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슬렘의 저택은 조용했다. 이 넓고 우아한 저택엔 상주 고용인이 없었다. 파출부는 매일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4시면 퇴근했고 정원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정원수를 손질하고 시든 꽃을 갈아 심었다. 고용인들이 헤슬렘과 마주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넓은 저택에 머무는 동안 그는 늘 혼자였다.
1층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홀에서 파티가 열린 건 내가 알기론 딱 한 번뿐이었다. 초대된 손님들은 대부분 헤슬렘이 사업상 알고 지내는 점잖지만 탐욕스러운 부유층들이었다. 그 외에 화가였나, 작가였나…… 아니면 둘 다였나, 아무튼 궁상이 줄줄 흐르는 서민이 두 명 정도 있었고 한때 스타였으나 이제는 한물 가버린 늙은 여배우도 파티 손님이었다.
그 요란하고 화려한 단 한 번의 사교 모임을 제외하면 지난 반년 간 이 집에 손님이라곤 지금 교제 중인 여자친구 하나뿐이었는데 그나마 같이 밤을 보낸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헤슬렘의 저택은 거의 언제나 물에 가라앉은 배처럼 조용했고 지금도 그랬다.
차분한 색조, 기품 있는 가구…… 코너마다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이 가득 담긴 화병이 놓여 있었던 게 기억에 남았다. 그러니까 저번에 집안에 들어와 봤을 때 얘기다.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지 무겁게 드리워져 있던 갈색의 벨벳 커튼이 가벼워 보이는 크림색 실크로 바뀌었고 높은 화병에 한 아름도 넘게 꽂혀 있던 붉은 장미 대신 커다란 유리그릇에 담긴 얼음물에 이름도 모를 색색의 꽃이 시원스레 떠 있는 것 정도가 차이라면 차이일 뿐, 나머지는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커피? 홍차? 아니면…….”
헤슬렘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전기 포트에 부으면서 나를 돌아봤다.
“아무 거나요.”
일전의 그 가택 수색은 명백한 불법이었다. 법대로 하자면 수색 영장부터 청구하는 게 순서지만 남의 집에 쳐들어가서 옷장 서랍이며 침대 밑바닥까지 뒤집어도 좋다는 허가가 아무 때나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순전히 쥬드 크롬웰과 아멜 굽타의 육감에 의존한 수사였기 때문에 수색 영장 같은 건 더더욱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굳이 영장이 필요할 만큼 헤슬렘의 집 담이 높은 것도 아니라서 굽타 선배와 나는 별다른 의견 차이 없이 그 불법적인 수색에 합의하고 헤슬렘이 일본 출장 간 사이에 당당하게(?) 이집 현관문을 땄다. 물론 불법이지만 세상에 원칙 다 지켜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있을까? 근무 수칙 따위나 외고 다녔다간 ‘무능한 머저리’라는 반장의 불호령과 함께 쿠간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 잡지의 구인 광고가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이는 집요한 왕따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선물 받은 운남차가 있는데…… 어때?”
헤슬렘이 작은 도자기 차 통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차는 이름도 처음이었다.
“차에 대해선 잘 몰라서요.”
수사에 원칙이 없는 것은 범죄에 원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종종 범죄에 가까운 수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불법이라도 필요에 따라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직업적인 소신이 있어서 집 주인 출장 간 틈에 문을 따고 들어와서 서재며 침실이며 다 뒤질 때도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가책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집 주인의 허락받고 들어온 지금은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 이렇게 하지.”
헤슬렘이 생수병을 다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주방 한쪽에 놓인 장식장 안에서 반쯤 남은 브랜디 병을 꺼내 들었다.
“긴장을 푸는 덴 술이 더 나을 거야.”
근무 중에 술 마시면 안 되는데…….
“그냥 차나 한잔 주세요.”
“차는 나중에…… 아침에 마시는 차 맛이 또 각별하거든.”
더 말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잔을 받았다. 술을 먹이려고 작정하고 수를 쓰면 안 마시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헤슬렘은 천재적인 연쇄살인범이고 나는 평범이 지나쳐서 요즘은 실적도 별로인 짭새일 뿐이다.
심란한 내 마음을 전혀 모르겠다는 듯 헤슬렘이 자기 잔으로 내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가워. 기대하던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건 굉장히 설레는 일이거든.”
헤슬렘은 가슴이 설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간 떨어질 뻔했다.
“저는 그냥…….”
헤슬렘이 따라준 브랜디를 한 입에 털어 마시면서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마키바 반장 손에 죽지 않으려고 대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는 얘기만 아니면 뭐든 무슨 상관이냐.
“인사나 할까 해서 들른 것뿐이에요. 덕분에 살았으니까…….”
“그런데 왜 나무 뒤로 숨었어?”
“당신이 무서워서요.”
헤슬렘도 자기 술을 한 입에 털어 마셨다.
“몸은 좀 어때? 심하게 다쳤었잖아.”
“괜찮아요.”
“다행이군.”
“덕분에요.”
이러다 싸움나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써먹을 고운 말이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쁜 자식! 탈세, 횡령, 갈취, 공갈 협박…… 하다못해 사기 결혼 기타 등등…… 다른 좋은 범죄도 많은데 왜 하필 살인이냐? 그것도 줄줄이 몇 건인지 셀 수도 없는 연쇄살인이라니.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얼굴이 아까웠다. 그저 기술 좋게 덮어 쓰고 있는 껍질에 불과하다 해도 말이다.
굽타는 현명한 사람이다. 내가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한 팀이 되어 잠복근무를 하던 몇 개월간 굽타는 헤슬렘만 지켜본 것이 아니라 파트너인 나까지 관찰했던 거다. 한시라도 빨리 헤슬렘을 끝장내버리고 싶은 마키바 반장의 의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를 무슨 비장의 카드나 되는 것처럼 이 조심스런 게임에 던져 놓은 것은 경솔한 짓이었다.
임무가 싫고 좋고는 한가한 문제였다. 솔직히 나는…… 이 남자한테 아무것도 숨길 자신이 없었다. 이건 경찰이라는 신분을 들킨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지금만 해도 나는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헤슬렘의 멱살을 틀어잡고 ‘나는 니가 지난 십 몇 년간 해온 짓을 다 알고 있다. 이 개 같은 자식아!’ 라고 소리 지르지 않을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여.”
“별로 안 좋아요.”
“왜?”
애매하게 웃으면서 그냥 일어나려는 데 헤슬렘이 잽싸게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안됐지만 나는 술이 세다. 술로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이면 브랜디 반병으론 어림도 없을 거다.
“그냥, 사는 게 힘들어요. 당신은 그럴 때 없어요?”
“왜 나라고 힘들 때가 없겠나? 사는 건 누구한테나 비슷한 짐이야.”
