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딛고 있는 바닥이 출렁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바닥뿐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있던 세상이 뒤틀리고 조각조각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3년 전에 경찰이 놈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발이었다. 쥬드 크롬웰이 조건 좋은 다른 일 다 마다하고 경찰서장 비서로 취직하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어림없었다.
쥬드가 최근 10년 동안의 미해결 살인사건의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하고 그중 열일곱 건의 살인사건에서 미묘한 공통점을 찾아내기 전까지 경찰은 연쇄살인범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쥬드가 경찰서에 수사관도 아닌 서장 비서로 취직해서 실체도 모호한 연쇄살인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말과 평일에 짬을 내서 피해자 주변 인물을 인터뷰하고 다닌 것만 1년이 넘는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쥬드 크롬웰의 보고서로 경찰이 더 이상은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묵과할 수 없게 된 이후로도 한참 동안 수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장기 손상, 신체 일부 훼손, 출혈과다, 혹은 잔혹한 유기…… 각각의 사건들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서 아귀가 맞지 않는 퍼즐 같았다. 희생자들 사이엔 눈에 띄는 공통점도 없었다.
희생자들 중엔 백인이 가장 많았지만 흑인과 아시안도 적지 않았다. 혐의선상에 오른 열일곱 건의 사건에서만 보면 여자 열 명, 남자 일곱 명으로 성별도 어느 한쪽에 편중되어 있지 않았고 나이도 1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도 그 사건들은 동일범의 소행이 아니었다.
쥬드가 주장한 공통점은 대략 3가지였다. 우선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에서 상당한 인기인들이었다. 대부분 자유분방했고, 열린 사고와 독특한 재능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면은 희생자들의 사진만 봐서는 알아내기 힘든 부분이었다.
희생자들은 시체로 발견되기 전까지 보름에서 3개월의 실종기간이 있다. 시체가 심하게 부패되어 발견된 경우도 있어서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었지만, 실종 이후 얼마간은 생존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모두가 흐리고 비오는 날 실종됐는데, 그 사실을 신문에서는 엄청난 특종인양 호들갑 떨며 보도하기도 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들이 실종, 살해되기 전에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이었다. 새 친구에 대해 일기를 쓴 사람도 있고 간단한 메모를 남긴 사람도 있었다. 희생자 중 상당수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확인해보면 그들에게도 매력적인 새 친구가 나타났었던 것은 분명했다. 희생자들의 일기와 메모……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연쇄살인범에 대한 유일한 단서였다. 하지만 그나마도 결정적인 단서는 아니었다.
빛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검은 눈동자, 진한 커피 같은 목소리, 야생 표범처럼 우아한 몸놀림…… 그런 설명으로는 뭘 어떻게 해볼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런 뜬구름 잡은 묘사로는 어설픈 몽타주 한 장 얻을 수 없었다. 비니는 그런 단서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없는 거나 똑같았다. 여러 명의 기록과 증언을 대조해본 결과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은 짐작이 가능할 뿐이었다.
지나간 미해결 살인사건에 대해서 경찰이 재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짧은 뉴스가 보도된 이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경찰은 희생자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만 듣고 또 들어야 했다.
레이 스웨인은 쥬드의 사건 파일 명단의 3번째 희생자였다. 사망 당시 23세였고 금발에 녹색 눈동자가 성모 마리아라도 꼬실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고 건강한 청년이었다. 쿠간 대학에서 설치 미술을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밤이면 작은 클럽에서 기타도 연주하고 노래도 불렀다. 학점도 좋았고 클럽에서도 인기 스타였다는 건 「레이니 잭」사건 희생자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레이니 잭」이란 니콜라스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경찰에서 붙였던 살인범의 별칭이다.
8년 전, 어느 비 내리는 봄날 강의실에서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실종 42일 만에 킬리와트 강 하구에서 낡은 쪽배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가는 그의 시체를 늙은 어부가 발견했다. 발견 당시 전라였고 두 손이 뱃머리에 못 박혀서 그 모습이 마치 박해당한 순교자 같았다. 게다가 안구가 두 개 모두 적출된 상태여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제물로 희생당했을 거란 추측이 난무했었다.
검시 결과 사인은 독살이었고 그 외에 다른 외상은 없었다. 엽기적인 사건이라 당시 전국이 떠들썩했고 경찰도 수사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6개월 만에 미해결 사건으로 분류되고 말았다. 사실, 그런 사건은 꽤 많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실종 직전까지 같이 살던 스웨인의 동거녀였다. 쥬드가 개인적으로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한사코 거부해서 만나지 못한 여자였는데 만나서 신원을 확인해보니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지난번 선거 때 당선된 초선 국회의원의 부인이었다.
스웨인에게도 실종되기 2, 3개월 전에 나타난 남자가 있었다. 스웨인의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콕스 부인도 그 남자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훨씬 상세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기억하고 있었다. 빗속의 살인마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도 그녀의 기억에서 나왔다.
스웨인의 매력적인 새 친구는 평범한 대학생이 접근하기 힘든 고급 문화 행사…… 예를 들어 유명한 교향악단의 초청 연주회나 인기 있는 공연에 스웨인을 몇 번 데리고 갔었는데 한번은 특이하게도 유명한 자선가인 노부인의 소장품 경매에 같이 갔었다고 했다. 거기서 남자는 부인이 내놓은 고급 찻잔 세트를 4만 불 정도에 낙찰 받았다.
“레이는 그때 꽤나 흥분했었어요. 찻잔이 예뻐서가 아니라 겨우 찻잔 몇 개와 주전자 하나를 그 많은 돈을 주고 사들인다는 것이 못 마땅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나도 화가 났었죠. 레이는 그에게 반해 있었거든요.”
경찰도 흥분했다. 그때 사건 담당은 론 마키바 반장과 비니…… 그리고 쥬드였는데 그들은 곧장 그 자선 경매에서 물건을 사간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익명으로 물품을 구입한 사람도 꽤 있었지만 부인의 빅토리아 시대 찻잔 세트를 구입한 사람들 이름은 모두 있었다.
문제는 워낙 찻잔이 많은 부인이라서 그날 경매에서 팔린 빅토리아 시대 찻잔이 일곱 세트나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니콜라스 헤슬렘이었다.
일곱 명 중 2명이 여자였고 한 사람은 고령으로 사망했으니까 남은 용의자는 4명이었다. 용의자가 수백만 명의 불특정 다수에서 달랑 네 명으로 줄었으니 그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였지만 그 다음 일이 간단치 않았다.
네 명이라고 해도 그중에는 연쇄살인의 혐의를 둘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없는 중에도 가장 가능성 없는 용의자가 니콜라스였다. 그에게는 연쇄살인 아니라 어떤 범죄의 혐의도 두기 어려웠다. 제조업으로 출발해서 정보산업까지 손대고 있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가 수십 년에 걸쳐서 그런 짓을 했을까? 탈세라면 또 모를까…… 그렇다 해도 그건 국세청 소관이지 경찰청 소관은 아니었다.
쥬드는 오감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은 육감으로 해결했다. 니콜라스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무슨 정황 증거나 물증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쥬드와 비니는 각자 부동산업자로 가장해서 용의자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는데 쥬드가 방문한 첫 집이 니콜라스의 집이었다.
현관에서 그와 몇 마디 나눠보고 돌아온 쥬드는 다른 집엔 가 보려고도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머지 집은 비니 혼자서 다 돌았는데 마지막 집주인이 집을 좋은 값에 팔지 않겠느냐는 비니의 제안에 반색하는 바람에 알지도 못하는 부동산 시세에 관한 상담을 두 시간이나 하고 진이 다 빠져서 돌아왔었다.
애초에 쥬드가 시작하고 지휘한 수사이기는 해도 막연한 감으로 사람을 잡아들이는 법은 없다. 설혹 니콜라스 헤슬렘이 레이 스웨인과 경매에 같이 간 그 친구가 맞다 치더라도 그가 연쇄살해범이라는 논리는 여전히 억지스러웠다. 연쇄살인은 낯모르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경우가 더 많다.
쥬드가 확신에 차 있으니 그 멀쩡해 보이는 사업가가 연쇄살인범 「레이니 잭」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물증 없이는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며칠 해외로 출장 간 틈을 타서 몰래 집도 한번 뒤져봤지만 성공한 사업가의 고급 브랜드 취향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수사는 또 하릴없이 제자리였다. 몇날 며칠을 잠복해도 니콜라스 헤슬렘은 바쁜 사업가일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연쇄살인범 「레이니 잭」이라기보다는 「레이니 잭」의 희생자들 쪽에 더 가까웠다.
연쇄살인범의 정체만 밝혀지면 당장이라도 체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너져버렸고 잠복이 한 달 가까이 지속되자 모두들 쥬드의 육감에 불손한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경찰 고위층들은 그들대로 신문 방송에서 대서특필할 만한 성과를 빠른 시일 내에 얻어내기를 원했고 희생자 레이의 옛 애인도 사랑하는 남자를 무참히 죽인 살인마가 하루 빨리 법의 심판을 받기를 원했다. 연쇄살인사건에 미끼를 쓰자는 천인공노할 제안이 받아들여진 건 그런 복합적인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런 놈을 정신병원에 보내준 것부터가 정신 나간 짓이었어! 전기 통구이를 만들어도 시원찮을 놈을 감방도 아니고 병원에 보내? 그따위 판결을 내린 판사 그놈부터 병원에 처넣었어야지!”
좀 전까지 얼 시모네와 토미 테시오가 마주앉아 장기 두던 응접실에 니노 가르시아, 얼 시모네, 토미 테시오, 레빈, 비니, 사이몬 발렌타인이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거기까진 괜찮은데 나도 그 틈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 무척 불편했다. 시모네가 맥주 상자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안됐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짭새들이 돌대가리지. 나 같으면 그놈을 체포할 때 죽여버렸을 거야. 당연히 그렇게 했어야지. 놈은 부자고 똑똑해. 백년 묵은 너구리 같은 변호사를 사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빠져나갈 거라는 건 누가 봐도 빤한 일이었잖아?”
그게 내도록 마음에 걸렸는데 결국 가르시아 같은 놈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듣는구나. 사람 죽인 숫자로만 따진다면 저런 소리 속 편하게 떠들 입장이 아닐 텐데…….
“내가 볼 때…… 이건 음모야. 놈의 배후엔 어떤 막강한 배후가 도사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좀 전부터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던 테시오의 주장이 너무도 확신에 차 있었다. 배후라니…… 한 번도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는데, 새로운 접근이다.
“저 자식은 무슨 일만 터지면 다 배후 세력이고 음모야.”
테시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르시아가 면박을 줬다.
“올리버 스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저 자식은 도날드 서덜랜드 대사까지 다 외워.”
시모네까지 나서서 음모 이론에 제동을 걸자 테시오가 발끈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야?”
“여태 연쇄살인범한테 막강한 배후 세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어.”
가르시아가 느긋하게 대꾸하며 맥주병 뚜껑을 이빨로 깠다.
“누군가가 병원을 때려 부수고 놈을 탈출 시킨 거야! 내가 감방에 좀 있어 봐서 아는데 그런 특수 감방에서는 절대 혼자서 탈출 못해!”
“여기서 감방 한 번 안 갔다 온 놈 있냐? 우리도 그쯤은 알아!”
짜증이 나는지 시모네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죽은 여의사가 한패였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놈이 있었네?”
비니가 눈치 없이 마피아들 말다툼에 끼어들었다. 시모네가 아니꼽다는 듯 비니를 야렸다. 비니는 모른 척 병 뚜껑을 비틀어 땄다.
