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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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야?”

위니가 장식장 서랍에서 목걸이를 꺼내 보이면서 물었다. 가느다란 순금 체인에 아무 장식도 없는 수정 펜던트가 매달린 단순한 디자인의 목걸이였다.

“어…… 그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점퍼 주머니에 넣어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세탁물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모양이었다.

“그냥, 며칠 전에…….”

위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불안하고 의심스런 눈빛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나도 내 점퍼 주머니에서 저런 목걸이가 나온 걸 설명할 말이 궁했다.

“주웠어. 사건 현장 근처에서…….”

“주웠다고?”

“응.”

내 궁색한 변명에 위니의 표정이 훨씬 더 어두워졌다. 잠깐 암담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위니가 목걸이를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위니…….”

“출근 안 해? 늦겠어.”

작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위니가 소파에 몸을 파묻듯 웅크리고 앉았다. 왜 화를 내지 않을까? 누구 거냐고, 왜 그런 걸 갖고 있느냐고 좀 더 캐묻지 않는 걸까?

나가지도 못하고 다른 변명도 없이 머뭇거리는 나를 힐끔 본 위니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당신을 참 힘들게 하지?”

“…….”

“다른 사람이 생긴 거면…….”

위니가 하려던 말을 삼켰다. 대신 위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목걸이를 처음 발견한 게 언제였을까? 그 점퍼를 마지막으로 입은 게 일주일은 된 것 같으니까…… 그동안 내내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고, 혼자 괴로워했을 거다.

“당신 때문에 힘든 건 맞아. 하지만 그 목걸이는 그런 거 아니야.”

위니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혹은 어떤 말도 믿지 않겠다는 듯…… 차라리 위니가 화를 냈으면 좋겠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따지고, 테이블에 놓인 플라스틱 화병이라도 집어 던졌으면 좋겠다.

“그거…… 훔친 거야.”

내 고백에 위니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수사 중인 사건용의자 집에서…….”

“거짓말 하지 마.”

“조사할 게 있어서 집안에 들어갔다가 눈에 띄길래…… 슬쩍했어.”

위니가 당황했다. 내 얘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니콜라스의 호숫가 별장에서 하루를 더 지냈다. 둘 다 몸이 안 좋았고, 별장에서 서둘러 나올 이유도 없었고, 비니가 챙겨준 먹거리로 하루 정도는 버틸 만했기 때문에…… 지붕 위에 타격대 한 떼거리가 올라가 앉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니콜라스와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괜찮았다.

사방은 조용했고 세상에 니콜라스와 나 둘만 남은 것 같은 고립감이 느껴졌고,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했다. 벽난로에 굵은 통나무를 던져 넣고 그 앞에 나른하게 누워서 하염없이 불길을 쳐다보는 것도 좋았고, 니콜라스가 바로 옆에서 한대 얻어맞고 뻗은 것처럼 곯아 떨어져 있는 것도 좋았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최대한 끌어봐야 좋은 시간은 하루 반나절이 고작이었다.

별장을 떠난 건 다음날 해 저물녘이었다. 별장에서 나오기 직전에 벗어놨던 내 옷가지를 챙기러 옷 방에 들어갔다가 그 목걸이를 다시 봤다. 보석이나 장신구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처음엔 무심히 봐 넘겼던 물건인데 까닭 없이 시선이 끌렸고, 모양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아름다운 목걸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목걸이를 들어서 저녁 햇살에 비춰보다가 니콜라스가 들어오는 기척에 당황해서 그만 점퍼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말았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기념품이라도 갖고 싶었던 걸까?

“도로 갖다 놔야 되는 거 아냐?”

“비싼 물건도 아닌 것 같고…… 목걸이 주인은 그게 없어진 것도 모를 거야.”

위니가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당신은 그런 짓 안 하는 사람이잖아. 대체 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이유가 있다면 아마 이런 걸 거다.

“나도 가끔 나쁜 짓을 해.”

니콜라스…… 호숫가 별장…… 위니…… 호숫가 별장…… 훔친 목걸이…… 또 그 빌어먹을 호숫가 별장…… 서에 도착하기도 전에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난 한 주일 내내 나를 괴롭혔던 두통이었다. 그동안은 머리가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한 알씩 씹어 먹으면서 그럭저럭 버텼었는데, 어젯밤 드디어 약병이 바닥나버렸다. 그 덕에 경찰서로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내내 머릿속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은 고약한 두통에 시달렸다.

아무래도 서에 들어가서 마키바 반장 얼굴을 보기 전에 두통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아서 경찰서에서 제일 가까운 약국에 먼저 들렀다.

“두통이 일주일이나 계속되는 건 안 좋은데……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찰을 받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 뻔질나게 드나들며 얼굴을 익힌 탓에 이젠 표정만 봐도 대강 어디가 아픈지 집어낼 정도로 나에 대해 잘 아는 약사 우드가 아스피린 두 병을 내 쪽으로 밀어주며 침착하게 충고했다.

“그냥 두통이야, 우드. 아스피린 몇 알이면 충분해.”

“아스피린이 좋은 약이긴 하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않아.”

“단순한 두통이라니까. 학교 다닐 때, 시험이 닥치면 며칠 연달아 지끈거리는 거랑 비슷한 거야.”

“뇌는 너나 니 생각만큼 단순한 기관이 아니야. 생각 잘 해봐. 일주일 전쯤 머리를 세게 부딪친 적은 없는지…….”

그런 거라면…….

“있어.”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보트가 부서지고 물에 빠지면서 온 몸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었으니까 머리도 어딘가에 부딪혔을 거다.

“뭔가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기절하게 놀란 적은?”

그런 적도……

“있어.”

헤론지 뭔지…… 그 상태 안 좋은 여편네 때문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불현듯 물에 젖은 그 축축한 얼굴이 떠올라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우드가 혀를 끌끌 찼다.

“병원에 가 봐. 되도록 빨리.”

약을 주머니에 챙겨 넣고 영수증 끊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아는 짭새가 한 마리 들어왔다. 러셀이었다.

요즘 들어 나를 대하는 러셀의 반응은 대강 3단계였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그 다음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도망이라도 치듯 후다닥 가버리는 거였다. 딱히 러셀이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지붕 위의 그 원수 같은 다람쥐들 때문에 서에는 벌써 소문이 쫙 퍼져서 온 동네 짭새들이 요즘 나만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러셀은 지금 1단계를 겪고 있었다. 우드가 러셀을 힐끔 보더니 뭐 필요하냐고 묻지도 않고 스프레이 파스 한 박스를 꺼내서 선반에 올려놨을 때쯤 2단계로 접어들었고…… 지난 한 주일간 반응 시간을 관찰한 결과 약 1, 2분 정도 더 지나면 3단계로 상황 종료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영수증까지 챙겨 든 상황이고 러셀은 아직 볼일이 남았으니까 오늘은 내가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먼저 출입문 쪽으로 다가갔다.

“잠깐 기다려 봐.”

약국 문을 막 밀고 나가려는데 러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어…… 안녕……’ 외에 다른 말을 우리 팀 외부의 짭새한테서 들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왜?”

“얘기 좀 해. 조용한 데서…….”

다른 직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경찰서 주변엔 조용한 데가 별로 없다. 오가는 사람 없고, 차 소리 덜 들리는 곳이라고 기껏 찾은 데가 경찰서 후문 근처 골목길이었다.

“할 얘기라는 게 뭐야?”

러셀이 나를 골목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장장 5분을 머뭇거렸다. 사실은 한 주일도 넘게 머뭇거린 거지만…… 어쨌든 러셀이 마음을 정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키바 반장의 심기가 요 며칠째 부쩍 불편한데 지각까지 해서 화풀이 할 빌미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본래 타격대엔 말주변 좋은 녀석이 드물었다. 하지만 심경을 고백하는 것도 아닌데 웬 뜸을 이렇게 들이는지 모르겠다.

“5분 더 줄 테니까 얘기를 할지 말지 결정해.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할 마음이 생기면 거기서 5분 더 줄게.”

“다그치지 마. 무슨 말을 먼저 할지 생각 중이니까…….”

“무슨 말을 먼저 해도 안 놀랄 테니까 그냥 해.”

러셀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도 러셀을 비슷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그 주말이 채 지나기도 전에 경찰서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쫙 깔아버린 주둥이 가벼운 놈들한테 감정이 좋을 이유가 없었다.

“딴 놈들한테 그딴 소리를 흘리고 다닌 건…… 내가 아니야.”

“누가 뭐래?”

이제 와서 그런 거 따지는 것도 부질없다. 말은 한번 퍼지면 그걸로 끝이다.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나는…….”

“5분 거의 다 돼 가.”

사실, 무슨 소리를 할지는 뻔했다. 러셀과 타격대원들은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마키바 반장의 요청으로 출동해서 강력사건 용의자의 집 지붕 위에 올라가 대기하다가 신호 떨어지면 덮치라는 막연한 지시만 듣고 있다가 내가 니콜라스랑 그러고 있는 걸 봤으니까…… 대경실색과 함께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는 건데, 지금 나를 붙들고 캐물어봐야 헛수고다.

“그러니까…… 니네 팀이 뭔가 큰 건수를 물었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멜 굽타에, 마키바 반장에, 크롬웰까지…… 비니가 낀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완전히 서장 직속 드림팀이잖아? 중요한 일이란 건 다들 알고 있어. 하지만…….”

“용건만 간단히 해봐. 요즘 마키바 반장이 뿔이 잔뜩 올라 있어서 늦으면 안 돼.”

“그러니까 내 말은…….”

“러셀.”

러셀이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호숫가 그 집에 같이 있던 그 작자는 대체 뭐야?”

질문도 간단하구만 그거 한마디를 못 물어서 일주일을 변비 걸린 고양이처럼 낑낑거리다니…… 짭새치곤 마음씀씀이가 참 곱다. 하지만…….

“말 못해.”

내 대꾸에 대번에 러셀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짭새치곤 마음씨가 곱다고 해도 러셀도 엄연한 타격대 대원이다. 타격대는 대부분 일이 자기 맘대로 안 풀리면 성질부터 내고 본다.

“왜?”

“보안 유지가 필요한 사건이야.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마키바 반장한테 직접 물어봐.”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러셀이 나를 벽 쪽으로 밀어 붙이며 화를 냈다.

“너랑 그 작자가 그 집 테라스에서 뒹구는 걸 타격대 대원 다섯 명이 같이 봤는데, 이 마당에 보안은 무슨 얼어 죽을 보안이야?”

잘하면 사람 치겠다.

“나는 현직 짭새가 무슨 일로 대낮에 남자랑 그러고 있었는지, 우리는 그 집 지붕에 뭣 때문에 하루 반나절이나 죽치고 있어야 했는지, 그리고 니가 그 남자랑 그런 게…… 마키바 반장이나, 상부에서 시켜서 그런 건지 꼭 알아야겠어!”

“니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열 받은 러셀이 성질을 못 이기고 내 멱살을 잡아챘다. 한순간이지만 숨이 턱 막혔다.

“뭐가 상관할 일이 아니란 거야? 우린 친구잖아!”

친군데…… 숨이 막혀서 하늘이 노랗게 보이도록 멱살을 잡고 안 놔주는 건 무슨 경우냐?

“무장 강도도 아니고, 조폭 소탕도 아닌데 타격대가 2개조나 동원되는 경우는 드물어. 그 자식, 대체 뭐야? 뭔데 굽타랑 마키바 반장이 반년이나 붙어서 죽을 쑤는 것도 모자라서 니가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냐고?”

“살인사건 용의자야…….”

어떻게 숨이나 좀 쉬어볼까 해서…… 사건의 내막을 일부 흘렸다. 하지만 웬걸, 한숨 돌리기도 전에 러셀이 나를 골목 담벼락에 거칠게 밀어 붙였다. 애초에 이러려고 인적 드문 골목길로 끌고 왔나 보다.

“누구 놀려? 쿠간에 살인범이 그놈 하나야?”

“연쇄살인범이야. 내가 알기론…… 최근 20년 안에 쿠간에 나타난 연쇄살인범 중에서 상위 1%에 드는 위험한 놈이야.”

“…….”

러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연쇄살인이라니까 마음이 확 풀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연쇄살인범이라도 그렇지, 그놈 하나 잡자고 니가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남자가 데이트를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선을 넘을 때가 있잖아. 니가 그때 본 건…… 그런 거야. 의도했던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빠져 나올 수가 없었어.”

내 논리 정연한 대답에 러셀이 완전히 벙…… 쪘다.

“데이트? 선을 넘어? 너 지금 제정신이야? 그놈은…… 남자잖아!”

“원래 연쇄살인범은 대부분 남자야.”

