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수아저씨
가뜩이나 더운 여름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불쾌지수가 제대로 치솟는 나날이다.
셔츠 단추를 세 개까지 푸르고 서류로 부채질을 하지만 얼굴만 시원하고 팔목만 아프다.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해원의 인내심이 뚝 하고 끊겼다.
“에어컨 언제 고친다는 거야? 대체 며칠 째야?”
책상을 쾅 내려치며 으르렁거리며 따지듯 묻자 옆에 있던 철중이 어깨를 으쓱한다.
“오늘 고치러 온다니까 좀 참아.”
그의 눈빛에서 자업자득이란 문자가 보였다.
얼마 전에 자신이 에어컨을 걷어찬 것 때문에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선풍기를 돌려놓기는 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해원은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디 가?”
“더워서 일 못하겠다.”
언제는 열심히 일한 것처럼 얘기한다. 문을 우악스럽게 박차고 나가는 그를 보며 철중은 혀를 찼다.
“쯧, 그 핑계로 땡땡이지. 하여간 성질하고는.”
그나저나 정말 덥긴 더웠다. 책상에 앉아있던 그는 선풍기 바람을 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쪄 죽을 것 같긴 하다.
“은선씨, 기사 언제 온대?”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던 여자 직원에게 묻자 그녀도 더운지 머리를 질끈 묶고 미니선풍기를 들고 있다.
평소엔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채 한껏 청순하던 그녀도 더위엔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세시쯤 온대요.”
“그나저나 더운데 우리 점심은 뭐 먹을까? 콩국수 어때?”
마침 점심시간이기도 해서 배가 고픈 철중이 제의하자 은선도 반가운 얼굴을 한다.
“괜찮죠. 근데 전 냉 모밀 먹고 싶은데.”
“그래? 그럼 냉 모밀 먹지 뭐.”
“냉 모밀에 초밥 먹어요!”
철중은 전화기를 들어 단골 일본식 음식점에 전화를 넣었다.
냉 메밀두개와 초밥을 시키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둘은 소파에 앉았다. 더우니 밖에 나가기도 싫었다.
“그나저나 정실장님, 왜 저리 기분이 안 좋으신 거래요?”
평소 비단결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냥한 편에 속하던 남자였는데 요 근래 들어선 폭군이 따로 없다.
“원래 저랬어. 그동안이 이상했던거지.”
“어머, 저 입사하고 나서 쭉 그래오셨는데?”
주임인 은선이 이 회사에 입사한건 이년 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취직해 회사에 다니다 대학 진학 때문에 퇴사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대학자격증이 필요했던 것이다.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하고 싶던 공부를 하려 야간 전문대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해 다시 직장을 구하던 차에 이곳에 왔다.
처음엔 일수 대출회사라기에 꺼려졌지만 경력자 완전 우대에 월급도 후하고 면접을 보러 와선 깔끔한 이미지에 반했다.
신축건물 3층에 위치한 이곳은 평범한 사무실과 같았다.
대출이라곤 해도 요즘은 캐피탈도 대중적이니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면접관이었던 상사 두 명이 미남이었고 상냥했다.
간혹 어깨들이 들락거리고 거친 사람들도 많지만 여태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이곳에서 공주대접 받는 게 나쁘지 않다.
일하는 동안 많이 친해져 떼인 돈 있거나 누가 해꼬지 하면 얼른 말하라며 귀여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합법적인 법인회사에 경리 직이니 불리할 것도 없다.
사장은 명동 쪽에서 다른 대출일 때문에 거의 오지도 않고 사무실엔 이사인 철중과 실장인 해원만 있었다.
경리사원과 전화 상담을 받는 여직원은 지금 휴가 중이고 몇 명의 직원들이 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영업 쪽이라서
거의 얼굴도 보기 힘들어 늘 해원 아니면 철중과 함께 있곤 한다.
사실은 그들도 개인사무실이 따로 잇고 외근이 잦아 은선 만이 상담원인 혜경과 경리사원인 승진과 함께 사무실을 지켰다.
지금은 휴가철이라 이사와 실장인 둘이서 업무를 도와주느라 사무실에 나와 있는 것이다.
철중은 늘 웃는 얼굴에 다정다감한 성격이고 해원은 냉정해도 상냥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내다보니 처음의 냉랭한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어지고 갈수록 대하기 편해졌다.
“원랜 안 그랬어요? 난 실장님이 낯 가려도 친해지면 굉장히 사근사근하신 줄 알았는데.”
