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비니가 카이잘 고가를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다음 사거리에서도 그대로 직진을 했다.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 방향으론 100년을 달려도 마리우스의 책방이 안 나온다.
“병원에 먼저 들르자고 했잖아.”
비니가 흘낏 곁눈질을 하며 대꾸했다.
“내가?”
“아니, 내가. 넌 맘대로 하라고 했고.”
아, 그랬었지. 로빈하고 칼이 지하실에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서둘러 봐야 걔네들을 우리가 꺼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출발하기 직전에 병원에서 몬티첼리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연락이 왔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얼마쯤 가다가 비니가 뜬금없는 소릴 했다.
“무슨 말?”
“할 말이 없으면 화라도 내든가…….”
“화낼 일이 뭐가 있어? 그 자식이 나한테 폭탄을 보낸 것도 아닌데.”
병원 주차장은 초만원이었다. 병실이 초만원이니 그럴 테지만…… 그 바람에 주차장을 세 바퀴나 돌고서야 겨우 한 귀퉁이에 차를 들이밀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새로 뽑은 것 같은 벤이 있어서 조마조마 했는데 다행히 비니가 요번엔 남의 차 긁는 대신에 앞에 있는 화단을 들이박았다.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니네 작은아버지만 보고 나와.”
“같이 가자.”
“싫어.”
혼자 내리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잠시 밍기적거리던 비니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제이,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심각한 얼굴이었다. 요즘은 비니 얼굴에도 전에 없던 그늘이 생겼다.
“정말?”
“그렇다니까. 우린 파트너잖아.”
“솔직히…… 바바라를 만날까 봐 무서워.”
내 대답에 비니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난치지 말고, 솔직히 말해도 된다니까?”
“솔직히 뭘?”
“루크 첸 말이야!”
“그 자식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
“관 둬!”
비니가 삐져서 차에서 내렸다.
왜 화를 안 내느냐고? 솔직히 말하라고? 저렇게 눈치 없는 놈이 어떻게 형사가 됐을까? 솔직히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아무 상관도 없는 비니를 붙들고 불평을 하는 것조차도 허탈할 정도로.
이 길로 차를 몰고 흑풍회로 쳐들어가서 그 망할 자식을 쏴 죽여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니가 또 한 건 올렸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차에서 내려 보니, 별로 큰 사고도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빠져나가던 차가 갑자기 나타난 비니를 피하려고 방향을 틀다가 주차 중인 다른 차 범퍼를 연달아 긁은 모양인데 긁은 차나, 긁힌 차나 별로 심하게 망가지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니 비니 녀석, 마리우스의 서점을 때려 부순 이후론 명성에 걸맞는 대형사고가 별로 없었다. 어쨌든 열 받은 운전자가 내려서 비니에게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저씨가 잘못해서 사고 친 거 갖고 왜 나한테 시비에요?”
비니도 지지 않고 사납게 대들었다.
“니가 갑자기 차 앞으로 튀어 나왔잖아!”
“나는 그냥 걸어가고 있었다고요!”
겁을 상실한 운전자가 비니 멱살을 틀어잡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헉, 저러면 안 되는데……
성격도 별로 안 좋은 수많은 경찰 동료들이 비니의 징크스에 걸려서 몸과 마음을 크게 상하고도 좀처럼 보복할 엄두를 못내는 데는 그러고도 남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비니 첫 번째 파트너였던 로드니는 비니한테 주먹질을 잘못했다가 비니 등 뒤의 유리벽을 때리는 바람에 손가락이 세 개나 부러지고 정맥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었었다. 그 외에도 비니와 관련된 자잘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사고는 셀 수도 없었다.
“이봐! 그러지마! 물러 서!”
얼른 달려가서 운전자 코앞에 경찰 배지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 성질 급한 남자는 배지를 거들떠도 안 보고 나를 거칠게 밀쳐버렸다. 덩치가 두 배 정도 되는 뚱뚱한 남자한테 떠밀려서 주차장 바닥을 나뒹구는 사이, 남자가 비니 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무게가 상당히 실린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넘어지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보다는 비니도 이렇게 당할 때가 있구나 싶어서 기분이 묘했다. 비니 파트너 생활 어언 2년…… 그동안 쌓인 원한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억하심정으로 비니 턱이 깨지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기만 하던 비니의 징크스가 이제야 진정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요즘은 이렇다 할 사고도 없었고…… 더욱이 저런 보복 공격이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비니가 남자의 헤머 같은 주먹에 맞아서 비명도 못 지르고 날아갈 판이었던 것이다. 이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비니에게 주먹을 휘두르던 남자가 멈칫하더니…… 그 다음 순간 얼굴이 콱 일그러지고 말았다
“어흑…….”
남자가 숨 막힐 것 같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경미한 디스크 증세로 물리치료를 받고 나가던 길이었다. 별로 심하지도 않던 디스크가 왜 하필 비니랑 실랑이를 벌이다가 응급실에 실려 들어갈 정도로 악화됐는지는 알 도리가 없는 일이고…….
“본래 디스크가 있었다잖아! 나는 그 아저씨한테 손도 안 댔어!”
응급실 문을 밀고 나오면서 비니가 짜증을 냈다.
“누가 뭐래?”
비니가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가던 나를 노려봤다. 나도 얼른 걸음을 멈췄다.
“너 아까부터 근처 반경 2미터 이내론 들어오지도 않잖아.”
“내가?”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비니가 손가락도 까딱 않고 사람 하나 중환자 만드는 걸 지척에서 지켜본 이상 별 수 없다. 나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바보가 아니다. 게다가 오늘처럼 비니가 무섭기도 오랜만이었다.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비니는 진짜 기분 상한 얼굴로 휭 하니 앞서 가버렸다. 기왕 응급실까지 쫓아 들어왔는데 그냥 가기도 뭣해서 나도 뒤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반경 2미터라니…… 안전거리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특실이 있는 7층은 그야말로 1급 경계 상황이었다. 몬티첼리의 병실로 향하는 복도 쪽에만 다섯 명의 경호원이 늘어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문 앞에도 두 명이 버티고 서서 병실로 들어가려는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고 몸수색을 했다. 이 정도면 경호는 빈틈없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가짐들을 보아하니 다 이 방면엔 프로페셔널인데 몬티첼리 조직원 중엔 이만한 인원이 남아 있지 않았고 이 많은 전문가들을 새로 고용하기엔 요즘 몬티첼리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으니, 역시 바바라가 보낸 경호원들인 모양이었다. 단순히 장래의 시숙부에 대한 호의라고 보기엔 좀 과한 것 같기도 하다.
문지기 두 명 중 하나는 다가오는 우리를 힐끔 보고는 다시 잡지를 뒤적거렸는데 나머지 한 녀석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몸수색 좀 합시다.”
내가 비니 대신 경찰 배지를 꺼내 보였다. 경호원은 신분증 사진과 내 얼굴을 한 번씩 들여다보고서도 우직하게 버텼다.
“그래도 무기는 못 갖고 들어갑니다.”
경호 수칙은 제대로 배운 모양이다. 화낼 일도 아닌데 아까부터 기분이 꼬여 있던 비니가 놈을 노려보면서 한 걸음 다가섰다. 그제야 잡지책 보던 놈이 책을 접고 일어나더니 자기 파트너에게 주의를 줬다.
“너무 붙어 서지 마. 비니 몬티첼리야.”
커튼을 반쯤 내린 병실에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초췌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워낙 부상도 심했고, 며칠이나 의식이 없었던 것치고는 양호한 편이었지만 눈 밑이 시커멓게 여윈 그의 얼굴은 사실…… 좀 충격이었다. 그는 상태가 좋을 때에 비해서 1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고 보스로써의 기백과 카리스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 우울한 시선으로 우리를 맞은 몬티첼리는 정말 평범한 중년 남자처럼 보였다.
“왔니?”
병실엔 우리보다 먼저 온 방문객이 이미 있었다. 몬티첼리 머리맡에 바싹 붙어 앉아 있던 여자가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였다. 어제 병원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여자였다.
다시 보니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예뻤다. 얼굴이야 쥬드도 물론 예쁘지만 저쪽은 좀 비현실적이라고 할까…… 눈매가 기품이 있으면서도 신비롭게 느껴질 정도로 깊었다.
몬티첼리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가까이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비니는 의자를 끌어다 필리스 맞은편으로 다가앉았고 나는 그냥 창가에 기대섰다.
“우리가 데이트를 방해했나 봐요?”
한동안 몬티첼리를 쳐다만 보던 비니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넌 조카니까, 한번은 봐줄게.”
몬티첼리가 썰렁한 농담을 한마디 던지고 창가에 기대 서 있는 나를 쳐다봤다. 용케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실은 폭발 직전이었다. 단지 너무 오랜 세월 이성을 잃어본 적이 없어서 화도 못 내고 있는 것뿐이었다. 저러면 주변 사람들도 편치 않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좋지 않다. 저런 상태가 오래가면 우울증도 되고 화병도 된다. 몸이 웬만히 나아지면 정신과 치료도 따로 받아야 될 거다.
“자네 친구 일은 나도 들었어. 안됐네.”
뜻밖이다. 니콜라스 일은 안중에도 없을 줄 알았는데.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저…… 소문일 뿐이죠.”
몬티첼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런 남자를 포기하는 건 쉽지 않지.”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노려보자 필리스가 몬티첼리의 쇠약해진 얼굴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타일렀다.
“짓궂어요, 당신…….”
진한 코코아처럼 깊고도 달짝지근한 음성이었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도 그윽한 유혹처럼 들리는, 마치 주문을 외는 것 같은…….
“당신이 헤슬렘을 못 봐서 그래.”
“못 보긴요. 나도 그 남자를 알아요.”
세 남자가 동시에 필리스를 쳐다봤다. 필리스는 ‘뭐 그 정도 가지고……’ 하는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한동안 우리 클럽에 자주 왔었어요. 미남이고 팁도 후해서 모두들 좋아했었죠. 특히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아이리스가 많이 좋아했었는데…… 얼마 후에 신문에 얼굴이 나더군요. 아주 크게요.”
클럽이란 소리에 여자 포준가 싶어서 환상이 다 깨질 뻔했다. 하지만 클럽이란 건 변두리의 작은 재즈 바를 말하는 거였고 필리스는 바를 운영하면서 노래도 직접 부르는 아티스트라니 잠시나마 오해했던 게 미안했다.
“당신, 나한테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잖아.”
“물어 보지도 않았잖아요.”
“그자를 좋아한 게 아이리스뿐이었나?”
마피아 대부로써의 기백은 잃었어도 바람둥이 기질은 여전한 몬티첼리가 필리스를 슬쩍 떴다.
“아쉽게도…… 나는 그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첫눈에 알아봤거든요.”
“나도 꽤 위험한 편인데…….”
“최소한 당신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잖아요. 뭐…… 별로 오래 가지는 않는 것 같지만.”
“여자들한테는 그게 그렇게 큰 문제야?”
“열두 시간 지속이라도, 그동안만 진심이라면 나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영원한 것도 없으니까…….”
몬티첼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을 때 떠올릴 만한 당혹감 같은 것도 잠시 얼굴을 떠돌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고, 몬티첼리는 다시 만만한 화제로 돌아갔다.
“그래, 그 남자는 사랑을 모르던가?”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든가 인정하곤 상관없는 존재니까요. 흉내는 잘 내더군요. 놀랄 정도로…….”
“저 친구를 보러 우리 집 파티에까지 쳐들어왔었는데…… 그것도 그냥 흉내였을까?”
필리스가 그제야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세상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조금씩 변해요. 그도 조금은 바뀌었을지 모르죠.”
나도 필리스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 지혜로워 보이는 눈동자 이면엔 깊이 가라앉은 슬픔이 보였다. 그녀는 내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나라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아는 건 아니거든요. 특히 당신에 관한 일은 잘 모르겠어요. 정말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몬티첼리가 주사 바늘이 두 개나 꽂혀 있는 오른손을 힘들게 들어 올려서 손가락으로 필리스의 턱을 잡아서 눈을 맞췄다.
