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궁 (?:굽실거릴 궁)
여전히 날씨는 더웠다.
학교 도서관은 에어컨은 빵빵하기에 별 문제가 없지만 길바닥에선 일사병으로 객사 할 것 같다.
도서관에서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저녁인데도 뜨거웠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는 아이스크림이 직빵이지. 수현은 아, 먹고 싶어라 아이스크림이여 타령을 했다.
그러나 들어야할 사람이 반응이 없자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유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유현아. 형이 나뚜루 녹차라 땡기는구나.”
“먹고 싶으면 니가 사서 쳐 먹어.”
유현은 수현의 말에 지랄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곧 물끄러미 쳐다보자 움찔하고는 근처에 슈퍼로 발길을 옮긴다.
흥, 지은 죄가 있으면 잘 할 것이지. 수현이 중얼거렸다.
해원과 그 일이 있은 뒤, 수현은 다음날에야 통화내역을 살펴보다 원인을 알게 되었다.
전화부에 해원과의 기록이 있던 것이다.
분명 통화한 기억이 없는데 이럴 리가 없다 생각한 그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때쯤이면 클럽에 있을 땐데 자신이 아니면 유현과 경헌밖에 없다.
경헌이 그럴 리는 없고 유현을 추궁하자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지만 끈질긴 닦달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해원에게 확인 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실토한 것이다.
가증스러운 새끼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철판 깔고 아니라고 박박 우기 더만 해원에게 전화하려고 액션을 취하자 바로 넙죽 엎드리던 그 앞뒤 다른 모습이라니
진정 정치적 인간이었다.
‘미안해! 죽여줘!’
오냐, 네 소원대로 죽여주마. 수현은 바닥에 달라붙은 유현이놈의 등을 고대로 찍어버렸다.
꽥 소리를 내며 엎어지는 것을 자근자근 밟아주기도 했다.
‘다 너 때문이잖아! 이 궤색키야! 니가 친구냐? 웬수지?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냐? 어?’
‘으악! 수현아! 살려줘! 잘못했어!’
‘혹시 나만 고시에 합격할까봐 두려웠던 거냐? 아니면 내가 너한테 큰 잘못했어?’
피해망상이 극대화된 수현은 친구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화려한 그라운드 기술을 시전 했다.
다짜고짜 드롭킥을 날리고 이어서 연속기를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한 때 철권에 재산을 투자하며 꿈꾸던 소년의 기억들이 다시금 부활한다.
아류겐, 소류겐 , 와따다두겐! 효과음까지 내면서 폭력에 심취한 수현이 유현에게 심각하게 물었다.
‘바라는 대로 해주지. 어떻게 죽는 게 취향이냐?’
님하, 그건 킹오파 이오리 대사…. 유현은 맞는 와중에도 오류를 지적하려 했다.
그러나 사지를 압박하는 강렬한 고통에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고 결국 바닥을 치며 패배를 시인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굽실 모드로 지내는 것이다.
나뚜루 녹차 아이스크림, 이 돈이면 담배는 한 갑 소주는 세 병인데.
분식집가면 떡볶이와 튀김 네 개와 순대까지 먹을 수 있는 가격도 된다.
삼겹살은 일인분, 식당가면 정식 한 끼였다. 구체적 아쉬움이 태풍이 되어 그의 가슴을 짓이긴다.
자그마치 삼 천 원에 가까운 가격을 지불하며 유현은 피눈물을 흘렸다.
물론, 당분간 집안에서 모든 가사활동 전반도 그의 몫이었다.
‘아즘마, 배가 고프네. 오늘 점심은 냉면 어때?’
‘…….’
시켜먹어 개놈아! 라고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안쓰럽다.
‘아즘마~내 티셔츠 아직 안 빨았어? 오늘 입으려고 하는데 안 보이잖아. 빨리 빨아서 다려놔요.’
수현은 대놓고 가정부 취급하며 유현을 막 굴려먹었다.
부잣집사모님 흉내를 내며 얄밉게 구는 것이 뒷산으로 끌고 가서 패고 싶은 걸 억누르라 미칠 것 같았다.
‘아유~강원댁, 밥은 하고 쳐 자니?’
게다가 굳이 자는 걸 깨워서, 그것도 고향 지명으로 불러대니 확 열불이 솟기도 했다.
