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왜 이러세요 하느님!
비싼 티켓 값을 내고 닉네임을 적은 명찰을 끼고 들어가니 토요일 저녁답게 인산인해를 이루는 클럽 안은 이미
후끈한 열기로 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우리의 교복차림은 그나마 준수했고 여장한 사람들과 코스프레한 사람들까지 널려 파티 장은 대략 아수라장이다.
귀가 따가운 음악소리에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카운터로 가니 지호 형이 보인다.
“어이, 왔냐?”
우리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바빠 보이길래 고개 짓으로 인사하곤 빈 테이블이 없나 찾았다.
다행히 구석자리에 빈 공간이 보인다. 평소엔 저런 곳이 인기지만 파티 날이라 그런지 비어있었다.
셀프였기 때문에 유현이 음식과 술을 가져왔다.
내가 좋아하는 데낄라 슬래머와 DNA, XXXX등을 내려놓고 안주를 더 가져오겠다며 또 자리를 뜬다.
그 와중에 경헌은 둔켈이 없다며 가지러 갔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유현이 가져온 안주 중에 딸기가 있기에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타코야끼도 하나먹고 새우튀김도 주워 먹고, 그러다 탄력 받아서 마구 입에 쳐 넣었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나보다. 결국 유현과 경헌이 접시를 세 개들고 왔을 땐 내가 다 먹은 후였다.
입가심으로 마지막 남은 사과를 먹는데 분노의 오라가 느껴졌다.
“야 이 돼지새끼야!”
유현은 용서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결국 유현의 명령으로 다음부턴 내가 안주를 가져왔다. 제길.
파티는 뒷전이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유현과 경헌이 나가서 허우적거리며 춤을 출 때도 나는 우적우적 먹기만 했다.
어두운 구석자리에서 교복차림으로 계속 먹기만 하다니 참으로 서글픈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먹다 지쳐 식후땡 할 담배를 찾는데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봐도 담배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집에 놓고 온 모양이다. 하나 사와야 되겠다 싶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워낙 이상한 인간이 많은 동네라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 두 갑을 샀다. 편의점 알바가 날 보더니 킥 웃는다.
왜 그런 가 했더니 가슴팍에 있는 곰 모양의 명찰 때문이었다.
호모심슨이라고 적힌 걸 그대로 차고 나왔던 것이다.
“풋!……큭.”
“……하하.”
애써 숨죽여 웃지만 다 들린다.
힘들게 웃음을 참으려 하는 알바에게 그냥 웃으라며 나도 마주 웃어주곤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도 지갑도 가방까지 다 놓고 현금만 가지고 나온 터라 몸은 가벼웠다.
안에 들어가자니 너무 덥고 답답해서 밖에서 한 대 피우고 들어가기로 했다.
입구 앞에 계단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교복 차림으로 흡연이라니 별 짓 다한다 싶다.
뭐 걸려도 민증 까면 그만이지, 한 모금 빨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고개를 흘끗 돌려 바라보니 이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라이터 좀 빌려줄래요?”
대답 없이 라이터를 내밀었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선 고맙다며 다시 내게 넘긴다.
원래 흡연석으로 사용하는 곳이니 별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담배를 몇 모금 더 빠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진다. 흘낏 고개를 돌리니 남자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훑어보니 꽤 나쁘지 않은 인상, 고개를 돌리며 담배를 다시금 빨았다.
그러나 남자는 계속 날 바라보는지 피해도 계속 느껴지는 시선, 슬슬 피부가 따금따끔 하다.
“…….”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걸 어쩐다? 그냥 자리 피해버리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버려?
그러나 귀찮기도 하고 아직 제대로 수작을 걸지도 않았는데 과민반응 같기도 하고, 게이가 게이 바에 와서,
그것도 파티에 참석해서 얌전히 술만 먹고 돌아가는 것은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러다 이게 웬 떡이냐 싶기도 한 것이, 사실 요즘 많이 굶었다는 게 기억이 나는구나.
슬금슬금 단전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빤 뒤 고개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나를 쳐다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명찰과 얼굴을 교대로 보고 있다.
“혼자 왔어요?”
“……마누라랑 애들은 미국에 두고 왔지요.”
