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병동 5층을 3시간 동안이나 완전히 고립시켰던 연기, 혹은 안개의 발생 원인에 대해 병원 측은 어떤 해명도 내놓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가 지나도록 당시 현장에서 겁에 질린 채 연기에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 병원 측으로부터 들은 소리라고는 아직 원인을 조사 중이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뿐이었다.
병원 관계자들이 인상 험한 몬티첼리 경호원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안개 사태의 주범인 기린은 자기 방에서 반 기절 상태로 뻗어 있었다. 하루 반나절이 지나도록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걸 보면, 아픈 몸으로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무리가 많이 갔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안개로 꼭꼭 틀어막았다고는 해도 의사가 4명이나 버티고 있던 좁은 병실에서 3시간 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발렌타인은 긴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고, 통증도 많이 가벼워졌다.
사실 나는 아직 발렌타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오전에 크루거 간호사가 뚱한 얼굴로 전해준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좋은 소식이기는 하지만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환자의 기분이 몹시 우울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서 담당의사도 방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다니, 기린을 발렌타인이 절대 못 찾을 만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하지 않을까? 애를 말리기는커녕 내가 멍석 깔아준 사실이 발렌타인의 귀에 들어가면 내 목숨도 안전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차분하고 정중한 노크에 화들짝 놀라서 문가에 붙어 섰다. 어젯저녁 이후로 누가 방문을 두드리거나 문고리를 잡아 돌릴 때마다 간이 떨어질 것 같았다.
“누구세요?”
“형, 저예요.”
롭이 문을 열고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었다.
“저랑 커피 한 잔 안 하실래요?”
롭이 바싹 얼은 채 문 옆에 붙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놀란 건 잠깐이고 시선은 이내 기린에게 고정이었다. 롭은 벌써 며칠째 이방 근처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커피?”
“바쁜 일이 없으시면요.”
이 방, 잠깐 비워도 될까? 다 죽어가던 발렌타인이 기린의 3시간짜리 작업 끝에 얼마나 기력을 회복했는지는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기린을 혼자 두기가 좀 그런데…….
“좀 있다 다시 올까요?”
롭이 자는 건지 기절을 한 건지 분간도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인 기린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기린도 기린이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롭이 비니 일로 애가 타서 이러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단 롭을 데리고 방을 나왔다.
“커피 마시자. 가까운 데서…….”
가까운 휴게실에 있는 자판기 캔 커피는 별 맛은 없었지만 롭도, 나도 진짜로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커피 캔 하나씩을 꺼내 들고 복도에서 기린의 병실 입구가 잘 보이는 쪽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어젯저녁에 암 병동에서 이상한 일이 있었다는데, 얘기 들으셨어요?”
롭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하룻밤 새 무서운 속도로 퍼져나가서 이제 병원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 얘기를 꺼냈다.
“사람들이 짙은 연기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제 생각엔 그게 혹시…….”
“혹시, 뭐?”
“우리가 며칠 전에 집에서 봤던 그거하고 비슷한 종류의 안개가 아닌가 해서요.”
비니도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롭은 비니보다 훨씬 더 상황파악이 빠른 것 같았다. 롭이 경찰이 되는 것도 좋았을 텐데. 비니는 다른 일을 하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사람들 말이, 바로 눈앞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 짙은 연기가 3시간도 넘게 암 병동에 가득 차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리고 난 후에 임종을 기다리던 환자가 정신을 차렸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이 병원에선 기적이 종종 일어나잖아요. 꼭 집어서 누구 덕분이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나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은 정말 별로다.
“그런 기적이야 종종 일어나주면 좋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형 친구는 어떻게…….”
롭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많이 졸리거나, 어떤 불의의 사고로 미각이 마비됐나 보다.
“저 친구가 일어나면 비니 일은 내가 다시 확인해볼게.”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롭을 달랬다. 체온이 올라가고 맥박도 정상에 가깝게 잡힐 때는 당장이라도 비니가 깨어날 줄 알았는데 며칠째 저러고 있으니 더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실은 나도 그렇다.
“형 때문에 저렇게 다쳐서 누워 있는데 이렇게 보채는 게 염치없다는 생각은 들지만, 저러다가 다시 형의 상태가 악화되는 건 아닐까 점점 불안해져서요.”
롭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기린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린의 몸이…… 아니다! 지금 당장 기린을 깨워야겠다. 방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거기서 발렌타인이 내렸다.
“자, 잠깐…… 잠깐만!”
혼비백산해서 들고 있던 커피 깡통을 집어 던지고 기린의 병실 쪽으로 달려가서 문을 막아섰다. 일단 의식이 돌아왔다니 어젯저녁에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깨닫는다면 기어서라도 올 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들이닥칠 줄은 몰랐다.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그렇지 않아도 너하고도 할 말이 있어!”
발렌타인이 내 멱살을 잡아서 옆으로 끌어내면서 짧게 대꾸했다. 그 음성, 나를 보는 눈빛에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발렌타인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지금 이 남자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깨닫지 못했을 거다.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앙상한 발렌타인의 팔을 붙잡고 한 번 더 매달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발렌타인은 나한테서 변명 따위 들을 기분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넌 잠깐 기다려. 그 자식 먼저 죽이고 나올 테니까. 오래 안 걸려.”
발렌타인이 팔을 뿌리치면서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위급한 상황을 한 번 더 넘긴 건 사실이지만 발렌타인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광대뼈가 다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비쩍 마른 얼굴에,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해서 환자복 등판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얼결에 붙잡은 팔도 앙상하기가 젓가락 같아서 발렌타인이 힘으로 나를 밀친 게 아니라 더 이상 잡고 있다가는 뼈가 부러질까 겁이 나서 내가 놔준 거였다.
어쨌든 기린 녀석, 정말 대단하다. 불과 스무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발렌타인은 환자라기보다는 시체에 더 가까웠는데 겨우 3시간 작업 끝에 저렇게 걷고, 말하게 만들다니…… 물론 화도 잔뜩 돋궈놨지만. 지난 몇 주 사이에 몇 번이나 직접 눈으로 봤으니 이제 기린의 치유 능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 치료방법에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은 게 안타까울 뿐이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보통사람이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고 한다면 그건 대부분 누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는 뜻일 뿐, 그때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다르다. 발렌타인은 죽이고 싶은 놈은 죽인다.
“내 말 좀 들어봐, 발렌타인. 기린은 단지…….”
밖에서 한숨 한번 쉬고 나서 발렌타인을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숨쉬기 운동을 하고 들어가길 잘했지, 안에선 숨 돌릴 정신도 없었다. 방에 들어간 지 불과 10여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발렌타인은 벌써 기린을 잡기 직전이었다. 아무리 사경을 헤매다 금방 정신을 차렸어도 전문가는 전문가다. 저 메스는 대체 어떻게 훔쳐온 걸까?
“제발 진정해!”
금방이라도 기린의 목을 향해 내리꽂을 듯 메스를 움켜쥔 발렌타인의 손목을 늦기 전에 잡아 붙들었다. 발렌타인의 컨디션이 정상이었으면 이것도 어림없었을 거다.
“이거 안 놔?”
발렌타인이 나한테 손목을 잡힌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선 이거 놓고 말로 해. 얘도 지금 힘들어.”
대답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거칠었다. 발렌타인이 팔꿈치로 내 명치를 올려 찍었다. 세계 최고의 킬러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은 일격이었고, 덕분에 숨이 턱 막혀서 잡았던 발렌타인의 손목을 놓치고 말았다.
발렌타인이 몸을 틀면서 메스를 크게 휘둘렀다. 작고 예리한 칼날이 큰 원을 그리면서 내 어깨를 스친다 싶더니 이내 어깨에서 붉은 피가 튀었다.
몸 생각도 안 하고 그렇게 한바탕 설치고 난 후에 발렌타인이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현기증이라도 났던 걸까? 어쨌든 그 틈을 타서 발렌타인의 손에서 메스를 빼앗아 복도 쪽으로 집어 던지고 팔을 뒤로 꺾었다. 발렌타인을 힘으로 제압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기력이라곤 없는 상태였으니까…….
나한테 잡힌 팔을 빼내려고 몇 번 버둥거리던 발렌타인이 제풀에 주저앉았다.
“이 자식, 아주 상습이야!”
발렌타인이 숨을 헐떡거리며 기린을 노려봤다.
“너무 그러지 마. 얘도 어제 당신 때문에 기운 다 빼고 저렇게 뻗은 거야.”
