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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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약한 악당의 저택은 나지막한 야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호화스런 중국풍 궁전이었다. 입구부터 정원의 꾸밈이며 저택의 전면이 어찌나 요란한지 보다 놀라서 딸꾹질이 났다.

리무진은 고풍스런 중국풍 정문을 통과해서 전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정원과 반쯤 얼어붙은 연못을 지나 저택의 현관까지 미끄러져 들어갔고 턱시도 차림의 물 찬 제비 같은 관리인이 매너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차 문을 열어줬다.

“흐억…….”

차에서 뛰어내리자 관리인이 손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황급히 물러섰다.

“뭐야? 이건…….”

“그 새끼 어디 있어?”

다그치며 한 걸음 다가서자 남자가 두 걸음 더 물러섰다.

“여우 새끼 같은 니네 두목 말이야! 어디 있느냐고!”

냄새 때문인지 잠시 멍하던 남자의 눈살이 확 일그러졌다. 거의 동시에 현관 어귀를 서성이던 거구의 악당 3명이 나타나서 삽시간에 진로와 퇴로를 다 막아섰다.

“어으…… 이게 무슨 냄새야…….”

“이 새끼 뭐야?”

다행히 다들 다가오지는 않고 나를 노려만 봤다. 나름대로 예복을 빼입은 터라 옷을 버리기 싫은 눈치였다. 그중 제일 인상 험한 남자 하나가 선 자리에서 손을 뻗어서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말로 할 때 가라, 응?”

“니네 두목이 제발 와달라고 애걸복걸 통사정을 해서 왔다고!”

“근데 이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 들어와서 행패야? 세상 그만 살고 싶어?”

옆에 서 있던 몸집은 다소 작지만 인상이 칼 같이 매서운 남자가 손가락을 우두둑 꺾으며 사납게 나를 을렀다. 하지만 내가 ‘어쩔 건데?’ 하면서 한 걸음 내딛자 코를 틀어쥐고는 얼른 뒷걸음질을 쳤다.

“어떻게 된 거야? 자오?”

남자가 막 차에서 내린 자오에게 대뜸 따졌다.

“오는 길에 쓰레기통이라도 뒤졌어? 저런 건 어디서 주워왔어?”

“물러서. 회장님 손님이야.”

자오가 묵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하지만 남자가 어림없는 소리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스컹크 방귀보다 더 고약한 이 냄새까지 초대한 게 아니면 절대 못 물러 서. 안에 손님들 다 쫓아내려고 우리 모르게 무슨 작전 세웠어?”

남자가 세게 나오자 자오가 그건 그래…… 이러면서 고민에 빠졌다.

“그럼, 너 안에 들어가서 회장님 좀 모시고 나와 봐.”

“지금 안에 중요한 손님들 많이 계신데…… 쟤를 일단 보내고 며칠 있다 오라고 하면 안 돼?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파.”

“난 저 자식이랑 내내 같은 차를 타고 왔어!”

“그래서 너한테서도 냄새나.”

자오가 남자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점잖게…… 동시에 살벌하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들어가서 회장님 모시고 나와. 모가지 부러지기 싫으면 지금 당장!”

첸을 기다리는 동안 냄새가 고약하다는 죄로 현관 근처에서도 쫓겨났다. 현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비비 꼬인 향나무 근처에 서서 쫙 빼입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선남선녀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더 불쾌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와서 대접이 이게 뭐냐?

“그 새끼는 대체 속셈이 뭐야?”

하도 답답해서 아쉬운 대로 자오한테 따졌다.

“어떤 새끼?”

“당신네 두목 말이야!”

자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아나?”

“두목이잖아! 당신은 경호원이고. 그 자식 마누라보다 더 그 자식을 잘 알 거 아냐?”

“그건 그런데, 사생활 쪽은 도통 감을 못 잡겠어.”

“누가 그 자식 사생활이 궁금하대? 내가 알고 싶은 건…… 왜 날 이렇게 못살게 굴어? 당해도 알고나 당하자고! 이유가 뭐야? 그 새끼한테서 뭐 흘려들은 거라도 없어?”

내 절박한 추궁에 자오가 그다지 확신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게 아무래도 사생활 관련이 아닐까 싶거든.”

젠장!

이런 문제는 역시 본인하고 결판을 내야 된다. 마침 나를 초대한 바로 그놈이 현관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눈길이 딱 마주쳤다. 녀석은 짙은 회색 공단에 이상한 무늬가 그려진 중국 전통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호리낭창하니 예쁜 몸매에 비단 원피스까지 입고 있으니 갈데없는 한 마리 중국 제비다.

“이 재수 없는 자식!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웃으면서 살랑살랑 걸어오는 놈의 꼬락서니를 보니 쌓였던 화가 폭발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몇 걸음 떼어 놓지도 못한 채 자오한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워낙 거구에 힘이 세다 보니 어딘가 솔기 뜯어지는 소리가 두둑하고 들리면서 발이 땅에서 떴다. 하지만 입까지 틀어 막히진 않았으니까…… 할 말은 할 거다.

“대체 누구한테 스토킹이야? 나는 경찰이란 말이야!! 이 망할 놈아!”

다가오던 루크 첸의 표정이 딱 굳었다. 욕이 좀 심했나? 자오는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덜미를 잡은 걸로 모자라서 내 팔을 뒤로 확 꺾었다. 아윽…….

“니가…… 무슨 꿍꿍이로 나한테 이러는지는 모르겠는데……. 한번만 더…… 악…….”

자오가 팔을 더 세게 비틀었다. 조금만 더 꺾이면 팔이 빠져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자오한테 붙들려서 버둥거리는 걸 보고 한두 걸음 더 다가오던 첸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쥐었다.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냄새? 아…… 냄새…….

“지금 냄새가 문제야?”

저 얄미운 얼굴을 한대 갈겨버리고 싶지만 아무리 몸을 비틀어도 자오는 꿈쩍도 않았다. 온몸이 쇠사슬에 단단히 휘감긴 기분이었다.

“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설마…….”

첸이 자오를 엄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그 의심스런 눈길에 자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맹세코, 머리카락 한 올도 안 건드렸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꼴이던데요.”

첸이 한숨을 쉬었다.

“예쁘게 하고 오라고 리무진까지 보냈더니…….”

그 망할 리무진이랑 12인조 악단 생각에 다시 한 번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다.

“너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발뒤꿈치로 자오의 정강이를 힘껏 찍었다.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자오는 조금 움찔했을 뿐이었다. 그리곤 말 그대로 팔이 뽑혀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따라왔다. 첸이 손을 들어서 자오를 말렸다.

“놔줘.”

“하지만…… 덤빌 텐데요.”

“괜찮아. 놔줘.”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지 자오가 서너 걸음 뒤로 나를 끌고 가서는 천천히 비틀어 쥐고 있던 내 팔을 풀어줬다.

한동안 잡혀 있었더니 어깨가 마비된 것처럼 뻐근했다. 어쨌든 놓여났으니까 몸 좀 풀고, 저 자식을 그냥…….

따끔하게 손 좀 봐주려는 순간…… 첸이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먹을 막 내지르기 전에 녀석의 총구가 내 코끝에 닿았던 것이다.

“내 파티에 이런 냄새를 풍기면서 온 놈은 니가 처음이야.”

좀 전의 한가한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굉장히 차갑고 사나워 보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죽일래?”

“생각 중이야.”

첸이 생각에 잠겼다. 잠깐 심각한 얼굴로 뭔가 궁리를 하던 놈이 총을 겨눈 채 한 걸음 물러섰다. 꼭……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릴 것처럼 표정이 살벌했다.

“돌아서.”

헉…… 놀라서 머뭇거리자 자오가 내 어깨를 틀어잡고 사정없이 돌려 세웠다.

“너…… 내가 여기 온 거, 다른 짭새들도 다 봤어!”

“그러라고 마리아치랑 리무진을 보내서 정중하게 모셔온 거야.”

“야!”

나도 모르게 몸을 틀어 반쯤 돌아보니 첸은 한 손으론 여전히 나를 겨눈 채, 나머지 한쪽 소맷자락으론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걸어.”

진짜…… 화났네.

“나는 분명히 오기 싫다고 했어! 니가 멋대로…….”

“걸어!”

할 수 없이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자오가 내 등을 세게 떠밀기도 했고, 또…… 저 자식의 저런 목소리는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엄하고 위협적이라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저택의 오른쪽 끄트머리에서 첸이 왼쪽으로 돌라고 명령했다. 왼쪽으로 돌아서 조금 걷다 보니 후원 풀장이 나왔다. 풀장에 다 닿도록 녀석은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자리에 보석 같은 조약돌이 빙 둘러 박혀 있는 호사스런 풀 모서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계속 가.”

“어디로?”

발끈해서 돌아섰다. 앞은 물이고…… 지금은 늦은 겨울이었다. 청과물시장 쓰레기장에서 뒹구느라 여기저기 젖은 데다 계속 밖에 서 있어서 안 그래도 몸이 얼 것처럼 추운데, 이 자식이 나를 지금 물에 처박을 심산이다. 아무리 총 든 놈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지만 이건 말도 안 된다.

“앞으로 계속 가라고.”

“싫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대들자 첸이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내 코앞에서 총을 치웠다. 여전히 한 손으론 코를 틀어막은 채…….

예민한 척은…… 냄새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나는 널 최대한 정중하게 초대했어. 그런데 어떻게 이 꼴을 해가지고 나타나?”

“지금 ‘정중’이라고 했어?”

“꽃다발, 음유시인, 리무진, 그 이상 뭘 어떻게 더 해? 너…… 이건 완전히 날 물 먹이자는 수작이야. 그러니까 너도 물 좀 먹어.”

놈은 ‘정중’의 사전적인 의미를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여유가 없었다. 자기 말만 지껄이고 난 놈이 비단 원피스 자락을 걷어 올리더니 내 배를 발로 밀어버렸다.

다행히 물이 그렇게 차지는 않았다. 어쩐지 김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했더니…… 따뜻하지는 않아도 미지근한 정도는 됐다. 하지만 불시에 풀장에 처박혀서 물을 좀 먹었고, 기분이 말도 못하게 불쾌했다.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헐떡거리며 기침만 하고 있는데 놈이 물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지저분한 경찰도 꽤 많이 봤지만…… 너처럼 더러운 경찰은 처음 봤어.”

첸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놈을 잠시 노려보다가 별 수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물 밖으로 나를 끌어내는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루크 첸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나도 이제 이 자식을 두려워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그만큼 강했다.

“말장난 집어치워. 그럴 기분 아니야.”

“얼굴은 왜 이랬어?”

첸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내 턱을 잡아서 시선을 맞췄다. 이런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지금은 그저 보기보다 손이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만큼 추웠다. 몸도, 마음도…….

“그럴 일이 있었어.”

첸의 손을 얼굴에서 털어냈다.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었다. 아까 그 리무진 아직도 있으면 그거라도 타고…… 하지만 곧 돌아갈 곳이라곤 장기 투숙하고 있는 허름한 모텔뿐이란 사실이 생각났고, 내 기분이 이렇게 심란한 게 꼭 이 자식의 짓궂은 장난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왜 이렇게 우울해?”

“그냥 사는 게 힘들어.”

“위로해줄까?”

“웃기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첸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오에게 손짓을 했다.

“별채로 데려가. 씻기고, 뭐 좀 먹이고…… 쉬게 해. 난 접대해야 할 손님이 있어.”

“나 돌아갈 거야.”

첸이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손을 내저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용건을 말해줄게.”

후원 안쪽으로 10분이나 자오를 뒤따라갔다. 녀석이 드디어 용건을 털어놓겠다니, 그게 뭐든 일단 알고 싶었다. 목욕물이 있다면 더 좋고…… 하지만 가도 가도 빌어먹을 별채가 나오질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별채.”

자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산으로 끌고 가서 묻어버리는 거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 묻을 자리가 아직 좀 남아 있으니까.”

아기자기하게 다듬어진 정원도 거의 끝나고 풍경이 점점 야산으로 변해갈 무렵 밤안개가 깔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그 건너편에 날아갈 듯 선이 고운 별채의 기와지붕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헐벗은 겨울 나뭇가지와 옅은 안개 사이로 반쯤 언 연못과 극도로 이국적인 선을 가진 작고 아름다운 건물을 보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묘하냐 하면…… 마치 오래된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가 성가신 차이나 마피아 두목의 저택 뒷마당이 아니라 중국의 어느 산기슭인 것 같았다.

호사가 지나쳐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요란한 본채에서 10분 정도 걸어 들어온 것뿐인데…… 이곳은 마치 시간을 몇 백 년은 족히 거슬러 올라간 듯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여긴 본래 이렇게까지 아름다운 곳은 아닐 거다. 이건 달빛과 안개가 수백 겹으로 겹치고 엉켜서 지어낸 환각이었다. 그 환각에 취해서 숨 쉬는 것조차 잠시 잊었다.

“뭐해? 들어가.”

자오가 재촉하면서 내 등을 떠밀었다.

성질 건드리는 놈은 누구든 멱살을 잡아서 창밖으로 던져버린다는 위험한 남자 자오가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준비해준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면서…… 어쨌든 별채로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얼었던 몸이 한순간 풀리면서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울한 기분도 잠시 잊었다. 얼굴에 든 피멍도, 이 지독한 냄새도 앞으로 한주일은 족히 갈 거다.

자오가 욕조 발치에 놓여 있던 바구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집어 들어 뚜껑을 땄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은은한 꽃향기 같은 것이 삽시간에 욕실에 가득 찼다.

“그건 뭐야?”

“향유.”

대답과 동시에 자오가 0.5리터 정도 되어 보이는 꽃향기 진동하는 기름 한 병을 욕조에 몽땅 들이부었다.

“고맙긴 하지만…… 난 몸에서 꽃 냄새 나는 건 별로야.”

“뭐라도 그 썩는 냄새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런데, 향이 너무 강렬했다. 게다가 내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랑 섞여서 장미꽃 썩는 냄새가 되는 바람에…… 그 역한 냄새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슬슬 도졌다.

“이 저택엔 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별채만 해도 네 군데나 되지만 그중에서도 여긴 노회장님이 각별히 아끼시는 곳이야. 만들 때 돈도 엄청나게 들었고 실내 장식도 중국에서 직접 들여온 흑단하고 향나무로 했는데, 니 고약한 악취라도 배면 곤란해.”

“그렇게 곤란하면 애초에 끌고 오질 말든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말해. 갖다 줄 테니까.”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더운물 속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자오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냄새 다 빠질 때까지 물에서 나올 생각 말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사방이 다 고요했다. 이런 조용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때와 장소와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은 하나 좋을 게 없었지만, 이 적막감은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싶었다. 니콜라스, 비니, 발렌타인, 좀 전에 잡아서 유치장에 넣고 온 그 남자…… 모두 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내가 혼자라는 것도,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그럴 거라는 사실도…….

욕조에서 나와서 샤워를 한 시간이나 했다. 악취는 대강 없어진 것 같은데 짙은 꽃향기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어지럽고 약간 춥고…… 온몸이 쑤셨다. 온 종일 이놈, 저놈한테 두들겨 맞다가 하루가 다 갔다. 내일이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플 거다.

망할 꽃향기랑 온몸이 지끈거리는 통증 때문에 비틀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창가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자오의 뒤통수가 보였다. 아무 데나 좀 누웠으면 좋겠지만 그전에…….

“자오. 내 옷은 어쨌어?”

“옷은 왜?”

되물으며 나를 돌아본 남자는 자오가 아니었다. 내가 노려보자 루크 첸이 입 꼬리를 슬쩍 끌어 올리며 재수 없게 웃었다.

“그거라도 입어야지.”

“참아줘. 아까는 정말 기절할 뻔했어.”

“버렸어?”

“그랬겠지. 자오는 성격이 깔끔하거든.”

“바지 주머니에 지갑이랑 휴대폰이 있어. 서에 전화도 해야 된단 말이야!”

첸이 테이블에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걸로 해. 지갑은…… 물어 볼게.”

전화기를 낚아채서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맞은편 소파에 주저앉았다.

“됐으니까, 용건이나 말해.”

옷에 그려진 무늬가 뭔가 했더니…… 용이었다. 커다란 검은 용 한 마리가 첸의 몸을 둘러 감고 있는 형상이었다. 짙은 회색 바탕에 까만 무늬라 확 드러나진 않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첸에게 잘 어울렸다.

