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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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은 할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너하곤 이제 끝이야.’……라니, 뭐냐?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생각할수록 쪽팔림만 뼈에 사무칠 뿐이었다.

“기분은 좀 어때요?”

딴 생각하느라 누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쥬드가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쥬드가 손에 든 종이봉투를 쇠창살 틈으로 들이밀었다.

“뭐야?”

“샌드위치요.”

샌드위치라는 건 안다. 지난 이틀 동안 아침마다 샌드위치 도시락을 얻어먹고 있으니까…….

“성분이 뭐냐고?”

“통밀빵, 소나무 꽃분, 아카시아 꿀, 이런 저런 허브 약간…….”

받아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일단 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두툼한 통밀빵 사이에 묘한 향기를 품은 노란색 잼이 살짝 묻어 있었다. 겉보기엔 그다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샌드위치에 햄이나, 참치 같은 걸 넣거든?”

“보통 샌드위치가 먹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사 먹어요.”

쥬드가 한심하다는 듯 타박을 했다. 나도 유치장에 틀어박혀서 갖다 주는 사식이나 얻어먹는 주제에 샌드위치 맛이 있니 없니 트집 잡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처지가 한심해도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거 먹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내 질문에 쥬드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배가 부르겠죠.”

“어제도 당신이 갖다 준 샌드위치랑 차 한 잔 마시고 종일 고생했어.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대체 사람 먹는 음식에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내 예리한 추궁에 쥬드가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예요? 어제 그건 그냥 검은 밀빵에 블루베리 잼하고 염소 치즈였어요!”

아무리 몸으로 다 때우는 강력반 근무지만 경찰 밥 먹은 게 햇수로는 8년이다. 그동안 숱한 좀도둑과 사기꾼과 살인범을 심문하면서 터득한 감각에 의하면 저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신 샌드위치 때문에 잠도 한잠 제대로 못 잤단 말이야!”

“샌드위치엔 이상한 거 안 넣었다니까요?”

딱 걸렸다. 샌드위치엔 안 넣었다고? 나랑 시선이 마주친 쥬드가 말실수한 것을 깨닫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쩐지, 차 맛이 이상하더라…….”

“그냥 녹차였어요.”

이 경찰서에서 쥬드한테 평범한 커피나 녹차를 얻어 마신 사람은 없다. 그동안 서장실에 다녀간 손님들에게 무슨 차 마셨느냐고 일일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랑 내 주변 사람들은 그랬다.

지그시 노려보자 쥬드가 마지못해 범행을 실토했다.

“로즈마리랑 마녀 발톱 달인 물을 약간 넣긴 했어요.”

“마녀 발톱이라고?”

그렇게 더러운 걸 달여서 사람한테 먹이다니…… 이건 범죄다!

“진정해요. 진짜 발톱이 아니라 풀뿌리 이름이에요.”

뭐가 됐건…….

“그 망할 풀뿌리 때문에 지난 이틀 동안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온종일 머릿속엔 잡생각만 가득하고, 심장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처럼 두근거리다 말다 하는 바람에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쥬드가 놀랐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늘 그렇듯 성분이 불량한 차에 관해선 전혀 미안해하는 기미가 없었다. 쥬드가 팔짱을 끼고 진귀한 동물 구경하듯 잠시 나를 쳐다봤다. 관찰 당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루크 첸하고 무슨 일 있었죠?”

쥬드가 차분하게 물었다. 쥬드의 이런 말투와 분위기는 사람 마음을 굉장히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 고집 센 지능범들을 심문할 때 주로 써먹는 말투였다. 말리면 끝장이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무 일도 없었어.”

내 대꾸에 쥬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난 본래 거짓말을 잘 못하니까…….

비공식적인 정직 상태라서 할 일도 없고, 갈 데도 마땅치 않고, 기분도 엉망이고 해서 자발적으로 유치장에 들어앉은 지 정확히 이틀 반이 지났다. 아침은 쥬드가 갖다 주고 저녁은 앤디가 한 번, 에쉬가 한 번씩 가져왔다.

나랑 묶인 처지라 똑같이 할 일이 없는 앤디가 자주 내려와서 아프면 병원엘 가야지 여기서 이러면 어쩌냐고 걱정도 하다가 짜증도 내다가 했지만, 어제 저녁까지는 대꾸할 기분도 아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처음부터 유치장에 사흘씩이나 틀어박힐 작정을 한 것도 아니었고…… 처음엔 그냥 한숨 자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한숨 자고 나니까 몸은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고 머릿속은 멍하고…… 아무런 의욕도 생기질 않았다. 보통 때도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예 두뇌가 활동을 딱 멈춘 것처럼……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만 가득하고 잠이나 여한 없이 자고 싶을 뿐이었다.

쥬드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옆에 던져 놓고 다시 간이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아파서 돌 것 같았다. 비니, 니콜라스, 루크 첸…… 잠이라도 푹 잘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두통 때문에 잠도 안 왔다. 사실, 이미 잘 만큼 자기도 했고.

“머리 아프면 내가 준 차라도 한잔 마셔 봐요.”

“그 독약 탄 차 때문에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다 귀찮으니까 빨리 나가주기나 했으면 좋겠다. 아까부터 유치장에 갇혀 있는 모든 흉악한 놈들이 쥬드를 잡아먹을 듯 눈독 들이고 있는 것도 신경 쓰였다. 그중에서도 무장 강도질 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려온 두 놈의 눈빛이 특히 위협적이었다.

“마녀 발톱은 신경안정제에요. 진정효과가 있으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뭘 잘못 넣은 거 아냐? 진정은커녕 숨도 못 쉬겠어!”

“틀어진 애정 문제를 당장 잊게 해줄 만큼 약효가 세진 않거든요.”

누운 채로 쥬드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놀리거나, 비아냥거리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서 참는 거다.

“그 자식하고 틀어져서 이러는 거 아니야.”

“틀어지긴 틀어졌군요.”

과연 심문의 귀재답다.

“그 뱀 같은 자식…… 목적이 있어서 접근한 거였어.”

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몸 말고 또 다른 목적이 있대요?”

“니콜라스를 찾고 있었어.”

쥬드의 표정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과 부딪혔을 때 한 번씩 보던 표정이다.

“루크 첸이…… 왜요?”

“그건 모르겠어.”

갑자기 스스로가 더할 수 없이 한심한 놈처럼 느껴졌다. 왜 그걸 안 물어 봤을까? 아니, 물어보긴 했는데 놈이 뭐랬더라? 나중에 얘기 하자고 했었나?

생각할수록 맥이 빠졌다. 총 잡은 김에 제대로 캐봤어야 했는데, 횡설수설하다 땅바닥에 총질이나 하고 뛰쳐나왔으니……

“당신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흑풍회 영감들이랑 비밀회의 하는 자리에서 직접 들었어. 그 기분 나쁜 조직이 무슨 이유에선지 니콜라스를 노리고 있는데…… 나를 미끼로 써 먹을 작정을 하고 작업을 했던 거였어.”

쥬드가 고개를 요리조리 갸웃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중국계 범죄 조직에서 연쇄살인범을 붙들어다가 어디다 쓰려고요? 그쪽에도 쓸 만한 킬러라면 꽤 있을 텐데…….”

정말 오랜만에 나랑 쥬드의 생각이 딱 일치했다.

“혹시 ‘천년조약의 기사단’이라고…… 들어봤어?”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실망스럽다. 쥬드는 시내의 웬만한 조직에 대해서는 다 꿰고 있는데…… 하긴, 차이나타운의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 워낙 비밀이 많은 동네니까.

“흑풍회 산하엔 소소한 조직들이 꽤 많아요. 이제 쿠간을 다 차지했으니까 앞으로도 세가 더 늘어나겠죠. 현황을 파악하는 중이긴 한데…… 알잖아요. 원체 비밀결사 체질이라 정보를 빼내기가 쉽지 않아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정회원이었으니 최근에 생긴 조직은 아닐 거다. 게다가 요즘 들어서 말썽이 잦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하고 뭉쳐서 뭔가 대형 사고를 칠 것처럼 얘기가 끝나던데…… 그냥 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 생각엔…….”

쥬드가 잠깐 말을 멈췄다. 유치장 입구에 터너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터너가 꽤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뒤에 에쉬랑 앤디가 따라오고 있는 게 보였다. 워낙 덩치가 커서 유치장 철창 사이의 복도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좀 어때?”

쥬드랑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터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기는…….

“별로 안 좋아.”

“몸이 아픈 거야?”

“그냥…….”

“아니면 그만 나와.”

거의 명령이었다. 터너는 경찰학교 2년 선배고, 덩치도 크고, 성격이 과묵한 반면 상당히 과격하기도 해서 이렇게 나오면 거스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보통 때 얘기고 지금처럼 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는 경찰학교 선배가 아니라 서장이 쫓아 내려와도 내 대답은 이거다.

“싫어. 피곤해.”

내 대꾸에 터너가 눈살을 확 찌푸렸다. 유치장 안까지 밀고 들어와서 끌어내면 끌려 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해결하기 좋아하는 에쉬랑 그나마 나 아니면 파트너도 없이 경찰서 안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할 수밖에 없는 앤디가 양 방향에서 터너를 얼른 붙들었다.

“당장 안 나와?”

터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치장이 갑자기 공포 분위기로 변했다.

“지은 죄도 없이 왜 자청해서 감옥살이야? 너 지금 루크 첸, 그 자식하고 헤어졌다고 우리한테 시위하는 거야?”

내가…… 웬만하면 안 일어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냥 누워 있을 수가 없어서 일단 일어나 앉았다.

“내가 무슨 시위를 했다고 그래?”

“사흘이나 유치장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고 구겨져 있는 게 시위가 아니면 뭔데?”

“피곤해서 그렇다니까!”

“피곤하면 집에 가!”

“집이 있어야 가지!!”

터너도 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요즘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흥분해서 깜빡 했겠지. 어쨌든 집 얘기가 나오자 터너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터너가 땡감 씹은 얼굴로 나를 노려만 보는 동안 에쉬가 터너를 옆으로 밀고 대신 나섰다.

“야, 그러지 말고…… 그만 나가자. 전부 다 니 걱정 많이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행…… 하는 콧방귀가 터져 나왔다.

“전부 다라니? 누구? 위층 짭새들?”

“그동안 너한테 심하게 한 거 다들 반성하고 있다니까.”

믿을 수 없다. 그 인정머리 없는 것들이 내 걱정을 하고 있으며, 그동안 나를 두고 지들끼리 수근거리고 공연히 구박했던 것을 반성하고 있다는 얘긴데…… 그 자체로도 믿기 어려운 일일 뿐더러 내가 아는 한 경찰서에서 왕따가 사흘 만에 철회된 경우는 없었다.

자기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에쉬가 겸연쩍은 얼굴로 부연 설명을 달았다.

“너는 여기 이러고 있지, 루크 첸한테서는 며칠째 아무것도 안 오지…… 다들 불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힌대.”

결국 터너가 에쉬와 앤디를 털어내고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서 내 팔을 움켜잡았다. 컨디션이 최악이라서 정말 한 발자국도 옮기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버틸 도리가 없었다. 기분 안 좋고 피곤하다고 유치장에 틀어박혀 있었던 게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막 잠이 쏟아지는 참인데…….

“그 자식하고 헤어진 건 확실해?”

터너가 나를 현장에서 체포한 갱단 똘마니 연행하듯 질질 끌고 가면서 물었다.

“응.”

“한심한 놈. 그렇게 마음이 아프냐? 그깟 놈, 무슨 대수라고…….”

“그게 아니라니까…….”

“시끄러!”

재수 없게도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반장하고 딱 마주치는 바람에 유치장에서 아예 살지, 뭐 하러 기어 나오느냐고 욕을 한 바가지나 얻어먹었다. 뒤이어 반성은커녕 아직도 나한테 유감이 많은 짭새들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고…… 그렇게 샤워장까지 끌려간 후에야 겨우 터너의 우악스런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흘이나 머리도 안 감고, 면도도 안 해서 몰골이 흉악하기는 했다. 퀴퀴한 냄새도 나고…… 뜨거운 물에 샤워라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그랬으면 좋겠다.

“샤워하고, 뭐라도 좀 먹고 나서 나스카 형사랑 반장님한테 가 보세요.”

터너한테 붙들려서 어디까지 가나 끝까지 쫓아와서 확인한 쥬드가 다소 안심한 표정이었다. 터너는 뭐…… 화난다고 사람을 함부로 치거나 심한 행패를 부리는 성격은 아니다. 강력사건 용의자들하고 몸싸움 할 때나 갱단 소탕할 때는 말도 못하게 거칠다는 평가도 있지만…… 동료들한테는 심하게 한다고 해봐야 그저 툭 치는 정도였다. 워낙 거구에 힘이 장사라서 그 정도만 맞아도 턱이 돌아가고 코가 주저앉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반장한테는 왜?”

주섬주섬 옷을 벗으면서 물었다. 좀 전에 봤을 땐 평생 할 말이 없을 것 같은 분위기던데…….

“두 사람이 담당하기 적당한 사건이 있어요.”

쥬드의 표정이 좀 애매했다. 나랑 앤디가 담당하기 적당한 사건이라…….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니 개운하기도 했지만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그 바람에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반장 앞에서 깜빡 졸았다.

“내 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야?”

반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놀라서 깼다.

“17번 도로변 풀숲에서 시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하셨잖아요.”

앤디가 반장 눈치를 살피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랑 앤디가 담당하기 적당한 사건이라는 쥬드의 말투에 약간의 비아냥이 묻어 있어서 어디 유명 가수 공연장 같은 데서 관객들 줄 세우는 일이나 시킬 줄 알았는데 웬일로 강력사건이 떨어졌네?

“당장 가서 현장 상황 살펴보고 보고해.”

“예…….”

마음 같아선 유치장에서 일주일 정도 더 쉬고 싶지만, 놀고 싶을 때 맘대로 놀 수 있는 직장인이 몇이나 되나……. 지하실에 콕 박혀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느니 바쁘게 돌아다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지금은 어디 가서 딱 세 시간만 더 잤으면 좋겠다.

“그리고 너, 루크 첸하고 끝낸 거 확실하지?”

돌아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반장이 한 번 더 첸과의 결별을 확인했다.

“시작한 적도 없어요.”

“한번만 더 경찰서로 이상한 거 오는 날엔, 내 손으로 직접 널 유치장에 처넣고 열쇠는 강에 던져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만약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반장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그 자식을 죽여버릴 테니까.

17번 국도는 사시사철 공장 폐수가 흐르는 더러운 도랑과 함께 리즐 시와 쿠간의 경계선 노릇을 겸하고 있는 외곽도로였다. 한때는 출퇴근 시간의 상습적인 정체로 악명이 높을 만큼 교통량이 많은 중요한 도로였지만 리즐 시와 쿠간 시를 직통으로 잇는 10차선 대로가 개통되고 나서부터는 도로로써의 위상이 급격히 추락해서 이제는 거의 버려진 길이었다.

경찰서에서 현장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라서 앤디한테 운전을 시키고 나는 옆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앤디는 아직 시내 지리를 잘 모르니까 운 좋으면 두 시간은 아무 방해 없이 잘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커다란 코끼리 옆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비니, 마주 앉아서 담배 피우는 발렌타인, 코끼리를 쳐다보면서 입맛 다시는 용이랑 기린…….

며칠째 비니랑 발렌타인이 같이 있는 꿈을 꿨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인데 맘에 걸렸다. 시한부 인생에 그나마 그 시한이 얼마 길지도 않은 발렌타인이랑 비니가 같이 나타나는 게…… 비니한테 안 좋은 징조처럼 느껴졌다.

‘그자를 끌어내려고 널 이용하고 있는 거 아니야.’

‘사실은 너도 보고 싶었어.’

‘너…… 나한테 와라.’

첸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서 교활하게 속삭였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며칠째 같은 소리뿐이었다. 빌어먹을! 그렇게 치사하게 사람을 이용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왜 남의 꿈에까지 나타나고 난리냐! 꺼져라! 이 나쁜 놈아!

눈이 돌아가도록 노려봤지만 놈은 오히려 더 뻔뻔해질 뿐이었다.

‘안녕, 내 사랑.’

놀고 있네. 한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서 허튼수작을 부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흑풍회가 회장을 다시 뽑게 만들어주고 말 테다!

‘어차피 넌 나한테 오게 돼 있어.’

쥬드가 준 차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이래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꿈이란 건 알고 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옆구리를 더듬으며 총을 찾다가 잠에서 깼다. 앤디가 사건 현장에 진입해서 막 차를 세우려던 참이었다.

현장은 17번 도로 중에서도 외진 장소였다. 특히 시체가 발견된 곳은 주변 수 킬로미터에 걸쳐 인가라곤 없는 잡목 숲 주변으로, 허리까지 올라오는 키 큰 잡초가 빼곡히 들어찬 마른 웅덩이였다. 이런 곳에 유기된 시체는 작정하고 찾으려고 해도 수색이 쉽지 않았다. 그러니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기란 더욱 어려운 노릇이었다. 이런 길가에 차를 세우고 풀숲을 뒤질 만한 일이란 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체를 발견한 것은 실수로 치어 죽인 이웃집 강아지 묻을 곳을 찾던 40대 남자였다. 죽은 강아지와 이웃관계를 불편하게 할 만한 비밀을 함께 묻으려고 했던 남자는 아직도 현장에 붙들려 있었는데,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뒤적이던 풀숲에서 시체가 나오면 누구라도 혼비백산을 하게 마련인데…… 이번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처음 출동했던 순찰대 대원들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시체의 상태가 보통 보던 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런 거…… 전에 본 적 있으세요?”

차를 세우자마자 현장으로 바람처럼 뛰어 내려가서 시체를 확인한 앤디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는 앤디보다 도착이 좀 늦었다. 졸음이 덜 깬 상태라서 덤불에 발이 걸려서 두 번이나 엎어졌고, 그 바람에 풀숲을 거의 기어가다시피 했기 때문에……. 강력계 형사를 기다리던 정복 경관이 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도착해보니 이런 곳에 버려진 시체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났다.

“이게 대체…….”

상황이 기대하던 거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앤디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럴 땐 일단 위로부터 해주는 것이 파트너의 도리였다.

“우리가 이 여자를 좀 늦게 찾았네. 그러니까, 한 천 년 정도…….”

17번 도로변에서 발견된 시체는 그냥 시체가 아니라 미라였다. 키는 약 165센티미터 정도, 옅은 갈색 머리, 잡목 숲속에 길게 엎드린 모습에…… 피부는 수분이라곤 하나도 없이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쿠간은 수 천 년 전에 선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때문에 요즘도 시 언저리에서 새로운 유적지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가끔 나오곤 했다. 사막 근처의 유적지에서 선주민의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살인 사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실망한 열혈 형사 앤디가 아무나 붙들고 화를 냈다. 나는 방금 시체감식반의 동료 그레이스와 통화를 마친 참이었다. 좀 있으면 감식반 차량도 도착할 거다. 감식반보다는 고고학자한테 어울리는 사건이긴 하지만 일단 시체는 시체니까 절차에 따라 처리될 터였다.

“살인 사건일 수도 있어. 그런데 이 정도면 살인범도 옛날에 죽었을 테니까, 그럼…… 사건 종료지.”

쥬드가 유치장에서 금방 끌려 나온 나랑 리즐 시 경찰청장의 금지옥엽한테 잘 어울리는 사건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긴 했었다. 그런데 앤디는 전혀 그런 낌새를 못 느꼈었던 모양이다.

“오는 길에 아빠한테 전화까지 드렸단 말이에요! 드디어 사건다운 사건을 하나 맡았다고…… 그런데 이게 뭐예요?”

기대가 너무 컸던지, 앤디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해결 강력 사건도 많아. 아버님도 이해하실 거야.”

“정말…… 너무해요!”

“뭐가?”

“여기는 자고 깨면 강력사건이 다발로 터지는 개판 5분 전의 동넨데…… 왜 나는 천 년 전에 죽은 여자 미라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냐고요!”

개판 5분 전이라니…… 얘가 우리 동네를 너무 만만하게 보네. 오컴이 출몰하고 동네 한 블록이 다 무너져 내린 것으로 ‘개판 5분 전’이라는 아름다운 시절도 이미 지났다. 몇 주 더 지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낌이 올 텐데…… 어려서 그런지 성격이 급하다.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 제이크 브론테 사건은 해결했잖아. 그 건은 엄연한 연쇄살인이었어.”

“그건…… 선배님이 해결한 거죠.”

“같이 한 거지. 파트너잖아.”

화가 안 풀려서 쌕쌕거리는 앤디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현장을 처음 발견했다는 소심해 보이는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40대 중,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왜소한 남자였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남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남자는 신고 받고 출동한 순찰대에 이미 상황을 진술했을 테지만, 이런 경우엔 같은 말을 몇 번씩 반복하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명령받고 출동한 거니까 나도 보고서를 써야 되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경찰 배지와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남자에게 물었다.

“래리 파커요.”

남자도 자기 신분증을 꺼내서 내밀며 대꾸했다. 말하기 귀찮으니까 알아서 적으라는 투였다. 래리 파커, 46세. 콘돌 거리 1342번지…… 콘돌 거리라면 고급 주택이 많은 말끔한 동넨데, 여기서 상당히 멀다.

죽은 강아지를 버리러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려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곳까지 오다니…… 되게 소심하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이웃을 뒀나 보다.

“시체를 어떻게 발견하시게 된 겁니까?”

“버려야 할 게 있어서…….”

남자가 발치에 놓인 낡은 가방을 가리켰다.

“덤불 안으로 들어갔다가 그…… 여자 다리를 밟았어요. 처음엔 나무토막인 줄 알았죠.”

“이웃이 개 걱정을 많이 하겠군요.”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이웃이 워낙 다혈질이라서요. 가끔은 미친 사람 같을 때도 있거든요. 게다가 이건 꼭 내 잘못만도 아니라고요. 우리 애들을 볼 때마다 짖어대는 사나운 놈이었는데, 그 사람은 개를 묶어 놓지도 않았어요.”

치어 죽인 이웃집 개를 몰래 버리는 행위도 분명히 범죄에 속하지만 내가 보고해야 할 사건은 그쪽이 아니었다. 그리고 쿠간에서 이웃과의 불화로 일어나는 폭행이나 살인의 비율을 생각해보면 사고를 조용히 처리하려는 이런 노력을 무턱대고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시체를 발견한 시간은요?”

“세 시간 전이요.”

바싹 마른 미라를 발견한 최초 목격자한테는 또 뭘 물어봐야 되더라……. 잠이 덜 깨서 그런지 다음 질문이 생각나질 않았다.

“세 시간 전이면, 집에서 상당히 일찍 나오셨군요.”

“출근도 해야 되니까요. 벌써 지각이지만…….”

“직장이 이 근처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쿠간 대학에서 중세 문학을 가르쳐요.”

“아…….”

교수님이시군. 학교도 멀다. 사실, 시내 자체가 여기서 멀었다. 그건 그렇고……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더는 물어볼 게 없었다. 이 사람은 살인 현장 목격자가 아니라 미라 발견자일 뿐이니까.

“저 여자는…… 대체 어떻게 된 거죠?”

할 말이 없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남자가 내게 물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죽은 지 상당히 오래 됐고, 바싹 마른 것처럼 보이는군요. 검시반에서 미라를 수거해서 조사해보면 살았던 연대 정도는 알 수 있겠죠.”

남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어 하는 표정이었다.

“다른 의견이 있으신가요?”

수첩을 집어넣으며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냥, 이런 장소에서 미라가 발견되는 게…… 좀…….”

확실히 미라 발견 장소로는 생뚱맞았다. 도로변이라니…… 게다가 요즘 들어 한가해지긴 했지만 여긴 한때 상당한 교통량을 자랑하던 번잡한 도로였다. 여기가 이집트도 아닌데 길가에 미라가 굴러다니는 현실이 당황스럽기는 하다.

“길가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미라는…… 드물지만요.”

“드문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죠.”

“그런가요?”

지난 몇 달간 여러 가지 일을 겪은 이후 나는 이 도시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교수님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었다. 이 사람은 그런 일을 안 겪었을 테니까.

“미라는 대부분 건조한 지역에서 발견돼요.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그렇죠. 그런데 여긴 건조하곤 거리가 멀어요. 지척에 하천이 있고…… 강수량이 적은 편도 아니고요. 게다가 가끔 하천이 넘칠 때도 있잖아요. 사체가 미라로 보존될 조건이 아니에요.”

“하지만…… 미라가 분명하던데요?”

이론과 명백한 물증이 서로 다른 말을 한다면 일선 경찰은 물증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수님은 아무래도 이론 쪽에 미련이 남는 눈치였다.

“최소한 계속 여기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그건 확실해요.”

교수님 말씀이 맞다. 이른 봄이라서 지금은 주변이 바싹 마른 덤불숲이지만 여긴 5월부터 11월까지는 늪지에 가까운 축축한 풀숲이었다. 교수의 지적대로 시체가 바싹 마른 채 보존되기엔 터무니없는 장소였다. 미라는커녕 백골도 남을까 말까다.

누군가 여기까지 미라를 가져와서 버리고 간 걸까? 교수도 죽은 강아지를 처리하러 왔다가 미라를 발견했다. 17번 국도변이 언제부터 처치 곤란한 사체유기 장소로 각광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을 놓고 보면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더 물어볼 말이 없으시면 그만 가 봐도 될까요? 오후에도 수업이 있거든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의문 나는 점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교수가 어정쩡한 자세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미들 사이즈의 여행 가방이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생각해보면, 저걸 들고 다시 차에 타는 것조차 고역일 거다. 교수가 내 눈치를 힐끔 살폈다.

“이거, 가는 길에 버리고 가면 법에 심하게 저촉될까요?”

“애완동물의 사체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소각처리 하는 게 원칙입니다.”

“그건…… 그렇죠.”

교수가 난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실수로 죽인 강아지 때문에 이웃과 평생 원수를 지고 사는 게 옳은 건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슬쩍 덮고 넘어가는 게 옳은지…… 나도 얼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원칙대로 하자면 이웃에게 솔직히 사실을 털어 놓고, 용서를 받고, 사이좋게 지내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그거야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열 받은 이웃이 뛰어나와서 이쪽 집에 총질을 해댈지도 모르는 게 이 동네 현실이었다.

