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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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이었다.

10대의 히스패닉 불량배 놈들하고 그 한주 내내 숨바꼭질을 하고 난 터라 한 걸음 옮기기도 짜증날 정도로 피곤했다. 4주 전에 발생한 데릭 앤 소여사의 무기 수송 트레일러가 차량째 도난당한 사건 여파로 제조번호도 없는 총기가 하루에도 10여 정씩 적발되는 상황이었고, 그중 절반의 출처가 시 외곽을 어슬렁거리는 10대 애 녀석들 주머니였다. 무기 절도범이 파격적인 창고 세일이라도 벌였던지 소음기까지 달린 최신 모델이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는 애들 장난감이 되어버린 이번 사태는 경찰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날 아침 뉴스에 연방경찰이 무기 탈취범을 검거했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연방경찰만 용 됐지 이미 시중에 풀려버린 총기 회수는 순전히 지역경찰 몫이었다.

일주일간의 밤낮 없는 검문검색에 집에 전화 한통 할 시간이 없었고, 신발 밑창도 벌어져버렸고…… 지난밤 억세게 반항하는 덩치 큰 깡패 놈에게 수갑을 채우려고 몸싸움을 하다가 어깨가 빠져버린 파트너 러셀의 병문안도 가야 했다. 집에 전화를 할까, 새 신발을 사러 나갈까, 아니면 러셀에게 가 볼까…… 잠시 멍하게 앉아 있는데 물 찬 제비처럼 빼입은 비니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어딘가로 바삐 전화를 걸었다.

비니는 요즘 무슨 연쇄살인사건에 투입돼서 모든 동료들의 부러움과 시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중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서장 비서 크롬웰과 찰싹 붙어다니는 걸 며칠 전에 봤는데 얼핏 보기에도 꼭 데이트 중인 연인 사이 같아 보였다. 쥬드 크롬웰은 돌부처라도 넋이 나갈 정도의 미인인데다, 대책 없는 사고뭉치라는 본색을 모르고 보면 비니도 꽤나 젠틀한 이탈리아 미남이었다.

피차 바빠서 얼굴 마주친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는 험한 뒷골목을 헤집고 다니느라 발바닥이 부르틀 지경인데 한 벌에 몇 천 불씩 하는 최고급 정장 차림으로 크롬웰 같은 미인과 한가롭게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의 뒤통수를 한대 쥐어박아주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법적인 책임은 전혀 없는 거죠?”

별로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바로 옆자리라서 그냥 다 들렸다. 비니가 자기 변호사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야 노상 있는 일이었다. 비니 주변엔 사고가 끊이질 않고 그때마다 비니는 변호사에게 전화해서 정황 설명을 하고 끝에 가서는 법적인 책임 여부를 물어보곤 했다. 「제리 카이거 수영장 추락사건」이후론 몇 주 잠잠하더니…….

제리는 바로 최근까지의 비니 파트너였다. 발단은 그냥 흔한 폭력 사건이었다.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비니와 제리가 마주친 상대는 술과 약에 곤죽이 되어 난동을 부리던 40대 남자였다. 그런 경우는 말도 안 통하고 경찰배지도 무용지물이었다. 수갑을 채워가라고 순순히 손을 내밀 리도 없고, 그렇다고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총질을 해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둘은 죽을 고생을 해가면서 남자를 일단 집 밖으로 끌어냈다.

사람이 약에 취해 돌면 엄청나게 기운이 세지기 때문에 두들겨 맞던 남자의 아내는 벌써 혼수상태였다. 남자를 집 밖으로 끌어내 놓고 제리가 부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사이에 비니가 얼마나 고생 했을지는 안 들어도 한편의 액션 영화였다.

비니는 천신만고 끝에 남자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나머지 수갑 한쪽을 마당 잔디밭에 깔린 스프링클러 파이프에 채우려고 정말 애썼다. 하지만 미친 곰처럼 날뛰는 남자의 일격에 턱이 부서질 정도로 얻어맞은 비니가 그만 남자를 놓쳤고, 남자는 그대로 차고 앞에 세워 놓은 자신의 지프에 올라탄 후, 비니를 깔아뭉개려고 돌진했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때 제리가 부인에게 응급조치를 하고 안뜰로 뛰어나왔다. 바깥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제리가 돌진하는 차에 깔릴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몸을 날려서 제리를 옆으로 밀친 비니의 행동이 경찰 무공훈장감이었다는 건 인정하자. 옆으로 밀쳐진 제리가 무사하고 비니가 차에 치어 부상을 당했다면 그 일은 각종 일간지 사회면에 실렸을 테고 비니는 최소한 한 달은 다른 경찰관 부인들이 구워준 쿠키를 먹어가며, 각지의 어린이들이 보내준 위문편지를 읽어가며 꿈같은 병원생활을 즐겼을 터였다. 그러나…… 운수불길하게도 제리는 옆에 있던 깊이 1.5미터짜리 물 빠진 풀장으로 밀려 떨어져버렸고 비니를 덮치던 지프는 갑자기 시동이 꺼져서 비니 턱밑에서 멈춰 서고 말았다. 어깨뼈가 박살난 제리는 전치 10주 진단 받고 아직 병원에 있다.

근무 파트너들의 말로가 다 그와 같이 비참하기 때문에 파트너를 구하기 힘들어서 비니는 할 수 없이 요즘은 혼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며칠 전부터 크롬웰이 서장 허가 하에 비니의 손을 빌리는 중이었다. 한동안 사고 없이 잠잠하다 했는데 이번엔 누굴까…… 생각하다가 어떤 불길한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일어섰다. 이 자식이 설마 크롬웰을……?

“……그러니까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죠? 집 주인은 구두 계약을 했다고 믿는데…… 혹시 사기죄로 고소당할 위험은 없을까요?”

구두 계약? 사기? 내용이 참신한데?

“……그럼 다행이네요. …… 아니, 절대 안 돼요! 작은아버지한테는 아무 말 하지 마세요!!”

비니 작은아버지 얘기가 나오면 경찰은 어떤 일이나 궁금하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끊고 넥타이를 풀고 있는 비니에게 넌지시 물었다.

“별 일 아니야.”

니네 작은아버지 관계된 일 중에서 별 일 아닌 일이 하나라도 있었냐?

“그냥…… 45번가에 있는 저택 한 채를 200만 달러에 구매하기로 구두계약을 했는데, 법에 걸리는 일인지 궁금해서 집안 변호사한테 물어본 것뿐이야.”

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는지 비니가 주섬주섬 오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요즘 비니가 아르마니 정장 차림으로 하는 일은 크롬웰과 분담해서 연쇄살인 용의자네 집을 위장 방문하는 일이었다. 본래 두 집씩 나눠서 방문하기로 했는데 크롬웰이 첫 집을 방문하고 옆길로 새는 통에 남은 세 가구를 비니 혼자서 돌았고, 마지막 집 주인이 비니가 부른 집값에 반색을 하며 달려드는 바람에 집안에 끌려 들어가서 두 시간 반이나 부동산 시세 상담을 하고 돌아온 것까지…….

“그래서 계약서를 썼단 말이야?”

“내가 부동산 계약 서류가 어디 있어? 일단 구두로 계약하고 사무실에서 서류 갖고 다시 온다고 얘기하고 도망 나왔지. 그렇게라도 안 했으면 아직도 그 집에 잡혀 있었을 거야. 내 생각엔 그 영감이 범인인 것 같아!”

비니가 이를 갈았다.

“니네 작은아버지 얘긴 뭐야?”

“변호사가 정 귀찮게 굴면 작은아버지한테 말해준다고 해서…… 그러지 말라고 한 것뿐이야.”

그런 거면 정말 별 일 아니네.

“그건 그렇고…… 딱총 수거는 잘 돼 가?”

“일사천리로…….”

“다행이네.”

“앞으로 740개만 더 찾으면 돼.”

비니가 하품하다 놀라서 딱 소리를 내며 입을 닫았다.

그래, 집에 전화부터 하자. 그러고 보니 지난 화요일이 위니 생일이었다. 막 수화기를 드는데 헨슨이 비니에게 다가왔다.

“서장님 호출이야. 모델 양반.”