“정신 차려, 필리스. 쟤는 내 조카 파트너야. 경찰이고…… 별로 재미도 없는 놈이야.”
비니가 나를 돌아보면서 어정쩡하게 웃었다. 눈치 무딘 비니도 몬티첼리가 너무 태연하고 침작하다는 걸 이제 알았나 보다.
“지금 내가 실업 중이긴 하지만…… 뭘 해도 짭새보다는 낫게 한단 말이야.”
“정말요?”
필리스가 몬티첼리에게 괜찮은 제안을 했다.
“얼마 전 가게에 피아니스트가 그만 뒀는데, 생각 있어요?”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니랑 나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여자친구가 와 있는데 길게 붙어 있는 우리 잘못이긴 하지만…… 옆구리가 결리는지 몬티첼리의 얼굴은 금방 일그러졌다.
“난 피아노 못 쳐. 그리고…… 당신 가게엔 피아니스트 같은 거 처음부터 없었잖아.”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저런 여자가 옆에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헛산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전 같지는 않겠지만 덕분에 암흑가에서 손 씻고 저렇게 속 깊은 미인에게 정착하는 것이야말로 화를 복으로 바꾸는 탁월한 선택이다.
생각해보면 나야말로 헛살았다. 친구라곤 초능력보다 더 무서운 징크스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짭새에, 예쁘고 마음씨 고운 애인은 고사하고 갑자기 웬 아시안 갱단 두목이 들러붙어서 사람 속을 뒤집질 않나…… 사는 게 너무 재미없다. 힘만 들고…….
“당신, 나한테 거짓말했어.”
“그런 적 없어요. 프랜, 난 거짓말 못해요.”
“내가 행복해질 거라고 했잖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기만 하면…….”
몬티첼리를 응시하던 필리스의 눈동자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무 상관없는 사람조차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선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그 손을 잡고 있던 몬티첼리의 손가락이 가는 경련을 일으켰다. 피곤한 것 같았다. 필리스가 몬티첼리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불을 고쳐서 덮어줬다. 몬티첼리가 필리스를 올려다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 가 봐, 필리스. 그리고…….”
피곤에 지친 몬티첼리의 음성이 어느새 많이 쉬었다.
“다신 오지 마.”
몬티첼리의 모진 작별인사에 필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눈길로 몬티첼리를 응시하다가 이마에 키스를 한번 해주고 방을 나갔을 뿐이었다.
“작은아버지, 지금 제정신이에요?”
필리스가 나가자마자 비니가 몬티첼리에게 따지고 덤볐다. 내가 볼 때도 몬티첼리가 좀 미친 것 같았다.
“요즘 작은아버지 형편에 어디 가서 저런 여자를 만나요? 저쪽에서 헤어지자고 해도 무릎 꿇고 잡아야 할 판에 도리어 쫓아보내요?”
“시끄러워. 너도 나가.”
몬티첼리가 돌아누우며 귀찮은 듯 잘라 말했다.
“저도 다신 오지 말까요?”
“맘대로 해.”
비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봉을 놓친 건 몬티첼린데, 내가 왜 이렇게 아까운지 모르겠다.
나무랄 데 없는 숙모감을 놓쳐버렸다는 상실감에 비니가 병실 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문가에 앉아 있는 경호원 둘이 깜짝 놀라서 일어날 정도로…… 그때 몬티첼리의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가는 길에 가르시아한테 들러서 산소 호흡기나 떼 주고 가.”
비니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비니한테 끌려 나가던 나는 제때 멈추질 못해서 반쯤 열린 문짝에 얼굴을 갖다 박았다. 아우, 코야…….
“직접 해주고 싶지만 난 내 발로 화장실 가는 데만 2주일 정도 걸린다니까…….”
“가르시아는 괜찮을 거예요.”
“괜찮기는 개뿔…….”
비니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문을 닫았다.
“살려고 애쓰고 있잖아요.”
“죽지 못해서 저러고 있는 거야.”
비니가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눈 밑까지 끌어 덮은 이불자락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 올리고 안을 들여다봤다.
“가르시아도 작은아버지도…… 다 괜찮을 거예요.”
몬티첼리가 힘겹게 돌아누우며 이불자락을 확 낚아챘다.
“됐으니까 꺼져!”
“저녁 때 또 올게요.”
병실을 나오는 비니 걸음이 무거웠다. 다 괜찮을 거라고 말은 좋게 했지만 비니가 몬티첼리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자기 아파트를 팔아서 병원비 일부 내주는 정도였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니 작은아버지가 그동안 저질러온 악행을 떠올려보면 동정의 여지가 얼마 없긴 하지만 그건 개인적으로 몰랐을 때 얘기고, 지금은 안됐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어차피 대도시에 조직범죄가 없을 수 없다면 그래도 루크 첸보다는 몬티첼리가 좀 낫지 않을까?
레빈하고 가르시아도 잠깐 들여다보기로 하고 5층에 내리다가 뜻밖의 진풍경에 걸음을 멈췄다.
“여긴 병원이고, 규칙이란 게 있단 말이에요!”
“난 그 잘난 병원 규칙 같은 건 관심 없어. 여기 오래 있지도 않을 거고!”
발렌타인이 복도에서 키가 자기 가슴까지밖에 안 오는 간호사랑 아옹다옹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환자예요. 환자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요!”
“이 따위 담배, 이제 와서 끊어 봐야 난 6개월도 못 산단 말이야!”
이제 스무 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어린 간호사가 한 손에 담배 갑을 쥐고 발렌타인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물론 자기가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몰라서 저럴 테지만 진짜 용감하다.
“이제 막 숨이 넘어가는 환자라도 병실에선 담배 못 피워요!”
“그러니까 간호사가 사형수 감방 간수보다 더 못됐다는 소릴 듣지!”
“세상에…… 뭐라고요?”
간호사가 보인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발렌타인이 그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발렌타인에게 저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만, 작고 어린 여자애를 상대로 저런 추태를…… 저렇게까지 할 정도로 골초였었나?
하지만 간호사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했다. 발렌타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고는 다시 담배를 낚아챘던 것이다. 시한부 6개월 선고를 받은 중환자한테 저래도 되나 하는 원론적인 문제를 떠나서 대단한 파이팅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열한 살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엄청나게 고생하셨다고요.”
너스 스테이션으로 넘어가서 쓰레기통에 담배를 던져 넣은 간호사가 발렌타인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발렌타인이 행, 하고 코웃음을 쳤다.
“폐암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온몸이 암이야.”
간호사가 혀를 낼름 내밀었고 발렌타인은 손사래를 치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내키진 않지만 인사는 해야 될 것 같아서 내가 말을 걸었다.
“좋아 보이네. 손가락은 좀 어때?”
“집어치우고…… 담배 있어?”
발렌타인 어깨너머로 넘겨다 보니 그 어린 간호사가 목을 빼고 우리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있지만, 여기선 어림도 없겠는걸?”
“따라와.”
발렌타인이 우리를 데려간 곳은 5층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공중 정원이었다. 돈 많은 병원이라 휴게시설도 시립 병원이나 경찰 병원하곤 격이 틀렸다. 그런데 바람이 세서 좀 추웠다. 담배에 불도 셋이 빈틈없이 머리를 맞대고서야 겨우 붙일 수 있었다. 나하고 비니야 상관없지만 발렌타인은 환자복 위에 별로 두꺼워 보이지도 않는 가운을 하나 걸친 게 전부였다.
정원엔 나, 비니, 발렌타인 세 사람뿐이었다. 별로 할 말도 없고 해서 발렌타인 따라 비니랑 나도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란한 일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담배 맛이 각별했다. 로빈이랑 칼은 지하실에서 살라고 하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할까?
“날씨 좋군.”
발렌타인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아련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워낙 죽음과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지, 혹은 이제 마음의 정리가 다 끝난 건지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에 연연하는 기색은 없었다. 몬티첼리는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이쪽은 진짜 담담했다.
“정말 아무런 치료도 안 받을 거야?”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토끼 구름이 티본스테이크처럼 넙적해져 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던 내 입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갔다. 발렌타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난 대머리로 죽기는 싫어.”
“머리 벗겨지는 게 이상할 나이도 아니잖아.”
“죽는 게 이상한 나이도 아니지.”
“이러는 거…… 자살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냐?”
발렌타인이 담배꽁초를 마른 화단에 집어던지고 한 가치를 더 입에 물었다.
“그래서? 누구 손해 보는 사람이라도 있어?”
“엘리야 하이네가 살아 있었어도…….”
비니가 담배연기에 사래가 들려서 거칠게 콜록거렸다. 나도 내가 왜 이런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발렌타인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뭐……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보통 때에도 거의 비슷하니까 특별히 더 겁나거나 껄끄러울 건 없었다.
“그 녀석이 살아 있었다면 최소한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줬겠지. 정이 많은 놈이었거든.”
발렌타인이 담배연기를 내 얼굴에 대고 길게 뿜었다. 그래봐야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곧바로 흩어져버렸다.
“엘리야의 시체는 어쨌어? 설마 먹어버린 건 아니겠지?”
빈정거리던 발렌타인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갑작스런 통증으로 그 창백한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가 싶더니 결국 앉아 있던 벤치에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비니랑 내가 달려들어 잡아주지 않았으면 바닥에 굴러 떨어졌을 거다.
“잠깐 있어. 간호사를 불러올게.”
비니한테 한마디하고 돌아서는데 발렌타인이 그 앙상한 손으로 내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왜 그래? 사람 불러온다니까?”
고통이 얼마나 모진지 발렌타인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곧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헐떡거렸다. 이런 꼴 지켜보는 것도 힘든데 움켜쥔 옷자락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 좀 지나면…… 괜찮으니까…… 그냥…….”
들어가서 진통제라도 한대 맞으면 훨씬 편할 텐데 이게 무슨 고집인지 모르겠다.
별 수 없이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별로 내키진 않았지만 발렌타인의 머리를 무릎에 얹어 놓고 그의 고통이 잦아들기를 기약도 없이 기다렸다. 나랑 발렌타인이 이러고 있는 걸 알면 오닐하고 하이네 둘 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거다.
발렌타인의 고통은 길고 지독했다. 앞으로 점점 더 그럴 거고…… 이렇게 살려면 6개월도 그렇게 짧은 시간은 아닐 거다. 물론 발렌타인이라면 그 시간을 훨씬 단축시킬 수도 있을 테지만.
발렌타인의 호흡이 좀 안정되고 경직된 근육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한 건 시간이 꽤 지나서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이라도 널 죽여버리고 싶어.”
제정신이 돌아오는지 발렌타인이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리야 하이네가 아직 살아 있었다면 나도 놈을 죽이고 싶었을 거다. 실은 놈을 죽여도 오닐이 살아 돌아오질 않아서…… 그 후로도 오랜 시간, 놈을 증오했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는 발렌타인의 증오를 잘 안다.
“왜 못하는데?”
“글쎄…… 이젠 좀 늦었지.”
발렌타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기 5분만 더 있으면 발렌타인은 암이 아니라 감기로 죽을 거다. 온몸이 땀에 축축이 젖었고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추워서 덜덜 떨면서도 좀 전에 못 피우고 버린 담배에 미련이 남는지 발렌타인이 내 주머니를 뒤져서 담배 갑을 꺼내갔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야 될 것 같은데 야생 고양이만큼이나 말을 안 들어먹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니가 마지못해 발렌타인에게 라이터를 건네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좀 전에 발렌타인의 정강이를 걷어찼던 씩씩한 간호사였다. 간호사를 본 발렌타인이 흠칫 놀랐다.
“하필이면…….”
발렌타인이 담배를 잽싸게 숨기며 투덜거렸다.
