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한동안 치료 받으러 다닐 때 내 담당의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과 치료 같은 게 필요 없다는 말을 했었다. 한 번도 시간 약속을 어긴 적 없이 의사를 찾아갔지만 일주일에 두 번, 거의 한 달간 안락의자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니 그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얘기가 있다.
도로 표지판을 보니 켄들 공원묘지가 얼마 멀지 않았다. 여기서 우측으로 돌아나가면 쿠간 시 최대의 홍등가가 나온다.
“루벳 거리로 가자.”
비니가 운전하면서 나를 힐끔 돌아봤다.
“거긴 왜?”
“그쪽에서 니콜라스를 봤다는 제보가 있었어.”
“우리 소관이 아니야.”
“나 때문에 동료가 둘이나 당했어.”
“두 사람은 안됐어. 하지만 거기 대해서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어.”
비니의 태도가 전에 없이 단호했다. 사건 현장을 본 직후라서 비니 역시 사태의 심각성이 실감나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둘러보고 가자. 부탁이야.”
초겨울 짧은 해가 긴 그림자를 끌며 고층 건물 저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루벳 거리는 아직 영업개시 전이다. 이곳은 홍등가라기보다는 빈민가에 가까웠다. 어느 건물이고 할 것 없이 색색의 낙서로 가득 차 있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이름 없는 어느 길거리 화가의 작품 같아 보였지만 그 내용이란 실은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설이었고 아무리 지워도 누군가가 다시 그려 놓고 달아나는 낯 뜨거운 춘화에 불과했다.
길가에는 신문지며 깡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고 몇 개 안 남은 거리의 쓰레기통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온갖 오물이 흘러 넘쳤다. 어지러울 정도로 현란한 네온 간판 어느 하나도 켜지지 않았고 가죽 재킷이며 빨간 스타킹을 신은 거리의 여자들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루벳 거리는 사람이라곤 살지 않는 버려진 영화촬영소 같은 기이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차도 몇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를 훑어가는 비니의 운전이 거칠었다. 몇 블록을 주마간산으로 돌아봐도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이런 식으론 동네 구경밖에 안 된다.
“여기엔 아는 사람이 없어?”
“없어!”
비니가 잘라 말했다.
“그럼 내려서 탐문을 좀 하자. 노숙자들은 뭔가 봤을지도 모르니까…….”
“잠깐 둘러만 보고 간다며!!”
비니가 드디어 분통을 터뜨렸다.
큰 길에서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간 뒷길 으슥한 곳에 비니가 차를 세웠다. 여기가 어딘고 하니, 라이브 클럽 <여신들>이라…… 비니가 총을 점검하고 탄창을 두 개나 더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여벌의 총을 내게도 건넸다. 자기 총도 종종 잊고 다니는 비니로서는 일급 경계태세였다.
“내려!”
비니가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아는 사람 없다더니, 클럽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구렁이를 어깨에 걸친 반라의 여인이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어머…… 비니!”
“오랜만이야. 슈가.”
클럽도 영업전이라 손님은 없었고 관계자로 보이는 몇 명이 무대 위아래를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쇼의 리허설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고양이 가면에 채찍…… 검은 가죽 옷 입은 여자들은 이런 클럽 단골 메뉴였다. 하지만 저 뒤쪽 테이블 사이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저 동물은 아무리 봐도 반달곰인데, 대체 이런 가게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곰에게 다가가려 하자 슈가가 앞을 막아섰다. 푸른색과 금색 비늘이 음산하게 번쩍이는 구렁이가 때맞춰 거하게 용트림을 했다. 적게 봐도 2미터는 넘을 것 같은 놈이 저렇게 요동을 치니 가냘픈 여자의 몸이 주체를 못하고 휘청거렸다.
비니 덕에 중심을 잡은 여자가 뱀 대가리를 한 대 쥐어박고는 비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동안 뭐했어? 이젠 아예 발길 끊은 거야?”
“좀 바빴어. 파트너 바꿨네? 네드는 어쨌어?”
비니가 조금 전에 주인 손에 얻어맞고 풀이 죽은 뱀 대가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비니의 손이 닿자 뱀이 고개를 스윽 치켜들며 비니의 손을 피했다.
“뺐겼어. 한 달 전에 업소 단속이 있었는데 동물 보호협횐가 뭔가 하는 데서 동물학대로 신고를 했다는 거야!”
뱀을 비니가 빼앗아간 것도 아닌데 여자가 비니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네드를 학대했다는 게 말이 돼? 잠만 같이 안 잤지, 네드는 내 남자친구나 다름없었단 말이야!”
여자가 흥분하더니 급기야 눈가에 눈물을 글썽였다. 네드가 많이 그리운 모양이다. 비니가 여자와 여자가 어깨에 걸친 뱀까지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뱀은 아무래도 비니가 무서운지 요동을 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좀 힘들어 하긴 했었지. 아무리 봐도 네드 녀석, 무대 체질은 아니었잖아.”
“그럼 동물보호소 철조망 체질이란 말이야? 부탁인데 비니…… 네드 좀 빼내줄 수 없을까?”
여자가 처량하면서도 교태 가득한 시선으로 비니를 올려다봤다. 저러면 비니는 꼼짝 못한다.
“네드한테 소금 범벅 포테이토칩 같은 거 다시는 먹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한번 알아볼게.”
“아는 사람 없다면서?”
여자는 업소 사장을 불러오겠다면서 뱀을 앞에 있는 테이블에 부려 놓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여기 사장이 예전에 작은아버지 심복이었거든. 그래서 안면이 좀 있어.”
좀 전에 여자가 하는 걸로 봐서는 안면이 좀 있는 정도가 아니다. 게다가 왔다 갔다 하는 다른 여자들도 거의 대부분이 비니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쨌든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슈가의 커다란 비단 구렁이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일로 기분 꿀꿀한데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비니는 동물이라면 거의 다 좋아하고 비니가 좋아하는 모든 동물들은 비니를 무서워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기에도 거북할 정도로 거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녀석 옆에 앉아서 비늘을 만져줄 정도로 뱀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어느새 뱀 대가리가 딱 내 눈높이와 수평이었다. 도무지 감정이라곤 없는 차가운 파충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자니 겁도 나고 어지러웠다. 나는 뱀이 무섭다.
“야…… 이거 왜 이래? 어떻게 좀 해봐.”
“뭘 어떻게 해? 니가 맘에 든다는데 오히려 영광이지.”
비니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뱀 꼬리를 붙들고 장난질을 치며 태평하게 대꾸했다. 아직도 나한테 삐져 있는 게 분명하다.
