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1화 (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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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왔다. 봄비 치곤 빗발이 굵어서 주차장에서 병원 로비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어깨가 다 젖었다. 게다가 갑작스런 돌풍 때문에 병원 마당에서 날려갈 뻔했다. 궂은 날씨 탓에 마음이 무거웠다.

사실 마음이 무거운 건 날씨 탓이 아니었다. 병가로 얻은 3일 간의 휴가를 다 쓰고 출근하는 길인데…… 비니가 여전히 중환자실 신세였다. 비니가, 정확히 말하자면 몸을 버리고 나가버린 비니의 알맹이가 푸른 코끼리 카페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일은 다 해결된 것 같았다. 하지만 푸른 코끼리 카페를 찾는 일에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쿠간에는 그런 카페가 없었다.

루크 첸이 나쁜 짓하는 바쁜 틈을 쪼개서 온 도시 지리에 빠삭한 부하들을 닦달해봤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차이니스 마피아도 나름대로 역사가 깊지만 그 세력이 차이나타운 담장을 넘은 게 얼마 되지 않아 시내 지리에 어두운가 싶어서 나는 나대로 순찰대 왕고참 루디한테 전화를 걸어 푸른 코끼리 카페의 소재를 물어봤지만…… 돌아온 것이라곤 푸른 고양이 카페는 아는데 그걸로는 안 되겠느냐는 서운한 대답뿐이었다.

그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다. 루디는 동부, 서부, 남부 지청을 옮겨 가면서 시내 순찰만 13년째 돌고 있는 살아 있는 시내 지도였다. 시내에서 루디가 모르는 건물이나 골목은 없었다. 아주 후미진 골목길의 작은 가게나, 범죄 없는 조용한 중산층 동네 어귀의 편의점이라면 모를 수도 있지만 내가 찾는 건 노천 카페 영업을 할 만큼 유동인구가 많은 사거리에 있는 카페였다.

나도 루크 첸한테서 차 한 대를 빌려서 용과 기린을 태우고 온 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어제 밤까지 꼬박 사흘간…… 하지만 간판에 푸른 코끼리가 그려진 카페는 어디에도 없었다.

복도를 지나는데 중환자실 맞은편에 있는 휴게실 소파에 롭이 커피 잔을 손에 쥔 채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왔어요?”

내가 코앞까지 다가가자 롭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롭은 사랑스러운 구석은 별로 없는 녀석이었지만, 비니가 정말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매사에 날카롭고 냉랭하던 롭이 이렇게 맥없이 앉아 있는 걸 알면 비니도 마음이 안 좋을 거다.

“일찍 왔네. 시간이 이른데…….”

“어제 저녁부터 있었어요.”

“어머님은?”

“엄마는 위층에 계세요.”

계속 비니 옆에서 맘을 졸였으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은 했었지만 결국 입원을 하셨나보다.

“진즉에 집으로 모시고 갔었어야지.”

“위층으로 올려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잠시도 형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아서…… 제가 대신 형을 지켜주기로 하고 여기 앉아 있는 거예요.”

롭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학교는 어쩌고?”

“어차피 지금은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와요.”

롭과 나 사이에 길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롭도 나도 붙임성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게다가 이런 상황에선 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비니나 보고 가려고 슬그머니 돌아서는데 롭이 나를 불러 세웠다.

“바쁘지 않으면 나랑 커피 한잔 할래요?”

자판기 커피를 한 잔씩 뽑은 후 다시 휴게실로 되돌아와 마주 앉았다. 롭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뭔가 할 말은 있는데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는 눈치였다. 롭하고는 안다고 할 만한 사이가 아니지만, 할 말 못하고 망설이는 성격이 아닌데 무슨 일일까?

“차이니스 갱단 두목하고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아마도 농담으로 분위기를 좀 풀어볼 생각이었겠지만 듣는 순간 움찔했다.

“미안해요, 난…… 헛소문인 줄 알고…….”

롭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헛소문이야.”

분위기가 어색하고도 썰렁했다.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시계를 힐끔 봤다. 서둘러 나가도 지각이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 때문에 롭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아서 잠자코 있었다.

“형 얘기를 좀 하고 싶어요.”

롭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커피 한잔을 다 마셔갈 즈음이었다.

“비니는 괜찮을 거야.”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나도 자신이 없었는데 비니가 어디 있는지 대강 알고부터는 훨씬 안심이 됐다. 물론……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아침저녁으로 스스로에게 물어보긴 하지만.

“경찰서에선 어땠어요? 형은 괜찮은 경찰이었나요?”

“그야…….”

예, 아니오,로 대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비니가 경찰관으로써의 자질이나 능력이 딸리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롭이 어색하게 웃었다.

“좋은 말만 하려고 애쓸 거 없어요. 우린 둘 다 형에 대해서 잘 알잖아요.”

“비니는 심성이 착해.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싶어 하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맡겨지면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형편없었어요?”

비아냥거리려고 한 말이 아니다.

“문제가 있긴 했지만, 비니는 좋은 경찰이었어.”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요. 힘들 때도 많았죠?”

“그야…… 그렇지 뭐.”

롭이 다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 침묵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는 형이 무서웠어요.”

롭이 중얼거렸다. 오래도록 묻어 두고 있었던 큰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처럼 서글프고 비장하게…….

“형은 보통 사람들하곤 많이 달랐어요. 주변에 있던 물건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늘 있는 일이었고, 형이 쳐다보기만 해도 뭔가에 떠밀린 것처럼 계단을 구르기도 하고, 자전거도 멈추질 않고…… 나는…… 그렇게 겁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형이 가까이 오면 무릎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었어요.”

롭은 자신만 비니를 겁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큰 오해다. 경찰서에도 비니만 보면 슬금슬금 내빼는 동료들은 많았고, 파트너라서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니긴 했지만 나도 가끔은 근처에도 가기 싫을 만큼 비니가 무서웠다. 비니한테 떠밀려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락하거나, 은행금고에 다섯 시간씩 갇혀 있다 나오면 안 그러기가 정말 어렵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집에선 나만 그랬어요.”

롭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미간이 일그러지는 걸 보니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열세 살인가, 네 살 되던 해였는데…… 형이 오랜만에 집에 왔었어요. 경찰학교 여름 방학이었거든요. 다른 식구들은 모두 어디론가 나가버리고 어떻게 형하고 단 둘이 집에 남게 됐는데…… 형이 샌드위치를 만들었고, 우린 정말 오랜만에 얘기를 나눴어요. 물론 그때도 형이랑 단 둘만 집에 있는 게 신경 쓰였었지만…… 나도 형을 오랜만이 본 거라서 마음이 좀 풀어져 있었거든요. 그리고 형은 얘기를 재미있게 잘하잖아요. 그런데 샌드위치 먹으면서 사격 시험에서 연거푸 낙제한 얘기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눈빛이 녹색으로 변해버려서…….”

롭이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볼 때마다 섬뜩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 고약한 경험이다. 그것 때문에 비니가 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그날 이후론 형하고 제대로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형을 노골적으로 피해 다녔죠.”

그런 것도 잘못이냐? 누구라도 그랬을 거다.

“엄마도, 아빠도, 누나들도…… 별다른 내색 없이 잘 지냈는데 나만 별나게 굴었어요.”

롭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롭이 안 됐다. 성격이 예민하고 원만한 구석이 없어서 비니의 징크스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한 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비니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걸 비난할 수는 없다.

“덕분에 다친 데는 없었잖아.”

롭이 고개를 들어서 나를 노려봤다. 위로가 될까 싶어 한 말인데…… 내가 본래 말주변이 없다.

“비니하고 제대로 얘기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열심히 찾아다니는 중이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돌아보니 롭이 나를 시무룩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탐문을 좀 해보기로 했다.

“혹시…… 비니가 울적할 때 갈 만한 데가 있을까? 카페라든지…….”

롭이 고개를 저었다.

“내 얘길 제대로 안 들었네요. 형이랑 10분 넘게 대화를 해본 게 8년쯤 전이라고요.”

사실, 최근 몇 년 사이 비니 주변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하지만 비니의 영혼이 죽치고 앉아 있을 만한 카페 따위는 알 길이 없으니…… 더 어렸을 때 일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어땠나 싶어서 말이야.”

“형은 우울할 때가 별로 없었어요.”

징크스만큼이나 우리를 열 받게 했던 것은 그런 가공할 불운을 몰고 다니는 당사자가 노상 명랑하고 태평하다는 사실이었다. 징크스는 고의가 아니었다 치더라도 비니는 정말 양심도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발뺌하던 그 뻔뻔함이 아쉬웠다. 하긴, 사고가 그렇게 컸으니…….

“비니가 집에서 친 사고 중에 제일 치명적인 게 어떤 거였어?”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게 네 건 정도 되거든요.”

롭에게서 전해 들은 비니의 어린 시절 전적도 만만치는 않았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새로 인수한 슈퍼마켓에 놀러갔다가 대형 선반 여덟 개가 도미노 쓰러지듯 넘어가버린 일을 필두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가 불꽃놀이 폭죽처럼 터지는 바람에 트리 옆에 서 있던 할머니가 다리에 화상을 입어서 3주일이나 병원 신세를 졌고, 서재 책장이 무너지면서 비니가 어려서부터 키우던 개 와플의 새끼 세 마리가 깔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내 다리가 두 번 부러진 건 순위에도 못 들어가요.”

“나도 죽을 뻔했던 게 다섯 번 정도 되지만 두 번은 순위에서 뺐어. 그거 말고도 기막힌 일이 많거든.”

“형이 친 사고 중에 제일 심했던 건…… 엄마가 다쳤던 걸 거예요.”

비니가 아직 10대였던 어느 날…… 보통 때 같지 않게 우울한 얼굴로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비니도 여러 가지 문제로 울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무슨 일이 터져도 꼭 터졌다.

그날, 비니가 어두운 얼굴로 응접실에 들어서자 응접실에 있던 모든 유리가 차례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스탠드 전등, 장식장 유리문, 그 안에 진열되어 있던 크리스털 조각, 정원을 향해 난 대형 유리창…….

“그 바람에 창가에 서 있던 엄마가 봉변을 당했어요. 어깨, 팔, 다리…… 유리 파편이 수도 없이 날아가 박혔어요. 다 합쳐서 100바늘 정도 꿰맸고…… 아빠가 형한테 그렇게 화내는 걸 처음 봤어요. 엄마 얼굴엔 아직도 그때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요. 파편이 조금만 아래쪽으로 튀었어도 실명했을 거예요.”

비니의 징크스엔 안전지대가 없다. 하지만 어머니까지 그런 사고를 당했다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비니도 많이 놀랐겠네.”

“그랬죠. 할아버지가 쓰시던 작은 서재에 꼬박 나흘이나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할아버지 서재?”

“와플의 강아지들이 책장에 깔려 죽었을 때도 다음날 아침까지 그 방에서 나오질 않았어요.”

비니가 어렸을 때 우울함을 달래던 장소는 알아냈지만, 푸른 코끼리 카페랑은 아무 상관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형을 진짜 끔찍스럽게 사랑하셨어요. 형 주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바람처럼 나타나셔서는 ‘비니가 그런 게 아니야!’ ‘비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감싸 주셨거든요. 오죽하면 돌아가실 때 유언도 ‘비니 잘못이 아니다’였다니까요.”

비니가 노상 입에 달고 사는 ‘내가 그런 거 아니야!’가 아마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형은 그 방에 들어가서 오래 있었어요.”

마음이 울적하면 할아버지 서재에 틀어박히고, 그보다 더 심한 충격을 받으면 영혼이 몸에서 튀어나가는 게 비니의 패턴인가 보다. 그런데 온 도시를 다 뒤져도 그 망할 카페를 찾을 길이 없으니 이젠 어디를 쑤시고 다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니의 잠은 여전히 깊었다. 그래도 지난 사흘 동안은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거나, 호흡이 멈추지는 않았다. 현재로선 그 정도가 제일 좋은 소식이었다.

망할 자식…… 의식이 돌아오면 기절할 만큼 패버리고 싶다. 그렇게 겁이 나고 마음이 아팠으면 할아버지 서재에나 한 일주일 틀어 박혀 있다 나올 것이지, 대체 이게 뭐냐?

“우리 가족들 모두 형이랑 잘 지내준 걸 고맙게 생각해요. 형한테는 친구가 없었거든요.”

비니가 나에 대해 가족들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었을 거다. 비니랑 파트너로 오래 묶여 있긴 했지만 잘 지낸 거하곤 거리가 멀었다.

“비니는 좋은 친구였어. 딴 건 몰라도 성격은 좋았어.”

“나도 형하고 그렇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형을 피해만 다닌 게 후회스러워요.”

롭이 비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어느새 눈이 푹 젖어 있었다.

“내가 형을 그렇게 싫어한 건 아니라는 걸…… 형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거의 닷새 만에 출근한 경찰서는 여전히 시끄럽고 어수선했다. 좀 특이한 점이라면 마주치는 동료들마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한 30초 정도 쳐다본 다음에 자기 갈 길을 가는 버릇이 생긴 건데…… 왜들 저러나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내가 지난 나흘 간 루크 첸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면 경찰서 인심도 많이 좋아졌다. 경찰서 정문 통과한 지 5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면전에서 시비 거는 놈이 없었다.

“늦었어요.”

내 자리에 앉아 있던 앤디가 브리핑 파일을 건네주며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어떻게 지냈어?”

“터너 선배랑 에쉬 선배하고 같이 다녔어요.”

아까 다른 동료들이 나한테 했던 것처럼 나도 앤디를 잠깐 쳐다봤다.

“왜요?”

