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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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을 잤다. 몸살감긴가…… 으슬으슬 춥고 몸이 무거웠다. 밤에도 눈이 좀 왔는지 창밖으로 보이는 자작나무 가지에 눈이 두껍게 쌓여서 가지 위에 하얀 솜을 얹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낮인데 눈이 녹아내리지 않는 걸 보면 밖이 꽤 추운 모양이었다.

내가 쓰는 방은 일전에 일주일 내리 쓰러져 잤던 그 호화판 게스트 룸이었다. 좀 더 잘까, 밥 먹으러 내려갈까…… 생각하다가 그나마도 귀찮아져서 모로 쓰러져서 막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레빈이었다.

“점심은 드셔야지요.”

그래야지요…….

“식당에서 드시기 불편하시면 방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솔깃한 제안이긴 하지만 때마다 방으로 배달시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숨어 있기도 싫고…… 그리고 저녁때라도 정신과에 들려보려면 일어날 때가 되긴 했다.

“금방 내려갈게요.”

“그럼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기분이 뒤숭숭한 건 당연하다. 요즘 들어서는 정말 좋은 일이 없었다. 그런데다 지난밤엔 엘리야 하이네의 환생 같은 남자까지 만났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이네를 지난 밤 꿈에 본 것 같기도 했다. 첫 번째 살인의 기억은 첫사랑의 기억보다 훨씬 더 깊고 아팠다.

대충 세수나 하려고 욕실에 들어가서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짱했다. 턱에 시퍼렇던 멍 자국도 간 데 없고 유리에 베인 자리도 희미한 생채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육체의 자연 치유는 빠른 편이었다. 정신의 문제가 그와 같지 않은 것이 항상 아쉽다.

식당은 완전히 악당 소굴이었다. 점심 먹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10여 명이나 되는 몬티첼리 조직원들이 식당 한 가운데 놓인 긴 만찬 테이블을 가득 매우고 앉아 있었는데, 그중엔 아는 얼굴도 꽤 있었다. 가르시아는 식탁 정 중앙에 앉아서 쌀밥을 한 입 가득 밀어 넣는 중이었고 테시오는 그 맞은편에 앉아서 정체불명의 알록달록한 시리얼을 퍼먹고 있었다. 교대 시간인지 정문을 지키던 올리버도 한 쪽 구석에서 마늘빵을 뜯고 있었다.

주방문을 밀고 들어서자 일제히 내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일부러 노려보지 않아도 인상들이 워낙 험하기 때문에 분위기 살벌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주변에 시선 한번 한 주고 빈자리를 스캔하자 놈들도 다시 먹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 집 식당 주방은 가운데 접이식 문을 달아서 주방과 긴 만찬 테이블이 있는 대 식당을 분리해 놓고 있는데, 주방에서는 요리사로 보이는 풍채 좋은 아줌마가 한숨 돌리며 식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보통 때는 닫아 놓고 있다가 지금처럼 열대여섯 명씩 한꺼번에 식당에 밀어닥치면 이런 식으로 공간을 개방해서 쓰는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문이 닫혀 있을 때만 들어와 봐서 식당이 이렇게 넓은 줄 몰랐다.

“이 자식…… 니가 감히 내 빵에 손을 대? 너 죽을래?”

“빵 한 바구니가 전부 다 니 거야? 이 돼지 같은 놈아!”

올리버와 이름 모를 40대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사실 경찰서 구내식당에서도 가끔은 이 비슷한 다툼이 벌어지곤 한다. 마지막 남은 머핀 한 개…… 멜론 한 조각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달려 있는 만큼 절대 양보 없는 다툼인데다, 근무 중에 뭔가 언짢은 일이라도 당한 뒤끝이라면 식당 집기가 다 부서지는 험악한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 몬티첼리가의 식당은 경찰서 구내식당에 비하면 특급 레스토랑이라고 할만 했다. 식탁 한쪽에는 아직도 빵이며 과일이 산같이 쌓여 있고 공기 중을 떠도는 음식냄새도 향기롭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사용하는 식기도 스텐으로 만든 식판 따위가 아니라 고운 꽃무늬가 그려진 우아한 도자기였다.

“이 자식이……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어쩌고 어째?”

올리버가 상대 남자의 옷깃을 틀어잡았다. 상대도 전혀 눌리는 기색 없이 올리버의 멱살을 마주 잡았다.

“이 빵이 다 니 거냐고!!”

“니가 내 밥상에 앞발 올려놓을 군번이야? 너는 서열도 모르냐?”

“이 자식이…… 자기는 정문 지키고 나는 뒷문 지킨다고 건건이 사람을 갈구네?”

둘의 기세가 지금 당장 한데 엉켜서 나뒹굴 정도로 험악했다. 그때……

“한 끼라도 조용하게 좀 먹어 보자!! 뭐야? 대체? 빵 한 쪼가리 갖고!”

가르시아가 들고 있던 포크로 테이블을 확 내리찍으면서 버럭 소리쳤다. 그 엄청난 성량에 막 상대방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던 올리버가 멈칫했다.

“……짭새가 우릴 뭘로 보겠냐고!”

가르시아가 힐끗 내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짭새에게 쪼잔한 밥 투쟁 현장을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올리버와 상대 남자가 흠……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떨어져 섰다. 경찰도 별 것 아닌 일로 크게 다툴 때가 있지만 피의자들 앞에선 참는다.

처음부터 놈들 사이에 끼어 앉을 맘은 없었다. 분위기도 나쁘고 빈자리도 없었다. 둘러보니 그나마 주방 쪽 식탁이 한가했다. 일전에 숨넘어가게 매운 요리 품평회를 했던 그 동그란 나무 식탁엔 딱 한 사람이 앉아서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다. 이 난장판에 비하면 저쪽은 분위기가 지적인데?

“그리로…… 가게?”

내가 주방 식탁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테시오가 시리얼을 퍼먹다 말고 쭉 찢어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시오 뿐 아니라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자리 비었는데…….”

테시오가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 틈에 끼느니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겠다.

주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좀 전까지도 시장바닥처럼 시끄럽고 어수선했는데 갑자기 침묵을 서언한 수도사들의 점심시간 같이 잠잠해진 것이다. 왠지 불안한데……

“댁이 비니 도련님 친구라는 그 형사 양반이구먼.”

요리사가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말을 걸어왔다.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넉넉한 체구의 아줌만데 그 목소리가 발성 좋은 성악가처럼 곱고 매끄러웠다. 외모도 투박하고 말투도 거칠었지만 길만 잘 들어섰으면 가수로 대성했을 법한 음성이었다.

“그래…… 점심으로 뭘 드실 거유?”

아줌마의 태도가 아들 친구라도 대하듯 스스럼없고 우호적이었다.

“뭐가 되는데요?”

“재료만 있으면 뭐든 되지. 좋은 감자도 있고…… 싱싱한 해물도 있고…… 면발 탱탱한 국수도 있다우. 하지만 빵은 다시 구우려면 시간이 좀 걸려.”

다 늦게 얻어먹으러 온 처지에 요리사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우선 커피 한 잔 하고요…….”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신문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해물 파스타가 먹을 만해. 치즈 소스 펜네도 괜찮고…….”

남자가 대충 훑어봤는지 신문을 반으로 접었다. 사이몬 발렌타인이었다.

저쪽에서 숨죽이고 이쪽을 쳐다보던 패거리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냥…… 커피나 한 잔 주세요.”

한풀 꺾인 내 목소리에 아줌마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커다란 머그 컵에 향기 좋은 커피를 가득 부어 왔다. 커피 향기를 들이마시는 척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고르고 골라서 앉은 자리가 왜 하필 여기야…….

“불편해?”

발렌타인이 신문 사회면을 다시 펼쳤다. 내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투였다. 하지만 가끔 마주치는 날카로운 시선, 내 몸을 위 아래로 훑고 지나가는 싸늘한 탐색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달랐다. 발렌타인은 나를 죽이고 싶은 거다.

“편하진 않아.”

발렌타인의 증오는 나름대로 정당했다. 엘리야 하이네를 죽인 건 나니까. 그 당시 상황은 중요하지 않다. 이 남자는 폭발직전의 화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뻘건 용암처럼 들끓는 분노를 이성으로 누르고 있지만, 얼마나 더 그럴 수 있을까?

“나가 줄까?”

읽지도 않는 신문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발렌타인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커피 맛이 너무 썼다.

발렌타인의 이력은 자세하지 않았다. 수십 년간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유럽 어느 지역의 소년병 출신이라고도 하고, 러시아 특수부대의 장교였다는 설도 있었다. 한때 중미 어딘가에 소년들을 모집해 전문자객으로 키우는 용병학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그때는 발렌타인이 그 학교 출신이라는 주장이 꽤나 그럴 듯했었다.

발렌타인의 청부 살인이 어떤 건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길거리나 혹은 자택에서 저격당해 사망한 유명 인사나 암흑가 거물이 한해 몇이나 될까? 국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그가 지금까지 몇 건이나 되는 청부 살인에 관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자신도 다 기억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처음 몇 년간 그는 존재조차 확신할 수 없는 저승사자 같은 인물이었다.

사이몬 발렌타인은 사격의 귀재였다. 이 귀신같은 저격수의 장거리 사격 실력에 일반적인 기준을 적용한 것이 그의 활동 초기 몇 년간 경찰이 저지른 실수였다. 초반에 경찰은 그의 범행 위치를 찾아내는 데만 상당한 시간을 낭비했고 기껏 잡아낸 단서라는 것도 인근 고층 아파트나 호텔의 단기 체류객이라는 애매모호한 형태였다.

경찰 수사망에 발렌타인이 포착된 것은 루디 콜롬바인 피습 사건 때였다.

콜롬바인에게는 중요한 두 가지 직업이 있었다. 우선 그는 업계에서 1,2위를 다투는 대형 출판사의 최고경영자로 정계와 제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유력 인사였다. 그의 출판사에서 출간된 저서들은 거의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자신도 성공적인 경영자였다. 하지만 콜롬바인의 또 다른 직업은 항상 경찰과 그의 정치가 친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쿠간 시뿐만 아니라 전국에 자기 조직을 피자 체인점처럼 운영하던 암흑가 실세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몬티첼리가 한창 세력을 확장하면서 또 다른 암흑가의 실력자로 급부상하는 시점에서 둘은 충돌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먼저 실력 행사에 들어간 쪽은 콜롬바인이었다. 나와 비니가 병아리 경찰로 속이 시커멓게 되도록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시며 교통정리나 하고 있을 그때, 몬티첼리는 콜롬바인의 대공세로 조직도 반이나 와해된 상태에서 일주일에 한 명씩 자객을 상대해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려 있었다.

암살자들이 쓰는 방법도 다양해서 자동차를 벌집처럼 난사해 버리는 시가전은 기본이었고 폭탄 테러도 심심찮게 선보였으며, 나중엔 여자 좋아하는 몬티첼리의 성향을 이용한 미인계까지 동원됐다.

몬티첼리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은 두 손 놓고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콜롬바인의 조심성은 편집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콜롬바인에게는 정해진 스케줄이 없었다. 사업상 미팅이나 만찬 참석도 성사 직전에 통고하는 식이었고 그나마도 마음 내키는 대로 취소하기 일쑤였다. 사무실 출근도 같은 길로 이틀 이상 다니는 일이 없었고 차량도 수시로 바꿔 타고 다녔다. 게다가 주거도 일정치 않아서 시내에만 다섯 군데나 되는 아파트, 펜트하우스, 호텔 등을 정해진 노선 없이 자기 맘대로 들락거렸다. 그러니 그가 지나가는 길목을 노린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허공 속의 총알>이었던 발렌타인이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이면엔 그런 곤란함이 있었던 것이다.

몬티첼리와 콜롬바인의 박빙의 승부는 온 쿠간을 발칵 뒤집으며 2개월이나 지속되다가 결국 콜롬바인이 정부의 침실에서 세 군데 동맥이 잘린 채 절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3중의 보호망과 12명의 경호원을 뚫고 들어간 자객이 사용한 무기는 길이 20센티미터 남짓한 사냥용 단검 한 자루뿐이었다. 경호원 3명과 아파트 경비원도 같은 무기로 살해당했다. 모든 살인은 현장에서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경호원조차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자객이 남긴 흔적이라곤 현장에 남기고 간 단검 한 자루가 전부였다.

콜롬바인의 정부는 조사를 받으면서 사건이 일어나기 수 주 전부터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던 사실을 경찰에 털어놨다. 하지만 조사받는 내내 그녀는 누구한테도 직접적으로 콜롬바인의 행적을 알려준 적은 없다고 목이 쉬도록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사실 당시 정황으로는 그녀가 누군가에게 콜롬바인의 행적을 알려 주고 싶었어도 알려줄 방법이 없었다. 콜롬바인이 그날 그녀의 아파트로 간 것은 경호원도 예상치 못했던 변덕스러운 결정이었다. 콜롬바인은 자택으로 향하다가 아내가 외출한 걸 알고는 갑작스럽게 행선지를 바꿨던 것이다. 콜롬바인은 그녀에게 자신의 방문을 알라지 않았었다.

범인은 어떻게 그날 콜롬바인이 정부의 아파트에 갈 것을 알았을까? 콜롬바인을 미행했을까? 그럴듯한 추리이기는 하지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최고층 펜트하우스까지 올라 갈 수 있었으며 그 많은 경호원들을 통과했느냐 하는 것은 두고두고 미스터리였다.

복면한 범인의 얼굴을 목격하지 못했다는 그녀의 주장은 경찰을 맥 빠지게 만들었다. 그녀의 새 남자친구가 범인이라는 어떤 정황 증거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경찰은 일단 그녀의 남자친구를 찾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할 만한 일은 그뿐이었다.

경찰은 그녀와 함께 일주일 동안 수천 장의 테러리스트들과 동일 범죄 전과자들의 사진을 확인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녀가 사건 이후 종적이 묘연한 남자친구를 찾아낸 것은 연방경찰이 몬티첼리의 주변을 정탐하면서 촬영한 수백 장의 사진들 중 한 장에서였다. 몬티첼리 저택의 테라스에 기대선 채 차를 마시고 있는 남자는 말 그대로 뉴 페이스였다.

경찰이 그의 사진을 확대해 들고 골목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이란 일은 모조리 꿰고 있는 정통한 정보통과 전 몬티첼리 조직원과 몬티첼리와 원수진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 당시 비니는 아침저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달달 볶이는 처지였다. 몬티첼리가 비니 작은아버지라는 사실은 경찰학교에 다닐 때부터 비밀도 아니었고 콜롬바인과 몬티첼리가 전쟁을 벌인 두 달 내내 비니는 낮에는 교통정리하고 밤에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암살자들과 사투를 벌이는 이중생활을 했다.

비니의 징크스가 암살자들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비니는 살고 놈들은 죽었다. 단순한 친인척 관계를 떠나서라도 비니는 몬티첼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본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니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며 마피아 경찰이라는 비난을 감수했다.

경찰학교 시절부터 비니에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다. 비니에게 있어 작은아버지의 일은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문제였다. 작은아버지에게 가서 경찰서 내부의 일을 떠벌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서에서도 작은아버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일에도 원칙 따지지 않는 비니의 유일한 원칙이었다.

비니의 사회생활 초반부는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비니의 집안 배경은 틀에 박히고 배타적인 경찰 공무원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복잡했던 것이다. 부친은 당대에 자수성가한 사업가, 이모부는 차기 시장후보로 거론 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정객이라는 번듯한 배경조차도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상류층 출신 신참을 바라보는 고참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고 동료들도 은근히 비니를 따돌렸다. 그런데다 작은아버지는 떠오르는 암흑가의 다크호스였으니 비니의 처지는 외롭고도 난감했다. 더구나 크고 작은 녀석의 징크스 때문에 몬티첼리가 경찰력을 저하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비니를 경찰에 들이밀었을 거라는 루머도 꽤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경찰학교 다닐 때부터 했었다.