말이나 못하면…….
“그런가요?”
나도 모르게 빈정거렸다.
“나한테는 전혀 힘든 일이 없어 보여?”
“당신 같은…… 부자한테도 힘든 일이 있는 줄 몰랐어요. 이렇게 근사한 저택에, 포르쉐에, 빵빵한 여자들에…… 뭐가 부족한데요?”
“부족한 건 없어.”
“살면서 언제가 제일 힘들었어요?”
술잔을 집어 들면서 헤슬렘을 빤히 쳐다봤다. 누굴 죽일 때가 가장 힘들었지? 죄책감이 조금은 있었나? 헤슬렘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친구를 잃었을 때 마음이 많이 아팠지.”
“친구가 죽었나요?”
하마터면 ‘친구를 죽였나요?’ 라고 물어볼 뻔했다. 언제 말이 헛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이번 잔도 원샷으로 털어 마셨다. 헤슬렘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린 일종의 사업 파트너였는데…… 처음엔 의견도 잘 맞았고 일도 순조로웠고, 사이도 괜찮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조금씩 변했어. 의견은 항상 충돌했고 일도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리고, 그 친구는 결국 성격까지 변해버리더군. 그는 내가 자길 배신했다고 생각해.”
“겨우 그겁니까?”
친구하고 싸우고 헤어진 정도가 살면서 제일 힘든 일이었다니…… 애냐?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었어. 그 친구를 사랑했거든.”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화해를 하시죠.”
“이젠 안 돼.”
헤슬렘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면 아직도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그는 날 찾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를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한잔 더?”
두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헤슬렘이 무척 사랑했던 친구 얘길 하는데 공연히 비위가 상했다.
몇 시나 됐나 싶어 시계를 봤는데 아직 11시였다. 새벽 한두 시는 된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렀다.
“자네 시계, 아까부터 죽어 있어.”
헤슬렘이 벽장에서 뚜껑도 안 딴 잭 다니엘스를 꺼내서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빙긋 웃었다. 브랜디 반병도 나 혼자 거의 다 마셨다. 나를 술로 죽일 작정인가 보다.
헤슬렘을 노려볼 수도 없어서 서버린 고물 시계를 하릴없이 노려봤다. 이 고물딱지! 수리한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말썽이야?
“한 시, 조금 넘었군.”
헤슬렘이 숫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이아몬드가 한 개씩 박힌 눈알 튀어 나오게 비싸 보이는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시간을 일러줬다.
“너무 늦었네요.”
대충 접고 빠져나갈 시간이었다. 피곤하다.
“결혼했나?”
“……아니오.”
“여자친구는 있겠지?”
나는 약간 취한 것뿐이다. 과음한 건 맞지만 헤슬렘에게 위니 얘기를 털어 놓을 만큼 돌진 않았다.
“요즘엔 시들해요. 만나면 노상 싸우다 날 새죠.”
이만하면 여자 얘기는 잘 넘겼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데 헤슬렘이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술병을 비틀어 땄다.
“그럼 서둘러서 일어날 필요는 없겠군.”
빌어먹을!
헤슬렘이 큰 쟁반에 마시던 술과 안주거리를 대충 챙겨서 일어났다. 옮겨 앉은 곳은 주방에서 좀 떨어진 아늑한 서재였다. 이쯤 되면 무책이 상책이었다. 자포자기 술을 홀짝거리면서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헤슬렘의 여자친구 얘기를 물었다.
“엘마? 예쁘지. 수완도 좋고, 욕심도 많고…….”
“좋으시겠어요.”
나도 그 여자의 얼굴은 안다. 사진으로만 본 거지만, 얼음같이 차가워 보이는 슬라브계 미인이었다. 인상으로만 보면 헤슬렘보다 그 여자가 훨씬 무섭게 생겼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근데 저건 다 뭐예요?”
서재 한 쪽 벽에 붙어 있는 묘한 장식품은 가택 수색 할 땐 없었던 거였다. 벽에 붙여 놓은 돌 부조와 그 밑에 건…… 칼인가? 돌 부조는 도깨비 얼굴 같이 생겼다. 세상에서 가장 흉측하고 무서운 얼굴을 만들기로 작정한 고대 조각가의 고뇌가 엿보인다고 할까…… 호랑이처럼 사납게 치뜬 눈에, 코는 펑퍼짐하게 눌려 있고, 커다란 입 양쪽엔 마치 멧돼지 엄니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무섭도록 못생긴 얼굴인데, 민속 공예품 특유의 순박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보면 볼수록 오싹해지는 게 매력인 모양이다.
“바야쿰의 잔해.”
“바야쿰이…… 뭔데요?”
“페루의 정글에 묻혀 있는 고대 신전이지. 물론 지금은 신전이 아니라 그저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지만.”
“아…….”
기억난다. 헤슬렘이 자금을 지원했던 고고학 발굴 작업. 학자 두 명이 죽고 중요한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던…….
“학자들 몇 명이 거길 발굴하려고 한다기에 재미있을 것 같아서 자금을 좀 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공연한 짓이었던 것 같아.”
“사건은 어떻게 됐어요? 해결이 됐나요?”
헤슬렘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도 미결이면 물 건너간 사건이다.
“도난당한 물건이 그렇게 대단한 보물이었나요?”
“별로…… 예술적인 가치로만 따지자면 넘어진 신전의 기둥만도 못했지.”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면서요.”
“그러니 웃기는 일이지. 암시장 같은 데 내놔봐야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을걸.”
페루 밀림까지 찾아가서 돈도 안 되는 물건을 훔쳐가다니, 그것도 사람들 둘이나 죽이고? 그 방면의 전문가로써 단언하지만 그런 범죄는 없다. 사라진 유물에 예술적인 가치는 없었는지 몰라도 헤슬렘이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내게 말하지 않은 다른 가치는 있었을 거다.
“어쨌건 안됐네요. 살인범을 놓치다니…….”
“그런 얘기 하는 건 자네가 처음이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대부분은 이렇게 말하더라고. ‘안됐네요. 중요한 유물을 잃어버려서…….’ 요즘은 온통 물건 얘기뿐이야.”
“고고학 쪽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 지금 상당히 취했다.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브랜디 반병에…… 잭 다니엘스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어느덧 바닥이었다. 아무리 술이 세도 이 정도면 치사량이다.
휘청거리면서 도깨비 얼굴 조각이 붙어 있는 벽으로 다가갔다. 상당히 오래 전 물건인 것 같았다. 부서진 곳은 없지만 이목구비가 세월에 깎여서 많이 무디어져 있었다. 돌 벽에 부조되어 있는 걸 떼어 온 것 같은데 가까이서 보니 한층 더 으스스했다. 나 같으면 이런 거, 절대 집안에 들여 놓지 않았을 거다.