“사근사근은 무슨, 살벌하다면 몰라. 저게 애인 생겨서 변한 거야. 그래서 한동안 내숭떨고 다니더니 얼마 전에 헤어졌대나 봐.”
그래서 저 지랄인 게지, 덧붙이며 철중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입사 전부터 절친했던 사이기에 해원의 본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삼년 전쯤인가? 어쩌다 명문대 생을 만났는데 그 애가 양아치 싫어한다고 했다더라. 그러더니 주먹질 딱 끊었었지.
욕도 자제하고 사람이 완전 변했더라고. 난 쟤 미친 줄 알았잖아.”
“어머 애인 때문에 변한 거예요? 와, 정말 대단하다.”
멋있다 외치는 은선을 보며 철중은 표정을 구겼다.
“멋지긴, 줏대 없지.”
“어머, 그게 왜 줏대 없는 거예요? 오히려 소신 있는 거지. 애인을 위해서 변하다니 얼마나 로맨틱해요?”
로맨틱은 무슨, 주책이지. 철중은 작게 중얼거리며 다시 혀를 찼다.
“조금 변하면 말도 안 해. 이건 완전 갈아엎은 정도니까 그렇지.”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포켓에서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더니 갑작스레 피곤해진 얼굴로 설명을 시작한다.
“원래 우리도 명동 쪽에 있었어. 근데 해원이가 갑자기 계열사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그것도 소규모로 정식 대출 업을 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 회사 만든 거야.”
덕분에 사업 단위가 확 줄어버렸다.
어차피 정식 법인을 만들어 방패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너무 이른 결정이었다.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애들 장난 같았고 심란했다.
그러나 은선은 그 것에 더 감동을 받은 건지 아예 환호를 질렀다.
“우와, 대단해. 정말 사랑했나 봐요?”
원래 이들이 음지쪽에서 일하던 것은 넌지시 알고 있었다.
원래 사업체를 나눠 이 회사를 설립했다는 것도 예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애인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회사를 차리다니. 스케일이 대단한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철중의 안색은 더 어두워졌다.
“……그렇게 열과 성을 바쳤는데 차였으니 불쌍하지.”
“어머! 차였어요? 왜요?”
“나야 모르지.”
철중은 담배연기를 다른 쪽으로 내뿜으며 인상을 구겼다. 차인 덕분에 쪽박 찬 건 이쪽이다.
요즘 해원의 성질을 감당하기가 힘든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업자 하나를 조져놔서 이래저래 귀찮아졌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평범한 일인데 그런 식으로 깽판을 쳐놨으니 문제가 생겼다.
워낙 변제가 밀린 상대긴 했지만 그냥 평소처럼 테이블 몇 개 엎고 협박이나 할 것이지.
철중은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지금 나갔으니 내일이나 사무실에 돌아올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 것이다.
“썩을 놈.”
철중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친구를 잘못 사귄 게 뼈저리게 후회가 든다.
해원은 사무실을 벗어나 어딜 갈까 고민하다 목이 말라 근처 카페로 향했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실내에 들어가니 그제야 살 것 같다.
구석자리에 앉아 털썩 주저앉자마자 아르바이트생에게 코로나 한 병을 시켰다.
당장은 일사병에 걸릴 것 같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정신이 돌아온다.
가슴팍까지 풀러진 셔츠단추를 한 칸 채웠다.
레몬이 꽂혀있는 맥주병을 얼굴에 대고 열을 식히고 있자니 문득 익숙한 실내 풍경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얼마 전 수현이 찾아와서 이별통고를 때린 곳이다.
평소와는 달리 더 서늘한 무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끝내자던 말이 떠올라 다시 열이 올라왔다.
“하.”
절로 한탄이 터져 나온다.
마냥 순수한 줄만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희한한 차림새를 해서는 욕을 하질 않나.
소리 지르고 성질부리고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서 뭐라 대꾸도 못했다.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뒤에 메롱거리며 쪼르르 들어가 버리는 그 뒷모습을 잡아 챌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것보다 더 충격인 건 그동안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너만 연기 잘 하는 줄 알았어?’
수현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연기’였다고. 그럼 예전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단 말 아닌가?
자긴 직업 하나 알려주지 않은 것뿐인데 오히려 큰소리다.
사기라니, 게다가 망할 사채업자라고도 했고 그동안의 시간이 아깝다는 폭언까지 퍼부었다.
요 일주일 사이에 정신없는 일들만 벌어져서 지친 그는 나른한 몸을 소파에 깊이 뉘이며 이마를 문질렀다.
지끈지끈 거리는 머리를 지압하는데 옆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한다.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부터가 특이한 여자였다.
