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1화 (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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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빈 잔에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향기로운 풀 냄새가 서늘한 방안에 가득 퍼졌다. 무심코 찻잔을 집어 들었다가 벌써 차를 두 잔이나 마셨다는 게 생각나서 그냥 내려놨다. 찻잔 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거슬릴 정도로 방안 공기가 무거웠다.

“의식이 돌아왔었던 건 확실해요?”

마리아 첸이 입을 열었다. 첸이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을 집사로부터 전해 듣고 이 방에 와서 그 상태를 살펴본 다음…… 어둡고 싸늘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은 지 10여 분만에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방안 공기가 이렇게 썰렁한 건 연못 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실은 마리아가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냉기 때문이다.

첸은 모기 소리만 하게 ‘괜찮아……’ 한마디를 지껄이고는 다시 정신을 놨다. 괜찮기는 개뿔……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마리아 첸이 저렇게 심기 불편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남편이 정신 차렸다는 소식에 기대를 잔뜩 하고 달려왔을 텐데, 막상 남편이란 녀석은 정신 차렸던 흔적도 없이 저렇게 누워 있으니 속이 타는 게 당연했다.

“분명히 의식이 돌아왔었습니다. 말씀도 하셨고…….”

집사가 대답했다.

“뭐라고 했는데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둘러대면서 집사가 나를 힐끔 노려보는데, 솔직히 눈치가 많이 보였다.

“숙부님 댁에 소식을 알릴까요?”

집사가 물었다.

“무슨 소식을요?”

마리아 첸이 소파에 몸을 깊이 파묻으며 언짢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회장님이 깨어나셨다는 걸 숙부님과 사촌오빠들도 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아 첸이 남편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를 볼 때는 냉랭하기만 하던 얼굴에 여러 가지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걱정, 노여움, 안타까움, 그리고 또 걱정…….

“눈 한번 떴다가 도로 감은 건 깨어난 걸로 볼 수 없어요. 오빠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 그리고 나는 이런 시기에 내 집에 콴 오빠를 불러들이고 싶지 않아요.”

“콴 사장을 의심하시는군요?”

“의심할 만한 사람이 달리 있나요?”

집사를 보는 마리아 첸의 눈길이 부쩍 날카로웠다. 이젠 분위기가 냉랭한 정도가 아니라 추웠다. 좀 있으면 얼음도 얼겠다.

“저는 이탈리아 마피아들 쪽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특히 리즐 시의 여 두목이 이쪽을 기웃거린다는 말이 있더군요.”

“사흘 전에 청연루에서 그 소란을 피운 건 이탈리아인들이 아니었을 텐데요?”

“그건…… 말 그대로 사소한 소란이었을 뿐입니다. 식당에서 취객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마리아 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흑풍회 원로들을 따로 만나고 다니면서 순수한 중국인 혈통 운운하는 사람도 이탈리아인들의 대부는 아니죠. 바깥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바보 취급하지 마세요.”

차이나타운이 관할도 아니고, 주 종목이 조직범죄도 아니라서 나는 첸씨 집안 가족사에 관해서 잘은 모른다. 하지만 오가는 말 중에 사촌 오빠 얘기가 뻔질나게 나오는 걸로 보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러니까…… 지금 차이나타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는 순전히 집안싸움이란 얘기였다.

대문 앞에 둘러친 저 거창한 바리 케이트가 일가친척 방지용이었다니…… 정말 잘 돌아가는 집구석이다. 집안사람이 다쳐서 생사불명인 채 누워 있으면 이유야 어찌 되었든 먼저 안부를 묻고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젊은 회장의 컨디션 안 좋다는 소문 퍼지기가 무섭게 대문을 때려 부수고 쳐들어올 궁리라니…… 첸, 저 자식은 어쩌다 이런 집구석에 장가를 들었을꼬?

그런 생각하면서 멍하니 첸을 쳐다보다가 집사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다. 마리아 첸이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심히 언짢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마리아 첸이 얼른 고개를 돌렸고, 나도 별로 볼 것도 없는 창밖을 쳐다봤다.

“어쨌든…… 루크가 회복되면 콴 오빠는 그 일에 관해서 해명을 해야 할 거예요.”

“흑풍회 수장 자리를 믿을 만한 중국인이 승계해야 한다는 건 콴 사장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것도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고…… 그런 정황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회장님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저 집사란 사람이 보통 때도 안주인 말에 저렇게 꼬박꼬박 토를 달 만큼 발언권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주인이 누워 있는 틈에 건방을 떨고 있는 건지, 그런 건 모르겠다. 주인 내외가 워낙 젊다 보니 집 안팎의 연장자들이 이런 식으로 간섭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마리아 첸도 전 회장 외동딸에 현 회장 부인인 만큼 태도가 만만치 않았다.

“루크가 믿을 만한 중국인이 아닌 건 유감이지만, 어쨌든 그건 루크가 흑풍회 수장을 승계했을 때 이미 다 끝난 얘기예요.”

마리아 첸이 집사를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며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마리아 첸이 눈을 반쯤 내리 깔고 뭔가 생각에 잠겼다. 집사도 더 이상은 안주인 말에 토를 달며 가르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살벌한 말싸움은 일단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을 정도로 무겁고 불편한 침묵이 방안 공기를 내리 눌렀다. 마리아 첸과 집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불편했다. 그만 가보겠다고 하고 일어나야 되는데 안주인이 저렇게 얼음처럼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 말도 못 붙이겠고……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첸이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시선이 갔다.

분명히 정신을 차렸었는데, 나를 알아보고 말까지 했었는데…….

“몸이 많이 불편한가 봐요. 안색이 안 좋네요.”

마리아 첸이 갑자기 말을 붙이는 바람에 놀라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 예…… 좀…….”

내 안색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거슬리니까 이제 그만 꺼지라는 의미였다. 어차피 오래 있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손님을 현관까지 안내하고 내 차를 내 드리세요.”

내가 일어나자 마리아 첸이 기다렸다는 듯 집사에게 지시를 했다. 집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은 뭐 그렇게까지 할 거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차는 됐습니다. 집 앞에서 택시를 타면…….”

“집 앞엔 택시가 안 다녀요.”

하긴…… 길 끝에 위치한 저택이라 일 없이 택시가 다닐 리 없고, 혹시 있다고 해도 집 앞에 차려 놓은 그 살벌한 바리케이트를 보면 오다가도 도망갈 거다.

“별로 호의랄 것도 없으니까 내 말대로 하세요. 연유야 어찌 되었든 남편의 손님을 박대하는 안주인이란 뒷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마리아 첸이 한층 더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젠 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썰렁한 방에 첸을 두고 돌아서는 걸음이 정말 무거웠다. 여긴 첸의 집이고, 여자는 첸의 아내인데 마치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집에 녀석을 버리고 나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안쓰러웠다. 주제넘은 걱정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결국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첸 회장이 이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콴이란 자가 집안에 들이닥치면…… 회장이 위험해지는 겁니까?”

돌아서서 마리아 첸에게 물었다. 집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 팔을 잡아끌었지만 그냥 뿌리쳤다. 다행히 집사는 안주인이 보는 앞에서 내 팔을 잡아 비틀지는 않았다.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친구로서 신경 쓰입니다. 그리고 쿠간 시 경찰로써 그런 일을 구경만 하지는 않겠습니다.”

“루크의 안전이 걱정되나요?”

조폭 두목이란 본래부터 어느 정도 위험은 각오하면서 사는 인생이다. 보통 때라면 걱정은 개뿔…… 누구한테 호락호락 당할 놈도 아니지만 혹시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해도 인생을 그렇게 살아온 본인 탓이고 책임이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으면 어떤 일을 당하든 저 녀석 걱정 같은 건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방비한 상태에서 누군가 첸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건 얘기가 달랐다.

“회장이 혼수상태에 있는 동안 누군가 집안에 침입해서 회장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리고 집안에 그런 상황을 막을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다면 당연히 걱정을 해야죠.”

“이건 집안일이에요. 외부인이 간섭할 일도, 걱정할 일도 아니에요.”

차이나타운 사람들은 본래부터 집안일하고 형사 사건을 구별하는 능력이 다른 동네 사람들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너무들 한다.

“무단 침입에 살인 미수, 혹은 살인은 집안일 따위가 아니라 명백하게 형사 사건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 경찰에 신고하죠. 그럼 되나요?”

“남편이 죽어도 아무 상관없다면 그렇게 하시든가요!”

말투가 하도 밉살맞아서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해놓고 보니 남편이 근 열흘이나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 그 부인한테 할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기 때문에 뻘쭘하게 서서 뭔가 더 독한 말 펀치가 날아오길 기다렸다.

마리아 첸이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빈 잔이었다. 마리아 첸이 침울한 표정을 더는 감추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역시…… 말이 너무 심했나 보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누구한테도 좋을 게 없는 건 사실이에요. 특히 루크한테는 그렇죠.”

얼음처럼 차갑던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졌다. 비록 깊은 상심일망정 감정이 나타난 마리아 첸의 얼굴은 훨씬 더 인간적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자택이 위험하다면 남편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어디로요? 어떻게요?”

마리아 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엔 측근 몇 명만 동원하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은데…….

“나는 남편의 수하들 중 누굴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적으로 신임할 만한 측근이 한 명 있긴 하지만, 그 사람도 지금은 상태가 안 좋아요.”

누구 얘기를 하는지 대강 알 것 같고, 나도 마지막으로 봤던 자오의 모습이 떠올라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뭐냐? 흑풍회 수장이라면 수하가 줄잡아 천 명은 족히 넘을 텐데, 믿을 만한 인간이 달랑 자오 하나라니 이런 것도 조직이냐?

뭔가 얘기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마리아 첸이 내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봤다. 그간 수많은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얻은 경험상…… 저러면 말문은 금방 열린다. 마리아 첸도 남편이 저렇게 된 이후로는 속을 털어 놓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어서 답답했었던 게 틀림없다.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해요. 외부인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죠. 고용인이건, 일가친척이건 다들 한두 군데 이상은 외부에 연줄이 있고, 그 외부인들도 누가 적이고, 친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입장이 급속도로 바뀌어요. 이 집안엔 비밀이 없어요. 루크가 아침에 차를 마셨는지, 커피를 마셨는지, 커피를 마셨으면 설탕은 몇 스푼이나 넣었는지까지 외부 유력자들에게 알려지죠. 그날 점심때가 지나기도 전에요.”

말하면서 마리아 첸이 집사에게 마땅치 않은 시선을 던졌다. 집안 첩자 1순위가 누군지 알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였다가 콴 오빠나 다른 유력자들한테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루크는 이 집 대문을 나서자마자 죽어요.”

좀 전에 털고 일어났던 의자에 도로 앉았다. 기운 없어서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실은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어디 좀 누웠으면 좋겠다. 명색이 노회장의 양자겸, 사위겸, 흑풍회 수장이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자리 보존하고 누운 지 몇 달이나 지났으면 말도 안 한다. 이제 겨우 열흘 남짓 지났을 뿐인데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집에서 죽든가, 길에서 죽든가 둘 중 하나라니…….

루크 첸이라고 하면 세간에는 여자 꼬시는 기술 하나로 차이나타운을 통째로 집어삼킨 뻔뻔하고 팔자 늘어진 악당, 제비, 한량 정도로 알려져 있고, 최근까지는 나도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속사정을 알면 알수록 유서 깊은 조폭 가문의 외동딸하고 결혼한 남자 팔자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죄송하지만, 저 차 한 잔만 더 주실래요?”

차 한 잔 더 달라는 요구에 집사가 하…… 요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차 한 잔을 더 얻어 마실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끌려 나갈 지는 전적으로 마리아 첸의 결정에 달렸다. 어쩔까 잠깐 망설이던 마리아 첸이…….

“내 것도 한 잔 더 부탁해요.”

라고 말하며 찻잔을 집사 쪽으로 밀었다.

“그만 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보아하니 병원에서 멋대로 나온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도 기운이 급격히 떨어지고 으실으실 추워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컨디션이 문제가 아니다.

“상황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남편의 적들이 왜 당장 밀고 들어오지 않는 겁니까? 기다려 봐야 본인들한테 이로울 게 없을 텐데요.”

“흑풍회는 계파가 많은 조직이에요. 혈연과 지연에다 이권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히니까 무슨 일이든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아요.”

그렇게 수박 겉핥기식으로 얘기하면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콴 오빠가 루크를 제거하고 흑풍회를 접수하는 일에 장 대인 일파가 반대 의사를 밝혔어요. 장 대인 세력이 흑풍회 조직원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재력은 거의 반이죠. 장 대인의 묵인 없이 루크를 해치면 콴 오빠는 후에 장 대인 일파와 전쟁을 벌여야 되는데, 그건 콴 오빠한테도 큰 부담이거든요. 차이나타운에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일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 자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져요.”

흑풍회 세력 30%에 재력은 반을 차지하고 있는 일파가 첸을 지원하고 있는 거라면 지지 세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럼 장 대인 일파는 저 녀석…… 아니, 남편 쪽 사람들인가요?”

“장 대인은 내 외삼촌이에요.”

든든한 처족이 있다는 건 일단 마음 놓이는 일이다. 하지만 녀석이 지금까지 몰고 다닌 그 수많은 스캔들을 생각하면 글쎄…… 처가 식구들 눈에 쟤가 그렇게 곱게만 보일까?

“지금도 외삼촌을 만나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 시간을 벌고 있는 셈이죠. 이번에 루크가 어려운 일을 직접 나서서 처리한 공이 있으니까 외삼촌도 전보다는 루크에게 호의를 보이고 계세요. 하지만 콴 오빠가 외삼촌을 만나서 루크가 보장하는 것보다 더 괜찮은 이권을 약속한다면 외삼촌은 언제라도 입장을 바꿀 수 있어요.”

정말…… 알면 알수록 정 떨어지는 집구석이다.

첸, 저 자식은 조직을 장악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아예 끼어들질 말았어야지 어정쩡해가지고……. 답답한 마음에 다시 일어나서 침대로 다가갔다. 지금 이렇게 누워서 버틸 때야? 처지가 이 따위면 알아서 몸을 사렸어야지, 대공인지 뱀파이언지 그놈을 잡아줘 봐야 고마워하는 인간도 하나 없는데 공연히 나서서 설치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슬쩍 흔들어봤지만 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눈을 떴었는데…… 마음이 조급해져서 좀 더 세게 흔들었다. 그러다 마침 차를 들고 돌아온 집사한테 딱 걸렸다.

“그러지 말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의식이 없는 사람을 그렇게 흔들면 위험합니다.”

집사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어린애 야단치듯 나를 나무랐다. 마음 같아선 찬물이라도 한 컵 갖다 부어 봤으면 좋겠는데 와이프랑 집사가 버티고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차나 드시죠. 타고 가실 차는 현관 앞에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집사한테 질질 끌려서 다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차도 마시기 싫고 병원으로 돌아가기도 싫다.

“남편 분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첸의 아내한테 하기는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도저히 걸음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첸의 주변 상황이 이렇게까지 개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리아 첸이 나를 빤히, 그리고 오랫동안 쳐다봤다.

“전 남편하고 그렇게 이상한 사이가 아닙니다.”

“얼마나 이상해야 진짜 이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이상해요.”

“…….”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언제 이 집 대문이 터져나가고 콴인지 뭔지 하는 처사촌이 밀고 들어와서 첸을 죽일지도 모른다는데 이대로 병원으로 돌아가서 진통제에 취해 잠이나 잘 수는 없다. 첸이랑 내가 어떤 사이냐 하는 사소한 문제는 잠깐 덮어두면 안 될까? 마리아 첸의 쿨한 표정을 보면 그렇게 해줄 것도 같은데…….

“이런 상황에선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게 나을 텐데요.”

“그렇겠죠.”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마리아 첸을 쳐다봤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그래도 안 되겠어요.”

“왜요?”

이렇게 따질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당신 몸 상태가 그다지 미덥지 않아요. 당장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몸이 언제 이렇게 옆으로 기울었을까?

“저 보기보다는 상태 괜찮거든요…….”

얼른 고쳐 앉으며 거의 사정을 했다. 하지만 마리아 첸은 싸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루크 하나 신경 쓰기에도 벅차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세요.”

결국 집사한테 끌려서 방에서 나왔다. 마리아 첸을 매정하다고 원망하기도 힘든 게…… 몸이 안 좋은 건 사실이었다. 이 상태로는 당장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도움은커녕 오히려 짐이다. 알지만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첸은 질기고 운이 좋은 놈이다. 하지만 운이라는 건 언젠가 반드시 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의식도 없이 누워 있는 상태에서 적들이 사방에서 목숨을 노리고 몰려든다면 운 같은 건 기대할 수도 없다.

결국 현관까지도 다 못 가고 복도에서 주저앉았다. 잠깐 걸었을 뿐인데 온 몸이 땀에 푹 젖었다. 병원에서 나올 때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문 앞에서 그 머저리들하고 티격태격한 게 무리였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 끌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일어나시죠.”

집사가 신경질을 내면서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 집사를 많이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집사는 처음이다.

“놔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집사를 뿌리치고 휘청거리다가 하마터면 옆에 놓인 화병을 깨뜨릴 뻔했다. 바로 옆에 있는 방에서 누군가가 나오다가 잡아주지 않았으면 가격이 얼만지 가늠도 못할 정도로 크고 화려한 화병은 박살이 났을 거고, 나는 집사 손에 멱살을 잡혀서 끌려 나갔을 거다.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든가…….

“언제 왔어?”

화병을 바로 세우고 나서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가 누구더라…… 아, 용이다.

용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스타일도 말끔하고 혈색도 좋고…… 평범한 청바지에 셔츠일망정 입고 있는 옷도 멋졌다. 어디로 봐도 용은 훤칠하고 인상 좋은 평범한 젊은이였다. 이 정도라면 사회 생활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을 거고, 곧 여자친구도 생길 거다. 어디 가서 자기 입으로 용이란 소리만 안 하면…….

“야! 이거 갖고 가.”

좀 전에 용이 나온 방에서 덩치 큰 대머리가 따라 나오더니 세숫대야만한 바구니를 안겨줬다. 안엔 튀긴 닭다리가 하나 가득이었다.

“고마워.”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응. 일단 이거면 됐어.”

용은 집안 고용인, 혹은 조직원들하고도 잘 지내는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은 별로 안 들지만. 용이 바구니에 가득한 닭다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한번 보고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어딜 다친 거야?”

“일하다가 좀…….”

정신이 없다 보니 그동안 용하고 기린을 깜빡하고 있었다. 여기 오래 두면 나쁜 물 금방 들 텐데…… 게다가 이 집은 현재 화약고나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나가는 게 급한 게 아니라 얘하고 기린을 내보내야 된다.

“많이 아픈 것 같은데…….”

머리가 아파서 비틀거리자 용이 얼른 한 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나하고 용을 지켜보던 집사가 중간에 끼어서 나를 끌어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자넨 들어가서 닭튀김이나 먹지 그래? 늘 하던 대로 말이야.”

사람을 함부로 밀고 당기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왜 먹는 거 갖고 타박이냐? 얘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나하고는 달리 용은 집사가 못된 계모처럼 구는 게 전혀 신경이 안 쓰이는 것 같았다. 용이 고리눈을 해 가지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집사한테 통닭 바구니를 턱 갖다 안겼다. 그리고…….

“무리해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잠깐 쉬는 편이 낫겠어요. 별채로 데려갈게요.”

라고 말하면서 나를 번쩍 안았다.

또 열이 오르는지 으슬으슬 춥고 어지러웠다. 몸에 와 닿는 바깥 바람도 좀 전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래도 마음은 한결 놓였다. 잘하면 여기서 며칠 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별채에 박혀 있으면 마리아 첸하고 얼굴 마주칠 일도 없을 거고…… 용, 이 녀석 밥만 많이 먹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쓸 만하다. 타이밍 딱 좋게 나타나주고, 맘에 안 드는 집사도 싹 뭉개 버리고…….

“기린은?”

“몰라. 마당 어딘가에서 풀이라도 뜯고 있겠지.”

용의 말투가 어째 좀 퉁명스러웠다.

“싸웠어?”

“아니.”

아니다. 뭔가 있다.

“왜 그래? 둘이 사이 좋았었잖아?”

“싸운 거 아니라니까.”

청소년기엔 친구끼리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는 게 일상다반사다. 용이랑 기린처럼 노상 붙어 다니는 놈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얘기는 천천히 하고 일단 내리려고 몸을 비틀었다. 별채까지는 꼬불꼬불한 언덕길 넘어서 10분인데, 내도록 이렇게 갈 수는 없으니까…… 아까 집사 앞에서야 그럴 필요가 있어서 잠자코 들려 나왔지만, 별채까지 이렇게 가면 용도 뻗을 거다.

