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다. 빌어먹게 춥다.
“날이 너무 춥지 않아서 다행이야.”
비니가 잔뜩 얼어 터진 입술로 지껄였다. 약혼녀가 사준 삼중 누비 내복에 엄마가 떠준 털내복까지 껴입은 비니야 그렇겠지. 나는 이제 3미터 떨어진 편의점 간판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내 생에 이렇게 추운 날이 또 있었을까? 동태처럼 얼어붙은 손으로 놈을 맞출 수나 있을까?
“지원팀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알래스카 백곰처럼 옷을 겹겹이 껴입은 비니가 드디어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복 안쪽으로 찬바람이 스며드는 모양이다.
“지원 좋아하네!”
겨우 편의점 돈 통이나 털자고 들어가서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 머리통에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쫌스런 강도 한 놈 잡는데 서장이 특공대라도 파견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놈이 너무 어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부들부들 떨다가 엄한 사람 머리통에 구멍을 내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조만간 벌어질 총격전이 끝난 후에 눈을 허옇게 부릅뜬 열다섯 살짜리 철없는 어린애를 보는 일도 되도록 없었으면 좋겠고…….
“서에 지원 요청 안 했어?”
비니가 달달 떨면서 따지고 들었다. 이 갑작스런 대치 상황이 내 탓이라도 된다는 투였다.
“했어? 안 했어?”
비니는 순도 100%짜리 이탈리안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고 흥분하면 대단히 말이 많아진다. 다른 때 같으면 모르지만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음산한 가을밤, 반시간이나 편의점 강도하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 비니의 수다까지 더해진다면 우울증이 도져버릴 거다. 게다가 내 얄팍한 청바지 밑에는 하얀 면 팬티 한 장뿐이다.
“엄호해!”
“너, 지원 요청 안 했구나!”
비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들었다. 비니가 내게 총구를 들이대지 않은 건 순전히 방금 편의점에서 울려나온 총성 덕이었다.
“이 개새끼들! 당장 꺼져!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죽이기 싫으면 가! 가란 말이야!”
떠드는 수준을 보아 하니 많이 먹어봐야 열대여섯 살 먹었겠네. 다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판단하건데 여기서 더 시간을 끄는 건 위험했다. 더 이상 꼼짝 않고 있는 건 나한테도 위험한 일이다. 동상 걸리겠다.
“야! 어디 가?”
“좀 더 크게 말해! 그래야 저 녀석이 듣고 나한테 총질을 하지!”
어·디·가·는·데?라고 비니가 입을 벙긋거렸다. 비니는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닌데 성격 탓인지 위기 상황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어디 가냐고? 여자친구네 집에 저녁 먹으러 간다!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비니를 내버려두고 차 뒤쪽으로 돌았다. 타이어 뒤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편의점 통유리가 그런 대로 잘 보였다.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놈도 나를 보지 못할 거다. 그거면 됐다.
질퍽한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편의점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보통 걸음으로 1분 거린데 차가운 흙탕물에 다 젖은 채 기어가려니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평생처럼 느껴졌다면 너무 과장일까? 어쨌거나 이 상황을 빨리 종료시키고 싶다. 너무 성급해지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했다. 지금 놈은 뭘 하고 있을까? 아마…… 가게 안을 허둥지둥 돌아다니며 도망갈 구멍을 찾고 있겠지.
“차! 차 갖다 놔! 시동 걸어서 가게 앞에 갖다 놔! 5분 주겠어! 1분이라도 늦으면 다 죽을 줄 알아!”
놈이 머릴 쓰기 시작했다. 비니를 돌아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윌리!”
“더러운 짭새놈아! 윌리라고 부르지 마! 내 이름은 더그다!”
비니도 제법이다.
“좋아! 더그! 차가 필요하다는 거지? 평소에 어떤 차가 제일 갖고 싶었지?”
저런 농담, 지금은 할 때가 아닌데…….
“나랑 농담 따먹기 하고 싶어? 헛수작하지 마! 이제 4분 남았다.”
“화낼 거 없잖아.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정말 갖고 싶은 차 없어?”
타앙…… 하는 위협적인 총성이 한발 울려 퍼지고 내 머리 위로 유리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비니 저 망할 자식……. 이를 갈면서 창 아래쪽에 몸을 붙였다. 다행히 아직은 살아 있지만 비니가 입 닥치지 않으면 무슨 불상사를 당할지 모른다. 비니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3분 남았다! 짭새!”
비니가 나를 쳐다봤다. 비니가 차를 문 앞에 대주면 이대로 문 옆으로 기어가서 인질을 잡고 나오는 놈을 기다릴 참이었다. 긴 말 하기는 거리도 너무 멀고 시간도 없어서 그냥 비니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 손가락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제대로 해석을 한 걸까? 비니가 부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더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이 위기일발의 대치 상황을 유유자적 지켜보고 있는 한가한 운전자를 어거지로 차에서 끌어내렸다. 거기까지 구경하고 잽싸게 문 쪽으로 기었다. 비니가 문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그나저나 저 낡은 택시가 놈의 맘에 들지 모르겠네…….
“더그! 차 가지고 왔다.”
“물러나! 헛수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너, 짭새…… 너부터 죽을 줄 알아! 차에서 떨어져! 이 새끼들! 무슨 구경났어?”
보통 이런 종류의 인질극은 순찰 중인 경관 두 명이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우선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진압 대원들과 노련한 협상가,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실력 있는 정신과 의사, 가난하기는 하지만 자식 뒷바라지에 평생 궂은일을 마다 않았던 더그의 엄마, 그리고 주변을 통제할 다수의 인력…….
비니가 서에 지원 요청 안 했다고 눈 부릅뜨며 내게 대들었지만 지원 요청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30분이 다 지나가도록 감감 무소식인 것은 오늘밤 어딘가에서 대형 사고가 터져 시시껍절한 편의점 강도사건에 배치할 인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당장 곤란한 건 주변에 구경꾼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안에 있는 강도와 인질들에게만 온 정신을 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틈에 주변이 시장 바닥처럼 어수선했다. 영화 촬영이라도 하는 줄 아는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행인들이 경찰과 강도의 인질극을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제 곧 더그가 인질을 잡고 나올 텐데 저 사람들 때문에 사소한 자극이라도 받는 날이면 인질은 그 자리에서 황천행이다. 인질을 죽이고 나면 자포자기에 빠진 더그는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군중들에게 총질을 해댈 수도 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런 판국에 사진을 찍어 대는 얼간이 같은 자식까지 있네. 더그가 나오길 기다리며 편의점 문 옆에 숨어 있는 처지만 아니면 저 자식을 그냥…… 이크! 더그 나온다.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써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더그는 아주 건장한 체격이었다. 한 손엔 코끼리 사냥에나 쓸 것 같은 엽총을 들고 한쪽 팔로는 체격이 열서너 살짜리 여자 아이만 한 노파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노파의 쪼글쪼글한 목덜미가 총구에 눌려서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놈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내 위치는 놈의 바로 뒤쪽이었다. 지금 목덜미에 총구를 들이대면 놈이 놀라서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버리지 않을까? 놈이 불시에 나를 후려치고 내 머리에 총알을 날릴 수도 있었다. 뒷모습이 그다지 날렵해 보이진 않지만 놈도 목숨이 걸린 일이니…… 조심…… 조심해. 제이. 비록 평탄치 않은 인생살이에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지만 나이 스물아홉에, 이 구질구질한 날씨에…… 너절한 편의점 앞에서 죽을 수는 없지.
“반가워, 더그.”
방금 코너를 돌다가 만난 직장 동료에게 하듯……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상대의 귓전에 총구를 들이밀고 말을 건네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건조했다. 더그도 느꼈을 거다.
“안 돼! 아직 움직이지 마. 천천히…….”
더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걱정했던 것만큼 무모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천천히…… 빌어먹을!
“개새끼들!”
더그가 비호처럼 돌아서더니 개머리판으로 내 목덜미를 내리찍었다. 그 바람에 더그의 머리통에 쑤셔 박아줄 총알을 허공에 날려버리고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놈의 몸놀림은 흡사 전갈을 습격하는 뱀과 같았다.
더그가 여전히 한 팔로는 노파를 부서져라 끌어안은 채 내 쪽으로 총구를 들이밀었다. 이젠 내 머리통이 날아갈 차례라는 듯……. 놈이 그저 얌전히 체포되어줄 거란 기대를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기민하게 대응할 줄도 몰랐다.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총구를 손으로 잡아 밀쳐버리고 그냥 놈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이제 노파는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어지간히 놀랐는지 놈에게 놓여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나랑 더그를 넋 나간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이 개만도 못한 짭새! 나를 속여?”
이제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미친 듯이 덤벼드는 더그의 완력은 대단했다. 총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녀석의 엽총에 매달렸다. 살 길은 그뿐이었다. 놈에게서 이 총을 뺏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마음대로 총질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이 자식 진짜 괴물이다. 비니…… 비니…… 제발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 봐……. 나만 경찰학교 나왔냐?
“꼼짝 마라! 경찰이다!”
얼씨구!
하지만 다음 순간 나와 더그를 향해 총을 꼬나잡고 이리저리 조준을 해대는 비니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애초에 파트너를 배정 받을 때 아무도 비니와 짝이 되려고 하지 않았었다. 비니가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놈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비니는 사격 낙제생이었던 것이다. 안 돼! 비니! 총 저리 치워!
불행히도 더그는 자신이 지금 어떠한 위험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발의 총성이 울리고 편의점 유리창이 또 한 장 날아갔다. 더그가 잠시 움찔했다. 나? 나는 기절할 뻔했다.
“비니! 뭐 하는 거야? 누구 죽이려고 총질이야?”
잠시 움찔했다가 여전한 기세로 나를 내리누르는 더그를 힘겹게 막아내며 비니를 향해 목쉰 소리를 질렀지만 비니는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걱정하지 마! 다리를 쏠 거야!”
이런 청천 날벼락 같은 소리를……. 어떡해, 난 몰라…….
걱정을 말라고? 다리를 쏜다고! 내가 비니랑 경찰학교 동기가 아니고 또 1년 반을 넘어가는 파트너 사이가 아니었다면 걱정을 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니가 매 학기마다 사격 테스트에서 낙제하고 재시험도 천신만고 끝에 D로 간신히 통과하는 눈물겨운 과정을 4년 동안 옆에서 지켜본 나한테 걱정하지 말라는 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다.
게다가 불과 2달 전 서부 할렘에서의 갱단 소탕작전 때 비니는 그 무서운 총 솜씨로 트레일러라는 별명을 가진 레드 드래곤파의 부두목을 황천으로 보낼 뻔했던 전력이 이미 있었다. 그놈은 지금 찢어진 걸레로 변해버린 창자가 회복되길 기다리며 기약 없이 시립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데…… 비니의 취중 고백에 의하면 자기는 그때 놈의 다리를 쐈다는 거다. 범죄가 별게 아니다. 비니 같은 놈한테 총을 쥐어주면 그게 범죄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더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더그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얼핏 비니를 보니 눈가에 결연한 의지가 떠돌고 있었고, 보통 때는 닫혀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입술까지 꽉 악물고 있었다. 이건 정말 위험하다.
타 앙…….
마지막으로 닦은 게 언제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유리문을 거칠게 밀어젖혔다. 확 끼쳐 오는 매캐한 담배연기와 땀 냄새…… 좀 떨어진 벤치에 모여 앉은 매춘부들에게서 풍겨오는 엄청 쎈 향수 냄새에…… 내 몸에 엉겨 붙은 피 냄새까지 한데 섞여서 숨도 크게 못 쉴 지경이었다. 여기 오래 있으면 조만간 폐암에 걸릴 거다.
오가는 거친 욕설과 전화벨 소리, 책상 두드리는 소리, 의자 끌리는 소리……. 어수선한 로비를 지나서 곧장 반장실로 향했다.
“반장님 안 계셔.”
바로 옆 책상에서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던 넬이 내 쪽을 힐끔 쳐다보다가 얼어붙은 듯 멍한 얼굴로 일손을 멈췄다. 안 계셔? 부하는 비명횡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 간신히 살아왔는데 반장은 땡땡이를 쳐? 잠시 생각하다가 쇼크로 넋이 반쯤 나간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넬을 버려두고 서장실로 향했다.
“서장님 안 계세요.”
서장 비서 쥬드 크롬웰이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처박은 채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서장의 부재를 알렸다.
아침나절엔 빈틈없이 곱게 틀어 올렸던 밝은 금발이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탓에 흐트러져서 푸석해 보였다. 그런 모습까지도 숨 막힐 정도로 섹시했다.
쥬드는 쿠간 시경에서 제일가는 미인이고 쿠간에서도 제일 예쁜 여자였다. 지금까지 순찰 도느라고 쿠간 시를 골백번은 돌았지만 쥬드만큼 예쁜 여자는 보지 못했으니 아마 맞을 거다.
“어디 가셨는데?”
“나한테 반말하지 말아요.”
쥬드가 그제야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고 진흙탕과 피에 범벅이 된 옷과…… 설움이 복받쳐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게 꿈만 같은데 내 기막힌 사정을 들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쥬드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오는 길에 헌혈차라도 들이받았나요?”
“반장도 없던데 서장님은 또 어디 간 거야?”
“사건이 터져서 상황 보러 나가셨어요. 제이, 나한테 반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반말이고 빈말이고 간에 더 말할 기운도 없어서 그냥 비서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울고 싶지만 너무 오래 안 울어봐서 어떻게 우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들어오시는데?”