신호가 간다. 화가 많이 났을 텐데 이 일을 어쩐다. 러셀의 어깨뼈가 빠진 게 하필 화요일이었다. 그 사건만 없었으면 그렇게 까맣게 잊지는 않았을 거다. 세 번…… 네 번…… 자나?

“서장님이? 무슨 일로?”

“무슨 일이겠어? 안개 속의 연쇄살인범 말이야. 듣기론 크롬웰은 두 번째 남자를 찍었다던데?”

일곱 번…… 여덟 번…… 아홉 번…… 쇼핑이라도 나간 걸까?

“그 남자는 아니야. 팔자 늘어진 바람둥이 백만장자가 왜 그런 짓을 해?”

“여자의 직감은 무서운 거야.”

“직감이고 뭐고 우린 그 남자 만나지도 못했어. 일이 바쁜지 집에 있을 때가 없더라고.”

열네 번…… 열다섯 번…… 혹시 친정에 간 거 아냐?

그만 수화기를 놓으려는데 열여덟 번째 신호 끝에 달그락하며 저쪽에서 수화기가 들렸다.

「제이?」

왠지 감이 멀어서 위니가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막 대답을 하려는데 헨슨이 내 등을 툭 쳤다.

“너도 호출이야. 비니랑 같이 가 봐.”

경찰서 출근 첫날, 바로 이 방에서 다른 동기들과 서장에게 경찰관의 자세와 책임과 위험에 관해 훈시를 들었었다. 그 이후 4년간 표창 두 번, 징계 3번…… 다 합쳐도 내가 서장실에 들어와 본 건 10번이 채 못 된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요즘은 상 받을 일도 없고 징계 먹을 일도 없었다. 왜 나를 불렀을까?

바짝 긴장하면서 비니를 따라 서장실에 들어서니 베르히만 서장과 강력 A-5반 반장인 론 마키바, 최근 10년간 다수의 미해결 강력사건을 해결해서 쉴 새 없이 매스컴을 타며 명탐정으로 부각되고 있는 아멜 굽타…… 등이 나를 맞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건 역시 크롬웰의 부드러운 미소였다.

“앉게.”

서장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면서 자리를 권했다.

크롬웰이 차를 한잔 내왔다. 빛깔이 맑은 청색인 것을 보니 커피는 아니고…… 달콤쌉싸름한 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것으로 미루어 맛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셔도 별일 없을까? 1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크롬웰이 내준 차를 마신 서장의 손님들이 날아서 돌아갈 뻔 했던 일은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데 서장이 자기 책상에서 일어나 내 앞에 와서 앉았다. 나머지도 서장 양 옆으로 좍 벌여 앉으니 모양새가 1:5의 대결 구도처럼 되어버렸다. 용건이 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일방적인 대화가 될 터였다.

크롬웰이 그간 따로 조사해왔다는 연쇄살인사건에 대해선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금발미인의 취미생활로는 특이하지만 한두 가지 특이한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일로 놀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경찰 서장 비서라는 직업이 그다지 위상 높은 일은 아니지만 그녀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겐 상당한 이점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크롬웰은 방대한 강력사건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소스들을 추리고 분석해서 몇 개의 연결 조각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만 개의 퍼즐조각을 헤집다가 맞는 짝을 발견한 경우처럼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최근 30년간 잠자고 있던 수천 건의 미해결 강력사건 중에서 그녀가 찾아낸 조각은 열다섯 개였다. 컴퓨터를 이용했다는 것과 데이터가 엄청나게 방대하다는 점만 빼면 아주 고전적인 추리 방식인 셈이었다. 물론 천재에게나 가능한 방식이기도 했다.

서장은 이곳이 자기 방이니까 당연히 여기 있는 거지만 아멜 굽타가 와 있다는 것은 크롬웰의 연쇄살인 시나리오가 가설 단계를 지나 검증까지 마쳤다는 의미였다. 최소한 열다섯 건의 완전범죄를 저지른 천재…… 혹은 미치광이가 이 도시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흥분을 맞본 것이 나 혼자뿐일까?

서장의 요구는 예상했던 대로 일방적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가 어떤 식으로 팀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어도 나는 기꺼이 승낙했을 거다.

잠복은 한 달 가까이나 계속됐다. 그토록 교묘한 연쇄살인범이라니 일이 쉽지 않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헛다리를 짚었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한 달간 밤낮 없이 저택 주변을 맴돌고 쓰레기통 뒤지고 가사도우미에게 웃돈 쥐어주며 사생활 캐내고…… 용의자가 일본 출장 간 사이에 지하실부터 다락방까지 이 잡듯 뒤졌지만 그에 관해 알아낸 것이라곤 고급 브랜드의 옷이 아주 많다는 것과 골동품 수집이 취미라는 것…… 그리고 자외선 알러지가 좀 심하다는 것뿐이었다. 생각다 못한 비니가 용의자가 자주 가는 회원제 클럽에 바텐더로 위장 취업까지 했지만 아직까지 그와 말도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나날이 칵테일 실력만 일취월장하는 판이었다. 쥬드가 지목한 남자, 니콜라스 헤슬렘이 정말 우리가 쫓고 있는 악마일까? 그런 의구심이 드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나마 한 달을 참아낸 것은 평소 우러러보기도 아찔했던 대수사관 굽타와 한 팀으로 일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굽타도 쥬드의 육감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까만 후배 수사관 앞에서 드러내놓고 내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좁은 차안에서 이런 저런 얘기로 시간을 죽이며 한 달 정도 보내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일이 있게 마련이었다.

“오늘 그자가 나한테 말을 걸었어.”

비니가 차 뒷문을 열고 머리를 디밀었다. 취직한 지 거의 보름만의 희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보다는 비니가 들고 온 음식 꾸러미가 더 반가웠다. 주급을 받았나 보다. 지난주에도 비니는 클럽에서 주급을 받았다면서 초밥이며 튀김 같은 걸 한 보따리 사 들고 왔었다. 이번엔 중국 음식인데 아직도 따뜻했다.

니콜라스가 말을 걸어왔다는 소식은 들은 척도 않고 걸신들린 듯 음식 포장만 열심히 뜯자 비니가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칵테일 만들다 손이 미끄러워서 술병을 깨뜨렸거든…….”

“또?”

굽타와 내가 동시에 비니를 쳐다봤다. 도대체 그동안 깨 먹은 술병이 몇 개냐? 사건이 빨리 일단락되지 않으면 클럽이 거덜나겠다.

“그래서 지배인한테 잔소리 듣고 있는데…… 그자가 다가왔어.”

“와서 뭐랬는데?”

잡채를 한입 가득 밀어 넣으면서 내가 물었는데 솔직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칵테일 한잔 만들어 달라면서 싱가폴 슬링을 주문했어. 운이 좋았지. 내가 그거 만드는 법은 확실히 알거든.”

그럴 줄 알았다. 손님이 바텐더한테 할 말이란 게 다 그렇지…….

“듣고 보니 나도 술 한 잔 하고 싶군.”

굽타가 젓가락으로 위태롭게 탕수육을 집어 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비니가 기다렸다는 듯 안주머니에서 양철 술병을 끄집어냈다. 둘 중 하나는 운전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비니가 준비해온 잭 다니엘스를 존경하는 선배에게 두말없이 양보하고 도어 포켓에 세워 놨던 물병을 집어 올렸다.

“싱가폴 슬링을 한 모금 마시더니 어떤 재료를 썼냐고 묻더라고. 재료야 빤하잖아? 어쨌건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붙들고 말을 시켰지. 사업 얘기…… 여자 얘기…….”

“설마 사회 문제 같은 걸 떠들진 않았겠지? 꼭 연쇄살인범 얘기가 아니라도 말이야.”

굽타가 향기 좋은 술을 한 모금 홀짝 들이키면서 물었다.

“그럴 리가요. 여자 얘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는데요. 친구 분을 기다리느냐고 물어보니까 좀 있다 나가서 만날 거라고 하더라고요.”

엘라 칼리코바는 니콜라스 헤슬렘과 2년째 데이트하고 있는 늘씬한 슬라브 미인이었다. 그녀는 전직 모델에 시내에 뷰티 숍을 여섯 개나 가지고 있는 사업가이기도 했다. 크롬웰이 벌써 전에 대부호의 망나니 정부처럼 꾸미고 가서 그녀와 몇 시간이나 수다를 떨다 왔는데 역시 건진 건 없었다. 지금 집에 둘이 같이 있다.