“배신자는 입 닥치고 가만히 술이나 마셔!”
시모네는 8개월 전에 비니한테 체포당해서 서까지 끌려왔었는데…… 비니가 수갑 열쇠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등 뒤로 수갑을 차고 밤을 꼬박 샜던 아픈 기억이 있다. 배신자 운운하는데 비니가 가업을 이어받는 대신 경찰 일에 뛰어든 걸 비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때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웬 신경질이야? 그 여자가 니 여자 친구라도 돼?”
도대체 눈치라곤 없는 비니가 태연한 얼굴로 시모네의 약을 바짝 바짝 올렸다.
“너는 니 집안을 배신했어. 옛날 같으면 넌 죽은 목숨이야. 가문을 배신한 놈은 절대 용서 못 해!”
시모네가 알 파치노 흉내를 내며 험악한 얼굴로 비니를 을렀다. 얼 시모네는 자기네들끼리 부르는 별명이 독사였다. 눈 꼬리가 쫙 올라간 것이…… 저런 눈으로는 사람을 노려만 봐도 범죄다. 그런 시모네가 잡아 죽일 듯이 째려보고 있는데 비니는 그 앞에서 여유롭기 이를 데 없었다. 막 술병을 입에 대던 비니가 시모네와 눈이 딱 마주쳤다. 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따지면 니네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철물점을 했는데, 넌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 말에 바로 옆에서 땡감 씹은 얼굴로 무게를 잡고 있던 사이몬 발렌타인이 킥…… 하고 웃었다.
“근데 술이 맥주밖에 없어? 언제부터 니들이 이런 음료수만 마시고 살았어?”
비니의 질문에 반병이나 남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 마시던 가르시아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도 지금 비상 걸렸어. 짭새들만 비상사태가 아니라고.”
무슨 비상인지 대충 짐작은 간다. 몬티첼리의 요즘 상대는 중국계 조폭들이었다. 정식으로 접수된 사건이 아직 없어 경찰은 나서지 않고 있지만 반년 전부터 두 조직 사이를 관통하는 기류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발렌타인이 맥주를 내밀었다.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맥주를 그냥 내 앞에 내려놨다. 음산한 회색 눈동자가 한순간에 내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동맥의 흐름을 타고 내려가는 것 같은 그 탐색에는 직업적인 섬뜩함조차 느껴졌다.
발렌타인하고는 5년 전에 딱 한번 마주쳤었다. 아주 짧은 조우였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내가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있는 것처럼 발렌타인도 그때 일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음을 싸늘한 시선이 말하고 있었다.
“떨 거 없어! 여긴 안전해! 요즘은 중국 놈들하고 전쟁 중이라서 경비도 보통 때 갑절은 되니까 쥐새끼 한 마리 마음대로 못 드나든다니까?”
발렌타인과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시모네가 떠들면서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모네한테 이런 위로를 듣고 앉아 있으려니까 그렇지 않아도 먹구름이 가득한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울리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테시오는 한술 더 떴다.
“짭새들이 나쁜 짓만 하는 것도 아니잖아? 특히나 마누라 두들겨 패는 덜 떨어진 놈들이랑 애들만 골라서 따먹고 다니는 변태들 잡아가는 놈들도 있어야 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당분간 좀 참기로 모두가 합의를 봤어. 여기서 네가 그 미친놈한테 다시 잡혀가길 바라는 놈은 한 놈도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화장실 문만 벌컥벌컥 열어젖히지 않는다면 말이야.”
가르시아의 비아냥에 모두가 키득키득 웃었다.
“신세진다고 생각할 것 없어. 나중에 길바닥에서 안 좋게 만났을 땐 봐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다. 비니가 내 눈치를 슬슬 보면서 테시오에게 그러지 말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놈은 마치 저하고 나하고 친구라도 된다는 듯 내 등을 퍽퍽 두들기면서 복장을 뒤집었다. 그래…… 너 나중에 두고 보자.
“화 많이 났어?”
조용히 일어나서 응접실을 나오는데 비니가 따라 나오면서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화 안 났어.”
사실, 기분이 좋지는 않다.
“쥬드가 말한 안전가옥이 여긴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화 안 났다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크롬웰은 그래도 여기가 다른 데보다는 안전하다고 우기지…… 넌 갑자기 혼수상태인데다…….”
화 안 났다는 말에 비니가 더 어찌할 바를 모르며 횡설수설했다.
“레빈은 방 다 치워놓고 기다리고 있지…… 상황이 그런데 난들 어떡해?”
……난들 어떡해?
“당연히 말렸어야지!”
면전에 대고 고함을 버럭 지르자 비니가 불에 덴 듯 놀라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나도 안 된다고 했단 말이야…… 딴 건 몰라도 발렌타인 때문에 절대 안 된다고…….”
“상황은 이해할 수 있어. 모든 사람들이 널 설득했겠지.”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생각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게다가 수면제 때문에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아무 데나 혼자 두는 건 널 니콜라스 손에 쥐어주는 거나 같다고…… 그리고…… 여긴 정말 보안은 철저하거든.”
확실치도 않은 신상의 위협 때문에 개인 경호를 요청하기도 힘드니까 24시간 살벌한 무장 경호원이 순찰을 돌고 방마다 악당들이 가득한 이 저택에 나를 맡겨 놓는 것이 최선이라고…… 쥬드가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거다. 비니는 쥬드가 그렇게 나오는데 그래도 안 된다고 우길 만큼 지조 있고 파트너쉽이 돈독한 놈이 절대 아니다.
“비니…….”
이름을 부르자 비니가 침을 꼴딱 삼켰다.
“파트너 바꿔달라고 한번만 더 말해보고…… 정 안 된다고 하면 다른 직장을 찾아볼 거야.”
비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크롬웰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 말이야!”
“내 파트너는 쥬드가 아니라 너야.”
내 싸늘한 질책에 배신자 비니가 입을 다물었다.
“차 열쇠나 내놔.”
비니가 순순히 자기 차 열쇠를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
“어디 가려고?”
“총은?”
“경호원들 외에는 총기 소지 금지야. 아마 정문 관리실에서 보관하고 있을 거야. 어디 갈 건데?”
“나도 몰라.”
그래도 옷은 찾아 입고 가야 하니까……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침실을 찾아 올라가는 중에 아직도 잠이 덜 깼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침실 문 앞에 이르러서는 숨이 차서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큰일났네, 어떡하지?
어쩌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말았다.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눕히자 좀 살 것 같았다. 일주일이나 내리 누워 지내던 침대라서 그런가…… 말도 못하게 편했다.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 게스트룸 같은 데서 짭새가 편안함을 느끼면 안 되는데…… 어디선가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슨 소릴까…… 눈을 감자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온 사방이 위협적인 추적자들의 발소리로 터져나갈 듯 시끄러웠다.
눈을 떠보니 길게 이어진 좁은 골목길이었다. 철거 직전의 건물들 틈으로 손전등 불빛이 어지럽게 얽히고 방탄조끼와 소총으로 무장한 동료들이 주변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수색이었다.
“제이! 오닐! 왼쪽 두 블록을 맡아! 쥐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막고 있으니까 놈들은 분명히 여기 어딘가 있을 거야!”
기동타격대 대장 헤인즈의 명령에 오닐이 옆으로 바싹 붙어왔다. 검은 헬멧 아래로 질끈 묶은 금발이 바람결에 출렁였다. 아…… 또 꿈을 꾸고 있나 보다. 오닐은 잠시 멈춰 서서 이제부터 헤치고 들어가야 할 콘크리트 정글을 비장한 얼굴로 응시했다. 내가 기억하는 오닐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가자! 딴 놈들이 선수 치기 전에 우리가 끝내버리자.”
등을 돌리면서 내뱉는 오닐의 말투가 자신만만했다. 가지 마…… 우린 아무것도 끝낼 수 없어……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이쯤에서 이 뻔하고 절망적인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둘 중 어떤 것도 뜻대로 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지난 몇 년 간 계속 반복되는 몇 가지 악몽 중 하나였다. 체념하고 오닐을 뒤쫓아 걷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5년 전 그때와 같았다.
재개발이 예정돼서 철거를 며칠 앞둔 지역이라 바람만 세게 불어도 그냥 허물어질 듯 모든 건물이 위태로웠다. 주변을 경계하며 앞서 가던 오닐이 갑자기 나타난 넓은 홀에서 흠칫 멈춰섰다. 이 구석 저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거주민들이 떠난 이후 하나둘씩 모여든 도시의 무숙자들이었다. 잠에서 깬 몇몇이 갑자기 뛰어든 무장 경찰을 놀란 기색도 없이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마약 중독자들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최근 3일 동안 연달아 터진 두 건의 살인사건 용의자를 추적한다는 단순한 작전이 갑자기 끼어든 열댓 명의 무숙자들로 인해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중무장한 두 명의 용의자들과 마주쳐서 총격전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생각지도 못한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머뭇거리는 사이, 오닐이 마음을 다잡고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꺼운 담요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꿈틀거리는 부랑자들의 모습이 어느새 커다란 애벌레처럼 기묘하게 변했다. 오닐의 주변이 온통 벌레들이었다. 나는 이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렵고 슬퍼서…… 가지 마, 오닐. 제발…….
무숙자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던 오닐이 한 구석에 웅크린 애벌레 앞으로 다가섰다. 예감 같은 것이 있었을까? 오닐의 등이 두려움에 뻣뻣하게 굳었고 다음 순간 벌레가 갑자기 커다랗게 몸을 일으켰다. 벌레는 순식간에 엘리야 하이네로 변했고 오닐이 한 걸음 물러설 여유도 주지 않고 그의 배와 목덜미에 두 개의 단검을 박아 넣었다.
실제로는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꿈속에서는 언제나 늘어진 필름을 보는 것처럼 길고 생생했다. 그리고 실제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이네 같은 직업적인 자객에게는 두 사람 정도 죽이기에 부족한 시간도 아니었다.
오닐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엘리야 하이네의 단검이 내게 날아들었다. 하이네의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을 실제로 본 것은 1초나…… 2초쯤이었을 거다. 내게 선사한 죽음의 선물이 총신에 맞아서 쨍그랑 소리를 내며 튕겨나가는 순간, 그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굳었다.
그와의 대면은 순간이었다 해도 좋을 만큼 짧은 것이었지만 나는 그 얼굴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야 하이네는 흐린 겨울 하늘처럼 공허한 얼굴로 죽었다. 내 총격에 이마가 깨어져 나갈 때도 그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닐은 내 첫 파트너였고 엘리야 하이네를 죽인 건 내 첫 살인이었다.
꿈에서는 하이네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을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럴 시간이 없었고 상황이 그걸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암흑가의 주도 세력으로 떠올라 경찰과 암흑가의 기존 세력들을 긴장 시키던 일본계 마약상을 백주에 저격한 혐의를 받고 있었던 인물은 엘리야 하이네가 아니라 사이몬 발렌타인이었다.
발렌타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왔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가 시야에 잡히기도 전에 사방에서 총성이 터지더니 총알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그 무차별 총격으로 당시 건물 안에 있던 부랑자 3명이 사망했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눈감으면 그때의 총성이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킬러 발렌타인과의 첫 번째 조우는 대단히 소란스럽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발렌타인은 하이네의 시체를 복도까지 끌고 나갔었다.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을 텐데. 그때 어쩌면 비명과도 같은 흐느낌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그것이 발렌타인의 것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시계를 보니 두 시가 조금 넘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일 투성인데 꿈까지 한 짐 거드니까 심란해 미칠 것 같았다. 이제 정말 일어나야겠다.