제대로 건수 물어 사람 피 말리게 하는 수현이었다. 그 집요함에 유현은 혀를 내둘렀다.
세상이 참 각박하다. 사소한 실수가지고 친구를 압박하다니, 유현은 옆에서 팔자 좋게 누워있는 수현의 뒤통수를 가격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잠시 쉰다는 명목이지만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든 그는 코까지 약하게 골고 있다.
확 코를 틀어막아버려 천국으로 보내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수현이 발로 허공을 찬다.
“억!”
헛발질을 한 그는 자신의 행동에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수업시간에 자다가 자주 겪는 잠꼬대였다.
스스로도 민망한지 머리를 긁던 수현은 주위를 쏠리는 시선을 의식하고선 곧 스윽 침을 닦으며 다시 공부하는 척을 했다.
뻗친 머리와 책에 눌린 자국 그대로 뻔뻔스럽게 공부에 열중하는 척 하는 모습이 가열차다.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벙찐 얼굴을 했다.
유현도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다. 저런 상병신을 봤나 싶은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은 경헌 또한 표정이 제대로 구겨져있었다.
유현은 그의 반응을 보고 구겨진 인상을 피며 작게 소리 내며 웃었다. 수현은 여전히 공부하는 척이다.
도서관에서 셋이 보이는 일상적 풍경이었다.
그러다 세 시간에 한번쯤은 담배 타임을 가지러 밖에 나온다.
셋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기도 하고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도서관은 공부하긴 편했지만 자세가 불편해 가끔 가볍게 스트레칭도 했다.
나무 테이블에 다리를 올려놓고 허리를 숙이자 뿌드득 소리가 난다.
“아이고, 허리야. 강원댁아. 나 어깨 좀 주물러라.”
그새를 못 참고 또 부림질이다.
유현은 이를 빠득 갈면서도 며칠 만에 길들여진 노예근성으로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앗, 아잉. 거긴 성감대야.”
몸서리를 치며 반응하는 수현의 말에 유현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그곳만 더 집중적으로 건드리자 수현이 자지러지며 낄낄거린다.
“으앗! 하악! 아! 그만해. 으하하하하하하!”
“겁내 시원하지? 더 해주랴?”
“으하하하하학! 하악! 이 새끼! 너도 당해라!”
미친놈처럼 웃어대는 수현과 이젠 아예 대놓고 간지럼피우는 유현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곧 쌍방향 성희롱을 시작했다.
“이리 와! 엉아가 격하게 안아줄게!”
“아앙! 야메떼!”
본격 에로놀이를 시작하는 그들을 보며 경헌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것들은 삼 분 이상 조용하질 못한다.
“……도대체 너희들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
한심하다는 표정이 제대로 우러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수현과 유현은 잠시 놀이를 멈춘다.
그리고 곧 뻔뻔스럽게 대꾸하는 것이다.
“초딩 때 슬기로운 생활대신 야매로 술기운에 생활 배워서 그래.”
“나는 탐구생활 대신 탐욕생활을 사교육 받았지.”
가정교육을 퓨젼 무협 판타지로 받아서의 리뉴얼 판인가? 경헌의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이들을 만나고 나서 주름살 걱정이 마를 날이 없는 그였다.
이년쯤 되었으니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볼 때마다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말린다고 들을 인간들도 아니라 경헌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아, 이제 들어가서 공부나 하자.”
유현과 장난을 치던 수현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요 근래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이 없어 긴장했는지 바짝 학구열을 태우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가망 없는 첫 시험을 초반부터 박살조짐이 보여 겁을 먹은 그다.
수현의 제안에 나머지 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책 파러 갈 시간이었다.
“배고프다.”
“저녁 되려면 멀었어.”
“앉아서 공부만 하니 괜히 허기진다. 이러다 똥배 생기겠어.”
“마치 없는 것처럼 얘기한다?”
가면서도 수현과 유현은 서로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며 장난을 쳤다.
생긴 건 전혀 닮지 않았지만 하는 짓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이름도 비슷하고 체격도 비슷해서 의혹은 점점 커지고 있다.
혹시 친척은 아닐까 아니면 경헌은 진심으로 의심했다. 게다가 은근히 비밀이 많은 것도 닮았다.
겉으로 보면 숨김없는 성격 같지만 그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경헌이다.
‘지난 번 그 남자는 대체 뭘까?’