첸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눈동자가 마치 보석 같았다.

“너한테서 아직도 냄새 나.”

“멋대로 오라 가라 하지 마. 그럼 되잖아.”

“피곤해 보여.”

“피곤해.”

“그리고 또…… 뭐가 그렇게 슬퍼?”

“응?”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슬픈 거야. 나도 가끔은 그래.”

“헛소리 작작해. 넌 나한테 장난칠 만큼 쳤어.”

첸의 시선을 피해서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방안엔 볼거리가 많았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목재 조각, 벌겋게 달아오른 새까만 무쇠 난로의 정교한 돋을새김, 고서와 도자기가 보기 좋게 진열된 장식장…… 그러고 보니 테이블에 커다란 쟁반이 놓여 있고 은제 덮개가 덮여 있었다. 뭘까…… 이 자식이 꾸미는 짓은 뭐든지 꺼림칙했다. 사람 목이라도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슬그머니 겁이 났다.

“내가 너무 지나쳤나?”

“한참 지나쳤어.”

“사과할게.”

그게 진심이면 내가 니 동생이다. 진심이라곤 손톱만치도 안 느껴지는 무성의한 사과와 함께 녀석이 커다란 뚜껑을 들어 올렸다.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그동안 워낙 이상한 짓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하지만 다행히도 쟁반에 담긴 건 요한의 목이 아니라 잘 차려진 밤참이었다. 파티 음식을 이것저것 긁어 담았는지 종류도 다양하고 맛있어 보였다.

“좀 식었는데…… 데워오라고 할까?”

“됐어.”

새우, 버섯, 브로콜리를 한데 꿰어서 구운 요리를 집어서 한 입에 털어 넣었다. 뭐랄까…… 놀랄 정도로 맛이 좋았다. 그동안 녀석이 나한테 한 짓을 다 용서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까 풀장에 밀어 넣은 거 한번은 눈감아줘도 좋을 만큼…….

“좀 씹어 가면서 먹어.”

입안에 마구 쓸어 넣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수북하던 음식의 반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 말했던 그…… 용건이란 거나 말해봐.”

“천천히 하지 뭐. 먹던 거나 마저 먹어.”

“지금 말해. 듣고 갈 거야.”

내가 재촉하자 루크 첸이 갑자기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고자세를 취했다. 이쯤에서 말을 할까, 아니면 나를 더 가지고 놀까 머리 굴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그렇고…… 이 해산물 스프, 입안에서 녹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본 게 언제였더라, 생각해보려고 애썼지만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니 파트너한테서 전화가 몇 번 왔었어.”

순간,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파트너란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비니가…….”

첸이 고개를 저었다.

“새 파트너. 버릇없는 어린애처럼 되바라진 목소리였는데…… 니 걱정을 많이 하던데? 좀 전에도 전화가 왔었는데, 샤워 중이니까 좀 있다 다시 해보라고 했어.”

“뭐야?”

“샤워한다는 소리에 애가 좀 놀란 것 같긴 하더라.”

그 소리에 나도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그간 받았던 스트레스를 오늘은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욕 가운 하나 걸친 허술한 복장이긴 하지만, 저쪽도 원피스니까 피차 복장 불량하긴 마찬가지였다.

“너…….”

거의 날아서 놈을 덮쳤다. 머리가 지끈할 정도로 화가 났고, 밤새 주먹질을 해도 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놈에게 덤벼들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좀 전까지 루크 첸이 앉아 있던 긴 의자에 내가 길게 누워 있었다. 이 자식이 달려드는 나를 받아 안고는 몸을 한번 트는 걸로 이 꼴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서둘지 않아도…….”

놈이 가운 앞섶을 슬쩍 끌어내리더니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무슨 짓이야?”

밀어내려고 용을 썼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냐…….

“긴장할 거 없어. 부드럽게 할 테니까.”

그런 얘길 들으니까 온몸이 뻣뻣해질 정도로 심하게 긴장이 됐다. 거기다 감기 기운까지 겹쳐서 눈앞이 가물거리는데 이 망할 자식의 손이 가운 자락을 슬쩍 들추더니, 내 다리를 슬금슬금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비키란 말이야!”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라서 그랬는지, 제정신이 들었는지 놈이 일단 내 다리에서 손을 치웠다.

“싫다는 사람한테 이상한 짓 좀 하지 마!”

“싫다가도 좋아지는 게 마음이야. 특히나 인간의 마음이란 건 말이야…… 변덕이 심하잖아.”

“그럴 일 없어! 절대로!!”

첸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별로 심각해 보이는 얼굴도 아니고 결론도 순 엉터리였다.

“그럼…… 일단 한번 해보고, 그래도 싫으면 니 맘대로 해.”

“하긴 뭘 해? 이거 당장 안 놔?”

인생이 꼬이고 꼬이다가 이젠 비단 원피스 입은 놈한테 성폭행까지 당하나 싶어서 기분이 말도 못하게 암울해졌다. 망할 자식, 기운은 또 왜 이렇게 세냐? 아니, 이 자식이 센 게 아니라 내 컨디션이 너무 엉망이다. 기력이 보통만 됐어도 이런 짓…… 어림도 없었다.

“나는 내 품에 날아든 작은 새를 그냥 날려 보내진 않아.”

느끼한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놈이 다시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가 막혀서 뭐라 할 말이 없고…… 숨만 몰아쉬고 있자니 난데없이 어디선가 작은 새 소리가 들렸다. 첸의 새타령에 신경이 곤두서서 환청이 들리나 했는데…… 첸도 그 소리에 잠시 주춤했다. 전화벨 소리였다.

벨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내 손목을 움켜 쥔 첸의 손이 약간 느슨해졌다. 그 틈에 놈을 발로 밀어 차고 긴 의자에서 굴러 내려왔다.

“여, 여보세요?”

일단 전화를 받은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이 방엔 장식품뿐 아니라 무기로 쓸 만한 게 많았다. 벽에 걸린 저 중국 칼…… 진검이면 좋을 텐데.

「회장님은?」

자오였다. 되바라진 파트너 얘길 하기에 앤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첸이 걷어 채인 옆구리를 움켜쥐고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잽싸게 벽으로 다가가서 장검을 내렸다. 보기보다 무겁고…… 진검이었다.

“니네 회장, 완전히 맛이 갔어. 바꿔줄게 작별 인사나 해. 이제 금방 내 손에 죽을 테니까.”

검을 한쪽 옆구리에 끼고 집에서 뽑아냈다. 날을 어찌나 번쩍거리게 닦아놨는지 거울 대용으로 써도 될 정도였다. 오웬이 휘두르고 다니는 검처럼 살벌한 느낌은 없었지만 저 자식 목을 따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럴 건 없고, 니 파트너란 애가 자꾸 너 좀 바꾸라고 보채는데, 받을 수 있어?」

“여기 일 해결 좀 해놓고 내가 건다고 전해줘.”

「그 해결해야 할 일이란 게 침대 위에서 하는 일이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지금 받아봐. 이 자식, 1시간 전부터 5분에 한 번씩 전화질이야. 귀찮아 죽겠어.」

첸의 동향을 살피니 놈은 겁먹은 기색을 감추느라 공연히 실실 웃으며 방 끄트머리에 있는 미니바 쪽으로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앤디랑 전화로 수다 떨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지만 철딱서니 없는 파트너가 겁도 없이 자오를 귀찮게 하고 있다니 잠깐 시간을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바꿔 봐.”

「선배님! 대체 거기서 뭐 하세요?」

전화 연결 되자마자 앤디가 단도직입적으로 따지고 들었다.

“지금 좀 바빠.”

「중국 마피아 보스하고 수사관이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바쁜 건데요?」

“개인적인 일이야.”

내가 듣기에도 이게 제대로 된 설명 같지는 않지만…….

「선배님!!」

“서에 별 일 없는 거면, 내일 얘기하자.”

엔디가 숨을 몰아쉬었다. 숨소리만 들어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뭐 놀랄 만한 얘기가 있다고…….

「오늘 거기서 주무실 거예요?」

“상황 봐서.”

「…….」

첸이 바에서 위스키를 한 병 따더니 연달아 두 잔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곤 테이블에 턱을 받치고 나를 노려보는 중인데…… 그 무표정한 얼굴이 정말 예뻤다. 원피스도 잘 어울리고.

「저기, 실은요…….」

더 이상 용건은 없는 것 같아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데 앤디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서에 일이 좀 있었어요. 그 남자 말이에요…….」

그 남자라면 아마 제이크 브론테 얘기일 텐데…… 느낌이 안 좋다. 제이크 브론테를 경찰서로 연행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무슨 일인데?”

「죽었어요.」

듣는 순간엔 많이 놀랐다. 하지만 곧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치소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심장마비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그렇게 희귀한 병도 아닌데…… 기분이 이상해요.」

슬픔이 그 남자의 심장을 멎게 했다. 앤디가 허둥대는 건 당연했다. 흔한 일이 아니니까.

“잊어버려.”

「멀쩡하던 사람이 자살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죽고, 마피아가 경찰한테 악단이랑 리무진을 보내고, 선배님은 거기 가서 한 시간도 넘게 샤워 중이고…… 여긴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아요. 잘할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집에 가서 한잠 푹 자. 진로 상담은 내일 하자.”

「선배님, 그 악당 두목이랑 진짜 사귀시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요즘 들어서는 그놈이 쿠간에서 제일 나쁜 놈이라던데요. 물론 선배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고 싶진 않지만요…… 찾아보면 괜찮은 남자도 많을 텐데 왜 하필 그런 놈이에요?」

“잠이나 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전화기를 내려놓고 들었던 검도 바닥에 던져버렸다. 피곤하고 만사가 귀찮았다.

“왜 그래?”

검을 바닥에 팽개치고 좀 전에 심각한 성추행을 당했던 의자에 주저앉자 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 거 없어.”

“새 파트너가 비니 몬티첼리만큼 사고뭉치야?”

“그렇지는 않아.”

“하긴…… 그러기 쉽지 않지.”

첸이 다가오더니 얼음 띄운 위스키 한 잔을 내밀었다.

“한 잔 할래?”

“고마워.”

술맛도 모르겠다. 독한 술 한 잔이 속에 들어가자 몸만 더 노곤했다. 빈 잔을 내려놓고 맥없이 소파에 기대앉았다. 피곤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첸이 내 가운을 맘 놓고 풀어헤쳤다.

“심하네. 대체 어떤 놈한테 당한 거야?”

옆구리와 가슴 언저리에 시뻘건 피멍을 본 첸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의 멍은 발렌타인한테 쥐어 박힌 흔적이었다. 그 팔꿈치에 얻어맞았을 때 정신이 나가는 것 같더라니…….

“알아서 뭐하게?”

가운을 여며서 꽁꽁 묶으며 쏘아붙였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니가 날 체포할 테니까…… 그냥 적당히 만져줄까 싶어서.”

말은 고맙지만…….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죽어가.”

첸이 그러냐…… 하는 얼굴로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요즘 들어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 죄다 힘들고 맘에 안 든다. 앤디가 풀 죽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앞으로 닥칠 안 좋은 일이 또 뭐가 남았나 생각하다가 불현듯 비니 얼굴이 떠올랐다. 불길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머리를 세게 가로저었다. 아우…… 머리야.

“의사라도 불러줄까?”

“됐어. 그보다…… 침실이 어디야?”

“침실?”

루크 첸의 별채에서 하룻밤 신세질 예정은 전혀 없었지만, 지금은 장소 따질 여유가 없었다. 빨리 일진 사나운 하루를 끝내버리자. 어쨌든 내일은 오늘만큼 나쁘지는 않을 거다. 계속 이러면 나는 못 산다.

이 거실에 문이라곤 두 개뿐이었다. 저쪽은 욕실이었으니까…… 당연히 침실일 거라고 생각하며 멋들어지게 휘어진 소나무가 조각되어 있는 문을 열었더니…… 찬바람 쌩하니 부는 바깥이었다. 침실이 없나? 뭐, 저 푹신한 소파도 침대 대용으론 손색이 없다.

“이쪽이야.”

첸이 나무 조각으로 된 벽으로 다가가더니 벽을 한쪽으로 밀었다. 이제 보니 벽이 아니라 문이었고, 안쪽에 침실이 있었다. 침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별채의 용도를 대강 알 것 같았다.

“맘에 들어?”

“나 지금 기분 되게 안 좋으니까 허튼 짓 하지 마.”

슬금슬금 다가오던 첸이 안타까운 얼굴로 걸음을 멈췄다.

“꼭 그래야겠어? 나 테크닉은 끝내주는데…….”

남은 기운을 모두 모아서 놈을 노려봤다.

“아침에 깨워. 일곱 시쯤.”

중국 황제의 후궁 같은 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편하게 잘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보려고 일단 누웠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낌새가 이상해서 눈을 떠보니 루크 첸이 아직도 머리맡에 서 있었다.

“나갈 때 불 좀 꺼주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깜빡 잊은 게 있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렇게 중요한 얘긴 아니었어. 대신 진짜 중요한 용건이 생각났는데, 해도 될까?”

“해. 그거 들으려고 온 거니까.”

첸의 용건은 그렇게 길진 않았지만 무례하고 섹시했다. 이 자식, 사람이 방심하고 있는 틈에 이런 짓을…….

“너…….”

화가 난 것처럼 놈을 노려봤지만 사실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다정한 입맞춤이 대체 얼마만이었을까? 놈의 얼굴에도 이젠 장난기가 없었다.

“이게 용건이야. 잘 자.”

녀석이 몸을 일으켰고 바로 불을 껐다. 다행이다. 어둠 속의 검은 윤곽을 멍하니 쳐다보는 내 얼굴을 녀석은 못 봤을 테니까…….

누군가 어깨를 뒤흔들었다.

“그만 좀 일어나 봐!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또 다른 놈이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자게 좀 두세요. 불쌍하잖아요. 얼굴은 부어서 두 배고…… 식은 땀 흘리는 거 안 보이세요?”

“시간이 몇 시냐고? 지금!”

“몇 시든 무슨 상관이에요?”

“무단결근인데 왜 상관이 없어? 리즐 시에선 그렇게 편하게 근무 했어?”

“어차피 일하기 글렀잖아요! 그냥 잠이나 푹 자게 두자고요!”

말은 고마운데, 귓전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자란 말이냐?

태어나서 이렇게 편하게 자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잠이 달았다. 잠에서 깨는 게 정말 아쉽고, 할 수만 있다면 일주일이라도 이 자세로 자고 싶었다. 하지만 반장이랑 앤디가 머리맡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더 버틸 도리가 없었다.

“좀 어때요? 괜찮아요?”

눈을 떴는데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어쨌든 이건 쥬드 목소리였다. 괜찮다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목이 쉬어서…….

“봐요. 되게 아프다니까…….”

걱정하면서 다가오는 부연 형체를 옆에 있던 시커먼 형체가 확 떠다밀었다.

“금방 쓰러져 죽을 정도로 아픈 거 아니면 당장 일어나! 넌 현직 경찰관이야! 경찰이 어떻게 이런 데서 잠을 자?”

여기가 어딘데? 아직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거무스름한 벽과 붉은 커튼의 대비가 어두우면서도 강렬하다는 느낌은 드는데…… 뵈는 게 없으니 알 수가 있나? 그러니까 내가 어제…….

“너…… 너, 뭐야? 왜 다 벗고 있어? 옷은?”

어제 일을 더듬으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데, 반장이 걷잡을 수 없이 말을 더듬었다. 반장에게 떠밀려서 저만치 물러났던 앤디가 다시 다가왔다.

“왜 벗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보시는 거예요?”

듣고 보니 뭔가 허전한 느낌은 있는데 지금 그런 사소한 상황에 신경 쓸 만큼 내 상태가 양호하질 않았다.

“눈이 안 보여요?”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쥬드의 손이 하얀 막을 사이에 둔 것처럼 모호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격투의 와중에 머리를 몇 번인가 세게 부딪쳤는데 그 때문일까? 아니면…… 눈에 뭐가 들어갔나 싶어서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비비다가 앓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얼굴이 너무 아파서…….