“그냥 기념품이야.”
“신전에서 나온 거면 남의 나라 문화잰데, 그걸 맘대로 집어와서 벽에 걸어놔도 괜찮아요?”
“1년에 백만 불씩, 5년 동안이나 발굴 비용을 댔으면 나도 뭐하나 건지는 게 있어야지. 게다가 그 얼굴은 별로 귀한 것도 아니야. 바야쿰의 신전 기둥마다 하나씩 붙어 있거든.”
“수호신 같은 건가요? 신전을 지키는…….”
“발굴 책임자도 그 비슷한 주장을 했었지.”
말투가 삐딱한 걸 보니 헤슬렘은 생각이 다른가 보다.
“바야쿰에 관해선 기록이 없어. 다들 나름대로 추측이나 하는 거지 정확한 사실이야 누가 알겠나? 유적은 적어도 7, 8천 년은 됐을 거야.”
8천 년이란 소리에 딸꾹질이 나왔다.
도깨비 얼굴 아래쪽엔 작은 선반이 달려 있었다. 그 위에 금으로 만든 받침대가 있고…… 받침대 위에 얹혀 있는 게 뭔가 했더니 돌로 만든 칼이었다. 반들거리는 검은 돌로 만든 단검은 비바람에 닳고 닳은 도깨비 얼굴과는 달리 아직 날카로웠다.
“케이크 자르는 칼처럼 생겼네요.”
헤슬렘이 킥, 웃었다.
“케이크 자를 때 쓰던 건 아니야. 물론 케이크도 잘 잘렸겠지만.”
“신전 기둥엔 이런 칼도 하나씩 매달려 있었나요?”
“돌칼도 많이 나왔지. 하지만 흑요석으로 만든 걸로는 그게 유일해. 그 폐허에서 파낸 돌덩어리 중에선 제일 아름다운 물건이지.”
고고학이나 유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 석검은 국립 박물관 상석에 있어야 할 물건이었다. 이건 단순한 돌덩어리 이상의 어떤 느낌이 있었다.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지만…….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어요?”
“훔쳤어.”
문화재 절도 혐의 추가다.
“만져 봐도 되요?”
“바야쿰의 대신관 아니곤 누구도 만질 수 없는 칼이야.”
하지만 헤슬렘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돌칼을 선반에서 집어 들고 있었다. 묵직했다. 까맣고 단단하고 매끈하고…… 날은 더 단단한 어떤 돌로 깨뜨려서 세웠는지 들쑥날쑥했지만 숫돌에 갈아낸 어떤 칼보다도 더 예리했다.
“손대면 다쳐.”
헤슬렘이 조용히 타일렀지만 벌써 늦었다. 칼날이 이미 손가락 마디를 스쳐 지나갔고, 잠시 후에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베이지색 카펫에 붉은 얼룩을 만들었다. 칼날에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인데. 아니면…… 내가 너무 취했나?
어느새 다가온 헤슬렘이 내 손에서 칼을 빼앗아 쥐었다. 그리고 피가 흐르는 내 손을 펴보더니 손가락을 혀끝으로 살짝 핥았다. 소름이 끼쳤다.
“누가 손만 댔다 하면 이 모양이라니까.”
“엄청 날카롭네요. 보기엔 그냥…….”
헤슬렘에게 잡힌 손을 잡아 빼서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멋쩍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아직 돌칼이 들려 있었다. 억지로 웃고는 있지만 왠지 모를 공포감에 뱃속이 싸하니 아파왔다.
“바야쿰에서 신에게 제물을 바칠 때 쓰던 칼이야. 거의 천 년 동안 제물의 심장을 도려내거나, 동맥을 끊는 데 쓰였었지. 그 시절에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란 건 거의 대부분 사람이었어.”
아…….
“그런 얘기, 들어는 본 것 같아요. 아즈텍 신화죠?”
갑자기 어지러웠다.
“세상이 소멸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태양이 순환을 계속 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피와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거죠.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때론 전쟁에서 패한 모든 적을 신에게 바쳤지.”
헤슬렘의 손에 들린 저 물건이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의 살을 찢고 심장을 들어내던 칼이라니…….
“끔찍하네요.”
“더 끔찍한 건 그런 미친 제사가 수천 년간 이어지고 맹목적인 기원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애초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악마가 태어나기도 한다는 거야.”
“정말 끔찍한 건 인간이 인간의 존재를 타오르는 불을 계속 지펴두기 위한 장작개비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거죠. 어떤 악마도 그런 인간을 당할 수 없을걸요.”
헤슬렘이 손에 쥔 돌칼을 우울한 시선으로 응시하다가 다시 선반에 얹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솔직히,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헤슬렘의 질문은 너무 진지했다. 뭔가 그럴 듯한 대답을 해줘야 할 것만 같아서 잠깐 생각은 했는데, 내 입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화장실이 어디예요?”
변기를 붙들고 한참 토하면서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닌데. 헤슬렘의 정체도 다 알겠다, 그냥 설렁설렁 기분이나 맞춰주면서 기다리다 결정적인 순간에 덮치면 그만인 것을……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세면대에 찬물을 받아 놓고 한참 머리를 처박고 있었더니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늦는다고 전화도 안 했으니 위니가 걱정할 거다. 그때 헤슬렘이 화장실 문을 삐끔 열었다.
“괜찮아?”
“그만 가봐야겠어요.”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헤슬렘과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헤슬렘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미안하다 그러기도 이젠 귀찮다.
“가끔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마련이야.”
헤슬렘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모습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려서 어지러웠다.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맞아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죠.”
헤슬렘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섰다. 오늘까지 살면서 내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게 딱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비니 몬티첼리의 징크스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니콜라스 헤슬렘이란 인간 그 자체였다.
“어차피 세상 일을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모른 척, 못 본 척 지나치는 것도 방법이야. 사실은 그게 제일 상책일지 몰라.”
배에 기름이 잔뜩 낀 중년의 남자들이 가장 자신만만하게 지껄이곤 하는 개 같은 충고를 헤슬렘이 나한테 했다. 하도 같잖아서 한마디 해주려고 다시 돌아섰다.
헤슬렘은 불꽃이 이는 것처럼 사납게 일렁거리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신 제물을 바쳤다는 신전에서 뜯어온 조각상만큼이나 사나운 얼굴이었다. 이자는 지금 내게 세상을 적당히 살라는 시시껍절한 충고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엄중한 경고인 동시에 노골적인 협박, 혹은 자신이 하는 일, 앞으로 하려는 일을 방해하면 살려두지 않겠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협박에 휘둘릴 정도면 애당초 경찰이 되지도 않았다.
“……벌써 그렇게 하고 있어요. 어쨌든 충고는 고마워요.”