집 앞까지 찾아와 보쌈 하듯 끌고 갔던 해원을 생각하면 사귀던 관계가 아니라 채무관계 같았다.
혹시 숨겨둔 빚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라고 하고.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겠다며 훌쩍거리며 차 빌려달라고 하기에 빌려줬더니 남자 쪽은 매달리고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분명 몇 주 전 차 빌려 갈 때만 해도 수현은 이리 말했었다.
‘그 사람은 날 호구로 알아. 완전 정부취급이라니까. 흑, 난 완전히 장난감이었어. 아이고, 이 죽일 놈의 사랑.
흑흑흑. 하지만 이제 차였으니 잊어야겠어. 그러기 위해선 여행이 필요해.’
그때 만해도 수현은 분명 자신이 피해자며, 그 남자는 천하의 망나니인 뉘앙스를 풍겼다.
저 성질에 그럴 리가 없다곤 생각했지만 잔뜩 우울한 얼굴로 실연했으니 여행이 가고 싶다 징징거리기에 큰 맘 먹고 빌려준 차였다.
기차는 싫다, 시원하게 드라이브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며 훌쩍거리는 게 불쌍해서.
그래놓고선 지금 저렇게 희희낙락이란 말이렷다. 역시 그 말도 사기였던 거다. 도저히 믿을 구석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앞에서 가던 둘이 또 무언가 틱틱거리기 시작했다.
“사와!”
“돈 없어!”
보아하니 수현이 또 유현에게 뭔가 사오라며 시키는 모양이었다.
어제 오늘 들어 보이는 신 풍경에 경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유현이 넌 쟤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냐? 왜 그렇게 설설 기어?”
확실히 유현이 수현한테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움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서로 한번 시선을 교환 한 뒤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우리 사정이니 너는 알 거 없어.”
“……아, 그러세요?”
또 유치하게 왕따 놀이냐? 하여간 쓸데없이 비밀도 많은 것들이라고 경헌은 혀를 찼다.
미친 듯이 궁금하지도 않으니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약간은 섭섭한 게 사실이었다.
학기 초부터 그랬지만 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둘만 노는 것은 여전하다.
마치 친한 여자친구들처럼, 서로에게 말도 다른 곳에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그조차도 같이 지낸지 일 년이 넘었으나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곤 없었다.
꼭 끼어들고 싶은 목표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기분이 나쁜 경헌은 입가를 씰룩였다.
그런 경헌을 보면서 수현과 유현은 피식 웃음을 짓는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약 올리는 게 훤히 보였다.
“것 봐. 역시 수상하잖아.”
집에 오는 길에 유현은 내 옆구리를 찔렀다. 푹 찔러 들어오는 아픔에 윽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분히 사감 섞인 동작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내가 봐도 그래.”
경헌은 오늘 과외가 있는 날이라며 저녁을 먹자마자 휭하니 사라졌다.
전문 법조인에게 과외를 받는다니 역시 재벌은 달라 비꼬았지만 부럽긴 부럽다.
원래 사시 생들의 법학 강의는 보통 몇 사람들이 한정된 득세를 하지만 그 같은 갑부들은 독점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말로는 아는 사람에게 모르는 것이나 물어보는 정도라지만 아무리 봐도 시커먼 기운이 엿보였다.
괜히 욱하는 마음에 ‘갈 거면 밥이라도 사주고 가!’ 조르자 경헌은 짜증스럽게 훑어보긴 했지만 결국 식당에서 밥까지 사주고 갔다.
지금은 밤 열한시가 가까운 시각, 우리 둘은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지쳐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중이다.
“만약 걔가 들이대면 어쩔 거야?”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해원과 사시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한 머리다. 한숨을 내쉬자 유현은 키득거리며 웃는다.
“병신, 차라리 안 하고 말지. 올라타는 건 또 뭐야. 크하하하하!”
“아, 닥쳐! 니가 그 상황이었어 봐라.”
몸은 달궈질 대로 달궈졌지.
오랜만에 하는 거라 절박한 그 상황에 대물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자 유현은 길거리에서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아 놔 웃겨서 미치겠다! 으헤헥! 크학! 헤엑! 쿨럭!”
웃다가 숨이 막힌 지 꺽꺽 거리는 유현을 짜증스럽게 후려보며 앞서 걸었다.
뒤에서 같이 가 하며 유현이 또 쪼르르 달려왔다.
