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안하다 사채한다
생각해보면 개 깡이었다. 뭘 믿고 그런 도발을 했던 것일까? 보복이 두렵지도 않았던가?
진정 난 돌 머리였나? 차에 타고 옮겨지면서 별별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뻑큐 날린 것도 죽도록 후회했다.
밖에선 얘기하기 힘든 건지 해원은 나를 자신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데려왔다.
그의 회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학동의 한 빌라다.
주차장에 차를 댄 그는 내리지 않으려는 나를 또 힘을 써서 끌어냈다.
나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엄청난 약력에 낑낑 거리며 엘리베이터까지 끌려 왔고 결국 그의 집에 떠밀려 들어갔다.
들어가지 않으려 버텼으나 또 힘 싸움에 져 거실 소파에 앉혀졌다.
난생 처음 와본 전애인의 집은 깔끔하긴 했지만 너무나 살풍경했다.
블루와 화이트 톤으로 이루어진 깔끔하고 넓은 아파트는 장식품도 없고 필요한 가구밖에 없었다.
모델하우스만큼이나 삭막해서 보자마자 약간 질리는 기분이다.
“다 끝난 마당에 무슨 얘길 하겠다고.”
양반다리로 앉아 작게 꿍얼거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해원은 그런 나를 피곤한 얼굴로 바라보며 되묻는다.
“왜 자꾸 피하는데?”
그거야 지은 죄가 있으니 그런 거지. 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그렇게 끈질긴 건데? 내가 빚이라도 졌어? 왜 자꾸 찾아와서 괴롭혀?”
누가 사채업자 아니랄까봐 집에까지 들이닥쳐 닦달이다. 그러나 해원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발뺌을 했다.
“내가 괴롭혔다고?”
아니면 뭔데, 라는 얼굴로 바라보자 기가 막힌 지 혀를 차더니 이마를 꾹꾹 누르며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너 김수현 맞냐?”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다.
“당신이야말로 정해원 맞아?”
내가 아는 정해원은 무척이나 차분한 사람이고 상냥한데 당신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당신이 아는 나와 지금의 나도 다르지만 말이야. 이건 염두에 뒀으면 좋겠네?
“내숭은 연애의 기본이야!”
“인격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내숭이야.”
“윽”
제길,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다. 움찔거리며 입을 다문 나를 보며 해원은 인상을 구겼다.
심히 억울해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다를 수가 있어!”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예전이랑 똑같구먼.”
그저 긴장 좀 풀었을 뿐인데, 내가 뭐 변신괴물이라고 되는 것처럼 말한다.
울컥해서는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자 그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린다. 그리고는 차갑게 내뱉는 한 마디.
“우길 걸 우겨라.”
“…….”
아 예, 겁나게 죄송하네요 씨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훈계 질이냐!
“그래도 직업숨긴 당신보단 나아. 내숭은 애교지만 사기는 범죄라고!”
버럭 외치자 해원은 억울한 듯 외쳤다.
“내가 언제 속였어?”
“친구들이랑 벤처 한다며!”
“나름 벤쳐야! 그리고 친구랑 하는 거 맞아. 신용 대출이라고!”
웃기고 있네.
벤처란 정확한 지식 및 신기술을 활용하면서 창조적이고 모험적인 분야로서 주로 급성장하는 정보, 전자 산업이다.
사채가 벤쳐면 일수는 생활회계 혹은 매니지먼트냐? 부동산 불법 매매는 국토개발이겠네.
무 개념 한 소리를 하는 해원을 보며 나도 절로 이마에 힘줄이 솟는다.
“시끄러! 신용대출이나 사채업이나 뭐가 달라!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앞에 있는 테이블을 주먹을 내려쳤다. 쾅 소리가 좁은 거실에 메아리쳤다.
“당신이나 나나 피장파장인데 뭐 그래서 어쩌자고! 이제 와서 사기 였네 속았네 하면 뭐가 바뀌기라도 해?
헤어진 마당에 자꾸 왜 이러는데?”
소리를 지르자 해원은 잠시 주춤하더니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꾸한다.
