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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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집 맞습니까?”

몬티첼리 저택에 거의 다 와서 기사가 물었다. 비니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원에서 야간 경기라도 하는 모양이죠? 무지 밝네요?”

아닌 게 아니라 저택 안팎의 밝기가 야간 경기 진행 중인 야구장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택에서 꽤 떨어진 큰 길에 취재 차량까지 한 떼거리 몰려와서 서성이고 있었다.

몬티첼리는 마피아 실세 중의 실세로 요즈음에는 거의 백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계 조직과 사활을 건 한판 대결을 벌이는 중이었다. 저택의 일급 비상 체재와 방송국 취재 차량이라…… 혹시 몬티첼리가…….

달려드는 기자들을 힘겹게 뚫고 들어간 택시가 굳게 닫힌 정문 앞에 멈췄다. 정문 경비의 삼엄함이 전쟁 중인 군대의 총사령관 막사보다 오히려 더하고 그 넓은 정원에 깔린 무장 경호원의 숫자도 보통 때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침착해 보이던 비니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비니가 차에서 얼른 내리질 못하고 꾸물거렸다. 여러 가지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니와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불가사의할 만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격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 공통점이라곤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것은 별로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정문 바깥쪽에서 올리버와 가르시아까지 낀 몇 명의 조직원들이 동그랗게 모여서 뭔가를 떠들고 있었다. 진작부터 조짐은 심상치 않았다. 우리를 발견한 올리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첸 진한테 기습이라도 당한 거야?”

내려서면서 다급하게 묻자 올리버가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한 마디로 미루어 짐작컨데 중국 조폭에게 기습당한 건 아닌 것 같았다. 대신 더 심각한 일이 벌어졌나 보다.

사실 몬티첼리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참사를 당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 살인 청부의 결정적인 증거 같은 것이 경찰에 포착돼서 체포라도 당했나?

하지만 그건 가능성이 별로 없는 얘기였다. 몬티첼리는 그렇게 허술하지 않고, 경찰은 그렇게 유능하지 않다. 미모의 여인들과 복잡한 애정 행각 끝에 질투심에 불타는 어느 한쪽에게 총 맞아 죽었다는 편이 훨씬 그럴 듯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올리버가 나한테 버럭 소리쳤다.

“대체 점심나절에 기어나가서 어디서 무슨 짓거릴 하다 이제 들어오는 거야?”

깜짝이야.

“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니 여동생이야?”

“이 난리 북새통이 다 너 때문인데 왜 상관이 없어?”

올리버의 고함 소리에 저만치 떨어져 있는 저택 유리창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귀가 멍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자 내 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올리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너 때문에 대부님한테 욕만 배 터지게 얻어먹고 애들을 풀어서 온 시내를 뒤진 게 벌써 열 시간째야! 일 있으면 나가는 것까지는 좋아. 하지만 날 저물면 째깍 들어와야 할 거 아냐! 대체 지금이 몇 시야? 짭새, 넌 앞으론 집 밖에 나갈 생각 꿈도 꾸지 마! 그리고 너…….”

올리버가 차 문을 열고 비니를 억지로 끌어 내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비니는 지금 막 차에서 내리려던 참이었다.

“이 망할 놈아! 휴대폰은 왜 끄고 다녀? 내가 니네 반장한테까지 전화해서 너 있는 데를 물어봐야 속이 시원해?”

“나 휴대폰 안 껐어.”

올리버의 사나운 기세에 좀 전의 불안함을 다 잊은 비니가 억울하다는 듯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들여다봤다. 그리곤 혼자 멋적게 중얼거렸다.

“……꺼졌네?”

순간 올리버의 주먹이 비니를 향해 날았다. 올리버는 정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비니가 누군가의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는 일은 그간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오웬이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비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리버가 그제야 오웬의 존재를 깨닫고 눈썹을 사납게 치켜 올렸다.

“넌 또 뭐야?”

다행히도…… 혹은 안타깝게도 몬티첼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것은 저택 주변을 불야성처럼 밝힌 수십 개의 조명과 수십 명의 무장 경비원들이 동원되어 지키는 것이 대부의 목숨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저택에 이 난리가 난 건 나 때문이었다.

시내 모처에서 볼일을 보던 몬티첼리도 뉴스를 봤다. TV에서 하루 종일 경찰관 사망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하면서 니콜라스가 자기 집에 신세지고 있는 나를 노리고 있으며 언제 저택이 습격당할지 모른다는 선정적인 멘트를 단 것이 화근이었던 것 같았다.

몬티첼리는 무슨 일이든 남한테 지고 못사는 못난 성격은 아니지만, 이따금 엉뚱한 승부욕으로 세간에 화제를 뿌리는 인물이었다. 탱고 댄서에게 애인을 빼앗긴 게 분해서 근 3년 와신상담 끝에 유명인사의 파티에 전문댄서를 파트너로 데려가서 수많은 상류층 인사들 앞에서 멋들어진 춤 솜씨를 자랑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었다. 몬티첼리 정도면 애인을 빼앗아간 겁 없는 댄서를 잡아다가 다리를 부러뜨리는 편이 더 쉬웠을 텐데 말이다.

만약 니콜라스가 자신의 요새 같은 저택에 침입해서 나를 죽이는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그거야말로 일생의 망신이라고 생각한 걸까…… 일개 연쇄살인범에게 보안이 뚫리는 사태가 공들여 쌓아올린 마피아 일인자의 위상에 흠집을 내는 일이라고 단정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몬티첼리는 레빈에게 전화를 걸어서 저택 경비를 강화하고 나를 저택 밖으로 한 발짝도 내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저택을 나간 후였고, 덕분에 올리버와 레빈만 한참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즉시 조직에 비상령이 내렸고, 온 시내의 조직을 동원해서 나와 비니를 찾고 있었던 거다.

“그만해라. 아무 탈 없이 왔으면 된 거지 뭘 그래?”