이게 갑자기 덮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 정도 덩치면 힘이 보통이 아닐 텐데…… 뱀의 습격에 대비한 방어법을 학교 다닐 때나 정기 연수 때 교육 받은 적이 있었나? 아무리 되짚어봐도 야외에서 독사에 물렸을 때 응급 처치법이 뱀에 대한 상식의 전부였다. 아마존 정글에서 수입해온 것 같은 이런 엄청난 덩치의 구렁이 대처 방법은 뒤돌아서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뿐이었다.
될 수 있는 대로 거리를 두려고 한 걸음 발을 떼는 그 순간…… 뱀 대가리가 잠깐 흔들린다 싶더니 놈이 나를 공격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어깨에 머리를 턱 얹었다. 어깨 무거운 건 둘째 치고 목에 전해오는 이 섬뜩함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비니가 뱀 꼬리를 놓고 일어섰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은 그쪽이 아니었다.
“슈가!! 이 망할 구렁이 얼른 치우지 못해!”
정체 모를 남자의 걸걸한 외침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슈가가 어디선가 달려나와서 뱀의 목을 사정없이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뱀이 컥…… 하고 기침을 했다.
“죄송해요. 굉장히 순한 녀석인데…….”
말만 그렇지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어 보였다. 무대 위에서 누군가가 여자를 불렀다. 뱀 쇼 리허설 차례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뱀을 처음처럼 어깨에 메고 돌아서면서 비니에게 윙크를 했다.
“네드 일…… 부탁해요, 비니.”
클럽 주인인 비아조는 50대 초반 정도의 비만한 남자였다. 전직 조직원이라더니 예전에 무슨 부상이라도 입었던지 다리를 조금 절고 있었다. 그는 니콜라스 헤슬렘이 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비니의 말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사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이 걸레 같은 동네만큼 숨을 데가 많은 곳도 없을 테니까……. 그래, 뭘 도와줄까?”
“아는 애들한테 전화나 몇 통 해주세요. 길에서 수상한 사람 본 적 없는지…….”
비니의 청에 비아조가 선선히 일어났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 맥주라도 한잔씩 하고 있어. 잠깐 알아보고 올 테니까.”
앰프에선 좀 전부터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고 무대 위에서는 비단 구렁이쇼 리허설이 한참이었다. 좀 전에는 긴 가운을 걸치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쭉 뻗은 슈가의 다리가 상당히 매혹적인데다 음악에 따라 흔들거리는 구렁이 몸통이 조명 아래선 더 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비아조가 아무 이상 없다고 하면 이 동네는 이상 없는 거야.”
비니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거만을 떨었다. 확실히 추운 날씨에 노숙자나 거지들을 붙들고 탐문 하는 것보다 이편이 효율적이고 몸도 편했다.
“여기 자주 와?”
별다른 뜻이 있어서 물어본 것도 아닌데 비니가 움찔했다. 때맞춰 웨이터가 테이블에 맥주 두 잔과 땅콩 한 접시를 내려놨다.
“가끔…….”
“오랜만에 오셨군요. 몬티첼리 형사님.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이죠?”
쇼에 출연하는 여자들에다 웨이터까지 안면을 튼 걸 보면 출근부 찍으며 다녔던지, 이 가게 주주든지 둘 중 하나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하여튼 굼뜨기는…….”
비니가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 비아조가 사무실에 들어간 지 10분도 아직 안 지났다.
비니는 비니대로 허둥거리게 두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뱀 쇼 리허설은 끝났고…… 다음 차례로 무대에 올라간 반달곰이 반라의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여서 술 취한 중년 남자처럼 비틀거리며 춤추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비아조가 사무실에서 나온 건 5분 정도 더 지나서였다.
“헤슬렘을 봤다는 녀석은 없어.”
비아조의 보고에 비니가 거 봐라…… 하는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며 미련 없이 자리를 털었다.
“알아봐주셔서 고마워요. 아저씨.”
“그냥 가게? 오랜만에 왔는데 좀 놀다 가지 않고…….”
“다음에 들릴게요.”
비니에게 떠밀려서 클럽을 나서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찜찜했다. 생각해보면 아까 얼핏 들은 그 제보도 정확하게 헤슬렘을 봤다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 외에 뭐 이상한 일은 없었나요? 꼭 헤슬렘을 보지 못했어도 평소하고 다른…… 수상한 놈이라든지…….”
내가 생각해도 어설픈 질문이었다. 막 돌아서려던 비아조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수상한 놈들이야 항상 눈에 띄지. 알다시피 여긴 좀 별난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동네라서 어지간히 수상하지 않고는 수상한 놈 대접도 못 받아. 어쨌건 그 연쇄살인범을 봤다는 놈은 없었어. 그거만 확실하면 되는 거 아냐?”
그래도 혹시나 해서 몇 가지 더 물어보려는데 비니가 내 등을 확 떠밀었다.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대부님께 안부 전해다오.”
비니가 나를 짐짝처럼 차에 밀어 넣고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일이 더 귀찮아지기 전에 서둘러 이 동네를 벗어날 심산이다.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깔리기 시작하면서 거리엔 한두 군데 불빛이 반짝거리고 행인도 좀 전보다 부쩍 늘었다. 대부분 당장이라도 한 탕 저지를 것처럼 수상하고 위험해 보였다.
비아조가 아무리 이 동네를 꽉 잡고 있다 해도 그 사람 한마디에 이렇게 철수라니, 이런 걸 수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큰 길이라도 한 30분 훑어야 이 찜찜함이 가실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소리 꺼내기엔 비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비니가 터무니없는 과속으로 코너를 아슬아슬하게 돌았다. 옆 차선을 달리던 차가 우리를 피하다가 하마터면 인도로 올라설 뻔했다.
“천천히 가.”
서둘러 가 봐야 나를 기다리는 건 발렌타인과 가르시아와…… 올리버 기타등등이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순간, 비니가 오는 차 없다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위반하고 좌회전을 걸었다.
“비니!”
“왜?”
“천천히 가자니까!”
가만히 있어도 사고가 물어물어 찾아오는 형편인데 이렇게 폭주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다.
비니가 마지못해 속도를 늦췄다. 그런데 하필 그때 맞은편에서 오던 트럭이 기우뚱하더니 느닷없이 중앙선을 넘었다.
집채만 한 트럭이 불시에 눈앞을 덮치자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겨왔는데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서 기가 막혔다. 비니가 으악……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있는 대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순간 차가 그대로 날았다는 게 내 솔직한 느낌이었다.
6차선 도로 가장 안쪽을 달리던 우리 차는 그대로 인적 드문 보도로 뛰어들었다. 길가에 세워져 있던 늘씬한 오토바이 한 대가 범퍼에 받혀서 10여 미터를 날다가 제법 장한 가로수 한 그루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둔중한 파열음을 내며 내려앉았다. 오토바이가 아직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차는 이제 막 셔터를 올리고 있는 길모퉁이 가게로 날아가 박혔다. 하필 딱 그때 가게 문을 열던 남자가 돌진해 들어오는 차를 발견하고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다.