“그게 짭새가 할 소리야? 저 자식은 강간범이란 말이야!”
앉아 있을 기운도 없는지 발렌타인이 바닥에 머리를 대고 아예 누워버렸다. 나도 어지간하면 강간범 변호 같은 건 안 하지만, 이런 경우를 일반적인 강간 사건하고 동일하게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물론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덮치는 행위 자체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흉악한 짓이다. 하지만 이 일은 일반적인 범죄하고는 동기도 다르고 결과도 달랐다. 쿠간에서 제일 꽉 막힌 검사나 판사라도 이번 일의 앞뒤 사정을 제대로 안다면 정상을 충분히 참작해줄 거다.
“괜찮으세요? 형?”
롭이 언제부터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얘기 잘 하다가 갑자기 이리로 달려와서 해골 같은 몰골의 중환자하고 몸싸움을 벌였으니 애가 저렇게 놀란 것도 당연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다쳤어요?”
롭이 반쯤 열린 문을 좀 더 밀고 방안으로 한발을 들여놨다. 롭이 총명하고 상황 파악이 빠르기는 하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발렌타인과 나, 그리고 기린만 보고 이게 무슨 일인지 짐작할 정도는 아니다.
“괜찮아. 별 거 아니야.”
“하지만 피가…….”
상처는 깊지 않았다. 당장 급한 일은 발렌타인을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는 거다. 지금은 기운이 없어서 이렇게 축 늘어져 있지만 언제 기운을 차려서 기린의 목을 따겠다고 다시 덤빌지 모를 일이다.
“별 거 아냐. 그보다, 근처에 간호사나 의사 있으면 불러줄래?”
일어나 앉으려고 버둥거리다 기력이 딸려서 다시 엎어지는 발렌타인을 보고는 롭이 두말없이 방을 나섰다.
“내 생각엔…….”
롭이 나가고 난 후에 나도 발렌타인 옆에 주저앉았다.
“너한테도 생각이란 게 있기는 해?”
“둘이 진지하게 얘기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당신도, 기린도…… 둘 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난 다음에 분위기 좋은 데서 와인이라도 한 잔씩 하면서…….”
“웃기지 마. 난 저 자식하고 데이트 같은 거 안 해.”
그때 기린이 꿈틀하면서 돌아누웠다. 거의 동시에 발렌타인이 바짝 긴장해서 일어나 앉았다.
기린이 눈을 뜬 건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것 같지도 않았고 눈빛도 흐릿했다. 잠깐 동안 눈을 떴다가 두어 번 깜박거리고 나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게 전부였다. 발렌타인을 알아보기나 했을까? 다시 눈을 감을 때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 것 같긴 했지만…….
“쟤하고 얘기를 해야 될 거야, 발렌타인. 내 생각엔 그게 최선이야.”
응급실에 내려가서 어깨를 열 바늘 정도 꿰매고 구내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 다음, 다시 기린의 방으로 올라왔다. 또 다른 응급 환자가 입원 했는지 복도엔 사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도 들렸고…… 간호사가 차트를 정리하느라 환자 보호자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소리로 사방이 소란스러웠다.
“어디 갔다 왔어?”
복도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었다. 터너, 에쉬 그리고 앤디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밥 먹으러…….”
“여긴 또 왜 이래?”
에쉬가 눈살을 찌푸리며 피에 젖은 내 어깨를 가리켰다.
“사고가 있었어.”
“또 무슨 사고요?”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복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앤디가 끼어들었다. 파트너 복 지지리도 없는 옆 동네 청장 막내아들은 요즘 줄곧 터너와 에쉬 사이에 끼어서 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경찰서에 3인 1조는 좀처럼 없는 구성이지만 엄마, 아빠, 버르장머리 없는 아들…… 대충 그런 분위기였다.
“계단에서 굴렀어.”
발렌타인과 기린 사이의 그 길고 긴 사연을 병원 복도에서 간단하게 설명할 재주가 나한테는 없다. 설명해봐야 이해도 못할 거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터너와 에쉬를 밀치고 앤디가 앞으로 나섰다.
“지금 짭새들을 우롱하시는 거예요? 헛소리 작작 지껄이고 솔직히 부세요.”
앤디는 내가 만나본 최고의 파트너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나하고 다닐 때는 말은 곱게 했었다.
“애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킨 거야?”
내 추궁에 에쉬가 자식 자랑하는 엄마처럼 뿌듯한 표정으로 앤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난 몇 주 동안 갱단 소굴을 화장실 드나들 듯하더니, 이렇게 됐어.”
터너와 에쉬는 2주째 케이린 거리 갱단 살인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2주 전에 케이린 거리 뒷길에서 심하게 손상된 3구의 시신이 발견됐는데 그중 2명이 인근에서 활동 중인 조직원들이었기 때문에 사건은 자연스럽게 갱단 간의 세력 다툼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우리 일 중에 쉬운 사건은 거의 없지만 특히 갱단 조직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수사가 어렵다. 폭력에는 이골이 난 놈들이라 어지간해서는 증거도 남기지 않았고 범행 시간에 같이 술을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했다고 증언해줄 놈들도 잔뜩 대기하고 있고…… 터너와 에쉬도 그런 문제로 애먹고 있는지 한두 주일 사이에 얼굴들이 좀 갔다.
“비니 보러 왔어?”
에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비니도 보고…….”
“또 뭐?”
“반장님이 너 요번 주까지만 놀고 그만 출근하래.”
미안하지만 나는 병가가 아직 2주일 남았다. 범죄 현장에서 입은 총상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부상이었고, 부상 정도에 비해서 휴가가 긴 것도 아니었다. 몸 상태로만 보면 지금 당장 복귀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당장은 곤란해.”
덩치가 미식축구 선수급인 간호사한테 붙들려서 자기 방으로 끌려가던 발렌타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발렌타인은 기회만 있으면 열 번이라도 기린을 잡아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발렌타인이 전혀 화를 풀 기미가 없는데 의식도 없는 기린을 두고 출근하는 건 살인 방조나 마찬가지다. 당장 한 시간 정도 방을 비우는 것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급한 대로 기린 옆에 롭을 붙여 놓고 응급실에 갔다 왔다.
“웬만하면 복귀하지 그래? 몇 주째 병원에 죽치고 앉아서 하는 일도 없잖아?”
“하는 일이 왜 없어? 니네가 몰라서 그렇지 나 요즘 바빠.”
에쉬가 피 묻고, 찢어진 내 셔츠를 손가락으로 슬쩍 집어 올렸다.
“갈아입을 옷은 있어?”
쥬드네 집에 옷이 몇 벌 있기는 하지만, 갈아입으러 갈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수사 중인 사건은 어때? 진전은 있어?”
“별로…….”
터너가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둘이 맡은 사건은 한방에 해결하기 무척 어려운 종류의 사건이다.
“제가 볼 때는, 그 사건은 걔네들 소행이 아닌 것 같아요.”
터너와 에쉬를 쫓아다닌 몇 주 사이에 상당히 껄렁해진 앤디가 건방을 떨며 터너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론 신참도 담당한 사건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만 명확하다면.
“요즘 갱단들은 특수부대만큼이나 화기가 빵빵한데, 피살자들은 맞아 죽었다고요.”
터너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니가 잘 몰라서 그렇지, 깡패 놈들이 사람 죽이는 방법은 상상을 초월하게 다양해.”
터너 말이 맞다. 갱단이 사람 잡는 방법은 길바닥에서 총질하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공포감을 조장하거나, 상대 조직을 자극하기 위해서 일부러 참혹한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갱단 소행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어?”
“그냥, 느낌이 그래요.”
몇 주 사이에 사고방식이 심하게 단순해졌네. 이것도 갱단의 영향인가?
“그 좋아하는 과학수사는 어쩌고 느낌 타령이야?”
과학수사 운운에 앤디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심란해졌다.
“지난번 미라 사건 이후로는 과학에 대한 제 입장이 전 같지 않거든요.”
미라 연쇄살인사건은 앤디 같은 신참이 감당해내기엔 지나치게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결이었다. 담당했던 사건이 미결로 넘어가면 한동안 마음이 찜찜하고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편이 기분이 조금은 후련했을까? 잘 모르겠다. 범인이 뱀파이어라는 걸 인정하는 것도 그렇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어.”
“진짜 그런 것 같아요.”
미라로 발견된 시체들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걸까? 앤디가 더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배운 걸 다 잊어버릴 필요는 없어.”