“왜?”

“걸어갈 수 있어.”

“괜찮아.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그냥 가.”

이렇게 친절하게 나오니까 되게 겸연쩍었다. 그동안 용하고 기린한테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는데…… 잘해주기는커녕 비니하고 한통속이 돼서 몇 달이나 정신병원에 가둬 놓기도 했었고, 기린을 한대 쥐어박은 적도 있었다.

“야, 잠깐…….”

언덕 중간쯤에 있는 작은 소나무 숲 어귀에서 용을 세웠다.

“또 왜?”

“저기 소나무 그늘에 엎어져 있는 게 기린 맞지?”

아무리 봐도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왜 저런 데 저렇게 웅크리고 있을까? 청승맞게…….

“모른 척하고 그냥 가. 저 녀석, 요즘 신경이 바짝 곤두섰어.”

“왜?”

“몰라.”

애가 저러고 있는데 어른 된 입장에서 모른 척하고 그냥 갈 수가 있나? 저렇게 밖에서 뒹굴어도 될 만큼 오늘 날씨가 맑고 화창한 것도 아니고……

녀석은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게 아니라면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은 지금 온 몸으로 ‘나 힘들어’ 라고 외치고 있었다. 청소년 고민 상담은 자신 없지만 한번 시도해보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잘못하면 들이 받히거나 물릴지도 모른다고 만류하는 용을 뒤에 두고 기린에게 다가갔다. 꽤 오래 한자리에 누워 있었는지 주변에 새파란 풀이 종아리까지 수북하게 올라와 있고 이름 모를 들꽃도 많이 피어 있었다. 영 적응이 안 될 것 같더니 이런 것도 이젠 그냥 그런가 보다 싶다.

“뭐야?”

나를 발견한 기린의 반응이 까칠했다. 반갑게 맞아줄 거라곤 기대도 안 했지만 자식, 성깔하고는…….

“여기서 뭐해?”

“아무것도 안 해.”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기린이 다시 돌아누웠다. 말대꾸하기도 귀찮다는 투였다. 나도 더는 서 있기 힘들어서 기린 옆에 주저앉았다. 이상하다. 왜 옆에만 앉아 있어도 아픈 게 조금은 덜한 느낌이 들까? 이 근처만 공기가 유독 따뜻하고 풀 냄새가 향기로워서 그런 걸까?

기린은 그냥 누워 뒹굴게 버려두고 풀숲 사이에 피어 있는 노란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단할까? 한 고비 넘었다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닥치고, 한 놈 잊을 만하면 또 다른 놈이 불쑥 나타나고…… 그런데 그놈도 그렇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놈은 아니고…….

몸 아픈 것도 힘들고 첸이 지금 처한 상황도 답답했다. 게다가 마리아 첸을 직접 만나고 보니 막연히 아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하곤 느낌이 많이 달랐다. 언제쯤 되면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더 이상은 상처받지 않게 될까? 이런 일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갈 때마다 아직은 너무 아프다.

“왜 그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린이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럼 아무 데로나 가버려. 신경 쓰여.”

싫다. 그나마 여기 있으니까 아픈 게 좀 낫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그래서 기린 옆에 나도 길게 누웠다. 좀 떨어진 곳에서 용이 머리카락 날리며 서 있는 걸 보니 날이 갑자기 따뜻해진 건 아니고, 여기만 봄날인 게 틀림없었다.

“에잇…….”

내가 누워서 버티자 기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냥 일어나서 갈까 봐 얼른 기린을 잡았다.

“고민이 뭐야? 형한테 얘기 해봐.”

“무슨 상관이야?”

말투는 사나웠지만 다행히 기린은 나를 들이받거나 물어뜯지는 않았다. 그냥 쌩하니 일어나서 언덕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갔을 뿐이었다. 상관없으면 관둬라. 나도 남의 고민 따위 꼬치꼬치 캐는 취미 같은 건 없으니까…….

기린이 가버리자 바람은 금세 싸늘해졌고 이파리에서 빛이 날 정도로 싱싱하던 풀도 생기를 잃었으며, 코끝에 알싸하던 풀 향기도 바람에 씻은 듯 날려 가버렸다. 좀 전의 온기가 아무래도 아쉬워서 조금 더 누워서 버텨 봤지만 그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다. 풀잎이 빠른 속도로 노랗게 시들어 가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잠시 잠깐의 눈속임 같은 훈풍으로 지금의 이 고단함이 가실 리도 없는데…….

용이 다가와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걸을 수 있겠어?”

“응.”

잠깐 누워서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별채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이 저택 본채에서 별채 가는 길은 웬만한 산책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분위기 좋은 오솔길이었다. 조폭 두목 저택 뒷마당에 있다는 게 탈이긴 하지만 길은 정말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았던 거야?”

“한…… 2, 3일 된 것 같아.”

“2, 3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별일 없었어.”

“잘 생각해봐. 대부분의 일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니까 기린이 저렇게 뿔이 오른 데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사흘 전에 병원에 갔었어.”

“병원? 겐지 클리닉?”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네들끼리 병원에도 다니고…… 의외로 성실하네?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뭐, 별로…….”

용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용한테는 아무 일도 아닌 게 기린한테만 별일이었겠지. 흔히 있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빼 놓지 말고 얘기 해봐. 생각은 내가 할 테니까.”

용하고 기린은 이 저택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집주인의 정식 손님 자격으로 집안에서 가장 번쩍거리는 별채도 당당하게 차지했고,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하지 않게 대주라는 지시에 따라 눈칫밥일망정 입에 맞는 음식 배부르게 먹어가면서 급할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태평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용하고 기린은 첸과는 명백한 계약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기린이 비니의 혼을 찾아주는 일이나, 첸이 용과 기린을 행방이 묘연한 현자와 만나게 해주는 일엔 꼭 언제까지라고 정한 기한이 없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흐르는 게 비니 주변 사람들한테는 피가 마르는 일이지만 용하고 기린이야 아쉬울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그래서 둘은 본채를 드나들면서 친구 사귀고, 이런 저런 나쁜 짓도 배우고, 오늘처럼 주방 들락거리면서 냉장고나 털어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집안에만 있기도 답답하고 심심하면 시내 구경도 할 겸 병원에도 가고…… 둘이 가장 최근에 병원에 갔었던 건 사흘 전이었다.

“안됐지만 당신 친구는 잠이 점점 깊어지고 있어. 뭐 되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야. 저절로 제정신 돌아오긴 힘들겠어.”

기린 덕인지, 기운 탓인지 잠시 좋아졌던 컨디션이 비니 소식에 급격히 떨어졌다. 어떻게 된 게 요즘은 뭐 하나 좋은 일이 없냐?

“좋은 소식이 그것뿐이야?”

용이 이마를 긁적거리며 사흘 전 일을 되짚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남자 병실에 잠깐 들렀었어.”

그 남자라니?

“잠깐 들러볼 곳이 있다고 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갔었는데 그 남자 방이더라고.”

“어떤 남자 말이야?”

“전에 잠깐 봤었던…… 비쩍 마르고, 빨간 하트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던 그…….”

그럼 발렌타인인데…….

“거긴 왜?”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야 하이네랑 꼭 닮은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발렌타인 근처에 얼씬거리기까지 하면 그림이 너무 무섭다. 내가 죽였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는 기분,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른다.

“나야 모르지. 가자고 해서 갔던 것뿐이야.”

“그 아저씨하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일은 무슨…… 문만 살짝 열어 보고 그대로 돌아섰어.”

“왜?”

“누가 벌써 안에 있더라고. 여자였는데…… 그 남자랑 한창 키스 중이던걸.”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자 용이 나를 돌아봤다.

“방을 잘못 찾아갔던 거 아냐?”

발렌타인은 요즘 여자랑 놀아날 형편이 못 된다. 다 죽어가면서 그새 여자친구를 새로 만들었을 리도 만무하고…… 그럴 기운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년 전에 비명횡사한 남자친구가 아직도 사무치게 그리워서 가끔 우는 처지에 웬 여자? 게다가 웬 키스? 뭔가 잘못 본 걸 거다.

“어쨌든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그게 다야. 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는데…….”

말하다 말고 용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어이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럼 저 자식이 그 남자 때문에 저러는 거야?”

기린은 별채에 있었다. 지가 삐져서 어디로 숨어봐야 별채 아니면 본채, 아니면 정원 구석이었다. 침대에 이불을 꽁꽁 싸매고 누워 있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 진짜 뒤숭숭했다. 저렇게 생긴 애들은 발렌타인 같은 남자가 취향인 걸까? 꼭 그거라는 확증은 없지만 기린하고 꼭 닮은 남자가 예전에 발렌타인하고 어떤 사이였는지에 관해서 보고 들은 게 있다 보니 우선 그런 쪽이 의심스러웠다.

“야.”

침대 옆구리에 앉아서 기린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살짝 손만 얹었을 뿐인데 손바닥이 파스를 붙인 것처럼 후끈했다. 기린이 비니를 깨울 능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붙어 있으면 최소한 근육통은 확 풀릴 것 같았다.

“밥은 먹었어?”

본래 하려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지만 발렌타인한테 관심 있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할까 무서워서…….

“가만 좀 냅둬. 귀찮아…….”

기린이 어깨에 붙어 있는 내 손을 손가락 끝으로 밀어 치우고 이불을 아예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기린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보다 훨씬 더 분명한 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본래 사춘기 소년의 고민이란 깊고 복잡한 것 같아도 본질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성적과 여자…… 때론 남자. 하지만 지금이 기말 고사 기간도 아니니까 기린이 저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대체 언제부터 일이 그렇게 된 걸까? 둘이 연애라도 했나? 기린이랑 발렌타인은 만날 시간도 얼마 없었을 거고,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요즘 발렌타인은 그럴 정신이 없었을 텐데…….

“야.”

조용히 부르자 기린이 엎드린 채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렸다. 이불 틈새로 보이는 눈동자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 때문에 짜증이 잔뜩 난 십대의 눈빛 그 자체였다.

발렌타인에게 뭔가 매력적인 분위기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지적인가 하면 야만적이고, 강인한가 하면 한없이 나약하고, 신경질적인가 하면 세상사 따위는 달관이라도 한 듯 담담하기도 하고…… 물론 건강이 요즘 같지 않을 때 얘기지만, 잠시 스쳐만 지나가도 인상이 깊은 건 사실이었다.

경찰서에 팬클럽까지 거느리고 있을 정도니까 기린의 취향이 유별나게 독특한 것도 아니다.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남자에게 끌릴 수도 있겠지. 마음이 꼭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상대가 안 좋다. 시기는 더욱 안 좋고.

“그 아저씨한테는 신경 꺼.”

“신경 쓴 적 없어.”

“내 말 허술하게 듣지 마. 그 사람은 많이 아파.”

“알아.”

“알면 됐어.”

십대들은 아침에 화르륵 달아올랐다가 그날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데 정신이 팔리곤 한다. 발렌타인이 부추긴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몇 번 마주친 걸로 혼자 들떠서 이러는 거면 마음이 식는 것도 빠를 거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린의 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여긴 또 왜 이래?”

기린이 내 옷섶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본래 기린은 자기하고 상관없는 일엔 무심한 놈이다. 내 몸 상태가 안 좋은 걸 이제 알았다는 투다. 아니면 아는 척 할 기분이 들었던지…….

“총에 맞았어.”

“어쩌다가?”

곤란한 질문이다. 아니, 질문 자체는 곤란할 게 없는데 대답하기가 좀 그렇다. 하지만 길게 늘어 놓기도 귀찮아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뱀파이어 잡다가.”

“아…….”

반응이 쿨하네.

“물린 데는 없고?”

“응.”

피곤해서 기린 옆에 누웠다. 내가 물린 건 아니지만 뱀파이어한테 물려서 생사불명인 어떤 놈 때문에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았다.

“많이 아파?”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기린이 물었다.

“좀…… 그래.”

기껏 물어 놓고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기린이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인사치레를 하긴 했지만 사실 기린이 내 건강에 크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었다. 얘는 지금 자기 고민만으로도 머리 터진다. 그런 기분은 나도 잘 안다. 요즘 내 머릿속이 늘 그러니까.

기린 옆에 길게 누웠다. 눈을 감으니까 첸이 생각났다. 사실은 지난 며칠간 한시도 녀석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 그놈이 내 마음을 다 차지한 걸까? 이젠 더 이상 생각하기도 지겨운데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회오리바람이라도 일으킬 듯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기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입을 맞추는 건 어떤 기분이야?”

“한 번도 안 해봤어?”

“응.”

발렌타인이 첫사랑인가 보다. 하필이면…….

“좋아. 굉장히…….”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기린이 내게 턱…… 입을 맞췄다. 내 대답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 같았다. 야밤에 19금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10대답게 기린의 키스는 길고 난폭하고 서툴렀다.

“별론데?”

거의 5분 만에 내 입에서 떨어진 기린이 투덜거렸다. 나도 썩 좋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야지.”

“그런 거야?”

기린이 입술을 문질러 닦고는 털썩 누웠다.

“너무 실망하지 마. 언젠가는 너도 진짜 키스를 하게 될 테니까.”

성질만 좀 고치면…….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그럼 몇 시간이나 잔 거지? 방안이 대낮처럼 환해서 처음엔 날이 이미 밝은 줄 알았다.

불이란 불은 다 밝혀 놓고, TV까지 켜 놓은 채 용은 소파에 쓰러져서 자고 있었다. 기린은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서 자는 중인데 꿈속에서도 기분이 안 좋은지 표정이 시무룩했다. 애들 하고 있는 걸 봐도 그렇고, 이 집안 돌아가는 형편을 생각하면 더 그렇고…… 당장이라도 거처를 옮겨야겠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나도 당분간은 병원 신세라서…… 아, 병원!

생각해보니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나와서 이 시간까지 연락도 안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걱정할 사람도 별로 없었다. 물론 환자가 없어졌으니까 간호사들이 찾아다니긴 하겠지만…… 돌아가면 데릭한테 잔소리는 좀 듣겠지. 그리고 앤디한테도……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어나긴 이른 시간이라서 한잠 더 잘까 했지만 눈 감자마자 미라처럼 비쩍 마른 첸의 얼굴이 떠올라서 얼른 눈을 떴다.

잠이 더 올 것 같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뭔가 다른 일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그래봐야 비니, 아니면 니콜라스, 아니면 도살장 같던 백화점 로비…… 빌어먹을! 뭔가 좋은 기억이 없을까? 아주 예전의 기억이라도 좋으니까 아무 거나…….

문득 아까 기린한테 당했던 키스가 생각났다. 기린이 나를 찍어 누르고 입을 맞출 때, 태연한 척 했지만 속으론 덜덜 떨었다. 기린은 먼발치에서 봐도 엘리야 하이네랑 많이 닮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진짜 비슷하게 생겼다. 그 음산한 얼굴에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코앞에서 얼굴 마주보고 키스를 해도 괜찮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솔직히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하지만 그 느낌이 아직 입술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걸까? 뜬금없이 누군가와 키스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살벌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키스 말고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는 기분 좋은…… 진짜 키스를 하고 싶었다.

한동안 그런 생각에 시달리다가 신경질이 나서 벌떡 일어났다. 모조리 잡생각뿐이다. 키스는 무슨 얼어 죽을…… 이런 때 그렇게 한가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도 한심하고, 그런 거 할 만 한 상대가 중국계 조폭 두목뿐인데다 그놈이 지금 성치도 않다는 건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 비참했다. 돌기 전에 세수나 하고 정신 차려야겠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손끝이 퉁퉁 불 정도로 오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지도, 마음이 가벼워지지도 않았다. 키스를 하고 싶다던가, 사람의 체온이 그립다든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괜히 기린한테 자극 받아서 그런 거니까 이런 기분은 금방 가라앉을 거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냥 인생 자체가 다 문제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을 하기는커녕 마리아 첸의 눈에 띌까 무서워서 별채 구석에 숨어 있는 신세라니…… 차라리 여기 오질 말 걸, 이게 뭐냐? 첸, 그 망할 자식 때문에 나만 정신 나간 놈이 됐다.

마음만 더 무거워진 채로 욕조에서 일어났다. 산책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아…… 술이 있었지. 테라스 옆에 홈 바가 있으니까 술 몇 병 정도는 있을 거다. 기왕이면 독한 술이 있었으면 좋겠다. 마시고 뻗어버리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 쪽으로 다가가다가 거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서 한동안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뭐가 잘못된 건지 얼른 떠오르질 않았다. 대신 전에도 한번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아주 강력하게 들 뿐이었다. 이게 단순한 기시감일까? 아니다. 전에도 분명히 이런 적이 있었다. 이 욕실에서 꼭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서 바로 이 거울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그때는 무슨 문제가 있었지?

생각나는 건 ‘몸매 감상 하냐?’라고 빈정거리는 첸의 목소리하고 욕실 문 옆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녀석의 얼굴뿐이었다.

갑자기 그때 얼굴이 그린 듯 선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그날 아침엔 짜증이 날 정도로 얄밉게 보였던 얼굴이 기억 속에선 터무니없이 섹시하고 아름답고 귀엽고…… 뇌가 피곤에 쩔어서 그런 걸까?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 말도 안 되는 미화와 왜곡은 다 뭐냐?

더 이상한 생각이 날까 무서워서 바지만 주워 입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최대 속도로 거실을 가로질러 홈바로 다가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셔야지 맨 정신으론 못 버티겠다.

홈바로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불과 몇 주 전의 일인데 장검을 뽑아 들고 신경질 내면서 놈을 쫓아다니던 그때가 그래도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다니, 사는 게 뭐 이러냐?

술이…… 없다. 전면 유리에 용을 조각한 화려한 장식장엔 항상 대여섯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고 전에 첸이 여기서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봤는데, 어찌된 일인지 장식장이고 바 아래 선반이고 간에 텅텅 비어 있었다. 그 많던 술이 어디로 갔을까? 그새 누가 다 먹었나? 바로 그때 소파에 누워 자던 용이 음…… 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눕다가 소파 아래로 톡 떨어졌다. 저 자식!

고개를 돌려서 용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래 봐야 내 눈만 아프지 녀석은 소파에서 떨어지고도 까딱없이 잘 잔다. 자는 걸 깨워서 족칠 수도 없고, 그런다고 이미 없어진 술이 나올 것도 아니고…… 진짜 너무 하네. 청소년 주제에 그 독한 술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다 털어 먹다니. 한 놈은 사자처럼, 또 한 놈은 코끼리처럼 먹어 제끼는데, 이젠 그것도 모자라서 술까지 퍼 마시면 여기서 쟤네들을 데리고 나간다고 해도 뒷감당을 어떻게 하냐? 내 월급 가지고는 저 두 녀석의 사료 값도 못 댈 거다.

혹시 마시다 남은 맥주라도 한 병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이번엔 냉장고를 열었다. 하지만 있는 거라곤 생수 한 병, 오렌지 주스…… 그것도 병 바닥에 살짝 깔려 있는…… 그거 외에 먹을 거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보통은 유통기한 지난 우유라든가, 말라비틀어진 피자라도 한 조각 떨어져 있는 게 냉장고 본연의 모습이거늘 이 냉장고에는 최근에 음식이 들락거린 흔적조차 없었다. 먹다 남아서 냉장고까지 들어올 음식이 없었던 거다.

기운 빠져서 냉장고 앞에 대자로 누웠다. 술이라도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그것도 없으니까 짜증나고, 서럽고, 외롭고…… 엉망진창이었다. 밤바람이 거센지 창문이 한번 크게 흔들렸다. 고개를 돌려서 창 쪽을 쳐다봤다. 정원을 밝힌 등도 다 꺼져서 밖은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하루 중에 제일 어두운 시간이었다.

언제부터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까? 기분이 폭삭 내려앉기는 했지만 감정이 격해지거나 흥분한 건 아닌데 눈물이 마치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펑펑 솟더니 도무지 그치질 않았다. 어째서 사랑 같은 걸 하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나 남는 건 상처뿐인데……

고통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온통 사람들의 얼굴뿐이었다. 한때 사랑했지만 하나씩 떠나 버린 사람들의 그리운 얼굴이 좀처럼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다 젖고 바닥이 축축해지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눈물이 흘렀다.

어느새 창밖이 어슴푸레했다. 한없이 흐를 것 같던 눈물은 이제 그쳤다. 그건 좋은데 이젠 눈이 따끔따끔했다. 일어나 앉아서 벽에 걸린 거울을 보니 눈이 탱탱 부었다.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심하게…… 10대 여자애도 아닌데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다니, 사람이 이렇게 미쳐 가는구나 싶어서 한심했다.