“예? ……아!”
말에 남자가 아 맞다, 심슨은 유부남이었지 하며 웃었다. 이왕 온 파티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티켓 비용만큼은 놀아야지. 수절 지킬 상대도 없는데 망설일 게 뭐 있다고.
스테이지에서 돌아오자 구석자리에서 한참 먹고 있던 수현이 보이지 않는다.
유현은 지친 건지 눕다시피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수현이 어디 갔냐?”
“화장실이라도 간 거겠지.”
경헌은 앞에 놓인 맥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핸드폰과 가방도 보이는 걸 보니 가진 않고 근처 어딘가 있는 모양인가 생각하며 유현도 그러려니 했다.
그때, 구석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워낙 어둡고 시끄러워 잘 안 들렸지만 호랑나비 벨소리와 함께 진동하면서 액정화면이 빛나니 발견한 것이다.
유현은 수현의 가방 옆에서 몸을 떨고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정해원이라고 적힌 세 글자가 빛나고 있다.
“우왓! 사채다!”
유현은 전화상대를 알아보곤 눈을 빛냈다. 수현이 사귀던 사채업자 남자였다.
한때는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뒷조사하려고 했던 적도 있던 그 남자!
마침 수현도 자리를 뜨고 없는 상태였다. 유현은 무작정 슬라이드를 열어 자신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수현 씨 핸드폰 아닙니까?”
주인이 안 받고 다른 사람이 받자 건너편에선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유현은 소리 안 나게 웃으며 시침 뚝 떼고 대답을 한다.
“수현이 화장실 갔는데요. 전화 왔다고 전해드릴까요?”
“…….”
유현의 말에 상대는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끊은 건가싶어 유현이 되묻자 해원이 조금 늦게 대답을 한다.
“그냥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아, 예. 그러세……어, 수현이 왔네요. 잠깐만요.”
유현은 알았다며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입구에서 수현이 보였다. 화장실이 아닌 입구 방향이었다.
게다가 옆에 웬 남자를 달고 있다.
“어라? 같이 있는 저 남잔 누구야? 그새 낚았나?”
당황한 나머지 수화기에 댄 채로 유현이 중얼거렸다. 전화 중인 것도 잊은 채였다.
수현은 정장차림의 어떤 남자와 함께 시시덕거리던 중이다.
언제 남자를 낚은 걸까 궁금해 하는 와중에 갑자기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거기 어딥니까?”
“……헉!”
그러고 보니 통화하는 중이었다.
당황한 유현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데 전화기에선 정중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골수까지 압박하는 냉랭한 음성이 들린다.
“거기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아, 저…… 그게.”
“저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합니다. 빨리 대답하시지요.”
웁스! 좆 됐다! 유현의 머릿속에서 빨간 경보가 삐용삐용 울리기 시작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짙은 낭패감에 오들오들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일단 대답안하면 전화기에서 튀어나와 모가지를 비틀어버릴 태세였다.
“……이태원인데요오오.”
“정확히 어디? 이태원이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짜증이 짙게 배인 목소리로 해원이 언성을 높인다. 유현은 찔끔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높임말을 썼다.
긴장으로 인한 극존칭이었다.
“예! 저번에 그쪽, 아니 정해원님이 때려 부셨던 옆 건물 지하 게이바입니다!”
“……게이 바?”
“예!”
“…….”
철컥, 해원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전화를 끊었다. 그 동안 수현은 점점 가까워진다.
유현은 잽싸게 수현의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아마 곧 적의 습격이 있을 텐데!
이곳에 있다간 수현의 원망을 한 몸에 받아야할 상황! 그걸 겪느니 차라리 튀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유현은 덥석 경헌의 어깨를 잡았다.
“튀자!”
“…뭐?”
경헌은 이유도 모르고 유현의 손에 잡힌 채 질질 끌려나왔다.
“야! 갑자기 왜 이래!”
“위험해! 곧 전쟁터진다고! 숨어야 해!”
이 무슨 6.25 대피 훈련 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도 시끄러워 유현의 통화소리도 묻혔기 때문에 전혀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경헌이다.
경헌은 빈손으로 왔기에 짐도 없었다.
수현은 곧 마왕이 강림할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후덜덜 떨고 있다.
