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거칠게 쳤다. 올려다봤는데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더라, 낯은 익은데…….
“누가 정신 차리고 말 좀 해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떤 놈이 여길 이렇게 해놨냐고!!”
남자가 맞은편 길가에 퍼질러져 앉은 비니를 발견하고 달려가더니 비니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남자도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때 사방으로 뻗친 금발 머리에 얼굴엔 화장기 하나 없는 중년 부인이 남자를 밀치더니 비니를 보고 악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 이 피 좀 봐!”
맨 얼굴은 본 적 없어서 장담할 순 없지만 저 여자…… 비니 막내 이모 같았다. 비니는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고 날아온 벽돌 파편에 이마를 찍혔다. 덕분에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있는 건 맞지만 상처 자체는 대수롭지 않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비니 이모도 금방 비니 상태를 눈치챘다.
“어머, 어떡해…… 얘가 왜 이래? 비니? 비니?”
비니는 지금 정신이 완전히 나간 상태였다. 좀 놀랐다거나 제정신이 아니란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녀석의 영혼이 몸을 두고 나가 버린 거다. 이런 일이 전에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반이나 그랬던 적은 없었다.
비니를 버려두고 일어서서 멀리 보이는 벌건 화염을 비통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저 반 대머리 중년 남자가 누군지 이제 생각났다. 비니 막내 이모부……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이 잇따르는 이 불운한 도시의 시장이었다.
길바닥은 난장판이었다. 온 도시에서 몰려온 소방차, 경찰, 기자, 사람들…… 미궁을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간까지도 다 잡히지 않았다.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좁은 길이 많아서 소방관들이 애를 먹고 있었다. 이 구역 관할 책임자들과 얘기를 끝내고 온 애쉬와 터너도 지친 얼굴이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난 다친 데 없어.”
“……비니 말이야.”
터너가 비니를 힐끔 쳐다봤다. 비니 막내 이모가 비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비니는 아직 그대로였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찢어진 머리 밑도 말끔하게 꿰매 줄 테고 어긋난 발목 관절도 잘 맞춰 주겠지만, 도망친 영혼까지 찾아줄 수 있을까?
내가 본 것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오렌지 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빛의 폭발과도 같은 것이었고 동시에 비니의 폭발이기도 했다. 비니에게선 미동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비니의 빛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빛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 빛에는 소리도, 느낌도, 열기도 없었다. 피아 분간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빛은 나타났을 때 그랬던 것만큼이나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엔 바람이 불었다.
그다지 강한 바람은 아니었다. 옷깃이 슬쩍 들리고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의 미풍…… 다소 이른 봄바람이었을 뿐…….
난데없는 훈풍이 수상하단 생각이 들 즈음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부터 골목 양쪽의 건물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먼 바다에서 몰려오는 거친 파도처럼…… 갑작스런 소나기에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미처 피하지 못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계곡의 물처럼…… 이제는 건물의 붕괴 속도와 기세가 오컴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지축을 울리는 우레 같은 붕괴음에 오컴이 주춤했다. 산산조각 난 콘크리트와 벽돌의 파도가 놈을 집어 삼키듯 덮쳤다. 놈이 뒤를 돌아본 것과 거의 동시였고, 비니와 내게서 불과 10미터 앞이었다. 놈이 복잡한 절차 없이 곧바로 무덤에 묻힌 걸 기뻐할 여유도 없었다.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이젠 정말 끝이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비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에쉬가 비니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정말 비니가 저런 걸까?”
기겁을 해서 에쉬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델 파소 한복판 반경 100미터가 자갈밭으로 변한 마당에 시장 귀에 비니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어가는 날엔 제 아무리 처조카라도 시장이 비니를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시장 눈치를 살피며 입을 틀어막은 채 애쉬를 소방차 뒤쪽으로 끌고 갔다.
“미안해, 시장 생각을 미처 못 했어. 그런데…….”
애쉬가 입에 들어간 흙먼지를 뱉어내며 자신의 눈치 없음을 반성했다. 델 파소를 거의 빠져나갈 무렵 세상의 마지막 날 같은 광경을 봤으니 에쉬도 정신이 없을 터였다.
“진짜 비니가…….”
“어떤 자식이 그 따위 소릴 지껄여?”
에쉬를 따라온 터너가 손을 들었다. 하긴, 제시와 발렌타인이 병원으로 실려 갔으니 현장 목격자는 이제 터너와 나뿐이었다. 비니도 있지만 지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난 그냥……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뿐이야.”
“비니는 아무 짓도 안 했어.”
이건 사람들에게 추궁을 당할 때면 비니가 노상 지껄이던 변명이었다. 내가 비니 대신 이런 변명을 해줄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비니야 항상 아무 짓도 안 하잖아. 그냥 녀석 주변에서 일이 일어나는 거지.”
재산 피해는 둘째 문제고 이 천재지변으로 인한 사상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아직 모른다. 이 엄청난 일을 아무 증거도 없이 비니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비니한테 징크스가 약간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약간?”
터너가 삐딱하게 되물었다.
“비니는 초능력자가 아니란 말이야. 비니는 평범한 짭새야. 어떻게 저런 짓을 해?”
사실은 스스로도 지금 하고 있는 말의 진실성이 의심스러워서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졌다. 터너가 뭐라 대꾸도 없이 나를 요렇게 노려보더니 손을 뻗어서 내 머리에 눈처럼 내린 흙먼지를 툭툭 털어줬다.
“비니 탓이라고 한 적 없어. 비니 덕에 목숨을 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지.”
다음날 조간신문엔 오컴에 관한 기사도,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관한 얘기도 없었다. 1면 전체에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델 파소의 사진이 실렸고 가운데 커다란 물음표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지진, 테러, 연쇄 폭발, 지반 침하(?)…… 등등 추측은 난무했지만 그럴듯한 건 별로 없었다. 지진이라기엔 피해 지역이 너무 좁았고, 그런 빈민가가 테러를 당했다는 주장은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별로 없었다. 몇 군데 가스 폭발이 있기는 했지만 동네 하나를 쓸어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연쇄 폭발은 없었고, 아무리 살펴봐도 지반은 멀쩡했다. 어떤 경위로 델 파소의 구조물들이 지름 4,5센티미터 이하의 잔돌맹이가 되어 무너져 내렸는지에 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써는 아무도 없었다.
정확한 인명 피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물 붕괴 직전에 많은 주민들이 델 파소를 빠져나간 덕에 사건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많지는 않으리라는 추측이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었다. 그리고 신문 어디에도 비니 몬티첼리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델 파소 붕괴 사건은 영영 베일에 싸인 채 쿠간의 미스터리로 남을 거고, 이런 종류의 황당한 사건 사고를 다루는 작가들에게 짭짤한 소스를 제공한 후 천천히 잊혀질 터였다.
“커피 드실래요?”
롭이었다.
“고마워.”
롭이 내게 커피 잔을 건네고 옆에 앉았다. 병원에 올 때만 해도 반쯤 자고 있었는데 비니를 보고 잠이 확 깼는지 눈이 초롱초롱했다. 롭은 비니 동생이다. 비니한테는 롭 외에도 여동생이 두 명 더 있었다. 친구들하고 스키 타러 가는 바람에 아직 병원에 오지 못한 둘째 여동생 외에 나머지 가족과 시장 부인은 지금 비니가 입원한 병실에 모여 있었다.
“혹시 델 파소도 형이 그런 거 아니에요?”
커피 마시다 입천장을 델 뻔했다.
“농담이에요. 놀라긴…….”
롭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커피를 홀짝거렸다. 롭은 스물세 살이었고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부친의 사업체는 아마 롭이 물려받게 될 거다. 이탈리아인들은 뭐든지 가족끼리 경영하는 걸 좋아하니까…….
“많이 놀랐지?”
롭하곤 몇 년 전에 짧은 인사를 한번 나눈 게 전부라서 좀 서먹했다.
“놀랐어요. 병원에 있다고 해서 어딜 크게 다친 줄 알았는데…… 멀쩡하잖아요.”
“정신은 금방 돌아올 거야.”
“의사들은 그런 얘기 안 하던데요.”
“비니는 내가 더 잘 알아.”
롭하고 커피 잔으로 건배를 하고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롭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저러고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해요. 그동안 정신이 나가는 건 주로 주변 사람들이었거든요.”
“그 사정도 잘 알지. 지난 2년 동안은 내가 주로 비니 주변에 있었거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롭은 비니하고 별로 안 닮았다. 비니가 아버지를 닮아서 골격이 크고 훤칠한데 비해 롭은 어머니를 꼭 닮아서 금발에 아담한 체구, 쌀쌀 맞은 눈매를 가졌다. 비니의 두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쫓고, 쫓기고, 터지고, 무너지고…… 늘 있는 그런 일이었어.”
“그만한 일에 형이 저렇게 됐다는 거예요? 나도 형을 알 만큼은 알아요.”
롭이 깐깐하게 따지고 들었다. 웬만한 일은 대충 설렁 넘어가는 비니하곤 눈빛부터 틀렸다.