경찰은 이름도 경력도 알 수 없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콜롬바인 사건의 참고 증인으로 소환했다. 몬티첼리 주변 인물들이 줄줄이 경찰서로 불려 들어와 조사받는 중이었으니 몬티첼리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콜롬바인의 정부에게 접근한 것만으로도 소환 조건은 충분했다. 그 남자의 이름이 사이몬 발렌타인이었다.

발렌타인에 대한 조사는 지하에 있는 2번 조사실에서 이루어졌다. 담당수사관 두 명이 발렌타인을 심문했다. 조사실 분위기는 시종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넓은 조사실에 달랑 세 명이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얼마나 한가로운지 마치 손님도 별로 없는 카페에서 친한 친구들끼리 세상살이 잡담이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면 조사실 옆방은 몰려온 경찰관들로 미어터졌다. 본래 조사실 옆방은 경찰 간부와 관계자 몇 명을 위한 은밀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노련한 경관은 용의자의 증언에서 허점을 찾아내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고, 심리학자는 용의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고, 서장은 다음 승진과 관련된 인사이동 판도를 가늠해 보곤 했다.

그런데 그 좁은 방에 예고도 없이 수십 명이 밀어닥치자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혼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중엔 사람들이 밀리는 바람에 조사실 방향으로 설치된 매직미러가 깨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졸지에 눌어붙은 껌처럼 벽에 밀려 서게 된 서장은 웬 호들갑이냐며 언성을 높였지만 열두 명이나 되는 전문 경호원을 뚫고 들어가서 암흑가 실세인 콜롬바인을 암살하고 사라져버린 실력자에 대해 그만한 경의는 표해야 한다는 게 짭새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나도 그때 발렌타인을 구경하러 갔었다.

“이름이 사이몬 발렌타인…… 맞습니까?”

“예.”

“직업은?”

“댄서요.”

하도 엉뚱한 대답이라서 마키바 반장이 머뭇거렸다. 매직미러 건너편도 잠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탱고 전문이죠.”

반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도 잠시 술렁거렸다. 킬러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줄 알고는 있었지만 탱고 댄서라니…….

“엘렌 헤이즐 양을 아십니까?”

마키바 반장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압니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엘렌이 말하지 않던가요?”

“말했습니다. 이번엔 당신이 말 할 차례죠.”

발렌타인이 잠시 벽에 걸린 거울을 쳐다봤다. 이쪽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발렌타인에게서는 몰락한 귀족 같은 기품과 비애가 엿보였다. 그의 눈매는 상당히 차가웠고 어느 정도는 우울했으며 약간 슬퍼 보이기도 했다.

“클럽에서 만났습니다. 엘렌은 눈에 띄는 미인인데 그녀와 춤추려는 남자가 아무도 없더군요.”

헤이즐 양은 물론 대단한 미인이다. 하지만 목숨 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이 춤을 청했나요?”

발렌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탱고?”

“부르스였어요. 엘렌은 탱고를 출 줄 몰라요. 그러고 나서 술을 한잔씩 마시고……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그냥 헤어졌습니다. 이틀 후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죠.”

발렌타인의 태도는 시종 진지하면서도 담담했다. 줄르족 전사처럼 사납게 생긴 마키바 반장 앞에선 어지간한 흉악범도 기가 눌려서 허둥거리는데 발렌타인은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마키바 반장이 발렌타인에게 발코니에서의 티타임 사진을 비장의 카드인 양 내밀었다. 사진을 확인한 발렌타인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머리도 엉망이고 옷차림도 한심하네요. 상당히 먼 거리에서 찍었군요. 망원렌즈 성능은 괜찮은 것 같은데 사진사 실력이 형편없나 봐요. 초점도 흐리고 각도도 좋지 않고…… 점심 먹고 방에 올라와서 차 한 잔 마시고 있는 중에 찍힌 것 같은데, 차는 영국산 다즐링이었고요. 그건 그렇고…… 엘렌도 이 사진을 봤습니까?”

발렌타인의 동문서답에 마키바 반장이 열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여자였는데…… 이제 만나기 힘들겠네요.”

“이 집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키바 반장이 으르렁거렸다.

“댄스 교습을 하고 있었죠. 두 시간씩…… 주 3회 교습해주기로 했습니다. 보수도 밝혀야 하나요?”

참 엉성한 알리바이다. 마키바 반장이 기가 막혀서 하…… 하고 한번 웃고는 다음 말을 좀처럼 잇지 못했다.

“콜롬바인의 암살자들이 어떤 날은 하루 두 번씩도 들이닥치는 와중에 탱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주 3회…… 두 시간씩이나??”

“빠지는 날도 많았죠.”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란 겁니까?”

“믿어달라고 사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사실인 걸요.”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성토가 터져 나왔다. 발렌타인도 거울 건너편에서 터져 나온 야유를 들었을 거다.

“말도 안 돼! 탱고라니…… 마피아가 그런 건 배워 뭐 하려고?”

“춤 선생이면 춤이나 가르칠 일이지 엘렌 헤이즐은 왜 찝적거려? 완전히 고의적으로 접근한 거였잖아?”

“그 여자 아파트에서 콜롬바인이 죽어나간 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물어보지?”

그러다가 모두가 동시에 입을 다물고 구석에 찡겨 서 있는 비니를 노려봤다. 갑작스런 눈총에 놀란 비니가 얼떨결에 원칙을 깼다.

“삼촌이 평소에 탱고를 굉장히 배우고 싶어 했던 건…… 사실이에요. 예전에 사귀던 여자가 탱고 댄서랑 눈이 맞아서 작은아버지를 차버린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사건은 많았다. 그런 경우는 범인이 자기 입으로 범행을 자백한다고 해도 일이 어려웠다. 마키바 반장이 산전수전 엄청나게 겪은 베테랑 수사관이라 해도 증거가 없는 이상은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반면 심문 받는 내내 발렌타인은 담담하고 자신 있는 태도였다. 마키바 반장의 어떤 질문에도 그는 사전 질의서라도 받아본 사람처럼 막힘이 없었다. 침침한 조사실에 불려 들어와서 마키바 반장처럼 인상 험악한 수사관과 마주 앉게 되면 어지간히 배짱 좋은 사람도 당황하게 마련인데 발렌타인은 그렇지 않았다.

탱고 댄서라는 어설픈 알리바이보다는 그런 태연자약함 때문에 심증은 더 굳어졌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심증만 굳혀 놓고 사이몬 발렌타인은 우아하게 조사실을 나섰고 루디 콜롬바인 살해 사건은 결국 미해결로 남고 말았다.

커피를 반쯤 마시고 입맛이 써서 그냥 일어나려는데 레빈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숨소리가 거친 걸로 봐서 급하게 뛰어왔든지…… 아니면 뭔가에 놀란 것 같았다. 나랑 발렌타인이 같은 테이블에서 땡감 씹은 얼굴로 마주 앉아 있는 걸 보고는 얼굴 표정을 얼른 고치긴 했지만 혹시…… 첸 진 패거리들이 쳐들어오는 중일까?

“벌써 다 드셨습니까?”

내 앞에 커피 한잔이 달랑 놓여 있는 것을 본 레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오.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그보다도…….”

“아침 겸 점심인데 그럼 안 되죠. 같이 드시죠. 저도 아직 점심을 못 먹었습니다.”

막 일어서려는데 레빈이 다짜고짜 옆자리로 밀고 들어왔다.

요리사가 갖다 준 해산물 스파게티를 걸신들린 듯 먹어치우는 나를 레빈은 딱하다는 듯, 발렌타인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스파게티 한 접시도 모자라 레빈이 덜어준 라쟈냐 반 접시에, 올리버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마늘 빵 바구니까지 거덜 내고 나자 정신이 살살 돌아왔다. 정신 차리자마자 좀 전에 입맛 없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심히 민망했다. 하지만 배가 부르니까 발렌타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언짢았던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서쪽 별관 1층은 실내 수영장과 헬스룸이니까 운동을 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이용하세요. 2층에는 당구대도 있고, 후원엔 테니스 코트도 있습니다. 조용히 책이나 읽고 싶으시면 서재도 1층, 2층에 하나씩 있으니까 편한 곳을 이용하세요. 생각해보니 아직 집 구경을 안 시켜 드렸군요. 저랑 지금 좀 둘러보시겠습니까?”

점심도 드는 둥 마는 둥 하며 두서없이 떠드는 폼이 적잖이 수상했다. 본래 이렇게 야단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죽하면 발렌타인이 레빈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무 일도 없어!”

말 할 수 없는 일이면 굳이 캐묻진 않겠지만…….

“말씀은 고맙지만 오늘은 안 되겠어요.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레빈의 안색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어, 어디를 가시게요?”

“병원에 좀…….”

“병원엔 왜요?”

니콜라스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정신과에 간다는 얘기를 꼭 해야 되나?

“같이 나가면 되겠군. 나도 오후에 병원에 가야 하거든.”

발렌타인이 신문을 접어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래도 무슨 일인지 말 안 할래? 하는 발렌타인의 태도에 레빈이 더 당황했다.

“저…… 실은…….”

그때 점심을 다 먹고 사라졌던 올리버가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주방 유리창이 덜컹거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내게 소리쳤다.

“야, 짭새! 뉴스 봤어? 어젯밤에 짭새 둘이 니콜라스한테 당했대!!”

현장 경계는 삼엄했다. 철근 골조만 반쯤 올라간 상가 건물은 2중의 출입 저지선과 수십 명의 경찰로 빈틈없이 에워싸여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밖에는 백 명도 넘을 것 같은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아우성 치고 있었다. 그 인파를 헤치고 현장에 접근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세바스찬 길버트와 케빈 왕, 길버트는 이 건물 7층에서 아래로 내 던져졌다. 현관 바로 옆에 시커멓게 번진 핏자국과 현장을 표시한 하얀 페인트가 눈에 들어왔다. 길버트의 회색 머리카락이 마른 피와 엉겨 붙어 한 데 뭉쳐 있는 모양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사인은 목뼈와 척추 골절…… 두개골과 장 파열이었다. 죽임을 당한 후에 내던져졌는지 아니면 추락할 때까지 의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자의 경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케빈 왕은 길버트의 시체가 발견된 지 20여 분이 지난 후에야 건물 7층 구석에서 발견됐다. 온몸의 일곱 군데 뼈가 부러져 손끝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두 시간여를 버틴 후였다.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까지도 희미하게 의식이 남아 있어서 니콜라스에 대한 단편적인 몇몇 단어를 말할 수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왕은 과다출혈과 쇼크로 호흡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고, 의사는 그가 앞으로 12시간도 버티기 힘들 거라고 말했다.

사건 현장은 중세 지하감옥처럼 음산했다. 검은 콘크리트 벽 전체에 양동이로 부어 놓은 것 같은 핏자국에서는 아직도 비린내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다. 들리는 것이라곤 조심스런 발소리……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증거물을 주워 담는 현장 조사요원들의 숨소리뿐이었다.

심장을 옥죄어 들어오는 공포가 깊은 연못 바닥의 썩은 물처럼 조용하게 마음에 고였다.

“여긴 왜 왔어요?”

현장의 벽돌 더미에 망연히 앉아 있던 쥬드가 나를 보고 일어났다.

“결국 니콜라스를 찾기는 찾았군.”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우리를 찾은 거죠.”

탈옥한 죄수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은신처와 돈이다. 그를 체포한 후, 경찰은 시내와 시 외곽에서 각각 한 군데씩 그의 은신처를 찾아냈었다. 시내의 은신처는 경찰이 수사 끝에 밝혀낸 곳이고 킬리요크 강 상류 숲속에 교묘히 은폐되어 있던 오두막은 니콜라스에 대한 재판도 다 끝난 이후에 인근을 지나던 낚시꾼들이 우연히 발견해서 신고해준 덕에 뒤늦게 찾아낸 곳이다.

“은행에서 신고가 들어왔었어요. 니콜라스로 보이는 남자가 5년째 휴면 상태인 계좌에서 현금을 인출해 갔다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죠.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숨어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까…….”

“그런데 왜 두 사람만…….”

“두 사람이 지원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니콜라스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럴 수가 없었겠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주변에는 반장도 있고 노튼도 있었다. 얼굴 알 만한 동료들도 몇 명 있지만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어딘가에 또 다른 소굴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니콜라스와 관련된 서류란 서류는 다 끌어 내놓고 다시 검토하는 중이에요. 그의 회사에 근무했던 중역들이나 직원들도 소환해서 여러 각도로 알아보고는 있지만…… 혹시 짐작 가는 장소는 없어요?”

“전혀…….”

내가 니콜라스와 같이 다녔던 곳은 거의 공공장소였다. 니콜라스는 그런 곳을 좋아했다. 공연장, 도서관, 박물관, 클럽…… 개인적인 장소라곤 서부 호수 근처에 있는 그의 별장뿐이었는데 그곳은 경찰도 이미 알고 있다.

“전혀 그답지 않아요. 경찰을 유인해서 이런 식으로 살해하다니…… “

쥬드가 시뻘겋게 피로 물든 벽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유인이라니?”

“야구 모자 하나 달랑 쓰고 은행에 나타났고 두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10여 분이나 은행 주변에서 얼쩡거렸어요. 섣불리 따라나서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쥬드의 말대로다. 이런 건 니콜라스답지 않았다. 연쇄살인범이라고는 해도 니콜라스에게는 희생자를 선별하는 기준이 있었다. 참사를 당한 동료들한테 이런 말 하긴 싫지만 그들은 니콜라스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혐오나 증오가 많은 경우 살인의 동기를 제공하지만, 니콜라스의 관심 분야는 그런 쪽이 아니었다.

“지내기는 좀 어때요?”

글쎄…… 어떻다고 한 마디로 말할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릴 짜 봐도 거기만큼 안전한 곳이 없었어요.”

그 좋은 머리를 제대로만 쥐어짰으면 좀 더 그럴듯한 장소가 없었을까? 궁지에 몰린 경찰이 마음 놓고 은신할 곳이 깡패 암살자 소굴뿐이라니…… 그런 사정을 미리 알았으면 애초에 경찰에 지원도 안 했을 거다.

“사실, 더 안전한 장소가 한 군데 있기는 있었죠.”

내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하면서 쥬드가 변명을 덧붙였다.

“그게 어딘데?”

“시립 형무소 지하 독방이요.”

“왜? 거기다 던져 놓지? 어차피 난 자고 있었고 당신 추종자 비니도 말리지 않았을 텐데?”

“거긴 항상 만원이거든요.”

쥬드 크롬웰의 공식 직함은 경찰서장 비서였다. 그녀는 이 사건에 아무런 권한도, 책임도 없었다. 사건을 해결한 공로도 그녀의 것이 아니지만 실패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 크롬웰은 탐정이었다. 범죄 수사에 관한 본능적인 감각과 두뇌를 가졌지만 조직 안에서 자신의 행동 범위가 통제되는 것은 싫은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식 수사관이 될 수 있는 그녀가 굳이 지금의 자리를 고수하는 이유에 대한 의견은 항상 분분했다. 공식적인 인물로 부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거라는 얘기도 있고 비서 일이든 범죄 수사든 다 취미에 불과하니까 직함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거라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는 제복이 마음에 안 들어서 경찰이 되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진위야 어찌 되었건 뒤에서 남을 조종하는 그녀의 스타일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휘하던 수사관을 두 명이나 잃은 이 상황에서 그 면책의 지위가 일말의 위로라도 되기를 바라지만 정신적인 타격은 적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번 살인은 단순해요. 니콜라스는 알아내고 싶은 걸 알아냈고 그 다음엔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어요. 그는 서두르고 있어요.”

“놈이 뭘 알아냈는데?”

니콜라스가 궁금해 하는 것, 길버트와 왕이 그 답을 알고 있는 게 대체 뭘까? 그게 어떤 일인지 감도 안 잡혔다. 쥬드가 뭔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렸다.

“몬티첼리 저택에서 하루 이틀만 더 참아요. 지금 다른 안가를 수배 중이니까 결정되는 대로 옮겨줄게요.”