러셀이 나한테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는 폼이…… 내 두통이 옮아갔나 보다. 그래서 좀 전에 산 아스피린 두 병 중 한 병을 러셀 손에 쥐어 줬다. 아깝긴 하지만 친구니까……

“니네 팀이 일하는 방식, 진짜 맘에 안 들어.”

러셀이 나랑 아스피린 병을 번갈아 노려보면서 툴툴거렸다.

“그럼, 넌 그 자식을 체포할 때까지 계속…… 그 자식이랑 자고 다니겠다는 거야?”

솔직히 니콜라스와의 잠자리가 그렇게까지 땡기는 건 아니다.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얼굴 쳐다보고…… 그런 건 좋은데 거기서 더 넘어가는 건 민망하고 무섭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별 수 없지 뭐.”

내 대답에 러셀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정신적인 충격이 심한 모양인데, 별 것도 아닌 일로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수 있는 러셀의 정신상태가 부럽다. 호수에서 니콜라스의 옛 여자친구를 만난 이후론 간이 부었는지 요즘은 놀랄 일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었다.

“연쇄살인범이라면서?”

“내가 그자랑 순수하게 좋아서 만나는 사이였으면 더 좋았을까?”

러셀이 벽에 기대서서 나를 노려봤다. 정신적인 탈진상태랄까…… 아침부터 기운이 쫙 빠진 얼굴이었다.

“왜?”

“너 때문에 우리 직업에 회의가 생기려고 해.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남자랑 자는 건 난데, 니가 왜?”

“야!”

러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 좀 심했나? 어쨌든 이제 10분 다 지났다.

경찰서 분위기는 한주일 내내 별로 변화가 없었다. 특히 나에 대한 반응은 더 그런 편이었다. 순찰대 대원 3명이 자기네들끼리 얘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표정이 딱 굳었고 마주 오던 정복 경찰 하나는 나를 피하려고 허둥거리다가 손에 든 커피를 옷에 쏟았다.

“이런 상황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이길 바래.”

나를 발견하고는 지들끼리 히죽거리면서 지나가는 짭새 두 마리를 노려보며 러셀이 으르렁거렸다.

“니네 패거리가 그 별장 지붕에 올라가지 않았거나, 올라가서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다 봤다고 해도, 그렇게 촉새처럼 조잘거리지만 않았으면 감수할 상황 자체가 없었을 거야.”

“일이 이렇게 된 건 나도 유감이야. 하지만 그 자식들 입에 재갈을 물릴 수도 없잖아?”

러셀이 신경질을 냈다. 이 상황에 짜증낼 사람은 러셀이 아닌 것 같지만…… 어차피 대화도 이걸로 끝이다. 우리 팀 회의실 문 앞에 다 왔으니까.

“니가 하는 그 일……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나도 그래.”

“그럼 하지 마! 누구도 너한테 그런 짓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충고에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런 충고를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팀이 진행하고 있는 수사는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날 거야.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분명한 건, 수사가 마무리되는 순간엔 나도 현장에 있을 거란 사실이야.”

러셀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의실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마키바 반장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왔으면 들어오지, 문 밖에서 뭐해?”

“대화……요.”

마키바 반장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러셀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특유의 사람 얼게 만드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날렸다.

“촉새 같은 놈들…….”

러셀이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마키바 반장과 잠시 눈싸움을 했다.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 마키바 반장과 맞짱 뜨기엔 러셀은 너무 순하다. 결국 1분도 못 버티고 러셀이 분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러셀.”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생각해보니 러셀한테 못한 말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가던 러셀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회의실 멤버는 단출한 편이었다. 마키바 반장, 굽타, 크롬웰…… 비니는 새벽 3시까지 알바 뛰는 정상을 참작해서 오전 미팅은 면제 받았고, 이토는 비번이고, B팀은 니콜라스한테 붙어 있으니까 나까지 네 명이면 모일 사람은 다 모였다.

“오늘 저녁이지?”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기도 전에 마키바 반장이 다그치듯 내 데이트 스케줄을 확인했다. 러셀은 누구도 나한테 그런 짓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지만, 마키바 반장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애초에 내가 니콜라스랑 낚시 갔다가 그렇게 된 거…… 반장의 강압과 강요도 크게 작용한 일이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반장은 미안한 기색 따위 하나도 없었고, 니콜라스를 체포할 수만 있다면 더한 일도 하라고 등 떠밀 사람이었다. 반장은 니콜라스 헤슬렘이 전대미문의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를 체포해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데이트 하는 날엔 옷 좀 제대로 입고 다녀. 뭐냐? 그게…….”

반장이 나를 까칠한 시선으로 뜯어보며 트집을 잡았다. 이 사람은 진짜 내 걱정이 하나도 안 되는 걸까? 반장의 희망대로 사건이 화려하게 해결되고 연쇄살인범 체포의 공으로 특진에, 포상에, 토크쇼 게스트 초대까지 받는다고 해도, 지금 이 방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추문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다.

경찰이 장고 끝에 연쇄살인범을 체포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함정수사 중에 용의자하고 잠자리를 하는 일은 여태 보고된 바가 전혀 없는 초유의 사태니 만큼…… 사람들은 니콜라스 헤슬렘은 잊어도 그 일은 잊지 않을 거고, 이 스캔들은 두고두고 내 발목을 잡을 거다. 이게 전부 반장님 탓이라고 볼멘소리 하고 싶지는 않지만 걱정하는 척이라도 잠깐 해주면 큰 위안이 될 것 같은데…… 반장하는 걸 보면 어림도 없는 얘기다.

“옷이 뭐가 어때서요?”

내 귀에도 내 말투가 좀…… 불손하게 들리긴 했다. 니콜라스의 옛 여자친구를 만난 이후로는 반장도 전처럼 무섭지가 않다.

“촌스럽고 싸 보여.”

싼 건 사실이다.

“공연한 트집 잡지 마. 마키바. 헤슬렘은 제이가 넝마조각을 걸치고 나타나도 신경 안 쓸 거야.”

두툼한 파일을 진지한 눈초리로 들여다보던 굽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안색이 안 좋고, 기운 없어 보이는 건 신경 쓰겠지만…….”

호수에서 다친 상처도 아직 덜 나았고, 스트레스도 심했다. 전엔 아무리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도 잠은 기절한 듯 잘 잤었는데 요즘은 잠들기도 어렵고, 겨우 잠이 들었다가도 몇 번씩 잠에서 깨곤 했다. 불면증의 원인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꿈에 니콜라스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별장에서의 하룻밤이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아침은 먹었어?”

“좀 있다가…… 먹으려고요.”

“같이 가지. 나도 아직 아침을 안 먹었거든.”

굽타가 다시 파일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굽타는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이번 주 들어서는 말수가 부쩍 줄어서 사건관련해서 꼭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 외엔 거의 입을 다물고 지냈다. 밖에 있는 짭새들이 우리들보다 니콜라스 얘기를 더 많이 떠들기 시작한 이후로 팀 분위기가 바닥이긴 하지만…… 다른 걱정거리가 있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조사를 해봤는데, 헤슬렘의 회사는 이미 정리가 다 된 것 같아.”

굽타가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니콜라스에게 그럴 계획이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닥치니 역시 당황스러웠다.

“꽤 덩치가 있는 회사던데…… 몇 주 만에 그렇게 간단하게요?”

“가격과 조건을 조정하고 나면 오너는 매각 서류에 사인만 하면 되는 거야. 뒷정리는 회계사랑 변호사들이 알아서 하겠지. 오늘 내일 중으로 일을 마무리 짓지 싶어.”

그랬었나? 호숫가 별장에서 돌아오는 동안에도 니콜라스는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호수로 낚시 갈 때하고 표정도, 분위기도 비슷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나 신경이 쓰였었는데 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낚시 보트에서 곧 여기를 떠날 거라는 얘기를 직접 듣기까지 했으니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실감이 나질 않았다.

“매각 서류에 사인만 하고 나면 헤슬렘은 언제 어디로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요. 다시 돌아올 필요도 없을 테고…….”

크롬웰이 차 한 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딱 부러지게 요점을 정리했다. 반장은 반장대로 나는 나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반장이나 굽타야 어떻게 하면 니콜라스가 짐 싸기 전에 사고를 한 번 더 치게 만들까 하는 궁리가 한창일 테지만, 내 머릿속은 좀 더 복잡했다.

니콜라스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살인혐의로 체포하는 것과 공항에서 손수건을 흔들며 날려 보내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괜찮을까?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반장이 니 속마음 다 안다는 듯 강력하게 경고했다.

“생각이 나는 걸 어쩌라고요?”

“생각하지 말라니까!”

반장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내 앞에 놓여 있던 찻잔에서 차가 반이나 쏟아졌다. 성질을 못 이기고 들썩거리는 반장을 굽타가 일단 힘으로 주저앉혔다.

“일이 이렇게 돼서…… 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요. 제이.”

흥건하게 쏟아진 차를 크롬웰이 티슈로 대강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헤슬렘은 정말 매력적인 남자예요. 지적이고, 위트도 있고, 무엇보다 당신한테 다정하고…… 반장님이라도 헤슬렘하고 몇 번 그런 식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마음이 흔들렸을걸요.”

반장이 ‘말도 안 돼’ 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크롬웰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판단력을 잃으면 안 돼요. 그건 그 남자의 진짜 얼굴이 아니에요.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을 좀 더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어요. 물론 힘들겠지만…….”

“솔직히 힘들어요.”

어지간해서는 진심을 내보이는 일이 없는 크롬웰의 얼굴에 짙은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좀 더 냉정해지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좋아요. 헤슬렘이 당신을 또 다른 제물로 삼으려고 덤비는 그 순간엔, 헤슬렘 때문이 아니라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 때문에 더 상처받을 테니까…….”

회의 같지도 않은 회의는 크롬웰과 마키바 반장이 서장 호출로 방을 나가면서 흐지부지 끝났다. 솔직히 요즘은 매일같이 회의를 할 건수도 없었다. 니콜라스가 눈에 띄는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이쪽도 할 일이 없는 상황인데 니콜라스는 요즘 죽어라고 일만 하고 있으니까…… 우리도 덩달아 니콜라스의 움직임을 모니터하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서부호수에서 돌아온 다음 이틀 동안은 니콜라스도 두문불출이었기 때문에 수사는 사실상 휴업상태였다.

“뭘 읽고 계시는 거예요?”

회의실에 둘만 남은 뒤로 굽타는 계속 말이 없다. 아까 펼쳐 보던 파일을 계속 뒤적거리면서 뭔가를 메모하고, 확인하고…… 굽타는 현장에서 범죄자를 쫓아다니는 것보다 저런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그냥, 크롬웰한테 부탁해서 이것저것…… 요즘은 시간도 꽤 남으니까…….”

“뭔데요?”

“별거 아니야.”

얼버무리면서 굽타가 파일을 덮었다.

“식당에 갈까? 늦었지만 아침을 먹어야지.”

배고픈 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굽타도 뭐 그렇게 시장한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파일을 슬쩍 내 앞으로 당겼다.

“괜찮으시면 저도 좀 볼게요.”

니콜라스에 대한 새로운 정보라도 있나 싶어서 들춰본 파일은 좀 색다른 자료였다. 오래된 문서의 복사본과 번역 메모…… 몇 장을 더 넘기자 사람의 목을 베거나 배를 가르는, 조잡하지만 잔혹한 그림도 몇 장인가 있었다. 니콜라스하고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자료는 아닌 것 같았다.

“인신 제사에 관한 옛날기록 같은 게 있으면 좀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다음날로 이런 파일을 두 박스나 보내주더군. 당사자 없는 데서 말하긴 그렇지만…… 크롬웰도 진짜 별종이야.”

이 파일은 하루 만에 인터넷에서 벼락치기로 찾아낸 게 아니라 몇 년에 걸쳐 모아온 크롬웰의 개인자료였다. 파일도 낡았고, 복사본에 붙어 있는 번역지 필체도 틀림없는 크롬웰의 것이었다.

크롬웰의 취미가 다양하고 독특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예쁜 여자의 취미가 옛날 책 뒤져서 사람 목 따고, 배 갈라서 창자 꺼내는 장면 스크랩하기라니…… 정말 깬다.

“인신…… 제사요?”

“까마득한 고대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진 잔혹한 풍습이지.”

“헤슬렘이 정말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재미로 읽는 거야. 흥미 있는 주제잖아.”

글쎄, 잘 모르겠다. 이런 데 흥미를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뒤로 가니까 여럿이 둘러앉아 사람을 먹어 치우는 그림도 있고…… 그런데 이건…….

“뭐예요? 좀 달라 보이는데…….”

내 눈에 띈 건 오래된 책의 전면 복사본이었다. 원본은 얼마나 오래된 책이었을까? 책 가장자리뿐 아니라 꽤 안쪽까지 벌래 먹은 듯 손상이 심했다. 문서 위아래로는 읽을 수 없는 고문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고 그 가운데엔 책 상태에 비해선 신기할 정도로 선명한 그림이 남아 있었다.

