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빅 하우스 (14/15)

14.빅 하우스

구름이 껴서 약간 흐린 날씨였다. 

사무실은 여전히 한가했고 철중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뗐다. 

들어오라 소리를 내니 상대는 해원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일부러 사무실까지 찾아온 친구를 바라보며 무슨 용건인지 궁금해 했다.

“왜?”

해원은 앞에 있는 친구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인상도 평소보다 더 구겨진 것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니 베개 옆에 식칼이 박혀있더라.”

“뭐?”

“거실은 난장판에 컴퓨터는 박살이 났고.”

“왜?”

“내가 알면 너한테 물을까?”

 해원은 피곤한 얼굴로 답한 뒤에 철중의 책상위에 앉았다.

“게다가 연락두절이야. 이건 무슨 뜻 같으냐?”

“……죽어버려?”

 떠오르는 대로 중얼거리자 해원의 낯이 눈에 띄게 썩어갔다. 

그러나 부정 할 수도 없는 게 아침에 눈뜨자마자 강렬한 살의를 느낀 것이다. 

품고 잤던 연인 대신 아침햇살에 살벌하게 빛나는 식칼이 눈앞에 있으니 아무리 그라도 경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컴퓨터는 박살이 나있고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방음이 잘 되어 있긴 하지만 저 난리에 왜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가도 궁금할 정도였다.

“모니터엔 내가 사준 핸드폰 박아놨더라.”

“……너 무슨 짓했냐?”

철중은 친구의 안위보다 궁금증이 먼저 일었다. 그 반응에 해원이 버럭 화를 냈다.

“아무 짓도 안했어! 안했으니까 묻지. 그래서 더 미치겠다고!”

분명 어제 수현이 요구한대로 친구를 소개시켜주고 원하지 않지만 그들의 친구까지 초대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섹스도 하고 함께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그 꼴이었다. 

억울하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건 자신이라며 해원은 목소리를 높이며 성질 있는 하소연을 했다.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내 덕분에 스터디고 뭐고 파토 나고 아침부터 중노동을 한 둘의 모습은 초췌했다. 유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불만을 참으며 물었다. 그러나 티가 확 난다.

“해원씨 피해서 집을 나간다는 계획은 좋은데.……근데 나까지 가야 되는 이유는 뭔데?”

“집에 남아있으면 해원이 찾아왔을 때 네가 불면 안 되니까.”

사실은 네가 있어야 경헌에게 면목이 선다는 이유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유현은 어이없다는 얼굴이 된다.

“누가 말한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지.”

말도 안 된다며 유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는 철회할 마음이 1 나노 그램도 없었다.

“한 삼 개월 잠수타면 지가 어쩌겠어?”

“야, 그럼 너 밖으로도 안 나가게?”

“응.”

 고개를 끄덕이자 경헌과 유현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심했다. 

해원과 완벽하게 인연을 끊을 것이다.지금 이 곳은 경헌의 집이었다. 

다행히 방도 많으니 얹혀살아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옮긴 것이다. 

오늘 새벽에 급하게 옮기느라 옷과 생활용품 몇 개 외에는 대부분 두고 왔다. 나도 유현의 옆에 앉았다. 서랍정리를 마친 참이었다. 

더블침대와 옷장, 서랍장으로 이루어진 모텔 비슷한 구조의 손님방은 우리 둘이 묵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사실 우리 집 보다는 백배는 좋은 환경이기도 하다.

“그냥 고시원에서 공부한다 생각해라.”

“야, 남의 집인데 네 멋대로.”

“경헌이도 허락했는데 뭐 어때.”

 뻔뻔스럽게 대꾸하자 유현은 이젠 대놓고 질색을 했다.

“도대체 이유가 뭔데!”

“……말하기 싫어.”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이고 뭐고 전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입을 다물고 이불을 뒤집어쓰자 유현이 혀를 차더니 곧 나가버린다. 

나 때문에 공부까지 멈추고 하고, 집까지 점거한 상태라 미안하긴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니터에 보이는 문서에는 내 일거수일투족이 담겨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차곡차곡 담겨있는 그 내용은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고’라는 형식을 띄고 해원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하자 아찔했다.