“넌 너무 순진해.”
헤슬렘이 눈에 켰던 불을 끄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갑자기 애 취급이냐? 기분 나쁘다.
“사람 잘못 봤어요.”
순간…… 또다시 구토가 치밀었다.
화장실에서 한 번 더 토하고 나니까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좀 전까진 이렇지 않았는데 취기가 갑자기 확 올랐다. 몇 번이나 찬 물을 뒤집어쓰고 나서 거울을 보니…… 웬 한심한 놈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니가 정말 나 맞냐? 성질나서 거울에 머릴 갖다 박았다가 머리가 울려서 기절할 뻔했다.
머리통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기어 나오는 나를 보는 헤슬렘의 인상이 곱지는 않았다. 하긴, 가만히 서 있다가 가슴팍에 토사물 벼락을 맞았으니 누군들……. 더러워진 웃옷을 벗어서 가슴과 배를 대충 닦고는 쓰레기통에 처 넣어버리는 폼을 보니 기분 상해도 단단히 상한 것 같았다.
“주는 대로 잘 받아 마시길래, 난 또 술을 잘 하는 줄 알았지.”
“……죄송해요.”
헤슬렘을 체포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를 자꾸만 치면 연쇄살인범이 아니라도 날 죽이고 싶어질 테니까……. 마키바 반장은 내가 이렇게까지 일을 잘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다.
“저기…….”
“저기, 뭐?”
헤슬렘의 음성이 냉랭했다.
“아니에요.”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취하면 나는 좀 그렇다. 쉽게 우울해지고 사는 게 그냥 힘들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헤슬렘을 지나쳤다. 헤슬렘은 여전히 언짢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그 순간 갑자기 헤슬렘이 내 팔을 움켜잡았다. 팔이 비틀렸나 싶더니 다음 순간엔 목이 뒤로 꺾였다. 전광석화라더니…… 이런 거였나?
만취 상태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나오면 별 수 없었을 거다. 빨간 뱀도 반항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목이 부러졌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더니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이 위태로운 순간에 내 머리 속엔 고작 ‘술 좀 작작 마실 걸……’ 하는 한가로운 후회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누굴 원망하랴. 내 무덤 내가 팠다. 이제 곧 닥칠 일은 운명인 양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헤슬렘은 틈을 주지 않고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두 눈을 질끈 감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무자비하고 치명적인 최후의 손길을…….
헤슬렘의 마지막 공격은 생각만큼 무자비하지도 않았고 치명적이랄 것도 없었다. 그건…… 그냥 키스였다. 사실 그냥 키스는 아니고 좀 거칠고 길었다. 한참을 붙들려 있다가 놓여나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가 막혀서 올려다 보니 헤슬렘은 시침 뻑 따고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뭐 저딴 게 다 있지?
“좀 전에 토했는데…….”
헤슬렘이 그제야 얼굴을 찡그리며 손등으로 혓바닥을 슥 닦았다.
“깜빡했어.”
“나 정말 가야 돼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자고 가지?”
유혹이라고 하기엔 말투가 담백하지만…….
“안 돼요. 절대…….”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냥 어지러운 정도였는데 이젠 세상이 핑핑 돌았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저 간교한 자식이 나 몰래 술에 약이라도 탄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남자 경험이 전혀 없나?”
헤슬렘이 서재로 따라 들어오면서 약을 올렸다.
“그 딴 거, 알 필요 없잖아요?”
소파에 벗어놨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알고 싶어. 너에 관한 거라면 뭐든 다.”
문으로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헤슬렘과 부딪칠 뻔했다. 내가 셔츠를 버려 놓은 덕분에 그는 상반신을 벗은 상태였다.
헤슬렘은 위협적일 만큼 거구는 아니다. 키는 큰 편이었지만 몸은 오히려 조금 말랐다 싶은 정도였다. 헬스와 건강식으로 가꾸는 부유층 특유의 부티나는 몸매랄까…… 날렵해 보여 좋긴 한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좀 비켜주세요. 가게…….”
손을 뻗어서 그의 어깨를 옆으로 밀었다. 헤슬렘이 별 수 없다는 듯 순순히 물러섰다. 하지만 그가 시야에서 비켜서는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이상한 광경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고 말았다.
“왜 그래?”
내가 한 발짝도 더 떼어 놓지 못하고 바싹 얼어붙은 걸 본 헤슬렘이 내 시선의 방향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등 뒤로 소파를 더듬어 앉으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도저히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헤슬렘이 벽에 걸린 도깨비 얼굴을 힐끔 보더니 수상쩍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시 저것 때문에 그래?”
쪽팔려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취해서…… 기운이 없어요.”
내가 본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커다란 불길? 소용돌이? 아니면…… 악령? 헤슬렘이 대답을 기다리며 공포에 질린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지만 벽에 걸린 돌 조각이 갑자기 살아서 움직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 괴상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불꽃이 이 방 한 면을 다 덮을 만큼 확 번져서 거친 소용돌이를 그렸다고 떠들 정도로 취하진 않았다. 살아 있는 것은 뭐든 덮쳐서 숨통을 끊어버릴 듯 살기등등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곧 덤벼들 것처럼 포효했다는 헛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헛것이 보였을까?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팔짱을 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술 탓인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심하게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은 고개를 들어서 도깨비 얼굴을 다시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눈 좀 떠 봐.”
“좀…… 있다가요.”
헤슬렘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대로 쭉 있으면 나야 좋지.”
진짜 마음 상한다. 연쇄살인범이지만 그래도 신사 아니었나? 간신히 실눈 뜨고 쳐다보니 도깨비 얼굴은 그냥 닳아빠진 8000년 된 돌 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좀 전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서 그 태두리가 여전히 벌겋게 달아 있었다.
“저거…… 그저 집이나 지키는 수호신은 아니죠?”
헤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야쿰엔 수호신 따위가 필요 없었어. 그냥 둬도 거길 범할 자는 없었을 테니까.”
“굉장히 무서운 신이었나 봐요?”
“훔쳐갈 만한 보물이 없었어.”
헤슬렘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하나도 안 웃긴다.
“황금과 보석을 기대했던 후원자들이 실망을 많이 했지. 내색은 안 했지만 학자들도 그랬을 테고. 처음부터 어림없는 기대였지. 그 신전엔 처음부터 금붙이 따위는 없었어. 신이 요구한 공물은 그런 게 아니었거든.”
“어떤 신의 신전이었죠?”
“신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제 없어. 하지만 어떤 신이었는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지. 세상에 나라와 문자가 생기기도 전에 어떤 잔인한 부족이 거의 날마다 인간의 생피로 제단을 적시며 필사적으로 숭배하던 신이었어.”
“죽음이나 전쟁의 신이었나 봐요?”
