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운 밤을 보낸 탓인지 거리는 유난히 조용했다. 마치 크리스마스 다음날처럼…… 날이 많이 풀려서 길옆에 쌓여 있던 눈이 질펀하게 녹아내려서 도로가 축축했다. 도로에 살짝 고인 물을 기분 좋게 가르며 전과 12범 벤츠 013이 경쾌하게 미끄러졌다. 과거를 불문에 부친다면, 013은 좋은 차다.
병원 주차장에 세워진 013을 보는 순간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비니 손에 걸린 지 꽤 됐는데 어찌된 일인지 013의 까만 차체는 기름을 바른 듯 매끈했던 것이다.
“이 차…… 왜 이래?”
“뭐가 어때서?”
유리창도 금 가거나 깨진 곳 없이 깨끗했고 아직 라이트도 부서지지 않았다. 013의 표면엔 잔 흠집 하나 찾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최신 기종의 풀 옵션으로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던 지난 번 뷰익도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앞뒤 범퍼가 시커멓게 긁히고 안테나가 부러졌었다. 013을 둘러싼 그간의 소문과 괴담을 다 믿었던 건 아니지만, 이 범상치 않은 사태를 접하고 보니 냉철하고 과학적인 내 이성이 발을 헛디딘 듯 휘청거렸다.
“이거, 웬만하면 다시 창고에 반납하고 중고차라도 하나 사는 게 어때?”
“안 그래도 보관소에서 연락이 한번 오기는 했었어.”
가까이 서 있는 것조차 꺼려지는 013의 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고 타면서 비니가 타라는 손짓을 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차를 대하는 비니의 손길이 애틋했다. 평생에 새 차다운 새 차를 길게 몰아보지 못했던 비니로써는 물 찬 제비 같은 이 벤츠가 그저 대견하기만 한 모양이었다. 비니가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죽을까 봐 무서워서 못 타겠다는 소리가 차마 나오질 않았다.
“보관소에서…… 뭐랬는데?”
마지못해 조수석에 타면서 물었다. 비니가 시동을 걸었다. 여태 타 본 차 중에 엔진 소리가 제일 상큼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니까 그만 타고 갖다 놓으라고…… 차 살 돈 없으면 보관실에 임자 없는 차가 한 대 더 들어왔으니까 그걸로 바꿔 타는 게 어떻겠냐고.”
“그렇게 하지 그랬어?”
비니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폐차 직전의 혼다였어. 게다가 분홍색이더라고!”
세상에는 분홍색 차는 절대 탈 수 없다고 버티는 취향 까다로운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다. 하지만 비니는 그렇게 까다로운 놈이 아니다. 여태까지 비니는 제대로 굴러가기만 하면 분홍색이 아니라 무지개 색이라도 아무 상관없이 잘만 몰고 다녔다. 실제로 비니가 헐값에 구입한 중고차 중에는 형형색색의 번개가 그려진 정신없는 벤도 있었고 차 옆구리에 다 벗은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요상한 컨버터블도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분홍색 혼다는 양반이다. 비니의 색깔에 대한 감각이나 관심도는 색맹보다 나을 게 없었다. 폐차 직전이니, 분홍색이니 하는 건 다 핑계다. 비니는 013이 마음에 든 거다.
“일단 내 아파트로 가자.”
비니가 방향을 보겔 거리로 잡았다. 보겔 거리는 고급 아파트가 많은 지역이었고 비니의 아파트도 거기 있었다. 비니는 침실 2개짜리 고급 맨션에 사니까 객식구 하나 거느릴 여유는 있었다. 내가 얼른 대답을 않자 비니가 불안한 듯 곁눈질을 했다.
“설마 크롬웰 양 신세를 지려는 건 아니겠지?”
“처음엔 별로 생각 없었는데, 이제 마음이 바뀌었어.”
“야, 너…….”
비니가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가 볼 곳이 있어.”
처음엔 단순한 사건이었다. 연쇄살인범이 수감 중인 병원에서 탈출했다. 탈출하자마자 또 다른 살인 행각이 이어졌고, 경찰은 눈에 불을 켜고 놈을 찾아다니고…… 하지만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을 뒤쫓는 건 경찰뿐이 아니었다. 해병 특수부대 찜 쪄 먹을 화력과 기동력을 가진 정체불명의 조직도 그를 쫓고 있었고 연방특수경찰의 수상쩍은 부서 책임자도 니콜라스가 내게 줬다고 우기는 빈 병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오베른은 그간 니콜라스가 저지른 살인 행각에는 일전 어치의 관심도 없었다. 오베른이 연방경찰에서 하는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범죄를 다루는 수사관은 아니었다. 그의 질문은 모두 범죄와 관련된 요소에서 벗어난 것들뿐이었다. 오베른에게는 연쇄살인이나 학살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화낼 일은 아니었지만 화가 났고 생각할수록 오베론이 재수 없었다.
“마리우스의 서점엔 왜?”
“뭣 좀 물어보려고.”
“뭔지 몰라도 쉬면서 해.”
비니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병원에 있는 부상자들 중 혼수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 대부분이 정신적인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경찰관이라고 대뇌구조가 일반인하고 다른 건 아니니까 비니 눈에는 나도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며칠 후에 가도 마리우스는 어디 안 가고 그 책방에 그대로 있을 거야. 자기 말로는 1000년도 넘게 책방에 죽치고 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다른 계획이 없댔어.”
“오래 안 걸려.”
비니가 더는 다른 말 없이 집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파이잘 고가로 올라섰다. 파이잘 고가는 쿠간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차도였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감히 지나다닐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높이가 장난 아닌데다 차들이 이 고가에만 들어서면 이상할 정도로 속도를 높이기 때문에 마치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것처럼 아찔할 때가 많았다. 013의 속도도 현재 빠르게 상승 중이었다.
웬만해선 정체 현상이 없고 시내 요소요소로 통하기 때문에 시간에 쫓기는 도시인들에게 유용한 도로였지만 구조가 복잡해서 그런지 고가를 탔다가 말도 안 되는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쨌든 파이잘 고가 7번 도로는 루벳 거리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수사는 좀 진전이 있어?”
“잘은 몰라.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거든.”
프란시스 몬티첼리뿐 아니라 집안에 있던 몬티첼리의 조직원들은 거의 다 비니 친구들이었다. 물론 본인들은 절대 친구가 아니라고 우겼지만 실은 비니가 경찰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형제처럼 지내던 동네 친구들이었다. 비니도 눈 밑이 어두웠다. 화도 나고 슬프기도 할 거다.
“새벽같이 루크 첸을 연행해다가 수사관 다섯이 돌아가면서 심문 중이라는데 만만치 않은가 봐. 증거도 아직 없고…….”
꽤 각이 예리한 커브 길을 비니가 감속도 거의 없이 매끄럽게 타고 돌았다. 비니는 그렇게 섬세한 운전자도 아니지만 대책 없는 폭주족도 아니다. 시속 140킬로미터라는 속도나, 갑자기 상향조정된 것 같은 운전 실력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다. 비니가 운전을 하는 게 아니라 013이 알아서 제 갈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공포스런 의심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놈들이 현장에서 사용했던 화기가 거의 다 전문적인 군사장비였는데, 유통경로도 아직 못 밝혔다는 거야. 딴 건 다 그만두고라도 블랙호크 같은 건 자동차 대여하듯 빌려 쓰고 갖다 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루크 첸이 아닐지도 몰라.”
비니를 놀라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시속 150킬로미터 속도로 운전하고 있는 비니를 놀라게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짓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저 일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비니가 남들보다 좀 더 일찍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제일 안쪽 차선을 달리던 비니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바깥쪽 갓길로 뛰어들었다. 다른 데선 어떨지 몰라도 쿠간의 구름다리라는 별명이 붙은 카이잘 고가에서 운전을 이 따위로 했다간 진짜로 하늘을 날게 되는 수가 있다.
차가 갑자기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갓길로 돌진하는 몇 초 간, 나는 우리가 그대로 도로 난간을 들이받고 허공으로 뛰쳐나가는 줄 알았다.
차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도로 난간에 몸을 붙이고 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상황을 살피니 난간과 차체 사이에는 파리도 가볍게 눌러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
“루크 첸이 아니면?”
“나도 몰라.”