“제이…….”
쥬드가 나를 딱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알았어. 반말 안 할게…….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별명이 「여섯 시 칼 퇴근」인 쥬드 크롬웰이 11시도 넘은 이 시간에 사무실에서 뭘하고 있는걸까?
“오늘 밤엔 여기 아무도 없어요.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상상도 못 할 거야. 내 입으론 차마 말할 수도 없어. 비니가…… 비니가…….
“일어나요, 제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옷에 묻어 있는 그게 당신 피면 당장에 병원에 가고 다행히 당신 피가 아니면 집에 가서 샤워하고 잠이나 자요. 지금은 당신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어요.”
“대체 무슨 일인데?”
쥬드가 나를 요렇게 노려봤다.
“……요?”
“이런 저런 사건이야 많죠.”
쥬드가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지원도 없이 나를 살인마 비니 손에 넘겨준 거였군…….”
바로 그때, 살인마 비니가 비서실 문을 빠끔 열었다. 놈의 간교한 시선이 쥬드와 마주쳤다. 놈이 비열하게 웃었다. 솔직히 얼빠진 놈처럼 웃었다.
“그만 집에 가요, 제이. 당신이 아니라도 오늘밤은 지옥 같아요.”
쥬드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얼음 동굴에서 나오는 차디찬 북풍 같았다. 다 귀찮아서 그냥 사무실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눈의 여왕께서 신경질을 벌컥 내며 살인마 비니를 추궁했다. 비니가 그 한마디에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면서 내 팔을 잡아 일으키려고 끙끙거렸다.
손 치워! 이 천하에 둘도 없을 흉악한 놈아!
“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크롬웰 양, 그냥…… 좀…….”
살인마 비니가 나를 일으켜 어깨에 떠메면서 횡설수설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편의점에 강도가 들었는데……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쥬드가 송곳 같은 시선으로 비니의 눈을 쳐다봤다. 비니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천하에 살인마도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별 수 없는 모양이다.
“총격전이 있었어요.”
들릴 듯 말 듯 우물거리며 비니가 참혹한 현실을 최대한 덮었다. 쥬드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어요?”
쥬드의 추궁에 비니가 펄쩍뛰며 범행을 부인했다.
“아니에요! 안 죽었어요! 그냥 좀 다쳐서 병원에 있어요! 난 그냥 다리를 쏘려고 했는데…….”
불쌍한 더그…….
그날 밤 더그가 꿈에 나타났다. 무슨 꿈이었는지 생각은 하나도 안 나지만 꿈에 더그를 본 건 확실했다. 검은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러대는 남자였으니까. 하필 사격 낙제생의 탈을 쓴 무자비한 살인마 비니의 손에 걸려든 불쌍한 더그를 생각하니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아서 아침 일곱 시에 출근했다.
별로 이를 것도 없는 시간이긴 하지만 아침부터 경찰서 앞마당이 시장바닥 같았다. 이 부근에는 일 없을 때에도 한두 명씩 얼쩡거리는 게 기자지만, 오늘 아침엔 경찰서 앞 큰길까지 온통 취재 차량으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6개월 전에 이 지역 마피아 실세인 프란시스 몬티첼리가 탈세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아침 출근 시간의 지하철을 연상시키는 인파라서 뚫고 들어가 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헤이! 제이!”
저렇게 빽빽한 인파는 어느 각도에서 뚫어야 무사히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까를 잠시 따지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되게 오랜만이지? 그동안 별 일 없었어?”
“뭐…… 그럭저럭…….”
얼마 전까지 유력한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직함을 바꾼 제프 리만이었다. 리만을 찾아낸 곳은 내 등 뒤…… 하고도 배하고 가슴 사이였다. 리만은 키가 작다. 뒤에서 말을 걸어오면 꼭 이런 식으로 두리번거리게 되지만 본인은 별로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리만의 인사를 건성으로 넘기면서 경찰서 앞에 모인 기자들과…… 리만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무리 시경 앞이라도 매일 아침 이런 풍경이 연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리만이라니……. 저 앞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저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리만과는 그간 몇 차례 교류가 있어 아는데 이 친구는 톱뉴스 아니면 취재 사절이다.
“이리 좀 와 봐!”
아하…… 이 사람들이 벌써 지난밤 「편의점 앞의 참극」에 대해 들었구나. 이제 비니는 끝장이다. 기자들이 비니 같이 잔인무도한 사고 제조기와 1년 6개월이나 파트너로 지내야 했던 그 심정에 대해 물어오면 뭐라고 대답할까. 두서없이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는데 리만이 다짜고짜 나를 경찰서 모퉁이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단한 밤이었지?”
난쟁이만 간신히 면한 작은 키에 나잇살이 36인치 정도 되어 보이는 리만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어. 엄청…….”
리만은 니 맘 다 안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겉보기는 맘씨 좋은 구멍가게 주인아저씨같이 순진해 보이지만 저 뚱뚱한 뱃속에 들어앉은 구렁이가 열두 마리다.
“그래, 현장에 있었나?”
“응…….”
리만이 침을 꼴깍 삼켰다.
“얘기 좀 해 봐.”
먼저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지난밤을 회상하자니 가슴이 콱 막혀서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내 침묵을 불순하게 해석한 리만이 손에다가 100달러짜리 꼬깃꼬깃한 지폐를 턱 쥐어줬다.
“죽는 줄 알았어.”
“아…… 잠깐! 녹음기 좀 돌리고…… 됐어.”
리만이 취재용 녹음기를 내 얼굴에 들이댔다. 근데 상부에 보고도 하기 전에 인터뷰 같은 거 해도 되나? 리만이 좀 언짢은 기색을 보이며 주머니에서 100달러짜리 한 장을 더 끄집어냈다. 해도 되겠지 뭐…… 나는 사건 피해자니까…….
“그러니까…… 범인이 인질을 잡고 있었는데…….”
“인질?”
리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인질극이었군. 그럴 줄 알았어. 분명히 뭔가 구린내가 나더라니…… 그러니까 계획범죄였군!”
그게 계획범죄였던가?
“놈이 차를 요구했어. 인질을 잡고서…… 그래서 비니가…….”
더그의 계획성이 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얘기를 계속 하기로 하자.
“비니?”
리만이 멍청한 얼굴로 반문했다. 리만도 비니를 안다. 그냥 아는 것뿐 아니라 관심도 상당히 많아서 상황을 좀 더 두고 본 다음에 비니의 징크스에 대한 기사를 써볼 생각이라고 했었다.
“비니도 거기 있었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하다. 편의점 사건 취재면 비니 얘기는 이미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설마…… 병원에 불을 낸 게 비니는 아니겠지?”
이게 무슨 소리야?
“비니가 병원에 불을 질렀어?”
그러고 보니 비니는 더그가 입원한 병원까지 쫓아갔었는데, 하느님 맙소사…… 병원을 통째로 날려버렸구나. 비니가 언젠가는 세상을 경악시킬 대형 참사를 일으키리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비니의 파트너로써, 그리고 경찰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로서 마음이 착잡했다. 비니였구나……. 병원을 어디로 어떻게 날려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비니 때문에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있었구나…….
그런데 리만이 미심쩍은 얼굴로 내게 좀 더 구체적인 정황을 캐물었다.
“그러니까 콘웨이 요양소 화재사건 말이야.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인질극이었다는 거지?”
“…….”
리만이 녹음기를 껐다.
“내 돈 내놔!”
“어젯밤에 콘웨이 요양소에 불이 났었던 거야?”
콘웨이 요양소란 억만장자 파트리샤 콘웨이 여사가 정신분열로 자살한 아들 로빈 콘웨이를 기리는 의미로 사재를 출연해서 설립한 사설 정신병원이었다. 그렇다고 서민들 상대의 자선병원 같은 건 아니고…… 돈 많은 미치광이들이 주로 입원해서 요양하는 시설로 로빈 콘웨이 공원을 끼고 있는, 시설 좋고 의사 좋고 치료비 비싸기로 소문난 병원인데…… 불이 나다니…….
콘웨이 요양소가 일반인들에게 유명한 이유는 유명한 영화배우나 가수들이 자살 충동, 마약 중독, 이혼 스트레스 따위로 자주 드나드는 병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희대의 연쇄살인범 니콜라스 헤슬렘이 감금되어 있는 시설이라서 경찰들 사이에서도 아주 잘 알려진 병원인데 불이 나다니…… 반장이랑 서장이 오밤중에 혼비백산해서 뛰쳐나갈 만도 하네. 가만 있자, 콘웨이 요양소에 불이 났으면…….
“…….”
“내 돈 내놓으라니까!”
심장에 막 바로 뜨거운 물을 끼얹은 것 같은 충격에 멍하게 서 있자 리만이 짜증스럽게 다그쳤다. 잠자코 리만의 손에 100달러 지폐를 쥐어주었다.
“니콜라스는…….”
목소리가 너무 떨렸는지 리만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됐어?”
“그거 알아내려고 아침부터 배고픈 강아지처럼 경찰서 현관에서 끙끙거리는 내 꼴이 안 보이나? 쿠간 시 소방차 절반이 달려가서 불길이야 금방 잡았지만 화재 규모에 비해서 사상자가 빌어먹게 많은 게 이상하단 말이야. 한 장 더 내놔! 두 장 갔잖아!!”
100달러 지폐 한 장이 마저 리만에게 건너갔다.
“몇 명이나 죽었는데?”
“스물여섯. 중화상이 열넷. 그리고 그 와중에 자유를 찾아 뛰쳐나간 미치광이가 스물하나. 지금 그놈의 병원에 남은 사람이라곤 똥오줌도 못 가리는 치매환자 몇 명하고 문하고 벽도 구별 못 할 만큼 심하게 맛이 간 환자들뿐이야.”
“그럼…… 혹시 니콜라스가…….”
3개의 얼굴을 가진 남자. 수완 좋고 사교적인 재계의 신사이기도 했고,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과대망상에 젖어 있는 미치광이이기도 했으며, 비 오는 날이면 사냥감을 찾아 도시 뒷골목을 헤매는 연쇄살인범이었던 남자의 우울하면서도 차가운 미소가 아직도 꿈에 보였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쿠간 시 기자협회 주관 하에 친선 마라톤 대회 준비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어? 니콜라스가 콘웨이 요양소 마룻바닥에 눌어붙은 시체 중에 없는 게 확실하면 오늘부터는 비 올 때마다 문 걸어 잠그고 미리 사다 놓은 비상식량 뜯어 먹으면서 날 맑아지기나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판이라고!”
깊은 우물처럼 음산하고 위압적이던 검은 눈동자가 일상의 기억을 비집고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환영에 질려 있는 내 어깨를 리만이 두드렸다.
“뭐……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까……. 미리 걱정할 건 없어.”
“…….”
“가보니까 현장이 아주 아수라장이더라고. 물론 내부는 접근 금지였지만…… 내가 누구야? 니콜라스가 수용되어 있던 동관 지하는 골조만 겨우 남아 있더란 말이야. 탈출 가능성이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어.”
“…….”
“탈출했다고 해도 뭐, 자네한테 별일 있겠어? 그놈이 자네 이름도 기억 못 할 거라는데…… 10달러 걸지.”
“…….”
리만은 당장이라도 지갑을 꺼낼 기세였다.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리만이 이렇게 당황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리만이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지난밤에 비니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궁금하지만 이 건이 먼저니까…… 또 보자고.”
리만이 100달러 지폐 두 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돌아섰다. 밤새 사건 현장과 경찰서로 동분서주한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어깨가 흥건히 젖은 주황색 더블코트가 마치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 같았다.
뭔가 할 말을 잊은 듯 리만이 멈춰 서서 고개를 삐끔 돌렸다.
“부탁 하나 할까?”
“뭔데?”
“다음에 놈을 체포할 때는 말이야…… 그냥 죽여버리라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스산한 겨울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길모퉁이에 얼마를 그렇게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거리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머리카락을 축축하게 적시는 이 비도…… 낯설었다. 한순간에 세상 모든 일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떤 생각에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이따금 그럴 때가 있는데 니콜라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매울 때마다 그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놈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고 들인 노력이 얼마며 정신과에 갖다 바친 돈이 또 얼마냐. 고개를 세게 흔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현관을 직접 공략하는 건 생각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10분이나 기자들한테 이리 밀리고 저리 치인 끝에 간신히 접근을 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기자들이 둑 터진 물처럼 밀려들어올 테니 그랬겠지만 동료도 들여보내주질 않다니! 문 두드리고, 발로 차고, 욕도 하고…… 문을 지키고 서 있는 제니퍼한테 무릎 꿇고 비는 시늉까지 했지만 동료애라고는 빈대 낯짝만큼도 없는 빨강머리 순경은 난처하다는 듯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정문은 포기하고 인파에서 빠져나와 경찰서 건물을 한 바퀴 돌았다. 4년 전에 설계 공모를 해서 꽤 이름 있는 건축가가 디자인한 이 차가운 프러시안 블루의 유리 건물은 겉보기엔 단순해도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꽤 복잡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창문이 정말 많았다.
어딘가 열려 있는 창문이 있을 텐데…… 그렇지. 저거다.