“도로를 따라서 몇 킬로 더 내려가시면 나지막한 언덕이 나올 겁니다. 봄부터 야생화가 많이 피는 멋진 곳이죠. 그 근처에 잘 묻어주세요. 아무 데나 버리지 마시고…….”

교수가 얼떨떨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좋겠군요.”

“가방에 붙은 어드레스 카드 떼는 거 잊지 마시고요.”

도시는 넓고, 변태는 많다. 하지만 대체 어떤 놈이 미라같이 기분 나쁘고 구경하기도 힘든 걸 여기다 버려 놓고 사라진 걸까?

교수를 보낸 후 다시 덤불숲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있으면 시체처리반이 도착할 거고, 감식반의 여왕님 그레이스는 일손 빠르기로 유명했다. 후다닥 들이닥쳐서 미라를 치워 가기 전에 현장을 조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뭔가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또 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아까부터 눈이 찢어질 것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는 순찰대 경관의 눈빛이 좀 부드러워질 것 같고…….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서 가만히 미라를 들여다봤다. 10분 정도 주의 깊게 살피고 머리를 굴리자 그저 건성으로 봤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하나씩 보이면서…… 일이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미라에 관한 상식 한 토막도 주워들은 적 없고, 구경은 더군다나 처음이지만 이건…….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세요?”

도로변에 주저앉아서 툴툴거리고 있던 앤디가 어느 틈에 옆으로 다가왔다.

“이상해서.”

“뭐가요?”

손끝으로 살짝 만져본 피부는 종잇장처럼 얇게 말라붙어 있었지만…… 오랜 기간 노출되어 있던 피부라고 단정 짓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손톱은 금방 네일샵에서 나온 사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게다가…….

“왜 그러세요?”

내가 잠시 숨을 멈추자 앤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 오래 전에 죽은 게 아닌가 봐.”

내가 발견한 걸 앤디는 아직 못 봤다. 여자의 피부는 검은데 문신은 짙은 청색이기 때문이었다. 골반에 걸치는 청바지를 입으면 반쯤 보일 만한 지점에 작은 천사 날개…… 그리고 아래쪽엔 잔뜩 멋을 부린 작은 글자가 보였다. 러브 시드니……

여자의 이름은 티파니 샤오란, 35세, 시내의 멋쟁이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구두 전문 매장 <샤오란>의 오너이자 디자이너였다. 아니…… 였었다. 여자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 간단치는 않았다. 그래도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쉬웠던 셈이다. 닷새 걸렸으니까.

감식반에서도 미라의 사망 연대를 그렇게 멀리 보지는 않았다. 가슴 언저리에 피부가 깊게 찢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외형이 깨끗하고, 위에서는 채 소화되지 않은 아스파라거스 줄기와 깍지콩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스는 여자가 몸 관리 부지런히 하던 업타운 걸이고, 마지막 식사를 한 지 두세 시간 이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문제는 그녀가 사망한 시간을 짐작할 수 없다는 거였다.

여자의 몸에는 수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인체에서 수분이 차지하는 비율을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사체를 건조시키는 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었을 거다. 어쨌든 그 때문에 사체는 생명이 빠져 나간 육체가 겪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사후 경직, 곤충의 산란, 자연스러운 부패…….

강력사건에서도 과학적인 조사와 분석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추세지만, 이 경우엔 과학이 진실을 밝혀낼 여지가 많지 않았다. 여자의 신원도, 살해 방법도, 어떤 방법으로 사체를 이렇게 급속하게 건조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도…… 수사는 전적으로 고전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고전적인 수사란 수천 명이나 되는 실종자 명단을 샅샅이 뒤지고, 여자의 엉덩이에서 발견된 문신 사진을 확대 복사해서 시내의 모든 타투 숍을 들락거리는 육체노동을 의미했다.

하지만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단서로 피해자 신원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자의 신원에 대해 희망적인 제보가 들어온 것은 계속된 강행군으로 신발 밑창이 떨어져 나갈 즈음이었다.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 지 닷새, 두개골 골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그래픽 몽타주가 방송을 탄지 이틀만이었다.

“점심은 먹었어요?”

쥬드가 물었다. 한주일간 밖에서 살다시피 돌아다녔기 때문에 쥬드와는 얼굴 마주친 것도 오랜만이었다. 지금도 인사를 길게 할 시간은 없었다.

“나중에 먹을 거야.”

“뭘 먹고 다니긴 하는 거예요?”

요즘은 사람들한테서 얼굴 안돼 보인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먹는 건 잘 먹는데…… 하도 걷다 보니 그게 살로 안 가는 것 같았다.

“어린 파트너를 데리고 다니면서 설마 굶겠어?”

옆에 서 있던 어린 파트너가 뚱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앤디는 요즘 강력사건이 제대로 걸리면 얼마나 심신이 피곤한지 온몸으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간 사건다운 사건 타령한 죄가 있어서 아직까지는 찍소리가 없었다.

“점심 같이 먹을래요?”

쥬드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도시락도 곧잘 싸주고, 차도 잘 만들어주지만 같이 밥 먹자는 소리는 오랜만이었다.

“고맙지만 나가 봐야 돼. 좀 전에 병원에서 연락이 왔었어.”

“병원에서요?”

쥬드가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이며 되물었다. 비니가 입원한 이후 병원 얘기만 나오면 다들 흠칫 놀란다.

“그 남자 말이야. 시드니 캠프. 이제 정신을 차렸다니까 가서 몇 가지 물어봐야지.”

러브 시드니…… 문신의 주인공은 힘들게 찾을 것도 없었다. 시드니는 티파니 샤오란이 운영하던 구두매장 지배인이었다. 그는 고용주였던 티파니와 지난 3년 동안 연인 사이였고, 작년 가을부터는 약혼자로 신분이 상승했다.

관상만 보고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시드니는 수사를 방해할 사람도, 도움을 줄 사람도 아니었다. 남자는 악의라곤 없어 보이는 순한 얼굴인데다 앤디가 경찰 배지를 내보이자마자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것도 모자라서 들고 있던 보석 박힌 구두까지 떨어뜨렸다.

과학수사 좋아하는 앤디는 시드니가 배지를 보고 얼굴색 변하는 게 수상하다고 주장했지만, 일반인들은 약혼녀가 며칠째 종적이 묘연해서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때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서 배지를 들이대면 최소한 그 정도는 놀란다.

TV에서 티파니 샤오란의 몽타주를 보고 경찰에 제보를 한 사람은 샤오란의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남자가 꺼내서 보여준 사진 속의 티파니 샤오란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17번 국도변의 미라와 실제로 닮은 데가 많았다.

며칠 전에 발견된 시체가 약혼녀일지도 모른다는 말에 시드니는 금방 주저앉을 듯 휘청거렸다. 말만 듣고도 그렇게 허둥거리는데 거기다 대고 직접 시체를 보고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매장엔 온통 여직원들뿐이었고 그는 티파니의 동거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시드니를 설득해서 시체 보관소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다. 시체 보관소 입구에서부터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던 시드니는 바디백을 열자마자 기절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비니한테는 가끔 가 봐요?”

경찰서 로비까지 일없이 따라 나온 쥬드가 물었다.

“응.”

“마지막으로 비니를 본 게…….”

“어젯밤이었어. 비니는…… 괜찮아.”

새벽까지 실종자 파일을 뒤지며 보낸 이틀을 빼고는 매일 병원에 들렀었다. 비니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여전히 창백했다. 겉보기엔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비니는 지난 며칠 사이 체온이 2℃나 떨어져서 이젠 체온이 24~25℃에 불과했다.

머리를 다친 것도 아니고, 출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엇이 비니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비니에게 필요한 건 치료가 아니라 기적이라는 것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정도였다.

“정말 점심 같이 안 먹을래요? 간단하게…….”

쥬드 같은 미인이 나처럼 별 볼일 없는 경찰관한테 점심 같이 먹자고 자꾸 보채는 건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진 알겠는데 사람 가슴에 대못 박는 소리도 아무렇지 않게 잘 하는 여자가 대체 무슨 소릴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서 좀 불안했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그럼 커피라도…….”

짜증나…….

“그냥 하라니까?”

“루크 첸이 전화했었어요. 그만 화 풀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전해달라던데요?”

후회가 막심이다. 점심 먹자고 좋게 얘기할 때 고분고분 말 들을 걸…… 루크 첸한테서 온 전화 내용을 쥬드가 냉큼 불어버린 현장에는 경찰서 대표 촉새 로빈이 지나가는 중이었고, 맞은편 회의실에선 강력반 반장 다섯 명이 회의를 마치고 막 나오고 있었다.

강력 2반의 스타이너 반장이 우리 반장을 쳐다보면서 히죽 웃었다.

“헤어졌다고 하더니, 그냥 사랑싸움 한 거네?”

반장이 나를 때려죽일 것처럼 위협적으로 노려봤다. 그 서슬에 놀라서 황급히 쥬드를 끌고 맞은편 방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 소릴 거기서 하면 어떡해?”

혹시 반장이 쳐들어올까 무서워서 먼저 문부터 잠그고 쥬드한테 따졌다.

“그냥 하라면서요?”

“그 자식 메신저 노릇을 당신이 왜 해?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렇게 할 일 없느냐는 소리에 쥬드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당신이 전화를 안 받으면 첸이 누구한테 전화를 하겠어요? 내 전화번호를 그 사람한테 준 건 당신이잖아요?”

“당신이랑 잘해보라고 적어줬던 거라고!”

“유감스럽게도, 그 남자는 당신이랑 잘해볼 생각만 굴뚝같다고요!”

살짝 미안한 기색이라도 있으면 화가 좀 덜 날까?

“어쨌든, 복도에서 그런 얘길 하면 어떡해?”

“그냥 하라고 했잖아요!”

앤디도 밖에서 기다릴 테고, 병원에 가서 시드니도 만나야 되고…… 쥬드랑 같은 소리를 끝도 없이 되풀이하며 싸우기도 싫었다. 그래서 딱 잘라 말했다.

“앞으론 당신도 그 자식 전화 받지 마!”

별로 어렵지도 않은 일인데 쥬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잘생긴 악당한테서 오는 전화를 어떻게 안 받아요?”

더는 말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방에서 나가려고 문을 확 열었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닫고 말았다. 문 밖에 반장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든 말든 당신 맘대로 해. 하지만 그 자식이 무슨 말을 하든, 나한테 일일이 전할 거 없어.”

이번 제안엔 쥬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일단 됐고, 이제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여긴 창문도 없고 다른 출입문도 없었다. 간단한 미라 수거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엽기적인 강력사건으로 재분류된 이후, 반장하고는 다른 문제없이 잘 지내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반장을 따돌릴 방법이 없을까 머리 굴리고 있는데 쥬드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비니 얘긴 뭐예요?”

루크 첸은 쥬드한테 그렇게 긴 얘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지만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끝낸 통화에서 집으로 오라는 헛소리 외에 비니에 관해서 한마디 흘리는 걸 잊지 않았다.

“하던 일은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비니 몬티첼리 형사에 관한 일이라면 알 거라고 하던데요?”

쥬드는 내가 루크 첸과 어울려서 비니와 관련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 했지만, 기린이나 용…… 그리고 카페에 틀어박힌 비니의 영혼에 관한 얘기를 쥬드한테 할 수는 없었다. 해봐야 믿지도 않을 거고, 나도 이젠 그런 소리가 더 이상 안 믿긴다.

“무슨 일이에요?”

“알 거 없어.”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쥬드가 머리 좋고, 아는 거 많고, 그 외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비니를 깨우는 일에는 도움이 안 될 거다. 쥬드가 도와줄 일은 따로 있었다.

“다음에 또 그 자식한테서 전화가 오면, 지옥으로나 꺼지라고 전해줘.”

다시 문을 열었을 때도 반장은 여전히 화난 얼굴로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자식한테서 자꾸만 전화가 오는 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반장은 나한테 화가 나 있었다. 변명할 말도 없고, 들어 주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반장 뒤편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앤디를 낚아채서 냅다 뛰었다. 시간이 약이라니까 저녁쯤엔 화가 좀 가라앉겠지.

17번 국도 변에서 미라가 발견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쿠간엔 벌써 이런저런 대형 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이제 도로 옆에서 시체 하나 발견된 정도는 신문 사회면에서도 2단짜리 짧은 기사거리에 불과했다.

온 도시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앤디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미라 수거 작업 같은 잡일이 아니라 엽기적인 살인사건이라는 사실에 대단히 만족스러워했고, 쉬는 시간엔 두 형들한테까지 전화로 자랑이 늘어졌다. 뭐…… 긍정적인 태도는 좋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느낌이 별로였다. 이게 그렇게 단순한 사건일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시드니 캠프는 퇴원 준비를 마치고 막 병실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병실에 들어서는 우리를 보자마자 다시 얼굴이 노래져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마음의 준비도 없었던 사람한테 그렇게 험한 시체를 보여줬으니 당분간은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상심이 크시겠지만, 어려우시더라도, 협조를 해주시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겁니다.”

나름대로 정중한 협조 요청에 시드니가 손과 고개를 동시에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그건 첫눈에 알아봤다. 내가 바라는 건 살인사건을 단번에 해결할 결정적인 단서…… 뭐 이런 게 아니라 티파니가 그날 저녁에 만났던 친구들 연락처 정도였다.

“그건…… 티파니가 아니었어요.”

“…….”

“모르는 사람이었다고요. 그런…… 세상에, 그렇게 끔찍한 건 처음 봤어요.”

시드니가 이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애초에 사체 확인이 여자의 신원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티파니 샤오란의 시체는 해골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시드니가 아무리 티파니를 사랑했대도 그런 모습까지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거다.

“미안하지만, 댁의 약혼녀가 맞아요.”

“아니라니까!”

시드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한마디만 더 하면 나한테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은 이런 거였다.

“어제 오후에 샤오란 씨의 치과 진료기록을 찾아서 검시반에 보냈었고, 아침에 결과가 나왔는데…… 사체의 치아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어요. 우리도 정말 유감입니다.”

시드니가 티파니 샤오란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티파니는 매장 위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오후까지 일했고, 4시쯤 매장을 나섰다. 시드니가 티파니를 본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진즉에 실종 신고를 내지 않았던 것은 티파니가 말도 없이 며칠씩 사라진 게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티파니는 종종 친구 별장이나 한적한 호텔에 며칠이고 틀어박히곤 했다.

게다가 티파니와 시드니는 다툼이 잦은 커플이었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서는 강도까지 심해져서 티파니가 마지막으로 매장을 나서기 직전에도 선반에 장식되어 있던 벨벳 구두가 허공을 날았을 정도였다.

어쨌든 티파니가 그렇게 화가 난 채 나가버렸기 때문에 시드니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녀의 잠적을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실종 신고를 제때 했다고 해도 이미 늦었겠지만.

“여자친구와 다투셨다고요?”

앤디가 심각한 얼굴로 시드니를 추궁했다. 젊은 여자가 변사체로 발견될 경우엔 애인이나, 남편이나…… 옆집에 사는 남자가 최우선으로 혐의 물망에 오르곤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애인이나 남편이나, 주변 남자들이 살인범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찰관 집안 출신이고 형제들도 경찰이니까 앤디도 그런 사건에 대해서 들은 얘기가 많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 앤디는 연인들 사이는 본래 다툴 일이 많고,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사이라면 상황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물론 수사를 좀 더 하다 보면 시드니에게 혐의를 둘 만한 정황이 포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정상적인 범행으로 보기엔 사체 상태가 너무 비정상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뭐요? 내가 티파니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시드니가 발끈해서 앤디에게 대들었다.

“그냥 질문을 한 것뿐입니다.”

앤디가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약혼녀를 잃은 남자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은 가지만 앤디가 형사로써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시드니의 감정이 격앙되어 있기도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앤디가 너무 어리고 만만해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이럴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파트너가 나서줘야 된다.

“나스카 형사의 질문에 답변을 하세요.”

“나를 범인으로 모는 겁니까? 티파니를 내가…… 죽였다고요?”

“수사에 협조해주세요. 무슨 일로 다투셨길래 약혼녀가 구두를 집어던지고 나갔는지 정도는 우리도 알아야 됩니다.”

살인사건을 다루면서 힘든 일은 피해자 가족들을 대하는 거였다. 슬픔도 전염이 되는지, 내가 너무 감정이 무른 건지…… 상황이야 어떻든 물어볼 거 묻고, 조사할 건 해야 되는데 슬픔에 몸도 못 가누는 가족들을 상대로는 그러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건…… 그냥 사소한 말다툼이었어요.”

내가 사무적이고 담담한 태도로 나가자 시드니가 금세 풀이 죽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얼마나 사소한 일인지 판단하는 데 도움에 될 텐데요.”

티파니가 시드니와 다툰 것은 매리앤이라는 직원 때문이었다. 그 여직원은 잦은 지각과 서툰 영업실력 때문에 사사건건 티파니의 신경을 거슬렀는데, 그날 마침 커피 타임에 시드니와 히득거리는 것까지 딱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냥 커피만 마셨던 것뿐이라고요…….”

시드니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먹거렸다. 티파니가 오해를 했던 거라고 해도 구두 한 짝 정도는 날아올 만한 사안이었다. 어쨌든 안됐다. 그렇게 화를 내고 나가버린 게 약혼녀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어차피 시드니에게서 대단한 단서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티파니가 그날 이후 만나거나, 연락을 했을 만한 사람들의 연락처 정도가 그가 수사에 줄 수 있는 도움의 전부였다.

앤디는 그거 외에도 시드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더 있는 눈치였지만…… 그냥 끌고 나왔다. 앤디가 한마디만 더 했으면 이번엔 시드니가 자기 구두를 벗어서 던졌을 거다.

“선배님은 그 남자가 수상하지 않으세요?”

내 처사가 못마땅해서 툭 튀어나온 앤디의 주둥이가 좀처럼 들어가질 않았다. 병원에서 나온 지 1시간이 넘도록 아직 차 안이었다. 아말 거리로 가는 이 도로는 요즘 들어선 하루 종일 정체가 풀리질 않았다.

“넌 뭐가 그렇게 수상한데?”

“전부 다요. 동업자가 사망하면 가게는 누구 게 되죠? 티파니는 디자이너에 가게 사장인데 시드니는 그 밑에서 일하는 점원이죠.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 없었을까요? 또…… 바람피우다 여자친구한테 딱 걸렸는데, 혹시라도 가게에서 잘리면 불쌍한 시드니는 뭘 먹고 살아요?”

치정에, 돈에…… 살인 사건 날 만한 동기로는 충분하다. 하지만…….

“구두 가게 점원이 무슨 수로 시체를 그렇게 바싹 말렸을까?”

“그건…….”

“보통 살인범들은 사체를 그냥 유기하거나, 묻어버려. 좀 더 머리 쓰는 놈들은 보일러 같은 데 넣어서 흔적 없이 태워버리기도 하고, 성질 더러운 놈들은 토막을 내기도 하지. 리즐 시에선 어땠는지 몰라도 우리 동네에선 심해봐야 그 정도야.”

“자랑하시는 거예요?”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야.”

“요점이 뭐예요?”

앤디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요점은 간단하다.

“짭새 노릇을 10년 가까이 하면서 미친놈도 많이 보고, 독한 놈도 많이 봤지만, 사체를 며칠 만에 미라로 만들어서 버리는 놈은 지금까지 없었어. 이제 한 놈 나타났는데…… 넌 그게 그 얼빵한 구두 가게 점원이었으면 좋겠냐?”

내 설명이 맘에 들었는지, 앤디의 얼굴에서 부기가 빠지면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럼…….”

“여긴 시드니보다 훨씬 더 흉측하고 괴상한 놈들이 많아. ……내가 ‘오컴’ 얘기를 해줬던가?”

티파니는 그날 가게에서 나온 후, 아말 거리에서 친구 두 명을 만났다.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들에게 시드니와 헤어져야 할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아무도 그 얘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이 그런 식으로 다투고 헤어지네 마네 한 것도 이미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티파니의 친구들은 시드니를 별로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혹시 요즘 들어 이상한 낌새가 없었느냐는 앤디의 유도성 질문에는 하나 같이 고개를 저었다. 우유부단한 게 탈이지 그런 짓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게 그녀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물론 시드니가 두 얼굴의 점원일 수도 있었다. 조사를 좀 더 하다보면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티파니와 친구들은 <이오>라는 유명한 건강식 전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고, 근처의 클럽에 가서 술도 마셨다. 그렇게 자정까지 놀다가 헤어졌고…… 티파니의 아파트는 클럽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불과했다.

“이젠 뭘 하면 되죠?”

앤디가 물었다. 티파니의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나오니 벌써 저녁때였다.

“음…….”

솔직히 막막했다. 달랑 시체 하나 가지고 시작한 수사에서 닷새만에 신원확인까지 했으면 진행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티파니의 사체에는 단서라고 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았다. 폭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흔적도 없었고 사망 시기조차 애매했다. 실종된 직후에 살해됐을 수도 있고, 훨씬 후에 그랬을 수도 있었다. 기운 빠지는 일이지만, 귀가하는 길에 낯선 누군가에게 납치 살해를 당한 거라면 성과를 기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우선…… 클럽으로 가 보자.”

<스토리 1001>은 시내에서도 꽤 유명한 클럽이었다. VIP 카드가 없으면 몇 시간이고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서 들어가야 하는 문턱 높은 가게였지만 다행히 초저녁이었고, 또 경찰 배지도 VIP 카드 정도의 효력은 있어서 문 앞에서 기약도 없이 기다리는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봐야 수사에 도움 될 만한 단서는 없었다. 지배인과 웨이터 한두 명이 티파니와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날은 다른 평범한 날과 다를 것이 없어서 손님은 많았고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은 없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앤디가 물었다. 클럽에서 앤디는 레모네이드 한 잔, 나는 마티니 한 잔을 마셨고 나와 보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티파니 일행은 자정이 넘어서 클럽에서 나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번화가라면 그 시간에도 행인이 많았을 거다. 티파니의 아파트까지는 불과 20여 분 …… 대로변에서 납치극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을까?

“선배님…….”

앤디가 보챘다. 사건을 빨리 해결해서 기자들과 인터뷰도 하고, 아버지와 형들한테 자랑도 하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벽에 부딪혔다. 여기서 티파니의 아파트까지 가면서 무작정 탐문을 해보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내키질 않았다.

누군가가 여자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수백 년 간 햇빛에 말린 것 같은 몰골을 만들어서 도로변에 아무렇게나 버렸다. 이유가 뭘까? 납치 살해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티파니에게 원한을 품은 정신병자라도 있는 걸까?

어쨌든 사건을 해결하려면 시체의 상태가 왜 그 지경이 되었는지부터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선배니임…….”

앤디는 어지간히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떤 수사는 해결하는데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상황이 더 안 좋은 경우엔 영영 미해결로 남기도 한다.

“집에 가라.”

다음 행선지에 관한 내 지시에 앤디가 펄쩍 뛰었다.

“벌써요?”

어린애한테는 초저녁일지 몰라도 노땅은 피곤하다. 오후 아홉 시 반이면 퇴근 일찍 했다고 시비 걸 사람도 없을 시간이다.

“나는 병원 앞에 좀 내려주고.”

겐지 클리닉은 진료비 비싸고 시설 좋은 만큼이나 면회 규정이 까다로웠다. 본래는 그랬다. 하지만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들이 입원하고 그 환자들의 이탈리아계 친인척들이 몰려와서 병원을 도떼기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부터는 알게 모르게 규정이 많이 느슨해졌다.

말 많은 다혈질 문병객들에게 줄곧 시달린 병원 관계자들은 이제 좀 늦은 시간이긴 해도 조용히 와서 친구 얼굴이나 잠깐씩 보고 가는 사람까지 신경 쓰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출입하면서 경비원이나 간호사들하고 얼굴을 익힌 덕분에 요즘은 그냥 편한 시간에 왔다 가면 된다.

오늘은 그렇게 늦게 온 것도 아니니까 레빈의 병실에 들러서 인사나 하고 갈까…… 지난주에 봤을 때 레빈은 비록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긴 했지만 정원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반면에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생각보다 회복이 더딘 편이었다. 경과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거의 제자린데…… 아마 비니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울적하게 병원 로비를 지나가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낯이 익기는 한데 누구더라…… 잠시 생각을 하고 나서야 여자가 발렌타인 담당인 그 귀여운 간호사라는 걸 깨달았다. 간호사 복장이었으면 금방 알아봤을 텐데 청바지에 카키색 점퍼 차림이라…… 사복을 입으니까 더 어려 보였다.

“저…… 유제이 형사님이시죠? 비니 몬티첼리 환자 친구분이시고…….”

보아하니 퇴근하는 길인 거 같은데…… 내게 뭔가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어두울까?

발렌타인은 요즘 들어서는 몰핀에 취해 늘어져 있는 게 전부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들여다봤을 때는 거의 그랬다.

“발렌타인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그런 건 아니에요.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크루거 간호사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실은 요즘 들어 심하게 울적해하는 것 같아서요. 물론 정신 제대로 차리고 있는 시간도 얼마 없긴 하지만, 어쨌든…….”

어린 간호사의 눈 주위가 어느새 빨갛다. 발렌타인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자친구로 생각하든…… 가슴이 많이 아플 거다. 일전에 발렌타인이 어울리지도 않게 간호사 걱정을 할 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막상 때가 닥치고 보니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기왕 오셨으니까 좀 들러 주셨으면 해요.”

“발렌타인이 그래 줬으면 하던가요?”

크루거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님 얘기를 꺼내다가 그냥 됐다면서 입을 다물어버려요. 두세 번 정도 그랬던 것 같아요.”

발렌타인의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호흡기를 쓰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은 게…… 비니를 볼 때하고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마음이 심란했다.

요즘 들어 거의 매일 병원에 들르면서 비니만 보고 간 건 아니었다. 발렌타인의 병실도 몇 번 들여다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약에 취해 축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나를 본 지 오래됐다.