“왜 그래? 귀여운데.”
간호사는 마침 두툼한 담요까지 한 장 안고 있었다.
“천년조약의 기사들보다 더 질긴 계집애야. 쟤는 간호사 때려치우고 추적자로 나서도 대성할걸.”
“당신이 맘에 드나보지.”
“내 타입이 아니야.”
하여튼 취향 이상한 것들 때문에 요즘 피곤해 죽겠다. 내 눈엔 엘리야 하이네처럼 음산하게 생긴 놈보다 저쪽이 만 배는 낫구만…… 간호사가 발렌타인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쏘아보며 다가왔다.
“담배 피울 만큼 피웠으면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지 그래요?”
“아직 다 못 피웠어.”
발렌타인이 보란 듯이 담배를 입에 물고 이죽거렸다.
“감기 걸린다고요.”
간호사가 담요를 발렌타인의 어깨에 둘러주고 바람 들세라 턱밑까지 담요 자락을 꼭꼭 여며줬다. 발렌타인은 영 깝깝한 표정이었다. 취향이 아니면 이런 종류의 친절도 성가시기만 한 걸까?
“통증은 좀 어때요? 새벽엔 많이 힘들었다면서요? ……괜찮아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크루거.”
발렌타인이 손을 들어 간호사의 입을 막았다. 명찰을 보니 이름이 K, 크루거였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해줬으면 좋겠어.”
“뭘요?”
발렌타인의 당부는 별로 심한 말은 아니었지만 다소 엉뚱했다.
“날 니 아버지로 착각하진 말아줘.”
“뭐가 어째요?”
크루거 간호사가 언성을 높이며 앙칼스럽게 눈을 부라렸다. 달려들어서 얼굴이라도 긁어버릴 기세였다. 그 바람에 발렌타인도 약간 쫄았다.
“이것봐요! 난 간호사고, 그래서 말도 더럽게 안 듣는 당신 같은 환자라도 돌봐줄 책임이 있는 것뿐이라고요!”
“거기까진 좋아.”
“100% 거기까지예요! 세상에…… 우리 아버진 시청 공무원이었단 말이에요. 안전 관리과 직원이었고…… 정말 근사한 분이었다고요! 당신 같은 갱단 조직원이랑은 비슷한 데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한단 말이에요?”
크루거 간호사가 씩씩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더니 죄 없는 우리까지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흥분의 정도로 보건데…… 발렌타인이 아주 헛짚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발렌타인이 그만큼 미운 건지 어느새 눈가에 눈물까지 그렁그렁했다. 그 와중에도 책임감 투철한 크루거 간호사는 마지막 경고를 잊지 않았다.
“분명히 일러두는데…… 10분 안에 당신 방으로 안 돌아가면 침대에 아예 묶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어쩐지 우리한테 10분 안에 데리고 들어오지 않으면 니네들 죽을 줄 알라고 협박 하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여기서 나가야겠어.”
발렌타인이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암이야 치료를 포기했다 치고, 손가락 봉합수술 받은 지 이틀밖에 안됐는데 병원에서 호락호락 내보내줄 리 없었다. 게다가 치료비까지 비니가 지불 보증을 한 마당이다.
“난 처음부터 이런 데 오기 싫었어. 떨어진 손가락 붙여달라고 누구한테 부탁한 적도 없고.”
“그냥 잘 지내보지 그래? 귀엽잖아?”
비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게 뭐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니네들 의견 물어본 적 없어.”
발렌타인이 꽁초까지 다 태운 담배를 아쉬운 듯 비벼 끄고 일어섰다. 말은 퉁명스럽게 해도 침대에 묶이긴 싫은 것 같았다.
“내가 볼 때는 그냥 순수한 호의야. 대체 뭐가 문제야?”
“순수 좋아하네.”
“흑심이 있다고 해도…… 그런 애한테라면 당하는 것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겠던데?”
발렌타인이 병원 복도로 난 문을 열다 말고 나를 째려봤다.
“아, 깜빡했네. 당신 타입이 아니랬지?”
“뭘 믿고 이렇게 까불어?”
“좋은 일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쁠 거 없잖아. 어차피 반 년밖에 못 산다며?”
발렌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짭새들…… 단순하기는.”
뭐, 비니랑 내가 단순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한 거랑 그 간호사 일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남자가 누군지 알아? 열한 살 때 죽은 아버지야. 걔네 아버지는 딸이 사춘기도 되기 전에 죽었어. 데이트 나갈 때 너무 짧은 치마 입는다고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거고, 집에 늦게 들어왔다고 화를 내지도 않았겠지. 어느 화창한 봄날에 공원에 소풍갔던 기억만 그림처럼 남아 있을 거야. 농담이 아니야. 걘 진짜로 지갑에 아버지 사진을 넣고 다녀.”
비니랑 내가 서로 쳐다봤다. 비니도 이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게 확실했다.
“크루거는 내가 마취 당해서 아무 기억이 없을 때 날 찍었어. 그래 놓고 자기가 너무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못해봤던 걸 하고 싶어 하는 거란 말이야. 담배 피운다고 잔소리를 퍼붓거나, 혹시 감기 걸릴까 봐 담요를 싸안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건 시작일 뿐이야. 좀 있으면 내 병실에 꽃도 꽂아 놓을 거고, 더 있으면 가족 문제에, 애정 문제, 장래 문제 상담까지 하려고 들 거야. 그리고 나중엔 결혼식 때 입장도 같이 해달라고 하겠지.”
내 생각엔 그 간호사도 며칠 더 겪어 보면 자기가 사람을 얼마나 잘못 봤는지 깨닫게 될 것 같지만…….
“나쁠 거 없잖아?”
“나쁠 거 없지. 그런데 말이야…….”
발렌타인이 병실 문을 벌컥 열다가 문전에 딱 멈춰 섰다. 어깨너머로 들여다보니 예쁜 꽃이 몇 송이 유리 화병에 꽂혀서 침대 머리맡에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 간호사가 아버지가 그립긴 그리운 것 같았다. 발렌타인이 죄 없는 꽃병을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난 6개월 후면 죽는단 말이야.”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아쉽지만 레빈하고는 정말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돌아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일을 끝내고 가는 길에 다시 들린다고 했더니 웃는 얼굴로 읽을 만한 책 한 권하고 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정작 큰일을 당한 당사자들이 다 태연하다 보니 휴게실이나 복도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비니가 나한테 키를 던졌다.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아무도 비니에게 운전을 시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비니가 자청해서 자동차 키를 내놓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주차장을 막 빠져 나올 무렵까지 병원 건물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비니가 입을 열었다.
“넌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
“요즘 들어서 일어난 일 중에 이상하지 않은 일도 있었어?”
“왜…… 모든 사람들이 니콜라스를 찾지?”
오웬,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연방특수경찰, 쿠간 시 경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니콜라스를 찾고 있었다.
“그야, 놈이 연쇄살인범이고 병원에서 탈출한 이후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까.”
“병원 얘기하니까 기린하고 용도 생각난다.”
비니가 인상을 썼다. 안됐지만 머리 굴려봐야 헛일이다. 비니 머리가 나쁘단 뜻이 아니라……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 전담반조차도 현재까지 사건이 루크 첸과 관계가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습격자들의 시체, 장비, 추락한 헬기 잔해를 뒤지고 뒤져도 그 지경인데 못된 송아지 같은 신참들을 찾으러 가는 길에 열 받은 머리로 잠깐 궁리해봐야 두통만 심해질 뿐이다.
“쥬드는 뭔가 알고 있을까?”
쥐어짜 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는지 비니가 쥬드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그 여자가 똑똑하긴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잖아?”
“그래도 우리보단 낫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루크 첸 일로 심술이 잔뜩 나 있는 상황인데 곱게 도와줄까? 정말 흉악한 놈이라도 하나 잡아다가 들이밀면 몰라도 그 전엔 어림없을 거다.
루벳 거리로 가려면 아직 길이 먼데 차가 이상하게 밀린다 싶더니 좀 전부터는 도로가 거의 주차장이었다. 러시아워는 아직 이른데, 앞에 사고라도 났나?
샛길로 빠질까 하다가 서둘러서 가 봐야 할 일이란 게 칼이랑 로빈을 지하실에서 꺼내 오는 거란 사실이 생각나서 관뒀다.
“이게 아무래도 그냥 교통 체증은 아닌 것 같은데…….”
비니가 고개를 창밖으로 빼고 앞을 내다봤지만 앞에 무슨 일이 생겼든 여기선 안 보였다. 그래서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이 시간 교신 담당은 에바였다.
“현재 킹 7번가에 5분째 서 있는 중인데…… 무슨 사고라도 있나요?”
「킹 7번가라, 딱 걸리셨구만.」
에바는 22년째 근무하고 있는 이무기 같은 교신 담당이었다. 쥬드 크롬웰이 범죄 관계 정보를 틀어쥐고 있다면 에바는 경찰서 내 모든 관계자들의 사생활을 쫙 꿰고 있는 정보통이었다. 그 정보 청취력이 어떤 때는 쥬드 크롬웰을 능가할 정도라서 제 아무리 성질 더러운 놈이라도 에바한테는 함부로 못한다.
“우리가 내려서 좀 살펴볼까요?”
「거기라면 아침나절에 벌써 한 떼거리가 뛰쳐나갔으니까 니네들은 그냥 가던 길 가. 갈 수만 있으면. 」
“무슨 일인데요?”
「길가에 보기 흉한 게 좀 떨어져 있었던 모양이야. 현재 정리 중인데 시간이 좀 걸릴 걸. 그보다도……」
“그보다도…… 뭐요?”
「아니야. 아무것도.」
넉살 좋고 입심 좋은 이 아줌마가 이런 식으로 말꼬리 돌릴 때는 상상도 못할 큰일이 있는 거다.
“에바?”
「운전하는 중이면 조심해야 될 걸.」
에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혹시 니콜라스가…….
「니 남자친구가 너한테 꽃다발을 보냈어. 친구 이름이…… 첸 맞지?」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마음 졸이고 있었더니 이게 웬 뒷북? 에바는 최신 정보와 가쉽만 다루는 줄 알았는데 정말 실망이다.
“에바, 그 망할 꽃다발은 받은 지 하도 오래 돼서 이제 시들시들 하다고요.”
「그런 걱정은 할 거 없겠어. 새 꽃이 한 시간에 한 무더기씩 오고 있거든.」
브레이크를 너무 세게 밟는 바람에 차가 딸꾹질을 하면서 멈춰 섰다.
“뭐라고요?”
「너 나간 이후로 3개가 더 왔어. 어머, 저기 또 하나 온다. 세상에…… 저건 ‘모닝 글로리’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미야. 어쩜, 곱기도 하지…… 」
“운전…… 내가 할까?”
비니가 발치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무전기를 주워서 제자리에 놓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앞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쪽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했다.
“비니, 발렌타인 말이야.”
경황없이 쫓아가다가 하마터면 앞차 꽁무니를 들이받을 뻔했다.
“싫다는 걸 억지로 수술대에 눕힐 순 없잖아. 게다가 사실…… 이미 말기라서 상태가 호전된다는 보장도 없고. 잘해봐야 반 년 정도 더 사는 건데…… 알잖아? 그렇게 권할 만한 일은 아니야.”
비니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엉뚱한 소릴 지껄였다. 이 자식이 지금 내 심정을 알 리가 없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다.
“그게 아니고, 한 건 처리하는데 보통 얼마나 챙기느냐고.”
“응?”
“죽기 전에 좋은 일 한번 하는 셈치고…… 좀 싸게 안 될까?”
기도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지금 심정이 절박했다. 절박함이 통한 덕인지 내 기도에 대한 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있는데?”