“난 헤어지는데 동의한 적 없는데?”
쯧, 까고 있네. 사귈 때랑 헤어질 때랑 똑같은 줄 아나. 원래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랑 다른 법이야.
“원래 헤어지는 건 동의 없어도 되거든?”
“누구 맘대로?”
다시 눈에 힘을 주며 해원이 따졌다. 이 인간 지금 문제의 논점을 살짝 어긋나 있다.
“이봐.”
“왜?”
“나랑 계속 사귀고 싶어?”
“…….”
제길, 대답하지 않으니 은근히 열 받네.
“아니잖아. 근데 뭐 어쩌라고?”
막말로 우리가 계속 사귀는 상태였으면 이 지랄 다 용서하겠다.
그런데 헤어진 마당에 이러는 건 민폐라고.
“이제 와서 어떡하라고!”
진즉 잘하던가! 책상을 탕탕 두들기며 따지니 해원은 곤란한 표정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잠깐, 저 인간 혹시 아무 생각 없이 나 데려온 거 아니야?
설마 싶어 가늘게 눈을 뜨고 주시하자 해원은 슬쩍 눈길을 피하더니 더욱 심란한 얼굴이다.
욱하고 성질이 치고 올라온다. 짜증이 나 머리를 벅벅 긁다가 더워서 모자도 벗어버렸다.
이놈의 집구석 왜 이리 더운 건지.
“이봐.”
고민에 빠져있는 해원을 불렀다. 그는 날 바라보다 곧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린다.
떡지고 눌린 머리 때문인 것 같았다.
“에어컨 없어? 더워 죽겠어.”
내 말에 그제야 더위를 느낀 건지 해원이 아 소리를 내며 거실 테이블에서 리모컨을 꺼낸다.
하지만 시원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다 싶고 머리도 간지럽다.
“머리 좀 감아야겠다. 욕실 어디야?”
해원에게 묻자 오른편을 가리킨다.
“잠깐 욕실 좀 쓸게.”
아무래도 이틀째라서 무척이나 간지러웠다. 뻔뻔한 내 행동에 그는 아무런 재제도 가하지 않았다.
욕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너무 간지럽고 땀에 흠뻑 젖은 채라 신경에 거슬린다.
그러다보니 샤워까지 하고 싶은 욕구가 당겼지만 너무 실례 같아서 살을 내놓은 부분만 물로 씻고 나왔다.
해원은 지친 얼굴로 소파에 앉아있다.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대충 털면서 나오자니 눈가를 찌푸린다.
“바닥에 물 떨어지잖아.”
“내버려두면 말라.”
쪼잔 하게 굴기는. 젖어봤자 얼마나 젖는다고.
그러나 그것조차 용납 못하겠는지 해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더니 욕실로 걸어간다.
수건을 하나 들고 나오더니 내 머리에 덮어씌우고 물기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조금은 거칠지만 여전히 섬세한 움직임, 익숙한 손길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삼년간 만난 사람이다.
산처럼 쌓인 추억 중엔 좋은 기억들도 많고 지금처럼 내 머리를 말려 준적도 있었다.
시선을 들어 바라보니 그도 날 쳐다보고 있다. 이렇게 마주보고 있자니 변한 건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어디까지나 기분만 그렇다는 거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세 가지가 있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만 움직이며 말을 걸자 그가 턱짓으로 대답을 촉구한다.
“깡패, 사채업자, 마약.”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해원은 내 단호한 말투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질 않다.
아차!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다.
방금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던 눈길에서 미미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만 화가 났다는 건 본능만으로 느낄 수 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상대가 낯설어진다. 슬금슬금 뒤로 몸을 뺐다.
왠지 좋을 꼴을 보진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다 말랐겠네.”
슬쩍 해원의 손을 치웠다.
내가 혹시 모를 구타유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나저러나 깡패는 깡패, 수틀리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아무튼, 얘기 끝났으면 이만 가볼게.”
그러기 전에 슬쩍 빠져나가기로 했다.