놀라서 그러지. 경찰서 안에 잡아 놓고 사흘 내내 커피 심부름이나 시켜 먹을 줄 알았는데…… 옆 동네 경찰청장의 금지옥엽을 그렇게 물불 안 가리는 터프한 팀한테 붙여주다니, 반장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앤디를 진짜 경찰로 만들기로 작정했거나…… 둘 중 하나다.

“터너와 에쉬라…… 재미 좋았겠는걸.”

“말도 마세요.”

앤디가 아픈데 찔린 것처럼 움찔하더니 곧 분통을 터뜨렸다.

“사흘 내내 커피 심부름만 했다고요. 그리고 두 사람이 타격대원들이랑 마약 판매 조직을 소탕할 때는 수갑에 묶여서 차 안에 갇혀 있었고…….”

그럼 그렇지…….

“니가 다칠까 봐 그랬겠지.”

“마음을 다쳤어요.”

파일을 들춰보니 어제 있었던 소탕 작전의 마무리가 깔끔하질 못했다. 조직의 부두목과 중간책 한 놈이 현장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도시에 놈들의 수배령이 내렸다. 어딘가에 콕 처박혀 있을 놈들을 찾아내려면 터너와 에쉬도 꽤나 애 먹을 거다.

“선배는 어땠어요?”

“잘 지냈어.”

“그래도 쿠간 시 경찰들은 동료애가 남다른가 봐요. 리즐 시 같았으면…….”

아무래도 말을 잘못 꺼냈다 싶은지 앤디가 말꼬리를 슬쩍 흐렸다. 하지만 기왕 시작한 얘기는 끝까지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리즐 시 같았으면?”

“굉장히 곤란해졌을 텐데요. 갱단 두목이랑 사귀고 그러면…….”

“본래 대도시에선 남의 사생활 따윈 신경 안 쓰거든.”

진짜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책상 위로 종이비행기가 하나 날아들었다. 용건을 알려고 펴볼 필요도 없었다. 날개에 ‘호모’라는 글씨가 아무렇게나 갈겨져 있으니까.

비행기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하면 죽여버리려고……. 그런데 벤 웨인이 터너한테 걸려서 벌써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웨인이 피가 철철 흐르는 코를 움켜쥐고 급하게 화장실로 사라지고 나서도 방 분위기가 좀처럼 회복되질 않았다.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싸늘해지고, 불만이 가득 차고 있었다. 웨인이 터너한테 몇 대 얻어맞은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루크 첸과의 스캔들이 불쾌하다는 거다. 어쩌란 말이냐? 경찰서를 통틀어서 그 스캔들 때문에 제일 불쾌한 사람은 바로 나다.

“얼굴은 많이 좋아졌네?”

에쉬가 뭔가 따지고 나서려는 데니스를 엄한 눈으로 제압하며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첸이 지어준 한약 먹고, 아침저녁으로 연고도 발랐어.”

터너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지폐를 한 장 꺼내서 앤디 손에 쥐어줬다.

“넌 가서 커피나 좀 뽑아 와.”

“또요?”

좀 전에 웨인이 터너한테 얻어터지는 걸 보고도 앤디가 터너한테 덤볐다.

“난 밀크, 에쉬는 블랙이야. 알지?”

심부름하기 싫어서 퉁퉁 부은 앤디를 등 떠밀어 보내고 나서 터너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표정으로 봐선 터너도 웨인 못지않게 첸과의 소문이 마땅치 않은 게 틀림없었다.

“금요일 날 경찰서 앞에서 벌어졌던 공연 건으로 루크 첸한테 따지러 간 건 이해하겠는데…… 그 길로 눌러 앉으면 어쩌자는 거야?”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그걸 말이라고 해?”

에쉬의 말투가 냉정했다.

“험한 꼴 안 당하고 공무원 생활 길게 하고 싶으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해봐. 솔직히 말해서 나도 니가 루크 첸하고 사귀는 건 반대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비니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기린이 비니를 깨울 수 있다는 첸의 감언이설에 솔깃해서 정신병원에서 용과 기린을 데리고 나오고, 그 후에 둘을 데리고 있을 만한 데가 마땅치 않아서 그냥 첸의 별채에 눌러 있었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하란 거냐?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내 머릿속에서조차 상황이 제대로 정리가 안 돼서 인상을 쓰자 터너의 시선이 부쩍 날카로워졌다.

“설마…… 당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내 말은, 억지로…….”

“그건 아냐.”

적어도 아직까지는…….

“대체 그 자식은 너한테 왜 그런데?”

터너가 화를 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그 자식 마누라는 뭐라고 안 해?”

“해외여행 중이래.”

터너와 에쉬와…… 근처에 있던 동료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마누라가 여행 간 사이에 널 집안으로 끌어 들였단 말이야? 진짜 나쁜 놈이네…….”

“아무 일 없었다니까!”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이, 앤디가 커피 넉 잔을 들고 돌아왔다.

“고마워, 앤디.”

“잔돈은 없어요.”

앤디가 커피를 한 잔씩 돌리면서 툴툴거렸다. 어제 있었다는 소탕 작전에서 따돌려진 게 어지간히 속상한 기색이었다. 사실, 총격전이 예상되는 마약 조직 소탕 작전에 앤디처럼 새파란 신참을 데리고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황 파악 못하고 허둥거리다 총알받이 되기 십상인데다, 경험도 없는 어린애가 그렇게 비명횡사라도 하는 날이면 한동안은 모두가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고…… 두루두루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럴 작정이었으면 그냥 경찰서에 놓고 가면 될 걸, 현장까지 데리고 가서 물 먹인 건 심했다.

“긴말 안 할 테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터너는 본래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루크 첸하곤 그쯤 해둬.”

“그게…….”

“꿍꿍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넌 그놈하곤 게임이 안 돼. 니가 쥬드 크롬웰이야? 붙어 있어 봐야 너만 말려.”

긴말하기 싫어하는 터너를 대신해서 에쉬가 설명을 달았다.

“나도 그 자식하고 길게 상종하고 싶은 맘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해.”

“그게 쉬우면 이런 꼴을 당하지도 않았겠지.”

방금 전에 책상 위로 날아들었던 종이비행기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졌는데 그게 또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세상 일이 다 내 맘대로 안 되는데, 그 자식은 특히나 그래. 솔직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럼 내가 방법을 가르쳐줄게.”

시간이 없는지 에쉬가 시계를 힐끔 들여다봤다. 어제 소탕 작전의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해결될 때까지는 정신없이 바쁠 거다.

“무조건 만나지 마. 만약에 그 자식이 바라는 게 널 처절하게 왕따 시켜서 경찰서에서 쫓아내려는 거라면…… 목적을 벌써 반은 이뤘어.”

충고해줘서 고맙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근무가 끝나면 또 루크 첸의 궁전으로 퇴근해야 된다. 어째서 선행에는 이렇게 모진 시련이 따르는 걸까? 악행은 그렇지 않은 것 같던데…….

“어쨌든 노력은 할게.”

잠깐 딴 데 보다가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틈에 에쉬가 터너를 끌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중이었다. 어딘가에 반장이 나타났다는 의미였다. 아, 있다. 문 앞에…….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게요.”

다가오는 반장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나도 모르게 앤디를 끌어다 앞에 세웠다. 하지만 반장의 거친 공세를 차단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반장이 앤디를 옆으로 밀어 치우고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당연히 그래야 될 거야!”

“그러니까 그게요, 루크 첸하고 아직까지는 아무 일 없었고…….”

아무 일 없었다는데 반장이 경련을 일으키며 두 손을 내저었다.

“먼저 서장실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담배 한대 피우고 내 방으로 와.”

어쩌다 내 출근 코스가 서장실, 반장실, 그 다음에 내 책상이 돼 버린 걸까…… 전엔 서장과 반장의 잔소리를 같이 듣고 어설프게나마 편 들어주는 파트너라도 있었지만 이젠 완전히 외톨이에 경찰서 공식 왕따 신세다.

비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변한 건 아니지만 예상보다 훨씬 싸늘한 경찰서 공기가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서장은…… 첸이 보낸 리무진에 올라탈 때 봤던 서장의 표정을 생각하면 서장실에 올라갈 엄두가 안 났다.

“같이 가 드려요?”

앤디가 파트너 쉽을 발휘해서 기특한 제안을 했다. 하지만 중국 마피아 두목의 계략에 빠진 불운한 형사가 서장한테 깨지는 모습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할 거다.

“여기 있어. 잠깐 갔다 올 테니까.”

터너도 가버리고 없으니 이제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며 복도로 나왔다.

“잘 지냈어요?”

문가에 기대서 있던 쥬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첸과의 스캔들로 모든 짭새들의 심기가 불편하다지만, 쥬드는 누구보다도 기분 나쁠 만한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 경찰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나쁜 놈도 많이 봤지만 루크 첸 정도면 쥬드 크롬웰의 천생연분인데…… 어쩌다 내가 그놈을 가로채버렸을까?

“거기서 뭐해?”

“서장실까지 에스코트 해주려고요.”

“서장실 가는 길은 알고 있는데…….”

“무사히 올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서요.”

쥬드의 태도며 말투가 정중하고 친절했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설 정도로…… 당분간은 경찰서 안에서 먹고 마시는 건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쥬드랑 같이 서장실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동료 경관들의 눈초리 때문에 온몸이 따끔따끔했다. 뭐…… 상관없다. 내근직도 아니고,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은 길바닥 인생이니까. 시간이 약이라니 이러다 말든가, 내가 죽든가…….

“참, 칼을 찾았어요.”

“칼이 누군데?”

쥬드가 힐끔 나를 노려봤다. 아, 깜빡했다. 그 녀석…….

“괜찮데?”

마리우스가 고생했겠네.

“병원에 있어요.”

“그 지하실을 며칠 헤매다 보면 미치기 딱 좋지.”

“영양실조예요.”

하긴, 먹을 것도 없었을 테니까…….

“루크 첸의 집은 어땠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쥬드가 물었다. 말투는 아무 관심 없다는 듯 무심했다.

“집은 좋았어.”

“첸은요?”

“그냥…… 그랬어.”

“첸하고 데이트했던 여자들 얘기하곤 많이 다르네요.”

심사가 비틀린 건 이해가 가지만…….

“당신까지 왜 이래?”

“미안해요. 하지만 생각할수록 아까워서 심술이 나네요.”

“일이 이렇게 된 건 미안해. 당신한테도 곧 좋은…… 아니, 나쁜 남자 나타날 거야.”

“이 동네에 루크 첸보다 더 나쁜 남자가 있긴 있을까요?”

쿠간 시 인구가 천만을 웃돌지만 그놈보다 더 나쁜 놈이라…….

“미안해.”

서장실 갔다가 반장실을 들러서 앤디가 기다리는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한 시간 반쯤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번엔 큰 실수 했다는 낭패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비니를 구한다는 명분이 있긴 했지만 내가 판단을 제대로 한 걸까?

경찰서라는 현실적인 공간에서 호랑이 같은 상사들에게 순서대로 깨지다 보니 내 현실감각도 돌아오기 시작해서 지난 며칠간 품었던 희망에 강한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비니가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은 처음과 다름없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 방법이란 게 며칠 전까지 정신병원에 있던 어린애들 말만 믿고 있지도 않은 카페를 찾아다니는 거다. 물론 비니만 놓고 생각해보면 더 잃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크 첸하고 이런 식으로 엮여 돌아가는 건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나한테 오라’는 제안의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맘대로 하라고 해버린 참이었다. 설마 하니 내가 그 자식 밑에서 깡패 노릇을 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혼 많이 났어요?”

앤디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설마…… 잘린 건 아니죠?”

“그건 아닌데, 꼼짝도 말고 서 안에 박혀 있으래.”

그 말에 앤디가 풀이 팍 죽었다.

“언제까지요?”

“루크 첸하고 헤어질 때까지.”

앤디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처량한 표정으로 물었다.

“헤어지시면 안 돼요?”

말투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아무래도 조용한데 가서 머리를 좀 식혀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지난 며칠 결근한 덕에 급히 처리해야 할 문서나 보고서도 없으니까 사방에서 사나운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성질 더러운 짭새들을 피해서 조용히 쉴 만한 곳을 찾아보자.

“……야.”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쳤다. 에잇, 빌어먹을…… 막 잠들려던 참인데.

오늘은 유치장 일진이 사나웠다. 소변 검사만 해도 코카인 100그램은 너끈히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약에 잔뜩 취한 어린놈이 아까부터 자꾸만 귀찮게 구는 바람에 짜증나서 돌 것 같았다. 방을 옮겨 볼 생각도 했지만 새벽에 떼로 잡혀온 갱단 애들 때문에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뭐야? 또…….”

신경질을 버럭 내면서 고개를 확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그 다음엔 손을 헛짚어서 간이침대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좀 전까지는 나랑 뽕 맞은 어린놈 둘뿐이었는데…….

“자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넌 출근할 때만 해도 짭새였잖아?”

자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갑자기 어떤 무서운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이 떨렸다. 설마 루크 첸이 보낸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고 나발이고, 니네 짭새들은 왜 그렇게 매너가 없어?”

자오가 나를 밀고 간이침대에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다짜고짜 팔을 뒤로 꺾고 수갑을 채우더라고! 나는 점심을 먹는 중이었단 말이야!”

잡혀왔구나. 그럼 다행이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구석에 주저앉는 나를 자오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봤다.

“무슨 짓을 했는데?”

“아무 짓도 안 했어!”

경찰도 가끔 쓸데없는 짓을 할 때가 있지만, 아무 짓도 안 한 중국인을 체포하려고 차이나타운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다.

