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애증의 조건
노인은 느긋한 손길로 담뱃재를 털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지만 여전히 뺀질뺀질한 면상이었다.
“다시 말해봐라.”
“그만둔다고요. 진짜, 정말, 제대로, 확실하게.”
벌써 몇 번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해원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강조를 덧붙이며 노인을 째려봤다.
“보청기 사드려요?”
그 결정적인 말에 노인의 느긋했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나 아직 귀 안 먹었다. 이 건방진 녀석아.”
“근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해원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인다.
서른 번이 넘도록 얘기했는데 무시로 일관하니 열이 받을 만도 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딴청을 부린다.
“곤란한데?”
“곤란하건 말건 내 알바 아닙니다.”
냉정하게 자르자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식새끼 다 키워봤자 헛짓거리 라더니 딱 그 꼴이구나. 못된 놈 같으니.”
“……헐.”
해원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퇴직하기가 왜 이렇게 힘든 것인가?
퇴직금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만두겠다는데 말이다.
“내가 그만두고 싶다는데 왜 자꾸 말리는 건데요? 대한민국에 쓸 만 한 놈이 나밖에 없어요? 예? 그렇게 인력부족입니까? 그리고 사장님 아들은 철중이거든요?”
“너도 내 자식처럼 키웠잖아.”
한 사장은 잔뜩 삐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해원은 그 말을 꺼내자 말문이 막혔다.
“아니……그건 고마운데요. 저도 할 만큼 했거든요?”
“고마우면 계속 해.”
“……아 글쎄 그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결국 열 받은 해원이 버럭 성을 냈다.
“십년 넘게 부려먹었으면 됐지. 아, 짜증나! 아무튼 나 이제 그만뒀어요. 그런 줄 아세요!”
“싫다.”
“이 노인네가 정말!”
생각 같아선 확 앞에 있는 테이블이라도 엎어버리고 싶지만 겨우 참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노인은 자신의 은인이자 부모 비스무리 한 존재였고 상사였다.
“후임자도 구해놨어요. 저보다 더 잘할 겁니다.”
“난 마음에 안 들어.”
그러나 노인은 완고했고 해원은 솟아오르는 짜증과 혈압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환장할 정도로 답답해서 벽에 머리를 박기 직전이었다.
노인은 발작 일초전인 해원을 보더니 쯧쯧 혀를 찬다.
“그 애가 그렇게 좋으냐?”
그 말에 해원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예, 좋아 죽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두게 해줘요!”
성질어린 대답에 노인이 쳇 소리를 냈다.
역시 자식 키워봤자 헛수고라며 중얼거리던 그는 비꼬듯이 물었다.
“너 싫다고 도망간 놈을?”
“윽!”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해원이 주춤 거렸다. 철중도 그렇고 부자가 사이좋게 혀에 칼을 달았다.
노인은 입 꼬리를 올리며 명백한 비웃음을 지었다. 망할 노인네, 하여간 모르는 게 없다.
해원은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노인은 화가 나서 붉어지는 얼굴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냥 포기해. 얼마나 갈 것 같으냐? 네가 어려서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그거 약발 오래 못가.”
어린 애 달래듯 아우르는 말에 해원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러나 노인은 멈추지 않는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만 둬라. 돈, 시간, 감정 낭비야. 유흥으로 젊음 탕진하지 말고 접어.”
“……사장님.”
“왜?”
“아무리 돈이 좋아도 전 감정까지 계산하고 살진 않습니다.”
해원의 말에 노인이 표정을 구겼다. 얘가 지금 뭐라고 씨부리는겨? 라는 얼굴이다.
“그리고 낭비해도 내 돈이고 내 시간이고 내 감정이에요. 남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아니 이 고얀 놈이!”
남이라는 말에 감정이 상한건지 노인이 삿대질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해원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장님 돕기로 결심한 것도 내 마음이고 수현이 택하는 것도 내 마음이에요. 내 인생 선택권 저한테 있는 겁니다. 그만둔다면 그런 줄 아세요. 아무튼 허락 하신 걸로 알고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거기 안 서!”
노인이 소리를 질렀지만 해원은 무시했다.
“어이쿠! 저 놈이, 억!”
노인이 뒷목을 잡으며 쓰러졌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을 뿐이었다.
“건강진단 결과 다 알거든요?”
“……쳇.”
요거 안 먹히네, 노인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건강하시니 앞으로 십년은 더 일하실 수 있겠습니다.”
해원은 얄밉게 중얼거리며 방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비척비척 일어난 노인은 분한 듯 옆에 있던 테이블을 걷어찼다.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흥 콧방귀를 끼며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으이구, 헛 키웠어.”
“……그러게 왜 성질을 돋구고 그러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해원이 성격 아시면서, 라고 덧붙이며 옆에 있던 철중이 쓰게 웃었다.
여태껏 옆에 있었지만 너무 조용해서 존재를 잊고 있었다.
노인은 아들을 바라보며 괜히 왈칵 짜증을 부린다.
“넌 왜 애가 저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뒀어! 단단히 씌였구만.”
“저 정도일줄 몰랐죠. 그리고 제가 말린다고 듣나요?”
괜히 자기한테 그런다며 철중은 어깨를 으쓱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노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가냐?”
“구경하러 갑니다.”
“어딜?”
아버지의 질문에 철중은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밖으로 나가자 해원이 전화를 받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쨌든 금연 건물인데 복도에서 저리도 당당하게 피우다니 참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원은 상대방을 협박하듯 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 똑바로 말을 해야 알아듣지. 그래……직접 가 봤어? 없으면 어쩔래?……뭐? 죽고 싶냐?”
전화예절부터 다시 가르쳐야겠다. 철중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해원은 가까이 다가온 친구를 보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듯 손짓하곤 곧 통화를 끊었다.
“찾았대?”
철중이 묻자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할 놈의 집구석, 땅이 왜 이리 많아. 죄다 돌려놔서 찾는데 죽을 뻔 했다.”
탈세는 아무나 하나? 명의라도 돌려놔야지. 그거야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담배 한 대를 물고 창가에 앉았다. 날씨 한 번 기가 막히게 좋다.
햇빛이 따사롭게 내려쬐고 바람은 살랑살랑, 주위에 산이 있어 그런지 초록의 신선한 향기도 물씬 풍겼다. 게다가 고요하기까지 하니 금상첨화라. 이곳에선 마음의 풍랑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내 부족한 정서를 보충해줄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보기만 해도 웰빙이 되는 것 같았다.
사삭거리며 바람에 나뭇잎들끼리 부딪히고, 근처에 있는 고양이들이 냐옹 거리는 작은 울음만이 이곳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나는 자연인이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요즘 나의 생활패턴은 해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난다.
그동안 모자란 잠들을 보충하자는 건지 아니면 유아퇴행이라도 하자는 건지 모를 정도로 바른 생활이었다. 관리인 아저씨는 아침마다 내가 잘 지내는지 보러왔다.
“학생,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요.”
“제대로 된 것 좀 먹어. 이것들이 다 뭐야?”
그는 휴지통에 쳐 박힌 라면봉지를 보더니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하하, 귀찮아서요.”
