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해원아 감옥가자 (13/15)

13. 해원아 감옥가자

지금 신림동에선 온 나라 법대생들 혹은 사시 생들이 코피 터지게 공부를 하고 있다. 

나 또한 학교 앞에서 자취하며 휴학한 주제에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공부중이고.

 오로지 사시합격만을 위해 20대의 절반을 투자했는데 떨어지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잘 것이다.

 로또 당첨 아니곤 그 상처를 덮어줄 것이 없다. 

그런데 일단 애인이라는 인간이 작심하고 태클을 걸고 있단 말이지. 솔직히 말해서 죽여 버리고 싶다.

 예전에 애틋하던 감정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지금은 오로지 살기뿐이다. 

사실 처음부터 가슴 절절하게 좋아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관심뿐이었다.

 연애할 당시에도 그저 ‘보기 좋은 떡이 먹으니까 더 맛있네!’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었고, 잠자리 테크닉과 돈 씀씀이가 헤픈 것이 그 자체보다 더욱 매력적인 요인이었다. 

심각하지 않고 쿨하고 멋진 관계라는 것에 들떠있던 나는 그 이후는 생각하지 못했다.

 알고 보니 나 정말 어렸구나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그렇게 천천히 길들여진 것 같다. 나에겐 과분하게 멋진 사람인데 누구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잖아.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구나 깨닫고 나니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헤어지기도 싫어 지지부진 끌다가 결국 쫑 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의 어거지와 나의 우유부단으로 다시 어이없는 만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사귀자니 내가 죽을 노릇이다.

 완전 180도 변해서 나타나 민폐를 끼치면 쌓였던 애정도 날아가기 마련이다.

 정해원 이 인간, 정말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또라이였다. 

나도 만만치 않은 병신이긴 하지만 너무 심하다.

“……비교하자면 에어리언 vs 프레데터 수준일까?

“크하하하! 제이슨 vs 프레디? 혹은 쳐키 vs 사다코? 또는 오멘 대 고질라 vs 용가리? 아니면 킹콩 vs 아나콘다?”

유현은 내 말에 낄낄거리며 웃더니 예증을 끝도 없이 늘어놨다. 

전부 그럴듯해서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헤어지고 싶어.”

“헤어지면 되잖아?”

그게 쉬우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고. 내가 헤어지자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칼 들고 쫓아올 것 같아서 무섭다.”

해원이 그 성질에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니 죽고 나 죽자 미져리의 새 역사를 쓰겠지. 

널 가질 수 없다면 장기라도 가지겠어 하고 다 잡아 뺀 뒤 날 콘크리트에 발라버리면 어쩌지? 

기념품삼아 집에 모셔두고 있다가 나중에 질리면 깨버리는 거 아냐? 그러고도 남을 놈 같아.

 그나저나 우린 왜 이렇게 싸이코 로맨스만 찍고 있는 거냐? 

게다가 정이 쌓이는 게 아니라 뚝뚝 떨어진다.

“원래 연애하면 서로 안티가 된다더니 우리가 그 꼴 인가봐.”

“……하긴, 그 사람 거의 테러수준이긴 하더라.”

 털썩 바닥에 쓰러지자 유현은 불쌍한 듯 혀를 차며 대꾸했다. 

오랜만에 둘이 오붓하게 맥주를 먹으며 집에서 노가리를 까고 있다. 

조미오징어와 해원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데 점점 힘이 빠진다.

“근데 나 진짜 궁금한데 해원씨 원래 또라이일까? 사귈 땐 전혀 아니었는데 인간이 어떻게 한 순간에 찌질 해지냐?”

“……글쎄다. 사귄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찌 알겠냐?”

“그건 그렇다.”

 내가 한숨을 푹푹 내쉬자 유현은 코를 후비며 한 마디 했다.

“친구한테 물어봐.”

“응?”

“그 사람 친구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내가 못 알아듣자 유현은 건더기를 엄지와 검지로 뭉쳐서 손가락으로 튕긴다.

“어떻게?”

“어떡하긴, 까짓 거 한번 자리 만들면 되지. 내 친구 소개시켜주겠다. 너도 한번 데리고 와 봐라. 싫다고 하면 애인사인데 그것도 못 해주냐? 이 정도로 오래 사귀었으면서 숨기는 게 왜 이리 많냐? 너 나랑 진지하게 사귀는 거 아니냐? 이런 말 하면 넘어오겠지. 지가 어쩔껴?”

“……굿 아이디어!”

 김유현, 은근히 똑똑했다.

해원은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싫어.”

또 야밤에 지 내키는 대로 찾아온 것이다. 차에 있다간 또 덮칠 것 같아서 짚 앞 공원에서 만났다.

“왜?”