쥬드가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졌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

“아직은 확실한 게 없어요.”

쥬드가 말을 자르고 돌아섰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사진기 플러시 불빛에 눈이 부셨다.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상황에 따라서 현장 수색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 구의 시체 이외에 남겨진 것이 별로 없는 이런 경우엔 서너 시간으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살인 무기가 뭐였을 것 같아?”

노튼이 내게 다가왔다. 같이 다니던 수사관 두 명은 피로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 같은 벽을 보고 몸이 굳어서 걸음을 떼어 놓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빈센트의 시체를 보고 오는 길이야. 참혹하더군. 직접적인 사인만 찾으려고 해도 검시관들이 꽤 고생할 것 같았어.”

“저는 추락사라고 들었습니다만…….”

노튼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냈다. 두 시간쯤 전에 찍은 폴라로이드였다. 신체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찍었는데 팔목과 목덜미였다.

“찢어졌군요.”

건성으로 넘겨보고는 노튼에게 돌려줬다. 이런 사진, 들여다보기도 괴로웠다. 두 곳 모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살점이 뜯어져 나갔다. 뭘로 이렇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빨로 물어뜯은 거야. 정확하게 동맥이 지나가는 지점이지. 출혈이 심했을 거야.”

내가 벽에 뿌려진 핏자국으로 시선을 던지자 노튼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피를 전부 벽에 퍼부었을까? 니콜라스가 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던가?”

글쎄…… 니콜라스가 피에 집착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생살을 이빨로 물어 찢은 적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니콜라스에게 살인이란 하나의 의식이었다. 방법은 매번 조금씩 달랐다. 매우 우아하고도 잔혹한 제의를 즐겼지만 이렇게 원시적인 가학성도 분명히 있었다.

“지난 경찰 기록을 살펴보니까 희생자의 피를 마시기도 했다는 자백이 있더군.”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값비싼 와인은 즐겨 마셨지만…….”

노튼이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만간 그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드나?”

그와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특수 경찰의 노튼이 아니라 니콜라스 헤슬렘이라고 가정하자. 그와 마주 서고, 시선이 맞부딪치고, 서로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고…… 아니, 한가하게 안부 인사 따위 나눌 시간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힘으로 내 목을 움켜잡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다면 그에게 몇 발의 총을 발사할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빈센트나 왕이 그 몇 초의 여유도 얻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가능성은 별로 없을 거다.

누군가 생각에 잠겨 있는 내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이렇게 멋대로 나돌아다닐 거면 니 아파트로 돌아가!”

비니였다. 그렇지 않아도 레빈이 말리는 걸 뿌리치고 뛰쳐나온 길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리던 차에 비니가 고압적으로 나오니 나도 좀 당황했던지 기껏 한다는 말이…….

“니네 작은아버지가 일 있으면 얼마든지 돌아다녀도 좋다고 했어!”

내 대꾸에 비니가 불같이 성을 내며 버럭 소리쳤다.

“작은아버지가 니 상사야?”

아니…….

“니 친구야?”

아니…….

“작은아버지는 짭새 한 마리 아무도 모르는데 붙들려가서 죽어도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야! 언제부터 니가 우리 작은아버지 말을 그렇게 잘 들었어?”

찍 소리도 못하고 비니의 면박을 들어내려니 좀 전까지는 고개도 한번 안 들던 사람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나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는 않았다.

“그럼 이 상황에 내가 니네 작은아버지 집 손님방에 이불이라도 덮어 쓰고 숨어 있었어야 한다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비니가 내 소매를 잡아채며 벌컥 소리쳤다.

“일단 나가!”

비니의 말과 행동이 상당히 거칠었다. 사고뭉치이긴 하지만 심성이나 행동이 그렇게 거친 놈이 아닌데…… 비니한테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강력 C반의 글렌 반장이 현장으로 다급하게 들어섰다. 글렌 반장은 니콜라스 체포 팀의 공식적인 책임자로 두 건의 연쇄살인을 해결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성질도 더럽고 비리 혐의도 화려했다.

“고블린 가하고 길리 선착장에서 온 제보는 허탕이야! 지난 1시간 사이에 사방에서 제보 전화가 50통은 더 왔을 거야.”

반장이 숨을 몰아쉬며 쥬드에게 서너 장쯤 되는 서류를 내밀었다.

“검문 쪽은 어때요?”

“전혀…… 도로 봉쇄 때문에 시민들만 아우성이야.”

쥬드가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반장이 가져다준 구겨진 서류를 펼쳤다.

“사이빌 거리하고…… 유마 12번가 쪽이 그럴듯하군요. 그리고 루벳 거리에도…….”

“루벳 거리보다는 근처 공원이 더 수상해. 인상착의가…….”

“온 도시에 경찰이 깔렸는데 아직까지 그 복장 그대로 돌아다닐까요?”

쥬드가 고개도 들지 않고 반장의 의견을 반박했다.

“하지만 모자 색깔까지 똑같다고!”

“좋아요. 그러면 그 공원에도 대원들은 보내죠. 남은 팀이…….”

지시를 내리다가 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남은 대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니콜라스라도 경찰을 두 명이나 잡아 죽이고 여태 그런 홍등가를 기웃거리겠나? 게다가 루벳은 놈이 사라진 방향하고도 맞지 않아. 미친 듯이 짖어대던 개가 갑자기 조용해져서 수상하다니…… 어떤 개새끼가 이런 걸 제보라고 해온 거야?”

글렌 반장이 언성을 높이며 쥬드의 손에서 서류를 획 낚아챘다. 글렌 반장은 본래 거칠고 무례한 성격이었다. 지금의 행동은 쥬드의 기선을 제압하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어 더 비열하게 느껴졌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반장이 그제야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가 여기 웬일이야? 몬티첼리네 집에서 마피아 자식들하고 당구나 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글렌 반장이 내게로 한발 다가섰다. 이렇게 빈정거리는 건 분명히 한판 붙어보자는 뜻이 담긴 시비였다. 쥬드가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우선 공원에 대원들을 보내서 조사를 해보죠. 직접 지휘하시겠어요?”

쥬드가 한발 물러났다. 분위기 그만 흐리고 꺼지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글렌 반장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녀를 흘겨보고는 건물 외부에 설치된 작업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쥬드는 똑같은 말투로 내게도 한 마디하고 돌아섰다.

“잘 가요. 제이.”

작업용 엘리베이터는 한 대뿐인데 마침 서너 명의 수사관들이 내리는 중이었다. 그 바람에 하필이면 글렌과 동행이 되고 말았다. 그 엄청난 수사 팀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텐데 거기다 팀장이 아서 글렌이라니…… 도대체 서장을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이런 수사팀의 재가를 얻어낼 수 있었을까?

아서 글렌은 이력서상으로는 대단히 유능한 수사관이었다. 관할 구역의 폭력배들하고 종종 어울려 그 뒤를 봐주고 있다는 혐의도 수사팀의 다른 수사관들보다는 부패 수위가 낮은 편이고, 어쨌든 맡은 사건은 범인 검거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피의자들은 종종 치명상을 입을 채 체포되곤 했다. 부상으로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응급실에서 영 깨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사살된 일도 몇 번인가 있었다.

“니들 둘은 대체 뭐하는 사이야?”

글렌이 한쪽 입 꼬리만 히죽 올린 채 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비니가 나를 반쯤 가리면서 대꾸했다.

“우리야 손발이 척척 맞는 파트너 사이죠. 여태 모르셨어요?”

“아니, 말고…….”

글렌이 나를 슥 쳐다봤다. 술과 담배와 비틀어진 심성으로 찌들대로 찌든 눈빛이었다.

“너랑…… 니콜라스 헤슬렘.”

비니가 글렌을 노려봤다.

“어째서 그놈이…….”

순간 엘리베이터 위쪽에서 빠각…… 하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한순간 뒤집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심하게 요동쳤다.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잡이를 잡고 있던 비니까지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진짜 큰 문제는 철망으로 설치된 엘리베이터 문이 떨어져 나가는 통에 문가에 서 있던 글렌 반장이 밖으로 떨어진 거였다.

“으아…… 악…….”

용케 문틀 아래쪽을 잡고 매달린 글렌 반장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렀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떨어졌을 텐데…… 나이에 비해선 대단한 순발력이다.

“나 좀 잡아줘…… 누가 좀…….”

천천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었다. 작업용 엘리베이터라서 바닥이 흙투성이였다.

“끌어 올리란 말이야!! 뭐 하는 거야?”

글렌이 악을 썼다. 어떻게든 올라오려고 버둥거릴 때마다 엘리베이터가 금방 떨어져 내릴 듯 덜컹거렸다. 얼굴이 상한 당근처럼 붉으락푸르락 한 걸 보니까 죽는 게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다.

“범인 호송 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면 반장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내 질문에 비니가 어깨를 으쓱했다.

“얼른 끌어올려 주셨겠지. 워낙 인간성이 좋으시잖아?”

“그랬겠지, 우리하곤 다르니까…….”

“5분 버티는데 10달러 건다.”

비니가 쪼그리고 앉아서 반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듣기에 따라 대단히 엽기적일 수 있는 제안을 했다. 글렌 반장은 요즘 들어 배가 더 나왔다. 5분은 무슨…….

“나는 3분.”

힘이 빠져서 축 처져가던 글렌 반장이 갑자기 눈에 핏발을 세웠다.

“이 자식들…… 니들…… 죽을 줄 알아!!”

글렌 반장이 으아 악…… 하는 기합을 한번 넣더니 어디서 힘이 솟는지 철망을 붙잡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쉽게 죽을 타입은 확실히 아니다. 비니가 유감천만한 얼굴로 일어섰다. 반장은 벌써 반이나 기어 올라와서 씩씩거리며 한쪽 다리를 엘리베이터 바닥에 걸쳤다.

“이 개 같은 마피아 자식…….”

반장이 기진맥진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비니가 천천히 문가로 다가섰다. 이 자식이 또 뭘 어쩌려는 걸까…… 비니를 노려보는 반장의 눈빛이 겁에 질렸다. 자신이 그간 연행 중인 피의자들에게 저지른 짓을 떠올리면 무서울 만도 하다. 하지만 비니는 그렇게 비열한 놈이 아니다.

비니가 반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반장이 놀라서 숨을 멈췄다.

“뭐해? 그만 가자!”

바닥에 내려선 비니가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뭐, 더 이상 있어 봐야 구경거리도 없다. 그래도 위에서 볼 때는 조금 높이가 있어 보였는데 뛰어내려 보니 전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는 2층하고 1층 중간쯤에 걸려 있었고, 2미터가 조금 안 되는 높이였다. 글렌 반장은 맥이 빠지는지 우리를 따라 내려올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엘리베이터 바닥에 누워버렸다.

우리가 나타나자 카메라 플러시가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터졌다. 들어올 때도 기자들에게 된통 잡아 뜯겼는데 비니는 그 혼잡한 사이를 얼어붙은 바다를 가르고 나가는 쇄빙선처럼 기세 좋게 뚫고 나갔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온몸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

인파를 뚫고 막 차에 올라타려는데 누군가 내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리만이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이 자네 때문에 경관을 살해했다는 게 사실이야?”

잠시 걸음을 멈추고 리만을 내려다봤다. 리만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헤슬렘이 자네 행방을 알아내려고…….”

비니가 리만을 거칠게 밀쳤다. 리만이 짧은 다리로 몇 발짝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비니가 돌아서서 나를 차 안에 밀어 넣었다. 리만에게는 한 마디 사과도 없었다.

“무슨 소리야?”

“신경 쓸 것 없어.”

비니가 액셀을 밟으며 짧게 대꾸했다.

길버트는 온몸이 다 터진 시체로 발견됐지만 왕은 발견 당시까지 희미하게나마 의식이 있었다.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으로 향하는 도중에 완전히 의식을 잃었지만 그 직전까지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가냘픈 신음을 흘렸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심해에 난파된 선박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전기 신호처럼 희미한 것이어서 경관이 그의 입가에 귀를 들이대고도 제대로 식별하기 힘들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뭔가 단서를 제공하려는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준 고통과 공포 때문이었을까? 체내에 얼마 남지도 않은 피를 베개에 계속 토해가면서 그가 몇 번이고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되뇌인 이름은 몬티첼리…… 프란시스 몬티첼리였다.

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프란시스 몬티첼리에게 신세지고 있다는 사실은 경찰서 내에선 비밀이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도 현직 경찰관이 은퇴한 마피아도 아닌 현역 마피아 보스 집에 얹혀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할 만큼의 명예심은 있었다. 그리고 내 거취에 관한한 보도를 자제해주자는 자체 강령이라도 택한 건지, 아니면 경찰 쪽에서 쪽 팔리니까 절대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이라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문이나 뉴스에서도 그 사실을 기사화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거취는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경찰 조직 내부에서는 비밀이랄 것도 없는 비공인 정보인 셈이었다. 더구나 죽은 두 경관은 니콜라스 체포팀 소속이었으니 사방에 물어보고 다닐 것도 없이 그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다.

그들은 끝까지 내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을까? 아니면 어떻게 했어도 니콜라스는 그 두 사람을 결국은 죽여버릴 작정이었을까?

마지못해 전후 사정을 털어놓은 비니가 말없이 앞만 쳐다봤다.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혈관으로 왈칵 쏟아져 들어가는 것 같은 이 격한 감정이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잘 모르겠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색깔이 있었다. 목소리를 들은 것이 처음이 아닌데…… 게다가 그 몇 주간은 계속 전화 도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꿈속에서도 들을 정도로 익숙한 말투와 악센트였는데 기계를 통해서 들었던 음성에는 없던 색깔과 질감이 있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심호흡을 한 다음 천천히 일어났다. 당장은 어디가 아픈지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무마시켜야 했다. 니콜라스 헤슬렘과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일을 이렇게 망쳐버릴 수는 없었다. 별거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저 담 모퉁이까지만 가자. 기절을 하든 쓰러져 죽든 거기 가서 해결하자.

“괜찮아요…….”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한 걸음 옮기려다가 그만 무릎이 꺾여서 아스팔트 바닥을 세게 찧으며 꿇어앉고 말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빗발이 점점 굵어지면서 얼굴엔 빗물인지 핏물인지 알 수 없는 게 흘러내려서 눈앞이 가물거렸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이제 하나의 검고 둥그스름한 형체에 불과했다.

일어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쓰러져버릴 수도 없었다. 길바닥에 꿇어앉은 채 내 몸이 차갑게 젖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니콜라스 헤슬렘이 그 차가운 손으로 힘겹게 땅을 짚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았다.

“두려워하지 마. 해치지 않을게.”

그의 목소리에는 또…… 까만 커피에 하얀 크림이 섞여 들어갈 때 생기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소용돌이가 있었다. 현기증이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원에 있었는데, 분위기가 별로 안 좋았다. 쥬드 크롬웰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최근 발행된 패션 잡지를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멜 굽타는 창턱에 걸터앉아 정오의 짧은 햇살을 등에 지고 자기 야구 모자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굽타는 초조할 때면 모자를 못살게 구는 습관이 있었다. 마키바 반장은 까만 양복을 입고 하얀 벽에 기대서서 배고픈 독수리 같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고 돌아누웠다. 다들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일이 틀어진 거다. 연쇄살인범의 존재를 파악해낸 크롬웰의 수 년 간에 걸친 조사, 그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지난 수 개월 간의 추적과 잠복근무가 한순간의 교통사고로 헛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니콜라스 헤슬렘의 차에 치이기 직전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

“정신이 들어요?”

크롬웰이 잡지를 내려놓고 내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헤슬렘의 부축을 받으며 그의 차에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차에 시동을 거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눈을 감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니콜라스는…… 어떻게 됐어요?”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내 물음에 크롬웰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몰라요.”

나를 안심시키려는 거짓말일까? 크롬웰의 거짓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키바 반장이 거친 음성으로 진실을 밝혔다.

