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는 길고 길었다.
눈발이 분분히 날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목사의 장황하고 과장된 애도를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시장 부부를 비롯해서 일선 경찰관의 장례식에선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고위공무원들과 중앙정부의 관리들이 모여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케빈 왕은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망적인 혼수상태로 이틀을 버텼다. 48시간은 관할 구역 마약 딜러들의 뒤를 봐주고 수수료 챙기기를 본업보다 더 충실히 했던 비리 경찰을 영웅으로 만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추도사가 끝나고 시장이 직접 고인에 대한 1계급 특진과 경찰 무공 훈장을 추서했다.
시장이 떼지어 몰려온 기자들을 의식하며 추도 연설을 시작할 즈음엔 그칠 듯 그칠 듯 날리던 눈발이 갑자기 폭설로 변했다.
공직자들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이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만이 경찰관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란 취지의 짧은 연설 도중에 옆 사람 얼굴도 안 보일 정도의 폭설이 쏟아지자 시장도 당황해서 몇 번이나 헛기침을 했다. 검은 상복을 맵시 있게 차려 입고 나온 시장 부인은 추위에 파랗게 질린 채 추도사 내내 남편을 원망어린 눈길로 노려봤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코트와 여우 털목도리로 무장한 쥬드 크롬웰은 무표정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는 반장 자리에서 떨려난 후에도 며칠 간 계속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은 글렌 반장이 떫은 얼굴로 서 있었다.
반대편에는 서장과 엘리자베스 칸의 모습이 보였다. 검은 상복 차림의 칸 반장은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작고 나이 들어 보였다. 평생 염색이라곤 해본 적 없어 보이는 반백의 머리카락이 이따금 불어 닥치는 찬바람에 어지럽게 날렸다.
이마와 눈가에 깊게 패인 주름 때문에 칸의 인상은 평생을 벽촌의 농장에서 노동에 시달린 노파처럼 억세고 완고해 보였으며 실제 성격도 그랬다. 별 생각 없이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칸이 능력 있는 수사관이라는 데 이견을 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연방경찰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일찌감치 노튼 같은 베테랑을 파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후엔 어디서 뭘 하는지 도무지 소식이 없었다. 노튼이 쿠간에서 하는 일도 분명치가 않았다.
예포가 차가운 겨울 공기를 울렸다. 왕의 가족과 친지와 그리고 동료들이 그의 무덤에 꽃을 던져 넣는 동안 나는 좀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낯빛이 파리한 왕의 부인은 위로의 말이라도 전하려고 다가서는 나를 보자마자 싸늘한 얼굴로 돌아서버렸다.
사방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러시 때문에 눈이 아팠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니콜라스 헤슬렘이란 살인마를 발굴해서 세상에 내놓은 것이 정말 잘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할 때가 더 좋았었다.
“제이, 인사해. 칸 반장이야.”
어느새 다가온 서장이 칸 반장을 소개했다. 칸 반장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제 만나는군. 유제이.”
몇 년 전에 시의 전 경찰들이 대규모 마피아 소탕작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칸 반장과 딱 한번 같이 일해 본 적이 있었다. 반장의 손은 건조하고 차가웠다.
“사건을 맡으셨다고요?”
칸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카로운 관찰의 시선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을 짧게 스쳐 지나갔다.
“몬티첼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들었네. 가르시아는 잘 있던가?”
“예…….”
“지난번에 너무 거칠게 대한 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전해주게.”
전해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런다고 가르시아의 마음이 풀리진 않을 거다. 가르시아는 칸 반장에게 체포당하면서 미친 곰처럼 날뛰다가 허벅지에 총 구멍이 뚫렸었다.
“베네티도 별일 없고?”
별일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몬티첼리 수하의 조직원들에 대해서는 환하게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놈들 틈에서 용케 버티는군. 조만간 복귀해야지?”
칸 반장이 코트 주머니에서 일전에 반납한 내 총을 꺼내서 내밀었다. 쥬드에게 미리 들은 얘기라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반납할 때는 거의 빈총이었는데 탄창이 가득 차 있었다.
“배지는요?”
칸 반장이 서장을 돌아봤다. 서장이 어깨와 모자에 쌓인 눈을 툭툭 털며 대답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해. 얘긴 그때 하지.”
폭설 때문에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멀어져 가는 칸 반장과 서장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는데 비니가 어느새 옆에 다가와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잠깐 이모부한테 인사만 하고 가자.”
부인한테 외투를 뺏긴 채 덜덜 떨면서 장례식에 참석한 쿠간 시 유력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리 시장이 비니를 보고 멈칫 했다.
“오랜만이구나, 비니.”
“별 일 없으시죠?”
“한두 가지만 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시장은 여러모로 심기가 편치 않아 보였다. 비니에게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눈치를 챈 비니가 옆에 있던 시장 부인을 덥석 끌어안았다.
“안녕! 이모! 여전히 예쁘세요.”
“고맙다, 비니.”
시장 부인은 비니의 막내 이모였다. 비니를 끌어안고 있으니 추위가 좀 가시는지 시장 부인이 좀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데 시장이 억지로 둘을 떼어놨다.
“비니 너, 나하고 얘기 좀 하자.”
“저 지금 좀 바빠서…….”
비니가 돌아서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막아서는 시장의 행동도 민첩했다.
“니네 작은아버지 말이다, 대체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통…….”
“100명도 넘는 총잡이들을 집안에 들여 놓고는 뭐가 어째? 그게 니콜라스 헤슬렘 때문이라고?”
시장도 암흑가에서 벌어지는 위기일발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은 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애냐? 그런 헛소리에 속게?”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전쟁을 준비하는 것보다 빤한 거짓말을 둘러대는 게 더 분통 터진다는 투였다.
“왜 애한테 신경질을 부리고 그래요? 비니가 마피아 보스예요?”
비니 이모가 하이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빽 소리를 내질렀다. 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졸업한 이후 무명 락커로 3년간 갈고 닦은 목청이라 성량이 보기보다 대단해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봤다. 놀라기는 시장이 제일 많이 놀랐다.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해결할 일이 있으면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해결하세요. 왜 애먼 비니는 닦아 세우는 거예요?”
시장 부인이 비니 팔짱을 끼고 보란 듯이 남편을 갈궜다.
“바쁜 일 없으면 점심 같이 먹자. 내가 얼마 전에 음식 맛 죽이는 중국집을 하나 텄거든. 거기 형사님도 같이 가요. 제이?”
시장 부인이 나를 보며 다년간 훈련한 사교계 여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니는 요즘 얼마나 바쁜지 모르지만 나야 뭐…….
“그 빌어먹을 마피아 사돈 때문에 내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지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리 하는 거야?”
마피아 사돈이란 말에 시장 부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 언니가 30년 전에 매너 좋은 이탈리아 미남자와 결혼한 게 이제 와서 문제가 되나요?”
“그 이탈리아 미남의 막내 동생이 이 도시 깡패 중의 깡패라는 게 문제잖아! 그놈이 조만간 쿠간을 벌집으로 만들 계략을 꾸미고 있단 말이야! 시장 선거가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는데 이러다가 난 실업자가 되고 말 거야!”
시장이 길길이 뛰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시장은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암흑가의 실력자로 부상하면서부터 정적들로부터 마피아 정치가라는 억울한 인신공격을 당해왔던 것이다. 쿠간 시 시장이 되기까지의 그의 행보는 길고 험난한 것이었는데, 마피아 인척이란 그렇지 않아도 험난한 그 길 한복판에 뾰족이 튀어나와 자꾸만 발에 차이는 성가신 돌부리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결혼하자고 쫓아다니기 전부터 그 사돈은 마피아였어요!”