차 뒷좌석에서 몸을 일으키며 발렌타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우선 급한 대로 차를 길옆에 붙였다. 원래 주차가 안 되는 대로변이지만 길바닥이 이미 주차장이라서 시에서 제일 깐깐한 주차요원이 달려온데도 뭐라고 시비 걸 형편이 아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발렌타인은 저택이 습격당하던 그날 입었던 그 옷을 입고 있었다. 까만 풀 오버 스웨터. 흙투성이에 여기저기 뜯어지고, 잘 들여다보면 피가 잔뜩 말라 붙어 있는…….
“병원에서 나온 것뿐이야.”
발렌타인이 창밖을 내다보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럴 거라고 내가 말 안 했었나?”
비니가 심란한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대체 이게 우리 차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별로 어렵지 않았어. 주차장에서 제일 파킹을 멋지게 한 차를 찾았지.”
발렌타인이 비니에게 윙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우리도 허둥거리며 따라 내렸다. 비니가 발렌타인의 앞을 막아섰고 나는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어딜 가는 거야?”
“아무 데나.”
발렌타인이 내 손을 뿌리쳤다. 대체 사이몬 발렌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적이었나?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 성격이 변했다고 해도 너무 심하다.
“그 간호사가 그렇게 신경 쓰이면 담당을 바꿔달라고 하면 그만이잖아. 겨우 그거 때문에 병원에서 도망을 친단 말이야? 암세포가 벌써 뇌까지 퍼진 거야?”
“더 있어 봐야 병원에서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
“최소한 진통제는 제때 주겠지!”
발렌타인이 쓰게 웃었다.
“농담해? 쿠간 시 뒷골목에선 아편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순도 99%짜리로. 물 탄 소다보다 못한 멀건 몰핀 반값에 말이야.”
“거기가 어딘지 나한테도 좀 갈켜줘 봐.”
“왜? 너도 어디 아파?”
“아니, 오랜만에 실적 좀 올리게.”
발렌타인은 이제 입씨름이 귀찮은지 인상이 좀 굳었다.
“그만 하자. 내가 어디서 죽든 상관없잖아?”
상관없다. 발렌타인이 우리 차 뒷좌석에 숨어서 병원을 빠져 나오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아직도 추운 날씨에 말기 암환자를 길바닥에 버리고 갈 수 없는 이쪽 입장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막 인파 속으로 뛰어드는 발렌타인의 뒤를 쫓아가서 팔을 비틀어 등 뒤로 꺾고, 이젠 거의 뼈만 남은 앙상한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다행히 나머지 한쪽을 내 손목에 채울 때까지 치명적인 반격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킬러를 상대로 이런 짓을 하다니…… 내가 미쳤나 보다.
“말로 할 때 이거 풀어.”
발렌타인이 나를 서늘한 눈초리로 노려보며 조용히 협박했다. 그 조용함은 어떤 요란한 엄포보다도 더 섬뜩했다. 나도 모르게 열쇠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어야 할 정도로…… 하마터면 열쇠를 건네줄 뻔했다.
“고집 피우지 말고 그냥 돌아가. 지금쯤 그 귀여운 간호사가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니겠어?”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비니가 발렌타인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살살 달랬다. 비니한테는 위협이나 협박 같은 게 잘 안 먹힌다. 비니가 들러붙자 발렌타인도 순간 움찔했다.
“그 귀여운 간호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난 호스에 칭칭 감겨서 병원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죽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비니가 발렌타인의 어깨너머로 나를 쳐다봤다. 이건 죽음과 발렌타인 간의 일이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주제넘었다는 걸 인정하고 수갑 열쇠를 꺼냈다.
“뭐, 근사한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오늘 계획은 산책이나 좀 하다가 괜찮은 바에 들어가서 한잔 하는 거야.”
수갑이 풀려 나가자 발렌타인이 손목을 주무르며 사방을 한번 둘러봤다. 킹 7번가는 오피스 타워가 줄지어선 번화가였다. 사건이 대로변에서 터졌는지 인파도 정체였다. 아마 근처에 현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인파 속으로 사라져버리면 다시는 발렌타인을 만날 일이 없을 거다. 시체나 찾을 수 있을까?
“돈은 있어?”
비니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고마워.”
발렌타인이 비니 손에서 지갑을 낚아채더니 현금을 몽땅 긁어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빈지갑을 비니에게 던져줬다. 잠시나마 돈 얘기에 기분 상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아깝다. 거금은 아니지만 현금을 싹 털린 비니가 떫은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고 있는데 누군가 비니를 툭 쳤다.
“니네들 여기서 뭐해?”
에쉬였다. 손에는 반쯤 뜯어먹은 햄버거하고 콜라를 들고 있고…… 바로 옆에는 터너가 창백한 얼굴로 붙어서 있었다. 둘이 바쁘게 출동했던 현장이 이쪽이었던 거다. 터너가 발렌타인을 아주 짧은 시간에 슬쩍 훑었다.
“지나가는 길이야. 그건 그렇고 길이란 길은 다 막아 놓고 뭐하는 거야?”
“수사.”
에쉬가 터너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넘어가게 생겼는데 점심나절부터 지금까지 조사 중이라…….
“살인?”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에쉬도 발렌타인을 보고 표정이 약간 굳었다. 발렌타인이 슬그머니 한발 물러섰다.
“선배는 얼굴이 왜 그래?”
점심때 현장 출동하던 그 얼굴에 비해서 터너는 상태가 심히 안 좋아 보였다. 내 질문에 에쉬가 터너를 힐끔 돌아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현장에서 아침 먹은 거 고스란히 다 토하고 점심도 걸렀어. 그나마 강력계 형사라 다행이지, 저런 비위 갖고는 햄버거 가게 점원도 못할 걸.”
에쉬를 노려보는 터너의 시선엔 환멸과 경탄이 반쯤 섞여 있었다.
“그 꼴을 보고도 햄버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너 같은 놈하곤 말도 하기 싫어.”
곱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에쉬는 비니보다 더한 철벽의 비위를 자랑하곤 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터너 역시 그렇게 비위 약한 사람이 아닌데 저렇게 애먹을 정도였다면 현장이 상당히 참혹했던 게 틀림없다. 에쉬가 보란 듯이 햄버거를 한입 뜯어먹었고 터너는 먹는 거 보기도 괴로운지 헛구역질을 했다.
“아주 푹 썩었던 모양이지?”
에쉬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지는 하루도 안 지났어. 아주 싱싱한 고기였던 셈이지.”
터너가 드디어 입을 막고 돌아섰다. 토할 게 더 안 남았는지 그러고 말았지만 어쩐지 흥미진진하다. 하긴, 무슨 일이라도 로빈하고 칼을 지하실에서 꺼내러 가는 일보다는 흥미로울 거다.
“고기라니…… 누가 잡아먹히기라도 한 거야?”
“다 먹힌 건 아니고…….”
네 명의 형사들 틈에 끼어서 조용히 얘기를 듣고 서 있던 발렌타인이 조용히 돌아섰다.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질 생각이었나 본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터너가 발렌타인의 팔을 움켜잡았다.
“당신, 잠깐만 있어 봐.”
“아무래도 난 형사들한테 인기 있는 타입인가 봐.”
발렌타인이 니네가 좀 어떻게 해보라는 사인을 나랑 비니한테 보냈다. 에쉬가 남은 햄버거를 마저 입안에 우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꽤 그런 편이죠. 세인트 발렌타인.”
발렌타인은 루 콜롬바인 사건으로 경찰서에 얼굴이 대대적으로 팔렸었다. 얼굴 없는 킬러로써의 명성도 높았지만 마키바 반장을 상대로 꽤나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기 때문에 많은 경찰관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뭐라고 거들어줄 틈도 없이 터너가 발렌타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오늘은 은팔찌하고 인연이 깊은 날이군.”
발렌타인이 수갑 찬 팔목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피의자 권리는…… 속이 좀 가라앉는 대로 읊어 드리죠.”
“혐의가 뭔지는 지금 좀 읊어 보시지?”
발렌타인의 날카로운 지적에 터너가 움찔했다. 혐의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몬티첼리의 정적 다섯 명을 죽인 거 외에도 의심 가는 사건은 서너 건이나 더 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도 발렌타인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비니나 내가 발렌타인을 봐주느라 체포를 안 했던 게 아니다. 발렌타인 같은 스페셜리스트는 범행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야마다 피살 사건 때…….”
크리스 야마다 사건은 발렌타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사건이었다. 사실 야마다를 저격한 건 엘리야 하이네였다. 놈은 경찰 잠복조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야마다를 사살했고, 그 당시엔 경찰의 대응도 기록적으로 민첩해서 10여 분 만에 경찰 특공대 5개 조가 2인조 암살범을 포위해서 건물에 몰아넣는데 성공했었다. 결국 하이네는 현장에서 사살 당했다.
머리가 박살난 하이네를 끌어안고 내게 총알을 비처럼 퍼부었던 건 틀림없이 발렌타인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를 놓쳤고 그걸로 끝난 게임이었다. 터너가 내게 눈짓을 하면서 지원사격을 요구했지만 미안하게도 진실은 이런 거다.
“얼굴은 못 봤어.”
터너가 펄쩍 뛰었다.
“넌 현장에 있었잖아! 발렌타인이 틀림없었다면서?”
“틀림은 없지. 하지만 얼굴 마주 보고 인사를 하진 않았어.”
“그래서, 거기까지 가서 코빼기도 못 봤단 말이야?”
“그랬으면 내가 진즉에 체포해서 올해의 경찰관으로 떴지, 길에서 수다나 떨고 있었겠어?”
터너가 끙…… 하는 신음을 입안으로 삼켰고 발렌타인은 씨익 웃으며 수갑 찬 손목을 터너 코앞에 내밀었다.
“그래서? 사이몬 발렌타인을 이렇게 놔주란 말이야?”
터너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신경질을 냈다. 놔주기 싫으면 경찰서까지 끌고 갈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잡아두기 어려울 거다. 그건 터너도 잘 안다. 에쉬가 터너 옆구리를 쿡 찌르며 발렌타인에게 귀엽게 웃어 보였다.
“우리가 댁한테 무슨 유감이 있는 건 아니고…… 이 친구랑 오닐, 그때 당신 친구가 살해한 경관이요, 그 친구하고 굉장히 친했거든요.”
“유감이군. 그럼 자네한테 부탁 좀 할까?”
“나도 좋아했었어요. 누구나 다 오닐을 좋아했죠.”
에쉬가 터너를 달래가며 외투 주머니를 뒤져서 수갑 열쇠를 꺼냈다. 그때 정복 경찰 두 명이 숨이 턱에 차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두 사람의 경황 없어 보이는 얼굴에 터너와 에쉬가 바짝 긴장했다.
“또 뭐야?”
“시체가 하나 더 나왔어요. 저기 보이는 악기상 건물 뒤쪽에서요.”
“빌어먹을…….”
에쉬가 햄버거 껍데기와 먹던 콜라 컵을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현장으로 향했다. 터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에쉬를 뒤쫓았다. 몇 백 미터 간격을 두고 상태가 심상치 않은 시체 두 구라…… 로빈하고 칼은 지하실에서 하룻밤 더 자도 괜찮을 거다. 강력반에선 살인사건이 우선이다.
“이건 풀어주고 가야 할 거 아냐!”
비니랑 내가 의논 맞춰 볼 것도 없이 터너를 따라 나서자 발렌타인이 버럭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 터너가 수갑도 안 풀어주고 가버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쨌든 아픈 사람을 수갑 차고 길 한복판에 마냥 서 있으라고 할 수도 없어서 급한 대로 발렌타인에게 자동차 키를 던져줬다.
“차에서 기다려.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골목은 어둡고 깊었다. 하루 종일 빛이라곤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협소한 건물 틈새라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두껍게 얼어서 바닥은 완전히 빙판이었고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대로의 그것보다 한층 더 차갑게 느껴졌다. 쓰레기나 다름없는 잡동사니들이 키 높이까지 쌓여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삐죽이 튀어나온 나무 상자 모서리에 찢어진 천 조각이 걸려서 바람에 날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잔가 봐.”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리며 비니가 중얼거렸다. 갈색 꽃무늬…… 상태로 봐선 찢어진 지 얼마 안됐다.
