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파주의 연인 (9/15)

9. 파주의 연인

요 며칠 내 인생이 이렇게 편했던 적이 없다. 

원하는 것은 입만 벙긋하면 알아서 내 앞에 착착 놓아지고 이보다 더 편할 순 없음이다.

“아~목마르다.”

 한 마디 꺼내자 바로 앞에 놓이는 물 컵, 그러나 물보다는 상큼한 것이 먹고 싶었다.

“레모네이드 먹고 싶다.”

“썅…….”

유현은 짜증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갔다. 아까 전에 경헌이 사온 것이 있는 것이다. 

경헌은 유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또 나를 바라본다.

“왜?”

능글맞게 웃으며 묻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할 말 없다는 태도였다. 

그 비굴한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녁은 피자가 좋겠다. 요즘 돈있노 피자에서 새로 나온 게 있다더라. 맛있다던데.”

“…….”

경헌은 샤프를 꾹 쥐었다. 저러다 노트 뚫겠지 싶다. 

키득거리며 웃자 유현이 곧 레모네이드를 한 잔 떠가지고 왔다. 

유리잔에 담긴 노란 액체를 보자 보기만 해도 시원하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한 가지가 빠졌다. 

받아들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현이 왜 안 먹냐는 표정으로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얼음.”

“씹…….”

“내가 가져 올 게.”

유현이 울컥하며 욕을 외칠 때였다. 갑자기 경헌이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간다. 

어이구, 웬일로? 유현이 희한하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자기 때문인지는 꿈에도 모르는 모양이다.

“경헌아.”

“왜?”

 부엌으로 향하던 경헌은 내 부름에 뒤를 돌아본다.

“침 뱉지 마라.”

너 걸어가면서 가래 끓던 소리 나는 거 다 들었다. 정곡을 찔리자 경헌의 낯이 제대로 구겨진다. 

유현은 자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잘됐다며 자리에 앉는다.

“자기네 집이라고 선심 쓰는 건가?”

“그런가보지.”

 시침 뚝 떼고 대답하자 그래도 에어컨 빵빵하고 편하고 좋다며 다른 소리를 꺼낸다. 풋, 웃겨 죽겠다.

지금 우리는 경헌의 휘황찬란한 오피스텔에서 공부중이다. 

에어컨 빵빵하지, 부식 공짜에 식사제공까지 곁들여져 있다. 

물론 나의 자잘한 협박도 들어갔지만 결국 수락한 것은 경헌이다. 지 팔자려니 해야지 어쩌겠어?

 낄낄 웃으며 바닥에 앉아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거실도 널찍해서 테이블에 셋이 앉아 공부해도 넓기만 하다. 

그리고 또 다른 재미라면 흘끗 흘끗 시선을 돌려 몰래 유현을 관찰하는 경헌이다. 

내 고시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등극한 강원댁과 절대 반지덕분에 웃음이 마르질 않는다. 

윤경헌, 알고 보니 취향 한 번 고약했다. 하필 고르고 골라 김유현이라니…… 짜식, 앞으로 고생길 훤하다. 키득거리고 있는데 앞에 불쑥 유리컵을 들이미는 누군가의 손이 보인다.

“자, 마셔.”

경헌은 침을 못 뱉은 게 분한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내 앞에 내려놓더니 휙 지 자리로 가버렸다. 

그리고선 새침하게 유현을 한 번 보는데, 어찌나 원망스러워 하는지 보는 내가 웃겨죽을 뻔 했다. 크하하!

어제 도서관에서였다. 

말을 꺼내자마자 경헌은 다짜고짜 나를 끌고 나가더니 으슥한데 쳐 박으며 경고했다.

‘걔한텐 절대 말 하지 마!’

화장실 옆 계단이었다. 잔뜩 겁을 먹은 얼로 나를 벽에다 밀치고선 한 다는 말이 겨우 고거였다.

‘언제부터야?’

‘…….’

내가 묻자 경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말하기 싫은 표정을 하는 걸 보니 날 제대로 파악은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묵비권 행사한다고 해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뭘 알고는 있어야 제대로 도와줄 거 아냐.’

히죽 웃으며 묻자 더욱 구겨지는 얼굴이 볼 만하다. 

도와준다는 말에 순간 꿈틀하는 눈썹도 이미 목격했다.

‘……정말이야?’

미심쩍어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최대한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뻥이군.’

허나 경헌도 바보는 아닌지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진짜야. 도와준다니까.’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착했다고?’

‘오해야. 나 원래 착해.’

‘지랄 마.’

경헌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뒤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뱉은 한 마디에 세 걸음도 안 돼 발걸음은 멈춰지고 말았다.

‘도와줄 거 아니면……그럼 방해할까?’

 움찔하며 굳어버린 경헌이 놈이었다. 씨익 입 꼬리가 올라가며 절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언제부터야?’

 다시 묻자 이번엔 솔직하게 대답이 나왔다. 축 쳐진 어깨만큼이나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일 년 쯤 전부터…….’

처음으로 보는 경헌의 비굴한 모습이었다. 정말 세상엔 별 취향이 다 있는 모양이다. 