“그랬었지!”
“그때는 당신 입으로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고 큰 소리 쳤었잖아요!”
“그때 그 자식은 그냥 잔챙이 깡패에 불과했다고! 난 그 자식이 길어야 3년 안에 뒷골목 어귀에서 칼 맞아 죽은 시체로 발견될 줄 알았단 말이야!”
두 사람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비니가 뒤로 슬그머니 한 걸음 물러서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막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는 참에 시장 부인이 남편을 향해 거친 콧바람을 날렸다.
“정치가의 약속이라니! 믿은 내가 등신이지!!”
시장 부인이 앵 돌아서더니 비니와 나를 한 팔에 하나씩 끼고 걷기 시작했다.
“가서 밥이나 먹자!”
“가긴 어딜 가? 저녁에 루소 의원댁 만찬에 가야 되잖아!”
시장이 부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혼자나 실컷 가시구랴!”
시장 부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나하고 비니를 대기하고 있던 검정색 리무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모부 얘기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비니.”
시장 부인이 우리를 데리고 간 음식 맛 죽이는 중국집은 차이나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으리번쩍한 호텔이었다. 시장 부인은 얼마 전에 처음 와본 모양이지만 새로 생긴 호텔은 아니고, 나도 전에 한번 와 봤던 곳이다.
현대식 고층 건물이 아니라 중국의 대가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은 구조로 개업 당시부터 꽤 화젯거리였던 차이나타운의 명손데…… 첸 진 소유였다.
“신경이 곤두서서 그래. 요즘 별로 좋은 일이 없잖니.”
시장 부인이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밀가루 빵을 집어 들었다. 빵 속에는 돌돌 말린 행운의 종이가 하나씩 들어 있었는데 모두 좋은 말뿐이었다. 나는 큰 재산을 모을 횡재수가 있고 비니는 득남할 운이 있었다.
나머지 빵 다섯 개는 모두 시장 부인이 쪼개 봤는데 남쪽으로 여행을 떠날 운세부터 헤어진 옛 애인과 만날 운에다 빚지고 살지 말라는 충고까지 다양하게 나왔다.
“거긴 뭐라고 적혀 있어요?”
비니가 시장 부인이 쥐어뜯어 놓은 빵 조각을 부지런히 집어 먹으며 물었다.
“읽을 수가 없어. 이런 글자는 처음 봐.”
시장 부인이 비니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비니가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중국어 같지도 않은데? 요즘엔 아무도 모르는 외국어로 행운의 쪽지를 써서 주는 모양이네?”
비니가 별 기대 없이 쪽지를 내게 돌렸다. 쪽지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열한 살 이후로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이 글자는 기호와 그림에 가까운 원시적인 문자다.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모퉁이를 돌아 낯선 사람과 마주 서라. 그가 세상의 주인이며 너의 주인이다.”
비니가 빵 조각을 하나 가득 입에 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뜻이야? 그게?”
“난들 알아?”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중국집 행운의 쪽지 같은 것에 우니 문자가 쓰여 있을까?
시장 부인의 얼굴에는 감탄의 표정이 떠올랐고 비니는 빵 한 조각을 한 개 더 입안에 우겨 넣었다.
“그게 어느 나라 글자예요?”
“이런 글자를 쓰는 나라는 없습니다. 마법의 글자죠.”
“부업으로 마법도 하나 봐요?”
“외할아버지께서 그 계통에 오래 계셨거든요.”
「실행 가능한 마법과 불가능한 마법」
「대마법사 사바델의 비기」
외할아버지 평생에 읽은 책이라곤 그 두 권이 전부였다. 예쁜 옷이나 장신구는 몇 가방씩 넘쳐났지만 책은 그 두 권 외에는 찢어진 동화책 한 권도 없었기 때문에 그 책들은 내 유일한 교재이기도 했다.
내 또래 다른 아이들은 밝고 건전한 동화를 읽으면서 크는 동안 나는 악마 소환술이나 시한부 사자死者 환생법, 정령과의 계약서 양식, 악마 혹은 마녀와 동침하는 법 같은 음산하고 비교육적 내용으로 가득한 책을 읽어야 했다.
외할아버지의 주먹구구식 학습법 때문에 글을 배우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흔일곱 개의 그림과 기호로 구성된 글자를 완전히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나 걸렸다. 그래도 나는 비교적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읽을거리가 달리 없었던 탓에 그 두 권의 책을 달달 외우도록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고아원에 남겨진 후 일반 학교라는 곳에 가 보니 내가 배운 글자는 어디에도 쓰이는 데가 없었고, 나는 열 살이 넘도록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이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우니 문자였던 것이다.
“우니 문자라니?”
비니가 쪽지를 거꾸로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물었다. 우니 문자는 본래 고대의 무당들이 주술적인 목적으로 부적이나 주문에 쓰던 기호가 발전한 문자였다. 특정한 장소에서 말하거나 지면에 쓰는 것만으로도 초자연적인 힘을 불러낸다고 여겨져서 신성시 되었던 것인데, 없어진 지 천 년도 넘은 죽은 문자다. 등교한 첫 날에 담임선생이 준비해준 교재를 펼쳐본 순간의 황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났다.
“이집트 상형문자 비슷한 거야. 몇몇 연구자들 빼고는 아무도 못 읽는 사라진 문자 같은 거야.”
“나도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우리끼리만 통하는 암호 같은 걸 만들어 쓰곤 했었는데…… 그런 글자를 알고 있다면 정말 유용했겠는걸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니던 변두리 공립학교에는 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 글자를 우니 문자라고 부른다는 것도 안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래요?”
“니콜라스 헤슬렘이 가르쳐줬어요.”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사교계 재치 부인이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빵을 다 먹고 멀뚱히 앉아 있던 비니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나섰다.
“이 친구가 그때 함정 수사하느라고 니콜라스하고 여기저기 좀 다녔었거든요.”
“그 얘긴 나도 알아. 나는 그냥 좀…….”
부인이 나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무리 직업이 경찰이라도 그런 일은 많이 힘들었겠어요.”
“별로요. 연쇄살인범이란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시장 부인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만 나가죠. 저녁에 만찬 약속이 있어서요.”
이 호텔은 식당가와 객실 그리고 연회장과 카지노 구역이 각각 담장 두른 별채로 구분되어 있었다. 제법 높은 담장 사이 골목 양 옆은 아담한 자연석과 화초로 단장해놨는데 지금은 눈에 덮여서 별다른 정취가 없지만 지난 번 왔을 때는 여름 초입이라서 중국의 어느 마을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 같은 느낌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옛 생각을 지우면서 호텔 정문으로 나가는 코너를 막 돌아서는데 비니가 걸음을 멈췄다.
“저 자식이 여기 웬일이야?”
비니의 마땅찮은 시선을 따라 가보니 검정색 정장 차림의 잘생긴 남자가 한 떼거리의 거한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반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차이나타운에서 마주치는 게 놀라울 것도 없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망설임도 없이 다가왔다. 차이나타운의 새로운 거물, 쿠간 시 암흑가에 몰아치는 태풍의 눈. 루크 첸이었다.
“또 뵙는군요. 부인.”
루크 첸이 시장 부인의 손을 어려운 줄도 모르고 덥석 잡더니 손 등에 입을 맞췄다. 시장 부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만나서 반가워요. 점심 들고 막 가려던 참이에요.”
“음식이 입에 맞으셨는지 모르겠군요.”