깨울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문 옆에 놓여 있는 의자를 당겨서 침대 옆에 앉았다.

발렌타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다. 무척 위험한 지역에서 거친 시절을 보냈을 거고, 많은 사람을 죽였을 거고…… 그 자신도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을 거라는 것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이 남자의 마지막 싸움이겠지.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싸움보다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까…….

발렌타인은 물론 동정 같은 거 질색이겠지만 불쌍하단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비썩 말라가는 데다 앙상하게 마른 팔은 서너 개나 되는 튜브에 칭칭 감겨 있고, 빨간 하트랑 LOVE가 번갈아 찍힌 귀여운 잠옷까지 입고 있으니…… 눈물이 날만큼 불쌍했다. 만약 그때 내가 엘리야 하이네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남자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행복했을까?

고통에 지쳐서 잠든 걸 깨우기도 그렇고,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옆에 누가 있는 낌새라도 챘는지 발렌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하지만 눈을 떴어도 약 기운에 취한 갈색 눈동자는 한동안 초점을 못 잡았고, 나를 금방 알아보지도 못했다.

“뭐야?”

발렌타인이 호흡기를 떼서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투덜거렸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게 짜증나고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그냥, 보고 싶어서.”

“웃기지 마. 크루거가 쓸데없는 소릴 했겠지.”

“나 그동안 자주 왔었어. 당신이 자느라 몰라서 그렇지.”

발렌타인이 기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가 그것도 힘든지 눈을 감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많이 아파?”

“어떻게 된 게…… 이젠 안 아플 때가 없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간호사를 불러줄까?”

발렌타인이 고개를 저었다.

“둬. 몰핀 따위, 이젠 듣지도 않아.”

잔뜩 웅크린 채 고통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발렌타인에게 달리 해줄 일이라곤 없었다. 그냥 아무 거나 움켜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아주고 야윈 어깨를 안아주는 것밖에는…… 하지만 발렌타인의 고통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서 결국은 침대 옆에 붙은 호출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정말…… 힘들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죽질 않는 거지?”

몰핀의 힘으로 간신히 고통을 억누른 발렌타인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발렌타인이 진정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약에 취해서 몽롱해지는 걸 진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발렌타인은 위암 말기에다 중증의 아편 중독이 겹쳤다. 웬만한 양으론 진통도 잘 안 되는 지경이니 몰핀의 양이 점점 늘었을 테고, 그래서 하루 종일 몽롱한 상태로 늘어져 있게 되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금단 증세까지 겹쳐서 더 고통스러운 거다.

“너랑……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던 니 파트너 녀석만 아니었으면 이 고생은 안 했을 거야.”

안다. 어느 허름한 모텔 방에서 자기 머리에 대고 총을 쏘든가,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든가…… 발렌타인이라면 뭐가 됐든 이렇게 침대에 묶인 채 약 기운으로 연명하는 것보다는 더 세련되고 덜 고생스러운 방법을 찾았을 거다.

“어디 가고 싶은 데라도 있었던 거야?”

“별로…….”

발렌타인이 몽롱해지는 정신을 수습하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것도 싫지만, 이렇게 멍한 것도 못 견디겠어. 불쾌하고 지겨워.”

“이해는 하는데, 그러려면 진작 건강관리를 하든가 병원에라도 일찍 가 봤어야지.”

발렌타인이 내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부릅뜨고 있던 눈에서 기운이 점점 빠지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감겨버렸다. 이렇게 잠들면 약 기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자는 모양이었다.

잠깐 지켜보다가 일어서려는데 발렌타인이 다시 눈을 떴다. 하지만 이미 초점이 많이 흐려진 상태였다.

“비니는 좀 어때?”

“그냥 그래.”

“빨리 찾아야 될 거야.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것 같으니까…… 저대로 오래 두면…….”

발렌타인이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든 약 기운을 이기려고 애쓰는 게 안쓰러웠다.

“그냥 자. 내일 또 올게.”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이 비니의 사라진 영혼에 관해 뭘 알아서 그런 말을 한 걸까? 빨리 찾아야 될 거라니……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 도무지 모를 카페에서 놀고 있다는 비니의 영혼 얘기는 용과 기린을 빼면 나랑 루크 첸밖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특별히 비밀로 간주하고 은밀히 주고받은 말은 아니었지만, 그런 얘길 누가 들으면 우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스러워서라도 누구한테도 발설한 적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발렌타인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약기운이 본격적으로 도는지 발렌타인이 완전히 축 늘어져버렸기 때문에…… 호흡기를 제대로 씌워 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발렌타인이 내 손목을 갑자기 움켜잡는 바람에 호흡기를 발렌타인의 얼굴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발렌타인이 다시 눈을 떴다.

“그 녀석은 누구였어?”

누구? 내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발렌타인이 잠시 망설였다.

“그…… 이상한 녀석 말이야. 정원에서 봤던…….”

“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히말라야에서 온 기린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성깔 사납고 야채 좋아하는 어린애라고 해야 할지…….

기린과 그렇게 마주쳐서 발렌타인이 놀란 건 알고 있었다. 놀라는 게 당연하다. 기린은 엘리야 하이네하고 진짜 많이 닮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무 둔하고 무심한 걸까? 발렌타인이 아직도 기린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그냥, 우연히 만난 애들인데…… 왜?”

“아니야. 아무것도…….”

내 손목을 잡고 있던 발렌타인의 손이 침대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억지로 뜨고 있던 눈도 어느새 감겼고, 말소리도 분명치 않았다.

“엘리야의 무덤에…… 가보고 싶어.”

약에 취해서 의식을 거의 잃어가던 발렌타인이 중얼거렸다. 거의 알아들을 수도 없을 만큼 낮고 슬픈 목소리로…….

병원 드나드는 일이 점점 힘겹게 느껴졌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병원에서 비싼 돈 내고 치료 받으면 뭐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지, 비니는 비니대로 저 지경, 레빈이나 몬티첼리도 그날이 그날…… 게다가 발렌타인은 애초에 원장이 부른 6개월에서 반도 못 채울 형편이었다. 올 때마다 실망스럽고 기운 빠지는 일뿐이었다.

“자네…….”

비니 병실로 가는 복도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돌아보니 몬티첼리 씨였다. 비니 어머니가 노심초사 끝에 몸져누운 이후 비니 동생들이 번갈아가며 병실을 지켰었는데 오늘은 아버님 차례였던 모양이다.

“오랜만이군. 비니를 보러 왔나?’

“예.”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몬티첼리 씨가 악수를 청하며 안부를 물었다.

“저야 뭐…… 잘 지냅니다.”

“얼굴이 많이 상했어. 뭘 하든 건강해야지.”

몬티첼리 씨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까 또 가슴이 뭉클했다.

비니 아버지…… 레오나르도 몬티첼리로 말하면 몬티첼리 가문의 둘째 아들로, 맨손으로 시작해서 현재는 시내 요소에 커다란 슈퍼마켓을 네 개나 소유하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사업적인 성공보다 더 놀라운 건 소심하고 겁 많은 형과 아무도 말릴 수 없는 말썽꾸러기 동생 사이에서 평생 정상적인 마인드를 유지했고, 세금 잘 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지역사회에 알게 모르게 베푸는 자선도 만만치 않은 모범적인 기업인이란 사실이었다. 평생 지역사회에서 분란만 일으켜온 프란시스 몬티첼리와는 여러모로 딴판이었다.

형제들 중에 성격도 제일 좋고, 키도 제일 크고, 미남이고…… 몬티첼리 씨를 처음 봤을 때는 비니랑 참 많이 닮았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진중하고, 품위 있는 그 분위기에 놀랐었다. 비니처럼 뻔뻔하고 썰렁한 농담 잘하는 놈에게 저렇게 멋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고, 비니가 나중에 저렇게 멋있는 중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웠다. 어쨌든 몬티첼리 씨에 대한 내 첫인상은 한마디로 이런 거였다. 저런 아버지 밑에서 크면 기분이 어떨까?

“아내가 자네 얘기를 많이 했어. 그 사람은 처음 봤을 때부터 자네를 아주 맘에 들어 했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비니한테 잘해준 거, 우린 두고두고 못 잊을 거야.”

몬티첼리 씨하고는 연말이나 연초에 비니네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인사 정도 나눈 게 전부였다. 어머니는 그 전에도 몇 번 뵌 적이 있지만 몬티첼리 씨는 워낙 바빴고, 나도 남의 집 가족 파티에 가서 뻘쭘하게 서 있는 게 과히 즐겁진 않아서 자주 가지는 않았었다.

비니네 일가친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비니랑 기꺼이 어울릴 만큼 배짱 좋은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놀아줄 사람 없는 비니랑 아는 사람 없는 나, 둘이 홀 구석에서 따로 붙어있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럴 때 잠깐 방심하면 칵테일 나르던 웨이터랑 부딪혀서 술 벼락을 맞든가, 멀쩡하던 벽장식이 떨어져서 발등이 부서지든가, 특별 주문한 3단 케이크가 얼굴 옆에서 폭발을 하니까…… 음식 맛있고, 분위기 화기애애하고 모두가 나한테 친절하긴 했지만 그런 사소한 장점으로 메우기엔 너무 위험한 파티라는 계산이 나왔고, 세 번 정도 끌려 다닌 이후엔 되도록이면 비니네 집안 연말 행사엔 안 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몬티첼리 씨와 함께 비니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비니가 이렇게 누워 있다는 현실이 믿기질 않았었다. 보고 또 봐도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가슴만 답답할 뿐 빤히 보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지금은 비니가 깨어나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이렇게 죽은 듯이 몇 달이고 누워 있다가 어느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눈을 뜨는 게 가능할까? 세상엔 기적도 가끔 일어난다지만 우리가 그렇게 운이 좋을까? 떠올리는 것조차도 불길해서 싫지만, 요즘은 어쩔 수없이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했다.

침대 머리맡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든 믿고 의논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 자상하고 아름다운 어머니, 예쁜 여동생들, 성깔은 좀 있어 보이지만 잘생긴 남동생……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가정을 뽑는 대회 같은 게 있다면 비니네 집도 꽤나 윗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다. 롭이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게 약간 걸리긴 하지만…….

“어머님은 좀 어떠신지…….”

“그 사람이야…….”

몬티첼리 씨가 말을 못 잇고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비니 어머니는 지난주에 집으로 돌아갔다. 비니 때문에 과로로 쓰러진 이후 비니 어머니는 한동안 위층 병실에 입원을 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틈만 나면 이 방으로 내려와서 비니 곁을 지켰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건강이 더 안 좋아졌고, 결국은 한 번 더 쓰러지고 말았다.

의사 처방은 별게 없었다. 절대 안정하고 푹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바로 아래층에 자식이 싸늘하게 식은 채 죽었는지 살았는지 분간도 안 되는 지경으로 누워 있는데 어머니가 마음을 편하게 먹을 도리가 없는 거고…… 그래서 가족들이 우겨서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비니가 이러고 있는데 집에 있다고 마음이 편할 리 있나? 별로 안 좋아.”

비니만큼이나 어머니도 걱정스러웠다. 마음이 그렇게 강한 분도 아닌데, 하긴…… 아무리 강해도 이런 일을 견딜 부모는 없겠지. 비니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몬티첼리 씨의 눈이 어느새 푹 젖어 있었다.

“기운 내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운이 좋은 녀석이라는 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선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뭔가 희망적인 말로 위로를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좋질 않으니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용이랑 기린 얘기를 할 수도 없고…… 불현듯 코끼리 카페의 행방을 몬티첼리 씨한테 한번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다물었다.

“아내는 항상 비니 걱정을 했어. 경찰 일이 워낙 위험하니까…… 처음엔 반대도 많이 했었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경찰이 되고 싶으면 뜻대로 하라고 애를 부추겼지. 요즘은 그때 생각이 많이 나고, 생각할 때마다 후회스러워. 어떻게 비니한테 이런 일이 절대로 없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몬티첼리 씨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비니의 핏기라곤 없는 창백한 손을 잡아서 꼭 쥐는 그 모습에 나도 울컥 눈물이 솟았다.

“만약에 비니를 잃는다면 아내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니를…….”

다행히 ‘찾아내겠습니다’까지는 튀어 나가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별 신통치도 않았던 기린 생각이 간절했다.

“몇 개월씩 누워 있다가도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상황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비관적인 건…….”

내 횡설수설에 몬티첼리 씨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의사들이 그러더군. 비니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고…… 이렇게 체온이 떨어진 상태로는 숨이 붙어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거라는 얘기를 담당의사한테서 며칠 전에 들었네.”

몬티첼리 씨는 오래 울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져서 옷섶을 적셨고, 가끔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가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몬티첼리 씨의 들썩이는 어깨를 끌어안고 나도 한동안 울었다.

병원을 나온 건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서 걸음을 떼어 놓는 것조차 힘들었다. 보통은 울고 나면 마음이 진정되고 좀 후련한데, 비니 자식이 노상 그 모양이니까 오랜만에 눈물 쏟은 보람도 없이 그냥 기운만 빠졌다.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은 비니를 두고 오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밤새 병상을 지킬 몬티첼리 씨를 혼자 두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언제까지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른 봄의 밤바람이 한겨울 바람보다 더 매서웠다. 병원 문 앞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번호를 꾹꾹 누르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날이 추워서 그런 건지, 목소리도 듣기 싫은 놈한테 전화를 하려니 분해서 그런 건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여보세요?」

이상하다. 번호를 잘못 눌렀나? 아닌데, 이 번호 맞는데…… 뭐야? 이 기름진 목소리는…….

“누구세요?”

「그러는 넌?」

어쭈…….

“루크 첸 씨 휴대폰 아닙니까?”

「맞는데, 누구냐고?」

두목이나 똘마니나 하나 같이 싸가지 없기는…… 남의 전화를 받았으면 찍소리 말고 바꿔주던가, 대꾸라도 공손하게 하든가…… 상대방의 버릇없는 태도에 기분을 싹 잡치긴 했지만,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공무원으로써 차이나타운 뒷골목에서 굴러먹는 깡패 녀석과 같은 수준으로 놀 수는 없는 일.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점잖게 대응했다.

“알아서 뭐할래? 두목 바꿔.”

「이런 씁쌔…… 우리 회장님이 니 친구야? 얻다 대고 바꿔라 마라야?」

그렇지…… 니네가 좋게 말로 해서 들을 놈들이 아니지. 루크 첸, 이 자식은 이럴 거면 핸드폰은 뭐 하려고 들고 다니고, 번호는 왜 가르쳐줬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직통이라면서 무슨 큰 선심이라도 쓰듯…….

“정말 전화 안 바꿀래?”

「글쎄, 누구냐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비니를 깨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섰었는데, 온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푸른 코끼리 카페를 찾아낼 작정이었는데…… 전화 통화부터 막히니까 짜증이 확 솟구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뻔질나게 전화질이더니, 막상 전화를 하니까 안 받아?

“됐어. 끊어!”

「야! 누구 맘대로…….」

전화를 끊고 병원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에 되는 대로 주저앉았다. 앉아서 차디찬 밤공기를 몇 번 더 깊이 들이마셨다. 한기가 뱃속까지 스며들었다. 이젠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찬 기운 때문에 온몸이 덜덜 떨리긴 하지만…… 덕분에 머릿속이 좀 전보다는 훨씬 맑아졌다.

머리가 맑아지니까 더 화가 치밀었다. 망할 자식! 살려준다고 큰소리 탕탕 쳤으면 살려내야 할 거 아냐!! 있지도 않은 카페 타령이나 하면서 노닥거리는 동안 비니네 집안에 줄초상이 날 판이다. 애초에 깡패 두목 따위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소리를 믿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가만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바람을 넣었으면 맛보기라도 보여주는 게 도리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잠잠한 거냐?

맘 같아선 당장 놈의 집으로 쫓아가고 싶지만, 선뜻 그러기도 어려운 게…… 이런 기분으로 그 자식과 대면하는 게 현명한 일일지 모르겠다. 내 성격도 예전 같지 않아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데 그 자식이 얄미운 얼굴로 몇 마디 깐죽거리기라도 하면 지난번처럼 총을 뽑아서 바닥만 쏘고 말 자신이 없다.

두서없이 마음만 어지럽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찬바람을 줄창 맞고 서 있어서 그런지 좀 전부터는 머리도 심하게 지끈거렸다. 일단 모텔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할까 보다. 이런 기분으로 잠자리를 찾아 들어가 봐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지만, 날이 추운데다 바람까지 점점 거칠어지고 있으니까…….

밤새 길가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어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큰길까지 나왔다. 병원이 중심가에선 좀 떨어진 위치라서 이 시간엔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앤디를 택시 태워 보내고 차를 내가 쓸 걸 그랬다.

길가에 5분 정도 서 있었나…… 이젠 뼛속까지 쑤실 정도로 추웠다. 지금 몸살이 나면 안 되는데 몸살의 느낌이 확실히 왔다. 나 때문에 티파티 샤오란 사건이 다른 팀한테 넘어가버리기라도 하면 쿠간 시 같은 범죄 다발 도시에서도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엽기 살인마를 추적해서 잡아넣을 희망에 잔뜩 부푼 앤디는 다시 경찰서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하게 될 테고…… 만에 하나 후발팀이 그 흉악한 살인마를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격투 끝에 체포라도 하는 날엔, 평생 나를 원망할 거다.

그냥 병원에서 하룻밤 잘 방법이 없을까? 침대도 있고, 약도 줄 테고…… 그런데 겐지 클리닉 같은 대형 병원 응급실에서 감기 환자도 받아줄지 모르겠다. 꾀병을 좀 피우면 병원 응급실에서 하룻밤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차 잡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병원에서 하룻밤 지낼 방법을 진지하게 궁리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뭐야?”

전화 받자마자 냅다 소릴 질렀다. 루크 첸의 전화번호가 떠 있어서…… 하지만 저쪽에서 들려온 건 이번에도 그 자식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화했었어?」

자오다. 얘네들이…… 요즘 자금 사정이 안 좋은가? 휴대폰 하나를 조직원들이 다 돌려쓰나 보네.

“응…….”

「미안해. 회장님이 지금 회의 들어가서 전화를 못 받으셔.」

이 늦은 시간에 회의라…….

「그리고 좀 전에 니 전화 받은 놈은 노 회장님 셋째 조카의 처남인데, 여기 분위기를 잘 몰라. 다른 동네에서 놀다왔거든. 혹시 너한테 뭐 실수라도 했어?」

“아니야. 별로.”

「어떻게 지내?」

“잘…… 지내.”

아무리 언짢고 화가 나도 자오한테는 말을 함부로 못하겠다. 일단 너무 무섭게 생겼고, 또…… 자오가 나한테 뭘 잘못한 건 아니니까.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어? ……응.”

「어디야?」

순간 밤바람이 얼굴을 한번 후려갈기고 지나갔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꼭 누구한테 주먹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얼얼하고 머릿속이 멍했다.

“겐지 클리닉…….”

정신 좀 차리자. 내가 어디 있는지 자오한테 왜 곧이곧대로 일러주는 건데?

“그런데, 그건 왜?”

「거기 있어. 데리러 갈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왜라니? 집에 안 올 거야?」

자오의 천연덕스런 대꾸에 컴컴한 병원 앞길에서 나 혼자 펄쩍 뛰었다. 집이라니…… 누가 들으면 거기가 내 집인 줄 알겠다.

“나 이제 거기 안 가. 니네 두목하고도 더 볼일 없고.”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서 들여다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회장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화 풀어. 회장님이 계속 저기압이라서 우리도 피곤하고, 또 별채에 있는 애들도 널 기다리는 눈치야.」

별채에 있는 애들 얘기가 나오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만 화를 풀라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지만, 용하고 기린을 언제까지 그 악의 소굴에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용과 기린이 신통력이 있든 없든, 조만간 가서 데리고 나와야 된다. 문제는 당장 데리고 나와도 걔네들을 맡겨 놓을 데가 없다는 거 하고, 둘의 밥값을 내 월급으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건데…… 그 생각하니까 또 골이 띵해서 잠시 멈칫하는 사이, 자오가……

「있어. 금방 갈게.」

라고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잽싸게 끊어버렸다.

“애들은…… 어떻게 지내?”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쳐다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내.”

자오가 짧게 대꾸했다. 하긴, 걔네들이야 먹을 것만 넉넉하게 챙겨주면 어디서나 잘 지낼 놈들이긴 하다.

“시내 관광도 하고, 쇼핑도 하고…… 우리 애들하고도 많이 친해졌어.”

안 좋은 소식이다. 그놈들하고 친해지다니, 죄다 조폭들인데…….

“애들한테 무슨 나쁜 짓을 가르친 건 아니겠지?”

“뭐…….”

자오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카드 긁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 같던데…… 많이 해로울까?”

자오는 전화 끊은 지 35분 만에 큰길가에서 달달 떨고 있는 내 앞에 나타났다. 금방 오겠다고 장담을 하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차이나타운에서 겐지 클리닉까지 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거리 신호란 신호는 다 무시하고 엄청난 속도로 밟은 것치고도 너무 빨리 온 거였다.

“니네 두목은?”

“아직 회의가 안 끝나서…….”

놀고 있네. 지금 시간이 새벽 1시다. 지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 시간까지 회의냐? 조폭들이 이 늦은 시간까지 머리 맞대고 범죄 모의를 하면, 경찰 노릇을 어떻게 해 먹으란 소리냐?

“어쩌다 보니 좀 길어졌어. 어쨌든 회의 끝나는 대로 바로 집으로 오실 거야. 시엔한테 얘길 해놨으니까…….”

듣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자오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것도 그렇고, 새벽 1시까지 회의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 회의라는 거 혹시 호텔방 같은 데서 여자들 두세 명이랑 뒤엉켜서 하는 그런 거 아닐까? 그 자식이 어딜 봐서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할 놈이냐? 분명히…… 그거다.

“왜…… 그렇게 보는데?”

자오가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첸, 그 자식 생각하다가 그냥 눈이 마주친 거지 자오를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아냐. 아무것도.”

새벽 1시라도 쿠간 시 기준으론 아직 저녁이라서 시내엔 차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자오의 운전 실력은 쥬드가 화났을 때 하는 난폭운전이랑 수준이 거의 비슷해서 차선도, 신호도 안중에 없었다.

그 자식 집에 이렇게까지 서둘러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 운전 좀 얌전하게 하라고 주의를 줬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서…… 루크 첸네 집 대문 끄트머리가 멀리 보일 즈음이었다. 내가 어쩌다가 여길 다시 오게 됐을까?

“안 내리고 뭐해?”

내가 꾸물거리자 자오가 재촉 했다. 내리기도 싫지만 잔뜩 얼었던 몸이 오는 동안 빵빵한 히터에 녹아서 등이 의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지쳐 있었나 보다. 게다가 별채까지는 10분도 넘게 걸어야 하는데…… 귀찮다.

“별채까지 차로는 못 가?”

“못 가.”

딱 잘라 말하고 자오가 나를 차에서 끌어 내렸다.

자오한테 질질 끌려가다시피 도착한 별채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닥엔 먹다 남은 과자부스러기, 샐러드 접시, 빈 와인 병…… 용은 반쯤 뜯어먹다 만 바게트 빵을 꼭 쥔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있고, 기린은 졸린 눈을 비비며 TV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하고 있는 게 꼭 돌봐주는 사람 없이 집에 남겨진 애들 같아서 한심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왔어?”

기린이 나를 돌아보고는 무심하게 한마디 건네고 다시 TV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린이 보고 있는 건 야심한 밤 시간대에 지천으로 나오는 야릇한 드라만데…… 때마침 극중 남녀가 한창 부스럭거리는 중이었다.

뒤따라 들어오던 자오가 애들 하고 있는 꼴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중국 황제의 후궁 같던 별채가 졸지에 대학 신입생 기숙사 분위기로 내려앉아버렸으니…… 난폭하고 깔끔한 자오가 화낼 만했다.

“니네들은 좀 치워 가면서 먹으면, 먹은 게 얹히기라도 하냐?”

자오가 짜증을 내건 말건 기린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서 TV만 뚫어져라 들여다볼 뿐이었다. 결국 바닥에 늘어놓은 건 내가 대강 치우고 자오는 맨바닥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용을 들어다 침대 위에 집어던졌다.

사람 집어던지는 게 특기란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용 같은 거구를 저렇게 맘대로 들었다 놨다 하는 걸 보니까…… 웬만하면 기분 거슬리는 일 없도록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용은 그 와중에도 빵은 꼭 쥐고 있었다.

“저렇게 하면…… 기분이 좋은 거야?”

청소할 때는 본 척도 않더니…… 자오가 쓰레기를 대강 챙겨서 나가자마자 기린이 뜬금없이 물었다.

“뭐가?”

“저런 거 말이야.”

기린이 TV 화면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피곤해서 TV도 눈에 제대로 안 들어오지만……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는 중인 것 같은데…… 둘 다 되게 어설펐다.

“저런 건 구속감이야.”

“구속이라니?”

기린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리단 얘기는 들었지만…… 많이 어린 건가? 아무리 그래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데 전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저런 건 저렇게 억지로 하는 게 아냐. 여자도 안 좋아하잖아.”

“지금은 좋아하는데?”

아무리 포르노라지만 참…… 보기 민망해서 리모콘 찾아서 TV를 꺼버렸다.

“왜 꺼?”

기린이 화를 냈다. 생긴 건 엘리야 하이네랑 한 틀에 찍어낸 것처럼 음산하고 썰렁하게 생긴 놈이 이렇게 나오니까 좀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비니 말이야.”

리모컨을 집으려고 일어서는 기린을 도로 소파에 밀어 앉히고 나도 마주 앉았다.

“너…… 정말 살려줄 수 있는 거야? 의사들도 다 두 손 들었다는데, 너한테 그럴 능력이 있어?”

“어디 있는지만 알면…….”

또 그 망할 카페 타령……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비니는 지금 죽어가. 있지도 않은 카페 따위 찾아다닐 시간이 없단 말이야. 만약에…… 저대로…….”

갑자기 비니랑 몬티첼리 씨의 얼굴이 떠올라서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데, 오늘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분이 아주 바닥을 쳤다.

