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병은 내 가슴에
세상에서 제일 싫은 건 깡패와 사채업자다. 어릴 때 아버지가 집을 말아먹은 적이 있다.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여지고 빚쟁이들이 와서 난리법석을 피우고 갔다.
온 집안이 발자국으로 가득했고 어린 내 눈에 마냥 커보이던 부모님들은 황폐한 겨울 농촌의 허수아비 같았다.
아버진 폐인이 되고 어머닌 바닥에 쓰러져 울고 남동생도 덩달아 울고 난장판이었다.
깡패들까지 동원해서 사단을 내고 나서야 빚쟁이들은 돌아갔다.
집을 팔고 재산을 다 처분해서야 빚을 반쯤 갚았다.
집이 변두리로 이사 가서 서울인데도 농촌 같은 곳에서 살아야했다.
게다가 비닐하우스에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지지리 궁상의 극치를 달렸다.
학교에서 주택인지 빌라인지 아파트인지 다세대인지 알아볼 때 나만 침묵을 지켰다.
나를 향해 선생님은 왜 손을 들지 않느냐 물었다.
‘수현이는 비닐하우스에 살아요.’
별 뜻 없이 던진 반 친구의 말에 아이들은 모두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개중엔 비웃는 아이들도 있었고 동정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때 온몸에 열이 올라 온몸이 붉어져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창피했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앙금이 되어 남아있다.
그 후에 단칸방으로 이사 갔을 때 남들이라면 한숨을 내쉬었겠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놀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조금만 봐주세요.’
‘돈 없어요. 먹고 죽을래도 없다니까!’
어머니는 늘 애원을 했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고 실의에 빠져 지내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쯤에 돌아갔다.
어차피 그때쯤엔 손 쓸 수 없이 망가져 폭군에 쓰레기가 되어버려 슬프지도 않았다.
짐 하나를 덜은 기분이었으니까.
배운 것도 없어 어차피 할 줄 아는 거라곤 단순노동이나 아줌마들이 하는 일 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아버지에게 시집와서는 애 둘 낳고 살림만 했던 분이다.
그래도 처음엔 아버지네 집안이 사는 편이어서 괜찮았지만 막상 빚을 지고 나니 친가 쪽에서 인연을 끊었다.
어머니는 먹고 살기위해 사채를 빌려다 쓰고 일단 급한 불부터 막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의식주는 보장되었지만 사정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기만 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때까지 하던 보험설계사를 때려 치고 술장사를 시작했다.
그 후에야 그래도 먹고살만해졌다.
어머니는 다행히도 미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집주인의 아들이란 오명이 동네사람들의 눈에서 뼈아프도록 느껴지니 예전보다 더 지옥 같기만 했다.
내가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공부 말고는 허락되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집안 형편은 나아졌고 보통 수준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그때 내가 겪은 수치와 자격지심은 훗날의 성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깡패와 사채업자들은 내 어린 시절에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가끔 어머니가 돈을 갚지 않으면 사채업자들이 와서 가게나 집을 한바탕 뒤집어엎곤 했다.
깡패 같은 놈들한테 비위맞추며 싸구려 같이 구는 어머니의 꼴이 보기가 싫었다.
빚쟁이들은 십년이 넘게 우리 집을 괴롭혔다. 나는 그런 집안 꼴이 싫었고 익숙해지는 것도 싫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살고 싶어도 우울한 집안 사정을 계속 나를 수렁으로 이끌었다.
아쉬울 거 없이 사정이 나아져도 예전의 처량한 기억이 괴롭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성벽을 핑계로 도망 나왔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술에 취해 환청을 본 건지 아니면 악몽을 꾼 건가 착각할 정도다.
깡패 같은 놈들과 같이 있던 그 사람, 그리고 가게주인을 집어던지고 발로차서 굴리던 그 사람.
가게를 박살내고 협박을 하던 그 사람이 연속 파노라마 무한반복으로 떠올라 밤새 뒤척인 탓에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알람을 매일 맞춰둔 덕분에 정확히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생리적 요인으로 화장실로 왔고 온 김에 세면을 하려고 거울 봤다가
심장마비 걸릴 뻔 했다.퀭한 내 모습에 움찔 놀라 잠이 확 달아나 버린다.
살찐 골룸이 거울에서 썩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식겁할 수밖에.
거울을 애써 피하며 찬물에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고 나오자 유현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래봤자 콘 푸레이크에 우유 말아놓는 것뿐이지만 나름 정성스레 똑같이 나누려고 발악중이다.
조금이라도 양이 차이나면 내가 숟가락으로 확 찔러버릴지도 모르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사소한 싸움을 할 기운도 없어 식탁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밤중에 이라크 가서 참전이라도 했냐? 꼴이 왜 그래?”