“아주 좋았어요. 인사하세요. 이쪽은…….”
비니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지간해서는 사람 앞에서 대놓고 싫은 내색은 안 하는 놈인데 어지간히 비위가 틀린 모양이었다. 루크 첸은 그런 비니의 태도가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내 조카예요. 비니, 이분은 첸 사장님이야.”
비니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시장 부인이 비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쥐어박았다.
“소개 안 해주셔도 돼요. 이모. 첸 사장님은 우리 바닥에서도 유명한 분이거든요.”
“비니!”
시장 부인이 비니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루크 첸이 빙긋 웃었다.
“조카 분의 징크스도 우리 바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죠.”
루크 첸이 나를 보더니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옆에 더 유명한 분이 계셨군요.”
비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루크 첸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키는 비니보다 약간 더 큰 정도고 몸은 호리호리하니 남자치고는 좀 마른 체격이었다. 사실, 이 남자에게는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다. 루크 첸은 대단한 미남자였다.
이 젊은 남자는 첸 진의 딸과 결혼해서 암흑가에 데뷔한 직후부터 여러 면에서 프란시스 몬티첼리와 비교 대상이었다. 범죄 전문가들은 잔인함, 과감함, 기민함, 보스로서의 카리스마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을 비교 분석하며 난감해했고, 일반인들은 두 사람의 수려한 외모와 서로 질세라 뿌려대는 엄청난 염문을 비교하며 재미있어 했다.
“저 자식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 이모?”
시장 부인에게 인사를 마친 루크 첸이 덩치 큰 부하들을 이끌고 골목 저편으로 다 사라지기도 전에 비니가 언성을 높였다.
“잘생겼잖니. 내 이상형이야.”
시장 부인이 루크 첸이 사라진 방향을 아쉬운 듯 돌아봤다.
“이모부는 어쩌고요?”
“이상형 얘기하는데 이모부가 왜 나오니? 설마하니 내 이상형이 대머리 유태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생긴 건 고집 센 유태인같이 생겼지만 사실 시장은 그쪽은 아니다.
“이모 제정신이에요? 저 자식은 중국 마피아 두목이에요! 그런데 저 자식 얼굴 한번 보자고 마피아 식당 같은 델 드나들어요? 게다가 저 자식은 시내에서 제일 유명한 선수라고요!”
“뭐 어떠니? 얼굴만 보는 건데.”
“가정 있는 여자가 그런 소리 막 해도 돼요?”
시장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탈리아 남자들이라니…….”
“그 자식이 뭔가 작업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비니가 계속 투덜거렸다.
“그러지 않고는 이모가 저럴 수가 없어! 루크 첸이라니!”
“진짜 걱정이 뭐야?”
“이모가 걱정 돼.”
비니가 뚱한 얼굴로 대꾸하며 급하게 차선을 바꿨다. 이렇게 과속하면서까지 골재 트럭 앞에 끼어드는 심보를 모르겠다. 더구나 이런 눈길에…….
“너…… 그 자식 전에 본 적 있어?”
“실물은 처음이야. 사진이야 많이 봤지.”
“느낌이 어땠어?”
비니의 표정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느낌이라…….
“조만간 사고 한 번 크게 칠 놈 같던데?”
“역시 그렇지?”
비니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모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작은아버지가 걱정되는 거겠지…….
사거리 신호가 타이밍 좋게 떨어졌다. 비니가 달리던 속도 그대로 크게 좌회전을 했다. 안전벨트를 매긴 했지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이제 비니 파트너도 아닌데 왜 같은 차를 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차…… 괜찮아? 그동안 별 일 없었어?”
비니가 지금 몰고 있는 차는 3만 킬로미터도 안 뛴 벤츤데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013번으로 불리는 흉악한 차였다. 비니가 일전에 몰고 다니던 뷰익은 마리우스의 서점에서 최후를 마쳤다. 비니가 그런 식으로 해치운 차가 나하고 파트너 할 동안만 석 대였다.
“아무 일 없었어. 차가 뭐 어때서?”
비니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했다.
비니가 그동안 몇 대나 되는 자동차를 고물 처리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쨌건 그동안은 열 대 중 석 대는 경찰에서 지원하고, 석 대는 자기 돈 주고 사고, 나머지는 작은아버지한테 비벼서 얻어내는 식으로 그럭저럭 꾸려나갔었다.
하지만 경찰서는 시에서 집행한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었다. 비니한테 한정 없이 새 차를 공급하려면 시민의 세금을 두 배로 올려도 모자랄 거다. 게다가 요번에는 프란시스 몬티첼리조차 쓰던 차라도 한 대 빌려달라는 비니의 부탁에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 번 뷰익도 몬티첼리가 새로 뽑아준 차였으니 인정 없는 작은아버지라고 불평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저런 사정으로 차는 나무랄 데 없지만 그 기막힌 사연을 알고는 거저 가져가래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경찰 보관소 골칫덩어리가 드디어 비니한테 떨어진 것이었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동안 벌어진 모든 사건들이 이 차 탓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 말이야. 넌 이해가 돼?”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차는 본래 시내에서 꽤 알려진 변호사 소유로 임시 번호판을 떼기도 전에 사무실 앞에서 도난당하면서부터 경찰과 불길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차는 3개월 후에 어느 빈민가 공터에서 버려진 채 발견됐다. 부품이 도난당한 흔적도 없고 긁힌 자국도 없었다. 도난당한 지 3개월이나 된 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상태가 좋았다. 차 트렁크에 구더기 들끓는 신원불명의 시체 두 구가 뒤엉켜 있었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첫 사건에서 붙은 증거물 보관증 번호 끝자리가 013번이었다.
그 후 013을 돌려받은 변호사는 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고 차고에 버려뒀다. 사건이 잊히는 대로 제값을 받고 팔아넘길 생각이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등학교 다니는 변호사의 아들이 아버지 몰래 013을 끌고 나가서 친구들을 잔뜩 태우고 광란의 질주를 벌였다.
하룻밤 신나게 즐기고 몰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기만 했으면 만사 순탄했을 테지만 술 취한 친구 한 놈이 차 밖으로 굴러 떨어져서 목이 부러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변호사 아들은 보호 감호 처분을 받았고 013은 두 번째로 경찰서 증거물 보관 창고 신세를 졌다.
이 차의 다섯 번째 주인은 고리대금업자였는데 영문 모르고 헐값에 산 013을 여자친구보다 더 아껴서 온갖 액세서리에 최고급 가죽 시트로 치장하고 다녔다. 그는 어느 허름한 골목길에 013을 세워 놓고 빚을 받으러 갔다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013은 그런 식으로 뻔질나게 증거물 보관 창고를 드나들었다. 거의 10여 년 간 이런저런 험악한 사연으로 보관 창고를 들락거리면서 013도 어느덧 전과 12범이었다. 이제 어느 골목에 013이 버려져 있으면 곧바로 사건으로 접수될 정도로 013의 악명은 대단했다.
우선 급한 대로 비니에게 보관소에서 1년째 놀고 있는 013이라도 꺼내주자는 결정에 몇몇 경관들은 아무리 상대가 비니 몬티첼리라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대 했다지만, 정작 당사자인 비니는 먼지만 털면 새 차나 다름없는 벤츠에 반색을 했다. 사실 013의 엔진 소리는 아직도 조용하고 매끈했다.
“너만 좋으면 됐지 뭘 그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빈이 그럴 줄 정말 몰랐어.”
