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13번가는 오래된 극장과 공연장과 술집이 많아서 낮보다는 날 저문 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 많은 번화가였다. 오늘따라 길에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건 현장으로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거리는 더 혼잡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당장 급한 사건이 없는 짭새들이 몽땅 다 몰려와서 인상을 구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라가 발견된 곳은 클럽 뒷방이나, 인적 드문 도로변의 풀숲이 아니라 시내 한복판의 아파트였다. 로즈 10번 가부터 15번가는 작지만 비싼 고급 아파트가 많은 구역이라서 도난 신고는 종종 들어오곤 했지만 강력사건하곤 거리가 먼 괜찮은 동네였다.
이런 동네의 예쁜 아파트에서 미라가 나왔다는 사실도, 새까맣게 몰려와 있는 경찰관의 숫자도…… 심상치 않았다. 자오가 전한 건 그냥 또 다른 희생자가 발견됐다는 얘기뿐이었지만 뭔가 그 이상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오가 접근할 수 있는 한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첸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나는 반대쪽으로 내리려고 문을 열다가…… 황급히 뒷좌석에 얼굴을 박았다.
“왜 그래?”
첸이 물었다. 내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전방 10시 방향에서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꺼내 무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반장 코앞에다 차를 댈게 뭐냐?
“너 먼저 내려. 나는…….”
어렵게 얻어낸 휴가 기간 동안 첸하고 같이 있었던 걸 반장이 아는 건 반장하고 나, 모두에게 좋지 않다. 어쩌지? 이대로 차를 타고 한 블록 정도 더 가서 내릴까? 주변을 둘러보던 첸이 반장을 발견했는지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한 짓 하면 죽을 줄 알아!”
최대한 험악한 목소리로 녀석에게 경고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
놈이 반장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음흉하게 대꾸했다. 그것만으로도 간이 졸아드는 느낌이었다. 반장이 수상한 낌새를 채고 접근하기 전에 움직이는 게 낫겠다.
급한 대로 첸의 뒤쪽으로 몸을 날려서 길바닥을 굴렀다. 이렇게 하면 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반장은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금방 소나기라도 지나갔는지 길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어서 모처럼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무리도 아니다. 은색 포르쉐처럼 눈에 띄는 차에서는 정상적으로 내려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헉, 이 목소리는…… 고개를 들어보니 터너가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쉬가 커피 심부름이라도 시킨 모양이다.
“저기, 그게…….”
애초에 첸은 나를 현장에 데리고 오는 걸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워주기 싫으면 택시 타고 가겠다고 방방 뜨면서 첸을 밀고 차에 올라탄 건 나였다. 물론 택시를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간에 차이나타운 앞길에서 택시를 잡는 건 인내심과 순발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매우 어려운 종목이었다. 로즈 거리에서 찾아냈다는 시체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현장에 쫙 깔려 있을 짭새들 생각을 미처 못 한 게 실수였다.
“아파서 하루 쉰다더니, 왜 저 자식 차에서 굴러 나와?”
“못 본 척하고 그냥 가. 나중에 설명해줄게.”
첸의 차 바로 앞에 주차된 차까지 기어가서 차 옆구리에 몸을 바싹 붙였다. 보닛 너머로 슬쩍 넘겨다봤는데 막 도착한 앰뷸런스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반장님 때문에 그래?”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거지…… 뭘 물어?
“그만 일어나.”
터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날 거야. 그런데…… 반장님 어디 있는지 보여?”
일단 눈에 안 보여서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안 보인다고 벌떡 일어났다가 지척에서 반장이랑 마주치면 어쩌냐? 아직은 첸과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서 지금 들키면 그야말로 딱 걸리는 거다.
반장 보이느냐는 간단한 질문에 터너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응…….”
“어느 방향이야? 여기선 안 보여.”
터너가 커피 잔 든 손으로 내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거기…… 니 남자친구 바로 옆에.”
“…….”
조용히 일어나서 뒤를 돌아봤다. 첸 녀석 옆에서 담배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반장이었다. 그렇게 동작이 빠른 사람이 아닌데…… 언제 여기까지 왔을까?
반장은 그렇게까지 놀라거나,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대신 뭔가 포기한 듯 체념 섞인 표정인데…… 화를 내는 것보다 그게 더 맘에 걸렸다.
바싹 얼어 있는 내가 보기 딱했는지 터너가 에쉬 주려고 사 가던 커피를 내밀었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나는 본래부터 이런 일에는 운이 없다. 그러니까…… 뭔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했을 때 안 걸리고 넘어간 적이 거의 없다. 고등학교 때, 딱 한번 수업을 제끼고 영화 보러 갔을 때…… 위니한테 껄떡거리던 상급생하고 학교 뒷담 옆에서 한판 떴을 때…… 그 외 크거나 작거나 뭔가 사고를 칠 때마다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동양인 혼혈은 어디서나 눈에 띄었을 거고, 뭔가 잘못을 했을 때는 더욱 더 그랬을 테니까.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시간이 2, 3분쯤 흘렀다. 바로 길 하나 건너 저쪽은 행인 통제하고, 사방에서 카메라 플러시가 터지고…… 시체처리반이 몰려든 행인들을 비집고 들어가느라 난리가 났는데 이쪽은 공기가 한없이 싸늘했다.
이런 분위기, 정말 부담스럽지만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라서 아쉬운 대로 터너를 쳐다봤다. 터너는 어지간해서는 궁지에 몰린 친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외면했다.
그새 성격이 변했나? 터너가 내 눈을 피하면서 일없이 커피를 홀짝거리는 사이 반장이 천천히 다가왔다.
“왜 아무 말이 없어?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될 거 아냐? 나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여?”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할 말이 없다.
“죄송해요…….”
“뭐가 어째?”
내 짧은 한마디에 반장이 폭발했다. 죄송하다고 한 것뿐인데…… 그것도 진짜 죄송해서라기보다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니가 내 딸이었으면 당장 다리를 분질러서 방에 가뒀을 거야! 아들이었으면 두 다리를 다 분질러버렸을 거고!! 죄송하다면 다야? 이게 죄송하고 말 일이야?”
반장이 벼락 같이 고함을 치면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장이 무슨 험한 말을 해도 찍소리 없이 다 감수해야 할 처지였지만 달려드는 기세가 장난 아니게 험악했기 때문에 얼결에 옆에 있는 기둥 뒤로 몸을 피했다. 아니, 기둥이 아니라 터너 등 뒤로…….
자기 속도를 못이긴 반장이 터너를 들이받았다. 커피 마시면서 딴 생각하다가 불시에 반장한테 가슴을 받힌 터너가 억……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렸다. 터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살자니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딜 숨어? 이리 안 와? 우울하고 기운 없어서 일 못하겠다고 죽는 소리를 하기에 하루 쉬라고 했지, 저놈 만나서 놀라고 휴가 준 줄 알아?”
반장이 이성을 잃었다. 나 때문에도 화가 나고, 터지는 일마다 심상치도 않고…… 반장도 요즘 힘들다. 나를 잡아 죽일 듯 펄펄 뛰던 반장이 터너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뻗어서 내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런 기습에 기겁을 해서 반장한테 빌었다.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필요 없어! 사표 써! 사표 쓰고, 니 인생 니 맘대로 살아!!”
경찰은 공무원이니까 뭔가 중대한 비리나 실책이 있으면 옷을 벗어야 된다. 하지만 루크 첸의 중국집에서 술 한 병 마시고, 하룻밤 신세진 정도가 면직에 해당하는 중대한 비리라는 반장의 주장에는 동의 못하겠다. 게다가 전직이 강력반 형사라면 다른 직업 구하기도 쉽지 않다.
“진정하세요.”
터너가 마지못해 반장을 말리는 척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는 걸 보면 터너는 내가 이참에 반장한테 잡도리를 한번 당하고 정신을 차렸으면 하는 눈치였다.
“진정하기 싫어! 내가 강력반 반장 노릇 근 10년 하면서 별의별 부하 놈들을 다 만나봤지만 갱단 두목하고 정분난 놈은 여태 없었어!”
지금이 이럴 때가 아니란 건 알지만 귓불이 화끈해졌다. 거리엔 길 건너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서 모여 있는 동네 사람들이 족히 백 명은 될 것 같은데…… 갱단 두목하고 정분 어쩌고 하는 반장의 폭언에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나한테 쏠리고 말았다.
누가 반장 좀 말려줬으면 좋겠다. 나는 연쇄살인사건 희생자가 늘어 가는 게 안타까워서 담당도 아닌 사건에 득달같이 쫓아온 성실한 경찰일 뿐이다. 물론 갱단 두목하고 한 차를 타고 온 건 잘못했지만…… 길바닥에서 이게 웬 봉변이냐?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에쉬가 우리를 발견하고 길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에쉬는 말주변도 좋고, 상관들한테 두루 사랑받는 모범 짭새니까 반장도 에쉬 얘기라면 귀담아 들을 거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처음은 있기 마련이죠.”
이런 상황에선 제일 도움이 안 되는 놈이 반장과 나 사이에 톡 끼어들었다.
“당신 말이야…….”
반장이 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렸다.
“대체 제이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 거야?”
“딱히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좋아서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다. 이제 사람들한테는 길 건너보다 이쪽이 더 구경거리다.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어!”
첸의 기름진 대꾸에 반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꿍꿍이라니요?”
“뭔진 모르겠어. 어쨌든…… 그냥 좋다는 건 말이 안 돼. 쟤는 요즘 들어서 얼굴도 확 삭았고, 걸핏하면 우울증이니 뭐니 해서 상태도 안 좋아. 게다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박봉에 시달리는 평범한 짭새란 말이야. 그냥 좋다는 게 말이 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은근히 기분 나빴다. 하지만 막 바로 이어진 첸의 응수가 더 나빴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면 사랑이라고 하던데, 내가 그러면 꿍꿍이가 됩니까?”
첸이 사랑 운운하면서 뻔뻔하게 나오자 반장의 말문이 막혔다. 첸은 말싸움 상대로는 최악이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까.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반장이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한 걸 에쉬가 얼른 붙들었다.
“들었어? 저 자식이 제이를…… 사랑한대…….”
반장이 에쉬를 붙들고 신세타령을 했다. 반장의 푸념을 길게 들어줄 마음이 없는 에쉬가 반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간단하게 위로했다.
“안 그런 사람도 있나요?”
“진심일까?”
에쉬가 첸을 쳐다보는 눈빛은 불신 그 자체였다. 직업상 달리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뿐 아니라 에쉬는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다.
“진심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가겠어요?”
맞는 말이다. 지금은 짭새를 갖고 노는 게 재미가 나서 저러지만, 그 재미가 얼마나 갈까? 내가 노려보자 첸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런 말 믿지 마. 이번엔 오래갈 거야.”
첸의 장담에 터너가 불쑥 나섰다.
“오래, 얼마나?”
“내가 오래라고 했으면, 진짜 길고 지겹게 오래란 뜻이야.”
“니 마누라는 어쩌고?”
“나하고 쟤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집사람 얘기는 할 필요 없잖아?”
터너는 말이 짧은 대신 요점이 확실한 편이다. 첸의 불손한 대꾸에 터너가 한마디로 못을 박았다.
“경고하는데, 결혼할 거 아니면 옆에 얼씬거리지도 마!”
터너의 나지막한 음성과 살벌한 눈빛, 그리고 거대한 덩치에 위협을 느낀 자오가 얼른 첸 옆으로 붙어 섰다.
자오도 한 덩치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터너가 더 컸다. 하지만 자오는 쿠간 시 최대 범죄조직 보스의 보디가드인 만큼 뭔가 필살기가 있을 수도 있었다. 터너를 들어서 던지지는 못하겠지만…… 중국인이니까 쌍절곤 같은 걸 꺼내서 휘두를지도 모르고, 쿵푸 유단자일 수도 있었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상황 전개에 기대 가득한 눈길로 군침을 꼴딱 삼켰다.
싸움 구경이 재미있다고는 하지만 그보다는 안에 좀 들어가 봤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연방 경찰의 것으로 보이는 벤츠가 넉 대나 길가에 급정거하는 걸 보고 있자니 더욱더 마음이 다급해졌다.
시내 여기저기서 미라가 발견되는 건 보통 큰일이 아니고. 아파트에서 발견됐다는 미라가 벌써 네 번째니까 그것만으로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현장엔 구급차가 석 대나 서 있고, 연방 경찰까지 떼로 몰려온 걸 보니 처음 느꼈던 안 좋은 예감의 구체적인 가닥이 잡혔다. 희생자가 최소한 두 명은 넘는 거다.
연방경찰의 벤츠에서 줄잡아 열다섯 명 정도가 일사분란하게 뛰어내렸다. 얼핏 보니 노튼도 끼어 있는 것 같은데…… 저쪽은 나를 못 봤다.
더 늦으면 현장을 제대로 못 본다. 검시반도 와서 일을 시작했을 거고, 연방 수사관들까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곧 시체를 옮길 거고, 그 외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연방경찰이 몽땅 쓸어갈 거다. 그렇게 한번 쓸리고 나면 현장에 남는 거라곤 가족사진이랑 가구뿐이다. 연방경찰 관할로 넘어간 사건이니까 제대로 된 수사 자료를 받아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형편이었다. 그러니 말싸움을 하던 주먹질을 하던, 맘대로들 하시고…….
“어디가?”
눈에 안 띄게 빠져 나가려고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고 있는데 에쉬가 내 어깨를 잡았다.
“현장에.”
“가지 마.”
“현장은 봐야지. 연방 짭새들이 물어가기 전까지는 이건 내 사건이었단 말이야!”
언성이 좀 높았는지, 반장과 터너와 자오가 동시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라는 험악한 눈빛이었다. 이 상황에서 나를 보고 웃어주는 건 첸뿐이었다.
“가지 마. 너 때문에 터너랑 중국 거인이 한판 붙게 생겼는데…… 구경해야지.”
싫다.
“잘 봐놨다가 누가 이겼는지 나중에 얘기해줘.”
“말 들어. 웬만하면…….”
