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2)

No,566 : 프레자일  Fragile (2)

 물의 기척은 끊길 줄을 몰랐다.

 장마철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계속내리는 비는 어딘가 서늘한 여름을 예감시켰다.

 여름이 시원하면 그만큼 지내기 쉽다는 거니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지만, 어려움을 하나 말하라면 통근 때의 불편한 발치일까?

 그런 비의 기척도 지하에 있는 이 가게 안까지는 숨어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어깨에서 그 흔적을 볼 뿐.

 재즈가 흐르는 점내에서 오오코오찌는 찬 술의 잔을 입에 날랐다. 

나무처럼 상쾌한 느낌 뒤에 과일처럼 매끄러운 감미로움이 입안에 퍼졌다.

 가게 주인이 권할 만한 꽤 좋은 술이었다.

 그레보사(社)의 임원 접대가 끝난 뒤, 오오코오찌는 부하인

 플래너 시노를 데리고 번화가 언저리에 있는 바에 와 있었다.

 자신이 오고 싶었던 것이기도 하지만, 접대 준비로 아침부터

 쉴새없이 일한 부하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오오코오찌는 술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뭐가 제일이냐고 하면 역시 

일본주라고 대답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전국의 질좋은 술들을 두루갖추어 놓고 있으며

 분위기도 좋은 이 조용한 가게는 오오코오찌가 즐겨찾는 곳이었다.

 접대에서는 오오코오찌도 시노도 그레보사의 사원의 마음에 드는 것에 성공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프레젠테이션이라면 타사에 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자사의 기획이 평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미리 접대하고 아부를 해두는 것이다.

 오오코오찌의 노골적인 방식을 싫어하는 동료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해도, 실력승부를 해서 타사에 일을 빼앗겨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접대의 반응은 좋았다.

 게다가 임원 중 한사람은 기획서도 보지 않은 지금 이 단계에서

 <자네 회사를 밀어줌세>라고까지 잘라 말했다.

 오오코오찌는 그레보사 사원의 취향을 조사하고 세련된 가게를 찾아

 세심한 여흥까지 준비한 이번의 중심인물인 시노에게도 상을 줄 작정으로 술을 권했다.

 하지만 일본주에는 그다지 세지 않은 듯 글라스로 겨우 두세잔 마시고 시노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고 보니 아오이케 말입니다만…."

 뜬금없이 대뜸 시노는 떠들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지금, 그것은 듣고 싶은 종류의 이름이 아니었다.

 "저녁에 회사로 전화했을 때 미네기시 상한테 들었습니다만,

 마침내 사표를 제출했다더군요."

 놀라움은 없었다. 그보다는 <이제서야>라는 생각 쪽이 강했다.

 아오이케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오오코오찌는 불쾌했던 가슴의 울증이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가위를 들고 덤벼든 날로부터 오늘로 1주일.

 아오이케는 무단결근을 계속하고 있었다.

 회사내에서 상사에게 폭력 행위를 한 것은 위에도 보고를 끝냈고, 

비록 회사에 나왔다고 해도 아오이케는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기 전에

 퇴직을 권고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만둘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런 소동을 일으켰고 지금은 소문도 굉장하고…."

 소문.

 시노가 내용을 덮어서 얘기한 부분. 

 지금 사내에는 아오이케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 한창 떠들썩했다. 

 자신이 흘린 사소한 한마디가 이토록 효과를 나타낼 줄은 오오코오찌도 생각지 못했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중얼거리는 시노의 얼굴에는

 아오이케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한 빛은 보이지 않았다.

 사내에서 똑같은 플래너라는 입장에 있던 아오이케가 퇴직함에 따라,

 앞으로는 시노가 중심이 되어 기획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라이벌의 말없는 퇴진은 시노에게도 잘된 일일 터였다.

 <그렇군…>하고 중얼거리고 오오코오찌는 글라스 바닥에 남아있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오이케는 굉장히 자존심이 센 남자였지. 게다가 격정가야.

 회사라는 조직에서 일하려면 그는 좀더 자신을 억제하는 법을 배워야 했어."

 미간을 찡그린 복잡한 얼굴로 시노는 턱을 받치고 작게 신음했다.

 "계장님은 아오이케에게 엄했죠? 정말 녀석의 기획서가 그렇게 심했던 겁니까?

 늘 계장님 선에서 퇴짜를 맞고 전혀 채용되지 않았잖습니까?"

 오오코오찌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회사를 그만둔 남자고 뒤에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도 가엾지만…

 그가 올리는 기획안은 솔직히 말해서 초등학생 작문 수준이었어."