“난 어렸을 때부터 별명이 ‘감정도 없는 롭’이었어요. 형이랑 한 집에 살면서 하도 희한한 일을 많이 보고 당해서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도 않는다고요. 내 생에 가장 좋았던 날은 형이 경찰학교에 입학해서 집을 떠나던 날이었고…… 솔직히 말해서 난 형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요. 형제간에 우애도 모르는 재수 없는 놈이라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 그래요. 하지만 세상엔 겪어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요.”
세상 어느 누구도 롭을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욕할 수 없다.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가서 때려줄 거다. 비니 얘기를 하면서 롭이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난 누나들하고 달라서 겁도 많은데 형은 날 제일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엉켜 붙고, 또 내가 막낸데 우리 부모님은 형한테만 신경 쓰느라 난 늘 뒷전이고, 친구들도 우리 집에 한두 번 놀러 오고 나서는 나까지 슬슬 피하고…… 팔도 두 번이나 부러지고, 잔디 깎는 기계에 반나절이나 쫓겨다니고, 자전거 타는 법 가르쳐 준다면서 풀장에 처박고, 계단에서 구른 건 셀 수도 없고…… 내 성격이 이렇게 된 것도 다 형 탓이라고요!”
롭이 마시던 커피를 쓰레기통에 확 처박아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비니의 전 파트너들이나 비니 징크스에 골탕 먹은 동료들도 이 비슷한 반응을 종종 보이곤 했다.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어렸을 때라 그런지 징크스도 귀엽다. 잔디 깎는 기계라니…… 요즘은 그냥 차로 밀어버리는데.
“어쨌든!”
내가 웃어서 기분이 상했는지 롭이 인상을 확 구기며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 밀었다.
“형은 형이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요!”
“같이 있었던 건 맞지만…….”
“말 못할 일이 대체 뭐가 있어요? 델 파소를 형이 쓸어버린 것만 아니라면…….”
다음 순간 롭과 내 시선이 딱 마주쳤다. 롭이 딸꾹질을 하면서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진정해, 롭. 비니가 그런 거 아니야.”
“정말요?”
“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증거는 없어.”
좀 기다렸다가 비니가 정신 차리는 걸 보고 가려고 했지만 서에서 호출이 빗발쳤다. 비니를 두고 가기가 안타깝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비니가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만으로도 병실이 미어터졌다. 원인 불명의 재난으로 도시 한 귀퉁이가 내려앉아 버렸으니 현장에 있던 경찰관은 이만 돌아가서 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이었다.
공식 보고서에다 비니 몬티첼리의 눈에서 오렌지 빛 광선이 발사되면서 델 파소가 무너져 내렸다고 쓸 수는 없으니까 무슨 말을 갖다 붙일지는 지금부터 생각을 해봐야겠다.
가장 시급한 건 오컴 문제였다. 그 짐승은 본래 이 도시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혹시 누군가가 잡아와서 고의로 대도시 한복판에 풀어 놓은 걸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야기책에나 봤지, 한 번도 실존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는 그 괴물을 어떤 놈이, 대체 어디서 찾아낸 걸까? 오컴의 습성이나 위력을 알고 있다면 그놈이 도시 한복판에 풀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을 보듯 뻔한데,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내려가는 길에 발렌타인의 병실에 잠깐 들렀다. 노크를 하고 문을 밀어보니 발렌타인은 두 손을 모으고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델 파소 붕괴 사건 직후 발렌타인은 갑작스런 통증으로 쓰러졌고 현장에 있던 몇몇 부상자들과 함께 병원으로 후송됐다. 발렌타인이 누운 채 고개를 돌리다 나를 알아보고는 노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눈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눈빛이 좀 몽롱했다. 저런 발렌타인은 처음 본다.
“몸은 좀 괜찮아?”
“덕분에…… 막 오르가즘을 느끼던 참이었어. 몰핀을 엄청 주더라고.”
농담인 건 알겠는데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발렌타인은 본래 겐지 클리닉 환자니까 이쪽으로 보내는 게 좋을 거란 얘기를 구조대에 슬쩍 흘려준 것뿐이었다. 발렌타인은 오컴이나 그 망나니 기사단에 대해 뭘 좀 알까 해서 들렀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다.
“오늘, 고마웠어. 도와줘서…… “
“내가 받을 인사가 아닌데…….”
“제시를 위해서 애써 준 거 말이야.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놓쳤지. 고통은 엄청났겠지만…… 오래 끌지는 않았을 텐데…….”
“어쨌든, 신세 한번 크게 졌어.”
발렌타인이 약에 들떠서 어울리지도 않는 나른한 웃음을 웃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몰핀에 최음제 같은 걸 탔나 봐. 자꾸…….”
“왜? 흥분이라도 돼?”
나사 풀린 발렌타인의 모습은 정신 나간 비니만큼이나 보기 괴로웠다.
“……엘리야가 생각 나.”
발렌타인이 베개를 끌어안고 킥킥거렸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약에 취한 미소였다. 솔직히 이젠 발렌타인이 그렇게 나쁜 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지독하게 지쳐 보일 뿐이었다. 고통에, 슬픔에, 사는 것 자체에…….
“솔직히 난…….”
발렌타인의 눈을 이렇게 제대로 쳐다보기도 처음이었다. 약에 취해서 미움과 원망을 잠시 잊은 옅은 고동색 눈동자가 정말 고왔다.
“그 자식 죽인 거, 하나도 안 미안해.”
금세기 최악의 범죄자들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를 자랑하는 쥬드 크롬웰의 개인 자료실에는 엘리야 하이네의 파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야 하이네에 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발렌타인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확인 할 수 없는 수많은 루머가 떠도는 것과는 다르게 하이네에게는 서너 가지 짧은 이력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력은 모두 확인된 사실이었고, 사실이라는 걸 인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했다.
하이네는 주로 고아들을 군인으로 훈련시키는 중앙아시아의 어느 군사 캠프 출신이었고 용병으로 아프리카에서 근 10년간 활동하면서 몇 번의 대규모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력이 있는 국제 범죄자였다. 그 후 콜롬비아의 한 범죄 카르텔에 고용돼서 조직 간의 마약 전쟁을 주도한 것을 마지막으로 몇 년인가 행적이 끊어졌다가 청부업자가 돼서 이 도시에 나타났고, 여기서 죽었다. 하이네를 죽인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이네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었다. 그자에겐 출생 기록 자체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나 군사 캠프 출신의 소년병들이 아주 이른 나이에 실전에 데뷔하는 현실로 미루어 사망 당시 나이는 많아 봐야 서른도 채 안되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캠프 출신 소년병들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본다면 그다지 이른 죽음도 아니었다. 소년병들은 거의 대부분 소년인 채로 죽는다.
잠시 활동하던 북부 콜롬비아 산간 지방에서 하이네의 별명은 ‘미스터 죽음’이었다. 놈이 지나는 곳 어디에나 죽음과 고통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적은 물론이고 눈앞에 거치적거리면 어린애라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평생 사랑이란 말은 입에 담아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차가운 남자 발렌타인이 사랑했던 건 그런 놈이었다. 그 비정한 두 남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는 고통을 넌 몰라. 그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야.”
약기운 때문에 이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발렌타인이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기분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엘리야는…… 그렇게 작고 사랑스러웠는데…… 아무도 그 앨 사랑해주지 않았어. 세상을 향해 내민 손이 갓 돋아난 새싹처럼 여리고 아름다웠는데 누구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 고통이 그 앨 악마로 만들었어. 인간들이라니…… 벌래도 그보다는 자비로웠을 걸…….”
발렌타인이 한 순간 반짝 눈을 떴다. 아주 불쾌한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그가 언짢은 얼굴로 허공을 노려봤다. 그는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환각을 보고 있었다.
“너희들을 사랑한 꼭 그만큼 증오하게 될 거라고…… 아주 예전에 아담이 경고했었는데…….”
“아담?”
발렌타인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뒤척였다. 마치 비웃음 같은…….
“한마디로 왕 재수였어. 우아하고 고귀하고 순수하고 밥맛 떨어지는…… 하지만 그 예언이 빗나간 적은 별로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 옷자락이라도 잡아채고 싶은지 까딱거리던 발렌타인의 손이 맥없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엘리야를…….”
발렌타인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고 애썼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들릴 듯 말 듯 그렇게 중얼거리곤 몽롱하던 눈마저 감겨버렸다. 발렌타인의 손을 잡아서 이불 아래로 밀어 넣었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발렌타인의 손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따뜻했다. 그의 고통이 길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찰서 분위기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침울했다. 어디 경찰서뿐이랴. 쿠간 시 전체가 원인 불명의 재난으로 침통한 분위기였다. 방송에서는 중화기로 무장한 괴한들을 목격한 시민들의 제보를 단서 삼아 모종의 테러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신나게 추측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내 귀에도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다. 델 파소가 테러 때문에 그렇게 된 거면 차라리 속이 편하겠다.
“그래도 이번 사건에서 얻은 게 아주 없지는 않죠.”