터너하고 에쉬는 병원 복도에 선 채로 자판기 커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서 그만 가 봐야 한다며 돌아섰다.
“서에 가는 거야?”
안색도 그렇고,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폼이 둘 다 심한 수면 부족이었다.
“우리 지금 출근하는 길이야.”
터너하고 에쉬는 새벽까지 잠복근무를 하다가 아침에 들어가서 잠깐 눈 붙이고 다시 일하러 뛰쳐나가는 길이었다. 짭새들의 근무 환경이 이렇게 열악하니 내가 휴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일하러 갈 마음이 날 리가 있나?
“범인은 어떤 놈이야?”
“알게 뭐야?”
그래도 용의자 한두 놈 찍어 놓고 장고에 들어간 거면 사건 해결이 멀지 않았거니 싶었는데 터너의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잠복을 한다면서?”
“그 사건 때문에 갱단 간에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야. 피살자 중 한 명이 보스 동생이거든. 요즘은 사건 해결보다 그놈들이 오밤중에 완전무장하고 뛰쳐나가서 다른 놈들 잡아 죽이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게 더 급해.”
반장이 일손 딸린다고 일찍 출근하라고 재촉하는 이유가 슬슬 나온다. 잠이 많이 모자랐는지 에쉬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터너를 잡아끌었다.
“어디 있는 건지는 몰라도 계단 조심하고, 반장이 좋게 말로 할 때 출근해라.”
“상황 봐서…….”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면 얘는 여기 놓고 갈게.”
에쉬가 슬그머니 앤디를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갑자기 등을 떠밀린 앤디가 속이 상해서 에쉬를 노려봤다.
“선배님!”
“아슬아슬해서 그래. 잠복할 때는 심심치 않아서 좋은데, 진짜 전쟁이라도 터지면 그땐 어쩌라고? 너를 끌고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들 수는 없잖아.”
“왜 없어요? 저도 형사라고요!”
앤디는 펄쩍 뛰었지만 나라도 앤디를 끌고 총알 튀는 현장으로 뛰어드는 짓은 안 할 거다. 앤디네 아버지가 옆 동네 청장님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앤디가 가진 분위기 자체가 생사를 같이하는 파트너라기보다는 철없는 막내 동생 쪽에 더 가까웠다. 누구라도 어린 동생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꺼리는 게 당연하다.
“일손이 딸린다면서? 앤디를 여기 놓고 가도 반장이 뭐라고 안 하겠어?”
“반장도 우리가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게 불안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야. 얘가 자기 아빠한테 이른다고 겁만 안 줬으면 벌써 내근으로 돌리고도 남았을걸.”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앤디가 나름대로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에쉬는 누가 뭐래도 오늘은 앤디를 현장에 데리고 나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안됐지만 넌 강력반에 너무 일찍 떨어졌어. 청소년 보호과 같은데서 한 5년 구르다 오면, 그땐 동료로 인정해줄게.”
5년 전엔 에쉬도 다른 놈한테 저런 소리 할 처지가 아니었는데 시간이 참 금방 간다.
에쉬하고 앤디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자 복도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병원 복도에서 떠드는 것도 예의 없는 짓이고, 터너랑 에쉬가 이미 결정을 내렸다면 앤디가 그 틈에 낄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퉁퉁 부어 있는 앤디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하루 이틀은 내가 데리고 있을게. 잠복 끝나면 데리고 가. 니들도 몸조심하고.”
“고마워.”
“고맙긴. 본래 내 파트너였는데 뭐…….”
그렇게 앤디를 떼어낸 두 사람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럼 잘 있으라고 손 흔들고 돌아섰다. 이제 보니 저 두 녀석, 비니 병문안이나 반장의 말을 전하러 온 게 아니라 앤디를 나한테 떠넘기려고 병원에 왔던 거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 걸려서 좀처럼 내려오질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터너와 에쉬의 뒷모습에서 초조한 기미가 살짝 엿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터너와 에쉬가 번갈아가며 나를 돌아봤다. 역시 뭔가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나한테 맡기고 싶은 게 얘 말고 또 있어?”
“아냐.”
터너가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에쉬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고…….
“하지 마.”
터너가 낮게 속삭이며 에쉬를 돌려세웠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텐데 뭐…….”
“하지 말라니까?”
에쉬가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너, 루크 첸 소식 아직 못 들었지?”
첸의 승용차가 습격을 당한 건 오전 일곱 시 경이었다. 사건 발생장소는 차이나타운에 있는 흑풍회 사무실 근처였고, 첸의 출근길을 노린 범행이었다.
차이나타운으로 막 진입하던 복잡한 길목에서 루크 첸이 탄 차와 두 대의 경호 차량을 정체불명의 트럭 석대가 포위했고 트럭에서 뛰어내린 한 무리의 무장괴한들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그 총격전으로 주변에 있던 차량 수십 대와 인근 상가도 피해를 당했고 사상자는 20여 명에 이르렀다. 사건은 발생 직후 쿠간의 모든 뉴스 채널을 장악하며 떠들썩하게 보도됐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사건을 알고 있었는데 나만 까맣게 몰랐다.
“루크 첸의 생사는 아직 몰라. 흑풍회에서도 별 말이 없고, 또…….”
사건 소식 끝에 에쉬가 자기 생각을 덧붙였다.
“또, 뭐?”
“사망자 신원이 다 밝혀지지 않았어.”
소총 뿐 아니라 수류탄까지 동원된 습격은 흡사 특수부대의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특히 집중 사격을 당한 첸의 차량은 화재 끝에 폭발해버려서 차량 안팎에서 발견된 3명의 시신은 육안으로는 신원확인이 불가능했다.
“야, 정신 차려!”
터너가 내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후려갈기며 짜증을 냈다. 나는 괜찮다. 정신도 멀쩡하고…….
요즘 첸의 주변 상황을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차이나타운 내부에 존재하던 반대파들은 콴이란 놈이 아예 나라 밖으로 쫓겨난 이후 더 독이 올랐을 테고, 겉으로는 잠잠했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모종의 반격을 준비 중이었을 거다. 게다가 요즘 들어 쿠간 시 진출 초읽기를 하고 있는 바바라는 백주 대낮의 시가 폭력이 전매특허였다.
오전 일곱 시라…… 내가 그때 뭘 하고 있었지? 녀석은 보통 출근을 그 시간에 했었나?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루크 첸은 괜찮을 거예요. 그 작자는…….”
앤디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는 걸 에쉬가 뒷덜미 잡아서 도로 끌고 갔다.
“확인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릴 해?”
“하지만…….”
“나중에 피해자 가족한테도 이런 식으로 할래?”
“제이 선배가 피해자 가족이에요?”
에쉬한테 말도 안 된다는 투로 깐죽거리던 앤디가 터너한테 뒤통수 한대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우리가 왜 그놈 소식을 이런 기분으로 너한테 전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어.”
터너의 얼굴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괜찮다고 하잖아. 바쁠 텐데 일이나 하러 가.”
“속단하긴 그렇지만, 나도 녀석이 그렇게 맥없이 당했을 것 같지는 않아. 사건 규모에 비해서 차이나타운 분위기도 침착하고, 흑풍회도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그러니까 벌써부터 벽에다 머리라도 갖다 박을 것 같은 얼굴로 허둥거릴 거 없어.”
내가 어떤 얼굴을 하던 내 맘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나 좀 내려두면 안 돼?”
이런 얘기를 계속하다가는 정말 머리를 벽에 박아버리고 말 것 같았다. 터너는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눈치였지만 에쉬가 터너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떠밀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에쉬가 나를 돌아봤다.
“미리부터 낙심할 거 없어, 제이. 검시반에서 결과 나오면 바로 전화할게.”
첸은 평범한 회사원이나 식당 사장 따위가 아니었다. 녀석은 범죄도시 쿠간의 어두운 이면을 틀어쥐고 있는 잔혹한 갱단의 보스였다. 가끔 싱거운 수작을 걸고 태평한 농담을 지껄이고, 낯 뜨거운 장난을 친다고 해서 첸이 착한 남자가 되는 것도, 지금까지 저지른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이 백주에 총격을 당하거나, 폭탄 테러를 당하거나,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에 맞아 죽거나…… 모두 당할 만해서 당하는 일이었다.
“선배님.”
복도에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30분? 한 시간? 앤디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
“아직도 거처를 못 구하셨어요?”
“그건 왜?”
“댁에 가서 쉬셔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입원을 하시거나…….”
