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가 있을까?”
누군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공중 폭발이었으면 그럴 가능성은 만에 하나도 없어.”
전문 구조대원의 복장을 한 남자가 잘라 말했다.
때맞춰 깨진 얼음 사이로 얼핏 봐서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어떤 덩어리가 밀려왔다. 어떻게 보면 추락 헬기에서 떨어져 나온 잔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람의 다리 부분 어디쯤인 것 같기도 했다. 잔해를 먼저 발견한 건 사진기자들이었다. 뒤늦게 현장 요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대는 기자들을 밀치고 잔해를 건져냈는데 꺼내 놓고 보니 역시 사체 일부였다.
“수면에 떨어진 다음에 폭발했다면 또 모르지.”
“추락에서 폭발까지 길어봐야 30초에서 1분 사이였을 텐데 그럴 시간이 있었을까?”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니까 하는 말이야.”
서부 저수지는 최고 수심 30여 미터의 인공 호수였다. 중간 규모의 양어장과 낚시터가 몇 곳인가 있었고,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북쪽 언덕은 젊은이들의 아베크 명소였다. 물론 이런 겨울엔 아무도 차를 끌고 그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1미터도 넘게 얼어 있던 빙판이 지금은 산산이 부서져서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두 척의 인양선을 호수에 띄우느라 포크레인까지 동원되어 한나절 얼음을 깬 덕에 호수는 극지방의 바다와 흡사한 기이한 풍경이 돼 버리고 말았다.
침입자들의 헬기 중 나머지 한 대는 귀신같은 저공비행으로 군의 레이더망을 빠져나갔다. 현재까지 군경이 광범위한 지역을 수색 중이었지만 무슨 성과가 있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었다.
지난 밤 몬티첼리 저택에서 벌어진 참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신문사마다 조간 1면에 폐허로 변해버린 마피아 대부의 저택 사진을 대서특필했고, 그간 도시의 암흑가에 벌어져왔던 범죄 조직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를 특집 기사로 실었다. 덕분에 저수지를 둘러싼 나지막한 언덕에 구경꾼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있었다.
저택 쪽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아서 특종을 잡으러 몰려온 기자들, 그간 몬티첼리에게 신세를 졌거나 원수졌던 사람들, 거기다 순수하게 위세당당하던 마피아 보스의 저택이 초토화된 광경을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하려는 일반인들까지 몰려들어서 주변을 정리하는 데만 수십 명이 붙들려서 정작 중요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들려왔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인양선 와이어에 제법 큼직한 잔해가 걸려나온 것이었다. 헬기의 꼬리 날개 부분인데 프로펠러까지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저 정도가 지금까지 인양한 기체 잔해 중 가장 큰 덩어리일 정도로 침입자들의 블랙 호크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공중 폭발이든 추락한 이후 폭발했든 생존자에 대한 기대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호수 한가운데까지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인양선을 띄우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 생존자가 있었다 한들, 이 넓은 호수에서 얼음 깨진 곳을 찾아 물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을 터였다.
추락한 헬기가 니콜라스가 탔던 그 헬기일까? 니콜라스의 몸뚱이도 갈가리 찢어져서 얼음 아래 조각난 사체로 떠다니고 있는 걸까?
“제이! 제이!”
노란색 경찰 저지선 밖에서 리만이 목이 쉬도록 내 이름을 불러재꼈다.
“나랑 얘기 좀 해!”
누구하고도,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못 들은 척하고 인양선 쪽만 쳐다보고 있는데 리만이 조각난 채 물가로 밀려오는 팔다리를 건지러 다니느라 넋이 나가서 허둥거리는 초짜 순경들을 밀치고 저지선을 넘었다.
“헤슬렘이 엊저녁 만찬에 왔었다던데 사실이야?”
“나 좀 내버려둬.”
“그러지 말고 협조 좀 해줘.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어떻게 하면 이 찰거머리를 따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네가 헤슬렘하고 같이 숲으로 달아나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어. 지금 다른 기자놈들도 자네를 찾아서 눈에 불을 켜고 있다고! 그 승냥이 같은 놈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배겨날 수 있을 것 같아?”
리만이 노골적으로 협박을 했다.
“꺼져!”
무작정 호숫가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포기하고 돌아설 리만이 아니었다.
“너랑 헤슬렘이랑 몬티첼리가 한 테이블에 앉아서 저녁식사를 했다면서? 사실이야?”
“…….”
“총격전이 벌어져서 저택엔 몸 성한 인간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넌 어떻게 이 호숫가까지 와 있었던 거야?”
“…….”
내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리만은 종종걸음을 치다가 좀 전부터는 아예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더 이상은 귀찮게 하지 않을게…….”
리만이 내 팔을 붙들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제야 나도 걸음을 멈췄다. 리만 때문이 아니었다. 불과 몇 미터 앞에 헬기 잔해 몇 조각과 함께 사체 일부가 떠밀려와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머리 부분이었다. 길러서 질끈 묶은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어젯밤에 봤던 니콜라스의 그것과 흡사했다.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갑작스럽게 구토가 치밀었다.
“저기…….”
리만이 내 안색을 살피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하나만 물을게. 그러니까 말이야…….”
저 시퍼런 얼음물에 머리라도 처박아버리면 진정이 좀 될까…… 이대로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등성이에 차 한 대가 와서 섰다. 쥬드 크롬웰의 은색 재규어였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은 여기 있기 싫었다. 차가 서 있는 언덕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리만이 내 옷깃을 거머쥐었다.
“헤슬렘 말이야, 숲으로 같이 도망친 후에…… 어떻게 됐어?”
아직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호숫가를 떠다니는 사체 일부분에 나도 모르게 다시 시선이 꽂혔다.
“나도 몰라.”
내 기색을 살피는 리만의 탐색이 날카로웠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야. 니콜라스가 어떻게 됐는지 나도…… 몰라.”
쥬드가 차에서 내려섰다. 긴 금발이 차가운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렸다. 내가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인양선 크레인에 높직이 끌려 올라가고 있는 헬기 꼬리 날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얼굴을 반이나 덮는 까만 선글라스 때문에 그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쥬드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화장기라곤 없는 얼굴이었다. 머리도 딱 떨어지게 매만지고 다니던 평상시와는 사뭇 달랐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경황없이 달려 나온 것 같았다.
내가 다가서자 쥬드가 말없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오랜만이외다. 크롬웰 양.”
쥬드가 시동을 걸려는데 헐떡거리며 쫓아온 리만이 앞을 막아섰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몬티첼리 저택이나 병원에 가 있던데 여기서 뭘 하세요?”
“가 봐야 온통 시체뿐인 걸…… 뭉개고 있어봐야 죽은 사람들이 말 한마디라도 해줍니까?”
“리만 씨 정도 되는 분이라면 죽은 사람한테서도 얻어낼 정보가 많을 텐데요?”