“아무튼 빨리 나가자고!”
원인제공은 자신이 했지만 같이 쪽박 찰 의리는 없다. 경헌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코앞에 수현이 보인다.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웃으면 뭔가 얘길 하더니 떠나려는 둘을 보고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너희들 어디가?”
“우리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넌 더 놀다 와라.”
“…엉?”
수현이 당황해하는 사이 유현은 그럼 이만하곤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아줌마들 경보하는 걸음보다 더 빠르고 신속한 몸놀림이다.
질질 끌려가는 경헌이 당황해하며 자신과 유현을 교대로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한다.
“저 둘이 눈 맞았나?”
본인의 빈약한 추리력으론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수현은 머리를 벅벅 긁은 뒤 다시 뒤를 돌았다.
담배 피다 낚은 남자가 무슨 일이냐는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들이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네요.”
“그래요?”
남자는 오히려 더 잘됐다는 얼굴이다. 유현과 경헌이 없는 덕분에 텅 빈 구석자리에 남자와 앉았다.
말발굽 모양으로 연결 되어있는 소파 가운데 자리에 붙어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학생이에요?”
“네. 지금은 휴학 중이에요. 시험공부 때문에.”
“시험? 어떤 시험?”
사시라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싶어 잠시 고민하던 수현은 어떻게 대답할까하다가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사시요.”
“……사법고시?”
남자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하긴, 법대생이 게이 바에 와서 펑크 버젼으로 리폼한 교복차림으로 남자나 후리고 있다니 상당히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수현은 그 생각보다는 사시라고 하니 자신의 눈이 몰린 기분을 느꼈다.
“직장인이세요?”
수현이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회사가 끝나고 바로 온 건지 깔끔한 정장차림이다.
겉으로 보면 수수하지만 폭이 좁은 넥타이로 포인트를 준 세련미가 돋보인다.
키도 크고 외모도 나쁘지 않고 성격도 모나 보이지 않고 다 쓸 만 했다.
방금 가지고 온 새 맥주를 서로 맞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남자는 전자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나이는 서른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애인 없다는 거 정말이에요?”
멀쩡해 보이는데 애인이 없으면 두 가지였다.
병이 있거나 바람둥이거나 분명 둘 중 하나,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눈이 더럽게 높을 수도 있고, 알고 보면 성벽이 특이하다거나,
결벽증 등등의 유난스런 구석이 있곤 했다.
의심스런 눈으로 한쪽 팔을 턱에 괴고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없어요. 정말.”
“그러시구나.”
“수현씨는요?”
“얼마 전에 헤어졌어요.”
“같은 처지구나. 잘됐네.”
그래, 그렇긴 하지. 근데 그게 자랑이냐? 일단 낚여주긴 했는데 어째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수현이었다.
하긴 자신도 솔로니 할 말은 없다. 어차피 사시 때문에 남자를 사귈 생각은 없다.
시린 옆구리 잠시나마 데워주려고 했을 뿐이지.
예전엔 긴장감 넘치고 스릴 있던 견제의 시간이 지겹게 느껴졌다.
어차피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도 없고 대화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냥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릴까 고민하던 수현은 그것 또한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시 준비하려면 굉장히 힘들 텐데, 내 친구는 삼년 걸려서 1차 합격했어요.
그런데 2차를 떨어져서 지금 또 준비 중인데 애가 아주 바싹 말라가더라고요.”
“그렇죠. 뭐.”
가벼운 대화들이 오가고 수현은 네 병째의 맥주를 마셨다. 슬슬 배가 부르다.
아까 전까지 안주를 배터지게 먹은 데다 술까지 들어가니 장이 팽창하는 기분이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화장실로 향했다.
지루한 차에 화장실 가는 척 하고 휙 도망가 버릴까? 그런 생각도 든다.
매너 없는 짓이지만 이런 곳에선 부킹한 상대가 어디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거절이란 건 어차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다음에 마주치면 껄끄러우니 좋은 말로 완곡하게 거절하는 게 보통이다.
수현은 볼일을 보고 나서 손을 씻은 뒤 어쩔까 고민을 하며 밖으로 향했다.
‘그냥 내 스타일 아니다 하고 나갈까?’