“죽음과 전쟁, 그리고 잔인한 승리…… “
그럴 것 같았다. 벌건 잔영이 잠차 희미해져 가는 걸 노려보며 다시 물었다.
“저게 그 신의 얼굴인가요?”
“아마도…… 고약한 놈이지.”
역시 술 탓일까? 헤슬렘의 대답이 왠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서글프게 들렸다.
머리가 아프고 몸도 무겁고, 무엇보다 기분이 나빴다. 눈을 뜨기도 전에 지난밤의 추태가 끊어진 필름처럼 드문드문 떠올라 기분이 더 엉망이었다.
마키바 반장한테 가서 죽어도 못 한다 그러고 한바탕 얻어터지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아니다. 지난밤에 술 퍼먹고 헤슬렘한테 오바이트한 걸 사실대로 고백만 하면 그냥 일에서 빼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얻어터지긴 하겠지만. 그건 그렇고…… 여기가 대체 어디야?
벽도 바닥도, 지금 누워 있는 침대도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게 반짝였다. 테라스 쪽으로 길게 난 격자창의 창살조차도 하얀색이었다. 흰색 외에 다른 색채라곤 저만치 떨어진 벽난로 위에 걸린 추상화 속의 어지럽게 섞인 원색과 군데군데 놓여 있는 화병에 가득 꽂힌 장미꽃의 붉은색 정도였다. 이 방…… 전혀 낯설지는 않은 걸 보니 전에 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그게 언제였지?
밀려오는 두통 때문에 눈을 감고 몸을 뒤척였다. 점잖게 표현해서 두통이지 실상은 머리가 아예 빠개지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목은 타 들어가는 것 같은데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내가 언제 이런 방에 와봤을까? 내 평생에 이렇게 호사스런 침실은 구경 할 일도 몇 번 없었을 텐데…… 아, 생각났다.
일전에 굽타 선배와 헤슬렘의 저택을 수색을 빙자한 무단침입을 했을 때 선배가 이 방을 보고 어딘지 모르게 병적이라면서 기분 나빠했었다. 나는 나대로 굽타 같은 명수사관은 용의자의 침실만 봐도 정신병을 짚어내는구나…… 속으로 한 번 더 감탄했었고. 그러니까 여기는…… 다음 순간,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왜 이 방에 있어?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난 어제 분명히 저택에서 나갔는데. 헉…… 생각해보니까 막 나가려다가 술이 떡이 돼서 급기야는 헛것을 보고 다시 주저앉았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무슨 얘길 한 것도 같은데, 어쨌든 헤슬렘하고 얘기를 잠깐 더 하고 저택에서 나갔다. 분명히 그랬는데, 왜……
“일어났어?”
“으아……악!!”
헤슬렘이 문가에 기대서서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기분 나쁘게 웃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샤워라도 했는지 베스 가운 차림에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면서 그가 침대로 다가왔다. 내가 이 집을 나갔던 게 꿈이었나? 아니면 이게 꿈인가?
“저기…….”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헤슬렘이 테이블에 놓인 물병에서 물을 한잔 따라서 내밀었다. 안 그래도 목이 타서 곧 죽을 것 같던 참이라 일단 잔부터 받았다.
“한 잔 더?”
찬물 한 잔을 한입에 털어 마시고도 내가 넋 놓고 앉아 있자 헤슬렘이 내 앞에 와서 걸터앉았다.
일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불을 들쳐보니 걸치고 있는 거라곤 달랑 팬티 한 장이었다. 게다가 헤슬렘은 막 샤워를 하고 나와서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냐?
“저기…… “
내 목소리가 반쯤 울고 있었다.
“왜?”
“내가 여기서 잤어요?”
헤슬렘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나?”
고개를 가로젓다가 머리가 울려서 관두고 대신 손을 내저었다.
“안 나요. 아무것도.”
헤슬렘이 내 어깨를 밀었다. 별로 세게 민 것도 아닌데 딴 데 정신 팔고 있다가 맥없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안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데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하지만 내 기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헤슬렘이 침대로 기어 올라와서 나를 깔고 앉았다.
“이래도?”
헤슬렘은 들떠 있었다. 이런 상황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듯 실실 웃고 있는 느끼한 얼굴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기억나는 거라곤 어제 나를 기함하게 만들었던 도깨비 얼굴뿐이었다. 그 망할 환각 때문에 놀라서 주저앉았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놀리지 말아요. 난…… 그냥 취해서 잠들었고,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헤슬렘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며 애원하듯 중얼거렸다. 화낼 기운도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 일 없었다고 한 마디만 해주라. 응?
헤슬렘이 어깨를 으쓱하며 옆으로 비켜 앉았다. 그리고 물에 젖어서 반짝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미안해. 나…… 그렇게까지 신사는 아니야.”
이제 내 인생은 쫑이다.
헤슬렘의 저택에 끌려 들어갈 때만 해도 나는 그저 그런 보통 경찰이었는데, 다음날 오후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경찰이 돼서 저택을 나왔다.
마셔 보라고 하도 권해서 풀 냄새 나는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시내까지 데려다준다는 걸 뿌리치고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큰길을 따라서 터덜터덜 두 블록 쯤 내려가자 회색 벤 한대가 옆구리에 바싹 다가와 붙었다.
“타!”
굽타가 차 문을 밀어 젖히며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요즘은 헤슬렘 수사팀이 거의 동아리방처럼 사용하고 있는 지하 2층 회의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앉아 있으려니 크롬웰이 차 한 잔을 가져다줬다.
“마셔요. 술이 좀 깰 거예요.”
그리고 아까부터 의자에 앉지도 않고 문 옆에 기대 선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굽타에게도 차 한 잔이 전해졌다.
“드세요. 화가 좀 풀릴 테니까.”
굽타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닙니다, 미스 크롬웰.”
“지난밤에 한 잠도 못 주무셨다면서요? 머리가 좀 맑아질 거예요.”
굽타가 마지못해 잔을 받아 들었다.
“난 뭐 없나?”
마키바 반장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반장이 막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굽타의 상태로 미루어 마키바 반장은 총이라도 뽑아 들고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웬걸? 표정이 근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밝았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다 드릴까요?”
“그것도 좋지.”
크롬웰이 비니를 쳐다봤다. 크롬웰은 마음이 내키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차를 다 끓여주지만, 자판기 커피까지 직접 뽑아 바칠 만큼 헌신적인 비서는 아니었다.
“비니, 반장님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전 지금 동전이 없어서요.”
“그러죠 뭐.”
비니가 선선히 대답하고 방을 나가려는데 마키바 반장이 손을 내저으며 비니를 가로막았다.
비니는 이런 종류의 잔심부름도 마다 않을 정도로 성격이 좋지만, 비니 손에 무사히 차를 얻어 마신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커피 드신다면서요?”