“그래도 어디 산 사람만 하겠습니까?”
리만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쥬드가 어림없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이는 지금 경찰청으로 들어가야 돼요.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경찰에서 공식적인 발표가 날 때까지는 개인적인 인터뷰 같은 걸 해서도 안 되고요.”
하지만 리만은 호락호락 비켜줄 생각이 꿈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기사는 나가게 돼 있어요. 이런저런 추측 기사보다는 제대로 된 보도가 나가는 편이 경찰 쪽에도 이로울 텐데요.”
리만을 쳐다보는 쥬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저녁때까지는 경찰청에서 보도자료가 나갈 거예요. 제대로 된 기사를 쓰고 싶으시면 다른 기자들하고 같이 경찰청 기자실에서 몇 시간만 기다리세요.”
그 음성에도 약간의 짜증이 내비쳤는데…… 눈치 빠르기라면 리만은 둘째도 서러웠다. 게다가 리만은 쥬드의 성격이나 그간의 행적에 관해 꽤나 소상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외부인이었다. 리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쯤에서 길을 비키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임하는 리만의 결의는 생각보다 비장했다. 리만은 순순히 비키기는커녕 아예 차의 보닛 위에 올라타는 일대 모험을 감행했다. 쥬드 크롬웰의 애장품 제규어XJ 6의 은빛 보닛에 작은 생채기라도 났으면 리만은 죽은 목숨이다.
“뭐가 그렇게 알고 싶어요?”
쥬드가 액셀러레이터를 확 밟아버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리만이 차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직업적인 호기심과 특종에 대한 열망으로 이글거렸다.
“추락한 헬기에 헤슬렘이 타고 있었나?”
쥬드가 액셀러레이터를 꾹 밟았다. 슬쩍 밟은 것뿐인데 워낙 좋은 차다보니 순식간에 시속 40킬로미터를 돌파했다. 스포츠카의 속도로는 우습지만 차창 밖에 매달린 리만은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몇 십 미터를 차분하게 달리던 쥬드가 차를 멈추자 리만이 알아서 보닛에서 기어 내려왔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리만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눈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죠.”
리만을 대하는 쥬드의 태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저수지 진입로는 경찰차와 소방차, 취재 차량과 뉴스 보고 구경 나온 일반 차량이 뒤엉켜서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쥬드는 대체 어떻게 저수지로 들어왔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이 지경이라니…….”
대책 없이 엉켜 있는 2차선 도로를 본 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대뜸 도로를 이탈해서 숲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트막한 언덕이라 주행 불가능한 난코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법 굵은 잡목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데다 군데군데 얼어붙은 빙판이었다. 지프라면 또 모르지만 스포츠카로 밀고 내려가기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얼음이라도 밟았는지 찌익하는 불길한 소리를 내며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두 바퀴 정도 옆으로 돌면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동안 큰 나무들은 요행히 피했다. 하지만 사람 허리 높이의 잡목 덩굴을 몇 개나 뭉개면서 내려왔기 때문에 차체가 성할 리 없었다. 큰 도로까지 약 5킬로미터를 그런 식으로 내려오는 동안 쥬드의 얼굴은 그냥 그랬다.
어찌어찌 큰길까지 내려온 후에 차창을 내리고 옆구리를 내다봤는데 걱정했던 대로 새까맣게 긁혀 있었다.
차에 대한 쥬드의 애정은 각별했다. 쥬드는 이 차 때문에 감사 기간도 아닌데 따로 감사과에 불려가서 차 구입자금에 대해 두어 시간 조사까지 받았었다. 서장 비서가 무슨 돈으로 이런 고급차를 몰고 다니느냐는 의혹의 시선 때문이었는데, 그때 밝혀진 바에 의하면 2년간의 저축에다 상속받은 주식을 처분한 돈을 보태서 구입한 차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차는 쥬드 입장에서도 상당한 사치품인 셈이었다.
“추워요. 창문 올려요.”
쥬드가 나한테 괜히 짜증을 냈다. 창문을 올리면서 무심히 길 옆을 쳐다보니 멀리 몬티첼리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이젠 몬티첼리의 저택이었던 잔해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몬티첼리의 저택은 녹아내린 철근과 불 탄 돌무더기에 불과한 처참한 몰골이었다. 본체는 날개 부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괴된 데다 습격자들의 계획적인 방화로 본래의 아름다운 모양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몬티첼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서재도 회백색 잿더미로 변해버렸을 테고 차고에 늘어서 있던 초 1급 컬렉션 카들도 대부분 전소되어 이젠 녹아내린 고철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따위 재산 피해는 100여 명에 가까운 인명 피해에 비하면 얘기 거리도 되지 못했다. 만찬에 초대받았던 시의 명사들 중 1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병원에 실려간 50여 명 중에도 중상자가 다수였다. 그 외에 현장에 있던 밴드 단원과 요리사들 중에도 사망자가 적지 않았다.
가장 피해가 컸던 쪽은 역시 몬티첼리 측 경호원들이었다. 침입자들이 철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한 결과는 사망자 32명에 부상 37명이었다. 몬티첼리의 경호원 중에 몸 성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였다.
몬티첼리가 비싼 돈을 들여서 고용한 용병들은 전투력 측면에서는 확실히 경호원들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세 불리함을 깨닫자 약속이라도 한 듯 철수해버린 탓에 그 대단한 전투력의 반도 발휘하질 못했다. 그림자 부대 쪽은 사망 3명에 중·경상자 모두 합쳐도 사상자가 열 명을 넘지 않았다. 돈에 팔린 몸이라 목숨까지 걸어줄 의리는 없는 건지, 아니면 본래 불리한 싸움은 하지 않는 게 원칙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몬티첼리로써는 돈 들인 보람이 없었던 셈이다.
“사망 3명이라도 피해가 적다고 할 수는 없죠. 그 3명 중에 용병 대장이 끼어 있다니까요.”
내가 세자르라는 이름의 검은 표범한테 깔려서 버둥거리고 있을 때 잠자코 구경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이 오스카였었지, 아마…….
“어디로 가는 거야?”
몬티첼리의 저택이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즈음 쥬드에게 물었다.
“글쎄요…….”
쥬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몬티첼리와 측근들은 대부분 겐지 클리닉에 있고, 칸 반장과 경찰 타격대 쪽 부상자들은 경찰 병원에 있어요. 나머지 부상자들은 대부분 시립병원에 있고 시체는 시내 일곱 개 병원 영안실에 안치돼 있고요. 어디부터 갈까요?”
침입자들은 니콜라스 때문에 몰려와 있던 경찰 타격대와도 한판 붙었기 때문에 경찰 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침입자들 입장에서도 정말 재수 없는 경우였을 테고, 연쇄살인범 하나 인도 받으러 갔던 타격대로써도 황당한 일전이었다.