가게 전면의 통 유리가 산산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튀었고 차는 가게 안쪽의 진열장과 높이 쌓인 물건들을 덮치고도 모자라서 가장 안쪽 벽을 들이받고서야 멈춰 섰다. 차 지붕으로, 바닥으로 알 수 없는 묵직한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이 와중에 아무도 안 죽이고 우리도 안 죽었다.
“……내가 천천히 가자고 했지.”
“이게 내 탓이야?”
지나온 사거리에서 신호 위반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그 문제는 나중에라도 따질 기회가 있을 터…… 거미줄처럼 바스러지고 구겨진 차 앞 유리가 쏟아져 쌓인 물건의 무게 때문에 서서히 내려앉는 중이었다. 얼른 차에서 내리지 않으면 꼼짝 못하게 갇힐 상황이었다. 차 문이 찌그러져서 열리질 않으니 어쩐다……. 맥이 탁 풀려서 잠시 넋 놓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차창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으세요?”
좀 전에 셔터를 올리다가 비호처럼 몸을 날려 목숨을 부지한 그 남자였다. 짧은 은발에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피부가 매끈한 청년인데, 가게 주인치고는 젊었다. 20대 초반? 10대 후반? 물러서라고 손짓을 한 후 차창을 발로 걷어찼다. 이미 산산이 깨져 있던 유리창이 힘없이 떨어져나갔다.
내려서 살펴보니 남자의 옷이 온통 흙투성이인데다 얼굴이 보도에 쓸렸는지 생채기가 제법 컸다. 정작 죽을 뻔한 건 이 남잔데 우리 안부를 물어올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저희는 괜찮은데…… 다친 데 없으세요?”
남자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갈색 눈동자가 총명하고 너그러워 보였다.
가게는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셔터는 떨어져나가서 보도에 나뒹굴고, 유리창은 가루로 변했다. 가게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을 낮은 책장들은 차에 깔려서 파편만 무수했고, 최소한 3중으로 놓여 있었을 가게 안쪽의 키 높은 책장은 겹치고 겹친 채 부서지고 무너졌다. 그 바람에 수천 권에 이르는 책들이 차 위에 수북이 쌓이고 바닥에도 어지럽게 널렸다. 비니가 덮친 가게는 믿을 수 없게도 책방이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맞은편에서 트럭이 갑자기…….”
비니도 놀란 얼굴로 가게를 빙 둘러봤다. 루벳 거리에 책방이라니…….
오토바이 순찰대 한 조와 견인차 한 대가 가게 앞에 섰다. 오토바이에서 내려선 건 순찰대 게슈타포 루디였다. 같이 온 대원은 초면인데 빳빳하게 굳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신입이 분명했다.
가게 안으로 한 발 들이밀다가 비니를 발견한 루디는 그 순간에 사태를 모두 파악했다.
“인명 피해는 없나요?”
루디가 비니를 싹 지나쳐서 가게 주인인지 점원인지 분명치 않은 남자에게 물었다.
“……없는 것 같은데요.”
남자의 대답에 루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를 슥 둘러봤다.
“가게가 많이 부서졌군요.”
“예.”
“많이 놀라셨겠습니다.”
“그야…… 요 근래 들어서는 이런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남자가 놀란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쿨하게 대답했다.
“운전자를 형사 고발할 생각이십니까?”
“별로요.”
루디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인명 피해가 없는 이런 사건은 대부분 당사자 간 합의로 마무리되곤 한다. 물론 합의가 원만하지 않으면 재판까지 가지만.
“피해가 어느 정도 되는지 조사해서 합의를 봐야겠군요. 나중에 따로 조사관이 나오겠지만 피해 당사자가 조사한 액수하고 차이가 커서 항상 말썽이죠. 가게 수리비하고 파손된 물건…… 영업 중단에 따른 손해 이외에 이 난장판을 정리하는데 드는 인건비까지 보상 액수에 포함됩니다.”
루디가 거기까지 말하는데 밖에서 웬 남자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좀 전에 박살난 오토바이 임자가 이제야 나타난 모양이었다. 루디가 비니를 돌아봤다.
“내 조카가 이번에 보험회사에 취직했는데, 대인 대물 재난 보험이 새로 나왔대. 소개시켜 줄까?”
“마주 오던 트럭이 중앙선을 넘었어!”
비니의 항변에 루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셔츠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들고 건성으로 물었다.
“덤프? 트레일러? 탱크로리? 차종이 뭐였어?”
“그냥…… 트럭이었어. 아마 청색이었던 것 같은데…… 워낙 순식간이었다고!”
“번호판 봤어?”
“…….”
비니가 나를 돌아봤다. 나라고 그 경황 중에 무슨 수로 그런 걸 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가게 청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오레스 시 번호판이었어요. PP-4527, 가장자리에 먼지가 많아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아래쪽에 내 사랑 산드라라고 적혀 있던데요.”
비니 차는 견인되어 끌려갔고 오토바이 주인도 진정 기미를 보이며 떨리는 손으로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루디는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동시에 나중에 참고인 진술을 하게 될지도 모를 남자의 이름과 신상을 수첩에 기록했다.
“마리우스라고 합니다. 전화번호는 7001-6*1*구요…….”
“댁이 이 가게 주인입니까?”
“예.”
루디가 남자를 힐끔 훑었다. 그 매서운 눈초리에 남자가 주춤했다.
“사실 삼촌 가게예요. 삼촌 안 계신 동안 잠깐 맡아보는 거죠.”
루디는 본래 눈매가 사납다. 특별히 안 좋은 감정이 있어서는 아닐 테지만 루디가 자꾸만 가게 주인 마리우스를 쳐다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 남자는 어딘지 들떠 있었다. 좀 전에 등 뒤에서 날아든 차에 깔려 죽을 뻔했던데다, 아무리 자기 소유가 아니라도 관리하던 가게가 초토화된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별로 바람직한 반응이 아니었다.
“제가 좀 이상하게 보이죠?”
남자가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면서 히죽 웃었다.
“상당히요.”
“이런 일이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꽤 오랫동안 주변에 사건다운 사건이 없었거든요.”
항상 무표정한 루디의 얼굴에 염려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겠죠. 워낙 조용하고 점잖은 동네니까요.”
루디가 비니를 슬쩍 노려봤다. 뺑소니 트럭을 잡아봐야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겠지만 저 정신적 쇼크는 분명히 비니 책임일 거다.
“게다가 요즘은 손님도 뜸해서요. 하루에 한두 명 드나드는 게 고작인데 그나마도 한 발짝 들어오다가 도로 나가버리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저희 가게가 원래 고서 전문이지만 얼마 전부터는 신간도 꽤 들여놓는데 통 반응이 없어요. 요즘 사람들은 책 보는 것 말고도 재미있는 일이 많은가 봐요. 어쨌거나 이러느니 가게 문 닫고 어디 여행이나 갔다 올까도 싶지만 가게를 맡길 사람도 마땅치가 않아서요.”