쓰레기통을 밟고 올라서서 들여다보니, 안은 샤워장이었다. 누군가 사용하고 습기 때문에 열어 놓고는 그냥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창문이 좀 작기는 해도 못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 샤워실인데 괜찮을까? 내려가서 다른 창문을 찾아볼까 하다가 귀찮기도 하고 마침 사용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냥 좁은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1층 뒤쪽 구석에 자리잡은 이 샤워실은 사실 남자들 거였다. 경찰서란 대체로 권위적이고 단조로운 것이 자연스러운데 이 새 건물은 몇 가지 독특함으로 단순한 경찰 공무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상계단이 건물 한 가운데 있고 지하 유치장 창살이 벌집을 연상시키는 정육면체의 구성이라는 건 그나마 참신한 편이었고, 몇 가지는 참기 힘든 것도 있었다.
여성용 샤워장을 3층 전면에 배치하고 바깥쪽은 매직미러로 마감한 아이디어도 몇 차례 공청회에서는 참 독특하군…… 정도로 받아 들여졌었다. 오히려 남자 샤워실은 창고나 있을 법한 한 구석으로 밀어버린 게 성 차별적이라는 지적까지 있었다. 정말 남성용 샤워장엔 제대로 된 환풍기도 없었다.
하지만 건물이 완공되고 샤워실을 사용해야 할 시점에서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웃 건물 헬스클럽 샤워장으로 발길을 돌렸고, 몇 주 후에는 샤워실을 바꿔달라고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3층에 있는 호텔 목욕탕 같은 샤워실은 지금 남자들이 쓴다.
사연 많은 샤워실 창문으로 출근을 하자니 심정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출근 안 했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비번이라는 게 하필 지금 생각날 게 뭐냐?
머리에 이어 어깨와 배까지는 그럭저럭 좁은 창을 통과했는데 엉덩이가 딱 걸리고 말았다. 별로 큰 엉덩이도 아닌데 뒤춤에 항상 차고 다니는 총이 턱에 걸린 것 같았다. 손으로 더듬어서 걸린 걸 빼내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일이 꼬이려다 보니 때맞춰 샤워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큰일 났네…….
도리스 게이트하고 미셸 바우먼이 손에 수건만 하나씩 들고 샤워실에 들어왔다. 어제 야근이라도 한 모양이다. 샤워를 하러 들어왔으니 당연히 알몸이었다. 순간 당황해서 상반신을 벽에 바싹 붙였다. 얼른 창밖으로 몸을 빼내려고 몸부림을 쳐봤지만 어디서 걸렸는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선선히 샤워실을 바꿔주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한 눈도 안 팔고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으며 샤워 부스 아래 섰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고개만 돌리면 여자 목욕탕이나 엿보고 다니는 변태라는 오명을 덮어 쓸 판이었다. 게다가 도리스는 레즈비언이란 소문이 있는데, 본인의 성적 취향이야 내 알 바 아니지만 키가 180센티미터도 넘는 장정에 성격 거칠기가 겨울잠 자고 일어난 불곰 같은 전직 필드하키 선수라는 건…… 지금 상황에선 몹시 마음에 걸렸다.
“밖에 기자들 봤어? 큰길에 방송국을 차려도 되겠더라.”
물줄기를 맞으며 미셸이 목소리를 높였다.
“몇 주 조용해서 웬일로 월급 좀 편하게 받아보나 했더니…… 빌어먹을…… 이게 웬 날벼락이야?”
머리에 샴푸를 하며 도리스가 대꾸했다. 그동안 손을 열심히 놀린 보람이 있어 창턱에 끼인 총이 손에 잡혔다. 손잡이가 창문 걸쇠 부분에 끼어 들어갔던 모양이다.
“아까 서장이 말하는 거 들었지? 그놈이 탈출한 게 우리 탓이야?”
서장이 뭐라고 했는지 안 들어도 뻔하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죽을 고생해서 연쇄살인범을 잡아주면 뭐해? 정신병원이라니…… 다 미쳤어. 니콜라스보다 그놈 변호사랑 담당판사부터 잡아서 요절을 내야 돼!”
말하면서 도리스가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기분도 별로 좋지 않은데 샤워실 창문에 끼어 있는 남자를 보면 더욱 기분 잡칠 게 분명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걸린 거야?
“흥분할 거 없어. 그놈 잡아넣으려고 죽을 고생 한 사람은 따로 있잖아?”
오, 예…… 애쓴 보람이 있어서 창턱에 끼었던 총 손잡이가 드디어 빠져나왔다. 이제 되도록 조용히 샤워실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상반신을 끌어내기만 하면 완전범죄다.
“그러게…… 몸은 벌써 바쳤고 하마터면 목숨까지 바칠 뻔했잖아. 제이는 지금 기분이 어떨까?”
성공적으로 조용히 몸을 빼내고 막 목을 끄집어내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누군가 내 얘기를 하고 있을 때는 되도록 빨리 자리를 피하는 게 여러 모로 이롭다는 건 안다. 하지만 나는…….
“세상 끝날 때까지라도 쫓아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그놈이 제이한테 그랬다면서?”
숨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나는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도리스가 미셸 쪽으로 돌아섰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눈이 딱 마주칠 각도지만 지금은 얼굴에 비누 거품이 잔뜩 묻어서 눈도 못 뜨고 있는 형편이라 우려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게다가 마지막 공판 때 말이야. 넌 그때 방청석에 있었다면서?”
“그땐 정말 놀랐었어. 놈…… 진짜 빠르더라.”
도리스가 그 최후 공판에 왔던가? 하긴…… 직접 못 봤어도 전국 일간지에 톱기사로 실렸으니 그때 일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2년이나 지난 일인데, 왜 그런 일은 잊어버리지도 않는지 모르겠다.
“제이…… 위험하지 않을까?”
도리스가 샤워기 쪽으로 돌아서서 머리에 잔뜩 인 거품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도리스가 잠시 뜸을 들였다. 말소리가 잘 안 들려서 빼냈던 한쪽 어깨를 안쪽으로 다시 들이밀었다.
“위험하겠지.”
도리스의 대답에 미셸이 킥킥 웃었다. 저렇게 좋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셸이 도리스에게서 샴푸를 건네받으며 음흉하게 덧붙였다.
“니콜라스도 그렇게 귀여운 남자는 처음 봤을걸?”
“난 잘 모르겠던데?”
도리스가 자기 근육을 거울에 비춰 보면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너야 원래 남자한텐 관심 없는 애니까 당연히 잘 모르지.”
“어디가 귀여워?”
“엉덩이.”
여자들도 샤워실에서 저런 얘길 하는구나.
“그리고 비니한테 당하고 퉁퉁 부어 있을 때 말이야, 어떤 때는 너무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을 지경이라니까.”
“남자를 너무 애 취급하는 것도 정상은 아니야.”
“애 같은 건 사실이야. 어떤 때는 애들보다 더 단순하단 말이야.”
“하긴…… 니가 만나고 다니는 반편들은 거의 그렇더라.”
도리스의 퉁명스런 대꾸에 정곡을 찔렸는지 미셸이 움찔했다.
“내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못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적어도…….”
“레즈비언은 아니라…… 그거지?”
“그런 말 하지 않았어.”
미셸이 정색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도리스는 느긋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격이 굉장히 급하고 난폭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면도 있었네?
“뭐라고 해도 상관은 없어. 사실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만한 남자 골라서 니 멋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그 이상한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평생 제대로 된 남자 만나기 힘들 거야.”
“내가 남자 복 없는 게 순전히 내 탓이란 거니?”
“응.”
미셸이 완전히 삐져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댔다. 바로 옆에서 미셸이 살기를 내뿜고 있어도 도리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내 말이 기분 나빴어?”
“솔직히 여자랑 같이 사는 여자한테서 그런 충고 듣고 싶지 않아.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유제이가 잘생긴 건 나도 알아. 그래도 귀여운 구석은 없는 놈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도리스가 미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미셸이 두 손으로 머리카락에 거품을 내다가 캑 하고 자지러졌다.
“그냥 미루어 짐작해. 물론 레즈한테는 어려운 숙제겠지만…….”
“별로 어렵지 않아.”
“정말?”
“섹시하긴 해. 내 취향은 아니지만……. 꽤 도발적일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말이야…….”
도리스가 깨끗이 씻어낸 머리칼을 뒤로 넘겨서 물기를 쥐어짜며 고개를 돌리다가 딱 멈췄다.
“특히…… 언제?”
미셸의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에 도리스가 흠…… 하고 숨을 삼켰다. 그리고 손가락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저러고 있을 때.”
여자 샤워실 창틀에 끼어서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이 아무리 도발적이라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침착하게 안으로 내려서는데 도리스가 두 손을 허리에 턱 짚고 서서 나를 지그시 노려봤다. 미첼은 도리스 등 뒤에 숨어서 보이지도 않았다. 현재 내가 느끼는 체감 온도는 빙점 이하였다.
“엿볼 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엿본 건 엿본 거야.”
“그건…… 그래.”
처음엔 여자들의 벗은 몸을 본다는 것이 굉장히 민망하고 난감했는데 자꾸 봐서 그런지 이젠 별 느낌이 없었다. 이렇게 도리스와 마주 선 마당에 단지 걱정되는 것은 그녀의 우람한 근육과 해머 같은 저 주먹이었다. 몇 달 전인가, 강간범 한 놈이 보석으로 유치장을 나서면서 도리스한테 깝쭉거리다가 얻어터진 사건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가면 곧장 여자 친구부터 찾아보겠다며 시답잖은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그놈은 도리스의 번개 같은 어퍼컷과 라이트 훅을 얻어맞고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었는데 그러고도 두 시간은 더 혼수상태였다. 물론 그 덕에 도리스도 정직에 감봉 처분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 여자는 그런 거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다.
“엿들을 생각도 없었어.”
이 말은 하지 말걸…… 도리스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난 그냥…….”
사과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한 대 맞고 하는 것보다는 미리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을 꺼냈는데 도리스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지 말을 잘랐다.
“얘긴 나중에 하고…… 우선 여기서 나가주지 않겠어?”
도리스가 문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일의 순서를 정리했다. 그래, 그게 좋겠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시퍼런 타일 바닥에 내 조급한 구둣발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창피하고 당황스러웠다. 뛰다시피 막 샤워실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뒤쪽에서 도리스의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다시 보니까 되게 귀엽다.”
3층 로비는 항상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는 경찰관들의 오른손엔 커피가, 왼손엔 담배가 들려 있기 마련이었고 몇 명은 지난밤 진탕 퍼마신 술 때문에 퀭한 얼굴로 신문을 보는 척하며 졸았다. 매일 아침이 비슷하고 또 조금씩 틀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용한 적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였다. 그리고 몇몇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나를 힐끔거렸다.
“하이! 제이!”
독일 병정 루디가 표정을 고치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이 통나무 장작 같은 교통순경에게서 아침 인사를 받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좋은 아침이지? 제이!”
자기도 아프리칸이면서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감이 남달라서 보통은 시비나 걸어오기 일쑤인 제이크의 굿모닝 인사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네…… 괜찮아?”
마약 단속반의 파커가 동정심 가득한 시선으로 내 몸을 훑었다. 파커는 2주일 전 대규모 마약 소탕 작전에 참가했다가 비니로부터 예기치 않은 봉변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직 다리를 조금 절었다. 파커는 본래 신앙이나 운명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쿨한 성격이었는데 그 사건 이후론 일간지 「오늘의 운세」를 유심히 들여다보곤 한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용케 출근했네? 하루 정도 꼼짝 않고 있어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몸무게가 5킬로그램만 더 늘어나면 권고사직을 당할 판인 사무엘이 단내가 풀풀 풍기는 커피를 털어 마시며 고개를 저었다. 선량한 눈가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대체 왜들 이래?”
짜증이 나서 버럭 소릴 지르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편의점 간판에 깔렸다면서!!!”
괜히 출근했다.
“명사수 비니는 어디 있어?”
“언젠가는 그놈이 큰일 낼 거라고 내가 그랬잖아! 사격 솜씨가 날로 훌륭해지고 있다니까?”
경찰서는 소문이 빠른 직장이다. 게다가 스트레스 때문인지 몇 명은 아주 짓궂고 몇 명은 거의 미쳐가고 있으니까 비니가 다른 사고를 안치면 이 시달림이 한 달은 갈 거다.
“우리가 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거 잊으면 안 돼, 제이.”
루디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친근한 어조로 속삭였다.
“비니 몬티첼리의 파트너 1년 6개월 차에 아직도 두 다리로 걸어 다니다니, 이 기록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거야!”
“게다가 비니 그 녀석, 날로 포악해지고 있는데 말이야. 너 같은 녀석을 두고 2주일에 10달러를 걸다니…… 난 정말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비니 파트너가 새로 배정되면 아래로는 엊그제 경찰학교 졸업하고 들어온 신참부터 위로는 경찰청장에 이르기까지 한 차례 내기 판돈이 오간다. 비니 파트너가 얼마나 단기간 내에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 기간이 짧게는 세 시간에서 길어봐야 2개월이었다. 이 내기에 참가하지 않는 건 서장 비서 쥬드 크롬웰과 기분 나쁜 내기 대상이 된 당사자 정도였다.
“그만해. 별 일도 아니잖아.”
꾸역꾸역 모여드는 인파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신경질을 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별일이 아니라니…… 너를 타고 앉았던 그놈은 비니하고 마주친 지 5분 만에 중환자실로 실려 갔잖아!”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정말 울고 싶다
애써 출근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하며 이제라도 집에 가려고 돌아서는데 내 시야에 반장이 다급히 걸어 들어왔다. 항상 말끔하던 감색 슈트 여기저기 허술한 주름이 가 있고 셔츠도 어제 입던 것 그대로인 것을 보니 집에 못 들어간 것 같았다.