어쨌든 한발 늦게 필리스 홀로 뛰어 들어간 타격대도 침입자들과 한 차례 교전을 벌였다. 놈들이 필리스 홀을 거의 초토화시키고 막 철수할 즈음이라 교전은 길지 않았다. 타격대원 두 명이 사망하고 열일곱 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 열일곱 명 중엔 칸 반장도 끼어 있다. 아침까지 나도 경찰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칸 반장은 부상이 심해?”
“안타깝게도…….”
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심하지 않아요. 오른쪽 대퇴부에 총알이 박혔는데 수술이 잘 됐대요.”
몬티첼리의 이름도 부상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가르시아는 한때 사망으로 발표가 났었다가 중상자로 확인됐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얘기도 있는 데 진위는 알 수 없었다. 사망자 명단이나 부상자 명단 어디에도 발렌타인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쥬드에게 물어봤더니 가명으로 입원해 있다고 가르쳐주면서 토마스 모어라는 근엄한 이름을 짚어줬다.
“습격해온 놈들 중에 병원에 있는 놈이 있다던데?”
“가망 없어요.”
쥬드가 가만히 앞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습격자들은 중상을 입어서 퇴각이 불가능한 동료들을 현장에서 사살하고 떠났다. 중상을 입은 칩입자의 머리에 또 다른 침입자가 확인 사살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여럿 있었다. 살 가망이 없는 중상이거나, 같이 움직일 수 없는 경우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까닭으로 숨이 붙은 채 발견된 침입자는 두 명뿐이다. 둘 다 허물어진 건물 잔해에 묻혀 있다가 구조됐는데 그 덕에 확인 사살을 면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여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놈들에게서 뭘 알아낼 가망은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었다.
차가 만성 정체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조금 전부터 슬슬 기어가던 차가 사거리를 앞에 두고는 완전히 멈춰 섰다. 그제야 쥬드가 나를 돌아봤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
“병원에 좀 더 있지 그랬어요. 한 시간이나 제대로 잤어요?”
대답하기가 애매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립 경찰 병원의 비좁고 썰렁한 1인용 병실에 누워 있었고 시간은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동 틀 무렵, 호숫가에서 나를 발견한 것은 경찰과 지역 예비군으로 구성된 수색대였다. 얼음 위에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내려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침입자들의 블랙호크가 파란 불꽃을 뿜으며 호수로 추락한 장면까지였다.
머리가 멍하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했다. 졸려서 그런가 싶어 눈을 감아봤지만 잠도 오질 않았다. 지금 같아선 앞으로 영원히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비니는?”
“아침에 겐지 클리닉에 있다는 연락이 왔었어요. 아마 아직도 거기 있을 거예요.”
비니가 저택에 도착한 것은 사태가 일단락 나고 인근에서 몰려온 의료 요원들이 사상자를 저택 밖으로 경황없이 실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비니는 요 며칠 동안 소소한 갱단에게 불법으로 무기를 판매하고 돌아다니는 떠돌이 무기상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새벽까지 조무래기 갱단의 아지트를 돌면서 탐문 수사를 하다가 지쳐서 잠시 쉬려고 길가에 있는 커피숖에 들어갔고 거기서 작은아버지의 집이 불타는 장면을 봤던 것이다.
“겐지 클리닉으로 가줘.”
눈을 감은 채 쥬드에게 부탁했다. 지난밤의 단상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처럼 뒤엉켰다.
겐지 클리닉은 암 수술에 세계적인 권위가 있는 휴고 겐지 박사의 개인 병원이었다. 개인 병원이라곤 해도 규모는 시립 병원 수준인데다 시설 역시 쿠간 시내에서는 따라올 곳이 없다고 할 정도로 특급이었다. 암에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다른 분야에서 소홀한 것은 아니라서 외과 수술 쪽은 대부분 탁월하다는 평이었다. 실력이나 서비스가 확실한 만큼 병원비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이 병원 고객 중에는 시내의 유력자들이 많았고, 몬티첼리도 이 병원에 주치의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몰려든 중 환자들 탓인지 로비에서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허둥거리는 문병객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걸음이 바빴고, 바닥엔 군데군데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가운을 입은 채 바쁘게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들도 많았다.
로비를 서성거리는 사람들 중에는 이탈리아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이탈리아인들은 대부분 일가가 많고 현재 이탈리아 마피아 수십 명이 입원한 상태인 것을 생각한다면 이 번잡함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겐지 클리닉이 초행인 쥬드와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탈리아 인들이 우르르 몰려 타는 엘리베이터에 아무 생각 없이 끼어 탔다. 그리고 그들이 한꺼번에 내리는 층에서 따라 내렸다.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곧바로 넓은 로비가 나타났다. 로비 중앙엔 너스 스테이션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디자인이 독특해서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세트처럼 보였다.
역시 이탈리아계로 보이는 문병객들이 로비를 빽빽이 채우고 있었는데, 이 정도 인원이라면 사전에 관계당국에서 집회 허가를 얻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았다. 대부분 연락을 받고 황망하게 병원을 찾아온 것 같은 행색이었다. 점퍼 안쪽에 파자마를 걸친 50대 남자도 있고 금방 자다 일어난 듯 머리가 부스스한 중년 부인도 있다. 그 사이에 말끔한 양복 차림의 남자들 몇몇이 섞여 있었다. 남자들의 표정과 태도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 얘기를 주고받는 문병객들의 웅성거림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첸 진의 중국계 마피아를 범행의 배후로 단정 짓고 성토하는 내용이 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 웅성거림은 애초에 작은 속삭임이었겠지만 어느새 점점 커져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위태로웠다. 지금 이곳에는 공기 대신 사람들의 절망, 슬픔, 분노의 입자가 가득 떠돌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시자 그런 사념들이 걷잡을 수 없이 내 뱃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왔어?”
비니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밤을 꼬박 샜는지 눈자위가 빨갛고 얼굴이 어두웠다. 몬티첼리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중한 모양이었다.
“돈 몬티첼리의 상태는 좀 어때요?”
쥬드가 물었다.
“뭐…… 일단 수술은 잘 끝났다니까 경과를 봐야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중상은 아니라서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비니가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다, 비니. 현장에 있었으면서 아무 도움이 못 돼서…….”
“니가 안 다쳐서 다행이지. 지난 밤 사건에서 다행스러운 건 그것뿐이야.”
비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안쓰러움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비니가 나를 끌어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일 년 반을 파트너로 동고동락하면서 좋을 때보다는 개와 고양이처럼 사납게 아르릉거릴 때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우린 나름 정이 깊은 파트너였다. 비니가 끌어안으면 안는 대로 등을 두드리면 두드리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비니하고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고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 걱정해줘서…….”