목덜미에 감겨드는 차가운 바람에 흠칫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바람이 불고 있고 공기가 축축할 뿐이었다. 음습한 찬바람이 폐에 가득 들어차자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저택에서 나온 지 5분도 안됐는데…… 이러다 감기 들겠다. 요즘은 날씨가 계속 이랬다. 니콜라스가 잡히기 전까지는 비 같은 거 오지 않는 편이 좋은데…… 벌써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내렸다.
니콜라스에게는 다중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이 있다……고 했다. 평소에는 정상이다가 무슨 자극을 받으면 한 바퀴 뺑 돌아서 무시무시한 살인마가 되는 희한한 정신병이라는데, 놈의 경우에 그 광기를 발사하는 방아쇠가 바로 비라고 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일부 정신과 의사들 주장이었는데 니콜라스 재판 때 에너벨 베긴 박사도 그렇게 말했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도 아닌데 갑자기 다른 놈으로 변하다니 그럴 수가 있느냐고, 니콜라스는 어떤 짓을 할 때든 니콜라스였다고 법정에서 아무리 얘기를 해도 판사는 놈의 손에 죽을 뻔했던 내 얘기는 들은 척도 않고 베긴 박사와 다른 정신과 전문의들 말만 철썩 같이 믿었다. 정신병자가 저지른 미친 짓이라고 믿어 넘기는 게 더 편해서였을까? 이제와 생각하면 그랬던 것 같다. 그나저나…… 비니 자식, 차를 어디다 세워 놓은 거야?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 앞마당은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고도 자투리가 남아서 농구장도 두 개쯤 들어갈 정도로 광활했다. 저 멀리 보이는 정문까지만 걸어가려고 해도 날이 새고 말겠다. 차를 멀리 두지는 않았을 텐데…… 열쇠에 붙어 있는 리모컨을 누르니 저 끝에서 희미하게 삑 소리가 났다.
비니의 팔자 사나운 뷰익은 저택 옆에 죽 늘어서 있는 번쩍거리는 차들 사이에 초라하게 끼어 있었다. 본래 그렇게 볼품없는 차가 아니었건만 비니 손에 7개월간 시달린 끝에 거지도 안 집어갈 고물로 변한 것을 보니 동지를 만난 듯 애처로웠다.
운전석에 앉아서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일주일이 지났는데, 니콜라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늘 같은 밤이라도 일을 벌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3년이나 굶주렸으니 그 맹수가 사냥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니콜라스가 비오는 날마다 살인을 했다는 항간의 소문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하지만 비오는 날이면 보통 때보다 들뜨곤 했던 건 기억난다. 이 싸늘하고 음습한 바람은 놈의 광기를 얼마든지 자극할 수 있었다.
정문으로 나오면서 백미러로 뒤쪽을 힐끔 돌아봤다. 불 꺼진 몬티첼리의 저택이 빗속에 점점 멀어져갔다. 중국계 조폭하고 대치 중이라더니 정원 곳곳에 총을 든 경비원들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정문 경비도 제법 삼엄했다.
정문 경비는 문을 열기 전에 저택에 인터폰으로 확인 전화를 하더니 차 옆으로 다가왔다. 몬티첼리 저택의 정문을 경비할 정도면 놈도 꽤나 관록이 붙은 조직원일 터, 아는 얼굴은 아니지만 쿠간에는 내가 모르는 악당도 많다.
경비원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와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잠시 망설이다 창문을 내렸다. 남자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좀 곤란한데…….”
이게 무슨 뜻일까? 문이 고장났나? 아니면 이 앞길에 중국 깡패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나오는 차는 모두 벌집으로 만들어버리나?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대부님하고 연락이 안 된단 말이야. 뭐…… 엄청나게 긴급한 상황이면 연락 못 할 것도 없지만 이런 일로 한참…… 거 뭐랄까…… 어쨌거나…… 방해하기 곤란하거든. 알잖아…… 그런 거 말이야…….”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문도 멀쩡하고 상대조직이 앞길에 지키고 서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지금 나갈 건데…….”
“비니 녀석이 횡설수설하면서 문을 열어주라고 하긴 하는데 말이야…… 이 집에서 누가 비니 명령을 듣나? 날도 궂은데 어지간하면 얌전히 있지 그래.”
“헛소리 작작하고 문이나 열어!”
“곤란하다니까!”
놈이 차안으로 목을 쑥 밀어 넣으며 버럭 소리쳤다. 깜짝이야…….
“멋대로 나돌아다니다가 그 미친놈한테 잡혀 가기라도 하면 어떡해?”
기가 막혀서 빤히 쳐다보자 놈이 겸연쩍은 듯 마른기침을 했다.
“솔직히 짭새 한 마리 죽거나 말거나 난 별로 상관없지만 말이야……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 미친놈한테 잡혀갈 거 알면서 쫓아낸 거라고 떠들어댈 게 빤하잖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지 않아도 마피아라고 그러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좋은 일 하려다가 덤터기 쓸 일 없으니까 좋게 말로 할 때 들어가셔. 응?”
이쪽은 나갈 의사를 밝혔고 저쪽은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그것도 아주 분명하게. 어쩔 수가 없어서 차를 후진시켰다. 놈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있는 힘껏 엑셀을 밟았다. 성능 좋은 뷰익 엔진에서 터져나온 파열음이 차가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급발진한 차에 받힌 저택의 정문이 양쪽으로 튕겨져나가듯 열렸다. 초소로 들어가던 놈이 손에 총까지 들고 뛰쳐나와서 소리소리 지르고 발을 굴렀지만, 분별없이 총질을 해대지는 않았다. 정문이 좀 찌그러졌을 테고 차 앞 범퍼는 박살이 났겠지만 뭐…… 이 차는 어차피 성한 곳이라곤 없었으니까 비니도 그렇게 속상해하진 않을 거다. 이제 어디로 갈까…… 생각해보니 갈 곳이 없었다.
길만 보고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로빈 콘웨이 공원 안내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비니 작은아버지네 집하고 콘웨이 공원은 별로 멀지 않았다. 그 집에서 남쪽으로 산 하나만 넘으면 콘웨이 공원이다.
콘웨이 요양소는 로빈 콘웨이 공원에서 차로 30분 정도 더 들어가는 숲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울창한 숲이라서 요양소 정문에서도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말이 병원이지 경관이 백만장자의 성채처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이 병원에는 니콜라스가 격리 수용된 직후에 딱 한번 와본 적이 있었다. 놈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한번 구경도 하고 나는 잘 살고 있다고 약도 좀 올려줄 작정으로 찾아왔었는데…… 막상 와보니 도저히 그 얼굴을 볼 엄두가 안 나서 건물만 노려보다가 돌아갔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이쪽으로는 고개도 한 번 안 돌리고 살았다.
콘웨이 요양소 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면서도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정신과 치료를 다시 받아야 할까 보다.
현장이 보존돼 있을까? 생각해보니까 아직 현장에 가 보질 못했다. 쥬드 때문에 일주일간 뻗어 있지만 않았으면 진즉에 가 봤을 텐데…… 니콜라스가 갇혀 있던 북쪽 병동은 전소됐다고 했는데, 흔적도 없이 타버린 걸까? 뭔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걸 찾으려면 증거물 보관실에 가는 편이 빠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 길을 가고 있을까?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급히 멈췄다. 비니 차가 몰골은 폐차 직전이지만 실상 뽑은 지 반년밖에 안 된 새 차였고, 브레이크 성능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내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건 커브를 돌면서 슬쩍 쳐다본 백미러에 뭔가가 휙 지나쳐갔기 때문이었다. 저거 사람 아냐? 핸들을 움켜쥐고 심호흡을 했다. 인적 드문 새벽의 공원은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백만장자의 이름을 딴 공원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시간, 이런 날씨에 어떤 미친놈이 이런 곳을 어슬렁거리는 걸까? 니콜라스는 아닐 거다. 아직까지 이 근처에서 알짱거리고 있다면 놈은 정말 미친 거다. 아마 근처 부랑자나 공원관리인이나, 사건 현장 주변을 수색 중인 경찰이거나 아니면…… 무더기로 탈출했다는 정신병자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니콜라스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냥 못 본 척할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여긴 사건 현장 근처고, 나는 경찰이니까…… 하지만 차에서 내리려고 안전벨트를 풀다가 무서운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총이 없다. 내 총…… 정문 보관실에 있을 거랬는데, 문 앞에서 마피아의 평판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경비원하고 실랑이하다가 총 생각을 까맣게 잊었다. 생각해보면 총 내놓으라고 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이 일을 어쩐다…….
혹시나 싶어서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자식…… 그래도 경찰이라고 여벌을 챙겨서 다니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총을 집어서 탄창을 살폈다. 어디다 썼나? 왜 총알이 다섯 발뿐이야? 떼강도하고 마주치는 상황만 아니라면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없는 것보다야 백배 낫고…… 총을 움켜쥐고 차 문을 열었다. 그 순간, 한겨울 바람보다 더 차고 매서운 새벽바람이 얼굴을 후려갈겼다.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서 주변을 한번 빙 둘러보다가 흠칫 멈춰섰다. 범퍼만 깨진 줄 알았는데 어쩌나…… 생각보다 많이 부서졌네. 그 튼튼한 철문을 작정하고 들이받았으니 사실 이렇게 된 게 무리는 아니었다. 범퍼만 부서진 게 아니라 한쪽 라이트가 박살난데다 보닛까지 와싹 찌그러졌다. 한 바퀴 돌아보니 조수석 문짝까지 엉망으로 긁히고 찌그러져서 문이 제대로 열릴지도 의문이었다.
잔 흠집이 많아서 그렇지 실상은 일곱 달밖에 안 탄 새 차인데다 풀옵션인데, 이 지경을 만들어 놓은 걸 알면 아무리 비니라도 열 받을 거다.
어차피 망가진 차, 들여다보고 있어봐야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고, 수색에나 집중하자 싶어서 주변을 살폈다.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 저기 어디쯤이었을 텐데…… 이런 때 비니라도 있었으면…… 헉,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비니라면 우연을 가장해서 놈을 식물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니의 징크스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는다. 가끔 비니는 니콜라스보다 더 위험했다.
정신집중해서 신중하게 숲을 수색해야 하는데 내 머릿속은 비니에, 쥬드에, 위니에, 니콜라스에…… 난데없이 서장까지 등장해서 돛대기 시장보다 더 어수선했다. 그냥 어디 모텔 같은 데 들어가서 잠이나 잘 걸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 흰 새벽에 귀신 나올 것 같은 숲을 뒤지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달달 떨면서 앞으로 한발 한발 전진했다. 축축하게 젖은 숲의 공기에 허파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동트기 직전의 어둠은 어찌나 짙은지 칠흑 그 자체였다. 들리는 것이라곤 불안에 떨며 숲으로 점점 깊숙이 걸어들어가고 있는 내 숨소리와 발소리뿐이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자꾸만 얼굴을 때리고 옷깃을 잡아 뜯었다. 몇 번인가 넘어질 뻔하면서 앞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아무것도 없다. 잘못 본 건가? 꼭 사람 같았는데…… 하긴, 이런 시간에 사람은 무슨……. 맥이 좀 빠지긴 하지만 다행이다 싶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 가운데 분수가 있는 제법 넓은 잔디밭까지 숲을 가로질러도 별 인기척이 없는 걸 보면 공원에서 기르는 사슴 같은 것을 잘못 본 걸 수도 있었다.