냉장고에 기대앉아서 창밖으로 날이 밝아오는 걸 멍하니 쳐다봤다.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복직을 해야겠다. 일에 시달리는 편이 낫지, 이런 상태는 더 못 견디겠다. 언제쯤 퇴원이 가능할까? 몸 상태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매양 제자리라 언제쯤 병원 신세를 면할 수 있을지 가늠도 하기 힘들었다.

어깨 관통이라도 총상은 총상이니까 앞으로 최소한 2주는 더 걸리겠지. 2주라…… 너무 길다. 지금 같아선 단 이틀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갑갑한 마음이 들어서 어깨를 주무르다가 손을 멈췄다. 아까 욕실을 나오다가 느꼈던 그……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찜찜함의 원인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깨가 안 아프다.

내가 꿈을 꾸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몰라서 눈을 잠깐 감았다가 다시 떴다. 기린이 돌아눕느라 뒤척거린 걸 빼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날이 조금 더 밝아졌고, 용은 소파 아래서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이번엔 셔츠를 다 벗고 어깨를 살펴봤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상처는 많이 아물어 있었다. 씻은 듯이 나은 건 아니지만 상처 부위가 벌겋게 부은 정도였다.

총상이 나은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게 마냥 좋아만 할 일인가? 대체 왜 이렇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못 견디게 쑤시고 조금만 움직임이 커도 벌어져서 피가 흐르던 중상이었는데…… 돌겠네. 진짜…….

나는 본래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처가 빨리 아무는 체질이었다. 전엔 잘 몰랐는데, 최근 몇 년간 비니 파트너 노릇을 하면서 다칠 일이 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진 탓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보통 타박상 정도는 사나흘, 현장에서 범인과 몸싸움을 심하게 한 경우라도 한 주일이면 털고 일어났다. 이번처럼 총에 맞은 경우는 아무리 재수 없는 나라도 드문 일이라서 비교할 만한 사례가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런 식으로 낫는 건 반갑지 않다. 반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섭다.

어깨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전에도 한번 이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하룻밤 자고 나니까 뻐근했던 몸이 말짱해지고 여기저기 들었던 멍이 싹 없어졌었다. 지금 이건 거기에 갖다 댈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한 상황이지만…… 두 사건 사이엔 뭔가 연관이 있지 않을까? 부상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단 시간 내에 극적으로 나았던 건 아니니까. 그때도 이 방에서 잤었다. 저 침대에서…… 혹시 침대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자는 기린을 밀어내고 침대를 다 뒤집었다. 하지만 평범한 이불이고, 평범한 매트리스고, 그저 평범한 나무 침대일 뿐이었다. 물론 모두 다 상당히 고가의 제품이긴 하겠지만 어느 것 하나 기적의 치료약으로 의심되는 물건은 없었다. 하다못해 베갯잇까지 벗겨봤지만 흔해빠진 깃털만 잔뜩이었다.

“뭐야?”

자다가 봉변을 당한 기린이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며 버럭 화를 냈다.

“더 자.”

“자고 있는데 당신이 굴렸잖아!”

“미안해.”

하긴, 침대 때문에 이렇게 됐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게 전치 4주짜리 총상을 하룻밤 만에 낫게 하는 기적의 침대라면 흑풍회가 이걸로 돈을 벌지, 왜 잡다한 나쁜 짓에 그렇게 열을 올리겠나?

“뭐냐고?”

기린이 침대를 돌아와서 내 앞에 버티고 섰다. 미안하긴 한데, 지금은 머릿속이 한창 바쁘다. 침대가 아니면 뭘까? 목욕탕? 목욕물? 아니다. 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붕대를 다 풀어버리고 들어갔었다. 딴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몰랐던 거지 상처는 그때 이미 아물었던 거다.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몸이 씻은 듯이 낫는 초능력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 거면 입원한 그날로 털고 일어났어야지 열흘이나 지나고 나서 이럴 리가 없는데……

“야!”

잘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지, 묻는 말에는 대꾸도 없지…… 뿔이 오른 기린이 내 목을 덥석 잡았다. 침대에서 두 번만 밀었다간 사람을 죽일 기세다.

“눈은 또 왜 그렇게 퉁퉁 부었어?”

금방이라도 한대 칠 것처럼 으르렁거리던 기린이 내 얼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좀…….”

“울었어?”

“…….”

창피해서 대답을 못한 게 아니다. 기린에게 잡힌 목 언저리부터 뭔가 뜨끈한 기운이 번지더니 그 뜨거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머릿속까지 스며드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기린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때마다 이런 열기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혹시…….

“아파서 그래? 아직도 그렇게 아파?”

기린이 내 목에서 손을 떼고 옷섶을 헤집었다.

“그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상처를 확인한 기린이 공연히 엄살 피운다는 투로 나를 밀었다. 이번엔 내가 기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너야? 너……였어?”

기린한테 뭔가 남다른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언 땅에서 꽃 피우기, 마른 땅에 풀밭 만들기, 미운 놈 기억 없애기…… 내가 원하는 능력이 아니라서 그렇지, 할 줄 아는 게 꽤 많은 놈이다. 그리고 꼭 기린이 그랬다는 증거는 없지만 오래 혼수상태였던 환자도 여러 명 깨웠었다. 정작 깨우라는 비니는 여전히 그 모양이지만…… 어쨌든 기린한테는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내가 왜 기린 생각을 못했을까? 바보, 멍청이, 겨울잠 자는 곰보다 더 미련한 둔탱이!

“왜 이래?”

느닷없이 팔을 잡아끌자 기린이 놀라서 나를 밀쳤다.

“나랑 어디 좀 가.”

“어딜?”

“어딜 것 같아?”

기린을 끌고 한달음에 본채로 달려왔다. 꼭두새벽이라 얼쩡거리는 놈들도 없고, 본채 현관을 지키던 놈들도 기린을 보고는 순순히 길을 비켰다. 덕분에 첸의 침실까지 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기린이었다. 첸을 좀 깨워보라는 내 말에 기린의 반응이 매우 시큰둥했다.

“뭘 어쩌라고?”

“깨워 달라고. 넌 할 수 있잖아.”

방 중간에 서서 침대 쪽으론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는 기린을 억지로 떠밀었다. 하지만 기린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년째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사람들도 벌떡 일으킬 정도면 첸을 깨우는 정도는 일도 아닐 텐데 얘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싫어.”

기린이 잘라 말했다. 전에도 이렇게 고집 피우다 나한테 한대 얻어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 전혀 안 나나?

“왜?”

“저 작자, 재수 없어!”

“…….”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첸한테 그런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 마음은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재수가 없다느니, 귀찮다느니 하는 사소한 이유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그냥 구경만 하겠다는 그 심보는 이해할 수 없다.

“부탁이야. 열흘째 저렇게 누워 있단 말이야!”

“나도 알아.”

기린의 대꾸에 열이 확 올라왔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런지 내가 요즘은 화를 잘 못 참는다. 요즘이 아니라…… 그런지 한참 됐다. 하지만 폭력은 답이 아니다. 또 다른 문제를 만들 뿐이지. 그래서 꾹 참았다.

“알면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러면 안 돼?”

기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주먹이 기린을 향해 날았다. 주먹이 나가는 순간에도 내가 요즘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착잡했다. 다행히 내 주먹이 턱에 닿기 전에 기린이 내 팔을 잡아 비틀었다.

“자꾸 이런 짓 하지 마. 번번이 맞아줄 정도로 당신 주먹이 빠른 것도 아니니까.”

기린이 나를 밀치며 경고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너 참 많이 컸다.

“좀 봐주면 안 돼?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그동안 신세진 걸 생각해서라도…….”

“일어날 거야.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만…… 내가 나서야 될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렇게 할 말만 내뱉고 기린이 문 쪽으로 쌩하니 걸어갔다. 내가 볼 때는 저 놈이 첸보다 인간성이 더 나쁘다.

“저 아저씨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어. 계속 저렇게 정신 놓고 있다가는 사방에서 더 나쁜 놈들이 쳐들어올 거란 말이야! 저렇게 누운 채로 살해당할 수도 있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기린이 첸을 힐끔 돌아봤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도 같았다. 아니, 내가 잘못 봤다.

“알 게 뭐야?”

기린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쁜 놈!

시간이 좀 걸려서 그렇지 언젠가는 정신을 차릴 거라는 얘기는 어쨌든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릴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기다리기가 싫었다. 이런 식의 기다림이 이젠 지긋지긋하다. 방법이 아주 없다면 모르겠지만, 기린이 힘만 좀 쓰면 금방 해결될 일인데 그 고생을 내가 왜 하냐?

“비켜. 가서 잠이나 더 자게.”

기린이 문 앞에 버티고 선 나를 옆으로 밀었다. 이 자식도 체격이 호리호리한 것치곤 힘이 세다. 어쩌지? 이젠 동작이 빨라져서 잡아다 팰 수도 없고, 인정에 호소하자니 인정 같은 건 전혀 없는 놈이고…….

“계약은? 그건 어쩔 거야?”

문을 밀고 나가는 기린의 뒤통수에 대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용과 기린은 첸하고 계약 관계가 있었다. 먼저 기린이 비니를 깨우고, 그 다음에 첸이 니콜라스를 찾아서 용과 기린을 만나게 해주기로 한…… 정식으로 서류를 작성한 것도 아니고 그저 구두로 한 약속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계약 때문에 용하고 기린이 이 집에 오게 된 거다.

“계약?”

기린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무슨 기대를 갖고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계약서도, 계약금도 없이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고 밥 한 끼 먹은 게 전부라서 그런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가물가물했다. 기린이 반응을 보여서 내가 오히려 놀랐다.

“그래. 계약!”

아직까지 기린은 비니를 깨우지 못했지만 어쨌든 첸이 이대로 변이라도 당하면 두 녀석은 직접 니콜라스를 찾아야 된다. 니콜라스를 찾는 건 누구한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쿠간 시 초행에다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애들한테는 더더욱 그럴 테고…… 개인적인 친분 들먹이며 사정할 때는 눈 하나 까딱 안 하던 기린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그 주제에 남의 인간성 들먹이며 재수가 있니 없니 타박이라니…… 너도 참 양심 없다.

“어쩔 거야?”

마음 흔들린 김에 몰아치는 게 상책일 것 같아서 숨 돌릴 틈도 없이 기린을 다그쳤다.

“이런 일은 계약에 없었어.”

“이 자식이 없으면 계약 자체가 없어진다니까!”

이건 계약에 따라붙는 옵션 같은 게 아니다. 돌발 상황이지. 돌발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고, 그게 진짜 능력이다. 나도 그런 걸 제대로 못해서 사는 게 이 꼴이긴 하지만, 지금만큼은 살아가는 일에 대해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기린을 응시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애들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어쩌라고?”

기린이 짜증을 냈다. 이제 다 넘어왔다.

“깨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첸의 침대 옆으로 다가가는 기린의 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이유 없이 재수가 없는 게 아니라 나 없을 때 둘이 대판 싸움이라도 벌였던 게 아닐까? 아니곤 저렇게까지 싫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침대 옆에 가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기린이 내 눈총에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어 첸의 손목을 잡았다. 저렇게 만지기만 해서 무슨 효험이 있을까 싶은데…… 역시, 거의 5분이나 그렇게 있어도 첸한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뭐 딴 거 없어?”

“대체 나한테서 뭘 바래?”

기린이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툴툴거렸다.

“이 아저씨가 당장 정신 차리고 벌떡 일어나게 해 달라고!”

손을 옮겨서 첸의 이마도 만지고 목 언저리도 더듬던 기린이 한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뭔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눈치였다. 이제 향 피우고 주문이라도 외우려나? 무슨 짓을 하던 좀 전에 했던 것보다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첸을 깨울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영 떫은 표정으로 첸을 내려다보던 기린의 다음 행동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꼭 저런 방법밖에 없나 싶기도 하고…… 하마터면 너 이게 무슨 짓이냐고 타이르면서 기린을 첸에게서 떼어 놓을 뻔했다.

기린이 첸에게 키스를…… 그것도 상당히 찐하게 하고 있는데 저게 첸을 깨우려고 저러는 건지, 보다 보니 구미가 당겨서 그러는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젯밤에 저런 짓을 당하기는 했는데, 총상이 말짱히 나은 게 그럼 그 무미건조한 키스 덕분이었던 걸까? 할 때는 별 느낌 없었는데…… 어쨌든 서로를 재수 없어 하는 두 남자가 입을 맞추고 있는 걸 지켜보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사실, 보기 편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 5분만 더 지켜보다가 반응이 없으면 그때 말리자.

어디선가 향긋한 바람이 불었다. 한창 무르익은 봄바람 같은……. 코끝에 살짝 느껴질 정도로 희미한 미풍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차디차던 방안의 공기가 한결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향기와 온기가 이젠 낯설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기린이 불러온 바람이었다.

저렇게 무심하고 차가운 놈이 어떻게 이런 훈풍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르겠다. 성격으로만 보자면 겨울비 추적추적 내리는 밤에 휘몰아치는 음산한 칼바람이 제격인데…….

“그거 이제 그만 해라.”

첸의 입술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기린한테 조용히 주의를 줬다. 비록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인권이 있는데, 동의도 없이 이러는 건 추행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5분 지났다.

“깨워달라며?”

기린이 고개를 들었다. 첸이 싫기는 싫은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 키스에 열중하던 녀석의 표정이 저렇게 심란한 걸 보면…….

“안 일어나잖아. 뭐 다른 건 없어?”

“이 작자하고 섹스라도 하라는 거야?”

놀라서 벌떡 일어나긴 하겠다.

“야밤에 케이블에서 본 거 실습할 궁리 하지 말고, 진지하게 좀 해봐!”

“하고 있으니까 방해나 하지 마.”

그렇게 싫으면 키스 말고 다른 걸 해봐도 괜찮을 텐데 기린이 다시 첸의 얼굴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름대로 애는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공연한 기대를 가졌던 걸까?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키스 따위 백날 해봐야 첸이 눈을 뜰 것 같지 않았다. 방안이 아까보다 조금 더 따뜻해지고 꽃향기, 풀내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기린이 첸에게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이 작자…… 어딘지 이상해.”

기린이 첸을 음산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사경을 헤매던 사람이 키스 두 번으로 벌떡 일어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기운 빠져서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숨은 점점 돌아오는 것 같은데…… 한 번 더 해볼까?”

“그러다 정들라.”

“걱정 마. 내 타입은 아니니까.”

“내 타입도 아니었어.”

공연한 짓이었다. 자는 애를 깨워서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잠시나마 희망을 가졌던 것도…….

“가서 잠이나 더 자라.”

기린이 첸 쪽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쟤도 고집이 있다. 되든 안 되든 삼세번은 시도를 해볼 모양이었다. 기린이 첸의 입술을 한 번 더 지그시 깨물었다.

세상만사가 다 허탈해서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첸의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내가 놀라서 숨을 멈추고 있는 동안 첸이 크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이 가물거리는지 잠시 앞을 노려보던 첸이 코앞에서 기린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다. 하지만 안개가 짙어서 창밖이 부옇게 흐렸다. 바다에서 몰려오는 이런 안개는 종종 오후 늦게까지도 풀리지 않고 도시를 마비시키곤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첸이 물었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많지 않다.

“뭐가?”

“내가 어떻게…….”

“뱀파이어 잡는다고 까불고 돌아다니다가 그놈한테 물렸잖아. 그 길로 뻗어서 자다가 이제 일어난 거야.”

정신만 돌아왔다 뿐, 첸은 아직 기진맥진이었다. 얼굴은 백지장 같고, 대공한테 물어뜯긴 목덜미부터 오른쪽 뺨은 여전히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키스를 한두 번 정도 더 하면 얼굴도 정상으로 돌아오려나? 한두 번으로 안 되면 서너 번…….

“자고 있는 동안 나를 덮친 게 이 자식 하나야? 아니면 집안을 돌아다니는 놈팽이들이 다 한 번씩 찝쩍거렸던 거야?”

첸이 아주 언짢은 표정으로 기린을 노려봤다. 기린이 첸을 보는 시선도 만만치 않게 아니꼬웠다.

“나도 좋아서 그랬던 건 아니거든!”

“그 말 들으니까 마음이 푹 놓인다.”

싸움 날까 무서워서 일단 기린을 뒤로 잡아끌었다. 싫다는 걸 억지로 끌고 와서 빌다시피 해서 도움을 받은 건데 첸이 저렇게 나오면 내가 기린 볼 낯이 없다.

“눈 뜨자마자 왜 애한테 시비야? 덕분에 정신 차린 거니까 고맙다는 인사나 해.”

“그런 짓 안 했어도 금방 일어날 참이었어.”

첸이 쉬어 터진 목소리로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키스를 하려면 니가 해야지, 왜 턱도 없는 놈을 들이밀어?”

“웃기지 마. 내가 왜?”

“눈 떴다가 놀라서 다시 기절할 뻔했단 말이야.”

“…….”

겨우 그거 떠들고 기운이 빠졌는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방안의 공기를 다 들이마실 듯 헐떡이던 녀석이 잠시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멀찍이 서 있어? 이리 와.”

“그냥 여기 있을래.”

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가까이 와. 잘 안 보여서 그래.”

녀석이 금방이라도 세상을 버릴 듯 파리한 얼굴로 뻗어 있을 때는 눈만 뜨면, 그리고 사람이나 제대로 알아보면 그 이상 더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일어나서 사람을 알아볼 뿐 아니라 성질도 그대로인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더할 수 없이 좋고, 안심되는 건 사실이지만 가까이 가는 건 두려웠다.

첸은 그렇게 계속 노려보고, 기린은 발로 테이블 다리를 툭툭 차면서 나하고 첸을 구경 중이었다.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한동안 머뭇거리다 결국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침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얼굴은 분명히 보이지만 손이 닿을 정도는 아닌…… 적당한 거리였다.

“넌 어때?”

첸이 또 앞뒤 없이 물었다.

“뭐가?”

“너도 그때 총에 맞았었잖아. 괜찮아?”

아, 그거…….

“괜찮아.”

“정말?”

“니 걱정이나 해.”

“괜찮은데 얼굴이 왜 그래?”

무심코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뭐…….

“눈이…… 많이 부었어. 한참 운 것처럼.”

“…….”

내가 이 인간을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그때였었나? 비니 작은아버지 저택 테러 혐의로 경찰서에 불려와서 밤샘 조사 받고 나가던 길에 복도에서 비니한테 받혀서 요란하게 나동그라졌었던…… 아니, 처음 본 건 그때가 아니었다. 지난겨울, 느닷없는 폭설이 내렸던 우울한 날에 청연루 뒷담 근처에서 첸을 처음 봤었다. 그 전에도 신문이나 TV에 종종 얼굴이 실리는 나름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 첸이 무슨 말을 했는지, 첫인상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불과 몇 개월 전의 일인데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겨우 조폭 보스 사위 주제에 무슨 대단한 거물이라도 되는 듯 인상 거친 부하들을 거느리고 거들먹거리는 게 웃기고 재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더 괜찮다는 생각도 했었고…….

“울었어?”

첸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조금…….”

“왜?”

“그냥, 요즘은 온통 짜증나는 일뿐이야.”

첸은 바람둥이 악당의 교본 같은 놈이었다. 외모 괜찮고, 말주변 좋고, 얼굴 두껍고, 일단 목표물을 하나 찍으면 넘어올 때까지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솔직히 이 자식은 나한테 완전히 계획적으로 접근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건 확실했다. 그걸 다 알면서도 넘어간 내가 등신이다.

“나, 너 꿈에서 봤어.”

첸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래?”

“꿈에서도 울고 있더라.”

고개를 돌려서 아직도 부연 창밖을 쳐다봤다. 딱히 할 말도 없고, 피곤했다.

“나…… 이제 가 봐야 돼.”

“어딜?”

“병원에. 말도 안 하고 나와서 사람들이 찾을 거야.”

“그래?”

첸이 한 번 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번엔 좀 오래 깨어 있어야 될 텐데 저러다 또 정신을 놓을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기린이 있긴 하지만 첸하고 접촉하는 걸 싫어하고, 미성년자한테 상습적으로 그런 짓을 시키는 건 나도 싫다.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 복잡하고 위험한 것 같던데…….”

긴장하고 정신 잘 붙들고 있으라는 뜻으로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첸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막았다.

“됐어. 그런 얘긴…….”

“괜찮겠어?”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

간신히 숨만 쉬는 주제에 자신감은…….

“그럼 쉬어. 나 갈게.”

“야…….”

막상 가려고 하니까 마음이 안 좋아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첸이 나를 불렀다. 그럴 리가 없는데 녀석의 눈빛이 굉장히 선해 보였다.

“아직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응?”