“갑자기 생각이 없어졌어.”
비니를 억지로 의자에 눌러 앉히고 반장도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감해서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반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간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거지?”
옆에서 맹물 마시고 있던 비니가 풋, 하고 물을 뿜었다. 그 바람에 반장의 옷깃과 내 손등에 물이 튀었다. 반장은 그것조차 너그럽게 봐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희희낙락이야? 제이는 어제 진짜 위험했어.”
굽타가 눈살을 찌푸리며 반장에게 따졌다.
“과장하지 마. 섹스가 위험해봤자 섹스지. 안 그래?”
“자넨 수사 책임자야.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난 진도가 빠른 게 일단 맘에 들어. 기약도 없이 질질 끌려다닌 게 벌써 몇 달이야? 데이트 기간은 짧을수록 환영이야.”
굽타가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팽개치듯 내려 놨다.
“우리가 쫓는 건 희대의 살인마란 말이야. 희대의 색마 따위가 아니라고! 제이는 어제 죽을 수도 있었어. 송수신기까지 멋대로 먹통을 만들어 놓는 바람에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도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단 말이야. 내가 지난밤에 몇 번이나 놈의 집안으로 밀고 들어갈까 망설였는지 알기나 해?”
찻잔을 옆으로 밀어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송신기를 꺼버린 건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내 잘못이다. 그냥 딱 죽었으면 좋겠다.
“무슨 걱정이 그렇게 늘어졌어? 그 자식 스타일이야 빤하잖아?”
“무슨 스타일? 헤슬렘은 규칙이나 습관에 메인 놈이 아니야!”
“사냥감을 최소한 한두 달은 갖고 노는 고약한 버릇이 있잖아! 놈의 손에 죽은 열다섯 명이 다 그런 식이었어. 설마 까먹은 거야?”
굽타가 자꾸 딴지를 걸며 좋은 기분을 망치자 마키바 반장이 발끈해서 맞섰다. 하지만 굽타는 반장과 생각이 많이 달랐다.
“놈을 과소평가 하지 마, 마키바. 열다섯 명은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최소한의 숫자일 뿐이야. 놈의 손에 몇 명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라.”
반장의 말문을 그렇게 막아 놓고서 굽타가 고개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내 어깨를 움켜쥐고 뒤흔들었다. 굽타는 헤슬렘의 집 근처에서 나를 벤에 태운 이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줄은 알고 있었지만…… 화내는 걸 몇 번 못 봤기 때문에 무서웠다.
“너, 지금 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알고나 있어? 넌 지금 미친 호랑이랑 한 우리에 갇혀 있는 거야. 우리가 널 거기 밀어 넣었어. 그놈은 곧 배가 고파질 거고, 니 목을 물어뜯으려고 덤빌 거야. 가까이서 지켜보기는 하겠지만, 니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놈을 체포하기 전에 우린 니 시체를 먼저 끌어내야 할지도 몰라!”
“죄송합니다.”
사과 한마디로는 굽타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어려웠다. 굽타가 내 멱살을 틀어잡고 내 눈을 응시했다.
“근 20년간 살인자들을 뒤쫓으면서 나는 동료를 많이 잃었어. 나이가 드니까 그게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 난 정말이지 널 그렇게 잃고 싶지는 않아!”
같이 근무하면서 사실…… 굽타 같은 아버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서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를 실망시킨 못난 아들이 된 것 같았다.
“니가 없어도 그놈은 어떻게 해서든 잡아넣을 거야! 나는 10년이라도 그놈을 쫓아다닐 수 있어! 그러니까 제대로 할 자신이 없으면 당장 그만두고 어디로든 꺼져버려!”
뭐라고 대꾸할 면목도 없어서 침만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데 비니가 쭈뼛거리며 나섰다.
“선배님. 저…… 진정하시고요. 일단은 얘기를 좀 들어보죠.”
어디서부터 보고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치를 살피며 크롬웰이 준 차를 끌어다 한 모금 마셨는데 술 깨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술기운이 확 달아날 정도로 맛이 지독했다.
“술은 얼마나 마신 거예요?”
크롬웰이 물었다.
“브랜디 반 병…… “
대강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데 모두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거의 범죄자를 심문하는 분위기였고,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분야에선 전문가였다.
“그리고요?”
“잭 다니엘스 작은 거…… 한 병을 나눠서…….”
“너 미쳤니?”
비니가 인상을 쓰며 나를 타박 했다. 반장도 어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처음엔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설명을 해놓고 보니 지난밤의 상황은 간단한 거였다. 헤슬렘이 권하는 대로 진탕 마시고 곯아떨어진 게 전부였다.
“뭐야? 그럼 같이 잔 건 아니네?”
필름이 끊어져서 아무 기억도 없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헤슬렘의 침대에서 뻗어 있었다는 얘기를 듣더니 마키바 반장이 김샌 얼굴로 투덜거렸다.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기억이 없다. 어제 있었던 일 중 다행스러운 건 기억이 안 난다는 것뿐이었다.
“반장님 같은 분은 호모 섹슈얼리티 같은 거엔 엄청난 혐오감을 갖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가 봐요?”
비니의 질문에 악의는 없었다. 항상 그렇듯 너무 직설적이고 업무와 상관없는 얘기일 뿐…….
“살인사건만 아니면 사내놈들 둘이서 무슨 짓을 하던 무슨 상관이야?”
“혹시 이런 일 있을 거, 예상하고 계셨던 건가요?”
반장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마키바 반장은 웃는 얼굴도 무섭다.
“피살자 신상 브리핑 할 때 넌 달나라에 가 있었냐? 전시회다, 공연이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이벤트에 끌고 다니는 몇 주 동안 놈이 그 사람들 손목만 주물렀을 것 같아? 이 정도 예상도 못한 놈 있으면 손 한번 들어봐.”
아무도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가만 보니 비니랑 나만 예상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정말 전시회나 공연장만 같이 다니면 되는 건 줄 알았다.
“니콜라스하고 무슨 얘기를 했어요?”
크롬웰이 약간 흐트러진 주의를 환기시켰다.
“별 말 안 했어요.”
“니콜라스하고 집안으로 들어간 게 아홉 시였어요. 취해서 잠든 건 새벽 두 시쯤이라면서요. 다섯 시간 동안 아무 말 안 하고 술만 마셨어요?”
그렇진 않지만…….
“그냥 잡담이었어요. 무슨 단서가 될 만한 얘긴 전혀 없었어요.”
크롬웰이 고개를 저었다.
“단서는 우리가 찾아요. 당신은 헤슬렘이 어떤 말을 했는지 그것만 얘기 해주면 돼요.”