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 돌아섰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머리고 옷이고 어느 새 푹 젖어버렸다. 더 추워진 것처럼 느껴진 건 실제로 기온이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내리던 비가 진눈깨비로 변해 흩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진저리를 쳤다. 빨리 차에 가서 몸을 녹이지 않으면 이대로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작은 불빛이 반짝 타올랐다. 어둠 때문에 거리는 가늠하기 힘들었지만 분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잔디밭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분명히 남자였고 질퍽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알 수 있는 건 그뿐이었다.
저게 니콜라스 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내가 놈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시간에 공원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시간 죽일 놈이 아니다. 게다가 여긴 자기가 2년 반이나 갇혀 있던 병원 앞마당이다. 아무리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도 이건 아니지. 그간 눌러 참았던 광기가 솟구치더라도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냥감을 물색해야 옳은 일이지,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 근처를 서성일까? 아마 저건 병원 화재 때 얼떨결에 탈출한 다른 환자일 거다.
이제 어쩌지? 생각해보니까 정신병자는 별로 상대해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당황스럽네. 아니…… 처음부터 당황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혔다. 탈출한 정신병자한테 총 들이대며 꼼짝 마…… 라고 하면 순순히 말을 들으려나?
내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그쪽으로 치료는 상당히 오래 받았으니까 그 경험이라도 되살려보자. 섣부르게 자극하면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노련한 협상가나 정신과 의사처럼 말을 걸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오랜 친구에게 하듯이 다정하고 침착하게…… 하지만 6개월 전쯤이던가, 15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자살하려던 50대 남자 하나를 동부 경찰청에 근무하는 베테랑 협상가가 살살 달래서 끌어내리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타고나야지 말주변 없는 짭새가 함부로 흉내 낼 일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선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꾸물거리는데 남자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내 쪽을 돌아봤다. 이제 그도 나를 봤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총을 움켜쥐었고 남자는 담배꽁초를 집어던지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망설임도 없이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저 남자,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면 저쪽도 놀라든지…… 거기 누구냐고 한 마디쯤 물어야 하지 않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어서 총을 남자에게 겨누고 한발 다가섰다.
“멈춰! 멈추지 않으면…….”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뭐야? 진짜로 미친놈 아냐? 다가올수록 남자의 윤곽이 확실해졌다. 굉장히 건장한 체격이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거친 얼굴이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데 뭔지는 잘 모르겠다. 엽총보다 길고 모양새도 단조로워서 그다지 위험한 물건 같지는 않지만…… 남자가 손에 든 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는가 싶더니 갑자기 손에 쥔 막대기가 두 개로 늘어났다. 저게 뭐야?
남자가 손에 든 것은 검이었다. 순간,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마주쳤던 묘한 남자와 그의 장검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 남자가 아니었다. 검도 그 남자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워 보였다.
한순간 멍해져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놈이 무서운 기세로 내게 들이닥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 상대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시퍼런 살기…… 본능적으로 놈의 공격을 피해서 몸을 틀었다. 귀 옆으로 쉬익……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쏜다!”
쥐죽은 듯 고요하던 새벽 공기를 찢고 총성이 고막이 아플 정도로 날카롭게 울렸다. 나를 향해 달려들던 남자의 몸이 한 차례 크게 뒤흔들렸다. 남자는 그대로 멈춰서더니 한 손으로 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남자의 배가 검게 젖어 들어갔다. 남자가 피에 젖어서 흥건한 자기 손을 들어 신기한 듯 쳐다봤다.
“무기 내려놓고 바닥에 엎드려! 섣부른 짓 하면…….”
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배에 총을 맞았는데도 놈은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었고 얼굴도 고통에 일그러지지 않았다. 나를 지그시 노려보는 눈빛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것을 보면 맛이 가도 이만 저만 간 놈이 아니었다.
총에 맞은 게 확실하니까 금방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쪽은 오히려 나였다. 놈이 검을 고쳐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난 몰라…… 이런 때 비니라도 있었으면…… 난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놈의 검이 내 목을 노리고 들이쳤다. 놈에게 총질을 해대며 경황없이 뒤로 물러서다가 뭔가에 걸려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그 덕에 칼끝이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넘어지지 않았으면 내 목을 안고 주저앉을 뻔했다.
미친놈이 마구잡이로 휘두른다기엔 지나치게 예리하고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게다가 방탄조끼라도 챙겨 입었는지 총을 세 발이나 맞고도 죽기는커녕 기세가 더욱 펄펄해지고…… 칼싸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프로는 프로의 냄새를 맡는다. 이놈은…….
놈이 휘두르는 검날을 요행히 한번은 피했지만 이제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놈은 두발로 땅을 버티고 서서 내 가슴을 내리 찍으려고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이렇게 죽나?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저 자식의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줘도 여전히 저렇게 무표정할 수 있을까? 나도 총을 들어서 놈의 미간을 조준했다. 놈이나 나나 어차피 단발 승부다.
아마도 나는 놈의 두개골에 멋진 구멍을 만들어줄 수도 있었을 거다. 그리고 놈도…… 단칼에 내 심장을 찢을 수 있었다. 총격에 머리가 날아간다고 해도 이미 한껏 치켜든 검을 내 심장에 내리꽂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그 위태로운 순간에 뒤쪽에서 불쑥 튀어오른 검은 그림자가 놈에게 달려들지만 않았으면 놈도, 나도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터였다.
갑자기 놈의 뒤쪽에서 뭔가 시커먼 그림자가 솟아오르는 바람에 아주 잠깐이지만 놈이 악마고…… 등에서 검은 날개가 솟구친다는 생각을 했다. 어지간한 높이까지 떠오른 그림자가 곧장 놈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히는 걸 보고서야 누군가 뒤에서 놈을 공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차앙…… 하는 굉음이 조용한 새벽을 뒤흔들었다. 그저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혀서 나는 소리라기엔 박력이 지나쳤고 그 순간 휘몰아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로 기류가 거칠었다.
미친 터미네이터가 나를 노리던 검을 틀어서 등 뒤에서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총격에도 까딱 않던 놈이 크게 휘청할 만큼 최초의 일격은 위력적이었다. 첫 공격에 실패한 검은 그림자가 날듯이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한 손에 든 검을 내리면서 아주 한가로운 폼으로 맛이 한참 간 남자와 마주섰다.
지금이 몇 시쯤 됐을까? 어느새 동녘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흐린 날씨라서 여전히 어두웠지만 좀 전의 칠흑 같은 어둠은 이미 가시고 없었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놈의 얼굴도 이제 확실히 보였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그림자 역시 그랬다. 그런데…… 뭐야? 오웬?
어렴풋한 미명 속에 검은 머리카락을 어지럽게 흩날리며 칼 든 백정 같은 미치광이와 마주선 남자는 오웬이었다. 확실히 그날 아침에 봤던 그 오웬이 틀림없었고 쥐고 있는 검도 그…… 엑스칼리버? 아닌데…… 뭔가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하여튼 그거였다. 아직도 어둠이 미쳐 가시지 않은 숲에서 오웬이 든 검만이 환한 은색으로 빛났다. 이제 막 무슨 일인가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먼저 공격을 한 것은 미친 터미네이터였다. 쩌렁쩌렁한 기합과 함께 온몸의 기운을 다 실어서 내리치는 그 검날은 바위라도 능히 두 쪽으로 가를 것 같았다. 오웬도 피하지 않고 자기 검으로 그 공격을 받아냈다. 갑자기 생각났다. 저거, 오거스트 크로스랬었지. 오웬의 것도 작은 검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휘두르는 장검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웬의 검 따위는 맥없이 부러져버리고 오웬도 그대로 두 동강이 날 것만 같아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순간, 쩌엉…… 하는 엄청난 굉음에 고막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상대의 무식한 공격을 무식하게 막아낸 오웬이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나무젓가락처럼 부서져버릴 것 같았던 오웬의 검은 이제 은색을 지나쳐 푸르스름한 기운까지 감도는 것이 얼핏 광선검처럼 보일 정도였다.
오웬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곧장 상대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놈도 만만치 않은 순발력과 유연함으로 오웬의 검을 막아냈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이야…….
한바탕 붙어 싸우던 둘은 이제 어느 정도 떨어져서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의 공격으로 그들은 서로의 파워나 기량을 가늠했을 터였다. 검날이 맞닿을 듯 가까이 접근했다가 뒤로 물러서길 몇 차례…… 둘은 선뜻 서로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들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심한 눈길로 상대를 응시했다.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교차하는 두 검객의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격렬한 증오나 분노…… 하다못해 서로에 대한 희미한 연민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황량한 겨울 벌판을 헤매다 마주친 맹수들처럼 맹목적이었다.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마치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맞닥뜨리면 둘 중 하나는 죽을 터였다.
총을 움켜쥐고 주춤주춤 일어났다. 조금 전에 거의 저승 문턱을 밟은 탓인지 심장이 아직까지도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듯 제멋대로 펄떡거렸다. 이 길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겁도 나고, 한편으론 저 미친 살인광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주고 싶을 만큼 화도 났지만…… 그냥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힘들게 몸을 지탱하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눈앞에서 곧 살인이 벌어질 텐데, 누가 누굴 죽일지는 아직 모르지만…… 손에 총까지 들고 그냥 구경만 하고 서 있다니…….
오웬과 마주선 저 미친 자식의 얼굴엔 이제 광기 같은 건 없었다. 미친놈 주제에 상당히 쿨한 얼굴을 하고 어떻게 하면 상대를 단칼에 두 동강낼 수 있을지 골몰하고 있는 놈은 총을 4발이나 맞고도 쌩쌩하고 팔팔하기가 금방 낚싯줄로 건져 올린 송어 같았다.
손이 너무 떨려서 총알이 다 빗나간 걸까? 생각해봤지만 놈의 모직 코트엔 총알구멍이 뚜렷하게 나 있었고, 상반신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심하게 미치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얘긴 들었지만 그 상태를 넘어서면 죽지도 않게 되는 걸까?
“나라면 그냥 구경이나 하겠어.”
내가 총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오웬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둘은 지금껏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보통 영화 같은 거 보면 악당과 주인공이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면 최소한 10분은 실컷 수다를 떨어서 그간의 사연을 설명해주던데…… 영화랑 현실의 차이가 이런 건가 보다.
바로 그 순간, 터미네이터가 오웬에게 달려들었다. 전광석화처럼 옆구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공격을 오웬은 몸을 한 바퀴 돌려 위태롭게 막아냈다. 첫 번째 공격이 막히자 곧바로 검날이 그 머리로 날아들었다. 오웬이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숙이자 뒤에 있는 분수 가장자리에서 물 항아리를 들고 있던 대리석상의 허리가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지금 돌을 자른 거야? 대리석 아가씨에게 일어난 참사에 놀라서 입안으로 비명을 삼켰다.
오웬은 계속 쫓겼다. 아무래도 힘이 부치는지 오웬은 놈을 피해서 달아나기만 했다. 이따금 오웬과 놈의 검이 맞부딪히기라도 하면 깨진 교회 종에서나 날 것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고, 그때마다 놈은 오웬을 더 거칠게 몰아쳤다.
얼굴 정면으로 들이닥치는 무차별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던 오웬이 결국 뒤로 나가떨어졌다. 마치 좀 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냥 구경이나 하라더니…… 저게 뭐야? 다음 순간, 쓰러진 오웬의 머리를 향해 놈의 검날이 숨 돌릴 틈 없이 내리꽂혔다.