흥분을 못 다스려서 아무 상관없는 오웬에게까지 시비를 거는 올리버의 등을 가르시아가 툭툭 쳤다.

“나는 또 작은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지…….”

비니가 터진 입술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얜 누구야?”

가르시아가 오웬을 턱으로 가리켰다.

“친구야.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갈 거야.”

“신원은 확실해?”

“응.”

비니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오웬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등에 맨 저 막대기는 뭐야? 무기는 못 갖고 들어가!”

올리버의 날카로운 시선에 오웬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장검을 선선히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절대 안 된다고 화내면서 버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올리버가 미심쩍은 얼굴로 검을 받아들고는 이쪽저쪽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주변을 서성거리던 경호원들 몇 명이 슬슬 다가왔다.

“뭐야…… 이게?”

올리버가 코를 씰룩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라곤 자동 소총 같은 것만 봐오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고전적인 무기에 적응이 힘든 눈치였다.

“장검 같은데? 일본 애들 중에 이런 거 짊어지고 다니던 놈이 하나 있었지.”

가르시아가 아는 척 하고 나섰다.

“그래? 난 못 봤는데…….”

“칼춤 추다 내 총에 맞아 죽었어.”

가르시아가 올리버에게서 검을 뺐더니 검집에서 쑥 뽑아냈다.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오웬의 검은 대단히 위험한 무기였다. 은빛 광채를 뿜어내는 것 같은 검날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저 살벌한 검에 안드레아스의 목이 떨어져 나가던 그 장면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생각지도 않았던 광채에 가르시아도 놀란 눈치였다.

“이거…… 되게 비싸겠는데?”

오웬이 비니를 돌아봤다. 그 얼굴엔 약간의 짜증이 비쳤다. 비니가 허공에 검을 휘둘러보고 있는 가르시아에게서 억지로 검과 집을 빼앗아서 오웬에게 돌려줬다. 가르시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올리버를 돌아봤다.

“저런 것까지 맡아둘 필요 있냐? 그냥 들려서 들여보내.”

비니가 올리버에게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며 앞장섰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작은아버지 집이니까 비니는 이 집에 드나드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입장이 달랐다.

정원에서 북적거리는 수십 명의 무장 경비원들과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비추는 서치라이트…… 그리고 올리버의 성난 얼굴이 모두 나 때문이란 걸 알고 나니까 선뜻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시립 형무소 지하 감옥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니나 몬티첼리가 알면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빨랑 안 들어가고 뭐해?”

올리버가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가르시아가 올리버의 옆구리를 쿡 쥐어박으며 눈치를 줬다.

“그만 좀 해라, 올리. 짭새 기분이 지금 얼마나 더럽겠어?”

“그러는 넌 언제부터 짭새 기분 따위를 그렇게 신경 썼는데? 그리고 내 이름 함부로 줄여서 부르지 마!”

“인정머리 없는 놈…….”

흠……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가르시아가 내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그리고는 아주 친근한 어투로 속삭였다.

“아무 걱정하지 마, 짭새. 집안엔 애들 더 많아.”

이 저택은 문 열고 들어서면 바로 갤러리 같은 현관이 나타났다. 정 중앙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고 양쪽 벽감에 작은 대리석 조각이 자리 잡고 있어 차분하고 고급스러웠던 공간이었다. 현관만 봐도 집 주인이 얼마나 허영심 많은 멋쟁이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모딜리아니의 창백한 미인도는 오간 데가 없었고, 그 자리엔 상황판으로 보이는 커다란 화이트보드가 하나 떡 하니 걸려 있었다. 작지만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위트 넘치는 조각상도 치워지고 한쪽에는 근육질의 특공대 인형이…… 다른 한쪽에는 수영복 입은 바비 인형이 놓여 있었다. 이제 현관만 봐도 집 주인이 얼마나 전의에 불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저택 평면도와 배치 인원 그리고 교대 시간과 이름 등이 빼곡히 적힌 상황판의 기록이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면, 현재 이 저택의 무장 경비원은 100명이 넘었다. 이만한 인원에 이 정도 화력이면 저택 경비원이라기보다는 군대라는 편이 정확할 것 같았다.

중화기로 무장한 100여 명의 사병이란 비록 그들이 점심내기 포커 한판 치러 모였다고 해도 명백한 위협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세를 과시하기 위한 무력시윈데 이게 진짜 나 때문이라고 믿었다면 올리버나 가르시아는 너무 순진한 거다.

나도 현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엄청난 상황판을 대하니 좀 전의 민망함은 사라지고 석연찮은 의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내가 나직이 중얼거리자 상황판 들여다보면서 열심히 인원을 세던 비니가 움찔했다.

“좀 이상하긴 하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경계할 때는 가능한 침입경로 몇 군데를 파악하고 집중적으로 인원을 배치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판대로라면 50여 명에 가까운 병력이 그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죽 늘어서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저택 앞쪽에 거의 몰려 있고 뒷마당은 그냥 버려둔 상태였다.

한 마디로 외부 침입자는 안중에도 없는 배치였다. 몬티첼리는 지금 누군가에게 우리가 이 정도 모여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고 주먹을 휘둘러 보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상대가 니콜라스는 아닌 것 같았다.

“어디 갔다 이제들 오십니까? 얼마나 찾았는데요?”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사람이 누구지…… 하고 생각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왜 그런 옷을 입고 있어요?”

비니가 놀라서 물었다.

“글쎄…… 다들 군복이나 캐주얼 차림인데 저만 너무 겉도는 것 같아서요. 이 많은 인원을 제대로 움직여야 되는데 왕따 당하면 곤란하잖습니까?”

카키색 군복 바지에 검은 티셔츠 차림의 레빈이라니…… 날 때부터 검은 양복 차림에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머리를 하고 있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런 변신은 파격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아침까지 깔끔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도 풀기 없이 많이 흐트러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훨씬 젊어 보였다.