“쯧, 내가 뭐라도 좀 갖다 줘야겠구만. 몸 상해. 이런 것들만 먹으면. 그리고 이상 있으면 연락해.”
“네.”
헤헤 거리며 대답하자 아저씨는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면 식사준비를 했다.
주로 토스트나 샌드위치 정도다. 빵에 야채나 고기 끼워 넣으면 그게 샌드위치다.
덕분에 완성된 것들은 전부 밍밍하고 엉성한 솜씨였다.
사흘 동안 먹은 것들이 죄다 컵라면, 삼 분 카레 등의 인스턴트였다.
마트에서 식료품 고를 때 이런 것들 밖에 안 사온 내 탓이었다.
먹는 건 그렇다 치고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이래도 되나 싶다.
오기 전에 결심한 것들을 실행하질 않으니 슬슬 압박감이 밀려온다. 사흘이나 놀았으니 슬슬 시작해볼까. 방으로 기어들어가서 책들을 꺼냈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몇 번이나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십분 정도를 끙끙대다가 책을 덮었다.
어제 읽다 말던 소설책과 MP3, 스피커를 챙겨들고 밖으로 향했다.
산언저리쯤에 세워진 이 별장은 근처에 몇 채의 건물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낮잠을 자는 고양이 몇 마리만이 내 근처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뿐이다.
관리인 아저씨가 키우는 거라는 데 팔자가 좋은 모양이다.
뱃살도 두툼하고 털도 반질반질 한 것이 고아먹으면 딱 좋게 생겼다.
요즘 허리도 안 좋은데 한 마리 몰래 가져다먹을까 생각을 하며 빈둥빈둥 늘어졌다.
테라스에 있는 흔들의자에서 넋을 놓고 있으려니 별별 상상이 다 든다.
마음 한 편에서 이렇게 한가하다니 미친 거 아니냐며 제정신이 잔소리를 퍼붓긴 했지만 무시했다.
이 나른함은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다. 또 체력의 한계라는 약점도 있었다.
무념무상의 단계로 나아가는 지금의 정신 상태를 수습하기엔 에너지가 바닥이었다.
거기에 방금 전에 읽은 책까지 더해 허무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책장에서 아무 책이나 한권 꺼내왔는데 잘못 고른 것 같다.
하필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봤더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현기증을 느끼는 건 ‘자기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라고 나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지 보단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서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지금 내가 현기증을 느끼는 건 번역이 엉망진창이라 그러거든? 책과 대화도 나누었다.
문맥이 맞지 않아 성질이 났지만 그래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집요하게 봤다.
간간히 괜찮은 문장들이 마음을 잡아 끈 탓도 있을 것이다.
남녀관계를 치밀하게 파고 들어간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재미는 지독하게 없었다.
첫 번째 배신은 그 연해작용으로 인해 또 다른 배신을 야기하며, 그 하나하나의 배신은 최초의 배신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먼 곳으로 이끌기 마련이다.
읽다가 ‘그래! 맞아! 그거야!’ 하면서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필터를 통한 문학과의 조우였다.
사실 이런 감정과잉 소설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냥 눈에 띄어서 들고 나왔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반대되는 편향으로 그것을 이겨내고 싶은 보상심리를 추구한다더니 내가 그 짝이었다. 난데없이 문학청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버려두라, 내 궁핍한 영혼을 살찌우리라.
책은 나의 소울 푸드.
흐흐흐흐, 미친놈 마냥 음산하게 웃으며 엉망진창인 책을 읽어나갔다.
단어의 반복이 거슬리고 쓸데없이 집요한 감정묘사도 지겨웠지만 괜한 고집으로 읽어냈다.
어쩌면 활자중독의 습관성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책을 봐야한다, 나는 공부해야한다 의식적으로 세뇌가 걸려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현시대의 모든 학생들은 지식을 활용하지 못하는 레디메이드 인생이라지만 나는 전공공부의 압박을 벗어날 수 없는 팔자인 것이다. 가방에 들어있는 법전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옆에 둔 MP3에 스피커를 연결해놓고 음악을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만 선별한 건 참 좋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들고 내려온 게 댄스곡들만 있을 게 뭐냐. 노래방 애창곡들만 모아져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따라 불렀다. 정말 할 일이 없었으니까.
현실도피의 극치였다.
삼일 간 공부라곤 한 줄도 안했다. 시도는 해봤지만 읽히지가 않는다.
뇌가 파업선언을 했고 심신은 급격히 노화했으며 관절은 삐그덕 거렸다.
그 와중에도 식욕과 수면욕만은 왕성한 것이 참 웃겼다.
냉장고엔 관리인 아저씨가 준 밑반찬과 비서아저씨가 사준 음식물 등이 가득 쌓여있었다.
심심하면 먹고 졸리면 자고를 반복했다.
공부할 것도 가져왔고 차고에 예비용으로 쓰는 차도 있어서 심심하면 드라이브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드리지도 않는다.
온종일 늘어져있었다.
이러다 퇴화되면 어쩌지 걱정될 정도로 굼뜨게 하루하루를 보냈고 이러다 벌레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벌레가 되어 있더라는 카프카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벌레는 싫은데, 이왕이면 고양이 어떨까? 부잣집 고양이로 태어나서 고상하게 살고 싶다.
하루 종일 이런 헛짓거리만 하면서 보내고 있다.
쓸데없이 넓은 집안은 안정도 안 돼서 야외에 나와서 궁상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빈둥빈둥 소파 위를 굴렀다.
의자에만 앉아있자니 허리가 아파서 자리를 옮기며 성의 없이 불러재끼는 노래는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나보다 노래를 더 못 부르는 가수라서 그런지 별로 창피하지가 않았다.
이 생각을 하자 웃음이 튀어나와서 혼자 미친놈처럼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허리 끊어지게 쳐 웃다가 가실 때 쯤 다시 공허함이 밀려왔다.
숨을 고르며 누워있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흐르다니, 부스스 일어나 책과 그릇을 정리했다.
브런치를 먹을 때부터 있었으니 여섯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붉게 물드는 노을을 감상하며 잠시 더 머물렀다.
주위의 모든 풍경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다니. 태양, 이 대단한 녀석 같으니. 멋있어.
……이거 슬슬 위험해지고 있다. 이제 주위의 모든 사물과 대화할 경지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위험경보가 삐빅거리며 울렸다. 이러다 조만간 꽃 달고 산에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왜 이 가평 구석에서 남의 집 별장에 틀어박혀서 고양이나 부러워하고 자빠진 거냐!
정신 차려라! 김수현! 냅다 그릇과 물건들을 챙겨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릇은 싱크대에 쳐 박고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절대 공부! 사시합격! 인생 한방!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책을 폈다. 화르륵 불타오르는 이 학구열, 그 누가 막을쏘냐!
그러나 내 뜻과는 달리 전혀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읽히기는 읽히는데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문자들.
게다가 한자는 왜 이리 많고 내용은 어려운데 문장은 간결하니 더더욱 욕이 나온다. 우라질레이션!
괴성을 지르며 책상에서 일어나 방안에서 우다다 돌아다녔다.
머리를 벽에 찧기도 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한동안 온갖 지랄 옘병을 떨었다.
그러다 다시 재도전도 해봤지만 도무지 책이 읽히질 않았다.