내가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서 정신병원에 끌려간다면 그건 비니 때문이다. 쥬드한테서 얻어먹은 진정제의 약발이 때마침 다했는지, 아니면 비니 옆에서는 백약이 무효인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이렇게는 더 못 살겠다는 절망감이 울컥 치밀었다.
“자리 바꾸자. 내가 운전할게.”
“운전이야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야?”
비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비니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다.
“하던 얘기나 계속 해! 그 자식이 아니면 대체 어떤 놈이라는 거야?”
“가비우스 그라하 기사단.”
“…….”
1초나 2초 정도 비니가 멀뚱하니 나를 쳐다봤다.
“그게 뭔데?”
침입자들이 노린 것이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목숨이 아니라 실은 니콜라스였다는 내 얘기에 비니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 역시 니콜라스가 놈들에게 붙들려서 헬기에 타는 걸 보기 전까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니콜라스는 정식으로 초대된 손님이 아니었어. 그자가 어젯밤 만찬에 나타날 거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잖아. 놈들이 그자의 행보를 어떻게 알고 거길 쳐 들어와?”
그런 거 나한테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다. 나도 모른다.
“게다가 놈들이 들이닥친 건 니콜라스가 나타난 지 불과 한 시간 이쪽저쪽이었어. 그 인원에 그 장비를 움직이자면 준비 기간도 엄청날 텐데, 항시 비상 대기라면 모를까, 테러 진압 같은 것만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라도 그렇게 빨리는 못 움직여.”
“내가 아는 거라곤 니네 작은아버지는 병원에 있고 니콜라스는 놈들에게 끌려갔다는 것뿐이야.”
사태의 진상이 생각했던 것 같지 않자 비니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비니도 나만큼이나 복잡한 일엔 조예가 없다. 사복 경찰이긴 해도 머리 쓰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고 비니와 나는 그동안 단순한 육체노동에만 주력해왔다. 사실 강력계 업무는 머리 쓸 일보다는 몸 쓸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다 보니 그쪽이 더 적성에 맞기도 했고…… 어쨌든 그 덕에 생각지도 않았던 데서 일이 꼬이고 앞뒤가 안 맞으면 우리끼리 백날 떠들어봐야 답이 없었다.
“루크 첸이 꾸민 짓이 아니란 말이야?”
물론 루크 첸도 비슷한 짓을 꾸미고는 있었겠지만, 누군가 선수를 쳤다.
“아마도…….”
땅거미가 어스름 질 무렵, 검은 벤츠 013이 루벳 거리로 부드럽게 들어섰다. 초저녁 거리 풍경은 언제나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사거리에서 몇 번 좌회전 우회전을 반복한 끝에 마리우스의 서점이 있는 거리 모퉁이에 도착했다. 거리 간판에 이제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비니가 차를 때려 박은 마리우스의 서점은 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새것으로 갈아 끼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까지 기름기도 가시지 않은 깨끗한 유리창 너머로 어른 어깨 정도 높이의 새 진열장이 놓여 있는 것까지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비니가 다 때려 부쉈으니까 새로 맞추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 진열장에 세계 각국의 최신판 도색잡지들이 쫙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신기할 정도로 고풍스럽던 마리우스의 서점이 어쩌다 이 모양으로 변했을까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번엔 머리 위에서 시뻘건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라서 올려다보고서야 건물 간판에 불이 켜진 걸 깨달았다. 마리우스가 그렇게 소원하던 빨간 네온 간판이었다.
“진작 이런 걸 해서 달았으면 용하고 기린이 길을 안 잃었을 텐데…….”
스핑크스 이마빡에 빨간 야광 팬티 뒤집어 씌어 놓은 듯 엽기적인 조합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듣고 있던 비니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달아줄 때 나도 그 생각 했었어.”
“니가…… 달아줬어?”
비니를 보는 내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거다. 비니가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변명하듯 말했다.
“마리우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해맑고 다정하던 마리우스는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하니 약간 겁이 났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딱 한번 마주친 게 전부였지만 나는 마리우스가 맘에 들었다. 비니한테 그런 봉변을 당하고도 그토록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 타고난 심성이 낙천적인 것 외에 다른 비결이 있다면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서라도 그 비결을 꼭 배우고 싶었다.
붉은 빛이 도는 책방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서가에서 고개를 내민 사람은 마리우스가 아니라 어디서 본 듯도 한 웬 여자였다. 염색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옥수수수염처럼 거칠어진 은발에 짙은 화장을 했는데, 행색만 보면 평범한 책방 점원은 아니었다. 누구더라…… 저 여자 어디선가 봤는데…….
여자가 카운터로 나오다가 비니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비니.”
“안녕, 슈가.”
“많이 놀랐죠. 나도 텔레비전으로 봤어. 세상에…… 당신 삼촌 집, 완전히 개박살이 났더라.”
탱탱한 가슴이 반 정도 드러난 야한 티셔츠에 얼기설기 구멍이 뚫린 청바지 차림의 여자가 비니를 와락 끌어안으며 다소 거친 표현으로 위로를 전했다. 무슨 악의가 있는 건 아니고 평소 언어생활에 문제가 좀 있어 보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근데 이 시간까지 여기 있어도 돼? 클럽 문 열 때 되지 않았어?”
클럽 얘기가 나오니 이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이 아가씨는 멀지 않은 곳의 라이브 클럽 「여신들」의 여신 중 하나다.
“우리 사장 어떤지 자기도 잘 알잖아. 어젯밤에 뉴스 보고 빡 돌아서 장사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당신 삼촌이 입원한 병원으로 쫓아가서는 소식이 없어. 홍콩 애들이랑 맞장 한번 뜨기 전엔 올 생각이 없나 봐.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문을 열까 했는데 글쎄, 세상인심이라니…… 당신 삼촌이 꿩 떨어진 매 신세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별 존만한 양아치 새끼들이 다 껄떡거리면서 뜯어 먹으려고 덤비는 거 있지?”
쿠간 시 암흑가는 지금 주인이 없다.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는 왕은 더 이상 왕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동안 왕의 위세에 눌려서 기를 펴지 못했던 2인자들의 세상이었다. 세상인심이 보통 그렇지만, 오로지 돈과 폭력이 지배하는 이런 뒷골목에서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지금쯤은 루크 첸 같은 발 빠른 야심가의 행보가 바쁘고도 용의 주도 할 터였다. 일단 몬티첼리 휘하에 있던 조직이 루크 첸에게로 돌아서면 몬티첼리가 기력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었다. 수족처럼 부리던 부하들을 거의 다 잃고, 세력 있는 조직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에서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다시 자신의 위치를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당한 일은 단순한 한밤의 습격이 아니라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허물어 내리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비니가 슈가를 떼어내며 도무지 나타날 기미가 안 보이는 책방 총각의 행방을 물었다. 슈가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와 보니까 없네?”
“없어?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비니가 나 들으라는 듯 건성으로 물었다. 비니도 종일 병원에서 마음 상할 일이 많았을 테니 피곤할 거다.
“병원에 간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 친구가 어딜 다쳤습니까?”
슈가가 그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아는 척을 했다.
“아까 점심때는 있었거든요. 옷에 피가 묻었길래 어딜 다쳤냐고 물었더니…….”
“피가…… 묻어요?”
“괜찮다고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죠. 걔가 보통은 가게를 잘 안 비우는데…….”
슈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가게 뒷방 문을 열어 젖혔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종이 뭉치와 책 더미가 커다란 나무 테이블 위에, 옆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주방에서 또 뭔가를 태웠는지 아직도 탄내가 방안에 가득했다.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니 커다란 닭 한 마리가 숯덩이가 된 채 버려져 있었다.
또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방문한 건 아니었을까? 사람이 그리운 마리우스는 누군가가 가게에 찾아오면 사람에게 정신이 팔려서 요리 중인 음식을 태우곤 했다. 뭘 찾고 있는지 확신도 없으면서 널려 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뒤집고 응접실에 딸린 문들을 열어 젖혔다.
“이 문은 어디로 통하는 문이지?”
“그거야 모르죠.”
잠겨 있었다. 흔들고 비틀어도 꿈쩍 않는 것을 보니 안에서 자물쇠라도 채운 것 같았다.
“뒤에 창고 같은 게 있나 봐요. 거기서 책 같은 걸 꺼내 오고 그러더라고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문고리를 잡고 흔들다가 동작을 멈췄다. 문틀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모호하기만 하던 막연한 기대가 그 희미한 핏자국으로 인해 어떤 확신으로 바뀌었다.