“그 자식은 좀 전에 페루행 비행기를 탔어. 간단하게 말해서…… 날라버렸어.”

마키바 반장의 얼굴엔 연쇄살인범을 감시하다가 그 차에 치여서 병원에 입원한 얼빵한 부하 짭새에 대한 경멸과 분노가 역력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내가 니콜라스의 차에 올라타는 걸 보고 기절초풍 한 굽타는 곧장 마키바 반장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도로를 날듯이 질주하는 포르쉐를 굽타를 포함한 4대의 차량이 번갈아가며 힘겹게 미행했다. 미행의 마지막 주자가 된 비니는 이 병원 주차장까지 따라 들어왔었다고 한다.

헤슬렘은 내 입원 수속까지 다 마친 후 곧장 공항으로 향했고…… 페루로 날아가버렸다.

헤슬렘의 페루 여행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항 직원에게 제일 빨리 출발하는 항공편을 문의하고 표를 샀다. 출국하는 그의 손에는 작은 손가방 하나도 없었다.

“눈치를 챈 거야. 틀림없어.”

쿵…… 소리가 나서 이불을 걷고 보니 마키바 반장이 주먹으로 벽을 때리고 있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이 단순한 교통사고 한 건으로 줄행랑을 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헤슬렘의 재산이나 사회적인 위치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은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차 안에서 의식이 없었고, 그가 내 점퍼 자락을 슬쩍 들춰 보기만 했대도 얘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업상 출장일 수도 있지. 비니가 따라갔으니까 무슨 소식이 올 거야.”

“소식? 그래! 조만간 비행기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했다는 소식이 오겠지!!”

마키바 반장이 점점 흥분하더니 내 쪽으로 몸을 획 틀었다. 흠칫 놀라서 다시 이불을 덮어썼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가 내 옷자락을 들춰볼 정도로 무례하지 않았다고 해도 응급실까지 따라 들어오거나 입원 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병원 직원이 내 총과 경찰 신분증에 대한 얘기를 그에게 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마키바 반장이 덮어쓴 이불을 획 벗겨내고는 코앞에서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잠복근무 중이면 죽은 듯이 차안에나 틀어박혀 있을 일이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일을 이 지경을 만들어? 대체 그 자식 차엔 왜 뛰어들어?”

“어쩌다 보니까…….”

하필이면 그 자식 차에 받힌 건 절대 저지르면 안 되는 실수였다. 나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고,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희대의 살인마가 눈앞에서 튀는 걸 뻔히 보고도 우리는 두 손 놓고 그걸 구경만 했어! 모든 경찰력을 동원해서 놈을 뒤쫓고 공항에서 놈이 탄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활주로에 드러눕기라도 해야 했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비니를 딸려 보낸 것뿐이었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원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자 반장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그만해! 마키바! 제이는 많이 다쳤어.”

굽타가 반장의 어깨를 잡아서 말렸다.

“그만 할 거야! 딱 한마디만 더 하고 말이야!”

반장이 굽타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곤 엄한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우린 놈을 놓쳤어!”

정말 니콜라스 헤슬렘을 놓쳐버린 걸까? 놈을 법정에 세우기는커녕 제대로 된 증거 하나 잡지 못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 해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온몸이 동시에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은 통증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일어설 수도 있고, 걸을 수도 있었다. 절룩거리면서 옷장을 열어 젖혔다.

“뭐 하는 거예요?”

크롬웰이 내게 다가섰다.

“여기서 나가려고요.”

“기분은 이해하지만 당신은 당분간은 아무 데도 못 가요.”

크롬웰이 옷장 문을 닫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말투는 조용해도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었다.

그녀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시 옷장을 열었다. 좀 눅눅하긴 하지만 옷은 대충 말랐다. 하지만 바지를 입으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아파서 기절할 뻔했다.

“당신까지 왜 이래요? 대체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크롬웰이 내 손에서 바지를 낚아채며 언성을 높였다. 어디로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집으로 갈 수도 있고 이대로 페루행 비행기를 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 누워서 계속 마키바 반장의 면박을 듣지는 않을 거다.

“내비둬 봐. 혹시 알아? 페루에 가서 놈을 끌고 올지?”

그렇게 퍼붓고도 분이 덜 풀렸는지 마키바 반장이 계속 툴툴거렸다.

돌아서서 마키바 반장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꽤 시간이 걸렸지만 반장은 한결같이 나를 노려보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키바 반장의 가슴팍이 내 코앞에 와서 닿았다. 반장은 워낙 거구인데다 나는 옆구리가 결려서 허리도 똑바로 펴지 못하는 형편이라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반장님 말씀이 다 맞아요.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죽은 듯 차에 박혀 있지 못하고 멋대로 싸돌아다니다가 그 자식 차에 치여서 산통을 다 깼다고요! 그렇게 빈정거리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제발 입 좀 닥치세요!”

목소리도 엉망으로 쉬어 있고, 또 기운도 없어서 맨 마지막 말은 반도 못했다. 그래도 반장은 다 알아듣고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병실이 난장판으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굽타는 마키바 반장의 등에 매달렸고 크롬웰은 나하고 반장 사이에 끼어들어서 내 멱살을 움켜쥔 반장의 손등을 물어뜯었다.

얼마나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했는지 모르겠다. 곱게 빗어 올렸던 크롬웰의 머리가 엉망으로 엉클어졌고, 나는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두 번쯤 기절했다가 깼고, 굽타는 마키바 반장과의 10년 우정을 정리할 각오로 반장의 턱에 어퍼컷을 먹였다. 그 난리통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 문 앞에 선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로저 실베스타인이라고 합니다. 니콜라스 헤슬렘 씨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을 한 초로의 신사가 방안에 한발을 들여놓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좁은 병실에서 한데 뒤엉킨 채 우리가 잠시 숨을 멈췄다. 헤슬렘의 변호사?

크롬웰이 제일 먼저 나하고 반장 사이를 비집고 일어났다. 굽타가 마키바 반장을 일으켜서 의자에 주저앉히고 심호흡을 시키는 사이 크롬웰은 재빨리 머리를 매만졌고 나는 침대로 기어 올라가서 교통사고 환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헤슬렘 씨는 개인적인 용무로 급히 출국하시느라 환자분이 깨어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을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 일은 제게 대신 사과의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하셨고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우리가 각자 자리를 잡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주던 변호사가 마키바 반장 쪽을 힐끔거리며 침대로 다가섰다. 뺑소니만 아니면 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환자를 응급실에 버려둔 채 사라져버리다니…… 뺑소니로 경찰에 신고하려던 참이었소!”

좀 전에 그 환자를 폭행한 마키바 반장이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변호사를 노려봤다.

“뺑소니라니, 당치않습니다. 헤슬렘 씨는 그럴 분이 아닙니다. 일이 수습되는 대로 돌아와서 정식으로 환자와 보호자 분께 사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습이 되는 대로 돌아온단다.

“헤슬렘 씨는 언제쯤 돌아오시죠? 병원비하고 사고 보상 문제도 협의해야 하는데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거든요.”

크롬웰이 너무 안도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세 남자를 보다 못해 앞으로 나섰다. 변호사가 크롬웰을 보는 시선이 금발 미녀에 대한 호기심에서 직업적인 통찰력으로 바뀌었다.

“부인 되십니까?”

“환자의 변호사예요.”

크롬웰의 돌연한 전업에 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오직 실베스타인 변호사만이 아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헤슬렘 씨는 일체의 법적인 문제를 저한테 일임하셨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협의를 하면 되겠군요. 명함 한 장 주시겠습니까?”

“지금은…… 없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이건 의사 앞에서 수술칼 들고 설치는 거나 진배없었다. 변호사 앞에서 변호사 행세라니…… 모두가 망연한 얼굴로 크롬웰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당사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둘러댔다.

“급히 나오느라 놓고 왔거든요.”

일체의 법적인 문제를 위임받은 실베스타인도 헤슬렘이 왜 페루에 갔는지, 또 언제쯤 돌아올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막연한 기다림은 지루했다. 하지만 그동안에 얼떨결에 페루행 비행기를 탔던 비니가 전화로 니콜라스 헤슬렘의 거동을 하루 한 번씩 보고해왔고, 굽타와 마키바 반장은 그간의 수사 자료와 피살자들의 파일을 다시 한 번 검토했으며, 크롬웰은 헤슬렘의 변호사와 한치의 양보도 없는 협상 끝에 무려 2만 불이나 되는 사고보상금을 받아냈다.

니콜라스 헤슬렘이 병원에 나타난 것은 사고를 내고 종적을 감춘 지 보름이 지난 후였다.

내가 있는 병원은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과 주변 경관을 자랑하는 부유층 전용의 의료 시설이었다. 특히나 내가 입원한 병실의 일몰 풍경은 날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온종일 창을 대각선으로 지나가는 앞산 등성이에 물안개가 올라와서 한 폭의 동양화를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는데, 전신 타박상에 경미한 복부 출혈이 증상의 전부인 접촉사고 환자에게는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호사였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서 통증도 거의 없어질 즈음엔 병원에 입원했다기보다는 시설 좋은 휴양지에서 놀고 있는 기분까지 들었다.

갑작스런 휴가에, 상당한 보상금까지 받아냈다는 소문이 돌자 병문안 온 동료들마다 백만장자 차에는 한번쯤 뛰어들 만하다고 빈정거렸는데…… 맞는 말이었다.

그날은 이른 봄날의 비가 그칠 듯 그칠 듯 종일 내렸다. 막 해가 저물 무렵 서쪽부터 구름이 천천히 걷히면서 햇살이 한두 줄기 창으로 들어왔다. 내다보니 창밖은 온통 보라색과 분홍색이었다. 니콜라스 헤슬렘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날의 그런 시간이었다.

병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침대 머리맡에는 막 꽂아 놓은 싱싱한 장미가 화병에 가득했다. 방금 환기를 시킨 덕에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도 없었고 나는 막 샤워를 해서 머리엔 그때까지 물기가 맺혀 있었다. 쥬드가 심심할 때 보라고 가져다 준 화집을 막 펼쳐 들었을 때, 헤슬렘이 반쯤 열린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니콜라스 헤슬렘이 병실로 발을 한 걸음 들여놓다가 잠시 멈춰 섰다.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 숨을 깊이 들이 마시더니 그가 나를 쳐다봤다.

나와 헤슬렘의 시선이 마주쳤고 순간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 나올 것처럼 거칠게 쿵…… 울렸다.

“항상 혼자 있었습니까?”

헤슬렘이 의자를 끌고와서 침대 옆에 앉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슬렘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사고에 대한 사과, 2주일간 페루에 가게 된 갑작스러운 사정…… 그가 돌아온 것은 바로 오늘 새벽이었다.

같은 비행기 편으로 돌아온 비니의 보고에 따르면 헤슬렘은 안데스 산자락 어딘가에서 진행 중인 고고학 발굴팀과 합류해서 근 열흘간이나 햇빛도 안 들어올 만큼 숲이 빽빽하게 우거진 밀림에서 지냈다.

그가 후원하고 있던 발굴 작업 도중 고고학자가 살해당하고 유물이 도난당하는 대형 사고가 터진 탓이었는데, 내막을 알고 보면 그날 새벽 헤슬렘이 그렇게 다급하게 출국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밀림에서 어지간히 시달렸는지 얼굴이 까칠하니 피곤해 보였다.

“가족들은 떠돌아다녀요. 1년쯤 전에 리즐 시에서 엽서를 한 장 받은 게 마지막이었어요.”

“캠핑족인가요?”

“유서 깊은 캠핑족이죠.”

“집시?”

고개를 끄덕이자 헤슬렘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출신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당신은 전혀 집시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난 집시가 아니니까요.”

내 가족이 집시라는 건 사실이었다. 가족이라야 외가 친척들 몇 명이 전부지만, 그들은 선천성 방랑증후군의 증세가 뚜렷한 집시들이었다. 집시라면 어딘가 낭만적으로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상은 거지보다 나을 것도 별로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나도 그들과 함께 세상을 두 바퀴 정도 돌면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도둑질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들은 나를 캠핑하던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고아원에 맡기고 떠나버렸다. 이제 와서는 나조차도 실감나지 않는 개인사라서 남들에게는 이런 얘기를 잘 하지 않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굉장히 긴장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얘기 빼고는 그냥 있는 대로 말하라는 크롬웰의 충고를 따르기로 했다.

있는 대로 얘기한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니콜라스 헤슬렘과 이렇게 얽혀버린 마당에 한 번은 만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도 이 어색하고 조마조마한 인사치레가 얼른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헤슬렘의 시선은 사람의 영혼을 바닥까지 훑어볼 듯 깊고 깊었다.

“날씨가 좋군요.”

헤슬렘이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돌아보니 빨간 태양의 마지막 조각이 막 산등성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이런 날씨를 좋아했던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이 또 마주쳐서 황급히 무릎에 내려놓은 화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퇴원은 언제쯤 합니까?”

“글쎄요…… 아마 다음주쯤?”

헤슬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칸딘스키를 좋아하나 봐요?”

헤슬렘이 내 무릎 위에 놓인 화집에 시선을 던졌다.

“예…….”

이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칸딘스키였군.

“그만 가야겠네요. 회사도 너무 오래 비웠고, 또 당신도 쉬어야 할 테니까…….”

이제야 가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문가로 걸어가던 헤슬렘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당황해서 얼른 화집을 집어 들었다. 헤슬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책…… 거꾸로 들었어요.”

니콜라스 헤슬렘이 사라진 문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벽장문이 덜컹…… 열리고 그 안에서 마키바 반장이 굴러나왔다. 병원 로비에서 헤슬렘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놀라서 뛰어온 것은 크롬웰이었다.

크롬웰이 떴다…… 하고 소리치자마자 한가롭게 위니와 수다를 떨고 있던 비니가 벌떡 일어나 위니의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크롬웰은 병실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격려 편지와 짓궂은 선물들을 되는대로 마키바 반장에게 안겨주고 잽싸게 병실을 뛰어 나갔는데, 마키바 반장만 짐을 한 아름 안은 채 갈팡질팡하다가 벽장 속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말로이! 이 개 같은 변태 자식! 죽여버리고 말 테다!!”

반장이 성난 사자처럼 포효하며 병실을 뛰어나갔다.

말로이는 헤슬렘의 감시 임무를 맡은 수사관인데…… 도색 잡지의 열광적인 수집광으로 종종 근무태만이라는 중한 과실을 저지르곤 했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최신판 플레이보이 같은 것에 열중하느라 니콜라스를 놓쳤을 거다.

어쨌거나 일이 큰 실수 없이 이 정도로 마무리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고 나는 이틀 후에 퇴원했다. 그리고 니콜라스에게 얼굴 팔렸다는 이유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는 니콜라스 헤슬렘 수사에서 떨려나서 엘리스 스톤이라는 클럽 가수의 실종 사건에 뒤늦게 합류하게 됐다.

나이 스물여섯 살 먹은 나이트클럽 가수의 실종 사건이라는 건 애정의 도피 행각이거나, 얽혀 있는 범죄 조직으로부터의 탈출…… 아니면 살인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도 아니었고 강력사건이라는 어떤 단서도 없어서 내가 수사 팀에 합류했을 당시 스톤의 사건은 이미 단순한 실종으로 처리돼서 제보자가 결정적인 제보를 해오지 않는 이상 수사를 재계하지 않는 잠자는 사건으로 분류되기 직전이었다.

스톤은 대인 관계는 신통치 않았지만 작은 클럽에서 노래나 하기엔 아까운 재능을 가진 가수였다. 스톤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클럽 지배인까지도 그녀가 조만간 연예계 스타로 뜰 거라면서 속상해했다니까 노래는 곧잘 했던 모양이다.

스톤에겐 재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룸메이트도 그 정체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비밀스런 남자친구도 있었다. 젊고 재능 있는 여자의 실종 사건이라면 남자관계부터 확인하고 들어가는 게 정석인지라 경찰도 당연히 그쪽부터 손을 댔는데…… 최근 1년간 이 자유분방한 미인에게 청혼 하거나 그녀가 청혼 한 남자가 모두 합쳐서 열일곱 명이었다.

