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간을 동서로 관통하는 킬리요크 강 서쪽 하구에는 높고 너른 언덕이 있다. 예전에 푸른 나비들이 날아다녔다고 해서 푸른 나비들의 언덕이라고 불리는데 이제 그런 나비는 없다. 바다가 멀지 않은데다 지대가 높기 때문에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시원하고 향기로운 바다 바람이 풍겨 오고, 언덕 가장자리는 바다에 맞닿는 백색 절벽으로 해질 무렵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그 경치가 관광 엽서처럼 깔끔하고 예쁘다.
사정이 이러니 이 언덕의 주인은 당연히 부자들이었다. 언덕 아래쪽은 당대에 백만장자가 된 족보 없는 부자들이 주로 사는데 일반인들에게는 백만장자라도 이 언덕 주민들 기준에서 보면 서민이었다. 언덕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경관도 더 근사해지고 집도 더 훌륭해지고 집 주인의 가문도 유서 깊었다. 니콜라스의 집도 이 근처였다. 위치는 언덕 중간쯤이었지만, 어떤 호화주택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엄청난 부에다 정치적 권력까지 더해지면 좀 더 높은 곳에 살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알렉산더 루소의 저택은 꽤나 위쪽이었다. 루소 가문은 본래 몇 군데나 되는 제철소와 조선소를 가지고 있는 철강 재벌이었다. 벌써 120년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 이만치 위쪽에 사는 걸 고까워할 사람은 없었다.
루소는 젊었을 때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서 가문의 재산을 천문학적인 수치로 불린 후에 정계에 투신해서 지난 20년간 쿠간 시 최고 권력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친히 전화를 걸어서 청해오는 정중한 부탁이라는 건 법원 명령보다 더한 강제성을 띄게 마련이었다.
금박과 검은 강철로 중세 고지도를 새겨 넣은 예술적이면서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정문 앞에 서자 오웬의 배후가 생각보다 엄청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루소 의원이 관련돼 있다면…… 그 새벽의 결투도 정치적인 음모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떤 압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묻혀 버린 것은 아닐까? 정문 너머로 지붕만 삐죽 보이는 저택을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경비원이 차로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의원님 계신가요?”
비니가 경비원에게 물었다. 루소 상원의원은 개인적인 이유로 중앙 의회 개원 중에 낙향해 있는 중이었다. 그 개인적인 이유가 뭔지는 찰거머리 같은 긴급취재 60분 팀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의원의 나이가 있으니 중병설이 가장 유력할 뿐이었다.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그 사무적인 어투에는 사전 약속이 없다면 저택에 한 발짝도 들여놓을 생각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깔려 있었다. 일반 시민의 주택이야 경찰 신분을 밝힌 다음에 그냥 밀고 들어가도 별 문제 되지 않겠지만, 여기서 그러려면 옷 벗을 각오가 필요했다. 비니가 윗저고리에서 경찰 배지를 내보였다. 나는 정직 중이라 배지도 없고 총도 없었다.
“의원님과 시간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우린 공무로 온 겁니다.”
“방문객 열 분 중 여덟 분이 공무로 오시는데 모두 약속을 하고 오십니다.”
비니가 나를 돌아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장 의원을 만나 본론으로 들어가도 일이 어려울 판에 별게 다 거치적거리네.
경비원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 양복이야 흔한 거지만 어쩐지 상복처럼 보였다. 태풍이 몰아 닥쳐도 끄떡 않을 것 같은 경비원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대신 그의 검은 넥타이를 노려봤다.
“우린 살인사건 용의자를 찾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 의원께서 그 용의자의 신원 보증을 해주신 일에 관련해서 몇 가지 알아 볼일이 있어요. 잘 아시겠지만 살인사건에 성역은 없습니다. 상원의원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일이 있는 겁니다.”
“영장이 있습니까?”
“우린 의원님을 체포하러 온 게 아니라 그저 몇 가지 물어보러 온 것뿐입니다.”
“없다는 뜻이군요.”
“…….”
“그럼 안 됩니다.”
정 그러면 의원에게 전화해서 우리를 만나줄 의향이 있는지 물어 보기나 해달라는 정중한 부탁도 경비원은 거절했다.
“정문 앞에서 비켜주시겠습니까?”
경비원은 우리 부탁을 모조리 거절했다. 그래서 우리도 차 빼 달라는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자꾸 이러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경비원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우리가 경찰이라니까요?”
비니도 나름대로 성의껏 얼굴을 구기며 대꾸했다.
“5분 안에 이 똥차를 치우지 않으면 의원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경비원의 협박에 비니와 내가 잠시 얼굴을 마주봤다. 비니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실쭉 웃었다. 내 표정도 비슷했을 거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
내가 먼저 자동차 보닛 위로 올라가서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았다. 비니는 아예 차 지붕에 기어 올라가서 요염한 포즈로 누웠다. 그리곤 도발적인 시선으로 경비원을 응시했다. 바위 같은 얼굴의 경비원이 치를 떨며 경비실로 뛰어 들어갔다.
“의원이 직접 나올까?”
비니가 요렇게 조렇게 포즈를 바꿔 가며 중얼거렸다.
“안에 있는 게 확실하다면…… 한 3시간만 버티면 될 거야.”
“이러다 미운 털 박히면 너나 나나 평생 실업자 연금이나 타 먹으면서 살게 될지도 몰라.”
“너야 무슨 걱정이야? 아버지 슈퍼에서 경비라도 돌면 되지.”
“아버지가 잘도 나한테 일자릴 주겠다!”
“아버지 슈퍼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아무 짓도 안 했어!”
비니가 아버지 슈퍼에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더 깊이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경비원이 곧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경비실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저 살벌한 표정을 보니 비니랑 내가 경찰 제복을 벗어야 할까 보다. 두 달에 한번은 이 일을 걷어치우고 좀 더 인간답고, 한가하고, 보람찬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지만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뭐가 있을까?
비니는 대형 슈퍼마켓을 네 개나 갖고 있는 부자 아버지도 있고 쿠간에서 제일 유명한 이탈리아 음식점을 하는 큰아버지도 있고…… 항상 조직원을 모집하고 있는 작은아버지도 있다. 돈 많은 숙부와 고모들에게서 용돈만 조금씩 받아 모아도 경찰 월급보다는 훨씬 짭짤할 거다. 게다가 비니 이모는 시장 부인이다. 비니는 걱정할 것도 없다. 문제는 나다.