“너, 총 있지?”
비니한테 물었다.
“뭐?”
“좀 빌리자.”
문에 귀를 갖다 대고 무슨 소리가 나나 살펴도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바람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비니 총집에서 총을 빼들고 문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여기저기 옹이가 지고 패인 두꺼운 나무문에 사정없이 총질을 해대자 슈가가 기겁하며 방을 뛰쳐나갔다.
문은 생각보다 튼튼해서 총알을 여덟 발이나 맞고서야 달칵 소리를 내며 뒤로 밀렸다. 돌아보니 비니가 곧 주저앉을 듯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야…….”
“잘 썼어.”
총을 비니에게 돌려줬다. 비니가 총을 얼른 받아서 총집에 밀어 넣었다.
“너 괜찮아?”
슈가의 짐작은 틀렸다. 문 안쪽은 옛날 책들이 잔뜩 쌓인 퀴퀴하고 어두운 창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니콜라스가 서툰 응급조치를 받고 죽은 듯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문 뒤에 있는 것은 방이 아니라 통로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 돌계단 저 아래쪽에서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루벳 거리 같은 홍등가 구석에 있는 볼품없는 책방 지하실이 왜 이렇게까지 깊고 비밀스러운 걸까?
지하실로 한 발 들이미는데 비니가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보통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식의 방해가 견딜 수 없이 성가셨다.
“피곤하면 넌 그냥 돌아가. 나는 좀 둘러보고 갈게.”
잡힌 팔을 뿌리치고 지하실로 뛰어 들려는데, 비니가 순순히 놔주질 않았다. 비니가 내 멱살을 움켜쥐고 문 밖으로 끌어내더니 문짝이 부서져라 거칠게 닫았다.
“너, 아직 나한테 아무것도 설명 안 했어!”
비니가 나를 벽에 거칠게 밀쳤다.
“대체 왜 이래?”
“마리우스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그뿐이야.”
“그럼 곱게 말로 하지 왜 문짝에다 총질은 하고 난리야? 걔가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그렇지, 올 때마다 이러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어?”
마리우스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다. 만나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문도 새로 달아줄 거다. 하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다.
“여기, 아무래도 니콜라스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아.”
“너 정말 어디 아프냐?”
비니가 버럭 소릴 지르며 내 팔을 난폭하게 끌어 당겼다.
“일단 나가.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 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같이 병원에 가자.”
“그놈들이 니콜라스를 라두칸이라고 불렀어!”
라두칸이란 요즘 들어서 생각지도 않았던 장소에서 이상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몇 번인가 들었던 이름이다. 그것은 푸른 용과 기린이 찾아다니던 현자의 이름이기도 했고, 정체불명의 검객 오웬이 찾아다니던 남자의 이름이기도 했다.
자기 사업과 살인 행각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던 니콜라스가 변두리 사창가에 있는 책방까지 운영하고 있었다는 건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두칸이란 이름은 적어도 쿠간에서는 그렇게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이 책방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내 주장에 비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밤에 니콜라스는 피투성이였어! 엉망진창이었다고! 그런데 마리우스가 옷에 피를 묻히고 있었고 이 문틀에도 피가 묻어 있어!”
“니콜라스는 놈들하고 같이 헬기에 탔었다면서? 그런데 어떻게 여길 와?”
“어떻게든 탈출해서 여기까지 왔을 수도 있지!”
사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거울 호수는 여기서 상당히 멀었다. 호수에서 나와서 차를 탔다고 해도 그 과정에 분명히 목격자가 있었을 테고,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을 거다.
“실망시키고 싶진 않지만…… 마리우스도 꽤 덜렁거려서 여기저기 많이 다치는 편이야.”
비니가 어두운 지하실 계단으로 마지못해 한 걸음 들여 놓으며 중얼거렸다.
크고 위험한 괴물의 창자 같은 나선 계단을 한동안 말없이 내려갔다. 이따금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찬바람조차 음습한 야수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계단은 가파르고 통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축축한 벽을 더듬어 내려가느라 한발 한발이 조심스러웠다. 처음 이 통로를 발견했을 때는 막연히 보통 지하실보다는 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통로는 예상보다 훨씬 더 깊었다.
“볼 것도 없는 헌책방에 왜 이 따위 지하실이 딸려 있는 거야?”
비니가 투덜거렸다. 20분이나 계단을 따라 내려왔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더듬거리면서 천천히 내려왔다곤 해도 상당한 깊이였다.
“조심해. 바닥이 미끄러워.”
“걱정 마…….”
라고 대답하는 그 순간, 비니가 발을 헛디디며 쫙 미끄러졌다. 본능적으로 벽에 딱 붙어 섰지만 계단은 폭이 좁고 비니는 자기 혼자 굴러 내려갈 만큼 양심적인 놈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절대 비니 앞에 서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는데 깜빡 잊은 죄로 비니랑 엉켜서 가파른 돌계단을 굴러 내려갔다. 그렇게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하실 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그래도…… 빨리 내려왔잖아.”
어둠 속에서 비니의 뻔뻔하고 뺀질한 음성이 들려왔다.
계단이 끝났다는 것 외에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을 만큼 주변은 어두웠다. 바닥을 더듬다보니 아직껏 누워서 끙끙거리는 비니의 발목이 잡혔다. 바닥은 경찰서 화장실 크기 정도가 될까 말까 한 좁은 공간이었다. 벽과 바닥에는 축축한 이끼가 한 뼘이나 자라 있었는데 뇌진탕을 면한 것도 다 그 덕인 것 같았다.
벽을 더듬거리며 일어서서 비니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쪽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킥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비니가 비명을 질렀다.
“미안해. 거기 있는 줄 몰랐어.”
계단 맞은편을 두드려 보니 이쪽은 나무였다. 그럼 이게 문인가? 혹시 문고리 같은 게 있나 싶어서 여기저기 더듬고 밀고 하는데 어느 순간, 손이 따끔했다.
“아…….”
화가 나서 있는 힘껏 문짝을 발로 걷어차는 순간, 문짝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으로 빛이 들어와서 칠흑 같은 어둠을 반으로 잘랐다.
“왜 그래?”
비니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손에 가시가 박혔어.”
“어디 봐.”
비니가 새어나오는 불빛에 내 손을 끌어당겼다. 손바닥에 자잘한 가시가 두세 개 박혀 있었다. 비니가 가시를 손톱으로 살살 일으켜 뽑아냈다.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면, 안에 사람이 있나 봐.”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많이 놀랐을 거야. 문이 빠개질 정도로 세게 걷어찼으니까.”
비니가 두 번째 가시를 뽑아서 바닥에 털고는 내 손을 눈가에 더 바짝 갖다 댔다.
“그게…… 니콜라스라고 생각해?”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은 잔가시를 마저 뽑아내면서 비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들어가 보면 알겠지.”
비니가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나를 밀치고 문에 붙어 서서 문고리를 잡고 앞으로 조용히 당겼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당겨야 열리게 되어 있는 걸 무턱대고 밀면서 안 열린다고 걷어차서 절단을 내놨으니, 앞으론 마리우스한테 찬물 한잔도 못 얻어 마실 거다.
문이 열리면서 밝은…… 그러면서도 얇은 천으로 한 겹 씌운 듯 탁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이상한 책방의 수상쩍은 지하실에 뭐가 있든 상관없었다. 마피아 보스의 저택에 겁도 없이 숨어 들어온 니콜라스를 만나서 저녁도 같이 먹었고, 수십 명이나 되는 인간 백정들에게 밤새 쫓겨 다니기도 했다. 게다가 막판엔 니콜라스가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헬기가 내 눈앞에서 얼어붙은 호수에 곤두박질치는 것까지 봤으니 세상엔 나를 놀라게 할 만한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뛰어 들어가기에 앞서 문틀에 붙어서 안을 힐끔 들여다보던 내 심장에 갑작스런 마비 증세가 왔다. 총을 꼬나 잡고 내 뒤를 따라 오던 비니도 그냥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그렇다고 지하실 안에 별스럽게 희귀한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비니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지하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책이었다. 분명히 책인데…… 대체 이게 다 뭘까?