빨강색 금연 딱지 바로 옆에서 담배를 뻑뻑 빨고 앉아 있던 쥬드가 나를 발견하고는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피곤해 보였다. 어제 입은 낙타색 스웨터와 검정색 스커트를 그대로 입고 있는 걸 보니 집에 못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시선이 보통 때와는 달리 좀 나른했다.
“뭘 얻었는데? 오컴 가죽 핸드백?”
“우선 쿠간 시 최대의 미궁이 사라졌고, 그리고 비니 몬티첼리의 징크스가 초능력이라는 게 밝혀졌잖아요.”
“비니가 그랬다는 증거가 있으면 갖고 와봐.”
쥬드가 담배를 비벼 끄고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서 제법 멀리 떨어진 쓰레기통에 깨끗하게 집어넣었다.
“나도 터너의 보고서를 보기는 했는데, 오컴이 대체 뭐예요?”
“내가 어떻게 알아?”
쥬드를 지나쳐가자 그녀가 나를 따라왔다. 쥬드는 본래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하지만 지금은 쥬드의 탐정 놀이에 동참해줄 여유가 없다.
“당신이 잘 안다던데요?”
“누가 그래?”
“터너가요.”
“뼈와 살과 가죽을 가진 생물 중에 가장 흉폭하고 질긴 놈이었어. 나도 그 이상은 몰라.”
쥬드가 내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당신이 비니를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비니 걱정을 왜 해? 내 걱정만 해도 정신이 나갈 것 같아.”
“지금 비니 얘길 하자는 게 아니에요.”
“나도 그래.”
이 진드기 같은 미인을 어떻게 떼어내나 머리를 굴리면서 사무실 문을 밀었다. 쥬드한테 붙들려서 이런저런 경로로 쥐어 짜이다 보면 비니 얘기를 안 하고 버틸 재간이 없다. 쥬드는 유도 심문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스페셜리스트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으로 한 걸음 들여 놓다가 사무실 풍경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게 다 뭐야?”
쥬드가 허탈하게 웃었다.
“꽃…… 같은데요.”
내 책상이 있던 자리가 온통 꽃밭이었다. 한 아름이나 되는 꽃바구니 열대여섯 개가 책상 위아래 빼곡히 놓여서 앉을 자리도 없었다. 첸…… 그 자식 소행이다.
지난 몇 년간 쉴 새 없이 토닥거리던 프란시스 몬티첼리를 옆으로 밀어 치웠으니, 첸은 요즘 할 일이 별로 없다. 심심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망할 자식! 바람은 당신한테 맞고, 왜 나한테 화풀이야?”
이런 게 왔으면 알아서 좀 갖다 버리지, 책상 주변에 수북하게 쌓아 놓는 건 대체 무슨 심술이냐? 직장 동료란 것들이 그 깡패 자식보다 더 나쁘다.
짜증나서 책상 위에 놓인 꽃바구니를 들어 바닥에 내팽개치는데, 마침 지나가던 반장이 그걸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반장이라고 이 와중에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보고서는 다 썼어?”
반장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꽃다발 한 번, 나 한 번 노려보면서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쓸 건데요.”
자리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켰다.
“비니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됐단 소리야? 머리라도 다친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멍해요.”
긴말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얼버무렸더니 반장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니네들은 이젠 그냥 좀 멍하기만 해도 병원에 누워서 버티냐? 월급을 날로 먹을래?”
“그런 얘기는 비니한테 직접 하세요.”
비니의 상태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가서 보는 거밖에 수가 없다. 대꾸하고 돌아앉는데 반장이 의자를 빙 돌리더니 내 코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반장에게 콧잔등이라도 들이받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로빈하고 칼은?”
“누구요?”
되묻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아, 맞다! 걔네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 두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반장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걔네들을 어떻게 한 건 아니다. 주제 넘는 짓 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건만 씹어버린 건 그놈들이었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서점 지하실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지 따위를 길게 설명할 분위기도 아니라서 그냥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보고서 써 놓고, 오늘 중으로 찾아올게요.”
“그리고 하나 더…….”
“또 뭐요?”
나도 모르게 반장에게 신경질을 냈다. 단언하건데 지난 밤 내가 겪은 사건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경험 중 최악이었다. 저녁 내내 꿈에 볼까 무서운 괴물을 쫓아다니다 때론 쫓겨다녔고, 멀쩡하던 동네 사방 100여 미터가 가루가 되어 무너지는 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미울 때도 많았지만 본성이 나쁜 놈은 아니었던 파트너는 아예 정신을 놔버렸다.
그 시간에 반장은 어디서 뭘 했을까? 아마 집에서 맥주 마시면서 축구 중계나 보고 있었을 거다. 그런 주제에 온갖 시련을 이기고 출근한 사람한테 따지고 요구하는 게 너무 많다. 나는 경찰이지 슈퍼맨이 아니다. 하지만 반장의 마지막 당부는 지극히 정당한 것이어서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니 남자친구한테 꽃 좀 그만 보내라고 해!”
루크 첸이 내 남자친구 아니라는 헛소리를 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꽃바구니 틈에 한동안 앉아 있자니 없던 꽃 알레르기가 다 생길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보고서를 맨 정신으론 못 쓸 것 같았다.
나가서 담배라도 한대 피우고 들어올까 싶어서 일어서는데 사무실 문이 삐죽 열렸다. 또 꽃이었다. 이번 건 여태 온 것보다 두 배는 더 컸다. 배달원은 이제 헤매지도 않고 곧장 내 책상으로 다가왔다.
“이보세요. 이제 그만 좀 하시죠?”
막 들고 온 꽃바구니를 다른 바구니 틈새에 밀어 넣던 배달원이 그제야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야 그냥 배달하라는 대로 배달하는 것뿐인데요.”
“받는 사람은 지금 꼭지가 돌기 직전이거든요.”
“그런 얘기는 꽃을 보내시는 분한테 직접 하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희는 고객의 주문을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서요.”
배달원이 약간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인수증을 내밀었다. 사인을 해주며 생각해보니 이 사람 말이 다 맞다. 배달원을 닦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디가요?”
점퍼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데 옆자리에서 버티던 쥬드가 내 팔을 잡았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어.”
경찰서 건물 밖에 나와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쥬드가 내 뒤에 있었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 지경인데 왜 쥬드까지 안 하던 짓을 할까?
“지금 나를 따라오는 거야?”
“뭘 하려는지 몰라도 파트너가 필요할 거예요.”
“서장도 비서가 필요할 거야.”
면박을 주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쥬드가 자기 차 열쇠를 꺼내서 보란 듯 흔들고 있었다. 차를 빌려줄 생각이라면…… 그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 쥬드도 좋은 일할 때가 있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고마워.”
내가 열쇠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쥬드가 어림없다는 듯 열쇠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기사 딸린 렌트에요.”
“관둬!”
“택시를 타려고요? 지하철도 나쁘진 않을 거고…… 하지만 역시 걷는 게 건강엔 최고죠.”
“당신은 내가 어딜 가는지도 모르잖아.”
“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당신에 관해서 많이 알아요.”
쥬드 크롬웰이 내 새 파트너가 된 줄 알면 몸을 버리고 나간 비니 정신이 확 돌아오지 않을까? 돌아오는 길에 쥬드랑 같이 병원에 가 봐야겠다. 기사 딸린 재규어라…… 편하긴 하다. 쥬드가 무슨 꿍꿍이로 파트너를 자청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땡땡이 쳐도 서장이 뭐라고 안 할까?”
“뭐라고 하겠지만…… 알게 뭐예요.”
약간 열린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 그렇게 차지는 않았다. 길고도 길었던 겨울도 서서히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런 놈은 어떻게 다뤄야 되지?”
“못 다뤄요. 그런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 역시 그런 놈은 죽여버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겠지. 하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이고…… 여러 가지 궁리가 많은 쥬드는 뭔가 좋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 한 번 더 넌지시 물었다.
“그럼, 차이나타운에 가서 뭘 어떻게 하란 거야?”
“뭐든…… 첸이 하자는 대로요.”
“난 현직 경찰관이고 그 자식은 시에서 제일 큰 범죄 조직의 악질 보스야. 뭐가 됐든지 간에 놈이 하자는 대로 할 수는 없어.”
그 자식을 경찰서 복도에 내동댕이치고 물벼락 씌운 건 내가 아니다. 저녁 데이트를 약속해 놓고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린 것도 내가 아니고…… 그런데 왜 하필 내가 그 자식한테 찍혀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첸은 굉장히 영리해요. 분쟁을 즐기는 타입이고…… 상대를 제압하는데 있어서는 인정사정없어요. 섣부르게 덤볐다간 호승심만 자극하게 될 테고…… 그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에요.”
“그 자식 호승심 따위 자극할 생각 전혀 없어. 난 그냥 얘기만 하고 나올 거야. 경찰서로 꽃다발 한번만 더 보내면 목을 따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라고 말이야.”