싫다는 데 이렇게 붙잡는 것도, 말꼬리 흐리는 것도 에쉬답지 않았다.
“웬만하면 뭐?”
“안 보는 게 낫다고. 현장 분위기가 뭐랄까…… 안 좋아.”
살인사건 현장에서 분위기 찾는 것도 에쉬답지 않고…….
“나하고 터너가 여기 제일 먼저 왔어. 근처에서 막 저녁 먹으려던 참에 호출을 받았거든. 솔직히…… 오늘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
아무래도 일이 걱정하던 그대론가 보다. 아니면 더 심하거나…….
“시체가…… 많아?”
“침실하고 거실에 널려 있는 시체만 여섯 구야. 천장이나 마룻바닥을 뜯으면 더 나올지도 모르고.”
현장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건물 경비원과 밀린 월세 독촉을 하러 온 관리인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벨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문을 따고 들어갔던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1층 로비에 정신이 반쯤 나간 채 앉아 있었다.
나도 아파트에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에쉬가 말했던 그 안 좋은 분위기, 그리고 어떤 냄새……. 동네 자체가 집값이 만만치 않은 부촌이기도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아파트 내부는 무척이나 튀었다. 붉은색 실크소파, 금박이 둘러진 가구, 크림색의 대리석 바닥, 그리고 사방에 붙어 있는 금발 미인의 사진…….
“집주인이야. 안나 로딕이라고…… 나이는 스물아홉. 직업은 모델인데 그렇게 유명한 모델은 아니고…… 이웃들 말로는 여행도 잦고, 파티도 잦았데. 시끄러운 이웃이었겠지.”
에쉬의 설명은 간단했다. 제일 먼저 도착했다고는 해도 이제 겨우 두세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까 그 이상을 알아낼 시간은 없었을 거다.
“유명하지 않은 것치곤 아파트가 고급인데?”
“물주가 있었겠지. 부업을 했거나.”
“집주인은 공범이야? 아니면 희생자야?”
“희생자.”
거실은 화려하고 비싸 보이는 가구가 많다는 것 말고는 특이할 게 없었다. 밀리거나 엎어진 가구도 없고, 여기저기 튄 핏자국도, 썩어 가는 시체가 풍기는 악취도 없었다. 미라가 발견됐다는 것 말고는 이곳이 살인사건 현장이란 걸 보여주는 정황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뭘까? 이런 느낌은…… 여느 사건 현장과는 다른, 뭔가 선듯하고 오싹한 기분이 드는데 이게 순전히 거실 구석에 구겨져 있는 저 앙상한 시체들 때문일까?
침실에 엉켜 있는 다섯 구의 사체까지 보고 나자 모호하던 느낌이 좀 더 분명해졌다. 이곳은 단순한 사건 현장이나 희생자의 아파트가 아니라 어떤 사나운 짐승의 소굴 같았다.
시체들은 침대 맞은편에 있는 장식용 벽난로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시체를 보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긴 지금까지 봤던 어떤 현장과도 달랐다.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에쉬도 같은 생각이 들었을까? 이 사람들은 살해당했다기보다는 잡아먹힌 것 같았다.
“왜? 무서워?”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데…… 첸이 내 어깨에 팔을 척 얹으며 속 뒤집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이 자식은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냐? 분명히 입구에서 주변 정리 중인 경관한테 붙들렸었는데…….
“여기저기 연줄이 좀 있거든.”
녀석이 뒤에 서 있는 노튼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그래…… 둘이 아는 사이였지.
“연줄까지 동원해서 비집고 올라온 이유가 뭐야? 관광?”
목에 감긴 팔을 풀어내고 놈을 옆으로 밀었다.
“그냥 궁금해서.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그냥 궁금해서 구경 온 게 아니야. 이 사건은…….”
“니 사건도 아니라면서?”
지금 이게 니 꺼 내 꺼 따질 상황이냐? 허허벌판에서 난데없이 미라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다음엔 둘, 그 다음엔 여섯…… 피살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었다. 이게 전부일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어느 곳엔가 또 시체가 이렇게 한 무더기 쌓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정신을 놓고 서 있었다. 그 틈에 놈이 다시 나를 끌어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덕분에 정신없이 움직이던 수사관들이 잠시 일손을 멈췄다.
“걱정 마. 애들 풀어서 이 잡듯 뒤지고 있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것도 걱정이다.
“그…… 뱀파이어 말이야?”
“아니면 누가 저런 짓을 했을 것 같아? 이 집 세탁실에 초대형 건조기라도 있을까 봐?”
처음에 이런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웃긴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하도 참혹하다 보니 내 마음이 살짝 뱀파이어 쪽으로 기울었다. 사람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기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 오컴 같은 괴물도 나타나서 한바탕 날뛰다가 비니한테 걸려서 비명횡사한 마당에, 다른 괴물이라고 없으란 법 있나……. 지난 일이라서 그렇지 오컴 때도 기함하게 놀랐었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으려고 머릿속으로 뱀파이어, 뱀파이어…… 되뇌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이것들이…… 어디서 연애질이야?”
반장이 버럭 소리를 쳤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셔? 침실 풍경이 하도 살벌한 탓에 정신이 잠깐 나가 있기는 했었는데…… 아, 여태 이 자식을 끌어안고 있었구나. 욕을 먹어도 싸다.
“연애질이 아니라 그냥…….”
“그냥, 뭐?”
반장의 추궁에 말문이 막혔다. 할 말도 마땅치 않고, 생각해보니까 진짜 연애질 같기도 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좀 놀라서요.”
“너…….”
반장이 잔소리의 융단폭격을 퍼부을 기세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반장 마음대로 성질부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등판에 연방 수사국 로고가 박힌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열댓 명이나 쏟아져 들어와서는 반장과 나 사이를 비집고 침실로 쏟아져 들어갔던 것이다.
방구석을 샅샅이 뒤지며 바닥에 떨어진 걸 닥치는 대로 주워 담던 수사관들이 다시 한 번 일손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현장이 수사관들로 터져나갈 것 같은데…… 이러면 초동수사에 문제가 생긴다. 더구나 수사관들이 현장 증거물도 제대로 수거하지 못한 상황에서 함부로 시체를 들어 옮기면…….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좀 전까지 나를 향했던 반장의 분노가 연방 짭새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반장한테 진로가 막힌 연방 짭새가 거실입구에 버티고 서 있는 노튼을 가리켰다.
“시체를 연구소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았는데요.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반장이 노튼을 노려봤다.
“문제가 있지! 아직 조사가 안 끝났단 말이야!”
자기 동료들이랑 뭔가 얘기를 하던 노튼이 그제야 반장의 불만을 눈치챘다. 반장이 노튼을 들이받을 듯 터프하게 다가갔다. 노튼이 반장의 기세에 밀려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 사건은 연방경찰 소관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반장은 사건이 어디 관할인지 몰라서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반장이 연방 짭새들의 일방적이고 무례한 일 처리에 막말을 섞어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래서! 당신들이 사건을 해결했어?”
반장이 나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아무 데나 푸는 사이에 첸이 침실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무신경하게 지껄였다.
“침실 좋은데?”
메마른 놈…… 시체가 다섯 구나 쌓여 있어도 좋으냐?
“쓸데없이 얼쩡거리지 말고 여기서 나가. 방안에 니 지문이라도 묻으면 연쇄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될 테니까.”
첸이 보란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대비가 나름대로 철저하다고 해야 할까? 이제 보니 까만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반장도 있고,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이니…… 얘를 어떻게든 내보냈으면 좋겠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다행히 첸은 미라가 쌓여 있는 침실보다는 거실에 더 관심이 있는지 침실 앞에서 물러섰다.
“저 여자가 이 집 주인인가?”
첸이 벽에 커다랗게 붙은 여자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응.”
“심각한 공주병, 아니면 모델…… 둘 중 하나겠네.”
“모델이래.”
내 대답에 첸이 고개를 끄덕이며 베란다 쪽으로 다가갔다. 아파트 크기가 아담한데 비해 베란다는 제법 넓었다. 첸을 따라서 베란다로 나갔다. 단서가 될 만 한 건 없는 것 같지만 번화가에 위치한 아파트 8층이라서 야경이 꽤 볼 만했다.
“대공은 이 집에 며칠 머물렀을 거야. 이따금 여기 서서 거리를 내려다봤겠지. 높은 바위 위에서 자기 사냥터를 내려다보는 맹수처럼.”
“구경 다 했으면 가라. 좀…….”
“여자를 해치우고 거리로 나가기까지는 오래 안 걸렸을 거야. 적응력이 좋은 편이거든. 영악하기도 하고. 처음엔 주변을 돌면서 산책을 하는 정도였을 테지만…… 곧 사냥하기 좋은 장소를 발견했을 거야. 여긴 극장이 많은 동네잖아. 그렇게 어둡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라면 놈에게는 파티나 마찬가지야. 처음으로 극장에 들어갔을 땐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걸?”
놈이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연쇄살인범이 뱀파이어란 전제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얘기는 그럴 듯했다. 그럼…….
“니네 클럽에선 시체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갔는데…… 티파니 샤오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감춰 놓은 걸까?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니까 머리를 쓰기 시작한 건가?”
내 질문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감추지 않았어. 사자가 사슴을 사냥한 다음에 그 흔적을 감추나? 대공은 귀찮은 거 싫어해. 그 때문에 놈이 지나간 자리엔 항상 저렇게 시체가 쌓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놈을 ‘죽음의 대공’이라고 불렀던 거야.”
첸의 말이 다 사실이고 그래서 놈의 별명이 그 지경인 거라면…… 진짜 살벌한 놈인가 보다.
“시체를 여섯 구나 아파트에 쌓아 놓은 건, 어쨌든 감춘 거잖아.”
“조심스럽기는 했겠지. 주변은 낯설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놈도 처음엔 겁을 먹었을 거야. 도시 환경이란 게…… 좀 그렇잖아? 그래서 처음엔 사람들을 소굴로 끌어들였겠지. 아주 가까운 데부터 시작했을 걸. 예를 들면…… 저런 데.”
첸이 가리킨 것은 두 블록 쯤 떨어진 사거리의 극장 간판이었다. 요즘 한창 흥행 중인 영화 포스터가 걸린 간판과 함께 심야 상영이란 광고가 무섭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골목 안쪽으로는 바도 있고, 새벽까지 영업하는 클럽도 있을 거고…… 헌팅이 목적이라면 이보다 더 입지가 좋을 수는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니 말은, 저 사람들이 제 발로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기꺼이 그랬겠지. 미남은 하룻밤 상대를 구하기 쉽거든.”
“미남……이라고?”
마치 범인을 본 것처럼 얘기를 하는 게 미심쩍어서 다시 물었다. 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렇던데?”
도시가 크고 사람이 많다 보니 원나잇을 스릴 넘치는 스포츠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섹스가 스포츠에 들어가는지 어떤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지만, 스릴 있는 건 사실이다. 실제로 위험한 일이니까.
“꽤 놀았나 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얘기다. 첸은 그동안 유명한 영화배우나 모델의 염문 상대로 심심찮게 매스컴을 탔었기 때문에 쿠간 시 암흑가를 접수하기 훨씬 전부터 나름대로 유명 인사였다. 유명 연예인들하고도 그 정도였으니까 이름 없는 일반인하고 소리 소문 없이 놀아난 건 셀 수도 없을 거다.
“넌 그런 적 없어?”
첸이 되물었다.
“없어.”
내 대답에 녀석이 피식 웃었다.
“고지식하기는…….”
“니가 문란한 거지.”
“최근에 여자랑 만난 게 언제였어?”
최근엔…… 없다. 하지만 첸에게는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얘기 하면서 노닥거릴 때도 아니고. 좀 전에 어디까지 얘기를 했더라…….
“니 말대로라면 경비원이나 이웃이 놈을 봤을 텐데?”
기껏 머리 굴려서 생각해낸 건데 첸이 너무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봤겠지.”
베란다에서 거실로 나오다가 하마터면 시체 운반 중인 들것을 덮칠 뻔했다. 반장의 항의도 사체 수거가 우선이라는 연방 짭새들의 작업 방침을 바꾸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현장은 연방수사관들이 접수한 상태라서 우리 쪽 수사관들은 이제 일손을 거의 놓고 있었다.
다들 하나 같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기분 나쁜 건 당연하다. 시체가 여섯 구나 쏟아진 현장에서 두 손 놓고 연방 짭새들 일하는 거 구경이나 하려고 경찰이 된 건 아니니까.
왜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걸까? 시체를 옮기는 일은 급할 게 없을 텐데. 연구소로 옮긴다고는 하지만 연방 수사 연구소에는 이미 저런 미라가 3구나 있다. 필요한 조사는 이미 다 마쳤을 테고 여기서 발견된 사체에 전에 없는 특이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저 사람들은 현장을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노튼한테 대들다가 현장에서 아예 쫓겨났는지, 반장은 아파트 밖 복도에 웅크리고 있었다. 직속상관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탱탱 부어 있는 걸 보고 마음이 편할 부하직원은 없다. 하루 이틀에 풀릴 화도 아니고…… 괜히 말 붙였다가 또 날벼락이나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뭐야?”
반장이 총알 빗맞은 멧돼지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슬금슬금 다가서는 나를 노려봤다. 아무래도 거리를 좀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얘기 나누기엔 조금 멀다 싶은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뭐냐고?”
“그러니까…… 범인이…… 며칠이라도 이 아파트에 머물렀다면 이웃이나 경비원이 범인을 봤을지도 모르니까…… 제 생각엔…….”
“몽타주 말이야?”
여태 단서 하나 없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제대로 된 몽타주라도 한 장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큰 수확이다. 하지만 반장의 반응이 어째 신통치 않았다.
“참 일찍도 생각해냈다. 그거라면 진즉에 작업 중이야.”
반장의 말을 듣고 나니까 내가 진짜 모자란 놈처럼 느껴졌다. 에쉬랑 터너가 현장 출동을 했었으니까 현장 확인하고 지원을 요청한 다음에 제일 먼저 이웃을 돌면서 목격자부터 찾았을 거다. 그야말로 수사의 기본인데 요즘은 무슨 마가 꼈는지 제대로 된 사건을 맡아본 적이 까마득했고, 그 바람에 기본도 다 까먹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뭐 다른 할 말은 없어?”