“그건 그렇고, 분위기가 왜 이래?”
골목 안을 휘감고 있는 바람은 그저 차가운 겨울바람이 아니라 음산하고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마치 어떤 사나운 짐승의 소굴에 한발 들여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쯤에서 아무 핑계나 대고 당장이라도 돌아 나가고 싶은데, 비니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저녁때가 돼서 그런가…… 되게 춥네.”
저만치 앞쪽에 뻣뻣하게 서 있는 터너의 뒷모습이 보였다.
“햄버거를 괜히 먹었나 봐.”
터너와 나란히 서 있던 에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돌아섰다. 시체는 무너진 잡동사니 위에 얹혀 있었다. 부러진 관절이 기묘하게 뒤틀린 데다 하얗게 얼어붙어서 마치 망가진 마네킹 같은 몰골이었다. 참혹하다 못해 기괴해 보일 정도였고, 역시…… 여자였다. 시체를 보는 순간 비니도 어, 하는 작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희생자는 큰길에서 누군가와 마주쳤고 이 골목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사력을 다해 달렸지만 결국 습격당했고,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회색 돌 벽과 바닥 여기저기에 들이부은 듯 튀어 있는 핏자국은 채 마르기도 전에 얼어붙어서 아직 붉은 빛이 선명했다. 무너진 쓰레기 더미에 어깨 위쪽이 파묻혀 있는데다 몸이 심하게 꺾여 있어서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가슴 바로 아래부터 골반 뼈까지 허리 절반이 없었다. 마치 엄청나게 큰 입을 가진 맹수에게 한 입 먹힌 것처럼…… 어쩌면 산 채로.
“니네들 생각은 어때?”
터너의 음성이 꼭 신음하는 소리 같았다. 당장은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그냥…….
“사람이 한 짓은 아닌 것 같은데…….”
“반가운 소식이네. 그런데…… 아니면 뭐?”
“이건 꼭…….”
“뭐?”
고개를 세게 흔들어서 문득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그동안 시체는 볼 만큼 봤다. 처참하기로 따지자면 소총 사격에 산 사람 몸이 두 동강 나는 광경도 상당히 그랬지만 이건 뭔가 달랐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심장을 짓누르는 이 기운이 대체 뭘까?
터너가 정복 경관들에게 현장 정리를 지시하고 무전기로 기록 담당을 불렀다.
“큰길에서 발견된 시체도 이랬어?”
“비슷해. 여자 쪽은…….”
비니가 사방에 튄 핏자국을 살펴보다가 에쉬의 대답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피살자가 몇 명이나 되는데?”
“저쪽에선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남자는 목을 물렸고, 여자는 거의 두 동강이 났어. 육안으론 어딜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엉망이야. 어쨌든, 이 여자가 세 번째 희생자야.”
“이건 뭐지?”
비니가 바닥에서 뭔가를 찾아냈다. 긁힌 자국이었다. 어떤 날카로운 것에 얼음이 깊이 파이고 길게 긁혀 있었다. 살펴보니 주변에 그 비슷한 자국이 꽤 있었다. 종이 상자, 나무 조각, 심지어는 돌 벽에까지 뭔가로 긁어 놓은 흔적이 뚜렷했다.
“저쪽 현장에도 이런 흔적이 있었어. 자동차 옆구리도 반은 뜯겨져 나갔고 아스팔트까지 쥐어뜯은 것처럼 돼 있더라고. 이게 대체 뭐 같아?”
터너의 질문에 비니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갈고리? 정육점 같은 데서 쓰는 거 있잖아.”
“아니면 발톱이거나…….”
내가 끼어들자 에쉬가 심드렁하게 고개를 저었다.
“동물원에서 사자라도 탈출했을까 봐?”
“사자는 아니야. 간격으로 봐선 최소한 발 크기만 50센티가 넘는데다 발가락도 세 개뿐이니까…….”
내 의견에 대한 에쉬와 터너의 반응은 극히 부정적이었다.
“발가락 세 개, 갈고리 같은 발톱…….”
“사람 허리를 한 입에 물어뜯을 만큼 커다란 주둥이에, 힘도 엄청났을 거고…….”
에쉬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뭔지 알겠다.”
“뭔데?”
“벨로시랩터.”
내 말이 말 같지 않으면 그냥 그렇다고 하면 되지, 저렇게까지 비웃을 건 또 뭐냐? 무안해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터너가 뭔가에 찍혀서 아예 떨어져나가버린 벽돌 조각을 집어 올리며 조용히 만담을 마무리지었다.
“자연사 박물관에 연락해볼까? 혹시 알아? 도망친 랩터 뼈다귀가 있을지?”
보통 때 같았으면 재치 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많이 웃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터너도 웃자고 그런 얘기 한 건 아니었다. 비니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특수 제작한 흉기일 거야. 이 동네에 미친놈이 얼마나 많은지는 너도 알 만큼 알잖아?”
미울 때도 많지만 이럴 때 편들어주는 건 역시 파트너뿐이다. 살인범이 갈고리 같은 발톱을 가진 50센티 미터짜리 발과 엘리게이터 악어처럼 커다란 입을 가진 엄청나게 덩치 큰 괴물 아니면 초인적인 힘과 특수 제작한 갈고리를 휘둘러대는 살인마, 둘 중 하나라면…… 그래도 이 도시에선 후자일 확률이 조금 더 높다.
사실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건 현장에서 나온 단서를 토대로 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비니가 골목 안쪽에서 뭔가를 더 찾아내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터너와 에쉬를 불러들였다.
“그렇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발자국처럼 보이지 않아?”
흔히 볼 수 있는 발자국은 아니었다. 하지만 희생자의 피에 젖어서 마치 도장처럼 바닥에 꾹 찍혀 있는 흔적은 어떤 짐승의 발자국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발자국과 핏자국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골목의 갈림길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한참 안쪽까지 뒤져봐도 흔적을 찾지 못한 비니가 돌아와서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면 날개도 달렸을지 몰라.”
이제 잡아보기 전엔 뭐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건 담당인 터너와 에쉬는 얼굴이 완전히 흙빛이었다.
“씨바…… 이건 또 뭐야?”
기록 담당인 제시가 현장을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시는 꼼꼼하게 현장 사진도 잘 찍고 작은 흔적도 놓치는 법 없이 잡아내고, 욕도 걸쭉하게 잘하는 유능한 수사관인데 어쩐 일인지 지금은 현장에서 15미터나 뒤로 물러서서 도무지 다가오려고 하질 않았다.
“니가 니 일을 해야 우리도 치울 거 치우고 우리 일을 하지!”
잘못하면 날개 달린 벨로시랩터를 추적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신경이 있는 대로 곤두선 터너가 짜증을 냈다. 하지만 제시는 들은 척도 않고 카메라를 터너에게 냅다 던졌다. 꽤 멀리서 날아온 묵직한 카메라를 받아 안느라 터너가 얼음 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나 지금 임신 4개월이야. 요즘은 음악도 빌어먹을 모짜르트만 듣는데 나더러 저런 꼴을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으라고? 이 천하에 몹쓸 짭새놈들아!”
“임신했어?”
터너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면서 제시를 흘겼다. 임산부한테 보여줄 만한 광경은 아니다. 사실 험한 꼴 볼 만큼 봐온 일선 경찰한테도 만만치 않게 엽기적인 상황이었다.
“초장부터 이런 꼴 보여주면 애가 세상에 나올 맘이 생기겠어?”
“전혀 몰랐어. 배도 안 나왔잖아!”
“이제 알았으면 그 카메라 갖고 니네들이 알아서 일 좀 해.”
“애를 가졌으면 휴직계 내고 집에 들어앉아서 뜨개질이나 하지, 임산부가 이런 덴 왜 돌아다녀?”
터너가 투덜거리며 카메라를 에쉬에게 넘겼다. 에쉬가 군말 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 터질 줄 알았냐? 나도 미쳤지. 이런 엿 같은 세상에서 애 낳을 궁리를 하다니…… 에쉬, 정면 사진만 죽어라고 찍지 말고, 어디 상자라도 밟고 올라서서 전신을 잡아!”
현장에서 시체를 치우고 뒷정리하고 나면 참고할 건 현장사진뿐이었다. 현장사진에서 뭔가 단서를 잡아서 사건을 해결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에쉬가 제시에게서 잔소리를 들어가며 10여 분에 걸쳐 수백 장의 사진을 찍은 다음에야 터너와 내가 희생자의 얼굴과 신체 일부를 짓누르고 있는 잡동사니를 치울 수 있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과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긁힌 팔,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 같은 것이 드러났다. 아마 최후의 순간에 그걸로 얼굴이라도 가렸는지 가방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내용물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깨진 손거울, 피에 젖은 수첩, 립스틱, 지갑…… 신분증, 카드, 현금 모두 그대로였다.
“지갑은 건드리지도 않았어.”
“신원 확인은 간단하겠네.”
지갑을 받아 찬찬히 살펴보던 터너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망할…….”
“왜 그래?”
“이 여자도 임신 중이었나 봐.”
터너가 지갑에서 발견한 건 산부인과 진료 카드였다. 에쉬가 침울한 표정으로 사진 찍던 손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뼈 속까지 추워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이 여자도……라니?”
킹 거리는 사무실 건물이 밀집해 있는 도심이었다. 이런 지역은 출퇴근 시간엔 차도, 사람도 거리가 미어터질 정도로 붐볐다. 마치 컨베어 벨트에 올라타기라도 한 것처럼 인파에 떠밀려서 출근하고 퇴근 후에 다시 그런 식으로 집에 돌아간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어떤 것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게다가 반쯤 부서진 채 길가에 방치된 자동차 같은 건 갈 길 바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엔 너무 흔한 물건이었다.
첫 번째 시체는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 버려진 차를 견인 조치하려던 주차 단속원에 의해 발견되었다. 뭔가에 심하게 물려서 목이 반쯤 떨어져 나간 남자의 시체는 운전석 발치에 구겨져 있었고, 차 문을 열자 바닥에 고여 있던 피가 빗물처럼 아스팔트 바닥을 적셨다.
살인사건을 접수하고 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인근 건물 근처에 조성되어 있던 정원의 작은 수풀에서 두 번째 시체를 찾아냈다. 터너와 에쉬가 경찰서에서 달려나가던 그때쯤이었다.
희생자는 여자였는데 신원조회를 해보고서야 임신 7개월째로 접어드는 임산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
골목 입구에 접근 저지선이 둘러쳐지고 경관들이 행인과 몰려온 사건기자들을 통제하는 동안 나는 흩어져 있는 상자를 깔고 앉았다. 터너처럼 속이 뒤집히는 건 아니지만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심한 현기증 때문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임신한 여자들만 해치고 다니는 미치광이라…… 오늘 내일 중으로 해결 못하면 큰일 나겠는데?”
희생자의 소지품을 비닐봉지에 넣어 정리하면서 에쉬가 중얼거렸다. 비니는 제시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서 범인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곧 날이 저물 거고 날이 저물면 골목은 칠흑 같을 거다. 도착한 응급 요원들이 슬슬 시체를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냥 해친 게 아니야.”
“잡아 먹혔다고?”
에쉬가 억지로 웃었다.
“아까 그 랩터 얘긴…… 그냥 농담이었어.”
“‘오컴’이 뭔지 알아?”
에쉬는 전혀…… 라면서 고개를 저었고 대신 등 뒤에서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니가 오컴을 어떻게 알아?”
발렌타인이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희생자의 피 묻은 구두를 주워 담던 터너가 벌떡 일어섰다. 터너를 노려보는 발렌타인의 시선은 유감 그 자체였다.