얼굴이 못 견딜 정도로 욱신거렸다. 통증과 함께 어제 오후 청과물시장 쓰레기장에서의 그 리얼한 난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본래 그렇게 한바탕 몸싸움을 하고 나면 그 당시보다 다음날 더 아프고 힘들다. 의식을 하고 나니까 온몸이 안 아픈 데 없이 다 쑤셨다. 잠이나 계속 잘 걸…… 웬수들!

“누가 보면 쿠간에서 일어나는 강력 사건은 너 혼자 해결하고 다니는 줄 알겠다.”

반장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는 사이 쥬드가 물에 적신 차가운 수건을 눈에 대줬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별난 여자긴 하지만 역시 남자들보다는 섬세하다.

찬 물수건으로 찜질을 한 덕분인지 몇 분이 지나자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이 돌아왔다. 하지만 금방 눈앞이 다시 캄캄해졌다. 이 벌겋고, 화려하고 기분 나쁜 방이 누구네 집 침실인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여긴…… 뭐 하러 오셨어요?”

어제 분명히 가운을 입은 채 잤는데, 어느 놈이 벗겨가버린 걸까? 난감하고 쪽 팔려서 목소리가 점점 기어 들어갔다.

“어제 그렇게 리무진에 냉큼 올라탄 후에 연락도 없고 출근도 안 하는데, 어떻게 안 와?”

“그래도…… 반장님은 안 오셔도 되는데…….”

“그럼, 동네 지리도 모르는 애를 혼자 보내란 말이야? 이 악당 소굴에? 리즐 시 나스카 청장은 중앙정부에 연줄도 많은 마당발이라고!”

쪽팔려서 얼굴이 뜨끈뜨끈했다. 온 얼굴에 피멍이 들어 있을 테니 아무도 알아보진 못하겠지만. 중국 마피아 보스의 후원 별채, 수상쩍은 침실에서 다 벗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으니까 변명도 구차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런 꼴을 직속상관하고 핏덩이나 다를 바 없는 어린 파트너한테 고스란히 들키고 말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지 모르겠다.

“그놈이 그렇게 좋으면 사직서를 내라. 응? 내가 급행으로 수리해줄게.”

반장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말씀이 심하시네.

“좋은 게 아니라…….”

문득 이 난감한 사태가 루크 첸, 그 자식의 연출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자식이 지금까지 나한테 한 짓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어디선가 이 꼴을 지켜보면서 히죽거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쾌한 생각이 들어서 시야를 좀 넓혀서 방안을 빙 둘러봤다. 이제 보니 저만큼 떨어진 문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덩치로 봐서 첸은 아닌 것 같고…… 자오였다.

“좋은 게 아니면 겁탈이라도 당했단 소리야?”

반장이 점점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고 해봐야 비웃을 테고…… 정말 아무 일이 없었는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다행히 쥬드가 반장을 뒤로 끌어냈다.

“얘기는 가면서 하고…… 제이, 옷 입고 나와요.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아야 할 것 같고, 또…….”

쥬드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동시에 반장의 흥분이 싹 가라앉아버린 게 수상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야?”

“가면서 얘기해요.”

쥬드가 반장과 앤디를 데리고 나간 사이에 자오가 옷을 가져다 줬다. 상표도 안 뗀 새 옷이었다. 지퍼도 빡빡하고 단추 채우기도 성가셨다.

“왜 그래?”

자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뭘?”

“꼴이 엉망이잖아. 옷도 제대로 못 입어?”

나를 침대에 밀어 앉히고 자오가 셔츠 단추를 다시 채웠다. 앉아 있자니 옆구리가 아파서 자오의 어깨에 잠시 머리를 기댔다.

“힘들면 그냥 여기서 쉬어. 의사를 불러줄 테니까.”

“아픈 건 견딜 만해.”

“그럼, 달리 견디기 힘든 일이라도 있어?”

“아니, 아직은…….”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너 있잖아…….”

자오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응?”

“우리 회장님이 맘에 없는 게 확실해?”

뜬금없다. 이런 얘기 할 기분도 아니고…….

“확실해. 그런데 왜?”

“그런 거면 회장님 앞에선 이런 표정 짓지 마. 진짜 어려워질지도 몰라.”

표정이 뭐 어떤가 싶어서 벽에 붙어 있는 거울을 봤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터지고 멍든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선배님…… 진짜 예쁘시네요.”

자오가 걸쳐주는 대로 입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앤디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까불었다.

“너 변태냐?”

아직도 눈이 잘 안 보였다. 하지만 방향 제대로 잡아서 앤디를 노려봤다.

“얼굴 말고…… 옷이요.”

앤디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서며 둘러댔다.

후원에서 본채까지 가는 길이 어젯밤보다 두 배는 더 길게 느껴졌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무거웠다. 말 한마디 없이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비니가 잘못된 거면…….

“제대로 좀 걸어! 어제 뭔 일 있었는지 꼭 그렇게 티를 내야 돼?”

잠시 말이 없던 반장이 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짜증이 확 밀려왔다.

“어쩌라고요? 반장님이 몰라서 그렇지, 그 남자 기운이 장난 아니었다고요!”

“경사났네. 꽃 보내, 악단 보내, 리무진 보내, 거기다 힘까지 좋아…… 아예 그놈한테 시집을 가라.”

이 양반이 근데…….

“그 자식 말고, 제이크 브론테 말이에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반장이 좀 전에 내게 막말했던 것에 대한 반성도 별로 없는 얼굴로 내 무릎에 묵직한 신문 뭉치를 던졌다.

“뭐에요? 이게?”

혹시 부고란에 불길한 소식이라도 있을까 봐 겁이 나서 얼른 신문을 앞자리에 앉은 앤디한테 넘겼다. 앤디가 뒤적뒤적 몇 장을 넘기더니 뭔가를 찾아내서 다시 나한테 넘겼다.

“선배님, 이제 완전 떴어요.”

[러브 이벤트]

주말 오후 경찰서 앞길에서 로맨틱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말이 좋아 문화면이지, 보통 영화배우나 명사들의 가십이 주로 실리는 지면에 어제 저녁 경찰서 앞 풍경과 내 사진이 제법 크게 실렸다. 혹시 이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신문에 얼굴이 나버렸으니까 당분간 잠복근무는 힘들 거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가십은 쉽게 안 잊는다.

신문을 접어서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로 두고두고 시달리겠지만 예상했던 최악의 소식이 아니라서 일단은 마음이 놓였다.

“좋냐? 신문에 나서?”

잠깐 잠잠하던 반장이 퉁명스럽게 시비를 걸었다.

“내가…… 말 꺼내기도 민망하고 어이가 없어서 이런 소리 안 하려고 했는데, 대체 그 악당 놈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안 좋아요.”

“만나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하게 만나든지, 뭐 그렇게 떳떳한 사이라고 동네방네 광고를 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입장 곤란한지 알아? 너 때문에 서장님이 어제 조퇴를 하고 집에 들어가셨어!”

“죄송해요.”

반장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요번 잔소리는 상당히 길 거다.

“그게 다야?”

“그 자식하곤 깨끗이 정리하고 헤어질게요.”

반장이 발끈해서 내 옷깃을 틀어잡았다.

“이게 지금 농담 몇 마디 지껄이고 넘어갈 일이야?”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데 왜 신문을 보고도 반응이 그 정도야? 창피하지도 않아?”

물론 창피하다. 나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전 비니가…….”

비니 이름이 나오자마자 반장이 틀어잡았던 멱살을 놓고 후다닥 물러앉았다.

갑자기 차안 분위기가 숙연해졌고 나는 불안해서 숨이 막혔다.

“아까 안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서…… 비니가…… 혹시…….”

이쯤 되면 누구라도 나서서 비니는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켜야 되는데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반장은 우울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고 앤디는 앞차 번호판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설마 비니가…….”

아까부터 입 꼭 다물고 운전만 하던 쥬드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사실은 많이 안 좋아요. 제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병원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호흡, 체온, 심장의 박동…… 모든 것이 좋지 않았다. 비니의 바이탈 사인은 이제 너무 약해서 겐지 클리닉의 정밀한 측정기조차 비니가 살아 있다는 신호를 간간히 놓쳤다. 어젯밤에 한번, 새벽에 한번…… 비니는 공식적으로 심장 박동이 멎었었다.

의사들은 기계가 고장이었던 건지, 실제로 비니의 심장이 멎었던 건지는 확실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입원한 이후로 비니의 심장 박동은 천천히 늦춰지고 있었고, 체온도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중환자실 침대 위에 호스와 전선에 휘 감긴 채 누워 있는 비니의 얼굴은 이미 시체나 다름없었다. 지난번에 봤을 땐 이렇지 않았는데…… 창백하고, 건드리면 부서져버릴 것처럼 굳어 있었다. 비니는 죽어가고 있었다.

복도로 나와서 가까운 빈 의자에 앉았다. 앉고 보니 한쪽은 비니 고모 중 한 명이었고, 한쪽은 바바라 소사였다. 비니 고모는 쉼 없이 훌쩍거렸고, 바바라는 훌쩍거리진 않았지만 울 만큼 울었는지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바바라의 충혈된 눈을 보고 있자니 이 악몽 같은 현실이 더 실감났다. 징크스는 살인적이었지만 악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내 오랜 친구, 비니를 이제 곧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이…….

의사들도 처음 겪는 경우라 전혀 손을 못 쓰고 있다는 둥, 부친의 사업이나 물려받도록 했어야지 경찰관 같은 별난 일을 하게 두는 게 아니었다는 둥…… 비니 일가의 한숨 섞인 푸념이 귓전에 오락가락했다. 비니 어머니는 밤새 병상을 지키다가 탈진해서 맞은편 병실에 누워 있었고, 프란시스 몬티첼리도 뒤늦게 사실을 알고 비니를 보고 갔는데…… 그 후 몸 상태가 악화돼서 의사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반장인데 눈앞이 흐릿해서 얼른 알아보질 못했다.

“나랑 크롬웰은 서에 들어가 봐야 돼. 앤디는 두고 갈 테니까…… 너도 치료 받고 좀 쉬어. 진단서 끊어 오면 병결로 처리해줄게.”

“예.”

“사흘 이상은 안 돼.”

“예…….”

“얼굴 좀 펴. 비니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란 건 너도 잘 알잖아?”

나는…… 그런 어설픈 희망으로 자신을 속이는 부질없는 짓에 이제 지쳤다.

“예…….”

오닐을 잃고 나서 한동안 파트너하고 원만하게 지내기가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다시는 누구하고도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었다. 친구를 눈앞에서 잃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비니는…… 경찰학교 동기생이기도 했지만, 말 그대로 만만치 않은 놈이라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실수였을까? 부상자가 즐비하게 나오는 대규모 조직범죄 소탕 작전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녀석은 거의 다치는 일이 없었다. 비니는 징크스만큼이나 운도 막강한 놈이었다. 저런 모습으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비니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반장과 쥬드가 무거운 발소리만 남기고 떠나버린 후에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엔 마비된 듯 멍하던 가슴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곧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왔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렇게 비니를 잃다니…….

“무슨 일이야? 너…… 괜찮아?”

어떤 따뜻한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감당하기 힘든 절망감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며 애처럼 울고 있는 내 앞에 꿇어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이 내 주변에 있었던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상대가 누군지 확인했다. 뭐야…… 루크 첸이잖아…….

“왜 이렇게 울어?”

“비니가…….”

말 대신 신음소리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첸이 나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뿌리칠 기운도 없어서 그냥 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눈물만 쏟았다.

“왜? 많이 안 좋아?”

“죽어가.”

첸을 끌어안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지금은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기댈 어깨가 있다면 기댈 수밖에…….

하지만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복도 분위기는 별로 좋지 않았다. 특히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바바라는……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싶은 표정으로 나랑 루크 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외 비니 소식을 듣고 시간 내서 잠시 들른 경찰 동료 몇 명, 몬티첼리 패밀리 다수, 그리고 앤디…….

“정말 유감이야. 진심으로…… 안 됐어.”

루크 첸이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주며 나를 위로했다. 나쁜 자식…… 하필 이런 때 왜 이렇게 다정한 거냐?

“잠깐이라도 눕는 게 낫겠다. 빈 병실이라도 찾아볼까?”

“괜찮아.”

“몸 상태도 지난밤보다 더 안 좋은 것 같고, 그러는 편이 울기도 더 편할 거야.”

지난 몇 년 간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살아서는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 정신병원 지하 병동에 수감됐고, 위니와 헤어졌고, 위니를 잃었다. 그때마다 온몸에 금이 가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했고, 조금씩 부서져 내리면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시간이 약이 될 거라는 말을 믿으려고 애썼지만 어떤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았다.

“마음이…… 산산조각 난 기분이야. 이젠 두 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비니 몬티첼리하고 그렇게까지 친한 줄은 몰랐어.”

간호사가 안내해준 작은 병실에 이제는 첸과 단 둘이었다.

“녀석이 가버리면 난 혼자야.”

“넌 절대 혼자 남지 않을 거야. 내가 있잖아.”

첸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어젯밤 했던 것만큼이나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음산한 바람처럼…… 교활한 놈.

“너…… 비니가 일어날 거라고 했잖아? 1년이든, 2년이든 어쨌든, 언젠가는 일어날 것처럼 말했었잖아?”

“나도 놀랐어. 비니 몬티첼리처럼 강한 마법사는 여간한 일로는 소멸되지 않으니까. 하긴 그때도…….”

첸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그때도…… 뭐?”

“그만두자. 해봐야 소용없는 얘기야.”

있는 기운을 다 짜내서 첸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말해! 뭐야?”

“어차피 넌 내 말은 믿지도 않잖아.”

“뭐냐고?”

비니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다. 말이 되던 안 되던 그런 건 상관없다.

“방법이 있다면…… 말해줘. 부탁이야.”

“말해줄 수는 있지만, 그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내가 어지간히 딱해 보였는지 첸의 눈동자에 측은함이 가득했다. 이 자식의 말과 행동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헛갈릴 때가 많지만, 지금 이 눈동자에는 거짓이 없었다. 첸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사바델이 1년 넘게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건 사실이야. 하지만 혼자 힘으로 일어난 건 아니고…… 깨달은 종족과 교분이 있던 아이스란 녀석이 기린을 데려와서 사바델을 깨웠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눈물도 대강 훔치고, 첸이 가져다 준 찬물도 한잔 마셨다. 아까보다는 훨씬 진정이 된 상태에서 첸을 졸라서 좀 전에 했던 얘기를 한 번 더 들었지만 아무래도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기린을 그 골짜기에서 끌어내는 게 아이스한테도 쉽지는 않았을 거야. 아주 괴팍한 짐승이거든.”

기린이라 하기에 순간적으로 전에 비니랑 같이 정신병원에 데려다 줬던 그 이상한 남자들이 생각났었다. 게다가 아이스라면…… 오웬의 옛날 이름으로 마리우스가 오웬을 그 이름으로 불렀다. 오웬도 용하고 기린을 찾는다면서 그 두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고…… 이만하면 대강 아귀가 맞아떨어지지만 첸의 설명은 또 뭔가 달랐다. 짐승이라니?

“대체 기린이 뭔데?”

“글쎄…….”

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털 가진 모든 짐승의 왕이라고도 하고, 왕의 짐승이라고도 해. 기린에 올라타면 세상을 얻는다고도 하고…… 병을 고치는 재주도 있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기린은 어지간해서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첸은 아까부터 계속 이렇게 뜬 구름 잡는 소리만 지껄였다.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구체적인 인적 사항이다.

“어떻게 생겼는지 혹시 알아?”

“이것저것 잡탕으로 섞였지만…… 역시 말하고 제일 비슷하겠지.”

낙심해서 이불을 덮어쓰고 돌아누웠다. 애초에 기대를 가진 게 잘못이긴 하지만…… 말이라니. 비니는 지금 다 죽어가는 데, 말 한 마리 끌고 와서 어디다 써먹으라는 거냐? 또 눈물이 나올 것처럼 코끝이 시큰한데 첸이 나를 돌아 눕히고 이불을 끌어내렸다. 그리곤 내 눈가에 흐른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줬다.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어.”

“그…… 오컴처럼?”

“그보다는 훨씬 예쁘지.”

보통 때라면 이런 정신 나간 얘기 따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쿠간에는 보도 듣도 못한 괴물이 나타나서 날뛰었고, 멀쩡하던 동네 하나가 눈앞에서 한 순간에 자갈밭으로 변해버렸다. 더구나 비니는 언제 숨이 떨어질지 모르는 판국이다. 이런 상황에선 못 믿을 일 따위는 없다. 비니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어딜 가려고?”