난 외계인이란 말인가? 어째서 히어링은 되는데 리딩이 안 된단 말인가?
내가 언어 연수 온 외국인도 아니고 한국어를 왜 못하지?
짜증 이빠이 데쓰네, 오 갓, 플리즈. 엇,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뇌가 다이어트를 한 건가?
이미 내 주위는 찌질의 생츄어리였다. 그렇게 한참을 사차원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벨 소리가 울렸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생각을 하다 보니 관리인 아저씨가 떠올랐다.
저녁거리를 가져다준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예, 나가요!”
우렁차게 외치며 방문을 열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방긋 웃으며 먹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앞에 있는 건 관리인 아저씨가 아니다.
“야…….”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해원이었다. 그가 한발자국 움직여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였다.
급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를 확 밀어버리곤 문을 쾅 닫았다.
내가 정신이 나간 나머지 헛것이라고 본 모양이다.
“휴, 몸이 허해졌나? 못 볼 것도 보이네.”
그러나 내 현실도피가 무색하게 문을 쾅쾅 두들겨 대는 해원이다. “야! 문 열어!”
갑자기 잊었던 분노가 끓어오른다. 저 인간은 왜 여기까지 와서 깽판이란 말인가?
내가 누구 때문에 서울을 떠났는데.
“안 여냐? 김수현! 야!”
문을 부실 작정인지 미친 듯이 두들기며 문 열어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온 집안이 쾅쾅 울려댔다. 덩달아 내 머리까지 쿵덕쿵덕 망치질 당하는 기분이다.
아름다운 별장이 공포의 귀곡 산장이 되어버렸다.
“아악! 닥치고 니네 별로 돌아가!”
왜, 왜 자꾸 나를 괴롭히는 건데! 나 좀 내버려두라!
새하얗게 질려 문을 막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챙그랑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으로 뭔가가 날아온다.
“으악!”
와장창창창 소리가 나더니 거실 한복판에 퍽 하고 쳐 박힌 것은 사람 머리통만한 돌이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제이슨의 탈을 뒤집어쓴 해원이 날 죽이러올 것만 같다.
혹은 가평 짱돌 살인사건을 찍어야 하는 건가?
후덜덜 떨면서 있는데 창문에 남은 유리들이 바스라지며 해원이 등장했다.
“아……진짜 가지가지 귀찮게 하네.”
해원은 몸에 묻은 유리를 털어내며 창문을 넘어왔다.
그의 구두 밑에 깔린 유리조각들이 밟힐 때마다 날카로운 소음을 흘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입을 쩍 벌린 채 공황에 빠진 나를 보더니 해원은 인상을 구기며 다가왔다.
“오랜만이다.”
왜 왔냐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안 떨어진다.
해원이 한걸음씩 다가 올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등을 문에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내 앞에 선 그가 다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김수현.”
잔뜩 독이 오른 눈동자를 보자니 뱀 앞에 개구리가 된 기분이다.
눈도 깜빡이지 못할 정도로 긴장해 있는데 해원의 손이 내 쪽으로 다가온다.
길고 보기 좋은 손가락이지만 체격만큼이나 큰 손이다.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날 때리겠다는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 아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는다.
“미안하다.”
……어라? 이게 무슨 소리냐? 살짝 한쪽 눈을 뜨자 해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어디로 갔지?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자 한참 낮은 곳에 위치한 게 보인다.
“내가 다 잘못했다.”
그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맙소사, 그 모습에 놀라 눈알이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지금, 해원이 내 앞에서 빌고 있는 건가?
“뒷조사해서 미안하고, 여러 가지로 속인 것도 다 내 잘못이다. 그 일도 그만 뒀어. 그러니까 제발 한번만 용서해라. 다신 안 그럴게. 나랑 같이 돌아가자.”
“……뭐?”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자 해원의 고개가 다시 올라왔다.
“그만뒀다고. 네가 싫다며.”
“……그만둬?”
뭘? 어떻게? 당황해서 눈만 껌뻑거리는데 답이 들려온다.
“그래.”
“……일?”
해원의 일이라면 사채업? 그리고 깡패 짓? 그만 뒀다고? 확인하듯 묻자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만 뒀어.”
“……정말?”
작은 목소리로 쥐어짜내듯 묻자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 때문에?”
“그래.”
“……그 거짓말 진짜야?”
“그래. 진짜다.”
“……뻥 같은데.”
해원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화가 난 모양이다.
곧 온 집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왜 안 믿느냐며 소리를 친다.
일을 그만뒀든 아니든 성질은 역시 개차반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어리벙벙해 있는데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야, 그렇다고 창문을 깨 부시면 어떻게 하냐?”
철중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거실에 널린 유리 파편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오랜만입니다. 아이고, 이거 완전 난장판이네.”
나를 보고 꾸벅 인사하더니 치워야겠다며 빗자루를 찾는 그를 보자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휘청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는데 바깥에서는 꽥하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관리인 아저씨였다. 그는 음식 쟁반을 들고 깨진 베란다 창문 앞에서 하얗게 질려있었다.
“수현 학생! 이게 어찌된 일이야! 누구 짓이야!”
“……에이 씨발.”
“수현씨, 여기 빗자루 어디 있어요? 도저히 못 찾겠네. 아, 여기 관리인이십니까? 잘 되었네요. 빗자루 어디 있어요?”
관리인 아저씨는 베란다로 넘어와 날 발견하더니 닦달을 했고 해원은 분위기 확 깬다며 욕을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빗자루 어디 있냐며 철중이 질문을 하고 나는……기절하고 싶어졌다.
격동의 두 달 이었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본색을 알고 도망치고 다시 또 만나기까지.
전부 뇌와 심장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신경이 이젠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해원에게 끌려 일방적으로 짐 싸서 서울로 올라와 그의 집으로 옮겨졌다.
식탁에서 철중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있는 지금도 얼떨떨하다.
철중은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하는 나를 보며 많이 먹으라며 반찬을 밀어 준다.
차려주니까 먹긴 하겠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인스턴트만 먹으면 몸 버려요. 사람이 제대로 된 밥을 먹어야지.”
“또 시작이다.”
해원은 지겹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철중은 싹 무시하며 내게만 시선 고정이다.
“해원이가 성질은 더러워도 알고 보면 괜찮은 구석도 있어요. 시키는 일 잘하고 지 앞가림정도는 잘 해요.”
“……예.”
철중은 유리창 값을 지불하고 관리인에게 대신 사과한 뒤 식사까지 만들어줬다.
역시 엄마인가 생각이 들었다. 정작 유리창 깨 부신 건 해원인데 말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너무 큰 충격에 내 뇌에도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다.
빈 방에 환풍기 돌리듯 털털거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엔 ‘나 때문에 일 그만 뒀대.’ 그 하나의 사실만 떠오른다.
흘낏 시선을 올려보니 해원은 철중에게 뭐라고 불평을 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너 왜 집에 안가냐는 소리다. 철중은 알았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를 배웅하고 해원과 둘만 남으니 분위기가 어색의 극치를 이룬다.
그때 해원이 갑자기 내 손을 끌고 가더니 침실로 향한다.
“왜, 왜이래?”