마리우스의 지하실은 지하에 있다는 것만 빼면 어느 한 구석도 지하실다운 곳이 없었다. 격납고만큼이나 넓은 이 공간은 마치 수 만년은 족히 묵은 종유 동굴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방의 벽 어느 한 곳도 반듯한 면이 없고 어지럽게 놓인 책장도 크기와 높이가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사무실에 놓고 쓸 만한 아담한 크기부터 높은 것은 거의 3, 4층 높이에 이를 정도인데다 벽면엔 그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온갖 크기의 책이 빼곡히 꽂히고 쌓여 있었다. 그중엔 이제 곧 쓰러지지 않을까 위태로운, 오로지 책으로만 이루어진 기둥도 수십 개에 이르렀다. 어찌 보면 수백 개의 개미탑이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리 위엔 책장과 책장을 잇는 구름다리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발밑에는 돌계단과 복도가 미로처럼 어지럽게 연결돼 있었다. 아니, 이건 분명히 미로였다. 비니와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런 이중 미로의 중간 지점이었다. 밑으로 2층 정도 더 내려가야 지하실 바닥이었다.
홍등가 구석의 허름한 중고 책방 이름으로 갖다 붙이기엔 라두칸 장서각이란 이름이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게 장서각의 실체였나? 종이와 양피지로 이어진 셀 수 없는 지식의 탑이…… 이런 건 진짜 상상도 못했다.
“내려가려면 털실이라도 한 뭉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비니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있어?”
내가 물었다. 비니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아니.”
“그럼 그냥 내려가자.”
내가 계단을 한 발 내려서자 비니가 황급히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잠깐 있어 봐. 생각을 좀 해보자.”
아무래도 비니는 들어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비니는 사람이나 길 잃은 강아지 찾는 데는 명수지만 미로 탐험은 알콜 주사 맞은 흰쥐보다 서툴렀다.
“그럼 넌 위에 올라가서 털실을 한 뭉치 찾아갖고 내려와. 나는 먼저 좀 둘러보고 있을 테니까…….”
돌아서서 내려가려는데 비니가 내 옷깃을 붙든 채 놓을 생각을 안 했다.
“보고도 몰라? 이건 어떤 미친놈이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말고 안에서 죽으라고 만들어 놓은 함정이란 말이야!”
“니 말이 맞아, 비니.”
다시 한 번 눈앞에 펼쳐진 기묘한 미로를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차분히 훑어봤다. 세상에 이토록 기이한 장소가 또 있을까…….
“여긴 니콜라스하고 닮았어.”
2층 높이에서 내려다볼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미로는 짐작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바닥 높이가 제 각각으로 보인 것은 책장과 책장 사이사이에 2층, 혹은 3층 높이의 바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바른 길이라곤 애초에 없었고 가다보면 경사로 위로 2층, 막다른 길, 돌아서면 복도는 계단도 없이 뚝 끊어진 채 허공에 함정처럼 뻗어 있고 한참 떨어진 맞은편 위쪽에 3층이 불쑥 솟아 있는 형국이었다. 물론 그 아래쪽으로도 엉망진창의 미로가 뒤 엉켜 있어서 금방 지나오고도 어느 길로 왔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모든 것들이 마치 정신병자의 머릿속처럼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저…… 제이.”
한동안 말없이 뒤따라오던 비니가 헛기침을 하며 2미터 정도 끊어진 복도를 뛰어 넘으려고 뒷걸음질 치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떨까? 정 궁금하면 나중에 마리우스한테 부탁해서 안내를 해달라고 하던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끊어진 복도를 뛰어 건너려는 생각을 고쳐먹고 책장을 타고 위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책장이 무너지지만 않으면 구름다리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길이 좀 보이지 않을까?
“013말이야. 그냥 가게 앞에 세워 놓고 들어왔거든.”
혹시 내가 못 들었나 싶었는지 비니가 언성을 좀 높였다.
“그래서?”
“순찰 경관 눈에라도 띄면 이번엔 보관 창고도 못 들리고 폐차장으로 끌려갈 거야. 담당자가 그런 말하는 걸 들었단 말이야.”
“지금 차 걱정할 때가 아니야. 비니.”
책장에 매달려보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책장에 꽉 찬 장서의 무게가 엄청날 터였다.
책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한 칸 한 칸 밟아 위로 올라갔다. 별로 어렵지는 않았다.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이, 정말 괜찮은 차란 말이야!”
비니가 책장의 책이란 책은 모조리 무너뜨리며 나를 따라 올라왔다. 낡은 밧줄과 송판으로 얼기설기 엮은 구름다리는 꼭 생각했던 것만큼 위태로워서 올라타자마자 어찌나 심하게 요동을 치는지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이 판국에 웬 차 타령이야? 넌 차에는 관심도 없었잖아!”
비니가 구름다리에 기어오르려고 매달리면서 다리를 있는 대로 뒤흔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 다리는 유격 훈련용 삼각 줄다리보다 나을 게 별로 없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난간을 움켜잡았다.
“013은 보통 차가 아니야.”
그렇겠지. 013을 으슥한 길가에 세워놓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수많은 주인들은 살아서 013에게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이 얼토당토않은 미로에서 헤매게 된 게 혹시 그 재수 옴 붙은 차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문득 들었다. 아니…… 이제 와서 013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 그 차를 타기 훨씬 전부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놈이었다.
고생해서 높은 곳까지 올라온 보람이 없지는 않아서 최소한 우리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삐죽삐죽 솟은 탑 꼭대기 같은 책장 사이로 지하실 입구가 조그만 구멍처럼 보였다. 아래쪽에서 무려 두 시간이나 헤매 다녔는데 지하실 입구에서 불과 20여 미터 정도 안으로 들어왔을 뿐이라니…… 이곳은 정말 니콜라스하고 닮았다. 복잡하고 고약하고 근사한 것이…….
“그만 돌아가자, 제이. 이러다 길이라도 잃으면 마리우스가 몇 년 후에 책 더미 속에서 우리 시체를 찾게 될지도 몰라.”
이제 그만 사실을 말해야 할까 보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비니를 돌아봤다.
“우린 벌써 길을 잃었어.”
비니는 우리가 처한 곤란에 대해 특별히 나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름다리를 타고 얼마 정도 가다가 다리가 끊어지자 배고파 죽겠다면서 더 이상은 움직이려 들질 않았다.
“그럼 넌 여기서 살아. 나는 내려가서 길을 찾을 테니까.”
“난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비니가 퉁퉁 부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그래봐야 여긴 아무것도 없어. 정 못 견디겠으면 나를 잡아먹든가.”
마침 앞에 길게 늘어진 밧줄이 있었다. 바닥에 닿을 만큼 길지는 않지만 중간쯤에서 뛰어내리면 크게 다칠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길을 잃은 거야?”
비니가 어쩔 수 없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악 쓰듯 물었다.
“여섯 번째 십자형 복도를 지나서 왼쪽으로 돌았을 때부터.”
거기서부터는 완전히 거미줄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비니는 제멋대로 뚫린 방사형 아홉 갈래 길을 보고는 그냥 돌아가자며 심술 난 늙은 노새처럼 한 발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었다. 비니는 그때 이미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겁을 잔뜩 집어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녀석이 혼자서라도 왔던 길 되짚어 돌아가지 않은 것은 우정이나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비니는 그때 벌써 방향감각을 잃은 지 오래라 혼자서는 되돌아갈 수가 없었던 거다. 비니가 밧줄 끝에서 아래로 풀쩍 뛰어내렸다.
“좀 쉬었다 가자.”
비니는 완전히 탈진한 기색이었다. 상어 같은 체력을 가진 놈이라서 비니가 이렇게까지 지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미로는 교묘함과 음모, 그리고 비밀의 산물이었다. 비니를 지치게 하는 것도 그렇게 비틀린 상징들이다. 그 어느 것도 비니하고는 맞지 않았다. 비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피곤해서 비니 옆에 주저앉았다.
비니가 책장에서 비죽이 튀어나온 두루마리 하나를 끄집어냈다. 이곳에 쌓여 있는 책의 60%가 이런 두루마리 형태였다.
누렇게 바래고 군데군데 좀이 슨 두루마리 책은 금방이라도 삭아 없어질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 양피지도 아니고 보통 종이보다 질감이 훨씬 거칠었다.
“뭐라고 쓴 거야?”
“몰라.”
“이런 거 읽을 줄 안다고 했었잖아. 뭐라더라…… 무슨 문자?”