주섬주섬 소파에서 가방과 모자를 챙기는 나를 보며 해원은 다시 긴 한숨을 내쉰다.
“너랑 계속 사귈 건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나도 없거든? 가방을 매다가 울컥해서 쳐다봤다. 해원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날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헤어질 생각을 해본적은 한 번도 없다.”
“……어쩌라고, 그래서?”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우린 이미 헤어졌어. 그리고 나는 이런 고민을 수도 없이 해왔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모자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이 한마디는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싶다.
아니, 사실은 백마디도 넘게 쏘아대고 싶다.
“지금 당신이 하던 고민 난 천 번도 넘게 했어. 이름과 핸드폰 번호와 나이밖에 모르는 남자와
삼년동안 연애하는 게 쉬웠을 거라 생각해? 진지하던 안하던 간에 스트레스였다고.”
과정이야 어쨌건 결과는 쿨 하게 헤어지고 싶었는데 사람 구질구질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해원은 내 말에 찔린 듯 움찔하더니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말 하려고 했어.”
나한테 질렸을 때? 나 위험한 남자야, 하면서 개폼 잡으며 거절하려고 벼르고 있었을지도.
그런 상상을 하자 웃기면서도 성질이 난다.
“언제? 당신이 헤어지고 싶을 때?”
“마음대로 상상해서 사람 모함 하지 마.”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의심하고 오해하고 실망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나 혼자 속 끓이고 결국 다 타버렸는데 이제와 고백한다고 봐줄 리가 없잖아.
네가 헤어지기 싫어도 우린 이미 끝났어. 하지만 해원은 여전히 정상참작을 원하는 듯하다.
역시 질기기는 더럽게 질겼다.
“내 직업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쉬운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네가 법대생이라는데 어떻게 말해!”
“그러게 왜 그런 민망한 직업을 택했어? 남들이 하는 일 하지!”
더럽고 치사해도 그냥 평범한 일 했으면 좋았잖아. 왜 그 따위 추잡스런 직업을 택한 거야?
지긋지긋한 말싸움을 끝내기 위해 내가 먼저 말을 잘랐다.
“아무튼 나중에 법정에서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 이만 가볼게.”
판사지망은 아니지만 억하심정이 있는지라 공정한 판결이나 변호 따윈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세 걸음도 가기 전에 또 잡혔다.
“난 헤어질 생각 없다니까!”
이 인간이 진짜, 나 데리고 지금 장난치나?
“사귈 생각도 없다며!”
“헤어질 생각도 안했어.”
해원은 내 팔을 잡고는 다시 소파위로 던지다시피 밀어내곤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사람도 열 받으면 저러는구나. 하긴 고운 성정이었으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댁도 나만큼이나 내숭 떠느라 수고 하셨수다.
“그래서 어쩌자고?”
귀찮다는 얼굴로, 짜증난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해원은 고민만 하고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결론을 말하라고!”
“……아직 생각 안 했는데.”
“……장난해?”
이 인간이 지금 시간 없는 고시생 데리고 장난 하나!
피곤한 하루였다. 해원과 만난 것만으로도 오늘치 칼로리는 다 소비한 기분이었다.
어서 가서 눕고만 싶은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현이 나를 붙잡고 닦달을 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걱정한 건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붙잡아 놓고선 어떻게 된 거냐, 그 사람은 누구냐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그래도 꼴에 친구라고 납치당하듯 끌려간 나를 반겨주다니, 조금 감동했다.
찡해서 바라보는데 유현이 답답하다는 어서 대답을 촉구하라며 멱살을 잡는다.
“아! 빨리 얘기해보라고! 그 잘생긴 남자는 뭐냐!”
“……이런 씨댕.”
목적은 그거냐? 가뜩이나 얄팍한 우정 산산이 부서지는구나.
유현이놈을 확 밀어버리곤 내 방으로 들어왔다.
댁이 데려왔으니 데려다 주라고 지랄 지랄해서 편하게 오긴 했지만 마음은 한 없이 찝찝했다.
‘일단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얘기하자.’
머릿속이 카오스인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던 해원의 얼굴은 야근한 회사원 같았다.