 그리고 해원이 그것을 의뢰했음이 분명하다 생각되자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리 애인이라 해도 사생활은 보장해야 했다. 나는 해원을 만난 것이지. 

해원에게 인생을 저당 잡힌 것은 아니다. 당장에 가서 사단을 내려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다 나를 붙잡은 것이 복수 심리였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왔다면 나 또한 무례를 저질러주마 결심하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드를 전부 뒤져서라도 약점을 찾아줄 것이다.

예전에 친구가 해준 얘기가 기억났다. 

헤어진 다음 날, 애인 집에 짐을 찾으러 갔더니 애인이 없어 열쇠로 따고 들어갔다.

 PC가 커져있어 들여다보니 화면에선 야동을 다운 받던 중이었다고 했다. 

헤어지고 24시간도 안된 그 동안 전화롤 미안하다 다시 시작하자 애원을 하더니 그런 짓거리나 하고 있었다니. 너무 한심해서 욕도 못하겠다. 아무튼 해원도 남잔데 야동 하나 없을 리가 없지.

미친 듯이 뒤졌다. 그러나 업무용 문서로 보이는 것들 외엔 별 다른 게 없었다. 

미친, 이 새끼는 야동도 안 보나? 아무리 뒤져봐도 야동으로 보이는 것도 없고 즐겨찾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시간 때움으로 고스톱도 안하는지 게임 사이트도 하나 없다.

 오로지 통합검색 사이트 주소와 자신의 회사 홈페이지밖에 없다. 그것도 ‘회사’라고 써져 있어서 알았다. 들어가 보니 평범한 대출업체 같기는 했다. 흥미를 잃고 다른 것들을 마구잡이로 클릭하기 시작했다. 

뭐 하나만 제발 걸려다오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삐끗해서 업무용으로 보이는 파일을 하나 건드렸다. 

별 거 아니겠지 하며 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조현우 사건’ 이라고 적힌 보고서 밑에 거슬리는 단어가 있어 가까이 가서 잘 살펴봤다.

읽어보니 조현우라는 인간이 어느 회사의 돈을 먹고 튀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경찰에 수배를 내렸지만 먼저 잡았으며 그가 이미 도박으로 진 빚을 갚는데 대부분 써버려 원금회수가 힘들다는 내용이 죽 이어졌다.

 가족들까지 전부 붙잡아 딸은 섬에 팔고 나머지 가족들 모두 장기를 밀매했다는 기록이 써있다.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날짜와 결론만은 정확하게 나열되어 있다.

누가 쓴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해원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은 확실 했다. 

적막한 거실에서 그 파일을 보고 있다가 무언가 머리에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얼굴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피로가 날아가고 남은 건 오로지 충격의 여파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다른 파일들을 하나하나 클릭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기업에 필요한 서류였지만 개중에는 그 파일과 비슷한 내용도 있었다.

 나중엔 도저히 더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부를 쓸어버리는 것 같은 고요한 정적이 찾아왔다.

 한동안 멍하니 그곳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십 분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해원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그때처럼 격렬한 살의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칼을 뽑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따위 인간 말종은 하나쯤 사라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확 배때기를 한방 찔러줄까 고민했지만 내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결국 그 대신에 침대에 칼을 박았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이별선언도 없을 것이다. 

침대 옆에 있던 내 옷을 챙겨 입은 뒤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고 아직도 화면이 꺼지지 않은 컴퓨터가 보인다.

컴퓨터를 책상 밑으로 내다 꽂은 것은 무의식 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조금은 속이 시원했고 가방에 있던 핸드폰도 꺼내서 모니터에 박아버렸다. 

이제 해원과 연관되는 모든 것들은 없었으면 싶다. 

내 파일이 들어있는 본체도 짓밟고 다용도실에 있던 망치로 깨 부셔 놨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그의 집밖으로 나와서 무작정 걸었다.

 택시를 타기 위해 정신없이 걸어가다가 술 취한 사람과 부딪혔다.

‘야! 너 뭐야! 똑바로 못 걸어?’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잔뜩 취해선 친구 한명과 걸어가고 있는데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멍한 정신이 그가 내 어깨를 치자 불시에 무언가 치밀어 올라 가방을 놈의 면전에 날려버렸다.