내가 끙끙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내려오자 첸이 급히 나를 붙들었다.

“기린 찾으러.”

“기린은 이 근처에 안 살아.”

“가까운 데 아는 기린이 하나 있어.”

첸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열도 있을 거다. 사람으로 변신하는 말 얘기에 마음이 동해서 지금 시립 정신병원에 가보려는 참이니까.

침대 아래 벗어 놓은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방을 나가려는 데 첸이 나를 번쩍 들어서 다시 침대에 밀어 넣었다.

“진정해. 이 꼴을 해가지고 어딜 간다는 거야?”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내리 누르며 첸이 말했다. 완전 명령조였다.

“어떻게 진정해? 비니가 죽어가! 나는 이렇게 누워서 의사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리진 않을 거야!”

“이대로는 나가봐야 병원 밖으로도 못 나가고 주저앉을 거야. 게다가 아는 기린이라니…… 동물원에라도 가볼 생각이야? 내가 말하는 기린은 목 길고 맹하게 생긴 그 동물이 아니야.”

기력이 떨어지긴 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첸을 밀어내기가 힘들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녀석이 있단 말이야!”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용이니, 기린이니 하는 이상한 동물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돌아다닌다는 게…… 하지만 생각해보면 요즘 들어 일어나는 일이 모두 이상한 일뿐인데다 사람은 결국 믿고 싶은 걸 믿는다.

처음엔 초겨울에 마주쳤던 그 젊은 남자가 진짜 기린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시립 정신병원 담장이 멀찍이 보일 즈음엔 그 남자가 정말 영험한 능력을 가진 신비로운 동물이라서 비니를 곧 깨워줄지 모른다는 바람이 확신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첸이 슬그머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움켜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 자식을 달고 용과 기린을 만나러 갈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자기도 꼭 기린을 봐야겠다면서 기어이 나를 이 시커먼 벤츠에 밀어 넣는 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내 컨디션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이 자식한테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진 않았을 텐데…….

“애초에 기대를 갖게 만든 게 누구야?”

“기대를 가지라고 해준 얘기는 아니었어.”

첸이 내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킥킥 웃었다.

“기린하고 용을 속여서 정신병원에 밀어 넣다니…… 깨달은 종족에게 그런 짓 할 수 있는 건 온 세상에서 니네들뿐일 거야.”

이 자식한테 지난겨울 초입에 용하고 기린을 만난 자초지종 따위 시시콜콜 늘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급하고 이 자식은 꼼짝도 못하게 하고…… 그 얘기라도 안 했으면 아직도 겐지 클리닉의 1인용 병실에서 가니 못 가니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을 거다.

사소한 오해로 용과 기린을 정신병원에 데려다 준 대목에서 첸은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웃었다. 남은 애가 타서 죽을 것 같은데 떼굴떼굴 굴러다니면서 웃는 꼴을 보자니 부아가 치밀었지만…… 곧 본래 나쁜 놈이라는 사실이 생각나서 그냥 참았다.

“화가 많이 났을까?”

“아마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에 오웬이랑 갔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꺼내주는 건데…….

나야 아무런 힘도 없지만 비니는 맘만 먹으면 연고 없는 환자 두 명 정도 병원에서 꺼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엉뚱한 사람들을 입원시킨 건 맞지만 그들 역시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환자들이란 얘기에 그냥 나온 게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그 운수 사나운 애들이 정말 영수靈獸들일까?”

첸이 아무래도 미덥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본인들 입으로 그렇게 말했고, 오웬도 두 사람을 찾고 있었어.”

“깨달은 종족이 인간의 도시로 나오는 일은 드문데…….”

두 사람이 라두칸을 찾는다는 얘기는 안 했다.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정신병원엔 대체 무슨 일로 가는 건데요?”

범죄 조직 보스의 차에 타고 있다는 거부감 때문에 빳빳하게 굳어서 한 구석에 박혀 있던 앤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나볼 사람이 있어.”

앤디한테는 용과 기린에 관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경찰학교 우등생에게 용이니 기린이니 떠들어봐야 내 입만 아프고…… 그리고 비니와 내가 실수로 엉뚱한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가둔 걸 알면 저 어린것이 나를 얼마나 만만히 볼까 걱정도 됐다. 사실 여기까지 데리고 올 마음도 없었지만 파트너 자격 운운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걸 떼어낼 도리가 없었다. 파커가 빨리 복귀해서 쟤를 찾아가야 할 텐데…….

앤디는 아직도 우거지상이었다. 대답이 너무 간단했나? 아니면…… 잠깐 생각하다가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첸에게 기대 앉아 있었던 건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었다. 처음엔 중심을 잡고 똑바로 앉아 있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기댈 곳이 필요하다 보니…… 첸이 앤디를 보고 히죽 웃더니 보란 듯이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한대 갈겨버리고 싶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정말 이해를 못하겠어요.”

앤디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겐지 클리닉에서 시립 정신병원은 멀지 않았다. 가는 길도 순조로웠고…… 하지만 용과 기린을 면회하는 데는 생각지 않은 작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구라고요?”

간호사가 되물었다.

“용하고…… 기린이요.”

경찰배지를 들이밀며 애원조로 한 번 더 이름을 댔다. 옆에서 루크 첸이 키득키득 웃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환자는 없는데요.”

“두 달 전에 나랑 파트너가 데려온 사람들인데…… 둘 다 키가 이만하고, 하나는 아무렇게나 자른 짙은 갈색머리고…… 하나는 굉장히 긴 은발에 은색 눈동자에…….”

이젠 앤디도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름은 모르지만…… 눈에 띌 텐데요.”

간호사가 고개를 저었다.

“입원 환자만 수백 명이에요. 이름을 모르면 도와드릴 수 없어요.”

한숨이 나왔다. 요즘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직접 인계까지 하고도 이름을 몰라서 찾을 수가 없다니…… 한심해서 너스 스테이션에 머리를 두어 번 박았다.

“진정해.”

첸이 내 뒷덜미를 움켜잡더니 로비 한 구석에 있는 빈 의자로 끌고 갔다.

“이해할 수가 없어. 걔네들은 눈에 띈다고! 백 미터 밖에서 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은 니가 그래.”

첸이 나를 의자에 눌러 앉혔다.

“영수들은 기색을 감추기로 작정하면 눈에 잘 안 띄어. 인간계에 나온 지 오래 되면 더 그렇고…… 아직 여기 있는 건 확실해?”

전에 오웬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용이고, 기린이니까 병원 정도야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그 사이에 둘이 병원을 나가버린 거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지금으로선 기린이 유일한 희망인데…… 머리 한쪽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멍하고,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것도…….

그러다 문득,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두 사람의 행방을 확실히 알 만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방금 맞은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게 눈에 딱 띄었던 것이다. 비니랑 만담 콤비로 호흡이 기가 막히던 그 의사였다.

“전에 데려왔던 두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다짜고짜 붙들어 세우자 의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신지…….”

“용하고 기린 말이에요! 어디 있느냐고요?”

코앞에 경찰배지를 들이밀자 의사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 보더니 좀 전보다 더 놀랐다.

“얼굴이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

얼굴 망가진 얘기를 하자면 제이크 브론테 사건을 다 풀어놔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의사의 질문은 무시하고 다시 용과 기린의 소재를 물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용하고…… 기린이라니요?”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이 내 취향이 아닌데 이 사람까지 이렇게 나오니까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가 데려왔던 남자들 말이에요! 하나는 푸른 용이고, 하나는 히말라야에서 온 기린이라고 해서 그 길로 입원시키고…… 다음날 도로 데리러왔을 때는 퇴원 허가를 내줄 권한이 없다면서 그냥 돌려보냈었잖아요!”

울화통이 터져서 하마터면 의사를 한대 갈길 뻔했다. 첸과 앤디가 말리지 않았으면 진짜로 때렸을 거다.

“잘 기억해봐요. 의사 선생. 이 친구가 생각난다면 그때 일도 완전히 잊은 건 아닐 테니까…….”

첸이 나를 옆으로 끌어내고 신사적으로 의사를 다그쳤다.

“이 친구랑 파트너가 데리고 왔던 두 사람, 그날 밤…….”

“그야 물론 기억하죠. 그러니까…….”

의사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말로는 물론 기억난다고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눈치였다.

“마커스하고 킵이요. 용하고 기린이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의사는 그날 밤 비니랑 같이 용이니, 기린이니, 깨달은 종족이니…… 떠들면서 두 사람을 슬쩍 속여서 입원시킨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환자도 많고 일도 많으니까 몇 달 전에 있었던 일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서 이상한 사람을 숱하게 만나고 다니는 나한테도 그 둘은 대단히 인상적이고 특이했었는데, 여기 시립 정신병원에선 그런 경우가 드물지 않은 걸까?

“그런데 얼굴은 어쩌다 그랬어요? 많이 다치셨네…….”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면서 우리를 건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길에 의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무래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알 거 없어요.”

“그러고 보니 아침 신문에서 당신 사진을 본 것 같아요.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얘기가 나오면 오늘 하루 아무리 나한테 잘해줬어도 걸음을 멈추고 첸을 노려볼 수밖에 없다.

“그 두 사람, 성격은 어때요? 얌전한 편인가요?”

첸이 내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슬쩍 돌렸다.

“폭력적인 성향은 낮은 편이에요. 둘 다…… 아니, 킵은 좀 거칠죠. 여기 온 지 얼마 안 지났을 때 남자 간호사의 팔을 부러뜨린 적이 있었거든요. 한동안 격리 병동에 있다 나온 후론 잠잠해요.”

일단은 찾아서 다행이지만, 듣고 보니 걱정스러웠다. 나를 알아보면 내 목을 부러뜨리려고 덤비지 않을까?

“상태는 어때요?”

“그냥 그래요. 호전되지도 않고, 악화되지도 않고…….”

“어쨌든 그 두 사람…… 오늘 데리고 나갈 건데, 문제는 없겠죠?”

의사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있죠. 환자를 맘대로 데리고 나갈 수는 없어요. 당신은 보호자도 아니잖아요?”

“강력 사건 관련입니다. 병원 규정보다는 법이 우선이죠.”

내가 세게 나가자 첸이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어 올렸다. 강력계 형사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면 그것도 강력 사건이다.

“두 사람이 살인이라도 했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요!”

“그건 그렇고, 그 악단이랑 리무진은 누가 보낸 거였어요?”

의사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중증의 정신질환자들이 어슬렁거리는 우울한 병동이 아니라 병원 뒷마당에 딸린 조그만 유리 온실이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인지 병원 뒤뜰을 가로지르는 짧은 시간이 굉장히 춥게 느껴졌다.

“온실 용도로 짓긴 했는데 온실로 쓰인 건 얼마 안 되고, 거의 창고죠. 어쨌든…… 그 친구들이 여길 마음에 들어 해서 요즘은 취침 시간 외엔 거의 여기서 시간을 보내요.”

온실 문을 열자마자 포근한 온기와 함께 어지러운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도 모르게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고, 등 뒤에서 앤디가 우와…… 하는 탄성을 토해냈다.

온실 내부는 꽤 넓었다. 하지만 창고로나 쓰인다는 설명과는 달리 사방이 온통 이름 모를 꽃과 풀로 뒤덮여 있다. 한쪽 구석에 의자, 파일 박스, 낡은 캐비닛 같은 비품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기는 했지만…… 깨지고 엎어진 블록 틈으로 빼곡하게 뚫고 올라온 꽃과 풀의 색조는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했고, 낡고 허술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나무 테이블 위에 어수선하게 놓인 화분엔 주먹만 한 꽃들이 넘칠 정도로 가득했다.

천장까지 타고 올라간 등나무 줄기엔 등꽃이 빼곡하게 매달려서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부연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조차도 이 안에선 어딘가 달랐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질감……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묘한 분위기에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의사가 바닥에 핀 꽃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미 넝쿨이 휘감긴 쇠파이프 더미와 흐드러지게 핀 꽃의 무게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3단짜리 나무 선반을 지나 몇 걸음을 더 들어갔다. 안쪽으로 갈수록 온기와 향기가 더 짙어졌다.

“마커스, 손님이에요.”

의사의 말에 나무 궤짝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용하고 기린은 좋아 보였다. 아이보리색 환자복에 회색 가운을 걸친 용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고, 기린은…… 사람 어깨 높이 정도 되는 선반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보라색 꽃이 넘치도록 피어 있는 화분을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꽃에게 말이라도 거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했고 나도 그랬다. 아까 로비에서 간호사가 왜 내 설명을 못 알아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삐죽 삐죽하게 뻗쳐 있던 용의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기린의 은발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고 은분을 가득 뿌린 것처럼 화사하게 빛나던 그 머리카락은 어깨 정도 길이의 단발로 바뀌어 있었다. 거기다 아무 특징도 없는 환자복을 입고 있으니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온실 분위기와는 달리 둘은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보통 젊은이들일 뿐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기린의 눈동자는 여전히 현란하게 반짝거렸지만…… 실망스러웠다. 그날 밤에 느꼈던 신비감과 이질감은 난데없는 폭설과 내 정신적 불안함이 빚어낸 환각이었던 걸까?

“오랜만이에요.”

얻어 터져서 엉망으로 부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용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누군지 기억이 났나보다.

“잘 지냈어요? …… 마커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봤지만 용은 내 손을 마주 잡을 기미가 없었다. 대신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신문을 접어서 기린에게 내밀었다.

“내가 뭐랬어? 그 남자가 맞다니까…….”

아침 신문인데…… 엊저녁에 경찰서 앞길에서 찍힌 사진이 실려 있었다. 차에서 봤던 거하곤 다른 신문이라 각도도 다르고, 얼굴도 더 크게 나왔다. 그래도 다행이다. 사진 속의 몰골이 워낙 엉망이라서 부기와 멍이 빠지고 나면 알아볼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다.

기린은 용이 내민 신문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녀석은 좀 전부터 루크 첸과 눈싸움 중이었다. 역시 신통력이 있는 걸까? 그래서 나쁜 놈은 첫눈에 알아보는 건가?

“당신…… 누구야?”

기린이 물었다. 내가 볼 때는 첸에게 물어본 게 분명한데, 옆에 있던 앤디가 냉큼 나섰다.

“앤디 나스카에요. 경찰이요. 강력계…….”

앤디가 경찰 배지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강력반에 들어오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 것 같았다.

“말고, 당신.”

기린이 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지만 역시 닮았다. 엘리야 하이네랑…….

“그냥 친구야. 혼자 보내려니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야.”

첸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넉살 좋게 대꾸했다. 그리곤 기린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난 루크 첸이야. 히말라야 기린은 처음 보는데…… 예쁘게 생겼군.”

비니가 자기 친구는 아니라지만 이 판국에 기린한테 작업을 걸다니…… 첸이 기린에게 수작을 거는 틈에 앤디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이제 보니 애가 허옇게 질렸다.

“봐요, 꽃이…… 계속 피어요.”

사실이었다. 부러진 사다리를 감고 올라간 장미넝쿨에서 실시간으로 꽃망울이 툭툭 터지고 있었다.

“그게 뭐?”

앤디의 손을 털어내고 기린과 첸 사이에 끼었다. 둘이 나중에 따로 약속을 잡든가, 방을 잡든가……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지금은 내 용건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첸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기린에게 다가섰다.

“당신 친구는 이 남자가 아니었을 텐데…….”

기린이 첸에게 잡혔던 손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실은 그 친구 때문에 왔어요. 같이 좀 가줘야겠어요.”

용과 기린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건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의사는 환자들을 이런 식으로 데리고 나가려면 최소한 구인장 같은 거라도 가져와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앞길을 막았다. 구인장? 비니 목숨이 간당간당한 이 판국에 무슨 구인장?

“까다롭게 굴지 말아요! 이 사람들은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우리가 찾던 환자들도 아니라고요!”

“이 정도는 까다로운 게 아니에요. 당연한 절차죠.”

성질 같아선 확 받아버리고 싶었지만 첸이 내 뒷덜미를 잡아서 앤디 쪽으로 떠밀어버렸기 때문에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퇴원 허가는 누가 내줍니까? 닥터…….”