설마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침대로 가는 거냐?
놀라서 손을 떼어내려 하자 해원이 도끼눈을 뜨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일주일동안 얼마나 개고생 했는지 아냐?”
“……엉?”
그리곤 바로 침대로 나를 밀어 넣고는 자기도 옆에 털썩 누워 버린다. 내 허리와 목을 꽉 안은 채였다.
“잠 좀 자자. 밤새고 가평까지 왔다 갔다 하느라 피곤해 뒤지겠다.”
눈을 감고 빠득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며칠 사이에 푹 삭아버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인수인계 하느라고 요즘 밤새 일하고 너 찾느라고 잠도 못 잤다고.”
“……에?”
“그러니까 얌전히 옆에 있어라. 또 도망가면…….”
뒷말은 작아서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마에 주름이 확 파이고 주먹을 불끈 쥔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여전히 내 목을 꽉 끌어안고 있는 손에서……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사랑하면 어디까지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봤지만 결론은 ‘모르겠다.’ 이다.
사랑하던 이유가 사라지고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의 상냥함과 외모적인 조건을 좋아했다.
외모야 이미 질렸고 상냥함은 거짓임이 밝혀졌음에도 이 사람이 싫어지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이래서 정이 무섭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겹고 학을 떼고 싫어해도 결국 그것 때문에 다시 서로를 찾게 되니까.
어쩜 그렇게 미련스럽냐며 욕을 했는데 이젠 그럴 주제도 아니게 됐다.
정말 싫다면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을 테니까.
내 본모습을 보고도 꿈쩍하지 않는 근성과 몇 번을 차여도 다시 달려드는 광기어린 집착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나 때문에 일까지 포기했다니 의외로 기특한 남자다.
만득이 비슷했던 이미지가 급 호감으로 변해서 만 원짜리 지폐는 되 보인다.
어젯밤에 잠이든 그를 관찰하다가 나도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일어나니 아침이었고 해원은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채다.
자다가 답답해서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꽉 끌어안길 반복해서 포기하고 잠들었는데 깨어나도 이러고 있을 줄이야. 감탄인지 허탈인지 모를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빤히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얼굴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어느 방송에선가 부인인지 남편인지가 제일 사랑스러웠을 때가 언제인가 물어보자 한 연예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 옆에 있는 모습이 참 좋더라고.
바보같이 침 흘리고 코골아도 정말 내 사람이구나 싶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신혼이라서 그렇지 병신, 비웃었는데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자세가 불편해서 뒤척거리자 잠이 깬 그가 눈을 번쩍 뜬다.
갑작스런 취침에 움찔 놀라자 나를 확인한 그가 다시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곤 뭐라 또 웅얼거리는데 들리지 않는다. 입가에 귀를 가까이 대니 그제야 조금 갈피가 잡힌다.
가지 말고 계속 옆에 있으란다.
“……풋.”
집념이 느껴지는 한 마디에 픽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나는 화장실이 급했기에 주저 없이 그의 팔을 휙 던져버렸다.
신진대사 앞에서는 사랑이고 나발이고 다른 것 다 소용없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해원의 칫솔로 이빨을 닦는데 어느새 잠이 깼는지 해원이 비척비척 걸어 들어온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날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옆에 있으랬지?
부라리려면 눈곱이나 떼고 하든가.
이빨을 닦으며 눈빛으로 타박을 하자 그가 변기뚜껑을 내린 채 옆에 앉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모양이다.
“하여간 말 더럽게 안 들어.”
초췌한 몰골로 벽에 머리를 기댄 채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분에 안에 있는 거품 다 흘릴 것 같아 재빨리 입안을 헹궜다.
어이없게도 연애한지 삼년 만에 처음으로 상대를 귀엽다고 느꼈다.
저 인간을 평가하는 말에 이 단어가 나오다니, 아무래도 미쳐가는 모양이다.
해원은 피곤하다며 다시 침대를 타고 드림랜드로 여행을 떠났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짐도 가져다 놔야하고, 여러 가지로 신세도 졌으니 집에 가기 전에 경헌 네 집부터 갔다.
걸어가기 귀찮아서 슬쩍 해원의 차키를 훔쳐 차를 타고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며 송구함에 온 몸을 뒤틀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난리를 쳐놓고 다시 붙어먹었다고 말하는 것도 창피하고, 남의 별장에서 난동을 부린 것도 미안했다.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석고대죄를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 와중에 도착했고 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그러나 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다.
학교 도서관이라도 간 건가? 비밀번호야 알고 있으니 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거실은 텅 비어 있다. 에어컨도 틀어져있고 공부하던 흔적도 보이는 사람이 안 보인다.
지금 시간이 오전 열 한 시니 혹시 밖에 식사라도 하러갔나?
짐이라도 미리 챙겨놓으려고 내가 쓰던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고리를 잡았을 때 무언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띄엄띄엄 들리는 그 소리를 따라 걸으니 경헌이 쓰는 안방이다.
혹시 얘들이 여기있는건가 싶어 방문을 열었다.
“얘들아, 나 왔!…….”
그러나 말을 끝마칠 수가 없다.
침대 위에선 경헌이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고 유현이 위에 올라타선 헉헉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얄딱 구리한 상황은 무엇일까? 뻣뻣하게 경직된 채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경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경기를 일으키며 놀랐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행동을 멈추려했다.
그러나 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모가지를 빨아대는 유현이 때문인지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 잠깐! 수현이 왔어!”
“웃기지마. 걘 가평에 있잖아.”
경헌이 발버둥을 쳤지만 유현은 아랑곳없었다. 그리곤 경헌의 벨트를 푸르기 시작했다.
셔츠는 이미 다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진짜야!”
“알았어, 알았어. 한번만 하자.”
알긴 개뿔……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다. 유현이 경헌을 덮치고 있었다.
“앗! 잠깐, 그만!”
경헌은 필사적으로 말리려 했지만 유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유현이가 호리호리 해서 그렇지 저래 봬도 태권도 3단에 힘이 굉장히 센 놈이다.
아니면 어떻게 장정들을 깔고 다녔겠는가?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허허허허허…….”
어이가 없어 건조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걱정 끼친 게 미안해서 한 턱 쏘려고 했더니 이것들이 지금 떡방아를 찧고 있네?
내가 뒤에서 웃고 있는데도 유현은 절대 눈치 채지 못했다. 하긴, 눈깔 뒤집혔는데 뭐가 보이겠는가.
부엌으로 갔다. 일단 목이 마르니 뭐라고 마실까 했는데 마침 냉장고에 맥주가 보인다.
반갑게 안아들고는 식탁위에 팝콘봉지도 가져왔다.
다시 안방으로 가선 문 옆에 아예 자리를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 그……그만.”
“……하아……읏.”
“진짜 수현이 왔다고! 읏…으응.”
“수현이고 나발이고 지금 나 떡 안치면 죽는 병 걸렸어.”
저런 썩을 놈, 그 대사 키핑해두마. 두고 보자 김유현.
그건 그렇고 생 라이브 쇼로 포르노를 보게 되다니 진귀한 광경이다.
팝콘을 아작아작 깨물어 먹으며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김수현!”
