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607 : 프레자일 Fragile (3)
"오랜만입니다."
온 몸에서 발산되는 정체 모를 박력에 짓눌린 오오코오찌는
작은 소리로 맞장구치듯이 <아아…>하고 대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늘…아, 벌써 어제가 됐습니다만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과장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어서 아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계장님에게는 폐를 끼쳐 놓고 인사도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직접 댁으로 찾아 뵈었습니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말은 정중했지만, 오전 2시가 넘은 이런 시간에 남의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 자체부터가 이상했다.
"…저, 일부러 와줘서 고맙네."
흐트러진 복장을 고치는 척하며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고
오오코오찌는 태연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사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쫓아내 버리고 싶었지만,
상대방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이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폭발하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가위를 들고 덤벼들었던 귀신 같은 형상이 오오코오찌의 뇌리를 스쳐갔다.
"모처럼 와줬는데 미안하네만, 이미 늦은 시각이고 난 내일 회사에
또 나가야 해서 말이야. 여기에서 실례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오이케는 아쉬운 표정으로 눈길을 떨궜다.
이런 시간에 찾아오는 비상식은 물론 지적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부드럽게…자신을 타이르듯이 오오코오찌는 머리 속으로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저녁부터 줄곧 계장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얘기를 들어주실 수 없습니까?"
거절할 구실을 찾으면서 <아아, 하지만…>하고 오오코오찌가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벽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오오코오찌는 등줄기를 움찔 떨었다.
"폐가 되는 줄 알면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그런 말씀 마시고 얘기만이라도 들어주실 수 없습니까?"
정중히 승낙을 얻는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명령형'임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알아버린 이상, 오오코오찌에게 거절할 길은 남아있지 않았다.
거역하고 화나게 해서 폭력 앞에 노출 되어도
여기에는 자신을 구해줄 인간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그, 그렇군. 모처럼 와주었고…올라오지."
'무섭다'고도 '싫다'고도 말하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집안에 들였다.
아오이케는 <실례하겠습니다>하고 인사한 뒤,
당당하게 운동화를신은 채 방으로 올라왔다.
'신을 벗는다'는 당연한 일을 알고 있으면서 하지 않는 아오이케에게서
자신에 대한 분노의 편린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값비싼 카펫을 진흙 묻은 운동화로 딛고 손님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오만한 태도로 소파에 걸터앉은 아오이케는 무례한 시선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좋은 곳에 살고 계시군요."
"고마워…."
칭찬 받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일단 인사를 했다.
"이런 좋은 맨션에 살 수 있다니, 부럽습니다.
침실하고 거실 말고도 객실이 두세개 더 있죠?
하지만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겠는데요.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 예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좀처럼 인연이 생기지 않아서…."
표면적인 말만 들으면 아무런 위화감도 없는 대화였다.
오오코오찌는 이상하게 안정이 되지 않아 한곳에 멈춰 서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오이케의 맞은편 소파 주위를 서성거렸다.
"아, 참. 그렇지, 뭔가 마실 거라도…."
순간, 눈길을 사로잡혔다.
미소를 떠올린 채로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에, 오오코오찌는
뱀 앞의 개구리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상관하지 마시고, 모쪼록 앉아주십시오."
명령 받는 대로 오오코오찌는 아오이케의 맞은편에 있는 일인용
소파에 어색하게 걸터앉았다.
"계장님은 올해로 서른 한 살이셨죠?
하지만 연령과 직책에 어울리는 능력은 없어…….
나는 무능한 사람을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도저히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당신에 관해서는, 언제까지고 그렇게 무능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기보다도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일에만 열심이니까요."
정중한 어조로, 그러나 분명하게 오오코오찌를 비난한다.
안경 속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아오이케는 등을 구부리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자 손끝을 깎지 끼었다.
"회사를 그만둔 우에다상이 했던 말이 기억나는군요.
<오오코오찌는 남에게 알랑거리는 재주밖에 없는 기생충>이라고.
…남들에게서 그런 식으로 일컬어지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이 끊기고 침묵이 찾아들었다.
아오이케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오코오찌는 얼굴을 수그린 채 대답을 망설였다.
부정하면 화를 낼 것이고 긍정하면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성을 내는 것보다는 비웃음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말대로겠지."
오오코오찌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아오이케는
매우 우습다는 듯이 큭큭거렸다.
"당신처럼 무능한 남자 밑에서 나는 반년이나 참았습니다.
뭐라 해도 당신은 내 상사였으니까요.