이런 동네에 서점을 차려 놓고 반응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게다가 찢어진 채 날아다니는 책장들은 도색잡지나 성인 만화책도 아닌, 앞뒤 빼곡히 글자가 들어찬 엄청난 읽을거리였다.
“내가 이 동네 순찰만 3년째 도는데 이 가게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네요. 최근에 개업했나요?”
“아마 여기 동네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걸요.”
루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발랄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하고 이렇게 얘기를 나눠본 것도 언제 일인지 까마득해요. 이런 일이 진작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후라도 두통이 심하거나 구역질 같은 게 나거든 지체 없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세요. 그리고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이 난장판을 치우는 동안에도 기분이 가라앉지 않거나 속에서 열불이 치솟지 않으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겁니다.”
기본적인 조사를 마친 루디가 수첩을 원래 있던 주머니에 꽂아 넣고 돌아섰다.
신장 190센티미터의 거구인 루디와 그 파트너가 조사를 마치고 빠져나가니 그렇지 않아도 폭탄을 맞은 것 같은 가게의 전경이 더욱 살풍경했다.
“안 돼요! 그 책 이리 주세요.”
세 시간째였다. 완전히 찌그러져 못 쓰게 된 책과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책을 분류하고 나눠 쌓다 보니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바람은 말 그대로 칼날 같았다. 두꺼운 표지 외에는 완전히 가루가 되다시피 망가진 책을 들어 올렸다.
“이거 말입니까?”
마리우스가 바닥에 널린 책 파편을 밟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건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중 한 권이거든요.”
한 권이라곤 하지만 실은 반에 반 권도 안 남았다.
“비싼 책인가요?”
“요즘은 어디서도 구경 못 하는 책이에요. 원본은 아니고 중세 때 어느 수도원에서 제작한 필사본이겠지만, 그나마 이거 한 권 남은 건데 어떻게든 살려봐야죠.”
객관적으로 볼 때 이미 죽은 책이다. 어떻게 살려낸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한 쪽 벽면에 쌓인 책이 줄잡아 100여 권이었다. 책을 받아 안고 돌아서던 마리우스가 맞은편에서 책 정리 중인 비니를 옆으로 확 밀쳤다. 그리고는 그 엉덩이에 깔려 있던 종잇조각 하나를 들어 올리고서는 환호성을 질렀다.
“찾았다!!”
마리우스에게 밀려 옆으로 쓰러졌던 비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게 뭔데요?”
“『카툴루스 연애 시 모음』 중 열아홉 번째 페이지요. 아까부터 찾고 있었거든요. 나머지 반쪽이 근처에 있을 텐데…….”
비니가 책 무더기를 뒤적거리더니 누런 양피지 쪼가리를 마리우스에게 내밀었다.
“이거 아니에요?”
마리우스가 양피지 조각을 받아 들고 잠시 들여다보더니 대답했다.
“이건 칼리마쿠스 원본이에요. 2500년 된 연애시죠.”
그때 큰길에 커다란 화물차가 지나가면서 가게 안으로 바람이 불어 닥쳤다. 바람이 차가운 건 둘째 문제였다. 비니와 나…… 그리고 마리우스가 바닥에 널린 종잇조각들을 몸으로 덮었다. 고대 문서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한 조각이라도 날아가 없어지는 날엔 인류 역사의 파괴자로 남을 판이었다.
루디도 가버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가게 앞을 기웃거리던 구경꾼들도 제 갈길 가기 시작할 즈음 소맷자락 걷어 부치고 널린 책들을 치우기 시작한 것은 비니였다.
오늘 하루는 정말 힘겨운 날이었다. 길버트와 왕의 처참한 몰골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제발 좀 살려달라고 줄곧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힘겨운 고통을 끝장내고 싶다는 충동 이외에 내 머릿속은 텅 빈 상태였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다. 그런 나를 뱀 쇼 전문 스트립 바 같은 곳에 끌고 들어간 것도 모자라서 난폭 운전 끝에 길모퉁이 중고책 전문서점에 처박고는, 이제 저 혼자 미안한 양 부산스럽게 구는 비니의 뒷모습이 가증스러웠다.
“괜찮으세요?”
마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청년에게는 안 된 얘기지만 현재 반 미친 연쇄살인범이 나를 쫓아다니고 있고, 나도 연쇄살인범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부서진 가게를 같이 치울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가셔도 되는데요. 어차피 다 치우고 정리하려면 석 달쯤 걸릴 것 같으니까…….”
“석 달이요?”
망연자실해서 묻자 청년이 천사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파손된 문서를 복원하려면 10년쯤 걸릴 수도 있고요.”
어쩔 수 없이 나도 비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예상대로 일이 끝도 없었다.
“저…… 이 책은 어떻게 하죠?’
비니가 세 갈래로 찢어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마리우스가 거둬들인 책들에 비하면 그래도 상태가 양호한 편인데 마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한 옆에 던져두세요. 신간이니까…… 다시 구해봐야죠.”
비니가 책을 폐기 서적으로 분류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초판본인데…….”
1452년 출간된 「흑마술 교본」은 바티칸 장서각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폐기 대상에 올랐고 작자 미상의 「저수지 근처에서 자라는 독초와 약초」라는 제목의 본초학 저서는 내용은 순 엉터리지만 삽화가 훌륭하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들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최근이라 해봐야 1900년대 이후에 출판된 책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차를 몰고 책방으로 돌진한 정도는 비니가 친 사고로는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이번 일이 비니가 저지른 최악의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표정이 전에 없이 시무룩한 걸 보면 비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이 추워지는데 유리부터 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치고도 추운 기색이 별로 없던 마리우스가 책 더미에서 고개를 비죽 들었다.
추운 것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종이며 양피지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리는 게 맘에 걸렸다. 하지만 부서진 책장 틈에서 찾아낸 전화기도 이미 파편이었다.
“유리 가게도 문을 닫았을걸요. 게다가…….”
마리우스가 전화기 바로 옆에 찌그러져 있는 금고를 두들겨 열었다. 바닥에 굴러 떨어진 동전 몇 개가 금고 안에 있는 돈 전부였다. 유리 값 정도야 비니가 카드로 긁으면 그만이긴 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겸연쩍은 얼굴로 동전을 집어 주머니에 얼른 넣어버리는 이 아름다운 남자도, 그리고 중세 수도원의 도서관 같은 이 서점도 지독하게 비현실적이었다.