흔쾌히 수락까진 기대안했지만 기대 이상의 반응이었다.

 내가 헤어지자고하면 짓는 표정과 거의 흡사하게 인상을 쓴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해원은 그냥 싫다며 결단코 거부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유현이 가르쳐 준대로 물었다.

“당신 나랑 장난으로 사귀지?”

“뭐?”

“주위 사람들한테 소개 안 시켜주는 걸 보니 그런 거지?”

“……얘가 뭐래?”

 기가 찬 표정으로 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친구도 소개 안 시켜주고 만나선 섹스만하고 우리 엔조이지?”

“……야.”

해원이 드디어 화를 낸다. 반은 넘어왔지 싶은데 그는 오히려 내 태도를 지적했다.

“그런 소릴 하려면 좀 진지하게 해야지! 그게 닦달하는 태도냐? 그리고 그게 화내는 표정이야?”

“……그런가?”

오디오는 완벽했는데 비디오가 구렸다.

 졸린 얼굴로, 벤치위에 쭈그려 앉아서 쭈쭈 바를 먹고 있는 상태로 묻기엔 좀 그렇긴 했다. 

이건 뭐 동네 양아치 혹은 백수가 시간 때우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자리 한번 마련해.”

“싫다니까.”

“그럼 헤어져.”

“야!”

“뭐가 그리 비밀이 많아? 이래서 난 당신 못 믿는다니까. 친구도 소개 못 시켜줘?”

“……쓰벌.”

해원은 끙 소리를 내며 괜히 옆에 있는 벤치를 발로 찼다. 내숭 걷어치우니 정말 날건달이 따로 없다.

 시간 잡아서 연락하라고 한 뒤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어딜 그냥 가냐고 성질을 버럭버럭 내는 해원을 무시한 채 오면서 생긴 게 멀쩡하다고 해서 괜찮다는 편견을 버려야한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저 따윈 줄 알았다면 애초에 건드리지도 말걸. 

그냥 눈요기삼아 바라보고 있을 때가 훨씬 더 나았다. 아마 해원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지도.

 내가 정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던 그때의 김수현을 사랑해서 지금까지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정이 다 사라지면 우리 사이도 자연소멸 되겠지. 조급해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 죽고, 모든 연인들은 언젠가는 헤어지는 거니까.

불안하니까 헤어져야지, 속았으니까 헤어져야지, 짜증나니까 헤어져야지, 찌질 하니까 헤어져야지. 

헤어져야 되니까 헤어져야지. 헤어져서 속이 시원하다면 헤어져야지. 

가뜩이나 피곤한 인생 연애질로 기운 낭비하지 말고 헤어져야지.

 헤어질 이유라면 너무도 많은데 정작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해원 때문이다. 

이혼도 아니고 꼭 합의해야겠냐는 거대한 불만과 왜 상황이 이리 된 건가 원망스러울 뿐.

자려고 누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딱히 우울하거나 그러지도 않고 그냥 그런 기분일 뿐. 

어느새 지겨운 일상처럼 스며들어버렸다.

삼일 뒤, 해원에게 연락이 왔다. 결국 약속을 잡아오다니 생각보단 성실한 태도였다.

“너 왜 이렇게 까다롭냐?”

“당신이 이상 한 거야.”

수화기 너머로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목소리는 잔뜩 골이나 있다. 

알았다고 대답한 뒤 공부해야 한다며 냉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자 날 바라보는 두 쌍의 눈과 마주쳤다. 경헌과 유현이 지그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다.”

“공부하자.”

둘은 금세 시선을 피하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죽이 잘 맞는 친구처럼 짜고 치는 타이밍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된 공기는 어쩔 수 없이 합석한 사람들 마냥 어색하다.

 워낙 뻘쭘한 사이라 예전과 별로 다를 건 없지만 확실히 티가 나긴 한다. 

좋아할 줄 알았던 유현이 놈의 반응이 예외긴 하지만 지금 남의 일 신경 쓸 데가 아니니까.

 어깨를 으쓱한 뒤 유현이의 노트를 툭툭 쳤다.

“유현아 저녁에 시간 비워 놔.”

“그때 보재?”

“응.”

유현은 기대되는지 키득 거렸고 경헌은 무슨 얘기냐며 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악의가 꾸물거리며 올라온다.

“남자 만난다. 왜? 2대 2로 미팅한다. 부럽지?”

경헌의 낯짝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혀를 낼름 내밀며 놀리자 유현은 그런 날 보며 눈을 부라렸다. 

그런 둘을 모른척하며 책을 팠다. 아무래도 요즘 성격이 더 나쁜 쪽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경헌과 유현이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유현은 경헌의 마음을 눈치채곤 일단 곤란해 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본적도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현금인출기에 카드를 넣었더니 비밀번호를 눌러주세요 대신 그 예전에 나왔던 인형들처럼 재수 없는 목소리로 

딸링 알라뷰~가 나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말 경헌한테 전해도 되냐?’