니콜라스 탈출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경황 없는 게 당연했다. 주변으론 눈길 한번 안 돌리고 쌩…… 하니 스쳐 지나가던 반장이 내 앞에서 휘청거리며 멈춰 섰다. 그리고 자기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챈 나를 불쾌한 얼굴로 노려봤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더라? 일단 붙들기는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분명히 할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 비번인데도 출근한 건데…… 생각이 안 나네?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반장의 얼굴이 더 사나워졌다.
“놔! 지금 바빠!”
자기 옷깃을 붙잡은 손을 뿌리치는 태도가 야멸차기 이를 데 없었다. 애초에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데 이런 푸대접으로 내 기분을 아예 잡쳐 놓고 반장은 그대로 돌아서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혼자도 아니고 뒤에 처음 보는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세 명이나 반장을 쫓아가던 중이었다. 그중 한 명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하여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파트너 바꿔줘요!”
말해 놓고 보니 이것도 굉장히 중대한 용건이다. 아니, 반장에게 하려던 얘기가 바로 이거였다. 내 고함 소리에 반장이 흠칫 멈춰 섰다.
“좀…… 있다 얘기하지.”
반장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그맣게 한숨 쉬는 게 맞은편 거울에 그대로 비쳤다. 거울을 통해 나하고 눈이 딱 마주치자 반장이 갑자기 딴전을 피웠다.
“노튼 요원, 존스 요원, 헤크만 요원…… 상부 지시도 있으니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정보를 공유하는 거지 사건을 연방특수경찰에 넘기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원이라고? 연방특수경찰?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데니스 노튼…… 이 사람한테 내 목숨과 양복 윗도리를 빚졌었다. 2년 반 전 쯤. 어쨌거나, 상대가 연방 특경이면 나는 찬밥이냐?
“파트너 바꿔 달라고요!”
“좀 있다 얘기하자니까!”
바쁜 척이 안 통하자 이젠 목소리로 기선을 제압하려는지 반장이 벌컥 소리쳤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우렁찬 고함소리에 내가 움찔하자 이번엔 연방특수경찰이 끼어들었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빠뜨리면 안 됩니다. 일선 경찰들이 우리를 얼마나 아니꼬워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놈의 소재를 한시라도 빨리 파악해서 잡아들이는 겁니다. 공과를 따지는 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데니스 노튼의 어조가 더할 수 없이 진지했다.
니콜라스 헤슬램…… 니콜라스의 본명이다. 애초에 니콜라스의 행동반경이 여러 도시에 걸쳐 있었고 최소한 10년에 걸친 장기적 살인행각이었기 때문에 니콜라스 체포는 지역 경찰 관할이 아니라 연방경찰 소관이었다. 그런 처지에 니콜라스가 체포될 때까지도 연쇄살인의 기미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연방특수경찰 위신과도 관계된 문제였다. 그러니 니콜라스가 튀어버렸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이 시점에 연방특수경찰도 놈을 잡아넣는 일에 한자리 차지하려고 나서는 건 당연했다.
“담당자들이 지난밤 화재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준비 중이니까 곧 받아볼 수 있을 겁니다.”
반장이 마뜩치 않은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노튼은 반장 기분 따위는 신경 밖이었다.
“사건이 난 지 열 시간도 넘었는데 그밖에 다른 건 없습니까?”
“병원 주위 검문을 강화하라고 어젯밤에 벌써 지시해놨으니 뭔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연방경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탈주한 다른 환자들도 찾아야 할 테니까요.”
굳이 그렇게 비꼬지 않아도 니콜라스가 검문에 걸려들 정도로 순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장 빼고…….
“그건 그렇고…….”
노튼이 아주 중요한 용건을 말하려는 사람 특유의 뉘앙스로 말끝을 흐렸다. 반장이 긴장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크롬웰 양은 아직도 여기서 근무합니까?”
“……그럼요.”
반장의 대답에 노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제야 그들이 반장에게 뭐 특별한 협조를 요청하러 온 게 아니라 쥬드가 아직도 여기 있는지 확인하려고 왔다는 걸 눈치챘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크롬웰 양에겐 경호원을 따로 붙이라고 권하고 싶군요. 물론 부하 직원의 안전이야 서장님이 먼저 살피시겠지만 말입니다.”
“그럴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제 라커에서 날마다 전쟁이 나겠네.
모두가 경찰에 투신할 때는 각각 그럴 만한 이유와 포부가 있었겠지만 일단 우리 서에 들어오면 그런 건 다 잊어버린다. 출세? 그것도 좋지만 쥬드 크롬웰과의 데이트는 모든 경찰의 꿈이었다. 서장 자리조차 그 다음이다. 니콜라스 체포팀에 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쥬드의 개인 경호에 지원할까를 놓고 고른다면 여기선 당연히 후자다.
노튼이 나를 돌아봤다. 니콜라스의 최후 공판 때 이후론 처음 보는 거였다. 연방특수경찰 쪽도 일이 고달픈지 반백이었던 머리가 이제는 거의 백발이었다. 그래서 얼른 알아보질 못했던 거다. 빈틈이라곤 없던 연방경찰의 얼굴에 이제는 지친 기색이 어렴풋이 떠돌았다.
“오랜만이군.”
“예.”
그다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노튼은 변했다. 매일 같이 부딪혀 오는 많은 일들이 그를 조금씩 변하게 했을 거다. 그는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도 그렇게 변했을까?
“소식 들었나?”
“대강…….”
“니콜라스는 자네를 찾아올지도 몰라.”
“큰일이네요. 비니도 저를 노리고 있거든요.”
대충 얼버무리려고 던진 농담에 노튼도 쓴 웃음을 지었다.
“비니 몬티첼리?”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군.”
“아직까지는요.”
노튼이 어색하게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하게.”
노튼이 나직하게 충고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니콜라스를 조심하라는 건지 아니면 비니를 조심하라는 건지…….
볼일을 마친 요원들이 노튼을 선두로 바람을 일으키며 일사분란하게 사라졌다. 근엄한 양복쟁이 3명이 빠져나가자 경찰서 풍경이 본연의 난장판으로 돌아왔다.
“재수 없는 자식들…….”
이제 노튼, 존스, 헤크만이 못 들을 만큼 멀리 갔다는 확신이 섰는지 반장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체포 당시의 일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말도 못하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벌어진 옛 상처의 아픔 때문에 황폐해진 시선으로 반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파트너 바꿔주세요!”
그제야 반장이 부하를 걱정하는 상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측은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편의점 간판에 깔렸었다면서?”
미치겠네.
“어떻게 된 거야?”
반장이 신문과 잡지와 보고서와 담배꽁초가 산같이 쌓인 책상 너머에 앉으며 내 속을 뒤집었다.
“알면서 뭘 물어보세요?”
“내가 알고 있는 건 자네가 어젯밤에 편의점 강도하고 한창 재미보고 있는데 비니가 거기다 간판을 내던졌다는 것뿐이야. 비니 질투가 보통이 아니지?”
이건 성희롱이다.
“비니는 위험인물이에요. 그 자식은 경찰이 안됐으면 연쇄살인범이 됐을 거라고요! 아니, 그놈은 경찰인 척하는 연쇄살인범이 틀림없어요! 아니면 본래가 흉악한 살인범인데 정체를 숨기느라 경찰이 됐든지…… 어쨌거나 더 이상은 비니랑 일 안 해요! 그 자식 얼굴 보기도 무서워요!”
“보고서나 써 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정확하게 알아야 조치를 하지.”
반장 앞에 앉아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어젯밤 나하고 더그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렸다. 단언하건데 필설로 형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설혹 비니의 만행에 대해 상세 보고서가 아니라 범죄학계에 길이 남을 한편의 논문을 써 낸다 하더라도 반장은 내 기분을 이해 못할 거다.
땅바닥에 뒹굴고 있던 더그의 다리를 쐈다는 놈이 3미터 높이에 매달린 편의점 간판 이음매를 정확히 맞췄을 때 내가 느낀 황당함이 어느 정도였으며, 육중한 네온간판이 나를 깔아뭉개고 있던 더그의 등으로 떨어져내릴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또 구경하던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박살난 간판을 치우고 피범벅이 된 더그를 내 위에서 들어낼 때까지 내가 느낀 공포감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그 자식은 마피아보다 더 악질이라고요!”
“어쨌거나 비니 덕에 목숨 건졌잖아.”
비니 덕분에 뭐가 어째? 반장의 망언에 니콜라스 탈출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가 막혔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니콜라스가 탈출했다고 해서 내가 위험할 것이라는 추측은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내가 돈 많고 매너 좋은 중년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백수건달이라는 복잡한 역할을 정말 무리해가며 소화해낸 끝에 니콜라스를 기소할 수 있었고 놈을 전기의자에 앉히지는 못했지만 정신병원에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니콜라스는 복수심에 불타는 인간적인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2년 7개월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놈을 변하게 할 만큼 긴 시간도 아닐 터…… 지금 당장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어제 저녁에 탈출한 전설적인 살인마가 아니라 징크스의 황제, 부상자 제조기…… 나의 파트너 비니다.
“총 든 비니는 히틀러만큼이나 위험해요!”
반장에게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비니는 시장님 처조카야!”
반장도 지지 않고 비니의 출신 성분을 들먹였다. 치사하게…….
“그래서 엄마 아버지도 없는 나 같은 놈은 편의점 간판에 깔려 죽어도 좋단 말이에요?”
흥분해서 소리소리 지르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쥬드가 서류를 한 뭉치 안고 들어오다가 문가에 멈춰 섰다. 어젯밤 야근 탓인지 얼굴이 좀 부어 보였지만 어두운 보라색 입술이 그래서 더 근사하게 어울렸다. 몸에 딱 붙는 까만 티의 가슴과 배는 온통 반짝거리는 은색 나비로 덮여서 그렇지 않아도 완벽한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갈색 니트 스커트는 동굴에서 고행하는 은자라도 후릴 만큼 유혹적이었다.
“그럼 날더러 어쩌라고? 실수 한번 한 거 갖고 면직이라도 시킬까?”
반장이 잽싸게 쥬드의 종아리를 훔쳐보며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자식이 실수 한번 할 때마다 나는 죽다 살아난다고요!!”
“실례지만…….”
쥬드가 중간에 어떻게든 끼어 보려고 기회를 보다가 내가 잠깐 숨 돌리는 사이를 치고 들어왔다. 하지만 어림없다. 니트 스커트 아니라 비키니를 입고 들어왔대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시장님 처조카가 그렇게 좋으면 맛있는 저녁 사주고, 예쁜 옷 사 입히고, 밤에 끼고 재미나 볼 일이지, 왜 나한테 붙여서 사람 돌게 만들어요? 이러다 우울증 도지면 반장님이 책임질 거예요?”
사실 우울증은 어젯밤에 벌써 도졌다.
“실례지만…….”
쥬드가 다시 틈을 노렸다.
“파트너 바꿔줘요!”
“자네까지 이러면 비니는 어떡하라고?”
음흉한 중늙은이 같으니…… 이제 인정에 호소해볼 모양이지만, 나는 본래 인정 같은 거 없는 놈이다.
“반장님!”
쥬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릴 질렀다. 앙칼지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지만 반장은 반색하며 쥬드를 돌아봤다.
“무슨 일인가? 크롬웰?”
“콘웨이 요양소 화재사건 1차 조사 보고서예요. 관할 소방서에서 보내온 화재 원인 조사 보고서와 시내 3군데 병원에서 보내 온 사망, 사상자 신원과 용태에 대한 보고서…… 그리고 요양소 측에서 보내온 실종자 명단하고 ……연방특수경찰에 보낼 복사본은 지금 준비 중이고…… 그리고 외관으로 식별하기 힘든 시체는 정확한 신원 파악에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데요. 그리고 지난밤 편의점 강도사건 보고서는 맨 아래 있습니다.”
안고 있던 서류 뭉치를 쓰레기장 같은 반장 책상 위에 부려 놓으면서 요점만 딱 부러지게 보고하는 쥬드의 태도는 다국적 대기업의 회장 수석 비서한테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지적 매력이 풀풀 풍겼다.
“정말로 니콜라스가 요양소에 불을 지르고 탈출했을까? ……자네 생각은 어때?”
반장이 대놓고 쥬드의 의견을 물었다. 자기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우리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해결책이 바로 이거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쥬드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금은 말하기 싫은 모양이다.
“그냥 대강 짐작이라도…….”
“보고서를 읽어보세요, 반장님. 아니면 서장님한테 가서 물어보시던지.”
서장은 뭔가 알고 있다는 얘긴데…… 하긴 서장도 현역 시절에는 4건의 미해결 사건을 연속으로 해결한 유능한 수사관이었다. 하지만 나 같으면 서장 의견 들으러 가느니 그냥 과학 수사 연구소에서 검사 결과 나오기를 기다리겠다. 반장도 나랑 의견이 같았다.
“서장님이 뭘 얼마나 안다고…….”
반장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쥬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서장님이 아침에 물어보시길래 대답을 해드렸거든요.”
그렇다면 서장님도 이번 사건에 대해 꽤 알고 있겠네. 쥬드가 옆으로 자꾸만 쓰러지는 서류 더미를 대강 쌓다가 반장의 책상 귀퉁이에서 몇 주째 혼수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동양란 화분을 들어올렸다. 말이 난초지 내가 볼 때는 잡초보다 더 팔자가 기구한 풀이다.
“어떻게 탈출했을까? 우리도 몇 번 시설을 점검했었는데…… 웬만한 감옥보다 더 빈틈없었잖아. 전자동 센서에, 삼중폐쇄장치에, 감시 카메라…….”
