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24/49)

16813443622711.jpg

16813443622719.jpg

“나쁜 자식!!”

분통이 터져서 글러브박스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하지만 쥬드는 침착하게 안전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었다.

“그 빌어먹을 놈이 나를 아예 갖고 놀 작정이야!”

“어디로 갈까요?”

쥬드가 물었다. 내가 그 여우같은 자식한테 농락당하는 게 자기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투였다. 하지만 애초에 그 자식한테 찍힌 게 쥬드 탓이다.

“뭐라고 말 좀 해줘 봐! 깡패 두목이 경찰한테 이러는 법은 없어!!”

내 절박한 애원에 쥬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별로 그럴 기분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도 나는 이제 첸하고 당신 일에는 안 나설래요.”

“아까는…… 화내서 미안해.”

쥬드하고 다투고 나면 아쉬운 건 언제나 나다.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나 이제 어떡해?”

아니꼽긴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나 혼자서는 첸을 감당 못한다. 놈이 나한테 싸움을 거는 거면 죽든 살든 싸워 보겠는데 그렇게 느끼한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주말에 우리 집에 꼭 와…….’ 이러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요.”

“12인조 멕시코 악단은 어쩌고?”

“12인조 암살단을 보내는 것도 아니잖아요?”

“암살단이나 뭐가 달라?”

꽃다발 소동도 모자라서 경찰서 밖에서 한 떼거리의 마리아치들이 사랑노래 메들리를 불러 재끼면 그날이 내가 경찰서에서 매장당하는 날이다. 명백하게…… 사회적인 살인이다.

“그럼 그냥 파티에 가요.”

“가서 그놈하고 춤이라도 출까?”

“어차피 선택은 둘 중 하나잖아요.”

쥬드가 총알같이 도로로 뛰어들면서 건조하게 대꾸했다. 이젠 귀찮은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체 내가 왜 그런 거지같은 선택을 해야 되는데?”

루크 첸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고스란히 당해 놓고서 안 보이는 데서 분통 터뜨려봐야 내 속만 타지, 쥬드는 이제 듣는 척도 않았다.

“일단 행선지부터 정하죠. 로빈하고 칼을 어디서부터 찾아볼까요?”

사거리를 50미터 정도 앞두고 쥬드가 방향을 물었다.

3년도 더 지난 일을 새삼 꺼내서 면박준 건 내가 잘못했다. 그 일에 관해선 기회가 있다면 제대로 사과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말해봐야 들어주지도 않을 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전방을 노려보는 폼이 심술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이 분풀이를 어디다 할까 궁리 중인 것이 분명했다. 당분간 쥬드가 권하는 건 물 한모금도 안 마시는 게 신상에 이롭겠다.

“겐지 클리닉.”

“두 사람이 병원에 있어요?”

쥬드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런 건 아니고…….

“비니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의사랑 얘기 좀 해봐야겠어.”

1년 2개월이란 소릴 듣고 그렇게까지 놀랐던 게 오히려 이상하다. 무슨 근거가 있는 얘기도 아니었는데…… 비니는 쇼크로 정신이 살짝 나간 것뿐이다. 녀석은 지금쯤 벌써 정신을 차리고 자기한테 주사바늘 들이대는 간호사들의 손목을 부러뜨리고 있을 거다.

당장이라도 내 눈으로 비니의 건재를 확인하고 나서 첸을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었다.

“비니를 걱정하는 당신 마음 알고도 남지만…… 칼이 오늘 중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칼의 할머니가 경찰서로 쳐들어올 거란 말이에요!”

쥬드가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면서 루벳 거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비니랑 내가 지원 요청한 위치는 대강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자식들을 꼭 내가 찾으러 가야 된다는 법이 어디 있어?”

파트너는 잠자는 공주 신세에, 쿠간에서 제일 성질 더러운 깡패 두목한테 느닷없이 찍혀서 그렇지 않아도 초라한 인생이 아주 비참한 국면으로 접어든 판이었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할 입장이 아니다.

“그런 법은 없지만, 당신하고 비니가 요청해서 지원 나갔다가 없어진 거면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죠.”

보통 때 이런 소리 들었다면 모든 책임이 나한테 있다고 생각했을 거고, 능력 닿는 한도 내에서 질 수 있는 책임은 다 졌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귀찮다. 누가 지하실에 내려가라고 그 두 녀석들의 등이라도 떠밀었나? 다 스스로 자청한 재난이다. 그리고 이건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비니랑 내가 지원을 요청할 때마다 서에서 제일 얼빵하고 못된 것들만 골라서 보내는 이유가 대체 뭐야?”

“당신들 지원 요청에 기꺼이 나서는 착하고 똑똑한 경관이 한 명도 없거든요.”

그런 이유가 있었군.

“다른 놈 아무나 보내. 난 비니 정신 차리는 거 보고 밀린 잠이나 잘래.”

쥬드가 짜릿할 정도로 매섭게 나를 노려봤다. 칼의 할머니 때문에 쥬드가 얼마나 시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녀석 문제로 더는 들볶이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루크 첸의 재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서 등골이 오싹해지고 말았다.

“좋아요. 어디로 보내면 되는 데요?”

한번만 더 로빈하고 칼을 찾아내라고 조르면 차에서 뛰어내릴 참이었는데 웬일로 쥬드가 순순히 타협안을 내놨다.

“라두칸 장서각.”

순간 차가…… 격하게 한쪽으로 쏠렸다.

잘 달리고 있던 쥬드가 느닷없이 핸들을 확 틀어서 바깥 차선으로 뛰어 들었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에서의 느닷없는 난폭 운전으로 옆 차선을 달리던 차들이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여파로 하마터면 줄줄이 충돌사고가 날 뻔했다.

사방에서 빵빵거리며 난폭운전을 항의했지만 길가에 급정거를 한 쥬드는 계기판만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무슨 짓이야? 이게? 비니 징크스, 당신한테 옮았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본래도 운전 습관이 좋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사고가 없어서 그냥 참고 있었던 건데…… 비니랑 다닐 때는 마음의 준비나 하고 있었지, 대체 뭐냐?

“어디 라고요?”

“뭐가?”

솟구치는 신경질을 주체할 길이 없어서 안전벨트를 풀어 던졌다. 비니 녀석의 징크스는 인력으로는 통제할 길 없는 일종의 천재지변이었다. 스케일 차이는 있지만 지진이나 태풍, 혹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쥬드의 난폭운전은 습관적이고 고의적이었다. 비니의 징크스는 고칠 수 없지만 난폭한 운전습관은 마음 먹기 따라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질이 나쁘다.

화난 김에 재규어 문짝을 발로 걷어차고 막 내리려는데 쥬드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묻고 있잖아요! 금방 뭐라 했어요?”

“이거 안 놔?”

놓기는커녕 쥬드가 내 목에 팔을 감고는 마구 졸라대기 시작했다. 힘이야 대단한 게 아니지만 예기치 못했던 기습이라서 숨이 컥 막혔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울화가 쌓여 있던 차…… 이런 일까지 당하니 뚜껑이 확 열리고 말았다.

“왜 이래? 정신 나갔어?”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해서 돌아버리겠는데…… 뭐가 어째요? 무슨 장서각?”

쥬드가 내 귓전에 대고 소프라노 톤으로 악을 썼다. 쥬드랑 안면을 튼 지도 햇수로 8년인데…… 이렇게 날뛰는 건 여태 한 번도 못 봤다. 이건 기분이 좋고 나쁜 차원이 아니라 거의 발작에 가까운 히스테리였다. 어찌나 기세가 사납고 심상치 않은지 덜컥 겁이 났다.

어쨌든 계속 잡아 뜯기고 있을 수는 없어서 급한 대로 쥬드의 가는 손목을 틀어잡았다.

“진정 좀 하고…… 말로 해! 대체 왜 이래?”

“봉인이니, 변신 괴물이니…… 기가 막혀서 가만 듣고 있었더니,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에요?”

“내가 뭘?”

차 안은 좁지, 쥬드는 소리소리 지르면서 버둥거리지…… 별 수 없이 쥬드의 손목을 잡아 비틀고 불에 덴 고양이처럼 요동치는 몸을 거의 깔고 앉다시피 내리 눌렀다.

“라두칸 장서각이라면서요!”

몇 번 용을 쓰다가 아무래도 힘으론 뭘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자 쥬드가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날카로운지 머리가 멍멍했다. 대체 장서각이 뭘 어쨌다고 이 난리냐?

“칼하고 로빈이 어디 있느냐고 당신이 물어봤잖아!”

“그래서, 걔네들이 지금 라두칸 장서각에 있다는 얘기에요?”

그게 이렇게 화낼 일이냐? 이해를 못 하겠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뒤엉켜서 터질 것 같은데,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해요?”

“내가 무슨 농담을 했다는 거야?”

“작작 좀 해요!”

쥬드가 이를 빠득 갈면서 몸부림을 쳤다.

“왜 화는 내고 그래? 언제 장서각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어?”

“진짜…….”

정말로 나를 죽이고 싶은지, 쥬드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려고 덤벼들었다. 기겁을 하고 물러앉다가 뒤통수를 차 천장에 얼마나 세게 갖다 박았는지 한순간 정신이 아득했다. 그때 누군가 차창을 톡톡 두드렸다. 루디였다.

“잠깐…… 내려봐.”

차창을 내리자 루디가 차 안을 잠깐 들여다보더니 나한테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려 보니 가던 길을 멈추고 차 안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를 지켜보던 행인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나를 미심쩍은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대강 알겠다.

“루크 첸하고 짜고 나한테 장난치는 거면 둘 다 죽을 줄 알아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쥬드가 머쓱하게 내려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쉬어 터진 목소리로 악담을 퍼 부었다.

목덜미 좀 할퀴고 욕 몇 마디 듣는 정도는 근무 중에 일어나는 갖가지 위험에 비하면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이유나 알고 당했으면 좋겠다.

독일 병정 루디가 커다란 손으로 내 어깨를 틀어잡았다. 그리곤 엄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오해야.”

긴말하기도 귀찮다.

“나도 니가 벌건 대낮에 길바닥에서 쥬드 크롬웰을 덮칠 만큼 정신 나간 놈이라곤 생각 안 해.”

루디가 대꾸하면서 차 쪽을 힐끔 쳐다봤다. 무뚝뚝해서 그렇지, 사리분별은 있는 친구다. 루디가 내 턱을 들어 올려서 쥬드의 날카로운 손톱에 심하게 긁힌 목덜미를 살펴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쥬드 크롬웰의 남자를 가로챈 건 좀 심했다고 생각하지만…….”

“미안하지만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언제 내가 농담하는 거 봤어?”

루디가 무뚝뚝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긴…… 루디는 농담 같은 거 잘 안 한다.

“벌써 말들이 많아. 루크 첸이 크롬웰한테 데이트 신청하고 기다리는 걸 주차장에서 가로챘다며? 니가 언제쯤 크롬웰 손에 죽을지 모두 궁금해 하고 있어.”