“어므나~정 실장. 여긴 웬일이야?”
은근히 발음이 새는 것이 전도연과 비슷한 목소리다. 하지만 남자만큼이나 허스키한 것이 영 듣기 싫다.
“……오랜만이네.”
근처에서 동일업종에 종사하는 황 마담이었다.
짝퉁 루이비통 일수가방을 옆구리에 끼고선 촌스런 몸빼 바지와 화려한 꽃무늬 내복 같은 티셔츠를 입은 푸짐한 몸매가 보인다.
게다가 안 어울리는 금자씨 선글라스는 뭐란 말인가?
시장 아줌마 같은 패션에 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게 저래 봬도 알부자였다.
게다가 몇 개의 영업장을 가지고 있어 이 근처에선 꽤 끗발 날리는 업주였다.
IMF가 터지고 척박했던 시절에 제일 먼저 단란주점에 2부로 호빠를 돌려 불경기에 떼돈을 벌기도 했다.
요즘은 부업으로 매춘대신 대신 딸딸이를 쳐주는 대딸방을 만들어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말이 대딸방이지 사실 마사지업소나 다름없다.
딸딸이 쳐주면 결국 몸 달아서 풀 옵션메뉴에 삽입까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카마수트란지 뭔지에 방중술까지 가르쳐놔서 한 번 가면 단골손님 되고 입소문이 돌아 환장하고 몰린다고 한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인도까지 다녀왔단다.
저 할머니 뽀글 머리에서 돈 버는 아이디어만큼은 제대로 나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게다가 의외로 나이도 젊다. 이제 겨우 서른다섯쯤인가라고 했다.
그나저나 돈 벌었으면 옷이라도 사 입고 머리 좀 하라고 해주고 싶어 해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원래 안면이 있긴 했지만 한때 황 마담이 하는 호스트바에 단골이었기에 잘 알고지내는 사이다.
퇴역 호스트들을 모아 비즈니스클럽을 만들었는데 싼 맛에 자주 들리곤 했던 것이다.
호스트출신답게 반반하고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남자들이라 주제파악을 잘 해 달라붙지도 않아 좋았다.
게다가 따로 팁을 줄 필요도 없이 돈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다리를 벌리니 단골이 될 수밖에.
그 업계에서 황마담은 재활용의 달인이었다.
이쪽동네에선 무시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 해원은 귀찮았지만 티를 내지 않았고 황마담은 앉으란 얘기도 없는데
반대편에 자리를 잡는다.
“왜 혼자 술 마시고 있어?”
“……더워서 맥주 한잔 하는 거야.”
“그래? 나도 약속 전에 와서 심심했는데 같이 한 잔해. 아가야~여기 같은 걸로 한잔 줄래?”
곧 맥주가 나왔고 황마담은 반반하게 생긴 남자 아르바이트생의 엉덩이를 콱 움켜잡았다.
음산하게 웃으며 떡처럼 주물주물 거리는 꼴이 진상이었다.
경기를 일으키며 피하는 직원을 보며 황마담은 홍홍 거리며 웃었다.
“아유, 아들 같아서 그래.”
아들은 무슨, 첫사랑에 성공해도 저만한 아들 못 낳을 나인 거 뻔히 아는데 거짓부렁이다.
해원은 애써 무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요즘 장사는 잘 돼?”
“아유, 잘되긴 그냥 본전만 쳐.”
“외국 애들 끌어들여서 또 호빠 하나 차렸다며? 장사 잘 된다고 소문났던데?”
“아유, 그냥 클럽인데 단골손님들이야. 이쪽이 원래 외국인이 많잖아. 소문이 잘못 나서 그래.
외국인 잘못 썼다 무슨 쪽박을 차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보통에 의하면 아르바이트로 정식 직원은 아니고 비밀리에 하는 일이었다.
요즘 여자들이 양키들을 그렇게 좋아 한다더니 사실인가보다. 정확힌 양키들 사이즈가 좋은 거겠지만.
동두천 쪽에 있는 잘생긴 튀기들도 섭외했다고 하던데.
생글생글 웃으며 실감나게 구라를 치는 황 마담을 보며 해원은 피식 웃었다.
만만하게 굴었다면 진작 망하고 남았다. 이 살벌한 세계에서 독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잘나가던 호스티스 출신으로 물주를 잘 잡아서 가게 차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뒤
이렇게까지 사업을 키웠다고 한다. 남편이나 기둥서방 하나 없이 이 업계에서 독신으로 사는 특이한 여자다.
