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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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긴 박사의 맨션을 떠나서 내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오후 세 시도 지난 시간이었다. 신호 위반 두 번에, 차선 변경하다가 바로 옆을 달리던 포르쉐 옆구리를 긁을 뻔했다. 극도로 피곤했고, 집에 빨리 돌아가서 잠이나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형편 빠듯한 독신 남녀가 주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싸구려 임대아파트 엘리베이터는 또 고장인지 수리 표지가 붙어 있었다. 계단으로 5층까지 올라가자니 초입부터 다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토악질을 해놓았는지 심한 악취에, 아무렇게나 버려 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풍기는 썩어가는 음식 냄새…… 속이 울렁거려서 숨도 크게 못 쉬고 계단을 올라갔다.

생각해보니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자고 나면 틀림없이 배가 고플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편의점에 들러서 뭐라도 사올 걸……. 다시 내려갈까도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던 게 생각났다.

복도를 걷다 보니 이번엔 어디선가 탄내가 났다. 맞은편 방에 사는 나이트클럽 가수가 또 요리를 태운 게 틀림없었다. 조만간 이 건물엔 큰불이 날 거다.

헛기침을 하며 현관문에 열쇠를 꽂았다. 무심코 내려다보니 바닥에 검붉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핏자국인가? 발끝으로 바닥의 빨간 얼룩을 문질렀다. 핏자국은 아니고…… 색종이? 아니다. 주워서 올려 보니 꽃잎이었다. 이런 게 왜 떨어져 있을까?

왼쪽 막다른 방문을 슬쩍 쳐다봤다. 이웃에 사는 단역 배우 브리트니는 꽃을 좋아한다. 그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남자친구가 어젯밤엔 장미꽃을 사들고 왔던 모양이다. 꽃잎을 털어버리고 열쇠를 돌렸다. 열쇠가 헛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달려가던 이웃의 아이가 내 옆구리에 세게 부딪치고 미안하다는 인사도 없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그 발소리도 멀어진지 꽤 되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 무렵에야 총을 꺼내 들었다. 막 문 열고 나오려던 맞은편 방의 나이트클럽 가수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복도에 더 이상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문을 열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인기척은 없었다. 두 손으로 총을 꽉 움켜쥐고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좁고 어수선한 거실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거실 구석에 놓인 갈색 소파 위엔 아침에 벗어던지고 간 배스 가운이 구겨진 채 걸쳐져 있었고 발치엔 집에서 늘 입고 있는 반바지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깜박 잊고 나간 담뱃갑이랑 재떨이…… 어제 보다가 팽개쳐 놓은 신문과 잡지 같은 것들이 바닥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흐린 초겨울 햇살이 커튼 틈으로 새어들어오고 있을 뿐, 모든 것이 아침에 나갈 때 그대로였다. 없어진 물건도 없고 변한 것도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문단속을 잊었던 걸까?

총을 고쳐 잡고 안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가며 부엌 쪽을 살폈다. 아침에 반쯤 마시다 그냥 두고 나간 머그잔 속에 커피며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는 프라이팬에 하얗게 앉은 먼지…… 다른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 차갑고 조용한 공기 중에는 어떤 이질감도 떠돌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총을 내렸다.

생각해보면 오늘 아침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단속 같은 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문 잠그는 걸 잊고 그냥 나갔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대충 집어서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지난 며칠간은 집 정리할 시간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혹시나 싶어서 열어본 냉장고는 역시나 텅텅 비어 있다. 뭘 좀 사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닫아버렸다.

빨래거리나 대충 치우고 자러 들어갈 양으로 소파 위에 뭉쳐 놓은 배스 가운을 집어들었다. 순간, 뭔가가 옷자락 사이에서 떨어져 팔랑거리며 마룻바닥에 내려앉았다. 새빨간 꽃잎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은 발작적인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총을 고쳐 잡고 침실 벽에 붙어 섰다. 어지러워서 금방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놈이 여기에 왔었던 걸까? 아직도 여기에 있을까? 심호흡을 하고 침실 문을 밀어 찼다. 거친 발길질에 문짝이 떨어져 나갔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진한 꽃향기가 나를 덮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잊은 줄 알았던 악몽을 되살리는 기묘한 풍경에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쥬드가 커피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아…… 고마워.”

쥬드가 내민 커피를 받아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세 명의 경관이 내 아파트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뭘 찾고 있는걸까? 떨어진 머리카락? 지문? 누가 왔다갔는지는 다 알고 있는데 저렇게 바닥이며 벽에 코를 박고 있는 꼴을 보니 기운이 더 빠졌다.

서장과 반장은 줄곧 침실에서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반장이 뭔가 얘기를 하자 서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장이 끌고 온 엄청난 병력 중 한 팀은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고 있고 그 나머지는 온 아파트 일대를 탐문하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부엌을 겸한 작은 거실에 침실 하나 뿐인 좁아터진 아파트는 지금 있는 사람만으로도 터져나갈 지경인데 또 문이 열렸다. 기자들은 동료들이 아파트 입구에서 차단하고 있었고, 완곡하게 방을 비워줄 것을 요구하던 입주자 대표는 벌써 다녀갔는데 또 올 사람이 남았나…… 생각하며 돌아보니 아침에 마주쳤던 연방특수경찰 데니스 노튼과 그 일행 두 명이었다.

쥬드가 그들에게 말없이 침실 쪽을 가리켰다. 노튼이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침실로 들어가다가 문 앞에서 멈칫 걸음을 멈췄다. 생각 없이 커피 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놨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커피 잔만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쥬드가 옆에 앉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쩐지 내키질 않아서 어깨에 얹힌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놨다.

“나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만…… 가벼운 동정심으로 남자 어깨에 손을 얹기엔 쥬드는 너무 예쁘다.

“제대로 잠을 잔 게 언제였어요? 피곤해 보여요.”

“실제로 피곤해.”

“수면제가 좀 있는데…… 줘요?”

“고맙지만 필요 없어.”

연쇄살인범이 거창한 선물을 놓고 간 침실은 일군의 경찰 병력이 점거 중이었다. 내가 저 침실을 쓰게 될 일은 이제 없을 거다. 수면제 같은 거 먹어봐야 잘 곳도 없는 거다. 얼굴도 잘 모르는 공동주택의 거주자들일 뿐이지만 이웃들은 내가 빠른 시일 안에 방을 비워주길 바라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내 침실에 얼마나 머물렀을까? 5분? 10분? 그 짧은 방문으로 놈은 내게서 집을 빼앗았다. 니콜라스에게는 그렇듯 모든 일이 손쉬웠다.

그때 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 바람에 문 옆에 엎드려서 바닥을 이 잡듯이 뒤지다가 막 일어나던 헤밀튼이 문에 부딪쳐서 싱크대를 들이받았고, 내가 가진 유일한 머그잔과 세 개밖에 없는 접시 중에 두 개를 박살냈다. 누가 왔나 굳이 돌아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고장인지 비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다가왔다. 헤밀튼이 일어나서 비니에게 달려드는 걸 옆에 있던 웨인이 잡아 말렸다.

“왔어?”

“니콜라스가 왔었다는 게 정말이야? 너…… 괜찮아?”