비니 눈에 그 글자가 그 글자로 보이는 모양이지만 이건 우니 문자하고는 한 구석도 닮은 데가 없는 다른 글자였다. 이 종이는…… 파피루슨가?
“루벳 거리 지하에 왜 이런 게 있을까?”
비니가 파피루스를 말아서 제자리에 얹어놓으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거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게 아닐까?”
순찰 경관 루디가 마리우스에게 새로 생긴 책방이냐고 물었던 게 기억났다. 루디의 질문에 마리우스는 거리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거라고 농담처럼 대답했었는데 그게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니가 목을 쑥 빼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꽤 오래된 것 같기는 해. 거리가 생기기 전이면…… 백 년? 선주민들이 건설한 지하 벙커라도 되나?”
그런 거 나한테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아무리 이상해도 이미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알고 싶은 것은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이자 진퇴양난의 함정이기도 한 이 묘한 서고가 니콜라스와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느냐는 거였다.
“니콜라스는 없잖아. 여기…….”
비니가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헷갈리고 정신없는 건 이만해도 충분해. 여기 니콜라스까지 버티고 있었으면 돌아버렸을 거야.”
그쯤에서 일어섰다. 더 앉아 있어도, 더 헤매봐도 나올 게 없었다. 니콜라스는 여기 없다. 있다고 믿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그만 나가자.”
“길을 모른다며?”
“길은 필요 없어.”
“날아갈래?”
“그게 좋겠다.”
비니가 내 면전에 대고 너 미쳤니? 라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히 그랬다. 그러니까 내 말은 룰을 무시하자는 뜻이었다. 종이에 인쇄된 미로 찾기 게임을 하다가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입구부터 출구까지 그냥 일직선으로 쭉 그어버리고 종이를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물론 여기는 종이 위의 미로와는 달랐다. 따라서 규칙을 무시하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2, 3층 높이의 서고는 기어서 넘어가고 장애물이 거의 천장까지 닿아서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경우만 길을 찾아 돌아갔다. 걸어 다니는 것보다 몇 배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최소한 방향을 잃지는 않았다. 나중엔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웠지만 어쨌든 한 시간 정도 책장을 오르내린 후에 지하실 입구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지하실 문에 거의 다 가서였다.
“문이…… 이상해.”
비니가 망연자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밀히 말해 문은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멀쩡했을 뿐…… 그러니까 이 문은 내가 3시간 전에 발로 차서 부순 그 문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비니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주먹 따귀를 한대 갈기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조차도 자신을 한대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비니를 남겨 두고 문을 향해 올라갔다. 꼭 그 문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지상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하나뿐이라는 법도 없으니까 어디로든 올라갈 수만 있다면…… 그런 희망을 갖고 문을 열었다가 기겁을 하고 물러섰다. 무서워서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왜 그래?”
내 얼굴 표정을 본 비니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왔다.
“최악이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막혔어?”
“아니. 계단은 있어.”
“그럼 뭐가 문제야? 일단 나가자.”
비니 생각보다 문제가 컸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야. 밑에 지하실이 더 있나 봐.”
갇혔다. 금방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들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은 공포보다 더 무겁게 우리를 내리 눌렀다.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라 앉아서 거친 숨을 쌕쌕 몰아쉬던 비니가 갑자기 책장에서 책을 한 무더기 꺼내서 바닥에 쫙 깔더니 그 위에 길게 누웠다.
“나는 절대로, 죽어도 밑으로는 더 안 내려갈 거야!”
비니가 딱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5분도 안 지나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도 좀 저래 봤으면 좋겠다.
더는 한 발짝도 더 옮겨 놓을 기력이 없어서 나도 비니 옆에 누웠다. 비니 흉내를 내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볼까 했지만 이리저리 뒤척일수록 정신만 말똥말똥해졌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공중누각처럼 위태롭게 쌓인 두루마리와 책 더미들이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아찔했다. 이런 곳이 언제부터 여기 존재했을까? 책이란 건 본래 전혀 해롭지 않은 물건인데 그런 걸로 이렇게 치명적인 함정을 만들어낸 놈은 대체 누굴까? 건축이란 건 본래 과학적이고 정연한 것인데 어떻게 이런 구조물이 존재할까? 이 공간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미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빛도 그랬다. 밝지만 탁했다. 미로 전체에 옅은 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천정이나 벽 어디에서 전등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어쩐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일어나 앉아서 잠시 망설이다가 또 다른 지하로 통하는 문으로 다가갔다. 뭐가 있을까? 이 지하 장서각만 해도 꽤나 깊을 텐데 이 밑에는 또 어떤 비밀스럽고 기묘한 것이 숨겨져 있을까?
문을 밀고 한발 들여 놓는데 뒤에서 뒤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잠꼬대를 하며 뒹굴고 있었다. 밑에 내려갔다가 또 다른 미로나, 아니면 어떤 위험에 휘말려서 올라올 수 없게 되면 비니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다가 그냥 문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비니의 사격실력이 형편없는 건 그 불가사의한 방향감각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라면 며칠을 헤매서라도 나갈 길을 찾아내겠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비니는 이곳을 혼자 빠져 나갈 수 없을 터였다. 탄저병 걸린 가젤처럼 한 자리만 빙빙 돌다가 죽을 수도 있었다. 책방 지하 창고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여기에서라면…… 그리고 비니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거친 나무문을 닫았다. 지금 급한 건 세상 밑바닥 탐험이 아니라 세상으로 무사 귀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목이 긴 동물의 목구멍 같은 지하 통로에서 이상한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조그맣고 규칙적인 소리였다. 자연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소리…… 시간이 약간 흘렀을 때, 그것은 마치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통로 아래쪽에 누군가가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어쩔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문을 열어젖히고 어두운 통로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잘못 들었나? 내 귀가 잘못돼서 있지도 않은 헛소리를 들었나? 한동안 정신없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가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 속에 잠시 멈춰 섰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의 발소리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이 줄줄 흘러내릴 듯 축축한 벽을 손으로 짚고 서서 어둠 속에서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낼 누군가를 기다리는 몇 분간은 길고도 두려운 시간이었다.
미로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희뿌연 빛의 입자가 저 아래쪽에서 담배 연기처럼 두서없이 피어올랐다. 빛은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반적인 빛의 성질이 얼마나 직선적인가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빛이라기보다는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수만 마리의 반딧불 무리에 더 가까웠다. 밝지만 불길하고 꺼림칙한 빛 한가운데에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불과 몇 미터 앞까지 다가왔어도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빛은 밝으면 밝을수록 더 탁해져서 사물을 감추고 있었다. 몇 계단 아래서 그 빛나는 안개덩어리가 멈칫하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형사님?”
“마리우스?”
짙은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거추장스러운 것을 걷어내듯 서너 번 허공을 휘젓자 안개가 통로에 넓게 흩어졌다. 빛이 흩어진 자리에서는 마리우스가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맥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내려 오셨어요?”
마리우스는 요즘 젊은 애들 유행에 걸맞게 한쪽 다리가 온통 찢어진 청바지에 입에 담기 민망한 욕설이 휘갈겨진 반짝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엔 묵직해 보이는 꾸러미를 들고 있었고 어딜 봐도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마리우스의 표정은 변함없이 맑고 순했다. 이 청년에게는 악의라는 게 손톱 끄트머리만큼도 없었다.
“아니.”
“올라가요. 피곤해 보여요.”
마리우스가 주저앉은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 길고 가파른 계단을 거의 기다시피해서 올라와보니 비니는 잠에서 깨 있었다. 녀석은 빳빳하게 굳은 채 창백한 얼굴로 지하 통로를 노려보고 앉아 있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화도 많이 나 있었다.
“비니 형사님!”
마리우스가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지만 비니는 마리우스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너…….”
비니가 노여움에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비니를 안 지 꽤 오래 됐지만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내가 없어져서 엄청나게 놀랐던 모양이다.
“발소리가 나길래 잠깐 내려갔다 온 것뿐이야.”
“나를 여기다 버려놓고…… 너 혼자…….”
“금방 돌아왔잖아. 애냐? 10분도 혼자 못 있게?”
나는 비니한테 미안한 거 하나도 없다. 정말 지하통로로 내려간 지 10분도 안 돼서 올라왔을 뿐 아니라 마리우스까지 데리고 왔다. 물론…… 내가 내려가지 않았어도 마리우스는 이리로 올라왔을 테지만.