별로……
“저놈은 대체 어쩔 거야?”
반장의 신경질에 뒤를 돌아봤다. 뒤따라 나오면서 키득거리던 첸이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딴전을 피웠다.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건 진짜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마음이 복잡해져서 첸을 노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휴대폰이 울렸다. 첸의 전화였다. 녀석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나야.”
전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녀석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순간…… 내 신경도 덩달아 곤두섰다.
“……그래?”
내가 쳐다보는 걸 깨달은 첸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리고는 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은 최대한 음성을 낮췄지만 내 귀에는 녀석의 말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잡아둬.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고…….”
너 왜 이러느냐고 붙잡는 터너랑 반장을 뿌리치고 첸을 쫓아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통화 내용을 제대로 들은 것도 아니고 녀석도 급한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느낌이 왔다. 녀석의 부하들이 미라 연쇄살인범, 그…… 대공이란 놈을 찾아낸 거다.
“같이 가.”
“어딜?”
첸이 물었다.
“어디든…… 니가 지금 가는 데.”
녀석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곤 곧 표정을 지우고 시치미를 뗐다.
“그냥 개인적인 일이야.”
“구체적으로 대 봐.”
첸이 잠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적당히 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집사람 만나러 가.”
“웃기지 마!”
첸의 마누라가 어떤 여잔지는 몰라도 부하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 할 정도로 무섭지는 않을 거다. 그랬으면 그렇게 거칠 것 없이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니지도 못했을 테니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변명이 어설펐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녀석이 어깨를 들썩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솔직히 난, 널 어디든 데려가고 싶어. 드라이브, 쇼핑, 해안 별장…… 어디라도 괜찮고 언제라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안 돼.”
“왜?”
“너무 위험해.”
그렇게 잘라 말하고 첸이 나를 싹 지나쳐서 차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위험하다는 건 나도 안다. 범인이 진짜 뱀파이어라고 믿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인간일 리는 없고…… 놈은 백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슈퍼 사이코다. 당연히 위험할 거다. 하지만 아무리 위험해도 나는 범인이 어떤 놈인지 꼭 봐야겠다.
녀석을 밀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여기까지 올 때도 이런 식으로 묻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반응이 아까 하고는 상당히 달랐다.
“안 된다고 했잖아!”
첸이 차에서 내리더니 내 뒷덜미를 움켜잡고는 거칠게 차 밖으로 끌어냈다. 순식간에 포르쉐 뒷좌석에서 끌려 나와서 길바닥에 던져지고 보니, 놈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비해 완력이 대단했던 게 새삼 떠올랐다.
“왜 이래?”
나를 등신 머저리 취급하는 것도 불쾌하고, 길바닥에 밀어 던진 것도 화났다. 지금까지 놈에게 온갖 질 나쁜 시달림을 다 당했지만, 이런 종류의 폭력은 처음이라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한번 안 된다고 했으면 안 되는 거야.”
“왜 안 되느냐고!”
벌떡 일어나서 놈에게 대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어주고 싶지만…… 마음뿐이었다. 녀석 옆에는 항상 자오가 있으니까.
“위험하다니까!”
“말이 돼? 살인범 체포하러 가는 게 위험해서 안 된다니! 니 눈엔 내가 대체 뭘로 보여? 나는 강력반 짭새라고!”
내가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자 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 문을 땄다. 그리고는 긴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잘라 말했다.
“니가 무슨 말을 해도 그놈 근처에 널 끌고 갈 생각 같은 거 전혀 없어.”
그거야 니 생각이고…… 차가 움직이기 전에 어떻게든 따라 붙으려고 문손잡이를 덜거덕거려봤지만 벌써 잠겼다. 열이 뻗쳐서 놈이 앉은 방향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거칠게 내리쳤다.
“연쇄살인범 관련된 사안을 경찰 따돌리고 니네들끼리 이러는 거, 명백한 불법이야! 너한텐 그놈을 체포할 권한도 없잖아!”
하지만 정작 시커먼 유리창이 슥 내려갈 때는 속으로 흠칫했다. 특별 주문제작 포르쉐에 주먹질을 하다니, 내가 미쳤나 보다. 안에는 자오도 타고 있는데…… 다행히 걱정했던 자오는 미동도 없고 첸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자식을 체포하러 가는 게 아니야.”
첸의 음성엔 감정도 없고 체온도 없었다. 말 자체는 별 내용도 아닌데 그 목소리 때문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살짝 얼어 있는 나를 보고는 놈이 빙긋 웃으며 차창을 다시 올렸다.
“뒤로 좀 물러서. 위험해.”
나를 떨궈 놓고 은색 야수처럼 밤거리로 뛰쳐나가는 포르쉐 꽁무니를 쳐다보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했다. 저 자식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걱정도 되고, 완전히 무시당한 것 같아서 분하기도 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길래 그 따위 헛소리를 하는 걸까? 위험해서 안 된다니…… 이래 뵈도 내가 맷집은 쿠간 시 최곤데.
택시라도 잡아서 뒤를 쫓을까 생각해봤지만 현장이 혼잡해서 택시도 눈에 안 띄는 데다 포르쉐처럼 성능 좋은 스포츠카를 택시 따위로 추적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대로 녀석을 놓치는 건가?
저만치 떨어진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사라지는 첸의 차를 눈으로 쫓으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루크 첸의 주문제작 포르쉐에 필적할 만한 명차가 기적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쥬드 크롬웰의 재규어 XJ6였다.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당연히 쥬드에게 호출이 갔을 터…… 보통 때에 비하면 현장 출동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차가 밀렸든지, 멀리 떨어진 동네에서 악당이랑 데이트하다 뛰어왔든지……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어쨌든 내 입장에서 보면 타이밍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내가 많이 늦은 건가요? 현장 상황은 좀…….”
차에서 내리면서 다급한 어조로 묻는 쥬드에게 달려들어서 다짜고짜 손목을 비틀었다.
“무슨 짓이에요?”
쥬드가 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차 좀 쓸게.”
“뭐라고요?”
불시에 자동차 키를 강탈당한 쥬드가 다시 키를 뺏으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쥬드는 굽 높은 구두를 신었고, 나는 갈 길이 바빴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면 쥬드는 다 이해할 거다. 그리고 나서 호시탐탐 독차로 내 목숨을 노리겠지만…….
첸의 차를 추적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면 시내는 어디나 제 속도를 내기 어려울 만큼 도로가 혼잡했다. 포르쉐 아니라 페라리라도 날개를 달지 않는 이상 이 시간대에 시내에선 시속 30~40킬로미터로 슬슬 기어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역시나…… 차가 사라진 코너를 접어들자마자 바로 앞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린 포르쉐가 눈에 딱 들어왔다.
차량 두 대 정도를 사이에 두고 슬슬 녀석의 뒤를 밟았다. 이러다 외곽 도로로 빠져서 전속력으로 내달린다고 해도, 쥬드의 재규어 정도면 얼마든지 따라 붙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첸의 포르쉐는 정체가 점점 심해지는 중심가 쪽으로 파고들 뿐, 좀처럼 방향을 바꿀 조짐이 안 보였다.
시내 한복판에서 무슨 볼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시내 중심을 관통하는 이 혼잡한 도로보다는 킬리요크 강변도로를 끼고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가브리엘 듀이>
시내의 수많은 쇼핑몰 가운데서도 값비싼 명품만 취급하는 부유층 대상의 백화점으로 나 같은 서민은 들어갈 일도 없고, 들어가 봐야 현관 매트 한 장도 사들고 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혼잡한 길바닥을 비집고 어렵게 앞으로 나가던 첸의 포르쉐가 멈춰선 곳은 하필이면 그 백화점 정문 앞이었다. 뚜껑이 열린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녀석과 자오가 차에서 내려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화가 나서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로 마누라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그럼 위험하다는 둥, 그놈 근처에 나를 데려갈 생각 없다는 둥…… 그건 다 무슨 소리였어? 분명히 그 대공이란 놈과 관련된 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반장이나 다른 친구들의 오해도 무릅쓰고, 쥬드의 재규어까지 강탈해서 쫓아온 건데…… 또 낚인 거야?
여태까지는 첸이 너무 교활해서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번번이 걸려드는 걸 보면 내가 너무 멍청한가 보다. 요즘 들어서 하도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다녀서 그런가, 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바보가 돼 가는 것 같았다.
혼잡한 백화점 앞길이라 잠깐 정차해 있었을 뿐인데도 뒤에 밀린 차들이 클랙슨을 두드리고 난리가 났다. 이대로 차를 돌려서 로즈 거리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반장하고 터너한테는 뭐라고 하나…… 그리고 쥬드는…… 이 차는 쥬드 허락 없이 만지기만 해도 죽음인데 거기다 손목까지 비틀었으니, 앞으로 닥칠 핍박은 지금까지 겪었던 소소한 왕따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처절할 터, 이번 일로 짭새 생활을 아예 접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첸…… 그 자식이 괘씸했다. 놈이 유부남이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막상 마누라를 보러 가는 놈의 뒤통수를 지켜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정말 나를 갖고 놀았구나 싶기도 하고, 놈이 나쁜 놈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기분 상하고 우울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다음 사거리에서 차를 돌리려고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다가 다시 차를 세웠다. 뒤쪽에서 시커먼 승합차가 다섯 대나 비집고 들어와서 차선을 온통 막아버렸던 것이다. 딴 생각하느라 이런 차들이 몰려오는 것도 몰랐다.
덩치 큰 승합차들 틈에 옴짝달싹 못하고 끼어 있으려니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던 참에 느닷없이 인도 쪽에서 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서 간이 툭 떨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인도 쪽을 내다보니 차도에서 진행이 막힌 승합차 두 대가 인도로 주행 중이었고 그 바람에 길을 걷던 행인들이 놀라서 도로로 뛰어내리거나 백화점 건물 쪽으로 몸을 피하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그렇지, 뭐 이런 경우 없는 놈들이 다 있나 싶어서 어안이 벙벙한데, 이번엔 어떤 놈이 내 차 뒤꽁무니를 터억…… 들이받았다.
정신이 반쯤 나가서 차에서 뛰어내렸다. 세게 받힌 건 아니었다. 모든 차량이 서행 중이었기 때문에 세게 받고 싶어도 그럴 여건이 안 된다. 하지만 가해 차량이 워낙 육중한 승합차라서 부딪힌 강도에 비해선 손상이 컸다. 뒷 범퍼 오른쪽이 심하게 찌그러지고 깜빡이 나가고…… 정말 살 수가 없다. 이게 누구 찬데…… 여태 지은 죄만 해도 사형감인데, 차를 이 꼴을 만들어서 갖다 주면 쥬드가 나를 산 채로 뜯어 먹겠다고 덤빌 거다.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찌그러진 재규어 범퍼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자니 가해 차량에서도 사람이 내렸다.
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이걸 어떻게 할 거냐고 대판 따지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고 뒷걸음질을 쳤다.
가해 차량, 그러니까 그 시커먼 승합차에서 내린 것은 한 떼거리의 무장 괴한들이었다. 게다가 내 차를 들이받은 차에서 뿐 아니라 좀 전에 인도를 타고 달려서 백화점 정문 앞에 급정차한 차량과 내 차를 추월해서 앞서 가던 차에서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뒤집어쓰고 손에는 자동 소총을 움켜쥔 괴한들이 일사분란하게 쏟아져 나왔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경미한 접촉사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라서 눈치껏 차에 바싹 붙어 섰다. 저쪽도 남의 차를 들이받은 일 따위 신경 쓰는 기색이 전혀 아니고…… 내리자마자 나한테는 눈길도 한번 안 돌리고 곧바로 백화점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뭐야? 저 놈들…… 지금 백화점을 털러 가는 거야?
놈들의 행색이나 행동은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고 해도 무장 강도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승합차만 해도 일곱 대. 한차에 열 명만 잡아도 70명이었다. 연방 은행도 아니고, 70명이나 되는 무장 강도가 백화점을 털러 간다는 게 말이 되나?
멍청한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머리를 제대로 굴려 보자. 저렇게 떼로 몰려다니는 소속불명의 무장괴한들은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니콜라스 하나 잡자고 몬티첼리 저택을 흔적도 안 남기고 쓸어버리고, 오컴을 잡겠다면서 버젓이 사람 사는 동네에다 기관소총이며 로켓포를 날려대던 위험천만한 사이코들이다. 소속을 나타내는 견장이나, 별다른 특징이 없는 놈들이니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스타일이 어디 가나? 분명히 그 놈들이다.
놈들이 몰려왔다는 건 뭔가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의미였다. 일을 제대로 하는 건 한 번도 못 봤지만 출동만큼은 진짜 신속하게 하는 놈들이니까. 루크 첸 혼자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쇼핑중인 마누라를 데리러 가는구나 싶었지만, 저 사이코들까지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걸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대공이란 놈이 안에 있는 거다.
안에서 벌써 무슨 일이 있는지 백화점 쇼핑백을 움켜쥔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건물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라는 그 사이코들은 자기네 목표물을 제거하는 것 외에는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는 무도한 놈들이었다. 설상가상이라고 백화점은 한창 사람이 많을 시간이니 이거야말로 우려하던 상황 중에 최악이었다.
잘 모르겠다.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할지, 서에 보고를 먼저 해야 할지…….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현재로써는 서에다 보고할 것도 없고 지원을 요청할 근거도 없었다. 대공이란 그놈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봤다 한들 그놈이 미라 연쇄살인범이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우리 경찰서의 모든 타격대를 다 동원한다고 해도 기사단 70명의 화력을 당해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까딱 잘못해서 타격대와 기사단이 정면으로 붙기라도 하면 궁전같이 번쩍거리는 백화점 건물이 한순간에 전쟁터가 되고 말 거다.