경찰의 동료애와 돈독한 우정을 좀 낯간지럽게 확인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또각또각 굽 높은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단호하면서도 규칙적으로 살짝 바닥에 끌리는 특이한 발소리를 듣는 순간…… 뒷덜미에서 서늘한 바람이 한 차례 스쳐 지나갔다. 비니를 밀치고 얼른 돌아섰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바바라였다. 바바라의 음산한 회색 눈동자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순간 놀라기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녀가 여기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사 가문과 몬티첼리 가문은 선대부터 친분도 있었고 활동 구역이 서로 달라서 이후로도 척을 진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사돈 간이 될지도 모르는 사이고 보면, 이런 변고에 들여다보고 안부를 묻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오, 오랜만입니다, 바바라.”
말 하면서 나도 모르게 비니 뒤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멀쩡하시네요?”
크게 다친 데 없어서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투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바라는 나를 싫어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운 하나는 정말 억세게 좋네요.”
바바라가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웬만하면 바바라를 상대로 언짢은 얼굴 하기 싫지만 이런 시비를 곱게 받아주기엔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대답을 하기도 그렇고, 가만있기도 곤란해서 멀뚱히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데 잠시 사태를 주시하던 비니가 나섰다.
“볼일 다 봤으면 그만 가.”
바바라가 비니를 서늘한 시선으로 흘겨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니는 퉁명스럽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너랑 네 부하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항상 느끼는 거지만 비니는 눈치도 없고 겁도 없다. 저런 소리를 들으면 바바라 성격에 불같이 화를 낼 법도 한데, 비니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지 꾹 참는 눈치였다.
“숙부님을 뵙지 못해서 유감이에요. 부하들은 남겨 놓고 갈 테니까…….”
“부하들이 왜 여기 남아? 다 데리고 가!”
비니가 버럭 소릴 지르는 바람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만 이렇게 조마조마한 줄 알았는데 쥬드도 옆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니의 호통에 바바라가 눈을 착 내리깔고 냉랭한 어조로 대꾸했다.
“돈 몬티첼리에게는 살아 있는 경호원이 필요해요.”
“작은 아버지 신변은 경찰이 보호할 거야. 소사 패밀리의 경호원 손까지 빌릴 이유가 없어.”
아까부터 눈에 띄던 양복차림의 남자들이 바바라의 부하들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당신 숙부님은 헬기에다 중화기로 무장한 적을 상대하고 있어요. 오는 길에 숙부님 저택을 지나쳐왔는데……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이 병원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게다가 경찰은 아직 차이나타운 쪽에는 손도 쓰질 않고 있던데요?”
“어쨌든…….”
비니가 얼굴을 붉히면서 항의 하려고 했지만 바바라는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경호원이 필요 없다는 건 당신 생각이에요. 숙부님이 의식을 회복한 후에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장 애들을 철수시키겠어요.”
그렇게 비니의 말문을 딱 막아놓고 바바라가 돌아섰다. 그녀는 쥬드에게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나를 한 번 더 흘겨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난 것도 몇 번 안 되고 그다지 큰 실수를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바바라는 나를 이렇게 싫어할까?
바바라의 본명은 바라라 블렛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본명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비니와 그 주변의 몇 명뿐이고 일반인들은 대부분 그녀를 바바라 소사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까닭은 그녀가 리즐시 범죄조직의 대부인 코시모 소사의 손녀딸이며 대리인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실질적인 보스이기 때문이었다. 코시모 소사의 나이가 이제 칠순이고 보면, 요즘 들어 리즐 시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무지막지한 폭력 사태가 누구 소행인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바라는 리즐 시에서 자행되는 여러 가지 불법적인 일에 깊이 개입된 혐의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오싹한 것은 알버트 소사 피살사건이었다. 소사 패밀리의 공인된 후계자였던 알버트 소사는 정부의 집에 다녀오는 길에 경호원 두 명과 함께 실종됐다가 6개월이나 지난 후에 철거 예정이던 낡은 아파트 지하실에서 파묻힌 시체로 발견 됐다.
알버트는 코시모의 외아들이니까 바바라에게는 외삼촌이었다. 경찰은 바바라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지만 코시모는 그 일로 바바라를 여러 차례 죽이려고 했었다. 여러 번의 시도가 다 실패한 후에 그 간악하고 잔인한 노인이 제발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만이라도 알려달라고 바바라에게 간청한 끝에 시체를 찾아냈다는 풍문도 돌았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 현재는 바바라가 조직의 전권을 접수한 상태였고 코시모 소사는 자기 경호원들과 뒷방에서 하루 종일 체스로 소일하는 한가한 신세로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바바라의 뒷모습은 작고 여렸다. 불편한 오른쪽 다리를 끌고 가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가 품고 있는 원망, 비탄, 허무, 노여움의 부피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불길한 것들로 이루어진 어떤 덩어리 같아서 마주칠 때마다 그 섬뜩함에 놀라곤 했다. 과부거미같이 음침한 바바라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비니의 시선이 착잡했다. 바바라는 한때 비니의 약혼녀였었다.
비니와 바바라의 약혼은 역사가 깊었다. 두 사람이 아직 어렸을 때 각자 조직에 몸담고 있던 비니와 바바라의 조부들이 나중에 꼭 사돈을 맺자고 술자리에서 약속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으니, 아주 전통적인 약혼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본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나온 말이니까 요즘 세상에선 약혼이라고 말하기도 우습고, 비니가 꼭 바바라와 결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바바라와 비니 사이가 처음부터 싸늘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0대 중반까지 바바라는 비니 주변에서 그 살인적인 징크스를 옹호하는 유일한 아군이었고, 비니도 바바라를 애틋하게 생각했었다. 사실은 바바라가 첫사랑이었다는 고백을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온갖 부정한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천덕꾸러기로 겉돌던 조용한 소녀가 음침하고 냉혹한 범죄자로 변해가면서 비니의 마음도 식었다. 바바라의 마음도 같이 식었으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이 그렇게 순조롭질 않았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리즐 시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바바라는 굉장히 집요한 성격이었다.
보통 남자라면 저런 여자를 피해서 세상 끝까지라도 도망쳤겠지만, 비니는 무작정 도망치는 대신 경찰이 됐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매우 현명한 처사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경찰이 입은 피해는 말로 다 못할 정도다.
“레빈은 어때?”
비상계단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비니에게 물었다.
병원 복도에는 비니의 일가가 많이 와 있었다. 비니의 부모님과 삼촌, 사촌들은 물론이고 먼 도시에 살고 있는 오촌 당숙에, 육촌 동생하고 인사를 나누다 보니 병원을 가득 매운 문병객 중 반 정도가 비니 친인척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를 대하는 일가의 시선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보면 비니의 징크스는 먼 일가에게도 유명한 게 틀림없었다. 일단 비니 일가의 질문 공세에서 빠져 나오긴 했는데 휴게실이고 병원 복도고 사람들로 들어차서 앉을 데도 마땅치 않았다. 할 수 없이 비니가 나하고 쥬드를 안내한 곳이 비상계단 통로였다. 나와 보니 번잡한 로비와는 달리 조용하고 공기도 차분했다.