첸이 의사와 마주섰다. 차이나타운에선 왕일지 몰라도 여기선 그 위세가 통하지 않을 텐데 거만하기는…….

“두 사람은 막스 박사님이 담당하고 계신데, 지금은 퇴원 안 시키실 거예요. 둘은 처음 왔을 때보다 나아진 게 없고, 또…… 박사님이 개인적으로 관심 있어 하시니까.”

“의사가 환자한테 흑심을 품다니…… 비윤리적이군. 게다가 쟤네들은 천 살도 안 된 어린애들인데.”

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흑심이 아니라 관심이에요. 순수하게 직업적인 관점이죠. 정신세계가 독특한 친구들이거든요. 주변도 독특하고…….”

“어쨌든, 그 박사가 퇴원 허가서에 서명하면 얘기가 끝나는 겁니까?”

퇴원 허가를 받아주면 나야 좋지만, 첸의 태도가 사실 좀 재수 없긴 했다. 의사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럴 능력이 되시나요?”

첸은 그 자리에서 어디론가 전화 두 통을 날리는 것으로 능력을 보여줬다. 한 통은 누구에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전화는 루소 의원과 통화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온실을 나와서 병원 본관 로비에 도착하자 병원장이 나와 있었다. 따로 퇴원 허가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

“고마워.”

퇴원이 결정되고 용과 기린이 입원할 때 맡겼던 소지품을 찾으러 간 사이 첸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까지는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알아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도움은 예상도 못했다. 고맙단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진짜 어려운 일은 지금부터야. 아까도 말했지만 기린은 어지간해서는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아. 게다가 저 기린은 아직 어린데다 성질 사나운 수컷이고. 비니 몬티첼리를 깨울 재주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아.”

“하지만 너, 아까는 기린이…….”

“기린도 기린 나름이야. 깨달은 종족의 장로들이 사절로 보냈다기에 최소한 태산의 제월공 정도는 되는 줄 알았지. 대체 무슨 맘을 먹고 저런 망아지를 골라서 보낸 건지 모르겠어.”

“태산의…… 제월공이라니?”

첸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게 참 맘에 들어. 넌…… 무슨 소릴 해도 못 알아듣거든.”

나 스스로도 가끔은 내가 일반인들에 비해 좀 무식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지만, 이런 소리를 대놓고 들으면 기분 나쁘다.

“뭐냐니까? 그게?”

“제월공은 태산에서 사방 천리를 관장하는 기린이야. 기린치곤 성격이 특이한 편이었지. 호기심 많고 인간사에 곧잘 참견하곤 했으니까. 덕분에 영수들 사이에선 거의 왕따였지만…… 라두칸 하고는 친했으니까 사절을 보냈다면 아마 제월공이 아닐까 했는데, 그 편이 비니 몬티첼리한테도 좋았을 거야. 예전에 사바델을 깨운 게 제월공이었거든.”

기린이라는 동물이 사람으로 둔갑도 하고 병을 고쳐주기도 한다는 얘기가 여전히 미덥지 않지만, 깨달은 종족의 장로란 자들이 전에 입었던 이상한 옷을 걸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저 살벌하게 생긴 남자애 대신 제월공이라는 그 기린을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는 것도 기특한 재주지만, 할 줄 아는 게 그뿐이면 어떡하지?

“그런데 넌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첸이 뭐 대단할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정보가 생명이라고…….”

정보가 생명이라…… 맞는 말이다. 용이나 기린 같은 이상한 동물에 관한 옛날 얘기가 언제부터 정보의 범주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피아 보스치고 첸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활동 구역이 차이나타운이라서 그런 걸까? 하긴, 그 동네가 좀 유별나긴 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선배님은 다 알아 들으시는 거예요?”

앤디는 온실에서부터 줄곧 얼굴이 허옇게 떠 있었고, 지금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보통은 롤러코스터를 다섯 번 정도 연거푸 탔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뜯어 맞추려고 과도하게 노력할 때도 정신적인 멀미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안쓰럽긴 하지만…… 잘됐다. 달고 다니기도 거추장스러웠는데 이쯤에서 떼버리자.

“왜? 뭐가 이상해?”

앤디가 걸음을 멈췄다.

“뭐가 이상하냐고요?”

“쿠간에서 짭새 노릇을 하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얼마 전엔 임산부만 습격하는 변신 괴수도 나타났었어. 얼마나 무서웠다고?”

앤디가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놀리지 마세요.”

“서에 가서 터너나 에쉬를 붙들고 물어봐. 내 말이 거짓말인지. 쿠간에선…….”

“이런 일이 다반사라고요?”

그런 건 아니지만…….

“너는 그만 서로 들어가라.”

“싫어요.”

앤디가 첸을 힐끔 째려보며 내 지시를 씹었다. 한대 쥐어박아서 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 녀석은 삐지면 오래 갈 성격이었다.

“난 이 길로 겐지 클리닉에 돌아가서 진단서 끊고 누울 거야. 그러니까 넌 서에 들어가서 동네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이나 해. 그게 싫으면 다시 리즐 시로 돌아가서 외딴 동네 순경 노릇을 몇 년 더 하던가.”

“마음이 안 놓인다고요.”

투덜거리던 앤디와 첸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앤디가 고관댁 막내아들 겸 강력계 신참답게 철딱서니 없고 일이 서툰 건 사실이지만 이유 없이 첸을 싫어하는 걸 보면 그래도 경찰관으로써 기본적인 자질은 있는 놈이다.

첸은 앤디한테 무슨 유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녀석도 앤디를 겐지 클리닉에 데려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파트너 말을 듣는 게 좋지 않을까? 벤츠가 비싼 차긴 하지만 너까지 태울 자린 없거든.”

원한다면 트렁크에라도 태워주겠다는 첸의 얄미운 제안에 앤디가 삐져서 가버렸다. 인원도 맞췄겠다, 이제 용하고 기린을 밀어 넣고 출발만 하면 만사 순조로울 텐데…… 용이 첸의 벤츠를 보더니 걸음을 딱 멈췄다.

“우린 당신들과 같이 가지 않을 겁니다.”

“하,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벌써 많이 늦어졌습니다.”

용이 엄격한 눈길로 나를 쏘아봤다. 마치 너 때문이야 라고 비난하는 것 같은 그 시선에 속이 뜨끔했다.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처음부터 걱정은 했었지만…….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뭐든지…….”

“당신은 라두칸이 여기 있을 거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어요.”

“착오가 있었어요. 그때는 당신들이 콘웨이 요양소에서 탈출한 환자들인 줄 알고…….”

용하고 기린의 표정은 단호했다. 내가 뭐라고 하던 뿌리치고 자기들끼리 갈 길 가버릴 태세였다.

“실수였다는 걸 알고 바로 데리러왔었지만 의사가 치료를 받아보는 편이 더 좋겠다고 해서…… 미안해요. 일부러 거짓말 한 건 아니었어요.”

나름 성의껏 사과 했지만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사람이면 억지를 써서라도 차에 밀어 넣겠는데 그것도 아니라니…… 막막해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첸을 힐끔 쳐다봤다. 기린의 생태나 성질에 대해 뭔가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번에도 좀 거들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첸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차 문을 열었다.

“일단 타. 얘기는 가면서 하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우릴 데려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용이 말했다. 태도는 정중했지만 딱 부러지는 거절이라서 더 이상 설득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첸도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진 않았다.

“원하는 곳에 가려면 원치 않는 곳도 들러 가야 하는 법…… 여행이란 그런 거야. 이번 여행이 멀고도 험할 거라는 사실을 장로들이 일러주지 않았던 모양이지?”

용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오랜 세월 숨어 지내고 있는 현자를 찾아서 전갈을 전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첸이 피식 웃었다.

“그 교활한 노친네들한테 속았군.”

노친네들한테 진짜로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용과 기린이 떫은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첸이 잽싸게 둘을 차 안에 밀어 넣었다.

첸도 알고 보면 괜찮은 놈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린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쯤 얘기를 꺼내면 좋을까 기회를 엿보던 참이었다.

“실은 비니가, 그러니까…… 그때 봤던 내 친구가 지금 혼수상태라서요.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데 의사들도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기린 씨라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해서…… 이런 부탁하기 염치없지만…….”

할 말은 많고 마음은 급하다 보니 말에 두서가 없었다. 예전에 내가 죽였던 놈이랑 꼭 닮은 사람한테 아쉬운 소리 하려니 기운도 묘하고…… 해서 말을 좀 더듬었더니 앞자리에 앉아 있던 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곤 자기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자네들의 긴 여행에 우연은 없을 거야. 어디를 가든, 누굴 만나든…… 반드시 가야 할 곳이고 예정돼 있던 만남일 뿐이지.”

기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린은 처음부터 첸이 거슬리는 눈치였다.

“당신…… 맘에 안 들어.”

“난 틴에이저들한테는 본래 인기 없어. 나도 관심 없고.”

첸이 대놓고 기린을 갈궜다. 이러다 기린이 기분 상해서 차에서 뛰어 내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필이면 길도 막혔다. 올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헉…… 차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기린이 문 손잡이를 재꼈다.

“억지로 붙들어 놓거나, 뭘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냥 어떤 남자를 잠시 만나줬으면 해.”

말은 그렇게 하면서 첸이 재빨리 차 문을 잠갔다.

“어떤…… 남자?”

“도움이 필요한 남자.”

“안됐지만, 난 인간의 일 따위엔 관심 없는데?”

기린이 잘라 말했다. 말투가 너무 냉정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첸이 가만있으라고 눈치를 줘서 가만있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가끔은 관심을 끄는 인간도 있거든.”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야.”

“글쎄…… 그럴까?”

어쩐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첸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비니는 여전히 그렇게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 얼음장 같은 몸, 금방이라도 멎을 듯 위태로운 호흡…….

처음 비니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는 어서 일어나기를 바라며 조바심을 냈지만 지금은 제발 이 상태라도 유지해주기만 바라는 형편이었다.

병실로 들어서자 넋 나간 듯 앉아 있던 비니 부모님이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용과 기린의 행색이 워낙 특이하고 눈에 띄다 보니 마주치는 사람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광대들은 대체 뭐예요?”

바바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비니 친구들이에요. 소식 듣고 문안 차…… 들렀어요.”

비니에게 특이한 친구가 많은 건 바바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미심쩍은 듯 바바라가 용과 기린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훑어봤다. 그러다 루크 첸하고 눈이 딱 마주치자 다시 신경질을 냈다.

“루크 첸하고 언제부터 이렇게 친했어요?”

“얼마 안 됐어요.”

오래 떠들 기력도 없어서 무시하고 그냥 돌아섰다. 등 뒤에서 바바라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신경 쓰였지만 본래 좋은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용하고 기린은 문가에 선 채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비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비니 상태를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줘야 할 것 같아서 기린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막 말을 걸려는 순간, 기린은 그냥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버렸다.

“이봐! 야!!”

쫓아나가서 기린을 붙들었다.

“‘리리스’야.”

기린이 내 팔을 뿌리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리리스’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가면 어떡해?”

“‘리리스’ 라니까!”

“그게 뭐든! 최소한 상태는 보고 나서 도와줄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벌써 말했잖아. 난 이런 일은 안 해.”

기린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내 주먹도 망설임 없이 나갔다. 불시에 한대 얻어맞고 복도 바닥을 나뒹구는 기린을 봐도 잘못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나쁜 자식……. 그때 누군가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는 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용이었다. 힘이 어찌나 센지 발이 바닥에서 번쩍 들렸다. 이젠 내가 어디론가 내던져질 차롄가 보다. 이대로 정신을 잃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그럼 잠시라도 비니 생각이 안 날 테고…… 마음은 편할 테니까.

“그러지 마!”

첸이 용의 팔을 잡았다.

“비켜! 인간 따위가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산의 주인에게 손을 댈 수는 없어!”

용도 화가 났는지 말투가 거칠었다.

“해칠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야. 슬픔이 지나쳐서 그래.”

“이유는 상관없어! 인간이 기린을 치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용의 호통에 첸이 지지 않고 인상을 구겼다.

“내 성질을 건드리면 더한 꼴도 당하게 될 거야. 좋게 말할 때 내려 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버려둬도 상관없는데…… 첸이 기어이 용의 팔을 끌어 내렸다.

기린이 벌겋게 부은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용이 마지못해 나를 놔주고 기린에게로 돌아섰다.

“괜찮아?”

“아파.”

투덜거리면서 기린이 나를 매섭게 쏘아봤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한바탕 눈싸움 끝에 기린과 내가 한판 제대로 붙어볼 요량으로 동시에 움찔했다. 하지만 저쪽은 용이 막아섰고, 나는 첸한테 붙들렸다. 첸이 비틀어진 옷매무새를 잡아주며 차분하게 나를 타일렀다.

“아무한테나 주먹부터 휘두르고 보는 버릇은 좀 고치는 게 어때? 기린은 사나워.”

버릇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다.

“저 자식이 비니를 안 깨워준다잖아! 사람이 죽어가는 걸 봤으면 능력 닿는 대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런데 뭐가 어째? 이런 일은 안 해?”

비니를 깨울 신통한 능력이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최고의 경력을 자랑하는 의사들도 두 손 들어버린 마당이니까. 하지만 저 태도는 대체 뭐냐? 저 자식은 인간이 덜 됐다.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인간의 일 따위, 나는 관심 없다고!”

기린이 용을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비니가 멀쩡해서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돌아다닐 때는 세상 사람들이 비니에 관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저 지경으로 누워 있을 때는 말조심을 해줬으면 좋겠다. 최소한 내 앞에서는…… 나도 첸을 밀치고 나섰다. 하지만 첸은 끄떡도 않고 버텼다.

“좀 비켜!”

“진정해. 아직 어린애야. 게다가…… 기린도 무서워하는 게 있단 말이야.”

첸이 내 팔을 움켜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속삭인 것 치고는 목소리가 커서 기린도 그 말을 다 들었다.

“무슨 뜻이야?”

기린이 따졌다. 상당히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그냥 그렇단 얘기야.”

“귀찮은 일이 싫은 것뿐이야. 인간을 두려워하는 기린은 없어.”

저 싸가지 없는 것…….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을 고려해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지만 또 다시 혈압이 솟구쳤다. 하지만 첸이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필이면 그때 비니 병실에서 나오던 바바라가 첸이랑 나를 보고 걸음을 딱 멈췄다. 바바라가 정말 별꼴을 다 보겠다는 듯 못마땅하게 노려봐도 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첸의 현재 관심사는 오직 기린 약 올리기뿐이었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리리스는 다들 두려워하니까.”

기린의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동안 내가 겪어봐서 잘 아는데 저런 어린애 복장 뒤집는 정도는 첸한테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어리다곤 해도 천살을 거저먹은 건 아닌지 기린의 표정이 금세 냉정해졌다.

“지금까지는 인간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젠 싫어졌어.”

기린이 용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정말 가버릴 모양이었다. 화가 치미는 것과는 별개로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이대로 놓쳐버릴 수는 없다. 기린을 놓치는 것이 비니를 놓치는 것과 똑같은 의미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첸이 나를 놔주지 않았다. 놔주기는커녕 조여 드는 엄청난 기운에 온몸이 저릴 정도였다.

“두려운 게 아니면…… 대각성大覺醒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어디론가 흩어져버린 리리스의 혼을 찾아서 깨울 재주가 없는 건가?”

첸이 빈정거렸다. 지금 막 우리를 지나쳐가는 기린의 귓가에 마치 독약을 흘려 넣듯 은밀하고 교활하게…… 싸늘하던 기린의 얼굴이 다시 후끈 달았다.

“앞으로 어디를 가게 될지 누굴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신하고는 그만 만났으면 좋겠군.”

기린의 대꾸에 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안 됐지만 얘는 자신이 없나 봐. 태산泰山의 기린은 어렵지 않게 했던 일인데…….”

여차하면 기린이 첸을 한대 칠 기세였다. 이번에도 용이 기린을 말렸다. 용이나 기린이나 나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저쪽이 기린보다는 훨씬 어른스러웠다. 어쩌면 나나, 첸보다 더…….

“인간의 혼을 찾아서 깨우는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대로 두는 편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좋을 겁니다.”