이 시간대, 이 정도 규모의 쇼핑센터라면 안에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몰려나오는 인파를 거슬러서 건물 안에 진입하는 데만 해도 5분 넘게 걸렸다. 잠깐 사이에 족히 5, 6백 명은 빠져 나간 것 같은데도 1층 로비는 아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에스컬레이터 통로도 내려가려고 서두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서둘러 대피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건물 전체에 울리는 화재경보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연기라든지, 타는 냄새 같은 게 전혀 없는 걸 보면 사람들을 내보내려고 일부러 경보를 울린 것 같았다. 화재경보는 이렇게 큰 건물에서 사람들을 단시간에 내보내기에 제일 빠른 방법이니까 머리를 잘 쓴 거다. 전엔 시민의 안전 같은 거 안중에도 없던 놈들이었는데…… 웬일이냐? 몇 주 못 본 사이 철이 좀 들었나?
몰려나가는 인파를 피해서 급한 대로 화장품 코너 구석에 붙어 섰다. 대강 살펴본 바…… 1층엔 그 말썽꾸러기 기사단 놈들이 없었다. 70명이나 몰려 들어오는 걸 분명히 봤는데, 잠깐 사이에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70명이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지만 8층짜리 대형 쇼핑몰, 지하층도 최소한 5층 이상이라는 건물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무작정 뒤지고 다니는 건 내키질 않았다.
잠시 그렇게 서서 건물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놈들을 찾아내는 편하고 확실한 방법은 기다리는 거다. 놈들은 비까번쩍한 개인 화기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놈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기사단은 본래 조용히 다니는 놈들이 아니다.
백화점 직원들이 서둘러서 모든 출입문을 완전히 개방한 덕에 건물이 빠른 속도로 비어가고 있었다. 이제 꽉 메어 있던 에스컬레이터 통로도 좀 여유가 있을 정도니까 위층에 있던 사람들도 대강 빠져 나온 것 같았다.
처음에 우려했던 큰 인명피해는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한시름 놨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등장을 알리는 오프닝 음향, 팝콘 터지는 듯 요란한 총성은 어디서도 들리질 않았다.
언제까지 화장품 코너에 붙박이장처럼 서 있는 것도 바보 같아서 10센티미터도 넘을 것 같은 하이힐을 신고 절뚝거리며 뛰어가던 중년 부인을 잡아 세웠다.
“위층에서 총 든 남자들 못 보셨어요? 까만 옷 입고, 스키 마스크 쓰고…….”
하지만 부인은 탐문에 영 비협조적이었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냥 손을 내저으면서 앞 사람을 쫓아가기 바빴다. 생각해보면 화재경보에 놀라서 정신 놓고 달려 내려온 사람들이니…… 옆에서 군부대가 구보를 했어도 알아채지 못했을 거다.
역시 방법은 층층마다 돌아다니며 무작정 찾아 헤매는 것뿐인가? 일을 좀 편하게 해보려고 해도 나한테 걸린 일이란 게 다 이 모양이다.
‘죽음의 대공’이 위층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을 확률하고, 지하 주차장에서 헌팅을 하고 있었을 확률……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일단 지하로 내려가 보자. 주차장이라면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 외에는 시야를 가리는 시설이 없는 공간이니까 수색도 수월할 터였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를 달려 내려가서 지하 1층을 반쯤 돌아봤을 즈음…… 이번에도 번지수가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희미한 총성이 들려온 것은 건물 위층이었던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간간이 들리는 총성은 더 크고 분명해졌다. 그리고 교전 현장인 5층까지 뛰어올라갔을 때는 본격적인 총격전이 벌어진 듯 엄청난 총성이 고막을 찢을 것처럼 거칠게 울려 퍼졌다. 수십 명이 동시에 집중사격을 하지 않고는 낼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거기에 두서없이 들려오는 고함 소리, 비명소리, 또 끊이지 않는 총소리…… 에스컬레이터가 5층에 미처 닿기도 전에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5층은 완전히 전쟁터였다. 매장 한복판으로 연결되어 있는 에스컬레이터 통로로는 5층에 진입할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5층에 막 올라서려는 순간, 어떤 놈이 나를 향해 총질을 해대는 바람에 그걸 피하다가 아래층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일의 양상이 지난 번 오컴 때하고 흡사했다. 그때도 놈들은 지금처럼 한 떼거리나 몰려왔었고, 오컴 한 마리만으로도 충분히 살벌하고 위험한 동네를 아예 생지옥으로 만들어 놨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놈들은 시중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중화기를 온 몸에 휘감고도 겁에 질려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허둥거렸고, 대응이 과했던 거다. 이제 와서 그때 일로 기사단 녀석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오컴은 정말 겁낼 만했다. 하지만 살인범 하나 잡자고 70명이나 몰려와서 저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했다. 일만 터졌다 하면 꼬박꼬박 끼어들어서 저게 무슨 주접이냐?
기사단 등쌀에 에스컬레이터 통로를 포기하고 비상계단을 찾았다. 비상계단 통로에 들어서자 잠시 잠잠하던 총격이 다시 시작됐다. 대체 저렇게까지 할 게 뭐가 있을까?
그동안 강력사범 검거를 부지기수로 해본 입장에서,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범인이 무장을 하고 있는 경우엔 물론 총격전도 벌어질 수 있고 상황이 더 어렵다면 우리도 타격대를 동원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쳤다. 놈들이 계속 저러면 범인을 잡기 전에 건물이 먼저 무너질 거다.
아무래도 서에 지원요청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시내 한복판에서 장사 잘하던 백화점이 전쟁터로 변했으니 경위야 어찌 되었든 경찰도 상황은 알아야 된다. 그리고 상황이 나 혼자서 어떻게 해볼 만큼 만만치도 않았다. 기사단 애들이 겁에 질려서 인기척만 나도 벌집을 만들어버릴 기세로 소총을 갈겨대는 통에 어디로도 움직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서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가 3개나 떠 있었다. 진동으로 맞춰 놓고 잊고 있었는데, 3번 다 쥬드 전화였다. 마침 잘됐다. 서에 전화를 하느니 쥬드한테 하자. 쥬드도 타격대 출동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대체 무슨 일이에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쥬드가 사납게 따졌다.
“얘긴 나중에 하고, 여기 <가브리엘 듀이> 백화점인데…….”
「어디라고요?」
쥬드의 음성이 한층 더 까칠해졌다.
“하툰 거리에 있는 번쩍거리는 백화점 말이야.”
「가브리엘 듀이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알아요. 지금 설마 거기서 쇼핑이라도 하고 있는 거예요?」
어허, 사람을 어떻게 보고…….
“타격대 있는 대로 긁어서 보내줘. 여기 완전히 전쟁터야.”
뭐라고 대답이 없었다. 너무 단도직입적이라 감을 못 잡은 눈치였다. 이런 일은 어떻게 설명을 하나…… 고민스러워서 머뭇거리는 사이, 위층에서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귀가 다 멍할 지경이었다.
「지금 들린 게…… 총소리는 아니죠?」
어지간히 놀랐는지 쥬드가 말을 더듬었다.
“왜 아냐?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일단…….”
바로 그때…… 고막이 터질 듯 엄청난 폭발음이 울리면서 비상계단 입구가 눈앞에서 터져나갔다.
꼼짝할 수가 없었다. 주변은 어둡고, 등과 다리에는 건물 부서진 잔해 같은 것이 떨어져서 묵직하게 내리 누르고 있었다. 눈을 뜨고도 얼마간은 내가 왜 여기 이렇게 쓰러져 있는지 이유가 생각나질 않았다. 머릿속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려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조차 부옇고 불분명했다. 선명한 거라곤 머릿속을 찌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두통뿐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자 뜨겁고 끈끈한 어떤 것이 이마와 목 언저리로 주룩 흘렀다.
얼마나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어디를 다쳤는지 전혀 모르겠다. 정신을 잃기 직전의 폭발과 폭음…… 또 뭐가 있었지? ……시체.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말라비틀어진 끔찍한 주검들. 하나씩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이어서 루크 첸, 그 빌어먹을 자식 얼굴이 눈앞에 불쑥 나타났고……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내가 여기 이렇게 엎어져 있는 이유가 두서없이 떠올랐다.
손가락부터 천천히 움직였다. 다행히 부러진 데는 없어서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첸의 중국집에서 잘 자고, 잘 얻어먹은 덕에 몸 상태는 괜찮았었는데…… 이걸로 다 도루묵이다. 머리도 머리지만 폭발 때문에 파편이라도 박혔는지 어깨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바지 무릎이 온통 피투성이인 걸 보면 나가떨어지면서 무릎도 어딘가에 되게 찍힌 모양이었다.
쥬드한테 지원요청을 하던 중에 날벼락을 맞았으니 지원이 제대로 올지도 의문이었다. 몸도 안 좋은데 그냥 죽은 척하고 근처에 구겨져 있을까? 아니다. 움직이자.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오고 있다.
“8층엔?”
“없습니다.”
“확실해?”
떠들면서 내려오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최소한 네댓 명 이상이었다.
“옥상까지 다 뒤졌는데 흔적도 없습니다. 위로 올라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곧 경찰이 들이닥칠 텐데…….”
허겁지겁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사이를 기어서 매장 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놈들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가는 그대로 벌집이 되고 말 거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일단 갈기고 보는 놈들이니까.
“분대장님?”
비상계단을 타고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 같던 놈들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여기…… 좀 전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안 보이는데요.”
저거, 내 얘기다.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잔해에 깔려 있는 나를 봤던 모양이다.
“죽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분대장님인가 하는 놈이 건성으로 지껄였다. 아무 관심도 없는 투였다.
“깨어나서…… 어디론가 간 걸까요?”
“우리 목표는 대공이야. 다른 건 신경 쓸 거 없어.”
멀리서 또 한 차례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아래쪽이었다. 총소리 때문인지 놈들이 아래층으로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들이 터뜨린 벽에 사람이 깔려서 쓰러져 있는 걸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는 얘기다. 기본적인 윤리의식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기사단은 무슨 얼어 죽을! 저놈들이 조폭, 떼강도랑 다를 게 뭐냐?
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퍼부은 다음에 눈에 흘러 들어간 피를 훔치고 주변을 둘러봤다.
매장 안의 조명이 반도 넘게 나간 데다 좀 전에 폭발 여파 때문인지 아직 시야가 분명하질 않았다. 게다가 눈으로 자꾸만 피가 흘러드는 바람에 주변 파악이 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흐릿한 눈에도 5층은 전체가 박살났다는 표현 이외에 달리 설명할 말을 못 찾을 정도로 참혹했다. 여긴 본래 의류와 스포츠용품 같은 걸 파는 매장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성한 옷도, 제자리에 걸린 물건도 없었다. 게다가 기사단 놈들이 날려댄 로켓포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것이…… 화재위험까지 다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심장을 서늘하게 만든 건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까만 옷을 입은 저 남자들은 분명히 기사단원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았다. 내가 앉아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해도 3명…… 일방적인 총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죽은 게 아니라 그냥 정신을 잃은 게 아닌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거리가 좁혀질수록 기사단원으로 보이는 저 남자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바닥에 고인 엄청난 피만 봐도 그건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선명한 붉은색을 띄고 있는 피 웅덩이를 밟는 순간 찰박…… 하고 피가 발에 감기는 느낌이 어찌나 섬뜩한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짙은 피 냄새 때문에 속이 역한 걸 꾹 참고 남자에게 다가가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안으로 비명을 삼키며 황급히 물러섰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남자의 옆구리는 장이 다 쏟아질 정도로 심하게 벌어져 있었다. 총격을 당한 것 같지도 않고, 날카로운 것에 베인 상처도 아니었다. 상처부위가 피범벅이라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건 찢어진 상처 같은데, 신체에 이런 종류의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무기가 뭘까…… 생각해봐도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오컴과 그 피해자들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건 물어뜯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속옷 코너에 구겨져 있는 또 다른 기사는 목이 부러졌고, 그 바로 옆의 남자는 척추가 부러진 듯 허리가 심하게 꺾인 것 외에도 온몸이 끔찍하게 뒤틀려 있었다. 곳곳에 그런 시체가 널려 있었다. 특수부대를 능가하는 수준의 중무장을 하고도 이렇게 당했다면 오컴만큼이나 위험한 놈이라는 첸의 말이 괜한 허풍이 아닌 것 같았다. 범인이 뱀파이어라는 게 사실일까?
대강 눈에 띄는 기사단의 시체만 해도 대여섯 구…… 몬티첼리 저택을 습격했을 때나, 오컴이 나타났을 때보다는 덜하지만 이 정도면 기사단의 피해도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놈들이 몬티첼리 저택을 습격해서 파티 손님들을 학살하는 걸 본 이후, 그리고 팔이 다 떨어질 지경이 된 니콜라스를 헬기로 끌고 가는 걸 본 다음부터는 놈들이 무슨 짓을 해도 좋게 봐 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좋은 일 하는 것도 못 봤고…….
어쨌든 사망자 중에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휘말린 것으로 보이는 일반인도 서너 명이나 되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기사단의 소행이었다. 총격에 얼굴이 반이나 날아간 여자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에게 이 여자를 꼭 죽여야 할 절박한 사정 같은 게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쏟아져 있는 속옷 무더기에 주저앉았다. 진동하는 피 냄새와 화약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첸 그 자식은 어쩌자고 이런 난장판에 끼어든 걸까? 잔머리야 초고속으로 돌아가는 놈이지만, 총이나 제대로 쏠 줄 아나? 배가 찢어지고 목이 부러진 기사단원의 시체를 본 순간…… 사실은 놈이 걱정스러웠다.
아니, 그놈이 무슨 걱정이냐? 자오가 항상 붙어 다니는데. 지금은 내가 걱정이다. 지원 없이 혼자서 뭘 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지금 같아선 괜히 돌아다니다가 기사단 놈들한테 걸려서 총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어쩐다…… 좀 전에 엿들은 대로라면 경찰이 오긴 오는 모양이니까 넉넉잡아서 20분 정도만 버티면 살 길이 트일 것도 같은데……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뭔가 기척이 들려온 곳은 매장 뒤쪽이었다. 속옷인지, 수영복인지를 입은 모델의 전신 액자가 부서진 채 가로막고 있어서 몰랐는데…… 뒤쪽에 피팅룸이 있었다. 부상자라도 있는 걸까?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보니 피팅룸 안쪽도 어지간히 부서진 상태였다. 입구 바로 옆에 젊은 여자가 앉은 채로 죽어 있었다.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안에 있었든지, 급한 대로 이리 들어와 숨은 모양이지만 합판으로 만든 이런 가벽으로는 스콜피오처럼 성능 좋은 자동소총에서 쏟아져 나오는 총알을 막을 수 없다.