“많이 다쳤어?”
이 마당에 궁금한 게 고작 마피아 보스 저택의 집사 안부냐고 한심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그 이외엔 궁금한 것도 별로 없었다.
“어깨 관통상 외에는 괜찮아.”
“만나볼 수 있을까?”
비니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안 될 거야. 병원 쪽에서 일체 면회 허가를 안 해줘. 그건 그렇고…… 너 정말 괜찮아?”
비니가 걱정스런 눈초리로 나를 내려다 봤다.
“가르시아는?”
비니가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잘 몰라.”
가르시아는 복부를 관통한 총상 때문에 출혈도 심했고, 장기 손상도 심했다. 수술 도중 호흡이 두 번이나 멈출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 다행히 응급조치 끝에 호흡을 회복하고 수술을 마치기는 했지만 회복된다고 해도 뇌손상이라는 최악의 후유증을 각오해야 한다는 게 병원 쪽 얘기였다.
테시오는 오른쪽 무릎 뼈가 손도 못 쓸 정도로 박살나서 쇠심을 박아도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나마 살아 있는 사람들은 얘깃거리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발렌타인은……?”
“막 수술을 끝내고 나왔으니까 오후에는 면회할 수 있을 거야.”
그 이상 자세한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발렌타인도 부상이 심각한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서슬 퍼렇게 맞섰으니 놈들의 포화가 발렌타인에게 집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찰청에 들어가기 전에 병원부터 들린 건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했고, 가능하면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했던 것뿐인데 비니 말대로라면 여기서는 할 일이 달리 없었다. 지난 밤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제대로 쓰려면 길게 노닥거릴 시간도 없어서 몸을 일으켰다. 몸도 머리도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비상계단 통로를 열고 로비로 향하는 짧은 동안, 이젠 퇴근해도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는 이미 퇴거한 상태인데다 신세지고 있던 몬티첼리의 저택은 그렇게 돼버려서……. 천행으로 목숨을 건지고 나서 맞닥뜨리는 현실의 구질구질함이라니, 신세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저녁에 집에 와요.”
쥬드가 엘리베이터 내려오는 층수를 세면서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어디? ……당신 집?”
“당신이 머물 만한 적당한 곳을 아직 알아보지 못했어요. 집에 빈 방도 몇 개 있고 또 조용하니까 지낼 만할 거예요.”
쥬드의 집이 호젓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조용하기는 했다. 하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넙죽 들어가기도 조심스럽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에 그녀를 빠뜨리기도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쥬드 크롬웰을 짝사랑하는 위험한 남자 비니 몬티첼리가 바로 옆에서 호흡 곤란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내 집이 당신 주머니 사정으로 갈 만한 허름한 모텔보다는 나을 거예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럼 좋을 대로 해요.”
잠시 대화도 끊어지고 각자 멍한 얼굴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 저쪽 끝에서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의료진이 이동침대를 밀고 나왔다. 하얀 시트가 머리끝까지 덮여 있는 누군가의 시신이었다.
산발한 노파가 사람의 소리라고 할 수 없을 것처럼 애달픈 울음을 토해내며 시신을 따라가다가 시트 한끝을 잡은 채 복도에 주저앉았다.
시트가 반쯤 벗겨져서 바닥에 끌리는 바람에 시신의 상반신이 드러났다. 사방에서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신은 얼굴을 들여다봐도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온몸이 부어 있었다. 미라처럼 붕대로 휘감아 놓은 상반신 곳곳은 벌겋게 피에 젖어 있는데 오른 팔은 팔꿈치 위쪽에서 절단되어 있고 왼팔은 손목이 잘려나가고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간호사로 보이는 체격 좋은 남자가 노파의 손에서 시트를 빼앗아 시신을 얼른 덮었다.
멍한 얼굴로 서 있던 나는 시신이 환자 전용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진 후에야 그 남자가 베네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쥬드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지금 괜찮은 건가? 쥬드가 내게 뭐라고 몇 마디 말을 더 걸었는데 무슨 소린지 들리질 않았다. 이 짙은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헤어나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면서 질식을 할 것 같았다. 아무 창문이나 열고 제대로 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젊은 의사가 링겔의 주입 속도를 조절하면서 쥬드를 힐끔거렸다. 그녀도 표정이 어두웠다.
“지난 밤 몬티첼리 씨의 저택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 무사한 사람이 있기는 있었군요.”
방안의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의사가 한마디 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지만 어쩐지 비난처럼 들렸다. 「몬티첼리 저택의 참사」는 분명히 평생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로 남을 일이었다. 이따금씩 발작적으로 찾아와서 숨을 막히게 하는 고약한 천식 같은 기억이 또 하나 더해진 것이다.
“그래도 정신과 치료는 제대로 받아야 할 겁니다.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는 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큰 숙제죠.”
이 과도한 스트레스가 정신과 치료 정도로 아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의사는 그 외에도 직업적인 몇 가지 충고를 더 하고 방을 나갔다.
쥬드는 입고 있던 두툼한 모피 코트를 벗어서 한 옆에 놓인 소파에 걸치더니 잠깐 실례한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러게…… 병원에 좀 더 있지, 왜 벌써 나돌아다녀?”
비니가 의자를 옆으로 당겨 앉으며 짜증을 냈다.
“다친 데도 없는데 뭘 더 있어?”
“넌 크게 다쳤어.”
비니가 버럭 소릴 질렀다.
“현기증 때문에 잠깐 주춤했던 것뿐이야.”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겐지 클리닉에서 제일 비싼 병실이었다. 일종의 병원 스위트룸인데 특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떻게 이런 병실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넓고 시설이 호화스러웠다. 병원이라면 직업상 병문안도 빈번히 다녀 보고 직접 입원도 많이 해봤지만 이런 병실은 구경도 못 해봤다. 박봉에 시달리는 경찰관 주제에는 가당치도 않은 호화판 병실에 몸을 눕히게 된 데에는 비니의 호들갑이 크게 작용했다.
소녀티도 얼마 못 벗은 어린 간호사가 비니한테 몰려서 곤란해 하고 있는데 마침 병원장인 겐지 박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중환자들 때문에 겐지 박사도 경황이 없었다. 겐지 박사는 개인적으로 몬티첼리와 친분이 있었고 비니하고도 초면은 아니었다.
잠시 비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박사는 마땅한 병실이 없으면 우선 특실이라도 쓰라면서 좋은 말로 비니를 달랬다. 이 방은 애초에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병실로 예정된 방이었는데 몬티첼리는 회복실에 적어도 24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잠깐 쉬었다 가는 정도는 괜찮다는 얘기였다.