“아무리 봐도 정신병자 같아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렇게까지 정상적인 사람도 연쇄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건가요?”

“신사던가?”

“완벽하게요.”

굽타가 탕수육 상자를 내려놓고 다른 꾸러미엔 뭐가 있나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젠 심란한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쥬드 크롬웰의 가설이 그저 가설일 뿐이고 우연히 아귀가 맞아 떨어진 엉터리 퍼즐이라면 그건 좋다. 하지만 최소한 십 수 년에 걸쳐 연쇄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 자행된 것이 분명하다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굽타 같은 베테랑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일 터였다

“자네가 주로 얘기하고…… 그는 듣는 입장이었나?”

굽타가 봉지 맨 아래 쪽에서 만두 꾸러미를 찾아 들었다.

“주고받았죠. 제 칵테일 솜씨를 칭찬했어요. 특별한 비법이 있느냐고요.”

“언제 나도 가서 한잔 마셔 봐야겠군.”

“자기 옛날 친구랑 닮았대요.”

“자네가? 아니면 칵테일 솜씨가?”

굽타는 왕만두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갑자기 좁은 차안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수사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선배님?”

입안에 든 만두를 다 씹어 삼키도록 기다려서 내가 의견을 묻자 굽타는 고개를 한번 갸웃하곤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왜? 다른 용의자라도 있나?”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한 번 더 검토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자는…….”

“너무 완벽하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굽타가 술병에 뚜껑을 덮어서 비니에게 돌려주고는 흠…… 헛기침을 했다.

“너무 완벽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나?”

……모릅니다.

“완벽하게 위장하고 있다는 뜻이야.”

굽타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럼 크롬웰의 직감이 맞다는 겁니까?”

“난 직감 따윈 몰라. 하지만 니콜라스 헤슬렘은 알면 알수록 수상해.”

머릿속에 입력된 헤슬렘의 이력을 재빨리 살폈지만 굽타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사업가로써, 그리고 한 인간으로써 큰 잘못 안 하고 순조롭게 살면 수상한 건가요?”

“헤슬렘은 이제 40대 중반이야. 나랑 비슷한 나이지. 남자가 이 나이 되도록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친구도 많지만 그만큼 적도 많은 법이야.”

굽타도 헤슬렘을 의심하고 있었다니 나로선 의외였다. 분명히 뭔가 마뜩치 않은 기색이 엿보였는데…… 내가 잘못 짚었던 걸까?

“이자는 그런 게 없어. 백만장자에, 미남에, 독신에, 늘씬한 여자 친구에…… 주변을 아무리 캐고 다녀도 잡히는 게 전혀 없잖아? 5년 전에 과속 한번 한 게 유일한 위법 사례야. 형사 생활 18년에 이렇게 깨끗한 프로필은 처음 봐. 요즘은 TV시트콤 주인공도 그렇게 못살아.”

“하지만 저희 이모님도 교통 신호 위반 딱 2번하고 지금까지 모범적으로 살고 계신데요.”

바텐더와 손님 관계로 잠깐 얘기하다가 정이라도 들었는지 비니가 편을 들고 나섰다.

“자네 이모님은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아니잖아.”

굽타가 비니를 점잖게 타이르고 말을 이었다.

“난 여태 많은 사건을 다뤄왔어. 거의 대부분 살인이었지. 우발적인 범행도 있었지만 계획범죄가 훨씬 많았어. 이건 자네들한테 도움이 될까 해서 해주는 조언인데…… 완벽한 건 위험한 거야. 특히나 이번 경우는 얼마나 위험할지 감도 안 잡혀.”

말을 마친 굽타의 얼굴에서 익히 봤던 절망적인 표정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굽타도 내가 자기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입가에 쓴 웃음을 떠올리며 속내를 털어놨다.

“보면 볼수록 나는 그자가 무서워. 거기…… 술 좀 더 줘 봐.”

비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굽타에게 술병을 건네줬다. 나로 말하면 떨떠름한 정도가 아니었다. 굽타와 파트너로 일하면서 나도 그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걸 지켜봤고, 사적인 전화를 도청했고, 집안을 수색했고,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느낌이 전혀 안 들었을까?

40도짜리 위스키가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가자 굽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약간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네 말대로 수사 방향을 바꿀 필요는 있어. 100년을 지켜봐도 이런 식으론 놈을 못 잡을 거야.”

“미끼?”

쥬드 크롬웰의 제안에 굽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무작정 지켜보면서 헤슬렘이 사고치기를 기다리느니 우리가 나서서 사고를 만들어주자는 제안은 한 달 반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차 안에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던 내 귀에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크롬웰?”

서장이 크롬웰의 입에서 말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를 닦아 세웠다. 서장은 일선에서의 잠복근무가 어떤 건지 기억도 안 날 거다.

“그자에겐 자기만의 소굴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어떤 숨겨진 장소가 있어요. 자기 집 부엌에서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고 뇌수를 파내진 않을 테니까요. 우린 그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자하고 관계있는 부동산 중에서 아직도 못 뒤져본 곳이 남아 있나?”

“아니오.”

서장이 물어보나마나 서류상 확인 가능한 곳은 다 뒤져봤다. 헤슬렘의 회사도 옥상부터 지하 보일러실까지 다 살펴봤고 회사 소유의 공장 세 곳이랑 창고 다섯 곳…… 그의 저택…… 별장…… 약간 거짓말 보태서 그자의 어머니 무덤만 빼곤 다 뒤집어엎었다.

“그럼 자네가 잘못 짚은 게 아닐까?”

크롬웰이 서장을 도전적으로 쳐다봤다.

“자네도 실수할 때가 있는 거야. 육감 타령 이제 그만하고 다른 쪽도 알아봐. 어차피 장기간에 걸쳐 일어난 범죄니까 한두 달 안에 결판날 거라고 기대도 안 해. 단지, 한 가지 가능성에 집착하느라고 또 다른 가능성을 지나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라네.”

비서 파워에 눌린다는 소리 들을까 겁이 나는지 서장이 상당히 세게 나갔다.

“찍기는 제대로 찍었습니다. 서장님.”

굽타가 크롬웰을 두둔하고 나섰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나?”

굽타의 의견에 서장의 태도가 확실히 누그러들었다. 서장이 평생 여기저기서 받은 감사패와 공로패 중 절반은 굽타 덕분에 얻은 것들이었다.

“근거가 있으면 벌써 잡아 들였죠.”

“자네까지 왜 이래? 육감 얘기라면 이제 듣고 싶지 않아!”

“그자는 보통 이상으로 치밀합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사람 같지도 않을 정도예요.”

“여기가 무당집이야? 여긴 경찰서야! 법원에서 그런 식으로 영장을 발부해줄 것 같아? 베네딕트 판사가 술은 좀 많이 마시지만 아직 돌진 않았어!”

서장이 벌컥 짜증을 내며 자기 책상에 가서 앉았다. 갑자기 소릴 지르는 통에 방심하고 있다가 간 떨어질 뻔했다.

“감 좋은 자네들 말이 맞다고 쳐! 그자가 범죄 역사에 길이 남을 흉악범이라면 더더욱 안 될 말이야. 다른 놈도 아니고 인간 백정 같은 연쇄살인범 앞에 미끼를 들이밀자니…… 내가 자네들 상관으로 있는 동안엔 절대 안 돼!”

“하지만 서장님…….”

“한번만 더 그따위 소리하면 서부 저수지 파출소로 보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서장의 협박에 크롬웰이 입을 다물었다. 전에도 크롬웰은 서부 저수지 파출소로 쫓겨간 적이 있었다. 서장의 손님들에게 묘한 차를 대접한 벌이었는데 물 밖으로 튀어나온 잉어를 찾아서 물속에 도로 던져 넣는 일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그곳 생활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 현명한 사람이었죠. 배짱도 두둑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잘 알았고, 그 일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헤슬렘은 어제 밤새 회사에 있다가 새벽에야 집에 돌아와서 지금 어디론가 전화 중이었다.