잘못 들었나?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아니, 분명히 누군가가 있다. 안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팅룸엔 칸막이가 3개였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칸막이는 집중적인 총격에 문짝까지 다 떨어져 나간 상태라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바닥에 흥건한 피는 세 번째 칸막이 안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세 번째 칸막이 문을 밀었다. 순간, 배를 움켜쥔 채 칸막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환한 금발에 에메랄드 같은 녹색 눈동자를 가진……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예쁜 여자였다. 아니…… 남자다.
“움직이지 말아요.”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남자를 일단 눌러 앉혔다. 배에 총을 맞은 게 분명하고, 출혈도 엄청났다.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가 전부 이 남자가 흘린 거라면 아직까지 의식을 잃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금방 경찰이 올 겁니다. 구급차도 올 거고…… 그러니까…….”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 걸까? 남자가 일어나려고 한 손으로 다시 바닥을 짚었다. 남자는 지금 쇼크 상태였다. 심한 부상을 당하고도 이렇게 버둥거리다가 상처가 더 악화되거나 출혈이 심해져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남자를 부축해서 일단 칸막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피가 고이지 않은 곳을 가려서 다시 앉혔다. 남자가 깊은 숨을 들이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 두면 얼마 못 버틸 거다. 어떡하지? 머리가 아프기만 하고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살려야 되는데……. 그러니까 일단 지혈을 하고…… 지혈을…… 뭘로?
남자를 앉혀 놓고 피팅룸을 나왔다. 장소가 백화점 의류매장이니만큼 지혈대로 쓸 만한 물건은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스카프 몇 장을 주워서 다시 피팅룸으로 들어갔다. 아직까지 놈들이 다시 몰려오는 기척은 없었다. 좀 전부터는 총소리도 잠잠했다. 대공을 아직 못 찾은 걸까? 아니면 경찰이 온다니까 이쯤에서 철수를 해버린 걸까?
피팅룸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입구에 있는 여자하고 똑같아서 멈칫했다. 죽은 걸까? 다행히도 남자는 곧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색을 곱게 입힌 유리 같았다. 20대 중반도 안 돼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살다 보면 정말 재수 옴 붙는 경우가 있고, 나도 심하게 재수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백화점에 쇼핑하러 왔다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 정말 운이 없다. 아니, 그래도 살아 있으니까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일까? 입구에 죽은 채로 앉아 있는 저 여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고사하고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죽었을 거다.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지혈이라곤 하지만 스카프로 동여매는 정도의 어설픈 조치가 이 남자한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바싹 다가앉자 남자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살기가 돌았던 건 잠시뿐이고, 말 한마디 채 끝내기도 전에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하고 말았다.
“난 경찰이에요.”
남자의 얼굴에 묻은 피를 스카프로 대강 닦으며 안심을 시켰다.
“경……찰?”
“서에서 지원이 도착하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지혈을 할 거니까…… 힘들어도 참아요.”
남자의 허리에 스카프를 두 번 둘러 감은 다음 단단히 묶었다. 굉장히 아팠을 텐데 남자는 매듭을 지을 때 얕은 비명을 한번 질렀을 뿐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지 않으니 편하긴 하지만 이건 절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남자는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실제로 부축해서 바닥에 눕히자마자 남자의 고개가 옆으로 툭 떨어졌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해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스카프로 몇 번 동여맸다고 피가 금방 멈추는 것도 아니고…… 이 남자는 절대 이 상태로 20~30분을 더 버틸 수 없었다. 이렇게 젊은 애가 쇼핑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죽다니…… 사건현장에서 부상자를 보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혹은 살고, 혹은 죽고…… 이런 일도 직업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하려고 애는 쓰지만,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핏기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휴대폰 생각이 났다. 내 휴대폰은 비상계단이 터질 때 날아가 버렸지만, 피팅룸 입구에 앉아 있는 저 여자 핸드백에는 휴대폰이 있었다. 있는 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여자의 가방에서 막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기약도 없이 죽치고 있느니 쥬드한테 전화로 지원요청을 확실히 하고 현 위치를 알리자. 지원이 도착하는 시간만 구체적으로 알아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을 거다.
“으악!”
전화기를 찾아보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발목에 뭔가 끈적하고 차가운 것이 감겼다. 발목에 붙은 걸 경황없이 털어 내고 벽에 붙었다. 놀라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나도 지금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이렇게 심하게 놀라면 같이 정신을 잃을지 모른다.
대체 좀 전에 그게 뭐였을까? 호흡을 가다듬고 내려다보니……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남자가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화벨 소리에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내가 어디론가 가는 줄 알고 발목을 잡았고…… 별것 아닌 일이긴 하지만 아직도 심장이 펄떡거렸다. 발목을 잡혔을 때 느꼈던 그 음산한 냉기는 남자의 손에서 잔뜩 엉킨 채 굳어가는 피 때문이었을까?
“혼자 두고 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저쪽에 전화가 와서…….”
다시 남자에게 다가갔다. 일어나려고 뒤척거리는 걸 말리려고…… 남자가 손을 뻗어서 내 이마를 만졌다. 남자의 손끝에 미처 마르지 않은 내 피가 묻었다.
“배고파. 목도 마르고…….”
남자가 중얼거리며 손가락에 묻은 피를 혀끝으로 핥았다. 그리곤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다. 맛이 별로 없나 보다.
“목, 목이 마르면…… 저기…….”
느낌이 이상하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니…… 생긴 거 하곤 달리 스산한 구석이 있는 애라고 생각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피팅룸 자체가 본래 좁은 공간이라서 입구까지의 거리가 불과 2미터 정도였다.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자 더 이상은 갈 데가 없었고…… 여자의 핸드백이 발에 밟혔다.
핸드백을 뒤져서 분홍색 크리스털이 빼곡하게 박힌 휴대폰을 찾아 들자마자 여태 울리던 벨소리가 뚝 끊어졌다. 가족, 아니면 친구 전화였을 거다. 통화를 하게 되면 휴대폰의 주인이 왜 전화를 받을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것도 난감했을 텐데……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 다시 전화를 하겠지만.
쥬드의 휴대폰 번호를 누르면서 남자 쪽을 힐끔 봤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예 나갔다고 해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좀 전에 너무 놀라서 이젠 저 남자 가까이는 가기 싫었다. 구급차가 올 때까지 곁에 있어줄 거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 보호하겠지만…… 되도록이면 근처엔 가지 말자.
「여보세요?」
“나야.”
내 목소리를 들은 쥬드가 헉, 하는 한숨을 토해냈다.
「괜찮아요?」
“지원이 언제 오느냐에 따라서 달라.”
「아까 그건 무슨 소리였어요? 뭔가 터지는 것 같던데…… 건물 안에 있어요? 다치진 않았어요?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어디예요? 상황이 어때요?」
폭발음과 함께 전화가 끊어져서 쥬드도 걱정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질문에 두서도 없고, 끝도 없었다.
“5층 스포츠 용품 코너에 있는 여성용 피팅룸에 갇혀 있어. 그리고 상황은 아주 안 좋아.”
「소방차하고 구급차가 그쪽으로 가는 길이예요. 도로사정이 안 좋아서 10분 정도 걸린다는데…… 버틸 수 있겠어요?」
구급차가 10분이라…… 생각보다 시간은 괜찮다. 그건 그렇고.
“소방차라니?”
「가브리엘 듀이에서 화재 신고가 들어왔어요. 나도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고…… 그러니까 타고 갈 차를 구하는 대로요.」
기사단 놈들이 아무 데나 로켓포를 갈겨대고 있으니까 곧 불도 나겠지만 당장 급한 건 소방차가 아니다.
“화재가 아냐! 여긴 지금 무장한 사이코들한테 점령당했어! 소방차가 아니라 타격대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많이!!”
「백화점에…… 강도가 들었어요?」
쥬드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이렇게 눈치가 없지 않은데…… 하긴, 직접 목격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강도가 아니라…….”
「서장님한테 보고하고, 우선 터너하고 에쉬를 데려갈 수 있으면 같이 갈게요.」
터너하고 에쉬가 쓸 만한 짭새들이라는 사실에 태클을 걸 생각은 없다. 하지만, 무장한 사이코가 70명인데 걔네 둘을 어디다 갖다 붙이냐? 턱도 없는 소리다. 쥬드한테 상황을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 망할 기사단 놈들 얘기를 간단하게 요약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남자가 다시 눈을 떴다.
“터너한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이 떴다고 말하면 상황을 알 거야. 오컴 때보다 숫자가 더 많은 것 같다고 얘기하고…… 그리고, 당신은 올 거 없어.”
「무슨 소리예요? 차 때문에라도 가야죠!」
차 얘기가 나오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저 또라이들 차에 들이 받혔으니 보험처리는 어림도 없을 거고, 내 한 달 월급으로 깨진 깜빡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마당에 차가…… 문제야?”
중간에 말을 좀 더듬었더니 쥬드의 음색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설마 무슨 사고가 난 건 아니겠죠?」
“…….”
「제이!!」
변명할 말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남자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내 손에서 전화기를 낚아갔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와.”
남자가 휴대폰을 꺾어서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지르고 주저앉았다.
남자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는 것까지는 나도 봤다. 그리고 쥬드가 꺼낸 차 얘기에 놀라서 아주 잠깐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어느 틈에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걸까?
“어, 어떻게…….”
이러면 안 되지만, 정말 기절할 것 같았다. 남자가 기척도 없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도 간 떨어질 일이지만, 이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도 이 정도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놈들이 온다고.”
놈들? 어떤 놈들? …… 아, 걔네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나 싶어서 귀를 기울여봤지만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내 대꾸에 남자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나를 문 옆으로 밀었다.
“냄새가 나.”
배를 움켜쥔 채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냄새…… 라고?
남자는 10미터 정도 걷다가 골프용품 코너에서 걸음을 멈췄고, 그때쯤은 나도 정신이 돌아와서 서둘러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지금 이렇게 움직이면 남자는 죽는다.
“당신은 지금 부상이 심해. 잘못하면 죽는다고!”
대리석 선반에 머리를 대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힘들게 고개를 들었다.
“너…… 좀 이상하다?”
“니가 더 이상해!”
일단 남자를 부축했다. 되도록이면 가까이 안 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러면 어쩔 수 없다. 일단 부축은 했는데…… 어디로 가지? 좀 전의 그 피팅룸이 숨기는 괜찮은 장소였지만 두께 1~2센티미터짜리 합판은 믿을 만한 엄폐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발각되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막다른 구석으로 자청해서 들어가는 게 썩 내키질 않았다. 더 안전한 장소가 없을까? 딱 10분만 버티면 되는데…….
막막했다. 장소가 하필이면 백화점이라 숨을 만한 곳도 없었고, 간신히 몸이라도 가릴 만한 곳은 죄다 부실한 가벽뿐이었다. 언제 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부상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도 없고…….
“내려가.”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다시 피를 토했다. 4층이 여기만큼 부서지지 않았다면 시간을 벌기엔 거기가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을까? 남자의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3가지였다. 에스컬레이터, 비상계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통로를 택한 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엘리베이터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비상계단에서는 거친 군화발 소리가 들려왔다. 놈들이 다시 돌아온 거다.
남자를 끌고 경황없이 에스컬레이터 통로로 뛰었다. 하지만 부상자를 떠메고 움직이는 나보다 놈들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라서…… 우리가 에스컬레이터에 미처 닿기도 전에 놈들이 매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상계단 쪽에서 매장 한복판에 위치한 에스컬레이터 통로까지는 뭐 하나 제대로 서 있는 게 없을 정도로 싹 쓸린 상태였다. 누굴 찾아서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 통로에서 허둥거리는 내 모습이 똑똑히 보였을 거다.
그럴 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확인도 경고도 없는 무자비한 총격이 쏟아졌다. 남자를 끌어안고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통로를 말 그대로 굴러서 내려왔다. 에스컬레이터 계단은 보통 계단하고 달라서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힐 때마다 온 몸의 뼈가 다 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망할 자식들!! 에스컬레이터 통로를 구른 게 벌써 두 번째였다. 게다가 부상자까지 있는데…….
남자는 완전히 뻗었다. 죽은 게 아닌가 놀라서 두서없이 흔들었더니 다행히 인상을 쓰면서 내 손을 밀어내긴 했지만…… 지혈한 보람도 없이 온 바닥이 다 피였다. 하긴, 이 몸으로 계단을 굴렀으니 지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추적자의 발소리가 어느 틈에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대공인지 뭔지…… 그놈을 잡으러 왔으면 그놈이나 쫓아다닐 일이지, 엉뚱한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모진 행패를 부리는 이유가 대체 뭐냐? 놈들과 사이에 묵은 원한도 있고, 지금 하고 다니는 짓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도 총을 빼 들었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통로 위쪽으로 되는대로 갈겼다.
아무 놈이나 맞아 죽었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저쪽은 헬멧에 방탄조끼까지 보호 장비도 빵빵했다. 그런데다 내가 가진 총알은 열다섯 발뿐이었고, 여벌의 탄창도 없었다. 이런 마구잡이 총질에 한두 놈 맞아서 쓰러진다고 해도 놈들에겐 그렇게 큰 타격이 아니었다. 시간을 좀 벌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봐야 몇 분이 고작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반격에 놈들이 주춤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살 길이 있긴 있을까? 인원도, 화력도 저쪽이 압도적이었다. 차라리 피팅룸에 그냥 숨어 있었으면 상황이 이보다는 나았을까? 놈들이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더는 희망이 없었다.
