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1화 (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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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생각은 어때?”

터너가 물었다.

엔젤 가브리엘 거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신고가 들어온 건 두 시간 전이었다. 엔젤 가브리엘 가는 젊은 층 대상의 쇼핑몰과 식당이 모여 있는 상업지구로 이따금 소매치기들이 조직적으로 떠서 쇼핑객들의 지갑을 싹쓸이 해가는 것 외엔 별다른 사건이 없는 조용한 동네였다.

10대 중·후반의 여자애들이 헬로키티 머리띠 같은 거나 고르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분위기 발랄한 상가에서 총격전이라니, 누구라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을 거다. 마침 근처를 순찰 중이던 루디가 파트너와 함께 현장으로 출동한 시각이 신고가 들어온 시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분 후였으니까 아무리 성미 급한 시민이라도 경찰이 늑장을 부렸다는 트집을 잡을 수는 없을 만큼 출동은 빨랐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루디와 파트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황이 다 끝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총격전이 있었고, 누군가 죽었어.”

총격전은 규모가 컸다. 쇼핑가 뒷골목의 쓰레기통 부근에서 시작된 총격전은 엔젤 가브리엘 거리에서 제일 번화한 사거리 모퉁이의 상점 다섯 곳의 쇼윈도를 다 때려 부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사건의 양상은 전형적인 추격전이었다. 누군가가 한 무리의 무장한 괴한들에게 쫓겼고 필사적으로 달아나다가 큰 길 쪽으로 튀어 나왔다. 그리고 몇 블록을 무차별 총격을 피해 달리다가 길모퉁이에 있는 옷가게 앞에서 결국 당하고 말았다.

옷 가게 앞 한 블록이 불운한 피해자가 흘린 피로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이 정도 출혈이라면 피해자가 살아 있을 도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건을 살인으로 단정 짓기엔 결정적인 단서가 부족했다. 그러니까…… 시체가 없었다.

“분명히 죽었을 거야. 시체는 없지만…….”

“나도 눈이 있고, 짬밥이 있는데 그걸 몰라서 니 생각을 물었겠냐?”

터너가 사건 현장을 불편한 시선으로 노려보면서 투덜거렸다.

“바라는 게 뭐야? 구슬 점이라도 쳐줄까?”

신고 전화는 총격전이 시작된 시점에서 걸려왔다. 신고를 받은 순찰대가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다.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어봐도 시가에서 총격이 벌어진 시간은 불과 10분 안쪽이었다.

그 빠듯한 시간에 괴한들은 번잡한 거리 끝에서 끝까지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목표물을 쫓았고, 결국 죽였다. 그리고 시체까지 수습해서 현장을 떠났다. 놈들이 현장에 남겨 놓은 것이라곤 총격전 와중에 부상을 입은 서너 명의 시민들과 갑작스레 펼쳐진 참사에 패닉 증세를 일으킨 10대 소녀들 몇 명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위험한 조직을 하나 알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로써는 꼭 그 자식들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증거가…….

“저거 보면 뭐 떠오르는 거 없어?”

터너가 반장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반장은 현장요원들이 박살난 옷가게를 뒤져서 찾아낸 증거물을 어이가 없다는 듯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미사일처럼 생긴 살벌한 총알이다.

“그 자식들, 이젠 대낮에도 사냥을 다니기 시작했어.”

목격자들 몇 명에게서 진술을 들은 에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피해자는 신장 190센티미터에서 2미터 정도의 남자였어. 두건 같은 걸 깊이 내려쓰고 있어서 얼굴을 분명히 본 사람은 없고. 행색이 남루하고 신발도 안 신고 있었다는 걸로 봐선 근처를 배회하던 노숙자였던 것 같아.”

에쉬가 아이스크림 전문점과 ‘핑크 스크림’이라는 옷가게 사이로 난 좁은 골목을 가리켰다.

“남자가 먼저 저쪽 골목에서 뛰어나왔고 네 명의 무장 괴한들이 그 뒤를 쫓았어. 비교적 근거리 사격이었고, 가게 앞에서 남자가 쓰러진 후엔 코앞까지 다가가서 확인사살을 했어. 거의 같은 시간에 까만 밴 한 대가 저쪽 거리에서 튀어나와서 사건 현장 바로 앞에 멈춰 섰고, 놈들은 그 차에 시체를 싣고 사라졌어. 그게 불과 5분 정도 사이에 벌어진 일이야.”

이쯤 되면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건 시간 낭비였다.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인정사정없고…… 치고 빠지는 솜씨도 익히 알고 있던 스타일 그대로였다. 이건 그 엿 같은 기사단 놈들 짓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대체 놈들의 정체가 뭘까?

“사람인 건 확실해?”

내 질문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 중에서 표정이 심각한 건 에쉬와 터너뿐이지만…….

“어느 쪽이?”

터너가 되물었다.

“괴물 사냥을 꽤나 즐기는 놈들이잖아. 오컴이라든가, 필립 같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현실은 현실이다. 요즘 우리 동네엔 괴물이 종종 나타난다.

“필립은 또 누구야?”

쿠간에서 제일 럭셔리한 백화점 하나를 작살내고 그 많은 사람들을 물어 죽였는데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니, 본인이 알면 서운하겠다.

“뱀파이어. 전에 내가 얘기 했었는데 기억 안 나?”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필드에서 마주친 건 세 번이었다.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 오컴 추격전, 그리고 필립이 떴을 때 백화점에서 또 한 번…… 놈들이 어째서 니콜라스를 뒤쫓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외엔 놈들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피해자가 사람인지, 괴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놈들이 시체를 가지고 가버렸으니까.”

에쉬가 피해자의 핏자국을 힐끔 돌아봤다. 피해자가 괴물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눈치다. 그래도 피는 잔뜩 남아 있으니까 연구실에서 분석해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상대가 사람이건 괴물이건, 이건 살인 사건이야.”

터너가 잘라 말했다.

“죽은 게 괴물이라면, 살인사건은 아니지.”

에쉬가 다소 감정에 치우친 터너의 발언을 정정하며 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세상에 괴물이 어디 있어?”

터너가 에쉬의 손을 뿌리치며 벌컥 화를 냈다.

“시내 한복판에서 미사일을 날려대는 놈들이야. 어떤 놈들인지 이번엔 꼭 밝히고 말 거야!”

터너는 델파소에서 처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만났을 때부터 놈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놈들에 대해 뭔가 단서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개인적으로 조사를 했던 적도 있었고…… 하지만 터너가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터너와 에쉬는 새로운 사건을 맡은 지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았다. 킬리요크 강변 도로변에서 발견된 토막 난 시체는 아직 신원도 밝혀내지 못했다.

“선배님. 무슨 생각하세요?”

두 블록이나 떨어진 커피 전문점까지 커피 심부름을 갔다 온 앤디가 나한테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그냥…….”

어떻게 하면 이 사건을 맡을 수 있을까 생각 중이었다. 복직하라고 할 때 고분고분 말을 들을 걸, 너무 버틴 게 화근이었는지 복직한 이후 반장은 나한테 죽어라고 서류작업만 시키고 있었다. 왜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최근 3년간의 미해결 살인사건 분류와 재정리 작업 때문에 근 열흘 동안 점심 먹으러 갈 때 빼놓고는 근무시간 중에 경찰서 밖으로 나가본 적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실, 지금 하는 일에도 불만은 없었다. 몸 편하고 정시 퇴근 가능하고 서류 정리를 하나, 현장에서 뛰나 월급은 나오니까…… 요즘은 그렇다. 의욕도 책임감도 없이, 그냥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형편이랄까…… 오늘 여기 나온 것도 쥬드가 같이 가자고 잡아끌어서 할 수 없이 나온 거지 애초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보니 마음이 살짝 바뀌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 세 번이었다. 놈들하고 내가 각별한 인연이 있어서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게 아니라면 요즘 우리 동네에서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그 기사단은 어떤 놈들인지 슬슬 알아볼 때가 됐다.

누구한테 잘 보여야 사건을 따낼 수 있을까? 반장 쪽은 쳐다볼 것도 없고, 쥬드? 아니면 앤디 아빠?

가만…… 전화가 왔네?

「뭐해?」

“일해.”

요즘 이 시간쯤에 걸려오는 전화는 발신자 확인을 할 것도 없었다. 터너와 에쉬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퇴근 시간 아니야?」

“아직 아니야. 너는 뭐해?”

「동네 유지들하고 점심 먹고, 얘기 좀 하고…….」

동네 유지들이란 틀림없이 흑풍회 영감탱이들이겠지. 얘도 피곤하겠다.

“좀 있다 내가 전화할게. 지금 사건 때문에 밖에 나와 있어.”

「사건?」

“응.”

「오늘 늦어?」

휴가 끝나서 복귀한 그날 이후로 첸은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서 이러고 논다. 빈틈을 보이고 결국 녀석을 받아들인 내 잘못이긴 하지만, 오늘 늦어? 라니…….

“야…….”

「일찍 와. 보고 싶어.」

“그만 좀 해. 안 어울려.”

수화기 너머로 녀석이 키득키득 웃었다. 웃을 때면 눈가에 살짝 잡히는 주름이라든지 얄밉게 말려 올라간 입술 따위가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일찍 와.」

“봐서…….”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돌아보니 어느 틈엔가 쥬드가 앤디 옆에 끼어 서 있었다. 할 말도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무슨 전화예요.”

“친구.”

내 대꾸에 다들 표정이 시큰둥했다. 하지만 내 새 친구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그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그 기사단 소행인 것 같다는 얘기죠?”

쥬드가 하던 얘기나 계속 하자며 터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얘긴가요? 근처 갱단 간의 전쟁이 과격해진 걸 수도 있잖아요?”

“오컴 사건 때 쓰였던 것과 비슷한 총알이 나왔는데, 그건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조직명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요.”

“명함이라도 받았나요?”

터너가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 얘기는 전에도 몇 번 했었는데…….

“니콜라스한테서 들었어.”

그동안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딱히 감춘 것도 없는데 쥬드는 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되게 생소하고 곤란한 표정이었다. 요즘 들어서 우리 동네엔 종종 괴물도 나오고, 괴물 잡는답시고 거리를 다 때려 부수고 다니는 실성한 놈들도 있다. 인정하기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까지 이 난리가 났으니 속편한 현실 도피도 끝낼 때가 됐다.

“피살자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뭔 잠꼬대냐는 듯 쥬드가 나를 쳐다봤다.

“내가 그놈들하고 마주친 세 번 중에 두 번은 놈들이 쫓고 있던 대상이 사람이 아니었어.”

“목격자들은 그런 말 없던데요?”

오컴도 죽은 시체는 인간과 흡사했었다. 대공은 어디로 봐도 완벽한 인간이었고…… 녀석이 사람 잡아먹는 걸 직접 보지 못했으면 나는 지금도 놈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사람 잡는데 저런 총알은 필요 없어.”

“전기톱이나 양날 도끼 같은 것도 필요 없지만, 개인 취향에 따라서 종종 필요 이상 과격한 무기가 동원되기도 하잖아요?”

“…….”

증거로 수집된 총알과 박살난 옷가게 쇼윈도를 번갈아 쳐다보던 쥬드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검시 보고서를 기다려 보죠. 바닥에 피가 한바가지나 쏟아져 있으니까 피살자가 괴물이나 외계인이라면 검시반에서 뭔가 알아내겠죠.”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몰려들었던 취재 차량도 하나 둘 떠나갔고, 살인 현장으로 추정되는 가게 앞길에 둘러쳐졌던 폴리스라인도 정리가 끝났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라…….”

터너와 에쉬는 맡은 사건 때문에 벌써 자리를 떴고 현장 요원들도 맡은 일을 마치고 하나 둘 현장을 떠나고 있었다. 이젠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쥬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볼 때는 놈들 짓이 맞아.”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아니었으면 싶네요.”

“어째서?”

“일이 너무 어려워질 것 같아서요.”

“그거야말로 당신 전문이잖아.”

“칭찬은 고마워요. 하지만 유령을 쫓아다니고 싶지는 않거든요.”

물론 놈들의 정체를 밝히고 체포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조직을 상대하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나 그 자식들은 첫눈에도 정말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경찰 일이라는 게 본래 우리가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령이면 뭐 어때서?”

“난관이 많을 거예요.”

“이번 사건, 내가 맡고 싶은데…….”

내 말에 쥬드는 별 반응이 없었다. 대신 좀 떨어진 곳에서 총알에 패인 아스팔트와 가로수 둥치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앤디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요? 당신 적성에 딱 맞는 것 같던데요?”

“누가 아니래? 적성에 딱 맞고 정말 마음에 들어.”

앤디가 얼른 달려와서 내 옆에 섰다. 앤디는 내도록 터너와 에쉬 팀에 묻어 다니며 커피 심부름을 하다가 내가 복직한 후로는 나랑 같이 문서 창고나 들락거리는 갑갑한 처지였다.

앤디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쥬드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딴청을 피웠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쥬드도 농담이 많이 늘었다. 물론 쥬드가 번잡한 경찰 일을 떠나서 비서의 본분에만 충실하며 여섯 시 땡 치면 경찰서 문을 박차고 나선 지는 꽤 됐지만, 필드에 복귀만 하면 그날로 지휘권을 틀어잡을 수 있는 영향력은 여전했다. 사태가 이 정도면 서장도 쥬드의 현장 복귀를 간절히 바랄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하고, 이 사건 나 줘.”

쥬드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퇴근이나 해요. 시간 다 됐으니까.”

“놈들을 쫓는데 내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까? 쥬드는 어지간해서는 남의 사생활에 태클을 걸지 않는다. 본인의 사생활도 만만치 않고…… 무엇보다도 남의 사생활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루크 첸 같은 놈을 만나고 다니면서 사생활을 존중받기를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나도 내가 잘못 하는 거 안다. 아니까 별 쓸데없는 서류가 책상에 산같이 쌓여도 찍소리 않고 참았던 거다. 하지만 경찰에서 그 빌어먹을 기사단을 정식으로 수사하겠다면 거기엔 내 자리도 있어야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놈들에게 갚을 빚이 있다.

“그런 게 아니면? 내가 요즘 현장 근처에도 못 가고 있는 게 그냥 반장한테 밉보인 탓인 거야?”

“아무도 당신을 밉게 보지 않아요.”

쥬드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자기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현장 복귀에 대해서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다는 투였다. 답답해서 쥬드의 팔을 붙들었다.

“이러려면 나를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왔어?”

“이런 사건인 줄 몰랐거든요.”

쥬드가 내 손에서 팔을 빼내고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쥬드가 차를 몰고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앤디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노려봤다.

“이 사건, 물 건너간 거예요?”

“거의…….”

나에 대한 경찰서의 내부 방침이 이제 확실해졌다. 루크 첸하고 헤어질 때까지 나는 투명인간이다. 각오는 했던 일이다. 하지만 나랑 엮여서 지은 죄도 없이 투명해진 앤디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앤디가 정식으로 따졌다. 일주일이면 앤디도 많이 참은 거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도 답을 모르겠다.

“퇴근해야지. 내일 보자.”

지난주에 방을 얻었다. 카셀 거리에 있는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는 그럭저럭 지내기에 괜찮아 보였다. 건물 사이 간격이 너무 좁아서 낮에도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았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가에서 차량 소음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위치가 경찰서에서 한 시간 안쪽이라 별다른 고민 없이 계약을 했다.

하지만 새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본 결과, 집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많았다. 아래층 어딘가에서는 사이 나쁜 부부가 거의 새벽까지 말다툼을 벌였고 바로 위층에선 아기가 밤새도록 울어댔다.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낮보다 더 심해서 방음창을 달지 않고는 잠을 못 잘 정도였다. 하지만 집을 잘못 구한 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나한테는 다른 문제도 많았고 사실, 그 집에서 잠을 잔 건 이사한 첫날뿐이기 때문이었다.

“왔어?”

“어…….”

우화각으로 가는 작은 돌다리 앞에서 첸과 마주쳤다. 뒤쪽에 늘 몰고 다니던 애들 숫자가 보통 때보다 훨씬 많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녀석들을 다 끌고 우화각으로 가는 길이라면 나는 그냥 내 아파트로 갈 거다.

“저녁은? 아직이지?”

“할 일 있으면 해. 나 신경 쓰지 말고…….”

첸의 등 뒤에 병풍처럼 버티고 선 남자들의 눈빛은 떨떠름 그 자체였다. 첸을 노상 쫓아다니는 경호원 서너 명은 이제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됐을 만도 한데 여전히 자기네 보스가 짭새랑 놀아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하긴, 일주일째 여기 호텔방을 자발적으로 들락거리고 있는 나부터도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여태 일하고 오는 길이야.”

나는 저녁 생각 별로 없는데 첸이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청연루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가서 밥 먹자. 나 배고파”

아무리 부하들이라고는 해도 인상 험악한 어깨들이 빙 둘러서서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신경할까?

“놔 봐. 이거 좀…….”

밥 먹으러 같이 갈 때는 가더라도 좀 떨어져서 가려고 잡힌 팔을 탈탈 털었다.

첸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란 듯 더 치대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본래 성격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싫다.

“오늘도 하루 종일 보고서 정리했어?”

“넌 어때? 오늘도 나쁜 짓 많이 했어?”

“요즘 내가 하는 나쁜 짓이라곤 너하고 만나는 것뿐이야.”

주변에서 인상 쓰고, 한숨 쉬고 난리가 났다. 어윽 하고 토하는 시늉을 하는 놈도 하나 있었는데, 그러다가 뒤에 서 있던 놈한테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았다. 그러고 보니 저 남자…… 아는 얼굴이다.

“자오?”

내가 알고 있던 그 얼굴보다 많이 마르고 기운이 좀 없어 보였지만 확실히 자오였다. 주변이 어두운데다 덩치 제일 큰 놈 뒤쪽에 숨은 듯 서 있어서 자오가 있는 걸 여태 모르고 있었다.

자오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돌멩이처럼 딱딱한 얼굴로 나를 봤다.

“오랜만이야.”

자오는 백화점에서 중상을 입었었다. 자오 소식은 첸에게서 간간히 듣고 있었는데 첸의 말을 빌리자면 대공한테 아주 잠깐 잡혀 있었을 뿐이고 공연히 엄살 피우느라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용한 한의원에 박혀 있는 거라고 했었지만 그거야 말로 괜한 소리였다. 자오도 그 당시엔 황천 가는 길 근처를 오락가락했었다.

“몸은 좀 어때?”

“이제 괜찮아.”

“병문안이라도 한번 갈 걸 그랬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병원에 한번 찾아가야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됐어. 짭새 병문안이라니, 소문나면 딴 놈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자오가 곁눈으로 나를 힐끔 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 봐서는 알 길이 없었다. 아마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자오가 기침을 하는 척하면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청연루에 도착할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 자오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엔 말이 없었다. 본래부터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과묵한 남자였나 싶을 정도로 입이 무거웠다.

“그럼 병원엔 2주일 정도 입원해 있었던 거야?”

“응.”

“그 후엔 계속 집에 있었고?”

“응.”

대답이 계속 단답형이었다. 자오가 나하고 사이가 좋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었다.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

“아니.”

“내가 병문안 안 가서 삐친 건 아니고?”

“야!”

자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도 놀랐고, 주변에서 우르르 몰려다니던 놈들도 놀라서 자기네들끼리 붙어 섰다. 대공 때문에 얼굴이며 몸매가 반쪽이 나긴 했지만 자오는 여전히 보통사람보다는 체격이 크고 눈매가 사나웠다.

“왜 화는 내고 그래?”

“화 안 냈어!”

자오가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여기서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한 대 얻어맞겠다. 사람 들어서 던지는 게 특기라니 연못에 처박힐지도 모르고…… 피차 죽을 고비를 한 번씩 넘기고 꽤 오랜만에 만난 건데, 뭐가 못마땅해서 이렇게 부어 있는 걸까? 나도 모르게 자오한테 실수한 게 있었나?

“너, 자오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자오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무슨 말인가 막 하려는 참이었는데 첸이 나를 식당 안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삼각관계도 재미는 있지만 상대가 자오라니, 곤란하거든.”

아무리 보스라도 이런 소리 지껄이면 열 받아서 집어던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자오를 돌아봤다.

“저는 좀 빼주시죠.”

자오가 옆에서 키득거리는 놈들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식당 안에 들어와서야 첸이 부하들을 떼어 놓고 2층으로 앞장서서 올라갔다. 다행히 밥은 둘이 먹게 될 모양이었다.

“뭐 먹을래?”

첸이 메뉴판 너머로 나를 응시하며 입맛을 다셨다.