확인사살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다.

‘도대체 걔 어딜 봐서 좋은 건데?’

경헌은 내말에 울컥하는 표정을 짓더니 쌀쌀맞게 대꾸했다.

‘너보단 나아!’

경헌은 불리함도 잊고 제 무덤을 파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도망가듯 사라져버렸다.

병신, 앞날을 생각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샤프로 머리를 긁으며 나는 경헌을 흘끗 바라보았다. 

어느새 책에 집중해선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그다. 맞은편에선 유현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도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잽싸게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찌됐든, 나는 고시생인 것이다.

힘겨운 공부가 끝나고 경헌이 데려다줘서 집 앞에 도착했다. 

자기 전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핸드폰 소리가 들린다. 

이제 슬슬 지겨워지려고 하는 김흥국 벨소리를 흥얼거리며 액정을 보자 해원의 이름이 보인다.

“왜?”

전화기를 받자마자 무뚝뚝하게 물었다.

“뭐 해?”

그러나 대답대신 질문을 던지는 해원이었다.

“자려고. 왜 전화했어?”

“그냥.”

“……심심해?”

“약간?”

바보 같은 문답들이 오갔다.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거실에선 유현이 놈이 뉴스를 보는 중이었다. 친일파에 대한 뉴스가 나오자 흥분해선 욕을 내뱉고 있다.

“아 놔, 저런 새끼들은 사형선고를 때려야 돼!”

마구 광분을 하는 유현 때문에 시끄러워서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니 역시 덥긴 덥다.

 그래도 방금 샤워를 해선지 참을만한 더위였다.

“헤어진 남자가 끈질기게 굴면 더 정 떨어진다는 거 모르나?”

“안 헤어졌다고 몇 번 말해.”

놀리듯 묻자 해원은 언짢은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며칠째 밤만 되면 전화질이다. 

처음엔 답답하고 황당했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 그저 귀찮기만 했다. 

그래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는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주말이다.

“그래서 내일 만나자고?”

“잘 아네.”

“당신이 며칠째 매일 그 소리만 했잖아.”

 처음엔 주말에 보자, 그 다음날엔 잊지 않았지? 

그리고 또 다음날엔 주말이다 잊지 마라 경고하고, 무슨 취조하듯이 사람을 몰아붙이니 모를 수가 없다.

“누가 사채업자 아니랄까봐 하는 짓 완전 악질이셔.”

“내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시침 뚝 떼는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앞에 있으면 한 대 칠 것 같다.

담배연기는 내뿜으며 이걸 어째야 하나 고민을 했다.

“당신 성격 원래 그렇게 뻔뻔해?”

“너도 건방진 게 원래 성격이냐?”

“응, 정 떨어지지?”

“……오늘 날씨 덥다.”

해원은 금방 말을 돌렸다. 요즘 들어 늘 이런 식이었다.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혹시 정신병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황당해서 담배 연기가 코로 나오는 것도 모르고 벙쪄 있는데 수화기에선 그의 뻔뻔스런 목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헤이리 마을 가 봤어?”

“……아니.”

거기 갈 생각인 모양이다. 

헤이리 마을이라면 인터넷에서 보고 한번쯤 가보고 싶었었는데 이 인간이 웬일로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서 묻자 얼마 전에 갔었다고 한다.

“파주에 있는데 괜찮더라.”

“가봤나 보지?”

“땅 보러 가는 김에.”

“……이젠 부동산매매도 해?”

“원래 했어. 지금은 부업 비슷한 거지만.”

그리고 이젠 대놓고 자기 직업에 대해 떠든다. 

그나저나 왜 우리가 예전처럼 데이트 약속을 잡고 자빠졌지? 그런 생각을 하자 어색함이 밀려왔다. 

거절해야겠다 싶어 핑계를 꺼냈다.

“주말에도 공부해야한다니까.”

“하루 정돈 쉬어.”

“그러다 떨어져.”

“떨어지면 다시 봐.”

“지랄 마!”

이 인간이 진짜, 사시가 운전면헌 줄 아나? 울컥해서 오밤중에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다 스스로가 더 놀래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내일 아침에 보자. 열 한 시에 데리러 갈게.”

 그 사이에 해원은 전화를 냅다 끊어버린다. 잠깐, 나 아직 대답 안했다고! 

뒤늦게 외쳤지만 뚜뚜 거리는 신호음밖에 들리지 않는다. 

옘병, 요즘 들어 뒷북치는 일이 왜 이리 잦아졌지? 

황당해서 꽁초를 베란다에 있는 재떨이에 쑤셔 박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유현은 어느새 채널을 돌려 케이블에서 재방송하는 망상플러스를 보고 있다.

“으하하핫핫핫핫!”

 탁사마의 개그에 감격해 데굴데굴 구르는 꼴이 완전 또라이 같았다. 

이 모습을 찍어 경헌에게 보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좋아할 것 같아서 관뒀다.

 나이가 들어 감정보다는 이성이 우선시 되면 사람 만나는 것도 쉬워진다. 