그제야 무슨 일인지 깨달은 터너가 주머니에서 수갑 열쇠를 꺼냈다. 손목에서 수갑이 풀려 나간 후에야 발렌타인이 막 바디 백에 담겨진 시체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바쁜 사람 손목에 수갑 채워서 30분도 넘게 길바닥에 세워 놓은 인권 침해에 대해서 좀 따질까 했는데…… 불쌍해서 그것도 못하겠군. 오컴이라니…….”
“무슨 소리야?”
터너가 흥분했다. 내가 뭐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발렌타인이 한마디 하는 건 그럴 듯하게 들렸나 보다. 내가 중간에 막아서지 않았으면 발렌타인의 멱살이라도 틀어잡을 기세였다.
“진정해, 터너. 이 자식은 우릴 그냥 놀리는 거야.”
“오컴 어쩌고 하잖아! 그게 대체 뭐냐고?”
“오컴이란 건 세상에 없어. 그냥…… 애들 동화책에나 나오는 괴물이야.”
“너한테 묻는 거 아니야!”
터너가 나를 확 밀치고 발렌타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시체 위에 미끄러질 뻔했다. 발렌타인이 그런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오컴이 세상에 없었다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다시 나타난 것 같군. 그리고 니가 오컴에 관한 걸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동화책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오컴’에 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목격자들의 증언』 그리고 그 못 그린 삽화를 본 것은「대마법사 사바델의 비기秘記」중 한 챕터였던 《멸종된 괴수 12종과 봉인된 괴수 7종에 관한 간단한 기록》편에서였다.
「대마법사 사바델의 비기秘記」란 거창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책이었다. 사바델이 마법사로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몰라도 작문 실력은 조잡하고 어설픈 3류 작가에 불과했고 내용이란 것도 몇 가지 마법 소개와 자신도 주워들은 단편적인 옛날 얘기, 운도 잘 안 맞는 시 몇 편이 전부였다. 어쨌든 그 책은 어렸을 때 내 교과서이기도 했고 몇 권 안 되는 외할아버지의 소장 도서였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멸종된 괴수 12종과 봉인된 괴수 7종에 관한 간단한 기록》 부분은 제목부터 그 지경이라서 설명과 묘사의 간단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오컴에 관한 설명도 조잡한 삽화 아래 불과 대여섯 줄뿐이었고 그다지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차갑고 음습한 골목 깊은 곳에서 반쯤 뜯어 먹힌 여자의 시체를 처음 본 순간 오컴이 생각났다.
〔네 발 짐승. 세 개의 발가락 끝에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어서 그 발에 한번 채이는 것만으로도 인마가 목숨을 잃는다. 주로 밤에 활동하고 동작이 민첩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사냥이 불가능하다.
오컴이 나타나면 문을 닫아걸고 그 저주받은 짐승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라. 임신한 부녀자를 집 밖에 내보내지 말라. 짐승이 노리는 것은 그 복중의 태아이기 때문이다.〕
대강 설명을 듣고 난 후 에쉬와 터너의 표정이 볼 만했다.
“진짜 골 때린다.”
“니가 이렇게 깨는 놈이란 거, 왜 진작 몰랐지?”
반응이 이럴 거 같아서 처음부터 말 안 하려고 했다.
“오컴이 뭐냐고 물어본 건 니네들이잖아!”
터너는 더 이상 한 마디도 듣기 싫은 듯 손을 내저었다.
“됐으니까 비니 데리고 꺼져. 너한테서 무슨 단서를 기대한 내가 돈 놈이지.”
사실 이 사건엔 단서가 필요 없다. 범인의 흔적은 현장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리고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어떤 지능적인 시도도 없었다. 이건 단순한 습격사건이었다. 범인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놈은 그저 사냥을 한 것뿐이었다. 돌 벽에 뚜렷이 찍혀 있는 핏자국과 발톱 자국을 들여다보던 발렌타인이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봐, 날이 저물고 있어.”
“나도 알아! 그래서 뭐?”
터너가 벌컥 짜증을 냈다.
“이렇게 서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뜻이야. 오컴은 밤에 움직여.”
발렌타인의 따뜻한 충고에 터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이봐.”
“응?”
“난 오늘 어떤 미치광이가 잡아 뜯어 놓은 시체를 세 구나 봤어. 속도 안 좋고, 기분도 말 못하게 더럽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재미있는 옛날 얘기는 니네들끼리 하고 내 앞에선 좀 꺼져줘!”
터너는 진짜 열 받았다. 한마디라도 더 붙였다간 누구든 한대 후려갈길 기세였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심기 불편한 터너보다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하늘과 왠지 음산한 바람이 더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충고를 하나 더 해줄 테니까 잘 들어.”
“…….”
“여기 있는 누구한테도 꺼지라고 하지 마. 사람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대충 좀 해! 우리더러 지금 마늘 목걸이에 십자가 들고 괴물 사냥이라도 하란 거야?”
에쉬가 터너를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두 사람을 조용히 비웃었다.
“내일 아침에 물려 죽은 임산부 시체가 길바닥에 열 구쯤 널려 있는 걸 보면 무슨 짓이라도 하고 싶어질 걸?”
그때 골목 안쪽에서 박스 무너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시와 골목을 수색하던 비니가 돌아오는 소리였다. 어째서 비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리 없이 다니질 못하는 걸까? 안 그래도 기분 이상한데 갑작스런 소음이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안쪽엔 별 거 없어. 수색을 계속할 거면 라이트가 있어야 할 거야. 그리고…….”
우리가 모두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비니가 멍한 얼굴로 멈춰 섰다.
“왜 그래?”
“제시 어디 있어?”
내 물음에 비니가 손가락으로 이제 완전히 컴컴한 골목 깊은 곳을 가리켰다.
“왜? 아직 안 왔어? 저 끝에서 오른쪽을 확인해 본다고…….”
비니를 밀치고 골목 안쪽으로 가장 먼저 달려 들어간 건 터너였다. 그 뒤를 내가 쫓아갔고, 에쉬가 발렌타인을 잡아끌고 따라붙었다. 뒤쪽에서 우르르…… 하고 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비니도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골목은 어둡고 복잡했다.
“제시!”
터너가 외쳤다. 대답 대신 어디선가 총성이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순간,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어떤 기묘한 울음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심장이 덜컥 멎는 것 같았다. 터너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
“제시! 어디야? 빌어먹을!! 어디 있는 거야?”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골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다보니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터너와 내가 갈림길에서 일단 반대쪽으로 흩어지려고 하는데 발렌타인이 터너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쪽이야.”
코너를 몇 번이나 돌고 돌아서 방향 감각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방향이고 뭐고 따질 것도 없이 그냥 발렌타인을 쫓아가기 급급했다. 이제 막 또 다른 코너로 접어든 발렌타인이 걸음을 멈췄다. 그때 지척에서 다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우리 쪽으로 날아온 총알은 천행으로 빗나가서 벽에 튕겼다.
“어디다 갈겨대는 거야? 정신 나갔어?”
터너가 발렌타인을 밀치고 나서며 버럭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제시는 혼이 완전히 나간 얼굴이었다. 에쉬가 나서서 제시의 떨리는 손에서 총을 받아쥐고 제시를 끌어안았다. 제시가 그제야 꽉 막혀 있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뭐였어?”
터너가 다그쳐 물었다. 제시가 경황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억누르려고 애쓰면서 제시가 간신히 대답했다.
“뭔지 못 봤어?”
“봤는데…… 모르겠어.”
제시가 결국 에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제시의 숨넘어갈 것 같은 울음소리가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골목길의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모두가 당황했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살인범과 마주치는 게 기분 좋은 일은 분명 아니겠지만, 그뿐이었다면 제시가 이럴 리 없었다. 그녀는 현장을 겪을 만큼 겪은 베테랑 경관이었다. 터너가 제시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느 쪽으로 갔어?”
에쉬가 터너를 거칠게 밀치고 제시를 안아 들었다.
“우선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안 서는지 터너가 발렌타인을 슬쩍 쳐다봤다. 사방에 내린 어둠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시하던 발렌타인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 같이 빠져 나가. 흩어지면 다 죽어. 몰려다닌다고 산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다 놈을 놓치면?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놈을 잡아야 돼!”
“그럴 필요 없어. 여자를 데리고 있으면 놈이 우릴 찾을 테니까.”
그 말에 제시가 정신이 번쩍 나는지 에쉬를 뿌리치고 자기 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그리곤 에쉬 허리춤에서 자기 총을 찾아 들었다.
“그게…… 날 따라올 거란 거야?”
제시가 발렌타인에게 사납게 따졌다. 발렌타인이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제시를 더 이상 놀라게 하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제시한테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 우리 중에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건 발렌타인뿐이었다.
“왜 말을 못해? 미녀만 노리는 야수라도 나타난 거야?”
발렌타인이 제시의 농담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뿐이었다. 제시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다가서던 발렌타인의 얼굴에서 갑자기 여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발렌타인이 갑자기 제시의 손목을 틀어쥐고는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골목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까만 벨벳처럼 짙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뭔가를 발견한 건 비니였다.
“뭐야? 저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싹한 공포감이 온몸을 훑고 내려갔다. 짐승은 한발 한발 다가오는데 우리는 한 걸음 물러서지도 못하고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대체 저게 뭘까?
“저게 오컴이야?”
터너가 허리춤을 더듬어서 총을 꺼내 들었다. 터너의 목은 어느새 잔뜩 잠겨 있었다.
“그런가 봐. 잘은 모르겠지만…….”
저게 진짜 오컴이라면 사바델이란 작자는 순 사기꾼이다. 책 속의 오컴은 어금니가 날카로운 들소 같은 거였다. 엉성하고 조악하게 그려진 그 못생긴 짐승은 지금 현재 약 30미터 전방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저 괴물하곤 털끝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
마치…… 사납게 빛나는 황금색 얼굴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더운 김을 연기처럼 내뿜고 있는 펑퍼짐한 코, 면도칼 같은 어금니가 비죽 튀어나와 있는 커다란 주둥이, 마치 마녀의 손톱처럼 길게 휘어진 발톱…… 그 어떤 것도 익히 보아왔던 맹수의 그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것은 짐승의 눈이었다. 그것은 영락없는 사람의 눈…… 지극히 아름다운 인간의 눈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에쉬가 비실비실 뒷걸음을 치다 털썩 주저앉았다. 어디 걸려서 넘어진 게 아니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풀에 주저앉은 거였다. 비니가 에쉬의 어깨 죽지를 잡아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짐승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음산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굴만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 것은 짐승의 나머지 몸체가 주변에 깔린 어둠과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색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라 어둠 그 자체 같아서 짐승의 크기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골목을 가득 채운 어둠이 모두 다 놈의 거대한 몸뚱이 같았다. 놈이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감싸고 뒷덜미까지 이어지는 풍성한 갈기에선 금분이라도 한 줌씩 떨어져 내릴 것처럼 빛이 번쩍였다.
“이, 이걸로 잡을 수 있을까?”
에쉬가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떨면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실은 나도 그게 의심스러웠다. 두려운 건 놈의 괴상한 생김새가 아니라 열기처럼 확 끼쳐오는 엄청난 기운이었다. 놈의 힘이 엄청날 거라는 건 놈에게 당한 시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맞닥뜨린 지금 느끼는 위협은 막연히 상상했던 그런 게 아니었다. 믿을 거라곤 손에 쥔 총 한 자루뿐인데 이게 지금은 아무 짝에도 못 써먹을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놈이 접근을 멈췄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다.
잠시 서서 우리를 응시하던 괴물이 갑자기 앞발로 땅을 차고 튀어 올랐다. 그 거대한 덩치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도약하는가 싶더니, 건물 벽을 타고 우리 머리 위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놈은 우리를 상대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놈이 지나가는 방향을 따라 총을 갈겨댄 건 터너였다. 그와 거의 동시에 모두가 놈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눈을 감고 쏴도 그 정도 총알 세례면 최소한 열 발은 제대로 맞았을 터였다.