“해물하고 같이 볶은 국수 괜찮던데…….”

쿠간에는 요즘 중국 음식 열풍이 불고 있었다. 특히나 이 식당은 쿠간의 명소 중 하나로 아침 방송에 한두 번 소개된 후로는 예약 없이는 국수 한 가닥 얻어먹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문전성시였다.

“그거하고 또?”

“난 그거면 됐어.”

“뭐야? 다이어트 중이야?”

첸은 몸매가 날렵한데 비해선 꽤 먹성이 좋은 편이었다. 외모는 입맛 엄청나게 까다롭고 건강식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볼 것처럼 생겼는데, 종종 사흘 굶은 노숙자 같은 기세로 3, 4인분 정도 되는 코스 요리를 혼자 해치울 때가 있었다.

오리고기 한 접시, 만두 3인분, 튀긴 두부, 해물 누룽지탕 큰 거 하나, 거기에 술 한 병을 더 시키고 나서 첸이 웨이터를 내보냈다. 첸도 오늘 저녁은 간단하게 먹을 모양이었다.

“아까 전화했을 때는 어디 있었던 거야?”

만날 때마다 의례히 묻는 말이었다. 오늘은 뭘 했는지, 특별한 일은 없었는지…… 지난 한 주 동안 내 대답은 한결같았지만 오늘의 일과는 다른 날과는 달랐다.

“사건이 있어서 현장 보러 잠깐 나갔었어.”

“다시 현장 근무를 하는 거야?”

첸이 마땅치 않다는 투로 눈살을 찌푸렸다.

“사건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일손이 딸리면 그럴 수도 있고.”

첸이 흠…… 하고 한숨을 쉬면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내가 퇴직할 때까지 계속 창고에 박혀서 서류 정리나 했으면 좋겠어?”

“그 편이 안전하잖아. 출퇴근 시간도 일정하고.”

“일이 늘 그렇게 위험한 건 아니야.”

첸이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위험을 쫓아다녀. 아니면 위험이 널 쫓든가…….”

공연한 걱정은 아니다. 특히나 지난 몇 달간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가는 데마다 지뢰밭이었고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뭔가가 펑펑 터졌다.

“조심할게.”

첸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첸은 이따금 저런 시선으로 나를 보곤 했다. 그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물어볼까 하던 참에 웨이터가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테이블 하나 가득 차려진 국수, 만두, 튀긴 두부, 누룽지탕 등등을 보니 세상에서 제일 영양가 있는 데이트 상대는 식당 사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폭 겸업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어떤 사건이었는데?”

“총격전.”

“오늘 시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이라면…….”

문득, 첸이라면 그 기사단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첸은 쿠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대해 경찰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엔젤 가브리엘 거리. 맞지?”

첸이 내 국수를 반이나 덜어가서 한 입에 밀어 넣으며 우물거렸다.

“경찰 업무를 모니터링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필요하면 그런 거라도 해야겠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거야. 오후 내내 뉴스에서 떠들어댔으니까…….”

나는 뉴스는 못 봤다. 하지만 현장에 취재 차량이 한 무더기 몰려와서 소란을 피우다 간 건 사실이다.

“수사는 어땠어? 뭐 알아낸 거라도 있어?”

“너는?”

첸이 하…… 요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요즘 내 일만 해도 바빠.”

“정보가 생명이라며?”

“사건 수사는 경찰이 해야지.”

첸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뭔가 안다. 하지만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너…….”

첸이 만두 한 개를 집어서 내 입에 물려줬다. 입 다물고 저녁이나 먹으라는 뜻인가 보다.

내가 만두 몇 개를 집어먹고 누룽지탕 몇 번 떠먹는 사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던 국수, 만두, 튀긴 두부, 누룽지탕 등등은 전부 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첸하고 같이 식사를 하다 보면 녀석이 먹는 걸 쳐다보느라 내 입에 음식 집어넣는 걸 잊을 때가 종종 있다.

“그거만 먹고 되겠어? 딴 거 더 먹을래?”

먹을까 말까 망설이며 노리고 있던 마지막 두부 한 개를 첸이 잽싸게 낚아채면서 히죽 웃었다.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입맛도 떨어지고…….

첸이 집어갔던 두부를 나한테 내밀었다. 좀 전에 만두 한 개를 내 입에 밀어 넣은 것 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좀 전에 그게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 였다면, 이건 완전히 ‘자기야, 아……’ 이거다.

“뭐 어때? 보는 사람도 없잖아.”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창피하고 낯간지럽다. 남자에, 조폭에, 유부남에 악조건은 다 갖춘 주제에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싶어 하는 뻔뻔함이 얄밉기도 하고…….

“수줍어하는 거야? 나 또 그런 거엔 약한데…….”

“됐어.”

이제 와서 버티는 것도 웃긴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받아먹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부를 우물거리는 나를 보고 첸이 씨익 웃었다.

“뭔가 길들여지는 느낌이야.”

“연애라는 게 본래 그렇지, 뭐.”

첸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연애라…….

“일방적이잖아.”

“너도 나를 길들이면 되잖아?”

“난 그런 거 별로…….”

첸이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로 몸을 굽히더니 내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럽기도 하고 식사 중에 하는 키스치곤 과격해서 두부가 목에 딱 걸리고 말았다.

“너도 한번 해봐. 재미있으니까.”

후식으로 차 한 잔씩을 마시고 식당에서 나와 정원으로 나갔다. 약간 늦은 저녁이라서 한참 손님이 많을 시간이기도 하고, 쿠간 최고의 맛집으로 방송을 탄 이후 워낙 인기몰이 중이라서 정원에도 사람이 많았다.

“장사 잘 되네?”

아름답게 조각된 난간에 몸을 기대고 물속을 들여다보는 젊은 커플도 있고, 골목길을 기웃 거리는 중년 아주머니들도 있고, 연못 언저리엔 빵 부스러기 따위를 잉어에게 던져주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전에도 사람은 많았지만 정원이 크고 사이사이 골목길이 있어서 붐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지금은 마치 축제라도 벌어진 것 같다.

“우리도 좀 걸을까?”

바로 옆으로 우르르 뛰어가는 애들을 피해 내 쪽으로 다가선 첸이 후원으로 가는 골목을 가리켰다. 산책이라…… 얼핏 듣기엔 건전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첸의 입에서 산책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주변에 둘러선 첸의 부하 녀석들 입에서는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냥 방으로 들어가세요! 왜 그러세요? 자꾸…….”

자오의 부재를 틈타서 그동안 첸의 경호원 중에서 제일 말발을 세우던 녀석이 짜증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첸의 부인의 외사촌 동생의 친구라는데 동양인 치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인상도 자오만큼 안 좋은 놈이다.

“내가 내 식당 마당 좀 걷겠다는데 니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좀 걷기만 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지난 한 주일 동안 매일 같이 이 식당에서 첸하고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에 식당 후원을 산책한 건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다 산책만 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으슥한 골목 구석에서 키스 한두 번 주고받는 정도였는데 엊그저께 대나무 숲속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는 도가 지나쳐서 하마터면 밖에서 사고를 당할 뻔했다. 그러니 경호원 노릇까지 겸하면서 침실 외엔 첸이 어딜 가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부하 녀석들이 산책이란 소리에 펄쩍 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직 초저녁이고 후원엔 애들도 바글거린다고요!”

참 반듯한 윤리관을 가진 조폭인데 하필이면 보스가 루크 첸이라서 안됐다. 면전에 대고 아무리 입바른 소리 지껄여봐야 첸의 대꾸는 이런 거다.

“애들이 근처에 못 오게 니들이 잘 지키면 될 거 아냐?”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애가 약이 바싹 올라서 첸한테 대드는 데, 자오가 덜미를 잡아서 뒤로 끌어냈다.

“놔 봐!”

녀석이 뒤로 질질 끌려가면서 버둥거렸다. 녀석도 힘깨나 쓸 것 같은 덩친데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자오를 당해내지 못했다.

자오가 녀석을 담벼락 쪽으로 내동댕이치면서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죽을래? 누구한테 꼬박꼬박 말대꾸야?”

자오의 살벌한 호령에 보스의 후안무치한 애정행각에 분개하던 일당들의 풀이 팍 죽었다.

첸하고 내가 이 상황에 큰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무리 봐도 이 조직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감을 못 잡겠다. 보스 면전에 대고 이렇게 툴툴거리며 기어오르는 걸 보면 의외로 민주적인것 같기도 하고, 친인척이 마구 뒤섞인 패밀리 비즈니스의 막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첸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지만…….

“가자.”

첸이 내 손을 덥석 잡더니 후원과 호텔 쪽을 향해 난 세 갈래 골목길 중 오른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청연루 후원은 빙 둘러서 대숲이었다. 청연루가 어지간한 공원 정도의 면적이다 보니 대숲이 넓지는 않아도 죽 따라가다 보면 길고 긴 숲길을 걷는 느낌이 났다. 쿠간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대나무 숲을 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 지역은 본래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인데, 어떻게 이런 숲을 만들었을까?

“기린한테서는 연락 없었어?”

“응?”

기린 따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첸이 되물었다.

“아…… 그 녀석?”

기린하고 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어린 녀석들이 돈 몇 푼 쥐고 사라져서 일주일째 소식이 없을 때는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줬으면 좋겠다.

“걱정 안 돼?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걱정은 무슨……. 돈 떨어지면 기어들어 오겠지.”

나를 당겨서 어깨를 끌어안으며 첸이 건성으로 대꾸했다.

발렌타인이 병원에서 도망쳤다. 기린한테 그렇게 맥없이 당하고 난 후, 그날 밤에서 새벽 사이에 병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화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병원으로 다시 가보니 병원 직원들이 정신없이 사라진 암환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직원 사물함 근처 쓰레기통에서 버려진 해바라기 꽃무늬 파자마가 나왔고, 청소 용역 직원의 작업복이 한 벌 없어졌다니 탈출 경로는 대강 짐작이 갔다.

발렌타인이 그렇게 없어져버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린도 병원을 뛰쳐나갔다. 말 한마디 없이 한 10분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주사 바늘 잡아 뜯고 병실을 나가는데, 어찌나 표정이 살벌한지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나가는 걸 빤히 보면서도 붙잡거나 말릴 수가 없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첫사랑에 화가 난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발렌타인이 어디로 갔든 기필코 찾아내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도 좋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린의 첫사랑은 잠수 전문가였다. 발렌타인이 작정하고 몸을 감추기로 했다면 찾아낼 방법이 달리 없었다. 게다가 기린은 쿠간 시 지리도 잘 모르고, 사람 찾는 일에는 별다른 성과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면 안 돼?”

용하고 기린, 두 녀석이 퀭한 얼굴로 나를 찾아온 게 이틀 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실종 신고를 내고 직접 찾아 나설까 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며 경찰서 안을 기웃거리는 놈들을 봤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반갑고 마음이 놓였다.

가진 돈 다 털어서 점심 사 먹이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골목길이나 뒤지고 다니는 방법으로는 발렌타인을 찾을 수 없다고 밥 먹는 내내 설득을 했지만 기린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다.

밥 다 먹고 나서 기린이 돈 좀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그 요구에 가지고 있던 카드를 한 장 꺼내서 쥐어준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발렌타인도 한창 전성기 때처럼 교묘하게 숨어 다닐 형편은 아니니까,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거야. 웃기지도 않는 가명으로 허름한 모텔 같은 데 처박혀 있겠지. 어지간하면 그냥 두고 보겠는데, 워낙 중환자라서 말이야…….”

첸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마땅치 않은 얼굴이었다.

“빨리 찾아야 할 것 같아.”

“…….”

“싫어?”

“귀찮아. 별로 예쁜 구석도 없는 녀석 때문에 그런 일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고…….”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

첸이 손끝으로 자기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못된 궁리를 할 때 주로 저런다. 아니나 다를까…… 첸이 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을 좀 더 성의 있게 해보든가…….”

“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첸이 얼른 뒤로 물러서며 손을 내저었다.

“강요하는 건 아냐.”

내가 이런 장난 싫어하는 줄 뻔히 알면서 왜 번번이 이러는지 모르겠다. 첸은 이런 게 재미있는지 몰라도 나는 시달린다는 느낌뿐이다.

“뭘 어쩌라고?”

“날 설득해봐. 내가 니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뻑 가게…….”

“됐어.”

돌아가자니 첸의 부하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그냥 앞으로 계속 걸었다. 길 따라 5분만 더 가면 청연루로 가는 샛길도 있고 밖으로 나가는 쪽문도 나온다. 공연히 녀석한테 아쉬운 소리 했다가 기분만 잡쳤다.

“하긴, 너도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겠지.”

그래도 기린의 사정이 딱하니 좀 있다 한 번 더 운을 떼볼까, 쪽문으로 나가서 그냥 집에 갈까 갈등하고 있는데 첸이 내 뒤통수에 대고 비아냥거렸다. 열 받아서 다시 돌아섰다. 정말, 주둥이를 들이받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

한차례 불어온 밤바람에 댓잎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첸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어지럽게 날렸다. 만날 때마다 최소한 두 번은 내 속을 뒤집는 밉살맞은 놈이지만, 그리고 다른 문제도 많은 놈이지만 잘 생긴 건 사실이다. 하필이면 바람 부는 대숲에서 저렇게 폼 잡고 서 있으니까 묘한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정신 차리려고 고개를 세게 한번 털고 첸 쪽으로 다가갔다. 확 받아버리고 집에 갈 수도 있지만, 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첸이 원하는 대로 적극적인 설득을 해보는 것도 나쁠 거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됐지?”

“성의가 없어.”

첸이 입맛을 다시면서 트집을 잡았다. 그냥 민숭민숭한 키스 한번이긴 했지만 그나마도 뒤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해준 거다. 나한테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내 입장에선 최대한 마음을 독하게 먹은 거다.

“가끔 좋은 일 한 번씩 하면 어디 덧나? 둘 다 불쌍하잖아.”

“그렇기는 해도…… 너무 싱겁잖아. 다른 거 뭐 없어?”

이제 남은 거라곤 눈에서 불이 번쩍할 정도로 강력한 헤딩하고 주먹따귀뿐이다.

“그만 좀 놀려. 그렇게 재미있어?”

첸이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힘들게 참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어렵냐? 조금만 귀엽게 굴면 뭐든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는데?”

첸의 손이 어느새 내 옷자락을 헤집고 옷 속으로 들어왔다. 맨살에 차가운 손이 와서 감기는 느낌이 오싹해서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느낌이 좋은지 싫은지, 내가 지금 행복한 건지 불행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 절반은 마비라도 된 듯 멍했고, 나머지 절반은 피가 흐르는 것처럼 아팠다.

엔젤 가브리엘 거리 총격전 사건은 강력반과 조직 폭력과 공조로 수사팀이 꾸려졌다. 나하고 앤디는 그 수사팀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워서 미해결 사건 파일이고 뭐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등을 꾹 눌렀다. 목소리와 등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촉으로 봐서 돌아볼 것도 없이 쥬드였다.

“왜?”

“뭐하는 거예요? 대낮부터…….”

잠깐 잤다. 점심시간에 앤디랑 나가서 점심 먹으면서 맥주 두 잔 마신 게 갑자기 확 올라와서…….

“이게 그렇게 바쁜 일도 아니잖아. 중요한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근무 시간에 술 먹고 잠을 자요?”

“맥주 마셨어. 딱 두 잔.”

요즘 나를 따라다니면서 들들 볶는 건 주로 반장님 일이었다. 쥬드는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쥬드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서류다발을 바닥으로 밀어내고는 책상 위에 주저앉았다.

나하고 달리 쥬드는 요즘 바쁘신 몸이다. 이 도시에서 제일 화력 빵빵한 무장 폭력배들을 뒤쫓느라 눈코 뜰 새가 없을 텐데, 지하 1층 자료 창고에서 귀양살이 중인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남자친구하고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전혀…….”

남자친구가 생긴 거 자체가 문제지, 그 외엔 다 괜찮다.

“나한테까지 숨길 필요가 뭐 있어요? 뭐가 문젠지 털어놔 봐요.”

쥬드가 헛소리 말라는 듯 내 말을 자르고 흉악범 심문할 때처럼 은근한 눈초리로 내 눈을 응시했다. 문제라…….

“남자에, 조폭에, 유부남에…… 엄청난 바람둥이야.”

“다 알고 시작한 거 아니었어요?”

“아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첸이 싫어요?”

“내가 싫어.”

바닥에 한 무더기 쌓인 서류 더미를 베고 아예 누웠다.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졸았더니 허리가 뻐근하다. 이러고 한 시간만 더 잤으면 좋겠는데 쥬드는 나갈 기미가 없었다. 나가기는커녕 쥬드도 책상 위에 길게 뻗었다. 그리고는 푸념조로 투덜거렸다.

“항상 남자가 말썽이죠.”

쥬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나쁜 남자 전문가다. 쥬드의 전 남자친구 명단이 곧 쿠간 시 최악의 범죄자 명단이었다. 숫자도 많고 살인범, 방화범, 폭탄 테러범, 폭주족 기타 등등…… 죄질도 다양했다. 어쩌다보니 나도 남의 말 할 처지가 아니게 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런 정신 나간 놈들과 어울릴 때도 신세타령하는 걸 못 봤는데 웬 한숨이 저렇게 길까? 내가 모르는 사이 상대가 바뀐 게 아니라면 요즘 쥬드가 만나고 있는 남자는 아무 문제도 없는 착한 남자였다. 쥬드가 인품에 반해서 마리우스하고 사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왜? 마리우스가 속 썩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쥬드가 남자 문제로 고민하는 건 처음 봤다. 수많은 남자친구들이 징역 15년에서 종신형까지 다양하게 선고받고 큰집으로 끌려갈 때도 끄떡없더니…… 뭐가 문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됐다.

“헤어져.”

“장서각이 탐나서 마리우스하고 만나는 거 아니라니까요?”

최근에 들어본 것 중에 제일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어쨌든…… 헤어져.”

“나하고 결혼하고 싶대요.”

아무래도 낮잠을 더 자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주섬주섬 일어나서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게 꿈이 아닌 게 유감이다.

“마리우스는 정말 착하고, 성실하고, 매너도 좋아요. 어리지만 속도 깊고 똑똑하고…….”

“있어 봐. 설마 결혼할 생각이야?”

“그러면 어떨까 생각은 했었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쥬드가 눈을 감은 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 책방은 주인이 따로 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쥬드가 짜증을 내며 일어나 앉았다.

의자에 최대한 편하게 기대앉은 다음에 쥬드를 가만히 쳐다봤다. 예쁜 얼굴,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 지금 바로 패션쇼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간다고 해도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을 만큼 쫙 빠진 몸매…… 쥬드를 한번 본 사람들은 누구나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혼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여자에게서 사랑받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고 절망하지만…….

나는 쥬드가 평생 나쁜 놈들 애간장이나 녹이고, 서장한테 맛대가리 없는 차나 끓여 먹이면서 독신으로 살 거라고 생각했었다. 결혼이라니, 게다가 열 살도 더 어린 서점 점원하고…….

“마리우스가 학교 운동장만한 에메랄드 반지를 내밀면서 결혼해달라고 하는데, 얼마나 진지하고 정중한지 하마터면 그러자고 해버릴 뻔했어요.”

“자랑하는 거야?”

쥬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마리우스가 정말 좋아요. 하지만…… 마리우스한테는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있나?”

“당신 생각보다 심각해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그렇고요.”

마리우스가 손가락 한마디가 다 덮일 정도로 커다란 에메랄드 반지를 들이밀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만 해도 쥬드는 이 청혼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있었다. 일단 에메랄드의 사이즈가 너무 컸고, 고전적인 세팅도 딱 쥬드의 취향이었다. 마리우스가 비록 쥬드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이상형과 결혼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어른이라면 대부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리우스한테는 쥬드가 거부하기 어려운 탐나는 조건이 있었다.

쥬드의 입장에서 보면 마리우스는 세상에서 제일 값진 보물을 지키는 용이나 다름없는데, 보물의 주인이 행방불명중인 연쇄살인범이라면 보물을 지키는 용하고 잘 지내는 것도 나쁠 거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을 거다. 하지만 결국 마리우스의 홀랑 깨는 한마디 때문에 쥬드의 결혼 계획은 날개를 달고 날아가버렸다.

“데 로카 후작…… 이라고?”

“무릎 꿇고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데 로카 후작 가문의 안주인이 되어달라고 하는데, 하마터면 대체 왜 이러느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니까요?”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손사래 치고…… 쥬드의 반응이 격했다.

“데 로카 후작이 누군데?”