벤치 아래로 몸을 굴려 들어가는 오웬의 민첩함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지만 나무와 철로 만들어진 벤치를 단칼에 두 동강으로 잘라버리는 괴물 같은 놈을 당해내기는 힘겨워 보였다.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잠깐 마주쳤던 사람이 미친놈 칼에 맞아 죽는 걸 구경만 할 수가 없어서 총을 들어 놈의 머리를 조준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목표를 명중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남은 총알도 하나뿐이었다.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내리찍히는 검을 피해 벤치 아래에서 기어 나오기는 했지만 오웬의 목 언저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놈의 검이 오웬의 목을 노리고 사납게 바람을 갈랐고, 거의 동시에 내 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은…… 아마 빗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놈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고, 그 짧은 순간에 오웬이 놈의 옆구리를 검으로 후려쳤다. 하얗게 얼어붙은 바닥에 빨간 피가 점점이 튀었다.
놈의 몸놀림이 먹이를 쫓는 사자 같았다면 오웬은 물을 차고 날아오르는 제비 같았다. 오웬이 놈의 등 뒤로 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검이 어느 틈에 놈의 등에 깊이 박혔다.
등이 꿰뚫린 고통에 놈의 상체가 뒤로 깊이 꺾였다. 놈의 입에서 끓는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등으로 들어간 검의 끝부분이 배를 뚫고 나와서 음산한 빛을 발했다. 다음 순간, 오웬이 단단히 박힌 검을 놈의 등에서 뽑아냈고, 등줄기에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놈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끝난 건가? 하지만 놈은 여전히 검을 쥔 상태였다. 거머쥔 검으로 상반신을 지탱하며 서서히 휘어진 등을 곧게 펴려고 움찔거렸고,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놈의 앞엔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보고 있는 걸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오웬도, 그의 검으로도 놈을 죽일 수는 없는 건가? 놈이 누군지, 어째서 나를 공격했는지…… 이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빌어먹을 자식이 어째서 죽지 않느냐 하는 거다. 좀 전에 나를 공격해온 것에 대한 원한 때문에 놈이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단지 어떤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꽃이 너무 두려웠다.
오웬은 자기 검에 몸통을 꿰뚫리고도 죽지 않는 인간에게 나만큼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웬이 침착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은 절차에 따라 어떤 의식을 집행하는 제사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웬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이상한 울림이 마치 울음소리처럼 낮고 우울하게 퍼졌다. 어떻게 해서든 꺾어진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버둥거리는 이상한 남자과 하얗게 빛이 서려 있는 검을 머리 위까지 들어올린 오웬을 번갈아 쳐다봤다. 울림은 그 어디쯤에서 시작된 것 같았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 끝났어.”
오웬이 말했다.
“끝이라…… 듣기 좋군.”
남자가 일어나려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마치 저 숲에 뭔가 중요한 게 있는 것처럼…….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그뿐이었다. 둘 다 뭔가 못다한 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두 마디 정도는 더 나누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웬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두렵고 우울한 울림이 고막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고, 오웬의 검이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커다란 호를 그렸다. 죽지 않는 남자의 머리가 공원 바닥의 노란 모자이크 블록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잠시 후였다.
“……이…….”
무슨 소리지…….
“…… 이…… 제…… 이…….”
시끄럽고 귀찮아…… 어떤 놈이 아까부터 이렇게 떠드는 거야? 일어나서 입 좀 닥치라고 소리라도 질러줄까 생각했지만 너무 귀찮아서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손끝은커녕 눈꺼풀도 못 들어올리겠다.
“…… 제이…… 정신 좀 차려봐…… 제이…….”
잠 좀 자자! 쫌!!
시끄러워서 도저히 더는 잘 수가 없었다. 눈을 다 뜨는 것도 힘들어서 반만 뜨고 대체 어떤 놈이 자는 사람 귓전에 대고 이렇게 앵앵 거리는지 확인할 양으로 옆을 노려보니 멀쩡하게 잘생긴 사내놈이 눈물 글썽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낯이 익기는 익은데…….
“제이!”
내가 깨어난 것을 안 남자가 뛸 뜻 기뻐하며 내 목을 끌어안고 등을 사정없이 두들겨댔다. 친군가 보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다.
“환자한테 그러면 안 돼요!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고요.”
간호사가 불쑥 나타나서 남자에게 소리쳤다. 전사처럼 거친 외모에 덩치가 농구선수 만한 간호사의 출현에 놀란 남자가 나를 놓고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자기 발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다가 내 팔뚝에 꽂힌 링거 줄을 잡아채면서 주저앉는 통에 꽂혀 있던 주사바늘이 확 뽑혀나가고 말았다. 아우…… 팔이야…… 이 남자가 누군지 그제야 기억났다.
“비니?”
입을 열고나서야 목이 엉망으로 쉬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간호사한테 혼이 달아날 정도로 야단을 맞고 풀이 팍 죽은 비니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묻고 싶어. 넌 대체 어쩌다 이 꼴인 거야?”
여기가 어딘데?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병원이다.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왜 병원에 누워 있을까?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비니가 신문 일면을 펴서 코앞에 들이 밀었다. 헉……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런 일이…… 부서지고 찌그러진 비니의 자동차가 신문 일면에 실리다니, 대체 왜? 그건 그렇고 밝은 날에 찍은 사진으로 자세히 보니까 새벽에 얼핏 봤을 때 보다 차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엔진까지 터졌겠는데? 라이트도 그냥 나간 게 아니라 있었던 흔적도 없이 떨어져 나가버렸고, 문짝도 앞뒤로 갈아끼워야 될 것 같고…… 비니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게 거칠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문제가 좀 있었어. 대단한 건 아니고…….”
비니가 나를 엄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화가 많이 났다.
“정문에서 경비 보던 녀석이 문을 안 열어줘서…… 정말 나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발렌타인도 있는데…… 생각을 해봐. 내가 어떻게 그 집에 다시 들어가?”
비니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되도록 빨리, 감쪽같이 고쳐줄게. 며칠만 내 차 타고 다녀. 응?”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정말…… 그땐 흥분해서 그게 니 차란 걸 까맣게 잊어버렸었어.”
“무슨 헛소리야?”
이렇게까지 사과하고 또 차도 고쳐준다는데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냐?
“미안하다고 사과하잖아! 깨끗하게 고쳐준다니까!!”
정말 깨끗하게 고쳐질지는 의문이지만…… 견적이 얼마나 나올까? 상태만 봐선 폐차를 하고 새로 한 대 뽑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비니가 내 귓전에 대고 울부짖었다.
“지금 차가 문제야?”
또 다른 문제가 있나? 그러고 보니…… 비니 작은아버지가 언짢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호의를 무시한데다 자기 집 대문까지 때려부수고 뛰쳐나가버린 내 소행에 대해서 비니 작은아버지가 괘씸해하고 있다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쿠간에서 프란시스 몬티첼리에게 찍히고도 제명대로 산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비니가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콘웨이 공원 숲길에서 차만 발견되고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우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니콜라스 자식한테 끌려가서 죽어버린 줄 알았단 말이야! 도대체 그 새벽에 거긴 왜 가? 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차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었어?
「비오는 날의 악마, 니콜라스 헤슬렘의 복수」라…… 이게 일간지 헤드라인이라니, 유치하다. 비니를 힐끔 쳐다보니 여전히 표정이 뚱했다. 얼른 자동차 사진이 실린 일면을 넘겼더니 허리가 잘려나간 분수 조각상…… 반 토막 난 공원 벤치 사진이 극적인 구도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고 「니콜라스 탈출 일주일 만에 3년 전 그의 체포에 깊이 관여했던 경찰관 실종, 사건 현장에 격투 흔적 역력」이라……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겠다. 그런데…….
“빌어먹을!!”
“흥분하지 마. 의사가 안정하랬다잖아?”
흥분 안 하게 생겼어?
“대체 어떤 자식이 남의 신분증을 멋대로 빼돌려서 신문에 내는 거야?”
힐끔 비니를 보니, 시선이 언제 자기 구두 끝으로 옮겨 갔을까?
“경황이 없어서…… 니 최근 사진 한 장 내놓으라고 기자들이 난리를 쳐서……”
신분증을 태워버리든지 해야지 하필이면 왜 저 사진이야? 저렇게 얼빵한 얼굴이 온 나라 안에 깔리다니…… 이제 경찰서에 출근하면 어떤 일을 당할지 불을 보듯 훤했다. 내 책상이랑 사물함, 심하면 온 경찰서 게시판이 이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을 거다. 망할 놈…… 차 때문에 지금은 참는다. 분을 삭이느라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아까 봤던 간호사가 다시 들어왔다.
“환자는 절대 안정해야 한다고 했죠?”
간호사가 비니를 슬쩍 노려봤다.
“안정시키려고 노력 중이에요!”
비니가 몹시 억울해하며 항변했지만 간호사는 귓등으로 들어넘기고 새 링거를 건 뒤 내 손등에 바늘을 찔러 넣었다. 바늘이 혈관에 박히는 순간 핑그르…… 세상이 돌았다.
“제이!”
비니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다가섰고 간호사는 다급하게 의사를 부르며 방에서 뛰쳐나갔다.
“왜 그래? 제이! 어디…… 어디가 아파? 응?”
비니가 내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눈을 떴다.
“피곤해.”
지금 같아선 100년을 퍼질러져 자도 이 피곤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비니가 괜히 신경질을 내며 잡아 흔들던 내 어깨를 확 밀쳤다.
“장난칠 때야? 너 때문에 전 경찰이 초비상이었단 말이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야 할 거 아냐?”
글쎄……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지금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오르는 새벽의 결투가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혹시 지난 밤 내내 꾼 긴 꿈은 아니었을까? 아마 꿈이었을 거야……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을 리가 있나? 뒷골목 쓰레기통만 잘 뒤져도 권총 두 자루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동네에서 진검 승부라니…….
아니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자.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그게 꿈이면 신문에 난 저 사진들은 대체 뭔데?
“살인사건이야…….”
칠흑 같은 바다 속에서 저 혼자 빛을 발하며 헤엄쳐다니는 심해어 같은 검의 광채, 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나뭇가지, 귓전에 어렴풋이 울리던 불길하고 우울한 울림, 오웬의 긴 머리카락, 어둠 속에서는 그저 검게만 보이던 피…… 목을 만져보니 거즈를 대고 빙 둘러서 붕대를 감아놨다.
“공원에서 결투가 있었어. 어떤 미친놈이 먼저 나를 공격했는데…… 공원에서 말이야. 사람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차 세우고 숲을 뒤지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공원에 왜 갔냐 하면, 아무래도 사건 현장을 내가 봐야 될 것 같았거든. 그런데 어떤 놈이 갑자기 칼을 들고 나한테 달려드는 거야. 왜…… 우리 전에 봤던 것 같은 긴 칼 말이야. 총을 아무리 쏴도 죽지도 않고…… 그때 갑자기…….”
설명이 좀 두서가 없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측은한 표정 지을 건 또 뭐냐……. 그때 아까 주사 놓다가 뛰쳐나간 간호사가 의사하고 같이 들어왔다. 나이가 한 50쯤 되어 보이는 의사가 들어오자 비니가 대단히 걱정스런 얼굴로 의사를 돌아봤다.
“대단한 외상은 없다면서요?”
비니의 근심 어린 질문에 의사가 당황해서 나를 쳐다봤다.
“외상이라곤 타박상 몇 군데하고 목에 베인 상처뿐입니다만…… 그 외엔 경미한 감기증세하고 발열증세가 좀 있긴 한데…… 왜요? 무슨 이상이 있습니까?”
“헛소리를 해요!”
근데 저 자식이…….
로빈 콘웨이 공원 진입로에서 비니 차가 발견된 것은 동 트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순찰 중인 경찰이 공원길에 아무렇게나 세워 놓은 청색 뷰익을 발견하고 차적을 조회해서 그 고물차가 비니 몬티첼리의 차라는 걸 알아내는 데는 시간도 얼마 안 걸렸을 거다.