“잠깐 쉬었다 올라가자.”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어서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았다. 비니는 여전히 고리눈을 하고 나를 노려봤고 마리우스는 비니 때문에 겁먹은 얼굴로 주춤거렸다.
“니콜라스가 그렇게 좋아?”
“무슨 소리야?”
“니콜라스가 있나 싶어서 내려갔던 거잖아? 마리우스라서 엄청 실망했을 텐데…… 그 자리에 주저앉지는 않았어?”
주저앉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니 눈엔 내가 그 자식이 좋아서 찾아다니는 걸로 보여?”
“완전 그렇게 보여!”
비니랑 내가 잠시 서로를 노려봤다. 맘 같아서는 달려들어서 뒤통수라도 한대 갈겨주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이 없었다.
“저기…….”
마리우스가 비니와 나 사이에 얼른 자리를 잡고 앉더니 들고 있던 꾸러미를 바삐 풀었다. 제법 묵직해 보이던 꾸러미 안에는 커다란 호밀 빵 3덩어리, 삶은 감자 다섯 개, 튀긴 닭 한 마리와 맥주 서너 깡통이 들어 있었다. 비니랑 내가 동시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배 안 고프세요? 이거라도 좀…… 드실래요?”
마리우스의 꾸러미를 깨끗이 거덜내는 데 걸린 시간은 약 15분 정도였다. 그 사이에 비니와 내가 나눈 얘기라곤 마지막 남은 삶은 감자 한 개를 놓고 다투다가 반씩 나눠 먹자고 한 게 전부였다. 먹느라 바빠서 다른 얘기는 할 틈도 없었다. 미로에서 길을 잃고 애먹은 얘기를 번갈아가며 마리우스에게 해준 게 유일한 대화였다.
“대단하세요. 두 분 다…….”
얘기 듣는 내내 마리우스는 닭 날개를 쪽쪽 빨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보통은 중간까지도 못 찾아들어가고 그냥 되돌아가거든요. 그것도 며칠이나 걸려서 간신이요. 어쨌건 3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그날로 찾아내는 사람들은 드물어요.”
“여기 오는 사람들이 많아?”
비니가 놀라서 물었다. 마리우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최근엔 별로요.”
얘기 도중에 나랑 비니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획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야?”
마지막 맥주 한 모금을 털어 마시면서 내가 물었다. 마리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라두칸이죠. 그러니까 여기 이름도 라두칸 장서각인 거고요.”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
비니가 중얼거리며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그리곤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도 처음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겪어보니까 생각보단 멀쩡하더라고요.”
마리우스가 빈 깡통과 닭 뼈 같은 것을 주섬주섬 보따리에 싸면서 별다른 감흥 없이 이 엄청난 장서각에 점원으로 취직하게 된 경위 회상했다.
“옛날에 사고로 크게 다쳤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라두칸이 치료를 잘해줬어요. 치료비 대신 책방이나 봐달라고 하길래 별 생각 없이 승낙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이 지경이더라고요.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겠어요? 약속을 했는데…….”
“그러니까 여기 주인이 삼촌은 아니란 얘기지?”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라고 해서요. 해로운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마리우스가 그만 일어날까요? 라는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 사인에 비니랑 나는 지체 없이 일어섰다.
마리우스가 길을 알고 있는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지름길이나 샛길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대체로 망설임 없이 미로를 헤치고 나가던 마리우스도 이따금 멈춰 서서 한동안 망설인 후에야 방향을 잡아야 할 정도로 미로는 복잡했다.
4층 정도 되는 높이에서 2층 높이의 끊어진 복도로 뛰어 내리기도 하고 나선 계단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구름다리를 타기도 하고, 사방 1미터도 안 되는 맨홀 같은 통로를 기어서 지나기도 하면서 우리 세 사람은 간신히 미로를 빠져나왔다.
“두 분이 여기서 몇 시간 헤맨 건 약과예요. 저는 처음에 2주일이나 헤매고 다닌걸요. 그땐 정말 그 작자를 죽여버리고 싶었죠.”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그래도 용케 빠져 나갔네.”
마리우스가 여기서 나가는 데 2주일 걸렸으면 나는 얼마나 걸렸을까 생각하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쫙 솟았다.
“운이 좋았죠.”
무려 열여섯 개나 되는 방사형 통로 앞에서 마리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곳은 작은 광장인데 여태까지 이 비슷한 곳을 두 군데나 지나왔다. 마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이게 나오면 안 되는데…….”
“길을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비니가 펄쩍 뛰어 오를 정도로 놀라서 마리우스를 다그쳤다. 나도 모르게 비니 옆구리를 팔꿈치로 꾹 찍었다. 지금은 길을 다 모른다고 마리우스를 타박할 입장이 아니다.
“라두칸도 다는 모를걸요.”
마리우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아래층엔 또 뭐가 있어? 설마…… 이런 게 하나 더 있는 건 아니겠지?”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마리우스를 졸졸 따라가면서 물었다.
“지하 4층까지는 여기랑 비슷해요.”
비니와 내가 동시에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하 4층?”
“4층도 있어?”
코너를 돌아가면서 마리우스가 뭘 그렇게 놀라느냐는 듯 우리를 돌아봤다.
“지하 11층까지 있다는데 저도 7층 아래로는 못 내려가 봤어요.”
마리우스가 복잡한 서고를 돌고 돌아 구름다리를 타고 4층과 3층 사이에 묘하게 뚫려 있는 터널을 기어나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일전에 푸른 용과 기린의 일로 병원에 들렀을 때 의사가 했던 말이 흐릿하게 맴돌고 있었다.
뭐라 그랬더라……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을 때 썼던 돌로 만들어진 13층짜리 탑…… 천 살도 더 먹은 늙은 기사, 마리우스…… 지하 11층하고 지상에 있는 2층을 합하면 13층짜리 탑이란 주장이 헛소리가 아니란 건데 그럼 설마…….
“저기…….”
“예?”
마리우스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저 멀쩡한 얼굴로 천 살도 넘었는데요…… 어쩌고 하면 나는 그냥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뭐 하고 있었어? 아래층에서?”
“가끔 한 번씩 내려가요. 정리할 것도 있고, 찾을 것도 있고…….”
“먹을 거 한 보따리씩 싸들고?”
“조심하세요.”
마리우스가 폭삭 허물어진 복도를 훌쩍 뛰어 건넜다.
“라두칸이란 자가 여기 왔었지?”
바로 뒤따라 허물어진 복도를 건너뛰면서 다시 물었다.
“그 음식…… 누군가 갖다 주려고 가지고 있던 거 아니었어?”
마리우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있는 힘껏 복도를 건너 뛴 비니가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몇 년을 같이 다녔어도 이런 식의 기습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비니는 정말 사람을 빛의 속도로 덮친다.
“동 틀 무렵에 그가 가게에 왔었던 건 사실이에요.”
비니랑 바닥에 뒤엉켜서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마리우스가 비밀을 털어 놓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니를 밀치고 후다닥 일어섰다.
“그자가 지금 여기 있어?”
“모르겠어요. 지하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찾아다녀봤는데…… 못 찾았어요.”
마리우스가 새벽에 잠을 깬 것은 단순히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듯한 느낌에 어디 창문이라도 열렸나 싶어서 가게로 나온 마리우스는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라두칸이, 그러니까 니콜라스가 가게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도둑이 든 줄 알았어요. 몰골이 형편없었거든요.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온통 피투성이에…….”
놀라서 테이블에 앉혀 놓고 방에 들어와서 수건과 붕대 같은 것을 찾아가지고 나왔을 때 이미 니콜라스는 오간 데가 없었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점심때까지도 안 나타나길래 혹시나 해서 내려와봤어요.”
비니가 코트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너덜너덜한 니콜라스의 수배 전단을 꺼내서 마리우스 코앞에 들이밀었다. 비니가 저런 걸 챙겨 가지고 다닌다는 게 뜻밖이었다. 사진을 고민스럽게 노려보던 마리우스의 대답이 사뭇 엉뚱했다.
“닮았네요.”
“이 사람…… 아니야?”
비니가 다그쳤다.
“이렇게 이상한 얼굴을 한 라두칸은 본적이 없어서요. ……한 번도요.”
마리우스가 전단을 비니에게 돌려주며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라두칸이 니콜라스 헤슬렘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속 시원하게 확인한 비니가 전단을 도로 접어서 주머니에 챙겨 넣는 동안 나는 책장 한 옆에 기대서서 힘겹게 심호흡을 했다. 그자가 정말 사람일까? 그 몸을 해 가지고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을까…….