자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초조한 기색이었다. 말로는 아무 짓 안 했다고 하지만 뭔가 한 건 크게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보통 갱단 조직원들은 대부분 10대 후반부터 감방을 들락거린다. 유치장 출입도 처음이나 불안하고 심란하지, 뻔질나게 들락거리다 보면 나중엔 유치장 매트리스 쿠션과 청소 상태를 따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자오 정도라면 그 경지도 벌써 지났을 거다.

“처음이야.”

“응?”

“유치장에 끌려온 게 처음이라고!”

차이나 마피아 총수의 오른팔에다 가끔은 창밖으로 사람도 집어 던지고 다닌다는 이 무서운 남자가 여태 유치장 구경을 한 번도 못했다니…… 아무 짓 안 했다는 말보다 그게 더 믿기 어려웠다.

“전과가 없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좀 전에 내가 누워 있던 침대에 자오가 털썩 누웠다. 차이나타운이라는 데…… 진짜 무서운 동넨가 보다.

“넌 어떻게 된 거야? 짭새들은 맘에 안 들면 자기네끼리도 서로 가두고 그러는 거야?”

“그냥 좀 쉬고 있었어. 피곤해서…….”

“여기서?”

맞은편 방에서 갱단 애들 떠드는 소리에 자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할 때도 있어.”

“별일 없는 거지?”

별일 없다고 하긴 힘들지만…… 정식으로 연행된 거라면 남 걱정 할 때가 아닐 거다.

“당신 얘기나 해봐.”

“무슨 얘기? 난 진짜 아무것도 몰라.”

자오는 납치당한 게 아니라 경찰에 체포된 거다. 경찰이 일을 막 하는 것처럼 보여도 용의자를 체포할 때엔 절차가 있다.

“체포될 때 혐의 내용이랑 피의자 권리는 들었을 거 아냐?”

내가 면박을 주자 자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카루손지, 카우친지 그놈은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내가 첸의 집에서 신세지며 행방이 묘연한 비니의 영혼을 찾아다니던 며칠 사이에도 쿠간에는 사건 사고가 많았다. 열 건 안팎의 살인사건 외에도 대여섯 건의 자살…… 그리고 수십 건에 이르는 실종…… 그중에서 경찰이 특히 주목한 것은 빌리 카루소의 투신자살이었다. 카루소는 절대로 자살할 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시내에 있는 12층 자기 아파트에서 깨끗하게 뛰어 내렸어.”

보고서 작성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안젤라의 대꾸가 퉁명스러웠다.

“얼마나 깨끗하게?”

“유서도 없고, 격투 흔적도 없었어. 집안의 모든 게 파출부가 3시에 퇴근하면서 치워 놓고 간 그대로였고, 창문만 깨졌어.”

정황상으론 자살로 보기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

“자오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어.”

“뭐야?”

빌리 카루소는 몬티첼리 밑에서 일하던 중간 보스로, 지난 몇 년 간 해안가에 늘어선 특급 호텔 몇 곳의 카지노 매니저 일을 하고 있었다.

카지노 일을 보면서부터는 많이 신중해졌지만 본래 성질이 가르시아와 맞짱을 뜰 정도로 더러운 놈이고 몬티첼리가 카지노 이권을 놓고 다른 마피아 패밀리와 다툴 때 전면에 나서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쿠간의 백색 해안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다녔던 놈이라서 경찰관이면 그 이름을 잊기 어렵다. 하지만…….

“증거도 없이 무작정 잡아들였단 말이야? 체포 영장은 어떻게 받아냈어?”

“무슨 상관이야?”

안젤라가 키보드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나를 노려봤다. 그제야 안젤라가 바빠서 짜증이 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루크 첸이랑 데이트하는 거야 니 맘이지만, 중국 깡패 한 놈 잡아들였다고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시비가 아니라…….”

왕따란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실감이 났다. 말문이 막혀서 대꾸도 못하고 빤히 쳐다만 보자 안젤라도 자기가 심했다 싶었는지 약간 풀 죽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바쁘니까 따질 일 있으면 서장님한테 직접 따져. 서장님 특명이었고, 영장도 그쪽에서 내려왔어.”

체포 영장과 함께 내려온 서장님 특명이라…… 서장도 차기 경찰청장 자리에 대한 야심이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증거도 없이 차이나타운을 들쑤실 만큼 간이 크지는 않다. 경찰서 내에서 서장한테 그런 짓을 하라고 코치할 만한 사람은 딱 하나였다.

“빌리 카루소는 시체라도 수습했지만, 카를로스 폰티랑 토미 지아니는 며칠째 종적이 묘연해요. 시체를 찾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다행히 쥬드는 안젤라처럼 혐오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루크 첸의 일로 나한테 개인적인 유감은 있을지언정, 갱단 두목이랑 데이트하는 걸 고까워할 입장은 아니라서 그런 걸까? 쥬드도 왕따로 마음 고생한 적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토미 지아니가…… 실종이라고?”

“사흘 전에 골프 치러 간다고 차를 몰고 나간 게 마지막이었어요. 지아니도, 차도 아직 못 찾았어요.”

쥬드가 나를 서장실 옆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경찰서를 방문한 시청의 고관들을 접대하거나…… 간부들끼리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방인데 요즘처럼 서장의 심기가 불편할 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지 모르겠다.

“서장님은 잠깐 외부에 나가셨어요. 네 시는 넘어야 들어오실 걸요.”

청하지도 않았는데 쥬드가 차까지 한잔 내왔다. 갑자기 긴장감이 확 몰려왔다.

“뭐…… 큰 사건이 터진 건 아니지?”

“혈압 체크하러 병원에 가셨어요. 마침 진정제도 다 떨어졌고요.”

카를로스 폰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토미 지아니는 몬티첼리가 거느린 중간 보스들 중에서도 꽤 세력이 큰…… 이를테면 넘버3 정도는 되는 놈이었다. 몬티첼리의 갑작스런 몰락 이후 파죽지세로 도시를 먹어 치우고 있는 차이나 마피아들을 견제할 만한 이탈리아인이라면 지아니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뒷골목 세력 다툼 전문가들의 의견이 상당히 많았는데…… 벌써 당하다니, 싱겁다.

“토미 지아니한테는 세력이 있었고, 빌리 카루소는 돈줄이 있었죠. 카를로스 폰티는 리즐 시 여두목이 보낸 일종의 파견 사원이었는데…… 지금까지 알아낸 걸로는 셋이 지난 3주 사이에 최소한 4번은 만났거든요.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동업으로 이탈리아 식당을 내자는 얘기 아니면…… 조직을 재건할 궁리를 했겠지.

“루크 첸이 세 명을 다 죽인 거야?”

“이 동네에서 그 세 사람이 만나는 걸 가장 달가워하지 않을 만한 인물이 현재는 루크 첸이죠.”

지난 며칠, 바쁘다면서 계속 늦게 들어오더라니…… 나쁜 놈.

“당신 남자친구는 프로예요. 데이트는 데이트고 일은 일이죠. 게다가 일하는 방식이 너무 사납고 무자비해요.”

쥬드가 내 찻잔을 가져다가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돌려줬다. 차에 이상한 거 안 탔으니까 마시라는 뜻이다. 내키진 않지만…… 이렇게까지 권하면 별 수 없었다. 차라리 커피를 주지.

“첸은 이미 전쟁에서 이겼어요. 적군은 몰살했고, 적의 성은 흔적도 남지 않았죠.”

결과적으로는 그렇지만 몬티첼리 저택을 잿더미로 만든 건 첸이 한 나쁜 짓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소리 했다가 또 남자친구 역성든다고 펄펄 뛸까 무서워서 그냥 차만 마셨다.

“그런데 그 걸로도 성이 안 차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씨를 말리려 들고 있어요.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으로 100명도 넘는 사람을 죽인 게 불과 몇 주 전이라고요. 게다가 잘못하면 그 사건은 영영 미해결 사건으로 남게 생겼어요.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곤란해요. 차이나타운에선 그래도 괜찮았는지 모르겠지만, 진짜 세상에선 지켜야 할 선이란 게 있잖아요.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점잖지는 않았지만…… 첸은 지나쳐요.”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증거가 없으면 중국인 변호사가 쫓아와서 자오를 꺼내 나가는 데 반 나절도 안 걸릴 거야.”

“상관없어요. 루크 첸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몇 명이라도 잡아들일 거예요. 조직원 전체가 반나절씩 유치장 구경을 하고 나가면 저쪽도 일에 지장이 좀 있겠죠.”

루크 첸하고 제대로 한판 붙어볼 모양이네…….

“그럼 차라리 그 자식을 잡아들이지 그랬어?”

“그것도 생각 중이에요.”

루크 첸과 쥬드 크롬웰의 대결이라, 둘이 데이트 하는 것도 그림이 좋았겠지만 싸움 구경은 더 볼 만할 거다.

“첸을 체포할 땐 날 좀 보내줘. 그 자식 팔을 비튼 다음에 손목에 수갑 채우고 연행하는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어.”

잠깐 생각하던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플레이 하고 싶으면 침실에서나 해요.”

“나 그 자식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야.”

“어쨌든요.”

왜 안 믿지? 진짠데…….

“나 언제까지 서에 죽치고 있어야 돼?”

차가 적당히 식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원샷으로 마셨다. 나른하지도 않고, 몽롱하지도 않고, 맛도 괜찮은 걸 보니 나를 죽일 생각은 없나 보다.

“서장님이 뭐라고 했어요?”

“경찰 일을 정리하든가, 첸을 정리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라는데…….”

“그래도 선택권은 있네요.”

물론 제정신이라면 첸을 정리해야겠지만, 그 자식은 내 힘으로는 정리가 안 된다.

“당신은 그런 선택 안 하고도 잘 살잖아?”

쥬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쥬드의 말문이 막히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다.

“그 심정, 이해해요. 루크 첸은 정말 아까운 남자죠.”

창문을 열고 날아가버리고 싶다. 설마 내가 마신 게 쥬드가 예전에 서장의 손님들에게 대접했던 그 악명 높은 <천사 차>는 아니겠지…….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라…… 어쨌든 당장은 정리하기 힘들어.”

“이해한다니까요.”

쥬드는 이해 못한다. 사정 얘기를 듣고 나면 나를 미친 놈 취급할 거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정직을 시키지 그래?”

경찰서 안에서 오만 구박 다 받아가며 근신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비니를 찾아다니기도 수월할 테고…… 첸의 소굴에서 어리바리한 용하고 기린이 무슨 못된 짓이라도 배우지 않을까 그것도 걱정스럽다. 하지만 쥬드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그거야 서장님 권한이죠.”

겸손하기는…… 말은 저렇게 해도 쥬드가 서장을 손안의 구슬처럼 갖고 논지는 꽤 됐다. 말 들어서 손해난 거 없으니까 서장을 줏대 없다고 나무랄 수도 없다.

“당신이 서장님한테 얘기를 좀 해주면…….”

“솔직히 말해서……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쥬드가 내 부탁을 단칼에 잘랐다. 내가 하는 말이라면 어떤 것도 들어주기 싫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근신을 풀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직이면 징계 수위가 더 높은 건데…… 그것도 싫다니 섭섭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준다며?”

“평생 그런다고는 안 했어요.”

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타협안을 내놨다.

“휴가를 며칠 더 늘려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휴가 처리가 떨어지자마자 루크 첸한테 달려가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건…….”

용과 기린을 데리고 비니를 찾아다니려면 일단 루크 첸의 저택으로 가야 되는데,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 눈엔 그게 루크 첸한테 달려가는 걸로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쥬드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제이, 시기가 좋지 않아요. 루크 첸이 경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설치고 다니는 바람에, 대체 경찰이 하는 일이 뭐냐고 신문마다 불평인데…… 하필 요즘 같은 때 그 옆에 붙어 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이래요?”

그래서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한 거였군.

차이나타운은 중국인 자치지구나 마찬가지라서 외부인들은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관심도 없고, 자세히 알 길도 없었다. 그래서 루크 첸이 흑풍회를 움켜쥘 때만 해도 관계자들은 또 한 놈 떴구나…… 정도만 알았지, 일을 처리하는 방식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차피 루크 첸이 차이나타운 안에서만 움직일 때는 스타일이 어떻든 별로 문제될 것도 없었다. 경찰 입장에서는 그나마 좋은 시절이었던 셈이다.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으니까.

“게다가 그 남자는 전형적인 바람둥이 난봉꾼이라고요. 결국 당신만 다쳐요.”

“나도 알아.”

별 의미도 없는 대꾸였는데, 쥬드가 딱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게 아니라, 비니 때문에 지금은 어쩔 수가 없어.”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비니는 왜요?”

“혹시…… 간판에 푸른 코끼리가 그려진 카페 알아?"”

비니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얘기해봐야 반응은 별로 안 좋을 거다. 지난번 라두칸 장서각 얘기 나왔을 때도 그랬지만 쥬드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얘기를 현실처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장서각이야 눈에 보이는 건물이니까 보고나서는 별 말이 없지만…… 영혼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용하고 기린도 그냥 사람처럼 생겼으니까 못 믿겠다고 버티면 그뿐이었다. 게다가 그때 장서각 얘기 꺼냈다가 목 졸리고, 욕먹은 거 생각하면……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저기, 선배님…….”

앤디였다. 나야 지은 죄가 있어서 근신이지만, 파트너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앤디가 불쌍했다. 어떻게 쟤라도 바깥바람을 쐬게 해줘야 할 텐데…….

“지금 바쁘세요?”

앤디가 내 눈치를 살폈다. 왠지 불안해 보였다.

“왜?”

“좀 나와 보셨으면 해서요. 로비에 선배님 남자친구가 왔어요.”

내 남자친구는…… 현관 로비 귀퉁이에 놓인 비닐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살인과 폭행 혐의로 경찰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현직 갱단 두목이 경찰서 로비에 다리 꼬고 앉아서 신문 뒤적이는 걸 곱게 보는 짭새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여기가 자기 집 응접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만만이었다.

