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니랑 내가 장서각 지하실을 헤매 다니던 사이에 병원에선 사망자가 두 명 늘었다. 그 둘은 비니와도 잘 아는 사이였고, 나도 몬티첼리의 저택에서 아침저녁으로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회생 여부가 불투명한 중환자가 어림잡아 스무 명 안팎이라니 사망자가 몇 명이나 더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숙부님은 좀 어떠셔?”
혼자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나온 비니에게 물었다. 뒤집어 쓴 캡과 마스크를 벗는 비니 얼굴이 시무룩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그렇게 중태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작은아버지는 괜찮아. 오후엔 일반 병실로 옮길 거래.”
“가르시아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
가르시아는 중환자 중에서도 상태가 가장 나쁜 편이었다. 질기고 악착같기가 거머리 같은 놈이라서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모양인데 의사들 사이에선 뇌사가 아니냐는 말까지 오가는 모양이었다.
“아직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 좀 두고 봐야지.”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부하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가르시아는 일단 적으로 간주된 상대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었다. 놈은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시내 조직을 통합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먹히던 협박 카드였다. 똑같이 몬티첼리에게 당했어도, 그 많은 부하들 중 가르시아에게 밟히는 건 제일 재수 옴 붙은 경우였다.
가르시아는 8년 전 자신과 정면으로 맞붙었던 쿠간 시 남부의 터줏대감 카누치 패밀리를 전멸시켜버린 것으로 특히 악명이 높았다. 놈은 쿠간 시 최고의 악당 중 한 놈이었고, 악당 중에서 쿠간 시 최고라는 건 전국 최고란 의미이기도 했다.
사건 자체는 말할 나위없는 비극이었지만 이참에 그런 놈 하나 죽어주는 건 경찰들 입장에선 일종의 횡재였다. 지난 몇 주, 몬티첼리의 저택에서 먹고 자면서 아침저녁으로 얼굴 마주치는 불상사만 없었더라면 나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가르시아가 설마 이 정도로 죽겠어? 별일 없을 거야.”
축 처진 비니 어깨를 두드리며 진심으로 위로를 건넸다. 짭새의 본분을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레빈은 총알 한발이 어깨를 관통했고, 왼쪽 다리 두 군데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분명히 중상이었지만 사망자만 백여 명에 목숨이 간당간당한 중환자가 지천으로 깔린 현재 상황에선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우리가 병실에 들어갔을 때 레빈은 진통제 기운에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얼굴이 핼쑥하니 안됐다.
“좀 어때요?”
“말짱해요. 보다시피…….”
병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막상 누워 있는 레빈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저런 사건이 많다 보니 마음이 약해진 걸까? 레빈이 나를 보고 졸린 미소를 지었다.
“살아서 다시 만나다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없군요.”
저야말로…….
“소란스런 밤이었죠?”
“아직도 귀가 멍멍할 정도로요.”
레빈이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따뜻했다. 레빈도 나도 더 이상은 할 말이 없었다. 엄청난 재난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그런 걸까? 이렇게 손만 잡고 있어도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레빈이 내게, 내가 레빈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인사를 전했다.
“니콜라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저택에서 죽었단 얘긴 없더군요.”
“나하고 같이 산으로 도망쳤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랬군요.”
레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레빈은 곧 다시 잠들었고 우리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비니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의기소침이라니…… 비니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작은아버지의 갑작스런 몰락에 충격이 컸을 터였다.
“이제 어쩌지? 일이 이렇게 되면 레빈은 진짜 입장이 곤란해져.”
비니가 레빈의 병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넌 작은아버지 걱정은 안 되니?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큰 다행이지 뭐가 걱정이야? 있을 데가 마땅치 않으면 니 아파트라도 같이 쓰든가, 아니면…….”
나하고 같이 지내든가……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당장 있을 곳이 없었다.
“레빈은 시민권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의료보험도 없어. 서류상으론 세상에 없는 사람이야. 유일한 신분증이라곤 쿠간에 들어올 때 썼던 여권뿐인데 그나마도 위조였어. 지금까지는 작은아버지가 바람을 막아줘서 별 탈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굉장히 위험해.”
“위조 신분증이라도 하나 구해 볼까?”
시내에 기술자들은 많다. 값이 비싸다는 게 큰 걸림돌이긴 하지만, 잘 찾아보면 적당한 가격에 쓸 만한 신분증을 구할 수 있을 거다. 쿠간 시 뒷골목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없다. 요즘엔 사회보장번호까지 딸린 진짜 신분증도 빈번히 사고 팔린다.
비니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전직 용병대장의 불법체류엔 신분증 문제 외에 진짜 곤란한 속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문제가 뭐야?”
“작은아버지가 그동안 방패 노릇을 해줬었는데 이렇게 돼버렸으니까 레빈을 죽이려고 전 세계에서 암살자들이 몰려올지도 몰라.”
“설마…….”
암살자라니…….
“레빈은 15년 동안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온갖 분쟁엔 다 관여했었어. 원수 진 사람이 한둘이겠어?”
“은퇴한 지 10년도 넘었잖아.”
“잊은 사람도 물론 있겠지. 하지만 기억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야.”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타버린 집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이전의 권력과 영향력을 재건 할 수 있을지 여부는 훨씬 복잡한 문제였다. 저택이 습격당해서 완파되고 수하 조직원을 100명이나 잃은 사건에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다시 왕좌를 되찾으려면 이미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잔인해져야 했다. 그 방면으론 워낙 독보적이라서 거기서 더 지독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 과정에서 쿠간 시 전체가 또다시 오랜 전쟁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그런 엄청난 소요를 겪느니 차라리 수순대로 루크 첸이 왕좌를 차고 앉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비니야 작은아버지니까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 입장에선 그 악당이 그 악당일 뿐이었다. 하지만 당장 레빈의 생존 문제가 걸렸다니 생각이 슬쩍 바뀌고 말았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사회정의를 외면하는 게 좀 고통스럽긴 하지만 나는 레빈이 정말 좋다. 그가 암살자 손에 비명횡사하는 불상사는 생각도 하기 싫었다.
정신을 딴 데 팔면서 걷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하고 거의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상대방도 정신을 놓고 어떤 여자랑 얘기하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지만 역시…… 자꾸 만나게 되는 군.”
남자가 참 달갑지 않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나라고 너랑 자꾸 마주치는 게 반갑겠냐? 비니는 반가운 모양이지만…….
“당신이 여긴 또 웬일이야?”
“병문안.”
아는 사람이 입원이라도 했나? 오웬이 같이 걸어오면서 얘기 나누던 여자를 돌아봤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보석보다 더 아름다웠다. 눈인사를 나누는 걸 보니 비니는 여자를 아는 눈치였다.
“전 이만 가 볼게요. 오웬, 만나서 반가웠어요.”
“카시엘은 만나지 않으실 겁니까?”
“오늘은 좋지 않을 것 같네요. 그는 날 꺼려요.”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으니 그런 척 하는 거죠. 당신이 싫어서 멀리하는 건 아닐 겁니다.”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동그란 이마에 큰 흉터가 있지만 그런 게 전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기품이 넘치는 우아한 여자였다.
“카시엘은 많이 지쳐 있어요. 누구라도 좋으니 그 메마른 마음을 위로해줬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타락하면 그는 소멸해버리거나, 어두운 존재가 되어버릴 거예요.”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필리스, 당신의 안타까움은 이해하지만 카시엘은 무엇이 될지 스스로 선택할 겁니다. 항상 그렇게 해왔고, 그것이 그자의 능력이죠.”