“내려가서…… 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비니가 나를 돌아봤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다면 당연히 찾아서 데리고 나와야 된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다.
“여태 찾다가 못 찾았다니까요!”
비니가 마리우스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죽을지도 몰라.”
“저는 라두칸에 대해서 걱정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마리우스의 음성이 약간 부어올랐다.
“형사님들은 이해 못 해요. 라두칸이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어요. 적어도 여기서는요. 이 장서각은 그자의 영지라고요.”
말로는 걱정하는 거 아무것도 없다지만,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이 정신병원이나 감옥에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이다. 게다가 이런 미로가 저 아래층에 두 개나 더 있다면 니콜라스를 찾는 일은 덤불을 헤치며 바늘 하나 찾아 헤매는 것보다 더 막막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 자식을 찾아야 돼!”
비니를 옆으로 밀고 내가 나섰다.
“니콜라스는 병원에 가야 돼. 재판을 받더라도 그 후에 받게 될 거고…… 최악이라고 해봐야 다시 정신병원에 가는 정도일 거야. 니콜라스는 벌써 법원에서 심신 상실 판정을 받은 상태니까, 재판에서 판정이 번복되지 않는 이상 전기의자에 앉는 일은 없을 거야.”
라고 그럴 듯하게 말은 했지만, 실제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라두칸이 전기의자에 앉거나 말거나 저는 관심 없다니까요? 제 말뜻은 제가 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두 분을 아래층으로 데리고 내려갈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라두칸이 지하에 있어도 제 발로 걸어 나오기 전까지는 없는 거나 똑같아요. 솔직히 아직 여기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너 정말 이럴래?”
비니가 마리우스의 옷깃이라도 틀어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비니는 몹시 피곤한 상태인데다 마리우스는 불시에 뒤에서 덮친 비니의 차를 피할 만큼 몸놀림이 빠르다.
“두 분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라두칸은 괜찮을 거예요.”
“니콜라스는 심하게 다쳤어!”
마리우스가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맑고 순해 보이는 눈인데도 지금은 거스를 수 없을 만치 단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제 말을 믿으세요. 그는 괜찮을 거예요.”
일이 제대로 되려면 마리우스를 잘 설득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야 했지만, 우리는 도리어 마리우스에게 설득당해서 지상으로 올라오고 말았다.
니콜라스를 지척에 두고 그냥 돌아 나온다는 게 어처구니없는 짓이기는 했지만 마리우스가 뭐라고 말 붙일 틈도 안 주고 좁디좁은 책장 사이로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황급히 뒤따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마리우스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비니를 데리고 이 미궁에서 최소한 2주는 헤매야 될 판인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비니랑 둘이서 이 어지러운 미로를 수색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서에 지원 요청해서 정식으로 수색하자.”
내 의견이 타당하다고 여겨졌는지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길 제대로 뒤져보려면 몇 명이나 있어야 될까?”
“글쎄…… 한 30~40명 정도?”
미로의 규모를 감안하면 그것도 충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 사건 뒷수습이 워낙 큰일이라서 30명을 빼내는 건 지금으로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 침입자들의 헬기에 끌려 탔던 니콜라스가 새벽녘에 루벳 거리에 나타났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요청이 받아들여진다고 하더라도 지금 사정으로는 큰 선심 쓰는 척 하면서 어리버리한 초짜 서너 명 정도 붙여줄 공산이 컸다.
“그런 거 안 하면 안 될까요?”
앞서 가던 마리우스가 뒤를 돌아봤다. 얼굴에 약간의 근심이 어려 있었다.
“이건 중요한 공무야. 우린 양보할 만큼 했어.”
비니가 딱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요…….”
마리우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예전에도 한 번 무슨 원정댄가 조사댄가가 하는 사람들이 100명이나 지하실로 몰려 내려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들 다 찾아서 데리고 나오는데 한 달 반이나 걸렸어요. 제가 그때 고생 좀 했다고 이런 얘기 하는 건 아니고요…….”
수많은 책장을 돌고 돌아 드디어 출구 앞이었다. 앞서가던 마리우스가 가운데가 쩍 나간 문짝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요, 그때 그 사람들 중에 네 명은 아직도 못 찾았다는 거죠.”
올라가는 길은 내려올 때보다 두 배는 더 길고 가파르게 느껴졌다. 그 어두운 통로에서 마리우스는 이상하게 빛났다. 두 번째 통로에서 본 것처럼 탁한 빛에 둥그렇게 휘감긴 형상이었는데 꼭 지하실에서 빛을 잔뜩 묻히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이상했지만 비니나 나나 이미 그걸 이상하게 느낄 만큼의 기력도 남아 있질 않았다.
총알 세례에 벌집에 된 문을 본 마리우스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마리우스는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한결같이 친절했는데 우리들은 번갈아가며 행패만 부린 꼴이었다. 가게에 오가는 사람이 아무리 없어도 우리 같은 사람은 이제 반갑지 않을 게 분명했다.
“문틀에 피가 묻어 있는 걸 보고 내가 좀 흥분해서…… 그랬어. 미안해.”
“예에…….”
마리우스가 얼른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여전히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날 밝는 대로 새로 해서 달아줄게. 마음 풀어.”
비니가 마리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옷에 묻어 있던 환한 입자가 밀가루처럼 사방에 날렸다.
“괜찮아요. 조금만 고치면 되겠는데요, 뭐…….”
가게가 다 부서졌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하긴 그건 사고였고 누구라도 자기 집안에 들어와서 문짝에 총질을 해댄 사람을 좋게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니가 포기하지 않고 마리우스를 달래기 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문에다 명패도 달자. 네온으로 【지하실】이라고 글자를 만들어서 붙이면 방 분위기가 엄청 틀려질 걸? 요번엔 파란색으로 할까?”
파란색 네온이란 소리에 마리우스가 솔깃한 표정이었다.
“실내에도 그런 걸 달 수 있어요?”
“물론이지. 침대 머리맡에 달아놓는 사람도 많아. 파란색 싫어?”
마리우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요.”
미궁에서 보낸 하룻밤은 길고 한심했다. 여기가 거기 같고 한없이 돌아도 제자리인 미로 탐험은 총 든 괴한들에게 쫓기는 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몹시 두렵고 불쾌했다. 녹초가 된 채 식탁 테이블에 늘어져서 마리우스가 차 한 잔 끓여주기를 기다리는 사이 비니는 가게 앞에 세워 놓은 013의 안부를 확인하러 나갔다.
“그…… 푸른 용하고 기린은 왜 니콜라스를 찾고 있는 거지?”
“그건 푸른 용하고 기린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를 앞에 놓고 보니 잠시 묻어뒀던 의구심도 함께 피어올랐다. 니콜라스와 라두칸이 동일인물이란 걸 알았을 때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머리를 좀 식히고 생각해보니 내가 알고 있는 건 그저 니콜라스가 라두칸이란 이름도 하나 더 갖고 있더라는 사실 뿐이었다.
사실 그것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건 니콜라스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마리우스가 새벽에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니콜라스는 살아 있고 그 무지막지한 살인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니콜라스가 살아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뜨거운 녹차를 막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밖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니가 지르는 소리였다. 마리우스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013이 폐차장으로 끌려간 모양이지…… 개의치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비니가 사색이 되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없어! 013이…….”
“어쩌냐…….”
사실은 잘됐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허둥거리는 것을 보니 안됐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013과는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비니를 위해, 그리고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지 않는 한 계속 비니와 같이 다니게 될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었다. 그래도 비니한테는 아직 분홍색 혼다가 남아 있으니까…….
비니와 내가 마리우스의 서점에서 나온 것은 출근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였다. 급한 대로 서에서 파견한 두 명의 얼빵한 신참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마리우스에게 라두칸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을 캐물었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은 없었다.
예전에 마리우스가 크게 다쳐 죽을 뻔했었는데 그때 니콜라스가 나타나서 치료를 해주고 가게를 맡긴 게 전부라는 것이었다.
“그 전에 일면식도 없었으면 어떻게 니가 다쳤을 때 딱 맞춰서 치료를 해주러 나타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어디선가 데리고 왔어요. 나는 상처가 덧나서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다짜고짜 하는 말이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나를 가져야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가……져?”