“젊었을 때 입던 건데 좀 작아졌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나이답지 않게 날렵한 몸매의 소유자라서 군복이 심상치 않게 잘 어울렸다. 거기에 본래 가지고 있던 품위까지 더해지다 보니 레빈은 마치 영화 속의 야전 지휘관 같았다. 비니 작은아버지 밑에서 집사 노릇이나 하기는 아깝다고 항상 생각했지만…… 본래 뭐하던 사람이었을까?

“저분은 친구 분이신가요?”

레빈이 오웬을 가리켰다.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자고 갈 건데, 준비 좀 해주시고…… 숙부님 지금 어디 계세요?”

레빈이 난처한 얼굴이었다.

“안 좋을 때 친구 분을 모시고 오셨네요. 보시는 것처럼 객식구가 넘치다 보니 빈 방이 하나도 남아 있질 않습니다.”

“내 방을 같이 쓰죠. 그럼…….”

“도련님 방을 벌써 3명이 같이 쓰고 있습니다.”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이 아무리 넓어도 100명이나 되는 조직원을 재우기엔 좁다. 이 많은 인원을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끼워 넣는 것만도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닐 거다.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요?”

애초에 혼자 가려던 오웬을 끌고 온 건 비니였다. 정문 통과도 수월하지 않았는데 막상 잘 방도 없다는 얘기에 비니가 당황했다. 오웬은 아직까지는 화도 안 내고 오가는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하필 이런 날에 친구 분을 모시고 온 게 잘못이죠. 가만있자…….”

레빈이 상황판으로 다가섰다.

“현재 빈 방은 없고…… 주인님 침실과 사이몬 침실 그리고 형사님 침실이 한가하군요. 주인께 방을 비워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예쁜 손님을 모르는 용병들 틈에 끼어 자게 할 수도 없으니까…… 어쩐다…….”

용병이라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맞은편의 로비 겸 응접실에는 10여 명의 험상궂은 남자들이 TV 앞에 모여 앉아서 야참을 먹어가며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용병이란 말을 들어서 그런지 야한 비디오를 보면서 놀고 있는 저 남자들은 정말 어느 분쟁지역에서 단체로 모집한 용병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정원 곳곳에서 마주친 경비원들에게도 평범한 뒷골목 건달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었다. 시내의 조직원들만으로 모자라서 용병까지 고용했다면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나 때문에 이 모든 수고와 비용을 감수할 이유가 몬티첼리에게는 없다.

“한 수만 물러주면 안 될까?”

“한 수만 물리면 나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일단 한 수만 물러봐.”

몬티첼리는 2층에 있는 작은 서재에서 발렌타인과 체스를 두고 있었다. 실력이 형편없는지 여왕이 사방으로 포위당하고 마지막 남은 기사가 발렌타인에게 막 먹히는 중이었다.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의 손안에서 방금 전사한 기사를 억지로 빼앗았다.

아래층에 중대 병력을 모아 놓고 한가하기도 하다. 비니가 일부러 문을 소리 내서 닫았다. 그제야 몬티첼리가 우리를 돌아봤다.

“늦었구나, 비니.”

“밑에 있는 애들은 다 뭐예요?”

“저녁은 먹었니?”

몬티첼리가 딴전을 피웠다. 발렌타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의 백기사를 밀어내고 좀 전에 빼앗은 자기 흑기사를 체스 판에 다시 올려놨다.

“작은아버지!”

비니가 언성을 높였다.

“어디 다른 나라에라도 쳐들어갈 작정이세요? 전쟁이라도 너끈히 치르겠던데요!”

“집 주변 경비를 강화할 필요가 있어서 경비원을 몇 명 늘린 것뿐이야.”

호들갑 떨 것 없다는 투였다. 몬티첼리가 심사숙고한 끝에 기사를 오른쪽으로 한 칸 옮겼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의 말에게 대번에 잡히고 말았다.

“저는 작은아버지 돌아가신 줄 알았단 말이에요!”

“걱정시켜서 미안하구나.”

몬티첼리가 뚱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테이블에 얹어놨던 지갑을 집어 들었다.

“니콜라스 때문이에요?”

비니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슬그머니 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지갑을 뒤집어서 얼마나 있나 살피던 몬티첼리가 돈 꺼내고 말고 할 것도 없는지 지갑을 통째로 발렌타인에게 던졌다. 돈내기 체스였던 모양이다.

공중에서 지갑을 낚아챈 발렌타인이 안쪽을 슬쩍 살폈다.

“많이 모자라는데요?”

“안에 든 돈보다 그 지갑이 더 비싸.”

“그건 처음 샀을 때 얘기죠.”

“그림자 부대 애들한테 가진 거 다 털리고 그 지갑에 있는 게 전 재산이야. 이제 나 정말 개털이야.”

양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 풀썩 몸을 파묻는 모양세가 발렌타인과의 내기 체스에 진 게 속상해서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았다. 몬티첼리 같은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림자 부대라면 보통은 10여 년 전쯤 아프리카의 모 공화국 쿠데타에 개입해서 신문 지상에 이름을 날렸던 피의 그림자 부대라는 이름을 가진 사나운 애들을 떠올린다. 특히나 하인리히라는 이름의 독일인 대장이 잔머리 좋기로 유명했던 2,30명 규모의 그 무국적 군대는 요즘은 남미 어느 나라의 마약 전쟁에 끼어서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소문만 얼핏 들릴 뿐이었다.

“가르시아와 올리버가 오후 내내 우리를 찾아다녔다면서 길길이 뛰던데요?”

“뉴스 때문에 신경 쓰여서 찾아보라고 한마디 한 것뿐이야. 가만 보니까 둘이 정말 열심히 찾아다니긴 하더라.”

정문에서 들었던 거하곤 얘기가 너무 다르다. 100명이나 되는 용병과 조직원을 끌어 모은 것이 나 때문이 아닌 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쪽도 100% 진실은 아닌 것 같았다. 몬티첼리 같은 사람은 100% 거짓말을 하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 두 가지를 적당히 섞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면 그뿐이었다.

“아니면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요?”