기린이 손을 뻗어서 긴 손가락 끝으로 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쓱 훔쳤다. 그냥 무심코 그런 거였고, 손끝만 살짝 얼굴에 닿았을 뿐인데 마음이…… 이상했다. 더운 바람에 얼음이 녹아버리듯 속에서 뭔가가 풀리는 게…… 기분도 이상하고 덜컥 겁도 나서 소파 끄트머리로 물러앉았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글쎄……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것까진 모르겠어.”

“그런 카페는 아무리 찾아도 없단 말이야!”

“있어.”

말문이 막혀서 잠시 쳐다만 보자 기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좀 이상하긴 해. 그 거리엔…… 왜 바람이 없을까?”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뜨기도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깃털에 휘감긴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꿈속에서까지 사람을 괴롭히던 만성적인 두통도 없고, 이젠 아예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지던 통증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오늘 아침엔 코끝에 감도는 공기조차 달고 감미롭게 느껴졌다.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니라 몸 상태가 실제로 그랬다. 요즘 들어서는 크게 몸싸움을 한 적도 없던 터라 심하게 안 좋은 데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일 일어날 때마다 온 몸이 뻐근하면서 어딘가 아팠었고, 특히 어젯밤에는 몸도 마음도 극도로 지친 상태였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말짱해진 걸까? 그것도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이런 아침이 대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고 여기가 루크 첸의 별채 침실이란 걸 확인하고도 기분이 별로 나쁘질 않으니,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아예 정신이 나갔나 보다.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둘러봤을 때도 느낌이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이 방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이었었나? 이 별채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변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낯설고…… 전에 봤을 때하곤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짙은 자주색 커튼을 통과한 와인 빛 햇살이 방안에 가득했고 흑단으로 짠 벽과 문, 거기 새겨진 꽃과 풀과 나무와 구름과 용의 형상…… 바람에 날리는 커튼 자락과 창가에 서린 정원수의 그림자…… 모든 것이 처음 보는 풍경처럼 새롭고, 선명하고,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침대에 앉아서 한동안 그렇게 방안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속으로 감탄을 하다가 문득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루크 첸, 그 자식 별채 인테리어나 감상하면서 좋아할 처지냐? 가뜩이나 몸 상태도 미심쩍은데 정신 상태까지 이러면 곤란하다. 찬물에 세수하고 긴장을 좀 하자.

반쯤 닫혀 있던 미닫이문을 완전히 밀고 거실 쪽을 내다보니 용은 어제 저녁부터 끌어안고 있던 빵을 아침 삼아 뜯어 먹으며 TV를 보는 중이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용이 고개를 한번 까딱했다. 그리곤 다시 보고 있던 아침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들은 사람을 며칠 만에 봐도 태도가 어찌 이리 시큰둥한지…… 그나저나 기린은…… 기린은? 아…… 여기 있구나. 기린은 바로 옆에서 이불에 푹 파묻힌 채 자는 중이었다. 어쩐지 자는데 뭐가 자꾸 엉켜 붙는다 싶었다.

잠든 기린의 얼굴을 들여다보자니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얘는 아무리 봐도 엘리야 하이네랑 국화빵인데, 이 얼굴이 이렇게까지 말갛고 예뻐 보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비니 보러 병원에 갈 때는 조금 서둘러서 정신과에 먼저 들러봐야겠다.

“일어났어?”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기린이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 좀 더 자지 그래?”

이 자식, 잠이 덜 깼다.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으며 다시 눈을 감는 걸 보니……

“출근해야 돼.”

기린의 손에서 손목을 얼른 빼내고 일어났다. 그냥 슬쩍 잡혔을 뿐인데 손목이 후끈해서 깜짝 놀랐다.

“벌써?”

기린이 이불을 돌돌 말고 돌아누우며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벌써는…… 시간이 열 신데…….”

헉! 열 시?

컨디션이 갑작스럽게 좋아진 것과는 별개로 첸의 저택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게 자꾸만 찝찝했다. 첸한테 전화를 걸었던 건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이성적인 행동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어젯밤에 병원에서 나왔을 때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먼저 숙이고 들어온 꼴이 됐으니 그 얄미운 자식이 이제 나를 얼마나 얕잡아보고 까불까?

샤워라도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했지만…… 첸, 그 자식의 밉살맞은 얼굴과 서둘러봐야 이미 지각이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기껏 상큼했던 기분이 또 다시 가라앉고 말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제에 용과 기린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버릴까? 자라는 애들한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보면 두 녀석은 이 위험하고 퇴폐적인 악의 소굴에 너무 오래 있었다. 그동안에도 아주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막상 애들을 보니까 이렇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찬물에 머리 감으면서 궁리를 해보니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 비니의 맨션이 비어 있으니까 우선 거기다 데려다 놓고, 먹는 건 마트에서 싼 거 사다가 같이 먹으면 되고…… 비번인 날이랑 일찍 퇴근하는 날에 같이 좀 놀아주고……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컨디션이 좋은 덕에 오늘 아침엔 머리도 핑핑 잘 돌아갔다.

비누 거품만 대강 씻어 내고 욕실에서 나왔다. 기왕 결정한 거…… 출근길에 데리고 나가자. 비니 아파트까지 갔다가 출근하려면 상당히 늦겠지만, 애들 장래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여기서 더 얼쩡거리다가 첸 그 자식이랑 얼굴 마주치기도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기를 닦으며 나오다가…… 거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냥 걸음만 멈춘 게 아니라 거울 앞에서 아예 얼어붙고 말았다.

처음엔 꼭 찍어서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몰랐다. 그냥 뭔가 좀 허전하다는 생각이…… 그러다가 문득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랗고 빨간 멍 자국이 제법 크게 남아 있던 옆구리가 너무 깨끗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의 나아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어제 아침에 경찰서 샤워실에서 확인했을 때만 해도 멀쩡히 잘 있던 것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뿐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졸다 엎어져서 까진 무릎도 말짱하고, 어젯밤에 병원 벽에다 대고 괜히 주먹질 했다가 벌겋게 부은 손등도 깨끗했다. 그리고 전에 청과물시장 쓰레기장에서 제이크 브론테하고 거칠게 한판 붙었다가 된통 터져서 피멍이 든 이후, 제 색깔로 돌아올 기미가 전혀 없던 관자놀이 부근의 갈색 흉터도 흔적이 없었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조화야? 몸에 든 멍이 깨끗하게 없어졌는데, 기분은 마치 돈이 잔뜩 든 빵빵한 지갑을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어젯밤에 내가 무슨 약을 먹었나? 아니면 몬티첼리 씨하고 마신 커피가 몸에 좋았나? 아무리 병원 커피지만 그럴 리가 있나? 앞뒤 돌려가며 몸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어제 점심 메뉴는 뭐였더라…… 생각하고 있을 때, 문가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몸매 감상 하냐?”

샤워실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 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표정이 영 시무룩했다. 전에 비해 기세가 한풀 죽은 것 같기도 하고 피곤한 것 같기도 했다. 새벽까지 회의를 했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어쨌든 자주 보나 간만에 보나 마음 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냥 마주쳤어도 기분이 심하게 나빴을 텐데…… 뭐냐? 이 민망한 상황은…….

“사람 있는 욕실에 기척도 없이 들어오는 건 어느 나라 풍속이야?”

“하도 안 나오길래 욕조에 빠진 건 아닌가 걱정이 돼서.”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짧은 시간에 욕실의 체감 온도가 한기가 들 정도로 싸늘하게 식었다.

“어떻게 지냈어?”

놈이 어색하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어.”

이 자식하고는 길게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가려는 걸 꾹 참고 그냥 지나쳐 나가려는데 놈이 내 팔을 잡았다.

“그날 일은 오해라고 했잖아?”

“놔!”

성질대로 하자면 놈의 고개가 확 돌아가도록 주먹 따귀를 날리던가, 가차 없이 들이받아서 코뼈라도 분질러버렸을 텐데……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그냥 팔만 뿌리치고 곱게 나와버렸으니까.

속에서 자꾸 울화 같은 게 치밀어 오르는 걸 정말 힘들게 눌러 참았다. 빨리 옷 입고 여기서 나가야겠다. 나는 오래 참을 자신이 없고, 저 자식은 멀쩡한 사람 약 올려서 분통 터뜨리는데 도가 텄으니까.

“언제까지 이럴 거야?”

욕실 문 앞에서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고 있는데…… 놈이 쫓아 나오면서 계속 사람을 갈궜다. 본래부터 속이 시커먼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속내가 다 들통 난 이 마당에 어떻게 저런 소릴…… 그동안 이 복잡하고 사람 많은 도시에서 나쁜 놈도 종류별로 다양하게 접해봤지만 이렇게까지 낯짝 두꺼운 놈이 또 있었을까?

“이럴 거면 어젯밤에 전화는 왜 하고, 내 집엔 왜 온 거야?”

바지 지퍼를 막 올리고 셔츠를 집어 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놈이 투덜거렸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놈의 후안무치한 태도에 내 인내심이 빠른 속도로 바닥났다.

“설마 니 얼굴 보고 싶어서 왔겠어?”

돌아서서 놈의 면전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녀석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벽에 등을 부딪쳤다. TV 보면서 빵을 뜯어 먹던 용은 사래가 들려 콜록거렸고, 여태 퍼질러져 자고 있던 기린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체 같은 말을 몇 번을 더 해야 돼? 그 영감들이 멋대로 짐작하고, 멋대로 지껄인 헛소리를 날더러 어쩌라고?”

녀석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빤한 변명을 지껄였다.

“오해 좋아하네! 처음부터 수상했어! 꽃다발에, 노래하는 열두 명의 머저리들에…… 뭔가 꿍꿍이가 있을 줄 알았다고!”

“꿍꿍이가 있었으면? 그럼 넌 내가 너한테 꽃다발하고 악사들 보낼 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어?”

“니가 나를 이용해서 니콜라스를 잡아? 니가 뭔데? 이 망할 자식아!!”

“그런 꿍꿍이가 아니었다니까!!”

이 방엔 장식품도 많지만 무기도 많았다. 마침 바로 옆에 허리 높이 정도 되는 자개장이 있고 그 위에 우아한 칼 받침이 놓여 있었다. 더 좋은 건 그 칼 받침 위에서 날씬한 검 한 자루가 심상치 않은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루크 첸과 아주 잠깐 곱지 않은 시선을 교환한 다음 나는 검을 집어 들었고, 녀석은 침착하게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들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한 거…… 인정할게.”

놈의 기세가 많이 꺾였다. 뽑아보니 칼날이 번쩍거리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것이…… 아주 훌륭했다.

“조심해. 그거…… 위험해.”

얼마나 위험한지 확인할 겸해서 한번 휘둘러본 검날에 제법 묵직한 의자 다리가 두부 잘리듯 깨끗하게 썰려나갔다. 나도 놀라고 녀석도 놀라고, 등 뒤에선 용과 기린의 우와…… 하는 감탄사가 들려왔다. 검이란 게 생각했던 것보다 성능이 짱짱하네.

“정말 이럴 거야?”

첸이 기분 상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니콜라스 얘길 해봐.”

두 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놈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놈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얘기?”

“니가 왜 그자를 뒤쫓아?”

“얘기가 긴데…….”

긴 게 문제가 아니라 말하면 니가 알아들을 수나 있느냐는 투였다. 한 번 더 작정하고 휘두른 검날에 붉은 가죽을 씌우고 징을 박아서 장식한 의자 바닥이 두 동강 났다. 이제 놈이 들고 있는 건 구름무늬를 멋들어지게 새겨 놓은 등받이랑 바닥 부분 절반뿐이었다. 그제야 놈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자를 쫓아. 연방 정부, 교황청,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천년조약의 기사단, 유력한 가문에서 고용한 사설탐정까지…… 다 합치면 세상 사람 절반은 될 거야.”

“뭣 때문에?”

말을 할까 말까…… 놈이 망설였다. 심문에도 엄연히 테크닉이 있다. 이렇게 약아빠진 놈을 심문할 때는 숨도 못 쉴 만큼 거칠게 몰아붙여야 된다. 그렇게 해도 바른 소리가 나올까 말까다.

그래서 아주 죽여버릴 작정을 하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놈이 바짝 긴장하고 의자 등받이를 고쳐 잡았다.

“말해도 못 알아듣잖아?”

이 자식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극도로 안 좋았던 기분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처박혔다. 이 자식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날 무시하고, 만만하게 보고…… 이용해 먹으려고 들었다. 칼 든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놈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칼 맞고 말할래? 그냥 할래?”

“나도 처가 쪽 일을 거들어주다가 엮인 것뿐이라서 내막을 자세히는 모르고…… 애초에 그러기로 하고 한 결혼이라서 귀찮아도 어쩔 수 없이…….”

그렇지, 니가 말로 해서 들을 놈이 아니지…….

조폭 두목이라고 다들 싸움 실력이 대단한 건 아니다. 우선 요즘 조폭들이 중국 무협 영화 같은 데나 나오는 몸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꼴에 돈 되는 비즈니스라고 2세들이 보스 자리를 물려받는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그나마 바닥에서부터 시작한 프란시스 몬티첼리 같은 경우는 몸싸움도, 사격실력도 수준급이라고 알려진데 비해 루크 첸처럼 여자 후리는 기술 하나로 승부수를 던진 경우는 싸움은 좀 하는지 어떤지 궁금해 하는 사람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말싸움으로는 턱도 없지만, 몸싸움은 내가 놈보다 나을 거다. 나는 그게 직업이니까……. 게다가 손에 장검까지 쥐고 있으니 이건 싸움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나는 쫓고, 놈은 쫓기는 일방적인 추격전의 양상이었다.

하지만 요리조리 빠져 달아나는 놈의 몸놀림이 심상치 않게 날렵했다. 그 바람에 애꿎은 별채 살림살이만 박살날 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대체 왜 이래? 나를 죽일래?”

도망가다가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밟고 미끄러져서 꼼짝없이 잡힌 놈이 이제는 나무 도막으로 변해버린 의자 등받이를 손에 쥔 채 버럭 화를 냈다. 쥐새끼처럼 잽싸게 빠져 달아나는 놈을 쫓으면서 내 흥분이 지나쳤던 탓에 실내가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사면을 자개로 싹 발라서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거리던 테이블도 반쪽이 났고, 창 쪽에 세워져 있던 장식장도 다리가 날아갔다. 그 바람에 장식장이 쓰러지면서 안에 있던 화려한 도자기와 보석함이 산산조각이 났고 그 맞은편에 놓여 있던 장식장도 안에 품위 있게 진열되어 있던 고서적과 함께 반으로 싹 썰렸다. 벽걸이 TV 액정도 깨지고, 비단 소파도 귀퉁이가 나가고, 쿠션이란 쿠션은 다 터져서 사방이 깃털 천지였다.

이 방안에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골동품, 아니면 고가품이었는데…… 이제는 고물, 잡동사니, 폐품이 되고 말았다.

정신이 슬슬 돌아오고 나니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했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니 별수 있나? 놈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서 쓰러뜨리고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목을 내리 찍었다.

녀석의 눈빛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최상품 자수정을 깎아서 박아 넣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다 이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을 올려다 볼 때면 그 빛이 지나쳐서 오싹한 한기가 느껴질 때조차 있었다. 영혼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놈의 눈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첸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상처라고 해봐야 피부가 살짝 베인 정도지만 꽤 놀랐을 텐데…… 놈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어거스트의 봉인 때문이야. 이제 시한이 거의 다 됐거든.”

첸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런 자백에 이번엔 내가 움찔했다. 왜냐하면…….

“그게 뭔데?”

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비웃어라.

“그 얘기가 길어.”

아무리 길어도 들을 얘기는 들어야겠지만, 너무 전문적인 얘기면 곤란하다. 들어도 무슨 말인지 통 모르니까. 게다가 어거스트의 봉인이라니…… 시작부터 난이도가 장난 아니다.

“그래도…… 해봐.”

“그 얘기 다 들으려면 오늘 출근이 상당히 늦어질 걸.”

조폭 주제에 경찰의 출근 시간을 걱정하는 거야?

“상관없어.”

“니네 반장은 상관 많은 것 같던데?”

무슨 소리야? 혹시 반장이…….

“너 샤워하고 있을 때 전화 왔었어.”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게…… 식전 댓바람부터 한바탕 뛰어서 그런 건지,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 돼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니가 전화를 받았단 말이야?”

“그럼 어떡해? 전화는 자꾸 오고, 넌 욕실에서 나올 기미도 없고…….”

“반장한테 이상한 소릴 지껄인 건 아니겠지?”

“별로…… 너 바꿔달라고 하길래 지금 샤워한다고 했더니 그냥 끊던데?”

마룻바닥에 박힌 검을 다시 뽑아들었다. 한순간이나마 눈이 예쁘다는 둥……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얼빠진 놈이다.

작정하고 휘두른 검날에 녀석의 머리카락이 싹뚝 잘려 나갔다. 검날이 녀석의 눈썹 근처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데, 녀석이 그걸 제때 피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옆머리가 한줌이나 날아가버렸다.

“무슨 짓이야?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녀석이 바닥에서 한 바퀴 데구르 구른 다음에 벌떡 일어나면서 시퍼렇게 성을 냈다. 되게 놀랐나 보다. 사실은 나도 놀랐다. 솜씨 좋은 미용사의 비싼 작품이 분명했던 세련된 헤어스타일이 오른쪽 옆통수가 깎아지른 절벽처럼 잘려나가는 바람에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검이 조금만 더 옆으로 스쳤어도 녀석의 얼굴이 날아가버렸을 거다.

내가 너무 심했나? 녀석의 붉으락푸르락한 얼굴과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그만 하고, 그거 이리 내.”

녀석이 내 손에서 검을 뺐으려고 손을 뻗었다. 어쩔까…… 머뭇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그만 하자고!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이래?”

아니다. 심하긴 개뿔…… 나는 당장 출근해서 반장 얼굴 볼 일이 아득한데, 이 자식 뭐가 어째?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나도 녀석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녀석의 목에 검날을 최대한 바싹 들이밀었다.

첸이 걸음을 멈추고 그야말로 간이 졸아들 정도로 서늘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녀석은 진짜 열 받았다. 검날이 녀석의 목 줄기에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인데, 피부가 베여서 피가 흘렀다.

검이란 건 외관상 멋지긴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저 선반이나 장식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휘둘러보니 놀랄 만큼 위험하고 살기등등했다. 검날이 공기를 가르고 나갈 때, 혹은 나무로 만든 고가구를 가뿐하게 두 동강 낼 때마다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낯설면서도 생생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총을 겨누거나 방아쇠를 당길 때하곤 확연히 다른…… 뭔가가 있었다. 마치 나 자신이 이 아름답고 위험한 무기의 일부분, 혹은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지금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 경고하는데…….”

놈이 음험하게 으르렁거렸다.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비록 컨트롤이 서툴러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내긴 했지만, 녀석이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목에 칼날 좀 스친 정도가 뭐 그리 대수냐?

“기분은 너한테만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어젯밤에 자오한테 억지로 끌려오다시피 와서 별채에서 애들이랑 세상모르게 잤을 뿐이고, 자기는 새벽까지 또 무슨 나쁜 짓으로 도시를 난장판을 만들까…… 못된 궁리하다가 지금 막 나타나 놓고는, 앞뒤 사정 다 잘라먹고 지금 샤워 중이란 말만 지껄이면 어쩌란 말이냐? 그것도 반장한테! 진작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자식은 사람을 아주 지능적으로 괴롭힌다.

“그래서? 어쩔 건데? 이걸로 내 목이라도 칠 거야?”

놈이 손끝으로 검날을 톡 튕기며 나를 비웃었다.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이런 놈 때문에 형무소에 가기는 싫다. 게다가 전직 경찰 공무원한테는 형무소 생활이 특히나 고달프다는 소문이 있다.

“더 이상 나한테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걸려온 전화를 받은 것뿐이야.”

목에 칼이 들어가도 이렇게 뻔뻔하게 나온다면…… 나도 길게 할 말은 없다.

“다시는 나한테 전화하지 마.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경찰서로 이상한 것도 보내지 마!”

녀석을 몰랐을 때도 내 인생은 고달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통째로 물릴 수는 없고…… 그냥 딱 이 자식이랑은 일면식도 없던 그때로만 돌아갔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놈이 못 믿겠다는 듯 투덜거렸다. 내가 자기를 한번 떠 보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는 투였다. 마침 잘 드는 검도 쥐고 있겠다…… 눈 딱 감고 사고 한번 치고 싶다는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치밀어 오르는데, 그걸 참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 그거만 듣고 갈 거니까.”

“무슨 얘기?”

놈이 시치미를 뗐다. 이 자식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흐지부지 넘긴 게 벌써 몇 번째냐?

“어거스트의 봉인 어쩌고…… 그거 말이야!”

“이거나 치워. 기분 나빠.”

녀석이 목전에 얼쩡거리는 검날을 내려다보며 짜증을 냈다. 확실히 어떤 얘기를 하기에도, 듣기에도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긴 얘기라면 더욱 그렇고…… 하지만 지금 목에서 칼을 치워주면 녀석이 고분고분 내 말을 들을까? 어림도 없다. 이렇게 간사하고 음흉한 놈한테는 폭력이 최고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검 끝으로 녀석의 턱을 받쳐 올리며 험악하게 다그쳤다.

“나도 짭새 노릇 근 10년 건성으로 한 거 아니고, 그동안 상상을 초월하게 무식하고 난폭한 놈들도 많이 상대해봤어. 그놈들에 비하면 너 같이 얍삽한 제비 한 마리 잡아 족치는 건 일도 아냐!”

“말이 좀 심하잖아? 내가 왜 제비야?”

녀석이 자존심 상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제비가 별거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 꼬셔서 결혼한 다음에 장인 사업체를 한 입에 집어 삼켰으면 그게 제비지.

“내 입에서 진짜 험한 말 나가기 전에 빨리 불어. 니네들이 왜 니콜라스를 찾는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인가 뭔가 하는 놈들은 정체가 대체 뭔지…….”

“그자는 키맨이야.”

녀석이 귀찮다는 듯 말을 툭 던졌다. 말투는 아무래도 좋은데…… 무슨 맨?

“바하르나 조약에서 결정된 사항 일체를 그자가 집행했어. 바하르나 회의의 결정에 따라서 흑룡 바솔로뮤와 그 군대를 봉인한 것도 그자였고, 조약에 명시된 기한이 지나면 그 봉인을 뜯고 세상을 종족대전 이전의 상태로 돌려보내는 것도 그자야.”

경찰서에서 범인 취조할 때도 제일 신경질 나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헛소리를 범인 혼자 줄창 지껄일 때다. 바하르나 조약은 뭐고, 회의는 뭐고, 봉인은 뭐고, 종족대전 이전 상태는 또 뭐냐?

“얘기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하라니까?”

검을 고쳐 잡으면서 놈에게 경고했다. 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웃었다.

“바하르나 회의란 건, 종족대전 이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소집된 오합지졸 진상들 모임이야. 100년이나 계속된 그 전쟁이 종결된 건 라두칸이 기사 아이스를 사주해서 바솔로뮤를 암살한 덕분이지만…… 바하르나 회의에선 정작 전쟁의 승리에는 아무런 공도 없는 인간의 왕과 기사들이 모여서 바솔로뮤의 영지와 보물을 나눠 가졌어. 그것도 의견이 안 맞아서 자기네들끼리 싸우느라 3년이나 걸렸고…….”

그래도 이번엔 아는 이름이 몇 개 나와서 안심이 좀 되는 듯싶다가 짜증이 확 솟구쳤다. 라두칸이 아이스를 사주해서 바솔로뮤란 자를 암살했다니…… 연쇄살인이야 기왕에 밝혀진 혐의에서 한두 건 더 추가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만, 그 인간이 살인 청부까지 했었단 거야?

“그게 대체 언제 일어난 사건이야?”

“글쎄…… 한 천년쯤 된 거 같아.”

“야…….”

“나는 최대한 쉽게 얘기하는 거야. 못 알아듣는 건 니 사정이지.”

그렇지 않다. 이러는 거…… 의사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전문용어 써 가면서 환자 엿 먹이는 거랑 뭐가 다르냐?

“내 손에 칼이 들렸으면 내 사정이 니 사정이야. 종족대전이란 건 또 뭐야?”

내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빡빡하게 나가자 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얘긴 벌써 책으로 나와 있어. 그것도 한 권으론 모자라서 1, 2, 3권 시리즈로…… 각 권마다 두께가 이따만 한데, 그걸 여기서 너한테 다 읊어줘야 돼?”

녀석이 이만해…… 라면서 손가락으로 대강 잡은 두께가 15센티미터도 넘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책하고는 친하게 지내질 않았고, 최근 2, 3년 사이엔 업무관련 보고서나…… 뭐 그런 거 외엔 활자라곤 읽어본 적이 없는데 난데없이 백과사전 두께의 3권짜리 시리즈라니 코스가 너무 험난하다.

“그럼 대강 줄여서…….”

나도 모르게 한풀 죽어서 협상자세로 나가려는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거, 분명히 반장 전화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벨 소리까지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대체 어디 있는 거냐? 내 휴대폰…… 온 방안이 난장판이라 건성으로 둘러만 봐서는 휴대폰을 찾을 길이 없었다.

휴대폰 찾느라 정신이 팔려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녀석이 그때까지도 계속 들고 있던 의자 등받이 남은 쪼가리를 나한테 냅다 집어던졌다. 녀석이 던진 나무토막이 정확하게 손등에 명중했고…… 손등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자식, 너…….”

“전화나 받아!”

바닥에 떨어진 검을 물 찬 제비처럼 잽싸게 가로채면서 녀석이 무뚝뚝하게 지껄였다.

휴대폰은 쿠션이란 쿠션은 다 터지고, 팔걸이도 반이나 잘려나가서 완전히 폐품으로 변해버린 소파 밑에 굴러 들어가 있었다.

예상대로 반장 번호였다. 전화를 받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난 수년 간 반장 밑에서 일하면서 들을 수 있는 막말은 거의 다 들은 것 같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어떤 험한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예…….”

