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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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마키바 반장이었다. 서장하고 미팅이 있다고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왜 벌써 내려왔지? 아니, 시간이 꽤 지났구나. 거의 두 시간이나…….

“왜 그래?”

“뭘요?”

“왜 그렇게 멍하냐고? 정신 나간 놈처럼…….”

요 며칠째 나를 보는 사람들이 다 하는 소리다.

“그냥 앉아 있었어요.”

“뭐가 그냥이야?”

“전 일 없을 때 앉아서 쉬지도 못해요?”

요즘 내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머릿속이 안개라도 낀 것처럼 자욱하고 답답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내가 뭘 했는지…… 그런 게 통 생각이 안 났다. 솔직히 뭔가 생각하려고 애쓰고 싶은 의욕조차 없었다.

내 대꾸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은 내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마키바 반장이 의자를 끌어다 내 앞에 앉았다.

“니가 정신은 딴 데 보내고 몸만 나와서 왔다갔다 한 게 오늘로 나흘째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놈 집에서 하룻밤 자고 나온 다음부터 완전히 맛이 갔어.”

나흘이나 지났구나…… 아니, 나흘밖에 안 됐구나. 그 집에 갔었던 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겠어요?”

빤히 쳐다보면서 반항적으로 묻자 반장이 당황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뿐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반장의 표정이 점점 고약해졌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잖아!”

“그 외엔…… 별일 없었어요.”

반장의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다시 한 번 거짓말을 했다.

니콜라스의 비밀 정원에 머물렀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오래 있고 싶지도 않았고, 마침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할 말 하고 난 다음에 바로 일어섰다. 하지만 들어가는 과정이 복잡했던 만큼 나오는 길도 순조롭지 않았다. 너무 흥분해서 까맣게 잊었었지만…… 거기는 미로 한복판이었고 이번엔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꽃잎 같은 것도 없었다.

결국 또 길을 잃고 말았다. 들어갈 때 고생했던 게 생각나서 신경질이 솟구쳤다. 그럼 나갈 때도 이 웃기지도 않는 미로를 그렇게 헤매야 되는 건가?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 미로에서, 니콜라스에게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거의 달리듯 미로를 헤매며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두서없이 갈팡질팡하는 동안 출구를 찾기는커녕 방향감각조차 완전히 날아가버렸고, 내리는 비에 몸은 푹 젖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뛰다가 어디쯤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애써도 이 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영원토록 이 거지같은 미로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고, 가슴이나 쥐어뜯다가 죽을 것 같았다.

오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한 채 발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미로의 모서리에서 니콜라스가 돌아 나왔다. 빗물이 눈에 들어가서 눈앞이 부옇게 흐렸다. 다가오는 니콜라스도 그저 희뿌연 덩어리로만 보였다. 눈을 아무리 비벼도 그랬다.

“길을 잃었어요.”

“여기선 다 그래.”

니콜라스가 웃옷을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주면서 조용히 말했다.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니콜라스가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니콜라스에게 이끌려서 모퉁이를 세 번 정도 돌고, 문을 두 개 지나자 저택 후원이 나왔다. 혼자서 20~30분이나 헤매 다니고도 빠져나오지 못했던 미로를 이렇게 간단하게 나오고 보니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도 걱정스러웠다. 그동안은 내 머리가 아주 좋지는 않아도 보통은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집안으로 들어온 후 니콜라스는 수건을 가져다주고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집안에서 오래 머뭇거릴 마음은 없었지만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한 걸음도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살면서 이렇게 피곤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니콜라스가 손을 뻗어서 내 웃옷 단추를 풀었다.

“이러지 말아요.”

니콜라스의 손길을 피해서 뒤로 물러앉았다.

“감기 걸려.”

“괜찮아요. 한 겨울도 아니고…… 별로 안 추워요.”

추운지 어떤지 감각도 없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는 하지만, 이건 추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별 수 없다는 듯 커다란 수건으로 내 어깨를 푹 덮었다.

“앉아 있어. 갈아입을 옷하고 먹을 걸 좀 찾아올 테니까.”

거실에서 나가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멍한 시선으로 쫓았다. 지난 몇 개월간 니콜라스를 만나면서 겪었던 일들이 순서 없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첫 만남,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세 번째, 또 그 다음…… 니콜라스와 관련된 기억 따위 깨끗하게 지워져버렸으면 좋겠다. 지워버릴 수 없다면 제발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려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도 안 된다면…… 최소한 지척에 두고도 이렇게 그립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후 니콜라스가 회색 스웨터 한 벌과, 차 한 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미안해. 정말 먹을 만한 게 별로 없네.”

니콜라스가 따뜻한 머그잔을 내 손에 쥐어줬다. 지금 놓치면 어디서도 다시는 자기를 볼 수 없을 거랬으니까, 이제 영영 이 사람을 못 보는 건가 하는 얼빠진 생각을 하다가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몸 좀 말리고 나가자. 나가서…….”

“좀 전에 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넌 진심의 의미를 전혀 몰라.”

니콜라스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이런 말장난 같은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 그런 걸 진심이라고 하지는 않아.”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마당에 진심 따위가 뭐가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진심은 이런 거다.

나는 니콜라스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 니콜라스가 체포돼서 전기의자에 앉는 걸 보느니 연쇄살인범과 내통해서 탈주시킨 더러운 경찰이란 오명을 쓰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런 속사정을 자세히 설명할 처지가 못되다 보니 그냥 떠나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는 거다. 이런 게 진심이 아니면 대체 뭐가 진심이냐?

“진심이든 아니든, 가라고요!”

“니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내가 뭘 걱정하는데요?”

마치 덤비듯 따져 물었다. 니콜라스는 대답 대신 안타까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차를 반쯤 마시고 일어났다. 니콜라스는 나를 잡지 않았고, 나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 후회와 죄책감과, 이런 일에 나를 끌어넣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때론 차례대로, 때론 한꺼번에 몰려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느라 잠도 오질 않았고 노상 물처럼 마시던 커피조차 입에 못 댈 정도로 속이 쓰렸다.

“진짜로 별 일 없었다니까요?”

마키바 반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봤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내가 비니처럼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할 줄 알고, 재치도 좀 있었으면 반장이 내 말을 믿었을까? 그렇지 않을 거다. 반장은 평생 살인자, 사기꾼, 도둑놈들의 거짓말을 들으면서 그 거짓말을 더듬어 진실을 밝혀온 사람이다. 차라리 입 다물고 계속 피해 다닐 걸…… 마주 앉아서 말 상대를 한 게 화근이었다. 아니, 나흘이면 나는 반장을 피할 만큼 피해 다녔다. 반장도 봐줄 만큼 봐준 거고…… 문제는 나나 반장이 아니다. 니콜라스다.

위험하니까 빨리 도망치라는 언질을 아예 대놓고 해줬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니콜라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꼼짝이 다 뭐냐? 이틀이나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어제 저녁에야 기어 나와서 클럽으로 직행했고, 거기서 술이 떡에 되도록 퍼 마시면서 클럽 문 닫을 때까지 버티다가 비니가 불러준 택시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곤 어제 점심 무렵엔 시에서 제일 비싼 파티 플래너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50여 명 규모의 만찬을 겸한 파티 준비를 맡겼다.

그의 행동은 마치…… 이 도시를 떠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선언, 혹은 시위 같았다.

니콜라스가 그 따위로 나오는 바람에 내 상태가 어제부터 부쩍 더 안 좋아졌다. 니콜라스는 내가 자기 때문에 뭘 버려야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관심도 없겠지. 책임감, 양심, 고달프긴 하지만 뭔가 쓸 만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존심…… 나한테는 그런 것들이 중요했다. 달리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양심이고 자존심이고 다 팽개쳐 가면서까지 살려 주려고 나 혼자 용을 쓰면 뭐하냐? 당사자가 저렇게 비협조적인데……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인간이긴 했지만, 지은 죄가 엄연하고 상황이 이렇게 안 좋을 때에 파티라니…….

“너 상대로 긴말하기 나도 피곤해. 그러니까 좋은 말 할 때 불어.”

마키바 반장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나를 압박했다. 강력계 반장 중에서도 제일 성격 안 좋고 인상 험한 마키바 반장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길게 버틸 재간이 없었다. 쿠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조폭, 살인범도 못하는 일이다.

“남자들끼리 섹스를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으세요?”

반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일어서더니 내 옷깃을 움켜잡았다.

“이리 와. 취조실로 가자!”

취조실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탁 트인 사무실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그 컴컴하고 공기 안 좋은 좁은 방에 반장하고 마주 앉는 건 죄가 있건 없건 숨 막히는 일이었다. 반장은 보통 때도 무섭지만 취조실에선 완전히 맹수다. 아직은 반장한테 미로 속의 비밀 제단에 대해 털어 놓고 싶지 않았다. 내 정신도 덜 돌아왔고, 니콜라스도 계속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니콜라스가 자기 따라 가자고 했었잖아요.”

취조실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책상을 붙들고 버텨봤지만 마키바 반장은 힘이 장사였다. 어떻게 하면 반장을 제풀에 떨어져 나가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두서없이 그런 말이 튀어나갔다.

“그런데?”

“따라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미쳤어?”

반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자기 목소리에 놀라서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별건 없었다. 그냥 일 없는 짭새 몇 명이 지나가다 반장 목소리에 놀라서 벽에 붙어 섰고, 한 사람은 커피 마시다가 사레들려서 고생이 막심하다.

“따라 와!”

반장이 주변 짭새들을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면서 나를 사정없이 자리에서 끌어냈다.

반장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취조실이 아니라 우리팀 전용 회의실이었다. 하지만 취조실이나 회의실이나 반장하고 얼굴 마주보고 앉아 있으면 거기가 거기다.

나를 회의실 구석 자리에 집어던진 반장이 맞은편에서 무려 7분째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7분 동안 얻어맞는 게 낫지, 이런 분위기가 조금만 더 오래가면 마음에 병 생기겠다 싶을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헛소리 작작하고 불어. 대체 뭐야?”

“…….”

드디어 심문이 시작됐다. 굽타는 어디 있는 걸까? 크롬웰은? 하다못해 비니라도…… 아, 그 자식은 지금 클럽에 있지.

“야!”

“그냥…… 좀 안 좋았어요.”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안 좋았는지 말을 하란 말이야!”

반장이 테이블을 두 동강이라도 낼 듯 사정없이 내리쳤다. 용의자 몰아세울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그러니까 저는…… 니콜라스가 그 식당에서 술에 많이 취한 줄 알고 그냥 순수한 마음에서 집에 데려다줬었던 거거든요. 그런데 침대에 눕히자마자 그 자식이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는 침실에선 신사가 아니라면서 나를…….”

“야!!”

반장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아예 뒤집어엎었다. 반장은 지금 진짜 열 받았다. 일단 테이블 뒤집으면 그 다음 순서가 심문 중이던 용의자한테 달려드는 거다. 가끔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반장이 취조실에 들어가면 덩치 좋은 짭새 두세 명이 항상 문밖에서 비상대기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문밖에 구조대가 대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올게 왔구나 싶었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라면서요?”

이제 정면으로 한방 날아오겠구나 생각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대 맞고 정신이나 번쩍 났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정신을 잃든지…… 하지만 예상했던 폭력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잠잠하기에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반장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있을 뿐…… 예상외로 차분했다.

나랑 시선이 마주치자 반장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 자식한테…… 찔렀냐?”

사람들이 이유 없이 마키바 반장을 명수사관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반장은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차마 대답을 못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는 내 꼴을 보고는 반장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아니, 충격을 받기는 받은 것 같지만 한편으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어? 니가 짭새란 거?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

“가라고 했어요. 혼자 가라고…….”

“왜?”

폐를 찔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반장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같이 간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반장은 벼락같이 고함을 치지도, 나를 한대 후려갈기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 한쪽에 놓인 캐비닛에서 두툼한 파일을 하나 꺼내왔다.

[레이니 잭 15]…… 니콜라스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열다섯 건의 살인사건 조사기록이었다.

반장이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던 테이블을 다시 끌어다 놓고 그 위에 파일에서 꺼낸 사진을 죽 늘어놨다. 목이 잘린 채 이름 모를 들꽃 가득한 들판에 버려져 있던 다니엘 트로이, 안구가 적출된 채 조각배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가던 레이 스웨인, 두 손목이 잘린 채 델 파소 초입 뒷골목에서 발견된 안젤라 레이크…… 론테스 산 어느 골짜기 나무에 매달린 채 발견된 심장이 없는 남자는 끝내 신원도 밝혀내지 못했다. 나도 수없이 봤던 사진들이다.

“사진을 봐.”

“이미 다 본 건데요.”

“다시 봐!”

마키바 반장이 어느 허름한 골목길에 앉은 채 죽어 있는 여자 사진을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안젤라 레이크는 상류층 출신의 이것저것 취미가 많은 지적인 미인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막대한 재산을 물려줄 부자 아버지와, 능력 있는 변호사 약혼자까지 있었으니 그녀는 무척 행복한 사람이었을 테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아마…… 죽음만이 그녀의 인생에 유일한 불행이었을 거다.

피살자들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감정이 복잡했었다. 섬뜩하기도 했고 화도 났다. 이런 짓을 저지른 놈을 내 손으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다 그놈이 저지른 짓이야. 니콜라스 헤슬렘이 이 사람들을 끌고 가서 눈을 파내고, 심장을 도려내고, 손목을 잘랐어!”

대부분의 수사관들이 용의자 심문할 때는 인정사정 안 봐주지만, 마키바 반장은 용의자 주변 인물들 사정도 안 봐주기로 유명했다.

“저도 알아요.”

“알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해?”

반장이 축 늘어진 내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사진을 다시 쳐다봤다.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비어 있는 레이 스웨인의 참혹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니콜라스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나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나흘이면 니콜라스한테 시간은 줄 만큼 줬다. 이젠 반장한테 니콜라스의 후원 미로에 숨겨져 있는 제단에 대해 털어 놓을 시간이었다. 그렇기는 한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반장님은…… 예전에 그 여자분, 한번 봐주고 같이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던 적 없으셨어요?”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이 나갔다. 내 말에 마키바 반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너…… 어떻게 그 일을…….”

당황해서 더듬거리던 반장이 곧 어디서 말이 샜는지 알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멜, 이 자식…….”

“죄송해요.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할 말, 해서는 안 될 말조차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반장은 좀 전에 내가 했던 무례한 질문을 더는 문제 삼지 않았다. 반장은 노련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뭔가 숨기는 게 있고, 이제 막 비밀을 털어놓을 참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화를 누르고 조용히 자백을 기다렸다.

피살자들의 사진을 더 보기가 힘들어서 팔짱을 끼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후원 미로에 비밀 장소가 있어요. 거기가 아마…… 우리가 찾던 범행현장인 것 같아요.”

벨을 누르려다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혹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위니는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서 달 지난 잡지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나를 본 위니가 잡지를 덮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왔어?”

오후 다섯 시면 퇴근시간으로는 이른 편이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다쳤어?”

“조퇴했어. 좀 피곤해서…….”

조퇴를 한 건 아니고, 마키바 반장한테 쫓겨났다. 하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저기……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나 좀 쉴게.”

니콜라스의 후원 미로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서 마키바 반장은 바로 굽타를 호출하고 서장에게 수색인원을 요청했다. 반장은 나를 연쇄살인범과 내통한 놈이라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저 집에 가 있으라고…… 연락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고만 했다.

“당신…… 왜 그래?”

위니가 방으로 따라 들어오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서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일이야 늘 있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위니가 내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당신이 이러는 거 처음 봐.”

“괜찮아.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제이…….”

“그냥 당신 볼일 봐. 나는…… 잠깐 혼자 있고 싶어.”

남녀관계는 사랑이 없으면 끝난 거라고 했던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위니가 한 집에, 한 방에 같이 있는 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아직은 뭔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라곤 사랑했던 기억에 대한 미련뿐이었다. 위니와 나는…… 우리 관계는 오래 전에 끝났다. 그래서 위니는 병들었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줬다.

위니는 마치 떠밀린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미안하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보다는 혼자 있게 된 게 다행스러웠다. 웃옷만 벗고 침대에 길게 누웠다. 반장은 일을 오래 끌지 않을 거다. 후원에서 제단을 찾으면 뭔가 증거가 나올 테고, 그럼 니콜라스는 그 자리에서 구속이다. 차라리 이대로 숨이 멎어버렸으면 좋겠다.

전화벨이 울렸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잠을 잔 것도 아닌데 벨소리에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몇 번 울리다 제풀에 끊어지기를 바라면서 돌아누웠다. 반장일까? 후원을 수색해서 제단을 찾아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질기게 울리던 전화벨이 멎었다. 아니…… 잠시 사이를 두고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결국은 일어나서 의자에 걸쳐 놓은 웃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액정에 찍혀 있는 건 반장의 번호가 아니었다.

「나야.」

니콜라스다.

「잠깐 만나. 나올 수 있지?」

다리가 풀려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내가 꿈을 꾸나?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어서 고약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만나……자고요?”

이 사람이 어떻게 지금 이 시간에 나한테 전화를 하고 있는 걸까?

「지금 세인트 35번가에 있는 작은 칵테일 바에 있어. 그러니까 여기 이름이…….」

놀라서 일어났다. 머리카락이 벌떡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어, 어디요?”

「‘미스틱’이야. 찾기 어렵진 않을 거야. 바로 길 건너편에 지하철역이 있고, 옆에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어딘지 안다. 바로 집 앞이니까.

저녁때라 큰길가,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 잡은 칵테일 바는 상당히 붐볐다. 홀을 가로질러 가려면 사람들 틈을 비집어야 할 정도였지만 니콜라스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눈엔 니콜라스밖에 안 보였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니콜라스는 바 구석에서 거의 바닥이 보이는 위스키 잔을 살살 흔들고 있었다. 니콜라스를 만나기 시작한 이후, 내 심장은 우연히 마주친 눈빛, 대수롭지 않은 그의 말 한마디에도 심하게 두근거렸었다. 지금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가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나다가 간판이 눈에 띄길래.”

“헛소리 집어치워요. 내가 여기 사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몰랐어.”

거짓말이다. 그나마 성의도 없는…… 니콜라스가 남은 술을 한 입에 털어 마시고 빈 잔을 바텐더에게 들어 보였다.

“같은 걸로. 한 잔 더…….”

니콜라스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미 전작이 꽤 있었는지 나를 보는 눈빛이 아련했다.

“대체 왜 이래요?”

“나도 잘 모르겠어.”

지금쯤은 반장이 니콜라스의 후원 미로에서 그 신전을 찾았을 거다. 이미 도시 전체에 수배령이 내렸을 테고…… 언제 저 문을 박차고 타격대가 뛰어들지 모른다.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니콜라스는 내가 자기한테 해준 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사람한테 할 만큼 했다. 더 이상은 해줄 수 있는 일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우선, 좀 앉았으면 좋겠어.”

니콜라스가 내 손을 잡아서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 손을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을 한번만 더 볼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니었다.

손을 뿌리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더 이상 뭘 어쩌라는 거냐고…… 시간이 아직 남았을 때 아무 데나 가 버리지, 여기서 뭘 하는 거냐고…… 하지만 결국은 손을 뿌리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니콜라스는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렇게 어리석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만나서 술 한 잔 하는 거야 뭐 어때? 나, 너한테 그렇게까지 크게 실수한 건 없잖아?”

바텐더가 주문한 위스키를 가져왔다. 나도 같은 걸로 한 잔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니콜라스가 원하는 게 북적거리는 술집에서 한가롭게 술잔을 기울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못 해줄 것도 없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을 수 있는 시간도 길지는 않을 테니까. 결국 이런 식으로 파국을 지켜보게 되는 걸까?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나는 본래 이런 일에는 운이 없다.

“어떻게 지냈어요?”

바텐더가 내준 술을 나도 한 모금 마셨다. 술맛이 쓰디썼다.

“잘 지냈어.”

술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잔을 내려놨다. 니콜라스와 나 사이의 공기가 주변 사람들까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게 만들 정도로 썰렁했다. 지금까지 모든 대화는 니콜라스가 주도했었다. 그러니 저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아직 여기 있어요?”

내 퉁명스런 질문에 니콜라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딱히 가고 싶은 데가 없어.”

나는 니콜라스 때문에 바보짓을 했고, 니콜라스는 나 때문에 바보짓을 하고 있다. 니콜라스가 내 입에서 가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도 안 돌아보고 냉큼 튀었으면 배신감 같은 게 들었을까? 당했다, 속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분했을까? 그랬으면 지금보다 더 속이 타고 화가 났을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바텐더한테 술 한 잔을 더 시켰다.

“저녁은 먹었어요?”

“이게 저녁이야.”

니콜라스가 자기 잔을 들어 보였다.

“이러는 거…… 당신답지 않아요.”

“그렇게 많이 마시진 않았어.”

“남의 집 앞까지 밀고 들어와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거하고, 이런 싸구려 술집 구석에 찌그러져서 궁상떠는 거하고, 내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못 알아드는 척하는 거요.”

내 가시 돋친 비난에 니콜라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요즘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지친 것 같았다. 표정도, 말투도…… 나를 보는 시선에도 기운이 없었다. 그동안 봐온 니콜라스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기억나?”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 아득히 멀게 느껴졌고, 다시 생각하면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기도 했다. 여태 살아온 살벌하고 삭막한 인생 중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날을 꼽으라면 이 남자 차에 받혔던 그날을 꼽겠다. 살면서 또 무슨 일을 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슬슬 꼬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 꼴이 났다.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었을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를 차로 받은 게요?”