크롬웰이 똑똑하다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완전히 바보 취급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크롬웰도 내 불쾌감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건방진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애초에 당신이 송신기만 건드리지 않았으면 이런 거 물어볼 필요도 없었어요.”
어젯밤에 내가 헤슬렘이랑 무슨 얘기를 했더라…… 여자친구 얘길 잠깐 했고, 지금은 관계가 틀어졌다는 헤슬렘의 옛날 사업 파트너 얘기도 좀 했다. 헤슬렘에게 특별한 친구가 있단 얘기에 굽타가 솔깃한 얼굴이다.
“친구? 누구?”
“이름은 몰라요. 예전에 사업 파트너였다는데 안 만난 지 꽤 됐다고 했어요.”
반장이 크롬웰 양을 쳐다봤다.
“사업 파트너라면 여럿 있었죠. 지금 경영하는 회사 설립 초기에 동업을 하다가 지분을 찾아서 독립한 사람이 있는데…… 그 얘기 아닐까요?”
“살아 있나?”
“예.”
그 외엔 정말 별 얘기 없었다. 헤슬렘의 서재에 장식되어 있는 조각상이나 돌칼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헤슬렘의 인테리어 취향이 독특한 건 수사팀의 관심사가 아니고 그가 남미의 고대 유적 발굴을 후원했던 건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 외엔 정말 별로…….”
“니콜라스가 친구 얘기랑 애인 얘기를 잠깐 하다가 갑자기 달려들었단 건가요? 제이.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지난 밤 일을 묻는 게 아니에요.”
나를 다그치는 크롬웰의 시선이 서릿발 같았다.
“야한 얘기도 좀 했겠지. 숨길 거 없어. 여기서 나온 얘긴 밖으로 새지 않을 거야. 내가 보장할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 집에서 밤새고 나왔다니까 마키바 반장은 헤슬렘하고 내가 꽤나 분위기 좋았다고 생각하나 보다. 야한 얘기라니…….
“남자 경험이 있느냐고 묻던데요?”
이 정도면 야한 건가?
“수작이 빤하군. 그리고?”
“알 거 없다고 그랬더니…… 나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반장이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곤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걸렸어. 넉넉잡고 한 달 보름이면 사건 종결이야. 서장님한테 경과보고하고 인원을 서너 명 더 요청해야겠어. 일이 풀리기 시작하니까 일사천리네. 예감이 좋아.”
일이 순조롭고 예감이 좋다니, 좋은 일인데 나는 아까부터 이렇게 기분이 언짢을까? 어제 일이 순전히 개인적인 실수였다고 생각했을 때는 그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화가 났다. 경찰관이 언제부터 용의자한테 몸까지 팔았지? 지들 몸뚱이 아니라고 사람을 그런 상황에 들이밀고 일이 벌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니…….
“함정 수사란 게 본래 용의자하고 잠자리까지 같이 해야 하는 겁니까?”
막 회의실을 나가려던 반장이 삐끔 고개를 돌렸다. 어쭈, 요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어떤 사건이냐에 따라서 다른 거 아니겠어?”
“내가 남창입니까? 막말로 경찰 월급 몇 푼이나 된다고, 연쇄살인범하고 잠까지 같이 자라고 하세요?”
생각할수록 열 받쳐서 안면 몰수하고 험악하게 따졌다. 하지만 반장은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니었다.
“월급 몇 푼에 목숨도 걸잖아?”
“목숨은 목숨이고, 이건 다른 거잖아요!”
“니가 그렇게 생긴 걸 날더러 어쩌라고?”
순간 발끈해서 반장에게 달려들어서 막 반장의 두툼한 입술을 들이받을 찰라, 비니가 내 허리를 공중에서 낚아챘다.
“반장님, 말씀이 좀 심하신 것 같은데요.”
비니가 나를 벽으로 밀어 던지고 반장을 점잖게 타일렀다. 비니 주제에 가당치 않은 오바였다. 너 같은 놈한테는 콧방귀도 아깝다는 얼굴로 반장이 벽시계를 가리켰다. 4시 10분이다.
“넌 오늘 출근 안 해?”
위장 취업해서 근무 중인 클럽 얘기다. 월급이 30% 인상된 후, 비니는 근무 시간도 약간 연장됐다. 오후 다섯 시 출근, 자정 퇴근이었다.
“좀 늦어도 뭐라는 사람 없어요.”
경찰서에서도 비니의 지각에 대해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아예 나타나지 않는 데도 크게 나무랄 사람은 없을 거다. 그건 그렇고, 아무래도 억울해서 비니를 밀치고 다시 반장과 마주 섰다. 반장은 이젠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반장님 실적만 올라가면 부하 경관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단 겁니까?”
“내가 언제 그놈하고 같이 자라고 한 적 있어? 술이 떡이 돼서 그 자식 페이스에 놀아난 건 너야.”
“일이 계획대로 착착 풀려서 그래, 얼마나 좋으세요?”
내 항의에 반장이 빛의 속도로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코앞으로 내 얼굴을 확 끌어 당겼다.
“그놈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재주껏 몸 사리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서툴게 굴다가 한번만 더 다된 밥에 코 빠뜨리면, 그땐 평생 정복 차림으로 주차위반 딱지나 떼게 될 줄 알아!”
“그쯤 해둬. 마키바!”
보다 못한 굽타가 나서서 반장을 뜯어냈다.
“왜 볼 때마다 애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정작 고생하는 건 제이잖아!”
반장은 선선히 물러섰고 나는 짜증이 나서 옆에 서 있는 서류함에 대고 괜한 주먹질을 했다가 손가락이 부러질 뻔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회의실 분위기는 숨 막히게 어색하고 갑갑했다. 마키바 반장은 나를 괘씸하다는 듯 노려보고, 지난 밤 내내 헤슬렘의 집 앞에서 발만 동동 굴렀던 굽타는 피곤에 쩔어서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어지간히 눈치 어두운 비니조차도 더 못 버티고 시계 보는 척 하면서 슬쩍 일어났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 먼저 일어날게요.”
거의 탈진 상태인 굽타가 비니를 따라 일어나며 마키바 반장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해산하자고. 나도 집에 가서 눈 좀 붙여야겠어.”
마키바 반장이 뚱한 얼굴로 회의실을 나서자 비니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봤다.
“집에 갈 거면 가는 길에 태워줄게.”
별로 집에 가서 위니 얼굴 마주 볼 기분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도 불륜에 해당되나? 아마 그렇겠지……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 비니에게 손을 내저었다.
“신경 쓸 거 없어. 택시 타면 돼.”
그때, 한 옆에 가만히 붙어 서서 나와 마키바 반장의 험한 싸움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크롬웰이 입을 열었다.
“손은 어쩌다 다쳤어요?”