「샤워 다 했어?」

예상대로 말투가 까칠했다.

“예.”

「너…… 진짜 이럴래?」

반장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벼락 치듯 소리부터 냅다 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니까 더 민망하고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죄송해요.”

반장은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하고, 나는 면목이 없어서 할 말이 없고…… 그런 이유로 반장과 나 사이에 극도로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서서 어떻게 하면 반장의 오해를 풀고 무사히 출근할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루크 첸은 표정이나 태도가 천하태평이었다.

방구석에 떨어진 검집을 찾아서 검을 꽂아 넣고 본래 있던 선반 위에 다시 곱게 올려놓은 녀석이 방 꼬락서니를 한번 슥 훑었다. 가구랑 항아리 부서진 걸 아까워하는 기색이라도 있었으면 내 속이 좀 시원할 텐데…… 표정이 그냥 그래서 김샜다. 어쨌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저기……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고요…….”

일단 반장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오해를 푸는 게 급했다. 하지만……

「그런 일 절대로 없는데, 그놈 집엔 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려? 너…… 현직 짭새…… 아니, 경찰관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아……악!”

아니오…… 라고 대답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첸이 어느 틈에 다가와서 좀 전에 자기가 던진 의자 쪼가리에 맞아서 욱신거리는 손을 덥석 쥐는 바람에…….

“많이 아파?”

이 자식이 정말…….

“어딜 만져?”

화가 치밀어서 손목을 잡아 빼고 나서 놈의 정강이를 확 걷어찼다. 놈이 입안으로 신음을 삼키며 정강이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내가 처음으로 놈에게 제대로 먹인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걸 기뻐할 틈도 없이 반장이 다 포기한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자식이 어딜 만졌는데?」

“손……이요.”

「…….」

내가 그동안 반장한테 뻔질나게 거짓말을 해댄 것도 아닌데 왜 내 말을 안 믿는 걸까?

“저, 지금 갈 거거든요. 가서 말씀 드릴게요.”

「올 거 없어.」

반장이 잘라 말했다. 화난 건 알고 있었지만, 올 거 없다니…… 이게 화 풀릴 때까지 나타나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아예 일을 때려치우고 다른 직업을 알아보라는 뜻일까?

“반장님…….”

고달프고 위험한 짭새 노릇을 때려치우고 다른 직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지난 8년 간 한 번도 안 했었던 건 아니었다. 잘만 찾아보면 할 만한 일도 꽤 있겠지만…… 루크 첸, 이 자식 때문에 당치도 않은 누명을 쓰고 쫓겨나는 건 말도 안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전화통 붙들고 쩔쩔 매는 꼴을 보고는 히죽 웃던 놈이 나랑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입 꼬리를 내렸다.

“이 자식이 저 혼자 좋다고 쫓아다니는 걸 어쩌라고요? 쥬드도 숱하게 사고를 치고 다니지만 서장님이 사표 쓰고 나가라고 하신 적 없잖아요! 저 정말 이 자식이랑은 손 한번 잡아본 적도 없다고요!!”

「금방 만진 데가 손이라면서?」

반장이 짜증을 냈다. 마음이 조급하다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억울해요!”

「뭐가?」

“다른 비리 짭새들도 많은데, 왜 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건으로 칼같이 자르시는 건데요?”

그냥 변명이 아니다. 유흥가에서 포주나 약 장사들 뒤 봐주고, 수입에서 몇 퍼센트씩 뜯어내면서 거의 동업을 하고 있는 놈도 있고, 마피아나 야쿠자 끄나풀 노릇으로 용돈벌이 짭짤한 놈들도 멀쩡한 얼굴로 잘만 출근하는데…… 왜 나한테만 근무 규정이 이렇게 엄격하냐?

“제가 그동안 일이나 편하게 했으면 이런 말씀도 안 드려요! 비니 파트너 2년도 모자라서 이젠 옆 동네 경찰청장 막내아들 보모노릇까지 시키면서,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막말로 제가 이 자식이랑 죽고 못 사는 사이라고 해도…… 너무하시는 거잖아요!”

빌어봐야 별 뾰족한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 때문에 말이 거칠게 나갔다. 무턱대고 여기까지 온 나도 잘한 건 없지만, 깡패 두목 말 한마디에 부하 경관을 냉큼 자르다니…… 이런 법이 어딨냐?

「정신 차려. 내가 언제 널 자른댔어?」

반장이 좀 전보다 한층 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출근하지 말라면서요?”

「경찰서로 올 거 없이 현장으로 바로 가란 말이야.」

현장이라니?

「루벳 거리. 템페스트라는 클럽이야. 앤디는 벌써 가 있고, 나도 지금 출발할 거야.」

반장의 설명에 정신이 번쩍 났다. 앤디가 가 있다는 건…….

“티파니 샤오란 사건하고 관련이 있는 일인가요?”

「아마도…… 샤오란하고 상태가 비슷한 시체가 두 구나 나왔으니까, 관련이 있지 않겠어?」

내 짧은 상식에 의하면 미라는 이집트 왕의 무덤, 아니면 최소한 기절하게 덥고 건조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동네에서는 도로변 습지나 나이트클럽 화장실, 혹은 뒷방에서 미라가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클럽 템페스트는 오픈한 지 채 두 달도 안 된 루벳 거리의 새로운 명소였다. 번쩍거리는 인테리어와 미끈하게 잘빠진 댄서들 덕에 문 열자마자 루벳 거리뿐 아니라 쿠간에서 제일 물 좋은 나이트 중 한 곳으로 떠올랐고, 주말엔 말할 것도 없고 평일 저녁에도 홀이 미어터질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영업장이었다. 지난밤에도 열두 시까지 출입문 밖에 긴 줄이 늘어섰을 정도로 클럽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영업은 새벽 4시 반이 지나서야 끝났다.

귀청이 터질 정도로 음악은 시끄러웠을 거고 술에, 춤에, 마약까지 뒤섞여서 위험할 정도로 흥청거렸을 테지만 클럽 측이나 몰려온 손님들에게는 다른 날과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밤이었다. 새벽 어스름에 클럽 영업이 마감될 때까지도 어떤 위험이나, 사고의 징후는 없었다.

그 평화로운 밤이 지난 후, 청소부가 지하 나이트클럽 남자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말라비틀어진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 시간이 오전 8시, 그로부터 10분쯤 후에 클럽 종업원이 2층에 있는 귀빈전용실 구석에서 또 한 구의 시체를 찾아냈다.

“여자 쪽 신원은 아직 파악이 안 됐어요. 룸에서 발견된 남자는 클럽 바텐더 중 한 명이고…… 이름은 루이스 최. 사망 시간은 오늘 새벽 3시에서 오전 8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앤디가 수첩을 꺼내서 더듬더듬 피살자 신원을 설명하는 사이 에쉬가 나이트 홀 중앙에 놓인 두 개의 바디백 중 한 개를 열어서 보여줬다.

사체는 완전히 말라붙은 상태였다. 노상에서 발견된 티파니 샤오란의 시체와 다른 점이라면 남자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엔 아직도 윤기가 남아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체가 이런 상태면 사망시간을 추정하기 곤란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

“추정은 무슨…… 이 친구는 오늘 새벽 3시까지 수백 명이나 되는 손님들 앞에서 칵테일을 만들었어. 보통 3시 반까지가 근무시간인데 오늘은 피곤하다면서 다른 바텐더들보다 30분 일찍 퇴근했대.”

에쉬가 바디백의 지퍼를 올리면서 대꾸했고, 나는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멍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반장을 비롯해서 홀에 있는 사람들 상태가 다 비슷했다.

태양과 건조한 바람이 만든 진짜 미라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것도 이런 느낌일까? 산 채로 말라붙은 것 같은 남자의 시체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음산하고 기괴했다.

한적한 도로변에서 발견된 미라에서부터 시작된 미스터리가 이제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사태의 심각성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 결과 나이트클럽과 수상쩍은 밀실과 수십 개의 객실로 이루어진 7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봉쇄됐고, 불과 10시간 전까지만 해도 쿠간 시의 선남선녀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모여서 흥청거리던 댄스홀은 이제 시에서 한 가닥 한다는 수사관이 몽땅 몰려와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 사건은 더 이상 앤디와 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쿠간 시 전체의 사건이고,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비상사태였다.

“괜찮아?”

사건이 접수되자마자 바람처럼 현장에 달려와서 다른 수사관들 틈에 끼어 현장을 둘러본 앤디는 아직까지도 손을 떨고 있었다. 놀란 게 당연했다. 시체라면 신물이 나도록 봐온 나조차도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피살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보통 미라라고 하면 죽은 후에 어떤 처리를 거쳐서 시체를 바싹 말리는 거지만, 이 경우는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티파니 샤오란의 시체를 봤을 때만 해도 처음엔 오래된 미라라고 생각했었고, 사체의 신원이 최근에 발생한 실종자라는 게 밝혀졌을 때에도 살해된 후에 미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죽은 지 불과 7시간 안팎이라는 바텐더의 시체를 확인하고 보니, 이 사람들이 애초에 이런 식으로 살해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오싹한 거고, 홀에 모여 있는 짭새들이 하나 같이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거였다.

“너만 놀란 거 아냐. 우리도 이런 건 처음 보니까…… 다 비슷해.”

앤디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좀 안 좋은 것 빼곤 괜찮아요.”

“아무 데나 앉아서 좀 쉬어. 여긴 너 아니라도 경찰이 지천이니까.”

“예…….”

보통 때 같으면 어린애 취급한다고 어지간히도 툴툴거렸을 텐데…… 풀이 팍 죽어서 가까운 소파에 얌전히 주저앉는 걸 보니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흉악한 살인마와 정면 대결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아쉽게도 이번엔 그럴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생전 구경도 못 해본 기괴한 상태의 사체가 세 구나 쏟아졌으니 최고의 실력을 가진 수사관들로 전담반이 꾸려질 테고, 그러면 앤디 같은 신참은 낄 자리가 없다.

“뭐 하다 이제 나타나? 이건 니네들 사건이었잖아!”

막 홀에 들어온 터너가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사건의 소재가 벌써부터 과거형이다.

“이거 왜 이래? 아직 우리 사건이야.”

“이젠 아냐. 수사권이 연방 특경에 넘어갔어.”

터너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앤디의 어깨를 툭 쳤다.

“연방 특경?”

“지난달에 오레스 시에서도 비슷한 시체가 나왔었다나 봐. 2층에 있는 상황실에서 서장하고 그쪽 책임자가 의논 중이야. 아예 그쪽에서 접수를 할지, 공조를 할지…….”

오레스 시에서 미이라가 나왔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오레스 시는 쿠간 시 아래쪽에 붙어 있는 위성도시였다. 규모도 작고, 큰 사건도 별로 없는 동네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뉴스가 나왔을 텐데…….

“공조면…… 수사를 계속할 수 있는 건가요?”

앤디가 울적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사태가 갈수록 끔찍해지는 현실과는 별개로 수사에 미련이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공조 수사가 결정된다고 해도 사람을 삽시간에 말려 죽이는 괴물 같은 놈을 앤디를 데리고 쫓아다닐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리고 공조라는 게 말은 그럴싸하지만 실은 무슨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경 쪽에 손이 모자라면 가서 노가다나 대신 뛰라는 뜻이다.

“글쎄, 결정이 되면 무슨 말이 있겠지.”

사실대로 말하면 더 낙심할 것 같아서 대강 얼버무리고 홀을 나왔다.

어쨌든, 내 사건이었으니까 현장은 봐둬야 할 것 같아서 시체가 나왔다는 곳을 둘러봤는데…… 솔직히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현장이라고 부르기도 한심했다.

수백 명이 드나든 클럽 화장실, 수십 명이 들락거린 클럽 뒷방…… 두 곳 다 발자국, 지문, 떨어진 머리카락만 잘 모으면 100명도 너끈히 체포할 수 있을 만큼 어수선했다. 여기저기 튀어 있는 정액까지 단서에 포함시키면 거기서 또 열댓 명은 추가로 잡아들일 수 있을 거고.

두 곳 모두 말라붙은 사체가 나왔다는 사실 이외엔 범행 현장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흔적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거라면 격한 몸싸움의 흔적이라든지 핏자국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여긴 그냥 청소할 시간이 약간 지난 공공 화장실에 불과했다.

혹시 내가 오기 전에 치운 게 있나 싶어서 같이 온 에쉬와 터너한테 물어봤지만 둘 다 고개를 슬슬 저었다.

“대체 이놈의 동네는 날이 갈수록 왜 이 모양이야?”

증거가 없는 게 딱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만 막막한 기분이 들어서 터너한테 투덜거렸다.

“그러게.”

터너가 내 투정을 가볍게 받아 넘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을 몇 시간 안에 몸에 수분 한 방울 안 남을 정도로 바싹 말릴 수 있지?”

일선 경찰관치고는 유식하고 상식도 풍부한 에쉬에게 물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상식하고는 상관이 없다 보니 대답도 시원찮았다.

“부검을 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티파니 샤오란의 시체를 가지고도 검사란 검사는 다 했었는데…… 알아낸 건 쥐뿔도 없었어.”

“전문가들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래도…… 그렇겠지. 에쉬가 똑똑하다고 해봐야 경찰관 중에서 그렇다는 정도다. 전문가들도 대책이 없는 이런 일이야말로 천재의 분야다. 이럴 때는 주변에 아는 천재가 한 사람 정도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보통 때는 그 천재 때문에 골치가 아프더라도…….

“쥬드는 어디 있어?”

“통제실.”

터너는 아무리 쥬드라도 별수 있을까 하는 표정이었다.

“어딘데?”

“2층 복도 오른쪽 마지막 방인데…… 시설이 끝내줘.”

시설이 끝내준다는 터너의 말은 공치사가 아니었다. 나이트클럽 통제실 기자재가 거의 방송국 상황실 수준이었다. 건물 겉치레도 그렇고, 나이트클럽 인테리어도 그렇지만 외부인한테는 보여주지도 않을 통제실에까지 돈을 아주 갖다 발랐다. 사장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안됐다. 문 연지 한 달 반 만에 시체가 두 구나 나왔으니 당분간 장사는 다 한 거다. 어쨌든 쥬드는 통제실에 없었다.

20분이나 클럽을 뒤진 끝에 쥬드를 찾아낸 곳은 지하 나이트였다.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온 셈인데…… 쥬드는 홀을 가로질러서 길게 설치된 바에서 자기 맘대로 생맥주를 한잔 따라 마시는 중이었다.

벌써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이긴 하지만, 쿠간 시 경찰관 중에 최고 과체중인 사무엘마저 입맛을 잃은 상황에서 맥주 한잔을 원샷으로 마셔 치운 쥬드와 내 시선이 딱 마주쳤다.

“시체 봤어?”

내가 물었다.

“그럼요.”

쥬드가 잔에 맥주를 한잔 더 채우면서 대꾸했다.

“그런데 맥주가 넘어가?”

“목말라서 한잔 마신 것뿐이에요.”

“통제실에선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새벽까지 이 홀은 출근길 지하철만큼이나 붐볐어요. 알아낸 건 그것뿐이에요.”

“그래서…… 당신 생각은 어때?”

두 잔째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던 쥬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생각요?”

“시체도 보고, 현장도 보고…… 모니터도 봤으면 뭔가 생각이 났을 거 아냐?”

내 질문이 맘에 안 들었는지, 쥬드가 반쯤 남은 맥주를 숨도 안 쉬고 마저 들이켰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너무 솔직해서 실망스러웠다. 남이야 실망을 하든 말든 쥬드가 생맥주 밸브를 다시 비틀었다. 남의 가게에서 주인 허락도 없이 너무 퍼 마시네. 검시반에서 시체도 아직 수습을 안 했는데, 그 옆에서 아주 술판을 벌일 기세다.

“그만 마셔. 근무 중이잖아.”

맥주잔을 뺐으려고 손을 뻗었다가 손등만 된통 얻어맞았다.

“대체 어떤 놈의 소행일까요? 무슨 짓을 했길래 사람이 저 꼴이 된 걸까요?”

쥬드가 사체가 담긴 백을 침울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쥬드가 살인사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호기심이 반이고 그 나머지 반이 승부욕이었다. 완전범죄를 꿈꾸며 교묘히 계획된 살인사건이야말로 그녀의 주된 먹잇감이었고 야생 살쾡이만큼이나 눈 밝고 영리한 이 여자가 한번 찍은 먹잇감을 놓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하지만 지금 쥬드를 지배하고 있는 건 호기심이나 승부근성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쥬드는 화가 나 있었다.

“술 좀 작작 마시고 맨 정신으로 그걸 생각해내란 말이야.”

“맥주 한두 잔에 취하기라도 할까 봐서 그래요?”

눈에 확 들어오는 단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부검을 해도 나오는 게 없고, 모니터링을 해봐도 건질 게 없으니 천하의 쥬드 크롬웰도 도리가 없는 모양이었다. 쥬드까지 이렇게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니까 너무 심란해서 나도 술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맥주 같은 거 말고, 더 쎈 걸로.

“시체는 언제까지 바닥에 둘 거야?”

보통 때 같았으면 검시반에서 득달같이 실어 갔을 텐데, 몇 시간씩 저렇게 두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서 물었다.

“연방 경찰이 자기네 연구소에 가져가서 검사를 하겠대요. 20~30분 안에 운반 헬기가 옥상에 도착할 거예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연방경찰 쪽이 인력이나 장비 면에서 지역 경찰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빵빵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사체 검시에 관한한 쿠간 시 검시소도 무시 못 할 관록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지만 일방적으로 따돌려지는 느낌이 들어서 찜찜했다.

현장이라고 해봐야 조사할 만한 단서가 워낙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잔뜩 몰려온 수사관들이 일 없이 삼삼오오 모여서 바디백을 힐끔거리며 한숨이나 쉬고 있는 건 수사권 문제 때문이었다. 관할구역에서 이렇게 기상천외한 사건이 터졌는데 느닷없이 연방경찰이 들이닥쳐서 수사권과 증거를 싹 걷어가버리면…… 본래 수사체계가 그렇기는 하지만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달 전에 오레스 시에서 비슷한 사체가 나왔다던데…… 연방경찰은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뭐 들은 얘기 없어?”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오레스 시에서 그런 게 나왔다는 얘기조차 금시초문이에요. 그쪽 경찰서에도 친구가 있으니까, 좀 있다 한번 물어보려고요.”

맥주를 물처럼 퍼 마시던 쥬드가 다시 빈 잔을 채우다가 내 눈치를 슬쩍 봤다.

“한잔 줘요?”

“맥주는 됐어.”

쥬드가 너 좋을 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기 잔에 맥주를 꽉꽉 눌러 담았다. 벌써 네 잔째다. 맥주 됐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마신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 뒤쪽에 있는 조니 워커나 한잔 줘 봐.”

말 떨어지기 무섭게 쥬드가 조니 워커 한잔을 내 앞에 대령했다. 경찰서에서 서장보다 더한 상전노릇을 한지 한참 지났지만, 본업이 비서라서 마실 거는 부탁하는 족족 잘 갖다 준다.

근무 중에 이래도 되나 싶은 죄책감은 잠시 잊고 일단 술부터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술이 체 넘어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딱 소리가 나도록 갈겼다.

“너는, 이 꼴을 보고도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반장이었다. 하필이면 딱 걸렸구나 싶어서 돌아보다가 놀라서 숨을 삼키고 말았다. 근무 중에 술 한 잔 마시다가 반장한테 걸린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반장 뒤에 왜 첸이 서 있는 거냐?

“괜찮아?”

사래가 들려서 쩔쩔매고 있는 나한테 녀석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이가 없어서…….

“내가 닦아줘?”

그 소리에 놀라서 얼른 손수건을 낚아챘다. 위스키와 콧물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대강 닦고 정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놈에게 따졌다.

“너…… 너…… 너…….”

“뭐?”

“대체 왜 이래? 이젠 일하는 데까지 쫓아다닐 작정이야?”

“착각하지 마. 너 때문에 온 거 아냐.”

녀석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딱 잡아뗐다. 믿을 수 없다. 사람들 많이 모인데만 골라서 쫓아다니며 나를 곤란하게 만든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면, 니가 여긴 왜 들락거리는데? 여긴 범행 현장이야!”

코가 시큰거려서 아직도 숨이 제대로 안 쉬어졌다. 첸이 그런 나를 안됐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클럽…… 내 거야.”

놈이 뚱한 표정으로 한마디 던지고 바디백이 놓인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체를 확인한 루크 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보가 생명이란 신조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지만 시체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은 일반인치고는 상당히 침착한 편이었다. 첸의 어깨너머로 시체를 본 자오는 헉…… 하고 비명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에 서 있던 정복 경관하고 부딪혀서 비틀거렸는데…… 사실, 반응은 그게 정상이었다.

첸이 허락도 없이 바디백의 지퍼를 끝까지 끌어내리고 시체의 옷자락을 들췄다. 옷이라고 해봐야 허수아비에 걸친 넝마 조각 같은 형상이라 슬쩍 들췄을 뿐인데도 시체의 몸통이 다 드러났다.

지가 나이트클럽 사장이면 사장이지, 왜 시체에 손은 대고 난리냐? 자기 나이트에서 나온 시체라고 저래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저런 짓은 분명히 공무집행 방해다. 근처에 있던 경관 둘이 놈을 저지하려고 나서는 걸 자오가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어쩐지 책임감이 느껴져서 내가 나서서 따졌다. 내가 왜 그런 걸 느껴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보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녀석이 시체의 목 언저리와 옆구리를 뒤적거렸다. 죽은 사람의 체온만큼이나 썰렁하던 홀 안에 삽시간에 첸에 대한 못마땅함과 적대감이 가득 찼다. 그동안 사건 관련으로 나이트클럽도 많이 드나들었고, 업주를 면담한 적도 몇 번인가 있지만…… 이런 놈은 처음이다.

“손 떼고 물러나!”

언제나 그랬듯…… 녀석이 말을 씹었다. 옷만 들추는 게 아니고 이젠 시체를 뒤집기까지 하는데 놀라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뼈에 가죽만 덮어놓은 듯 앙상한 시체라서 저렇게 거칠게 다루면 부서질 수도 있었다.

“야!”

“어딘가 물린 자국이 있을 텐데…….”

녀석이 마지못해 시체를 바로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시체를 계속 건드리면 아예 수갑을 채워버리려고 다가서다가 멈칫했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혼잣말이었다. 표정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제일 심각했다.

“물린 자국이라니?”

“남은 것도 얼마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먹혔는데…… 어딘가 흔적이 있는 게 당연하잖아?”

시체를 잠시 내려다보던 첸이 이번엔 죽은 남자의 머리 밑을 헤집었다.

뭐가 당연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놈의 팔을 잡아서 등 뒤로 돌린 다음에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왜?”

수갑이 반짝이는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면서 녀석이 태평하게 물었다.

“내가 시체에서 손 떼라고 했지?”

“좀 보는 것도 안 돼? 내 클럽에서 나온 시체잖아.”

이거 진짜 웃기는 놈이네…….

“좀 보기만 했어? 니네 클럽에서 나온 시체면 그렇게 떡 주무르듯 주물러도 되는 줄 알아? 수사 방해야!”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순간…… 마음이 또 약해졌다. 정보가 생명이란 소리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만, 이 자식은 그간 이 도시에서 일어난 수상한 사건들에 관해서 최소한 나보다는 아는 게 많았다.

“무슨…… 도움?”

“저 남자는 머리 밑이 찢어졌어. 목덜미 바로 위쪽, 여기가…….”

그러면서 녀석이 내 뒤통수를 슬쩍 만졌다. 한쪽 손목을 마저 비틀어서 수갑을 채울 걸 그랬다.

“도와줘서 고마운데, 검시관은 우리한테도 있어.”

“검시 같은 건 해봐야 시간낭비야.”

어쩐지 비웃는 투라서 기분 나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사실일 거다.

쿠간은 인구 천만이 훌쩍 넘는 대도시고, 도시 규모가 이렇게 커지기 훨씬 전부터 사건사고가 유난히 많았던 곳이었다. 특히나 강력사건 발생률이 높아서 지난 4, 5년간은 온갖 종류의 시체와 살인범을 매일 같이 보고 살았지만…… 솔직히, 요즘은 뭔가 한계를 넘어선 느낌이었다.

세상이 지옥 같고 내가 그 지옥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오컴을 추적할 때도 그랬었고, 새벽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던 사람들이 수 백 년 간 햇볕 아래 버려져 있었던 것처럼 바싹 말라버린 걸 보니까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니콜라스를 체포했을 때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으니까 태연한 척 하고는 있지만 실은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암담했다. 이런 기분이 오래 가면 의욕도 땅에 떨어지고 일도 못할 정도가 된다. 니콜라스를 체포하고 난 후에도 몇 달을 의욕상실에 시달렸었는데…… 병원에서는 그걸 우울증이라고 했었다.

우울증 치료를 다시 받아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루크 첸이 내 코앞에다 수갑 찬 손목을 들이밀고 흔들었다.

“풀어줘.”

이 자식도 내 우울증 재발에 큰 요인이다. 어쩔까? 마음 같아선 이대로 수갑 채워서 구치소에 처넣어버리고 싶다. 공무집행 방해로…… 사흘 정도만.

“화가 덜 풀린 건 알겠는데,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 경찰 쪽 책임자하고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를 해야 되는데, 이런 걸 차고 어떻게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하겠어?”

풀어주고 싶은 마음 털끝만큼도 없지만, 첸의 등 뒤에서 자오가 팔짱 끼고 나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자오가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면 무섭다. 게다가…… 지금은 자오를 바로 쳐다보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다.

내가 아까 반장 전화를 받고 나서 놀라서 별채를 뛰쳐나올 때 자오는 막 별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지나쳤는데…… 어쨌든, 별채 앞 연못에 걸쳐진 무지개다리를 다 건너기도 전에 안에서 자오의 무시무시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한테 말하기는 회장님이 아끼는 별채라고 하더니…… 첸은 별채가 무너지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었다. 정작 별채 살림살이를 금쪽 같이 아끼는 건 자오였던 거다.