“당신은 카시엘의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를 위로하러 온 게 아니었나요?”
오웬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해하신 겁니다. 전 그냥 지나던 길에 들린 것뿐입니다.”
“영원한 방랑자 신세인 당신은 지나던 어떤 길목에서 쉬어갈 땐 특히 조심해야 돼요. 예상치 못한 운명이 당신을 덮칠지도 모르니까요.”
“하이랜더에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것 이외에 또 다른 운명이 있을까요?”
“죽음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아요. 살아 있는 동안엔 사는 일만 생각하면 그뿐이에요.”
오웬이 여자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영문 모를 소리뿐이지만 오웬은 감명 깊은 얼굴이었다.
“이런 곳에서 당신을 만나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그래요, 불멸의 기사님.”
오웬에게 인사를 한 여자가 비니를 돌아봤다.
“우린 분명히 처음 만나는데, 전 당신이 누군지 알 것 같네요.”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필리스 양. 작은아버지를 만나러 오셨군요.”
“만나진 못했어요. 프란시스가 깨어나면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여자친구라고 하면 방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요.”
여자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프란시스에겐 저 말고도 여자친구가 한 무리에요. 번호표라도 받아서 기다려야 할 걸요.”
유구무언이라…… 비니가 겸연쩍게 입을 다물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엽색 행각은 유명하다. 화려한 여배우들이나 모델들이 주 공략대상이었는데, 저런 미인은 또 어디서 찾았을까?
“프란시스에게 닥친 불행이 가슴 아파요. 물론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렇게 전해 드릴게요.”
말하다가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비니가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주변이 다 환해질 정도로 활짝 웃고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그리고 오웬과도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내가 여자를 돌아본 건, 그 긴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가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여자도 나를 돌아봤다.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느냐고 묻고 싶었다. 좀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 안타까움과 연민이 가득한 눈동자로…… 하지만 여자는 금방 고개를 돌렸고 저만치 떨어진 엘리베이터를 향해 우아하게 걸어가버렸다.
“야, 진짜 예쁘지 않냐?”
비니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조그맣게 떠들었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그건 그렇고, 오웬을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어떤 일이 떠올랐다.
“그…… 푸른 용하고 기린은 어떻게 됐어? 퇴원은 했지?”
“퇴원은커녕 면회도 금지였어.”
여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던 오웬이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왜?”
비니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나도 놀랐다. 담당의사랑 얘기가 잘 돼서 둘 다 퇴원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면회조차 금지라니…… 대체 왜?
“기린은 중환자 격리실에 갇혀 있고, 푸른 용은 기린을 혼자 둘 수 없다면서 격리실 문 앞에서 꼼짝도 안 한다는 거야. 그 두 녀석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병원에 있어야 할지도 몰라.”
오웬이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비니를 한번 사납게 노려보고는 너스 스테이션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기린이라면 엘리야 하이네 닮았던 그 성깔 있어 보이던 녀석이다.
중환자 격리실이라니…… 망상이 상당히 정교하긴 했어도 구속복을 뒤집어쓰고 골방에 처박힐 정도로 미치진 않았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비니가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투덜거렸다.
“퇴원도 못 시켜주겠다고 우기면서 사람을 붙들어놨으면 뭐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지, 더 악화를 시켜 놓은 거야?”
비니는 그 두 사람을 콘웨이 요양소에서 탈출 환자들로 단정 짓고 정신병원에 데려다 준 걸 뼈아픈 실수로 여기고 있었다. 사실, 기린의 병세가 악화된 건 비니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마음이 영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나 역시 당황스러웠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도 없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지만 용과 기린은 현자 라두칸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확보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라두칸은 거의 틀림없이 니콜라스와 동일 인물이었다. 최소한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를 찾고 있는지, 혹시 니콜라스를 찾는다던 깨달은 종족이란 자들이 지난 밤 몬티첼리 저택을 습격한 가비…… 뭐랬더라? 하여튼, 그 인간 백정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었는데 아예 뺑 돌아버렸으면 거기다 대고 무슨 질문을 할 것이며,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김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발렌타인이란 사람이 입원해 있을 텐데요.”
오웬의 문의에 간호사가 환자 명단을 뒤져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요.”
“몬티첼리 저택에서 실려 온 사람들은 다 이 병원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발렌타인이란 사람은 없어요.”
병문안이라기에 누굴까 했더니 발렌타인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하긴, 발렌타인과 오웬은 안면이 있는 사이였었다.
“그럼 뤼시엥 브리에나, 막심 벨라스케는요?”
간호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웬이 난감한 얼굴이다.
“죄송하지만 안드레이 아시모프나 프란체스코 디포라는 이름이 있는지도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카시엘…….”
“토마스 모어야.”
옆에서 넌지시 일러주자 오웬이 나를 돌아봤다. 오웬을 대신해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토마스 모어 씨의 병실이 몇 호실입니까?”
어디서건 발렌타인 같은 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숨는 방법을 잘 알고 있고, 꼭 필요할 때 아니면 나타나지 않으니까. 차트를 확인한 간호사가 우리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래서 비니의 경찰 배지를 대신 내밀었다.
“우린 경찰입니다. 사건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간호사가 그제야 병실 번호를 알려줬다.
“5046호에요.”
중환자실이 아닌 걸 보면 발렌타인은 몬티첼리나 가르시아보다는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습격자들을 향해 매그넘을 갈겨대던 발렌타인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냉정하고 가차 없는 살인자의 모습은 두려운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죽음의 신이 있다면 그런 얼굴이었을까? 그 정도면 습격자들의 1차 제거 대상이었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얼굴은 한번 보고 가려던 참이었어. 부상이 너무 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날 밤에 대단했었거든.”
사실 굳이 발렌타인을 보러 갈 마음은 없었다. 발렌타인이 엘리야 하이네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발렌타인을 보면 나는 오닐이 생각났다. 시간 날 때마다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를 즐기던 유쾌한 남자. 나의 첫 파트너. 형제가 없는 내게 형제 이상이었던 정말 좋은 친구. 같이 일한 건 고작 6개월 정도였지만 나는 아직도 그가 그립다.
발렌타인도 나를 보면 엘리야 하이네가 생각날 거다. 사진으로만 봐도 영혼이 식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맹수. 하지만 발렌타인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주고 싶어 했던 남자. 발렌타인과 나는 피차 덮어버리기엔 너무 깊은 상처를 주고받았다.
“잠깐 얘기 나눌 정도만 되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오웬은 발렌타인의 부상 정도나 몬티첼리 저택 습격사건 따위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딱 보기에도 오웬은 사회 문제 같은 데 관심 있을 타입은 아니었다.
“당신, 라두칸을 찾아다녔었지?”
“내가 찾는 건 푸른 용하고 기린이었어. 라두칸이 아니라. 덕분에 찾긴 했지만 정신병원이라니…… 처음엔 열 받아서 거치적거리는 놈들은 다 죽이고 데리고 나올까 생각도 했지만…….”
헉…….
“참아줘. 안 그래도 우리 요즘 죽겠어.”
오웬에게 진심으로 부탁했다. 니콜라스 문제에 마피아 전쟁도 모자라서 이젠 정체불명의 특수부대까지 한 짐 거들고 나선 판이다. 시립 정신병원에 칼부림이 나서 의사나 간호사들 목이 댕강댕강 날아가는 참사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다.