 취객이 쓰러졌고 그 친구가 나에게 덤볐다.

 한바탕 바닥을 구르고 나자 머리가 뜨거워졌고 이대 일로 붙어버렸다. 

둘 다 거나하게 취했기에 상대하긴 어렵지 않았지만 나 또한 무사하지 못했다. 

특별히 맞은 데는 없지만 여기저기 넘어져 스친 곳 때문에 무척이나 쓰라렸다. 

둘이 뻗은 뒤 완전히 지친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비틀거리며 걷다 계단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독한 설움이 밀려왔다.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내 자신의 대한 연민에 찌들려 도착하자마자 유현을 보고 안도와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나 불쌍해졌고 스스로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또 해원이 미웠고 징그러웠다.

 영화에서나 보던 비열한 사채업자가 내 애인이었구나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마저 실망스럽기도 했다.

 여태까지 그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면서 눈감아주고 싶었던 무의식을 마주한 것이다. 

본성을 적나라하게 목격하자 이제 더 이상 현실도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싸움을 하고 내 자신의 난폭성을 해결하자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침대 위에서 잡념에 빠져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온몸의 관절이 굳어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노곤하다. 

목이 말라 물이라도 마시려고 방문을 열고 나가니 그곳엔 경헌과 유현이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다.

“나왔어?”

내가 나오자 둘의 시선이 한꺼번에 꽂혔다.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한잔 따라 마시자 조금 두통이 가시는 것 같기도 하다. 

늘 책만 읽고 있으니 두통은 지병이나 다름없기에 익숙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절대 정들 수 없는 것이었다.

요 근래 공부를 제대로 한 적도 없이 누워있기만 했는데도 머리가 아프다.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는데 유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너 자고 있는 사이에 몇 번이나 그 사람한테 전화 왔었어. 내 번호는 어찌 알았는지.”

“……그럴 줄 알았다.”

유현의 번호 알아내는 것 쯤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아마 경헌의 정체도 알고 있을지도. 

이 아파트에 있는 것도 영 안전하진 않은 것 같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디 지방으로 확 도망가 버릴까?”

“네가 왜 도망을 가?”

 유현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의 집요함을 뼈저리게 알기에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해원은 자기가 납득하지 않는 이상 포기할 리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경헌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슬쩍 우리를 돌아보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곁눈질로 그를 보다가 다시 유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괜히 나 때문에 중요한 시기에 시간낭비를 하게 만들었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친구의 모습에 이제야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

“지금은 말하기 좀 그래.”

물 잔을 싱크대위에 올려놓고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현이 단단하게 붙잡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야!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여기저기 걱정 끼쳐놓고.”

 나 좀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자꾸 얘기하라며 찔러대니 짜증이 와락 밀려온다.

 그러나 내 처지를 생각해서 화를 낼 순 없고 조용히 유현의 팔을 떼어냈다.

“조금만 시간 좀 줘. 일단은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하니까.”

“야!”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방으로 걸어갔다. 온 몸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다.

누워서 쉬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방  문을 잡는데 그때 갑자기 경헌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김수현.”

 저 자식은 왜 또 불러 싸고 지랄일까. 한숨을 내쉬며 옆을 돌아보니 경헌이 손을 까딱거린다.

“잠깐 와 봐.”

“왜?”

귀찮다는 얼굴로 다가가자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

“너 잠깐 어디 내려가 있을래?”

“어딜? 나 갈 데 없어.”

 가족들은 서울에 살지만 인연을 끊었고 친척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돈이라도 많으면 모르겠는데 모아놓은 것도 빠듯하다. 경헌은 그건 안다며 말을 잇는다.

“국내에 별장이 몇 군데 있으니까 아무거나 하나 빌려줄게. 내 명의로 된 집도 따로 있으니까.”

확실히 부자들은 이럴 때 좋은 것 같다,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여유 있게 떠날 수 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경헌은 그럼 자기가 알아서 준비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지금 우리 딴 짓할 틈도 없고, 너도 편하게 공부하고 싶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다.”