‘됐거든? 난 여기서 게임종료하고 싶거든?’
얄밉게 쏘아붙이던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끝끝내 때리지 못했다.
하긴 ‘쳐라, 쳐 진단서 끊고 호강 좀 하자. 삼일만 누워있으면 70만원이라더라.’ 등등을 지껄이며 기를 꺾어 놨으니
때릴 수가 없지. 내가 사채업은 몰라도 자해공갈은 빠삭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옷가지를 내팽겨 치고 욕실로 들어가는데 유현이 졸졸 쫓아온다.
“야. 왜 말 안 해줘? 그 사람 누구냐니까?”
“니가 알아서 뭐하게.”
내 애인 이름이 해원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이상은 모르는 유현이다.
삼년동안 유현이놈을 붙잡고 날 사랑하지 않나봐 엉엉 한탄을 하게했던 주인공이라고 말하기가 민망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피곤한 하루였다.
원래 계획은 집에서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면서 다리 뻗고 공부하는 거였는데.
경헌이가 치킨도 쏜다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못 먹었다.
“야, 경헌인 갔냐?”
“갔다. 너 그렇게 가고 나서 우리 둘이 뻘쭘하게 뭐 하라고.”
“공부도 안했어?”
“하긴 했지.”
“치킨은?”
“먹었지.”
유현이 상큼하게 대답했다.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러냐는 표정이다.
친구가 복날 개 끌려가듯이 갔는데 넌 속편하게 치킨을 먹어?
“…개놈.”
다음에 뭐 먹을 기회 생기면 두고 보자. 절대 너 안 나눠준다.
속으로 화르륵 올라오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데 유현이 놈이 스윽 다가온다.
“농담이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번엔 제법 진지한 표정이다.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왠지 입 열기가 좀 그렇다.
“그게 말하기가 좀……그렇다.”
내가 영 내키지 않아하자 유현은 빽 소릴 지른다. 같잖은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내가 싫은 모양이다.
“야! 친구끼리 이러기냐? 뭐가 그리 비밀이 많아?”
유현에게 멱살을 잡혔다. 놈은 내 목을 잘잘 흔들며 압박을 가해온다. 컥! 무서운 녀석.
“뱉어! 얼렁 안 뱉어?”
“알았어…… 켁! 말하면 되잖아.”
말로 하자고 좀!
긴 밤 지새우며 나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흘렀다.
그동안의 연애과정이야 알고 해원의 정체를 까발리는 것 또한 짧았다.
사실 길어봤자 한 시간이면 쇼부 보는 이야기다. 그러나 내 억울함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새끼가 조폭, 아니 사채업자였다고?”
“그렇다니까!”
이야기하기 전에 맨 정신으로 하긴 어렵다고 운을 떼자 정말 궁금했는지 유현이 자진해서 맥주를 사왔다.
게다가 먹다 남은 치킨까지 알아서 바친다. 망할 놈, 두 마리나 시켜먹었다. 그것도 양념 반 후라이드 반.
다행히 유현이 퍽퍽한 살을 좋아해서 살코기가 많이 남아 너그러운 맘으로 용서했다.
계란도 나는 흰자, 유현인 노른자만 먹는다. 이런 면에서 참 좋은 친구긴 했다.
“끄윽, 내가 살다 살다 진짜 이런 개 같은 경우는 처음이다.”
“그러게. 이야, 어떻게 삼년이나 숨기냐? 독하다. 그놈.”
맥주를 마신 뒤 시원하게 트림을 하며 말하자 유현은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곧 푸하핫 웃었다.
“하긴, 너도 내숭 겁나게 깠지! 둘이 똑같네.”
“야! 이거랑 그거랑 같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직업을 속인 것은 이혼 사유가 되지만 내숭은 아니라고.
“그리고 내가 그동안 좀 속 썩었어? 일주일에 한번은 울증이 찾아와서 니가 그럴 거면 헤어지라고 할 정도였잖아.”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자 유현은 옛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지. 니가 좀 많이 고민하긴 했지.”