현실에 맞춰 감정도 변하게 되니까. 하지만 누구나 가슴속에 첫사랑을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가장 큰 흉터가 돼서 남기 때문에.

첫사랑을 잊기 힘든 이유는 아마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게 힘들어서 일거다. 

처음 한 연애, 사랑은 맹목적이기 마련이고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 할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기준은 이미 그 사람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도 가장 선명하게 각인 된 건 아마 다들 첫 사랑 일 테지. 

처음 사랑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한 첫 순위의 사람이 첫사랑이기도 하다.

 좋아한 사람은 많았다. 감정은 언제나 지 멋대로 외로움에 힘입어 누군가에게 늘 마음을 줬었으니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인간들 몇은 있다. 

너무 좋아해서라기 보단 너무 이상해서 혹은 너무 웃겨서 혹은 좆같아서 등등. 

원나잇하러 갔더니 조루라 빨아도 안 섰던 병신 같은 놈도 있고, 친구로 지내다 섹스파트너로 지내다 어정쩡하게 

어느 순간 연락이 끊긴 놈들은 뭐 수두룩하다. 

길가다가 애인이랑 있는 걸 마주쳐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며 지나가기도 했고, 전혀 질투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해원은 처음으로 끝이 두려웠던 사람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내 첫사랑 비스무리한 존재였으니까. 

생각이 뒤죽박죽 섞여서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할지 알면서 행동은 굼뜨기 짝이 없다.

유현은 그런 나를 보더니 혀를 차며 충고했다.

“그래서 섹스가 무섭다니까. 하여간 헤어진 애인이랑 술 먹으면 안 돼. 술김에 빽도 된다니까.”

“술 안 먹었어.”

“알아.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술 먹으면 성욕 솟구치고, 그걸 정당화 하려고 감정이 과잉 이입 되선 미련을 후회로 착각한다고. 옆에 있는 사람이 괜히 간절해지고 예전 추억들이 미화 되서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그러나 어차피 끝은 늘 똑같아. 한 번 헤어지면 어차피 계속 헤어져.”

 유현은 나에게 착각하지 말라며 잔소리를 했다. 해원과 만난다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우리 같은 처지에 그 쪽 사람들이랑 인연 맺는 거 안 좋아. 아무리 캐피탈 쪽이라도 결국 고리대금이라고.”

“알아.”

“알면 어서 끊으라고.”

그러고 싶은데 상대방이 도움을 안주는 걸 어떡하라고. 에휴, 한숨밖에 안 나온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열 한 시다. 해원이 온다고 약속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정말 끝내야지.”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유현은 경헌 네 집에 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본가에 갈 일이 있다며 점심쯤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그놈이랑 둘이 있으면 어색한데.”

 투덜거리는 유현을 보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경헌이 놈은 아마 나 없다면 좋아 죽을 거다. 

윤경헌, 나에게 감사해라. 재밌는 구경거리를 놓치는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머니에서 벨이 울렸고 꺼내보니 발신자가 해원이다.

“왔어?”

“집 앞이다.”

“알았어.”

 전화를 끊고 베란다를 힐끗 보니 해원이 보인다. 

몸에 딱 붙는 민소매의 캐주얼한 라운드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채 담배를 물고 우리 집 베란다를 보고 있다. 

저런 차림새는 또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 

늘 답답한 양복이나 세미정장만 봐왔는데 저 인간한테도 청바지가 있었다니 예상외였다. 

그는 나를 발견했는지 빨리 내려오라는 듯 손을 까딱거린다. 

예전처럼 우리 집에 날 데리러 왔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긴 나도 그때와는 많이 다르긴 했다. 

밀집으로 만들어진 아이보리색 중절모에 옅은 하늘색의 나시와 흰색의 후드 나시를 레이어드한 상의, 바지는 끝부분이 접힌 무릎까지 오는 데님반바지였다. 

흰색 투 버튼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가자 그가 담배를 버리던 중이었다.

“……아무데나 버리지 마. 주인이 잔소리해.”

“안 걸리면 돼지.”

내 잔소리에 그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더니 운전석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타라.”

 예전처럼 안에서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그가 말했다. 그 행동에 이상하게 가슴이 싸해진다. 

달라진 건 옷차림뿐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자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마지막이라고 몇 번이나 속으로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헤이리로 가는 길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말로만 듣던 문화예술마을에 간다니 조금 들뜨기도 했다. 

그곳엔 영화감독 박찬욱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의 집과 갤러리가 멋진 건축물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멋진 감각들,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더 멋져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작 와볼걸 하며 아쉬워하는데 해원은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배를 쓰다듬으며 식사부터 찾는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그러지 뭐.”

나도 식전이라 허기져서 일단 식당부터 찾았다. 

북하우스 1층에 있는 foresta 라는 식당에 갔는데 건물 외관도 멋지고 천장이 높아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음식 값은 레스토랑답게 3,4만 원대 코스 요리였지만 어차피 해원이 낼 테니 부담 없이 주문했다. 

코스 요리라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 흠이긴 했지만 나오는 족족 다 먹어치웠고 우리 둘 다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디저트 나올 때쯤 돼서야 여유가 생겼을 정도로 식사에 열중했다. 