유현은 다크써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내 모습을 보더니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개놈, 닥치라는 눈빛으로 살짝 쏘아 봐준 뒤 그릇을 뺏어 콘 푸레이크를 입으로 넣었다.
일단 습관적으로 아침만 되면 배가고프다.
어제 핵폭탄 급의 심란한 사건이 있었어도 잠에서 깨면 오줌은 마렵고 장은 더부룩하고 배는 고프다.
염병할 신진대사, 그리고 염병할 사시. 유현은 어느새 다 먹어치우고 테이블 위에 교재들을 늘어놓는다.
나도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우고 거실로 나갔다. 맞은편에 앉아 교재를 폈다.
민법 공부를 하느라 지원림 서를 펴놓고 오늘의 분량을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유현이 생각났다는 듯이 물어온다.
“근데 어제 그 남자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어제 그 가게 때려 부서트리던 놈이 너한테 아는 척 했잖아.”
빠각! 나도 모르게 힘을 줘 펜슬이 부러져버렸다.
“…….”
잠시 유현과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친구를 보자니 속이 무지하게 썰렁해진다.
“……공부나 해라.”
“야…….”
유현은 이게 미쳤나 싶은 얼굴이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책에 고개를 파묻었다.
머리카락이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중얼중얼 책 내용을 읽어 내리자 곧 유현도 한숨을 내쉬며 책에 시선을 돌린다.
“판시사항, 불법행위자의 행위가 사용자인 법인의 업무집행에 속하지 않음을 피해법인의 대표자가 알았을 때
피해법인이 사용자법인에 대하여 사용자책임을 물을 수 있는 지…… 어떤 불법행위자의 행위가 그 사용자인 법인의
법무집행에 속하지 아니함을 그 피해 법인의 대표자가 알았다면 바로 그 피해 법인이 이를 알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이러한 경우 피해 법인으로서는 불법행위자의 사용자 법인에 대하여 사용자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할 것이며,
이는 당해 불법행위가 피해 법인의 대표자와 공동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도 마찬가지…….”
맥없이 책에 써있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읊어 내린다. 그러나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다.
자료들이 자동필터링을 거쳐 마구 각색되어선 맘속에서 어지럽게 울린다.
‘깡패의 연애사기행각이 피해자인 나의 학업진행을 방해하는 바, 심적 고통에 의한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사기행각으로 연애질시 나를 감쪽같이 속였지만 절대내숭으로 맞받아친 내가 그를 법정에 서게 할 자격이 있는가?
이는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경우와 마찬가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결국 책상의 중심에서 씨발을 외치고 말았다.
남자 나이 서른이면 결혼 걱정 할 나이라고 본다. 해원 씨가 나보다 두 살이 많았으니 스물여덟이었다.
집안에서 사귀는 사람은 없느냐는 얘길 듣진 않을까 걱정했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애인이 결혼해버려서 쪽박 찬 동지들 이야기는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다.
나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 사람이 지금은 날 좋아해도 결국은 여자랑 결혼하진 않을까?
한국은 게이가 게이답게 살만한 곳이 아니다.
집 얘기를 꺼낸 적이 없으니 당연히 그의 가족관계도 모른다.
‘집에서 결혼하라 뭐라고 안 해요?’
‘우리 집은 서로 상관 안 해. 걱정 할 필요 없어.’
넌지시 묻자 안심하라는 듯 내 이마에 키스하며 대답해주던 그였다.
같이 살자,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따위의 약속은 안했지만 헤어질 걱정도 안 들도록 잘해주던 사람이었다.
나 몰래 결혼만 해봐라, 내가 내숭 다 집어치우고 요절을 내주마 남몰래 이를 갈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이의 직업은 사채업자, 취미 협박 특기 폭력.
떼인 돈 받아주는 든든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참 신나게 야동 다운받던 도중에 정전된 것보다 억만 배는 더 충격적이고 심난한 상황이다.
벤처기업 좋아하네. 언제부터 사채가 벤처였냐. 차라리 금융업이라고 하지.
근무시간이 불규칙한 거 좋아한다.
이자 비싼 값에 불려서 돈세고 안 갚으면 깽판부리고 그 일이 퍽이나 바쁘시겠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부잣집 한량인가 추리도 하고, 낭비벽이 있어서 나중에 카드 값에 허덕이는 건 아니겠지?
걱정도 했다. 그런 내 착한 마음씨가 전부 개 삽질이었다니.
투덜투덜 거리며 동네 길을 걸었다.
집에서 십분 마다 발작을 일으키다 결국 유현이 놈한테 쫓겨났기 때문에 동네 시립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다. 교재 무거워 죽겠다.
간편한 차림으로 동네를 걸어가는데 살짝 긴 커트 머리가 자꾸 흘러내린 땀에 젖어 귀찮다.
확 쳐버릴까 고민하는데 검은색 차가 앞으로 다가오는 게 보인다.