“내가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너한테 이러는 것 같아?”

당황해서 첸을 빤히 쳐다봤다. 솔직히 말하기도 뭣하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그랬다.

“무슨 소리야?”

“니가 좋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야. 뭐…… 믿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교활한 놈……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 정신 차려 보니까 내가 첸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가고 있는데, 녀석이 정신을 차려서 좋은 거하곤 별개로, 마음이 무거웠다. 걸음은 더 무겁고…….

가까이 다가서자 첸이 내 손을 찾아 쥐었다. 손이 차가웠다. 기운도 없고…… 하지만 별 것 아닌 접촉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했고, 진심으로 마음이 놓였다.

“뭐 하는 거야?”

첸이 잡았던 손을 놓고 내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것도 기운이 딸리는지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총 맞은 데 어떤가 해서…….”

내 옷섶을 뒤적거려서 상처를 찾아낸 녀석의 눈빛이 대뜸 날카로워졌다.

“이거야?”

첸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첸의 손을 가슴팍에서 떼어낸 다음 이불 속에 파 묻어버렸다. 죽다 살아난 지 이제 겨우 10분이 지났다. 바람둥이인 것도 알고, 배짱 좋은 것도 알지만 눈 뜨자마자 작업 개시라니 너무 지나치다.

“아니, 내가 한 석 달쯤 누워 있었던 건가 해서…….”

첸이 나 한번, 저쪽 구석에 삐딱하게 서 있는 기린 한번 번갈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럼, 두 달 반?”

“열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첸이 내 멱살을 턱 잡았다. 녀석의 기습에 비틀거리다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녀석도 이제 금방 정신 차렸지만 나도 기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이래?”

“너, 저 자식하고 무슨 짓 했어?”

저 자식이란 건 아마 기린을 말하는 것 같은데…… 질문의 의미조차 모르겠다. 내가 쟤하고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거냐?

“무슨 소리야?”

“저 자식하고 잤어?”

어이가 없어서…….

“정신 나갔어?”

“아니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 거야?”

첸이 내 상처 근처를 쥐어박으며 으르렁거렸다. 망할 놈! 거의 아물었다고는 해도 그렇게 치면 아프다.

“내가 이걸 왜 너한테 설명해야 되는데?”

내 거친 대꾸에 첸이 나를 빤히 노려봤다. 그러더니 잡고 있던 내 옷섶을 놓고는 벌렁 누워버렸다. 녀석의 이런 반응이 더 기분 나쁘다. 뭐냐? 저 표정은??

“야!”

“됐어. 잤으면 잔 거지, 내가 무슨 권리로 그런 걸 따지겠어? 계속 데리고 자든, 타고 다니든 니 맘대로 해.”

첸이 낑…… 하고 신음 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녀석의 몸 상태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걸 감안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쳤다. 녀석이 나를 미성년자 추행범으로 아주 단정을 지어버렸다. 요즘 들어서는 다른 일도 참은 적 없지만, 이건 정말 못 참겠다.

“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대답 대신 첸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 자식이 근데…… 성질이 나서 이불을 확 잡아 벗겼다. 그제야 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니란 말이야?”

“당연히 아니지! 니 눈엔 내가 어린애나 덮치는 변태로 보여?”

벌컥 소리를 지르자 놈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 상처는…….”

녀석이 한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상처가 뭐?”

“저 녀석하고 그런…… 게 아니라면 열흘 전에 입은 총상이 벌써 아물었을 리가 없잖아…….”

말하다 말고 녀석이 갑자기 숨을 심하게 헐떡였다. 그리곤 다음순간, 고개가 옆으로 톡 떨어지고 말았다. 헉…….

이제 겨우 눈을 뜨고 말 몇 마디 하는 놈을 내가 너무 심하게 다그쳤나 보다. 급한 마음에 어깨를 붙잡고 살살 흔들어봤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이 일을 어쩌지? 맞다. 기린이 있었지. 하지만 문 옆에 서 있던 기린은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어날 때까지 계속 흔들어볼까, 물 한 잔 갖다가 얼굴에 부어볼까, 나중엔 나라도 이놈한테 키스를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자식 때문에 정말 못 살겠다. 일어나자마자 사람 속을 홀딱 뒤집어 놓고는 이렇게 또 정신을 놔버리면 어쩌라는 거냐?

어지러워서 주저앉을 것 같은 걸 침대 옆구리를 짚고 간신히 버텼다. 이 자식한테는 한시가 절박한 상황이다.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하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깨워야 된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기린을 쳐다봤다. 하지만 기린의 입장은 분명했다.

“기껏 깨워줬더니 저 자식이 나한테 뭐랬더라?”

애프터서비스를 거부하는 기린의 사유가 너무 타당해서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진심이 아니었을 거야. 오랫동안 정신이 없다가 갑자기 깨어나면 사람이 헛소리를 하기도 하거든.”

“진심이었어.”

목이 타서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주전자에서 물 한 잔을 따랐다. 하지만 막상 컵에 가득한 찬물을 보자 이걸 그냥 마셔 없앨 게 아니라 더 중요한 일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조금씩 뿌릴까? 아니면 한꺼번에 확 부어버릴까?

손끝에 물을 적셔서 첸의 얼굴에 살짝 뿌려봤다. 하지만 미동도 없었다. 모르겠다. 그냥 붓자. 일이 더 잘못 될 것도 없으니까.

마음먹고 첸의 얼굴에 물을 부으려는 순간…… 녀석이 조그맣게 기침을 했다.

다시 눈을 뜨긴 했는데 녀석의 상태가 좀 전보다 확연히 안 좋아 보였다. 아무래도 의사를 불러야 할까 보다. 기린이 와서 키스를 한 번 더 하는 게 의사 열 명이 몰려와서 수선 떠는 것보다 훨씬 낫겠지만, 기린은 이제 첸한테 손가락 하나 갖다 댈 마음이 없었다. 첸이 억지로 눈에 힘을 주면서 입 안으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귀를 바싹 들이댔다.

“그 말…… 믿어도 돼?”

“무슨 말?”

“저 자식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

이제는 화낼 기운도 없고 이 자식하고 한방에 길게 같이 있어 봐야 좋을 것도 없고…… 나도 어디 가서 누워야겠다.

“어디 가…….”

놈이 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정신 차린 거 축하해. 그리고…… 힘들 텐데 입 닥치고 푹 쉬어.”

아직 이른 아침인데 복도에 사람이 있었다. 무장 경호원 숫자도 들어올 때보다 좀 늘었고…… 집사도 이쪽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집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안 갔습니까?”

이제 금방 가려던 참이기에 망정이지, 오갈 데 없어서 빌붙어 있는 처지였으면 엄청 서러울 뻔했다.

“부인은 아직 주무시나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꼴 보기 싫은지 집사의 표정이 부쩍 사나워졌다.

“그러시겠죠.”

“일어나면 남편이 깨어났다고 전해주세요.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런 소식에 놀랐는지 집사의 표정이 멍해졌다. 첸이 깨어난 게 집사한테는 그렇게 반가운 소식이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이 반가운 거 하곤 거리가 한참 멀었다.

“사실입니까?”

“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니까 너무 낙심은 마시고요.”

집사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방금 전까지 첸하고 말싸움 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이번엔 집사 차례냐? 똑같은 조폭 두목 집이래도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은 인심도 괜찮았고, 가끔 괜찮은 애들도 있었는데 이놈의 집구석엔 주인부터 그 아랫것들에 이르기까지 맘에 드는 놈이 한 놈도 없다. 다행히 집사는 잠깐 그렇게 흘겨보고는 침실로 바삐 걸어갔다. 그래도 두목님 생사 확인이 우선일 테니까.

나도 어서 여기서 나가야겠다. 이러다 첸 부인한테까지 걸리면 마음 아파서 하루를 어떻게 버티냐? 기린의 손을 잡아끌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걸음 따라오던 기린이 어느 시점에서 발을 바닥에 딱 붙이고 버티기 시작했다.

“왜 그래?”

“배고파.”

“…….”

이번엔 기린이 나를 끌고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행히 먼 데는 아니고…… 저택 주방이었다.

꽤 이른 시간인데도 주방은 벌써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집안에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저택의 아침 준비는 어지간한 식당 개점 준비만큼이나 분주하고 할 일이 많아 보였다.

“일찍 왔네?”

앞치마를 두르고 양배추를 썰고 있던 젊은 남자가 기린을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기린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면 끼니를 거의 이런 식으로 해결해왔던 모양이다.

“배고파. 밥 줘.”

“저쪽에 앉아서 잠깐 기다려. 하던 거 마저 하고 차려줄게.”

남자가 작은 산처럼 쌓아 올린 양배추 더미를 뒤로 하고 커다란 나무 상자에 하나 가득 들어 있던 야채를 옆에 있는 물통에 쏟아 부었다. 아직 흙이 마르지도 않은 당근, 작은 호박, 탱탱한 가지 등등…… 모두 다 기린이 좋아할 만한 먹거리였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데?”

허락도 안 받고 요리사가 썰어 놓은 양배추를 한웅큼 집어서 입안에 밀어 넣던 기린이 코를 킁킁거렸다. 그리고는 아침에 배달되어 온 부식 상자를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꼭 부엌에 숨어 들어온 야생 사슴이 먹이를 찾아서 이 구석 저 구석 기웃거리는 형상이었다. 아니, 사슴처럼 귀여운 동물은 아니고…… 엘크? 아니면 말?

야채를 씻느라 바쁘던 요리사가 기린을 힐끔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한창 바쁜 시간에 옆에서 이렇게 거치적거리면 신경 쓰이고 귀찮을 텐데, 싫어하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어지간히 사람이 좋거나, 기린하고 친한 것 같았다.

“버섯이네?”

양파 자루하고 배추 상자 틈에 끼어 있던 중간크기 박스를 열어 본 기린이 반색을 했다.

“근처 숲에서 바로 어제 딴 버섯이야. 쿠간에서 구할 수 있는 버섯으론 최상품이지. 물론 가격은 더럽게 비싸지만…….”

요리사가 기린의 손에서 상자를 낚아갔다. 기린이 낙심한 얼굴로 박스를 쳐다봤다. 상자 안에는 보기에도 싱싱해 보이는 온갖 종류의 버섯이 하나 가득이었다.

“그거 한 상자에 얼만데요?”

얼마나 비싸기에 손도 못 대게 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버섯이 비싸 봤자…….

“이렇게 한 박스면 700불 정도 할 걸요.”

비싸네. 비싸건 말건 기린은 버섯에 시선 고정이었다.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이번 달에 월급 받으면 저걸 한 상자 사서 안겨줘야겠다. 기린은 비싼 버섯을 먹을 자격이 있다. 오늘 아침엔 특히나…….

요리사가 접시를 하나 꺼내더니 버섯을 한 주먹 덜어서 접시에 놨다. 저건 주려나 보다 싶어서 기린하고 같이 군침을 삼키고 있는데 요리사가 접시 대신 상자를 기린에게 안겨줬다.

“가져가서 먹어. 이런 건 노 회장님하고 아가씨 상에 조금만 올리면 되거든.”

어린놈들 둘이 낯선 집에 얹혀서 눈칫밥이나 먹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주방 인심은 후한 것 같았다. 용하고 기린은 말 그대로 식객이었다. 두 녀석은 첸이 아니면 데리고 있을 사람도 없었다. 금방 데리고 나가야지 싶다가도 둘이 밥 먹는 광경을 생각하면 결심이 서질 않았다.

기린이 상자를 받아 들고 흡족한 표정으로 주방 한구석에 놓인 간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씻지도 않은 버섯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데, 정말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기린의 한 끼 식사로는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식사 시작한 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상자는 벌써 바닥이었다.

“맛있냐?”

기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버섯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내가 살던 곳엔 이런 게 그렇게 많지 않았어.”

“그거 먹고 되겠어?”

“안 되지.”

기린이 뭐 또 먹을 만한 거 없나 목을 빼고 조리대 쪽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기린이 일어나기도 전에 주방 보조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온갖 야채가 가득 담긴 커다란 소쿠리를 들고 와서 테이블 위에 얹었다. 배추, 양파, 호박, 고구마, 각종 푸성귀에 사과하고 석류까지 굴러다니는 야채 과일 종합 세트였다. 대강 봐도 다 합쳐서 10kg은 넘어 보이는데 아무리 기린이 대식가라도 이건 너무…….

“이거면 되겠어?”

남자가 기린한테 물었다.

“어. 요즘은 입맛이 별로 없거든.”

“이분은 누구셔?”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까딱 숙이며 어색한 인사를 했다.

“아는 아저씨야.”

기린이 배추 하나를 집어서 와작 씹어 먹으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남자도 뭐 관심이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고…… 남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면 앞으로 3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일러주고 다시 일하러 갔고, 그 짧은 시간에 기린은 커다란 배추 한 통을 다 먹어 없애고 새빨간 석류를 집어 들었다.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여기 주인 말이야?”

기린이 석류를 껍질째 뜯어 먹으며 물었다.

“당신하고 그 남자는 대체 어떤 사이야?”

“보면 몰라?”

“볼수록 모르겠어.”

사실, 녀석과 내 관계는 일반적인 인간관계하고는 진행 방향이 반대다. 보통 처음엔 불분명하던 사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되고 분명해지곤 하는데 나하고 그놈 사이는 왜 이 모양일까? 처음엔 분명히 놈이 싫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니…… 어쨌든 기린 덕분에 앞에 널려 있던 수많은 문제 가운데 급한 일 한 가지는 해결됐다.

광주리에서 사과를 하나 집어 들었다. 기린이 먹고 있는 석류만큼이나 붉은 사과였다. 사과는 적당히 시큼하고 달콤했다. 오랜만에 음식 맛을 느껴 보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음식 맛은커녕 살아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사과 맛을 본 김에 광주리에서 오이를 하나 더 집었다.

내가 그렇게 사과 한 개, 오이 한 개를 씹어 먹는 동안 기린은 야채 한 광주리를 다 비웠다. 키가 커서 그렇지 몸은 마른 편인데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 볼 때마다, 그리고 볼수록 신기하다.

“왜 그래?”

마지막 남은 사과로 입가심을 하던 기린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녀석을 좀 오래, 빤히 쳐다보기는 했다.

“그냥…….”

“여긴 얼마나 있을 거야?”

“이거만 먹고 갈 거야.”

“어디로?”

“우선 병원부터 가야지.”

퇴원수속도 해야 되고 이 코트도 돌려줘야 된다. 그리고 그 다음엔…… 갈 곳이 없다. 할 일도 없고. 부상이 많이 회복됐다고는 해도 당장 복직할 정도는 아니니까……. 앞으로 한두 주일을 어디서 지내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이를 한입 더 씹었다. 그때 갑자기 주방문이 벌컥 열렸다.

평화롭고 바쁘던 주방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만든 건 집사와 한 떼거리의 무장 경호원들이었다. 거의 아침 먹을 시간이긴 하지만 아침이나 먹자고 이렇게 터프하게 들이닥친 건 아닐 텐데…… 집사가 주방을 둘러보다가 구석에 박혀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집사의 표정이 아주 안 좋았다. 뭔가 못마땅하고 신경질은 나는데 내색을 할 수는 없어서 꾹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아직 집안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나? 아니면 첸이 정신을 차린 게…….

“나가는 길은 저도 알고 있는데요.”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금방 보고 나왔는데 뭘 또 찾아?

“못 찾았다고 하세요.”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사 뒤에 있던 경호원 하나가 튀어나와서 내 어깨 죽지를 움켜잡더니 거칠게 끌어냈다.

“왜 이래요? 가기 싫다니까!”

그 방에 다시 가기 싫다. 지금쯤은 마리아 첸도 와 있을 텐데…… 그 살벌한 부부 사이에 끼어서 뭘 어쩌라고? 마음이 다급해져서 되는 대로 주방 문틀을 잡고 버텼다.

“회장님께서 꼭 하실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집사가 짜증을 내면서 내 손을 문틀에서 뜯어냈다.

환자 하나 덩그러니 누워 있던 좀 전하고는 달리 첸의 침실은 초만원이었다. 급히 달려온 듯 보이는 의사, 조직원으로 보이는 열 명 남짓한 남자들, 그리고 첸의 아내…….

“콴 사장한테 문병 오라고 해요. 사촌 간에 그 정도 인사는 하고 살아야지…… 남들이 알면 인정 없는 집안이라고 비웃어요.”

첸이 마리아 첸의 손을 잡고 조곤조곤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지간히 금슬 좋은 젊은 부부의 모습이었다.

“벌써부터 그런 일에 신경 쓸 거 없어요. 우선 몸부터 회복을 해야죠. 콴 오빠 일은…….”

“난 괜찮아요.”

얼음처럼 썰렁하기만 하던 마리아 첸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앞으론…… 몸조심을 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가 해서…….”

마리아 첸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조심할게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첸이 손끝으로 마리아 첸의 눈가에 젖은 눈물을 닦아주며 자상하게 위로했다. 첸도 미남이지만 마리아 첸 역시 기품 있는 동양 미인이었다. 자다 일어나서 화장도 안 한 맨 얼굴인데 어제 봤을 때보다 오히려 더 예뻤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라고 할 만큼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부부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회포를 풀고 있는데……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몸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고 있는데 첸이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 바람에 마리아 첸하고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크게 죄 지은 것도 없으니까 이렇게 저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조폭 경호원이 죽 늘어서 있는 방안에 서 있는 것부터가 짭새한테는 심장이 떨리는 일이었다.

“뭐해? 오라는데?”

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 있던 어떤 놈이 나를 침대 쪽으로 거칠게 밀었다.

“너는…… 얘기 하다 말고 그렇게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

첸이 나를 나무랐다. 무슨 말? 기린하고 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느냐던 그거??

“그 얘기를 계속 하게?”

“됐어. 그건…….”

첸이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 별것 아닌 말과 행동에도 속이 살짝 끓는다. 내가 과민한 건가?

“더 할 얘기 없으면 나는 그만…….”

“당분간 여기서 지내.”

첸의 느닷없는 헛소리에 흠칫해서 마리아 첸을 쳐다봤다. 마리아 첸도 놀랐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왜 여기서 지내?”

“갈 데도 없잖아.”

“왜 갈 데가 없어? 있어!”

“어디? 경찰서 유치장?”

경찰서 유치장이 아니라 길바닥에서 노숙을 해야 할 처지라고 해도 여기서 빈대 붙을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 아직 기운 없고 힘들어. 그러니까 너한테까지 신경 쓰게 만들지 말고…… 말 들어.”

힘들다는 건 엄살이 아니었다. 첸은 이마에 땀도 살짝 맺혔고 호흡도 거칠었다.

“됐으니까 니 몸이나 잘 추슬러.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주제에 맘대로 사람 갖고 놀 생각하지 말고.”

첸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가만히 노려봤다. 녀석뿐 아니라 사방에서 눈총이 얼마나 쏟아지는지 등이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첸을 내려다보는 마리아 첸의 복잡한 표정은 마음에 걸렸다.

“누워서 꼼짝 못하는 건 길어야 이번 주까지야.”

“그럼 제발 이번 주만이라도 조용하게 지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너…….”

할 말이란 게 이 썰렁하고 재수 없는 집에 얹혀 있으란 거라면, 충분히 들었고 대답도 이미 했다. 그래서 등 뒤에 버티고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밀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꼴이 대체 뭐냐? 낯 뜨거워서 고개를 못 들겠다.

“너…… 거기 서!”

첸이 나를 불러 세웠다. 녀석이 바람둥이 난봉꾼이란 건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람을 피우려면 최소한 아내 모르게 피우려고 노력은 해야 하는데, 이 자식은 뭘 믿고 이렇게 공개적인지 모르겠다. 나한테만 이러는 것도 아니고…… 여태 녀석이 뿌리고 다닌 염문이 하나같이 세상 사람들 다 보란 듯 떠들썩하고 요란했다.

“또 왜?”

돌아서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경을 헤매다 일어나줘서 고맙고 다행스럽기는 한데 봐주고 참는 것도 여기까지다. 대체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녀석을 매섭게 노려봤다. 나를 보는 녀석의 눈빛도 못지않게 험악했다.

“루크…….”

잠잠히 상황을 지켜보던 마리아 첸이 나섰다. 사실 이 상황에서 제일 열 받을 사람은 마리아 첸이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저런 놈하고 결혼을 한 게 잘못이다.

“진정해요. 이렇게 흥분하면 안 좋아요.”

마리아 첸의 만류에 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첸이 아내의 손을 찾아 쥐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한다는 소리가…….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줘요. 저 친구하고 조용히 얘기 좀 해야겠어요.”

마리아 첸이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됐지만 당신은 지금 누구하고도 단둘이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걱정 말아요. 진짜 얘기만 할 거니까…….”