“정 견디기 힘들면 자기들이 알아서 빠져나오겠지. 한 마리는 용이고, 한 마리는 기린인데 설마 그 정도 재주도 없겠어? 장로들에게도 알려뒀으니까 더는 내 소관이 아니야.”
다행이다. 용이니 기린이니…… 이런 소리는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강력 사건만 안 터지면 걔네들이 용이건 미꾸라지건 나랑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장로들이라…… 그건 나중에라도 좀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자들이기에 니콜라스를 찾고 있는 걸까? 직함이 장로라니 종교 지도자 느낌도 좀 있는 것 같고…… 사절로 보낸 애들이 깨긴 하지만…….
발렌타인의 병실은 아담한 1인실이었다. 살면서 나름대로 험한 꼴도 많이 봤고, 저택 습격 사건에서 수많은 부상자와 시체를 벌써 봤기 때문에 나는 발렌타인이 어떤 지경을 당했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사는 일이 언제 그렇게 만만할 때가 있었나? 발렌타인은 내 예상에서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문전에 멈춰서 있다가 뒤따라 들어오던 비니한테 떠밀려서 비틀비틀 두어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발렌타인이 보고 있던 만화책을 사이드 테이블에 던지며 심드렁한 얼굴로 나랑 비니랑 오웬을 쳐다봤다. 요즘 들어서 주변에 황당한 일이 부쩍 늘었지만 이 사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습격이 있던 밤, 몬티첼리 저택은 어떤 전쟁터보다 치열한 격전장이었고 발렌타인은 집중사격 목표였다. 최소한 총알에 벌집이 돼서 미라처럼 붕대에 둘둘 말려 있어야 정상인데…… 이게 웬일이야?
“말짱하잖아…….”
“말짱하다니! 이거 안 보여?”
발렌타인이 왼손을 들어 보이며 항의했다. 손가락에 붕대가 감겨 있기는 했다.
“손가락을 다쳤어?”
“다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날아갔어!”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총격에 죽고 다치는 동안 발렌타인이 입은 부상이라곤 어디선가 터진 수류탄 파편에 왼쪽 약지가 날아간 게 전부였다.
손가락은 주워서 봉합했고, 수술 경과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니까 어제 비니가 막 끝냈다고 한 그 수술이 손가락 봉합 수술이었던 거다.
그 외에 오른손 등이 까지고 이마와 얼굴에 긁힌 자국이 난 정도가 발렌타인이 입은 부상의 전부였다. 물론 같이 있던 나도 멀쩡하긴 하다. 하지만 멀찍이 비켜 있다가 잽싸게 도망친 나하고 몬티첼리를 경호하느라 격전지 한복판에서 깡으로 버틴 발렌타인은 경우가 다르다.
“그렇게 실망할 거 없잖아?”
내 망연한 표정을 본 발렌타인이 볼멘소리를 했다.
“좀…… 놀라서 그래.”
“설마 나보다 더 놀랐겠어?”
발렌타인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넌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당신만큼이나 운이 좋았거든.”
“그런 것 같군.”
발렌타인과 내가 얘기하는 동안 오웬은 구석에 있는 의자를 창가에 끌어다 놓고 앉아서 조용히 우리 얘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야 뭐…… 더 이상은 발렌타인과 할 말 없다.
“프란시스는 좀 어때? 아직도 중환자실이야?”
발렌타인이 몬티첼리의 안부를 물었다. 비니는 발렌타인의 부상이 경미한 것에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비니는 그날 저택에 없었으니까 눈앞에서 기적을 보고도 그게 기적인 줄 모르는 거다.
“오후엔 일반병동으로 옮길 거야. 살아 있으니 다행이지, 뭐 더 바랄 게 있나?”
“그게 다행일지 어떨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거야.”
맞는 말이다. 지금 이 병원 복도엔 단 한 명의 지부 책임자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왔다 갔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거다. 오가는 사람들이라곤 모두 부상자의 가족들뿐이었고 그나마 조직원 비슷한 사람들은 바바라 소사가 남겨 놓고 간 경호원들이 전부였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실제 현장에 있다가 목숨 건진 사람들은 그것만 해도 천행이지만 몬티첼리는 처지가 달랐다. 저택에서 살아남은 게 진짜 다행이려면 그는 수습해야 할 일이 많다.
쿠간에서 프란시스 몬티첼리 체제는 이미 무너졌다. 그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범죄조직의 거친 도전과 암살기도뿐이었다. 이게 전부 니콜라스 탓인 걸 알면 몬티첼리가 얼마나 황당해 할까? 어쨌든 앞에 닥친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종전의 지위와 영향력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세계 범죄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충분했다.
“뭐…… 그건 작은아버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비니의 표정이 씁쓸했다.
“자넨 웬일이야?”
발렌타인이 그제야 오웬을 돌아봤다. 오웬은 우리 얘기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물끄러미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하늘, 구름, 건물들…… 무심한 오웬의 얼굴은 마치 어린 소년 같았다.
“설마하니, 내가 걱정돼서 온 건 아니겠지?”
“전 당신을 걱정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주제넘지도 않습니다.”
빈말이라도 걱정돼서 왔다고 하면 누가 잡아가냐? 싸가지 하곤…….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자네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어.”
“당신이 인간이란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건 지나친 겸손이군요.”
“솔직히 요즘은 평범에도 못 미쳐.”
오웬이 할 얘기 다 끝났으면 좀 꺼져달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나도 발렌타인 주변에 쓸데없이 오래 머뭇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오웬과 비밀 얘기를 할 마음이 별로 없어 보였다.
“라두칸에 대해서라면 전에도 얘기했지만, 저 녀석이 나보다 더 많이 알아.”
발렌타인이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오웬의 표정은 영 시원찮았다.
“자신이 누군지도 잘 모르던데요.”
“궁금한 게 저 녀석에 관한 거야? 라두칸에 관한 거야?”
“사실, 진짜 궁금한 건 바솔로뮤에 관한 겁니다.”
발렌타인이 고개를 저으며 덮어놨던 만화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바솔로뮤에 관해서 알고 있는 건 바솔로뮤 자신뿐이야.”
“사바델도 뭔가 알았을 겁니다.”
“예언 얘기라면 관둬. 예언이란 건 대부분 선잠 깨서 지껄이는 헛소리 같은 거야.”
“카시엘!”
발렌타인이 만화책을 다시 치웠다. 오웬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상당히 매서웠다.
“난 그 이름이 지겨워.”
비니랑 내가 ‘이게 대체 뭔 소리냐……’ 라면서 서로 아무것도 아는 바 없음을 눈치로 확인하는 동안 작은 병실 안엔 침묵과 긴장감이 가득 찼다.
라두칸은 니콜라스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치고, 바솔로뮤는 그러니까 전설 속에 나오는 용의 이름이고 사바델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살았던 마법사다.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사바델이 유명한 마법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외할아버지 소장 도서 두 권 중 한 권이 사바델이 쓴 마법서였기 때문이었다.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연쇄살인범하고 불 뿜는 용하고 천 년 전에 살았던 마법사가 대체 무슨 상관이냐? 둘 다 제정신이 아니거나 혹시 이거, 직업 킬러끼리만 통하는 은어 같은 게 아닐까?
발렌타인이 정색 하고 노려보자 오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오웬이 서글픈 눈으로 발렌타인을 쳐다봤다.
“날 좀 도와주면 안 됩니까?”