길모퉁이로 비켜주고 걷는데 끼이익 소리가 들렸다.
“수현아!”
그리고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해원이 보인다.
“……해원 씨?”
이젠 신기루까지 보이나? 난데없이 나타난 그를 보며 처음 한 생각은 그거였다.
여름햇살에 선명하게 보이는 그 모습은 너무나 생생해서 비현실적일 정도다.
사실 양지라서 햇살이 따갑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이 큰길과 연결된 일직선이기 때문에 엇갈리지도 않고 만난 것 같다.
다시 더위 먹은 것 마냥 어지러워진다. 몸을 돌려서 가려고 하는데 성큼 다가온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잠깐만, 할 얘기가 있어.”
무슨 얘기? 그동안 엿 먹여서 미안하다고? 해원 씨의 말에 순간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온다.
헤어지자고 한지가 일주일인데 연락 한 번 없다가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뭔 말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난 할 말 없는데.”
냉정하게 손을 뿌리쳤다.
이 개색캬! 내가 너 때문에 일주일동안 심신이 곰팡이 필 정도로 썩은 것도 모르고!
속이려면 완벽하게 속이던가 하필이면 내 홈그라운드인 이태원에서 그 지랄을 떨고 있냐?
등등의 폭언도 퍼부어 주고 싶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분노 때문에 제브라 무늬가 가슴팍에 그려진 흰 티셔츠와 검은색 베스트, 청바지를 입은 내 뇌출혈한 모습은 잠시 잊어버렸다.
게다가 한쪽 팔엔 땀 닦을 아대와 두통이 발생 시에 지압해줄 해골반지까지 끼고 있던 것마저도.
그리고 검은 모노그램의 반스 스니커즈까지.
그에게 숨기고 싶어 하던 내 취향과 성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마저도 깜빡했다.
그도 다급했는지 내 옷차림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랬다. 너무 놀라선지 날 의아한 눈으로 보지도 않았다.
이태원 게이 바 앞에서 만났는데도 대리운전이 와서 유현이 부르자 후다닥 도망가 버렸는데 다시 만나니 아차 싶다.
내가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해원 씬 다시 내 팔목을 아프게 잡아왔다.
“일단 타라.”
질질 끌려가다 시피해서 조수석에 태워졌다. 뿌리치려고 해도 강한 손아귀 힘에 반항도 못했다.
더운 날씨 때문에 과열된 차가 손목에 살짝 스치자 뜨거움에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지독하게 잔인한 여름이다. 더위뿐만 아니라 내 추억까지 산산조각 내버리다니.
게다가 이런 좆같은 우연까지 선사할 줄이야.
차 안은 에어컨이 돌아가서 시원하긴 하지만 어색함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우리 사이에 공기는 아예 얼어붙은 것 같다.
집 근처 초등학교 뒤쪽에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그는 차를 세웠다.
운전대에 엎어져 양손을 마주 잡은 채로 고개를 숙인 그가 보인다. 기도라도 할 태세다.
이젠 나보고 고해성사라도 들으라는 건가? 내가 목사로 보이나?
하필 블랙 앤 화이트로 빼입은 것도 마음에 걸린다.
온갖 잡생각들이 얼씨구나하고 돌아가는 와중에 해원 씨는 초조하게 손을 까딱거린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늘 연상의 여유를 팍팍 풍기다가 이제와 안절부절 이라니.
내가 인터넷에 제 동성 애인을 소개합니다. 알고 보니 조폭이더라 이런 글을 올릴 것도 아니고.
찌질하게 다시 만나 달라 러쉬 들어 간 것도 아닌데 뭘 그리 고민하시는지 모르겠다.
“할 얘기 있다면서?”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걸자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든다. 칼로리가 두 배의 속도로 소모되는 기분이다.
얼굴 마주하고 있는 게 이리 힘들 줄은 몰랐다.
헤어지면 상대의 존재 자체가 민폐라던 유현이의 말이 맞는 말이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백배다.
해원 씨는 나를 바라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인다.
“일단 미안해.”
“뭐가?”
“알면서 모르는 척은 하지 마.”
“……내가 당신에 대해 뭘 알겠어.”
딱딱하게 대꾸하자 안색이 더욱 구겨진다.
삼년 사귀는 동안 이름 말고 제대로 아는 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차피 헤어진 마당에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알았어도 계속 안 만났을 텐데.”
비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조적인 대사였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뜩이나 사시 스트레스로 짜증이 덕지덕지 뭉친 나에게 이 상황은 무척이나 힘겹다.
혹시 라이벌 한명을 제거하기 위한 어느 개놈의 수작이 아닐까 음모론이 뭉실뭉실 솟았다.
심적인 충격으로 내가 드러눕길 바라는 건가?
이미 안드로메다로 관광 간 정신을 포기하고 의자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기운이 땀구멍 사이로 술술 새어나가는 것 같다.