니콜라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만나지 않았어도 우리가 우연히 마주칠 일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겠죠.”

그러니까 그때 차 조심을 했어야 했다.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했어.”

“그랬겠죠. 당신 차에 치여서 비틀거리고 있었으니까…….”

퉁명스럽게 굴긴 싫지만, 나는 그날 일을 떠올리는 게 별로 즐겁지 않다.

“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서도 계속 니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

“보통…… 사람을 차로 치고 나면 한동안은 그렇지 않나요?”

바텐더가 나 마시라고 주고 간 술을 슬그머니 당겨가면서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엔 나도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

니콜라스가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저 깊은 눈동자를 마주볼 때면 어느 정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니 생각도 많이 났고, 걱정도 됐었지만 결국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사실은…….”

잠시 망설이다 니콜라스가 말을 이었다.

“궁금했었거든. 날 지켜보고 있는 게 누군지…….”

니콜라스가 수사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게 이젠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그냥, ‘역시…… 그랬었구나.’ 그 정도였다.

“그런데…… 아니었어요?”

“충동을 못 이기고 너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까지도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전혀 몰랐었어. 오다가다 만나서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기껏 해봐야 그런 건 줄 알았지. 그런데 막상 수화기 저쪽에서 니 목소리가 들려오니까 당황스럽더라고. 손이 다 떨릴 정도로.”

미안하지만 못 믿겠다. 니콜라스가 당황해서 손을 떨다니…… 그것도 나 때문에?

“그러다 ‘유니콘’ 바에서 널 봤을 때 말이야…….”

‘유니콘’ 바라니…… 그런 데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난다.

“내 머리보다는 심장이 먼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았던 것 같아. 최근 몇 백 년 사이에 심장이 그렇게 빨리 뛰었던 적은 없었거든.”

어이가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연쇄살인범인데다, 좀 있다가 경찰 타격대가 들이닥칠 거란 문제가 있어서 기분이 좋기는커녕 가슴만 미어졌다.

니콜라스가 손을 뻗어서 내 얼굴을 만졌다.

“니가 알고 있는 거하곤 상황이 달라. 걱정하고 있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뭘 믿고 이렇게 태평한지 모르겠다. 나를 믿었던 거라면 실수한 거다.

“같이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어. 지금처럼 가끔 만나고,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면…….”

니콜라스가 가져간 술잔을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반쯤 남아 있던 술을 단숨에 털어 마셨다. 술인지 물인지 맛도 모르겠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보고 싶을 때 가끔 보고, 사는 얘기 따위 주고받으며 술잔도 기울이고…… 그럴 수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얼핏 들으면 어려울 것도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제 불가능해요.”

시간이 하릴없이 흘러서 이제 거의 자정이었다. 니콜라스와 주거니 받거니 마신 술도 적지 않아서 니콜라스는 테이블에 코를 박고 엎어졌고 나도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한지 꽤 됐다. 왜 여태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까? 타격대가 열 번은 더 들이닥쳤을 시간인데…… 니콜라스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오늘 안 오나?

생각하면서 혼자 피식피식 웃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다고 해도 참 웃기는 상상이다. 가게 밖 어딘가엔 니콜라스가 달고 온 잠복조가 서성이고 있을 거다. 경찰이 이따금 한심할 정도로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도 있지만 다 잡은 연쇄살인범을 이런 식으로 놓치지는 않는다. 마키바 반장이나 굽타가 그렇게 허술한 사람들도 아니고…….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라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문만 열리면 계속 이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무장한 타격대가 아니라 벌써 어디선가 잔뜩 퍼 마시고 한 잔 더 하러 온 한 떼거리의 취객들이었다.

딱 한 잔만 마시고 가겠다고 소란을 피우던 취객들이 영업시간 이미 끝났다고 버티는 종업원들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가게 밖으로 밀려나갔다. 그러고 보니 가게엔 언젠가부터 니콜라스와 나 둘뿐이었다.

뒤늦게 몰려온 취객들을 쫓아낸 종업원이 이젠 니네들 차례라는 듯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손님, 죄송하지만…….”

“알았어요.”

혀 꼬인 소리로 대답하고 일어섰다. 뭐…… 이대로 술집에서 밤을 새울 수도 없으니 나가야지. 그런데 혀만 꼬이는 게 아니라, 다리도 꼬여서 바로 서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니콜라스는 일어설 기미도 없었다.

“일어나요.”

니콜라스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하긴, 위스키 거의 한 병을 숨도 안 쉬고 퍼 마셨으니 기절을 했대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일어나요. 그 빤한 수법에 두 번은 안 넘어간다고요!”

아무리 밀고 흔들어도 니콜라스는 꼼짝 하지 않았다. 이번 건 진짠가 보네…….

축 늘어진 니콜라스를 떠메고 가게를 나왔다. 거리에 밤안개가 자욱했다. 마치 두터운 베일이라도 드리운 것처럼 세상이 온통 부옇게 흐렸다.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시니까 정신이 한결 맑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길바닥이 왜 이렇게 울렁거리냐?

일단 차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택시를 잡아야 할 테니까. 하지만 몇 걸음 떼어 놓지도 못하고 니콜라스와 함께 길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냥 넘어진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했다.

밤거리를 걷던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쳐다볼 정도로 된통 넘어졌는데도 니콜라스는 정신이 안 돌아왔다. 이만하면 술에 취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혼수상태다. 이거…… 병원에 데리고 가 봐야 되는 거 아닐까?

넘어진 김에 잠시 길바닥에 쭉 뻗은 채 하늘을 잠깐 올려다봤다. 대도시의 밤하늘이란 게 뭐, 볼 건 없다. 게다가 지금은 안개가 짙어서 건물 3층 이상은 보이지도 않았다. 킬리요크 강이 멀지 않아서 이따금 안개가 몰려오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짙은 안개는 드물었다.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누워 있어도 어지러웠고 길바닥에서 니콜라스를 깔고 누워 있으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술 탓인지 몸이 붕 뜨는 것 같았고, 하염없이 이렇게 있고만 싶었다. 그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쓰러져 있는 니콜라스를 내려다봤다. 이 사람은 나한테 너무 무겁다. 내 한 몸 제대로 가누고 똑바로 걷기도 쉽지 않은데…… 이 사람 때문에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인사불성으로 늘어진 니콜라스를 질질 끌고 차도까지 가서 어렵게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물었다. 글쎄…… 차는 잡았는데 갈 데가 없다. 니콜라스의 집으로 가자니 수사팀 입안에다 니콜라스를 털어 넣어주는 거나 다름없는데, 아쉬운 쪽에서 움직여야지 내 손으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까운 호텔, 아무 데나요.”

니콜라스를 끌고, 메고 호텔 객실까지 들어오는 동안 나는 술 다 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을 정도로 진이 빠지긴 했지만…… 니콜라스를 침대에 던져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담배 한대 피웠으면 좋겠는데, 없어서 그냥 참으려니까 답답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호텔이었다. 전면의 창은 킬리요크 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낮에는 제법 전망이 좋았겠지만 지금은 온통 안개뿐이었다. 강 건너로 보이는 불빛도 곧 꺼질 촛불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니콜라스와 함께 좁은 호텔방에 앉아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안개 때문일까? 지금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니콜라스와 어딘가 먼 곳으로 도망쳐서 숨어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꿈이다. 이 안개도, 나도, 니콜라스와 함께 여기 있는 것도 모두 꿈이었다. 깨고 나면 그 허무함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게 될…… 아름답고 잔인한 꿈에 불과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게 아무래도 지나치게 마신 술 때문인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게 될 것 같아서…… 입을 막아도 신음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미 최악의 상황을 각오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이 되는데 이번 일은 그렇지 않았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손에 피가 잔뜩 배어 있었다. 아까 길에서 바닥을 쓸면서 넘어진 탓이었다. 피가 난다고 할 정도도 아니고, 군데군데 피부가 벗겨져 나간 곳에서 조금씩 묻어나는 정도였다.

다치기는 니콜라스가 훨씬 더 심하게 다쳤다. 니콜라스는 비싸 보이는 옷 한 벌을 다 버렸고, 보도블록 모서리에 이마라도 찍혔는지 양미간 사이로 피가 한줄기 가늘게 흐르고 있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까부터 계속 닦아주는데도 쉽게 멎질 않았다.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손도 씻고 찬물에 세수도 했다. 그리고 수건을 물에 적셔서 가지고 나왔다. 찬 물수건이 이마에 닿자 니콜라스가 인상을 잔뜩 쓰면서 몸을 뒤척였다.

혹시 깰까 싶어서 손을 멈추고 지켜봤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잠꼬대처럼 뭐라고 한마디 웅얼거리면서 돌아누웠을 뿐이었다. 원수 같은 인간…… 이런 상황에서 세상모르고 퍼질러져 잘 수 있는 정신력은 정말 부럽다.

니콜라스의 머리 밑에 말라붙은 피를 닦아주며 생각을 해봤는데…… 역시 이상했다. 어째서 이렇게 잠잠한 걸까? 수사팀이 미로 속의 그 신전에서 살인무기를 찾아내지 못한 걸까? 거기가 범행현장이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앞서 나갔던 걸까?

술이 완전히 깬 것도 아니고, 취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서 생각이 계속 이어지질 않았다. 한 순간은 온갖 상념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혼란스럽다가도 또 다음 순간엔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비었다. 정신을 차린 건 문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노크가 한동안 이어질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드리는 소리가 이젠 제법 거칠었다.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사팀이 일하는 스타일, 정말 맘에 안 든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헛된 희망을 갖게 만들고, 방심하고 있을 때에 이런 식으로 들이닥치다니…….

“뭡니까?”

“룸서비스요.”

룸서비스는 무슨 얼어 죽을. 시킨 적도 없는데…….

“샴페인이라도 가져 왔습니까?”

신경질을 내면서 거칠게 문을 열었다. 이게 화낼 일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문 앞에는 어리바리한 인상의 젊은 종업원이 서 있었다. 그 뒤엔 굽타가, 옆엔 크롬웰이, 그리고 문 옆에는…….

“너, 이리 나와!”

마키바 반장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로 내 멱살을 잡아채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대로 반장한테 멱살을 잡혀서 복도 끝까지 질질 끌려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반장이 복도 끝 방에다 나를 밀어 던지고는 버럭 소리쳤다. 방 한가운데 있던 작은 테이블이 박살나고 1인용 소파도 창 쪽으로 한참 밀렸다. 반장은 지금 굉장히 화가 났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면…….

“뭐가요?”

“그 자식 집 뒷마당에 뭐가 있다며?”

“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 집 뒷마당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얘길 하니까……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쳐다보자 반장이 날아서 나를 덮쳤다. 본인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몸을 날려서 사람을 깔고 앉기엔 반장의 체격과 몸무게가 너무 살인적이다.

“자, 잠깐만요…….”

“뒷마당에 있긴 뭐가 있어? 니가 이젠 나를 갖고 놀아?”

멱살 움켜잡는 손이 얼마나 힘이 센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후원에 미로가 있고, 그 미로 안에…….”

“미로는 무슨 미로?”

반장 손에 목 졸려서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숨 넘어가기 직전에 비니가 반장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는 반항하는 흉악범 제압할 때 하는 것처럼 팔을 잡아서 등 뒤로 비틀었고, 그 사이에 굽타가 내 어깨를 잡아서 나를 반장 엉덩이 밑에서 끌어냈다.

“마키바한테 범행현장을 찾았다고 했다면서? 헤슬렘의 저택 후원에 미로가 있고, 그 안에…….”

굽타가 나를 침대에 밀어 앉히며 다그쳐 물었다. 비니는 마키바 반장을 문 옆에 있는 소파에 끌어 앉히고 내 쪽으로 못 오게 밀착 마크를 하고 있었다.

“예…….”

“거긴 아무것도 없었어. 미로도, 비밀장소도…….”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굽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후원 경계에 있는 그 나무 울타리 안에 분명히…….”

“그건 그냥 울타리던데요.”

크롬웰이 끼어들어서 말허리를 잘랐다.

“미로 흉내를 내긴 했지만, 겨우 세 겹짜리 단순한 나무 울타리던데…… 그걸 미로라고 했던 거예요?”

“안으로 들어가면 밖에서 보는 거하고 달라요. 굉장히 복잡하고 넓어서 들어갈 때, 나올 때 합쳐서 한 시간은 헤맸어요.”

굽타랑 비니, 크롬웰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깐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주 무거운 침묵도 흘렀다. 비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이나 밖이나…… 별거 없던데?”

수사팀은 니콜라스의 저택 후원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후원을 뒤지다 눈에 띄는 게 없자 내친김에 저택 뒤편으로 꽤 넓게 펼쳐진 숲까지 집중적으로 수색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걸 못 찾을 수가 있을까? 니콜라스의 저택 전체보다도 미로의 면적이 더 넓었을 텐데…….

“너, 솔직히 말해. 그날 헤슬렘하고 이상한 약 먹었지? 약 먹고 밤새 놀다가 꿈 꿨지?”

내가 비록 잘한 건 없지만, 말이 너무 심하다.

“아니에요!”

“아닌데 어디서 헛것을 보고 와서 헛소리야?”

반장의 호통에 옆방에서 한창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딱 멎었다. 굽타가 진정하라는 뜻으로 반장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미로가 거기 있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크롬웰의 말대로 그 나무 울타리는 단순한 구조를 가진 후원 담장에 불과했다. 울타리 뒤쪽으론 작은 공터가 있고 그 다음부터는 잡목 우거진 수풀이었다. 나무 울타리와 숲 사이엔 그렇게 크고 복잡한 미로와 신전이 들어앉을 공간이 전혀 없었다. 미로를 헤맬 때도 내도록 뭐에 홀린 느낌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미로가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수사팀이 신전을 못 찾고 허탕을 친 게 한편으론 마음 놓이는 소식이었지만 좋게만 생각하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괴이했다. 신전에서 결정적인 물증을 못 찾은 것도 아니고, 미로 자체를 못 찾다니…… 그럼 거기서 한 시간이나 헤맨 나는 뭐냐?

“그럼…… 지금이라도 저하고 같이 가 보실래요?”

“같이 가면? 없는 미로가 어디서 생겨?”

반장이 발끈해서 일어서다가 비니한테 막혀서 다시 소파에 앉았다. 맘 같아서는 그냥 마음 풀릴 때까지 때리시라고 대주고 싶다. 반장한테 몇 대 맞으면 정신이 번쩍 나서 이 상황이 이해가 되려나?

“헤슬렘은 여기 왜 온 거예요?”

크롬웰이 물었다. 좋은 질문이다. 니콜라스가 왜 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가다가…… 간판이 맘에 들어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얘기를 했어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대화에 내용이 별로 없었다.

“그냥 안부 인사했어요. 어떻게 지냈느냐는 둥…… 뭐 그런 거…….”

“구체적으로요.”

내가 퍼 마신 술의 양과 도수를 감안하면 비교적 말짱한 편이긴 하지만, 그런 걸 구체적으로 진술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는 않다. 사실…… 나도 지금 필름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 얘기를 했어요. 나를 차로 치어서 운이 좋았다고…… 아니, 만날 수 있어서…… 나 때문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또……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서도 계속 내 생각이 났었다고…….”

내 입으로 주절주절 늘어놓으면서도 대체 이런 소리를 왜 지껄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지간히도 듣기가 싫었던지 마키바 반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저 자식을 죽여버릴 수도 없고…….”

한잠도 못자고 소파에 앉은 채로 밤을 새웠다. 그 깊은 미로가 아직도 눈에 선하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로를 헤매던 막막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습기 찬 바람이 몸에 감겨드는 느낌이 이렇게 생생한데…… 내가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지껄인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분명히 니콜라스를 뒤쫓아 미로에 들어갔었고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신전을 찾아냈었는데, 내가 꿈이라도 꿨단 말인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던 절망감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던 그 슬픔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술 깨고 맑은 정신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지 몰라도 지금 같아선 니콜라스하고 같은 호텔방에 들어 있는 지금 이 현실도 꿈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개를 들어보니 니콜라스가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정신을 차린 걸까? 생각에 골몰하느라 니콜라스가 깨어난 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니콜라스가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이다가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퍼 마셔요?”

“숙취가 이렇게까지 심했던 적은 없었는데…….”

니콜라스가 어깨를 주무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 보니까 숙취 때문이 아니라 어젯밤에 길바닥에 곤두박질친 것 때문에 온 몸이 아픈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을 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어쨌든 그것도 결국 술 때문에 아픈 거다.

“너는 괜찮아?”

이런 상태를 괜찮다고 해도 되는 걸까? 니콜라스처럼 머리를 보도블록에 갖다 박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나도 머리가 아프다.

“어떻게 한 거예요?”

니콜라스가 뜬금없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뭘?”

“그 미로하고…… 거기요.”

“아무것도 안 했어.”

마키바 반장은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나를 잡아 족친 다음에 함께 몰려왔던 수사팀을 데리고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술 깨고 말짱한 정신으로 출근하라고, 아침에 다시 얘기하자면서 이를 갈던데…… 얘기는 무슨 얘기, 또 욕이나 한바가지 퍼붓겠지.

수사팀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 나도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니콜라스가 어쩌고 있는지 잠깐 들여다보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소파에 앉아서 마냥 넋 놓고 있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밤새 그렇게 앉아 있었던 거야?”

한참을 끙끙거리다 간신히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던 니콜라스가 머리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나왔다.

“잠이 안 와서요.”

니콜라스가 맞은편에 앉았다. 이마에 빨갛게 생채기가 나 있는 걸 보니 좀 조심해서 데리고 다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눈 좀 붙일래?”

니콜라스가 침대 쪽을 가리키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참 좋겠다. 걱정이 없어서…….

“가 봐야 돼요. 당신도 그만 집에 가요.”

냉랭하게 대꾸하면서 일어서는데 니콜라스가 내 손목을 잡았다.

“주말에 집에서 파티를 할 거야. 너도 와.”

“내가 거길 왜요?”

“얘기도 하고, 저녁도 먹고, 정원 산책도 하고…… 나쁠 거 없잖아.”

“별로 놀러 다닐 기분이 아니에요.”

니콜라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제 저녁 때보다는 훨씬 여유가 생긴 얼굴이었다. 마치 우리 둘 사이가 훨씬 가까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같이 술 마시고 길바닥에서 한번 뒹굴고 호텔 방에서 밤을 보내기는 했지만 상황이 더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는데…….

“안 오면 계속 전화한다?”

응?

“계속 찾아와서 집 앞에서 서성거리고…….”

“뭐가 어째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아주 뻔뻔하게 나왔다.

“뭐, 난 별로 곤란할 거 없으니까…….”

소파에 기대앉은 채 졸고 있던 위니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문소리가 집안을 다 울릴 정도로 크고 거칠었던 탓이었다.

“제이…….”

“밤새 그러고 있었어?”

위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치고, 슬픈 눈빛으로.

“어디 갔었어? 밤에…… 뭐 했어?”

“근처에 있었어.”

간단하게 대꾸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몇 번이나 전화했었는데 왜 안 받았어?”

방으로 따라 들어오며 따지던 위니가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가 벽장에서 제일 커다란 여행 가방을 꺼내서 침대 위에 얹어 놓는 걸 본 위니의 얼굴이 불안으로 가득 찼다.

“뭐…… 하는 거야?”

“짐 싸.”

“출장이라도 가?”

“미안하지만 당신, 부모님 댁에 며칠만 가 있었으면 좋겠어.”

만나주지 않으면 계속 전화하고 집 앞에 버티고 있겠다는 말을 다른 사람한테 들었다면 어땠을까? 누구한테 들었든 무척 난감했을 거다. 외도 사실을 아내한테 터뜨려버리겠다는 분명한 협박이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무수한 사람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라면 상황이 난감한 정도가 아니다. 니콜라스에게서 그 소리를 듣는 순간엔 어이가 없었지만, 다음 순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위니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체 왜 이래? 어딜 가라는 거야?”

옷장을 열어서 옷가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에 우겨 넣는 나를 위니가 붙들었다. 그제야 이 일에 대해서 위니한테 뭔가 설명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침대에 걸터앉아서 심호흡을 하고, 눈앞을 어지럽히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셔츠가 땀에 젖어 축축했다. 호텔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출근 인파로 붐비는 거리를 거슬러 오면서부터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설마 위니를 해치기야 할까? 보통 지껄이는 짓궂은 농담이겠지…… 하지만 내가 자기랑 바람피운 걸 위니한테 신사적으로 말만 한다고 해도, 위니하고 니콜라스를 맞닥뜨리게 할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는 살인범이다. 니콜라스한테 정확하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람 목숨 따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위니를 그렇게 위험한 인간의 사정거리 안에 둘 수는 없다.

“무슨 일이야? 당신이 이렇게 겁먹은 거…… 처음 봐.”

위니가 내 옆에 앉아서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을 손끝으로 닦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확히 어떤 걸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위니한테 니콜라스에 대해 얘기를 해야 하는 건가?

“요즘 수사 중인 사건이 있는데…… 사건 용의자가 집 근처에 왔었어. 우리 집이 어딘지도 알고, 당신에 대해서도 아는 것 같아.”

“응?”

위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당연하다. 설명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굉장히 위험하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놈이라서, 당신을 집에 혼자 두는 게 마음이 안 놓여.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 댁에 가 있으면…….”