그 후엔 담배 한 대 피고 바로 산책을 시작했다. 워낙 볼게 많은 곳이라서 눈이 휙휙 돌아갔다. 

딸기 전시관에 특히 사람이 많았는데 애새끼들도 많고 해서 대충 둘러본 뒤 패스했다.

“우리 집 근처에도 이런 데나 생기면 좋겠다.”

 솔직하게 감상을 이야기 하자 해원은 픽 웃더니 대거릴 한다.

“서울은 땅값 비싸서 안 돼.”

“…….”

 그 현실적인 대답에 절로 얼굴이 구겨지자 해원은 자기도 계면쩍은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앞에 있는 희한한 건축물에 감탄하는 척 하며 휙 앞서 나가는 모습이 어이가 없다.

주말이라 사람들도 꽤 많아 느릿느릿 걸으며 구경을 하는데 아이가 와서 부딪혔다. 

남자아이였는데 뒤로 쿵 엉덩방아를 찧는다.

“조심해. 임마.”

 해원은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엎어진 아이를 일으키곤 계속 걷는다. 

상냥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애는 안 걷어차네.”

 비꼬듯 말하자 그는 얼굴을 구겼다.

“그 정도로 인간말종은 아니거든?”

그 비슷한 건 된다는 말인지? 의심을 가득 담아 째려보자 해원은 또 딴청을 부렸다.

“와, 저 집 멋있다.”

“……바보.”

화제 급전환하는 거 너무 티 나잖아. 게다가 얼굴이 전혀 감탄하는 얼굴이 아니라고.

우리 둘이 그러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애들이 또 한바가지 굴러온다. 

꺅꺅 거리며 시끄럽게 뛰어 다니는 아이들이 개떼마냥 우르르르 몰려들더니 우리 사이를 휙 지나간다. 

내 허벅지에도 안 오는 것들이 굴러다니듯 돌아다니니 나도 모르게 발로 찰 뻔했다.

“얘들아! 조심해야지! 그러다 넘어져.”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다그치며 휙휙 지나갔다. 그 모습을 해원은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데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 건지 모르겠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엉덩이를 팡팡 두들기는 아줌마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당신 취향이야?”

 혹시나 싶어 물으니 해원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나를 돌아본다.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아님 말고.”

너무 질색하는 표정이다. 하긴 저 아주머니 시집도 용케 갔다 싶은 비주얼이긴 했다. 

햇살이 따가워 모자를 푹 눌러 쓰는데 해원은 여전히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뛰어노는 그 얼굴들이 팔자 좋아 보인다.

 하긴 저 어린 것들이 무슨 고민이 있겠냐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안 가?”

“……가.”

 그제야 느릿하게 몸을 돌리는 해원이다. 코스를 돌며 걷다보니 심심했다.

 딱히 할 말도 없지만 말없이 걷기도 지루해서 질문을 던졌다.

“난데없이 헤이리는 왜 온 거야? 이런데 좋아했어?”

“아니.”

“그럼 왜?”

“친구가 여기가 좋다기에.”

 친구도 있었구나. 한 번도 자기에 대해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어떤 친구?”

“돈 많은 친구.”

“……좋은 친구네.”

 밑도 끝도 없이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돈 많으면 도움 되고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다는 얼굴을 하자 해원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하지. 걔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명동에서 알아주는 전주야. 

대통령도 알 정도로 유명해서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 친구는 뭐하는데?”

“아버지 밑에서 일해.”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그가 대답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솔솔 불어오기 시작했다.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해원은 순순히 시인했다.

“나도 그 밑에서 일하고.”

 역시, 내 예상대로였다. 급격히 피곤해지는 머리를 잡고 물었다.

“지금 한다는 일도 그 쪽 계열이야?”

“아니라곤 못 하지.”

 길 한가운데서 끙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보통 사채업자라도 감당하기 힘든데 망할, 이거 완전 어둠의 세력과의 조우구만. 어질어질하다. 

그런 나를 보며 해원도 주저앉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머리 아파.”

“뒤늦게 멀미냐?”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귀찮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은 그런 날 보며 얼굴을 찡그리더니 날 일으켜 근처 벤치로 데리고 갔다. 

나를 앉혀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일분 여쯤 지나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설탕을 약간 넣은 아메리카노는 내가 즐겨 마시는 음료였다.

“……고마워.”

잔을 받아들이며 말하자 해원은 웃으며 차가운 물수건을 내 이마에 얹어준다.

“공부하느라 체력이 약해진 거 아니냐?”

말투는 예전과 달리 투박하지만 그 미소와 내 피부에 닿은 손길만은 여전히 다정했다.

“해원씨.”

“응?”

물수건을 얹은 그대로 상대를 불렀다. 

바로 나오는 대답소리는 눈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간격이 얼마나 짧은 지 알려주고 있다. 

바로 지척에 있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내가 할 말을 기다리는지 해원은 말이 없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 건지 몰라도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진다. 물수건을 이마에서 눈까지 내렸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편했다. 어차피 해야 될 말이기에 잠시 망설이다 결국엔 입을 열었다.