레빈은 013의 내력을 전해 듣고는 그 귀신 붙은 차를 절대 집안에 들여 놓지 말라고 비니한테 엄중 경고를 날렸다. 종교도 없고, 미신 같은 것도 전혀 안 믿는 레빈의 조치는 예상 밖이었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요즘 비니는 저택 담장 밑에 차를 대놓고 정문에서 저택 본채까지 걸어다니는 처지였다.
비니가 저택에서 좀 떨어진 담 옆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라. 저녁 때 보자.”
“너 없어도 나 안 죽어. 번거롭게 그럴 거 없어.”
여기서 경찰서까지는 전속력으로 달리면 한 시간이고 길이 보통으로 막히면 두 시간 반이었다. 비니는 경찰서에서 30분 거리에 침실 두 개짜리 자기 아파트가 있었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를 2주일간 출퇴근했으면 비니는 나한테 할 만큼 했다. 더군다나 악명 높은 013을 몰고서…….
뭐 어쩌겠다는 대꾸도 없이 비니가 차를 돌렸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013의 꽁무니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나도 걸음을 옮겼다. 비니가 차를 잡을지, 차가 비니를 잡을지…… 정말 기대된다.
눈발은 많이 잦아들었지만 바람은 더 심해졌다. 2층 서재 벽난로 앞에서 뜨거운 커피 한잔 마시며 책이나 읽으면 더없이 좋을 날씨였다.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걷다가 정문을 지나칠 뻔했다. 정신 차리고 돌아서다가 걸음을 멈췄다.
정문은 반쯤 열린 채 한 차례 불어닥친 세찬 북풍에 삐걱거리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면 올리버가 나와 있을 시간이지만 경비원도, 정원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조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열린 채 팽개쳐져 있는 철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황량한 겨울바람이 또 다시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대기 중에는 불길한 기운의 입자가 가득 떠돌고 있었다. 습격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저택 앞마당이 넓다고 해봐야 직선거리로 뛰면 본채 현관까지는 5분 거리였다. 하지만 인기척 하나 없는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은 아득할 정도로 길었다.
홍콩 가수를 따라 들어왔다는 팬클럽 회원들은 현재 시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경찰이 그들을 마냥 내버려두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 발급 받은 관광비자는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는 것이어서 뭔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경찰이 나설 명분이 없었다.
혹시……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싸늘하게 식어 있는 레빈을 내려다보게 되는 걸까? 현관문을 밀치고 뛰어드는 순간 그런 두려움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현관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는 현장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다. 희미한 화약 냄새라든가 진동하는 피 냄새…… 때로는 목숨 건 사투로 인해 흐트러진 공기의 기류가 어찌나 격렬한지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중 어느 한 가지도 없었다.
잠시 현관에 서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식당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반사적으로 총을 빼 들었다. 칸 반장에게서 건네받을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었다. 그나마 반장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맨 주먹이었을 거다.
발소리를 죽이고 식당 문가에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이 났다. 두 명…… 아니면 세 명 정도? 상대가 무장을 했다면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두세 명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재수 없으면 안에 수십 명이 모여 있을 수도 있었다. 몬티첼리의 조직원들도 폭력과 살인에는 미립이 난 악당들인데, 한두 놈에게 당했을 리 없었다. 깡패들 세 싸움에 휘말려 죽어도 경찰 묘지에 묻어주려나?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문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문이 열리고 검은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타났다. 놈은 별다른 의심이나 긴장이 없었다. 내 총구가 놈의 귓가에 조용히 가서 닿았다. 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왔어? 점심은?”
가르시아였다.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배가 좀 고파서.”
가르시아가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던 접시를 들어 보였다. 커다란 접시에 스파게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런 게 아니라…….”
가르시아가 내 총을 지그시 노려봤다. 아주 불쾌한 기색이었다. 하긴, 누군들 자기 머리에 총구가 겨눠져 있으면 그렇지 않을까? 얼른 총을 내렸다.
“대문 활짝 열어 놓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다들 어디 갔어?”
가르시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문이 열려 있었어?”
기가 막혀서…….
그 순간 또 누군가가 주방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서 다시 총을 겨누고 보니 이번엔 테시오였다. 양동이만한 아이스크림 통을 옆구리에 끼고 퍼 먹던 테시오가 놀라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왜 이래? 나 요즘은 아무 짓도 안 했어!”
테시오가 총구를 노려보면서 투덜거렸다.
어쨌거나 다들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다. 폭탄 맞은 것 같은 정문과 상황이 너무 판이한 것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하긴…… 자세한 내막 따위는 몰라도 그만이다.
“주변 경계를 이 따위로 하려면 차라리 경비 용역을 주는 게 어때?”
“그런 얘기는 그 총 내려놓고 해도 되잖아? 짭새.”
그러지 않아도 내려놓으려던 참이었다. 총을 막 허리춤에 꽂아 넣으려는데 가르시아가 어…… 하고 숨을 삼켰다. 등 뒤의 공기가 거칠게 흔들렸다. 뭔가 싶어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뭔가 시커먼 것이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표범이다…….
“인사해. 이쪽은 세자르야.”
가르시아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대충 훔쳤다. 하얀 수건에 선홍색 피가 벌겋게 묻어났다. 좀 떨어진 곳에 앉아서 헐떡거리고 있는 세자르를 힐끔 쳐다봤다.
파르스름한 인광이 돌 정도로 새까만 피부와 표범같이 날렵한 몸매…… 그리고 바위 같은 무표정을 지닌 남자가 나를 마땅찮은 시선으로 노려봤다. 인사 따위 주고받을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저 자식은 그림자 부대 서열 3윈데 우리말을 잘 몰라. 놀라서 그런 거니까 짭새 니가 이해해라.”
기왕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리 화가 난데도 이제와선 별 수 없었다. 애초에 총을 들고 식당으로 뛰어든 내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우기면 나도 할 말은 없다. 더구나 가르시아와 테시오만 보고 상황을 낙관해서 등 뒤를 경계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건지 올리버가 주방에 한 발 들여 놓다가 주방의 난장판과 분위기에 놀라서 문가에 멈춰 섰다.
뒤에서 나를 덮친 놈은 외양만 표범 같은 것이 아니라 행동도 야생동물처럼 민첩하고 인정사정없었다. 최초의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못했으면 온몸의 뼈가 성치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제대로 피한 건 아니라서 놈의 커다란 덩치에 밀려서 얼굴부터 벽에 들이받고 말았다.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분간할 틈도 없이 해머 같은 주먹이 아랫배에 꽂혔다. 흡사 차에 치인 것 같은 충격에 장이 왈칵 뒤틀렸다. 상대를 파악할 여유는커녕 숨 돌릴 틈도 없는데 이번엔 억센 손가락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놈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내 목을 잡아 졸라도 가르시아와 테시오는 그냥 구경만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가르시아…… 이 자식 좀 어떻게 봐! 그렇게 구경만 하고 서 있을 거야?”
놈의 손목을 움켜쥐고 어떻게든 떼어 내려고 용을 쓰면서 가르시아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요렇게 지껄였다.
“걘 우리말 몰라.”
우리말을 모르면, 나보고 이렇게 죽으란 소리냐?
행색을 보아하니 놈은 몬티첼리가 불러들인 용병 중 하나였다. 단단히 오해를 했는지 녀석은 기어이 내 목을 부러뜨려야 직성이 풀릴 기세였다. 두 손목을 움켜잡았지만 놈의 갈퀴 같은 두 손을 풀어내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목뼈가 부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식당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가 싶어 몇몇이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선뜻 달려들어서 이 자식을 떼어내주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싸우고 있을 때 절대 말리지 않는 게 이 자식들 불문율인 것 같았다.