“그래서 그 쪽에선 연락 없어?”
어느새 말끔한 본 목소리로 돌아와 묻는다.
“아, 몰라.”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다 이놈아.”
자꾸 보채는 유현을 밀어버렸다. 그러나 이젠 내 목을 잡고 달달 흔들며 말해달라고 지랄이다.
“나도 정말 모른다니까! 뭘 알아야 얘길 하지, 그 이상 아무것도 없었는데 뭘 말하라는 거냐?”
벌컥 성을 냈다. 유현은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야? 진짜 연락 없었어?”
“그렇다니까!”
집근처 골목엔 내 노성이 울려 퍼진다.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무척이나 짜증스러웠다.
그저께 밤이었다. 해원은 날 집 앞까지 데려다 줬다. 오랜만에 관계를 하니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등은 안락한 시트에 기대있고 치킨 한 마리를 먹어치워 배도 불렀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애써 눈을 부릅뜨며 참았더니 하품이 새어나왔다.
차가 집 앞에 서자 나는 미련 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잘 가.’
예의상 인사를 해주자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는 달리 별로 피곤해보이지 않았다.
그를 잠시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곧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해원이 재빠르게 빈손을 잡아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귀찮다는 뜻이 역력한 싸늘한 음성이었다. 해원은 그 소리에 쓴웃음을 지었다.
내 태도는 여전히 까칠했고 그때가지만 해도 아무런 미련 없어 보인다.
밀려오는 쪽팔림의 도가니탕에 푹 절여져 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해원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잡힌 손을 풀어주지도 않은 채였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들어는 주마.
하지만 짧게 해라 나 졸리다 기운을 강하게 내보이자 그는 또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내 목에 손을 댔다. 갑작스런 동작에 움찔하는데 불시에 끌어당겨졌고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윽.’
입술이 강제로 벌려지고 혀가 침투해온다. 윗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며 혀가 잇몸을 건드렸다.
떼어내려고 했지만 역시나 장사급의 힘을 가진 그라서 헛수고였다.
그러나 정사 때처럼 강렬하지는 않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포기하고 그에게 맞춰 나도 혀를 굴렸다.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달까?
조용한 밤거리에다 차 안이라 우리가 내는 숨소리와 질척이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었다.
한참이나 내 입안을 헤집어놓고서야 그는 떨어졌다.
얼떨떨한 나는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는데 그가 내 뺨과 이마에 차례로 키스 한 뒤 입을 열었다.
‘난 너 포기 할 마음 없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 후엔 잘 들어가라며 인사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기에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얌전히 내리고 집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졸리고 피곤하고 정신없었다. 내가 헛것을 들었나 싶기도 했다.
결정적으론 그 집요함에 오싹함까지 느껴 빨리 잠들어버리고 싶었기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와서 누워버렸다.
“……무섭다.”
“그치?”
유현은 내 말을 듣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하도 말해 달라 징징 거리기에 풀 스토리를 말해주니 공포라며 소리를 지른다.
나도 무서운데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곧이어 나온 소리에 내 인상도 살벌하게 구겨졌다.
“네 본모습을 보고도 포기하지 않겠다니……정말 무서워.”
“…….”
“그거야 말로 공포특급이다.”
“……이 새끼가.”
유현은 내가 주먹을 휘두르자 깔깔 거리며 한 바퀴 굴러 옆으로 피했다.
화가 가시지 않은 나는 옆에 있던 베개를 던졌다.
“너나 나나 그 나물에 그 밥이거든? 오십 보 백보야! 니 주제파악이나 해!”
“내가 너보단 낫지.”
“어디가?”
“몸매를 보나 성격을 보나 다들 내가 낫다 그래.”
“좆 까! 꿈꿨냐?”
어디서 그딴 개소리를, 발로 차려고 하자 유현은 한 바퀴 더 굴렀다. 그러다 벽에 머리를 찧었다.
우리 집은 굴러봤자 몇 바퀴도 안 된다. 으하하하 샘통이다!
손가락질 하며 비웃자 유현은 바닥에 엎드려 끙끙거렸다.
“아우, 샹. 졸라 아프네.……근데 너, 영 싫어하는 것 같지가 같은데?”
유현은 부딪힌 부분을 문지르며 물었다.
“……어디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묻자 유현이 킬킬거린다.