만약 오웬이 여자였다면, 어떤 남자도 저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진 미인의 청을 거절하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오웬이 남자라서 그랬는지 발렌타인의 대답은 굉장히 차가웠다.
“난 널 못 도와.”
대답과 거의 동시에 발렌타인이 억눌린 비명을 삼키며 옆으로 쓰러졌다.
내가 복도로 뛰어 나가서 지나가는 의사를 잡아오고, 의사가 발렌타인의 팔목에 꽂혀 있는 링거에 진통제를 주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기껏해야 10여 분 정도였다. 겨우 그 몇 분 동안 발렌타인의 얼굴은 핏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고 흘러내린 땀에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이제 곧 괜찮아질 겁니다. 발렌타인 씨.”
풍채 좋은 40대 중반 정도의 의사가 발렌타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따라 들어온 젊은 의사와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무슨 검사 결과를 가져오라는 얘기도 있고, 환자가 원할 때마다 진통제를 투여해주라는 지시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약기운이 돌아서 통증이 좀 가셨는지 시트를 잡아 찢을 듯 움켜잡았던 발렌타인의 손마디가 풀리고 깊게 패인 양 미간의 골도 서서히 펴졌다. 갑자기 엄습한 격심한 고통에서 간신히 놓여난 발렌타인의 기진맥진한 얼굴은 지독하게 슬퍼 보였다.
오웬은 황망한 얼굴로 발렌타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런 발작에 그도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발렌타인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던 오웬의 팔에 난 손톱자국이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깊었다.
“사바델의 예언서는 불타버렸어. 차라리 잘 됐지. 그 따위 예언은 없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발렌타인이 허리를 펴면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런가요?”
오웬이 발렌타인에게 잡혔던 팔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발렌타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보통 때의 냉랭한 그것보다는 좀 더 인간적이었다. 안타까움 같은 걸까?
“예언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면…… 더 유명한 예언서를 하나 추천해줄까?”
“뭔데요?”
“요한계시록.”
오웬과 발렌타인이 그들만의 짧을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의사는 환자가 안정을 해야 한다며 우리 셋을 병실에서 내몰았다.
오웬은 벽에 기대 세워둔 검을 집어 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병실을 나갔고, 비니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다가 발렌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창 쪽으로 힘겹게 돌아누웠다. 그런 모습을 나한테 보인 게 짜증나는 눈치였다. 나도 어쩐지 봐선 안 되는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렌타인의 기진한 눈동자가 눈물에 촉촉이 젖어들고, 눈시울을 흘러넘친 눈물이 하얀 시트에 스며드는 모습이 마치 느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물론 큰 고통일 터였다. 하지만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고작 그런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발렌타인은 많이 여위어 있었다. 본래 마른 편이었지만 지금은 얇은 환자복 아래로 어깨뼈가 앙상하게 도드라질 정도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작아졌을까? 돌아누운 그의 뒷모습은 헐벗고 마른 나무 등걸 같아서 내 마음조차 서글퍼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발렌타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빌어먹을!!”
복도로 나오자마자 오웬이 장검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복도 양 옆에 죽 놓여 있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뜻밖의 상황에 그도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발렌타인이 총에 맞아 죽거나 어느 으슥한 골목 귀퉁이에서 칼에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는 건 놀랄 일도, 화낼 일도 아니다. 발렌타인이 습격자들의 총에 중상을 입고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누워있었다고 해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중병에 걸린 채 병원 침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발렌타인의 모습은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곧 죽는 겁니까?”
오웬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되게 못마땅한 말투로 이제 막 나와서 병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거야…… 본인과 의료진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린 일이죠.”
표현이 완곡하긴 하지만, 그래봐야 사형 선고였다. 뭐라고 할 말도 없어서 비니랑 나는 떫은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프란시스는 봤나?”
의사가 비니에게 말을 건넸다. 몬티첼리를 프란시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의사는 프란시스 몬티첼리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비니도…….
“중환자실에서 잠깐요. 의식이 없어서 얼굴만 봤어요.”
“운이 좋았지. 총알이 늑골에 박히지 않았으면 그대로 세상 하직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자네 시간 좀 있나?”
“바쁜데요.”
“바빠도 나 잠깐 보고 가.”
비니는 별로 따라가고 싶은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가 엘리베이터로 앞장서서 걸어가버리자 별 수 없이 뒤를 따르며 조그만 목소리를 나를 책망했다.
“의사를 데리고 온다더니, 원장을 끌고 들어오면 어떡해?”
심란한 얼굴로 앉아 있는 오웬을 그냥 두고 가기가 좀 망설여졌다. 무엇보다도 오웬이 찾고 있는 라두칸에 대해, 내가 찾고 있는 니콜라스에 대해 나눌 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일어나면서 오웬에게 물었다.
“아니.”
오웬이 바닥에 던져놨던 검을 집어 들며 짧게 대꾸했다.
“지금 있는 데가 어디야?”
“그건 왜?”
오웬이 경계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경찰이 연락처를 물으면 거의 다 저런 얼굴로 본다.
“만나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왜? 곤란해?”
“곤란할 건 없지만……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도 가는 곳마다 마주치잖아.”
“어쨌든.”
“일정한 거처는 없어.”
오웬이 엘리베이터가 어디쯤 내려오고 있는지 올려다보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연락처를 일러주기 싫은 눈치였다.
원장과 비니가 기다리는 엘리베이터와 오웬이 타고 내려갈 엘리베이터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휴대폰도?”
“마리우스한테 연락해. 가끔 들리니까.”
오웬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귀찮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얼른 따라 타질 않자 비니가 내 뒷덜미를 잡아서 엘리베이터 안에 끌어넣었다. 비니한테 원장실까지 같이 가주겠다고 한 적 없다.
“얼마나 가끔?”
비니에게 끌려가면서 큰 소리로 묻자 오웬이 돌아섰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글쎄…… 100년에 한 번쯤?”
겐지 클리닉의 원장인 휴고 겐지 박사는 쿠간 시 의료 분과 위원회의 고문이기도 하고, 꼭 의료 관련이 아니라도 이런저런 행사에 얼굴도 많이 내비치는 저명인사였다. 그리고 박사는 개인적으로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절친한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원장실은 병원 12층이었다. 전망 좋고 널찍한 것이 병원 원장실이 아니라 대기업 사장실 같았다. 하긴…… 겐지 클리닉 정도면 규모면에선 이미 대기업이었다.
겐지 박사가 비니에게 꼭 해야 할 얘기란 건 다름 아니라 병원비 문제였다. 몬티첼리나 다른 중환자들의 경과에 관한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소 의외였다.
“사건 관련 환자 대부분이 외과 수술을 요하는 중환자인데다 숫자가 너무 많아서 현재 병원 의료진 중 30%가 그쪽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는 형편이야. 중환자실도 다 차고 빈 병실도 없어서 예약 환자들도 다른 병원으로 돌리는 판이지. 잘 알겠지만 내 병원은 의료진도 초일류고 치료비도 초고가야. 시에서 나온 관계자도 붙들고 얘길 해봤는데, 마피아 전쟁으로 발생한 병원비 보조는 시 예산에 없는 것 같았어. 이런 얘긴 본래 총무과 담당이지만 프란시스가 관련된 일을 그 재수 없는 놈한테 맡겨두긴 싫어서 내가 직접 얘기하는 거야.”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불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얘기였다. 겐지 박사는 지금 몬티첼리가 자신과 부상당한 부하들의 병원비를 문제없이 지급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장담하건데 몬티첼리의 수입은 쿠간에서 가장 큰 교회가 거둬들이는 십일조 수입과 맞먹거나 더 많을 터였다. 겐지 클리닉의 병원비가 혼이 나갈 정도로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설마 작은아버지한테 병원비가 없을까 봐 그러세요?”