알렉산더 루소 같은 고위층한테 찍히면 다른 직장 구하는 데도 불리하고 억울한 일이 많을 거다. 역시 괜한 짓을 한 걸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 보닛 위에 버티고 있긴 하지만 기세등등하게 걸어나오는 경비원을 보자 슬그머니 겁이 났다. 앞일 걱정은 접어놓고라도…… 나랑 비니가 상원의원 집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걸 서장이 알면 우리를 죽이려고 쫓아 나올 거다.
“당신들 두 사람…… 의원님께서 지금 당장!”
경비원이 분해서 어쩔 줄 모르며 으르렁거렸다. 겁먹은 비니가 차 지붕에서 얌전하게 무릎 꿇었다.
“……안으로 들어오랍니다!”
알렉산더 루소의 저택은 어마어마했다. 넓은 회랑에는 대리석 기둥이 마치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장엄하게 늘어서 있었고 바닥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반짝거렸다. 현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의원 보좌관을 따라가노라니 눈에 띄는 것이라곤 온통 대리석에 금동 장식품 일색이다.
주 기둥 사이 사이에는 어른 허리 높이 정도 되는 선반들이 기둥 모양으로 늘어 서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금은보석의 장식품들은 어찌나 번쩍거리는지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정도였다. 집 좋기로 따지자면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저택에 비하면 소박한 서민의 집 정도 되겠다.
루소의 저택은 그 자체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웅장함이 느껴지는 건축과 집주인의 부유함을 짐작케 하는 세부 장식은 아름답고 조화롭기가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았다. 거기에 넓은 창밖으로 펼쳐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어우러져서…… 저택은 마치 그리스의 어느 언덕에 세워진 신전 같았다.
박물관, 혹은 오페라 하우스 로비처럼 화려한 회랑을 지나자 십자로 교차되는 복도가 나타났다. 거짓말 약간 보태서 복도 끝까지 걸어가려면 중간에 한번 쉬었다 가야 할 것처럼 길고 길었다. 겉에서 볼 때도 엄청나게 큰집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안에서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더 크고 넓었다.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은 비록 상종도 못할 깡패들이 우글거리기는 해도 최소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란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곳에서는 아무런 활기도,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한 점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권위뿐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자로 잰 듯이 걸어가는 젊은 의원 보좌관을 뒤따라가고 있는데, 저 앞쪽의 교차 지점을 가로로 스쳐 지나가는 일행이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은 우리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니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봤어?”
“응.”
“데니스 노튼 같던데…….”
같은 게 아니라 틀림없이 노튼이었다. 연방특수경찰이 여긴 무슨 일일까?
정문에서의 일로 루소 의원 같은 거물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절차 복잡하고 까다로운 일인지 몸소 체험한 직후라서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저 근엄한 얼굴의 베테랑 수사관이 우리처럼 억지로 밀고 들어왔을 리는 없고, 최소한 하루 전에는 약속을 정하고 왔다는 얘긴데…… 니콜라스 사건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일로 굉장히 바쁜 연방 수사관이 그런 번거로움을 무릅쓸 만큼 중한 사건이란 게 대체 뭘까? 비니도 나랑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은지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난 내 볼일만 보면 그만이야. 노튼의 일이야 노튼이 알아서 하겠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대꾸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궁금했다. 무슨 일일까? 니콜라스 사건 외에 또 다른 큰 사건이라도 있나?
보좌관이 우리를 안내해 간 곳은 미로 같은 복도의 막다른 곳에 자리 잡은 응접실이었다. 한쪽 전면이 유리인데다 창밖이 온통 자작나무 숲이라서 마치 쓸쓸한 초겨울의 숲속 한복판에 끌려 들어온 것 같았다.
“노튼이 뭣 때문에 왔을까?”
보좌관이 잠시 기다리라며 방에서 나가자마자 비니가 방방 떴다.
“루소하고 노튼이 엮인 일이면 엄청나게 큰일일 거야. 그렇지?”
이럴 때 맞장구치면서 분위기를 띄우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아지기 때문에 아무 관심도 없는 척 방안을 둘러봤다.
키 높이 정도의 벽난로에선 장작 타는 냄새가 향기롭게 풍겨 나오고 있었고 벽난로 좌우에 벌여진 책장은 따로 정리하는 사람이 없는지 최신 잡지부터 표지가 낡아서 떨어질 것 같은 옛날 책까지 두서없이 꽂혀 있었다. 이 방은 손님을 맞는 접대용 응접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주 이용하는 서재 같았다. 루소 의원의 서재라면 그는 꽤나 독서를 즐기는 사람일 터였다.
“누가 뭐래도 루소 의원은 정계 2인자니까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닥친 걸지도 몰라! 노튼은 연방경찰 중에서도 특수경찰이니까…….”
“니네 작은아버지한테 물어보지 그래? 맘만 먹으면 못 알아낼 정보가 없을 텐데?”
“작은아버지는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든.”
비니가 옆으로 바짝 다가서는 바람에 얼른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맞은편 벽엔 별 다른 장식 같은 게 없는 대신 벽면 전체에 대형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중세 기사와 시커먼 용이 한판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중세 설화가 주제인 모양인데…… 구도가 꽤 좋다.
“그 벽걸이가 마음에 드는가?”
갑작스런 말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는 안색이 파리한 초로의 신사가 서 있었다. 루소 의원이었다. 복장에 대한 규정이라도 있는 건지 문 앞의 경비원도 그랬는데……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했던 보좌관도, 그리고 루소도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넥타이까지도 검은색이라서 마치 상복 같았다.
“검은 용 바솔로뮤와 불멸의 기사 아이스의 대결 장면이라네.”
그의 말에 건성으로 보는 척했던 태피스트리를 다시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시커먼 용의 심장에 덩치 좋은 기사가 막 검을 내리꽂고 있었다. 심장에 검이 박힌 검은 용의 앞발이 기사의 허리를 금방이라도 잘라버릴 듯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가 인상적이었다.