혼자라면 살 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쥬드가 말한 시간 안에 소방대가 도착한다면 10분 정도는 놈들을 따돌릴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오래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혼자 갈지, 같이 죽을지…… 당장 결정을 내려야 했다. 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협사격을 하면서 놈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사격 개시에 나도 총알이 있는 한 응사했다. 제대로 조준도 안 하고 그냥 쏜 총알에 한 놈이 맞았는지 무서운 기세로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 신음 소리는 컸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놈은 다리에 한방을 맞은 것뿐이었다. 총 맞은 다리만큼이나 계단 모서리에 부딪힌 어깨도 아플 거다. 어쨌든 덕분에 놈들이 다시 멈췄다.
이제 남은 총알도 없고,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마침 지금 위치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엘리베이터 한 대가 문이 열린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쓰러진 안내 표지판에 문이 반쯤 물려서 열렸다 닫혔다 하는 걸 보니까 고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혼자서 용하게도 반쯤 몸을 일으킨 남자를 끌어안고 전속력으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었다.
내가 남자를 데리고 뛰어든 엘리베이터는 그냥 평범한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타원형의 유리캡슐로 된 동체에, 청동과 도금한 파이프로 장식된…… 러시아 황제나 타고 다닐 만한 초호화판 엘리베이터였다. 이 백화점은 4층부터 1층까지는 홀 중앙이 뻥 뚫린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 엘리베이터는 길이 2미터짜리 초대형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함께 백화점 중앙 홀을 장식하고 있는 움직이는 장식품이었다.
고장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지만 걸려 있던 안내판을 밀어내자 곧 문이 닫혔고, 1층 버튼을 누르자 문제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여도 문제였다. 엘리베이터가 전시용 장식품이다 보니 움직이는 속도도 한심해서 거의 놀이공원 관람차 수준이었다.
힘들게 잡아탔는데, 이게 뭐냐? 답답한 마음에 유리벽에 주먹질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내가 탄 엘리베이터가 복장이 터질 정도로 느릿느릿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바로 옆에 있던 다른 한 대의 엘리베이터는 비슷한 속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이 난리통에 어떤 놈이 위층에 올라가나 했더니…… 첸, 저 자식, 저기 있었네!
내가 녀석을 본 것과 거의 동시에 녀석도 나를 봤다. 비록 느려 터진 장식용 엘리베이터지만 교차하면서 서로의 놀란 얼굴을 쳐다본 시간은 불과 2 ,3초 정도였을 거다. 놈이 백화점 내부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놈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동시에 화도 났다. 저 자식도 가비우스 또라이들하고 한패다. 지금 당장도 녀석 뒤쪽엔 시커먼 기사단 놈들이 대여섯 명이나 버티고 있었다. 기사단 놈들을 잡을 수 없다면 저 자식한테라도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묻고 말 테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우선은 엘리베이터가 제발 빨리 좀 내려갔으면 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바로 머리 위에서 살벌한 총성과 함께 총알이 쏟아졌다. 이건 첸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감행해온 공격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그런 식으로 공격을 당하면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같이 있는 사람을 끌어안고 외벽이 보기보다 튼튼하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이 개새끼!! 얻다 대고 총질이야?”
한 차례 총격에 엘리베이터 외관을 장식하고 있던 청동 파이프가 떨어져 나가고 2중 강화유리에 금이 쫙쫙 갔다. 다행히 아직은 총격에 뚫리지 않았지만 2차 공격에는 버티지 못할 거다.
어이가 없다. 기사단 놈들은 본래 그런 놈들이니까 기대하는 거 전혀 없지만, 첸 저 자식은…… 뭐야?
나를 죽일 작정일까? 음흉하고 못된 놈. 백날 좋다고 쫓아다녀봐라! 넌 이제 완전히…… 그때, 뭐가 무거운 것이 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천장에 떨어져 내렸다. 그 충격에 엘리베이터가 한번 크게 흔들렸고 나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엘리베이터 속도가 아무리 느려도 4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 2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특히…… 첸이 엘리베이터 외부에 둘러진 파이프를 붙잡고 바깥에 매달려 있는 걸 봤을 때는 길어도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동 파이프를 움켜쥔 채 위태롭게 매달린 녀석이 유리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금이 가 있던 유리벽이 녀석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쩍쩍 금이 가고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무슨 짓이야? 정신 나갔어?”
“내려!”
깨진 유리벽 너머로 녀석이 소리쳤다.
“이 자식아! 간 떨어질 뻔했잖아! 거기 매달려서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리란 말이야!”
“엘리베이터가 멈춰야 내리지, 벽이라도 들이받고 뛰쳐나가란 말이야?”
이 자식, 올라가던 엘리베이터에서 이리로 뛰었나 보다. 그게 아니곤 저렇게 밖에서 매달릴 도리가 없었다. 기사단 애들만 미친 줄 알았는데, 저놈은 거기서 한술 더 뜬다. 좀 전에 나한테 총질해댄 건 뭐고, 지금은 왜 저렇게 매달려 있는 건데? 그건 그렇고…… 이거 왜 이렇게 안 내려가지? 이러다 저 자식 떨어지겠다.
엘리베이터가 1층 로비에 닿기도 전에 첸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순간 간이 철렁했지만 착지가 깔끔한 걸 보니 크게 다치지는 않았겠다. 어쨌든…… 이제 기사단 놈들 총에 맞아 죽을 염려는 안 해도 되는 걸까? 아니다. 좀 전에 한 짓을 생각해보면 저놈이 제일 위험할 수 있었다.
거의 의식이 없는 남자를 끌어안고 1층 로비로 내려섰다. 하지만 1층 돌아가는 상황은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엘리베이터 입구에 어느 틈에 스무 명도 넘는 기사단 놈들이 몰려와 있었고, 정확히 나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놈들의 선두에 첸이 버티고 있었다.
그동안은 저 자식이 비록 나쁜 짓은 해도 정신 상태는 정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한테 총질을 한 것도 그렇고, 좀 전에 선보인 엘리베이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뛰는 묘기도 그렇고, 저 미친 것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어쩔 거야?”
첸과 나 사이의 거리는 불과 2, 3미터였다. 하지만 감정적인 거리는 그보다 훨씬 멀었다.
“이쪽으로 와.”
첸이 손짓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녀석의 얼굴이 마치 가면을 쓴 것 같았다. 왜 저렇게 굳어 있을까? 녀석이 이렇게까지 긴장한 건 처음 봤다.
“이쪽으로 오라고.”
녀석이 재촉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무장병력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사람을 빙 둘러싸고 있으면서, 게다가 나는 무기도 없고 부상자까지 떠메고 있는 판인데 뭐가 무서워서 저렇게 바싹 얼었을까? 저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두려움이 틀림없는데…… 어쨌든 오라고 하길래 한 발짝 다가갔다.
내 몸만 해도 천근인데 축 늘어진 남자까지 끌고 힘들게 걸음을 옮겼건만, 반응이 안 좋았다. 내가 움직이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나한테 총질을 해댈 기세로 스콜피오를 바싹 치켜들었다. 특히나 자오 옆에 서 있는 놈은 총을 들고 얼마나 떠는지…… 당장이라도 총구에서 총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서워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만 오란 말이야. 그 자식은 거기 두고…….”
첸이 짜증을 냈다.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대체 왜 이래? 사람 다친 거 안 보여? 얘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된단 말이야! 이러다 죽는다고!!”
“절대 안 죽어!”
첸이 말리는 자오를 뿌리치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던 남자가 그때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총성이 먼저 울렸고, 어깨가 불에 타는 것처럼 아팠다. 몸이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시간이 길고 길었다. 내 몸이 중력을 벗어난 것 같았다. 마치 허공을 유영하는 것처럼 한동안 공중에 떠 있었다.
어깨부터 바닥에 떨어졌는데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나한테 총질을 한 놈이 자오한테 한 대 얻어맞고 뒤쪽으로 날아가 떨어졌고, 기사단 중 몇 놈은 총부리를 겨눈 채 점점 다가오는 중이었다. 첸은 그냥 그렇게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모든 것이 마구잡이로 편집된 조잡한 영화처럼 의미 없이 눈앞을 스쳐 갔다. 의식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 지금 눈을 감으면 다시는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이 느껴져야 된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과 고통을 일깨운 것은 머리 위에서 들려온 총성이었다. 지척에서 들려온 다발적인 총성에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무자비한 통증 때문에 온 몸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총상을 입었던 게 언제였었지? 그때도 이렇게 아팠었나?
끝도 없는 총소리…… 비명……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고 총성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눈앞이 흐릿한 와중에도 그 남자…… 방금 전까지 과다출혈로 축 늘어져 있던 남자가 기사 중 한 놈을 붙들고 있는 게 보였다. 한 팔로는 기사의 목을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놈의 소총을 비틀어 잡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저 남자는 도저히 저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기사들이 먼저 총질을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가 먼저 기사단을 공격한 걸지도 모르겠다. 붙들린 기사가 몸을 빼내려고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게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손에 쥔 소총에서 총알만 헛나갈 뿐, 빠져 나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넋 놓고 올려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발목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총알이 팝콘처럼 튀는 위험지역에서 나를 끌어낸 건 첸이었다. 발목을 잡고 되는 대로 당겨서 끌어내는 바람에 기사단 놈들 군화 발에 등짝 밟히고, 머리 차이고…… 죽는 줄 알았다. 녀석의 거친 행동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더 심한 짓을 한다고 해도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일단 격전지 한복판을 벗어나자 녀석이 나를 옆에 있는 가방 매장 유리 선반 뒤로 냅다 던졌다. 다분히 감정이 실린 행패였다. 선반에 어깨를 된통 부딪치는 바람에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내 목소리는 저쪽에서 들리는 위급한 고함 소리와 총성에 파묻혀서 내 귀에도 제대로 안 들렸다.
선반 뒤로 던져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본 건…… 기사 한 놈을 잡고 있던 남자가 반원형으로 빙 둘러선 기사단 놈들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자기네 편이 잡혀 있거나 말거나…… 기사단은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이어진 근거리 사격으로 남자의 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너…….”
첸의 얼굴이 두 개로 나눠졌다가 어설프게 겹쳐졌다.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중이었다. 의지는 이제 별 도움이 안 된다. 출혈이 이 상태로 계속되면 곧 의식을 잃을 거다. 첸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정신이 깜빡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녀석이 총 맞은 쪽 옷깃을 조심성 없이 틀어잡았기 때문이었다. 아우, 어깨야…….
“아파!”
“당연히 아프겠지. 총에 맞았으니까.”
놈이 내 셔츠 앞섶을 잡아 뜯으며 퉁명스럽게 지껄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파서 기절할 것 같은데 총 맞은 어깨를 이리저리 뒤집고, 꾹꾹 누르고…… 아무리 내가 내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고 해도, 이러기냐? 너??
“그나마 한 발만 맞은 걸 천행으로 알아. 그라하 공작의 기사들은 인정사정 안 봐주는 놈들이야.”
첸이 총 맞은 자리에 손수건을 대고 누르면서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렇게 아플 바엔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낫겠다. 그때 홀 중앙에서 다시 산발적인 총성이 들려왔다.
“기사는 무슨 얼어 죽을…….”
남자는 이미 죽었을 거다.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가 아픈 것만큼이나 마음이 아팠다.
“대체 왜 이래? 니네들, 이게 다…… 무슨 짓이야?”
“너야말로 대체 왜 이래?”
나를 한대 칠 것처럼 녀석의 기세가 험악했다. 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지…… 멀쩡한 백화점 건물 하나를 다 쓸어버리고, 쇼핑하던 사람들까지 닥치는 대로 쏴 죽인 주제에 누구한테 큰소리냐?
“오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말 했잖아!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니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들어야 된다는 거야? 니가 뭔데? 니가…….”
“시끄러!!”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내 심정도 만만치 않다. 내가…… 마음이 편해서 조용히 있는 게 아니다. 화낼 기운이 없어서 늘어져 있는 거지. 하지만 녀석이 너무 경우 없이 나오는 바람에 들끓는 분노가 과다출혈의 고통을 잠시 이겼다.
“양심이 있으면 너나 입 다물어. 왜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애한테까지 총질이야? 안 그래도 총에 맞아서 다 죽어가는 애한테…… 그렇게까지…….”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얼마나 큰지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자식을 대체 어디서 찾아낸 거야? 어쩌다 실수로 마주쳤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내뺐어야지! 왜 그놈을 들쳐 매고 돌아다녀? 니가 정신이 있는 놈이야?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어!!”
녀석이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녀석의 목소리가 아까 비상계단에서 들었던 폭음보다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너도 어느 구석에서 정체불명 뼈다귀로 굴러다니고 싶어? 죽고 싶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 더 우아하고 덜 고통스러운 걸로…….”
“대체…… 무슨 소리야?”
녀석은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마음도 없어 보였고 지척에서 귀를 찢을 듯 위협적인 총성이 울리는 바람에 그럴 여유도 없었다. 총소리가 난 것과 거의 동시에 놈이 나를 덮쳐서 바닥에 깔아뭉갰고…… 어깨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남자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환한 금발머리, 짙은 회색 반코트, 피에 젖은 하얀 손가락…… 다 터져버린 남자의 등을 얼마나 그렇게 내려다봤는지 모르겠다. 긴 시간은 아니었을 거다. 이건 꿈이니까. 스무 명 남짓이나 되던 기사들도 간 곳이 없고, 지금 서 있는 곳은 백화점 로비도 아니었다. 현실처럼 생생한 꿈도 간혹 있지만, 이번 꿈은 영 엉성했다.
남자에게 다가가서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꿈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현실이었다면 슬프고, 화가 많이 났을 텐데…… 남자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꿈이란 건 아무리 엉성한 개꿈이라도 내 맘대로는 되지 않는다. 손을 뻗어서 남자의 몸을 뒤집었다. 영혼이 빠져 나간 남자의 몸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밀랍처럼 하얀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생각했다. 남자가 이렇게 생겼었나? 남자의 환한 금발이 어느새 갈색…… 아니,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어두운 검은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첸이었다.