목이 터져라 나를 부르는 경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열렬한 환영에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응원을 했다. 그야말로 '축 절대반지 바텀데뷔'였다.
[럽필 외전]
love terror-한 없이 민폐에 가까운 애정
시종일관 시무룩했던 수현을 가평으로 보냈다.
비록 다정다감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이 지낸 정 때문일까?
괜히 보냈나 싶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경헌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수현이 학업방해를 유발하는데다, 붕대인간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고 또 자신의 연애사업에 지대한 훼방을 끼친다.
그리고 수현이 없으니 돌아가겠다는 유현을 붙잡은 이유는 사실 경헌에겐 나름 속셈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이 경헌의 집으로 옮겨온 뒤 방에 틀어박혀 화석처럼 굳은 수현은 그렇다 치고 둘은 공부를 계속했다.
유현은 어색해했고 경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저지른 일, 남자답게 마저 고백을 했다.
‘어차피 너도 내 마음 알고 있으니 말 할게.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엉?’
유현은 그 말에 당혹스러워 했지만 싫다고 딱 잘라 거절하진 않았다.
그저 곤란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다.
‘나 아무 생각 없는데?’
‘……윽.’
거절보다 더한 타격을 주는 유현이었다. 경헌은 또 한 번 좌절했지만 어차피 상대는 유현이었다.
이런 일 정도로 무너지기엔 앞으로 갈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고민 해봐.’
‘공부해야 되는데…….’
경헌은 다시 한 번 휘청거렸다.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과 화를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미친 듯이 손해인 것을 알지만 마음은 이미 넘어갔으니 어쩔 수가 없다.
‘다른 남자들은 만나잖아.’
‘그건 섹스 하려고 만나는 거고. 공부해야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차라리 대놓고 거절을 해라. 경헌은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무릎을 꿇을 순 없었다.
‘알았어. 이 시기가 중요한 건 나도 알아. 원래 고시 끝나고 말하려고 했으니까.’
유현도 그 말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너도 다른 남자 만나지 마라.’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인상을 구겼다.
‘뭐?’
‘그 남자들 만나지 말라고.’
‘왜?’
어째서 자신이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경헌은 어금니 꽉 깨물고 설명을 했다.
‘내가 너한테 고백했잖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뒹굴 걸 생각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심이 샘솟는다.
그러나 유현은 도저히 이해 못하는 표정이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세 번째 확인사살, 이미 너덜너덜해진 경헌에겐 타격이 컸다. 이젠 뭐 막 가자는 거냐?
결국 열이 받은 경헌이 책상을 치며 외쳤다.
‘그럼 차라리 나랑 해.’
‘엥?’
유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경헌은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충격을 받아 놀랐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또 둘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난감함에 온 몸이 당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유현을 쳐다보며 경헌을 결심했다.
‘그래, 될 대로 대라…….’
더 이상 망가 질수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 이후로 유현이 남자들 연락을 받나 감시했다.
다행히 수현이 저모양이라 밤 마실 까진 참는 모양이었다. 유현은 버럭버럭 성을 냈다.
‘아니, 우리부모님도 날 포기했는데 니가 뭔데 날 관리해!’
맞는 말이라 살짝 찔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 후엔 멋대로 남의 집을 점거한 뒤 골방늙은이마냥 방에 틀어박혔던 수현을 쫓아내니 조금은 홀가분해진 기분이다.
그것이 사일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재앙의 시작이었다.
해원이 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간 뒤 유현과 경헌은 덩그러니 남아 난감한 시간을 보냈다.
어떻게 내외 할 거 없이 민폐인지, 어른들 말씀 잘못된 거 없다더니 친구를 잘못사귄 그의 마음은 쓰렸다.
‘어쩌지? 가봐야 되나?’
유현은 수현이 걱정된다며 가평으로 가봐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안절부절 했고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느라 진땀을 뺐다.
‘거기까진 모를 거야.’
명의가 다른 데로 돌아가 있으므로 라는 말은 쏙 뺀다.
그러나 유현은 안심하긴 커녕 밥은 제대로 먹는지 공부는 언제 할 거냐며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아이고 타령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불길한 상상이 펼쳐진다.
저렇게 잘 맞고 친한데 둘 사이에 아무런 일은 없을까? 혹시 친구 이상은 아닐까 의심이 드는 것이다.
‘너 수현이랑은 그냥 친구지?’
조심스레 묻자 유현의 시선이 경헌에게 돌려졌다.
무슨 소린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곧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수현이랑은 안 해.’
‘왜?’
‘가족이나 동물이랑 하는 것보다 더 껄끄러운 기분이 드니까.’
‘무슨?’
‘……자위하는 기분.’
유현은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정말 싫겠구나, 동의라도 해줘야하나 잠시 고민이 들었다.
어째서 하고많은 남자 중에, 하필이면 김유현이냐? 하루에 세 번은 꼬박 꼬박 드는 생각이었다.
자신의 취향이 이리도 그로데스크를 넘어 아스트랄 할 줄은 몰랐다.
어린 시절에도 게이임을 자각한 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고민했던 시간만큼 힘들었다.
경헌은 성 취향만 빼면 모든 게 스탠다드한 인간이었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나름 고급스럽게 자라 대충 건방지긴 했지만 말이다.
여태 만나왔던 상대들은 어느 정도 구색이 맞았다. 유현도 외모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성격이 문제였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똘끼를 가지고 있다 보니 옆에 있으면 심신이 피곤했다.
거기에 수현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로 경헌은 그들과 같이 다니고 몸무게가 3kg가 빠졌다.
그런 고생도 몰라주고 유현은 남자도 못 만나게 한다며 투덜거렸다.
“아니, 내가 왜 네 눈치를 봐야하냐?”
그러나 말과는 달리 경헌이 사준 음식을 먹으며, 편하게 집에서 공부하고 뒹굴거리는 유현이었다.
뻔뻔도 저 정도면 심각하다. 경헌은 집에서 보내준 택배를 풀면서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근데 그게 뭐야?”
유현은 먹을 것의 향기를 맡고 경헌의 근처로 다가왔다.
“복두황정차라는 데.”
“그게 뭔데?”
“정력에 좋은 음식이래. 요즘 공부하느라 야윈 것 같다고 보내 주시더라. 커피나 탄산 같은 거 먹지 말고 이거 먹으래.”
정력에 좋다는 말에 유현의 눈이 번쩍했다.
자고로 남자란 정력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 그래도 외식이 잦다며 얼마 전부터 가정부를 보내겠다고 난리치는 경헌의 집이었다.
부잣집 막내 도련님답게 과보호를 받고 있었다. 유현은 경헌이 들고 있는
“나도 한 잔 줘.”
“그래.”
경헌은 물통에 담겨진 차를 두잔 따르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집에서 미리 다린 것을 몇 통이나 보내왔다.
“냉장보관해서 물이나 차 대신 먹으라네.”
복분자, 두충, 둥글레로 이루어진 차였다.
경헌은 한꺼번에 먹으면 좋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며 집에서 보낸 설명서를 읽어 내렸다.
그러나 유현은 무시하고 바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경헌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정력증강이란 생각밖에 없는 유현이었다. 그 뒤로 둘은 복두황정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웬지 효과 있는 것 같아.”