“그 정도 되니까 2년 반이나 꼼짝없이 갇혀 있었죠. 시설은 나무랄 데 없었어요.”
쥬드가 화분을 눈높이로 들어 올려서 요리조리 돌려보며 대답했다.
“그래도 탈출했잖아. 불까지 지르고 말이야.”
“내통한 사람이 있었을 거예요.”
“내통?”
나와 반장이 동시에 외쳤다. 내통이라니…… 어느 미친 인간이 니콜라스 같은 맹수와 내통해서 놈을 우리 밖으로 풀어줬단 말인가…… 니콜라스는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자기 친엄마하고도 만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병원 직원들 중에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외부인과의 면회 따위 철저히 통제되었을 텐데…… 내통하고 싶어도 그럴 사람이 없었을 거다.
“에너벨 베긴 박사였을 거예요. 니콜라스의 정신 질환을 연구해 보겠다고 앞뒤 없이 설칠 때부터 미덥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보나마나 매일 니콜라스가 감금된 방을 찾아가서 여러 가지로 성가시게 굴었겠죠.”
쥬드가 노랗게 말라서 돌돌 감긴 난초 잎사귀를 손끝으로 펴보면서 흠…… 하고 한숨을 쉬었다.
“담당의사가 한패였을 거란 말이야?”
“베긴 박사는 유명한 연쇄살인범의 심리를 분석해서 프로이드 버금가는 명성을 얻고 싶어 하는 야심가인 동시에 니콜라스의 병든 영혼을 구제해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중증의 구원자 콤플렉스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녀가 니콜라스에게 집착한 건 그가 자신에게 의사로서의 명예를 가져다줌과 동시에 정신적인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니콜라스가 박사를 지능적으로 부추기기도 했겠죠.”
나도 베긴 박사가 기억난다. 니콜라스 심리 때 변호사측 증인으로 니콜라스의 심리 상태에 대해 꽤나 장황한 증언을 했었는데……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도무지 허술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던 중년의 의사가 그런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니…….
“매일 같이 상담하고 분석하면서 자기가 니콜라스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고 느꼈겠죠. 그리고 자신이 그를 도울 수 있다고 확신했을 테고, 어느 순간 반했을 테고…… 정신없이 빠져 들었겠죠. 급기야는 그 말주변과 매력에 말려들어서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됐을 거예요.”
반장이 흥분해서 쥬드가 손에 든 화분을 빼앗아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심리학과 정신질환에 학위를 가진 담당의사가 그렇게 손쉬운 상대였을까? 프로이드만큼은 못 됐어도 뭔가 믿을 만하니까 법원에서 그 여자를 담당으로 정했겠지. 안 그래?”
쥬드가 다시 반장에게서 화분을 뺐었다.
“닥터 베긴이 천지 분간도 못하는 망나니였다는 소리가 아니에요. 니콜라스를 정신병자 취급하고 의사를 붙여준 것부터가 실수였어요. 베긴은 철저히 교본대로 니콜라스를 파악했어요. 유아기 때의 학대, 애정결핍, 욕구불만…… 단언하건데 니콜라스하고는 손톱만치도 상관없는 요인이에요. 그 따위 판에 박은 이론으로는 니콜라스를 읽을 수 없어요. 오히려 베긴이 니콜라스에게 읽혔겠죠. 그녀는 니콜라스가 상대해온 사냥감들 중에서 제일 손쉬운 상대였을 거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입장에 있어야 할 담당의사가 놈과 한패가 돼서 그런 대형 참사를 일으켰다니…… 맥이 풀리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반장을 뒤로 한 채 쥬드는 반장의 난초를 옆구리에 끼고 막 나가려는 참이었다. 쥬드는 남의 책상에서 말라죽은 화초 같은 것들을 곧잘 들고 가버리곤 했다.
“망할…… 여편네!”
반장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앞에 가던 쥬드를 밀치고 문을 열어젖혔다. 반장한테 떠밀린 쥬드는 하마터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하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들고 있던 화분을 놓쳐서 바닥에 깨박을 치고 말았다. 쥬드가 반장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봤다.
“에쉬! 터너! 지금 당장 나가서 에너벨 베긴 박사 소재 파악해서 연행해와! 그 정신 나간 여편네가 대체 무슨 맘을 먹고 병원에 불을 싸질렀는지 직접 들어봐야겠어!”
“누구요?”
문 가까이 있던 에쉬가 반장에게 되물었다.
“콘웨이 요양소 직원이야. 벌써 튀었을지도 몰라! 찾아보고 없으면 수배 전단이라도 뿌려서 당장 잡아와!!”
콘웨이 요양소란 소리에 눈치 빠른 에쉬가 감 잡았는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집어들었다. 아까부터 쥬드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반장이 끼어드는 바람에 자꾸 까먹네. 베긴 박사에 대한 쥬드의 추리는 설득력 있지만 뭐랄까…… 석연찮은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었다. 게다가 쥬드는 반장이 신속하게 니콜라스의 공범 체포를 명령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박살난 화분 조각을 치우고 말라비틀어진 풀뿌리에 붙은 흙을 툭툭 털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는 반장 책상에서 복사 용지 한 장을 빼서 난초를 생선 말듯이 둘둘 싸서 일어났다. 베긴 박사를 체포해서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일보다 이쪽이 더 중요하다는 듯. 저런 건 가져가서 어디에 쓰려는 걸까?
쥬드가 나가려다가 나를 흘끔 쳐다봤다. 그때 갑자기 궁금했던 게 생각났다.
“왜 아까부터 계속 과거형으로 말하지? 그 베긴 박사 말이야…….”
“죽었으니까요.”
쥬드가 문을 나서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장은 아까 반장에게 전달된 것과 거의 비슷한 양의 보고서를 앞에 놓고 끊었다던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고개를 얼른 돌리는 걸로 봐서 용건을 짐작하고는 있는 것 같았다.
“파트너 바꿔주세요.”
“나중에 얘기해. 보다시피 지금 좀 바빠.”
“어젯밤에 저 죽을 뻔했어요! 파트너 좀 바꿔주세요!!”
“괜찮아 보이는데 뭘 그래? 그 정도야 별로 큰 사고도 아니잖아.”
떨어져내린 간판의 크기나 그 간판에 깔린 부위로 봐선 더그는 아무리 가벼워도 반신마비다. 별로 큰 사고도 아니라니…….
“사고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요! 이대로 가다간 전 조만간 비니 손에 죽을 거예요!”
서장은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담배를 비벼 끄고 보고서를 펼쳐들었다.
“진정해, 제이. 비니 입장도 생각을 해줘야지…… 비니가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잖아.”
보고서를 펼쳐들면서 서장이 건성으로 말했다.
“그게 더 무섭단 말이에요!”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지을 양으로 내가 막 세게 나가고 있는데 쥬드가 문을 열었다. 보통 때는 하루에 두 번도 보기 힘든 이 여자가 오늘 아침에는 왜 이리도 빈번히 나타나서 중요한 면담을 방해하는지 모르겠다.
“어젯밤에 연행된 「절단기 오웬」 씨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목격자를 데리고 나타났던데요. 아무래도 더 이상 잡아두기는 힘들 것 같아요.”
어젯밤에 일어난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래 가지곤 편의점 간판 살인미수사건 같은 거…… 그냥 시시한 소동 정도로 잊혀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절단기 오웬」이라니…… 은행 금고라도 자르고 들어간 놈일까?
“정당방위라 이건가?”
서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만하면 정당하다고 봐야죠. 만약 서장님이 엑슬 엔젤스파하고 레드 리벤지파가 패싸움 하는 중간에 끼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중국 식칼 같은 걸로 누구 건지도 모르는 팔을 다섯 개나 잘랐을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냥 돌아가셨겠죠.”
워낙 얼굴이 예쁜 탓인가? 비웃음도 일품이란 말이야…….
쥬드가 돌아서다가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수사관 같은 눈길로 서장을 돌아봤다.
“그리고 그 남자가 휘두른 건 중국 식칼이 아니라 아주 잘 빠진 장검이에요. 얼핏 보니까 오거스트 크로스의 복제품 같았어요.”
“오거스트 크로스?”
서장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말이다. 쥬드는 더 이상 설명해봐야 니네가 알아들을 수나 있냐는 투로 서장의 질문을 씹었다.
“그런 게 있어요.”
하긴, 여태 그런 거 몰랐어도 별 지장 없이 살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지장 없이 살기 위해서 다시 서장에게 매달렸다.
“파트너 바꿔줘요!!”
“이건 인종 차별이야!”
어젯밤에 붙들려온 창녀들이 싸구려 향수냄새를 풀풀 풍기며 앉아 있던 그 벤치에 앉아서 점점 숱이 줄어가고 있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건 인종 차별이고 계급 차별이다. 만약 내 일가친척 중에 시의원이나, 하다못해 구청 직원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비니를 은근슬쩍 나한테 떠넘기지도 않았을 거고 또…… 파트너 좀 바꿔달라는 내 간절한 요청을 이렇게 무시하지도 못했을 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럽 쪽 떠돌이 민족의 피란 피는 다 한줄기씩 섞여 있는 집시여인과 먼 타국에서의 삶이 힘들기만 했던 말수 적은 동양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내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했다.
저만치서 동료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바쁜 업무를 잠시 잊은 채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지난밤 내가 겪은 참사에 대해서는 모두 들어서 알고 있을 터…… 측은지심이 들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
“저…….”
많이 듣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비니다. 쉬는 날에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온 걸 보면 새벽에 나한테 한 몹쓸 짓이 맘에 조금이라도 걸렸던 걸까? 놈도 잠을 설쳤는지 눈에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커피 마실래?”
비니가 몸을 비비 틀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속 쓰려.”
비니의 사격 실력이 형편없는 게 비니 잘못은 아니다. 비니는 노력했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번번이 파트너를 죽을 구덩이로 몰아넣는 비니의 징크스도 비니를 탓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비니가 일부러 편의점 간판 연결 부분을 맞춘 건 아니니까…… 만약에 간판을 맞추려고 했으면 그 총알이 지금쯤 어디에 가서 박혀 있을지는 하느님이나 알 일이다.
비니는 본래 재수가 없는 놈이다. 멋모르고 비니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날벼락 맞은 사람이 이 경찰서에서만 열 손가락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럼…… 홍차 마실래?”
뻔뻔한 놈! 비니를 노려보며 벌떡 일어났다. 문제는 그런 대책 없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놈이 경찰이 됐다는 거다.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경찰을 택했으며, 많고 많은 경찰 중에 왜 하필 내 파트너냐! 게다가 너! 이 망할 자식! 너한테 그런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줄 알았으면 냉큼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거 아냐? 아버지 슈퍼에서 경비를 돌든가, 큰아버지 식당에서 마늘을 까든가…… 생각해보면 다른 할 일도 많은 놈이 왜 경찰은 돼 가지고 선량한 동료의 목숨을 노리는 건데?
내가 험한 얼굴로 일어나자 비니가 곧장 뒷걸음질을 쳤다.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두려움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매사에 공정한 헤일런이 여차하면 말리려고 한발 나서는 걸 지지난번 마약 소탕작전 때 비니한테 떠밀려서 2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던 파커가 잽싸게 붙들었다. 비니를 향해 걸어가는 내 얼굴이 어땠는지 나야 모르지만 울상이 된 비니가 주위를 돌아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구원을 요청했다.
마이론은 그제야 서류작성의 시급함을 깨닫고 키보드를 부서져라 두들겨댔고 헨슨은 머쓱하게 유치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비니의 두 번째 파트너로, 범인을 추적하다가 후진하는 비니 차에 받혀서 사경을 헤맨 전력이 있는 알랙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비니에게 윙크를 보냈다. 시경의 동료애가 이와 같이 돈독함을 깨달은 비니가 몸을 틀어서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도망을!!
후다닥…… 퍼억…… 콰당탕!!
마이론은 키보드에 얼굴을 파묻었고 헨슨은 유치장 창살을 붙들고 한숨을 쉬었으며 알랙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성호를 그었고 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우리를 비니로부터 구하소서…….
잠시 자신의 가호를 신에게 빈 우리들은 곧바로 비니의 습격으로 파일 박스와 서류 뭉치의 무덤에 매장된 운수불길한 남자에게 애도의 눈길을 보냈다. 비니는 떨어지는 서류 뭉치에 얻어맞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면서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바로 저 표정 때문에 우리는 종종 경찰관 살해라는 중범죄의 유혹에 빠지곤 한다.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지금 막 자기 사무실에서 나오던 쥬드가 우뚝 멈춰 섰다. 머리 좋은 그녀는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우리들과 시침 뻑 따고 앉아서 도리어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비니와…… 족히 30킬로그램은 넘을 것 같은 종이 뭉치에 깔려서 다리밖에 안 보이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보고 어렵지 않게 사태를 파악한 것 같았다.
물론, 나를 피해 전력으로 달려가던 비니가 뭔가에 한눈을 팔면서 대각선으로 지나가던 한 남자를 덮쳤으며, 부지불식간에 비니의 습격을 받은 남자가 벽에 늘어서 있는 캐비닛에 온몸으로 날아가 부딪치고, 그 바람에 그 위에 위태롭게 쌓여 있던 서류 뭉치와 종이상자 같은 것들이 남자에게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는 구체적인 정황 같은 것까지는 알 리 없었다 하더라도……. 경찰관한테 우리가 모르는 무슨 면책 특권이 있는 게 아니라면 비니는 현행범으로 체포돼야 마땅하지 않을까?