“오래된 거야. 유럽 어느 가문에서 내려온 금서 중 일부라는데…….”

유럽의 어느 가문이라…….

“위아래에 적혀 있는 건 라틴어라서 크롬웰 양이 해석을 붙였는데 가운데 몇 줄이 비었기에 물어봤더니 자기도 모르는 글자라는군.”

제단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고, 또 다른 남자가 제단 옆에 서서 뭔가를 들고 있고, 그 주변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꿇어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는…… 꽤 정교한 그림이었다. 누워 있는 남자는 차림새가 중세의 기사나, 왕자 같고…… 서 있는 남자는 바닥까지 끌리는 긴 가운을 입고 있는 걸로 봐서 성직자나, 제사장 정도로 보였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뭘까? 비교적 선명하다고는 해도 워낙 오래된 그림이라 뭉개지고 얼룩까지 심해서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사람의 머리나 심장 같은 걸 거야.”

“그림이 이 정도만 남아 있어도 선배님 눈엔 문제없이 파악이 되세요?”

내 감탄에 굽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데 무슨 근거로 머리나 심장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선배가 대답 대신 그림을 가리켰다.

“누워 있는 남자의 몸도, 제단도 온통 피로 물들어 있잖아. 크기로 봐선 심장보다는 머리일 가능성이 더 커.”

“이게 피였어요?”

“아니면 뭘로 보이는데?”

“그냥…… 얼룩이요.”

어쩐지 다른 데는 없는 얼룩이 거기만 유독 많더라. 굽타 선배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웃었다.

크롬웰이 읽을 수 있는 부분만 해석한 걸 보면 제단에 누워 있는 남자는 결투로 부상당한 젊은 후작이었다. 이 그림은 나그네, 혹은 손님이라고 불리던 자가 후작을 치료하는 장면이었다.

<부인의 간곡한 청으로 나그네가 후작에게 신비한 치료를 베푸니 후작이 깊은 잠에 빠지고 상처에서 피가 멎고 점점 아물며 외모가 천상의 사람처럼 변해갔다……>

‘부인의 간곡한 청으로……’ 라는 구절이 두 번이나 들어간 걸 보면 의사도 두 손 들고 나간 안 좋은 상황에서 주술사를 불렀던 것 같다. 재단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부인인가 보다.

들고 있는 게 정말 사람의 목일까? 어쨌든 이런 건 치료라기보다는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자료가 달랑 한 장뿐이라서 후작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후작의 생사를 알기 위해 굳이 뒷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음산하고 의미 없는 의식이 그나마 얼마 남지도 않은 후작의 명을 더 재촉했을 거다.

“8세기나 9세기경 유럽의 유력한 영주 가문의 숨겨진 기록이라는데…… 어쨌든 흥미로워.”

“어떤 부분이요?”

“자넨, 이 그림 보면 뭐 떠오르는 거 없나?”

별로…….

“바톨리 백작부인 얘기…… 들어본 적 없어?”

없다. 눈치를 보니 꽤 유명한 사람인 모양인데…… 나는 왜 모르지? 내 얼굴이 점점 침울해지는 걸 본 굽타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도 있지 뭐. 옛날 사람이야. 그렇게 유명한 여자도 아니고…….”

“누군데요?”

“엘리자베스 바톨리라고, 16세기경에 트란실바니아에 살았던 귀부인이야. 아름답고, 지적이고, 간질 발작과 정신질환을 앓았던 걸로 알려진…… 연쇄살인범이지.”

여자 연쇄살인범은 드문데…….

“몇 명이나 죽였는데요?”

“알려진 대로라면 600명 정도?”

유명한 여자 아니라더니, 얘기가 다르다.

“하녀들부터 시작해서 성에 젊은 여자들을 잡아와서 아주 잔인한 수법으로 살해했지. 그리고 희생자들의 더운 피로 목욕을 했대. 백작부인의 살인 동기는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었거든. 백작부인은 젊은 여자의 피가 자신을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도록 해줄 거라고 믿었어.”

“이 그림하고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겠지. 일단 연대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백작부인이 이 책을 봤을 것 같지도 않아. 하지만 누워 있는 남자의 온 몸에 피를 뿌리고 있는 걸 보니 지체 높으신 귀족들 사이에 은밀히 전해 내려오는 비밀 얘기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비방이라면 젊게 사는 데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닐까?”

안 그래도 다 죽어가는 부상자가 이런 비위생적인 도살장에서 살아났다면 그런 헛소문이 떠돌았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사실, 내 눈에 이 그림이 유별나게 보였던 건 그림 자체나, 위 아래로 적힌 라틴어 때문이 아니라 그림 옆에 낙서처럼 쓰여진 짧은 글귀 때문이었다.

크롬웰이 해석하지 못하고 남겨놨다는 그 부분…… 줄 맞춰서 제대로 적어 놓은 라틴어와는 달리 펜으로 대강 갈겨 쓴 건데, 대체 어떤 놈이 여기다 이런 낙서를 했을까?

“뭐라고 쓴 건지 뜻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뭔가 결정적인 답이 숨어 있는 글귀 같거든.”

굽타가 안타깝다는 듯 글자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안됐지만 그건 그렇게 결정적인 글귀는 아니었다.

“엘로 루파, 엘로 브리가, 타이레 엘로 우나…….”

“응?”

굽타 선배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크롬웰이 모르는 걸 내가 아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이건 내가 아는 글자다.

“어렸을 때 공부를 좀 했었거든요. 집시 주술사들이 쓰는 주문 같은 거예요.”

“뜻도 알아?”

<엘로 루파, 엘로 브리가, 타이레 엘로 우나>

우니 언어로…… 그 의미는 대강 이렇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생명 그리고 영원한 고통>

인신 제물이라…… 고대인들은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고, 부족의 번성을 빌었다. 혹은 사람을 바쳐서 자신의 죄를 씻고 신의 노여움을 달랠 수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피를 바쳐야만 그 힘으로 신이 우주 만물을 운행시켜서 인간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잔혹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런 제사는 목적이 확실했다. 굽타 옆에서 같이 자료를 뒤적거리고 있으려니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니콜라스가 정말 인간을 제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 거라면……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혹시 또 아는 글자가 있나 싶어서 뒷장까지 쭉 훑어보고 있는데…… 밖에서 뭔가 부딪히고 깨지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돼지 멱따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니가 왔다.

비니의 징크스는 요즘 들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폭되는 중이었다. 양적으로도 그렇고 질적으로도 그랬다. 이번 주 들어서만 현관의 대형 유리창이 두 개나 깨졌고, 엘리베이터는 수시로 고장이 났다. 사흘 전에는 지하 1층의 형광등이 모조리 터져나가는 바람에 세 시간 동안이나 지하층 업무가 완전히 마비됐었고 이틀 전에는 2층 화장실 수도관이 터져서 경찰서 1, 2층이 반나절 동안 물바다였다.

비니 주변에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이번 한 주는 낙상사고도 유난히 많아서 계단을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보다 굴러서 내려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모두 다 원인불명의 사고였지만, 우리 서에서 일어나는 원인불명의 사고라면 대부분 비니한테 혐의가 간다. 어제부터는 드디어 비니의 경찰서 출입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데…… 피해가 여기서 더 커지면 서장님이 뭔가 결단을 내려야할 거다.

“왔어?”

문을 열고 내다보니 청소 카트에 깔려서 버둥거리는 조시를 동료 두 명이 막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응…….”

비니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조시의 원망 어린 눈초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체 요즘 왜 그래?”

“내가 뭘?”

비니가 손에 든 커다란 꾸러미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냄새만 맡아도 이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비니 큰아버지네 식당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해물 스파게티, 파스타, 그라탕…… 시간도 이른데 이걸 다 어떻게 가져왔냐?

“잔뜩 열 받았잖아.”

“내가?”

비니의 징크스는 예측불허, 경우불문이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비니의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 건 분명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강 해둬. 이런 식으로 짭새 한두 마리씩 슬금슬금 때려잡아봐야 니네 작은 아버지는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비니가 시치미를 딱 떼면서 테이크아웃 포장 박스를 하나씩 까기 시작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니 이렇게 나오면 별 수 없을 뿐 아니라…… 스파게티 소스 냄새가 정말 끝내줬다. 그래서 최근 빈발하고 있는 크고 작은 상해에 관한 문제는 잠시 덮어두기로 하고 굽타와 내가 동시에 포크를 집어 들었다.

로만 가든은 이탈리아 음식점 부문에서는 시내에서 랭킹 5위 안에 드는 유명한 식당이었다. 명사들의 저녁 식사코스로 애용되는 식당인 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고 예약경쟁도 치열해서…… 가끔 비니를 따라가서 큰아버지 빽으로 남의 예약석을 가로채든가, 아니면 이렇게 도시락으로 얻어먹는 게 나 같이 평범한 짭새가 그 집 음식 맛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야 뭐, 그렇게 입맛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내 평소 식생활은 미식하고는 거리가 백만 광년이지만 로만 가든의 해물 스파게티는 먹을 때마다 아, 음식이 맛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요 며칠은 변변히 챙겨 먹은 게 없어서 노상 허기져 있던 상태라서 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이 새우 칵테일은 그냥 맛있는 게 아니라 부드러워서 입안에서 아예 녹는 것 같았다.

“그런데요, 선배님…….”

마지막 남은 새우 칵테일 박스를 나한테 뺏긴 비니가 시무룩한 얼굴로 굽타를 쳐다봤다.

“왜?”

콘비프 그라탕 박스를 박박 긁고 있던 굽타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말이죠. 그게…… 우리 생각대로 돼 가고 있는 걸까요?”

“글쎄…….”

비니의 질문에 굽타가 자신감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헤슬렘은 회사도 다 정리했는데, 그냥 이대로 튀어버리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마키바 반장은 생각도 말라고 했고, 크롬웰은 니콜라스에 대해 공연한 기대를 가져봐야 나만 상처 받을 거라고 했지만…… 뭐가 되었든 간에 니콜라스가 전기의자에 앉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니콜라스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죄받을 생각이긴 한데…… 자꾸만 니콜라스가 그냥 아무 데로나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어.”

굽타가 나를 힐끔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굽타는 마키바 반장만큼이나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니까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 결국 제이만 개망신 당하고 손 터는 거잖아요.”

망신이야…… 뭐,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잖아. 그렇게 쉽고 허술한 상대였으면 벌써 꼬리를 밟혔겠지.”

“애초에 제이를 그 자식 앞에 그런 식으로 들이미는 게 아니었어요!”

비니가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화를 내며 대들었다. 먹던 거 내려놓고 일단 비니를 자리에 앉혔다. 기운이 남으면 마키바 반장한테나 덤비지…… 왜 굽타한테 시비냐? 선배는 처음부터 함정 수사도, 나를 미끼로 쓰는 것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된 게 유감스러워. 제이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제이가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도 모자라서 못돼 먹은 짭새들한테 호모라고 욕먹는 거……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게다가…….”

“그래서 요즘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았군.”

“요즘 일어나는 사고가 정말 제 기분 탓이라면, 형광등 몇 개 터지는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걸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간의 변고가 정말 형광등 몇 개 나간 것뿐인 줄 알겠다. 형광등 몇 개라니…… 지하 1층에서 한꺼번에 터진 형광등만 해도 200개가 넘는다. 게다가 어제까지 계단에서 구른 사람이 총 일곱 명에, 그중 셋이 정강이가 부러졌다. 그러고 보니 저 자식…… 물건 깨진 건 은근히 실토하면서 사람 다친 건 무의식중에도 오리발이다.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장담은 못해. 하지만 최선은 다 해야지.”

선배의 지당하신 말씀에 비니가 정면으로 반발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좀 의외의 발언이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연쇄살인 같은 반사회적인 범죄에 대한 비니의 거부감도 보통 이상은 된다. 일에 대한 고집이랄까, 오기 같은 것도 남 못지않은 녀석인데…….

“그럴 수는 없어. 연쇄살인이잖아. 장장 열다섯 건에다…… 앞으로 생길 피해자 생각도 해야지.”

“하지만…….”

“우리가 그만두려고 해도 헤슬렘이 그만두지 않을 거야.”

“그자는 이제 곧 떠나요!”

비니의 단호한 한 마디에 좀 전에 먹은 게 목에 딱 걸린 느낌이었다. 요즘은 늘 그렇다. 걸리기 전에 아무 데로나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막상 니콜라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하면 또 기분이 안 좋다.