“그러게. 평소보다 덜 피곤하네.”
한방차라서 그런지 커피나 녹차등보다 몸에도 좋은 건 확실했다.
그러나 경헌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유현이 수분섭취를 무척이나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에 2리터 정도의 물을 먹기 때문에 다섯 통은 이틀 만에 금방 동이 났다.
몸에 좋다고 물 대신 복두황정차를 과잉섭취 한 것이다. 그리고 유현의 상태는 점점 이상해져갔다.
“……이상하게 근질근질하네.”
“응? 어디가?”
유현은 몸 상태가 좋아진 건 알겠는데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느꼈다.
만약 수현만 있었다면 공부 때려 치고 클럽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혼자라도 가볼까 했지만 경헌이 보내줄 리가 없다.
담배 사러간다는 핑계로 몇 번 나가볼까 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을 하는 등 방해를 펼쳤다.
우린 고시생이고 절제해야 돼가 이유였지만 속이 빤히 보였다.
성질 같아선 확 던져버리고 싶지만 합의금 물을 돈이 없다.
어쨌든 얼마 전에 고백까지 받은 상대이니 더 문제다. 김유현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란 건 있었다.
자기 좋다는 진귀한 인간이 나름 고맙긴 했다.
‘저 멀쩡한 놈이 어쩌다 나 같은 난봉꾼을…….’
경헌이란 존재는 싫지는 않지만 부담스럽고, 모자란 데는 없지만 너무 과하다.
순정을 간직한 이십대 후반의 남자란 어쩌면 외계인 같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특히 유현 같은 인간에겐 순진함이 찌질 해 보이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어서 빨리 맘 접고 정신 차리길 바랐는데 아직은 먼 일인가 보다.
김유현이라고 해서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도 한때는 천진난만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타고난 똘끼는 옵션으로 붙어있었지만 그래도 또래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환상도 갖고 있었다.
다행히 머리는 좋아 공부는 잘했지만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으며 적당히 약아서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았다.
수현이 그때엔 모범생의 탈을 뒤집어쓰고 욕구불만에 걸려있었다면 유현은 일찌감치 성 취향을 깨닫고 어린 외모를 무기로 원조교제에 가까운 관계들을 맺고 있었다.
회사원이나 대학생들을 사귀며 주변에는 일절 알리지 않은 채 중학생 때부터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지방출신이었기 때문에 소문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었다.
옆집 숟가락 객수까지 안다는 시골입심은 무척이나 보수적이라 조금만 튀어도 바로 자신에게까지 들렸다. 시내에 있는 대학가에는 다행히 게이 바가 있었고 그런 곳에서 주로 파트너를 골랐다.
약삭빠른 김유현은 어른 남자들의 허세라는 것을 이용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얻어 낼 줄도 알았다.
원하는 가방이나 옷, 신발이 갖고 싶으면 늘 같은 것만 입고, 신고 다녔다.
‘아, 뭐가 정말정말 너무너무 갖고 싶다.’ 라고 한탄처럼 중얼거리면 알아서 선물이랍시고 들고 왔다.
수현에게 내숭을 사사한 선생답게 그의 내숭도 가히 여자연예인 뺨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한없이 맑고 티 없이 깨끗한 십대의 순진한 바텀 인 척 하며 남자들을 희롱하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로 유용하게 사용됐다.
그래도 언젠가 자신과 운명 같은 상대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게 그의 유일한 순진함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선 자신이 탑이 되기도 했다.
근처 대학에 순진한 대학생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비밀은 영원할 수 없는 법이고 어느새 바람둥이 딱지가 붙어버렸다.
그다지 질이 좋지 않다는 것도 몇 년 사이에 들켜버렸고 그는 수험에 올인 했다.
노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인생을 오입질에 낭비할 순 없었다.
서울로 가서 화려하게 놀아 주마 결심하고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첫사랑과 만났다. 상대는 같은 반 동급생 최정웅이었다.
유현에게 간혹 시비를 걸기도 했던 녀석으로 덩치가 꽤 컸다.
엄청난 모범생으로 뺀질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별 같잖은 놈이었다.
‘이제 와서 정신 차렸다고 지가 뭐 될 줄 아냐?’
그 말을 듣고 빠직하지 않았다면 김 유현이 아니었다.
성질은 제대로 삐뚤어지고 뒤끝이라면 끝장나던 그는 가슴 깊이 그 말을 새겼다.
‘두고 보자. 곰탱이.’
유현은 그때부터 미친 듯이 공부했고 2학년 2학기 중간고사에서 성적을 올렸다.
곰탱이를 앞지르기 위해서 코피 터지게 공부했다.
원래 높은 편이던 점수를 평균 5점을 올리자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담임은 ‘철없던 니가 철들었구나.’ 응원을 하고 곰탱이는 제대로 한 방 먹었다.
당당하게 곰탱이에게 썩은 미소를 날려주자 낯짝이 제대로 구겨졌다.
‘이 맛에 공부하는 구나.’
유현은 그 후부터 남을 밟고 올라서는 쾌감을 배웠다.
처음 남자를 깔았을 때의 그 쾌감보다 덜하진 않았다. 곰탱이는 그때부터 유현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너 학원 어디 다니냐?’
‘나? 씨알학원 다니는데?’
‘아 그 씨발 학원?’
씨알이라고 시내에서 꽤 유명한 학원이 있었다. 그곳의 별명이 씨발이었다.
스파르타식이라서 아이들이 진심으로 욕 별명을 지어준 곳이었다.
라이벌 학원에 다니던 곰탱이는 바로 유현의 학원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곰탱이와 유현은 라이벌 구도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단순한 십대 남자아이들답게 처음의 목적은 잊고 사이좋게 문제집을 사러 다니고 가끔은 놀러 다녔다.
유현도 건전한 학창시절을 즐기려고 했다.
그러나 다년간 남자 맛을 들인 탓에 의도하지 않아도 색기가 질질 흘렀던 게 문제였다.
한참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곰탱이는 서서히 유현에게 성욕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현은 자신의 일엔 약간 눈치가 느렸다.
악의가 없는 일에는 한없이 순진한 이중적인 성격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곰탱이를 후리고 있었다.
최정웅은 유현을 여자 다루듯 시작했고 은근슬쩍 스킨쉽을 시도하는 듯 과감한 행동을 하면서도 내면적인 자기혼란에 빠졌다.
‘나는 호모란 말인가! 이럴 수가!’
어찌 보면 참으로 불쌍한 아이였다. 결국 술을 마시던 중 유현을 덥쳤다.
술에 꼴아있던 유현은 옳다구나 하며 받아들였고 결국 둘은 일을 쳤다.
‘……헉……헉, 유현아. 좋아해. 으윽…’
‘아앗……으응……좋아……거기……더.’
취해서 부모도 못 알아보던 상태였던 유현은 오랜만에 섹스에 넋이 나갔다.
정웅인지도 모르고 교태를 부렸고 자기도 모르게 익숙하게 조였다.
순진했던 정웅은 그 자극에 더욱 정신 못 차리고 박아댔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 정웅은 유현 앞에서 싹싹 빌었고 유현은 숙취에 시달리며 얼라리요를 외쳤다.