하긴 내가 있으면 둘이 공부하려고 해도 자꾸 신경 쓰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를 못 찾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고마워.”

 냉정한 배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준비할 건 별로 없었다. 가져왔던 짐들과 유현이 집에서 가져다 준 옷가지들과 책을 챙겨서 차에 실었다. 일단 한 달 예정으로 내려가는 것이고 생필품은 다 갖춰진 집이라서 따로 챙길 것도 없다. 

같이 가주겠다는 유현의 제의를 거절하고 경헌에게 감사인사를 한 뒤 차에 탔다.

 유현은 자세한 사정을 얘기하지 않자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웅하러 왔다. 쓴 웃음이 나온다.

“민폐 끼쳐서 미안.”

“괜찮아. 아무튼 가서 마음 정리되면 올라와.”

경헌이 내 등을 툭툭 두들겼다. 눈인사로 감사를 대신하곤 차 위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안경을 쓴 남자가 물었다.

“출발해도 될까요?”

“예.”

경헌이네 집안 비서중 하나인 삼십대 남자다. 그가 날 별장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결정하자 바로 다음 날에 순식간에 준비를 마치다니 역시 있는 집은 뭔가 다른 것 같다.

 그건 그렇고 경헌에게 폐만 잔뜩 끼친 것 같다. 

고시 공부 하느라 바쁜 와중에 나 때문에 시간만 뺏기고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큰 배려까지 해주다니 미안한 게 너무 많다.꼭 사시에 합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경헌아, 이 은혜는 출세해서 갚으마. 그리고 미친 듯 공부해서 꼭 상위 15%가 되어 주겠다는 결심도 했다. 그래야만 판검사가 될 수 있으니까.

“꼭 큰 집 보내주마….”

“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필요한 거라도 있냐고 묻는 남자에게 아니라며 손을 흔든 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검은색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거칠게 운전을 하며 옆으로 지나갔다. 주택가에서 사고 칠 일 있나?

 언짢은 표정으로 슬쩍 본 뒤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나 집에 갈래.”

유현은 수현이 가자마자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경헌은 그 말에 인상을 구겼다.

“당분간 있지 그래? 수현이도 없어 혼자 지내기 적적하잖아.”

“내가 뭐 애냐? 그리고 내 집이 더 편해.”

물론 여기가 훨씬 더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같이 지내기엔 어색했다.

 경헌은 유현이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았다.

“어차피 공부하느라 여기 와야 되잖아. 왔다 갔다 하기도 귀찮은데 그냥 있어.”

“……그래도.”

일단 경헌의 마음을 알고 나자 예전보다 더 불편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수현과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둘이 있으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유현이다. 

스터디도 꼭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멀쩡한 집 놔두고 굳이 경헌의 집에 신세질 이유도 없다.

 그러나 경헌이 단호하게 있으라고 하자 계속 거절하기도 곤란했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벨이 울린다.

경헌이 인터폰을 받기 위해 거실로 나가고 유현도 따라 나갔다. 화면에는 해원이 보였다.

“어쩌지?”

유현이 곤란한 듯 얼굴을 구기자 경헌이 다짜고짜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화들짝 놀란 유현이 무슨 짓이냐며 빽 소리를 지를 때였다. 벌컥 문을 열어 재끼며 해원이 들어왔다.

“김수현 어디 있어?”

 인사 한 마디 없이 들어와선 밑도 끝도 없이 수현 부터 찾는다.

유현은 멍한 기분에 실례를 지적하는 것도 잊었다. 경헌은 그런 해원을 보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붕대…….”

난데없이 웬 붕대를 찾고 있냐! 유현은 어이가 없어 속으로만 외쳤다. 의아한 것은 경헌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냐? 그리고 수현이 여기 있지?”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해원은 수현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고 경헌은 그의 어깨를 틀어잡았다.

“없습니다.”

“웃기지 마.”

“진짜 없습니다.”

“그럼 어디 있는데?”

 해원이 경헌의 손을 쳐내며 언성을 높였다.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이런 모습만 봐 왔는데도 경헌은 그러려니 했다.

“십년 쯤 전에 한번 봤죠?”