“우리, 제대로 헤어지자.”

헤어지자는 말을 꺼낼 때마다 내 맘도 같이 찢겨지는 기분이다. 

차곡차곡 쌓인 울화를 견디지 못해 처음으로 이별을 결심 했을 때, 그 전날도 사실 이렇게 눈물이 났다. 다 큰 남자가 아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질질 짜는 꼴을 들키기 싫어 욕실에서 물을 틀어놓고 소리죽여 울었었다. 내 처지가 너무 가여워 스스로를 동정했고 위로했다.

 사랑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헤어져야 했다. 

나는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상태가 싫었고 그로 인한 조울증이 너무 무서웠다. 

관계에 대한 끝없는 의심과 비굴한 내 모습이 스스로를 초라하게 했다. 

내가 해원에게 따지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정당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본성을 숨긴 것은 그가 그런 나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다. 

노력해서 그의 뒤를 캐지 않았던 것은 내 환상을 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우리의 관계는 이처럼 위태로운 묵약에서 사상누각처럼 존재했다.

물론 처음에는 내 헤어지자는 소리에 나를 붙잡을지도 모르고 우리의 관계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걸었다. 연락이 없던 일주일동안 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그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다. 

유현이와 하하호호 떠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계속 짓눌리듯 아팠는데, 연락도 없던 주제에 이따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상냥한 정해원, 사채업자 정해원, 아저씨를 패는 정해원, 강간을 화간이라 우기는 정해원은 사실 모두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 맘속에선 이분법이 작용해 과거와 현재의 정해원 둘이 있는 기분이었다. 

최근에 만난 해원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기에 무의식중으로 구별을 한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과거의 그였고, 현재의 그는 마냥 나쁜 놈 같아서 모든 원망을 뒤집어 씌었다.

 하지만 결국 둘 다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맞다. 

그래서 울적했다. 나는 이 사람과 완벽하게 헤어질 자신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지금이야 그때와 사정이 다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안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산 넘어 산이라고 우리가 딱 그 꼴이었다. 과연 이것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인가?

 자기가 헤어지자고 해놓고 눈물을 뚝뚝 떨구는 나를 해원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주차장에서 해원의 차 안이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자 바로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 

그 와중에 물수건도 떨어트렸고 커피도 두고 와 버렸다. 

매우 화가 나 보이는 모습의 그는 날 조수석에 쳐 박은 뒤 운전석에 앉았다.

“왜 또 이러는데?”

“난 이해 못해. 당신 직업도 당신 하는 일도.”

곧 죽어도 나는 깡패는 싫다. 

그것도 보통 깡패도 아니고 정재계에서 본격적으로 노는 그런 악질은 더더욱 싫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건지 해원은 내 말에 화를 낸다.

“야 내가 무슨 범죄자냐?”

“비슷하잖아!”

아니라면 증거를 대봐! 

나도 따라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해원은 미치겠네 소리를 중얼거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 근데 왜 우는 건데? 니가 차놓고?”

“슬프니까 울지!”

그럼 기뻐서 울겠냐? 이 등신아! 목매인 소리를 중얼거리며 티슈를 뽑아 눈을 닦았다. 

내친김에 콧물까지 팽하고 풀었다. 하여간 울면 왜 코까지 막히는 건지 이놈의 지긋지긋한 축농증, 하여간 짜증나. 풀다보니 모자라 몇 장 더 뽑았다.

 코가 빠지게 풀자 시원하긴 했지만 너무 푼 건지 지끈거리며 아프다. 안 봐도 붉어졌을 게 뻔 했다.

 해원은 그런 날 보더니 쯧쯧 거리며 콘솔에서 물티슈를 꺼내 눈가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너는 꼭 이런 데까지 데이트 와서 그런 소릴 해야겠냐?”

“이 소리 하려고 나온 거란 말이야.”

변명하듯 중얼거리자 해원은 기가 찬 숨소리를 내뱉는다.

“내가 도대체 너한테 몇 번 차여야 되냐? 넌 내 얼굴 보면 그 소리밖에 안 떠올라? 아, 이놈이랑 빨리 헤어져야지. 그런 생각만 나?”

“……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길이 거칠어졌다. 울컥한 표정이 훤히 보였다. 

그는 내게 손을 뗀 뒤 티슈를 바깥에다 집어 던지며 젠장 소리를 내뱉었다. 

그 모습에 바로 잔소리가 튀어나간다.

“쓰레기 무단 투기 하지 마.”

“……니가 경찰이야?”

 심히 고깝다는 얼굴이다. 꼭 내가 경찰이 아니더라고 저건 훈계감인데 오히려 따지다니 양심불량이었다.

“그런 식으로 살지 마!”

“……내가 뭘 어쨌다고.”

“왜 젊은 나이에 사지 멀쩡 해갖고 사채 업 같은 거나하고 자빠졌어? 차라리 일수를 찍어라! 남들처럼 평범하게 더럽고 치사해도 남의 돈 받아먹으면서 고생할 것이지! 왜 그런 일을 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해원은 황당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 어디 가서 명함 내밀기도 쪽 안 팔려?”