‘죽을래!’

여태까지 유현이 경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윤경헌, 진짜 불쌍한 놈이었다.

 순정을 다 바쳐도 이딴 말 밖에 못 듣고, 사람도 아니고 사물에 비유 당하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이 많다는 이유로 이 정도 수모쯤은 당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인생의 어려움 좀 알아봐 하는 심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내 친구지만, 유현이랑 사귀어봤자 경헌이 손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안 친했다면 친구로서도 인간으로도 사실 별로인 게 유현이고, 남자로서 애인으로선 더 최악이다.

 나도 그렇지만 걔는 더 심해. 그동안 뜯어먹은 죄를 갚는 차원에서 정신 차리라고 조언 좀 해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시 목이 말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흘낏 돌아보니 경헌이 무서운 얼굴로 나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움찔거리는 사이 지척까지 와서는 질질질 나를 끌고 부엌 다용도 실로 향한다.

“왜이래?”

“몰라서 묻냐? 저녁 어딜 가?”

방금 전의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듣고는 내 멱살을 잡고 여러 대 칠 기세로 압박한다.

 눈빛이 살의를 질펀하게 담고 있었다.

“농담이야! 농담! 야, 사실 내 애인 보여주러 가는 거였어.”

바둥거리며 진실을 토로하자 그제야 손의 힘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의심은 더럽게 많아서 놓아줄 기색은 없었다.

“진짜냐?”

“그럼!”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자 멱살을 풀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내 어깨를 틀어잡으며 하는 말에 또 다시 숨이 막혔다.

“그럼 나도 데려가.”

“…뭐?”

 진심인가 싶어 쳐다보니 표정이 결연했다.

 그 순간 육백년 묶은 삼을 캔 심마니마냥 좆됐다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결국 경헌과 유현과 함께 약속장소로 향했다. 

해원은 특이하게도 집으로 불렀고 경헌의 차를 타고 도착해서 벨을 누르자 곧 편한 차림으로 나왔다. 

흰색의 심플한 머슬 티셔츠와 검은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도 내린 상태였다.

 정장차림보다 젊어 보여 처음엔 깜짝 놀랐다.

“왔냐?”

“응. 여긴 내 친구들.”

 뻘쭘한 얼굴로 유현과 경헌을 소개했다. 

그들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해원은 자신도 무뚝뚝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뒤돌아가 버렸다.

“야! 나와서 인사해라.”

 해원이 외치자 곧 부엌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경헌이 부잣집 외동아들같이 생긴 영화배우 과라면 이 남자는 왠지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나오는 착한 도련님 같이 생긴 인상이었다.

“애가 내가 말한 김수현. 이 분들은 친구.”

해원은 성의 없이 날 소개하고 차례대로 친구들이라며 인사시켰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해원이 친구 한철중이에요.”

 그는 우리를 보더니 눈을 반으로 접으며 빙긋 웃었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경헌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는 가정형편상 워낙 많은 사람들을 만나 와서 그런지 곧 생각을 지웠다.

 해원은 앉으라며 거실을 가리켰고 우리 셋은 가방을 거실 구석에 내려놓고 뻘쭘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곧 철중이란 사람이 음료수를 내왔다.

“식사 준비 중이에요. 아직 식전이죠?”

“예.”

신혼집에 찾아오니 형수님이 따스하게 맞아주는 상황 같아 기분이 얼떨떨했다.

 해원은 우리가 앉아있는 소파 건너편에 앉아서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빨리 안 되냐? 배고픈데.”

“조금만 기다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꼴을 보니 싸가지 없는 자식과 자애로운 어머니 같기도 했다. 

철중이란 사람은 해원에게 대답하고 곧 부엌으로 사라졌다. 

텅텅텅 거리며 도마 위에서 무언가를 썰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 구조상 거실 소파에 앉으면 부엌이 내다보여서 그가 중간에 있는 시스템키친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요리사처럼 익숙하게 재료를 다듬고 부지런히 조리하는 모습이 보인다.

“…왠지 익숙한 칼놀림이야.”

 경헌이 또 중얼거렸다.

“넌 뭐가 그렇게 익숙한데?”

 한마디 쏘아주자 입을 다물었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다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이쪽은 김 유현이고 내 룸메이트야. 얘는 윤경헌. 동기야.”

“안녕하세요.”

 둘은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그의 직업은 미리 알고 있는지라 조금 겁을 먹은 것 같다.

“반갑습니다. 정해원입니다.”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로 해원이 인사했다. 그때 철중이란 사람이 해원을 불렀다.