“일단 포장 천막 같은 거라도 구해서 덮어놓고 내일 일찍 유리부터 해서 단 다음에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친구랑 나는 일 때문에 내일은 오기 어렵겠지만 필요하면 사람을 몇 명 보내 드릴게요.”
비니의 제안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우리를 보내려고 그러는 건지 남자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도 한잔씩 드실래요? 뒷방이 응접실이거든요.”
비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누굴 보내겠다는 거야? 니네 작은아버지 똘마니들?”
“레빈은 이런 일 잘해. 작은아버지 댁에 3개나 되는 서재를 12년 동안 정리해오고 있으니까 도서관 정리는 전문이야.”
레빈은 그렇다 치고 또 누구?
“니가 보기엔 발렌타인도 요즘 일 없이 놀고 있는 것 같지 않던?”
또 한 차례 바람이 불어 들었다. 제법 매운바람에 바랜 양피지 조각들이 키 높이로 날아올랐다.
얼른 몸을 일으켜서 손을 뻗어봤지만 한 발 늦었다. 바람이 어느 틈엔가 내 손 바로 앞에서 종이를 걷어 길거리로 날려 보냈다. 쌀쌀맞은 여자 치마꼬리처럼 잡힐 듯 잡힐 듯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소중한 고대문서의 한 조각을 쫓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길거리였다.
바람은 제멋대로 종잇조각을 부쩍 늘어난 행인들의 다리 사이로…… 혹은 어깨 너머로 불어 날렸고 이제 막 차들이 꽉 들어찬 도로에 내던질 기세였다. 인류의 문화유산 한 조각이 자동차 타이어에 짓이겨져 사라질 찰나였다. 날아다니는 종잇조각을 쫓아다니는 내 꼴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리라고 생각하고 손을 뻗었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양피지 조각이 내 손끝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간 그 순간, 어떤 낯선 손이 나타나서 그 조각을 잽싸게 잡아챘다.
남자가 손에 양피지 조각을 움켜쥔 채 우뚝 섰다. 나도 흠칫 놀라서 뻣뻣하게 멈춰 섰다. 검은 가죽바지에 니트로 짠 성긴 겉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질끈 묶은 행색은 그다지 별난 차림새는 아니었다. 등에 맨 장검만 아니라면…….
“당신 겁니까?”
오웬과 내가 서로를 멀뚱하게 쳐다봤다. 그때 어떤 남자가 내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갔다. 오웬이 비틀거리는 내게 양피지 조각을 내밀었다. 이렇게 우연히 자꾸만 마주치는 걸 인연이라고 하던데…… 저쪽도 나만큼이나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종류의 우연은 대부분 악연이죠.”
말없이 양피지를 받아들자 오웬이 그렇게 말하고 나를 지나쳤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박살난 마리우스의 서점 앞이었다. 오웬은 그야말로 얼어붙은 듯 가게 앞에 붙박여서 간판 한번 올려다보고 난장판이 되어버린 가게 한번 들여다보고, 또 간판을 한번 올려다봤다.
뒷방에서 담요 더미를 잔뜩 끌어안고 나오던 마리우스가 오웬을 발견하고 담요를 바닥에 내던졌다. 내가 양피지 조각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아이스!”
마리우스가 환호성을 지르며 오웬에게 달려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웬이 온몸으로 대시하는 마리우스를 받아 안으며 숨을 삼켰다. 오웬의 목에 찰싹 감긴 마리우스가 흥분된 어조로 좀 전에 있었던 사건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했다.
“차가 날아들어서 나 오늘 죽을 뻔했어! 진짜 엄청났어!”
“차가…… 날아?”
되묻던 오웬이 비니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비니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루벳 거리…… 서점주인 마리우스…….
책 더미를 가게 한 구석에 쌓고 마리우스가 이웃 가게를 돌며 얻어온 천막과 담요로 대충 덮었다. 임시방편이었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밖으로 달려나가는 수고는 일단 덜었다. 마리우스는 오웬을 만난 이후 일할 생각이 싹 가셨는지 그렇게 대충 얼버무려 놓고는 우리를 모두 가게 안쪽에 있는 방으로 몰고 들어갔다.
마리우스의 서점은 파리 날리는 골목 귀퉁이 가게치고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하지만 마리우스가 우리를 데리고 들어간 가게 뒷방은 가게보다 두 배는 더 넓었다. 보통 집 2층 높이는 넘을 듯 높직한 한쪽 벽에는 수백 년은 족히 묵은 것 같은 장서들이 켜켜이 쌓여 있고 방 한 가운데 놓인 넓은 테이블 위에는 필사본 두루마리 양피지가 수북했다.
몇 백 년을 단숨에 거슬러 중세 학자의 방에 초대 받은 기분이 들었다. 부식되어가는 종이의 큼큼한 냄새, 동물성 아교와 희미한 곰팡이 냄새가 한데 섞인 방안의 공기조차도 수백 년 전의 것 같았다. 혹시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의심스러울 만큼 위태롭게 쌓인 책 더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마리우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두루마리를 한쪽으로 걷어치우고 빠른 손놀림으로 찻잔을 늘어놨다.
“두 분이 아이스의 친구들이었다니…….”
마리우스가 보온병을 기울여 차를 따르면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감탄의 감탄을 연발했다.
“친구 아니야!”
“친구 아니에요!”
설령 친구 사이라 해도 그게 뭐 그렇게 감탄할 일일까 싶은데 마리우스가 오웬을 멀뚱히 쳐다봤다.
“서로 아는 사이라면서?”
“우연히 서너 번 만난 게 전부야.”
“서너 번씩이나 우연히 만나는 걸 보통은 운명이라고 하지.”
오웬이 마리우스를 흘겨봤다. 우리들하고 빈번히 마주치는 게 상당히 신경 거슬린다는 투였다. 운명이라도 좋고, 친구라도 상관없는 비니와 나는 찻잔을 한번 부딪치고 마리우스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씩 마셨다. 알 수 없는 풀잎 냄새가 났다.
“옛 격언도 있잖아. 우연히 세 번 마주친 사람과는 친구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엮여서 뒤끝 좋았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으면 얘기해봐.”
오웬의 퉁명스런 대꾸에 마리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일은 드문 모양이다.
“우연히 세 번 마주친 사람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비니가 물었다.
“적이 되죠.”
어디를 가도 자꾸만 마주치는 사람은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얘긴가 보다.
“항상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 오웬의 눈치를 살피면서 마리우스가 차를 홀짝거렸다.
“전 두 분이 가끔 한 번씩이라도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 여긴 재미있는 책들도 많고…… 손님은 별로 없거든요.”
가게가 다 허물어지는 봉변을 당하고도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정말 손님이 없었던가 보다.
“게다가 아이스의 친구라면 언제나 환영…….”
“친구 아니라니까!”
오웬이 신경질을 냈다.