용이 기린의 등을 떠밀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보내면서 둘의 말싸움에 마침표를 찍었다. 저대로 두는 편이 모두의 안전을 위해 좋을 거라는 말이 뼈가 아프도록 불쾌했다. 하지만 또 뭐랬더라…… 혼을 찾아서 깨우는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뒤통수로 첸의 턱을 들이 받았다. 제대로 맞았는지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컸고, 첸이 악! 소리를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어제 오늘, 나한테 잘해줬던 거 생각하면 미안하긴 하지만…… 놓으라고 했을 때 놨으며 나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지. 어쨌든 비니를 깨울 수 있으면 깨워주고 가야지 그냥은 못 간다.

첸을 막 뿌리치고 용과 기린을 뒤쫓아 달리려는 순간…… 이번에 자오가 내 팔을 움켜잡더니 뒤로 확 꺾었다.

“놔 봐! 좀…….”

놔주기는커녕 자오가 나를 벽에다 사정없이 갖다 박았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아픈 데가 많은데…… 내 힘으로 자오를 당해내긴 어림없었다.

누가 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곁눈질을 해보니 첸은 턱 잡고 오만 인상을 다 쓰는 중이었고, 그 뒤쪽엔 바바라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중환자실 앞에서 뭐 하는 거예요?”

눈이 마주치자 바바라가 대뜸 소리쳤다. 걱정에, 피곤에…… 핸드백에 총이 있다면 아무라도 쏴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바바라! 저 사람들…… 잡아요!”

목이 쉬어서 엉망이지만 그래도 알아듣긴 했는지 바바라가 용과 기린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누군데요?”

“일단 잡아요! 얘긴 나중에 하고…….”

바바라가 귀찮기 이를 데 없다는 듯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때마침 도착했지만 아무도 타거나 내리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입구가 바바라의 인상 살벌한 부하들에 의해 삽시간에 막혀버렸던 것이다.

“목이라도 부러뜨릴 게 아니라면 그만 놔주지 그래요?”

바바라가 복도 의자에 주저앉으며 첸에게 짜증을 냈다. 저 작고 사악한 여자는 비니를 사랑한다. 세상을 향한 그녀의 증오가 진심이듯, 사랑도 진심이다. 바바라 소사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삶에서 유일한 위안은 비니에 대한 사랑뿐이었을 거다.

“턱이 깨지는 줄 알았어.”

첸이 자오를 내 등에서 떼어내면서 툴툴거렸다. 나야말로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게다가 벽에 부딪힌 얼굴 반쪽도 얼얼하고…… 자오랑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있다 얘기해. 지금은 바빠.”

기린에게 가서 얘기를 좀 하려는데 첸이 다시 내 팔을 붙들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어. 기린한테는 어떤 일도 억지로 못 시켜.”

“그럼 어쩌라고? 비니를 이대로 죽일까?”

첸을 뿌리치고 돌아서다가 멈칫했다. 기린과의 거리가 한 순간 굉장히 멀게 느껴졌고……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뭘 하려고 했더라?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기억 밖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아버린 느낌이었다.

“왜 그래요?”

바바라가 물었다. 바바라…… 이 조그맣고 창백한 여자와 마주치면 당연히 생각나는 얼굴이 있어야 하는데 그 얼굴이 떠오르질 않았다. 마치 깊은 우물 속에 비친 그림자처럼…… 어떤 형상이 어둡고 불분명하게 일렁거릴 뿐이었다.

“쳐다보지 마!”

첸이 급하게 다가와서 손으로 내 눈을 가리고 벽 쪽으로 나를 돌려세웠다. 영문도 모른 채 잠시 그렇게 서 있노라니 천천히…… 이제는 내 영혼의 일부분인 듯 친숙해져버린 슬픔이 다시 느껴졌고 잠시 후엔 비니의 얼굴이 기억났다. 비니, 내 친구, 파트너, 지금 저 방에서 죽어가는…… 기억과 함께 안도와 고통이 동시에 밀려왔다.

“제이!”

바바라가 못마땅한 듯 엘리베이터 입구 쪽을 가리켰다.

“언제까지 잡아둘 거예요? 할 얘기 있으면 하고 아니면 그냥 보내요. 간호사들 잔소리 듣기 싫어요.”

그 앙칼진 음성에 정신 차리고 기린을 봤다. 기린도 나를 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보지 말라니까!”

첸이 내 등을 세게 쳤다.

“……왜?”

좀 전에 깜빡 정신이 나갔던 것이 기린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소리 입 밖에 내면 나만 미친 놈 취급을 당할 것 같아서 애매하게 물었다. 하지만 첸의 대답은 질문에 비해 꽤 구체적이었다.

“난 니가 있는 그대로 맘에 들어. 하지만 지금보다 더 맹해지면 사회 생활하기 힘들 거야.”

“혹시…… 그럼 저 녀석이…….”

“말했잖아. 막무가내로 덤벼서 될 일이 아니라고.”

표정이 진지한 걸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저 자식, 비니를 살려주기 싫어서 나한테 주술을 걸었다는 얘긴데…….

“치사한 자식!”

마음 같아선 바람처럼 달려가서 기린에게 어퍼컷을 한대 더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기린을 보는 순간 몸이 다시 얼었다. 이제 보니 기린의 주변에 파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다. 아니, 불꽃인가? 바바라의 경호원들도 어느새 둘에게서 물러섰고 용이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그냥 보내는 게 좋겠어.”

첸이 조용히 말했다.

“그럴 순 없어!”

비니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니 몬티첼리가 그렇게 쉽게 잘못될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니를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하지만 나는 또 사람은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젠 아무도 용과 기린을 막지 않았다. 기린이 무슨 수를 썼는지 바바라의 경호원들은 완전히 얼이 나가 있었다. 부하들의 그런 태도에 바바라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혹시 이게 다 꿈이고, 꿈에서 깨면 누군가가 다가와서 비니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건 아닐까…… 갑자기 무서워졌다.

“놔! 이대론 못 보내!”

이제라도 기린을 잡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살면서 악몽도 많이 꿔 봤지만 그중에서 제일 지독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용과 기린이 올라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이렇게 구경이나 하고 서 있다니……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첸이 움켜진 내 옷섶을 놔주지 않았다.

“기린은 지금 화가 많이 났어! 가서 1분만 저 예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나면, 그땐 니 이름도 기억 안 날 거야!”

“비니는 어쩌라고!”

“처음부터 니 상대가 아니었어!”

“비니는 어떻게 하냐고!!”

내가 언제부터 울고 있었던 걸까…… 이젠 앞도 제대로 안 보이고 속이 울렁거려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비니랑 그 남자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멀지 않은 곳에서 첸과 나를 지켜보던 바바라가 입을 열었다. 여자의 육감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궁금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아무 상관도 없어요.”

첸이 잘라 말했다. 하지만 바바라는 그 정도 면박에 기가 죽을 정도로 심성이 여리지 않다.

“비니랑 관련 있는 일이면 나도 알아야죠!”

바바라가 사납게 받아쳤다. 여자들에게는 유들유들하기 이를 데 없는 첸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기세가 매서웠다. 활동 구역이 다르니까 아직까지는 마주칠 일이 없었지만…… 혹시라도 바바라가 이쪽으로 영역 확장이라도 나서는 날이면 쿠간 시 역사에 길이 남을 피바람이 불까 두렵다. 둘 다 진짜 악당들인데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흐릿한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한 유감이 철철 넘쳤다.

“그 이상한 애들…… 대체 뭐냐고요! 비니를 어쩔 거냐는 게 무슨 뜻이에요?”

바바라가 나한테 사납게 따졌다. 하지만 그래 봐야 용과 기린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첸도 바바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상황을 너무 절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요. 소사 양. 비니 몬티첼리 정도 되는 리리스는 잘못되기도 쉽지 않으니까…….”

리리스가 대체 뭘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중환자실 문이 다급하게 열리고 간호사가 뛰쳐나왔기 때문이었다. 중한 환자가 입원한 병실에서 간호사가 저런 식으로 다급하게 의사를 찾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비니의 심장은 3분 정도 멎어 있었다. 벌써 3번째였다. 의사들이 심폐 소생술로 잠들려고 하는 비니의 심장을 다시 깨우긴 했지만, 박동 수는 이전보다 더 낮아져버렸고 체온도 한번 떨어진 그 지점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비니는 싸우고 있는 걸까? 영혼은 벌써 떠나버리고 식어가는 육체만 남았는데 우리가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비니 어머니가 복도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흐느꼈다. 비니의 징크스를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라 나를 볼 때마다 항상 걱정하고 미안해하며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대해줬던 분이었다.

평생 어려운 일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부인의 부쩍 늙어버린 모습을 보니 무거운 죄책감이 느껴졌다. 사고현장에 비니랑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멀쩡한 것도 그렇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기린을 때려서 쫓아버린 걸 생각하니 부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용하고 기린이 아직 멀리는 못 갔을 거다. 이제라도 뛰어 내려가면 붙잡을 수는 있겠지만…… 기린을 설득할 수 있을까? 왜 그랬을까? 가뜩이나 성질도 안 좋은 걸 한대 쥐어박기까지 했으니…… 걸음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잠깐 기다려 봐.”

첸이 내 어깨를 잡았다. 분위기가 보통 때 같지 않게 진지했지만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무턱대고 덤벼봐야…….”

“이럴 바엔 다 잊어버리는 게 차라리 속 편하겠어! 겁날 거 뭐 있어? 어차피 좋은 기억도 없어.”

가망이 있겠느냐는 비니 아버지의 물음에 겐지 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니의 심장은 언제라도 다시 멎을 수 있고…… 그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첸은 엘리베이터 입구를 막아서지 않는 대신 엘리베이터에 같이 올라탔다. 물론 자오도 함께…….

“방법이 있을 거야! 사바델이란 작자는 깨웠는데 왜 비니는 안 돼?”

“영수들은 자원봉사 체질이 아니야. 걔네들한테서 뭔가 얻어내려면 대신 뭔가를 내줘야 돼. 그걸 <신성한 계약>이라고 하는데…….”

진작 말을 하지, 그런 거면 뭐가 어렵냐?

“뭐든 달라는 대로 주면 될 거 아냐!”

첸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깔아봤다.

“전치 3주짜리 타박상 말고 니가 가진 게 뭐가 있는데?”

“비니는 부잣집 아들이야. 돈이라면 부모님이 얼마든지…….”

“그런 걸로는 어림도 없어. 히말라야 골짜기에 파묻혀 사는 애한테 돈이 무슨 소용이야?”

“그럼 어쩌라고?”

히말라야 골짜기에 파묻혀 살아도 뭔가 필요한 게 있긴 있을 텐데…….

1층에 내려서 로비를 훑어봤지만 둘은 흔적도 없었다. 벌써 밖으로 나가버렸나 보다. 겐지 클리닉은 한산한 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지만 언덕 아래로 두 블록만 내려가면 바로 번화가였다. 용과 기린의 행색이 특이하다곤 해도 인파에 휩쓸리면 찾아내기 쉽지 않을 텐데…… 인상착의를 불러 주고 수색 요청을 할까? 기린한테는 미안하지만 절도나, 폭행 같은 걸 살짝 씌우면 일은 간단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건물 밖까지 뒤쫓아온 첸이 내 뒷덜미를 움켜잡고 인도 위쪽으로 끌어 올리며 버럭 화를 냈다. 거의 동시에 앰뷸런스 한대가 바로 코 앞을 스쳐 지나갔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차를 못 봤다.

“보면 몰라? 길 건너는 중이잖아!”

“달리는 차 앞으로 뛰어드는 중이었잖아! 이 미련한 짭새야!”

첸이 나를 건물 쪽으로 확 밀어 던지며 성질을 피웠다. 그 바람에 유리로 된 로비 외벽에 어깨부터 갖다 박고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왜 이래?”

“얘기 좀 해.”

첸이 팔짱을 끼고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중에 해!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원한다면…… 기린을 설득해줄게.”

“…….”

첸이 나쁜 놈인 건 확실하지만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함부로 내뱉는 놈은 아니다. 그랬으면 저 자리에 있지도 못할 거고,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다.

기린을 설득해준다는 말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비니를 살려주겠다는 뜻으로 들려서 멍한 눈으로 첸을 쳐다봤다.

“대신 조건이 있어.”

……그렇겠지.

“뭔데?”

“너…… 나한테 와라.”

비니를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돼 있긴 했지만 이 제안은 선뜻 받아들이기 찝찝했다.

“사표 내고 니 밑에 취직이라도 하란 말이야?”

“직장 문제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어.”

“그럼 뭔데?”

뭔지 알 것도 같았고, 미안하지만 그럴 마음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수정처럼 곱게 반짝이는 첸의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빠졌다.

“헛소리 작작하고 저리 비켜!”

짜증이 나서 첸을 밀쳤다. 첸은 선선히 물러섰다. 하지만 녀석의 말투는 속이 울컥 뒤집힐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이건 너한테 유리한 거래야. 비니 몬티첼리의 목숨을 걸고 흥정하지 않아도, 어차피 넌 나한테 오게 돼 있어.”

“송아지 안심이랑 와인 소스 연어 구이…… 이건 뭐죠?”

“타임 오일에 구운 닭 요리랍니다. 손님, 신선한 버섯도 곁들여지고요.”

“그럼, 그것도 두 접시 주세요.”

용이 입맛을 다시며 메뉴를 웨이터에게 건넸다.

“난 샐러드나 먹을래.”

기린이 용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용과 기린을 찾아낸 곳은 번화가 초입에 있는 화원 앞길이었다. 용은 벤치에 쪼그리고 앉은 노숙자의 담배꽁초에 불을 붙여주고 있었고 기린은 햇볕을 쏘이려고 화원에서 내놓은 월귤 나무 화분에서 월귤을 따 먹는 중이었다. 다가가는 우리를 본 두 사람의 얼굴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맛있는 점심을 사주겠다는 첸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샐러드도 종류가 많은데요. 어떤 샐러드로 하시겠습니까?”

웨이터의 질문에 기린이 다시 메뉴를 들여다봤다.

“여기 있는 거 다요.”

열두 가지나 되는 샐러드를 다 갖다 달라는 말에 웨이터가 흠칫 놀랐다.

“한창 클 나이니까 많이 먹어야지. 넌 뭐 먹을래?”

첸이 물었다. 나한테…….

“난 됐어.”

입맛이 없다. 나한테 오라는 맘 상하는 요구에 얼떨결에 니 맘대로 하라고 해버렸는데…… 잘한 짓일까?

“크림 스프, 와인 한 잔. 그리고…… 샴페인 한 병 준비해주게. 이 집에서 제일 좋은 걸로.”

첸이 주문을 마무리 지었다. 샴페인을 터뜨릴 만큼 거래가 성공적이었으면 좋겠다.

“도시를 본 소감이 어때?”

첸이 와인 잔을 살살 흔들며 용에게 말을 붙였다.

“별로…… 거리는 복잡하고, 인간들은…….”

적당한 표현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지 용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아요. 굉장히 바빠 보이고 두려움에 가득 차 있고…….”

“그리고 대부분은 미쳤고…….”

창가에 놓인 화병에서 국화꽃을 슬쩍 뜯어 먹던 기린이 투덜거렸다. 내도록 정신병원에 있었으니 그런 생각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고 공기가 안 좋아요. 가끔은 숨 쉬기도 힘들 정도로……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 왔을 때는 우리 둘 다 고생을 많이 했어요.”

“고생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겠군.”

“물론이죠.”

2단짜리 트레이에 하나 가득 실려 오는 요리 접시를 본 용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송아지 안심, 연어 스테이크, 구운 닭 두 접시를 다 해치우고 나서 용은 추가로 연어 한 마리를 더 잡아먹었고, 기린은…… 코끼리의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할 것 같은 푸성귀를 먹어 치우고도 뭔가 허전했는지 아까 먹다 남긴 국화로 입가심을 했다. 사업엔 접대가 따르게 마련이라지만 둘의 식대가 만만치 않겠다.

첸은 둘의 무시무시한 식사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시켜주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들의 빠른 귀가를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용이 기린을 쳐다봤다. 기린은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산딸기 샤베트를 한 입 물었다.

“우린 라두칸을 찾아서 데려가기만 하면 그뿐이야.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

“라두칸이라…….”

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곤란한 표정이 언뜻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셀파들의 작은 마을에서라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여기서도 그럴까?”

“뭐가 달라? 인간들이 좀 많은 것뿐인데…….”