쥬드가 딱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보내준 꽃은 고맙게 잘 받았다고 하고…… 답례로 저녁식사 같이하자고 해요. 첸이 원하는 게 그 정도라면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요.”
“미쳤어?”
“무척 어려운 상대이기는 하지만…… 내가 당신보다는 남자를 잘 알잖아요. 대부분의 남자는 일이 너무 순조롭게 풀리면 열정을 잃어요.”
쥬드가 큰길을 버리고 건물 사이 샛길로 들어섰다. 쥬드는 아무리 복잡한 샛길에서도 방향 감각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건 좋은데 샛길로 들어오면 운전이 거칠어지곤 했다.
“그런 소리…… 이젠 못 믿겠어.”
“질문은 당신이 했고, 나는 성의껏 대답했을 뿐이에요.”
“지금 나더러 그 자식이랑 데이트라도 하란 거야?”
“데이트를 다시 시작할 때도 됐잖아요?”
뒤늦게 안전벨트를 찾아 매고 있는데 쥬드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데이트, 물론 좋다. 하지만 왜 상대가 루크 첸이냐?
“난 당신이랑 취향이 달라. 그런 놈은 정말 싫단 말이야.”
“첸하고 데이트를 하란 얘기가 아니라……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여자랑 자본 게 언제에요?”
“오래 됐어.”
남자에 대해선 쥬드가 나보다 많이 알고 있겠지만 범죄자들에 관해선 나도 쥬드만큼 안다. 첸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 데이트 운운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뭐가 됐든지 간에 그 자식의 시커먼 꿍수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 나처럼 단순한 육체노동자한테 첸 같은 모사꾼은 너무 벅찬 상대다. 상대해봐야 나만 죽는다.
“그 남자가 무슨 목적이 있어서 당신한테 접근하려는 건 아닐 거예요.”
“니콜라스 때도 당신은 비슷한 말을 했었어. 기분 맞춰주고, 데이트 하는 시늉이나 하라면서,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인 것처럼…….”
차가 샛길을 벗어나서 막 차이나타운으로 통하는 대로로 뛰어들었다. 하마터면 직진하는 차 옆구리를 들이받을 뻔했다. 그만 입 다물라고 위협이라도 하는 건가?
“당신은 날 이용했어.”
“우린 같은 팀이었어요.”
“나는 니콜라스한테 말려들면 내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어.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었잖아?”
이런 얘기를 꺼낸 게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쥬드가 그냥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요.’ 정도로 시치미 떼고 넘어가준다면 얘기는 이쯤에서 덮어두고 싶었다. 하지만 쥬드는 내 투정을 기꺼이 받아줬다.
“니콜라스는 연쇄살인범이에요. 정체를 안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잖아요.”
지극히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얘기다.
“내가 그 망할 자식을 진짜 좋아하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당신은 날 그 자식한테 들이밀었던 거야. 니콜라스를 체포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어?”
쥬드는 좀 전에 신호위반을 했고, 지금은 복잡한 대로에서 차 사이를 아예 헤집고 다니는 중이었다.
“괜찮을 줄 알았어요.”
쥬드가 중얼거렸다. 마치 변명하듯…… 나도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니콜라스를 체포해서 최소한 정신병원에는 넣었으니 성공적인 수사라고 생각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도 죽다 살아난 쇼크에서만 벗어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살인현장을 목격한 이후, 그리고 그를 체포해서 정신병원 지하 병동에 가둔 이후…… 괜찮았던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몬티첼리 저택에서 니콜라스를 봤을 때 비로소 그걸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오래 니콜라스한테 붙들려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 자식이 날 잡고 놔주질 않잖아.”
쥬드가 길가에 차를 세웠다. 흑풍회 사무실에 다 왔다. 쥬드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난 그자를 이기고 싶었어요. 상대가 만만치 않으면 않을수록…… 나는 그래요. 그래서 당신이 다칠 걸 알면서도 이용했고,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나도 이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아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하지만 루크 첸 같은 자식하고 저녁 먹어라 말아라 그런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들으면 옛날 생각이 나고, 옛날 생각이 나면 화가 치밀어.”
쥬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내가 경솔했어요. 첸의 일에는 나서지 않을게요.”
쥬드가 이렇게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이러는 걸 보니 공연한 얘기를 꺼냈나 싶어서 슬그머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이후로 계속……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미안한 거 아는 사람이 나한테 <무덤속의 줄리엣> 같은 걸 먹여서 비니 작은아버지 집에 던져놨었던 거야?
“그리고 위니 일도…….”
“위니 얘기는…… 할 거 없어.”
역시, 괜히 이런 얘길 꺼냈다고 생각하면서 첸의 사무실 쪽으로 앞장서서 걸었다.
“내가 다 잘못했다고요!”
쥬드가 내 뒤통수에 대고 버럭 소릴 질렀다. 얘기가 어쩌다가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렸을까? 난 그냥 농담으로라도 첸하고 엮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돌아서보니 쥬드는 상심한 얼굴로 보도블록 모서리를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사실 쥬드가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한때 연쇄살인마를 잡으려고 팀플레이를 했었고, 내가 제일 위험한 포지션에 있었던 것뿐이다. 일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몰랐던 거지, 그때 나는 내 역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위니랑 이혼한 건 당신 탓이 아니야. 그리고…… 죽은 것도.”
혼잣말 하듯 한 마디를 던지고 첸의 건물로 먼저 들어갔다.
쿠간 시 차이나타운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리는 습성이 있었다. 사소한 분쟁은 물론이고 가족 간의 재산 싸움이나 상인들 간의 분란, 심지어는 강도나 폭행 같은 강력 범죄까지도 자체 내에서 해결하는 기막힌 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경찰도 중국음식 먹고 싶을 때가 아니고는 차이나타운에 발 들일 일이 별로 없었다.
정당한 권위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위험한 사조직이 특정지역 내에서 행정 전반에 걸친 결정권과 더불어 사법권까지 휘두르는 건 명백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시에 내는 것만큼 그쪽에도 세금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중 과세조차도 당사자들이 감수한다는 데야 굳이 들쑤셔서 풍파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게 경찰과 시 당국의 입장이었다.
물론 당국의 태도는 틀려먹었다. 중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조직에 내는 세금보다 시에 내는 세금이 더 아까울 판이었다. 쿠간에서 차이나타운에 제공하는 서비스라곤 중심가를 관통하는 도로와 전기, 상, 하수도 시설 같은 아주 기초적인 인프라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차이나타운 내에서 경찰이 개입하는 사건은 1년에 서너건 신고 되는 살인사건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반은 범인이 알아서 자수를 하거나 주민들의 파격적인 협조로 말 그대로 인도받는 형식이라 수사는 따로 할 것도 없었다. 쿠간의 차이나타운은 항상 잔잔한 호수 같았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 거주자가 아니고는 이 평화로운 물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알기는 어려웠다.
우리의 목적지는 몇 개월 전에 신축한 45층짜리 초현대식 건물 40층부터 꼭대기까지 자리 잡은 흑풍회 사무실이었다. 이곳은 차이나타운의 실질적인 행정 중심지였고, 지역 사회의 결속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금전적, 물리적 제재가 결정되는 엄격한 재판정이자 이 크고 복잡한 도시의 새로운 주인이 거주하는 성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보니 40층까지밖에 번호가 없었다. 말없이 따라오던 쥬드가 40층 버튼을 눌렀다.
“흑풍회 구역엔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을 거예요.”
4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바꿔 타고 놈이 여러 가지 나쁜 짓에 골몰하고 있을 44층으로 올라갔다. 44층은 내부 장식이 온통 대리석이었다. 바닥에 쫙 깔린 붉은 빛 대리석이 마치 카펫 같았다. 어지간히 돈들인 티가 나는 인테리어라서 근사하기는 한데 온통 검붉은 돌이라니……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는 보통 사무실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양복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는 남자들, 칸막이 책상, 전화 벨 울리는 소리…… 이 사람들은 정말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였다. 간혹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쥬드가 스쳐 지나가는 남자 하나를 붙들고 회장실이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 물었다.
“회장님은…… 지금 긴한 회의 중이십니다.”
갈색 양복 차림에 깔끔한 외모를 가진 젊은 남자가 자개가 박힌 현란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앞을 다급하게 막아섰다. 여기가 일반 회사라면 회의 중이란 말에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얘네들이 모여서 하는 긴한 회의란 건 십중팔구 범죄와 관련된 구린 일이었다.
그래서 문 앞에 버티고 선 비서를 밀고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긴한 회의 중이라는 비서의 말은 아주 헛소리는 아니었다. 첸의 회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은밀하고 음란한 것이었다.
“뭐야?”
늘씬한 금발 미인의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노느라 정신없던 놈이 문 열리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러면서 나한테 꽃을 보내?
“이 바람둥이야!”
“미리 전화라도 좀 하지…….”
여자는 우리를 보고 얼굴을 붉히며 얼른 옷깃을 여몄지만, 첸은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그 태도만 봐도 쿠간 시 최고의 바람둥이 타이틀이 거저 붙은 게 아니라는 걸 알 만했다. 어느 새 등 뒤로 첸의 경호원들이 한 떼거리 몰려들었다. 첸이 경호원들에게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면서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사실 이런 적 별로 없는데…… 사무실에선 말이야.”