“그것도 오해야.”

루디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니가 길바닥에서 크롬웰 손에 뜯겨 죽을 뻔했다는 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문득 생각이 나서 주변을 살피니 루디의 수다스런 파트너가 보이질 않았다. 순찰대는 혼자 다니는 일이 거의 없는데…….

“그 녀석은 델 파소 쪽으로 파견 보냈어. 지금 현장에 손이 모자라서 난리거든.”

델 파소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루디가 물었다.

“비니는 좀 어때?”

“비니가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대들자 루디가 한 걸음 물러서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떠냐고 물어본 것뿐이잖아?”

요즘은 왜 이렇게 무슨 소리를 들어도 화부터 나는지 모르겠다. 쥬드한테 긁힌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루디한테 소리친 걸 반성하고 있는데, 쥬드가 차에서 내렸다.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솔직히…… 무섭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크롬웰 양.”

루디가 안부를 묻는 척 하면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친구가 진짜 친구다. 게다가 루디는 교통경찰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이라서 쥬드도 함부로 덤비거나 하진 못할 거다.

“괜찮아요.”

쥬드가 마땅치 않은 투로 대꾸했다.

“여기가 주차금지 구역인 건 아시죠?”

“오래 있지는 않을 거예요.”

“서까지 에스코트 해 드릴까요?”

“좀 비켜주실래요? 제이랑 할 말이 아직 남았어요.”

루디가 나를 힐끔 돌아봤다.

“말만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나도 바쁘거든요.”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루디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잡았다.

“믿지 마. 난 가만 있는데 갑자기 덤볐어.”

쥬드가 인상을 쓰며 루디를 옆으로 밀쳤다.

“장서각 어쩌고 하면서 당신이 먼저 약을 올렸잖아요!”

이 여자 성격 진짜 이상하네…….

“장서각 얘길 하는데 왜 약이 올라?”

“계속 이럴 거예요?”

쥬드가 아예 잡아먹을 것처럼 나한테 달려드는 걸 루디가 얼른 붙들어서 요번엔 유혈사태를 면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루디가 쥬드의 손목을 등 뒤로 돌려 틀어잡으며 인상을 썼다. 쥬드가 뒷발질로 루디의 정강이를 걷어찼던 것이다.

“로빈하고 칼이 어디 있느냐고 묻길래 라두칸 장서각에 있다고 했더니…….”

“그 녀석들이 거기 있었어?”

루디의 반문에 쥬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루디를 노려봤다. 하지만 노려만 봤지 루디한테 덤벼들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떤지 몰라도 마지막으로 본 건 거기였어.”

“어제만 해도 두 번이나 그 앞으로 지나갔는데…… 별다른 낌새는 없던데?”

두 녀석이 장서각을 나와서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공사 중인 맨홀 같은 데라도 빠진 거면 차라리 좋겠다. 찾기가 훨씬 수월할 테니까.

“아마 지하실에 있을 거야.”

루디가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바닥만 한 책방 지하실에서 사흘씩이나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거야?”

분명히…… 나오는 길을 찾으려고 필사적으로 헤매고 있겠지.

“지금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쥬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허름한 2층짜리 벽돌 건물에 내걸린 『라두칸 장서각』이란 빨간 네온 간판을 발견한 쥬드가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라두칸 장서각이에요?”

“그럼 뭔 줄 알았어?”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요.”

쥬드가 경적에 대고 이마를 쿵 찧으며 대꾸했다. 그 바람에 경적이 빵…… 하고 한숨 쉬듯 한번 울었다.

“이 따위 허접한 포르노 책방에다가 라두칸 장서각이란 이름을 갖다 붙이다니…….”

쥬드가 괜히 투덜거렸다. 마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악랄한 범죄라도 된다는 듯…….

애초에 병원에 갔다가 밀린 잠이나 잘까 했던 계획은 당장 장서각으로 안내하라는 쥬드의 불같은 호령에 깨끗이 틀어지고 말았다.

쥬드가 그렇게 펄펄 뛰며 화를 냈던 건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쥬드의 세상은 호기심과 통찰력, 그리고 이성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영역이었다. 너무 명확하고 분명해서 어떤 모호함이나 신비함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지금까지 도저히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교묘한 범죄나 사고처럼 보이도록 그럴듯하게 위장된 지능적인 범죄를 몇 건이나 해결했고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은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루크 첸의 싱거운 옛날 얘기가 그토록 쥬드의 심경을 건드린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전설속의 괴수가 도시 한복판에 출몰하고 인구 밀집지역이 이유 없이 한순간에 허물어져 버리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누구에게나 난감한 일이었다.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야는 정신 나간 헛소리로 일축해왔던 쥬드에게는 더욱더 쉽지 않을 터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 중에서 쥬드가 인정하는 건 비니의 징크스뿐이었다.

나야 뭐…… 그 심정 이해가 갈 듯 말 듯했다. 조금만 복잡한 사건이 튀어나와도 곧바로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니까 쥬드가 느끼는 곤란함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워낙 자주 겪는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화낼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천재한테는 그렇지 않은지 몰라도 혼란과 모호함은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일상이다.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란 게 뭔데?”

안전벨트를 풀면서 그때까지 눈이 아플 정도로 번쩍이는 빨간 간판을 노려보고 있던 쥬드에게 물었다.

라두칸 장서각이란 건 인류 최고最古, 최대의 도서관으로 일종의 환상 궁전이었다. 바하르나 제국의 신성한 언덕 아래 있던 거대한 탑인데 지상의 어떤 궁전보다 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까마득히 솟은 최상층은 언제나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인간과 그 외 다섯 종족의 모든 역사와 지혜의 보고로 현자들과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지혜가 또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 장서각의 서고를 풍요롭게 했다. 물론 장서각은 실존했던 건물이 아니고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상상속의 도서관이다.

“가끔은 백색의 자갈이 보석처럼 깔린 너른 광장에 서 있는 상상을 할 때도 있어요. 바로 앞에는 깨달은 종족의 장로들의 모습을 아로새긴 열두 개의 돌기둥과 여섯 종족의 문자가 빼곡하게 조각된 여섯 개의 문이 늘어서 있는데…… 깎아지른 벼랑처럼 까마득하게 높고 큰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 안에 인류가 잃어버린 기억과 한때 세상을 지배하다가 사라져간 종족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거죠.”

장서각에 대해 설명하면서 쥬드가 좀 흥분했다. 도서관 얘기에 같이 흥분해줄 수 없는 게 왠지 미안했다.

“특히 비밀의 서고는 일반인 열람은 아예 금지고 장서각 사서들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이유는 열람객들이 자꾸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거든요. 하지만 늘 출입하는 사서들도 가끔 나오는 길을 몰라서 헤맸대요. 재미있지 않아요?”

실제로 당해봤는데 그렇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기왕 왔으니까…… 들어가 봐. 보기보다 책은 꽤 많은 편이야.”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가판을 최신판 도색 잡지로 가득 채운 보람이 있어서 가게는 종전과는 비교도 못하게 성업 중이었다. 쥬드랑 내가 차안에서 원조 라두칸 장서각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에만 손님이 무려 다섯 명이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만큼 로빈하고 칼에 대해서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서 반짝거리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초미니 스커트에 가슴이 반이나 드러나는 가죽 브래지어 차림의 불타는 빨강머리 아가씨가 카운터에서 인사를 하다 말고 저 남자를 어디서 봤더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같은 표정이었을 거다. 저 여자를 어디서 봤더라…….

“아, 형사 아저씨네. 비니 파트너였던…….”

그러고 보니 라이브 클럽의 「여신들」의 여신 중 하나였다. 슈가라는 이름을 가진…… 얼른 알아보지 못한 건 머리 색깔 때문이었다. 전에는 솜사탕처럼 복실복실한 금발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빨간 폭탄 같았다.

“그런데…… 비니는요?”

슈가가 선반에 놓인 포르노 잡지를 뒤적이고 있는 쥬드를 꼬나보면서 물었다.

“병원에 있어요. 좀 다쳤거든요.”

슈가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총에 맞기라도 한 거예요?”

“그 정도는 아니고, 약간 다쳤어요. 그건 그렇고…….”

소심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카운터에 구입한 물건을 내려놓는 바람에 대화가 잠깐 끊어졌다. 슈가가 책값을 계산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비니 작은아버지가 그 빌어먹을 중국 놈한테 당하는 바람에 우리 가게는 완전히 망한 거나 마찬가지에요. 거기가 그래 봬도 이 근방에선 제일 잘 나가는 라이브 클럽이었는데…… 길 건너편에 3층짜리 대형 클럽이 생겨버렸다고요.”

첸이 직영하는 게 아니라면…… 길 건너편에 경쟁업체가 생긴 게 꼭 그 탓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덕분에 요즘은 테이블이 반도 안 차고 그 바람에 출연료도 왕창 깎여버렸어요. 그 돈으론 방세도 못 낸다고요. 다른 언니들도 요즘엔 업소를 서너 군데씩 돌아다녀요.”

“당신은 비교적 건전한 아르바이트를 택한 셈이군요.”

슈가가 손님의 책을 까만 비닐봉지에 넣어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솔직히, 무대에 서는 게 재미는 더 있어요. 그렇지만 마리우스는 장사에 대해선 상상을 초월하게 무식하다고요. 걔는 이런 책을 어디서 주문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갑자기 슈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처음엔 이런 책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고요.”

“설마요…….”

내가 피식 웃자 슈가가 정색 하면서 카운터에 쌓여 있는 잡지 중 한 권을 들어 보였다. 압도적인 분위기의 동구권 미녀들이 떼로 엉켜 있는 커버에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물 장사도 안 가져갈 헌책만 잔뜩 쌓여 있던 이 가게를 따끈따끈한 최신 잡지만 취급하는 제대로 된 서점으로 만든 건 나랑 가게 언니들이라고요. 꼬박 닷새 동안 가게 치우고, 물건 정리하고…….”

경영 마인드가 갑자기 확 바뀐 게 이상하다 싶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군. 종전에 그 고서점 분위기가 아쉽긴 하지만 마리우스에게는 이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곰팡내 나는 책방에 처박혀서 종일 사람 구경도 못하고 지내는 건 마리우스처럼 젊은 애한테는 잔인한 일이다.

“마리우스는 어디 있어요?”

슈가가 턱으로 오른쪽 코너를 가리켰다.

“성인용품 코너 정리하고 있어요.”

“성인…… 용품도 취급하나요?”

내 질문에 슈가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최신형으로만요.”

책이며 dvd를 한 보따리나 끌어안고 카운터로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서 돌아서자 쥬드가 떫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리우스라고요?”

“그것도 맘에 안 들어?”

“뭐, 컨셉은 충실하네요.”

쥬드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앞장서서 최신형 성인용품 코너로 다가갔다.