기분 나빠서 눈을 떴다. 이렇게 기분 나쁜 꿈도 참 오랜만이었다. 얼마나 잔 걸까? 아직도 귓전엔 총성이 쟁쟁했고, 어깨는 감전된 것처럼 짜릿하게 아팠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예 푹 자다가 병원 침대 같은 데서 눈을 떴으면 좋았을 걸, 아직도 다 무너진 가방매장 구석이었다. 첸, 이 자식은 사람을 덮쳐서 기절을 시켰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디로 가버린 거냐?
총도 맞았겠다…… 어지간하면 그냥 누워서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지만, 마냥 누워서 버틸 만한 상황일까? 아직까지는 외부에서 경찰이나 구조대가 들어오는 기미가 없고, 몇 가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다.
우선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게 신경 쓰였고, 첸이 사라져버린 것도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게 거슬려서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켰다.
무너진 선반 틈새로 고개를 내밀어서 바깥을 살폈다. 홀 중앙 어딘가에 그 남자의 시체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좀 전에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척이 없는 걸 보면 기사단 놈들은 일단 1층에서는 철수를 한 것 같았다. 어딘가 다른 데로 몰려가서 사고를 치고 있거나, 경찰이 오는 낌새를 채고 빠져 나갔거나…… 아니, 잠깐…… 저게 뭐야?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을 다시 떠 봐도 눈앞의 광경은 그대로였다. 혹시나 싶어서 총 맞은 어깨를 슬쩍 눌러도 봤는데…… 기절할 것처럼 아프니까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꿈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백화점 한복판이 마치 죽음의 신이 짓밟고 지나간 것 같은 형상이었다. 눈에 띄는 시체만 대여섯 구…… 그중에서도 얕은 분수대의 조각상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는 시체는 모질게 내던져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온몸이 부서져 있었다. 시체의 몸통에 제대로 붙어 있는 부분은 한쪽 다리뿐인데 그것마저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건들거렸다. 다리 한쪽과 머리는 헬멧 채로 분수대 물속에 빠져서 분수가 아예 핏빛이었다. 그나마 몸통이 조각나지 않은 건 방탄조끼 덕분이었다. 남자의 몸은 저기 던져지기 전에 이미 무자비한 총격에 터져나갔던 것 같았다.
좀 떨어진 곳에는 또 다른 시체가 목이 완전히 뒤로 돌아간 끔찍한 형상으로 널부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다른 기사가 몸 안의 피란 피는 모조리 하얀 대리석 바닥에 쏟아낸 채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액세서리 매장을 반이나 부수고 나동그라져 있는 또 다른 기사의 사인은 명백히 총상이다. 까만 헬멧 안면부가 산산이 깨져나간 걸 보면 저 불운한 기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다. 최소한 두 발 이상…….
죽음의 고통이 길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은 불과 몇 시간 전에 목격했던 사건 현장과 많이 다르면서도 상당히 닮아 있었다.
‘……놈이 지나간 자리엔 항상 저렇게 시체가 쌓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놈을 죽음의 대공이라고 불렀던 거야.’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로 가득한 공기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좋든 나쁘든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건 기사단 쪽이었다. 그리고 이자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전투 전문가들이었다. 이게 정말 그 대공이란 놈의 짓일까?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 정도 능력과 화력을 갖춘 전문가들을 다 쓸어버린 걸까?
사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출혈 때문인지, 너무 충격을 먹어서 그런지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되도록 피가 덜 튄 장소를 골라서 다시 기절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 그렇다는 거고…… 살인마가 건물 어느 구석을 돌아다니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니 최소한 정신은 차리고 있어야 된다.
더 이상은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아무 데나 일단 앉았다. 앉아서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기분은 점점 나빠졌다.
첸, 그 자식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자오처럼 듬직한 보디가드가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지키고 있으니까 보통은 전혀 걱정할 게 없는 놈이지만…… 성능 좋은 자동소총과 방탄재킷과 헬멧으로 무장한 군인들조차 저렇게 험한 꼴로 죽어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딴 놈들은 총에, 로켓포까지 들고 돌아다니는 마당에 놈은 무슨 멋인지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있었다. 설마…… 당한 건 아니겠지?
머리를 털어서 나쁜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개만 슬쩍 돌려도 어깨가 엄청나게 아팠다. 약삭빠른 놈이니까 어디론가 잽싸게 튀었겠지, 설마 이 꼴을 보고도 미련하게 버티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기절한 나를 저 구석에 버려 놓고 혼자 튀었을까? 사방에 널려 있는 기사들의 시체를 한 번 더 훑어보면서……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움직이려니 몸이 불편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눈을 감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다른 생각을 하자. 첸의 행방 말고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잡히질 않고 어렴풋해서 기분만 찜찜했다. 정신 차리고 그거나 생각해내자. 첸은 괜찮을 거다. 놈은 절대 이렇게 재수 없게 죽을 타입이 아니다. 질기게 버티면서 두고두고 쿠간 시 짭새들의 두통과 화병과 탈모의 원인을 제공할 거고, 자기 장인보다 훨씬 더 오래 살 거다. 그 자식 걱정은 한마디로 시간낭비다
하지만 애써 마음 다잡은 보람도 없이 눈앞에 피투성이가 돼서 죽어 있는 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아까 꿨던 개꿈에 나왔던 그 모습이었다. 경찰이란 직업이 여러 가지 안 좋은 점이 많지만 특히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된다. 사람이 얼마나 부질없이, 쉽게 죽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픈 몸을 달래서 억지로 일으켰다. 앉아서 이런저런 잡생각에 시달리느니 고통스럽더라도 움직여서 뭐라도 확인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 판단이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지만…… 덕분에 총알 세례로 박살이 나고 무너져 내린 화장품 판매대 안쪽에서 시체 한 구를 더 찾아냈고, 아까부터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면서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석연치 않은 부분도 생각이 났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져서 피가 흥건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빠진 것 같더라니…… 이제 보니 그 남자가 없었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에, 배에 총을 맞은 채 죽어가던…….
희미하게 들려온 총소리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건물 내부에서 아직도 추적이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몰려 들어온 기사들의 숫자를 떠올려 보면 사망자, 부상자 다 제하고도 아직 50명은 여유가 있을 거다. 하지만 동료들이 눈앞에서 저런 꼴을 당했는데도 계속 범인을 쫓다니…… 보통 근성이 아니다. 정말 싫은 놈들이지만, 투지 하나는 인정해주자.
건물 안에서 울리는 이런 소리는 방향을 찾기가 쉽지 않다. 방금 전 것도 소리만 들어서는 어디쯤에서 나는 소린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피에 젖은 발자국 수십 개가 비상계단 통로를 향하고 있는 경우라면 굳이 어딘가에서 들려온 희미한 소리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좀 전보다 소리가 길었다. 기사의 시체 옆에 떨어져 있는 스콜피오를 움켜쥐고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을 쫓아 컴컴한 비상계단 통로로 걸음을 내딛었다.
한동안 한 덩어리로 엉켜 있던 발자국은 지하 1층, 관계자 외 출입금지 표지가 붙어 있는 창고입구에서 세 갈래로 흩어졌고 나도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백화점 규모가 큰 만큼 창고 넓이도 만만치 않았다. 2층 높이의 철재 선반 위 아래로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고, 선반과 선반의 간격도 조그만 운반차 하나가 들락거릴 정도였다.
“하필이면…….”
이런 조건은 수색에는 아주 쥐약이었다. 선반 사이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범인이 어디서 튀어나올지도 알 수 없는 위험한 숨바꼭질이었다. 게다가 그 대공이란 놈이 여태 저지른 짓과 내 시원찮은 상태를 감안하면 하루 일과가 최악의 비극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혼자서 놈을 상대할 생각은 없다. 녀석이 대체 어떻게 배에 총을 맞고도 1층 로비를 저 꼴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거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기사단 스무 명이 놈을 못 잡았으면 나도 놈을 못 잡는다. 그런 놈을 상대로 영웅놀이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첸, 그 자식만 찾으면 그만이다. 녀석이 1층에 널린 시체들 틈에도 없고, 집에 돌아간 것도 아니라면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테니까.
창고 안은 조용했다. 총소리도 없고, 격투의 조짐도 없었다. 창고 깊숙한 곳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리다가 방금 멈췄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려오는 정도였다. 그 외엔 이곳이 긴박한 추격전의 현장이라는 느낌은 별로 없었다.
총을 든 손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일단 총을 내려놓고 손바닥에 흥건한 땀과 피를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기사단의 자동소총이 성능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하지만 지금 나한테는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어깨 때문에 총을 한 손으로만 들어야 되는데…… 이래가지고서야 위급한 상황에서 이걸 제대로 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신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신음 소리의 주인공이 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첸이었으면 좋겠다. 입구에서 20미터도 안 들어갔는데 거기서부터 시체가 발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조금 더 들어가자 두 명, 세 명 무더기로 엎어져 있는데…… 하마터면 그냥 왔던 길 되짚어 뛰쳐나갈 뻔했다. 이 판국에 몸 성하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고, 아무렇게나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
세 명이 한데 얽힌 쪽은 두 명이 아직 살아 있었다. 창고가 전체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세 명이 한데 얽혀 있어서 어디를 다쳤는지, 어느 정도 다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미약한 생기와 대공의 사람 잡는 실력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구조대가 언제 오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릴 공산이 컸다.
조금 더 안쪽엔 두 명의 기사들이 몇 미터 사이를 두고 쓰러져 있었다. 복도 한 복판에 쓰러진 기사는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배가 찢어졌는지 창자가 반이나 바닥에 쏟아져 있었으니까…… 오늘은 시체를 너무 많이 봤다. 이제 시체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래서 제일 안쪽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시체 쪽으로는 눈길도 안 주고 지나쳤다.
총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리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앞으로 계속 걸었다. 하지만 두세 걸음 걷다가 아무래도 이상해서 다시 뒤를 돌아봤다.
시체가…… 헬멧부터 방탄조끼까지 제대로 걸치고는 있는데 그냥 옷만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피감이 없었다. 주변에 핏자국도 없고…… 미심쩍기도 하고, 뭔가 오싹하기도 해서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시체가 이상하게 보였던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저 슬쩍 들춰보기만 해도 족했다. 기사단의 제복 안에 남겨진 것은 앙상하게 마른 미라였던 것이다.
섬뜩한 느낌 때문에 뒷걸음질을 쳤다. 미라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미라라면 이미 볼 만큼 봤다. 나는 그러니까…… 상대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사실이 너무 실감이 나서 당황스러웠다. 그놈을 부상자라고 생각하고 한동안 데리고 다녔던 걸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 첸이 왜 그렇게 신경질을 부렸는지 알 것도 같았고…… 하지만 진짜 보통 사람처럼 보였는데,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싶기는 했지만 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보통 남자애 같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앞도 제대로 안 살피고 걷다가 이번엔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헉!”
“으악!!”
주저앉아서 소총을 소리 나는 방향으로 조준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방도 똑같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짭새?”
“자오?”
10년 감수라더니 정말…… 간 떨어질 뻔했다. 자오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상대가 나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총을 떨구고 옆으로 폭 꼬꾸라졌다. 아니…… 놀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자오는 심하게 다쳤다. 다시 보니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놈한테 당한 거야? 많이 다쳤어?”
“…… 괜찮아. 나는 괜찮은데…….”
자오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머리 밑이 찢어졌는지 이마부터 흐른 피가 온 얼굴에 뒤덮여 있는데 거기다 피까지 토하고 나니 얼굴이 마주보기 괴로울 정도로 처참했다.
“회장님이…….”
자오가 입에 가득 고인 피를 아무렇게나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첸이…… 왜?”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폈지만 적어도 시선이 닿는 곳엔 시체도, 생존자도 없었다.
“회장님이…….”
자오는 지금 혼절 직전이었다. 자오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지 짐작은 간다. 하지만 ‘회장님이……’ 까지만 지껄이고 정신을 놔버리면 나더러 어쩌란 거냐? 다급한 마음에 자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그 자식이 어떻게 됐는데? 지금 어디 있어?”
“말렸어야 했는데…… 못 가게…… 내가…….”
자오가 실신상태로 접어들면서 혼잣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러면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정신 차리긴 틀린 거다. 자오를 포기하고 일어섰다. 까짓 거, 찾아내면 되지. 창고 따위…… 넓어봐야 창고일 뿐이다.
“혼자서는 그놈을…… 못 당해. 내가…….”
내려놨던 소총을 다시 챙겨 들고 선반 모퉁이를 돌 때까지도 자오는 끊어질 듯 가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귀를 기울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자오의 마지막 중얼거림이 유독 날카롭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죽어…… 다 죽고 말 거야…….”
코너를 돌아서 다음 복도를 살펴보려고 한 걸음 내딛다가 제풀에 거꾸러졌다. 체력이 이제 거의 한계였다. 게다가 눈앞이 자꾸만 캄캄해지는 게…… 이러다 나도 자오처럼 헛소리하면서 넘어갈까 무서웠다. 좀 전에 내가 자오한테 했던 것처럼 누가 나를 좀 흔들어줬으면 좋겠다.
정신이 혼미하고 오만 잡생각이 머릿속을 들락날락하는 와중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첸 같은 놈이 이런 사지에 뛰어들었느냐는 거다. 첸은 대공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놈을 뒤쫓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지도 잘 알고 있었을 거다. 보스 좋다는 게 뭐냐? 위험한 일은 아랫것들한테 떠넘기고 경과보고만 받아도 첸한테 시비 걸 놈은 없을 터였다. 보스란 그런 자리다. 그런데 그놈은 왜 지가 앞장서서 이렇게 설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래놓고, 그 자식이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눈앞이 자꾸만 부옇게 흐려져서 짜증이 솟구쳤다. 아무리 창고지만 불 좀 밝게 켜 놓으면 누가 잡아가나? 시내에서 제일 호화판 백화점이라면서 조명이 왜 이 따위냐?