마리아 첸이 물끄러미 첸을 내려다봤다. 나 같으면 신경질 나서 베개로 얼굴을 눌러 버렸을 것 같은데 마리아 첸은 조그맣게 한숨을 한번 쉬고 말았다.

마리아 첸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긴 하지만 이 부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부부 관계가 완전히 파탄이 나서 남처럼 살기로 합의를 봤거나, 아니면 마리아 첸이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나 보다. 그것도 아주 큰 걸로…….

커다란 침실에 이제 나하고 첸 둘만 남았다. 이번엔 나한테 가까이 오라고 하기도 전에 내가 알아서 녀석에게 다가갔다. 실은 나도 녀석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의식조차 없이 누워 있다가 이제 간신히 일어난 녀석에게 신경질이나 내면서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진짜 녀석이 걱정스러웠고 간절히 보고 싶었다. 막상 보면 마음이 달라져서 탈이지…….

“진짜 갈 거야? 나 아직 많이 아픈데?”

녀석이 어울리지도 않는 어리광을 피웠다. 아직도 핏기가 돌아오지 않은 창백한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녀석이 하는 말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서부터가 진담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며칠 있다가 또 올게.”

“마리아 때문에 그래?”

꼭 누구 때문이라고 하긴 그렇다. 하지만 마리아 첸 때문에 입장이 더 난감한 건 사실이다.

“걱정돼서 보러 온 거지 여기서 살러온 거 아니잖아.”

“마리아는…….”

“좀 쉬어. 넌 주변에 사람도 없어? 눈 뜨자마자 니가 나서서 일을 해야 돼?”

첸이 대답 대신 씨익 한번 웃었다. 그 얼굴이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잠깐 정신 놓고 있는 틈에 녀석이 손을 뻗어서 내 옷깃을 잡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휙 끌어당기더니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는 진짜 키스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이런 거였을까? 혀가 감기고 이가 부딪치는 깊은 키스를 나누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첸의 키스는 무척 관능적이면서 과격했고, 한편으론 두려울 정도로 집요했다. 정말 이게…… 그걸까?

“정말 갈 거야?”

한참 만에 나를 놔주면서 첸이 한번 더 물었다. 저렇게 보석 같은 눈동자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러는 건 반칙이다.

“응.”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주에 봐.”

첸이 마땅치 않다는 투로 대꾸하며 나를 밀어냈다.

“미리 경고하는데, 후회할 거야.”

많이 듣던 협박이다.

“뭘 어쩔 건데?”

꽃바구니도 수십 개 받아봤고 노래하는 한 떼거리의 악사들도 몰려왔었고…… 녀석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이젠 놀라지 않을 거다.

녀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위아래로 쫙 한번 훑었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있어. 다음엔 키스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날씨가 좋다. 전형적인 봄날의 오후라고나 할까…… 며칠 쌀쌀하고 간간이 비가 내리더니 어제부터 갑자기 날이 확 풀렸다. 아직은 이렇게 따뜻할 시기가 아닌데, 어쨌든 덕분에 온 몸이 노곤하고 하루 종일 졸음이 쏟아져서 초저녁이 되도록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퇴원한 지 오늘로 사흘째였다. 기린 덕분에 총상은 거의 아물었지만 체력까지 돌아온 건 아닌지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피곤하고 자도자도 졸렸다. 지금도 몸이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서 꼼짝도 하기 싫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아침 점심 다 거르고 내쳐 잤으니 허기지는 게 당연했다.

한참을 누운 채 꼼지락거리다가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너무 늘어져 있어서 더 기운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힘들어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 창밖으로 보이는 작은 정원에도 봄기운이 완연했다. 아직 꽃이 피거나 잎이 돋아난 건 아니지만 잔디 아래에서 푸른 기운이 올라오고 있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겨울이 그렇게 길더니…….

“제이? 아직 자요?”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쥬드였다.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에 하얀 카디건을 걸친 모습이 눈부시게 예뻤다.

“일어났어.”

“주방으로 나와요. 하루에 한 끼는 먹어야죠.”

첸의 저택에서 나와 병원으로 돌아간 날은 하루 종일 경찰 병원 장비로 할 수 있는 검사란 검사는 다 받았다. 아픈 데도 없는 사람을 이틀이나 붙들어 놓고 수사관이 범인 취조하듯 대체 총상이 어떻게 된 거냐고 의사들마다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병동을 외과에서 정신과로 옮길 뻔했다. 쥬드가 제때 나타나서 병원에서 꺼내주지 않았으면 분명히 그렇게 됐을 거다.

“언제 들어왔어?”

“좀 전에요.”

“데이트 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

“하고 왔어요.”

데이트 나간 여인의 귀가 시간이 뭐 이렇게 이르냐? 아직 날이 저물지도 않았는데…….

“데이트는 어땠어?”

“완벽했어요.”

새 애인이 생긴 이후로 쥬드는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이 없었다. 쿠간에서 어떤 난리가 나든 여섯 시면 칼같이 퇴근하고 휴일이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쁘게 차려 입고 데이트를 하러 나갔다. 서장은 속 좀 터지겠지만 나는 그런 쥬드의 모습이 좋았다. 평범하고, 행복해 보여서…….

“같이 저녁 먹어요. 시드의 레스토랑에서 오늘의 추천요리를 몽땅 싸 갖고 왔어요.”

쥬드의 새 남자친구가 쥬드 등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귀엽게 웃었다. 다 좋은데, 그 남자친구가 왜 하필 마리우스냐? 나는 이 교제 반대다.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엔 가까운 호텔로 갈 생각이었다. 며칠 쉬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집도 알아보고, 비니한테도 가보고…… 본래 계획은 그랬는데 쥬드가 말도 없이 나를 자기 차에 밀어 넣더니 이리로 데리고 왔다. 여기는 쥬드의 집이다.

쥬드와 마리우스가 레스토랑에서 사 온 스테이크며 샐러드를 예쁜 접시에 다시 담으며 다정하게 놀고 있었다. 하얀 테이블보로 식탁을 덮고, 그 위에 은 식기와 크리스털 잔을 세팅하고, 싱싱한 꽃으로 장식한 화병까지 테이블 중앙에 놓으니 작고 소박하던 주방이 여느 고급 레스토랑의 정찬 테이블 못지않게 화려해졌다.

오븐에 다시 데운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고 구운 감자와 버섯으로 주변을 장식하던 쥬드가 깨진 감자 한 조각을 마리우스의 입에 넣어줬다. 두 사람이 하고 노는 게 영락없이 한창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오붓한 한때였다.

감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마리우스가 나를 발견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안 좋지 뭐…….”

쥬드의 호의는 고맙게 생각한다. 막 병원에서 나와서 갈 곳 마땅치 않은 직장 동료한테 선뜻 방을 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 쥬드는 단순히 직장 동료나 친구 관계를 넘어서 거의 보호자처럼 나를 돌봐줬다. 음식도 챙겨주고 내가 좀처럼 기운을 못 차리자 지난 이틀간은 특별히 조제한 시커멓고 엄청나게 쓴 차를 달여주기도 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기는 한데, 그거하고는 별개로 마리우스가 쥬드랑 사귀는 게 도무지 좋아 보이질 않았다.

이른 저녁식사는 부드러운 크림스프부터 시작됐다. ‘시드의 레스토랑’이 어디 붙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식 맛은 좋았다.

내가 접시에 코를 박고 열심히 스프를 퍼먹는 동안 쥬드와 마리우스는 연애질에 여념이 없었다. 쥬드는 맛대가리 없는 아스파라거스를 마리우스의 접시에 떠넘겼고 마리우스는 으깬 감자를 쥬드한테 양보했다. 내가 볼 때는 손해 보는 물물교환인데…… 쥬드와의 데이트가 길면 길수록 마리우스의 손해가 더 커질 거다.

“한 주일 정도만 더 연습하면 운전면허를 딸 수 있을 거야.”

쥬드는 요즘 마리우스한테 운전하는 걸 가르치고 있었다. 쥬드의 재규어 정도면 남자 꼬시는 데는 아주 막강한 아이템이다.

“정말요?”

“그럼. 운전 배운 지 겨우 2주밖에 안 됐는데 해안 도로를 혼자서 달렸잖아. 넌 굉장히 감각이 있어.”

쥬드의 칭찬에 마리우스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 운전은 못할 것 같아요.”

“하긴, 시내 길이 복잡하긴 하지? 특히나 오늘은 휴일이라…….”

“너무 복잡해서 지금까지도 정신이 없어요.”

겸손하기는…… 그 장서각 지하실에 비하면 시내 길 따위는 그냥 껌이다. 거길 그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닐 정도면 지상에선 어디에 던져 놔도 길 잃고 헤맬 일은 없을 거다.

“차는 저하고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말이라면 어떤 녀석하고라도 친해질 자신이 있지만…….”

“어머, 말을 탈 줄 알아?”

“예전엔 많이 탔어요.”

“굉장하다. 난 아직 말은 한 번도 못 타봤는데…….”

그렇게 시작된 말 얘기가 밥 먹는 내내 계속되더니 결국 다음엔 공원에 말 타러 가자는 귀여운 약속으로 마무리됐다.

쥬드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머리도 좋고 능력도 있고, 좋다 나쁘다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긴 하지만, 옆에 있으면 피해를 입는 경우보다는 도움을 받는 일이 훨씬 많았다.

무엇보다 쥬드한테는 원하는 남자는 누구라도 두 손 들게 할 만큼 대단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 당장 봐도 마리우스는 쥬드한테 완전히 넘어갔다. 사실 둘이 좋아서 사귄다는데 거기에 태클을 걸 사람은 없다. 얼핏 봐도 나이 차이가 열 살은 족히 나 보이지만…… 당사자들은 마냥 좋아 보였다.

남녀가 만나는 데 중요한 건 딱 하나, 진심뿐이었다. 그래서 내 눈엔 쥬드가 마리우스를 저렇게 꼬드기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쥬드는 마리우스가 좋아서 저렇게 시간 내서 같이 놀고, 기분을 맞춰주는 게 아니었다.

밥만 먹고 얼른 일어나려는데 쥬드가 후식까지 먹어야 다 먹은 거라면서 나를 억지로 잡아 앉혔다. 나하고 마리우스는 아이스크림 한 그릇씩, 그리고 쥬드는 향기 짙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동그랗게 마주 앉았다.

“가게는 비워둬도 괜찮아?”

딸기 아이스크림을 걸신들린 듯 퍼먹고 있는 마리우스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답답했다. 착하고 성실하고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가 없는 앤데, 조만간 여자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겠구나 싶어서…….

“오후엔 슈가 씨가 봐주기로 했어요.”

“슈가라면…… 전에 봤던 그 아가씨?”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있다 들어가 보긴 해야 돼요. 문도 닫아야 되고, 늦은 시간엔 이상한 남자들이 들어올 때가 있어서요.”

그런 동네에서 그런 장사를 하는데 늦은 시간에 멀쩡한 인간이 드나들 리 없지.

“장사는 잘 되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저기 웬만하면…….”

웬만하면 다른 여자 찾아보란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힘들게 참았다. 남의 연애사에는 간섭하지 말자는 생활신조도 있고, 또…… 바로 옆에서 우아한 폼으로 커피 마시고 있던 쥬드가 나를 한번 쓱 훑는데 한마디 잘못했다간 뼈도 못 추리겠다 싶을 정도로 눈빛이 서늘했다.

“예?”

마리우스가 뒷얘기를 들으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떨까 해서.”

“지금 하는 일도 괜찮아요. 요즘은 손님도 많이 늘었고…….”

“가게 위치도 그렇고…… 지하엔 돈 될 만한 책도 꽤 있는 것 같던데, 위험할지도 몰라.”

쥬드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리고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차이나타운 소식, 궁금하지 않아요?”

“…….”

며칠 전에 쥬드한테 차이나타운에 콴이란 녀석이 있다는데 어떤 놈인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듣는 태도도 건성이었고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나는 일은 외부인이 알아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별다른 기대는 않고 있었는데 뭔가 정보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첸 콴은 차이나타운 실세 중 한 명이에요. 차이나타운의 노친네한테는 행세께나 하는 조카가 열 명도 넘는데, 첸진한테는 아들이 없으니까 그 조카들이 후계자처럼 위세를 부리고 다녔었나 봐요. 그러니까…… 루크 첸이 나타나기 전까지요.”

“루크 첸이 눈엣가시 같았겠군.”

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뭐해요? 게다가 경찰에 공식적으로 접수가 안 돼서 그렇지, 루크 첸이 조직을 장악할 당시 차이나타운 내부에선 꽤 큰 소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첸진의 조카들 중 둘은 홍콩으로 쫓겨 갔고 셋은…….”

끝까지 안 들어도 어떻게 된 건지 대강 알겠다.

“죽었어?”

“종적이 묘연해요. 당한 쪽 입장에선 더 안 좋은 경우죠. 장례도 못 치르게 됐으니까요.”

그 정도 사건이 있었으면 일가가 아니라 원수다. 첸이 안 좋은 상황에 처하자마자 사촌들이 그렇게 득달같이 달려든 게 무리도 아니다.

“그래서 그놈은 어떻게 됐어?”

“어제 아침에 여자친구하고 파리행 비행기를 탔어요.”

생각보다 처벌이 경미하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추방이라니…….

“첸 콴은 노회장이 굉장히 아끼는 조카였나 봐요. 차이나타운에 떠도는 풍문엔 조카가 아니라 밖에서 낳은 아들이란 말까지 있으니까 아무리 루크 첸이라도 함부로 어쩌지는 못하는 거겠죠.”

안팎으로 진짜 복잡한 집구석이다.

“루크 첸에 관한 얘기는…… 뭐 없어?”

뭐 그렇게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쥬드가 커피 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뜸을 들였다.

“아직 두문불출이라 자세한 정황은 알 길이 없어요. 차이나타운이란 곳이 본래…….”

“아는 게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급한 마음에 다그쳐 묻자 쥬드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자기 휴대폰을 테이블에 툭 던졌다.

“그렇게 궁금하면 전화라도 해보지 그래요? 그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됐어.”

“잘 생각했어요. 그렇게 적당히 애태울 줄을 알아야 원하는 남자를 손에 넣죠.”

쥬드가 드러내놓고 시비를 걸었다. 마리우스가 불안한 얼굴로 우리 둘을 쳐다봤다.

“남자 후리는 방법에 대해서 나한테 한 수 가르칠 생각이야?”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어떤 면에선 이제 당신 전적이 나보다 더 화려한데?”

“어쨌든 난 돈 때문에 남자한테 접근한 적은 없어.”

“나도 마찬가지예요.”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마음에 딴 생각을 품고 사람을 만나는 건 당신답지 않거든.”

주먹 싸움으로 한번 이겨 보겠다고 터너한테 달려드는 것과, 말싸움으로 이겨 보겠다고 쥬드한테 덤비는 것, 둘 중에 어떤 게 더 바보짓일까? 서로 한 번씩 비수 같은 말 펀치를 휘둘렀고 피차 비슷하게 상처 입었다. 식탁 분위기가 어지간히 험악했는지 마리우스가 다 먹지도 않은 아이스크림 컵을 들고 일어났다.

“왜?”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던 쥬드가 갑자기 상냥한 연인으로 돌변해서 마리우스를 붙잡았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그걸 자기가 왜? 그릇도 몇 개 안 되는데 신경 쓰지 말고 후식이나 마저 들어.”

“두 분이 하실 말씀도 있는 것 같고…….”

“우리 싸우는 거 아니야.”

쥬드가 좀 거들어달라고 나한테 눈치를 줬다. 마리우스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하긴, 마리우스 앞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우린 경찰서에서도 내도록 이러고 놀아. 친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마리우스가 내 눈치를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자리를 비킬 사람은 나였다. 한창 분위기가 달콤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앉아 있는 게 편하지도 않고, 쥬드하고 말싸움 하느라 신경을 써서 그런지 저녁 먹기 전보다 더 피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켜주기가 싫지? 쥬드의 본심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두 사람 잘되라고 멍석 깔아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들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병원에 가는 날이 언제예요?”

아무리 눈치를 줘도 내가 꼼짝을 않자 쥬드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화제를 돌렸다.

“내일.”

“몇 시에 가요?”

“두 시. 그런데 그건 왜?”

“같이 가요.”

호의는 고맙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 집 객실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 해도 지나치게 신세지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은데…….

“총상이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아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퇴원한 후로도 기력이 너무 없잖아요.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모르니까 전체적으로 검사를 한 번 더 받아 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퇴원하기 전에 하도 시달려서 이젠 검사에 ‘검’자만 들어도 지친다.

“경찰 병원에 있는 장비로 할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았어. 어떤 건 두 번씩.”

“그럼 한약이라도 먹어볼래요? 차이나타운을 뒤져보면 잘하는 약방이 있을 텐데…….”

한약이라니까 일전에 첸한테서 얻어먹은 술 깨는 차 생각이 났다. 생각만 해도 혓바늘이 벌떡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다.

“내 걱정은 더 할 거 없어.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고, 다음 주쯤엔 근무 복귀도 할 수 있을 거야.”

“복직은 급할 거 없어요. 복귀해봐야…….”

말하다 말고 쥬드가 이미 식어서 미지근해진 커피를 홀짝거렸다.

“왜 그러는데?”

복귀하면 당할 수 있는 안 좋은 일이 몇 가지나 될까 머릿속으로 얼른 꼽아봤다. 다행스럽게도 경찰서에는 루크 첸처럼 짓궂은 악당은 없기 때문에 괴롭힘이라고 해봐야 아주 참신한 건 없었다. 비아냥, 왕따, 사사건건 시비, 린치, 교통정리…… 대부분 다 당해본 적 있는 일이라서 신선하지도 않고 별로 두렵지도 않았다.

“한동안 현장 근무는 못할 거예요.”

“그 정도야 뭐…….”

“아예 다른 도시로 발령이 날지도 몰라요.”

“…….”

그동안 루크 첸이 벌인 일도 있고 또 내가 벌인 일도 있고…… 입원 중에 말도 없이 사라졌었던 일까지 문제가 돼서 현재 경찰서 분위기가 꽤나 험악한 것 같았다. 윗분들은 윗분들대로 심사가 불편하고, 동료들은 또 동료들대로 투덜거리고…….

“이럴 땐 그저 조용히 있는 게 최고예요. 시간이 좀 흐르면 흥분도 가라앉겠죠.”

“얼마나 오래?”

“최대한 오래요.”

이제 와선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경찰서에 꽃다발하고 악단이 들이닥친 것까지는 내 탓이 아니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두 내 잘못이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당신도 그동안 고생한 게 있는데, 설마 서장님이 다른 동네로 쫓아 보내시기야 하겠어요? 단지 화가 풀리려면 시간이…….”

“다른 동네로 가라면 가지 뭐.”

나도 이 동네엔 미련 같은 거 없다. 미련이 다 뭐냐? 이젠 넌더리가 난다. 호구지책은 있어야 하니 일을 그만둘 수는 없고…… 어디 조용한 시골 파출소 같은 데로나 날려갔으면 좋겠다.

“남자친구는 어쩌고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겠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그 집 지하 감옥에 갇히는 건 아니고요?”

내가 노려보자 농담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쥬드가 옛날에 다 식은 커피를 집어 들고는 호호 불었다.

“어쨌든…… 내일 병원에 같이 가요.”

쥬드는 애초에 약속했던 시간에서 한 시간은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에 도착해서 검사실을 한 바퀴 다 돌고, 담당의사를 만나서 지난번 검사 결과 듣고, 다음 약속까지 다 잡고 나올 즈음이었다. 일도 밀렸고, 오는 길에 차도 밀렸다고 대강 변명은 하는데 느낌엔 조퇴하고 나오기가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게 왜 왔어? 올 거 없다고 했잖아.”

“검사 결과는 어떻대요?”

“괜찮대.”

황 박사 말로는 달리 걱정할 만한 이상은 없고, 몸이 피곤한 것도 한두 주일 쉬면 차차 회복이 될 거라고 했다. 짧은 진단을 마치고 나서 대체 총상이 어떻게 그렇게 삽시간에 나았느냐고 다시 묻길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도망 나왔다.

“그럼……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내가 살게. 뭐 먹을까?”

쥬드한테는 점심 한 끼로는 갚을 수 없는 신세가 있다. 요즘 쥬드 집에 얹혀 지내는 것도 그렇지만 일부러 시간 내서 병원에 와준 것도 고마웠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도 그만이지만…… 요즘은 부쩍 마음이 허전할 때가 많다.

“중국 음식 어때요?”

“언제까지 그렇게 비아냥거릴 거야?”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 먹고 싶어서 그래요. 마침 해줄 얘기도 있는데, 차이나타운에서 들으면 재미가 각별할걸요.”