“헤슬렘은 제이가 경찰인 것도 알고, 우리가 자기를 노리는 것도 알아요. 알면서 제이를 갖고 노는 거라고요! 그게 다른 짭새들한테까지 알려져서 이젠 두고두고 호모 취급을 받으면서 시달리게 됐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전 아무리 생각해도 선배님이나 반장님이 제이한테 너무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내 생각 해주는 게 고맙긴 하지만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나도 그렇고 비니도 이미 한두 번, 공개적으로 불평했던 사안이다.

“그것 때문에 요즘 그렇게 신경이 뻗쳐 있었던 거야?”

“그것도 그렇고…….”

경찰서 대표 단세포 동물인 비니의 얼굴에 전에 없이 복잡하고 고민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불안해.”

“뭐가?”

내 간단한 질문에 비니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음식에 비듬 튈라…… 반쯤 남은 파스타 박스를 얼른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니가 호수에 빠지는 걸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요즘 들어서 자꾸 불안한 느낌이 들어.”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비니한테 예지 능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뭣 때문에 그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 알아내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비니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줘야 보통 때의 천하태평한 단세포 비니로 돌아올 테고, 그래야 우리도 예고 없이 닥치는 날벼락을 모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그러기 어려울 것 같았다. 잠깐 생각하던 비니가 자기 머리를 테이블에 갖다 박으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건…… 모르겠어.”

불안감은 비니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비니는 뭐가 불안한지 잘 모르겠다니까 일단 밀어 놓고…… 마키바 반장은 니콜라스를 이대로 놓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하고, 굽타는 니콜라스가 연쇄살인범의 본색을 드러내고 내 목숨을 노리는 순간, 나를 무사히 구해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불안하고, 나는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나……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스럽고 불안했다.

니콜라스를 쫓는 일은 처음부터 일과 외도의 경계가 모호했다. 그렇던 게 시간이 지날수록 외도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더니 결국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남 말하기 즐기는 짭새들이 뒤에서 수근 거리는 건 아무래도 좋다. 내도록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는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는…… 그리고 니콜라스는 어떻게 될까?

니콜라스의 회사 로비에서 지난 주 잡지를 뒤적거린 지 20분이 지났다. 잡지책을 아무리 쳐다봐도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서 좀 전부터는 벽에 붙은 대형 수조 안에서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열대어를 또 뚫어져라 노려봤다. 달리 할 일은 없고,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은 더하고…….

“왜 이렇게 떨어?”

깜짝이야!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인데 예고도 없이 이렇게 치고 들어오면…….

“간 떨어질 뻔했어요. 선배님…….”

“미안해.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

굽타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으며 신문을 펼쳤다.

“왜 오셨어요? 이제 금방…… 올 텐데요.”

“그 전에 자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돼서…….”

도청장치 성능이 날로 좋아지는 건 알고 있지만, 내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리는 걸까?

“자네 한숨 소리가 차 안에서는 거의 태풍 소리로 들려.”

“죄송해요. 그런 줄 몰랐어요.”

굽타가 신문 스포츠 면을 뒤적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을 힐끔 봤다.

“긴장하는 건 좋아. 가끔은 자네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우니까.”

“그럼 지금 제 상태가 마음에 드시겠네요. 바짝 얼어 있으니까…….”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웃고 있을까?

“헤슬렘은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든 것 같아.”

“…….”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가끔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나는 봤어.”

“무슨 말씀이세요?”

이번엔 굽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래 봐야 보이는 건 어제 날짜 신문 일면뿐이었다.

“아니, 그냥…… 저쪽도 나름대로 진지한 것 같아서…….”

굽타가 진지하다면, 진지한 거다. 선배의 상황파악은 언제나 정확했다. 보통 데이트 중인 상대가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지만, 그런 건 내가 싱글이고 상대방이 연쇄살인범이 아닐 때 얘기다. 갑자기 두통이 확 도졌다.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 앓고 있는데 어떤 따뜻한 손이 어깨를 잡았다.

“왔어?”

지난 주말 그 스펙터클했던 낚시 데이트 이후로 처음 니콜라스를 보는 거다. 닷새 만이면 그동안 만난 중에 최고로 자주 만난 건데도 되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몸은 좀 어때?”

니콜라스가 맞은편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나를 위아래로 쫙 한번 훑었다. 그 사이에 나는 굽타 쪽을 힐끔 살폈는데,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머리가 좀 아픈 것 빼곤…… 괜찮아요.”

“머리가? 왜?”

“당신 여자친구 얼굴이 자꾸 꿈에 보여요.”

니콜라스가 허허……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이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너무 풀리면 그것도 곤란한데…….

“생각하지 마.”

“어떻게 생각을 안 해요? 지금 같아선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나하고 같이 있으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 생각을 할 수가 있어?”

이번엔 내가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당신은 어때요?”

귀가한 이후 니콜라스는 이틀 동안 집밖으로 나오질 않았었다.

처음 별장에서 나왔을 때는 니콜라스를 곧바로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하루 종일 자고도 피곤한 얼굴이었고 안색도 무척 안 좋았기 때문에…… 하지만 본인이 한사코 마다하는 바람에 어쩔 수없이 집에 데려다 줬고, 2층 침실까지 부축해서 데리고 올라갔었다.

“걱정 많이 했었어요. 전화도 안 받아서…….”

침대에 눕히자마자 니콜라스는 곧 잠이 들었다. 온통 하얗고 온기라곤 없는 썰렁한 침실에 쫙 뻗은 니콜라스를 두고 나오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고, 숨소리가 편해질 때까지 만이라도 옆에서 지켜봐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와 내가 마냥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고 조용했던 그의 별장에서나 꿀 수 있었던…… 지나치게 달콤하고, 지나치게 짧은…….

“좀 피곤해서 계속 잤어. 이젠 괜찮아.”

짧게 대답하고 니콜라스가 일어나서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 하루 종일 서류만 쳐다봤더니 눈이 빠질 것 같아. 배도 고프고…….”

로비엔 오가는 사람도 많은데 니콜라스가 겁도 없이 내 어깨에 팔을 척 둘렀다.

“사람들이 봐요.”

조용하게 타이르면서 어깨에 얹힌 팔을 밀어냈다.

“보면 뭐 어때서?”

“여긴 당신 회사잖아요.”

얼굴을 붉히며 타박하자 니콜라스가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다시 내 목에 팔을 감았다.

“이젠 아냐. 좀 전에 팔아버렸거든.”

나는 직장 동료들한테 섹스하는 장면까지 다 들켰는데, 남의 회사 로비에서 좀 치대는 정도가 무슨 대수냐…… 싶은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역시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행각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니콜라스는 아무렇지 않은지 몰라도 나는 쪽팔리고 싫었다. 그래서 엉겨 붙는 니콜라스를 떼어내고 출입문 쪽으로 먼저 나갔다.

회사를 팔아버렸다는 건 니콜라스가 백만장자 사업가에서 백만장자 백수가 됐다는 얘기고, 그건 곧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걸까? 아니면 이제부터 뭔가가 시작되는 걸까?

“어디로…….”

갈 건지 일단 그거나 물어보려고 돌아서다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좀 전에 주차장으로 은색 벤틀리 한 대가 들어왔는데 지금 막 거기서 아는 여자가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지? 아는 여자라서 놀랐는데, 너무 놀라다보니 정작 저 여자가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많이 본 얼굴인데…….

“왜 그래?”

니콜라스가 물었다. 그 순간 여자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놀라서 최대한 민첩하게 바닥에 몸을 깔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 여자가 누군지 생각났다. 엘리스 스톤이다.

“어, 어디가?”

내가 낮은 포복으로 차 앞을 향해 기어가자 니콜라스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일단 차 반대편에 몸을 붙였다. 아이고, 심장이야…… 함정 수사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사표를 쓸 걸. 어떻게 된 게 하루도 편할 날이 없냐? 호수에 죽치고 있는 물귀신 같은 여자친구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젠 또 엘리스 스톤이야?

엘리스 스톤은 일전에…… 실종 신고가 들어와서 며칠 조사를 하다가 니콜라스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잠시 니콜라스의 희생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갔었던 클럽 가수였다. 아니, 클럽 가수였었다. 지금은 자기 음반 내고 꽤 잘 나가는 신인 가순데, 얼마나 잘 나가는지는 지금 몰고 온 번쩍거리는 벤틀리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니콜라스 손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는 실종된 지 4주일 만에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자기는 잠깐 머리 식히러 여행을 갔다 온 것뿐인데 실종은 무슨 실종이냐며 담당 수사관에게 되레 성질을 부려서 우리 경찰서 짭새들한테 아주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

노래도 꽤 잘하는 편이고, 얼굴도 저만하면 미인인데…… 인품은 바닥이라는 게 엘리스 스톤에 대한 주변인들의 공통적인 평가였다.

“뭐하는 거야?”

니콜라스가 눈치도 없이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면서 물었다. 그때 여자가 니콜라스를 불러 세웠다.

“니키!”

여자의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돌아섰다.

“오랜만이야…… 엘리.”

니키…… 엘리…… 저렇게 부르던 사이였구나…… 생각하면서 맞은편에 주차된 밴 아래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 내 위치에선 니콜라스의 발밖에 안 보였다. 한 바퀴 빙 돌면서 건성으로 묻는 걸 보니 나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니콜라스하고 데이트 약속을 잡은 건 난데…… 불쑥 나타난 여자한테 밀려서 이게 무슨 꼴이냐?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나를?”

“아니면, 내가 당신 회사에 달리 무슨 볼일이 있겠어요?”

니콜라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엘리스 스톤의 말투가 까칠했다.

“나한테도 남은 볼일은 없잖아?”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니콜라스가 저런 소리 하는 걸 보면 벌써 끝난 사이인 것 같은데…….

“화났어요?”

엘리스 스톤이 물었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지금은 아양 떠는 것처럼 착 감기는 목소리였다. 얼굴도 예쁘장한데다 이제 막 뜨는 신인 가수에, 목소리까지 이렇게 애교가 철철 넘친다면…… 남자라면 보통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아니.”

다행히 니콜라스는 안 그런 모양이었다. 대꾸가 아주 쿨하다.

“그때는…… 내가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고, 중압감도 너무 심해서…… 잠깐 감정적이 됐던 것뿐이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은 혼란스럽고 감정적이었어, 엘리. 그게 본래 당신 성격이야.”

혼란스럽고 감정적이라…… 참 점잖은 표현이다. 저 여자 실종사건을 수사하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들은 말 중엔 훨씬 심한 것도 많았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조용한데 가서 얘기 좀 하면 안 돼요?”

여자가 솟구치는 성질을 힘들게 눌러 참으며 니콜라스를 설득했다.

“곤란해.”

“왜요?”

상황이 맘같이 안 되니까 여자의 음성이 대뜸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말 몇 마디만 듣고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저 여자…… 살짝 싸이코 같았다. 호수에서 만난 그 여친한테 갖다 댈 정도는 아니지만…… 니콜라스는 여자 취향에 문제가 있는 걸까? 뭐, 호수의 그 여자는 사람인지 뱀인지 그것조차 분명치 않았던 걸 생각하면 취향 이전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그런 건 상관없어요. 잠깐 얘기나 하자고요.”

니콜라스하고 잠깐 얘기만 하면 나를 아웃시킬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안 돼. 지금 그 친구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던 길이었어.”

“내 눈엔 안 보이는데요?”

“그러게.”

진퇴양란이다. 계속 버틸 수도 없고, 이제 와서 기어 나갈 수도 없고…… 그런데 지금 막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 저 여자는 나를 모른다. 실종자 수사하느라 사진도 골백번 들여다보고, 주변 사람들도 여럿 만나고 다녔기 때문에 여자도 나를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엎어져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차 밑으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나와.”

“저기…….”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니콜라스가 내 팔을 움켜쥐고 마치 말 안 듣는 강아지 끌어내듯 나를 차 밑에서 끌어냈다. 먼지투성이가 돼서 끌려 나온 나를 여자가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그 밑에서 뭐했어?”

니콜라스가 내 가슴과 배에 허옇게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주면서 물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다음부터는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

니콜라스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힘들게 참으면서 차분하게 나를 놀렸다.

“누구예요?”

여자가 대뜸 니콜라스한테 따졌다.

“내 데이트 상대.”

“누구 놀려요?”

“잘 가. 엘리.”

딱 잘라 말하고 니콜라스가 차 조수석에 나를 먼저 밀어 넣었다. 간 크다. 여자가 당장 칼이라도 들고 달려들 것 같은 표정인데 싹 무시하고 등을 보이다니…… 컴백한 옛 여자친구한테 마음 흔들리지 않고 의리를 지켜준 건 고맙지만 이러고도 뒤탈이 없을까? 치정관련으로도 얼마든지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강력반 형사 입장에서, 그리고 불과 며칠 전에 다른 여자친구한테 걸려서 죽을 뻔했던 경험자로써…… 많이 걱정스럽다.

“여자친구들이 왜 다 저래요?”