비니를 체포하는 것이 먼저냐, 아니면 부상자를 구출하는 것이 우선이냐……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결정은 쥬드가 내렸다.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날듯이 달려와서 비니에게 희생당한 남자의 머리 위에서 서류 더미며 종이박스 같은 것들을 치워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경찰서에는 쥬드가 발벗고 나서는 일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을 짭새는 없었다.
먼저 자타가 공인하는 터프가이 알랙이 시민의 공복으로서의 사명감에 온몸을 불태우며 쥬드 옆에 바짝 붙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꽤나 묵직한 복사 용지들을 들어냈다. 뒤질세라 시경 최고의 문재를 자랑하는 보고서 작성의 귀재 마이론이 쥬드가 건네주는 파일 박스를 저쪽 구석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신장 190센티미터에 별명이 슈왈츠제네거인 시경 최고의 근육질 사나이 헨슨도 구조에 합류해서 종이더미에 깔려 혼절한 남자를 번쩍 들어올렸다.
남자를 어디 내려놓을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헨슨은 나를 밀치고 내 뒤에 있는 벤치에 길고 긴 비니의 희생자 명단에 새로 이름을 올릴 가엾은 남자를 내려놨다.
서류 뭉치 속에서 끄집어낸 남자는…….
“음주운전으로 들어온 락커 같은데?”
이래도 나를 안 쳐다볼 테냐…… 라고 외치는 것 같은 섹시한 가죽 바지, 거기에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세탁한지는 좀 되어 보이는 성기게 짠 스웨터, 허리까지 내려올 듯 윤기 자르르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분명해. 락커야.
“마약 소지 같은 걸로 끌려온 영화배우 같은데…….”
어느새 내 옆에서 자기가 때려눕힌 남자의 으리번쩍한 외모를 감상하던 비니가 반대의견을 밝혔다. 가까이 선 김에 주먹 따귀라도 한대 올려주고 싶지만…… 쥬드의 행동거지가 수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헨슨이 남자를 벤치에 내려놓는 사이에 이 발 빠른 여자는 어느 틈에 손수건에 물을 축여서 남자의 이마며 얼굴을 다정하게 닦아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쥬드로부터 저렇게 황송한 대접을 받은 남자가 누구누구였던가……. 돌이켜보건데 시시한 사건으로 붙들려온 락커나 영화배우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 사이 쥬드의 남자 취향이 바뀐 걸까?
“정신 차려요. 이봐요…….”
저 8월의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 여름 햇살에 녹아서 뚝뚝 떨어져내리는 초콜렛 같은 목소리, 쥬드처럼 아름답고 지적인 여인이 경찰서 구치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거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저 남자는 아무리 봐도 쥬드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큰 키와 넓은 어깨만 아니면 여자로 오해할 만큼 곱상한 얼굴에 나이도 많아봐야 이제 20대 초반 정도? 물론 쥬드는 지성인답게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그녀의 애정 행각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확실히 안다.
“남자 취향이 그새 바뀐 걸까?”
비니가 불안한지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낮게 속삭였다. 글쎄…… 그렇게 쉽게 변할 것 같지 않은 독특한 취향이었지만 이제라도 바꾸기로 했다면 잘 된 일이다.
쥬드의 사생활이야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콘웰 기념관 외 빌딩 세 곳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폭파 협박범 로빈 트로이를 필두로 4개 도시를 넘나들며 강도 행각을 일삼은 폭주 히피 브라더 밥…… 이스트사이드의 지배자를 자칭하던 폭력조직 서틴 먼스의 두목 윌리 프란시스에다 범죄 역사에 길이 남을 연쇄살인범 니콜라스…… 금세기 최고의 흉악범 명단과 쥬드의 데이트 상대 명단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은 그녀를 흠모하는 모든 이들의 크나큰 안타까움이었다.
“으…… 음…….”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짝…… 눈을 떴다. 아무리 봐도 참 예쁘게 생긴 얼굴인데다 저 눈동자는 3년 전인가 유명한 배우인 헤밀튼 양이 도둑맞았다가 열이틀 만에 찾아낸 돈강의 눈물인가 뭔가 하는 별명이 붙어 있는 터키석의 색깔 그대로였다. 저렇게 희한한 눈빛이라니…… 저러니 아무리 변태적인 남성 편력을 자랑하는 쥬드라도 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체 저 자식이 누구야?”
대부분의 짭새들과 마찬가지로 쥬드에게 군침을 흘리던 파렴치한 카사노바 비니가 낙심천만한 음성으로 낮게 투덜거렸다.
“정신이 좀 들어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윌리 프란시스가 경찰서에서 행패 부리다가 나한테 떡이 되도록 얻어맞았을 때 쥬드가 꼭 저랬었는데…… 나한테가 아니라 윌리한테.
남자가 말없이 몸을 일으켜 벤치에 걸터앉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 잘 빠진 다리라고 생각하다가 얼른 머리를 털어 좀 전의 생각을 날려 없앴다. 잘 빠져봐야 남자 다리잖아……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긴 정신도 없겠지. 비니의 습격을 한번 받으면 그 후유증이 짧으면 열두 시간이고 길면 평생이다.
자신에게 쏠린 관심이 당황스러운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일어서려던 남자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털썩 주저앉았다. 두 번째 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 그리고 새끼손가락에서 커다란 보석 반지가 눈부시게 번쩍거렸다.
“앰뷸런스를 부르죠. 머리를 다쳤을지도 몰라요.”
비니의 습격을 받았으니까 병원에 가서 뢴트겐도 찍고 CT 촬영도 해야겠지만…… 쥬드…… 저 여자가 어젯밤 피칠갑을 하고서 나타난 나한테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핀잔을 주던 그 여자라니…… 저 자식이 나보다 다리 잘 빠지고 얼굴 잘생기고 비싸 보이는 반지를 많이 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하지만 나와 비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별로 동요가 없었다. 쥬드를 위해서라면 폭파범 로빈에게 니트로글리세린이라도 갖다 바칠 추종자 알랙마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이해가 안 가네? 이게 무슨 일이지?
문제의 남자가 정말로 앰뷸런스를 신청하려고 돌아서는 쥬드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챘다.
“친절은 고맙습니다만…… 레이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셰익스피어 극단 단원인가? 레이디라니…… 아…… 닭살. 하지만 라파엘 그림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미남자에게서 저런 고전적인 대사를 들은 당사자는 감흥이 영 다른 모양이었다. 쥬드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하…… 하지만 아무래도 걱정스러워서요.”
낯선 남자에게 손목을 잡힌 채 얼굴을 붉히고 말까지 더듬는 저 아름다운 여인이 진정 쿠간 시경 서장 비서인 쥬드 크롬웰이 맞나요?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변할 수도 있는 건가요?
지난 얘기 꺼내긴 싫지만 2년 반 전에 지하 1층 3번 취조실에서 연쇄살인범 니콜라스에게 다섯 번째 살인에 대해 추궁하다가 갑자기 책상을 타고 넘어가서 등 뒤로 수갑을 차고 있던 니콜라스에게 격정 적인 키스를 퍼붓던 쥬드의 모습은 오래도록 잊히질 않았다. 매직미러 건너편에 있던 수사관들이 허위허위 들어가서 뜯어내지 않았으면 니콜라스는 틀림없이 강간을 당했을 거다.
형사들은 다 어디 가고 서장 비서가 그런 중범을 취조했느냐고 묻는다면, 형사들 중엔 아이큐가 185나 되는 미치광이를 감당할 만한 인재가 없었다고 정직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내가 아파 보입니까?”
쥬드의 본색을 알 리 없는 셰익스피어 배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생긴 것과는 달리 거칠거칠한 저음이었다. 악센트로는 어디 출신인지 분간이 어렵지만 표준말을 하려고 노력하는 외국인의 억양에, 어딘지 딱 부러지게 단호한 느낌이 드는 어조였다.
“모든 상처가 밖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에요.”
“당신 말대로 내게는 영혼의 상처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니 헤너 하이더라반을 돌려준다면 난 곧 떠날 겁니다.”
확실히 시대착오적이다. 갈수록 닭살 돋는 남자의 대사에 쥬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고개를 틀어서 비니를 돌아봤다. 헤너……하이더라반이 누구야? 라고 텔레파시로 묻자 ……몰라. 나도……라는 제스처가 돌아왔다. 얼핏 이름만 들어선 외국 출신 테러리스트 같은데…….
“어젯밤 당신들이 내게서 가져간 검 말입니다. 레이디.”
아하! 검이었구나! …… 검…… 검이라고?
“아…… 그건…….”
쥬드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만 보니 나랑 비니만 빼놓고는 다 알아들은 눈치였다. 최근의 정보에서 소외당한 나와 비니만 서로 쳐다보면서…… 검이라고? 그러니까 칼…… 같은 거 말이야? 검이라는 거 보니까 더 긴 거 아닐까? ……긴 거 뭐? ……이러고 있다.
남자가 일어났다. 비니를 흘낏 곁눈질하는 품이 다시 덮치지 않을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니 이 자식…… 저 남자에게 미안하단 소리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디서 돌려받아야 하는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차가운 보석 같은 시선에 쥬드가 움찔했다. 오늘따라 새로운 모습을 많이도 보여주네.
“당신의 검은…… 불법무기로 분류되어 있어요. 어떤 기관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더군요. 이 경우엔 절차에 따라 무기 소지 허가를 받기 전까지는 사유재산이라 하더라도 압류할 권한이 있어요.”
공과 사를 구분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쥬드가 불법무기 소지에 대한 국가의 입장에 대해 말하자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검이라면 그러니까 칼이란 소린데 그런 것도 신고 대상이던가?
“허가라고 했습니까?”
남자의 음성에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직까지 아름다운 레이디에 대한 매너를 잃지는 않았지만 자기 물건을 호락호락 돌려주지 않겠다는 말에 어지간히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쥬드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냉랭해졌다. 저렇게 방자한 시선으로 쥬드를 노려보다니…… 자식 제법이네.
“헤너 하이더라반은 천 년 전부터 나의 것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그 소유에 대해 간섭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하르나 제국의 오거스트 대왕이 내게 하사하고 신께서 그 소유를 허가하신 것으로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나직하지만 노여움이 깔려 있는 목소리로 남자가 쥬드에게 따지고 들었다.
알랙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떠올랐다. 쥬드는 낭패감에 들릴 듯 말듯 한숨을 내쉬었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비니는 고개를 푹 숙였다. 거울이 없어서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하고 비슷했을 거다. 저 남자…… 머리를 다친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남자가 우리 얼굴을 살피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우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이란 말입니다.”
남자의 변명에 비니가 고개를 발딱 처들었다. 그리고 비니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쥬드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나는 당신들의 절차 같은 것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난밤의 일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서 나를 풀어주는 거라면 부당하게 내게서 빼앗아간 물건도 돌려주는 것이 순리가 아닙니까?”
남자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찌나 단호하고 정연한지 하마터면 ‘당연히 그렇지요!’ 라고 대답할 뻔했다. 다행히 쥬드는 그러지 않았지만…….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절차죠. 간단한 서류 몇 장만 작성해서 접수하면 사흘 내로 연락이 갈 거예요.”
시에서 월급 받는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망각하지 않은 쥬드가 검이건 뭐건 간에 남자가 달라는 건 다 줘버리고 싶은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사흘이라니…… 깜찍하기도 하지. 청소부 아줌마가 당장 쓸 화장실 비품 청구를 해도 변호사가 쫓아와서 강짜를 부리지 않으면 석달 열흘은 걸리는 게 행정절차의 정상적인 속도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서류 작성하고 기다리기로 한다면 무척이나 오래 기다려야 할 거다.
“그들이 먼저 나를 공격했습니다!”
남자가 쥬드를 사납게 노려봤다. 허술해 보여도 국가 기관의 서류처리 속도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아는 모양이다.
“정당방위라는 건 우리도 알아요. 문제는 당신의 검이 지난밤 같은 사건에 이도 안 나갈 정도로 성능 좋은 무기인데다, 신고도 허가도 없는 불법무기라는 거죠.”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집니다.”
쥬드도 지지 않고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맨손으로 그들의 팔을 잘랐다면 나는 풀어주고 내 손만 잡아뒀겠군요.”
쥬드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남자를 바라보는 아주 잠깐 사이, 경찰서 전체에 잠잠한 침묵이 흘렀다. 무척 깨뜨리기 어려운 무게가 느껴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자식…… 누구야?”
조심스런 질문에 알랙이 그것도 몰랐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절단기 오웬이야.”
지금 시간이 오전 10시 24분이니까…… 아홉 시간 전인가 보다. 내가 더그와 사투를 벌이다가 비니 손에 죽을 뻔했던 그 시간 즈음에 이스트사이드에서는 올해 초부터 부쩍 말썽을 부려온 10대 갱단 패거리들이 모여서 자기들 방식대로 친선을 도모하고 있었다.
놈들의 패싸움 자체는 그다지 큰 뉴스는 아니었다. 액슬 엔젤스나 레드 리벤지 같은 조무래기들이 같이 놀기에도 이스트사이드 근처의 상가 대여섯 블록은 절대 넓은 곳이 아니고 그다지 번화가도 아니었다.