“장서각의 수호 기사요.”

요즘 세상에 후작이라니 좀 깨긴 하지만, 그게 화낼 일인가? 마리우스가 예전에 유럽에서 잘 나가던 귀족 집안 출신이 절대로 아니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리우스가 그 책방을 지키고 있는 건 맞잖아.”

나를 보는 쥬드의 시선이 싸늘했다.

“마리우스는 정상이 아니에요. 다락방에서 키우는 아편 때문인지, 장서각에서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떤 때는 애가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아요!”

마리우스는 종종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 그건 사실이다. 아편 차도 그렇고, 다 쓰러져가는 책방에서 포르노 잡지나 팔고 있는 게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겠지. 하지만 깨는 소리를 한 번씩 할 때 빼면 일상생활은 쥬드보다 정상이다.

“나도 당신이 마리우스하고 결혼하는 건 반대야. 하지만 마리우스가 자신을 후작이라고 우기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그게 진짜 마리우스의 이름일 수도 있잖아?”

“말도 안 돼요!”

쥬드가 머리카락을 잡아 뜯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나는 요즘 들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이 일이 그렇게까지 심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내가 마리우스랑 결혼할 것도 아니고…….

“마리우스 데 로카 후작은 그냥 옛날 얘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이에요. 그것도 반은 판타지 소설이라고요.”

“장서각에 대해서도 당신은 같은 말을 했었어. 내가 장서각 얘기를 하니까 헛소리하지 말라면서 차 안에서 나를 뜯어 먹으려고 했었잖아?”

혹시 자신이 후작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쥬드가 나쁜 기억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건물은 천년을 서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게 오래 못 살아요.”

마리우스 데 로카 후작은 오롯이 마리우스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후작은 라두칸 장서각과 관련된 몇몇 고문서와 옛 유럽 귀족 가문의 연표에도 등장하는, 나름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인물이었다.

“데 로카 가문은 한때 남부 스페인을 지배했던 유력한 귀족 집안이었고, 마리우스 데 로카는 그 집안의 마지막 영주였어요. 어떤 이유로 시비가 붙어서 이웃 영주와 결투를 했는데 그때 입은 부상으로 결국 사망했어요. 결혼도 안 했고, 당연히 후계자도 없었고, 결국 가문의 대가 그렇게 끊어졌죠.”

“그래도 실존 인물이긴 하네.”

그래서 특별히 다행스러울 건 없지만…….

“거기까지가 역사고, 죽은 후엔 판타지 세계에서 환생해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후작이 다시 살아나서 장서각의 주인인 라두칸으로부터 장서각에 있는 열세 개 층의 열쇠를 받고 장서각의 수호기사가 된 거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쯤은 폭삭 늙었겠네.”

“데 로카 후작은 늙지도, 죽지도 않아요. 장서각의 주인에게서 받은 선물이죠. 장서각이 먼지가 되는 날까지 그곳을 지키고 보호해야 되는데, 월급이 제때 나오는 직장도 아니거든요.”

후작한테 너무 불리한 조건이다. 나 같으면 그런 일자리는 딱 잘라 거절할 거다.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당신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책에서 봤어요.”

“아…… 책…….”

마리우스 생각에 마음이 답답한지 쥬드가 또 한숨을 쉬었다.

“그 책이 쓰여진 게 최소한 700~800년은 지났을 거예요.”

오래된 종이 냄새만 가득한 문서 보관실에 갑갑한 침묵이 흘렀다. 이 조용함이 그렇게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는 않은데 좀 피곤했다. 요즘은 남의 애정 문제에 조언해줄 기분이 아니다. 그럴 자격은 더더욱 없고.

“마리우스를 데리고 병원엘 가 봐. 아니면 재활센터라도…….”

나도 가끔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쥬드처럼 천재가 되는 것도 바라지 않고, 비니처럼 초능력자가 되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그저 지금보다는 좀 더 쓸 만한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은 앤데…….

“오늘 저녁에 뭐 해요?”

쥬드가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이제 그만 나갈 모양이었다. 요즘은 쥬드도 장시간 땡땡이를 칠 여유가 없다. 엔젤 가브리엘 거리 총격전에 관한 수사는 실질적으로 쥬드가 지휘하고 있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뒤쫓는 일은 상당히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릴 거다.

“왜?”

특별할 건 없지만 나는 요즘 퇴근 후에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이 거의 정해져 있다.

“같이 마리우스 보러 가요.”

“둘이 데이트하는 데 나도 끼워주는 거야?”

“마리우스네 부엌에서 스테이크랑 감자 구워먹어요. 와인도 한 잔 하고…….”

오랜만에 장서각에 가서 마리우스하고 저녁을 먹는 건 좋다. 마리우스도 반가워할 거고……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 내가 거기 가서 마음 편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뭐가 문제야?”

“별로 큰일은 아니에요.”

거 봐. 역시 이유 없는 친절 따윈 없다니까.

“같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얘기를 들어줬으면 해서요. 마리우스가…… 자기가 그 기사단에 대해서 안대요. 필요하면 자료도 찾아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마리우스가?”

방엔 우리 둘밖에 없는데도 쥬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예전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소속의 기사하고 결투를 한 적이 있었대요.”

첸이 전화를 안 받는다. 첸의 전화는 종종 불통이었다. 뭔가 바쁜 일이 있으니까 안 받는 거겠지만 이러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몰고 다니는 경호원들이 몇 명 늘어나긴 했지만 전에 비해 특별히 몸조심을 하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아서…… 이러다 또 뉴스에서 총격전이나 폭탄테러 소식을 듣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전화 안 받아요?”

쥬드가 스테이크 사이드 메뉴로 쓸 당근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슬쩍 물었다. 우리는 퇴근하고 장서각 가는 길에 식료품 가게에 들러서 장을 보는 중이었다.

남자친구 저녁을 해주려고 이것저것 고르는 쥬드를 보고 있으니까 꼭 장서각 때문에 마리우스한테 잘 해주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장서각이 아니었으면 마리우스같이 순해빠진 어린애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바쁜 일이 있나 봐.”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하는 일도 그렇고, 사장님이란 직함도 있어서 첸은 출근이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니었다. 보통은 일어나는 것도 내가 먼저고, 내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설 때까지 첸은 커피 마시고, 신문 보면서 노닥거리는 게 일이다. 그러던 녀석이 새벽 댓바람에 전화를 받고 주섬주섬 일어나서 나가더니, 오후 서너 시쯤 의례히 걸려오던 전화도 오늘은 없었다.

“첸하고는 어때요?”

쥬드가 당근 두 개하고 칠리 서너 개를 봉투에 집어넣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냥 그래.”

“그렇게 시시해요?”

쥬드는 첸하고 나 사이가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 우리 둘 사이가 시시한 건지, 아니면 심각한 건지…….

“당신 사생활을 꼬치꼬치 캘 생각은 없지만…….”

“그럼 캐지 마.”

루벳 거리는 요즘 경기가 좋았다. 이 동네는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홍등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허름한 사창가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형 클럽이 동네 초입에 여러 개 생기면서부터는 밤 풍경이 휘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즘 마리우스의 책방에 손님이 많은 건 거리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업종 전환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거리 자체가 전에 비해 많이 번화해진 덕분이었다.

“오셨어요?”

카운터 뒤에서 뭔가를 정리하던 마리우스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정신적인 문제는 말투라든가 눈빛에서 대강은 표가 나게 마련인데 마리우스한테서는 전혀 그런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잘 지냈어?”

“복직하신 후론 바쁘신가 봐요.”

“어, 좀…….”

사실 그렇게 바쁜 일도 없었지만 대강 얼버무렸다. 마리우스는 만날 때마다 어린 동생처럼 나한테 착 감기는데 상대적으로 내가 무심했던 건 사실이라서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뭐예요?”

마리우스가 내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녁거리야. 안심 스테이크 좋지?”

쥬드가 나를 밀고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리우스에게 입을 맞췄다. 비록 혼담은 깨졌지만 아직 사랑은 깨지지 않았다는 듯 키스가 진하고 길었다.

“그럼요.”

마리우스가 약간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창고 정리라도 했어? 웬 먼지야?”

쥬드가 마리우스의 어깨에 앉은 먼지를 털어주며 물었다. 마음먹고 재고 정리라도 했는지 셔츠도 그렇고, 바랜 청바지에도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찾을 책이 몇 권 있어서 지하실에 갔다 왔어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관한…… 일단 눈에 띄는 대로 모아왔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쥬드가 나를 가정식 스테이크 요리로 꼬드겨서 장서각 뒷방으로 끌고 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스테이크 한 접시 얻어먹는 대가로 내가 할 일이 뭐냐 하면…… 일단 마리우스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얘기할 때 쥬드가 너무 흥분해서 마리우스를 윽박지르거나, 때리려고 덤벼들면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거였다. 잘 할 자신은 없지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분위기 봐서 마리우스한테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는 건데, 본래는 여자친구인 쥬드가 할 일이지만 청혼을 거절하고 하루도 안 돼서 병원에나 가보라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고 죽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내가 총대를 메기로 했다.

쥬드가 스테이크를 요리하고 소스를 만드는 사이 마리우스는 옷을 갈아입고 와서 테이블에 어지럽게 널려 있던 양피지를 치우고 식탁을 차렸다.

그 사이에 나는 마리우스가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써가며 찾아온 그 빌어먹을 기사단 관련 자료를 뒤적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유심히 들여다봐도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이것들이 하나같이 굉장히 오래 된 문서라는 것뿐이었다.

이게 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책 가장자리에 장식된 방패 문양과 가시덤불을 엮어 만든 십자가 그림뿐이었다.

“라틴어예요.”

쥬드가 다가와서 내가 들고 있는 책을 힐끔 들여다보며 일러줬다.

“다행이네. 이 문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으니까.”

“대강 뜻은 알 수 있겠지만 제대로 해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걸요.”

고문서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요즘처럼 바쁘고 뒤숭숭한 시기에 옛날 얘기 번역하느라 시간 버리기 싫은 건 싫은 거다. 쥬드는 마리우스가 찾아온 고문서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 없는 걸 떠나서 보면 볼수록 마리우스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이 실감나서 싫은 눈치였다.

그 깊은 지하실까지 내려갔다 온 성의가 있으니 문서 박스를 마지못해 집에 가지고 가긴 하겠지만, 쥬드가 이걸 밤새워가며 해석해서 이번 수사에 참고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저녁 식사는 그럭저럭 평온했다. 쥬드의 스테이크도 맛있었고, 마리우스가 꺼내온 와인도 약간 쌉싸름하면서 스테이크와 맛이 잘 맞았고, 식사 중의 대화 역시 누가 들어도 걱정스러운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상적이었다.

“서적 코너 한쪽에 DVD를 들여 놓은 다음부터는 손님이 전보다 조금 더 늘었어요. 수입도 늘어서 이젠 슈가 씨 월급을 주고도 돈이 좀 남을 정도예요.”

DVD라…… 분명히 자연 다큐멘터리의 일종일 텐데, 뭔지나 알고 그런 걸 파는 걸까?

“그런 거, 직접 보기도 해?”

보물창고 같은 장서각이 본격적인 포르노 숍으로 변해가는 것이 안타까운지 쥬드의 표정이 어두웠다. 한때 매장을 가득 채웠던 아름다운 고서적들은 하릴없이 뒷방으로 밀려나고 매장의 반이 성인 잡지, 성인 용품, 이젠 성인 DVD까지…… 내 걱정스런 물음에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플레이어도, TV도 없어서요. 여유가 생기면 한 대 사야죠.”

마리우스의 대답을 끝으로 식탁이 잠잠해졌다. 분위기가 은근히 무거웠다. 청혼을 거절당한 일로 마음이 울적한지 마리우스의 고개가 자꾸 아래로 떨어졌다.

고기를 썰어서 부지런히 입에 넣기는 하는데 맛이 있어서 먹는 게 아니라 그저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쥬드한테서 들었는데,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다고?”

무슨 말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저렇게 먹다 체할 것 같아서 기사단 얘기를 꺼냈다. 이 얘긴 저녁 다 먹고 시작할 걸 그랬나? 이번엔 쥬드가 씹고 있던 고기를 힘들게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일가 중에 기사단원이 몇 명 있었어요. 사촌형 둘은 평기사였고 외숙은 기사단의 수석 기사 중 한 분이셨죠. 요즘으로 치면 지부장 정도랄까…….”

스테이크가 내려가다 얹혔는지 쥬드가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와인 잔을 찾아 쥐었다.

“그러니까 집안이…….”

조폭이었어? 라고 물어볼 뻔했다. 놈들의 행실만 놓고 보면 마피아보다 더한 또라이 폭력단이지만, 어쨌든 마리우스의 말 중 극히 일부만 사실이라고 쳐도 집안 분위기는 완전히 개판이었겠다.

“귀족이었던 거야? 백작, 공작…… 뭐 그런…….”

마리우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온 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기억도 희미하지만, 제 고향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하루 꼬박 말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 바닥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았던 강이랑 지평선까지 뻗어 있던 황금빛 밀밭…….”

마리우스가 손을 뻗어서 쥬드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 영지를 당신한테 보여줄 수 없는 게 안타깝고 미안하네요. 당신도 그곳을 정말 좋아했을 텐데…….”

이게 연기라면 마리우스는 당장 배우 에이전시를 찾아봐야 된다. 연기가 아니기 때문에 병원에 가야 하는 게 현실이지만…….

“쥬드가 그러는데, 그 기사단원하고 결투를 했었다면서? 집안이 다 한패였으면…… 아니, 기사단원이었으면 결투 얘기는 뭐야?”

마리우스 상대로 수사관 티를 내고 싶지는 않지만 이 어린 친구의 머릿속 세상도 궁금하고, 뭔가 허점이 있으면 본인도 문제를 자각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좀 깊이 캐물었다.

“기사단이라고 다 좋게 지냈던 건 아니니까요. 특히 푸케 남작은…… 기사라는 이름이 아까운 호색한 건달이라 기사단 내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나도 그 인간이 1년이나 내 성에서 식객노릇을 하면서 부인들을 희롱하고 다니는 걸 참기 힘들었고요.”

푸케 남작이라…… 마리우스의 망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정교한 것 같았다. 전체적인 설정이 황당해서 그렇지 세부사항은 빈틈이 없다.

“그렇게 싫었으면 그냥 쫓아내지 그랬어? 네 성이라면서?”

“사정이 있었어요.”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마리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작자는 어머니의 애인이었거든요.”

십대 소년이 엄마의 새 애인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동틀 무렵 성 뒤편 언덕에서 맞장을 뜨는 건 도가 지나쳤다. 그것도 칼부림으로…….

“솔직히, 내가 싸워서 이길 만한 상대는 아니었어요. 그쪽은 나이도 30대 초반이었고 산전수전 다 겪은 싸움꾼이었거든요. 제가 무모했어요. 어리석기도 했고…….”

나이 열여덟이면 한창 그럴 때다. 마리우스가 어리석은 게 아니고 이렇게 순진한 어린애를 일부러 갈궈서 싸움을 건 그놈이 나빴다. 마리우스의 설명대로라면 그 남작인지 뭔지 하는 놈은 후계자인 마리우스를 없애버리고 후작가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꼼수를 피운 게 틀림없었다.

“니네 엄마는? 그걸 말리지도 않았단 말이야?”

어느새 중세 기사담에 푹 빠진 쥬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어머니는 모르셨어요. 아셨다고 해도 그 재수 없는 인간한테 무조건 사과하라고 나만 들들 볶았겠죠.”

마리우스 주장으로는 초반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결이었다지만 그럴 리는 없고…… 실제로 그런 결투가 있었다면 마리우스는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을 거다.

“왼쪽 가슴 부근을 검에 찔려서 이내 정신을 잃었어요. 한…… 7일 정도 의식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애를 병원에 데리고 가긴 가야 할 것 같은데, 하도 정황 설명을 그럴듯하게 하니까 말 꺼낼 타이밍을 못 잡겠다.

“자기 가슴에서 그런 상처, 나는 못 본 것 같은데?”

쥬드가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조심스럽게 허술한 곳을 공격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요. 많이 희미해지긴 했지만 아직 흔적은 남아 있어요.”

“어디에?”

쥬드가 갑자기 셔츠를 걷어 올리는 바람에 마리우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얗고 맨질맨질한 마리우스의 가슴에는 눈에 띄는 상처 같은 건 없었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방금까지 들었던 얘기, 굉장히 재미는 있었는데…… 나하고 쥬드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마리우스가 왼쪽 가슴 약간 아래쪽에 희미한 흉터를 가리켰다.

“이거요.”

“이게 칼에 찔린 자국이란 말이야?”

쥬드가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마리우스의 가슴에 가늘게 그은 것 같은 자국이 있는 건 맞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살짝 긁힌 자국이지 칼 맞은 자리는 아니었다. 우선, 깊은 칼자국은 한두 해만에 저렇게 희미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저 위치를 장검에 찔렸다면 마리우스는 여기 앉아서 우리랑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없었을 거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테니까.

“커피 마시자.”

스테이크를 반이나 남겨 놓고 쥬드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한테 병원 얘기 빨리 하라고 눈치를 잔뜩 주고 무쇠 주전자가 걸려 있는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저기, 있잖아…… 마리우스.”

일주일 중에 가게 한가한 날이 언젠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마리우스가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인지하고 있으면 나도 편하게 병원에 한번 가 보자고, 시간 내서 나랑 같이 가자고 하겠는데 본인이 전혀 인식을 못하고 있으니까…….

“내일이 나 쉬는 날이거든. 내일 점심 때 시간을 좀…….”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달그락거리며 커피를 준비하는 쥬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리우스가 선수를 쳤다.

한 대 얻어맞은 어린 사슴처럼 슬프고 순한 눈빛으로 그렇게 묻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아니.”

쥬드가 내 앞에 커피 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아니, 내던졌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도와달라고 해서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마음으로 왔지만, 나한테 마리우스를 병원에 데려갈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마리우스의 망상증 때문에 곤란한 것도 내가 아니고…… 망상이 범죄로 발전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될 건 없지 않을까? 헛소리를 아무리 길게 늘어놔도 마리우스는 여전히 귀엽고 착한 애다.

“사실은 저, 이런 얘기 사람들한테 거의 안 해요. 그동안은 들어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사랑했던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는 건 슬픈 일이거든요.”

마리우스의 표정엔 거짓이 없었다. 마리우스 입장에선 여태 한 얘기가 다 사실이니까. 커피 잔을 마저 내려놓던 쥬드가 고개를 비틀면서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마리우스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이제 내가 있잖아.”

사랑의 힘 덕분인지 걱정했던 것보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있기는 하지만 쥬드가 옆에 있어주는 게 마리우스한테 득 되는 일일까? 아직은 확신을 못 하겠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근엔 이 시간에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번호가…… 첸이었다. 액정에 뜬 번호만 확인하고 그냥 전화기를 껐다. 이제라도 전화가 걸려온 걸 보니 걱정할 만한 일은 없는 것 같고, 그거면 됐다.

“왜 전화를 안 받아요?”

“중요한 전화 아니야.”

“남자친구 전화보다 더 중요한 전화도 있어요?”

하여튼, 눈치는…….

“놀리지 마.”

쥬드가 좀 전에 마리우스를 바라보던 근심 어린 그 눈빛으로 이번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전화 걸어봐요. 그 남자를 약 올려봐야 당신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하고 첸 사이에 뭐 심각한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쥬드한테 곧이곧대로 말하기도 뭐해서 한 번 더 거짓말을 했다.

“나중에 할게.”

첸 얘기가 다시 나올까 봐 마리우스 쪽으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마리우스도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남자친구 생기셨어요?”

“기사단 얘기나 계속 하자.”

마리우스는 자신이 중세 시절을 살았으며, 광활한 영지와 아름다운 성을 소유한 영주였다는 야무진 망상에 빠져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마리우스의 세계가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다. 그 설정의 대부분은 자신이 언젠가 읽었던 역사적인 기록이나 소설 따위를 토대로 한 것이었다. 그걸 본인 입맛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너무 심취한 게 문제를 불러온 것 같았다.

마리우스가 진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일원과 결투를 벌인 끝에 죽다가 살아났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리우스가 알고 있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한 얘기가 온전한 상상의 산물은 아니었다.

이 책방 지하에는 상상을 초월하게 방대한 도서관이 있었다. 마리우스가 마리우스 데 로카 후작에 대한 기록을 어딘가에서 보고 그걸 참고로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했다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한 얘기도 분명히 그럴 거다.