“대체 무슨 소리야?”

잠시 숨을 돌리고 이 일을 어떻게 말할까 생각해봤지만 머릿속만 두서없이 복잡할 뿐이었다. 그래서 일단 한 손에 트렁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위니의 손목을 잡았다.

“일단 가. 가면서 설명해줄게.”

경찰서에 도착한 건 점심시간도 훨씬 지난 후였다. 스텔라벨리의 작은 포도밭이 딸린 처가까지 거리도 멀었지만 요즘 들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를 감시하는 일이란 얘기를 들은 위니가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놀라는 바람에 진정시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부인은 좀 어때?”

회의실에 들어서자 복사지 더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굽타가 고개를 들었다. 마키바 반장은 안 보였다. 다행이다. 요즘은 마키바 반장의 그림자도 무섭다.

“많이 놀랐어요.”

“무리도 아니지. 게다가 부인이 많이 여려 보이던데…… 걱정이군.”

출발하면서 전화로 사정 얘기를 해뒀기 때문에 수사팀은 내 출근이 늦어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위니를 그 먼 데까지 쫓아가서 해코지한다는 건 전혀 현실감 없는 얘기지만 그가 위니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했다.

“크롬웰이 그쪽 관할 경찰서하고 연락을 해서 신변 경호를 요청했으니까 집 주변에 경관이 배치될 거야.”

조치가 신속한 건 맘에 든다. 위니가 더 놀랄까 봐 걱정은 되지만…….

“반장님은요?”

반장이 안 보여 그런지 경찰서가 평소보다 휑한 느낌이다.

“현장에 나갔어.”

“현장이요?”

“베이록 거리에 있는 주택에서 가스가 폭발해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거든. 그쪽으로 지원 나갔어.”

마키바 반장이 다른 사건에 지원을 나간 건 처음이 아니었다. 당장은 움직일 기미도 없는 니콜라스만 지켜보면서 죽치고 있기엔 론 마키바는 지나치게 고급 인력이니까.

“어젯밤엔 제가 술이 과해서…….”

“그랬었지. 좀 어때? 속은 괜찮아?”

굽타가 들여다보던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길이 마키바 반장하고는 다르게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나 같은 놈하고 같이 일하려면 한 번씩 울화통이 터지기도 하련만, 늘 참아주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괜찮아요.”

“피곤할 텐데…… 처가에 갔다 오느라 한잠도 못 잤을 거 아냐?”

잠이 오는 건 아닌데, 좀 멍했다.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었는데…… 뭐였더라? 아…….

“그런데 제가 어젯밤에 얘기를 제대로 들은 건가요?”

“무슨 얘기?”

“후원에서 아무것도 못 찾았다는 거요.”

마키바 반장 같았으면 다짜고짜 멱살부터 틀어잡고 봤을 텐데 굽타는 신사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자네가 약 먹고 헛소리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근처에는 자네가 말한 그런 규모의 미로가 있을 만한 공간이 없어. 후원에 있는 나무 울타리는 넉넉하게 잡아봐야 너비 80미터에 폭 20미터야. 개인 정원에 있는 울타리치곤 작은 편이 아니지만 들어갔다가 나오는데 5분이면 뒤집어 써.”

굽타가 파일을 뒤적거려서 니콜라스의 저택과 정원을 찍은 사진 몇 장을 밀어 보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멋진 정원과 어딘가 다른 세계로 통할 것 같은 미로의 입구……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곳인데 사진으로 보니까 이런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낯설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역시 한 시간을 헤맬 정도로 크고 복잡한 미로나 후원 전체만큼이나 넓은 신전 같은 건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 되면 거기서 내가 본 것, 느꼈던 감정은 다 뭐야? 어이가 없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뜯어 맞추다 보니 나조차도 그 전날 차이나타운에서 마신 독한 술의 성분이 의심스러웠다. 내 복잡한 얼굴을 본 굽타가 착잡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비밀장소가 있었다면 예전에 우리가 찾아냈을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고, 다음엔 왼쪽으로 돌고…… 저 문으로 나가면…… 정원 밖이구나. 몇 번을 들락거리고 어떻게 돌아다녀 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미로 같은 건 없었다. 잘 손질된 풍성한 나무 울타리와 그 아름다운 신전에 대한 기억과 아직도 뚜렷한 슬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뭐해? 거기서…….”

놀라서 돌아보니 니콜라스가 좀 떨어진 대리석 벤치에 걸터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뭘?”

니콜라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내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니콜라스를 생각하면 여기에 아무것도 없는 게 천만다행이지만, 내가 그간의 스트레스 때문에 미쳐서 헛것을 보고 그렇게 전전긍긍했던 거라면 그것도 무턱대고 좋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니콜라스에게 다가가서 잔을 받아 들었다. 깊은 나무향이 풍기는 와인이었다. 와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제 막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이 멋진 정원하고 잘 어울리는 술이었다. 꽃이 한창이라고 하기엔 이르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천 개나 되는 꼬마전구가 장미꽃 대신 정원을 수놓고 있어서 분위기가 제법 좋았다.

“좋네요.”

니콜라스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올 생각 따위 전혀 없었지만, 수사가 거의 원점으로 돌아가버린 데다 파티에 안 오면 계속 찐드기 붙겠다는 협박도 무시할 수는 없고, 또…… 미로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도 해보고 싶어서 겸사겸사 왔다.

파티엔 사람이 많았다. 클럽 친구도 있는 것 같고, 니콜라스가 후원하고 있는 이런 저런 단체에 속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고…… 서빙 하는 사람들과 8인조 악단 빼고도 인원이 60~70명 정도 되는 제법 규모가 큰 파티였다.

쿠간에서 제일 비싼 파티 플래너를 고용했다더니 정원 곳곳에 돈 들인 티가 확실히 났다. 그냥 둬도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푸른 천막을 세우고, 보석 같은 등을 달고, 크리스마스트리에나 달 것 같은 작은 전구를 장미나무마다 감아 놓으니 정원이 완전히 별천지였다. 음악도 좋고, 음식도 좋고. 술도 좋았다. 지난 며칠간 졸였던 마음이 이 아늑한 밤공기 덕분에 조금이나마 풀리는 느낌이었다.

“가서 어울리지 그래?”

니콜라스가 야회가 한창인 천막 쪽을 가리켰다.

“나중에요.”

집주인의 남자친구로 소개받는 것도 내키지 않지만, 천막 근처에 못 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티 손님들은 대체로 점잖고 우아한 편이었지만 게중엔 좀 튀는 캐릭터도 두세 명 있었다. 특히 소설간지, 시인인지…… 아까부터 진공청소기처럼 술과 음식을 집어삼키고 있는 산적 같은 남자가 거슬려서 천막 근처엔 가까이 가기 싫었다.

저 남자…… 불과 몇 달 전에 경찰서에서 봤던 사람이다. 죄목이 아마 기물 파손과 호텔 영업 방해였던 것 같은데, 내 사건은 아니었지만 술에 취해서 여자친구랑 싸우다가 호텔 로비를 반이나 때려 부수는 행패 끝에 경찰서에 연행되어왔었다. 하지만 서에 와서도 계속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힘 좋고 마침 일없는 짭새 두세 명이 달려들어서 거의 밟다시피 하면서 중범죄자 호송용 수갑으로 팔 다리 둘둘 말아서 구치소 독방에 처넣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일없는 짭새 중 한 명이 나였다.

저 남자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부모 형제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만취해 있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자기를 깔고 앉아서 손목에 수갑 채운 사람 얼굴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니까. 아니……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나?

“안 오는 줄 알았어.”

“그랬다가 계속 전화하고 집 앞에 얼씬거릴까 봐 무서워서요.”

“그것도 재미는 있었을 텐데…….”

니콜라스가 껄껄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이 사람이 며칠 전 봄비가 오락가락하던 그 아침에 기묘할 정도로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음산하던 신전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 남자란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잠시 넋을 놓고 쳐다보다가 공연히 겸연쩍어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

밑도 끝도 없는 내 질문에 니콜라스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질문의 수준하고 비슷한 대답을 했다.

“글쎄…… 어떻게 할까?”

“떠날 거라고 했었잖아요.”

말 꺼내 놓고 나서 움찔했다. 이거…… 수사팀에서 다 듣고 있는데, 마키바 반장이 니콜라스 등 떠민다고 분명히 한 소리 할 거다.

“혼자 돌아다녀봐야 무슨 재미야?”

“나랑 같이 다니면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재미있어.”

좁은 벤 안에 쪼그리고 앉아서 돋아 오르는 닭살에 몸부림치고 있을 수사팀을 생각하니 송신기를 떼서 옆에 있는 분수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 그럼…… 계속 이렇게 지낼 건가요? 파티나 열면서…….”

“나쁠 거 없지.”

계속 이렇게 얌전하게만 지내준다면 나쁠 건 없는데…… 그럼 수사는 접나? 그런 생각 하면서 넋 놓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슬쩍 붙어 앉았다.

“파티에, 와인에, 아름다운 남자에…… 뭘 더 바라겠어?”

어, 소름 끼쳐…… 일단 내 낯이 뜨겁고, 다음으론 이런 얘기를 마키바 반장이나 굽타 선배가 다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쥐구멍에라도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살 수 있어요?”

“응”

“현역에서 은퇴한 백만장자처럼…… 그렇게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역에서 은퇴한 백만장자처럼 꼭 그렇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연쇄살인범이 살인을 멈추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경찰에 체포되거나. 아니면 죽거나…….

“왜 그런 눈으로 봐?”

속에서 뭔가 울컥 치미는 느낌이 들어서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동안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가지 질문으로도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 같았다. 진심일까?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도 해피엔딩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당신을 못 믿겠어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을 들어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니, 믿어버릴 것 같아서…… 니콜라스와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한 걸음 떼어 놓기도 전에 니콜라스가 내 손목을 잡아채더니 자기 옆에다 끌어 앉혔다. 그리고 내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는 나직하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100년 정도는 조용히 지낼 수 있어.”

니콜라스가 병째 가져온 와인을 내가 거의 다 마시는 중이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마시긴 하는데 이게 물인지 술인지…… 아무리 마셔도 알콜이 혈관으로 퍼지는 알딸딸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천막에 가서 바텐더한테 더 센 걸로 한 병 받아올까? 막 겨울잠을 자고 일어난 곰처럼 파티 음식을 쓸어 먹던 그 소설가 녀석이 아직도 천막에 죽치고 있는 게 걸리지만 않았어도 벌써 새 술을 한 병 땄을 거다.

“무슨 생각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한다고 하기는 그렇고…….

“그냥…….”

진심과 거짓을 말 한마디,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표정만으로 알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100년 정도는 조용히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파티 분위기를 타고 상대방 환심이나 사 보려고 지껄인 헛소리 때문에 내 숨이 그렇게까지 막히진 않았을 거다.

‘레이니 잭’ 사건은 이제 완전히 날아갔다. 혐의만 꼽자면 열 손가락 갖고도 어림없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증거가 없어서 지켜만 보던 차에 니콜라스가 이렇게 독하게 나오면 수사팀도 방법이 없다. 마키바 반장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반장이 이성을 잃고 차 안 여기저기를 들이받고 다니는 처절한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웬 한숨을 그렇게 쉬어?”

“내가……요?”

“진정 좀 해. 나 날려 가겠어.”

니콜라스가 빙긋 웃으면서 자기 잔에 남은 와인을 부었다. 병을 거꾸로 들고 털어봐야 바닥에 깔릴 정도도 안 되는 양이었다.

“한 병 더 가져올까?”

니콜라스가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 바람에 정신이 퍼뜩 돌아와서 용수철 튀듯 벌떡 일어섰다. 그간의 경험에 의하면 니콜라스가 저렇게 음흉한 표정을 지으면 꼭 사고가 났었다.

“내가, 내가 갔다 올게요.”

장미 화단에 둘러싸인 푸른 천막 안은 아까보다 사람이 더 늘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니콜라스와 연배 비슷한 상류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두 시간 사이에 계층과 연령대가 훨씬 다양해졌다. 한쪽에는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중년 부인과 사업가로 보이는 남자들이 어울리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껄렁해 보이는 젊은 남자애들과 옷차림 요란한 파티 걸들이 마침 시작된 경쾌한 음악에 맞춰 흔들거리고 있고…… 그런가 하면 천막에서 좀 떨어진 대리석 정자 쪽에는 나이 꽤나 지긋한 노인들도 몇 분 계시고, 정원 초입에 있는 풀장에는 아예 10대로 보이는 애들 열댓 명이 철벅거리는 중이었다. 니콜라스가 이 사람들을 다 아는 것 같지는 않은데, 파티 손님 초대 기준이 뭔지 궁금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물이 좋아지죠?”

바로 다가가자 바텐더가 반쯤 벗고 설치는 어린 여자애들 쪽으로 눈짓을 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비비안 로건하고 샘 밀러라고…… 요즘 뜨는 파티 싹쓸이 2인조죠.”

저쪽이 좀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파티를 싹쓸이 하고 있는 건 뷔페 테이블 옆에 죽치고 앉아서 음식이란 음식은 다 쓸어 먹고 있는 그 술버릇 고약한 소설가였다. 저런 진상까지 불러다가 공짜 저녁을 먹이는 걸 보면 니콜라스가 돈이 많기는 많은가 보다.

“처음엔 그저 그런 상류층 어르신들의 가든파티라고 생각했었는데, 유명 인사들이 많죠? 엘버트 리브 씨까지 온 걸 보면 집 주인이 발이 넓은 양반인가 봐요.”

“저 사람이…… 유명해요?”

내 질문에 바텐더가 어느 별에서 오셨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세요? 별명이 베스트셀러 제조기에다 TV에도 꽤 자주 나오는 분인데…… 저 양반 작품 중에 영화로 나온 게 올해만 두 편이거든요.”

내가 예술 문화 방면으로 완전히 깡통이란 건 별로 비밀도 아니지만 앞으로 TV 정도는 보고 살아야 할까 보다. 유명한 분인 줄도 모르고 깔고 앉아서 팔을 비틀고, 수갑 채우고, 몸부림 심하게 친다고 한 대 쥐어박기까지 했으니…….

유명인사라고 경찰서에서까지 특별대접을 받는 건 아니지만 잘못 건드렸다가 매스컴이라도 타면 그것도 난감한 일이라서 상대하기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다. 어쩐지 술에 취해서 그 행패를 부리는데도 다들 꾹 참는 눈치더라. 보다 못해서 담당도 아닌 내가 총대 매고 진압할 때는 말리는 놈도 하나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가 쪽을 힐끔 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해서 고개를 얼른 돌렸다.

“술 한 병 주세요. 와인 말고 좀 센 걸로…….”

바텐더한테서 방금 뚜껑 따서 거의 새 병이나 다름없는 발렌타인 17년짜리를 받아서 다시 정원으로 나왔다. 안주거리도 좀 담아가고 싶었지만 테이블 옆에 케로베로스처럼 버티고 앉아 있는 그 문제의 유명인사 때문에 음식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괜찮을까? 이건 깡술로 마시기엔 너무 센데…….

보석처럼 반짝이는 불빛, 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장미꽃 향기, 정원 곳곳에 숨어든 연인들의 속삭임, 웃음소리……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아까 술을 가지러 간다고 일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저 얼떨떨하고 금방 토할 것처럼 속이 안 좋더니, 그게 천천히 가라앉고 나서는 이유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들떴다. 뭘까? 이런 기분…… 좀 전에 벌컥벌컥 마신 와인이 이제야 취기가 오르는 걸까?

이전엔 한 번도 느껴 본 기억이 없는 이 수상한 두근거림의 정체가 뭘까 고민하면서 니콜라스가 기다리는 벤치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걸 가져온 거야? 어쩌려고?”

니콜라스가 내 손에 들린 술병을 보고는 허허…… 웃었다.

“마셔야죠.”

“마시고 뻗으면 나야 좋지만…….”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곤란하다. 애초에 그럴 마음으로 온 것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그러는 것도 부담스럽다. 게다가 마키바 반장하고 굽타 선배가 다 듣고 있을 텐데 거기다 대고 사생활을 생중계하는 것도 민망하고…….

“그럼…… 다시 갖다 놓을까요?”

“나는 좋다니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내 허리춤을 끌어당기며 니콜라스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자. 파티 음식을 좀 싸가지고 2층으로 올라가서…… 우리끼리 파티를 하자.”

잘못하면 오늘도 감청 수위가 심의에 걸리겠다. 한두 번까지는 실수라고 우겨 보기라도 하지, 이러면 완전히 상습이다. 내 기분이 살짝 들떠 있는 건 맞지만 침실로 가자는 소리에 넙죽 따라 나설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다.

“그건 좀…….”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흠칫했다. 돌아보니 술기운에 기분이 한창 들뜬 남녀가 미로 입구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안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려는 걸까?

“저렇게 함부로 드나들게 내버려둬도 괜찮아요?”

니콜라스가 뭐가 걱정이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부터 슬슬 붐빌 시간이야. 저래 봬도 인기 데이트 코스거든.”

대체 그날 아침에 내 상태가 어땠던 걸까? 반장 말대로 모르는 사이에 약이라도 주워 먹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이 꿈같지는 않은데…… 미로 속의 신전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붕 떴던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니콜라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요렇게 보채는 바람에…….

“2층에 가는 거…… 싫어?”

“싫다기보다는…….”

“그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니콜라스는 재미로 이러는 거지만 지금은 재미있고 재치 있는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급할 거 없잖아요. 여기도 분위기 좋으니까…… 그냥…….”

“그냥?”

“얘기나 하자고요.”

얘기나 하자면서 벤치 끄트머리에 주저앉았지만 막상 할 만한 얘기가 안 떠올랐다. 까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숨만 계속 나오는데,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분이 좋은 건가? 아마 그런 것 같다.

“그 말…… 한번만 더 해줘요.”

“무슨 말?”

“앞으로 100년…….”

“녹음을 해서 줄까? 가지고 다니면서 계속 반복해서 들을 수 있게.”

“비싸게 굴지 말고요.”

내 채근에 니콜라스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얹고 선서하듯 진지하게 말했다.

“약속해. 앞으로 운전보다 더 위험한 일은 안 할 거야. 운전도 안 된다면 택시를 타고 다닐게.”

바에서 가져온 위스키를 와인 잔에 따랐다. 마시고 뻗으면 안 되니까 바닥에 깔릴 정도로 조금만…….

“못 믿는 거야?”

“믿어요.”

대꾸하고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 분량 정도 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니콜라스의 진심 여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요즘은 하고 싶은 짓을 다 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쿠간에서 제일 실력 좋은 수사팀이 붙어서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으니까 싫어도 조용히 지낼 수밖에. 100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 20년만…… 아니, 30년만…….

니콜라스가 말없이 내민 잔에 술을 부어줬다.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가 평범한 친구 사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종류의 희망을 갖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애초에 니콜라스와 관련해서 뭔가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내 마음이 너무 약하고, 감정이 앞선 나머지 분별력을 잃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죄책감…… 평생이라도 안고 살 수 있다. 니콜라스가 이제라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살아주기만 한다면…….

바람이 불었다. 장미꽃 향기 가득 품은 향기로운 바람이 니콜라스의 앞머리를 가볍게 들어 날렸다. 내가 따라준 술을 한 입에 털어 마신 니콜라스가 가볍게 인상을 쓰며 입술을 핥았다.

“얼음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입맛을 다시던 니콜라스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왜 이렇게 숨 쉬기가 힘든지, 왜 이렇게까지 이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는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어떤 충동 때문에 빛에 끌리는 나방처럼 니콜라스에게 다가갔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평생 키스라곤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거칠고 서툴게…….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그만…….”

와인 잔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돌아와서 니콜라스한테서 떨어졌다. 니콜라스는 지금까지 봤던 것 중에 제일 멍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중이다. 아무리 정원 구석이라고는 해도 사람들 오가는 곳에서 좀 과격하기는 했다.

“미안하다면 다야?”

그 정도론 안 되나? 그럼…….

“다신 안 그럴게요. 그럼 됐죠?”

니콜라스가 실눈을 뜨고 나를 노려봤다. 말싸움해서 처음으로 본전 한번 찾았다. 하지만 뿌듯한 것도 잠시뿐……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덮쳤다.

“자, 잠깐만요!”

“잠깐 뭐?”

시큰둥하게 대꾸하면서 니콜라스가 내 입을 턱 막았다. 좀 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거칠고 서툰 키스가 아니라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육감적인…… 키스였다. 아니, 등골이 오싹했던 건 키스 테크닉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잘못하면 여기서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을 거다.

“무슨 짓이에요? 공공장소에서…….”

“여긴 내 집 뒷마당이거든. 공공장소가 아니라…….”

“누구네 집 뒷마당이든, 사람이 백 명이나 돌아다니고 있으면 공공장소라고요!”

니콜라스가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셔츠를 걷어 올렸다.

“괜찮아. 이런 건 못 본 척하고 지나갈 정도의 매너는 있는 친구들이거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젖 먹던 힘까지 다 쥐어짜서 니콜라스를 밀쳤다. 니콜라스의 친구들이 매너가 있든 없든, 나는 싫다. 동물이냐? 사람들 왔다 갔다 하는 정원 구석에서…… 게다가 니콜라스의 친구들 대부분이 이렇게 막 나가는 모습까지도 못 본 척 지나칠 정도로 매너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막 분수대 모퉁이를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춘 저 여자는…….