좀 전까지 재미 좋았던 금발의 글래머 미인은 아주 기분 잡친 얼굴이었다. 첸이 경호원들과 함께 여자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짧은 귓속말을 속삭였다. 나중에 다시 보자는 빤한 얘기였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방을 나서는 여자의 얼굴이 약간 풀렸다.
“나한테 꽃 보내지 마!”
“그렇게 화낼 거 없잖아. 저 여잔 그냥 1층 행사장에서 일하는 직원이야.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꽤 예쁜데다…… 저쪽이 더 적극적이었단 말이야. 하지만…….”
내가 요즘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이 자식은 사람 열 받게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놈인 것 같았다. 얼굴 마주친 지 1분도 안 지났고, 몇 마디 지껄이지도 않았는데 속이 울렁거리더니…… 놈의 마지막 한 마디에 속이 확 뒤집어지고 말았다.
“니가 싫다고 하면 앞으론 안 만날게.”
깜빡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삽시간에 쏟아져 들어온 첸의 경호원들이 내 팔을 잡아 비틀고 있었고, 루크 첸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첸을 한대 때렸다.
쥬드가 사색이 돼서 바둥거리는 첸을 일으켰다. 놈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자 입안에 고여 있던 벌건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샌드맨을 상대로 사고 쳐서 정직을 당했던 게 불과 몇 주 전이었다. 전엔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잘 참았는데, 요즘은 왜 열 받으면 주먹부터 나가는지 모르겠다. 이 계통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성격이 변한다고들 하던데…… 성격이 변한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빠졌나 보다. 흑풍회 사무실에서 루크 첸한테 주먹질을 하다니…….
첸이 오만상을 다 찌푸리고 소파에 앉아서 나를 죽일까 살릴까 궁리 중이었다. 쥬드가 옆에 바싹 붙어 앉아서 녀석을 달래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 해봐요.”
쥬드가 첸의 턱을 붙들고 입안을 살펴보더니 난감한 듯 배시시 웃었다.
“앞으로 며칠 동안은 시큰하겠는데요.”
첸이 쥬드 손에서 손수건을 빼앗아 들고는 벌떡 일어났다.
“미스터 첸, 좀 전의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면 안 될까요? 저 사람, 요즘 제정신 아니에요. 어제만 해도 델 파소에 갔다가…….”
첸이 쥬드에게 잠자코 있으라는 엄중한 사인을 보냈다. 쥬드가 난감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헤비급 경호원들에게 잡힌 팔목에 피가 안 돌아서 감각이 거의 없었다. 옴짝도 못하게 붙들린 상황에서 놈이 사나운 얼굴로 다가오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첸이 내뿜는 살기는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해서 쿠간시 앞바다에 던져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기분이 꼬이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이런 놈의 소굴에 쳐들어와서 주먹질을 해대다니…… 나는 죽어도 할 말 없는데, 쥬드한테 미안했다. 첸이 지척에 다가와 섰다. 녀석의 차가운 눈동자가 내 눈을 핥듯이 응시했다. 굉장히 예쁜 눈동자였지만, 오래 마주 보기는 부담스러웠다. 여태 봐온 어떤 흉악범의 눈동자도 이 자식 것만큼 음산하고 싸늘하지는 않았었다.
“너…….”
속이 미식거리고 기분이 이상했다. 어젯밤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질 않아서 그럴까? 지난밤에 본 오컴만큼이나 루크 첸이 무서웠다. 녀석이 불쑥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움찔했지만 거구의 경호원들에게 단단히 잡혀 있는 처지라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놈이 내 옷깃에 허옇게 들러붙어 있는 먼지를 톡톡 털어주면서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응.”
일이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루크 첸이 점심을 사준다면서 나랑 쥬드를 데리고 간 곳은 같은 건물 3층에 있는 우아한 카페였다. 쥬드는 홍차를 곁들인 샌드위치와 과일 칵테일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뭐, 쥬드라면 첸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도 배가 부를 터였다.
“왜? 이런 건 별로야?”
첸이 찻잔으로 쥬드와 건배를 하면서 내 표정을 살폈다. 목숨하고 바꾼 점심이니까 아무리 형편없어도 음식을 타박할 처지는 아니다. 게다가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샌드위치, 스콘, 샐러드, 홍차…… 나무랄 데 없는 런치 브레이크였다. 눈앞에 루크 첸, 저 밉살맞은 자식만 없었다면…….
“맘에 안 들면 내가 하는 중국집이 멀지 않은데 거기 갈래?”
“됐어.”
첸이 홍차를 한 모금 들이키다가 인상을 썼다. 나한테 맞은 주둥이가 다 터졌으니까……. 나도 주먹이 얼얼할 정도니까 아마 며칠은 더 고생할 거다. 지난번엔 별로 잘못한 것도 없이 꽃바구니 세례를 받았는데 앞으론 뭐가 날아올지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런데, 언제부터 파트너가 바뀐 거야?”
“바뀐 거 아니야.”
“니 파트너는 그 이태리제 사고뭉치였잖아?”
“비니는 병원에 있어요. 좀 다쳤거든요…….”
쥬드가 씹던 샌드위치를 얼른 삼키고 나하고 첸의 분위기 칙칙한 대화에 끼어들었다.
“비니 몬티첼리가? 어쩌다가?”
이 자식, 너무 좋아하네. 지난 번에 비니한테 습격당한 앙심이 아직 남아 있는 게 분명했다.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니었는데…… 쪼잔한 놈.
“경찰 일이란 게 본래 좀 위험하잖아요.”
쥬드가 이번에도 대답을 가로챘다. 쥬드는 내 입에서 무슨 험한 소리라도 튀어나갈까 걱정이 태산이다.
“어제 저녁에 델 파소에 있었다더니…… 거기서 다친 거야?”
“뭔 상관이야?”
“그래서 꼴이 그렇게 엉망이었군. 다친 데는 없어?”
첸이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 자식은 사람 놀려먹는데 도가 텄다.
길게 앉아 있어봐야 내 속만 뒤집어지지 좋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가만 보니 쥬드와 첸은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고, 누가 봐도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둘 다 얼굴 예쁘고, 성질 더럽고…….
데이트 주선한 셈치고 나는 이만 빠져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첸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어디 가?”
“일 하러.”
“우리,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던 거 아닌가?”
“다 먹었어.”
그래도 나름대로 스타일과 자존심이 있는 놈이라서 길게 엉겨 붙을 기미는 없어 보였다. 쥬드가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차 열쇠를 내밀었다.
“됐어.”
마리우스의 서점은 별로 멀지 않다. 로빈과 칼을 지하실에서 꺼내 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돌아오는 길에 비니 상태도 살펴보려면 쥬드 퇴근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데이트 잘 하라고 손 한번 흔들어주고 돌아서는데 첸이 내 뒤통수에다 대고 등골 오싹한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후회할 걸…….”
런치 브레이크의 주된 화제는 <델 파소 붕괴> 사고였다.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이 앞으로 며칠은 사라져 버린 쿠간 시 최대, 최악의 미궁에 관해 떠들며 시간을 보낼 터였다. 첸은 자기도 아침에 신문 보고 많이 놀랐다며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댔고 쥬드는 녀석의 질문에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런 줄 알고는 있었지만, 쥬드는 맘에 드는 남자 앞에선 정말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런 여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없던 밥맛이 쥬드 때문에 뚝 떨어져서 나는 따로 주문한 커피만 두 잔째 마시는 중이다.
“신문 한 귀퉁이에서 그 기사 봤어요. 킹 거리에서 들짐승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사람이 서넛이나 그렇게 죽었으면 그것도 작은 사고는 아니죠.”
사실, 오컴 사건 정도면 1면 탑에 며칠을 두고 실릴 만한 사건이었는데, 델 파소 붕괴 때문에 사회면 2단 기사로 밀려버렸다. 첸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까, 너랑 몬티첼리 조카는 미친 들개를 쫓아서 델 파소까지 들어갔었던 거야?”
첸의 표정이 흥미진진했다. 이런 거대 도시 한복판에 미친 들개라니 가당치도 않은 얘기지만, 오컴 얘기를 굳이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뭔지는 아직 몰라. 돌무더기 밑에서 사체를 끄집어내보면 알 수 있겠지.”
“봤다면서?”
“들개는 아니었어.”
그냥 가면 놈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무서워서 꼼짝없이 붙들려 앉아 있는 내 처지가 한심했다.
“그럼 뭐였는데?”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2단짜리 기사였고 이제 끝난 사건인데…….”
첸이 미지근한 홍차를 마시면서 있는 대로 인상을 썼다.
“난 이 멋진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뭐든 관심 있어. 그래서 점심 먹고 나서 대체 그 동네가 얼마나 폭삭 무너졌는지 구경 가려던 참이었고…….”
못된 놈!