“꽤나 근사한 남자였던 모양이더라고요. 엘리스는 본래 남자들에게 점수가 짜거든요. 얼뜨기 같다거나, 재수 없는 녀석, 지겨운 놈…… 그런 게 남자 얘기할 때 걔가 흔히 썼던 표현이었어요. 엘리스는 그 남자를 귀족이라고 불렀어요.”

열일곱 명 중에는 빼어난 미남자도 있었고 준 백만장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을 다 만족시키는 후보는 없었고 그녀가 사라진 날의 알리바이들도 꽤 신빙성이 있어서 수사는 하릴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물론 저도 엘리스가 무사하길 바라지만…….”

수사 파일을 미해결 사건 보관실에 넘기기 전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엘리스 스톤의 룸메이트를 인터뷰하러 갔을 때 그녀는 몹시 지쳐 보였다.

“솔직히 룸메이트라고 해서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니었어요. 엘리스는 남자친구가 굉장히 많았다고요. 그 남자들 인상착의 같은 시시한 수다를 일일이 귀담아듣지 않은 건 미안하지만 정말…… 더 이상은 어떻게도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단순한 실종 사건을 이렇게 장기간 수사하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목격자도 없고 몸값을 요구하는 전화도 없는 이런 종류의 사건은 접수만 받아 놓고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골 소읍도 아니고 이런 대도시에서 사람 하나 사라진 것은 그다지 주목받는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스 스톤은 실종되기 직전에 이름 있는 음반 회사와 계약을 맺었었다. 클럽을 전전하던 무명가수라면 일생의 꿈을 실현한 셈이었다. 그녀의 실종을 경찰에 신고 해온 것도 회사 측이었다. 진전도 없는 수사에서 쉽사리 손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음반 회사의 경영자이기도 한 거물 프로듀서의 입김이 작용했던 탓이었지만…… 거액의 계약금까지 받고 막 스타덤에 한 발 내딛으려는 순간의 돌연한 실종은 누가 봐도 단순한 잠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에 응해준 룸메이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나오면서 내가 느낀 것은 엘리스 스톤의 실종이 살인사건일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었다. 경찰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면 발달하는 이런 종류의 육감은 다른 수사관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살인사건이 영원히 묻혀버릴 때 느껴지는 패배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런 얘기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막 인사를 하고 현관을 나오려는데 룸메이트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엘리스가 없어지기 사흘쯤 전에 그 애 전화를 제가 받았거든요. 그때 엘리스는 샤워 중이라서…… 아마 그 남자였던 것 같아요. 유명한 가수 공연에 같이 가자는 전화였었는데 목소리가 뭐랄까, 나직하니 울림이 있는……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 음색이…… 하여튼…… 굉장히 좋은 소리였던 것 같아요.”

내가 그녀를 어떤 시선으로 봤기에 그렇게 당황하며 말끝을 흐렸을까?

“……별로 도움이 안 되겠죠?”

크롬웰과 마주친 건 2층 강력계 사무실 복도에서였다. 마침 크롬웰을 찾던 참이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수사 중인 여가수 실종사건 말인데…….”

“니콜라스 헤슬렘의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요.”

순간 크롬웰은 밑도 끝도 없이 웬 실종사건이냐는 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나대로 니콜라스 헤슬렘의 변호사에게서 무슨 일로 연락이 왔을까 궁금해서 잠시 말을 멈췄다.

“당신에게 뭔가 보내고 싶은데 주소를 알 수가 없다면서…….”

“좀 전에 실종자의 룸메이트를 인터뷰 하고 왔는데…….”

크롬웰이 한숨을 쉬었다.

“먼저 얘기하세요.”

막 조사실로 끌려 들어가는 두 명의 갱단을 피해 복도 한 옆으로 물러서면서 크롬웰이 내게 말차례를 양보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하면…….

“니콜라스 헤슬렘이 내 주소를 물어 봤다고요?”

“당신에게 뭘 보내주고 싶다면서요.”

“그래서 가르쳐줬어요?”

“나한테 보내달라고 했죠. 내가 전해준다고요. 그랬더니 이런 걸…… 보냈어요.”

크롬웰 양이 안주머니에서 초록색 봉투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뭐야…… 이게?

“루소 박물관 전시회 티켓이에요.”

현재 루소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 작품 전은 일반 미술 박물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라 주최 측에서 개인 소장품들을 그 소장가들과 협의해서 일정 기간 동안만 빌려서 전시하는 일종의 문화 이벤트로 티켓 가격이 만만치 않게 비싼 전시회였다.

회의실 긴 소파에는 베르히만 서장, 마키바 반장, 아멜 굽타, 그리고 크롬웰과 비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니콜라스 헤슬렘이 내게 보내준 칸딘스키 작품 전시회 티켓과 크롬웰이 내준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자네가 설명해봐.”

서장의 음성이 오늘따라 근엄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크롬웰이 솔직하게 말했다. 서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크롬웰 자네 말고, 제이! 너 말이야!”

서장이 바람난 외동딸 윽박지르듯 내게 소리쳤다.

“놈이 어째서 이런 걸 보낸 건가? 대체 그놈하고 무슨 일이 있었나?”

니콜라스가 어째서 이런 걸 보냈는지 내가 알게 뭐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모두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억울하다. 그래서 마키바 반장을 쳐다봤다.

“반장님도 거기 계셨었잖아요!”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마키바 반장이 창밖을 보며 딴전을 피웠다. 하긴, 반장은 그때 벽장 속에 처박혀 있었지.

마키바 반장은 그날 뜻하지 않게 벽장에 갇힌 일에 대해 확실하게 분풀이를 했다. 헤슬렘의 집 앞까지 쫓아가서 도색 잡지에 코를 쳐 박고 키득거리던 말로이를 기분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팬 후, 성 아그네스 수녀원에 있는 율리아 수녀의 신변 경호팀으로 쫓아 보냈던 것이다.

율리아 수녀는 빈민가에서 점심때 무료 도시락을 전해주다가 살인사건을 목격한 목격자로 범인의 신병이 확보되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 경찰의 경호를 받게 돼 있었다. 율리아 수녀가 목격한 살인 용의자는 경찰도 수 개월간 쫓고 있던 흉악범이었다. 살인 목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격자를 해칠 놈이었기 때문에 24시간 경호가 필수였다.

문제는 성 아그네스 수도원은 현장에서 활동하기 힘들 정도로 노쇠한 수녀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수녀 양로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성 아그네스 수도원에서의 하루하루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글래머 미인을 밝히는 말로이에게는 말도 못하게 고통스러울 터였다.

“칸딘스키 전시회라…… 무슨 꿍꿍이속일까?”

굽타의 표정이 고민스럽다.

“헤슬렘은 본래 그런 거 좋아하잖아. 오페라, 발레, 락 콘서트, 전 세계의 박물관, 유명 브랜드 패션쇼까지…… 이런 전시회라고 특별할 게 뭐야? 문제는 어째서 이딴 걸 제이한테 날렸느냐 하는 거지.”

마키바 반장이 나를 슥…… 노려봤다. 그 눈초리에 내가 움찔하자 반장의 눈빛에 어떤 확신이 떠올랐다. 그림 위아래도 구별 못하고 화집을 거꾸로 들고는 열심히 보는 척했다는 얘기를 진작 털어놨어야 했을까? 반장은 그때 벽장 속에서 말로이를 족칠 궁리에 골몰하느라 나와 헤슬렘의 대화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보고하면서 그 얘기는 슬쩍 빼고 넘어갔는데…….

“제가 보기엔…….”

크롬웰이 입을 열었다.

“티켓이 한 장 남아서 별 생각 없이 보낸 것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제이 또래 젊은이를 꼬시려면 좀 더 파격적인 제안을 했겠지. 칸딘스키 작품전 같은 거…… 보통은 티켓이 다발로 있어도 안 갈 테니까 말이야.”

굽타가 크롬웰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반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의 심문을 시작했다. 반장의 날카로운 시선은 명백히 너…… 뭐 숨기는 거 없냐? ……라는 의미였다. 마키바 반장은 심중에 의심을 담아두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 사실은요…….”

내가 우물거리며 입을 열자 모두가 일제히 나를 노려봤다.

루소 박물관은 철강과 해운 업계에서 대대로 재벌 가문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는 루소 집안 소유의 아트센터 중 하나였다. 규모가 어지간한 시립 박물관보다 더 크고 소장품도 여러 분야의 명작들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 수준 높은 박물관인데 이번 칸딘스키 개인 소장품 전시회 같은 이벤트도 이따금 기획해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평이 좋았다.

루소 박물관 방문은 이번으로 3번째였다. 한 번은 위니하고 왔었고 또 한 번은 경찰학교 동기생들과 왔었다.

위니와의 데이트는 기억이 별로 없지만 두 번째는 달랐다. 루소 박물관에서 대단한 명화 한 점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날고 기는 전문 수사관들조차 범인의 침투 경로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솜씨였기 때문에 장래의 명수사관을 꿈꾸는 나와 몇 명의 친구들은 그림 없어진 자리를 그 자리에 명화가 걸려 있을 때보다 더 유심히 살펴보고 눈에 띄는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고 박물관을 구석구석 살펴본 후 신출귀몰한 도둑놈에게 감탄하고 또 감탄했었다.

내가 칸딘스키 화집을 들고 쇼를 하다가 니콜라스에게 망신당한 얘기를 털어놓자 다들 당황했다.

“니콜라스가 책상 서랍을 열고 남는 티켓 한 장을 별 생각 없이 보내온 것이 아니라 제이를 미술 애호가로 착각하고 일부러 구해서 보냈다면 그건 상당히 의미 있는 행동일 수도 있어요.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크롬웰이 일껏 돌려서 완곡하게 표현한 말을 비니가 장작 패듯 단호하게 재정리했다.

“그럼…… 헤슬렘이 제이를 찍은 건가요?”

겉보기에도 웅장한 건물 내부는 그리스 신전처럼 쭉쭉 뻗어 오른 하얀 대리석 기둥이 보기에도 시원스러웠고 붉은 색조가 흐르는 바닥은 먼지 하나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난방을 할 정도의 날씨가 아닌 탓인지 박물관 안의 공기는 정신이 맑아질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현재 시각 오전 10시…… 차가운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제3전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끼를 던져보자는 크롬웰과 굽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던 서장은 큰 망설임 없이 태도를 바꿨다. 수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장기화되고 있는데다 쿠간에서 하루에도 몇 건이나 터지는 강력 사건에는 항상 손이 딸렸다. 기약도 없는 수사에 언제까지 묶어두기엔 론 마키바나 굽타 같은 수사관은 너무 유명하고 유능했다. 게다가 니콜라스 헤슬렘이 사냥감으로 찍은 대상은 신참내기 여순경이 아니라 수사 중에 죽어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걱정이 별로 없는 강력계 남자 형사였던 것이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화장실 옆 휴게실에 놓인 이 소파는 정말 좋다. 잠깐 앉아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제3전시관 긴 복도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하릴없이 오가며 2층 계단을 대충 스물다섯 번 정도 오르내렸더니 다리가 저리고 온몸이 노곤했다. 다른 할 일도 없고 해서 비슷비슷한 그림들을 보고 또 봤더니 눈앞이 빙빙 돌고 머리도 아팠다.

병원에서 2주일 동안 하는 일 없이 놀고먹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몸이 무겁고 쉽게 피곤해졌다. 몇 걸음 떨어진 자판기에 가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먹을까……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일까…….

뭔가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있어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니 편지였다. 어제 저녁에 우편함에서 들어 있던 걸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잠시 잊고 있었다. 봉투에는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서툰 글씨로 주소가 쓰여 있었고 발행된 지 30년도 더 된 것 같은 우표가 붙어 있었다. 푸른 잉크가 바래서 옅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이 우표만 봐도 이게 누구 편지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우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외할아버지뿐이었다.

외할아버지의 편지는 솔직히…… 별로 반갑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내가 고아원에 버려졌던 게 이맘때쯤이었다. 외할아버지의 편지도 항상 이때쯤 우편함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잊고 지내던 옛 기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우울해졌다. 게다가 답장을 쓰고 싶어도 보낼 도리가 없으니 그것도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내용은 별게 없었다. 외할아버지는 직접 글씨를 쓰지 않고 대필을 시키기 때문에 항상 필체가 조금씩 틀린 데 이번 건 필체도 엉망이고 오자도 장난이 아니라 읽기가 더 괴로웠다.

이번 편지의 특이한 점이라면 사진이 한 장 들어 있다는 건데…… 핑크색 테이블 위에 놓인 수정 구슬은 어렸을 때 몇 번인가 본 기억이 나는 물건이었다. 구슬을 앞에 놓고 앉은 외할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했다. 외할아버지 사진을 보니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폐관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 주변이 조용했다. 창을 향해 놓인 소파에 한 사람이 전시회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 발소리도, 인기척도 없었다. 헤슬렘은 오지 않았다. 별다른 의미 없는 그의 행동을 우리가 너무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주섬주섬 일어나면서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았다. 현재 시각 오후 6시 20분. 작전은 종결이다. 아, 배고파……. 소파에서 막 일어서는데 건너편 소파의 남자가 팸플릿에서 고개를 들었다.

“전시회가 마음에 들었습니까?”

헉…….

“언제…….”

“조금 전에 왔어요.”

“…….”

한잠 자고 금방 일어난 데다 이런 상황은 내가 예상했던 다섯 가지 가상 시나리오에 없었다. 게다가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임무에 대한 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다.

“저기, 그러니까…….”

“몇 주 자리를 비운 덕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 같이 쌓여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떨어졌을까? 마약 거래 현장을 덮친다든지 무장 강도와 대치하는 쪽이 몸은 고달파도 골치 썩일 일은 없었는데.

“나가죠. 이제 곧 폐관시간이에요.”

헤슬렘이 팸플릿을 주머니에 말아 넣고 일어섰다.

“예…….”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는데 헤슬렘이 바닥에서 뭔가를 주워 올렸다. 외할아버지 사진이었다.

“당신 건가요?”

자면서 떨어뜨렸던 모양이다. 멋쩍게 웃으며 사진을 받아서 얼른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우리…… 외……할머니세요. 옷이…… 좀 웃기죠?”

외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푸른 실크 드레스에 색 유리로 만든 귀걸이 목걸이를 줄줄이 걸고 있는 이분이 외할아버지라는 게 알려지면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헤슬렘은 거기에 대해 긴말은 하지 않았다. 앞장서 걸어나가면서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헤슬렘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그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교 클럽이었다. 시내를 조금 벗어난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이 건물은 전체가 회원 전용의 사교 클럽으로, 조사해본 바에 의하면 쿠간 시에 어지간한 명사들은 모두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었다.

건물 1층은 전체가 레스토랑이었다. 웨이터가 안내해 주는 대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마디도 읽을 수 없는 프랑스어 메뉴판을 들고 난감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와장창…… 한 무더기의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족히 열 장은 넘어 보이는 도자기 접시가 바닥에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있었다. 접시를 나르던 웨이터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고 있는 걸 비니가 막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둘 사이에 충돌 사고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레스토랑 저쪽에서 지배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콧김을 내뿜으며 비니에게 달려왔다.

“자네! 왜 또 이러나? 응?”

지배인의 음성이 상처 입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소리 같았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지배인님. 잠시 한눈을 팔다 보니…….”

비니가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지배인에게 사과했다. 저 자식이 저렇게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하다니…… 비니는 파트너를 번번이 지옥문 바로 앞까지 끌고 가면서도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그런 놈이 접시 몇 개 깨뜨린 걸로 저렇게 저 자세를 취하다니…… 서비스 업계에서 버티려면 어쩔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저 지배인이 우리 서장이나 반장보다 더 무서운 걸까?

“죄송도 한두 번이야! 자네 때문에 내 수명이 줄 지경이란 말일세!”