그런 줄 진작 알았으면 최대한 조심을 했을 텐데…… 어쩌냐? 벌써 그렇게 된 걸…… 당황스러워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별채 쪽에서 덜컥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나길래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뛰었다. 덕분에 현장 도착시간이 예상했던 것보다 30분은 빨랐다.

첸의 손목에서 수갑을 풀어줬다. 자오가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것처럼 노려보는 것도 무섭지만 그보다…… 녀석은 사건에 대해 뭔가 아는 것 같은 태도였다. 시체를 보고 대번에 물린 자국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이런 시체를 아주 처음 보는 것도 아닌 것 같은 눈치였다.

경찰 책임자하고 하겠다는 중요한 얘기란 게 사건과 관련된 거라면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경찰은 사건에 대해 감도 못 잡고 있는 형편이니까…… 우리가 사건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거라곤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이 섬뜩한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른 미라가 계속 나올 거라는 사실 정도였다.

“고마워.”

놈이 나를 음흉한 눈초리로 쳐다봤다. 이 자식, 아침에 그렇게 쫓겨 다니고도 혼이 덜 났다.

“좀 있다 점심 같이 먹을래? 아침도 안 먹었잖아.”

또 그런다.

“반장님한테 할 말 있다면서? 그럼 얘기나 빨리 하고 꺼져!”

“어쨌든 밥은 먹을 거잖아?”

한대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척에 서 있는 자오 때문에 참는 건 아니었다. 여긴 경찰관 숫자가 첸이 끌고 온 부하들 숫자보다 열 배는 더 많고, 또 장소가 지하 1층이라서 자오가 나를 들어 던질 창문도 없었다. 뭔가 중요한 얘기가 있다니까 혹시 수사에 뭐 참고할 만한 거라도 있을까 싶어서 참기는 참는데, 이러다 정말 병 날 것 같다.

“우리 반장님은 저쪽에 계시거든? 더 높은 사람이랑 얘기하고 싶으면 그 옆에 회색양복 입은 덩치 큰 아저씨하고 얘기를 하든가. 우리 서장님이니까.”

중앙에 있는 바 근처에서 팔짱 끼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반장이랑 서장을 가리켰다. 녀석이 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돌아섰다.

“생기긴 정말 잘생겼어. 그렇지?”

바 쪽으로 걸어가는 첸을 보면서 에쉬가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기름통에 빠졌다 나온 제비 같은 놈이 니 취향이야?”

터너가 에쉬한테 핀잔을 줬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얼굴만 보면 혹할 만도 하잖아.”

그러면서…… 왜 나를 봐?

“니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야.”

나랑 시선이 마주친 에쉬가 건성으로 둘러댔다.

경찰 쪽 책임자하고 할 얘기가 있다더니 녀석은 서장과 반장을 싹 지나쳐서 쥬드와 정면으로 마주섰다. 누가 실질적인 책임자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걸 보면…… 저 자식, 경찰서 내에도 끄나풀이 있는 게 확실했다.

“자주 만나네요.”

맥주 네 잔을 숨도 안 쉬고 들이킨 쥬드는 얼굴이 살짝 붉었다.

“좋은 일로 그러질 못해서 아쉽군요.”

“굉장히 멋진 클럽인데, 안됐어요.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쩔 수 없죠.”

“피살자가 여기 바텐더였다는데 개인적으로 아셨나요?”

쥬드의 질문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종업원이 한두 명도 아니고…… 일일이 알기는 어려워요. 직원채용 면담은 지배인이 주로 하죠.”

“그렇겠네요.”

쥬드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하게 대꾸했다. 낮술 마신 바텐더가 손님하고 농담 따먹는 분위기였다.

“시체는 언제까지 저렇게 둘 겁니까?”

첸이 시체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곧 검시소로 옮겨갈 거예요.”

“시간이 지체되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시간이 좀 경과된다고 뭔가 변화가 올 상태가 아니니까요. 서두를 거 뭐 있나요?”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쥬드가 건성으로 일관했다.

“여긴 언제까지 이렇게 막아둘 겁니까?”

“당분간요.”

쥬드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녀석은 쥬드가 애매하게 표현한 ‘당분간’의 의미를 알긴 아나 보다.

이만 저만 엽기적인 사건이 아닌 만큼 현장은 사건 해결 종료 시점까지 폐쇄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많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고, 언론이나 시민들 시선을 의식한 전시 행정일 경우도 있는데…… 며칠 사이에 동일범 소행으로 보이는 살인사건이 3건, 그것도 남겨진 사체의 상태가 이렇게까지 사람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경우라면 쥬드가 말한 대로 <당분간> 클럽 문을 다시 여는 건 어려울 거다.

“그건…… 곤란한데요.”

첸이 쥬드의 결정에 반발했다.

“이제 문 연지 한 달 반이고 매상도 꽤 괜찮았는데, 기약도 없이 문을 닫을 수는 없어요. 투자자들이 화를 많이 낼 겁니다.”

“당신 클럽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난 건 안됐어요. 하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운이 없을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이죠.”

그렇게 말해도 첸의 표정이 풀리질 않자 쥬드가 수세에 몰리거나, 긴말하기 귀찮을 때 주로 쓰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저한테 무슨 결정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첸은 저런 새빨간 거짓말에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넘어가기는커녕 좀 전보다 태도가 더 강경해졌다.

“두 사람이 변을 당한 건 안됐어요. 하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것도 아닌데 건물에 통째로 폴리스 라인을 둘러치는 건 너무 지나친 조치 아닙니까?”

“이 사건은 몇 시간 후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날 거예요. 문을 열어도 놀러 오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네요.”

“그런 걱정은 할 거 없어요. 우리 클럽 손님들은 신문 따위는 보지도 않을 테니까.”

쥬드가 주춤했다. 아무리 악덕 나이트클럽 업주라도 본인이 운영하는 업소에서 이렇게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으면 일단은 놀라는 게 순서고……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경찰 수사에 최대한 협조적으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한창 장사 잘되던 클럽 문을 몇 주씩 닫아 놓으려면 녀석도 타격이 크겠지만, 사건 당일부터 저렇게 보채는 경우는 처음 봤다.

“이 클럽이 내 소유라고는 해도 외부 투자자들 지분이 반이 넘어요. 아주 거친 사람들이고…… 손해가 커지면 시를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어요.”

실력행사로 나오겠다는 첸의 협박에 쥬드가 발끈했다. 상대방이 저렇게 나오면 누구라도 기분 나쁘겠지만 쥬드는 특히나 저런 거 못 참는 성격이었다.

“흑풍회 돈벌이보다는 시민의 안전이 우선이에요. 살인사건 현장은 당분간 보존할 거고, 당신 임의로 클럽에 손님을 한 명이라도 들여 놓는 날엔 공무집행 방해로 그 자리에서 체포하겠어요.”

쥬드가 첸을 상대로 맞짱을 떴다. 보통 면전에서는 좋은 말로 살살 달래 놓고, 뒤에서 후려치는 게 주특긴데…… 지금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살짝 높아서 그런지 태도가 솔직하고 거칠었다.

“필요하다면 시체가 나왔다는 룸하고, 화장실은 개미 한 마리 드나들지 못하게 막아 드리죠.”

첸이 나름대로 타협안을 내놨다. 하지만 쥬드는 이 사건에 관해서는 어떤 타협도 할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그러실 거 없어요. 경찰이 알아서 조치할 테니까요.”

솔직히 속 시원하고, 첸을 저렇게 찍 소리도 못하게 눌러버리는 쥬드의 기백과 말발이 부러웠다. 쥬드는 저렇게 수월하게 녀석을 뭉개는데 나는 왜 허구한 날 저 자식한테 말려서 본전도 못 찾는 걸까?

쥬드를 만만히 보고 덤볐다가 박살난 첸이 삐져서 돌아섰다. 영업은 영업이고, 저 자식…… 부하들을 몽땅 끌고 그냥 나가버리네? 아무리 서운해도 이러면 안 되지.

당황스러워서 첸을 쫓아가서 잡아 세웠다.

“중요한 얘기를 한다며?”

“했어.”

녀석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 나이트 문 언제 다시 열어도 되느냐는 그 얘기?”

“나한테 그거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어?”

“야!”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 있던 터너가 어느 틈에 다가와서 뒷덜미를 잡아채지 않았으면 놈에게 달려들었을 거다. 시체까지 이리저리 뒤집으면서 물렸니 어쩌니, 꼭 뭔가 아는 것처럼 설치더니…… 뭐가 어째?

“왜?”

“사건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아까 분명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었잖아!”

“도와줬잖아?”

“언제?”

“뒷머리 쪽에 상처가 있는 거 가르쳐줬잖아. 그게 치명상이야.”

물론 놈이 구체적으로 뭘 도와준다고 말한 적이 없고, 경찰에 협조적일 이유도 없지만…… 또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놈의 소행이 괘씸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점심 안 되면 나중에 저녁 같이 먹자. 나 오늘은 계속 청연루에 있을 테니까 그리로 와.”

나를 한참 갖고 논 것도 모자라서 놈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기어코 복장을 터뜨렸다. 그때까지도 나를 붙잡고 있던 터너의 팔을 뿌리치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분명히 첸을 보고 덤벼들었는데…… 첸하고 거리를 좀 두고 서 있었던 자오가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내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자오한테 달려든 꼴이 되고 말았다.

피할 겨를도 없이 자오의 가슴팍을 들이받고는 뒤로 튕긴 걸 터너가 붙들어준 덕에 바닥에 나뒹구는 망신은 면했다. 계속 느낀 거지만 자오가 나를 보는 시선이 오늘따라 심하게 사나웠다.

“아침에 보니까 별채가 완전히 폭탄을 맞았던데…… 니가 그런 거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조마조마했는데, 자오가 한 걸음 나서면서 아침에 있었던 기물파손에 대해 정식으로 책임을 물었다. 자오 어깨너머로 첸이 히죽 웃다가 내가 노려보자 시침 딱 떼고 고개를 돌렸다.

“그건…….”

내가 그런 게 사실이니까 마땅히 변명할 말도 없었다.

“니가 박살낸 가구하고 도자기가 어떤 물건이었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값 좀 나가게 생겼었다는 거 말고는…… 전혀 모른다. 다행히 내 앞으로 자꾸만 다가오는 자오를 첸이 붙들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자오.”

보통 때라면 군소리 없이 첸의 명령을 따랐겠지만 이번엔 자오의 태도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잠깐이면 되는데요.”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집에 가서 적월赤月을 가져와.”

첸을 돌아보는 자오의 얼굴에 미세한 표정 변화가 있었다. 살짝 움찔한 것뿐이지만…… 자오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만 해도 굉장히 놀란 거다.

“적월……을요?”

자오의 반문에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 대인한테 전화해서 점심 약속 잡아.”

깜빡 잊어버리고 나온 물건을 집에 가서 가져오고, 점심 약속 잡아 놓으라는 건 그냥 듣기엔 사소한 심부름이었다. 하지만 자오와 그 부하들의 표정과 태도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넘쳐흘렀다.

〈적월〉이란 게 대체 뭘까? 이 모든 긴장감이 그 한마디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는데…….

“그럼…… 나중에 얘기하자.”

자오가 사납게 으름장을 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야구하다가 내 생애 처음으로 날린 홈런이 고아원 원장실 유리창을 박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 이게 다…… 첸, 저 자식 때문이다. 기회 있을 때 아주 보내버렸어야 되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사건현장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어 놓고, 첸이 부하들을 몰고 이제 갈 모양이었다.

맘 같아선 이놈의 클럽, 아주 영업취소를 시켜버렸으면 좋겠다. 이젠 놈의 뒤통수만 봐도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부하들 몰고 출입구 쪽으로 거의 다 갔던 놈이 다시 돌아왔다. 뭔가 깜빡 잊었다는 듯…….

“너 말이야…….”

“너랑 밥 안 먹어! 이 자식아!!”

내 고함 소리에 녀석의 머리카락이 살짝 뒤로 날렸다. 이런 식으로 껄떡거리는 것도 넌더리가 나지만…… 너 때문에 자오한테 찍혔어! 이제 어쩔 거야?

“이 사건도 니 담당이야?”

내 기세에 움찔 뒤로 물러서면서 놈이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손 떼.”

“…….”

“손 떼라고. 대공大公은 니가 상대할 만한 놈이 아니야. 너무 위험해.”

출입문 너머로 사라지는 놈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앤디였다.

“무슨 생각하세요?”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대공이란 게 누굴까? 혹은 뭘까? 그리고 적월이란 건 대체 뭘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식이 뭔가 알고 있는 건 틀림없다는 생각을 막 하던 중이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앤디를 남겨두고 돌아섰다. 놈이 차를 타고 가버리기 전에 붙잡아서 확실히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세 걸음도 떼어 놓기 전에 터너가 앞을 막았다.

“어디가?”

“밖에.”

“왜?”

“아무래도, 그 자식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이 드는데?”

확실한 건 없다. 녀석의 태도, 말투, 그리고 그 긴장감…….

“그냥 느낌이 그래.”

아무래도 비켜줄 기미가 없어서 내가 터너를 비켜 가려는데 이번엔 에쉬가 뒤에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나를 타일렀다.

“니가 매사 그런 식이니까 저 자식이 널 밥으로 보고 시도 때도 없이 먹으려고 들지.”

“무슨 소리야?”

“그냥 느낌이 그렇다고? 당연히 그렇겠지. 시체도 적당히 만지작거리고, 표정관리 해가면서 애매하게 한두 마디 툭툭 던지다 쌩하니 나갔으니까…… 터너, 그런 걸 보통 뭐라고 하지?”

터너는 이런 종류의 만담을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뭐가 되었든 에쉬가 하는 질문에는 성의 있게 대답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작업.”

터너의 투박한 눈에도 그게 작업으로 보였다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로 뭔가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 뒷골목 정보가 장난 아니게 빠삭한 놈이란 말이야!”

내 의견에 홀 안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장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고, 쥬드는 맥주 한잔을 더 따랐고, 반장은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쳤다. 나를 한심해 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막 홀 안으로 들어온 까만 양복 입은 남자 세 명뿐이었다.

“어쨌든, 이거 좀 놓고 얘기해.”

파리 끈끈이처럼 철썩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에쉬에게서 빠져 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에쉬가 나를 더 바싹 끌어안았다. 놔 줄 마음이 전혀 없나 보다.

“지금 따라 나가봐야 녀석이랑 점심이나 같이 먹게 될 거야. 아니면 니가 점심으로 먹히든가.”

에쉬는 매사에 감이 좋고 상황판단이 정확한 편이었다. 따라서 에쉬의 충고는 어떤 때나 인생에 도움이 된다. 그런 이유로…… 보통 때라면 아무 불만 없이 에쉬의 충고를 따랐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 하겠다. 첸은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놈이 적월인지 뭔지를 가져오라고 했을 때 보였던 자오의 그 놀란 표정도 가짜였을까? 첸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놈이긴 하지만, 자오는 그렇게까지 연기파는 아니다.

“그럼 어떡해? 미친놈이 넘쳐나다 못해서 이젠 어떤 변태가 사람을 죽여서 미라를 만들고 다니는데, 그놈이 어떤 놈인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우린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 자식이 단서 비슷한 거라도 갖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알아낼 거야!”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니가 왜?”

“이건 내 사건이잖아!”

“이젠 아니거든.”

터너가 좀 전에 홀 안에 들어와서 나랑 에쉬를 힐끔 쳐다보고는 서장 쪽으로 몰려가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을 가리켰다.

“루크 첸하고 점심을 먹어도 쟤네들이 먹어야지. 이젠 쟤네들 사건이니까.”

티파니 샤오란 사건을 포함한 <미라 살인사건> 일체는 완전히 연방 특경의 소관으로 넘어갔다. 연방 경찰이라는 양복차림의 멀끔한 녀석들에게 티파니 샤오란 사건에 관한 얇은 파일을 넘기는 기분은…… 솔직히 별로였다. 연방 경찰은 그간의 사건 파일을 요구하면서 시경의 공조 제의조차 받아들이지 않아서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연쇄살인 사건이 완전히 남의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더 능력 있는 전문가들이 사건을 맡아서 신속하고 깔끔하게 해결해준다면, 그건 불평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파일을 건네주고 티파니 샤오란 사건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는 내내…… ‘그래, 니네가 얼마나 스페셜하게 일을 잘하나 한번 보자.’ 라는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라면 연방 경찰의 데이터가 더 쓸 만하겠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런 식으로 사건만 낚아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동종 업계 종사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넋 놓고 앉아 있지 말고, 앤디 데리고 나가서 동네 순찰이라도 돌아!”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딱 10분 앉아 있었을 뿐인데 반장이 까칠한 목소리로 사람을 들볶기 시작했다.

“저, 좀 쉬면 안 돼요?”

“쉬는 날 쉬어. 누가 뭐래?”

일주일에 두 번, 쉬는 날이 분명히 있긴 있는데 왜 요즘은 제대로 쉬어 본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

“휴가 좀 주세요.”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던 반장이 다시 돌아섰다. 좀 전에 들은 말이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뭘 달라고?”

“힘들어서 일 못하겠어요.”

어림도 없는 소리라는 건 잘 알지만…… 정말 의욕이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숨 쉬는 것도 귀찮다.

“너, 어디 아프지?”

“어디가 아프면 일주일 정도 쉴 수 있는데요?”

내 진지한 질문에 반장이 세찬 콧방귀로 대답했다.

“강도 잡다가 배에 총을 맞았대도 요즘 같아선 휴가 없어.”

짜증나서 책상 위에 그냥 엎어졌다. 수사 중인 사건이 연방경찰 소관으로 넘어가서 기분이 엉망인 건지…… 며칠 사이 미라를 3구나 구경한 후유증인지 그건 모르겠는데, 어쨌든 지금은 아무것도 못하겠다.

“간이 부었냐? 발딱 일어나서 못 나가?”

불같은 성화에도 내가 꼼짝 않자 반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일주일이 안 되면, 사흘 만요…….”

“시답잖은 경찰 드라마 작작 좀 봐! 기분 안 좋다고 사흘씩 땡땡이를 칠 거면 영화배우를 하지, 왜 경찰을 하니?”

반장 말이 백번 옳다. 그래도 일은 못하겠다.

“선배님, 왜 이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반장이 나를 한대 쥐어박을 기세로 돌진해오자 앤디가 얼른 중간에 끼어서 내 어깨를 흔들었다. 앤디도 연방경찰이 거만한 태도로 파일 챙겨 들고 사라진 후로 기분이 안 좋아서 건너건너 빈자리에 팅팅 부은 얼굴로 앉아 있던 중이었다.

“선배님…….”

“그만 좀 흔들어. 멀미 나…….”

귀찮게 구는 앤디를 털어 내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보니 반장이 코앞에 서 있었다. 내가 요즘 들어서 잘한 건 없지만…… 그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나를 내려다보는 반장의 표정이 지나치게 심란했다.

“우울증 도졌냐?”

반장이 불친절하게 물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니 인생만 우울해? 유난 떨지 말고 정신 차려!”

“…….”

“내 책상 서랍에 우울증 치료제 있는데, 몇 알 줄까?”

“휴가 주세요.”

반장과 나 사이에 짜증과 긴장감이 최고조를 쳤다. 나를 노려보는 표정이 너무 험악해서 반장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을 때는 진짜로 한대 맞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가라! 가! 우거지상 하고 앉아서 분위기 흐리지 말고…….”

반장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반장 맘 변하기 전에 얼른 사라지려고 서둘러 일어났다.

“사흘이요?”

“웃기지 말고, 내일 하루 쉬고…… 모레 나와.”

애초에 원했던 기간에 비하면 턱도 없이 짧긴 하지만 하루 반나절이면 반장도 인심 쓸 만큼 쓴 거다. 더 이상 졸라봐야 욕이나 먹지 나올 것도 없다. 아니, 하나 더 있다. 항우울제…….

반장 방에 따라 들어가서 우울증 치료약을 병째 들고 경찰서를 나왔다. 나와서 택시 정류장에 20분도 넘게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택시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근처 모텔 말고는 달리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아무 데나 틀어박혀서 잠이나 자려고 얻어낸 휴가니까 모텔이라도 가면 되는데…… 막상 그러자니 마음이 또 서글펐다.

반장에게서 탈취해온 항우울제를 세 알이나 씹어 먹어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30년을 살았는데 가족도 없고, 마음 울적할 때 찾아갈 친구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으면 세상 완전히 헛산 거다. 신세가 이 모양이니 항우울제 따위 백병을 털어 먹어도 우울증이 가실 리 없었다. 내 우울증은 병이 아니다. 이 상황에 우울하지 않으면 그게 정상이 아닌 거다.

어쨌든…… 어렵게 얻어낸 휴가를 길바닥에서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일단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애초에 가려던 곳은 파크 사이드 호텔이었다. 공원 옆길이라 일단 조용하고 생긴 지 이제 두세 달밖에 안 돼서 시설도 깨끗한 비지니스 호텔이었다. 경찰서에서 차로 15분 거리니까 이 길로 틀어박혀서 원 없이 자고 모래 아침에 출근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입지가 좋은 곳이다.

“손님?”

“저…….”

차가 슬슬 속도를 내고 있었다. 다음 사거리를 지나치면 세 블록을 더 돌아야 되니까 기사한테 얼른 행선지를 일러줘야 되는데, 금방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얼굴 때문에 혼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렇게 기운 없고 기분 나쁠 때 만나서 술 한 잔 할 만한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루크 첸, 그 자식 얼굴이 아른거리느냐 말이다.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멀리 가실 건가요?”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힐끔 살피며 재촉을 했다. 정신 차리고…….

“파크 사이드 호텔이요.”

술 몇 병 사가지고 들어가서 마시고 잠이나 자자.

“파크 사이드면 나단 거리에 있는 거죠?”

기사가 나단 거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사거리 가장 안쪽 차선으로 접어들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솔직히,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그 자식 얼굴을 지우려고 애쓰면서.

이럴 때 그 자식 생각이 나는 게 불쾌하고 불안했다. 기분 꿀꿀할 때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놈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도 우울증의 일종일까? 전엔 이런 적 없었는데 이번 건 증상이 고약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약을 몇 알 더 먹어 볼까?

“괜찮으세요?”

기사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혼자 중얼거리고, 고개를 마구 저어대니까 당연히 신경이 쓰이겠지. 솔직히, 나도 내가 미친 놈 같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지 않다. 호텔 근처까지 다 와서 결국은 기사한테 이런 말을 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죄송한데, 차이나타운으로 가주세요.”

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미친 걸까? 성문처럼 거창하고 화려한 청연루 입구 근처를 하염없이 서성거리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거밖에는 답이 없었다. 심신이 지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는데, 그래서 반장한테 그 욕을 먹어가면서 억지로 휴가까지 얻었는데…… 도로 사정 안 좋을 때 잘못 걸리면 두 시간도 더 걸리는 이 먼 동네까지 대체 뭣 하러 온 걸까?

식당 앞길에서 반장한테 얻어온 알약을 두 개 더 먹었다. 이렇게 사탕 까먹듯 자꾸 먹어도 되는 약인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걱정이냐? 부작용이 있다 한들 여기서 더 심하게 미칠 수도 없을 텐데.

첸, 그 자식을 보러 오다니……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겨우 서너 시간 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병원에 입원을 해야 될 판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약 기운 덕에 이제라도 제정신이 돌아오면 택시를 잡아타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 비밀 많고, 음흉한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속만 매스껍지 도무지 나아지는 게 없었다. 남의 약이라서 그런가…… 머릿속은 멍하고, 기분은 암울하고, 주변에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그런 자식이 다 보고 싶을까 싶어서 내 자신이 말도 못하게 불쌍했다.

아무리 친구가 없고, 마음이 허전해도 이건 아니다. 이런 짓까지 할 정도로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니, 없다. 비니 자식이 그렇게 뻗어버린 이후론 아무도 없다. 에쉬하고 터너도 좋은 놈들이긴 하지만 걔네들은 지금 바쁘다. 쥬드는…… 얘기 좀 하자고 매달리면 마지못해 말 상대도 해줄 테고 인생에 도움 될 만한 조언도 해주겠지만, 왜 택시 안에서 떠오른 게 쥬드의 얼굴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 미칠 것 같았다. 처지가 외롭고 허전하면 쥬드처럼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가 생각나야지…… 왜 그 자식이야?

어쩌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잠시 정신이 나갔었다는 걸 깨끗하게 인정하고 돌아가면 별 일도 아닌데, 그러질 못하고 결국 식당 안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살면서 어리석은 짓도 많이 했고,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고 한심한 실수도 많았다. 실수라는 건 대체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사고치는 거지만…… 실수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짓 할 때도 가끔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이 식당은 개업했을 때부터 장안에 화제가 됐을 만큼 안팎으로 호화판에다 음식 값도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이만한 식당이라면 예약을 안 하고는 자장면 한 가닥도 맛보기 어려운 게 보통이지만…… 시간대가 어중간한 덕에 넓은 홀 안에는 빈 테이블이 꽤 많았고, 별 어려움 없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런 데는 밥 먹으러 혼자 오는 경우가 드문 탓인지 웨이터가 나를 힐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지만 다행히 안내된 곳은 까만 대나무 칸막이에 와인색 커튼까지 길게 드리워진 으슥한 구석 자리였다. 얼굴이 다 비춰 보일 정도로 얇은 커튼이긴 하지만……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어딘가에 숨고 싶던 참이었다.

구석이라곤 해도 커다란 창을 통해 정원과 연못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괜찮은 자리였다. 아직은 철이 일러서 바깥 풍경이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연못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어지간한 조각상보다 더 멋지게 휘어져서 눈길을 끌었다. 달리 쳐다볼 것도 없어서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음식과 술을 가져올 때까지 그 나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중국 요리라곤 아는 것도 없고, 뭘 먹을 기분도 아니라서 메뉴판 제일 위에 있는 오늘의 추천 요리하고 중국 술 한 병을 시켰는데…… 그 결과 고기 완자에 걸쭉한 주황색 소스가 잔뜩 얹힌 처음 보는 음식 한 접시하고 색깔도, 향기도 없는 작은 술 한 병이 내 앞에 놓여졌다.