에쉬한테서는 아직 전화가 없었다. 폭발로 심하게 훼손된 시체의 신원을 밝히는 건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에쉬의 전화는 아무리 일러도 내일 아침에나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알고 있는데 자꾸만 휴대폰에 눈길이 갔다.
하루 종일 아무한테서도 전화 한 통, 문자 한 건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건 이른 아침이었는데 흑풍회는 왜 그렇게 잠잠한 걸까? 보스의 신변에 변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뭔가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면 놈들은 첸이 대공한테 물려서 근 열흘간이나 생사가 불명일 때도 이런 식으로 침묵을 지켰었다. 그럼 혹시 첸이 그때처럼…….
“제 아파트에 같이 가실래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를 앤디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내가 정신 나간 놈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실제로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놈들의 침묵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놈들이라고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거 기다리다가는 내가 말라 죽을 판이었다.
휴대폰을 움켜쥔 채 어디선가 날아올 날벼락 같은 소식을 기다리는 것도 못해먹을 짓이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시게요?”
당연히 같이 가는 줄 알았는지 앤디도 따라 일어났다.
“넌 여기 있어.”
“선배님도 안 계시는 병원에 제가 왜요?”
“급하게 신변 보호가 필요한 환자가 있어. 내 대신 걔 좀 지키고 있어.”
앤디를 그때까지 기린의 병실에 있던 롭하고 교대시키면서 혹시 발렌타인이 들이닥치면 최선을 다해서 막아보고 혼자 감당이 안 되면 서에 지원을 요청하라고 일러주기는 했는데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은 눈치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렇게 떠밀듯 앤디를 기린의 방에 밀어 넣고 병원을 나왔다.
사건 현장은 청연루에서 세 블록 떨어진 큰길 한복판이었다. 8차선 도로와 주변 인도에 걸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차량이 불타고, 부상자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던 현장은 아직도 폴리스 라인이 둘러쳐져 있었고 차량과 행인의 출입이 부분적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엔 밀리지 않는 날이 1년 중 하루도 없을 정도로 교통량과 통행량이 많은 도로에서 벌어진 총격전이었다. 루크 첸의 차량은 신호 대기에 걸려 멈춰선 불과 몇 분 사이에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트럭에 의해 포위됐고, 방탄차량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집중 사격을 당했다.
현장에 있던 차량은 이미 경찰이 견인해간 다음이었지만 거리에는 아직까지도 타이어와 차량 내장재가 불타서 녹아 붙은 자국이 선명했고, 화약 냄새도 희미하게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아스팔트 바닥 곳곳이 총격에 패여 나갔고 여기저기 핏자국도 선명했다. 이 습격의 목적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습격자들이 원한 것은 첸의 죽음뿐이었다. 경찰의 추적, 시민들의 원성, 이후에 닥칠 조직의 위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건의 동기는 차고 넘쳤다. 돈, 조직 내부의 세력다툼, 외부 갱단의 공격, 사적인 원한…… 경찰이 이 사건의 1차 배후로 지목할 수 있는 사람만으로도 화이트보드가 모자랄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건 사건의 동기나 범인 따위가 아니었다. 첸은 어떻게 됐을까?
“왔어요?”
조직 범죄과 수사관들과 현장 근처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던 쥬드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쥬드를 현장에서 볼 줄은 몰랐다. 규모가 크기는 하지만 쥬드가 관심 갖기엔 너무 빤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응.”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
“안색은 별로네요.”
이 꼴을 보고도 안색이 좋을 정도로 첸이 싫었던 건 아니다.
“사망자 신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쥬드가 ‘아, 그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첸이 차에 타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 같은 건 없을까?”
내 절박한 질문에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불탄 자동차 밑에서 반쯤 녹은 휴대폰이 나왔는데, 첸의 전화기였어요.”
어쩐지 아무리 전화를 해도 신호가 안 가더라니…… 습격자들도 목숨 걸고 벌인 짓인데 그 정도 사전 조사도 없이 습격을 강행하지는 않았을 거다. 보스의 차를 다른 놈이 타고 출근했을 리도 없고…….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이 일곱인데 둘은 불에 심하게 탔고 한명은 얼굴이 완전히 날아갔고, 한명은 후진하는 트럭에 치여서 몸이 다 으깨졌어요. 육안으로 신원 확인이 가능한 사람은 셋뿐이에요.”
“결과는 언제쯤 알 수 있어?”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트럭에 치인 남자는 키가 190cm 정도 되는 백인 남자고 얼굴이 없는 남자는 루크 첸에 비해서 키가 작아요. 그럼 신원 불명의 남자 둘이 남는데…….”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첸에게 오늘은 그냥 평범한 여느 하루와 다를 바 없었을 거다. 이 거리를 지나던 많은 사람들도 그랬을 거고……. 불시에 차량을 에워싼 대형 트럭, 쏟아져 나온 한 무리의 괴한들, 총격, 방화, 생사를 건 추격…… 그 습격으로 오늘 아침 이 거리는 한순간에 전쟁터로 돌변했을 텐데, 그래도 첸 정도면 어떻게든 그 아수라장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
첸은 보기보다 민첩한 편이었다. 대공하고 한판 붙을 때도 몸놀림이나 격투 실력이 제대로 훈련받은 특수부대원처럼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물론 그러다 물려서 죽을 뻔했지만…….
가까이에 있는 신호등에 기대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첸이 말짱하게 현장을 빠져나갔을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막상 이 꼴을 보니까 그러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속이 탔다.
어쩌다 붙은 패싸움도 아니고, 그 많은 무장 괴한들이 작정하고 녀석 하나를 노렸다. 무사할까? 차가 두 동강이 날 정도로 집중포화가 쏟아졌다는데 그 무자비한 습격을 피해서 빠져나갔을까? 그게 가능했을까?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요. 첸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쥬드가 딱하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사건 발생 시각 즈음에 저쪽 뒷길에서 뽑은 지 한 달도 안 된 BMW를 강탈당했다는 신고가 있었어요. 피투성이가 된 남자가 운전자를 끌어내리고 차를 빼앗아 타고 사라졌다는데…….”
“피투성이 남자?”
“그 남자가 루크 첸인 것 같아요. 운전자가 이미 사진을 확인했어요.”
「걱정했어? 나 괜찮아.」
루크 첸으로부터 문자가 날아온 건 쥬드하고 현장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앉은 지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문자를 확인한 순간, 열이 뻗쳐서 휴대폰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뻔했다.
“진정하고 전화기 이리 줘 봐요.”
“뭐하게?”
“전화하게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쥬드가 내 손에서 전화기를 강탈해갔다.
“하지 마!”
“나도 당신 기분 이해해요. 당연히 화 낼만 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열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문자 한줄 달랑 보내는 남자는 거꾸로 매달아도 분이 안 풀리죠. 하지만 루크 첸은 오늘 아침에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은 대형 사건의 핵심인물이에요. 무사하다면 찾아내서 진술도 받고 신변 보호도 해야 돼요.”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 자식 신변을 보호하게?”
내가 아무리 도끼눈을 뜨고 노려봐도 쥬드는 이미 손에 넣은 내 휴대폰을 그냥 돌려줄 마음이 없었다. 쥬드가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딜 다쳤을지도 모르잖아요.”
신호 떨어지자마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첸이 직접 받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근처에 첸 회장님 안 계신가요? 이 번호로 방금 문자를 받았는데요.”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저쪽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소릴 지껄였는지 쥬드가 별 싸가지 없는 놈 다 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흑풍회 애들의 전화 매너가 대부분 그 따위다.
“댁은 누구세요?
쥬드가 전화기에 대고 차분하게 따졌다. 그래 봐야 걔네들은 두목님 찾는 전화 같은 거 호락호락 안 바꿔준다.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아서 쥬드한테서 전화기를 되찾아왔다. 그래도 나는 이 몰상식한 놈들하고 말싸움 끝에 첸하고 통화에 성공한 경험이 한 번 있다.
“두목 바꿔.”
전화기 저편에서 신경질 섞인 남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넌 또 뭐야?」
“니네 두목 남자친구야.”
「…….」
남자가 당황해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뭐야?’ 라고 묻는 희미한 음성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첸의 목소리였다. 순간, 막혔던 숨이 한 번에 트이는 것 같은 안도감이 몰려왔다.
「나야.」
첸이 전화를 넘겨받아서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
「별일 없지? 몸은 좀 어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너는?”
「괜찮아.」
“그럼 됐어.”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녀석이 한마디 지껄일 때마다 뭔가가 속에서 울컥 치미는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고개를 들어보니 쥬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쥬드는 호기심이 발동하기만 하면 캐낼 수 있는 건 다 캐내고 들여다보고 싶은 건 뭐든 들여다본다.