어차피 유현도 없고 경헌도 없으니 뻘쭘 하기도 하고 흥도 안나니 집에 가고 싶어졌다.
밖으로 나와 느릿느릿 테이블로 향했다. 남자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다.
수현은 딱히 할 말도 없어 그냥 웃자 남자도 따라 웃는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프구나 생각을 하며 수현은 마냥 웃었다. 어떻게 거절을 할까 고민 할 때였다.
실내가 더 소란스러워진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살폈다. 사람들이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뭔가 싶어 자신도 시선을 따라 가보니 한 남자가 보인다. 입구에서부터 성큼 성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인다.
잔뜩 인상을 쓰고 살벌하게 눈을 부라리는 남자를 보며 수현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남자는 해원이었다. 식겁해서 그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경악어린 표정을 짓자 해원이 자신을 본 건지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게 보인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를 불도저처럼 뚫고 오고 있다.
부딪혀서 인상을 쓰는 사람들은 개 무시한 채, 한 걸음씩 가까워 질 때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렸다.
‘왜 저인간이 여기 있는 건데?’
입만 뻐끔거리며 황당해하는 사이 해원은 벌써 지척까지 다가왔다.
풍이라도 온 건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해원은 무지막지 화가 난 모습이었다.
평소엔 전혀 무섭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도 살짝 쫄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두려운 건 처음이었다.
온 몸으로 나 화났어 기운을 풍기며 까딱하면 한 대 칠 표정이다.
코앞에 있는 상대를 올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해원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험악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너!”
그의 커다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게다가 양 손을 들어 막는 모양까지 취하자 해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 때릴 줄 알았거든. 다시 손을 풀었다. 겁나게 어색한 순간이었다. 에어컨이 이쪽으로 직방인가보다.
심하게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민망함이 온몸을 훑는 와중에 갑자기 옆에 앉아있던 남자가 끼어든다.
“누구신지?”
아, 이놈을 잊고 있었다. 조금 전에 날 낚은 남자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해원과 나는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곤란함 때문에 그런 거고 해원은 아마도 불쾌감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다시 살벌한 얼굴로 돌아가서는 잡아먹을 듯이 남자를 노려본다.
아니, 그냥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무서웠다. 저것이 바로 조폭 포스란 말인가?
남자가 뱀 앞에 쥐 마냥 찍하고 굳는 게 보인다. 쯧쯧, 불쌍하다.
남자를 동정하는데 다시 해원의 시선이 나로 향한다.
“김수현.”
한 글 자씩 또박또박하고 딱딱하게 끊어 말하는 것이 단단히 열받았나보다. 그래 너 화난 거 알겠다.
근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왜?”
그리고 내가 꿀린 건 또 뭔데,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기분 나쁘다.
“여긴 또 웬일이셔?”
“……너 지금 이 남자랑 뭐하는 거냐?”
그러나 해원은 내 질문에 대답은 안하고 딴소리다. 눈이 삔 모양이다.
“보면 몰라? 술 마시잖아.”
날카롭게 대꾸가 나온다. 음주 겸 미팅 중인 거 안 보이시나? 그새 봉사라도 된 건가?
갑자기 떠오르는 한 마디, 장님도 아닌데 눈에 뵈는 거 없는 당신에게 진지하게 라식을 권유해 드립니다.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해원의 인상은 더욱 구겨지더니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어이쿠, 여기서 힘자랑 하시려고? 그거 정말 민폐라니까 그러네.
얼마 전에 고기 집을 화려하게 박살낸 것을 목격했기에 또 다시 그 참상을 겪을까 살짝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뭘 잘못했다고 겁먹어야 하는가? 아까 전에야 놀라서 그렇다 치고 지금은 아니다.
해원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 하고 있었다.
낚시꾼이 해원이 누군지 알려주길 바라는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알았지만 무시했다.
사실 저 남자도 눈에 차지 않았고 이걸로 원 샷 투 킬이 되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꺼져.”
살벌한 목소리로 해원이 눈에 레이져 빔까지 쏘아대자 남자는 움찔거리더니 곧 빌빌거리며 자리를 떴다.