저쪽 구석에 한 박스 찾아 놓은 중세 자료를 직접 해석해 읽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마리우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저 낡은 문서에 등장하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지금 밖에서 날뛰고 있는 그놈들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굳이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데는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제2차 종족대전이 끝난 직후에 각국의 왕과 제후들에 의해 결성된 비밀결사예요. 일종의 전후 처리반 같은 거죠.”

제2차 종족대전이란 말에서부터 벽에 부딪힌 기분이 들었다. 슬쩍 곁눈질을 해 보니 쥬드는 아예 딴 생각 중이었다.

“기사단의 임무는 검은 용의 봉인을 지키고, 검은 군대의 잔당을 소탕하고…… 전쟁 후에도 남아서 세상을 떠도는 괴수들을 사냥하는 거였는데, 세월이 가면 갈수록 몰려다니면서 민폐나 끼치는 불량배들 모임으로 변하고 말았죠. 전쟁이 끝나고 2, 3백 년이나 지난 후였기 때문에 그땐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주로 자기네들끼리 귀부인 쟁탈전을 하면서 싸움질을 했어요. 진지하게 임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하는 기사들도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직접 본 적은 없고요.”

“기사단이 주로 했던 일이 뭐라고?”

“음…….”

마리우스가 좀 전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새김질하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술 먹고 싸우고, 여자 문제로 싸우고, 돈 문제로 또 싸우고…….”

마리우스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감정이 아주 안 좋았다. 한창 민감한 소년 시절에 부랑자 한 떼거리가 집안에 쳐들어와서 무전취식에 어머니하고 놀아나는 꼴까지 옆에서 지켜봐야 되는 입장이라면 상상만으로도 속이 새까맣게 탈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알고 싶은 건 마리우스가 그 기사단 때문에 얼마나 애먹고 속상했었는지 따위가 아니다.

“말고, 괴수 사냥이라고 했어? 그런 일을 했었단 말이야? 그 기사단이?”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모든 괴수들이 다 봉인되거나 죽은 건 아니었거든요. 뭐, 제 영지 근처에서 그런 게 나타난 적은 없었지만요.”

내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마주친 게 3번이었는데 그중 두 번이 괴수 사냥과 연관이 있었다. 기사단이란 명칭도 그렇고, 어쩌면 놈들은 굉장히 오랫동안 활동해온 조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 결사라…… 요즘 하고 다니는 걸 보면 그다지 비밀스럽지도 않은 것 같긴 하지만…….

“마리우스가 찾아 놓은 문서 말이야. 해석 좀 해봐.”

장서각을 나서면서 쥬드한테 당부했다. 어차피 놈들의 정체를 밝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경찰에게는 놈들을 파악할 만한 단서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우선 확보한 단서에서부터 시작해야 된다. 그게 수백 년 묵은 양피지 쪼가리뿐이라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집으로 갈 거예요? 아니면…….”

“집에 갈 거야.”

“하루 푹 쉬고, 모래 봐요.”

“기사단 수사팀으로 출근하면 되는 거지?”

오기 전에 약속을 했었다. 같이 저녁 먹으면서 마리우스가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얘기를 잘해주면 기사단 수사팀에 끼워주겠다고…….

“와서 한 것도 없잖아요.”

쥬드가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노력은 했잖아.”

“시끄러워요!”

동네가 낯설었다. 집이라고 얻어만 놓고 이제 두 번째 와 보는 거니까 낯선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아파트만 빼곡히 들어선 동네인데다 야심한 밤이라 아파트 호수도 헷갈렸다.

집에 갈아입을 옷은 있나? 집안에 쌓여 있을 일주일치 먼지와 텅 빈 냉장고 생각을 하니 걸음이 무거웠다. 이사한 첫날 우유 한 병하고 도넛 한 상자 사다 놓은 것도 분명히 버려야 될 거다.

곰팡이 핀 우유하고 도넛 말고도 이사한 집에 또 다른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에 가득한 애 우는 소리하고 옆집 부부 싸움 하는 소리…… 내일은 쉬는 날이라 하루 종일 잠이나 잘 생각이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 이제 보니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층간 소음뿐이 아니었다.

“자오?”

내 집 문 앞에 불곰이 한 마리 버티고 서 있는 줄 알았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자오가 나를 노려보며 잔뜩 부은 목소리로 다그쳤다.

“루벳 거리에 있는 친구 책방에 잠깐…….”

자오 같은 거구의 인상파를 비상등 나간 컴컴한 복도에서 마주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다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잘못한 거 없어도 무섭다.

“대체 지금이 몇 시야? 내가 이 거지같은 아파트 복도에서 이 시간까지 널 기다려야 돼?”

자오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딱 멎었다. 하지만 애 우는 소리는 더 커졌다.

“누가 기다리래? 여긴 왜 왔어?”

“너야말로 집 놔두고 여긴 왜 온 건데?”

“여기가 집이야.”

자오랑 복도에서 옥신각신 말싸움 하고 있는데 비상계단 쪽에서 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뭐야? 이제 온 거야?”

쟤는 자오 없을 때 내도록 2인자 역할을 하면서 나를 못마땅해 하던, 자오보다 인상 더 안 좋은 그놈이다. 이름이 후웨이였나, 푸웨이였나…… 어쨌든, 자오뿐 아니라 다른 놈들까지 몰려와 있다는 건…….

“첸이 와 있는 거야?”

자오가 뭘 물어보느냐는 투로 문 쪽을 가리켰다.

“들어가 봐.”

이것들이 근데…….

“현관문을 땄어?”

“그럼 어떡해? 열쇠가 없는데.”

“무단 침입이잖아!”

“들어가서 회장님한테 따져. 나한테 징징거리지 말고.”

자오가 짜증을 내면서 나를 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구석에 싱크대 한줄 붙어 있는 거실에, 침대 하나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방 하나. 구조랄 것도 없는 작은 집인데 일단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첸은 본래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열 받게 만드는 일엔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꽤 오래 잠잠하길래 이제 그런 종류의 깜짝 이벤트는 마감한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화 한번 씹었다고 부하들 몰고 집까지 쳐들어올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내 동선이 빤하다고 해도 내가 이리로 올 줄은 어떻게 알고 미리 와서 진을 치고 있는 걸까? 첸한테는 이집 주소를 가르쳐주기는커녕, 집을 얻었다는 말조차 꺼낸 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리우스의 책방 구석에라도 낑겨서 하룻밤 잘 걸. 아니면 아까 그 전화를 그냥 받던지…….

침실 문을 열려고 문고리에 손을 뻗는데 안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서 얼마나 오래 나를 기다렸던 걸까? 30분? 한 시간?

“너…….”

첸이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서 나를 노려봤다. 조금 피곤하고 화난 표정이었다. 첸은 오늘 아침엔 다른 날보다 출근이 일렀다. 그 시간에 뛰쳐나가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분명히 길고 힘든 하루였을 거다.

“어디서 뭐 하다 오는 거야? 전화는 왜 안 받아?”

첸이 따졌다. 분위기가 어째 부부싸움 비슷하게 가는데 이런 때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본래 이런 식의 인간관계엔 서툴다. 그리고 아까 전화를 씹은 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여긴 뭐 하러 왔어?

“뭐 하러 왔겠어?”

첸이 소파 쪽으로 가면서 일부러 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말해봐. 뭐가 문제야?”

한쪽이 푹 내려앉아서 거의 폐품에 가까운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첸이 나한테 정식으로 따졌다. 아무 거나 걸리는 대로 트집을 잡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최근엔 쟤가 나한테 잘못한 게 없었다.

“전화 안 받은 건…… 미안해.”

“대체 왜 그래?”

어지간히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 섞어가며 유들유들하게 나오던 녀석이 이렇게 정색을 하니까 당황스러웠다. 첸이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내는 건 백화점에서 눈치도 없이 대공을 들쳐 업고 돌아다녔던 그때 이후 처음이다.

말싸움도 피하고 분위기도 돌릴 겸, 뭐 마실 거라도 하나 던져주고 싶었지만 지금 이 집에 있는 거라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로 수북한 먼지뿐이었다.

“전화 한번 안 받은 것뿐이잖아. 그렇다고 집까지 쳐들어 오냐? 나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어!”

“전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야. 받기 싫으면 받지 마.”

“그럼…….”

더 이상 다툴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첸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여전히 심각했다.

“하지만 이런 먼지구덩이에 혼자 앉아 있는다고 기분이 나아지겠어?”

아니겠지. 혼자 있기 싫어서 첸을 받아들였던 거고, 매일같이 녀석의 호텔을 들락거렸던 거니까.

“요즘 니가 어떤 줄 알아?”

첸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사소한 동작 하나까지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어떤데?”

“우울증 걸린 유령 같아.”

내게 있어서 혼자라는 건, 외로움이나 고독이란 단어조차 사치스러운…… 고통 그 자체였다. 모든 고통이 시간과 함께 익숙해지고 아물어 가는데 유독 외로움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에 고통만 겹겹이 쌓여갔다.

그날 첸에게 갔던 건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섹스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머리에 대고 총질을 할 것 같아서, 무슨 짓을 하든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거였다. 하지만 잘한 짓이었을까? 우울증은 딱히 나아진 것도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갈증만 더해진 느낌이었다. 목마르다고 함부로 바닷물을 퍼마신 어리석은 조난자처럼…….

“우울증은 예전부터 앓고 있는 지병 같은 거야. 그래도 요즘은 많이 좋아졌어. 덕분에…….”

“웃기지 마.”

“어쩌라고? 나도 우울하고 싶어서 우울한 건 아니잖아?”

“본래부터 우울증이 있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그게 왜 나 때문에 더 심해져?”

내가 대답을 못하고 한없이 시간을 끄는 바람에 거실 공기가 납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말았다. 첸하고 만날 때는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저녁 먹고, 산책하고, 같이 자고…… 우울한 티 안 내려고 나름대로 애썼는데 내 연기력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대답을 기다리다 지친 첸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남자 두 명 서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거실이 꽉 찬 느낌이라 어디로 피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니콜라스 헤슬렘이 아니야. 날 만날 때마다 그 남자를 생각하는 건 이제 그만둬.”

“그런 적 없어.”

“밥 먹고, 섹스할 때마다 그 작자하고 나를 일일이 비교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결국 똑같은 실수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잖아. 그러니까 잠자리는 같이 해도 마음은 안 열어주는 거고, 혼자 끙끙거리면서 우울증만 키우고 있는 거 아냐?”

“니가 정신과 의사야?”

버럭 화를 내면서 첸을 밀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같은 실수였다. 이 관계엔 신뢰도 없고, 안정도 없고. 미래도 없었다. 현실 도피 같은 섹스, 헛된 기대, 그리고 빤한 결말…… 나하고 내 주변의 모두가 이 일로 또다시 다치게 될 수도 있었다. 니콜라스 때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만 가. 나중에 전화할게.”

내가 생각해도 이건 공연한 신경질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버럭 소리치면서 현관문을 벌컥 열었는데, 그 바람에 문짝에 귀를 대고 있던 자오랑 푸웨이가 복도 저편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짜증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종일 휴대폰 들여다보면서 니 전화나 기다리라고?”

첸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두 녀석을 한번 노려보고는 거칠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돌아서서 내 팔을 움켜잡더니, 나를 벽에 거칠게 밀어 붙였다.

“공연한 걱정 그만 좀 해!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첸이 키스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기분도 안 나고 그럴 분위기도 전혀 아니었지만, 별 수 없이 입술을 맡기고 있는 동안 첸의 거친 손놀림에 셔츠 단추가 뜯어져나갔다.

“너하고 난 오래도록 잘 지낼 거야. 나도 널 좋아하고, 너도…… 튕기는 게 버릇이라 탈이지, 나한테 완전히 뻑이 갔으니까. 같이 밥도 먹고, 지칠 때까지 섹스도 하고, 가끔 여행도 가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서로 싸울 때도 있을 거고, 싫증이 나서 꼴도 보기 싫을 때도 오겠지만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봐야 대판 싸우고 헤어지는 것뿐이야.”

“고마워. 그런 말 들으니까 위로가 많이 되네.”

첸이 내 입술에서 입을 떼고 멋대로 떠드는 사이 호흡을 가다듬고 첸의 입술을 이마로 들이받았다. 첸이 그제야 억……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나한테서 떨어져 나갔다.

한동안 입술을 움켜쥐고 쩔쩔매던 첸이 입술에 묻어난 피를 소맷자락으로 찍어내면서 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어쨌든…… 그런 일 때문에 너나 니 친구들이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너한테 채였다고 경찰서로 쳐들어가서 총질이라도 할 것 같아서 그래?”

“하지만 니콜라스 때도…….”

니콜라스의 이름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콧잔등으로 주먹이 날아왔다.

“그 자식 생각하지 말랬지!”

나한테 차인다고 경찰서에 쳐들어와서 총질을 해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곱게 헤어지기도 힘들겠다.

아우, 콧잔등이야…… 뭐 집어던질 거 없나?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쉬운 대로 소파 구석에 끼어 있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던지려고 폼을 잡기도 전에 첸이 몸을 날려서 나를 덮쳤다.

첸이 내 팔을 잡아 꺾고 나를 뒤에서 꼼짝도 못하게 끌어안았다. 빠져 나가려고 몇 번 몸부림을 쳐봤지만 팔만 빠질 것처럼 아팠다.

“아파!”

이 자식하고 제대로 붙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종목이 대체 뭘까? 몸싸움도 안 되고, 말싸움은 더더군다나 어림도 없고…….

“얌전하게 있을 거야?”

첸이 내 목덜미를 혀끝으로 살짝 핥으며 낮게 속삭였다. 좀 전에 얻어맞은 콧잔등은 여전히 시큰거리고, 잡힌 어깨도 찢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유도 없이 속이 울렁거리는 게……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알았으니까…… 놔줘.”

뭔가 울컥 치미는 걸 억지로 삼키느라 말이 엉망으로 나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참지 마.”

첸이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나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되게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면서…….

“뭘?”

“그냥 울어버려. 참지 말고.”

“됐어. 내가 애야? 한 대 맞았다고 울게?”

첸의 손을 밀어 치우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황해서 얼른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건 그냥 눈물이 좀 난 것뿐이다. 우는 게 아니라…….

“너 진짜 바보 같아.”

첸이 투덜거리면서 내 손을 잡아 바닥에 눌렀다. 그리고 내 눈물을 혀끝으로 핥았다.

첸의 입술이 내 온몸을 마치 맛이라도 보듯 탐욕스럽게, 그리고 음란하게 애무했다. 첸이 목덜미를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사납게 이를 세웠을 때는 나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고, 부드러운 입술이 등줄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등뼈 마디마디에 키스를 퍼부을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정도로 진이 빠져서 거친 숨만 헐떡거렸다.

오늘따라 내 몸에 닿는 손길이며, 키스가 거칠고 제멋대로였다. 그동안은 잠자리 매너가 부드럽고 조심스러워서 본인이 즐긴다기보다는 나를 배려한다는 느낌이 많았는데, 오늘은 그런 거 없다.

“아…….”

녀석의 손가락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이어졌던 전희를 생각하면 오늘은 바로 본론이었다. 게다가 이 자식 숨소리나 눈빛도 심상치 않고…….

“있어 봐.”

허리를 비틀어 녀석에게서 벗어났다. 내 거절에 녀석의 눈초리가 대번 거칠어졌다.

“얌전히 있기로 했을 텐데?”

그러기로 했었는데…….

“별로…… 안 내켜.”

덕분에 한없이 추락하던 기분이 많아 나아진 건 사실이다. 혼자 지내는 밤이 길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와서 싸움이라도 걸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하지만…….

“화났어?”

“응.”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 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쳐들어와서 싸움 걸고, 사람 울리고, 결국은 굴복시키고…… 나는 이 자식이 두렵다. 녀석은 나를 기어이 손 안에 넣고 사랑에 빠진 병신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겠지만 나는 제발 이제라도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미안해. 나는…….”

“막 작업 시작하려는데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 걸면 남자는 다 화 나.”

첸이 내 다리를 거칠게 잡아 벌리고 그대로 밀고 들어왔다.

“아…….”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고통도 이젠 익숙하다. 처음 들어오는 느낌이 거북하고 오싹해서 그렇지, 괜찮다. 이것만 견디면 그 다음은…….

“아, 악…….”

충분히 깊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첸이 나를 다시 한 번 거칠게 밀어 올렸다. 이런 건 정말 무리다. 흉기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허우적거리다 첸의 팔을 움켜잡았다.

“아파. 제발…….”

대답 대신 돌아온 건 별로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의 입맞춤이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버릇없는 물건과는 달리 키스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키스를 마치고 나서도 첸이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화가 많이 났었던 모양이다.

“소리를 지르든, 울든, 마음대로 해. 이게 진짜 내 방식이니까.”

“야…….”

“루크라고 불러.”

명령하듯 냉랭하게 지껄이고 나서 첸이 다시 나를 뒤흔들었다.

첸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 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살과 살이 맞부딪히면서 내는 음란한 소리로 작은 침실이 가득 찼다.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볼썽사나운 몰골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수치스럽다. 그런데다 첸이 나를 끌어안고 자기 위에 주저앉혔을 때는 삽입이 너무 깊어져서 몸이 저도 모르게 위로 튀어 올랐다. 내장을 주먹으로 얻어맞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는…… 못하겠어. 나 좀…….”

나를 속속들이 헤집어 놓고 이제 심장에까지 들어와서 날뛰고 있는 사나운 남자를 끌어안고 두서없이 용서를 빌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냉담한 대답뿐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루크, 제발…….”

“제법인데?”

첸이 비아냥거리며 나를 뒤로 밀쳤다.

수치심, 죄책감, 슬픔…… 그 반면에 또 목이 막힐 것 같은 포만감, 누군가 나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기묘한 고통과 쾌감 때문에 숨이 막혔다.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에 안 드는지 첸이 내 팔을 잡아 비틀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넌 마치 내가 예전에 정복했던 도시들 같아. 내게 저항하다 불타고 멸망했던 수많은 도시…… 너를 보면 가슴이 멜 정도로 처연하고 아름다웠던 그 도시들이 생각나.”

“무슨 헛소리야?”

첸이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 같기도 했지만 웃는 걸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첸이 내 가슴을 그림이라도 그리듯 어루만지며 나를 내려다봤다. 녀석이 실제로 도시를 정복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만은 마치 정복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왕처럼 거만했다.

“하긴, 니가 그런 걸 다 알 필요는 없지.”

“나 지금 많이 힘들거든?”

몸을 위로 조금 끌어올리는데도 악 소리가 날 정도로 거북하고 아팠다. 뒤이어서 첸이 퍽 소리가 나도록 나를 밀어 붙였을 때는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굉장히 길고 힘들겠다.

“넌 내 거야.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앞으로 영원히.”

녀석이 나를 한껏 휘저으며 오만하게 지껄였다.

얇은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화물트럭 지나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자다 일어난 건지,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건지 모르겠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등에 코를 박고 있는 첸은 깰 기미도 없었다. 자기는 새벽까지 실컷 즐겼으니까 잠이 꿀처럼 달겠지. 짐승 같은 놈.

몸 상태가 정말 안 좋다. 몸은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고 녀석에게 얻어맞은 콧잔등은 숨 쉴 때마다 욱신거렸다. 그리고 녀석이 힘대로 잡아 비틀었던 어깨는 아직도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눈은 또 얼마나 부었는지 보통 때의 반도 떠지질 않았다. 마침 쉬는 날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꼼짝없이 무단결근이었을 거다.

“깼어?”

첸이 잠에 취해 해롱거리면서 나한테 감겨들었다.

“건드리지 마.”

빌어먹을…… 목소리도 갔다.

“간밤엔 내가 좀 심했어. 많이 힘들었어?”

슬슬 다가오는 녀석을 피해서 침대 끄트머리로 옮겨 앉았다. 겨우 그거 움직이는 데도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보내게 생겼다.

“니 부하 놈들 끌고 내 집에서 당장 꺼져!”

“왜 그래? 나도 피곤해.”

“오늘 부로 넌 접근금지야. 앞으론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얼마 동안이나?”

첸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웅얼거렸다.

“앞으로 영원히.”

첸이 킥득키득 웃으면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새벽까지 죽을 고생을 한 건 자기가 아니기 때문에 녀석은 아픈 데도 없고 기운도 넘쳤다.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인데, 간밤에 했던 얘기 한 번 더 해줄까?”

나른하게 지껄이면서 녀석이 슬금슬금 나를 타고 앉았다.

“왜 이래?”

“상황이 비슷하면 기억이 더 잘 날까 해서.”