“뭐?”

“양평 별장에서요. 기억 안 나십니까? 한사장님이랑 저희 할아버지와 함께 몇 번이나 봤었지요.”

그날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나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수현이 돌아온 뒤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혹시 몰라 만일을 대비해 해원을 조사했었다.

 아까 전 전화에서 그가 한지훈의 수하란 것을 알아냈다. 

한지훈이라면 그때 할아버지가 소개했던 사채업자였다. 

그제야 예전에 봤던 한사장과 그 아들과 친구까지 전부 기억이 났다. 

그러나 해원은 경헌을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이다.

 경헌은 살짝 서운한 마음에 그때 개 잡아줬잖아요, 라고 하려다 말았다.

“정해원씨, 그냥 대출 업만 하시는 건 아닌 걸로 하는데요?”

“근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런데 어째서 수현이랑 사귀는 겁니까?”

 적당한 관계라면 상관없다. 경찰과 조폭이 섹스파트너로 지낸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사귀고 있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 비리관계가 아니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다. 수현은 예비 법조인이고 해원은 자신이 알기론 음지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한지훈은 대기업 회장들과 있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정도의 사람이었다.

 어릴 때야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의 할아버지가 보통 사채업자와 어울릴 리가 없었다.

“그땐 제가 순진해서 정말로 곰이랑 싸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뭐?”

“사실은 그게 아니었더군요.”

“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난데없는 곰 얘기에 해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유현도 곰은 또 뭐냐며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헌은 그런 해원을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바라보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곰이랑 싸워서 온 몸에 붕대를 감았다고 생각했다니 아무리 십대였지만 멍청했다. 

사실은 싸움판에서 입은 부상이었다.

“한사장이 무척이나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교육을 받으셨다고요? 이력이 무척이나 화려하시더군요.”

“무슨 말이냐?”

“한지훈 사장이 늦둥이로 얻은 아들을 무척이나 아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후계자가 두 명이라고 공공연히 소문이 돌고 있더라고요. 외아들을 위험한 일을 시키기엔 아무리 악명 자자한 그 분이라도 두려웠나 봅니다.”

“그래서?”

해원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했다. 하지만 경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곧 한 해원 씨가 되신 다던데, 늦기 전에 그만두시죠. 그런 위험한 관계는.”

불시에 해원이 경헌의 멱살을 잡았다.

“이봐, 도련님.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애초부터 경헌이 윤 회장의 손자란 것을 알고 있던 해원이었다. 

예전에 만난 것 까진 일일이 기억은 못하지만 말이다.

“닥치고 수현이 행방이나 불어.”

“안 되겠는데요.”

경헌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해원의 손을 떼어냈다. 

그의 뒤를 의식 한 건지 해원도 순순히 힘을 풀었기 때문에 푸는 건 쉬었다.

“별로 연관 되서 좋을 일 없을 것 같은데 포기하시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의 친구거든요.”

“……뭐라고?”

앞에 뭐라고 작게 중얼 거린 것 같은데 듣지 못했다. 해원이 물었지만 경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원이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끝끝내 무시한 뒤 귀찮은 얼굴로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이제 그만 가주세요. 이곳에 수현이 없습니다.”

“그럼 어디 있어?”

 해원은 끈질겼다. 그러나 경헌역시 만만치 않았다.

“모릅니다. 정 알고 싶으면 찾아보시든가요. 아무튼 나가주세요.”

경헌은 해원의 등을 밀어 현관으로 내쫓았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 해원이 홧김에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확 신고해버릴까 생각을 하며 들어오는데 유현과 눈이 마주쳤다. 

 “너 대단하다.”

깡패를 내쫓다니 보통사람이 보기엔 무척이나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경헌은 유현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조금 으쓱해졌다.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한 대 맞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기대와는 다른 말에 힘이 쭉 빠지는 경헌이었다. 그러나 유현은 그가 좌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아무튼 너 저 남자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야? 수현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야! 빨리 말해. 당최 뭔 소린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경헌의 팔을 잡아당기며 재촉하는 표정이 절박했다.

“진정해.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단지 남자의 신상정도만 파악했을 뿐이다.