「정말 걸출한 인물이었지. 특히 군인으로서 말이야.」

「여자 쫓아다니는 재주는 더 비상했었죠. 전 그 점이 좋던데요.」

「니콜라스, 이 친구야. 여자는 전쟁만큼 위험하고 복잡하지는 않잖나?」

「그 시절 여자들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당신이 알 리가 있나요? 복잡하기는 또 어떻고요? 그에겐 차라리 전쟁터가 안전했을걸요. 마음도 편하고요.」

헤슬렘은 아까부터 웬 노인이랑 계속 어떤 남자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화 내용으로 짐작컨데 꽤 괜찮은 남자인 것 같았다.

「살해당한 곳도 전쟁터는 아니었죠.」

살해를 당해? 그럼 이거 살인사건이잖아?

「그렇다고 여자 손에 죽은 것도 아니잖나?」

대꾸하는 노인의 음성은 느긋하고 한가로웠다.

「옛 애인의 아들 손에 죽었으니까 여자랑 관련이 전혀 없진 않죠.」.

“이게 대체 누구 얘기에요?”

답답해서 굽타를 돌아봤다.

“내 생각엔…….”

같이 통화내용을 듣고 있던 굽타가 물끄러미 나를 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아.”

“…….”

살인사건은 분명하지만 200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인데다 그 사건에 대한 재판은 이미 끝났다. 밤새 일하고 들어왔으면 잠이나 잘 일이지 저렇게 한가한 수다라니…… 더구나 이건 국제전화다.

「오늘은 1학년들하고 알레시아 공방전에 대해 토론을 했지. 다음 시간엔 그 전투에 대해 자네가 쓴 리포트를 읽어줄 생각이야.」

「대단한 전투였던 건 분명하지만, 전쟁은 장수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학생들이 이해했으면 좋겠네요. 카이사르에게는 훌륭한 참모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덕에 명장 소리도 듣는 거구요.」

「이런 얘기 하다 보면 말이야…… 자네가 그 참모들 중 하나인 것 같아.」

「부탁 하나 드릴까요?」

헤슬렘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뭔가?」

「학생들한테는 비밀로 해주세요.」

헤슬렘은 새벽 6시 반이면 회사에 출근했다.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지만 중간에 골프장에 놀러간다거나 점심시간에 애인과 데이트를 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녁까지는 일만 했다. 출장 갈 때 외엔 퇴근 후에 클럽에 잠시 들러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사업 파트너와 뭔가를 구상하는데 귀 밝은 비니가 일하는 척하며 한마디 안 빼놓고 다 들어봐도 재미없는 얘기뿐이었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데 사람 사냥은 언제하지? 휴가 때?

“그 작전 말이에요…….”

“뭐? 유인작전?”

헤슬렘의 국제 학술세미나가 유쾌한 농담과 안부 인사로 끝나자 굽타가 헤드폰을 내려놨다.

“그거…… 꼭 서장님 허가가 있어야 되나요?”

“서장도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는 알고 있어야 돼.”

그건 그렇지만…….

“서장 말대로 위험하기도 하고, 또 놈의 취향도 잘 모르겠고…… 미끼를 쓰자고 해도 경찰관 중에서 골라야 되는데 저놈 맘에도 들고 일도 제대로 할 만한 인물이 안 떠올라.”

“비니는 어때요?”

그냥 농담이었는데 굽타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난 헤슬렘을 산 채로 잡고 싶어.”

물적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면 정황 증거라도 찾아야 한다는 크롬웰 의 주장은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지당한 말씀이었다. 그러니까 헤슬렘이 다른 표적을 공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건데 일반 시민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는 것보다야 훈련 받은 경찰이 나서는 게 도리였다. 심증은 있으나 달리 물증이 없는 이런 사건에 미끼를 던지는 건 고전적인 수사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서장이 그렇게 길길이 뛰며 화를 내는 건 수사 방법이 부당해서가 아니었다.

불과 6개월 전에도 경찰은 매춘부들의 연쇄살인사건에 젊은 여경을 미끼로 던졌었다. 작전 개시 19일째 되던 날 매춘부로 가장한 경찰은 접근해온 남자의 차에 탔고 수사팀은 곧장 미행을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어이없게도 차를 놓치고 말았다. 차적 조회 끝에 다섯 시간 만에 차 주인을 검거하고 차량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사라진 경찰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이틀 후 철거 직전의 낡은 아파트 건물 지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름은 메리앤이었고 나이는 스물넷…… 경찰이 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신참이었다.

“선배님, 어디 가세요?”

어떻게 하면 서장 몰래 함정수사를 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굽타가 차 문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맞은편 담벼락을 가리키는 데 자세히 보니 우거진 장미 덤불이 혼자 바스락거리고 있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덤불에 갇혀서 용을 쓰는 중이었다. 굽타는 내가 보지 못하는 여러 가지를 본다. 좀 전부터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이제 제법 굵어졌는데 차안엔 우산도 없었다. 길 하나만 건너면 되지만 옷이 다 젖을 거다.

“제가 갈게요.”

다가가 보니 버셋 하운드 새끼였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 데 어쩌다 여기까지 기어 나왔을까? 폭삭 젖어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데 덤불을 헤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가 굉장히 예뻤다. 주인 없는 개라면 위니에게 가져다주고 싶었다. 남편 대신 개라도 키우라면 화낼까?

강아지 몸엔 상처가 많았다. 장미 가시에 찢어졌는지 부드러운 발바닥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굽타가 보지 못했으면 아마 죽었을 거다. 강아지를 끌어안고 막 돌아서는데 갑자기 차에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퍼뜩 정신이 들어서 헤슬렘의 저택을 올려다보니…… 침실에 불이 꺼져 있었다. 굽타가 성급하게 손짓을 해대는 걸 보면 외출할 낌새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저택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왜 들리지 않았을까?

빗발은 점점 굵어졌고 주변은 아직 조용했다. 헤슬렘의 차가 나오기 전에 길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품에 안은 강아지가 끙끙거리면서 작은 발로 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고 빗물이 눈에 들어가 아주 잠깐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 갑자기 시커먼 물체가 나타나면서 내 몸을 거칠게 후려쳤다.

차에 부딪친 충격으로 차도 한복판까지 굴러나갔는데…… 처음엔 아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검은색 포르쉐 스포츠카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내려섰다. 좀 전까지 품에 안고 있던 조그만 강아지는 저만치 내팽개쳐진 채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멍한 눈으로 죽어가는 강아지와 비껴 선 포르쉐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데 포르쉐에서 내린 남자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자의 손이 내 얼굴에 와서 닿았다. 순간,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미처 보질 못했습니다. 병원에 가야 될 것 같군요.”

그것이…… 니콜라스 헤슬렘과의 첫 만남이었다.

창문도 하나 없는 지하 1층 소회의실에 밀려들어온 지도 한 시간 째였다. 서장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었고 비니는 짙은 녹색 유리 테이블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쥬드는 벽에 기대서서 사선으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콧잔등이랑 왼쪽 뺨이 퍼렇게 부어오르는 중이었다.

샌드맨은 병원에 실려 갔다. 이 일로 최소한…….

“1개월 정직감이야. 그것도 샌드맨이 별도의 고소 같은 거 하는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갈 경우에 말이야.”

서장이 엄숙하게 선고했다.

“그 자식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서장님도 분명히 들으셨잖아요.”

나는 지은 죄를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데 비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들었지. 그런데 엄청나게 두들겨 맞는 것도 봤단 말이야!”

“그런 자식은 맞아도 싸요!”

“샌드맨도 잘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죽게 두들겨 패면 어떡해? 솔직히 이건 정직이 아니라 구속감이야.”

서장의 말이 다 옳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땅 끝까지 꺼질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을 맛보고 있자니 테이블에 놓인 종이 쪼가리가 눈에 들어왔다. 대충 갈겨썼는데 쥬드 글씨였다.

「폴 베컴

세바스찬 길버트

케빈 왕

샤리마 빌라이

마사키 코지

에드워드 로비」

쪽지에 적힌 이름들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쥬드가 어느 틈에 다가와 쪽지를 낚아채서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야? 비리 경찰 친목회라도 생긴 거야?”

무심코 중얼거리자 비니가 고개를 저었다.

“특별수사팀이야.”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특별수사?”