첸진이 원망스럽다. 그 영감이 평생 나쁜 짓을 많이도 저질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범죄가 저 자식이랑 자기 딸을 결혼시킨 걸 거다.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코앞까지 다가가서 신문을 들추자 그제야 첸이 눈을 들어서 나를 쳐다봤다.

“그러는 넌?”

“여긴 내 직장이야.”

“사무직은 아니잖아. 일은 밖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건…….”

“외출 금지라도 당한 거야?”

“응.”

“그래도 퇴근은 제 시간에 하는 거지?”

“그거야…….”

대화 내용이 왜 이 따위지? 직장 동료들한테서 배신자에, 취미 고약한 호모 취급을 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퇴근 시간이 문제냐?

“너, 대체 여긴 왜 온 거야?”

“니 친구들이 자오를 잡아갔다며?”

첸의 말투에 불쾌한 기색이 약간 묻어 있었다. 이런 종류의 항의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드물기는커녕 사건 용의자를 체포할 때마다 벌어지는 실랑이였다.

하지만 온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당사자한테서 이런 불평을 들으니까 기분 정말 이상했다. 그동안 쿠간 시 암흑가를 지배했던 나쁜 놈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뻔뻔한 놈이 있었을까?

“쉬는 날에 자기 집에서 점심 먹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끌고 가다니…… 다른 동네에선 그래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차이나타운에선 아주 예의 없는 짓이야.”

어쭈…….

“게다가 자오는 12층에서 사람 안 던져. 지금까지 최고 기록이 3층이었는데, 그나마 창문 바로 밑이 풀장이라서 크게 다치지도 않았어.”

어느새 주변에 사람이 늘었다. 앤디는 처음부터 내 뒤에 따라 붙어 있었고, 무슨 사건인지 껄렁해 보이는 10대 애들 3명을 한꺼번에 연행하던 핸슨이 걸음을 멈췄다. 그 외…… 경찰서 내 가쉽의 여왕인 에바가 교신기도 팽개치고 나와서 구경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고, 반장도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서장이 없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변호사를 보내지 그랬어?”

“변호사하고 왔어.”

첸이 보던 신문을 접어서 옆에 앉아 있던 중년 아저씨한테 넘겨주고 일어섰다. 취미가 경찰서 내부 스캔들 집대성인 에바만 호기심 만만이고, 그 외에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자오는 장인의 죽마고우의 외아들이야. 걔네 엄마는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목소리 크고 극성스런 아주머니고…… 자오가 잡혀가자마자 그 아줌마가 흑풍회 사무실로 쳐들어와서는 아들을 꺼내주기 전에는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울고 있단 말이야. 아스피린을 두 알이나 먹었는데도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려.”

어차피 근거도 확실치 않은 연행이었으니까 자오를 꺼내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첸도 그 정도는 알고 왔으니까 요렇게 뺀질거리는 걸 테고…….

“그리고…… 사실은 너도 보고 싶었어.”

이렇게 사람들 많은데 왜 그런 소리 안 하나 했다.

“퇴근할 때까지도 못 기다려?”

“니가 정말 좋아졌나 봐. 여태 이런 적 없었거든.”

애초에 로비에 내려올 때엔 경찰서라는 곳이 갱단 두목이 맘대로 들락거려도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다음 매몰차게 쫓아 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젠 내가 쫓겨나게 생겼다.

“퇴근하고 차이나타운으로 와. 같이 저녁 먹게.”

이쯤에선 사방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고, 핸슨이 연행해 가던 양아치 애녀석들은 휘파람을 불어 올렸다. 반장은 휘청거리다 옆에 있던 기둥을 잡고 중심을 잡았고, 에바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미칠 것 같다.

그나마 주변이 좀 잠잠해진 건 쥬드가 나타난 덕분이었다. 찻잔을 씻어 놓고 내려온다더니…… 찻잔만 씻은 게 아니라 립스틱도 고쳐 바르고 블라우스 단추도 한 개 더 풀었다. 내 남자친구한테 아직 미련이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겠지. 여전히 미남이고, 여전히 나쁜 놈이니까…….

“오랜만이에요. 미스터 첸.”

“당신은 점점 더 예뻐지는군요, 미스 크롬웰.”

예쁘다는 소리는 지겹게 들어도 좋은지 쥬드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 미소가 또 얼마나 예쁜지 앤디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었다. 핸슨한테 끌려가던 애들도 완전히 넋이 나갔고…… 다행히 그때쯤엔 핸슨이 정신을 차리고 애들 뒤통수를 한대씩 갈긴 다음에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루크 첸을 대하는 쥬드의 태도는 친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쥬드 같은 미인이 흉악범만 보면 이러니까 착하게 살면 뭐 하나 싶은 자괴감이 살짝 들었다. 뭐, 이렇게라도 첸을 낚아 가주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3시간 전에 경찰이 우리 회사 직원을 하나 잡아갔어요.”

“직원들이 체포될 때마다 이렇게 직접 오실 거면, 앞으로 우린 꽤 자주 만나겠네요.”

쥬드의 우아한 선전포고에 루크 첸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나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루크 첸이 살짝 굳었던 얼굴을 풀고 여자 꼬시기 딱 좋은 미소를 쥬드에게 날렸다.

“그 오해를 풀기가 쉬울지 모르겠네요.”

“지금 내 변호사가 검사를 만나서 오해를 푸는 중이에요. 비싼 변호사니까 뭐…… 오래는 안 걸리겠죠.”

“살인사건에 관한 오해는 그렇게 쉽게 안 풀려요.”

“풀릴 거예요. 자오가 그런 게 아니니까.”

쿠간 시 제일의 미남 미녀가 꽃단장을 하고 마주 서서 주고받는 대화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초반엔 우호적이던 두 사람 사이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확신하세요?”

쥬드가 미소를 거두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내가 세상일을 다 알진 못해도,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아요. 이번 일은 경찰이 잘못 짚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잘못 짚은 거죠.”

둘이 이제라도 잘됐으면 했던 기대는 완전히 물 건너갔다. 한마디 안 지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첸이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옆에서 보는 내가 이런데 쥬드는 얼마나 약이 오를까? 아닌 게 아니라 쥬드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첸을 매섭게 노려봤다.

“일의 배후가 당신이란 생각이 자꾸만 드는데…… 그것도 잘못 짚은 걸까요?”

“쿠간에서 그런 생각을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꽤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날 진짜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면 증거를 잡아요.”

다음 순간, 쥬드가 첸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어서 심하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고, 키스를…… 잡아먹을 것처럼 터프하게…….

첸이 꼼짝도 못하고 당했다. 사실, 저런 상황이면 남자 혼자 힘으로 빠져 나오는 건 무리다. 우리야 뭐, 이런 일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잠시 동안은 침착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2분이 경과해도 쥬드가 떨어질 기미가 안 보여서 결국 반장과 에바가 팔을 걷어 붙였다. 반장이 중간에 끼고, 에바가 쥬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둘만 갖고도 역부족인지 반장이 나한테 눈치를 줬다.

“뭐해? 안 거들고?”

썩 내키진 않았지만…… 성희롱에 대한 법이 나날이 엄해지고 있는 마당에 쥬드가 아무리 미인이라도 자꾸 이러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첸의 목을 담쟁이 넝쿨처럼 칭칭 감고 있는 쥬드의 팔을 풀어내고 첸을 뒤로 끌어 당겼다. 얼떨떨하게 서 있던 앤디까지 나서서 거들어준 덕에 어렵지 않게 쥬드를 떼어낼 수 있었다. 뜯어 놓고 보니, 첸의 얼굴이 시뻘게서 흠칫 놀랐다 하지만 립스틱이 번져서 그런 거고…… 다행히 물어뜯긴 데는 없는 것 같았다.

“조용히 지내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예요. 자꾸 이런 식으로 소란 피우면 좋을 거 없을 테니까…….”

쥬드가 채 흥분이 안 가신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첸에게 경고했다.

“당신이야말로…… 같은 실수 자꾸 되풀이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첸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씩씩거렸다.

“깜짝 놀랐어.”

첸이 세수를 다 하고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며 중얼거렸다. 얼굴이 아주 멀쩡한 건 아니고…… 입술이 약간 부었다. 쥬드가 달려드는 바람에 이에라도 부딪힌 모양이었다.

“너도 싫은 기색은 아니던데?”

“무슨 소리야? 그 여자가 갑자기 달려드는 거 너도 봤잖아!”

첸이 정색을 하고 변명을 늘어놨다. 누가 달려들었대도 상관은 없지만 변명치곤 궁색하다.

“힘이 없어서 그렇게 당하고 있었던 거야?”

쏘아붙이자 첸이 주춤했다. 저항하기 힘들었던 사정은 이해한다. 하지만 기운이 딸려서 남자들이 그 여자한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아니다.

“그거야…….”

“됐어.”

“사실, 꽤 예쁘게 생겼잖아. 데이트할 기회도 있었는데…… 생각하면 좀 아쉽기도 해.”

로비에선 그렇게 으르렁거리더니…… 하긴, 저도 남잔데 본색이 어디 가나?

“그거라면 지금도 안 늦었어.”

쥬드도 좋아할 거고, 나도 진심으로 도와줄 마음이 있다. 하지만 첸이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나한텐 니가 있잖아.”

“야…….”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사람들 많은 데서는 놀려먹는 재미 때문에 그러는 거 알겠는데 아무도 없는 데서까지 왜 이러냐? 그런데…… 갑자기 화장실 맨 안쪽 칸에서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샌드맨이었다. 하필이면…… 일전에 내 손에 코뼈가 나간 걸로 아직도 앙심이 만만치 않은 놈인데……. 샌드맨이 손을 씻고 나가면서 나랑 루크 첸을 희한한 동물 보듯 쳐다봤다. 한 눈 팔고 나가다가 화장실 벽에 부딪혀서 허둥거리는 꼴을 보니 약간 마음이 풀리긴 했지만…… 코뼈가 한 번 더 나가면 수술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면전에서는 아무 말 없지만, 이런 데서 샌드맨 같은 놈이랑 마주친 거 자체가 언짢다.

“괜찮겠어?”

첸이 종이 타월 뽑아서 입술을 꾹꾹 누르며 내 속을 뒤집었다.

“괜찮아. 저 자식은 내 밥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눈물을 삼켰다. 앞으로 이 직장에서 탈 없이 생활할 수 있을까? 달리 할 만 한 일이 뭐가 있을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마땅한 게 안 떠올랐다.

“곤란한 일 생기면 얘기해. 내가 손 좀 봐줄게.”

이 자식이 근데…….

“이탈리아 마피아들을 손 봐주고 남는 시간에?”

어차피 쿠간 시 암흑가의 주도권은 이제 첸이 잡았다. 몬티첼리 패밀리 중에 조직을 재건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은 프란시스 몬티첼리 자신뿐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실의에 빠져서 그럴 의욕도 전혀 없는 상태니까 당분간은 루크 첸 1인 독주였다. 잔챙이들 몇 명이 지들끼리 만나고 다닌다고 큰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다 죽여버리다니…… 본래 성질이 모질고 난폭해서 그렇다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데이트 상대하곤 일 얘기 안 해.”

첸이 타월을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대꾸했다.

“경찰이랑 데이트를 안 하면 되겠네.”

“여기 분위기로 봐선 별로 오래 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내가 좀 참을게.”

화를 너무 참아서 병이 날 것 같았다.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힌 시계 줄 때문에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저 손목을 비틀어서 수갑 채우고 피의자 권리 읊어줄 날이 오긴 올까?

나오다가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던 쥬드랑 에바와 딱 마주쳤다. 저쪽도 번진 립스틱 자국이랑 엉클어진 머리를 수습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루크 첸을 보자마자 쥬드의 눈동자가 또 다시 번뜩였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고야 말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기세에 첸도 겁이 나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일 벌어지기 전에 에바가 쥬드의 허리를 낚아챘다.

“나쁜 짓이야! 임자가 있는 남자잖아!”

에바가 쥬드를 따끔하게 나무라며 등을 떠밀었다.

“무슨 상관이에요? 결혼을 할 것도 아닌데…….”

저만치 밀려나간 쥬드가 안타까운 눈으로 첸을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에바가 쥬드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끌고 가며 한 번 더 엄하게 타일렀다.

“아무리 맘에 들어도 직장동료 간에 남자 하나 갖고 다투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제이 기분이 어떻겠어?”

잠시 화장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루가 이제 절반 정도 지나갔을 뿐인데 정신적으론 이미 탈진 상태였다. 정말 힘들었을 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봤지만, 정말 힘들었을 때도 이렇게 속이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몸값 비싼 변호사를 동반하고 온 보람이 없지 않아서 자오가 변호사랑 같이 로비에서 첸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치장에 들어간 지 3시간도 아직 안 됐으니까 증거 불충분인 것 치고도 초고속으로 나온 거다. 자오가 첸을 보더니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회장님께서 어떻게 직접…….”

자오를 보는 첸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좀 전에 쥬드랑 키스했을 때 봤던 헤벌쭉한 표정은 간 데가 없었다. 일할 때는 이런 얼굴인 걸까? 자오를 대하는 첸의 태도엔 직업적인 냉정함과 개인적인 유감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곧장 사무실로 가서 어머니 모시고 집에 가. 그리고…… 부를 때까지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자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어, 어머니가…… 사무실에요?”

“니가 경찰서에 잡혀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가 사무실로 쫓아오기로 얘기가 되어 있는 거면, 앞으로는 청연루 주방에서 양파나 다듬어. 주방장한테는 내가 얘기해놓을 테니까.”

