바람도 쐬자.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귀찮은 표정으로 물러서려던 발렌타인이 뭘 봤는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해서 나도 난간 너머로 기린이 선 자리를 내려다봤다. 기린의 발밑에서 어느 틈에 하얗고 노란 풀꽃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기린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꽃밭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그것도 속도가 아주 빨랐다.
발렌타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난간을 넘어갔다. 기린의 도움을 받아 잔디밭에 내려선 발렌타인을 보니 완전히 기린의 영역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린이 발렌타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 순간 발밑에서는 꽃망울이 폭죽처럼 터지고, 정원엔 꽃향기가 가득 찼다.
“밖에선 거기까지야. 그 이상은 안 돼!”
이건 공연한 걱정이 아니었다. 기린이 밤새 눈 비비며 열중했을 19금 에로영화에는 야외 플레이도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했을 거다. 내 주의가 잔소리로 들렸는지 기린이 못마땅한 시선으로 나를 흘겨봤다.
“왜?”
기린의 불량스런 대꾸에 발렌타인이 기겁을 하며 녀석을 밀고 물러섰다. 발렌타인의 반응에 기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풀밭이 뭐 어때서? 컴컴한 방안에서 하는 것보다…….”
기린의 태연한 풀밭 예찬에 발렌타인이 치를 떨며 돌아섰다. 되짚어보면 간호사, 의사 뻔질나게 드나드는 병실에서 한 번, 여러 사람 타고 있는 차 뒷좌석에서 한 번…… 발렌타인은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할 만큼 당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평생 상처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야. 나 좀 잡아봐.”
기린한테 붙들릴까 봐 조급해진 발렌타인이 내 손을 잡고 난간을 넘어왔다. 얼굴 표정 보니까 오늘 안에 또 보따리 싸게 생겼다.
발렌타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이불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웠다. 기린을 떼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주자니 애가 너무 외설적이고…… 발렌타인을 뒤따라 방에 들어온 기린은 풀밭이 왜 안 되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가는 눈치였다.
“아니, 풀밭이 왜?”
기린이 툴툴거렸다. 하지만 TV 틀어 놓고 메뉴판 뒤적거리며 아침은 뭘 먹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용한테 그런 거 물어봐야 대답은 뻔했다. 기린이 본 건 대부분 용도 같이 봤으니까.
“그러게? 공원 같은 데서도 꽤 하던데?”
용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동차 뒷좌석, 풀장 가장자리, 공원 벤치, 마구간, 지하 감옥…… 주로 그런 데서 하는 거 좋아하던데…….”
얘네들이 대체 뭘 보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음란물에 무방비로 노출된 10대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다더니, 역시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다.
“몸은 좀 어때?”
아침 먹고 오라고 애들을 식당으로 쫓아내고 나서 발렌타인에게로 다가갔다. 이불이 들썩거릴 정도로 숨이 거친 걸로 봐서 자는 건 아니었다. 말을 걸면서 이불을 들추자 발렌타인이 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괜찮아.”
“진통제 없어도 되겠어? 힘들면 오늘이라도 병원에 가서…….”
발렌타인이 내 손에서 이불자락을 낚아채서 다시 뒤집어썼다.
“그 자식한테 한번 깔리고 나면 2, 3일은 살 만해.”
“배는 안 고파?”
“까딱 잘못하면 이번엔 잔디밭 한가운데로 끌려 나가게 생겼는데, 이 판국에 밥이 넘어가겠어?”
하긴…….
“기린이 가끔 깨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놀랄 건 없어. 걔가 세상 구경 나와서 초반에 문제가 많은 환경에서 몇 달 지내서 그러는 거지, 본성이 그렇게까지 망나니는 아니야. 이제라도 잘 타이르면…….”
발렌타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짜증을 내며 돌아누웠다.
“그 자식은 본래 성질이 그래. 사납고, 급하고, 거칠고……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은 다 하는 놈이야.”
“사납고 거친 남자도 좋아하잖아?”
엘리야 하이네는 거칠고 사나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승사자였다. 그런 놈을 사귈 배짱이면 세상에 감당 못할 인간은 없다.
“엘리야는 본래부터 그런 놈은 아니었어.”
그놈이 본래 어떤 놈이었는지 내가 알게 뭐냐? 어쨌든 내가 아는 한, 놈은 사람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악귀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도 험한 일을 많이 겪다 보니 그렇게 되긴 했지만…….”