지난밤에 나를 완전하게 지배했던 그 난폭한 정복자는 지금 여기 없다. 이 녀석은 루크 첸이다. 뭐, 그놈이 그놈이긴 하지만…….

“어젯밤에 어떤 놈이 날 죽이려고 했던 건 기억 나.”

“난 어젯밤에 어떤 녀석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울었던 게 기억나거든?”

“야, 그건…….”

그건 녀석에게 몰리다가 거의 혼절하기 직전에 흘러나온 헛소리였다. 곧 죽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를 못하냐?

“부끄러워할 것 없어.”

녀석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그리고 손등과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정말 감동적이었으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렇게까지 진심이었던 적은 얼마 없었거든.”

“나도 진심은 아니었어.”

“한 번 더 물어볼까? 지난밤에 했던 것처럼 진지하고 정중하게…….”

내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게 우울증 때문일까? 아니면 이 자식 때문일까? 녀석의 따귀를 한 대 갈기고 몸을 일으켰다. 요즘은 말이 막히면 대뜸 주먹부터 나가는데, 버릇 들기 전에 고쳐야겠다.

“어디 가?”

녀석이 벌겋게 손자국이 난 얼굴을 문지르면서 투덜거렸다.

“전화 왔어.”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던 이 소리가 무슨 뭔가 했더니, 내 휴대폰 벨소리였다. 한동안 울리다 멎었던 벨소리가 좀 전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받지 마.”

나도 피곤하고 귀찮다. 하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연거푸 걸려오는 전화라면 뭔가 급한 일이다.

“받아야 돼. 서에서 걸려온 거면…….”

“내 전화는 잘만 씹더니.”

“너도 내 전화 씹었잖아?”

“너한테 전화 왔을 때는 장인하고 얘기하는 중이었어. 바로 옆에 장 대인도 있었고…… 너한테서 온 전화를 받을 분위기가 아니었어.”

녀석이 태연하게 지껄이면서 내 옆구리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밤새 사람을 그렇게 못살게 굴고도 미안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다. 염치 좋게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녀석의 얼굴을 밀어내고 옷장을 뒤져서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니네 장인은 니가 짭새하고 바람피우는 거 어떻게 생각해?”

“좋게 생각하진 않겠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첸의 장인인 첸 진은 뇌졸중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지 몇 년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위 녀석의 난잡한 행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까? 백 대인인지 뭔지 하는 장인 측근이 이 사실을 일러바치고도 남았을 거다.

“장인은 남자가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밖에서 재미 좀 보고 돌아다니는 건 크게 문제될 거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조폭 노인네다운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 ‘재미’가 짭새에 남자라도 아무 상관없는 걸까? 중국 마피아 보스네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개방적일 리 없을 텐데…….

허리가 제대로 안 펴져서 어기적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나와 보니 내 옷하고 첸의 옷은 사방에 하나씩 널려 있고, 자오랑 푸웨이는 각자 소파를 하나씩 차지하고 웅크리고 자는 중이었다. 휴대폰은 내 웃옷에 돌돌 말려서 바로 방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벨소리는 시끄럽고, 받기는 또 그렇고 하니 저 두 놈 중 한 놈이 이쪽으로 집어 던졌나 보다.

“대체 어떤 놈이 아침부터 너한테 전화질이야?”

문 앞까지 따라 나온 첸이 내 등에 엉겨 붙으며 칭얼거렸다. 부재중 전화 세 통…… 쥬드였다.

「잤어요?」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쥬드가 전화를 받았다.

“아직 잘 시간이잖아. 그건 그렇고…… 왜? 큰 거라도 하나 터진 거야?”

「비슷해요.」

무슨 일일까? 아침부터 세 통이나 전화를 날릴 정도면 보통일이 아니다. 쥬드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 놀라거나 흥분하는 타입이 아닌데…….

“뭔데?”

「비니가 깨어났어요.」

비니는 오늘 새벽 동틀 무렵쯤 눈을 떴다. 옆에서 밤새 곁을 지키던 어머니가 잠깐 졸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비니는 고개를 돌려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몇 달 만에 눈을 뜨고 하늘을 보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지진도 없었고, 정전도 없었다. 어떤 귀환의 징후도 없이 비니는 아주 조용하게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같이 들어가 줄까?”

막 차에서 내리려는 참에 첸이 나를 붙들어 앉혔다. 내가 첸을 만나는 걸 비밀로 하기는 이미 늦었지만, 그렇다고 겐지 클리닉에 같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안에 있을 내 동료들과 비니 친척들을 생각하면 안 그러는 편이 낫다.

“비니 작은아버지, 아직 병원에 있어.”

“그건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어쨌든 그 사건으로 제일 땡 잡은 건 너잖아.”

“그게 죄야?”

그냥 집 앞에서 택시를 잡을 걸. 한사코 가는 길에 데려다준다고 해서 편하게 오긴 했는데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다.

“내가 비니 몬티첼리하고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 병문안 정도야 뭐…….”

그때 앞자리 조수석에 잠잠히 앉아 있던 자오가 고개를 돌렸다.

“안에 바바라 소사까지 와 있으면 회장님 혼자만 올라가실 일이 아닌데요. 저희 둘만으로도 감당이 될지 모르겠고…… 사무실에 연락해서 애들을 몇 명 더 부르죠.”

이쪽 패밀리에서 내 맘에 드는 건 자오뿐이다. 첸이 그냥 돌아갈까, 부하들한테 전화를 할까 머리 굴리는 사이에 차에서 얼른 내렸다. 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이미 비니 병실에 가 있었다.

잠깐 정신을 차렸다가 또 길게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한번 돌아왔으면 이제 괜찮은 거겠지? 그런 불안감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나중에 봐. 있다 청연루로 갈게.”

다행히 첸은 더 이상은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 있는 자오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의자 등받이를 발로 한번 걷어차긴 했지만.

“비니 몬티첼리한테 안부 전해줘. 옆에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비니가 델 파소를 산산조각내고 쓰러진 그날 이후 지난 몇 개월간, 한 번도 비니 생각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고 마음이 편한 날도 없었다. 처음 몇 주 동안 비니의 체온이 바닥으로 내리 꽂히고 어떤 의사도 비니의 상태에 대해 긍정적인 얘기를 못할 때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미칠 것만 같았고 비니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니가 눈을 뜨다니, 드디어 돌아오다니…….

겐지 클리닉 일반 병동 5층은 층 전체가 붕 뜬 분위기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 들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상류층 이탈리아인, 마피아, 경찰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고도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제이.”

복도에서 비니의 여동생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쥬드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중간에 놀라서 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에요?”

“뭐가?”

쥬드가 뭔가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고심하며 나를 위 아래로 다시 한 번 훑었다.

“누구한테 한대 얻어맞고 밤새 운 것 같은 얼굴이잖아요. 혹시 첸한테…….”

누가 들을까 무서워서 얼른 손을 들어 쥬드의 말을 막았다.

“비니는 어때?”

“첸한테 맞았어요?”

“그런 거 아냐.”

뭔가 상당히 의심스럽다는 눈초리였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대강 알 것 같지만, 이젠 일일이 변명하기도 지친다.

“의사는 뭐래? 이제 괜찮은 거 맞아?”

내 조급한 질문에 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니는 괜찮아요. 좀 멍해 보이긴 하지만, 사람도 다 알아보고 말도 잘 해요.”

비니 부모님, 일가로 보이는 노부인 두 명, 프란시스 몬티첼리, 그리고 바바라…… 커튼이 반쯤 드리워져 있는데도 병실은 밝았다. 기쁨과 안도감으로 모두의 표정이 들떠 있었다. 바바라가 웃는 걸 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짙은 그늘이 걷힌 바바라의 얼굴은 못 알아볼 정도로 순하고 예뻐 보였다.

“왔어요? 우리 비니가…….”

비니 어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부둥켜안으며 울먹였다. 아들의 긴 혼수상태 때문에 몇 달간 속을 끓이느라 부쩍 야윈 부인의 어깨를 끌어안는 순간, 나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비니는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얼굴은 커튼 때문이 빛이 가려서 어두워 보였지만 아직까지 울먹이고 있는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저 녀석은 분명히 비니였다. 이런 장면을 꿈에서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비니가 친척부인과 프란시스 몬티첼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내 쪽을 쳐다봤다.

“왔어?”

몇 달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비니를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비니가 살아났다는 게 실감났다.

비니는 몇 개월간의 혼수상태에서 막 깨어난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전에 비해 조금 마르고, 혈색이 엉망이긴 했지만 눈빛도 또렷하고 말투도 분명했다. 의식이 없었던 몇 개월 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 상태가 시체나 다름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 현실이 그동안 꿔온 꿈보다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었다.

이건 아마도 기린 덕분일 거다. 기린이 비니 본가에서 푸닥거리를 한 이후로 체온이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그때부터 비니는 그저 긴 잠에 빠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들이 종종 그러는 것처럼…….

“왜 그렇게 서 있어?”

비니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걸까? 침대에 기운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비니의 모습에 본가에 유령처럼 웅크리고 있던 비니의 영혼이 겹쳐 보였다. 죄책감이든, 충격이든 극복을 했으니까 돌아온 거겠지?

“너…… 되게 말랐다.”

비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떻게 된 거냐는 듯 내 콧잔등을 가리켰다.

“별거 아냐.”

비니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같았으면 어떻게 다친 거냐고 내가 귀찮아서 신경질을 내거나 이실직고 할 때까지 캐물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운은 없어 보였다.

“믿어져? 그 괴물을 쫓아서 델 파소 뒷골목으로 뛰어든 건 한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여름이라면서?”

“아직 초여름이야.”

비니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다친 데는 없어?”

“응?”

“너하고 터너, 에쉬, 그리고…….”

델 파소가 무너졌던 그때 얘기다. 분명히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반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인데, 먼 옛날에 겪은 일처럼 기억이 아득했다.

“다 괜찮아. 터너하고 에쉬도 무사하고…….”

안타깝게도 델 파소의 모든 사람이 무사했던 건 아니지만…… 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비니 입장에선 자고 일어났더니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뛴 셈이니까, 창밖으로 보이는 여름풍경이 이해 안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정말로 기억이 안 나는 걸 수도 있다. 오컴이 하늘로 훌쩍 날아오르고, 강렬한 오렌지색 오라가 델 파소를 온통 뒤덮었을 때부터 비니는 이미 의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이나 죄책감 때문에 현실을 회피하는 거라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많은데 실제로 본 건지, 꿈을 꾼 건지 분간이 안 돼. 반년이나 잠을 잤으면 아마 대부분은 꿈이겠지만…….”

비니가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오랜 시간 누워만 있었으니 기력이 없는 건 당연하지만,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피곤하니?”

몬티첼리 부인이 다급하게 비니 옆으로 다가서며 상태를 살폈다. 질세라 바바라도 나를 밀치고 비니에게 다가갔다.

“비니, 왜 그래?”

“괜찮아. 그냥 좀…….”

비니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니는 괜찮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힘든 기색이었고, 방안에 사람도 너무 많았다. 모두가 비니를 사랑하고 걱정해온 가족과 친구들이긴 하지만, 그 조차도 아무 위안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비니에겐 상황을 정리하고 안정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비니한테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방에서 나왔다. 비니가 일어나기만 하면 망할 자식,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화도 내고, 그간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서 웃고 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마음 같지 않았다.

병실에서 나오다가 비니를 다시 돌아봤다. 그리고 비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많이 기다렸어. 지난 몇 달 동안 속이 다 탈 정도로…….”

“제이.”

“델 파소에서 일어난 일은, 그냥 사고였어.”

대답 대신 비니가 긴 한숨을 쉬었다. 바바라가 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느냐는 듯 나를 노려봤다.

비니가 내 손을 찾아 쥐더니 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글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델 파소가 산산조각이 나서 무너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니…… 역시 꿈이 아니었나 봐?”

잠깐 사이에 복도엔 사람이 더 늘어 있었다. 좀 전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모여서 비니의 무사귀환을 축하하고 있었고, 비니 막내 이모하고 이모부도 금방 도착해서 비니 아버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터너하고 에쉬도 왔다. 휴게실 한 쪽에서 쥬드와 뭔가 얘기 중인데…….

“좀 비켜봐.”

앉아 있는 에쉬를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야말로 맥이 빠져서 바닥에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기력이 확 떨어졌다.

“너…….”

에쉬하고 터너가 내 얼굴을 보고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짭새들이 허구한 날 보는 게 폭행 사건 피해자다. 주먹에 맞은 건지, 혼자 놀다 엎어진 건지 정도는 한 눈에 구분할 수 있다.

첸 그 자식은, 하필이면 얼굴 한복판에다 주먹질을 할 게 뭐냐? 콧잔등에 멍 빠질 때까지 마스크라도 쓰고 다녀야 할까 보다.

“내 사생활엔 관심 꺼. 귀찮아.”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터너가 내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이젠 그 자식한테 맞고 다니냐?”

덕분에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 도졌다.

“비니 때문에 온 거면 좀 기다렸다 비니 얼굴이나 보고 가. 가만있는 사람 들볶지 말고…….”

머리를 감싸 쥐고 의자에 모로 기댔다.

“비니가 정신을 차렸다는데 니 표정이 왜 그래? 좋아서 방방 떠야 되는 거 아냐?”

비니가 정신을 차리면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다. 물론 비니가 돌아온 건 그 어떤 일에도 비할 바 없을 정도로 기쁘지만, 맥이 풀리고 머릿속이 멍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쥬드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토닥였다.

가만 보니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 방금 바바라가 비니 병실에서 나왔는데 저쪽도 뭔가가 많이 풀린 얼굴이었다.

리즐 시에 남은 반대파를 싹쓸이하면서 터뜨린 서너 건의 유혈사태로 시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는 바쁜 와중에도 바바라는 사흘들이 병원으로 쫓아와서 비니를 돌보며 노심초사했었다. 그 정성만 보면 본색이야 어떻든 비니는 바바라하고 결혼해야 된다.

바바라가 방을 나오자 어디선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나타나서 그림자처럼 바바라 옆에 붙어 섰다.

리즐 시 암흑가의 여왕님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하필이면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바바라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좀 전에 방에서 본 작고 여린 그 여자는 오간데 없고, 이제 완전히 바바라 소사였다.

바바라가 시장 부인과 프란시스 몬티첼리 사이를 지나서 한눈도 안 팔고 내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듣기엔 남자친구하고 잘 지낸다고 하던데, 정보원을 바꿔야겠네요.”

또 시비 건다. 오늘같이 좋은 날은 한번쯤 모른 척 넘어가주면 좋을 텐데…….

“내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요.”

“당신 사생활이 루크 첸의 사생활이 된 다음부터는 그렇게 됐어요.”

바바라하고 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피곤이 따블이다. 비니 얼굴만 보고 바로 갈 걸, 바바라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버티고 있었던 게 실수였다. 바바라가 흠……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손버릇 나쁜 남자, 난 별로던데…….”

마치 내가 첸한테 상습 폭행이라도 당하고 있다는 투였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사실대로 말하기 수치스러운 일이죠. 나도 알아요. 많이 당해봤으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그런 일은 대부분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건 알죠?”

바바라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조곤조곤 시비를 걸었다. 바바라의 표정이 워낙 음산하다 보니 옆에 선 짭새 두 마리가 아무 말도 못하고 구경만 하고 서 있었다. 바바라하고는 되도록 부딪히지 않는 게 현명한 행동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조까지 할 건 없지 않나?

“얘기 끝에 분위기가 좀 거칠어졌다고 해두죠. 일방적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눈에 부기가 아직 하나도 안 빠졌어요. 밤에 꽤 울었겠는데요?”

쪽팔려서 정말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다. 이걸로 나는 꼼짝없이 남자 애인한테 두들겨 맞고 밤새 울다 뛰쳐나온 한심한 놈으로 찍혔다.

바바라가 네 맘 다 안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드럽고 은밀하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자꾸 그러면 죽여버려요. 좀 아깝긴 하지만, 루크 첸이 아니라도 남자는 많잖아요?”

첸에게는 적이 많다. 생각해보면 그 자식 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사방이 포위된 위태로운 처지였다. 일단 경찰도 놈을 주시하고 있고, 슬슬 회복기에 접어든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그렇고, 처가 쪽 진상들도 만만치 않았다.

다들 막강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적을 꼽으라면, 당장은 바바라다. 루크 첸을 죽여버리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마치 ‘내가 죽여도 되지? 루크 첸 아니라도 남자는 많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바바라 짓인 것 같지 않아? 그 루크 첸 피습 사건…….”

에쉬가 부하들을 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멀어지는 바바라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터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두면 조만간 큰 거 한방 또 터지겠는데…….”

“조폭이 어차피 거기서 거기지만, 난 바바라가 우리 동네로 진출하는 거…… 좀 그래.”

에쉬, 터너, 그리고 나…… 셋이 동시에 쥬드를 쳐다봤다.

우리는 바바라하고 싸우기 싫다. 비니 여자친구라는 사소한 이유는 접어두고라도 시가전, 폭탄 테러, 암매장…… 최근 10년 간 리즐 시가 전국적인 뉴스를 타는 경우는 대부분 바바라가 사고를 쳤을 때였다. 에쉬 말대로 조폭이 다 거기서 거기고, 루크 첸도 전에 몬티첼리의 사무실에 미사일을 날린 만만치 않은 전력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하기는 그쪽이 바바라보다는 나았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쥬드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책 없다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둘의 정면충돌은 피할 수 없어요. 루크 첸의 실력을 봐야죠.”

비니는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곧 퇴원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의식이 없었던 거지, 애초에 몸에 부상이 있었던 건 아니니까 비니는 금방 퇴원할 거고 회복도 빠를 거다. 언제쯤 복귀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터너와 에쉬는 비니를 못 만나고 그냥 돌아갔다. 담당한 사건에 진전이 없어서 둘은 요즘 여유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사건 현장 탐문이라도 다시 해본다고 나서긴 했는데, 오늘 내일 중으로 진전이 없으면 사건은 미해결로 넘어갈 거다. 그런 사건이 요즘 들어서 부쩍 늘어가는 추세였다.

오후까지 버텨서라도 비니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바바라도 오늘은 금방 철수하지 않을 기세였다. 가는 데마다 바바라하고 마주칠 걸 생각하니 머리가 띵해서 쥬드하고 같이 병원을 나왔다. 다음부터는 비니 근처에 갈 일이 있을 때면 미리 바바라가 있나 없나 확인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루크 첸한테 한 대 맞고 밤새 울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뭐 그렇게 좋아 보이지도 않네요.”

나하고 첸 얘기,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서 안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아.”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런 거예요?”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래.”

쥬드가 신호에 걸려 아슬아슬하게 좌회전을 했다.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해서 점심 먹으러 가는 중이다. 딱히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이렇게 기운이 없는 게 아침을 안 먹어 그런 것 같기도 해서 따라 나섰다.

“하긴, 상대가 루크 첸인데 연애가 항상 구름 탄 것처럼 달콤하고 짜릿하고…… 그럴 수는 없겠죠.”

“연애라는 말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 마. 속 안 좋아.”

“미안해요. 달리 적당한 표현이 안 떠올라서요.”

정말로 속이 쓰다. 경찰서 공식 골치 덩어리 쥬드 크롬웰도 마음을 고쳐먹고 착실하고 귀여운 서점 점원하고 결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이 마당에, 내가 왜 이러냐?

“청연루로 갈까요?”

아, 깜짝이야…….

“거긴 왜?”

“점심 먹어야죠.”

“점심에 무슨 중국요리야? 그냥 가벼운 거 먹어.”

내 핀잔에 쥬드가 입을 삐죽이며 얄밉게 말펀치를 날렸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요즘 자주 먹겠네요.”

중국 음식 싫다는데도 쥬드가 기어이 청연루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었다. 중국 요리를 차이나타운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이나타운에 요릿집이 청연루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기어이 이리로 사람을 끌고 온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다.

“나 그 자식한테 맞아서 운 거 아니라니까!”

“누가 뭐래요? 점심으로 만두나 먹자고요.”

쥬드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차에서 내렸다.

“아니면 뭐 다른 용건이라도 있어? 녀석이 사고 칠 조짐이라도 있는 거야?”

“조짐이야 늘 있죠. 루크 첸의 진짜 직업이 식당 사장은 아니잖아요?”

진짜 직업이 식당 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첸은 식당에 있을 때가 얼마 없었다. 특히나 하루 중 이맘때는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귀신도 모른다.