비니가 참았던 신경질을 벌컥 쏟아냈다.

“내가 하는 일마다 일일이 너하고 의논하고 허락을 받아야 되니?”

“흑풍회에 전화 걸어서 물어봐요? 그럼?”

흑풍회란 첸 진이 총수로 있는 중국 조폭들이 대외적인 간판으로 내걸고 있는 차이나타운 번영회 명칭이었다. 몬티첼리가 꾸미는 일의 내막을 비니라 해서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이런 대소동의 진원이 될 만한 곳은 그쪽뿐이었다.

한동안 버티던 몬티첼리는 비니가 전화기를 꺼내 들고 흑풍회 사무실 번호를 누르기 시작하자 할 수 없이 오후부터 지금까지 급박하게 돌아간 사정 얘기를 간단하게 털어놨다.

“너…… 류밍이라는 가수 알아?”

“몰라요.”

“지금 홍콩에서 제일 인기 좋은 댄스 가순데 그 녀석이 정오 비행기 편으로 쿠간에 들어왔어. 흑풍회 초청으로 쿠간 시립경기장에서 주말에 공연을 한다는 거야.”

“그래서요?”

몬티첼리가 소파 옆에 놓인 서랍장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비니에게 내밀었다. 비니가 사진을 건성으로 훑어보고 나한테 넘겼다.

“공항에서 우리 애들이 찍어온 거야.”

“그런데요?”

“너는 그 사진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전혀 없니?”

몬티첼리의 핀잔에 비니가 나를 돌아봤다. 나 역시 건장한 남자들로 가득 찬 별 특징 없는 사진들을 건성으로 들여다보다가 이제 막 내려놓으려던 참이었다.

몬티첼리의 면박에 서른 장 남짓한 사진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니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있기는 있었다. 공연 스텝치고는 숫자가 많다. 게다가 모두 지나치게 건장했다.

“개인 경호원 10명에 스텝 30명…… 같이 입국한 팬클럽이 70명이야.”

비니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는 얼굴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웬만한 가수들 공연에 몇 백 명씩 따라다니는 건 보통이잖아요?”

몬티첼리가 짜증스런 얼굴로 비니를 째려봤다.

“그 떡대들이 어딜 봐서 가수 팬클럽이야? 류밍은 22살짜리 남자애야!”

니콜라스 탈출 이후로 쿠간은 치안 부재에 가까운 혼란 상태였다. 시민들이 온통 니콜라스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것이 사태의 발단인데, 그렇다고 다른 범법자들이 이런 사정을 봐주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범죄자들에게는 요즘 같은 시절이 제 세상이었다. 검문검색이 터무니없이 강화되어 있으니 자잘한 잡범들은 운신이 힘들어졌을 테지만 약간만 체급이 높아지면 상황은 그 반대였다.

첸 진이 아무리 암흑가의 거물이라고 해도 본국에서 100여 명에 가까운 행동대원을 공수해오는 건 보통 때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경찰이 연쇄살인범 하나 쫓아다니느라 경황없이 헤매고 있을 때 암흑가의 우두머리들은 이토록 야단스럽게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이 사태를 모르고 있다면 그야말로 한심한 노릇이고 알고도 방치하고 있는 거라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거다.

“곤란한데…….”

비니가 내게서 사진을 빼앗아 다시 한장 한장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마 작은아버지 댁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신세 좀 질까 했던 건데, 쿠간에서 제일 위험해져버렸으니…… 이 일을 어쩌지?”

“너는 내 걱정은 전혀 안 되니?”

몬티첼리가 투덜거리며 집어던진 장기 말이 비니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비니가 이마를 감싸쥐고 몬티첼리에게 대들었다.

“도대체 작은아버지하고 그 중국 영감은 하필 요즘같이 뒤숭숭할 때 이렇게 한 짐 거들고 나서야 돼요?”

몬티첼리가 달려드는 비니를 살짝 피하더니 팔을 뒤로 꺾어 소파에 처박아버렸다. 몸놀림 날렵하기가 마치 20대 청년 같았다.

“그러는 니네 경찰은 중국에서 마적단이 한 떼거리나 입국할 때 어디서 뭘 했는데?”

“우리 요즘 바쁘니까 어디 조용한 중국집에라도 모여서 말로 해결하세요. 작은아버지는 그런 거 잘 하시잖아요!”

비니가 몬티첼리 밑에서 빠져 나오려고 버둥거렸다. 조카가 작은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큰데도 어딜 어떻게 꺾였는지 쉽게 떨치고 나오질 못했다.

비니가 중국 영감 운운했지만, 사실 첸 진은 반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반신 마비 상태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30년째 중국 마피아 총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첸 진은 본국에서 수십 명의 조직원을 공수해 올 만큼 호전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갖가지 술수에 능한 책략가 타입으로, 막후 협상이나 은근한 협박이 첸 진의 주특기였다. 몬티첼리도 못된 두뇌 플레이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두 사람은 10년 가까이 탐색의 탐색을 거듭하며 호적수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두 조직은 꽤 오랫동안 각자의 구역과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도발을 자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첸 진의 평화 유지 노선이 1년쯤 전부터 슬슬 바뀌기 시작하더니 6개월 전부터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테러까지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뇌혈관이 터져서 쓰러진 다음에 성격이 변했다고 우기면 할 말 없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은 대부분 첸 진의 사위인 루크 첸의 농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걸어오는 시비를 번번이 피하는 것도 경쟁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나도 이번엔 성심성의껏 응해줄 생각이야. 그리고 자네…….”

몬티첼리가 비니를 깔고 앉은 채 나를 돌아봤다.

“경찰에선 조만간 자네 거처를 옮길 생각인 것 같아. 내 집에 있는 이상 그깟 미치광이 한 놈 못 막아주겠나만…… 그 음흉한 늙은이랑 뺀질한 사위 놈이 중국 애들을 앞세워서 밀고 들어오는 날엔 자네 안전도 100% 보장하기 힘들어.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아 나도 유감이야.”