“차이나타운엘 가자고?”

그냥 가까운 중국집에 가자는 소린 줄 알았다. 내 물음에 쥬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요리를 제대로 먹으려면 차이나타운에서 먹어야죠.”

나야 요즘 일없이 노닥거리는 처지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쥬드는 상사 눈치 봐가면서 한두 시간 짬을 내서 나온 직장인인데, 여기서 시간 반이나 걸리는 차이나타운까지 꼭 가야 되나? 뭐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점심 한 끼 먹자고…….

“점심 먹고 비니 보러 가요.”

“나야 좋지만 당신은 시간이 되겠어?”

“갔다가 바로 퇴근하려고요.”

뭔가 이상하다. 요즘은 시간 외 근무도 안 하는데 서장이 이렇게 인심 좋게 쥬드의 땡땡이를 허락했을 리 없다. 왠지 쥬드가 막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웬만한 수사관 서너 명 합한 것보다 실적 면에선 더 우수하기 때문에 이 정도 농땡이로 문책을 당하지는 않겠지만…… 이러다 도가 지나치면 또 몇 달 후미진 데로 귀양살이를 떠날지도 모른다.

찜찜함을 안고 결국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중국 요리를 먹으려고 먼 길을 나섰다.

쿠간 시 뒷골목 지리에 정통한 쥬드가 상습 정체 구간과 공사 구간을 피해 정신없이 골목길을 누빈 덕분에 차이나타운엔 한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델 파소 옆을 지나쳤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재개발의 기미도 없이 폭삭 주저앉아 있는 동네를 지나치다보니 저기서 겪은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비니는…….”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요. 가끔 체온이 올라갈 때도 있거든요.”

“정말?”

“올라간다기보다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지만…… 그래도 계속 떨어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때 일은 아직도 가끔 꿈에 보이고, 눈을 뜨고도 생생하게 눈앞에 보일 때가 있었다. 좀 지난 일인데도 그럴 때마다 기분이 말할 수 없이 뒤숭숭했다.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아마 비니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았다. 비니가 그렇게 쓰러진 것, 지금까지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나한테는 동네 하나가 다 무너진 것보다 더 큰 충격이다.

청연루는 여전했다. 콴 사장인가 뭔가 하는 놈 부하들이 들이닥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수리도 다 끝났는지 안팎으로 깔끔하고 번쩍거리고…… 어정쩡한 점심시간인데도 20분이나 자리 나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도 많았다.

안내된 자리는 2층 구석이었다. 구석이라고 해도 전망이 좋아서 후원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좋은 자리였다. 청연루 후원엔 작은 거리처럼 보이는 골목과 기와를 얹은 아름다운 담장, 담장을 따라 조금 가면 작은 돌다리가 걸려 있는 시내가 나오고, 그 시내를 건너면 가는 대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작은 숲이 있었다. 중국식 정자와 별채가 들어서 있는…….

후원은 마치 아기자기한 중국 풍경화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과 많이 달라서, 신선이나 노닐 것 같은 저 별채에 드나드는 건 돈 욕심이 목구멍까지 들어찬 조폭 영감탱이들이 고작이었다.

“뭐 먹을래요?”

쥬드가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글쎄…….”

메뉴판 제일 앞쪽에 청연루 스페셜 코스가 적혀 있었다. 이게 일전에 첸이랑 먹다가 배터질 뻔했던 그건가? 이 식당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많은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몇 번 드나들지도 않았는데…… 메뉴판을 뒤적거리던 쥬드가 런치 코스 2인분을 주문했다. 메뉴 선택에 성의가 전혀 없는 걸 보니 딱히 중국음식이 먹고 싶었던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루크 첸은 어때요?”

잠시 후원을 내려다보던 쥬드가 물었다. 이제 새 남자친구도 생겨서 첸한테는 관심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잘 모르겠어.”

“며칠 전에 만나고 왔잖아요.”

“괜찮아 보였어.”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얘기를 좀 해봐요.”

쥬드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진지하게 물었다.

“무슨 얘기?”

내 간단한 질문에 쥬드가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히 골치 아픈 일이 아니고는 저런 표정 짓지 않는데…….

“당신은 그날 루크 첸을 따라서 백화점에 갔었어요. 거기서 나한테 긴급 호출을 했었고, 백화점은 쑥밭이 됐고, 당신은 총에 맞았고, 루크 첸은 계속 두문불출하다 식당까지 박살이 났었어요. 당신은 성치도 않은 몸을 끌고 루크 첸의 저택에 갔었고, 그것 때문에 서장님이 반나절을 서장실 소파에 누워서 보내셨죠.”

“다 알면서 더 무슨 얘기를 하라는 거야?”

“진실을 알고 싶어요.”

“…….”

“백화점에 강도가 들었던 건 아니잖아요?”

물론 나는 진실을 말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쥬드가 아주 싫어하는 종류의 진실이었다. 쥬드한테는 나름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이 있었다. 그 철학과 세계관이 건실하고 윤리적이진 않지만 아주 현실적이기는 해서, 공중을 붕붕 날아다니는 무시무시한 금발 미남 뱀파이어 얘기 같은 건 견디지 못할 거다. 공연히 나만 들들 볶이겠지. 마침 주문한 점심이 나왔다.

“재미있는 얘기는 당신이 나한테 해주는 거 아니었어?”

되도록이면 화제를 돌려보려고 애쓰며 얼른 숟가락을 들었다.

그동안 마리우스하고 연애하느라 다른 일엔 관심 끊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백화점에서 그 사달이 난 게 벌써 언제 일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 일을 캐나 싶기는 하지만…….

“터너한테 들었는데, 뱀파이어를 쫓아다녔다면서요?”

스프 떠먹다가 목에 걸려서 기침을 5분도 넘게 했다.

“터너가…… 그런 소릴 했어?”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요.”

“…….”

내가 묵묵부답으로 버티자 쥬드가 한숨을 쉬며 자기 숟가락을 들었다.

“밥이나 먹죠.”

소문난 요릿집인 만큼 나오는 음식마다 별로 트집 잡을 거리가 없을 정도로 괜찮았다. 사실 쥬드네 집은 분위기가 너무 학구적이라 책은 어딜 가나 발에 채일 만큼 흔하지만 먹을 건 귀했다. 아니, 먹을 게 귀하다기보다는 대부분 식재료라서 뭔가 요리를 해야 먹는 게 가능한 상태라 요리엔 별다른 취미도, 의욕도 없는 나한테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쥬드가 나 먹으라고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놓고 출근하긴 했지만 요즘 쥬드가 주력하고 있는 한방 건강식은 건강엔 얼마나 좋은지 몰라도 솔직히 맛은 별로였다.

“그동안 입맛이 없었던 게 아니었나 봐요?”

작은 대나무 찜통에 담겨 나온 만두를 내 쪽으로 밀어 보내며 쥬드가 툴툴거렸다.

“이제 몸이 많이 좋아졌나 봐.”

“그래도 잘 먹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좀 놓여요.”

“마음 써줘서 고마워.”

“별로 해준 것도 없는데요. 뭐…….”

뱀파이어 얘기를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저렇게 나긋나긋한 걸 보면 말해도 큰 탈은 없을 것 같지만, 전에도 한번 습격당한 기억이 있어서 선뜻 입이 안 떨어졌다. 그땐 뱀파이어도 아니고 그냥 마리우스의 책방 얘기를 했을 뿐인데도 쥬드한테 뜯겨 죽을 뻔했었다. 일단…… 먹던 거나 마저 먹고 생각하자.

“차이나타운은 마치 딴 세상 같네요.”

쥬드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이 식당 후원만 그런 게 아니라 담장 너머 차이나타운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런 편이었다. 건물 뒤편은 차이나타운의 구 시가지라서 나즈막한 기와집이 몇 블록이나 이어져 있다. 먼 곳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곳에선 사람들도 우리들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살 것 같지 않아요?”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할 거야.”

쥬드가 애매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별난 구석이 있더라고요. 다는 모르겠지만 첸의 집안은 좀…….”

“무슨 얘기야?”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쥬드가 한가롭게 찻잔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뜸을 들였다. 웬만하면 안 들어도 상관없지만 첸하고 관련된 얘기라니 갑자기 궁금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차이나타운에 자주 왔었거든요. 여긴 좋은 찻집도 많고, 내가 잘 모르는 약재들도 많아요. 또 괜찮은 식당도 많으니까 데이트 코스로는 그만이죠. 지난 몇 주 동안 차이나타운에 드나든 횟수가 내가 평생 여기에 왔던 횟수보다 더 많을걸요.”

“지금 마리우스하고 데이트 많이 했다고 나한테 자랑하는 거야?”

생각만 해도 좋은지 쥬드가 활짝 웃었다. 생각하는 게 마리우스인지, 마리우스의 책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아는 사람도 생기고, 얻어 듣는 정보도 있게 마련이죠.”

정보라…… 경찰서 내에서도 쥬드의 정보력은 꽤 쓸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동안 차이나타운에 관해서는 별반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 같더니 그새 정보원을 하나 뚫었나 보다.

“차이나타운 돌아가는 일도 이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당분간 쿠간 시 암흑가는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고 그 판도가 쉽게 바뀌지도 않을 것 같거든요.”

쥬드가 찻집 주인, 한약방 간호사, 식당 아줌마들한테서 주워들은 얘기는 정보라기엔 좀 격이 떨어지는…… 풍문에 가까운 가쉽이 대부분이었다. 외부인들이 몰라서 그렇지 첸 집안의 가족사나, 루크 첸과 마리아 첸의 결혼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는 차이나타운 내에서는 왕족의 스캔들만큼이나 초미의 관심사였고 널리 알려진 소문이었다. 하긴, 차이나타운에선 그 집안이 왕족이나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선 워낙 떠도는 말들이 많아요. 루크 첸이 말단 조직원 출신이었는데 마리아 첸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마음을 얻었다는 말도 있고, 마리아 첸이 루크 첸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말도 있어요.”

의도적으로 접근한 첸한테 마리아 첸이 첫눈에 반했단 얘기네…….

“어쨌든 마리아 첸한테는 정해진 결혼 상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루크 첸이 나타나면서 일이 틀어진 거죠.”

“약혼자가 있었단 말이야?”

“정식으로 약혼을 한 건 아니고, 집안 간에 혼담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녀석이 혼처가 정해진 여자를 중간에 가로챘다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았을 거고.

“상대가 누구였을 것 같아요?”

마치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투였다. 나는 차이나타운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설마 그 콴이란 놈은 아니겠지?”

“왜 아니에요?”

“사촌이라며?”

“사촌간의 결혼이 그다지 흉이 안 되는 문화권도 있어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사촌이 아니라 배다른 오빠일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루크 첸이 그놈을 못 죽이는 거라고…….”

“어쨌든 서류상으론 사촌이잖아요.”

너무 억지스럽다. 자식에게 그런 결혼을 권할 부모가 있을까?

“엄청나게 많은 게 걸린 결혼이었어요. 차이나타운은 여자로써의 행복 같은 건 하찮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노인들이 많은 결정권을 가진 동네고…… 첸진도 아들한테 합법적으로 모든 걸 물려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걸요. 뭐, 한 구석엔 찝찝한 마음도 아주 없진 않았겠지만…….”

“다른 방법도 있잖아. 조카를 양자로 들인다든지, 그냥 자기 자리를 물려줘버린다든지…… 어쨌든 남매를 결혼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덜 흉악한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마리아 첸의 외가에서 들고 일어났겠죠. 마리아 첸의 외가는 차이나타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유력한 집안이에요. 첸진의 서자한테 전권이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할 입장이 아니죠.”

“그럼 결혼 얘기엔 아예 뒤집어졌어야지.”

“뒤집어졌었어요. 차이나타운 내부가 그 문제로 몇 년간 아주 소란스러웠던 모양이더라고요. 백주에 패싸움도 빈번하게 벌어질 정도였다니까…… 물론 우린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하던 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서 첸진의 외동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는 아주 난리가 났었겠다. 그때는 차이나타운뿐 아니라 외부인들도 예상외의 결혼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으니까. 루크 첸, 징그러운 놈…… 대체 어떻게 그 난리 북새통을 뚫고 마리아 첸을 낚아챈 걸까?

“알면 알수록 대단한 남자란 생각이 들어요. 루크 첸 말이에요.”

쥬드가 찻잔을 기울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고비가 많았을 텐데 너끈히 살아남았잖아요. 마리아 첸도 결혼할 당시에는 루크 첸이 이렇게까지 잘 해낼 줄 몰랐을걸요.”

“그렇게 미친 듯이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닐 줄도 몰랐겠지.”

마리아 첸의 얼굴이 잠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인상이라곤 차갑고 쌀쌀맞다는 게 전부였다. 첸의 침대 머리에서는 간혹 안도하고, 기뻐하는 표정을 보이긴 했지만……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자잘한 감정 따위는 오래 전에 잊은 얼굴이었다. 사실, 그런 얼굴은 그렇게 낯선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봐왔는데, 오랜 불행에 시달린 사람의 지친 표정을 마리아 첸의 얼굴에서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랑 결혼을 하든, 배다른 오빠하고 결혼하는 것보다는 나았을 거다. 하지만 루크 첸과의 결혼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까? 본성이 나쁘지도 않고, 처신이 어리석지도 않은 사람 같았는데, 주변 환경에 휘말려서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준다고 했었죠?”

쥬드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내 표정을 살폈다.

“충분히 재미있었어. 차 다 마셨으면 그만 일어나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차이나타운에 비밀 얘기가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고작 루크 첸의 결혼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뭐 이렇게 기냐?

“아직도 남은 얘기가 있어?”

“루크 첸이 당신한테 계속 수작을 걸고 있고, 당신도 마음이 점점 기울고 있는 이 시점에서…….”

“사람 면전에다 대고 그런 소리를 꼭 해야겠어?”

쥬드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한테 루크 첸을 빼앗긴 유감이 아직 가시지 않았나 보다.

“어쨌든…… 루크 첸하고 마리아 첸이 진짜 부부가 아니라면 당신의 죄책감이 좀 덜어질까요?”

“그 둘은 요즘 쿠간에서 제일 유명한 부부야.”

“무늬만 부부란 뜻이에요. 부부 관계도 없고, 서로 사생활도 간섭하지 않는…….”

대체 누구한테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설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일은 외부인이 알기 어렵다.

“그래서? 나더러 그 자식하고 맘 놓고 놀아나라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크 첸의 사생활 같은 거, 깊이 알고 싶지도 않다. 녀석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죄짓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이 마리아 첸과 어떤 사이든 그 죄책감은 가벼워지지 않을 거다.

비니는 그 모습 그대로 한심하게 뻗어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체온이 24℃ 아래로 떨어지고 심장이 두 시간 사이에 두 번이나 멈춘 다음부터 비니는 아예 중환자 병동에서도 제일 상태가 위급한 환자들만 모아 놓은 병실로 침대를 옮겼다. 비니가 이 중환자실 한구석을 차지한지 몇 주나 됐을까? 중환자실을 드나드는 간호사나 의사들 중 이젠 누구 하나 비니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없었다.

하얗게 얼어 있는 비니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얼굴만 봐서는 영락없는 시체였다. 이제 비니가 깨어나기를 바라는 건 기적을 바라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비니를 보면 볼수록 절망만 깊어졌다. 내 앞에 싸늘하게 누워 있는 이 남자가 정말 비니가 맞는 걸까? 내 기억 속의 비니는 절대 이렇게 가버릴 녀석이 아닌데…….

“그만 나가요. 형.”

롭이 넋 나간 듯 비니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 팔을 끌어 당겼다.

“어째 몇 주씩 안 보인다 했어요. 난 그냥 일이 바빠서 그런 가 했었는데…….”

그동안 병원에 있었다는 말에 롭이 한숨을 쉬었다. 애가 지쳐서 그런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안됐다. 마르고, 창백하고 무엇보다 풀이 많이 죽었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형이 오래 안 보이는 게 걱정된다고…… 그런 일이 있었으면 우리한테도 연락을 하지 그랬어요?”

“연락은 무슨…… 그냥 살짝 긁힌 정도였어.”

“살짝 긁혔는데 얼굴이 그렇게 반쪽이에요?”

풀이 죽었다곤 해도 까칠한 성깔은 아직 안 죽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쏘아붙이는 말투가 제법 매서워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경찰이라고 다 그렇게 목숨 내놓고 일하는 것도 아니던데, 형들은 대체 왜 그래요?”

롭이 분통을 터뜨리며 휴게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게 말이야.”

한때 루크 첸의 장담에 홀려서 푸른 코끼리 카페를 찾아다녔던 일은 지금 생각해보면 말짱 미친 짓이었다. 영혼이 빠져 나가서 카페에서 노닥거리고 있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나, 믿고 찾아다닌 나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희망이라도 있을 때가 훨씬 좋았던 것 같다. 그때는 미친 척하고 할 일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말없이 잠시 사라졌던 쥬드가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나하고 롭한테 한 잔씩 쥐어줬다.

“어머님은 좀 어떠셔?”

어머님 안부를 묻는 말에 롭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형만큼이나 걱정이에요. 의사는 절대 안정하라는데, 절대 안정이 돼야 말이죠. 하루 걸러 한번은 형을 보러 오시거든요. 형 옆에 앉아서 아예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고…… 엄마는 아마…….”

롭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

“형이 이대로 훌쩍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때 봐두고 싶으신 거겠죠.”

“비니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팔짱 끼고 묵묵히 오가는 대화를 듣고 있던 쥬드가 롭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옆에 앉았다. 낙심한 롭을 달래느라 한 소리지만, 나한테도 위로가 많이 됐다. 지금 제일 듣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었다. 비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제일 몸 튼튼하고 얼굴이 두꺼운 녀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에 있어서는 막강한 뭔가가 있는 놈이니까…….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엄마가 아침부터 여태 계시다가 좀 전에 들어가셨거든요.”

혼자 잠잠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롭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막내이기도 하고 하나뿐인 남동생이기도 해서 비니는 롭을 정말 귀여워했었다. 물론 롭은 비니를 많이 피해 다녔지만…….

“바바라 소사 양은 어때요? 자주 오나요?”

쥬드가 바바라의 근황을 물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그냥 물어본다는 투로…….

“일주일에 두 번은 와요. 오늘도 오전에 왔다가 어머니 모셔다 드린다고 같이 집에 갔어요.”

저녁에 비니 어머님을 찾아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바라가 같이 있다고?

“지금쯤은 돌아갔을 거예요. 아마…….”

바바라 얘기에 내 안색이 확 변한 걸 눈치챘는지 롭이 얼른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롭이 나하고 바바라 사이가 안 좋은 걸 알고 있었나?

“비니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요즘 꽤 바쁠 텐데.”

쥬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바라가 바쁘다는 건 흘려들을 얘기가 아니었다. 경찰에게도, 리즐 시 시민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왜? 리즐 시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고요…….”

롭 앞이라 말을 아끼는 눈치지만 뭔가 사고가 없었다면 쥬드가 리즐 시 돌아가는 사정까지 알 리 없었다. 쥬드는 요즘 데이트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 관할 구역에도 관심이 없는 형편이었다.

비니 본가에 갈까? 말까? 병원에 죽치고 누워 있느라 3주 가까이 비니 어머님을 뵙지 못했다. 이제 퇴원해서 멀쩡히 돌아다닐 정도가 됐으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당연한 도리지만, 바바라하고 마주치는 건 무서웠다.

“아까 롭 앞에서 못한 얘기가 뭐였어?”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5층 버튼을 눌렀다. 겐지 클리닉엔 아는 환자가 많았다.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레빈, 발렌타인, 또 나머지 일당들…… 잠깐씩만 들여다보려고 해도 반나절은 그냥 날아갈 정도였다. 내가 어쩌다 이탈리아 마피아들하고 안면을 터서 그 자식들 병문안을 다니고 있는지 생각하면 울적한 일이지만, 왔다가 그냥 가는 것도 좀 그래서…… 올 때마다 죽 돌아보곤 했다.

“우리 관할도 아닌데 자세히 알 거 뭐 있어요?”

쥬드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굳이 비밀로 할 것도 없잖아?”

리즐 시는 작은 동네였다. 하지만 바바라는 인구 100만도 안 되는 작은 도시에서 자릿세나 뜯어먹는 걸로 만족할 만큼 착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상냥한 성격이었으면 애초에 외할아버지하고 암흑가 패권을 다투지도 못했을 거고, 외삼촌을 그렇게 무참히 죽이지도 않았을 거다. 아직은 바바라의 패권에 완강하게 버티는 반대파가 남아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게 리즐 시 마피아 판세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조직 정리가 마무리되고 나면 바바라가 시 경계선을 넘어와서 우리 관할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 주일쯤 전에 리즐 시에서 폭발사고 한 건 하고, 본격적인 시가전이 한 건 있었어요. 둘 다 마피아 관련이었고, 리즐 시 수사관들은 사건의 배후에 바바라가 있다고 생각해요.”