기획서를 몇십장이나 쓰고, 부당한 지적을 받은 끝에
통과되지 못했을 때도 당신이 시키는 대로 고쳤던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내 기획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떨어뜨리고,
귀여워하는 시노의 재미없는 기획 쪽을 채용했죠."
아오이케는 한숨을 내쉬고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도 바보라, 언젠가는 시노보다 인정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노력했던 겁니다. 계장님은 휙 훑어보기만 하고 간단히
<쓸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 기획서에 내가 얼만큼의 시간을 소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시겠죠?
난 요령이 좋지도 않고, 하물며 아이디어가 순간적으로
재치있게 떠오르는 그런 형이 아니야.
때문에 남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리 철저하게 리서치해 두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카드 게임의 인기 캐릭터까지 말이죠.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좋아서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쓸모없다>고 말한 기획 아이디어를
시노에게 슬쩍 흘렸을 때는 아무리 나라도 쇼크였습니다."
아오이케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듯이 자신의 배를 살며시 문질렀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하룻밤새 위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켕기는 기분과 함께 떠올렸다.
그때 시노는 새로 시판될 부인용 손목시계 판매 기획을 세우지 못
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기한도 닥쳐오고 있었고, 보다 못한 오오코오찌는
같은 상품을 대상으로 아오이케가 세워 놨던
---전날에 <쓸모없다>고 말했던---판매기획서 아이디어를 그냥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시노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썩은 지푸라기에도 매달릴 심정이었던 시노는 오오코오찌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기획서에 실었다. …그것은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대호평을 받았고, 그 부인용 손목시계는 절호조의 매상을 보였다.
그 정도까지 비슷하면 뭔가 말을 해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때도 아오이케는 오오코오찌에게 직접 항의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에 맛을 들인 오오코오찌는 가끔, 떨어뜨린 아오이케의 기획
아이디어를 시노에게 슬쩍 흘려주곤 했었다.
"그런 일이 계속되면 아무리 나라도 깨닫지 않을 수 없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전혀 채용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때문에, 당신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과장님께 기획서를 제출했던 겁니다.
그래서 내 기획은 채용되기로 내정 되고 회의에서 검토 받기로 되었죠.
하지만 그 중요한 회의 자리에서 당신은 내가 전날밤에 잠도
자지 않고 정리한 기획서를 <아오이케가 서류를 내지 않았다>며
거짓말을 하고 제출하지 않았어.
당신은 나한테 말했었죠? <회의 결과, 채용 불가가 되었다>고.
……나중에 과장님께 진짜 이유를 들었을 때, 난 집에 돌아가서 울었습니다.
어째서 이토록 무시 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걸까…하고 말이죠."
아오이케가 자신을 거치지 않고 위에 기획서를 제출했음을 알았을 때.
오오코오찌는 그때까지 저항다운 저항을 하지 않았던 남자의 첫 반항에,
기르던 개에게 손을 물린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때문에 채용이 거의 결정되어 있던 기획을 자신의 손으로
으깨버렸을 때도 죄의식은 느끼지 않았었다.
"그때도 역시 위가 아파서 병원 신세를 졌지만, 난 참았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고, 언젠가 당신 앞에서
당당히 성공해 보이고 말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하지만…단 하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있었어."
아오이케는 일단 말을 끊었다.
"회사 일이라면 몰라도, 사생활은 당신에게 관계없었잖아."
오오코오찌가 아오이케의 성벽(性癖)을 알게 된 것은 정말이지 우연한 일이었다.
아오이케의 기획을 무(無)로 돌아가게 만든 그날 밤.
접대로 귀가가 늦어진 오오코오찌는 번화가의 뒷골목에서 우연히
서로 끌어안고 있는 두 남자를 보게 되었다.
밤거리에서는 술에 취한 남자들이 장난으로 키스를 하는 일 따위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숨다시피 해서 서로 껴안고 있는 남자들에게서는,
농담으로 끝낼 수 없는 진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동성에게 기우는 남자의 심리 따위 이해할 수 없는 오오코오찌는
혐오감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양복차림의 남자들을
<모럴 없는 녀석들>이라며 속으로 비난하면서 지나가려던 오오코오찌는
어딘가 낯익은 뒷모습에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이 아는 얼굴들임을 깨닫고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부하인 아오이케와 오오코오찌의 동기로 회계과에 근무하고 있는 코스게….