“니키…….”

엘리스 스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니콜라스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능력 있는 사업가에 미남이고, 성격 좋고, 취미 고상하고…… 직업상 여러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니콜라스처럼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명품 광고 속에 나오는 모델처럼…… 너무 그래서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실상 니콜라스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입 밖에 내기도 무섭고…… 지금 당장 난감한 건 니콜라스의 여자 취향이었다. 내가 아는 니콜라스의 옛 여자친구는 두 명이었다. 서부 호수에 사는 물뱀 한 마리하고, 엘리스 스톤…….

“안녕…… 하세요.”

니콜라스를 밀고 일어나서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엘리스 스톤은 호수에서 만났던 그 여자처럼 무섭게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질이 더 나아 보이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왔어?”

니콜라스도 엘리스 스톤한테 인사를 했다. 완전 건성으로…….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별로요. 당신은 좋아 보이네요.”

엘리스 스톤의 눈빛과 목소리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굴도 전보다 까칠한 것이…… 니콜라스 때문에 어지간히 속이 탔었던 모양이다.

“보다시피.”

“당신 정말…….”

엘리스 스톤이 포문을 열며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틈을 안 주고 그녀의 말을 막았다.

“기왕 왔으니까 놀다가 가. 당신하고 말이 통할 만한 친구도 좀 있을 거고, 찾아보면 당신 팬도 있을 테니까.”

니콜라스의 태도와 말투엔 빈틈이 없었다. 그래도 한때 교제하던 여자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빙 둘러서 괜한 미련을 남기는 것보다 저렇게 칼같이 자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각자 성격대로 하는 거지만, 어쨌든 이미 정리한 여자친구를 대하는 태도로는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엘리스 스톤의 상태가 별로였다. 짭새 노릇을 몇 년 하면서 성한 사람보다는 수상한 사람 만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내 입장에서 보면 저런 성격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생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고집이 세다고 할까, 아니면 망상이 깊다고 할까…….

그나마 말이 통할 정도라면 그저 성질이 못된 정도지만 상태가 악화되면 사이코로 넘어가는 위험한 성격인데 엘리스 스톤은 정상인과 사이코의 경계 선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병원엘 가는 게 좋을 텐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엘리스는 니콜라스가 전에 자기가 잘못한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마음에도 없는 상대하고 놀아나고 있는 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음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으면서 공연히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거다. 둘이 만날 때도 니콜라스가 엘리스 스톤을 그렇게 좋아했을까 의심스럽지만…… 저 여자가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면 그 생각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건 헛수고였다.

“나를 모욕할 생각이라면 좀 더 그럴듯한 상대를 찾아보든가요!”

엘리스 스톤이 나를 앙심 가득한 눈초리로 흘겨보며 소리쳤다. 내가 뭐 어때서……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나서 봐야 긁어 부스럼이라 잠자코 있었다.

“억지 부리지 마. 엘리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언제부터?”

니콜라스는 엘리스 스톤을 좋은 말로 설득하거나, 달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아니까 그렇겠지만 옆에 있는 나까지 속이 싸늘해질 정도로 여자를 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엘리스 스톤도 같은 느낌인지 좀 전까지 등등하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당신은 성격상 아무도 사랑 못해. 질투하고 증오하고, 비웃고 배신하는 게 전부지. 그래서 나도 부담 없이 만났던 거고.”

“그렇지 않아요.”

“남자한테 먼저 차이는 게 기분 나쁜 일이라는 건 나도 알아. 나도 당신이 보란 듯이 음반 제작자하고 놀아났을 때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그 남자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니콜라스가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듣기에도 참 답답했다. 이런 얘기는 백날 해봐야 같은 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언제까지 이럴 작정이야?”

니콜라스가 드디어 짜증을 냈다. 그 한마디에 주변 기온이 5℃ 정도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니키…….”

“나는 당신이 지금까지 만나면서 성질대로 주물럭거렸던 얼간이들하곤 달라. 그러니까 더 이상 내 파티를 방해하지 말아줘. 그리고 내 데이트도!”

니콜라스의 살벌한 경고에 엘리스 스톤이 쇼크를 먹었다. 사실은 나도 좀 놀랐다. 니콜라스가 이렇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지간히 놀란 여자가 꼿꼿하게 선 채 움직일 생각을 않자 니콜라스가 술병하고 잔을 챙겨 들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니콜라스한테 등 떠밀려서 나도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원 모퉁이를 돌기 전에 뒤를 한번 돌아봤는데 그때까지도 엘리스 스톤은 선 자리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꼼짝 않고 있었다. 말귀를 알아들은 걸까? 이쯤에서 분위기 파악 제대로 하고 더 이상 니콜라스 주변에 얼씬거리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된다.

“아까 약속한 거 잊지 말아요. 앞으로 100년이랬어요.”

화가 나서 좀 전에 했던 얘기 까먹었을까 봐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그런데…….

“…….”

대답이 없다. 니콜라스의 묵묵부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걸음을 멈췄다. 니콜라스는 좀 전보다 표정이 더 안 좋았다. 헤어진 여자친구한테 스토킹 당한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왜 대답을 안 해요?”

“별로 그럴 기분이 아니야.”

니콜라스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고는 나를 앞질러서 집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화나면 저렇구나. 나는 왜 니콜라스의 저런 면을 몰랐을까? 지은 죄도 없이 덩달아 겁을 집어먹고 니콜라스 등짝만 쳐다보면서 뒤를 쫓아갔다. 1층 로비를 지나서 2층 응접실까지 가도록 니콜라스는 말 한마디 없었고, 나를 한번 돌아보지도 않았다.

니콜라스는 정말 심하게 열 받았다. 2층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구석에 있는 홈 바로 직행하더니 스트레이트 잔을 꺼내서 정원에서부터 들고 온 술 한 잔을 원샷으로 마셔 치웠다.

숨도 안 쉬고 석 잔 정도 그렇게 후딱 해치운 니콜라스가 정원 쪽으로 난 창문의 커튼을 거칠게 내렸다.

“저…….”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니콜라스도 답답하고 짜증나서 저러는 거지만 화난 건 화난 거고, 약속은 약속이다. 기분에 따라서 지키고 말고 하는 건 약속이 아니라 말장난일 뿐이다.

“왜?”

니콜라스가 내 쪽으론 고개도 안 돌리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말 한마디 하는 게 기분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안 그래도 기분 별로인 사람 상대로 까칠한 소리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도 마음 많이 상했다. 그리고 그런 중차대한 문제를 분위기 따위에 밀려서 흐지부지 넘기기도 싫었고…… 어쨌든 그제야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봤다.

“아무 상관없어.”

나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다.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위협적이었다. 그 눈빛을 마주보고 있으려니 속이 시릴 정도였다.

“그럼 왜…….”

“그 얘긴 그만해. 실성한 여자애 얘기나 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니콜라스가 나직하게 대꾸하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울렸다. 그간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위험의 실체를 본 것 같아서…… 이런 거였나? 결국 이런 게 이 사람의 본색인 걸까? 다가오는 니콜라스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 여자를…… 해칠 건가요?”

엘리스 스톤을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작한 얘기를 끝내고 싶어서 대놓고 물었다. 니콜라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 봐서.”

뭐가 어째?

“말이 틀리잖아요! 아깐 분명히…….”

“그 여자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좀 전처럼 좋은 분위기에 한번만 더 초를 치면 그땐 정말 죽이고 싶을 거야.”

무표정한 얼굴로 저런 소리 하니까 더 무서웠다. 게다가 이젠 눈빛이 노골적으로 배고픈 맹수였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벽에 막혔다. 아무리 넓어도 집안이니까. 이제 어쩌지? 이거…… 진짜 위험한 상황인가? 그 순간 니콜라스가 더 바싹 다가섰고, 머릿속에 어떤 판단이 서기도 전에 손이 허리춤으로 올라갔다.

총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그 짧은 순간에 니콜라스가 내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손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쩔 건데요?”

겁도 나고, 화도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얼굴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빤히 응시하던 니콜라스가 음산하게 속삭였다.

“너도 참…… 눈치 없다.”

크롬웰이 금방 내린 원두커피를 잔에 따랐다. 각종 허브와 약초 전문인 크롬웰한테서 평범한 커피를 얻어 마시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키바 반장, 굽타, 비니, 이토, 크롬웰에 서장님까지 회의에 참가하는 것도 그렇고…… 그리고 회의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이 분위기만 점점 무거워지는 것도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다른 차 드려요?”

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커피 잔을 내려다보고만 있자 크롬웰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오. 커피…… 좋아요.”

입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눈총이 일제히 나한테 쏟아졌다. 다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순서를 정리 중이거나 자기도 모르게 너무 심한 욕이 나올까 봐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뿐이다.

“마키바.”

테이블에 놓인 파일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서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연쇄살인범이 개과천선하고 완전히 새 사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마키바 반장이 나를 노려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겠지…….”

서장이 좀 더 희망적이고 구체적인 대답을 바라며 크롬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크롬웰도 이런 경우엔 별다른 묘책이 없는 모양이었다.

“수사가 오래 가겠네요. 개과천선이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 지켜보는 걸 뻔히 아는데 그 앞에서 사고를 칠 만큼 바보는 아니니까요.”

똑같은 말이라도 크롬웰이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만 크롬웰이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까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렇겠죠?”

너무 안심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거의 동시에 티슈 박스하고 차 숟가락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넌 앞으로 3년 동안 교통정리야! 이 시간 이후로 헤슬렘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

차 숟가락에 정통으로 맞은 옆통수를 긁적거리고 있는데 반장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교통정리 3년은 너무 가혹하다. 그리고 니콜라스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것도 좀…….

“꼭 그래야 되나요?”

요번에도 말 떨어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비수 같은 눈총이 쏟아졌다. 내부 고발자나 첩자가 당하는 집단 따돌림이 이런 걸까? 웬만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 느껴지는 살벌함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뭐야? 교통정리 하기 싫어? 그럼 서부 호수 파출소로 갈래?”

“그게 아니고요…….”

“아니면?”

“니콜라스가 정식으로 기소된 것도 아니고, 저도 근무시간 이외에 누굴 만나는 건 사생활인데…….”

“야! 이 자식아!!”

반장이 테이블을 후려갈기며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나도 일어나서 재빨리 문 옆으로 붙었다. 일단 살아야 되니까…….

사실 이런 얘기는 한두 달 바짝 엎드려 있다가 눈치 봐 가면서 슬그머니 꺼내야 되는 얘긴데, 오늘따라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들떠서 그런 가…… 빨리 이성을 못 찾으면 내 무덤을 내가 파겠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 죽일 기세와는 달리 반장은 평소 하던 대로 민첩하게 나를 덮쳐서 깔고 앉거나, 팔을 비틀지는 못했다.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순간 테이블 다리 한쪽이 나가면서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줄줄이 바닥에 떨어져서 박살이 나버렸기 때문에…….

“넌 또 뭐야?”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데다 뜻하지 않은 봉변까지 당한 반장이 비니를 향해 울화통을 터뜨렸다.

“뭐가요?”

잠이 모자라서 꼬박꼬박 졸고 앉아 있던 비니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 판국에도 친구라고 저 자식 편을 들어?”

“제가 언제요?”

누가 봐도 테이블 다리를 부러뜨린 건 반장이었다. 하지만 서장님도, 크롬웰도, 심지어는 굽타까지 비니를 마뜩치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다지 논리적인 사고방식은 아니지만 비니랑 몇 년 같이 지내다 보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가 비니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반장이 이를 빠드득 갈면서 비니를 노려보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더 괘씸한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째? 사생활?”

“그런 뜻이 아니라, 당장은 그렇게 단칼에 헤어지기가 좀…… 곤란해서요.”

내 궁색한 변명에 반장이 매우 흥분했다.

“넌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 자식하고 놀아날 생각이란 말이야? 니 마누라는 어쩌고? 이제 봤더니, 이거 아주 웃기는 놈이네!!”

“바람을 피우겠다는 게 아니라…….”

“파티에서 히히덕거리다가 침실로 직행하는 게 바람이 아니면 뭔데?”

거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얕은꾀로 사람 속여서 침실로 끌어들이는 니콜라스의 수법을 이제 대강 알았으니까, 그렇게 속아서 당하는 일은 다시 없을 거다. 하지만 내 대답에 반장 빼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한숨을 내쉬었다. 반장은 한숨 대신 거친 콧방귀를 날렸다.

“잘도 그러겠다!”

“어제는 깜빡 속아서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요. 앞으로는 절대…….”

“니 주제에 앞으론 별 수 있을 것 같아?”

“…….”

잠복 수사 중에 용의자가 눈치를 채고 잠적하거나 바른 생활 사나이로 돌변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내가 담당한 사건 중에는 처음이고,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도 처음이지만…… 용의자를 한방에 보낼 증거도 없고, 더구나 용의자로 찍힌 당사자가 한동안 움직일 생각이 없다면 일이 어려워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런 경우 수사는 대부분 중단이다. 이 동네에 니콜라스 헤슬렘 외에 살인범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진전도 없는 일에 계속 인원을 묶어둘 만큼 짭새가 남아도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니콜라스의 경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상황이 안 좋다고 덮어두기엔 그동안 니콜라스가 치고 다닌 사건이 워낙 만만치 않았다. 연쇄살인을 폭행이나 절도, 사기 같은 여타 범죄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 문제로 거의 30분간 서장과 반장과 굽타 사이에서 일대 설전이 벌어졌다.

서장은 사건에 더 이상 이 정도 규모의 팀을 유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굽타는 니콜라스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며 서장과 팽팽하게 맞섰다. 마키바 반장은 나에 대한 교통정리 3년형과 니콜라스 근처 접근 금지 명령 외에 더 독한 보복 조치가 뭐 없나 궁리하느라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서장과 의견이 비슷해서 일단 팀은 해체하고 니콜라스는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올려서 관리하자는 의견을 밀었다.

이 상황에서는 반장의 의견이 제일 현실적이고 적절한 것 같았지만 굽타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면 사표 쓰고 프리로 나서서 혼자라도 니콜라스의 뒤를 캐겠다는 굽타의 으름장에 서장하고 반장이 동시에 움찔했다. 사실은 나도 놀랐다. 연쇄살인범이니까 수사관 입장에서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체포하고 싶은 게 당연하지만…… 굽타는 상황이 불리하면 물러서서 기다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니콜라스한테 집착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니콜라스에 대해 말할 때마다 조용조용하고 차분하기에 보통 다른 사건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는 줄 알았었다.

“연쇄살인만 사건이야? 자네가 헤슬렘하고 숨바꼭질 하는 동안 다른 일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나 해? 지난달에 발생한 살인 사건 여섯 건 중에 네 건이 오리무중이란 말이야!”

서장이 태도를 바꿔서 애원조로 굽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굽타가 정말 사표를 쓰고 나가버리면 그렇지 않아도 시원찮은 범인 검거율이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 칠 터였다.

“하지만 헤슬렘은…….”

“모든 부서에서 자네의 컴백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어. 물론 헤슬렘 그놈도 잡아야지. 하지만 그 자식은 한동안 쉰다니까…… 일단 다른 불부터 좀 끄자고. 나 지난달에도 청장한테 불려가서 한바탕 깨지고 왔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덕분에 여간해서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언쟁이 잠시 멈췄다.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민 사람은 행정과의 도밍고 부인이었다.

“서장님 여기 계시죠?”

“무슨 일로 그러세요?”

크롬웰이 서장 대신 일어났다. 실제로 하는 일은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크롬웰의 공식 직함은 서장 비서니까 서장하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유 정도는 물어본다.

“웬 남자들이 서장님을 찾아요. 연방특수경찰에서 나왔다는데요.”

연방특수경찰이 경찰서를 방문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쿠간은 인구 천만을 웃도는 대도시인 동시에 악명 높은 범죄 도시인만큼 연방경찰하고 공조할 일도 많았다. 하지만 보통은 사전에 약속을 잡고 오던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서장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크롬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상하네요. 연락 받은 게 없는데…….”

“급한 일이라서 당장 만나야겠다는데요.”

도밍고 부인이 재촉했다. 하지만 서장은 사전 약속도 없이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중요한 회의를 도중에 덮어버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사실 일선 경찰들은 연방경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연방특수경찰이라면 일반 경찰보다 엄청난 상전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이것저것 통제하고 결정권을 가지려고 드니까 반감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한번 둘러본 크롬웰이 그간 연방경찰한테 쌓인 감정과 방안 분위기를 감안해서 적절한 결정을 내렸다.

“서장실에서 좀 기다리라고 하세요. 우리 일도 급하거든요.”

도밍고 부인이 문을 닫고 나간 후 한참 동안 회의실 분위기는 정처 없이 겉돌기만 했다. 서장은 연방특수경찰이 무슨 일로 들이닥쳤나 신경 쓰이는 눈치였고, 굽타는 어떻게 하면 수사팀을 반이라도 건져서 니콜라스 수사를 계속할 수 있을까 그 생각뿐이고, 이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 봐서는 알 길이 없고, 비니는 본래 생각을 깊게 안 하는 성격인데다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젠 아예 책상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마키바 반장은…… 저 화가 언제나 풀릴까? 정말 걱정이다.

교통정리도 경찰이 하는 일이고 누구든 해야 될 일이니까 하라면 하겠지만, 니콜라스는 당장 오늘 저녁에 만나야 된다. 니콜라스가 자주 가는 그 클럽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전화를 해야 되나? 오늘은 못 간다고…… 아니, 그냥 살짝 만날까? 들키면 몇 대 맞는 거고…….

고민하면서 힐끔거리다가 하필이면 마키바 반장하고 눈이 딱 맞았다. 완전히 내 속을 까뒤집어 보는 눈빛이었다. 시커먼 흉악범들 속도 다 들여다보는 사람인데, 그다지 비밀스럽지도 않은 내 속이야 거울 보듯 빤하겠지. 내 눈에도 반장 속이 빤히 보였다. 이글거리는 반장의 눈빛이 보내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니콜라스하고 몰래 만나고 다니다 들키면 너 내 손에 죽는다…… 이거다.

“크롬웰, 자네 생각은 어때?”

계속 같은 말만 오갈 뿐, 좀처럼 결론이 안 나자 서장이 마지막 카드를 던졌다. 잠자코 앉아서 뭔가를 끄적거리던 크롬웰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굽타를 쳐다봤다.

“수사팀을 이 상태로 유지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크롬웰까지 서장 편을 들자 굽타가 한숨을 내쉬었다.

“헤슬렘을 이 상태로 방치하는 건 심각한 직무 유깁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했지, 헤슬렘을 방치하자고 하지는 않았어요.”

크롬웰의 똑 부러지는 한마디에 회의실에 새로운 긴장감이 돌았다. 서장님의 히든카드, 경찰서의 특급 브레인 쥬드 크롬웰에게 뭔가 묘안이 있는 걸까?

“헤슬렘이 장담한 대로 앞으로 100년 동안 착하게 살지, 아니면 중간에 본색을 드러낼지 그건 모르는 일이죠. 어느 쪽이라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예요. 헤슬렘도 쉽게 긴장을 풀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우리한테 헤슬렘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짭새…… 아니, 수사관이 있다는 사실이죠.”

복잡한 심정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크롬웰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 헤슬렘을 조용히 지켜봤으면 해요. 아주 가까이서…….”

내 라커에 또 어떤 놈이 「호모」라고 갈겨 쓴 쪽지를 붙여 놨다. 쪽지마다 필적이 다른 걸 보면 서너 명이 번갈아가며 써 붙이는 것 같았다.

“또야?”

내가 쪽지에 손을 대기도 전에 비니가 버럭 짜증을 내며 쪽지를 잡아 뜯었다. 라커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틈에 옆에 온 걸까?

“대체 어떤 놈들이야? 내 손에 걸리기만 하면…….”

비니가 주변에 얼쩡거리는 짭새들을 무차별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니콜라스에 대한 경계경보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자마자 비니는 일도 편하고, 수입도 경찰 월급보다 짭짤했던 그 괜찮은 직장을 미련 없이 때려치웠다. 비니한테도 괜찮은 직장이었지만 우리한테도 정말 좋은 직장이었는데…….

비니가 바텐더 일을 그만두고 정시 출근을 시작하고부터는 경찰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다. 한동안 그럴 거다.

“됐어.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이게 동료라는 것들이 할 짓이야?”

“그냥 낙서잖아.”

지난주에는 어떤 놈이 사물함 열쇠를 따고 안에다 빨간색 스프레이 페인트를 잔뜩 뿌려 놓는 바람에 사복을 다 버려서 정복 차림으로 퇴근한 적도 있었다. 이런 거…… 고등학교 다닐 때 종종 당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당하는 일은 느낌이 또 달랐다. 어렸을 때는 화가 났지만, 지금은 한심할 뿐이었다.

“이게 어떻게 그냥 낙서야? 행패지!”

“신경 쓰지 말라니까?”

“이런 거 써서 붙이려면 마키바 반장 사물함에나 붙이든가! 애초에 너를 헤슬렘한테 떠다 민 게 반장이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반장 사물함에 이런 걸 갖다 붙이는 건 죽을 각오가 없이는 할 수 없는 짓이다.

“그 다음부터는 다 내 책임이었어. 그리고 이만한 일에 일일이 발끈하고 다닐 정도로 일을 잘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참을래.”