“그치? 생각나지?”
“일 년 후부턴 한 달에 한번은 꼭 차버리겠다고 나갔잖아. 헤어졌나 기다리고 있으면 선물 받고 헬렐레 거리면서 들어왔지.”
“…….”
“그 모습이 마치 비리공무원 같아서 나는 생각했지. 아, 이 놈 검사나 판사 되면 큰일 날 놈이구나.
뇌물수수로 콩밥 먹을 기미가 보이더라고. 내가 꼭 말려야…….”
“야! 김유현!”
이 새끼가 지금 친구 하소연 하는데 소금뿌리고 자빠졌다.
확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까 손을 뻗어 모가지를 잡으려하자 휙 피한다.
“야, 농담! 조크!”
“닥쳐! 지금 농담이 나와?”
“아이고! 잘못했어.”
기어코 머리를 쥐어박아야 정신을 차린다. 망할 놈 같으니.
“야! 내가 선물이 좋아서 그런 줄 아냐?”
“아니었어?”
“이게 진짜!”
다시 한 번 머리를 쥐어박으려 주먹을 쥐자 유현은 펄쩍 뒤로 도망간다.
“그럼 뭐가 좋았는데?”
그리고 무슨 법학도라는 놈이 주먹부터 먼저 나가냐, 덧붙여 중얼거리며 유현이 물었다.
“마음씀씀이가 고마워서 그랬지! 나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거야. 내가 뭐 물욕이 심해서 그런 줄 아냐?”
날 추워지면 목도리 선물해주고 손 시릴까봐 장갑까지 챙겨주는 그 정성이 좋았던 거다.
비록 의심이야 사라지진 않았지만 이런 저런 배려에 감동한 거였단 말이다.
찬바람 쐬면 안 된다고 집까지 태우러오고 데려다주고 여름엔 바빠도
바다구경은 잊지 않고 시켜주던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랬던 거라고!
그러나 유현이놈은 이런 내 마음을 전혀 이해해주지 않았다.
“어. 너 물욕 심하잖아.”
“…….”
“게다가 너 돈도 엄청 밝히고.”
유현은 이마에 정답이라도 써 붙이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아찔하며 시야가 흐릿해지고 혈압이 올라 뒷목이 꺾인다.
저 망할 놈, 정말 저딴 걸 친구라도 믿고 살았던 내가 병신이다.
“……너는 좀 맞아야겠다.”
“악! 폭력 반대!”
반대 같은 소리 하네. 반쪽이 되도록 주먹으로 어루만져주마. 개새끼. 넌 뒤졌어.
곧 매타작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집 안을 울려 퍼졌다.
세상이 내 맘 같지가 않다는 것쯤 예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연애도 희망도, 그 어떤 것도 성공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환골탈태의 경지에 다른 내숭을 떨었던 건데. 이렇게 되기 전에 끝내려고 한 건데.
‘어떤 남자는 처음 만날 땐 넌 감동이었어, 그 자체지. 하지만 그건 대뇌환각작용에 의한 내 착각일 뿐이야.
시간이 흐르고 서로를 알면 알수록 실망하고 진부해지는 거야. 사실 그것도 내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러브 필터가 만든
짧은 즐거움이었거든. 세상에 100%만족할 남자는 없어. 언젠가 분명히 웃음대신 눈물만 줄 테니까.’
누가 한 말이더라. 유현이었나? 아니면 어떤 드라마였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에 세뇌하듯이 들려오는 말소리.
속삭이는 것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마신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홧김에 마시는 술은 꼭 이렇다니까. 등이 푹신한 걸 보니 침대인 것 같다.
유현이 놈을 두들겨 팬 뒤에 마구 들이킨 것이 결국 취한 모양이다.
밀려오는 센티멘탈에 온 정신이 흠뻑 젖는다.
평소엔 무덤덤했던 가슴에 소나기처럼 내려오니 김장김치마냥 감상에 푹 절었다.
평소에는 모르는데 문득 가슴 언저리쯤이 뻥 뚫려있는 기분이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렸는데 무언지 알 수 없는 이 초조한 심정은 뭘까. 숨 쉴 때마다 답답해.