건물 벽을 타고 3, 4미터 높이를 날듯이 질주하던 놈이 바닥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 무시무시한 황금빛 얼굴이 뒤쪽을 힐끔 돌아봤다. 급소를 제대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 쓰러질 테고, 섣불리 변죽만 울린 거면 돌아서서 달려들 거다. 만약 달려들면 이대로 서서 총질이나 계속해야 할지, 뒤돌아서서 냅다 뛰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예상이 전부 빗나가고 말았다.
1, 2초 정도 뒤를 돌아보며 기분 나쁜 시선을 보내던 놈은 그대로 발렌타인과 제시가 사라진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저 망할 괴물은 우리한테는 관심도 없었다.
“저거, 왜 죽지도 않아?”
터너가 탄창을 갈아 끼우며 나한테 따졌다. 오컴이 총에 맞고도 죽지 않는 게 마치 내 탓이라도 되는 것처럼…….
“몰라…….”
“대체 니가 알고 있는 게 뭐야?”
“내가 오컴 전문가라도 되는 줄 알아? 나도 지금 처음 봤어!”
우리도 놈을 뒤쫓았다. 급한 대로 에쉬가 휴대폰으로 타격대라도 부르려고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화도 먹통이었다.
“놈은 총 소리엔 놀랐어. 그래서 제시가 총을 쏘자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거야.”
애쉬가 애꿎은 전화기를 벽에 내던져 박살 내면서 나름대로 오컴의 습성을 추리했다. 그럴듯한지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총에 맞아도 안 죽는다는 걸 알고 말이지.”
킹 거리는 번듯한 번화가였다. 뒷골목도 복잡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쪽으로 서너 블록만 건너가면 델 파소였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띵했다. 설마 발렌타인이 제시를 끌고 그리로 들어가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까 들어왔던 큰길하곤 방향이 영 틀렸다. 제일 선두에서 달리던 터너가 멈칫했다. 좁은 차도가 교차하는 4거리였다.
“망할…….”
어두운 밤에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 추적이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선 사람도 놓치기 십상인데 하물며 펄펄 날아다니는 괴물을 뒤쫓는 일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어쨌든 놈을 이렇게 놓칠 순 없었다. 놈의 정체가 뭐든 간에 우리 눈앞에서 제시를 사냥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비니가 좀 떨어진 귀퉁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사람이었다. 노인이고, 혼비백산한 얼굴이었다. 노인이 뭘 봤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우리랑 눈이 마주치자 노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괴물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왜 안 좋은 예감은 노상 맞아 떨어지는 누가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다.
“니네들 델 파소에서 길 잃어본 적 있어?”
미로 공포증이 있는 비니는 그저 암울한 얼굴이었고, 에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 어렸을 때 이 동네에서 몇 년 살았었어.”
“그래?”
잘 됐다. 그럼…….
“니가 앞장 서.”
내가 등을 떠다밀자 에쉬가 원망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사 가는 그날까지 하루도 길을 안 잃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델 파소로 뛰어들어서 사행천처럼 굽은 골목을 따라 갈림길을 3개도 미처 지나기 전에 방향에 대한 모든 확신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가 의지할 거라곤 길 잃은 강아지 찾는데 초능력에 가까운 실력을 갖고 있는 비니의 본능뿐이었다. 하지만 현재 위치가 델 파소인 데다 비니의 형편없는 방향감각을 생각하면 상황이 최악이었다. 지금으로선 이 최악의 상황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비니가 다섯 갈래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동물을 추적하는 초능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느 집 현관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할머니가 황망한 얼굴로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초저녁이라서 골목에 사람이 좀 있었고 오컴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체로 반응이 그랬다.
“진짜! 뭐 이딴 개 같은 동네가 다 있어?”
방사형으로 얽힌 거미줄 같은 샛길을 돌고 돌다가 지친 터너가 드디어 바닥에 떨어진 깡통을 발로 걷어차며 버럭 화를 냈다.
우리는 보통 관할 구역 지리는 손금 보듯 훤히 안다. 잡범들 쫓아다니다 보면 큰길 보다 샛길 지리에 더 밝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델 파소는 우리 관할도 아닌데다 관할 경찰도 약도를 그려 갖고 다녀야 할 정도로 심란한 미로였다.
“미로에 갇힌 괴수를 추적하다니, 본래 경찰이 이런 일까지 하는 거였나?”
비니가 뭔가 흔적을 찾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예정에 없던 초저녁 마라톤이 체력의 한계를 넘었는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본래는 오지랖 넓은 영웅들의 취미 생활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미친 애들이 없잖아.”
먼 곳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누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괴물이 나왔다는 신고에 순순히 출동을 하다니, 경찰도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래 봐야…….
“동부 지청에서 제일 얼빵한 신참들일 거야.”
내 의견에 에쉬가 동감의 뜻을 표했다.
“날 새기 전에 신고자 집이나 찾으면 다행이지.”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콩 볶는 것 같은 거친 소음이 들려왔다. 총 소리였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거의 10분이나 헤매다가 오컴, 아니 오컴이 휩쓸고 간 자리를 간신히 찾았다. 이러다 놈을 찾기 전에 심장마비로 쓰러지겠다. 오컴이 지나는 길에 이 동네에서는 흔하디흔한 양아치 조직을 덮친 모양이었다. 바닥에 애 하나가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져 있고 양 옆에 두 명이 어떻게든 피를 멎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나머지 한 놈은 벽에 붙어선 채 덜덜 떨다가 우리를 보고는 경황없이 총을 겨눴다. 하지만 사람인 걸 깨닫고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주저앉아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내 평생에 뭔 일 터지고 나서 짭새가 이렇게 빨리 뜨는 건 첨 봤어.”
쓰러진 애한테 달라붙어 있던 두 놈 중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원망이 가득한 눈길이었다. 쓰러진 애는 안됐지만 가망이 없어 보였다. 물어뜯긴 것 같진 않았지만 뭔가 날카로운 것에 어깨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긁혔고 내장이 쏟아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상처가 깊고 컸다. 오컴의 발톱에 당한 게 틀림없었다.
오늘은 어디서 한 건 터뜨릴까 궁리 중이던 살벌한 애들 틈을 비집고 웬 남자가 기진맥진한 여자를 막무가내로 끌고 지나간 건 10분쯤 전이었고…… 불과 2, 3분 후에 뒤쫓아온 괴물이 아이들을 덮쳤다. 사실, 덮쳤다기보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애를 그냥 밟고 지나갔다는 게 맞는 표현이었다.
터너가 에쉬를 현장에 남기기로 결정했다. 발렌타인이 절대 흩어지지 말라고 당부 했지만 애들만 남겨 놓고 갈 순 없었다. 엠블런스도 불러야 되고 지원도 절실했다.
“명심해! 에쉬, 괴물이란 소린 입 벙긋도 하지 말고…….”
경찰서엔 괴물이나 귀신을 봤다며 숨넘어갈 듯 횡설수설하는 전화가 꽤 자주 걸려오는 편이었다. 신고자가 상당히 진지한 경우도 있고 누가 들어도 장난치는 기색이 빤한 경우도 있는데, 어떤 경우라도 경찰이 귀신을 잡으려고 출동하는 일은 없다. 여긴 우리 구역도 아니고…… 기를 쓰고 쫓아다니고는 있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할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킹 7번가 살인사건 용의자 추적 중이라고 해. 완전 무장한 흉악범이니까…….”
“잔소리 그만 해! 내가 애야?”
부상당한 애가 거칠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결국 숨이 떨어지는 꼴을 지켜보던 애쉬가 터너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래도 터너는 마음이 안 놓이는지 돌아서기 전에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타격대 있는 대로 긁어서 보내라고 해!”
비니가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젠 여러 갈래 좁은 길과 마주쳐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놈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처음 오컴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한기가 바람과 함께 온몸에 휘감겼다. 어디선가 또 총성이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터너가 총성을 구분 못해서 묻는 건 아니었다. 좀 전에 들려온 건 권총 소리가 아니었다.
“자동소총 같은데?”
“언제부터 이 가난한 동네 조무래기들이 스콜피오 같은 진짜 무기를 갖고 놀게 된 거야?”
터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타격대가 온 건지도 모르잖아.”
비니가 상황을 마냥 좋게만 해석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에쉬랑 헤어진 지 5분도 안 지났다. 경찰 타격대는 절대 이렇게 빨리 현장에 도착 못한다. 그랬으면 쿠간이 오늘날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발소리…… 여러 명이 무리지어 다닐 때 나는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들려왔다. 터너가 비니의 뒷덜미를 틀어쥐고 맞은편 좁은 샛길로 급히 몸을 숨겼다.
바로 2, 3미터 앞의 골목길을 정체불명의 무장 병력이 빠른 속도로 통과했다. 대여섯 명이 한 조를 이뤄서 골목을 수색 중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고 싶어도 저자들은 동부 지청에서 출동한 경찰 타격대로 보이지 않았다. 경찰 마크도 없고, 헬멧에 로고도 없고…… 무장의 수준도 경찰 타격대를 훨씬 넘어섰다. 오컴의 가죽만큼이나 시커멓고 음산한 그들의 제복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쟤네들은 또 뭐야?”
놈들이 지나가고 발소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저편 골목에서 터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문제야? 어차피 우린 지원이 필요했잖아.”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려는 비니의 태도는 좋다. 하지만 놈들이 누군지 알고서도 저렇게 속 편한 소릴 할 수 있을까?
“저 자식들이 뭘 갖고 다니는지 넌 보지도 못했어?”
“봤어. 반자동 소총, 로켓 포, 총은 총인데 한 번도 못 본 거…….”
비니도 제대로 보기는 본 모양인데, 오컴을 우리 셋이 상대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는 희망에 들떠서 정상적인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무장 괴한들이 밤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터너가 고민에 빠졌다. 어차피 오컴을 우리 손으로 처치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 손을 좀 빌리는 게 나쁠 건 없었다. 하지만 결과를 보기 전엔 좋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닌자? 배트맨? 뭐가 됐든지 간에 이름표도 안 단 놈들이 저렇게 중무장을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 반갑지 않아.”
“불러서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네?”
비니가 아직껏 뒷덜미를 틀어잡고 있는 터너의 손을 뿌리치면서 투덜거렸다.
“물어볼 필요 없어. 뭐하는 애들인지 내가 알아.”
터너가 날카로운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이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에 관해 터너에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엄청난 총성과 폭발음이 거미줄 같은 미로를 뒤흔들었다. 불과 한두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곧이어 들려온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괴성은 틀림없이 오컴의 것이었다.
일대 격전의 현장을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진동하는 화약 냄새와 사람들의 비명소리만 쫓아가도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중화기에 박살난 짐승의 시체를 기대하고 달려간 우리 앞에 펼쳐진 참상은 끔찍하고도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망할…….”
터너와 비니가 욕도 길게 못하고 멍한 얼굴로 현장 꼬락서니를 쳐다봤다. 나야 기사단의 일솜씨를 일전에 본 적이 있었던 터라 놀라움이 두 사람 같지는 않았다. 놈들이 어디 소속이고 어떤 훈련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동 수칙에 민간인 보호 조항은 들어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기사단의 총공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골목이 여섯 갈래로 갈라지는 작은 공터가 지옥도의 한 장면이었다. 공터 쪽으로 난 창이란 창은 모조리 박살이 났고 총격의 집중 세례를 받은 곳은 사형장 뒷담만큼이나 흉악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로켓포 세례를 정통으로 받은 4층짜리 조잡한 아파트는 건물 가운데가 커다란 헤머에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뚫려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은 지 오래돼서 허물어질 듯 위태로운데 폭발 여파로 화마에까지 휩싸였으니, 이 불이 사방으로 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래놓고도 오컴의 역습을 당했는지 바닥엔 짓찢어진 기사단의 시체가 대여섯 구나 널려 있었다.