수사관이 아니라 어린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 동네는 몇 년 전부터 바바라가 아니면 시끄러울 일이 없었다.

“본격적인 시가전이라…… 한동안 잠잠한가 싶더니, 상황이 왜 그렇게 안 좋아진 거야?”

“상황이 안 좋아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종료됐어요. 그 건으로 코시모 소사의 마지막 가신들까지 다 쓸려 나갔으니까.”

폭탄 테러에, 백주 대낮에 시가지 한복판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다니…… 리즐 시 짭새들이 혼비백산을 했겠다. 바바라가 거칠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막가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요즘 들어서는 거치적거리는 놈들을 아주 보란 듯이 잡아 죽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비니 때문에 마음 상한 분풀이를 그렇게 하고 있었군.”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건재할 때는 그쪽에서 바바라와 코시모 소사의 가신들 사이를 중재했었어요. 중재라곤 하지만 사실 코시모 소사의 가신들을 보호해준 거죠. 프란시스 몬티첼리 입장에선 바바라가 리즐 시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제 프란시스 몬티첼리한테는 아무것도 중재할 힘이 없거든요.”

전에도 쿠간 시가 조용했던 건 아니지만 바바라는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는 성격이 또 달랐다. 같은 조폭 보스라도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이익 앞에선 타협도 할 줄 알고, 어려운 협상이라도 되도록이면 말로 잘 마무리하려고 애쓰는 성의가 있었다. 물론 그러다 틀어지면 국물도 없었지만…….

“바바라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는 불상사를 막을 방법이 없을까?”

“오는 거야…… 어떻게 막겠어요?”

쥬드가 몬티첼리의 병실을 몇 미터 남겨 두고 걸음을 멈췄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은 바바라의 부하들이었다. 이제 몬티첼리는 중재나 압박은커녕 바바라의 보호를 받는 형편이었다. 아니, 감시라고 해야 할까?

“사이몬한테나 가 볼까?”

“안 그러는 게 좋을 걸요? 독이 잔뜩 올라서 방문만 열어도 아무거나 집어 던지고 있다니까…….”

“물건 집어 던질 기운이라도 있다니 다행이군.”

몬티첼리의 병실에는 레빈도 와 있었다. 레빈은 경과가 좋은지 안색이 전보다 많이 좋아졌다. 몬티첼리는 그저 그렇지만…… 쥬드하고 내가 들어서자 두 사람이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우리를 돌아봤다.

“오랜만입니다, 돈 몬티첼리.”

“오랜만이군.”

몬티첼리가 건성으로 인사를 받으며 내 몰골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훑었다.

“한방 맞고 경찰 병원에 누워 있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쩐 일이야?”

병원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처지라도 바깥소식이 아주 어둡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거의 다 나았습니다. 비니를 보러 들렀다가, 어떠신가 해서요.”

“나야 뭐, 보다시피…….”

역시나 대강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몬티첼리가 쥬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프란시스 몬티첼리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게 냉랭했다.

“당신은 볼 때마다 더 예뻐지는군요, 미스 크롬웰.”

처지가 안 좋다고 성격이 바뀌는 건 아니라서 소문난 바람둥이답게 예쁜 여자 앞에선 분위기가 훈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언감생심 쥬드랑 같은 대접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전엔 이렇게 확 드러나게 사람 차별하고 그러지 않았었는데…….

“앉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네요.”

몬티첼리의 태도에 레빈이 쓴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됩니까? 총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그냥 가벼운 상처였어요.”

“얼굴이 많이 안됐어요.”

문병 온 사람은 난데 어느새 입장이 바뀌었다.

“금방 좋아질 거예요. 잘 쉬고 있으니까…….”

또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몬티첼리가 마땅치 않은 시선으로 나를 흘겨봤다. 비록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입지가 전 같지는 않지만 몬티첼리는 지난 십 수 년 간 쿠간 시 뒷골목의 패자로 군림하던 악당 중의 악당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니까 나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요즘은 어디서 지냅니까? 거처는 정했습니까?”

레빈이 다시 내 근황을 물었다. 그 질문에는 쥬드가 대신 대답했다.

“요즘은 저하고 같이 있어요. 마음 편하게 쉬면서 몸조리하기엔 호텔보다 나을 것 같아서요.”

쥬드의 대답에 몬티첼리의 시선이 좀 전보다 더 예리해졌다. 내가 그렇게 못마땅한 이유는 잠시 후에 알았다. 몬티첼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한창 교제 중이라는 남자친구는 어쩌고?”

내가 알기론 몬티첼리 저택이 박살나고 그 휘하의 부하가 반도 넘게 살해당한 건 루크 첸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었고…… 아마 몬티첼리도 그럴 거다. 저택 습격 사건이 루크 첸이 저지른 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몬티첼리가 루크 첸에 대한 유감을 거둘 이유는 없었다. 둘은 몇 년째 쿠간 시 뒷골목 이권을 놓고 쉴 새 없이 다퉈 온 껄끄러운 사이였고, 몬티첼리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이득을 챙긴 것도 루크 첸이었다.

“그건…….”

반장이나 서장한테 추궁당하는 것보다 더 입장이 난처했다. 내가 몬티첼리 집안사람도 아닌데, 원수 가문의 아들하고 정분난 걸 일가의 어른한테 들킨 것 같은 이 난처함은 대체 뭐냐?

“됐어. 조카 친구 녀석 사생활 따위, 내가 알게 뭐야?”

몬티첼리가 손사래를 치며 내 말문을 막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한대 갈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소리 해봐야 믿기지도 않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내 대답에 레빈이 후…… 하고 한숨은 내쉬었다. 몬티첼리가 팔짱 끼고 누워서 거 보란 듯 레빈을 쳐다봤다.

“내가 뭐랬어? 사실일 거라고 했지?”

몬티첼리가 노려보는 것보다 레빈이 저렇게 측은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게 더 민망하다.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겁니까? 그 남자는 니콜라스 헤슬렘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인데요.”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리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내 말이 미덥지 않은지 몬티첼리의 표정은 그저 시큰둥했다.

“빤한 잔소리 따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비니가 저렇게 누워 있어서 그런지 자네가 아주 남 같지는 않아서 한마디 하는 거니까, 고깝게 듣지 말았으면 좋겠어.”

“…….”

“자네 사생활이고, 자네 목숨이야. 좀 소중하게 여기라고.”

몬티첼리나 레빈은 루크 첸과의 관계에 대해 나를 비난하지도, 길게 잔소리를 퍼붓지도 않았다. 그냥 몸조심 하라는 당부를 몇 마디 건넸고, 루크 첸과의 관계가 나한테 하나도 이로울 게 없다고 레빈이 걱정 어린 충고를 짧게 덧붙인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병실에서 나왔을 때는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진이 빠졌다. 이젠 쪽팔려서 병문안도 못 다니겠다.

“뭐…… 루크 첸하고 당신이 남의 눈 피해가면서 조심스럽게 만났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쳐다보고 걸어가는데 쥬드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모양인데…….

“새삼스럽게 속상해 할 거 없어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을 몬티첼리라고 모르겠어요? 그나마 몬티첼리가 요즘 바깥일에 관심이 없어서 소식이 늦은 거지…….”

이게 위로냐?

“어디 가요?”

엘리베이터를 그냥 지나치자 쥬드가 물었다.

“들여다볼 데가 있어서.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당신은 여기서 잠깐 기다려줘.”

발렌타인의 병실은 최근 들어서는 갈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혹시 썰렁하게 빈 침대를 보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런 걱정을 해야 할 만큼 발렌타인의 경과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며칠 만에 한 번씩 올 때도 그랬는데 발렌타인을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3주가 다 됐다. 아까 몬티첼리 병실에 들어갈 때 두 사람이 발렌타인 얘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별일 없는 것 같지만…….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침대에 얌전하게 누워 있던 발렌타인이 문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야?”

“아니, 그냥…….”

놀라서 흠칫 걸음을 멈췄다. 눈빛이며 표정이 장난 아니게 살벌했다.

“괜찮은가 해서.”

“꺼져!”

발렌타인이 털썩 누우며 공연히 신경질을 냈다. 본래 성격이 저랬었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몸은 좀 어때?”

병원에 몇 달씩 있다 보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인사가 그걸 텐데 뭐가 그렇게 거슬렸는지 발렌타인이 베고 있던 베개를 냅다 집어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뒷걸음질 쳐서 방을 나왔다. 맞았다고 해봐야 깃털 베개니까 다치거나 충격을 받은 건 아니지만…… 얼떨떨하다. 왜 저러지? 잠시 방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경고도 없이 500ml짜리 패트병이 날아왔다. 다행히 이번엔 조준이 빗나가서 문에 맞고 튕겨 나간 덕에 살았다.

“무슨 일이에요?”

완전히 질려서 문 닫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쥬드가 다가와서 물었다.

“몰라…….”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발렌타인은 지금 문병객을 맞이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쥬드가 무심코 병실 문을 열어 보려고 하길래 놀라서 뒤로 끌어당겼다. 집어 던질 게 더 이상 없으면 링겔 병이라도 빼서 던질 기세던데, 제대로 맞으면 크게 다칠 거다. 의식이 있고, 뭔가 집어 던질 기운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문병은 한 거다.

몬티첼리 저택이 기사단의 습격을 받은 그날 이후로는 겐지 클리닉에 자주 드나들었고 비니가 입원한 이후로는 아예 병원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비니 병실을 시작으로 이 방 저 방 다닐 곳이 많아서 이젠 정해진 동선이 생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병문안이 이번만큼 당황스럽고 험난하기는 처음이었다.

몬티첼리하고 레빈한테는 루크 첸 문제로 추궁 당하고, 발렌타인은 이유도 없이 신경질이고…… 당분간 병원에 오지 말까?

차에 올라타자마자 입에서 끙…… 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실, 나는 지금 다른 사람 병문안 다닐 주제도 못 된다. 이대로 돌아가서 뻗으면 내일 저녁때까지도 못 일어날 것 같다.

“피곤해요?”

시동을 걸면서 쥬드가 물었다.

“괜찮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서 한창 퇴근 정체가 시작되는 혼잡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나는 나대로 마음이 무겁고, 쥬드는 쥬드대로 뭔가 생각이 골똘했다. 그렇게 한 30분 가까이 차가 도로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차안엔 낮은 음악만 잔잔히 흘렀다.

“아까 했던 얘기 있잖아요…….”

정체가 좀 풀렸는지 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할 즈음 쥬드가 입을 열었다. 아까 무슨 얘기를 했었더라?

“그 뱀파이어 얘기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언제 차분하게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델 파소가 무너지던 날 있었던 일도 그렇고, 또 몬티첼리 저택이 습격당하던 날 당신이 목격한 일도…….”

얘기는 해줄 수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쥬드가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실제로 목격한 나조차 뭘 봤는지 알 수가 없는데…….

“그런 얘기는 왜?”

“사방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 해봐도 그게 뭔지 모르겠거든요.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변신 괴수, 뱀파이어…….”

“당신은 그런 거 안 믿잖아.”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로는 답이 안 나오는 일이 부쩍 많아졌어요. 몇 주 전까지 심심찮게 발견되던 미라 문제도 그렇고, 델 파소가 한순간에 자갈로 변해서 무너진 것도 그렇고…… 이 기회에 사고방식의 폭을 넓혀 보는 것도 나쁠 거 없죠. 지금까지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단정 지었던 일들이 사실은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엔 많이 들어요.”

쥬드가 논리정연하고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건 다른 이유도 많지만 우선 그녀가 그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쥬드의 천성이기도 했다. 가벼운 기호하고 달라서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 쥬드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정도였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데?”

“내 평생 상상해온 것들 중 제일 비현실적인 걸 실제로 봤거든요.”

쥬드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게 뭔데?”

“라두칸 장서각이요.”

마리우스의 책방 지하실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놀라움? 감탄? 경악? 보통 쓰는 말로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양피지 두루마리가 켜켜이 쌓인 아찔한 탑들과 위태롭게 걸린 구름다리,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킨 미로……. 그렇게 신비롭고 아름답고, 한편 무서운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사실 그 이후로도 워낙 이상하고 충격적인 일을 많이 봐서 책방에 대한 기억은 그냥 먼 옛날 일 같았다. 비니랑 헤매 다니면서 죽도록 고생한 건 가끔 생각나고, 꿈에서도 보긴 보지만.

“그런데, 어딜 가는 거야?”

병원에서 나와서 계속 직진이었다. 루벳 거리로 가나 싶어서 여태 잠자코 있었는데 로즈 거리에서 좌회전이면 그 방향도 아니다.

“비니 본가요.”

헉…….

“거, 거긴…….”

“몬티첼리 부인은 요즘 정말 상태가 안 좋으세요. 병문안을 간다고 크게 위안이 되진 않겠지만…… 당신을 보면 반가워하실 거예요.”

“하지만 거긴 지금 바바라가…….”

“그 여자는 요즘 바빠요. 벌여 놓은 일이 있는데, 여태 비니네 집에 죽치고 있겠어요? 벌써 갔을 거예요.”

“안 갔으면 어떡해?”

신호에 걸려서 차가 섰다. 마음 같아선 이참에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지만 쥬드가 비웃을까 봐 참았다. 아니…… 그냥 내려버릴까? 쥬드는 벌써 나를 잔뜩 비웃고 있었다.

“바바라가 그렇게 무서워요?”

“당신은 안 무서워?”

내 질문에 쥬드가 애매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무섭죠. 나도 사람인데.”

“그런데 지금 꼭 비니네 집엘 가야겠어?”

“난 이번 주엔 더 이상 조퇴 못해요. 시간 있을 때 들러봐야죠. 설마 바바라가 당신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건 모르는 일이다. 바바라가 나를 보는 시선은 이따금…… 진짜 살벌하다.

길이 많이 막혔다. 쥬드가 전공을 살려서 큰길과 골목길을 번갈아가며 종횡무진 달려봤지만 골목길도 막히긴 마찬가지라 비니 본가까지 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 비니 성화에 억지로 끌려 와서 가족들하고 같이 저녁 먹고 하룻밤 신세진 이후 처음 와보는 거니까…… 나도 오랜만에 오는 거다.

기분 탓일까? 언제나 푸근하고 활기차 보이던 저택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렇게까지 황량하고 어수선하다니…… 마치 오래 전에 버려진 집처럼…….

문을 열어준 건 제이드였다. 제이드는 비니 바로 밑의 여동생으로 성격이며 외모며 비니랑 닮은 데가 많았다.

“어머, 제이…….”

제이드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겼다.

“어서 와요. 제이. 요즘 통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제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별로 잘 지낸 것 같지는 않네요. 많이 말랐어요.”

저렇게 약간 짓궂은 표정은 정말 비니하고 많이 닮았다. 비니 형제들은 대체로 분위기가 그렇다. 밝고, 선하고, 약간 엉뚱한 면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배짱이 두둑해서 비니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롭은 예외지만.

“와주셔서 고마워요, 미스 크롬웰.”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 오전에 병원에 오셨다 가셨다고 들었어요.”

“오늘은 기분이 많이 나아지셨어요. 응접실에 계신데 두 분을 보면 굉장히 반가워하실 거예요.”

제이드가 밝게 웃으면서 나하고 쥬드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온 집안이 다 침울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밝은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저 속마음이 어떨까? 비니의 징크스가 여동생들이라고 비켜 간 건 아니지만 비니는 동생들한테 다정하고 자상한 오빠였고, 사이가 정말 좋았었다. 나 보고 말랐다고 걱정하고 있지만 제이드도 보기 딱할 정도로 얼굴이 상했다.

응접실은 상류층 부인들의 티타임 같은 분위기였다. 벽난로엔 조그맣게 불이 피워져 있고 소파엔 서너 명의 여자들이 차를 한 잔씩 앞에 놓고 둘러 앉아 있었다. 몬티첼리 부인 외에도 비니 둘째 여동생인 안젤라하고 시장 부인, 잘 모르는 부인 두 명, 그리고 바바라…….

몬티첼리 부인은 기운을 차렸다기보다는 이제 마음 졸이고 슬퍼하는 일에도 지친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는 우아한 부인이었는데 지금은 그림자처럼 공허한 표정뿐이었다.

“잘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어서 연락을 한번 해볼까 하던 참이었어요.”

나를 보는 부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자주 찾아 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부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바라가 잠자코 옆으로 비켜 앉았다. 응접실에 앉을 자리가 여기 말고 없는 것도 아닌데 꼭 바바라 옆에 앉아야 되나? 아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바바라 주변 50미터 안쪽으로는 접근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뭐해요? 그렇게 서 있을 거예요?”

비켜준 자리에 냉큼 앉지 않는다고 바바라가 시비를 걸었다. 별 수 없이 나는 바바라 옆에 앉고 쥬드는 시장 부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얼굴이 많이 축났어요. 안색도 안 좋고…….”

“좀 바빴습니다.”

“그냥 바빴던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제 걱정을 하실 게 아니라, 어머님께서 기운을 차리셔야죠.”

비니는 절대 저렇게 잘못될 녀석이 아니다, 꼭 일어날 거다…… 그런 빤한 위로조차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웠다. 같이 파트너로 다니다가 비니만 저 지경이 된 이후로는 부인과 비니 가족들한테 큰 죄를 지은 느낌이 떨쳐지질 않았다. 차라리 비니하고 내가 처지가 바뀌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수없이 했었다.

“총상을 입었다고 들었는데, 회복이 빠르네요. 벌써 이렇게 나돌아 다니는 걸 보니…….”

얘기가 잘 마무리되고 있었는데, 바바라가 옆에서 어깃장을 놓으며 끼어들었다.

“총상을 입다니…… 총에 맞았단 말이에요?”

내가 총에 맞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몬티첼리 부인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바바라가 쓸데없는 소릴 지껄인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무겁고 조심스러운 응접실 분위기가 완전히 바닥에 깔리고 말았다.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에 강도가 들었을 때 유제이 형사도 현장에 있었거든요.”

쥬드가 얼른 분위기 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부인이 쉽게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을 때라 진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백화점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던 게 한 달 가까이 된 것 같은데, 그럼 그동안 계속 병원에 있었던 거예요?”

“며칠 병원 신세를 진 건 맞지만 총상이라고 할 것도 없는 가벼운 부상이었고, 이젠 다 나았습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주 오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기만 했어요.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당신이 병원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진정하세요, 부인. 전 정말 괜찮습니다.”

진정은커녕 부인이 갑자기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격하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선 채 괜찮은데…… 괜찮은데…… 아무리 중얼거려 봐야 부인의 귀엔 내 말이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주변에서도 부인을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어서 결국 제이드와 시장 부인이 몬티첼리 부인을 침실로 데리고 갔다.

문안인사 왔다가 도리어 폐만 끼친 격이 되고 말았다. 오늘은 일진이 되게 이상하다. 다음엔 집 나서기 전에 오늘의 운세라도 확인을 해야 할까 보다.

공연한 얘기를 들춰서 그나마 평온하던 분위기를 파토 내버린 당사자는 태연하게 앉아서 아직껏 차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넘어가자니 신경질 나고, 따지자니 무섭고…… 저 여자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왜요?”

바바라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쥬드 말로는 요즘 바쁠 거랬는데, 태도나 표정은 전혀 바쁜 기색이 없었다. 제이드가 오면 인사나 하고 가야겠다.

“어머님은 당신을 보면 더 마음이 아프신가 봐요. 최근엔 저렇게 우신 적이 없었는데…….”

몬티첼리 부인이 탈진해서 쓰러질 지경이 된 것도, 비니가 저렇게 된 것도…… 모두 내 탓이라는 투였다.

“부인이 그렇게 걱정스러우면 그 앞에서 쓸데없는 소릴 말았어야죠.”

“걱정이 돼서 나도 모르게 그만…….”

바바라가 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바바라는 인상이 전보다 더 안 좋아져서 이젠 미소조차도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듣기엔 그렇게 가벼운 부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회복이 빨라서 다행이에요. 어쩌다 보니 병문안도 한번 못 갔네요. 그동안 나도 좀 바빴거든요.”

“무슨 일로 바빴는지는 대강 들었습니다.”

내가 미쳤나 봐……. 실수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는데 어쨌든 말은 벌써 뱉은 다음이었다. 바바라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만만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백화점에 당신 남자친구도 같이 있었다면서요?”