마리우스가 지금 생각해도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래서 난 또 엄마가 새로 발견한 사이비 종교 전도사거나, 과부 홀리는 게 전문인 돌팔이 의사거나…… 아무튼 그런 천한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좀 미친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대꾸하기도 싫어서 자는 척 하고 그냥 누워 있는데 엄마가 귓전에 대고 얼마나 울고불고 하는지 견딜 수가 있어야죠. 엄마는 나를 평생 못 봐도 괜찮으니까 제발 살려만 달라고 그자한테 울면서 매달리다가…… 또 내 옆에 와서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 나가기도 전에 탑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다가…… 또 찢어지는 소리로 울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아픈 사람 옆에서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언제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해도 넌더리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라두칸한테 그냥 맘대로 하라고 그래버렸어요. 진짜로 나를 살려 놓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성 안에서 제일 용하다는 의사도 그날 밤을 못 넘길 거라고 했었고, 나도 사신이 내 침대 머리맡에 서 있는 걸 봤으니까…… 그때 내 희망은 그냥 엄마 없는 데서 조용히 죽는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널 치료해주고 이 가게로 데리고 왔단 말이야?”
마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치료를 해주고 며칠 후에 사라졌다가 모두가 그자를 잊고 있을 때쯤 갑자기 나타났어요. 1년도 더 지나서요. 그리곤…… 약속했으니까 자기랑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가게 점원을 채용하는 방법치고는 참 특이하다.
“엄마는 마음이 바뀌어서 돈이나 몇 푼 줘서 보내자고 하셨죠. 하지만 그런 일은 엄마하고 의논할 일이 아니잖아요. 기사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한 약속이었는걸요.”
비니와 내가 마리우스 몰래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쩌면 기사라는 게 아직까지 경찰 정보망에 잡히지 않은 신흥 범죄 조직의 조직원을 지칭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마리우스는 절대로 불량스러워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어두운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딴 건 모르겠지만 마리우스는 절대로 천 살 넘은 노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사라는 단어를 애써 무시했다.
“그리곤…… 보시는 대로예요. 그 후로 라두칸이 여기 온 건 손에 꼽을 정도였어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러서 지하실에서 필요한 물건이나 찾아가는 정도였죠.”
“연쇄살인범이란 거…… 눈치도 못 챘어?”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하지만 그보다 더한 짓을 했대도 놀라지 않았을걸요.”
마리우스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다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심하게 다쳤었던 거야? 교통사고?”
비니의 질문에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리우스의 대답은 그의 과거가 생각보다 더 어두웠을지 모른다는 어떤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투에서 패했어요.”
서에서 나온 두 명의 정복 경찰들은 태도가 신참답지 않게 껄렁했다. 하나는 벌써부터 각종 비리의 싹이 보이는 날라리였고, 나머지 하나는 전형적인 야심가의 눈빛과 태도를 갖고 있었다. 시내에 대형 사고가 줄줄이 터지는 판에 서장 특명을 받고 달려와 보니 홍등가 뒷골목의 성인 잡지 서점이라 잠시 어리벙벙하던 두 놈의 태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걷잡을 수 없이 방자해졌다.
“그러니까, 여기서 플레이보이 같은 걸 훔쳐서 도망치는 동네 꼬맹이라도 잡아달라는 겁니까?”
야심가 타입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한테 대들었다.
“아니.”
“그럼 뭘 지키란 겁니까?”
“니콜라스 헤슬렘이 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날나리가 기가 막혀서 그런지 아니면 본래 숨을 입으로 쉬는지 입을 딱 벌리고 가게 안을 빙 둘러봤다.
“이 안에요?”
웃기지 말라는 투였다.
“헤슬렘을 찾아보기는 하셨습니까?”
야심가가 나한테 대놓고 따졌다. 이것들 눈에는 내가 선배로도 안 보이는 모양이다.
“못 찾았어.”
“2층밖에 안 되는 쬐끄만 책방인데 선배님들이 못 찾으셨다면 없는 거죠! 저희는 다른 할 일도 많고,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시간 낭비할 수 없습니다. 포르노 책방을 지키라고요?”
놈들의 태도에 비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 그럼 내가 여길 지킬게. 자네들은 비니 몬티첼리 선배하고 같이 동행하도록 해. 장담하지만 배울 점이 무척 많을 거야.”
내 제안에 두 뺀질이가 주춤하며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곤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들이 제대로 수색을 해보죠.”
“내 지시를 멋대로 바꾸지 마. 나는 지키고 있으라고 했지 수색하라고 명령한 적 없어.”
두 놈은 고까워하는 기색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지키고 있어야 됩니까?”
“니콜라스가 나타나거나, 다른 곳에서 발견되거나, 내가 그만 집에 가도 좋다고 할 때까지.”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서둘러 가게에서 나왔다. 가게 앞에는 녀석들이 끌고 온 순찰차가 얌전하게 서 있었다. 013이 견인되어 끌려가버린 탓에 택시라도 타야 할 처지였는데 이러면 얘기가 또 다르다. 우리가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나온 지 1분도 안 됐는데, 녀석들이 벌써 내 지시를 씹고 있었다.
“2층엔 뭐가 있지?”
야심가가 마리우스를 구석에 몰아세우고 협박조로 물었다. 날라리는 그 옆에서 건들거리며 도색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침실이요.”
“다락방 같은 건 없고?”
“없긴요. 다락방도 있어요.”
“우리가 좀 봐도 될까? 2층하고…… 다락방?”
비니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야심가의 귓바퀴를 모질게 잡아당겼다. 날라리가 보던 잡지를 얼른 제자리에 놓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비니와 마주섰다. 비니가 두 신참을 엄하게 다그쳤다.
“여기 출입구는 두 군데뿐이야. 가게 정문하고 응접실 쪽에 딸린 뒷문. 아무 데나 쑤시고 다닐 생각 하지 말고 출입문이나 제대로 지켜. 그것도 못하겠으면 다른 직업을 찾던가!”
“저희는 단지…….”
“그리고 마리우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해.”
“하지만 저희도…….”
“차 열쇠나 내놔!”
날라리로부터 차 열쇠를 받아든 비니가 두 놈을 한 번씩 노려봤다. 두 녀석은 아직도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다. 맡은 일만 제대로 해준다면 싸가지 없는 것 정도야 눈 감아 줄 수 있지만 이토록 위아래 없는 것들한테 이런 일을 맡기고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저는 괜찮으니까 두 분은 그만 가보세요.”
마리우스가 야심가와 날라리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순한 얼굴로 우리를 배웅했다. 본래 화란 걸 낼 줄 모르는 성격인 걸까? 마리우스에게는 계속 신세만 지고, 죄다 미안한 일 뿐이었다. 마리우스는 진짜 두 녀석의 방자한 태도가 전혀 불쾌하지 않았을까?
마리우스가 돌아서서 두 신참에게 친절하게 가게 구조를 알려줬다.
“2층하고 다락방을 보여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죠.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지하실만 아니면 어디라도 상관없어요. 지하실은 본래 출입금지 구역이거든요.”
우리는 녀석들에게 의도적으로 지하실 얘기를 하지 않았다. 공연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의 마지막 말은 지금 당장 지하실로 내려가 보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진배없었던 것이다. 기가 막혀서 빤히 쳐다보자 마리우스가 멋쩍은 듯 눈길을 피하며 가판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니는 출근하기 전에 곧장 폐차장으로 가야 한다고 우겼지만 지금 운전을 하는 건 나였다. 013이 폐차장으로 끌려갔는지 아직 확실치 않고, 또 그렇다 해도 폐차장이 그렇게 일찍 일을 시작하지는 않을 거라고 비니를 설득해서 일단 겐지 클리닉으로 방향을 잡았다.
정직이 예정대로 철회되었다면 곧바로 사건에 투입될 수도 있고, 또 사건 보고서도 따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며칠 안에는 병원을 들러보기 어려운 개인 사정도 있었고, 되도록 비니의 폐차장 행을 늦추고 싶은 바람도 간절했다. 비니가 늦으면 늦을수록 013이 폐차장 대형 프레스에 납작하게 눌려 있을 가능성이 컸다.
비니는 013 걱정에 상당히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의식을 회복했다면 조카를 보고 싶어 할 거라는 내 말에는 이견을 달지 않았다. 몬티첼리 이외의 다른 부상자들의 경과도 궁금했다. 오늘은 레빈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