엘리스 스톤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는 걸 백미러로 지켜보자니…… 아무래도 저 여자가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늘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폭행이나 살인 사건도 많이 줄어들었을 거고, 지난주에 호수에서 그 험한 꼴을 당하지도 않았을 거다.

“난 착한 여자 취향이 아니거든.”

난 착한 여자 좋던데…….

“그럼 계속 만나지 왜 찼어요? 당신 취향에 딱 맞겠던데.”

니콜라스가 큰길에서 좌회전 차선으로 접어들었다. 자주 가는 클럽에 가려면 길 따라서 직진인데…….

“난 재능 있고, 개성이 강한 사람이 좋아.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으면 성질 좀 못된 건 그렇게까지 거슬리지 않아. 하지만 못된 거하고 미친 건 문제가 달라.”

역시 사이코였구나. 아무래도 수사팀 차원에서 엘리스 스톤에 대한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여자가 남자한테 심한 해코지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엘리스 스톤이 멋모르고 니콜라스를 스토킹이라도 한다면 본인에게도 경찰수사에도 득 될 게 없었다. 그건 그렇고…….

“재능 있고, 개성 강하고, 성질 못된 여자가 그렇게 좋으면…… 나는 왜 만나는 건데요?”

얘기를 하다 보니까 궁금해져서 물었다.

“넌 착하잖아.”

뭐냐?

“착한 건 취향이 아니라면서요?”

“취향은 아닌데…… 그렇게 됐어.”

니콜라스가 성의 없이 얼버무리며 카이잘 고가로 올라섰다. 이러면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클럽도 아니고 집도 아니면…… 어딜 가는 걸까?

“취향은 아닌데 그렇게 됐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넌 니가 원하는 타입도 아니고, 성격이나 취미도 전혀 다른 사람한테 끌렸던 적…… 한 번도 없었어?”

첫사랑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나한테는 어려운 질문이다. 내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성격이 어떤지, 취미가 뭔지…… 그런 거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위니하고 만날 때는 취향 같은 거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위니는 학교에서 제일 예쁘고 다정한 여학생이었고, 남자애들은 누구나 위니하고 데이트하고 싶어 했다. 나도 그런 남학생 중 하나였기 때문에 위니가 나한테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위니를 사랑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랑에는 어떤 갈등도 없었다. 전혀 취향이 아닌 사람한테 끌렸던 적이라…….

“있는 것 같아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니콜라스가 속도를 높였다.

“내가 지금 그래.”

한동안 고가를 타고 달리던 니콜라스가 제일 바깥쪽 차선으로 들어섰다. 이제 내려갈 모양이다. 가만있자…… 여기가 어디더라?

“이리 가면 차이나타운인데요?”

“오랜만에 중국 음식, 괜찮지?”

괜찮기는 하지만…….

“자주 가던 그 클럽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당분간 거긴 안 갈래. 못 가겠어.”

니콜라스가 정색을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요? 클럽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니콜라스는 그저께 회사일 마치고 클럽에 들러서 잠깐 놀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그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

“에?”

“엊그제 저녁 먹으러 갔었는데…… 왜, 그 바텐더 기억나지? 잠복근무 중인 형사라고 했던…….”

비니가 뭔가 사고를 쳤구나. 하긴, 요즘 들어서 경찰서가 다 허물어지는 중인데 거기라고 무사할 리가 있나? 애초에 비니한테 잠복근무를 맡긴 것 자체가 사고다.

“왜요? 그 짭새가 총이라도 들고 휘둘렀어요?”

“그 정도가 아니었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니콜라스가 몸을 살짝 떨었다. 비니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니콜라스까지 이렇게 겁에 질렸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즘 부쩍 오라가 강해졌어. 문 열고 바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안이 환한 지 처음엔 불이 난 줄 알고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니까?”

오라? 그게 뭐더라?

“그…… 주황색 빛 같은 거요?”

비니 주변에 그런 빛이 나는 거, 나는 한 번도 못 봤는데…….

“빛만 나는 거면…….”

현관 유리가 터져나가거나 계단을 구르는 건 실질적인 위험이 있으니까 겁나는 게 당연하지만, 빛이라…… 그게 내 눈에 안 보여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비니가 그냥 번쩍거리기만 하는 거면 뭐, 그렇게 문제될 건 없지 않나?

“내가 들어가자마자 바에 장식돼 있던 크리스탈 잔들이 차례로 폭발하듯 터져 나갔어. 예전에 중국에 있을 때…… 광장에서 벌어진 신년맞이 불꽃놀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폭죽 3만 발이 터져나가던 그때보다 더 볼 만했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지하 1층에서 형광등이 모조리 터질 때도 그 비슷한 광경이었을 거다. 다들 그런 건 처음 봤다면서 진저리를 쳤으니까.

“파워가 강해지면 빛도 밝아지는 거야. 악의가 없는 친구라는 건 알지만…… 너무 지나쳐. 차라리 그 친구가 자기 파워를 조절할 줄 아는 악당이라면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았을 걸.”

그 기분…… 나도 안다. 그 수많은 사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비니가 여태 큰 위기 없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비니가 암흑가와 정재계에 걸쳐 배경이 빵빵한 상류층 자제라는 것과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정도가 지금처럼 심하면 고의성 여부를 놓고 정상을 참작해줄 여유가 없다.

“그 친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야. 그 기세로 파워가 강해지면 조만간 작은 건물 한 채 정도는 문제없이 허물고 말 걸.”

니콜라스의 장담에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니콜라스가 지금 하는 말은 농담도 아니고 과장도 아니었다. 비니는 벌써 경찰서 건물을 심하게 손상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건물이 낡아서 두 블록 위쪽에 새 건물을 짓는 중이라 더 무서웠다.

이제 차이나타운 초입이었다. 쿠간에 차이나타운이 조성된 지도 100년이 넘었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에는 중국풍의 오래된 건물이 많았다. 보수적이고 비밀 많고 우중충하면서도 빨간색 간판 때문에 인상이 강렬한…… 차이나타운은 몇 년에 한 번씩 들러도 좀처럼 변한 곳을 찾을 수 없는 한결같은 동네였다.

니콜라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차이나타운을 관통하는 대로변에 새로 생긴 으리번쩍한 식당이었다. 최근에 차이나타운에서 무슨 호텔인지, 레스토랑인지가 개업해서 손님이 미어진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었는데…… 거기가 여긴 것 같았다.

내려서 보니 건물은 흔히 보던 중국집이 아니라 완전히 성이었다. 차이나타운이 수상쩍고 이국적인 동네이긴 하지만 현대적인 것과 조잡한 중국풍이 뒤섞여서 전체적으로는 어수선하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한복판에 커다란 성이 생기고 나니 동네가 확 달라 보였다. 이젠 제대로 중국풍이랄까…… 아직 페인트 냄새도 다 날아가지 않은 새 건물이었지만 이 성을 중심으로 동네 전체가 자연스럽게 조성된 옛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중국에 가 본 적 있어?”

중국집 대문을 넋 놓고 올려다보고 있는 내 어깨를 니콜라스가 툭 쳤다. 중국은 무슨…….

“쿠간 시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얼마 없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 니콜라스가 나를 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여기부터 시작하자. 크기는 작지만 제법 중국 분위기가 나거든.”

시내엔 크고 화려한 레스토랑이 많았다. 실내장식 화려하고 음식 값 비싼 레스토랑을 다 돌아다녀본 건 아니지만, 문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순간…… 중국집에 딸린 정원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집에 딸린 정원이 아니라 왕궁의 정원과 비교를 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높은 담장을 빙 둘러싼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 때마다 춤추는 것처럼 일렁거렸고, 화단에는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온갖 종류의 풀과 꽃이 뒤덮여 있었다. 정원 한쪽에는 제법 커다란 연못도 있었는데, 가운데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섬까지 딸려 있어 동양적인 정취 정도가 아니라 그냥 중국 어느 성의 정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정원이 맘에 들어?”

웨이트리스가 안내한 예약석도 끝내줬다. 정원 쪽으로 한발 나간 정자에 마련된 테이블이었는데 정자 바로 옆을 끼고 도는 도랑엔 거울처럼 맑은 물이 흘렀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냇가에는 커다란 두루미가 두 마리나 잔뜩 폼을 잡고 서 있었다. 이 정도면 그냥 밥 한 끼 먹고 나가는 게 아니라 거의 신선놀음이었다.

오리고기랑 국수 따위를 팔아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식당을 이렇게 호화판으로 차렸을까? 주인이 누군지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다.

“여기…… 진짜 근사하네요. 저렇게 큰 두루미는 동물원에서도 못 봤어요.”

“다음엔 동물원에 갈까?”

어쩐지 좀 삐진 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엘리스 스톤 때문에 차 밑에 기어 들어갔었던 거 말고는 오늘은 실수한 게 없는 것 같은데…….

“한눈 그만 팔고 내 얼굴도 좀 쳐다보라고. 나하고 데이트하는 거지, 두루미 구경 온 거 아니잖아.”

“와, 저기…… 비단 잉어가 엄청 커요.”

“말 돌리지 말고.”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도랑엔 실제로 팔뚝만한 비단잉어가 대여섯 마리씩 몰려다니고 있었다. 중국엔 비단 잉어가 흔한지 몰라도 쿠간에선 이런 거 구경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분위기 좋은 데서 남자 둘이 빤히 쳐다보고 앉아 있는 거…… 다른 사람들 보기엔 웃길 거다.

멀지 않은 대숲에서 사각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냇가에 있던 두루미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퍼덕여서 연못 가운데 있는 섬으로 날아갔고, 정자 바로 옆에 모여 있던 잉어들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먹이를 던져주고 있는 부인에게로 몰려가버렸다.

웨이트리스가 건네준 메뉴판에서 나는 북경오리를, 니콜라스는 이름만 들어서는 뭐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요리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다. 호수에서 만난 그 여자 일만 해도,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특이한 여자를 만나서 사귀게 된 건지, 그 여자의 진짜 정체가 뭔지 궁금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히 혼쭐이 난 터라 말문이 쉽게 열리질 않았다. 또 과거에 만났던 여자에 대해 캐묻는 게 데이트 상대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고…… 별장에서 단 둘이 있을 때는 무슨 얘기를 했더라? 기억이 안 난다. 아니,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말을 거의 안 했었다. 단지 그때는 지금처럼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을 뿐이다.

니콜라스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꺼내면 좋을 텐데 아까부터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회사를 팔았으면…… 이젠 뭘 할 거예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써야지. 백만장자 백수가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나?”

“날마다 파티라도 열 건가요?”

“파티도 좋지.”

니콜라스가 막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뭐예요?”

“애인한테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도 돈 많은 백수가 돈 쓰기엔 좋은 방법이거든.”

니콜라스가 상자를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금색 포장지를 뜯고 상자를 열어 보니…… 시계였다. 절도 전문이 아니라서 이런 귀금속 종류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 막 넘어가는 저녁 햇살을 받아 번쩍거리는 광채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이런 거, 받아도 되나? 나는 공무원인데…….

“지난주에 호수에 빠지는 바람에 니 시계 완전히 갔잖아.”

“그렇지만…….”

니콜라스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내 손목을 잡아서 시계를 채워줬다.

“맘에 들어? 내가 볼 때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맘에 드느냐고? 상자에 든 걸 봤을 때는 좀 심하게 번쩍거리는 시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목에 차고 보니 이거…… 시계의 탈을 쓴 다이아몬드 팔찌였다. 강력계 형사는 이런 시계 못 찬다. 일단 쪽팔릴 뿐 아니라, 이런 걸 차고 돌아다니면 당장 내사과에서 감사가 들어올 거다.

“이거 비싸 보이는데…….”

시계를 풀면서 니콜라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냥 받아줬으면 좋겠어. 다른 의미는 없어. 그냥 나 때문에 시계를 못 쓰게 됐으니까 주는 거야.”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하면…… 뭐든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여자들이 뻔히 알면서도 못된 남자한테 휘말리는 그 심정…… 대강 알 것 같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정원에 붉은 등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양화 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기분이 낯설면서도 묘한데, 붉은 등이라니…… 분위기가 너무 로맨틱해서 오히려 거북했다. 저녁 먹고 술도 한 잔 마시면서 놀다가 식당 뒤쪽에 있는 호텔로 직행하라고 완전히 등 떠미는 분위긴데, 정상적으로 데이트하는 남녀야 좋겠지만 나는…… 어쩌라고?

“안 마실 거야?”

니콜라스가 입도 안 대고 그냥 놔 둔 술잔을 가리켰다.

“죄송해요.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어서요.”

술은 나도 좋아한다. 줄줄이 나온 요리도 훌륭하니 반주 한 잔 곁들이면 더욱 일품이겠지만…… 오늘은 참자. 술기운이 올라서 분위기에 휩쓸리면 끝장이다. 호숫가 별장에서 있었던 일은 그냥 어쩌다 일어난 사고였을 뿐이다.