갑자기 나만 세상과 툭 끊어져서 동떨어져있는 기분이고.
어른이 되고나서 나이를 한두 살 먹을수록 뭔가 잃어가고 있어.
사람 혹은 사랑.
입에서 닭 비린내와 알콜 내가 섞여서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밀려오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잡채마냥 섞인 이 상념들도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오로지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곧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수마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숙취가 별로 없는 체질이라서 다행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속 좀 쓰린 것 외엔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다.
설사를 하긴 했지만 오히려 시원하니 좋았다. 사실 장이 안 좋긴 하다. 그래서 툭하면 설사를 하곤 했다.
이런 나를 관장형 체질이라며 비웃는 유현이놈과 살벌하게 아침을 먹고 도서관에 왔다.
미리 자리를 맡아 놓고 있는 경헌이 보인다.
경헌은 우리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밖으로 나가자는 싸인을 보낸다.
“어젠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람은 누구야?”
매점에서 냉커피를 사와 하나씩 돌리며 경헌이 물었다.
“그냥 전에 사귀던 사람이야.”
기운 없이 대꾸하자 경헌이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근데 반응이 왜 그래? 무슨 빚쟁이 찾아온 것 같더만.”
“…….”
쓸데없이 감 좋은 놈. 표정을 구기자 옆에서 유현이 키득키득 거리며 웃는다.
안경을 치켜 올리며 슬쩍 씹고선 어서 공부나 하자며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법전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1차 시험이 2월인데, 이제 육 개월도 안남은 이 시점에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서브노트야 학기 중에 틈틈이 공부해서 미리 만들어놓았고 사시 패스한 선배에게 애걸복걸해서 싼값에 구매한 것도 있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애써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슬슬 눈에 잡히기 시작하는 문자의 나열들, 이때다 하고 책에 덤벼들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어릴 땐 무슨 일이 생기면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우울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자고.
그 누구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다는걸 아니까 그런 거겠지. 이해할지언정 동감하진 못한다.
내 일만 잘하면 뭐라고 하지도 않고. 당장은 죽을 것 같아도 조금만 지나면 평소처럼 괜찮아지곤 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혼란도 곧 잡을 수 있을 거다.
며칠 뒷면 원래대로 돌아 갈 테고 몇 달 뒷면 새까맣게 잊고 몇 년 뒤엔 기억도 안날 테지.
공부하고 밥 먹고 다시공부하고 집에 와서 씻고 다시 공부했다.
유현은 오랜만에 진지한 날 보더니 자신도 탄력 받는다며 웬일로 한 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그러다 새벽 한 시쯤 돼서 잠이 들었다. 그때까지 해원의 연락은 없었다.
나쁜 새끼, 아직도 결정 못 했냐?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이대로 연락이 끊겼으면 하는 기분이 들면서도 한 편으론 그가 무릎 꿇고 잘못했다며 싹싹 비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갱생의 길에 들어서 떳떳한 직업을 가지면 안 되나 하는 아쉬움까지 든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
만나면 폭언을 퍼붓고 거부하면서도 막상 떨어지면 그 사람 생각만 계속 반복하고 있다.
사랑은 각인이다.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잊지 못하게 주술을 건다.
편집된 것처럼 잊고 살던 기억도 어느 순간 무언가 실마리를 발견하면 퐁 하고 떠오르곤 하듯이.
내 머릿속에 해원을 박아 넣은 것 같다. 뭘 하려고 하든 자꾸 걸림돌이 돼서 자기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감성들을 방해하는 또 다른 상념, 바로 이성이다.
그럴 시간에 책 한 장이라도 더 읽자, 헤어진 마당에 무슨 삽질이냐?
사채업자랑 뭐하겠다고 등등의 얄밉게 옳은 소리들을 하며 지체 없이 뜯어말린다.
생각해 봐, 그동안 네가 고민했던 시간들 아깝지도 않아? 헤어지려고 결심했던 이유를 잊었어?