점심시간이라 식당엔 손님이 많았다. 청연루가 예약 필수 식당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부쩍 찾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쑥 들어와서는 단무지 하나 집어먹고 나가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여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게다가 혼자 들락거린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직원들이 대부분 나를 안다. 마침 홀을 가로질러가던 지배인이 나하고 쥬드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 좋은데요?”

흑단으로 만든 테이블, 등받이와 팔걸이를 자개와 비단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의자. 풍경화가 정교하게 음각된 작은 장과 사방탁자…… 황제의 다이닝만큼이나 사치스러운 방을 둘러보며 쥬드가 작게 탄성을 토했다.

이 방엔 나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첸이랑 주로 밥을 먹었던 방은 뒷마당 뷰에 이 방보다 약간 더 작고, 덜 화려한 방이었다. 어쨌든 그간 식당 인테리어 따위엔 통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도 다른 방은 어떤가 다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실내장식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이런 데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면 점수 엄청 따겠다. 어지간히 눈이 높은 쥬드도 예쁘다고 잔뜩 들뜬 걸 보니…….

“첸하고 데이트하면 매일 이런 방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쥬드가 창턱에 몸을 기대고 정원 경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본인은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인지 몰라도 듣는 순간 울컥해서 쥬드를 창밖으로 밀어버리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여긴 아니고, 주로 복도 막다른 방이야.”

“그런 남자를 당신한테 빼앗기다니…… 두고두고 아쉬울 거예요.”

또 그 얘기다.

“안 말릴 테니까 도로 뺐어가.”

“자신만만하네요?”

아까부터 몸이 파김치처럼 축축 늘어져서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참 힘들게 한다. 이젠 체력 딸려서 표정 관리도 못하겠다. 짜증이 목구멍까지 꽉 차서 금방 터져 나올 것 같은데 쥬드가 내 어깨를 토닥거리고는 맞은편에 우아하게 앉았다.

“그 자식이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쥬드가 만두 한 접시 먹자고 빠듯한 점심시간에 여기까지 밀고 온 건 아닐 거다. 마리우스하고 결혼 얘기까지 오가는 마당에 예전에 잃은 스코어를 만회하려고 이러는 건 더더욱 아닐 거고…….

“첸은 요즘 얌전하게 지내고 있어요. 바바라 소사한테 당한 봉변을 되갚아줄 궁리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난 그저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거예요.”

“그게 정말 바바라 짓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내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내 절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와 새로 생긴 남자친구가 길바닥에서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는 사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보면 둘 다 죽어도 싸지만,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되질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하고 그렇게까지 깊은 이해관계가 없는 쥬드는 새삼스럽게 뭘 묻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아니면 누구겠어요?”

만두 먹고 싶다더니 만두는 들어가 있지도 않은 런치 스페셜을 주문하고 쥬드가 메뉴판을 덮었다.

방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쥬드는 사방탁자에 장식용으로 놔둔 옛날 책을 들고 와서 뒤적거리며 밥 나오길 기다렸고, 나는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서 일 없이 찻잔만 들었다 놨다 했다.

“무슨 생각해요?”

내 한숨이 거슬리는지 쥬드가 책장을 뒤적이던 손을 멈췄다.

“비니 생각.”

“오늘 같은 날엔 비니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야 도리죠. 비니가 복귀해서 다시 파트너가 된 다음엔 어쩔 수 없겠지만요.”

지금 내 눈앞에 선한 건 좀 전에 보고 온 그 비니가 아니었다. 허깨비 같은 형상으로 현실엔 존재하지도 않는 카페에 웅크리고 있던…… 절망과 자책에 빠져 있던 비니였다. 이제 돌아왔으니까 다 잘 된 걸까? 우리가 알던 비니의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돌아온 걸까?

“까마득하게 먼 옛날 일 같아. 비니하고 파트너로 일했던 게…….”

“비니는 괜찮을 거예요.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아겠지만 진짜 강한 건 그런 타입이잖아요.”

지난 반년 간 비니가 어디서 어떤 꼴을 하고 숨어 있었는지 몰랐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첸한테 물어볼 일이라는 건 뭐야?”

“그냥, 차이나타운 내부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한 일이 있어서요.”

“차이나타운 내부 상황이 언제부터 경찰 소관이었어?”

“차이나타운이 생겼을 때부터요.”

원론적인 얘기일 뿐이다. 차이나타운은 일반인이나 경찰에게 외국이나 다름없다. 보통은 외교관이나 누리는 치외법권이 이곳에서는 아주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차이나타운 내부의 일을 외부인이 알기도 어렵거니와 간섭하고 통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자식이 묻는 말에 호락호락 대답을 하겠어?”

쥬드가 우리 서에선 알아주는 심문의 달인이지만 첸도 말장난이라면 만만치 않은 놈이다. 하지만 일전을 앞둔 쥬드의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어쨌든 물어나 보는 거죠. 어제 오후에 데니스 노튼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궁금하잖아요?”

차이나타운의 오랜 보스였던 첸 진이 현역에서 물러난 후, 그 후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첸은 요주의 인물이었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경찰의 수사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요즘은 쿠간 시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바바라 소사하고 요란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첸에게는 24시간 감시가 따라붙고 있었다. 그 감시망에 어제는 좀 특이한 인물이 걸려들었는데, 연방특수경찰 데니스 노튼이었다.

“알고 있었나 봐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네요.”

쥬드가 닭고기와 같이 볶은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 올리면서 물었다. 내가 아는 거라곤 데니스 노튼이 첸을 만난 게 어제가 처음은 아니라는 것 정도다. 그때 노튼하고 첸이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 노튼하고 첸 간에는 별 얘기가 없었다. 기억나는 건 그때 모인 흑풍회 원로 영감들이 땅 문제로 시끄럽게 떠들었던 거하고, 첸이 나를 니콜라스 낚시 미끼로 쓰고 있다는 얘기에 기분 싹 잡쳤던 것 정도였다. 그 외에 무슨 얘기가 오고갔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노튼하고 첸은 전에도 한번 만난 적이 있어.”

“그럼 혹시 아는 거 있어요? 둘이 대체 뭣 때문에 만난 거예요?”

“그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때 무슨 일로 그 영감들이랑 노튼이 만났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명색이 수사관인데 어렵게 엿들은 얘기는 오리무중이고, 바닥에 총질하고 뛰쳐나간 것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전엔 흑풍회 원로라는 노인네들이 떼거리로 몰려와서 부동산 얘기만 잔뜩 늘어놨었어. 대부분 중국말이라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당신 말을 듣고 보니 더더욱 수상하네요. 노튼 요원이 어째서 흑풍회 노땅들까지 만나고 다니는 건지…… 그 사람은 조직범죄 전문도 아닌데 말이에요”

나도 그때는 그게 궁금했었다. 무슨 회합을 주선하는 것 같았는데, 그러니까…….

“첸이 늦네요.”

쥬드가 새우 고추 볶음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자식하고 약속이라도 잡았어?”

“그럴 필요가 뭐 있어요? 당신이 온 줄 알면 금방 나타날 텐데…….”

“그렇게까지 얼빠진 놈은 아니거든?”

“사랑에 빠진 건 얼빠진 것보다 더 한심하죠.”

쥬드가 왕새우를 와작와작 씹으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첸이 언제쯤 나타나나 카운트라도 하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그렇게 로맨틱한 사이로 보여?”

내 콧잔등이 시퍼런 걸 뻔히 보면서도 사랑타령은……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달콤한 표현은 첸하고 나한테는 안 어울린다.

“영화 찍는 것도 아닌데 그만하면 로맨틱하죠.”

“로맨틱은 개뿔…….”

데니스 노튼이라…… 그동안 나는 데니스 노튼이 연방특수경찰의 연쇄살인범 전문 수사관인 줄 알았었다. 니콜라스 헤슬렘과 관련해서 그를 처음 만났었고, 이후론 얼굴 볼 일이 통 없었으니까.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초로의 연방경찰이 다시 나타난 건 니콜라스 탈출 사건 때문이었다. 그건 그럴 수 있다. 본인 말로 니콜라스는 그가 평생 쫓던 인물이라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데니스 노튼의 진짜 업무가 뭔지 지금은 전혀 모르겠다. 그 이후 노튼이 나타났던 장소나 만났던 인물 간에는 일관성이 전혀 없었다. 루소 의원의 집엔 왜 갔었던 걸까? 첸과 흑풍회 원로들하고는 무슨 일로 남몰래 만났던 걸까? 대체 그 인간이 하고 있는 일이 뭘까?

꽤나 푸짐하게 나온 런치 스페셜을 거의 다 먹어치운 쥬드가 내가 주문한 냉국수까지 자기 앞으로 슬그머니 끌어갔다. 평상시에도 보기보단 먹는 양이 많은 편이지만, 특별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도 있나? 오늘따라 심하게 먹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

요즘 들어 까다로운 사건이 몇 건 밀려 있긴 하지만, 그건 늘 있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스트레스 받아서 폭식을 되풀이했으면 지금쯤 쥬드는 굴러다녔을 거다.

“일 때문에 그렇죠. 뭐…….”

“당신 연애는 어때? 결혼 신청을 퇴짜 놓고도 잘 굴러가고 있는 거야?”

“마리우스는 여자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기꺼이 시간을 내주는 남자예요. 내가 만나본 남자들 중 제일 신사라고요.”

그동안 쥬드가 만나온 문제아, 골칫덩어리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칭찬도 아니다.

“마리우스랑 결혼 같은 거 안 하고도 장서각을 집어삼킬 좋은 방법이 안 떠올라서 그래?”

그릇에 반 정도 남아 있던 국수를 한입에 쓸어 넣던 쥬드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흘겼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만두 2인분만 더 시켜줘요.”

웨이터를 불러서 만두 2인분하고 튀긴 두부 한 접시를 추가로 주문했다. 만두 먹여서 빨리 보내고 좀 쉬어야지, 정말 지친다.

“착한 남자하고 데이트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

“당신은 모르겠네요.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으니까.”

쥬드가 남은 국수 가닥을 찾으려고 젓가락으로 대접을 휘저으며 비아냥거렸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빈정이 상해서 나도 쥬드를 긁었다.

“하긴, 나쁜 놈들이 섹시하긴 하지.”

“마리우스 때문에 심란한 거 아니라고요.”

“그럼 뭐 때문에 대접에 코를 박고 있는 건데?”

쥬드는 착한 남자한테 적응하기가 힘들어서 기름진 중국 음식을 이렇게 닥치는 대로 퍼먹고 있는 게 아니었다. 쥬드가 꺼낸 얘기는 내 예상하고는 많이 달랐고, 무척 심각했다.

“그 총격 사건 말이에요. 당신들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소행이라고 주장했던…… 현장에서 채취한 혈흔 검사 결과가 아침에 나왔거든요.”

“결과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사람의 피가 아니래요.”

테이블에 놓인 벨을 다시 눌렀다. 만두 몇 개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이건 최소한 디너 풀코스 2인분짜리 나쁜 소식이었다.

“내가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우리 동네에 요즘 들어 괴물이 한 마리씩 튀어나오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뜻이 있나?

“우리가 그간 갖고 있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그동안 뭔가 잘못 알고 있었거나, 모르는 일이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어?”

“당신한테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에요?”

나는 본래 인생관 따위가 그렇게 확고하지는 않았다. 세계관이나 우주관 같은 건 있었던 것 같지도 않고…….

“나한테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어.”

나한테도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당황스럽고 믿기 힘들었다. 언제부터 다 체념하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시작한 걸까? 아마…… 백화점에서 대공하고 마주친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세상은 좋든 나쁘던 사람들끼리 지지고 볶는 정상적인 세상이에요. 괴물 따위는 동화책, 영화, 애들 꿈에나 나오는 허깨비일 뿐이잖아요. 세상에 괴물이 어디 있어요?”

처음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있는 걸 어쩌냐?

“유령도 없고, 요정도 없고, 천사도 없고, 신도 없고, 괴물도 없어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다 사람이 일으키는 거라고요!”

쥬드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장서각 얘기를 듣고 흥분해서 날뛰던 그때하고 비슷한 분위기라서 테이블에서 슬쩍 떨어져 앉았다.

쥬드는 빈틈도, 약점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유난히 취약했다. 쥬드가 나하고 같이 오컴도 쫓아다니고, 백화점에서 대공이 사람 물어 죽이는 것도 봤으면 현실을 인정하는 게 좀 쉬웠을까? 어쨌든 직접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한테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최근에 이상한 일이 많이 있었던 건 사실이잖아.”

쥬드가 서장 스케줄 챙기고, 서류 타이핑하고, 커피 심부름이나 하는 평범한 비서라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하지만 쥬드가 실제로 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중요했다.

오컴하고 대공이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 출몰한 유일한 괴물이었을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싶지만, 당장 번화가에서 벌어진 총격전 현장을 피바다로 만든 피살자의 정체조차 불명인 상황이었다. 쥬드가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경찰서 실세로 군림하면서 앞으로도 종종 터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싶다면 싫든 좋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도시엔 괴물이 있다.

“인정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쥬드가 소스밖에 안 남은 빈 접시에 젓가락질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쥬드가 스트레스성 허기를 못 이겨 접시라도 핥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웨이터가 주문한 만두하고 두부 요리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주문 안 한 것도 하나 따라 들어왔다. 첸이었다.

“갔다 왔어? 비니 몬티첼리는 좀 어때?”

첸이 쥬드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내가 식당 근처에 나타나면 지배인이나 웨이터를 통해서 첸한테로 신고가 들어가는 모양이다.

“비니는 괜찮아. 이제 의식이 돌아왔으니까 점점 더 괜찮아질 거고…….”

“한시름 놨네. 그동안 걱정 많이 했었잖아.”

첸이 뿌듯한 표정으로 내 등을 툭 쳤다. 녀석의 표정이야 항상 자신만만하고 음흉하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불안하지?

“넌…… 오늘은 식당근무야?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사무실에 있었어. 요즘 차이나타운 재정비 때문에 준비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거든.”

흑풍회 사무실은 지척이었다. 차로 5분,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오가는 곳이었다.

그나저나 차이나타운 재정비라…… 흑풍회에서 그렇게 건설적인 일도 했던가? 금시초문이다.

“그거 합법적으로 하는 거야?”

내 심각한 질문에 첸이 피식 웃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진행하려고 애는 쓰고 있어.”

대답의 뉘앙스가 합법적인 거 하고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조폭 두목한테 이런 거 물어보는 내가 한심하지…… 그때 쥬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 재정비라는 게, 차이나타운 서북부 두 블록에 걸쳐 있는 매춘굴 이권다툼하고 관련이 있는 얘긴가요?”

계속 만두만 집어먹길래 세계관, 우주관 바꾸는 문제로 바빠서 첸한테 할 얘기는 잊어버렸나 했었는데, 말 꺼낼 타이밍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경찰이 차이나타운 내부 일에도 관심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요?”

첸이 아직 남아 있는 만두 접시를 쥬드 쪽으로 밀어주며 수비에 들어갔다.

“먼저 차이나타운 담장 넘어서 세상 구경을 나온 건 당신이잖아요. 바깥세상은 거칠고 추워요.”

“이번 재정비 계획에 그 구역도 포함돼 있는 건 맞아요.”

중국계 범죄조직의 비행은 뿌리가 깊었다. 갈취, 폭행, 살인, 마약, 매춘, 인신매매, 비밀 도박…… 다른 범죄 조식들도 양상은 비슷하지만 차이나타운에선 그 일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벌어지고, 그대로 묻혀버리기 때문에 더 음침하고 위험했다.

“하지만 다툼이라니, 내가 매춘굴 문제 따위로 누구하고 다툴 짬밥으로 보입니까?”

“매춘은 전통적으로 중국 마피아들에겐 제일 짭짤한 돈벌이 중 하나죠. 더럽기도 제일 더럽지만…… 어쨌든 그 더러운 일로 생기는 목돈을 두고 당신네 조직 계파들이 허구한 날 다투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잖아요.”

첸이 조폭 두목인 거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범죄 행위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오니까 나도 스트레스 지수가 확 솟구치면서 갑자기 허기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매춘업소라니…… 직접 보지 못해서 차이나타운 매춘굴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초년병 시절 업소 단속할 때 몇 번 들어가 본 사창가는 대부분 형편없었다. 좁고 더러운 숙소에, 마약에 찌들어서 자기 이름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여자들…… 쥬드 말대로 조폭 돈벌이 중에서도 특히 더러운 돈벌이였다.

첸이 남의 사무실 건물에 미사일을 날리거나,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거나, 장검 휘두르며 뱀파이어를 쫓아다니는 걸 봤을 때는 크게 놀라거나 충격을 받긴 했었지만, 지금처럼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야. 천천히 먹어. 체해.”

내가 만두 두 개를 한꺼번에 집어서 입안에 밀어 넣자 첸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됐어. 신경 쓰지 마.”

“나는 여자들 팔아서 돈벌이 한 적 없어.”

“웃기지 마.”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는 나쁜 짓은 모두 첸하고 관계가 있다. 직접 관리는 안 했을지 몰라도 직책이 흑풍회 회장이면 그런 짓 한 적 없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는 없다.

“내가 흑풍회 수장으로 여러 문제를 처리하는 동안 무리한 일도 종종 하기는 했지만, 여자를 짐승처럼 다루고 돈으로 사고파는 짓을 하지는 않았어. 지난 10년간 그쪽 일은 전적으로 콴의 소관이었고, 돈도 그놈이 다 차지했었어.”

콴이라면, 첸이 대공한테 물려서 사경을 헤맬 때 그 틈을 노려서 첸을 죽이고 차이나타운을 차지하려고 했던 치사한 놈이다.

“정말이야?”

“본래는 그러면 안 되지만, 알잖아? 장인이 아들처럼 아꼈던 조카거든.”

첸이 매춘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한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콴이라면 얼마 전에 차이나타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당신 경쟁자 말인가요?”

쥬드가 한숨 돌릴 틈도 안 주고 첸을 다그쳤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정황상 사망이 확실하지만 시체를 못 찾았을 때 주로 쓰는 표현인데, 이건 내가 들은 거 하고 얘기가 다르다.

“콴은 여자친구하고 같이 파리에 갔어요. 원해서 떠난 건 아니지만 파리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적응을 하겠죠.”

만두가 목에 걸려서 고생하는 나한테 물 한 잔을 건네며 첸이 딱 부러지게 대꾸했다.

첸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짓말도 능숙하게 잘 하는 놈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첸이 그 자식을 죽였다고 해도 그거 갖고 시비 걸 생각은 없다. 첸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을 때 벌어졌던 일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 졸였던 거 생각하면 내 손으로 그 놈의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다.

첸의 장인 영감인 첸 진의 편애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차이나타운 실세로 군림하면서 각종 너저분한 돈줄을 움켜쥐고 있던 첸 콴이 대역죄를 짓고 외국으로 쫓겨 간 이후 차이나타운에서는 물갈이, 줄서기, 주인을 잃은 각종 이권에 대한 분배 요구가 러시를 이뤘다. 그 모든 뒷정리와 이권 배분이 콴을 쫓아내고 경쟁자도 없는 패왕으로 우뚝 선 첸의 몫이었고, 솔로몬이 무덤에서 일어나 일처리를 했다고 해도 뒷말 없기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콴의 남은 형제들과 첸의 처가 일족이 그가 놓고 간 사창가와 도박장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투느라 벌어진 폭력사태 때문에 이틀 전에는 경찰 타격대가 차이나타운에 출동할 정도였다니, 상황이 얼마나 난장판이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냥 작은 소동이었어. 차이나타운에 놀러왔던 관광객이 애들 싸움에 놀라서 신고한 거야.”

경찰이 차이나타운에 출동하는 건 10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사건이다. 출동해서 뭘 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출동 자체만으로도 경찰서 안팎에서 큰 화제가 됐을 텐데 왜 그런 일을 나만 몰랐을까? 요즘 첸과 관련된 이런저런 잔소리 듣기 싫어서 사교활동을 접었더니 이런 불편이 있네.

“그 폭력 사건으로 현장에서 23명이 체포됐고, 여덟 명이 병원에 실려 갔어요. 잽싸게 튄 행동대원들은 머릿수에서 빼더라도, 작은 소동은 아니죠.”

“경찰에 수고를 끼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어쨌든 이제 그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됐고, 화해할 사람들은 대강 화해했으니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차이나타운에는 첸 진의 친족과 처족인 장씨 집안 사이에 전통 깊은 알력 다툼이 존재했다. 첸이 첸 진의 데릴사위로 누리는 것도 많았지만, 수년간 첸 집안과 원로 영감들의 텃새에 시달리느라 고생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고생의 하이라이트가 지난 번 혼수상태 때 벌어진 하극상이었다.