늘어지는 신체와 바싹 건조되어 부서질 것 같은 마음, 날씨는 더운데 마음은 시베리아 기단이 휩쓸고 지나간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슬픔, 분노, 짜증들 때문에 마음이 혼잡하다.
당신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기대를 준만큼 확실한 사람이어야 했어.
헤어질 때 쿨 했던 것처럼 그때 날 봤어도 모르는 사람마냥 스쳐갔어야 했다.
전부를 받을 수 없다면 좋은 추억이라도 지고 가려고 했는데,
구질구질해 보일까봐 단 한 번도 진심을 내보인 적이 없는 나한테 이런 식으로 뒤통수 날리다니.
목구멍에서 맴도는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안구가 뜨거워지는 것이 왈칵 눈물이라도 쏟을 것 같지만 어금니 꽉 깨물고 참아냈다.
“어차피 서로 즐기려고 만났던 사이였는데 직업이 뭐든 원래 성격이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고.”
“김수현!”
마구 지껄이자 해원 씨는 화난 표정으로 내 이름을 외친다.
그래봤자 내 눈엔 찔려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 진심이었다면 나한테 이럴 순 없는 거다.
“내 말이 틀려?”
“수현아,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듣기 싫어. 안 들려.”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이젠 안 들을 거야.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직업을 가졌고,
나에겐 절박했던 삼년동안 날 기만했고 속여 왔어.
내가 당신을 속였던 건 단지 내숭일 뿐이었지만 당신은 나한테 사기를 친 거야. 하지만 제일 열 받는 건 따로 있다.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꺼져.……이 개새끼야.”
결론은 속은 내가 등신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사랑하겠다고 생각했던 게 처음 일 년,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던 게 이년,
익숙해져서 가끔은 잊고 살다가 문득 찾아오는 의문에 초조해하던 삼년.
이게 연애인가 의심만 하던 그 세월이 아깝다.
멱살 잡고 짤짤 흔들며 정체가 뭐냐 외치고 싶던 내 정서불안은 어쩔 것인가?
어디 가서 보상받을 수 있는 건가? 돈도 많을 테니 정신적 피해보상이 가능할지도.
하지만 어느 법원에 가야하나? 젠장, 연애도 보험제도가 필요하다.
도서관에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책을 펴놓고 종일 달달 외우긴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가는 건 거의 전무하다.
노트에 내용을 휘갈기며 뇌에 쳐 박으려고 노력했지만 민법이고 나발이고 들어올 리가 없다.
“하아…….”
한숨이 오 분마다 튀어 나온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자리여서 사람들의 눈총은 받지 않았지만 괜히 미안해진다.
정숙이 생명인 이곳에서 나만 번잡스럽다. 이미 밖은 어둑해지고 있다.
해 질 동안 진도는 겨우 두 페이지, 제대로 읽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배도 고파오고 해서 짐을 싸서 퇴실했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유현이 저녁을 먹던 중이다.
“일찍 왔네?”
반찬은 김치뿐 상에는 부르스타 위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이 보인다.
온 집안에 진동하는 고기냄새와 그 작태에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유현은 계면쩍은 표정을 짓더니
쌈을 하나 싸서 쏙 지입으로 넣는다.
“너더 머그애?”
입에 쌈을 넣은 채 말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같이 먹으라 권유하는 걸 도리 도리질로 사양하고 털썩 거실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더위를 만끽하느라 입맛이 없다.
“요즘 날이 더우니 몸이 허해서. 고시는 체력이 중요하잖냐.”
나 몰래 혼자 고기를 먹은 게 창피했는지 유현은 괜히 한 마디 덧붙인다.
됐다고 손을 흔들며 소파위에 엎어졌다. 제길, 오늘도 공부하긴 그른 모양이다.
그런 내가 삐진 건줄 알고 유현은 같이 먹자, 미안해 칭얼거렸지만 대답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몸을 둥글게 말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몸이 나른하고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고 있는 것 같다.
심장이 체한 기분이다. 해원의 차를 박차고 나올 때 얼핏 봤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내뱉은 욕에 생전 처음 들은 듯 벙찐 얼굴이라니 연기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다.
이틀 연속 공부를 못한 탓에 삼일 째 되는 날은 맘 잡고 책상 앞에 앉았다.
고시가 내년 초인데 딴 짓 할 틈이 어디 있다고 그 삽질을 한 건지 눈물을 질질 흘리며 책을 파고 있었다.
유현이놈과 함께 염불 외둣이 중얼중얼 민법을 외웠다.
딴 짓 하면 겁나게 두꺼운 법전으로 쳐 맞기로 이미 합의를 본 상태였다.