“그리고…… 이상하잖아?”
“그 이상한 사건을 수사하러 나가려는데 니가 지금 시간을 뺐고 있잖아!”
“그 수사를 꼭 니가 해야 돼?”
내가 사건 현장에 있었고, 오컴을 지척에서 목격했다. 게다가 요즘 담당하고 있는 사건도 없는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첸이 반들거리는 은수저에 파랗게 멍이 번져가는 턱을 한번 비춰 보고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난 말이야…… 니가 위험한 일은 안 했으면 좋겠어.”
쥬드가 냉수 한잔을 얼른 내 앞에 놔줬다. 마시고 진정하라는 뜻이다. 이 자식을 한 대 더 쥐어박아 주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게 어찌나 힘든지 물 잔을 집어드는 손이 달달 떨렸다.
“내 걱정은 할 거 없고…… 꽃이나 작작 보내!”
“꽃바구니 스무 개면 니가 열 일 재껴 놓고 날 만나러 오는데…… 내가 왜?”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너머로 놈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이대로 가다간 내가 널 죽여버릴 것 같단 말이야!”
“참아요! 제이!”
쥬드가 내 허리를 안고 매달렸다. 그때 저만치서 아까 위에서 내 팔을 잡아 비틀었던 떡대가 부리나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놈이 다가오다가 내가 첸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걸 보고는 눈을 화등잔 만하게 부릅떴다.
“아침에 말씀하셨던 자룝니다. 들어오는 즉시 가져오라고 하셔서…… 1차 발송된 현장 사진이고, 관련된 자료는 좀 더 기다려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첸에게 건네주면서 녀석의 멱살을 얼른 놓고 얌전하게 앉아 있는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괜히 찔려서 앞에 널려 있는 빵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서 한입 뜯었다.
“그리고 이 녀석…… 자꾸 까불면 제가 손 좀 볼까요?”
첸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데이트 중이야. 자오.”
“가까이 있을 테니 언제든 부르십시오.”
자오가 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사납게 더 노려보고는 건너건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오가 멀어지자 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가끔 자오가 겁나. 자오는 특기가 창밖으로 사람 집어던지는 거야.”
나도 모르게 창밖을 힐끔 내다봤다. 3층이지만 높았다. 게다가 바로 큰길이라서 밖으로 던져지면 살기는 글렀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오랑 약속을 잡을 땐 1층을 선호하지. 걱정 마. 창밖으로 던져져서 죽은 사람은 아직 없어. 심해봐야 척추가 부러지는 정도야.”
첸이 서류 봉투에서 한 뭉치나 되는 사진을 꺼내면서 느긋하게 지껄였다.
“그거, 무슨 사진이야?”
“기념사진이라고 해두자. 너도 볼래?”
첸이 다 본 사진을 나한테 넘겼다. 델 파소를 촬영한 상세 사진이었다. 구도도 단순하고 기교도 없는…… 이건 기념사진이 아니라 현장 자료 사진이었다. 서너 장을 더 받아보니 역시나…….
“이거, 경찰 수사 자료 아냐?”
“아니면 이렇게 센스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진을 또 어디서 구경하겠어?”
“경찰 컴퓨터를 해킹이라도 한 거야?”
“요즘은 그런 걸 보통 정보 공유라고 하던데…….”
“불법이야!”
“그럼 어쩌라고? 두 손 놓고 앉아서 아침 신문이나 기다릴까? 이 바닥에선 정보가 생명이야.”
첸이 나한테 계속 사진을 넘겨주면서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진은 허물어진 건물의 상태와 발굴 현장의 모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워낙 구역이 넓은 탓에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주로 경찰을 쓰러뜨렸던 비니가 요번엔 소방관들을 다 쓰러뜨리게 생겼다. 비니 생각하니까 사진을 보는 것도 괴로워서 건성으로 훑어보고 쥬드한테 넘겼다.
“폭탄 테러일 거라고 헛소리하는 애들도 꽤 있는 모양이지만, 무너진 돌 더미를 좀 봐.”
“돌 더미가 뭐?”
이번 사진은 보지도 않고 쥬드에게 넘기면서 심드렁하게 물었다. 하지만 쥬드는 사진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관찰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주의 깊게.
“크기가 거의 비슷해요. 대부분 어른 주먹 정도 크기로 잘게 부서졌네요. 벽돌, 콘크리트, 심지어 나무나 유리까지도…… 경찰이 임의로 구획을 나눴는데 A-1구역이나 C-12 구역이나 별 차이가 없는 걸 보면 어느 한 군데서 폭발이 있었던 건 아닐 거예요. 붕괴 구역 전역에 걸쳐서 동일한 충격이 있었다는 얘기죠.”
첸이 눈을 반짝였다.
“계속해봐요.”
“그런데 그 충격은요, 구조물만 파괴했을 뿐 생명체는 상하게 하지 않았어요.”
“사람 사는 동네 한복판이 이 지경이 됐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을까요?”
첸은 비웃음을 감추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내 말은, 사람까지 산산조각 내진 않았단 뜻이에요. 제이가 현장 한복판에 있었어요.”
먹다 보니 빵 맛이 괜찮아서 샌드위치도 하나 집었다. 딱 점심시간인데다 일하러 나가려면 뭐라도 먹긴 먹어야 된다. 첸이 나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내가 눈을 슥 들자 다시 사진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막힌 충격의 정체가 대체 뭘까요?”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처음 보거든요.”
첸이 사진 중 몇 장을 골라서 쥬드에게 건넸다. 폐허에 묻혀 있다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사람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도 있고,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는 몇 명은 사진만으론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히 알기 어려웠다.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비니는 정신이 나간 채로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아주 예전에 이 비슷한 걸 본 적 있는데…….”
쥬드와 내가 바짝 긴장했다. 비니가 전에도 비슷한 사고를 친 적이 있었던가? 비니에게 내가 모르는 어두운 과거라도 있나? 아니,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나는 비니랑 열아홉 살 때부터 알고 지냈다.
“거긴 그라하 공작의 거성이었는데…… 공작은 자기 성이 어떤 인간도 침입할 수 없는 견고한 요새라고 자랑이 늘어졌었어요. 공작은 밥맛없는 꼴통이었지만 녀석의 성이 상당히 근사한 작품이라는 건 사실이었죠. 물론 그 자식이 지은 건 아니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거였지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은 물론이고 영지를 둘러싼 까마득한 성벽까지 한순간에 조약돌로 변해서 얌전하게 내려 앉아 버렸다더군요.”
처음 듣는 얘기다. 그라하 공작이라면…… 유럽 쪽 얘기 같은 데 난 국제 뉴스는 거의 안 본다. 지역 뉴스만으로도 골치 아프다.
“그라하…… 공작이라고요?”
쥬드의 반문에 첸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해서 만사를 젖혀놓고 달려가 봤죠. 소문이란 게 항시 과장이 많아서 곧이곧대로 믿기도 어렵지만, 그냥 지나치긴 아까워서…… 사실, 그 시절은 구경거리도 많지 않았거든요. 어쨌든 그렇게 사흘 밤낮을 달려가 보니 정말로 그 장하던 성은 오간 데가 없고 골프공 크기만 한 자갈만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얘기를 듣던 중, 대학 시절…… 나는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탕 씩 뛰어야 했던 여름 방학 때, 비니는 뻔질나게 유럽으로 여행 가곤 했던 게 갑자기 생각났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사바델.”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쥬드는 무슨 얘긴지 감 잡은 얼굴이었다.
“그 밥맛없는 공작 놈이 사바델을 끌어내서 막 처형하려던 참에 재앙이 닥쳤던 거지. 사실 사바델은 대단한 마법사도 아니었어. 별점이나 좀 치고…… 고약이나 만드는 정도였지. 마법보다는 요리를 더 잘했는데, 그래도 가끔 한 번씩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지. 어쨌든 그때 얼마나 웃었는지 아직도 가끔 옆구리가 땡겨. 이후론 그 얼빵한 마법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렇게까지 밉지 않더라고.”
첸이 공중 촬영한 델 파소 전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거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어. 인명피해도 심해서 최소한 100명은 돌무더기에 깔려서 죽었을 거야. 그땐 인구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얘기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비니가 그 일과 관계가 없어서 다행이다. 차분히 첸의 얘기를 경청하던 쥬드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하르나 대전…… 얘기군요.”
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전 일이라고 내가 말했던가요?”
놈이 그럴듯하게 떠벌인 얘기는 <바하르나 전서>라는 옛날 이야기책의 내용이었다.
바쁜 사람 앉혀 놓고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혹시 비니랑 상관있는 얘긴가 해서 맘 졸인 거 생각하면 테이블을 확 때려 엎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문가에 버티고 있는 자오가 달려들어서 나를 창밖으로 던져버릴까 무서워서 꾹 참았다.
“왜 그래?”
첸이 부글부글 끓는 내 마음 따위 전혀 모르겠다는 듯 건성으로 물었다. 녀석은 200장도 넘을 것 같은 사진을 이제 거의 다 봤다. 말로는 그냥 궁금해서 저런다지만 뭔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다.