이놈들은 더 번화한 곳으로 파고들기엔 너무 풋내 나고 요령도 없는 고만고만한 10대 마약 딜러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성질들은 더럽게 사나워서 조만간 큰 충돌이 있으리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는데 그게 어젯밤이었던 거다. 일이 꼬인 것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놈들의 살벌한 싸움판 한복판에 무명의 락커 내지는 막 상경한 영화배우 지망생 같은 남자가 뛰어들면서부터였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다. 그때 현장을 누구보다 자세히 본 놈들은 몽땅 병원 수술실로 실려가는 바람에 주변 목격자들의 진술이 상황을 그려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종합해 보건데 남자는 그 두 패거리들이 총에, 칼에…… 난투극을 벌이는 거리를 태연히 지나쳐 지나가는 중이었단다. 그러니 남자는 남자대로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지들은 하던 대로 죽인다 살린다 하면서 총질이나 해댔으면 그걸로 좋았을 텐데, 어느 놈이 겁도 없이 이 무심한 행인에게도 총질을 한 것이 큰 실수였다.
“그래서 팔을…… 잘랐다고?”
더듬거리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그것도 다섯 명이나…….”
파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뭘로 그랬다는 거야? 전기톱?”
“아까 들었잖아. 뭐라더라…… 헤더…….”
“하이 드라이버.”
비니가 한마디 거들었다가 만인의 눈총을 사고 입을 다물었다.
이 동네에서 5년 가까이 강력반 짭새 노릇을 하는 동안 온갖 험한 꼴과 별 희한한 사건을 다 보고 살았다는 자부심이 또 한 번 무너졌다. 백인 연쇄살인범, 이탈리아계 마피아, 흑인 갱단, 아시안 포주…… 등등만으로도 도시가 포화상태인데 거기에 정체불명의 검객이라니…….
“이해할 수 없어!”
비니가 아무 죄 없는 마이론에게 따지고 들었다.
“세상엔 이해 못할 일도 있는 법이야.”
“하지만…… 놈들은 총을 가지고 있었잖아. 그놈들이 얌전히 자기 팔을 내밀고 잘라주세요…… 하면서 눈 감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멀쩡해? 저 남자 말이야, 아무 데도 안 다쳤잖아.”
“놈들 사격 실력이 너랑 비슷했던 모양이지.”
오웬은 아까까지 자기 칼 내놓으라고 쥬드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딘가로 전화 한 통을 때린 이후 팅팅 부은 얼굴로 벤치에 팔짱 끼고 앉아서 시위 중이었다. 정황이 그렇다면 당연히 정당방위지만 사지 절단이라니, 전혀 그렇게 안 생겼는데……. 하긴 니콜라스도 겉보기엔 별 문제 없는 사업가같이 보였다.
니콜라스 헤슬렘은 실제로 체포되기 전까지 연 매출액 15,000만 달러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사업 방면으로만 보자면 건실하다고 해도 별로 시비 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수완도 상당했었다. 뭐…… 아이큐가 185였으니까 뭘 해도 보통 사람보다는 낫게 했을 거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살인 행각의 면면도 범상치는 않았었다. 범상치 않았다기보다는 거의 예술적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최상의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되는 것처럼…… 살인에도 그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놈이 그 좋은 머리로 천재성을 발휘한 것은 돈벌이에서가 아니라 살인 행각에서였다. 놈의 인간 사냥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희생자가 몇 명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놈의 소굴에서 찾아낸 몇 가지 단서와…… 최근 십수 년 간 쿠간 시와 근처 3개 도시에서 비 오는 날에 실종된 남녀의 명단…… 여기저기서 유기된 채 발견된 시체들을 토대로 최소한 열다섯 건의 살인 혐의로 기소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 거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거야? 일들 안 해? 파커! 마이론! 셈슨가 근처에서 수상한 놈들이 얼쩡거린다는 제보야! 탈출한 미치광이들이 스물두 명이나 길바닥을 헤매고 있단 말이야! 얼른 튀어나가지 못해?”
무슨 전화를 받았는지 반장이 갑자기 펄펄 뛰기 시작했다. 병원 근처에서 슬슬 제보 전화가 오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콘웨이 요양소 입원 환자라면 중증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었다.
정신이상이라고 해서 다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바람을 오래 쐬는 것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을 건 없다. 파커와 마이론이 반장의 채근에 마시던 커피를 쓰레기통에 부어버리고 분주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헨슨! 알랙! 들어와서 경과보고 안 할 거야? 그 빌어먹을 미성년자 스너프 수사 시작한 지가 몇 주째야? 벌써 다른 필름이 돌아다닌다는 제보가 있어! 자신 없으면 지금 당장 얘기해! 교통정리 쪽은 항상 일손이 모자라니까!”
반장이 지지부진한 수사에 대해 일갈하자 헨슨과 알랙이 기가 콱 죽어서 반장실로 끌려 들어갔다.
몇 개월 전에 입수된 미성년자 스너프의 복사 필름은 나도 본 적이 있다. 보고 나서 하루 꼬박 입맛이 없었다. 나일 악어 같은 먹성을 지닌 비니까지도 점심 식사인 햄버거를 반도 못 먹고 쓰레기통에 내던지는 것으로 자신에게도 비위라는 것이 있음을 증명할 정도로 끔찍했다.
우리 일이라는 게 본래 시체를 보는 일이 일상사고 그중 많은 경우가 보기 괴로울 정도로 험하게 망가져 있기 마련이라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비위 거슬리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총격에 안면이 완전히 박살났거나 죽은 후에 토막이 났거나…… 그건 이미 죽은 시체일 뿐이다. 우리가 보아온 것은 상황이 끝난 결과물일 뿐이었다. 시체를 보는 것과 10대 소녀가 강간당한 후에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필름을 본 모든 사람들이 사건을 맡겨달라고 요청했는데 그중에서 반장이 고른 팀이 헨슨하고 알랙이었다. 그런 종류의 필름을 유통시키는 자들의 보안망을 뚫고 들어가는 건 보통의 인내심과 두뇌 플레이로는 어려운 일이다. 사건 수사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반장만 빼고…….
“그리고 자네들! 제이! 비니! 파커랑 샘슨따라 나가서…….”
“우린 비번이에요!!”
비니랑 내가 동시에 외치자 반장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럼 당장 꺼져!”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이제 갈 거다. 궁금한 거 하나만 해결하고…….
“그거 지금 어딨어?”
자기 책상에 앉아서 입술을 고쳐 그리던 쥬드가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뭐가요?”
“그거 있잖아…… 칼…… 오웬 씨의 절단기 말이야.”
“그건 왜요?”
립스틱 뚜껑을 닫으며 쥬드가 나를 올려다봤다. 사실 그녀에겐 저런 칙칙한 색깔보다는 빨간색이 더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녀가 입술을 빨갛게 칠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냥 한번 보고 싶어서. 어떤 건지 말이야…….”
쥬드가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일어났다.
“같이 가죠. 그렇지 않아도 그걸 가지러 가려던 참이거든요.”
그런 건 봐서 뭐 할 거냐고 귀찮아 하며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너그럽게 나오니 오히려 불안했다. 사랑에 빠져서 갑자기 착해졌나? 그러고 보니 내가 반말하는데 화도 안 내네?
당신이 갑자기 12킬로그램의 헤로인이나 22킬로그램의 코카인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급한 현금이 한 50만 불 정도 필요하다면? 구식 사냥총부터 최신식 기관소총에 이르는 화기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나 같으면 경찰서 증거물 보관실을 털어보라고 권하겠다. 증거물 보관실은 대단한 곳이다.
경찰이라도 허가와 신분 확인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그곳을 쥬드는 노크 세 번과 윙크 한번으로 그냥 들어갔다. 서장 비서 대우로는 가히 파격적이지만 거기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사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행정 담당관 도밍고 여사조차 쥬드가 행사하는 여러 가지 월권을 그냥 눈감아주는 형편이었다. 도밍고 여사는 경찰서에 25년째 일하고 있는 행정 담당이니 쥬드의 미모가 감탄스러워 그럴 리는 없고 내 생각엔…….
“이거예요.”
현금 10만 불이 들어 있는 셈소나이트 가방 다섯 개와 시가 15만 불이 넘는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는 피 묻은 보석 상자를 지나쳐서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던 쥬드가 내 앞에 길이가 1미터 20센티미터에서 약간 더 길거나 짧을 것 같은 기다란 가죽 막대기를 들어 보였다. 너비도 7.8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것은 보기에도 꽤 묵직해 보였다. 그 무게 때문에 쥬드의 팔에서 파란 힘줄이 솟아올랐다.
“이거야?”
시시했다. 애써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죽막대기를 받아들었지만…… 이게 뭐야? 사람 팔을 다섯 개나 날렸다기에 뭐 대단한 건 줄 알았는데 그냥 긴 칼이잖아? 이 손잡이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진짜라면 값은 좀 나가겠지만…….
“구경하고 싶다면서요?”
“하고 있잖아…….”
“한번 뽑아보지 그래요?”
뽑아보라고? 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내가 이 장검의 멋진 손잡이와 낡아빠진 가죽 칼집만 구경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칼이란 것은 칼집에서 빼낸 다음에 날카롭게 벼른 칼날을 이용해서 싸우는 원시적인 무기였지. 그럼 동양 무술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멋지게 한번 뽑아볼까?
스릉……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마치 어두운 동굴에서 기어 나오는 은색의 뱀처럼…… 순간 검이 떨린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이 잠시 떨렸던 모양이다. 이건 어떤 종류의 금속일까? 가운데에 깨진 다이아몬드를 필두로 사방에 빨갛고 파란 보석이 박힌 손잡이를 잡고 칼날을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면도를 해도 되겠네…….”
나는 사실 검 같은 것에 대해선 잘 모른다. 총기류라면 한때 너무 열중해서 전문잡지도 구독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동료와 시간 날 때마다 온갖 종류의 총기류에 대해 수다도 떨고…… 경찰 봉급이 너무 적어 세상의 모든 총기를 종류별로 수집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플 때도 있었지만 검이라니…….
“느낌이 어때요?”
“…….”
칼날은 면도날처럼 예리했다. 한군데 휜 곳도 패인 곳도 없었고 그 예리한 날 위로 희미하게 푸른빛이 떠돌아서 여기저기 시커멓게 말라붙은 핏자국조차 아름답게 보일 정도였다. 은? 이런 걸 은으로 만들 수 있을까? 차갑고 섬뜩한 살기……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무기에서도 느낀 적 없는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뭐, 별로…….”
사실은 넋이 나갈 정도로 묘한 기색이 느껴졌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지껄이면 쥬드가 걱정할 것 같았다. 이건 아침에 좋지 않은 뉴스를 들은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조만간 정신과 상담을 다시 받아봐야 할 모양이다.
“오거스트 크로스예요. 복제품이라도 이만하면 대단한 명검이죠. 당대의 솜씨 좋은 장인이 필생의 걸작으로 자부했을 만한 작품인데 내가 보기엔 못 되도 2~3백년은 전에 제작되었을 거예요. 1600년대 이후로는 오거스트 크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으니까 어쩌면 그보다 더 되었을지도 모르고…….”
“오거스트 크로스가 뭔데?”
쥬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무리 예의바른 미소라도 이런 상황에선 비웃음 같다.
“당신 손에 들고 있는 거요.”
“세상에 있는 모든 기다란 칼을 오거스트 크로스라고 부르진 않잖아.”
쥬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설명하면 이 무식한 경찰관에게 한 수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쥬드가 입을 열었다.
“바하르나 전서라는 거 읽어본 적 있어요?”
“아니…….”
“페라가몬의 노래는요?”
노래 제목인가 본데 요즘은 통 음악 들을 시간이 없었다.
“못 들어봤어. 요즘 유행하는 노래야?”
쥬드의 얼굴에 절망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최신 히트곡인가 보다.
“그럼 여기서 얘기 하긴 곤란하겠네요. 한가할 때 다시 얘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더 이상 말하기 귀찮을 때 쥬드가 자주 써먹는 방법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가 한번 밀리면 나중에 다시 들을 기회가 생기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급한 일도 많은데 내도록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시간 있을 때마다 물어보는 건 나한테도 어려운 일이다.
“그냥 대충 설명해봐. 내가 알아서 들을게. 노래 같은 건 나중에 찾아서 들으면 되잖아.”
쥬드가 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 아직도 검을 들고 있는 내게 그만 칼집에 넣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검을 돌려받아서 손잡이 부분을 들어 보였다.
“크로스라는 건 검의 모양이 전체적으로 십자가의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에요. 손잡이가 달린 검이라면 다 그렇겠죠. 유독 오거스트 크로스라고 불리는 건 바하르나 왕국의 대왕 오거스트의 명령으로 제작된 검이라서 그런 거고요. 이제 됐죠?”
너무하네.
“대충 설명하자면 그렇게밖엔 할 수 없어요.”
내 원망 어린 표정에 쥬드가 약간 반성의 기미를 보이며 사과했다. 그리고는 검을 들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준다며? 분명히 그랬었잖아!”
막 보관실 문을 나서려는 쥬드를 막아서며 항의했다.
“그건 벌써 3년도 전의 얘기예요.”
“그동안 내가 당신한테 무슨 무리한 부탁한 적 있었어?”
잠깐 생각하던 쥬드가 얼른 대답했다.
“당신 대신 부인을 설득해달라고 한 건 좀 무리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이혼했잖아!”
“나 때문에 이혼했다는 투네요.”
물론 쥬드 때문에 나하고 위니 사이가 틀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쥬드가 위태로운 우리 사이에 결정타를 먹인 건 분명했다.