이제 보니 성인용품 코너가 가게 절반이었다. 눈높이 정도 높이의 진열장 사이로 보이질 않아서 진열장 사이를 훑고 지나가다가 한구석에서 가죽 바지에 망사 티 입은 어린 청년을 찾아냈다. 취급하는 품목이 바뀌었으니 의상도 분위기 맞게 바꾸는 게 나쁠 건 없지만, 이 동네를 서성이는 거친 남자들을 너무 자극하지는 말아야 할 텐데…… 쥬드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저 예쁜 남자애가 여기 주인인가요? 마리우스라는…….”

쪼그리고 앉아서 성인용품 박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마리우스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마리우스가 오래 못 본 친구라도 반기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요즘엔 저렇게 기분 좋게 웃는 사람도 보기 드물다. 우중충한 벽돌 건물에 어울리지도 않는 빨강색 네온 간판을 내다 걸고도, 변태에 범죄자들이 득실거리는 동네 한구석에서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감도 안 잡히는 묘한 성인용품을 팔면서도 마리우스의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았다.

마리우스가 덥석 안길 기세로 다가왔다. 얼결에 받아 안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마리우스가 쥬드를 보고는 주춤 멈춰 섰다.

“동행이신가요?”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쥬드가 마리우스에게 악수를 청하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쥬드 크롬웰이에요.”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 찾아주시다니…… 이 누추한 장서각이 천 년 전에도 누리지 못했던 영광입니다.”

마리우스가 쥬드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 하면서 쥬드에게는 과분한 인사치레를 했다. 걱정스럽다. 한 손에 「최신 버전 하드 플레이 바이브레이터, 리모컨트롤 가능. 대형」같은 걸 들고 할 만한 인사는 아닌데다 쥬드는 여기 상호가 맘에 안 들어서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참이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세상에 존재했던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궁전의 영주님, 존재했던 인간 중에 가장 순결하고 의로운 영혼을 가진 기사님을 뵙게 되다니…….”

쥬드가 비아냥거렸다. 말투도 그렇지만 언제부터 쥬드 크롬웰이 순결하고 의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었나? 순진한 애한테 저런 식으로 시비를 걸다니, 어른스럽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마리우스는 예쁘다는 칭찬을 좀 거하게 했을 뿐…… 나쁜 마음으로 쥬드를 놀린 게 아니었다.

“순결하고 의롭다니…… 당치 않습니다. 그저 탑과 함께 낡아가는 변변찮은 인간에 불과한 걸요.”

마리우스도 만만치는 않네. 처음부터 좀 그랬지만…….

“뭘요. 천년도 넘게 장서각을 지켜오신 분치고는 상당히 젊어 보이시는데…….”

그 가시 돋친 독설을 더 듣기가 힘들어서 쥬드의 어깨를 잡아서 마리우스에게서 떼어놨다.

“너무 하잖아?”

“무슨 짓이에요? 장서각의 수호 기사님과 인사 중인데…….”

“여기 이름은 쟤가 지은 것도 아니란 말이야!”

“이름이 마리우스라면서요?”

쥬드가 빽 소리를 내질렀다.

“마찬가지야. 자기 이름 자기가 짓는 거 봤어?”

쥬드가 천재인 것도 좋고, 그 덕도 봤다면 많이 봤지만 이런 히스테리를 마냥 받아줄 수는 없다. 서장도 참다 참다 폭발하면 쥬드를 인적 드문 외딴 파출소로 서너 달씩 귀양 보내곤 했다. 내가 비록 쥬드 크롬웰을 오지 파출소로 쫓아 보낼 권한은 없지만, 좋은 말로 타이르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볼 생각인 모양인데…… 누군 스트레스가 없어서 죽은 척하고 있는 줄 알아? 계속 이럴 거면 그 잘난 재규어 끌고 가서 서장한테나 게기라고!”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을 갈군 게 누군데 그래요?”

“나는 로빈하고 칼이 라두칸 장서각에 있단 소리밖에 안 했어!”

“변신 괴물에, 봉인에 사바델 어쩌고 떠든 건 왜 빼먹어요?”

“루크 첸, 그 자식이 멋대로 지껄인 걸 왜 나한테 따져?”

“당신 남자친구잖아요!”

치사하게…….

“저…….”

쥬드와 내가 이를 갈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데 마리우스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차라도 한 잔씩 하실래요? 아니면 시간이 어중간하긴 하지만 간단한 식사라도…….”

“비니 형사님은 왜 같이 안 오셨어요?”

마리우스가 투박한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비니의 안부를 물었다. 뒷방은 가게와는 달리 처음에 비해 변한 게 거의 없었다. 옹이진 참나무로 짠 낡은 서고엔 양피지 두루마리며 낡아빠진 가죽 장정의 책이 어수선하게 포개져 있고 손님에게 기꺼이 소박한 식사를 대접하던 통나무 테이블도 그대로였다. 어렴풋이 나는 탄내도 그렇고…… 지하실로 통하는 문도 부서진 채였다.

쪼개진 문짝을 보고 있노라니 비니가 마리우스에게 파란색 네온 장식을 약속했던 게 떠올라 약간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 있어.”

자기 잔에 물을 붓던 마리우스가 놀라서 그만 찻잔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덕분에 테이블 아래 쌓여 있던 책 무더기에 물이 튀었다. 쥬드가 옆에 있던 수건을 집어서 책에 튄 물기를 재빨리 닦아냈다.

“설마요.”

마리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강렬한 오렌지 빛 오라를 가진 마법사를 다치게 할 만한 위협은 좀처럼 없을 텐데…….”

아주 예전에…… 니콜라스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어떨 때는 너무 빛이 강렬해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라고…… 델 파소가 허물어지기 직전에 뿜어져 나왔던 그런 섬광을 오라라고 하는 건가? 2년 가까이 붙어다니면서도 나는 그때 처음 봤는데…… 눈이 좋은 사람들한테는 늘 보이는 걸까?

“많이 다친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그리고…… 비니는 마법사가 아니야.”

“황색 오라를 가진 사람은 모두 마법사에요. 제가 아는 한은 그래요.”

“비니는 형사야. 내가 아는 한 다른 직업은 없어.”

마리우스가 겸연쩍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꽤 위험한 직업이니까요. 병문안을 가 봐야겠네요.”

차 맛이 좋았다. 마치 시간이 멈춰 있는 듯 조용한 공기도…… 지하실 쪽에서 이따금 올라오는 오래된 바람의 냄새도…… 마리우스가 부엌 쪽에 가서 부스럭거리더니 껍데기가 까맣게 그을린 빵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왔다.

“아침에 구운 건데, 그때 마침 물건이 도착하는 바람에…… 탄 데는 뜯어내고 드세요.”

“고마워.”

쥬드를 쳐다보니…… 좀 전에 마리우스가 뜨거운 물을 쏟았던 책을 펼쳐서 홀린 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용해서 좋긴 한데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뭔가 색다른 트집을 잡기 전에 데리고 나가야 될 것 같아서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쥬드가 고개를 들었다.

“로빈하고 칼이나 찾아서 빨리 가자고. 겐지 클리닉은 면회 시간이 엄격하단 말이야.”

“누구요?”

반문하던 쥬드가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중얼거렸다.

“아, 아…… 로빈하고 칼…….”

하지만 반응도 그뿐이었고 시선은 다시 책 쪽으로 돌아갔다. 쥬드는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특히나 말랑말랑한 양피지, 게다가 핸드 메이드 칼라 삽화라면 아무리 재미없는 책이라도 일단 눈빛이 번뜩일 정도였다. 안타깝게도 경찰 서장 비서라는 직업이 그렇게 월급이 많은 일이 아니라서 저런 책을 사 모을 수는 없지만, 구경할 기회는 놓치지 않는 편이었다.

로빈과 칼이란 이름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마리우스였다. 고약한 장난을 들킨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마리우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지하실로 내려간 거지?”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아침에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물건이 잔뜩 오는 바람에…… 슈가는 오후 3시는 넘어야 나오거든요. 상자에 있는 것만 정리하고 나면 내려가서 데리고 올 생각이었어요.”

“이 빵도…… 걔네들 주려고 구웠던 거야?”

“배가 많이 고플 테니까요.”

하긴…… 사흘도 넘게 굶었으면 지금쯤 양피지라도 뜯어먹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까맣게 타버린 빵 껍데기는 대충 뜯어내고 한입 뜯어먹었다. 음식을 상습적으로 태우는 게 탈이긴 하지만 마리우스는 꽤 괜찮은 요리사였다. 빵에서는 단백하고 순수한 맛이 났다. 마치 마리우스 자신처럼…….

“같이 가자.”

어차피 녀석들을 데려가려고 온 거고 마리우스 혼자만 내려보내기도 미안했다.

“괜찮아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애초에 녀석들을 여기로 부른 책임도 있으니까…… 별로 도움은 안 되겠지만.”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제가 책임져요.”

이런 걸…… 거역할 수 없는 권위라고 하는 걸까? 말투는 보통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반박을 용납하지 않는 묵직한 분위기는 보통 때와는 많이 달랐다. 한순간이지만 나도 모르게 쫄았다.

“혹시…… 이게 무슨 글잔지 알아요? 이런 글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일일이 손으로 적어 넣은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글씨와 책 테두리를 빈틈없이 채운 화려한 채색화에 시선과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서 딴 세상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쥬드가 마리우스에게 책을 들이밀었다. 쥬드는 이제 로빈이랑 칼이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도 없었다.

“대강 해둬. 지금이 취미생활 즐길 때야?”

“하지만 이 책…… 진짜 이상해요.”

쥬드가 보란 듯 책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내 눈엔 그저 다 떨어진 옛날 책일 뿐이었다. 삭아서 없어지지 않고 여태 책장이 붙어 있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겉표지나 제본한 부분이 다 삭아서 낱낱이 떨어지는 걸 보면 굉장히 오래된 책이 분명한데, 잉크는 이제 금방 칠한 것처럼 윤기가 흘러요. 색상도 선명하고……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글자는 처음 봐요.”

좀 전의 신경질은 간데없고 마치 엄마의 보석 상자를 열어본 어린 여자애처럼 놀라움과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책을 들여다보는 쥬드의 눈빛은 지금까지의 모든 악행을 다 용서해주고 싶어질 정도로 순수했다.

“「비온시누카」에요. 깨달은 종족의 비문秘文이죠.”

마리우스가 친절하게 설명한 보람도 없이…… 쥬드의 얼굴이 또 시무룩해졌다.

“소수의 은둔자들인데…… 입이 무거운 대신 기록을 좋아해서 엄청난 양의 장서를 남겼어요. 따로 방을 하나 만들어야 할 만큼요.”

“저기…… 그 깨달은 종족이란 게 설마 바하르나 전서에 등장하는 영수靈獸들은 아니죠?”

대화의 위험수위가 경계를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어요. 제가 관리하게 된 후론 한 번도 온 적이 없거든요.”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마리우스가 착하고 순진한 애라는 건 확실하지만 가끔 엉뚱한 소릴 지껄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간신히 진정 기미를 보이는 쥬드의 히스테리가 도지기 전에 둘을 떼어 놓는 게 상책이었다. 적당히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셔 치우고 쥬드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만 가. 나도 할 일이 있고…… 당신도 서에 들어가 봐야 될 거 아냐!”