내가 쓴 각본대로 되지 않은 결말과 예상대로가 아닌 전개에 혼란스러워 자아분열까지 일어나고 있다.
헤어지면 속 편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사흘 동안 먹고 자고 공부하고 반복하는데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 다니기로 한 게 오히려 잘 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나도 따라가게 되니까.
그리고 경헌도 여전히 같이 다니는 중이다.
지금도 우리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휭 사라지는 놈을 보더니 유현이 어이없다는 묻는다.
“저게 진짜 너한테 관심 있나?”
“그러게, 나도 슬슬 의심이 드네.”
그 수많은 삥 뜯기와 갈굼과 핍박과 구박을 꿋꿋하게 견디면서 경헌은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유현보다는 나한테 선심을 쓰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내가 저놈한테 뭐 잘 보일게 있었던가? 전혀 없다.
목마르다고 하면 음료수 사다주고 다리 앉아있느라 다리 저리다고 했더니 차로 데려다주고,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혹시 알고 보니 친구가 없어서 저러나?”
“설마, 친구는 없어도 주위에 사람은 많은데?”
그렇게 의견을 나누는데 마침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아, 원래 쟤 삼학년 끝나고 휴학한다고 안 했나?”
“그랬던 것 같은 데.”
“근데 왜 우리랑 맞췄지?”
“모르지.”
유현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면서 우린 윤경헌이 왜 저러나 의견을 나누었다.
해원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잊어버리기로 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근데 그 사람한텐 연락 안 와?”
“어? ……어.”
유현이 해원의 얘길 꺼낸다.
마침 생각하던 중이라 뜨끔해서는 대충 대답하자 놈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본다.
“너 설마 기다렸냐?”
“무슨! 야, 어이없는 소리마라.”
“진짜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유현은 의심을 풀지 않는다.
가늘게 눈을 뜨고 내 옆구릴 쿡쿡 찌르며 추궁을 한다.
“솔직히 말해 봐. 기다렸지?”
“아니라니깐!”
“정말이야?”
“이 새끼가 속고만 살았나 왜 친구 말을 못 믿어? 와, 세상 진짜 삭막하다.”
일부러 더 과장된 제스쳐를 취하며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아니라고, 아니거든? 아니라잖아!
우겨대자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렇다 치자가 아니라 그렇다니까!”
“그래, 그래. 우리 수현이 아주 그냥 귀여운 짓만 골라하지.”
“아악! 김수현! 귀 썩었냐? 왜 니 멋대로 각색이야!”
하지만 내 절규는 귓등으로 흘리며 유현은 터벅터벅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야 임마! 너 지금 나 무시 하냐!집에 돌아와 유현은 메일확인을 하고 나는 샤워를 했다.
날이 더워서 이젠 매일 씻어야하니 귀찮아 죽겠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오는데 유현이 날 부른다.
“야! 수현아.”
“왜?”
“우리 내일 휴일인데 저녁엔 쉴까?”
휴일에도 도서관은 개방하기에 애초에 목적은 공부였다.
하지만 웬일로 먼저 놀자고 제안하다니 무슨 일인가 싶어 유현의 방으로 가니 모니터엔 대문짝만하게
한 여름 밤의 꿈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그동안 메일확인을 안 해서 몰랐는데 오늘 보니 초대장이 와있더라고. 지호형네 가게 이맘때쯤엔 대대적으로 파티 열잖아.
오라고 메일까지 보냈는데 씹으면 미안해서 말이지.”
“아, 그랬지.”
그러고 보니 계절마다, 삼 개월의 한번은 파티를 연다.
분장을 해도 되고 각자 실명대신 명찰에 닉네임을 적어서는 솔로들 간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원래 지호 형은 바를 열기 전에는 이벤트업체에서 일해서 이런 걸 매우 좋아했다.
“갈까?”
“가자!”
안 그래도 꿀꿀했는데 가서 화끈하게 놀면 좋지.
좋아라 대답하자 유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뭘 입고 갈까 고민을 시작했다.
“우리 저번에 입었던 하와이안 티셔츠 맞춰 입고 갈까?”