비니가 대답 대신 쥬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니콜라스 체포 특별수사팀이라니…… 농담으로라도 기발하다.

“정신 나갔어?”

경찰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은 서장이다. 하지만 내가 거칠게 항의 표시를 한 상대는 서장 옆에 서 있는 쥬드였다.

“그러는 당신은 제정신이에요? 사람을 죽일 뻔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당신보다는 덜 미쳤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일어서자 서장이 얼른 쥬드 앞을 막아섰다.

비리 경찰은 어떤 나라에나 있고 어떤 도시에나 있고…… 어떤 경찰서에나 있다. 우리 경찰서에도 당연히 그런 놈들이 있다. 종이 쪼가리 위에 거명된 그 인간들은 저지른 비리의 유형으로 보나 횟수로 보나 경찰관이 아니라 이미 범죄자에 더 가까웠다. 명확한 증거가 없어 어쩌지 못하거나 얄팍한 동료애 때문에 못 본 척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노점상들한테 자릿세를 뜯어먹든 성매매업소에 단속 정보를 귀띔해주던…… 혹은 신변보호 중인 증인에 대한 정보를 팔아서 침실에서 벌집이 돼서 죽게 만들든 아직까지는 덜미를 안 잡히고 알아서 잘들 하고 있으니 그냥 두고 보겠지만 세상에…… 니콜라스 헤슬렘을 체포하기 위한 특별수사팀이라니!

“아멜 굽타까진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이게 뭐야?”

“그때하곤 상황이 틀리잖아요.”

더 엉망이지. 놈은 더 조심스러워졌을 테고 우리한테는 굽타도 없으니까…….

“그땐 그의 경험과 머리가 필요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추적자들이에요.”

그럴듯하다. 죄다 승냥이처럼 사납고 질긴 놈들이니까…….

“저 거지 같은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진 이유는 뭐야?”

내 항의에 서장이 쥬드 대신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좀 전에 정직을 당했어.”

“한 달이라고 해놓고서!”

두 달 정직이라니…… 샌드맨 그 자식은 뼈도 안 부러졌는데! 코뼈 빼고…….

“말 마! 그 치사한 자식! 고소하겠다고 얼마나 길길이 날뛰는지…… 크롬웰이 오기 전까지 나랑 반장님이랑 얼마나 애먹었다고!”

쥬드 말은 순순히 듣던 모양이지?

“처음엔 크롬웰한테도 얼마나 재수 없게 굴었는데…… 고소한다고 날쳐서 니 껍데기를 다 벗겨 먹을 속셈이 빤했어. 병실엔 벌써 능구렁이 같은 변호사도 한 놈 버티고 있었고. 한 달 정직 가지곤 어림도 없다고 그놈의 변호사가 정색을 하고 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기간이 좀 늘어난 거니까 니가 이해해라. 2개월 정직에…… 2개월 감봉이야.”

“감봉 얘긴 듣지도 못했어!”

“그렇게 됐어.”

자기 월급 깎인 거 아니니까 비니는 태평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자식을 몇 대 더 패서 아예 보내버리는 건데…… 가다 보니 벌써 비니 작은아버지네 저택 철문이 삐죽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저길 꼭 들어가야 하나? 경찰서엔 그만한 재원이 없어도 노튼에게 얘기하면 연방경찰 산하에 있는 안가 하나쯤은 얻어줄 수도 있으련만 이 깡패 소굴에 나를 다시 밀어넣다니…… 니콜라스에게서는 안전할지 몰라도 발렌타인 손에 난 죽을 거다.

“그래…… 그걸로 그 자식은 만족한 거야?”

물어보면서 얼른 몸을 아래로 숙였다. 일전에 정문을 박차고 나갈 때 실랑이를 벌였던 그놈이 문 앞에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이 일을 어째?

“처음엔 보상금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지. 변호사가 달리 변호사야?”

그랬겠지.

“그런데?”

“쥬드가 알아듣게 잘 얘기했어. 지가 별 수 있어? 경찰 노릇 계속 하려면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지.”

차가 일단 정문 앞에 섰다. 그와 동시에 몸을 더 깊이 숙였다. 경비가 차 옆으로 슬슬 다가왔다.

“쥬드가 뭐랬는데?”

“별 말은 아니었어.”

놈이 나를 봤다. 내가 왜 내 아파트로 안 가고 여기로 왔을까?

“그냥…… 니가 감방에 가고 나면 나한테 새 파트너가 필요하니까 나랑 한 조로 근무하게 만든다고 했더니 곧바로 백기 들었어.”

정말 악랄한 여자다.

경비가 조수석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인정머리 없는 친척에게 맡겨진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사방이 다 적군인데 비니까지 일하러 나가버리면 이 집안에서 나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이다.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했다. 마지못해 차창을 내리자 놈이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또 왔네.”

“어쩌다 보니…….”

내 떨떠름한 대꾸에 놈이 입 꼬리를 씰쭉 올렸다.

“이번엔 잘 한번 지내보자고. 짭새!”

대단한 손님도 아닌데 레빈이 현관에서 깍듯하게 나를 맞았다. 이 사람이 집주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안녕하세요. 레빈.”

비니가 인사와 함께 코트와 장갑을 레빈에게 건넸다. 비니의 옷가지를 옆에 놓인 의자에 가지런히 얹은 다음 레빈이 나를 쳐다봤지만 입고 있는 점퍼를 벗어주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얇은 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니기엔 쌀쌀한 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레빈 뒤쪽으로 가르시아를 위시한 악당 놈들이 하나 가득 서 있는데 여기서 더 허전한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식당으로 가시죠.”

“배가 별로 안 고픈데요.”

입에서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에서 내 생에 들어본 중 가장 우렁찬 꼬로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르시아와 테시오가 키득키득 웃었다.

“「로만 가든」의 요리장인 주세빼 루셀로 씨가 특별요리를 준비했습니다. 약식 정찬이지만 거절하시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주세빼가 왔어요?”

비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반문했다.「로만 가든」은 비니 큰아버지 식당인데 평일날 점심도 예약 않고는 못 먹을 만큼 손님이 많은 유명한 식당이었다. 물론 비니는 조카니까 아무 때나 가도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준다.

“그리고, 주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피아 대부님 접견이라…… 손등에 키스라도 해야 되나? 그런 걱정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레빈이 걸음을 멈췄다. 따라 걷다가 등을 받을 뻔했다.

“무슨 일…….”

이냐고 물어 보려는데 갑자기 레빈이 돌아서더니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크게 다치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아침 뉴스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나가자마자 그런 일을 당하다니, 제 책임이 큽니다.”

한 번 더 힘껏 끌어안은 다음 나를 놓아준 레빈의 눈이 어느새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왠지…… 독한 술을 세 잔쯤 연거푸 들이킨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말릴 만큼 말렸다. 어젯밤 일에 대해 레빈이 책임질 일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저 망할 놈들 주둥이 단속만 제대로 했으면 그렇게 나가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 망할 놈들이 바로 뒤에 서 있는데 저런 소리 막 해도 되나? 가르시아의 못생긴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레빈은 싹 무시하고 앞장서서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참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피아 저택 집사에게 호감을 갖는 게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레빈이 우리를 안내해 간 곳은 전에 내가 레빈에게서 샌드위치 대접을 받았던 그 주방 식당이었다. 비니 작은아버지 같은 거물은 저녁 한 끼를 먹어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식당 한가운데 놓인 12미터는 족히 넘을 길고 긴 식탁 상석에서 하인들 시중을 받아가며 먹는 줄 알았는데…… 헐렁한 스웨터 차림으로 전에 내가 샌드위치 뜯어먹던 그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같이 있던 발렌타인의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비니 도련님과 친구 분께서 오셨습니다.”

레빈의 말에 비니 작은아버지가 고개를 돌렸다.