“놔 봐요. 이거…….”

쥬드가 물어뜯을 듯 거칠게 대들고는 마리우스 쪽으로 돌아섰다. 신화나, 전설…… 혹은 옛날 얘기가 취향에 안 맞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걸리는 족족 시비냐? 정 이렇게 경우 없이 나오면 우격다짐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앙칼지게 뿌리친 손목을 다시 틀어잡으려는 순간, 쥬드가 마리우스에게 물었다. 그것도 아주 상냥하게…….

“혹시 해석서 같은 거 구할 수 없을까요?”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깨달은 종족 아니곤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문자에요.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쥬드가 한숨을 내쉬며 낡은 책장을 어루만졌다. 보통 사람들은 저렇게 누덕누덕하고 곰팡이 핀 책엔 손도 안 댈 텐데…….

“이렇게 아름다운 책인데 내용을 알 수 없다니, 아무도 기억 못하는 어떤 전쟁의 기록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연가戀歌일 수도 있는데…….”

쥬드의 안타까운 혼잣말에 마리우스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깨달은 종족이 쓴 책은 대부분 자기네 집안 족보예요. 자신들의 혈통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데다 역사도 오래고, 뛰어난 필경사들도 많고, 설상가상 시간도 남아도는 종족이라서 같은 내용의 족보도 수 백 가지 사양으로 만들고 또 만들고…… 오죽하면 라두칸이 ‘깨달은 종족’이 아니라 ‘할 일 더럽게 없는 종족’이라고 빈정거리다 그쪽하고 원수를 졌겠어요?”

쥬드가 잠시 머뭇거리다 의자에 앉았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듯도 하고, 아무 말도 하기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쥬드가 이제야 봤다는 듯 거들떠도 안 보던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맛이 좋네요.”

차향을 맡아보고 한 모금 입에 물더니 좀 전과는 또 다르게 놀란 기색이었다. 칭찬은 그저 건성일 뿐, 슬그머니 내려놓는 걸로 봐선 차 맛이 입에 안 맞는 것 같았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는 몰라도 마리우스의 차는 쥬드가 내놓는 요상한 차보다 맛도 좋고 안전할 텐데…… 말뿐인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지만 차 맛이 좋다는 소리에 마리우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좀 데워 드릴게요. ‘영원화의 재’는 따듯하게 마시는 게 더 좋거든요.”

그제야 쥬드의 차나 마리우스의 차나 성분 불명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화의 재’라니…… 저 주전자 속에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마리우스가 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사라지자마자 쥬드가 내 옷자락을 확 잡아채더니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쟤…… 아무래도 좀 이상해요.”

“뭐가?”

“과대망상 같은 게 있나 봐요. 꼭…… 자기가 라두칸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잖아요?”

“실제로 봤으니까…….”

쥬드가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라두칸은 마법사 멀린하고 비슷해요. 굉장히 옛날 사람이고…… 실존 인물도 아니에요.”

“실존 인물이야.”

“마찬가지에요. 천 년도 더 전의 인물인데 실제로 살았었다고 달라질 거 있어요?”

“우리도 그자를 만난 적 있어.”

쥬드가 사나운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무슨 말이에요?”

“니콜라스.”

쥬드한테 일부러 말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워낙 경황도 없었고, 니콜라스를 직접 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사실은 경찰에서 니콜라스 사망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나서는 그자가 다른 말썽만 안 피운다면 계속 죽은 채로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자가 라두칸이야. 여기 주인이기도 하고.”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마지막 한마디가 입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쥬드의 시선이 얼음처럼 냉랭해졌다.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면 안돼요?”

“그런 뜻이 아니야.”

쥬드가 말하는 라두칸이랑 니콜라스가 동일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니콜라스를 천 년 전에 살았던 현자라고 우길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저…… 니콜라스가 쓰던 많은 가명 중에 그런 이름도 있었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쥬드가 좀처럼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난밤에 킹 거리에 출몰해서 임산부를 습격했던 짐승이 진짜 변신 괴수라고 쳐요. 상관없어요. 첸이 말한 대로 이미 죽었으니까. 이 책방 이름이 라두칸 장서각이래도…… 뭐, 어쩌겠어요? 가게 이름 짓는 거야 주인 맘인걸. 다 좋으니까 그만하자고요.”

아까처럼 펄펄 뛰면서 덤벼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용인 즉, 헛소리 집어 치우란 뜻이었다.

“니콜라스는 안 죽었어.”

쥬드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책을 보는 건 아니었다.

“기쁘면서도 곤란한 소식이네요.”

“몬티첼리 저택이 습격당한 새벽에 니콜라스는 여기 왔었어.”

“직접 봤어요?”

“마리우스가…….”

쥬드가 책을 덮고 일어났다.

“그자가 살아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요.”

근처에서 차를 잡아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다. 거울 호수에서 루벳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봐야 쿠간 시 이 끝에서 저 끝일 뿐이다. 아니, 사실은 불가능하다. 그 시간, 그 근처에 차가 있었을 리 없고 니콜라스는 부상이 심했다. 게다가 그가 탔던 헬기는 내 눈앞에서 추락했고…… 곧바로 폭발했다. 폭발이 일으켰던 날카로운 섬광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하지만 마리우스가…….”

마리우스가 부엌에서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차가 정말 맛있어요.”

쥬드가 마리우스에게서 찻잔을 받아서 입술만 살짝 축이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몇 가지 물어볼 모양이었다.

“그렇죠? 이 차는 다들 좋아해요.”

“‘영원화의 재’ 라고 했죠? 나도 차는 꽤 좋아하고 많이 아는 편인데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봤어요. 어디서 나는 차예요? 중국? 인도?”

“사실은…….”

마리우스가 겸연쩍은 듯 몸을 비틀었다.

“다락방에서 키워요. 언젠가 라두칸이 씨앗을 얻어다줘서…… 본래는 푸른 용의 계곡에서 나는 독초거든요. 구하기도 어렵고 키우기는 더 어렵다는데 달빛이 잘 들어서 그런지 다락방에선 잘 크더라고요.”

독초란 소리에 쥬드가 멀뚱히 마시던 차를 내려다봤다. 평소에 자기가 잘 하던 짓을 그대로 당했으니 기분이 묘할 거다. 하지만 독초라…… 쥬드는 이제 두 모금 마신 것뿐이지만 나는 꽉꽉 눌러담은 한잔 다 마신 마당에 마냥 고소해 하고 있을 일도 아니었다. 마리우스가 당황해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말려서 태우면 안 독해요. 진통 효과도 있고 우울할 때 마시면 기분도 좋아져요.”

“진정 효과는 탁월한가 봐요. 그런 소릴 들어도 화가 안 나는 걸 보니…….”

쥬드가 억지로 허허 웃었다.

“진짜에요. 몇날 며칠 이 차만 마시고 지낼 때도 있었는데…… 그 땐 이거보다 훨씬 진하게 마셨었는데도 괜찮았어요.”

쥬드가 내 눈치를 힐끔 보더니 마리우스의 손목을 잡아서 옆에 있는 의자에 끌어 앉혔다.

불시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예쁜 여자한테 손목을 잡힌 마리우스가 귓불까지 벌겋게 붉히며 쩔쩔 맸다. 요즘도 저렇게 순진한 애가 있다니…… 이거야말로 놀랄 일이다.

“며칠이나 이 차만 마시고 지냈어요? 왜요? 뭐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요?”

온몸에 닭살 돋을 만큼 다정한 질문이었다. 폭탄 테러범 트로이를 심문하면서 그 엄청나게 복잡한 폭탄 제조법을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볼 때랑 비슷한 분위기다. 그 머저리 같은 자식은 쥬드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경찰이 미처 찾아내지 못한 여죄까지 자기 입으로 술술 불었고 덕분에 형량이 엄청 불어났다.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거든요. 가끔…….”

마리우스가 겸연쩍은 듯 대답했다.

“이런 진정제를 며칠이나 마셔야 할 만큼?”

쥬드가 찻잔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마리우스의 등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린 앤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러니까…… 친구도 없고, 오는 사람도 없고,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지내야 하나…… 그런 생각이 한 번씩 들 때가 있거든요. 술도 마셔 봤는데 숙취가 너무 심하더라고요. 술이 깨면 더 기분 나쁘고…… 차가 훨씬 나았어요.”

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쥬드의 저런 행동은 심문 테크닉일 뿐이었다. 하지만 처음 왔을 때 이 가게가 얼마나 파리 날렸는지 알고 있는 나는 마리우스의 심란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가게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정확한 날짜는 몰라요. 대충 천 근처까지 세다가 그것도 지겨워서 관뒀거든요.”

대충 천 일이면…….

“그럼 3년도 넘게 이런 다 썩어가는 책방에 박혀 있었단 말이야?”

이제 갓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애한테 3년이면…… 꽃 같은 청춘이 구질구질한 헌책방에서 다 지나간 거다. 이런 홍등가 구석에서 사람 구경도 못하고 썩기엔 성격도 아깝고 인물도 아까워서 나도 모르게 흥분했다. 마리우스가 돌아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아니고…….”

쥬드가 마리우스의 어깨를 툭 건드려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리곤 어깨 너머로 나를 한번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업 중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저 사람이 그러는데 여기 주인이 니콜라스 헤슬렘이라던데요.”

마리우스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요?”

“주로 쓰는 이름은 라두칸인데…… 사실 그것도 본명은 아니고, 이름은 가는 데마다 틀려요. 어쨌든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건 맞아요.”

“증명할 수 있어요?”

“제 말을 믿을 수 없다면, 달리 증명할 방법은…… 없어요.”

쥬드의 접근 방식이 좀 허술했다. 보통 때 같으면 절대 저런 식으로 서툴게 덤벼서 상대방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데…… 쥬드도 금방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그 사람…… 며칠 전에 여기 왔었다면서요?”

“예.”

“어땠어요? 그러니까 옷차림이나, 분위기나…….”

“대뜸 화부터 내더라고요. 자기가 쳐놓고 간 결계를 어느 놈이 깨부쉈냐고 투덜거리면서 들어오더니, 믿고 맡겼더니 장서각 꼬락서니가 이게 뭐냐는 둥…… 저 웃기지도 않는 빨간 간판 당장 떼라는 둥…… 오만 트집을 다 잡고…… 그래서 말다툼을 좀 했어요.”

쥬드가 마리우스의 어깨너머로 나를 봤다. 그날 새벽 여기 나타난 사람이 니콜라스라면 그런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고 말다툼 벌일 여유는 없었을 거다. 가게 간판이 아무리 흉물스러워도 말이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증언은 계속 이어졌다.