화석처럼 굳어서 꼼짝 않는 팔뚝 붙들고 아무리 용을 써도 힘으론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목이 부러질 각오를 하고 손을 놨다. 그리고 주먹으로 놈의 턱을 후려 갈겼다. 우득…… 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손등이 벗겨져 피가 맺히도록 주먹질을 해도 꼼짝 않던 놈이 세 번째에 비로소 고개를 꺾으며 떨어져나갔다.
아우…… 목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숨이 막히든가, 목이 부러지든가 했을 거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마땅히 화낼 상대가 없어서 가르시아를 노려보자 가르시아가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다.
“그러게 누가 총을 들고 뛰어 들어오래?”
이 와중에도 스파게티 접시는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있네. 긴 말 하기도 싫고 기운도 없었다.
“레빈 어디 있어?”
“그런 거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가르시아가 턱으로 내 어깨 너머를 가리키며 주의를 줬다. 말 끝나기도 전에 시커먼 팔이 다시 목을 감고 비틀기 시작했다. 완전히 나가떨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요행히 한 번은 빠져 나왔지만 맨손으로 상대하기엔 어림도 없는 상대였다. 대체 레빈은 이런 때 어딜 간 걸까?
가르시아가 드디어 내가 상대의 억센 팔에서 빠져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꼴을 구경하고 서 있는 얼룩무늬 군복 입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외부 침입자가 아니라 2층 손님이거든,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단 말이야.”
정신이 아득한 중에도 가르시아의 말소리가 들려와서 좀 안심했다. 그래도 죽게 버려두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용병의 태도가 애매했다.
“좀 두고 보지. 솜씨가 제법인데?”
“그럴까? 그럼…….”
빌어먹을!
발등을 구둣발로 찍어도 반응이 없고 팔꿈치로 명치를 치려고 해도 번번이 허사였다. 워낙 밀착되어 있는데다 그런 빤한 공격을 허용할 정도로 허술한 상대가 아니었다. 팔을 붙들고 힘대로 비틀어 봐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버둥거리면 버둥거릴수록 목을 옥죄는 힘은 점점 강해졌다. 주변에 이용할 만한 지형지물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쩌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발 닿는 곳에 있는 거라곤 꽤 묵직해 보이는 나무 탁자뿐이었다.
될까? 효과가 의심스럽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탁자를 힘껏 발로 밀어 찼다. 탁자가 삐걱 소리를 내며 밀려 나갔다. 그리고 내 목을 잡아 비틀고 있는 무지막지한 용병도 중심을 잃고 뒤로 몇 발자국 밀렸다. 목을 감고 있는 팔이 아주 조금 느슨해졌다. 그 순간 놈의 팔을 풀어내서 덥석 물어버렸다.
그것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생소한 일렁임이 한순간 온몸을 뒤흔들고 멀어져 갔다. 뭘까? 이런 설렘은…… 낮은 물살로도 몸을 흔드는 기분 좋은 파도가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것 같은 기묘한 착각 때문에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근육 깊이 파묻혀 있는 혈관의 고동이 왈칵 입안으로 쏟아졌다.
“으악!”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거칠게 털어냈다. 머리가 멍했다. 독한 술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모두가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을 물어뜯긴 당사자는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왜 그러냐고 물어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입안에 가득 고여 있던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사방이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한데 테시오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봤지? 우린 저런 짭새들을 상대한단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어딜 어떻게 다쳤길래…….”
올리버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내 몰골을 위아래로 살폈다. 다친 데는 많다. 벽에 얼굴부터 부딪치는 바람에 머리도 띵 하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까져서 피가 배어나왔다. 내일 아침이면 야구 장갑 낀 것처럼 부풀어 오를 거다. 하지만 손을 다친 건 목 아픈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는, 이 자식아!”
올리버가 가르시아를 노려봤다.
“옆에 있었으면서 애가 이 지경이 되도록 구경만 하고 있었어?”
가르시아가 별 꼴 다 본다는 얼굴로 올리버와 마주 섰다.
“얘가 어디가 어떤데?”
“온통 피투성이잖아!”
올리버가 내 얼굴과 탁자에 올려놓은 수건을 번갈아 보며 언성을 높였다.
“저 인간 백정 같은 새끼들이…….”
올리버가 용병들에게 대놓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걸리는 대로 목을 잡아 뽑으려고 덤벼드는 판국에 레빈이 없으면 너라도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할 거 아냐? 짭새가 죽으면 니가 책임질 거야?”
“뭘 알고나 떠들어! 이거 저 자식 피 아니야!”
가르시아가 턱으로 세자르를 가리켰다. 까만 팔에 감긴 하얀 붕대에 점점이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핏자국이 좀 전보다 크게 번져 있는 걸 보니 지혈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았다. 테시오가 올리버에게 자기 팔을 물어뜯는 시늉을 해보였다.
“까딱 잘못 했으면 저 군바리 새끼가 골로 갈 뻔했다고!”
올리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누가 뭐래도…… 정당방위다.
“이봐! 너…….”
세자르 옆에 붙어 서서 줄곧 나를 쳐다보던 짧은 금발머리가 말을 걸어왔다.
“대단한데? 세자르한테 걸려서 살아남은 놈이 별로 없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까 가르시아가 싸움을 말려줬으면 했을 때 솜씨가 좋으니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던 그놈이다. 내가 노려보자 금발머리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세자르가 금발머리에게 뭐라고 짧게 웅얼거렸다.
“목은 괜찮아?”
금발이 다시 물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다고 전해줘.”
금발이 세자르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세자르는 내가 괜찮다는 사실이 상당히 언짢은 모양이었다. 나를 노려보는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노려본다고 꿀릴 것도 없어서 나도 세자르를 마주 쳐다봤다. 생살을 저 정도로 심하게 물어 뜯겼으면 충격 때문에라도 기가 죽을 만한데, 기질이 보통 아니다. 서로 그렇게 한 1분 정도 노려보자 식당 분위기가 또 험악해졌다. 잘하면 한 라운드 더 뛰어야 될 것 같은 긴장감이 흐르는데 갑자기 테시오가 빗자루하고 쓰레받기를 들고 우리 사이에 뛰어들었다.
“식당을 이렇게 어질러 놓은 걸 알면 아무리 너라도 레빈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테시오가 깨진 그릇 파편을 쓸어 담으면서 언성을 높여 툴툴거렸다.
“레빈이 이 접시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아? 돈 주고도 못 사는 골동품이라면서 근처에 얼씬도 말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데 이걸 다 깨부수다니…… 이러고도 니들이 성할 줄 아냐?”
테시오가 이탈리아 사투리를 섞어가며 두서없이 떠드는 의도는 뻔했다. 테시오는 그다지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테시오가 험한 분위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물을 타자 용병들이 눈치껏 세자르를 일으켰다.
마지못해 일어난 세자르가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금발머리를 따라 나서다가 신경질적으로 뿌리치고 돌아섰다. 그리곤 뭐하고 한 마디 나직하게 외쳤는데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욕은 분명한 것 같은데…….
“신경 쓸 거 없어. 별 말 아니야.”
금발 머리가 얼른 둘러대며 세자르를 잡아끌었다.
세자르를 위시한 용병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두통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머리를 그 정도로 부딪쳤으면 벽이 깨지든 머리가 깨지든 둘 중 하나였다. 살점이 뜯어져 나가도록 팔을 물어뜯은 게 잘한 짓은 아니었지만, 피장파장이다. 그 자식 때문에 내 뇌세포가 절반은 죽었을 거다.