기린은 쿠간 시 인구가 천만인 걸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찾고 있는 그 라두칸이란 자가 니콜라스라면…….

“사람이 많고 적은 건 문제가 안 될지 몰라도, 본인이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숨어 지내는 현자를 찾아내는 일은 간단치 않아. 왜 장로들이 자네들처럼 물정 모르는 젊은이들을 골랐을까? 나이 지긋하고 라두칸에 대해 잘 아는 현명한 영수들은 모두 낮잠이라도 자고 있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한 입에 먹어 치운 용이 기린의 샤베트를 한 숟가락 슬쩍하다가 동작을 멈췄다.

“대장로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데는 이유가 있겠죠. 예지력이 뛰어난 분이시니…….”

“예지력이 뛰어난 분이니까 다른 데 말해봤자 퇴짜 맞을 게 뻔하다는 것도 알았겠지. 그 결과 만만한 자네들이 일을 떠맡은 거야.”

기린이 디저트 스푼을 내려놨다. 입맛이 싹 가신 얼굴이었다. 하지만 용은 아직도 뱃속에 빈 구석이 남았는지 기린의 디저트를 냉큼 집어가버렸다.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

기린이 용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말 좀 곱게 해라. 아버지한테 망할 영감탱이가 뭐니?”

용이 기린을 점잖게 타일렀다.

“나이 좀 들었다고 뻑하면 심부름 시켜 먹을 궁리뿐이잖아! 그리고 그 영감이 내 아버지란 증거가 어디 있어?”

대답 대신 용이 기린의 은색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집어 올렸다.

“증거가 더 필요해?”

“아이스크림 내놔!”

기린이 신경질을 버럭 내며 아이스크림 컵을 찾아왔다. 그래 봐야 벌써 빈 컵이지만…….

“그래서, 라두칸을 찾아주는 대신 그 리리스를 깨워달라는 거야?”

기린은 비니를 깨워주는 게 어지간히도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비니가 둘을 속여서 정신병원에 가둔 전과가 있긴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었다. 비니와 보낸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물론 어딜 좀 다치기는 했겠지만.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잖아.”

“…….”

기린이 어쩔까…… 하는 눈길로 용을 쳐다봤다. 용은 니 맘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계약을 맺은 후엔 마음대로 파기할 수 없어. 그건 알고 있어?”

“난 어떤 계약도 중도에 파기해본 적이 없어.”

첸이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요구했다. 계산은 내가 하려고 했는데 밥값이…… 내 한 달 월급이었다.

“그만 결정을 내리자고.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잖아?”

요즘 세상에선 총보다 더 강력한 무기인 골드 카드를 폼 나게 한번 휘두른 다음 첸이 기린을 재촉했다. 기린이 마지못해 첸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렇긴 한데……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리리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작은 소용돌이’라고 한다. 물론 깨달은 종족의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다.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서툰 마법사를 빗대는 말인데 능력에 따라 리리스의 급수도 천차만별이지만 비니 정도 되면 울트라 초특급 리리스에 속한다는 게 첸의 설명이었다.

“비니가…… 마법사야?”

비니는 마법에 ‘마’자도 모르는 놈인데…….

“그 녀석은 마법사가 아니라 리리스야. 걸어 다니는 천재지변이라고.”

실감이 안 난다. 세상에 비니 같은 놈은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사고뭉치를 부르는 단어까지 따로 있었다니…… 비니 같은 말썽꾸러기가 많지는 않아도 종종 있다는 얘긴데, 비니가 사실을 알면 반가워할까? 아니면 자기는 그런 거 아니라고 짜증을 낼까?

용과 기린이 비니의 병실에 들어간 지 꽤 지났다. 병원 관계자와 어머니까지 다 쫓아내고 둘이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돼야 할 텐데…….

“어느 순간 바람을 일으킨다든지, 돌에서 불꽃을 피워 올린다든지…… 예전엔 그런 애들은 일찌감치 유명한 승려나 마법사한테 보내서 엄하게 훈련을 시켰어. 이름난 마법사들은 대개 태생 마법사들이고, 그런 식으로 훈련을 받았지.”

“비니가 경찰학교 대신 마법 학교에 갔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젠 앉아 있을 기운도 없었다. 기린이 정말 비니를 살릴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지만 열린 건 비니 옆방이었다. 간병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복도로 뛰어 나오더니 경황없이 간호사를 찾았다.

“좀 들어와 봐요.”

“왜 그러세요?”

“고든 씨가…….”

“저런…… 돌아가셨나요?”

간호사의 물음에 부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렸어요.”

고든 씨는 갑작스런 뇌출혈로 2개월째 의식이 없는 환자였다.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가족들이 생명 유지 장치를 떼도 좋다는 법원의 허가를 기다리는 처지였는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기린의 신통력 덕분인지,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조짐이 좋다.

“얘기 들었어? 오하라 부인도 좀 전에 의식을 회복했대.”

“기적의 날이군. 그 부인은 2년도 넘게 의식 불명이었잖아.”

의사들이 잔뜩 들떠서 얘기를 주고받으며 병실로 몰려 들어갔다. 비니 어머니가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다른 환자들이 정신을 차리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이제쯤은 비니한테서도 뭔가 기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는 게 좀 어설프네. 하긴, 어리니까…….”

첸이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용과 기린이 방에서 나온 건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기린의 얼굴에 지친 기색만 가득할 뿐이었다.

“여기 없어.”

기린이 복도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뭐가?”

“리리스의 혼 말이야.”

“혼? 혼이…… 없어?”

“그만큼 불러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확실해. 텅 비었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자에 앉아 있던 비니 어머니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린에 관해선 아무런 설명도 드리지 않았는데…….

“너…… 잠깐 와봐.”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비니 어머니 앞에서 녀석의 혼이 있니 없니 떠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 녀석을 데리고 일전에 발렌타인과 담배를 나눠 피웠던 정원으로 갔다. 아직은 추운 날씨라서 정원은 인기척이라곤 없이 조용했다.

“혼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설마…… 죽었다는 거야?”

“나 피곤한데, 좀 있다 얘기하면 안 돼?”

기린이 벤치에 주저앉으며 짜증을 냈다. 피곤하냐? 나는 죽겠다.

“일어나긴 일어나는 거야? 옆방 아저씨랑 아래층 아줌마는 벌떡 일어났는데 왜 비니만 그냥 그대로야?”

“말했잖아. 그자의 몸엔 영혼이 없다고.”

하마터면 기린을 받아버릴 뻔했다. 말하는 게 마치 차에 기름 떨어졌어…… 이런 투다. 하나 대수로울 거 없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에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해보려는 내 노력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죽은 것도 아닌데 그게 왜 없냐 말이야?”

버럭 소리를 치며 기린에게 따졌다. 잠시라도 희망을 가졌던 게 어리석었을까?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기린은 별꼴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진정해.”

첸이 내 어깨를 잡아서 야트막한 화단 언저리에 밀어 앉혔다.

“영혼이 없다잖아! 식물인간도 아니고, 완전히 빈 깡통이라는데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게 기린에게 화낼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비니가 이렇게 된 게 기린 탓은 아니니까. 너무 지쳐서 그럴까……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정하고 내 말을 좀 들어.”

“말해.”

첸이 나를 슬쩍 밀고는 옆에 붙어 앉았다. 거치적거리는 놈은 아무나 한대 갈겨버리고 싶은데…… 녀석이 눈치 없이 내 어깨에 슬쩍 손을 얹었다.

“비니 몬티첼리의 상태는 니가 이해해야 돼.”

가장 친한 친구가 영혼도 없이 껍데기만 누워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다. 이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게 아니다.

“주택가 한 블록이 고스란히 무너져 내렸고, 사상자도 많았잖아. 그 광경에 누가 가장 겁에 질렸을 것 같아? 누가 제일 큰 죄책감을 느꼈겠어? 비니 몬티첼리는 이번엔 자기 잘못을 인정했어.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발뺌할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을 거야.”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음성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감당하기 힘든 사고를 친 인간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비니 몬티첼리도 도망가서 숨어 있는 거야. 보통 인간하고 다른 점이라면, 몸은 두고 영혼만 빠져 나가버렸다는 거지. 그 녀석 영혼은 육체가 아닌 다른 곳에 깃들어 있을 거야. 찾아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

하도 기막힌 일을 많이 겪다 보니까…… 나도 모르는 새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애들 앞에서 눈물 보인 게 쪽팔려서 소매 자락으로 얼른 얼굴을 훔치고 숨을 한번 깊이 내쉬었다.

“영혼이 딴 데…… 있으니까 찾아오면 된다고 했어?”

내 입으로 되뇌면서도 대체 이게 무슨 미친 소린가 싶을 뿐이었다. 영혼이 동전 지갑도 아닌데 잃어버리고, 찾아오고…… 어떤 상황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적응이 되기 마련인데 이번 사태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갈수록 적응은커녕 사람 돌겠다.

“쉽게 찾을 거란 장담은 못해.”

기린이 싸가지 없는 말투로 툴툴거리다 내가 노려보자 얼른 용을 끌어다 앞에 세웠다.

“일이 이렇게 되면 번거로운 건 어쩔 수 없어. 예전에 제월공도 사바델의 혼이 숨은 곳을 찾아서 시타나의 넓은 숲속을 열하루나 헤매 다녔다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절대 못 믿을 놈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첸을 쳐다봤다. 제발 사람 미칠 것 같은 이 황당한 대화에서 나를 좀 구해주라…….

“사바델의 혼은 시타나에서 가장 골짜기에 숨어 있었어. 하얀 떡갈나무 갈라진 틈에 깃들어 있는 걸 찾아내긴 했는데…… 그만 육신을 찾아 가라고 제월공이 타일렀지만, 좋게 말로 하니까 들으려 하질 않았어. 그 바람에 수령이 200년도 넘는 근사한 나무 한 그루만 절단이 났지. 결국 베어버려야 했거든.”

“…….”

뭐라 할 말도 없고, 말할 기분도 사라졌다. 이 근처엔 그렇게 오래된 나무가 없을 텐데…….

그건 그렇고, 어째 공기가 따뜻해진다 싶더니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어느 틈엔가 물이 올라서 통통했다. 화단 아래쪽은 벌써 마른 흙을 뚫고 올라온 어린 풀잎이 파랗게 덮여 있고……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담배 있어?”

내 물음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끊었어.”

어디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이것도 일종의 환각일까? 아, 참…… 이 병원엔 정원 구석에 숨어서 담배를 피울 만큼 간 큰 환자가 한 명 있었지.

“어디 가지 마. 담배 한대 피우고 올 테니까…….”

건물 내에 있는 정원이라 면적이 넓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미느라 그랬는지 구불구불한 코너를 여러 개 만들어 놔서 어느 한 구석에 꼭 틀어박히면 담배 한두 개피 무사히 숨어서 피울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는 구조였다.

화단 모퉁이를 세 개 정도 돌자 역시나…… 있었다. 발렌타인과 담배가.

“안녕, 발렌타인.”

“그럭저럭…….”

발렌타인이 고개를 까딱이며 가운 자락을 여몄다. 하지만 나는 봤다. 푸른 색 병원 가운 아래 삐져나와 있는 곰돌이 푸 파자마를…….

“오래 살면 재미있을 텐데. 나이 들수록 더 귀여워지고 있으니까.”

발렌타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은 어디다 갈아서 그렇게 싹 버려놨어?”

“여기 저기…….”

“비니가 누워 있을 때라도 멀쩡해야지.”

“나도 그럴 줄 알았지.”

발렌타인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야위었다. 하긴, 호전될 병세도 아니었으니까…….

“비니 때문에 걱정이 많겠군.”

“응”

“프란시스도 완전히 맥이 빠졌어. 자식이 없으니까…… 아마 비니가 아들 같았나 봐.”

“담배 한 대만 줘봐.”

내 간절한 부탁에 발렌타인이 야멸차게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 마. 병원에서 담배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다음에 올 때 한 갑 사다 줄게.”

“그때쯤엔 여기까지 나와 앉아 있을 기력도 없을 거야.”

안 그래도 뒤숭숭한데 발렌타인까지 이렇게 나오니까 속에서 우울증이 울컥 솟구쳤다.

겨우 담배 한두 개피 때문에 아쉬운 소리 하기도 귀찮아서 발렌타인에게 달려들어서 파자마 윗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통째로 뺐었다. 한때는 세계 최고의 킬러였으나 이제는 그냥 말기 암환자에 불과한 발렌타인이 거친 숨을 내쉬며 나를 노려봤다.

며칠 후엔 앉아 있을 기력도 없을 거라는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주머니를 뒤지느라 더듬어 본 발렌타인의 가슴은 갈비뼈가 그대로 만져질 정도였고 나뭇가지처럼 가늘어진 손목엔 기력이라곤 없었다. 병원이니까 아픈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하지만 참 서글펐다.

담배갑에 담배라곤 달랑 두 개비가 남아있어서 한 개비는 꺼내 물고 돛대는 돌려줬다.

“말소리가 들리던데, 누구랑 떠들고 있었던 거야?”

“루크 첸이랑…… 아는 애들.”

“루크 첸이라면 요즘 사귀는 그 남자?”

뜨끔해서 노려보자 발렌타인이 킥킥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병원에도 신문은 들어와.”

신문에 실린 가쉽의 여파가 의외로 클지도 모르겠다. 온 도시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걸 보니…….

“그거만 피우고 들어가. 감기 걸려.”

“아까보단 훨씬 따뜻한데 뭐. 올해는 봄이 이른가 봐.”

발렌타인이 싸구려 라이터를 던져주면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좋은 선물을 받는 기분이야. 봄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거든.”

기린이 가버리면 곧 사라져버릴 짧은 봄이지만…… 좋다니 다행이다.

“아픈 건 좀 덜한 거야? 전엔…….”

“몰핀을 잔뜩 맞고 나왔거든. 지금이라면 목이 날아가도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야.”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어? 안 그래도 나 요즘 기분이 별로 안 좋아.”

사람이 죽을 장소와 방법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이런 마지막이 발렌타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사이몬 발렌타인 정도 되는 거물이라면 누군가가 보낸 자객의 손에 사지가 찢겨서 여기 저기 흩어진 채 발견되든가…… 경찰의 추격에 쫓기고 쫓기다가 포위당한 끝에 투항을 거부하고 수십 발의 총알에 난사 당해 쓰러지든가…… 뭔가 극적이고 스펙터클한 라스트가 있어야 했다.

병마에 시달려서 비쩍 마른 몰골로 곰돌이 푸 파자마를 입고 병원 구석에서 도둑 담배나 피우는 꼴을 보고 있자니 발렌타인 팬클럽이 아닌 내 눈에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발렌타인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피식 웃었다. 실없이 웃는 거 보니까 약 기운이 세긴 센 모양이다. 평소엔 거의 안 웃던데…….

“내가 죽으면 슬플까? 너 말이야…….”

“조금…… 그럴 것 같아.”

“왜?”

“알게 뭐야? 그냥 그래.”

그러게 아무리 갈 데가 마땅치 않았어도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저택 같은 데서 식객 노릇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담배 한 대 얻어 피우려다가 기분만 더 잡쳤다.

꽁초를 화단에 비벼서 끄려고 내려다보니 여기도 풀이 돋아 있었다.

“들어가. 나도 갈 거야.”

“좀 있다…….”

나를 올려다보던 발렌타인이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뭘 보고 그렇게 놀랐나 싶어 뒤를 돌아봤다. 용과 기린이 막 화단 모퉁이를 돌아선 참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기린은…….

“저기, 얘들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발렌타인의 눈이 젖어 들었다. 그 마른 입술에서 흘러나온 나직한 중얼거림이 내 귀엔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렸다.

“엘리야…….”

병원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정원엔 때 이른 훈풍이 가득했다. 용과 기린을 처음 봤던 그 공터에서 맡았던 이상한 계절의 냄새와 함께…… 기린의 등 뒤에서 이름도 모를 꽃들이 폭죽 터지듯 피기 시작하는 걸 멍하니 보던 발렌타인의 얼굴이 점점 냉정해졌다.

“이쪽은 그러니까…….”

“알아. 엘리야는 죽었어.”

발렌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 누구보다도 분명히 알아! 머리가 박살난 그 녀석의 시체를 10분이나 끌고 다녔으니까!”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터진 것처럼 아프고 당황한 얼굴로…… 발렌타인이 기린을 지나쳐갔다.