말없이 병실을 나갔던 쥬드가 쟁반에 물 컵 몇 개를 받쳐 들고 돌아온 건 잠시 후였다. 컵에서 김이 올라오기에 자판기에서 커피라도 뽑아왔나 싶었는데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은 걸 보니 그냥 맹물이었다. 쥬드가 모피 코트를 뒤적이더니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순간 머릿속에서 윙…… 하는 경계음이 울렸다.
“그거…… 「무덤 속의 줄리엣」 아냐?”
“석류차 엑기스예요.”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 쥬드가 유리병 속에 든 새빨간 액체를 컵 세 개에 조금씩 나눠 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라서 그 빨간 액체가 더운 물에 섞여 들어가는 모양이 또렷이 보였다.
한 방울 떨어지는 순간, 빨간 색소가 마치 뮤지컬 무대의 커튼이 내려가는 것처럼 컵 바닥까지 스르르 내리 깔렸다. 보통 액체가 섞이는 모습과는 많이 틀렸다. 그 모양을 보니 더욱 더 불안하고 저건 함부로 마시면 안 되는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고맙지만, 나는 됐어.”
쥬드가 못 들은 척 컵을 코 밑에 들이밀었다.
“피로회복에도 좋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그만이에요.”
못 믿겠다.
“한두 시간 안에 연방 경찰에서 특별조사관이 올 거예요. 당신은 현장을 제대로 목격한 몇 안 되는 증인인데다 경찰이니까 조사는 길고 집요하겠죠. 특별조사관이란 인간들이 얼마나 인정사정없는지는 당신도 알죠? 견뎌내려면 기운을 차릴 필요가 있어요.”
“조사관이 여길 온단 말이야?”
특별조사관이란 얘기에 마음이 약해졌다. 예전에 니콜라스 체포 직후에도 특별조사관들이 나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간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쉬지 않고 거의 열일곱 시간 동안 그랬던 것 같다.
“당신이 경찰청에 들어가서 보고하는 게 제대로 된 절차지만 지금은 움직일 상황이 아니라고 연락을 했더니 그렇다면 그쪽에서 오겠다고 했어요. 지금 관계자들하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니까 여기 오려면 최소한 두 시간은 걸리겠죠.”
그 혼잡스럽던 호수 주변의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오늘 안에 올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당신도 같이 마시는 거야?”
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두통이 멎질 않아요.”
비니는 쥬드가 권하기도 전에 남은 한 잔을 집어 들었다. 비니는 비록 독약이라도 쥬드가 주는 건 마다않고 마실 놈인데다 웬만한 거 먹고는 탈도 안 난다. 쥬드가 잔을 들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우린 범인들을 꼭 잡을 거예요.”
석류 달인 물이라면 별로 해로울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쥬드랑 비니와 잔을 한번 부딪치고는 그 따뜻하고 시큼한 차를 한 입에 털어 마셨다.
“본래 석류가 이런 맛인가요?”
보통은 차 맛에 별로 관심이 없는 비니가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는 쥬드에게 물었다. 나로 말하자면 잔을 쟁반에 내려놓기도 전에 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데 마시자마자 손끝으로 힘이 쪽 빠져나가면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중국산 석류를 열두 시간 달인 물에다 천분의 일로 희석한 차이니스 뷰티의 독을 좀 섞었어요.”
상당히 심상치 않다. 천분의 일 희석은 뭐고 중국 미인은 또 뭐냐…….
“차이니스 뷰티가…… 뭔데요?”
“뱀이요.”
쥬드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두 손으로 삼각형을 그려 보였다. 그러니까 독사라는 얘기다. 비니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본래 저런 얘기는 먹기 전에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기가 막혀서 빤히 쳐다보자 쥬드가 당당하게 말했다.
“미리 말하면 안 먹을 것 같아서요.”
쥬드는 여러 가지로 장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녀가 만들어 대접하는 엽기적인 차와 저 뻔뻔함을 용서할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당신이란 사람은 말이야…….”
그렇게 이것저것 섞어서 달이는 게 재미있으면 변두리 약국 같은데 취직해서 불법 조제약이나 지어 팔지, 경찰서 근처에는 왜 얼씬거리느냐고 한 소리 해주려는데 비니가 이불을 고쳐 덮어주는 척 하면서 내 입을 막았다.
“그쯤 해둬. 뭐…… 별 일도 아니잖아?”
별 일이 아니라니!
“우린 언젠가 저 여자 손에 독살을 당하고 말 거야!”
“천분의 일이라잖아. 설마 그 정도로 죽기야 하겠어?”
쥬드 크롬웰에게 머리 꼭대기까지 푹 빠져서 독약을 얻어 마시고도 그저 감싸주기 바쁜 이 배알 빠진 자식하고는 더 이상 한 마디도 하기 싫었다. 비니를 밀치고 쥬드 크롬웰을 노려봤다. 노려보는 중에도 눈에서 자꾸만 힘이 빠졌다.
“솔직히 말해. 그거 말고 또 뭐 탔어?”
“양귀비 꽃대 요만큼이요.”
쥬드가 손가락 두 마디만큼을 벌려서 들어보였다. 역시 미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뱀독도 모자라서 아편까지 집어넣었단 말이야? 이건 명백한 불법이야!”
“체포라도 할 건가요?”
쥬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폭삭 주저앉았다. 독 기운과 약 기운이 동시에 몸에 퍼지니 더는 버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괜찮으세요? 크롬웰 양?”
비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하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비니가 간신히 쥬드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옆으로 길게 쓰러졌다. 애초에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이제 몸이 침대 아래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
“사실 이건 나 먹으려고 만든 차였어요. 요즘 정말……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고요.”
칸 반장한테 밀려서 서장 비서라는 본업으로 복귀하면서부터 쥬드는 일절 일선 수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기 손으로 독약을 만들어 먹을 정도라면 그간의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니콜라스 사건에 있어서는 쥬드 크롬웰의 우선권을 인정해야 한다. 니콜라스는 쥬드가 발굴해낸 살인마였다. 게다가 여러 가지 고약한 취미에도 불구하고 쥬드 크롬웰은 유능한 탐정이었다. 이만한 인재를 단지 직함이나 성격차이라는 사소한 이유로 푸대접하는 건 절대 합리적인 처사가 아니다.
“난 따돌림을 당하고 있어요.”
몸이 점점 무거워져서 지하실까지라도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래서 쥬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칸 반장이 수사를 맡은 이후로 니콜라스 수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마디도 얻어들을 수가 없었단 말이에요.”
“설마……요?”