죽다 살아나서 간도 부어 있었고, 외진 곳이었고, 헤어진 여자친구랑 싸우느라 여기저기 긁히고 찔린 니콜라스도 안쓰러웠고, 지붕 위의 그 원수 같은 다람쥐 놈들 때문에 놀라기도 했고…… 여러 가지로 악조건이 겹치다 보니 벌어진 일이지 절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니콜라스를 코앞에 두고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니 새삼스럽게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니콜라스와의 잠자리가 나빴던 건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침실로 끌려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절대로…….

“중국에 가 본 적 있어요?”

하면서도 뻔하고 재미없는 질문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별 수 없었다. 본래 말주변이 없으니까.

“응.”

“얘기 좀 해봐요. 거긴 어때요?”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비슷해.”

나하고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이렇게 나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뿐이다.

“일본엔 가 봤어요?”

“…….”

술 생각 없다니까 굳이 권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니콜라스가 홀짝홀짝 자기 술잔 비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상대방이 말도 없이 술만 마시니까 나 혼자 계속 떠들기도 뻘쭘했다. 그래서 나는 음식만 꾸역꾸역 집어 먹고, 니콜라스는 계속 술을 마시면서 하릴없이 시간만 흘렀다.

“나는…… 떠날 거야.”

앞에 놓인 음식을 다 먹어갈 즈음 니콜라스가 혼자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회사를 처분했다고 했을 때 이미 짐작했던 일이고, 같은 얘기를 호수에서 이미 한번 들었으니까. 놀란 건 아닌데…… 먹던 음식이 명치끝에 딱 걸려서 내려가질 않았다.

“알아요.”

달리 시선 둘 만한 곳이 없어서 손목에서 번쩍거리는 시계를 쳐다봤다. 그럼 이건…… 작별 선물쯤 되는 건가? 목이 막혀서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야 오늘은 술을 안 마시기로 했었다는 게 생각났다.

“같이 가자.”

놀라서 금방 마셨던 술을 토할 뻔했다.

“같이 가자고.”

“어디로요?”

“어디든…….”

니콜라스가 내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며 짧게 대답했다. 앉아 있는데도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중국은 어때?”

“헤어지자면서요?”

“마음이 바뀌었어.”

“변덕스럽네요.”

비난하거나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닌데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같이 가자니…… 지난주에 호수에서 그 여자가 불쑥 떠올랐을 때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호수에서 내가 했던 말은…….”

니콜라스가 다시 술잔을 비웠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급하게 마시면 아무리 주당이라도 금방 취할 거다.

“진심이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하는 게 너나 나한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짭새라는 내 본분을 생각해보면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각이 왜 바뀐 건데요?”

니콜라스한테 대놓고 따졌다. 이쯤에서 조용히 떠나는 건 적어도 니콜라스한테는 최상의 선택이었다. 마키바 반장이나 굽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내 입장은 그 사람들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내도록 이렇게 심한 두통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그땐 너를 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어. 막연하게 생각은 했었지. 서운할 거라고…… 며칠, 혹은 몇 주…… 허전하고 괴로울 거라고…… 그리고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지금까지 모든 일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나를 바라보는 니콜라스의 눈빛은 보통 때처럼 부드럽고 차분했다. 말투도 담담하고 그냥 일상적인 대화 같은 분위긴데 자꾸만 속이 울렁거렸다. 오리고기를 괜히 많이 먹었나 보다.

“니가 호수에 빠지고, 헤로가 니 목을 감아 조이는 걸 봤을 때 깨달았어. 그렇게 너를 잃는다면 마음이 허전하고 괴로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거고, 그 고통을 견디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같이 가자고요?”

“내가 이렇게 떠나버리면 넌 어떨 것 같아? 괜찮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야…….”

괜찮을 리가 없다. 일단 마키바 반장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덤빌 테고, 경찰서엔 벌써 소문이 쫙 돌았고…… 앞날이 첩첩산중이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괜찮을 수는 없을 거다.

“나하고 같이 갈 수 없는 이유가 있어?”

술을 안마시기로 했던 걸 잊어버리고 한 잔을 더 마셨다. 니콜라스가 내 정체를 알고도 이러는 거면 정말 너무 하는 거다.

“직장 문제도 있고…… 또, 여자친구도…….”

“기억 나. 위니라고 했었지?”

그 이름을 여태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 여자하고는 이미 끝났잖아.”

니콜라스가 멋대로 단정을 지었다. 니콜라스한테 위니와의 관계를 털어놓거나 의논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거든요.”

“남녀관계는 사랑이 없으면 끝난 거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남녀관계는 사랑이 식으면 끝나는 건지 몰라도, 부부는 다르다. 부부는…… 꼭 사랑이 아니라도 많은 걸 공유하는 사이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치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잘라 말했다.

“마찬가지야. 끝났다는 걸 인정하기가 좀 더 어려울 뿐이지.”

마음도 복잡하고 머릿속도 복잡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니콜라스의 눈치를 보면서 마른 침만 꼴딱꼴딱 삼키고 있는데 웨이트리스가 번쩍거리는 은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코스가 아직도 남아 있었나? 속이 거북해서 이젠 음식 냄새도 맡기 괴로운데…….

“저희 가게 특별 서비스랍니다.”

웨이트리스가 니콜라스와 내 앞에 각각 작은 접시를 하나씩 내려놨다. 다행히 기름진 요리가 아니라 조가비처럼 생긴 작은 과자였다. 후식인가? 먹기에 별 부담은 없어 보였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차를 더 드릴까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으며 빈 술병을 들어보였다.

“술이나 한 병 더 갖다 줘요.”

그렇게 독한 술은 아니지만 혼자서 저거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는데…… 오늘 어지간히 술이 땡기는 모양이다. 사실은 나도 술이 고프다.

웨이트리스가 금방 가져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다음에 니콜라스가 한 손으로 과자를 부셔서 안에 든 쪽지를 꺼냈다. 이거…… 후식이 아니라 행운의 과잔가 뭔가 하는 그거구나. 속이 안 좋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종이째 먹어버릴 뻔했다.

쪽지를 들여다본 니콜라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 웃으면서 종이를 구겨버렸다. 무슨 말이 쓰여 있길래 그런 표정으로 웃었을까? 꼬깃꼬깃 구겨서 접시에 버린 니콜라스의 쪽지를 슬쩍 집어왔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신중히 결정하시길. 결코 잊혀지지 않는 사랑도 있는 법이니……>

중국집 행운의 과자에 딱 어울리는 상투적인 문구다. 너무 뻔하니까 니콜라스도 표정이 그랬겠지…… 생각하면서 이번엔 내 과자를 부셨다. 가만있자. 이건…….

“거긴 뭐라고 적혀 있어?”

니콜라스가 묻기에 종이를 움켜쥐고 얼른 대답했다.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그렇게 말하고 그때까지는 생각도 없던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벌떡 일어났다. 쪽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 간다고 말하고 당장 나와!>

홀에서 웨이터를 붙들고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다가 비니한테 납치당해서 식당 구석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딱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만들어 놓은 좁아터진 방이 정원을 한참 초과했다. 마키바 반장, 굽타, 크롬웰에다 비니…… 그리고 나. 니콜라스하고 내가 하는 얘기를 다 들었으니까 당연히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아예…… 수사를 접자.”

진이 다 빠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아 있던 마키바 반장이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왜 저한테 그러세요?”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이렇게 된 게 다 니 탓인 것 같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죽겠어요.”

말 한마디 하고 바로 방에서 나왔다. 반장 꼴 보기 싫어서 뛰쳐나온 게 아니라 아까부터 부대끼던 속이 확 뒤집어져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심해서 정말…… 이 무릉도원 같은 식당에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분위기가 괜찮았었는데…….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서 좀 전에 먹었던 오리고기를 다 토하고 얼굴이 허옇게 떠서 돌아오자 굽타가 걱정스런 얼굴로 의자를 밀어줬다.

“괜찮아?”

안 괜찮다. 전혀…….

“이제 어떡해요? 가서…… 뭐라고 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나보다 말주변도 좋고, 연애 경험도 많았다. 그러니까 제발 누가 지도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들 대답은 없고…… 대신 마키바 반장이 내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이건 또 뭐야?”

반장이 좀 전에 니콜라스한테서 선물 받은 시계를 보고는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좀 전에 받은 게 이거예요?”

크롬웰이 우와…… 하고 입안으로 감탄사를 삼켰다. 졸지에 남자친구한테서 받은 선물이나 자랑하는 푼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반장한테 잡힌 손을 비틀어서 잡아 빼고 소맷자락으로 시계를 가렸다.

“그때 호수에 빠져서 시계가 못 쓰게 됐을 거라면서 막무가내로 채워주는 걸…… 어쩌라고요?”

“자랑하냐?”

정말 너무 하시네. 다행히 굽타가 마키바 반장한테 입 닥치라는 사인을 보내고 앞을 막아섰다.

“그 시계 대신이라기엔 좀…… 그렇네. 최소한 만 불은 넘어 보이는 걸.”

믿었던 굽타까지 이렇게 나오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사달라고 졸라서 뜯어낸 것도 아닌데…… 왜들 이러냐?

“늑대 같은 놈…… 사람 꼬드기는 데는 도가 텄어. 안 그래도 애 상태가 어리바리하니까 아예 쐐기를 박겠다 이거지! 이런 다이아 잔뜩 박힌 시계 따위로…….”

마키바 반장은 니콜라스가 맘에 안 드는 걸까? 시계가 맘에 안 드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맘에 안 드는 걸까? 어쨌든 시계 얘기나 하면서 시간 보낼 때가 아니었다. 집에 간다고 말하고 나온 게 아니고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고 하고 빠져 나왔기 때문에 빨리 가 봐야 된다.

“못 간다고…… 해야겠죠?”

마키바 반장 기분을 더 거스르기 싫어서 조심스럽게 내 의견을 말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대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장이 내 멱살을 움켜잡았다.

“얕은 수 쓰지 마! 이런 식으로 은근 슬쩍 그 자식을 날려 보내고 싶어 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럼, 같이 간다고 해요?”

따지듯 되묻자 반장이 이번엔 내 얼굴을 자기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가긴 어딜 가! 그놈 하나 놓치는 것도 억울하고 속이 쓰린데, 짭새까지 한 마리 딸려 보내란 말이야?”

“이렇게 화만 내시면 어떡해요? 저 빨리 가 봐야 된다고요!”

“니가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저놈이 이렇게 나오느냐고!”

반장의 고함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요즘은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신경질인지 모르겠다.

“궁금하시면 그동안 녹음한 걸 다시 들어보시든가요!”

애초에 니콜라스와 데이트하라고 등 떠민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일이 뜻대로 안 풀리는 걸 다 내 탓이라고 덮어씌우는 거…… 불쾌하고 서운하다. 그동안 내가 겪은 일, 앞으로 겪을 일을 생각하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그동안 아껴놨던 독한 욕을 몽땅 퍼부을 기세로 반장이 움찔하는 순간, 굽타가 손으로 반장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에 크롬웰이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당황하지 말고…… 긴장 풀어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제이,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잖아요.”

니콜라스가 나더러 위니랑 이혼하고 자기 따라서 중국에 가자는데…… 별일이 아니라고?

“일종의 프러포즌데…… 그런 제안엔 할 수 있는 대답이 ‘예, 아니오’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또 있는데요?”

“가서 헤슬렘한테 ‘생각해보겠다’고 해요.”

아…… 그런 게 있었구나. 요즘은 별다른 활약이 없어서 크롬웰의 명성에 어느 정도 거품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크게 실례했다. 크롬웰은 천재다. ‘생각해보겠다’라니…… 지금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대처가 또 있을까?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한 다음에 며칠 두고 머리를 쥐어짜다 보면 정말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도 모르고…….

큰 걱정을 덜고 나니까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렸다. 그런데…….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됐다고 그러고 때려 쳐!”

여태 있는 듯 없는 듯 잠잠하던 비니가 간신히 안정을 찾아가는 방안 분위기에 초를 쳤다. 몰고 다니는 징크스가 무시무시해서 탈이지, 성격 모난 데 없고 긍정적인 녀석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즘 들어서는 매사에 어둡고 부정적이었다. 징크스가 부쩍 심해진 것도 문제지만, 안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칙칙하게 나오니까 그것도 적응이 힘들다.

“저 자식이 편의점 연쇄털이범이야? 연쇄살인사건을 어떻게 때려 쳐?”

비니의 태클에 안 그래도 심기가 많이 불편한 마키바 반장이 곧바로 응징에 나섰다. 하지만 비니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반장이랑 마주 섰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요.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뭔가…… 불길해요.”