“자기 에너지도 주체 못하는 마법사하고 친구가 되고 싶은 생각 따위 전혀 없어. 게다가…….”
그때 마리우스가 벌떡 일어났다.
“깜빡 잊고 있었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놀란 우리를 남겨 놓고 마리우스가 책장 사이 작은 나무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방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 그리고 밀가루 탄내가 풀풀 풍겼다.
“어떤 게 본명입니까? 오웬하고 아이스 중에…….”
내 질문에 오웬이 내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아이스는 예전 이름입니다. 몇 안 되는 옛 친구들만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죠.”
예전에 쓰던 이름이란…… 본명이란 뜻인데? 이름을 바꾸고 다니는 사람들은 보통 과거사가 복잡하기 마련이다. 아이스란 이름으로 신원조회를 해보면 엄청난 전과가 나올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웬이 찻잔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입을 열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궁금하다는 듯 그가 물었다.
“어떤 종족입니까?”
말문이 막혔다. 종족이란 고전적이면서도 생소한 단어인데다 인종하고도 뜻이 달랐다.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이 남자가 구사하는 어휘는 꽤나 고색창연한 구석이 있었다. 어쨌건 종족 얘기가 나오면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개인 사정 때문에 꾸물거리자 비니가 대신 나섰다.
“이 친구는 좀 복잡해요. 그러니까…… 이쪽저쪽 많이 섞였다고 보면 되죠.”
“아…….”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마리우스가 부엌이라고 추정되는 방에서 새까만 숯 덩어리를 한 바구니 들고 나왔다. 비니가 가게를 덮치기 전에 과자라도 굽고 있었던가 보다.
“이게 두 판째야. 오후에도 라두칸이 오는 바람에 홀랑 다 태워 먹었었는데…….”
마리우스가 숯 바구니를 한 구석에 내려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가게가 부서진 것에 대해서는 하나 애달픈 기색이 없더니 바구니를 쳐다보는 시선은 못내 아쉬워 보였다.
“라두칸이 왔었어?”
오웬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라두칸이란 이름은 이제 우리 귀에도 상당히 익었다. 비니가 내 찻잔에 자기 잔을 부딪쳤다. 마저 마시고 일어나자는 사인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오거스트의 상자를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그거 맡겨 놓은 게 언젠데 당장 찾아내라고 어찌나 성화를 하는지…… 지하 7층까지 뒤져서 찾아주느라 그 아까운 과자를 몽땅…….”
오웬이 짜증나는 걸 꾹 참고 조용히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여기 왔었단 말이야?”
“못 본 사이에 성격이 변한 것 같았어. 무슨 일이든 서두르는 법이 없었는데……. 그래서 가고 난 뒤에 한판 새로 얹었는데 이번엔 또…….”
“지금 과자가 문제야?”
오웬이 버럭 소리쳤다. 갑작스레 방안에 흐르는 기류 심상치 않았다. 오웬이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우리 둘을 슬쩍 노려보고는 입을 닫았다.
피곤한 하루였고 밤도 깊었다. 내가 먼저 일어섰고 비니가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내일 일찍 가게 정리 도와줄 사람들을 보낼게요.”
비니가 마리우스에게 간단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인사에 마리우스가 화들짝 놀랐다.
“벌써 가시게요?”
마리우스가 비니의 옷깃을 잡았다.
“저녁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많이 바쁘세요?”
그 말투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비니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자기보다 키가 약간 작은 마리우스를 내려다봤다. 가게를 다 때려 부순 이 마당에 피해 보상하라는 강짜는커녕 차 대접도 모자라서 저녁 먹고 가라고 붙잡는 사람이 비니 평생에 또 있었을까?
비니의 얼굴에 감격스런 표정이 수평선에 떠 있는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를 즈음 오웬이 마리우스의 어깨를 사정없이 잡아챘다.
“그자가 또 무슨 얘기 했어?”
“좀 있어 봐! 이분들이 가신다잖아!!”
“가라고 해!”
오웬이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리우스도 완강했다.
“얼마 만에 온 손님들인 줄 알아? 다른 사람하고 차를 마셔본 게 정확하게 4년 7개월 6일만이야!”
금방 구운 빵 한 접시, 삶은 닭고기 두 마리, 소금이 지나치게 들어가 짭짤한 크림 스프 한 냄비가 마리우스가 내온 저녁 메뉴였다. 화려한 식탁은 아니지만 마리우스의 환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가 손님으로 온 건 아니지만 그나마 4년만의 방문객이라니…… 마리우스가 그동안 뭘 먹고 살았는지도 신기하거니와 여기서 서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지 궁금했다. 내도록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던 오웬도 슬그머니 식탁 머리에 와서 한 자리 끼어 앉았다.
“항상 이렇게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던 건 아니고요, 한 15년 정도 됐나 봐요. 그전에는 그냥 조용한 상업지구였는데…… 요 옆에 있던 가전제품 공장이 망하면서 다니는 사람도 줄고 주변 상인들도 하나씩 떠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파리를 날렸죠. 공장 문 닫고 나서 한 3년은 길에 다니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썰렁하더니 어느 날부터 짧은 치마 입은 젊은 여자들이 서성거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주로 저녁때요. 10년 전부터는 새로 가게들이 하나씩 생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번쩍이는 간판들도 부쩍 늘어나고…… 돈이 좀 모이면 저 그런 간판을 하나 달고 싶어요. 빨간색으로…… 커다랗게 《라두칸 장서각》이라구요.”
큼직하게 뜯은 빵을 스프에 푹 찍어서 입안으로 밀어 넣던 비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라고요?”
“이름이 좀 촌스럽죠? 새로 하나 해서 달기는 해야겠지만 지금은 돈이 별로 없거든요.”
비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비니를 마주보는 내 얼굴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비니는 들고 있던 빵을, 나는 닭다리를 가만히 접시에 내려놨다. 라두칸이란 이름에다 장서각이라는 생소한 단어까지 튀어나오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푸른 용과 히말라야 기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까닭이었다.
“접시가 이거밖에 없어?”
비니와 내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때 오웬이 접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빵을 집어 들면서 뜬금없이 접시타박을 했다. 마리우스가 빵을 담아온 접시는 우묵한 바닥에 태양 문양이 새겨진 묵직한 돌접시였다. 검은 화강암인데 문양이 많이 마모되고 접시 주변이 반질한 것으로 봐서 상당히 오래된 물건 같았다. 빵 접시로는 대단히 특이하다는 생각을 나도 했다.
“뭐가 어때서? 무난하잖아.”
마리우스가 입을 삐죽거렸다.
“바야쿰의 제물 접시잖아!”
“쓸 만한 접시는 이것뿐이야.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마리우스가 잘라 말했다. 접시 따위야 뭘 쓰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오웬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지 여전히 언짢은 기색이었다.