“1946년 발굴된 스페인의 인드라 동굴 사원 천장화를 본떠서 제작한 명품이지. 그 벽화와 크기도 대충 비슷할 거야. 그건 그렇고…….”
루소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 노신사와는 완벽한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낯설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간 각종 대중 매체를 통해서 빈번히 봐온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노련한 정치가가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는 어떤 어색함이나 긴장감도 없었다.
“정문에서 차는 치웠나?”
“그럼요.”
비니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 루소의 첫 인상은 그의 집과 비슷했다. 키 크고 하얗고…… 엄숙해 보이는 것이 이 황량한 신전하고 딱 어울렸다. 루소가 짙은 갈색 소파에 기대앉으며 우리들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하얀 키톤을 걸치고 엄숙한 얼굴로 새 점을 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하고 비니가 소파에 걸터앉았다.
이 60대 후반의 정객은 대단히 보수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엄청난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대부호로 살았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이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젊었을 때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고 해도 그 나이쯤 되면 대부분 보수로 돌아서게 마련이었다.
어쨌든 내가 여기 온 목적은 하나였다.
“오웬이라는 남자를 아십니까?”
방문 목적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루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웬이라면 여러 명 알고 있지. 대통령 비서 오웬, 쿠간 시 서부 검찰청 검사 오웬, 영화배우 오웬, 내 별장 관리인 오웬…… 정확하게 어떤 오웬을 말하는 건가?”
“열흘 전에 의원님께서 경찰서에 신원 보증을 해주고 풀어주신 오웬 말입니다.”
“떠돌이 오웬 말이군.”
의원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자를 아시는군요.”
“왜 그를 찾나?”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다. 오웬이 산사람의 사람 목을 쳐버렸다는 말을 막 하려는데 비니가 험…… 하고 크게 헛기침을 하며 내 말을 막았다.
“이 친구 얘기는 그러니까, 좀 잔인하고 특이한 사건이었단 얘깁니다.”
비니가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상류층 언어로 순화시켜서 다시 정리하는 동안 나를 쳐다보는 의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자네가 그 새벽에 현장에 있었던 젊은이였군.”
“공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는군요.”
잠시 숨을 멈췄다. 또 다른 현장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 나도 현장을 목격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내 증언은 먹히질 않았다. 하지만 알렉산더 루소의 증언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믿을 거다.
비록 그가 현장 목격자가 아니라 해도 그 새벽의 결투에 대해 최소한 나만큼은 알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루소의 대답은 나를 상당히 실망시켰다.
“나도 뉴스에서 현장을 봤거든. 경찰이나 언론은 니콜라스와 자네가 공원에서 대판 싸운 것처럼 떠들더군.”
마치 니콜라스와 내가 공원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했다는 투다.
“자네 차에…… 총까지 현장 근처에 떨어져 있었으니까 무리도 아니지. 대체 그 새벽에 거긴 왜 갔었나?”
“그냥 우연히…….”
“많이 놀랐겠군. 다친 데는 없고?”
“오웬에게서 들으셨습니까?”
루소가 고개를 저었다.
“내게 얘기 좀 해주지 않겠나?”
“예?”
“그…… 새벽에 있었던 결투 말일세. 오웬은 그저 큰 고통 없이 떠났다고만 얘기하더군.”
콘웨이 공원에서 일어났던, 명백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루소 의원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말이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혹시 졸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반쯤 뜬 그 눈은 그 이상 감기는 일도 없었으며 남자가 오웬의 일격에 어떻게 무너졌는지에 대해 말할 때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루소 의원의 진지한 경청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잠이 덜 깨서 그런 소리한다는 둥, 무슨 약을 먹고 헛소리를 하느냐는 둥…… 심하게는 서장한테 목이 졸려서 아예 세상 하직할 뻔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다.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콘웨이 공원 사건이 하이라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오웬이 남자의 일격을 피해서 그의 등에 검을 내리 꽂는 장면이 눈앞을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힘없이 무릎을 꿇고, 검을 높이 들어올린 오웬이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목을 내리치고…… 평생 그 장면을 잊을 수 있을까? 내게는 이미 고통스러운 기억이 너무도 많다.
남자의 머리가 보도블록에 떨어지는 장면을 너무 상세하게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데 비니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루소 의원의 눈시울이 어느 틈에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안이 벙벙한데 루소 의원은 한술 더 떠서 안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서 한참이나 눈가를 꾹 누른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루소는 울고 있었다. 알렉산더 루소가 울다니…… 내가 루소 의원을 울리다니…… 놀라서 비니를 돌아봤는데 비니도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루소가 지난 번 대통령 선거에서 물을 먹은 건 철강회사 회장 시절에 주변 기업을 다 잡아먹은 공격적인 경영 스타일 때문이었다. 공약이나 정치적 입지는 상대후보보다 우세했지만 막판에 인간성 시비에 말려서 고배를 마신 셈이었다.
혈관에 헤모글로빈 대신 드라이아이스가 떠다닌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인정이라곤 없는 사람인데…… 이렇게 되니 큰 실수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랬군……. 그렇게 갔군.”
속으로 울음을 삼키느라 그런지 루소의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 있었다. 호락호락 우리를 집 안에 들인 데에는 무슨 까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공원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의원이 입고 있는 검은 양복은 진짜 상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이었군요.”
루소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오랜 친구였네. 멀리 떠나 있다가 얼마 전에야 돌아왔지.”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컨데 친구도 예사 친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러면 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의원님 친구가 그…… 죽은 남자가 확실한가요? 오웬이 아니고요?”
“그의 이름은 안드레아스였어.”
“제가 알기론 경찰에 오웬의 신원을 보증하고 살인 무기까지 쥐어서 내보낸 분이 바로 의원님이신데요?”
말 끝내기도 전에 비니가 내 옆구리를 확 찔렀다. 너무 놀라서 의원이 보는 앞에서 캑,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고개를 획 돌려서 노려보니 비니가 도끼눈을 뜨고선 손으로 모가지 날리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지난 번 선거 때 잘못했으면 대통령 될 뻔했던 거물한테 이렇게 덤비다니……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잠시 반성하고 있는데 다행히 루소는 별로 화난 것 같지는 않다.
“안드레아스가 내게 부탁을 했었네.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지.”