“라두칸이 여기 주인인 건 맞지만 장서각 관리를 맡길 때 분명히 전권을 위임한다고 했고, 또 자기는 여길 나한테 떠넘겨 놓고 휭하니 떠난 이후로 100년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고 나는 꼼짝도 못하고 매여 있는 처진데, 그 정도도 내 맘대로 못해요? 라두칸이 뭐라든 간판은 절대 못 내려요. 덕분에 요즘은 사람들이 꽤 많이 드나들고…… 친구도 생겼다고요!”

“핏자국이 있었잖아? 그건 뭐였어?”

쥬드는 이미 조사를 끝냈다. 그래서 이젠 내가 끼어들어서 마리우스를 다그쳐도 불쾌해 하지 않았다.

“그건…….”

마리우스가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좀 다쳐서 왔거든요. 그러니까 한쪽 팔이…… 없더라고요.”

울컥 화가 나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책장에 기대서서 잠깐 기다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 울화가 가라앉기를…… 미간을 찌푸리고 거친 숨만 푹푹 내쉬고 있으려니 마리우스가 내 눈치를 슬슬 살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이상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사람 팔이 떨어져 나간 걸 좀 다친 정도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이건 마리우스에게 화낼 일이 아니었다. 화가 나는 건 마리우스의 태도 문제가 아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확인했고…… 이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돼버린 탓이었다.

“그 얘긴 좀 있다 하고, 여기 왔던 두 형사들 얘길 좀 듣고 싶은데…….”

쥬드는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태도가 아니었다. 하긴 새삼 놀랄 것도 없겠지. 니콜라스의 팔이 떨어져 나간 건 이미 철 지난 뉴스일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두 녀석 얘기를 꺼내는 건 맘에 안 들었다. 그 둘은 가게 지하실에 잘 있을 거다. 팔 다리도 떨어져 나간 데 없이 멀쩡할 거고…….

“다른 얘기는 더 없었어?”

쥬드의 말을 막고 내가 나섰다.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그날 밤 저택을 습격한 놈들이 어떤 놈들이었다든가, 아니면 어떻게 빠져 나왔다든가…… 무슨 말이 있었을 거 아냐?”

마리우스가 잠깐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성질 같아서는 확 엎어버리고 싶지만…… 피곤해서 참는다고 한마디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렸어요.”

“사람 팔이 한 짝 날아갔는데 겨우 가게 인테리어 문제로 다퉜단 말이야?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아니면 병원엘 데려가든가……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그냥 두면 죽는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엔 이런 얘기는 없었다. 그때는 비니도, 나도 기상천외한 지하실 풍경에 기가 질려서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할 수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신이 나갔었나 보다. 니콜라스가 나타났었는데 신참 두 명한테 이 중요한 현장을 맡기고 자릴 뜨다니, 그가 여기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 그래서…… 치료는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따라 들어갔는데…….”

마리우스의 멱살을 틀어잡아 턱밑으로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그 바람에 당황한 마리우스가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그새 없어졌더라고요. 처음엔 또 어디로 가버렸나 했는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문에 피가 묻어 있어서…….”

옆에서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던 쥬드가 마리우스와 나 사이에 끼어들어 마리우스의 멱살을 움켜쥔 내 손을 억지로 뜯어냈다.

“제이, 나가서 나랑 얘기 좀 해요.”

“당신하고 할 얘기 없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쥬드를 뿌리치고 지하실 물을 열어 젖혔다. 때마침 까마득한 어둠 저 아래쪽에서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카락을 날렸다. 늙은 짐승의 긴 한숨과도 같은 그 바람결에는 켜켜이 쌓인 시간의 냄새가 묻어 있다. 이 도시의 메케한 공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무서울 정도로 이질적인 그런 공기였다.

“얘기 좀 하자니까요!”

계단으로 막 한발 내딛으려는데 쥬드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

“진정 좀 해요.”

“진정이 안 돼.”

“차를 한잔 더 마셔 보지 그래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정도론 어림없어!”

“그렇지 않을 걸요.”

쥬드가 나를 지하실 문 앞에서 끌어내고는 쿵 소리가 나도록 문을 거칠게 닫았다. 그리고 돌아서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 차…… 아편이에요.”

거친 노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고 불꽃같은 빨강머리 아가씨가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마리우스. 나 그만 가봐야 될 것 같은데…….”

우리와 눈이 마주친 슈가가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퇴근 시간이 다된 모양이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방에서 나갈 기회가 어지간히 반가운지 마리우스가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모처럼 타이밍이 좋다. 마리우스 앞에선 하기 곤란한 얘기니까.

“차에 아편이 들었단 거야?”

“진통 효과에, 마시면 기분도 좋아지는 차라는 게 그럼 뭔 줄 알았어요? 거기에 로즈마리하고 민트가 아주 약간 들어갔어요.”

테이블로 다가가서 쥬드가 들었다 놨던 찻잔을 집어 들었다. 냄새도 맡아보고 맛도 다시 봤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차에 관한 한 쥬드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아편이라니…… 이런 걸 그냥 차라고 믿고 아무 의심도 없이 마시고 있었던가? 멀쩡한 얼굴을 해가지고 한 번씩 뜬금없는 헛소리로 사람 당황시킨다 했더니…….

“니콜라스, 그 망할 자식이 애한테 아편을 갖다 먹였단 말이야?”

들고 있기도 짜증나서 찻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렸다.

“아뇨.”

쥬드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니콜라스는 여기 온 적도 없고, 저앨 만난 적도 없어요. 안됐지만…… 그는 아직 생사불명이에요.”

“무슨 소리야?”

“저 나이에 이런 포르노 샵을 운영하는 게 쉽진 않겠지만, 본인의 건강을 위해서 아편 차 같은 건 이제 그만 마시는 편이 좋을 거란 뜻이에요.”

마치 마리우스의 말이 모두 약에 취해 지껄인 헛소리라는 투였다.

“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야?”

“아니면 환각이라도 봤겠죠.”

미안하지만 그 말엔 동조할 수 없다. 경찰서에서, 길거리에서 마약 중독자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흔하게 봐왔다. 마리우스가 아편 차 같은 걸 즐겨 마신다고는 해도 얼토당토않은 환상을 볼 정도로 중증의 중독자는 아니다. 앞으론 어찌될지 알 수 없지만…….

“성분이 아편이라고 해도 한 모금 마시고 뿅 가는 것도 아니고 약간 나른해질 정도잖아. 게다가 약에 취해서 지껄이는 헛소리를 믿고 지원 요청을 했겠어? 당신 눈엔 나하고 비니가 한심한 머저리들로 보이겠지만, 그 정도 분간도 못할 정도는 아니야.”

“저 남자애가 아까 자기 입으로 한 얘기도 제대로 안 듣고 뭐 했어요? 이런 거 액기스로 달여서 몇날 며칠 퍼 마시면 보고 싶은 건 뭐든 볼 수 있다고요!”

그건 그렇지만…….

“왜 하필 니콜라스야? 게다가 마리우스는 그 자식 팔이 날아간 것도 알고 있었잖아!”

쥬드가 노골적인 경멸의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 얘긴 온 세상 사람이 다 알아요. 제이. 2박 3일 동안 일간지 일면 특종이었으니까요. 대문짝만하게 났었잖아요. <니콜라스 헤슬렘. 호수에서 발견되다. 왼쪽 팔만…….>”

가까이 있는 의자를 끌어다 주저앉았다. 내가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머저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가게에 몇 년씩 혼자 멍하니 있다 보면 누군가 유명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래서 나랑 친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 정도는 누구라도 하게 돼 있다. 그 대상이 대부분은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 짝사랑하는 여자 정도였을 텐데, 마리우스는 취향이 좀 특이해서 연쇄살인범이었던 거다. 그 취향 특이한 녀석이 마침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슈가가 저녁 때 약속이 있다고 해서…… 오늘은 가게 문을 좀 일찍 닫았어요.”

마리우스가 바쁜 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가더니 좀 있다가 까맣게 그을린 빵 한바구니, 보온병 한 개를 들고 나왔다. 보온병에 뭐가 들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마리우스가 배낭을 꺼내서 빵과 물병을 챙겨 넣고, 신고 있던 샌들을 운동화로 바꿔 신고…… 도발적인 망사 티 위에 책장 모서리에 걸어놨던 낡은 모직 셔츠를 걸쳤다.

“지금 가려고?”

“형사님은 돌아가 계세요. 그 두 사람은 제가 찾아서 보내 드릴게요.”

“같이 가.”

니콜라스가 거기 없다는 결론이 난 이상…… 지하실에 내려가고 싶은 마음 따위 전혀 없었다. 사실 무섭다. 그래서 애초엔 마리우스에게 두 녀석을 찾아 달라고 부탁이나 해 놓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알고 나니까 아편차를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애를 혼자 그 험하고 복잡한 지하실로 내려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좋겠지만 중간에 헤어지기라도 했으면…… 이틀 정도는 걸릴 거예요.”

“대체 어딜 가는데요?”

쥬드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지하실에요.”

“아…….”

쥬드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편 중독이라고 해도 정도가 심하다 싶은 표정이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여기 지하실이 얼마나 골 때리는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니까 같이 가.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내 제안에 마리우스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는 혼자 내려가고 싶어 하는 솔직한 내막을 털어놨다.

“그러다 형사님까지 잃어버리면 일주일도 넘게 걸릴지도 모르고요…….”

“얘기 중에 자꾸 끼어들어서 미안한대요…….”

그다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쥬드가 치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지하실로 내려간 건 확실해요?”

“아니면 어디로 갔겠어요?”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보느냐는 표정으로 마리우스가 되물었다.

“그 사람들이 저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걸 직접 봤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쥬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손님하고 얘기 잠깐하고 들어와 보니까 벌써 없어졌더라고요. 그 두 사람, 처음부터 지하실에 관심이 많았어요. 갈 만한 데도 지하실뿐이고……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걸 봐도 분명히…….”

“마리우스 씨가 다른 볼일 보고 있는 틈에 밖으로 나간 게 아닐까요?”

쥬드는 우리 얘기가 다 헛소리로 들리고 허튼 짓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뭐, 그럴 수 있다.

“혹시 밖에서 뭔가 일을 당했을 수도 있잖아요. 이 동네는 특히나 험한 동네니까…….”

루벳 거리가 험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동네 뒷골목에서 당할 수 있는 어떤 사고도 저 지하실을 헤매 다니는 것보다 더 위험하진 않을 거다. 그건 확실하다.

마리우스가 가끔 뜬금없는 소릴 지껄이는 게 아편 때문이라고 해도 로빈하고 칼이 지하실에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 쿠간이 아무리 넓고 복잡해도 경찰관 두 명이 흔 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 최악의 경우, 골목 으슥한 곳에서 시체로 뒹굴고 있다고 해도 벌써 누군가의 눈에 띄어서 신고가 들어왔을 거다.

“당신이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 지하실 굉장히 복잡해.”

“경찰서 지하 자료실만큼이나 복잡한가 봐요. 사흘씩이나 헤매고 있는 걸 보면…….”