하긴, 저 꼴을 보니 남자가 생길 리도 없겠지만. 늘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닌다.
소문엔 쌍꺼풀 수술 부작용으로 가리고 다닌다던데 확실치는 않다.
예전엔 미인이었다던데 그것도 못 믿겠다. 호빵 같은 얼굴을 보니 자기가 지어낸 것이 틀림없다.
“정실장 넨 잘 되가? 요즘 나르는 애들이 많더라고. 여름이라 노숙도 감행하겠다는 거지. 독한 것들.”
“발라봤자 국내지. 그리고 지금 하는 일은 워낙 소소한 변제들이라귀찮기만 하지. 별 문제는 없어.”
업계 얘기로 넘어가자 자연스레 대화가 된다.
이십분 여정도 얘길 나누며 담배를 피우던 중 약속 상대가 와 황마담은 자리를 떴다.
은근슬쩍 계산을 떠넘기고 가는 모습을 보며 해원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돈도 많은 여편네가 치사하게 굴기는.”
마침 맥주도 다 비웠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값을 치루고 나와 보니 갑자기 투둑 소리가 나더니 하늘에서 물이 떨어진다. 갑작스런 소나기였다.
절로 욕이 나온다. 가까운 곳에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긴 했지만 오 분은 걸어가야 했다.
해원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어쩔까 고민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간판 밑에 방수천이 달려있어 그 밑에 서 있었다. 비에 젖는 것은 딱 질색이다.
철중에게 차를 가지고 나오라고 시킬까 고민하다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커피숍 문 앞에 서서 비가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짧은 머리카락의 청년.
눈가를 찌푸린 채로 손바닥을 펴고 빗방울을 맞으며 어찌해야 되나 싶던 얼굴, 역시 우산이 없었구나 싶어
얼른 차를 움직여 청년의 앞에 댔다. 갑작스레 나타난 자신을 향해 곱게 쌍꺼풀진 눈이 커진다.
타라고 말하며 문을 열어주자 놀란 얼굴은 곧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안도와 반가움이 가득한 그 얼굴에 자신도 따라 웃던 기억이 난다.
수현은 지금보다는 더 까맣던 피부와 짧은 커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손님이 거의 없을 시간엔 카운터 옆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모습이 종종 해원의 눈에 띄곤 했다.
가게는 해원이 지금의 사무실을 개업하기 전, 관리하던 영업소 때문에 자주 들락거리던 지역이었다.
말이 사채업자지 사실은 조폭이나 진배없다.
관리금 뜯어가는 일을 어쩌다 맡게 되어선 일주일에 한 번쯤 가야하는 일이었다.
관리금은 월 일 회지만 틈틈이 감시도 해야 하니까.
주차장 옆에 있어 지나가다 종종 보곤 했던 아르바이트생은 언제나 무표정했다.
하지만 지나가는 길에 목격하다보면 가끔 책을 보다 웃기도 했고 전화를 하면서 다채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차에 관심도 없고 커피라면 질색인 그가 그곳에 들락거렸던 것은 실제로 가까이서 볼까하던 속셈이었다.
물론 처음엔 관리금을 받으러 갔는데 약속시간보다 너무 일찍 가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수현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토익 문제집으로 보이는 것을 풀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자신이 온 줄 모르다가 카운터 앞에 서있길 이분쯤 지났을까?
시선을 느낀 건지 힐끗 시선을 주더니 후다닥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온다.
메뉴를 살피다 먹을 게 없던 해원은 녹차를 주문했다.
안 그래도 담배 때문에 생긴 입 냄새 제거를 위해 종종 마시곤 했던 음료였다.
컵에 홀더를 끼우고 녹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커피머신에서 받아 순식간에 만들어내서 건네주는
부지런한 손길을 바라보며 빠르다고 감탄을 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친절해 보이는 미소가 순해 보이는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아직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모습에 단정한 옷차림도 맘에 들었다.
바이 섹슈얼이었던 그는 같은 남자일지라도 외모에 민감했다.
뚜껑을 닫아 건네는 컵을 받은 해원은 아르바이트생이 앉아있던 자리와는 조금 떨어진 창가에 앉았다.
오디오에서는 경쾌한 템포의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르바이트생은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문제집을 풀고 있다.
쳐다보면 싫어할까봐 괜히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딱히 볼게 없어 메뉴판을 바라보다 음료 가격들이 나열되어있다.
영어로 되어있는 보기 힘든 메뉴판에 가격들은 한 끼 식사와 맞먹는 가격이다.