나를 보는 발렌타인의 시선은 처음처럼 싸늘하고 살기 가득한, 그런 건 아니었다. 여전히 유감이 많은 눈초리지만 이젠 증오나 노여움보다는 뭔가 씁쓸한 느낌이 더 많았다.
“그 자식이 그날 죽인 내 친구한테는 곧 태어날 딸이 있었어. 사랑하는 아내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일 인기가 좋았고…… 특히나 나한테는 형제 같은 동료였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운 좋은 놈이었는데, 그 자식 때문에 자기 딸 얼굴도 한번 못 보고 그렇게 갔어.”
다 끝난 일에 이런 얘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발렌타인이 너무 질기게 나오니까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이 나가고 말았다.
“엘리야는 평생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을 거야. 누구한테도 사랑받아본 적 없고, 누굴 사랑해본 적도 없었어.”
그건 그것대로 안 됐다.
“당신하고는 사이가 좋았었잖아? 둘이 서로 좋아했던 거 아니었어?”
발렌타인이 몸을 뒤척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이란 게 좋은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아니잖아? 다시 만났을 때 엘리야는 벌써 반 미치광이였어.”
내가 봤을 땐 미친 정도가 거기서 훨씬 더 나간 것 같았다. 아주 잠깐 마주쳤을 뿐이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게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시간이 약이라고, 요즘은 엘리야를 잊고 지내는 날도 많았었는데 기린 그 자식하고 마주친 후로는 마음 편할 날이 없어. 볼 때마다 생각이 나니까…….”
기린을 볼 때마다 엘리야 하이네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조차 그 녀석 볼 때면 찬바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보다는 많이 덜해졌다. 얼굴은 미치광이 킬러를 빼다 박았지만 본색은 심각한 포르노 중독의 질풍노도 10대 청소년이고, 멍하니 있을 때는 뭔가 초월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기린은 엘리야 하이네하고 판이하게 달랐다.
“자꾸 보면 괜찮아질 거야.”
꼭 그렇게 될 거란 확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엘리야 하이네 같은 놈한테서까지 사랑스러운 구석을 발견해낸 발렌타인이니까 노력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거다.
“너야 그렇겠지. 니가 그 자식한테 깔리는 게 아니니까…….”
“귀여운 구석도 꽤 있는 편이잖아?”
“너는 그 자식이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는 있는 거야?”
기린이 사람이 아니란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기린이 언 땅에서 꽃 피우는 것도 봤고, 아픈 사람을 여럿 깨우는 것도 봤고, 정액 검사 결과가 영 엉뚱해서 강간을 하고도 무죄로 풀려나는 것까지 봤다. 하지만 여전히 기린이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이란 사실이 믿기질 않는데, 발렌타인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 녀석 정도면 사람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어서 넌 니콜라스 헤슬렘하고 그렇게 놀아났었던 거야?”
아는 사람이나 친구한테서 이런 소리 들었으면 심정 상하고 화도 많이 났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여러 번 마주치고 우여곡절이 쌓였다고 해도 발렌타인하고 내가 친구가 된 건 아니었다. 본래 발렌타인과 나는 더 심한 욕도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다.
“당신은 대체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전부터 여러 가지로 궁금한 점이 많았었는데, 물어볼 기회가 통 없었다. 그동안 발렌타인은 너무 아프거나, 기분이 안 좋거나, 어디 있는지를 아무도 모르거나…… 항상 그랬으니까.
“그러는 너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뭘 모를 수가 있어? 니콜라스 헤슬렘이 어딜 봐서 평범한 인간이야?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사람은 아니잖아?”
보통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아예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상하지도 않았었다. 우리 경찰서 특급 베테랑들이 다 들러붙어서 장장 6개월이나 잠복근무를 하면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어도 니콜라스가 사람이 아닌 거 같다는 소리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몬티첼리 저택에서 마주쳤을 때 당신은 니콜라스하고 이미 구면이었어. 니콜라스를 어디서 만났었던 거야?”
“그 작자를 어디서 만났든, 니가 그걸 알아서 뭐 할 건데?”
발렌타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만 생각해보면 당신이 제일 수상해.”
“그걸 참 빨리도 알았다.”
발렌타인이 비아냥거리면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내 엉덩이를 발로 밀어 찼다.
짭새 노릇을 근 10년 가까이 하면서 온갖 유형의 범죄자와 참고인을 만나봐서 아는데, 일단 취조실에 들어가면 발렌타인 같은 인간들이 의외로 사람 진을 빼고 애를 먹인다. 겉보기는 그다지 독한 구석도 없고, 뭔가 포기한 듯, 체념한 듯 만만해 보이지만 막상 본론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전혀 진행이 안 되는 타입이다.