“……아니 별로.”

“나한테도 말 못했잖아!”

“……그건 니가 법대생이라서…….”

그건 비겁한 변명입니다! 하고 외치고 싶다. 

내가 법대생이라서 말 못했다는 것 자체가 뒤가 구리단 얘기니까.

“그럼 내가 미대생이었으면? 말 할 거야? 의대생이었으면? 말 할 거였어? 법대생만 아니었으면 고백하려고 했어?”

“……아니 그게 또.”

곤란한 표정으로 해원은 시선을 돌렸다. 상황은 점점 우습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반면에 나는 더욱 화가 났다.

“내가 헤어지자고 안했으면 언제까지 속이려고 했어?”

“언젠간 말하려고 했다니까.”

“언제? 나한테 정 떨어 졌을 때?”

저번처럼 사납게 쏘아붙이자 해원은 인상을 확 구겼다.

“아니라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날 못 믿어?”

“믿을 구석이 있어야지! 이름이랑 나이 빼고 다 속였잖아! 그것도 성격까지!”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까 그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뭔데!”

“아, 씹!”

 해원은 내가 몰아붙이자 답답한지 핸들을 주먹으로 치며 버럭 소리쳤다.

“아, 썅! 사랑하니까 그렇지.”

“…….”

“네가 그런 모습을 좋아했잖아. 그런데 너한테 어떻게 말 해? 네가 이런 성격인 줄 몰랐는데! 너도 내숭떨었잖아! 

나도 사기당한 기분이라고!”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울며불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나도 침묵했고 해원도 입모양으로 니미럴, 옘병만 연신 중얼거렸다.

 난데없는 고백에 놀란 나는 그 거침없는 고백에 화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놀라고 답답한 마음에 훌쩍거리며 이 한마디만 내뱉었을 뿐이다.

“지랄…….”

“…….”

 해원은 그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구라 까지마. 이 사기꾼아. 정말 좋아했다면 못 그래. 그렇게 모질게 사람 못 속여. 상대방이 걱정하는 거 알면서 

절대 그렇게는 못 해. 물론 닦달하면 정 떨어질 까봐 끝까지 고고한 척 한 나도 잘한 건 아니지만 당신만큼 독하지 못해서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였어.”

 다시 펑펑 눈물이 나왔다. 참았던 억울하고 분한 감정들이 이때가 기회다 하고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통제 못할 감정들 때문에 나조차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저 울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흐릿하고 뜨거운 시야사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원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조금은 통쾌했다. 

그리고 곧 내 어깨위로 올라와 목을 감싸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미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과를 해도 이보다 더 어색할 수는 없을 거다. 

끙 소리를 내며 등을 토닥이는 손 또한 서툴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전 원한 대신에 서글픔만 밀려왔다.

그제야 그를 피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왜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냐면, 다시 만나고 그를 본다면 용서할까봐 그랬던 거다. 

병신처럼 아직도 사랑하니까.

해원의 품에 안겨있자니 원한이 사그라들고 대신 땡깡만 부리고 싶어졌다. 

예전보다 거하게 만만해진 그를 머리부터 씹어 먹으며 욕을 진탕 퍼부어주고 싶었다. 

일단 울음부터 멈춘 뒤에 하든지 말든지 해야겠다. 그나저나 콧물이 티셔츠에 묻었는데 이걸 어쩐다? 

사소한 고민을 하며 그의 티에 얼굴을 비볐다. 콧물을 흘리는 추한 모습만은 이 판국에도 감춰야 했다.

더운 날씨지만 집 안은 서늘할 정도로 시원했다. 유현은 몸을 휘두르는 냉기에 팔을 벅벅 긁었다.

“야, 좀 춥지 않냐?”

가슴이 훤히 다 보일 정도의 넉넉한 라운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인 유현은 추운 모양이었다. 

경헌은 단박에 옆에 있던 에어컨 리모콘을 들었다. 

자신은 원래 싸늘할 정도로 틀어놓지만 유현이 춥다니 바로 온도를 조정했다. 

유현은 그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보다가 다시 책에 집중을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찌푸렸다.

“배고프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경헌은 그 말에 또 쫑긋 귀를 세웠다.

“뭐 시킬까?”

“그럴까? 근데 시켜먹는 것도 좀 지겹네.”

“그럼 나가서 사먹자.”

 이게 웬일로 먹는데 적극 적일까? 

유현은 경헌의 태도에 가뜩이나 얇은 눈매가 가늘어지며 의심스런 눈을 한다.

 그러나 경헌은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근처에 괜찮은 한식당이 있는데 가자.”

한식이란 말에 유현의 눈이 빛난다. 

수현이 기분 내킬 때 하나씩 던져주는 정보에 의하면 유현은 토속적 입맛이라고 했다.

 고기야 원래 좋아하지만 스테이크보단 갈비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갸가 입맛이 좀 싸구려라서 양념 떡칠 된 걸 미치도록 좋아해. 빵 같은 것도 꼭 길거리에서 파는 토스트 같은 거 먹고, 

붕어빵 같은 것보단 닭 꼬치 환장하지. 꼭 달짝지근하면서 얼큰해야 해.’