책임지겠다고 좋아한다고 비는데다 일까지 쳤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현도 내심 정웅이 귀여워서 둘은 곧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둘의 만남이 순탄할리만은 없었다.
철없고 개념 없는 십대였던 정웅은 유현과의 섹스에 맛을 들였다.
툭하면 엉덩이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고 엄청난 소유욕을 보였으며 진심으로 유현에게 마음을 던졌다.
‘사랑과 정열을 그대에게’ 그 자체였다.
성인 남자들의 담백함과는 다른 어리지만 솔직한 감정표현이 좋았었다.
귀엽고 한심하고 사랑스럽고 복잡한 기분을 느껴졌고 가끔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버려두었다.
헤테로에 가까운 동급생이라 문제는 많았지만 일단은 좋아하니까, 신선한 것이 나름 재밌었다.
게다가 덩치만큼이나 성기도 크고 힘도 좋고 어려서 그런지 정력도 좋았다.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커버하며 둘은 시간 나는 대로 몰래 섹스를 즐겼다.
맞벌이 하던 정웅의 부모는 거의 집에 없었고 공부를 핑계로 놀러가서 뒹굴었다.
임신 걱정 없는 십대의 성욕이란 가히 발정기 짐승에 가까운 행태였다.
정웅은 둘만 있을 때면 늘 유현의 옷을 벗기고 피부를 핥고 빨아댔다.
성욕이라면 만만치 않게 높던 유현은 어느 정도 몸이 달았다 싶으면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아……아앗……아앙……거기 더……더 세게 박아줘.’
‘으읏…………조이지마. 큭, 쌀 것 같아.’
공부하다 놀다가 박다가를 자다가 또 박다가 배고프니 먹다가를 반복하며 나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둘의 성격이 달라 자주 다투긴 했지만 장난 정도였다.
섹스 할 때 외엔 냉정한 편인 유현을 정웅은 못 마땅해했고, 바보같이 순진한 정웅을 유현은 비웃었다.
‘너 왜 그렇게 차가워? 사실 내 몸이 목적이지? 흑.’
‘아……토 쏠려.’
정웅의 앙탈에 솔직하게 유현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정웅은 삐쳤다.
그런 그를 나 몰라라 하면 정웅 쪽에서 화가 풀려 결국 먼저 다가오는 게 반복이었다.
‘유현아, 하자.’
‘넌 머릿속에 그것밖에 없냐?’
둘은 옹녀와 변강쇠 같은 커플이었다.
하루에 한번은 꼭 어떻게든 박아보려고 하는 정웅과 별 관심 없는 척 튕기면서도 결국은 자신도 같이 흥분해서
끝을 보고야 마는 유현이었다.
그러나 어린 그들의 연애가 순탄할리만은 없었다.
고3이 되고 바빠졌지만 둘은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유현 쪽은 살 붙은 정이 무섭구나 느끼며 정웅에게 익숙해졌다.
그러나 원래 스트레스에 약한 정웅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유현 쪽은 꾸준히 성적이 오르는데 자신은 제자리 아니면 조금 떨어지는 등 성적이 들쑥날쑥해졌다.
유현은 까칠한 제 딴엔 위로도 하며 다독였지만 그럴수록 정웅은 더욱 삐뚤어졌다.
막말로 같이 놀고 같이 뒹굴던 유현 쪽은 여유만만이니 자신만 손해 본 기분이었다.
섹스도 뜸해졌다.
위로한답시고 잠자리 기술을 선 보여줘도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며 의처증 걸린 남편마냥 화를 낸다.
‘씨발 놈, 내가 요즘 지 밖에 더 있나? 언젠 오럴 한번만 해 달라 애원하더니 저게 눈에 뵈는 게 없나?’
억울하고 성질은 나지만 좋아하니까 참았다.
시큰둥해하면 자신이 올라타서 절정을 이끌었고, 화풀이 같은 섹스에도 색다른 쾌감을 위로삼아 참았다. 지 꿀리는 대로 유현에게 난폭하게 삽입을 하기도 하는 둥 시간이 지날수록 정웅의 상태는 나빠졌다.
싫다고 거절했음에도 유현의 바지를 벗기고 강제적으로 피스톤 질을 했다.
애무도 없이 자크만 내려 콘돔을 끼고 퍽퍽 소리가 나게 박아댔다.
‘아앗……으응……아, 아파……악!’
‘윽……좋아하면서 웃기고 있네. 걸레 같은 게, 넌 넣어주기만 좋아하잖아. 싫다면서 다리나 벌리고……그렇게 이 짓거리가 좋아?’
‘아……윽……뭐라고?’
결국 유현도 성질이 나서 섹스도중에 상대를 걷어차 버릴 지경까지 가버렸다.
같은 나이지만 정신연령은 한참이나 어린 새끼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머리꼭대기에 기어 올라와서 지랄하고 자빠지셨다.
‘야 이 개새끼야! 맘대로 꽂게 해주니까 호구로 보이냐?’
참을 만큼 참았고 갈 때 까지 왔다. 두고두고 쌓인 원한과 성질이 한 번에 폭발했다.
그날 제대로 자근자근 밟아줬다.
‘이런 별 그지 같은…….’
정말 최악의 엔딩이었다.
한쪽은 커다란 덩치를 해갖고 맞고 나서 뭐가 그리 억울한지 불쌍하게 울고 있고 한쪽은 담배를 뻑뻑 피며 내가 왜 이런 놈이랑 사귀었나 후회를 한다. 결국 둘은 그 일을 계기로 끝이 났다.
유현 쪽은 오만정이 다 떨어졌고 정웅 쪽은 유현의 본모습에 경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정웅 쪽에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심한 수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를 보다 못해 유학을 보내버린 것이다.
그 이후론 정웅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사실 유학 간 것도 인연을 끊은 것처럼 두어 달 보내다가, 정웅이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자 학교에 소문이 돌아서 알게 된 것이다.정웅과 헤어지고 유현은 수험에 올인 했다.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때의 장난 같던 연애로 마지막 보루인 꿈까지 빼앗긴 기분이었다.
어려서 또 철이 없어서 정웅이 실수를 했다. 자신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현은 이기적이었고 남까지 배려하는 다정다감함이 없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봤자 후회밖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한 뒤 편부슬하에서 살던 그와 그의 아버지는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보수적인 곳이니만큼 어린 시절 별별 말을 다 들었기에 유현은 고향을 증오했다.
남의 일 얘기하길 무척이나 좋아하는 한가한 동네 사람들이 참 싫었다.
집과도 거의 연락을 끊었고 명절날에도 거의 찾아가지 않는다.
커밍아웃은 하지 않았지만 가족들과는 거의 남보다 못한 관계인 유현이었다.
정웅이 말도 없이 떠나고 지독한 무관심속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만큼이나 고독한 시간이었다.
수능이 없었다면 그나마 대학이라는 희망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고3시절이었다.유현은 수능 후 서울로 올라오면서 과거의 모든 것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진지해지면 결국 자신만 손해였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유현에겐 고시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사람에게는 다시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서울에 와서 만난 동지인 수현에게도 마음을 터놓는 데 반 년이나 걸렸다.
우정이라면 몰라도 애정을 믿을 순 없었다.