“정말 싫으면 키스할 때 가만 두지 않았을 거 아니야?”
“…….”
“그리고 올라타지도…….”
“그만 해!”
내가 무슨 콩 나무 타는 잭도 아니고 하루 종일 올라가는 얘기만 한다.
이러다 대기권 뚫겠네! 짜증이 솟구쳐 유현에게 베개를 던졌다. 놈은 맞으면서도 끝가지 낄낄 거린다.
“아이고, 이 년 하여간 밝히기는.”
“……닥쳐라? 응?”
“하긴 오래 굶었지? 원래 일주일에 한 번은 하다가 몇 주 쉬니까 죽을 맛이었지? 크하하하하하!”
“야!”
저 놈 아주 작정을 하고 개긴다.
에어컨은 차마 킬 엄두가 안놔 선풍기를 틀어놓고 마루에서 나란히 누워 있는 중이다.
바닥을 굴러다니며 우현이 쳐 웃는 꼬라지를 보다니 속이 뒤틀린다. 제길, 괜히 얘기해줬다.
원래 서로 숨김없이 얘기하는 편이라 다음 날 유현에게 털어놓은 건데. 후회가 든다.
“사실 애인이라기 보단 스테디 같은 거였잖아. 이 기회에 진짜 애인하던가. 크크크, 법대생과 깡패라니 무슨 드라마 같다.”
“닥쳐라.”
어느새 데구르르 굴러와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고 누운 유현이 나한테 달라붙어 속삭인다.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자 유현은 좋으면서 빼기는 이라며 또 킬킬킬 거렸다. 드라마 좋아하고 자빠졌다.
그리고 만약 드라마라면 코믹로맨스가 아니라 본격 싸이코 법정 드라마가 될 게 뻔했다.
“말 이 되는 소리 좀 해. 그리고 잠이나 자라.”
유현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유현은 궁시렁 거렸지만 이내 입을 다문다.
사람은 옷을 입고 생활한다. 웬만하면 자신의 맨 몸을 보이는 것은 보통 싫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끔은 누드가 되기도 한다. 탈의실이나 목욕탕 같은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벗어야 하니까.
그리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곳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치기도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 민망함과 비슷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해원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서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온전한 내 모습을 보여준 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에게 절대 내 바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사정이야 어쨌든 겉보기엔 완벽한 연인이었고 나 또한 그에 어울리는 역할을 연기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숨기는 게 많아서 나 또한 그러겠다는 복수하고 싶은 심리도 약간 섞였을지도 모른다.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남들이 뭐라 하건 인생을 즐기며 욕망에 솔직하게 살아왔다.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쪽팔리기도 했지만 순간일 뿐이다.
실수는 있지만 엄청난 피해나 비판받을 행동은 한 적이 없다고 자부한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쯤은 성인이나 당연한 것이다.
완벽하진 않아도 그럭저럭 스스로와 타협해서 만족할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전화기는 계속 울린다.
해원의 번호가 액정에서 빛나고 있지만 받아야 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여졌다.
한 번 끊겼지만 다시 걸린 전화다. 받을 때까지 걸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어쩔 수없이 도서관 밖으로 나가 슬라이드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왜?”
“나야.”
무뚝뚝하게 입을 열자 해원이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예전 같은 목소리였다.
“공부 중이었어?”
“……그래. 무슨 일이야.”
“그냥.”
해원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말없이 있자 그가 다시 물었다.
“언제 시간 나?”
“고시생이 놀 시간이 어디 있어?”
“주말엔 쉬는 거 아니었어? 이태원 게이 바에도 갔으면서?”
퉁명스레 대꾸하자 해원이 묻는다. 그 말에 입이 다물렸다. 제길, 할 말이 없다.
“그땐, 친구들이 꼬셔서 어쩔 수 없이 간 거야.”
변명하듯 내뱉으니 수화기 너머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웃어라 아주 그냥 쳐 비웃어라.
자폭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그가 소리 내어 더욱 크게 웃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주말에 보자.”
웃음기를 머금은 채 제안하는 소리에 어이가 잠시 외출했다.
“……왜? 무슨 일로 봐야 되는데?”
우리가 왜 만나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궁금함을 숨기지 않고 묻자 해원 쪽에선 침묵이 이어진다.
“있잖아. 정해원 씨. 우리 헤어졌어. 당신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미 끝났거든?”