“해원아. 상 좀 펴놔라.”

“귀찮게 하기는.”

 해원은 궁시렁 거리며 부엌에 있는 상을 가지고 와서 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밥 아직 멀었느냐고 묻는다.

“십분 정도만 더 기다려.”

그 말에 다시 뭐라고 투덜거리며 돌아오더니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다.

“근데 왜 집으로 불렀어?”

“철중이가 밥해준대서.”

“그 이유였어?”

 어이가 없어 되묻자 해원은 그게 뭐 잘못되었냐는 눈빛이다.

“쟤가 어릴 때부터 자취해서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데. 자격증도 있어. 그리고 밖에 나가서 상견례라도 하자는 거야? 쪽팔리게.”

“…그건 그렇네.”

 그나저나 얼마나 요리를 잘하기에 해원이 집까지 끌어들였을지 궁금해졌다.

 가만히 있기도 뻘쭘해서 부엌으로 향했다.

“도와드릴까요?”

“아, 그럼 상 차리는 것 좀 도와주세요.”

철중은 나에게 수저와 저분 등을 옮겨달라며 지시했고 부지런히 갖다 옮겼다. 

유현도 와서 물통과 반찬 등을 날랐다. 부엌을 보아하니 벌써 몇 가지 요리가 준비되어있다. 

무쌈말이에 연어샐러드와 여러 가지 튀김에 야채가 곁들여진 요리와 무슨 찜 같은 요리도 보이는데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쇠고기 궁중떡볶이를 볶고 있는데 냄새도 기가 막혔다. 

 “요리 잘하시나 봐요.”

“취미입니다. 하하.”

 감탄을 하자 철중이란 사람은 쑥스럽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이것저것 배우게 됐어요. 제가 입맛이 좀 까다롭다보니 남이 해주는 것 보다 해 먹는 게 더 편하기도 했고요. 또 아버지가 미식가라서 어릴 때부터 이런 저런 걸 많이 가르쳐 주셨죠. 여행이나 낚시 같은데 가면 꼭 저한테 요리를 시키기도 하고요.”

“그러셨구나.”

할 줄 아는 건 딱 다섯 가지인 내가 부끄러워진다. 계란말이, 감자조림, 김치찌개, 된장찌개, 볶음밥뿐이다.

 곧 오븐에서 띵하는 소리가 났다. 철중은 능숙하게 그릇을 꺼냈다.

“이거 튀김재료가 남아서 만든 건데 감자 떡 같은 겁니다.”

얇은 판에는 감자로 보이는 것에 옥수수가 박혀있고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그것을 나무판에 올려 나에게 건네주었고 상에 갖다놓자 곧 궁중떡볶이를 가지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해둔 홍합탕까지 가지고 나오자 철중은 먹으라며 우리를 독촉했다.

“이건 무슨 찜이에요?”

“퓨전 갈비찜인데 칠리소스를 베이스로 만든 거예요.”

“와! 나 매운 거 진짜 좋아하는데.”

 철중이 설명하자 유현이 신나서 외쳤다. 이미 먹을 것들로 눈이 휘둥그레 돌아간 상황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유현이 발랄한 목소리로 외치자 경헌도 젓가락을 들었다. 나 또한 이것저것 주워 먹는 재미에 빠졌다.

 그러나 말 한마디 없이 먹는 해원의 속도를 따라갈 순 없었다.

“천천히 먹어라. 흘린다.”

철중이 옆에서 혀를 찼지만 듣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떨떠름했다. 

이건 애인 집에 친구 소개받으러 온 게 아니라 친구 생일파티에 와서 ‘쟤네 엄마 요리 잘 하는구나. 이 자식 부러워라.’ 하는 심정이었다. 주섬주섬 주워 먹는데 철중이 맥주를 꺼내왔다.

“한잔씩들 받아요.”

“감사합니다.”

일단 나부터 주고 친구들에게 돌린 뒤 해원의 잔에는 컵에만 따라주고 슥 밀어주기만 했다.

 해원은 여전히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다 목이 마른 건지 철중이 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다 철중이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더니 그의 목 뒤를 내리쳤다.

 컥 소리가 나며 해원이 맥주를 내뱉을 뻔했다.

철중은 그 모습을 보며 칠칠맞다고 중얼거리더니 옆에 있던 휴지를 건넸다.

“건배하고 마셔야지.”

 그렇다고 수도를 날릴 것까지야. 순간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철중은 화들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워낙 먹을 땐 정신 못 차리는 놈이라서 그만.”

참 살벌한 우정이다. 나도 샤프로 유현이놈을 찍긴 하지만 저게 더 무서웠다.

 해원은 켁켁 거리더니 잔을 들었고 우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건배를 마쳤다. 맥주가 심하게 썼다.