저런 근성 없는 놈! 좀 버팅 길 것이지. 짜증스러운 뒷모습을 눈으로 쫓자 해원이 보인다.
“일어나.”
명령조로 내뱉는 말투가 영 거슬린다. 불만스러움에 눈썹이 절로 꿈틀거렸다.
못들은 척 하자 해원이 다시 이를 갈며 말한다.
“일어나라고.”
목소리 깔면 멋있는 줄 아는 족속들이 많은데 저 인간도 그런 모양이다.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역시나 귀머거리인 척 하자 해원이 목소릴 한 옥타브 높여서 협박을 가했다.
“못 일어나면 내가 일으켜줘?”
나 다리병신 아니거든? 니가 싫어서 이러는 거거든?
짜증스런 눈길로 후려봐 주자 해원은 덥석 내 팔을 잡더니 끌어 올린다.
“아! 아퍼!”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기운도 센 게 팔을 뽑을 듯이 잡아당기니 힘줄 늘어난 것 마냥 쑤셔온다.
거기다 팔을 잡고 질질질 끌고 가기 까지 하니 고통이 두 배였다.
“놔!”
주위의 시선이 느껴진다.
교복차림의 내가 푸댓자루처럼 끌려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미성년자 단속 풍경이 펼쳐지자 몇몇은 웃기도 했다. 야!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놓으라니까!”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하도 단단히 잡혀서 풀어지지도 않는다. 이게 벌써 몇 번째 연행인지 모르겠다.
체념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데 뭔가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뒤를 살펴보자 내 가방이 보였다.
“잠깐! 나 핸드폰이랑 가방 가져가야 된다고!”
그제야 해원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풀어주기는 커녕 지나가던 웨이터를 잡는다.
“야!”
웨이터는 우리를 지켜보다가 해원이 갑작스레 손을 까딱거리니 움찔 했다.
그러나 직업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무슨 일이냐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해원은 어리바리해 보이는 그 웨이터에게 명령했다.
“저 테이블에서 짐 가지고 주차장으로 와.”
“……예?”
“저기 저 빈 구석 테이블!”
“네?……예, 예! 알겠습니다.”
얼빵한 표정으로 묻자 해원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웨이터는 곧 테이블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주차장으로 끌려갔다.
해원에 차에 억지로 태워진 것도 이젠 익숙해지려고 한다.
답답한 차안을 둘러다보며 뭐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내 모습이 창에 비춰진다.
해원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쓴 채 난폭하게 운전 중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 집은 아닌 것 같다.
“이번엔 또 어디 가는 건데?”
비꼬듯 물었지만 대답도 하지 않는다.
총알택시 아르바이트라도 한 건지 놀라운 테크닉과 무시무시한 속도로 신호위반과 속도위반을 번갈아 행하며 달리고 있다.
확 뒤통수를 쌔려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어디 가냐니까!”
답답함에 외쳤지만 상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그래, 씹어라. 아주 꼭꼭 씹은 뒤 살아서 장까지 가라!
옘병할, 짜증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리젠트로 넘긴 것이 산발이 된다.
그 모습이 또 창에 비치니 성질이 나서 결국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몇 모금 환장하며 빨아대자 기분이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니미,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몰아서 액땜하나 싶다.
멍하니 창가를 바라보는데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밤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본 기억이 있는 동네였다.
긴가민가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골목길로 들어간 해원이 곧 어느 빌라 앞에 내리자 확신이 든다.
해원의 집이었다.
“내려.”
차가 세워지고 해원이 시동을 뜨며 드디어 입을 연다. 끝가지 명령조다.
너 군대 갔을 때 교관이라고 했냐? 웃기지 말라는 표정으로 오히려 시트에 더 깊이 몸을 기댔다.
해원은 운전석에서 내려 거칠게 문을 닫는다. 하이고, 그래서 문 부서지겠냐?
지 놈 찬데 고장 나면 지만 손해지. 흥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곧 조수석으로 다가와서 문을 연다.
열자마자 강한 손아귀에 어깨가 잡히고 구르듯이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곤 팔을 잡힌 채로 또 다시 질질질 끌려갔다.
“놔! 나도 발 있어.”
그러나 내 말은 또 개 무시. 엘리베이터에 강제로 태워졌다.