프란시스 몬티첼리 나이 46세, 신장 178센티미터, 갈색 머리, 갈색 눈동자, 재산 규모는 그 변호사도 잘 모르고, 아직 독신에…… 최대 33개까지 난립하던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을 불과 10년 만에 정리하고 히스패닉계 조직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 암흑가의 제왕은 요즘은 중국계 거대 조직까지 집어 삼키려고 물밑 작업 중이었다. 그쪽 조직 총수인 첸 진이 앞으로 몇 달이나 더 버틸 것이냐는 진작부터 관계자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별 다른 일 없으면 3개월에 한번은 일간지 사회면에 그 사진이 실릴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악당인데다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갈아치운 새 애인과 타블로이드 신문 일면을 장식하는 바람둥이이기도 한데, 그 엽색 행각이 두어 달째 잠잠하니 첸 진과의 한판 대결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서 은행 강도를 잡았다면서?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도드라진 광대뼈와 얄팍한 입술에 약간의 긴장감이 돌긴 하지만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눈빛은 마치 학자처럼 지적이고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본색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그 눈빛이 도리어 사람을 질리게 했다. 마치 온몸이 그의 보호색처럼 느껴졌다. 눈빛마저도 위장할 정도로 철저한 이 남자의 본색은 어떤 걸까?

“없어요. 그깟 강도 한 놈 잡는데 뭘…….”

비니의 잘난 척에 몬티첼리가 고개를 저었다.

“너 말고 강도 말이야.”

“머스터드 보다는 칠리가 나아. 둘 다 전에 쓰던 소스보단 훨씬 낫지만 말이야. 나 같으면 칠리로 하겠어. 자넨 어때? 사이몬?”

몬티첼리랑 발렌타인이 나란히 앉아서 할 일이란 건 십중팔구는 살인청부였다. 발렌타인이 이 집에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건 상대편 보스인 첸 진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몬티첼리는 언제나 자신의 행보에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은 깨끗이 치우고 넘어갔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생존법은 그런 잔인함을 전제로 한 것이다.

“다음 주 만찬 때 메인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하지만 열 번에 한두 번 정도는 특이한 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이 비정한 두 남자가 머리 맞대고 하는 일이 유명한 이탈리아 요리장의 새 요리 품평회라니…… 한가하고 영양가 있는 행사같기는 한데 내 입에는 칠리고 머스터드고 너무 독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슬금슬금 먹다 보니 이젠 속이 따끔거렸다. 발렌타인도 속사정이 비슷한지 아까부터 와인만 홀짝거릴 뿐 반쯤 남은 송아지 고기 스테이크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전 전통적인 이탈리안 소스가 더 맘에 드는데요.”

발렌타인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게 뭔데?”

“토마토케첩이요.”

순간…… 루셀로 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의 손에 날이 시퍼렇게 선 식칼이 들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존심을 다친 요리 거장의 상처 받은 얼굴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비록 상대가 칼을 들고 있다고는 해도 발렌타인은 프로였다. 실력행사로 들어가면 루셀로 씨는 발렌타인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쯤에서 침착하게 의자를 뒤로 뺐다. 비록 둘이 먹다가 둘 다 죽을 만큼 지독한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라고 할지라도 죽게 내버려두는 건 직무유기다. 슬쩍 보니까 비니도 여차하면 둘 사이에 뛰어들 태세였다. 발렌타인이 잠시 루셀로를 쳐다봤다. 발렌타인은 놀라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았다. 시선은 루셀로를 응시하면서…… 그의 왼손이 누구도 모르게 앞에 놓여 있는 나이프를 쥐었다. 이제 루셀로의 한쪽 발은 관속에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니 작은아버지네 넓은 식당 주방에 위기일발의 긴장감이 가득 찼다.

목표를 제거하기 위해서 발렌타인은 수십 명의 전문 경호원도 뚫고 들어가곤 했다. 일이 벌어지면 비니와 나…… 둘만으로 발렌타인을 저지할 수 있을까? 루셀로를 노려보는 발렌타인의 눈빛이 부쩍 어두워졌다. 일촉즉발…… 무슨 일인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발렌타인이 쥐고 있던 나이프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가 나이프를 루셀로의 심장에 박아 넣기로 작정했다면 누구도 그걸 저지할 수 없었다.

전광석화의 속도로 발렌타인의 나이프가 루셀로의 심장에 박히고 불쌍한 루셀로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눈앞에서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살인이 벌어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바로 그때, 발렌타인이 나이프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나하고 비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놀란 건 발렌타인이 아니라 루셀로였다. 루셀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발렌타인은 착잡한 표정으로 스테이크 접시를 앞으로 끌어 당겼다.

발렌타인이 칠리와 머스터드가 잔뜩 얹힌 스테이크와 커틀렛 두 접시를 다 쓸어 먹은 다음에야 루셀로의 얼굴이 좀 풀어졌다. 매운 소스 때문에 눈동자까지 발갛게 충혈된 발렌타인은 와인을 홀짝거리는 정도로는 안 되겠던지 아예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마시곤 취해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만장일치로 루셀로의 새 요리 소스를 칠리로 정한 후에야 우리는 겨우 커피를 얻어마실 수 있었다. 요리 품평도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다.

“소스가 너무 독하지 않아요? 정말 다음 주 만찬에 메인 코스로 내실 거예요?”

루셀로가 품평회 결과에 매우 만족하며 돌아간 후에야 비니가 음식에 대해 본격적인 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응.”

“그런 걸 먹였다간 모두 적으로 돌아설 거예요! 그 칠리소스는 정말 살인적이었다고요.”

“어차피 다 적이야.”

몬티첼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먹고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투였다.

“아무래도 좋은 데요……. 그거 먹고 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숙부는 구속이에요.”

비니의 경고에 몬티첼리가 펄쩍 뛰었다.

“내가 왜? 주세빼를 잡아가야지!”

돌아가는 얘기를 대충 들어보니 비니 큰아버지 식당 손님들이 요즘 음식 맛에 대해서 불평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음식 맛이 전 같지 않다는 완곡한 불만의 소리가 이거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드높은 원성으로 바뀌면서 급기야는 수십 년 단골손님까지 발길을 끊을 지경이 되자 자존심 높고 고집 센 루셀로가 고심 끝에 새로운 소스를 개발했는데…… 그게 일명 「사람 잡는 칠리소스」였다.

“음식 맛을 못 보는 게 틀림없어. 그 정도로 독하지 않으면 맛을 모르는 거야.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면 좋을 텐데…….”

몬티첼리가 얼음물을 두 컵째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왜 본인한테 그런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그래서 큰 아버지가 이리로 보낸 걸 텐데…….”

“아까 사이몬 얘기 듣고 얼굴 변하는 거 너도 봤잖아? 이런 하찮은 일로 암살당하긴 싫어.”

우정을 지킬 것이냐…… 가게 문을 닫을 것이냐를 놓고 몇 주간 고심의 고심을 거듭하던 비니 큰아버지는 루셀로가 새로 개발했다는 비장의 요리를 맛본 직후 동생을 찾아왔었다. 그리고 비정한 청탁을 넣었다.

“주세빼를 죽여다오.”

그 부탁에는 비니 작은아버지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냥 해고하세요.”

누가 들어도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었다. 하지만 비니 큰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해고당하면 골목에 숨어 있다가 날 찔러 죽이든지, 우리 가게에 불을 지를 거야.”

“하지만…… 어떻게 요리 못한다고 사람을 죽여요?”

“쿠간 시 최악의 요리사라는 불명예를 안고 사느니 지금 죽는 게 주세빼한테도 나을 거야!”

비니 큰아버지는 천성이 호인이었다. 고지식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도무지 분쟁이란 걸 견디지 못했다.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마피아 조직에 스카웃 돼서 들어갈 때 비니 아버지는 목숨 걸고 말렸지만, 큰아버지는 동생이랑 싸우기 싫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비니 큰아버지는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마피아 대부에게 살인 청탁을 하러 온 사실 자체가 보통 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터였다. 그래서 몬티첼리는 청을 거절할 때도 되도록 완곡한 표현을 썼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우선 음식 맛을 좀 보고 나서요…… 잘 설득해볼게요.”

“큰아버지님한테는 뭐라고 할 거예요?”

요리 품평회의 살벌한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는 비니가 몬티첼리를 슬쩍 노려봤다.

“설득은 해봤다고 해야지.”

몬티첼리가 땅콩 껍질을 까면서 태평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큰형님 댁 일이라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어나는 분쟁까지 해결해줄 의무는 없는데다, 지금은 만찬에 초대되어온 정적들을 골탕 먹일 생각에 마냥 흐뭇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발렌타인만 반 죽어 있었다. 엄청나게 매운 칠리소스를 그는 정말 많이 먹었다.