“……왠지 익숙한 풍경인데?”

“그만 해!”

 경헌이 또 중얼거렸고 이번엔 내가 버럭 짜증을 부렸다. 그만 좀 익숙했으면 싶다.

 식사라고 할 게 없어 술자리로 변해버렸다. 맥주에서 양주로 바뀌고 이런 저런 대화들이 오갔다.

“다 같은 법학과라고요?”

“예, A대 다녀요.”

“어? 나 거기 나왔는데 이거 동문이네요? 전 경영학과였어요.”

“와, 선배셨네요?”

 유현은 내숭모드로 열심히 분위기를 업 하기 위해 노력했다. 

경헌은 그런 유현 옆에 얌전히 앉아있고 나도 자리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해원을 바라보니 그는 묵묵히 주워 먹기만 했다.

“그렇게 맛있냐?”

“응. 자주 안 해주니까 있을 때 먹어야 돼.”

 결연한 의지가 돋보여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집주인이 저모양이고 애인인 나는 왠지 기분이 다운 되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오로지 유현과 철중 만이 신났다.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형이신데 말 놓으세요.”

“아, 그럴까?”

“네.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어느새 철중이 형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김유현 잘 논다.

 옆에서 실눈을 뜨고 바라보자니 참 아니꼬운 풍경이었다.

“금융업이라면 혹시 해원 씨랑 비슷한 건가요?”

“뭐 그렇지. 가업이다 보니 물려받으려고.”

 순간 그 말에 내려뒀던 고개를 들었다.

 전에 해원이 말했던 유명한 전주아들 이콜 돈 많은 친구가 생각났다. 그게 저 사람이었나?

“음, 웬지 회사원인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하하. 그런 소리 많이 들어.”

인상도 좋고 행동거지도 바르게 보여 전혀 예상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이놈도 사채업자였구나. 

역시 유유상종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데 유현이 뼈있는 질문을 던졌다.

“빛 독촉 못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일이 일이다보니 그런 일도 있을 텐데 해요?”

“아니, 나는 주로 경영이랑 회계 쪽이야. 그런 쪽으론 영 젬병이라서. 그래서 해원이 도움을 많이 받지.”

 ……역시나, 해원을 흘끗 바라보자 그는 맥주를 마시며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는다.

 유현은 계속해서 대화를 빙자한 취조를 했다.

“두 분은 언제부터 친구신데요?”

“아, 우린 중 1때부터 짝이었던 걸 계기로 친해졌어. 아니 엮였다고 해야 되나?”

“와, 오래 되셨네요. 저희는 대학 와서 만났어요.”

“하하, 부럽네. 난 대학 때도 친구 사귀기 힘들었는데.”

“왜요? 인상도 좋으시고 성격도 좋아 보이시는데.”

“아, 그게 집안이 워낙 살벌해서 친구 사귀기가 힘들더라고.”

“그래요?”

“그렇지. 나랑 있으면 칼이라도 맞을까봐 무섭더라. 납치도 몇 번이나 당해서 어릴 땐 늘 보디가드들이 붙어있었거든.”

 철중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지만 유현은 당황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해원이 같은 망나니 아니면 옆에 두기도 힘들어. 그러다보니 친구가 얘밖에 없더라고. 하하하하.”

“자랑이냐?”

해원은 기가 찬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철중은 그렇긴 하네 소릴 하며 허허 웃더니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줬다.

“그나저나 나중에 판검사 되면 마주치기 껄끄럽겠어. 다들 변호사를 지망하길 바란다.”

철중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고 우린 다 썩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워낙 청렴결백과는 거리가 먼 인간들인지라 곧 그러려니 하게 되어버렸다. 

말 많고 탈 많은 재벌가의 자식과 법에 접촉되지 않는 한에서 온갖 비리를 저지른 나와 유현이 새삼 놀랄 일도 없었다. 

사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범죄를 저지르는 쪽이나 다스리는 쪽이나 빠삭하긴 마찬가지였다. 

유현과 철중의 만담 같은 대화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철중이 형도 취향이 이쪽인가요?”

“아, 그렇지는 않아.”

“그런데 별로 어색한 게 없으시네요.”

“그것도 직업이 워낙 그렇다보니 별 별 꼴을 많이 봐서.”

 철중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처음에야 놀랐지만 해원이 이 녀석이야 원래 대책이 없는 놈이라서 생각보단 충격도 덜하고 주위에 그런 쪽이신 분들도 많고.”

대책 없는 놈, 그 말엔 동의하고 싶다. 슬쩍 쳐다보니 해원은 내가 뭘 하는 표정이다. 

철중은 그런 우리 둘을 보더니 신기하단 목소리를 낸다.