“전화를 왜 그렇게 끊어요?”
쥬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아침에 상황이 어땠는지, 지금은 안전한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지 그랬어요? 걱정을 많이 했잖아요?”
“괜찮대.”
“제이.”
내 속마음 정도 읽는 건 쥬드한테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진심이 어떤 건지 자신도 모를 때 누군가가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건 불쾌하고 수치스럽다.
“나 그만 갈게.”
나와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사건 현장은 아직 다 정리되지 않았지만 차도 쪽은 작업을 서둘러 마쳤는지 차량이 정상적으로 통행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피가 시뻘겋게 말라붙은 보도와 차가 뛰어들어서 반파된 인근 상가에서는 아직도 남은 증거물을 찾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고, 취재 차량도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아침이 되기 전에 나머지 현장도 정리 되겠지. 그리고 사흘 정도 지나면 이 거리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을 거다. 쿠간은 그런 도시다.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퇴근길이라서 도로는 아직 정체가 다 풀리지 않았다. 이 시간쯤엔 온 도시가 다 이렇다. 중심가를 빠져나갈 때까지 택시는 한동안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다들 어딘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니까. 나도 갈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창밖으로 흐르는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인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감기에 걸렸다. 기침이 나거나 콧물이 흐르는 건 아니었지만 머리가 깨질듯 아프고 몸도 무거웠다. 하루 종일 졸리고, 만사 귀찮고…… 하지만 자리를 펴고 누워야 할 정도로 심하게 아픈 건 또 아니라서 이틀째 병원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좋은 병원이니까 이러다 복도에서 주저앉기라도 하면 진료는 제대로 해주겠지. 청구서는 장난 아니겠지만…….
“왜 안 오지?”
기린은 아까 점심 먹고 난 후로 계속 저 소리다. 녀석이 정신을 차린 건 어제 점심 무렵이었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기린 옆에서 아무리 얼쩡거려도 내 감기는 별 차도가 없었다.
“얘기했잖아. 왔었다고…….”
그다지 우호적인 방문은 아니었지만…… 눈 뜨자마자 발렌타인 타령을 하기에 왔다 갔다고만 얘기해줬다. 발렌타인이 소맷자락에 메스를 숨겨가지고 왔었다는 것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틀 전이었잖아. 혹시 증상이 다시 악화된 건 아닐까?”
“아직은 괜찮댔어.”
나도 발렌타인을 직접 본 건 아니다. 발렌타인이 나도 공범으로 찍어서 벼르고 있으니까 그쪽 병동 근처를 함부로 들락거리다간 기린보다 내가 먼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사정으로 어제 저녁에 퇴근하는 크루거 간호사를 붙들고 상태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본 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정체불명의 안개가 암 병동을 뒤덮었던 그날 이후 발렌타인은 암세포 수치가 기적적으로 떨어졌다. 그래 봐야 사경을 헤매는 말기에서 의식은 있는 말기로 살짝 옮겨간 정도였지만 어쨌든 현재는 통증도 많이 줄었고 그 외 다른 경과도 좋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심경은 전보다 부쩍 우울해져서 진료 거부에 기본적으로 공급되는 식염수까지 빼 던지고는 이불 덮어쓰고 홀로 시위에 들어갔다. 두 번이나 그런 몹쓸 짓을 당한데다 경찰에 신고해봐야 소용도 없으니 화병이 났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겠어.”
기린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기린은 발렌타인이 좋고, 또 걱정이 돼서 저러는 거지만 내 눈엔 죽으려고 용쓰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가긴 어딜 가? 그냥 누워 있어.”
“보고 싶어.”
“참아.”
어쨌든 심기 불편한 것 빼고는 컨디션이 전반적으로 좋다니 조만간 한 번 더 쳐들어오기는 하겠지. 되도록이면 좀 천천히, 그리고 빈손으로 왔으면 좋겠다. 또 그렇게 거칠게 들이닥치면 당장은 말릴 기운도 없다.
“당신은 대체 왜 그래?”
발렌타인 보러 간다는 걸 말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입술을 삐죽거리던 기린이 나한테 짜증을 냈다. 주변에 만만한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갈구기로 했나 보다.
“내가 뭐?”
“약 먹은 병아리 같아. 왜 그렇게 비실거려?”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래.”
정신없고, 머리 아프고, 입맛 없고, 이유 없이 짜증만 솟구치고…… 감기 증상이 본래 이런 거였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대로 반나절만 더 지나면 실성을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다.
“감기도 아니고, 겨우 감기 기운 가지고 그렇게 유난을 떠는 거야?”
“너한테 고쳐달란 소리 안 할 테니까 신경 꺼.”
“어차피 감기 같은 건 취급도 안 해. 그냥 약 먹어.”
기린이 투덜거리며 돌아누웠다. 못된 짐승 같으니라고…….
병원에 오래 죽치고 있었던 덕에 안면 튼 의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린을 담당하는 레지던트가 마음도 약하고 물러 보이던데, 그쪽에 부탁해서 감기약이라도 몇 알 얻어먹어야겠다. 마음 같아선 근처 호텔이나 쥬드네 집에 가서 뻗어버리고 싶지만 언제 킬러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 그러기는 어렵고…….
“어디가?”
문 여는 소리에 기린이 고개를 돌렸다.
“밖에. 감기약 구하러.”
기린이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베개를 고쳐 베더니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 그냥 뽀뽀 한번 해줄게.”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이틀째 계속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어서 그런지 기린의 제안이 정말 유혹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잠깐 망설이다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됐어.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잖아.”
이 녀석, 지금 배고프다. 기린이란 건 늑대하고 비슷한 종류일까? 나를 보는 눈빛이 정말 배고픈 늑대의 그것처럼 위태위태했다. 녀석도 지금 컨디션이 바닥이긴 하지만, 십대의 성욕은 본래 컨디션 같은 거 모른다.
“걱정 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난 당신한테 아무 관심 없어.”
저 나이 때 성욕은 관심하고도 상관없다. 그리고 저렇게 입맛을 다시면서 그런 말 해봐야 믿기지도 않는다.
“그냥 약 먹을래.”
정신이 돌아오면서부터 계속 그 생각뿐이었던 걸까? 아니면 좀 전에 발렌타인이 보고 싶다고 하더니 그 생각을 하다가 끓어올랐나?
“겨우 키스 한 번 갖고 뭘 그래?”
기린이 털썩 자리에 누우면서 경우 없이 짜증을 냈다. 기린 입장에서야 아무 의미도 없는 키스겠지만 나는 아주 절박한 사정 없이는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10대 애녀석하고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
“전에 말했잖아. 그런 건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라고.”
“나도 그러고 싶은데 당신이 못 만나게 막고 있잖아!”
지금 만나러 가면 발렌타인이 ‘어서 오세요’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반겨주기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인데, 굉장히 위험한 착각이다. 기린이 발렌타인에게 한 짓은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명구조였지만 부정적으로 보자면 중한 범죄였고 발렌타인은 이제 그 건에 대해서는 재판도 필요 없다는 입장이다.
“정말 보고 싶단 말이야.”
“나도 보고 싶은 사람은 많아. 하지만 여기서 아무 느낌도 없는 니 얼굴만 쳐다보고 있잖아. 인생이 본래 그런 거야.”
흑풍회 대변인이 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사건이 일어난 지 만 하루가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첸이 참고인 진술을 위해 직접 경찰서에 출두하는 모습이 매스컴을 탔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말짱한 모습이었고 그런 일이 일어나서 본인도 무척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둥, 사건의 전모가 빨리 밝혀지기는 원한다는 둥 빤한 인터뷰를 할 때도 침착하고 여유가 있어서 바로 전날 출근길에 테러를 당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목하고 왼손에 붕대를 감고 있기는 했지만 저 정도 부상으로 끝난 게 어디냐 싶어서 안도감도 들었고, 걱정 괜히 했다는 생각에 허탈하기도 했다. 그 잘난 문자 한줄, 서너 시간만 일찍 보내줬어도 그 걱정은 안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도 못하게 괘씸하고 미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 다시 만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인간들은 다 그렇게 살아?”
“다는 아니겠지.”
아마도…….
“후졌어.”