 경헌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철중은 더위가 가셔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한 여름이었다면 15년 우정이고 나발이고 친구를 예쁘게 썰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해원의 킥에 움푹 들어간 에어컨은 더 이상 고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한 구석에서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는 해원을 슬쩍 돌아보던 철중은 흠흠 거리며 기침을 했다.

“그 남자 윤 회장 손자라고?”

해원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중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봤다.

 예전에 양평 별장에 간 기억은 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뭘 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년도더라. 흠, 어디보자.”

 손가락으로 횟수를 세가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자 얼추 생각이 난다. 

그때 커다란 항쟁이 한 건 있어서 년도를 상기하자 바로 떠올랐다. 해원이 엄청난 부상을 입었었다.

“아, 그때 너 개 박살 났을 때 같은데?”

“……한철중.”

“……그러고 보니 윤회장이 손자 하나를 계속 데리고 다녔지.”

철중은 해원이 험악한 인상으로 쏘아보자 말을 돌렸다. 차례차례 기억이 난다. 

신생 조직 하나가 겁도 없이 날뛰어 밟아줬을 때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른 조직과 연합으로 쳐들어와서 꽤 일이 커졌고 해원이 처음으로 선봉에 나섰을 때였다. 

물론 활약이야 돋보였지만 덕분에 전치 삼 개월의 부상을 입었고 화염병이 근처에 터지는 바람에 화상까지 입어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양새라 철중은 숨죽여 웃었다.

 온몸에 미라처럼 붕대를 감고 한손엔 기브스를 한데다 눈가도 크게 찢어져 안대까지 했다.

 레이저 수술로 지금은 멀쩡해서 티도 안 나지만 그땐 꽤 심각했었다. 보고 경악을 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그 애지중지하던 애인이 도망을 갔다니 큰일이다. 철중은 곰곰이 생각하다 전화를 들었다.

“나다. 윤 회장이 가진 토지들이랑 숙박업체들 정보 좀 알아 와. 어? 그래. 국내 한정으로. 그리고 그 손자 말인데, 

아니 그 쪽 말고 윤경헌이라고 있어. 그 쪽 재산 내역도 부탁해. 김수현이 그 쪽에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 잘 찾아봐.”

간단하게 명령을 하고 곧 전화를 끊었다.

“며칠 있어 봐. 찾아 줄 테니.”

느긋한 어조였지만 해원은 전혀 안심이 되질 않았다.

“빨리 찾아.”

생각 같아선 그 경헌이란 놈의 모가질 비틀어서라도 토해내게 하고 싶지만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상대였다.

“제길.”

욕을 내뱉으며 해원은 앞에 있는 탁자를 찼다. 철중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정해원, 물건에 화풀이 하지 마.”

저 못된 성미는 하여간 고칠 수가 없다며 그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궁금증이 인다.

“근데 왜 너 피해서 도망가는데?”

물어도 하필이면 정곡만 찌르는 철중이다. 해원은 울컥하는 마음에 살기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동거만 십년, 부대낀 세월은 십오 년의 철중은 쉽사리 겁을 먹지 않는다. 

또랑또랑한 눈으로 대답만 재촉할 뿐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내 직업이 싫대.”

 컴퓨터를 부순 걸로 보아 그 안의 내용을 봤을 거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몇 개의 업무 보고서와 수현의 조사내용까지 담겨져 있었다. 

왜 그것을 봤는지는 모르지만 발단은 그것이 확실하다. 

철중은 잔뜩 우울한 친구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법대생들은 정의감이 투철한가? 성공하려고 하는 거 아니었어? 내 친구들은 돈 벌려고 하는데 걔는 다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질색을 하는지 모르겠다. 수현이 특별히 바른생활 청년인 것도 아니다. 

입도 걸고 행동도 격한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유난인지도 모르겠다.

 해원은 품을 뒤적거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여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이며 등받이에 기대자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았다.

“어찌됐든 일반인이잖아. 자기네들은 특별히 착한 것도 아니면서 이런 쪽은 질색들을 하지.”

겨우 생각난 결론이 이런 것 밖에 없다니 말을 꺼내면서 씁쓸했다. 