처음은 '농담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얼버무리기에는
너무 긴 키스와 포옹이었다. 게다가 코스게는 허리를 아오이케의 몸에
문지르며 노골적으로 유혹하고 있었고, 아오이케도 그런 코스게의
허리를 음란한 손놀림으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결국, 남자끼리의 러브신 같은 꼴불견을 언제까지나 감상할 만한 취미도 없었던
오오코오찌는 둘이 깨닫기 전에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처음은 아오이케의 성벽을 알게 된 놀라움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건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문제라고 해도, 사회에는 그런 섹슈얼리티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다.
만약 회사 내에 알려지면 아오이케는 소외 당하고 고립되지 않을까?
그것을 기대하고 오오코오찌는 일부러
모두 있는 앞에서 아오이케의 성벽을 폭로했던 것이다.
그날. 오전중,
아오이케는 팩스를 잘못 보내 일반 가정에서 고정(苦情)이 들어왔다.
팩스 뒤는, 배달 미스.
보통은 배달처를 꼭 확인하도록 되어 있는데 낮부터 시노가
중심이 되어 하는 데모 프레젠테이션을 돕느라 바빴던 듯,
드물게 확인을 잊은 것 같았다.
사소한 실수고 보낸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오오코오찌는 아오이케를
자신의 데스크로 불러 설교를 했다.
"보낸 것이 확인된 상태였으니까 망정이지, 만약 중요한 서류였다면
어떻게 변명할 작정이었나? 오늘은 마침 고정이 들어 왔지만,
오지 않는 경우도 있어.
이쪽은 보낸 줄 알고 있는데 저쪽에는 도착하지 않아서 거래처의 기분을
상하게라도 하면, 자네는 거래처를 하나 잃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오오코오찌는 일부러 얘기를 과장되게 부풀렸다.
송신 미스라는 자신의 과오에 아오이케는 일절 대꾸하지 않고
몇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오오코오찌는 아오이케에게 설교를 할 때는 반드시
주위에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소리로 얘기했다.
그것은 데스크에 불러서까지 하는 설교의 대부분이
한마디 주의로 끝날 만한 사소한 미스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오코오찌도 이 정도의 일로 불러 혼낼 필요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원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그런 설교는 아오이케에게 훈계를 한다기 보다
모두의 앞에서 몇번이나 데스크로 부름으로 해서
<실수가 많은 무능한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흡사 시시콜콜 쓸데없는 일까지 끄집어내서 실컷 잔소리 한 뒤에
아오이케에게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게 만든 후에 해방하는 척을 해보였다.
그리고 기나긴 잔소리를 듣고 역시나 질려서 데스크로 돌아가던 아오이케를
오오코오찌는 다시 불러세웠다.
'또 뭔가'라는 표정으로 돌아본 아오이케는 <네>하고 또렷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이번 건에는 관계없지만, 요전에 자네를 시내에서 봤네."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는 듯한 눈빛으로 아오이케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 뒷골목에서 남자와 껴안고 있더군."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오오코오찌의 데스크 가까이에 앉아 있던 사원 몇몇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아오이케의 얼굴은 마치 솔로 쓸어내리듯이 싸악 창백해졌다.
오피스라는 샘물에 돌을 던졌다.
나머지는 천천히 파문이 펴져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오오코오찌는 다시 소리를 낮추었다.
"개인의 섹슈얼리티고 편견은 없지만 그런 연애행각에 빠지기 전에
자신의 일을 정확히 해주었으면 싶군.
…그나저나 공공 장소에서 당당히 러브신을
연기하는 것은 사회인으로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그리고
모럴이라는 것을 한번 잘 생각해봐주게."
오오코오찌는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손끝으로 가볍게 툭 쳤다
"뭐, 동성에게 기운다는 시점에서 자네에게 모럴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야. 아아, 이제 됐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개라도 쫓듯이 손짓을 했다.
하지만 아오이케는 언제까지나 오오코오찌의 데스크 앞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잖나. 언제까지나 딴짓하고 있는 거 아니야."
눈앞의 성가신 존재에 언성을 높이자, 꽉 깨물려서 보랏빛이 된
아오이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당신에게 나를 모욕할 권리는 없어.
왜 모두의 앞에서 일부러 멸시하는 말을 하는 겁니까."
드물게 남자가 반론했다.
오오코오찌는 어깨를 슬쩍 으쓱했다.
"멸시하다니, 오해야.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자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부도덕한지 자각하고 있거나
혹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겠지."