“혹시 당신도 니콜라스 편이야?”
“누구 편도 아니야.”
“설마…… 사귀는 사이였어?”
질문이 조금 자극적이었는지 발렌타인이 이불을 확 재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잖아? 둘 다…….”
“불가능해. 나도, 그자도 서로의 정체를 아니까.”
발렌타인이 말만 들어도 불쾌하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둘의 정체가 대체 뭔데? 하지만 발렌타인이 뒤이어 꺼낸 말 때문에 그걸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넌 대체 ‘시간의 병’을 어떻게 한 거야?”
‘시간의 병’이란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 아니다. 니콜라스가 나를 보자마자 대뜸 꺼낸 말이 그거였고, 그 듣도 보도 못한 병 때문에 이튿날엔 연방특수경찰한테 한나절이나 쥐어 짜였었다.
“대체 그게 뭔데?”
“정말 몰라?”
“니콜라스한테서 병 같은 거 받은 적 없다니까?”
내 반박에 발렌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쨌든, 니콜라스 헤슬렘이 널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한 건 그 물건이 너한테 있기 때문이야.”
경찰서 취조실에서 나를 얼간이 범죄자 취급하던 노튼과 오베른도 비슷한 주장을 했었다. 니콜라스의 저택 뒷마당에서 엘리스 스톤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니콜라스하고 내가 좋은 사이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나한테 보여주거나 맡긴 적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보고 싶어서 거기까지 온 건 아니었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야. 니콜라스의 집에서도 술병 외에 다른 병은 구경도 못 해봤어.”
“그럼 그냥 니가 보고 싶어서 왔었나 보지.”
발렌타인이 긴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발렌타인이 완전히 묵비권 체재로 돌입했다. 이제 조금만 더 캐면 뭔가 나올 것도 같은데…… 어떻게 하면 저 입을 열 수 있을까?
침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빈틈을 찾아봤지만 발렌타인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계속 자는 척이었다. 그래서 무척 위험한 짓인 줄 알면서도 발렌타인이 뒤집어쓴 이불 밑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대체 당신은 정체가 뭐야? 액수만 맞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청부업자 주제에 말하고 행동이 너무 초연하잖아.”
머리를 무작정 들이밀고 보니 하필 발렌타인의 얼굴이 딱 코앞이었다.
“당신도 용이나 기린 같은 이상한 동물 아냐?”
“나는 사람이야.”
발렌타인이 조용히 대꾸했다.
“하지만 보통사람은 아니지?”
“보통사람보다 훨씬 못하지. 살인자에, 말기 암환자니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살인자에 암환자라는 건 사실이기도 하고…….
“니콜라스하고는 어디서 처음 만났어?”
“얼굴 저리 치워!”
발렌타인이 내 얼굴을 손으로 험하게 밀었다. 아무래도 니콜라스하고의 첫 대면이 발렌타인한테는 그다지 좋은 기억이 아닌가 보다.
“당신 혹시…….”
“그 작자하고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니까!”
“아니, 전직 기사단원 같은 거 아니었나 싶어서…….”
“무슨 기사단?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일반인이 모르는 걸 너무 많이 알잖아.”
대답 대신 발렌타인이 내 콧잔등에 주먹을 날렸다. 컴컴한 이불 밑인데도 눈앞에 불이 번쩍 하더니 콧잔등이 말도 못하게 아팠다.
“내가 인생을 제대로 산 건 아니지만, 그 망나니들하고 엮일 정도로 막 살지도 않았어.”
발렌타인이 되게 기분 나쁘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떠돌이 용병에, 청부 암살자면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는 밑바닥 인생인데, 그 기사단 놈들하고 맞먹으려면 얼마나 더 막 살아야 하는 걸까?
화끈거리는 코를 잡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허리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나를 이불 밖으로 끌어냈다.
“이불 뒤집어쓰고 둘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기린이 나하고 발렌타인을 번갈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밥 먹으러 간 지 아직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얘가 어떻게 벌써 돌아왔을까? 기린하고 용은 먹는 양이며 시간이 일반인들하고는 많이 다르다. 식탁에 한번 앉으면 보통 4, 5인분을 주문해서 꼬박 두 시간은 손하고 입이 쉴 틈이 없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먹는다.
여기서 청연루까지 오고 가는 데만 20분 정도 걸리는데, 청연루가 패스트푸드점도 아니기 때문에 식사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또 30분 정도 걸리고…… 그렇게 따지면 식당까지 갔다가 밥도 안 먹고 그냥 돌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뭐 하고 있었냐고?”