주변을 정리하던 레빈이 의사 불러다 줄까? 물어도 발렌타인은 말없이 손만 내저었다. 그걸 보자니 몬티첼리도 양심이 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자네…….”

몬티첼리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침나절에 연쇄살인범에게 쫓겨다닌 사람치곤 얼굴이 괜찮군.”

연쇄살인범에게 쫓겨다닌 건 아니지만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니한테서 얘기는 종종 들었지. 만나게 돼서 반가워. 물론…… 내 집에 오게 된 사정은 유감스럽지만 말이야.”

이 사람이 프란시스 몬티첼리만 아니라면 만난 게 반갑다고 생각될 만큼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그에게는 권력을 움켜쥔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여유가 있었다. 이 정도 매력이라면 이면에 비정함과 잔혹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자극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크롬웰도 그렇고, 레빈도 갑자기 베이비시터 흉내를 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자네가 필요해서 들고 나는 걸 막을 생각은 없어. 올리버에게도 그렇게 말해놨으니까 앞으로 대문을 부수고 나갈 필요는 없을 걸세.”

“그 일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사과에 몬티첼리가 고개를 저었다.

“올리버가 주제넘었어. 크롬웰은 니콜라스 헤슬렘이 무슨 초능력을 가진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설혹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비니 옆에서 1년 반이나 버틴 자네 같은 친구한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1년 반이라니, 이전에 비니 파트너가 두 달에 한번 꼴로 바뀐 걸 생각하면 나는 최소한 아홉 명의 목숨을 구한 거다. 지금까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하며 심란해 하고 있는데 발렌타인이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잘 삶은 당근처럼 빨갛던 그의 얼굴이 이젠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이몬, 괜찮은 거야?”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던지 몬티첼리가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아무리 봐도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이마에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폼이 아무래도 저러다 쓰러지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발렌타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위경련 같습니다.”

발렌타인에게 진통제를 주사하고 돌아서면서 의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의사는 아까부터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몬티첼리의 주치의가 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바람에 주변에서 노닥거리던 의사가 대타로 불려온 모양인데 멋모르고 따라와 보니 장소는 마피아 대부의 저택이요, 환자는 세계 랭킹 5위 안에 드는 킬러인지라 의사도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다.

“일단 진통제를 주사했으니까 한잠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위경련이란 게 느닷없이 일어나기도 합니까?”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의 이마에 손을 슬쩍 대보면서 물었다. 기절한 줄 알았던 발렌타인이 그 손을 사납게 뿌리쳤다.

“느닷없이라기보다…… 본래부터 위염 같은 게 있었다든지, 심하게 긴장한다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매운 음식을 먹어도 그럴 수 있죠.”

몬티첼리가 다시 발렌타인의 얼굴에 손을 댔다. 하지만 이번엔 발렌타인의 공격을 잽싸게 피했다.

“독극물 검사 같은 걸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비니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비니도 루셀로의 요리를 꽤 많이 먹었던 것이다. 비니는 맵거나 짜거나 독약이 들었거나 먹을 거 있으면 아무거나 잘 먹는다. 말리는 사람 없다고 그렇게 꾸역꾸역 먹어대더니 이제 와서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너 혼자 먹은 거 아니잖아.”

내 핀잔에 비니가 씩씩거렸다.

“다 조금씩밖에 안 먹었잖아! 나랑 사이몬이 제일 많이 먹었단 말이야!”

그러는 사이에도 몬티첼리가 자꾸만 발렌타인에게 장난을 쳤다. 둘이 얼마나 친한 사인지 모르지만 아픈데 저렇게 귀찮게 하면 좋지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발렌타인이 몬티첼리의 손목을 틀어잡고는 눈을 번쩍 떴다.

“한번만 더 내 얼굴에 손대는 날엔…….”

발렌타인이 띄엄띄엄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날 죽일 거야?”

“사람 죽여달라고 아무리 사정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

처음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발렌타인은 조금 피곤한 듯…… 지친 듯 보였다. 단순히 위경련 때문일까? 그런 생각하며 쳐다보는 데 갑자기 발렌타인이 나를 쳐다봤다. 상처 입은 동물 같은 눈을 마주 쳐다보자니 왠지 뱃속에서 찬바람이 한 바퀴 불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지내라고는 말하지 않겠어. 그러긴 힘들 테니까.”

몬티첼리가 발렌타인을 흘끔 곁눈질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한번 잘 버텨 보게.”

나는 담당하고 있는 사건에 대한 사명감이나 책임감 때문에 휴일이나 휴가 때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헤매는 미친 경찰이 아니다. 사실 그런 경찰은 영화 속에나 나온다. 나도 비번일 땐 집에서 낮잠 자면서 노는 게 좋고, 휴가 때는 험한 산속에서 혼자 캠핑을 할망정 경찰서 주변엔 얼씬도 않는다.

내 주변에 영화배우 같은 짭새들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생각해보면 아멜 굽타는 정말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명탐정이었다. 범죄 현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 작은 얼룩 하나 놓치는 법이 없었고 그 실낱같은 단서를 토대로 거미줄 같이 정교한 범죄 시나리오를 재구성해내는데 휴일도 없고 밤낮도 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진정한 경찰이라고 칭송했지만 그건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그는 대단히 특이한 경찰이었다. 그 특이한 경찰 흉내를 내 보기로 한 건 막연한 충동이 반…… 궁여지책이 반이었다. 정직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수배 중인 강도를 자동차로 추적하던 중 벌어진 교통사고 책임을 물어서 1개월간 근무 정지였고 두 번째는 경찰서에서 난동 부리던 테러범을 몇 대 쥐어박은 건으로 2주…… 기간으로 따지면 이번이 제일 길다. 말이 두 달이지 날 수로 따지면 60일이다. 마피아 보스의 저택에서 사이몬 발렌타인과 숨바꼭질하며 지내기엔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어딜 간다고?”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비니는 아직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비몽사몽이었다. 5분만 더 잔다고 버틴 게 벌써 30분째다.

“콘웨이 공원!”

대답해봐야 비니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놈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출근 직전까지 늦잠을 잘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궁리뿐이었다. 비니 엄마는 이 징그러운 놈을 아침마다 어떻게 깨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포기다.

출근하는 길에 차 좀 얻어 타려 했던 소박한 희망을 접고 일어서는데 등 뒤에서 비니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긴 뭐 하러?”

돌아보니 베개에 얼굴을 묻은 비니가 천근이나 되는 눈꺼풀을 용케도 반이나 들어 올리고 있었다.

“됐으니까 잠이나 자.”

손 한번 흔들어주고 방을 나오려는데 비니가 휘청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일어나면서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서 넘어졌는데 비니는 이럴 때 혼자 넘어지는 법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는데 팬티 바람의 남자에게 깔려서 넘어지기까지 하니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그 빌어먹을 공원엔 뭐 하러 가냐고?”

서장도 그렇고, 쥬드도 그렇고 나를 니콜라스 체포 팀에 끼워줄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이번 정직만 해도…… 샌드맨을 두들겨 팬 게 잘한 짓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 달이나 정직을 먹일 정도의 과실도 아니었다. 이건 분명히 나를 니콜라스 사건에서 배제하기 위한 꽁수였다. 어쨌거나 결정권자들의 의사가 그렇다면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범죄 현장이잖아!”

“무슨 범죄?”

비니는 어제 내가 했던 얘기를 벌써 까맣게 잊었다. 비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찰에서는 내 증언을 완전히 무시하고 콘웨이 공원에서 일어난 새벽의 결투는 아예 없는 일로 치부해버렸다.

느닷없이 경찰서로 뛰어들어서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다거나,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했다고 떠들어대는 이상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선별해서 다룬다. 허위신고 비율은 언제나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건을 허위신고로 분류한 것도 아니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처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증언이 아무리 믿기 어려워도 최소한 오웬을 찾아내서 일차적인 조사는 할 줄 알았다. 니콜라스 탈출사건 때문에 전 경찰이 비상이라곤 해도 살인사건을 이렇게 허술하게 다루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 그거?”