대답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식어서 미지근해진 커피 잔을 다시 들었다.

“그 자식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거실 꼬라지가 이게 뭐야? 니콜라스 자식이 이렇게 어질러 놓고 간 거야?”

커피를 다시 탁자에 내려놨다. 너무 세게 내려놓는 통에 커피가 테이블에 반이나 쏟아졌다.

“침실에 들어가 봐요.”

쥬드가 말했다. 별로 크지도 않은 침대 하나로도 가득 차는 좁은 방에 서장, 반장, 노튼과 그 똘마니 둘에…… 비니까지 북적거리는 걸 보니 갑갑해서 숨이 막혔다. 서장하고 반장은 여전히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고 노튼은 자기 부하들에게 뭔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비니는 그 너머로 잠시 방을 기웃거리다 금방 나왔다.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뭐야…… 저게?”

비니가 허공에 대고 아무한테나 물었다.

“보면 몰라? 꽃잎이잖아. 빨간 장미 꽃잎!”

헤밀턴이 좀 전에 비니한테 당한 후유증으로 두통이 오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거밖에 없잖아. 장미…… 꽃잎…….”

니콜라스는 빨간색을 좋아했다. 그게 생명의 빛깔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놈이 빨간 장미를 좋아하는 건 그것이 피의 색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붉은 벨벳…… 와인…… 장미꽃…… 누군가가 내 집에 몰래 들어와 침대에 피처럼 붉은 장미 꽃잎을 한 수레나 쏟아 놓고 갔다면 참 로맨틱한 장난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겼겠지만 그 누군가가 니콜라스라면 문제가 달랐다.

침대에 하나 가득 쌓이다 못해 바닥까지 철철 넘치는 꽃의 사태가 비니 눈에는 그냥 꽃잎이 참 많다……로 보였겠지만 내 눈에는 한방 가득 흘러넘치는 피바다로 보였다. 침실의 열린 문틈으로 계속 흘러나오는 꽃향기가 피비린내보다 더 역해서 자꾸만 구역질이 올라왔다.

온몸의 다섯 군데 동맥을 잘린 엘리스 스톤이 빨간 꽃잎 가득한 하얀 사기 욕조에서 엄청나게 흘러나오는 자기 피에 경악하며 죽어가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피 냄새가 숨 막힐 것 같은 꽃향기와 함께 내 몸에 엉겨 붙었다. 토할 것 같아서 다시 커피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마실 수가 없었다.

“저건 일종의 통보예요.”

쥬드가 내 손에서 커피를 뺏으며 말했다.

“보통…… 꽃은 사랑하는 사람한테 보내는 거잖아요.”

“뭘 보내느냐는 니콜라스 마음이죠. 중요한 건 의미예요. 마피아가 어떤 사람한테 죽은 짐승의 머리를 보내면 그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건 대부에나 나오는 얘기지, 요즘은 그런 짓 안 해요!”

비니가 볼멘소리로 항의했지만 쥬드는 들은 척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꽃만 보낸 게 아니에요.”

쥬드가 비니 앞에 경찰이 꽃잎 더미 속에서 찾아내 밀폐 봉지에 하나씩 담아놓은 다섯 장의 사진을 던져주자 비니의 얼굴도 뻣뻣하게 굳었다. 질퍽한 아스팔트 바닥을 기어가는 나…… 편의점 문가에서 더그의 목덜미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나…… 더그의 엽총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 버둥거리는 나…… 그 망할 자식은 어젯밤 편의점 인질 강도사건 현장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시간상으로 콘웨이 요양소에 불이 난 지 3시간도 채 안 된 시간이었다.

니콜라스가 어떻게 병원을 탈출한 지 세 시간 만에 변장하고 카메라를 구해서 내가 일하고 있는 현장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밤 우리도 경황이 없었지만 놈도 꽤나 바쁘게 보낸 건 틀림없었다. 니콜라스가 나한테 서운한 감정이 많은 건 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를 지목하고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사람 성격이란 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신병원에서 썩는 동안 성격이 많이 변했나 보다.

아래층 남자가 두어 시간 전에 커다란 군용 가방을 등에 지고 올라가는 낯선 남자를 봤다고 나섰다. 우리가 베긴 박사의 맨션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궁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때 거기 안 가고 그냥 집에 와서 잠이나 자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놈과 마주쳤을까? 내가 놈을 잡았을까? 아니면 놈이 나를 죽였을까?

그 외에 달리 놈의 행적을 쫓는데 단서가 될 만한 증언은 없었다. 어쨌거나 경찰은 더 이상 니콜라스 사망 여부에 관한 법의학 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됐다. 니콜라스는 살아 있고 병원을 탈출했으며 두 번째 사냥감을 정했으니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나오는 걸 보니까 꽤나 자신만만한 모양이야. 게리, 주변에 인력 배치하고…… 니콜라스 최근 사진으로 수배 전단 다시 만들어. 그리고 버나드는 쿠간 시 인근 꽃집 다 뒤져서 니콜라스가 어디서 꽃을 구했는지 알아보고 또…… 그리고…….”

서장과 반장과 노튼 일행이 침실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서장이 여기저기에 부산하게 지시를 내렸다. 슬슬 수사 방침을 정하고 가닥을 잡아야 할 텐데 저 두 사람은 딱할 정도로 허둥거리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다. 니콜라스는 탈출 당일부터 쉴 틈도 없이 경찰과 기자들을 뺑뺑 돌리고 있었다. 모두들 눈에 핏발이 서 있고 얼굴엔 피로가 역력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기자들도 커피 마시면서 연방 하품을 해대느라 떠들지도 못하고 있었다. 부하들에게 마구 수사지시를 해대던 서장이 문득 나를 돌아봤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자네도 니콜라스를 잡고 싶을 거야. 놈의 계획이 뭔지 대충 알았으니까 우리도 계획을 세워야지. 협조해줄 거라고 믿어.”

서장의 말은 어쩐지 나를 한 번 더 니콜라스 낚시에 떡밥으로 쓰겠다는 의미 같았다. 경찰 목숨도 목숨인데…… 너무 한다 싶어 주변을 휙 둘러 분위기를 살펴봤지만 내 목숨은 별로 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애초에 비니를 파트너로 정해줄 때부터 이럴 줄 알고는 있었다.

“어떻게…… 협조할까요?”

내 우울한 반문에 서장과 반장과 노튼의 시선이 동시에 쥬드에게 쏠렸다. 나도 쥬드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너무 조용하다 싶더니 쥬드는 창가에 기대서서 깜빡깜빡 졸고 있다. 입가에 침까지 흘려가면서…….

“쥬드!”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놀라서 눈을 뜬 미모의 여인이 입 언저리를 손등으로 쓱 닦으면서 딴청을 피웠다.

“좀 전에 한 얘기 잘 못 들었는데…… 뭐라 그랬어요?”

쥬드가 손등을 옷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물었다.

“유인 작전을 쓰자는 거지. 전처럼 말이야.”

서장은 그 작전이 아주 순조롭고 간단했던 것처럼 말하지만, 그 거지 같은 작전 덕분에 나는 니콜라스에게 잡혀서 죽다 살았고 이후 6개월간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종국엔 아내랑 헤어지는 시련까지 감수해야 했다.