비니가 하…… 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웃겨서가 아니라 기가 막혀서. 하지만 겐지 박사는 본래 남의 표정 따위는 신경 안 쓰는 사람이거나,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나도 이런 걱정 안 해.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프랜의 돈줄이 다 말라붙었단 소문이 시내에 파다해. 프랜의 변호사도 자긴 비자금 내역은 모른다고 고개를 젓고 있고…… 게다가 입원 환자들 가운데엔 의료보험 없는 사람이 열여섯 명이나 된단 말이야.”
“대체 병원비가 얼마나 되는데요?”
비니가 당장 자기 지갑이라도 던져줄 기세로 따져 물었다.
“현재까지 55만 불 정도야.”
그 한마디에 비니의 기세가 확 꺾였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전성기엔 그 정도 돈은 여자친구 반지 값에 지나지 않는 잔돈이었는데, 어쩌다 처지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겐지 박사도 심란한 듯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시무룩한 얼굴로 뒤적거렸다.
“확실한 지불 보증이 없는 이상, 그 많은 환자들을 다 끌어안고 버틸 순 없어. 장담하지만 병원비는 앞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거야.”
“길거리로 내쫓기라도 하실 건가요? 박사님은 작은아버지 친구잖아요!”
비니가 원망스런 얼굴로 인정에 호소했지만 박사도 나름대로 사정이 절박했다.
“나도 속이 쓰려! 프랜이 한 푼 없는 건달일 때부터 난 녀석의 친구였고, 오밤중에 불려나가서 녀석의 등짝에 박힌 총알을 뽑아주고 경찰에 위증까지 했었어! 그런 일이 전부 몇 번이었는지 알아? 솔직히 말해서 비니, 난 프랜이 좋아. 사고를 당한 게 프랜 혼자라면 10년이라도 특실에 모셔 놓을 수 있어. 하지만 이번 일은 규모가 개인적인 친분의 선을 넘었어.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병원인데, 친구 때문에 말아먹을 순 없잖아!”
비니가 소파에 주저앉아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뭔가 궁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비니는 은행 강도가 아니라 경찰이었다. 당장 그만한 돈을 구할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이게 몸싸움이면 내가 좀 거들어 주겠지만 그 달 벌어 그 달 버티는 처지에, 그나마 월급도 두 달째 못 받고 있는 내가 끼어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고 친구 조카 불러 놓고 이런 얘기 하면서 마음이 편하겠나? 당장 길바닥으로 내쫓겠단 얘기가 아니야. 프란시스가 깨어나면 얘길 좀 해보고 정 어려우면 부상 정도가 가벼운 환자부터 시립병원이나, 자선병원으로 옮겨야 할 거란 뜻이지.”
박사도 이런 얘기는 빨리 끝내고 싶은지 서둘러 결론을 짓고는 서류를 뒤적거려 찾아낸 필름을 벽에 있는 보드에 붙이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한테는…… 아무 말씀 마세요.”
라이트에 비친 사진을 렘브란트 그림 감상하듯 유심히 들여다보던 박사가 비니를 돌아봤다.
“지불 보증은 제가 할게요.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저한테 주세요.”
“자네한테 그만한 돈이 있나?”
비니네 집안이 상당한 부자고 비니 아버지가 시내 대형 마트 네 곳의 소유주라는 건 사실이지만, 수백 만 불을 척척 융통할 정도의 자산가였던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있고, 5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그림도 몇 점 있어요. 다 팔면 못해도 2백만은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걸로 안 되면 아버지 슈퍼라도 한 개 뺐어서 팔아 드릴 테니까 작은아버지한테는 당분간 돈 얘기 꺼내지 마세요.”
궁전 같던 저택은 불타 없어졌고 수족처럼 부리던 부하들은 모두 죽거나 다쳤다. 몬티첼리 본인도 심한 부상을 입었고……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수하 조직까지 돌아앉은 게 분명했다. 조직이 돌아앉았다는 건 다달이 들어오던 엄청난 상납금이 묶였다는 뜻이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호사가들 입에 빈번히 오르내릴 정도로 돈 씀씀이가 헤픈 바람둥이였다. 그런 사람이 비자금 같은 걸 꿍쳐 놓기나 했을까? 있어도 분명 얼마 안 될 거다. 가르시아도 안 됐고, 레빈도 딱하고, 발렌타인도 불쌍하다. 하지만 제일 신세가 비참해진 사람은 프란시스 몬티첼리였다.
“자네한테 병원비 보증이나 세우려고 불러들인 건 아니었어. 미안하군.”
겐지 박사가 인터폰으로 서류를 가져오라고 지시하고 나서 소파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박사도 피곤해 보였다.
“어쩔 수 없죠. 뭐…….”
박사가 한숨을 한번 길게 내쉬고는 그제야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지 않아도 박사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발렌타인 말인데요…….”
“그 사람하고 친한가?”
친하다, 혹은 아니다…… 그와 나는 그렇게 단순한 말로 규정지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박사가 나를 잠깐 응시했다. 그리곤 내가 발렌타인과 친할 거란 생각이 들었는지 다소 예상 밖의 얘기를 꺼냈다.
“그럼 자네가 설득 좀 해주겠나? 나는 할 만큼 했어.”
“무슨 설득이요?”
“수술 말이야. 더 지체하면 그땐 손도 못 쓰게 돼. 미스터 발렌타인은 진행이 빠른 편이거든.”
내 벙벙한 표정에 박사가 좀 실망하는 눈치였다. 내가 발렌타인의 병명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위암이야.”
아…….
“거의 말기지. 저대로 두면 앞으로 6개월도 버티기 힘들어.”
세계 각국에서 이름도 없이 암약하던 암살자, 저격수, 용병이었던 발렌타인이 쿠간에서 악명을 드높이기 시작한 건 프란시스 몬티첼리와 거의 전속 계약을 맺다시피 하면서 그의 처치 곤란한 정적들을 다섯 명이나 깨끗이 해치운 덕분이었다.
안토니오 비티, 그랙 몬타나, 루 콜롬바인, 크리스 야마다, 랄프 슈나이더…… 한때 쿠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서 왕 노릇을 하다가 몬티첼리와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한 악당들이었다. 성질머리도 사납고 세력도 만만치 않아서 짧게는 10년부터 길게는 25년까지 거대 조직의 보스로 군림하던 저 5인방은 새로운 암흑가의 주인으로 부상하던 몬티첼리에게 거친 공세를 퍼붓다가 불과 1년 6개월 사이에 차례대로 비명에 갔다.
그들을 모두 발렌타인이 처치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흔한 게 범죄자고 악당인 쿠간에서도 몇 백 미터 밖에서 단발 저격으로 표적의 목을 꿰뚫어버리거나, 수십 명의 경호원을 뚫고 제거 대상의 여자친구 침실까지 숨어 들어가서 외과의사 찜 쪄 먹을 실력으로 동맥만 골라서 끊어놓고 사라져버리는 스페셜리스트는 귀하디귀했다.