"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부끄러워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부도덕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것은 당신을 포함해서
여기는 그것을 이해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눈앞에서 진지하게 말하는 남자가 슬슬 귀찮아졌다.
스스로 뿌린 씨였지만 질려서 오오코오찌는 서류 다발로 데스크를 두드렸다.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여기는 회사야.
월급을 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면 자네 개인을 주장하기 전에
나름대로 일하는 게 어떤가?"
"일에 관계없는 말을 먼저 꺼낸 건 당신이야."
한 발자국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오이케에게
오오코오찌는 넌더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자네는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아직 해야할 일이 많이 있단 말이야."
오오코오찌가 가까이 걸어가자, 아오이케는 강경한 자세와는
반대로 주저하듯이 한걸음 물러섰다.
키가 큰 남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그 귓가에 오오코오찌는 속삭였다.
"자네, 알고 있나? 개(犬)라도 같은 수컷끼리는 교미하지 않는단 말야."
오오코오찌가 여사원에게 카피를 부탁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아오이케는 자신의 데스크로 돌아가 있었다.
오오코오찌도 자신의 데스크로 돌아가서 서랍을 열었다.
신입사원에게 제출하도록 시킨 기획서의 답을
오늘 중에 해주겠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전에 없이 사담(私談)이 많은 사무실에도 아예 주의를 주지 않았다.
자신이 폭로한 아오이케의 성벽이 화제가 되고 있음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아오이케는 데스크에 돌아갔지만 고개를 떨군 채 일을 하는 기미도 없었다.
…아오이케가 가위를 들고 자신을 공격한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뒤의 일이었다.
그때의 공포를 오오코오찌에게 똑똑히 떠올리게 한 뒤,
아오이케는 괴로운 듯이 애틋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생각합니다. 어째서 당신같은 남자 때문에 위장을 버리고,
한번도 기획을 통과시켜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게이'라며 모두의 앞에서
모욕을 받고, 그렇게 좋아했던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하고요."
오오코오찌는 고개를 수그린 채 손목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이제 곧 새벽 3시가 된다.
자신은 내일도 회사에 나가야 하고, 아오이케의 원망을 언제까지나 듣고 싶지도 않았다.
사죄하는 마음 때문이라기 보다는 빨리 이 상황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오코오찌는 낮은 탁자에 두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지금까지의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 돈으로 네 마음이 위로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하다못해 사죄의 마음으로 얼마쯤
받아주지 않겠나?"
"사죄의 마음…."
아오이케가 불쑥 중얼거렸다.
"오늘 안에 백만엔을 자네 구좌로 넣어주겠어.
그걸로 용서해 줄 수 없을까."
언제까지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고 의아해하며
얼굴을 든 오오코오찌가 본 것은, 모멸이 담긴 싸늘한 눈빛이었다.
"참 이상하죠?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유없이 죽이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충동을 억누를 수가 있을까?"
마지막은 자신에게 하는 질문 같았다.
그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더욱, 괜한 협박이 아닌 진심의 기척을
풍겨서 오오코오찌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에게서 '죽이고 싶다'는
말을 들은 자신이 그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모쪼록 그만둬줘>하고 애원하는 이외에….
"오줌이 마려운데."
그때까지의 심각한 얘기에서 일전하여 아오이케는 갑자기 그런 말을 꺼냈다.
오오코오찌는 용수철처럼 일어서서 거실 출입구를 가리켰다.
"화장실은 거실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곳에 있어. 마음대로 써줘."
맞은편의 남자는 느린 동작으로 소파에서 일어섰다.
"여기에서 해도 괜찮습니까?"
오오코오찌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해도 되냐고 묻고 있잖습니까."
여기는 거실이지 화장실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됩니까, 안됩니까?"
서서히 어조가 험악해졌다.
흥분 시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이 남자는 방금 전에 자신을 죽이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거역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저어…맘대로."
오오코오찌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승낙하자마자 아오이케는
지저분한 운동화를 신은 채로 낮은 탁자에 뛰어올라가 떡 버티고 섰다.
"계장님은 소파에 앉아계셔 주십시오."
못을 박는 말에, 오오코오찌는 의자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눈앞에 선 아오이케가 청바지 지퍼를 내리고 그 안에서 페니스를
꺼내 오른손을 갖다댔을 때, 오오코오찌는 '설마'…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기세좋게 방출되는 것.
오오코오찌는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움직이지마>하는
강한 음성에 찔려, 그 자리에 머리를 끌어안고 웅크렸다.
뜨뜻미지근하고 강한 암모니아 냄새.