루소 의원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런 건 빈틈없고 노련한 정객의 얼굴이 아니었다. 경찰관 생활을 오래 하면서 나는 이런 얼굴을 많이 봤었다. 거짓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얼굴, 아무리 뛰어난 배우라도 그대로 흉내 낼 수 없는 얼굴이 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얼굴은 울지 않아도, 소리 지르지 않아도…… 이렇게 조용히 앉아만 있어도 속이 시릴 정도로 공허하고 서글펐다.
“안드레아스와 오웬 사이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두 사람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자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이야.”
아마, 루소 의원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오랜 친구 사이지만 얼마 전에야 돌아왔다고 했으니까…… 어쨌든 그 두 사람은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었다. 둘 다 요즘은 구경도 하기 힘든 장검을 지니고 있었고…… 대체 그런 걸 어디서 구한 걸까?
둘은 서로를 죽여버리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의지로 말끔하게 단장된 공원을 폐허로 만들어가면서 말 그대로 혈투를 벌였다. 루소도 그럴 줄은 몰랐으니까 오웬의 편의를 봐줬던 게 아닐까? 하지만 루소 의원은…….
“안드레아스가 어째서 자네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나?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고 싶어서였을까?”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안드레아스는 자네를 오웬이라고 생각했던 걸세. 그는 오웬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거야.”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니고…… 대체 뭐야??
“그럼…… 의원님은 오웬을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나도 몰랐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전직 다국적 기업 최고경영자에다 현직 대권주자를 상대로 진실 게임 같은 걸 벌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이렇게 나오면 나도 오기가 있다.
“그날…… 오웬의 전화를 받으셨잖습니까?”
“나는 오웬이란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은 일이 없네.”
거짓말…… 다섯 명이나 되는 불량배의 팔을 잘라낸 혐의로 경찰서에 연행된 다음날 아침에 오웬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루소 의원을 얼마나 매섭게 노려봤던지 비니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비니나 쫄았지 루소 의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웬은 루벳 거리에서 서점을 경영하고 있는 마리우스라는 남자에게 전화를 했었던 거야.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서 약속을 미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안드레아스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 같더군. 내 집에 전화를 한 건 그 마리우스라는 남자였네. 그 전화를 받고 나서 안드레아스는 굉장히 흥분했었어. 내가 말리지 않았으면 경찰서로 쳐들어가서 난동이라도 피웠을 거야. 내가 오웬을 본 건 어제 아침이 처음이었네.”
단서를 하나 건졌다. 마리우스라…… 루벳거리…… 가만, 어제 새벽에 오웬을 만났다고? 어디서?
“기절한 자네를 떠 매고 택시를 잡으려고 애쓰고 있더군. 등에 매고 있던 장검만 아니었으면 누군지도 몰랐을 걸세. 생각보다 훨씬 젊고 몸이 왜소하더군. 정말…… 그렇게 어려 보일 줄은 몰랐어.”
“예?”
루소 의원이 어제 새벽에 공원에 있었다니…….
“내가 안드레아스를 데려다 줬네. 공원 앞길까지…….”
루소 의원이 깊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눈을 감고 그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드레아스는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 그냥 돌아가라고…… 가는 내내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손짓을 했네. 어둠이 빨리도 그 뒷모습을 삼켜버리더군. 하지만 나는 내내 거기에 있었지. 그를 기다린 건 아니었어. 혹시나 하는 요행도 바랄 수 없었지. 오웬은 안드레아스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안드레아스도 더는 살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냥,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네. 공원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드레아스가 말한 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시간이 그렇게 길었던 적이 없었지.”
“그런 일이 생길 걸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루소 의원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깐이었고 의원이 손으로 이마를 짚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동도, 그의 고통도, 그리고 그의 슬픔도…….
“언제부터…….”
“안드레아스가 떠나던 날이 생각나는군. 그저 잠시 다녀오겠다고만 말하고 저 밖에 보이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지. 작은 가방 하나만 둘러매고 한나절 나들이라도 가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내가 할아버지께 회사를 물려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네. 날짜도 안 잊혀지는군. 11월 7일이었지.”
루소가 좋지 않은 생각이라도 떨쳐버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떠나더니 내가 결혼을 했을 때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또 내가 회사에서 은퇴할 때까지도 돌아오질 않았지.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기다릴 수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결국 그가 돌아온 건 지난봄이었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뭣 때문에 돌아왔는지 알 수 있었지. 두고 갔던 자기 검을 찾으러 온 거였어.”
죽은 남자는 아무리 많이 봐도 30대 중반에서 후반이었다. 날이 어둡고 정신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고는 해도 노인과 청년을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 물었나?”
루소 의원이 막 생각났다는 듯 되물었다.
“안드레아스가 돌아온 그날부터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고 있었네.”
아주 오랫동안 진실로 슬퍼해본 적 없는 사람의 깊은 슬픔이 그의 온몸과 이 응접실과 온 저택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딴 거 다 그만 두고라도 루소 의원은 어째서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던 걸까? 신분 노출이 걱정되었다면 익명의 신고도 얼마든지 가능했을 텐데…… 그랬으면 나는 그…… 니콜라스의 애인이라는 둥 하는 기분 잡치는 소리 듣지 않아도 됐을 거고, 샌드맨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을 테고, 두 달 정직에 두 달 감봉이라는 청천 날벼락 같은 징계도 먹지 않았을 거다.
“새벽에 오웬을 보셨다고 했는데, 그 후엔 어떻게 됐습니까? 그가 당신에게 접근했나요?”
“내가 그에게 다가갔지.”
“그래서 어떻게…….”
“그저…… 고통 없이 떠났다고 말하더군. 그뿐이었네.”
“오웬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짐작 가는 곳이 없으십니까?”
비니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루소 의원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공격적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애초에 여기까지 온 목적은 오웬의 행방을 알아내는 거였다. 여기서 몇 마디 주고받는 것으로 사건의 명백한 진상을 캐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찾아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일단은 질문을 몇 가지 해야겠죠. 궁금한 게 많으니까요. 그 친구 덕에 벌써 여러 사람 다쳤고, 칼 한 자루 믿고 그렇게 설치다간 본인도 조만간 큰 낭패를 당할 테니까 그냥 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루소가 어째서 우리를 자택으로 불러들였는지, 왜 이런 얘기들을 들려주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고, 또 루소 의원이 그 자신의 입으로 오웬을 만났다고 밝힌 이상 그의 행방은 알고 가야겠다.