건너편 어딘가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잘못 들었나? 귓가에서 무슨 소리가 윙윙 울리는데 이게 사람들 발소린지 멀리서 울리는 사이렌 소린지, 아니면 그냥 헛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시력에 이어서 청력까지 맛이 가고 있었다. 이러면 더 이상 수색을 못한다. 감각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가는 와중에도 자오가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지척에서 들려온 산발적인 총소리, 그리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비명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환청이 아니다. 등골을 찌르는 듯 날카로운 이 비명은 사람이 죽어가는 소리였다.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대형 창고 매장 같은 곳에서 쓰는 커다란 선반을 서너 개 정도 지나서 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울려온 곳은 전등도 거의 깨진 어두컴컴한 창고 구석이었다. 선반 아랫단에 쌓여 있던 물건은 상자째 무너져서 복도에 널려 있었고, 상자 아래 두세 명 정도가 깔려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천사 같은 낯짝을 가진 살인마가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수상한 기척과 함께 크고 무거운 상자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상자를 피한 건 정말 운이 좋았다. 크고 묵직한 것이…… 내용물이 중간 크기는 넘는 가전제품 같은데, 이런 상자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았다면 기절 정도가 아니라 즉사다.
머리 위에 놈이 있었다. 비록 주변이 어둡고,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상태였지만 녀석의 금발은 똑똑히 보였다. 주변이 흐려 보여서 더 그런 걸까? 놈의 머리카락은 빛이 나는 것처럼 환했고, 굉장히 아름다웠다. 기사 한 명을 붙잡고 그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놈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봤을까? 아마…… 그럴 거다.
녀석에게 잡힌 기사는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무리 눈에 제대로 뵈는 게 없어도 저 남자가 이미 시체라는 건 확실했다. 놈이 죽은 남자를 아래로 툭 던졌다. 역시 부피감이라곤 없는 남자의 앙상한 몸이 상자 더미 위에 맥없이 떨어져서 꺾였다.
저 자식…… 지금 웃고 있는 건가? 저런 걸 무고한 피해자로 착각하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거 생각하니까 소름 끼치는 한편, 이가 갈렸다. 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마주쳤으니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녀석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소총을 들어 올렸다.
놈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녀석이 맞은편 선반으로 몸을 날렸다. 놈은 말 그대로 날았다. 맞은편 선반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가 연이어 옆으로 옮겨가는 놈의 비행은 빠르고 우아하고, 위험해 보였다. 좀처럼 놈을 공격할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다. 눈으로 녀석을 쫓는 것조차 내게는 벅찼다. 저렇게 빨리 나는 새를 잡을 수 있는 사냥꾼은 어디에도 없을 것 같았다.
놈이 선반 제일 꼭대기를 타고 올라서 곧 시야에서 사라질 참이었다. 방아쇠 한번 못 당겨 보고 이렇게 놈을 놓치다니…… 저 자식은 재범률 100%짜리 흉악범이다. 이렇게 놓쳐버리면 며칠 못 가서 또 미라가 산처럼 쌓인 아파트를 들락거려야 될 거다.
어떻게 해서든 놈을 잡아야 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마지막 집중력을 쥐어짜서 놈의 등을 조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또 다른 새 한 마리가 사정거리 안으로 날아들었던 것이다.
불시에 날아든 새가 한순간에 대공을 등 뒤에서 덮쳤다. 그 속도가 뱀을 덮치는 독수리만큼이나 빨랐다. 그 민첩함도 감탄스럽지만 저렇게 위험한 놈을 맨몸으로 덮치는 배짱에 정말 놀랐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냐?
잠시 선반의 철골을 잡고 버티던 대공이 결국 등 뒤에 들러붙은 남자의 무게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추락지점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환한 금발이 눈에 딱 띄는 대공하고는 달리 뒤늦게 날아든 정신 나간 빅 버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컴컴해서 어둠 속에서 식별도 어려울 정도였다. 옷차림으로 봐서 기사단은 아니었다. 기사들의 무장에 비하면 가볍고 허술한 복장이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까만 스웨터에 블랙 진…… 무기도 보잘 것 없어서 남자가 들고 있는 거라곤 기다란 검 한 자루뿐이었다. ……검?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다가 총을 고쳐 쥐었다. 미친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대공을 끌어안고 등부터 바닥에 떨어진 첸이 불에 덴 듯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동작이 재빠른 걸 보니 그 높은 데서 떨어지고도 등뼈가 부러지진 않았나 보다.
녀석이 검을 제대로 고쳐 잡고 대공과 마주 섰다. 어이가 없어서 숨이 안 쉬어졌다. 상대는 자동 소총과 중대 병력으로도 답이 안 나오는 놈인데…… 칼 한 자루 들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야…….”
조용히 첸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첸의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되게 놀랐나 보다.
“너…….”
첸이 뒤를 돌아봤다. 지척에 위험한 살인마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처럼.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저런 흉악범과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아주 작은 부주의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뭐해?”
“비켜!”
첸이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재차 경고할 여유가 없었다. 대공의 번뜩이는 눈빛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대공은 금방이라도 첸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첸이 위험을 감지하고 대공을 향해 돌아섰지만 녀석은 변변한 무기도 없는 형편인데다…… 대공은 빨랐다. 기사단 수십 명조차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위험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좀 더 빨랐다. 놈이 첸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방아쇠를 당겼으니까.
대공이 가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대공과의 거리는 지척이었고, 중간에 첸이 끼어 있기는 했지만 아예 손도 못 쓸 정도로 가로막힌 건 아니었다. 총알은 첸의 옆구리를 스쳐서 대공의 가슴에 명중했다. 안도감과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제 더 이상 미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반갑지만, 어떤 경우든 사람을 죽이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더구나 상대가 저렇게 새파란 어린애라면…….
더 이상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서 옆에 떨어져 있는 상자더미 위에 웅크리고 쓰러졌다.
“잘했어.”
첸이 나를 곁눈으로 흘기며 시큰둥하게 지껄였다.
“왜? 뭐가 맘에 안 들어?”
“잘했다고.”
“그런데 말투가 왜 그 따위야?”
저도 총에 맞을 뻔했으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사실, 중간에 사람을 두고 총격전을 벌이는 건 교전수칙상 절대 금물이다. 하지만 현장상황이 항상 수칙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살았으면 됐지…… 웬 짜증이야?
“말투가 어때서?”
첸이 대공을 향해 돌아서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대공은 아직까지도 가슴을 움켜쥐고 선반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된 총에 가슴을 맞았으면 말 그대로 치명상이다. 저런 총격을 당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어떻게 아직까지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걸까?
첸이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대공에게 다가갔다. 첸의 장검은 나도 잠깐 휘둘러봐서 아는데…… 제대로 힘만 실리면 사람도 두 동강 낼 수 있는 살벌한 무기였다. 설마 저걸로 저 남자애를 아예 절단이라도 내버리려는 걸까?
첸의 의중도 모르겠고, 눈앞의 광경이 영 실감이 안 나서 그냥 쳐다보고만 있는데 녀석이 검을 머리위로 치켜들었다. 저 자식…… 진짜 그럴 작정인가 보다.
“야, 잠깐…….”
놈의 소행은 괘씸하지만, 그냥 둬도 곧 죽을 애를 그렇게까지 하는 건 심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첸은 벌써 검을 크게 휘둘렀고…… 대공은 첸의 공격을 비호같은 몸놀림으로 피했다. 몸을 낮춰서 바람이라도 가를 듯 위협적인 일격을 피한 대공이 첸의 팔을 잡아 비틀었다. 잡힌 팔을 단숨에 뿌리친 첸이 대공의 턱을 팔꿈치로 내리 찍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놈이 옆으로 몸을 날리는 바람에 이번에도 맨 바닥을 치고 말았다. 대공의 움직임은 선반 사이를 날아다니던 좀 전에 비해선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첸과 대공 사이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첸은 말싸움 전문 몸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일단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검을 휘두르며 대공을 뒤쫓는 첸의 모습은 날렵하면서도 위협적이었다. 굳이 보스의 못생긴 외동딸하고 결혼하지 않았어도 중간 보스 한자리 정도는 문제없이 해 먹을 실력이었다. 어지간한 악당하고 맞짱을 떠도 밀리지 않을 파워와 기술인데…… 안타깝게도 오늘은 상대가 정말 안 좋다.
대공이 몸을 일으키기 전에 끝장을 낼 작정으로 성급하게 다가서던 첸이 놈에게 발목을 잡혀서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넘어진 첸의 등이 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대공이 녀석을 타고 앉았다. 대공이 검을 쥔 첸의 손목을 잡아 누르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첸의 입술에 거칠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이 모두 피투성이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사방에 사상자가 널려 있지 않았다면 상황이 좀 달리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공의 키스는 예사롭지 않았다. 키스의 의미는 많았다. 사랑, 욕망, 때론 존경…… 하지만 놈의 키스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죽음뿐이었다.
첸이 대공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거칠게 몸부림을 쳤고, 나도 옆에 던져놨던 총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더 이상은 손끝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급하니까 몸은 움직여졌다. 하지만 놈이 첸과 딱 붙어 있으니 거기다 대고 총질을 할 수는 없었다. 첸이 자유로운 한 손으로 대공을 밀어내려고 마구 몸부림을 치고 있어서 조준이 어려울 뿐 아니라 총알이 관통이라도 하면 첸의 목숨도 위험했다.
“필립!”
왜 녀석을 그렇게 불렀을까? 대공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올려다봤다. 녀석은 어쩐지 당황한 눈치였다. 마치 은밀한 비밀을 들킨 소년처럼…… 갑작스런 반응에 나도 놀라서 주춤거리는 사이, 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공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일단 빠져 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첸의 상태가 영 시원찮았다. 녀석하고 키스를 한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첸의 얼굴엔 혈색이 거의 없었다.
“총 치워. 그걸로는 못 잡아.”
첸이 입안에 고인 피를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휘청거렸다. 그에 비해 대공은 벌써 컨디션을 많이 회복했는데…… 그게 첸의 상태가 안 좋은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그걸로 잡게?”
가격으로만 따지면 첸의 검이 이 소총보다 몇 배는 더 비쌀 터였다. 하지만 실전에 써먹기엔 지나치게 후졌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현재로써는 유일한 해결책이야.”
첸이 억지로 웃으며 검을 흔들었다. 허세는…… 서 있을 기력도 없는 주제에.
“겨우 키스 한 번에 뻑 갔네.”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첸이 대공을 노려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첸과 대공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창고 안에 있던 기사들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확히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낌상 열 명 이상이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나를 노려보는 대공만큼이나 녀석들의 발소리가 무섭게 느껴졌다.
첸까지 대공에게 반쯤 먹히다 빠져나와서 맛이 살짝 간 상황이니까 누구든 와주기만 한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기사단 놈들은 반갑지 않았다. 놈들은 총 들었다 하면 아무 데나 일단 갈기고 보는 나쁜 버릇이 있는데다 인권이나 인명보호에 대해선 아예 개념조차 없었다.
놈들의 목표는 물론 대공이겠지만 보나마나 멀찍이 떨어져 서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총질을 해댈 거고,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총격에는 까딱도 않는 대공보다는 첸하고 내가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내 이름을…… 니가 어떻게 알아?”
대공이 입을 열었다. 너 같은 게 감히 어떻게 내 이름을 부르느냐는 듯 거만한 말투였다. 이 판국에 그런 게 궁금하냐?
“마지막으로 이름을 들은 게 천년은 된 것 같아.”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한 걸음 다가섰다. 아무래도 나한테 유감이 많은 모양인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소총으로 놈의 가슴팍을 다시 한 번 정 조준했다. 하지만 첸이 또 다시 대공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흔해빠진 이름이잖아!”
첸의 장검이 대공의 머리를 향해 날았다. 공격이 처음보다 더 거칠었다. 도둑키스를 당한 것에 대한 앙심 때문인지 첸의 공세는 너무 마구잡이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총질을 해대는 스타일이라면 어떻게 좀 거들겠는데…… 저렇게 한 덩어리가 돼서 굴러다니면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까딱 잘못해서 한 번 더 물리기라도 하면 정말 위험할 텐데 어쩌자고 저러는 걸까? 첸이 놈과 가까이 붙어 설 때마다 간이 한 뼘씩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고, 그에 따라 움직임도 둔해졌다. 야구방망이 휘두르듯 거친 첸의 칼질에 애꿎은 선반 철골 두 개가 싹둑 썰렸고 상자 한 무더기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대공이 쏟아지는 상자를 피하느라 한 눈 파는 사이, 첸이 다시 한 번 놈을 향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대공은 머리위로 떨어지는 커다란 상자는 문제없이 피했지만 첸의 마지막 공격은 피하지 못했다. 검 날이 대공의 가슴을 아주 가깝게 스쳐 지나갔고…… 가슴을 가로지른 길고 예리한 상처를 따라 피가 튀었다.
하지만 상처는 놈이 타격을 입을 정도로 깊지 않았다. 빗맞은 총알에 멧돼지가 더 사나워지는 것처럼 녀석의 성질만 돋웠을 뿐이었다. 커다란 호가 그려질 정도로 검을 휘두른 여파로 첸이 중심을 잠시 잃은 틈을 놈은 놓치지 않았다.
대공이 뒤에서 첸의 팔을 움켜쥐었다. 우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렸다. 첸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고…… 피에 젖은 대공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놈이 첸의 어깨를 물었다.
“놔!”
대공의 머리를 조준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놈은 쏠 테면 쏴 보라는 투였다. 소총을 들어 올리는 것만 해도 이젠 버거워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상태로 방아쇠를 당기는 건 첸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첸의 목덜미에서 핏줄이 파랗게 솟고 뺨 언저리가 눈에 띄게 말라갔다. 녀석은 대공에게 산 채로 먹히고 있었다. 첸의 눈이 생기를 잃었고,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떨어졌다.
소총을 버리고 첸이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 들었다. 선택의 여지도, 시간 여유도 없었다. 이대로 두면 첸은 대공에게 피를 빨려서 죽든가, 기사단의 무차별 총격에 대공과 함께 벌집이 돼서 죽는다. 꿈인지, 환각인지…… 생기 없이 죽어 넘어진 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당장 떨어지란 말이야! 이 자식아!”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면서 대공의 등을 검으로 내리쳤다.
(7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