“병신아. 그건 관광용이고 이번엔 파티거든?”
“그런가?”
뭐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없지. 파티엔 평상복 입고 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고 보니 예전엔 우리도 이상한 분장을 하고 놀러가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드니 역시 그런 것 보단 다른 게 당긴다.
“뭔가 사람들이 보면 바로 기절초풍 할 그런 거 없을까?”
“그치? 더 괴상한 거 없나?”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꺼내봤지만 신통한 것이 없다. 즐거운 고민을 하며 떠들다가 결국 새벽에 잠들었다.
예상대로 오전 늦게 일어난 우리는 느릿느릿 준비를 하고 아예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다.
경헌에게 도서관 대신 우리 집으로 오라고 연락을 했더니 한 시간쯤 지나 벨이 울렸다.
“왔냐?”
반갑게 인사하며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얼굴은 못 볼꼴을 본 사람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나와 유현은 낄낄거리며 웃어재꼈다.
그리고 곧 어젯밤에 정한 닉네임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안능하쎄요. 전 호모 심슨입니당. 홍홍홍.”
“전 에러배우에요. 우~.”
“……무슨 개소리야?”
나는 바짓단을 잡고 숙녀처럼, 유현은 문에 기댄 채 입술을 내밀고 섹시하게 김애경 톤으로 인사하자
경헌은 더욱 인상을 찡그린다. 그리고는 아래위로 살펴보며 질색 팔색을 했다. 쯧쯧, 아직 모르나 보군.
“너 메일 못 봤냐? 지호형네서 오늘 파티 있잖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자 경헌은 그제야 아 하며 탄성을 질렀다. 메일을 받긴 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수초도 안 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니 근데 왜 교복차림이냐고!”
“뭐 어때? 여자교복도 아닌데.”
“가장하고 싶어도 재료가 없어서 말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미친.”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경헌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다. 하긴 우리가 봐도 좀 주책스럽긴 했다.
어디를 봐도 성인인 남자들이 교복을 입고 있자니 어색한 것이다.
그그래도 유현이 놈은 피부가 미친 듯이 깨끗한 동안이라서 괜찮았다.
염색한 갈색머리 때문에 조금 삑사리긴 하지만.
나는 검은머리지만 뒷머리는 어깨까지 오는 긴 레이어드 커트였다.
나는 여름이라 더워서 소매부분을 잘라버리고 펑크 삘로 리폼한 셔츠에 검은색과 붉은색의 비스듬한 스프라이트 넥타이를 매고 있다.
머리는 올백으로 넘겨서 뒷머리를 삐치게 만든 리젠트라 불량해 보인다.
셔츠는 두 개 풀러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해골마크 아대를 하고 있었다.
진회색 교복 바지에 신발은 검은색 올스타 스니커즈.
유현은 비슷한 차림에 체크 모노그램 넥타이다.
머리를 왁스로 삐쭉하게 세우곤 개목걸이에 가죽팔찌에 체인까지 달고 있어 양아치 같다.
거기에 뿔테 안경을 끼자 밴드 하는 놈 같았다.
그 꼴을 보며 경헌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도대체 교복은 왜 갖고 있는 거야?”
“예전에 만우절 날 입고 다녔었거든.”
그게 아마 대학교 2학년 때였나? 우리 둘 다 마침 교복을 갖고 있어서 의기투합해서 그러고 다녔다.
물론 예의상 학교에서는 안 그랬지만 그대로 게이나이트로 직행, 남자 여럿 후리고 왔다.
“너도 입을래? 하복 개조 한 거라 동복은 남았는데?”
내가 고3때 살이 쪄서 아마 경헌이 놈한테 맞을 것 같다. 친절하게 제안하자 경헌의 인상이 험악해진다.
“꺼져!”
싫음 말지 소리는 왜 지르는지. 쯧쯧, 재미없는 놈. 결국 우리 둘만 그 꼬라지로 외출해야했다.
경헌이 놈이 차가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마 이 차림으로 나갔다면 미친놈들 소리를 들어야 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