기린이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인생이 막장으로 떨어지는 건 순간이다. 안 된 얘기지만 죽을 병 걸린 킬러한테 첫눈에 꽂혀서 이렇게 궁상떨고 있는 걸 보면 기린도 인생을 우아하게 살기는 틀렸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얌전하게 누워 있어. 멋대로 나돌아 다니지 말고…….”
머리가 아팠다. 기린하고 쓸데없는 말싸움을 벌여서 그런가…… 아침보다 두통이 부쩍 심해진다 싶더니 복도로 나와서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엘리베이터까지 남은 10여 미터가 아득히 멀게 느껴질 정도로…….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신경 쓰면서 복도를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아주 잠시였지만 두통도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지금 막 의사랑 환자, 방문객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는데 그중에 발렌타인이 끼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컨디션 최악일 때 최악의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발렌타인을 어떻게 달래지? 달랠 방법이란 게 있긴 있을까?
발렌타인도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표정이 살벌하고도 싸늘했다. 시간이 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발렌타인은 전혀 화가 안 풀렸다.
“왔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일단 인사를 했다.
“몸은 좀 어때?”
“최악이야.”
짧게 대꾸하면서 발렌타인이 나를 싹 지나쳐 갔다.
“저기…….”
허겁지겁 뒤쫓아 가서 발렌타인을 잡아 세웠다. 나도 컨디션이 안 좋고 발렌타인도 겨우 걸음이나 떼는 처지라 복도에서 붙들고 뿌리치고 실랑이 벌이다가 둘 다 주저앉을 뻔했다.
“뭐하는 거야?”
넘어질 듯 비틀거리다 벽을 짚고 간신히 중심을 잡은 발렌타인이 벌컥 화를 냈다.
“좀…… 걱정이 돼서.”
급한 대로 소맷자락부터 털어봤는데 무기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허리춤이나 발목에 무기를 숨겼을지도 모른다.
“니 일이나 걱정해!”
사람 무안할 정도로 냉랭하게 쏘아붙이면서 발렌타인이 기린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우거지상을 하고 누워 있던 기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발렌타인을 보고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헤벌쭉 웃는 걸 보니까 불쌍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마음이 말도 못하게 짠했다.
기세 좋게 방안으로 밀고 들어간 발렌타인이 기린을 보고 주춤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손봐주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상대가 저렇게 웃으면서 반겨주면, 게다가 옛 애인하고 꼭 닮은 얼굴로…….
“넌 나가 있어.”
발렌타인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뒤따라 들어가는 나를 막아섰다.
“그렇게는 못 하겠어.”
킬러하고 강간범이 한 방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 터져도 곧 터질 거다. 그런데 경찰보고 나가 있으라니, 어림도 없다. 발렌타인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틈에 기린이 침대에서 내려와서 발렌타인의 팔을 덥석 잡았다.
“당신…….”
갑작스런 기린의 습격에 발렌타인이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건드리지 마!”
“나 보려고 온 거 아냐?”
천진하고 뻔뻔한 기린의 태도에 발렌타인이 잠시 말을 잊고 뻐끔거렸다. 발렌타인이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른 척 하는 건지 나도 헷갈린다. 첫 번째 강간 사건 때는 사고치는 중에 들통이 나서 바로 경찰서로 끌려가는 바람에 발렌타인과 솔직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을 테고, 두 번째 이후로는 오늘 처음 만나는 거니까…… 모를 수도 있는 걸까?
“몸은 어때? 통증이 심하지는 않아?”
기린이 말을 건네며 발렌타인 쪽으로 슬슬 다가왔다. 당황한 발렌타인이 내 멱살을 잡아다 엄폐물 삼아서 앞에 세웠다. 복도에서는 그렇게 살기등등하더니 막상 기린과 맞닥뜨리니까 기세가 한풀 죽었다고 해야 되나? 조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확실히 해두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성질 같아선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참겠어.”
발렌타인의 강경한 태도와 말투에 기린이 주춤해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야단맞는 어린애를 보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멍석 깔아주고 떠밀어서 그렇게 된 거니까 나도 책임감을 느낀다.
“너, 두 번 다시 나한테 그런 짓 하지 마!”
내가 발렌타인한테 기린하고 얘기를 해보라고 한 건 서로 잘 지내면서 살 길을 찾아보라는 뜻이었지, 이렇게 단칼에 잘라내고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란 뜻이 아니었다.
“한번만 더 내 몸에 손대면, 그땐 정말 죽을 줄 알아! 그때는 니가 왜 죽는지 가르쳐줄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말해두는 거야. 내 말 허투로 듣지 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고 싶어서 안달을 하던 남자가 들이닥쳐서 저렇게 퍼부어대니까 기린은 당연히 풀이 죽었다. 하지만 기린이 어른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는 아니라서 발렌타인의 엄중한 경고가 전혀 먹히질 않았다.
“내가 한 일을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좋고 싫은 게 그렇게 중요해? 덕분에 지금 살아 있잖아?”
“살려달라고 내가 너한테 매달리기라도 했어?”
언쟁 중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슬슬 과격해졌다. 발렌타인은 기린이 강간범 주제에 양심의 가책도 없는데다 자기 말에 토 달고 따지는 게 마음에 안 들고, 기린은 다시는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는 발렌타인의 경고에 이성을 잃었다.
“그럼 당신이 죽어가는 걸 그냥 구경만 하란 말이야?”
“맞아.”
“그렇게는 못하겠어!”
발렌타인이 잠시 헐떡거렸다. 호흡곤란이 온 것 같은데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지, 기린 때문에 기가 막힌 건지 그건 모르겠고…….
“왜 못해?”
“이유를 알고 싶어?”
“이유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있어?”
“당신이 죽는 게 싫어.”
기린의 시무룩하고 심플한 대꾸 때문에 발렌타인의 호흡곤란이 더 심해졌다.
“인간은 죽으면 그만이야. 그 후엔 아무것도 없어.”
“내가 원하는 상태가 딱 그거야.”
기린이 발렌타인의 앙상한 팔을 움켜잡았다. 기린은 이제 연약한 척이고 뭐고 없었다. 발렌타인이 매력을 못 느껴도 어쩔 수 없다. 저게 녀석의 본모습이다. 그리고 지금 드러난 기린의 모습은 평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거칠어 보였다.
“거짓말 하지 마. 그런 걸 누가 원해?”
“놔!”
발렌타인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잡힌 팔을 비틀어 뺐다. 그리고는 그 앙상한 손으로 기린을 한대 갈겼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기린이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죽든 살든 내가 결정할 일이야! 니가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뭔데 그런 걸 결정해?”
기린이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면서 발렌타인에게 따졌다. 말투는 차갑지만 눈에선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어딘지 냉엄함까지 느껴지는 기린의 기세에 발렌타인이 움찔했다. 녀석 제법이다. 초식동물 주제에…….
“내 목숨이야!”
“그러니까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말문이 막힌 발렌타인이 기린을 한 대 더 갈기려고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기린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발렌타인도 본래 완력이 약한 편은 아니었겠지만 지금은 힘자랑 할 때가 아니다. 지금 이 방에 있는 세 사람 중에 컨디션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발렌타인은 그중에서도 단연 최악이었다.
기린의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려고 용을 쓰던 발렌타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제풀에 쓰러졌는데, 그 방향이 하필이면 기린의 가슴팍이었다. 품안에 뛰어든 발렌타인을 기린이 덥석 끌어안았다.
“이거 안 놔?”
발렌타인이 헐떡거리며 기린을 밀쳤다. 하지만 기운도 없고 기세도 한풀 꺾인 아저씨의 신경질적인 한마디에 순순히 물러설 만큼 기린이 말랑한 녀석은 아니라서…….
기린이 한 손으로 발렌타인의 두 손목을 꼼짝도 못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발렌타인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발렌타인은 지금 기절 직전이었다. 전성기의 체력과 실력만 믿고 기린과 담판을 지으려고 힘들게 먼 길 찾아왔다가 일이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꼬여버렸으니 기분은 안 좋겠지만, 이런 반응은 너무 오버다.
살다 보면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 정도는 발렌타인도 잘 알 거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지켜본 발렌타인은 어쩔 수 없는 일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남자였다. 물론 강간 사건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발렌타인은 몇 년이나 전쟁터를 떠돌면서 강간보다 심한 일도 많이 겪은 질기고 무서운 남자였다. 이렇게 화내고 당황하는 거 솔직히 안 어울린다. 당할 일은 당해주고 기회를 만들어서 조용히 복수하는 게 발렌타인의 방식이다.