경찰서에도 피의자 엄마나 여자친구가 쳐들어와서 소란 피우는 경우가 가끔 있다. 통곡은 기본이고, 드센 아줌마들은 경찰관한테 행패도 부리고 물건도 내던지곤 했다. 자오 엄마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어머니가…… 처음 겪으시는 일이라…….”

자오가 뒷덜미까지 시뻘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첸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뭐해? 가라니까!”

자오가 더는 말도 못 붙이고 쫓겨갔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나가는 자오의 뒷모습을 보자니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카루소를 죽인 게 자기가 아니라는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순 없지만……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첸이 좀 전에 자오를 노려봤던 싸늘함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그 바람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퇴근하고 청연루로 와.”

명령조라서 기분 나쁘다. 그런데 청연루가 어디더라…….

“전에 왔었잖아. 차이나타운에 있는 내 식당 말이야.”

“거긴…… 왜?”

“저녁 같이 먹자고.”

난 또 무슨 일이라고…….

“됐어.”

“얼마 전에 북경에서 주방장을 새로 스카우트 해왔는데 솜씨가 괜찮아. 요즘 뭐 제대로 먹은 적 없잖아?”

“됐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첸의 표정이 갑자기 음산해졌다. 녀석이 나를 언젠가 한번 봤던 것 같은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더니……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

덜컹…… 하고 유치장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저녁 때 또 어느 놈이 잡혀 들어온 걸까. 관심 없어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더니…… 지금 내가 꼭 그렇다. 생각하기 싫은데도 루크 첸 그 자식 얼굴만 떠올랐고, 그 자식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속이 푹푹 썩었다.

“선배님, 주무세요?”

누가 잡혀 들어온 게 아니라 앤디였다. 돌아보니 처음 봤을 때의 그 명랑하고 싸가지 없던 얼굴은 간데없고 눈에 어린애답지 않은 수심이 가득 했다. 이것들이…… 내가 눈에 안 띄니까 대신 앤디를 괴롭히고 있는 거 아냐?

“뭐야?”

일어나 앉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일어나서 이거 좀 드시라고요.”

앤디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와 보온병을 내밀었다. 봉투에 든 건 근처 빵집에서 파는 샌드위치였고, 보온병에 든 건 꽃향기가 풍기는 수상쩍은 차였다.

“샌드위치는 제가 사왔고, 차는 크롬웰 양이 주고 갔어요. 점심도 안 드셨잖아요.”

“괜찮아.”

“그러지 말고 드세요. 벌써 저녁때에요.”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배고픈 줄도 몰랐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출근할 때 먹은 빵 한 조각하고 커피 몇 잔이 전부였다. 어쩐지 기력이 없고 기분이 점점 나빠지더라니…… 뭔가 먹으면 좀 나아질까?

“넌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앤디가 보온병 뚜껑에 차를 따라서 내밀었다. 민트향이 좀 진한 것 같은데…… 먹어도 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아무 일 없는 얼굴이 아니잖아?”

“정말이에요. 할 일도 없고, 말 붙이는 사람도 없어요. 여태 로비에서 잡지책 읽다가 왔어요.”

작정하고 애를 따돌리는 모양이네. 못된 것들…….

“너무 걱정하지 마. 금방 현장에 나갈 수 있게 해줄게.”

차를 반 모금 정도 마셨을 뿐인데 더운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살살 왔다. 뭔지 몰라도 보통 차는 아니었다. 전에 이런 거 한번 마셔봤던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데.

“선배님 걱정이나 하세요.”

앤디가 시큰둥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원망스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나 때문에 덩달아 근신에 왕따 신세니까…… 파트너 복 지지리도 없다고 속으로 신세 한탄이 늘어지겠지.

“쥬드도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야. 좀 있다 얘기해볼게.”

“쥬드라면 크롬웰 양이요? 그 여자는 서장님 비서잖아요?”

“그냥 비서가 아니라 우리 경찰서 실세야.”

“비서가요?”

흉악범만 보면 이성을 잃는 금발 미녀가 서장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앤디도 곧 상황을 이해하게 될 거다.

“서장 애인이라도 돼요?”

“그건 아니고…… 차차 알게 될 거야. 이거만 먹고 나가서 얘기해볼게.”

“벌써 퇴근했어요.”

시계를 보니 6시 20분이었다. 루크 첸 때문에 끙끙거리느라 시간 가는 것도 몰랐다. 6시 20분…… 헉!!

“왜 그러세요?”

늦었다!

영문 모르고 덩달아 놀란 앤디를 유치장에 팽개쳐 놓고 뛰어 나와서 경찰서 앞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허기가 져서 앉았다 일어나기만 해도 눈앞이 핑핑 도는 형편인데 거기다 숨이 턱에 차도록 뛰기까지 했더니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그 바람에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뒷좌석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기사가 물었다.

“차이나타운…… 커다란 성처럼 생긴 식당이요…….”

“청연루 말씀이시군요.”

“일곱 시까지 갈 수 있을까요?”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어요. 한창 밀릴 시간인걸요. 일곱 시 반까지도 닿을까 말까 해요.”

그 자식이 일곱 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요금 따블로 드릴게요.”

기사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요금 따블로도 해결 못할 어려운 문제가 있었으니…… 퇴근시간의 차량 러시였다. 차가 거북이걸음조차 못 걷고 사거리 신호에 걸려서 꼼짝 못한 지 10분이 넘었다. 이 상태라면 첸이 운영하는 그 망할 중국집에는 내일 아침에나 도착할 거다.

“중요한 약속이 있으신 모양이죠?”

기사가 뒤를 힐끔 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저녁 약속이요.”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받아서 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인이랑 데이트요?”

이젠 데이트라는 말만 들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비지니스요…….”

속도 안 좋고, 마음도 심란해서 다시 옆으로 누웠다. 이게 무슨 꼴이냐? 루크 첸하고 저녁 약속 늦을까 봐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가다니…… 안 간다고 하면 그 자식이 그걸 빌미로 또 무슨 짓을 할지 짐작도 안 가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내 머리론 12인조 멕시코 악단보다 더 지독한 게 있을 것 같지 않지만, 루크 첸은 그 방면으론 상상력이 무궁무진한 놈이다.

그 자식이 나를 아예 갖고 노는데 그 속셈을 빤히 알면서도 이렇게 놀아날 수밖에 없다니…… 첸이 원하는 게 나랑 짜장면 한 그릇 같이 먹는 거라면, 그건 좋다. 하지만 다음엔 짜장면하곤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요구를 할 수도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놈에겐 뭔가 꿍꿍이가 있다.

큰길과 샛길을 오가면서 기사가 나름대로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차이나타운 근처에 도착한 게 일곱 시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중국집 까만 기와지붕이 현대식 고층 건물 사이로 언뜻 보이는 걸 보니 오긴 다 왔는데, 차이나타운을 관통하는 대로가 또 만만치 않은 난장판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시는 게 더 빠르겠는데요. 인근에 식당이 많다 보니까 저녁 시간이면 항상 이렇더라고요.”

아무래도 그게 나을 것 같아서 약속한 요금을 주고 식당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뒷길에서 내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큰길로 돌아가는 것보다 뒷길로 질러가는 편이 훨씬 가까울 것 같아서 작은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허름한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차이나타운 골목길은 초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기도 하고, 다른 동네 골목하고는 달리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물론,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기도 했고…… 상가하고 주택이 두서없이 뒤섞인 데다,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막다른 골목도 많았다. 특히 첸의 식당이 있는 방향은 골목 구조가 거미줄처럼 복잡한 방사형이었다. 차이나타운 내에서도 오래된 구역이라 이 모양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큰 길로 갔을 텐데…….

첸의 식당은 중국 성곽 혹은 대부호의 저택 같은 전통 건축물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효과를 노렸겠지만, 이렇게 오래된 골목에서 기와지붕 틈으로 올려다 본 첸의 식당은 중국집 주제에 꼭 중국 어느 지방의 성채처럼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막다른 골목을 몇 번이나 돌아 나온 끝에 드디어 식당을 성처럼 둘러싼 긴 담장을 찾았다. 한 20분 헤맸나? 큰길로 갔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저녁 한 끼 먹으러 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다. 여기서 또 담을 따라 한참 돌아야 정문이 나올 것 같은데……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빠를까?

담벼락에 기대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으려니까 까만 자동차 한 대가 저만치 떨어진 골목을 빠져 나오더니 담을 돌아 사라졌다. 저쪽에 문이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한 5분 정도 돌아가니 역시 입구가 있고, 좀 전에 담을 돌았던 차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정문은 아니고…… 뒷문? 건물 규모에 비하면 뒷문이라고 하기에도 크기가 너무 아담했다. 다른 조직이나, 경찰의 습격에 대비한 비밀 출입구…… 아니면 정문 쪽에 주차할 곳을 못 찾은 손님들이 가끔 사용하는 쪽문인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남자 두 명이 막 문안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나도 빠른 걸음으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벌써 30분도 넘게 늦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찰서 분위기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은데, 그 자식이 또 한 번 경찰서에 이상한 거 보내는 날이면 진짜로 쫓겨날 판이다.

그런데…… 두 남자 중에 유난히 덩치가 큰 남자가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후다닥 담벼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숨을 이유는 없었지만 워낙 갑자기 그러니까 놀라서…… 중국집에 저녁 먹으러 들어가는 사람치곤 경계심이 지나치지 않나? 그러고 보니 저 남자…… 낯이 익었다.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베론이었다.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 직후에 니콜라스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으며 내 속을 뒤집었던 그 재수 없었던 놈…… 게다가 동행은 노튼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긴 한데, 나가서 인사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노튼이 오베론에게 물었다.

“누가 있는 것 같아서.”

오베론은 나를 못 봤다. 어둡기도 하고, 마침 나무 덤불 옆이라서 바짝 붙어 있으면 저쪽에선 나를 볼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겠죠. 주택가니까요.”

“지금은 잠잠하군.”

“살펴보고 오죠.”

헉, 노튼이 이리로 온다. 총까지 빼들고서…….

세상에 이런 법도 있나? 잘못한 것도 없고, 뒤를 밟으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혹시 몰라서 일단 나도 총을 꺼내 들었다. 노튼과 내가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는 불상사는 설마 없겠지만, 마주치면 분위기가 엄청 어색하겠다. 노튼이 바싹 다가왔다. 그때, 맞은편 골목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타이밍 딱 좋게 등장한 동네 주민 두 명은 나도 보고, 노튼도 봤다. 다행히 큰 소란은 없었다. 동네 어귀를 거닐다 뜻하지 않게 총 든 남자들을 본 행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방금 나왔던 골목으로 황급히 뛰어 들어갔고, 노튼도 그쯤에서 총을 거둬 들었다.

연방특수경찰도 먹어야 살고, 입맛 따라서 중국집에 들락거릴 수 있다. 지금이 딱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하지만 방금 전에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짜장면 한 그릇 먹으러 중국집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었다.

밥값만 있으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식당인데 왜 저렇게 바짝 긴장 하고 숨어들어가듯 하는 걸까? 연방특수경찰이 요원 훈련을 너무 엄격하게 시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안에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한동안 두 사람이 사라진 작은 문을 들여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알 수 있는 거라곤 두 사람은 니콜라스를 추적하던 연방경찰이라는 것과, 여기가 차이나타운에서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레스토랑이라는 것뿐이었다. 중국집에 심각한 일이라고 해봐야 식품위생법 위반이 고작이다.

여기가 마피아 직영 중국집이란 사실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두 사람은 여기 관할 경관도 아니니까 마피아 관련 비리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뭐가 됐든, 첸의 식당이니까 그 녀석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항상 뭔가 안 좋은 일을 꾸미고 있는 놈이긴 하지만 연방특수경찰이라니…… 그 자식이 뭔가 전국 단위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 수도 있다.

불현듯 오베론과 노튼의 뒤를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약속을 일방적으로 펑크 내는 후환이 두렵긴 하지만, 나도 다른 보통사람들처럼 남자친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두 사람을 뒤쫓든, 첸하고 저녁을 먹든 일단 안으로 들어가야 뭐라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들어간 문으로 따라 들어가려고 다가가다 멈칫했다. 처마 밑에 감시 카메라가 붙어 있는 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카메라는 보안 시스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 감춰져 있었다. 하지만 나도 이 계통으로 준전문가 정도는 되고, 예전에 수사차 들렀던 회원제 SM 클럽 입구에 이런 게 붙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루크 첸, 이 자식…… 혹시 식당은 부업이고, 안에다 비밀 변태 클럽 같은 걸 차려 놓고 장사를 하는 거 아냐? 사람됨으로 보건대 그러고도 남을 놈이고, 이 건물도 그런 거 하기에 아주 좋은 구조다. 오베론이랑 노튼을 수상한 클럽이나 들락거리는 변태 중년들이라고 가정하면 문 앞에서 그렇게 유별나게 굴었던 게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총까지 빼든 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으면 간단하겠지만 미행하는 입장에서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미는 게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리고 꼭 문으로 들어가야 할 만큼 담이 높은 것도 아니고…….

“거기서 뭐해?”

커헉…….

담에서 뛰어내린 다음에 막 털고 일어서다가 딱 걸렸다. 그것도 루크 첸 본인한테. 나도 웬만한 일엔 잘 안 놀라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간 떨지는 줄 알았다.

“저녁…… 먹자면서?”

미친 듯이 펄떡거리는 심장을 진정 시키려고 애쓰면서……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첸의 양 사이드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덩치들이 두 명…… 경호원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는 동양인 영감이 한 명…… 일 없이 서성거리다 나를 발견한 건 아니고 부하들 거느리고 어디론가 가는 길이었다. 이 식당 안에는 골목길도 많은데 하필 이렇게 딱 마주칠 게 뭐람?

“연중무휴로 11시까지 영업하는데 담은 왜 넘어?”