“아닙니다. 제가 그동안 지나치게 폐를 끼쳤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집에서 지낼 일이 막막했는데…… 잘 됐다고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데 몬티첼리가 엉뚱한 당부로 말을 맺었다.

“그래서 말인데, 거처를 옮길 때까지는 바깥출입을 삼가주게.”

잠에서 깬 건 새벽이었다. 눈을 떠 보니 밖이 환해서 아침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전 다섯 시도 안 된 시간이었고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은 밤새 대낮처럼 밝혀 놓은 라이트 불빛이었다. 옆에서 누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기에 살짝 들춰보니 비니였다. 용병들에게 방을 뺐기고 어디서 자냐고 투덜거리더니 달리 잘 곳을 못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 쓰는 침대는 장정 다섯은 넉넉히 잘 만한 특대형 원형 침대라서 별로 불편하지는 않았다. 혹시나 싶어서 침대 여기저기를 누르고 들춰봤는데 오웬은 없었다.

어느새 잠도 달아나버려서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보니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비니는 침대를 거꾸로 들고 털어도 일어나지 않을 놈인데 말이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침대 발치에 놓인 소파에 잠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얼마를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할 정도로 사방이 조용하고 마음이 편안해서 별 다른 일이 없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서 바로 앞에 놓여 있는 3인용 긴 소파가 갑자기 뒤척이는 일만 없었다면…….

“잠이 안 와?”

나는 놀라서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 같은데 사이몬 발렌타인은 태연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당신…….”

“소파에 웅크리고 샛잠이라도 자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잖아?”

아무리 방이 어둡고 여태껏 돌아누워 있었다고 해도 사람이 눈앞에 누워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다니…… 나도 정신이 나갔나 보다.

“대체 언제부터…….”

발렌타인이 발치에 놓인 쿠션을 집어서 머리맡에 있던 쿠션과 포개서 베고는 어둠 속에서 나를 응시했다.

“밖에서 이상한 녀석을 데리고 왔던데?”

이상한 녀석 누구? 오웬?

“하이렌더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언제 미쳐 날뛸지 아무도 모르거든.”

“무슨 소리야?”

발렌타인이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마에 얹은 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숨소리가 거칠어진 것 같았다.

“어디 아파?”

“졸려.”

몬티첼리 저택의 식당 풍경도 이제 경찰서 구내식당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불 위엔 작은 프라이팬과 냄비 대신 커다란 들통이 올라가서 끓고 있었고 손으로 그린 꽃무늬 고운 도자기 접시들도 어디론가 치워지고 없었다.

요리사가 직접 테이블까지 날라주는 식사를 기다리는 대신 저마다 손에 철재 식판을 하나씩 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병영이었다. 군복 입은 자들은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어제까지도 그렇게 풍채 좋고 혈색 좋던 요리사 아줌마는 핼쑥해진 얼굴로 식당 한 옆에 늘어져 있었고 테시오와 처음 보는 젊은 애가 바쁜 손놀림으로 식판에 이것저것 음식을 담아주는 중이었다. 30여 명 정도 그렇게 부산하게 오가는 식당 한쪽에 발렌타인이 앉아 있었다.

설핏 졸다가 눈을 떠 보니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고 비니만 침대에서 5분만…… 5분만…… 하며 혼자 자다 깨다 하고 있을 뿐 발렌타인은 오간 곳이 없었다. 출신이 자객이라 들고 나는데 기척이 없는 건가…… 아니면 지난밤에 내가 꿈을 꿨나?

머리를 털면서 일어서는데 소파 언저리와 바닥에 깔린 카펫에 작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직업이 경찰이 아니라도 금방 보면 알 수 있는 얼룩이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는 핏자국이었다.

발렌타인은 창백하고 피곤해 보였다. 큰 병을 앓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건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커피 한잔 들고 가서 옆에 앉자 그제야 발렌타인이 고개를 들었다. 밤새 한 잠도 못 잤는지 눈이 새빨갛다. 아침을 들고 있나 했는데 앞에 놓인 거라곤 물 한 잔과 얇은 잡지 한 권뿐이었다. 잡지엔 니콜라스 사진이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은 좀 잤어?”

그가 내게 물었다.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이래서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은 거다. 사이몬과 내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면서 인사를 나누다니…… 이런 건 내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게 없다.

소파에 떨어진 핏자국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조용히 앉아서 커피 마시고 있는데 오웬이 식당에 들어왔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오웬이 나하고 발렌타인을 발견했다.

“본래 손님 대접이 소홀한 집이 아닌데 때를 잘못 맞췄군.”

역시 커피 한잔 들고 와 옆에 앉는 오웬에게 발렌타인이 말을 건넸다.

“상관없습니다.”

둘이 초면이 아닌가?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지. 오래 전이라서 이쪽은 기억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발렌타인이 잡지를 뒤적거렸다. 니콜라스 특집이라도 실렸는지 몇 장을 넘겨도 니콜라스에 대한 기사뿐이었다.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칼잡이 오웬의 정체가 갈수록 수상쩍었다. 언제 어디서 발렌타인과 마주쳤을까…… 그동안 봐온 오웬의 행태로 보면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경쟁자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이 도시엔 일이 있어 온 건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길인가?”

발렌타인이 보고 있던 잡지를 덮으며 물었다.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는데 일이 자꾸 생기는군요. 그보다도…….”

오웬이 발렌타인이 보다가 밀어 놓은 잡지를 끌어당겼다. 표지가 죄수 번호 달고 찍은 니콜라스 사진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사진이다.

“이 남자에 대해서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시대의 천덕꾸러기지. 그자에 관해서라면 여기 이 친구한테 물어보게.”

발렌타인이 나를 지목했다.