수현은 잠시 자리를 뜬 유현이 없을 때 경헌이 쏜 돈있노 피자를 먹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의 증언답게 얼른 나갈 채비를 하는 유현이었다.

‘그리고 밥상에 고기 없으면 화낸다. 하다못해 참치라도 하나 까줘야 돼. 그것도 고추참치로.’

경헌은 자신이 가는 곳이 김치찌개와 갈비찜이 그렇게 맛있다며 소문난 곳이란 걸 다행이라고 여겼다.

둘은 한식집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걸어서 오 분 정도 거리였기에 걸어가기로 했는데 유현은 말이 없다. 

수현과 있을 때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리더니 자신과 있으니 입을 꾹 다문 채 멍한 눈빛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졸린지 눈가를 비비며 목을 이리저리 꺾는다.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만 하려니 힘든 게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평소에 수현과 있으면 간간히 쉬는 시간을 가지며 떠들기도 했는데 말도 없이 공부만 하자니 경헌은 조금 애가 탔다. 

수현이 없다고 좋아한 것도 잠깐 뿐, 적막한 공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이라도 붙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저녁까지 시간이 간 것이다.

경헌은 몰래 인상을 구기며 속으로 자신의 소심함을 구박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수현이 있는 게 나았다. 이거 해, 저거 해 재수 없게 굴어도 최소한 분위기가 썰렁하진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음식점에 도착했다.

“저기야.”

경헌이 음식점을 가리키자 유현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따라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또 어색한 시간을 보내다 식사가 나왔다. 

유현은 말없이 먹기 시작했고 경헌도 수저를 들었다. 유현은 조용하지만 복스럽게, 그리고 많이도 먹는다. 멀리서 보면 평범하지만 그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느새 한 그릇 해치우고는 아줌마를 불러 한 공기를 더 시켰다. 

그리고는 밥이 올 동안 심심한 듯 반찬을 뒤적이다 꾹 다물렸던 입으로 드디어 한마디를 꺼낸다.

“여기 맛있네.”

딱히 경헌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대화가 아닌 단순한 감상인 듯 반찬을 하나 집어 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건너편에선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를 대견해하는 경헌이 있었다.

네이버에 자신의 동네 맛 집을 검색한 뒤 추천수가 가장 많았던 집으로 온 것이다. 

어제 새벽 내내 시퍼런 모니터화면을 뒤져대던 수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띨구 같은지도 모르고 좋아라하는 경헌이었다.

경헌이 유현을 처음 본 것은 학교에서였다. 그때만 해도 사실 별 관심조차 없던 동기 중 하나였다. 

유현은 거의 개인플레이였고 수현 외에 사람과는 교제조차 하지 않았다. 

수현은 그나마 성격이 외향적이었지만 유현은 학교에서는 매우 조용했던 것이다.

같은 과라도 수업이 틀리니 둘이 늘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헌은 유현과 수업이 같은 것이 많아 자주 얼굴을 보곤 했다. 

그리고 그의 소문도 당연히 귀에 들렸다. 

선후배 동기 가릴 것 없이 쌩 까는 태도로 일관하는 그는 평이 매우 안 좋았다. 

건방지다, 재수없다 등등의 소리는 기본이었고, 여자애들은 처음엔 섹시하게 생겼다느니 좋아하다가 나중엔 싸가지 없게 생겼다로 의견을 바꾸었다. 

학과 모임에 참석하라는 말을 하면 대답도 하지 않고 휙 가버린다거나, 말이라도 붙이면 쌀쌀맞게 귀찮은 티 팍팍 내는 것이 경헌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왜 저렇게 싹퉁 머리가 없대?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사람들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했었다. 

수현은 요령 좋게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지만 유현은 말 그대로 개 무시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는 벼르고 있던 과대가 화를 내자 그는 피식 비웃음을 날리며 한 방 먹인 것도 목격했다.

‘내가 비싼 돈 주고 공부하러 와서 너희들 비위맞춰야 돼? 그리고 너희들 모여 봤자 중요한 일 얘기 하냐? 술 먹고 놀기밖에 더해?’

그 말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유현은 법학과 공공의 적으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헌에게 유현은 싸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제대 후였다. 

그의 집안은  충분히 면제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열혈법학도인 그는 어른들의 제안을 거절한 뒤 현역으로 입대했다. 

어릴 때부터 각종 비리와 루머에 휩싸이는 집안 환경을 싫어했고, 다큐멘터리 프로들을 보며 서민들의 애환과 학대받는 여성이나 아이들이 가여웠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기에 그런 죄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게이였음을 자각한 뒤 생긴 꿈이었다.

친구들도 모두 평범한 편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보통보단 형편이 나은 집들에 어릴 때부터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군 제대 후 게이 바에 갔을 때였다. 

평소엔 강남에 있는 데카당스가 단골이지만 그 날은 이태원 쪽으로 향했다. 

친구 중 한 명인 성호가 유학 갔을 때 만난 파트너가 추천한 곳이었다. 