“난 너하고 한 방에 있는 게 더 불길해!”

반장이 비니의 횡설수설을 한마디로 뭉개버리고 다시 나를 노려봤다. 다행히 굽타가 다시 반장의 입을 틀어막았다.

“긴장할 거 없어요, 제이. 당신은 잘하고 있어요. 너무 잘해서 탈이죠. 그러니까 가서 헤슬렘한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크롬웰이 반장한테 쥐어 잡혀서 구겨진 셔츠 앞섶을 매만져주면서 나를 격려했다. 역시 사람은 위기상황에서 진가가 나타난다. 경기 중에 선수를 링사이드로 불러냈으면 이렇게 현실적으로 도움 될 만한 조치가 있어야지…… 뭐냐? 반장은?? 하긴, 두 번 이혼 끝에 최근 2, 3년 동안은 강력사건 용의자 이외에는 여자는 구경도 못해본 반장이 남의 데이트에 훈수를 두겠다고 나서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크롬웰이 나를 의자에서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일이 있다든지, 속이 안 좋다든지…… 적당히 핑계대고 빠져 나와요. 지금 당신 상태로 봐선 같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어요.”

작전지시를 끝낸 크롬웰이 기운 내라는 뜻으로 나를 한번 안아주고는 등을 떠밀어서 거친 세상으로 내보냈다. 크롬웰한테 수사권을 빼앗길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는지, 반장도 자기 방식대로 작전지시를 했다.

“너…… 행여나 그놈 쫓아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마!”

자리에 돌아와 보니 니콜라스는 그 사이 새로 주문한 술을 반병이나 비우고는 나른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다.

지쳐 보였다. 그동안 오래 지켜보고, 몇 번을 만났어도 이렇게 지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몸이 안 좋은 건 아닐까? 갑자기 걱정스러웠다. 호수에서 니콜라스는 심하게 다쳤었다. 병원에 가 보질 않아서 어딜 얼마나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나흘 만에 회복되기엔 부상이 깊었다.

“왔어?”

“무슨 술을 이렇게 급하게 마셔요?”

니콜라스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화장실에서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어?”

급하게 작전회의하고 온 게 그렇게 티가 나나? 잠깐 서서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취했어요?”

적당한 기회를 봐서 크롬웰이 코치해 준대로 ‘생각해보겠다’고 대강 둘러댄 다음에 자리를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단 앉았다. 나도 힘들지만, 니콜라스도 이제 술은 그만 마시는 편이 낫겠다.

“아직은 괜찮아.”

“화났어요?”

니콜라스가 자기 잔에 술을 따르다 말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화를…… 내가 왜?”

“내가 같이 간다고 안 해서요.”

니콜라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깊고 부드러웠다. 얼른 할 말 하고 가야 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반이고, 계속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또 반이었다. 이 사람을 알고 난 이후로는 단순하고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내 말 한마디에 니가 당장 가방 들고 따라 나설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야.”

“다행이네요. 당장 공항으로 끌려가는 줄 알고 쫄았었는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간을 줄게.”

아무래도 작전회의를 다 들켰나 보다. 니콜라스가 이렇게 나오니까 맥이 탁 풀렸다.

“그래도 돼요?”

니콜라스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야.”

남은 술 반병을 사이좋게 나눠 마시고 식당 앞길에서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니콜라스의 무게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만취할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몸을 못 가누는 건 아무래도 안 좋은 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어렵게 잡은 택시에 니콜라스와 함께 올라탔다. 애초엔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전에 그 상처…… 별 탈 없는 거예요?”

“무슨 상처?”

축 늘어져 있던 니콜라스가 뜬금없다는 듯 되물었다.

“왼쪽 가슴 바로 밑에…… 찔린 상처 있었잖아요. 깊어 보이던데, 왜 병원에 안 가요?”

“괜찮아. 이제 다 아물었어.”

니콜라스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엉클었다. 나를 응시하는 니콜라스의 시선이 너무 반짝거려서 마주 보기 부담스러웠다.

“술을 괜히 마셨나 봐요.”

니콜라스의 시선을 피해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고가 아래로 보이는 시가지가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 같았다. 이 고가를 줄기차게 오르내리면서도 여기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이런 줄은 몰랐었다. 나는 대체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를 보고 다녔던 걸까?

“왜?”

“차 가지러 다시 오려면 번거롭잖아요. 몸도 안 좋은데…… 운전이라도 내가 할 걸 그랬어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니콜라스가 싱겁게 웃었다.

“왜요?”

“너 말이야, 나이든 모습은 어떨까…… 잠깐 생각해봤어.”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얼마나 나이든 거요?’

“일단 50대부터.”

헉, 50대…….

“얼굴에 주름도 질 거고, 배도 좀…… 나오겠지. 가슴 아프지만 귀여운 엉덩이도 탄력을 잃고 여기까지 내려올 테고…….”

“잠깐만요.”

이 사람이 진짜…….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건데요?”

“그냥……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니콜라스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서 나를 품에 푹 안았다. 운전기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 기겁을 해서 문 쪽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정말 궁금한 건…… 20년이나 30년이 지나도 그 눈빛이 지금 같을까 하는 거야. 넌 눈이 정말 예뻐. 선량하고 아름답고…… 영혼이 보이는 것 같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어디가 심하게 아픈 게 아니라면 아까 마신 술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와인이나 위스키 같은 거 마시고는 이런 적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됐지…… 뭘 더 바래요?”

니콜라스가 실없이 웃으면서 눈에 뭐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비볐다.

“그건 그렇다.”

웃는 얼굴도, 실없는 농담도 어째 좀 슬프게 들렸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을 즈음 니콜라스는 완전히 늘어지고 말았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구간구간 막히는 곳이 있어서 집에 오는 데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니콜라스의 회사에서 차이나타운은 별로 멀지 않지만, 해안 가까이에 있는 저택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니콜라스를 택시 뒷좌석에서 끌어내 거의 떠메다시피 2층 침실까지 데리고 올라갔다. 내일까지도 술이 안 깨면 차는 내가 가져다줘야겠다. 니콜라스의 차는 포르쉐 중에서도 나 같은 서민은 만져보지도 못할 정도로 하이클래스였다. 차가 아니라 거의 예술작품인데…… 그런 명품을 어수선한 식당 주차장에 마냥 대놓을 수는 없다. 비록 내 차는 아니지만 철딱서니 없는 동네 개구쟁이들 손에 차 옆구리가 긁히거나 라이트라도 깨지는 날엔 내 마음도 많이 아플 거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괜찮을까? 침실인데…… 괜찮겠지? 니콜라스는 지금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상태니까 나만 엉큼한 마음을 안 먹으면 위험한 일은 없을 거다. 잠깐 들어가서 니콜라스만 침대에 눕혀 놓고 얼른 나오면 일단 오늘 일은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침실로 한발 들이밀었다.

니콜라스의 침실은 하얗고, 썰렁하고, 살벌했다. 백만장자 취향을 내가 못 쫓아가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편하게 쉬기엔 지나치게 삭막한 방이란 느낌이 들었다.

웬만하면 방 분위기를 좀 바꿔 보지…… 이런 방에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돌아나가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침대에 니콜라스를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확인할 게 있으니까.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직접 보고 싶어서 셔츠를 들추고 니콜라스의 상체를 살펴봤다. 등하고 옆구리에 엄청난 넓이로 퍼져 있던 멍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가슴에 대각선으로 그어져 있던 할퀸 상처도 순조롭게 아물어 가는 것 같고…… 제일 걱정했던 왼쪽 가슴의 상처도 괜찮아 보였다. 예리한 것에 찔린 것 같은 상처는 여전히 붉고 선명했지만, 붓거나 곪는 기색은 없어서 일단 마음이 놓였다.

“괜찮다고 했잖아.”

니콜라스가 눈을 반쯤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럼…… 역시 술이 너무 독했던 걸까?

“쉬어요. 차는 내가 내일…….”

니콜라스가 내 머리를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지, 이런 식으로 말문을 막다니…….

“그만 갈게요. 오늘은…….”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니콜라스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와서 등을 더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그래서 니콜라스의 손을 잡아서 침대에 내리 눌렀다.

“그만해요. 몸도 안 좋잖아요. 그리고 나도 지금은…… 생각이 별로 없어요.”

“그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깨닫기도 전에 전세가 역전됐다. 니콜라스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어느 틈에 내 등이 침대위로 털썩 떨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전까지 몸도 못 가누고 해롱거리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팔팔해?

“취하고…… 아프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전혀.”

니콜라스가 맘 놓고 내 바지 벨트를 풀면서 대꾸했다. 이젠 말투도 분명하고 눈빛도 초롱초롱했다. 그럼 흐릿한 눈으로 사람 쳐다보고, 이상한 소리하고, 기운 없는 척 비틀거린 거…… 전부 다 쑈였냐?

“대체 왜…….”

“안 그랬으면 차이나타운에서 그냥 가버렸을 거잖아?”

이…… 비열한 악당!

니콜라스가 꼼짝도 못하게 내 두 팔을 찍어 누르면서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곳부터 전기가 쫙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 딸꾹질이 시작됐다.

“긴장 풀어.”

니콜라스가 내 셔츠를 헤치고 가슴에 입을 맞추며 태평한 소릴 했다.

“어떻게요?”

“글쎄…….”

어물쩍 대꾸하면서 니콜라스가 내 바지하고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그 바람에 놀라서 일단 딸꾹질은 멎었다.

“난 당신이 신사라고 생각했는데요…….”

니콜라스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일이지만 이렇게 음흉한 인간인 줄은 몰랐다.

“침실에선 안 그래.”

니콜라스가 뻔뻔하게 대꾸하면서 내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췄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사나운 키스에 숨이 막히고 정신조차 아득해졌다. 이렇게 습격당하는 것 같은 입맞춤은 별로라고, 키스는 부드럽고 달콤한 쪽이 취향이라도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니콜라스가 입술을 떼자마자 이번엔 내가 달려들어서 그 입술을 사납게 물었다.

사람 꼴 우스워지는 거 정말 한순간이다. 이러면 지난 번 호숫가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쩌다 일어난 사고라고 우길 수도 없어지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냐? 지금은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 남자를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남자 둘이 침대 위에서 싸운다고 할 정도 격하게 니콜라스와 부딪혔다. 지난 며칠, 아니 몇 주 동안 간신히 억눌러왔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버렸다.

두려움, 증오, 원망, 죄책감, 그리움…… 한동안 거칠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니콜라스를 찍어 누르고 배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노려봤다. 이 남자 때문에, 그리고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오는 슬픔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미안해.”

니콜라스가 사과했다. 담담하고 조용하게……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도 밝히지 않고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는 두 팔로 내 허리를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침대 위에 툭 밀친 니콜라스가 한손은 깍지를 끼고 다른 한손으로는 손목을 움켜쥔 채 매트리스 위에 꼼짝 못하게 내리 눌렀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꼼짝 못하게 잡혀버렸는데…….

“미안해.”

니콜라스가 좀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전엔 어땠더라? 그 호숫가 별장에서는…… 그때도 이렇게 삽입이 깊었나? 이렇게까지 아팠었나? 고통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니키…….”

그때도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 날뛰고, 바짝 마를 것 같은 갈증에 목이 탔었던 게 기억났다. 마치 한 몸처럼 가까이 있는데도 니콜라스가 그립고, 나를 응시하는 눈빛이 이렇게 다정한데도 그가 두려웠다. 모든 것이 그때와는 달랐지만, 동시에 똑같았다.

“아…….”

당황스러울 정도로 깊은 곳까지 니콜라스가 파고드는 순간에는 뒷골이 칼에 찔리는 것처럼 날카롭게 아팠다. 이런 아픔은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거다.

니콜라스가 나를 밀어 올릴 때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격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그저 사랑하는 것뿐인데, 그것조차 죄가 될까? 얼마나 죄가 크기에 이렇게까지 죄책감이 깊을까?

“제이.”

“괜찮아요.”

눈물이 흐르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니콜라스의 목에 팔을 감고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을 스치는 서늘한 바람 때문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볼 때마다 삭막하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던 니콜라스의 휑한 침실에 혼자 누워 있었다. 니콜라스는……?

몸을 일으키다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다시 쓰러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섹스를 한 게 아니라 복싱 12라운드를 풀로 뛰고 판정패를 당한 것 같았다. 당장은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아픈 게 좀 지나간 다음 고개만 들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떨어질 것처럼 반질반질하고 말끔하던 침실이 지금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 떼거리의 망나니들이 몰려와서 마약파티라도 한 것처럼…… 옷가지는 사방에 던져져 있고, 벽난로 앞에 반듯하게 놓여 있던 소파는 한참이나 옆으로 밀려나서 테라스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걸까? 소파에서도 한번 하기는 했었는데…….