학업을 향한 정열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일 미터쯤 떨어진 바닥에서 진동이 울리는 것을 힐끔 바라 보다 이내 무시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소음에 우리의 집중력은 깨져버렸고 아까부터 공부하기 근질근질 했는지 눈치를 살피던 유현이 기지개를 피며
넌지시 말을 건다.
“근데 어제 그 남자 정말 잘생겼더라. 조인성이 울고 가겠던데?”
“……공부안하냐?”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
“공부하자.”
대답 없이 스윽 법전을 들자 유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조인성 좋아하네. 우리 인성이 엉아가 훨 낫지.
혹시 야구선수 조인성 얘기하는 거냐? 사실 조인성과는 동갑이지만 그런 건 살짝 무시해줬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나도 모르게 형 소리가 절로 나온다.
얼마 전에 더블아가들 보고 현중이 형 했다가 유현이한테 등짝을 걷어차였다.
저 병신은 보아보고 누나라고 하는 주제에 나한테 지랄이다. 그리고 조인성보다는 현빈 닮았다.
"……."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법전으로 내 머리를 구타했다. 빡소리가 나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온다. 니미럴.
유현은 갑작스런 내 자해에 놀라선 펄떡 뒤로 물러난다.
이놈이 드디어 본격적으로 미쳤구나 싶은 표정이다. 법전을 옆으로 내 던지며 유현이 놈에게 말했다.
“내일은 오랜만에 학교 도서관이나 가자.”
“……왜?”
내가 학교 가서 무슨 해꼬지라도 할 것 같은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본다.
“…긴장 좀 하려고.”
법대에 고시실과 법대 도서관이 따로 있다. 아무래도 이런 해이한 마음가짐으로는 안 되겠다.
유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좋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제안을 한다.
“그래. 경헌이 놈도 부르자.”
“왜?”
“그놈은 집에서 따로 공부하라고 오피스텔 하나 잡아 줬잖아. 고까우니까 방해하자.
남들은 뼈 빠지게 좁아터진 도서관이나 개집 같은 고시촌에서 땀 뻘뻘 흘리며 공부하는데 말야.
돈 많아서 개인 과외까지 받는대. 방해해주자.”
유현은 내 친구지만 정말 개새끼였다.
“하긴, 그놈은 떨어져도 상관없어. 돈도 많아서 아무거나 해도 되니까.”
그러나 라이벌 축출하는 데 협조하는 나도 썩을 놈이었다. 윤경헌도 참 불쌍한 놈이다.
어쩌다 우리 같은 놈들이랑 엮여가지고선. 그러나 가진 게 많은 놈이니 조금 민폐 끼쳐도 상관없겠지.
유현이 경헌에게 전화를 했다. 같이 공부하자고 하니 의외로 흔쾌히 수락한다.
자신에게 닥칠 불행이 뭔지도 모른 채 내일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 놈을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갔다.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는데다 도서관에선 벗고 있다 보니 발이 더럽다.
양반다리로 앉아 더러워진 발바닥을 물티슈로 닦는데 앞에 앉은 여자가 얼굴을 확 붉히며 자리를 옮긴다. 벌써 두 번째다.
중도도 아니고 법도에서 저렇게 유난을 떨다니 별꼴이시다.
흥 콧방귀를 뀌며 다시 교재로 시선을 돌렸다.
밖에서 작열하는 태양만큼이나 실내는 뜨거웠다.
에어컨이 돌아가긴 하지만 풍기는 포스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놈의 로스쿨 도입 때문에 과열된 공기가 후끈하다. 옆에는 유현이 맞은편에는 경헌이 앉아있다.
원래 집중력이 좋은 유현은 이미 눈에서 레이져가 나오도록 법전을 들춰가며 공부중이고 경헌 또한 진지하게 열중하고 있다.
역시 학교에 오길 잘한 것 같다.
잠시 휴식할 겸 커피나 마시러 나왔다.
냉커피가 매점에서 천원에 판매하지만 그런 거 사 먹을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법대 바깥에 등나무 벤치에 있는 자판기에서 시원한 캔 커피나 하나 뽑았다.
근처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시원한 그늘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어? 수현 선배?”
“선배 오랜만이에요.”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오다 나와 마주쳤다.
법대는 원래 방학에도 학교에 죽치고 있는 애들이 많아 심심찮게 마주치곤 한다.
“그래. 오랜만이다.”
손만 살짝 들어 인사해주자 아이들이 잘 지냈냐며 우후죽순으로 인사를 건네 온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려주자 재잘거리다가 곧 밥 먹겠다며 인사를 건네고 사라진다.
아직은 고시 압박이 덜해서 생생한 모습의 아이들을 잠시 헛헛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벌러덩 누웠다.
하긴 저땐 나도 저렇게 생기발랄했었지.
당장 사시에 목숨 걸 필요도 없고 꿈에 부풀어서 이것저것 해보려고 했고 나름 여유도 있었다.