위니는 처음부터 그렇게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찰관하고 같이 사는 스트레스를 문제없이 감당할 만큼 무던한 성격도 아니었다. 위니가 안전한 직업을 가진 남편하고 좀 더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한 게 쥬드 탓은 아니다. 쥬드에게 아내를 좀 달래달라고 부탁한 건 쥬드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땐 니콜라스 체포 직후라서 나도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던 때였고, 위니의 우울증을 혼자 감당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했는데 쥬드는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머리 좋고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고, 게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준다는 약속까지 받아둔 상태였었다. 그리고 위니도 쥬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를 좀 달래달라고, 경찰 일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좋게 말해달라고 부탁한 게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쥬드에게는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지성은 있지만 위험한 직업을 가진 남편 때문에 신경쇠약 상태에서 자기 스트레스를 주체 못하는 여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위니에게는 무덤 갈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던 니콜라스 체포 작전의 전말을 다 까고 나서 따분한 촌구석에 내려가서 빈둥거리고 싶으면 혼자 가라고 닦아 세웠던 건 용서할 수 없다.
위니는 그날로 보따리 싸서 시골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혼 서류도 몇 주 지난 후에 우편으로 받았고……. 쥬드는 자기가 그런 소리하면 위니가 어떻게 할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다. 그 이후로는 쥬드에게 가능하면 부탁 같은 거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검에 대해 뭐가 그렇게 알고 싶어요?”
니콜라스 후유증과 이혼 쇼크에 연타를 먹은 내가 식음 전폐하고 2주일이나 누워 있다가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출근했을 때 봤던 그 표정으로 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의 가책과 동정심이 섞인 표정으로, 쥬드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인간적인 얼굴이었다. 하긴…… 말 몇 마디로 남의 가정을 들어 엎었으니 양심의 가책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지.
“그냥…….”
이런 절박한 시점에서 그 딴 게 왜 궁금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 주 토요일에 무슨 약속 있어요?”
“별로…….”
별로가 아니라 아무 일 없다.
“토요일 저녁에 우리 집에 와요. 갖고 있는 자료가 좀 있으니까 보면서 들으면 재미있을 거예요. 7시 어때요?”
물론 좋다. 햄버거, 피자도 먹기 지쳤는데 쥬드네 집 저녁식사면…… 최소한 손수 만든 해산물 스파게티나 스리 코스 스테이크다. 쥬드는 나 같은 서민은 이름도 잘 모르는 포도주도 꽤 고급으로 여러 병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한 쥬드는 집에 초대한 손님에게 그런 걸 아끼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검은 왜 가지고 나가는 거야?”
증거물 보관실 출입을 허용하는 게 가지고 가고 싶은 거 있으면 다 가져가라는 뜻은 아닐 텐데…….
“오웬 씨에게 돌려주려고요.”
“그래도 돼?”
“그 사람 거니까요.”
굉장히 간단하게 대답하기에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여기가 분실물 보관소였었나?
“그 녀석이 그렇게 좋아?”
“무슨 뜻이에요?”
“일처리가 초특급이라서 말이야. 서류 작성을 빈틈없이 해도 사흘은 기다려야 한다면서?”
쥬드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알렉산더 루소가 전화를 했어요. 오랜 친구 오웬 씨의 개인 소유물은 상당히 가치 있는 물건이고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것이니까 현행법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면 그에게 돌려주기 바란다는 완곡한 부탁의 전화였죠. 그렇게 정중한 부탁을 거절할 만큼 중대한 일은 좀처럼 없어요.”
알렉산더 루소라면…….
“상원의원이 그런 전화를 했단 말이야?”
“비서를 통해서도 아니고 직접 전화한 거 보면 정말 친한 친구인가 봐요.”
쥬드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치가들이란 자들은 법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 법을 제일 먼저 어기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는 자들이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다.
“상원의원 말 한마디면 온 세상이 평화로워질 텐데 우린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 불평에 쥬드는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는 보통 때의 어조, 보통 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돼요. 그 정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면 왜 사람들이 권력을 움켜쥐려고 그렇게 애쓰겠어요?”
인정하건 않건 간에 어차피 그렇고 그런 거다. 오웬에게 검을 돌려주는데 반대할 입장도 아니고 해서 잠자코 쥬드를 따라 나갔다. 토요일 저녁에 있을 오거스트 크로스 특강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물론 일류 레스토랑 정찬에서나 맛볼 수 있는 요리와 후식도 약간 기대되고.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왜 그래요?”
내가 자꾸 주변을 둘러보자 신경 쓰이는지 쥬드도 덩달아 주변을 돌아봤다.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요?”
어디서 웅…… 하고 소리가 울리는데…… 귀울림인가?
“아니야. 아무것도…… 잘못 들었나 봐.”
대강 얼버무리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어쩌지? 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오웬이 기다리고 있는 로비에 들어서면서 쥬드도 무슨 소리를 들은 게 틀림없었다. 나지막한 소리지만 분명히 어떤 공기의 떨림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소리의 울림을 따라서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아보던 쥬드가 검을 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쥬드가 검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1층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아니, 자기 검을 기다리던 오웬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내 환청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전히 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한편으론 음산하고 서글펐다. 환청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이런 소리가 나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 데 불시에 소리가 딱 멎었다.
“고맙습니다, 레이디. 수고를 끼쳤군요.”
오웬이 검을 받아들면서 쥬드에게 셰익스피어 풍으로 인사했다. 오웬을 바라보는 쥬드의 시선이 왠지 복잡했다. 하긴, 이제 이 남자가 저 현관 밖으로 나가버리면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검이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네요.”
쥬드가 검을 잡았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오웬에게 말했다.
“나도 좋아합니다. 오랜 친구니까요.”
보통은 쥬드의 전화번호나 주소 같은 걸 물어보던데…… 오웬은 쥬드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지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당신은 이 도시에 사는 분은 아닌 것 같네요.”
쥬드의 말에 오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친구만 만나고 바로 떠날 겁니다.”
쥬드의 얼굴에 서운함을 감추려는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쥬드 크롬웰도 딱지를 맞는구나, 고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좀 안됐단 생각이 들었다. 한때 사랑했던 흉악범들은 모조리 감옥에 가버리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경찰서 정문으로 당당하게 나가는 남자는 자신을 본 척도 않으니…… 나 같으면 세상 살기 싫겠다.
“당신의 모든 아침에 반딧불같이 작은 행복이 충만하기를…….”
“당신이 걷는 걸음마다 아침이슬처럼 찬란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오웬이 마지막 인사까지 중세풍으로 일관하자 쥬드도 지지 않고 어디서 봤던 시구를 읊었다. 오웬이 좀 당황한 얼굴로 쥬드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뭔가 한마디쯤 더 할 줄 알았는데…… 객관적으로 봐도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이렇게 헤어지다니 아쉽다.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는 쥬드의 뒷모습이 허전해 보였다. 그간 쥬드가 저지른 갖가지 비행을 돌이켜보면 박수 치며 기뻐해야 마땅한 일인데……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 보면 나는 인간성이 너무 좋다.
“대체 뭐하는 자식이야?”
검을 돌려받고는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오웬을 노려보던 비니가 공연히 툴툴거렸다.
“또 왜?”
“건방지잖아! 뭐야? 쥬드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전화번호도 안 물어 봐? 지가 그렇게 잘났어?”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쥬드 크롬웰의 전화번호를 궁금해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새로 생겼냐?”
“법 이전에 본능에 관한 문제야. 저 자식, 어딘지 이상해.”
비니의 인간성이 오늘따라 대단히 의심스럽다. 자기한테 떠밀려서 아침나절에 기절까지 한 사람한테 미안한 기색은커녕 이런 근거 없는 트집이라니…….
“그건 그렇고, 콘웨이 요양소에 불이 났다는데…… 얘기 들었어?”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는 쥬드의 뒷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던 비니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며 뒷북을 쳤다.
“들었어.”
“어떻게 생각해?”
“아무 생각 안 해.”
“니콜라스가 살아 있을까? 지하에 있는 특수병동에 내도록 갇혀 있었을 텐데…… 탈출이 가능했을까?”
“알게 뭐야!”
말투가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졌다.
“사망자 신원은 금방 밝혀질 거야. 죽었다면 잘된 거고 아니면 다시 잡아들이면 돼. 죽여버릴 수 있으면 더 좋고…….”
“말은 쉽지만…… 걱정 안 돼?”
대답 대신 비니를 노려봤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비니를 볼 땐 자꾸 노려보게 된다.
“무슨 뜻이야?”
“별다른 뜻은 없어. 그냥…….”
비니가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막 반장실에서 뛰쳐나오는 반장과 부딪힐 뻔했다. 양복저고리를 움켜쥐고 뛰쳐나가는 걸로 봐서 또 뭔가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혹시…….
“무슨 일이야?”
반장 방에서 뒤따라 나오는 샘을 잡아 세웠다. 혹시 니콜라스가…….
“살인사건이야. 좀 전에 신고가 들어왔는데…… 킬리요크 강변에 있는 고급 맨션에서 교살된 40대 여자 시체가 발견됐어. 파출부가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발견했대.”
“그뿐이야?”
“피살자가 에너벨 베긴이야. 쿠간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겸 콘웨이 요양소 정신과 과장이야.”
심란한 아침이었다. 흉포한 연쇄살인범이 갇혀 있던 병원에 불을 지른 것도 모자라 시체로 산을 만들어 놓고 사라져버렸고, 얌전하게 생긴 무명 락커는 맘에 안 든다고 사람 팔을 무 자르듯이 잘라버리고도 정당방위라며 당당하게 걸어나갔고…… 비니는 직업을 바꿔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니콜라스의 사냥이 다시 시작됐다.
쥬드가 재킷을 걸쳐 입으며 사무실에서 나왔다. 얼굴은 점심 먹으로 나가는 사람처럼 태연하지만 점심 먹기엔 아직 시간이 일렀다. 현장에 가는 게 틀림없었다. 나도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쥬드의 뒤를 쫓았다. 비니도 나를 따라 나섰다.
살인사건 현장이 어디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사건 현장에는 벌써 방송국 차량하고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있었다. 경찰서 앞에 있던 그 많은 기자들이 모두 어디 갔나 궁금했었는데 일사분란하게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 모양이었다. 인파 속에 리만이 까치발을 들고 아파트 경비원과 인터뷰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고 뭐라고 소리를 치는데 잘 안 들려서 그냥 손만 한번 흔들어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베긴 박사의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일종의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전에 이 아파트에 들어와 본 적이 있을 리 없는데 마치 예전에 한번 와 본 듯한 묘한 느낌 때문에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뒤따라오던 비니에게 떠밀려서 하얀 카펫이 깔린 거실 한복판까지 들어와서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기시감이라기엔 너무 강한데…….
은색 광택이 흐르는 벽면과 하얀 대리석 벽난로…… 보통은 그림이 걸려 있게 마련인 난로 위에는 은색 파이프로 이루어진 묘한 조각이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결벽증이 느껴지는 색조의 거실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벽난로 프레임 위의 하얀 꽃병에 가득 꽂혀 있는 붉은 장미였다. 그제야 이 방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났다. 아니, 이 방을 전에 본 적은 없어도 이게 누구 취향인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베긴 박사가 니콜라스와 얼마나 친했는지 알 만하네…….”
“친하다는 건 바른 표현이 아니에요.”
침실 쪽에서 나온 쥬드가 내 옆에 와서 섰다.
“얼마나 강하게 지배당했는지 알 만하군……이라고 해야죠. 정신적으로요.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갔겠죠. 머리 모양, 말투, 패션, 인테리어까지…… 덕분에 굉장히 세련된 취향이란 평판이야 들었겠지만 그녀 자신의 것은 없었을 거예요. 머리핀 하나까지도 그의 취향에 맞췄겠죠. 들어가서 보겠어요?”
반쯤 문이 열린 침실에 들어가 보니 시체는 아직까지 발견된 그대로 놓여 있었다. 40대 중반의 여자, 의대 재학 중에 한번 결혼했었지만 2년도 안 돼 이혼한 이후로 일에만 몰두해온 능력 있는 정신과 의사의 앙상하게 마른 팔이 침대의 철제 프레임에 까만 스타킹으로 결박되어 있다.
죽기 직전까지 심하게 몸부림을 쳤는지 팔목의 피부는 뼈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심하게 파헤쳐져 있었다. 나이에 비해 심하게 주름진 그녀의 앙상한 목은 전화선으로 감겨 있었고, 침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붉은색 전화기가 깨진 채 뒹굴고 있었다.
그 밖에는 눈에 띄는 게 별로 없었다. 외관상으론 다른 상처도 보이지 않았고 달리 손실된 곳도 없다. 그녀가 니콜라스의 담당의사만 아니었다면 이 사건에는 니콜라스 짓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특이점은 없어 보였다.
3년 전 법정에서 니콜라스의 정신 상태에 대해 증언할 때도…… 자기 침실에서 부패의 냄새를 풍기며 경직되어가고 있는 지금도 이 여자에게서 희대의 살인마를 탈출시킬 만큼 대담한 구석은 찾기 힘들었다.
베긴 박사는 니콜라스를 탈출시키기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있었을 터였다. 무엇이 이 여자로 하여금 불 속으로 뛰어드는 여름밤의 나방과 같은 부질없는 도발을 가능하게 했을까?
지난밤의 살인과 방화에 박사가 얼마만큼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계획과 실제로 눈앞에 벌어진 일은 상당히 달랐을 터…… 그 모든 일을 끝내고 니콜라스를 자기 침실로 끌어들일 때 박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