문 옆에 잘 놓여 있던 팔걸이의자도 나동그라져 있었고, 창가 콘솔 위에 놓여 있던 화병도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 있었다. 그 바람에 화병에 한 다발이나 꽂혀 있었던 피처럼 붉은 장미꽃도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버렸다. 생각해보니까 발바닥이 욱신거리는 게…… 병 깨진 것도 모르고 생각 없이 움직이다가 장미가지를 밟는 바람에 가시에 찔려서 그런 거였다.

니콜라스는 어디로 간 걸까?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누가 오는 기척이 없었다. 출근했나? 아니지. 이젠 출근할 회사가 없는데…… 회사는 어제 날짜로 정리를 했으니까, 뭔가 처리할 일이 남았다고 해도 새벽같이 뛰쳐나갔을 리는 없고…… 이 사람, 혹시 집안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거 아닐까? 피차 무리한 건 마찬가지지만 니콜라스는 새벽까지 이런 난리를 치고도 멀쩡할 나이는 좀 지났다.

그런 걱정을 하며 아픈 걸 꾹 참고 몸을 일으켰는데, 나도 그럴 나이는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주로 몸 쓰는 일을 하면서 길에서 강도하고 격투도 해보고, 도망가는 갱단 조직원 쫓아서 두 시간 마라톤도 해봤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저리고 아팠다.

움직일 때마다 찢어질 것 같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고 일단 바닥에 떨어진 바지랑 셔츠를 대강 주워 입고 절룩거리면서 욕실로 갔다. 욕실엔 아무도 없었다. 응접실 겸 서재로 쓰는 옆방에도 없고…… 아래층에 내려갔나?

1층에도 사람이 있는 기척은 없었다. 워낙 조용해서 사람이 있으면 기척이 느껴질 텐데…… 니콜라스 찾는 건 잠시 미루고 먼저 주방으로 갔다. 아픈 거하고는 별개로 배도 많이 고팠다. 어제 저녁에 먹은 비싼 오리고기는 식당에서 다 토해버려서…… 지금은 속이 완전히 빈 상태였다. 그래서 일단 냉장고로 직행을 했는데,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한숨만 나왔다.

부잣집 냉장고 꼬라지가 이게 뭐냐? 이 커다란 냉장고에 달랑 맥주 한 병, 와인 두 병…… 냉장고 돌리는 전기가 아깝다.

뒤질 것도 없는 썰렁한 냉장고를 닫고 돌아서다가 주방 창 너머에서 니콜라스를 발견했다. 후원에 있었구나. 금방 비라도 올 것처럼 바람 불고 썰렁한데…….

백만장자 사업가, 아니 이젠 백수의 저택답게 이 집에는 아담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후원이 있었다. 화려한 장미정원, 하얀 대리석 분수, 자갈 깔린 산책로와 규모는 작지만 제법 모양을 갖춘 근사한 미로까지…… 후원으로 바로 통하는 주방 뒷문을 열었을 때, 니콜라스는 막 미로 입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후원 미로는 사실 미로라기보다는 뒤쪽에 펼쳐진 숲과 저택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나무 울타리였다. 구조도 단순해서 3겹의 키 큰 나무 울타리에 중간 중간 엇갈리게 아치형 출입구를 만들어 놓은 정도였지만 나무 울타리가 높고, 가지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안에 들어서니 진짜 미로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이리로 나가면 바로 숲인데…… 숲길이라도 산책할 생각인가? 새벽까지 그러고도 산책할 기운이 남아 있다니 대단한 체력이긴 하지만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가 아니었다. 슬슬 빗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찾아서 데리고 들어가야겠다. 집안에 먹을 게 있는지도 물어보고…….

미로 제일 구석에 나 있는 첫 번째 문을 통과했다. 안에서 보니 나무 울타리가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길었다. 정원에 이런 걸 만들다니…… 니콜라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젠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지만 내면에는 복잡하고 잔혹한 비밀을 숨기고 있으니까. 마치 미로처럼…… 그런데 가만있자…… 왜 숲이 안 나오지? 문 세 개를 다 지났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도저히 미로에서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너비 50여 미터에 겨우 3겹밖에 안 되는 미로를 10분이나 헤맸다.

내가 꿈을 꾸나? 아니면 미쳤나?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젠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경찰서 내 책상에서 화장실 가는 길이 이 미로보다 더 복잡한데, 여긴 대체 어디지? 후원 미로는 도저히 길을 잃고 헤맬 수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나무 울타리로 된 벽은 끝이 없고, 코너를 아무리 돌고, 문을 몇 개나 통과해도 번번이 또 다른 문과 벽이 나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더 걸을 기운이 없어서 바닥에 깔린 축축한 이끼 위에 주저앉았다. 2층 침실에서 내려다보면 생긴 게 빤히 보이는…… 2차원 평면구조 짝퉁 미론데, 어쩌다 내가 여기 갇혔는지 정말 모르겠다. 요즘 들어서 스트레스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했는데, 그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 뒷마당에서 길을 잃다니…….

이끼 위에 그대로 길게 누웠다. 기운도 없고, 또……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 정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얼굴에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느끼며 5분 정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지만 뭐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앞뒤로 뻗은 나무 울타리는 여전히 깊었고, 나는 그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다. 뭔가 다르다. 이게…… 뭐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건 빨간색 꽃잎이었다. 장미꽃잎인데…… 좀 전엔 여기 이런 게 없었다. 어디서 날아온 걸까?

일어나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이번엔 서너 장의 꽃잎이 나무 담장 저 편에서 하늘거리며 날아와 떨어졌다. 니콜라스의 정원에 가득 피어 있는 그 장미였다. 저쪽이 정원이다.

방향이라도 잡을 수 있으니 일이 한결 수월했다. 문을 서너 개 더 지나는 동안에도 꽃잎이 계속 미로 안으로 날아들었다. 정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흩날리는 꽃잎의 양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바람이 별로 센 것도 아닌데 웬 꽃잎이 이렇게까지 날리는 걸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무 울타리의 제일 가장자리에 난 문을 지났다. 드디어…… 미로에서 빠져 나왔다.

꽃잎이 춤을 추고 있었다. 아니, 날고 있었다. 수천 마리씩 떼로 몰려다니는 작은 새처럼…… 날아다니는 꽃잎은 피보다 더 붉었다. 아름답기도 하고, 동시에 오싹하기도 한 광경이었다.

회오리바람처럼 정원을 휩쓸던 꽃잎이 세찬 바람을 타고 내 쪽으로 몰려왔다. 급작스럽게 꽃잎 폭풍에 휘말려서 비틀거렸다. 잠시 나를 휘감고 정신없이 몰아치던 꽃잎이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게 꿈인지 생신지도 모르겠고…….

니콜라스는 정원 한가운데 있는 대리석 석대 아래 계단에 앉아 있었다. 바람에 빛바랜 갈색머리가 가볍게 날리지 않았으면 석대에 장식된 조각상처럼 보였을 정도로 그는 이 정원에 잘 어울렸다.

인기척을 느낀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봤다. 그와 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바람이 멎었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던 꽃잎도 공중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여긴 어떻게 왔어?”

니콜라스가 물었다.

“미로로 들어가는 걸 보고…… 따라왔어요.”

“길을 잘 찾는군.”

별로…… 잘 찾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꽃잎이 대리석 석대 위에, 사방을 원형으로 둘러싼 기둥 위에, 그리고 니콜라스의 머리와 어깨에 비처럼 내렸다. 지금 막 생각난 건데…… 여기, 처음 와 보는 곳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저택 후원과 비슷했다. 그래서 처음엔 후원으로 돌아온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저택의 후원 어디에도 저렇게 크고 높은 석대는 없었다. 석대를 둘러싼 열두 개나 되는 기둥도…… 미로로 둘러싸인 정방형의 이 정원은 니콜라스의 후원 전체보다 훨씬 더 넓었고, 꽃도 훨씬 붉었다. 여기가 어딜까? 그동안 이 저택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는데 왜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을까?

니콜라스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왜 나왔어? 잠깐 산책하는 사이도 못 견딜 정도로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비 맞으면 감기 걸려요. 나이 생각을 해야죠.”

니콜라스가 웃으면서 나를 끌어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않을 데가 필요했다. 그래서 니콜라스가 앉은 계단 한 칸 아래에 주저앉았다. 겉보기엔 단순해 보였던 그 미로에 숲속으로 통하는 비밀통로 같은 거라도 있었던 걸까?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뭐…… 그럭저럭…….”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의 후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미로가 이렇게 복잡한 줄은 몰랐어요.”

“미로라는 게 본래 그렇잖아.”

하얀 대리석 계단 위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는 꽃잎이 마치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같았다. 직업상 피를 볼일이 많아서 그런 걸까? 하얀 대리석에 붉은 꽃잎이라는 건 무척 아름다운 조합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론 오싹하고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석대는 아무 의미 없는 정원 장식품일까?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선 기둥도…… 이 비슷한 구조물을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무슨 생각해?”

“배고파요.”

“들어가자. 찾아보면 먹을 만한 게 좀 있을 거야.”

니콜라스가 가늘게 떨리는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냉장고…… 텅 비었던데요?”

“그럼 피자라도 시켜 먹든가.”

이 새벽에 무슨 피자……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키스를 했다. 한두 번 같이 자고 나더니 이젠 뭐…… 키스 정도는 그냥 맘 내킬 때마다 할 모양이다.

“당신은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요?”

“생각.”

“무슨…….”

무심코 되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곳을 어디서 봤는지 이제 기억이 났다. 이 비슷한 모양의 석대, 이런 모양으로 늘어선 기둥…… 전에 니콜라스하고 같이 갔던 그 고고학 학술 세미나에서 슬라이드로 봤던 사진 속의 신전이 꼭 이랬었다. 그 오래된 신전은 기둥도 거의 허물어지고 석대도 검푸른 이끼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이미지는 많이 달랐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다른 게 없었다.

“왜 그래?”

내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걸 본 니콜라스가 손등으로 내 얼굴을 쓸었다.

“아니, 그냥…… 그냥…….”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똑바로 앉아 있기도 힘들어서 계단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대리석 바닥의 찬 기운이 얇은 셔츠 너머로 온몸에 느껴졌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건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가 수사팀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범행현장이었다. 이 석대는 평범한 정원 장식품이 아니라 제단이었다. 지금은 꽃잎으로 덮여 있지만, 한때는 죄 없는 희생자의 비명과 붉은 피로 뒤덮였을…… 이곳은 니콜라스의 신전이었다.

“왜 그래?”

니콜라스가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서요.”

“여행에 대해 생각했어. 둘이 하는 여행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

“어딜 그렇게 가고 싶은데요?”

“어디든, 너하고 같이라면 늘 가던 곳도 처음처럼 느껴질 거야. 벌써 오늘 아침의 바람도 어제하고는 달라.”

“그래서…… 같이 가자고요?”

니콜라스가 슬픈 듯, 안타까운 듯 내 눈을 들여다봤다. 여태 봤던 중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인생은 굉장히 짧아. 서글플 정도로…….”

“사랑은 인생보다 훨씬 더 짧아요.”

“내 마음이 식기 전에 니 몸이 먼저 식을 거야.”

이번엔 내가 손을 뻗어서 니콜라스의 얼굴을 만졌다. 지금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이 제단에서 희생자의 숨통을 끊을 때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미로에 들어오지 말 걸 그랬다. 이 신전을 찾아낸 게 후회스럽다. 니콜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가냘픈 줄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젠 잡고 매달릴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다는 표현은 그냥 장난이었다. 발밑이 꺼져서 아득하게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눈을 뜨고 있는데도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당신하고 같이 가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나요? 인생이 짧다는 거 말고, 다른 거요.”

“지금 나를 놓치면…… 어디에서도 다시는 나를 못 볼 거야. 그건 이유가 안 될까?”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더 깊어지는 이상한 사랑에 빠졌으니까…….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는 것, 목소리를 듣는 것, 이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 심지어 꿈을 꾸는 것조차도 고통 없이는 불가능했다. 마음을 빼앗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리석은 탓이고 벌써 그렇게 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고통과는 별개로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일이 분명히 있었다.

니콜라스를 고의로 놔주는 일은 동료들을 배신하고, 비판 받고, 사직을 하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살인을 부추기고 방조하고…… 내가 곧 살인자가 되는 짓이었다. 이후에 따를 희생에는 분명히 내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선택만은 하지 않겠다고 요즘 들어서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최면을 걸듯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었다.

니콜라스를 이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리고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된 건 그보다 더 아팠다.

“혼자 가요.”

사랑 때문에 이런 짓을 하다니…….

“후회할 거야.”

“어차피 세상만사가 다 후회스러워요. 떠나요. 되도록 빨리, 그리고 되도록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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