안 그래도 이런 커피 가격은 사기에 가깝다는 생각을 가진 그였기에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깟 녹차의 원가는 겨우 몇 백 원도 안 될 텐데 사 천 원이나 받아 챙기다니 괜히 들어왔구나 싶었다.
불편하고 딱딱한 의자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지 않는 테이블간격, 비합리적인 가격이라니 최악이다.
컵 뚜껑을 열어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수현은 여전히 문제집을 바라보며 펜을 굴릴 뿐이었다. 흐린 날씨였다.
겨울에 으레 그러하듯이 눈이 내리기 전 구름이 가득 찬 하늘과 쌀쌀한 날씨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보였다.
따듯한 안의 공기 탓에 뿌옇게 흐려진 창 구석, 황량하게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들이 보인다.
그리고 유리창에 어렴풋이 비치는 수현의 모습을 관찰했다. 뒤에선 스팀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수현은 넉넉한 사이즈의 흰 터틀넥을 입은 채 계속 팝송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 때문에 추운 모양인지 터틀넥을 턱까지 올린 채로 목뒤를 만지작거린다.
키나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목선이 얇은 편이었다. 얼굴도 남자치고는 얇은 선에 피부도 깨끗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깨가 뻐근한 모양인지 주무르면서 기지개도 킨다.
고정된 자세로 있던 해원은 눈동자만 움직여 보지 않은 척 했다.
바깥 풍경을 보는 척하고 있자 유리창으로 수현이 힐끗 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수현은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떨어트려 문제집을 푼다.
사각거리는 펜과 종이의 마찰음 은은히 흐르는 팝송만이 가게 안에 가득했다.
확실히 가격도 인테리어도 맘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썩 나쁘지만은 않다.
일단 추울 때 따듯하고 더울 땐 시원하고 갈증은 해소할 수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제법 취향인 아르바이트생까지 있으니까.
이십분 정도 시간을 때우다 그곳을 나오며 해원은 꽤 후하게 점수를 주었다.
그 뒤엔 그곳의 영업소에 갈 때마다 그곳에 들려 녹차를 마셨다.
이왕이면 같은 메뉴로 통일하는 게 좋으니까.
딱히 마시고 싶은 음료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일관성이 임팩트가 강한 법이다.
삼 개월쯤 지나자 수현은 그를 보면 웃으며 인사를 하고 알아서 녹차를 주었다.
뜨거운 음료를 싫어해서 겨울이 지나자 아이스로 바뀔 때쯤엔 간단한 대화도 하게 되었다.
늘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수현 때문에 발길을 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관심은 호감이 되고 호감은 호기심을 부른다. 또 호기심은 두려움을 부르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부터 해원은 수현을 보는 것이 일상화가 되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신이야 흑심이 있지만 상대방은 그저 친절을 베푸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해원이라고 원래 게이는 아니었다.
단지 어쩌다보니 남자 맛을 알게 되고 여자보다 더 편해서 섹스 할 때 우선시 하는 편일뿐이다.
늘 책을 읽고 있거나 사색에 잠겨있는 수현을 관찰하다 느낀 것은 그가 인텔리 계통이라는 것뿐이다.
대학생인 것 같고 순수해 보이는 청년, 그가 남자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받아든 아이스 컵을 톡톡 두들기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확인하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조금은 낯부끄러운 상상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면서도 어느새 용건이 없을 때에도 들려 별 다른 것도 없는 티백녹차를
비싼 값에 먹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때때로 그는 그런 생각에 빠져 주위를 잊어버리곤 했다.
‘너 뭐하냐?’
철중은 요즘 따라 고민이 많은 해원을 보며 의아한 낯으로 물었다.
출장으로 청주에 내려가는 데 차에서 종일 잡념에 빠진 그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애초부터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예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종종 넋을 놓고 있는 친구가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왜?’
해원은 상념에서 깨어나 흘낏 눈만 돌리며 대꾸했다.
생각을 방해한 것이 불쾌한 듯 미미하게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괜히 불렀다 싶다.
철중은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해서.’
사고방식 자체가 심플해서 고민하거나 자책하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는 해원이었다.
또, 중학교 때부터 친했기 때문에 단정한 외모와는 달리 위험한 녀석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욱하면 손부터 나가고 비위맞춰줘야 옆에 있기 편한 이기적인 인간이기도 했다.
웃으면 상냥해 보이지만 태반이 비웃음이란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일처리는 확실해서 스카웃해온 것이다. 철중의 아버지는 명동 사채시장에서 유명한 큰손, 전주였다.