녀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내가 좀 전에 타 넘은 담벼락을 올려다봤다.

“차가 밀려서 뒷길에 내리는 바람에…… 골목이 복잡해서 좀 헤맸어. 또…… 문도 못 찾겠고…… 돌아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문을 못 찾았다는 변명에 첸과 부하들이 거의 동시에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쳐다봤다.

“잠겨 있잖아!”

나는 굶어 죽어도 사기는 못 칠 거다. 변명이 상당히 어설펐지만 어쨌든 다행히 첸은 더 이상 추궁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다음에 이쪽으로 올 일 있으면 담 넘기 전에 벨을 눌러봐. 들어오기가 훨씬 쉬울 거야.”

“어…… 그럴게.”

첸의 경호원들과 옆에 선 노인이 나를 위아래로 싸늘하게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경찰서만큼이나 험악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눈초리였다. 하긴, 이제 흑풍회는 명실상부한 쿠간 시 최고의 범죄 조직인데 보스가 짭새하고 놀아나는 게 달갑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저 자식한테 드러내놓고 시비를 거는 놈은 없겠지만.

“많이 늦었어.”

첸이 나무라는 투로 투덜거렸다.

“겨우 30분…….”

시계를 들여다보니 조금 더 늦었다.

“40분 늦은 거 갖고 뭘 그래?”

첸이 자기 시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45분이야.”

그 말이 맞을 거다. 저게 더 비싼 시계니까…….

“미안해.”

늦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시간을 맞추려고 노력은 했으니까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그 정상은 참작해줬으면 좋겠다.

첸이 나를 갖고 놀기 만만한 쥐새끼 노리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노인이 험…… 하고 기침을 했다. 바쁘니까 할 얘기 있으면 빨리하고 가던 길 가자는 뜻이었다. 첸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노인을 돌아봤다.

“먼저 가시죠. 저는 좀 있다가 가겠습니다.”

순간적으로 노인의 눈썹이 움찔했다. 차이나타운의 악당들은 세간에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가 드물어서 노인의 얼굴을 신문 사회면이나 현상 수배자 명단에서 본 적은 없지만, 성깔이 보통은 넘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저쪽에서 늦는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겠나?”

노여움을 꾹 눌러 참으며 노인이 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잔말 말고 같이 가자는 뜻인 것 같은데…….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손님하고 저녁 먹는 중이라고…….”

노인의 근엄한 표정이 슬슬 무너지기 시작했다. 노인이 나를 다시 한 번 씹어 먹을 듯 노려봤다. 내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조른 것도 아닌데…….

“이건 중요한 일이고 자넨 노 회장 대리인 자격이야. 일을 소홀히 하는 걸 알면 노 회장이 실망할 걸세.”

말하는 걸로 보아하니 흑풍회에서 위세깨나 떠는 영감인 모양이다. 노 회장이란 첸진을 이르는 말일 터…… 장인에게 일러바치겠다는 치사한 협박에 첸이 고깝다는 듯 노인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요렇게 비아냥거렸다.

“장인어른이 아실 리 있습니까? 대인께서 일러바치지만 않으시면…….”

노인의 혈압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게 눈에 보였다. 노랗던 얼굴이 갑자기 벌겋게 달아오르고 입술이 경련하듯 실룩거리는 걸 보니 저러다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혹시 장인도 이런 식으로 쓰러뜨린 게 아닐까? 죽었다 깨나도 저 영감하고 친하게 지낼 일은 없을 테지만 루크 첸한테 저렇게 당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자, 자네…….”

“저야 어차피 발언권도 없는 참관인에 불과하잖습니까? 많이 늦지는 않을 겁니다.”

첸이 손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경호원 두 명이 노인 쪽으로 바싹 붙어 섰다. 일가친척 족보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중국 마피아라도 명령 체계는 분명한지, 경호원들은 첸의 명령 여부에 따라 노인을 억지로 끌고라도 갈 기세였다.

“그냥 볼일 보지 그래? 저녁은 내가 알아서 시켜 먹을 테니까…….”

그 볼일이란 게 좋은 일일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나 때문에 영감님 처지가 딱하게 된 것 같아서 슬그머니 끼어들어봤다. 하지만…….

“알아서 뭐? 짜장면 곱빼기?”

“중요한 일이 있는 거 아냐?”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냥 너랑 저녁이나 먹을래.”

첸이 내 손목을 잡아끌고 본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런 고연 놈…….’ 이라며 혀를 끌끌 차는 노인의 화난 목소리가 꽤 길게 뻗은 골목길을 다 벗어날 때까지도 그치질 않았다.

첸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본관 2층에 있는 작은 별실이었다. 후원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창문, 흑단으로 만든 4인용 식탁, 고풍스런 의자, 구관조가 노니는 아름다운 새장…… 1층에 있는 대형 홀도 일반 레스토랑에 비교하면 호화로운 편이지만, 이 방은 그보다 훨씬 호사스럽고 아늑해서 식당에 밥을 먹으러 왔다기보다는 중국의 어느 부잣집에 초대라도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영감은 누구야?”

“백 대인이라고…… 장인 친구야.”

첸이 메뉴판을 들추며 심플하게 대꾸했다. 그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화가 많이 난 것 같던데…….”

“본래 늙으면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는 법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

“장인한테 니 얘기를 일러바치는 정도는 맘대로 하겠던데?”

첸진은 30년도 넘게 차이나타운의 영주 노릇을 하던 눈치 빠르고 교활한 영감이었다. 건강 문제로 현재는 2선으로 물러앉은 처지였지만 난봉꾼 데릴사위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만큼 태평한 성격이 아니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나…… 근처에 측근을 심어 놓고 사위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보고를 받는 모양이었다.

“이러다 장인한테 불려가서 된통 깨지는 거 아니야?”

“두부 완자탕하고 쇠고기 죽순볶음 어때?”

첸이 메뉴판을 내밀며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무슨 일이든 멋대로 하면서 편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데릴사위가 겪는 애환은 따로 있는 모양이다.

“곰 발바닥이나 원숭이 골 요리 같은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첸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건 나도 못 먹어봤어.”

음식은 훌륭했다. 첸이 고른 두 가지 요리 외에도 풀코스로 앞뒤에 꽤 여러 가지가 나왔는데, 중국 요리치고 그렇게 기름지지도 않고, 향신료도 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이 많은 게 아주 맘에 들었다.

“하루 종일 굶었어?”

접시에 코를 박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긁어 먹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첸이 입을 열었다.

“맛있어서…… 그래.”

“많이 먹어.”

첸이 자기 앞에 있던 만두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보냈다.

“용하고 기린한테서는 무슨 얘기 없었어?”

“병원에 한 번 더 가봐야겠다고 해서 하이렌이 데리고 갔어.”

“병원에?”

“냄새를 한 번 더 맡아볼 모양이지.”

“그래……?”

“그리고 내 생각엔, 아무래도 그 푸른 코끼리 카페라는 게 시내에 있는 카페는 아닌 것 같아.”

만두 한 개를 입에 넣었다가 씹지도 못하고 꿀꺽 삼켜버렸다.

“시내에…… 없으면?”

갑자기 입맛이 없어져서 젓가락을 내려놨다. 뭐, 먹을 만큼 먹은 다음이었지만…….

첸이 지금 한 말은 푸른 코끼리 카페가 쿠간이 아닌 다른 도시 어딘가에는 있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카페는 세상에 없다는 의미였다. 비니의 영혼이 빠져나가서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은 건 아니지만 믿는 척하면서 비니를 찾아다닐 때는 마음이라도 편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기린이 나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시간이 좀 걸리는 거야.”

“너는…… 걔네들이 하는 말을 다 믿어?”

기린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나도 안다. 언 땅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 치우고…… 용과 기린은 정말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그냥 평범한 애들일 뿐이고, 이 모든 일이 고약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내 물음에 첸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천 살이 넘었단 말은 안 믿어.”

“…….”

녀석의 썰렁한 농담에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첸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내 잔에 술을 한잔 가득 따랐다.

“나라면…… 비니 몬티첼리가 정신 차린 다음 일을 걱정하겠어.”

말썽이 좀 줄어만 들어도 금상첨화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다. 본래 모습 그대로만 돌아와도 나는 불만 없다. 물론 그때 가면 마음이 변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술을 한 모금 홀짝거리다 첸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녀석의 음흉한 시선을 보는 순간 비니가 정신 차린 다음 일이란 게 내가 생각하는 그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고, 그 바람에 술이 그만 콧구멍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물이 잘못 넘어간 거 하고, 독한 청주가 잘못 넘어간 건 그 고통이 질적으로 달랐다. 한참 기침을 하고 난 다음까지도 콧속이 화끈거리고 아팠다.

사래 들린 게 대강 진정되고 나서 첸을 노려봤다. 녀석이 쓴 웃음을 지으며 냅킨을 내밀었다.

“왜 그래?”

“너 때문이잖아!”

“뭐가?”

“왜 사람을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응?”

녀석이 영문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꼬치에 꿰여서 불 위에서 기름 뚝뚝 흘리면서 돌아가는 통 오리 쳐다보듯 나를 봤잖아!!”

“내가?”

“그래, 니가!”

“오해야. 기름진 통 오리라니, 넌 절대로 그렇게 안 보여.”

녀석이 킥킥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잠깐 동안 새 주방장의 스페셜 해물 탕수육처럼 보이긴 했지만. 그건 진짜 맛있거든.”

근데 이 자식이…….

“먹어볼래? 소스가 꽤 매운 편이니까 그건 각오하고.”

나를 스페셜 해물 탕수육 보듯 보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놈이 저럴 때마다 ‘나한테 와라’ 하던 그 느끼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맴 도는 게 말도 못하게 언짢았다. 구체적으로 와서 뭘 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결국 그 의미는 저 자식 조직에 끌려 들어가거나, 침실에 끌려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

둘 다 제정신으론 못할 일이지만 이제 와서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할 수도 없어서 생각날 때마다 내 속만 썩었다.

“됐어! 안 먹어!”

첸의 뺀질한 낯짝이 보기 싫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후원 골목골목엔 홍등이 밝혀져 있었다. 애써 오래된 것처럼 꾸민 돌담, 담장 모퉁이마다 세심하게 조성된 작은 화단, 그리고 붉은 등…… 그 풍경이 이국적이면서도 은근히 섹시했다. 여기 후원은 지금 묵고 있는 첸의 집 후원과 어딘지 비슷한 분위기가 있었다.

여기서는 후원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 한 눈에 보였다. 후원은 전체적으로 아름답지만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제법 너비가 너른 개울과 울창하게 우거진 대숲이었다. 개울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아담한 연못과 별채가 대숲에 반쯤 가려진 풍경은 중국집 뒷마당치곤 운치가 제법이었다.

“경찰서에 출근은 계속 하는 거야?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면서?”

내가 후원 별채를 유심히 쳐다보는 걸 눈치챈 첸이 숟가락으로 물 잔을 땡땡 두드리며 주의를 돌렸다.

“갇혀 있었다고 누가 그래?”

“누구겠어?”

아, 자오……. 집으로 쫓겨가는 와중에도 그 얘긴 일러 바쳤나 보네.

“그냥 머리를 좀 식히고 있었던 것뿐이야.”

“유치장에서?”

“무슨 상관이야?”

이게 다 누구 탓이냐? 참으려고 해도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아니, 뭐…… 꼭 그 고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니가 이상한 짓만 안 했으면 그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지!”

“니가 내 말만 잘 들었으면 이상한 짓을 안 했겠지.”

확 달려들어서 한대 패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동안 신세진 것도 있고 앞으로 신세질 일도 좀 남았고,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런 게 길들여진다는 걸까? 기분이 정말 울적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분위기 참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무슨 일이야?”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만, 손님들이 언제쯤 회의에 참석하실지 궁금해 하십니다.”

“손님들이 아니라 백 대인이겠지.”

“어쨌든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손님 명단에 오베론과 노튼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력하게 들었다. 첸의 반응이 저렇게 시큰둥한 걸로 봐서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데 두 사람은 뭐가 그렇게 심각했을까?

“금방 간다고 전해.”

여자를 내보내고 첸이 나를 돌아봤다.

“미안해. 저녁 먹고 같이 들어갈까 했는데…….”

미안할 일도 많다.

“괜찮아.”

“지배인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내 차 타고 가.”

“그냥 택시 탈래.”

놈이 또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저런 얼굴만 보면 나도 모르게 속이 떨렸다.

“알았어. 니 차 탈게.”

첸이 나가고 난 후, 조용하고 아늑하고 아직 음식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방에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 식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이 식당에선 항상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을 거다. 여기는 첸의 두 번째 사무실이나 마찬가지니까. 차이나타운 건너편에 있는 정식 사무실에서 만큼이나 녀석은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나도 조직범죄에 대해 알 만큼은 아니까 그 바쁜 일이란 게 어떤 건지 대강 짐작은 갔다. 하지만 왜 거기에 오베론이랑 노튼이 끼어들어서 사람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분명한 건 한 가지뿐이었다. 생각만으로는 이 일의 진상을 밝힐 수 없다.

지배인에게는 잠깐 산책하고 돌아오겠다고 얘기하고 정원으로 나왔다. 워낙 유명한 식당이고 유명한 정원이라서 식사를 마치고 산책하는 커플들이 꽤 많았다. 덕분에 정원을 서성거린다고 수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후원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어 보였다. 특히나 비밀 회합을 위한 삼엄한 경계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작은 시내에 걸쳐진 무지개다리 초입에 관계자 외의 출입을 금한다는 무심한 표지가 있는 것 외엔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려는 노력은 개뿔도 없었다.