물론 몰라서 그러는 거지만, 적절한 비유가 아니다. 우선 경찰서 지하 자료실은 지저분한 거지 복잡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겨우 100평 남짓한 창고를 어디다 갖다 대냐?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당신은 차 갖고 먼저 가.”

이리저리 돌면서 내려갈 준비에 분주한 마리우스와는 달리 나는 신고 있는 운동화 끈 고쳐 매는 것 외엔 달리 준비할 게 없었다.

“장단 맞춰주는 것도 정도껏 해요. 비니 병문안 간다면서요?”

쥬드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며 내 팔을 붙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애들은 찾아 가야지.”

“가서 정식으로 실종 신고를 내요. 안 그래도 요즘 도시 치안이 엉망이라 경찰관 피습이 어제 오늘만 3건이나 발생했어요.”

“그중에 두 녀석도 끼어 있었어?”

“아뇨.”

“그럼 지하실이야. 틀림없어.”

“차 한 잔 마시고 벌써 약발 받았어요? 왜 이래요? 진짜…….”

쥬드가 신경질을 내거나 말거나…… 별로 크지도 않은 배낭에 얇은 모포까지 한 장 우겨 넣은 마리우스가 먼 길 떠나는데 또 뭐 빠진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아, 깜빡 잊을 뻔했네…… 이러면서 책장 사이에 장식품처럼 놓여있던 큼지막한 양철 깡통을 내렸다.

덕분에 안 그래도 위태롭던 책장 한 칸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우그러진 모양새도 심상치 않은 깡통 안에 뭐가 들었나 했더니…… 초코바가 하나 가득이었다.

“진짜 같이 가실 거예요?”

마리우스가 상표도 다양한 초코바를 되는 대로 움켜서 안 그래도 터질 것 같은 배낭에 억지로 쑤셔 넣으며 다짐이라도 받으려는 듯 물었다.

“녀석들이 어딜 다쳤을 수도 있고 놀라서 정신이 나갔을 수도 있어. 혼자는 힘들 거야.”

마리우스도 이젠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럼…… 한 눈 팔지 말고 저만 쫓아 오셔야 돼요.”

마리우스가 내 주머니에도 초코바를 몇 개 넣어주며 당부했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애는 참 나무랄 데가 없다. 시간 나는 대로 약물 중독 치료 센터를 알아봐야겠다.

“맘대로 해요.”

잘 논다…… 이런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쥬드가 투덜거리며 좀 전에 무너져 내린 책과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런 거…… 쥬드가 사족을 못 쓸 만큼 열광하는 컬렉션이었다.

쥬드가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리우스가 난처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얘기 못 들었어? 한 이틀 걸릴 수도 있다잖아?”

“헛소리 작작하고 10분 안에 올라와요.”

쥬드는 이제 아예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두루마리 중 하나를 살살 굴려서 펴보는 중이었다.

“내려가는 데만 30분 넘게 걸려.”

쥬드가 책이나 읽으면서 얌전하게 기다리기만 할 거면 몰라도 20. ,30분 기다리다 지쳐서 지하실로 따라 내려올 확률이 100%였다. 멋대로 지하실로 내려가버린 신참 두 명에 이어 쥬드까지 찾아달라는 건 마리우스에게 너무 큰 민폐였다.

“그럴 리가 있어요? 두 사람이 지하실에 뭔가 딴 짓을 할 게 아니라면…….”

두 번째 두루마리를 펼쳐서 대강 훑어보던 쥬드가 갑자기 숨을 삼켰다.

“우리가 밑에서 무슨 짓을 하든 오늘 안에는 못 올라온다고!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

“이거 설마…….”

“대형사고 뒤끝이라서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하루 종일 땡땡이를 치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서장이 가만있겠어?”

“사포의 시 같은데, 여섯 편이나…… 게다가 여기 세 편은 처음 보는 작품이고…… 설마, 이거 진짜야?”

누런 가죽 두루마리를 매만지는 쥬드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내 얘긴 귓등으로도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원본은 아니죠?”

쥬드의 음성이 어떤 기대감으로 울렁거렸다. 어지간한 흉악범 앞에서도 저렇게 흥분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사포가 누구더라? 어쨌든 쥬드의 질문에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원본은 아니고 로마시대 필사본이에요. 연대를 적어놓은 부분이랑 몇 군데가 심하게 삭아서 확실친 않지만…… 아마 4, 5세기 정도에 나온 출판물일 거예요.”

원본이 아니란 소리에도 쥬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은커녕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거…… 며칠 빌릴 수 없을까요? 이 계통으론 세계적으로 빠삭한 교수님을 아는데 그 분한테 가져가 보면 연대가 어떻게 되는지, 이게 진짜 사포의 신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진품이라면 이건 정말 대단한 발견이에요! 비록 원본의 가치엔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내용만 확실하다면…….”

마리우스가 가져가도 좋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쥬드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들고 일어섰다.

“그야 괜찮지만…….”

“고마워요. 다음에 내가 저녁 살게요. 아니, 갖고 싶은 건 뭐든 사 줄게요.”

“뭘 그렇게까지…… 간판도 벌써 받았고, 대단치도 않은 일로 숙녀분에게 선물을 받는 게 기사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선물 사준다는 말에 좋아서 입이 헤…… 벌어지면서도 마리우스가 예의상 한번 튕겼다.

“그래도 생각해봐요. 제이한테 말해 놓으면 다음에 올 때 사다 줄게요.”

쥬드는 마리우스가 맘 변할까 무서웠는지 자기 할 말만 해치우고 두루마리를 챙겨서 잽싸게 방에서 튀어 나갔다. 안 간다고 버티면 번거로울 뻔했는데 잘된 일이다. 너무 갑자기 사라져서 얼떨떨하긴 하지만…… 요즘처럼 암울한 시기에 누더기나 다름없는 옛날 두루마리 책 하나로 저렇게 들뜰 수 있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한편으론 부러웠다.

“차용증이라도 한 장 받아둬야 하는 거 아냐? 귀한 건가 본데…… 뭘 믿고 덥석 들려서 보내?”

마리우스에게 충고를 하면서 지하실 문을 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바람처럼 나갔던 쥬드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한 말…… 들었을까?

“가방을 놓고 나갔어요.”

싸늘하게 나를 한번 째려본 다음에 의자에 걸쳐놨던 백을 집어 드는 걸 보니…… 들었나 보다.

“부탁인데…… 며칠 소식이 없어도 찾으러 내려오거나 하지 말아 줘.”

“피곤한 건 알겠는데 그런 식으로 며칠씩이나 땡땡이 칠 생각은 안하는 게 좋을걸요.”

그렇지 않아도 지하실에 내려가는 거 내키지 않는데 땡땡이라니 기분 나쁘다. 하지만 좀 전에 내가 했던 악담에 대한 복수로는 왠지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쥬드가 결정타를 날리고 돌아섰다.

“안 그래도 당신이 루크 첸하고 너무 요란하게 사귀는 바람에 서장님 심기가 아주 불편하세요. 더구나 상대가 유부남이면 스캔들이 커질 수도 있고…….”

치사하게…… 나도 화가 난 김에 쥬드의 인간성에 대해 마리우스에게 확실히 일러두기로 했다.

“진짜 귀한 거면 아예 떼먹을 수도 있어! 욕심이 많은 여자라고!”

갑자기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마리우스가 쥬드의 눈치를 보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하실에 원본이 있거든요.”

막 문을 열고 나가려던 쥬드가 그 소리를 듣고 우뚝 멈춰 섰다.

쥬드는 아까부터 잠잠했다. 처음 몇 분은 확연히 겁에 질린 음성으로 얼마나 더 가면 되느냐고 묻고 또 묻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거친 한숨만 간간히 토해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방금 전에도 그 날씬한 등이 한번 크게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가늘고 깊은 한숨 소리가 무거운 공기를 울렸다. 쥬드의 두려움이 차갑고 수상쩍은 공기를 타고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다.

“거의 다 왔어.”

시계를 보니 그럭저럭…… 출발한 지 40분이 다 돼가고 있었다. 비니랑 같이 내려갔을 때는 시간이 이렇게 길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하긴, 그때는 막판에 굴러 내려간 거리가 상당했었다.

“웃기지 말아요.”

목소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게…… 누가 따라 내려오래?

“진짜야.”

“내려가는데 이틀, 올라가는데 사흘…… 로빈이랑 칼이 그래서 아직 못 올라오고 있는 게 아니고요?”

“10분 안으론 도착할 거야. 그렇지, 마리우스?”

앞서가던 마리우스가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럼요. 이제 다 왔어요.”

쥬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마리우스는 출발한 직후부터 쥬드가 물어볼 때마다 계속 저런 거짓말을 해왔다.

같이 가겠다고 무작정 지하실로 돌진하는 쥬드를 마리우스와 나는 말릴 만큼 말렸다. 데리고 내려가 봐야 로빈과 칼을 찾는데 도움이 될 리 만무한데다 이 고서적 애호가는 일단 복장부터 불량이었다. 여기 지하실은 무릎길이의 타이트 스커트에 굽이 송곳 같은 하이힐을 신고 출입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들고 있던 다 떨어진 두루마리 시집의 원본이 지하실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론 귓구멍이 막히기라도 했는지, 일단 내려가는 거리도 장난이 아닐 뿐더러 한번 길을 잃으면 찾아 나올 재간이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도무지 들어먹질 않았다. 나중엔 마리우스가 로빈하고 칼을 찾아서 데리고 나오는 길에 원본도 꼭 갖다 주겠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마리우스를 밀치고 지하실 문짝을 걷어찼다. 그 모양새가 흡사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열흘 굶은 호랑이 같아서 연약한 남자 두 명이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닥이 있기는 있다 치고…… 대체 뭐가 있는 거예요?”

“책.”

“그거 말고요.”

“그게 다야.”

쥬드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비니랑 내가 어떻게 이 계단을 끝까지 내려갈 수 있었는지 돌이켜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했다. 이렇게까지 깊었던가…… 피아 식별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어둠 속에서 시간 감각도 없어졌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마치 절벽을 기어 내려가듯 했던 처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최소한 2, 3미터 앞은 분간할 정도의 조명이 있으니까…… 하지만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탁한 빛의 입자, 혹은 은색으로 빛나는 한 덩어리의 안개는 본래 지하 서고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와서 우리를 따라 내려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겁도 없이 지하실 통로로 뛰어든 쥬드를 보고 마리우스도 나도 당황했다. 이 가파른 지하실 계단에서 한 걸음 헛디디기라도 하면…… 지하실까지는 특급으로 도착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고도 살아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다행히 내 걸음이 하이힐 신은 여자 걸음보다는 빨라서 큰 사고 나기 전에 쥬드를 따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버둥거리는 쥬드를 붙들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사이 뒤쫓아온 마리우스가 급히 손가락으로 허공에 뭔가를 그리면서 한두 마디를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마치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내가 보는 앞에서 딱 한번 그랬었던 것처럼…….