“오웬은 자네들이 쫓아다닐 만한 사람이 아니야. 게다가 그 사건은 자네들 소관이 아닌 걸로 아는데?”
의원의 지적에 맡은 사건을 팽개치고 온 비니가 휘청했다. 정직 중이라 수사권도 없는 나는 옆구리를 한대 걷어 채인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담당이…… 없는 사건이라서요.”
비니가 대뜸 잡아뗐다. 자식, 이런 때는 순발력이 좋다.
“담당수사관이 좀 전에 다녀갔는데 무슨 소린가?”
의원의 대답이 정말 뜻밖이었다. 접수 처리도 되지 않은 사건에 담당수사관이라니…… 가만 있자 좀 전에 다녀간 수사관이라면…….
“빌어먹을!”
사건이 연방경찰에게 넘어가다니…… 분통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자 비니가 기겁을 해서 나를 잡아 앉혔다. 물론 나는 수사권의 이전 여부에 대한 가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연방경찰이 나설 만한 일이면 얼마든지 나설 수 있다. 좋다. 좋은데…….
“사람을 물 먹여도 정도가 있지……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벌컥 울화통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루소 의원은 흠칫 놀라서 옆에 놓여 있던 쿠션을 끌어안았고, 문 밖에 서 있던 보좌관이 두 명이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야…… 진정해.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진정? 진정이 무슨 뜻인데?”
나를 잡아 말리는 비니의 얼굴이 거의 울상이었다. 웬만한 일이면 그 얼굴을 봐서라도 진정을 하겠지만…….
“수사 시작하자마자 별것도 아닌 줄기에서 알렉산더 루소라는 엄청난 고구마가 달려 나오니까 이 자식들이 완전히 쫄았던 거잖아! 그래서 몽땅 한 통속에 돼서 사건은 귀신도 모르게 연방으로 넘기고 …… 날더러 뭐라고? 니콜라스를 만나고도 잡아뗀다고? 그런 모함을 듣고 다니는데도 말짱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덕분에 나는 샌드맨 자식이랑 한판 떴다가 두 달 정직이다.
“그래도 우선은 진정하고…….”
“너나 진정해!”
오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 뛰어가서 서장한테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 비니가 나를 눌러 앉히는 척하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가슴 한복판을 정통으로 찍히는 바람에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저희는 사건이 연방경찰로 넘어간 걸 미처 몰랐습니다. 의원님께서 솔직하게 대답해주시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 드리죠. 저희는 그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됐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보통 살인사건 처리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거든요.”
비니가 비틀거리는 나를 소파에 슬그머니 부리면서 나름대로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그 말투며 태도가 프란시스 몬티첼리하고 똑 같았다.
“보통은 그렇겠지.”
루소 의원이 소파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가슴팍을 쥐어뜯고 있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비니는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도 사람을 죽였다 살리는 놈인데, 이렇게 고의적인 기습을 당하고 보니 아파서 기절할 것 같았다.
“그 일로 연방수사관이 다녀갔다는 말씀만 미리 해주셨어도 저희가 이런 무례를 범하진 않았을 텐데요.”
비니는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끌고 이 저택에서 뛰어나갈 태세였다. 처음부터 비니는 여기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니가 말 끝내기도 전에 소파에 거꾸러져 있는 내 어깨를 소매가 뜯어져 나갈 정도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의원님 같은 분이 살인사건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도 그냥 방치해 두셨다니 좀 의외긴 하지만…… 뭐, 이젠 연방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죠.”
순순히 끌려오질 않자 비니가 있는 힘껏 멱살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비니한테 맞아서 그런 건지, 권력자 앞에서 쪽도 못 쓰는 말단 경찰 신세가 서글퍼서 그런 건지…… 아까보다 가슴이 더 욱신거렸다.
“그냥 방치했다는 혐의는 인정할 수 없군. 나는 말릴 만큼 말렸네. 화도 내보고 사정도 해보고, 나 죽을 때까지만 기다려줄 수 없겠느냐고 억지도 부렸지. 좀 더 완강하게 만류했었다면 안드레아스가 내 말을 들었을까?”
의원이 말을 멈추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검은 양복 때문인지 그 얼굴은 정말 창백해 보였다.
“60년을 살면서도 인생이 타 들어가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어. 안드레아스에게 어떻게 더 살아달라고 강요할 수 있었겠나?”
“그래도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야죠!”
버럭 소릴 지르자 놀란 비니가 황급히 내 입을 틀어막았다. 비니는 아까부터 공무집행을 심하게 방해하고 있다. 동료의 수사를 방해하는 사고뭉치를 응징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비니가 나한테 손을 깨물리고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변호사한테 물어보시면 알겠지만 살인 방조는 중범죄거든요!”
“세상엔 경찰이 간섭할 수 없는 일도 있어. 그리고 미리 말해 두지만 그 일로는 체포영장을 받아내지 못 할 거야.”
그의 말은 대부분 옳았다. 세상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고 경찰이 간섭할 수 없는 일도 있고, 신원도 분명치 않은 남자 두 명이 공원에서 결투를 벌인 일로 알렉산더 루소의 체포 영장에 서명할 만큼 정신 나간 판사도 없다. 루소는 말단 형사 두 명이 상대하기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거물이었다.
게다가 경찰이 이미 사건을 알고 있고 연방특경에 수사권을 넘겼다는 것까지 확인한 마당에 우리가 사건에 끼어들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노튼이 담당수사관이라면 오웬을 찾아내는 것도,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것도 노튼과 연방특경 소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소가 왜 이렇게까지 우리를 상대해주고 있었는지 그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나도 한번은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었네. 나는 평생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거든. 가끔은 벽에다 대고 혼자 떠들 정도로…… 오래 참았지.”
루소는 다시 슬픔에 잠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굳게 다물어진 그 입은 쉽게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고 나도 그를 그냥 두고 싶었다. 장마철 습기처럼 온 집안에 꽉 들어찬 우울함 때문에 피곤하고 힘들었다.