비니가 어떻게 해서든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쓰며 간신히 대꾸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글쎄…… 칸 반장이 쥬드를 싫어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로서도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경찰서 복도에서 쥬드 크롬웰이 ‘잠깐만요……’ 하며 불러 세워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쿠간 시경에서 제일 목석같은 사나이인 터너도 꼼짝 없이 선 채로 그날 보고 들은 일 다 털어 놓고 자기 의견까지 덧붙이는 판이었다. 물론 쥬드처럼 이상한 여자는 싫다고 떠들고 다니는 녀석들도 몇 명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녀를 연모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나는 지난 밤 사건도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쥬드 크롬웰이 소파에 기대 누운 채 패배감 가득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밤 몬티첼리 저택에 칸 반장과 타격대가 도착한 건 아홉 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신고는 레빈이 했을 테고 전 경찰에 비상이 걸렸을 거다. 쥬드 크롬웰은 여섯 시 정각에 퇴근해서 어딘가에서 취미 생활에 몰두하고 있었을 테지만…… 자리에 없었다고는 해도 누군가가 그녀에게도 긴급한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 우리 서에서는 정상적인 업무 처리방식이었다. 중요한 범죄현장에 경찰보다 쥬드가 먼저 나타나는 일도 종종 있을 정도로 그녀의 정보망은 쓸 만한 것이었다.
따돌림이라니, 쥬드의 입에서 따돌림이란 소리가 나왔을 때는 그저 의아한 정도였지만 몬티첼리 저택 습격 사건 같은 빅 뉴스를 아침 신문 보고 알았다는 사실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놀라웠다.
“독한 약 먹고 세상모르게 잔 거 아냐?”
“새벽 두 시까지는 깨 있었어요.”
“전화기도 켜 놓고?”
“당연하죠.”
점점 몸이 무겁게 느껴지더니 이젠 침대에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쥬드와 비니도 소파에 찰싹 붙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피로회복이냐…….
그렇다고 잠이 오는 건 아니고, 머리도 별로 무겁지 않았다. 아니, 무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점점 맑아진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던 기분도 좀 전보다는 가벼워졌다.
“서장님이 아침에 사과도 안 하시던가요?”
비니가 까닭 없이 언성을 높였다. 반면 쥬드의 대답은 조용조용했다.
“보고서 올라오는 대로 받아서 책상 위에 갖다 놓으라고 하시던데요?”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중국 미인의 독과 아편이 체내에서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담배갑에도 일정 수준의 경고문을 붙여야 팔 수 있는 세상인데, 그런 독극물을 시침 뻑 따고 먹인 건 괘씸하지만 약효가 이만하면 용서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당신은 혼자서도 그런 일 잘 하잖아. 애초에 니콜라스 연쇄살인도 혼자 조사해서 알아낸 거니까,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서 연구하다 보면 성과가 있지 않겠어?”
“수사팀은 나한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아요.”
쥬드는 약발이 잘 안 받는지 여전히 침울한 목소리였다.
“정보가 별거야? 서장에게 올라가는 서류는 전부 당신 손을 거치잖아?”
“칸 반장은 서장과 청장에게 직접 보고해요. 나한테는 쓰다 버리는 이면지 한 장 떨어뜨리지 않는다고요.”
지난 수년 간 우리 경찰서를 실제로 지배해왔던 쥬드 크롬웰 체제가 위기를 맞은 모양이었다. 누구보다도 바라던 일이었지만…… 뭔가 개운치 않았다. 칸 반장에게 쥬드 크롬웰 체제를 전복시킬 만큼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나?
엘리자베스 칸이 유능한 수사관이기는 했지만 쥬드 크롬웰의 손발을 묶어 놓으려면 맡은 일만 잘 해가지곤 어림도 없었다. 요는 정치적인 감각인데, 사건 수사는 철두철미하게 해치우지만 휘하 경관에게조차 같이 일하기 갑갑하다는 평을 듣는 칸 반장에게 쥬드 같은 여우를 단숨에 제압할 만한 카리스마가 있을 리 없었다.
“위에서 누군가가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위에…… 누구?”
“그건 모르겠어요.”
쥬드의 음성이 노여운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쥬드가 어느 정도 윗선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윗사람들이란 눈에 보이는 실적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문에 긍정적인 기사가 실릴 만한 성과만 올려준다면 실무자가 경찰서장이건 그 비서건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쥬드에게는 안 된 얘기지만 경찰서장 비서가 뭐 그렇게 요직도 아니고 보면, 고위층에서 의도적으로 쥬드를 물 먹이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요 사이 결정적으로 미운 짓을 해서 윗사람 눈 밖에 났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 듯했다. 실제로 쥬드를 자기 눈알만큼이나 귀하게 여기는 서장조차도 한 번씩 발동해서 주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녀의 심술을 견디지 못해 두 번이나 한직으로 귀양을 보낸 적이 있었다.
“크롬웰 양 생각이 지나친 거 아닐까요?”
비니가 쥬드의 심기를 살피며 설설 기었다.
“특별조사관이 이 방에 들어오면 나를 먼저 쫓아낼 걸요.”
비니가 에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쥬드를 쳐다봤다.
“내기할까요?”
조사관들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약 기운이 몸 안을 두 바퀴 정도 돌면서 본격적인 항우울제의 역할을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조사관은 모두 네 명이었다. 노튼과 그 일행 중 하나가 끼어있기에 노튼이 책임자인 줄 알았는데 앞장서서 들어온 나이 3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대뜸 앞으로 나섰다.
“연방특수경찰 22과 책임자, 닥터 올리비에 오베론입니다.”
닥터 오베론의 인상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같이 생겨서 별로 특이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마주치면 쉽게 잊기 어려울 정도로 체격이 컸다. 반면 자기를 소개하는 말투는 어딘지 학교 선생님 같은 데가 있었다. 닥터란 소리에 쥬드의 예쁜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몸은 괜찮은가?”
노튼은 피곤해 보였고 목소리도 반쯤 잠겨 있었다. 침대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입원해 있다는 얘기 듣고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오베론은 멀쩡하네…… 라는 시선으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었다.
보이지 않는 사슬에 꽁꽁 묶인 것 같던 몸이 풀리기 시작한 건 석류 뱀독 아편차를 마신 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부터였다. 피로 회복과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는 장담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온 신경을 갉아 먹을 것 같던 지난밤의 기억조차도 어차피 벌어진 일…… 그래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 모든 일이 갑자기 긍정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타고 있던 헬기가 추락해서 폭발한 마당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라곤 만에 하나도 없을 것이 확실한데도, 좀 전부터는 그 인간이 그렇게 어이없이 죽었을 리 없다는 엉뚱한 생각이 자꾸만 들더니 이젠 거의 확신의 지경에 이르렀다.
약효가 얼마나 가는 걸까? 지금이라도 아까 화내고 핀잔 준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 빨간 약을 한 병 얻어내고 싶을 정도로 지금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너무 심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려왔다. 니콜라스가 병원을 탈출한 이후로 단 하루, 한 시간도 편안했던 적이 없었다.
“다친 데는 없습니다. 운이 좋았죠.”
“그랬던 것 같군.”