최초로 느껴진 것은 바람이었다.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오래된 책에서나 풍겨 나올 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실린 한줄기 바람이었다. 코끝을 간지럽힐 정도의 미풍은 점차 머리카락을 날릴 정도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뭐야?”

“통로가 너무 어두워서요.”

마리우스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쥬드도 이제 이상한 낌새를 채고 좀 전까지 밀어내려고 안간힘 쓰던 내 팔을 꽉 붙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땅 속 깊은 곳에서 어떤 소리가…… 마치 테이블 위에 설탕이 쏟아지는 것 같은, 혹은 마른 모래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미세한 알갱이가 서로 부딪치며 세게 밀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가 올라오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어느 틈엔가 저만치 앞쪽이 훤하게 밝아오는 것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쥬드를 뒤로 밀고 총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빛을 봤다고 생각한 순간은 이미 거칠게 밀어닥친 빛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후였다.

“뭐예요? 이게…….”

코를 베어 간데도 모를 암흑이 갑자기 훤하게 밝아졌다. 전깃불처럼 선명한 빛은 아니고…… 부옇고 탁한 한 덩어리의 빛나는 안개, 혹은 먼지였다. 그러니까…… 지하 서고에 가득 차 있었던 건데 뭐냐고 물어봐도 딱히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쥬드가 공기 중에 가득 떠도는 먼지 같은 빛의 입자를 움켜쥘 듯 손을 내뻗으며 묻다가 입을 다물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이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또 시작이다. 도무지 돼먹지 않은 초현실적인 현상들…… 초행이 아니라서 지하실에 내려가는 험난한 여정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마리우스가 어떻게 안개 소환술 같은 걸 알고 있는 걸까?

“이러면 좀 편하게 내려갈 수 있을 거 같아서……요.”

내가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마리우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거, 누구한테서 배웠어?”

마리우스한테 화낼 일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이런 건 별로 대단한 주술은 아니지만 그것조차도 보통 사람이 섣부르게 흉내 내다간 명을 재촉하기 십상이었다. 외할아버지는 고작 조그만 방 하나를 채울 만큼의 안개를 불러내고 나서 일주일을 꼬박 앓았었다.

“뭘……요?”

“허공에 낙서하면서 중얼거리는 거 말이야.”

이런 건 자격을 갖춘 주술사도 함부로 하지 않는 짓이었다. 시시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것 이외엔 아무 의미도 없고…… 무엇보다도 주술사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짓이었다. 허공에다 좀 전에 마리우스가 그렸던 기호를 비스무리하게 그려 보이면서 추궁하자 마리우스가 더 버티지 않고 순순히 자백을 했다.

“라두칸한테서요.”

나쁜 자식…… 애한테 두루두루 안 좋은 짓만 가르쳤네. 아편을 갖다 먹이질 않나, 어줍잖은 환술 따위를 가르치지 않나…… 그 인간이 살면서 좋은 일을 하나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라서 그런 게 아니야.”

물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말하다 낌새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쥬드가 아직껏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그렇게 놀랐나? 하긴, 놀랄 만하지…… 라고 생각하면서 쥬드의 눈앞에 손을 까불었다가 팔을 된통 꼬집혔다.

“괜찮으니까…… 진정해.”

“진정이 안 돼요.”

“지금이라도 돌아가든가…….”

할 말이 남아서 다시 마리우스를 돌아보다가 쥬드가 갑자기 들이닥친 은색 안개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이제 보니 벽이 온통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 그림으로 뒤덮여 있었던 것이다. 그저 밋밋한 돌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천장까지 이어진 부조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나도 쥬드만큼이나 놀랐다. 대체 어떤 할일 없는 인간이 봐주는 사람도 없는 이런 지하 통로 담벼락에 이런 짓을 해 놓은 걸까…….

“깨달은 종족의 작품이에요. 장서각은 원래 깨달은 종족의 탑이었거든요.”

마리우스가 따라 오라고 손짓을 하며 모퉁이를 돌아섰다.

“여기가 대체 어디에요?”

대답할 수도, 할 필요도 없었다. 쥬드는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안개 같은 빛을 몰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마리우스의 주문 몇 마디로 몰려온 빛의 덩어리는 그대로 보조를 맞춰서 우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기술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익숙해지니까 상당히 편리한 시스템이란 생각도 들었다.

“괜찮아? 발 안 아파?”

한참이 지나도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불안했다. 게다가 쥬드의 걸음이 부쩍 늦어지고 있었다. 마리우스가 멈춰 서서 우리를 기다리는 횟수가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아파요. 이거, 새로 산 구두거든요.”

“그러게 뭐 하러 따라 나서? 힘들 거랬잖아?”

“설마 이럴 줄 알았겠어요?”

쥬드가 멈춰 서서 또 다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곤 더 못 견디겠는지 구두를 벗어서 한 손에 한 짝씩 움켜쥐었다.

“마치…….”

쥬드가 벽에 새겨진 문양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마치…… 뭐?”

“어떤 근원을 찾아가는 기분이에요. 이 길은 끝이 없을 것 같네요.”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저 지하실에 내려가고 있는 것뿐인데 마치 까마득히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 기분이 들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했다. 이 나선 계단은 정말…… 깊고 깊었다.

“다 왔어요. 이번엔 진짜에요.”

모퉁이를 돌아갔던 마리우스가 삐죽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전에 본 적 있는 나무문…… 이제 보니 저것도 그냥 밋밋한 문짝이 아니라 각종 문양을 새겨 넣은 데다 군데군데 쇠나 구리 같은 철물로 장식을 붙여 놓은 엄청 부티나는 문이었다. 왜 전엔 저런 게 하나도 눈에 안 들어왔을까? 심란하다. 굽타 선배 왈, 수사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은커녕 뻔히 보이는 것도 못 보고 지나가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선배님이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마리우스가 문 안으로 사라지고 우리를 둘러쌓고 있던 진주 가루 같은 빛도 마치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마리우스를 따라 지하실로 들어가려는데 쥬드가 내 팔을 꽉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해요. 안에…… 뭐가 있어요?”

쥬드는 떨고 있었다. 살아생전에 이 여자가 바짝 긴장해서 사시나무 떨듯 떠는 걸 보게 되다니…… 뭘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걸까? 미로는 상당히 위험한 곳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껏 사귀었던 남자들은 훨씬 더 위험했다.

“다 책이야. 겁낼 거 없어.”

“진짜…… 책밖에 없어요?”

“그렇다니까.”

지금은 이렇게 떨고 있지만, 막상 안을 보면 굉장히 좋아할지도 모른다. 돈이 딸려서 닥치는 대로 사 모으지 못하는 게 한이지, 정보력과 집념으로 보고 싶은 책은 어떻게 해서든 구해 보는 게 쥬드의 특기였다. 책 한두 권 빌려 보자고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까지 찾아가 안면을 텄을 정도니까.

비니랑 내가 지하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지하실의 넓이와 어마어마한 장서의 규모에 기함하게 놀란 게 전부였지만 우리보다 훨씬 지적이고, 또 책에 관심도 많은 쥬드가 느끼는 감흥은 좀 다를 거다. 책장이 삭아서 떨어질 정도로 헌 고물이 대부분이지만 잘 찾아보면 볼 만한 책도 꽤 있을 거고…….

문을 열고 안으로 한 걸음 들여 놓는 순간…… 그 압도적인 풍경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미 며칠 전에 왔었던 곳이지만 지금 느끼는 놀라움과 두려움은 처음 봤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을까……

마리우스는 아직 멀리 안 갔다. 10여 미터 정도 앞에서 바닥을 들여다보는 폼이 범인의 흔적을 찾는 형사 같았다. 나는 초장부터 막막하기만 했다. 대체 그 두 놈을 어디 가서 찾아…….

“찾을 수 있기는 있을까?”

“그럼요.”

사태를 긍정적으로만 보는 마리우스의 태도는 참 맘에 든다.

“무너진 책장에 깔리지만 않았으면…….”

내 쪽을 돌아보던 마리우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뒤에…….”

뒤에 뭐? 돌아보는 순간, 넋 나간 얼굴로 장서각 풍경을 바라보던 쥬드가 정신을 잃은 채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에요?”

눈을 뜨고도 한참을 멍한 눈길로 천장만 올려다보던 쥬드가 입을 열었다.

“장서각 뒷방.”

“아…… “

쥬드가 다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꿈을 꿨어요.”

눈 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쥬드가 허탈하게 웃었다.

“글쎄…… 여기 지하실로 내려갔더니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 있더라고요. 여태 내가 상상했던 거하곤 너무 달랐어요. 진짜 굉장했어요…….”

나도 그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기절해서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여자를 두 시간이나 업고 올라왔더니 온몸이 다 부서지는 것 같다. 그때, 부엌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선배. 먹을 게 이것밖에 없어요?”

로빈이 팅팅 부은 얼굴로 볼멘소리를 하며 테이블 위에 마리우스의 부엌과 냉장고를 탈탈 털어서 찾아낸 스낵 두 봉지, 핸드메이드 쿠키 한 바구니, 정어리 통조림 여섯 개를 내려놨다.

“그만 먹어. 탈나.”

지하 미로에 갇힌 채 사흘을 꼬박 굶은 불운한 남자의 먹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우선 지하실에서 마리우스가 갖고 갔던 비상식량 절반을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고, 올라와서는 마리우스의 초콜릿 깡통을 깨끗이 비웠으며 부엌 선반에 놓여 있던 스튜 반 냄비와 닭 한 마리까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맘 같아선 피자라도 서너 판 시켜주고 싶지만 올라왔을 땐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 더 큰 탈이야 나겠어요?”

로빈이 두툼한 쿠키 두 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밀어 넣고 우물거렸다.

“어…… 일어나셨네요. 미스 크롬웰.”

쥬드가 잠이 덜 깬 멍한 얼굴로 로빈을 쳐다봤다.

“당신…….”

“인사해. 칼과 로빈 중에 로빈이야.”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3일간 굶은 덕에 음식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것 외에 로빈은 특별히 다치거나 아픈 데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 안 듣는 건 여전해서 일단 늦었으니까 택시 타고 집에 갔다가 아침에 출근해서 반장한테 그간의 일을 보고하라고 타일러도 집에 가 봐야 먹을 거 하나도 없다고 버티면서 마리우스의 부엌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되긴, 일단 한 놈을 찾은 거지.”

다행히 일이 순조로웠다. 내가 기절한 쥬드 때문에 쩔쩔매는 사이 잠깐 돌아보고 온다던 마리우스가 40분 만에 로빈을 끌고 나타났던 것이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탈진해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는데…… 탈진했을 뿐 아니라 마음도 많이 약해졌든지 로빈은 보자마자 나를 끌어안고는 지하실이 다 울리도록 한바탕 통곡을 했다.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뺀질뺀질하던 얼굴이 수염에 뒤덮여서 까칠했고, 눈도 퀭하니 들어간 것이 인상이 완전히 변해 있었다. 몸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마음고생이 만만치 않았던 것 같았다.