 그렇습니까…하고 중얼거린 부하는 술기운으로 붉그스레한 뺨을 

한 채 눈길을 슥 내리깔았다.

 "실은 말이죠. 딱 한번 아오이케가 저한테 기획서를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시점이 다르고 신선하달까…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오오코오찌는 놀랐다.

 아오이케가 플래너인 시노에게 자신의 기획서를 보여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같은 회사 내라 해도 플래너끼리는 늘 경쟁하는 상태에 있다.

 통상은 상사에게 아직 인정받지 않은 자신의 기획서를 남에게 보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안중인 아이디어를 동료에게 보이고 그것을 각색한 기획안을 가로채여도

 불평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획은 어쨌든 최초에 발표하는 자의 승리가 된다.

 아무리 좋은 기획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가져가지 않으면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걸 보여줬는데?"

 시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음, 에닉의 청량음료 <프리저>의 판매기획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에닉이라는 말에 오오코오찌는 떠올렸다.

 아오이케는 십대부터 20대의 남녀를 대상으로 한 음료수 광고를 

인터넷 상에서 철저하게 행하는 기획을 세웠었다.

 음료수 종류는 젊고 인기 있는 여배우나 음악 아티스트를 기용한

 TV광고로 팔려나가는 것이 통상인데, 얼마쯤 보급되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제한되어 있는 인터넷에서 광고를 하는 것은 일반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TV에 없는 커다란 이점이 있었다.

 방송 채널 스폰서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의 경비를

 대폭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오이케는 게임 감각의 광고를 인터넷상에서 흘리고,

 그 광고를 보고 있지 않으면 응모할 수 없는 식으로 했다.

 일견 폐쇄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심층심리를 꿰뚫어

 저도 모르게 구매의욕을 부채질하는 교묘한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오이케가 올린 <프리저>의 판매기획서를 읽었을 때,

 오오코오찌는 그 참신함에 놀랐다.

 세밀한 자료와 리서치 결과. 구체적인 판매안.

 완벽에 가깝다…아니, 그 이상의 완성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오코오찌는 아오이케의 기획안을

 <인터넷을 이용한 판매안은 선전효과가 낮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았다.

 <프리저>를 내놓을 에닉의 판매 촉진과 과장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

 아오이케의 기획안을 보면 다소의 리스크는 무시하고서라도

 두말없이 뛰어들 것이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오코오찌는 아오이케의 기획안을 밀어주지 않았다.

 "확실히 그 기획은 독창성이 있고 재미있었어.

 하지만 음료수는 TV광고의 영향이 크게 매상을 좌우하니까

 그걸 제외한 그의 기획은 쓸 수 없었던 거야.

 좀더 현실적인 것을 내주면 채용 되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기획안에

 프라이드가 강해서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어."

 시노는 얌전한 얼굴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의심도

 하지 않는 순종적인 부하에게 오오코오찌는 희미하게 웃었다.

 "기대했기 때문에 더 엄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는커녕

 나에게 이지메 당하고 있다고 오해한 끝에 그 사건이라니. 

그에게는 실망했어."

 납득했는지 이후 시노는 대화 속에 아오이케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오전 0시가 지난 무렵, 조금 술이 깬 시노가 시계를 신경쓰는 기척을 보였다.

 좀더 마시고 싶었던 오오코오찌는 내일도 일이 있는 부하를 먼저 보내고

 혼자 가게에 남았다.

 오오코오찌 쪽에서 말을 걸지 않는 한 대화 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주인은, 글라스가 비었을 때만 말을 건네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순수하게 술맛을 즐기면서 오오코오찌는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아오이케 타쯔로오는 사표를 제출했다.

 은테 안경을 쓴 키 큰 남자의 모습을 앞으로 영원히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진심으로 안도가 되었다.

 그런 공격을 받고 나서 그 남자를 만나는 것은 솔직히 무서웠다.

 때문에 자신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회사를 떠나준 것은 다행이었다.

 시노에게는 아오이케의 기획서가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에게 제출된 그것들은 에닉의 것도 포함해서 무서울 만큼 완성

도 높은 것이었다.

 시노 따위는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그랬다. 

 아오이케는 플래너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시장을 읽어내고 경향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단순히 아이디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기획을 세우는 데다가

 그 판매결과까지 시뮬레이션해 보인다.

 굳이 아오이케의 나쁜 부분을 들춰 내자면 플래너로서 너무

 뛰어나게 유능했다는 점과, 그리고 자신과 적대하고 있던

 우에다가 귀여워하던 남자라는 것일까….