안에서 하다못해 변태 SM쇼가 벌어지고 있는 거라도…… 최소한 입구에 덩치 좋은 경비원 몇 명은 세워 놔야 되는 거 아닌가? 아까 담을 뛰어 넘었던 건 정말 공연한 짓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몰라서 다리 한쪽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를 피해 아래쪽으로 개울을 건넜다.

안쪽도 그냥 조용했다. 저녁 바람이 대숲을 지날 때마다 댓잎 스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노친네들이 안에서 소란스럽게 노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내가 장소를 잘못 찍었나?

반대편에도 작은 건물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거기는 이 식당의 특별한 손님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생각하기엔 외관이 너무 초라하던데…….

개울을 건너느라 종아리까지 푹 젖었는데 이게 뭐냐……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성 없이 코너를 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너무 놀라서 주춤주춤 물러서다 머리 높이 정도로 돌출된 테라스 난간에 뒤통수를 부딪치고 말았다. 다행히 때마침 불어온 바람 소리가 내 머리랑 나무 난간이 부딪히는 소리를 묻어버렸다. 아이고…… 뒤통수야…….

별채 마당에 매달린 붉은 등 아래 여자가 멈춰 섰다. 옆모습을 보니 좀 전에 첸을 데리러왔던 그 여자였다. 헉…… 이제 보니 여자가 어깨에 둘러맨 게 핸드백이 아니라 자동소총이었다.

얼굴은 총 근처에도 못 가게 생겼는데……. 하긴, 생긴 것만 봐서 사람 속을 알 수가 있나? 쥬드 크롬웰도 흉악범 근처에도 못 가게 생겼지만 실상은 생긴 것과 많이 달라서 흉악범 아니면 근처에도 안 간다.

여자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저 자리가 자기 위치인 모양이었다. 그럼 반대편으로 돌아가 볼까? 하지만 반대편으로 몇 걸음 살금살금 돌다가 또 기겁을 하고 벽에 붙어서고 말았다. 저쪽에도 사람이 있었다. 무장의 수준도 여자랑 비슷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별채 주변으로 무장 경비가 쫙 깔렸다. 경비가 너무 없어도 서운하더니, 이젠 오도가도 못 할 판이었다. 나……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걸까?

밤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는데 젖은 신 신고 테라스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자니 으슬으슬 추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들키더라도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잡혀야 덜 서운할 텐데…… 그래서 세찬 바람에 댓잎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테라스 난간을 타고 넘었다.

내가 들어간 방은 아담한 응접실이었다. 한쪽 벽엔 작은 서가가 있고, 예쁜 탁자와 중국식 의자가 몇 개 놓인 것 외엔 별다른 세간이 없는 단출한 방이었다. 좀 전까지 사람이 있었던 걸까? 벽난로에 금방 넣은 것 같은 통나무 장작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그 옆방이었다.

“……그 땅은 대대로 우리 집안 소유였단 말이야!”

“돈 받고 팔았으면 이젠 아니지.”

문틈으로 살펴보니 방안엔 노튼, 오베론, 아까 그 영감과 첸 외에도 일곱 명이 더 있었다.

“형편없는 헐값이었어. 사기를 당한 거나 진배없다고!”

“아무짝에도 써먹을 데 없는 땅을 사겠다는 머저리가 나섰다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그땐 개발 제한 구역이었잖아! 내 평생에 그 땅에 호텔이 들어서는 걸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자네가 계속 갖고 있었으면 아마도 그랬겠지.”

나이 지긋한 영감님들이 잔잔한 비웃음을 터뜨렸다. 인상만 대충 살펴도 남 잘되는 거 좋아할 만큼 인정 많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수완이 보통이 아니야. 15개월 만에 시청에서 개발 허가를 얻어내다니…… 우 대인이 평생 별의별 짓을 다 했어도 못 해낸 일이잖아?”

땅 팔았다는 영감은 돌아앉아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안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만 들어봐서는 지금 울기 직전인 것 같았다.

“이럴 순 없어. 우리 집안은 그 땅을 90년이나 갖고 있었다고!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빼앗기진 않겠어!!”

“뺐긴 게 아니라 돈 받고 판 거잖아? 85만 불이면 그때 시세보다 50퍼센트는 더 받은 거였고. 우리는 자네가 애들을 데리고 가서 매입자 머리에 총이라도 들이대고 계약서를 받은 줄 알았단 말이야.”

“그 땅이 지금 천만 불짜리가 됐잖아!!”

땅 판 영감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야 다른 영감들은 이제 신경도 안 쓴다.

“무슨 회사였지? 주가가 많이 올랐겠군.”

“비상장이야. 알아보니까 이름만 등록된 유령 회사 같았어.”

“저런…… 작은 회사라면 우대인 등살에 견뎌내질 못할 텐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5백만은 더 뜯어내려고 들걸?”

“알아낼 수만 있으면 그러고도 남지. 벌써 계약을 대행해준 법률 회사를 쑤시고 다니는 모양인데 보안이 철저해서 뭐 별로 성과가 없나 봐.”

“그래서 저렇게 우거지상이었군.”

저것도 당사자들한테는 흥미진진한 얘기겠지만…… 나는 당장이라도 여기서 뛰쳐나가버리고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뭡니까? 이거? 뭐 중요한 일인가 싶어서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까지 뚫고 들어왔는데, 중국 노인들의 재테크 반상회라니…… 오베론하고 노튼한테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왜 문 앞에서 그 주접은 떨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었는지!

“이봐, 젊은 회장.”

땅 판 영감이 첸을 불렀다. 여기 영감들은 첸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조직의 원로들이라 그런가…… 첸도 구석에 앉아서 영감들 수다를 듣고 있을 뿐 전혀 나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손 좀 빌려주게.”

“예?”

보통 때 같지 않게 다소곳한 놈의 모습을 보니 조금 안됐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직의 데릴사위라서 노땅들 앞에선 기를 못 펴는 걸까? 밖에선 그렇게 무서운 거 없다는 듯 까불더니…….

“남의 땅을 그렇게 거저먹는 건 경우가 아니지. 그런데 법률회사 놈들이 말이야, 뭘 얼마나 주워 처먹었는지 도무지 입을 안 열어. 그러니까 자네가 그것 좀 알아봐줘.”

완전히 명령조였다. 마치 첸이 지 사위라도 된다는 듯…… 녀석이 왜 여기 오는 걸 그렇게 싫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요?”

“자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회사 건물에 미사일을 한방 날리든가…… 몬티첼리 놈한테 한 거 반의반만 해도 어느 놈이 자네를 거스르겠나?”

‘모임엔 생전 나오지도 않더니…… 오늘 득달같이 쫓아온 이유가 저거였군…….’ 하는 비아냥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우 대인.”

첸의 거절에 영감의 뒷모습이 딱 굳었다.

“이봐! 자네 장인은 친구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는 거,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았어. 내 돈 천만 불을 강탈당했단 말이야!”

영감이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회장한테 뭐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잖아? 어느 놈이 내 돈을 먹었는지 그거만 알아봐주면 애들을 데리고 가서 그놈을 거꾸로 매달든지, 목을 따든지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일가친척에, 장인 친구들이 포진하고 있는 조직의 보스 노릇도 참 할 짓 아니다. 첸이 나이 젊고, 친구네 데릴사위라고 막 보고 저렇게 해대는데도 녀석은 잘 참고 있었다. 성질대로 하자면 내가 니 사위냐? 이러면서 맞짱 한번 뜰 만한데…….

“자네가 나한테 이러는 거, 자네 장인이 알면 서운해 할 거야. 내가 소싯적에 노회장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준 줄 알아?”

불쌍한 놈…… 일가친척뿐 아니라 장인 친구들한테까지 이렇게 달달 볶이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런 게 처가살이의 설움이란 걸까? 땅 판 영감의 염치없는 어거지 생떼에 첸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땅을 샀는지 그것만 아시면 됩니까?”

아무리 루크 첸이라도 저렇게 경우 없고, 무식한 인간을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걸까? 녀석에게 저렇게 고분고분한 구석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니까!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돈을 깔고 앉아서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다면 크게 잘못 생각한 거야!”

“어르신.”

첸이 차분한 눈길로 땅 판 영감을 응시했다.

“그 땅, 제가 샀습니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떠드는 소리로 웅성거림이 그칠 새 없던 방안이 그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자, 자네……가?”

한참 후에야 땅 판 영감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안 보이는 게 안타깝다. 볼 만할 텐데…….

“변호사들은 아무 문제도 없다고 하던데…… 저야 돈이나 지불했지 계약서를 다 읽어본 건 아니라서요. 변호사들에게 문제되는 부분을 일러주시면 다시 정리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말투도 정중하고 태도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내 귀엔 더 이상 귀찮게 하면 너를 정리해버리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이해한 눈치였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아까 봤던 백 대인이란 영감하고 조용히 소근거리던 오베론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회원제 사교 클럽처럼 여기저기 앉거나 서서 각자 떠들던 참석자들이 가까운 의자를 찾아 앉았다. 루크 첸한테 한방 제대로 먹은 영감만 멍하니 서 있다가 옆에 있던 연배 비슷한 영감이 눈치를 준 다음에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도 문 옆에 그냥 퍼질러져 앉아서 젖은 신발을 벗었다. 여기서 재테크 정보 따위 얻어가 봐야 나한테 땅 살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나가고 싶지만 경비원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거 피해서 나가기도 귀찮았다. 영감들이 다 나가고 나면 경비원들도 해산할 테니까 그때 편하게 나가야지. 그동안 난로 불에 신발이나 말려야겠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오베른의 그 한마디에 하마터면 신발을 불 속에 던져 넣을 뻔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라니?

“기사단이 바하르나 회의를 소집하는 것에 대해 「천년조약의 기사단」의 동의와 참석을 요구해왔습니다.”

좌중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들 좀 전에 부동산 쇼크에서 아직 못 벗어난 눈치였다.

“회의 안건이 뭐라던가요?”

침묵이 오래 계속되자 첸이 오베론에게 물었다. 백 대인은 첸이 나서는 게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대인.”

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러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이 잠깐 머물렀는데…… 기척이라도 느낀 걸까?

“라두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의 피해가 컸습니다. 얼마 전 시내 한복판에 오컴이 출몰했을 때도 그렇고…… 기사단은 천년조약의 기사단과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제야 참석자들이 웅성거리며 성의껏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이제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저 사람들이 이젠 니콜라스 얘기까지 하네?

“정보를 공유한다고 했습니까? 그자들이?”

“우리가 가진 정보와 돈을 노리는 거겠지. 그자들은 믿을 수가 없어!”

반응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뭐, 나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대해 좋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돈밖에 모르는 조폭 영감들이랑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게다가……「천년조약의 기사단」은 또 뭐냐?

“어쨌든 그자들도 오거스트의 봉인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조약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백 대인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각자 떠드는 노인들의 중지를 모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반응이 별로였다.

“우리가 왜 그 또라이들하고 손을 잡아야 되나? 그자들은 정신이 나갔어. 제정신을 갖고는 라두칸한테 그런 짓을 못해!”

“맞는 말이야. 그렇게 행패를 부려 놨으니 그자가 이제 어떻게 나오겠나?”

「천년조약」이란 게 뭔지, 그게 니콜라스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산만하기가 초등학생보다 더한 저 영감들이 그걸 어떻게 지킨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까 부동산 얘기할 때는 그렇게 집중력이 좋더니만…….

“안 그래도 감옥살이를 3년이나 해서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놈을 제대로 붙들지도 못하고 한쪽 팔만 절단을 내놨으니……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나 한번 들어 보고 싶구먼.”

“그자는 어차피 때가 되면 봉인을 풉니다. 그걸 막는 게 여러분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할 일이고요.”

오베론이 짜증을 참으려고 애쓰면서 영감들을 좋은 말로 설득했다. 하지만 경찰관 짬밥 먹을 만큼 먹은 내 경험으로 보자면 나이 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듣기 싫은 말은 더 그렇고…….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어! 그자는 2차 종족 대전 때 오거스트 대왕 편에 서서 검은 군대와 싸우지 않았소! 이제 와서 봉인을 풀어서 묵은 원수를 깨워 일으키는 게 그자에게 무슨 소득이 있겠소?”

“안 그래도 그 작자들이 대책도 없이 나서서 설치는 게 영 불안하더니…… 우리한테 일언반구 의논도 없이 그 사달을 내놓고, 이제 와서 뭐가 어째? 정보를 공유하고 작전을 같이 수행하자고?”

첸은 그냥…… 잘들 논다. 이런 얼굴로 시계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얘긴지 굉장히 궁금하긴 하지만…… 들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일하는 방식이 우리 맘에도 꼭 드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오베론은 어떻게든 회의를 진행해보려고 애는 많이 쓰고 있었지만 이 영감들은 오베론이 하는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천년조약의 기사단」이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이 영감들은 자기들한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거나 손해나는 일, 그 외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다. 첸과 오베론의 시선이 마주쳤고 첸이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방안이 점점 더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중국말도 한마디씩 튀어나온다 싶더니 이젠 중국말이 반도 넘게 섞여서…… 혹시 니콜라스에 대한 얘기 중에 건질 거 없나 싶어서 신경 바짝 곤두세우고 엿듣던 나는 골치가 아파서 쓰러질 지경이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이렇게 어수선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하르나 회의를 소집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천년조약의 기사단도 회의에 참석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일시는 그쪽에서 결정하고 장소는 우리가 정하는 걸로 하죠.”

첸의 한마디에 방안이 기적처럼 조용해졌다. 별로 우호적인 침묵은 아닌 것 같지만…….

“그건 자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백 대인이 첸을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쏘아 봤다. 나머지 영감들도 기분 상한 표정이 역력했다. 현재 8대 1의 대결 구도에다 상대는 장인 친구들인데, 아무리 녀석이라도 이 싸움에서 승산이 있을까?