“일단 나가자.”
비니가 소매를 잡아끌며 나직이 속삭였다.
“저쪽은 정면 돌파가 안 되는 사람이야. 노튼이 그것 때문에 왔다 갔으면 우리 생각보다 일이 큰가 봐. 우선 정리를 좀 하자.”
비니의 주장은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었다. 반면 내 행동은 어설프고 어리석기만 했다.
되돌아 나오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어두웠다. 날이 저물 때는 아직 아니지만 확실히 좀 전보다는 더 흐렸다. 몇 걸음 앞서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남자는 이 저택의 집사라고 했다. 같은 직업을 가졌는데 분위기는 레빈하고 판이했다. 못생겼다거나 이상하게 생긴 건 아닌데 표정이 석고로 떠놓은 듯 굳어 있어서 실수로 웃기라도 하면 얼굴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짭새 노릇하면서 그동안 무서운 얼굴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 일을 반장하고 서장한테 어떻게 따질까……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걷고 있는데 비니가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세게 물지는 않았는데 흐르는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 떨어질 정도였다.
“그러게…… 입은 왜 막아?”
손수건 같은 거 안 가지고 다니는데…… 아니다. 나올 때 레빈이 빳빳하게 다린 손수건 한 장을 건네줬었다. 눈물을 닦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손수건으로 비니의 손을 감으면서 보니까 상처가 꽤 깊었다. 내가 아까 상당히 흥분했었나 보다.
“루소한테 그렇게 덤벼드는데, 그럼 가만히 구경만 해?”
“미리 신고만 했어도 사람 하나 살리고 나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저 영감이랑 오웬이 작당해서 그 남자를 죽인 것 같아!”
몇 발짝 앞서가던 집사가 흘낏 나를 노려봤다.
“그 남자가 먼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너한테 덤볐다면서? 오웬이 널 살려준 거라고 니 입으로 말했잖아! 그 자식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나 해. 그러고 나서 곧바로 체포를 하게 되더라도 말이야.”
그래야겠지. 루벳 거리. 서점주인 마리우스라고 했지? 그런데…… 루벳 거리 같은 홍등가에 서점이 있던가? 어쨌든 내일은 그쪽을 한번 뒤져보자. 실낱같은 단서도 놓칠 수 없다. 기어코 오웬을 찾아서…….
“게다가 이젠 우리가 나설 건덕지도 없잖아. 공조 수사도 아니고 연방경찰 소관이면 말 다한 거지. 설령 나설 자리가 있다고 해도 알렉산더 루소를 우리가 어떻게 해? 이런 사건은 누가 맡아달라고 바지자락을 붙들고 매달려도 도망치는 게 상책이야.”
“그래서? 사건을 덮어버리려는데 그냥 모른 척하라고?”
“정당방위잖아. 솔직히 말이야…… 너도 그 남자한테 총을 쐈다면서?”
손수건을 세게 잡아 묶자 비니가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정당방위인 줄은 나도 알아! 목숨 건져준 은혜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없었던 일로 그냥 덮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비니가 고개를 저었다.
“저런 거물이 연관된 일에 법적인 문제는 없어.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뿐이지. 우린 여기 못 끼어들어. 이 동네 규칙도 모르고 체급도 틀리단 말이야!”
고위층 출신이라 비니는 고위층을 상대하는 곤란함에 대해 일반인들보다는 아는 게 많다. 하지만…….
“이건 내가 직접 목격한 사건이야! 그러니까 내 사건이란 말이야!!”
“니가 길에서 주운 돈은 전부 니 거니?”
비니가 정원 쪽으로 한눈을 팔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비니는 아무 상관없겠지만 나는 입장이 다르다.
“콘웨이 공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게 확인되지 않으면, 나는 니콜라스랑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은퇴할 때까지 서에서 왕따를 당할 거야!!”
“……그것도 좋지 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비니를 획 돌아보니 놈은 창밖을 쳐다보느라 인사불성이었다. 밖에 뭐가 있는데? 그럼 그렇지…… 여자다. 정원을 산책하는 여인이라…… 뒷모습 죽이는데, 루소 의원 딸? 아니면 애인?
여자 뒷모습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냐. 이 한가한 놈아! 밉살맞아서 한대 쥐어박아주려고 손을 치켜드는데 문득 비니 손에 대충 감아 놓은 손수건이 벌겋게 젖어드는 게 보였다. 아직도 피가 멎지 않았나 보다. 이거, 병원에 가 봐야 되는 거 아닐까?
“누굴까? 되게 늘씬하다. 그치?”
슬그머니 다친 손을 들어 올려주는 걸 눈치도 못 챈 비니가 헤벌쭉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검은 가죽바지 입은 다리의 늘씬함이 거의 예술이었다. 뒷모습만큼 얼굴도 예쁠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여자가 우리 쪽으로 돌아섰다. 예쁘네. 그런데 왜 낯이 익지? 내가 저 여자를 어디서 봤나?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창에 붙어 서 있는 줄도 모르고 혼자 모퉁이를 돌아갔던 집사가 되짚어 돌아왔다. 나는 눈이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잔뜩 흐린 먹구름이 바다 쪽에서 몰려오는 중이라 이제 사방이 어둑하고 여자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터키석처럼 윤기가 도는 옥색 눈동자가 어째서 이렇게 똑똑히 보이는 걸까?
“저기…… 저 아가씨가 누군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비니가 음흉한 미소를 감추며 집사에게 물었다.
“저분은 아가씨가 아니라…….”
바로 그때, 저 여자가 누군지 생각났다.
“오웬이야!”
와장창…… 너덧 장의 유리 깨지는 소리가 먼 곳에서…… 아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내 몸이 온통 자잘한 유리조각 투성이였다. 1.5미터 아래 정원으로 내려설 때는 왼쪽 뺨이 아릿하다 싶더니 뭔가 뜨끈한 것이 한 줄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야! 너 어디가?”
비니의 갈라진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왔다.