“그래서, 그 사창가하고 도박장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기로 한 거야?”

짭새한테 대답하기 곤란한 얘긴가? 말을 꺼내 놓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첸은 별로 문제될 거 없다는 듯 선선히 입을 열었다.

“밀어버리기로 했어.”

“응?”

쥬드하고 내가 동시에 되물었다.

“처음부터 그 골목이 눈에 거슬렸었거든. 이 기회에 싹 밀어버리고 쇼핑몰을 하나 지을까 생각 중이야. 주변에 공원도 하나 만들고…… 그런 게 재개발의 진정한 의미 아니겠어?”

조폭과 패션 유통업이라…… 어울리나?

“그 사람들이 순순히 그렇게 하겠대요?”

첸의 사업구상에 쥬드도 쇼크 먹은 눈빛이었다. 사창가를 밀어버리고 쇼핑몰 같은 건전한 사업을 하겠다니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거 차지하겠다고 수십 명씩 떼로 몰려다니면서 싸우던 애들은 입장이 뭐가 되냐?

“일을 그렇게 해도 괜찮아?”

사창가 포주 노릇을 직접 하지 않기로 한 건 마음에 든다. 그걸 다른 놈한테 넘기고 거기서 수익금을 뜯어내지 않기로 한 것도 좋다. 하지만 조직의 여러 계파에 이권을 배분하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차이나타운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파벌을 둘 다 적으로 돌려버리면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할 확률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높아질 텐데, 대체 뭘 믿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두고 봐야지.”

잘 내려갔던 만두가 다시 올라와서 명치에 딱 걸렸다. 이 자식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큰 병이다. 언젠가 그 자신감에 발등을 호되게 찍힐 날이 올 거다.

“당신이 그 어떤 계파의 돈벌이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면 그들이 힘을 합쳐서 당신을 칠 수도 있어요. 그건 알죠?”

“첸씨 집안과 장씨 집안은 오랫동안 사이가 안 좋았어요. 두 집안이 손잡고 뭔가 일을 꾸민다면 차이나타운의 평화에 나도 나름대로 큰 공헌을 한 셈이죠.”

그것도 농담이라고 지껄이면서 실실 쪼개던 첸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 꼬리를 내렸다.

“분쟁 조정하고 재개발 계획 세우느라 정신없이 바빴겠네요.”

쥬드가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았다. 첸을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마치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될지 꼽아보는 것 같았다.

“그런 건 늘 하는 일이고, 요즘 진짜로 날 바쁘게 하는 일은 따로 있어요.”

첸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심란해서 욕할 기운도 없다.

첸이 중국계 범죄조직 총수의 외동딸과 결혼을 한 건 사랑 때문이 아니었다. 녀석이 마리아 첸과 결혼한 이유는 뻔했다. 그 결혼은 차이나타운의 주인이 되기 위한 철저한 정략혼이었다.

위험하지만 막강한 권력, 부정하지만 막대한 부…… 첸은 결혼으로 그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결혼만으로 얻을 수 없는 건 능력으로 움켜쥐었다.

첸이 그간 저지른 비행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잘 알려진 것만 꼽아 봐도 남의 사무실에 미사일 날리고, 라이벌이 몰락한 틈을 타서 삽시간에 온 도시의 뒷골목을 한 손에 거머쥐고, 나중엔 장검을 들고 뱀파이어 잡겠다고 설치다가 도리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 모든 게 흑풍회 원로들의 인정을 받는 진짜 보스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어쨌든 첸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목숨 걸고라도 해냈다.

그 험난한 여정의 궁극적인 목표는 암흑가의 실세가 돼서 돈과 권력을 맘껏 쥐고 흔드는 게 아니었나? 녀석의 인생에 뭔가 다른 목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의 행보는 마치 목적지에 다 와서 갑자기 핸들을 틀어 벼랑으로 뛰쳐나가는 격이었다.

첸이 자신감 과잉에 잘난 척 대장인 건 사실이지만, 자만심 때문에 자기 무덤을 팔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착하게 살고 싶어진 게 아니라면 녀석이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쥬드가 인상을 쓰며 물을 반 컵 정도 마시고 내려놨다. 표정이 어정쩡한 걸 보니 첸의 원대한 차이나타운 재개발 계획에 놀라서 본래 하려던 얘기를 까먹었나 보다.

몇 초 동안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머리를 쥐어짠 끝에 쥬드가 노튼의 일을 기억해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연방수사관은 왜 만났던 거예요?”

“연방수사관이라면, 노튼 말입니까?”

“그 사람은 조직범죄나 일반 형사사건을 수사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번이 처음 만난 것도 아니라던데,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거죠?”

첸의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그건 비밀이에요.”

그렇게 심각한 비밀은 아니라는 듯 어조가 반은 장난이었다. 하지만 노튼과의 사이에서 오고 간 말을 우리한테 해줄 마음은 없는 게 확실했다.

“뭔가 큰일인가 봐요?”

쥬드가 포기하지 않고 우회로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온 건 완곡한 거절뿐이었다.

“노튼 씨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는 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예요.”

쥬드는 첸을 고문해서라도 입을 열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용의자들도 입 다물고 묵묵부답일 때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데다 첸은 사건 용의자로 취조실에 불려온 것도 아니었다. 여기는 첸의 홈그라운드이기도 해서 심정적으로도 쥬드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당신이 몰래 연방 수사관을 만나고 있는 걸 다른 흑풍회 조직원들이 알게 되면 큰 오해가 생길 수도 있지 않겠어요?”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지금 건 쥬드가 잘못 짚었다. 첸은 다른 조직원들 몰래 노튼을 만나고 있는 게 아니라 원로 영감들 다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만나서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 지금 막 기억이 났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만나기로 했었던 건 어떻게 됐어? 잘 만났어?”

첸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나를 노려봤다.

노튼과 오베론이 뒷문을 통해 숨어들 듯 방문한 그날 밤, 청연루 별채에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오고갔다.

첸이 흑풍회 원로 영감의 묵혀둔 땅을 비밀리에 매입한 것 때문에 부동산 재태크 얘기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었고, 어떤 영감은 덤불을 두드리면 새가 날아오르는 법이라면서 나를 미끼삼아 니콜라스를 잘 낚아 보라는 소리를 지껄여서 회의실 옆 작은 방에 숨어 있던 내 속을 뒤집었었다. 그때 별채에서 오고간 얘기 중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쥬드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나한테 물었다.

“그게 지난번 노튼의 용건이었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흑풍회 영감탱이…… 아니, 원로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거…….”

“노튼 요원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알고 있단 말이에요?”

“아마도.”

“그리고 그 자식들, 아니…… 그자들이 흑풍회하고도 연관이 있고요?”

“응.”

“그 얘길 왜 이제 해요?”

쥬드가 테이블을 들어 엎을 듯 벌컥 화를 냈다. 나도 놀라고 첸도 놀랐다.

“아니, 나도 지금 막 생각이 나서…….”

“요즘 그 기사단인지 뭔지 하는 놈들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서 머리에서 김이 오를 지경인데, 뭐가 어째요? 지금 막 생각이 나요?”

쥬드가 험악하게 나오자 첸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진정하고 말로 하시죠.”

생각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차라리 쥬드한테 한 대 맞고 말지, 이런 문제로 남자친구 뒤에 숨어야 될 만큼 내가 머저리는 아니다. 그래서 첸을 옆으로 밀고 쥬드하고 정면으로 마주 앉았다.

“내 얘기를 믿지도 않았잖아! 내가 그놈들 얘기를 당신한테 한두 번 했어?”

“사람으로 둔갑하는 임산부 습격 괴수 얘기하고 뱀파이어 얘기를 제정신으로 어떻게 믿어요?”

번번이 나를 정신 나간 얼간이 취급한 건 쥬드도 부인 못한다. 요즘 들어서 워낙 터지는 일들이 심상치 않으니까 비현실적인 사건이나 현상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쥬드는 오컴이니 뱀파이어니…… 그런 얘기는 꺼낼 기미만 보여도 안색이 변할 만큼 싫어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귓등으로도 안 듣는 얘기를 떠들다 보면 나도 지칠 때가 있단 말이야. 이게 전적으로 나만 잘못한 거야?”

내 반격에 쥬드도 한풀 죽었다. 하지만 완전히 전의를 상실할 정도는 아니었던지,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지쳐서 입을 다문 게 아니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거잖아요.”

쥬드가 더 이상 붙들고 떠들어봐야 나올 것도 없는 나를 뒤로 밀고 첸을 향해 공격 태세를 갖췄다. 첸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쥬드를 향해 고쳐 앉았다. 첸 입장에선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닌 걸까? 아니면 쥬드가 어떻게 나오든 딱 잡아뗄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걸까? 당황한 기색은 없고 그저 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를 좀 해보시죠.”

“시간이 될까 모르겠네요. 남자친구 얼굴 보러 잠깐 들른 거라…… 아까도 말했지만 요즘 좀 바쁘거든요.”

첸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쥬드를 슬쩍 갈궜다. 말 안 하고 버티는 건 자유지만 얘기가 여기까지 진전된 이상 쥬드도 빈손으로 물러서지는 않을 거다. 이 크고 복잡한 도시엔 나쁜 놈도 많지만 첸 같은 난적도 드물다. 게다가 현재 쥬드에게는 첸을 공격할 만한 꺼리도 마땅치 않고……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흥미진진해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웬만한 운동경기보다 훨씬 더 볼 만한 대결이다.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당신 남자친구가 내일부터 갑자기 바빠질 수도 있어요. 아니면 차이나타운에서 심하게 먼 시골 마을 파출소로 전출을 가게 되든가…….”

아니, 왜 가만히 있는 나를…… 이런 일에 나를 협박 카드로 써 먹는 게 일단 기분 불쾌했지만, 얼마나 꺼리가 없으면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 한심하기도 했다. 나를 시골로 전출 보내는 게 무슨 협박이 된다고…… 그런데 쥬드가 무슨 소리를 하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처럼 여유만만하던 첸이 당황해서 헛기침을 했다.

“너무 치사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첸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치사하다는 정도는 쥬드한테 그렇게 큰 욕이 아니다.

협박이 제대로 먹혔다고 판단한 쥬드가 의자에 기대앉으며 거만하게 처음에 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대체 뭐하는 인간들이에요?”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쿠간의 안녕과 사회정의를 생각하면 쥬드 편에 서는 게 맞고, 남자친구의 곤란한 입장을 생각하면 자청해서 시골 파출소로 전출을 가야 할 것도 같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 당신도 바쁘고 내 점심시간도 그다지 길지 않은데…….”

쥬드가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첸을 재촉했다. 머리가 좋다는 건 멋진 일이다. 첸에게 당했던 수모를 5분 만에 고스란히 되갚는 그 통쾌함을 나는 평생을 살아도 모를 거다.

“생각 중이에요.”

“뭘요?”

아주 잠깐 첸이 내 쪽으로 눈을 흘겼다. 내가 눈치 없이 나서는 바람에 쥬드를 상대로 고전하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 내 직업이 짭새인 이상 이런 상황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당신한테 그 얘기를 떠들고 장인 친구들한테 칼 맞을 위험을 감수하는 게 나을까, 아쉽긴 하지만 남자친구하고 한두 주일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 그리워하는 애틋한 시간을 가져볼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는 게 자칫하면 장인 친구들한테 칼 맞을 일이란 말에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안 그래도 사방이 다 적인데 장인 친구들까지 그 대열에 합세하는 건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흑풍회 원로들이 겉으로 보기엔 욕심 많고 수다스런 보통 노인들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두 다 굵직한 조직을 갖고 있는 프로페셔널 조폭 두목들이었다. 그 영감들이 아니라도 출근길에 기관총 든 암살자들한테 쫓겨 다니는 한심한 처진데, 여기서 더 위험해지는 거……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첸은 그냥 두고 다른 쪽으로 알아보는 게 좋겠다는 사인을 쥬드한테 보냈다. 하지만 쥬드는 첸의 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현재 쥬드의 관심사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정체를 밝히는 것뿐이었다. 쥬드가 내 사인을 싹 무시하고 첸한테 좀 전보다 더 치사한 협박을 날렸다.

“전출 기간이 한두 주일이라고 누가 그래요?”

나는 첸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더 버틸 줄 알았다. 쥬드는 뭐 대단한 약점이라도 찾은 것처럼 기세등등하지만 솔직히 내가 서부호수 파출소로 쫓겨 가는 게 녀석이랑 무슨 상관이냐?

쥬드 같은 호각의 입씨름 상대도 좀처럼 없으니까 말장난 슬슬 치면서 뺀질거리다가 니 맘대로 해라, 나는 할 말 없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쥬드의 입에서 무기한 전출 얘기가 떨어지자마자 첸이 두말없이 백기를 들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야, 잠깐…….”

내가 첸을 가로막고 나서자 쥬드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나를 서부호수 파출소로 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호수에 처박아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그런 얘기 함부로 해도 돼? 발설하면 위험해진다면서?”

“말 안 하면 널 산골짜기 파출소로 보내버린다잖아.”

“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쿠간에서 외딴 곳이라고 해봐야 서부호수, 아니면 론테즈 산자락에 있는 등산객들을 위한 경비 초소 정돈데 둘 다 차이나타운에서 서너 시간 거리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처럼 편하게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 봐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줄어드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

“쉬는 날에 내가 나올게. 그럼 되잖아.”

첸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이나 간신히 보자고 너한테 그렇게 공 들인 거 아니거든.”

“그렇다고 죽냐?”

“됐어. 어차피 사방이 지뢰밭이야.”

너는 만두나 먹으라는 투로 접시를 내 앞으로 슥 밀어 보내고는 첸이 쥬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제2차 종족대전이 끝난 직후에 가비우스 그라하 공작이 창설한 기사단이에요. 말하자면 전쟁이 끝난 후에 할 일이 없어진 기사들을 모아서 만든 예비군 같은 건데, 봉인을 피해 달아난 검은 군대의 패잔병을 뒤쫓는 게 주된 임무였죠. 남는 시간엔 돌아다니는 괴물사냥도 하고, 영주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권 다툼에 끼어서 한몫 챙기기도 하고…….”

큰 맘 먹고 해주는 얘긴 줄은 알겠는데, 이건 어제 마리우스한테 다 들었던 거다.

“그게 바하르나 대왕 제위 20주년 되던 해의 일이라니까 지금부터 천 백년 정도 전일 거예요. 정확한 연도는…….”

쥬드하고 내 표정이 떨떠름한 걸 본 첸이 말을 하다 말고 뻘쭘한 얼굴로 물었다.

“얘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재미가 없나 봐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옛날 얘기 말고 좀 더 최근 소식이 궁금하거든요.”

“성질이 꽤 급하네요. 하지만 역사를 알아야 그자들이 지금 하고 다니는 일을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쥬드는 당장 놈들의 근거지로 쳐들어가서 요절을 내고 싶은 거지, 그놈들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다.

“말 나온 김에 그 얘기부터 하죠. 그자들이 요즘 하고 다니는 일이 대체 뭐예요?”

“좀 전에 말했잖아요.”

좀 전에 했던 말이라면 기사 예비군, 영주들의 이권 다툼, 지금으로부터 천 백년, 그리고 또…….

“괴물 사냥이요?”

쥬드는 이젠 완전히 체념한 얼굴이었다. 첸이 놀란 눈빛으로 쥬드를 쳐다봤다.

“역시 듣던 대로 똑똑한 분이라 이해가 빠르시네요.”

쥬드는 첸의 칭찬이 전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쥬드는 이런 칭찬보다는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느냐는 비웃음이 날아오기를 더 바랐을 거다.

쥬드가 허기진 표정으로 첸이 내 앞으로 밀어준 접시를 당겨가더니 하나 남은 만두를 젓가락으로 꾹 찔렀다.

“그 정도야 상식이죠.”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지금까지는 쥐뿔도 알아낸 게 없었는데 최소한 두 가지는 건졌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천년 전에 괴물 사냥 겸 이런 저런 일을 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라는 거 하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천년 전 그 기사의 유령들이 무덤에서 뛰쳐나와서 설치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자들이 쿠간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에요. 이 도시에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천년 전 얘기는 접어두고 최근에 일어난 일부터 짚어 보죠. 그러니까…….”

아무래도 전문 분야가 아니다 보니 쥬드가 갈피를 못 잡고 허둥거렸다.

“그자들이 정말로 괴물 사냥꾼들이란 말이에요?”

“사실이에요. 실력은 썩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첸이 쥬드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비웃는 거예요?”

첸의 미소에 쥬드가 한풀 죽었다.

“아니, 그저 당신도 귀여울 때가 있구나 싶어서…….”

귀여운가? 내 눈에 쥬드는 귀여운 여인이 아니라 현역 짭새들 중에 제일 머리 좋고 악착같은 수사관이다. 확실히 지금은 좀 버벅거리고 있지만 세계관과 우주관의 혼란 때문에 나타난 일시적인 증상일 뿐이다. 그 정도로 귀엽다는 둥 놀리고 무시하다간 조만간 큰 코 다칠 거다.

쥬드가 아쉽다는 듯 빈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좀 전보다는 전열을 가다듬은 듯 표정이 차분했다.

“아까 하려던 얘기, 계속 해보세요.”

“어떤 얘기 말입니까?”

“입 밖에 내면 당신 목숨이 위험해질 정도로 정보로써의 가치가 있는 얘기요.”

“지금까지 했던 게 다 그런 얘기였는데요.”

쥬드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쿠간 시 뒷골목에 있는 헌책방만 뒤져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어요. 벌써 자료도 한 박스나 모았고요. 당신 목숨은 적어도 그거보다는 더 가치가 있을 거예요.”

첸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럼…… 천년에 걸친 역사 공부를 다시 시작해볼까요?”

쥬드가 귀엽다더니 조금 더 놀려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짭새가 다 나처럼 만만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첸이 잘못 생각한 거다.

쥬드가 첸을 노려보다가 그 사나운 눈빛을 그대로 옮겨서 나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불똥이 나한테 튈 것 같더라니…….

“내일 아침부터 서부호수 파출소로 출근해요. 거기서 근무해본 선임자로써 충고하자면, 미리 짐을 꾸려야 될 거예요. 시내에서 출퇴근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거든요.”

나야 뭐, 서부호수 파출소 근무가 싫을 이유도 없다. 짭새가 뭔가 사고를 치면 의례히 몇 달간 쫓겨 가는 귀양지 같은 곳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서류 창고에 틀어박혀서 자다 깨다 하느니 파출소가 차라리 낫지 않을까? 호수 근처엔 단속할 아베크족이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첸은 나하고 한두 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게 정말로 싫은 것 같았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은 창설되고 나서 처음 백 년 동안은 일을 제대로 했어요. 군기도 제대로 들어 있었고, 할 일도 꽤 많았고,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았죠. 하지만 그 이후엔 점점 일 없는 건달들 집합소로 변했고 몰려다니면서 사고나 치는 골칫덩어리들이라는 눈총을 받다가 흐지부지 사라져버렸어요. 바하르나 조약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거창한 포부에 비하면 초라한 말로였죠.”

이젠 쥬드하고 입씨름 할 마음도 별로 없는지 첸이 요점만 딱 집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돌아다니는 애들은 뭐야?”

“기사단이 재소집된 건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일 거야. 바하르나 조약에서 정한 시한이 거의 다 끝나가는 시점이었고 봉인에서 풀려난 괴물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거든.”

“대체 그…….”

그때 쥬드가 첸과 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꾸 바하르나 조약 얘기가 나오는데, 그게 바하르나 전서에 나오는 그 전쟁이나 조약하고 상관이 있는 건가요?”

“바하르나 전서를 읽었다면 내가 따로 설명할 것도 없겠네요.”

첸의 대답에 쥬드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놀라거나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일종의 쇼크였다. 드디어 올게 왔다.

“그 책에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고요?”

“책 머리말에 그렇게 적혀 있지 않던가요? 이것은 인간이 겪은 가장 잔인한 전쟁과 위대한 승리에 대한 기록이니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그게 다 사실이라는 소리예요?”

쥬드가 또 까칠하게 따지고 대들기 시작했다. 이제 긴장하고 쥬드를 지켜봐야 된다. 이러다 언제 첸한테 달려들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 전혀 모르는 첸의 말과 행동에는 여유가 넘쳤다.

“터무니없는 헛소리도 꽤 많지만, 그건 엄연한 역사책이거든요.”

쥬드가 거의 5분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다. 쥬드의 확고부동한 세계관과 우주관에 쩍쩍 금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럼, 아서왕 이야기도 역사책인가요? 니벨룽겐의 반지는요? 반지의 제왕은 어때요?”