옛 생각을 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쿠간에 경찰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어째서 험하고 궂은일은 내가 다 떠안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별로 좋지 않아요.”

쥬드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젓자 반장과 서장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전에도 그 방법으로 성공했었잖아. 게다가 니콜라스가 제이를 원하고 있고 우리가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옛날의 성공은 잊어버리세요. 우리 상대는 같은 함정에 번번이 걸려들 만큼 멍청한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미치긴 했지만 계획은 용의주도하고, 성격은 대담하고, 행동은 민첩해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제이를 보호하는 거지 대책 없이 앞으로 내모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 미끼 작전을 제안했던 건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뿐이었어요. 미끼 작전은 잊어버리세요. 너무 위험해요.”

“어떤 일이라도 전혀 위험이 없을 수는 없지 않나?”

니콜라스가 배 나오고 대머리 까진 중년 취향이라 서장이나 반장이 그 앞에 알짱거려야 한대도 저런 소리를 태연하게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쳐다봤더니 서장이 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얼른 돌려버렸다.

“어쨌거나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지금으로선 시의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게 최선이에요. 놈이 자기 소굴로 숨어들기 전에 잡지 못하면 빠른 시일 안에 놈을 잡는 건 힘들어져요.”

반장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장기전이라니…… 절대 안 돼!!”

이혼한 부인에게 재혼할 때까지 매달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며 재혼 이후에도 아이들 양육비는 전부 부담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로 저렇게 약한 모습 처음 봤다. 위니는 합의 이혼 이후 내게 별다른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반장이 그걸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오늘 안으로 검문이나 시민 제보에서 별다른 성과가 없다면 장기전으로 돌입했다고 봐야죠.”

쥬드가 냉정하지만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상황을 아주 불길하게 단정지었다.

“하지만 놈은 제이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조만간 나타날 겁니다.”

노튼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튼도 피곤에 잔뜩 쩐 얼굴이었다.

“놈은 우리가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실컷 휘둘러보고 있을 뿐이에요. 당장 우리 꼴을 봐요. 전 어제 출근한 이후로 지금 이 시간까지 한잠 못 잤어요. 당신은 어때요? 얼굴만 봐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내도록 우리는 수면 부족과 만성 피로에 시달릴 거예요. 니콜라스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니까. 단언하지만 오늘 이후로 놈은 자기 소굴이 틀어 박혀서 몇 달이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쥬드가 노튼의 말을 일축하고 고개를 돌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졸린가 보다.

“그럼…… 내 집엔 왜 왔다 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좀 허탈하기도 해서 물었다. 내 질문에 쥬드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런 걸 전문 용어로 <교란>이라고 하죠. 당신을 공공연히 지목함으로써 모든 시선을 당신에게 쏠리게 하려는 책략이라고요. 당신을 미끼로 쓰자는 건 그자의 의도대로 몇 달이고 헛수고해주는 꼴밖에 안 돼요.”

모두들 오호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 방구석을 쓸고 다니던 동료들도 그 말에 머쓱하게 일손을 멈추고 쥬드를 쳐다봤다. 지금까지 눈에 불을 켜고 뭔가를 찾아 헤맨 수고가 쥬드의 말 한마디로 아무 쓸데없는 미련한 짓이 되고 만 것이다. 미궁에 빠진 강력 사건이 거의 대부분 그렇듯 이제 수사권은 쥬드 크롬웰의 손으로 넘어갔다.

“당신 말대로라면…… 우리가 할 일이 놈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포커라도 하면서 기다리는 것뿐이란 겁니까?”

“니콜라스가 탈출한 지 이제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어요. 심정은 알지만 욕심 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행동할 때가 있고 기다릴 때가 있는 법이에요.”

쥬드가 딱 잘라 말하고 탁자에 던져뒀던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가시게요?”

비니가 허둥거리며 일어났다.

“잠이나 자야겠어요. 서장님은 여기 있는 병력 모두 철수시키시고 베긴 박사 아파트도 폐쇄만 해두고 배치된 병력 이동 시키세요. 고속 도로…… 주택가…… 유흥가……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틈 없이 철저히 검문하고 수색하려면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노튼 요원도 당신 동료들한테 침실 뒤지는 일을 중단하라고 해주시겠어요? 니콜라스는 이곳에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았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쥬드가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돌다가 삐끗해서 간신히 중심을 잡는 걸 보아하니…… 눈 뜨고도 반은 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

니콜라스가 경찰을 교란인지 뭔지 시키려고 나를 이용한 거라면 그건 좋다. 그놈 맘이고 어차피 나쁜 놈이니까. 하지만 경찰은 뭔가 나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든지 아니면 경호를 붙여주겠다든지, 뭐 그런 조치 한 마디 없이 날더러 미끼가 되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에 가서 잠이나 자자고 우르르 몰려나가? 니들이 그러고도 경찰이야?

내가 팅팅 부은 음성으로 모두를 불러 세우자 서장은 아차…… 하는 얼굴로 쥬드를 돌아봤고 반장도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쥬드를 힐끗 쳐다봤다. 반장뿐 아니라 모두가 어떻게 할까…… 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론 쥬드도 멈춰 서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려 뭔가를 꺼내더니 내게 던졌다. 받아 보니 작은 약병이었다. 수면제 먹고 잠이나 퍼질러져 자라는 뜻인가 보다.

“니콜라스는 다시 오지 않아요. 피곤할 텐데 잠이나 푹 자고 내일 서에서 봐요.”

나쁜 년!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선배님! 쥬디 크롬웰이라구요? 예쁘고 잘 빠지긴 했지만…… 대체 뭐 하는 여잡니까? 비밀 수사관이라도 됩니까?”

거실에서 그만 철수하자는 소리를 들은 노튼의 일행 중 하나가 반발하고 나섰다. 이제 다 가버리고 내 아파트에 남은 인간이라곤 이 사람들하고 비니뿐이었다.

“쥬디가 아니라 쥬드야. 베르히만 서장의 비서지.”

젊은 연방 특경이 콧방귀를 꼈다.

“비서라고요? 서류 복사나 하고 커피나 타 나르는 여직원 말 한마디에 이 중요한 사건을 팽개치고 잠이나 자러 간단 말입니까? 모두 제정신입니까?”

쥬드를 모욕하는 언사에 비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젊은 연방경찰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저 남자는 쥬드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쥬드가 서류 복사는 해도 커피 안 탄지는 꽤 오래 됐다. 그러니까…… 4년 전인가, 쥬드가 탄 이상한 차를 마시고 서장의 손님들이 날아가겠다고 우기며 창으로 뛰어내리려 한 이후로 서장은 웬만해서는 쥬드한테 커피 심부름은 시키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졸려. 자넨 안 졸려?”

“저도 졸립니다. 하지만…….”

“안 자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순순히 피곤을 시인하던 연방경찰이 갑자기 충혈된 눈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은 우리가 어째서 아무 권한도 없는 경·찰·서·장·비·서·의 명령을 들어야 하느냐는 겁니다! 존스, 넌 어떻게 생각해?”

기생오라비처럼 얍실하게 생긴 연방경찰이 흥분한 동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도 졸려.”