대학을 나와서 가업을 물려받으며 자신의 파트너로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그를 데려온 것이다.
경영은 할 수 있지만 확실하게 아랫사람을 조이는 카리스마가 부족한 철중이다.
업무가 적성인 그였기에 일부러 밑에 해원을 둔 것이다. 출장도 그와 꼭 같이했다.
청주는 유흥업이 발달된 도시라 전주인 철중의 아버지의 손이 많이 닿은 곳이기도 했다.
폐쇄적인 시민성과는 달리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청주 IC의 울창한 플라타너스 숲만 지나면 그 여운을 달래기도 전에 바로 엄청난 규모의 나이트클럽과 모텔 촌이 등장한다.
그 곳에 잇는 분점들을 관리하러 가끔 내려가는 것이다.
주거 점은 명동이지만 지방 곳곳에 뿌리가 내려있다.
사채업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주먹패들을 관리하게 되거나 연계가 된다.
그의 아버지는 아예 직속으로 한 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만약 나중에 자신이 전주의 위치에 오르면 그곳에 해원을 얹힐 생각이었다.
나이트클럽에 들어가자 자신들을 반기는 그곳의 업주가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철중이 업주와 얘기할 동안 해원은 느긋하게 뒤에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가만히 있어도 흘끔흘끔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이야 익숙해서 알지만 예전엔 그가 책임자인줄 알고 철중을 제치고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철중이 직급이 위임에도 해원의 존재감에 눌리는 탓이었다.
‘넌 그냥 웃어라. 무표정하면 인상이 살벌해. 말도 못 걸겠다.’
‘……그러냐?’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얘기에 웬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해원의 모습에 오히려 철중이 놀랐다.
그 이후부터 해원의 인상이 좋아졌다는 얘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로 좋아하는 건 거의 본인의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저돌적으로 나가기엔 동성이란 게 걸렸다.
기회를 엿보다가 소나기가 내리던 날 드디어 행동에 옮겼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집까지 태워다 준다는 변명까지 생각해놓고 은근히 추파를 던지자 수현의 반응 또한 나쁘지 않았다.
까짓 거 차여도 안 보면 그만이라고 결심까지 해놨는데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 신상명세를 알아보다가 제대로 삑사리가 났다.
대학에 복학한다기에 어느 과냐고 물어본 게 화근이었다.
‘복학한다고?’
‘네. 이제 3학년으로 복학해요.’
‘전공은 뭔데?’
‘법학과에요.’
쑥스럽게 대답하는 수현을 보며 해원은 속으로 맙소사를 외쳤다.
전태일과 조영래 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신분이었다.
그나마 그들은 하나의 이상으로 이어져있다지만 둘 사이에 접점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사채업자와 법대생,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아마 없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변호사를 바라보며 해원의 인상은 절로 구겨졌다.
“……정실장님. 제게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신지?”
오십대의 머리가 벗겨진 고문 변호사는 자신을 굳어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해원의 눈초리 때문에 잔뜩 쫄았다.
“없습니다.”
아니면 왜 노려보는 건데, 가뜩이나 이놈의 조폭 소굴 들락거리기도 싫어 죽겠구만.
변호사는 그럼 이만 인사를 날린 뒤 재 빠르게 자리를 떴다. 해원은 그 모습을 끝가지 눈으로 쫓았다.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왔는데 보고가 끝나고 마침 고문 변호사와 마주친 것이다.
사장과 면담이 있는 모양이다. 그를 보자 문득 수현이 생각난 탓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담이 약한 변호사는 꽁지를 말고 잽싸게 경보하며 서재로 들어갔다.
해원도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지만 한동안 그는 눈가에 힘을 풀지 못 했다.
동부이촌동에 있는 본가는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이었다.
철중의 아버지인 사장에게 보고 겸 안부 인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용건만 간단하게 전하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기지 않지만 메일 한통이면 될 것 가지고 귀찮게 군다고 해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아 그렇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 부담스러웠다.
굳이 자신의 아들과 대학까지 보낼 필요는 없었다.
고아에 깡패였던 자신을 그나마 사람답게 만들어준 것은 고맙지만 말이다.
요즘 따라 양자입적 얘기까지 꺼내 골고루 압박을 하고 있어 기분이 편치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약한 성정을 가진 것이 불만이라면 진즉 독하게 키워놓을 것이지.
철중은 이런 사업을 하기엔 정서가 충만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자신이 면담할 동안 정원에서 개와 놀고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을 가진 사모예드였다.
정원에 나와 보니 철중이 개와 함께 뒹굴 거리는 게 보인다.