“아무래도 얘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되지 않을까?”
내가 머리통을 감싸 쥐고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자 테시오가 접시 쓸어 담기를 그치고 중얼거렸다.
“짭새가 유치원생이야?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게? 정 아프면 지가 알아서 가겠지.”
가르시아가 공연히 짜증을 냈다.
왕의 장례식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빈센트와 왕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니콜라스의 공범 정도로 생각하는 건, 뭐…… 어쩔 수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 마뜩찮은 시선과 악의에 가득 찬 수군거림을 흘려보내면서도 견디기 어려웠던 건 사람들이 내게서 니콜라스를 본다는 사실이었다. 제 아무리 흉악하고 엽기적인 사건도 일주일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는 게 대도시 사람들의 습성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 헤슬렘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노상 얼굴 마주치는 경찰서 동료들도 나와 마주서서 얘기하면서, 같이 작전을 수행하면서, 복도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면서 흠칫 놀라곤 했다. 그들의 눈동자에 순간 머물렀다 사라지는 공포의 기척은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좀 전에 세자르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도 그 비슷했다. 대체 내 어디에 니콜라스의 향기가 그토록 짙게 배어 있는 걸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운을 쥐어짜서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 주체할 길이 없는데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테러까지 당하고 보니, 이런저런 일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울증이 고개를 발딱 처 들었다. 유일한 위안은 그래도 안 죽었다는 거 하고 이번 주만 지나면 이 깡패 소굴에서 나갈 수 있다는 거였다.
두통약이라도 몇 알 얻어서 올라가야겠다. 문고리 걸고 이번 주말만 잘 넘겨보자. 그 전에 궁금한 거 하나만 물어보고…….
“하던 일 다 걷어치우고 집안에 모여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내 질문에 가르시아가 막 생각났다는 듯 피에 젖은 수건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올리버를 발로 툭 찼다.
“야! 올리! 너 대문 열어 놓고 온 거야!”
“기억도 안 나. 뉴스 듣고 무슨 정신이 있었어야지.”
뉴스? 첸 진하고 몬티첼리가 평화조약이라도 맺었나?
“고만 뭉개고 나가 봐! 이제 곧 대부님 오실 텐데 대문 활짝 열어 젖혀 놓고 너는 코빼기도 안 보이면 참 좋아하시겠다!”
가르시아가 올리버를 재촉했다. 올리버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안색도 안 좋고 표정도 시무룩했다. 평화 조약은 어림도 없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냐니까? 짭새라고 따돌리는 거야?”
답답해서 짜증을 내자 막 문을 나서려던 올리버가 뒤를 돌았다.
“TV 보러 잠깐 들어온 거야. 정문 초소엔 TV가 없거든.”
프란시스 몬티첼리와 첸 진의 대결 양상이란 이미 링에 올라선 권투 선수의 그것과 같아서 어느 한 쪽이 숨거나 피할 수도 없고, 누가 나서서 말리기도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둘의 목숨은 물론이고 도시의 패권과 조직의 사활이 걸린 이 경기에서 먼저 호된 펀치를 휘두른 쪽은 첸 진이었다.
오늘 오후 3시 15분경, 쿠간 시 중심가 소벨 거리에 있던 35층짜리 오피스 타워가 피격 당했다. 아홉 시 뉴스 화면에 비춰진 건물은 15층에서 20층 정도 높이의 우측 부분이 강철 이빨로 물어뜯어 놓은 것처럼 뻥 하니 뚫려 있었다.
“18층이 주인님 사무실이었죠.”
레빈이 내 앞에 진토닉 한 잔을 내려놓고 자기는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한 캔 맥주를 땄다.
나는 레빈의 서재에 죽치고 앉아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찾아보는 중이었고, 몸이 둘이라도 모자라게 바쁜 레빈은 잠시 숨이나 돌리려고 이제 막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레빈은 사고가 터지자마자 수하에 몇 명만 데리고 사건 현장에 갔다가 한 시간 전쯤 몬티첼리와 함께 귀가했다.
박살난 장식장과 접시들을 보고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만 레빈은 거기에 대해선 별 말이 없었다. 아래층에서 대충 보고를 받았는지 두통이 좀 어떠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사무실이 날아갈 때 몬티첼리는 요즘 공들이고 있는 여자친구한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건물 1층에 있는 보석상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운이 좋았던 건 아니라서 사망자 열한 명 포함해서 인명 피해가 스물여섯 명이었다.
“뭘로 저렇게 한 걸까요?”
오후 3시라면 시장부인과 첸 진의 식당에서 중국요리 먹고 배 두드리며 나올 즈음이었다. 루크 첸과 딱 마주쳤을 그 시간에 몬티첼리의 사무실이 날아가버린 거다. 그런 짓을 꾸미고 있었으면서 그토록 태연자약한 얼굴이었다니…… 보기보다 깜찍한 놈이다.
“단정적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미사일을 사용한 것 같더군요.”
컥…….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진 토닉이 입 밖으로 반이나 튀어 나왔다.
“미사일이요?”
“아프리카에 있을 때 저런 걸 많이 봤죠. 반경이 크지 않은 걸로 봐서 개인 휴대용 유도 미사일 종류였을 겁니다. 요즘은 중간 크기 트렁크만한 가방 하나에 발사대까지 다 들어가게 나오는데, 데릭 엔 소여 사에서 작년에 발표한 화이어볼 시리즈는 제일 큰 사이즈도 어른 팔뚝 정도 크기죠. 폭발 반경이 크지 않은 대신에 유도 장치 성능이 대단해서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발사해도 목표물 오차가 1미터 미만인데 얼핏 보면 꼭 애들 장난감처럼 귀엽답니다.”
“하지만 그런 걸 어디서 구해서…….”
“슈퍼에 재 놓고 팔지는 않죠. 하지만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손에 넣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물망 같은 조직과 도시를 들었다 놓을 수 있을 만한 재력을 가진 중국계 마피아 총수가 마음먹으면 못 구할 물건이란 건 없다. 놀라운 것은 그런 테러를 궁리해낸 인간의 두뇌 구조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미사일을 날리다니…….
레빈과 함께 귀가한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얼굴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노력의 결과였겠지만 그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겁을 집어 먹은 얼굴도 아니었다.
하지만 표적을 제거하기 위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사무실 건물에 미사일을 날리는 상식을 초월하는 대담함에 몬티첼리의 조직원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어서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는 애들이 보스의 사무실 피격 소식에 만사를 젖혀 두고 TV 앞으로 몰려들었던 것만 봐도 그 당황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했다.
이 싸움에 미사일 공격은 딱 한번만 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다음번엔 이 저택의 2층 침실로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제 삼자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첸 진 쪽에서 이런 식으로 독하게 나온다면 우르르 모여서 집이나 지키는 지금의 방식은 별로 실효성이 없어 보였다.
“그건 그렇죠.”
레빈이 별다른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에 벙커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테시오 의견보다는 현실성이 있군요.”
영화광 테시오는 미사일 얘기에 흥분해서 우리도 미사일을 사서 날아오는 미사일을 몽땅 요격해야 한다고 떠들다가 그림자 부대원들에게 된통 깔렸다. 아무리 미사일은 미사일로 제압하는 시절이라지만 그건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기껏해야 소총 사격이나 오가는 갱단 간의 세력 다툼이라고 생각하고 용돈벌이 하러 왔던 그림자 부대 역시 일 돌아가는 모양새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자 자기들끼리만 잠깐 회의를 열었다.