“접시 부서진 건 제 월급에서 제하시고…….”

비니가 미소 작전으로 나가봤지만 그게 오히려 꼴 보기 싫었는지 지배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자네 월급은 지지난주에 돔 페리뇽 한 상자 때려 부순 걸로 벌써 다 없어졌잖아!! 생돈을 밖아가며 직장에 다닐 텐가?”

지배인이 점점 더 흥분했다. 얘기하면 할수록 지난 일까지 두루 생각나서 감정이 격해지는지 지배인이 급기야 비니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 심정, 나는 잘 안다.

사태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주변에서 서빙을 하던 웨이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우리 테이블에서 주문 받던 웨이터도 잠시 양해를 구하고 지배인에게로 바삐 달려갔다.

“이거 놔! 나……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놓지 못해?”

웨이터들이 팔 다리를 붙들고 비니에게서 뜯어내자 지배인의 음성이 더 격해졌다.

“참으세요. 지배인님. 이 친구는 1965년 산 샤또 디켐도 두 병이나 깨뜨렸는데 이깟 접시 몇 개 가지고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일전에 VIP 전용 골동품 도자기 주전자를 깨뜨렸을 때도 잘 참으셨잖아요. 진정하세요, 지배인님.”

“2층 계단에서 카샴 부인의 코트 자락을 밟아서 부인이 1층까지 굴러 내려갔을 때도 지배인님이 중간에서 잘 해결해주셨잖습니까?”

웨이터들의 의도가 적잖이 의심스럽다. 정말 참으라는 뜻일까? 어쨌든 분명한 건 웨이터들의 말이 다 사실이라면 지배인은 참을 만큼 참았다는 거다.

“저 자식 작은아버지가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아니라 알 카포네라고 해도 나는 더 이상 못 참아!”

지배인이 절규했다. 결국은 다섯 명의 웨이터가 목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우렁차지만 체구는 그다지 크지 않은 지배인을 번쩍 들었다.

“이 마피아 자식! 당장 나가!! 니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갈 테다!!”

지배인이 소리소리 지르며 주방으로 들려나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비니가 나하고 헤슬렘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해 수군거리고 있는 손님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헤슬렘 씨. 주문은 하셨습니까?”

그 걸음걸이와 태도가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태연했다. 이놈은 본래 그런 놈이다.

“싱싱한 가제가 있다면 오랜만에 주방장의 특급 랍스터를 맛보고 싶군.”

비니를 대하는 헤슬렘의 태도가 다정다감했다.

“주방에 알아보겠습니다.”

비니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너는 뭐 먹을래? 하는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특별히 추천할 만한 메뉴가 있습니까?”

“싱싱한 개구리와 프랑스에서 직수입한 달팽이가 있는데 어떠십니까?”

비니와 내 시선에서 작은 불꽃이 튀겼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이 안 서는데 이런 장난을 걸어? 나쁜 놈!

“나는 그냥 평범한 스테이크가 좋겠어요. 고기도 좀 질기고, 앞뒤로 노릇노릇하게 구운 서민적인 스테이크로…… 배고프니까 되도록 빨리 갖다 주세요. 웨이터.”

“저는 웨이터가 아니고 바텐덥니다, 손님. 보시다시피 지금은 웨이터들이 좀 바빠서요.”

비니가 느끼하게 웃으며 헤슬렘에게 이탈리아 말로 몇 마디를 더 지껄였다. 둘이 상당히 친해 보였다. 비니가 주방으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한 번 더 나를 갈궜다.

“그렇게 서민적인 요리가 가능한지 주방장에게 물어 보죠. 손님.”

비니가 이 클럽에 바텐더로 취직한 지 어언 한 달…… 그동안 비니는 꼬박꼬박 헤슬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보고를 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클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와서 보니 모르는 일도 많았던 모양이다. 클럽 종업원들이나 손님들이 모두 비니를 슬슬 피하고 있었다. 유리컵 한두 개 깨뜨린 정도로는 조성할 수 없는 침울한 분위기였다.

헤슬렘과 내가 시킨 음식이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나올 즈음, 아까 웨이터들에게 들려나갔던 지배인이 초췌한 얼굴로 홀에 나타나서 테이블을 돌며 좀 전의 소란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머리가 젖어 있는 걸로 봐서 찬물에 푹 식히고 온 모양이었다.

“특이한 친구죠?”

헤슬렘이 내 잔에 와인을 부었다. 향기가 좋다. 와인을 홀짝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저 친구가 마피아 대부인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조카라는 소문이 돌았었어요.”

“설마…… 그럴 리가요?”

어쩌다 그런 정보가 샜을까? 아까 지배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데 비니가 자기 입으로 떠들었을 리는 없고…… 아는 사람하고 마주치기라도 한 걸까? 비니의 출신을 생각해보면 이런 상류층 사교 클럽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쳤대도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곤란한데…… 라고 생각하면서 갑자기 바짝 타 들어가는 목을 축이기 위해서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는데 헤슬렘이 나이프를 집어 들면서 더 곤란한 얘기를 했다.

“사실은 저 친구…… 잠복근무 중인 형사예요.”

순간……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와인이 뿜어져 나가려는 걸 가까스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얼굴이 사색이 되어 컥컥거리는 나를 보고 헤슬렘도 놀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안 괜찮다. 이게 뭐냐! 고개를 돌리는 척하며 비니를 노려봤다. 비니는 세상 태평한 얼굴로 크리스탈 잔에 마른행주질을 하는 중이었다.

“많이 놀랐어요? 나는 그냥 재미있을까 해서 꺼낸 얘긴데…….”

헤슬렘이 내 안색을 살폈다.

“재미……있는 얘기네요…….”

헤슬렘이 이 모든 일의 전말을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서없는 두려움이 맑은 물에 떨어진 푸른색 잉크처럼 마음 한 구석에 번져왔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는 사람에게서 들었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는 단서가 붙은 얘기였지만…… 어디로 어떻게 퍼졌는지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불쌍한 놈…… 다른 사람들 다 알고 있다는 걸 혼자만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맞은편에 걸린 거울에 비니의 모습이 정면으로 비쳐 보이는데 지금은 나른하게 취한 중년 부인하고 뭔가 심각하게 얘기 중이었다.

“게다가 저 친구하곤 페루행 비행기 안에서도 마주쳤었어요. 재미있는 우연이죠?”

잠복은 무슨…… 신문 방송에 대서특필로 때리고 공개수사를 했어도 이보다는 나았겠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눈이 딱 마주쳤는데…… 상당히 당황하더군요. 그때는 나도 내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저 친구도 공무 때문이라면 아는 척하는 게 곤란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냥 눈인사만 하고 지나쳤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니콜라스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멍청한 얼굴로 앉아만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이기도 하겠지.

“페루엔 무슨 일로……? 뭔가 급한 일이 있었나 봐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려고 얼른 페루 여행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별로……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의 일이 더 마음에 걸렸어요.”

하필이면 니콜라스와 안면이 있는 비니가 페루까지 쫓아간 게 우리로서도 확실히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급한 김에 비니가 나서기는 했지만 니콜라스의 목적지가 파악되는 대로 굽타가 비니와 임무 교대를 한다는 게 우리 쪽 계획이었다.

하지만 페루로 떠난 지 이틀 만에야 전화를 걸어온 비니는 어쩐 일인지 정확한 위치도 밝히지 않은 채 일을 자기한테 맡겨달라고 바득바득 우겼다. 하긴…… 가는 비행기 안에서 벌써 들통이 났었다면 그런 계획이 다 무슨 소용이냐?

“잊어버리세요. 차에 뛰어든 제 실수였어요.”

반잔 넘게 남은 와인을 한 입어 털어 넣으며 내가 대꾸했다.

나는 계속 잔을 비우고 헤슬렘은 계속 내 빈 잔을 채웠다. 등 뒤에서 또 쨍그랑…… 하고 컵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비니한테 잠복근무 같은 걸 시킨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 저 짭새하곤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나요?”

다 틀렸다는 절망감, 혹은 이 상황을 다 꿰뚫어 보면서 나를 가지고 놀아보겠다는 저 자신만만함에 대한 반감…… 이류도 아닌 삼류 사기꾼이 된 것 같은 민망함 때문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리마에 도착해서 나는 곧장 가야 할 곳이 있었거든요.”

헤슬렘은 몇 년 전부터 어떤 고고학 발굴을 후원하고 있었다. 페루의 밀림에서 옛 신전의 유적을 발굴하는 도중에 고고학자 두 명이 살해당하고 발굴된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 때문에 갑작스럽게 출국 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 아침의 사정은 비니가 보고해온 내용과 거의 맞아 떨어졌다.

“저 친구하고는 돌아오기 전날 호텔에서 다시 만났죠. 먼저 아는 척을 해오더군요. 내 일도 그럭저럭 정리했고 저쪽도 그다지 바빠 보이지 않아서 바에서 술도 마시고 얘기도 좀 했어요. 자기 말로는 그 지역에서 나는 민속주를 구하러왔다고 하더군요. 꽤 그럴 듯한 변명이긴 했어요. 실제로 저 친구…… 그 지역에서 나는 독주를 몇 병 가지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코카인 성분이 많이 함유된 술이라 세관에서 다 압수당하고 말았어요. 이런 고급 클럽에서 바텐더로 일할 정도의 베테랑이라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죠. 내 생각에는…….”

비니 몬티첼리 보고서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당신 생각에는요?”

“…….”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보니 헤슬렘이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산통 다 깨진 마당에 나라고 두려울 게 뭐냐. 최소 열다섯 건이나 되는 연쇄살인의 혐의를 받고 있는 니콜라스 헤슬렘의 첫 인상은 목소리가 좋다는 것이었고, 병원에 찾아왔을 때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보다 키가 더 크다는 것 정도였다. 아멜 굽타가 느꼈다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이질감이나 공포감 같은 거 아무리 애써도 나는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지척에 마주 앉고 보니 좀 당황스러운 건 이 남자가 몇 살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보통 나이를 알 수 없다는 건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뜻이지만, 니콜라스 헤슬렘의 경우는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크롬웰이 조사한 자료에도 그의 정확한 출생 기록 같은 건 없었다. 경제 활동 기간을 고려하면 최소한 40대 후반이라는 게 무리 없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너털웃음을 섞어가면서 페루의 정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을 얘기 할 때의 그는 마치 20대 청년 같았고, 지금처럼 어둡고 깊은 눈동자로 사람을 응시할 때엔 100살도 더 먹은 노인 같았다.

“나는 보기보다 나이가 많아요.”

독심술이라도 하는 걸까 싶어 얼떨떨한데 헤슬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헤슬렘이 반도 더 남은 메인 디시를 물리고 냅킨을 테이블에 얹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마약 밀매 조직에 관계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지역은 온통 코카인 재배 농장이거든요. 달리 쿠간 시 경찰이 페루의 오지까지 날아갈 일이 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테이블 러너에 그려진 꽃무늬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왼쪽 머리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스트레스가 정도를 넘으면 편두통이 오는데 아무래도 이런 일이 내게는 무리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내가 상관이라면 저 친구에게 절대로 총을 쥐어주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요?”

“에너지가 강해요. 처음 봤을 때는 이 홀 안에 가득한 오렌지 빛 오라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죠. 그렇게 화려한 빛깔의 오라는 엄청난 마나를 의미해요. 아마……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을걸요.”

몸을 틀어서 유리잔과 술병을 위태롭게 정리하고 있는 비니를 쳐다봤다. 녀석의 주변엔 푸른빛이 섞인 백색 할로겐 조명이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위험한 건가요?”

진정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날로 심해져 가는 비니의 징크스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헤슬렘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위험하죠.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크롬웰이 크고 화려한 나비 날개가 그려진 차 통 뚜껑을 열자 쌉싸름하면서도 아릿한 풀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뜨거운 물이 담겨 있는 하늘색 도자기 포트에 차를 작은 티스푼으로 조심스럽게 떠 넣자 향기가 일순간 작은 회의실 안에 가득 들어찼다. 크롬웰을 거들기 위해 일어서는 비니를 굽타가 잡아 앉히고 나섰다. 까만 원탁 위에 여섯 개의 작은 찻잔이 놓여졌고 크롬웰이 주위를 돌면서 잔을 채웠다. 크롬웰이 다기를 정리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어쩌면 좋겠나?”

서장이 차 한모금과 함께 한숨을 삼켰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사실 서장의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특별 수사본부라고 해도 다른 서에서는 서장이 직접 일선 수사에 관여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만큼 베르히만 서장은 연쇄살인 사건에 관심이 남달랐다. 연쇄살인범을 이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키고 싶어 하는 정의감이나 일선 수사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서가 아니었다.

연쇄살인은 보통 매스컴을 크게 탄다. 좋은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디어가 워낙 강한 시절이다 보니 주목 받는 사건 한두 건 해결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생색도 안 나는 강력사건 열 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인사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하는 게 현실이었다. 베르히만 서장 역시 현역 시절 엽기적인 살인사건 하나 제대로 해결한 이후 승승장구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요 몇 년 동안은 어쩐 일인지 서장에게 불운이 겹치고 겹쳤다. 우리 서에서 천신만고 끝에 시내의 서너 군데 은행을 털고 다니던 갱단을 체포하면 이웃 관할에서 전국적으로 수배 중인 위폐범을 검거한다든지…… 우리가 부잣집만 전문으로 털고 다니는 도둑을 잡으면 또 다른 서에서는 수년간에 걸쳐 고가의 미술품만 전문으로 훔쳐서 괴도로 알려진 거물을 체포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한번은 전국적인 아동 음란물 유통업자를 몇 개월간의 수사 끝에 체포했는데 바로 직후에 다른 서에서 더 악질적인 음란물 제작업자를 체포하는 바람에 서장과 인터뷰하던 도중에 기자들이 몽땅 그쪽으로 달려간 적도 있었다. 줄잡아 열다섯 건이 넘는 미해결 살인사건을 일거에 해결하는 쾌거야 말로 지난 몇 년간 서장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빅 이벤트였던 것이다.

“수사를 더 이상 진행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키바 반장의 말투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개인적인 낭패감이나 노여움 같은 것을 마음 깊은 곳에 꾹 내리 누르고 현실을 직시하기가 반장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서장이 다시 한숨을 몰아쉬자 비니가 고개를 푹 숙였다.

비니가 클럽에서 이모부 보좌관을 만난 것은 위장취업한 지 3일 만의 일이었다. 물론 비니는 당장 그 입 싼 보좌관을 화장실로 끌고 가서 자신의 신분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시에는 이모한테 일러서 당장 실업자로 만들어주겠노라는 치사한 협박까지 불사했다. 그러나 말이란 본래부터 한번 새기 시작하면 밤사이에 둑을 무너뜨리는 고인 물 같다.

자신이 잠복근무 중임을 만천하에 알린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해도 페루 미행 길에 헤슬렘과 마주치고도 시침 뻑 따고 있었던 것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나름대로 수습을 했다고 믿고 있었겠지만 우리 상대는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엘리스 스톤의 실종 사건이 헤슬렘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100/1뿐이라도 말이야. 나는 놈도…… 엘리스 스톤도 포기할 수 없어.”

굽타의 말투는 조용했지만, 그 의지는 단호했다. 굽타에게 중요한 건 언론의 야단스런 스포트라이트가 아니었다. 스톤이 일하던 업소 종업원들은 헤슬렘의 사진을 보고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총기 좋은 재즈 피아니스트 한 사람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헤슬렘은 몇 개월 전부터 가끔 클럽에 왔었고 자신의 연주가 마음에 든다며 꽤 많은 팁을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엘리스 스톤의 실종이 헤슬렘과 연관이 있다면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이 굽타를 어느 때보다 더 집요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우처럼 영악한 놈이 우리 때문에 더 조심스러워졌어. 놈은 이제 우리가 확실히 물러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아니, 놈은 움직여. 놈은 쉬지 않고 계속 헤엄치는 상어 같아. 그 움직임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이제 다 틀렸다니까!!”