화가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잘 될 것 같아? 난 아니라고 봐.”
“그건 두고 봐야 알지.”
그러나 해원은 뻔뻔스레 대꾸한다. 지랄한다, 두고 봐야 알겠다니. 충분히 겪고도 모르는 모양이다.
“우리 삼년동안 뭘 했는지 기억 안나?”
“…….”
이 얘기는 정말 하기 싫은데 자꾸 하게 된다.
내가 헤어지자고 한 이유이고 우리가 안 되는 증거니까 어쩔 수가 없다.
“삼년 사귀었어도 우리 제대로 안 거 없어. 그런데 다시 시작한다고 잘 될 것 같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지금부터 다시, 제대로 시작하면 되잖아.”
맙소사, 내 어이가 이젠 드디어 가출을 했다. 그리고 그는 개념이 내면에서 퇴출당했음이 틀림없다.
황당함에 굳어있는데 수화기에서 그가 언짢은 목소리로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툭 끊어버린다.
“어쨌든, 주말에 보자.”
“……. 이 거 봐라? 잠깐, 이봐! 정해원 씨 나 아직 대답 안했거든?”
발신이 끊긴 상태에서 외쳐봤자 삽질이었다. 전화를 들고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뭐하냐?”
경헌이 자판기 앞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음료수를 뽑으러 온 모양이다.
“전화 좀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경헌은 그러냐 하고는 자판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버튼을 누르자 쿠당탕 소리가 나며 음료수가 출입구로 떨어졌다.
경헌은 허리를 숙여 꺼내며 나에게도 묻는다.
“너도 마실래?”
“……실론티.”
평소 즐겨 마시는 음료를 말하자 경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찍었다.
교통카드로도 결제가 되는 자판기였다.
“유현인 커피면 되나?”
“어.”
유현은 커피 광이었다. 그것도 프림이 들어간 다방 커피 류를 좋아한다.
음료수를 들고 다시 들어가는데 경헌이 날 흘낏 쳐다본다.
“근데 너 그 헤어졌다는 남자랑 복잡한 것 같다?”
“……신경 꺼.”
싸가지 없는 말투로 대답하자 경헌은 혀를 찼다.
“걱정해줘도 뭐라 그러냐?”
별로 걱정하는 얼굴도 아니다.
그냥 궁금해 하는 걸로 보일 뿐, 눈가를 찌푸리며 남이사 뭘 하던 무슨 상관이냐 쏘아붙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유현이 했던 말이 또 기억난다.
평소엔 모르다가 가끔 혹시나 하는 그 것, 경헌의 의심스러운 태도문제였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호기심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너 나한테 왜 그렇게 관심이 많냐?”
게다가 잘해주기까지 하지.
차도 빌려주고, 밥도 잘 사주고, 술도 잘 사주고 부르면 투덜거리면서도 달려오고.
이건 거의 호의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같이 지내도 여태껏 별 생각 없었던 것은 놈이 막상 태도는 오만불손하기 그지없기 때문이었다. 전혀 흑심이 느껴지지 않는 저 표정과 상냥하지 않은 말투. 어딜 봐도 로맨스는 없었다.
따지듯이 묻자 경헌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
무슨 가당찮은 얘길 하냐는 얼굴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아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너 혹시 나 좋아 하냐?”
까짓 거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러자 완전히 굳어버린 얼굴이 보인다.
사시에서 네 번쯤 떨어지면 나올까 말까한 표정이다.
“김수현, 너.”
“뭐?”
설마 정곡 찔렀나 싶어 뻔뻔하게 대꾸하니 경헌이 놈이 나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죽고 싶냐?”
살인도 불사할 만큼이나 열렬한 눈빛이었다.
“…….”
유현아, 이건 절대 아니라고 봐. 지금쯤 도서관 구석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친구가 무척 원망스러웠다.
경헌은 여전히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묵묵히 운전을 한다.
공부가 끝나면 우리를 집 앞에 데려다주는데 오늘만큼 냉기가 풀풀 날린 적 이 없다.
왠지 심하게 미안하다.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저럴까? 그러나 마음 한편으론 울컥하기도 한다.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이정도면 쓸 만 하구만, 헤테로도 아닌 주제에 나를 거부하다니 재수 없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건 아까전의 극렬한 거부반응이 나를 죄책감에 물들이게 했다.