“이런저런 거…… 꽤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오웬은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까? 그는 꽤 놀란 눈치였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내색 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커피 잔을 들어 올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뜨거운 커피를 아무 생각 없이 한 모금 꿀꺽 들이키고는 무척 괴로운 기색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오웬이 발렌타인의 냉수를 허락도 없이 가져다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뭐가 그렇게 이상했냐고 물어 보려는데 레빈이 다가왔다. 여전히 군복 차림이었다. 어제 저녁에는 검은 티셔츠만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군용 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레빈은 예전에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여기 있었군, 사이몬.”

레빈이 말 꺼내기도 전에 발렌타인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겐지 박사한테서 전화왔었어! 어제 병원에 안 갔었다면서?”

병원이란 소리에 내 귀가 번쩍 뜨였다. 발렌타인이 다 보고 밀어놨던 잡지를 다시 뒤적거리며 딴전을 피웠다.

“병원 간다고 나가서 어디서 놀다 들어온 거야?”

“백화점에서 쇼핑도 좀 하고…… 분위기 죽이는 바에 들어가서 술도 한 잔 마셨지. 뭐 잘못됐나?”

발렌타인의 태연한 대꾸에 레빈이 폭발했다.

“자네가 10대야? 어지간히 좀 해둬! 병원도 내가 데려다줘야 하나?”

식당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이쪽을 쳐다볼 정도로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눈썹 하나 까딱 않았다.

“겐지 박사가 오전 중에 시간을 내준다니까 당장 갈 준비해!”

“그 돌팔이가 인심 한 번 크게 썼군.”

레빈이 엄한 얼굴로 발렌타인을 노려봤다.

“15분주겠어!”

레빈의 엄포에 발렌타인 대신 오웬이 일어났다.

“같이 가시죠. 저도 병원에 가 봐야 하거든요.”

발렌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가 아파서?”

“정신병원에 볼 일이 있습니다.”

그 대답에 발렌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이제 슬슬 맛이 갈 때도 됐지.”

오웬이 피식 웃었다.

“한 번만 더 딴 데로 새면 꽁꽁 묶어서 저 애들한테 들려서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레빈이 한쪽에서 식사 중인 용병들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놨다. 발렌타인이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10년 넘게 남의 집 살림살이나 챙기더니 잔소리가 늘었군. 하인리히.”

발렌타인 같은 청부 자객들은 거의 대부분 늙고 병들 때까지 살지 못한다. 운 좋고 솜씨 좋은 극소수만이 살아남아서 젊은 날의 악행을 회상하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다. 어디가 아픈 것 같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막상 얘기를 듣고 보니 좀 얼떨떨했다.

어지간히 중한 병이라고 해도 아직 병으로 쓰러질 나이는 아니니까 쓸데없는 걱정이겠지만…… 오웬과 함께 식당을 나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안타까웠다. 각국의 법망은 귀신같이 빠져나가던 발렌타인도 병마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발렌타인이 레빈을 하인리히라고 부르던데, 레빈의 본명인가? 혹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지만 레빈에게도 위험한 과거가 있는 걸까? 범죄형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하인리히라…… 독일계 남자에게는 흔한 이름이다. 하인리히…… 불현듯 머리 속에 레빈이 입고 있던 재킷에 붙어 있던 부대 마크가 떠올랐다.

비니는 아직 침대에 있었다. 어찌 어찌 잠은 깼는데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나기가 아쉬운지 멍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던 비니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든 나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 있어?”

“레빈이 하인리히야?”

“응?”

비니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바심이 나서 침대로 뛰어 올라가서 비니를 깔고 앉았다.

“피의 그림자 부대 대장 하인리히 말이야!”

“좀 비켜, 무거워.”

비니가 내 허리를 손으로 밀면서 투덜거렸다.

“얼렁뚱땅 말 돌리지 마!”

“내가 말을 왜 돌려? 하인리히 베른 맞아. 여태 몰랐어?”

그때 누군가 문을 열었다. 레빈…… 하인리히였다. 하인리히가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는 걸음을 딱 멈춰 섰다. 저 재킷에 붙어 있는 끊어진 S자 모양의 마크는 확실히 붉은 그림자 부대 마크였다.

“번번이 바쁘실 때 실례를 하는군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길래…….”

“괜찮아요.”

비니가 느끼하게 웃으면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 자식이…….

“어제 같이 오셨던 손님께서 금방 가셨습니다. 덕분에 하룻밤 편히 보냈노라 인사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물론 도련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만 출근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웬이 갔어요?”

비니가 나를 밀치고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오후에 같이 가기로 했었는데!”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테시오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다시 불러들일까요?”

“테시오 차로 보냈어요?”

“겐지 클리닉에서 시립 정신병원이 얼마 멀지 않아서 다행이죠.”

비니는 겐지 클리닉과 시립 정신병원이 가까이 있는 것이 어째서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 준비할까요?”

“됐어요. 작은아버지 방에 계세요?”

비니가 서둘러 침대 옆에 벗어 놓은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계십니다만…… 왜요?”

“차 좀 빌리려고요. 어제 사고가 있었거든요.”

레빈이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또요?”

레빈…… 아니, 하인리히가 쓸 만한 차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방을 나갔다. 아무리 봐도 더할 수 없이 정중한 매너를 갖춘 신사다. 저 사람의 어느 구석에 북아프리카의 여우…… 혹은 난폭자로 불리며 적병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던 용병의 모습이 감춰져 있는 걸까?

“저런 사람이 어쩌다가 니네 작은아버지 밑에서 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나 지금 나가야 돼.”

욕실에서 세수와 면도를 5분 만에 해치운 비니가 웃옷을 집어 들었다. 세수를 얼마나 날나리로 했는지 귓바퀴에 비누 거품이 허옇게 묻어 있었다. 게다가 면도칼 들고 칼싸움이라도 하고 나왔는지 오른쪽 뺨과 턱 두 군데에 칼자국이 선명했다.

“얘기 해주고 가!”

“거 참…….”

비니가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정치적 망명 같은 거야. 일종의…….”

“망명이면 망명이지 일종은 또 뭐야?”

“정식으로 망명 허가를 받지 못했거든.”