“그래도 난생처음 애인 소개시켜준다는 말이 나와서 놀랐어. 난 얘가 평생 그런 일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워낙 삭막해서.”

우리 아들 다 컸어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해원을 바라보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곤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아버님도 많이 보고 싶어 하시니까.”

“예?”

아니, 왜 내가 철중의 집에 인사드리러 가야하나? 

의아함에 그를 바라보자 철중은 어라 소리를 내더니 해원을 바라봤다.

“얘기 안했어?”

“……뭐 자랑이라고.”

 목뒤를 긁적거리며 해원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철중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더니 다시 얘기를 바꾸었다.

“아니, 뭐 아무튼 우리집안이랑은 절친한 편이라서 말이지요. 종종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으니 한 번 놀러 와요.”

급조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증거가 너무 많이 보인다. 

평범한 친구 사이를 넘어 거의 부모와 자식, 오래된 부부 같은 향기를 풍겼다. 

나보다 이 집에 더 익숙하고 부엌을 본진으로 만든 이 남자가 괜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자정이 다 되가는 시간까지 술자리는 이어졌다.

 떠드는 건 철중과 유현이 거의 맡았고 나와 경헌은 틈틈이 참여하는 정도에 해원은 거의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간간히 철중과 대화하는 정도였다. 그러다 철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내일 아침 일찍 약속이 있어서.”

“아, 저희도 이제 가봐야 해요.”

 경헌과 유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해원이 붙잡는다.

“자고 가.”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바로 이어지는 경헌의 말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술을 마셔서 차 두고 가야겠다. 네가 내일 가져와.”

“아, 그럼 되겠네.”

유현도 맞장구를 쳤다. 경헌은 차키를 나에게 건넸다.

“철중 형도 택시 타고 가세요?”

“아니, 나는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 아래까지 같이 가자.”

 곧 세 사람은 우르르 인사하며 사라졌다.

배웅을 하고 거실로 돌아오자 거나하게 차려진 상이 초토화 된 모습이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자 머리가 아파온다.

“이거 우리 둘이 치워야 돼?”

“청소해주는 아줌마가 내일 와서 치울 거야.”

“그래도 냄새 나는데. 벌레 꼬여.”

 내 말에 해원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설거지는 안하더라도 정리는 해야겠다 싶다. 

차곡차곡 접시들을 쌓고 잔들도 모아놓고 내가 테이블을 정리하자 해원이 싱크대로 날랐다. 

상을 대충 닦아 세워놓고 남은 음식들은 괜찮은 것들만 간추려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해원은 조리해둔 음식들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많이 남았다. 두고두고 먹어야지.”

“그렇게 좋아?”

“응.”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그의 기분을 고스란히 알려준다.

“예전에 같이 살 때는 자주 얻어먹었는데 요즘 그 놈이 본가로 들어가는 바람에 못 먹고 있지. 나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관뒀어. 노인네 잔소리가 심하거든.”

“……같이 살았어?”

“응.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군대도 같은 부대였으니 거의 십년 살았어.”

 십년이라니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알고지낸 시간은 더 길다. 

15년 동안 해원을 곁에서 지켜봤다니 복잡한 기분이 든다.

“사람 좋아 보이네. 요리도 잘하고.”

“좋긴 개뿔이.”

해원은 내 말에 진저리를 친다.

“저거 야마 돌면 칼질부터 하는 놈이야.”

꼬마가 ‘우리 엄마 열라 싫어!’ 하고 외치는 것처럼 밉지 않은 욕을 하고 자빠졌다.

그러나 내용만은 살벌했다. 해원과 화장실에서 교대로 손을 씻었다. 해원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아, 피곤하다.”

“집에서 놀았는데 뭐가 그렇게 피곤해?”

“어제 일 때문에 지방에 내려같다가 오늘 아침에 돌아왔다고. 잠도 거의 못 잤어.”

그러면서 나를 슬금슬금 침대로 끌고 가는 이유는 뭐란 말이냐.

 내 뒤에 딱 붙어선 머리카락에 얼굴을 부비며 부비적거리는 그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내숭을 집어던지니 잠자리에선 짐승이 따로 없다.

 예전엔 차마 얼굴 붉힐 짓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하고 싶던 건 다 해보는 것 같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잘 보이고 싶기보단 배 아래쪽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움직이니까. 다리를 벌린 그의 위에 등을 보인 채 걸터앉아 키스하면서 서로의 페니스를 손으로 애무했다. 

서로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반복하며 점막이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어지럽힌다. 

허리에 무리가 가는 자세였기에 어떻게든 편하게 바꾸며 여러 차례 뒤척였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사타구니를 붙이고 바쁘게 숨을 교환한다. 