해원은 여전히 내 팔을 잡은 채 층수를 누르곤 한숨을 내쉰다.
“김수현.”
“왜?”
띠껍게 대답하자 해원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냐?”
니 멋대로 끌고 와놓고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리고 무슨 해꼬지를 하려고 이러는 건데.
“어쩌긴, 집에 보내야지.”
자꾸 잊어먹는 것 같은데 나 고시생이야.
집에서 원조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수성가해서 성공해야 되는 케이스라고.
개처럼 공부해서 성공해야할 고시생, 일명 개고생이라고 하지.
사실 나랑 유현이 장난삼아 부르는 말이지만.
“그리고 앞으론 댁은 댁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아야지.”
헤어진다는 건 모두 끝내고 추억도 잊고 남처럼 사는 거야. 다들 그렇게 살아가.
죽을 정도로 애절했어도 몇 년 지나면 다 잊고 살지. 특히 우리 같은 악연은 절대 그래야 돼.
몇 번이나 복습시켜줘도 못 알아듣는 바보 같은 해원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도대체 몇 번이나 이별을 반복해야 하는지 지친다 정말.
“…….”
해원은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가 잡고 있는 팔목 부분이 뜨겁다.
피도 안 통할만큼 강하게 잡아 그 부분만 욱씬거린다.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해원은 나를 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해원 씨. 손 좀 놔.”
그러나 여전히 내말은 무시로 일관하는 그다. 콱 뒤통수를 후려 버리고 싶다.
“놓으라니까!”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는 그에게 외쳤다. 그러나 해원은 문이 열리자 말없이 나를 안으로 밀어버린다.
몸이 기울어져 현관에 엎어지다시피 굴러들어갔다. 그 사이에 쾅하고 문이 닫혔다.
난데없는 공격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보자 해원이 내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운다.
단단한 손바닥이 셔츠 밑에 피부로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해원은 그런 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뭐든 다 네 멋대로 군.”
바짝 다가서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얘기를 꺼낸다. 셔츠 단추를 천천히 푸르면서 말이다.
갑자기 오한이 든다.
“헤어지는 것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전부 네 자유고 말이야. 내 의사 따윈 상관없다는 건가?”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해원의 몸에서 검게 피어나는 포스가 다스베이더 뺨칠 정도였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고민해봤는데.”
고민은 왜 해! 그냥 쌈빡하게 끝난 거라고 생각 할 것이지.
하지만 평소엔 잘도 나불거리던 주둥이가 오공본드 쳐 바른 마냥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초특급 살벌함에 몸서리치며 전신을 휘감았다.
해원은 움찔거리는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억울해서 말이지.”
아니 억울할 것 것까지야……. 니가 뭘 잘 했다고.
그러나 여전히 덜 익은 바지락 마냥 다물린 입 때문에 속으로만 겁내 중얼거리고 있다.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강하게 스파이크 쳤다.
온 몸에 소름이 으슬으슬 돋아나고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이 지배한다.
‘튀어!’
그러나 배수의 진이 쳐져있다. 난데없이 주석의 배수의 진 가사가 생각난다.
앞엔 적이 있고 뒤엔 강이 있다. 앞엔 적이 있고 뒤엔 강이 있다. 그럼 싸워.
이런 가사였는데 내 상황엔 살짝 손을 봐야겠다.앞엔 해원이 있고 뒤엔 벽이 있고… 그럼 빌어!
“해원씨! 잠깐! 우리 대화로 하자고!”
“할 말 없다며?”
그러나 피식 웃으며 셔츠 단추를 벌써 다 풀어버린 그가 보였다. 이제 슬슬 감이 잡힌다.
남자가 옷을 벗는 이유가 뭐겠는가? 공무원 때려 치는 것도 아니고 지금 같은 상황에선 한가지 밖에 없다.
사실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결론은 피를 보겠다는 거잖아!
“왜 이래! 진짜 법정에서 보려고 그래?”
끄에엑 괴상한 소리를 내며 해원의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말에 코웃음 치더니 픽 웃을 뿐이다.
“법 무서웠으면 네 말처럼 남의 등쳐먹는 깡패 짓 했겠어?”
“…….”