알렉산더 루소의 정원은 온통 국화 천지였다. 이제는 반쯤 시들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낱낱이 흩어진 꽃잎이 사람 키보다 더 높게 솟구쳐서 한동안 떠돌다가 거의는 다시 바닥에 내려앉고 몇 장은 바람을 타고 먼 곳으로 날려갔다. 키 작은 난쟁이 국화가 잔디처럼 깔려 있는 쓸쓸한 정원 한복판을 거닐고 있는 사람은 오웬이었다.
오웬은 내가 창문을 박차고 뛰쳐나올 때부터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멀뚱히 서서 쳐다보기만 하더니 내가 점점 가까워지자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 넣은 것 같은 그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뛰다가 불현듯 생각난 건데, 나는 지금 총도 없다. 그나마 저쪽도 맨손이니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하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서 뻣뻣하게 서서 도망갈 생각도 별로 없는 오웬을 냅다 덮쳤다.
오웬의 날씬한 허리를 성공적으로 잡아채기는 했는데…… 나를 안고 넘어지는 그 등이 땅에 닿기도 전에 오웬의 손바닥이 내 턱을 밀어 쳤다. 그대로 목이 뽑혀져 나갈 듯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서 몸이 획 틀어지더니, 땅에 떨어질 때엔 내가 오웬에게 덮쳐진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생명의 은인에 대한 인사가 너무 거칠고 무례하군.”
내 목을 한 손으로 내리 누르면서 오웬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핥고 지나갔다.
나의 패인은 이 녀석이 얼마나 솜씨 좋은 싸움꾼인가 하는 것을 잠시 잊은 데 있었다. 비니가 시퍼렇게 멍들어가는 내 턱을 살펴보는 사이, 오웬은 새초롬한 얼굴로 집사가 가져다준 홍차를 홀짝거렸다.
“아야…… 거기 건들지 마…… 아파…….”
“이는 안 흔들리니?”
“응…….”
“딴 데는 다친 데 없고?”
특별히 심하게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은데…….
“온몸이 다 아파.”
“그나마 목이 붙어 있는 게 어디야?”
오웬이 찻잔을 탁자에 팽개치듯 내려놨다. 루소 의원도 안색이 안 좋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죽은 그 남자가 친한 친구라면서 울먹이더니…… 오웬을 집에 숨겨주는 건 대체 무슨 경우냐?
“저 친구한테 피의자 권리는 읊어줬어?”
“아니…….”
“그럼 내가 하지 뭐.”
비니가 오웬 쪽으로 돌아앉아 묵비권과 변호사 선임권에 대해 얘기해주려고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오웬이 손을 내저었다.
“그거라면 됐습니다. 일전에 들어서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까 우리를 안내해주던 그 집사가 얼음주머니와 얼음 조각이 가득 담긴 커다란 대접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내가 몸으로 창문을 때려 부수고 뛰쳐나가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집사는 아직까지 표정에 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지금 얼굴이 아까 보다는 낫다. 비니가 본격적으로 부어오르고 있는 내 턱에 얼음주머니를 갖다 대주면서 의연하게 경찰 공무를 수행했다.
“오웬 씨는 우리랑 같이 서까지 가 주셔야겠습니다. 일단 동행이지만 거부하면 체포하겠습니다.”
살인사건 용의자를 보고 그냥 못 본 척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비니는 처음부터 오웬에게 유감이 많았다. 뭐…… 오웬 역시 비니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 없고.
“그 얘긴 아까 그 노튼이란 사람하고 다 끝낸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오웬이 루소 의원을 쳐다봤다. 시선도 불손하고 말투도 건방졌다. 얘기라니…… 어찌 되었든 살인범인데 얘기만 몇 마디 해보고 그냥 가다니, 아무리 고위층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데니스 노튼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망이 크다.
“얘긴 그걸로 끝났습니다만 저 젊은이들한테는 이해시키기가 쉽지 않아서요.”
의원의 대답에 오웬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도록 얼음주머니를 턱에 붙이고 있자니 턱이 얼얼한 건 진통이 돼서 좋은데 손이 시렸다.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얼음 대접에 얼굴을 통째로 담그려는데 오웬과 눈이 마주쳤다. 오웬이 시선을 루소 의원에게로 돌렸다.
“자리 좀 피해주시겠습니까?”
오웬의 부탁에 루소 의원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이제 곧 밖에는 비가 올 것 같았다. 사방이 어둡고 고요한데 들리는 소리라곤 벽난로에서 참나무 장작이 탁탁 터지는 소리뿐이었다. 일부러 조명을 죽여서 실내는 컴컴했다. 흔들리는 불빛을 받으며 아까 봤던 태피스트리를 등지고 앉아 있는 오웬의 모습은 경찰서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달랐다.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가 나를 쏘아보는 시선도 아까 하고는 좀 달랐다.
“내가 갔을 때 안드레아스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총을 많이도 맞았더군요.”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얘기가 이렇게 시작되니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 새벽에 내가 그 남자…… 안드레아스를 죽이지 않았던 건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죽지 않던데요?”
내 시무룩한 대꾸에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이 죽였어요.”
“날이 시퍼렇게 선 장검으로 그 남자의 목을 내리친 건 내가 아닙니다.”
“하지만 기막힌 총 솜씨로 그에게 결정타를 먹였죠.”
비니가 내 얼음 대접을 들고 가더니 얼음 녹은 물을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자식 말이 사실이야?”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건 빗나갔어.”
오웬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당신이 쏜 총알은 단 한발도 빗나가지 않았어요. 더구나 최후의 일격은 안드레아스의 오른쪽 귀 뒤쪽에 명중했죠. 덕분에 머리 왼쪽이 거의 날아가버렸고 왼쪽 눈동자까지 오간 데가 없었어요. 당신에겐 잘 안 보였을 수도 있겠군요.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끔찍했으니까. 당신은 내가 만난 최고의 명사수였어요.”
“결국…… 시체의 목을 잘랐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내가 목을 베지 않았어도 안드레아스는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 상처를 입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혹시 하이랜더라면 또 모를까…….”
오웬의 말투가 심술궂었다. 그 보석 같은 눈동자를 쳐다봐도 잘 모르겠다. 그의 말이 사실인 것도 같고 거짓인 것도 같았다.
할 말을 잃고 그때 일을 떠올리며 망연히 앉아 있는데 비니가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울적하게 말했다.
“너한테 묵비권 있는 거 너도 알지?”