오래된 연인들은 서로의 몸을 잘 알고 있기에 편하게 섹스를 하듯이 우리도 그랬다. 

상대방에게 부끄럽다거나 섹스의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고 절정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삽입 직전에 잠시 멍하게 있었더니 해원이 등을 쓸면서 물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는 말이지.

 당신과 키스만 해도 황홀했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되어버려서 조금 씁쓸해서 그랬다. 

지금 비록 이 모양이 되었더라도, 그래도 이 말만은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내 위에 있는 해원의 목에 팔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힘을 풀자마자 곧바로 뚫고 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헉 소리가 터져 나온다.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삽입은 시작할 때는 아픔이 더 컸다.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더 큰 쾌락에 몸 전체가 저릿하게 물들 걸 알기에 꾹 참는 것이다.

그래도 아까 전 묘하게 부엌에 있던 상대에게 질투 비슷한 감정이 일었던 걸 보면 아직도 이 사람에게 남은 감정이 많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내가 모르는 과거나 버릇이나 습관 같은 걸 알고 있고 서슴없이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난생처음 만난 그의 친구라는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품다니 우스웠다.

 해원은 두 번의 삽입 후에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 

샤워도 하지 않고 잠이 들었고 나 역시 덩달아 그의 품에서 누워야했다.

 잠이 들 랑 말랑한 상태로 삼십 여분쯤 지나고 목이 말라 그의 팔을 떼고 밖으로 나왔다. 

콘돔을 끼고 했지만 씻지 않으니 찝찝해서 가볍게 씻고 가운만 걸치고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는데 거실 한 구석에 있는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불 키는 것을 깜빡해 환해 아무 방해 없이 그 곳으로 걸어갔다. 

먼지는 없지만 이리저리 서류가 흩뿌려져 있고 이것저것 표시가 된 메모들이 보인다. 

그 중에는 철중이 새끼 방문, 밥 많이 라고 적힌 것도 있어서 풋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러다 툭 마우스를 건드렸는데 확 화면에 불이 들어와서 화들짝 놀랐다. 윈도우 화면이 눈에 들어온다. 몇 가지 워드 파일과 사진 외에는 기본 프로그램들이다. 끄고 잘 것이지 칠칠맞게 왜 켜 놓은 채 일까? 대신 꺼둘까 싶어 프로그램다운 받는 건 없나 살펴보는데 무언가 눈에 밟힌다.

‘김수현’ 이라고 적힌 폴더가 하나 있었다. 왜 내 이름이 여기 있는 건가 싶다. 

혹시 내 사진이라도 모아놓은 건가? 예전에 찍은 게 몇 장 있기에 별 생각 없이 클릭했다.

 곧 폴더가 열리고 사진과 한글 파일이 보인다. 

미리보기가 되 있어서 물을 마시며 감상하는데 이상하게 내가 모르는 사진들이 많다.

 아예 의자에 앉아서 하나하나 클릭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모습, 집에 가며 유현과 장난치는 것, 경헌과 붙어 앉아 책을 보는 등의 사진이 보인다. 이건 해원과는 일절 연관이 없던 풍경들뿐이다. 

방금 전에 목으로 넘긴 물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옆에 있는 한글 파일까지 꼭 열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느리지만 단호하게 클릭했고 곧 하얀 배경과 검은 글씨가 내 시야에 가득 찼다.

 그 파일의 제목은 김수현 조사 보고서였다.

돈을 아끼려고 같이 합승하긴 했지만 역시 둘이 있기엔 어색했다. 

자정이라 도로는 한산했음에도 시간은 느리게만 흐르는 것 같았고 아직도 도착하려면 멀었다.

 유현은 초조하게 손을 까딱였다. 흘낏 시선을 돌리니 경헌은 얌전히 옆에 앉아 창가에 팔을 댄 채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였다. 경헌이 난데없이 말을 꺼냈다.

“그 형 요리 잘하더라.”

“어? 아…… 그렇더라.”

확실히 철중의 요리는 훌륭했다.

아마 분위기가 그나마 화기애애했던 것은 그 음식들 덕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맛을 다시 상기하자 군침이 흐를 것 같았다.

“남은 거 다 싸오고 싶더라고. 아, 매일 그런 것만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 사 먹는 것도 지겹고, 수현이가 해주는 건 꼴랑 두 가지 뿐이야. 매일 계란말이랑 감자조림만 먹는다고.”

수현이 옆에 있었으면 ‘그럼 니가 만들어봐! 이 은혜도 모르는 종간나쉐퀴야!’ 라며 지랄지랄했을 것이다. 밥도 안칠 줄도 모르는 주제에 입맛은 까다로워 늘 구박을 맞는 그였다. 