발렌타인이 막 코너를 돌아서던 첸과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누구야?”

발렌타인이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보던 첸이 물었다.

“정보가 생명이라면서? 재주껏 알아봐.”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첸이 내 멱살을 확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바싹 끌어당기더니 덥석 입을 맞췄다. 이 자식이 애들 보는 앞에서…… 애들은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지만…….

“무슨 짓이야?”

첸을 밀어내고 따귀를 한대 갈겼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 누구야?”

첸이 얻어맞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정보 수집을 항상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왜? 신경 쓰여?”

말싸움으로 이겨볼까 싶어서 덤빈 내가 잘못했다.

“해코지 안 한다고 약속하면…….”

“보아하니 한쪽 발은 벌써 관 속에 들어갔는데 뭐…… 니 남자친구만 아니면 안 건드릴게.”

“사이몬 발렌타인이야.”

첸이 입을 딱 벌리고 발렌타인이 사라진 쪽을 다시 돌아봤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관해서는 빈틈없이 꿰고 있더니…… 의외로 등잔 밑이 어둡다.

“킬러야?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흉악범이라고 모두 인상까지 흉악한 건 아니다. 잡아보면 인상은 의외로 평범한 경우가 더 많다.

“근데 왜 저렇게 다 죽어가?”

“암이야.”

첸이 그러냐? 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전설적인 킬러의 말로치곤 너무 싱거운걸.”

“암이 뭔데?”

기린이 물었다.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무심코…….

“나를 노려봤단 말이야. 기분 나쁘게…….”

모두가 빤히 쳐다보자 기린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날이 저물면서부터는 뒷산 수풀에서 음산하기 이를 데 없는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겨울바람이자 다소 거친 봄바람이었다.

바람 부는 날은 싫다. 내가 집시였던 어린 시절, 우리 패거리들은 낡은 트레일러를 몰고 작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보잘 것 없는 축제를 벌였었다. 외할아버지는 알록달록한 작은 천막을 치고 자신이 어떤 삶을 살지, 어떤 남자를 만날지 궁금해 하는 시골 소녀들에게 수정 구슬을 보여주는 일로 푼돈을 벌었다.

외할아버지가 예쁘긴 했지만 그다지 믿음직하진 못해서 그랬는지…… 이렇게 바람 부는 날이면 외할아버지의 텐트가 날려 갈까 걱정스러웠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떠나버린 후, 오래도록 외할아버지가 미웠지만 그래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엔 외할아버지 생각이 났고 그 작은 텐트가 걱정스러웠다.

뭐, 꼭 텐트 문제가 아니라도 길바닥을 헤매 다니는 인생들에겐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이 달갑지 않다. 집시 생활 청산한 지 20년도 넘었는데 아직도 이런 날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이거 다 먹었어…….”

기린이 빈 바구니를 털면서 초코칩 쿠키 더 없냐고 보챘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식성을 파악한 결과 기린은 채식 동물이고, 용은 육식 동물인가 보다 했는데…… 종류도 다양한 핸드 메이드 쿠키를 라지 사이즈로 세 박스나 먹어 치우는 걸 보니 아무래도 먹성 좋은 보통 애들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신경을 많이 썼더니 배가 고프다고!”

한 게 뭐가 있다고…… 한마디 쏘아 붙이려다가 참았다. 비니한테는 도움이 안 됐지만 장기간 의식 불명이었던 환자를 둘이나 깨웠으니까 아주 논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지만 몸을 일으켜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기 별챈데, 죄송하지만 쿠키…… 더 있나요?”

「쿠키……요?」

말투가 시큰둥했다. 저녁식사를 빼고도 두 번째 심부름이니까 역시 귀찮은 모양이었다.

첸의 저택엔 몬티첼리 저택에서 만났던 신사적이고 속 깊은 집사 대신 덩치 좋고 인상 안 좋은 젊은 애들이 번갈아 집안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적대적인 관계이긴 했지만 몬티첼리 부하들과는 안면이 있었던 것과 달리 여기는 다 모르는 애들뿐이었다. 관할도 아닌데다 차이나타운 내부에서 생긴 사건이 경찰서까지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예…… 다른 것도 있으면 좋고요.”

「우리 모르게 코끼리라도 한 마리 끌고 들어간 겁니까?」

기린이 그새를 못 참고 손을 뻗어서 테이블 가운데 놓인 난초 이파리를 뜯었다. 비싼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뭐가 됐든 서둘러주세요. 늦으면 나까지 잡아먹힐 것 같으니까…….”

비니를 그대로 두고 병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기린이 피곤하다고 땡깡을 피우는 바람에 별 수 없이 첸의 저택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사실은 나도 더 이상은 버틸 기운이 없었다. 첸은 사무실에 들려야 된다며 도중에 내렸는데, 일찍 들어갈게…… 라면서 손을 흔들고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기분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착잡했다.

“그 남자는 누구야?”

기린이 난초 이파리를 껌 씹듯 질겅질겅 씹으며 뜬금없이 물었다.

“이 동네에서 제일 나쁜 놈이 얼마 전에 병원에 입원했거든. 그래서 이젠 그 자식이 제일 나쁜 놈이야. 얼마나 나쁜지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비니만 살릴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말은 했지만, 뭐냐? 내가 지 마누라라도 된다는 그 태도는…… 그건 그렇고, 일찍 온다던 놈이 11시가 다 되어가도록 소식이 없으니 그건 그것대로 또 짜증이 났다.

“좀 비켜봐.”

기린을 바닥으로 밀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내일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말고…… 병원에서 봤던 남자 말이야.”

병원에서 봤던 남자라면…… 발렌타인? 내가 빤히 쳐다보자 기린이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앞에 놓인 난초를 화분 째 들어 올렸다. 저 자식…… 저걸 한 입에 먹어 치울 작정이다.

가까스로 몸을 날려서 녀석의 손에서 화분을 낚아챘다. 아…… 삭신이야…….

“관심 꺼. 그놈도 좋은 놈은 아니야.”

아무래도 이걸 안 보이는 데 감춰야 할까 보다. 예전에 정복 근무할 때 관할 지역 내의 제법 규모가 큰 화원이 차떼기 절도범들한테 홀랑 털린 적이 있었는데…… 꽃도 안 피는 이런 볼품없는 풀 포기 중엔 수천 불을 호가하는 희귀한 난초도 있어서 되게 놀랐었다. 여태 두 녀석이 먹어 치운 밥값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이렇게 비싼 디저트까지는 곤란하다.

“관심 있는 거 아니야. 그냥…… 나를 보고 많이 놀라는 것 같아서,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잖아?”

“그건…… 이해해줬으면 해. 그 남자 옛날 친구랑 니가 많이 닮았거든.”

이런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화분을 일단 현관 근처에 있는 콘솔 위에 얹었다.

발렌타인에 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하이네 얘기까지 하게 될 거다. 예전에 내가 죽였던 남자와 꼭 닮은 얼굴을 지척에서 보고, 또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갑갑한데 엘리야 하이네 이름 들먹이며 서로의 파트너를 죽인 얘기 따위…… 내 입으로 떠들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어떻게 됐는데?”

“죽었어.”

“왜?”

“그 남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기린이 삐졌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기린의 언짢은 얼굴을 본 용이 벌떡 일어났다. 기린을 뭔가 맘 상하게 하면 용한테서 바로 반응이 나왔다. 둘은 그저 친구 사이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치곤 용의 반응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아까 낮에 멱살 잡혔을 때 보니 기운이 장난 아니던데, 이 일을 어쩐다…….

“돼지고기다!”

용이 나를 싹 지나쳐 가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일전에 그 빌어먹을 파티 날…… 나한테서 냄새 난다고 더럽게 투덜거리던 녀석이 어깨에 커다란 바구니를 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루크 첸이 따라 들어왔다.

용이 냉큼 바구니를 받아서 뚜껑을 열어 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 바구니 가득 먹을 거였다. 빵, 과자, 각종 과일…… 돼지고기는 안 보이는데…….

“회장님, 저희들 아침은요?”

남자가 용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본채에 남아 있는 먹거리를 다 쓸어 온 모양이었다.

“피자라도 시켜 먹어.”

“몬티첼리네 애들하고 전쟁 붙으면서부터 이태리 음식은 안 먹잖아요.”

어쭈? 회장님한테 대드네? 몬티첼리 저택에선 보스한테 대드는 놈 한 놈도 못 봤는데…… 게다가 저놈은 가르시아처럼 유명한 악당도 아니다. 첸도 짜증이 나는 기색이었다.

“그럼 짜장면을 시켜 먹든가!”

용이 입맛을 다시며 바구니를 뒤지더니 맨 아래쪽에서 기름종이로 둘둘 만 커다란 몽둥이 같은 걸 들어 올렸다. 훈제 돼지 뒷다리였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용이 기름종이를 벗겨내고 돼지 뒷다리를 한 입 물어뜯는 걸 첸의 부하 녀석이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봤다.

“저녁은 먹었어?”

자기네 아침 식사를 통째로 뜯어 먹는 용이 못마땅해서 어쩔 줄 모르는 부하를 끌어내고 나서 첸이 멋적게 웃었다.

“조직 장악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문제?”

“몬티첼리 부하들도 먹는데 목숨 거는 애들이긴 했는데…… 그래도 보스한테 대들지는 않았어.”

첸이 그거…… 이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국인들 식탐은 이탈리아인들한테 댈 게 아니야. 그리고 저 녀석은 장인의 육촌 형의 다섯째 손자거든. 그래서 버릇이 좀 없어.”

장인의 육촌 형의 다섯째 손자라…… 남이란 얘긴데…….

“이 집안에 돌아다니는 애들이 대부분 그렇게 저렇게 얽힌 인척들이야. 주방에서 일하는 싱은 본토에서 온 지 3년 됐는데…… 장인의 누나의 둘째 아들의 두 번째 아내가 데려온 아들이래. 이탈리아 마피아들의 패밀리 비지니스하곤 또 분위기가 달라서 여긴 촌수 계산하려면 머리 터져.”

조직 장악이 문제가 아니라, 조직 자체에 문제가 있구나…….

“장인은 혈육에 대한 집착이 심해. 가족이 아니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거지. 나하곤 생각이 달라.”

첸이 예쁘게 조각된 크리스탈 잔에 와인을 부으며 장인 뒷다마를 깠다.

“니 생각은 어떤데?”

“난 가족도 안 믿어.”

첸이 와인 잔을 내게 내밀었다.

보잘 것 없는 처지의 야심가가 권력자의 딸에게 접근해서 부과 권력을 움켜쥐는 신분 상승 스토리는 흔하고 흔하다. 물론 성공할 확률이 아주 낮은 도전이긴 하지만 루크 첸 같은 미남자에겐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자라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린 아가씨의 환심을 사는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거다.

루크 첸의 등장 자체에는 도무지 참신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첸진이 자신의 외동딸을 중국인 후계자가 아닌 인종도 신분도 모호한 낯선 남자와 결혼시켰다는 사실이 잠시 세간의 화제가 되긴 했었지만…… 관계자들을 바짝 긴장시킬 만큼 참신한 면모는 마리아 첸과 결혼하고 한참 후에야 드러나기 시작했다. 녀석은 장인이 건강 문제로 2선으로 물러난 직후 잠시의 공백이나 소요도 없이 조직을 단숨에 틀어잡았던 것이다. 외부인에게 배타적인 차이나타운 텃세를 감안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열한 명이나 되는 첸진의 살벌한 조카들을 루크 첸이 어떻게 물리치고 설득했는지에 대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전혀 없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어?”

말을 말아야지. 와인 한잔을 원샷으로 부어 넣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눈꺼풀이 살살 내려왔다. 이대로 잠들면 사흘은 잘 것 같았다.

첸은 자기 잔에도 한잔 따르고, 나머지 와인은 병째로 용에게 넘겼다. 아무리 한참 클 때라지만 먹어도 너무 먹는다. 둘 다…….

“그래, 생각은 좀 해봤어?”

첸이 다른 자리 다 두고 남의 머리맡에 굳이 엉덩이를 디밀고 앉더니만 내 머리를 들어서 자기 다리 위에 얹었다. 덕분에 온몸의 세포가 다시 바싹 긴장이 되면서 잠이 저만치 달아났다. 어쩌다 내가 중국 마피아 보스의 허벅지를 베고 눕는 처지가 된 걸까? 이래도 되나?

“무슨…… 생각?”

“니 친구 말이야. 알맹이를 찾으려면 어디쯤 있을지 생각을 해봐야지.”

“어딘가 나무 틈새에 끼어 있는 거 아니었어?”

사바델이란 남자의 영혼이 나무 둥치 틈에 깃들어 있었다기에 영혼이란 게 빠져 나가면 전부 그렇게 되는 줄 알았는데…….

“비니 몬티첼리가 좋아하는 곳이나, 맘 편하게 틀어 박혀 있을 만한 장소가 있을 거야.”

그렇게 따지면 비니가 갈 만한 곳은 많다. 새로 개업한 클럽, 와인 바, 애견센터, 놀이공원…… 비니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 맘 편하게 틀어 박혀 있을 만한 장소라…….

“잘 모르겠어.”

“친구잖아. 같이 일만 하진 않았을 거 아냐.”

“일만 했어. 근무시간에 붙어다니는 것만 해도 죽을 것 같았어.”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첸도 비니의 징크스에 관해선 들은 얘기가 꽤 있는 눈치였다. 경미하긴 하지만 몸소 체험도 한번 했었고…….

“비니네는 가족 모임이 많아. 사촌 결혼식, 고모님 생일, 동생 졸업식, 또 사촌 결혼식…… 쉬는 주말엔 거의 가족 행사에 불려다녔고, 평일엔 클럽에 자주 갔었어.”

“클럽, 어디?”

“여기 저기.”

비니는 단골 클럽이 없었다. 비니가 나타나는 걸 반가워하는 클럽 주인이나 종업원이 없다 보니 새로 개업한 물 좋은 클럽이 비니의 주 공략 대상이었다. 징크스가 살인적이라 탈이지, 외모도 멀끔하고 매너도 괜찮은 놈이라서 처음 만나는 여자들한테는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비니가, 아니…… 비니의 영혼이 시내 나이트클럽에서 놀고 있겠어?”

“클럽 얘기는 니가 꺼냈어.”

쩝쩝 와그작 음식 씹어 먹는 소리가 신경 쓰여서 용하고 기린을 노려봤다. 눈치가 없는 건지, 나를 갈구려고 저러는 건지…… 우아하게 앉아서 사과를 아구아구 씹어 먹던 기린이 내가 뭘? 이런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남자 이름은 사이몬 발렌타인이야. 예전엔 청부 자객이었고 나쁜 짓을 많이 했어. 나도 그자에 대해 잘은 몰라. 죽은 옛 친구를 아직 못 잊었다는 거하고, 죽어간다는 것밖에는…… 그리고 그 옛 친구를 내가 죽였어.”

기린이 한입 가득 베어 문 사과를 씹지도 않고 꿀꺽 삼켰다. 목이 아파서 잠시 고생하는 눈치였지만 아픔 따위는 금세 잊고 꿋꿋하게 사과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그럼 널 미워해야지, 왜 나한테 화를 내?”

“날 미워해. 그리고 너한테 화낸 게 아니라 놀라서 그런 거야. 물론 인간한텐 아무 관심도 없겠지만…… 병원에 갔다가 혹시라도 발렌타인과 마주치면 모른 척해줘. 널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기린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표정이었다. 녀석이 뚱한 얼굴로 사과를 한 개 더 집어 들었다. 하지만 드디어 배가 부른지 아직도 식사가 한창인 용한테 틱 던졌다.

용의 반사 신경이 제법이었다. 기린이 던진 사과에 얻어맞고 툴툴거릴 줄 알았는데, 뜯어 먹던 돼지 뒷다리로 날아오는 사과를 쳐서 테이블에 놓인 전화기를 때려 엎었으니까. 얘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아, 클럽…….

“당신 친구는 어떤 거리에 있어.”

기린이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으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거리?”

“사거리 모퉁이에 작은 가게가 보여. 간판에 푸른 코끼리가 그려져 있고…… 길가에 테이블이랑 의자를 내놓고 차를 팔아.”

(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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