그 다섯 건은 각각 수법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다섯 건 모두 평생 범죄 현장을 봐온 최고참 선배들까지 이렇게 귀신같은 놈은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하고 결벽증이 느껴질 정도로 뒷마무리도 깔끔했다.
경찰은 여태 그림자도 못 밟아본 초절정 고수가 쿠간에 떴다는 걸 깨닫고 낙담과 동시에 흥분을 금치 못했다. 암살자는 한동안 적개심이나 분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피살자들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경찰이 십 수 년씩 혐의를 추적하며 골머리를 앓아온 원수 같은 범죄자들이었던 것이다.
루 콜롬바인 사건 때 경찰은 살인범을 체포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 완벽한 특급 킬러의 이름이 사이몬 발렌타인이란 걸 알아낸 것만 해도 성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대체 어떤 놈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는데, 그 궁금증이 풀린 것만 해도 우린 만족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루 콜롬바인의 살인범 따위, 기어이 잡아넣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었다. 군기 빠졌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경찰도 사람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퍼펙트한 하이 레벨의 킬러라도 재수 없을 때가 있고, 실수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가 쿠간에서 저지른 최후의 두 건은 그 두 가지가 겹친 경우였다.
슈나이더가 먼저 자기 사무실에서 심장에 단검이 박힌 채 의자에 앉은 시체로 발견됐고, 그 이틀 후에 크리스 야마다가 백주에 시내 한복판에서 저격을 당했다.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엘리야 하이네가 합류한 이후 그는 거칠어졌고, 일은 틀어졌다. 콜롬바인 사건 이후 경찰이 그를 예의주시하던 터라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던 것도 조바심을 부채질했을 수 있었다.
야마다를 저격한 직후 발렌타인은 엘리야 하이네와 같이 쫓기다가 그를 잃고 혼자 도망쳤다. 그 총격전의 현장에서 나도 친구를 잃었다. 5년 전의 일이었고…… 몬티첼리의 저택에서 그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세상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넌 알고 있었어?”
원장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잠시 망설이는 사이 비니가 5층 버튼을 눌렀다.
“대충은, 그래도 그렇게 안 좋은 줄은 몰랐어.”
비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불운의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나쁜 소식이 한꺼번에 덮치는 바람에 나 역시 이제는 몸과 마음이 멍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사이몬 발렌타인이 암으로 죽는다는데 내가 울적할 까닭이 뭐냐?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하지만 역시 심란했다. 6개월이라니…….
그러니까 발렌타인은 루크 첸 저격수로 고용돼서 몬티첼리 저택에 머물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냥 마지막 남은 몇 개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던 거였다. 행복도, 불행도 모른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언제나 시끌벅적한 저택의 복도를 오가면서…… 가끔은 후원 초입의 앙상한 고목에 기대선 채 서산으로 떨어지는 해를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향해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5층에서 문이 열리고, 비니가 내리고……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밀려 타는 동안 잠시 망설였다. 비니는 당연히 내릴 줄 알고 앞서 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로비에서 기다릴 테니까 남은 볼일 있으면 보고 와.”
“하지만 사이몬이…….”
죽는 건 안됐다. 하지만 발렌타인의 목숨이고 발렌타인의 선택이다. 넌 또 왜 그러느냐는 듯 당황한 비니를 5층 복도에 세워둔 채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다.
역시…… 5층에서 내리는 편이 더 좋았을까? 발렌타인 병실엔 들어가지 않더라도 말이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서 로비로 내려서다가 하필 그때 막 안으로 들어서는 바바라와 마주치고 말았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모른 척하고 지나기는 늦은 시점이었다.
바바라는 되도록이면 피해 다니고 싶은 상대였다. 저 작은 여자와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세상을 향한 강한 적개심이 내 몸에 묻을 것만 같아서 꺼림칙했다.
“비니는 어디 있어요?”
바바라가 나를 노려보며 따지듯 물었다. 바바라의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건 그녀가 검은 옷을 즐겨 입기 때문일까?
까만 실크 원피스에 윤이 반지르르한 밍크코트…… 한 손엔 좀 크다 싶은 검은 가죽 가방을 들었고, 다른 한 손엔 신문을 쥐고 있었다. 아름다운 옷이긴 하지만 마치 상복 같았다. 비니 마음을 돌려볼 생각이면 패션 센스를 좀 업그레이드해야 하지 않을까? 비니는 까만색을 별로 안 좋아한다.
“5층에요.”
피차 인사 차릴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대답만 간단히 하고 지나치는데 바바라는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대체 언제까지 비니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있을 생각이에요?”
바바라가 대뜸 따져 물었다. 마치 내가 좋아서 비니랑 같이 다닌다는 투였다. 지금은 비록 비니의 변심으로 약혼이 깨졌지만 어렸을 때부터 봐왔으면 비니가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하긴 저러니까 사랑이 위대하다고들 떠들어대는 거겠지.
“아마…… 심하게 다치거나 죽을 때까지 그렇지 않을까요?”
“비니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녀가 차갑게 명령했다. 내가 마치 자기 부하라도 된다는 듯…….
“비니를 어떤 식으로 말하든 그건 내 마음입니다.”
소사 패밀리는 몬티첼리 패밀리하곤 성격이 또 다르다. 그리고 바바라가 표면으로 급부상하고부터는 더 많이 달라졌다. 몬티첼리 스타일도 얌전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정적은 대부분 그림자 같은 특급 킬러 손에 조용히 죽었다. 반면, 바바라 손에 조용히 죽은 사람은 외삼촌인 알버트뿐이었다.
그녀가 한창 외조부인 코시모와 조직 이권을 놓고 다툴 때 리즐 시는 지옥 같은 전쟁터였다. 리즐 시는 쿠간의 반의 반 규모밖에 안 되는 고만고만한 위성 도신데, 한창 시끄러웠을 때엔 오죽하면 리즐시 경찰이 이럴 바엔 쿠간에서 근무하는 게 낫겠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그날 만찬엔 당신 애인도 왔었다면서요?”
비니의 징크스는 치명적이긴 하지만 나쁜 의도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니를 재수 없는 놈이라고 투덜거리긴 해도 나쁜 놈이라고 욕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바라의 말과 행동엔 분명한 악의가 있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여자를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라고 부르는 거다.
“그자는 내 애인이 아닙니다, 바바라.”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요.”
입 꼬리가 약간 말려 올라간 그 얼굴이 소름 끼칠 정도로 사악해 보였다거나 심장이 멈출 정도로 무섭다거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좀 걱정스럽긴 했다. 바바라 소사와 마주 서서 아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도 사실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가 거리낌 없이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몬티첼리 저택 사건은 이상한 점이 많아요. 경찰은 흑풍회 쪽에 혐의를 두는 모양이지만, 내가 알아본 바로는 루크 첸은 관련이 없는 것 같더군요. 물론 이 상황의 가장 큰 수혜자는 루크 첸이겠지만 운이 좋아서 어부지리를 얻는 게 죄는 아니죠.”
“지난 밤 일로 뭔가 이익을 얻는다면 그 자체가 범죕니다.”
“당신은 별로 순진해 보이지 않는데 가끔 순진한 말은 하네요. 그 자체로 범죄란 건 없어요. 경찰이 증거를 확보해서 기소하지 못하면, 그리고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내지 못하면 어떤 행위도 범죄가 아니에요.”
“법에 대해서 많이 아는군요.”
“살아남아야 되니까요.”
바바라가 나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아무 불만이 없다. 나도 바바라가 싫으니까. 내 소박한 바람은 그저 이 여자랑 너무 자주 마주치지는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다.