<이런 건 꿈이다! 꿈이야, 꿈>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머리카락과 목덜미 그리고 수트에 물들어
등을 적시는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지금 행해지고 있는 것
---아오이케가 자신에게 방뇨하고 있는---이 현실임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 개운하다. 고맙습니다."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한 뒤 아오이케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맞은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오오코오찌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서 두손을 꽉 움켜쥐고
심한 냄새와 굴욕감에 휩싸인 채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황금색 물방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설마 이 나이가 되어서 남의 소변을 뒤집어쓰는 일을 겪을 줄이야…….
"역시, 냄새가 나는군요."
아무데나 소변을 깔리는 개처럼 방뇨해 놓고서,
아오이케는 미간을 찡그리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샤워라도 하고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제안이라는 이름의 명령이었다.
오오코오찌는 언제까지고 이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일어섰다.
아오이케는 오오코오찌의 뒤를 따라 욕실 안까지 들어왔다.
등뒤에 선 남자의 시선이 신경 쓰여 오오코오찌는 젖은 수트를 좀처럼 벗을 수가 없었다.
"혼자 있게 해줄 수 없을까?"
조심스럽게 호소하자, 아오이케는 <등을 닦아드리겠습니다>하며 미소 지었다.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해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물러설 기미가 없는 아오이케에게 단념하고 오오코오찌는 옷을 벗었다.
알몸이 된 오오코오찌보다 먼저 샤워기를 손에 든 아오이케는 수도꼭지를 확 비틀었다.
그리고 온도조절도 하지 않은 채 갑자기 오오코오찌에게 샤워 물줄기를 퍼부었다.
비를 맞아 차가워져 있던 몸에 소변을 뒤집어쓴 끝에 냉수 샤워.
체온은 일방적으로 빼앗기기만 할 뿐이라, 오오코오찌는
욕실 구석에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만…."
냉수 샤워는 멈출 기척도 없었다.
오오코오찌는 어깨를 안고 잔뜩 웅크렸다.
"추워…추워. 그만해줘, 부탁이니까…."
아무리 호소해도 그만둬 줄 기척은 없었다.
물 때문에 일그러지는 시야에 남자가 엷게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오오코오찌는 보랏빛 입술을 깨물었다.
얼어붙을 계절이 아닌데 추위로 떨고 있는 자신이 슬펐다.
비참하고 슬퍼서 눈물이 솟구쳤지만 넘쳐 나오는 족족 물에 씻겨 흘러갔다.
오오코오찌를 실컷 얼어붙게 만든 뒤에야 아오이케는 <나갈까요>하며 중얼거렸다.
탈의실에서 간신히 욕의를 몸에 걸칠 수가 있게 된 오오코오찌였지만,
몸의 심지부터 솟구쳐 오르는 냉기에 부들부들 떨었다.
"계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그런 오오코오찌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면서 아오이케는 불쑥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는 공포로 오오코오찌의 등줄기는 잔뜩 오그라들었다.
"당신을 길러도 되겠습니까?" (*사육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을 발한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큭 하며 웃었다.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것 없습니다.
나는 제대로 보살필테니까요. 여기에 살면서 당신을 보살피게 해주세요."
심상치 않은 제안이었다.
이 남자가 정상적인 신경으로 자신을 접하고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여기에 살겠다는 말이, 이런 처사가 일상적으로 되풀이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하지만 얘기를 꺼낸 시점에서 그것은 <명령>이고,
NO라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싫다고 하면 이 남자는 어떻게 할까?
순순히 물러서 줄까? 성이 나서 자신을 해치지나 않을까?
다시 물을 퍼붓는 듯한 짓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오오코오찌는 점점 마음이 어두워졌다.
"아쉽게도 오늘은 목걸이와 사슬이라는 개(犬)용 아이템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이걸로 대용하죠."
아오이케는 오오코오찌에게 다가오더니, 입고 있는 욕의의 띠를 풀었다.
그리고 하얗고 가는 그것을 천천히 오오코오찌의 목에 휘감았다.
그것을 조여 올리는 예감, 공포로 오오코오찌는 눈에 눈물을 담고 덜덜 떨었다.
띠에 매듭을 묶은 남자는 미소를 떠올린 채 오오코오찌의 욕의를 벗겨내고
<네발로 기어 주셔야겠습니다>하며 명령했다.
"개는 옷도 입지 않고, 두다리로는 걷지 않잖아요?"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말을,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아오이케는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