회의실에서 나온 그림자 부대 지휘관은 레빈에게 보수를 애초 약속했던 금액의 두 배로 올려줄 것과 개인 화기를 보강해줄 것, 그리고 그림자 부대 참모를 이후에 열리는 작전회의에 참여 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몬티첼리는 마지막 조건은 거절했다.
“그자는 같은 방법을 두 번 쓰지는 않을 겁니다.”
레빈이 두 개째 맥주 캔을 땄다.
“근거가 있는 추측인가요? 아니면 그저 간절한 희망인가요?”
레빈이 소파에 등을 기대더니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많이 피곤한 얼굴이었다.
“루크 첸은 영리한 놈이에요. 대담하고, 아이디어도 넘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데서 대단한 재미를 느끼는 그런 타입은 어지간해서는 연달아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아요. 대신…….”
북아프리카에 있을 때 레빈이 꼭 그랬었다. 레빈이 잠시 뭔가 생각하면서 맥주를 반 넘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뭔가 더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2차 공격을 검토하고 있을 겁니다.”
전문 분야가 조직범죄가 아니라서 나는 쿠간을 양분하고 있는 두 조직 간의 암투에 관해서는 일반적인 상식 이상의 사항은 알지 못한다. 루크 첸의 경우만 해도 그간 몇 건의 살인사건 배후로 지목 된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인상이 강한 악당은 아니었다. 상대 조직 보스의 사무실에 미사일을 날리기 전까지는 그는 그저 조직의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첸 진의 양자 겸 사위일 뿐이었다.
그 루크 첸이 더럽고 침침한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곤 했던 범죄조직 간의 은밀한 암투를 시가전의 양상으로 뒤바꿔 놨다. 오늘 사건만 해도 사망자들은 조직원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었다. 두 조직이 무차별 시가전이라도 벌이는 날에는 니콜라스 같은 살인범이 사람 한두 명 사냥하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질 게 빤했다. 몬티첼리의 성격에 가만히 당하고 앉아 있을 리도 만무하니, 이제 남은 일은 온도시가 한바탕 피바람에 휩싸이는 것뿐이었다.
쿠간을 양분하고 있던 두 조직 간의 평화 공존은 이제 물 건너 갔다. 전운이 감돌던 불안한 평화도 몬티첼리의 시내 사무실이 흙더미로 변해버린 것을 기점으로 막을 내렸고, 상황은 본격적인 전쟁 상태로 접어들었다. 미사일 공격보다 더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이 어떤 건지는 상상하기도 싫다.
신문 일면 헤드라인이 드디어 바뀌었다. 몇 주째 일간지 전면을 차지하고 있던 니콜라스의 사진이 일제히 암흑가의 패권을 두고 격돌한 두 제왕의 사진으로 교체됐다.
루크 첸이 감행한 화끈한 선제공격의 여파는 생각보다 파장이 대단해서 그동안 두 세력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몇몇 조직이 공공연히 첸 진 쪽으로 기울었다. 설상가상 경찰에서 두 조직을 상대로 총 공세를 펴는 바람에 몬티첼리의 손발이 꼼짝없이 묶여버렸다. 루크 첸의 두 번째 도발 역시 여의치 않아진 탓에 두 조직은 온 도시를 뒤집어가면서 전쟁을 벌일 거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기약 없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덕분에 니콜라스 헤슬렘 전담반은 시민들의 과도한 관심에서 어느 정도 놓여날 수 있었다. 그간의 파행적이고 틀어막기식 대응 대신 좀 더 이성적으로 수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쥬드 크롬웰이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크 첸이 온 도시가 떠르르 할 정도로 요란한 선전 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칸 반장은 조직 범죄과로 복귀하지 않았다. 비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요즘 쥬드는 자기 할 일만 딱 하고 퇴근하는 평소의 생활 패턴으로 완전히 돌아갔다고 한다. 칸 반장과는 어떤 정보 교류도 없는 상태라니, 쥬드 크롬웰보다는 칸 반장의 처지가 더 딱하게 됐다.
일요일 오후였다.
날씨는 반짝 맑았지만 이제 완연한 겨울이었다. 저택은 몬티첼리의 사무실이 날아간 그날 이후로는 별다른 사건 없이 조용했다. 그날 밤에 세자르가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릴 하는 바람이 의사가 다녀가는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세자르의 상태는 진통제와 해열제 한 대씩으로 조용히 해결됐고 그 싸움 이후 조직원과 용병 세력 간의 소소한 다툼이 오히려 크게 줄었다.
창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다보니 커다란 배달 트럭이 다섯 대나 마당에 늘어 서 있고 배달원들과 흰색 가운을 입은 요리사들 열서너 명이 가르시아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있었다. 좀 전에 들어간 스무 명 남짓한 밴드 단원들도 비슷한 꼴을 당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풍경이라 그만 창가에서 물러 나오는데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가르시아가 요리사 하나를 다짜고짜 바닥에 매다 꽂았다. 요리사가 무슨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르시아의 신경이 곤두서고 있는 게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오후부터 만찬 전문 코디네이터 한 떼거리, 꽃 장식 전문가와 그 조수들, 몬티첼리의 재단사와 헤어 디자이너…… 하는 식으로 수십 명의 외부인이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정문에서는 올리버가, 저택 현관 앞에서는 가르시아가 일일이 몸수색하고 물품을 검사하느라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시의 명사들을 초청해서 만찬을 연다는데, 요즘 같은 비상시국에 무슨 정신으로 이렇게 떠들썩한 파티를 여는지 그 속을 알 길이 없다.
“사실 이렇게까지 크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1층을 기본 구조 빼고는 다 갈아치우다시피 하고 군복 차림의 용병들까지 새까만 양복으로 말쑥하게 단장시킨 후에야 레빈이 한숨 돌리러 방에 들어왔다.
“지난 번 사건으로 주인님 특유의 오기가 발동한 것 같아요. 웬만한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모조리 초대장을 돌렸거든요. 그래 놓으니 예정에도 없던 인테리어에, 18인조 밴드까지 동원된 거죠.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손님이 60명 정도는 올 겁니다.”
나는 그동안 내 방에 가져다 보던 책들을 책장에 정리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이 집에 다시 올 일은 없을 테니까…….
“온다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네요.”
목숨 건 저녁식사가 될지도 모르는데…… 칸딘스키의 화집이 꽂혀 있던 자리가 이쯤이었나?
“요즘 저택 주변에 배치된 경찰들이 몇 명인데요? 루크 첸 쪽에도 그만큼 붙어 있을 테니까 별일은 없을 겁니다.”
미사일 테러도 불사하는 또라이를 상대하면서 참 느긋하기도 하다, 생각하면서 고대 그리스 비극을 제자리에 꽂았다. 이 서재는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아쉽다. 그런 나를 레빈이 잠시 지켜봤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골라보세요. 선물로 드릴게요.”
마음은 고맙지만 고개를 저었다.
“당장 있을 데부터 알아봐야 할 처지라서요.”
“비니 도련님하고 같이 계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비니하고 함께 있는 게 니콜라스에게 잡혀 가는 것보다 덜 위험할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전혀요.”
비니는 아직도 콘웨이 요양소에서 도망 나간 환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계절이 며칠 사이에 갑자기 한 겨울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은 도시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얼어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안된 얘기지만 이 도시에는 그런 시체가 하루에도 몇 구씩 발견되곤 한다.