“넌 왜 안 가?”

바닥에 앉아 깜빡 졸던 비니가 퍼뜩 고개를 저었다. 잠시 소란을 피우던 연방경찰도 떠나버린 썰렁하고 어수선한 아파트에 남은 거라곤 어지러운 발자국과 스산한 바람…… 점점 더 독해지는 장미 향기와 비니뿐이었다. 어느 것 하나 맘에 드는 게 없다.

비니는 어젯밤에 잠 안 자고 무슨 짓을 한 걸까? 단언하건데 비니는 더그의 일 같은 걸로 가책을 느껴 잠을 설칠 만큼 인간적인 놈이 아니다. 게다가 원래 잠이 많아서 바쁜 일 없으면 곧잘 존다.

“나라도 있어야지.”

같이 있는 게 더 무서운데 비니가 그렇게 말하고 마룻바닥에 길게 누웠다. 쥬드가 던져준 수면제를 세 알이나 먹었지만 나는 어쩐지 잠이 통 안 왔다.

“침대에 가서 자지 그래?”

나는 어차피 저 꽃 무덤 속에서 잠을 청할 만큼 넉살 좋은 놈이 못 되지만 비니라면 혹시 모른다. 하지만 비니는 고개를 저었다.

“왜? 무서워?”

“현장 보존해야지. 멋대로 치웠다가 나중에 징계라도 먹으면 어떡해? 그건 그렇고…… 이불 남는 거 없어?”

“됐으니까 집에 가.”

아파트 무너지기 전에…….

“그럼 넌 여기 혼자 있을 거야?”

“무슨 상관이야? 니콜라스는 오지 않을 텐데…….”

비니가 바닥에 길게 누운 자세로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비니의 까만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서 묘하게 반짝거렸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올지도 모르잖아.”

비니의 목소리가 보통 때보다 약간 낮고 거칠게 들렸다. 가끔…… 그럴 때도 있다.

“쥬드가 안 온다잖아. 그 여자가 틀린 말 하는 거 봤어?”

비니가 슬슬 일어나더니 나한테 다가왔다. 기분이 이상해서 비니의 가슴팍을 발로 밀어버렸다. 분위기 파악도 더럽게도 못하지…… 지금이 이런 장난 칠 때야?

“거짓말은 곧잘 하던 걸…….”

떠밀린 비니가 엉덩방아를 찧고서도 여전히 음산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니가 이러는 게 처음은 아니다. 석 달 전에는 햄버거를 걸신들린 듯 뜯어 먹다가 갑자기 눈이 파란색으로 변하더니 아무도 못 알아들을 이상한 말을 5분이나 지껄여서 나를 식은땀 흐르게 만들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통에 쪽팔려 혼났지만 비니는 자기가 그런 소리를 한 것조차 기억 못했다.

무슨 사고를 치지 않으면 그런 식으로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만드니까 내가 아무리 인간성이 좋아도 이놈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눈 색깔이 어둡다. 비니의 눈동자는 본래 검은색이라서 잘 몰랐는데…… 보통 때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비니는 지금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몇 번 봤으니까 더 이상은 놀랄 일도 없으련만 어디선가 본 듯한 눈동자에 귀에 익은 음성을 내 몸이 먼저 기억해냈는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그만해!”

장난이 지나치다. 심한 징크스를 갖고 있긴 해도 그렇게 짓궂은 놈은 아닌데 웬일일까? 비니는 장난을 그만둘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한동안 잊고 있었지. 어젯밤은 무척 유쾌했었어. 자욱한 연기는 안개 같았고 타오르는 불길도 꽃처럼 아름다웠지. 오랜만의 살인도 나쁘진 않았어. 하지만 오래 갇혀 있던 곳을 나와서 거리를 배회하다가…….”

“그만 하라고 했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주먹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어느 허름한 골목에서 비에 젖은 너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공포와 분노를 주먹에 실어서 니콜라스…… 아니, 비니의 턱을 후려갈겼다. 니콜라스가…… 아니, 아니, 비니가 고개를 홱 꺾으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충격에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시 버둥거리던 비니가 간신히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무섭게 노려봤다.

“왜 때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둘이 싸웠어요?”

쥬드가 주먹을 쥐고 씩씩거리는 나하고, 얻어맞은 턱을 잡고 아파서 어쩔 줄 모르는 비니를 번갈아 쳐다보며 거실로 들어섰다.

“저 자식이 니콜라스 흉내를 내잖아!”

내 고자질에 쥬드가 싸늘한 눈빛으로 비니를 슬쩍 째려봤다.

“절대 그런 적 없어요!!”

비니가 펄펄 뛰었다.

“진짜로 저 자식이…….”

좀 전에 비니가 한 짓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려고 나서자 쥬드가 손을 들어서 내 말을 막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밖에서 기다릴 테니까 둘이 싸우든 화해를 하든 10분 안에 해결하고 짐 대충 챙겨서 나와요.”

쥬드가 자기 용건만 딱 얘기하고 돌아섰다. 막 전투태세에 돌입하려던 비니와 내가 서로를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우리가 백날 머리를 쥐어짜봐야 쥬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거처를 옮겨야죠. 설마 여기서 그냥 지낼 생각이었어요?”

대답하는 음성에 짜증이 약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른 채 이래라 저래라 명령 듣는 내 기분도 상쾌하지는 않았다.

“니콜라스는 절대로 안 온다고…… 아까 분명히 그랬었잖아.”

내가 불쾌한 얼굴로 따지자 쥬드가 생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거짓말이었어요.”

짐이라고 해봐야 별건 없고 갈아입을 옷 몇 가지하고 간단한 세면도구…… 자잘한 살림살이까지 다 챙겨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뭐 또 가지고 갈 거 없나 둘러보니 여태 이러고 살았었나 싶을 정도로 가진 게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침대 귀퉁이에 비상금 300불을 꿍쳐 놓은 것이 생각나서 지갑에 챙겨 넣고도 가방이 너무 헐렁해서 위니가 놓고 간 까만 테디베어까지 우겨 넣었다.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할 건데?”

비니가 시비를 걸어왔지만 못 들은 척했다. 머리맡에 다 떨어진 곰 인형이라도 있어야 잠이 온다는 얘기는 내 담당의사한테도 안 했다. 곰 인형 탓인지는 몰라도 가방을 손에 드는 순간 눈이 척…… 감길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효과가 좋았던 적은 없는데…….

“왜 그래? 어디 아파?”

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못 찾고 자꾸만 벽을 꾹꾹 누르자 비니가 대신 눌러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부어 있는 것을 보니 아까 얻어맞은 앙금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 같았다.

“왜 거짓말했어?”

“필요했으니까요.”

비니가 뒷좌석에 올라타기를 기다리던 쥬드가 차를 출발시키면서 짧게 대꾸했다. 일말의 가책도 없는 말투였다.

“그 말은 니콜라스가 정말로 나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야?”

“지금 상황에서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실망스럽다. 쥬드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은 좀처럼 하지 않는데…….

“니콜라스가 정말로 당신에게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고 공연히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려고 장난치고 있는 걸 수도 있어요. 하지만 놈이 당신을 어떤 식으로 건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좀…… 꺼림칙해요.”