쥬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첸한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그래도 첸이나 되니까 만만치 않아서 말로 하는 거지, 상대가 나였으면 벌써 싹 잡아 뜯겼을 거다.

“잘 모르겠네요. 그런 책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요즘 터지는 사건들도 있고 해서 내가…… 웬만하면 다 참고 들으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내가 당신을 놀리려고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서 더 어이가 없네요.”

누군가를 심문할 때는 심문하는 주체가 주도권을 확실히 쥐고 있어야 되는데 지금 쥬드는 눈 뜨고 기절한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런 식으로는 십대 좀도둑도 상대하기 어렵다. 하물며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놈은 루크 첸이다.

“그럼, 용들은 다 어디로 갔죠? 숲과 호수를 날아다니던 요정들은? 세상일을 환히 꿰뚫어보고 관장한다는 영수들은? 한때 세상의 반을 지배했던 그 사나운 검은 전사들은 어쩌다 다 사라져버린 거죠?”

정신 좀 차리라는 뜻으로 쥬드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범인을 심문하다 보면 다그칠 때도 있고, 비아냥거려서 상대방을 열 받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결정적인 단서나 자백을 위해서는 어르고 뺨치고 별짓을 다 한다. 하지만 이 방은 경찰서 취조실이 아니고, 첸도 죄짓고 잡혀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쥬드도 무슨 전략이 있어서 저렇게 펄펄 뛰는 게 아니고…….

“당신을 보니까 왜 기사단의 원로들이 그렇게 비밀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네요.”

첸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쥬드의 심사를 확 긁었다.

“당신은 진실은 거짓말처럼, 거짓은 진실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어요.”

“당신은 듣고 싶은 말만 가려서 듣는 재주가 있고요.”

“내가 듣고 싶은 건 당장 길바닥을 휘젓고 다니면서 아무 데나 총질을 해대는 무장 폭력단에 대한 정보라고요!”

“여태 그 얘기를 한 건데요.”

결국 둘이 싸운다. 잘만하면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건질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또 이렇게 날리게 될 모양이다.

쥬드나 내가 기사단에 관한 정보에 접근할 기회는 이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 하지만 이 주제에는 언제나 심각한 딜레마가 존재했다. 기사단에 관한 정보를 이해할 만한 지성을 갖춘 쥬드는 정보에 얽힌 초현실적인 부분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얘기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만, 들어도 이해를 못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다시 찾아와요. 이 얘기는 그때 다시 하죠.”

첸이 일어났다. 더 있어 봐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기는 이미 텄고, 바쁜 일도 있을 테니까…….

“다시 사무실로 가는 거야?”

내가 물었다.

“한 군데 잠깐 들렀다가…….”

“나중에 나하고 얘기 좀 해. 괜찮지?”

쥬드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서 그런지 나를 보는 시선도 싸늘했다.

“그거야 얼마든지.”

첸이 실의에 빠져 있는 쥬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대로 나가기는 좀 아쉬웠는지 문 앞에서 다시 돌아섰다.

“진짜 중요한 정보를 하나 알려줄까요?”

“뭔데요?”

완전히 김 나간 얼굴을 하고 있던 쥬드가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용하고 요정들, 결단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만 하늘을 찌르는 재수 없는 영수들, 그리고 세상의 반을 지배했던 사납고 아름다운 전사들은…… 이제 곧 돌아올 거예요.”

쥬드가 팔짱 끼고 눈 감은 채 10분째 잠잠했다. 자는 건지, 시위를 하는 건지, 아니면 넋이 나간 건지…….

“괜찮아?”

“…….”

“쥬드!”

“속이 울렁거려요.”

“계속 이럴 거면, 기사단 수사는 다른 사람이 맡는 게 낫지 않겠어?”

“그럴지도 모르죠.”

내가 쥬드를 처음 본 건 서에 출근한 첫날이었고, 장소는 전체 브리핑을 주로 하는 대회의실이었다. 서장이 방에 놓고 온 파일을 들고 뒤늦게 회의실로 들어온 쥬드는 말 그대로 넋이 나갈 정도로 예뻤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그녀에 관해서 들은 얘기는 더 놀라웠다. 그때 이미 쥬드는 무려 여섯 건의 미해결 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재수사해서 범인을 잡아들인, 쿠간의 모든 경찰서를 통틀어서 가장 실적 좋은 수사관하고 맞먹는 경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처음 마주쳤던 그날 이후로 쥬드가 이렇게까지 한심하게 보인 적은 없었다. 그 좋은 머리하고 냉정한 성격이 왜 이번 일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걸까?

“계속 이럴 거면 사건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든가.”

“고려해볼게요. 그런데…….”

쥬드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일어났다.

“그런데 뭐?”

“첸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기사단 수사 따위는 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왜?”

“곧 전쟁이 터질 테니까요.”

쥬드가 맥 빠지고 진 빠진 얼굴로 청연루를 떠났다. 주차장까지 따라가며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바하르나 조약은 뭐고 전쟁 얘기는 또 뭐냐고 캐물었지만 돌아온 거라곤 ‘나중에 얘기하자’는 성의 없는 대답뿐이었다. 살면서 무식해서 서러웠던 적은 얼마 없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되게 나쁘다.

비니가 무려 반년 만에 의식을 되찾은 이 기쁜 날에 대체 뭐냐? 기운 없고 기분 나쁘고…… 전쟁이라니, 무슨 전쟁? 우린 그냥 소소하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정체를 캐던 중이었는데, 얘기가 왜 그렇게까지 건너뛰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단 하나 다행스러운 건 뒤돌아서 10분만 가면 우화각이란 사실이었다.

우선 가서 좀 쉬고, 그 바하르나 조약하고 전쟁 얘기는 나중에 첸한테 물어보든가, 여의치 않으면 내일 경찰서에서 쥬드한테 다시 알아보자. 쥬드가 또 딴소리하면 그때는 내가 그 책을 구해서 직접 읽어보든가…….

쥬드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청연루를 지나쳐서 돌담을 몇 개 돌아서…… 작은 개울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서부터 우화각으로 이어져 있는 숲길은 짧았다. 하지만 이 길로 접어들 때면 간혹, 깊숙한 숲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때론 설레고 때론 두렵고…… 이 아름다운 길이 끝도 없이 길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쥬드하고 첸이 싸우는 바람에 졸음이 싹 달아나서 지금 방에 들어가 봐야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들어가서 잠깐 쉬다가 병원에나 다시 가 볼까?

방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대숲 쪽으로 난 창이 커튼으로 싹 가려져서 방이 온통 컴컴한데다 소파에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크롬웰 양은 잘 갔어?”

“사무실에 간다면서?”

“어딜 가든 그거야 내 맘이지.”

한 군데 들렀다 간다더니 이러려고 그런 말을 했었던 모양이다. 웃옷을 벗어서 현관에 있는 의자 위에 걸쳐놓고 첸을 마주보고 앉았다.

“괜찮아?”

밑도 끝도 없이 첸이 물었다.

“응?”

“비니 몬티첼리가 정신을 차렸으니까 앞으로 며칠은 정신 나간 놈처럼 히죽거리면서 다닐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서. 뭐 다른 문제라도 생겼어?”

비니의 회복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었던 놈이 살아 돌아온 거나 마찬가지였고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앞으로도 많지 않을 거다. 분명히 기쁜데 마음 한 구석이 왜 이렇게 울적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 거 없어. 다 괜찮아.”

“설마 내일부터 그…… 서부호순지 뭔지 그쪽 파출소로 출근하는 건 아니지?”

그건 처음부터 그냥 협박이었을 거다. 반응을 보려고 던져본 미끼였는데 첸이 덥석 받아 문 것뿐이다. 쥬드는 아무리 심사 뒤틀리는 일이 있어도 동료 짭새를 시골 파출소로 귀양 보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상한 차 한 잔 먹여서 반나절 정도 뻗어 있게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쥬드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본래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 대화중에 괴물이나 기사, 용…… 그런 게 등장하면 신경질적으로 변해.”

“누군들 안 그렇겠어? 지난 천년 동안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모조리 은폐됐고 남은 흔적이라야 고작 신화나 어린애들 동화책뿐인데 그런 얘기를 넙죽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아까 쥬드하고 했던 얘기, 나한테 설명 좀 해줄래?”

첸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역시 함부로 떠들기 곤란한 얘기라서 그런 걸까?

“그렇게 위험하면 됐어. 달리 알아볼 방법이 있겠지.”

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자기 목숨이 위험하거나 말거나 조건만 맞으면 조약이나 전쟁에 관한 얘기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투였다. 게다가 첸의 조건은 그렇게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다.

“이쪽으로 와. 그럼 얘기해줄게.”

첸이 그윽한 눈길로 나를 보면서 자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녀석을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눈이 엄청나게 내렸던 지난겨울 어느 날, 비니 이모랑 청연루에 밥 먹으러 갔다가 처음으로 녀석과 마주쳤었다. 이전에도 종종 신문에 기사가 실리곤 했기 때문에 사진은 몇 번 봤었지만 실물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녀석의 첫인상이 어땠었더라? 사진보다는 실물이 낫다고 생각했고 그 외엔 그저 제비처럼 뺀질한 느낌이 전부였다. 그게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인데…….

“자는 거야?”

첸의 물음에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냥 눈만 감고 있었어.”

“내 얘기를 듣기는 듣는 거야?”

사실은 중간에 딴 생각 잠깐 했다. 어쩌다 내가 대낮에 호텔방에서 이 자식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처지가 된 걸까, 뭐 그런…….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인간 말고도 여러 종족이 있었다는 거잖아. 요정이라든지, 난쟁이 광부, 숲을 지키는 전사들…… 그런데 인간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토분쟁이 생겼고, 수백 년 간 갈등이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전쟁이 터진 거고…….”

천 년 전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입장이 있었을 거고, 다른 종족들을 끌어 모아서 인간과 전면전을 선포한 용에게는 또 그 나름의 입장이 있었을 거다. 어느 쪽이 옳든 전쟁에선 승패가 갈라지게 마련이고 그 전쟁에서는 용과 그의 군사들이 패했다.

“그런데, 천년 전에 끝난 전쟁이 왜 지금 와서 문제가 되는 거야?”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는 게 특이하기는 하지만, 종족 전쟁은 고대나 중세에 벌어졌던 다른 전쟁하고 크게 다른 것도 없다. 영토 분쟁으로 두 세력이 맞붙었고, 결국 힘 센 놈이 이겼고, 몇 백 년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일들이 다 잊혀졌다.

보통은 그게 결말인데 왜 유독 그 전쟁에만 속편이 있는 거냐? 그것도 세월이 무려 천년이나 지난 후에…….

“쉽게 말하면 검은 용과 그 군사들한테 징역 천년 형이 내려진 거야. 이제 만기가 돼서 출소할 날이 온 거고.”

애초에 각오는 첸이 아무리 심한 소리를 지껄이더라도 마인드를 오픈 시키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거였지만, 역시 한계는 있다. 이런 얘기를 무심코 펼쳐든 옛날 책에서 봤다면 황당하지만 나름대로 흥미진진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가 다 사실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으려니 아까 먹었던 만두가 금방 올라올 것처럼 속이 괴로웠다.

“천 년이면 보통…… 다 죽지 않나?”

“용은 오래 살아.”

“그 용이라는 거 말이야, 무슨 별명이나, 비유로 용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진짜 용이란 거야? 못생기고, 배 나오고, 날개 달리고, 불 뿜고…….”

내 질문에 첸이 끙끙 앓았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나를 상대로 뭔가를 설명하고 설득할 의욕이 확 떨어진 눈치였다.

“용이 그렇게 생긴 거 아니야?”

“야, 너는…….”

첸이 말을 못 잇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첸이 내 머리를 치우고 일어서려는 걸 다시 붙들어 앉혔다.

“용을 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해?”

“내가 용을 어디 가서 봐?”

천 년 전에는 용에 발에 채일 정도로 흔했는지 몰라도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용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아동용 동화책 삽화나, 판타지 영화 정도가 고작이다. 게다가 나는 그런 영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너는 이제 마커스가 기억도 안 나냐?”

“그게 누군데?”

되묻다가 첸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커스라면…….

“푸른 용, 그 녀석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용이라고 부르다 보니 녀석 이름을 자꾸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놈이 진짜 용이라면, 용이 사람하고 다른 게 대체 뭐냐?

“걔가 용이라고?”

“니 입으로 그 녀석을 용이라고 불렀었잖아?”

지가 지 입으로 용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별 뜻 없이 그렇게 불렀던 거지, 나는 걔가 용하고 비슷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기린은 발렌타인 강간사건 때 정액 검사가 몽땅 불발이 된 전과도 있고 해서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용은 그런 사고를 친 적도 없었고…… 단지, 뭐 먹는 걸 볼 때면 저게 사람인가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용하고 사람이 대체 뭐가 달라? 기린은 아픈 사람이라도 고치지, 그놈은 밥 좀 많이 먹는 거 말고는 특이할 것도 없잖아.”

첸이 내 머리를 치우고 일어났다.

“어디가?”

“멀리 안 가.”

첸이 구석에 있는 홈바로 가더니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낮술의 힘이 필요할 정도로 우리 대화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나?

“왜? 맨 정신으로는 나하고 얘기를 못 하겠어?”

나도 바에 가서 붙어 앉았다.

“왜 시비야? 내가 뭐랬다고…….”

첸이 스트레이트 잔을 다 재껴두고 물 컵을 꺼내더니 위스키를 거의 반이나 차도록 부었다.

“너도 좀 전에 그랬었잖아. 그런 얘기를 넙죽 믿는 게 더 이상한 거라고…….”

“크롬웰이 너랑 같아?”

더는 못 참겠는지 그렇게 쏘아붙이면서 첸이 위스키 반 컵을 원샷으로 비웠다.

“그 여자는 한밤중에 오컴을 쫓아다니지도 않았고, 백화점에서 대공을 업고 돌아다니지도 않았어. 비니 몬티첼리 본가에 가서 걔네 할아버지 방에서 기린하고 비니 몬티첼리 유령이 떠드는 것도 못 봤고…… 그런 일을 그 여자가 겪었으면 진즉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도는 눈치챘을 거야.”

오컴 때문에 죽을 뻔했던 거, 백화점에서 그 이상하고 무서운 놈을 멋모르고 들쳐 매고 돌아다니다가 나는 어깨에 총 맞고, 첸은 놈에게 물려서 죽을 뻔했던 거, 니콜라스하고 같이 오밤중에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놈들한테 쫓겨 다녔던 거, 그렇게 힘든 와중에 이 자식한테 뚜껑이 확 열릴 만큼 시달렸던 거…… 생각해보면 나도 정말 힘들게 살았다.

“짭새 노릇, 그만 때려치우지 그래?”

술 한 잔 마셨다고 말을 막하네. 내가 용이니 종족대전이니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사실이지만, 일을 아예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그만 두면, 뭐해서 먹고 살라고?”

“놀고먹어. 내가 설마 너를 굶기겠어?”

조폭 두목도 직업이라고 잘난 척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 치우고 하던 얘기나 계속해봐.”

첸이 남은 술을 훌쩍 마셔버리고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서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알콜 도수 40짜리 딥키스를 퍼부었다. 키스만으로도 취할 것 같았다.

“용에 대한 건 그렇다 치고…… 그 봉인이란 건 대체 뭐야?”

첸을 밀어내고 바에서 떨어져 앉았다. 여기서 분위기가 조금만 더 이상해져도 그대로 침대로 끌려가는 수가 있다. 어젯밤 일로 피곤한 건 나지 녀석이 아니니까…….

“봉인이 봉인이지 뭐.”

벌써 말하는 게 성의가 하나도 없다.

“설명 제대로 안 해?”

첸이 취한 척하면서 바에 털썩 엎어졌다. 겨우 위스키 반 컵 마셔놓고 엄살은…….

“자꾸 이러면 나 집에 갈 거야.”

내 협박에 첸이 고개를 들었다.

“그 새 참 좋은 거 배웠다.”

“그러니까 딴 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천년 동안 걔네들을 냉동이라도 시켜놨었단 뜻이야?”

“비슷해.”

첸이 실실 웃으면서 장난처럼 지껄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표정을 고쳤다.

“요즘처럼 좋은 감옥이 없던 시절이었거든. 그러니까 뭐하고 비슷하냐면 말이야…….”

빈 잔을 다시 채우는 첸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뭔가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왜 그래?”

첸이 나쁜 기억을 떨치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짱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진시황의 무덤은 알지? 어떤 건지…….”

“사진은 봤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돼. 영원히 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장수들처럼, 검은 군대도 어딘가에 그렇게 잠들어 있을 거야. 봉인이 풀리고 자신들의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들이 먼지를 풀썩거리면서 살아 움직이는 만화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가끔 만화나 영화보다 현실이 더 황당할 때가 있지만, 설마 그런 거겠어?

나도 머릿속에 떠오른 얼토당토않은 망상을 지우려고 머리를 얼른 흔들었다. 어쨌든 그것도 그런 거라고 치자.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잘은 모르지만 천년 전엔 전쟁에서 지면 그냥 죽여도 되는 거 아니었어?”

“검은 군대는 전쟁에서 진 게 아니었어.”

“전쟁에 패해서 봉인을 당한 거라며?”

“얘기가 길고 복잡해.”

첸이 또 한 잔을 훌쩍 비웠다. 한입에 털어 넣기엔 술이 좀 많다 싶었는데, 술이 땡기는지 갑자기 막 털어 붓는다.

“작작 마셔. 일하러 가야 된다면서?”

“안 가도 돼.”

“좋겠다. 놀고 싶을 때 놀고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그게 다 장가를 잘 든 덕이지.”

주정을 하는 척하면서 녀석이 다시 나를 끌어당겼다. 아까부터 뭔가 얘기에 진전이 있을 만하면 딴전 피우고 치대고…… 기왕 옛날 얘기 나온 김에 중세 스타일로 고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전쟁이 터진 지 60년이 지나도록 인간들의 군대는 검은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패했어. 인간들에게는 제대로 된 지휘관도, 전술도, 충성심도 없었거든. 한심한 오합지졸들이었지. 반면에 검은 군대는 진짜 군대라고 할 만했고……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밀려서 거의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자 현자 중의 현자라 불리던 라두칸이 인간들 편을 들고 나섰어. 오거스트라는 작은 왕국의 이름도 없던 왕을 찾아내서 사령관 자리에 앉히고 전투를 직접 지휘했지. 덕분에 전투에서 몇 번 승리도 거뒀고, 잃었던 영토도 몇 군데 되찾았지만 그 정도로는 용의 군대를 물리칠 수 없다는 걸 라두칸도, 인간의 왕들도 알고 있었어.”

얘기가 그렇게까지 재미가 있는 건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녀석에게 잡혀서 벌써 침대 발치까지 끌려왔다.

“그래서?”

술기운이 도는지 첸이 뚱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리고는 울적한 시선으로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내 가슴팍을 거칠게 떠밀었다.

“딴 짓 하지 말고 하던 얘기나…….”

“지금 하고 있잖아.”

첸이 내 배를 깔고 앉더니 나를 꼼짝도 못하게 짓눌렀다.

“라두칸이 자객을 물색해서 용에게 보냈지. 아이스라고…… 꽤 실력이 좋은 칼잡이였는데 그자가 전투를 지휘하느라 본대와 떨어져 나와 있던 검은 용의 진중에 숨어들었고 결국 용의 심장에 칼날을 박았어. 하지만 용은 영수라서 인간의 손에 그렇게 간단히 죽지는 않거든. 물론 치명상이었지만 숨은 붙은 채로 오거스트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 거야.”

놈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반항하는 것도 잊고 첸을 멍하니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다. 녀석이 지금까지 지껄인 애기가 전부다 이상하지만…… 왜 거기서 라두칸이란 이름이 나오는 걸까?

갑자기 떠오른 어떤 불길한 생각 때문에 온 몸에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라두칸이라고…… 했어?”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지?”

“그건 천년 전에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

나를 내려다보는 첸의 얼굴에 보통 때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감정이 떠돌았다. 동정 같기도 하고 연민 같기도 한…… 조금은 슬프고 쓴 표정이었다.

“니콜라스가 사람이 아니야?”

가슴이 아파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다 헛소리다. 니콜라스가 용이나 기린 같은, 혹은 오컴이나 대공 같은 이상한 존재라니…….

‘농담이야’ 혹은 ‘넌 그걸 다 믿냐?’ 뭐 그런 핀잔이 돌아오길 바라면서 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첸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지껄였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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