“왜 참아? 넌 호모도 아니잖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헤슬렘하고 그렇게 된 건 니 탓이 아니야. 클럽에서도 헤슬렘한테 눈독 들이는 남자들이 꽤 있었어. 내가 알기론 그 사람들도 전엔 여자 좋아하는 보통 남자들이었다고.”

처음 듣는 얘기다. 니콜라스도 전혀 그런 얘기는 없었고…… 분위기 좋고 주방장 훌륭하고 연회비는 말도 못하게 비싼 클럽이라서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가던데, 눈독 들이는 남자들이 있다고?

“그리고 호모든, 아니든…….”

내가 잠깐 딴 생각하는 사이 비니가 느닷없이 맞은편 라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던 베커의 멱살을 비호처럼 틀어잡았다.

“그게 니네들하고 무슨 상관이야?”

비니가 현장에서 검거한 강도 닦달하듯 살벌하게 베커를 닦아 세웠다.

“내가 안 그랬어!”

타격대 베테랑에다 서에서 세 번째로 덩치 큰 터프가이 베커가 비니의 기습에 겁을 집어먹고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베커도 체격 좋고 성격 거칠거칠한 타격대원이라 사소한 시비 따위를 겁내지는 않았다. 재수 없어서 아주 거친 놈한테 걸려봐야 몇 대 맞아주면 그만이고…… 하지만 상대가 비니라면 얘기가 달랐다. 일단 방어가 불가능하고, 부상 정도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만둬. 자기가 그런 거 아니라잖아.”

나도 다 큰 어른들의 이런 유치한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라커에 낙서 몇 장 붙인 죄로 누군가가 비니의 노여움을 사서 머리가 깨지거나 허리가 부러지는 건 싫다. 그리고 느낌상 이게 베커 짓도 아닌 것 같고…….

“타격대에 니 친구 놈들이 뒤에서 뭐라고 쑥덕거리는지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럼 그 자식들한테 직접 말하지 그래?”

베커가 자기 멱살을 틀어잡고 있는 비니의 손목을 살짝 비틀며 좋은 말로 타일렀다.

일이 너무 커질까 봐 걱정이다. 비니는 타격대 상대로 면전에 대고 심한 욕까지 포함해서 하고 싶을 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놈이다. 타격대 찌질이 중엔 그런 비니를 상대로 주먹질을 할 만큼 머리 나쁜 놈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러면 또 사고가 날 거다.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샤워 중이니까 금방 나올 거야.”

나는 신은 안 믿는다. 하지만 비니의 징크스는 믿는다. 아니, 믿는 게 아니라…… 징크스가 있다는 건 분명히 안다. 그런 거 다 미신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비니를 모르는 사람이다.

“나가자. 내가 커피 사줄게.”

후딱 옷을 갈아입고 비니를 끌어당겼다. 비니를 여기 마냥 두는 건 경찰관으로써 심각한 직무유기다. 사고는 그저 예방이 최고다.

“가자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니가 이러니까 저 자식들이 더 만만하게 보고 까불잖아!”

“잘못했어. 앞으론 잘 할게.”

온 힘을 다해 밀고 끈 덕에 비니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라커룸에서 끌려 나오면서 비니가 베커한테 살벌한 경고를 날렸다.

“니 친구들한테 전해. 이런 짓 한번만 더하면 그땐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린다고!”

말은 손목이라고 하지만 그게 비니 뜻대로 되는 일도 아니라서…… 부러지는 게 손목일지, 갈비뼈일지는 일이 벌어져 봐야 안다. 일단 비니를 타격대 애들한테서 되도록 멀리 떼어 놔야 된다. 하지만 비니를 라커에서 끌어내고 겨우 한숨 돌리는 그 순간, 샤워실 쪽에서 우지끈…… 하고 뭔가 부러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처참한 비명소리가 온 건물에 울려 퍼졌다.

“자, 이거…….”

“커피 사준다며?”

내가 내민 종이컵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비니가 툴툴거렸다.

“커피야.”

경찰서 로비 구석에 있는 자판기 커피지만…… 나랑 비니가 마주 서서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는 사이, 머리와 등과 팔에 벌겋게 화상을 입은 타격대 애들이 끙끙거리며 로비를 가로질렀다. 병원에 가나 보다.

샤워실 온수 파이프가 터졌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냥 터진 것도 아니고 대폭발을 일으켰다는데, 그 덕에 샤워실에서 샤워하던 짭새들이 뜨거운 물로 말 그대로 세례를 받았다. 샤워실엔 다 합쳐서 열한 명이 샤워 중이었고 그중 타격대는 여섯 명이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내가 당한 일에 비해 너무 가혹한 보복이다. 게다가 아무 죄도 없이 그저 샤워하다가 봉변을 당한 녀석도 있을 거고…… 덩치가 산만한 사내들이 등하고 어깨를 벌겋게 데여서 웃옷도 못 입고 끙끙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아무리 화가 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소리야? 건물이 낡아서 그런 걸…….”

비니가 담담하고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건물이 낡은 건 사실이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건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비니다.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하자.”

조용한 데라…….

“무슨 얘기?”

“와 봐.”

비니가 커피를 원샷으로 마셔 치우고 나를 잡아끌었다. 경찰서 안에서는 둘이 조용히 얘기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은데…… 밖으로 나가야 되나? 어쨌든 얘기가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니콜라스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샤워실 소동 때문에 벌써 늦었다.

성질난다고 샤워실 온수 파이프를 터뜨려서 무려 열한 명에 달하는 짭새들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준 절친한 친구가 얘기를 좀 해야겠다는 데, 바쁘니까 다음에 하자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터덜터덜 따라 나섰다.

니콜라스가 기다리는데…… 노리는 남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그 퇴폐적인 클럽에서…….

시계를 힐끔거리며 로비를 막 나서려는 참에 누군가가 내 앞을 막아섰다. 제때 걸음을 멈췄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정면으로 부딪힐 뻔했다. 누구지? 모르는 사람인데…….

“실례합니다. 댁이 유제이 형사 맞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나이는 40대 중, 후반 정도…… 점잖고 순해 보이는 인상이지만 나를 훑어보는 시선은 꽤나 날카로웠다.

“그런데요.”

지금은 형사가 아니라 교통경찰이지만…… 내 대답에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배지를 꺼내 보였다.

“연방특수경찰의 노튼이라고 합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예?”

연방특수경찰이 두 번인가 왔다갔다는 얘기는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서장실로 직행이었고, 두 번째는 마키바 반장하고 굽타도 불려 들어갔었다는 데, 그 덕분에 뭔가 굉장한 사건이 터진 게 아니냐는 추측으로 경찰서가 후끈 달았었다. 자세한 내막은 아직 알려진 게 없지만 연방경찰이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는 걸 보면 어디선가 큰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서장이나, 최고 베테랑 수사관 아니면 상대도 안 하는 연방특수경찰이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니콜라스 수사를 말아먹은 것 외에는 잘못한 거 없는데…….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당신이 요즘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충고를 좀 할까 해서요.”

내가 요즘 하는 일이라곤 정체구간 교통정리뿐이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충고라니?

“자세한 얘기는 조용한 데서 합시다. 밖으로 나갈까요?”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연방특수경찰이 배지를 들이밀면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하는 수밖에 없다. 선약이 있긴 하지만…….

“정식으로 연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제가 먼저거든요?”

비니가 노튼 요원의 새치기에 퉁명스럽게 항의했다.

“누구시죠?”

노튼 요원도 못마땅한 눈초리로 비니를 쳐다봤다.

“비니 몬티첼리 형삽니다. 강력반이요.”

비니가 배지를 꺼내서 먼지 털 듯 탈탈 흔들어 보였다. 비니가 보통 때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한테 이러지 않는데, 오늘따라 언행이 거칠다. 사실 비니는 요즘 들어서는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댁은 유제이 형사를 연행하는 중이었나요?”

“둘 다 아닐 때는 선착순이 원칙이죠.”

노튼 요원이 할 말을 잃고 비니를 빤히 쳐다봤다. 당황했나 보다. 하긴, 연방경찰 배지를 내보이면서 얘기 좀 해야겠다는 데 선착순 운운하며 시비 거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비니가 저렇게 퉁퉁 부은 얼굴로 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로비 한복판이라 폭발할 만한 파이프도 없고, 깨질 유리창도 없지만 비니 몬티첼리 징크스의 핵심은 언제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는 데 있고, 진짜 핵심은 터질 상황만 되면 어떤 식으로든 터진다는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다리가 슬금슬금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뭔가에 턱 부딪혔다.

“반장님…….”

하필이면…….

“비켜!”

반장이 나를 옆으로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다행히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요즘 자주 만나는군요. 노튼 요원.”

반장이 비니마저 밀어버리고 노튼 요원과 마주 섰다. 비니가 옆으로 밀려나가자 당장이라도 뭔가 터질 것 같던 팽팽한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반장하고 노튼 요원 사이는 부드러운 것하고는 거리가 상당히 있어 보였지만…….

“당신하고 당신 부하 경관들이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더 자주 봐야 할 겁니다.”

“비협조적이라니요?”

“니콜라스 헤슬렘은 연방특수경찰 소관이라고 분명히 얘기 했을 텐데요?”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연방특수경찰 소관이라니……?

“수사는 진즉에 접었는데 무슨 소립니까?”

“수사를 접었다면 왜 당신 부하 경관이 아직도 헤슬렘을 만나고 다니는 겁니까? 지난주만 해도 두 번씩이나…….”

노튼 요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키바 반장이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뭐가 어째? 일주일에 두 번?”

비니와 노튼 요원이 원했던 대로 결국 조용한 곳으로 왔다. 지하 1층 5번 취조실…… 수많은 강도, 강간, 살인범들이 붙들려와서 엄중한 취조를 받았던 살풍경한 방안에서 마키바 반장을 마주보고 앉아 있으려니 지은 죄도 없이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죄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둘이 뭘 했다고?”

마키바 반장이 사진 두 장을 내 앞으로 밀어 보내며 엄하게 추궁했다. 화요일 저녁에 찍힌 사진이었다.

바르샤 거리에서 열린 세계 가면 전시회…… 니콜라스는 거칠게 깎은 아프리카 도깨비 가면을 쓴 채 팔짱을 끼고 있고, 나는 그 앞에서 얼빠진 놈처럼 웃고 있는…… 수사가 완전히 쫑난 줄 알고 마음 푹 놓고 있었는데 연방경찰이 쫓아다니면서 이런 사진을 찍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특이한 가면도 많고, 재미있을 거라면서…….”

“그리고?”

“그리고…… 뭐요?”

내 반문에 반장이 눈을 부라리며 테이블에 주먹질을 했다. 나야 뭐, 반장의 이런 폭력에는 미립이 났지만 매직미러에 기대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노튼 요원은 경기를 할 정도로 놀랐다. 마키바 반장 옆에서 긴장 풀고 있으면 저렇게 된다.

“저녁 내내 가면 구경만 하진 않았을 거 아냐?”

“가면 한 개씩 사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는데요…….”

“그리고?”

그리고…….

“헤어져서 각자 집으로…….”

“누구한테 거짓말이야?”

반장이 내 멱살을 움켜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반장보다 동작이 좀 더 빨라서 그 솥뚜껑만한 손으로 내 옷깃을 제대로 잡아채지 못했다.

“내가 반장으로 있는 한, 내 밑의 짭새가 연쇄살인범이랑 놀아나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했지?”

약이 바싹 오른 반장이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멱살 정도는 순순히 잡혀줄 걸, 괜히 피했다. 반장하고의 몸싸움은 승산이 없다. 마키바 반장을 상대하기엔 체급도 딸리고 직급도 딸렸다.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니까요!”

“그럼 금요일 저녁엔?”

“…….”

결국 요번에도 반장한테 깔렸다. 비니와 노튼 요원이 합심해서 반장을 뜯어 말려준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장이 온 몸을 날려서 나를 덮친 이후의 일이었다. 반장의 사정없는 보디체킹에 걸려서 바닥에 깔릴 때는 진짜로 배 터지는 줄 알았다.

“괜찮아요?”

노튼 요원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의자를 바로 놓고 나를 데려다 앉히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방안에 서리라도 내릴 것처럼 표정이 쌀쌀맞더니…… 반장 때문에 많이 놀랐나 보다.

“아니오…… 아니, 예…….”

괜찮은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아직 의식이 있는 걸 보면 괜찮은 것도 같고, 뒤통수가 욱신거릴 때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당신은 상부 지시하고 상관없이 니콜라스 헤슬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겁니까?”

“예…… 아니오.”

정신이 없어서 갈피를 못 잡고 횡설수설하자 마키바 반장이 다시 발끈했다.

“아니라니! 그럼 누가 그 자식하고 놀아나라고 등이라도 떠밀었단 말이야?”

초반엔 분명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부 지시가 아주 없었다고 하긴 그렇죠. 크롬웰이…….”

반장을 꼼짝 못하게 찍어 누르고 있던 비니가 내 대신 변명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반장이 솟구치는 분노의 힘으로 비니를 밀쳐내고 사납게 소리쳤다.

“쥬드 크롬웰이 니네들 상관이야?”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럴 때가 많다. 하지만 크롬웰을 끌어대는 건 구차한 핑계에 불과했다. 크롬웰 때문에 니콜라스를 만나는 건 아니니까…… 좋아하니까 자꾸 생각이 나는 거고, 보고 싶어서 보는 거고, 끌리니까 잠자리도 같이 하게 되는 거다. 반장이 하도 호되게 몰아붙이니까 자꾸 변명거리를 찾게 되지만 만나서 밥만 먹고 얘기만 한다고 바람이 아니라고 우기는 건 웃기는 얘기다. 니콜라스하고는 뭘 해도 이미 바람이다.

“금요일엔 만나서 뭘 했습니까?”

“금요일에는 연방경찰이 휴가라도 갔었나요?”

사진을 몇 장 더 뒤져보니 금요일에 찍은 것도 있었다. 파티장에서 서너 명의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니콜라스, 좀 떨어진 곳에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 유명 인사들이 많았던 파티라 여기저기서 플러시가 쉴 새 없이 터지기는 했었는데, 그중에 연방경찰이 끼어 있었다니…….

“사진 몇 장으로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금요일은 비번이라서 초저녁에 니콜라스를 만나서 꽤 유명하다는 피아니스트의 이혼 축하 파티에 갔었다. 이혼이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아서 파티를 벌일 정도로 축하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려하고 재미있는 파티였다. 원수 같은 네 번째 아내랑 어렵게 이혼에 성공한 집주인의 피아노 연주도 일품이었고, 집주인의 절친한 친구인 테너 가수의 축가도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건 니콜라스의 바이올린 연주였다.

여기 어딘가 니콜라스의 바이올린 연주에 넋 놓고 있는 내 모습도 있을 텐데…… 아, 있다. 니콜라스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모습이…… 연방경찰이 살인용의자 감시 차원에서 찍은 사진치고는 각도도 좋고, 표정도 좋았다.

집주인의 애장품이자 웬만한 저택 한 채 값이라는 비싼 바이올린에 멋대로 손을 대는 바람에 파티에서 쫓겨날 뻔했지만, 연주는 정말 좋았다. 니콜라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이성은 저만치 날아가버리는 내 귀에만 그렇게 들렸던 게 아니었다. 파티 홀에 있던 사람들 모두 훌륭한 연주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니콜라스는 한동안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서 빠져 나오질 못했다. 연주가 끝난 후에는 집주인도 귀한 악기에 함부로 손 댄 무례에 대해 더 이상 화내지 않았다.

“파티에서는 11시쯤 나왔는데 2차를 가자고 해서…….”

“2차를…… 헤슬렘의 집으로요?”

2차 가자고 꼬실 때부터 따라가면 무슨 일이 있을지 알고 있었지만,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됐어요.”

내 대책 없는 대답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나한테 따져 물었다.

“대체 어쩔 작정이야?”

방안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다. 나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비니가 더 문제였다. 비니는 요즘 들어 항상 저기압인데, 오늘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

마키바 반장이 솟구쳐 오르는 신경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 멱살을 잡아 흔들고 있을 때 어째 방안이 좀 밝아진다 싶더니 벽 한 면에 설치된 매직미러가 건드린 사람도 없이 저 혼자 금이 갔고, 좀 있다가는 형광등까지 나가버렸다. 결국 지하 취조실엔 더 있을 수가 없어서 다 같이 나와서 다른 방을 찾았다. 퇴근 시간이라 빈방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2층엔 작은 회의실도 몇 개 있고…….

“어딜 따라 들어와?”

새로 옮긴 2층 회의실까지 따라 들어오던 비니를 마키바 반장이 밀어냈다.

“저도 제이한테 할 말이 있다고요!”

“아까 샤워실에서 애들한테 뜨거운 물 뒤집어씌운 것도 너지?”

과연 명수사관이다. 성격 나쁘고 폭력적이라서 탈이지, 죄지은 놈 찾아내는 능력은 타고 났다.

반장의 날카로운 추궁에 비니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우리가 비니 몬티첼리 징크스라고 부르는 재난에는 이런 상황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비니의 뻔뻔함도 포함되어 있다.

“전 그때 분명히 라커룸 밖에 있었는데 무슨 수로요?”

“그걸 알면 예전에 널 잡아넣었지!”

“증거도 없으면서 공연히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제가 그런 거 아니라고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변명에 반장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됐고, 지금 이 시간부터 넌 휴가야. 내가 연락할 때까지는 경찰서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반장이 비니를 매몰차게 쫓아내고 방문을 닫아걸었다. 반장한테 욕먹고 저렇게 쫓겨가는 걸 볼 때마다 친구로서 많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 마음은 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튼 요원은 반장이 비니한테 왜 저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외부인이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비니한테 10년 가까이 시달리고 있는 나는 세상에 비니 몬티첼리 징크스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잠시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노튼 요원이었다.

“아까 어디까지 했었죠?”

그러니까…… 마키바 반장이 나한테 니콜라스가 그렇게 좋으면 이혼하고 사표 쓰고, 그런 다음에 만나고 다니라고 욕을 퍼 붓고 있을 때 형광등이 작은 불꽃을 튀기며 터졌었다.

“그러니까 너 말이야…….”

정확히 그 시점부터 얘기를 시작할 생각인지 반장이 내 멱살을 다시 움켜잡았다. 이젠 무슨 짓을 해도 거울이 깨지거나, 형광등이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마음 턱 놓고…… 반장의 성격과 지금 태도를 보면 오늘의 면담이 용건만 간단히, 신속하게 끝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벌써 많이 늦었는데…… 니콜라스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오늘은 만나기 어렵겠다고…….

“나도 이 친구 하고 얘기 좀 합시다.”

노튼 요원이 마키바 반장과 나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저리 비켜요! 내 얘기도 아직 안 끝났으니까!!”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폭행을 하고 있잖습니까?”

“내가 이 자식을 어떻게 하든, 댁이 무슨 상관이야?”

반장이 노튼 요원에게 짜증을 냈다. 굽타가 말리면 듣는 척이라도 하던데…… 그 외 다른 사람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마키바 반장은 내 멱살을, 노튼 요원은 반장의 팔을 잡고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헉…… 전화다.

전화가 누구한테서 온 건지 감 잡은 반장이 얼떨결에 손을 놨다. 덕분에 놓여나서 전화기를 꺼내 보니 역시 니콜라스였다. 전화 받기는 분위기가 좀 그런데…….

“예…….”

「30분 안에 안 오면 저녁 먼저 먹어버린다.」

경찰서 분위기가 날로 안 좋아지는데 반해서 니콜라스는 요즘 늘 기분이 들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약속을 못 지키게 돼서 더 미안하다.

“저…… 오늘은 못 볼 것 같아요.”

「왜? 무슨 일 있어?」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아서요. 미리 전화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해요.”

통화하면서 마키바 반장 쪽을 슬쩍 봤다.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안 좋은 정도가 아니다. 오늘 이 방에서 걸어 나갈 수만 있어도 운이 좋은 거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나중에…….”

「오기 힘들면 내가 갈게. 지금 어디야?」

헉…….

“안 돼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리고 있던 반장이 놀라서 흠칫할 정도로 내 목소리가 크고 절박했다. 침착하게 대처했어야 하는 건데…… 덕분에 니콜라스한테 내 신상에 변고가 생겼다는 확신을 주고 말았다.

「직장이지? 기다려. 지금 갈 테니까.」

내가 경찰이란 걸 알면, 내 직장이 경찰서라는 것도 알 텐데…… 여길 오겠다고? 어이가 없어서 잠시 뻐끔거리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무시무시한 장면 때문에 모골이 송연해지고 말았다. 니콜라스가 경찰서에 쳐들어와서 마키바 반장하고 맞짱 뜨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니콜라스지만 설마 제정신으로 그런 짓을 할까? 아니다. 온다고 했으면 올 사람이고, 와서 마키바 반장하고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뒷일은 아무도 모른다.

“됐으니까,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지금 갈게요.”

니콜라스는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보통 때 모습 그대로 느긋하고 품위 있게…… 웨이터에게 뭔가를 주문하던 니콜라스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빨리 왔네?”

과속에 신호 위반 두 번…… 애초에 약속했던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나 늦었지만 최선은 다 했다.

“직장 트러블은 잘 해결하고 온 거야?”

해결은 무슨…… 전화 끊고 나서 반장이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그냥 밀치고 뛰쳐나왔다. 내일이 영원히 안 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이대로 사라져버리든지, 마키바 반장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든지…….

“뭐, 대강…….”