꿈, 사랑 둘 다 놓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지금 당장은 변변찮아도 훗날을 기대하며 다시 희망을 암탉마냥 품고 살았는데.
이제는 현실 그 자체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혼자 발을 딛고 살아가려면, 내 자존심을 지키고 이 세상에 속해지려면 적당한 방어구가 필요하다.
사시합격은 지금 당장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그것을 뛰어넘어야한다. 그때였다.
다시 합격을 향해 투지를 불사르며 누워 있는데 누군가 꺄르르 웃으며 내 혼잣말에 태클을 건다.
“하하, 진짜 그렇게 될까?”
누구냐?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는 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커플로 보이는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지나간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다. 좋을 때다 중얼거리며 잠시 부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딱 달라붙어선 하하 호호 거리고 있다.
이 더운 날씨에 땀띠 날 텐데, 그런 걱정을 해주며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똑바로 위를 보고 누워있자니 눈부신 빛이 시야를 뿌옇게 만든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이다.
눈이 부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럽구나. 저런 평범한 연인들이라니. 내 인생에서 저런 염장의 기회는 없을 텐데.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태어나서 저런 짓을 할 수는 없지. 부럽다. 부러워 죽겠다.
제기랄, 입 밖으로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자니 난데없이 또 가슴이 소화불량이다.
답답한 속 때문에 끙끙거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손을 잡고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해도 그만큼의 결속력이 있다면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정말 사랑했다면 그 사람의 치부까지 감싸야 하는데. 어설픈 사랑이란 끝도 허무하기 마련이었다.
지금 내 심장 통은 이별보다는 이별의 이유 때문이다.
그 우환거리가 갈고리가 되어선 자꾸 심장을 긁어대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 안에 병 있다.
“으이구, 이놈의 굴삭인생.”
하지만 이렇게 마냥 우울할 수많은 없다. 지금 내 상황은 그럴 때가 아니기 때문에.
이럴 기운이 있으면 법전 한 장이라도 더 외워야 한다.
더 땅파기 전에 잽싸게 일어나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마침 화장실 앞에서 경헌이 놈과 마주쳤다.
“어디 갔다 왔어?”
“잠깐 커피 좀 마셨어.”
“치사하게 혼자 먹냐?”
“그런 거 가지고 따지는 게 더 치사 한 거다.”
경헌이 놈과 사이좋게 서로를 구박하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경헌이 놈이 쏴서 근처 한식당에서 배부르게 먹고 도서관 닫을 때 나와서는 경헌이 놈이 태워다줘서 편하게 왔다.
역시 부르길 잘 했다.
집에 돌아와선 샤워를 하고 내일 공부할 내용을 미리 훑어보려고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유현은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나에게 말했다.
“저게 원래 저렇게 친절한 놈이 아닌데. 확실히 너한테 관심 있다니까. 아까 너 나가고 나서 바로 뒤쫓아 나가던데?”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게다가 나한테 열라 까칠해.”
“그건 성격이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유현은 내 옆구릴 샤프로 콕콕 찌른다.
하지만 완전히 아니라고 하기엔 요즘 따라 경헌의 행동이 수상하긴 하다.
게이 바에서 걸린 이후에 어쩌다보니 같이 어울리긴 했지만 요즘은 예전보단 덜 틱틱 거리는 것이다.
예전엔 짜증도 많이 부렸는데 게다가 먼저 놀러가자는 말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마지못해서 쏘는 격이었는데.
“에이, 관심 없어. 그리고 그놈이 그렇게까지 성격 이상하진 않을 거야.”
괜히 헛다리짚었다가 나중에 무슨 쪽을 당하려고. 게다가 윤경헌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나무다.
나한텐 만만한 동창이지만 사실 놈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잘생긴 재벌 3세인 것이다.
하지만 놈은 바람둥이잖아. 난 바람둥인 딱 질색이라고.
그래도 억측이긴 하지만 들어도 썩 기분 나쁘진 않다.
“하긴 걔랑 사귀면 돈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으헤헤 거리며 웃자 유현은 피식거리며 비웃는다.
“병신, 좋댄다.”
그 말에 퓌시식하며 풍선 빠지듯이 상승했던 기분이 급 하강했다. 지가 바람불어놓고 개새끼.
빠직해서는 샤프로 놈의 손을 콱 찔렀다. 유현이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어퍼컷을 날렸다.
“아! 이 씨밤바가!”
“덤벼, 개나발아!”
한동안 샤프로 칼싸움하고 서로 머리채 쥐어 잡고 쿠션 던지고 난리가 났다.
놈이나 나나 역시 고시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기에 작은 도발에도 욱하는 것이다.
“농담 한 마디 했다고 샤프로 찌르냐? 이 성격파탄자야!”
“시끄러! 맞을 짓 했잖아!”
“그럼 때려야지 왜 찔러?”