 우에다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오코오찌는 여전히 속이 쓰렸다.

 한 살 연상으로 출신대학은 자신보다 레벨이 낮았지만,

 우에다는 통솔력이 있으며 매우 인망이 두터운 남자였다.

 작년까지 오오코오찌가 소속된 아사이 선전기획 주식회사 기획영업과의 사무실에는

 오오코오찌와 우에다가 각자 주임으로 지휘를 맡은 두 기획 그룹이 있었다.

 작년 9월, 회사에 직접 의뢰가 있었던 여성 속옷회사의 판매기획을

 어느 그룹이 맡는가로 트러블이 있었는데, 결국 두쪽이 기획을 세우고

 잘 된 쪽을 쓴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 기획이 성공하면 성공한 그룹의 주임이

 계장으로 승진한다는 것이 암묵의 양해였다. 

때문에 오오코오찌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리고 10월. 오오코오찌와 우에다 그룹이 기획을 냈을 때 채용된 것은

 오오코오찌 그룹의 것이었다. 기획의 실질적인 좋고 나쁨을 보면

 우에다가 낸 것이 단연 좋았지만 결국은 오오코오찌에게 승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승부하기 전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우에다가 기획을 세우기 위해 밤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오오코오찌는 과장이며 부장과 함께 회사 상층부 인간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장과 똑같은 대학출신이라는 이유로 오오코오찌는 귀여움 받아

 그 자리에서 계장 의자를 약속받았던 것이다.

 결과에 불만을 품은 우에다는 윗사람에게 직접 담판을 짓는 듯한 

짓을 하고 심한 반감을 샀다.

 계장이 된 오오코오찌는 우에다를 부리는 입장이 되었지만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우에다는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오코오찌는 오오코오찌대로 주임인 우에다에게 자료모음이나

 데이터 처리 따위의 1년차도 할 수 있을 만한 일밖에 주지 않으면서,

 아주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그것을 이유로 주임 자리에서도

 떨어뜨려 주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에다는 오오코오찌가 계장이 된지 두달도 지나기 전에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선전기획 회사로 혼자 스카웃되어 갔다. 

그리고 주임이 없어진 결과, 우에다의 그룹은 공중분해 되었다.

 우에다를 따라서 사직하는 자도 두명 쯤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회사에 남아 다른 과로 갔다.

 아오이케는 우에다가 아끼는 후배 중에서 유일하게

 오오코오찌 그룹에 들어갈 것을 희망한 사원이었다.

 우에다가 아오이케를 귀여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는

 오오코오찌는 처음엔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 외로 얌전하고 말대꾸도 하지 않는 남자에게,

 <있어도 방해는 되지 않겠다> 싶어서 자신의 그룹에 두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실력주의자인 우에다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었던 만큼, 

아오이케는 범용한 예스맨이 아니었다.

 아오이케가 제출한 기획서를 처음 읽었을 때,

 그 너무나도 완벽함에 오오코오찌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일단 맡아둔다는 형식으로 오오코오찌는 기획서를 받아들었다.

 그 뒤로 아오이케는 몇 개인가의 기획서를 오오코오찌에게 제출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기획서를 제출받을 때마다 실력과 재능이라는 말에 눌려

 오오코오찌는 이 얌전한 남자가 언젠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나 않을까 하고 무서워졌다.

 원래 오오코오찌는 입사한지 석달도 되기 전에

 이곳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회사임을 자각한 케이스였다.

 우선 뭔가를 발상할 힘이 없었다.

 기획 회사에서 기획력이 없다니, 치명적인 결점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실히 뻗어나가고 있는 야사이에는 장래성이 있었고 미련도 있었다.

 기획할 줄 모르는 인간이 회사 안에서 톱까지 뻗어올라가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오오코오찌에게는 회사내에서 소문이 날 만큼, 남에게 아첨하는 것이 능숙했다.

 기획을 세울 능력이 없는 이상, 영업으로 상사에게 아부해서

 위로 올라가려고 생각하는 것은 오오코오찌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에다 같은 남자의 눈에는, 아첨만 잘 할 뿐 실력이 없는 

남자가 위로 올라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던 듯 모두의 앞에

서 정면으로 비난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여유 있는 척하고 웃으며 흘려 넘겼지만 사실은 속이 뒤집힐 만큼 분했다.

 그러나 그런 성가신 인간관계도 과거의 이야기.

 싫었던 우에다도, 자신을 위협하는 아오이케도 이제 없어진 것이다.