“그 마법사 말이야, 사바델인가 뭔가…… 그러고 나서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
“그러니까 충격으로 정신이 좀 멍해졌다거나…….”
첸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놀란 것도 같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책엔 그런 얘기 안 나와요, 제이.”
쥬드가 첸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줬다. 책에 안 나오는 거 물어봤다고 사람을 저렇게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거야?
“성을 무너뜨리고 나서 사바델은 꽤 오랜 동안 가사상태였어. 그런데, 니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오호라…… 델 파소 붕괴 사건이 황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무후무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로 참고할 만한 사항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하고 찜찜하던 마음이 한결 놓였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사흘? 일주일?”
“1년 2개월.”
비니가 저렇게 정신을 놔버린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직접 본 건 처음이지만 전에도 두 번인가 이런 적이 있었다. 비니가 아직 정복 경찰이던 시절, 건물 7층에서 자기 자식을 인질로 잡고 자살 시위를 하던 마약 중독자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어린애가 그만 아래로 떨어져버린 일이 있었다.
천운이란 게 있었던지 아이는 아래층 상점에서 쳐놓은 햇빛막이 차양에 한번 튕기고 그 아래 과일 상자 위에 떨어져서 목숨은 건졌다. 어쨌든 눈앞에서 애가 추락하는 걸 본 비니는 잠시 눈을 뜬 채 혼절을 해서 주변 사람들을 한 번 더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두 번째는 니콜라스를 체포할 때였다는데, 그때는 나도 상당히 오랜 시간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어쨌든 니콜라스의 밀실 풍경에 충격을 먹은 비니는 거의 한 주일간이나 지금 같은 가사상태였었다. 그 외 잠깐잠깐 정신이 나가거나 헛소릴 지껄이는 경우는 꽤 있었고 그런 건 나도 몇 번 봤다. 어쨌든 그래서 이번에도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가 어째? 1년 2개월?
“말도 안 돼! 뇌사도 아닌데…… “
혼자 중얼거리다가 첸이랑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놈은 나랑 쥬드의 표정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쥬드도 표정 관리가 안 되기는 나랑 비슷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이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병원에 다시 가서 비니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보고 깨울 방법을 찾아야겠다.
경황없이 일어서다가 손으로 물 잔을 건드려서 반쯤 남은 냉수를 테이블에 쏟았다. 보통 때는 이런 실수 잘 안 하는데…… 첸이 늘어놨던 사진을 얼른 들어서 치우다 몇 장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미안해. 나, 이제 진짜 가 봐야 돼.”
“그 녀석 짓이었군.”
첸의 말투는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니 몬티첼리.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니…….”
첸이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집어 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이 자식…… 눈치가 귀신이다. 섣불리 비니를 감싸고 돌아봐야 의심만 더 사기 십상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데, 주워 올린 사진을 힐끔 들여다보던 첸이 아…… 하고 뜻 모를 탄식을 내뱉었다.
“니네들 설마 지난밤에 이걸 쫓아다녔던 거야?”
첸이 나랑 쥬드 앞에 반쯤 젖은 사진을 흔들어 보였다. 무너진 돌 더미에 정통으로 깔린 남자의 시체였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돌무더기에 정통으로 깔려서 두개골이 부서지고 장이 터져 죽은 남자 사진엔 어쩔 수 없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사태에 비니 책임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 차리고 제대로 봐. 이거 사람 아냐.”
위에 쌓여 있던 돌 더미를 막 치우고 나서 찍은 사진이었다. 남자의 사지는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얼굴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피부 색깔이 마치 바디 페인팅을 한 것처럼 묘하게 반짝거리고 있기는 했지만 분명히 사람이었다.
“오컴이야. 인간의 천적이지.”
쥬드가 첸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 갔다. 그리곤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람인데요?”
내가 쥬드 손에서 다시 사진을 뺐었다. 아무리 봐도 사진속의 남자는 그냥 사람이었다. 손발이 몸에 비해선 상당히 큰 편이고 손톱과 발톱이 길게 구부러져 있긴 한데, 어쨌든 지난밤에 내가 본 그 괴물은 아니었다. 오컴을 직접 목격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놈의 생김새에 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
“그동안 쿠간 시 짭새들을 우습게 본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한밤중에 오컴을 쫓아다니다니…… 제정신이야?”
“내가 본 건 덩치가 북아메리카 들소처럼 커다란 맹수였어. 이건…… 그냥 남자잖아.”
“이건 어때?”
첸이 사진 몇 장을 더 뒤적거리다가 또 다른 걸 내밀었다.
“오컴은 태양을 두려워 해. 빛이 자기 모습을 바꿔 놓기 때문이지.”
죽은 남자의 얼굴이 크게 찍힌 사진이었다. 흘러나온 뇌수와 검붉은 피, 반도 넘게 부서진 두개골 때문에 이전의 형태는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얼굴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거라곤 한쪽 눈과 벌어진 턱뿐이었다. 면도날 같은 이빨이 두 겹으로 박혀 있는……. 잠시 현기증이 났다. 지난 밤 비니와 나를 향해 포효하며 달려들던 짐승의 것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죽음도 놈의 모습을 바꿔 놓지. 나약하고 추하게. 마치 인간처럼…….”
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홍차를 홀짝이며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오컴이라니…… 진짜 대단한 걸 불러냈군.”
강력 범죄 수사라는 거친 일을 꽤 여러 해 동안 해오고 있었지만, 아직도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질 때가 많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서 손으로 얼굴만 쓸어내리고 있자니 나를 쳐다보는 첸의 시선이 웬일로 부드러웠다.
“너…… 비니 몬티첼리랑 오컴 같은 거 쫓아다니고 그러다간 제명에 못 죽을 거야. 물론 경찰 일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왜 쿠간에서 일어나는 궂은일은 모두 니가 떠안는 건데?”
실은 나도 그게 불만이다.
“니콜라스 헤슬렘에, 오컴에, 비니 몬티첼리에…… 어쨌든 오컴은 죽었으니까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지. 하지만 비니 몬티첼리는? 녀석은 걸어다니는 대재앙이야. 참고로 말해두는데 사바델은 그라하의 성을 무너뜨린 것 말고 다른 사고도 많이 쳤어. 주변에 얼쩡거리다가 날벼락 맞는 속도로 세상 하직한 사람은 셀 수도 없고…… 사고 패턴이 비슷한 걸 봐서는 니 목숨도 분명히 위험해.”
하마터면 그건 그래…… 하고 맞장구를 칠 뻔했다. 밉살맞은 놈인 건 분명하지만 지금 하는 얘기는 대체로 맞는 말이었다.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첸이 한층 더 친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건 니가 정말 걱정돼서 하는 얘긴데…… 너, 지금 하는 일 걷어치우고 내 밑에 들어오지 않을래?”
내가 즉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 건 첸의 제안이 심사숙고할 무슨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놈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밑에 들어오지 않을래가…… 대체 무슨 뜻일까?
“보수는 지금 니가 받는 쥐꼬리만 한 경찰 봉급의 두 배 보장할게.”
그러니까 지금 이게 날 스카웃하겠다는 소린가 보다.
“미안해. 난 범죄는 체질에 안 맞아.”
“내가 하는 사업은 대부분 합법이야.”
이직을 한 번도 고려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니콜라스 건으로 쇼크를 단단히 먹은 후, 도저히 복직할 엄두가 안 나서 직업과 인생을 바꾸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했던 기간이 꽤 길었다. 그래봐야 평소에 좋아하는 일이나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고 말았지만…… 어쨌든 이런 종류의 전업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공갈, 협박, 갈취, 폭행, 살인이 언제부터 합법이었어?”
“그건 다 장인어른 때 얘기고…… 그 양반도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법에 대해선 잘 모르시거든.”
약은 놈, 빌미가 될 만한 일은 중풍으로 몸도 못 가누는 장인한테 다 떠넘길 모양이다. 첸 진도 나쁜 짓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차이나타운의 보이지 않은 성벽을 넘어서 몬티첼리를 도발한 건 루크 첸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을 주워다가 사위를 삼았는지, 기회 있으면 그 영감한테 좀 물어보고 싶다.
“어쨌든 거절이야. 니 밑에서 중국인 노점상들을 등쳐먹고 다니느니 비니 손에 죽고 말래.”
내 대답에 첸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바델한테는 욥이란 친구가 있었어. 성격도 무던했고 사바델 옆에 몇 년이나 붙어 있을 만큼 배짱도 좋았지.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어떻게 됐대도 내 대답은 마찬가지야.”
그동안 비니랑 붙어다니면서 웬만한 일은 다 겪어봤다. 욥이란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내가 겪은 것보다 더 지독한 일을 당하진 않았을 거다.
“사바델이 잘못해서 출산 중인 여자를 죽이는 바람에 막 태어난 아기에다 그 위에 애들 네 명까지 떠맡아서 키워야 했어.”
“…….”