좀 꺼림칙하게 생각해준다니…… 그건 고맙네.

그때 갑자기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앞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쥬드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거다. 덕분에 차 앞 유리를 뚫고 나갈 뻔했다. 쥬드가 차선을 바꾸며 경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 새끼야! 운전 제대로 안 해?”

쥬드가 창문을 내리고 벼락 치듯 소릴 지르자 옆 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쪽도 뭐라고 욕설 한마디는 지껄일 만했는데 그냥 입을 다물어버리는 건 뒷좌석에서 자기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비니 때문인 것이 틀림없었다.

“서장이나 반장은 당신을 미끼로 흔들면 놈이 손쉽게 걸려들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생각인데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두 번씩이나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쥬드가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평상시 버전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시켰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

“쥬드…….”

조수석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쥬드의 말과 행동은 나름대로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중요한 사실을 고의적으로 간과할 때가 있었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무슨 뜻이에요?”

“당신은 경찰서장 비서야.”

볼썽사납게 하품 같은 거 하며 얘기할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 졸려…… 쥬드가 앞 사거리에서 황색 신호가 떨어지자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엔진에서 멋들어진 파열음이 터지면서 차가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쥬드 차는 재규어 XJ 6다.

“경찰 수사에는 원칙이라는 게 있어. 단서가 있으면 그걸 토대로 분석하고 추리하고 추적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게 우리들 일이야. 당신은 니콜라스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왜곡시켰어. 일선 수사관은 아니지만 경찰서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최소한 보조는 제대로 해줘야 할 것 아냐? 그런 당신이 공무집행을 방해했다고!”

쥬드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녀의 주장과 의견은 거의 대부분 타당한 것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다. 하지만 쥬드는 이따금 그 존중을 기만할 때가 있었다. 악의가 없다고는 해도 부당한 건 부당한 거다.

“대체 무슨 맘을 먹고 그따위 거짓말을 지껄였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렇게 주제넘게 사건에 끼어들어서 엉뚱한 방향으로 헤집어 놓기나 할 거면 앞으론 일절 우리 일에 관여하지 말고 서장님한테 농약 묻은 홍차나 끓여 드려! 당신 전문 분야에 대해선 나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

쥬드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지간히 불쾌했을 테지만 별다른 내색은 없었다. 졸린 눈을 부릅뜨자니 나도 힘들었다. 백미러를 슬쩍 보니 뒤에 앉은 비니가 ‘너 미쳤구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쥬드의 운전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한꺼번에 두 차선을 쏴아악…… 변경해서 안쪽 차선으로 파고드는 바람에 뒤쪽에서 경적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그래서 뒤늦게 안전벨트를 찾아 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그리고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

“쥬드!”

“가 보면 알아요.”

“지금 알아야겠어!”

“일종의 안전가옥인데 맘에 들 거예요.”

더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만 이젠 정말로 기절 직전이었다.

“아까 내가 준 약…… 먹었어요?”

쥬드가 나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그제야 아까 쥬드한테서 받은 수면제를 먹은 게 기억났다. 그래서 이렇게 졸렸구나. 약이 잘 듣네…….

“얼마나 먹었어요?”

“세 알.”

쥬드의 얼굴이 아주 잠깐 창백해졌다가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순간 잠이 확 깨는 것 같은 위기감이 밀려왔다.

“그거…… 수면제 맞아?”

“당연하죠. 내가 당신한테 독약이라도 줬을까 봐요?”

쥬드가 단호한 어조로 딱 잡아뗐다. 사실이라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쥬드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한꺼번에 세 알씩이나 먹는 약은 아니지만…….”

순간 심장이 발등까지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푹 자게 될 거예요. …… 아주 오랫동안.”

위니가 거실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놀라게 해주고 싶기도 해서 다가가 보니 거실에 걸린 그림들을 모두 거꾸로 걸어 놓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보니 그림은 거꾸로 걸린 쪽이 더 보기 좋았다.

이건 꿈이다. 내 집 거실엔 그림 따위 한 장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리고 위니도 이젠 이런 장난을 칠 수 없고. 거실 벽에는 그림이 셀 수도 없이 많이 걸려 있었다. 위니가 커다란 액자를 가볍게 들어내더니 뱅그르…… 돌려서 거꾸로 매달고는 뒤돌아서서 나를 보고 박꽃이 터지듯 커다랗게 웃었다. 위니를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 순간 반짝 눈이 떠졌다.

창밖이 어두운 걸 보니 밤인 것 같았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 이외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일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일어날 수도 없었다. 가위에 눌린 건지, 아니면 이것도 또 다른 꿈인 건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위니가 가버릴까 봐 두려웠다.

두 번째로 잠에서 깨어난 것은 낮이었다. 꿈속에서 내내 위니를 찾아다녔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헤매다가 지쳐서 눈을 떴을 때도 혼자 누워 있었다. 해가 저물어가는 건지 아니면 막 떠오르고 있는 건지 창가에 놓인 노란 장미꽃 그림자가 서글프게도 길었다.

쥬드가 안전가옥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경찰 안전가옥이 언제부터 이렇게 호화판이 된 걸까?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침대만 해도 그렇지…… 다섯 명이라도 문제없이 뒹굴 수 있을 정도로 큰 원형 침대라는 건 특급 호텔 같은 데나 있는 건 줄 알았었다. 혹시 호텔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때문에 호텔 특실을 빌렸을까?

세 번째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도대체 얼마나 더 자야 되는 건지 쥬드한테 물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아니…… 꿈속에서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눈 뜨자마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허우적거리면서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푹신한 카펫 위에 떨어진 몸이 어찌나 나른한지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 다음 잠에서 깼을 때 나는 정말로 화가 나 있었다. 꿈을 하도 많이 꿔서 더 이상 레퍼토리가 없자 드디어 꿈에 비니가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비니가 나타난 이후로는 꿈도 엉망이었다. 지금까지도 자고 싶어서 잔 건 아니었지만 또 잠들어버릴까 겁나서 얼른 일어나 앉았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며칠이나 곯아 떨어져 있었던 걸까? 하루 낮…… 하루 밤…… 이틀 정도 지났을까?

진짜 해도 너무 하네. 지금까지 쥬드한테 특별히 잘해준 건 없지만 데이트 하자고 귀찮게 들러붙은 적도 없고, 그 기이한 남성 편력에 대해서 뭐라고 잔소리한 적도 없고, 다른 짭새들하고 어울려서 음험한 농담을 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쥬드는 나한테 이렇게나 못되게 구는 걸까?

이제 잘 만큼 잤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고 반장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쥬드 때문에 출근할 수 없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반장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여길까…… 생각하며 침대에서 대여섯 걸음 정도 걸었을 때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다리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앉아 있자니 점점 숨이 차고 몸까지 떨리는 것이…… 이건 그 독약의 후유증이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시 자러 갈 수는 없었다. 꿈에 위니가 나올 때는 그럭저럭 잘만 했는데 비니가 나오면서부터는 아슬아슬한 악몽의 연속이더니 막판에는 니콜라스한테까지 쫓겨다녔다.