음식은 어차피 관심 밖이었고…… 술이나 취하도록 마시려고 했는데, 실망스럽다. 술병도 너무 작고, 외양도 그저 물 같고, 딸려 온 잔도 위스키 스트레이트 잔보다 더 작았다. 이거 마시고 취하려면 팔이 아플 정도로 부지런히 따라 마셔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한잔을 부어서 홀짝 털어 마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술이 이러냐? 혀끝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불에 타는 느낌이었다. 물 한잔을 들이부어서 일단 불을 끈 다음에 자리에 앉아서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라벨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몽땅 중국어라서 술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뭐…… 굳이 술 이름을 알 필요가 있나?

화끈한 기운이 가시자 벌써 기분이 알딸딸하면서 취기가 올랐다. 일단 그거면 됐다. 이름 있는 식당에서 파는 술이니까 조심해서 마시면 죽지는 않겠지.

어느새 해 저물녘이라 정원에 희고 붉은 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저녁때라서 식당 안에도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가는 사이, 조심해서 마신 술이 어느새 반병을 넘어갔고 몸이 슬슬 공중에 뜨는 기분이 들었다. 첸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옅어지면서…… 남은 술마저 마시고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바람직한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 술인가 보다.

“뭐해?”

인생 참 마음대로 안 된다. 누군가 커튼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오기에 웨이트리스일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봤는데…… 첸이었다.

“보면 몰라? 밥 먹어.”

첸 뒤쪽에는 언제나 세트처럼 따라다니는 자오 외에도 부하로 보이는 남자들이 세 명이나 더 있었다. 부하들 몰고 다니는 거야 전적으로 자기 맘이지만 식당 안에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나? 하여튼, 유난은…….

“접시에 젓가락 지나간 흔적도 없는데 밥은 무슨 밥?”

첸이 허락도 없이 내 술병을 집어가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독한 건데, 이 만큼을 혼자 다 마신 거야?”

“응.”

녀석은…… 어딘가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왜 달라 보이는지 모르겠다. 빈속에 약 먹고 술 먹어서 내 눈이 이상해졌나? …… 아니다. 가만 보니까 실제로 좀 달라졌다. 물 찬 제비 같은 양복 차림도 보고, 비단 원피스 입은 것도 봤지만…… 청바지에 스웨터, 가죽점퍼 입은 건 오늘 처음 봤다. 그리고 머리카락도 많이 짧아졌다. 아침에 내가 잘라준 길이에 맞춰서 손을 본 모양인데…… 좀 심하게 짧은 감은 있지만 나름대로 신선하고 얼굴이 훤했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왜 구석에 박혀서 술타령이야?”

“말 안 해도 잘 찾아내잖아?”

대꾸하면서 첸의 손에서 술병을 찾아와서 한잔 더 따랐다. 첸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거…… 45도짜리라는 거 알고 그렇게 퍼 마시는 거야?”

대강 그 정도 될 줄은 알았다.

“별로 많이 안 마셨어.”

녀석이 말 시키는 바람에 잔이 넘쳤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첸이 손에 들고 있던 긴 막대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이거 어디선가 봤던 건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 길고 까맣고 반질반질한 물건이…… 뭐였더라?

“기억 안 나? 아침에 이걸로 날 죽일 뻔했었잖아.”

아…… 맞다. 그거네.

“총알 떨어졌어? 이런 건 왜 들고 다니는데?”

“그만 마셔.”

잔을 비우고 다시 술병을 잡으려고 하자 첸이 병을 낚아챘다.

“내 놔.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실 거야.”

남 보기엔 한심해 보여도 나는 지금 내 상태가 맘에 든다. 눈앞이 심하게 가물거리고, 속 쓰리고, 기운 없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는지 생각이 안 나서 아주 좋다.

“근무 시간 아냐?”

“나는 나쁜 경찰이걸랑…….”

첸의 손에 들린 술병을 찾아오려고 손을 뻗다가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덕분에 한 접시 고스란히 남아 있던 걸쭉한 요리를 가슴으로 덮치고 말았다.

“너 때문에…… 옷 다 버렸잖아.”

“취해서 그런 거잖아.”

첸이 한심하다는 듯 타박을 하며 옆에 서 있는 자오한테 술병을 넘겨버렸다.

“아직 안 취했어.”

“취했어.”

“무슨 상관이야?”

“상관은 없어. 취해서 해롱거리는 것도 귀여우니까…….”

이런 소릴 들어도 그러려니 싶고…… 별로 화가 안 나는 걸 보면 취한 게 맞나 보다.

“그건 그렇고…… 안 바빠? 시내 나이트에서 그렇게 흉악한 게 나왔으면, 니네도 비상일 거 아냐?”

비상이다. 수사권은 연방경찰이 가져갔지만 사건 현장을 중심으로 동원 가능한 인력은 모조리 길바닥에 나가 있는 형편이다.

이럴 때 휴가를 달라고 그렇게 땡깡을 피워 놓고, 택시 잡아타고 이리로 달려오다니…… 반장이 이 사실을 알면 나는 재판도 없이 구치소 구석방 같은데 갇힐 거다. 대체 왜 이 자식이 보고 싶었던 걸까? 막상 얼굴을 보니까 그 까닭을 더 모르겠다.

“생각보다는 한가해. 연방경찰이 사건을 통째로 가져갔거든.”

내 대꾸에 녀석이 혀를 끌끌 차더니 자오한테 맡겨 놨던 술병을 찾아서 한 모금 마셨다.

“연방경찰한테 일거리를 뺏겼다고 삐져서 술 먹고 주정 부리는 거야?”

삐져서 술 먹고 주정이라니…… 기분 나쁘다.

“내가 무슨 주정을 부렸다고…….”

“짭새들 성격이 다 너처럼 이상한 거야? 아니면 너만 그런 거야? 딴 놈이 위험하고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준다고 나서면, 고맙고 기분 좋은 게 정상이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니네 경찰서는 실적 따라서 수당을 받는 거야? 아니면…… 오컴 한 마리 잡아보니까 괴수 사냥이 만만하고 재미있어?”

술만 이렇게 안 퍼 마셨으면 이 정도는 무슨 소린지 알았을 것도 같은데 지금은 뇌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아까 씹어 먹은 알약하고 좀 전부터 들이붓고 있는 알콜이 속에 격하게 뒤섞이는 느낌이 왔다.

갑자기 캄캄해진 눈앞이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렸다가 첸에게 물었다.

“괴수…… 사냥?”

“솔직히, 오컴도 무슨 능력이 있어서 잡은 거 아니잖아? 매번 그렇게 운이 좋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지금은 비니 몬티첼리도 없는데…… 뭘로 그놈을 잡을래?”

비니 얘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심한 말 했던 거, 때렸던 거, 노골적으로 피해 다녔던 거…… 당시엔 그럴 만해서 그랬던 거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모두 후회스러웠다. 그건 그렇고…….

“그럼 그게…… 괴물의 소행이란 말이야? 그…… 오컴 같은?”

눈물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으면서 물었다. 술주정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이제는 혀도 꼬였다.

“오컴 같지는 않아. 더 위험하고, 교활하지.”

한방에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테이블에 잠깐 엎어졌다가 일어났다. 말 한마디에 놀라서 정신이 돌아오기엔 술이 너무 과했다. 어떻게 하면 술이 깰까? 물이라도 한잔 마셔 볼까 싶어서 물 잔을 집다가 그것도 잘못 건드려서 테이블이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그만 일어나라.”

첸이 한숨을 쉬면서 먼저 일어났다.

“너, 범인을 알아?”

취했다고 무시하거나, 또 엉뚱한 소리로 말꼬리를 돌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물음에 대한 첸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응.”

“너…….”

아무리 시민의 안전과는 아무 상관없는 짓으로 먹고 살아도, 사회 구성원으로써 최소한의 도리가 있지…… 이 나쁜 자식아!! 엽기 살인마가 사람을 셋이나 죽여서 미라를 만들고 돌아다니는데 그놈이 누군지 혼자만 알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대체 어떤 놈이야?”

내가 소리를 치며 벌떡 일어서자 놈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올려놨던 검을 잽싸게 집어 들고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들고 있는 검 손잡이 쪽으로 자오의 가슴팍을 툭 치면서 명령했다.

“자오, 얘 위에 데리고 올라가서 좀 재워.”

“애도 아닌데, 꼭 제가 재워야 됩니까?”

자오가 마땅치 않다는 듯 투덜거렸다.

“어차피 좀 있으면 니가 업고 가야 돼. 그나마 정신 있을 때 데리고 가는 게 덜 무거워.”

말은 고맙지만 이제 술 다 깼다.

“어떤 놈이냐고 묻잖아! 당장 안 불어?”

놈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멱살이라도 잡아 흔들고 싶지만, 다리가 꼬여서 다시 의자에 주저앉고 말았다. 정신은 슬슬 돌아오는 것 같은데 몸 상태는 갈수록 혼미해지는 중이었다.

“정확한 건 잡아봐야 알겠지만…… 아마 대공大公일 거야. 뱀파이어도 종류가 많지만, 머리부터 먹어 치우는 놈은 흔치 않거든.”

대공? 뱀파이어? 어쨌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에 돌아가서 보고를 하고…… 근데, 잠깐…….

“뱀……파이어?”

“왜? 맘에 안 들어?”

이 마당에 맘에 들고 안 들고 할 게 뭐가 있냐? 그냥 어이가 없는 거지.

“오컴 같은 괴물도 돌아다니는데, 뱀파이어라고 특별히 곤란할 것도 없잖아?”

그건 니 생각이고…… 살인범이 뱀파이어라면 반장하고 서장한테 보고하기가 우선 곤란하다.

“박쥐…… 드라큘라…… 관에서 벌떡벌떡 일어나는, 그런 거 말이야?”

더 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 놈이 손을 내저었다.

“자오 따라 올라가서 잠이나 자. 술 깬 다음에 얘기하자.”

“싫어. 지금 얘기해.”

“알고 있는 건 다 얘기했어. 그리고 오늘은 나도 바빠서 니 술주정 길게는 못 받아줘.”

고렇게 지껄이고 나서 첸이 돌아섰고, 놈을 붙잡으려고 나도 일어섰다. 하지만 일어서는 순간…… 바닥이 푹 꺼지면서 내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의식이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갈증이었다. 단순히 목이 마른 게 아니라 온몸이 다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고, 그 고통 때문에 눈을 떴다.

푸른 벽, 검은 침대, 붉은 커튼…… 아름답고 어두운 동굴 같은 방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고개를 돌려보니 고맙게도 사이드 테이블에 주전자와 컵이 놓여 있다. 물을 마시려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는데…… 이번엔 평생 겪어 본 것 중에 제일 강도가 센 두통이 나를 덮쳤다. 덕분에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주전자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끙끙거리며 두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더 심해져서 이젠 커다란 바늘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한동안 침대 위를 설설 기다가 간신히 주전자를 잡았다. 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반은 바닥에 쏟아버리고…… 정작 입안으로 들어간 물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하여튼 그렇게라도 목을 축이고 나니까 우선 살 것 같았고, 첸의 식당에서 자동차 연료로나 쓸 것 같은 독주를 퍼 마신 것도 기억이 났다. 술에 취해서 음식 위에 엎어지고, 혀 꼬인 소리로 해롱거렸던 것도…… 좀 전까지는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속이 상해서 죽을 것 같다.

방에 사람이 들어온 건 몇 번이나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결국 침대 아래로 떨어진지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가뜩이나 두통이 심한데 떨어지면서 바닥을 머리로 들이박는 바람에 정신을 잠깐 잃었던 것 같다.

어쨌든…… 침대에서 떨어진 다음에 깨달은 건데, 이 자식들은 왜 사람이 정신을 잃으면 번번이 옷부터 벗겨 가는지 모르겠다.

“주정뱅이야!”

첸이 나를 내려다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창피하다. 이렇게 다 벗고 뻗어 있는 것도, 술 먹고 주정한 것도, 그리고 애초에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머리가 깨져서 죽을 지경이라도 이런 꼴로 있을 수는 없어서 일단 이불을 끌어다 몸에 감은 후, 소파까지 반은 걷고…… 반은 기었다.

“의사 불러줘?”

끙끙거리면서 소파에 주저앉는 나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던 첸이 물었다.

“됐어. 그냥 머리가 좀 아픈 것뿐이야.”

“좀 아픈 정도가 아닐걸?”

녀석이 들고 있던 검을 선반에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저건 뭣 때문에 저렇게 노상 들고 다니는 걸까? 보통은 손가방도 하나 없이 가뿐하게 다니던 놈인데…….

“아는 거 보니까…… 너도 그거 마시고 뻗은 적 있구나?”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소파에 길게 뻗었다. 내 목소리에도 머리가 울렸다.

“술도 문제지만 어제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부터 갖다 박았어.”

어쩐지…….

“미안한데…… 나 물 한 잔만 줘.”

녀석이 하품을 하면서 일어났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서 내 손에 쥐어줬다. 가까이서 보니……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지금 몇 시야?”

물 한 병을 다 마셔도 목은 마르고, 머리는 깨질 것 같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술 마실 때는 마시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죽을 지경이 되니까 괜한 짓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시가 좀 넘었어.”

“아침?”

“응.”

녀석은 나른하고 피곤해 보였다. 밤새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저렇게 녹초가 된 걸까?

“옷 줘. 가게…….”

녀석이 웃었다. 기운 빠진 웃음이라 표정이 부드러웠다.

“어딜 갈 건데?”

“일하러.”

오늘까지는 휴가지만, 놈에게 긴말하기 싫었다.

“기어서?”

보통 때도 이 자식하고 말싸움을 하면 기운이 쪽 빠졌다. 그러니 지금처럼 컨디션 안 좋을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할 말도 없고 기운도 없어서 소파에 코를 박고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 열리는 소리에 바싹 긴장했다. 지금 내 꼴이 하도 볼 만하다 보니……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들어온 건 자오였다. 자오한테는 그동안 못 볼 꼴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에 낯선 사람에 비해 쪽팔림이 한결 덜하다.

“살아 있냐?”

들고 온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자오가 내 안부를 물었다.

“응…….”

“속은 좀 어때?”

“안 좋아.”

자오가 안쓰럽다는 듯 내 머리를 토닥거렸다. 악의라곤 전혀 없는 행동이지만…… 머리 울려서 죽는 줄 알았다.

“너도 차 한 잔 할래?”

“옷이나 줘. 왜 남의 옷은 자꾸 벗겨 가는 거야?”

“오바이트해서 옷에다 다 비벼 놓고…… 누구한테 옷 타령이야?”

오바이트라니…… 머리부터 바닥에 갖다 박으면서 쓰러진 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바이트를 했다는 것도 민망하고 창피하지만…… 불안하다. 뭔가 다른 실수를 한 건 아닐까? 바닥에 쓰러지고, 먹은 거 토했으면 취중에 할 만한 실수는 대강 다 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기억 안 나?”

혹시 뭐라도 생각나지 않을까 해서 아픈 머리를 쥐어짜고 있는 나한테 첸이 물었다. 기억은 하나도 안 나지만,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

“하나도?”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면 물었다. 녀석이 저렇게 나오니까 불안을 넘어서 겁이 덜컥 났다. 매사 유들유들하니 여유가 넘치던 놈이었는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녀석이 찻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놨다.

“나한테 보고 싶었다고 말한 게 기억이 안 난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춘 다음에…… 다시 숨을 내쉬기까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장난치지 마.”

내가 어제 마신 게 술이 아니라 쥐약이었다고 해도 그럴 리 없다. 우선, 나는 저놈을 안 좋아하고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장난치지 말라니까…….”

내 귀에도 처량하게 들릴 정도로 내 목소리가 애절했다. 첸의 표정에 장난기가 전혀 없는 걸 보면 진짜로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지? 이젠 머리가 아프다 못해 쥐가 날 것 같았다.

절망에 빠진 내가 소파 등받이에 대고 헤딩하는 게 어지간히 보기 딱했던지…… 자오가 손을 내저으며 나섰다.

“걱정하지 마. 그런 적 없어.”

망할 놈…… 아주 갖고 놀아라! 달려들어서 요절을 내버리고 싶어도 그저 마음뿐이었다. 정말…… 술이 원수다.

“무슨 소리야? 너도 들었잖아?”

자오의 증언에 첸이 발끈해서 언성을 높였다. 보통은 직장 상사가 이렇게 거칠게 나오면 기가 죽기 마련이지만, 자오는 성품이 올곧은 상 남자였다.

“듣긴 들었지만, 그게 회장님께 한 말이었던가요?”

“그거야…… 쟤가 인사불성이라 그때 방향을 잘못 잡은 거지.”

“어쨌든 제가 있는 방향이었죠.”

둘이 주고받는 소릴 들어보니…… 내가 말실수를 하긴 했나 보다.

“그럼 니 말은, 쟤가 널 보고 싶어서 여기 왔다는 거야?”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얘긴 저한테 한 거죠.”

둘이 옥신각신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참에 술을 아예 끊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쁜 것들…….

“방향이 뭐가 중요해?”

첸이 다시 찻잔을 집어 들면서 툴툴거렸다. 첸하고 길게 말씨름하기 싫은지 자오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중요한 건…… 내가 무슨 말을 했든 술 취해서 헛소리 한 거고, 그나마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일은…….”

자오가 내 머리 밑에 쿠션을 밀어 넣어주면서 첸에게 물었다. 일 얘기인 모양인데, 아무래도 짭새 앞에서 하기엔 신경 쓰이는지 내 눈치를 슬쩍 보면서 내용을 대강 뭉뚱그리는 분위기였다.

나는…… 당장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소파에 들어붙은 몸을 어떻게 해도 떼어낼 방법이 없었다.

“놈은 야행성이야. 지금쯤 어느 구석에 틀어박혀서 배 두드리며 퍼질러져 자고 있을걸.”

“그럼, 수색은 밤에만 합니까? 가비우스 애들은…….”

“밤낮으로 돌아다니다가 코피 쏟으면서 쓰러지고 싶으면, 그건 걔네들 마음이지.”

가비우스 애들이라…… 그리고 ‘수색’이란 말이지…… 술이 덜 깨서 멍한 머릿속에 일전에 오컴을 뒤쫓다 마주쳤던 그 시커먼 패거리가 떠올랐다. 기사단 좋아하네. 동네가 무너지기 전에 한 짓을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KKK단보다 더 불량한 놈들이다. 그건 그렇고…… 수색이라니?

“그럼 우리 애들은 일단 빼겠습니다.”

무슨 소린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일전에 별채에서 훔쳐 들은 얘기를 입맛대로 갖다 붙여서 종합해보면 얘네들이 지금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라는 놈들하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 무장한 깡패들이랑 흑풍회가 뭉쳐 다니는 건 시민과 경찰에게는 최악의 재난이다.

“너도 좀 쉬어둬. 놈을 찾을 때까지는 밤에 잠은 다 잔 거야.”

“그럼 회장님도…….”

“나도 쉬어야지.”

놈을 찾을 때까지라…… 누굴 찾고 있는 걸까? 어째 중요한 얘기 같은데 뇌 세포가 술에 쩔어서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그 기사단 놈들이랑 흑풍회가 밤잠 설쳐가면서 찾아다니는 놈이라면 굉장히 거물일 텐데, 그러니까…… 니콜라스 같은…….

내가 벌떡 일어나 앉자 첸과 자오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잊으려고 무던히 애썼고 덕분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얼굴인데…… 갑자기 떠올라서 나도 놀랐다.

“어디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서자 첸이 물었다. 샤워하러 간다. 아무래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찬물이라도 한 바가지 뒤집어 써야 될 테니까…….

좀 전에는 머리만 아팠는데 지금은 물줄기가 떨어져 부딪치는 곳마다 그렇게 아팠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니콜라스…… 한쪽 팔이 거의 떨어진 채 눈밭을 달리던 니콜라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심란한 모습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위스키는 아무리 마셔도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 망할 중국술엔 대체 뭐가 들어갔던 걸까? 술기운 탓인지 니콜라스의 모습이 유난히 생생하고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뭐하는 거야?”

욕실 문 열고 들어오던 첸이 물끄러미 내 모습을 내려다봤다.

“술 좀 깨려고…….”

“감기 걸려.”

녀석이 물을 잠그고 수건을 내 얼굴에 집어 던졌다. 왠지, 화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한참 동안이나 찬물을 뒤집어 쓴 덕에 정신은 많이 맑아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움직일 수가 없어서…… 첸이 나를 떠메고 욕실을 나와야 했다.

이 자식이 여러 가지로 나한테 잘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태도가 늘 부드럽지는 않은데, 지금이 특히 그렇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프고 속 안 좋은데 이렇게 집어 던지면…….

“왜 안 물어봐?”

팔짱 끼고 삐딱하게 서서 녀석이 시비조로 물었다.

“뭘?”

“자오가 한 얘기를 대강 들었으니까,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냐?”

나를 쏘아보는 시선이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거북스러웠다.

“너도 어제 내가 마신 그거 한 병 마셔봐. 만사가 다 귀찮아.”

이불도 욕실 앞에 떨어져 있고, 달리 걸칠 만한 것도 없어서 침대 시트를 끌어당겨서 몸에 둘둘 말고 돌아누웠다. 하지만 돌아누운 보람도 없이 놈이 침대를 빙 돌아서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헤슬렘 얘기가 나올까 봐 겁이 나는 게 아니고?”

녀석도 나를 노려보고, 나도 녀석을 노려봤다.

“대체 왜 이래?”

“기분 나빠.”

“뭐가?”

“이따금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 하지만 그렇다고 허옇게 질려서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건 너무하잖아? 왜 이렇게 반응이 과민해? 그놈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함부로 떠들지 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하고 그 자식이 어떤 사이였는지 정도는 알아. 나도 정보통이 있으니까.”

머리는 아프지, 속은 쓰리지, 세상에서 제일 빤질한 놈은 눈앞에서 계속 시비지…… 무슨 휴가가 이러냐? 이렇게 쉬느니 차라리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옷 내놔! 일하러 가게!”

“허세 부리지 마. 두통 때문에 꼼짝도 못하잖아. 그리고…… 오늘까지는 휴가라면서?”

경찰서 내 끄나풀이 어떤 놈인지 몰라도…… 잡히면 죽여버릴 테다.

한심하긴 하지만 두통 때문에 꼼짝도 못할 거라는 첸의 말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나가려면 옷보다 휠체어가 필요했다.

어제 술 먹기 전에 반장의 항우울제를 여섯 알이나 씹어 먹어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걸까? 기껏 샤워까지 했는데 몸이 처음보다 더 안 좋아졌다. 나가긴 나가야 될 것 같은데 상태가 이 모양이니까 기분만 점점 더 울적해졌다. 내 꼴이…… 뭐냐? 이게…….

우울증과 숙취를 속으로 삭이느라 끙끙 앓고 있는데…… 첸이 이불을 가져다가 어깨까지 푹 덮어줬다. 방안 공기도 서늘한데다 찬물에 샤워까지 해서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던 터라,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이 자식이 사람 약 올리고 대책 없이 뺀질거릴 때보다 이럴 때가 더 난감하다.

“그래서…… 니네랑 기사단 놈들은 누굴 뒤쫓는 건데?”

녀석이 손끝으로 내 젖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몸을 슬쩍 뒤로 뺐다. 하지만 괜히 그랬다. 놈이 내가 비켜준 빈자리에 냉큼 걸터앉아서 이젠 내 얼굴을 주무르기 시작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헤슬렘은 아니니까.”

“그런 놈들이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걱정이야.”

“뭐…… 일솜씨가 좀 거칠긴 하더라.”

좀 거칠어? 사람이 백 명도 넘게 모여 있던 파티장 한복판을 헬기로 받아버린 놈들이다. 인구 밀집 지역 한복판에 총알이 미사일만한 머신 건을 난사한 놈들이기도 하고…… 좀 거칠다는 건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놈들은 미쳤다. 총 든 미치광이 집단보다 더 위험한 게 대체 뭘까? 놈들이 뭘 쫓아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네들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닐 거다.

“우리가 쫓는 건 대공이야.”

대공이라…… 어제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그때도 만취했을 때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대공이라면…… 귀족이야?”

“귀족은 무슨…….”

첸이 코웃음을 쳤다.

“애가 좀 있어 보이니까 촌놈들이 갖다 붙인 별명이야.”

갑자기 대공에 대한 흥미가 똑 떨어졌다. 귀족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뱀파이어 어쩌고 했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살인사건이야 어떤 케이스든 맡겨지기만 하면 최선을 다해서 수사하고 범인을 뒤쫓겠지만 뱀파이어라니…… 이 빌어먹을 동네에 살인자가 모자라서 뱀파이어까지 걷어 부치고 나선 거라면 직업을 바꾸는 거밖에는 살 길이 없다.

“그놈 이름은 필립이야. 내가 기억하기론…… 그래.”

“뱀파이어치곤 이름 좋은데?”

슬금슬금 목덜미를 타고 가슴까지 내려온 놈의 손을 밀어 치우고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 올렸다.

“놈은 그게 자기 이름인 줄도 모를 거야. 누가 그놈한테 이름 따위를 불러줬겠어? 알았었다고 해도 벌써 잊었겠지…….”

첸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뱀파이어든 뭐든, 쫓아도 경찰이 쫓아야지…… 니네가 왜 나서?”

“그놈 때문에 잘 나가던 클럽이 기한도 없이 영업정지를 먹었는데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잖아? 그놈을 빨리 잡아야 니네 경찰서에 웅크리고 있는 그 예쁜 마녀가 영업정지를 풀어줄 테고, 그래야 나도 다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돈을 싹 쓸어 담을 거 아냐?”

나는 정말 진지하게 따지는 건데, 놈의 태도는 그저 건성이었다.

“돈 타령 좀 그만 해. 클럽이 문을 닫으면 당장 밥을 굶어?”

“클럽 투자자들 대부분이 장인 친구들이야. 얼마나 지독한 영감들인지 너도 대강은 알잖아.”

물론 알지만, 그쪽은 전혀 걱정이 안 된다. 첸이 그 영감들을 얼마나 잘 다루는지도 알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그놈들하고 어울려 다니다간 너도 크게 다칠 거야. 완전히 또라이들이란 말이야.”