“이 일은 포기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놈이 알면 아는 대로 방법을 찾아내면 그뿐이야!”

마키바 반장과 굽타 선배의 설전이 거듭되고 분위기가 험악해질수록 하늘같은 선배님들의 일에 재 뿌리고 찬물 끼얹은 우리 두 사람의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차에 받히지만 않았어도 비니가 얼떨결에 헤슬렘을 따라 페루까지 날아가는 일은 없었을 터…… 이 사태의 반은 나한테 책임이 있었다.

“데이트는 어땠어요?”

잠자코 마키바 반장과 굽타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크롬웰이 두 사람이 서로 노려보느라 잠시 흐르는 침묵을 틈타서 내게 물었다.

“직접 만나 보니 어떻던가요?”

글쎄…… 처음엔 긴장하고 중간엔 당황해서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나중에는…….

“괜찮은 사람이던데요.”

“비니가 잠복 중인 형사라는 얘기 외에 또 어떤 얘기를 했어요?”

“중세에 태어났으면 마법사가 됐을 거라고 했어요.”

비니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크롬웰은 그런 거 하나도 안 궁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비니 얘기 말고요.”

헤슬렘은 한동안 마법사와 마녀에 관한 얘기를 했다. 화제는 독특했고 대화엔 위트가 넘쳤다. 비니의 징크스를 고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얘기는 좀 우울했지만, 누구라도 그와의 대화를 지루하다고는 하지 못했을 거다.

“유혹을 하던가요?”

“별로요.”

모두의 표정에 실망이 가득했다. 뭘 기대했는데?

“연쇄살인이란 건 일종의 중독이야. 담배 끊듯 간단하게 끊어지는 게 아니지. 그리고 내가 볼 때 그놈은 살인을 그만둘 마음도 없어.”

굽타가 햄버거를 껌 씹듯 질겅질겅 씹었다.

긴급회의는 굽타와 마키바 반장과의 고성과 욕설과 주먹질로 끝났다. 중간에 끼어서 사태를 진압해 보려던 서장이 굽타가 마키바 반장을 향해 날린 주먹에 배를 얻어맞고는 그대로 주저앉았고 그 옆에 알짱거리던 비니는 마키바 반장에게 칠칠맞은 놈이라는 비난과 함께 관자놀이를 된통 얻어맞고는 테이블 위로 날아 떨어져버렸다. 크롬웰은 아끼고 아끼던 하늘색 도자기 찻잔 세트가 비니의 습격으로 산산조각이 나자 세상을 다 잃은 얼굴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정말 혼자 하실 생각이세요?”

“혼자는 힘들지.”

굽타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잔을 내려놨다. 마키바 반장의 주먹에 제대로 한대 맞았으니 입 안이 성할 리 없었다.

“그 친구도 홧김에 그러는 거지 진심은 아니야. 수사를 포기하다니…… 말이 돼?”

그러고도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굽타가 남은 햄버거를 입안에 우겨 넣었다.

“사건을 수사하다보면 어려운 상황도 많아. 땅 속에 파묻힌 지 10년도 넘는 두개골하고 정강이 뼈 하나를 들고 살인범을 찾아야 할 때도 있었고 뒷골목에서 총격전을 벌인 갱단 놈들 잡아내느라 온 동네의 집이란 집은 다 두드리고 다닐 때도 있었어. 거기에 비하면 지금 상황이 뭐가 어떻단 거야?”

굽타가 흥분해서 다시 커피를 들이키다가 컥…… 하고 뱉어냈다. 관자놀이가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있으니 내일쯤이면 딱 보기 좋은 보라색이 될 거다. 말없이 냅킨을 집어서 건넸다. 입 언저리와 커피가 튀어 간 테이블을 대충 훔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놈이 살인자라는 걸 알았고 놈은 우리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았어. 비긴 거지. 범인이 눈치를 챘다고 접어버리는 수사가 세상에 어디 있나?”

“죄송합니다. 제 실수로…….”

“기왕에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굽타는 잠시 테이블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자넨 어쩔 건가?”

나도 앞에 놓인 햄버거와 콜라를 지그시 노려봤다. 전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엘리스 스톤 실종사건은 공식적으로 니콜라스 헤슬렘 수사팀에서 접수했다. 수사를 포기하니 마니 실랑이를 벌이기는 했지만 비니는 여전히 저녁 일곱 시부터 열두 시까지 클럽에서 바텐더로 일했고 크롬웰과 굽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동원해서 헤슬렘의 과거 행적과 주변을 캐고 다녔다. 마키바 반장은 잠깐 유마 거리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맡아서 일주일 만에 사건을 해결한 다음 다시 합류했는데 나만 썰렁한 4월의 한밤중에 완전 무장하고 무장 강도 소굴로 지목된 외딴집 담벼락에 붙어 서 있는 중이다. 벌써 3시간 째였다.

일당은 다섯이었다. 네 명은 초저녁부터 안에 있었고 주모자 급 한 놈이 여자 네 명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 게 두 시간 전이다. 여자들이 무사히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지금이라도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한창 재미를 보는 중에 뛰어 들어가는 게 제압하기는 용의하겠지만 저쪽은 작은 군대라고 불릴 정도의 화력을 자랑하는 떼강도들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진다면 여자들의 목숨이 우선 위험한데다 즉흥적인 인질극은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집안에서 무사히 나오고 놈들은 술이며 약에 곯아 떨어져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기약도 없이 마냥 기다리기엔 밤바람이 너무 차갑고 배도 고팠다.

당연한 일이지만 헤슬렘은 그 이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경찰이 있다는 걸 눈치챈 거야 우리 실책이었지만 나를 불러내서 그렇게 놀려 먹은 것은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이층에 있는 은발머리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을 입는 걸 보니 이제 갈 것 같다.>

듣던 중 반가워라…… 같이 들어왔으니 나가면서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나갈 가능성이 컸다. 졸음과 허기와 잡생각을 쫓으려고 이를 악물고 총을 거머쥐었다.

<잠깐, 은발 머리와 우드가 말다툼을 하는 것 같다.>

집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나무에 올라가 있는 감시조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여자가 우드에게 지르는 고함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 뭐야? 돈이 없어??”

놈들이 쿠간 시내와 인근 대도시 은행에서 털어낸 현금만 줄잡아 40만 불이 넘었다. 화대 몇 푼이 아까워서 창녀랑 실랑이를 벌이다니…… 인간성 더럽기 가늠도 못할 놈이다.

< 은발 머리가 놈에게 핸드백을 집어던졌다.>

우드란 놈은 습격한 은행에서 바닥에 엎드려 있던 한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머리를 박살내버린 흉악범이었다.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게 부질없었다.

오래 관리하지 않은 허름한 주택이라서 뒷문은 발길질 한 번에 맥없이 부서져 나갔다. 빠각…… 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동시에 2층에서 총성이 울렸다. 연거푸 3번? 4번?

<놈이 여자를 쐈다.>

양 사방에서 창문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집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3개조 14명이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였다.

부엌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그때까지도 한 놈이 여자랑 뒹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놈의 얼빠진 얼굴을 사정없이 걷어차자 같이 있던 여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여자가 겁에 질려서 옆문으로 도망가려다가 마침 그쪽으로 들어오던 러셀의 가슴팍에 세게 부딪쳤다. 러셀이 여자를 옆으로 밀치고 얼굴이 다 깨진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놈의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그대로 머리채를 틀어잡고 집 밖으로 끌어냈다.

비명소리와 총성이 어디서 들려오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온 집안에 가득했다. 2층으로 올라가려고 길을 찾는데 옆방에서 또 다른 놈이 튀어 나왔다. 나는 놈의 이마에 총구를 겨눴고 놈은 여태까지 끼고 놀던 여자의 목덜미에 총을 들이댔다. 놈의 알몸에 피가 튀어 있었다. 그건 여자의 피도 아니고 놈의 피도 아니었다. 놈이 뛰어나온 방안에서 가는 신음소리가 들려나왔다.

“저 자식이 자하드를 쐈어!”

뒤따라오던 제니가 소리쳤다. 그 다음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놈의 떨리는 손,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 놈의 핏발 곤두선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쳤다. 놈이 총구를 여자의 목덜미에 더 깊이 찔러 넣었다.

내 총구는 아직 놈의 이마 한 가운데를 향하고 있었다. 놈이 불안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놈이 물러난 만큼 놈에게 다가갔다. 바로 그때 어딘가에서 온 집안을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놈이 놀라서 흠칫 몸을 떨었고 그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근거리 사격의 충격으로 놈의 몸이 한순간 공중에 떴다가 무너져 내렸다. 터져버린 놈의 안구와 뇌수 조각이 벽에…… 바닥에…… 그리고 내 손과 얼굴에 튀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고 놈의 시체를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 그 자식이 수류탄을 손에 든 채 터뜨려버렸어!”

거실 문 앞에서 신음하던 케이시가 소리쳤다. 연쇄 폭발의 진원지는 말 그대로 지옥도였다. 자욱한 화약 냄새에다 여기저기 타오르는 불길에 싸구려 소파며 벽지에서 유독가스까지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한 발짝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바닥에 산산이 흩어져 있는 사람의 팔 다리가 아직도 꿈틀거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놈들의 저항이 너무 거칠고 무모했다. 거실에서 연달아 터진 두 개의 수류탄 때문에 최소한 두 명이 사망했고, 우리 측도 여기저기 부상을 입고 나뒹굴고 있었다. 2층에서는 아까부터 거친 총격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허물어져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반쯤 떨어져 나간 난간을 붙들고 2층으로 기어 올라가는데 총알이 난간을 맞고 튀어서 내 헬멧을 때렸다. 한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빌어먹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꾸물거리자 제니가 나섰다. 하지만 제니가 벽에 바싹 붙어서 두 발짝도 채 떼어놓기 전에 우드가 소총을 난사하면서 침실에서 튀어나왔다. 제니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졌다. 달려들어 살펴보니 방탄조끼 두 군데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관통은 면했지만 이 정도 충격이면 탈장이나 갈비뼈 골절이기 십상이었다. 그 사이에 우드는 무서운 기세로 내달려서 복도 막다른 창으로 뛰어들었다. 창 바로 아래가 헛간 지붕인데, 우리 대원 3명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내 뒤를 따라오던 나머지 대원들이 모두 창으로 달려갔고 나는 제니의 상태를 살폈다. 대원들이 우드를 성공적으로 제압하는 소리가 놈의 신음소리와 함께 들려 왔다.

“좀 참아. 어느 정도 부상인지 우선 보고…….”

제니의 방탄조끼를 뜯어내고 셔츠 아래 손을 넣었다. 오른쪽 갈비뼈 근처에 손이 닿자 제니가 헉…… 하고 숨을 멈췄다.

“아파? 부러진 것 같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제니가 번개같이 총구를 내 머리에 들이댔다. 놀라서 주춤 물러서려는데 뒤통수에 뭔가 딱딱한 것이 부딪쳤다.

일당은 다섯이었다. 셋은 처리됐고 하나는 창 밖에서 처리 중이고…… 나머지 한 놈이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서 있었다. 이 자식은 넬이었다. 다른 놈들이 강도짓 할 때 문가에서 망이나 보던 덜 떨어진 잔챙이다. 머리도 나쁘고 성격도 포악해서 우드 같은 망나니도 이 자식한테 총을 쥐어주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일어나. 허튼수작 부릴 생각 꿈도 꾸지 말고…….”

놈의 발음이 똑똑치 않았다. 몸에 안 좋은 약을 되는 대로 털어 먹은 게 분명했다. 놈이 내 목덜미를 틀어잡고 허리에 총구를 쑤셔 박았다. 놈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악취에 정신이 다 나갈 것 같았다.

“총 버려!”

놈이 제니를 윽박질렀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마!”

놈의 이마를 정 조준하고 있는 제니의 태도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불시의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제니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순순히 총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놈이 얌전해질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다 오히려 제정신도 아닌 놈이 무장 해제된 제니에게 총질을 해댈 가능성이 높았다.

제니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놈이 내 목을 세게 조르면서 계단 쪽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제니의 총구가 계속 우리를 따라 돌았다. 제니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저렇게 몇 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놈과 내가 계단으로 향하는 코너를 돌기 직전에 제니의 총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가득했다.

범죄자들은 보통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켜본 바, 범죄라는 것은 비틀린 욕구의 허무한 발산인 경우도 많았다. 터무니없이 강하게 지배하고 싶어 하고 이유 없이 파괴하고 싶어 하고…….

넬은 나를 인질로 잡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놈은 다친 짐승처럼 처연하게 쓰러져 있는 제니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비열한 욕구 때문에 잠시 안절부절 못하다가 나를 겨누고 있던 총으로 넬을 겨냥했다. 그 순간, 내가 놈의 총신을 잡아 비틀었다.

총알이 천장에 날아가 박히자 놈이 그제야 자기 실수를 깨달았다. 놈이 한 손을 잡힌 채 괴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체구는 엇비슷하지만 놈은 지금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데다 약 기운 때문에 완력이 엄청났다.

놈의 주먹이 내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에 한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컥…… 하는 비명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래도 총을 놓지 않자 놈이 이번엔 내 얼굴을 팔꿈치로 사정없이 올려 찍었다. 입안에 피 비린내가 확 끼쳤다. 그리고는 한숨 돌릴 여유도 없이 몸이 붕 떠서 반 바퀴 돌더니 바닥에 팽개쳐졌다.

놈의 팔목과 총신을 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넘어지면 놈도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복도에서 놈과 정신없이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어느새 계단까지 밀려왔다. 거실에서의 폭발로 계단은 중간쯤에서 끊어져 있었다.

나는 머리를 계단 아래쪽으로 향한 채 아직 놈에게 깔려 있는데 어떻게 해도 내가 자기 팔과 총을 놓지 않자 놈이 아래 쪽으로 늘어진 내 목을 한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놈의 무게 중심이 온통 아래쪽으로 쏠려 있었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박차고 놈을 밀어냈다. 그 바람에 놈이 머리부터 아래쪽으로 내리 박혔다. 중간에 끊어진 계단이라서 놈은 거의 날아서 떨어졌고, 놈의 팔을 붙들고 있던 나도 같이 떨어졌는데 어깨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거의 어른 키 정도의 높이에서 반 미친 마약중독자와 엉켜 떨어지고 나니 정신도 없고 총도 오간 데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 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누가 내 목덜미를 확 잡아 올렸다.

“수고 많았어. 좀 도와줄까 했는데…… 너무 사이좋게 붙어 있어서 방해를 못하겠던데?”

러셀이 나를 옆으로 밀어 던지며 건조하게 지껄였다. 그래…… 옆에서 구경하기는 재미있었겠지.

화낼 기운도 없어서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내고 끈적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닦았다.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래도 나는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넬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기척이 없었다.

“제니는 어때? 괜찮아?”

숨을 몰아쉬며 2층을 올려다봤다. 넬을 뒤집어서 수갑을 채우던 러셀이 딱한 얼굴로 나를 봤다.

“제니보다 니가 더 많이 다쳤어. 코뼈가 부러진 거 아냐?”

조심조심 만져보니 심하게 아프긴 해도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5인조 은행 강도 체포 작전치고는 지나치게 요란했고, 인명 피해도 많았다. 죽으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약에 취해 얼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놈이 자폭을 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매춘부까지 같이 날아가버렸고 폭발 현장에 있었던 우리 대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인명 피해는 우드가 쏴 죽인 은발 머리까지 합쳐서 세 명이었다.

거의 기다시피 밖으로 나와 보니 바깥 풍경도 만만치 않았다. 구급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탓에 부상당한 대원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고 한 구석에는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고 도망나온 매춘부들이 담요 한 장을 뒤집어쓰고 쪼그리고 앉아서 히스테릭하게 울고 있었다.

등 뒤로 수갑을 찬 강도 놈들이 버둥거리며 호송 차량에 올라타고 있는데 특히 우드가 시끄러웠다. 저 자식은 여태 지은 죄에다 좀 전에 매춘부를 죽인 것까지 합하면 가스실도 과분하다.