“야! 면담 끝났냐?”
그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구김살 없는 얼굴이 도저히 이런 집구석에서 자랐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끝났다.”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철중은 개를 몇 번 쓰다듬어 떨어트리곤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휴일인데 귀찮았겠다. 노인네가 하여간 자기 멋대로야.”
자신의 아버지를 노인네라고 칭하며 철중은 하하 웃는다.
늦둥이로 낳은 외아들이라 나이차이가 마흔 가까이 나니 아버지라기 보단 할아버지에 가까웠다.
“밥이나 먹고 가라. 이제 저녁땐데.”
“됐다. 체할 일 있냐?”
식사 때 또 얼굴 마주치긴 거북스러웠다. 이집에 들어앉히려 하는 상대를 자주 봐서 좋을 것이 없었다.
사정을 알고 있는 철중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간다고 말하며 그 집을 빠져 나왔다.
차를 몰고 가면서 피우는 담배 맛이 무척이나 썼다.
예전 같으면 휴일에 할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텅 비어버렸다.
삼년동안 규칙적인 만남을 가졌으니 습관화되어 따로 일정도 잡지 않아 할 일도 없다.
오후 늦게라도 만나 조수석에 태우고 다니던 상대가 없으니 차 안도 허전하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한 가지 떠오르는 건 메롱거리는 모습이다.
무한 반복되어 재생되자 울컥하며 뜨거운 것이 치솟는다. 요즘 들어 계속 이 장면이 잊혀 지지가 않았다.
돌이켜보자니 수현을 제대로 알고 있던 날도 없던 것 같았다.
선한 인상에 가려진 속마음이 궁금해 전전긍긍했던 건 언제나 해원 쪽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무언가를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이해심이 넓은지 간혹 일이 생겨 약속을 깨도 화도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보처럼 착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면이 좋기도 하면서 한 편으론 섭섭하기도 했다.
법대를 다니고 변호사가 되는 게 목표, 독서와 음악 감상이 취미인건 알지만 무슨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모른다.
음악 CD라도 사줄까 했더니 MP3로 듣는다고 해서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
나중엔 고장 났다고 AS값이 많이 든다고 투덜거리기에 새로 사줬더니 부담스러워 했다.
선물을 주면 기뻐하면서도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그 기특한 모습이 좋아서 오히려 선물공세를 펼친 것 같다고 해원은 생각했다.
결국 또 수현의 집 앞에 찾아왔다.
스토커도 아니고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답답해서 죽기보단 차라리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엔 도망가도 절대 놓치지 말자 다짐하며 그는 초조하게 수현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나 받지 않는 탓이다.
성질 같아선 문부시고 들어가면 끝이지만 그랬다간 당장에 신고할 것 같아서 참는 것이다.
흘낏 시선을 돌려 베란다를 바라보자 구석에서 바람에 하늘거리는 빨래들만 보인다.
가끔 얼굴이라도 볼까 싶어 전화를 걸면 곧바로 내려왔었다.
샤워를 한 것인지 젖은 머리로 베란다 문을 열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집 앞에 나와도 늘 깔끔했던 옷차림이었는데. 저번에 봤을 때는 자다가 그냥 나온 차림 같았다.
집 앞에서밖에 못 입을 꾸질한 나시와 반바지라니.
급해서 그냥 넘기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갭이 크다.
“역시 내숭이었나?”
하긴 만나서도 몇 번 의심하긴 했다.
조용하고 단아하고 스무 살 넘어서까지 마냥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 세상이 존재할 리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단점은 지니고 있다. 자신만 해도 수현 외에는 다른 사람에겐 가차 없는 성격이다.
자신과 제일 친한 철중도 눈치를 슬슬 볼 정도면 말 다했지.
차 안에만 앉아있어 답답했던 그는 걷기라도 할까 해서 차에서 내렸다. 그때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내가 대성분식 가쟀잖아. 벌써 배 꺼졌단 말이다.”
“병신아. 소문난 분식이 양이 많잖아.”
“거긴 계란이 없단 말이야.”
“난 오징어튀김만 있으면 돼.”
“난 떡볶이에 계란 없으면 안 먹어!”
“너희들 이제 그만 싸우지 못하겠냐? 그깟 분식 아무데서나 먹으면 돼지. 맛도 별로 없더만.”
“갑부는 닥쳐! 네가 떡볶이 맛을 알아?”
“맞아! 니가 분식의 중독성을 어떻게 아냐고! 그리고 계란은 떡볶이의 화룡정점이야! 마지막에 으깨서 국물에 비벼먹는 거란 말이다!”