아니, 감히 니가 어떻게 그따위 오해를 할 수가 있어? 라는 시선과 억울한 표정이 물씬 흘러나던 그 반응. 사람 한껏 소심 해지게 시리…… 나쁜 자식. 뒷좌석에서 얌전히 눈을 흘기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집까지 도착했다.
“잘 가라.”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현이 내리고 나도 따라 내려 문을 닫자 바로 경헌은 휭하니 떠나버렸다.
“아, 배고파.”
유현의 속편한 소리에 여태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야! 이 개새끼야!”
가방을 유현의 등짝에 메다꽂아버렸다. 쪽팔림이 그나마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넘어지며 어이쿠 소리를 내뱉는 유현을 다시 발로 밟았다.
“너 때문에 개 쪽 당했잖아!”
“악! 이놈이 미쳤냐!”
갑작스런 구타에 유현이 당황해하면서도 같이 덤볐다.
그러나 나의 불타는 분노의 어택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내가 다시는 니 말 믿으나 봐라!”
하여간 인생의 도움이 안 되는 자식이었다. 분이 가시지 않은 나는 계속해서 유현을 패고 또 팼다.
“악! 야! 이유나 알고 맞자!”
“닥쳐!”
이유를 말하기가 더 부끄럽다 이 개자식아!
아니 땐 굴뚝에도 연기가 나는 모양이다.
오늘 제대로 헛 다리를 짚어 창피함이 온 몸을 골고루 순환하고 있다. 거기에 울화까지 겹쳐 돌고 있다. 덕분에 고혈압 증세까지 보이고 있다.
“진짜 아니래?”
한참을 맞은 유현은 눈두덩이에 계란을 비비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뿔싸 하는 표정이다.
그리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린 것이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 왜 그랬대?”
“내가 아나!”
알면 그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지. 짜증을 팍팍 내며 대답하자 유현이 그럴 리가 없는데 소리를 지껄인다.
“그럼 대체 뭔 의도래?”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도대체 윤경헌이 그 대가리 속에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다.
뇌를 딸 수도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사실 뭐, 아니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쪽팔림은 순간 일뿐이고 경헌에게 이미지가 나쁘게 찍혔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볼 것은 없다.
나에게 윤경헌이란 존재는 지갑, 혹은 보너스 카드 같은 존재였다.
나에겐 유현이란 친구가 존재했고 이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을 거란 것도 알고 있다.
우린 처지가 비슷했고 서로에 대한 평가도 공정하다.
가족보다 잘 통하고 연인보다 특별하고 평생을 함께할 확신이 있는 친구가 있는데 난데없이 굴러온 돌에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돈이 좀 많고, 그것을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장점과 같은 게이라는 이유가 아니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윤경헌은 너무 잘났다.
미모, 지성, 재력, 운까지 겸비한 주제에 그것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건방짐조차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타고난 재수덩어리.
알고 보면 가난뱅이 출신에 콤플렉스 덩어리고 남 잘되는 꼴은 두고 보지 못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행운아, 품종 좋은 서러브레드였다.
재벌집안의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부족한 것이 없기에 아쉬움이 뭔지도 모르는 족속이 그였다.
일 년 넘게 알고 지내는 동안 경헌은 한 번도 그런 뉘앙스의 얘길 꺼낸 적이 없었다.
후회나 자책이나 고민 따위도 없어보였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완벽해 보인다. 자신감은 인간의 가장 큰 재산이라고 본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는 것은 사랑받고 풍족하게 자란 자에게 옵션처럼 따르는 일종의 권능이고.
유현과 나처럼 권력과 재산을 얻기 위해, 전문가가 되기 위해 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뚜렷한 소신과 목표가 있어 학과지망을 한 그는 근본부터 우리와 달랐다.
나와 유현의 모진 구박에도 꿋꿋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환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친구가 된 게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어쩌다보니 친해진 것이라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밥 얻어먹다가 친구가 된 사이였다.
학기 초에 유현과 나는 그를 보며 툭하면 뒷담을 까곤 했다.
‘저렇게 그림처럼 잘나면 재수 없지 않냐?’
‘뭔가 하자가 있겠지.’
그의 배경은 입학당시부터 소문이 나있었다. 유현과 막 친해진 초기에도 그는 눈엣가시였다.
자신과 같은 나이에 훨씬 더 앞서있고 가능성 있는 인간이 있으니 질투가 나는 게 당연했다.