이를 악물고 문을 향해서 기었다. 문전까지 포복하듯 기어가서 몸을 일으켜 간신히 문고리를 잡았다. 밖에서 잠겨 있나 싶었는데 몇 번 달그락거리자 쉽게 열렸다. 거기까지만 했는데도 이미 몸이 천근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몸이 복도로 쓰러졌다. 그래도 일단 방에서 반은 나왔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약 5미터 길이의 복도와 막다른 벽이 보였다. 저쪽으로는 가 봐야 별거 없겠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여긴 확실히 호텔인 것 같았다. 이 바닥에 깔린 청색 카펫도 그렇고 벽에 그림이 쫙 걸린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구경도 못 해본 특급 호텔인가 보다.

쥬드가 돈벼락을 맞았나, 아니면 호텔 사장을 꼬셨나…… 어쨌거나 2차 목표는 약 7미터 정도 떨어진 계단으로 정했다. 걸어가면 5초도 안 걸릴 단거리지만 비몽사몽 졸면서 기어가기엔 너무 멀지 않을까 싶지만, 별 수 없었다.

역시 무리였을까? 2미터쯤 기어가다가 너무 힘에 부쳐서 잠깐 쉰다는 게 나도 모르게 살짝 잠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꿈결에 니콜라스가 나를 보고 비실비실 웃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마구 흔들어서 잠을 떨치고 다시 목표를 향해 전진했다.

모르는 사람이 이런 꼴을 보면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다 큰 남자가 잠옷 바람으로 엉금엉금…… 그러고 보니 이거 내 잠옷 아닌데…… 라는 생각하며 기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검게 반짝이는 둥근 것이 나타났다. 잘 닦은 남자 구두를 정면으로 보면 아마 이런 모양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보니 실제로 잘 닦여 있는 남자 구두였다.

“뭘 도와드릴까요?”

회색 잠옷 위로 자주색 가운을 걸친 중년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은 좋았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합니다.”

남자가 햄 샌드위치를 썰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꺼내 내 손에 쥐어줬다. 남자가 건네준 물 한 병을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켜고나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맑아지니까 배가 더 고팠다.

“그거…… 더 먹어도 돼요?”

“물론이죠.”

남자가 선선히 대답하며 만들어 놓은 샌드위치를 내 앞으로 밀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라는 남자의 친절한 물음에 잠시 망설인 건 급한 일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많은 급한 일이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빌려달라고 할까, 여기가 어딘지 먼저 물어볼까, 의사를 불러달라고 할까…… 그때 남자가 말했다.

“뭘 좀 드시지 않겠습니까? 배가 고프실 텐데요.”

남자는 대형 레스토랑 수준의 설비를 갖추고 있는 주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재료는 다 꺼내서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중 가장 품위 있고 먹음직스런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남자의 이름은 레빈…… 이 집의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호텔인 줄 알았는데…….”

입 안 하나 가득 샌드위치를 밀어 넣으며 우물거리자 레빈이 팔뚝만한 호밀 빵을 반으로 자르며 미소를 지었다. 집사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의 사건이라 해봐야 깡패들 패싸움 아니면 강도사건…… 그러고 보니 중산층 가정 폭력사건도 담당했던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집사까지 두고 살 정도의 상류층은 큰 사건이라곤 모르는 얌전한 사람들인 건지, 아니면 사건이 생겨도 자기들끼리 그냥 덮어 버리는 건지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집사라는 직업이 실제로 있기는 있었구나……. 배트맨 같은 히어로 영화에나 나오는 직업인 줄 알았다.

“그랬다면 손님이 복도까지 기어 나오게 두지도 않았겠지요. 제가 한 번씩 들여다보기는 했습니다만…… 워낙 오래 주무시기에 오늘밤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으시면 의사를 부를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집사도 이렇게 정중하고 품위가 있는데 집주인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쳤네요. 그런데…….”

쥬드가 그동안 우리 모르게 백만장자랑 데이트라도 시작한 건가?

“크롬웰 양이 좀 오래 주무실 거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걱정했습니다. 다른 이상이 있으면 즉시 말씀하세요. 의사를 불러드릴 테니까요.”

“아니…… 아직은 괜찮아요. 그보다…….”

“크롬웰 양이 무척 각별하게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요즘 세상에는 정말 드문 아가씨지요.”

어떤 세상에서도 드물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지만…… 레빈이 쥬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이전에도 쥬드가 이 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리다. 호밀 빵하고 통밀 빵 중 어떤 걸 먼저 먹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호밀 빵을 집어 들었다.

“쥬드가 여기 자주 오나요?”

“한 달에 한두 번 오시죠. 요즘은 바쁘신 지 발길이 뜸했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용의 계보」를 반납하러 오신 게 마지막이었죠. 지난 7월에요.”

“용의…… 뭐요?”

“중세 시인 머독이 쓴 별로 두껍지 않은 책입니다. 전설 속에 나오는 용들의 족보인 모양인데 필사본이 아니라 원본이랍니다.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희귀본으로 주인께서 경매에서 8만 불에 구입하셨죠.”

“책 한 권에 8만 불이요?”

갑자기 호밀 빵이 목구멍에 딱 걸렸다. 레빈이 물잔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빌 게이츠 회장 때문에 값이 많이 올라갔어요. 그 양반은 사업가라 머리핀 하나를 사도 투자 가치를 생각하는데 책 한 권에 8만 불가치는 없다고 판단했나 봅니다. 뭐…… 용한테도 별로 관심이 없었겠죠.”

요즘 세상에 그런데 관심이 있으면 이상하지 않나?

“주인 되시는 분은 그런데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백만장자 사이코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우려와 달리 레빈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주인께서는 물건 사는 건 좋아하시고 남한테 지는 건 싫어하시죠. 사실 그분은 중세 라틴어를 못 읽으세요.”

“…….”

허영심 많은 속물이라……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그간의 흉악범들보다는 낫다. 세계적인 대부호와의 경쟁에서 지기 싫어서 읽지도 못할 책을 거금을 주고 사들인 일은 백주에 공공건물을 폭파하거나 시속 200킬로미터로 미친 듯이 질주하며 폭력을 일삼거나…… 연쇄살인을 저지르던 쥬드의 지나간 남자들의 행적에 비하면 재롱이다.

부자들에 대해서 아는 건 얼마 없지만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 과시 욕구가 있는 법이다. 쥬드가 돈 많고 마음 좋은 정상적인 남자하고 잘 돼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자. 물론 비니는 많이 울겠지만…….

“고문서 수집은 주인님의 많은 취미 중 하나죠. 크롬웰 양이 처음 방문하신 것도 문서 열람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이나 중세 문학 연구소에서도 가끔 청탁이 오지만 보통 주인께서는 그런 쪽의 청을 달갑게 여기시지 않는 편이거든요. 그쪽도 그걸로 더 이상 귀찮게 구는 일은 없었고요. 그런데 크롬웰 양은 좀 달랐어요. 어떤 책 때문이었는데…… 제목은 잘 모르겠어요. 그 책도 읽을 수 있는 말로 쓰인 게 아니었거든요.”

무척 고상하게 출발한 커플이네. 장서 수집가와 독서가라…… 하나 남은 통밀 빵 샌드위치에 손을 뻗으며 백만장자의 서재에서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는 쥬드와 그 옆에 서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그려보니 그럭저럭 그림이 나왔다.