“흑풍회의 수장은 접니다.”

“자네가 언제부터?”

아까 땅 문제로 첸에게 찍소리도 못하게 당했던 우 대인이 앙심 가득한 목소리로 따졌다.

“마리아하고 결혼한 그날부터요. 모두들 결혼식에 오셔서 만한전석으로 밤참까지 드시고 가셨죠.”

“자네가 마리아와 결혼하고, 노회장의 양자가 됐다고 해서 모든 일에 결정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나? 마리아랑 결혼했으면 마리아랑 침대나 같이 써. 우리가 인정하는 수장은 자네 장인뿐이야!”

백 대인이 싸늘한 어조로 쏘아 붙였다.

“장인께서 모든 권한을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잘 보고 배우라는 뜻이었겠지. 멋대로 나서서 설치라는 뜻은 아니었을 거야.”

영감들의 표정엔 새파란 애송이한테 결정권을 넘길 수 없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비록 자신들이 뭔가를 결정할 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저쪽 기사단은 라두칸을 잡으려고 무장 헬기를 동원해서 몬티첼리 저택에 쳐들어가기도 했었고, 오컴을 처치하려고 이 도시에서 가장 복잡한 미로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시원찮았지만…… 그들은 그래도 뭔가 하려고 애는 씁니다. 「천년조약의 기사단」이라…… 타이틀은 근사하지만, 우리는 뭘 했습니까?”

“우리들의 가문은 대대로 천년조약에 대한 의무를 물려받았어. 자네가 기사단의 일원이 된 건 이제 겨우 5년이고. 우리라는 말조차 거슬리는군. 대체 자네가 기사단의 의무에 대해 뭘 안다고…….”

첸의 얼굴엔 이제 보통 때 자주 보던 비웃음도 없고, 말투엔 이리 저리 비틀어서 사람 놀려 먹던 장난기도 없었다. 첸의 눈빛과 표정이 근엄하면서도 어딘지 음산했다. 언젠가 저런 얼굴을 한번은 본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외람된 질문이지만, 어르신들께서는 평생 부정한 돈벌이 외에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한마디에 사방에서 고연 놈…… 이라는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첸이 사나운 시선으로 영감님들을 제압했다. 이럴 때 보면 분위기는 제법이다.

“협잡, 투기, 협박, 살인……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이나 지켰겠죠. 앞으로 할 일은 그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대인들께서 평생 모은 재산을 내놔야 할 수도 있고, 대인의 아들들이 의무를 지키다 죽어가는 걸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뒷짐 지고 물러서서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하는 일에 트집이나 잡으며 그들과 만나지도 않으려는 건 그런 상황이 두려워서가 아닙니까?”

아무도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을 못하는 거 보니까 첸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영감들이 이젠 뭐라고 반박도 못하고 끙끙 앓고만 있었다. 사실…… 여기 모인 영감들 나이 정도 되면 제일 중요한 게 재산이랑 가족이다. 평생 모은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도 지켜야 하는 의무라…… 요즘 세상에 그런 것도 있던가?

“그런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시면 뒤로 물러서 계셔도 좋습니다. 어르신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하거나, 개인적인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휘하 기사들을 통솔하는 문제는 저한테 일임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어려운 일 안 시킬 테니까 대신 찍소리 말고 찌그러져 있으라는 첸의 제안에 영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런 말이 나오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자네는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대사大事를 의논할 만큼 믿을 만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나?”

백 대인이 첸에게 물었다. 저 영감님은 처음부터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과 협력하는 것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단지 첸이 나서는 게 달갑지 않았던 것뿐이다.

“만나보면 알겠죠.”

“그자들은 거칠어. 웬만해서는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고, 자네가 그자들을 만나서 대등하게 협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회의가 소집되면 대인들께서도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물론 오늘보다는 조용히 계셔야겠지만…….”

그렇게 해서 밤을 새도 끝이 안 날 것처럼 산만하던 회의가 의외로 신속하게 끝났다. 나이 젊고, 또 친구 데릴사위라고 첸을 만만히 보고 함부로 하던 영감들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뭐, 하긴…… 한번 만나보는 거야 나쁠 거 없겠지. 그자들이 라두칸을 우리보다 먼저 찾아낼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그자들은 라두칸의 팔을 갖고 있잖아.”

왜소한 대머리 영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을 또라이라고 욕했던 사람이다.

“명색이 현자라면서, 떨어져나간 팔 따위를 찾으러 그 소굴에 걸어 들어가겠나?”

옆자리에 앉아서 부스럭거리던 뚱뚱한 영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따지면 젊은 회장은 더 좋은 걸 갖고 있잖아?”

땅 판 영감…… 우 대인이 첸을 힐끔 노려보며 비아냥거렸다. 나머지 영감들이 더 좋은 거, 뭐? 하는 얼굴로 우 대인을 쳐다봤다. 나도 궁금하다.

“라두칸의 귀여운 애인.”

근데 저놈의 영감탱이가…….

땅 판 영감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키득거렸다. 친구 사위가 호모라는 데 그런 걸 걱정하는 영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신문 봤어. 그저 그렇던데?”

“덤불을 두드리면 새가 날아오르는 법이지.”

“그래도, 왜 하필 짭새야? 난 별로 맘에 안 들어.”

첸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영감들의 대화를 듣다가 또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옆에서 비켜 서 있으니 나를 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뭔가 기척이라도 느낀 걸까? 어쨌든, 나쁜 자식! 뭔가 속셈이 있는 것 같더라니…… 이런 거였나?

영감들이 떠들면서 하나둘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회의 분위기가 좋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갈 때는 첸에게 인사차, 격려차 한마디씩 하고 가는 사람이 꽤 있었다.

“어쨌든 젊은 회장이 나서서 애써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요즘 주가가 시원찮아서 말이야…… 손해가 많았거든”

이런 아부형도 있고…….

“라두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흑풍회 이미지 이상해지지 않게 조심 좀 하게.”

이런 당부형도 있고…….

“그놈들이 돈만 요구할 수도 있어. 옛날부터 그런 식이었다고. 니네는 돈이나 내라 그거지. 놈들이 수천만 불을 요구해와도 우리 없이 감당이 되겠나?”

땅 판 영감…… 그러니까 우 대인이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벌래 씹은 얼굴로 첸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럼 해안 절벽이라도 팔아야죠. 며칠 전에도 1200만 불에 사겠다는 제안이 있었거든요.”

첸의 일격에 우 대인이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거의 다 나가고 방엔 백 대인과 오베론, 노튼이 남았다. 오베론이 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런 일엔 별로 관심 없을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생각을 잘못했었군요.”

오베론은 첸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영감들 수다로 날밤을 샐 판이었는데 덕분에 회의도 빨리 끝나고 원하던 결과도 얻었으니 자기야 좋겠지. 하지만 녀석을 몇 번 더 만나 보면 그 생각도 바뀔 거다.

“시간을 담은 병의 행방은 아직 모르는 겁니까?”

첸의 물음에 오베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요?”

“당신들이 갖고 있을 가능성하고 비슷하겠죠.”

대체 시간을 담은 병이란 게 뭘까? 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걸로 봐서 시계 따위는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니콜라스는 내가 그걸 갖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 회의 날짜를 정하면 알려드리죠. 그때 봅시다.”

오베론이 먼저 나갔다. 노튼은 그냥 나갈까 첸에게 말을 걸까……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첸이 눈치를 채고 노튼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듯 노튼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유제이 형사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거, 별로 달갑지 않아요.”

노튼의 얘기가 예상 밖이었던지 첸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놀랐다. 갑자기 내 얘기가 나와서.

“제이를 아십니까?”

“잘 알진 못해요. 하지만 그 친구한테 상처 주는 짓은 안 했으면 좋겠군요.”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요?”

저런 뻔뻔한 놈. 경찰서로 꽃 보내고, 악단 보내고…… 그 결과로 맞아서 퉁퉁 부은 내 얼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고, 현재 경찰서에선 사상 초유의 왕따가 진행 중인데…… 뭐가 어째?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고생을 할 만큼 했어요. 더 이상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이용하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그냥…….”

첸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부탁 좀 합시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하는 처지라도 인정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돌아나가는 노튼의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얼굴을 마주친 것도 몇 번 안 되는데 저 사람이 내 걱정을 하고 있었네? 그것도 진심으로…….

모두 방에서 나가고 불도 꺼지고…… 사방이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라곤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와 그 불빛뿐이었다.

무장경비원을 뚫고 숨어 들어와서 중국 노인들과 연방특수경찰의 밀담을 엿듣는데 성공은 했지만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나? 제대로 이해한 거라곤 니콜라스를 뒤쫓는 떼거리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과 루크 첸이 나한테 치근덕거리는 게 니콜라스를 낚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뿐이었다.

망할 놈! 생각할수록 분통 터지네. 나는 경찰이니까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서 미끼가 필요하다면 그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조폭 두목까지 나를 미끼로 써먹어?

불쾌하다. 얼마나 불쾌하냐 하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다. 너무 흥분해서 지금 내 처지도 잊고 하마터면 문으로 나갈 뻔했다.

어렵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쯤이면 마당을 지키던 경비들도 모두 돌아갔을 테니까 나가기는 수월하겠지. 아 참, 내 신발…… 신발을 아까 난로 옆에 던져 놓고 잊고 있었다. 한 짝은 난로 바로 앞에 떨어져 있고 나머지 한 짝은…… 소파 아래 깊숙이 굴러 들어가 있었다.

일단 난로 옆에서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신발 한 짝을 먼저 신고, 나머지 한 짝을 끄집어내려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때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소파 뒤에 바싹 붙었다. 누군가 방에다 뭘 두고 갔다가 찾으러 온 건가? 아니면…… 사람이 있는 걸 알고 들어왔나?

하지만 이상했다. 문이 열린 건 분명한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워 봐도 마찬가지였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에 밀려서 문이 저절로 열린 걸까?

살펴볼까 싶어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는데 소파 등받이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뭐해?”

소스라치게 놀라서 총을 뽑았다. 첸이다. 귀신같은 놈…….

“알면서…… 뭘 물어?”

“어디서부터 들었어?”

“니가 중국 영감 등쳐서 떼돈 번 부분부터…….”

내 대꾸에 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등을 치다니…… 그건 아무 하자 없는 정상적인 계약이었어.”

“어쨌든!”

첸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건너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총구를 놈의 머리통에 겨눈 채 몸을 일으켰다.

“그럼 거의 다 들었다는 얘긴데…….”

놈이 중얼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총 좀 치워. 신경 쓰여.”

“너, 나한테 뭐 할 얘기 없어?”

내 추궁에 첸이 움찔했다.

“무슨…… 얘기?”

궁금한 게 산더미 같은데, 좀 전에 들었던 얘기가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았다. 조폭 주제에 왜 니콜라스는 쫓아다니는지, 그…… 천년조약의 기사단이란 게 뭔지, 기사단이란 것들이 떼로 몰려다니면서 니콜라스를 뒤쫓는데, 찾아내서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또…… 머시라? 덤불을 두드리면 새가 날아오른다고?

“내가 하나 묻자.”

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뭇거리는 틈에 첸이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뭐?”

“왜 쓸데없는 짓은 하고 그래? 여기까지 들어오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영감들한테 들키기라도 했으면 곱게 나가지 못했을 거야.”

고양이 쥐 생각 하시네!

“너 같은 악당을 감시하는 것도 경찰의 임무야.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잖아.”

저 자식이!

“총 치우라니까? 그러다 사람 잡겠다.”

놈이 옆으로 슬쩍 물러앉으며 비굴하게 실실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총 잡은 손이 달달 떨려서 언제 총알이 나갈지 나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덤불을 두드리면…… 새가 날아오른다면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그 얘긴 할 생각도 없었는데…….

첸의 얼굴에 살짝 곤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니가 이해해줬으면 해.”

“뭘 이해해?”

“그 영감들 앞에서 니가 진짜 좋아서 그런다고 할 수는 없잖아? 전부다 장인 친구들이란 말이야.”

이런 교활한 놈을 봤나?

“넌 처음부터 날 이용할 생각뿐이었어.”

“그렇지 않아.”

첸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대체 니가 니콜라스는 왜 찾아?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가까이 오지 마!”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놈은 내 말을 무시한 채 가까이 다가왔고, 내 손목을 비틀어서 총을 빼앗아 갔다.

“라두칸은 나타날 때가 되면 나타날 거고, 만날 시기가 되면 만나지겠지. 그자를 끌어내려고 널 이용하고 있는 거 아니야.”

“거짓말!”

“넌 라두칸한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자는 본래 인간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절벽에서 툭 밀쳐진 듯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니콜라스한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왜 그렇게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하지도 않은데 이용은 왜 해?”

“이용하는 거 아니라니까!!”

이 자식하고 이런 얘기 되풀이하는 것도 웃긴다.

“총이나 내놔.”

“그렇게 날 죽이고 싶어?”

“잃어버리면 시말서 써야 돼!”

이번엔 내가 놈의 손목을 비틀어서 총을 빼앗아왔다. 그리고 테라스로 나가려다가…… 정신 차리고 문으로 나왔다.

“오해라니까!”

첸이 따라 나오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열 받아서 놈의 발치에 총을 한방 갈겼다. 첸이 걸음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화낼 일도 없는데…… 이 상황에 맞는 뭔가 적당한 말이 있을 텐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머릿속이 이제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복잡하기만 했다. 첸과 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먼 곳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총소리 때문일 테지만, 신경도 안 쓰였다. 첸도 이젠 화가 나는지 허리에 손을 짚고 서서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도 놈을 노려봤다. 다음 순간, 내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갔다.

“너하곤 이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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