철중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음을 흘린다.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구석이 너무 많은 친구였다.

“너 정말 우리 아버지 자식 아니냐?”

“그 농담 정말 재미없다고 몇 번을 말 하냐?”

“아무리 봐도 닮아서 말이지.”

 정작 판박이인 것은 자신이지만 성격은 해원이 빼다 박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가 집착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며 철중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그 애 때문에 그만둔다는 거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담일 줄은 몰랐다. 조직까지 동원해서 찾다니 정성이 뻗쳤구나.”

“내가 농담하는 거 봤냐?”

 해원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친구를 흘낏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철중은 또 한 번 실소했다. 

저런 모습까지 닮았다니 이래서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걱정 마. 꼭 찾아줄 테니까. 넌 그동안 아버지랑 만나서 담판이나 지어. 계속 미적미적 끌고 왔잖아.”

“그 영감탱이가 요즘 계속 날 피한단 말이다.”

“아마 양평에 있을 거다. 거기가 제일 조용하다고 좋아하시잖아. 이때쯤이면 더위도 풀려서 딱 골프치기 좋다고 자주 가시잖아.”

한 사장은 몇 년 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지켜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철중과 간부들이 맡아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다. 

다행히 업무능력은 좋은 철중이라 간부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고 후계자 수업도 거의 끝나가는 중이다. 다들 삼년 안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다들 짐작하는 중이었다. 

사실 해원이 퇴직선고를 해서 미뤄진 것이었다. 

철중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그가 이년 전엔 난데없이 부업으로 이 회사를 차리겠다고 하더니 그만두겠다고 난리를 쳤다. 어차피 이 회사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고 별달리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해원의 존재는 달랐다.

 당연히 한 사장은 개소리 말라고 씹고 있고 간부들도 뜯어말리고 한 때 폭풍이 일었었다. 

물론 철중도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해원이 한번 그만두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주장을 밀어붙일 걸 알기에 포기한 상태였다.

도대체 수현이란 존재가 해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건지 모르겠다.

 한번 보긴 했지만 잘생겼다는 것 외에 별다른 매력도 없는 것 같은 데 왜 저리 미쳐 날뛰는 지 이유를 모르겠는 철중이다. 해원은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이곳에 더 잘 어울리는 인재였다. 

그런 그가 떠난다면 손해가 막심하다. 

기분과 이익을 생각하면 잡고 싶지만 끝내 잡지 못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해원아.”

“왜?”

 거칠게 담배를 비벼 끄는 친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철중은 정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네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꼭 그 애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어?”

“……무슨 뜻으로 묻는 거냐?”

해원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질문의 이유가 궁금한 건지 알 수 없다. 

철중은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에 살을 붙였다.

“김수현이란 남자를 위해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 거다. 그만두면서까지 잡아야할 가치가 있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철중은 대답을 기다렸다. 삼십 초쯤 지나서야 해원은 기가 막힌 얼굴로 길게 숨을 내쉬며 쯧쯧 혀를 찼다.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냐? 쓸데없는 소리할 시간 있으면 빨리 찾기나 해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해원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걔랑 만나서 처음으로 겁이란 게 생겼다. 칼 맞아 나자빠지거나 감옥가면 누가 채갈까 걱정 되서 도저히 이 일 못하겠다.”

그말을 내뱉은 해원은 곧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철중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가 말하던 멍청이가 되어버린 듯 했다.

짝이라서, 친구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어쩌다보니 뭉치게 된 것은 철중과 해원 둘에게 묘한 공감대를 형성해주었다. 삥 뜯기던 사건 이후로 대화라는 것을 하게 되고 가끔은 서로에게 궁금하던 것도 물었다. 

평소엔 꿈쩍도 안하고 자다가 점심시간엔 밖으로 나돌았다.

 혼자 밥 먹는 것이야 익숙했지만 철중은 그래도 옆에 누군가 붙어 있는 게 낫다는 생각에 해원을 붙잡았다.

‘넌 왜 학교만 오면 자냐?’

‘할일이 없잖아.’

‘할일 없으면 점심시간에 난 밥 먹을 때만이라도 옆에 앉아있어라.’