100여 명이 모여서 한창 파티 중이던 저택 중앙 홀을 헬기로 들이박을 때부터 사람 목숨을 우습게 아는 놈들인 건 알아봤다. 그러니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로켓포를 갈겨댈 수 있는 거겠지만…… 이젠 놈들이 오컴을 잡아준대도 고맙지 않다. 해 놓은 꼴을 보니 오컴 한 마리 잡으려다 동네 사람들을 다 잡게 생겼다.
아직은 불길이 크지 않았다. 놈들이 벌여 놓은 일이 아무리 기가 막혀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순 없어서 일단 불이 난 건물 안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조준도 제대로 못하고 갈겼는지 건물 1층과 2층 사이가 다 무너졌는데…… 잔해에 깔린 시체만 해도 세 구는 되는 것 같았다.
이런 빈민가 아파트는 인구 밀도가 높기 마련이었다. 셋도 적은 건 아니지만 그나마 아직 귀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피해가 이 정도인 것 같았다. 비니가 건물 위층으로 올라가서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던 애들 두 명을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나왔다. 나와 보니…….
“진짜 미치겠네.”
터너가 바닥에 주저앉아 굴러다니는 기사단의 무기와 총알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좀 봐.”
터너가 머신 건에서 미처 발사되지 않은 총알 하나를 꺼내서 내 코앞에 들이밀었다. 길이가 어른 가운데손가락만한 철갑탄이었다. 어쩐지 머신 건의 크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별로 크지 않네. 미사일 치곤…….”
아파치 헬기 같은 데 붙어 있는 걸 뜯어낸 건지, 아니면 본 따서 특수제작을 한 건지…… 기사단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터너의 시선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망할 자식들…….”
인구 밀집 지역 한복판에서 철갑탄 갈기고, 로켓포 날리고…… 그러고도 이 꼴이라니. 데리고 나온 애들 두 명을 동네 아줌마한테 맡기고 다가오다가 내 손에 들린 미사일만한 총알을 본 비니의 얼굴이 터너만큼이나 심란해졌다.
“이런 걸 갖고도 속수무책이면…… 우리 이제 어떡해?”
엽기 살인마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한 단순한 임무가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하고 기상천외해지더니, 결국은 시가지 테러 사건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동네 사람들이 있는 대로 몰려 나와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구경하느라 좁은 골목이 미어질 지경이었다. 기사단의 시체를 보고 기함을 해서 돌아서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 작은 광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 괴물이 다시 이쪽으로 들이닥치고 로켓포와 철갑탄으로 무장한 미친놈들이 쫓아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기도 무서웠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신속히 대피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 사람들한테 오컴과 미친 기사단에 대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우리도 그 둘에 대해 아는 게 얼마 없는데다 이런저런 사정 얘기 길게 할 상황도 아니었다. 제시도 찾아야 되는데…… 그때 비니가 한 걸음 나서서 두 손을 스피커처럼 모아서 동네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건물이 폭발할지도 몰라요!!”
비니의 거짓말이 꽤 그럴 듯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평생 속고만 살았나…… 기껏 술수가 통하질 않자 머쓱해진 비니가 경찰배지를 꺼내 들었다.
“무슨 구경났어요? 위험하니까 큰길로 나가라고요!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불이 번질 수도 있으니까…….”
비니가 목이 터지게 외쳐도 사람들은 그저 자기들끼리 무슨 일이냐고 수군거릴 뿐이었다. 반응이 신통치 않자 비니가 나한테 강력한 파트너쉽을 요구했다.
“너도 뭐라고 얘기 좀 해봐!”
무슨 얘기? 난 연설 같은 건 별로 소질이 없는데…….
“혹시 이 중에 임신하신 분 계세요?”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순 입을 다물고 뜨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터너가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소릴 했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낫네. 일단 시선은 집중 시켰잖아.”
비니가 격려 차원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난 제시나 찾아볼래.”
그때 터너가 뭔가를 발견했다. 말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어두운 골목 입구로 다가가던 터너가 걸음을 멈췄다. 너무 보고 싶다 보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어둑한 골목 안쪽에서 기진맥진한 채 발렌타인에게 끌려오고 있는 제시의 모습을 본 순간 나도 말문이 콱 막히고 말았다.
델 파소의 거미줄 같은 미로를 헤매는 내내 어쩌면 두 사람이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얼마나 지쳤는지 발렌타인과 제시는 거의 실신 지경이었다. 온몸이 땀에 푹 젖은 제시가 터너에게 쓰러질 듯 매달렸다.
“빌어먹을…… 이러다 애 떨어지겠어…….”
제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맨바닥에 아예 길게 누워버렸다. 영문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발렌타인에게 끌려다닌 제시는 우리를 보자 긴장이 다 풀려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달랐다.
“지금 사람들 모아 놓고 뭐 하는 거야? 반상회?”
“우리가 불러 모은 거 아니야. ……당신, 괜찮아?”
발렌타인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들을 빨리 어디로든 보내는 게 좋을 거야.”
우리도 그러고 싶다.
“놈도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올까?”
“먹이가 있으니 언제든 올 거야.”
발렌타인이 내 옆구리를 툭 치면서 담배 있으면 내놓으라고 눈치를 줬다. 라이터와 함께 담배를 아예 갑째로 손에 쥐어줬다.
“놈은 습성이 다른 맹수들하고 비슷해. 들판 가득 양떼가 널려 있어도 처음에 찍은 사냥감을 잊지 않거든.”
제시한테는 정말 안 좋은 소식이다. 아닌 척 하지만 그 역시 어지간히 체력이 달리는지 담배 불을 붙여 문 손이 덜덜 떨렸다. 발렌타인이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좋군, 로스킬에서 노아의 소년병들에게 강간당한 다음에 피워본 꼭 그 맛 같은데…….”
“…….”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자…….
“거긴 전쟁터였고, 별의 별 일이 많았어.”
발렌타인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괴물은 왜 죽지도 않아?”
터너가 손에 쥐고 있던 철갑탄을 내팽개치면서 낮게 소리쳤다.
“그놈도 죽어. 물론 쉽게는 안 죽지만.”
“죽여봤어?”
발렌타인이라면 뭔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내가 반색을 하자 발렌타인이 풋…… 하고 기침하듯 웃었다.
“구경은 해봤지. 아이스도 애를 많이 먹었어. 밤새 놈과 씨름하다가 동틀 무렵에야 겨우 놈의 사나운 얼굴 한복판에 헤더린을 박아 넣더군. 아주 오래 전 일이야.”
“아이스?”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막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려고 하는데 거친 총성이 델 파소의 어수선한 공기를 또 한 차례 뒤흔들었다. 우리가 뭐라던 눈 하나 까딱 않고 불구경을 하고 서 있던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우르르 골목을 빠져 나갈 정도로 소리가 컸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벼락같은 폭발음……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1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저 자식들이 원하는 게 오컴이야? 아니면 이 동네 재계발이야?”
터너는 할 수만 있으면 기사단부터 요절을 내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발렌타인이 담배꽁초를 던지고 일어서다가 한쪽 무릎을 찧으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곧 고통을 꾹 참고 다시 일어났다.
“휴식 시간 끝났어. 여자를 일으켜, 비니.”
다시 뛰어야 한다는 발렌타인의 말에 제시의 핏기 없는 얼굴이 아예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죽어도 더 이상은 못 뛰어!”
발렌타인은 제시의 호소 따윈 싹 무시하고 제시를 비니에게 넘겼다.
“방향은 아무래도 좋으니까 모퉁이마다 돌아. 절대 직선으로 길게 뛰지 말고…… 그리고 멈추지 마.”
비니가 일어나기 싫어서 엉엉 우는 제시를 억지로 잡아끌었다. 거기까진 잘 했는데 아무래도 막막한 듯 발렌타인을 돌아봤다.
“어디로…… 가야 돼?”
발렌타인이 너 좋을 대로 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행운을 빌어.”
친구 관계 이전에 비니는 괜찮은 놈이고, 경찰로써 능력도 절대로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다. 능력 대부분이 징크스에 가려서 희미한 게 탈이지만……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고약한 미로에서 괴물을 피해 도망 다니는 임무를 비니한테 맡기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비니는 가끔 경찰서 안에서도 길을 잃는다.
비니가 망설이고 망설이다 불타는 아파트 건물을 지나쳐 골목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걱정으로 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뒤늦게 나라도 쫓아갈 걸 잘못했단 후회가 들었다. 하지만 후회할 시간도 별로 길지 않았다. 좀 전에 사라졌던 바로 그 방향에서 비니와 제시가 혼비백산을 해서 뛰쳐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저만치 뒤쪽에 공중에 떠다니는 마스크 같은 오컴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필 도망친 방향이 오컴의 코앞이라니…… 일이 꼭 걱정했던 그대로였다.
발렌타인이 끙…… 하는 신음을 내뱉으며 죽은 기사 옆에 떨어져 있던 머신 건을 집어서 총알이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이런 걸로는 안 될 텐데…….”
엎친 데 덮친다고…… 완전히 기진한 제시가 불이 번져가는 골목을 다 빠져 나오지도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비니도 덩달아 바닥에 나뒹굴었다. 터너와 내가 달려들어서 급한 대로 제시를 끌어내는 동안 벼락같은 총성이 연달아 귓전을 울렸다. 발렌타인이 오컴에게 로켓탄을 갈겼던 것이다.
세계 최고의 킬러라는 명성이 헛되지 않아서 발렌타인의 총알은 모두 명중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괴물은 주춤 한 걸음 물러서서 거칠게 투레질을 해댈 뿐이었다. 장갑차 철판도 뚫을 만큼 위력적인 총격을 당하고도 끄떡 않는 걸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미친 듯 총질을 해댈 수밖에 없었던 기사단의 처지가 이해됐다.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원초적인 공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발렌타인이 총알이 다 된 머신 건을 버리고 다른 총을 찾았다. 하지만 탄창이 빈 모양이었다. 터너가 여벌의 총 한 자루를 발렌타인에게 내밀었다.
“살면서 별의 별 헛짓을 다 해봤어. 이젠 싫어.”
발렌타인이 고개를 가로 젓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제시는 니가 좀 맡아.”
터너가 제시를 나한테 밀어 보내고 총을 고쳐 잡았다. 소용없는 짓이란 걸 그도 안다. 그리고 제시도…….
“맡긴 뭘 맡아? 내가 물건이야?”
제시가 내 손을 뿌리치고 오컴 쪽으로 돌아섰다. 노여움과 안타까움 때문에 제시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쿠간 시 한 구석의 비좁은 거리가 화마와 아직은 멀찍이 떨어져 선 괴물이 뿜어내는 죽음의 공포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체념으로 가득 찼다. 비니가 아직 쓰러진 그 자리에서 비척거리고 있었다. 금방 일어나서 뒤쫓아올 줄 알았는데 넘어지면서 어딘가를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어디 가?”
터너가 내 뒤통수에 대고 소릴 질렀다.
“비니한테.”
비니가 나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봐야 불과 20여 미터 앞이었다. 몇 분 먼저 죽는 것뿐이다.
“고개 숙여.”
경고와 거의 동시에 터너와 제시가 오컴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소용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가졌던 헛된 희망이 빠르게 무너졌다. 총격에 아랑곳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오컴을 비니가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니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비니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뜨거웠다. 불길이 멀지 않은 탓일까? 불이 붙은 아파트 건물이 어지간히 타서 그 잔해가 부슬부슬 떨어져 내렸다. 어떤 것은 주저앉은 비니의 발치에까지 닿을 정도였다. 비니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제 유일한 위안은 고통의 시간이 그다지 길지는 않을 거란 짐작뿐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오컴이 바닥을 차고 공중으로 훌쩍 날았다. 흡사 수면을 스치는 제비처럼 빠르게, 동시에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