“비니는 5층에 있어요. 그거 말고 또 궁금한 게 있습니까?”
“요즘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짓을 했을까요? 무슨 목적으로?”
“수사에 진전이 있으면 그때그때 발표를 하겠죠. 신문을 열심히 보면 궁금증이 좀 풀릴 겁니다.”
“신문이라…….”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신문으로 내 가슴을 툭 쳤다. 내키진 않지만 별 수 없이 신문을 받아 들었다. 무슨 기사가 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바라의 흡족한 표정을 보건데 좋은 얘긴 아닌 게 분명했다.
“난 어렸을 때 추리 소설을 많이 봤어요. 너무 많이 읽어서 어느 날부터는 등장인물이 네 명 이상 나오면 누가 범인인지 감이 딱 잡히더군요. 하지만 지난 밤 일은 정말 모르겠어요. 딴 건 다 그만두고라도…… 대체 어떻게 호수에 떨어진 헬기 잔해에서 니콜라스의 팔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1면에 실린 건 리만의 특종 기사였다. 저택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니콜라스가 거기 왔었던 건 비밀도 아니었다. 눈치 빠른 리만은 호숫가에서 나를 보고 니콜라스가 혹시 헬기에 타고 있었던 건 아닌가 의심했고, 그의 사망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을 거다. 쿠간의 모든 기자들처럼 요즘 리만의 관심사는 온통 니콜라스뿐이었다.
경찰은 거울 호수의 얼음물 속에서 수많은 쇠붙이와 사체 일부를 건져 올렸다. 그런 식으로 수습한 사체 일부를 검사해서 신원을 밝혀내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다.
리만이 대체 무슨 수로 사건 발생한 지 3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검사 결과를 빼냈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리만은 자신만의 수완을 이용해서 의혹으로 가득한 마피아 대부의 몰락 스토리에서 엄청난 특종을 건져 올렸다. 기사의 제목은 <몬티첼리 저택의 참사 - 니콜라스 헤슬렘에 관한 몇 가지 미스터리와 그의 죽음>이었다.
리만은 니콜라스의 사망을 거의 기정사실처럼 보도했다. 헬기 폭발 현장에서 신체 일부를 찾아냈으니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도 없는 셈이다. 내가 어제 긴 꿈을 꿨던 것일까? 마리우스의 책방 지하를 밤새 헤매다닌 것도, 마리우스가 니콜라스를 봤다고 말했던 것도…… 내 간절한 바람이 불러일으킨 환각이었던 걸까?
“제이.”
비니가 로비 한구석에 고개 숙이고 앉아 있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발렌타인과 얘기가 잘 안된 건지, 아니면 바바라를 만나서 비니도 기분을 잡쳐버린 건지 표정이 별로였다.
“일어나. 그만 가자”
가야겠지. 어디로든…….
“너…… 왜 그래?”
털고 일어서는 내 얼굴을 본 비니가 당황했다.
“뭐가?”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엄청나게…….”
“사실 안 좋아.”
“바바라가 또 뭐라고 했어?”
내가 노려보자 비니가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바바라하고 헤어질 거면 제대로 헤어지고, 결혼을 하려거든 되도록 빨리 해버려. 그 여자가 나한테 킬러를 보내기 전에!”
얘기를 하다 보니 새삼 신경질이 뻗쳐서 바바라가 나 엿 먹으라고 주고 간 신문을 똘똘 뭉쳐서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앞서 가다 보니 비니가 쫓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잽싸게 따라 나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나 싶어 돌아보니 쓰레기통을 뒤져서 내가 버린 신문을 펴 보는 중이었다.
대문짝만하게 실린 1면 머리기사를 찾는 건 시간 걸리는 일이 아니다. 비니가 1면 기사를 잠시 멍한 눈으로 들여다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비니가 다시 신문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빠른 걸음으로 쫓아 나왔다.
“아마 뭔가 착오가…….”
“발렌타인은 뭐래?”
빤한 소리 듣기 싫어서 화제를 돌렸다. 기사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하려던 비니의 표정이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까불지 말고 나가서 주차위반 딱지나 떼래.”
“나쁜 자식!”
내 평생 이렇게 긴 겨울이 또 있었을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차고 메마른 풍경이 이젠 지겨웠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잔인한 계절이 싫었다.
“제이.”
외곽 순환도로로 접어들면서 비니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비니하고 내가 말 한마디 없이 앞서가는 자동차 꽁무니만 쳐다보면서 달린 지 20분 정도 지났다. 처음엔 내가 운전을 하려고 했는데 비니가 그랬다간 우리 둘 다 교통사고로 죽고 말거라면서 나를 억지로 운전석에서 끌어 내렸다. 지금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이 차가 013은 아니란 사실뿐이었다.
“리만은 기자라고 할 수도 없어. 그 작자 기사 절반은 추측이고 나머지 절반은 창작이라고. 딴 건 다 그만 두고라도…… 니콜라스는 안 죽었잖아?”
어쨌든 우리는 사건 이후 살아 있는 니콜라스를 봤다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대신 호수에 왼팔을 놓고 갔지. 깜빡 잊었던 걸까?”
“그것도 뻥일 확률 99%라는데 100달러 건다.”
“100달러 당장 내놔.”
“물속에 하룻밤이나 빠졌다 나온 사체 일부분일 뿐이야. 그런 건 그냥 고깃덩어리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정육점에 걸린 쇠고기를 사다가 DNA 분석을 한다고 해서 소의 이름을 알아낼 수 없는 거하고 똑같아. 게다가…… 마리우스가 거짓말했을 리가 없잖아.”
“멀쩡했다고는 안 했어. 비니, 그날…… 니콜라스는 부상이 심했어.”
니콜라스의 왼쪽 팔목은 헬기에 올라타기 훨씬 전에 이미 반은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떨어져 나간 팔까지 챙겨 갈 경황은 없었을 거다.
그저 손만 뚫어지게 쳐다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의 손이 어떤 모양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자의 손이기도 했지만 이따금 피아노 건반 위를 날듯이 질주하는 손이기도 했고, 아주 오래된 바이올린의 현을 구슬픈 소리로 흐느끼게 하는 손이기도 했다. 따뜻하고 부드럽진 않았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어떤 힘이 있는 손이었고, 고민 많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위로해주던 다정한 손이었다.
“까짓 거…… 팔 하나쯤 없으면 또 어때? 그래도 그 작자는 여전히 위험하고, 여전히 섹시할 거야. 그러면 된 거 아냐?”
졸음 쫓느라 인상을 좀 쓰고 있었더니 비니가 어설프게 나를 위로하려고 들었다.
“집어치워!”
“니가 니콜라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지만…….”
내가 그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조차 모를 때가 많다.
“니콜라스 헤슬렘을 너 혼자 지켜봤던 건 아니잖아. 나도 거의 매일 저녁 클럽에서 그자를 만났고, 한두 마디에 불과했지만 얘기를 주고받았어.”
“…….”
“그자는 사람을 끌어. 맘만 먹으면 시체라도 벌떡 일으켜 세울 만한 매력이 있단 말이야. 그자한테 끌린 건 니 잘못이 아니야. 누군들 안 그렇겠어?”
“마키바 반장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했어.”
“말 꼬리 잡지 말고.”