내가 기린의 병실을 비우지 못하고 계속 붙어 있었던 것도 발렌타인이 조용히 들이닥쳐서 애를 잡을까 겁이 나서 그랬었던 건데, 이렇게 허둥거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신경 끄고 호텔 찾아서 잠이나 잘 걸 그랬다.
“손 치워!”
발렌타인이 기린의 손길을 피해 고개를 틀었다. 발렌타인은 내 취향도 아닌데 지금 이런 태도와 표정은 내 눈에도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그러니 한눈에 뻑이 가버린 기린은 오죽하랴. 계속 저렇게 귀엽게 굴면 발렌타인은 본인이 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될 거다.
발렌타인이 거칠게 몸부림을 쳤다. 기린을 떼어내려고 그런 게 아니라 갑작스런 호흡곤란 때문에 발작을 일으켰다.
의사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발렌타인은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호흡에 문제가 있었다.
“너…… 어디 가…….”
병실 문을 막 나서는데 발렌타인이 숨을 쥐어짜며 다급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의사 부르러.”
그때 기린이 발렌타인을 찍어 누르고 입을 맞췄다. 발렌타인이 가는 경련을 일으키다 완전히 늘어져버릴 정도로 깊은 키스였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너무 인정사정없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 즈음에 기린이 발렌타인에게서 입을 뗐다. 동시에 발렌타인이 기침을 하면서 깊은 숨을 토해냈다. 의사는 필요 없겠다.
“그렇게 구경만 하고 서 있지 말고, 이 자식 좀 어떻게 해봐.”
간신히 숨을 돌린 발렌타인이 기린을 밀어내려고 버둥거리다가 힘이 부치자 나한테 신경질을 냈다. 발렌타인은 지금 겁먹었다. 기린이 자기를 옴짝달싹 못하게 찍어 누르고 있는데다 일이 키스 한번으로 마무리될 리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부탁하는 거야?”
“야!!”
“의사 불러올게.”
“너…… 잠깐만…….”
기린한테 깔린 채 버둥거리면서 내 뒤통수에 욕을 퍼붓는 발렌타인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발렌타인은 내가 같이 있어줬으면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남자 둘이 그러는 거 옆에서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
공중 정원에 나가서 반 갑 조금 넘게 남아 있던 담배를 줄줄이 태워 없앴다. 최근 들어 기분이 좋은 날은 없었지만 오늘따라 더 그랬다. 발렌타인의 등장으로 긴장했던 탓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두통이 두 배는 심해진 느낌이었다.
다음 주 정도엔 복귀를 할까? 아니면 한 주일 정도 여행이라도 갔다 올까? 최근에 그런 적이 별로 없었지만 전엔 가끔 혼자서 여행을 다니곤 했었다. 니콜라스가 체포되고, 위니가 떠난 후부터…… 휴가나 명절이 낀 긴 휴일에 혼자 캠핑을 가기도 하고 별로 볼 것도 없는 이웃 도시를 일없이 돌아다니기도 했었는데, 혼자 보내는 긴 휴가가 조금은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떠났던 여행이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줬던 적은 별로 없었다.
나는 사는 게 힘들고 지겨워서 이제 그만 끝을 보고 싶어 하는 발렌타인의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안다. 사는 동안에는 살려고 애써야 된다는 둥, 두 번째 사랑이 뭐가 나쁘냐는 둥…… 내가 그동안 발렌타인에게 했던 충고는 실은 오래전에 나 자신을 타이르느라 밤새 되뇌었던 말이었다. 발렌타인이 내 충고를 귓등으로도 안 듣고 비웃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빤한 소리가 나 자신에게 위로가 됐던 적도 거의 없었으니까.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고, 그대로 주저앉아서 내가 사랑했던 연쇄살인범을 원망하거나, 불행하고 불운했던 아내를 떠올리며 자책하는 대신 뭔가 다른 일을 하면 상처도 빨리 아물고 죄책감도 희미해질 줄 알았다. 고작 니콜라스 같은 연쇄살인범에게 휘말려서 실패한 경찰, 실패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오기도 있었다. 그런 확실치 않은 믿음 하나로 의미도 없이 먼 길을 떠났다가 녹초가 돼서 아무도 없는 작은 아파트로 돌아오는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었다. 하지만 이젠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정원에서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다 안으로 들어왔다. 기린의 병실에선 아직도 희미한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린이야 하루 종일이라도 그러고 싶을 나이지만 발렌타인은 좀 고달프겠다. 그러니까 스무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건가? 어린 연인이라…… 체력은 딸리겠지만 뭐, 좋은 점도 있겠지.
발렌타인과 기린이 방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병실을 지나쳐 비니 방으로 갔다. 폭발 사고의 충격 때문에 기린은 비니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 고개부터 가로저었다. 비니 몬티첼리라는 이름의 머리글자만 떠올려도 온몸의 솜털이 빳빳하게 일어서는 그 심정은 나도 잘 안다. 게다가 기린은 비니 징크스 중에서도 심한 축에 속하는 봉변을 당했다. 그렇게 격렬한 폭발은 비니와 10년째 친구로 지낸 나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 폭발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꽤 여러 번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기린에게서는 비니와 관련된 일에 대해 더는 성의를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기린은 이제 비니 근처에 얼씬거릴 마음도 없었다. 얼씬은 커녕 내가 비니 이름만 들먹여도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을 정도로 반응이 싸늘했다.
비니가 언제쯤 일어나겠느냐는 내 질문에도 자기는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까 비니를 깨우고 싶으면 엉덩이라도 한번 걷어차 보라는 버르장머리 없는 대꾸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정말 한번 걷어차면 비니가 일어날까? 지금 얼굴만 봐서는 그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하지만 몇 달째 의식 없이 누워만 있는 친구를 발로 차는 건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라서 그냥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비니는 혼자 있을 때가 별로 없는데 지금은 어쩐 일인지 방이 비었다.
죄책감과 절망이라…… 델 파소가 그렇게 무너져 내린 건 물론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고 사상자가 여럿 발생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정도로 죄책감을 느낄 일이었나? 살아남는 것 이외의 일은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누구라도 비니 같았을 거다. 그럴 능력만 있었다면…….
“야.”
금방이라도 뒤척이며 돌아누울 것 같은데…… 졸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면서 응? 하고 대꾸를 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야 비니는 미동도 없었고 때마침 불어 닥친 거센 바람에 창문만 한번 덜컹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사건은 니 잘못이 아니야. 물론 니가 지금까지 나쁜 짓을 아주 안 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 상대로 이렇게 주절거리는 게 쑥스럽고 정신 나간 짓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벽에 대고라도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냥 돌아왔으면 좋겠어. 너도 죽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냐?”
비니가 누운 침대 발치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러니까 대강하고 그만 돌아와. 지친다. 정말…….”
휴대폰이 울렸다. 간호사가 비니 상태를 체크하려고 들어오는 바람에 얼른 눈물 훔치고 뒤로 물러서 있을 때였다. 발신자 불명의 수상한 전화였다.
「뭐해?」
재수 없는 놈.
“아무것도 안 해.”
「아직도 화났어?」
이런 전화, 지금은 위험하다. 괜히 받았다.
“나한테 전화하지 마.”
「화났구나.」
“나, 너 싫어. 정말이야.”
「지금 병원이야? 내가 갈까?」
“니가 여길 왜 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비니 체온을 확인하던 간호사가 깜짝 놀랐다. 일단 복도로 나왔다. 첸하고 통화하는 동안엔 언제라도 언성은 높아질 수 있으니까…….
「나도 좀 다쳤거든. 치료도 받고 너도 만나고, 겸사겸사…….」
인터뷰할 때 멀쩡해 보이기는 했지만 첸은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귀신같은 놈이라도 그 아수라장에서 아주 말짱하게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 거다.
“많이 다쳤어?”
「총알이 목덜미를 스쳤어.」
이번엔 운이 좋았다, 하지만 그 운라는 게 얼마나 갈까? 이 자식이 길바닥에서 비명횡사하는 건 시간문제다.
첸은 적이 너무 많았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남은 조직, 쿠간 시 입성 초읽기를 하고 있는 바바라 소사 패밀리, 그리고 조직 내부의 반대 세력까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첸에게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아군이라는 게 있긴 한 걸까?
“야…….”
「루크라고 불러. 그럴 때도 됐잖아.」
악마 같은 놈. 이런 식으로 그 많은 여자들을 꼬드겨서 결국 쿠간 시 최고의 바람둥이란 타이틀을 얻었겠지.
“시끄러.”