밤이 되자 유현은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공부를 끝내고 이제 자려고 누웠는데 눈이 말똥말똥했다. 왜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 건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수다라도 떨며 시간을 보낼 수현도 없었다.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이라도 보면 잠이 올까 싶어 서브노트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한 정신노동을 당한 뇌가 글자를 거부했다.
더 이상 발전적인 방향이나 학문적인 성향으로 나를 혹사시키지 말아달라며 애원하는 듯하다.
유현은 서브노트를 내려놓고 잡지라도 읽을까 해서 꺼냈다. 그러나 도무지 흥미가 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몸의 갈증은 서서히 더 커져만 간다. 자극도 없는데 슬슬 그 곳이 간지러워진다.
‘왜 이러지?’
요즘 이주정도 얌전하게 살기는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어떻게든 욕구를 풀던 그 치고는 너무나 건전한 삶이었다.
당장 전화로 한 놈 불러내서 떡이나 칠까 생각이 들었다.
고시 생활에 지칠 만도 했지만 경헌의 집에서 팔자 좋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내니 살만 올랐다.
고단백에 필수영양소까지 듬뿍 섭취해서 건강은 더 좋아진다.
‘딸이라도 칠까?’
유현은 가방에서 PSP를 꺼냈다. 수현과 반반씩 내서 장만한 기계였고 몰래 저장해둔 야동이 있었다.
전원을 키고 수현은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남의 집에서 당당하게 하기엔 그도 양심이란 게 있었다.
그러나 이불속에서 더위를 참으며 시청각자료를 애청하는 것으론 부족했다.
어설픈 손장난으론 쉽게 절정을 맞지 못했고 감질 맛의 극대화를 느낄 뿐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낭비한 그는 결국 괴성을 지르며 이불 밖으로 나왔다.
벽을 벅벅 긁으며 정체 모를 고통에 힘겨워 했다.
만약 집이었다면 도움의 손길들이 있겠지만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끄어어어억.”
괴물 같은 신음을 흘리며 유현은 이불을 물어뜯고 허벅지를 미친 듯이 찔렀다.
다음 날 아침, 경헌은 아침에 일어나 늘 그래왔듯이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
토스트를 굽고 잼과 우유, 오렌지 쥬스를 꺼냈다. 그러나 일어날 시간임에도 유현이 나오지 않는다.
오 분 정도 기다리던 경헌은 유현을 깨우러 갔다. 그러나 방문을 두들겨도 아무 반응이 없다.
“김유현? 자냐?”
몇 번이나 노크를 했음에도 안쪽에선 잠잠하다. 경헌은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선 유현이 시체처럼 널 부러져 있었다. 경헌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김유현!”
다행히 숨은 붙어있고 몸이 뜨겁긴 했지만 심각하진 않았다. 놀라서 부랴부랴 유현을 안방으로 옮겼다.
밤사이에 왠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이 방은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야, 괜찮은 거냐?”
그러나 유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만 잤다. 경헌이 어떡해야 하나 안절부절 했다.
밤새 소리 없는 광란의 시간을 보낸 유현은 수면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유현은 잠에서 깨어나 뭐라 웅얼거렸다.
“으어……자……자 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남자를 애타게 찾는다. 그러나 경헌이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자가 무엇일까?
뭘 달라는 것인지 몰라 일단 경헌은 물대신 마시는 복두황정차를 내밀었다.
목이 탔던 유현은 받아서 꿀떡 꿀떡 잘도 마셨다.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격이었다.
몸에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다.
“크허어억!”
유현이 물을 마시다 눈에서 레이져를 뿜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흐릿한 시야로 경헌이 보였다.
에어리언이 인간의 열을 감지하듯 유현에겐 경헌이 남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먹이를 보고 달려드는 맹수처럼 유현은 경헌을 덮쳤다.
“왜, 왜이래?”
문답무용, 유현은 전광석화 같은 스피드로 그의 입술을 덮쳤다.
금욕과 정력 차와 수험 스트레스가 합쳐 이미 제정신을 잃었다.
혀를 잡아 뽑을듯이 빨아대던 유현의 눈에선 광기가 흘렀다.
“한 번만 대줘라아!”
“으악! 진정해!”
아무리 하려면 나랑 하자 외쳤던 경헌이지만 공포를 느꼈다.
자신의 셔츠를 우격다짐으로 벗기고 사타구니를 비비는 행동은 유혹적이라기 보단 호러였다.
“허억……허억.”
유현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밀어내려고 했지만 힘은 압도적이었다.
미친 사람은 괴력을 발휘한다더니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가 없다.
한 동안 둘은 레슬링 선수들 마냥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깔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얘들아! 나 왔…….”
정신없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수현이 등장했다.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구원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유현은 그의 등장에도 아랑곳없다.
“김수현! 살려줘!”
그러나 수현은 어느새 맥주와 팝콘을 가져와 먹으며 구경만 할 뿐이었다.
애타는 절규에도 엄지손가락만 세우며 유유자적 방관만 한다.
“김수혀여어어언!”
경헌은 마지막으로 쥐어짜내듯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유현은 경헌의 젖꼭지를 미친 듯 빨면서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수현은 킬킬거리며 환호했다.
“까짓 거 그냥 한 번 깔리고 책임지라 그래.”
“……윽.”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살을 내주고 목을 벤다는 명언이 생각난다.
탑의 위치를 내주고 유현을 얻을 수 있다면 한번 정도야 상관없지 않을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수현은 고민하고 있는 경헌을 보더니 넌지시 한 마디를 던졌다.
“걱정 마, 걔 잘해,”
그걸 네 놈이 어떻게 알아! 라고 경헌은 외치고 싶었다. 자랑할 광경도 아닌데 보여주고 있자니 창피하다. 깔리든 깔든 일단 수현부터 쫓아내야했다.
“윽……야! 너 나가.”
이제는 슬슬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 유현의 머리를 고정시키며 경헌이 외쳤다.
“싫은데?”
이 좋은 걸 내가 왜 포기해? 화사하게 웃으며 수현이 맞받아쳤다.
유현의 머리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경헌은 마지막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제발 나가라! 돈 줄게.”
그 말에 수현의 귀가 쫑긋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오십 이하론 짤 없어 포스가 풍긴다.
경헌은 힘겹게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백?”
아쉽다는 표정이 한 밑천 잡아보자는 속셈이 보인다.
돈이 아깝지만 이 장면을 보게 하면 두고두고 놀리고 소문낼 게 뻔했다.
놀림감으로 치자면 한 오십 년 정도, 경헌은 이를 빠득 갈며 손가락 두 개를 더 폈다.
그러자 그제야 사뿐히 밖으로 나가는 수현이다.
“오빠 파이팅.”
하리수 마냥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상큼하게 응원을 한 뒤 수현이 자리를 떴다.
“문도 닫고, 아예 집에서 나가!”
“쳇. 치사 빵꾸.”
수현은 사운드라도 감상하려고 한 건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덜컥 문이 잠기는 순간, 모든 구원의 가능성마저 닫힌 기분이었다.
아직도 눈 뒤집혀서 어떻게든 덤비는 유현이었다. 그냥 깔릴 것인가? 이걸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지상 최대의 난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