니콜라스 맞은편에 주저앉아서 나도 와인을 한 잔 마셨다. 올 때는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막상 와서 얼굴을 마주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사람을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다니게 만들고, 자기는 느긋하게 와인이나 즐기고…… 나를 손아귀에 넣고 이렇게 떡처럼 주무르는구나 싶어서…….

“저녁 먹어야지?”

“먼저 먹지 그랬어요?”

“혼자 무슨 맛으로?”

니콜라스가 웨이터를 불러서 이것저것 주문하는 동안 가만히 니콜라스를 노려만 봤다. 표면적으로 보면 점잖고 신사적인데…… 은근히 비열한 구석이 있다. 안 만나주면 집으로 쳐들어온다고 협박을 하지 않나, 이젠 직장으로 오겠다고 해서 기겁을 하게 만들고…… 나도 니콜라스가 보고 싶었고, 만나서 보내는 시간이 즐겁기는 하지만 자꾸 이러면 곤란하다.

주문 마치고 웨이터를 보낸 니콜라스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든 자기 맘대로 하면서, 무슨 불만이 있어서 시선이 곱지 않을까?

“옷깃이 찢어졌어. 누구한테 멱살이라도 잡힌 거야?”

니콜라스가 내 목덜미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제 보니 옷깃이 살짝 나갔다.

“별 일 아니에요.”

“니 성격에 누구한테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 거고…… 그것도 직장 트러블의 흔적이야?”

“신경 쓸 거 없어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까.”

본래 트러블이 아주 없었던 직장은 아니었다. 비니가 그렇게 대놓고 애들을 때려잡고 있으니 최소한 앞으로 2주는 잠잠할 거고…… 마키바 반장도 취조실에서 거울에 금 갈 때 꽤 놀랐었으니 최소한 비니 앞에서는 나한테 심하게 못할 거다. 오래가진 않겠지만.

니콜라스는 내 대답이 못 미더운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신경도 쓰이고, 걱정도 돼.”

“그래서 내가 일하는 데로 온다고 했던 거예요? 신경 쓰이고 걱정스러워서?”

“나 때문에 생긴 트러블이잖아.”

“당신이 해결할 수 있는 트러블은 아니거든요.”

보통은 니콜라스 앞에서 뼈까지 녹은 것처럼 흐물거리지만, 이번만큼은 딱 부러지게 못을 박았다. 농담으로라도 경찰서로 찾아오네 마네…… 그런 소리는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마늘 빵, 스파게티, 과일과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샐러드, 간간이 와인 한 잔…… 같이 있으면 한없이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한, 이상한 남자와의 저녁시간이 그렇게 천천히 흘렀다.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아까부터 당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어요.”

나이는 30대 초, 중반 정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였다. 이런 클럽에 자기 돈 내고 회원증 끊기는 좀 모자라는 나이로 보이는데, 재벌 2세라도 되나? 전에는 전혀 낌새를 못 챘는데 비니한테 이상한 소릴 들어서 그런지 신경 쓰였다.

“누구? 조슈아?”

뒤를 돌아보던 니콜라스가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남자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인기가 좋은가 봐요.”

“좀…… 그래.”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뺀질하게 대꾸했다. 그리곤 뭔가 재미있는 구경하듯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조슈아는 부동산 업계 뉴페이스야. 몇 달째 투자 권유를 하는 중인데, 내가 계속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아쉬워서 그러는 거야. 요즘 사막 한복판에 대형 워터파크를 건설 중이라 돈이 급하거든.”

확실히 뭔가 아쉬운 눈빛이긴 한데…… 돈 때문에 사람을 저렇게 애타게 쳐다볼 정도라면 사업이 망하기 일보직전인가 보다.

“정말 돈 문제뿐일까요? 당신 등에서 눈을 못 떼는데?”

“조슈아는 여자친구가 있어.”

비니도 그런 말 했었다.

“다음엔 다른 데서 만나요.”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딱히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쿠간에 식당이 여기 한 군데도 아니고, 두루두루 다녀보고 싶어서요. 왜 거기 있잖아요. 차이나타운에 있는 그 중국집…… 거기 한 번 더 가요.”

꼭 돈 많은 중년 남자한테 붙어서 여기 가고 싶어요, 저거 갖고 싶어요…… 하고 조르는 철없는 애가 된 기분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말끝이 흐려졌다.

“거긴 좀 곤란해. 요즘은 용이 지키고 있거든.”

“응?”

무슨 뜻일까? 용이 지키고 있다는 게…… 니콜라스가 웃으면서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데도 가 보자. 니 말대로 시내에 식당이 여기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반장을 밀치고 눈썹이 휘날리며 뛰어올 때는 니콜라스가 너무 내 사정 안 봐주고 제멋대로 사람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에 화도 많이 났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면 화가 오래 가질 않았다. 밥 먹는 동안 간간이 마키바 반장 얼굴이 떠올라서 심란하기는 했지만 세상일은 뭐든 대가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그런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여기 앉아 있는 거고.

“지난 사흘 동안은 뭐하고 지냈어요?”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반장의 얼굴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니콜라스의 근황을 물었다.

“그냥 집에 있었어.”

“당신을 기다리는 그 수많은 전시회, 공연, 파티는 어쩌고요?”

혼자서 너무 신나게 노는 것도 썩 달갑지는 않지만 그 크고 썰렁한 저택에 혼자 있었다니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귀찮아져서…… 요즘은 혼자 다니는 게 별로 재미가 없어.”

늘 같이 있을 수 없는 게 나도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은퇴한 백만장자가 아니라서 니콜라스 수준에 맞춰서 놀 수가 없다.

“왜 그래요? 친구도 많으면서…….”

“사거리 교통정리는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거야?”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도로 뱉었다. 내 정체는 진즉에 들통 난 거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거론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놀랐다.

“어떻게…….”

“도슨 양이 그러더라. 너랑 꼭 닮은 경찰관이 킹스 로드에서 교통 정리하는 걸 봤다고.”

입도 뻥긋 못하고 니콜라스를 쳐다만 봤다. 도슨 양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서 니콜라스 친구한테 정복 차림으로 일하는 걸 들키다니, 정말 재수 없다.

“왜? 정해진 기한도 없는 거야?”

니콜라스가 자기 커피를 내 앞으로 밀어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니콜라스와 나는 어떤 약속도 입 밖에 내서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는 니콜라스에게 과거에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묻지 않았고, 니콜라스 역시 내 직업과 가정에 관한 일을 묻거나,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게 우리 둘 사이에서 말없이 지켜지는 암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요즘 들어서 안색도 안 좋고, 자꾸 기침을 하길래 나는 니가 감기에라도 걸린 줄 알았었어.”

감기 대신 좀 전에 잘 먹은 저녁이 명치끝에 딱 걸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게 온전히 니 잘못도 아니잖아. 처음부터 얼마나 티 나게 어설펐는데…… 왜 너만 허구한 날 멱살 드잡이에, 기약도 없이 교통정리야?”

나도 하루 종일 자동차 배기가스 마시면서 길에 서 있다 보면 그런 생각 들 때가 있지만, 함정 수사 표적이었던 사람한테 이런 말을 듣는 건 자존심이 좀…….

“그렇게 티가 났어요?”

“말도 마. 얼마나 웃겼다고.”

그랬었구나…….

지난 몇 개월간 니콜라스 앞에서 삽질했던 몇몇 장면을 떠올리며 얼굴 붉히고 있는 사이, 니콜라스가 와인 한 병을 더 땄다.

“차 안 갖고 왔어요?”

“갖고 왔어.”

여기서 더 마시면 운전을 못할 텐데…… 사실 지금까지 마신 것만 해도 걸리면 면허정지, 내지는 구속이다.

“나, 집까지 데려다줄 거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니콜라스가 자기 잔에 와인을 한 잔 가득 부었다. 오늘의 구실은 대리운전이냐?

“앞길에서 택시는 잡아줄 수 있어요.”

“왜?”

니콜라스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따졌다.

“피곤해요. 정신도 없고…….”

나는 기분 내킬 때마다 니콜라스네 집에 놀러갈 처지가 못 된다. 위니는 요즘 들어서 불면증이 더 심해졌다. 바람피우는 주제에 아내 걱정을 하는 게 우습긴 하지만 내 잦은 새벽 귀가가 위니의 만성적인 우울증과 불면증을 더 악화시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저녁만 먹고 헤어지자고?”

“오늘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저 뚱한 얼굴을 보니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래 양다리 걸치는 체질이 아닌데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까? 못 보면 애달프고, 보면 골치 아프고…….

“미안해요.”

말없이 와인만 벌컥벌컥 마시던 니콜라스가 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놨다. 완전히 김 나간 얼굴이었다.

“그 일은 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일이라면 그러니까…….

“교통정리요?”

“포함해서 지금하고 있는 일 전부.”

“할 수 있는 한 계속 할 건데요.”

“그 일을 꼭 해야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어?”

꼭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고 따지면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죠.”

“나를 뜯어먹으면서 살 생각은 전혀 없어?”

한참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당신한테 빈대 붙어서 살라고요?”

“편하고 좋잖아?”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서부터 진심인지 모르겠다.

“말은 고맙지만, 곤란해요.”

“왜?”

“언제 등 돌릴지 모르는 바람둥이를 믿고 직장을 때려치울 수는 없잖아요. 나는 조건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새 직장을 구하려면 애 먹어요.”

오늘은 뭐라고 꼬드겨도 넘어가지 말고 집에 가자……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다시 커피 잔을 들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니콜라스는 잠잠했다. 집에 같이 가자고 한두 번은 더 조를 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없고, 와인만 빠른 속도로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왜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저렇게 씁쓸할까?

“아냐. 아무것도…….”

“얘기 해봐요. 그런 표정 가끔 짓던데…….”

“표정이 어떤데?”

“그냥…… 걱정이 있는 것 같아서요.”

니콜라스는 대답이 없고, 나도 달리 할 말이 없고……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봤다. 편해져서 그런 걸까? 이젠 이런 침묵이 전처럼 무겁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서 한 번씩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전엔 이런 적 없었는데…….”

와인 두 병을 다 마시고 빈 병을 아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니콜라스가 말끝을 흐렸다.

“같이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건 알지만.”

“여행이요?”

지금 내 처지로는 어려운 얘기다. 주중에 이런 식으로 잠깐씩 짬을 내는 것도 힘들 때가 많은데 여행이라…… 하지만 니콜라스 입장에선 얼마든지 바랄 수 있는 일이었다. 고작 그 얘기를 저렇게 힘들게 하는 게 도리어 미안했다.

“언제 한번 가요.”

니콜라스가 피식 웃었다. 표정이 그렇게 밝은 건 아니고…….

“중국 같은 델 갈 수는 없겠지만 하루 이틀 정도라면…… 시간을 내 볼게요.”

“무리할 거 없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어디 먼 데로 놀러가자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삐쳤어요?”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얼굴 보니까 삐쳤구만…….

“시간을 만들어본다니까요?”

비번에, 월차에, 니콜라스 수사 때문에 못 쓰고 미뤄 놓은 휴가까지 잘 맞춰 보면 시간이 될 것도 같다. 하지만 내 말이 못 미더운지 니콜라스의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여행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오늘 저녁 시간이나 어떻게 좀 해봐.”

벌써 택시를 두 대째 그냥 보냈다. 택시 잡아서 집에 보내준다는데도 니콜라스가 클럽 정문 앞에 있는 가로등에 등을 붙이고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는 땡깡 그만 피우고 이리 와요.”

“싫어.”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거리가 좀 멀긴 하지만 길이 막힐 시간도 아니고, 니콜라스가 퇴직 기념으로 장만한 은회색 에쉬튼 마틴으로 해안 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집 앞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바로 집안으로 끌려 들어갈 확률이 100%였다.

“그럼 밤새 그렇게 있던가요.”

요번에 택시를 잡으면 내가 타고 갈 거다. 번화가 앞길이라 택시는 많았다. 저기 한 대 또 오네…….

하지만 이번에도 택시를 그냥 보냈다. 기척도 없이 뒤로 다가온 니콜라스한테 기습당하는 바람에…… 니콜라스가 내 목을 잡고 꺾어질 정도로 획 돌려서 턱 하니 입을 맞추는 통에 기겁을 한 택시가 급발진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대로는 나도, 니콜라스도 날 샐 때까지 집에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뭐든 당신 맘대로 해야 돼요?”

차 시동을 걸면서 볼멘소리로 따졌다.

“내가 뭘 맘대로 했다고 그래?”

“전부 다 당신 맘대로만 하잖아요! 아까도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사람 놀래켜서 뛰쳐나오게 만들고…… 결국은 이런 식으로 집에까지 끌고 가잖아요!”

내가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행각에 얼마나 질색하는지 뻔히 알면서 그러는 게 더 화가 났다. 오가는 사람이 적지도 않은 길바닥에서 그런 짓을…… 놀라서 지금도 손끝이 떨렸다.

“진짜 내 맘대로 하는 게 어떤 건지 알면, 그런 말 못할 걸.”

무슨 짓을 했든, 결국 목적을 달성한 니콜라스가 귓구멍을 후비며 여유만만하게 대꾸했다.

“나를 침대로 끌고 가는 것 말고 또 하고 싶은 게 있긴 있어요?”

“가서 커피 마시면서 잠깐 얘기나 하자. 금방 보내줄게.”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저녁 내내 주고받은 건 얘기가 아니고 염불이었냐?

“됐어요!”

시내를 빠져나와서 한적한 해안 도로를 한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집에 혼자 있을 위니 생각, 아직도 뿔이 단단히 올라 있을 반장 생각, 그 연방 수사관은 나한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니콜라스한테 이런 식으로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고,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니콜라스하고 해안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 그런 생각은 지금 하지 말자. 어떻게 하면 니콜라스를 집 앞에 내려놓고 몸성히 귀가할 수 있을지…… 그거나 걱정하자.

“아직도 화났어?”

해안 도로를 빠져 나와서 푸른 나비 언덕 초입에 들어설 무렵 니콜라스가 말문을 열었다.

“예.”

“아까 길에서 그랬던 건 미안해.”

“그거 말고 또 미안한 건 없어요?”

“없는데…….”

경찰서로 쳐들어오겠다고 협박했었던 건 건성으로라도 사과할 마음이 없나 보다.

“관둬요.”

성능 좋은 스포츠카로 시원하게 달린 덕에 벌써 집 앞이었다. 여기서 차랑 니콜라스를 던져 놓고 바로 택시 잡으면 보통 때 비해서 그렇게 늦은 귀가도 아니었다. 집 앞에서 시간 끌면 끌수록 나한테 불리하니까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자.

“꼭 집에 가야 될 이유라도 있어?”

니콜라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건네주는 열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금부터가 열 번 중에 아홉 번은 내가 지는 진짜 어려운 싸움이다.

“위니가 많이 안 좋아요.”

니콜라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내가 쉬었던가? 대강 둘러대면 됐을 텐데, 왜 위니 얘기를 입에 올렸을까?

“그 여자한테 필요한 건 의사야. 바람난 남편이 아니고.”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심하다.

“병원에도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바람이 났어도 남편은 남편이니까…… 많이 아플 때 옆에 있어주는 정도는 해야죠.”

“어쩔 수 없지. 그럼 가 봐.”

짧게 대꾸하고 니콜라스가 차에서 내렸다. 나이도 만만치 않으신 분이 일이 자기 생각대로 안 된다고 막말에, 억지에, 투정에…… 마음이라도 좀 풀어주고 가야 될 것 같아서 따라 내렸다. 차 열쇠도 돌려줘야 되고…….

“그렇게까지 화낼 거 없잖아요. 내 사정도 좀 봐주면 안 돼요?”

“내릴 것 없어. 그냥 이 차 타고 가.”

뽑은 지 열흘도 안 돼서 광이 번쩍번쩍 나는 새 차를 어떻게 빌려 가냐? 이런 차는 우리 동네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택시 불러서 가면 돼요.”

“이거 너 주려고 산 거야.”

이거라니? 주변에 뭐 떨어진 거라도 있나 싶어서 한번 둘러봤다.

“좋아할 것 같아서…… 그런데 막상 선물이라고 하면 펄쩍 뛸 것 같아서 말을 못 했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로 흠칫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설마 이게 차 얘기는 아니겠지?

“말도 안 돼요. 어떻게 이런 걸…….”

“거봐. 펄쩍 뛰잖아.”

이건 너무 과하다. 전에 받은 시계도 너무 눈에 띄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끔 꺼내보는 게 고작인데, 이건 그럴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당황해서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두고 니콜라스가 쌩하니 돌아섰다. 내가 졌다.

“간다면서?”

뒤쫓아 가자 니콜라스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열쇠나 받아요.”

“…….”

“그리고 커피도 한 잔 줘요. 마시고 가게…….”

살다 보면 좋은 일이 연달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숨 가쁘게 터지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쁜 일은 종종 그렇게 몰아서 닥칠 때가 있는데…… 나한테는 요즘이 그런 시기였다.

닷새 전에는 킬리요크 강변도로에서 짙은 안개로 인한 7중 추돌사고가 터져서 아침나절이 사고 뒷수습으로 다 갔고, 그 다음 날엔 시내 한복판에서 무단 횡단하는 개를 피하려고 급정거하던 탱크로리가 미끄러져서 인근 상가를 초토화시킨 것도 모자라서 싣고 있던 기름을 반이나 길바닥에 쏟았다.

그 난리를 겪고 나서 한 사흘 조용히 지나가기에 한숨 돌리나 했더니…… 오늘 드디어 교통정리 짭새가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름하여 ‘시내 중심가 다섯 블록에 걸쳐 발생한 열일곱 건의 충돌 사고와 20중 연쇄 추돌 콤비 세트’였다. 눈물이 나도록 한심한 건 이게 태풍이나 지진 같은 천재지변에 의한 사건이 아니고 강도사건 용의자와 그 용의자를 추적하던 순찰 짭새들의 합작품이란 사실이었다.

소벨 5번가 어느 식당 앞에서 시작된 보석상 강도 용의자 두 명과 긴급 출동한 순찰차 석 대의 15분간에 걸친 추격전은 쿠간에서 가장 교통량 많은 거리 다섯 블록을 초토화 시키고 나서야 결판이 났다.

결과는 짭새 승이었지만…… 강도 놈들이 도주하다가 들이받은 차가 여섯 대, 추적하던 경찰차가 들이받은 차가 다섯 대, 그 받힌 차들이 각각 옆으로 튕겨나가며 주변 차량을 한두 대씩 더 들이받거나, 인도로 튕겨나가서 가게로 돌진하거나 행인들을 덮쳤다.

신고 받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길바닥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처음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고, 낮잠 자다가 악몽을 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량 수십 대가 잔뜩 우그러진 채 여기저기 나동그라져 있는 것까지는 연쇄 추돌 사고니까 뭐, 그렇지 하고 넘어갔지만 아스팔트 바닥에 맥주가 폭포처럼 흐르고, 사방에서 닭이 날아다니는 광경은 살인사건 현장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심하게 엽기적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다급하게 쫓기다가 막 신호가 바뀌는 사거리로 뛰어든 도주 차량 때문에 놀란 트럭이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맞은편에 있던 고가 기둥을 들이받고 뒤집어지면서 트럭 화물칸에 실려 있던 맥주 2천병이 길바닥에 다 쏟아졌고, 그 맥주 사태에 뒤차들이 미끄러지면서 충돌과 도로 이탈이 줄을 이었다. 하필이면 거기에 닭 운반 트럭이 버스하고 충돌하면서 뒤에 실은 닭장이 다 튕겨 나갔고…… 그 결과 맥주 바다에 살아 있는 닭들이 펄떡거리며 날아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카이잘 고가에서 시내 한복판으로 빠지는 그 복잡한 길목에서 차들이 쏟아진 맥주에 미끄러져서 20중으로 쌓였으니, 쿠간 시 남서부에서 어슬렁거리던 차량은 오늘 안으로 집에 들어가기 다 틀렸다고 보는 게 속 편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추격전이 한편의 액션영화 같았다는데……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보는 재미는 있었겠지만 대강 눈대중으로만 봐도 부서진 차량이 40여 대…… 한 차에 두 명씩만 타고 있었다고 쳐도 부상자가 80명이었다. 차라리 강도를 그냥 놔주지, 이게 대체 무슨 삽질이냐?

아지랑이 아롱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맥주 냄새 맡아가며 네 시간 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더니 먹은 것도 없이 오바이트가 치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시내에서 얼쩡거리는 교통경찰들은 다 끌려 나와서 현장 정리하고 진입하려는 차량을 돌려보내는 중인데, 일이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사건 현장이 너무 넓고, 차량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앰뷸런스 진입로를 만드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차량 수백 대가 엉켜 있는 복잡한 길에 시내에 있는 구급차란 구급차는 몽땅 다 몰려와서 번쩍거리지, 취재 헬기는 바로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지, 부상자들은 비명 지르고, 여자들은 울고……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런 아수라장은 처음이었다. 사고 규모가 큰데 비해 사망자가 없는 게 이 사건 관련해서는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아직도 이 지경이야?”

“선배님…….”

굽타였다. 혼자는 아니고, 마키바 반장이 아주 흐뭇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만날 복도에서 부딪히는 마키바 반장은 특별히 반가울 것도 없지만 굽타는 사정이 달랐다.