크롬웰의 질문에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손가락 마디마디에 빨갛게 벤 자국이 나 있었다. 칼날이 스친 흔적이 분명한데 글쎄…… 어쩌다 이런 상처가 생겼을까? 얼른 생각이 안 나서 머뭇머뭇하는 사이 반장과 비니가 방을 나갔다.
“생각이 잘…… 아, 칼에 베였어요.”
칼이란 말에 막 회의실 문을 닫으려던 굽타가 멈춰 섰다.
“어떤 칼이요?”
“서재 선반에 장식된 돌칼이었는데 집어 들다가 살짝 스쳤어요. 헤슬렘 말로는 무슨 신전에서 사람 잡을 때 쓰던 칼이라고…….”
굽타가 다시 들어와서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곤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린 쥬드 크롬웰의 ‘화도 풀리고 머리도 맑아지는’ 차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오만상을 다 찌푸리는 걸 보니 저것도 맛은 별론가 보다.
“무슨 얘기야? 돌칼이라니?”
사람 잡는 칼이라니 귀가 번쩍 뜨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 돌칼은 헤슬렘이 남미 오지의 유적 발굴 현장에서 빼돌린 고대 유물일 뿐이었다.
“발굴 작업하던 그 유적지가 신전이었다는 건 기억 나. 그러니까 인신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군.”
바야쿰의 유적에 관해서 들은 대로 대충 설명하자 굽타가 중얼거렸다. 헤슬렘이 자금을 지원하는 학술 단체는 우리가 아는 곳만 네 군데였다. 부자들에겐 그런 기부도 일종의 유행이고 과시였다. 수사팀도 그 정도로 이해하고 넘겼던 사항이었다.
“무슨 제사?”
서장실로 간 줄 알았던 마키바 반장이 되돌아와 문을 열고 고개를 삐죽 들이밀었다. 굽타가 따라 나오지 않아서 되짚어 온 모양이었다. 굽타의 심각한 표정을 본 반장이 다시 들어와서 자리 잡고 앉았다. 자기를 따돌려 놓고 우리끼리 모여 앉아 있는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 조각상이란 건 어땠어?”
굽타는 헤슬렘의 저택에 있는 살벌한 유물 얘기에 꽤나 호기심이 동하는 눈치였다.
“그냥…… 괴상했어요. 죽음의 신이라는데 오죽하겠어요?”
“한번 보고 싶군.”
“사진이라도 찍어다 드릴까요?”
말이야 태연하게 했지만 실은 그 도깨비 얼굴 때문에라도 그 집엔 두 번 다시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지난밤의 그 공포스러웠던 환각이 아직 눈앞에 선하다. 뭔가 기대를 하고 앉았던 반장은 몹시도 한심하다는 얼굴이었다.
“술도 거나하게 취했겠다, 단 둘이겠다, 분위기 한창 좋을 그 시간에 니들은 그런 얘기나 하고 놀았냐? 참 고상도 하다.”
“그럼 나란히 앉아서 게이 포르노라도 돌려본 줄 아셨어요?”
그동안 지은 죄가 많아서 참고 참았지만 내 성격도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반장이 ‘왜? 맞장 한번 떠 볼래?’ 라는 텔레파시와 함께 노골적인 비웃음을 보내왔다. 늙은 상급자라고 언제까지라도 참아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확 떨치고 일어나려는데 눈치가 번개 같은 크롬웰이 기막힌 타이밍으로 내 손목을 가만히 잡았다. 반장 쪽은 굽타가 말없이 타이르는 중이었다.
“그 유적 발굴에 관해서 좀 알아둘 걸, 바야쿰이라…… 혹시 누구 자세히 아는 사람 없나?”
굽타가 마키바 반장을 엄한 눈길로 노려보면서 물었다. 딴 사람들 기분 나쁠까 봐 저렇게 묻긴 하지만, 여기서 그런 걸 알 만한 사람은 쥬드 크롬웰뿐이었다.
바야쿰의 신전은 20여 년 전, 울창한 페루 밀림을 관통하는 지방 도로 공사 도중에 발견된 유적이었다. 지반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어느 날 수백 구의 백골이 뒤엉킨 구덩이를 발견한 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발견된 유골 중 많은 숫자가 신체 일부가 절단 되거나 두개골이 깨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국은 엄청난 범죄 현장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지만, 조사 결과 피살자들은 최소한 5천 년도 더 전에 살았던 고대인들이었다.
그 소동이 일어난 이후에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학술팀이 일대를 조사해서 비슷한 집단 매장지를 네 군데나 더 찾아냈다. 유골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렸고 최소한 천 년 이상 지속된 인신 제사의 공물로 희생되었을 거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했다. 그리고 몇 주 후, 조사팀은 매장지에서 수십 킬로미터 더 들어간 컴컴한 정글에서 이끼와 넝쿨 식물에 뒤덮인 낯선 유적의 폐허를 발견했다.
“그 발견은 학계에서도, 일반인에게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어요. 인신 공양이야 고대 문화에선 그다지 낯선 풍속도 아닌데다, 이목을 끌 만한 유물도 몇 점 없었고 굉장히 오래 되었다는 것과 남미의 여느 신전과는 양식적 차이가 크다는 것 외엔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요. 1차 학술 조사는 6개월 만에 자금과 관심 부족으로 마감됐어요. 그러다 5년 전에 남미 고대 문화에 정통한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램 박사가 바야쿰이 지금까지 남미 대륙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고대 유적일 거라고 주장하면서 학계에 연구 지원을 요청했죠. 헤슬렘 말고도 그 발굴팀엔 후원자가 여럿 있었어요.”
“얘기가 재미있긴 하지만 말이야…….”
반장은 내내 시큰둥하다. 하나도 재미있는 얼굴이 아니다.
“놈의 살인 행각하고 5천 년도 더 된 해골 더미가 대체 무슨 상관이야?”
이런 순간에 반장과 입장을 같이하긴 싫지만, 내 말이 그 말이다. 돌칼과 도깨비 얼굴이 헤슬렘의 살인과 무슨 상관이냐?
“구덩이에 묻힌 수 천 명을 헤슬렘이 죽이진 않았겠지만…… 상관이 전혀 없을까?”
굽타랑 같이 있다 보면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멍청한 놈이 아닐까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중고 자동차 매매나 회계장부 정리 같은 걸 하고 살았어야 하는 건데 직업을 잘못 고른 걸까? 슬쩍 보니까 반장도 비슷한 불안감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
“헤슬렘은 그저 재미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놈의 살인엔 목적이 있어. 그게 뭘까…… 오래 생각했었지.”
“니콜라스의 살인 행각이 고대 인신 제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세요?”
크롬웰 양의 질문에 굽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동기일 수도 있죠. 엄숙하면서도 잔혹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모습이 그자와 잘 어울렸을 겁니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