“산 사람 심장을 도려내서 담아 놓던 접시를 꼭 이렇게 써야 돼?”
비니가 컥…… 하고 기침을 했다. 마리우스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깨끗하게 닦아서 쓰면 됐지, 뭐가 문제야?”
바야쿰은 남미에서 발굴된 고대 신전의 이름이었다.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는 여느 신전과는 달리 밀림에 평지를 만들어서 각기 높이가 다른 수십 개의 기둥을 세우고 한 가운데 제단을 만들어서 신에게 제사 지내던 곳인데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유적이었다.
정확히 어떤 신을 모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의 형태나 문양으로 추측하건데 빈번히 벌어졌을 이웃 부족과 전쟁에서의 승전을 기원하던 신전이었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발굴된 엄청난 숫자의 유골로 미루어보아 인신 제물을 바쳤던 것이 거의 확실할 뿐이다.
나는 본래 고고학에는 아무런 관심도 조예도 없는 사람이지만, 니콜라스는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고 관심사도 다양했다. 그런데 그 신전에서 쓰던 제물 접시가 왜 이런 장소에서 빵 접시로 쓰이고 있는 걸까?
비니가 들고 있던 빵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험……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 얼핏 들었는데 그 라두칸이란 사람 말이에요. 오후에 왔다 갔다는…….”
빵 조각으로 접시를 싹싹 훔치던 마리우스가 비니를 빤히 쳐다봤다.
“그냥 궁금해서요. 오웬 씨도 찾아다니는 중인 것 같고…… 어떤 사람이에요?”
“여기 주인이에요. 나를 이 책 무덤 속에 던져놓고 자기는 세상의 온갖 재미를 다 보고 다니는 괴팍한 영감이죠. 보통은 100년에 한 번도 올까 말까 해요.”
“학자가 아니고요?”
마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학자는 무슨…… 요즘은 어디서 장사를 한다는 얘기는 들은 것 같아요. 돈은 벌어서 뭐에 쓰려는지 모르겠지만…….”
비니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고 나도 마음이 좀 놓였다. 라두칸 장서각이라니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설마하니 우리가 멀쩡한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보냈을까? 그 둘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얘기는 뭐야? 라두칸이 뭘 어쨌다고?”
마리우스가 오웬에게 물었다. 돌 접시를 기울여서 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오웬이 접시를 내려놨다.
“다른 말은 없었어? 바솔로뮤 일이라든지…… 요즘 들어 누군가 찾아왔다든지…….”
“아무 말 없었어. 그냥 자기 볼 일만 보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어.”
오웬이 다시 접시를 기울였다. 심란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마리우스도 약간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그 라두칸이 지난밤에 푸른 용과 히말라야 기린이 찾아다니던 그 인물만 아니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오웬이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깨달은 종족이 라두칸에게 보낸 사절 둘이 행방불명이야. 깨달은 종족의 장로들은 그자가 소환에 불응하려고 사절들을 해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경찰관도 사람인지라 이런저런 일처리를 하다보면 간혹 실수할 때가 있다. 마약 사범의 소굴인 줄 알고 덮쳐보니 신혼부부 살림집이었던 경우도 있었고 몽타주와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연행해 보니 서에는 이미 그런 남자가 한 다스나 잡혀와 있었던 적도 있었다. 단순히 언행이 수상쩍다는 이유만으로 엉뚱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오해해서 병원에 인계해버린 일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살면서 몇 가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실수는 바로잡으면 된다. 비니 차는 견인되어 끌려가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큰 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진 않았었는데…….”
비니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비니는 자신의 살인적인 징크스 때문에 동료들이 처참한 몰골로 쓰러지는 것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었다. 하지만 업무상 과실에 대해서는 자책이 지나친 편이었다.
“얼마나 가야 합니까?”
오웬이 물었다. 오웬은 이제 언짢은 기색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한 시간 정도…….”
하지만 시내 교통이 생각만큼 원활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쯤은 잘 달린다 싶더니 어디서부턴가 서행이 시작됐고 방금 전부터는 거의 기어가는 형국이었다. 길목마다 검문소가 설치돼서 일일이 신원확인을 하고 트렁크까지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알려져 있다곤 하지만 니콜라스 헤슬렘을 이런 식으로 잡을 수는 없다. 이건 일종의 보여주기식 수사일 뿐이었다. 수사관이 두 명이나 살해된 마당에 경찰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줄 수는 없으니까……. 시민들이 잠시나마 경찰이 그를 추적 중이고 이제 곧 다시 안전해질 것이라고 느껴주기만 하면 이 떠들썩한 소동도 전혀 무의미한 짓은 아니었다.
대로변에 있는 전자 제품 상가의 대형 TV가 니콜라스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다. 체포된 직후의 모습이었다. 푸른 죄수복에 죄수 번호를 달고 있었고, 얼굴은 차갑고 무표정했다. 저 사진도 니콜라스를 찾는 데는 큰 도움이 못 될 것 같았다. 분명히 니콜라스의 얼굴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틀어잡았던 그 압도적인 매력은 사진의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이 도시의 주인인가요?”
오웬이 물었다. 제일 놀란 사람은 운전기사였다.
“외국에서 오셨어요?”
“아닙니까? 도시가 온통 저 남자 얼굴로 뒤덮여 있던데요.”
“보기는 제대로 봤는데 귀는 닫고 다니셨구만?”
기사가 힘겹게 기어가던 차를 아예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저놈은 연쇄살인범이에요. 얼마 전에 정신병원에서 탈출해서 저렇게 사방에서 찾느라 난리죠. 오늘도 경찰관을 두 명이나 죽였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요즘은 애들도 맘 놓고 밖에 내보낼 수가 없다니까요.”
“그랬군요.”
“수십 년 동안 멀쩡한 유지 행세를 하면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 아무도 모른다지 뭡니까? 사람을 잡아다가 무슨 제사를 지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런 놈을 다 잡았다가 놓치고는 이 난리라니…….”
“제사……라고요?”
오웬이 뭔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TV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니콜라스의 얼굴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사라진 화면엔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스포츠카 광고가 한창이었다.
우리가 병원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불이 켜진 곳이라곤 응급실뿐이었는데 다행히 당직의사 중에 어제 그 의사가 끼어 있었다.
“저 기억하시죠? 어제 이맘 때 푸른 용하고 기린을 데리고 왔던…….”
의사는 당연히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냥 기억만 하는 게 아니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의사가 굳은 얼굴로 다가오다가 막 따라 들어온 오웬을 보고 흠칫 걸음을 멈췄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오웬이에요.”
의사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비니의 설명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분도 깨달은 종족이 보낸 분인가요? 라두칸 선생을 찾아오라는…….”
“아니…… 이 사람은…….”