뭘 하든 원조 해 줄 수 있는 배경까지 갖추고 있다면 그야말로 표적이 될 수밖에.
그래서 우리는 그를 대놓고 씹을 거리를 찾곤 했다.
그러나 저 새끼는 딱히 씹을 거리가 없었다.
건방지긴 했지만 근거가 있었고, 잘못된 행동은 애초에 안 하고, 공과 사를 구별하고 딱히 튀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군대 가기 전까진 변변찮은 대화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질투만 했던 기억이 난다.
‘재수 없어. 돈도 많은데 왜 저리 가진 게 많아?’
‘이래서 신은 불공평 한 거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만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나의 무기가 있지만 그의 부티 나고 다양한 것들이 더 멋져보였다.
남의 떡이 원래 커 보이는 법이니까.그나저나 경헌이 놈에 대해 생각을 하자니 자꾸 그 말이 떠오른다.
‘죽고 싶냐?’
…… 제길, 내 인생 최고의 굴욕이었다. 그럼 도대체 이유가 뭐란 말이냐!
왜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것이며 선심을 베푸는 거야! 화딱지가나서 베개를 퍽퍽 두들겨 팼다.
유리엄마가 토끼인형 구타하듯이 스트레스를 풀 때였다. 문득 유현이 놈이 중얼거렸다.
“그 새끼 내 앞에서는 별 말도 없고 조용하거든. 그래도 너랑 있으면 말도 많이 하고 잘해주기에 난 니가 목표인줄만 알았는데.”
“뭐?”
그 말에 고개가 휙 돌아간다. 뭔가 뒤가 구린 포스를 풍기는 이야기다.
귀를 쫑긋하고 유현의 말을 경청했다.
“셋이 있을 땐 몰라도 둘이 있으면 겁내 어색하거든. 나 너 없을 땐 걔랑 얘기도 거의 못 해봤어. 나랑 둘이 있을 땐 새끼가 언짢은 표정으로 기분 나빠하더라고. 너랑 더 친한 척 했지. 열라 싫어하더라고.”
“엥? 그랬어?”
처음 들은 얘기다. 무언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더 하라고 유현을 재촉했다.
“너 화장실가거나 그러면 나랑 둘이 공부할 땐 휙 나가버리고, 니가 뭐 조르면 바로 해주잖아. 내가 뭐 사달라고 하지? 그럼 꼭 다른 거 먹으라고 해. 넌 알잖아 내 입맛 완전 토속적인데다 노인네입맛인거. 근데 놈은 꼭 느끼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먹으라고 지랄이야. 하여간 재수 없어.”
“…….”
얼레려? 이건 아무리 봐도 그렇고 그런 것 같은데? 슬슬 각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번에 선유도 갔을 때 기억 나냐? 그때 놈이 자꾸 이왕 갈 거면 다른 데 가지 왜 하필 그런 데냐고 하루 종일 투덜거렸잖아. 개새끼, 내가 촌놈이라고 무시하지.”
“야, 그건 더 좋은데 가자고…….”
“그런 귀여운 짓거리라면 내가 이러겠냐? 게다가 그것 뿐 아니라 저번에도 그랬어. 내가 오랜만에 클럽 처음 가자고 했던 때 있잖아.”
“응, 그때 왜?”
“윤경헌이 옆에서 꼭 여기여야 되냐고 자기가 좋은바 안다고 차라리 거기 가자는 거야. 그것도 게이 바도 아니고 그냥 일반 바였어. 왜 그해야 되냐니깐 거긴 싫다는 거야. 미친놈 게이 바도 수준 맞춰서 가나. 무슨 로얄 패밀리 전용이라도 있나보지?”
“…….”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자 역시나 윤경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창가지만 나무 덕분에 그늘이 지는 명당자리였다.
일부러 유현에게 심부름을 시켜 먼저 오자 그는 날 보더니 고개 짓으로 인사만 한다.
“좋은 아침.”
작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자 경헌은 곧 관심을 책으로 옮겼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교재들을 꺼내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유현이 이상형 알려줄까?”
“…….”
경헌의 고개가 퍼뜩 위로 향하며 눈빛이 나에게 꽂힌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볼만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빤히 보인다. 나도 모르게 푹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윤경헌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인다.
그 순간, 내 기분은 절대 반지를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