하인리히 같은 특급 테러리스트의 망명을 중앙 정부에서 허용할 까닭이 없다. 게다가 그런 일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면 언론에서 대서특필할 만한 톱뉴스인데도 도무지 금시초문인 걸 보면 하인리히는 분명히 허가 받은 망명객이 아니었다. 여하튼 궁금한 건 망명의 적법성 여부가 아니었다.

비니가 약 1분에 걸쳐 간략하게 밝힌 바…… 하인리히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전투에서 부하들을 반이나 잃고 본인도 심하게 부상당해 일선에서 은퇴했고 그 후로 이 저택에서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집사라니…….”

하인리히는 꽤 오래 전부터 실종 상태였다. 지금껏 그에 관한 많은 루머들이 떠돌아다니는데 전투 중에 입은 부상으로 죽었거나 그를 뒤쫓는 수많은 적대 세력에게 암살당했을 거라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멀쩡히 살아 있어서 유감이라는 건 아니지만 하인리히 베른이 마피아 대부의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하고 있었다니 이게 웬일이야?

“뭐 어때? 직업에 귀천이 있냐?”

비니가 윗도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저녁 때 보자.”

거처를 옮길 때까지 외출을 삼가 달라는 몬티첼리의 완곡한 당부는 실제로는 완전 감금이었다. 올리버는 이제 내가 정문 근처에 얼씬만 해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시선으로 나를 경계했다.

몬티첼리가 니콜라스 때문에 저택 경비를 강화했다고 믿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제 나를 찾아다니느라 고생한 분이 안 풀려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이제 몬티첼리의 허락 없이는 저택 밖으로 한 발도 못 내놓게 생겼다는 거다.

물론 몬티첼리의 저택에는 남아도는 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낼 수 있는 나무랄 데 없는 시설과 장비가 마련돼 있었다. 지하에는 수영장과 헬스 룸이 있고 당구대까지 갖춰진 오락실도 두 군데나 있었다.

과연 누가 읽을지 의심스러운 수천 권의 장서로 가득 찬 서재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훌륭했고 서쪽 별채에 있는 20석 규모의 극장에는 수천편의 음란 비디오까지 갖춰져 있으니, 심심하다는 말 함부로 꺼냈다가는 이상한 놈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니콜라스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이 시점에 마피아 보스의 저택에 갇혀서 만화영화나 돌려보자니…… 화병이 날 것 같았다. 꾹 참고 만화 영화 두 편과 대부 1편을 보고 나니 그럭저럭 점심때였다.

더 보고 싶은 영화도 없고 기분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차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별관을 나와 본채로 가는데 격납고만큼이나 커다란 저택 차고에서 다섯 대의 까만 벤츠가 줄줄이 몰려나왔다. 몬티첼리가 외출을 하는 모양이었다.

몬티첼리는 보통 때도 차 두 대에 최소한 다섯 명 정도는 거느리고 다녔다. 오늘 같으면 차 한 대에 3명씩만 잡아도 열다섯 명이었다. 게다가 레빈이 피의 그림자 부대 지휘관이었던 하인리히라면 저택 안에 있던 그 군인들 역시 사이비 그림자 부대가 아닌 원조 그림자 부대라는 얘기였다.

몸조심이 이토록이나 야단스러운 것을 보면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두 조직이 조만간 쿠간 시 전역이 떠들썩하도록 한 판 붙을 모양이었다. 모른 척하면 직무 유기가 되지만, 그렇다고 경찰서에 전화 걸어서 이 저택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시시콜콜 일러바치기도 난처했다. 이 크고 복잡한 도시에는 숨을 데도 많으련만 하필 이런 데다가 나를 데려다놓을 게 뭐냐.

생각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본채에 한 발 들이 미는데 어디선가 쿠당탕…… 하는 거친 파열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하니…….

주방에서 대서재로 통하는 2미터 남짓한 좁은 복도에서 거구의 용병 하나가 역시 덩치가 만만치 않은 조직원의 팔을 뒤로 꺾어서 찍어 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누가 용병이고 누가 조직원인지는 복장으로 구분이 충분했다. 인사는 없었지만 저 조직원은 아는 얼굴이었다. 베네티라는 이름보다 미친 황소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몬티첼리 수하의 행동대장이었다. 언제 시작한 싸움인지 둘의 얼굴엔 벌써 시뻘건 타박상의 흔적이 역력했다.

바닥에 깔린 베네티가 거친 숨을 한 번 몰아쉬며 몸을 뒤틀었다. 베네티가 팔꿈치로 용병의 턱을 올려쳤다. 빡…… 하고 턱뼈 어긋나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용병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복도 한쪽으로 나가떨어졌다. 회색 타일 바닥에 붉은 피가 뚝뚝 튀었다. 용병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헤매는 사이, 베네티가 잽싸게 용병을 깔고 앉아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 죽은 듯이 뒷마당이나 지킬 일이지 누구한테 시비야?”

하지만 베네티도 윗자리를 그다지 오래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끝내기 펀치를 날리려다가 용병에게 사타구니를 제대로 걷어채였던 것이다. 베네티가 한동안 무시무시한 비명을 내지르며 복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더니, 그 다음부터는 서로의 머리카락 쥐어뜯고 팔 다리 물어뜯는 원초적인 난투극이 이어졌다. 진흙 밭에 개싸움이라더니 딱 그거였다.

복도엔 일 없는 몇 명이 늘어서서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리기는커녕, 빙 둘러서서 서로를 노려보는 분위기는 용병 팀과 조직원 팀이 편 갈라서 패싸움을 벌이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험악했다.

이질적인 두 조직이 한 집에 동거 하게 되면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다. 둘의 기세가 워낙 사나운 데다 덩치들이 커서 말리려고 나섰다가 되래 깔리기라도 하면 데미지가 만만치 않을 터……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식당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려던 계획을 접고 한발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무슨 짓들이야! 당장 떨어지지 못해?”

라는 날카로운 호통이 들려왔다. 레빈이었다.