내가 노려보자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내 위에서 좀 내려가 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녀석의 얼굴을 확 밀었다. 하지만 비니는 내려가기는커녕 허우적거리는 내 팔을 잡아 누른 다음 제대로 나를 타고 앉았다.

“안 내려가?”

“넌 지금 정직 중이잖아.”

하필이면 이런 때 꼭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이런 건 자연법칙보다 더 예외가 없다. 레빈이 한 걸음 안으로 들어서다가 짠…… 하고 멈춰 섰다. 빤스 바람으로 나를 깔고 앉은 비니와 녀석에게 깔려서 버둥거리는 나를 보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분명히 안 좋은 생각을 할 거다.

“바쁘시면…… 좀 있다 다시 오죠.”

당황한 표정을 감추면서 레빈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자식, 너 땜에 레빈이 오해하잖아!”

바쁜 일은 별로 없지만 뭐라 말도 못 하고…… 레빈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간 다음에 비니를 노려봤다. 하지만 비니는 느긋하게 이를 데 없었다.

“레빈은 오해 같은 거 안 해. 이해를 하지.”

말없이 노려만 보자 조금 겁이 났는지 비니가 내 손목을 비틀어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놨다. 아니…… 겁이 난 게 아니고 하품하느라 그런 거였다. 비니가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하는 틈에 얼굴에 주먹 따귀를 한방 먹이고 얼른 일어나 앉았다. 비니는 이제 완전히 깼다.

“그냥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쉬지…… 이런 날씨에 사건 현장에서 얼쩡거린다고 월급 한 푼이라도 나올 줄 아냐?”

존경하는 대선배 아멜 굽타의 어록에 따르면 범죄 현장에 모든 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만 하루 만에 현장에 다시 와 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오웬과 정체불명의 검객이 한바탕 칼부림을 벌인 현장은 아프리카 코끼리 떼라도 다녀간 것처럼 쑥대밭이었다.

“그 집이 내 집이면 나도 그냥 쉰다.”

도대체가…… 현장 보존이란 것도 모르나? 잔디밭은 온통 패이고 쓸린 자국투성이였다. 떨어져나간 대리석 동상도 누군가에게 밟혔는지 등짝에 발자국이 선명했다. 굽타가 이 꼴을 봤으면 땅을 쳤을 거다.

“다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런 거잖아. 쥬드가 작은아버지한테 그런 부탁하기는 쉬웠는지 알아? 이렇게 멋대로 나돌아다닐 거면 그냥 니 아파트에 그대로 있지 뭐 하러 작은아버지 신세를 져? 작은아버지 댁이 여관이야?”

“고만 좀 해!”

언젠가 굽타에게 정말로 현장에 모든 것이 다 있냐고 진지하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굽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조금 바꿨다.

‘한 가지 빼곤 다 있지.’

‘그게 뭔데요?’

‘범인.’

다 소용없는 짓이다. 나는 굽타 같은 명탐정이 아니다. 그냥 현장에 출동해서 잡아넣을 놈 잡아넣고, 도망친 놈 쫓아다니는 몸빵 전문 강력반 짭새일 뿐이다. 보고 또 봐도 내 눈엔 오웬과 그 미친 칼잡이가 두부 자르듯 썰어 놓은 동상과 벤치…… 어지러운 발자국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단서가 무슨 소용이냐? 만 24시간 전에 범행을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

그건 정말 단순한 칼싸움이었다. 그 험악한 결투 내내 두 사람이 지껄인 대화라곤 한두 마디가 고작이었다. 사건 현장이라고 아무리 뒤져봐야 왜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는지…… 오웬이 지금 어디 있는지 따위를 알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니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나 출근도 해야 돼! 나까지 정직을 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정말 귀찮다. 애초에 내 계획은 공원에 혼자 내려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현장을 둘러보는 거였다. 굽타도 이런 수다쟁이 파트너를 달고는 아무 일도 못 했을 거다.

“됐으니까 내버려두고 혼자 가!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너 혼자 여기 두고 가라고?”

“그래!”

“그러다 또 어디로 없어져버리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너한테 시달리다 내가 미쳐버리면 그 뒷감당은 편할 것 같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눌러 삭이며 분수에서 좀 떨어진 원형 잔디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웬이 미친 검객의 목을 내리친 그곳엔 아직도 핏자국이 선명했다. 그 미치광이가 여기 무릎을 꿇고 한 손을 땅을 짚은 채 일어나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바로 여기쯤에 오웬이 서 있었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다음…….

“뭐해?”

나도 모르게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데 비니가 어깨를 툭 쳤다. 시체를 어디다 숨겼을까? 오늘 아침 해 뜬 시각이 일곱 시 7분이고 공원 앞길에서 택시 기사가 나를 태운 시각이 일곱 시 40분쯤이라고 했다. 그때 오웬도 같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시체를 버릴 수 있는 시간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경찰은 아침나절에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바닥엔 시체를 끌고 간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들어서 옮겼을 수도 있지만, 그 커다란 시신을 떠메고 숲속 깊숙이 들어가기엔 오웬의 몸이 너무 가냘 펐다.

“그만 가자. 난데없이 웬 탐정 흉내야? 그렇게 들여다보면 뭐라도 떠올라?”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빨간 불빛처럼 피어오른 그 이름은…….

비니가 공원길 사거리에 차를 세웠다.

“거길 가잔 말이야? 상원의원 집에? 지금 이 시간에?”

벌써 다섯 번째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대답 대신 조용히 차 문을 열었다.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넌 출근해.”

비니가 화들짝 놀라서 얼른 내 멱살을 잡았다. 그리곤 다시 차 안에 끌어 앉히고 차 문을 닫았다.

“누가 안 간데?”

루소 상원 의원의 저택은 멀었다. 쿠간 시 서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루소 의원의 저택까지는 시내를 관통하는 직선 도로를 타고 달려도 두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 출근길이니까…… 시내로 들어가면 저녁때나 그 집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돌면 꼬박 3시간짜리 드라이브 코스니까 비니가 고장 난 트랙터처럼 툴툴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내 말은…… 왜 그 잔디밭에 서 있다가 갑자기 루소 의원 집엘 가자고 하느냐 말이야. 거기서 그 사람 명함이라도 주웠어?”

“굽타 선배 어록에 따르면 현장에 모든 것이 있다고 했어.”

“그건 굽타 자신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지. 우리 같은 일반인들한테는 어림도 없는 소리야.”

예리한 놈…….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난 것뿐이야.”

“글쎄 뜬금없이 그 이름이 왜 생각이 나냐고?”

“그야…….”

일전에 쥬드한테서 그 이름을 들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웬에게 그 검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경찰서에 압력을 넣은 인물이 바로 알렉산더 루소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이름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다니…… 역시 범죄 현장에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도시 외곽을 흐르는 도로 주변에 펼쳐진 산야는 벌써 겨울 풍경이었다. 바짝 마른 자작나무들은 한 꺼풀의 푸른빛도 없이 앙상한 팔을 벌린 채 서 있었고 남아 있는 풀숲도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단조로운 갈색이었다. 도시는 이제 막 겨울 초입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쿠간의 겨울은 언제나 길고 추웠다.

“작은아버지 댁에 있기가 정 불편하면 말이지…… 나랑 같이 다니지 않을래?”

“혼자 다니기 심심해?”

내 심드렁한 대꾸에 비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았어.”

반장이 진짜 중요한 임무를 비니에게 맡겼을까? 현재 파트너도 없는데?

“니콜라스가 탈출하던 밤에 같이 탈출한 환자들 중에 두 명을 아직 못 찾았거든.”

“너랑 같이 그 환자들을 찾아서 온 길바닥을 헤매자고?”

비니가 삐졌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가 너무 빈정거렸나 보다. 말하기 싫음 관두고…… 나도 조용히 생각할 일이 많으니까…….

“넌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

한 10분쯤 지났을까…… 비니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대답 대신 흠…… 하고 헛기침만 한번 했다.

“이제 곧 겨울이야. 어제도 길에서 자다가 얼어 죽은 사람이 3명이나 되는데, 정신도 온전치 못한 그 사람들을 빨리 찾지 못하면 뒷골목 깡패 놈들한테 맞아 죽거나, 아무 데서나 자다가 얼어 죽을 거야. 두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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