빵이 다 떨어져가는 것을 깨달은 레빈이 찬장에서 종이 봉지 서너 개를 꺼내더니 여러 가지 과일 말린 것을 한 접시 수북이 쌓아 내 앞에 놔줬다. 이 사람…… 정말 맘에 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척 실례되는 생각이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책 핑계로 주인님께 접근하려는 모델이나 영화배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도 책을 구실로 삼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좀 특이한 여자분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거절을 하니까 며칠 후에 비니 도련님하고 같이 찾아오셨더군요. 아…… 그 책 제목이 「바하르나 전서 3권」이었을 겁니다. 이제 기억이 나네요.”

“비니…… 도련님?”

내 반문에 레빈이 약간 당황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레빈이 갑자기 끄집어냈던 말린 과일 봉지들을 처음대로 묶어서 찬장에 집어넣고 샌드위치 만드느라 늘어놨던 재료들을 부산스럽게 치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비니가 어떻게 이 집 도련님인지에 대한 대답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결국 할 일 다 마치고 더 이상 치울 것도 없을 즈음 레빈이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모르고 계셨나요? 그러고 보니 처음 오실 때부터 주무시고 계셨었죠. 그래도 크롬웰 양이 미리 말씀을 안 하셨던가요?”

불길하고 불안하다.

“여기가 설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설마…….

“비니 작은아버지댁은 아니겠죠?”

사실 이건 무척 실례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레빈은 절대 비니 작은아버지 밑에서 일할 사람 같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싶어서 레빈을 쳐다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레빈도 나를 마주보며 선하게 웃었다.

“맞는데요.”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움켜쥐고 조용히 일어났다. 아직 발밑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여기가 어딘 줄 알았으면 촌각을 아껴서 이곳을 나가는 게 나의 할 일이었다.

비니에게는 두 명의 숙부와 다섯 명의 고모 그리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촌과 조카들이 있었다. 비니 아버지는 시내에 대형 슈퍼를 네 곳이나 운영하고 있는 건실한 사업가였고 큰아버지는 최고급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었는데, 나도 비니를 따라가서 정상적인 요식업소임을 수차례 확인한 바 있다. 그 외에 몬티첼리가문의 다른 일가들도 대부분은 아무 하자 없는 쿠간 시민이었다. 그런데 막내 숙부인 프란시스 몬티첼리는 여기서 제외다.

비니의 본가인 몬티첼리 가문이 이탈리아에서도 마피아였는지, 아니면 이민 온 이후 그렇게 거칠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밀수와 폭력으로 잔뼈가 굵은 집안이었다.

그때만 해도 비니 집안은 위세 있는 보스 집안하고는 거리가 먼…… 그냥 험한 일 몸으로 때우는 소소한 지부의 책임자 정도였는데, 할아버지 뒤를 이어 막내 숙부인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가업을 이어받으면서부터 마피아 파워의 세력 판도가 뒤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니 작은아버지 덕에 최근 15년간 쿠간 시 뒷골목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에 투신한 지 어언 6년. 그간 몬티첼리의 부하들과 벌인 총격전이 몇 번이며 체포한 그의 똘마니는 또 몇 명인가…… 중화기로 무장한 경호원들과 마약 딜러들과 청부 살인업자들이 버글거리는 마피아 대부네 집이 범죄자들한테는 확실한 안전 가옥일 테지만 경찰인 나한테는 저세상 특급 열차의 대기실과도 같다.

“왜 그러십니까? 침실로 모셔다 드릴까요?”

허둥거리는 나를 보고 레빈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나도 내가 걱정된다.

“택시 좀 불러주시겠어요? 제가 급히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요.”

내 다급한 부탁에 레빈이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런 일은 제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크롬웰 양의 당부도 있었고 또 주인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일단 비니 도련님이라도 돌아오시면 의논해서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비니 도련님은 당분간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에요.”

택시도 꿈같은 얘기고 지금 당장 담이라도 뛰어넘어야 할 만큼 절박한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레빈이 우격다짐으로 나를 의자에 앉혔다.

“지금 밖으로 나가겠다는 건 별로 현명한 결정이 아닌 것 같은데요. 벌써 자정이 다 돼가는 데다 경찰은 아직 니콜라스 헤슬렘을 못 잡았거든요. 게다가 오늘밤이나 내일 새벽에 비가 올 거라는 일기 예보가 있었고요…… 무엇보다 「무덤 속의 줄리엣」을 세 알이나 드셨으니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 다시 쓰러져서 이번엔 한 열흘쯤 자게 될 수도 있어요.”

다른 말은 대충 알아듣겠는데…….

“무덤 속에…… 뭐요?”

“드신 수면제 이름이랍니다.”

수면제 이름치곤 상당히 엽기적이다.

“얼마 전에 크롬웰 양이 「인생의 다섯 가지 난관을 위한 미약」이라는 중세 연금술사의 의약 저서를 해독했는데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닥치는 다섯 가지 난관을 위한 장>에 적힌 제조법대로 만든 강력한 수면제라고 하던데요. 크롬웰 양의 주장대로라면 줄리엣이 죽음을 가장하기 위해 마신 독약과 성분이 거의 같을 거라고……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은 픽션이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실제로 그런 약도 있었다니까요. 그래서 이름이 「무덤 속의 줄리엣」이 된 거죠.”

“역시…… 독약이었군.”

그럴 줄 알았다.

“한 알만 먹으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푹 자고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는 정말 괜찮은 약이에요. 독약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푹…… 몇 시간이요?”

“여덟 시간 정도죠. ……보통은요.”

거짓말…… 내가 서늘하게 노려보자 레빈이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실 몇 주 전에 사이몬이 물어보지도 않고 두 알이나 먹었던 적이 있기는 있었어요. 아스피린인 줄 알았다나요. 「무덤 속에 줄리엣」은 정량 이상 복용하면 효과가 엄청나게 상승할 수 있다는 걸 크롬웰 양도 그때 알았고요. 어쨌든, 그때는 모두가 굉장히 놀랐어요. 의사를 불렀는데 맥도 약하고 심장 박동도 거의 없다고 해서…… 의사가 별의별 처방을 다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죠. 심장에 곧바로 박동 촉진제를 주사했지만 시체에 주사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어서 잘 아는 장의사에게 장례절차를 상의할 정도였답니다. 사이몬은 나흘하고…… 일곱 시간 만에 깨어났어요.”

레빈의 설명을 들으니까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첫째…….

“저는 얼마 만에 깨어난 거죠?”

“그러니까…… 한 6일 정도 주무셨죠.”

일주일 무단결근이라니…… 이 일이 시말서 정도로 무마될 수 있을까? 그렇게 독한 약을 세 배나 정량 초과해서 먹고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게 대견하지만, 반장도 그렇게 생각해줄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두 번째…….

“죽었다 살아난 사이몬이란 친구가…… 혹시 사이몬 발렌타인인가요?”

“예.”

이 이상 지체하다간 죽는다. 붙잡는 레빈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주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레빈이 뒤쫓아나오며 뭐라고 소리쳤지만 무슨 소린지 안 들렸다.