누구는 말을 할 줄 몰라서 입 다물고 있는 줄 아나? 며칠 전에 외할아버지 친구 한 명하고 경호원 두 명을 아주 가루로 만들어서 날려버린 일 정도는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떠들 수 있다. 비니 여동생하고 동네 아줌마들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서 참는 것뿐이다. 하긴, 그런 소리 해봐야 눈 하나 깜짝 않겠지만.

바바라하고 싸울 수도 없고, 계속 얼굴 마주보고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몬티첼리 부인도 없는 자리에 더 머뭇거릴 이유도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젤라와 얘기를 나누던 쥬드가 나를 따라 나서려고 내려놨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쥬드보다 먼저 바바라가 일어났다. 빈손으로 일어나는 걸 보니 아직 갈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 어딜 가는 길이든 먼저 지나가라고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바바라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얘기 좀 해요. 조용한 데서 단둘이…….”

바바라가 앞장서서 나를 데리고 간 곳은 1층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막다른 방이었다. 그동안 이 집에 몇 번을 드나들었어도 이 방은 처음이었다.

꽤 큰 방이었다. 전실은 응접실이고, 안쪽은 침실인데 일상적으로 쓰는 자질구레한 물건이 없고 커다란 가구엔 하얀 천을 씌워 놓은 걸로 봐서는 현재는 쓰는 사람이 없는 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방의 전 주인이 누군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응접실 탁자와 벽난로 위쪽 선반엔 가족사진 몇 장과 노부부의 사진이 놓여 있고 여기저기 옛날 물건들이 장식돼 있는 걸 보면 여긴 비니의 조부모님들이 쓰던 방이었을 거다.

“한 잔 할래요?”

바바라가 장식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서 들어 보였다.

“별로…….”

“난 한 잔 마셔야겠어요.”

바바라가 장식장 아래쪽에 있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컵 하나를 꺼내더니 위스키를 반도 넘게 따랐다. 저렇게 구석구석 뒤져서 필요한 걸 찾아내는 걸 보면 바바라는 이 방에 자주 왔었나 보다.

“앉아요. 잡아먹지 않을 테니까.”

바바라가 위스키 반 잔을 한 입에 마셔 치우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이 됐든, 길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할 말이 있다기보다…… 궁금해서요.”

“뭐가요?”

“루크 첸하고는 어쩌다 그런 사이가 된 거예요?”

“…….”

내가 말없이 노려만 보자 바바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꾸만 그 얘기를 꺼내서 미안하지만…… 너무 하잖아요. 루크 첸이라니…… 처음엔 어쩌다 잘못 걸려서 고생하는 것 같더니, 요즘은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설마 그 남자를 진짜로 좋아하는 건 아니죠?”

내가 어쩌다 오늘 같은 날 집 밖엘 나와서 가는 데마다 이런 수모를 겪는지 모르겠다. 짜증나서 그냥 돌아섰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등 뒤에서 어떤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걸음을 멈췄다. 무슨 소리냐 하면…… 권총에서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였다.

“나를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얌전하게 말을 잘 들으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요?”

바바라가 총구를 까딱까딱 흔들면서 의자에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보니까 술기운이 좀 올랐는데 저러다 딸꾹질이라도 잘못 나오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루크 첸 얘기를 해봐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바바라가 대뜸 다그쳤다.

“무슨 얘기요?”

“둘이 어디까지 갔어요? 키스는 해봤어요? 혹시 갈 데까지 다 갔으면서 내숭 떠는 거 아니에요?”

다시 자리 털고 일어났다. 총 들었다고 이렇게 막 가냐? 기분 나빠서 못 앉아 있겠다.

“좋긴 좋은가 보네요. 한마디 할 때마다 발끈하는 걸 보니…….”

“겨우 그런 얘기나 하자고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냈습니까?”

“그렇게 시시껍절한 얘기 아니면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한 걸음 떼어 놓으려는데 바바라가 총을 고쳐 잡았다. 총 맞고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지 며칠 되지도 않는 사람한테 너무하네, 정말…….

“당신하고 그 중국 제비가 어떤 사이든, 그런 건 사실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럼 왜 이러는 겁니까?”

“궁금한 건 많죠. 이 도시에선 뭔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동네가 몇 블록씩 그냥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미라가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수십 명이나 되는 떼강도가 겨우 백화점이나 털겠다고 설치질 않나…… 그런데 그런 일에 대해선 당신도 딱히 아는 게 없는 것 같으니까 넘어가고…….”

술주정도 참 밉살맞게 한다.

“요즘 차이나타운 돌아가는 꼴이 여러 가지로 수상하고 또 루크 첸이 통 나돌아다니질 않는데, 루크 첸의 근황 따위 당신한테 물어봐야 대답을 해줄 리 없으니 그것도 패스하고…….”

바바라가 위스키를 아까 마셨던 것만큼 잔에 부었다. 바바라는 체격이 작은 편이었다. 키도 작고, 몸집도 바람 불면 날아갈까 겁날 정도로 말랐다. 평소 주량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에 저렇게 들이 부으면 버티지 못할 거다.

“웬 술을 그렇게 마셔요?”

“글쎄…… 자꾸 마시게 되네요.”

이젠 들고 있기도 귀찮은지 바바라가 총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나른한 표정으로 본격적인 술주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냥 얘기나 하자고요. 비니가 저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누구하고도 제대로 된 얘기를 못해봤어요.”

일단 소파 위에 굴러다니는 총을 집어서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 위로 치웠다. 그리고 바바라와 마주 앉았다.

무슨 얘기가 되었든 웬만하면 참고 들어주자. 얼마나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나를 붙들어 앉혀 놓고 저럴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고, 비니가 저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누구하고도 제대로 된 얘기를 못해봤다는 말을 들으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실은 나도 바바라하고 처지가 비슷했다. 주변에 사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속마음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녀석은 최근 몇 년간은 비니뿐이었다.

“이 방에서 비니를 처음 만났어요. 여덟 살 때였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안 지났을 때였는데…… 어쨌든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비니가 좋았어요. 정말 귀여웠거든요. 그때도 할아버지가 공들여 만드시던 모형 집 지붕을 다 날려버리곤 자기가 그런 거 아니라고 딱 잡아떼던 참이었죠.”

나는 비니를 경찰학교에서 만났다. 물론 첫날부터 녀석을 복도나, 강의실이나, 운동장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가 된 건 시간이 좀 지난 다음부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니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방을 바꿔주지 않으면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기숙사 사감에게 강력하게 건의를 넣어서 우여곡절 끝에 내가 비니의 룸메이트가 되고 난 다음부터였다.

첫 인상은 좋았다. 도무지 악의라곤 없어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이 일단 좋았고 따지는 것도, 가리는 것도 없는 너그러운 성격이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비니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나도 이만하면 룸메이트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평범한 듯 보여도 정말 좋은 사람은 언제나 드물었다. 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절실하게 좋은 친구가 그리웠었다. 물론 한 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 일을 기억하느라 긴장이 풀린 바바라의 얼굴은 평범하고 온순해 보였다. 뭔가 잘못 봤겠지 싶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바바라를 쳐다봤다. 역시…… 잘못 봤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바바라의 눈빛은 평범하지도, 온순하지도 않았다.

“비니를 자주 만나지는 못했어요. 외할아버지를 따라서 서너 달에 한 번씩 들리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그것도 비니 할아버지가 나를 꼭 데리고 오라고 당부를 하셔서 올 수 있었던 거고…… 비니하고 같이 온 집안을 다 뒤지고 다니면서 고물 잡동사니를 찾아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은 세상에 없을 것 같았죠. 비니하고 같이 있으면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였어요.”

나도 물론 비니를 좋아하지만, 같이 있으면서 안심이 되거나 마음이 놓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정하고 사랑은 그런 차이가 있는 걸까?

“비니는 당신 같은 사람을 좋아해요. 순진하고 착해빠지고, 외로운…… 꼭 당신 같은 사람이요. 그런 사람을 보면 기꺼이 친구가 돼주고, 보호해주려고 애쓰죠. 물론 어깨뼈가 빠지거나, 이가 부러지는 정도의 고통은 감수해야 하지만…….”

바바라가 자기 앞니를 톡톡 두드리며 킥킥 웃었다. 내가 알기론, 바바라가 일방적으로 비니를 짝사랑한 건 아니었다. 비니도 바바라를 좋아했다. 바바라 얘기를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잔도 거의 단숨에 마셔 치운 바바라가 잔을 내려놓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당신 같았을 때…… 비니는 날 정말 사랑했었어요.”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바라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바바라의 고통은 과거에 지나간 기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었다. 대체 어떤 고통이 천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냉혹하게 만들었을까?

“비니는 당신 걱정을 많이 했어요. 지금도 그럴 거고…….”

“사랑은 아니죠. 그냥 동정이고…… 연민이고……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는 옛정이고…….”

바바라가 병에 남은 술을 잔에 마저 털어 부었다. 애초에 병에 남은 술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취기가 많이 올랐는데…… 저거 마시면 여기서 자고 가야 될 거다.

“비니가 변한 건 비니 탓이 아니죠.”

내 대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바바라가 두리번거리며 총을 찾았다. 이럴까 봐 총은 이미 멀찍이 치워뒀다.

“그럼 어떡해요? 다락방에서 목이라도 맬까요? 외삼촌한테 강간이나 당하면서 골방에 처박혀서 평생을 살라고요? 오늘 밤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얻어맞지 않을까…… 마음 졸이면서 10년을 짐승처럼 살았어요. 비니가 변한 건 물론 비니 탓이 아니죠. 그럼, 내가 변한 건 내 탓인가요?”

소리치면서 바바라가 반쯤 남은 술잔을 나한테 집어던졌다. 스탠으로 만든 조그만 컵이 내 가슴팍에 맞고 튕겨 나갔다.

바바라가 거친 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서툰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그맣고 연약한 여자애가 숨을 곳을 찾아 집안 이곳저곳을 헤매 다니는 모습이 눈앞에 그린 듯 떠올랐다. 거칠고 야비한 남자한테 붙들려서 짐승처럼 끌려다니다 강간당하는 장면까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서 나도 잠깐 눈을 감았다.

“놀라지 않네요.”

어렵게 흥분을 가라앉힌 바바라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짭새 노릇을 몇 년씩 하다 보면 놀랄 일이 별로 없어요.”

어지간히 놀라도 좀처럼 내색을 않게 되거나…….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던 일이었다. 실종된 지 수 개월 만에 철거 예정인 사무실 건물 지하에서 어렵게 찾아낸 알버트 소사의 시체는 살인사건을 수없이 다뤄본 베테랑 경관들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로 그 몰골이 참혹했다. 온 몸에 부러지지 않은 뼈가 없을 정도로 심하게 폭행당했고 몸통의 절반이 콘크리트와 함께 굳어 있었다.

시체가 그 지경으로 발견된 탓에 알버트 소사의 죽음에 관한 흉흉한 뒷말도 끊이질 않았다. 폭행당한 후 바로 죽지도 못하고 다섯 시간가량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었다는 소문도 돌았고, 알버트 소사의 숨이 미처 끊어지기도 전에 바바라가 직접 얼굴에 콘크리트를 부어 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사건은 누가 봐도 원한에 사무친 살인이었다. 어린 조카와 삼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막연히 짐작만 하는 거 하고,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듣는 거하곤 느낌이 많이 다르지만…….

바바라가 취기를 못 이기고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파묻었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하지만 난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이 싫었어요.”

“그래요?”

전혀 몰랐다는 듯 대꾸했지만 나도 그만한 눈치는 있다. 별로 미안해 할 것도 없는 게…… 첫인상 안 좋기는 피차일반이었다.

“비니가 예전에 나를 보던 그런 눈빛으로 당신을 보더라고요. 다정하게 어깨를 두르고, 신경질이나 짜증도 두말없이 받아주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어디나 같이 가고…… 정말 어떤 때는…….”

나를 보는 바바라의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암사자의 그것처럼 음산하게 번뜩였다.

“죽여버리고 싶었어요.”

정말 성격 안 좋다. 어떻게 그런 걸 트집 잡아서 사람을 위협하냐? 비니랑 같이 밥 먹고, 같이 일하고, 어디나 같이 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요. 파트너니까.”

“그래서 안 죽였잖아요.”

겨우 위스키 석 잔에 거침없이 본심을 토해내던 바바라가 결국 소파에 모로 누웠다. 누웠다기보다는 쓰러졌다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운데, 그러면서도 자꾸 허리 근처를 더듬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신도 없으면서 총은 왜 저렇게 찾아?

“당신은 어떻게…… 그대로야?”

손에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자 혼자 짜증을 내던 바바라가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당신도 힘든 일이 많았잖아. 연쇄살인범한테 죽을 뻔했던 것도 그렇고…… 그 전에도, 후에도 완전히 재수 옴 붙어서 빌빌거리던데…… 어떻게 늘 그대로야? 왜 당신은 안 변해?”

“나도 많이 변했어요.”

“재수 밥맛이야…… 정말…….”

바바라가 드디어 잠들었다. 썰렁하고 추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오늘의 대화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바바라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게 공연한 걱정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고, 나를 미워하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알았다. 지금까지도 바바라를 최대한 피해 다녔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몸조심을 해야겠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소파에서 굴러 떨어질 것처럼 걸쳐져서 자고 있는 걸 그냥 두고 가자니 마음에 걸려서 일단 바바라를 안아 들었다.

비니 할아버지의 침실은 넓고 휑했다. 빈방 특유의 썰렁함이랄까…… 비록 주인 없는 방이라도 청소는 꼼꼼히 하는지 깨끗하게 치워져 있긴 하지만 정신도 없는 여자를 던져 놓고 나가기엔 공기가 차가웠다. 뭐. 남의 집에서 술 마시고 뻗은 주제에 이것도 과분하긴 하지만…… 바바라를 침대에 눕혀 놓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저지른 짓은 흉악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래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수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는 알버트 소사 같은 인간이 되고 말았다. 자신이 평생 그렇게 증오하고 미워했던 인간으로 사는 기분이란 건 어떤 걸까? 살자니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거다. 모든 복수가 부당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이대로 살다간 그녀도 누군가의 손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될 거다. 인생은 때론 깊은 함정 같다. 아무리 벽을 긁어도 번번이 굴러 떨어져 제자리에 처박히고 마는…….

곯아 떨어져서 씩씩거리던 바바라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는 바람에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러다 선반에 놓인 물건을 건드려서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무로 세심하게 조각한 미니어처 의자였다.

비니 집에는 이런 물건이 많았다. 미니어처 가구와 집을 만드는 건 비니 할아버지의 오랜 취미였다. 비니의 아파트 장식장에도 이런 미니 가구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아파트 한 코너에는 가구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중해풍 미니 거실이 놓여 있었다.

정신 차리고 둘러보니 침실 선반이 온통 할아버지의 작품으로 가득했다. 의자, 탁자, 소파, 서랍장 등등…… 미니 가구라고 해서 어설프고 조잡한 게 아니고 진짜 가구의 축소판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비니 할아버지도 꽤나 거칠게 사신 분인데,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기대도 안 했는데 방안엔 의외로 볼 게 많았다. 사방에 장식된 작은 소품 외에 침대 옆엔 미니어처치곤 꽤나 커다란 범선이 한척 놓여 있고, 테라스로 나가는 창문 옆에 놓인 커다란 테이블 위엔 아예 동네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범선도 훌륭하지만 테이블 위의 작은 마을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아자씨오 마을이에요. 할아버지의 고향 동네죠.”

동네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누가 방에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돌아보자 제이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여기 있는 걸 모르고 한참 찾았어요.”

바바라한테 끌려가서 한참 동안 소식이 없으니 걱정이 돼서 찾아다녔나 보다.

“미안해. 얘기가 좀 길어져서…….”

제이드가 침대에 늘어져 있는 바바라를 울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방이 추울 텐데…… 난로라도 피워야겠네요.”

다정하기도 하지. 제이드도 귀가 있으니 바바라의 만행을 모르지는 않을 터, 보통 사람이라면 바바라가 집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도 꺼림칙한 게 정상이다. 하긴, 비니 여동생들이 하나같이 배짱은 좋다.

“어머님은 어떠셔?”

“괜찮으실 거예요. 오빠도 곧 일어날 거고,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제이드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도리어 위로를 했다. 그리곤 내가 들여다보고 있던 작은 동네로 눈길을 돌렸다.

“근사하죠? 할아버지가 공을 많이 들이신 작품이에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고치고 매만지셨죠.”

“그동안 소품은 많이 봤는데, 이런 대작이 있는 건 몰랐어.”

비니 할아버지의 고향 동네라…… 그러고 보니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옛 이탈리아 풍 마을이었다. 중앙에 작은 광장이 있고, 하얀 분수대가 있고, 교회와 종탑이 있고…… 작고 아담한 노천카페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버지가 이걸 얼마나 탐내셨다고요. 고모님들도 그렇고…… 이것 때문에 오빠가 한동안 친척 어른들을 피해 다닐 정도였다니까요.”

비니가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일은 좀처럼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비니를 피해 다니는 일은 빈번하지만.

“비니가 왜?”

“할아버지가 작품을 몽땅 오빠한테 유산으로 남기셨거든요. 손자들을 다 귀여워하셨지만 확실히 오빠를 많이 편애하시긴 하셨죠.”

첫눈에도 비니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났다. 너그럽고, 자신만만하고, 어지간한 일에도 주눅 드는 일 없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 특유의 반듯함이랄까, 그런 게 있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그 반듯함이 큰 의미는 없었다. 징크스가 워낙 죽음이라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동네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2, 3층 정도 되는 주택의 지붕에 얹힌 갈색 기와도 앙증맞았고 집집마다 테라스에 내놓은 화분의 꽃도 진짜처럼 화사하고 색이 고왔다. 하지만 정말 볼 만한 건 광장을 따라 늘어선 상점들이었다. 빵가게, 식료품점, 정육점, 모자가게…… 상점 진열장엔 금방 구운 빵이 몇 바구니씩 가득 차 있는가 하면 모자 가게엔 꽃으로 장식한 섬세한 모자가 열 개도 넘게 걸려 있었다.

“이걸 진짜 할아버지가 다 만드셨단 말이야?”

“소품은 안젤라가 많이 거들어 드렸어요. 특히 벽화나 간판 그림은 대부분…… 걔가 그러다가 미대에 갔죠.”

깨끗한 흰색 벽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벽에 담쟁이나 장식 그림이 그려진 집도 꽤 많았다. 게다가 가게마다 내 걸린 간판 그림은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특히 노천카페에 걸린 성냥갑만한 간판에 그려진 코끼리는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품을 하는 것 같기도 해서 굉장히 귀여웠다.

“진짜 이런 데가 있다면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은 걸?”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옛날 고향이에요. 지금은 다 바뀌었을 거예요.”

제이드가 벽난로에 장작 몇 개를 넣고 불을 피우는 동안 나는 방 구석구석에 놓인 소품들을 감상했다.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다. 전에 왔을 때도 이런 거나 구경했으면 좋았을 걸, 괜히 비니랑 붙어 있다가 날벼락만 맞았다.

“어떤 게 맘에 들어요? 하나 드릴게요.”

불을 다 지핀 제이드가 옆으로 다가왔다. 말은 고맙지만…….

“할아버지 작품은 할아버지 방에 있는 게 제일 좋을 거야. 비니도 그렇게 생각할 거고.”

“오빠는 당신한테 뭐라도 주고 싶어 했을 거예요.”

뒤를 돌아 침대 쪽을 봤다. 다행히 바바라는 미동도 않고 잘 잔다. 이제 그만 나가는 게 좋겠다.

“바바라 손에 죽은 줄 알았어요.”

기다리느라 지루했는지 쥬드가 투덜거렸다. 올 때는 작은 핸드백 하나뿐이었는데 그 사이 짐이 늘었다. 케이크 상자만 한 미니어처 상점…… 아니 카페였다. 아까 방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데, 그보다는 좀 더 컸다.

“제이드가 선물로 줬어요. 멋지죠?”

그새 하나 챙겼구나.

“좀 들어줘요.”

쥬드가 카페를 나한테 냅다 떠넘기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마땅한 상자가 없었는지 미니어처 본채에 핑크색 리본이 하나 매어져 있을 뿐이었다. 리본 하나 맨 것도 예쁘긴 하지만 운반 잘 해야지, 잘못하면 본채 밖에 붙어 있는 테이블이며 의자 같이 자잘한 소품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준다고 덥석 받았어?”

“선물로 안 줬으면 훔쳐서라도 가졌을걸요. 이런 작품은 돈 주고 살 수도 없어요.”

쥬드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하면서 나를 현관 쪽으로 떠밀었다.

“푸른 코끼리 카페라니…… 이름도 귀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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