“어떻게 패든 내 맘이지!”
“좆나 치사해!”
“닥쳐. 그리고 너 머리채 얼렁 안 놔?”
“너나 내 옆구리 꼬집은 손 떼!”
남자들끼리 치사하게 머리채 잡고 꼬집고 할퀴고 추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레슬링을 하면 밑에 집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우리끼리 타협을 본 것이다.
싸움은 최소한 쪼잔하게 하자고.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십 분정도 발광을 했다.
이젠 체력이 떨어져 싸울 기운도 없다.
“헥헥, 덥다.”
“살 빠지고 좋지 뭐.”
“꼬집은 거 빨갛게 부었잖아.”
“그 부분 살 빠질 거다. 고마운 줄 알아라. 하지만 내 뽑힌 머린 어쩔 거냐?”
“그 부분이 여름엔 존내 시원할거다.”
“……개년.”
“닥치고 더우니까 냉수나 한 사발 떠와라.”
“니가 떠와. 씨댕아.”
또 한바탕 말싸움을 벌이다가 그것도 힘들어지니 결론은 더우니까 맥주나 먹자였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졌기에 어쩔 수 없이 문 밖으로 나갔다.
피쳐 하나에 새우깡이랑 오징어땅콩이랑 담배랑 또 뭘 사야 되더라?
문을 열자마자 후덥지근한 공기에 슬리퍼를 찍찍 끌며 텁텁한 밤공기에 덥다 더워 거리는데
빌라 대문을 나서는데 가로등 밑에 인영이 보인다. 동네주민인가 싶어 흘낏 시선을 돌리자 훤칠한 키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나를 보자마자 예전처럼 성큼성큼 긴 다리로 빠르게 다가온다.
“이제 나오는 군.”
그리고 듣기 좋은 중저음과 엷은 미소. 내가 좋아하는 외적인 조건은 다 갖춘 남자였다.
세련된 세미정장차림도, 담배를 피울 때 돋보이는 가느다란 손가락도, 군살은 없는 탄탄한 몸매도 내가 환장하고 연연하던 것들이다.
“왜 왔어?”
“오해를 풀고 싶어서.”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 얼굴은 오해를 풀기보단 원한을 풀러온 사람 같다.
눈이 웃고 있지를 않으니까 전혀 상냥하지도 않다. 그를 보니 다시 얹힌 것 마냥 속이 답답해져 온다.
“오해를 풀면 뭐가 달라져?”
“적어도 마음은 편해지겠지?”
“……끝까지 이기적이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세 걸음 정도 떨어져있던 그가 내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숙여진 고개 때문에 그의 구두가 보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명품 구두, 생각해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늘 단정했었지.
그런 쪽 사람이라곤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깔끔한 행동들, 그것들이 미리 의심을 차단했던 거다.
누가 이 사람이 빚 안 갚는다고 사람을 날려버릴 거라고 생각하겠어.
나도 아직까지 꿈인지 현실인지 아리 까리 한데. 구두부터 바지까지 시선을 올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세련된 패션의 내 빈약한 옷차림을 떠올리며 속으로 욕을 중얼거렸다.
집에서 굴러다닐 때나 입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온 것이다. 벌써 이번이 세 번째다.
하지만 역시나 내 옷차림에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주의력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이나 찾아오는 걸 보니 집요하기까지 하다.
“김수현.”
“……왜?”
그의 목소리가 유독 귓가에 오래 머무르는 것 같다. 목소리는 예전과는 달리 체온을 잃었다.
마주보는 눈빛도 싸늘하기 그지없다. 아마 나도 그렇겠지. 다시 가슴 한 구석이 욱씬거린다.
이젠 심장에 근육통까지 걸린 걸까? 게다가 호명해놓고선 말이 없는 것도 재수 없다.
“불렀으면 말을 해.”
답답하게 입을 다문 채 날 바라보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툭 내뱉었다.
더운 공기도 좁은 동네 골목도 이 상황도 짜증스럽다.
뾰족한 내 말에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연다.
“왜 전화 안 받아?”
“쓸데없는 전화는 안 받아.”
“너…….”
그는 내 차가운 대꾸에 다시 기가 막힌 표정이다.
예전에 헤픈 웃음보다는 훨씬 더 풍부해진 표정을 보고 있다니 나 역시 기가 막힌다.
기가 막히면 피가 원활하게 통하지 않아 심신이 약해지는 게, 지금 예민한 고시생인 나를 말려죽을 셈일까?
혹시 헤어진 복수냐? 그런 잡생각을 하며 불만스레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있자니 예전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예전엔 집 앞까지 데려다주면 이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도 했는데 이젠 원수 보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꼬우면 덤비라는 나도 그렇고 한 대 콱 쥐어박고 싶다는 그도 그렇고.