비니가 순환 도로에서 내려서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행선지도 안 밝히고 어딜 가나 했더니 랜턴 가가 목적지였던 모양이다. 랜턴 가는 쿠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언저리 외곽 동네였다. 초입만 조금 지나면 너른 황무지뿐인 이곳엔 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폐차장이 있었다.
“내 말은…… 니 감정이야 어쨌든 그자가 위험하다는 걸 잊지는 말란 얘기야.”
“난 그 자식이 위험하다는 걸 잊어버리려고 정신과 치료를 6개월이나 받았어.”
쥬드가 소개해준 개인 병원은 보험 처리를 해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병원비가 비쌌다. 경찰 병원에 비하면 상담도 좋았고, 처방도 만족할 만했지만 치료가 끝나갈 즈음엔 은행 잔고가 바닥을 쳤다.
“제이, 난 정말 니가 걱정돼.”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바바라나 어떻게 좀 해봐.”
비니가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나 역시 니콜라스가 몬티첼리 저택에 찾아오기 전까지는 같은 걱정을 했었다.
그는 병원에서 탈출한 직후 내 근무 현장에 왔었고, 내 아파트에 장미꽃을 한 짐이나 뿌려 놓고 사라졌고, 동료 경찰 두 명을 살해했다. 그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신세를 망쳐 놓은 짭새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갖고 있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는 분명한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복수나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것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연쇄살인범이고, 적당히 미쳐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 역시 니콜라스가 그간 덮어쓰고 있던 신사의 껍질을 벗어던지고 살인 충동에, 복수심까지 겹친 추악한 모습으로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혼자 두려움에 떨었었다.
하지만 몬티첼리 저택에 나타난 니콜라스는 하나도 변한 것 없는 예전의 그 니콜라스였다. 게다가 그는 나를 죽이러 거기 왔던 것도 아니었다. 시간을 담은 병이란 게 대체 뭘까?
“비니.”
“응?”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식을 체포하고 싶어. 다시 정신병원에 보내지든, 이번엔 아예 전기의자에 앉혀지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어쨌든 두 번 다시는 그 자식 손에 사람 죽었단 얘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아.”
“그야 뭐…….”
“하지만…… 그래도 팔은 제대로 붙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럭저럭 오후 3시였다. 폐차장 인부들이 파업 중이거나 폐차 대기 차량이 넘쳐나는 불상사만 없다면 형이 집행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순조로울까? 013도 질긴 놈이다. 놈이 폐차장에 끌려 온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와싹 찌그러진 013의 차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저만치 먼 곳에 고철의 산이 나타나자 비니 얼굴에도 비장미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판국에 차 한 대가 무슨 대수라고 저럴까 싶지만 안 좋은 시기일수록 사소한 일에 집착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비니한테는 이게 사소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비니는 평생 너덜거리는 똥차만 몰아오다가 기적적으로 자신의 징크스에 내성을 가진 차를 만난 것이다. 문제는 그 차야말로 온갖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진짜 악당이란 사실이었다.
013의 징크스에 비하면 비니의 징크스는 장난이다. 비니가 그간의 사건들로 비록 악명은 높았지만 그래봐야 3주간의 혼수상태가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013의 전 주인들은 번거롭게 병원에 들락거릴 필요도 없이 곧바로 관 속에 들어갔다.
비니는 자기 징크스에 지가 다친 적은 없으니까 징크스 따위 다 헛소리라고 우기지만 나는 정말 013이 무섭다. 013이 아직 살아 있고, 비니가 기어이 그 차를 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는 걸어서 순찰을 돌았으면 돌았지 비니가 운전하는 013 옆자리에 올라탈 생각은 없다.
넓은 폐차장 한 구석에 삐딱하게 서 있는 사무실 앞에 차를 세우기도 전에 사무실 옆에 묶여 있던 송아지만한 맹견 두 마리가 우리를 향해 거칠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 마리 다 굵은 쇠줄에 묶여 있었고 안에서 곧 사람들이 나왔다.
“왜요?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비니가 경찰 배지를 내밀자 기름때에 쩐 작업복 입은 인부 두 명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지은 죄가 없어도 불시에 들이닥친 경찰관을 좋은 얼굴로 맞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 아침에 여기 차가 한 대 들어왔을 텐데요.”
불길한 예감에 떨고 있는 비니를 대신해서 내가 나섰다. 두 사람 중 좀 더 나이 든 쪽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 서른아홉 대였죠. 그런데요?”
여전히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젊은 인부가 진정 시켜 보려고 해도 두 놈들은 더 기승스럽게 짖어댔다. 저 정도면 개가 아니라 맹수라고 해야 될 것 같았다. 그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에 올리브기름 바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검은색 벤츠가 한 대 끼어 있었을 겁니다.”
인부 둘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불안하다. 그렇게 멀쩡한 차가 폐차장에 끌려온 게 무슨 착오일 거라고 멋대로 짐작하고 013을 살려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니까 그런 차가 있었던 것도 같네요.”
“지금 어디 있죠?”
“글쎄요…… 저기 어디쯤 있겠죠.”
나이 든 인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통조림처럼 네모 납작하게 눌린 고철 더미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다가 핏기가 가신 비니의 얼굴을 보고 얼른 표정을 고쳤다. 주저앉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비니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거친 한숨을 한두 번 들이쉬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비니가 바닥에 떨어진 쇠붙이를 걷어차면서 짧은 욕설을 지껄였다. 비니가 걷어찬 쇠붙이는 하필이면 20여 미터 떨어져 있던 개집 지붕을 맞고 튕겨서 아직까지 미친 듯 짖어대고 있던 개 두 마리 중 한 마리의 뒤통수를 갈기고 말았다. 얻어맞은 개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 꼴을 본 나머지 한 마리는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아 넣고 개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남의 개를 잡을 뻔하긴 했지만, 그 덕에 짖는 소리는 딱 그쳤다.
비니가 더욱더 언짢은 얼굴로 자기를 노려보는 인부들은 본 척도 않고 네모반듯하게 뭉쳐진 고철더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013의 명복이라도 빌어줄 모양이다.
“우린 그냥…… 주는 대로 받아서 처리했을 뿐이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현재까지는 특별히 잘못된 게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또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짓눌러 버리기엔 차가 너무 예쁘장하지 않았나요? 게다가 중고 시세로 쳐도 당신들 두 사람 연봉보다 더 비싼 찬데…….”
“우리가 차를 뒷구멍으로 빼돌리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여태 잠자코 있던 젊은 인부가 발끈하고 나섰다. 나이 든 인부가 젊은이를 옆으로 밀고 나섰다.
“겉보기는 멀쩡해도 속으로 곯은 차도 많거든요. 어쨌건…… 이건 우리 책임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인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 남자의 눈이었다. 범죄형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아니면 다행…… 아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실례 많았습니다.”
이제는 비니가 나보다 더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에 돌아오는 길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보통 때였으면 013의 폐차 소식은 올 들어 제일 반가운 희소식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 기분 나쁜 차가 납작 눌린 고철 통조림으로 변해 있는 것조차 대단한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마음이 약간 가벼워진 건 사실이지만…… 괜히 웃음도 나고…….
“비니, 기분은 알겠지만 013이 니 차도 아니잖아.”
“경찰이 호수에서 건져 올린 팔도 니 팔은 아니지.”
어설픈 위로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러고 보니 피차 자기 것도 아닌 걸 잃어버렸고, 그 때문에 상심에 젖어 있었다. 그 한심한 상실감 때문에 비니와 나는 시내로 돌아올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대판 싸움이라도 하고 난 직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