“옆 동네 과부 두 명이 애들을 대신 키워주겠다고 나설 때까지, 그러니까 햇수로 한 7년? 아니다. 8년 정도 되겠네.”
“니 밑에서 무슨 일을 하면 되는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묻고 있는데 쥬드가 내 등을 철썩 소리가 나도록 후려 갈겼다. 손이 얼마나 매운지 아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스카웃 얘기는 나중에 단 둘이 하시고…… 오컴 얘기나 하죠.”
“별로 할 얘기가 없는데…….”
“진짜 대단한 걸 불러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그걸 일부러 풀어놨다는 건가요?”
아, 그래.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이 자식이 말꼬리를 엉뚱한 데로 틀어버리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임산부만 덮쳐서 죽이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고, 당신 말대로라면 사람으로 둔갑도 하는 짐승인데 왜 우리가 그런 짐승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까요?”
“오랫동안 사라졌었고 사람들은 그런 짐승이 있었다는 걸 잊고 싶어 했으니까 그렇겠죠.”
“멸종된 짐승이 다시 나타난 건가요?”
어떤 미친 과학자가 자신의 비밀 실험실에서 유전자 복제 실험이라도 했나? 쥬라기 공원처럼…… 첸이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마치 니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오컴은 멸종돼서 사라진 게 아니에요. 멸종될 리가 있나. 세상에 흔한 게 사람인데…… 게다가 오컴은 아주 오래 살아요.”
“그럼 왜 사라졌었죠?”
첸이 귀여운 척 하면서 입술을 실룩거렸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약간 고민스러운 것 같았다. 무슨 말 할지 대충 짐작은 간다.
“봉인을 당했다는 거지?”
봉인이란 건 무엇인가를 가둔다는 뜻이었다.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편지를 봉인하듯, 어떤 불가사의한 힘을 더 큰 힘으로 내리누르는 일종의 주술이다.
누가 그 괴물을 봉인했을까? 누가 그 봉인을 뜯어버린 걸까? 무엇보다도 이런 일이 어떻게 마치 현실인 듯 천연덕스럽게 내 눈앞에서 벌어졌을까?
“봉인이라고요?”
쥬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바람에 말문이 딱 막히고 말았다. 나는 어렸을 때 이상한 책을 주로 읽었고, 그것 때문에 고아원에서 곤란한 일을 많이 겪었다. 그런 안 좋은 기억이 때문에 이런 얘기가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다행히 루크 첸이 내 대신 쥬드의 질문을 받았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요즘으로 치면 냉동 캡슐 시스템 같은 거니까. 아주 소수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전해 내려온 극히 비밀스러운 기술이죠.“
첸의 부연 설명에 쥬드의 얼굴이 좀 풀렸다. 특히 냉동 캡슐이란 표현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니고는 달리 오컴처럼 요란한 괴물이 갑자기 나타난 걸 설명할 도리도 없었다. 하지만 쥬드나 나나 봉인이니 마법이니 하는, 잠꼬대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를테면…….
“그런데 누군가가 캡슐을 열었군요.”
“그럴 가능성도 있고, 얼음이 저절로 녹아버렸을 수도 있죠. 오래된 밀랍이 저절로 녹아서 떨어지듯…… 시간을 이기는 마법은 없거든요. 어쨌든, 내가 시장이라면 비니 몬티첼리에게 표창장이라도 주겠어요. 금일봉을 두둑하게 얹어서…… 물론 델 파소 일은 비밀로 해야겠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천 년 전에 마법사들에 의해 봉인된 괴물이 튀어 나왔다는 거예요? 그걸 믿으라고요?”
첸은 믿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표정이었다.
“바하르나 전서를 읽어봤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텐데요. 알면서도 못 믿겠다면 그건 어쩔 수 없죠.”
쿠간 시 서부지청 관할에선 계획범죄는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다. 쥬드 크롬웰한테 걸리기 때문이다. 쥬드는 아무리 실낱같은 단서라도 일단 잡히면 그걸 추적하고 조합해서 완성된 범죄 시나리오를 만들어내곤 했다. 정교하고 정확하게……. 서장과 그 외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경찰 간부들이 쥬드 크롬웰의 엽기적인 애정행각과 맛대가리 없는 차를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 제야의 명탐정이 지금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고 앉아 있었다.
“아…… 진짜 돌겠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온갖 소문과 정보에 귀 기울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쥬드 크롬웰이 경멸하고 무시하며 눈길도 주지 않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UFO 관련 특집, 신비한 전생 체험, 세기의 초능력자 소개, 유령과 만난 사람…… 같은 허접한 가쉽이었다. 쥬드는 성격 자체가 그런 얘기에 쏠릴 만큼 순진하거나 허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괴수에, 마법사에, 봉인까지 난무하는 희한한 사건이 앞에 떨어졌으니…… 요번에 아주 제대로 걸렸다.
내가 잠시 첸을 노려본 건 이러다 킬킬 웃으면서 ‘다 뻥이었어!’ 라고 외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였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친절하진 않았다.
“넌, 어떻게 그런 일을 다 알고 있는 거야?”
“말 했잖아. 이 바닥에선 정보가 생명이라고…….”
“니가 그런 건 아니고?”
기대가 사라지자 실망이 찾아왔고 실망이 깊은 나머지 말이 막 나갔다. 첸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최근에 쿠간에서 벌어진 안 좋은 일은 죄다 너랑 상관이 있었어.”
“그런 소리는 무슨 증거라도 하나 찾아서 내놓고 해야 되는 거 아냐?”
어제 저녁 킹 거리의 뒷골목에서 찢겨 죽은 여자 시체를 봤을 때부터, 칠흑처럼 깜깜한 골목에서 오컴과 마주쳤을 때부터,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델 파소가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리고 사방에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을 때부터, 어떤 광인이 그 짐승을 찾아내서 도시 한복판에 풀어놓고 인간 사냥을 시킨 거라면 범인은 꼭 내 손으로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루크 첸에게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마음이 슬그머니 바뀌어서 아무나 관심 있는 사람더러 찾아보라고 하고 난 그냥 뒤로 빠지고 싶었다. 천 년 전에 봉인된 괴수를 어떤 무당이 다시 깨워서 풀어 놓은 거라면 그런 귀신같은 놈하곤 옷깃 스치는 것도 싫었고, 봉인된 전설 속의 괴수들이 시한이 지나서 불시에 튀어 나오는 거라면…… 아예 쿠간을 떠야 할 판이었다.
“하던 얘기나 마저 해봐.”
“그럼 스카웃 건을 마무리 지어볼까?”
첸이 다리를 바꿔 꼬면서 엉뚱한 소릴 했다.
“말고! 오컴 얘기 말이야. 아는 대로 다 불어.”
“맨 입으로?”
그렇게 말하며 녀석이 입맛을 찹찹 다셨다. 그래서 구렁이 알 같은 비상금 100불을 꺼내서 첸의 양복 윗주머니에 쑤셔 넣어줬다.
“생각보다 후하네?”
첸이 주머니에서 꼬깃해진 지폐를 끄집어내서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그 괴물이 저절로 살아났다 한들 저 혼자 물어서 쿠간까지 온 건 아닐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난들 아나?”
“정보가 생명이라면서?”
놈이라고 모든 일을 다 아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아는 게 많아 보였다. 첸이 잠깐 머리를 굴렸다. 조짐이 안 좋다. 아니나 다를까 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저 갈게. 미팅 약속이 있어서…… 기다리게 할 수 없는 사람이거든.”
“아까 그 여자?”
첸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여자. 너…… 주말에 우리 집에 와라.”
자오가 앉아 있는 쪽을 힐끔 돌아봤다. 저 무서운 보디가드는 화장실 한번 가는 일 없이 눌러 앉아서 한눈도 안 팔고 나만 노려보고 있었다. 첸은 아까 나한테 맞은 입술이 딱 보기 좋을 만큼 탱탱 부었다. 한대 더 때려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기왕 참기로 한 거 좀 더 참아보기로 했다.
“니 마누라한테 인사라도 시켜주게?”
“집 사람은 유럽에 놀러갔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토요일 저녁에 파티를 열어. 물론 크롬웰 양도 환영이에요.”
하지만 그다지 환영하는 말투가 아니라서 자존심 상했는지, 첸이 아무리 명성 드높은 악당이라도 취향 안 맞는 신비주의자라 흥미가 싹 가셨는지…… 쥬드는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잘 가라는 듯 손만 흔들었다. 쥬드는 첸을 더 붙들어 놓고 싶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첸이 좀 전에 내가 줬던 100불을 도로 내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난 필요 없으니까 깨끗한 셔츠라도 한 벌 사 입어. 파티는 일곱 시부터 시작해.”
“아마 못 갈 거야. 바쁘거든.”
시간이 남아서 덤벼도 사양이지만…… 곱게 거절하고 일어서는데 첸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그 자체는 악의라곤 느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신사적이었다.
“토요일에 내 집에 오는 게 좋을 거야. 12인조 멕시코 악단이 경찰서 창문 밖에서 세레나데 부르는 걸 듣기 싫으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