유현은 잠시 긴장도 잊은 채 헤헤 거렸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 움찔거리며 경헌을 보자 그는 난생 처음 보는 미소를 달고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미 머릿속에 콱 박힌 후였다. 

평소에는 그저 그랬는데 잘 생긴 놈이 쪼개니까 간 떨린다는 생각을 하며 유현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아무 생각도 없이 현금인출기라고 생각했을 때는 몰랐는데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면접 보는 것 마냥 떨떠름했다. 멀쩡하게 생겨선 미친 게 아닌 가 의심도 든다.

내숭떨어서 차지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간다. 

그러나 본연의 모습을 보았음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그건 범우주적이고 광범위한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저 남자라면 다 좋은 거냐? 그런 생각도 해봤다. 자신을 격하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건 일반론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이런 사태를 예상해본 적이 없는 주제파악 잘하는 유현은 무서웠다. 

평소엔 쌩쌩 잘 돌아가는 머리가 갑자기 굳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거부감 비슷한 것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상황 정말 옳지 않다. 부적절해. 등등을 중얼거리며 유현은 창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경헌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김유현.”

“응?”

유현은 경헌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아무래도 설마설마 하던 것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전에 도둑 키스 했을 때 이후로 유현이 예전과 달라진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단 둘이 있으니 티가 난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유현의 집에 도착한 둘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일단 거실에 앉긴 했는데 막상 뭐부터 말해야할지 감이 안 잡혔다. 유현은 그것이 더 무서웠다.

 왜 자신의 인생이 캠퍼스 코미디에서 갑자기 공포로 바뀌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공포는 사실 낯설음이라고 했던가? 맞는 말이었다. 후덜덜 떨고 있을 때였다. 경헌이 직격탄을 날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 너 좋아해.”

“컥!”

유현은 듣자마자 목 졸린 소리를 냈다. 이거 너무 빠르잖아 불만이라도 표하고 싶은 표정이다.

 경헌은 그 솔직한 반응에 조금 기가 막혔다. 자신이 뭐 실수라고 한 건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내가 못 할 말 한 거냐?.”

 사람이 사람 좋아한다는 데 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는 건가? 

자신이 괴물도 아니고 특별히 빠지는 구석도 없는데 억울했다.

 그러나 유현은 야수에게 고백 받은 미녀마냥 꽥 소릴 질렀다.

“왜 하필 나야! 멀쩡한 애들 다 놔두고!”

“……나도 그게 궁금해.”

“너한테 절대 듣지 않겠다고 생각한 말이 좋아해 랑 돈 좀 꿔 줘 였는데! 왜! 어째서!”

“그러니까 나도 궁금하다니까! 나라고 네가 마냥 반가웠겠냐?”

 결국 경헌도 지지 않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신경 쓰이고 좋아하는 걸 어떡하라고…….”

“……어쩌다.”

 고백타임인지 고민타임인지 알 수가 없다. 유현은 동정 가득한 눈빛으로 경헌을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이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심각하게 엇나간 이 상황이 둘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거라도 마셔.”

 한동안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던 유현이 말을 꺼냈다.

 어느새 냉장고에서 꺼내온 맥주를 경헌에게 건넨다.

“아니야. 애초부터 내 문제지.”

좌절하고 자책하고 분위기 한번 잘 돌아간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몹쓸 증상이 나타났냐?”

“한 일 년 전부터.”

“야! 그럼 진작 도망갔어야지!”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둘은 한 동안 우울하게 바닥에 주저앉아 짙은 명암을 만들어내며 술을 마셨다. 

간간이 서로를 위로하는 말도 건넸다.

“너……생각보다 안 이상해.”

“……아니야. 그건 네가 눈이 삐어서 그래.”

“그건 그래.”

“……지금이라도 라식 해볼래?”

 그때였다. 갑자기 끼릭하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난데없는 제3자의 등장에 놀란 둘이 현관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그곳에는 엉망진창인 수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몰골은 초췌했고 티셔츠엔 피가 묻어 있는데다 머리도 산발이었다.

 퀭한 눈가는 몇 시간 사이에 사람을 개 폐인처럼 보이게 했다. 유현은 단박에 일어나 달려갔다.

“야! 김수현.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경헌도 덩달아 따라왔다. 

그러나 그들의 물음에도 반응 없이 수현은 가방을 내려놓고는 뚜벅뚜벅 냉장고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 밑에 있던 소주를 꺼내더니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야! 너 미쳤냐!”

 유현이 병을 뺏었지만 수현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곤 뚝뚝 눈물을 떨구기 시작하는 것이다.

“으……윽.”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패닉상태로 눈물을 흘리는 그를 보며 유현과 경헌은 제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자세히 바라보니 팔꿈치도 깨져있고 얼굴에도 자잘한 상처가 엿보였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바지에 가방 또한 성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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