차량 절도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차량 절도범들이 경찰관 차라고 특별히 봐주는 법도 없으니까 처음엔 그저 어떤 놈이 집어타고 실컷 돌아다니다가 기름 떨어지니까 아무 데나 버려 놓고 간 도난 차량으로 간주하고 비니에게 확인 전화를 할 때만 해도 집단 히스테리의 징후는 전혀 없었다.
니콜라스 탈출이 일주일째로 접어들고 있었고…… 경찰은 어떤 실마리도 찾아내지 못한 채 신고 접수된 가출 청소년과 가출 가장들을 열여섯 명이나 찾아내는 전대미문의 성과를 올리는 중이었다. 기자들은 상황이 더 좋지 않아서 니콜라스 특집 기사에 희생자 특집 기사…… 니콜라스 체포 전담반 특집 기사까지 다 우려먹고 더 이상 쓸 말도 없어 신문 일면을 영화배우 재혼 발표에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다.
상황이 이런 때 니콜라스가 자기 사냥감으로 공식 지정한 경찰관이 친구 차를 몰고 나갔다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 그 난리가 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설상가상 공원에서는 격렬한 사투의 흔적과 핏자국…… 그때까지도 화약 냄새 풀풀 풍기는 빈총까지 발견되었으니 이 정도면 아버지 빽으로 이제 막 신문사에 굴러 들어간 풋내기 기자라도 장편 소설을 써낼 만한 소스였다.
삼류 추리에, 묘한 치정의 분위기까지 풍기는 신문 소설이 가판대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을 시간쯤에 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지는 로빈 콘웨이 공원에서 차로 15분 거리도 안 되는 자선병원이었다.
전화를 받아서 잠자코 듣기만 하던 서장은 비통해하며 전화를 끊었고 한동안 자기 방에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서장은 독일인치곤 상당히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다.
병원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쥬드였다. 바람같이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시체 보관실로 직행했다. 니콜라스에게 당한 시체는 어딘가 한 군데는 손실된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심장이 사라졌거나 간이 잘려져나갔거나…… 뇌가 없는 경우도 네 건이나 되었으니까 비장한 각오 없이는 영안실 문을 열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애초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영안실에서 본 거라곤 교통사고로 사망한 젊은 남녀 두 명과 심장마비로 수술 도중에 절명한 60대 남자…… 약물 과용으로 비명횡사한 17세 소년의 사체가 전부였다.
뒤이어 도착한 서장과 반장도 영안실로 향하다가 막 나오는 쥬드와 마주쳤고 뒤늦게 도착한 비니는 눈물 펑펑 쏟으면서 영안실을 찾다가 약품 보관실에서 나오던 약사하고 부딪쳐서 약병을 두 개나 깨뜨렸다. 사소한 충돌사고 같지만 모양과 크기와 색깔이 비슷한 환각성 강한 진통제와 소화제가 뒤섞여버렸으니 약사는 지금쯤 자기 방에서 머리카락 쥐어뜯으며 고민에 빠져 있을 거다.
본의 아니게 걱정시킨 건 미안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급한 마음에 팔에 꽂혀 있는 주사 바늘을 뽑아 던지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체는?”
“무슨 시체?”
흙먼지가 쩔어붙은 바지를 대충 털고 다리를 꿰면서 던진 물음에 비니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반응을 보니까 공원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남자의 시체가 콘웨이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숲속 어딘가에 버려졌다면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아까 말했잖아. 공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어.”
“꿈…… 꾼 거 아냐?”
대답 대신 목에 감겨 있던 거즈를 잡아 뜯었다. 내 목의 상처를 본 비니가 낮은 신음을 토해냈다. 거울에 비춰보니 마치 목에 빨간 털실이 한 가닥 감겨 있는 것 같았다. 그저 몽롱하기만 했던 새벽의 결투가 다시 돌려보는 영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니콜라스보다 더 심하게 맛이 간 놈인지도 몰라.”
“…….”
비니는 영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신문을 집어서 비니 코앞에 들이 밀었다. 신문을 힐끔 쳐다본 비니가 한숨을 쉬었다.
“내 차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잘못 폈다. 얼른 뒤집어서 두 동강난 대리석 조각상과 벤치 사진을 보여줬다. 비니가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공원에서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죽은 사람이 너만 아니면 별로 관심 없어.”
“한가하게 관심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오웬을 찾아야 돼!”
“오웬이 누군데?”
그새 까먹었네. 하긴…… 밀쳐서 기절 정도 시킨 건 비니한테는 사고도 아니다. 잠깐 할 말을 잃고 쳐다봤더니 그제서야 생각이 나는지 비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 생각나. 근데 그 자식은 왜?”
“웬 미친놈이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와서 구해줬어.”
“그런 인사라면 천천히 해도 되잖아.”
“그러고 나서 그놈의 목을 날려버렸단 말이야!”
비니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힘든 줄은 알지만 기분 나빠서 그냥 돌아나가려는데 비니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지금 나가봐야 기자들한테 밟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게다가 이젠 차도 없잖아.”
서장과 반장이 병실에 들이닥친 건 병원에서 나간다, 못 간다 하며 비니와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말단 경찰관 병문안 치곤 멤버가 지나치게 화려했다. 게다가 앞장서서 밀고 들어온 서장의 표정만 봐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 걸 알 것 같았다.
서장이 다짜고짜 내 멱살을 틀어잡았다.
“이 망할 자식! 사람을 엿 먹여도 분수가 있지…… 새벽부터 있는 대로 뺑뺑이를 치게 만들고 정작 네놈은 병원 구석에서 팔자 좋게 퍼질러져 잠을 자?”
나 죽은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달려왔다가 병실에서 자고 있는 걸 보고 어지간히 맥 빠졌을 거란 생각은 대충 하고 있었지만…… 어흑…… 숨 막혀…… 신장 190센티미터에 몸무게가 최소한 100킬로그램 이상인 거구에게 깔려 보지 않은 사람은 지금 이 고통을 모를 거다.
“서장님! 진정하세요! 제이는 지금 정상이 아니에요…….”
비니가 온몸을 던져서 서장을 만류해봤지만 체급에서 워낙 밀렸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내려다보던 쥬드가 비니를 도와서 서장의 오른팔을 내 목에서 뜯어냈다.
“놓고 말로 하세요! 일단 어떻게 된 건지 들어는 봐야죠! 그 다음엔 서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쥬드까지 같이 말려준 덕에 창밖으로 던져지는 최악의 사태는 모면했다. 서장은 문가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대수롭지 않은 생채기라지만 서장한테 모질게 쥐어 흔들린 덕에 목의 상처에서 피가 스며나와 셔츠 깃을 적셨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내가 무슨 죄냐? 나 죽은 줄 알고 놀라서 이런다지만 실제로 죽을 뻔했고 또…… 안 죽은 게 잘못이냐?
속에 있는 말을 다 지껄였다간 진짜 몰매를 맞을 것 같아서 눈치껏 주저앉아 콜록거리고 있는데 쥬드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하얀 나리꽃 같은 손을 잡고 일어나려니 잠든 사이 비니 작은아버지 집에 버려졌던 일에 대한 원망이 춘풍에 잔설처럼 잦아들었다. 이 정도 친절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되는데…….
나를 침대에 밀어 앉힌 쥬드가 맞은편 빈 침대에 걸터앉았다. 암적색 모직 코트를 걸친 쥬드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조금 창백해져 있었다. 니콜라스 사건 수사가 지지부진한 탓일까? 아니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항상 저렇게 창백했던 걸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는 쥬드의 눈동자가 일견 무표정하면서도 서늘했다. 쥬드 역시 화가 많이 나 있는 게 분명했다. 서장과 다른 점이라면 쥬드는 참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공원에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지나치다 보니까 콘웨이 요양소 화재 현장이 멀지 않은 곳이었고 한번은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 공원길로 접어들다가 숲에서 인기척이 나기에 니콜라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니콜라스의 이름이 나오자 모두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현대의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일상이 특이할 건 없다. 하루가 단조롭고 평범하고 초라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경찰 일도 그렇다. 매일매일이 모험의 연속이거나 생사의 갈림길인 것은 아니다. 연쇄살인범을 잡으려다가 도리어 잡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도 드문 일이고, 피 튀기는 결투 현장에 멋모르고 뛰어들었다가 목이 날아갈 뻔한 것도 모든 경찰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놈한테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콘웨이 공원의 새벽 결투를 다시 떠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사방으로 피가 튀면서…… 남자의 목이 바닥에 툭 떨어졌어요.”
얘기는 거의 끝났는데…… 둘러보니 청중들의 반응이 너무 싸늘해서 신문을 집어들고 사진의 거무죽죽한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도…… 또 이것도 전부 그 남자의 피예요. 마치…… 터진 소화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고요. 피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그 참수 장면에 대한 묘사가 너무 리얼했는지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말들이 없나?
다들 심각한 얼굴인데 그중에서도 고개를 반쯤 숙인 쥬드의 미간에 내 천자 주름이 아주 깊이 잡혀 있었다. 아까부터 남몰래 한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햇수로 7년을 같은 직장에 근무했어도 저런 얼굴은 낯설다. 모두들 안색도 창백하고 표정도 시무룩하고…… 비니는 잠시 고개를 떨군 채 잠잠하더니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자네…… 제이한테 대체 뭘 먹인 건가?”
서장의 조용한 질문에 쥬드가 난감한 표정을 손으로 슬쩍 가렸다.
“지금 생각하는 중이에요.”
진실을 묻어버리고 좀 더 그럴 듯한 스토리를 하나 짜내는 게 더 현명했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지만 뒤이어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걸 보니까 병원 직원인 것 같은데, 아무 생각 없이 한발 들어서다가 한방 가득 찬 사람들을 보고는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체구도 외소한 편이고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 큼직한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다니는 폼이 꽤나 소심해 보였다.
“당신, 누구야?”
서장이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저…… 저요?”
남자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래! 당신 말이야.”
“인턴인데요.”
의사라는 말에 서장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등 뒤로 문고리를 잡았다.
“바쁘시면…… 좀 있다 올까요?”
“혹시 머릿속도 보쇼?”
남자가 얼른 머리를 끄덕였다.
“여러 군데 보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샘플만 있으면 뭐든…… 알아 낼 수 있습니다.”
“샘플?”
“검사실에 있거든요.”
남자의 대답에 서장이 슬쩍 눈을 흘겼다.
“저 자식 뇌 한 조각만 썰어다가 줘서 보내면 안 될까? 뭐든 알아낸다잖아.”
서장은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 같았다. 다행히 쥬드가…….
“검사실에서…… 무슨 일로?”
의사가 쥬드를 돌아보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쥬드를 처음 본 남자의 심장이 의례히 그렇듯…… 순간적인 마비 상태가 온 모양이다.
“그게 그러니까, 검사실로 혈액 샘플이 왔는데, 그게 좀…….”
쥬드가 남자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의사가 어쩔 줄 모르고 시선 둘 곳을 찾아서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오염이 됐었나 봐요. 흔한 일이죠. 종종 그런 실수를 하거든요. 그래서 샘플 채취를 다시…….”
의사의 방문 목적이 별로 달갑지 않다. 누구라도 검사 목적으로 생피를 자꾸 뽑히는 게 썩 내키진 않을 거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아닌데 검사는 무슨…….
“이 사람은 주치의가 따로 있어요. 검사를 해도 경찰 병원에 닥터 장이 할 겁니다.”