노튼이 정당방위인 것을 인정하고 갔다는 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사건을 어째서 대외비에 부쳤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연쇄살인범 탈출 사건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때 그 사건까지 보도되는 건 원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경위야 어찌되었건 경찰관 총에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쪽도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 하더군요.”
어느새 입장이 바뀌어서 이제 오웬이 나를 살인범 취급하고 있었다. 그랬었군. 니콜라스 사건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이는데 그런 엽기적인 사건까지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곤경에 처했을 테니까……
“손은 어쩌다 그런 겁니까?”
비니의 상처 얘기였다. 피는 멎었지만 손수건이 온통 검붉게 말라 가는 핏자국 투성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크게 다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웬이 좀 보여 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데 그 태도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비니가 오웬에 대한 적대감도 잊어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손을 쥐어줬다.
“물렸군요.”
상처를 풀어 본 오웬이 나를 지그시 노려보며 진단을 내렸다. 내가 그랬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괜찮을까요?”
비니가 엄살을 피웠다.
“일단 피는 멎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당신…… 위험한 파트너를 뒀군요.”
“이 도시에서 제일 그렇죠.”
비니의 천연덕스러움에 할 말을 잃었다. 비니가 친 사고 중에 편의점 간판 추락사고 같은 건 TOP 10 안에도 안 들어간다. 살인용의자를 추적하느라 낡은 아파트 외부계단을 타고 뛰다가 발을 헛디딘 비니한테 떠밀려서 난간 밖으로 떨어진 사건도 등수로 따지면 5등 정도에 불과했다. 밀려 떨어진 게 7층이었고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잡은 TV안테나 전선 겸 빨랫줄은 2층에 있는 거였다.
그래도 그 사건은 뉴맨 신용금고 사건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얼빵한 은행 강도 두 놈이 은행을 털러 들어갔다가 문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경찰에 포위된 사건이었는데…… 이런 경우 은행 안에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은행 강도는 곧장 인질범이 된다. 한 놈은 벌써 경비 손에 총알 밥을 먹은 상태였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었는데, 나머지 하나가 만만치 않았다.
그 망할 자식이 인질로 잡은 건 하필이면 대여섯 살짜리 아이 둘과 함께 있던 가정 주부였다. 재판 때 주장하기로는 아이들까지 인질로 삼을 의도는 없었다고 떠들었지만 어쨌건 엄마가 강도들한테 끌려서 은행 금고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아이들도 울면서 금고 안으로 따라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3중의 보안벽과 특수 자물쇠와 컴퓨터 보안 시스템을 자랑하는 금고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설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았다. 비니가 등 뒤에 있으면 더 그렇다. 그때 비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다. 철컥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문은 이미 닫힌 후였고 웬만한 주택 거실만한 금고 안에는 인질범과 심약하게 생긴 30대 여자…… 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두 명의 아이들과 나뿐이었다.
나는 다섯 시간 동안 인질을 잡고 있는 강도 놈 머리에 총구를 조준한 채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금고 문이 열린 것은 고장 난 자명종처럼 쉬지도 않고 울어대던 아이들이 목이 쉬어 더 이상 울지도 못하고 꼬박꼬박 졸기 시작할 때였다. 한번 잠기면 다섯 시간 안에는 어떻게 해도 절대 열리지 않는 특수금고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지금도 어디서 애 우는 소리가 들리면 머리가 아프다.
“댁도 일전에 비니한테 된통 당했던 걸로 아는데요?”
일일이 따지기도 치사하지만 그런 일을 1년 6개월 동안 당하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손등 한번 깨문 걸로 비니한테 위험한 놈 취급 받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내가 한 눈을 판 탓이었어요. 당신을 보고 있었거든요.”
오웬의 대답에 비니가 실실 웃었다.
“그만 가자!”
벌떡 일어서서 비니를 재촉했다. 하지만 비니는 뭔가 아쉬운 눈치였다.
“벌써?”
“그럼 여기서 살래? 저녁때 다 됐어! 중요한 임무가 있다면서?”
내 채근에 비니가 마지못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애초에 여기까지 왔던 목적은 오웬을 찾는 거였다. 하지만 찾아 놓고 보니 결과도 허탈하고 기분도 찜찜했다.
“혹시…….”
되도록 실망하는 기색 보이지 않고 나가려는데 오웬이 나를 불러 세웠다.
“라두칸을 압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니까…… 요즘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오웬이 나를 위아래로 또 한 차례 훑었다. 영혼의 내면이라도 찌르고 들어올 것처럼 날카로운 눈초리였다.
“이 도시에 아직도 볼 일이 남았습니까?”
“꽤 오랫동안 찾아다닌 사람인데 어쩌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그 사람도 죽일 건가요?”
내 마지막 질문에 씁쓸하게 웃는 걸 보니…… 죽일 생각인가 보다.
“너무 실망하지 마.”
비니가 나를 위로했다.
“응…….”
“나중에 니콜라스가 잡히면 다 밝혀질 거야.”
“그렇겠지.”
“지금은 다들 힘들고 피곤해서 그렇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럴까?”
내가 시경 짭새들의 인간성을 모르냐? 이 상태로 며칠이 더 지나면 나를 뜯어 먹으려고 덤빌 거다.
“정직을 먹은 게 이럴 땐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야. 그치?”
고개를 들어서 힘없이 비니를 노려봤다. 비니는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딴전을 피웠다. 막 차에 올라타려는데 비 대신 눈발이 한두 송이 흩날렸다. 첫눈으로는 많이 이른 편이었다.
“가는 길에 델 파소에 들렀다 가자.”
비니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말했다. 그 동네에서 온 호출이었나 보다.
델 파소는 쿠간에서 제일 골치 아픈 빈민가였다. 백인, 흑인, 아시안 중에 제일 재수 없고 팔자 더러운 인간들만 모여 사는 음침하고 위험한 동네로, 주민 절반은 실업자고 나머지 절반은 범죄자였다. 비니는 그런 동네에 쓸 만한 정보원을 꽤 확보하고 있었는데 비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게 그런 재주가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거긴 왜?”
“키누한테서 메시지가 왔어. 그 동네 근처에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알려달라고 부탁해 놨었거든.”
“콘웨이 요양소 환자들?”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