오베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치레는 이쯤 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노튼이 쥬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보니까 베르히만 서장이 당신을 찾더군요. 서장을 도와서 처리할 일이 많을 겁니다.”
쥬드를 대하는 노튼의 태도는 더 할 수 없이 사무적이었다. 니콜라스 사건에 관한한 연방경찰은 쥬드 크롬웰의 존재를 무시할 입장이 못 될 텐데 어째서 쥬드를 저렇게 푸대접하는 걸까?
자신을 성가신 잡상인 내몰 듯 하는 노튼의 태도에 쥬드는 달리 불쾌한 기색도 비치지 않은 채 순순히 일어났다. 그리곤 침착하게 소파에 얹어놨던 코트를 챙겨 들고는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노튼을 쳐다보고 있는 비니에게 거 봐, 내 말이 맞지? 라는 듯 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나가 있어야 됩니까?”
비니가 노튼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비니까지 떠밀려 나가자 병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찬 기운 가득한 조사실로 변했다. 오베른은 지난 밤 몬티첼리의 파티장에서 니콜라스가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관해 묻고, 묻고 또 물었다. 그들은 불과 열여덟 시간 전에 쿠시의 마피아 대부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저택에 한 무리의 괴한들이 난입해서 수많은 사람을 처참하게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 다른 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았다. 쥬드가 준 약 기운이 아니었으면 이런 식의 조사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조사관들은 지독하게 사무적이고 냉정했다.
“시계라고? 분명히 시계라고 했나? 어떤 시계?”
“전에 그가 저한테 시계를 선물했었습니다.”
“골동품이었나?”
“아니요.”
“그 시계, 지금 어디 있나?”
“버렸습니다. 고장이 나서…….”
조사관들이 자기네들끼리 실망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얘기해봐. 놈이 예전에 선물한 시계의 행방이 궁금해서 자넬 찾아가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게 실없는 놈이 아니잖아? 라두칸에겐 분명히 중요한 용건이 있었어!”
“분명히…….”
“자네 생각을 말하지 말고 놈이 한 표현을 그대로 말해. 놈이 분명히 시계라고 말했나?”
오베른이 마치 마녀를 심문하는 중세의 이단 심문관처럼 엄하게 다그쳤다. 기억이 분명치 않았다. 지난밤에는 니콜라스와 저녁 식탁에서 몇 마디 나눈 것 외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지난밤의 정황을 가지런히 떠올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억을 더듬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시간을 담은…… 병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을 담은 병」이란 말에 조사관들이 한순간 말을 잊었다. 뭔가 대단히 비밀스럽고 중요한 정보를 들은 엿들은 교활한 스파이처럼 회심에 찬 얼굴로 그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걸 찾고 있었군.”
노튼이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쭉 지니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오베른의 얼굴이 지금까지보다 더 험악해졌다.
“경찰에게 쫓기고 있었으니까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겠다고 생각했겠죠.”
날렵한 은테 안경을 낀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상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자기를 체포하려고 접근한 수사관한테 그걸 맡겼겠나?”
“맡겼으니까 찾으러 왔겠죠. 기사단에게 노출될 위험을 무릅쓰고 말입니다.”
낮선 남자의 입에서 기사단이라는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튀어 나오는 순간, 내 호흡이 잠시 멎었다. 기사단이라면…… 지난밤의 그 총 든 미치광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했다. 정보망이 깡통인 지역경찰하고는 격이 다른 연방특수경찰은 이미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에 두서없는 의구심이 자라고 있는 동안 조사관들은 큰 단서라도 잡은 것처럼 수선을 떨면서 시간을 담은 병이라는 어떤 물건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해줄 말이 없었고 그 때문에 분위기가 대단히 험악해지고 말았다.
“놈이 자네한테 시간을 담을 병의 행방을 물었다면 그건 그 병을 자네가 갖고 있기 때문이야. 기억이 안 난다는 건 말도 안 돼!”
“제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겁니까?”
화가 나서 나도 오베른에게 소리쳤다. 오베른은 한 시간도 넘게 니콜라스로부터 받은 물건에 관해 물었다.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연방 경찰에서 나온 특별수사관들이라 나도 최대한 협조하려고 했지만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병을 어쨌냐고 이렇게 윽박지르면 대답이 곱게 나갈 수 없었다.
“질문은 내가 할 테니까 자네는 대답이나 제대로 해!”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으면 오베른은 나를 깔고 앉아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서는 유감을 지나쳐서 살의까지 느껴졌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물어보시면 얼마든지요.”
“계속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자네 집이라도 뒤져야겠군!”
내가 오베른을 싫어하는 만큼 이제 오베른도 내가 싫어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퇴거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세간은 레빈의 배려로 몬티첼리 저택의 차고 한 구석에 보관해 놓고 있었다. 그건 내 물건들이 몬티첼리 저택과 함께 모두 불타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타다 만 잿더미라도 뒤지고 싶으면 얼마든지 뒤지시라고 한 마디 하자 오베른이 더욱 더 흥분해서 거친 콧김을 내뿜었다.
“이 친구는 정말로 아는 게 없는 모양이야. 올리비에.”
나하고 오베른의 지루한 입씨름을 지켜보고만 있던 노튼이 입을 열었다.
“오히려 그들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안다면 무슨 언질이 있었겠죠. 어차피 한배를 탄 처지니까…….”
노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외부인들을 절대로 자기들 배에 태우지 않아.”
그들이라…… 두 사람의 대화에서는 부정한 야합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오베른은 중앙특수경찰의 수십 개나 되는 부서 중 하나의 책임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지만 그 부서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자신이 무엇을 책임지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베른은 내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오베른이 소파에 물러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같이 온 은테 안경이 오베른 대신 나서서 만찬장에 괴한들이 난입한 이후 니콜라스의 행보에 대해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간신히 저택에서 빠져나온 후 숲을 헤매다가 결국 침입자들에게 발각되어 니콜라스가 헬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비난을 듣지 않을 정도로 성의껏 진술했다.
지난 밤 사건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놈들이 누군지, 왜 니콜라스를 그렇게 뒤쫓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조사를 마친 오베른과 다른 수사관들이 각자 자기 코트를 집어 들고 병실을 나갈 때까지 나는 그들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병실 문을 나서면서 오베른이 돌아서더니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들이 왜 니콜라스 헤슬렘을 데려갔다고 생각하나?”
시간을 담은 병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지만, 이번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에 오베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괜찮아?”
오베른이 나가고 나서 문이 닫히기도 전에 비니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표정이 조심스러운 걸 보니까 비니는 계속 문 밖에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리 특실이라도 경찰서 조사실처럼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나하고 오베른 사이에 오간 고성을 다 들었을 터였다.
“그만 나가자.”
환자복을 벗어서 침대 위에 던졌다. 기분도 나쁘고 머리도 복잡했다. 병원에서 벗어나서 찬바람을 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