쥬드가 오랜만에 내 편을 들어주니까 고맙긴 하지만 그 말투가 정 떨어지게 냉랭한 게 거슬렸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 예…… 하지만 병원 규정상 꼭 필요한 검사고…….”
의사가 어떻게든 내 피를 뽑아가려고 식은땀을 흘리며 버텼다. 너무 안쓰러워서 필요한 만큼 뽑아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번엔 서장이 앞을 막아섰다. 눈치 보던 반장까지 눈에 힘을 주고 서장 옆에 나란히 서자 널널하던 병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지하 1층 3번 취조실처럼 험악해지고 말았다. 흉악범 취조를 주로 거기서 한다.
“닥터 코넬도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서…… 의과대학 선배님이신데…… 성질이 무지 급하거든요…….”
서장이 말없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내가 앉은 자리에선 뒤통수밖에 안 보이는데…… 어떤 표정이기에 의사 얼굴이 저렇게 질려 있을까?
“그리고…… 만약에 혈액이 오염된 게 아니라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된 걸 수도 있으니까…… 만일을 위해서라도 재검을 해보는 편이…….”
“당신 눈엔 우리가 뭐 하는 사람들로 보여?”
서장이 목쉰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자 의사가 한발 더 물러서려다 문 바로 옆에 등을 딱 붙이고 선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제가 어젯저녁부터 검사실 밖으론 한발도 안 나와봐서…… 뭐하시는 분들인지는…… 잘…….”
“우린 경찰이야!”
반장이 래퍼마냥 껄렁거리며 신분을 밝혔다.
“아…… 그러세요? 그러시군요…….”
다른 데도 아니고 병원에서 의사를 저렇게 개 몰듯 하고도 우리가 무사할까?
“경찰 일이라는 게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피 뿌리면서 다닐 때가 많은데 말이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검사에 의사 맘대로 하루에 두 번씩 뽑아가고 그러면 체력 딸려서 일하기 힘들다고. 게다가 여기 있는 이 친구는 말이야…… 만성 빈혈이란 말이야!”
내가? 언제부터?
“그랬군요.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경찰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아무도 모르지!”
반장이 지나치게 흥분하며 나섰다.
“그게 아니라, 빈혈인 줄 몰랐다고요…….”
피 뽑으러 왔던 의사가 맥없이 쫓겨간 이후, 다섯 시간 같은 5분의 침묵이 흘렀다.
“기자들한테는 뭐라고 하지?”
반장이 커튼 너머로 밖을 힐끔 내다보며 침묵을 깼다. 여전히 밖이 시끄러운 걸 봐선 아직도 안 가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넨 기자들한테 뭐라고 할까 그게 걱정이야?”
서장이 반장을 위아래로 서늘하게 훑었다. 맞다. 기자들 걱정할 때가 아니다. 새로이 출현한 흉악한 사지 절단범으로부터 어떻게 시민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먼저다. 확실히 서장은 반장보다는 분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일 시의회가 소집된다는데…… 의원들한테는 뭐라고 해? 청장님한테 상황보고도 해야 하고, 오전 내내 시장님한테서 호출이 빗발치는데 무슨 보고를 어떻게 하란 거야?”
서장이 그렇지 않아도 탈모 증세가 완연한 앞머리를 한 움큼이나 잡아 뜯으면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놈이 탈출한 지가 벌써 일주일이야! 온 도시를 다 뒤집어 털고 다녀도 그림자도 안 비치는 그놈 쫓아다니느라 도시가 치안 마비상태라고. 이대로 일주일만 더 가면 어떤 대형 사고가 터진데도 나는 절대로 놀라지 않을 거야!”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사이에 사태가 정말 심각했었나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서장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게 돌진했다.
“내가 애초에 무슨 큰 기대를 하고 온 건 아니지만…… 뭐가 어째? 칼싸움? 목이 날아가?”
“제가 잠꼬대라도 한다는 겁니까?”
이젠 서장이 나를 타고 앉아서 내 목을 졸라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판에 일주일이나 자빠져 잤으면 얌전히나 있을 일이지!!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나타나서 헛소리야?”
“진짜로 둘이 칼싸움을 했다니까요! 공원에 가 보셨다면서요? 그 대리석 조각상하고 나무 벤치가 잘려져 나간 모양 살펴보셨어요? 뭘로 그렇게 했을 것 같아요?”
서장을 확 밀치면서 소리쳤다. 직장상사한테는 웬만하면 성질부리고 싶지 않지만, 자꾸 이렇게 갈구면 뒷일은 나도 모른다.
“그럼 니가 시의회에 가서 의원들한테 새벽에 웬 미친놈 둘이 칼싸움하는 거 구경하다가 기절했었던 거라고 말해! 청장님한테도 니콜라스 머리 끄트머리도 못 봤다고 보고하고 그리고…… 시장님 전화도 니가 받아!”
나한테 밀려서 잠시 물러앉았던 서장이 곧장 기세를 회복해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경찰서장하고 말단 형사는 월급부터가 다르다. 그런 걸 왜 내가 하냐?
“싫어요…….”
말 끝나기도 전에 서장이 옆에 있던 베개를 들어서 내 얼굴을 턱 덮더니 마구 내리 누르기 시작했다. 날 좋아하지 않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죽이고 싶어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한다고 할 걸…….
약에 취해 일주일을 누워 있다 일어난 상황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속수무책 당하고만 있지 않을 텐데,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며 두 팔만 휘젓고 있는데도 쥬드는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서 딴 생각에 빠져 있고, 반장도 심란한 듯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담배만 찾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비니였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비니가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안에 있던 모두가 바짝 긴장해서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방안의 상황에 놀란 건 오히려 비니였다. 비니…… 비니…… 나 좀 살려주라…….
서장에게 목이 졸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 비니가 허둥거리며 침대로 다가왔다. 그래도 급할 때는 파트너뿐인가 보다. 그런데 비니가 두 발짝도 다가서기 전에 우지끈…… 하는 둔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릴까 놀라서 서장과 내가 서로를 쳐다봤다. 비니가 거의 침대에 다가왔을 때 철재 침대 머리 부분에서 또다시 우둑…… 하고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위험하다.
다음 순간, 빠직! 엄청나게 큰 파열음을 내며 침대가 바닥으로 내려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기세 좋게 나를 타고 앉아 목을 졸라대던 서장이 어이쿠!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그 덕에 나는 살았다.
불시에 침대에서 떨어져서 저쪽 구석까지 돌돌 굴러간 서장이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하고 사태를 파악하기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침대가 갑자기 내려앉은 게 비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몸을 추스르자마자 서장이 험악한 눈초리로 비니를 노려봤다. 따지고 보면 서장이 자기 몸 무거운 건 생각도 않고 침대 위에서 설친 게 사고의 발단인데 내가 생각해도 완전 비니 탓 같으니, 이상한 일이다.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비니가 화들짝 놀라며 억울함을 항변했다.
“닥쳐! 이게 네놈 짓이 아니면 누구 짓이란 거야?”
서장이 무너진 침대를 가리키며 비니를 윽박질렀다.
“억울해요! 침대에 손도 안 댔단 말이에요!”
비니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항의해도 서장한텐 씨알도 안 먹혔다. 서장이 비니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갔고 비니는 계속 억울함을 호소하며 한발한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자선 병원 1인용 병실은 한 없이 물러설 수 있을 만큼 넓은 곳이 아니었다.
“제가 무슨…… 초능력자라도 되는 줄 아세요?”
벽까지 밀려선 비니가 대법원에서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처럼 비장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비니는 자기 징크스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전에 마약 공장 습격 작전 때 파커를 밀어서 전치 3주의 타박상을 입혀 놓고도 자기가 민 거 아니라고 잡아뗐고, 더 예전에 알랙을 차로 밀어버린 사고도 급발진 때문이었다고 지금까지도 오리발이었다.
서장이 그 솥뚜껑만한 두 손으로 비니의 양 어깨를 턱…… 잡아서 벽에 쿵 소리가 나도록 밀어붙였다. 그리고 조용히, 하지만 살벌하게 경고했다.
“나한테 이런 짓 한번만 더 하면…… 넌 파면이야!”
“정말로 저는…….”
서장이 간신히 자기 성질을 눅이며 돌아서는데 아무래도 억울한지 비니가 다시 삐죽거렸다. 그냥 두면 비니의 변명이 반나절은 갈 거다. 비슷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쥬드가 나섰다.
“남은 얘기는 서에 가서 하죠.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동안 일어났던 사고들에 책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기자들은 어쩌지? 그냥 나갔다간 다 잡아 뜯길 거야.”
반장이 심각한 어조로 쥬드를 거들고 나섰다. 자꾸만 말이 막힌 비니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이렇게 우연히 일어난 일까지 다 나한테 덮어씌우는 건 너무 하잖아요! 다들 봤으면서 왜들 이래요?”
비니가 흥분했다. 그동안 비니 때문에 산전수전 다 겪었건만 저러는 걸 보면 왠지 측은하기도 했다. 쥬드도 비슷한 감정인 걸까? 쥬드가 고개를 돌려서 비니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앰뷸런스를 한대 빌리죠. 병원 측에서 입 다물어주면 조용히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아까 어디 갔었어요?”
앰뷸런스가 병원을 성공적으로 빠져나온 직후, 쥬드가 비니에게 물었다. 비니가 여전히 팅팅 부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제이가 하도 이상한 소릴 하길래…… 그냥…….”
“그 얘긴 꺼내지 마! 나 또 혈압 올라.”
서장이 이동침대에 누운 채 조용히 경고했다. 서장은 지금 벤 한가운데 환자인 척 누워 있고 나머지는 그 옆에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비니가 서장을 원망의 눈길로 흘겨봤다.
“그래서 그냥 좀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절단기 오웬하고 아주 관련이 없진 않은 것 같아요.”
서장이 손을 뻗어서 비니의 멱살을 틀어잡더니 자기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눈을 반쯤 떴는데…… 그만 해도 비니를 잡아먹고도 남을 듯 험악했다.
“그러니까…… 택시 기사요. 제이를 병원까지 태우고 온 기사를 찾아서 좀 알아봤는데, 콘웨이 공원 앞길에서 누가 택시에 제이를 태웠는데 그때 같이 있던 남자 인상착의가…… 오웬인 것 같아요. 기사 말이 검은 머리가 아주 길어서 처음엔 여자인 줄 알았다더라고요. 등엔 긴 막대기 같은 걸 매고 있었고, 옷이 온통 피투성이라서 처음엔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고…… 제 생각에는요…….”
“자네 생각엔?”
비니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제이 말이 다 사실은 아니라고 해도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서장이 비니의 멱살을 힘없이 놔줬다.
“옛날에 아버지 말씀을 들었어야 했는데…….”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돌아누운 서장이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반장이 침울하게 물었다.
“경찰로 출세해봐야 얼마나 하겠냐고 하시면서 그냥 일반 회사에나 취직하라고 하셨지. 아버지 친구가 이사로 계시는 회사였는데…… 거기 취직했으면 지금쯤 서류에 도장이나 찍어주고, 일 년에 두 번씩 카리브 해로 휴가나 다니면서 살고 있었을 거야.”
“일반 회사에 취직해 가지곤 일 년에 두 번씩 카리브 해로 휴가 못 가죠.”
넋두리가 듣기 싫은지 쥬드가 뾰족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서장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기운 없이 대꾸했다.
“월마트였어.”