쥬드 크롬웰이 쥐어준 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털어 먹는 바보짓을 한 것도 기기 막히고, 그 덕에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맨 것도 억울했다. 게다가 그 일주일을 마피아 보스의 집에서 잔 것만도 언짢은데 거기에 사이몬 발렌타인이라니…… 좀 전에 먹은 샌드위치가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었다.

“여기 계시면 안전할 겁니다. 보안 장치도 최신식이고 잘 훈련된 경호원들이 24시간 경계를 하고 있으니까요. 크롬웰 양도 그래서 형사님을 이리로 데려온 거고요. 주인께서도 다 알고 승낙하신 일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계신 동안에는 아무도 형사님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사이몬 발렌타인이 이 집에 있다면서요!”

돌아서며 버럭 소리쳤다. 뒤쫓아나오며 속 편한 소리를 하던 레빈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목숨이 걸린 문제죠!”

“하지만 사이몬은…….”

설명해주지 않아도 놈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친구가 아닙니다. 절대로…….”

놈과 나 사이에 사적인 감정 따위는 없다. 죽음 이외의 것으로는 갚을 수 없는 원한이 있을 뿐이다.

이제 갈림길이다. 왼쪽? 오른쪽? 아직도 뒤를 쫓아오는 레빈에게 눈빛으로 길을 물어봤지만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협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쿠간 시 뒷골목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는 난데 이깟 집구석에서 길을 잃을 줄 알고? 감으로 오른쪽을 찍었다. 뒷문이건 쪽문이건 일단 건물 안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걸었는데 걷다 보니 막다른 복도였다. 다시 돌아나갈까 하다가 문득 여기가 1층이라는 게 생각났다.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창문으로 나가면 마당이다. 그래서 옆에 붙은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하필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이라도 창문은 있으니까 그대로 열고 나가면 그뿐이지만,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현재 누군가 사용 중인데 그게 누구냐 하면…….

“안녕, 짭새.”

가르시아가 열심히 들여다보던 플레이보이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묵직하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 가르시아…….”

숨을 삼키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프란시스 몬티첼리의 집안을 얼쩡거리는 이상 가르시아와 마주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놈은 몬티첼리의 충복 중 하나로 5년 전에 우리 팀에게 체포당해서 2년간 시립 형무소에서 복역한 전과가 있다. 기관총 들고 쫓아 나오기 전에 몸을 피하자. 어디로라도 달아나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이번엔 맞은편 문을 열어젖혔다.

다행히 이번 방은 화장실이 아니었다. 꽤 넓은 방인데 맞은편에 보이는 시원스런 통 유리창이 딱 마음에 들어서 성큼 한발을 들여놨다. 하지만 다음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창가에 테이블과 소파가 갖추어져 있는 걸 보면 응접실인데…… 그 소파에 토미 테시오하고 얼 시모네가 앉아서 장기를 두는 중이었다.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꿈이라도 이런 악몽은 싫다.

방에서 나와서 좀 전의 갈림길까지 전력으로 달렸을 때…… 뒤에서 달그락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돌아보니 가르시아였다. 연이어 응접실 쪽 문도 이제 막 열리는 참이었다. 저 앞 갈림길 중에 어느 쪽으로 가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까? 정면에는 레빈이 서 있었다. 레빈은 내가 이제 어떻게 하나 보고 싶은지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순간…… 뭔가 시커먼 것이 사정없이 내게 부딪쳐왔다.

그렇지 않아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탈진 상태에서 질주하던 중에 이런 식으로 태클을 당하는 바람에 속절없이 뒤로 튕겨나가고 말았다. 뒤에서 레빈이 받아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자빠져서 뒤통수가 깨졌을 거다.

따악…… 하고 굉장히 큰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뭔가 단단한 것에 부딪힌 것 같았다. 어떤 흉악한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가 일격을 가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좌우로 몇 번 흔들고 정면을 노려보니, 저 앞에서 머리통 붙잡고 뒹구는 놈은 비니 같은데…….

“비니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레빈이 달려가 비니를 일으켰다. 비니도 충격이 심한지 자꾸만 머리를 흔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비니 이 자식, 너 잘 만났다. 쥬드하고 공모해서 나를 이 호랑이 굴에 던져두고…….

가만…… 레빈이 어떻게 저기 가 있지? 나를 잡고 있는데? 지금 내가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건 레빈이 나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어서 아직까지 내 가슴팍을 감싸고 있는 하얗고 섬세한 손을 슬쩍 내려다봤다. 레빈이 아니면…… 누구지?

“일찍 일어났네. 한 100년쯤 더 잘 줄 알았는데…….”

사이몬 발렌타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놈을 밀치고 일단 벽에 붙어섰다. 사이몬 발렌타인은 정면에서 팔짱 끼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시모네와 테시오, 가르시아…… 나는 지금 쿠간에서 가장 난폭한 갱단과 맞닥뜨린 상태였다. 유일한 아군인 비니는 아직도 인사불성으로 비틀거리고 있으니까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후회막심이다. 내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을까? 서장한테 농약 묻은 홍차나 타주라고 타박을 하다니…… 사람이 필요하면 거짓말도 할 수 있는 거지, 그만한 일을 가지고 어쩌자고 쥬드한테 그런 막말을 했을까?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나를 이런 호랑이 소굴에 던져 놓고 가버린 거다. 그 여자는 그러고도 남을 여자다.

이제 어쩌지? 맨손에 잠옷 바람으로 이런 곤경에 처하고 보니 아무래도 뾰족한 수가 없어 아쉬운 대로 옆 선반에 놓인 화병을 잡았다.

“안 됩니다!”

레빈이 벼락같이 외치며 내 손에서 화병을 낚아챘다. 그 빠르기가 흡사 전광석화였다.

“이건 주인께서 중국 여행길에 직접 구해오신 명조 때의 자기란 말입니다. 이걸 어쩌시려고요?”

수틀리면 발렌타인의 대가리를 깨버리려고 했는데 이제 다 틀렸다.

“이 집에선 난폭하게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손님으로써 기본적인 예절은 지켜주십사 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부탁입니까?”

레빈이 화병을 본래 있던 자리에 놓으며 엄하게 꾸짖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볼 때는 무리하고도 무리한 요구다. 눈앞에 병풍처럼 둘러선 악당들을 번갈아 노려보며 이제 어쩔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노려본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내게는 없고…… 믿을 건 움켜쥔 두 주먹뿐인데 3:1 주먹 싸움은 16살 때 이후론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어떤 놈이 먼저 달려들까 조마조마한데 가르시아가 앞으로 한발 나섰다.

가르시아는 몬티첼리의 행동대장 격인데 성질 급하고 난폭하기가 불에 덴 살쾡이 같은 놈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몬티첼리의 보디가드지만 마피아 간의 충돌이 있을 때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놈의 이름은 언제나 마피아 리스트 상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전과도 있고, 3년 전에 있었던 변호사 살인사건 때 주범으로 체포됐다가 누가 봐도 조작이 확실한 알리바이를 제시해 풀려난 적이 있었고…… 그 외에도 최소한 4건의 폭력과 살인에 유력한 용의자였다.

“기본적인 예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가르시아가 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화장실에 들어올 때는…… 꼭 노크를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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