성호는 체구는 경헌과 친구들을 끌고 그곳으로 갔다. 

생긴 건 잘 생겼는데 키는 170이 약간 넘어 아깝다는 평가를 받는 친구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곳에서 성호가 유현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야, 저 놈 따악 내 식성이다.’

‘누구?’

친구들은 성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며 수근 거렸다. 바에 앉아있는 두 남자가 보인다. 

한쪽은 마르고 한쪽은 평범한 체구의 남자들로 둘 다 머리가 짧은 편이었다. 

유현은 헐렁한 줄무늬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털이 별로 없고 잘빠진 다리를 그대로 내놓고 있었다. 게다가 그 얇은 눈을 반달로 접어 웃으며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대화중이었다. 

수현은 옆에서 같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경헌은 처음엔 그들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가게가 어둡고 수현은 아예 등을 돌린 상태에다 유현도 경헌이 있는 쪽에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둘이 커플인건가? 아깝다.’

‘야 경비 있다고 도둑이 못 들어 가냐? 기다려, 내가 꼬셔 볼테니.’

성호는 호언장담을 하며 그 쪽으로 향했다. 

키는 작아도 근육도 단단하고 체격도 좋은 편인 그는 여태 퇴짜 맞은 적이 거의 없는 탑이었다. 

사실 같은 남자끼리 체격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탑, 바텀 구별이 리버시블한 이 세계였다. 

적성에 맞아 한 포지션만 고집하는 쪽도 있다지만 말이다. 경헌도 탑을 선호했다. 

곧 성호가 성큼성큼 다가가 유현에게 말을 붙이는 것이 보인다. 

유현은 그를 살펴보며 자신보다 키가 작음을 눈치 채곤 픽 웃음을 흘렸다. 

비슷하다면 몰라도 자신보다 5cm는 작은 남자는 취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호는 끈질기게 그에게 말을 붙였다.

‘내 친구들이랑 같이 한잔 하지 않을래?’

‘됐어.’

서슴없이 반말을 지껄이는 것도 왠지 재수 없다. 

이런 스타일은 건방이 하늘을 찔러 나중에 뒤끝도 안 좋기 마련이라 유현은 싸늘하게 거절했다.

‘왜이래. 내 친구들도 다 괜찮아. 우리가 강남의 F4라고 불린다니까. 야, 너희들 이리 와 봐.’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친구들을 가리키는 성호였다. 

하지만 그 말에 수현은 옆에서 자지러지듯 웃었고 유현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F4?’

친구들이 성호의 부름을 받고 다가갔다. 

경헌은 뒤쪽에서 느릿하게 걸어갔지만 유현과 수현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군대에서 얼굴이 많이 탄데다 머리가 짧아 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상태였다. 

유현은 친구들을 쭉 살펴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사실 성호와 경헌 말고는 상태가 그닥 좋지 않은 멤버들이었다. 짧게 혀를 차며 유현이 물었다.

‘……Fuck you 4의 줄임말이냐?’

‘으하하하하하! 퍽 유 포!’

수현이 그 말에 바닥에 쓰러질 것처럼 웃어댔다. 

난데없는 정신공격에 성호는 안색이 새파래졌고 친구들 또한 석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경헌은 그제야 유현을 알아보았다. 

비웃는 듯 올라간 입 꼬리와 상큼하게 눈웃음치며 욕을 하는 그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같은 과 동기를 게이 바에서 봤을 때 그 뻘쭘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몹쓸 말버릇이라니, 경헌은 초면부터 악담을 내뱉는 유현 때문에 아연실색해 있었다.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어라? 이게 누구야?’

따지려는 찰나였다. 수현이 갑자기 경헌을 알아보고 바싹 다가왔다.

‘너 윤경헌 아니냐? 와, 살다보니 이런 우연도 있네?’

‘뭐? 누구?’

수현에 말에 유현도 다가왔다.

‘아니,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웬일이야?’

 유현은 빙글거리며 웃는 낯짝 그대로였다. 그 순간 맹렬하게 앞에 있는 상대를 후려치고 싶었다.

그 이후에도 툭하면 그것을 빌미로 같은 동성애자 끼리 나누고 살자며 삥을 뜯었다. 

경헌은 처음엔 피해 다니려고 했지만 같은 과에 수업도 겹쳐 그 덫을 피해가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억지 춘향처럼 마지못해 끌려 다니다 어느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지금은 저 짐승 같은 식욕조차 사랑스럽다니 정말 갈 때까지 갔다는 생각을 하는 경헌이다.

정확히 언제라곤 집어 낼 수 없지만 저 거친 입담도, 도를 넘어서는 식욕도, 이해 안 되는 똘끼 까지 전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에 단단히 미확인 외계 콩깍지가 기생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사랑인지 저주인지 헷갈려하면서도 같이 있다는 게 행복하니 진정 돌아버린 모양이다. 

혼자 베시시 웃는 경헌에게 유현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쪼개고 지랄이야? 내가 우스워?”

“…….”

“아님 미쳤냐?”

 문제는 상대가 그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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