이 무슨 유치한 시퀀스란 말인가. 쿨하고 합리적이고 심플하던 관계였는데 끝은 블랙 코미디다.
내 연애질이 그렇지 뭐, 이젠 자학적인 생각까지 든다.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머리는 랜덤으로 떠오르는 결론과 추리와 잡상 때문에 또 과부하에 걸린다.
그리고 확신에 가까운 하나의 가설이 결정적으로 머리에 딱 꽂힌다.
그래, 사실 내가 가장 우울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직도 당신 때문에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체하고 소화불량에 걸리고 근육통이 생기고 조만간 쥐도 날 것 같다.
일주일 만에 격렬한 노화가 진행된 심장을 노인정에 보내야 할 것 같다.
내 심장에 만 가지 병사를 끌고 오다니 이놈은 역시 개새끼였다.
다시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내 심정과는 상관없이 해원은 말이라도 마구 내뱉는다.
“갑자기 사람이 변해버렸군.”
“하아?”
누가 할 소릴, 어따 대고 적반하장으로 기어오르시는지. 황당해서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당신만큼은 아니지.”
비꼬듯 대답하자 울컥한 표정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난 헤어지는 데 동의한 적 없어. 일방적으로 이러는 거 실례 아니야?”
동의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잖아. 눈을 치켜세우며 바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침묵은 긍정이랬어.”
“그런 게 아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헤어지고 나서 며칠이나 연락도 없던 인간이 할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빠서 연락을 못하기도 했지만 잠시 냉정하게 정리해보라고 시간을 준 거였기도 했어.”
좆까, 라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초인적으로 참아냈다.
“……가지가지 사기 치시네.”
“이봐, 너 내 직업 때문에 실망 한 거면 이해하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것도 전부 왜곡시키지는 마라.
그리고 지겹다는 말 듣고 누가 연락을 쉽게 하겠어? 나도 화가 났어.”
해원은 억울하다는 듯 논리정연하게 대꾸를 한다. 망할 놈의 인간, 이럴 때도 무척이나 냉정하다.
하긴 늘 난장판에서 살 테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애써 화를 억누르지도 않고 그를 밀어버렸다.
꽤 세게 밀어서 그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사이에 성큼 앞으로 발을 내밀었다.
맥주가 아니라 소주를 사와야겠다. 젠장맞을.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아 바로 손을 잡혀 끌려갔다.
해원은 나를 붙잡으며 황망한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너 우리가 만난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 거냐? 그렇게 쉬워?”
“그래서? 아까우니까 계속 만나자고?”
안 아까울 리가 없다. 실존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을 사랑했던 내가 병신스럽다.
잘 포장 된 아이돌을 따라다니던 빠순이가 성인이 돼서 내가 왜 그랬을까 자책하고 겉 멋들어 양아치 짓 하던 청소년이
회개하듯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리고 왜 반말이야? 전엔 욕까지 하더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꽥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는 걸로 대신했다.
얼얼한 손목을 주무르며 그에게 표독스레 물었다.
“왜 반말 하냐고? 당신 존칭을 왜 하는지 알아?”
“뭐?”
“예의와 존중의 의미라고. 하지만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야.”
“……이봐.”
그가 흥분한 나의 어깨를 잡아오며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그 손을 쳐내고 마저 말을 꺼냈다.
“닥쳐! 내 얘기 안 끝났어. 바람이나 배신이나 그런 차원을 넘어서 당신은 완전 나한테 사기를 쳤다고!
이 망할 사채업자야! 그 동안의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왜 아니겠어? 아까워 죽겠어. 그래서 꼴도 보기 싫어!”
이성을 약간 상실해 지른 목소리가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그리고 놀란 눈을 한 해원이 나를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것을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꼴을 보자니 속에서 압축된 분노가 확 올라온다.
“뭘 봐? 그렇게 놀랐냐? 왜 너만 속인 줄 알았는데 나도 이러니까 신기해? 누군 성깔 없냐? 그리고 너만 연기 잘 하는 줄 알았어?”
처음엔 버럭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이성이 더 이상 소리치면 경찰 뜨고 주인아줌마가 압박해 올 것이란
경고를 날린다.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아니면 속은 게 분해?”
마지막으로 한방 먹여주자 제대로 표정이 구겨진다. 나이스 샷!
스스로를 칭찬해주며 의기양양하게 비웃어줬다.
어차피 엉망진창으로 끝난 거 이왕이면 제대로 복수해줘야 직성이 풀린다.
순한 양처럼 굴던 것도 어차피 개 삽질인 마당에 이제 뭐가 쪽팔리겠는가? 엿이나 쳐 먹으세요.
당당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쑥 내밀었다. 팔꿈치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액션도 큰 뻑큐 동작이었다.
더불어 혀까지 쑥 내밀어줬다.
그러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 십년 묵은 숙변도 순산할 것 같은 기분이다.