틀렸다. 이미 작정했다. 제 정신은 은하철도 999타고 사차원으로 관광 갔어!
눈동자의 동공이 반쯤 풀린걸 보니 제대로 돌았다 이 인간!
해원은 손을 뻗어 내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기 시작했다.
오들오들 떨며 앞으로 다가올 암담한 미래를 상상했다. 빠른 버퍼링과 함께 3D 화면으로 펼쳐진다.
‘하느님! 살려주세요!’
마음속으로 간만에 하느님을 애타게 부르짖었으나 그 분께선 대답이 없으시다. 이런 망할!
언제는 나를 사랑한다더니! 역시나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다.
제길, 아무나 좋으니까 누가 이 놈 좀 말려줘!
달도 밝은 밤이었다. 유현은 멀리 있을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왠지 뒷골이 서늘한 기분이 든 탓이다.
“잘 끝나야 할 텐데….”
방금 전에 걸었던 전화에서 암담한 얘길 들어 마음이 과도하게 불편했다.
지호가 증언하길 웬 낯선 남자에게 질질 끌려갔다고 한다. 앞 일이 훤히 보였다.
그래도 설마 죽이겠냐, 쌓인 정이 있을 테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왠지 기분 상 허공에서 ‘김유현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하는 수현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고기와 곡기를 덜 섭취한 건지 환청도 들리나 싶어 유현은 귀를 팠다.
“어? 무슨 소리야?”
경헌이 옆에서 무슨 소리냐며 물었다. 유현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지금쯤 지옥에 휴가 갔을지도 모르는 친구를 생각하니 안구에 홍수가 밀려온다.
씁쓸하게 웃으며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 삑사리가 원인이래도 어차피 그게 니 운명. 수현아. 살아 만 돌아와라.”
★★★
수현이 들었다면 ‘그따위 미친 자기 합리화 하지 마!’ 외쳤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해원이 아파트에 갇혀있다.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리고 유현은 친구를 사지에 몰아넣는다.
사정은 달라도 결국엔 다 강하게 자라라는 이치라고 유현은 생각했다.
경헌을 꼬드겨 근처 술집으로 도망쳐 온 참이었다. 하지만 걱정은 걱정, 건수는 건수였다.
칠리 새우 탕수육과 이과두주의 끝내주는 조화를 혀끝으로 음미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 진다.
서둘러 나오느라 그 곳에선 안주도 주워 먹지 못했다.
셀프 뷔페라서 장이 터지도록 먹으려고 했는데, 춤추고 먹고 춤추고 먹고 반복하다가 나중엔 괜찮은 놈 있으면 꼬셔서 오랜만에 괄약근 좀 풀어주려 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수현보다 두 달 먼저 애인과 헤어져서 삼 개월 정도 거미줄치고 살았던 것이다.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있던 놈이 없으니 아쉽긴 했다.
‘거, 아깝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서 낚아볼까 고민하며 유현은 입에 또 하나의 안주인 치즈 붉닭을 입에 넣었다. 매운 거에 환장하는 그였기에 안주의 선택이 이기적이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 인생 지가 살아야지 하며 곧 수현의 일은 말끔히 잊어버리는 그다.
경헌은 그런 유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혼잣말도 잘하는 인간들이다.
두서없이 혼자 말하고 대답하고 납득하고,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가 보기엔 수현이나 유현이나 하는 짓이 너무 비슷했다. 특히 자신을 지갑으로 알고 있는 점이 심하다.
‘난 왜 저런 것들과 같이 다니는 걸까?’
물론 이유는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엔 거시기하고,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둘은 각자의 고민을 하며 매운 안주를 집어먹었다.
그러나 유현이 시킨 건 입에서 불이 날 것 같아 경헌은 자신만의 안주를 따로 시켰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체질 때문에 시킨 깻잎, 고구마, 단 호박 튀김을 곁들인 새우튀김이었다.
많이 시켰다고 서비스로 조개탕까지 받았다.
남자 둘이 와서 안주만 네 개라니, 심하게 낭비였지만 유현이 먹는 걸 보니 남길 것 같지도 않다.
그나저나 얻어먹는 주제에 안주를 마음대로 시키다니 심하게 뻔뻔한 유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