‘왜?’

‘좀 그래.’

남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데 혼자 우두커니 앉아 먹고 있자면 다른 세상에 와있는 기분이다.

 TV보면서 밥 먹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그건 재밌기라도 하지. 이건 소외감의 절정이었다.

‘넌 밥 안 먹어?’

‘안 싸왔는데.’

해원은 안 그래도 배가 고픈지 입맛을 다셨다.

‘그럼 평소엔 뭐 먹는데?’

‘물로 배 채우거나 자면서 시간 때우지 뭐.’

‘왜?’

 철중은 순진하게도 그 이유를 물었다. 해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며 타박을 했다.

‘고아원에서 애들 도시락까지 챙겨줄 것 같으냐? 초등학교 때야 아동학대로 걸릴까봐 해주지만 중학생부턴 잠만 재우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저녁만 준다.’

그 순간 괜히 물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성질을 봐선 책상을 엎으며 난동을 부릴 것 같은 해원이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해줬다. 

그 때문 이었는지 철중은 조심스럽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배 안 고프냐?’

‘넌 내가 이슬만 먹고 사는 걸로 보이냐?’

또 한 번 헛웃음을 흘리며 해원이 이죽거렸다. 철중은 곤란함을 느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는 해원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내가 밥 네 것까지 싸올 테니 같이 밥 먹어줘.’

‘뭐?’

해원은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것 마냥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철중의 머릿속에선 상부상조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별히 해원이 불쌍하진 않았다.

 자신과 별 관여도 없는 타인을 동정할 정도로 마음씨가 고운 편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이득인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해원은 처음엔 미심쩍어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어찌 보면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비즈니스로 시작한 관계였다. 

철중은 또래의 친구가 필요했고 해원은 조건을 보고 승낙했으니까 공정하기도 했다.

‘숙제 때문에 박물관 가야하는데 같이 가자.’

‘귀찮은데.’

‘대신 네가 먹고 싶어 하는 거 사줄게.’

‘……햄버거 세트.’

‘오케이.’

‘도서관에 가서 자료조사 해야 되는데 혼자 가긴 그래.’

‘……자장면.’

 시작은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점점 광범위 해졌다.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데 보디가드들이랑 가기 싫다.’

‘아……쯧. 뭐 사줄 건데?’

‘게임하는데 컴퓨터랑 하니 재미없다. 같이 하자.’

‘이젠 별 걸 다시키네.’

‘스키장 가야 하는데…….’

‘야……내가 니 애인이냐?’

그러다 보니 단짝마냥 붙어 다니게 되었다. 

철중은 혼자가 아니니 좋고 해원은 옆에서 콩고물 얻어먹으니 좋고 둘 다 편리했다. 

비록 사교성과 협조성은 없는 해원이고 귀찮게 구는 철중이지만 나름 합리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철중의 집에서 거의 눌러앉다 시피 했다.

 어차피 철중의 집은 넓었고 그의 아버지는 해원을 맘에 들어 했다.

‘이거 크면 물건이 되겠네.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쓸 만하겠어.’

‘왜 사람을 마음대로 물건 취급이에요?’

기가 팔팔하다는 이유였다. 그때부터 이미 철중의 아버지와는 구두 계약을 한 상태였다.

‘내가 키워 줄 테니 내 밑에서 일 할래?’

‘그러죠 뭐.’

‘양자로 들어 올 테냐?’

‘그건 싫어요.’

‘왜?’

‘그까짓 게 무슨 소용인데요? 차라리 계약서가 낫지.’

해원은 개념이 없다시피 했다. 싸가지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고 무서운 걸 몰랐다. 

까짓 거 몇 대 맞는 것쯤이야 상관없다는 투였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제대로 삐뚤어져 사고방식이 속물의 극치를 달렸다.

 정이라는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둘이 서로를 친구라고 인정하기까지도 거의 오년이 지나서였다. 그전엔 거의 대놓고 물주 취급이었다. 

고아원을 나와 독립한 철중과 같이 살면서 그제야 마음을 놓은 것이다.

그런 해원이 지금은 남자 하나 때문에 변해있었다. 

철중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