눈을 뜨고도 이게 꿈인지 생신지 도무지 구분이 안 가는 황당함은 나도 잘 안다. 녀석이 흘린 눈물에 어깨 죽지가 온통 젖어들고 보니 놈들이 며칠 전에 비니랑 나한테 재수 없게 군건 그것대로 괘씸하지만, 어쨌든 3일 동안이나 지하실에 팽개쳐둔 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먹이는 로빈을 마리우스가 배낭에 챙겨온 먹거리로 달래가며 칼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미로를 헤매다가 두 놈이 싸우고 헤어졌다는 것 외엔 칼을 찾는데 도움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어디서, 언제쯤 갈라졌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허겁지겁 빵을 물어뜯는 폼이 갈데없는 난민의 형상이었다.

“형사님은 일단 두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 계세요.”

배낭에 챙겼던 먹거리를 반쯤 헐어서 로빈에게 안겨준 후, 마리우스가 다시 일어섰다.

“혼자 어떻게…….”

“제 걱정은 하실 거 없고요. 아가씨를 언제까지 저렇게 둘 수는 없잖아요?”

두면 좀 어때서? 언젠간 일어나겠지. 장서각 초입만 보고 기절해 버린 주책스러움이 못마땅해서 나도 모르게 누워 있는 쥬드를 노려봤다.

“처음 온 순례자들이 기절하는 일은 전에도 종종 있었어요. 저도 처음엔 기절할 뻔했었고요.”

마리우스가 점잖게 나를 타일렀다.

“며칠 걸릴 수도 있거든요. 늦어진다고 사람들 내려보내지 마시고…… 남은 한명은 찾는 대로 연락드릴게요.”

마리우스를 혼자 미로로 들여보내는 게 썩 내키진 않지만 같이 움직이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기절해서 깨어날 기미조차 없는 쥬드도 쥬드였지만 서둘러서 올라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건 로빈 때문이었다. 이 미로에서 40분 만에 한 사람 찾아낸 실력이면 나머지 하나도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좀 기다려 보려고 해도 먹다가 울다가, 울다가 먹다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보이는 로빈을 보고 있자니 한시라도 빨리 여길 나가는 게 로빈한테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게…… 내려가지 말랬지?”

“중간에 다시 올라가자고 했는데…… 칼, 그 자식이 자꾸 우기는 바람에…….”

“그래서 둘이 싸운 거야?”

로빈이 마지막 빵 한 조각을 입안에 우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있자니 불쌍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지만…….

“겨우 그런 걸로 싸우고 삐져서 헤어졌단 말이야?”

날카롭게 추궁하자 로빈이 우물거리던 입을 딱 다물었다.

“적당히 기분 맞춰서 놀러나 다니는 게 파트너야? 위급한 상황에선 서로 생명을 책임지는 게 파트너잖아! 주변을 좀 둘러봐! 여긴 특급 위험지구야. 어떻게 마음 안 맞는다고 이런 데서 흩어질 생각을 해? 칼을 영영 못 찾을 수도 있어!”

로빈이 뭐라 대꾸도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눈꺼풀 한번 껌뻑거릴 때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정신도 아닌 놈한테 긴 얘기 해봐야 보람 없는 일이라서 쥬드를 들쳐 업고 일어섰다.

“일어 나! 일단 나가자.”

이제라도 다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얼굴로 쥬드가 나하고 로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꿈이라고 생각해.”

다시 지하실로 내려간다고 설치면 나만 피곤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을 뿐더러…… 이제 새벽이라서 지금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면 결근을 피할 길이 없었다. 벌써 반장한테 이래저래 찍힌 몸인데 거기에 근무태만이란 누명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반장한테 쿠간 시 최대의 홍등가 구석에 자리한 포르노 전문 서점 지하에 비행기 격납고를 서너 개 합쳐 놓은 것 같은 넓이의 엄청난 미로가 존재한다는 보고서를 설득력 있게 작성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직접 보여 달라면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러다 또 길이라도 잃으면 마리우스는 무슨 죄냐?

“꿈이 아니면…….”

쥬드가 멍한 시선으로 방을 찬찬히 둘러 봤다. 아무 장식도 없는 투박한 나무 테이블, 거기 앉아서 게걸스럽게 통조림을 따먹고 있는 로빈, 청장까지 닿는 사방의 책장, 거기 꽂히고 쌓인 수많은 책들. 대부분 한심할 정도로 낡고 초라한…….

“여기가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진짜든 가짜든 나야 상관없지만 일단 여기 상호가 그런 건 사실이다. 여기가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면 큰일이라도 나는지 쥬드는 다시 정신을 놓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쿠간 시 분점이라고 생각하든지…… 뭐가 그렇게 심각해?”

“게다가 니콜라스가 라두칸이고요?”

“여러 개 갖고 있던 가명 중 하나겠지.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비슷한 이름도 많잖아.”

“맞아요. 외국 체조 선수 중에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었어요.”

통통한 정어리 반 마리를 통째로 씹어 먹던 로빈이 아는 체를 하며 끼어들었다. 저게 벌써 두 개째 통조림이다.

“다시 내려가 봐야겠어요.”

쥬드가 소파 아래쪽을 발로 더듬어서 구두를 찾아 신었다.

“지금은 곤란해.”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마다 해도 되는 일인지, 안 되는 일인지 당신이 대신 결정할 필요는 없어요.”

“다섯 시간 후엔 출근해야 돼.”

“당신은 이해 못해요. 나는 꼭 확인을 해야 돼요.”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말투였다. 쥬드의 탐구심과 고문서에 대한 애정을 웬만큼 아는 입장에서, 우격다짐으로 그녀를 주저앉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쥬드 크롬웰의 실종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쥬드가 이틀만 안 보여도 말 그대로 경찰서가 발칵 뒤집힐 거다. 쥬드 없이는 어떤 결정도 내리기 힘들게 돼버린 서장이 우선 아쉬울 테고…… 변태 엽기녀라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도 모종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얼빵한 놈들도 경찰서엔 많았다. 그러니 일이 어떻게 될지는 빤했다. 추궁에 못 이긴 내가 장서각 지하실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여기가 진짜 라두칸 장서각이라면 이건 진시황의 무덤을 찾아낸 것만큼이나 엄청난 발견이란 말이에요.”

“그래?”

쥬드가 막아서는 나를 밀치고 지하실 문으로 다가갔다. 소맷자락을 움켜쥐고 놓질 않자 쥬드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

“아니, 어떤 면에선 그보다 더 대단하죠. 라두칸 장서각은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니까…… 실존해선 안 되는 곳이기도 하구요.”

“그건 또 왜?”

“뭔가 알고 싶으면 당신도 책을 좀 찾아봐요. 지금 당신을 상대로 환상문학 강의 같은 거 할 시간 없어요.”

쥬드가 붙들린 소맷자락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결국 비싸 보이는 실크 블라우스의 소매가 쫙 나가버리고 말았다.

“당신처럼 무거운 여자를 업고 두 시간이나 그 가파른 계단을 올라오는 짓…… 두 번은 하고 싶지 않아.”

“별로 안 무거워요!”

“무거웠어!”

로빈이 세 번째 통조림을 따다 말고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일개 수사관 따위가 감히 쥬드 크롬웰에게…… 그것도 몸무게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를 노려보는 쥬드의 독한 시선을 보니 몸무게 얘긴 괜히 꺼냈다 싶었다.

“어쨌든 내려가지 마!”

“날 죽이지 않고는 막을 수 없을 걸요.”

나도 무조건 내려가지 말라고 억지 부릴 생각은 없다. 쥬드는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래서 구치소에 있는 흉악범 전용 감방도 멋대로 드나들고 있는데 책방 지하실이 대수냐? 사소한 문제 몇 가지만 정리하고 난 이후라면 쥬드가 어디로 사라지든 상관없다.

“당신이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을 좀 해봐.”

“내가 무슨 스타라도 돼요? 물론…… 서장님이야 좀 갑갑하겠죠.”

쥬드가 상황을 제대로 짚었다.

“서장이 갑갑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될 것 같아?”

“새 비서를 채용하겠죠.”

쥬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교활하게 딴청을 피웠다.

“당신은 여기 지하실이 어떤 곳인지 몰라.”

“내가 본 게 확실하다면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고…… 그야말로 별천지던데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아름다웠어요.”

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사실이다. 로빈을 힐끔 쳐다보니 저쪽은 아득한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로빈이 갑자기 입맛을 잃고 통조림을 내려놨다.

“칼을…… 찾을 수 있을까요?”

잘하면 또 울겠다. 녀석도 몇 주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아야 할 거다.

“걱정 마. 마리우스라면…….”

문제없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전에 마리우스가 100명 정도 되는 지하실 방문객 중 세 명인가…… 네 명을 끝내 못 찾았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책으로 이루어진 미로라면…… 『비밀의 서고』, 아니면 『지혜의 서고』일 거예요. 장서각에서도 그 두 곳이 특히 악명이 높거든요. 그런데 13층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이 어떻게 그렇게 깊은 곳에 있는 걸까…… “

빈말이라도 칼 걱정 한마디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거늘…… 쥬드는 지금 다른 얘기는 귀에도 안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 지하가 라두칸 장서각일 리 없어. 누군가가 장서각 얘기에 감명이라도 받아서 비슷한 장소를 만들었다면 또 몰라도…… 니콜라스라면…….”

혼자 중얼거리던 쥬드가 더는 못 참겠는지 또 벌떡 일어섰다.

“그런 지하실을 어떻게 만들고, 운반은 또 어떻게 했을까요?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러면서 쥬드가 다시 지하실 계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진리 탐구에 관한 그 꺾을 수 없는 의지에 기가 눌려서 하마터면 그냥 내려가게 버려 둘 뻔했다.

“당신이 멋대로 내려갔다가 감감무소식이면 여긴 끝도 없이 경찰관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 될 거야. 농담이 아냐. 얼마 전에도 무슨 조사단인가, 연구단인가…… 한 100명 정도 들어갔다가 몽땅 길을 잃는 바람에 마리우스가 애 먹은 적이 있다고 했었어!”

지하실로 뛰어들려는 찰라 정신 차리고 쥬드의 허리를 붙들었다. 과격한 실랑이를 벌이며 소파로 질질 끌고 가는 동안 그녀가 보기보다 무거울 뿐 아니라 기운도 세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사건으로 도시치안이 엉망인데 경찰관 숫자가 그렇게 확 줄어들면 어떻게 되겠어?”

“과장하지 말아요. 좀 복잡해 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과장이라고? 좀 복잡해 보이는 그 지하실에서 사흘 반나절을 헤매다 거의 폐인이 된 당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쥬드를 소파에 던져 놓고 엄지손가락으로 로빈을 가리키자 쥬드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거긴 정말…… 끔찍했어요.”

로빈이 나름대로 지원사격을 했다. 고맙긴 하지만 잠자코 통조림이나 비우는 편이 더 좋을 뻔했다.

“세상에 그렇게 책이 많은 건 처음 봤다니까요.”

머저리!!

(5권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