 문득 깨닫고 보니 가게 안의 손님도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2시.

 내일도 일해야 인간이 술을 마시고 있을 시간은 아니었다.

 오오코오찌는 쓴웃음을 흘리고 계산을 끝낸 뒤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을 오르던 도중부터 비 소리가 들려왔다.

 빗발은 언제까지고 가늘어질 기척이 없었고, 자동차 타이어가 물을 

튀기는 소리가 끈임없이 이어졌다.

 평소 같으면 대로의 주변은 술에 취한 샐러리맨들이

 여기저기에서 주정을 부리고 있을 텐데,

 오늘은 비 탓인지 사람 그림자도 드물었다.

 이렇게 비가 내릴 때일수록 담배를 피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오오코오찌는 자신의 가방 안에 담배가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이 심심해서 엄지 손톱을 가볍게 깨물었다.

 학생 시절에는 골초로 하루에 다섯갑은 피고 있었지만, 취직한 뒤로는 딱 끊었다.

 비즈니스계에서도 금연이 세계적인 추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서 있자니, 빈 택시가 다가왔다.

 오오코오찌는 우산 속에서 가볍게 오른손을 들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택시 운전사가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다.

 오오코오찌는 그런 택시 운전사가 귀찮아서, 행선지만 말하고 일부러 잠든 척을 했다.

 택시에서 내리고 나서도 여전히 비는 세차게 아스팔트를 두드리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맨션 엔트런스로 뛰어 들어가,

 젖은 손으로 집합 포스트를 들여다보니 편지가 한통 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뒤집어 보니, 늘 옷을 사고 있는 가게에서 온

 다이렉트 메일이었다.

 가벼운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7층 램프가 깜박이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 밖으로 나갔다.

 방으로 가는 통로는 전구가 하나 나가서 조금 침침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있었던 오오코오찌는 엘리베이터 왼쪽의 계단에 있는 

사람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남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는데,

 술에 취했는지 계단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시간도 시간인 만큼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고 비에 젖은 발이 

뒤늦게 갑자기 춥게 느껴져서, 오오코오찌는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 앞까지 걸었다.

 다이렉트 메일을 입에 물고 가방안에서 열쇠를 꺼내던 오오코오찌는

 문득 다가오는 발소리를 깨달았다.

 계단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던것이다.

 불빛이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 한밤중에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체 모를 남자가 기분 나빠서 오오코오찌는 서둘러 문을 

열고 현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오오코오찌는 난폭하게 앞으로 떠밀리고 있었다.

 현관과 방 복도의 단차에 발이 걸려 앞으로 쓰러진다.

 가방은 방 저쪽까지 날아가고 오오코오찌는 바닥에 넘어지면서

 가슴을 세게 부딪혔다.

 "으윽…."

 오오코오찌는 작게 소리쳤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머리 속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얼굴을 들자,

 복도에 사람의 상반신으로 보이는 짙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다음 순간,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히더니 통로 불빛으로 보이고 있던

 그림자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의 기척은 있지만 뒤를 돌아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상대의 숨결만이 불길하게 울렸다.

 여기에 있는 것은 계단에 앉아있던 그 남자다.

 녀석은 강도로, 밤 늦게 귀가하는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섣불리 저항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죽음>의 공포에 오오코오찌의 심장은 일순간에 차가워졌다.

 옛날부터 완력에는 자신이 없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상처입는 것은 필시 자신 쪽일 것이다.

 두 손에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나왔다.

 오오코오찌는 떨면서 현관에 웅크리고 앉아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애원했다.

 "도…돈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아. 부탁이니까 난폭한 짓은 하지 말아줘."

 낮은 웃음소리가 좁은 현관에 울렸다.

 그리고 돌연, 벽을 쾅쾅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오오코오찌는 잔뜩 움츠러들어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위가 밝아졌다.

 형광등 불빛 아래, 주위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오오코오찌는 멈칫멈칫 얼굴을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운동화였다.

 블루 진즈에 짙은 초록색 티셔츠.

 그리고…

 오오코오찌를 향해 사람좋은 얼굴로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인 것은, 

어제부로 회사를 퇴직하게 된 아오이케 타쯔로오였다.

 하라 나리세 고유의 스타일이 맘껏 발휘된 '프레자일'.

 그러나 여태까지 봐 온 그녀의 작품들과는 또다른 충격….

 끈적거리는 듯하면서도 투명하고 얇은 물막 같은 감촉.

 절망속에서 애타게 기원하는 희망.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지….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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