수현과 두 남자였다.
한쪽은 조금 작은 체구에 눈매가 가늘고 조금마른 체격의 남자고 다른 쪽은 큰 키에 꽤 잘생긴 남자다.
싸움을 말리려는 쪽이 뭐라고 하자 수현과 비슷한 체구의 남자가 빽 소리를 지른다.
가방을 매고 있는 걸 보니 어딜 다녀온 모양이다. 아마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라도 하고 왔겠지.
수현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곤 했기에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해원은 어쩔까 고민하며 수현이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키가 큰 쪽을 향해 뭐라고 작게 투덜거리는 그는 오늘도 역시나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캡 모자에 몸에 피트 되는 흰 나시티와 베이지색 카고 바지를 입은 채 쪼리를 찍찍 끌고 날티 나는 차림새에
입에는 수박 바를 물고 있었다.
“더워 죽겠다.”
“근데 너 모자는 왜 썼어? 그리고 더우면 벗어.”
“안 돼. 머리 안 감았단 말이다.”
수현이 덥다고 칭얼거리자 키 큰 남자가 물었고 다시 수현이 대답했다.
키 큰 남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뭐라고 지적을 하자 듣기 싫은지 손 사례를 치는 걸 보며 해원은 어이가 없었다.
더위 안탄다며 민소매 티셔츠는 입은 적도 없고 떡볶이 좋아한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
머리를 안 감아서 가려운지 모자위로 벅벅 긁어대는 모습도 처음 본다.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다가 크게 한입 베어 물고 경박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수현과 이제 열 걸음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해원은 다섯 걸음 정도로 차이가 좁혀지길 기다렸다.
키 큰 남자 쪽이 먼저 해원을 알아보고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로고가 없어 티는 안 나지만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았다는 걸
해원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경계하는 눈빛을 지그시 받아쳐주자 곧 옆에 있던 제일 작은 남자도 자신을 바라본다.
오로지 수박 바에 정신이 팔린 수현만 모를 뿐이다.
“아 수박 먹고 싶어. 근데 수박은 비싸. 흑흑.”
“……하나 사주랴? 근데 저 사람이 너 쳐다본다.”
“정말? 이왕이면 메론으로……엉?”
키 큰 남자가 수박 바를 애처롭게 핥고 있던 수현에게 말했고 그제야 시선이 에서 떼어진다.
놀랐는지 수박 바를 떨어트리는 것을 옆에있던 상대가 꽥 소리를 지르며 받아냈다.
바닥과 겨우 5cm를 남기고 겨우 구출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야! 아깝게 무슨 짓이야.”
그러나 수현은 꽁꽁 얼어버린 채였다. 해원은 망설이지 않고 그를 향해 걸어가 팔목을 잡았다.
수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김수현.”
“허억!”
이제야 아차 싶은 얼굴을 하며 수현은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세 걸음도 안 되서 잡히고 말았다.
“우리 얘기 좀 하자.”
해원은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현의 안색은 급격히 뽀샤시 해졌다.
‘맞다. 이 새끼 조폭이었지!’
수현은 울상이 된 얼굴로 질질질 끌려갔다.
억지로 차에 태우자 수현은 내리려고 발악을 했다.
“난 할 얘기 없대도!”
“난 있어. 그리고 좀 조용히 얘기해라. 귀 울린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는 그를 해원이 뒷덜미를 잡아 다시 얌전하게 앉혔다.
“싫어!”
“조용히 좀 해!”
그러나 해원이 안전벨트로 묶어놓고 조용히 있으라고 한 마디 하자 다시 얌전해진다.
그러나 입만은 여전히 싱싱한 횟감마냥 팔딱 팔딱거린다.
“내려달라니까!”
결단코 거부하는 몸짓으로 창가에 달라붙은 그를 보며 해원을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찾아오다니. 누가 보면 일수 찍는 줄 알겠네.”
작게 중얼거렸지만 다 들리는 소리였다.
사채업과 일수, 뗄 레야 뗄 수 없는 사이긴 하지만 듣자니 기분이 나빠졌다. 누굴 일수쟁이 취급인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험악해졌는지 수현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모자를 꾹 눌러쓰며 눈치를 보는 상대를 보자니 힘이 빠졌다.
욕 할 땐 언제고 이제와 겁먹다니 어이가 없다.
“어디 가는데?”
“몰라.”
사실 자기 자신도 일단 차를 몰긴 하는데 행선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후우, 긴 한숨을 내쉬며 해원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