「지금 갈게.」
“다른 병원에 가. 여기와도 나, 너 안 만나.”
「너…… 괜찮아?」
괜찮은 게 어떤 건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
「좀 울먹거리는 것 같아서 말이야.」
“끊어.”
하마터면 첸한테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상처는 어느 정도인지, 달리 다친 곳은 없는지…… 보고 싶다는 말이 튀어 나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마땅히 정한 목적지도 없이 병원을 나왔다. 점심 무렵부터 바람 불고 컴컴하고, 날씨가 어수선하더라니…… 비 온다. 가뜩이나 기분도 엿 같은데 날씨까지 이러냐? 기린하고 발렌타인 사이가 급진전 된 이상 기린 옆에서 새우잠 잘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간만에 허리 펴고 잠이나 편하게 잘까 해서 나온 건데 가랑비도 아니고 소나기도 아니고…… 사람 기분 바닥에 처박기 딱 좋을 만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니 그냥 돌아 들어가고만 싶었다.
보통 때야 비가 오든 천둥 번개가 내리치든 아무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분이 바닥일 때는 빗소리도 달갑지 않고, 온 몸이 젖어드는 것 같은 이런 습기도 싫었다. 싫다고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꼭 이런 식으로 타이밍을 맞춰야 되나? 병원으로 돌아가기도 싫어서 일단 택시를 타기는 했는데…….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옷이라도 갈아입으려면 쥬드네 집으로 가야겠지만 마리우스가 와 있으면 완전 민폐였다. 나는 쥬드가 마리우스한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둘 다 성인이고 남녀문제다. 근처에 괜찮은 호텔이 어디더라?
“차이나타운…… 아니…….”
혼자 놀라서 도리질을 치자 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어딘가 갈 만한 곳이 있을 거다. 차이나타운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텐데…….
“손님?”
속 깊은 곳으로부터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뭐 이렇게 맘대로 되는 일이 없는지…….
“차이나타운이요.”
기와를 따라 흘러 떨어지는 낙수, 물기를 흠뻑 머금은 돌담, 황색 가로등과 뒤섞여 아련한 빛을 빚어내고 있는 홍등…… 비에 젖은 차이나타운의 구시가엔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정취가 있었다. 몇 번이나 왔었던 곳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청연루와 그 주변을 둘러싼 시가지의 풍경이 마치 물에 젖어서 번져버린 옛날 그림 같았다.
뭔가가 내 이성을 마비시켰다.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오고가는데 정작 마음은 아무 느낌도 없이 얼얼할 뿐이었다.
빗속에 서서 잠시 첸의 성을 올려다봤다. 내 자신이 어리석은 충동에 이끌려 불빛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화각이 어디더라…… 청연루엔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호텔 쪽으론 가본 적이 없어서 골목길을 조금 헤맸다. 골목길을 돌아들어 개울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는 사이 온몸이 비에 흠뻑 젖었다. 결국 골목길에서 마주친 직원한테 방향을 물어서야 겨우 찾아낸 우화각은 청연루에 딸린 세 개의 호텔 건물 중 제일 구석에 숨어 있는 아담한 4층 건물이었다.
여기, 예전에 내가 청연루에서 이상한 중국 술 마시고 뻗었을 때 하룻밤 잤던 거기다. 그럼 특실이란 게 그 방인가?
첸이 이 시간에 여기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혹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이런 시기에 한가롭게 자기 호텔 특실에서 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갈아 들었다.
제일 위층은 객실이 하나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자개장식이 가득한 화려한 문이 나타났다. 들어갈까? 그냥 갈까? 비에 젖은 몸이 식어서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저 비싼 호텔방에서 하룻밤 공짜로 자고 나가는 것뿐이지만, 이렇게 드나들기 시작하면 녀석을 만날 때까지 이런저런 핑계를 만들어가면서 계속 이런 짓을 하게 될 거다.
한참을 망설이다 카드키를 넣었다. 그런데, 뭐 이래? 키가 안 먹혔다. 이 건물이 아닌가? 두세 번 카드키를 넣어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몇 번 더 키를 넣다 뺐다 하다가 신경질이 나서 뒤로 물러섰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이런 상태로는 오면 안 되는 곳이고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냥 돌아가면 이번 실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지 아쉬워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뭐해?”
첸의 태도는 그냥 그랬다. 올 줄 알았다는 듯…… 기다리고 있었는데 너 좀 늦었다는 투였다. 목을 다친 건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오른팔에도 팔꿈치 아래부터 손등까지 붕대를 감고 있었다.
“키가 안 들어가.”
“거꾸로 들고 있잖아.”
아…….
“들어와.”
첸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첸이 젖은 내 옷을 벗겼다. 그리고 차게 식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어깨에 이마를 잠깐 기댔다.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왜 이럴까? 일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젖었어?”
첸이 내 얼굴의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물었다.
“비가 와서…….”
“넌 하고 다니는 게 왜 이렇게 다…….”
첸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뭐?”
“조심성이 없어.”
그런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니가 할 소리야?”
내 퉁명스런 대꾸에 첸이 소리 없이 웃으며 다시 나를 끌어안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주며 첸이 내 입술에, 어깨에, 가슴에 만 번 정도 입을 맞춘 것 같다. 녀석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몸이 움찔거릴 정도로 뜨거웠고, 그대로 낙인이 되어 몸에 새겨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만 좀 떨어. 내가 널 잡아 먹냐?”
남의 배에 얼굴을 묻고 스테이크 씹듯 쩝쩝거리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잡아먹는 거 아니라지만 지금 이 포지션은 딱 맹수한테 뜯어 먹히는 사냥감이다.
“추워서 그래.”
“아직도 그렇게 추워?”
녀석이 내 턱을 잡아서 눈을 맞췄다. 녀석의 얼굴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낯설었다.
“좀…… 그래.”
내 기어들어가는 대답에 녀석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기 셔츠를 벗어던지며 자신만만하게 지껄였다.
“있어 봐. 금방 따뜻하게 해줄게.”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제법 컸다. 좀 전까지 내리던 가랑비가 이젠 제법 폭우로 변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침실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창문 때문에 마치 빗속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온 세상에 내리는 비를 혼자 다 맞고 있는 것처럼,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한기가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첸이 키스와 부드러운 손길로 잔뜩 웅크린 내 몸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녀석의 손이 바지 벨트를 풀고 안으로 파고들었을 때는 당혹감 때문에 몸이 움찔했지만, 그뿐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지락거리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나를 태산 같은 무게로 내리 누르고 있는 건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이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나를 짓누르는 건 오랜 시간 혼자서 빗속을 헤매 다닌 것 같은 쓸쓸함과 피곤함이다.
“괜찮겠어?”
녀석이 정복자처럼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괜찮아.”
“처음이라 좀 아플 거야.”
“처음 아니야.”
녀석의 잘난 척에 빈정이 상해서 나도 잘난 척을 좀 했다. 말하는 순간 실수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녀석이 내 다리를 함부로 잡아 벌리며 경고라도 하듯 낮게 투덜거렸다.
“처음처럼 느껴질 거야.”
녀석이 천천히 내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그 이질감, 압박감, 그리고 거부감이 각오했던 것 이상이었다. 이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나한테 무슨 일이 닥치든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둘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사이 고개를 저으며 녀석을 밀어내고 있었다.
“아파…….”
하지만 첸은 이 정도로 하던 짓을 그만둘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녀석이 침대에 내 팔을 잡아 눌렀다. 더 이상은 녀석을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녀석은 그 이상,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와서 나를 뒤흔들었다.
“아…….”
“말했지? 넌 어차피 나한테 오게 돼 있다고.”
“아파. 조금만…….”
녀석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녀석은 바위처럼 나를 짓누른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참아. 곧 익숙해질 테니까.”
당하는 입장에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한테 이런 섹스는 익숙해지거나, 즐길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참고 견뎌야 하는 일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런 남자하고 사랑을 나눌 때 느끼는 죄책감에 비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또 아무것도 아니었다.
첸이 키스를 하고 온 몸을 어루만지면서 뻣뻣하게 굳은 내 몸을 달랬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녀석의 체온과 뭔가 소중한 것을 쓰다듬는 것 같은 손길에 마음의 한기가 조금씩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서글프긴 하지만, 이제는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이 녀석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아직도 추워?”
녀석이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는 첸의 손을 잡아서 입을 맞췄다.
녀석이 내 안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책감도 그대로였고 고통도 여전했지만, 녀석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빗소리, 세상이 온통 빗소리뿐이었다.
(9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