굽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같은 서에서 근무한다고는 하지만 니콜라스 수사가 일단락 된 후에 나는 교통과로 쫓겨 왔고, 굽타는 그동안 밀려 있던 강력사건을 수사하느라 바빠서 얼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여긴 웬일이세요?”

“사고가 크게 났다고 하기에 나와 봤어. 지금쯤은 정리가 좀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리’가 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 우그러진 차량을 뜯고 부상자들 실어내는 데만 시간이 다 갔다. 구급차가 빠져 나가야 견인차가 들어와서 이 고철 덩어리들을 끌어가기 시작할 테고, 차들을 다 치워야 길에 쏟아진 유리 조각하고 맥주를 씻어낼 텐데…… 지금 속도로 봐서는 내일 아침까지도 일이 다 끝날까 말까였다.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다 태워 먹은 꼴이군.”

굽타가 현장을 둘러보며 혀를 끌끌 찼다.

“안 그래도 요즘 사고가 많아서 고생한다는 얘기는 들었어. 힘들지?”

그렇다고 하면 마키바 반장이 너무 좋아할 것 같아서 한숨이 나오는 걸 꾹 참고 고개를 저었다.

“일이 다 그렇죠. 뭐…….”

“저녁은 먹었어?”

그럴 시간이 없었다. 속도 메스껍고…….

“아직…….”

“교대 조는 언제 오는 거야?”

교통정리는 교대 조 같은 거 없다. 본인 근무 시간대에 터진 일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본인이 마무리해야 된다. 내 표정을 본 굽타가 한숨을 쉬었다.

“현장 책임자가 누구야?”

정확히 현장을 누가 책임지고 있다고 하긴 그렇지만,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상급자는 순찰대 베리 반장이었다. 내가 순찰대 소속은 아니지만 피차 길바닥 인생이니까…….

“얘 좀 데려갈게.”

마키바 반장이 베리 반장한테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마키바 반장은 경찰서 내에서 반장 직급 가진 사람들 중엔 제일 파워가 센 편이었다. 하지만 베리 반장도 성격 까칠하고 깐깐하기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지금 여기 돌아가는 꼬라지 안 보여? 짭새 한 트럭을 더 풀어도 답이 안 나올 판에, 뭘 어쩐다고?”

베리 반장이 얼른 내 소맷자락을 움켜쥐며 마키바 반장의 월권에 항의했다.

“급히 조사할 일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지금은 안 돼!”

베리 반장은 일이 마무리되기 전에는 현장 인원을 한 명도 줄일 마음이 없었다. 반장도 지금 남의 사정 봐줄 처지가 아니었다. 이 난장판을 대강 정리하고 새벽에라도 집에 들어가려면 마음 독하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연쇄살인 관련이야.”

“연쇄살인?”

베리 반장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순찰대도 엄연한 짭새니까 연쇄살인이란 말이 나오면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실은 그 말 듣는 순간 나도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하고 관련된 연쇄살인범은 니콜라스뿐이기 때문이었다.

“교통사고 뒷수습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그런 말은 하지 말지…… 강력계 수사가 순찰대 업무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일이라는 그 말투에 베리 반장의 빈정이 매우 상했다.

“얘가 연쇄살인범이야?”

베리 반장이 마키바 반장을 꼬나보며 으르렁거렸다.

“뭐?”

“그런 거 아니면 나중에 봐. 지금은 사고 수습이 먼저야.”

하마터면 베리 반장하고 마키바 반장이 길에서 멱살을 잡을 뻔했다. 일하다 보면 부서 간에 의견 안 맞을 때도 있고, 그런 식으로 유감이 쌓이다 보면 거칠게 한판 붙기도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안 좋다. 장소는 더 안 좋고…….

그래서 내가 마키바 반장을 붙들고 있는 사이에 굽타가 베리 반장하고 협상을 했다. 나를 딱 한 시간만 빌려갔다가 돌려보내기로…… 어차피 밤새 길바닥에서 버티려면 저녁은 먹어야 되니까 한 시간이면 땡땡이를 친다고 할 것도 없었다.

“제이를 언제까지 교통과에 던져둘 셈이야?”

굽타가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마키바 반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렵사리 현장을 빠져나와서 자리 잡은 곳은 사고현장 바로 옆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이럴 거면 베리 반장하고 그 난리 피울 것 없이 저녁 먹고 온다고 하고 잠깐 나오면 됐을 걸. 어쨌든 굽타의 질문에 마키바 반장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3년.”

기운 빠져서 들었던 메뉴판을 그냥 덮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그것도 헤슬렘하고 헤어지는 날부터 계산해서 3년이야.”

말투에서부터 반장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 지 느낌이 바로 왔다. 선고는 3년이지만 1년만 잘 버티면 집행유예로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지난 한 달 반을 버텼는데…….

“너무하세요. 반장님.”

교통정리 3년 확정이라니, 그것도 하필 오늘 같은 날 그런 말을 들으니까 앞이 캄캄해서 뵈는 게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단 말은 하지 마. 난 너한테 분명히 경고했었어.”

“제가 니콜라스를 뜯어먹으면서 빈대 붙어서 사는 꼴을 보고 싶으세요?”

이게 반장하고 굽타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데…… 얘기 다 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내 대꾸에 마키바 반장의 눈빛이 대번에 언짢아졌다.

“왜? 그 자식이 직장 때려치우고 같이 살자고 하기라도 했어?”

“아……니요.”

굽타가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서툴게 잡아떼 봐야 소용도 없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그놈하고 살고 싶으면, 살지 왜?”

마키바 반장은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는 얼굴이었다.

“사표 쓰고 가라. 안 잡을게. 대신 그놈 손에 목이 부러져도 우리 원망은 말고.”

“아니라니까요?”

뭘 먹을 기분은 아니지만 밤샘하려면 뭐라도 먹어두라는 굽타의 권유에 치즈버거 한 개, 찐득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굽타도 커피, 마키바 반장은 나 보란 듯 맥주 한 잔…… 나는 당분간 맥주는 못 마실 거다.

치즈버거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길거리 쪽을 내다봤다. 이제 구급차는 대강 빠져 나갔고, 견인차가 현장 한복판으로 슬슬 진입 중이었다. 자정까지 차만 다 빼도 일단 성공이다.

“지난주에 그 연방경찰하고 따로 만났었다면서?”

요즘 경찰서에서 ‘그 연방경찰’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라면…… 노튼이었다.

“예.”

지난번에 나하고의 개인 면담 시도가 여러 돌발 사태로 무산된 이후 노튼한테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사흘 전에 뜬금없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것도 내가 일하는 데로 직접…… 여기서 멀지 않은 교차로였는데 그때도 접촉사고를 처리 중이었다.

“무슨 얘기 했어?”

그렇게 불쑥 나타난 것 치고 대화 내용은 그저 그랬다.

“니콜라스하고 만나지 말라고 하던데요?”

굽타와 마키바 반장이 서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 말 한마디 하고 가진 않았을 거 아냐?”

그야 그렇지만…… 요점은 그거였다. 니콜라스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니까 가까이 가지 말라고…… 또 뭔가 다른 얘기를 했었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것 외엔 별 게 없었다.

아, 저녁 나왔다. 우선 이거라도 먹고 기운을 내자. 쿠간 시 교통 상황이 제아무리 개판이라도 오늘 같은 사고가 그렇게 자주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거 말고 또 무슨 얘기 했어?”

“진짜로 그뿐이었어요.”

대답하면서 치즈버거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맛도 못보고 반장한테 뺐기고 말았다

“데니스 노튼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한마디도 빼지 말로 고대로 읊어 봐.”

저녁을 인질로 잡은 마키바 반장이 고압적으로 나를 을렀다.

데니스 노튼은 연방수사관이라기보다는 학자나, 학교 선생님 같은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수사관들은 대게 사람을 대할 때 위압적이고 딱딱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비해 노튼에게서는 그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연방 수사관을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예전에 알던 선생님이나 학교 선배를 만난 것 같았다. 주고받은 얘기의 내용은 무거웠지만 그 외에 별다른 껄끄러움은 없었다.

노튼은 내가 니콜라스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걸 비난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하기가 편했던 걸까? 노튼이 걱정하는 건 내 신변의 안전뿐이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일반인들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니콜라스가 하는 말은 듣지도 말고, 믿지도 말라고 하더라고요. 전에 피해자들도 나처럼 마음 놓고 있다가 당했던 거라고…….”

니콜라스의 이전 희생자들도 모자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대부분 머리 좋고, 매력적이고……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는 주목받는 인기인들이었다. 그 사람들도 다 나처럼 니콜라스한테 빠져 들었을까? 니콜라스는 지금 나한테 하듯, 이런 식으로 그 사람들을 유혹하고, 마음을 얻고, 그러고 나서 잔혹하게 죽여버렸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니콜라스의 진심이 의심스러워졌고, 그 빤한 패턴에 나도 속절없이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그런 말을 듣고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었어?”

너무 느껴져서 지금까지도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두고 보려고요.”

마키바 반장은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햄버거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 보냈다. 베리 반장하고 약속한 한 시간이 벌써 다 갔다.

먹고 바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햄버거를 한입 뜯어 먹다가 노튼이 좀 이상한 말을 했던 게 생각났다.

“뭐야?”

피의자의 사소한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는 송골매 같은 눈썰미를 가진 마키바 반장이 대뜸 다그쳤다.

“내가 만약에 니콜라스 손에 죽게 되면 니콜라스도 곤란해진다고…… 지금 상태가 나나 니콜라스한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고 했던 것 같아서요.”

말투가 내 신변이 아니라 니콜라스의 신변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좀 의아했었다.

“웬 잠꼬대야?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뭐 건질 게 있을까 기대했던 반장이 짜증을 냈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면전에 대고 무슨 잠꼬대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그 인간, 보면 볼수록 수상해.”

내 눈엔 별로 수상해 보이지 않던데…….

“헤슬렘 건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궁리만 했지, 연방특수경찰에서 놈을 체포하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 낌새가 전혀 없어. 며칠 전에 연방경찰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봤는데, 그 친구도 노튼이 소속된 과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더라고. 자기네들끼리도 22과 직원들은 월급만 받아가는 유령들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는 거야.”

답답해하는 마키바 반장을 위해서 굽타가 좋은 제안을 하나 했다.

“다음에 만나면 직접 물어봐.”

“물어봤어.”

“뭐래?”

“말해줄 수 없대.”

확실히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연방경찰에서 진작부터 낌새를 채고 수사를 진행해왔을 수는 있다. 니콜라스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미해결 살인 사건 중에는 십 수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건도 있으니까. 하지만 노튼의 태도와 말투엔 연쇄살인범을 체포하겠다는 굳은 의지나 조바심 같은 게 없었다. 그 때문에 어딘지 학자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그 사람은 니콜라스를 뒤쫓고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니콜라스가 천인공노할 연쇄살인범이라서 연방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닌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테지만, 마냥 내팽개쳐 두고 있는 느낌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용의자가 범행을 감쪽같이 은폐해서 손을 못 쓰는 거하고, 의지도 없이 손 놓고 있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십 수 년 간 니콜라스를 쫓아다니다 이젠 지쳐서 나가떨어진 걸까? 그런 거면 월급만 받아가는 유령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고…….

“헤슬렘은 요즘 어때?”

“그냥…….”

일도 바쁘고, 쉬는 날엔 위니하고 같이 병원에 가느라 이번 주엔 니콜라스를 못 만났다. 노튼 요원이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전화 한 통 하기도 그렇고…… 뭐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니콜라스 쪽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잘 있어요. 조용하게…….”

“알콜 중독자도 술을 끊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어. 반 년, 1년, 잘하면 한 10년까지…… 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다시 술잔을 들게 돼. 거의 대부분 그렇다는 거 자네도 알 거야.”

굽타가 얼마 남지도 않은 커피를 휘저으며 조용히 충고했다. 연방경찰의 미적지근한 태도와는 달리 굽타는 아직도 니콜라스를 뒤쫓고 있었다. 수사관이라면 이런 근성과 책임감이 있어야 된다. 지금 이게 내가 정신이 나갔다고 할 정도로 푹 빠져 있는 사람 얘기라서 속이 쓰리긴 하지만…….

“세상일엔 본래 해피엔딩이 드물어. 하물며 이런 경우엔…….”

나도 안다. 아는데, 그래도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나한테 했던 그 약속만큼은 지켜주지 않을까…… 니콜라스도 상황 파악 못하고 날뛸 정도로 대책 없는 미치광이는 아니니까 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은 채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고철 덩어리들이 견인차에 끌려가기 시작하면서 어수선하던 길바닥이 조금씩 제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엔 소형차들은 대부분 처리됐고, 이제 남은 건 트럭 석 대, 버스 한 대였다. 현재 시간 열두 시 10분 전…… 일이 거의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닭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근무 파트너인 드니즈가 커피를 건네주며 이제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지막 견인차까지 보내고 자체적으로 갖는 커피타임이었다. 청소차가 와서 길에 널린 유리 조각을 치우고 물로 한번 씻어내면 도로 상황은 그럭저럭 마무리가 될 것 같은데…… 닭 문제는 답이 없다.

“어딘가 숨어서 자고 있겠지.”

“내일 아침부터는 닭을 잡으러 다녀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괜한 걱정이야. 내일은 우리 비번이잖아.”

드니즈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전부 몇 마리나 될까?”

“글쎄…….”

처음엔 천 마리도 넘을 것 같던 닭들이 정신없이 일하는 동안 슬금슬금 줄어들더니 지금은 바닥에 떨어진 닭털 말고는 흔적이 없었다.

“잘하면 몇 년 후엔 근처에 야생 닭 서식지가 생길지도 모르겠는걸.”

“그것도 나쁠 거 없지.”

마지막 커피 한 방울까지 입안에 털어 넣던 드니즈의 시선이 어떤 한 점에 딱 가서 박혔다.

“야…… 차 좋은데?”

드니즈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은색 바디에서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스포츠카 한 대가 이쪽으로 슬슬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꿈에나 나오는 차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저런 게 굴러다니기도 하네. 저런 차는 대체 어떤 인간들이 몰고 다니는 걸까?”

저녁 무렵부터 이 구간은 통행 불가능이라고 뉴스에서 그렇게 떠들었는데도 이쪽으로 차를 몰고 나오는 인간은 대체 어떤 인간인지 나도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저 차…… 내 눈에는 익었다.

“나도 저런 차 있어.”

“내가 그 말에 웃어야 되냐?”

드니즈가 웃긴 웃었다. 비웃은 거지만…… 니콜라스가 나 주려고 샀다는 은회색 애스턴 마틴…… 비록 받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 그 차는 내 차다. 그나저나 흔히 볼 수 있는 차종이 아닌데 색깔까지 비슷하네. 아니, 똑같네…….

반쯤 남은 커피 잔을 바닥에 팽개치고 차로 다가갔다. 처음엔 설마 아니겠지 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내 차가 확실했다. 내가 차에 닿기도 전에 더 가까이 있던 교통이 차를 세웠다. 오토바이 순찰대 루디였다.

“이쪽으론 진입이 안 됩니다. 다른 길로 돌아가세요.”

반쯤 열린 차창으로 보이는 얼굴은…… 니콜라스가 틀림없었다.

“언제쯤 통행이 가능할까요?”

“한, 두 시간 후라면 부분 개통은 가능할 겁니다.”

“그렇군요…….”

건성으로 대꾸하면서 니콜라스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루디가 고개를 돌리다 나를 발견했고, 현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썰렁해졌다.

내가 강력반에서 교통과로 쫓겨 내려온 이유를 모르는 짭새는 없다. 1차로 타격대 다람쥐들이 별장에서 목격한 장면을 신나게 떠벌였고, 수사가 종결되면서 다들 별 탈이 없었는데 나만 일명 ‘지옥의 부서’라고 불리는 교통과로 미끄러졌다. 이후론 며칠에 한 번씩 내 라커에 호모라는 딱지가 나붙는 형편이니 경찰서 안에서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아는…… 사람이야?”

루디가 목이 막혀서 헛기침을 했다. 루디는 독일 병정, 게슈타포라고 불릴 정도로 성격이 삭막한 인간이지만 이번만큼은 심하게 당황했다.

“응.”

“…….”

짭새 아니랄까 봐 눈치들은 왜 이렇게 빠른지…….

장승처럼 멍하니 서 있는 루디를 지나쳐서 차 옆으로 갔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내가 선선히 직장을 때려치울 것 같지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 쫓겨나게 하려는 걸까?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다면서? 저녁 뉴스에 니가 나오더라.”

방송국에서 취재 차량이 한 떼거리 몰려와서 진을 치고 있었으니 한두 번 카메라가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다. 얼굴만 봐서는 니콜라스의 기분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경 나왔어요?”

“좀 일찍 올 걸 그랬지? 이제 대강 치웠나 봐?”

역시나 말투가 좀 삐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니콜라스의 비위까지 맞춰줄 기력이 없었다. 내가 오후 네 시 경부터 자정이 넘은 이 시간까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는 거…… 니콜라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아직 좀 남았어요. 일하는데 방해 되니까 그만 차 돌려서 가세요.”

“왜 요즘은 전화도 안 해?”

연락 없기는 피차일반이었다.

“바빴어요.”

내 냉랭한 대꾸에 니콜라스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특별히 무슨 유감이 있는 건 아닌데 피곤해서 그런지 신경이 자꾸만 곤두섰다.

“이 비슷한 사고가 지난주에는 이틀에 한 번씩 터졌어요. 정신도 없었고…….”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

대답 대신 그냥 고개만 저었다. 내 기분이 이런 건 노튼 때문이 아니었다. 의심, 원망, 체념, 또 원망 그리고 의심…… 그런 건 이 만남이 계속되는 한 벗어날 수 없는 함정과도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힘든 일이다.

“가세요. 시간 나면 전화할게요.”

맞은편에서 박살난 트럭을 운반해갈 대형 견인차와 운반차가 막 들어오는 중이었다. 길도 열어줘야 되고, 동료들 눈치도 보여서 할 말만 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면서 이러고도 뒤탈이 없을까 슬쩍 걱정은 됐지만…….

“퇴근 언제 해?”

니콜라스가 내 뒤통수에다 대고 냅다 소리쳤다.

“못해요!”

“제복 입은 모습도 꽤 내 취향인데…… 어떻게 안 될까?”

표정이 좀 시무룩하길래 기분이 안 좋은 줄은 알았지만, 보기보다 화가 많이 났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 일하는 데까지 찾아와서 이러는 건 너무 심하다. 그동안 신사라고 했었던 거 오늘로 싹 다 취소다.

비니의 샤워실 테러 이후로 주변이 한동안 잠잠했었는데 그 불안한 평화도 오늘로 끝이다. 루디는 확실히 이런 얘기를 경찰서 라커에서 떠벌일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지만 지금 주변엔 루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잘들 논다…… 이런 표정으로 나랑 니콜라스를 지켜보던 루디가 니콜라스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경찰 업무를 방해하고 계십니다. 저희도 여길 치워야 퇴근을 하죠.”

오늘 보니까 루디가 니콜라스보다 만 배는 더 신사적이었다. 사실 루디가 보통 때는 거치적거리는 상대를 저렇게까지 점잖게 대하지 않는데 타고 있는 차도 그렇고, 니콜라스도 만만한 구석은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아주 매너가 좋았다. 태도는 고압적이었지만…… 니콜라스가 루디한테 저런 소리 듣고 있는 게 짜증도 나고, 그래도 상대가 마키바 반장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냐 싶기도 했다. 어쨌든 차 빼라는 루디의 요구에 니콜라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일에 방해가 됐다면 미안합니다.”

니콜라스가 짧게 대꾸하고 차창을 올렸다.

니콜라스의 은회색 애스턴 마틴이 소문난 스포츠카답게 매끈하고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쳐서 가로등 불빛 휘황한 시내 쪽으로 사라졌다. 내가 가라고 등을 떠밀었는데, 정작 가고 나니까 기분이 왜 이 따윈지 모르겠다.

“뭐하는 놈이야?”

루디가 정신 차리라는 듯 내 어깨를 툭 쳤다.

“요즘은 그냥…… 놀아.”

“연쇄살인 용의자라는 그놈이야?”

“아직 증거는 없어.”

대답이 맘에 안 들었는지 루디가 내 뒤통수를 한 대 갈겼다.

“증거가 있든 없든 가까이 가지 마. 느낌이 안 좋아.”

현장이 정리됐다고 할 만한 상태가 된 건 새벽 3시도 지난 시간이었다. 고가 초입에 설치된 난간 우그러진 것과 길가에 가로등 대여섯 개 부러진 건 시간을 두고 보수를 해야겠지만 그건 경찰 소관이 아니다. 힘들고 긴 하루였지만 어쨌든 이제 지나갔다.

“드니즈.”

잠시 짬날 때마다 커피를 들이 붓다시피하고도 졸음을 못 이기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드니즈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 놀라서 입을 딱 닫았다. 니콜라스가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후로 현장 분위기가 계속 이랬다. 일에 지쳐서 다른 일엔 신경 쓸 기운도 없고, 빨리 마치고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굴뚝같아서 드러내 놓고 까칠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들 깜짝깜짝 놀란다.

“왜?”

“서로 들어갈 거지?”

드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되고…….”

“미안하지만 순찰차는 니가 좀 몰고 가.”

“넌 어디 가려고?”

얼결에 차 열쇠를 받아 쥐면서 무심코 묻던 드니즈가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내일 봐.”