마치 모세가 홍해 가르듯 인파를 가르고 나타난 레빈은 피투성이가 되어 쌕쌕거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긴 말 하지 않았다. 그냥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 충분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서열을 분명히 하자는 거죠. 닭장에 새로운 닭들을 풀어 놓으면 한바탕 서열 다툼이 벌어지는 거하고 같은 경우라고 보면 될 겁니다. 경찰서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까?”

북아프리카의 전설…… 사막의 난폭자 하인리히 베른이 바나나 한 개, 키위 두 개, 딸기 한 주먹을 썰어서 믹서에 넣었다.

“우리는 학번이나 기수로 서열을 정하니까요.”

뭐…… 그렇다고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싸워도 텅 빈 회의실 같은 데서나 그럴까 복도에서 저렇게 싸우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랬다간 반장이나 더 윗사람에게 불려가 진이 다 빠질 때까지 잔소리를 듣거나 시말서를 쓰게 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나처럼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까지 정직이다.

레빈이 마지막으로 럼주 한 잔을 믹서에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특제 생과일주스라는데 색깔이 묘했다.

“이 바닥은 그런 기준보다는 누가 더 세냐가 우선이죠. 아까 그 두 놈들도 이유가 있어서 싸운 건 아닐 겁니다. 보나마나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거나…… 바지에 커피를 쏟았다거나 하는 정도겠죠. 피차 워낙 거친 바닥에서 놀던 녀석들이라 위계가 불분명하면 불안해하거든요.”

고개를 끄덕이며 레빈이 커다란 유리컵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부어 준 주스를 받아들었다. 나로 말하면 얼굴도 처음 본 그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서로 끌어안고 복도를 나뒹굴었는가 하는 것보다는 하인리히 베른이 어쩌다가 용병생활을 청산하고 프란시스 몬티첼리 저택의 집사로 눌러 앉게 되었는가 하는 쪽이 백배는 더 궁금했다.

“저기…….”

“예?”

목이 말랐는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레빈이 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저기요…….”

어떻게 말을 꺼내면 이 사람 기분 상하지 않고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저택이 습격당할까 걱정되십니까?”

아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경찰 측에서 무슨 조치를 취하겠지요. 계시는 동안은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비니 도련님 맨션으로 옮기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베테랑 수사관 두 명이 그렇게 맥없이 당한 걸 보면 경호원이 최소한 다섯 명 정도는 돼야겠죠.”

니콜라스가 쳐들어오기로 마음먹었다면 경호원이 있든 없든 그건 별로 큰 문제가 아닐 거다.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신선하고 알싸하고…… 부드러웠다.

“첸 진이 정말 그렇게 막 나올까요?”

“첸 진은 사실상 실권이 없어요. 그게 문제죠.”

루크 첸이 첸 진의 딸과 결혼하고 그의 양자로 들어간 게 불과 2년 전이었다. 고작 2년 사이에 서슬 퍼렇던 장인을 뒷방으로 밀어버렸다면 그 하나만 놓고 봐도 예사 놈은 아니다.

“믿을 수가 없네요. 어느새 그렇게 거물이 돼버렸다니…….”

“머리 좋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은 어느 바닥에서든 빨리 크죠. 일찍 죽지만 않으면요.”

레빈이 남은 주스를 한 입에 털어 마셨다. 안팎으로 관리해야 할 인원이 네 배로 늘었으니 한가롭게 앉아 쉴 틈도 없을 터…… 먼저 나가봐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레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막 문을 나서려던 레빈이 돌아섰다. 이런 거 물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당신이 내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 같아요?”

“뭘 말입니까?”

내 뜬금없는 질문에 레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콜라스 같은 자에게 쫓기고 있다면…….”

“니콜라스 같은 자라는 게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역시 공연한 질문이었나 보다.

“하긴, 당신이라면 마피아 보스 집 구석방에 숨어서 처분만 바라지는 않았겠죠. 최소한…….”

레빈의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저는 마피아 보스의 집 구석방에 숨어 산 지 올해로 12년입니다.”

헐…….

“그런 뜻이 아니라…….”

“연쇄살인범에게 쫓겨다닌 적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레빈이 중간에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용병 생활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에는 최소한 다섯 나라 정부에서 파견한 킬러들이 뒤를 쫓았죠. 평생을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친 일이 되고 보니 그렇지가 않더군요. 이런 식으론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죠. 사실…… 어떤 식으로든 죽고 싶지 않았어요.”

불현듯 떠오른 옛 생각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듯 레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를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도망칠 수 있으면 도망치면서 1년을 살았죠. 하루하루를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힘들었던 때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견뎠어요?”

“그럴 때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해야 돼요.”

나도 단순한 거 하나는 자신 있는데…… 레빈이 뒷짐을 지고 벽에 기대섰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이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저건 하인리히 베른의 눈빛이었다.

“입장을 확실히 정하세요. 지금으로선 범죄자를 뒤쫓는 형사라는 입장이 제일 낫겠네요.”

“제 입장은 그뿐인데요…….”

“그럼 다행이고요.”

나도 모르게 레빈의 시선을 피했다. 처한 입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그뿐인 걸까?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저절로 기어들어갔다. 내 귀에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놈을 찾아내고 싶기도 하고, 놈을 피해서 세상 끝까지 도망치고 싶기도 해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두렵지만 한편 그립기도 하고…… 나는 니콜라스가……”

레빈과 내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당신 감정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요. 나는 평생 살면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누굴 사랑해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레빈이 내 말을 냉정하게 잘랐다.

“어쨌든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드니까, 도움 될 만한 충고를 하고 싶군요.”

레빈이 내게 해준 충고는 간단한 것이었다.

“놈과 마주치면 그냥 죽여버려요. 그 외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야…… 할 수만 있다면요.”

내 애매한 대답에 레빈이 씁쓸하게 웃었다.

“오후에 크롬웰 양이 온다니까 형사님 거처 문제는 그때 의논해 보도록 하죠.”

방을 나가면서 레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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