머리도 좋고 수사 능력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지만, 비니는 그 징크스 때문에 수사 팀에서 환영 받지 못했다. 내가 정직을 먹은 이후로는 파트너도 없는 외토린데 경찰서에서 팀에 합류하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사람 찾는 일, 아니면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잃어버린 강아지 찾아주는 일 따위가 고작이었다. 설상가상 비니는 없어진 사람하고 개 찾는 일에 있어서는 그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웬은 결국 시립정신병원에서 푸른 용과 기린을 데리고 나가지 못했다. 두 사람의 증세가 얼마나 중한지 병원의 모든 의사들이 몰려나와서 퇴원을 반대했다니 오웬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비니가 병원에 막 들어섰을 때 오웬은 푸른 용과 기린을 잠깐 면회만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비니로써는 면목 없는 일이었다.
내선 전화가 울렸다. 손님들이 슬슬 도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빈이 전화를 끊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언제고 밖에서 술 한 잔 하자고…… 내가 사겠다고 지금 말할까? 막 말을 꺼내려는데 레빈이 돌아섰다.
“만찬에는 참석하십시오. 옷은 준비해 놨습니다.”
“제가 만찬엔 왜요?”
“주인님 손님이시니까요. 밖에서 손님 불러서 저녁 대접하면서 안에 계신 손님한테는 식은 밥을 대접하겠습니까? 게다가 마지막 밤이기도 하니까…….”
이것저것 정리할 것도 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분위기 흐리기도 싫었다. 게다가…….
“루셀로 씨가 요리장이죠?”
“예.”
“초대는 거절할게요. 요즘 속이 안 좋아서요.”
하루가 참 길고도 짧다. 시간은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해가 저문 지는 꽤 됐다.
남은 책을 마저 책꽂이에 정리해 놓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올 때 워낙 들고 온 게 없으니까 정리할 것도 얼마 없는데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써 다 가방에 쑤셔 넣었고, 가방은 문가에 던져 놨다.
니콜라스 사건이 일단락 될 때까지는 새로 집을 얻게 되지는 않을 거다. 신변 안전상의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나를 좋다고 받아줄 동네가 지금은 없었다. 다른 안가가 없으면 경찰서 안에서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찰서가 최첨단 보안 시스템을 자랑하는 현대식 건물로 바뀐 후에는 주요 증인들이 며칠씩 경찰서 내부에서 보호를 받기도 했다. 경찰서 6층에 있는 게스트 룸 내부는 웬만한 호텔 수준은 되기 때문에 전에 살던 아파트보다 훨씬 쾌적한 환경이었다. 시내 신흥 갱단 두목의 살인 혐의를 입증해줄 증인이 계속 머물고 있었는데 이틀 전에 재판이 끝나서 지금은 비어 있다고 들었다.
다른 할 일도 더는 없고 피곤하기도 해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아래층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파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현관 앞에 잠시 왔다가 멀어지는 자동차 소리, 웃음소리, 음악 소리, 그리고 날카로운 바람소리……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은 채 억지로 잠을 청하다 보니 그런 잡다한 소리들이 바로 귓전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했다. 마치 파티장 한복판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우아하고 감미로운 음악에, 한가로운 대화, 근사한 요리…… 루셀로 씨가 준비했으면 말도 못하게 매울 테지만…… 부자들이란 복 받은 사람들이네.
얼마를 뒤척거렸는지 모르겠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데 음악이 딱 멎었다. 무슨 일일까? 파티가 벌써 끝났을 리 없는데, 무슨 사고라도 났나?
잠깐 생각하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누웠다. 사고가 났을 리 있나? 본격적인 저녁식사로 들어가서 루셀로 씨의 활화산 같은 칠리 요리를 한 입씩 물었겠지. 조용하니 잠자기는 더 좋다.
어둠 속에 뭔가 빛나고 있었다. 공? 아니……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구슬이었다. 나는 이 푸른 수정을 안다. 언제나 떠돌아다니는 외할아버지의 짐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구슬이다. 이게 왜 이런 데 떨어져 있을까? 아니…… 구슬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떠다니고 있었다. 구슬이 내 주위를 빙글 돌았다.
외할아버지에게는 두 개의 수정 구슬이 있었다. 투명하고 예쁜 구슬은 외할아버지의 주된 고객이었던 시골처녀들이 마음에 두고 있는 총각과 연인이 될 수 있을지…… 결혼은 언제쯤 할 수 있을지를 점치는데 사용되곤 했었다. 하지만 그 투명한 유리구슬은 실제로 안에 소다수를 잔뜩 채워 넣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소다수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와 유리에 붙은 모양이 예쁘기는 했어도 사람의 앞일을 비춰주는 영험이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서 푸른 구슬은 주로 외할아버지의 짐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서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머니 잔기침이 부쩍 심해지기 시작했던 여름 밤 이전까지 나는 푸른 구슬이건 하얀 구슬이건 관심도 없었고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따금 푸른 구슬을 근심 가득한 얼굴로 들여다보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나는 그 푸른 구슬에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 이상의 재주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내가 푸른 구슬을 외할아버지의 가방에서 꺼낸 것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는 어머니의 기침약이 구슬 아래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침약을 찾아서 꺼내놓고 구슬을 가방에 다시 넣으려고 돌아보니 외할아버지 실크 스카프에 둘둘 말려 있던 구슬은 어느새 저 혼자 방구석까지 굴러가서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종종 당신의 소품을 좀 더 특이하게 보이려고 여러 가지 장치를 해놓곤 했다. 요번엔 안에다가 꼬마전구라도 넣어 놓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구슬을 집어 드는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찬 기운이 손끝을 타고 심장까지 달려왔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구슬을 바닥에 집어 던질 뻔했다.
하지만 그 찬 기운보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구슬 속에 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구슬 안에 있는 어머니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누워 있었고,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 그 얼굴은 어느 때보다 희고 아름다웠다.
건너 방에서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을 때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구슬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가 약을 놓고 온 것을 깨닫고 다시 외할아버지 방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가방이 있는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약을 집어 들고 도망치듯 방을 나왔다.
어머니는 약을 먹고 나서도 한참을 기침에 시달리다가 어렵게 잠들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지 않으려고 방구석을 향해 돌아앉아서 숨을 죽였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자꾸 눈물이 났다. 그보다 더한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 구슬 속의 어머니는 죽어 있었다.
주위를 맴도는 구슬을 가만히 지켜봤다. 구슬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정한 속도로 날고 있다. 마치 지구의 주위를 맴도는 달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듯…… 마치 아무 관심 없는 듯 좀 떨어진 허공을 쳐다봤다. 구슬이 내 눈 높이에서 가슴 쪽으로 비스듬히 돌았다. 그리곤 반 바퀴를 돌면서 이번엔 다리 쪽으로 감겨들더니 다시 위로 올라왔다. 무릎으로…… 그리고…….
구슬이 손 등으로 날아온 순간, 구슬을 잡아챘다. 그리고 차갑고 불길한 그것을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순간…… 쿵! 하는 엄청난 폭발음이 귓전에 울렸다.
“깨셨군요.”
레빈이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레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바람 때문에 문이…….”
꿈에 들은 그 소리는 레빈이 열고 들어온 문이 바람에 세게 닫히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시계를 보니 설핏 잠든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선잠을 깬 탓에 아직도 눈앞에 푸른 구슬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동안 아주 잠깐 졸다가 다시 깼다.
“그만 일어나셔야겠습니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 있어요?”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꽤 깊이 잠들었던지 쉽게 깨질 않았다. 레빈이 얼른 대답을 못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망설이던 레빈이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래층에…… 니콜라스 헤슬렘이 와 있습니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