니콜라스의 저택 앞에 도착한 건 새벽 어스름이 다 되어서였다. 택시도 드문 시간이라서 차 잡는데 애를 먹었고, 사고 현장에서 니콜라스의 저택까지 거리도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정문 앞에서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벨을 눌렀다. 몇 번을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자나? 응접실에 불이 아직 켜져 있는데…….

자고 있는 거라면 굳이 깨우고 싶지는 않지만…… 아까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했던 것 때문에 화가 나서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이런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보니 말투며 태도가 냉랭했던 거지만 니콜라스가 내 머릿속 사정까지 알 수는 없는 거니까…… 갔다가 낮에 다시 오는 편이 나을까?

니콜라스가 그렇게 쌩하니 가버린 다음부터 계속 신경이 쓰여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작업 현장에 넋 놓고 서 있다가 포크레인이 들어 올린 트럭 화물칸 잔해에 얼굴을 얻어맞을 뻔하기도 했고, 살수차가 옆으로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바지자락과 신발도 몽땅 젖었다. 얼마나 허둥거렸는지 나중엔 드니즈가 나를 길가로 끌어냈을 정도였다.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상태만 유지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몇 주 전에 이 집 뒷마당에서 신전 비슷한 헛것을 보고 속 끓였을 때를 생각하면 요즘 들어 했던 고민은 오히려 사치다.

전화를 해볼까 싶어서 전화기를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얘기할 기분 아니라고 저렇게 버티는데 길게 보채는 것도 겸연쩍은 일이라……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불 켜진 저택 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철문 저편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현관문이 열리는 걸 보지 못했는데…… 집 안에 있었던 게 아니라 정원이라도 거닐고 있었던 모양이다. 니콜라스가 문 맞은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웬일이야? 바쁘고 피곤할 텐데?”

철문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니콜라스의 모습은 보통 때 모습하고는 어딘지 달랐다.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니콜라스가 서 있는 저쪽은 내가 있는 곳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 같았다.

“아까 그런 건…… 미안해요.”

“난 니가 그렇게 변덕스러운 줄 정말 몰랐어.”

니콜라스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그렇게 쿨하고, 멋지게만 보이더니…….

“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리겠어요?”

고개를 박고 완전히 저자세로 나갔다. 아까 기분 상하게 한 거 사과하려고 온 거지, 잘잘못 따져가면서 싸우려고 온 건 아니니까…….

“일 끝내고 바로 온 거야? 옷도 안 갈아입고?”

니콜라스의 말투가 어느 새 많이 누그러졌다.

“제복 입은 모습이 땡긴다면서요?”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철문 앞으로 다가오더니 우아한 주물 장식 사이로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살짝 만졌다. 별것 아니지만 그 친근한 손길에 그동안 마음 한구석을 떠나지 않던 불안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당신은 나한테 사과 안 해요?”

“뭘?”

“일하는 데 찾아와서 깽판 놓고 간 거요.”

“그거?”

굳이 물어볼 것도 없을 정도로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직장하고 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선택을 해야 될 거야.”

오늘처럼 생각날 때마다 사람 일하는 데 불쑥 찾아와서 휘젓고 가면 선택은 무슨 선택? 그냥 쫓겨나겠지. 내가 잘못한 건 사과했으니까 이번엔 니콜라스 차례다. 사과를 못하겠으면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런다는 약속이라도 해주기를 바라면서 물끄러미 니콜라스를 쳐다봤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내 눈빛을 달리 해석한 것 같았다. 뭔가 분위기가 수상해져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니콜라스가 내 뒷덜미를 잡더니 자기 코앞으로 끌어 당겼다.

지금까지 니콜라스하고 키스를 몇 번이나 했을까? 어떤 때는 키스가 섹스보다 훨씬 더 죄짓는 기분이 들곤 했다. 이렇게 길가에서 붙들려서 하는 키스는 더 조마조마하고, 한편으론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키스 자체도 굉장히 길고 집요해서 니콜라스한테 잡혀 있는 내내 아찔한 현기증에 시달렸다.

“저기…… 앞으로는 일하는 데 찾아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키스만 했는데도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탈진해서 뻗을 판인데…… 문 앞에서 주저앉지 않으려고 문살을 잡고 힘들게 버텼다.

“장담은 못해.”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으며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너하고 관련된 일은 좀 그래.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섣불리 못하겠어.”

“왜요?”

“내 맘대로 잘 안 돼.”

결국 신경질 나면 언제든지 다시 일터로 들이 닥치겠다 그런 뜻인가 보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문 안 열어줄 거예요?”

테라스 쪽에서 불어온 부드러운 바람에 앞머리가 가볍게 날렸다. 희미한 장미향이 섞인 향기로운 바람이었다. 약간 서늘한 느낌이 들어서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렸다. 니콜라스는 폭풍우라도 몰아치지 않는 한 테라스 쪽 창을 닫지 않았다. 그 때문에 침실엔 언제나 장미향과 함께 약간은 찬 기운이 돌았다. 바람은 서늘하고, 이불은 푹신하고…… 꼭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반이었다. 새벽에 여기 올 때는 아침 일곱 시쯤에는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늦잠을 자고 말았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니콜라스가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자는 얼굴이 되게 언짢아 보였다. 나쁜 꿈이라도 꾸는 걸까? 아니면 새벽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각하다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안으로 들어와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매연과 흙먼지, 그리고 땀에 쩐 내 몰골이 너무 흉악하다는 걸 깨닫고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다음 일은 통…… 비누라도 밟고 미끄러졌었나? 아무 기억이 없었다.

일단 일어나서 앉았다. 아침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편하게 잘 자서 그런지 몸은 가뿐했다. 기분도 괜찮고…… 며칠 쌓인 피로도 많이 가셨고 마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왜 필름이 끊어졌을까?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바람에 잠이 깼는지 니콜라스가 눈을 뗬다. 그리고…….

“잘 잤어?”

뚱한 얼굴로 물었다.

“하긴, 잘 잤겠지.”

니콜라스가 돌아누우면서 툴툴거렸다.

“왜 그래요?”

“잘 잤으면 됐어.”

‘잘 잤으면 됐어’……라니, 게다가 저렇게 부은 목소리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요?”

“실수를 했느냐고?”

니콜라스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선잠 깨면 만사가 귀찮고 다시 자고 싶은 마음뿐인데 니콜라스는 성격이 그렇지 않든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뭔가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기억 안 나?”

“잘…… 안 나는데요.”

니콜라스가 나를 노려봤다. 졸음과 유감이 가득한 눈초리로.

“샤워한다고 들어가서 한참을 안 나오기에 물에 쓸려갔나 걱정 돼서 들어가 봤더니, 샤워기 아래서 자고 있더라!”

그래서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구나…….

“깨우지 그랬어요?”

“완전히 뻗었는데 어떻게? 그리고 자는 거 깨워서 덮칠 정도로 니가 섹시하진 않아.”

니콜라스가 투덜거리면서 다시 돌아누웠다.

그렇게 피곤했었나? 물론 지난 한 주일간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긴 했다. 어제 사고는 그야말로 결정판이었고…… 하지만 교통과 근무를 처음해보는 것도 아니고, 일이라면 강력반 일도 만만치 않게 고될 때가 많았는데 그래도 샤워하다가 쓰러져 잠든 적은 없었다. 어쨌든 잠이나 자려고 왔던 건 아닌데 미안하게 됐다.

손을 뻗어서 돌아누운 니콜라스의 등을 슬쩍 만졌다. 그래서…… 김새서 잠든 얼굴에도 그렇게 심술이 뚝뚝 흘렀던 거구나. 미안하기도 하고 피식피식 웃음도 나오면서…… 기분이 되게 뒤숭숭했다. 이 넓은 등짝을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을 하다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이런 쪽이 아니었는데.

니콜라스의 등에 입을 맞추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이게 현실일까? 이 남자를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되다니……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뭐하는 거야?”

말투는 퉁명스러워도 내 손을 감싸 쥐는 손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데도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 집도, 이 남자도, 이 향기도, 그리고 지금 느끼는 이런 감정도…… 어느 것 하나 현실적인 게 없다.

“아무 데도 안 갈 거죠?”

“응?”

“말없이 사라져버리거나…… 그러지 않을 거죠? 그냥 이대로 계속 있을 거죠?”

니콜라스가 돌아누웠다. 이제 대충 잠은 깬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야?”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니콜라스를 마주보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어디 가?”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일어나 앉으려는 참인데 니콜라스가 내 허리를 잡아챘다.

“샤워……하려고요.”

“새벽에 한 시간이나 했으면 됐지, 무슨 샤워를 또 해?”

“그래도 세수는 해야죠.”

“나중에 해.”

활짝 열린 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침실에서 니콜라스가 내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목덜미, 가슴, 배…… 그 뜨거운 입술이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낙인이 찍히는 기분이 들었다. 전희는 길고 음란했다. 니콜라스가 허벅지 안쪽에 상처가 남을 만큼 거칠게 입을 맞췄고, 그 고통과 짜릿한 자극에 나는 몸을 비틀며 신음 소리를 흘렸다.

햇살이 가득한 방안이라서 그런 걸까? 마치 야외에서 낯선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 같은…… 혹은 강간당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햇살이 사정없이 들이치는 아침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니콜라스의 태도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고 위압적이었다. 보통은 내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신경 써서 되도록 부드럽게 대해주는 배려가 있었는데 오늘은 전혀 그런 쪽이 아니었다.

“화났어요?”

“아니.”

니콜라스가 내 몸을 뒤집으면서 짧게 대꾸했다. 니콜라스의 혀끝이 등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화난 게 아니면…… 흥분한 건가? 제복 취향이라서? 침실 끄트머리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진청색 경찰 유니폼을 힐끔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저건 그냥 작업복인데…….

“그것 때문에 흥분 돼서 이러는 거 아니야.”

니콜라스가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투덜거리면서 내 엉덩이를 꽉 깨물었다. 아야…….

니콜라스를 진짜로 흥분시키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흥분이 등 뒤에서 분명히 느껴졌다. 벌써 몇 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이쯤 되면 슬슬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은 분위기가 이전에 비해 상당히 거칠었다.

니콜라스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절대 뿌리치거나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억센 팔이 내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아…….”

니콜라스가 거칠게 내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고통 때문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손끝이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어 봤지만 자꾸만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니콜라스를 감당하기엔 내 몸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쾌감은커녕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화난 거…… 아니라면서요?”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이라도 풀어주면 몸이 좀 편해질 것 같은데 내 힘으론 도저히 이 팔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서 올려다본 니콜라스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했다. 니콜라스는 처음부터 화가 나 있었다. 어젯밤 사건 현장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내 항의에 대한 답이 더 깊은 삽입으로 돌아왔고, 그 바람에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누구도 들어온 적 없는 내 몸 깊은 곳이 침범당하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고, 누구한테도 허락한 적 없는 마음 깊은 곳이 만져지는 느낌은 몸이 느끼는 고통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쓰라리고 아팠다.

“솔직히 말해서 너한테 화가 날 때도 많아. 니가 그 알량한 짭새 노릇 하느라 이리저리 치이는 것도 보기 싫고, 너한테 여자가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건…….”

“나는 널 고스란히 갖고 싶어. 누구하고 나누기도 싫고, 눈치 보기도 싫어. 내가 왜 그래야 돼?”

뭐라고 할 말도 없었지만, 대답할 여유도 없었다. 니콜라스가 자기 할 말만 퉁명스럽게 던지고는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이게 키스를 하는 건지, 나를 잡아먹겠다는 건지…….

“하지만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니가 나를 의심하고, 피하는 거야. 내가 집구석에 처박혀서 온 종일 니 전화나 기다려야 돼? 그 밤에 너를 찾아서 길바닥을 헤매 다니게 만들어야겠어? 니 마음,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나는 전혀 몰랐었다. 내 감정 추스르기에나 바빴지, 니콜라스도 나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화가 나 있었구나. 내가 자기를 믿어주기를 바라고, 내 전화를 기다리면서…… 한 주일 내내, 혹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래서 지난밤에 내가 일하는 현장까지 와서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갔었던 거구나.

“미안해요.”

목이 쉬어서 말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니콜라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정말…… 미안해요.”

몇 번이나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는지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고백도 수없이 했다. 중간에 잠시 정신을 잃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니콜라스에게서 놓여났을 때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어서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섹스를 한 게 아니라 트럭에 치인 느낌이었고, 허리 아래로는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오죽하면 니콜라스의 피해자 중에 복상사한 사람은 없었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계속 누워 있을 거야?”

좀 전에 방을 나갔던 니콜라스가 돌아왔다.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고소한 빵 냄새, 그리고 커피…… 혼자서 아침을 먹고 왔나 보다.

“못 일어나겠어요.”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해서 슬그머니 돌아누웠다.

“그럼, 아침은 침대에서 먹을래?”

“아침……이요?”

니콜라스가 나를 돌려 눕히고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마음이 살짝 녹았다.

“많이 아파?”

“당신은 어때요? 화가 좀 풀렸어요?”

“아직 멀었어.”

이젠 니콜라스가 마키바 반장보다 더 무섭다.

니콜라스가 옆구리 쪽에 붙어 앉더니 이불을 들추고 내 어깨와 가슴을 슬슬 만지기 시작했다.

“제복도 좋지만 사실 이쪽이 만 배는 더 취향이야. 알몸에 하얀 시트, 나른한 표정, 완전히 ‘나를 잡아 잡수세요.’ 하는 것 같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건 좀…… 니콜라스를 피해서 침대 끄트머리로 몸을 굴렸다. 이러다 진짜로 한 번 더 먹히면 오늘 안으로는 이 집에서 못 나갈 것 같아서. 하지만 세 바퀴나 굴러도 괜찮을 정도로 침대가 넓지는 않아서 구르다가 바닥으로 톡 떨어지고 말았다.

놀란 니콜라스가 다급히 침대를 돌아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넘어진 채 버둥거리는 나를 보고 대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더 커지는…… 듣는 사람은 참 기분 나쁘고 민망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만해요.”

“미안해. 안 웃을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계속 꺽꺽거리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집에 쥐구멍 따위가 있을 리 없어서 시트를 둘둘 말고 일어섰다. 샤워나 해야겠다. 니콜라스는 실컷 웃게 내버려두고…… 하지만 니콜라스가 눈치도 없이 내 팔을 붙들었다. 안 되는데, 정말…….

니콜라스의 간절한 ‘한번만 더……’ 공세를 더는 뿌리치지 못하고 침대에 주저앉을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덕분에 살았다. 하지만 누가 오기는 이른 시간인데…… 궁금해서 빤히 쳐다보자 니콜라스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불청객.”

“불청객…… 누구요?”

“누구겠어?”

아, 그분…….

“씻고 내려와서 아침 먹어. 그동안 난 손님을 잘 타일러서 보낼 테니까.”

니콜라스가 내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안이 온통 장미향으로 가득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도 향기가 실려 왔고, 집안 곳곳에 장식된 화병에서도 향기가 뿜어져 나았다. 때론 니콜라스의 숨결에서도 장미향이 느껴졌고 이젠 내 몸에서도 향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보통의 향기라면 물에 씻겨서 희미해질 텐데, 이 향기는 이상했다. 씻어내면 씻어낼수록 더 짙어져서 이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좀 전까지 이 손으로 니콜라스를 안고 있었다니…… 원하면 언제든 전화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니콜라스는 좀 전까지도 같이 있었고,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그토록 따뜻하고 다정했었는데 왜 이렇게 현실이 꿈같은지 모르겠다.

만약 니콜라스가 약속을 깨고 연쇄살인범의 본색을 드러낸다면, 그동안 내게 했던 말과 행동이 모두 얕은 속임수에 불과했던 거라면, 그 때문에 결국 니콜라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이 모든 일이 후회스러울까? 내가 정말 정신이 단단히 나간 모양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이 상황이 후회스러울 것 같지 않았다.

장미향과 묘한 감상에 취해서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옷가지 찾아 입고 내려가려고 주변을 살펴봤지만 옷이 보이질 않았다. 내가 옷을 어쨌더라? 분명히 침실 근처에서 벗었던 것 같은데…… 배지랑, 총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니콜라스가 치웠나? 니콜라스한테 머리 꼭대기까지 빠진 건 빠진 거고, 한심한 건 한심한 거다. 마룻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배지랑 총을 집어 들면서 니콜라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옷하고 총은 1층 소파에 대강 걸쳐져 있었다. 먼지와 땀에 쩐 유니폼을 다시 입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옷을 입고 나니 비로소 허공에 붕 떠 있던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총까지 차니까 더 그랬다. 더럽고, 찝찝하고, 무겁고…… 이런 게 현실의 느낌이라서 그런가 보다.

집안은 조용했다. 그 진드기 같은 불청객이 벌써 갔나? 니콜라스는 잘 타일러서 보낸다고 굉장히 쉬운 일처럼 말했지만 그렇게 곱게 물러갈 성격이면 아침부터 남의 집에 들이닥치지도 않았을 거다. 서재엔 없고, 주방에 있나?

슬쩍 들여다본 주방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주방 식탁엔 토스트, 에그 스크램블, 반쯤 식은 커피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려와서 아침 먹으라고 하더니 나 먹으라고 차려 놓은 건가 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니콜라스가 게으른 사람은 아니지만 어쩐 일인지 냉장고는 항상 불모지나 다름없고, 직접 뭘 만들어 먹는 스타일은 더더욱 아닌데…… 간단한 요깃거리지만 풀코스 정찬을 대접 받은 것만큼이나 고맙고 기뻤다.

빵은 조금 탔고, 에그 스크램블엔 간이 하나도 안 돼 있었다. 확실히 평소에 뭘 만들어 먹는 사람의 솜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커피만큼은 향이 정말 좋았다. 다 식은 게 아쉽긴 하지만…… 미지근한 커피를 들고 후원으로 나갔다. 집안에 없으면 니콜라스가 손님을 데리고 갈 만한 곳은 후원뿐이었다. 역시 니콜라스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후원에 있었다.

높이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넝쿨장미 울타리 옆에서 두 사람이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두 사람 사이에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거리도 적당히 떨어져 있고, 니콜라스가 차분하게 여자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지난 번 파티 때 그렇게 싸늘하게 밀어냈던 거하곤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바보 같은 짓 그만둬.”

어느 정도 다가가자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지만 뭔가 긴장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장미 넝쿨로 뒤덮인 기둥에 가려서 엘리스 스톤의 뒷모습이 반밖에 안 보였다.

엘리스 스톤은 지난 번 파티에서 니콜라스에게 쫓겨나다시피 한 이후로도 두 번인가 더 니콜라스를 스토킹 했었다. 마키바 반장하고 굽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 여자가 공연히 니콜라스를 자극해서 화를 자초하지 않을까 우려하던 참이었다.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건 두 사람 쪽으로 좀 더 다가간 후였다.

“장래도 생각해야지, 엘리. 이런 짓 해봐야 당신 인생만 망치게 될 거야.”

“넌 날 가지고 놀았어…….”

엘리스 스톤은 한눈에 보기에도 지난 번 봤을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았다. 부스스한 머리에 터무니없이 짙은 화장만 봐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다 눈빛에도 확연히 광기가 떠돌고 있었다. 새벽부터 계속된 애정공세에, 꿈결처럼 화기애애하고 분위기가 좋다 싶더니…… 이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생각하면서 다가가다가 흠칫 걸음을 멈췄다. 여자가 총을 들고 있었다.

“날 싸구려 창녀 취급하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했어. 날 비웃고…….”

지금이라도 당장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스톤의 말투며 눈빛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묵묵히 듣고 있던 니콜라스가 더는 못 참겠는지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이제 여긴 그만 좀 찾아오고, 대신 병원엘 가 봐.”

제정신도 아닌 여자가 자기 머리를 근거리에서 정 조준하고 있는데 저런 짓을…… 스톤이 들고 있는 게 빈총이 아니라면 니콜라스는 죽은 목숨이었다. 기겁을 해서 머그잔을 내던지고 총을 빼 들었다. 컵 깨지는 소리에 니콜라스와 엘리스 스톤이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총 내려놔요, 스톤 양.”

갑작스런 경찰의 등장에 스톤이 놀랐다. 니콜라스는 더 놀랐고……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내 심장도 감당이 안 될 만큼 거칠게 뛰었다.

“제이…….”

니콜라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스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일이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 된다면, 니콜라스는 총을 들고 설치는 미친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끝도 없는 잔소리를 듣게 될 거다.

“총을 버려!”

스톤이 이름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하지만 총구는 여전히 니콜라스의 머리를 향하고 있고,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대로 발포라도 하게 되면 니콜라스는 치명상을 입을 터였다. 두려움에 입술이 바짝 마르고 총을 든 내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안 들려? 총을 내려놓으란 말이야!”

조금은 정신이 돌아온 걸까?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스톤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하고 니콜라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스톤이 총 든 손을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아니, 총을 내린 게 아니라 나를 향해 총을 겨눴다.

엘리스 스톤과 내가 거의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상황은 그걸로 끝이었다. 본래 이런 일은 대부분 한 순간에 결판이 난다. 엘리스 스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서 쓰러졌다. 정확하게 어디에 총상을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일어나서 누굴 위협하지는 못할 터였다. 니콜라스는 안전했다. 지금은 그걸로 됐다.

“제이!!”

니콜라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려왔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숨을 내쉬려는 순간 뭔가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피였다. 그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틀거리다 뒤에 있는 기둥에 간신히 기대섰다. 가슴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8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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