비니가 힘겹게 의사에게 자초자종을 털어놨다. 앞뒤를 아무리 꿰어 맞추려고 해도 잘 맞지 않는 두서없는 얘기를 듣고 난 의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니까 어제 그 두 환자를 데리러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임기응변이 뛰어난 의사는 용케도 비니의 횡설수설에서 포인트를 잡아냈다.
“그 일 때문에 이 밤중에 오신 겁니까?”
“아침에 올까 생각도 했었는데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넘겨 놓고 밤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요.”
멀쩡한 사람 여럿을 중환자로 만들어 놓고 밤잠을 설치기는커녕 낮에도 수시로 졸곤 했던 비니의 표정이 심각하고 진지했다. 반면 의사는 약간 졸린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들이 멀쩡하지는 않죠.”
“어쨌거나 우리가 찾던 사람들은 아니거든요. 사진이라도 한 장 있었으면 이런 실수는 없었겠지만 아시다시피 병원 화재 때 관련 서류들이 거의 다 타버려서요.”
“퇴원은 안 됩니다.”
의사가 잘라 말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그 사람들이 아니라니까요?”
“그 두 사람은 지금 현실 감각이 전혀 없는 상태예요.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면서 가르쳐주질 않더라고요. 푸른 용은 인간 세계에서 부르는 이름이 하나쯤 있는 것도 상관없다면서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고 했는데 기린은 그것도 싫다고 버티는 바람에 차트에도 그냥 기린이라고 적었단 말입니다.”
더 이상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의사가 돌아섰다. 정신병원에는 응급환자가 본래 몇 명 안 되는지 당직 의사나 간호사들이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책상 위에 놓인 차트를 뒤적거리면서 바쁜 척하는 걸 보면 우리랑 더 말하기 싫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비니가 아니다.
“물론 우리도 그 둘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주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이 찾던 사람도 실존하는 인물이고 또…… 장서각이란 곳도 실제로 있더라고요.”
의사가 집어 들었던 차트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비니를 요렇게 노려봤다.
“그 장서각이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에 쓰인 돌과 동일한 석재로 지어진 13층짜리 탑이던가요?”
“아니요…….”
비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2층짜리 허름한 중고책방이던데요.”
“장서각을 지키는 사람 이름이 마리우스였죠?”
“맞아요! 그건 틀림없어요!”
비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힘을 얻었다. 의사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물론 천 살도 더 먹은 늙은 기사였겠죠.”
비니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지원사격을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내 생각엔 그 둘은 그냥 병원에 두는 게 나을 것 같지만, 파트너의 구조요청을 마냥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그런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는 시간도 꽤 걸리고 돈도 많이 들 텐데요?”
의사가 이번엔 니 차례냐…… 라는 듯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요?”
“콘웨이 요양소 환자들 중 한 사람은 꽤 많은 유산이 은행에 있어서 자기 병원비 정도는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명은 외국에 있는 보호자가 1년에 한 번씩 병원비를 송금해주고 있었어요. 치료를 공짜로 해주신다면 저는 굳이 푸른 용하고 기린을 여기서 데리고 나갈 마음은 없습니다.”
“여긴 시립병원입니다. 콘웨이 요양소처럼 궁전 같은 사설 병원에서야 그게 중요한 문제겠지만 우리는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를 돈 때문에 거리로 내몰지는 않습니다.”
어제 병원 마당에서 비니랑 손발 맞춰 사기 치는 걸 봤을 때부터 보통 아닌 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의사 개인이야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든, 가진 돈이 없으면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라도 길거리로 내몰리는 게 현실이었다. 중증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설에서 내쫓기다시피 퇴원당한 노숙자들을 나는 여러 명 알고 있다.
“아는 사람들 중에 입원이 시급한 무일푼 노숙자들이 몇 명 있는데 당장 가서 데리고 와야겠네요.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열……대여섯 명 정도?”
의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의사가 우리를 작은 회의실 같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돌렸다. 그리고 병원도 엄연히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사회라는 것, 환자의 퇴원은 담당의사진이 회의를 거쳐서 결정하고 최소한 담당과장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 이틀 연속 당직이나 서는 끗발 없는 레지던트가 맘대로 퇴원 허가를 내줄 권한이 없다는 얘기 등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환자라도 최장 6개월은 입원 치료가 가능합니다. 시에서 해마다 그 정도 예산을 편성해주거든요. 물론 원무과에선 안 좋아하지만 아까도 말씀 드린 것처럼 여기가 돈 많은 백만장자들만을 위한 사설 병원은 아니니까요.”
“6개월이요?”
비니가 낙심해서 되물었다.
“증세가 많이 호전되거나 폭력적인 성향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보다 일찍 퇴원하는 경우도 있고요.”
“보호자가 와도 안 되나요?”
“보호자가 우겨서 억지로 입원시키고 가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우겨서 데리고 나가는 경우는 못 봤어요. 더구나 댁들처럼 오밤중에 들이닥쳐서 당장 내놓으라고 떼쓰는 경우는 이 병원 생긴 이래 처음일 겁니다. 어찌 됐든 담당과장의 허가 없이는 퇴원 못해요.”
일이 순조롭지 않다. 물건 맡기듯 맡기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불쑥 찾아온 게 따지고 보면 경우 없는 짓이었다. 묵묵하게 이 모든 사태를 주시하던 오웬이 앞으로 나섰다.
“그 담당과장이라는 사람하고 얘기하려면 언제 오면 됩니까?”
“정말 퇴원 시킬 생각이신가요? 두 사람 모두 상태가 중하던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느 정도 호전될 때까지 치료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일 오면 되겠습니까?”
오웬의 강경한 태도에 의사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내일은 대학 강의가 있으실 텐데…… 오후에 오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막스 박사님께 미리 말씀 드려 놓겠습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묘하게 꼬여버렸는데 다행히 오웬은 우리를 책망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어디 있는지는 알았으니까요.”
간단하게 대꾸하고 오웬이 큰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갈 겁니까?”
내가 물었다.
“마리우스한테요.”
그럼…….
“내일 두 사람을 퇴원시키면 그리로 데려다주면 되겠군요.”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까 혼자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더 이상 간여할 것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오웬의 일처리 방식이 어떤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확인한 바 있는 나로서는 혼자 해결한다는 말에 덜컥 겁부터 났다. 외양은 얌전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는 이 남자는 사실 엄청나게 흉포한 검객이었던 것이다. 담당의사하고 얘기 하다가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으면 어깨에 메고 있는 장검을 빼서 휘두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웬이 차 문을 열었다.
“이만 헤어집시다. 인연이 있다면 또 어디선가 마주치겠지요. 그때까지 행운이 함께하기를…….”
그때 비니가 그 열린 문으로 냉큼 올라탔다.
“같이 가시죠. 우리 작은아버지 댁이 여기서 가까워요. 오늘은 거기서 자고 내일 같이 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