발렌타인한테 한 대 맞은 것 때문에 아직도 눈에 초점이 잘 안 잡히는데, 이번엔 기린이 나를 한 대 칠 기세였다.
“얘기 좀 했어.”
“무슨 얘기를 이불 밑에서 해?”
“얘기만 했어.”
내 변명에 기린이 여전히 언짢은 눈초리로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발렌타인이 몸을 일으킬 기운만 있었으면 이번엔 기린이 두들겨 맞았을 거다.
“혼자 왔어? 마커스는?”
“걔는 아직 덜 먹었어.”
대꾸하면서 기린이 나를 싹 지나쳐서 발렌타인 옆으로 다가갔다.
“좀 어때?”
“저리 가.”
발렌타인이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기린한테는 이 정도 짜증은 이제 약발도 안 받는다.
“죽 가져왔으니까 일어나서 먹어.”
“나 좀…… 그냥…….”
“뭐라도 먹어야 기운이 나지.”
기린이 발렌타인을 억지로 일으켜 앉혔다. 밥 먹으러 잠깐 나갔다 온 주제에 발렌타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폼은 어디 먼 데 갔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온 귀환병 같았다. 계속 이렇게 분위기가 좋으면 발렌타인의 완쾌도 시간문제다.
“시간의 병을 어떻게 했는지 잘 생각해봐. 헤슬렘한테는 꼭 필요한 물건이니까…….”
발렌타인이 몸싸움 끝에 기린을 밀어내고는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소파 근처에도 못 오고 다시 기린한테 붙들리고 말았다. 기린이 발렌타인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이제 그만 자리를 비켜줘야겠다. 하던 얘기만 마무리 짓고…….
“그게 봉인을 깨는 데 필요한 도구라면서? 니콜라스가 그 병을 손에 넣으면 전쟁이 일어날 거라던데?”
발렌타인이 기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기린이 신음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비틀거렸고 그 틈에 발렌타인은 소파 제일 끄트머리에 앉아서 숨을 가다듬었다.
“애초에 천년이라는 시한이 정해진 휴전이었어. 인간들도 거기에 동의한 이상 검은 군대의 귀환을 막는 건 이유야 어쨌건 구차한 짓이야. 물론 전쟁이 벌어지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야? 인간들끼리도 전쟁은 끊임없이 하잖아.”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우리끼리 하는 전쟁도 지긋지긋한데 왕년의 용사들까지 컴백해서 설치는 건 정말 사양이다. 너무 인간 입장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던 당신한테는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쟁이란 건 무슨 수를 쓰든 일단 막고 봐야 되는 거잖아.”
“방법이 있으면 막아 보든가.”
발렌타인이 무심하게 지껄이는 사이 기린이 발렌타인 앞에 스프가 든 테이크아웃 봉투를 내려놨다. 전쟁 얘기할 때는 그렇게 태도가 단순하고 명료하더니, 기린이 포장 뜯어서 앞에 놔주는 쇠고기 버섯 스프를 대하는 표정은 뭐가 저렇게 복잡하냐?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발렌타인이 기린이 내민 숟가락을 받아들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냥 굶게?”
기린의 대꾸도 만만찮게 퉁명스러웠다. 좀 전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은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간만에 평화적이었다. 기린이 발렌타인을 억지로 잔디밭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지만 않으면, 그리고 기린이 한 눈 파는 틈에 발렌타인이 탈출 시도만 안 한다면 당분간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쉬어. 싸우지들 말고…….”
“일부러 자리 피할 거 없어.”
“차도 돌려줘야 되고, 병원에도 가 봐야 돼. 비니가 일어났어.”
비니가 깨어났다는 말에 발렌타인이 기린을 힐끗 곁눈으로 봤다. 비니가 깨어난 이유를 대강 알겠다는 표정인데, 보통 인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저렇게 눈치가 빠를까?
일단 의심을 하고 보니까 자꾸 그렇게 보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발렌타인은 보면 볼수록 수상했다.
“프란시스가 한시름 놨겠군.”
발렌타인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돈 몬티첼리한테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거 얘기해도 돼?”
“하지 마.”
발렌타인이 딱 잘라 거절했다.
“왜? 걱정할 텐데?”
“차라리 걱정하는 게 낫지, 이러고 있는 줄 알면 얼마나 비웃겠어?”
발렌타인이 스프를 숟가락으로 휘저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