“놈들 하는 짓이 시원찮다는 건 나도 알아. 어쨌든. 고마워. 걱정해줘서.”

놈이 내 충고를 씹으며 하품을 했다.

“어쨌든, 그 정신 나간 놈들이 한 번만 더 사람들한테 총질을 해대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한 번만 더 총질을 하면……이 아니라 지금 당장 서장한테 보고를 해야 할 일이었다. 놈들이 나타나면 꼭 건물이 부서지고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는다. 사실 진즉에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오컴 사건 이후로 비니가 그렇게 돼버리는 바람에 경황도 없었고, 일도 바빴고…… 하는 짓이 하도 희한한 놈들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도 서질 않았다.

“놈들을 혼내줄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가만 안 있겠다는 내 으름장에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한동안 애쓰던 첸이 결국 비웃음을 터뜨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기분도 나쁘고, 또 구체적인 방법은 생각해 놓은 게 없어서 놈을 노려만 보고 있으려니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자오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였다.

“차를 가져왔는데…… 어디에 놓을까요?”

나하고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이랑 이렇게 묘한 구도로 마주보고 있을 때 들어온 사람이 자오였어도 물론 쪽팔렸겠지만…… 그게 낯선 여자일 경우엔 쪽팔림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할까? 머리 아픈 척하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사이, 첸이 태연한 얼굴로 여자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져와.”

여자가 두고 간 차는…… 차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걸쭉하고, 시커멓고, 냄새가 고약했다. 온갖 거 다 쓸어다가 요리로 만들어 먹는 중국 사람들 입맛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저런 거 절대 안 마실 거다.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거…… 마실 거야?”

잔을 살살 돌리며 차를 식히고 있는 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좀 전에도 차 한 잔 마시던데, 무슨 차를 연거푸 마시나 싶기도 하고 차의 색깔과 냄새와 양을 종합해 보건데…… 마시면 얼마 못 살고 죽을 것 같아서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내 질문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이거 니 꺼야.”

헉…….

말하면서 첸이 차 사발을 내 코밑에 들이미는 바람에, 그거 피하려다가 하마터면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술 깨는데 도움이 될 거야. 속 쓰린 것도 훨씬 덜할 테고…….”

냄새만 맡아도 기절할 것 같지만 술이 깨는데 도움이 될 거란 소리만큼은 귀에 착 감겼다.

“주방 총책임자인 주씨 집안에서 자랑하는 비장의 한방차야. 효과도 믿을 만하고…… 지난 3백년간 꾸준한 임상실험을 거친 끝에 완성된 차거든.”

“3백년간의 임상실험이라니?”

“대대로 술꾼이 많은 집안이거든.”

믿어도 될까? 차의 상태로만 보면 3백년간 어떻게 하면 더 역겹고 맛없는 차를 만들까를 실험한 것 같은데?

“특히…… 두통엔 진짜 잘 들어.”

두통 얘기에 나도 모르게 찻잔으로 손이 나갔다. 머리 아픈 것만 해결할 수 있다면 웬만한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내 사정은 절박했다. 먹고 토하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시도해본다고 손해 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해도 두통이 지금보다 더 심해지지는 않을 테니까.

다행히 차는 걱정했던 것만큼 역겹지도 않았고, 보기보다 양도 많지 않았다. 단지…… 아주 썼다. 약이 입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혓바늘이 쫙 곤두섰고, 다음엔 온 몸에 신경이 벌떡 일어섰다.

술 깨는 차라더니…… 정말 깨긴 확 깬다.

“괜찮아?”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켜 세울 정도로 강렬한 쓴맛 때문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 내 뒤통수를 슬슬 만지면서 첸이 물었다. 괜찮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거…… 두통에 잘 듣는 건 확실한 거지?”

“…….”

대답이 없다. 이 자식…… 장난 친 거면 죽여버리려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놈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녀석의 얼굴엔 장난기도 없었을 뿐더러……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얼굴은 분명히 아닌데……

“좀 전에 그 차 말이야…….”

대강 얼버무리면서 침대에서 일어서기에 녀석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가는 건 좋은데, 묻는 말에 대답은 하고 가야지.

“걱정 마. 술도 깰 거고, 머리도 더 이상 안 아플 거야.”

원하던 대답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생겼다. 하지만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느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돌아서서 소파 쪽으로 다가가는 녀석의 뒤통수를 쳐다보는데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젠 차에 취했나 싶어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멍한 눈으로 녀석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어제 여기까지 온 게 순전히 저놈 때문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물어볼 게 있어서도 아니고 화가 나서도 아니고, 그냥 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여기서 나가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사는 게 고달픈데 이러면 더 힘들어진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팔에도 다리에도 힘이 통 들어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술 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녀석이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나를 돌아봤다.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좀 졸릴 거야. 한잠 자고 나서 같이 밥이나 먹자. 좋지?”

다시 눈을 뜬 건 저녁 무렵이었다. 속이 쓰리지도 않고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아침에 느꼈던 그 정도 숙취라면 며칠을 두고 고생하는 게 보통인데…… 속이 약간 더부룩하고 입안에 쓴 맛이 남아 있는 것만 빼면 컨디션은 여느 평범한 아침과 다를 게 없었다. 지금은 아침이 아니고, 여기는 내가 만만하게 들락거릴 만한 싸구려 모텔도 아니었지만…….

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붉은 커튼을 통해서 방을 비추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걸 잠시 지켜보다 일어나 앉았다.

푸른 벽, 검은 침대, 붉은 커튼, 아름답고 어두운…… 마치 동굴 같은 방. 이젠 눈앞에 어른거리는 색채만으로도 이게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이국적이라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는데, 눈에 익어서 그런지 이젠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거슬리기는커녕 아늑하고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 근처 허름한 모텔에서 눈을 뜰 때마다 느끼던 그 낯설음과 허전함에 비하면…….

일이 너무 힘들었나? 아니면 요즘 들어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마음이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모르겠다. 비니가 보고 싶다. 병원 침대에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 있는 비니 말고, 움직이고 말하고, 사고치는 비니가 그리웠다. 녀석이 있을 때는 노상 초 긴장상태라서 외로움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니콜라스도…….

갑자기 떠오른 니콜라스의 얼굴 때문에 짜증이 났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 인간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한동안 잊고 잘 지냈는데…… 답답해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첸 말이 맞다. 가끔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때마다 이렇게 놀라는 건 한심하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야 니콜라스가 그냥 옛날에 내가 잡아넣었던 미치광이 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을까?

이러고 있어 봐야 잡생각이 그치질 않을 것 같아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옷이 없어서 어쩌나 난감했는데…… 사이드 체어에 옷가지가 걸쳐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나 입으라고 갖다 놓은 건가 싶어서 들춰봤더니, 내 옷이었다.

너무 깨끗하게 빨아서 내 옷이 아닌 줄 알았다. 이 청바지는 처음 샀을 때도 이렇게 말끔하고 빳빳하지는 않았다.

그럼…… 옷 챙겨 입고 아무도 모르게 여길 살짝 빠져 나가면 여기까지 찾아온 거, 술 먹고 쓰러진 거, 자오한테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 거…… 등등의 추태가 없었던 일처럼 조용히 잊혀질 수 있을까?

샤워나 해야 되겠다. 첸, 그 자식이 보면 니콜라스 생각날 때마다 샤워하러 간다고 비웃었겠지. 없어서 다행이다.

일어서는 순간,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잠시 캄캄해졌다. 이건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만 하루를 굶어서 그런 것 같았다. 바로 아래층이 식당인데 나가면서 밥을 먹고 나갈까, 딴 데 가서 먹을까…… 그런 생각하면서 방을 가로질러 가다가 화들짝 놀라서 벽에 붙어 섰다. 방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뭐냐? 저거?

첸이 숨소리도 조용하게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자식이 왜 여기서 자고 있을까?

청연루는 중국의 대저택 양식으로 성벽처럼 높고 웅장한 담 안쪽에는 식당 건물 말고도 다른 부속 건물이 서너 개나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 두 개가 호텔이었다. 건물들이 아담하니 객실 수가 많지는 않겠지만 남는 방이 없지도 않을 텐데…… 졸리면 다른 방에서 잘 것이지, 왜 어울리지도 않는 궁상이냐?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공연히 미운 마음이 들어서 첸을 빤히 노려보다가 녀석이 몸을 들썩이는 바람에 더 놀라서 한달음에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허리에 수건 한 장 안 두르고 돌아다니던 중이었는데 녀석이 깨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것도 상당히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욕실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니 녀석은 그냥 뒤척이면서 돌아누웠을 뿐, 깰 기미가 없었다.

녀석의 꼬락서니가 완전히 늘어진 파김치였다.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기에 저 지경일까? …… 맞다! 가비우스 깡패들이랑 대공인가 뭔가 하는 놈을 쫓아다닌다고 했었지. 그렇게라도 해서 장사를 하루라도 일찍 시작해보겠다는 의지는 좋지만 대공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는 게 떠올라서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뱀파이어 운운에 마음 놓고 콧방귀를 뀌었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 이게 혹시 일전에 기사단 녀석들이 오컴을 쫓아다닌 것과 같은 맥락의 일일까? 뭐가 되었든 조만간 대형 사고가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안 좋은 예감이 비껴간 적이 거의 없어서 마음이 더 편치 않았다.

대강 씻고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첸은 아까 돌아누운 그 자세 그대로 뻗어 있었다. 옷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말리고, 지갑과 신분증과 총을 챙길 때까지도 미동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순조로우면 챙길 것 챙겨서 뒤돌아볼 것도 없이 잽싸게 방을 나가는 것이 내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였지만…… 그러는 대신, 녀석이 누워 있는 소파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요즘은…… 그렇다. 무슨 일이건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저지를 때가 훨씬 많았다. 지쳐서 그런 걸까? 깊이 생각하는 것도 귀찮고 앞일 걱정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기도 싫었다. 물론 이러다 조만간 날벼락을 맞겠지만…….

조용했다. 시간의 흐름조차 잊을 정도로…… 들리는 소리라곤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길거리의 소음과 루크 첸의 숨소리뿐이었다. 녀석도 매일 잠이야 자겠지만, 늘 이런 모습일까? 첸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녀석을 안 지도 꽤 됐고, 이런 저런 일로 부딪히면서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내 앞에 누워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이 남자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한낮에도 굴속같이 어둡던 방이 완전히 깜깜해져서 방안의 모든 것이 그저 희미한 윤곽으로 보일 즈음, 첸이 눈을 떴다.

잠에서 깼을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오싹하고 기분도 나쁘련만, 그런 기색은 없고…… 웃는 거냐? 지금?

“너…… 그거 진심이었구나?”

놈이 나를 보면서 잠꼬대하듯 웅얼거렸다.

“뭐가?”

“나 보고 싶었다던 거…….”

참 부지런도 하다. 눈 뜨자마자 시작이냐?

“난 술 취하면 본래 개야. 취해서 헛소리한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잖아.”

“대부분은 헛소리야.”

첸이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지만…… 뭔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사실 그랬어야 했다. 내가 제정신이면 당연히 그랬을 거고.

“나도 금방 일어났어. 그리고…… 오늘까지는 휴가잖아.”

녀석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잠에 취한 기색이었다.

“머리 아픈 건 좀 어때?”

“괜찮아. 덕분에.”

첸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잠시 일어나 앉았다가 쿠션을 끌어안고 다시 옆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하는 게 꼭 학교 가기 싫어서 꾀부리는 어린애 같다.

“피곤하면 더 자지 그래? 바쁜 일이라도 있어?”

“날…… 저물었지?”

“응.”

“그럼 일어나야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니 피곤하긴 되게 피곤한 모양이다. 머리가 좋으니까 무슨 일이건 맘먹은 대로는 해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일어나서 뭐하게? 또 그 대공이란 놈 쫓아다니자고 가비우스 애들이랑 약속이라도 잡았어?”

“시작한 일은 끝을 내야지.”

사회인으로써 아주 바람직한 태도다.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서 문제지.

“영역 침범이야.”

“응?”

“살인범이 뱀파이어든, 외계인이든…… 놈을 잡는 건 우리 일이야. 왜 니네가 경찰 일에 끼어들어?”

첸이 고개를 저었다.

“살인범이 사람일 때나 그렇지, 뱀파이어나 외계인이면 그건 짭새 소관이 아니야.”

놈의 말투와 표정이 잠에서 덜 깬 사람치곤 아주 진지했다. 하지만 살인범이 뱀파이어라고 계속 우기면 대화를 진지하게 계속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피살자가 사람일 경우엔 뭐가 되었던지 간에 살인범은 강력반 소관이다.

“2년 전에 미친 들개 한 마리가 동네 빈터에서 놀고 있는 애들을 습격해서 두 명은 심하게 다치고, 애 하나는 결국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미친개도 경찰이 잡았어. 이건 우리 사건이야. 그러니까 공연히 몰려다니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지 말아줘.”

“짭새들이 개도 잡으러 다니는 줄은 몰랐네.”

사람이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면 좀 귀담아 들어라. 나쁜 놈아…….

첸이 쿠션을 끌어안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말로는 일어난다고 하는데, 하는 걸 보면 내일 아침에나 일어날 것 같다.

“더 잘 거면 침대에서 자.”

소파에서 저렇게 뒤척거리는 거…… 솔직히 안 어울린다.

“일어날 거야.”

애 쓰는 건 가상하지만 자는 게 도와주는 거다. 하지만 내 희망과는 달리 놈이 굳은 의지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로 걸어가더니 침대 위에 털썩 엎어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기에 이렇게 늘어졌어?”

“그냥…… 클럽을 한 30군데 정도 돌아다녔어.”

입만 겨우 깨어 있을 뿐, 놈의 신체기관 대부분은 아직 취침 중이었다. 클럽 30군데라…… 클럽은 대부분 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으니까 그냥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했다고 해도 다리가 뻐근하겠다.

“왜 클럽만 돌아다녀? 그 대공이란 놈이 나이트 죽돌이야?”

“어둡지, 시끄럽지, 사람 많지…… 그놈 취향에 그렇게 딱 맞는 곳도 드물어.”

아주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다. 최근에 발견된 미라 두 구는 아예 클럽에서 나왔고, 첫 번째 미라, 그러니까 티파니 샤오란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도 클럽이었다.

사실 낯선 사람에게 접근하기에 클럽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현란한 조명, 시끄러운 음악, 거기다 알콜……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그런 곳에선 쉽게 풀리기 마련이다. 그럼 경찰도 야간 업소 집중 단속에 나서야 되나?

그런 생각하다가 잠잠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은 어느새 다시 잠들어 있었다.

자는 얼굴은 뺀질하지도 않고, 위험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룻저녁 좀 돌아다녔다고 이렇게 속절없이 뻗어 있는 걸 보니까 딱하기도 하고…… 체력도 딸리는 주제에 깡패 두목 노릇 한다고 참 고생한다.

이마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녀석의 머리카락을 무심히 쓸어 넘기다가…… 정신 차리고 손을 뗐다. 아무리 형편이 아쉬워도 얘를 상대로 이러는 건 안 될 짓이다.

자는 녀석을 두고 방에서 나왔다. 실컷 자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고, 여기서 더 할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하염없이 죽치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아직은 초저녁이니까 병원에나 가 볼까 생각하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가다가 마침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자오랑 딱 마주쳤다.

“어디 가?”

자오가 나를 보더니 대뜸 다그쳤다. 자오처럼 거칠게 생긴 덩치가 인상 구기고 이렇게 위압적으로 나오면 죄 지은 거 없어도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그, 그냥…….”

“회장님은?”

“자.”

뭔가 실수를 했나 보다. 내 짧은 대답에 자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넌 회장님 주무시는 사이에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이렇게 몰래 빠져 나가는 거야?”

“그러면…… 안 돼?”

우리가 오고 갈 때마다 인사 챙기는 다정한 사이가 아닌 것은 자오도 잘 알 텐데…… 아니, 모르나?

자오가 그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턱 잡더니 사정없이 돌려 세웠다.

“애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다시 들어가서 간다고 말하고 가!”

내가 예의범절하고 별 상관없이 사는 건 맞지만, 기분 나쁘면 사람도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자오한테서 예절교육을 받아야 될 정도로 막 살지는 않았다.

“자는 거 깨우기 싫어서 그냥 나왔어. 그리고 그 자식이 우리 반장도 아닌데, 일일이 보고하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이럴 거면 왜 불쑥 찾아와서 사람을 들뜨게 만들어?”

자오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나를 책망했다. 왠지 겁난다. 보고 싶다고 했던 거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자오까지 이러면…….

“내가 와서…… 들떴어?”

내 조심스런 물음에 자오가 나직하고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나 말고, 회장님 말이야!”

일단 자오가 나를 보고 들뜬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뭐…… 별로 그래 보이지 않던데…….”

“너 왔다는 소리에 열일 제껴 놓고 달려왔고, 밤새 온 도시의 클럽이란 클럽은 다 돌아다니다가 녹초가 돼서 돌아왔을 때도 제일 먼저 널 보러 갔어. 그 정도면 들뜬 거지, 앞에서 춤이라도 춰야 돼?”

글쎄…… 확 와 닿지는 않지만, 자오한테서 이런 말을 들으니까 잘못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불쑥 찾아온 건 확실히 내가 잘못했다. 나도 오는 길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고, 무슨 생각으로 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깊이 반성 하고 있고…… 내 발로 여기 다시 올 일은 이제 없을 거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한 일이라곤 중국집에 와서 술 한 병 마시고 뻗은 것뿐이다.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대단한 책임을 질 만한 일도 아니지 않나?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삐딱한 반문에 자오가 정말 화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들어가서 간다고 말이나 하고 가라고!”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오의 태도가 워낙 강경했다. 하지만 다시 방으로 들어갈 필요도, 간다고 인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막 문을 열려던 참에 안에서 문이 열렸고, 첸이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그새 일어나서 세수라도 했는지 얼굴이 말갛다.

녀석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가게?”

“응…….”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려니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긴 드네. 그럼, 앞으로는 가면 간다고 이 자식한테 보고를 하고 다녀야 되는 건가?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어서 뒤통수만 벅벅 긁고 있는데 놈이 나를 슥 지나쳐서 자오랑 마주 섰다.

“기사들은?”

“3개조는 수색에 먼저 내보냈습니다. 나머지는 대기 중이구요.”

“찾아낸 건 없고?”

“아직요.”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

지금 하는 걸 보면 인사 안 하고 갔어도 뭐 그렇게 서운해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 때문에 들떴었다더니, 들뜨긴 개뿔……

“저쪽 애들은?”

“몇 명은 쓰러졌겠죠. 그 쪽엔 쉬는 시간이 없었으니까요.”

회장님 업무 방침에 약간 불만이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분초를 다투는 급한 일도 물론 있지만…… 이번 일은 내 방식이 맞아. 일단 날이 밝으면 무슨 짓을 해도 그놈을 못 찾아.”

“날이 30분 전에 저물었거든요.”

자오의 대꾸에 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페이한테 대기 중인 기사들 데리고 나가서 어제 뒤졌던 클럽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해. 치산하고 그 밑에 2개 조는 가비우스 애들한테 붙여주고…… 그리고 주방에 얘기해서 디너 스페셜 2인분 준비시켜. 샐러드는 게살 샐러드로 하고…… 차 대신 커피, 그리고…….”

“디너 스페셜은 왜요?”

자오의 질문에 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배고파. 먹어야 일을 하지.”

맞는 말이다. 자오가 저렇게까지 조바심을 내는데 저녁밥을 굳이 풀코스로 먹어야 되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간다고 인사도 했겠다, 나도 어디 가서 밥 먹고 병원에나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첸한테 붙들리고 말았다.

“같이 먹자. 시간 괜찮지?”

첸과 마주보고 앉아서 말도 없이 저녁만 먹었다. 디너 스페셜은 풀코스 중에서도 요란한 정찬이라서 후식까지 다 나오려면 세 시간은 걸린다고 투덜거리는 자오한테 오래 걸리는 건 빼고, 되는 대로 가져오라고 딱 잘라 말한 지 20분 후부터 이름도 모르고, 한번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요리들이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허기진 두 남자가 그걸 먹어 치우는 기세도 만만치는 않았다. 줄줄이 들어오는 진수성찬을 보면서 얘랑 나 둘이서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먹나 싶어서 기가 질렸는데,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빈 접시인 것을 깨닫고…… 우리들의 짐승 같은 먹성에 더 질렸다.

처음 다섯 접시까지는 맛도 좋고, 배도 고팠던 터라 즐겁게 먹었지만 허기가 가시고 나서도 먹는데 경쟁이 붙어서 숨 쉬기도 버거울 정도로 배가 빵빵해진 다음까지도 마지막 꽃빵 하나를 놓고 다투다가 결국 반씩 뜯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더 먹을래?”

놈이 헐떡거리면서 허세를 부렸다. 나는…… 힘들어서 대답도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매일 저녁을 이런 식으로 먹어 치우는 거라면, 여러 가지 위험과 오명을 무릅쓰고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큰 중국집 사위로 들어앉은 걸 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얼마……든지…….”

“그럼 B코스 처음부터, 어때?”

내가 졌다.

“뱀파이어 잡으러 안 가?”

“솔직히…… 귀찮아.”

첸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함부로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일하러 가기 싫은 그 심정은 나도 잘 안다. 우선 나부터도 이 바쁜 때에 일 못하겠다고 땡깡을 피운 끝에 얻어낸 휴가로 여기 앉아 있는 거니까.

정 귀찮으면 땡땡이도 괜찮은 선택이다. 경찰 입장에서는 무장한 미친 애들이 떼로 돌아다니는 게 연쇄살인보다 배는 더 걱정스러운 사태인 만큼 수색 자체를 재고해주면 더 고맙고…….

“그냥 너하고 이렇게 앉아서 술이나 마셨으면 좋겠어. 아무 데나 미라를 던져 놓고 다니는 게 사람들 눈에 거슬려서 탈이지, 사실 대공은 그렇게 대식가도 아니거든. 많아봐야 한 주일에 서너 명 정도?”

마지막으로 먹은 꽃빵이 명치에 딱 걸려서 그거 넘기느라 물을 한 모금 마시던 참이었는데…… 놀라서 도로 뿜고 말았다.

“한 주일에 서너 명?”

“자기 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죽는 사람도 그 정도는 되지 않나?”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투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심장도 떨리고 머릿속도 복잡하다. 일주일에 서너 명이라니…… 티파니 샤오란의 시체가 발견된 건 지난주지만…… 그녀가 실종된 건 3주 전의 일이었다. 대공이란 놈이 한 주일에 서너 명씩 먹어 치우고 다닌다는 첸의 말이 사실이라면 피살자가 최소한 열 명 이상이란 얘기다. 티파니 샤오란이 첫 번째 희생자였는지도 확실치 않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아예 계산이 안 나온다.

“먹던 과자가 목에 걸려서 죽는 머저리도 그쯤 될 거고…….”

첸이 커피 잔을 기울이며 한가하게 지껄였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거나 과자가 목에 걸리는 건 사고일 뿐이야. 귀가 길이나 직장에서 습격당해서 목숨을 잃는 건 살인이고…… 그 차이를 정말 몰라?”

“어쨌든 많이들 죽잖아.”

이런 대화는…… 솔직히 싫다. 첸은 그동안 나한테 잘해줬다. 고약한 장난으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 끝에 직장 생활이 심각한 난관에 처하기는 했지만, 비니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위로해줬고 희망도 갖게 해줬다. 다 꿍꿍이가 있어서 한 짓이란 걸 생각하면 좋게만 여기긴 그렇지만…… 어쨌든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첸이 나쁜 짓도 많이 하지만 좋은 면도 있는…… 보통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나한테 잘해준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첸은 쿠간 시 공식 나쁜 놈 순위가 현재 넘버원이라서 인간성 따지기도 한심한 처지였다. 거기다 대화까지 이런 식으로 흐르면…… 나빠도 너무 나쁘다는 게 실감나서 기분이 좋지 않다. 슬그머니 열리려던 내 마음이 지금 막 다시 닫혔다.

“농땡이 그만 치고 갈려면 빨리 가.”

“동 틀 무렵에 돌아올 거야. 기다려줄래?”

말투가 얼마나 느끼한지 소름이 쫙 끼쳤다.

“내가 왜 널 기다려? 나도 갈 데 있어.”

내 퉁명스런 대꾸에 첸이 고개를 45도 정도 기울이면서 나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왜?”

“그냥, 답답해서.”

“뭐가?”

“감정을 그렇게 덮어버리는 거…… 힘들지 않아?”

놈의 말투와 눈빛이 기분 나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리면 그만인데…… 배가 너무 땡겼다. 마지막으로 나온 고추잡채랑 꽃빵은 먹지 말 걸 그랬다.

“그렇게 애쓰는 거 보면 안쓰러워.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되잖아. 이 이상 뭐가 더 잘못되겠어? 어차피 넌…….”

“나는…… 뭐?”

내가 노려보자 녀석이 시선을 피하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더 잃을 것도 없잖아.”

녀석의 말은 사실이다. 그런 생각은 나도 자주한다. 하지만…… 내가 무슨 감정을 덮었다는 거냐?

“나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아, 그거?

“맞아. 그리고 이제 너 때문에 가.”

내가 지금 바라는 건 최대한 빨리 녀석과 멀어지는 거다.

마침 마음 가는 대로 살라는 충고도 들었겠다, 문을 향해 최대 속도로 다가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열린 문짝이 내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어우…….”

눈앞에 별이 좀처럼 사라지질 않았다. 얼굴도 아프고…… 어제 오늘, 첸 앞에서 스타일을 너무 심하게 구기는 것 같아서 마음도 아팠다.

“미안해. 거기 서 있는 줄 몰랐어.”

자오가 나를 싹 지나쳐가면서 건성으로 사과했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야?”

얼굴 감싸 쥐고 끙끙거리고 있는 내 뒤통수를 이젠 마음 놓고 쓰다듬으면서 첸이 물었다.

“아무래도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로즈 거리에서 다른 시체를 찾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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