흉악범이 시설에서 탈출하고, 경찰이 그 흉악범을 다시 잡아넣으려고 쫓아다니고…… 빨리 못 잡으면 배가 빵빵하도록 욕을 얻어먹는 건 드문 일도 아니었다. 경찰의 일이라는 게 본래부터 뭐 한 가지 잘못하면 사방에서 얻어터지고 잘해봐야 본전일 때가 많은 일이라서 세간의 호들갑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보통은 그렇다.
베르히만 서장은 경찰 대학시절부터 엘리트였고 꽤나 번쩍거리는 코스를 제대로 밟아서 오늘에 이른 차기 경찰청장 후보였다. 뛰어난 리더십이라든지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준 적은 없지만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에게는 바위 같은 존재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가 지금 돌아누워서 경찰에 투신한 것을 가슴 치며 후회하고 있었다.
“당신이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시끄럽게 돌아갔거든요. 지금도 니콜라스를 목격했다는 제보전화가 하루에 평균 100통씩은 걸려와요.”
독약을 수면제라고 속여서 나를 잠재운 장본인이 그간의 사정을 흔들리는 앰뷸런스 안에서 대충 정리했다. 제보전화가 100통 걸려온다고 100번 다 출동하지야 않았지만 세상엔 말재주 비상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하루 평균 무장 출동 횟수가 열다섯 번이었다면 보통 뺑뺑이가 아니다.
사안이 중한 일이면 전 경찰력이 집중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처음 하루 이틀 정도다. 그 이상 지체되면 그땐 전담반이나 특별 수사팀을 꾸려서 전적으로 그쪽에 일임하고 나머지는 정상 업무로 복귀하는 게 상식이다. 현재 니콜라스 탈출에 대응하는 경찰의 태도는 상식 밖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사인이라곤 자연사밖에 없는 조용한 시골 소읍이 아니다. 밤이면 밤마다 총알이 달아오른 냄비에서 팝콘 튀듯 튀는 이런 범죄 도시에서 장난 전화 몇 통에 이쪽저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 축구 플레이를 일주일이나 계속하고도 도시가 무사할까?
“물론 특별수사반이 있긴 하지만…… 시민들은 우리가 모든 제보전화에 다 출동하지 않는 것에 화를 내고 있어요.”
“맞아!”
쥬드의 말에 비니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저께 잡아넣은 은행 강도 놈도 화를 내더라니까! 은행에 강도 잡으러 올 시간 있으면 니콜라스나 잡으러 다니라고 말이야!”
“강도는 당연히 화가 났겠지.”
내 핀잔에 비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은행 직원들도 그러더란 말이야!”
앰뷸런스가 경찰서 안뜰로 막 미끄러져 들어가려는데 맞은편에서 무장한 기동타격대와 기술팀이 운전 실력도 터프하게 정문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번호판에 찍힌 로고를 보니 C-3팀이었다. 100통의 제보 전화라…… 저렇게라도 해서 놈을 잡을 수 있으면 더 없이 다행일 테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어쨌든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줘야죠.”
앰뷸런스에서 내려서면서 쥬드가 말했다. 쥬드를 따라서 내리는데, 방금 타격대가 뛰쳐나간 그 문으로 B-5팀이 털털거리며 굴러 들어왔다. 앰뷸런스 바로 뒤에 선 B-5 벤에서 방탄조끼와 각종 보호 장구, 티타늄 헬멧으로 무장한 대원들이 시무룩한 얼굴로 내려섰다. 진이 다 빠진 저 허탈한 표정만 봐도 경찰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서장은 제일 나중에 앰뷸런스에서 내렸다. 일그러진 얼굴과 흐트러진 양복을 바로 하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겨 붙이자 그럭저럭 보통 때 분위기가 나왔다. 얼굴은 콘크리트처럼 굳어 있지만 평상시 얼굴이 그 얼굴이다. 험…… 하고 한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서장이 현관 로비로 들어서려는 반장을 밀치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부옇게 흐린 정문 유리는 어수선하게 손자국이 찍혀 있었고 와인색과 프러시안 블루가 바둑판처럼 배열된 카펫엔 커피 얼룩이 검게 굳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복도를 따라 놓인 벤치엔 신문이며 잡지가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고 한쪽에선 피곤에 쩐 정복 경관이 모로 누워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양철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고도 모자라서 바닥에도 한줌이나 떨어져 있다. 그 옆으로 방금 B-5 벤에서 내린 무장 경관들이 지친 얼굴로 무거운 발길을 옮기다가 어디선가 울린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경찰서 풍경은 얼핏 보기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서에 잔류하고 있는 인원이 평상시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것과 그 모두가 아무 말이 없다는 것 정도가 차이랄까……. 그러고 보니 들리는 소리라곤 삑삑거리며 문서를 출력하는 프린터 소음과 복도에서 자고 있는 경관의 코 고는 소리…… 그리고 걸려온 전화가 근처 사거리의 신호등 고장 신고 전화라는 걸 확인한 무장 경관들의 힘겨운 발소리뿐이었다.
“이봐!”
서장을 따라서 막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 세웠다. 러셀이었다. 한때 청소년 보호과에서 같이 근무하다가 기동 타격대로 부서를 옮긴 옛 동료다. 사실 내가 먼저 그를 봤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지나쳤는데 러셀이 아는 척을 해왔다.
“니콜라스한테 잡혀 갔었다면서?”
러셀의 한 마디에 라커로 향하던 대원들이 모두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노려봤다.
“그 자식, 지금 어디 있어?”
타격대 중 한 명이 내 어깨를 거칠게 밀치며 마치 내가 니콜라스랑 한패라도 된다는 듯 다그쳤다. 옛 동료 러셀이 침착하게 놈을 팔로 막아섰다. 하지만 러셀의 시선도 곱지는 않았다.
“말 좀 해봐. 니콜라스를 보기는 한 거야? 공원에서 놈을 봤어?”
까닭 없이 흥분하는 대원들보다 러셀의 미심쩍은 시선이 심장에 낙인처럼 뜨겁게 찍혔다.
“못 봤어.”
해줄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놈이 내 옷깃을 틀어잡았다.
“이 자식! 거짓말하는 거야!”
“맞아! 이 자식은 그놈 애인이잖아! 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입 닥쳐! 샌드맨!”
러셀이 소리쳤다. 하지만 러셀의 충고보다 내 주먹이 훨씬 더 빨랐다.
우득…… 놈의 코뼈가 내려앉는 감각이 손등을 타고 전기처럼 짜릿하게 내 몸에 전해졌다. 놈의 코에서 시뻘건 피가 튀어서 그렇지 않아도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은 내 옷자락을 다시 더럽혔다. 명찰을 보니 P. W 샌드맨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사를 나눈 사이도 아니다. 샌드맨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서 저만치 나가떨어지는 걸 보고도 분이 풀리질 않았다.
“저…… 저 자식이 날 쳤어!!”
불시에 습격을 당한 샌드맨이 코를 감싸쥐며 외쳤다. 그 손가락 사이로 시뻘건 피가 주르륵 흘렀다. 놈이 순식간에 손바닥에 넘치는 자기 피를 보고 경악했다. 놀라움에 멍했던 눈동자가 살기로 가득 찬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기동타격대 대원은 거의 다 신체 조건이 우수했다. 샌드맨 역시 키로 보나 몸무게로 보나 나보다 두 체급은 위쪽이었다. 게다가 눈에서 불을 뿜으면서 달려드는 폼이 영락없이 상처 입은 들소였다. 피하고 싶지도 않지만 피할 시간도 없었다.
놈의 해머 같은 머리통이 내 갈비뼈에 정통으로 들어와 박혔다.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이어서 몸이 공중에 아주 잠시 떴다가 그대로 뒤로 튕겼다.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에 척추가 다 바스러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생생한 고통도 오랜만이고 이렇게 강력한 적개심도 오랜만이었다. 놈이 나를 타고 앉아서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내 얼굴을 뭉개버리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귓전에 놈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주먹으로 맨땅을 내리찍은 샌드맨이 비명을 울렸다. 그 틈에 놈의 어깻죽지를 잡아 옆으로 던져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코뼈가 나간 데다 손까지 엉망이 된 놈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잡아 말리는 러셀을 뿌리치고 놈에게 달려들어 옆구리를 걷어찼다. 놈의 몸이 확 뒤집혀서 복도 한 쪽으로 쓸려나갔다. 샌드맨이 숨도 못 쉬고 컥컥거렸다. 다시 한걸음 다가가자 헛구역질을 해대던 샌드맨이 내 다리에 엉켜 붙었다. 그 바람에 비틀거리다가 엎어지자 놈이 곧장 내 등에 들러붙었다.
“뭣들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 두지 못해?”
서장의 노성에 복도가 울릴 지경이었지만 샌드맨은 들은 척도 않고 뒤에서 내 팔을 거칠게 꺾어 올렸다.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무거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놈은 내 팔을 계속 잡아 비틀면서 더러운 입김을 내 귓가에 내뿜었다. 몇 명인가 등 뒤에서 샌드맨을 뜯어내려고 애썼지만 그전에 내 팔이 먼저 빠질 것 같았다.
“호모 자식! 호모면 그런 놈도 좋은 모양이지?”
놈이 내 귓가에 대고 지껄였다. 이런 소리,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고, 별로 대단한 욕도 아니었다. 하지만 들을 때마다가 기분이 나빴다.
고개를 최대한 바닥에 붙였다. 그리고 놈의 콧잔등을 뒤통수로 있는 힘껏 찍어 올렸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팔을 잡아 비틀던 놈의 손이 풀렸다. 캑…… 소리를 내면서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 심했던 모양이다. 사실, 내 머리도 깨질 것 같다.
놈이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사이 얼른 몸을 틀어서 놈의 턱에 주먹을 내갈겼다. 놈이 옆으로 맥없이 쓰러졌다. 피에 젖은 샌드맨의 얼굴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분이 안 풀렸다. 일어나서 쓰러진 놈의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뒤집힌 놈의 가슴팍을 막 밟아서 짓이기려는데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아챘다. 비니였다.
“이거 놔!”
엉겨 붙는 비니를 뜯어버리려고 실랑이 하는 사이, 샌드맨은 풀려버린 다리를 질질 끌며 기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면서 연신 기침을 토해내는데 갑자기 놈의 입에서 피가 울컥 쏟아졌다. 장이라도 터져버린 걸까?
피 냄새를 맡는 순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호모 어쩌고 하면서 나를 갈굴 때보다 지금 저 참혹한 꼬락서니가 더 비위 상하고 혐오스러웠다. 살기…… 놈을 죽여버리고 싶은 짐승 같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어떤 식의 방해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욕구였다.
담쟁이 넝쿨처럼 들러붙는 성가신 비니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팔꿈치로 밀어 쳤다. 불시의 공격에 비니가 주춤 물러섰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멈춰요! 제이, 그만해요!”
쥬드가 사색이 돼서 앞을 막아섰다. 화장기 하나 없는 당혹스런 얼굴조차도 아름답지만, 그녀도 그냥 밀쳐버렸다. 얼마나 세게 밀었던지 쥬드가 벽에 얼굴부터 들이받고는 풀썩 쓰러졌다.
자꾸만 나를 잡아당기는 성가신 손들을 뿌리치며 샌드맨을 쫓아가서 그 앞에 버티고 섰다. 샌드맨이 나를 올려다봤다. 성난 들소 같던 좀 전의 기백은 어디로 갔을까? 그 눈엔 공포의 기색까지 떠돌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로 샌드맨을 죽여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발 다가갔다. 그때 목 뒤에 뭔가 서늘한 것이 와 닿았다.
“진정해. 이만하면 충분하잖아?”
비니가 조용히 나를 타일렀다. 총구를 내 귓가에 들이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