제니는 허리를 굽히고라도 걸어다니는 걸 보니 중상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넬에게 얻어맞은 얼굴이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하고 온몸이 쑤셨다. 그래도 수류탄 파편에 여기저기 찢겨서 얼굴이며 다리가 온통 피투성이인 대원들에게는 댈 것도 아니다. 어느새 앰뷸런스 사이렌이 가깝게 들려왔지만 나는 차례가 좀 멀었다. 범인과 몸싸움을 하다가 몇 대 얻어맞은 정도로 엄살 피울 상황도 아니라서 그냥 집 앞 마당에 누운 채 멍하니 하늘 쳐다보고 있는데 러셀이 다가왔다.

“퇴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병원신세를 지게 생겼군.”

“총에 맞은 것도 아니고 부러진 데도 없어.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갑자기 주변이 시끄러워서 고개를 돌려보니 앞마당에 앰뷸런스가 두 대 들어오고 있는데, 그 뒤를 따라오는 취재 차량이 무려 다섯 대였다.

“어디서 연락을 받으면 저렇게 번개처럼 들이닥칠 수 있을까?”

“뻔하지.”

러셀과 내가 동시에 떠올린 이름은…….

“첸들러!”

“첸들러 반장!”

첸들러 반장은 이번 작전을 총 지휘한 타격대 책임자였다. 무장 강도나 테러리스트 진압에 대단한 열정과 재능을 가진 반장은 언론 플레이도 프로급이었다. 챈들러 반장의 사건은 폭력적이고 극적일 때가 많아서 기자들에게도 반응이 좋았다. 이번처럼 육탄전에, 총격에, 폭발에…… 벌거벗은 여자들까지 곁들여 있는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질색하는 일이지만 사건 현장에 반장 묵인 하에 취재진과 같이 들어갈 때도 간간히 있을 정도로 챈들러 반장은 매스컴 타기를 즐겼다. 이런 때 인터뷰만 잘 하면 길게는 한 달 정도 스타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나 인터뷰 요청을 즐기는 대원들도 많았다. 몇몇은 벌써 카메라 앞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정작 앞에 나섰다가 죽을 뻔하거나 부상이 심한 대원들은 엠블런스에 실려가고 없어서 이런 때 나서는 애들은 대기조인 경우가 많았다.

앰뷸런스를 둘러싸고 취재 경쟁을 벌이다가 뒤로 밀려난 기자 몇 명이 주변을 헤매다가 나하고 러셀을 봤다. 그 바람에 얼른 몸을 돌려서 집 뒤편으로 기었다.

“뭐 어때? 굳이 도망까지 칠 거 없잖아?”

“위니가 이 꼴을 보면 나 이혼당해.”

교통사고로 입원했다가 퇴원한 지 두 달도 안 지났다. 그렇지 않아도 약장에 항우울제 약병이 쌓여 가는데 신문이나 TV 한 구석에 이런 참혹한 몰골을 보여서 심정 더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야. 지금 그 얼굴로 인터뷰하면 마누라도 못 알아볼 거야.”

“그 정도야?”

며칠 출장 간다고 하고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겠네.

“하루 이틀 지나면 더 심해질 걸. 안됐네. 꽤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러셀이 그런 소리 하지 않아도 얼굴이 빵처럼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입 안에 고이던 피는 대충 멎었지만 왼쪽 눈이 잘 안 떠지고 계단에서 떨어질 때 어깨를 다쳤는지 팔이 자꾸 처졌다. 러셀의 악담에 낙심하고 있는 사이에 기자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얼른 옷깃을 세우고 바닥에 엎드려서 인터뷰를 거부하는 사이 러셀이 기자들을 막아섰다.

“매춘부가 살해당한 다음에야 집안으로 들어갔다는데 판단 미스가 아니었나요?’

“주범인 우드를 체포하려고 여자 대원이 나섰다가 총격을 당했는데 남자들은 뭘 하고 있었죠?”

“저 분은 왜 바닥에 엎드려 있어요?”

왠지 기분이 언짢아서 속이 부글거리는데 어디서 익숙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지 옆 주머니에 넣어놨던 휴대폰이었다. 그 와중에도 망가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전화 받기에 적당한 상황은 아니지만 혹시 위니 전환가 해서 별 생각 없이 전화기를 꺼냈다.

“여보세요…….”

「늦은 시간에 지나친 실례가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한줄기 지나가는 것 같았다.

「여보세요? 듣고 있습니까?」

“예! 예…….”

놀라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일어날 기운도 없어서 바닥을 기어 다니다가 벌떡 일어서자 기자들이 놀라서 한 발 물러섰다.

“어디 가?”

이런 통화를 하기엔 주변이 너무 시끄러웠다. 황급히 집 뒤편으로 절뚝거리며 내달리자 러셀이 영문을 모르고 내게 소리쳤다.

「안 좋을 때 전화를 한 건가요?. 미안합니다. …… 끊을까요?」

“아, 아니오! 끊지 마세요!”

전화가 끊어진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아무 말이 없지? 나는 거의 패닉 상태다.

“여…… 여보세요…….”

「…….」

“빌어먹을!!”

「할 말이 있어요.」

정말…… 돌겠다. 전화기를 든 채 머리를 벽에 갖다 박고 있는데 헤슬렘이 전화기 저편에서 한숨을 쉬었다.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됐죠? 범인들과 몸싸움을 했나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황급히 전화기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기자들이 어느새 바로 등 뒤까지 쫓아와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입 좀 닥쳐요! 전화 받고 있는 거 안 보여?”

목에서 갈라지도록 고함을 쳐도 기자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우리도 마감 뉴스를 내보내야 된다고요!”

“러셀! 저 망할 자식들 좀 어떻게 해줘!! 이거 굉장히 중요한 전화야!”

내 절박한 얼굴에 러셀이 더 이상 묻지도 않고 기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취재 차량이 세워진 곳까지 러셀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기자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걸핏하면 피비린내도 채 가시지 않은 사건 현장을 서커스 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첸들러 반장에 대한 반감이 오늘따라 하늘을 찔렀다.

“여보세요…… “

「……내가 곤란한 얘기를 한 건가요?」

곤란하다니…… 뭐가??

「미안해요. 가끔 감상적이 될 때가 있어요. 이런 식으로 전화하는 일 다시는 없을 테니까…… 안심해요.」

“미안하지만…… 얘기를 제대로 못 들었어요.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럼 더더욱 없었던 얘기로 하는 게 낫겠네요. 그럼…….」

끊어졌다.

“안에 있는 거 확실해?”

“좀 전에 들어갔는데…….”

비니 얼굴이 잘 안 보였다. 가로등 깨진 골목이 너무 어둡고 그나마 뜨고 있는 한 쪽 눈도 이젠 좀 흐릿했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비니가 내 얼굴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현재 시각 새벽 1시 반. 내가 서 있는 골목에서 보이는 거라곤 새벽 4시까지 영업하는 재즈 바 [유니콘]의 삐죽 튀어나온 간판 앞부분이 고작이다. 크롬웰이 반쯤 태우던 담배를 담벼락에 비벼 껐다. 오후 여섯 시 퇴근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크롬웰이 이 시간에 찬바람을 맞으면서 밖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다.

“얼굴이 왜 그래요?”

“은행 강도 체포하면서 몸싸움을 좀 했어요.”

잠시 말을 잃고 있던 비니가 푹 눌러 쓴 야구 모자를 벗겨냈다. 내 얼굴을 확인한 크롬웰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좀 전에 버렸던 담배꽁초를 주워 털고는 다시 불을 붙였다.

“강도 다섯 놈을 너 혼자 잡았어?”

“그 얘긴 나중에 하자.”

비니 손에서 모자를 낚아채서 다시 눌러 썼다.

사건은 자정 뉴스 헤드라인이었다. 취재 카메라에 잡힌 현장의 모습은 실제보다 훨씬 살풍경했고 카메라를 향해 괴성을 지르는 우드의 모습은 미친 짐승 같았다.

헛간 지붕에 대기하고 있다가 창으로 뛰쳐나온 우드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두들겨서 체포한 스캇이 이번 작전의 인터뷰 스타로 떴다.

헤슬렘의 전화가 끊어지고 나서 몇 분간은 전화가 다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화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헤슬렘에게는 아직까지도 24시간 감시조가 딸려 있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전화 한 통이면 알 수 있었다.

헤슬렘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는 보고를 들은 마키바 반장은 그 전화를 받았을 때의 나만큼 놀라고 당황했다. 헤슬렘은 오늘따라 퇴근이 늦어 11시가 다 되어서야 회사에서 나왔고 마이론이 미행 중이었다.

재즈바라, 재회가 인상적이겠군.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큰 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비니가 내 팔을 끌어 당겼다. 하필이면 다친 쪽이었다. 골목으로 도로 끌려 들어가면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안에 있다며?”

“그 꼴로 들어가겠다는 거야? 사건을 아예 말아 먹을래?”

무기와 방탄조끼만 반납하고 온 터라 내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검은 색 타격대 셔츠는 흙먼지에 쩔어서 거의 회색이었고 옷깃과 소매 언저리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서 아무리 좋게 봐도 금방 전쟁터에서 돌아온 패잔병의 몰골이다. 하지만 옷차림같이 사소한 문제에 신경 쓸 경황이 없었고,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올 형편도 아니었다. 대충 털면 괜찮지 않을까?

성한 팔로 이쪽저쪽 툭툭 털고 있는데 크롬웰이 꽁초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아쉽다는 듯 비벼 끄고는 골목 어귀 비상계단에 걸터앉았다.

“앞은 제대로 보이는 거야? 대체 어떤 자식이 이랬어?”

비니가 내 모자를 다시 벗기더니 새삼 분통을 터뜨렸다.

“심하냐?”

거울을 안 봐서 나는 내 얼굴이 어떤지 모른다. 왼쪽 눈 밑이 쿡쿡 쑤시는 걸 제외하면 아픈 건 참을 만했다.

골목 앞길에 차 한 대가 급정거했다. 다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귀에 익었다.

“놈이 전화를 했다고?”

“전화해서 뭐라고 했어?”

달려오던 마키바 반장과 굽타가 얼굴을 식별할 만한 거리에서 걸음을 딱 멈췄다. 비니 손에서 모자를 다시 빼앗아서 눈 밑까지 푹 눌러 썼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까부터 굽타가 말의 순서를 못 잡고 헤매고 있었다. 굽타는 보통 당황해 가지곤 이러지 않는다.

“왜 제이한테 전화를 한 걸까? 놈은 제이가 경찰이란 걸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알긴 개뿔을 알아? 우리가 너무 앞서 나갔던 거지!”

마키바 반장이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었다. 내 얼굴에 성한 곳이 한 구석만 있었어도 한대 얻어맞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반장은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도대체 챈들러 그 자식은 기자들 앞에서 깝죽거릴 줄이나 알았지, 대원들 안전이 안중에나 있는 자식이야? 허구한 날 별 희한한 쓰레기 영화 대본 같은 걸 작전이라고 세워서 대원들은 다 병신을 만들어 놓고 뭐? 손이 딸려서 자기 능력을 제대로 못 보여준다고? 개새끼! 언제 내 손에 제대로만 걸리면 그 재수 없는 조동아리를 갈아놓고 말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반장에게 전화 같은 거 하지 말고 헤슬렘에게서 전화가 온 것도 그냥 묻어둘 걸 싶은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마키바 반장이었다. 반장의 인가 없이는 헤슬렘에 대한 어떤 행동도 중대한 월권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만나봤으면 하는데요.”

내 의견에 대한 마키바 반장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얼굴로?”

“제 얼굴 때문에 헤슬렘이 전화 한 건 아닐 거예요. 제가 경찰이라는 걸 알고도 전화를 했다면 별로 상관없는 문제고, 모른다면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고…….”

이쪽의 수를 읽고 게임을 청해오는 거라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잘못된다고 해봐야 더 틀어질 것도 없고…… 반장이 뚜렷한 동요의 표정을 보였다. 그런데 선뜻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던 굽타가 고개를 저었다.

“자넬 못 믿어서가 아니야. 하지만 ……자네는 이런 일에 맞지 않아.”

굽타는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겉보기는 온화하고 일견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굽타는 대범한 사람이었다. 범행이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그도 치밀하고 집요해졌다. 지금까지 굽타가 해결한 사건들이 대부분 강력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상대 역시 내놓으라 하는 흉악범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굽타가 언제 그들을 이렇게 두려워했던가. 생각해보면, 그의 두려움이 내게는 낯설었다.

결국 잠복 중인 대원은 그대로 헤슬렘을 지켜보기로 하고 나머지는 헤어졌다. 마키바 반장이나 쥬드가 굽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이 몰골로 헤슬렘을 만나서 좋을 게 없다는 쪽으로 모두의 의견이 기울었다.

굽타와 마키바 반장이 떠나자 비니가 떨떠름하게 서 있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병원에나 가자.”

“신경 쓸 거 없어.”

왠지 기운이 빠져서 아까 크롬웰이 걸터앉았던 계단에 주저앉았다. 크롬웰은 어쩐 일인지 아직도 안 가고 골목을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뭔가 할 말이 남은 걸까? 생각하며 돌아보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비니, 차에 먼저 가 있을래요? 제이랑 할 말이 있어요.”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크롬웰의 말투에서 비장미가 풍겼다.

엉성한 나무판자 같은 문을 밀어 열자 푸른 불빛이 문틈으로 가득 쏟아져 나왔다. 재즈 바라…… 재즈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예전엔 몇 번인가 이런 분위기가 좋아 드나들었는데, 이젠 그런 기억도 희미했다.

안쪽으로 한 발 들여 놓자 근처에 있던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다. 내 몸에서 나는 화약 냄새를 나도 맡을 수 있었다.

크롬웰은 사실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옆에 서 있다가 돌아섰고 비니에게 차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었다. 비니가 나를 돌아보며 머뭇거렸다. 크롬웰이 비니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 차에 올랐고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 나갔다.

이곳은 예전에 가 봤던 시내의 크고 유명한 바하고는 많이 달랐다. 천장은 낮았고 의자며 테이블은 낡아서 초라해 보였으며, 한 구석에 설치된 무대는 작고 나지막해서 뒤에서는 가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밴드는 이미 가버렸는지 무대에는 여가수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낮은 음성으로 처음 들어보는 우울한 멜로디를 노래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다른 세상의 풍경만큼이나 낯설었다.

길가에서 은색과 파란색 네온이 섞여 반짝이는 유니콘 모양의 간판을 한참동안이나 올려다봤었다. 도심의 변두리 풍경이란 대게 비슷비슷하지만 이 거리는 유난히 낯이 설었다.

그냥 갈까……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고, 그 엉성한 출입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있었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손님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 때문에 눈이 아팠다. 왼쪽 눈은 이미 감겨 있고 오른쪽도 시야가 흐릿했다. 그래도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대에서 좀 떨어진 동그란 테이블에 아마…… 여기서 만나 합석한 것 같은 서너 명의 젊은 남녀 사이에 끼어 앉은 헤슬렘은 별스럽게 눈에 띄었다.

어쩔까……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 난 빈자리에 앉았다. 그가 있는 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자리였다. 웨이터에게 술을 주문하는 그의 뒷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가수가 노래 한곡을 마치고 일어섰다.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온몸이 빛나는 것 같은 여자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이마에는 제법 떨어진 내 눈에도 어렴풋이 보일 정도의 흉터가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때문에 여자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여자가 무대에서 내려섰다. 헤슬렘과 아는 사이인지……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리곤 서로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여자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 가수의 거친 듯 달콤한 음성을 듣고 있는데 헤슬렘이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순간 당황했지만 출입문 옆이라서 주변이 어두운데다 마침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일행이 우르르 일어섰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도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묻어 나왔다.

등 뒤로 재즈 바의 작은 문이 닫히자 감미로운 노랫소리도 끊어졌고 어딘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평온함도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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